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3
고, 가능한 약한 마물을 목표로 삼았다. 놈들의 등급이 높지 않은 데다가 인원수도 많지 않으니 그러는 모양이었다.
이성현이 제일 처음 한 일은 놈들의 아지트에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깡패 무리 하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엘레인의 말에 따르면 도시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빛이 사라질 때가 되면 깡패들이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엘레인의 말대로, 도시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아지트에서 깡패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성현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놈들을 조용히 추격하고 놈들이 하는 행동을 관찰했다.
"너무 잔챙인데."
반나절 동안 관찰한 끝에 이성현이 내놓은 결론은 그것이었다. 엘레인은 놈들이 깡패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그저 질낮은 양아치로밖에 안 보였다. 놈들이 반나절 동안 한 행동은 이러했다.
지나가는 이 중에 만만한 놈이 있으면 어깨를 부딪치고, 그 핑계로 행인을 어두운 골목길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골목길 안에서 기다리던 다른 동료들과 합류해서 행인에게서 물건을 갈취한다.
이게 놈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이외에는 술집에 들어가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가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마물에게 쫓겨나거나. 말 그대로 흔해빠진 양아치였다.
'이런 놈들의 목을 베오라니…….'
이성현은 혀를 찼다. 양아치짓을 해온 결과치고는 너무 잔혹한 대가가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그가 몰라서 그렇지, 이 양아치들도 다른 마물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갈취했던 행인을 죽여서 어디 외딴곳에 묻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을 수도. 이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움직일까.'
날은 적당히 어두워졌고,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목표물인 양아치들은 하루 동안 벌어들인 소득을 들고 아지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문제라면 놈들이 너무 거나하게 취했다는 것. 양아치들의 대장은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는 녀석은 아닌 듯했다.
'그럼 그 대가를 치뤄야지.'
이성현은 어깨춤에 묶어둔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엘레인의 의뢰를 수행할 시간이었다.
* * *
"학, 카학!"
늦은 밤, 어둡고 좁은 뒷골목에서 한 마물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가졌지만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곳곳에 균열이 나 있는 몸. 마물은 크랙커라는 이름을 가진 마물이었다.
크랙커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급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다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동료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두 번 다시 이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목숨만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동료의 얼굴이, 마지막 유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동료를 단 한 줌의 자비도 없이 죽이고 목을 베어 넘기던 마물의 모습이.
크랙커는 잠깐 뒤를 돌아봤다가 아무도 안 쫓아온다는 생각이 들자 제자리에 멈춰 숨을 골랐다. 가슴을 터질 것 같았고 한계까지 혹사당한 팔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내가 왜! 왜 이런 꼴이 돼야 해!"
크랙커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랬길래.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왜 놈은 우리를 추격해오는 거고, 왜 우리를 죽이는 건가. 물론 자신들이 행인들의 돈이나 물건을 빼앗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때였다. 또각, 또각.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그 소리를 들은 크랙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식은땀이 자신의 온몸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서 고개를 뒤로 돌리니, 거기에는 한 마물이 서 있었다.
붉은 피부. 잘 단련된, 근육이 도드라진 몸. 윤기 없고 푸석한 흰색 머리카락. 어깨에 메고 있는 검집과 손에 쥐어져 있는 날카로운 검. 지금까지 크랙커와 그의 동료를 학살한 마물.
"도망은 다 쳤냐?"
이성현이었다. 낮고 거친 목소리는 그의 생김새와 잘 맞았다. 크랙커는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봤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나친 공포가, 두려움이 그에게서 사고라는 것을 빼앗아갔다.
"헉!"
크랙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뒷걸음질 쳤다. 이성현은 귀찮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대충 던진 검인데도 얼마나 빠른지 크랙커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검이 크랙커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크랙커는 그 충격에 땅을 나뒹굴었다.
크랙커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다.
"도,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우리는 죽이는 거야!"
"너희들의 목에 돈이 걸렸다."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어느새 크랙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였다.
"혀, 현상금? 누가?"
"글쎄다. 너희가 돈을 뺏은 놈 중 하나가 아닐까."
허벅지에 박힌 검을 빼내는 이성현. 그 고통에 크랙커가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의 마물에게 반항해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의 동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한 장본인이다. 혼자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 살려줘. 두 번 다신 다른 놈들 돈은 안 뺏을 테니까! 우리 조직도 탈퇴할게! 그러니까 살려줘!"
이성현은 무감정한 눈으로 크랙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크랙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에 그의 등골이 저절로 서늘해졌다.
이성현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주머니를 열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짙은 혈향,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동료의 얼굴을 본 크랙커의 입이 벌어졌다. 경악으로 가득 찬 눈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내가 널 살려줄 거 같나?"
"제, 제발! 제발!"
이성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크랙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안 돼."
냉정하게 휘둘러지는 검. 검은 크랙커의 뭉툭한 목을 너무나도 부드럽게 베어 넘겼다. 컥, 하는 짧은 비명이 잠깐 흘러나왔다가 공기에 흩어져 사라졌다.
이성현은 땅을 데구르르, 구르는 크랙커의 머리를 잡아 들고 가지고 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크랙커는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고, 그 원한은 이성현 같은 마물을 불러들였다. 크랙커가 지금까지 저질러온 잘못에 대한 대가는 목숨이었다.
이성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직 놈들은 남아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백을 한 손에 든 채, 이성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번화가의 한구석, 마물들의 발길이 더는 닿지 않는 그곳에는 버려진 건물들이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관리하지 않는 건물들. 예전에 영주 아들의 요구를 거역했던 이들이 살았었으나 이제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런 곳을 아지트로 삼은 이들이 있었다. 이성현의 목표인 깡패 집단이었다.
예전에는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었는지 건물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된 탓에 이제는 폐건물이나 다름없는 곳에 크랙커 네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이하게 생긴 크랙커가 하나 있었다. 다른 크랙커와는 다르게 머리에 뿔이 돋아나 있는 크랙커는 초조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들기고 있었다.
"젠장! 왜 안 오는 거야!"
분명히 이 시간이 되면 돌아와야 하는데. 늘상 이 시간이 되면 돌아오던 부하들이 오늘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술 마시고 있는 게 아닐까요? 캬란이 꼬셨을 거 같은데."
"캬란, 그 새끼는 돌아오면 내 손에 죽는다. 망할 새끼! 한두 번이 아니야!"
대장 크랙커는 이를 빠득 갈았다. 대장이라고 해봐야 8등급 밖에 안 되고, 부하들은 9등급이었기에 등급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부하들은 대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놈들은 그래도 명령을 따르는 척은 하는데, 캬란 그놈은 대장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
"대장, 이제 돌아가면 안 됩니까? 졸리는데."
"안돼! 그 새끼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아무도 못 나가."
"아……."
말을 건 부하가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대장 크랙커가 눈에 불을 내면서 부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짜증냈냐?"
그러자 부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대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망할 새끼들. 대장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어.'
빨리 정수석을 사서 등급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지 저 망할 부하 놈들이 무서워서라도 그를 따를 것이다. 문제는 돈. 돈이었다.
"제길, 제길."
길거리를 다니는 행인을 아무리 털어봤자 벌 수 있는 게헨에는 한계가 있다. 요즘 같은 때에 많은 게헨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마물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경비대 대장에게 찔러줘야 하는 뇌물도 있다. 돈이 모일 리가 없지. 대장은 아파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홧김에 마물 한 놈을 죽여버리는 것도 마음에 걸려.'
경비대 대장은 뇌물만 제 손에 쥐여주면 어느 정도의 범죄 행위는 눈감아 준다. 하지만 살해는 다르다. 마물을 죽이면 경비대 대장도 감싸주기 힘들어진다. 더 큰 게헨을 줘서 경비대 대장의 윗선까지 뇌물을 먹이지 않는 한.
"불길해……."
대장은 초조한 듯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찾아올 거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부하들이 안 돌아오는 것도 그랬다.
대장은 문이 걷어차이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와 건물 안에 있는 크랙커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한 마물이 서 있었다. 어깨에 검집을 메고 있는 마물이 한 손에 주머니를 든 채 서 있었다. 그 남자가 들고 있는 주머니는 새빨갛게 물들여져 있었고 빨간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뚝, 뚝. 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새빨간 피. 대장은 자신의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성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가 크랙이라는 양아치들의 아지트라던데, 맞나?"
대장은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불안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이성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대장에게 던졌다. 대장의 바로 앞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주머니. 퍽, 하는 뭔가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진하게 올라오는 혈향이 대장의 코를 자극했다.
대장의 인상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부하들이 제각각 몸을 풀며 이성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건 뭐냐?"
"열어봐라."
그러면서 턱짓으로 주머니를 가리켰다. 대장은 허리를 구부리고 피로 흠뻑 젖은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손에 닿는 눅눅하고 축축한 젖은 천의 촉감. 천천히 열리는 주머니의 구멍 사이로 보이는 네 개의 머리.
"헉!"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눈도 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죽어있는 크랙커들의 머리가 백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장이 잘 알고 있는 크랙커들이었다.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으니까.
"너, 넌, 누구냐?"
이성현은 어깨에 멘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용병 지원자."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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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그, 용병 지원자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냐?"
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성현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면서 몸을 풀었다. 이성현이 적의를 보이자, 대장의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성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글쎄. 네가 잘 알지 않을까?"
사 대 일. 충분히 해볼 만한 숫자다. 아니, 해볼 만한 숫자인가?
'내 부하 네놈을 죽이고도 상처 하나 없다.'
하나씩 죽였는지, 아니면 한 번에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처 하나 없이 죽였다는 게 문제였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춘 놈이라면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대장은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부하들은 제각각 가지고 있는 무기를 꺼냈다.
"대장! 거 너무 겁먹지 말고, 한 번에 칩시다!"
"아,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대장은 다급하게 제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부하들 중 하나가 몽둥이를 들고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어깨춤에 멘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오늘 여기서 살아나가는 놈은 없다."
이성현은 주먹과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크랙커에게 오히려 다가가 얼굴을 검 손잡이로 후려갈겼다. 뻑! 크랙커의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이성현은 젖혀지는 놈의 목을 손으로 움켜잡고 꺾어버렸다.
"컥!"
그리고 오른쪽에서 공격하려는 크랙커의 복부를 검으로 베어 넘겼다. 재빠른 일 섬. 크랙커의 복부가 길게 베이고 피가 흘러나왔다. 끔찍한 고통에 그의 몸이 크게 구부려지고, 이성현은 구부러진 그의 목을 검으로 내리그었다.
몸만 남아 아둥거리는 사체를 접근해오는 크랙커에게로 밀쳤다. 크랙커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사체를 받아들였고, 이성현은 그 틈에 거리를 좁혔다. 그는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였고 크랙커를 사체와 함께 크게 베어 넘겼다.
"잠깐, 이건 너무 강……."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크랙커의 미간을 겨냥하고 검을 투검했다. 크랙커는 자신의 동료가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경악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에 이성현의 검이 정확하게 꽂혔다.
"……제길."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대장은 욕을 내뱉었다. 이성현은 크랙커의 미간에 꽂힌 검을 빼내면서 무감정한 눈으로 대장을 바라봤다. 대장은 기다란 쇠사슬을 무기로 사용했는데, 쇠사슬을 쥐고 있는 손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살려줄 생각은, 없겠지?"
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성현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죽어있는 사체들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사체들이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죽은 자의 신음을 흘리면서. 대장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부하였던 이들을 바라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흐, 이상하게 불길하더라니."
사체들이 대장을 덮쳤다. 끔찍한 비명이 버려진 건물에 울려퍼졌다.
* * *
툭.
이성현은 접수대 위에 큰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주머니의 아랫부분은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서 더없이 불길하게 보였다. 접수대에서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엘레인은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꼭 접수대 위에 올려야겠어?"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이성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엘레인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주머니를 열었다. 커다란 주머니 안에는 가지각색의 머리가 여덟 개 들어 있었다. 그녀는 놈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맞네. 의왼데."
"뭐가?"
엘레인은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곤 옆에 있던 서류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읽었다. 그 종이는 이성현의 신상 정보가 적혀있는 종이였다.
"쉬운 의뢰긴 한데, 7등급의 핏 가드가 하려면 나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처리해서 말이야. 보아하니 다친 데도 없는거 같고."
"운이 좋았어."
"운?"
엘레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남자가 본다면 바로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매혹적인 웃음이었지만 엘프에게 크게 덴 적이 있는 이성현에게는 가증스러운 웃음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치지, 뭐."
"그래서. 합격인가?"
엘레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접수대의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동색의 징표를 하나 꺼내더니 이성현에게 내밀었다. 징표는 커다란 뱀을 검이 꿰뚫는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길드의 일원이라는 증표. 그리고 이거."
그리고 조그마한 단검 하나를 내밀었다. 아무런 특색 없는 싸구려 단검이었다.
"손가락 좀 따서 휘장에 피 좀 묻혀봐."
"음."
이성현은 엘레인의 말대로 손가락 끝부분을 단검으로 따고, 흘러나오는 피를 휘장에 묻혔다. 그러자 휘장이 피를 머금고 붉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잠깐 빛나던 휘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한 거지?"
"휘장이 네 영혼을 인식한 거야. 알고 있겠지만, 마물이라는 게 늘 똑같이 생기진 않잖아. 어제 봤던 놈이 내일 진화해서 생김새가 달라지고, 그러는 게 마계니까."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물들은 진화하더라도 같은 계통의 마물들로 진화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형 변화가 크다. 누군지 못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그 휘장이 있으면 마물의 생김새가 아무리 달라지든 누군지 확인할 수가 있어. 거기 뒷면에 보면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을 거야."
엘레인의 말대로 휘장의 뒷면에는 이성현의 가명이 그려져 있었다. 가브. 이제는 익숙해져야할 이름이었다.
"그 휘장은 피를 머금으면 빛나. 방금 당신이 휘장에 영혼을 인식시켰으니까, 이제 당신의 영혼 외에 다른 영혼을 가진 이가 피를 먹여도 빛나지 않을 거야. 뭐, 그런 거지."
"중요한 물건이겠군."
"그래. 비싸진 않지만 만들려면 귀찮으니까 잘 간직해줘."
엘레인은 접수대 위에 올려진 주머니를 아래로 내렸다.
"그 머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팔 거야."
"……판다고?"
이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레인은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매끄러운 팔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죽기 전에 공포와 원한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죽은 녀석한테는 그 사념이 잔류하지. 그런 사념을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거든. 언데드 계통의 마물들. 그런 놈들한테 팔아먹을 거야."
"의뢰인이 그러라고 했나?"
"의뢰인? 흥."
엘레인은 코웃음을 쳤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코웃음이었다. 엘레인은 정말로 가소롭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도시 경비대가 의뢰인이야. 놈들한테는 이 머리들이 달갑지 않을 걸. 빨리 사라졌으면 할 정도로."
"무슨 말이야?"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야. 하여튼, 축하해. 용병 길드의 일원이 된걸. 당신은 용병 길드가 있는 도시면 어디서든 용병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게 됐어."
그러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용병 길드와 도시 경비대 사이에 이성현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엘레인은 갑자기 접수대 아래로 고개를 처박더니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건 보상."
이성현은 주머니를 받아들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마계의 동전, 게헨이 열 개 정도 들어 있었다. 그는 가볍게 인상을 썼다.
"이게 다야?"
"그럼, 뭘 바랐어. 8등급 한 놈, 9등급 일곱 마리 잡고 부자라도 되길 바랐어?"
그건 아니었지만, 너무 짜다. 빵 하나가 게헨 한 닢이다. 그 마물들의 목숨값은 고작 빵 열 개밖에 안 된단 말인가. 엘레인은 웃었다.
"가입비를 제하고 준 거야. 그 휘장도 그렇고, 이것저것 돈 들어갈 일이 많거든. 원래 보상은 50게헨이었어."
"그래도 짠데."
놈돌의 목숨값이 빵 열 개에서 빵 오십 개로 올라갔다. 둘 다 저렴하긴 마찬가지였다. 하긴, 전쟁통에는 사람 목숨만큼 저렴한 것도 없긴 하지.
"그러면 다른 의뢰를 해서 돈을 버시던가. 밖에 게시판 있잖아."
엘레인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이성현은 그 손가락을 무시했다.
"요즘에는 무슨 의뢰가 제일 인기가 많지?"
"요즘? 요즘 같은 때야 전쟁과 관련된 의뢰가 많고, 인기도 많지. 전쟁터에서 구르거나, 아니면 던전에서 일하거나."
"던전? 던전에서 일하면 뭘 하는데?"
엘레인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용병 길드 라프타 지부에서 가장 외모가 뛰어나서 접수대를 보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의 질문에 좋게 대답해줄 성격이 못 된다는 뜻이다.
"뭘 하겠어. 던전에서 숙박하면서 정해진 기간 동안 일하는 거지. 적들이 공격해오면 병사들이랑 협력해서 막고. 휴가 받으면 도시에서 며칠 쉬고."
군인이잖아, 그건. 이성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엘레인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정말로 인기가 많으니까. 그래도 병사보다는 좀 자유로운 편이야. 게다가 활약하면 십인장이나 백인장으로 진급할 수도 있어."
"병사도 아니고 용병인데, 진급도 시켜줘?"
"음, 그 던전 직속의 용병이 되는 거지. 그 던전에서 나가면 직급은 다시 해제되고. 말 그대로 자기가 소속된 던전 안에서만 적용되는 직급인 셈이야."
"그렇군……."
이성현이 턱을 매만지면서 잠깐 생각에 잠기자 엘레인의 표정이 풀렸다.
"그래서, 던전 쪽에서 일하려고?"
"아니."
"……그럼 도대체 왜 질문을 해댄 거야? 짜증나게."
그러나 표정이 풀린 것도 잠시, 이성현의 무신경한 말에 인상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다크 엘프의 빼어난 외모는 일그러진 인상도 아름다워 보이게끔 했다.
"가스트 산적단 토벌 공고. 난 거기에 관심 있는데."
"가스트? 아아, 이번에 공고가 걸렸었지. 처음으로."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스트 산적단은 일 년 사이에 크게 이름을 알린 산적단이었는데, 도시 경비대나 영주는 그걸 알면서도 공고를 안 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무슨 변덕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공고를 냈고. 물론 그 변덕이 뭔지, 엘레인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스트란 놈의 무력이 제법 뛰어나서, 7등급의 마물이 신청하기엔 너무 위험한 의뢰였다.
"위험할 건데? 가스트 그 녀석, 6급이긴 한데 거의 5급이나 마찬가지인 녀석이야. 미노타우르스는 종족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놈들이라서 한 등급 위의 종족이랑 대등하게 싸울 수 있거든."
"됐으니까 넣어줘. 할 거니까."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인이 죽든 말든 그녀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 했지만, 신참 치고 너무 무리한 의뢰를 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같은 신참이 할 공고는 아닌데? 정말로 할 거야?"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정말로?"
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짜증을 냈다.
"아, 할 거니까 넣어달라고! 죽든 말든 내 목숨이니까."
"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네가 하겠다니 일단 넣어주긴 하겠는데. 죽어도 난 몰라. 난 말렸어."
엘레인은 귀를 틀어막더니 근처의 서류 더미를 뒤져 종이 한 장을 또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이성현의 이름, 가브를 적어 넣었다.
"오 일 뒤에 모여서 출발할 거야. 준비는 알아서 하시고. 며칠 노숙을 해야 될 테니 준비하고. 재수가 좋으면 살아서 돌아올 거고, 없으면 죽을 거고."
그러면서 엘레인은 악수라도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성현이 이 여자가 뭐하자는 짓인가 싶어서 그 손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손을 꿈틀거렸다.
"뭐하자는 거야?"
"이제 못 볼 놈 조의라도 표하려고."
"……살아서 돌아올 거니까 신경꺼라."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토요일은 시간대를 좀 바꿔서 올려볼게요. 11시, 3시, 7시로.
일요일은 새벽 0시 10분~20분 쯤에 올려볼게요.
25====================
데몬 로드
오 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흘러갔다. 이성현은 그 시간 동안 간단한 의뢰들을 해결했다. 전에 했던 깡패 퇴치 의뢰 같은 의뢰를 하거나, 짧게 끝낼 수 있는 물건 찾기라던가 애완동물 찾기 같은 의뢰도 했다.
"꼭 이런 의뢰를 해야 하나?"
"당신 같은 신참한테 중요한 일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 꿈 깨셔."
한 번 애완동물을 찾다가 회의감이 들어서 불평을 토했더니 엘레인이 해준 말이었다.
이성현의 용병 등급이 낮아서 그런지 할 수 있는 의뢰라곤 죄다 대단찮은 의뢰뿐이었다. 그래도 포인트를 벌려면 무슨 의뢰든 해야 했기에, 이성현은 오 일이라는 시간 동안 받을 수 있는 의뢰는 죄다 받고 해결했다.
그 결과 벌어들인 포인트는 2000. 정수는 500 정도가 들어왔다.
'이놈의 정수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들어오는 거야?'
같은 숫자의 마물을 죽여도 다른 양의 정수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포인트처럼 고정된 기준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오직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수에 비례, 그리고 차감한 뒤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이성현이 가지고 있는 특전 덕분에 정수의 손실량이 줄어들었음에도 이 정도라니. 보통의 마물이라면 진화하는 데에 엄청난 세월이 걸릴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이성현은 나름 빠른 속도로 정수를 쌓아나가는 중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포인트 양은 3400. 이성현은 이 포인트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계속 모아서 상급의 특전을 구매할 것인가, 아니면 중급의 특전을 하나 구매할 것인가.
특전 중에 단단한 몸이라는 게 있다. 신체 강화는 육체의 성능, 힘이나 민첩함 같은 걸 올려준다면 단단한 몸은 오직 육체의 내구도만 올려준다.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적의 공격을 받아도 몸으로 튕겨내거나, 깊게 베일 상처를 얕게 베이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갑옷과 비슷한 특전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격이 비쌌다. 일반적인 특전과는 다르게 처음 배울 때 300의 포인트를 필요했고, 그다음 등급으로 올리는 데는 3000의 포인트가 필요했다.
3. 단단한 몸 (중급)
["(은)는 단단해지기를 사용했다!"]
[당신의 몸은 척박한 히스토리아에 적응했습니다. 몸이 가죽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해집니다.]
어젯밤 한참을 고민하던 이성현은 결국 단단한 몸을 구매했다. 그 결과 남은 포인트는 100.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군.'
거기에 정수는 1300. 진화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한동안 진화도 꿈도 못 꾸겠고.'
다음 진화에 필요한 정수가 10000인 걸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돈을 모아서 정수석을 구매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았다.그리고 다음으로 진화할 수 있는 종족에 대한 특성들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놈의 시스템은 특전을 구매할 때는 쓸데없이 친절하더니, 진화할 때는 쓸데없이 불친절했다.
특전은 구매할 특전이 뭔지 자세하게 알려주는데 진화는 종족의 생김새, 특징,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간티로스에서 핏 워커, 그리고 핏 가드로 진화한 이성현은 어찌 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핏 가드라는 종족은 어느 정도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었으니까.
8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와 관련된 능력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라판, 레피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고정된 진화 트리가 없고 수많은 종족 중에서 무작위로 진화하는 이성현은 잘못하면 전투 능력이 없는 종족으로 진화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광산에서 탈출하는 데에서부터 애로사항이 꽃 폈겠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로 운이 좋았다면 엘프들이 배신했을 때 살아남았겠지. 그런 이성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옆에 있던 레피가 고개를 들었다.
"네에?"
이성현은 고개를 저으면서 레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피의 눈이 기분 좋은 듯 가늘어지더니 양 끝으로 길게 자라난 콧수염이 찡긋거렸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레피와 이성현은 꽤나 가까워졌다. 레피는 인간관계……, 아니, 마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굉장히 좁고 협소했다. 기껏해야 자주 가는 빵집 아저씨,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갔던 서점 아저씨……. 동년대의 친구가 아예 없었다.
'으음, 얘도 이십 대긴 한데.'
레피는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주로 집에 있는 걸 선호했고, 그렇다 보니 그녀의 하루 일과는 굉장히 단순했다. 일어나서 식사를 차리고, 책을 읽는다. 저녁이 되면 다시 식사를 차리고,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읽을 책이 떨어지면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한다. 이게 그녀의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일이 없던 하루, 그녀의 일과를 지켜본 이성현의 머릿속으로 어떤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떨쳐냈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 지내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상인, 라판의 과보호. 레피는 여러가지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아버지인 라판이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집에 있으라면서. 아무래도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곤 해도 너무 과보혼데…….'
라판은 레피를 마냥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번에 정신적으로 어린 면이 있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이성현은 용병 길드의 의뢰를 끝마치면 레피를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라프타의 지리를 익히고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는데, 레피는 누군가와 함께 밖에 돌아다니는 걸 꽤 즐거워했다. 그러다 보니 둘의 사이는 처음에 비하면 꽤 가까워졌다.
"오늘 출발하면 언제 돌아와요?"
"몰라. 일주일은 넘게 걸리지 않을까? 광산이 꽤 먼 곳에 있거든."
"그럼 오랫동안 못 보겠네요."
레피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이성현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스트 산적단 토벌대의 집결 장소는 용병 길드 앞의 거리였다. 레피와 함께 용병 길드 앞으로 가니, 거기에는 스무 마리 남짓한 마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엘레인 역시 있었다. 용병 길드의 접수원.
"……어? 왔네."
엘레인이 손을 흔들면서 반기자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 모인 건가?"
"대충. 토벌대 대장만 오면 끝이야."
"생각보다 숫자가 많진 않은데."
이성현은 머릿속으로 가스트 산적단의 숫자를 떠올렸다. 다른 무리들과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떠올리긴 힘들었지만, 토벌대보다는 많았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토벌이 성공할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로 충분할걸? 지금 가스트 산적단은 되게 약해져 있거든."
"약해져 있다고?"
"응. 가스트 산적단은 적이 많아. 저번에 다른 산적단 무리한테 공격을 당했다나 봐. 공격당하면서 부하들이 제법 많이 죽었다나 봐. 광산에 있던 노예들도 죄다 도망쳐서 광산도 제대로 못 돌리고 있다던데."
"으흠……."
이성현은 어색한 헛기침을 흘렸다. 하긴, 그 정도로 치열하게 싸운 데다가 부관까지 죽었는데 피해가 없을 리가 없다.
"웃기지, 참. 이용 가치가 없어지니 버리는 꼴이라니……."
"뭐?"
"아니,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엘레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눈이 이성현의 옆에 있는 레피에게로 향했다. 엘레인의 붉은 눈이 초승달처럼 휘더니 손바닥을 펼쳤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엘레인이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자 레피가 이성현의 뒤에 숨었다. 드물게도 레피의 얼굴에는 겁먹은 기색이 느껴졌다. 낯을 가리긴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애는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현이 엘레인의 얼굴을 뭘 했냐는 눈빛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자, 엘레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인사만 했는데 겁먹는 걸 어떡해."
"다크 엘프……."
레피는 엘레인의 종족명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엘레인의 귀는 제법 밝았기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엘레인은 레피의 모습을 훑어보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아, 얘. 하프랫 종족이구나. 하프랫 종족이면 그럴만 하지."
"하프랫 종족? 그게 왜?"
엘레인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얘네가 예전에는 우리 종족의 노예였거든. 다크 엘프의 노예."
"……아아."
이성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종족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랐겠지, 뭐. 미안해, 꼬마야?"
"아, 아니에요……."
엘레인은 레피에게 윙크를 날리면서 토벌대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아저씨. 다크 엘프가 몇 등급인지 아세요?"
"모르는데. 몇 등급인데?"
"……5등급이에요, 5등급."
이성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마계의 종족들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 등급 같은 건 몰랐다. 용병 길드의 접수원이나 하고 있으니 등급이 높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엄청 높잖아? 그런 여자가 왜 접수원이나 하는 거지?"
"저도 모르죠……. 아빠가 다크 엘프는 엄청 잔인한 종족이니까 가까이 하지 말랬어요……."
"으음, 그렇군. 그럼 먼저 돌아갈래?"
레피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성현의 옷자락을 손으로 꽉 붙잡았다.
"아저씨가 가는 건 보고 갈래요……."
묘한 데서 의리가 있는 녀석이었다. 이성현은 레피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었다. 푸석한 쥐색의 머리카락이 이성현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듯이 움직였다.
이성현은 레피를 데리고 근처의 나무 그늘 앞에 앉아 토벌대의 대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덩치의 웨어베어가 걸어오더니 토벌대의 제일 앞에 섰다.
"저 녀석인가? 웨어베어는 몇 등급이야?"
"저 정도면……, 6등급일 거에요. 웨어베어는 등급이 오를 수록 덩치가 커지거든요."
가스트랑 같은 등급이군. 아니, 엘레인의 말에 따르면 가스트는 5등급에 준하는 녀석이라고 했으니 조금 쳐지려나. 이성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웨어베어가 토벌대에게 얘기하는 것들을 들었다. 별로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자신의 결의, 우리는 가스트 산적단을 반드시 토벌할 것이니, 그런 말이었다.
웨어베어는 곧 출발할 테니 준비하란 말을 남기고 엘레인과 함께 용병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출발하려나 보다."
"네."
레피는 이성현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조심하세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스트 산적단의 야영지를 향한 여행길이 시작되었다.
* * *
여행은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진 않았다. 라프타 주변의 치안이 별로 안 좋은 탓에 산적들이 들끓었고, 가끔 겁 없는 산적들이 토벌대를 덮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는 몇 번의 산적 무리들과 싸워야 했고 때때론 사상자도 나오곤 했다.
처음에는 스물 남짓했던 용병들의 인원수가 열 여덟 명으로 줄었다. 용병 중에서 제일 약했던 8등급의 용병 둘이 산적들과 싸움 와중에 죽은 것이다. 웨어베어는 산적 따위에게 죽다니! 하면서 분통을 터트렸지만 죽은 자에겐 입이 없었다.
이성현이 강령술을 사용했다면 피해가 줄어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무난하게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허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러니 오히려 더 쓰기가 어려워졌다.
왜 이런 능력을 진작에 사용하지 않았냐는 추궁을 들으면 골치아파질 것 같아서였다. 굳이 나서서 귀찮은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용병 중에는 이 근방의 지리에 아주 익숙한 이가 하나 있었는데, 길 안내는 그와 대장인 웨어베어가 맡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스트 용병단이 있는 광산까지 이제 하루 남았다고 했다.
"하루라."
이성현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길었던 광산에서의 노예 생활, 자신을 악착같이 뒤쫓던 가스트의 모습, 그림자처럼 사라진 노인장의 모습.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는데 정말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내일이면 도착하겠군."
이성현은 복잡한 생각을 가진 채,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음 추천 부탁드릴게요.
26====================
데몬 로드
가스트는 요즘 두통을 앓고 있었다.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머리가 안 아플래야 안 아플 수가 없었다. 가스트는 자신이 늘상 앉는 의자에 앉은 채,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한 잔 더 따라봐, 부관."
본인이 내뱉은 말에 가스트 본인의 얼굴이 굳었다. 부관은 죽었다. 탈출하던 노예들의 손에 의해서. 죽은 자가 술을 따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쓸데없이 잔인하고 가끔씩 가스트의 말을 안 듣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머리는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놈의 종족인 뱀처럼.
"……제기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가스트 용병단에서 각종 업무를 담당하던 부관이 죽으면서 당장 용병단 운영에 공백이 생겼고, 광산의 노예들이 죄다 탈출하는 바람에 자금 흐름도 멈춰버렸다.
'그 노예 새끼만 아니었어도.'
가스트의 머릿속에 한 노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핏 가드. 가스트는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애초에, 7등급에 해당하는 핏 가드가 왜 광산에서 노예로 일하고 있었는지 그것부터 이해가 안 됐다.
가능하면 노예를 관리하는 놈들을 불러 죄다 족치고 싶었지만, 이전의 습격으로 죄다 죽어버렸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부관도 그놈이 죽였어.'
살아남은 부하 하나가 알려줬다. 놈이 부관을 너무나도 쉽게 제압하고, 죽였다고. 그리고 죽은 사체를 강령술로 되살렸다고. 그 말을 들은 가스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7등급의 핏 가드는 마법과는 인연이 없는 종족이다. 그런 종족이 강령술이라는, 고위 계통의 언데드 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그가 강령술을 사용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관의 사체 역시 그러했다. 이미 죽어서 엉망이 된 사체가 모종의 힘으로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죽은 채로 움직이면서 부하들을 공격하던 부관의 사체를 죽인 것이 바로 가스트 자신이었기에 잘 알았다.
"제길! 누군지 알아내기만 한다면 죽여버릴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가스트 용병단의 상황은 창단 이래 최악이었다. 돈도, 인력도, 아무것도 없다. 그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망할, 아길레라 새끼……."
자금 흐름이 멈춘 탓에 아길레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아길레라와 가스트 용병단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러니 그가 약속한 시간에 돈을 주지 못했으니 더이상 관계가 유지될 리가 없었다.
조금만 늦춰달라고, 지금 용병단 내부의 사정이 이래서 당장은 줄 수 없다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아길레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돈을 줬거늘, 그것도 단 한 번도 기일을 늦추는 일 없이 줬거늘, 아길레라는 단 한 번의 지연을 용서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길레라한테 반항할 수도 없었다. 놈은 3등급의 마족이다. 가스트가 6등급이지만 종족의 특성 상 5등급과 맞먹는 힘을 가졌다곤 하나, 3등급의 마족과는 비교도 안 된다. 3등급의 마족은 그야말로 괴물이다. 마물을 손짓 하나로 죽이는 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가스트 용병단이 그렇게 깽판을 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아길레라에게 바쳤던 뇌물 덕분이었다. 그 뇌물이 없어진 이상, 아길레라는 가스트 용병단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토벌 공고가 내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면.
"파멸이다……."
이전에 받은 피해를 제대로 복구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저번 습격으로 부하들이 많이 죽었고, 신입 단원들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지금 가스트 용병단의 인원은 총 삼십. 남아있는 녀석들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나마 힘 좀 쓰는 녀석들은 습격 때 거의 죽었다. 가스트는 아파오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제길, 일단 어디서 노예를 가져와야 돼. 사던가, 아니면 납치하던가.'
가스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있는 천막을 누군가가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가스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천막에 들어올 때는 말하고 들어오랬잖아!"
"죄, 죄송합니다, 단장!"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입이 송구한듯 고개룰 조아렸다. 가스트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무슨 일이냐?"
"네, 네! 그, 저희 용병단이……! 토벌 대상이 됐습니다!"
"뭐, 뭐라고?!"
가스트는 경악하면서 기함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닥치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도망쳐야 되나? 다른 곳에서 다시 터전을 만들까?'
아니. 가스트 용병단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라테나이트 광산이 있어서였다. 그 광산이 있는 곳을 다시 찾지 않는 한, 전과 같은 성장을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래서, 놈들이 어디까지 와있는데?"
"……바로 코앞까지 와있습니다!"
신입의 이어지는 말에 가스트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방금 전까지 빠르게 회전하던 가스트의 두뇌가 일시에 정지됐다.
"……망할."
* * *
이성현은 예전에 그가 도망쳤었던 야영지로 가는 길에 서 있었다. 그의 근처에는 토벌대원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던 웨어베어가 돌아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경계를 서고 있는 놈이 안 보이는데."
"요즘 가스트 용병단이 많이 약해졌다던데, 그래서 그런거 아닙니까?"
"그런가? 하긴, 인원이 많이 줄었다더군."
웨어베어는 근처에 있던 대원과 얘기를 나누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함정은 없다! 움직인다."
한참 동안 멈춰있었던 토벌대가 다시 움직였다. 이성현은 점점 가까워지는 야영지를 보면서 새삼스런 기분이 들었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오게 될 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하지만 기회는 기회였다. 가스트의 기세가 약해져있는 지금이 놈을 칠 절호의 기회였다.
이성현과 토벌대는 어두운 숲을 한참을 걸어갔다. 가장 앞장선 건 토벌대의 대장인 웨어베어였다. 그는 짐승의 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함정 같은 걸 파악하는 것에 능했다. 그가 앞장서며 혹시나 놓친 함정이 있을까 확인했고 길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영지게 눈에 들어왔다.
"……도착했군."
야영지는 불길하게 조용했다. 이성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야영지의 마지막 모습은 여러 마물들이 뒤섞여서 어지럽게 싸우고 있는, 난잡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야영지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너무 조용한데요. 아무도 없나?"
"그럴 리가. 놈들의 냄새가 난다. 안에 있어."
"매복이라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용병의 물음에 웨어베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장서지. 최대한 경계하면서 움직여라."
웨어베어는 제법 책임감 있는 마물이었다. 이번 여행길 동안 산적들이 습격해올 때마다 자신이 앞장서서 싸웠다. 조금 전에 길을 찾을 때도 그러했다. 다른 용병을 보내도 됐을 텐데 굳이 자신이 나서서 길을 찾았다.
'하긴, 그러니까 대장을 맡았겠지.'
아무나 대장 자리에 앉히진 않았을 것이다. 웨어베어는 자신을 따라오는 대원들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라고 손짓하곤 조용한 야영지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던 대원들까지 안으로 들어간 순간.
"쳐라!"
야영지의 곳곳에서 산적들이 튀어나왔다. 함성을 내지르면서 용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숫자는 삼십 남짓. 토벌대의 숫자는 열 여섯. 거의 두 배의 숫자 차이였다.
"대, 대장! 놈들이 너무 많은데요!"
"어차피 오합지졸이다! 놈들의 꼴을 봐라!"
웨어베어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산적들은 장비의 상태도 썩 좋지 못했고, 대다수가 약한 지옥 고블린이나 레서 리저드맨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성현은 모든 리저드맨이 다 같은 리저드맨인 줄 알았는데, 레서 리저드맨이라는 하위 종족이 있었다.
"저깟 놈들에게 지진 않겠지!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라!"
웨어베어는 큰 포효를 내지르면서 다가오는 산적을 공격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성현도 어깨춤의 검을 빼들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이성현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해오는 산적들의 공격을 받아쳤다.
제대로 검술을 배우지 않은 산적들의 공격은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특전을 잃은 이성현 역시 이전 만큼의 실력은 내보일 수 없었지만, 저런 산적들보다는 나았다.
이성현은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몸을 회전시켜 피하고, 그대로 자신의 검으로 내리찍어 튕겨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훤히 개방된 산적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큽!"
그리고 연이어서 다른 산적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성현은 방금 죽인 산적이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성현의 팔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이성현의 손에 쥐어진 산적의 검이 그의 손을 떠나 달려드는 산적의 복부를 찔렀다. 달려오던 산적의 발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추고, 이성현은 멈춘 산적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놈의 어깨춤을 크게 베어 넘겼다.
"크하악!"
이성현의 검은 막힘없이 산적의 뼈를 베었다. 포인트를 지불해서 검을 산 보람이 있었다. 검에 부여되어있는 샤프니스 덕분인지, 이전의 검에 비해 날카로운 게 몸으로 느껴졌다.
"산적을 가장 많이 죽인 이에겐 추가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웨어베어의 고함 소리를 들은 이성현의 눈이 빛났다. 이성현은 검 손잡이를 매만지면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주변의 용병들은 산적들과 어지럽게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 이성현은 그 중에서 산적들의 숫자가 많은 곳을 찾았다.
거기에는 산적 셋이 용병 하나를 단체로 공격하고 있었다. 이성현은 길게 숨을 토해내고, 땅을 박차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빠른 속도로 놈들과의 거리를 좁힌 이성현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적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날카로운 검은 산적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놈의 몸통까지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성현은 튀어오르는 피를 얼굴로 받아내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반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시체 너머, 용병을 공격하던 산적이 이상을 눈치채고 고개를 뒤로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이성현은 흐트러진 자세를 재빠르게 되돌리고 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 반동을 그대로 검에 실어 횡베기를 시도했다.
콰직!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이 매서운 소리를 내면서 산적의 목을 박살냈다. 짖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지지대를 잃은 산적의 머리가 허공을 비행했다.
"무, 무슨, 뭔……."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였던 동료들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버리자 산적이 입을 벌렸다. 이성현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시체를 발로 차 쓰러트리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산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 안 돼!"
산적은 고개를 저으면서 오히려 자신이 먼저 이성현을 공격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도끼가 움직였지만, 이성현이 보기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특전을 한 번 시험해볼까?'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이성현은 이번에 배운 특전, 단단한 몸을 시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현은 왼팔을 일자로 세워 다가오는 도끼를 받아냈다.
팍!
"헉!"
도끼가 이성현의 왼팔을 찍었다. 하지만 상처는 깊지 않았다. 종이에 베인 수준의 상처 만이 남았을 뿐. 이성현은 자신의 왼팔을 확인하곤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무슨, 맨몸으……."
섬광이 번뜩였다. 경악한 기색으로 뭔가를 말하려던 산적의 허리가 날아갔다. 이성현이 검을 수평으로 휘둘러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용병이 이성현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곤 다른 이들과 합류헀다.
============================ 작품 후기 ============================
추천 부탁드릴게요.
맞춤법 검사기 돌려야 되는데 기찮.. 자고 일어나서..
다음화는 7시에 올라올 수도 있고, 9시에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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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성현은 산적들과 싸우는 용병들을 지원했다. 죽은 산적들은 죄다 좀비로 되살리면서 용병들을 지원하니, 용병들은 처음에는 좀비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성현의 고함과 좀비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곤 좀비들을 이용하면서 산적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흐름은 용병들에게로 넘어왔다. 숫적인 차이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산적들이 하나씩 줄어들면 용병들의 숫자가 하나씩 늘어났다. 산적들은 자신들이 밀리고 있음을 깨닫고 가스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번에 습격당했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가스트라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가스트는 웨어베어와의 싸움에 한창이었다. 비록 가스트가 우세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산적들을 지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제길! 버텨! 어떻게든 버티면 단장이 도와줄 거……!"
이성현은 주변의 동료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려고 한 산적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목을 쳤다. 주변의 산적들이 순식간에 목이 날아난 자신의 동료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이성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성현은 다가오는 산적들을 처리하면서 가스트와 웨어베어가 싸우고 있는 곳을 봤다.
"저기로 가볼까."
이미 분위기는 용병에게로 넘어왔다. 이대로 둬도 알아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저 가스트 놈만 이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용병들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그럼, 이제 이성현의 개인적인 감정을 풀 시간이었다.
이성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걸음을 옮겼다. 가스트에게로.
* * *
웨어베어는 가스트와의 싸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미노타우르스와 웨어베어는 같은 6등급이었지만 차이가 있었다. 저 가스트라는 놈이 자신보다 더 강했다. 웨어베어는 자신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도끼를 가까스로 피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매서운 일격이었다.
"크허엉!"
웨어베어는 고함을 내지르면서 양팔을 크게 벌리곤 껴안듯이 휘둘렀다. 가스트는 놀라운 속도로 뒤로 빠지면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 큰 공격을 한 탓에 빈틈을 보인 웨어베어의 옆구리에 도끼가 꽂혔다.
나무를 패는 것 같은 일격에 웨어베어의 옆구리가 크게 파였다. 그는 짐승의 비명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크윽!"
"하하! 너 같은 늑대 새끼도 내 손으로 족쳤다! 곰 새끼라고 다를 건 없지!"
가스트의 일격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웨어베어와 가스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리치의 차이였다. 가지고 있는 손톱으로 공격하는 웨어베어와 큼직한 도끼로 공격하는 가스트는 리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리하다!'
웨어베어는 이를 악물었다. 이놈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전투에 특화된 종족인 미노타우르스는 일대일 전투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웨어베어 역시 전투에 능한 종족이었지만, 미노타우르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짐작컨데, 이놈은 5급으로의 진화를 앞두고 있는 놈일 것이다.
미노타우르스는 패도적인 기세로 치고 들어왔다.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한 번의 공격을 휘두르고, 또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공세를 이어나갔다. 웨어베어는 그 공격을 쳐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공격을 쳐내면서 옆구리에 난 상처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웨어베어의 몸의 힘이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었다. 웨어베어는 조금씩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가스트는 승리를 직감한 미소를 띄우면서 크게 포효했다.
"누가 날 상대하겠나!"
"내가."
크게 함성을 내지르던 가스트의 등을 검이 파고들었다. 가스트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앞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웨어베어는 온힘을 실은 도끼로 내리쳐 밀어냈다.
"크아아아!"
가스트는 몸을 회전시키면서 도끼를 휘둘렀다. 뒤에서 자신을 공격한 녀석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를 공격한 녀석은 이미 뒤로 물러난 후였다.
"어떤 놈이냐!"
가스트는 시뻘겋게 물든 눈으로 자신을 공격한 이를 노려봤다. 익숙한 얼굴. 그는 가스트가 잊을 수 없는 놈이었다. 광산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 자신의 부관을 죽인 노예. 그놈이었다.
"너……."
가스트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몸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성현은 검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가스트는 이성현을 보면서 주변을 흘겼다.
주변에는 죽은 부하들이 일어나 같은 동료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 역시 익숙한 광경이었다. 머리가 박살난 채로 살아서 움직이던 자신의 부관을 그의 손으로 재우지 않았던가.
"또 보는 구나, 이 망할 새끼야!"
가스트는 분노를 불태우면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도끼가 크게 회전하면서 이성현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이성현은 근처에 있던 좀비를 끌어들여 방패로 삼았다.
가스트의 도끼가 좀비의 몸에 박히다 못해, 좀비의 복부를 박살냈다. 상체와 하체를 이어주는 허리를 잃은 좀비의 상반신이 땅을 기어다녔다.
"자기 부한데 너무한 거 아닌가?"
"닥쳐라! 네놈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가스트는 또다시 도끼를 투척하면서 이성현에게 돌진했다. 이성현은 이를 악물면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도끼를 쳐냈다.
쾅!
검과 도끼가 맞부딪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가스트의 도끼가 이성현의 검을 강타했고, 이성현의 팔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뒤로 젖혀졌다. 이성현은 저려오는 팔을 억눌렀다.
"하앗!"
그리고 이성현은 기합과 함께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본 가스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현의 아밍 소드가 가스트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들어왔다. 순간적인 가속도와 힘을 담은 찌르기는 막을 수 없는 번개와도 같았다.
챙!
"어림 없다!"
하지만 가스트는 번개 같은 일격을 가볍게 쳐냈다.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으면서 즉각적으로 이성현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고, 이성현의 팔이 뒤로 밀려났다.
가스트는 바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도끼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힘이 가득 담긴 도끼가 회색 빛의 잔상을 남기며 이성현의 가슴팍을 노렸다.
"큭!"
이성현은 재빠르게 검을 세워 가스트의 일격을 받아냈다. 캉, 튕겨 나가는 도끼. 그러나 가스트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스트는 검과 도끼가 맞부딪히는 충격을 이용해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면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회전력이 가미된 도끼가 섬뜩한 빛을 내뿜으며 이성현의 검을 쳐냈다.
"흐흐, 한 번 계속 막아봐라!"
"크, 미친놈……!"
이성현의 팔이 크게 튕겨나갔다. 가까스로 검을 붙잡고는 있었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성현은 검을 받아낸 충격에 저릿한 손에 힘을 불어넣고 땅을 박차면서 뒤로 물러났다. 가스트는 광소를 터트리면서 이성현을 쫓았다.
"널 갈기갈기 찢어주마!"
뒤로 물러난 이성현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몸을 옆으로 세우면서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뻗고, 다른 손은 허리춤에 고정시켰다. 전형적인 찌르기 자세였다. 이성현은 기합을 내뱉으며 검을 쏘아냈다.
몸을 굳건하게 고정한 채 매서운 속도의 찌르기를 반복해, 적을 접근도 하지 못하게끔 하는 검술이었다. 연이어서 찌르기를 쏘아내고 있으면서도 그 속도가 느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찌르기의 궤도가 조금씩 변해 상대하는 이로써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성현이 예전에 전쟁터에서 배웠던 검술 중 하나였다. 원래는 엘프들이 쓰는 검술이었는데, 전쟁터에서 엘프를 도와주면서 배울 수 있었다.
엘프의 검술은 속도를 중시한다. 인간들을 습격하는 등의 게릴라 활동을 할 때 최대한 빠르게 공격하고 도망치기 위해 쾌검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검은 얇고 가벼웠다. 하지만 이성현의 검은 그렇지 않았기에, 그들의 검술을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크……! 잔재주가 많구나!"
하나하나가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매서운 찌르기. 가스트는 계속해서 쏘아지는 이성현의 검을 하나씩 쳐내려고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조금씩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했다. 그 모습을 본 이성현은 팔을 움직이는 속도를 올렸다.
"크아아!"
이성현의 검이 가스트의 도끼를 비껴나가고,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가스트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면서 검을 손으로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성현의 검은 어깨를 찌르고 재빠르게 빠졌기에 허공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가!"
가스트는 노성을 터트리면서 도끼를 휘둘렀다. 매서운 속도로 휘둘러진 도끼가 이성현의 몸을 찢어발기려 했다.
이성현은 마치 춤추는 것처럼 검을 움직여 가스트의 공격을 흘려내거나, 쳐내거나, 아니면 밀치면서 발을 써서 가스트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스트는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몸을 살짝 틀어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온 검을 피하고 이성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도끼에 온힘을 실어 이성현의 가슴을 내리쳤다. 이성현은 검으로 공격을 막아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제법 좋은 검을 가지고 왔구나!"'
불똥이 튀었다. 이성현은 이를 악물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가스트가 더 빨랐다. 가스트는 도끼를 든 손을 크게 위로 올리면서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성현이 이를 빠득 갈면서 충격에 대비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가스트의 등을 덮쳤다.
"크악!"
"크허엉!"
웨어베어였다. 웨어베어는 크게 다쳤던 옆구리를 불로 대충 지져서 지혈하곤 가스트와 이성현의 싸움에 동참했다.
"이, 곰 새끼가!"
"지원하겠다!"
이성현은 떨리는 무릎을 억지로 세웠다. 웨어베어는 온몸의 힘을 쥐어짰다.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에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참으면서 맹공을 퍼부었다. 가스트는 고함을 내지르면서 그 일격을 받아내고 있었고, 뒤를 신경쓸 여유는 없어보였다. 몸을 일으킨 이성현이 팔을 재빨리 움직여 가스트의 어깨를 찔렀다.
"크악!"
이성현의 검이 가스트의 살점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느낌과 고통에 가스트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가스트는 자신의 등에 달라붙은 이성현을 떨쳐내려 했지만 웨어베어가 그의 몸을 껴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제기랄! 떨어져라!"
가스트는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지만 웨어베어는 사력을 다해 달라붙었다.
"좀 죽어라!"
이성현은 가스트의 어깨에 박힌 검을 위로 움직였다. 그의 검이 살점을 너무나도 간단히 베어내면서 어깻죽지의 절반을 베어냈다.
"크아아아!"
이성현은 위로 빠져나온 검으로 가스트의 어깨를 내리쳤다. 덜렁거리던 가스트의 팔이 베어지면서 땅을 나뒹굴었다. 이성현은 흐르듯이 몸을 움직여 가스트의 다리의 살점을 베어냈다.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가스트. 이성현은 다른쪽 다리를 베어넘기고 그를 쓰러트렸다.
웨어베어는 가스트의 가슴에 손톱을 박아넣고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가스트는 남은 팔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발악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성현은 발버둥치는 가스트의 목에 검을 겨눴다.
"망할……."
가스트는 발악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성현은 사납게 웃었다.
"복수다."
이성현의 검이 가스트의 목을 꿰뚫고 베었다.
============================ 작품 후기 ============================
개쓰레기 같은 조아라 갈비지 쓰레기 사이트..
서버 맛탱이 가서 접속이 안 되는데 휴대폰 데이터로는 접속이 되서, 제 컴퓨터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한 시간 반 동안 헤맸습니다.
개같은..
*) 12시에 3편 연참으로 올리겠습니다. 많이들 봐주세요.
28====================
데몬 로드
가스트가 죽고 난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믿고 있었던 마지막 보루인 가스트가 죽자 산적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중에서는 싸움을 포기하고 무기를 버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웨어베어가 단호하게 소리를 질렀다.
"포로는 없다. 모조리 죽여라!"
용병들은 단장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항복하는 산적들의 무기를 걷어차고 죽였다. 조용하던 야영지가 순식간에 피로 얼룩졌다. 용병들의 숫자의 두 배에 달하던 산적들이었지만, 사기가 꺾인 그들은 용병을 이길 수 없었다.
웨어베어는 죽은 가스트의 머리를 들었다.
"망할 미노타우르스 놈."
그리고 그 머리를 자루에 집어넣었다. 가스트의 머리를 가져오는 것이 보상의 조건이었다. 가스트의 머리를 자루에 집어넣은 웨어베어는 검의 피를 닦아내고 있는 이성현을 바라봤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지도 모르겠군. 이름이 뭐지?"
"가브."
"가브. 흠, 묘하게 가명 같은데. 네 이름은 용병 길드에 전해두겠다. 아마 추가적인 보상이 주어질 거야."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웨어베어는 지친 듯 길게 한숨을 토해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로 지진 옆구리의 상처에서 계속해서 통증이 올라왔다.
"제길, 한동안 고생하겠군. 좀 쉬어야겠어."
"바로 출발합니까, 아니면 여기서 쉬다가 갑니까?"
"하루 쉬었다가 갈 생각이다. 방비도 잘 되어 있고, 마침 천막도 있으니까. 오랫동안 노숙을 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용병들도 그걸 더 좋아할 것이다. 웨어베어는 마지막으로 남은 산적이 죽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쉬는 건 좋지만 우선 저 사체들부터 치워야할 것이다. 사체들이 나뒹구는 곳에서 넉살좋게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비위가 강하지는 않았으니까.
"좋아! 고생했다! 부상자들은 상처를 치료하고, 괜찮은 자들은 사체들을 치운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출발할 거다!"
용병들은 힘이 빠진 함성을 내질렀다. 격렬한 전투였기에 모두가 지쳐 있었다. 부상자들은 미리 가져온 도구들로 상처를 치료했고, 그나마 덜 다친 이들은 근처에 널부러진 사체들을 치웠다. 그리고 겸사겸사 피로 더러워진 바닥도 흙으로 덮었다.
그걸 지켜보던 이성현이 웨어베어에게 말했다.
"잠깐 광산 안으로 들어와도 될까요?"
"광산? 거긴 왜? 아마 아무도 없을 텐데."
"혹시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웨어베어는 그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광산 안에서 숨어있는 놈이 있을 지도 모른다. 자기가 나서서 살피고 오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다른 이들을 데리고 가겠나? 원한다면 붙여줄 수도 있는데."
"아뇨.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흠, 그렇게 해. 너라면 별 문제 없겠지."
방금 전 가스트와의 싸움에서 큰 활약을 한 덕분인지 웨어베어는 이성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웨어베어는 갔다오라는 듯 손을 내저었고,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광산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웨어베어가 갑자기 그를 불렀기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봐, 가브. 멈춰봐."
그가 몸을 돌리니 웨어베어가 도끼 하나를 그의 앞에 던졌다. 이성현은 자신의 앞에 꽂힌 도끼를 들어올렸다.
신기하게도, 가스트가 썼을 때는 커다랗던 도끼가 웨어베어가 들자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도끼를 이성현이 드니 또다시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크기 조절과 관련된 마법이 걸려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가스트의 도끼 아닌가요?"
"그래. 네가 써. 마법 무기인 거 같더라."
"제가요?"
웨어베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었다. 곰의 얼굴을 가진 마물이 웃는 모습은 꽤나 기이하게 느껴졌다.
"검을 쓰는 녀석한테 도끼를 주는 것도 그렇긴 한데. 내 목숨값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라. 네가 가지면 불만을 가지는 녀석도 없을 거야."
"……흠."
이성현은 자신의 손에 있는 도끼를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끼에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주인에게 돌아오는 마법이 걸려있다. 평소에 투척을 즐겨하는 그에게 더없이 좋은 투척 무기였다.
"잘 쓰겠습니다."
"어. 갔다와라."
웨어베어는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이성현은 웨어베어를 뒤로 하고 광산으로 향했다.
* * *
광산 안은 예전과 다른 게 없었다. 라테나이트에서 나오는 냉기로 인한 추위와 매캐한 먼지 냄새. 두 달 동안 지겨울 정도로 겪었던 추위였고, 맡았던 냄새였다. 이성현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광산 안을 걸어갔다.
광산의 곳곳에는 전에 있었던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광산의 노예들이 모두 죽은 데다가 한동안 광산을 운영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그대로 방치해둔 모양이었다. 그나마 사체들이 수습되어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썩은 시체 냄새와 피 냄새로 괴로웠을 것이다.
"음."
걸어가던 이성현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뭔가 싶어서 내려다보니, 그에게 익숙한 곡괭이가 있었다. 이성현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곡괭이를 주웠다. 익숙한 촉감이었다. 그는 괜히 곡괭이로 벽을 한 번 쳐보고 다시 버렸다.
'망할 놈의 곡괭이.'
쓴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곡괭이질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노인장이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성현은 기억에 남는 장소를 걸으면서 노인장의 방이 있던 굴로 들어갔다. 광산 곳곳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가 래트뱃 감독관을 죽였을 때, 그리고 진화하고 나서 처음으로 적들과 싸웠을 때 흘렀던 핏자국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핏자국들을 보면서 굴의 끝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다른 벽과 별 차이가 없는 벽이 있었다. 이성현이 벽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멀쩡하던 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는 흔들리는 벽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노인장의 방이 있었다. 큰 소동이 있었음에도 노인장에는 누군가가 발걸음을 옮긴 흔적이 없었다. 그대로였다.
"이제 한 달 정도 지났나?"
어느새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이성현은 방 가운데에 있는 핏빛의 마법진에 다가갔다. 마법진에서는 더이상 빛이 뿜어져나오지 않았다. 이성현은 마법진의 가운데에 있는 검은 가루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잔해 만이 남았군요. 노인장."
그는 남아있는 가루를 쓸어모아 미리 가져온 주머니에 담았다. 광산 밖의 숲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광산에 묻어둘까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광산 안에서 살아왔던 노인장을 여기 묻어두는 건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현은 노인장의 잔해가 든 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달고 방안을 둘러봤다. 처음 왔을 때랑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방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서.
야영지 밖은 정리 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와중이었다. 야영지의 곳곳에 모닥불이 만들어져 어두워진 야영지를 밝히고 있었다. 주변 정리를 끝낸 용병들은 모닥불에 앉아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그중에는 웨어베어도 있었다.
그리고 야영지의 입구와 감시탑에는 몇 명의 용병들이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도 교대식으로 경계를 서면서 오늘 밤을 보낼 생각인 듯했다. 이성현은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서 야영지 바깥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나?"
"잠깐 근처를 둘러보고 오지."
"……근처를 둘러보고 온다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용병은 미심쩍은 눈으로 이성현을 바라봤지만, 순순히 그를 내보내줬다. 그가 이번 토벌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용병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현은 야영지의 위치를 기억해두고 숲속으로 걸어갔다. 여기까지 오면서 미리 봐뒀던 나무가 하나 있었다. 숲에 있는 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나무. 그는 그 나무까지 걸어간 뒤, 나무 앞의 바닥을 파헤쳤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구멍을 팠을 때, 노인장의 잔해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아마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차가운 광산에서 죽었겠죠."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노인장은 이성현이 광산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와 만난 것이 운명이라 말했다. 누군가의 의지가 그렇게 되게 한 거라고.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든 아니든, 그가 노인장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의지라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말했던 대로 운명이 인도해주겠죠. 이성현은 주머니를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하나 꽂아뒀다. 앞으로 여기를 올 일이 있을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음에 온다면 찾기 쉽게끔.
"편히 쉬십시오, 노인장."
이성현은 등을 돌리곤 그 자리를 떠났다.
* * *
야영지의 밤은 조용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도, 뭣도 없었다. 모두 전투의 피로를 술로 달래고 싶어했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참고 있었다. 라프타로 돌아가면 주점에서 거나하게 취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성현의 생각대로 용병들은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일곱 명 정도의 인원이 야영지에 있는 두 개의 입구와 감시탑에서 경계를 섰고, 그동안 나머지 인원들은 잠잤다.
원래대로라면 그도 불침번을 서야했지만, 그의 활약을 높이 산 웨어베어가 불침번을 면제해줬다. 이성현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런지 웨어베어는 그에게 큰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성현은 가지고 온 식량으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아무도 없는 천막에 들어갔다. 다른 이들과 같이 사용하는 천막이었지만, 때마침 다른 이들은 불침번을 서러 간 상황이라 아무도 없었다.
천막 안은 제법 넓었고, 또 퀘퀘한 냄새가 났다. 남자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 나는 냄새. 이성현은 산적들이 사용했을 이불들 중에서 그나마 깨끗한 이불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으음."
이성현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가스트가 쓰던 도끼. 이방인들에게는 마법이 걸린 물품들의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시스템에서 판매하는 물품 확인서라는 것을 구매해서 사용함으로써 물품에 걸린 마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깐 도끼를 들여다보던 이성현은 시스템에서 물품 감정서를 구매했다. 물품 확인서는 100포인트 밖에 안 했기에 부담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그는 끈으로 봉해져있는 물품 감정서를 펼치고, 도끼날에 붙였다.
그러자 물품 감정서에서 빛이 나더니 새하얗던 종이 위에 문자가 새겨졌다. 물품 감정서에 새겨진 건 도끼의 성능이었다. 이성현은 물품 감정서를 들여다봤다.
[먼 과거,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도끼. 도끼에는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애꿎게도, 도끼는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들어가 수많은 마물들의 피를 머금었다.]
[샤프니스, 리턴, 블리딩, 강도 강화, 크기 조절]
다섯 개의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무기였다. 샤프니스는 이성현의 검에도 걸려있는 날을 날카롭게 만드는 마법이었고, 리턴은 손에서 벗어난 무기를 의지에 따라서 되돌리거나 하는 마법. 블리딩은 도끼로 입힌 상처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드는 마법이었고, 강도 강화는 도끼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이었다. 크기 조절은 말 그대로 사용자에 맞춰서 도끼의 크기가 바뀌는 것이었고.
이 정도의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도끼라면 경매에 올려도 제법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무기를 하나 팔아서 상급의 특전을 구매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괜찮은 무기였다. 일개 산적단의 두목 따위가 쓰고 있었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투척용 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이성현은 도끼를 자신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작업을 끝마친 그는 도끼를 챙기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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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데몬 로드
다음 날, 이성현은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다. 숲 특유의 축축함과 눅눅함이 피부로 느껴져서 길게 잠들기는 힘들었다. 잠에서 깬 이성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조심스레 천막을 나섰다. 안에는 다른 마물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서 잠들고 있었기에 안 밟게끔 조심해야만 했다.
숲안에 있는 야영지는 아침과 밤의 구분이 제대로 안 됐다. 아침이 되면 조금 덜 어둡고, 밤이 되면 제대로 보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운 것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현은 곳곳에 피어있는 모닥불을 보고, 그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거기에는 선객이 있었다. 토벌단의 단장, 웨어베어였다.
"……음? 오, 일어났나."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모닥불을 쬤다. 입고 있는 옷의 눅눅함이 뜨거운 불로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웨어베어는 모닥불로 뭔가를 구워먹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쥐였다.
웨어베어는 이성현이 자신이 굽고 있는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알아채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 근방을 돌아다니더군. 마침 출출해서 잡았다."
쥐고기야 인간계에서도 많이들 먹는 음식이었다. 인간계 역시 전쟁으로 혼란스러웠기에 평민들의 생활은 많이 어려웠고, 쥐 같은 것들도 잡아서 먹곤 했다. 마물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더하면 더했지.
마물들은 쥐든 구더기든 뭐든 간에 날것으로 잡아먹곤 했다. 애초에 마물이란 종족은 식중독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었고, 먹을 것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종족들도 많이 있었다. 매일 같이 빵이나 스프처럼 제대로 된 음식을 해먹는 레핀 가족이 오히려 좀 특이한 편이었다.
"날로 안 먹고 구워먹는군요."
"뭐, 날로 먹을 때의 풍미가 당길 때도 있고. 구워먹을 때의 풍미가 당길 때도 있는 법이지. 먹을 텐가?"
"아뇨, 괜찮습니다."
이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가져온 식량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식량이래봐야 육포가 다였지만. 이성현은 가져온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모닥불로 구웠다. 웨어베어는 육포를 보곤 눈을 빛냈다. 이성혀은 처음에는 그 시선을 무시하려 했지만, 조금씩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먹을래요?"
"오, 그래도 되나? 이거 고맙군."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이성현은 쓰게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육포를 몇 개 더 꺼냈다. 인벤토리에 챙겨놓은 식량들도 있었기에 여유는 많았다. 웨어베어는 반가운 얼굴로 육포를 받아 굽기 시작했다.
"식량은 많이 안 가져왔나 보죠? 각자 지참이라던데."
"사냥해서 먹을 생각이었지. 근데 그럴 기회가 잘 안 생기더군. 산적 놈들이 좀 많아야지."
웨어베어는 얼굴을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여행길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산적들에게 습격을 받았고, 피해 상황을 확인하거나 부상자를 치료한다고 딱히 쉴 시간이 없었다. 단장인 웨어베어는 주변을 경계한다고 정신없었고.
"여긴 유독 엉망이야. 빨리 떠나고 싶어."
"라프타 출신이 아닙니까?"
웨어베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다 익은 쥐고기를 불에서 꺼냈다.
"아니야. 난 카르카스라는 도시에서 왔다. 전투에 미친 놈들만 모인 도시지."
"전투에 미친 놈들만 모였다……?"
"뭐야, 카르카스에 대해서 모르나?"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웨어베어는 쥐고기의 머리 부분을 크게 베어물더니 아그작거리면서 뼈째로 씹어먹었다.
"흠, 간단하게 말하자면 용병들이 모여서 만든 도시라고 할 수 있겠군. 용병 길드의 본부가 있는 곳이고, 유명한 용병단들이 다 카르카스에 있거든. 덕분에 힘 좀 쓴다는 놈들은 모두 카르카스로 모이지."
"흐음. 카르카스도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아니. 카르카스는 중립이야. 마왕군을 도와주는 용병단도 있고, 반란군을 도와주는 용병단도 있지. 마왕군이나 반란군도 카르카스는 건드리지 않아."
건드리지 않는다.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굳이 마왕군, 반란군 가리지 않고 돕는 카르카스를 공격했다가는 카르카스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러면 자군을 도와주는 용병단도 떠날 테고, 자연스레 적군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굳이 벌집을 쑤실 필요 없이 벌집에서 나오는 꿀만 먹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카르카스의 명물인 투기장이 있다."
"투기장? 마물들끼리 싸우는 곳일거 같은데."
"맞아.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도 있고, 죽이지 않고 싸우는 것도 있지. 모든 상대를 꺾고 챔피언이 되는 이에겐 막대한 명예와 부가 주어져."
"흐음, 재밌겠는데요."
여러모로 흥미가 생기는 도시였다. 이성현은 카르카스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뒀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라. 라프타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예. 한 번 가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라프타로 온 겁니까?"
웨어베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진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한숨을 내쉰 웨어베어는 괜히 땅을 걷어차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라프타의 용병 길드에 일할 놈이 없어서 끌려온 거다. 카르카스의 용병 길드에서 한동안 가서 일해달라더군. 어쩌겠어, 따를 수밖에."
"아하……. 라프타가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습니까? 마물수가 크게 줄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웨어베어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악이지. 이 도시 만큼 부패한 곳은 본 적이 없어. 도시 내부도 그렇고, 외부도 그렇고. 이렇게 치안 관리가 안되는 것도 처음 보고."
"다른 곳은 좀 괜찮은가 보군요."
"요즘 같은 때야 다 힘들긴 하지만 여기가 유독 최악이지. 하긴, 영주인 아길레라부터 부패했으니……."
아길레라. 이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웨어베어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아길레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단순한 소문일 뿐이야. 아길레라가 곳곳에서 뇌물을 받고 있다는 소문. 그 뇌물을 댓가로 산적들의 공격이나 온갖 부패들을 용인하고 있다더군."
"왜 그런댑니까? 자기 도신데. 그래봐야 좋을 게 없잖아요."
"글쎄다. 높은 놈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웨어베어는 남은 육포를 입에 털어넣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다른 천막에서도 용병들이 나오고 있었다. 웨어베어는 생각에 잠겨있는 이성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다들 일어나는군. 준비해라. 식사를 끝마치면 출발할 거니까."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모닥불에 육포를 구웠다. 다른 용병들도 알아서 식사를 준비했고, 몇몇 용병들은 부상자들을 챙겼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약간의 휴식 시간을 거친 후, 토벌단은 라프타로 되돌아갈 채비를 끝마쳤다.
* * *
라프타로 돌아가는 길 역시 험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스트 산적단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다른 산적단에게도 전해졌는지, 토벌단을 노리는 산적들의 숫자가 오히려 늘어나 있었다.
가스트 산적단을 공격하면서 다치고 지쳤을 토벌단을 기습해 물품을 챙기려는 속셈인 듯했다. 물론 산적들의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 토벌단은 이성현이 강령술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배웠고, 그걸 활용할 줄 알았다.
용병들이 공격해오는 산적들을 죽이면 이성현이 산적들을 좀비로 되살렸고, 용병들은 좀비를 방패로 삼으면서 싸웠다. 이런 능력을 지금까지 숨겨온 이성현을 비난할 수도 있었지만 용병들은 그러지 않았다. 뒤늦게라도 사용한 게 어딘가.
용병들은 광산으로 갔을 때보다 적은 피해로 라프타에 도착했다. 라프타의 요새가 보이자 용병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웨어베어는 흥분한 용병들을 다스리면서 라프타의 요새를 통과하고, 던전을 지나 라프타로 들어왔다.
"하, 드디어 끝났군."
근처에 있던 용병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성현도 용병과 같은 심정이었다. 올 때도 , 갈 때도 전투가 계속되서인지 유독 힘들었고, 길게 느껴진 여행이었다.
"모두들, 고생했다. 보고는 내가 해둘 테니 모두들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도 좋고."
웨어베어의 말에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각자 흩어졌다. 그중에는 술집으로 가는 이도 있었고, 매음굴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성현이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웨어베어가 그를 붙잡았다.
"가브, 넌 나랑 같이 가자. 너도 같이 가야될 거 같다."
"……제가요? 예, 그러죠."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의 말에 따랐다. 어차피 용병 길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웨어베어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고 이성현은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현의 눈에 용병 길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용병 길드의 입구에는 엘레인이 서 있었다. 나른한 눈으로, 길게 하품을 하면서.
엘레인은 이성현과 웨어베어의 모습을 보더니 손을 작게 흔들었다.
"나와 있었군, 엘레인."
"으음. 너희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생각보다 빨리 끝냈네?"
"생각보다 늦게 끝낸 거지. 끔찍한 의뢰였어."
웨어베어는 크게 혀를 찼다. 그는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옆구리의 상처가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왜? 어땠길래."
"말하기도 싫다. 내가 왜 이딴 마을에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웨어베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용병 길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엘레인은 그 뒷모습을 흘기더니 이성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이성현을 쳐다봤다.
"안 죽고 살아 돌아오다니, 놀라운데?"
"내가 죽을 줄 알았나?"
"그럼, 신참이 어려운 의뢰를 하러 가는데 살아 돌아오겠다고 생각하겠어?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성현은 혀를 찼다. 엘레인은 그를 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분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5등급인 엘레인의 눈으로 보기엔 7등급의 이성현은 나약하게 보일 것이다.
"저 곰팅이가 널 데리고 온 걸 보니 크게 활약한 것 같고. 대단한데. 뜻밖이야."
"이봐! 안 들어와? 나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이성현이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용병 길드 안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웨어베어의 목소리였다. 튼튼한 짐승의 몸을 가진 그도 이번 토벌로 크게 지친 모양이었다.
엘레인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한숨을 내쉬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현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웨어베어는 접수대의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엘레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망할 곰 새끼가! 뭘 쳐먹고 있는 거야!"
"엉? 접수대 위에 뭔가 있길래 먹었는데. 왜, 네건가?"
"그럼 접수대를 쓰는 사람이 나 뿐인데 당연히 내거지! 미쳤어?!"
엘레인은 표독스런 눈길로 노성을 터트렸다. 웨어베어가 먹은 것은 빵이었다. 웨어베어는 반쯤 남은 빵을 한입에 털어버렸다.
"아, 내 점심이었는데."
"그거 미안하군. 나도 아침을 굶었거든."
"……네가 아침을 굶은 거랑 내 점심을 빼앗기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웨어베어의 뻔뻔하기까지 한 말에 엘레인은 분노를 터트렸다. 웨어베어는 능글맞은 얼굴로 손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곰의 얼굴인데 어떻게 능글맞을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정말로 능글맞은 얼굴이었다. 보는 사람이 얄미워지는 그런 얼굴.
"아, 이 짜증나는 곰!"
엘레인은 주먹으로 웨어베어의 뒷통수를 강타했다. 그런데 그 손놀림이 꽤 빨라서 웨어베어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 힘이 한가득 실린 주먹이 웨어베어의 뒷통수를 강타했고, 웨어베어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면서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꽤나 아픈 모양이었다.
"젠장, 아프잖아! 쓸데없이 손만 매워가지곤!"
"그러게 왜 매를 벌어!"
이성현은 한쪽 벽에 기댄 채,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봤다. 둘의 싸움이 끝난 것은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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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데몬 로드
한참을 투닥거리던 둘은 싸움을 멈췄다. 엘레인은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빨리 본론을 말하고 꺼지라는 것처럼.
"그래서, 보고는?"
"멀쩡히 돌아온 걸 보면 모르겠어? 성공이지."
웨어베어는 가지고 온 자루를 접수대 위에 올렸다. 붉게 물들어있는 자수를 본 엘레인의 인상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엘레인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성현에게 향했고, 비난이 섞인 시선에 이성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엘레인의 얼굴에 짜증이 섞였다.
"왜 이 동네 용병 새끼들은……. 접수대에 뭘 올려두는 걸 좋아하는 걸까."
"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됐으니 안의 내용물이나 확인해봐."
"하아,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엘레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루를 열어젖혔다. 안에는 눈이 까뒤집힌 가스트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엘레인은 접수대에서 장갑을 하나 찾아서 끼더니, 장갑을 낀 손으로 가스트의 머리를 이리저리 만졌다. 질퍽, 질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맞는거 같네. 마법의 흔적도 없고."
"뭐야, 보기만 해도 아는 건가?"
"이 녀석이랑은 만난 적이 있어. 이 자식이 탈영하면서 크게 사고치고 도망친 바람에, 내가 뒷수습을 해야 됐거든. 망할 놈. 잘 죽었다."
이성현의 물음에 엘레인은 분통을 터트렸다. 엘레인은 자루를 접수대 아래로 거칠게 내려놨다. 콰직, 하는 뭔가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으깨진 것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엘레인은 마른 피가 묻은 장갑을 벗어 웨어베어의 면상에 던지면서 이성현을 가리켰다.
"그럼, 이 가브……, 라는 녀석을 데리고 온 이유는?"
"이 녀석이 이번 토벌에서 큰 역할을 했거든. 추가 보상 문제로."
"헤에. 무슨 활약을 했길래?"
웨어베어는 얼굴로 날아오는 장갑을 피했다. 그리고 웨어베어는 손짓을 해가면서 이성현의 활약을 설명했다. 가스트를 죽이고, 가스트의 용병단을 죽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 토벌단이 돌아오는 길에 토벌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는 것.
이성현은 본인은 딱히 노력한 적은 없었고, 포인트를 벌겠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싸운 거였지만. 웨어베어는 이성현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있어서인지 그의 행동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자기가 알아서 평판을 올려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웨어베어의 칭찬을 들은 엘레인은 이성현에게 의외라는 눈빛을 던졌다. 이 녀석이 살아남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의외네. 시체가 되서 돌아올 줄 알았더니."
"그래. 빨리 서류 작업이나 해줘. 돌아가서 쉬고 싶으니까."
"……재수없는 곰팅이."
엘레인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서류를 꺼내 뭔가를 적더니 이성현에게 건네줬다.
"다음에 보상받으러 올 때 들고 와."
"언제 오면 되지?"
"몰라. 한 이틀 정도 걸릴 거야."
그리고 웨어베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용병 길드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넌 꺼져, 망할 곰팅아. 먹을 것만 축내는 짐승 같은 놈."
자신을 향한 비난에 웨어베어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먼저 나가버렸다. 엘레인은 그 뒷모습을 짜증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카르카스에서 온 놈이라 그런지 예의가 없어. 멍청한 짐승."
"예의가 없는 걸로 따지면 너도 만만찮다고 생각하는데……."
"뭐라고?"
엘레인의 사나운 눈길이 이성현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의 저런 태도가 이해가 되긴 했다. 5등급의 마물이면 마물 중에서는 거의 최상급에 속해있는 것이니까. 7등급에 속하는 이성현이 그녀에게 반말을 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는 털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칫. 내가 어쩌다 이런 시골로……. 자, 이거나 가져가."
엘레인은 투덜거리면서 이성현에게 주머니를 하나 건네줬다. 뭔가 싶어서 받아드니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게, 게헨이 들어있는 돈 주머니인 듯했다.
"네가 토벌가기 전에 했던 의뢰들 보수야. 그리고 이번에 4급으로 승급했어, 축하해. 와아."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성의없는 박수를 치는 엘레인의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사람을 긁는 뭔가가 있었다.
"……고맙다. 이제 나도 가도 돼?"
"어어. 가도 돼."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용병 길드를 나갔다. 바깥에는 웨어베어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는 이성현이 나온 걸 확인하곤 손짓을 했다.
"절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어어. 얘기할 게 있어서. 잠깐 앉을까?"
그러면서 근처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이성현이 따라서 앉으니, 웨어베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꼭 해야되는 일정이라던가 있나? 이번 달 동안에."
"일정이요? 아뇨, 딱히 없는데요."
"그래? 그거 다행이군. 그럼 같이 일 좀 하자고."
웨어베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들겼다. 이성현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아해하자 알아서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에 산적단 토벌 의뢰가 많이 나오고 있거든. 이번에 했던 가스트 산적단 토벌 의뢰처럼. 네가 가능하다면 같이 할까 싶어서 말이야."
"……흐음."
이성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는 둘이서 싸우는 것이 낫고, 믿을 수 없는 이와 함께 싸우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이와 함께 싸우는 것이 낫다.
물론 이 웨어베어가 믿을 수 있는 이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마물이니 미약한 신뢰를 던질 수는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그렇지? 보상도 괜찮아. 이번에 걸린 놈들이 하나 같이 거물들이거든."
"거물들이라니, 가스트랑 비슷한 급의 산적들입니까?"
웨어베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때는 거물이었지만, 지금은 거물이라고 말하기는 그런 녀석들이어서였다.
"비슷하지. 카스카, 브헨. 정확히 말하자면 거물이었던 녀석들이라고 하면 되겠군. 요전에 가스트랑 치고박더니 세력이 많이 약해졌거든. 이 근처가 산적들이 워낙 많아서,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무너져."
전자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후자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가스트랑 치고박았다는 말에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브헨은 누구죠?"
"흠, 덩치 큰 해골 놈이지. 휘하에 있는 놈들도 하나 같이 우중충한 녀석들이지.
"
"……아하."
누군지 알 거 같았다. 이전에 이성현이 가스트에게 쫓겼을 때, 가스트에게 싸움을 걸어서 이성현의 목숨을 구해준 그 해골이었다.
"왜 갑자기 공고가 걸린 겁니까? 세력이 약해져서?"
"그런 것도 있고. 이용 가치가 없어졌으니 버리는 거지."
"저번에 엘레인도 그 말을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
웨어베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하기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었다.
"다음에 말해주지. 여기서 말하긴 좀 곤란하군. 듣는 귀가 많아서."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거주하는 이래 봐야 고작 삼 천밖에 안 되는 소도시였지만, 용병 길드가 있는 곳은 나름 번화가에 속하는 곳이었기에 지나가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웨어베어는 그런 이들의 귀를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귀가 밝은 마물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아주니 고맙군. 다음에 말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알아보면 될 일이다. 웨어베어에게 듣는 것보다는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얘기를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이성현과 웨어베어는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하늘에서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빛이지만 따사로운 빛이 내려쬐고 있었고, 주변은 평온했다.
근 이 주 동안의 여행길이 길긴 길었는지 이성현은 피로감을 느꼈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쉴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성현의 눈에 어떤 일행의 모습이 들어왔다.
망토를 둘러쓰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무리가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성현은 그 무리 중에서 익숙한 이의 얼굴을 발견했다.
"……라판? 저기서 뭐하는 거야?"
골목길로 들어가는 인파 중에서 라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비록 후드가 달린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얼핏 보인 얼굴은 분명 라판의 얼굴이었다. 라판은 그처럼 얼굴을 가린 이들과 함께 어둑한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야, 아는 마물이라도 봤나?"
"아뇨, 아니, 네. 물어볼게 하나 있는데요. 저기 골목길로 들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엉? 저기?"
웨어베어는 이성현이 가리키는 곳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가리킨 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어서였다.
"저긴 버려진 곳이야. 예전에는 마물들이 살았었는데 어떤 사건 때문에 죄다 떠났거든."
"떠났다? 무슨 사건이 일어났길래요."
그 물음에 웨어베어의 얼굴이 기묘하게 찡그려졌다. 물음에 답해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웨어베어는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학살이 있었어."
"학살?"
"그래.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몰라. 그런 일이 있었고, 그뒤로 저 구역이 버려졌다는 것만 들었지. 저기로는 아무도 가지 않아. 저주받을 거라고 불길해하거든."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의 이들은 불길하다고 안 가는 곳을, 레핀은 무슨 이유로 갔는가. 그것도 한눈에 봐도 의심스러워 보이는 이들과 함께.
"뭐지? 상인이 저런 곳에 갈 일이 있나……?"
"……음? 뭐, 어쨌든 난 이제 가봐야겠군. 좀 쉬어야겠어. 배도 고프고."
웨어베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성현이 그 뒷모습을 배웅하려니, 그가 갑자기 돌아보면서 악수를 청했다.
"깜빡했군. 내 이름은 르칸이라고 한다. 한동안 같이 의뢰를 할 거 같은데 퉁성명 정도는 해둬야겠지?"
"아, 예. 르칸."
"음. 한 삼 일 정도 쉬었다가 다시 만나지. 엘레인에게 얘기해둘 테니."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르칸은 눈을 찡긋거리더니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어디론가 떠났다. 이성현은 르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라판이 들어간 골목길로 눈길을 돌렸다.
'……가볼까?'
잠깐 든 생각을 이성현은 고개를 흔들면서 털어냈다. 개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는 법. 이성현이 자신을 미행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도 기분이 상할 것이다. 이성현은 마음 한 구석의 찝찝함을 놔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아저씨!"
거의 이 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성현을 레피가 격하게 반겼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던 레피는 문이 열리자 고개를 화들짝 들었고, 들어온 이가 이성현인 걸 알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이성현의 품안으로 안겼다.
이성현은 자신에게 안긴 레피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원래는 어깨까지 오던 단발머리가 이 주라는 짧은 시간 만에 제법 길어 있었다. 이성현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레피의 머리를 쓸어내렸고, 레피의 얼굴이 기분 좋은 듯 풀어졌다.
"기다렸어요. 엄청 오래 걸리셨네요."
"어. 생각보다 멀더라고. 책 읽고 있었어?"
레피는 이성현의 허리춤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라판은?"
"아빠요? 아빠는 오늘 일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상인 협회에 볼 일이 있다던데……."
"……상인 협회에?"이성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라판이 들어간 곳은 상인 협회가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상인 협회는 그런 음침한 곳에 있지 않았다. 라판은 왜 딸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거기로 갔단 말인가.
'제길. 신경쓰면 안 되는데, 자꾸 신경쓰여.'
그리고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하나씩 눌러주시면 감사합니당..
일단 목표인 30화까진 연재했고, 신규 연재작 투베에 올라갈 자격은 얻었네요.
내일부터는 다시 하루 2편씩 연재하겠습니다. 30화 찍는게 목표라서..
종합 투베야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
31====================
데몬 로드
이성현은 레피와 저녁을 먹었다. 레피 말로는 요 근래 라판이 집에도 못 들어올 정도로 바빠서, 거의 매일 같이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했다. 외로워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가는 것과 동시에 라판의 행적에 신경이 쓰였다.
'라판, 뭘하고 다니는 거지?'
이성현은 숟가락을 입에 물면서 생각에 잠겼다.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라판의 뒤를 쫓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라판이 집에 들어오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예전부터 이렇게 바빴어?"
"네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쭉 그랬어요."
"그래? 저기, 이게 너한테 상처가 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레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한 그 모습을 보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성현은 한참을 입을 오물거리면서 어떻게 말을 꺼낼까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
이성현이 조심스레 꺼낸 말에 레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저는 잘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난다고?"
"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주의 기억이 아예 없어요."
꽤 심각한 얘기인데도 레피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너무 평온한 얼굴이라서 오히려 이성현이 안절부절할 정도였다.
"라프타에서 치료를 잘 하는 마물한테도 찾아갔었는데, 그 마물은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언젠간 기억을 찾을 수 있겠지, 하고 지냈는데. 아직까지 못 찾았어요."
"그래?"
"아빠는 뭔가 알고 있는거 같은데, 말을 안 해줘요."
이성현은 또다시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라판은 레피의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레피에겐 말해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라판은 주민들이 학살당해서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안 이어지는데.'
아무래도 왜 주민들이 학살당했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야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일에 이렇게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뭔가 신경쓰여.'
이상하게 신경쓰였다. 레피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이성현을 조심스레 바라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어느새 식사를 마친 레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성현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레피는 눈을 빛내더니 조르르, 달려와 이성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책 읽고, 음……. 책 읽고, 그랬어요."
책 밖에 안 읽은 모양이었다. 자기가 말하고도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곤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게 꽤 귀엽게 느껴졌다. 이성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내일 같이 나갈까? 책도 좀 사고, 먹을 것도 좀 먹고."
레피는 밝은 얼굴로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현은 이 조그마한 쥐소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을 느꼈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애초에 레피의 몸은 십대의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조그마한 애한테 욕정이 생길 리가 없다.
'생기면 개새끼지, 그건.'
레피 역시 이성현을 자신의 오빠처럼 여기고 따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성현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성현은 그렇게 느꼈다.
이성현은 르칸과 만나기로 한 날까지 레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라판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예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고, 들어오더라도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에 들어왔다. 라판은 아예 집을 나간 사람 같았다.
이성현이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는 아침 식사 정도는 같이 했었는데 이젠 그러는 일도 없었다. 애초에 라판을 만나는 일이 없으니, 아침 식사를 같이 할 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라판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늘어날 수록 레피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져갔다.
"아빠가 자주 집을 비우시긴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얼굴도 못본 건 처음이에요."
레피가 시무룩해하며 남긴 말이었다. 이성현은 그런 레피를 신경쓰면서 놀아줬다. 어차피 이성현 역시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용병 길드에 들려야하는 날이었다.
"……꼭 가야 돼요?"
용병 길드의 앞. 레피는 이성현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머뭇거렸다. 레피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용병 길드에 엘레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크 엘프인 그녀와 하프랫인 레피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사이였다. 조금 다르게 얘기하자면 고양이와 쥐 같은 사이였다. 물론 고양이는 엘레인이었고 쥐는 레피였다.
"어. 돈 받아야 돼."
"……갔다와서 받아도 되잖아요."
레피는 이성현이 내일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온 투정이었지만, 이성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갔다와서 받던가, 아니면 내일 받아도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일은 르칸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돈을 받기로 한 것은 순전히 레피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성현은 머뭇거리는 레피를 억지로 끌고, 용병 길드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때마침 용병 길드에는 엘레인 밖에 없었다. 나른한 얼굴로 손톱을 다듬던 엘레인의 시선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성현에게 향했다.
"뭐야, 왜 왔어? 오늘 볼 일이 있었던가?"
이성현은 성큼성큼 접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엘레인은 별 흥미없다는 눈으로 이성현이 걸어오는 걸 지켜보다가, 그의 뒤에 쪼그마한 여자애가 숨어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저번에 봤던 하프랫 아가씨네. 데리고 온 거야?"
"어. 좀 일이 있어서. 난 돈 받을 거 받으러 왔고."
"아아, 돈. 맞네. 내가 오늘 오라고 했었지."
엘레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어차피 내일 또 올 일 있잖아. 그때 받으면 되는거 아닌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성현인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레인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항. 기다려봐. 도시 경비대 놈들한테 받아온 돈이 있어."
엘레인은 접수대 뒤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에 나왔다. 그녀는 손에 짤랑거리는 자루를 하나 들고 있었다.
"자, 여기."
"묵직해 보이는데. 얼마지?"
"칠 천 게헨. 다른 놈들이 천 게헨 정도 받은 걸 생각하면 다섯 배 더 받았네."
이성현은 묵직한 자루를 받았다. 이번 토벌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이성현임을 생각하면 다른 이들에 비해 돈을 많이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보상에 가스트의 머리값이 포함되어있는 게 아닐까. 거기에 가스트의 야영지에 있던 물건들을 판 돈이 골고루 분배된 것도 있었다.
"머리 칠천 개 값인가."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깡패 놈들 한 놈당 게헨 한 닢을 받았었는데. 이성현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레피가 자신을 쳐다보는 엘레인을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엽네. 이 정도면 등급이 그리 높아보이진 않는데. 9등급인가?"
"8등급이야."
"8등급이야? 8등급 치곤 많이 작네. 이리 와봐."
엘레인은 레피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겁먹어 있는 레피가 갈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면서 이성현의 등에 얼굴을 파묻는 레피의 모습에 엘레인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 마침 심심했는데.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그러면서 살금살금 걸어왔다. 그녀가 다가오자 레피가 다급한 손길로 이성현의 옷자락을 당기기 시작했다. 마치 저 여자가 다가오는 걸 어떻게든 막아달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성현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결국 레피는 이성현의 손을 놓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엘레인은 조금씩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혔고, 레피의 등이 용병 길드의 문에 닿을 때쯤.
"나 왔다."
용병 길드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르칸이었다. 르칸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엘레인과 잔뜩 겁먹은 레피를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뭐하냐, 너네."
"……아, 흥 깨지네."
엘레인은 르칸의 얼굴을 보자마자 흥이 깨졌다는 듯 혀를 차더니 접수대로 돌아가 버렸다. 엘레인이 사이가 좋은 마물이 있을까 싶었지만 르칸과는 유독 사이가 안 좋았다.
"어, 가브도 있잖아. 만나기로 한 날은 내일 아니었던가?"
"예. 돈 받기로 한 날이 오늘이라서 왔습니다. 그쪽은요?"
"나? 나는 내일 받을 의뢰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
말하면서도 르칸의 시선은 레피에게 향했다. 용병 길드의 문 가까이에 있던 레피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성현의 등에 안겼다. 그러면서도 원망스럽다는 듯 주먹으로 이성현의 등을 때렸다. 때린다고 한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때린 레피가 아픈지 자기 주먹을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르칸이 한 마디 내뱉었다.
"뭐야, 아내냐?"
"……미쳤습니까?"
이성현이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이없는 말을 내뱉은 르칸에 대한 혐오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르칸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아니, 걔가 하는 짓이 그래 보이잖아. 그렇다고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냐?"
"이런 애랑 결혼을 왜 해요? 내가 미쳤어요?"
"거 그럴 수도 있지……. 카르카스에서는 하프랫 암컷이랑 결혼한 놈들이 많았다고."
이성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르카스라는 동네는 도대체 얼마나 일그러졌길래, 이런 어린애랑 결혼을 한단 말인가.
"그런 일그러진 동네에 오라고 한 겁니까? 저한테?"
"야, 일그러졌다니……. 맞잖아, 엘레인."
르칸은 간절한 눈빛으로 엘레인을 쳐다봤다. 둘의 말싸움을 재밌다는 듯이 보던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르카스에 하프랫 종족이 좀 많거든. 인기가 있긴 하지. 등급이 낮으면 조그매서 좋고, 등급이 높으면 성숙해서 좋고."
"당신도 카르카스에 있었습니까?"
"응. 교육을 거기서 받았거든. 저 곰팅이도 거기서 알게 됐고."
엘레인은 질린다는 눈으로 르칸을 흘겼다. 싸울 만큼 친하다는 말도 있지만, 엘레인과 르칸은 그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엘레인의 눈빛에는 일말의 호감도 없었다. 증오와 경멸이라면 있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사이가 되게 안 좋은 것 같은데."
"……거야 날 집요하게 쫓아다닌 놈이랑 사이가 좋을 리가 없잖아."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이성현은 또다시 르칸을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걸로도 모자라 르칸과의 거리를 벌릴 정도였다. 르칸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집요하게 쫓아다녔다니. 우리 종족 나름의 구애 방식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지랄하고 있네! 남의 집 앞에 죽은 동물 시체를 두는게 구애 방식이라고?! 내 손에 죽고 싶냐, 너!"
엘레인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그 말을 들으니 왜 엘레인이 르칸을 싫어했는지 알 거 같았다. 르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서 사과했잖아……. 내 실수였어."
"내갸 그거 때문에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알아! 이 망할 곰팅이!"
엘레인은 접수대를 쾅 내리쳤다. 카르카스에서 르칸 때문에 몇 달을 놀림받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그 당시의 르칸은 자기 딴에는 고백했다고 수줍어하고 있었고.
"……거 참, 문제가 많은 동네군요. 카르카스는."
이성현은 투닥거리는 둘을 보곤 혀를 찼다. 그리고 자신의 등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레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갈까."
레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현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둘을 놔두고 용병 길드를 나갔다.
============================ 작품 후기 ============================
이번 화는 좀 쉬어가는 화..
왜? 그거야 이제부터...
32====================
데몬 로드
이성현은 한동안 르칸과 함께 근처의 산적단을 토벌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둘의 호흡을 시험해볼 겸 작은 규모의 산적단을 토벌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몇 번의 연습을 거친 둘은 다른 용병들을 모아서 카스카의 산적단을 토벌하기로 했다.
"크르릉!"
카스카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로 할 수 없는, 짐승의 포효가 터져나왔다. 웨어베어인 르칸 역시 온몸이 근육으로 덮여 있었는데, 카스카도 그에 못지 않았다. 엄청난 근육량에서 뿜어져나오는 폭발적인 힘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것이었다.
카스카는 짐승처럼 네 발로 달리면서 질주하더니, 날카롭게 자란 손톱으로 이성현의 몸을 찢으려 들었다. 이성현은 허리춤에 차둔 도끼를 빼들고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도끼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회전하더니 카스카의 등을 강타했다.
"크헝!"
등을 강타하는 충격에 카스카는 달려오던 와중에 땅에 나자빠졌다. 그의 등에 박혔던 도끼는 제 자리로 되돌아가듯이 주인인 이성현에게로 되돌아갔다. 카스카는 묘하게 익숙한 광경에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이건, 가스트의……!"
카스카는 이를 빠득 갈았다. 입밖으로 내뱉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그 저주받을 놈과 싸우면서 입은 상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고, 지금도 고생하고 있던가. 아직도 상처가 아려올 지경이었다.
이성현은 일어나려고 땅에 손을 짚은 카스카를 향해 손짓을 했다.
"덤벼, 멍멍아."
"죽여주마!"
이성현의 수준 낮은 도발에 카스카는 분노를 토했다. 카스카는 땅을 박차며 엄청난 속도로 이성현에게 접근해왔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곤 커다란 돌 같은 주먹을 앞으로 휘둘렀다. 이성현은 근처에 대기시켜뒀던 좀비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카스카의 앞발이 좀비의 머리를 강타했고, 좀비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이 터졌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미노타우르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웨어울프나 웨어베어 역시 만만찮은 힘을 가진 종족이었다.
이성현은 손으로 되돌아온 도끼로 카스카의 옆구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카스카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고통스러워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걸 가만히 놔둘 이성현이 아니었다.
"합!"
이성현은 또다시 도끼를 투척했다. 이성현의 손에서 벗어난 도끼는 매서운 기세로 카스카를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 도끼에게 크게 당했던 카스카는 도끼를 튕겨내는 것을 선택했다.
퍽!
카스카의 손톱과 이성현의 도끼가 맞부딪혔다. 이성현은 도끼를 투척함과 동시에 돌진하고 있었다. 카스카의 눈길이 도끼에게 향해있는 동안 거리를 좁힌 이성현은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번개 같은 찌르기. 카스카는 다급하게 자세를 되돌리려 했지만 이성현이 좀더 빨랐다.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카스카의 팔이 검에 꿰뚫렸다.
"크학!"
이성현은 카스카의 팔에 박힌 검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되돌아온 도끼를 받아, 카스카의 오른쪽 어깨를 장작을 패듯이 찍었다.
콰직!
살이 으깨지는 소리. 온갖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도끼는 튼튼한 웨어울프의 몸을 가볍게 찢어버렸다. 가스트의 도끼는 생각 이상으로 좋은 무기였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가스트가 그런 활약을 보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아아악!"
카스카는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이성현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이성현은 도망가려고 하는 카스카의 허벅지에 검을 내리꽂고, 반쯤 뜯겨져나간 오른쪽 어깨를 다시 내리찍었다.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카스카의 팔. 카스카는 끔찍한 비명을 계속해서 내질렀다. 이성현은 도끼를 든 팔을 크게 위로 올리고, 온힘을 실어 아래로 휘둘렀다.
매서운 기세로 휘둘러진 도끼가 카스카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터지는 촉감이 도끼를 타고 손으로 전해졌다. 가속도와 힘이 더해진 일격은 카스카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끔찍하게 박살난 머리에서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이성현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침을 뱉었다.
"제길, 입에 들어갔잖아."
비릿한 맛이 혀를 통해 느껴졌다. 이성현은 반쯤 조각난 카스카의 머리를 베어내서 높이 들어올렸다. 적들의 사기를 꺾기 위함이었다.
"너희들의 대장은 죽었다!"
르칸과 용병들을 상대하던 산적들의 사기가 꺾이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방금까지 팽팽하게 느껴졌던, 살갗을 찌르던 적의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놈들의 눈에 조금씩 두려움이 자리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성현은 카스카의 머리를 땅에 내팽개치면서 외쳤다.
"너희들도 이놈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이성현은 거칠게 포효하면서 주변에 있는 적들을 학살해나갔다. 이미 사기가 꺾인 적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르칸과 용병, 그리고 좀비들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산적들을 정리했고, 엉망이 된 카스카의 야영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끼는 쓸만한가?"
어느새 그에게 다가온 르칸이 뭔가를 씹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뭘 씹고 있나 싶어서 쳐다보니, 늑대의 다리였다. 카스카의 산적단은 동물 형태의 마물들을 위주로 구성된 산적단이었는데, 그 중에는 늑대 역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늑대들은 지금 르칸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맛있습니까? 날고긴데."
"마물이 언제부터 날고기랑 구운 고기를 가려서 먹었다고. 운동을 열심히 한 놈들이라서 그런지 질겨. 별로야."
르칸은 뼈를 뱉어내면서 투덜거렸다. 이성현은 투덜거리는 거 치고는 너무 잘 먹는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목구멍으로 삼키고 넘겼다. 이성현은 손에 쥔 도끼를 만지작거렸다.
"괜찮네요. 이거 꽤 비싼 물건일 텐데, 정말로 저한테 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안될 일은 뭐야. 그리고 내 손이 이래서 말이지. 무기는 못 써."
르칸은 뭉툭한 둔기 같은 자신의 손을 내보였다. 그의 말대로, 그의 손은 무기를 사용하기에는 적합한 형태가 아니었다.
"뭐, 팔면 돈은 제법 벌렸겠지만. 됐어. 말했잖아, 내 목숨값이라고."
"그랬었죠. 저야 잘된 일이지만요. 쓸만합니다, 이거."
실제로 카스카의 머리를 두동강낸 것도 이 도끼였으니까. 이성현은 도끼에 묻은 피를 천으로 닦아내곤 허리춤에 매달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정리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갑니까?"
"그래야지. 여기는 그래도 라프타랑 가까워서, 오늘 쉬고 출발하면 내일이면 도착할 거 같다."
"다행이군요."
이성현이 고개를 끄덕이니 르칸이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다행이군. 그 꼬마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빨리 돌아가서 말이야."
이성현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전에 용병 길드에서의 일 때문인지, 르칸은 레피와 이성현을 엮어서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이성현으로써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말했잖아요, 그냥 동생 같은 애라고. 그리고 그런 작은 애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봅니까?"
"왜? 하프랫은 배우자로써 인기있는 종족인데."
"……미쳐 돌아가는군요, 이놈의 마계는."
저런 작은 애가 배우자로써 인기가 있는 세계라니. 마계에 대한 환멸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르칸은 혐오스러워하는 이성현의 표정을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거야 그 꼬마애는 등급이 낮으니까 작은 거고. 암컷 하프랫은 진화할 수록 성숙해져. 외형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그 꼬마애가 지금은 8등급이라서 그렇지, 나중에 등급이 오르면 어찌 될지 몰라, 멍청아."
"나중에 어찌 될지 알든 모르든 간에, 그런 쪽으로 볼 생각은 없습니다."
"쯧쯧, 딱딱한 녀석이로군."
르칸은 혀를 차면서 다 먹은 늑대의 뼈를 버렸다. 얼마나 깨끗하게 먹었는지 살점 하나 없는 새하얀 뼈가 보였다. 이성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현은 레피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작은 애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성현은 화제를 돌렸다.
"이봐요, 르칸. 시간 있습니까?"
"……시간? 시간이야 남는 게 시간이지. 이제 할것도 없으니."
"그럼 얘기 좀 합시다.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거?"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칸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말했던 거요. 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는 곳.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듣고 싶습니다."
"아아, 그거……."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르칸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의 용병들은 정리 작업을 하느라고 정신없어 보였다. 르칸은 이성현에게 손짓을 하곤 근처에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은 카스카가 사용하던 천막이었다. 곳곳에 마물의 뼈와 머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침대와 의자가 하나 있었다. 르칸은 커다란 의자로 걸어가서 앉았다.
"음, 푹신푹신한데. 카스카 놈, 잘 살다 갔군."
이성현은 근처의 침대에 앉았다. 침대에는 어떤 동물의 모피인지 알 수 없는 모피가 놓여 있었다. 이성현은 모피의 촉감을 손으로 느꼈다.
"그럼, 이제 얘기해주시죠."
"흠, 그래. 얘기 못해줄 일도 아니니."
르칸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르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길레라한텐 아들 놈이 하나 있어."
이성현은 가만히 르칸이 하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야 할 때였다.
"아길레라 본인도 그리 깨끗한 놈은 못 되지만, 그 아들 놈, 크지라는 더하지. 4등급의 마물인데, 여기저기서 난봉꾼 짓을 많이 하고 다녔어. 그리고 그 난봉꾼 짓이 그 학살 사건에 원인이 됐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르칸은 한숨을 내뱉었다.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이성현과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말할 수밖에 없었다. 르칸은 자신의 입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을 참으면서 말을 꺼냈다.
"지금은 폐허가 된 그곳에 예쁜 여자들이 좀 많았어. 크지라는 평소 거기에 눈독을 들였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
"그래서?"
"죄다 납치했지. 야밤 중에. 유부녀든, 처녀든 뭐든 간에."
이성현은 혀를 찼다. 인간계에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마을에서 예쁜 여자가 있으면 억지로 끌고가서 노리개로 삼는 것. 그러고 돈 몇 푼 던져주고 모르는 일로 하곤 했다.
'마계도 별반 다를 건 없군.'
종족만 다를 뿐이지, 하는 짓은 인간계랑 비슷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이 가지는 권력은 평민들이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 이방인이 넘어오면서부터 약해지긴 했지만.
이방인이 넘어오지 않는 마계는 귀족에 해당하는 마족의 권력이 강력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성현의 생각 이상으로 강력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뭘 어쩌겠나? 간청했지. 제발 내 아내와 딸을 되돌려달라고. 아길레라는 마물들의 부탁을 들어줬어."
"……어떻게요?"
르칸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한탄이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모두 죽여서. 시체를 돌려보냈다."
여러모로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성현은 잠깐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 시체 중에는 라판의 아내 역시 있었을 것이다.
"……마물들은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런, 대우를 받고."
"……그 누구도 마족에게 뭐라 할 수 없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녀석이 아니고서야. 아길레라는 일말의 양보를,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거스르는 이들은 모조리 죽이고, 사건을 묻었어."
"라프타도 어지간히 대단한 곳이군요."
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라프타는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이들이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맞춤법 검사기가 지금 6화 정도 밀린 거 같은데 시간 나면 돌릴게요.
원고료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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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내가 알기론 그래. 그 동네에 있던 놈들을 괘씸하다고 죄다 죽였거든. 살아남은 놈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길레라가 그 사건을 완전히 묻어버려서 알려진 게 거의 없어."
"그렇군요……."
이성현이 아는 것만 해도 생존자가 둘 있었다. 라판, 레피. 라판은 자신의 실수로 아내를 잃었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실수가 크지라에게 아내를 납치당한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아내를 잃은 거라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라판?'
이성현은 눈을 찡그렸다. 그 동네를 들락거리는 이유가 뭘까. 자신의 과거라도 추억하려고? 그의 근처에 있던 이들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이면 상식적으로 못 들어가게 막을 거 같은데, 안 막고 있는거 같던데요."
"요즘 라프타 내부 상황을 보면 모르나? 개판이잖아, 여기. 깡패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동네에서 뭘 바래. 원래는 경계를 서는 놈이 있었는데 없어졌어. 그 뒤로는 경계를 안 세우더군."
"없어졌다……."
이성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걸리는 점은 많은데 아는 게 없으니 정리가 안 됐다.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갈 걸 그랬군.'
차라리 그때 몰래 따라가서 뭘 했는지 봤으면. 이성현이 인상을 찡그린 채 고민하는 것을 본 르칸이 물음을 던졌다.
"저번에 그 동네로 들어가는 놈을 봤다더니, 그거 때문인가?"
"……예. 좀 신경 쓰여서요."
르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라프타에는 빈 구역이 많다. 정말 많은 이들이 떠났고, 떠난 이들은 다시는 라프타로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이 라프타로 오는 이들도 없었다. 떠난 이들이 살던 곳은 자연스럽게 방치됐고, 그런 곳들은 자연스럽게 깡패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요즘 라프타가 많이 뒤숭숭해. 아길레라는 자기 구역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고 있지. 나도는 소문으로는 이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거라더군."
"다른 곳으로 간다고요? 자기 도시를 버리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라프타는 위험해."
갑작스러운 말에 이성현은 의문을 표했다. 왜 위험하다는 걸까. 마족인 아길레라는 라프타에선 불소부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을 텐데. 르칸은 근처의 테이블 위에 있는 술을 발견하더니 눈을 빛내면서 술병을 낚아챘다.
"아길레라 입장에선 위치가 너무 안 좋다는 거다. 아길레라는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잖아. 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어. 근처에 있는 도시들도 같이 반기를 들었었거든."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마왕군은 반격을 시작했고, 라프타와 함께 반기를 들었던 도시들은 하나씩 함락당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근방의 도시 중에서 마왕군을 거역하는 도시는 라프타 뿐이었다.
"마왕군이 아직 건재한가 보군요."
"마왕의 딸이 엄청나게 활약했다던데. 어쨌든, 그런 이유로 라프타는 사방이 적인 상황이다. 아길레라 입장으로써는 빨리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겠지. 여기 있어 봤자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테니."
마왕군에게 항복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아길레라가 마족이라고 하더라도, 반역죄에서까지 벗어날 순 없다. 마왕은 반역을 일으킨 아길레라를 죽일 것이다. 다른 반역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던 이들이 겪었던 말로처럼.
그것을 두려워한 아길레라는 치안 유지를 포기하고 도시를 지키는 던전과 요새에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자신은 성에 틀어박히고 돈을 끌어모았다. 다른 도시로 도망치고, 끌어모은 돈으로 재기하기 위해서.
이성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길레라가 도시와 길의 치안 관리를 포기한 이유를 이제는 알 거 같았다. 당장 자신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인데, 자신이 보기에는 하찮은 존재인 마물의 안전 따위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여유도 없었고.
"아길레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든 말든, 여기 사는 마물들은 참을 수밖에 없는 거군요."
"마족은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이니까. 그 누구도 마족에게 반항할 순 없지. 아까 말해줬잖나. 아길레라가 항의도 아니고 부탁을 한 마물을 학살했다고."
마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약자는 강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약자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었고 강자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마족은 그 생태계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마족은 마물을 죽여도 벌받지 않는다. 마물을 강간해도 벌받지 않는다. 남편이 있든, 남자를 한 번도 안 받은 처녀든 상관없다. 수십의 마물을 하룻밤 노리개로 삼고 죽여도 그 누구도 마족한테 대항할 수 없다. 마족은 그런 존재다.
그렇기에 아길레라가 자기 아들이 납치한 여자를 시체로 되돌려줬을 때도 마물들은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이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항의할 입을 봉해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라프타를 떠나는 것이었다.
'약육강식.'
약한 자는 얌전히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기다리거나, 그게 싫으면 강자에게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약육강식의 법칙이니까.
"……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다. 궁금한 건 해결됐나?"
"예,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됐어. 나도 너한테서 큰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라프타에는 강한 용병들이 없다. 강한 용병들이 없는 것은 라프타에서 산적들이 유독 활개 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카르카스 같은 경우에는 온갖 용병들이 있고, 강한 용병들이 많아서 산적들이 설칠 수가 없다. 그랬다간 바로 용병 길드에 공고가 내걸리고 토벌당하기 때문이다.
라프타의 용병 길드는 다른 지역의 용병 길드에 용병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대부분의 용병은 라프타의 상황을 알기에 거부했다.
르칸은 라프타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뭣도 모르고 수락했다가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밀려 있는 의뢰만 처리하면 난 카르카스로 돌아갈 거다. 이런 도시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카르카스라."
나쁘지 않은 도시였다. 이성현의 머리에도 조금씩 다른 도시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었다. 물론 라프타라는 도시에도 장점은 있다. 워낙 의뢰들이 많다 보니 포인트를 쌓기 쉽다는 것.
도시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면 바로 산적을 만나다 보니 거의 인간일 때 전쟁터를 돌아다녔을 때처럼 포인트가 벌렸다. 이건 확실히 이점이었다.
'나도 진화만 하고 다른 도시로 넘어갈까?'
이성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고민했다. 도망칠 생각을 하는 영주가 다스리는 도시에서 지내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마왕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언제 전쟁의 불길이 밀어닥칠지 모른다.
레피에게 정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피 하나 때문에 여기서 평생 머무를 순 없는 일이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라판이라는 가족이 있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긴 했다.
'문제는 라판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데.'
이성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라판, 라판.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너도 카르카스로 와라. 이런 도시에 있어 봤자 개죽음만 당할 거다."
"생각해보죠."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카스카의 야영지에는 별로 있는 게 없었다. 가스트의 야영지에는 그래도 마법이 걸린 곡괭이도 있었고, 아직 처분하지 못한 라테나이트들이 있어서 돈을 좀 챙길 수 있었는데, 카스카의 야영지에서 그런 걸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전투를 마친 토벌대는 카스카의 야영지를 정리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출발할 생각이었다. 요즈음 용병 길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성현은 천막 하나를 혼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름의 특별 대우인 셈이었다.
이성현은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에서 자신의 상태창을 훑어봤다. 저번에 가스트 산적단을 토벌한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산적단을 토벌한 덕분에 포인트나 정수가 제법 많이 쌓였다.
쌓인 포인트는 일 만을 넘어섰고, 정수는 육 천 정도가 모였다. 이성현이 마계에서 태어난 지 삼 개월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로 모은 셈이었다.
이성현은 히스토리아에 들어온 지 일 년이 다 됐을 때쯤 상급의 특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히스토리아에서 보낸 첫해는 당장 먹고 살길을 찾느라고 많이 헤맸다. 그 외에도 이성현의 의욕을 꺾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포인트를 많이 못 벌었다.
그래도 삼 개월 만에 상급의 특전을 얻은 것은 엄청난 속도였다. 이성현은 일 만의 포인트로 신체 강화의 등급을 올렸다. 특전 중에서 가장 체감이 잘 되는 것이 신체 강화였다. 몸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빨라진다. 당장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이 높은 특전이었다.
"좋아, 그럼 다음은……."
이성현은 상점에 있는 특전들의 목록을 살폈다. 신체 강화를 최상급으로 올릴 때까지 포인트를 모으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만, 그러려면 정말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성현은 신체 강화의 등급을 올리는 것을 미루고, 다른 쓸만한 특전을 살폈다.
'신체 강화 다음으로 쓸만한 건 마력순환인데.'
마력을 느끼고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특전. 마력순환이라는 특전이 있으면 신체나 무기에 마력을 입힐 수 있다. 등급이 높아지면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던 오러 같은 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 중상위권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마력 순환을 무조건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을 상대하려면 무조건 배워야만 했다.
인간이었을 때 이성현은 마력순환을 중급까지밖에 못 올렸지만, 상급 이상의 마력순환이 있으면 신체 일부분에서 순간적으로 마력을 뿜어내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다. 팔에서 마력을 방출하면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두를 수 있고, 다리에서 마력을 방출하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기에 마력순환을 배워두는 것 역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이것 외에는 검술이 제일 좋은데. 한참을 고민하던 이성현은 하급의 마력순환과 검술을 익혔다. 하급의 특전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지만, 어차피 합쳐봐야 200 포인트 밖에 안 들었으니 부담은 없었다. 이성현은 변화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400P
·보유 특전
1. 신체 강화 (상급)
2. 생기발랄 (중급)
3. 단단한 몸 (중급)
4. 마력순환 (하급)
5. 검술 (하급)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2. 영혼 흡수 (중급)
3. 강령술 (중급)
·종족 특전
1. 수호자는 지치지 않는다
2. 강인한 몸
"후우."
필요한 작업을 마친 이성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적단 하나를 토벌하면 대충 천 남짓의 정수가 들어왔다. 이다음에 브헨이라는 놈도 처리하고, 두 개 정도의 산적단만 더 토벌하면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진화를 최우선으로.'
상급의 신체 강화 특전을 가지고 있는 이성현은 7등급의 마물이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7등급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6등급의 마물은 가볍게 이길 수 있다. 방금 전 카스카 역시 6등급의 마물이었지만,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5등급에 준하는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던 가스트는 르칸이 아니었으면 위험했겠지만, 그것도 지금이라면 혼자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가스트는 어디까지나 5등급에 준하는 놈이었으니까.'
진짜 5등급의 마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방심했다가 죽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6등급으로 진화하면 5등급의 마물은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성현은 진화하는 데 필요한 정수를 모으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산적단들을 털면서 모아둔 게헨이 좀 있으니 그걸로 정수석을 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이성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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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라프타로 돌아온 이성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이성현은 제일 먼저 상인 협회를 방문했다. 레피는 요즘 들어 라판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다. 이성현은 그의 상인과 관련된 일이 바빠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런 일이 아닌 다른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성현은 상인 협회의 접수대에 있는 여자 마물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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