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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정기적으로 촬영하는 토크쇼의 촬영을 끝마치고, 쥬스농장은 서둘러 의식을 본체로 되돌렸다.
쯥, 지구산 인간 때문에 요즘 보호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에 저런 질문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괜한 트집 잡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말겠지.
사실, 쥬스농장은 굳이 보호종 지정을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편이다.
우주에는 생명이 넘쳐 나는데 굳이 보호종 지정을 해서 보호할 필요가 있어?
굳이 보호하지 않아도 지적 생명체로 진화할 생물은 알아서 지적 생명체로 진화할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 이 우주엔 생명이 너무나도 많다.
생명들은 대폭발마저 견디고 살아남았는데, 고작 남획이나 환경오염 따위로 온 우주의 생명체들이 멸종하겠는가?
뭐,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으니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기만 하는 거지만 말이다.
특히나 자신 같은 마키나들은 더욱더.
쥬스농장은 톱니바퀴들에 기름칠을 하며 마력 과다증을 보유한 모체들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보자.
모체로 사용할 개체들의 해동이 거의 다 끝났다.
제일 먼저 해동이 끝난 건…… 미네르바산 하르피아?
하르피아들이라면 교미 유도가 그렇게 어려운 종이 아니니 다행이다.
일단 하르피아를 이용해서 교미를 유도하며 지구산 인간의 습성을 살펴볼까?
쥬스농장이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이종간이다.
당연히 지구산 인간의 일반적인 습성을 이용해서는 교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르피아의 습성과 지구산 인간의 습성을 서로 잘 맞춰야 한다.
거기에 지금은 평소보다 암컷과 수컷의 마력 차이가 커다란 상황이니까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게 전문 브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뭐, 정 시도해 보다 안 될 것 같으면 서큐버스를 이용해서 대리 수정을 시도하면 되니까.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구산 인간을 먹이용 인간 사육항에서 꺼내 하르피아 번식장에 집어넣었다.
일단 첫 번째 교미까지는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자.
어차피 내게 시간은 많으니까.
지구산 인간이 사육장을 손쉽게 탈출할 개체도 아니고.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60화 [쥬스농장] 15년간 쌓아 온 브리딩 노하우를 공개합니다.
“이번 터미널은 중앙, 중앙입니다.”
“도착……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건만, 클라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머, 처자도 여기서 내려? 나도 여기서 내리는데!”
“아하하…….”
“요즘 세상에 처자처럼 참한 젊은이가 또 없어~ 진짜 며느리로 삼고 싶다니까.”
“네에…….”
지금껏 옆자리에 딱 달라붙어서 클라인을 괴롭히던 아주머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터미널 바깥에 잔뜩 넘쳐 나는 수많은 인파 때문이었다.
기계 의체를 업그레이드할 마력을 구걸하는 마키나, 아침부터 술에 취한 채로 바닥에 유해 정보들을 쏟아 내는 아저씨, 선조들의 의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시위.
전부 하나같이 클라인에게 너무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위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합니다! 권리에는 당연히 의무가 따라옵니다! 우리는 차원 생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이용하는 게 아닌, 이해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보호종과 지적 생명체 인증을 만든 의도를 떠올려야 합니다!”
“잉여 마력 조금만 나줘 주세요. 의체가 고장 나서 마력을 만들지 못해요. 의체를 수리할 잉여 마력 좀 나눠 주세요…….”
“시험 보기 전에 껌을 씹는 게 시험 볼 때 도움이 그렇게나 된다네. 처자, 힘내요!”
아주머니는 클라인에게 가는 길에 먹으라며 껌 하나를 쥐여 주고 떠나갔고, 클라인은 껌을 손에 꽉 쥔 채로 서둘러 지도를 찾아갔다.
터미널 지도를 바라보며 클라인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괜찮아.
여기까지 잘 왔어.
아직 시험을 시작할 시간이 되지도 않았고, 시험장은 터미널에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 곳에 있다.
이제 정말, 앞으로 정말 조금 남았다.
클라인은 그렇게 자신을 북돋우며 천천히 시험장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너, 누구?”
깃털 뭉치가 날개를 크게 펼치며 몸을 부풀리고는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곧바로 깃털 뭉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갈색의 깃털이 펼쳐지며 사방으로 은빛 알갱이가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신비로웠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긴 있었지만,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눈앞에 마주한 나는 그저 할 말을 잃어버리고 그 모습을 감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실시간으로 깃털 뭉치의 몸이 증발하는 것 같은 신비한 풍경.
거기에 더해서 간간이 은빛에 휩싸이는 갈색의 깃털이 더욱 몽환감을 더했다.
내가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고만 있자,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 누구냐고 물어보잖아.”
“어, 어?”
“너, 누구야?”
그제야 나는 그 장엄한 풍경에서 눈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깃털의 바다에 폭 파묻혀 있는 것 같은 얼굴은 그녀에게 몽환감을 더욱 부여해 주고 있었다.
노란 눈동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하면서도 지금까지 얼어붙어 있어서인지 살짝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샛노란 눈동자.
자칫 뱀의 눈처럼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눈동자지만, 기분이 나쁘기보단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듯한 앳된 느낌이 전체적으로 얼굴에 남아 있지만, 지금도 블랑카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외모였다.
블랑카로 이런 외모에 어느 정도 적응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했을 거다.
“나, 나는 잉간이라고 하는데. 너는?”
응.
말을 더듬긴 했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거지.
“잉간?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응?”
내가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자,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더니 내게 이것저것 질문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깃털하고 날개는 어디 있어? 감추고 있는 거야?”
“그건…….”
“너한테서 찌잉- 하는 감각이 느껴지는데. 뭐야?”
“어, 그러니까……?”
“너는 왜 발톱이 없어? 이상해!”
마치 세상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질문하듯 그녀는 내게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 냈고, 나는 계속되는 질문 세례에 쩔쩔매는 수밖에 없었다.
“어, 저기. 조금만 천천히 질문해 주면 안 될까? 그렇게 계속 질문하면 대답해 주기가 힘들어.”
“아, 미안…….”
내가 슬며시 그녀에게 살짝 거절의 의사를 나타내자, 갑자기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부, 불쾌했다면 미안……. 너 같은 건 처음 봐서…….”
“불쾌하진 않았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하나씩 물어봐.”
“부, 불쾌하지 않았어?”
“응. 그런데?”
이렇게 귀엽고 폭신해 보이는 아이가 이것저것 질문하는 게 불쾌할 리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미소 지었고, 내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는 방긋 미소 지었다.
“내, 내가 무섭거나 불쾌하지 않아?”
“어, 응. 귀엽다고는 생각되어도 무섭지는 않은데.”
뭐, 솔직히 말해서 본능 레벨에서 미약한 불쾌감이라고 해야 할까?
어떠한 두려움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오랜만에 서로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도 있고, 그녀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덕분에 그 정도는 무시할 만했다.
그 사이비들은 서로 말이 통하기는 해도 대화가 통하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이 아이도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에포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있었을 거다.
“귀, 귀여워? 내가?”
“귀엽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
“진짜? 동생들이 아니라 내가?”
“응, 귀여워.”
“우와…….”
히죽히죽.
앳된 외모에 맞지 않게 그녀를 휘감고 있던 얼어붙은 것 같은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한밤중에 빛나는 달처럼 내 칭찬을 듣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블랑카에게 해 주면 반응이 좋아서 이 아이한테도 귀엽다고 해 봤더니 반응이 꽤 좋네.
역시 귀엽다는 건 누구한테나 통하는 칭찬인 걸까?
“진짜 내가 안 무서운 거 맞지?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 아냐. 진짜로?”
“진짜, 진짜지?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해 줄 거지?”
“어.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그럼, 그럼 왜 너는 날개하고 깃털이 없는 거야? 엄마도 날개가 있고, 동생들도 날개가 있고, 가끔 먹을 걸 주던 아저씨도 날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너하고 나는 종족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종족? 종족은 또 뭐야?”
“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원래 태어났을 때부터 날개하고 깃털이 없던 거야.”
“어째서? 병이라도 있는 거야?!”
“종족이…… 다르니까?”
“종족이 뭐야?”
“음, 그러니까 그건…….”
마치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도 어린아이인 것이 맞지 않을까?
조카와 놀아 준 적은 없지만, 어린 조카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내게 질문해 오는 것에 성심성의껏 답해 줬고,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그녀의 질문도 일단락된 것 같다.
나는 슬며시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넌 이름이 뭐야?”
“이름? 이름은 몰라! 엄마는 이름이 있었는데, 나는 없어. 동생들도 이름이 있었어!”
“이름이 없다고?”
“응. 나도 이름을 달라고 했었는데, 화내면서 안 된다고만 했어…….”
그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갑작스럽게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답게 그녀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내게 말했다.
“그래! 잉간, 잉간이 나한테 이름을 지어 주면 되겠다!”
“어, 이름을?”
“응. 나 빼고 죄다 이름을 갖고 있는 건 치사한걸? 잉간이 그랬잖아, 원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그렇긴 한데, 내가 이름을 지어 줘도 되겠어?”
“그치만 잉간이 아니면 이름을 지어 달라 할 사람이 없는걸?”
음, 하긴 그렇긴 하네.
계속 이 아이를 대명사로만 부를 수는 없으니까 그냥 내가 적당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게 나으려나?
일단은 새 인간이니까, 라틴어로 새를 뭐라고 부르더라?
일단 이름을 지을 때 라틴어를 쓰면 적당히 멋있는 이름이 나오니까.
라틴어로 새가 아비, 아비였나?
음, 이건 별로인 것 같은데.
아비, 아비스, 아지스, 이지스, 아리스?
아리스?
이 정도면 괜찮은 이름이 아닐까?
“음, 아리스라는 이름은 어때?”
“아리스?”
내 제안을 들은 소녀는 곰곰이 고민하며 몇 번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은 거 같아!”
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중에 알아서 이름을 바꾸겠지.
“왕!”
내가 아리스의 이름을 지어 주자 에포나가 심통 난다는 듯 내 손가락을 깨물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포나를 달랬다.
그렇게 나는 아리스와 일단 통성명을 완료했고, 슬그머니 아리스에게 질문했다.
“아리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가 어딘데?”
“어…… 아무것도 몰라?”
“몰라. 눈떠 보니까 앞에 잉간이 있었어.”
“그럼, 내가 보이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응. 여기 오기 전에.”
그러자 아리스는 조용히 기억을 되짚더니,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새하얀 곳에 있었어.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동생들을 지키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그런 곳에 떨어졌어.”
역시, 나처럼 납치되어 온 걸까?
그 사이비들처럼 이곳에서 태어난 건 아닌 것 같다.
“너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거지?”
“응…….”
자, 그럼 생각해 보자.
나를 이 아이와 단둘이 놔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거기에 이 높은 탑 같은 구조물들의 정체는 도대체 뭐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나와 아리스를 이곳에서 키우겠다는 의도가 맞겠지?
도저히 먹을 걸 찾아볼 수 없는 인공적인 환경이기는 해도 나와 아리스를 키울 생각이라면 먹을 걸 구할 장소를 마련해 놨을 것이다.
어딘가에 분명히 그런 장소가 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사육장 안을 열심히 둘러봤고.
그러던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탑의 위편에 마치 난간처럼 발판이 붙어 있고, 그 발판과 연결된 탑의 벽에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붙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새들의 둥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저 탑은 아리스에게 주어진 은신처라는 게 되겠고.
그렇다면 나의 은신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거처로 삼을 만한 곳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탑을 기어 올라간다?
내가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아무리 봐도 여긴 내가 있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아리스만이 살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 같다.
어째서 나를 이곳에 집어넣은 거지?
그때, 문득 한 가지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나의 모습, 뭔가 익숙한 거 같은데.
눈앞에서 머리가 없었던 것이 되던 고블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마치 그 고블린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리스의 몸은 아무리 봐도 맹금류의 발톱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유전자 단위에서 느껴지던 정체 모를 공포감.
진짜 설마 하는 거지만.
진짜 설마 하지만.
설마, 나를 먹이로 여기에 던져둔 건 아니겠지?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리자 몸이 오싹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고.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아리스가 걱정스럽게 내게 질문해 왔다.
“저기, 잉간.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치만 안색이 안 좋은걸?”
아냐, 음.
그럴 리는 없겠지.
어떤 놈이 정성을 들여서 키우던 녀석을 다른 애완동물의 먹이로 던져 주겠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까 파충류나 햄스터들을 키우는 사람들 중에서는 먹이 생물도 같이 키우는 사람들이 있잖아?
좋게 생각하자.
만약 내가 진짜 먹이 생물로 던져진 거라면, 최대한 아리스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
그, 해외 토픽에도 간간이 나오잖아?
사자 우리에 먹이로 던져 준 염소와 기묘한 우정을 만들던 사자의 이야기.
나도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아리스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걸 잘 이용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꼬르륵 하고 배가 울리는 소리가 아리스의 배에서 울려 퍼졌다.
아리스는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지만, 내게 있어서 아리스의 배 소리는 조금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사형을 인도하는 카운트다운 같다고 해야 할까?
아냐,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한 거일 거야.
“잉간, 나 배고파…….”
“그, 그래?”
배가 고프다며 입술을 할짝이면서 냉혹한 기운이 서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아리스를 살짝 두렵다고 생각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겠지.
일단 아리스의 배부터 어떻게 채울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배가 부르면 불운한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함께 무언가 먹을 걸 찾아보자고 제안하려 한 순간.
쿠구궁.
갑자기 사육장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한쪽 벽면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으엑, 엑?”
갑자기 한쪽 벽면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대량의 물에 휩쓸리면 당연히 익사하고 말 거다.
내가 기겁하며 어떻게 해야 휩쓸리지 않을지 고민하던 순간.
“이, 잉간!”
“어?”
아리스도 저 물에 휩쓸리면 위험하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익숙한 모습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물에 휩쓸리기 직전에 나를 데리고 근처의 탑의 쉼터에 나를 데리고 착지했다.
에포나는 아리스가 나를 낚아채 갈 때 내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나와 함께 탑 위로 올라왔고.
간신히 탑 위에 올라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발톱에 낚아채이니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진짜, 아니겠지?
응. 아닐 거야.
“이야,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한시름 놓은 내가 내색을 숨기며 감사 인사를 전하려 아리스를 돌아보자.
“……아리스?”
“뭐, 뭔가 이상해…… 잉간…….”
눈물 젖은 눈동자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듯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아리스의 모습이었다.
“나, 나는 모른다고. 이런 거, 이런 거 모르는데…….”
그리고 그 모습은.
언젠가의 내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 *
브리더란, 차원 생물을 번식시키는 직업이다.
바꿔 말하면, 브리더는 차원 생물이 번식하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쥬스농장은 그 바꿔 말한 브리더의 정의에 상당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방송이나 쥬튜브상으로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말이다.
쥬스농장이 차원 생물의 습성이니 뭐니 하는 것을 챙기는 것은 차원 생물이 원활하게 번식하게 하기 위한 효율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런 쥬스농장의 사고방식은 지금까진 꽤나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쥬스농장은 자신의 방식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쥬스농장의 브리딩 방법을 적당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욕구의 제한과 번식 본능의 자극.
그것이 쥬스농장의 번식법이었다.
쥬스농장은 차원 생물들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 주려 노력한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뿐만 아니라, 차원 생물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니까.
식욕과 수면욕은 언제나 해소해 준다.
그렇다면 생물의 3대 욕구 중에서 해소되지 않고 남은 건 성욕뿐.
사실, 성욕은 여러 놀잇감이나 성취욕 같은 것을 자극하면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지만, 쥬스농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해소법을 완전히 박탈하고 차원 생물들에게 성적인 요소로만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한다.
만약 그러고도 차원 생물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면, 쥬스농장은 계속해서 차원 생물들에게 스트레스를 조금씩 축적시킨다.
차원 생물은 그렇게 스트레스를 참고, 또 참다가.
어느 날 성적인 욕구로 스트레스를 터트려 버리고.
그렇게 번식이 이뤄진다.
그게 쥬스농장의 기본적인 번식법이지만, 가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 성욕이 적거나, 번식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경우다.
쥬스농장은 그런 경우, 번식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차원 생물들의 번식 욕구가 가장 자극되는 경우는 목숨의 위기를 느꼈을 때.
즉, 쥬스농장은 인위적으로 차원 생물들에게 통제된 목숨의 위기를 조성한다.
죽지 않고, 번식 욕구가 자극받을 정도로만.
이 두 번째 방법은 지금까지 언제나 잘 먹혀 왔고, 쥬스농장은 이 방법으로 그렇게 어렵다는 정령의 번식에도 성공했다.
효율적으로 생각해서, 쥬스농장은 자신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 쥬스농장이 준비한 하르피아는 시간 동결을 한 지 15년 이상 넘어가는 개체.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직 생식 욕구가 적을 시기라는 것이다.
하르피아가 비록 생식 욕구를 자극하기 쉽다지만, 갓 성숙한 20살의 개체는 비교적 생식 욕구가 부족하다.
25살, 아니, 30살 정도까지만 놔두면 생식 욕구를 자극하기 쉽겠지만.
문제는 쥬스농장이 준비한 하르피아는 마력 과다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
25살?
이미 20살까지 살아남은 개체는 거의 자신의 수명을 다 써먹은 개체다.
좀 더 육체 나이를 숙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쥬스농장은 언제나처럼 하르피아와 지구산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려 했고.
거기에 더해서 하르피아의 지식에 약간의 조작을 가했다.
좀 더, 발정이 오기 쉽게끔 말이다.
거기까지 조작을 마친 쥬스농장은 더는 하르피아 번식항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하르피아가 번식할 테니까.
어차피 지구산 인간이 하르피아에게 저항할 수 있을 리도 없잖아?
효율적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육항을 살피는 게 더 효율적이다.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드래곤 사육항으로 의식을 돌렸다.
드래곤들은 자꾸 탈주를 시도한다는 게 문제란 말이지.
“도망친 녀석들은 어디에 있으려나…….”
쥬스농장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신의 몸 안으로 탐사용 의체를 내려보냈다.
61화 *공지* 브리더 시험 봤어요……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대요…….
“이름이 뭐라고요?”
“크, 크, 크…….”
“네? 잘 안 들리니까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크, 클라인이에요!”
“클라인. 네, 확인했습니다. 24번 시험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우, 후우.
클라인은 긴장된 기색으로 숨을 내쉬며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괜찮아.
평소대로만 하면 돼.
그런데 평소대로가 뭐지?
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평소대로만 하자.
마지막에 본 모의고사에서는 기준점을 훨씬 넘어섰잖아?
클라인은 자신을 다독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시험지가 배부되며 시험이 시작됐다.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시험을 보고 있으니 뭔가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네.
클라인은 잠깐 그런 딴생각을 하다가 다시 시험지에 얼굴을 박아 넣을 기세로 문제를 풀어 나갔고.
“후우…….”
모든 문제를 다 풀고 클라인이 조용한 한숨을 내쉬는 것과 함께, 시험지가 백지로 변하며 시험의 종료를 알려 왔다.
“다, 다 못 적었는데…….”
“저기요. 진짜. 진짜 숫자 하나만 더 적으면 되는데…….”
여기저기에서 제때 시험지를 다 풀지 못한 수험자들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인은 그런 수험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시간 내로 다 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나?
물론 시험문제가 어렵기는 했어도 충분히 시간 내로 다 풀 수 있을 텐데.
이제 남은 건 집에 돌아가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수험장을 나가려 했지만.
“지금부터 면접을 볼 테니, 수험생들은 자리를 지켜 주세요! 자기 번호가 불리면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면접장으로 향하면 됩니다!”
어, 면접?
브리더 시험에서 원래 면접을 봤었나?
커뮤니티에선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올해부터 새롭게 만들어진 건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랴부랴 휴대용 접속기를 꺼내서 브리더 시험 공지 사항을 확인해 봤다.
“필기시험 후, 인적 검사가 있을 예정……?”
이 인적 검사라는 게 설마 면접이라는 걸까?
어쩌지?
면접은 하나도 준비 안 해 왔는데.
클라인은 덜덜 떨면서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 속을 마구 헤집었고.
뭐든 잡을 것을 찾던 클라인의 손에 무언가가 붙잡혔다.
“응?”
터미널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주셨던 껌.
그래, 이거라도 씹자.
클라인은 아주머니가 주신 껌을 질겅거리며 긴장을 풀어 보려 했지만, 긴장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클라인의 긴장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다음, 1143번 지원자 들어오세요!”
“네, 넵!”
하지만 여전히 긴장이 과도한 탓이었을까?
클라인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면접장 안으로 들어섰고.
면접장 안으로 들어선 클라인은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
“어머, 여기서 또 만나네요. 젊은 처자.”
면접장에는 터미널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 * *
“쯧, 시간 동결로도 무리였나?”
쥬스농장은 탐사용 의체를 조작하던 중, 마력 과다증을 앓는 모체 하나가 증발해 버렸다는 정보를 보고 혀를 찼다.
역시 모체의 재활용은 무리였나?
이번에 증발한 모체는 이미 쥬스농장이 모체로 한번 사용했던 개체다.
임신에는 성공했지만, 배 속에서 아기가 유산돼 버렸다.
마력 과다증을 앓는 개체는 대개 임신을 하게 되면 마력의 제어에 실패하고 소멸하게 된다.
뭐, 쥬스농장이 억지로 개입해서 연명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소멸하기 직전에 시간 동결을 해서 보관해 두면 재활용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아직 모체는 많으니까 상관없다.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탐사용 의체의 탐지기에 붙잡힌 신호가 있는 곳으로 탐사선들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쥬스농장의 탐사선들이 무언가의 공격을 얻어맞고 추락했다.
“빙고.”
탈주한 녀석들이 여기 있었구만.
쥬스농장은 기분 좋게 사고 회로를 진동하며 탈주 개체들이 감지된 쪽으로 탐사용 의체를 움직였다.
저 녀석들이 더 깊숙한 구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자칫하면 다른 사육항에 구멍을 뚫고 숨어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덤덤하게 탐사용 의체들을 움직였다.
늘 그렇듯,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말이다.
* * *
“나, 나는 모른다고. 이거, 이런 거 모르는데. 이런 거 몰라……?”
아리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부짖고.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아리스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니, 경험한 적이 있다.
머릿속이 무언가에 의해서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워서, 저렇게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블랑카가 나를 다독여 줬었지.
“저기, 아리스. 괜찮으니까, 진정해.”
“모, 모르겠어. 몰라…….”
말로만 다독여서는 도저히 아리스가 진정할 것 같지 않다.
블랑카가 나를 어떻게 다독였더라?
꼬옥 안아 줬었지.
나는 머릿속으로 블랑카가 어찌 행동했는지를 떠올리며 공포에 질려 있는 아리스를 꼬옥 껴안았다.
“흐윽, 흑……?”
“괜찮아. 괜찮으니까. 무서운 게 아니니까. 조금만 진정해.”
“그치만, 그치만…….”
“조금만 진정하면 괜찮아질 거야. 응, 나도 그랬어. 나도 그랬으니까, 조금만 진정하면 돼.”
푹신한 털 이불에 감싸인 듯한 감촉이 내 몸을 끌어안고.
나는 아리스를 가슴에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아리스의 등을 토닥여 줬다.
토닥토닥.
“자, 괜찮아. 옳지, 괜찮아.”
“응, 응…….”
아리스를 토닥거리며 끊임없이 괜찮다고, 안심하라는 말을 속삭이자 아리스가 진정했는지 들썩이던 몸이 가라앉고.
아리스는 살포시 날개를 펼쳐서 내 몸을 감쌌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매달리는 듯한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아리스에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아?”
“괘, 괜찮지는 않은데. 진정은 된 거 같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
그치.
괜찮아질 수가 없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는 듯한 그 기괴한 감각은.
나는 아리스가 스스로 나를 꽉 껴안은 날개를 풀 때까지 아리스를 토닥였고, 아리스가 날개를 푼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였다.
나는 아리스를 위해서 조용히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강의해 줬다.
“그러니까, 음. 대충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편해. 괜히 어째서? 하고 생각하다 보면 머리 아프거든.”
“그래?”
“그렇게 미루면서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 보는 거야.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다시 기다렸다가, 다시 시도하면 돼.”
“잉간, 잉간도 그랬어?”
“응. 나도 그랬거든.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명상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야.”
“명상?”
“눈을 감고 특정한 호흡법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거야. 한번 해 볼래?”
“응! 해 볼래!”
아리스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아리스의 등 뒤로 돌아가서 아리스를 바닥에 앉혔다.
“자,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천천히 네 몸 안에서 움직이는 기운을 느껴 봐. 뭐,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느꼈어!”
“어?”
나는 아리스가 단번에 꿈틀거리는 기운을 잡아냈다고 해서 당황했지만, 곧바로 수긍했다.
생각해 보니 아리스도 판타지 세상 출신이겠지?
그럼 뭐, 마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명상법으로 사용하는 호흡법이지만 원래는 블랑카가 마나 연공법이라며 알려 준 거니까.
“으흠, 꿈틀거리는 기운을 잡았어?”
“응!”
“그럼 이제,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그 기운을 움직여 봐.”
나는 내게 블랑카가 명상법을 알려 주던 대로 손가락을 아리스의 등에 대고 움직인다.
“흐얏?!”
“간지러워도 참아. 지금 이 느낌을 잘 기억해.”
“어, 어…….”
깃털 사이로 드러난 뽀얀 맨살에 내 손가락이 닿자 아리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곧바로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에 집중을 쏟기 시작했는지 조용해졌다.
우웅.
우웅.
아리스의 깃털에서 뿜어져 나오던 은빛 알갱이들이 갑자기 더욱 강렬하게 빛을 내며 공멸하더니.
“읏?”
아리스의 깃털이 스르르 허공으로 바짝 솟아오르며 아리스의 몸이 은빛 입자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이래도 되는 거 맞나?
내가 명상할 때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에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아리스에게 나아갈 곳을 인도해 줬다.
그러자, 아리스의 몸에 맞닿은 내 손가락이 저릿해질 정도로 뿜어져 나오던 은빛 입자들이, 어느 순간 순식간에 아리스의 몸 안으로 흡수되고.
“아…….”
아리스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라, 뭔가.
뭔가가 일어난 거 같은데……?
“아리스, 괜찮아?”
“어, 응. 그냥. 그냥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 봐서…….”
“어떤데?”
“이렇게, 이렇게 몸이 가볍고…… 뜨겁지도 않고……. 아무튼 막 좋아!”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목을 돌려서 내 얼굴을 돌아봤고.
180도 돌아가는 아리스의 목에 살짝 놀랐긴 했지만, 그것보다 아리스의 노란 눈동자에 생긴 변화가 더 인상 깊었다.
노란빛 눈동자에 스며든 달을 닮은 은빛.
처음처럼 아리스의 몸에서 신묘한 은빛 가루가 솟아오르진 않았지만, 그 신비함이 전부 아리스의 눈동자로 스며든 것 같은 모습이다.
“어, 그래?”
“명상이란 거 엄청 대단한 거구나! 우와!”
음.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일단 이제 아리스가 더 혼란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한시름 놓은 나는 난간 아래의 풍경을 바라본다.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거친 물살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물살에 휩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고 죽겠지.
딱히 디디고 설 땅도 보이지 않고,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안전한 구역은 이 탑 위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뾰로통한 표정의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달래는 사이.
“잉간! 이리 와 봐!”
“응?”
어느새 탑 안으로 들어간 아리스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리스의 목소리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가자, 푹신한 천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둥지 비슷한 시설이 보였다.
새들의 둥지를 섬유로 재현해 놓은 걸까?
아리스는 둥지 위에 몸을 푹 파묻고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슬며시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아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거의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천장까지 가는 길에 마치 횃대처럼 발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렇게 푹신푹신한 둥지는 처음 봐!”
“그래? 잘됐네. 진짜로.”
벽면에 살포시 자리 잡고 있는, 그리운 형태의 기계였다.
이야, 맨 첫날 안개 속에서 본 뒤로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랑스러운 손길로 냉기를 뿜어내는 기계를 쓰다듬었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아리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응? 잉간, 그건 뭐야?”
“이거? 냉장고라고. 신이 만든 기계야.”
“시, 신님?”
솔직히,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얼마나 냉장고가 그리웠는데.
억지로 염장을 하지 않아도 음식이 상하지 않는 기계라니.
냉장고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었던 게 분명하다.
이 냉기가 얼마나 그리웠는데.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냉장고의 문을 열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재료를 보고 살짝 표정을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라? 먹을 게 들어 있어!”
“어…… 그러네. 먹을 게 맞긴 하지.”
고통에 일그러진 듯 보이는 고블린의 머리가 냉장고 한구석에 박혀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다.
냉장고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잘 손질된 고블린의 고기였다.
윽, 진짜 먹기 싫은데. 이건.
그렇지만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고블린 고기 말고는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과는 달리, 아리스는 꼴깍 침을 삼켰고.
나는 슬며시 아리스에게 아까부터 궁금하던 한 가지를 물어봤다.
“아리스. 너 평소에 뭘 먹고 살았냐?”
“엄마가 잡아 오는 거!”
“적당히 외형을 설명하자면?”
“그, 냉장고? 에 들어 있는 것도 먹었고. 막 커다란 꿈틀이도 먹고, 또 가끔씩 과일도 먹었고…….”
하하.
역시 맹금류다운 식성을 자랑하네.
보니까 딱히 불에 구워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때문인지 이곳을 만든 사육자도 불을 피울 시설을 만들어 두지 않은 것 같은데.
결국, 나도 이걸 날로 먹어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부감이 너무 심하게 느껴지는 외형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케흑, 켁! 켁!”
갑자기 에포나가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포나?”
어딘가 아픈 걸까?
내가 불안해하며 에포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자, 에포나가 무언가를 바닥에 토해 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라이터처럼 사용하던 작은 점화석이었다.
에포나가 어째서 점화석을 토해 낸 거지?
“에포나, 이게 뭐야?”
“왕!”
그렇지만 에포나에게 물어봐도 당연히 에포나는 언제나처럼 능구렁이 같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잉간, 거기서 뭐 해? 나 먼저 먹어도 되는 거 맞지?”
“어? 잠깐만 기다려 봐.”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일단 불을 피워 낼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나는 티셔츠의 오른팔 원단을 부욱 찢어 내 불을 피워 냈다.
“우와! 잉간, 방금 뭘 한 거야? 그거, 불 맞지? 불?”
“응, 불이야. 그러니까 아리스…….”
나는 아리스에게 고기를 굽게 고블린 고기를 달라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아리스가 행동에 나섰다.
“불이 있으면 맛있는 고기가 나와!”
아리스는 방긋 웃으며 발로 붙잡고 있던 고기를 작은 불꽃에 던져 버렸고.
당연히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불꽃은 그대로 꺼져 버렸다.
그러자 아리스는 당황해하며 불이 있었던 자리를 쿡쿡 건드렸다.
“불이, 불이 사라졌어……. 엄마가 불에 고기를 넣으면 맛있는 고기가 나왔는데, 나는 왜 이러지?”
“그야, 아직 불이 너무 작으니까 그렇지.”
“불이 너무 작아?”
“불이 고기를 이길 만큼 커다래야 꺼지지 않거든.”
“그러고 보니 엄마도 작은 불에는 고기를 안 던졌어!”
불이 꺼지긴 했어도 아직 점화석은 남아 있다.
내가 다시 불을 피우려고 하던 그때.
“그럼, 좀 더 커다란 불이 필요하다는 거지?”
“응? 뭐, 그렇지.”
“흐읍!”
갑자기 아리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땅바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리스? 지금 뭘 하는 거…….”
“아, 됐다!”
아리스가 됐다고 소리치자 아리스의 몸이 은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아리스가 바라보는 땅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이 홀연히 불꽃이 피어났다.
그야말로 마법을 부린 것 같은 기묘한 일.
나는 입을 떡 벌린 채로 아리스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물어봤다.
설마, 아리스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걸 넘어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아리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응? 잉간이 아까 한 걸 따라 했어!”
“내가 아까 한 거?”
“막, 몸 안에서 꾸물거리던 거랑 비슷한 걸 화악! 하고 부딪쳤잖아? 그렇게 하면 불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해서…….”
보아하니 마법을 알고 사용한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한 걸까?
뭐가 됐든 내 입장에선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대단하네…….”
“대단해?”
“응. 대단해.”
“히히…….”
어찌 됐든 계속해서 타오르는 모닥불이 생겨난 것이니 나는 고블린의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잘 구웠고.
에포나에게 고기 몇 점을 떼서 따로 챙겨 주며 아리스와 식사를 했다.
행복한 모습으로 발로 고기를 붙잡고 뜯어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저절로 흐뭇해진다.
아까 그렇게 오들오들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와 아리스는 침대라고 부를 수 있는 둥지에 털썩 쓰러졌다.
아리스의 날개가 푹신한 이불처럼 내 몸을 덮어서 기분이 좋다.
혹시나 서로 몸이 닿는 걸 불쾌해할까 봐 걱정했지만, 아리스는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럼, 슬슬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지?
분명히 이곳의 주인이 아리스의 머리에 무언가의 지식을 불어 넣은 게 맞을 텐데, 도대체 뭘 불어 넣은 걸까?
아리스의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이 뭔지 알면 이곳의 주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거다.
“아리스. 아까 도대체 무슨 정보가 들어왔길래 그렇게 겁먹었던 거야?”
“응? 그러니까, 그건…….”
내 질문을 듣고 조용히 무슨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생각하던 아리스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변한다.
“아리스?”
“어, 어…….”
그러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내 몸 위에 얹어 놨던 날개를 싹 걷어 간다.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그, 그래?”
아리스는 갑자기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냥. 그냥 별거 아니었어. 나는 거. 나는 거에 관련된 거였어…….”
“나는 거?”
“응. 나는 잘 못 날았거든. 원래. 엄마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아무리 봐도 그것만 알려 준 게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알려 준 거지?
갑작스럽게 어색한 침묵이 둥지 안에 자리 잡고.
아리스와 나는 둥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배도 부르고 따스하니 꾸벅꾸벅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자야지.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푹신한 둥지를 벗어나기 힘들어서 스르륵 눈이 감기기 시작했고.
내 몸이 스르륵 아리스의 품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앗?!”
툭.
내 얼굴이 아리스의 어깨 부위에 닿자 아리스는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흠칫거리며 조심스럽게 날개를 움직여 내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아리스? 미안, 내가 오늘은 바닥에서 잘 테니까…….”
“아니, 괜찮아. 괜찮으니까…….”
흠칫흠칫.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날개를 뻗어 내 몸을 감싸고.
포근한 깃털의 감촉에 더욱 수마가 내 의식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지, 진짜 그렇게 생긴 걸까……?”
호기심 가득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흥.”
다시 꿈속의 여인을 만나자, 여인은 기분 나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어째서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꿈속의 여인은 히죽 미소 지으며 나를 옥죄었다.
“한눈을 팔았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녀는 그렇게 속삭이며 내 귓가를 그녀의 혀로 간지럽혔고.
기분 좋은 얽매임이 이어졌다.
그리고.
쾅!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나는 강제로 잠에서 깨어났고.
“어, 어, 어?”
당황한 듯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인지 나는 바지가 살짝 내려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내 모든 신경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 눈앞의 풍경에 온통 집중됐다.
쩌적, 쩍.
알껍데기가 부서지듯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허공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디애나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이쪽으로!”
“그래도……!”
“우리가 도망치지 않으면 디애나의 희생이 무의미해진다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뱀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62화 [쥬스농장] 드래곤이 탈주했을 때 빨리 잡아야 하는 이유
“어머, 여기서 또 만나네요. 젊은 처자.”
“어, 어…….”
예상치 못한 만남에 클라인은 껌을 씹던 것도 잊어버리고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 입을 벌렸고.
그런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피식 웃으며 클라인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요. 껌을 씹으니까 긴장이 좀 풀리죠?”
꿀꺽.
그제야 클라인은 자신이 껌을 씹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사관은 피식 웃으며 클라인을 안심시켰다.
“면접이라고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요.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그, 그래요?”
껌을 삼키자니 예의 없어 보일 것 같고, 껌을 뱉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클라인이 내린 결론은 껌을 그냥 그대로 입안에 놔두는 것이었다.
“그래요. 클라인 양. 이제 면접을 볼 준비는 다 된 거 같네요.”
형식적인 질문이라고 해도 여기서 나쁜 모습을 보이면 분명 탈락시킬 거야.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할 생각일까?
글라인은 그렇게 두려워하며 조용히 심사 위원들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고.
이윽고 심사 위원들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이전의 선언대로 정말 간단한 것이었다.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이 브리더 시험을 보게 된 계기를 말해 볼래요?”
“제, 제가 브리더 시험을 보게 된 계기요……?”
심사 위원들의 질문을 듣고 클라인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브리더 시험을 보려는 것은 잉간이를 계속 사육하기 위해서다.
그냥 단순히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잉간이를 계속 사육하고 싶어 하는지.
지금까지 키워 왔던 다른 인간들과 잉간이가 뭐가 다르길래?
“클라인 양?”
“아, 네?”
“브리더 시험을 보게 된 계기를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아, 네!”
클라인이 면접 도중에 입을 다물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자 심사 위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클라인을 상념에서 끄집어낸다.
“사소한 질문에도 고민하는 건 좋은 습관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잠수를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에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브리더 시험을 보게 된 계기는……!”
어째서 자신이 잉간이를 계속 키우고 싶어 하는가?
그것은 클라인이 처음으로 파인만 외에 다른 생명체와 제대로 된 교감을 했고, 그 대상이 잉간이었기 때문이다.
잉간이를 키우기 전까지 클라인은 교감이 아닌 단순한 사육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째서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먼저 남에게 교감하려 하지 않은 클라인이었지만.
스스로도 모르는 이유로 잉간이에게 동질감을 느낀 클라인은 잉간이와 교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저는. 저는…… 차원 생물과 교감하기 위해, 브리더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교감요?”
“어, 네. 교감요.”
클라인이 생각하기에.
클라인과 잉간이의 첫 교감은 잉간이에게 그리 좋지 않은 경험으로 남았겠지만.
그렇기에 클라인은 다시 한번 잉간이와 제대로 교감을 하고 싶었다.
두 번째 교감이야말로 모두에게 행복한 교감이길 바라며.
“제가, 제가 키우는 인간하고 더 친해지고 싶어서……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래서 더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브리더 시험을…….”
“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클라인 양.”
횡설수설하며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모두 하던 클라인을 아주머니가 조용히 제지하고.
“원래는 질문 하나만 하고 끝나지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클라인 양.”
“네?”
“키우는 인간과 교감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약 키우는 인간이 지적 생명체로 지정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적 생명체 지정을 받아들일 건가요, 아니면 반대할 건가요?”
갑자기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클라인은 그 점이 의문스러웠지만, 일단은 아주머니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받아들일 것 같네요.”
“그렇게 되면 더는 애완 생물로 사육할 수가 없는데도요?”
“그렇게 되면 친구가 되면 되죠. 헤헤…….”
“허어…….”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대답했고, 심사 위원 아주머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면접은 끝이에요. 이만 돌아가도 괜찮아요.”
“가, 감사합니다……!”
클라인은 헐레벌떡 면접장에서 뛰쳐나갔고, 그런 클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사 위원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처자예요. 진짜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을 정도로…….”
“심사 위원장님은 아들 없으시잖아요? 딸이 최고라면서…….”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죠. 뭐.”
심사 위원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라인의 이름에 표식을 그었다.
* * *
도대체 누굴까?
아리스와 내가 벙 찐 표정으로 허공에서 무언가에 쫓기는 기색의 일행들이 걸어 나오는 것을 바라본다.
뱀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
마찬가지로 뱀의 눈동자와 산양의 뿔을 가진 여성.
앙증맞은 뿔과 하트 형태의 꼬리가 인상적인 소녀가 들어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허공에 나타난 구멍이 닫히고.
그제야 둥지 안으로 침입한 침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다.
“어…… 얘들아. 여기, 주인이 있는 방인 모양이다.”
맨 처음 튀어나온, 그러니까 대장 역할을 하는 듯한 뱀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슬며시 자신의 일행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아리스를 내 뒤로 숨기며 조심스럽게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 누구야?”
“잠시 숨을 곳이 필요해서 들어온 거니까, 잠시만 머무르면 돼. 차원 표준 시간으로 1시간 45분만 머무를 거야.”
“마, 맞아요! 먹을 것도 필요 없고, 싸울 생각도 없으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뱀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와 하트 꼬리를 지닌 소녀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그러는 사이, 뱀의 눈을 가진 여성은 조용히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1시간으로는 부족해. 2시간은 있어야 충분한 마력이 충전될 거야.”
“2, 2시간.”
“내가 물어본 건, 너희가 누구냐는 거지 뭘 하겠다는 게 아냐. 너희들 도대체 정체가 뭔데? 뭔데 어항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거야?”
이전, 세계의 끝에서 보았던 풍경 때문에 이 녀석들을 더 신용하지 못하겠다.
그때 내가 봤던 어항 바깥의 세상은 어항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독기로 가득 찬 생물들로 가득했다.
이 녀석들이 그런 생명체들과 다르다는 증거가 없기에,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다그쳤고.
내가 사실은 약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끔 더욱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자 뱀의 눈을 지닌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냥 이 세계를 탈출하려는 사람들? 그렇게 생각해 줘.”
“이 세계를 탈출하려 한다고?”
내가 머릿속으로만 망상하고 실제로 실천에 옮길 수 없었던 일.
나에겐 그 망상을 실행할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거야?”
나는 내가 보았던 그 거대한 기계들의 세상을 떠올리며 당연한 의문을 토해 냈고.
뱀의 눈을 지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뭐,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긴 하지만, 가능은 해. 이곳의 보안 시설은 전부 차원 장벽과 그 빌어먹을 골렘밖에 없으니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걸까?
나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꾹 참으며 나의 이름을 밝혔다.
“잉간.”
“응?”
“내 이름은 잉간이라고.”
“아, 내 이름은 드래곤이라고 해.”
“드래곤?”
“부끄럽지만, 이름을 지을 당시에는 내 동족이 나밖에 없는 줄 알아서. 최후의 생존자, 이런 느낌으로 지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지. 큭큭. 아, 내 이름은 드레이크라고 해.”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뱀의 눈을 가진 또 다른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드레이크라고 밝히고.
“아, 저는 큐비라고 해요. 종족은 서큐버스예요.”
하트 꼬리의 소녀가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래, 뭐.
서큐버스 같은 것도 있겠지.
판타지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뱀의 눈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가, 조금 심상치 않은데.
“저기, 드래곤 씨?”
“왜 그래?”
“설마 하지만, 이름만 드래곤인 게 아니라…….”
“종족도 드래곤이지. 드레이크도 나와 마찬가지로 드래곤이고.”
드래곤의 정체를 알자마자 나는 급격하게 공손해졌다.
드래곤?
드래곤이라고?내가 아는 그 드래곤 맞지?
흔히 판타지 세계에서 최강의 생물로 불리는 그거 말이야.
내가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공손해진 사이, 스스로를 큐비라고 밝힌 서큐버스가 슬며시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안녕? 네 이름은 뭐야?”
“……아리스.”
아리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큐비의 질문에 대답했다.
큐비는 그런 아리스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으며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아리스? 이쁜 이름이네?”
“그치?”
“응. 네 종족은 뭐야?”
“몰라. 그리고 말 걸지 마.”
어째서인지 아리스는 큐비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지만, 큐비는 그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뭐, 둘 다 아직 어린 것 같고, 둘이 놔두면 알아서 친해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아리스와 큐비한테서 신경을 돌렸고, 조심스럽게 드래곤에게 질문했다.
“저기, 드래곤 씨.”
“응?”
“이 세계를 탈출한다고 하셨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설명? 아, 역시 너도 탈출에 관심이 있구나?”
“뭐, 그렇죠. 돌아가야 할 집이 있으니까.”
기계 팔에 붙잡혀 정체불명의 공간을 봤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를 지금까지 키우던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나를 키우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돌아가야 한다.
나의 집으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드래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드래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탈출 계획을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일단 아까 봤듯이 마력을 쏟아부으면 이런 사육항의 차원 방벽 정도는 손쉽게 깨부술 수 있거든?”
“네. 그렇게 보이네요.”
“그런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사육항 바깥에도 거대한 차원 방벽이 둘러쳐져 있단 말이야. 그리고 그 차원 방벽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박살 낼 수가 없어.”
“그럼 뭐, 그걸 깨부술 방법이 있나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내 동족을 100명 이상 해방시켜서 마력을 일제히 집중하는 거. 문제가 있다면, 경비를 서는 골렘들 때문에 동족을 해방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럴 것 같네요. 그럼, 다른 방법은요?”
“장로님을 해방하는 거야.”
“장로님?”
“우리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마력이 많으시고, 강력하신 분이야. 그분이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바깥의 차원 방벽을 박살 낼 수 있을 거야. 뭐, 장로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드래곤 씨의 계획은 드래곤 100명을 해방하든지, 장로를 해방해서 이곳을 탈출한다는 건가요?”
“그렇지. 뭐, 100명을 해방시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서 일단 장로님을 구출하는 게 목표지만.”
참으로 단순무식한 방법이면서도, 꽤 괜찮은 방법이다.
원래 이런 방법은 힘만 충분히 있다면 알면서도 막기 힘든 법이니까.
그리고 딱히 내가 뭔가 지적할 정도로 이곳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없으니까.
“아까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게 설마…….”
“응. 이곳의 경비 골렘들. 파괴하려면 파괴할 수는 있지만, 솔직히 힘들거든.”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게,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해 보인다는 거다.
아까 공간 너머로 들려오던 소리로는 동료 한 사람이 희생을 하고 시간을 번 것 같은데…….
그런 내 걱정을 눈치챈 듯 드래곤은 피식 웃으며 내게 안심이 될 만한 소식을 전해 왔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이곳의 경비 골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릴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요?”
“뭔가 우리를 이용할 생각인 건진 모르겠지만, 만약 골렘에게 붙잡혀도 원래의 감옥으로 되돌려질 뿐이거든.”
“덧붙이자면 우린 지금까지 5번 실패했어.”
드레이크가 그렇게 부연 설명을 해 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다니, 이 정도면 할 만한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드래곤이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네 종족은 뭐야? 인간형 종족인 것 같은데…….”
“인간. 그냥 인간이에요.”
“인간? 네가?”
내가 드래곤의 질문에 대답하자, 드래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개 인간이 이 정도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이건 거의 드래곤급의 기운인데…….”
“기운요? 마력이 아니라?”
“기운, 간섭력, 용언력…… 뭐. 다들 제각각 아무렇게나 부르는데, 일종의 방어력 같은 거야. 원래 드래곤들의 기운으론 대부분의 생물체의 기운을 뚫고 정보가 보이는데 너는 보이지 않아서…….”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고요?”
“아, 드래곤들은 상대방의 정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거든.”
정보라.
나는 흘낏 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에포나를 바라봤다.
이건 에포나의 영향일까?
어쩐지 드래곤들이 꽤나 저자세로 나온다 했더니, 이런 속사정이 있었네.
굳이 에포나의 존재를 밝힐 필요는 없어 보이니,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적당히 드래곤의 말을 수긍했다.
“아무튼, 뭐. 그럴 만한 사연이 있긴 해요. 밝히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라고만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적당히 밑밥을 깔아 둔다.
드래곤은 굳이 이 부분을 더 추궁하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고.
“그럼 앞으로…… 2시간. 2시간 후에 드레이크의 마력이 전부 충전되면 다시 출발할 거야.”
“2시간. 알겠어요.”
드래곤은 이어서 내게 이곳의 지형을 물어보고는 주위를 둘러보겠다며 둥지를 나왔고.
드레이크는 얌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서 명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큐비와 아리스는.
“진짜? 진짜로?”
“응. 나는 성별도 없고, 딱히 그런 짓을 하고 싶지도 않은걸? 그래서 드래곤 아저씨를 따라 나온 거야.”
“그, 그래도 지식은 있는 거 맞지?”
“응, 그런데?”
“그럼 말이야…… 남자는 진짜로…….”
무언가 서로 속닥거리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내가 좀 더 자세히 들어 볼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이, 잉간은 듣지 마!”
얼굴이 시뻘게진 아리스가 나를 밀어내며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했고.
큐비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히죽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째깍거리며 시간이 흘러가고, 이 근방의 탑을 돌며 식량들을 모조리 가져온 드래곤이 돌아오고.
“이제 충분해?”
“거의. 진짜 거의 다 모였어…….”
드레이크의 마력이 거의 다 모였을 무렵이었다.
“……?”
무언가 다가오는 감각이 내 가슴을 욱신거리며 두드렸다.
주인의 것과는 다른, 차가운 칼날을 막 들이미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감각.
내가 의아해하며 압박감의 근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콰직, 콱.
허공이 박살 나며 그 안에서 거대한 로봇이 걸어 나왔다.
“001111110011111100111111”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화났다는 느낌을 주는 소리를 내뱉으며 말이다.
63화 *공지* 브리더 시험 합격했어요! 대박!!
“드레이크! 마력!”
“진짜, 진짜 조금 남았어! 1분, 1분만 버티면 돼!”
“아, 젠장! 나도 아직 마력이 간당간당하다고!”
거대한 로봇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드래곤은 드레이크를 목 놓아 불렀고.
드레이크는 드래곤에게 1분만 버텨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러자 드래곤은 욕설을 내뱉으며 로봇 앞을 가로막았다.
“001110100010110101000100”
또다시 로봇에게서 정체 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큐비! 정신 방벽 빨리 준비해!”
“주, 준비하고 있어요!”
드래곤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마력의 덩어리가 나타나 로봇을 가격한다.
무엇이든지 파괴할 기세로 로봇에게 날아들던 마력의 덩어리는 갑작스럽게 힘을 잃고 로봇의 몸에 부딪혀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다.
“젠장, 마력이 더 필요한 거냐고!”
드래곤은 그렇게 외치며 아까보다 더욱 커다란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지금까지 드래곤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던 로봇이 행동에 나섰다.
“01110011011101000110111101110000”
로봇이 또다시 뭐라 소리치자, 이곳에 끌려온 맨 첫 번째 날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
멈춰멈춰멈춰멈춰“크윽……?”멈춰멈춰멈춰“꺄악!”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
로봇에게서 터져 나온 정보들은 주위의 모두를 단단히 붙잡고 구속했고.
그것은 나와 아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처럼 수많은 정보들이 내 몸을 붙잡고 압박하려고 하던 그때.
“왕!”
에포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짖더니.
그대로 내 몸을 압박하는 정보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에포나가 나를 구속하던 정보들을 먹어 치워 준 덕분에 나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우선 아리스의 몸을 옭매는 정보들부터 손으로 쳐서 흩어 놓았다.
내가 그렇게 로봇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있는 와중에도 로봇은 천천히 드래곤에게 손을 뻗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정보들을 끊어 내려 하던 드래곤은 자신에게 다가온 로봇의 팔을 피하지 못했고.
“으윽……!”
로봇의 강철 팔에 몸을 꽉 붙잡히고 말았다.
그 타이밍에 나와 아리스는 큐비의 몸을 감싼 정보들을 흩어 냈고.
“차원 방벽…… 파괴!”
드레이크는 허공에 구멍을 뚫으며 탈출 준비가 완료됐음을 알렸다.
드레이크와 드래곤의 눈이 서로 잠시 마주치고.
“가! 먼저 가!”
“……알겠어. 잘 기다리고나 있으라고.”
그대로 드레이크는 나와 아리스를 이끌고 드래곤을 버려둔 채로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흐읍!”
그 순간, 지금까지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아리스가 버럭 소리치며 몸의 깃털들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자 은빛 알갱이들이 흩날리며 아리스의 몸이 달빛처럼 은은히 빛나고.
그대로 아리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마력 덩어리들이 로봇의 몸에 들이닥쳤다.
아까 드래곤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봤고.
“저리…… 꺼져!”
아리스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험한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로봇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아리스의 공격 때문에 로봇은 드래곤을 쥐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고.
드레이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드래곤을 낚아채 모두 다 함께 차원의 구멍 너머로 몸을 피했고.
그대로 차원의 구멍이 닫히며 나와 아리스는 처음으로 어항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두 발로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지면을 밟고.
두 눈으로 공장 지대같이 잔뜩 기계들이 늘어선 세상을 바라본다.
이곳이 어항 바깥의 세상.
그리고 내가 빠져나가야 할 세상.
내가 그렇게 어항 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져 있던 사이, 드레이크와 드래곤이 한숨을 내쉬며 선언했다.
“일단 어항 밖으로 빠져나왔으니 한시름은 놨어.”
“응. 경비 골렘이 추격해 오기 전에 빨리 이동하자.”
그런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나와 아리스는 드래곤 일행에게 이끌려서 복잡하게 얽힌 기계들 사이를 정처 없이 걸었다.
“우리의 위치를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디쯤인진 알고 있을 거야. 지금 우리 위치가…… 이곳. 거의 중앙 구역 근처거든. 장로님이 있으신 곳하고 얼마 남지 않았어.”
“진짜 얼마 남지 않긴 했네요?”
“여기까지 도달한 게 처음이긴 해. 사실.”
내가 그렇게 드래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드레이크는 아까 아리스가 보여 준 모습에 관심이 있는 모습이다.
드레이크는 아리스를 꽉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너, 아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냥. 그냥 보고 따라 했더니 되던데……?”
“마법을 그냥 보고 따라 했다고? 너, 설마 마력의 흐름이 보이는 거야?”
“마력? 그런 건 모르겠고, 아저씨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야.”
“있지. 잠깐만 좀 네 정보를 확인해 봐도 될까?”
“응? 정보? 어떻게?”
“그냥 경계심만 누그러트리면 돼. 별거 아니니까.”
드레이크의 제안을 들은 아리스는 내게 결정을 내려 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리스에게 조언을 건넸다.
“뭐, 잠깐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럼…… 잠깐만 봐야 해?”
“후훗, 나도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진 않을 거야. 괜찮아.”
드레이크가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아리스의 눈을 마주봤고.
이윽고 드레이크의 입에서 경악이 튀어나왔다.
“이건 웬만한 드래곤보다 더 마력이 높은데? 아니, 잠깐만. 이건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수준이야……!”
아리스의 정보를 확인한 드레이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외쳤고.
드레이크는 아리스에게 이게 어찌된 일인지 따지듯 물었다.
“너, 평소에 몸 상태가 어땠어?”
“평소? 여기 오기 전을 말하는 거야?”
“응. 평소에 몸이 어땠어? 막, 몸이 불타는 것 같다거나, 몸에서 반짝거리는 게 흩날리지 않았어?”
“응. 그랬어! 잉간이 알려 준 명상법대로 명상을 하니까 몸이 괜찮아졌지만.”
“명상법?”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아리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드레이크에게 내가 알려 준 명상법을 설명했고, 아리스의 설명을 들은 드레이크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건 드래곤 하트를 인위적으로 재현한 건데……? 이걸 누구한테 배웠다고?”
“잉간한테!”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진실을 이야기했다.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곳에서 배웠어.”
“누구한테 배웠는데?”
“뭐, 이곳의 주인 같은 사람? 나도 누군지는 정확하게 몰라. 슬슬 누군지 알아 가려던 찰나에 여기로 떨어져서.”
그러자 드래곤과 드레이크가 콰득, 이빨을 앙다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왜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아?
“역시, 밖으로 끌려간 동족들은…….”
“도축당했다고 보는 게 맞겠네.”
응?
갑자기 그런 결론이 왜 여기서 도출되는 거야?
내가 의아해하며 뻐끔뻐끔 눈을 깜빡이고 있자 드레이크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추리를 설명했다.
“네가 알려 줬다는 그 마력 연공법. 그건 드래곤 하트를 해부해서 내부 구조를 그대로 옮긴 거야.”
“어…… 그냥 연구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불가능해. 드래곤 하트는 우리들의 심장. 그 어떤 강대한 마법도 우리의 살갗을 살아서는 뚫지 못해. 우리를 납치한 누군가의 마법으로도 말이야.”
“허어…….”
그러니까 자기들의 심장을 연구하려면 자기들을 죽여서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거지?
“반드시. 반드시 동족들을 구해 내야 해…….”
“응. 반드시…….”
그렇게 두 명의 드래곤은 서로 각오를 다지고, 드레이크는 조심스럽게 아리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크흠. 아무튼 그래, 너. 나한테 마법을 배워 보지 않겠어?”
“마법? 막, 허공에 불을 만들고 반짝거리는 걸 만드는 거?”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라, 더 많은 걸 할 수 있지. 온 세상을 불로 뒤덮을 수도 있고, 세상에서 어둠이란 것을 없앨 수도 있단다.”
“흐음, 그래?”
그렇지만 아리스는 딱히 드레이크의 제안에 흥미가 돋은 것 같지 않고,
아리스는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잉간은 듣지 마!”
“응? 나?”
갑작스럽게 아리스에게 지목당한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좋아, 꼬마 아가씨. 그 정도 투정은 들어줄게.”
드레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갑작스럽게 아리스의 목소리만이 들려오지 않는다.
뭐야, 이거?
마법? 마법인 거지?
“----- -----------”
“후훗, 그럼. 당연히 가능하지. 마법을 배운다면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그렇게 될걸?”
“--- ----”
“응. 물론이지.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 -- -- ---”
아리스가 뭐라 중얼거리며 드래곤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
그제야 드레이크는 내게 걸린 마법을 해제했고, 아리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알려 줘. 그럼.”
“그래. 너는 이해가 빠른 것 같으니 이야기만으로도 배울 수 있겠지. 자, 제일 기초로는…….”
그 뒤로 아리스와 드레이크는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와 드래곤은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어색하게 가만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아저씨, 아저씨.”
“응, 나?”
“여기서 아저씨라고 불릴 사람이 아저씨 말고는 없잖아요?”
“아니, 드래곤도 있잖아…….”
“드래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죠. 나이 차를 생각하면 할아버지니까요.”
“드래곤이 몇 살인데?”
“드래곤 나이로는 20살? 막 청년이 됐다는데요?”
“그럼 많은 것도 아니잖아?”
“우주 표준 시각으로 계산하면 200살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아, 저는 태어난 지 6달 됐고요.”
“6달? 도저히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주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부위가 말이다.
발육 상태로는 아무리 봐도 6달이 아닌데……?
그러자 큐비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트릭을 밝혔다.
“어라, 커다란 게 취향이신가 봐요? 제 몸매는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크흠. 큼.”
뭐, 작은 것보단 커다란 게 좋긴 하지.
슬쩍 불편해진 나는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바꿀 겸, 큐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튼. 그러고 보니까 너는 어떻게 드래곤들이랑 같이 다니게 된 거냐? 나처럼 드래곤들이 쳐들어와서?”
“뭐, 그렇죠. 가장 큰 건 그, 다른 동족들처럼 맨날 사는 게 싫어서 드래곤들을 따라간 거였어요.”
“다른 동족처럼 사는 게 싫다고?”
“서큐버스의 삶이 뭐겠어요? 어쨌든, 저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존재한단 말이에요. 저는 수비보다 공격이 취향인데, 자꾸 수비하는 것만 시키니까…….”
“……응?”
뭔가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뭐? 공격하는 게 취향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큐비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자, 큐비가 그런 내게 결정타를 추가로 더 날려 왔다.
“아, 모르셨어요? 서큐버스는 양성이라는 거.”
큐비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사타구니를 두드렸고.
타이즈 너머로 존재감이 대단한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 어…….”
“그러고 보니까, 잉간 씨. 괴롭히는 맛이 있어 보이는데 제 취향일지도……? 얼굴도 귀엽고 말이에요.”
“히익……!”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슬쩍 한 걸음 물러섰고.
큐비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에요, 농담. 싫어하는 사람을 괴롭힐 정도로 목마른 것도 아니니까요. 뭐, 어쨌든 저는 제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서 드래곤들을 따라 나온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먹고사는 건 저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지만 잉간 씨도 그런 삶은 싫잖아요?”
“……그렇지.”
나도 안락하기만 한 어항보다는 차라리 몸은 힘들어도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어항이 좋으니까.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가 좋다면 자유로운 어항보단, 지구가 더 자유로운 게 아니야?
지구, 지구라.
내가 돌아가고자 하는 집은 과연 지구일까, 아니면 블랑카가 있는 어항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게 큐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때우던 그때.
“흥.”
“아리스?”
갑자기 아리스가 큐비와 나 사이로 끼어들어 왔다.
그러고는 입술을 부룩 내밀며 내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안아 줘.”
“응?”
“다리 아파. 힘들어.”
어…… 뭐, 새 인간이니까 걷는 건 힘들려나?
나는 어린아이의 어리광을 받아들이듯 조심스럽게 소위 공주님 안기의 자세로 아리스를 안아 들었고.
아리스는 만족한 듯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 인간이어서 그런가?
무척이나 가볍네.
뭔가 푹신한 인형을 껴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지켜보며 큐비는 쓴웃음을 지었고.
드레이크는 어째서인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아리스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드래곤의 인도를 따라서 기계의 세상을 걸었고.
어느 순간, 우뚝. 하고 드래곤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하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니.
“강?”
무척이나 거대한 강이 우리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생명의 샘에.”
드래곤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을 내뱉었다.
* * *
“젠장, 젠장……!”
쥬스농장은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욕설을 내뱉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필 드래곤들이 침입한 사육항이 지구산 인간이 들어 있는 번식장이었지?
충분히 시간을 들이면 탈출한 드래곤들과 지구산 인간을 다시 회수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쥬스농장에겐 이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클라인]
-브리더 시험 합격했습니다. 다시 잉간이 데리러 갈게요.
그 빌어먹을 히키코모리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단번에 브리더 자격증을 얻어 버렸다.
아니, 그것만이면 괜찮다.
쥬스농장이 직접 보내겠다며 시간을 질질 끌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클라인 따위가 아니었다.
[리만]
-이번에 지구산 인간을 임시 보호한다면서요? 저도 실물을 보고 싶으니 클라인 양과 함께 방문하도록 하죠.
진짜 문제는, 브리더 협회장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클라인과 함께 자신의 농장에 방문하겠다는 일정을 통보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인간형 생물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되면 클라인의 방문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협회장이 직접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까.
쥬스농장에게 남은 것은 이제 협회장이 방문하기 전에 지구산 인간을 회수하는 일뿐이었다.
“젠장, 젠장……!”
그렇게 궁지에 몰린 쥬스농장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몸 안으로 탐색용 의체들을 더욱 투입했다.
반드시, 반드시 협회장이 오기 전에 지구산 인간을 회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은 큰 곤란을 겪게 될 테니까.
64화 지구산 인간을 키울 때 주의해야 할 점
“드디어 도착했다. 생명의 샘에.”
“생명의 샘?”
어디선가.
정확히 말하면 사이비들에게서 들어 본 단어가 드래곤의 입에서 나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생명의 샘이라고?
아무리 봐도 샘이 아니라 거대한 강 같은데.
내가 그런 의문을 담은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자, 드래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신화 속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거든. 뭐, 내가 봐도 딱히 샘 같지는 않지만…… 다들 생명의 샘이라고 부르니까.”
“아무튼, 우리 목적지는 이 강 너머에 있다는 거죠?”
“그래. 차원 문을 열 마력이 모일 때까지는 잠깐 여기서 대기야.”
“대기? 어째서요?”
그냥 드래곤 폼으로 변하든지, 아리스처럼 날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아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고, 드래곤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그 이유를 말해 줬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거든.”
“하늘요? 어항 안에서는 잘만 날았는데…….”
“거긴 감옥 안이고. 여긴 감옥 밖이니까. 서로 적용되는 규칙이 다른 거겠지.”
“아하…….”
“강 자체에 마법을 써 보려고 해도 마법이 아예 무효화되더라. 뭐, 강 말고도 주위의 기계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말이기는 하는데.”
아무튼 비행으로 이 강을 건너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고.
수영으로 강을 건너기는 역시 무리겠지?
결국, 강을 넘으려면 차원 마법을 써야 한다는 건데, 아까 골렘에게서 도망칠 때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드래곤이 마법을 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냥 내가 마법을 쓰면 되는 거 아냐?”
드레이크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자신감이 높아진 걸까?
아리스는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제안했지만, 드레이크는 흐뭇한 눈으로 웃어 보이며 아리스를 타일렀다.
“차원 마법은 초보자가 사용하기엔 어려운 마법이란다. 좀 더 마법을 배워야 쓸 수 있을 거야.”
“으으, 그래도.”
아리스가 억지를 부리며 의지를 꺾지 않자, 현실을 보여 주겠다는 생각인 걸까?
드레이크는 상냥한 눈으로 아리스에게 차원 마법의 기초를 차분히 설명해 줬고.
아리스는 드레이크의 지도대로 조심스럽게 마법을 사용하려 시도를 했다.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우웅.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과 드레이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역시 단번에 차원 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리스도 힘든 일이었는지 결국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힘들어. 못하겠어.”
“역시 그렇지?”
아리스는 턱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포기를 선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은 혀를 내두르며 내게 속삭였다.
“진짜 저 아이의 재능은 엄청나네. 마력량도 엄청나고. 제대로 마법을 배우기만 하면 원로급의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허, 그래요?”
“그래. 잠깐 차원 마법의 기초를 배운 것만으로 차원 문을 완성 직전까지 만드는 건 웬만한 드래곤들도 못할걸?”
“허어…….”
아리스가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뭔가 나까지 기분이 다 좋아지네.
흐뭇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리스가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내 발치에 주저앉았다.
“아무튼, 드레이크가 마력을 충전하려면 좀 시간이 걸리니까, 잠시 여기서 휴식하자.”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서 고기들을 잔뜩 꺼냈고, 잔뜩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기들을 향해 내뱉었다.
화아악!
드래곤의 입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오며 고기를 노릇노릇하게 단번에 구워 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브레스를 그렇게 막 내뱉어도 되는 거예요?”
“드래곤 하트에 쌓인 열기를 내뱉는 거니까, 상관없지.”
“뭐, 필살기 같은 것도 아닌 모양이죠?”
“이름 그대로 그냥 단순히 숨을 내뱉는 거니까.”
드래곤의 숨결로 구운 고블린 고기라.
고블린 고기가 참 사치스러운 대우를 받았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내 몫의 고기에서 일부분을 떼어 내 에포나에게 건넸고.
에포나는 희희낙락하며 내가 내민 고기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드래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 옆에 있는 그건…….”
“에포나라고. 귀여운 아이예요.”
“에포나. 라고 부르는 건가? 너는 그걸?”
“그렇게 이름 붙였으니까요.”
“상당히 신기하네. 보통 그런 녀석들을 키우는 놈들은 정신 어딘가가 맛이 간 상태인데. 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런가요?”
정신 어딘가가 맛이 갔다라.
맞는 말이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에포나를 품 안에 끌어안고 에포나의 목을 쓰다듬었고.
에포나는 기분 좋다는 듯 나직한 울음소리를 냈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음은 당연하고 말이다.
“잉간, 거기 뭐가 있는 거야?”
“에포나라고. 아주 귀여운 아이가 있어.”
내가 드래곤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스도 에포나의 모습을 찾아내려 눈을 부릅떴지만.
에포나는 아직 아리스에게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뭐, 드래곤에게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지만.
드래곤은 계속해서 눈을 찌푸리며 에포나의 모습을 관찰하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는지 한숨을 내쉬며 포기 선언을 했다.
“역시 무리군. 네 설명을 들어도 인식하기가 힘들어.”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여서요. 생각보다 겁도 많고.”
“왕!”
아니라는 듯 에포나가 그렇게 짖어 오지만, 나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그날, 에포나가 벌벌 떨면서 내 품에 안겨 올 때의 모습을 말이다.
그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 에포나가 잊으라는 듯 내 손가락을 물어 오고, 나는 실실 웃으며 에포나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은 조용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강력한 정보 생명체를 어떻게 키우게 된 건지. 자네의 삶도 꽤 기구한 운명이었던 모양이네.”
“기구하다면 기구하죠.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는 삶을 살다가 눈을 떠 보니 숲속이었거든요.”
“도대체 자네에게 어쩌다가 그런 녀석이 달라붙었는지…….”
“별거 없어요. 그냥 달라붙을 사람이 저밖에 없던 거죠.”
그래.
에포나가 나에게 달라붙은 건 진짜 별일 아니다.
단순히 기생, 혹은 공생을 할 상대가 나밖에 없었을 뿐이니까.
진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어째서 그렇게 나를 도와줬는가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달은 거지만, 몇 번인가 에포나가 나를 도와줬을 때 굳이 에포나는 나를 돕지 않았어도 됐었다.
만약 에포나가 단순히 내게 기생만 할 것이었다면 그렇게나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도 됐었다.
내 뇌가 처리하지 못하는 정보를 대신 먹어 치우고.
꿈속에서 나를 위해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 주고.
그리고 음.
꿈속에서 뭔가 쌓이지 않게도 해 주고.
이건 그건가?
이기적 유전자적으로 생각해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어서 그러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도대체 에포나가 어째서 첫 만남부터 내게 호의를 보였는지.
나는 모르겠다.
단순히 숙주를 속이기 위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도움을 내게 줬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에포나를 바라봤고.
에포나는 내게 의심하지 말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에포나는 에포나다.
도대체 왜 에포나가 날 도왔는지는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지금의 에포나는 나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는 거니까.
그렇기에 나는 에포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에포나 또한 나를 전력으로 신뢰한다.
“네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전부 죽어 버린 차원에서 미쳐 버린 녀석. 그 녀석을 봤을 때 말고는 없었다고.”
“……그래요?”
어째서인지 갑자기 우울한 분위기가 강가에 깔리고.
“마력 충전 다 됐어. 슬슬 출발하자.”
그제야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출발을 선언했다.
허공이 일렁이며 차원 문이 만들어지고, 아리스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차원 문을 타고 강을 건너가자, 건너편에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강 밑바닥에서 죽어 버린 시체들이 떠오르듯 강물 위로 인간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그 기괴한 풍경에 내가 좀 더 자세히 생명의 샘을 바라보자, 강 밑바닥이 되어야 할 부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틀에 찍어 내듯 강 밑바닥에서 자라나는 수많은 인간들.
생명의 샘에서 태어났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내가 말문을 잃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드래곤이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이끌었다.
“네 동족을 위해서라도. 어서 가자.”
음.
딱히 동족을 위해서는 아닌데.
조금 기괴한 풍경이어서 충격을 받았을 뿐.
내 마음속에서는 저 사이비들이 딱히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기괴한 사이비들의 행동을 봐서 그런 걸까?
어쩌면 저 사이비들에게는 이 안에서의 삶이 바깥의 삶보다 더 편안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동족을 위해서라.
과연 내가 돌아갔을 때, 봉사할 동족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내가 납치된 날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쓴웃음을 흘리며 드래곤의 인도를 따라 다시 기계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고.
“장로님이 만드신 지도에 따르면, 이제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되는데…….”
“길이 없는데?”
분명히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지도대로 움직였건만, 막다른 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지도 제대로 본 거 맞아?”
“지도상에 우리 위치도 제대로 표시되니까, 길을 제대로 온 거 같은데……?”
그렇다면 지도에 써진 정보와 현실이 달라졌다는 건가?
순간 등골에 오싹한 기분이 들고.
그것은 드래곤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술을 깨물더니.
“함정……?”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고.
그것과 함께.
“001111100011101000101000”
잔뜩 성난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경비 로봇이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서 나타났다.
“드레이크. 이건 내가 상대할 테니 그 틈에…….”
드래곤은 자신을 미끼로 삼으라고 드레이크에게 지시하려 했지만.
“001111100011101000101000”
하나.
둘.
셋.
넷.
다섯.
무려 경비 로봇 다섯 마리가 더 나타나며 도망치지 못하게 길을 막아섰고.
“이런.”
드래곤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엄청 가까이 왔는데, 여기서 실패하네.”
“다음번에 더 잘하면 되지. 뭐.”
여기서 실패라고?
드래곤들은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과연 드래곤들이 다시 탈출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아리스를 데리고 가려 할까?
나라면 아니다.
나에게 이번 기회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리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전처럼 거대한 마력 덩어리들을 만들어 내며 저항을 시도해 본다.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벼려진 아리스의 마법.
어라? 이거면 돌파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힘차게 경비 로봇들에게 날아든 아리스의 마법은 드래곤의 마법처럼 효과를 잃고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01110011011101000110111101110000”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나와 드래곤들을 찍어 눌렀다.
“으윽……!”
그렇게 나와 드래곤은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로봇들에게 제압당해 버렸고.
에포나만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포나는.
* * *
“……잡았다.”
쥬스농장은 자신의 의체들이 탈출한 개체들을 붙잡았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사고 회로를 진동시켰다.
“어머, 베이컨. 뭐가 그렇게 좋은 거죠?”
“당연히 협회장님께 제 농장을 보여 드릴 수 있어서죠.”
“확실히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만큼 좋은 농장이네요. 무척이나 효율적인 농장이에요. 개체들의 스트레스도 최고한도를 지켜서 관리되고 있고…….”
“그렇죠?”
그리고 그런 쥬스농장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리만이 의아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고, 쥬스농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접대용 의체를 움직여 보였다.
다행히 오늘 이곳에 온 것은 클라인뿐만이 아니라 리만 협회장도 함께다.
그렇다면 최대한 이곳저곳에 끌고 다니며 지구산 인간을 회수할 시간을 끌면 된다.
지금껏 봐 온 클라인의 성격으로는 리만 협회장의 관광을 제지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지금도 클라인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지 않은가?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리만의 발걸음을 늦췄고, 그 계획은 꽤나 잘 수행되어 이렇게 지구산 인간을 함정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 드래곤 놈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에 정보 조작을 가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쥬스농장은 안도하고 있었지만, 리만은 언제나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쥬스농장에게 다가왔다.
“저기, 베이컨.”
“무슨 일이시죠, 협회장님?”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낼게요. 어째서 보호종은 브리더 말고 다른 사람이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그야, 보호종의 과도한 남획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렇죠. 더 정확하게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 보호종을 키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죠.”
“네, 그런데…….”
“그런데 말이에요. 보호종 지정에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지 아시겠어요?”
“그건…….”
쥬스농장은 서둘러 리만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지만, 리만은 쥬스농장의 대답보다 앞서서 정답을 공개했다.
“외우주까지 진출 가능한 생물들은, 지적 생명체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때문에 적절한 시설을 가진 브리더만이 보호종을 다룰 수 있는 거고요.”
“그렇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그리고 말이에요. 이 기준은 당연하게도 이번 지구산 인간의 보호종 지정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랍니다. 베이컨.”
어째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쥬스농장은 리만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기 전, 어디선가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콰득, 콰드득.
자신의 몸이 사정없이 누군가에게 뜯어 먹히는 기괴한 감각.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만은 조용히 쥬스농장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베이컨. 내 생각에는 네가 너무 지구산 인간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있던 것 같아.”
쥬스농장은 리만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몸이 사정없이 누군가에게 뜯어 먹히는 기괴한 고통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65화 차원 파괴자, 제대로 알면 대처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것은 결심했다.
아니, 그녀가 된 것은 결심했다.
설령 이 선택으로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게 될지라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리는 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반쪽을 믿고 있었다.
반쪽이 자신을 기억해 주는 한, 그녀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의 반쪽은.
절대로 그녀를 잊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 * *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다.
나와 아리스에겐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해야만 해.
하지만 어떻게?
내가 그렇게 다급하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왕!”
에포나는.
언제나처럼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고.
사방에 잔뜩 떨어져 있는 정보들을 마구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와그작, 우적, 아자작.
에포나는 평소의 식사와는 다른, 무언가를 물어뜯는 듯한 거친 식사를 시작했고.
서서히.
서서히.
자신의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드래곤들을 제압한 경비 로봇은 나와 아리스에게도 다가오기 시작했고.
경비 로봇의 억센 손아귀가 나의 몸을 붙잡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포나의 몸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에포나의 위장이 완전히 풀리기 직전.
나는 싱긋 에포나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본 듯했다.
그리고.
“001111110011111100111111”
콰드득, 콰직.
주위의 정보들을 먹어 치우고 커다랗게 성장한 에포나의 촉수가 경비 로봇의 몸을 단번에 꿰뚫었다.
“어……?”
“저, 저건?”
갑작스럽게 나타난 에포나의 모습에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 무슨 짓을 해도 쓰러질 것 같지 않던 경비 로봇은.
천천히 에포나의 몸에 흡수되어 갔다.
너무나도 손쉽게 경비 로봇을 에포나가 먹어 치우자, 잠시 정적이 흐르고.
경비 로봇들은 발광하듯 자신의 몸에 장착되어 있는 모든 것을 사용했다.
고밀도의 정보를 들이부어서 에포나를 제압하려 한다.
오히려 에포나의 덩치만을 불렸다.
경비 로봇의 눈이 빛나며 허공이 잠깐 일렁이더니, 거대한 에포나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물텅 에포나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렇게 에포나는 단숨에 경비 로봇들을 전부 먹어 치웠고, 경비 로봇들이 모두 사라지자 목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드래곤들은 멈췄던 숨을 토해 내며 경악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저게, 저게 도대체 뭐…….”
“촉수? 아니, 정보가 너무 과다해서 물질화한 거라면, 정보 생명체일 텐데…….”
그런 드래곤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나는 조용히 에포나의 이름을 불렀다.
“에포나.”
평소처럼 왕, 하는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에포나는 촉수를 내게 기울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살짝 피어난 의심을 조용히 잠재울 수 있었다.
아무리 모습이 변해도, 에포나는 에포나다.
단지 그뿐이다.
그러자 드래곤들이 식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저게 네가 말하던 에포나라고?”
“정보를 읽을 수 없던 것도 당연하네……. 저런 게 옆에 있었으니까.”
“저런 게 아니라 에포나라는 이름이 있거든요?”
“그래, 에포나. 아무튼, 네가 시켜서 한 짓이야?”
“아뇨. 뭐, 그냥 자기가 알아서 움직인 거죠.”
“네가 사역하는 게 아냐?”
“에포나는 제 사역마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가 좋아서 저를 따라다니는 거일 뿐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네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드레이크가 중얼거린 순간,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온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금단의 구역이었던 하늘에서 대량의 로봇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롭게 나타난 로봇들은 아무런 말 없이 에포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에포나는 마치 괴수물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촉수를 꿈틀거리며 로봇들을 격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드래곤들은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저 에포나인가 하는 녀석이 시간을 버는 동안 장로님을 찾아야 해!”
이대로 에포나를 두고 가도 되는 게 맞을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에포나를 바라봤고.
그런 나를 타박하듯, 에포나의 촉수가 뻗어 나와 내 배를 강타해 나를 드래곤들에게 날려 보냈다.
“크헥……!”
힘 조절에 실패한 건지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였지만, 에포나가 전하고 싶은 말은 잘 알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서 일어나 드래곤들과 함께 도망치려 했지만.
쾅.
갑작스럽게 에포나가 날뛰기 시작하며 촉수를 뻗어 드래곤들이 향하던 길을 박살 내 버렸다.
어라, 에포나?
이미 에포나는 충분히 성장할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에포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 모습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마치 폭주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나를 밀친 것을 기점으로 삼아서 인격이 바뀌어 버린 것 같다.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로봇들이 사라진다면, 우리까지 덮칠 것 같은 기세다.
아니, 이미 그럴 생각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박살 낼 기세로 등 뒤에서 에포나의 촉수가 무섭게 몰아치기 시작한다.
“잉간, 정말로 저걸 어떻게 조종할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요. 없다고요!”
앞길이 무너진 잔해들에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에포나의 촉수가 주위를 전부 박살 내는 상황.
도저히 어디론가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낭패라는 듯 혀를 걷어차려 할 때,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비상구처럼 벽에 뻥 뚫린 것 같은 구멍.
어째서인지 다른 드래곤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나만이 저 통로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다들 이쪽으로!”
“어, 어?”
아리스의 날개를 붙잡고 서둘러 통로로 몸을 이끈다.
드래곤들의 시야에선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걸까?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드래곤들은 내 뒤를 따라서 벽 안의 통로로 들어왔고.
쿠구궁.
우리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오던 에포나의 촉수가 우리가 있었던 곳을 완전히 뭉개 버렸다.
“여기는 경비 골렘들이 이용하는 통로인 건가?”
“이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지. 참…….”
드래곤들은 통로 안의 상태를 살피며 그런 결론을 내렸고, 드래곤이 마력을 사용해 새롭게 장로 드래곤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젠장, 신호가 너무 미약해. 이상한 신호들이 섞여서 제대로 탐지가 안 돼.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런 벽 안에서는 제대로 장로의 신호를 탐지할 수 없는 건지 드래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를 통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는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그 에포나라고 부르는 생명체 말이야. 그건 도대체 정체가 뭐야?”
딱히 할 일도 없이 어둑한 통로를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이 에포나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포나는 에포나예요. 단지 그것밖에 없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뭐, 저도 정체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나타나 있어서.”
“흠. 저 정도로 강력한 정보 생명체가 아무 이유도 없이 탄생할 리는 없는데…….”
드래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러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힘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큐비, 너는 저걸 보고 뭐 알아낸 게 있어? 같은 정보 생명체로서 느껴지는 게 있을 거 아냐?”
드래곤의 질문은 이어서 큐비에게로 옮겨 갔고, 큐비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드래곤의 질문에 대답했다.
“음, 저기. 기분 나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세요?”
“응?”
“제가 느끼기론, 온 세상의 악의와 고통을 하나로 모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아니, 이건 그냥 제가 느낀 느낌이에요. 그, 에포나가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에포나를 험담하는 것 같은 큐비의 말에 내 입술이 샐쭉해지자, 큐비는 웃음으로 자신의 발언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저 같은 서큐버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어요. 이 정도면 아마 이곳의 주인에게도 쉽게 당하지 않지 않을까요? 뭐, 이건 추측이지만요.”
그럼, 그럼.
우리 에포나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의 날개를 붙잡은 손을 슬쩍 놓으려 했지만, 아리스는 오히려 내게 날개를 더 얽혀 들게 하며 거리를 좁혀 왔다.
새의 몸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리스의 깃털 너머로 따끈따끈한 체온이 전해져 오며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그런 나와 아리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큐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냐고, 그 따봉은.
그리고 아리스? 너는 왜 또 날개를 들어서 화답해 주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일부러 눈치채라고 이러는 걸까?
그런 기묘한 기분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통로를 걷던 도중, 우리 앞에 거대한 문이 등장했다.
단단히 문이 잠겨 있어서 돌아가야 하나 걱정했지만.
“흐얍!”
아리스가 대량의 마력을 내뿜어 아예 문을 박살 내는 방식으로 길을 열었다.
“에포나가 시설을 공격해서인지, 보안장치 이것저것이 다 망가진 것 같네.”
“그런가요?”
“응. 아마 지금 이 상태라면 날아다니는 것도 가능할걸?”
“아, 진짜다!”
드레이크의 설명을 들은 아리스가 슬쩍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들뜬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다시 내 품 안으로 포르르 돌아왔다.
“어머머?”
이젠 드레이크까지 나와 아리스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빠르게 드래곤을 재촉해 열린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계단이 눈앞에 나타나며 어디론가 우리를 인도하던 와중.
“잠깐 정지.”
“무슨 일이에요?”
“아까부터 장로님의 신호를 방해하던 신호가 더욱 커졌어. 이 앞에 뭔가 있어.”
“아, 진짜네요. 뭔가 느껴지네요. 이건. 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 그런 거 같네요.”
큐비마저 드래곤의 발언에 동조하며 경계를 갖출 것을 요구했고.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자, 규칙적인 기계음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삐삐빅- 삐비빅- 삐비빅-
마치 심장박동처럼 느껴지는 기계음.
마침내 계단의 끝이 모습을 드러내고, 곧장 마법을 날릴 기세로 모두가 계단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쟁반 모양의 철판을 머리에 매단, 정체불명의 기계.
“뭐야, 이건……?”
드래곤들은 이것 또한 경비 로봇과 같은 개체가 아닌가 두려워하며 경계했지만.
나는 눈앞에 놓여 있는 기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구에 있었을 때, 언제나 저것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게 이곳에 있는 거지?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기계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보이저……?”
내 목소리를 들은 기계는, 마치 정답이라는 듯 신호음을 울렸다.
* * *
“어, 으. 저기, 혀, 협회장님? 저거…….”
“리만.”
“네?”
“리만 아주머니라고 불러 주세요.”
“리, 리만 아주머님. 저, 저 사람…….”
“아, 괜찮아요. 차원 파괴자에게 뜯어 먹히는 것 정도로 마키나가 어떻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단순히 엄청나게 아플 뿐.”
“그, 그래도……?”
그래도 저렇게 눈앞에서 끙끙거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차피 자업자득이에요. 베이컨이 지구산 인간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안 일어났어요.”
“네?”
“아, 클라인 양에게도 문제를 하나 낼게요. 정보 생명체는 어떻게 해서 탄생하죠?”
협회장이 질문하는 것이니만큼 고밀도 정보가 뭉쳐서 탄생한다는 단순한 답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고.
클라인은 잠시 머리를 팽팽 돌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리만의 질문에 대답했다.
“음…… 한 가지 감정이 반복적으로 축적되면 탄생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잘 알고 있네요. 생식 본능을 자극받아 탄생한 감정들에서 생겨난 것이 서큐버스, 의식 바깥의 정보들이 쌓여 탄생하는 것이 무의식-잠수파리. 자, 두 번째 질문이에요. 클라인 양. 그렇다면 차원 파괴자는 어떻게 탄생할까요?”
리만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쥬스농장의 몸을 박살 내고 있는 차원 파괴자의 모습을 가리키며 두 번째의 질문을 던졌다.
클라인은 조용히 차원 파괴자의 습성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충 시절에는 의태와 인식 저해를 이용해서 천적을 피하고.
성장기에 들어서는 정보들과 마력을 먹어 치우며 몸집을 불려 나가다가.
마침내 차원을 파괴할 정도로 성장하고 난 뒤에는 사람도 위협할 정도로 자라나는데.
그렇게 강력한 정보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죽음.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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