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4
"혹시, 라판이라고 아십니까?"
"라판? 라판……. 아아, 하프랫의 라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성현은 위화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라판이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만약 여기가 큰 도시의 상인 협회였으면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잠깐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라프타는 크지도 않을뿐더러 거주하는 마물 수도 적은 도시였다. 그런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알긴 아는데, 우리 협회에서 탈퇴한 지 꽤 되신 분이에요."
"……탈퇴한 지 꽤 됐다고요? 언제 탈퇴했죠?"
"글쎄요. 삼 개월 전쯤이었던 거 같은데. 다른 도시에서 가져올 게 있다면서 마차를 빌렸었죠. 갔다 오고 나서 바로 탈퇴하고, 그 뒤로는 못 본 거 같네요."
삼 개월 전. 이성현이 라판과 함께 라프타에 왔을 때다. 산적에게 습격당하고 있던 라판을 구하고, 처음으로 라프타로 왔을 때. 라판은 그때 마차를 반납한 이후로 한 번도 상인 협회를 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탈퇴했는지, 이유는 아십니까?"
"으음……. 해야 할 일이 있다던가?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거 같아요. 시간이 오래 지나서 자세히 기억은 안 나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성현은 여자의 손에 게헨 몇 닢을 쥐여줬다. 여자는 별다른 보상을 바라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손에 돈이 들어오자 꽤 반가운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성현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사람을 찾고 싶으시다면 여기로 가보세요."
여자는 종이를 꺼내 뭔가를 그리더니 이성현에게 내밀었다. 받아서 보니 어떤 곳으로 가는 길을 그려놓은 약도였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정보상……, 비슷한 거에요. 뒷조사를 해주는 곳이죠. 다른 도시에 비하면 수준은 떨어지긴 하는데. 이 도시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여기나 주점 말곤 방법이 없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상인 길드를 나섰다. 상인 길드를 나선 이성현은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라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는 다른 도시에서 뭔가를 가져오고 바로 상인 협회를 탈퇴했다. 마치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는 다른 도시에서 마차로 뭘 가지고 온 걸까. 상인이라는 직업도 그만둔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제길, 머리가 아프군."
의문점은 너무도 많았고, 풀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이성현은 아파지는 미간을 손으로 누르면서 약도에 나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중세 시대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정보상에서 싼 값에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조금만 발품을 팔면 얻을 수 있는 싸구려 정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계라고 별반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이성현은 자신이 발품을 팔아서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현은 정보상에게 라판의 뒷조사를 의뢰할 생각이었다.
라판이 그리 유명한 마물은 아니니 알려진 정보는 없을 테고, 어쩔 수 없이 라판의 뒷조사를 의뢰할 수밖에 없다. 정보상은 라판을 쫓아다니고 그의 뒤를 캐면서 알아낸 정보를 제공하고 이성현은 그 대가로 정보상의 손에 돈을 쥐여주는 것이다.
뒤를 쫓는 일이라면 이성현이 해도 되긴 하지만 전문가가 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고, 또 번거로울 것이다. 그럴 바에야 돈을 주고 전문가를 쓰는 게 낫다. 그들은 이성현보다 더 빠르고 전문성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일해줄 테니까.
정보상은 꽤 어둑한 곳에 있었다. 사람이 잘 드나드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가서 한참을 걸어가니 그제야 보였다. 어둑한 골목길에 좁은 건물. 입구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만물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성현은 약도를 다시 확인했다. 만물상. 이름은 이상했지만 여기가 약도에 나와있는 곳이었다.
"잘 찾아왔군."
이성현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있는 탓에 열 수 없었다. 이성현이 여러 번 문을 두들기니 그제야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온몸을 검은 망토로 가리고 있는, 한눈에 봐도 수상해 보이는 마물이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희미한 빛에 비친 얼굴에는 끔찍한 흉터가 있었다.
"……뉘슈?"
"소개를 받아서 왔다. 이거."
이성현은 약도에 그려진 서명을 보여줬다. 그 서명을 한참을 들여보던 마물은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흐음."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사방에 책이 한가득 든 서재가 놓여있었고, 가운데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손님용으로 놔둔 싸구려 의자가 하나. 그 외에도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정보상은 의자에 앉으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판이라는 마물의 뒷조사를 의뢰하고 싶다. 아는 정보가 있으면 그것도 사고 싶군."
"라판. 흠, 유명한 놈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 놈의 정보가 왜 필요한 거지?"
정보상은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다. 그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의뢰나 덜컥 받았다가 상대방이 생각보다 거물이면 정보상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뒷조사라는 것은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거니까.
"요즘에 자꾸 수상한 행동을 해. 원래 상인 협회에서 일하던 녀석인데, 갑자기 일을 그만뒀어. 가족들한테는 여전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요즘에는 아예 집에도 안 돌아오고 있지. 그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알고 싶다."
"흐음."
이성현의 설명을 들은 정보상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톡, 톡.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주기로 울리는 소리. 정보상은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주지. 값은 천 게헨이다."
깡패 머리 천 개 값이었다. 빵으로 치자면 빵 천 개 값이었고. 꽤나 비싼 돈이었지만 한 마물의 뒷조사를 해주는 거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리지?"
"일주일. 일주일 뒤에 여기로 찾아와. 그 라판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랑 어디서 볼 수 있는지도 적어놓고 가."
그러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성현은 그 종이에 라판에 대해서 아는 것들을 적었다. 정보상은 종이를 한 번 훑어보더니 문 쪽으로 손짓을 했다.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 * *
'이제 구천 게헨 정도 남았나.'
정보상이 있는 어둑한 골목을 나온 이성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계산했다. 이제 슬슬 이 돈을 어느 정도 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현은 어젯밤부터 뭘 살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 결과, 정수석을 구매하기로 했다.
이성현이 생각하기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화였다. 등급이 하나 오를수록 육체의 성능이 눈에 띄게 늘어남을 몸소 체감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9, 10등급의 마물은 갓 히스토리아에 들어온 이방인들도 처리할 수 있으며, 평생을 농사만 지어온 평민들도 약간의 상처만 입고 퇴치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 이성현이 아는 대다수의 약한 마물들이 9, 10등급에 속했다.
그나마 마물다운 구실을 하는 것이 7급부터고, 그 위로 올라갈수록 이성현이 알고 있는 나름 강한 마물들이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강한 마물로 진화하는 것이었다.
이성현은 엘레인을 통해 미리 알아뒀던 가게로 향했다. 그녀는 그곳을 정수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라고 했다. 이성현은 미리 익혀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가게가 하나 들어왔다. 길가에 서 있는 작은 크기의 가게. 입구에는 케나한의 보석상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이성현은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손님 하나 없이 조용했고, 가장 안쪽의 계산대에 남자 마물이 하나 서 있었다. 이성현에게 더없이 익숙한 종족, 리저드맨이었다.
리저드맨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덩치가 커지고, 피부에 붙어있는 비늘의 윤기가 좋아진다. 그리고 색깔이 변화한다. 지금까지 이성현이 상대했던 대다수의 리저드맨은 연초록색의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8등급 미만의 리저드맨이 그런 비늘을 가진다.
가게를 보는 리저드맨은 연한 붉은 색의 비늘을 가지고 있었고, 연초록색의 비늘을 가진 리저드맨보다 덩치가 컸다. 못해도 7등급 이상의 리저드맨이라는 것이다.
"으음,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로군."
신문 같은 것을 읽고 있던 리저드맨이 고개를 들어 이성현을 반겼다. 그는 한쪽 눈이 없었다. 그리고 그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무엇을 사러 오셨는지?"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에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진열대 안에는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정수석도 있었다. 이성현이 노예 짓을 하면서 질리도록 캤던 라테나이트로 만든 돌.
이성현은 정수석을 가리켰다.
"정수석을 사러 왔습니다. 정수가 담긴 걸로요."
"흠, 우리 가게에서는 낮은 순도의 정수석 밖에 취급 안 한다네."
'낮은 순도…….'
마계에는 정수석 안에 담긴 정수량을 알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그저 낮은 순도, 중간 순도, 높은 순도로 구분할 뿐이었다. 정수석을 정수로 다 채우면 빛이 나는데, 크기에 따라서 안에 들어있는 정수의 양이 달랐다. 크기가 클수록 순도가 높다고 했고, 작을 수록 낮다고 했다.
정수석을 판매하는 이들은 자신이 파는 정수석에 얼마 만큼의 정수가 담겼는지 모르고 팔았고, 정수석을 구입하는 이들은 자신이 구매하는 정수석에 얼마 만큼의 정수가 담겼는지도 모르고 구입했다. 애초에 어느 정도의 정수가 모여야지 진화하는 지도 모르는 이들이 정수석에 담긴 정수량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복불복. 이성현의 머리에 그런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운이 좋으면 똑같은 돈을 내고도 많은 정수가 담긴 정수석을 살 수도 있고, 운이 없으면 적은 정수가 담긴 정수석을 사게 되겠지.
"얼마 정도 합니까?"
"개당 천 게헨."
이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저드맨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커다란 옷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미처 옷으로 가리지 못한 부분이 상처로 가득했다.
리저드맨은 잠겨있는 진열대의 잠금을 풀었다.
"얼마나 살 테지?"
"다섯 개만 주십시오."
여기에 게헨을 모두 소비할 생각은 없었다. 낮은 순도의 정수석이 얼마 만큼의 정수를 주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기에 돈을 다 쓰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저드맨은 진열대 안에서 미약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정수석 다섯 개를 꺼내 조그마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성현 역시 가지고 온 주머니에서 게헨을 꺼내 건넸다.
"흠, 용병인가?"
"네. 어떻게 아십니까?"
"흐흐, 모습을 보면 알지. 나도 한때는 용병이었거든."
리저드맨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무슨 표정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웃는 표정인 모양이었다. 리저드맨의 웃는 얼굴은 특이했다.
"은퇴하셨습니까?"
"그래. 눈을 잃었으니까. 원근감이 사라지니 싸울 수가 없더군. 그래서 은퇴했지."
이성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작물들 중에는 외눈의 검사가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현실은 창작물과는 많이 다르다. 한쪽 눈을 잃으면 원근감을 크게 상실하게 되고, 상대방과 나와의 거리를 재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건 전투에서 치명적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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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그래도 벌어놓은 게헨이 좀 있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슬슬 닫을까 생각 중이지만."
"왜 닫으시려는 겁니까?"
"장사꾼이 장사를 그만두는 이유가 뭐겠나? 장사가 안 돼서 그렇네. 라프타에는 용병들이 많이 없거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정수석의 수요가 줄어들더군."
리저드맨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계산대로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쓴웃음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리저드맨의 표정은 이성현의 눈으로는 무슨 표정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성현이 보기에는 무슨 표정이든 다 화를 내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가게를 닫고 나면 뭘 하시려고요?"
"글쎄. 떠나야지.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저드맨은 탄식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알던 많은 이들이 이 도시를 떠났다. 영주에 대한 뒤숭숭한 소문이 도는 라프타에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이성현은 그런 리저드맨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떻게 된 게 라프타라는 도시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이들이 없었다. 전부 다 지금의 라프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길레라, 크지라. 젠장, 마계가 더 개판이군.'
인간계는 마족과 아인종과의 싸움으로 엉망이었는데 마계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성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많이 파세요."
"그래. 혹시 더 살 일이 있으면 와라. 아니면 폐점할 때 오던가. 할인해줄 테니."
"흠, 그걸 미리 말해주셨으면 그때 왔을 텐데요."
리저드맨이 말하는 걸로 보아하니 문 닫을 날이 그리 머지않은 것 같은데. 리저드맨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멋쩍은 웃음이래 봐야 이성현의 눈에는 화내고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였지만.
"떠나기 전에 돈은 벌어두고 가야 되지 않겠나."
"……환불됩니까?"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이성현은 혀를 찼다.
* * *
집으로 돌아온 이성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정수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저순도의 정수석을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꿀꺽 삼키면 된다. 정수를 머금은 정수석은 이빨로 깨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약해진다. 게다가 정수석 안에 있는 정수를 다 사용하고 나면 공기 중에 사라진다. 그러니 섭취한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물론 이건 크기가 작은 저순도의 정수석에만 사용되는 방법이었고, 고순도의 정수석은 별도의 마법진을 사용해 정수를 흡수했다. 고순도의 정수석은 크기가 크다. 그런 커다란 정수석을 삼켰다가 목 막혀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성현은 자신의 앞에 있는 다섯 개의 정수석을 긴장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 년 동안 히스토리아에서 지내면서 많은 것을 겪었지만, 가공된 광석을 통채로 먹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긴장감이 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성현은 주먹의 반만 한 크기의 정수석을 들었다. 그리고 입안에 집어넣었다. 딱딱한 광석의 촉감이 가장 먼저 느껴졌고, 그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냉기였다. 정수석을 입 안에 넣은 느낌은 마치 냉동실에서 막 꺼낸 얼음을 입에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성현은 눈을 질끈 감고 입안에 있는 정수석을 반쯤 베어물었다. 그리고 정수석의 반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차가운 얼음 조각을 그대로 삼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그다음으로 온몸으로 뭔지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현은 남은 정수석도 다 섭취하고 오 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정수량을 확인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정수량이 육 천 정도였는데, 거기서 사 백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사 백. 으음, 그리 많진 않은데."
천 게헨으로 사 백의 정수를 얻었다. 보통 마계의 평민 한 가구가 한 달을 지내는 데 사용하는 돈이 육백에서 칠백 정도다. 싸구려 빵에 밍밍한 스프만 먹는다면 이것보다 더 아낄 수 있겠지만, 대충 그 정도가 소비되었다.
이성현은 평민 한 가구가 한 달을 지내는데 쓰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사 백의 정수를 얻은 셈이었다. 산적단 하나를 털면 팔백에서 천 정도의 정수를 얻을 수 있는데.
'이거 손해 같은데?'
가성비가 너무 안 좋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이성현은 나머지 정수들도 섭취했다. 삼 백의 정수를 주는 정수석도 있었고, 육 백의 정수를 주는 정수석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섯 개의 정수를 다 섭취해서 얻은 정수는 2300이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성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수석을 사는데 전재산을 쓰지 않았다는 것. 만약 전재산을 썼다면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지금 이성현의 정수량은 8500이었다. 아직 진화하려면 1500의 정수가 더 필요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헨이라는 놈도 죽이러 가야겠군.'
목표로 했던 상급의 신체 강화도 얻었으니, 이젠 진화를 목표로 할 때였다. 이성현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 정수석들을 떠올리곤 묘하게 허무한 기분을 느끼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레피가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레피는 이성현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곤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을 지었다.
"아저씨, 볼일 끝났어요?"
"어. 라판은?"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바깥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레피가 그렇듯이 이성현 역시 라판의 얼굴을 본지가 너무 오래 돼서 그의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이성현은 시무룩한 레피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밥은 먹었어?"
"아뇨……. 아저씨 기다렸어요."
레피는 책으로 자신의 입가를 수줍게 가렸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집에서 밥을 먹으려면 레피가 요리해야 하는데, 그녀가 할 줄 아는 요리는 너무 한정적이었다. 아니,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스프. 그녀의 어머니가 해줬다는 스프 뿐이었다. 애초에 레피 본인은 먹을 거에 그리 관심이 없기에, 그녀는 고정된 메뉴에 큰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이성현은 레피를 데리고 외식을 하곤 했다. 레피가 해주는 스프의 맛이 괜찮긴 하지만 매일 같이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다. 다른 음식도 먹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나가서 먹을까?"
"네에."
레피는 조그마한 머리를 끄덕거렸다.
* * *
라프타 같은 조그마한 도시에서 외식하려면 번화가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거주 구역은 말 그대로 거주할 집들만이 모여있는 곳이었고, 그 외의 가게는 없다. 아니, 없어졌다. 레피가 예전에는 있었는데 마물들이 떠나면서 죄다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렇기에 레피와 이성현은 번화가로 왔다. 거주하는 마물 수가 고작 삼 천 밖에 안되는 곳이라곤 하더라도 밤이 되니 번화가도 나름 붐볐다. 이성현은 지나다니는 마물을 살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마물, 창녀로 보이는 마물을 품에 안은 채 어디론가 가는 마물, 그리고 지나가는 마물을 매의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깡패로 보이는 마물. 온갖 마물들이 있었다.
이성현은 레피의 눈에 음란한 것이 안 보이게끔 가리면서 늘상 가는 식당으로 갔다. 사실 식당이라기보다는 주점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파는 음식이 꽤 맛있어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식당으로 들어가자 한 여자 마물이 둘을 반겼다. 이 식당의 종업원이었는데, 이 식당에 여러 번 보면서 얼굴이 눈에 익은 마물이었다. 둘은 종업원에게 구석진 자리로 안내받았다. 평소에 둘이 앉는 자리였다.
"시킬 메뉴는 늘 드시는 걸로 할까요?"
"예. 괜찮지?"
레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종업원은 그런 레피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더니 웃음을 뿌리면서 주방으로 가버렸다. 이성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가 식당 안을 살폈다. 식당 안은 꽤 북적거렸다.
"오늘은 제법 마물이 많네."
"그러게요……."
이성현의 말대로 오늘 식당은 제법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식당 안에는 아홉 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한 개의 테이블만 빼고 다 차있는 상황이었다. 평소에는 절반 정도 차있는 걸 생각하면 오늘은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불편해요.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빠르게 먹고 돌아가자."
"……네."
식당이 평소보다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레피는 얼굴에 불편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이성현은 맞은 편에 있는 레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간계에 있을 때, 이성현은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꺼렸다. 히스토리아에 넘어온 초기에 겪었던 사건들이 이성현이 인간 관계를 맺는 데에 소극적이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성현의 힘이 조금씩 강해지고, 모험가 등급이 올라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그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접근해왔다.
당연하지만 이성현은 그런 이들에게 강한 혐오감을 내비쳤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 이성현에게 별다른 속셈이 없는 레피라고 하는 마물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녀를 챙겨주는 것은 자신의 여동생이 생각나서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별다른 속셈 없이 그를 따르는 레피가 마음에 들어서일 지도 모른다.
이성현이 주변의 마물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레피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종업원은 이성현과 레피의 앞에 음식을 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떠났다.
"흠."
저 종업원은 이 근처에서 꽤 인기가 있는 마물이었다. 이성현은 그녀의 종족명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레피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종업원, 종족이 뭐였지?"
"종족이요? 하프폭시……, 였던가. 아마 그럴 거에요.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종업원은 여우의 다리와 팔, 푹신해 보이는 기다란 꼬리와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출이 많은 옷으로 풍만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의 감성을 가진 이성현이 보기에도 꽤 매력적인 마물이었다.
이 마계에서 삼 개월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마물의 미에 대한 감각이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종족이 자신의 종족의 암컷을 최고로 여겼지만. 일반적으로 이성현이 보기에 괜찮다 싶은 여자 마물들은 다른 마물들도 좋게 평가했다.
이성현이 종업원을 지켜보면서 생각에 빠져있자, 레피가 뾰로퉁해졌다.
"저런 마물이 좋아요?"
"엉? 뭐, 매력적이긴 하지. 괜찮잖아."
"……저런, 커다란 게 좋아요?"
레피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녀는 종업원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줬다.
"우……."
"그, 너무 좌절하지 마라. 레피야. 너도 자랄 거야."
레피는 원망스런 눈길로 이성현을 째려봤다. 이성현은 왜 레피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린애가 으레 보이는 그런 질투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레피는 어린애가 아니었지만.
레피는 뾰루퉁한 얼굴로 스튜를 떠먹었다. 레피가 시킨 요리는 누우 고기를 넣어서 끓인 일종의 비프 스튜였다. 마계에서는 간단하게 누우 스튜라고 불렀다. 마계에서 지내면서 느낀 거지만, 마물들의 작명 감각은 최악이었다.
이성현이 시킨 요리는 큼직하게 자른 고기를 통째로 구운 스테이크였다. 이성현은 고기를 크게 잘라 한입에 베어물었다. 그렇게 둘은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시간은 순식간에 깨졌다. 식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어떤 무리들 때문에. 이성현의 눈이 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비대한 몸을 가진 마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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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뭐야?"
커다란 박쥐 날개를 가진 마물이 식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의 몸은 거대하고, 또한 흉측했다. 붉은색의 피부는 곳곳에 검은 반점이 있었고, 보기 흉할 정도로 살이 쪄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살덩어리들이 출렁거렸다.
그 마물의 뒤를 부하로 보이는 마물 세 마리가 따랐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식당이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물들의 얼굴을 살피니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들이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길래 저리도 겁을 먹는단 말인가. 포크에 꽂힌 고깃덩어리를 씹으면서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이봐, 주인장! 내가 늘 먹는 걸로 가져와라!"
흉측한 마물이 좁은 의자에 몸을 비집고 앉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종업원이 다급하게 그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흉측한 마물의 눈이 기분 나쁘게 빛났다.
"저, 저기, 여기, 물이에요."
"호오, 흐음."
흉측한 마물은 종업원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뱀이 자신의 몸을 핥는 것 같은 기분 나쁜 감각에 종업원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하지만 그녀가 떨든 말든, 흉측한 마물은 그녀의 몸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이거, 오랜만에 왔더니 괜찮은 년이 있잖아."
"네, 네?"
종업원을 몸을 떨다 못해 경련하고 있었다. 흉측한 마물은 징그러운 웃음을 짓더니 종업원을 돌려보냈다.
"빨리 먹을 걸 가져와! 난 배가 고프니까."
종업원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연신 숙이면서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성현은 그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꼴 보기 싫은 놈이었다.
"뭐야, 저놈은?"
"아, 아저씨!"
이성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레피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이성현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레피는 혹시나 그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요. 그냥 지켜만 봐요. 움직이면 안 돼요……!"
"……왜? 저 놈이 누군데?"
"크, 크지라에요. 아길레라의 아들……."
크지라. 익숙한 이름이었다. 라판과 레피가 살던 동네의 마물들이 학살당하는 계기를 제공한 마물. 4급의 마물이자, 여자를 밝히는 놈.
"저놈이……."
추한 놈이었다. 생김새가 추한 걸 떠나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추했다. 이성현은 저런 놈을 싫어하다 못해 경멸했다. 귀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놈들. 이성현이 인간이었을 때, 수도에서 귀족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성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런 그의 눈에 레피의 모습이 들어왔다. 레피는 살굿빛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아?"
"으, 아뇨, 아니, 네……."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겁먹은 상태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의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때 겪었던 일들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납치하고, 강간하고, 그리고 결국 죽게 된 계기를 제공한 놈을 보고 멀쩡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성현은 레피의 상태를 살피면서 크지라를 흘겼다. 종업원은 어느새 음식을 가지고 와 식탁 위에 내려두고 있었다. 크지라는 슬쩍 손을 내뻗어 종업원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종업원은 크지라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자 크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영주의 아들인 크지라에게 반항할 수도 없었기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저기, 제가 가봐야 해서……."
"여기 있어라. 죽기 싫으면."
크지라는 단호한 말을 내뱉었다. 한 손으로는 종업원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어댔다. 그가 음식을 먹는 동안 종업원은 자신의 몸을 만지는 크지라의 손길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금방 식사를 끝마친 크지라는 이윽고 종업원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몸에 비하면 한참 작은 그녀를 품에 안고 탐욕스런 미소를 흘렸다.
"크흐흐. 이봐, 점장! 이 여자는 내가 잠깐 데리고 간다. 괜찮겠지!"
주방에서 일하던 점장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안 됩니다, 크지라 님……. 제 딸은, 아직 남자를 받은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처녀라는 건가? 크흐, 더 마음에 드는군. 걱정마라. 여기 옆에 골목에서 잠깐만 하고 돌려줄 테니까.""크, 크지라 님!"
크지라가 종업원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점장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런 그를 크지라의 경호원이 막았다. 경호원 중 하나가 점장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고, 그 충격에 점장의 몸이 땅에 쓰러졌다.
"크지라 님이 말씀하시는 건 절대적이다. 죽고 싶나?"
"으으, 끄……."
점장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경호원이 막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크지라는 어느새 종업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점장이 애절한 비명을 내질렀고, 식당에 있던 이들은 그런 점장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점장은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면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여자의 비명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쾅!
"크아아악!"
폭발 소리에 이어서 크지라의 돼지 멱을 따는 비명이 들렸다. 폭발 소리를 들은 경호원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식당 안에 있던 이들도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갔고, 이성현도 떨고 있는 레피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갔다.
식당의 바로 옆에는 어둑한 골목길이 있었다. 크지라가 말한 골목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어둑한 골목길 안에는 눈을 매만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크지라가 있었고, 종업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크하악! 뭐야, 뭐냐고! 뭐냔 말이다!"
"크, 크지라님! 괜찮으십니까!"
"네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냐, 이 멍청한 새끼야!"
크지라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균형을 잃고 다시 쓰러졌다. 아무래도 눈 쪽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탓에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경호원들은 다급하게 달려와 크지라를 부축했다.
"이, 쓰레기들이! 날 안 지키고 뭐 했어!"
크지라는 자신을 부축하는 경호원들을 강타했다.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힘에 경호원들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크지라님! 일단 지금은 성으로 돌아가시죠.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래, 크윽, 일단, 일단 돌아간다! 젠장!"
크지라는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에 당황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눈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조금 전까지 욕정을 품었던 종업원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반쯤 벗은 몸으로 서 있는 종업원을 무시하고, 크지라와 경호원들은 골목길을 떠나 사라졌다.
어느새 식당에서 나온 점장이 그런 종업원에게 달려갔다. 점장은 반쯤 벗고 있는 종업원에게 옷을 걸쳐주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괘, 괜찮니?"
울음을 터트리는 종업원.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가 폭발해서 크지라의 눈을 다치게 한 건 확실한 거 같은데, 누가 그런 걸까. 주변을 둘러봤지만 의심스러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 돌아가요."
이성현의 품 안에 안겨있던 레피가 꼼지락거렸다. 이성현은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레피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새하얗게 질린 레피의 얼굴을 본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가자."
이성현은 레피를 안은 채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품안에 안겨있는 레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크지라를 무서워하는 거지?"
레피의 어머니는 크지라 때문에 죽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크지라를 무서워할 만도 하다. 하지만 레피는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크지라의 악명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레피의 모습이 심상찮았다.
"……모르겠어요. 그 마물을 보니까, 이상하게 몸이 떨려요. 무서워요."
"흐음……."
기억은 없지만, 몸은 기억한다는 건가. 이성현은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레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피가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 * *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많은 사건을 가져왔다. 아길레라의 아들인 크지라가 누군가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라프타 전체로 퍼졌다.
크지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졌고, 그 다음으로 폭발 소리가 들렸고, 눈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길레라는 당연히 대노했다. 부하들에게 자기 아들을 다치게 한 놈이 누구인지 찾아내라고 명령했고, 대외적으로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아직은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성현은 마지막으로 남은 산적단 토벌 의뢰를 받았다. 한때 이 근처를 주름잡았던 가스트, 카스카, 브헨. 이 셋 중 마지막으로 남은 브헨을 토벌해달라는 외리.
브헨의 거주지는 라프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으니, 카스카의 야영지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는 셈이었다.
그의 거주지가 가까운 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거주지로 삼고 있는 곳이 라프타의 공동묘지였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에 공동묘지로 썼다가 지금은 버린 곳이었다.
브헨은 버려진 공동 묘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았다. 공동묘지는 사기가 넘쳐흐르는 곳. 언데드인 브헨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공동묘지에는 많은 시체가 묻혀있고, 그 시체들은 사기의 영향을 받아 되살아난다.
'라판은 시체를 화장한다고 했었는데.'
모든 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의 미생물들이 먹지 못하게끔 시체를 매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미생물들이 먹으라고 탁 트인 곳에 시체를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종족 간의 문화의 다름으로 인해 생긴 차이점이었다.
어쨌든, 브헨은 그런 식으로 되살아난 언데드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으면서 자신의 산적단의 크기를 키워나갔다. 지금은 가스트와의 전투로 인해 생긴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 공동 묘지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이걸로 마지막이군."
이성현의 옆에서 걷던 르칸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번 의뢰를 마지막으로 카르카스로 돌아간다. 라프타의 용병 길드와 맺었던 계약이 끝나는 모양이었다. 그가 라프타의 용병 길드와 맺은 계약은 약속한 숫자만큼 의뢰를 수행하면 계약 관계를 끝낸다는 계약이었다.
"이제 카르카스로 돌아가시겠군요."
"으음, 돌아가야지. 가능하면 빠르게."
지금 라프타는 뒤숭숭했다. 눈을 다친 크지라가 분노하면서 날뛰고 있었고, 크지라의 부하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범인을 찾고 있었다. 덕분에 죽어 나가는 것은 깡패들이었다. 평소에 거리에서 날뛰고 다니던 깡패들이 용의자 1순위였고, 크지라의 부하들은 깡패들부터 족쳤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많던 깡패들이 거리에서 안 보이게 됐다. 크지라의 부하들이 무서워서 모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으으, 돼지 자식. 탐욕스럽게 여자만 밝힐 때부터 그리 될 줄 알았다. 그냥 죽어버리지. 너, 크지라가 습격당하는 걸 봤다며?"
"본 건 아니고요. 습격당하고 나서 괴로워하는 걸 봤습니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흐음. 아쉽군."
르칸은 혀를 차면서 아쉬워했다. 라프타에 있는 이들 중에서 크지라를 좋아하는 이들은 없었다. 여색을 밝히는 그가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많아서였다. 많은 이들이 크지라가 사고로 죽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비참하게 죽기를 바랐다.
============================ 작품 후기 ============================
크지라.
아, 이름 다른 걸로 할 걸.. 사투리 같네..
추천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37====================
데몬 로드
브헨이 머무는 공동묘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추워졌다. 그리고 까닭 모를 꺼림칙함과 불길함이 내면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공동묘지가 내뿜는 사기 때문이었다. 르칸은 털을 부르르 떨면서 투덜거렸다.
"제길, 더럽게 춥군. 이래서 언데드 놈들은 싫어."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강령술을 사용하는 이성현으로서는 귀가 간지러워지는 말이었다. 르칸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음, 네가 부리는 녀석들은 빼고."
"됐습니다. 저도 언데드는 싫어요. 제가 부리긴 하지만요."
"……흠, 다행이군."
르칸은 털털하고, 의리가 깊은 마물이었다. 마계에 있는 마물이라고 해서 모든 이들이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 마계는 인간계와 비슷했다. 사악한 놈들이 있는가 하면 선한 놈들도 있었다. 인간계가 그러하듯이.
"다 왔네요."
"그렇군."
공동묘지의 입구가 이성현의 눈에 들어왔다. 르칸은 코를 찡긋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공동묘지 안에는 죽은 자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특유의 썩은 내. 르칸이 가장 싫어하는 냄새였다.
르칸은 뒤따라오던 용병들에게 손짓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놈들이 있다. 아마 우리가 접근한 걸 알고 있을 테니 경계해라."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선두에 선 것은 르칸과 이성현이었다. 이성현은 허리춤에 매단 검을 빼들고, 다른 손으로는 도끼를 매만졌다. 금방이라도 던질 수 있게끔.
그렇게 경계하던 일행이 공동묘지의 입구를 넘어선 순간.
"흐흐, 산 것의 온기가 내 무덤에 들어왔구나."
낮은, 정말로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측되게끔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이성현과 르칸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덩치의 마물이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관리가 잘 됐는지 빛을 내뿜고 있는 갑옷과 매서운 예기를 발하는 검. 갑옷의 틈새에는 사람의 살결 따윈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뼈뿐이었다. 놈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투구의 안에 있는 얼굴은 틀림없는 해골이었다. 해골은 텅 빈 눈에서 푸른 안광을 내뿜으면서 달그락거렸다.
이성현은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브헨. 이성현이 탈출할 때 도움을 준 놈이었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이성현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스트를 공격한 덕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셈이었다.
브헨은 대검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너희들도 내 군대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이 행진하노라!"
브헨의 외침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공동묘지의 곳곳에서 언데드들이 일어났다. 언데드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단순한 좀비에서부터 스켈레톤, 데드 워리어까지 있었다. 7등급의 마물인 데드 워리어를 본 르칸이 눈을 빛냈다.
"저놈들은 내가 상대하겠다. 브헨은 네가 처리할 수 있겠지?"
"6등급이었던가요? 물론입니다."
이성현은 아직 7등급이었지만, 상급의 특전, 신체 강화를 가지고 있다. 신체 강화가 중급이었을 때도 큰 어려움 없이 카스카를 죽였다. 상급의 신체 강화를 가지고 있는 지금은 더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제가 맡죠."
이성현은 허리춤에 매달았던 도끼를 던졌다. 목표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스켈레톤이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 허름한 갑옷을 입은 스켈레톤은 입을 벌리면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녹슨 갑옷이 거슬리게 덜그럭거렸다.
이성현의 도끼는 매섭게 날아가 스켈레톤의 머리를 박살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으면서, 이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헨에게 돌진했다.
"누가 내게 도전하느냐!"
브헨이 고함을 내지르자 근처에 있던 스켈레톤들이 이성현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방패를 들고 있는 해골은 방패를 단단히 세워 방어 태세를 굳혔다. 그러면서 이가 다 빠진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지만 그 공격은 너무 느렸다. 이성현은 느릿한 베기를 가볍게 쳐내고, 도끼로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해골은 재빠르게 방패를 들어 이성현의 공격을 받아냈다.
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패가 찌그러졌다. 이성현은 도끼를 계속해서 휘둘렀다. 매서운 일격이 해골의 방패를 계속해서 강타했다. 쾅, 쾅하는 철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공동묘지에 크게 퍼졌다.
어떻게든 공격을 버텨내려고 하던 해골은 이성현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손에서 거의 걸레짝이 된 방패가 떨어졌다. 이성현은 방패를 놓치고 틈을 드러낸 해골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었다.
펑! 해골의 뼈밖에 남지 않은 머리가 호쾌하게 터졌다.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뼛조각들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다른 해골에게 공격을 이어나갔다. 방패를 들고 있지 않은 해골은 상대하기 쉬웠다. 이성현의 검이 해골을 박살냈고, 이성현은 브헨에게로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내 앞에 무릎 꿇으라!"
브헨은 거대한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커다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꽤 강력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이성현의 귓가를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이성현도 힘으로는 뒤처지지 않는다.
이성현은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맞받아쳤다. 브헨은 자신의 검을 맞받아치려 하는 이성현을 비웃었다. 놈은 자신의 검을 막아내지 못하고 죽으리라.
퍼엉! 검과 검이 맞부딪혀서 난 소리라곤 믿기 어려운 소리가 폭발하듯이 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튕겨나간 것은 브헨의 검이었다.
"큭?!"
브헨의 팔이 크게 뒤로 튕겨져나갔다. 브헨의 힘이 이성현보다 약했기에 튕긴 것이다. 놀라운 힘이었다. 7등급의 핏 가드가 이런 힘을 낼 수 있다니. 브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한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성현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도끼로 브헨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브헨의 갑옷이 움푹 파이고, 그의 몸이 충격에 휘청거렸다.
"크으아!"
브헨은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성현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성현은 재빠르게 브헨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브헨의 턱 부분을 도끼로 올려쳤다.
브헨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이성현의 도끼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도끼가 브헨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찍었고 그의 검이 브헨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이성현은 브헨의 갑옷이 부서지고, 브헨의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노옴!"
브헨이 분노를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뼈밖에 남지 않은 팔이 떨어져 나갔고, 브헨의 팔이 땅을 나뒹굴었다.
이성현은 브헨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면서 거리릅 벌렸다.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브헨의 이마로 도끼를 투척했다. 도끼가 혼란스러워하는 브헨의 투구를 강타했고, 이어서 거리를 좁힌 이성현의 검이 브헨의 목 부분을 나무패듯이 쳤다.
이성현은 자신의 왼손으로 돌아온 도끼로 또다시 브헨의 목을 강타했다. 브헨의 목을 박살내는 데는 두 번의 도끼질이면 충분했다. 이성현의 도끼가 브헨의 목을 처음 후려치자 목을 보호하는 갑옷이 찢어졌고, 그다음 도끼질로 목뼈가 날아갔다.
허공을 날아가는 브헨의 머리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허나 놀랍게도 브헨의 몸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불사자인 언데드는 머리가 분리되어도 죽지 않는다. 그들을 죽이려면 사기가 모여있는 머리를 박살내야 한다.
팔과 머리를 잃은 브헨의 몸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이성현은 그런 브헨의 다리를 부숴서 쓰러트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브헨의 머리에게 다가갔다.
브헨은 여전히 눈에서 푸른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 안광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이성현은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마주쳤다.
브헨의 입이 달그락거렸다. 이전에 가스트를 상대할 때도 무식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눈앞의 이놈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이런 힘은……."
"본 적이 없겠지?"
이성현은 도끼를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내리찍었다. 이성현의 도끼가 브헨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그의 두개골이 반으로 갈라지고,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성현은 반으로 갈라진 두개골을 발로 밟아 부쉈다.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브헨이 죽자 언데드들의 전투력이 크게 약해졌다. 용병들은 약해진 언데드들을 손쉽게 정리했다. 이성현 역시 언데드들을 정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쉽게 포인트와 정수를 모을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약해진 언데드들을 정리한 이성현에게 7등급의 데드 워리어들을 혼자서 상대한 르칸이 뻐근한 팔을 돌리면서 다가왔다.
"어째 넌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제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같이 돌아다니는 마당에."
"아니, 그렇긴 한데. 끄응."
이성현은 르칸을 무시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브헨이 사용했던 검이었다. 그가 들고 있을 때는 한손검으로 보였는데, 이성현이 드니 영락없는 대검이었다.
"브헨이 쓰던 검인가?"
"예. 뭐 좀 아시는 거 없습니까? 이 검의 성능이라던가."
"……그건 상대해본 네가 잘 알지 않나?"
이성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헨은 오히려 카스카보다 상대하기 쉬웠다. 몸이 거대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느렸고, 그러다 보니 빈틈을 찾기가 쉬웠다. 브헨의 검 성능을 몸으로 느끼기도 전에 죽여버렸으니 알 리가 없었다.
"글쎄. 브헨 그놈은 자기 장비에는 꽤 신경 쓰는 녀석이라서, 제법 쓸만한 무기일 텐데. 으음, 갑옷은 완전 걸레짝이 됐군. 네가 한 건가?"
"그럼 누가 했겠습니까. 꽤 단단하더군요."
브헨이 사용하는 갑옷은 꽤 튼튼한 갑옷이었다. 이성현이 박살내는 바람에 이젠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렸지만. 르칸은 브헨의 갑옷을 아깝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팔면 꽤 돈이 되는 물건일 텐데.
"아쉽군. 다음부턴 손대중 좀 하면서 죽여. 이런 건 팔면 돈이 된다고."
"음……. 생각해보죠. 이제 돌아갑니까?"
이성현은 브헨의 대검을 등에 멨다. 라프타로 돌아가서 감정 주문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괜찮은 검이면 쓰고, 아니면 경매장에 올려서 포인트를 벌면 되니까. 무엇을 하든 이성현에게는 이득이었다.
르칸은 용병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브헨이 죽고 난 뒤로 언데드들의 전투력이 약해져서 그런지, 부상당한 이들도 없었다. 이 정도면 잠깐의 휴식 시간만 가지고 돌아가도 될 것이다.
"그래. 한 시간 정도만 쉬고 돌아가자."
"……여기서요? 사양하고 싶은데요."
이성현은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에서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공동묘지에서 쉬고 싶진 않았다. 멀쩡한 몸이 괜히 아파질 것 같았다. 르칸은 이성현의 반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좀 걸어가다가 중간에 쉬던가. 망할, 더럽게 까다롭군."
"제가 까다로운게 아니라 당신이 이상한 겁니다, 르칸. 다른 용병들한테도 물어봐요. 나랑 같은 의견일 테니까."
"좋아, 기다려라. 물어보고 올 테니까."
르칸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결의를 다진 얼굴로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더니,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이성현에게 돌아왔다.
"……싫다는군."
"거봐요, 제 말이 맞죠?"
르칸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쉴만한 곳으로 가려면 한참 걸어가야 한다. 오랫동안 걸은 탓에 다리가 아파서 좀 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걸어가야할 것 같다.
르칸은 용병들을 추스르고 브헨의 거주지에 뭔가 쓸만한 물건이 있는가 뒤졌다. 그리고 약간의 수확을 거둔 뒤, 공동묘지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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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토벌을 끝마치고 보상을 받은 이성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자고 있는 레피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방으로 올라온 이성현은 감정 주문서를 꺼냈다. 브헨의 대검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성현은 브헨의 대검에 감정 주문서를 붙이고, 주문서에 나타난 글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지금 이성현이 쓰고 있는 검과 비슷한 수준의 검이었다. 부여되어있는 마법도 비슷했다.
'낯선 대검보다는 익숙한 아밍 소드가 낫지.'
이성현은 오랫동안 한손검을 사용했기에 대검류의 무기는 잘 다루지 못했다. 이성현은 대검을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고, 이성현은 경매 판매와 즉시 판매 중에서 즉시 판매를 선택했다. 가격은 이성현이 구매했던 검과 비슷한 가격에 올렸다. 2700 포인트.
놔두면 알아서 팔리겠지. 이성현은 쓸모없어진 주문서를 찢어발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수량을 확인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정수는 총 구천 오백. 진화에 필요한 정수가 일 만이었으니, 이제 다 모은 셈이었다.
'정수석으로 보충하면 되겠군.'
이성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수량과 진화하는데 필요한 정수량을 시스템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정수석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이성현은 홀로그램에 나타나 있는 진화 가능한 종족을 살폈다.
지금 이성현이 진화할 수 있는 종족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섀도우 솔저라는 종족이었고, 나머지는 맨티코어라는 종족이었다. 맨티코어라는 종족은 이성현도 알고 있는 종족이었다.
사자의 몸에 박쥐의 날개, 강철 같은 가시가 박힌 꼬리를 지닌 괴물. 얼굴은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흉측한 괴물이었다. 이성현도 인간계에 있을 때 딱 두 번 상대해본, 희귀한 마물이었다.
'무조건 인간형으로만 진화하는 건 아니었구나.'
맨티코어는 꽤 강력한 종족이다. 몸길이는 거의 5m에 달하는 데다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고, 독이 묻어있는 꼬리의 가시를 발사해서 적을 공격한다. 체중도 매우 무거워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반면에 섀도우 솔저는 인간형의 종족이었다. 어디까지나 형태만 인간과 유사하다는 것이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었다. 섀도우 솔저는 그림자에서 태어난 종족이라는 전승이 있다.
그 전승대로, 그들은 그림자에 녹아들 수 있다. 그림자에 숨어서 적의 공격을 회피하거나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그 외의 특성도 있겠지만, 문제는 섀도우 솔저 계통의 종족들이 이제 와서는 거의 멸종한 종족인 지라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섀도우 솔저라.'
아무래도 인간형에 가까운 섀도우 솔저로 마음이 기우는 것이 사실이었다. 맨티코어가 강력한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이성현은 평생을 인간으로 살아왔다. 갑자기 짐승형이 되면 혼란스러울 것이고 전투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이제 나갈까.'
이성현은 섀도우 솔저로 진화하기로 마음을 굳혔다.오늘은 정보상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성현은 어둑한 골목길에 박혀있는 만물상에 들러, 정보상을 만났다.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나?"
정보상은 이성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손님이 왔을 때 나올법한 반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알아낸 건 있어. 하지만 자세한 건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그게 천 게헨이나 먹어놓고 할 소린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그 라판이라는 놈. 비밀스럽게 뭔가를 준비하고 있어."
정보상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종이 몇 장을 이성현에게 건네줬다. 종이에는 가지런한 글씨로 여러 가지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정보상의 글씨인 듯했다.
"일 주일 동안 놈을 미행했는데, 놈이 유독 자주 가는 곳이 있더군. 예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구역인데, 매일 같이 거길 가더라고. 거기서 뭘 하나 싶어서 놈을 따라갔는데……. 놓쳤다."
"놓쳤다고?"
"그래. 놓쳤어. 어떤 건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더군. 온데간데없이 말이야. 그래서 주변을 조사하고 있으니, 이번엔 다른 놈이 그 건물로 들어가더군. 당연하지만 놈도 사라졌고 말이야."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정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인도 모르는 것을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까.
"모르지. 난 그 건물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그 결과, 제법 많은 이들이 그 건물을 드나든다는 걸 알게 됐지. 그리고 그중에는 묵직한 자루 같은 걸 가지고 들어가는 놈들도 있더군."
"그 자루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아냈나?"
"어떻게 알겠나. 자루를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라판이 드나드는 가게들로 유추해보니 대충 짐작은 가더군."
이성현은 정보상이 다음 말을 꺼내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마법석."
"……마법석?"
"그래, 마법석. 라판 그놈, 아상하게 마법석 가게를 자주 드나들더군. 그 가게 주인이랑도 제법 친해 보였어. 종이에 위치를 적어놨으니 찾아갈 테면 찾아가봐. 그 외에 내가 구한 정보는 모두 적어뒀다."
"흠……."
마법석. 마법이 저장된 돌이다. 마법을 배우지 않은 이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돌로, 무슨 마법을 저장했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보통은 간단한 공격 마법들을 저장해서 사용했다. 마법석은 특수한 장비를 사용하면 원거리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서 가끔 폭탄처럼 사용하곤 했다.
'천 게헨 치고는 정보가 너무 부실한 것 같긴 한데, 어쩔 수 없군.'
이성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새삼스레 여기를 소개해준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다른 곳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지지만, 여기밖에 없다고. 그 말이 정확했다. 이성현은 두 번 다신 이 정보상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만물상을 떠났다.
정보상이 건네준 종이에는 라판이 갔던 곳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하루는 여기에 적힌 곳을 돌아다녀야 할 것 같다. 라판을 만나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물어봐야 한다.
* * *
이성현은 그 날 하루를 라판을 찾는데 사용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간 마법석 가게도 라판을 모른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밖에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한참을 헤매던 이성현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라판이 예전에 살았던 구역이었다. 요즘에 라판이 드나드는 곳. 거기에 라판의 흔적이 있기를 바라면서.
"……으음."
골목길을 지나,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쭉 걸어가니 여러 개의 건물이 있는 구역이 보였다. 구역의 모습을 천천히 돌아본 이성현의 입에서 저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에서는 돌조각이 떨어져 나가 안의 골조가 드러나 있었다.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져 있는 데다가 건물 안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살풍경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이성현은 근처에 있는 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벽에는 핏자국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로 내리찍은 것 같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구역에 살던 이들이 죽으면서 만들어진 흔적인 듯했다.
"폐허군."
말 그대로 폐허였다. 이성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라판은 이런 폐허에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이성현은 코를 스치는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은 검의 손잡이에 다가가 있었다.
이성현은 정보상이 가르쳐준 건물로 다가갔다. 정보상의 말에 따르면 라판과 정체 모를 이들이 여기를 드나든다고 했다. 하지만 흔적을 캐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정보상조차 여기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과연 내가 여기서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한 건물 안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근방은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이성현은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없군.'
이성현은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근처의 구역은 오랫동안 방치됐음이 틀림없다. 누구 하나 관리하지 않는 건물일 텐데, 바닥에 먼지 하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드나든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이성현은 건물 안을 살폈다. 1층에는 주방과 거실, 예전에 침실로 쓰였던 것 같은 방이 있었다. 주방과 거실을 살펴본 이성현은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는 반으로 토막 난 침대와 부서진 가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토막 난 침대에는 새까맣게 변색된 피가 묻어 있었다.
예전에 있었던 학살의 흔적일 것이다. 이성현은 핏자국을 잠깐 봤다가 주변을 뒤졌다. 이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특이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이성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먼지가 쌓인 의자에 앉았다.
'찾는다고 뭐가 나올 거 같진 않은데.'
이성현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라판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이성현이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군요, 가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라판아 서 있었다.
"라판."
라판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로 그가 쓴웃음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라판은 들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예전에 당신이 이 골목으로 들어오는 걸 봤었습니다. 이 건물은……."
"뒷조사를 의뢰하셨군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드를 벗었다. 후드를 벗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요즘 어떤 마물 하나가 이 근처를 돌아다니길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당신이 보낸 마물이었군요. 다음부터는 실력이 좋은 마물을 쓰는 게 좋을 겁니다. 그자는 숨는 게 서투르더군요."
"안 그래도 바가지 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천 게헨이나 먹어놓고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안 주더군요."
라판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런 도시에 남아있는 정보상이래 봤자 대단찮은 놈들뿐이죠. 실력있는 이들은 진작 떠났으니까요. 겉만 번지르르한 놈일 겁니다."
"그 말대로더군요."
이성현과 라판은 서로를 마주 봤다. 이성현의 시선 한구석에 라판이 내려놓은 자루의 내용물들이 들어왔다. 자루에는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마법석이 들어 있었다. 이성현은 라판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
"라판,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라판은 이성현의 시선이 자루로 향한 것을 느꼈는지 자루를 내려다봤다. 라판은 자루의 주둥이가 열려있는 걸 보곤 쓰게 웃었다. 이성현은 한참 동안 그가 대답하길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해진 이성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레피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레피."
라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란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셨죠?"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상인 협회를 그만두고, 마법석을 모으고 있다.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구역에서, 정체 모를 이들과 모임을 하고 있다. 제 머리로는 그것 밖에 안 떠오르더군요."
이성현의 말을 들은 라판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성현이 인내심 있게 그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그는 헛웃음을 토해내면서 말을 내뱉었다.
"아니요. 우리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움직이는 거죠."
"……우리? 역시, 당신 말고 다른 이들이 있는 거군요."
라판은 조용히 수긍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죠?"
잠깐의 침묵.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성현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복수……. 개인적인 복수를 할 생각입니다."
============================ 작품 후기 ============================
아니, 크지라를 처음 쓸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저 놈이, 크지라..."
이렇게 딱 대사를 적고 보니까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크지라...? 커져라..? 꺼져라..?
아, 이 쓰레기 같은 작명 센스;;
그리고 길었던 라프타 챕터가 이제 3~4화 정도 남았습니다. 너무 끈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좀 들기도 하네요. 원고료 쿠폰 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cㅏ // 물건을 판매한 대가로 포인트를 버는게 아닌 이상 포인트는 타인에게 이전되지 않고요, 오직 자신 만이 쓸 수 있습니다. 종족 특전은 진화하면 바뀝니다. 간티로스에서 핏 워커로 진화할 경우, 간티로스일 때 가지고 있던 악의의 손톱은 사라지고 핏 워커의 종족 특전만 가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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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크지라에게, 말인가요?"
"그것도 알고 계시다니,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라판은 쓰게 웃었다. 복수라는 단어에서 크지라라는 이름을 유추해낼 정도면,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다 알고 있다는 것. 라판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처절하게 고통받다가 비참하게 죽은 제 아내의 복수를……. 제 삶을 망가트린 놈에게 철저하게 복수할 생각입니다."
이성현의 기억에 있는 라판의 얼굴은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그는 언제나 밝고, 딸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가득한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이성현의 눈에 보이는 남자는 그가 알고 있던 라판이 아니었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 그 얼굴에서는 견딜 수 없는 회한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성현의 라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라판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일그러져있던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성현은 그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뚱맞은 말이었다.
"전에 종업원을 강간하려던 크지라를 공격한 것도 당신들입니까?"
라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더군요. 예쁜 여자만 보면 탐하려 하고,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힘으로 갈취한다……. 혐오스러운 놈입니다. 전, 용서할 수 없었어요."
라판은 레피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레피와 이성현이 식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는 와중에 크지라가 한 짓을 본 모양이었다. 거기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라판은 자신의 감정을 추수리지 못하고 그를 공격했다.
라판은 또다시 일그러지려 하는 자신의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절 말리실 겁니까?"
이성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복수. 이성현에게도 익숙한 단어였다.
"제가 말리면, 그만 두실 건가요?"
라판이 바로 고개를 내젓자 이성현은 그것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누군가가 그에게 와서 과거의 일은 잊고 새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다면 거부할 것이다. 엘프, 드워프, 노움. 이성현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복수하려는 의지는 누군가가 말한다고 해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성현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사람한테 말해서 뭐합니까."
"잘 아시는군요. 현명하십니다."
하지만 라판에게 물어봐야할 것이 하나 있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하나 뿐입니다. 레피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 아이를, 버릴 생각인가요?"
"당신이 데려가십시오."
"제가요? 진심입니까?"
이성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정도로 무책임한 남자였던가. 이성현이 소리없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느낀 라판이 쓰게 웃었다.
"……저는 못난 아버지입니다."
라판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편하게 잠든 날이 있었던가. 언제나 늦은 새벽까지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어두운 밤에, 혼자서 침대에 누워있으면 그 날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날 밤 들었던 비명이 잊히지가 않아요. 제 아내가 끌려가면서 질렀던 비명……. 늦은 새벽,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사들한테 죽어가던 이웃들이 토해냈던 신음……. 꽤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레피는 잊었겠지만요."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려는 레피의 본능이 시킨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일을 잊었다. 그리고 그건 라판의 상처를 공유할 수 있는 이가 없어졌다는 걸 뜻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레피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할 순 없었다. 라판은 모든 아픔을 혼자서 씹어 삼켜야만 했다.
"그 뒤부터였습니다. 바깥에 나가는 게 두려워지더군요. 저든, 레피든. 바깥으로 나가면 누군가 절 해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가 가장인데. 레피를 먹여 살리려면 제가 나가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현은 라판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전 그런 두려움을 가진 채,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레피는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막았죠. 제가 없을 때 그 아이가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제 강압 때문에, 레피는 매일 같이 집에만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아이가 말수가 적어지고, 어두워지더군요. 매일 같이 우울해하고. 저한테 같이 있어달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저는 모두 무시했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사실은 두려웠던 거죠."
라판이 씁쓸하게 말했다.
"제가 그 아이를 망친 겁니다. 그런데, 그랬던 아이가 당신이 오고 난 후로 변하더군요. 조금씩 옛날의 모습을 되찾고……. 그때부터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그 아이를 맡아주면 좋겠다, 라고."
"……저희를 지켜본 겁니까?"
"네. 가끔 레피가 보고싶어서 도저히 못 견딜 거 같을 때, 몰래 지켜봤죠."
이성현은 막힌 숨을 토해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이성현은 입을 벌린 채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토해냈다.
"제가 거부한다면 어쩌려고……."
가까스로 토해낸 말에 라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성현이 그런 대답을 내놓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유창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거부하면 레피는 큰 위험에 처할 겁니다. 어쩌면 연고죄로 죽을 지도 모르죠. 레피를 꽤 아끼는 당신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군요."
이성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말 한마디에 또다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느껴졌던 황당함이 곧 분노로 변했다. 이성현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진심입니까?"
분노한 이성현의 얼굴을 본 라판의 얼굴이 오히려 환해졌다. 마치 자신이 바라던 반응이었다는 것처럼.
"당신이 아니었으면 제 계획은 실패했을 겁니다.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그 마차 안에 들어 있었거든요. 제가 당신에게 큰 호의를 보였던 것도, 거기서 비롯된 고마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라판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이성현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그는 연신 땅에 머리를 찧었다. 쿵, 쿵하는 낮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성현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레피를 보살펴 주십시오. 평생 보살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성현은 그에게 빌고 있는 라판의 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봤다.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레피를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데리고 가고 싶진 않았다.
이성현은 라판에게서 죽음을 각오한 자의 모습을 봤다. 자신이 죽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이성현에게 딸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챘기에, 이성현은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깨진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할 때, 이성현은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라판. 저는 카르카스로 떠날 생각입니다."
라판의 이마가 땅바닥에서 떨어졌다.
"그 날, 레피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라판은 연신 이성현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성현은 그런 라판을 일으켰다. 라판은 이성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사 일 뒤에 행동할 예정입니다. 부디 그 전까지, 여기를 벗어나십시오."
이성현은 라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을 생각입니까?"
라판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판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 아님을 이성현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집에는 안 돌아오시겠군요?"
"예. 특히 요즘에는 경계가 심해져서요. 위험하게 돌아다니기보다는 안전한 곳에서 준비하는게 더 나을 거 같습니다."
이성현은 그 말에 동의했다. 이전에 크지라가 습격당하고 난 후부터는 도시 내부를 순찰하는 인원들이 많아졌다. 그런 상황이니 섣불리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숨어서 지내는게 더 나을 것이다.
"한 번은 돌아갈 생각입니다. 레피에게 카르카스로 가라고 말해줘야 하니까요. 이틀 뒤에 가겠습니다."
"뭐라고 말하려고요?"
"글쎄요, 한 번 생각해 봐야죠. 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든, 어떤 식으로든."
이성현과 라판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쥐같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오늘 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라판은 헛기침을 하더니 거리로 나가는 골목을 가리켰다.
"그럼, 이만 돌아가시죠. 이런 곳에 오래 있으셔봤자 좋을거 없어요."
"……예."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말은 했고, 들어야 할 대답은 들었다.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라판은 이성현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성현은 그를 배웅하는 라판을 뒤로 했다. 라판은 이성현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배웅했다. 이성현은 묘한 감정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 * *
이성현은 레피에게는 비밀로 라프타를 떠날 준비를 했다. 라프타의 용병 길드와의 계약이 끝난 르칸이 카르카스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음을 떠올린 이성현은 르칸을 찾았다. 이왕 카르카스로 갈 거라면 지리를 잘 아는 이와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난 이틀 후에 출발할 예정이다. 같이 가면 나야 좋지.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아침에 보는 건 어떤가?"
이성현은 르칸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틀 후면 라판의 계획이 실행되기 하루 전이었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레피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할 것이냐였다. 라판은 자신이 직접 레피에게 말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약속한 날이 되었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이 듦과 동시에 내가 레피에게 말해야 하나, 라는 고민이 뒤섞였다. 밤늦게까지 라판을 기다리다 잠든 이성현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피는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다.
'제길, 내가 말해야 할 거 같은데.'
당장 짐을 싸고 출발할 준비를 해야 되는데. 레피의 얼굴을 보면서 망설이던 이성현이 결심을 다진 순간, 집의 정문이 열렸다. 정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라판이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슨 그는 오늘따라 유독 다급해 보였다.
거의 문을 박차듯이 들어온 라판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고, 레피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라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라판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아빠!"
"……레피야."
라판의 얼굴에는 오만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런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레피는 라판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빠, 왜 집에 안 들어온 거에요?"
"미안하다, 레피야. 해야 할 일이 있었어."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끝나서 돌아오신 거에요? 그럼, 앞으론 집에 돌아오실 거죠……?"
라판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레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피, 할 말이 있다."
"네……?"
"가브 님과 함께 한동안 카르카스로 가 있으렴."
그 말을 들은 레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큰 충격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적으로 새하얘졌던 그녀의 머리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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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왜, 왜요……?"
"……카르카스로 이사할 거란다. 요즈음 아빠가 집에 못 들어왔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이사할 돈을 벌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고 바빴거든."
"이사요……?"
새파랗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빛이 조금씩 돌아왔다. 하지만 레피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하는 기색이 남아있었다.
"갑자기 왜 이사를 가는 거에요?"
"여긴 위험하니까. 안전한 곳으로 떠나야지."
레피는 한참 동안 라판의 얼굴을 쳐다봤다. 라판은 웃는 얼굴로 레피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레피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서 준비하거라. 네가 필요한 것들만 챙겨. 나머지는 아빠가 나중에 들고 갈 테니까."
"……네에. 정말로 오시는 거죠?"
라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피는 아직 의심이 가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의 말에 따랐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레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성현이 조용하게 말했다.
"레피, 의심하는 눈치던데요."
"그렇겠죠. 똑똑한 아이니까요. 갑자기 이사를 간다니 의심할 수밖에."
굳이 레피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당일날 와서 갑자기 이사를 해야 된다는 소리를 하다니. 레피가 거부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빨리 준비하십시오. 계획이 앞당겨졌습니다. 지금 도망쳐야 해요!"
"……계획이 앞당겨졌다고요?"
이성현은 라판의 속사포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라판의 얼굴이 너무나도 급해 보여서 일단은 그의 말을 따랐다. 다급해하는 라판에게 떠밀려 자신의 방으로 간 이성현은 검과 도끼, 필요한 것들을 담아둔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콰앙!
뭔가가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집이 뒤흔들렸다. 그다음으로 엄청난 폭발음이 귀를 강타했다. 어찌나 큰 소리인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계단을 내려가려 하던 이성현은 그 충격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벽에 처박힌 이성현은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이성현은 눈앞을 가로막는 먼지에 기침을 토해내면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크, 대체, 무슨……."
그리고 이성현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재차 폭발음이 이어졌다. 벽이 박살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집이 뒤흔들렸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폭발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성현은 몸을 낮게 숙인 채 폭발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라판! 레피! 괜찮습니까!"
크게 소리를 내질렀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성현은 엉망이 된 바닥을 기었다. 라판과 레피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집을 뒤흔들던 폭발이 잠깐 멈췄고, 이성현은 시야를 가리는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으……."
아래층은 엉망진창이었다. 벽이 무언가로 공격받았는지 박살나 있었고, 그 파편이 거실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그리고 라판은 레피를 끌어안은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성현이 몸을 숙인 채 둘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확인했다. 라판의 품안에 있는 레피는 무사헀지만, 라판은 몸에 돌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라, 라판! 괜찮아요?!"
"으, 큭…… 괘, 괜찮습니다. 일단, 레피를……."
레피는 벽에 처박힌 충격으로 기절해 버렸다. 라판은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이성현에게 레피를 건네줬다. 이성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들어 어깨에 들쳐 맸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게!"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된 이성현이 혼란스러워하자, 라판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길, 계획이……, 어긋났습니다. 도발에 넘어갔습니다."
"뭐라고요?"
이성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도발에 넘어갔다. 계획이 어긋났다. 순간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라판은 신음을 흘리면서 몸에 박힌 돌을 빼냈다. 이성현은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상황 파악보다는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일단 여기서 벗어납시다. 입구 쪽으로는 못 갈 거 같은데요."
귀를 어지럽히던 폭발음이 진정되니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발원지는 집의 입구 쪽이었다. 입구 너머에 누군가가 있었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판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주방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갑시다. 저기에 길이 있습니다."
"……주방에요?"
라판은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성현이 그 뒤를 다급하게 따랐다. 주방으로 들어간 라판은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을 치웠다. 그리고 바닥을 손으로 더듬더니, 큼직한 타일 하나를 빼냈다. 그러자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나타났다.
라판은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성현 역시 한 손으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지하 통로가 있었다.
"여긴……?"
"예전에 쓰던 지하 통로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안 쓰죠. 여길 이용하면 번화가로 나갈 수 있습니다."
라판은 망토 안에서 손을 집어넣더니 포션 두 병을 꺼냈다. 한 병은 마시고, 한 병은 상처 부위에 재빠르게 뿌렸다. 포션이 닿은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크으, 죄송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시겠습니까? 눈이 감기는군요."
포션은 신체의 자연 치유력을 인위적으로 높여서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끔 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피까지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피를 제법 흘린 라판은 어지러워했다.
"괜찮아요?"
"괜찮다……, 고 말하지는 못하겠네요. 일단, 계속해서 가죠. 좀 걸어야 할 겁니다."
라판과 이성현은 어두운 지하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마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하 통로는 먼지로 가득했다. 지하 특유의 냄새가 이성현의 코를 찔렀다. 라판은 품에서 빛을 내는 수정을 꺼내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걸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후우……. 도발에 넘어간 겁니다."
"아까도 그렇게 말했었죠, 도발에 넘어갔다고. 무슨 말이에요?
라판은 침울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짙은 후회가 섞여 있었다.
"전에 크지라가 습격받았던 식당, 기억하십니까?"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다. 보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크지라의 모습. 그리고 그에게 핍박받던 식당 주인과 그 딸의 모습. 다시 생각해도 불쾌해지는 기억이었다.
"그 식당의 주인과 딸이 어제 죽었습니다."
"예? 대체 누가, 아니, 설마."
"네. 크지라입니다. 상처를 회복하고 돌아온 크지라가 한 짓입니다. 자신에게 창피를 줬다고 죽이더군요. 아주, 잔혹하게. 딸은 끝까지 노리개로 삼고……."
라판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식당 주인과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던 식당 주인의 시체. 그 모습을 보면서 크지라에게 범해지고 있었던 식당 주인의 딸.
"크지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서 습격당했으니 범인은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거라면서, 식당 근처에 살던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크지라는 정신을 놓은 식당 주인의 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민들을 학살했다. 네놈들도 잠재적인 공범이라면서.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많은 피가 흘렀죠. 그 소식을 들은 저희들은 현장으로 다급하게 달려갔고, 주민들을 죽이고 있는 크지라의 모습을 봤습니다……."
크지라가 움직일 때마다 생명이 하나씩 사라졌다. 끊이지 않는 비명, 사방으로 튀는 피.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까 싶었다.
"모두 눈이 돌아갔죠. 저와 동료들은 모두 크지라에게 피해를 받은 이들이니까요.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겁니다. 모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 저조차도, 우습게도 참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라판을 계속해서 괴롭혀온 악몽이 폭발했다.
"크지라는 호위병 하나 없이 혼자 있더군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격했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셨군요."
이성현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크지라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이가 호위병 없이 돌아다닐 리가 없다. 라판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리석은 짓을 했죠. 당연하지만, 함정이었습니다. 근처에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죠.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당연히 알아챘을, 함정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것인데……. 분노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방심한 결과는 참혹했다. 주민들을 학살하던 크지라는 광소를 터트리면서 라판의 동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어떻게든 대항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저와 동료들은 순식간에 둘러싸였고,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저와 동료 몇몇 만이 가까스로 도망쳤습니다. 만약 제가 거기서 죽는다면 레피도 위험해져요."
크지라는 자신에게 대든 이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것이고, 그들의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친척을 모두 죽일 것이다. 지금까지 크지라와 아길레라가 자신에게 대항한 이들을 다스린 방법이었다. 라판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그곳을 탈출했다. 레피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계획대로 했어도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어리석었습니다."
"라판."
이성현은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가 라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성현은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번화가 쪽의 입구는 못 가는 거 아닙니까?"
"예. 괜찮습니다. 다른 길이 있으니까요."
"다른 길이 있다고요?"
라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벽을 온 힘을 다해 밀었다. 그러자 벽이 회전하면서 좁은 공간이 나왔다. 벽 안에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하나 있었다.
"일단, 올라가죠."
라판은 사다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팔에 힘을 실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기에 고통이 더더욱 심해졌고, 자연스레 라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성현은 그를 따라서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어딘지 알 수 없는 건물이 나왔다.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성현은 가볍게 기침을 토했다.
"여긴……?"
"예전에 상인 협회가 쓰던 건물입니다. 전 협회장이 처형당하면서 폐쇄됐죠."
건물 안에 남아있는 가구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은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 이성현은 주변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언제적 이야깁니까, 그건?"
"글쎄요. 꽤 옛날 일입니다. 제 아내가 살아있었을 때 처형당했으니까. 저도 잘 기억은 안 나는군요."
라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라판은 어지러운지 한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라판은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는 게 어때요?"
"크, 아뇨. 빨리, 움직이죠.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라판은 어지러운 머리를 한 번 털어냈다. 그의 다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성현은 라판을 쉬게 하려고 했지만, 그의 의지가 너무도 완고해서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가브 님.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라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도시를 벗어나려면 크지라를 죽여야만 합니다. 무조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이성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 작품 후기 ============================
예약 아이템으로 올립니다.
다음화랑 다다음화면 라프타 챕터는 끝납니다. 독자분들이 기대하시는 것도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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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크지라를 죽여야 한다고요? 당신네가 복수하는데, 절 이용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미쳤습니까?"
"설마요. 그런 게 아닙니다. 화나시겠지만, 잠깐만 들어보세요."
처음에는 라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가, 이해가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라판에게 빚진 것이 있기에 레피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들어줬다. 그걸로 그에게 진 빚은 모두 갚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판은 자신에게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한 라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던전이 폐쇄됐습니다. 아길레라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누구도 나갈 수 없게끔 막았어요. 지금의 이 모든 사태가 끝나고 나서야 폐쇄가 풀릴 겁니다."
"얼마나 걸리죠?"
라판이 이성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이성현의 눈을 마주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만 아니었으면 이들은 아무 일 없이 라프타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현과 레피가 위험에 빠진 것은 그와 동료들의 책임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던전을 폐쇄했었는데, 반년이 지나고 나서야 개방했습니다. 영주가 허락한 이들이 아니면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이성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반년.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반년 동안 이곳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 이성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집어삼켰다. 눈앞의 남자가 하루만 참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래서, 그거랑 크지라가 죽어야 하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라프타에는 비밀 통로가 몇 개 있습니다. 아길레라가 도시가 함락될 경우 밖으로 탈출하려고 만든 것들이죠. 그런데 그 비밀 통로를 사용하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라판은 숨을 집어삼켰다.
"아길레라나 그 가족이 가지고 있는 징표. 그게 필요합니다. 그게 있어야지만 비밀 통로를 열 수 있거든요. 크지라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봤으니까요. 놈의 손에 있는 반지. 그게 징표입니다. 그 반지가 있으면 비밀 통로를 이용할 수 있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크지라의 뭉툭한 손가락의 반지. 라판은 자신의 동료들이 그 손에 찢겨져 죽는 것을 봤다.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성현은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욱신거리는 미간을 매만지면서 한숨을 뒤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크지라를 죽여야 한다. 그 징표란 걸 얻으려고. 당신네의 그 망할 실수 때문에."
라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현은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그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방법이 없었다. 도시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던전이 반 년 동안 폐쇄된다는 데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좋아요. 계획은 있습니까?"
라판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놈을 유인하겠습니다."
"어떻게요? 아니, 유인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에요?"
"이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터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준비해둔 마법진이 있습니다."
이성현이 라판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 힘을 줘서 잡지 않았음에도 연약한 하프랫의 몸은 이성현이 가볍게 끌어당긴 것만으로도 크게 휘청거렸다. 이성현은 라판에게 말했다.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크지라는 4등급의 마물이라고요."
"압니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데리고 올 테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성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판은 분노와 죄책감이 뒤섞인 눈으로 이성현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저지른 실수는 제가 만회해야죠."
"같이 가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 말에 라판이 쓰게 웃으며 레피를 가리켰다. 레피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레피를 데리고 가시겠다고요? 짐을 달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럼, 차라리 제가."
"혹시나 누군가가 올지도 모릅니다. 레피를 지킬 수 있는 이가 남아야죠. 제가 가는게 제일 낫습니다. 걱정 마세요, 준비해둔 게 있으니."
단호한 라판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젠장, 젠장! 빨리 생존자를 찾아, 이 멍청이들아!"
크지라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식당 주인을 죽이고 그 딸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을 때만 해도 기분은 좋았다. 그를 비난하던 주민들을 그를 습격한 놈들과 공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로 학살했을 때,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주민들을 학살하자 그를 습격했던 놈들이 나타났다. 크지라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의 몸이 가는 대로 그들을 죽였다. 평소부터 생각하는 것보다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기에, 크지라에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근처에 있던 이들을 죄다 죽였을 때, 그제야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길, 날 습격했던 놈들은 살려두라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정보를 캐내야 하니 살려두라고 했었다. 아버지가 특히 당부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멀었던 크지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었다. 크지라는 다급하게 생존자를 찾으려 했지만, 생존자는 단 한 놈도 없었다.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아길레라는 돈을 밝히고, 권력을 탐한다. 하지만 크지라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여자와 식욕. 아길레라는 그런 아들을 쓸데없는 것에 열을 올리는 못난 놈이라며 한심하게 여겼다.
크지라가 연신 여자 주민들을 덮치는 등 말썽을 피우자 자기가 허락할 때까지는 주민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 했었다. 하지만 크지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식당 주인의 딸을 건드리다가 눈을 다치는 추태까지 보였다.
자기 아들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한 아길레라가 결국 한 번만 더 자신의 말을 어기면 크지라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까지 내릴 정도였다.
눈을 다쳐 방에서 치료받고 있던 그에게 아길레라가 찾아왔다. 크지라는 그때 아길레라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차가운 눈. 아들을 짐승처럼 여기던 그 눈. 그 눈에는 혈육에 대한 정이라곤 눈곱 만큼도 없었다.
"제길, 흩어져서 찾아라! 도망친 놈들이 있을거 아냐! 빨리 찾아!"
크지라는 근처에서 혹시나 살아있는 놈이 있을까 싶어 시체를 뒤지던 부하들을 닦달했다. 부하들은 크지라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부하 두 놈만 남고 다른 부하들은 생존자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희들도 가라! 반란군 놈을 찾으러 가!"
"하지만, 크지라님.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병신아! 이 마을에서 나보다 강한 놈이 누가 있다고! 빨리 꺼지지 못해!"
왼쪽에 있던 부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크지라의 분노가 폭발했다. 크리자는 말을 꺼낸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부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땅에 처박혔다.
오른쪽에 있던 부하는 아무리 말린다고 한들 크지라가 들을 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면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반란군을 찾으러 떠났다.
"크으……."
크지라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평소에도 크지라를 탐탁지 못하게 여기던 아버지였는데, 이번 실수를 알게 되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반드시.
이를 빠득 갈면서 쥐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다시 찼다. 그리고 무거운 몸을 움직여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를 덮친 폭발에 내딛으려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퍼엉!
"크으아! 이런 망할, 어떤 새끼야!"
크지라는 분노를 토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정체 모를 이가 하나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크지라에겐 묘하게 익숙했다. 이전에 크지라가 습격당했을 때, 그를 덮쳤던 놈들과 복장이 유사했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렴풋하게 본 거라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가 찢어 죽인 반란군들도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
정체 모를 이, 라판은 한 손에 마법석을 쥐면서 크지라를 매섭게 노려봤다.
"크지라. 눈의 상처는 좀 괜찮으신가?"
"엉? 너……."
크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쉽군. 그때 네놈의 눈을 완전히 박살내버렸어야 했는데."
"하! 너구나! 내 눈을 다치게 한 놈이!"
라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그걸 본 크지라가 광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포로로 잡았어야 할 반란군들을 죄다 죽여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 발로 와주다니.
"흐흐, 포로가 필요했었는데 마침 잘 됐군! 운 좋은 줄 알아라!"
쿵. 크지라의 발이 움직였다. 뒷걸음질 치던 라판이 등을 돌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네놈은 특별히 죽이지 않고 포획해주마! 이리 와라!"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 * *
라판은 이성현을 공터로 안내해주고 떠났다. 이성현은 기절한 레피를 가까운 곳에 숨겨두고 라판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이성현은 진화창을 열었다. 진화에 필요한 만큼의 정수는 라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수석을 사용해서 채워뒀다. 아직까지 진화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만티코어와 섀도우 솔저 중에서 무엇으로 진화할지를 정하지 못해서였다.
마음은 섀도우 솔저로 기울었지만, 섀도우 솔저 계통의 종족은 멸종한 탓에 남아있는 정보가 극히 적었다. 인간형이다. 그림자를 드나들 수 있다. 이 두 개가 알려진 정보의 전부였다. 이 종족이 강한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어서, 섀도우 솔저라는 종족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난 후에 진화하려고 했는데. 이젠 시간이 없었다.
'확실한 건 만티코어. 하지만 만티코어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래도 짐승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까지 이성현은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둘 중에서 뭘 고를지 한참 고민하던 이성현은 하나를 선택했다.
"섀도우 솔저.'
그가 선택한 종족은 섀도우 솔저였다. 그가 진화를 선택하자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은 피부에서부터 일어났다. 이성현의 피부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온몸의 피부가 벗겨졌다. 그다음으로 사라진 것은 근육이었다. 멀쩡하게 붙어있던 근육이 갑자기 떨어져 나가더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성현은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피부와 살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 멀쩡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신선하다 못해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경험이었다. 고통이 없기에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보다, 진화 과정이 격렬한데…….'
피부와 살점이 모두 벗겨지고 뼈만 남았을 때. 그의 발아래에 있는 그림자가 파도처럼 치솟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성현의 몸을 집어삼킨 그림자는 그의 살과 근육이 되었고, 피부가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성현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진화가 완료되었다는 메세지였다. 이성현은 근처에 있는 유리에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이성현의 몸에는 색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직 진한 검은색과 연한 검은색 뿐이었다. 어떤 신체 부위는 색이 짙었고, 어떤 부위는 또 색이 옅었다. 이성현의 몸은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이성현의 모습은 주인을 버리고 혼자 돌아다니는 그림자와 같았다. 누군가의 등 뒤에 있던 그림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서 움직이게 하면 이런 느낌일까. 한참 동안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던 이성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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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700P
·보유 특전
1. 신체 강화 (상급)
2. 생기발랄 (중급)
3. 단단한 몸 (중급)
4. 마력순환 (하급)
5. 검술 (하급)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2. 영혼 흡수 (중급)
3. 강령술 (중급)
·종족 특전
1. 그림자를 드나드는 자
[섀도우 솔저는 그림자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림자로 녹아들 수 있습니다. 5초 동안 그림자 속에 머물 수 있으며, 그 시간 동안은 그림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2.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
[자신의 등뒤에 있는 그림자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형상화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등 뒤의 그림자를 일으켜 잠깐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3. 그림자에서 태어난 자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곳에 있으면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이성현은 변한 종족 특전을 세심하게 읽었다. 이전의 핏 가드는 힘과 체력 같은 육체 성능을 올려줘서 직접적인 전투 능력을 강화했다면, 이번의 섀도우 솔저는 그림자를 다루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림자에서 태어난 자라는 특전이 있긴 했지만, 이 특전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곳이어먄 한다는 것.
'이걸 좋다고 할 수 있나?'
그림자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좋을 수 있겠지만, 이성현은 지금 당장이 급한 상황이었다. 곧 있으면 크지라가 여기로 올 것이고 이성현은 그와 싸워야 하는데, 연습이 필요한 특전이 생기다니. 그는 팔짱을 꼈다.
"으음, 감촉이 특이하군."
이전의 단단한 몸과는 감촉이 달랐다. 희뿌연 안개를 손으로 헤집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안개나 그림자를 손으로 만질 수 있게끔 하면 이런 촉감이 아닐까.
이성현은 종족 특전을 시험해봤다. 가장 먼저 시험한 것은 그림자를 드나드는 자.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종족 특전은 그 종족의 특징을 특전이라는 형태로 설명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낮아지고, 마치 땅바닥에 엎드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성현은 자신의 몸을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몸이 그림자에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성현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다리를 움직여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시야가 움직였다. 그리고 5초가 지나자 그의 시야가 다시 높아지고, 그림자에 녹아들었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성현은 자신이 지금 서있는 위치와 5초 전에 서있던 위치를 비교했다.
"……이동했다."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그림자에 녹아든다길래 순식간에 이동하거나 그런 건줄 알았는데, 그림자 속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아니, 꽤나 좋은 특전임은 분명했지만, 그림자를 손으로 짚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걸지도.'
이성현은 그다음 특전을 연습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커다란 고함이 들려와서 하려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함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라판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크게 분노한 크지라가 따라오고 있었다.
"라판!"
"가브 님! 시간,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라판은 처음에는 낯선 이가 공터에 서있자 당황했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이성현이라고 추측했다. 라판이 이성현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라판은 그가 자신이 아는 가브일 거라 믿으며 공터의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오는 크지라를 막아섰다. 크지라는 포효를 내질렀다.
"크아아아! 이 쥐새끼가! 찢어 죽여버리겠다!"
포효를 내지르던 크지라가 뒤늦게 이성현이 있음을 알아챘다. 크지라는 벌겋게 물든 눈으로 이성현을 사납게 노려봤다.
"흐으, 넌 뭐하는 놈이냐! 저놈과 일행인가?"
이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지라는 라판이 공터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를 가로막는 마물은 난생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그림자가 형상화된 것 같은 마물. 눈앞의 마물이 뭐하는 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가로막는다면 찢어 죽일 뿐이다.
"날 가로막는다면 죽을 뿐이다!"
크지라가 그리 말하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딛자, 쿵하는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발이 닿은 곳이 마치 돌덩이가 내리 앉은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크지라는 양 허리춤에 매달아둔 검을 빼들었다.
'검?'
아니, 그건 검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식칼에 가까웠다. 고기를 도축하는데 쓰는 그런 식칼이었다. 크지라는 피로 얼룩진 검을 교차시켜 굉음을 냈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크지라가 성큼성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바닥에서 먼지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엄청난 무게였다.
이성현은 무기를 빼들고 크지라를 바라봤다. 진화했다고는 하지만 이성현은 아직 6등급에 불과하다. 한 등급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지만, 4등급의 마물까지 이길 수 있을까. 4등급이면 마족으로의 진화를 코앞에 두고 있는 단계다.
이성현은 이를 빠득 악물면서 도끼를 던졌다. 빙글, 날아가는 도끼가 크지라의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그의 두툼한 살이 베였지만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칫."
라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크지라는 압도적인 힘과 두꺼운 피부를 무기로 삼아 싸운다고. 이전에 크지라가 눈을 공격당해 괴로워했던 것처럼, 놈을 제압하려면 피부로 보호할 수 없는 부위를 노려야 한다. 문제는 그게 지금의 이성현에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라판, 당신이 뭘 준비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성현은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라판은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다.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앞으로 걸어온 크지라는 이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팔이 이성현을 향해 휘둘러졌다. 거대한 흉기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거친 바람이 이성현의 얼굴을 향해 몰아쳤다. 이성현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검을 검으로 받아냈다.
"크읍!"
둔탁한 둔기가 팔을 후려갈긴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성현의 팔이 크지라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튕겨져나갔다. 단 일격. 그러나 일격을 받아낸 충격에 이성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크, 힘이……!"
"약해 빠졌구나!"
무시무시한 힘. 압도적인 질량감. 저 일격은 여러 번 받아낼 수 있는 일격이 아니었다. 최대한 아웃파이트로 싸워야 한다. 이성현은 진화하면서 생긴 특전을 떠올렸다. 그림자를 드나드는 자.
이성현은 자신의 그림자를 손으로 짚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낮아지고, 몸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성현은 그 상태로 그림자 속을 움직여 크지라의 등뒤에 있는 그림자로 이동했다.
크지라는 자신을 가로막던 놈이 갑자기 형체도 없이 사라지자 눈에 띄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성현은 크지라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지라는 사라진 이성현이 자신의 등 뒤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등 뒤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이성현은 그의 발목을 도끼로 후려갈겼다.
쾅!
피부를 도끼가 강타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났다. 마치 단단한 방패를 도끼로 내리찍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허나 크지라 역시 타격이 없진 않았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성현은 그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공격했던 부분을 다시 공격했다. 그리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려고 했다.
"뭐야!"
하지만 그림자로 녹아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손으로 짚고 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크지라가 고개를 돌리는 시간 동안, 이성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온 결론은 재사용 대기시간.
"……망할!"
6등급 마물의 특전치고는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재사용 대기시간이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성현은 땅을 손으로 짚으면서 크지라와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까지 이성현이 있던 자리를 크지라의 검이 베고 지나갔다.
'쿨타임이 몇 초지?'
연습할 시간이 없어 종족 특전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쿨타임이 몇 초인지 알 리가 없었다. 이성현은 여기저기에 있는 그림자로 옮겨 다니면서 크지라를 공격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리고 다시 땅을 짚었다.
'그러면, 다른 종족 특전을……!'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 이성현은 자신의 그림자를 손으로 짚고, 원하는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지구에 있을 때 그림자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와 적을 공격하는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이성현이 떠올린 것은 그것이었다.
이성현이 머릿속으로 원하는 형태를 떠올리자, 이성현의 발밑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림자가 파도처럼 솟아오르더니, 날카로운 가시의 형태로 변해 그에게 다가오는 크지라를 덮쳤다.
다섯 개의 굵직한 가시가 크지라의 사지를 꿰뚫었다. 크지라는 두 개의 가시는 검으로 쳐냈지만, 나머지 세 개의 가시는 피하지 못했다. 이런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크아아아!"
가시가 크지라의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그렇게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의 단단한 피부는 그림자 가시로도 완전히 꿰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신비한 재주를 가지고 있군!"
크지라는 자신의 몸을 꿰뚫은 가시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반 토막 난 가시가 다시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현은 다시 가시를 만들어내 쏘아 보냈지만, 크지라는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았다.
크지라는 침착하게 가시를 하나씩 검으로 받아쳤다. 이성현은 자신에게 쏘아지는 가시를 하나씩 검으로 쳐내는 크지라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덩치에 안 맞게 손놀림이 빠른 놈이었다.
"하찮다!"
크지라는 땅바닥을 손으로 짚고 있는 이성현에게 검을 투척했다. 크지라의 손을 벗어난 거대한 식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이성현은 몸을 거의 던지다시피 옆으로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거대한 식칼이 이성현의 몸을 빗맞혔다.
콰앙!
어찌나 강한 일격이었는지. 빗맞은 검이 땅에 꽂히자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땅이 진동했다. 크지라는 포효를 내지르면서 이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고 있었던 이성현은 크지라가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달려오는 크지라.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검.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크지라는 오른손에 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성현은 검으로 그 일격을 막아내려 했다. 찰나의 시간, 둘의 검이 맞부딪히고, 교차했다.
"크학!"
결과는 금세 나왔다. 이성현의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났다. 허공을 날아오르는 검이 허망하게 땅에 꽂혔다. 이성현은 공격을 받아낸 팔이 저릿하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게 4등급!'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이성현이 상급의 특전을 가지고 있음에도 일격을 받아내기도 힘들었다. 만약 특전이 없었다면 팔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 나갔을 것이다. 이성현은 확신했다.
"잡았다!"
크지라는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이성현을 내리찍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놈도 반란군의 일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흥분한 크지라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의 마물의 피를 보겠다는 생각밖에 안 떠올랐다.
이성현은 자신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려 하는 검을 봤다. 이성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림자를 짚었다. 상대방의 등 뒤의 그림자를 일으켜 잠깐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성현은 그 기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크지라의 몸을 묶는다는 형상을 떠올렸다. 그러자 크지라의 발아래에 있던 그림자가 파도처럼 솟구치더니 크지라의 몸을 집어삼켰다. 거미줄 같은 형상의 그림자가 크지라의 몸을 묶었다.
"이게 무슨……!"
저 남자가 땅을 짚으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제 맘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은 끔찍했다. 온몸을 줄 같은 걸로 묶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지라가 혼란스러워하자 이성현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라판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아직 멀었습니까! 오래 못 버텨요!"
"거의, 다 됐, 습니다!"
이성현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거의 다 되고 뭐고 간에, 지금 죽을 판인데.
============================ 작품 후기 ============================
초반부 전개가 다시 보니 좀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언제 시간날 때 천천히 읽어보면서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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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널 박살내주마!"
크지라가 분노를 토해내며 몸을 비틀어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느슨해져갔다. 이성현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방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능력. 분명 좋은 능력이었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상대방의 몸을 붙잡고 있는 동안 나 자신의 몸도 고정된다는 것. 그림자에서 손을 떼는 순간 크지라의 몸을 묶은 그림자도 풀릴 것이다. 이성현은 점점 느슨해져가는 그림자를 보면서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속박이 풀리고 있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분은 끔찍했다.
"라파안!"
"다 됐습니다! 구석으로 물러나세요!"
이성현이 이제 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라판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성현은 그의 말을 따랐다. 바닥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달려오는 크지라를 피해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허나 크지라는 매서운 속도로 그를 추격했다. 저 정도의 속도면 금방 이성현을 붙잡을 것이다. 이성현은 이를 악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짚었다. 그림자로 녹아들기 위해서였다.
'제발!'
재사용 대기시간이 다 됐기를 기도하면서 그림자를 짚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크지라는 이성현이 사라진 자리를 검으로 내리찍었지만, 그의 검은 애꿎은 땅만 강타했다.
이성현은 그림자 속을 내달려 크지라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림자로 갔다. 5초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몸이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이성현이 크지라에게서 충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한 라판이 바닥을 땅으로 짚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그리고 저주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넓은 공터의 바닥이 사이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마법진이었다. 그것도 꽤나 복잡한. 마법과는 그리 인연이 없는 이성현으로서는 뭔지 파악할 수 없는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 위에 서있는 것은 크지라 뿐이었다.
"여기, 수많은 제물을 바친다!"
이성현을 놓친 크지라는 갑자기 붉은색이 시야에 가득차자 혼란스러워 했다. 멀쩡하던 바닥이 갑자기 불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지라의 시선이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가 쫓았던 라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지라는 뭔지 알 수 없는 이 의식을 끝내기 위해 라판에게 검을 투척했다.
"붕괴하라!"
라판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저주는 발동했다. 하지만 저 검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한 순간, 그의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는 장막처럼 라판을 감싸더니 날아온 검을 튕겨냈다. 무시무시한 일격을 튕겨낸 그림자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라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아아아아! 무슨,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크지라는 입에서 침을 토해냈다. 마법진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기운이 크지라의 몸속으로 스며 들었다. 크지라는 까닭 모를 불쾌함과 다급함을 느꼈다. 이 기운이 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좋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크지라는 라판에게 걸어가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됐습니다! 지속 시간이 길지 않아요! 빨리!"
라판이 외쳤다. 이성현은 크지라의 몸이 둔해졌음을 알아챘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조금 전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크지라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했다. 그는 땅을 박차며 크지라에게 달려들었다.
"크, 으!"
크지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달려오는 이성현을 공격하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팔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고,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것처럼 힘들었다. 크지라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이성현의 검이 허공을 베어가르며 크지라의 목을 노렸다. 크지라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튕겨내는 것뿐이었다. 반격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면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밀린 것은 크지라였다. 저주의 영향으로 약해진 크지라는 이성현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낼 수가 없었다. 크지라가 반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깨달은 이성현이 맹공을 퍼부었다.
'지금이 기회다!'
그의 검이 날카로운 채찍처럼 유연하게 움직였고, 그의 도끼가 크지라의 몸을 내리찍었다. 크지라는 최대한 맹공을 막아내려 했지만, 막아내는 공격보다 막아내지 못하는 공격이 더 많았다.
이성현의 맹공이 이어질 수록 크지라의 상처가 늘어났다. 크지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저놈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 망할 마법진 때문에.
"으, 으아아아!"
크지라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 고함은 지금까지의 고함과는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사냥감을 사냥하려는 포식자 같았다면, 지금은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만나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내가, 밀린다고?!'
크지라는 이성현에게 멀어지려고 발악했다. 이 마법진이 발동하고 나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 크지라는 이 마법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새하얘진 머릿속에는 제대로 떠오르는게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머리를 쓰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마물이었으니까.
"젠자앙! 저 망할 쥐새끼를 죽이면!"
크지라는 라판에게 다시금 검을 투척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이 움직이는 것보다 이성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가시가 크지라의 손과 팔을 꿰뚫었다. 그 충격에 크지라가 검을 놓쳤다.
"어림없다!"
이성현의 손이 등 뒤로 넘어가면서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팔에 한계점까지 힘이 실렸을 때, 이성현은 검을 쏘아보냈다.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는 검이 크지라의 크지라의 근육을 베고 뼈를 박살내고, 어깨와 분리시켰다.
크지라는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어깨에 붙어있던 팔이 땅을 나뒹굴고 있었다. 크지라의 피부는 이렇게 쉽게 베일 만큼 무르지 않다. 강철과도 같은 피부가 마치 종잇장을 베는 것처럼 베였다.
'무슨.'
크지라의 인상이 새파래지다 못해 새하얘졌다. 크지라는 지금까지 전투에서 진 적이 없다. 자신을 가로막는 이는 누구든 죽였고, 그 누구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크지라는 단 한 번도 패배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머리에 죽음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아니.'
확실하게 죽는다. 이성현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검을 휘둘러 남은 왼팔까지 베었다.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크지라의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이성현은 멀뚱히 서있는 크지라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그의 발목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균형을 잃은 크지라의 몸이 순식간에 기울어졌고,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아, 안 돼!"
크지라는 무심코 땅을 손으로 짚으려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팔이 없음을 깨달았다. 크지라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팔을 잃은 탓에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기 힘든 이에게는 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성현은 크지라의 어깨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는 검이 크지라의 어깨를 박살내면서 땅에 박혔다. 크지라의 피가 그의 몸을 적셨다.
"아악!"
크지라의 육중한 몸이 땅에 꽂혔다. 양팔을 잃은 채 검으로 고정당한 그의 모습은 박제당한 벌레처럼 보였다. 이성현은 그의 가슴을 발로 밟으면서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너, 너, 큰 실수 하는 거야! 날 죽이면 아빠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이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에 크지라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공포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내가, 내가 가진 모든 걸 줄게! 돈, 명예, 직위, 뭐든! 뭐든 줄 테니까 살려줘! 살려달라고!"
"네가 죽인 이들은 죽기 전에 뭐라고 했어?"
크지라의 눈이 찡그려졌다.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뭐, 뭐?"
"말해."
하지만 이성현의 태도가 너무나도 단호했기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크지라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 살려, 살려 달라고 말했어! 그게 왜!"
"넌 뭐라고 대답했지?"
그 말을 들은 크지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살려달라고 했던 이들에게 자신이 했던 말. 크지라는 단 한 번도 살려달라고 했던 이들을 살려준 적이 없었다.
"웃기지, 말……."
"그게 내 대답이야."
검광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크지라는 온몸의 감각이 아득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성현은 크지라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빼냈다.
"이건가?"
반지는 불필요한 장식이 많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경박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금반지였다. 반지의 중앙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성현이 크지라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자, 반지의 보석이 빛을 내뿜었다.
"뭐지?"
보석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빛을 내뿜고, 다시 조용해졌다. 멀찍이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던 라판의 얼굴이 보석의 빛을 내뿜는 걸 보더니 어두워졌다.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지라가 있었던 번화가에 한 무리의 마물들이 있었다. 그 마물들은 중앙에 있는 이를 경호하고 있었고, 중앙에 있는 이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외형이 주변의 마물들에 비해서 많이 특이했다.
삼 미터를 족히 넘는 거대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거대한 날개. 그의 온몸에는 새빨간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라프타를 다스리는 마족, 아길레라였다.
아길레라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번화가에 와있었다. 번화가는 수많은 시체와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엉망이었다. 번화가의 참혹한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아길레라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음."
아길레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 중 하나가 요란스레 진동했다. 아길레라는 자신의 반지를 내려다봤다. 반지는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이 반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나눠준 것과 한쌍을 이루는 반지다. 일정 범위 안에 있는 상대방의 위치를 알려주고, 반지를 다른 이가 착용했을 경우 반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용도의 반지였다. 그 외에 다른 용도도 있지만.
"크지라가 어디로 갔다고 했지?"
"예. 도망친 반란군 놈들을 쫓으러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반란군을 쫓으러 갔단 말이지."
아길레라는 자신의 반지를 매만졌다. 자신의 못난 아들 놈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좋아하기는 커녕 혐오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못난 놈이지만 그놈이 다치면 자신의 지배력에 문제가 생긴다.
적어도 그가 라프타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다른 곳에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때까지는 지배력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크지라에게 문제가 생겼다. 움직인다."
아길레라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반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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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성현은 라판에게 다가갔다. 그는 땅에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라판, 괜찮아요?"
라판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성현의 손안에 있는 크지라의 반지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군요. 이제, 갑시다."
라판은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이성현은 그 뒷모습을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 마법진을 발동하고 난 뒤부터 라판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 그는 레피를 어깨에 들쳐메고, 걸어가는 라판을 뒤따랐다.
둘은 넓은 공터를 나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라판은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막힘 없이 걸어갔다. 갈림길이 나와도 아무 고민 없이 길을 따라가서 보고 있던 이성현이 이게 맞는 길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라판은 기나긴 길을 걸어가면서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내지 않았다기 보다는 꺼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는 숨쉬기 위해 입을 여는 것도 힘들어했다. 마치 사지가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성현이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봐요, 라판. 힘들면 잠깐 쉬었……."
말하다 말고 이성현의 눈이 찡그려졌다. 그는 라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손에 느껴지는 촉감은 살의 촉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이라기 보다는, 다 부서져가는 유리를 만지는 것 같은 촉감에 전해져왔다.
이성현은 라판의 손목을 덮은 옷자락을 올렸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옷자락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참혹해서였다.
"라판, 이건……."
그의 몸은 부서져가고 있었다. 피부의 곳곳에 균열이 생겼고, 살점이 조금씩 부스러져 공기 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균열에서 마치 물이 새듯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성현은 그의 손목을 매만졌다. 그의 몸에는 아주 약간의 온기조차 없었다. 한 겨울에 밖에 내놓은 도자기처럼 차가웠고, 딱딱했다. 흘러나오는 피조차 차가웠다.
라판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쓰게 웃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마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저주하려거든, 두 개의 구멍을 파두어라."
그 말을 들은 이성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남을 저주하려거든 두 개의 구멍을 파두라는 것은 상대의 것과 자신의 것, 즉 무덤 두 개를 파놓으라는 뜻이다. 상대를 저주하는 장본인 역시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
한 마디로 크지라에게 걸었던 저주의 영향을 자신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저주를 건 겁니까?"
"붕괴의 저주……. 촉매를 필요로 하는 고대의 저주입니다. 마법진을 만들고,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데 일 년이 걸렸습니다. 촉매를 구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렸고요."
라판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크지라는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저처럼 몸이 무너져야 하는데, 놈은 몸이 약화되는 데서 그쳤으니까요. 예상 밖이었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가 사용한 저주는 쉽게 쓸 수 있는 저주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판 본인도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없다는 것. 라판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목을 붙잡은 이성현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비밀 통로가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요."
"……풀 방법은 없는 건가요?"
라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듯이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이성현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뒤를 따랐다.
"으음……."
등에 엎혀있는 레피가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이제 정신을 차리려는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레피를 바로 안고 길을 걸었다.
라판의 말대로 비밀 통로는 정말로 멀지 않았다. 한 십 분 정도 걸었을까. 라프타를 둘러싸고 있는 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벽이 가까워지자 그의 손에 있는 반지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라판은 이성현의 손에 있는 반지를 받아들고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반지의 빛으로 벽 이곳저곳을 비췄다.
그러자 빛이 닿은 벽의 일부가 허물어졌다. 사라진 벽 너머로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통로가 보였다. 이성현은 통로의 입구에 섰다.
"여기로, 가면 됩니다."
"이 통로를 지나면 어디로 나오죠?"
"글쎄요. 저도 실제로 이용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군요. 여기, 지도를."
라판은 망토 안을 뒤지더니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이성현은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 지도에는 라프타 주변의 지역이 나와 있었는데, 카르카스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 가시죠. 레피가 깨어나기 전에."
라판은 떠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이성현을 독촉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성현이 뭇내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에 엎혀있던 레피가 깨어났다.
그를 보내려고 하던 라판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피는 이성현의 등에서 꿈틀거리더니 눈을 떴다.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깨어난 그녀는 낯선 이의 등에 업혀있는 것에 놀라 바둥거리다가, 라판의 목소리에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빠?"
라판은 떨리는 손으로 레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레피는 그녀의 어머니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 어쩌면 그래서 레피와 함께 있는 걸 꺼려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를 닮은 레피의 얼굴을 보면 자신의 실수가 떠올랐으니까.
"레피."
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과거는 지났고, 흘러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 뿐.
"네가 쪼그만할 때 네 엄마를 따라다니던 게 기억에 선한데. 시간이 많이 흘렀군. 허비한 시갑이 아깝구나."
"아빠, 얼굴이……."
레피가 라판의 얼굴로 손을 내뻗었다. 후드의 틈 사이로 드러나는 그의 얼굴은 곳곳에 균열이 일어난 상태였다. 마치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행복하게 살거라."
라판은 품에서 조그마한 거울을 꺼내더니 레피의 얼굴에 비췄다. 그러자 거울에서 격렬한 빛이 뿜어져나왔고, 그 빛을 본 레피가 또다시 기절했다. 기절한 레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라판은 이성현에게 거울을 건네줬다.
"마법 물품입니다. 보는 이를 기절시키는 빛을 내뿜는 거울이에요.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고, 낮은 등급의 마물에만 통하는 물품이지만. 유용하게 쓰세요. 팔아서 정착비로 쓰셔도 되고요."
이성현은 거울을 받았다. 라판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을 만났기에 결심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부디, 이 못난 마물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길."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이성현의 물음에 라판은 자신의 손에 있는 반지를 그에게 보여줬다. 반지는 격렬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반지에 무슨 장치가 되있을 지 모릅니다. 어쩌면 위치 추적이 될 지도 모르죠. 이 통로를 숨기고, 제가 놈들을 유인하겠습니다."
라판의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자의 얼굴이었다. 이성현은 그에게 뭐라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결국 입밖으로 나온 말은 그런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이성현은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판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을 바라봤다.
"레피를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통로가 닫혔다. 이성현은 닫힌 통로를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 * *
아길레라는 크지라의 반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반지가 있는 곳에 가까워질 수록 아길레라의 반지가 내뿜는 빛의 세기가 강해졌다.
"……이런 곳에 반지가?"
반지는 아길레라와 부하들을 좁은 골목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눈빛을 받으면서 걸음을 옮기던 아길레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크지라는 도대체 왜 이런 곳으로 온 걸까. 아길레라는 근처에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크지라가 도망친 반란군을 뒤쫓으러 갔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아길레라 님."
그의 아들은 빈 말로도 머리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지능이 떨어졌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아길레라는 크지라의 모자란 지능을 후천적으로 메우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멍청한 놈. 뒤쫓으러 간 건지, 아니면 유인당한 건지."
아길레라는 혀를 찼다. 크지라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했지만, 그가 다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4등급의 마물은 시골 동네나 다름없는 라프타에서는 당해낼 이가 없는 강자였다.
아길레라는 병사들을 먼저 골목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밖에서 대기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골목으로 들어간 병사들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그도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한참 걸어가던 아길레라의 코에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짙은 피냄새. 그는 앞서 걸어가던 병사들을 밀쳐내고 앞서나갔다. 그리고 골목 너머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마물이었다. 그의 앞에는 뭔가 큼직한 것이 있었는데,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있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길레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반란군의 일원이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아길레라의 눈썹이 들썩였다. 마족에게 대하는 태도 치고는 너무 무례했다.
"크지라는 어디 있지?""
남자는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가 벗어던진 망토가 아길레라의 앞에 떨어졌다. 망토를 벗어나자 드러난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피부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한 게 곧 있으면 죽을 것처럼 보였다.
"날 기억하나?"
아길레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찮은 마물이 그에게 하대를 하고 있다. 그것도 하찮디 하찮은 하프랫 따위가. 그것은 아길레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앞에 있는 이가 마족임을 잊지 마라."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마계에서 마족이란 존재는 마물에게 있어서 신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하는 말은 법이고,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다. 라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다. 자신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라판은 떨려오는 다리를 바로잡았다. 마족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네 아들이 그녀를 강간했다. 네가 그녀를 죽였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나?"
라판은 아름다웠던 자신의 아내를 떠올렸다. 그리고 죽기 전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나친 고통을 겪으면서 잔혹하게 죽었던 그녀의 모습은 라판에겐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가끔씩 악몽으로 나타날 정도로.
"잘 봐라."
그는 자신의 앞에 있던 천을 걷었다. 천 아래에 숨겨져있던 것을 본 아길레라의 두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피로 젖은 천 아래에 있던 것은, 그의 아들, 크지라의 시체였다. 두 팔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땅바닥에 놓여 있는 시체. 아길레라의 두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네놈, 내 아들을!"
분노를 토해내는 아길레라의 모습을 본 라판이 조소를 터트렸다. 마족이든 마물이든, 소중한 이가 죽었을 때 보이는 반응은 똑같았다. 라판은 손에 쥐고 있던 마법석을 발동했다.
"그녀의 이름은 리셸, 리셸이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거다!"
그리고, 매서운 폭발이 골목을 집어 삼켰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제가 시골을 갑니다. 설날에 못 가서요.
그래서 아마 월요일은 글이 못 올라올 겁니다.
시골에서 노트북 붙들고 독자 분들한테 지적받은 부분 수정하고 다시 2연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글 쓰는데만 쫓기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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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끄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귀를 울렸다. 아길레라 본인이 데리고 온 부하들의 비명이었다. 그는 지옥의 불길이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느꼈다. 라판이라는 마물이 일으킨 불길은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고, 크지라의 시체를 집어삼키고, 좁은 골목을 집어삼켰다.
그가 주변에 있던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삼았음에도 이 정도였다. 아길레라는 죽어가는 부하들을 방패로 삼아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라판의 마법석의 효력이 끝났을 때, 아길레라는 죽은 부하들의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으……."
그의 입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고풍스러운 옷은 불로 태워져 너적데기가 되어 있었고, 그의 날개와 몸 곳곳에 검은 그을음이 있었다.
아길레라는 부하들의 시체들을 넘어, 자신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후."
아직도 피어오르는 불길 속에 크지라의 시체가 있었다. 그의 시체는 탐욕스럽게 불길을 집어삼키고,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길레라는 자신의 아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크지라의 시체 뒤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살점과 뼛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길레라는 이것들이 마법석을 사용한 그 마물의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이 정도의 폭발과 불길을 만들어낸 마법석이다. 모르긴 몰라도, 사용한 장본인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놈……."
아길레라는 자신의 아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아길레라는 불타고 있는 크지라의 시체를 감싸안았다.
"……네 복수는 내가 해주마."
조용한 속삭임이 골목을 울렸다.
* * *
통로는 어두웠고, 길었다. 이 좁은 동굴은 어디까지 이어져있는 걸까. 이성현은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다리가 아파오고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약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성현은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어두운 통로를 거의 뛰다시피 해서 걸은 그는 빛이 새어들어오는 벽을 밀었다. 그리고 환한 빛이 비추는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
이성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라프타 안이나 여기나 지하 세계임은 마찬가지였지만, 바깥이 좀더 공기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 위함이었다.
'어디지?'
그가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이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어두운 숲속. 그가 지나온 통로가 아길레라가 비상시에 탈출하기 위해서 만든 것임을 생각하면, 출구를 아마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둔 모양이었다.
그는 라판에게 받은 지도를 펼쳤다. 그가 준 지도에는 지금 이성현이 있는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성현은 카르카스로 가는 길을 알기 위해 지도를 꼼꼼히 살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가야할 길을 찾았다. 하지만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해봐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성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마냥 앞을 향해 걸었다. 길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그의 등에 엎혀있는 레피는 고른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듣자 걱정이 생겼다. 그녀에게 라판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그는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레피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크게 뒤척거렸다. 아무래도 깨어나려는 모양이었다. 어두운 숲속을 하염없이 걷고 있던 이성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레피가 깨어났다.
"여긴……."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한 탓인지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듯했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이 이성현을 향했다. 그녀는 자기가 모르는 이가 그녀를 안고 있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누, 누구세요……? 저를, 어디로……."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의 지금 모습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레피. 나야, 가브."
"가브? 아냐, 아저씨는……. 피부가 빨간데……."
이성현은 의심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가브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얘기했다. 그녀와 자주 갔던 식당, 그녀와 어디를 갔었고, 뭘 했었는지.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피는 그가 가브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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