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2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종족 특전
1. 수호자는 지치지 않는다
[핏 가드는 광산에서 일하는 핏 워커를 지키는 것 업으로 삼는 종족입니다. 그들은 핏 워커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2. 강인한 몸
[핏 가드는 동급의 종족에 비해 힘이 강력합니다. 핏 가드의 단단한 가죽은 쉽게 베이지 않습니다.]
"……젠장."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종족 특전이 구리다던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었다. 종족 특전은 7등급의 마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꽤나 괜찮아 보였다. 이성현은 오히려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유일한 불만이라면.
"이름 한 번 거지 같네, 진짜."
핏 가드라는 종족명이었다. 광산 수호자. 종족 특전의 설명에도 광산에서 일하는 핏 워커를 지키는 것을 업으로 삼는 종족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광산에서 원치 않는 노예짓에 무자비한 폭행까지 당했던 이성현은 이젠 광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광산 수호자라니. 광산을 지키는 종족이라니.
하지만 그런 마음도 고유 특전을 보니 조금은 나아졌다. 노인장이 준 보석 같은 것을 흡수하고 나니 영혼 흡수와 강령술의 등급이 올라갔다. 그리고 생겨난 부수적인 특성들. 고유 특전은 등급이 상승하면 부가적으로 특성이 생겨나곤 했다.
"젠장. 그나마 다행이군."
모든 걸 마친 이성현은 고개를 들어 노인장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노인장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죽은 건가?'
노인장의 몸을 볼 때마다 그림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노인장은 마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성현은 노인장이 앉아 있었던 마법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고맙습니다, 노인장. 탈출하면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멈췄던 공간이 다시 움직였다.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고, 움직였던 먼지들이 다시 떠다녔다. 이성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던 벽 쪽으로 걸어갔다.
"후우."
바깥은 가스트 산적단, 노예들, 바깥에서 침입해온 카스카라는 놈과 일당들. 그 셋의 무리가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7등급의 몸을 가지게 됐지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내 경험을 믿는 수밖에.'
이성현은 난전에 익숙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보면 불리한 상황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고,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상태에서 싸우는 때도 많았다. 이성현은 그 모든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배신으로 죽었지만.
이성현은 허리춤에 차뒀던 곡도를 빼들었다. 그리고 일렁거리는 벽을 넘어갔다. 벽을 넘어가니 소란스런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 굴밖으로 나갔다.
"모조리 죽여라! 우리는 위로 올라간다! 가스트 놈의 목을 가지고 가리라!"
"젠장, 뭉쳐! 일단 모이라고!"
카스카라는 마물과 그 부하들은 파죽지세로 전진해나가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감독관과 경비들을 모조리 학살해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가로막는 것을 분쇄하는 전차와도 같았다.
노예들은 그런 카스카 일당을 피해 구석에 모여 있었다. 카스카 일당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죽였다. 아무래도 지상으로 올라가 가스트 산적단의 대장인 가스트를 먼저 죽일 생각인 듯했다.
몇몇 감독관과 경비들이 그걸 눈치챘는지 그들의 진로에서 물러났다. 몇몇은 곳곳에 뚫려있는 굴안으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카스카의 무리들이 들어온 구멍으로 탈출하면 될 일이지만, 카스카의 무리들이 들어왔던 구멍은 돌이 무너져 막혀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진입하면서 터트린 폭발 때문에 천장이 무너져내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성현에겐 불운하게도, 그들 중 몇몇이 그가 있는 굴안으로 도망쳐왔다.
"……이런."
"크으?"
굴안으로 들어온 건 리저드맨 셋과 고블린 셋이었다. 그들과 이성현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 간에 정적이 흘렀다.
고블린은 인간계에 있는 몬스터였는데, 마계에도 있었다. 다만 인간계의 고블린과는 다르게 피부가 새까맿고 몸의 곳곳에 가시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리저드맨은 인간계에서 봤던 것보다 크기가 작았고.
"이봐. 서로 그냥 못본 척 넘어가는 게 어때? 저놈들이 올라가기 전까지 말이야."
"카아! 카스카 놈의 부하다! 죽여라!"
"제길!"
감독관들은 적의를 불태우며 이성현을 향해 병장기를 겨눴다. 놈들은 이성현을 카스카의 부하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7등급의 마물이 노예짓이나 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이성현은 욕을 내뱉으면서 래트뱃 감독관의 시체에서 가져온 곡도를 빼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리저드맨이었다. 방패를 든 리저드맨은 방패를 앞세운 채 이성현과의 공간을 좁혔다. 그 뒤를 고블린들이 따랐다. 고블린들은 조그마한 단검를 찌르고 들었다.
'일단 이 육체의 성능을 시험해보자.'
이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볍게 숨을 고르고,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던 리저드맨을 직시했다. 고블린은 곡도를 높이 들어올려 이성현의 목을 한번에 베어내려 하고 있었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이성현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리저드맨의 품안으로 순식간에 파고 들었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활처럼 구부리면서 팔을 뒤로 크게 젖혔다. 그리고 그 반동을 그대로 살려 리저드맨의 복부를 노리고 팔을 휘둘렀다.
"캬아아악?!"
푸슉!
그의 곡도가 리저드맨의 복부를 베고 지나갔다. 리저드맨의 살이 종이가 베이듯이 베여 나갔다. 리저드맨은 자신의 품안으로 파고들어온 이성현을 경악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고블린의 눈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이성현은 재빠르게 자세를 되돌리고 다시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검이 공기를 찢어가르며 리저드맨의 목을 꿰뚫었다.
"크륵, 끅……!"
리저드맨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성현은 죽어가는 리저드맨의 목을 베어내고 몸을 발로 걷어차 쓰러트렸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성현은 죽은 리저드맨을 강령술로 다시 일으켰다. 방금 죽은 리저드맨의 몸이 느릿하게 일어나고, 머리를 잃은 목에서 검은 색의 기운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응? 뭔가 다른데?'
목에서 뿜어져나온 검은 기운이 리저드맨의 몸을 감싸고, 리저드맨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리저드맨은 자신의 검을 들고,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마법, 마법이다! 젠장, 내가 막을게!"
리저드맨 하나가 방패를 앞장세우면서 전차처럼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그리고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 좀비 리저드맨을 들이박았다. 리저드맨 둘이 바닥을 나뒹굴고, 고블린들이 그 둘을 넘어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이성현은 재빠르게 고블린들의 숫자를 셌다. 총 셋. 고블린들은 인간계에서도 지겹도록 죽였던 몬스터다. 별로 강하지 않은 몬스터. 마계라 한들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크아아!"
그는 고함을 내지르며 앞에 있던 고블린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머리가 반쪽이 난 고블린의 시체가 허망하게 허물어졌다. 이성현은 본인이 한 행동에 본인이 놀랐다.
'7등급이 이 정도로 강한가?'
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넘길 정도의 힘이 있다니. 하지만 여유있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성현은 번개처럼 움직이며 주변의 고블린들을 정리해나갔다. 다가오는 고블린의 팔을 베어내고, 땅을 나뒹굴고 있는 곡도를 주워 멀찍이서 다가오는 고블린을 향해 투검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고블린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리저드맨들은 이성현의 엄청난 무력에 경악했고, 그들 중 하나가 이성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젠장! 저놈을 죽여!"
그와 동시에 한 리저드맨이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해왔다. 그리고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 가속도를 방패에 한가득 담고 이성현을 들이박으려고 들었다. 근데 그 속도가 제법 빨랐다.
'이 새끼들은 들이박는 걸 왜 이리 좋아해!'
이성현은 다급하게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리고 죽은 고블린들을 일으켰다. 되살아난 고블린은 검은 기운을 몸을 두른 채 리저드맨의 몸을 붙들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이, 망할!"
리저드맨은 달라붙은 고블린들을 떨쳐내고, 베어내면서 계속해서 전진했다.
강령술의 등급이 올라갔더라도 페널티는 여전했기에, 가뜩이나 약한 고블린들은 말 그대로 걸림돌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저드맨이 고블린들을 떨쳐내면서 생긴 약간의 시간, 틈. 그걸로 충분했다.
"뒤져라!"
이성현은 몸을 낮게 숙인 채 달렸다. 그리고 달리는 기세를 그대로 살려, 리저드맨의 복부를 어깨로 들이박았다. 순간적인 충격. 리저드맨의 입이 충격으로 크게 벌어지고, 뒤로 넘어졌다. 이성현도 리저드맨과 함께 넘어졌다.
이성현은 쓰러진 몸을 바로 일으키고, 쓰러져있는 리저드맨의 머리에 곡도를 꽂아넣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피가 튀어올랐다.
"카샨!"
"크아아!"
리저드맨 하나가 죽은 리저드맨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죽은 리저드맨의 이름이 카샨인 모양이었다. 좀비 리저드맨을 이제야 처리한 리저드맨은 카샨이라는 이름의 리저드맨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동료가 죽은 것을 확인한 리저드맨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샤아아아!"
리저드맨의 발이 땅을 밟고, 사나운 말처럼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그 손에 쥐어진 검이 이성현의 목 부분을 찌르고 들어갔다. 다만 분노에 눈이 멀어서인지 그 검로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단순하게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 것으로 검격을 피했다.
"크악!"
이성현은 리저드맨의 검을 쥐고 있는 손목을 곡도로 내리그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리저드맨의 손. 리저드맨의 두눈이 크게 뜨였다. 리저드맨의 가죽은 질기다. 그런 가죽을 이렇게도 쉽게 베어내다니.
"크으으……."
리저드맨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목을 움켜잡으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리고 그때, 어느새 좀비로 되살아난 카샨이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캬아아악! 카, 카샨! 카샨!"
"너도 뒤따라가라."
비명을 내지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리저드맨. 이성현은 리저드맨의 미간을 겨냥하고 곡도를 투척했다. 빙그르르, 원형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곡도가 정확하게 리저드맨의 미간에 꽂혔다.
"끅……."
리저드맨의 몸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 몸을 카샨이라는 리저드맨이 받아들였다. 이성현은 되살렸던 이들에게서 마력을 다시 회수하고, 시체로 되돌렸다.
"나쁘지 않은데?"
도합 여섯의 마물을 큰 무리 없이 제압했다. 이성현은 손을 쥐었다 폈다하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핏 가드라는 이름 때문에 적잖게 실망했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간티로스보다는 훨씬 강력했다.
물론 이 강력함에는 이성현이 가지고 있는 특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이 녀석들이 몇 등급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6등급의 마물까지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5등급도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이성현은 죽은 리저드맨의 미간에 꽂힌 곡도를 빼내 검집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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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가스트 산적단의 공식적인 이름은 가스트 용병단이었다. 용병.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이들. 하지만 이름만 용병이었지, 하는 짓은 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광산 하나를 점령하고 그 근처에 야영지를 만들어서, 길을 지나가는 이들을 습격한다. 가지고 있는 짐은 모조리 빼앗고 목숨은 앗아가는 가스트 용병단의 행태는 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거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산적단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주요 타깃은 주로 상인들이었다. 요즈음 빈발하고 있는 내전 탓에 상인들이 다니는 길을 지키는 병사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물론 거기에는 내전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상인들은 호위병들을 데리고 다니긴 했지만, 산적들의 숫자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가스트 산적단은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이봐, 부관."
"예, 단장."
그리고 가스트 산적단을 다스리는 두목, 가스트. 그는 미노타우르스였다. 원래는 던전에서 백인장의 직위에 있었지만, 그 모든 직위를 버리고 산적이 된 마물이었다. 6등급의 그는 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근방의 산적 중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잘 나가고 있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가스트는 술잔을 기울였다. 이 근방에서 가장 뜨거운 산적단을 찾는다면 분명 자신들일 것이다. 비록 가스트는 산적단이 아니라 용병단이라 자칭하고 있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여러 가지로.
"잘 나가는 우리의 이번 주 수입은 얼마나 되지?"
"글쎄요. 아직 완전히 계산하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 삼만 게헨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 아길레라 새끼 말이지."
가스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잔이 빠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가스트가 스스로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순 것이었다. 그걸 본 부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이번에도 40%의 수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병력을 보내겠다고……."
"정말 미친놈이군. 사실상 우릴 시켜서 자기네 주민을 약탈하게끔 하고 있는 거잖아, 이건."
"소문으로는 라프타를 포기할 생각이라고 하던데요."
가스트 산적단이 자리 잡은 곳은 라프타라는 도시 근처였다. 그리고 이곳은 유독 터널 관리가 잘 안되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라프타를 다스리는 아길레라가 산적들을 용인하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터널의 경비를 일부러 약하게 만들어서 산적단이 습격하기 쉽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산적단이 그들을 습격해서 수익을 올리면, 그 수익의 일부를 자신이 가져갔다.
라프타는 상업 도시였기에 상행이 잦은 편이었고, 그렇기에 수익은 제법 많은 금액이었다. 요즈음에는 그 상행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 수익이 유지될 거 같나?"
"글쎄요. 이제 계속해서 줄어들지 않을까요? 라프타 내부 상황도 안 좋고 해서 상행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달 말 때쯤 되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가스트는 쯧, 하고 혀를 찼고 부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다른 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흠, 아니. 그건 안 돼. 여기 있는 광산을 지켜야지. 우리 수익의 절반은 광산에서 나오잖나."
"그렇긴 하지만요. 요즘 주변 산적단의 견제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가스트는 깨진 유리 조각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약탈은 적당히 하고. 광산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광산은 어느 정도로 팠지?"
"절반 정도입니다. 아직 매장량도 충분하고, 못해도 몇 년은 더 라테나이트를 캘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좋아, 나쁘지 않군. 만족스러워."
가스트는 웃으면서 술병에 든 술을 들이켰다. 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광산을 지키고 있던 경비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허겁지겁 달려온 경비는 가스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두목!"
"두목이 아니라 단장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냐. 엉?"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반란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뭐? 반란?"
가스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부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설마 노예들의 반란 하나를 진압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건가.
"비리비리한 노예 새끼들이 반란 하나 일으켰다고 보고를 하러 와?! 반란에 참가한 새끼들을 죄다 잡아들이면 될 거 아냐!"
"그, 그렇죠! 근데, 그게! 적들이 공격해왔습니다!"
"뭐?"
가스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야영지로 들어오는 길목들을 지키고 있는 놈들에겐 아무런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적들이 공격해왔다니.
"공격이라니, 어디서?"
"광산에서요! 놈들이 땅을 파고 공격해왔습니다! 카스카 놈들입니다! 놈들이 광산을 돌파하고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요!"
"미친!"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가스트와 부관은 동시에 경악했다. 그리고 경악할 일은 또다시 벌어졌다. 야영지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 하나가 가스트의 앞으로 뛰어들어왔다.
"단장님! 적들이 공격해왔습니다!"
"젠장, 미치겠군. 이번엔 또 누군데!"
"프게야 놈들입니다! 놈들이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단장님!"
부관이 가스트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부관. 프게야와 카스카가 동시에 우릴 공격했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
"……놈들이 손을 잡은 거겠죠. 저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놈들이잖습니까."
가스트 산적단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제길! 나는 입구를 막는다! 부관, 너는 광산을 맡아라! 반란을 일으킨 노예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카스카 새끼도 죽여버려!"
"알겠습니다."
일이 귀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스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 * *
이성현은 죽은 감시관들의 몸에서 쓸만한 걸 뒤졌다. 하지만 놈들의 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굴 밖으로 나갔다. 카스카의 무리들은 그가 싸우는 동안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피해서 숨어있었던 감시관들이나 노예들이 조금씩 공동으로 나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예들은 처음의 기세를 잃고 싸우는 것을 망설이는 중이었고, 감시관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중이었다. 위로 올라간 카스카의 무리들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처리할 것인지.
"일단 노예 놈들을 족쳐! 어차피 카스카 놈들은 우리끼리는 못 막아!"
감시관 하나가 결심을 다지고 소리치자, 주변에 있는 이들이 그에 동조했다. 감시관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전의를 고취하고, 구석에 숨어있는 노예들에게 다가갔다.
"크으……."
노예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다가오는 감시관들을 바라봤다. 장비도 열악한 데다가 싸울 의지도 잃은 그들은 이미 감시관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성현은 감시관들의 숫자를 셌다.
'아홉.'
카스카의 무리에게 많이 죽었는지,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 하다.'
노예들의 숫자는 총 열여섯. 이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숫자가 사오십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이들이 죽었다. 저들은 전투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필요했다.
'일단 구해볼까.'
이성현은 조금 전에 좀비로 되살린 감시관들을 앞에 내세우면서 걸었다.
"어이!"
짧은 외침. 하지만 공동을 울리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노예들에게 접근하던 감시관들이 고개를 뒤로 돌렸고 그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이성현은 모두 다섯의 좀비들을 돌진시키고, 자신도 따라서 움직였다. 감시관들은 온몸이 너덜거리는 동료들이 기이한 신음을 내면서 달려들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좀비들이 감시관들을 덮쳤다.
"우으어……."
"아악!"
죽은 자의 신음과 산 자의 비명이 교차했다. 이성현은 곡도를 빙글 돌리면서 감시관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리고 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뻗으면서, 검으로 적의 목을 올려 벴다. 촤악, 피가 튀어올랐다.
이성현은 죽은 감시관을 바로 되살렸다. 그리고 품 안으로 끌어들여, 다가오는 감시관에게 내던졌다. 감시관은 시야가 좀비로 가려지자 당황했다.
이성현은 땅을 밟고 접근, 팔을 앞으로 쭉 내뻗으며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일 점 찌르기. 제법 빠른 속도로 쏘아진 찌르기가 감시관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카아아아!"
그리고 그런 그의 등을 적이 노렸다. 이성현은 손목 방패를 차고 있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튕겨냈다.
캉!
맑은 공명음이 울렸다. 불똥이 피어오르고 검을 휘둘렀던 적의 팔이 크게 뒤로 튕겨 나갔다. 이성현은 곧바로 놈의 몸통을 반으로 베었다. 그렇게 세 명의 감시관이 순식간에 죽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예들이 다시 전의를 되찾았는지, 함성을 내지르면서 감시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다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날카로운 돌이라서 원시인으로밖에 안 보였다. 먼 과거, 원시인들이 동물을 사냥했을 때 저런 모습이었을까.
그 뒤로는 일방적이었다. 감독관들은 좀비들과 노예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허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성현은 그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씩 감독관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정리한 감독관들은 모조리 좀비가 되어 다시 일어났다. 일으킬 수 있는 시체의 양은 하급일 때에 비해서 거진 두 배 정도 늘어났다. 이전에는 여덟 구의 시체밖에 못 일으켰다면, 이제는 열넷의 시체를 일으키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남아있던 감독관들을 모두 죽이고 시체로 되살린 이성현은 곡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노예들이 머뭇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카스카의 부하입니까?"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마물이 감독관들을 죽이니, 아무래도 카스카의 부하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예들은 이성현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지만 이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너희랑 같은 노예였고 노인장의 도움으로 7급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이런 말을 어떻게 그들에게 할 것이고, 또 그들이 어떻게 믿겠는가.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으니, 일단 탈출이나 합시다."
노예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처음 노예들을 선동했던 신입 노예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는 제일 처음 앞장서서 나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에게 미래란 없다. 여기서 가만히 있어도 이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죽을 것이고,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힘든 노예 생활이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저 마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저 마물은 신비로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니까.
"내가 앞장서죠."
이성현은 자기가 앞장서기로 했다. 어차피 노예들에게 전투 능력은 기대할 순 없다. 저들은 말 그대로 시선 끌기용이자 고기 방패 역할일 뿐이다. 이성현이 탈출하는 데 필요한 소모품들.
이성현은 노예들을 둘러봤다. 그에게 저들을 구출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가 감독관들에게서 저들을 구한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 탈출하는데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여차하면 지상에서 좀비들과 노예들을 던져놓고 혼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걸 모르는 노예들은 이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쯧쯧."
이성현은 혀를 차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노예들과 좀비들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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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부관은 부하들을 이끌고 광산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광산 내부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굳이 위험성이 있는 광산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어차피 여기서 대기하면 놈들이 나오겠지.'
만약 노예들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놈들은 입구를 통해서 바깥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놈들의 목표는 광산에서의 탈출, 더 본질적인 목표는 자유니까.
"흐흐, 자유는 얼어 죽을. 네놈들한테 어울리는 건 차가운 광산이야."
부관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부관 역시 두목인 가스트처럼 병사 출신이었다. 그는 7등급의 마물로 십인장이었지만, 너무나도 잔혹한 품성 때문에 재판에 넘겨졌다.
적에게만 잔혹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병사일 터. 하지만 그의 잔혹성은 적군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같은 아군에게, 더 나아가서 지켜야 할 주민에게까지 향했다. 아군 폭행, 주민 고문, 강간. 온갖 죄를 저지른 그는 사형 위기에 처했고 가까스로 도망쳐 가스트 용병단에 들어왔다.
"저, 부관님. 안에 동료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안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엉? 생각을 해봐, 머저리야. 카스카 놈들이 광산을 뚫고 올라왔는데, 안에 살아있는 놈들이 있겠냐? 다 죽었겠지, 뭐."
"그, 그렇습니까?"
"그래. 만약에 살아있어도 내가 죽일 거다. 카스카 놈들이 올라오는 걸 안 막고 어디 숨어있었다는 거니까."
부관은 들고 있던 단창을 만지작거렸다. 부관 노릇을 하다 보니 피를 보는 일이 너무 적어졌다. 이번에 노예들을 죽이면서 스트레스를 풀 생각이었다.
"그……. 단장님은 카스카 놈들도 막으라고 하셨는데, 이미 여길 통과했잖습니까. 막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노예들을 죽이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금방 죽이고 가면 돼. 그동안 단장이 버텨주겠지."
"예에……."
부관에게 말을 건 용병은 질렸다는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부관은 가끔씩 피에 눈이 멀어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곤 했다. 그럼에도 그가 단장의 부관이라는 직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가 용병단 중에서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마물이어서였다.
"부관님! 광산 입구가 열립니다! 누가 나오고 있습니다!"
"좋아. 준비해라, 자식들아! 나오는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단장을 지원하러 간다! 알겠냐!"
"오오!"
부관의 말에 부하들은 큰 함성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의는 입구 밖으로 나오는 이들을 보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저건……."
"……뭐지?"
나무로 된 광산의 입구가 부서졌다. 산산이 조각난 입구를 넘어서 나온 것은 시체들이었다. 걸어 다니는 시체. 머리가 부서진 시체가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건, 대체……."
부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뭔가 일이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지상으로 올라온 이성현은 적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다. 열여섯 정도의 용병들. 그 선두에 뱀의 상체를 가진 마물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저놈이 우두머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마물이 입을 열었다.
"내 부하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노예."
"눈이 멀었나? 보고도 몰라?"이성현은 바로 옆에 있는 좀비의 부서진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설마, 강령술? 아니, 그럴 리가."
"혼자 뭘 중얼거리는지 모르겠군. 넌 누구지?"
"……난 가스트 용병단의 부관이다."
부관은 단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각자 무기를 빼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너희들을 학살할 몸이지. 대화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강해 봤자 노예일 뿐이다!"
"카아아!"
좀비들의 모습에 전의가 꺾였던 용병들이 부관의 말에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이성현은 잔뜩 겁먹어 있는 노예들에게 소리쳤다.
"시체들을 방패로 삼아라! 결코 용병들과 정면으로 싸우지 마라!"
좀비들의 숫자 열여섯. 노예들의 숫자 열여섯. 용병들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였기에 해볼 만했다. 이성현은 곡도를 빼 들었다. 맞은 편에선 부관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이성현이었다.
"저 부관은 내가 상대하겠다!"
그리고 부관과 이성현이 충돌했다. 부관의 단창은 창대까지 강철로 되어있는 무거운 무기였다. 이성현은 횡베기로 부관의 목을 단번에 쳐내려고 했지만 부관은 단창을 수직으로 세워 그의 베기를 튕겨냈다.
"어림없다!"
부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의 힘에 당황했다. 그의 공격을 받아낸 손이 순간적으로 저릿해졌다. 이성현은 공격이 막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어서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부관은 입을 벌렸다.
"샤아!"
부관의 입에서 걸쭉한 독액이 뿜어져 나와 이성현의 곡도를 덮쳤다. 그러자 곡도가 푸시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흐흐, 어떠냐. 내가 자랑하는 독액이지.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지랄하고 있네. 고작 이걸로?"
이성현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부관은 창을 빙글 회전시키면서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자신과 등급이 같다고 한들 노예일 뿐이다. 이런 광산에 노예로 끌려온 놈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거기에 노예들보다 자신들이 인원수가 많은 만큼 질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부관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사나운 말처럼 이성현에게 접근했다. 그 손에 쥐어진 창이 이성현의 목 부분을 찌르고 들어갔다. 부관이 전쟁터에서 갈고 닦은 창술. 눈앞의 마물이 뭐하는 놈이지는 몰라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뭣!"
그런 부관의 확신은 처절하게 부서졌다. 눈으로 제대로 쫓기조차 힘든 일격을, 이성현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 걸로 피했다. 그리고 녹아내리는 검의 손잡이로 부관의 손을 내리쳐 손에 쥔 창을 놓치게 하였다.
빠각!
"크악!"
부관의 손이 구부러져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부러진 것이다. 부관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서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던 부하들이 부관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성현은 다가오는 부하들을 흘깃 쳐다봤다. 그리고 근처의 노예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빼앗곤 뒤로 물러나려는 부관을 땅을 박차면서 추격했다. 그리고 팔에 힘을 한가득 실어, 몽둥이로 부관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빠악!
커다란 굉음이 나면서 부관의 입에서 하얀 이빨들이 튀어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음 추격타가 들어갔다. 이성현은 몽둥이를 재빠르게 되돌리고, 부관의 복부를 강타했다. 마치 야구 방망이로 야구공을 치는 것처럼.
어찌나 강한 일격이었는지. 부관의 몸이 순간적으로 야구공처럼 붕 떴다가 땅에 처박혔다.
"커헉!"
숨이 안 쉬어졌다. 부관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성현은 다가오는 용병들을 공격했다.
"이 새끼가!"
용병 중 하나가 눈에 핏발이 선 채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의 손은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혀 있었고,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용병은 괴성을 내지르고 팔을 앞으로 쭉 내뻗으며 정면으로 쳐들어왔다.
이성현은 몸을 살짝 기울이고 용병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몽둥이로 용병의 배를 짧게 찔렀다. 순간적으로 용병의 숨이 턱 막히고 허리가 구부러졌다. 이성현은 바로 이어서 용병의 턱을 몽둥이로 후려갈기고, 턱뼈가 부서진 용병의 얼굴을 몽둥이로 갈겼다.
"끄륵……."
"큭!"
얼굴이 박살 나면서 순식간에 절명한 용병을 그 뒤에서 달려오는 용병에게 내던졌다. 뒤에서 다가오던 용병은 죽은 동료의 몸을 받아내느라고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성현의 외침. 그러자 용병의 품 안에 있는 죽은 동료가 크르르,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부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놈을 떨쳐내!"
"예, 예? 아악!"
부관은 다급하게 경고했지만 이미 늦었다. 좀비로 되살아난 동료가 용병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처절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 이성현의 발이 땅을 밟고 순식간에 용병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이성현은 양손으로 나무 몽둥이를 붙잡고 양팔을 크게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용병의 머리를 온 힘을 담아 수직으로 내리쳤다. 퍽! 수박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촉감이 나무 몽둥이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순식간에 절명한 두 명의 용병들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성현은 죽은 용병을 마찬가지로 좀비로 되살려냈다.
"미, 미친, 무슨 실력이……."
"젠장, 고작 한 놈한테 이게 무슨 추태냐!"
부관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없는 이를 갈았다. 간신히 살아는 있었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였다. 내장이 박살 나고, 이빨이 나간 데다가 턱이 산산이 조각났다. 살아난다 한들 평생 뭘 씹어먹지는 못할 것이다.
'제길.'
부관은 자신이 애용하는 무기인 창을 손에 쥐면서 이를 갈았다. 고작해야 노예. 이런 광산에까지 노예로 흘러들어왔으니 7등급의 마물이라 한들 그리 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부관의 오판이었다. 부관의 생각과는 달리 저 마물은 만만찮은 강적이었다. 그리고 마물이 사용하는 마법이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강령술. 저건 리치들이나 쓰는 마법인데!'
강령술은 마법 계통의 언데드, 그것도 상위종인 리치들이나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런 마법을 7등급의 마물 따위가 사용하고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부관은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관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역으로 흐려져 가는 정신을 일깨웠다. 부관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 이봐. 거래하자. 너희들은 모두 무사히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마. 그러니 날 살려다오."
"이 상황에서 그런 제안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나?"
이성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부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부관은 이성현의 뒤에 있는 용병과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성현을 덮쳤다. 부관은 창끝으로 이성현을 겨냥하고 온몸의 힘을 단창에 실었다. 혼신의 찌르기가 이성현의 가슴을 노렸다.
이성현의 귀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현은 나무 몽둥이를 가로로 눕혀 찌르기를 받아냈다. 단창이 나무 몽둥이를 찌르고 파고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이성현의 몸을 관통하지는 못했다. 부관은 이를 갈면서 나무 몽둥이에 박힌 단창을 빼내려 했지만 빼낼 수 없었다.
"큭!"
이성현이 단창의 창대를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대를 붙잡은 손에 힘을 한가득 싣고 끌어당겨, 오히려 부관을 끌어당겼다.
자세가 무너진 채 끌려오는 부관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하고, 그 충격에 구부러진 그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부관은 입에서 독액을 토해내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 입에서 독액과 피가 뒤섞여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동시에 이성현을 공격하려던 용병은 좀비들에게 막혔다. 부관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에 좀비들에게 용병을 막을 것을 명령해뒀다. 좀비들에게 가로막힌 용병은 필사적으로 좀비들을 떨쳐내려 하고 있었다.
이성현은 부관이 떨어트린 단창을 주워들어 용병의 머리를 겨냥하고, 일직선으로 투창했다. 일직선의 궤도를 그리면서 나아가는 단창이 정확하게 용병의 머리를 꿰뚫었다. 용병의 몸이 느릿하게 뒤로 넘어갔다.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는 어느 정도 정리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좀비들과 노예가 뒤섞여서 용병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용병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용병들이 좀비를 죽여도, 죽은 용병이 다시 좀비가 되어 되살아났기에 용병들의 힘이 점차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노예들과 좀비들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성현은 무릎을 구부려 부관과 눈을 마주했다. 좀비들을 가리키면서.
"너도 저놈들처럼 될 거다."
부관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비축본 4일치의 벽이 무너졌다..
오늘 두 편 반을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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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성현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부관의 목을 반으로 부러트려 즉사시키곤 그의 몸을 좀비로 되살렸다.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머리에서 그으으, 하는 신음이 흘러나오는 그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난전이군.'
광산 밖은 숲에 둘러싸인 야영지였다. 곳곳에 천막과 모닥불이 있었고 병장기들이 있었고, 그런 야영지를 높은 목책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야영지에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 같은 곳이 두 군데가 있었는데, 거기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목책을 부수지 않는 한, 저 입구밖에 길이 없는데.'
목책을 넘어서 나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목책이 너무 높았다.
현재 야영지에는 수많은 마물들이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 노예들, 이성현이 되살린 좀비들, 가스트 용병단, 카스카의 무리들, 그리고 입구 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알 수 없는 무리.
"어디가 활로일까."
다가오는 용병을 가볍게 죽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싸우고 있는 마물들 중에서는 유독 눈에 띄는 놈들이 있었다. 조금 전 광산 내부를 전차처럼 분쇄하면서 나아간 카스카라는 웨어울프, 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덩치를 가진 미노타우르스, 입구 쪽의 무리 중에서는 갑옷을 입은 거대한 해골이 눈에 띄었다.
카스카와 미노타우르스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거대한 해골은 입구 쪽을 지키는 카스카 측의 마물들을 죽이면서 야영지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다른 나머지 입구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길은 저기밖에 없어."
반대 방향의 입구에는 소수의 마물들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대다수 병력은 야영지 내부의 싸움에 투입된 모양이었다. 이성현의 시선은 노예들에게 향했다. 처음에 열여섯에 달하던 노예들은 이젠 열 마리 정도 남아 있었다.
좀비들을 방패로 삼아서 싸운다고 한들, 용병들에 비해서 장비도 열악하고 신체도 허약한 그들로서는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저 녀석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이성현은 딱히 노예들을 데리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길을 안내해줄 생각은 있다. 자신이 앞장서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이고, 그 뒤를 따라온다면 노예들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하지만 뒤처지는 이들을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도울 생각은 없었다. 이성현은 그런 성자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저들을 미끼로 던져두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성현은 고전하고 있는 노예들을 지원했다. 노예들의 숫자는 또다시 줄어들어 있었다. 남아있는 자들도 몸 곳곳에 상처가 나있는 등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이성현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노예들을 한곳에 모았다.
"우리는 저쪽으로 간다."
그나마 병력이 적은, 다른 쪽의 입구를 가리켰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거야. 뒤처지는 놈은 버리고 간다."
노예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다른 이를 챙기면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성현은 흩어진 좀비들을 모으고 앞장세웠다. 입구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마물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검 하나를 주웠다. 마물의 몸으로 변했다고는 해도 역시 검이 제일 익숙했다. 이런 때일수록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사용해야지.
이성현은 뻐근한 목을 돌렸다. 저기 앞쪽에 마물들이 다른 마물들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리며 자세를 취했다.
"간다!"
이성현은 뒤에 있는 노예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뛰쳐나갔다. 그는 한창 싸우고 있는 마물들을 덮쳤다. 좀비들을 이끌면서.
"뭐, 뭐야, 저건!"
"노예다! 노예들이다! 노예들이 탈주했다!"
한창 싸우고 있던 마물들은 가장 처음 이성현을 봤다가, 뒤따라오던 좀비들을 보고, 마지막으로 따라오는 노예들을 봤다. 노예들의 모습은 본 마물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리친 마물과 이성현의 눈이 마주쳤다. 이성현은 그 마물에게 달려가면서 검을 앞으로 쭉 내뻗어 찌르고 들었다. 마물은 그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성현은 번개처럼 마물의 품 안에 파고들어 복부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검을 위로 쳐올렸다. 상체가 반으로 갈라진 채 쓰러지는 마물. 그 마물이 쓰러지는 소리를 시발탄으로 좀비들이 길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덮쳤다.
"크아아악!"
"가, 강령술! 누가 강령술을……!"
좀비들은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이성현의 길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공격하고 길을 터주는 것. 그는 좀비들이 만들어내는 길을 일직선으로 달렸다.
"어딜!"
그런 이성현을 막으려 드는 마물도 있었다. 제법 강한 마물인지,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는 좀비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곤 그를 가로막았다. 이성현은 달리면서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길을 가로막는 마물에게 힘차게 내리찍었다.
"크윽!"
마물은 쌍도끼를 무기로 사용했다. 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격을 도끼를 교차하면서 막아냈다. 검과 도끼날이 맞부딪히자 불똥이 피어올랐다. 이성현은 검이 튕겨져나가는 반동을 이용해 검을 다시 위로 높게 들어올렸다.
"하!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이성현은 자신의 신체 능력에 자신 있었다. 특전의 영향을 받는 데다가 7등급의 마물. 방금 전 한 산적단의 부관을 맡고 있는 부관을 어렵지 않게 이기면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적어도 이 야영지 안에 있는 졸개 놈들은 이길 수 있다. 확실하게.
"큭!"
이성현은 검을 다시 내리찍었다. 마물이 자신의 검을 막아내든 말든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마물은 처음에는 도끼로 공격을 받아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검격까지는 받아낼 수 없었다. 도끼를 들고 있는 마물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도끼가 땅으로 떨어졌다.
"크아악!"
이성현은 곧바로 마물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그리 예리하지 않은 검은 마물의 살결을 베어낸다기 보다는 찢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가 그의 얼굴을 적셨다.
"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마물. 이성현은 마물의 목을 손으로 붙잡았다.
"너도 동참해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마물의 목을 꺾고 놈을 좀비로 일으켰다. 좀비를 만들어내면서 이성현은 주변에 있는 마물들을 슥 훑었다. 주변에 있는 마물들은 대다수가 고블린이나 리저드맨이었다. 그걸 확인한 그는 사납게 웃었다. 질 수가 없다.
"하."
근처에서 이성현을 경계하던 마물들은 방금 죽은 동료가 좀비가 되어 되살아나자 몸을 움찔거렸다. 아니, 움찔거리는 것을 떠나서 몸이 떨려왔다.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이 좀비들을 아무리 죽인들 의미가 있을까? 끝이 없는,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저놈이 주모자다! 저놈을 죽이면 이 시체들도 사라질 거야!"
한껏 움츠러들어 있던 마물 중 한 명이 억지로 용기를 끌어내며, 주변의 동료들을 다독였다. 주변의 마물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란히 이성현에게 돌진했다.
가장 앞장서서 돌진해오고 있는 마물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 방패를 앞세운 채, 마치 투우사에게 돌진하는 소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본 이성현은 근처에 있던 좀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좀비들은 달려오는 마물들을 막아섰다. 마물들과 좀비들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이성현은 좀비들과 싸우는 마물들의 목숨을 하나씩 끊었다.
가장 먼저 죽인 것은 방패를 들고 달려온 마물이었다. 놈은 다수의 좀비에게 몸을 물어뜯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서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성현은 놈의 목에 검을 꽂아넣었다.
"끅, 케륵!"
마물은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다른 마물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좀비들을 상대했다. 절망감이 마물들의 몸을 휘감았다.
야영지의 본진 쪽에서 지원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곳도 난전으로 정신이 없었다. 세 무리의 마물들이 뒤섞여서 싸우고 있는 상황에 여기로 지원을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제길!"
자포자기한 마물 중 하나가 이성현을 공격했다. 유독 주먹이 커다란 마물이었다. 마물은 커다란 주먹을 둔기처럼 휘둘러 이성현의 얼굴을 박살 낼 기세로 그를 덮쳤다.
"죽어라아아!"
서걱!
이성현은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지는 검격이 마물의 팔을 베어냈다. 팔과 몸통의 이음새 부분이 너무나도 쉽게 베이고 지지대를 잃은 팔이 허무하게 땅바닥에 떨어졌다. 팔을 잃은 마물이 비명을 내지르기 전에, 그의 검이 놈의 목을 베어냈다.
"가로막는 놈은 죽는다!"
이성현은 가로막는 마물들을 모조리 죽이면서 혈로를 뚫었다. 어느새 입구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좀비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달렸다. 주변의 마물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좀비들을 처리한다고 그런 이성현을 막지 못했다.
그런 이성현의 등을 향해 노예들이 애처로운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성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분명 말했다. 뒤처지는 놈은 버리고 간다고.
'나는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줬다.'
이성현은 자신을 부르는 노예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쾅!
"크윽!"
이성현의 바로 옆에 거대한 도끼가 내리꽂혔다. 도끼가 내리꽂히면서 발생한 충격파로 그의 몸이 떠밀렸고, 이성현은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성현이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는 찰나, 바닥에 꽂힌 도끼가 둥실 떠오르더니 어디론가 움직였다.
이성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도끼를 따라갔다. 허공을 날아가는 도끼의 목적지는 한 덩치 큰 마물의 손아귀였다. 소의 머리를 가진 근육질의 마물.
"……미노타우르스."
이성현은 이를 갈았다. 그의 목을 벤 마물이 미노타우르스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노타우르스를 보니 속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분명히 아까까지 카스카랑 싸우고 있었을 텐데."
아마도 저 미노타우르스의 이름은 가스트일 것이다. 이 용병단의 주인. 이성현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가스트와 격렬하게 싸우던 카스카는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제길. 저 녀석, 졌잖아.
가스트와 카스카의 싸움은 가스트의 승리로 끝난 모양이었다. 허나 쉬운 싸움은 아니었는지, 가스트의 몸에도 상처가 제법 많았다. 가스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딜 도망가느냐! 이 노예 새끼들아!"
그의 외침이 넓은 야영지를 울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이성현의 몸이 순간 떨릴 정도였다. 가스트는 손아귀로 들어온 도끼를 강하게 움켜쥐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희들은 내 노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도망치는 건 용서 못 해!"
가스트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그의 앞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예의 목을 도끼로 쳐 날렸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머리.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즉결처형이다! 네놈들 모두 이 꼴로 만들어주마! 특히 네놈은 내가 직접 죽여주겠다!"
가스트는 이성현을 도끼로 가리키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도망칠……, 수 있으려나.'
도망치기는 힘들어 보였다. 특히 미노타우르스의 속도가 생각보다 재빨랐다. 덩치가 커서 몸이 둔할 거라 생각했는데, 덩치와는 안 맞게 날렵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미노타우르스는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로 매서운 일격. 이성현은 세로로 내리찍는 일격을 검을 눕혀 막아냈다. 그러자.
"미친!"
검이 부서졌다. 미노타우르스, 가스트의 일격을 받아낸 검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가스트의 도끼는 검을 부수고 땅에 꽂혔다. 가스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크하하! 그딴 검으로 내 일격을 받아낼 수 있을 거 같나!"
"크윽!"
그리고 이어지는 일격. 가스트는 땅에 꽂힌 도끼를 빼내고 거칠게 휘둘렀다. 그의 공격은 기교란 일절 없이 그저 힘에만 의존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이성현은 땅을 박차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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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거 힘들겠는데.'
손이 아릿하게 저리는 게 느껴졌다. 이성현은 손을 털어내면서 가스트의 도끼를 눈여겨봤다. 마력과 관련된 특전을 익히지 않은 지라 마력에 관해서는 많이 둔해졌지만, 저 무기는 아마도 마법이 부여된 무기일 것이다.
거기에 가스트의 무식한 힘까지 더해졌으니 평범한 용병이 쓰던 싸구려 검으로는 막아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이성현은 근처를 나뒹구는 검을 주워들면서 좀비 하나를 자신의 앞으로 불러들였다.
"우우……아!"
파악!
매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도끼가 좀비의 가슴팍에 꽂혔다가 다시 돌아갔다. 가스트의 투척이었다. 망할 새끼. 도끼에 부여된 주인을 인식해주는 마법을 저딴 식으로 사용하다니.
"흐흐, 잔재주가 많은 놈이로군!"
가스트는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으면서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성현은 근처에서 마물들과 싸우던 좀비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노예들의 피해가 커지겠지만, 지금은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못 이겨.'
이성현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6등급의 마물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의 착오였다. 생각보다 6등급과 7등급의 차이는 컸다. 물론 거기에는 무기의 성능 차이도 있었다.
"이런 데서 템빨을 느낄 줄이야."
쓴웃음 밖에 안 나왔다. 이성현은 좀비들을 죄다 불러들이고 달려드는 가스트를 가로막게끔 시켰다.
"비켜라! 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한 때 자신의 부하였던 이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여나가는 가스트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성현은 검을 움켜쥐고 다시 입구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입구로 가는 길 와중에 있는 용병들을 하나씩 죽여나갔다.
"카악!"
"일어나라! 저놈을 막아라!"
용병들을 좀비로 되살리고 인간 방패로 삼기 위함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스트와 일대일로 싸운다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다. 아직 다른 입구 쪽에서 격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싸움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 싸움이 끝난다면 지원군이 몰려올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이성현의 죽음뿐이다. 그는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하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
"크아아아!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분을 억누르지 못한 가스트가 다시 도끼를 내던졌다. 이성현은 방금 죽인 용병의 몸을 방패로 삼아 막아내고, 시체를 내던졌다. 도끼가 박힌 용병의 몸이 검은 마력으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나랑 싸워라, 비겁한 자식!"
비겁하다는 소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가스트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좀비들을 떨쳐내면서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노예들의 대부분이 용병들의 손에 죽어가고 있었다. 용병의 공격을 대신 받아주던 좀비를 그가 불러들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입구까지의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가스트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마물이 아니었다. 가스트의 두눈이 시뻘게지더니, 자신의 몸을 물어뜯는 좀비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성현에게로.
"미친놈!"
이성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단순무식한 방법을 택하다니. 좀비들은 가스트의 몸을 계속해서 물어뜯었지만 가스트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이성현은 때아닌 술래잡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가스트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제길!"
다가오는 용병을 죽이면서 이성현은 결심을 다졌다. 죽든 살든 저놈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누군가가 가스트의 등을 강타했다.
"가스트! 이 브헨을 상대해라!"
커다란 체구의 해골. 다른 쪽 입구에서 공격해 들어오던 해골 무리의 대장이었다. 브헨은 거대한 체구에 걸맞은 커다란 대검으로 가스트의 등을 베었다.
"크아아악! 망할 새끼가!"
가스트의 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가스트는 달라붙은 좀비들을 모조리 떨쳐내고 이성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찢어 죽이고 싶은 게 가스트의 심정이었지만, 브헨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브헨 역시 6등급의 마물이었기에.
"크아아아아! 이 무능한 새끼들! 이딴 해골 따위를 못 막는단 말인가!"
"너도 내 군대에 동참해라, 가스트!"
이성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달렸다. 좋은 기회였다. 싸울 각오를 다지고 있는 순간이었는데, 시기 좋게 브헨이 개입해줬다. 이성현은 속으로 브헨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야영지의 입구를 통과했다.
"헉, 헉!"
그렇게 이성현은 한참을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얼마나 달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 숨이 가빠오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다.
야영지의 바깥은 숲이었다. 듬성듬성 심어져있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성현은 숨을 고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조그마한 별이 빛나고 있었고, 붉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니, 별이 맞나?'
그는 두눈의 안력을 집중했다. 하늘이 묘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안력을 집중시켜 하늘에 있는 별 같은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저건, 별이 아니야."
그건 별이 아니었다. 빛을 발하는 돌 같은 것들이 천장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 돌들이 내뿜는 빛이 모여 숲을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순간 이성현의 머릿속으로 마계의 지역적인 특성이 떠올랐다.
'지하 세계.'
마계는 지하 세계였다. 먼 과거에 쫓겨난 마신이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개척한 곳. 그런 곳에 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비슷한 걸 인공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이성현은 근처에 있는 나무를 손으로 매만졌다. 이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에 나무가 자랄 리가 없다.
그리고 저 보름달. 저 불길하게 붉은빛으로 빛나는 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르는 것투성이군.'
이성현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점들을 잠시 미루고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주머니 안에는 몇 개의 보석과 보존식, 그리고 지도가 하나 있었다. 지도는 이 근처의 지역을 그려놓은 지도였는데, 친절하게도 지금 그가 있는 곳이 V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성현은 지도를 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숲속은 꽤나 어두운 곳이라 주변을 경계하면서 움직여야 해서 빠르게 움직일 순 없었다. 팔다리가 배기고, 슬슬 나무 말고 다른 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내 숲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숲의 바깥으로 나간 이성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길게 이어진 길이었다. 이성현은 다시 지도를 펼쳐 지금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라프타라는 곳이었다.
'우선 라프타라는 곳으로 가볼까.'
이성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끝을 모르는 길로.
* * *
라프타라는 곳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다. 이성현은 이틀을 꼬박 걸어 다녔지만, 마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지도를 다시 확인했을 지경이었다.
가지고 있던 보존식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지쳐가고 있었다.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끝없이. 핏 워커의 종족 특전 덕분인지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게 잠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응?"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던 이성현의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옥신각신 거리고 있는 소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투고 있는 소리였다. 이성현은 걸음을 빠르게 옮겨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저긴가?"
길의 저 너머, 횃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곳에 한 무리의 마물들이 서 있었다. 그 마물들은 어떤 마물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시체가 즐비했다. 이성현은 소리를 죽이고 그들에게 접근했다.
"상인 양반. 그러게 얌전히 물건들을 내놨으면 이런 꼴은 안 봤잖아."
가까이서 보니 이족보행을 하는 쥐 같은 마물을 리저드맨과 고블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숫자를 모두 여섯. 리저드맨 셋과 고블린 셋.
'산적인 거 같은데.'
주변에는 산적들의 동료들로 보이는 이들의 사체가 있었다. 아무래도 상인의 동료들과 싸우면서 죽은 모양이었다. 산적들은 상인을 둘러싸고 그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열쇠는 어디 있나, 상인 양반. 응? 내놓지 않으면 너도 저놈들처럼 될 거야."
"어, 없습니다. 저한테 열쇠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 하지 마! 빨리 열쇠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마차의 열쇠!"
리저드맨이 방패로 상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상인은 찌익하고 쥐새끼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이성현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도와야 하나? 아니, 이 동네는 고블린이랑 리저드맨 뿐이야, 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블린과 리저드맨 정도는 1:6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저 녀석들의 동료가 더 있을 수도 있고, 저 녀석들이 소속된 집단이 있을 수도 있다. 굳이 위험 부담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저 상인을 돕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이성현은 몰래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빠직!
"……젠장."
그의 발이 돌멩이를 밟았다. 이 무식한 마족의 발은, 놀랍게도 부숴버렸다. 그 소리는 길에서 제법 크게 울려 퍼져서, 상인을 핍박하고 있던 산적들이 돌아볼 정도였다.
"누구냐!"
"하, 망할……."
이성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어둠 속에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산적들은 그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냥 지나가던 마물인데, 지나가면 안 될까?"
"얘들아, 죽여!"
"……그럼 그렇지."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적들의 눈은 또 다른 돈줄을 봤다는 눈빛이었다. 왜 이리 산적들이랑 악연이 깊은지. 그는 달려드는 산적들과 싸웠다.
리저드맨과 고블린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놈들의 등급이 몇 등급인지는 몰라도 7등급인 이성현보다는 낮아 보였다. 등급도 높은 데다가 특전의 보정까지 받는 이성현을 그들이 감당해낼 순 없었다.
이성현은 다가오는 고블린들의 목을 베어내고 좀비로 되살려서 리저드맨들의 발목을 붙잡게 하였다. 리저드맨이 되살아난 좀비들에게 당황하는 사이, 그들에게 접근해 하나씩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강령술, 생각보다 쓸만한데?'
예전에는 말 그대로 고기 방패. 발목잡기용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중급으로 올라가면서 생긴 특전의 추가적인 기능, 검은 갑옷 덕분에 적의 공격을 좀 더 버틸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단순한 시체였던 좀비들의 활용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일으킬 수 있는 시체의 양이 늘어났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성현은 반쯤 박살 난, 그럼에도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는 고블린 좀비를 다시 시체로 되돌렸다. 고블린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이성현은 고블린과 리저드맨의 몸을 뒤져 쓸만한 게 있는가 살폈다.
역시나, 별다른 건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상인에게 다가갔다. 상인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성현이 다가오자 뒤늦게 고개를 푹 숙였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인은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코 양 끝에 붙어있는 수염이 겁에 질려서 그런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굴이 쥐새끼처럼 생겨서 그런지, 감사를 표해도 어째 영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예. 놈들이 저는 일부러 살려뒀거든요.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지만……."
상인은 허리를 숙여 주변의 시체들을 살폈다. 시체들의 상태는 끔찍했다. 사지가 멀쩡한 시체가 거의 없었고, 대다수의 시체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고문이라도 하고 죽인 것처럼.
============================ 작품 후기 ============================
어떤 분이 원고료 쿠폰 몰빵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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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아는 사람들입니까?"
"예. 동료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호위병들도 있고요."
"유감이군요."
"슬프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흔한 일입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상인은 갑자기 시체들을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가 하는 걸 지켜봤다. 묻으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저 정도의 시체를 묻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뭘 하려는 겁니까?"
"시체를 불태울 겁니다."
"불태운다고? 묻지 않고?"
이성현이 그런 말을 하니 오히려 상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잠깐 말을 골랐다.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그나마 제일 나은 답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나와서요. 그래서 마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좀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예 생활…….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상인의 눈빛에 섞여 있던 약간의 의심이 눈이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상인은 동정심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이성현을 바라봤다. 이상하다 생각할 법도 한데, 아무래도 자신을 구해준 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인은 주변에 있는 시체들을 계속해서 모았고, 이성현도 그를 도왔다. 상인은 시체를 모으면서 말했다.
"마계에는 무수히 많은 생물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눈으로 보기도 힘든 아주 작은 종족들도 있죠. 바로 저것들처럼요."
이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상인이 횃불의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거미처럼 생긴 조그마한 생물과 거머리처럼 생긴 것들이 어둠 속에서 아둥거리고 있었다.
"저것들은 시체를 탐합니다. 마물의 시체에는 정수가 머물거든요. 그리 많지 않은 양이지만 저런 생물한테는 충분히 많은 양이죠. 그래서 저것들은 죽은 몸에 달라붙어서 시체를 뜯어 먹습니다."
"아아, 그래서."
"예. 뜯어먹고 남은 시체의 몰골은 끔찍하거든요. 제 동료들이 그런 꼴이 되게끔 놔둘 수는 없어서요. 아, 이제 다 모은 거 같군요."
이성현과 상인은 어느새 시체를 한곳에 다 모았다. 상인은 시체 더미 위에 횃불을 던졌다. 시체들이 입고 있는 옷가지들이 불타오르고 순식간에 연기가 그들의 시체를 집어삼켰다. 따로 기름을 끼얹지 않았는데도 제법 빠르게 불탔고, 매섭게 타올랐다.
상인은 불타고 있는 시체들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성현을 바라봤다.
"어디로 가시는 중이셨습니까?"
"라프타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 제일 가깝더군요. 그쪽은요?"
"우연이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가시죠."
상인은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타고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이성현이 그의 옆자리에 올라타니, 상인은 마부석에 있는 채찍을 들어 소처럼 생긴 말을 내리쳤다.
"구우우우!"
소의 머리와 꼬리를 가진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인은 마차를 몰면서 입을 열었다.
"라프타에는 무슨 용무로 가시는 겁니까?"
"음, 가장 가까운 곳이 라프타라서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아,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셨다고 했었죠. 이런, 그럼 잘 곳이 없겠군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은 잠깐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한동안 머무시겠습니까? 라프타에 집이 있거든요."
"……저야 좋긴 한데. 너무 호의를 베푸시는 거 아닙니까?"
이성현이 약간의 의심을 담은 눈길로 바라보자 상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쥐가 짓는 미소는 꽤나 특이하게 느껴졌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니, 목숨값만큼의 은혜를 갚는 거죠. 모름지기 상인은 은원 관계에 철저해야 하니까요."
상인은 뾰족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공짜는 아닙니다. 아직 라프타로 가려면 길이 한참 남았거든요. 그때까지 절 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세상이 워낙 뒤숭숭해서요."
"……그렇다면야.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상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성현은 상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과 함께해온 동료가 산적들에게 몰살당했는데, 상인은 꺼림칙할 정도로 멀쩡했다.
"근데, 꽤 괜찮아 보이는군요. 함께 해온 동료가 죽었는데."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이성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씀드렸듯이, 흔한 일이니까요."
"흔하다는 건……?"
상인은 말의 고삐를 잡은 채 잠깐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성현은 인내심 있게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흠, 현재 마계의 상황을 잘 모르시겠군요. 지금 마계는 극심한 내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 마왕에 반발하는 세력이 들고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죠."
"내전 중이라고요? 왜죠? 제가 알기로는 인간계를 침공하고 있을 텐데.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상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없죠. 근데,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마왕이 자신의 권능을 상실했거든요."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상인은 잠깐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계를 침공하려면 포탈이 필요합니다. 지하세계에서 인간계로 올라갈 수 있는 구멍은 강력한 봉인으로 막혀 있거든요. 먼 과거, 신화시대에 신에 의해 만들어진 봉인이라더군요."
"포탈……."
"그리고 포탈은 오직 마신께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신께선 돌아가셨고,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신하에게 자신의 권능을 넘겨줬죠. 그 권능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선대 마왕입니다."
이성현이 노인장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노인장은 마신이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인은 마치 마신이 자연스레 죽은 것처럼 말했다. 추측건대 그 당시에 마신을 배신한 신하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바꾸지 않았나 싶었다.
"선대 마왕이라면, 그 마왕은 죽은 겁니까?"
"예. 꽤 예전에 죽었죠. 선대 마왕 역시 죽으면서 자신의 후세에게 권능을 넘겨줬습니다. 그게 현재의 마왕이고요. 마왕은 처음에는 포탈을 능숙하게 열었지만, 요 몇 년 새에 포탈을 열지 못하게 됐습니다. 권능을 상실한 겁니다."
이성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노인장, 당신의 숙원은 못 이루게 됐군요.'
노인장은 마신을 배신한 마왕을 죽여달라 했지만, 이미 죽은 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마왕급의 마족을 마물에 불과한 이성현이 죽일 수 있기는 했을까. 그는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난 겁니까?"
"그렇죠. 포탈도 열지 못하는 이를 마왕으로 섬길 수 없다면서, 마계의 유력자들이 죄다 들고 일어났습니다. 반란이 일어난 거죠."
이성현은 의구심을 품었다. 포탈이 마왕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곤 하지만, 겨우 그것 때문에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난단 말인가.
"사실 마왕이 여러 가지 실책을 저지른 탓도 있습니다. 선대 마왕과는 다르게 지금의 마왕은 굉장히 오만하고, 거만했거든요.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그렇게 밀어붙인 정책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때부터 마계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의구심은 상인의 이어지는 말에 금세 해결되었다. 한 마디로 지금의 마왕은 암군이라는 것이다. 암군이지만,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포탈을 여는 권능 때문에 억지로 참으면서 섬기고 있었는데. 그 권능까지 잃어버리니 더는 참지 못하고 반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마족 놈들이 그웬성을 점령하고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건 이래서였나.'
마계 내부가 엉망인데 침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겠지. 초기의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점령했던 지역을 모두 빼앗겼던 것도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아인종들한테 제안을 한 이유가 있었군.'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생각보다 마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새삼스레 아인종들에 대한 증오가 끓어올랐다.
'망할 새끼들. 그때 포탈만 닫았으면 이길 수 있었다는 거 아냐, 이거.'
어느 정도 피는 보게 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긴 했다. 인간과 아인종 사이에는 긴 세월 동안 쌓인 벽이 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인간은 자신들과 협력하지 않는 아인종을 몬스터로 취급하고 토벌한다. 오직 협력하는 이들만 아인종으로 취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대해주는 건 아니었다.
엘프 같은 경우에는 인간들에게 납치되어 성노예로 부려지는 경우가 잦았다. 드워프, 노움처럼 손재주가 좋은 종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만드는 무구들은 인간들의 것보다 월등히 질이 좋았기에 노예로 부려먹곤 했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아인종들과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한 번 일어났었다가 마족들의 침공 때문에 정전한 상황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아인종들이 배신한 것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들로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을 박해해온 인간들을 믿을 바에야 마족들과 협력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신데."
"……음, 아뇨.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럼 반란 때문에 치안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저희가 지금 가고 있는 라프타도 그중 하나라서, 병력이 거의 다 전선에 투자되어 있습니다. 병력이 없는 거죠. 이런 길목까지 관리할."
그 뒤로도 상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라프타는 아길레라라는 마족이 다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치안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도적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도시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전선의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많은 마물들이 죽어 나가다 보니 아무 마물이나 마구잡이로 병사로 고용하고 있었다.
그 덕에 병사들의 질이 많이 떨어졌고 심지어는 라프타의 주민들에게까지 횡포를 부리는 병사들까지 생겨났다고 했다. 거기에 상인들이나 주민들을 착취하는 깡패 같은 녀석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전선이라. 으음, 전쟁터라.'
이성현은 또다시 턱을 매만졌다. 생각할 게 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턱을 매만지다 보면 뭔가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 고유 특전을 제대로 살리려면 전쟁터가 최선이긴 한데.'
이성현의 영혼 흡수는 적을 죽이면 추가적인 포인트를 흡수한다. 이 특전은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최적의 효율을 보인다. 이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A등급의 용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영혼 흡수라는 특전 덕분이었다. 이전처럼 빠르게 강해지려면 전쟁터로 갈 필요가 있었다.
'……전쟁터라.'
전쟁터에 가서 구르든 어쩌든, 지금은 마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성현은 상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단 마계의 정보를 알아내고 생각해볼까.'
필요한 건 지식이었다. 만약 이번에 라프타로 간다면 책을 파는 곳부터 찾아볼 생각이었다. 마계에 관한 지식이 있는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책을 읽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성현이 원해서 상인을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인 역시 이성현이 마계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 동안에 이 상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다 얻을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스타2 한 판만 하고 글쓸 겁니다.
진짜로요.
주인공 진화 방법 -> 11화에 나와있듯이 시스템을 이용. 일반적인 마물은 정수가 일정량에 도달하면 진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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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여행은 제법 길었다. 라프타는 가스트 산적단이 차지했던 광산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길 동안 느낀 건 상인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이었다.
'치안이 정말 엉망이잖아.'
여행길 동안 산적들에게 세 번 습격당했다. 삼 일 정도 됐으니, 하루에 한 번꼴로 습격당한 셈이다. 그놈의 내전이 뭐길래 이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 된 건지. 이성현은 습격한 산적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내쫓았다.
그리고 상인은 꽤 친절한 사람, 아니, 마물이었다. 이성현이 물어보는 질문의 대부분을 웃으면서 답해줬다. 성가실 만도 한데도. 물론 그 친절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상행을 지켜주던 호위병들이 모두 죽은 상황인 데다가 본인은 전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종족. 그나마 전투에 능한 이성현에게 친절하게 대해서 호의를 사는 것이 상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러니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겠지.
이성현은 상인에게 이것저것, 정말 많은 것을 물어봤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노예 생활을 해왔고, 그 탓에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핑계로. 상인은 동정심 반, 이성현이 필요한 마음 반으로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해줬다.
상인의 얘기에 따르자면, 지하 세계, 그러니까 마계는 재밌는 곳이었다.
일단 도시라는 개념이 인간의 도시와는 전혀 달랐다. 인간은 맨땅에 터를 다지고 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방책을 세우거나 벽을 쌓는다.
하지만 마계는 다르다. 마계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땅을 파내고 벽을 파내서 거대한 공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공동을 크게 둘러싸는 벽을 만들고, 벽과 공동 사이의 공간을 여러 개의 방으로 만들어서 일종의 거대한 던전을 만들어서 적을 막아냈다. 방에 함정을 설치하거나 병사들을 배치해서 침입해오는 적들을 막아내는 것이다. 안쪽에 있는 도시를 바깥쪽에 있는 던전이 지키는 것이었다.
지하 세계니까 가능한, 마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었다. 그리고 또, 지금의 마계는 개발이 거의 끝나서 도시 바깥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했다. 이성현은 병사에게 통행증을 내밀고 있는 상인을 지켜봤다.
바깥의 던전은 도시로 침입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둔 것이었다. 다른 도시 역시 마찬가지로 도시의 방비를 그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다른 도시를 공격하려면 도시의 바깥에 있는 던전을 돌파해야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던전에는 막대한 마력과 정수를 가지고 있는 코어라는 것이 있어서 도시와 던전을 수호한다. 그 코어 때문에 침입자들은 던전의 벽을 무너트리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코어의 마력이 던전의 구조물이나 벽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를 침공하려면 던전을 무조건 거치고, 그 코어라는 것을 부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던전의 입구에는 대부분 요새 같은 건물들을 쌓아 들어오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또 적이 오면 던전 내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게 마계의 공성전의 전부였다.
'단순하군.'
단순하지만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하는 공성전이었다. 인간은 공성전을 할 때 다양한 도구를 사용한다. 하지만 마계는 지하세계라는 특성 상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마계 만의 독특한 공성전 양식이었다.
"흐음, 이런 식으로 도시를 방어한다, 이거지."
이성현은 돌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중세 시대의 요새를 올려다봤다. 요새는 공동의 벽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조그마한 틈조차도 없어서 요새를 통하지 않고서는 공동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요새의 꼭대기나 감시탑에는 많은 수의 병사들이 활을 들고 적을 경계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병사들도 있지 않을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인은 마계에는 공성 병기 같은 건 없다고 했다.
'이런 요새를 공성 병기 없이 뚫을 수는 있나?'
인간은 이런 요새를 뚫을 때 공성 병기를 사용한다. 벽을 무너트리거나, 성문을 박살내거나. 하지만 마계에 공성 병기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요새를 뚫을 수 있을까.
보통 이런 중세 시대의 성의 위력은 대단하다. 제대로 축조한 요새에 식량만 충분히 비축한다면 요새 내부에 전염병이라도 돌지 않는 한 공격해 온 적군이 식량이 떨어져서 후퇴할 때까지 버티는 것도 가능할 정도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공격 측이 요새나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방어 측의 병력의 세 배가 필요하다고. 그런 병력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게 공성 병기일텐데. 공성 병기를 사용하더라도 공성 과정에서 많은 병력이 손실되는 것이 공성전이다.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도시로 돌아가면 지금 가지고 있는 보석을 모두 팔아버리고 책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이 마계의 지식이 나타나있는 책. 혹시나 해서 상인에게 물어보니 갓 태어난 마물이나 마족 용으로 그런 책들이 나와있다고 했다.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는 법이라.'
이성현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상인을 따라 요새의 문을 통과했다. 그 뒤로도 두 번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요새 안에도 문이 있었고,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다. 요새 하나를 통과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요새를 벗어나서 다시 터널로 나왔을 때. 이성현은 지친 나머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셨습니까?"
"예. 좀 길군요. 원래 이렇습니까?"
"요즘에는 워낙 첩자들이 많아서 좀 더 엄격해지긴 했습니다."
상인은 마부석에 올라타면서 이성현에게 손짓했다. 이성현은 그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이번 상행도 끝이 보이는 군요."
"후우, 좀 쉬고 싶군요."
이성현은 마부석의 등받이에 늘어지듯이 기댔다. 상인의 상행이 다사다난했듯, 이성현의 요 근래의 삶도 다사다난했다. 죽음, 광산에서의 노예 생활, 그리고 상인의 호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상인은 누우의 고삐를 당기면서 가볍게 권했다.
"좀 쉬시죠. 여기서부턴 안전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고생하셨잖습니까."
이성현은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감고, 짧은 잠에 빠졌다.
"……으음."
누군가의 몸을 흔드는 손길에 잠을 깼다. 이성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뿌연 시야가 조금씩 맑아지고, 따갑게 느껴지는 밝은 빛이 따사롭게 느껴질 때 쯤, 그는 정신을 차렸다.
"여긴……."
"도착했습니다. 라프타입니다. 여기가 번화가죠."
그를 깨운 상인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성현은 도시를 잠깐 둘러보고 가볍게 실망했다.
'도시라더니, 좀 기대했는데."
라프타는 마치 사막의 도시를 보는 듯했다. 흙 위에 돌로 된 건물을 쌓아올린 형태. 밝은 갈색과 어두운 노란색이 섞인 풍경은 어딘가 살풍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건물의 형태도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네모나거나, 아니면 지붕이 조금 뾰족하던가. 그게 다였다.
"실망하셨습니까?"
"으음……. 솔직하게 말해서, 예. 처음 보는 도시라 많이 기대했었는데."
"여긴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낙후된 도시는 굴을 뚫고, 굴에서 살거든요."
"허어."
사실상 원주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계는 이성현의 생각보다 굉장히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계에 처음 왔을 때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런데 이제는 지하에서, 원주민 생활이라.
'거지 같네.'
욕이 저절로 나왔다.
* * *
상인은 이성현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상인의 집은 라프타의 번화가에서 한참 지나서, 터널 하나를 지나자 나오는 또다른 공동에 있었다.
"공동이 여러 개 있군요?"
"예. 거주 지역이랑 군사 지역이 따로 있습니다. 거주 지역은 일반적인 마물들이 사는 곳이고, 군사 지역은 병사들이 훈련을 받거나 지내는 곳이죠. 그리고 여기 번화가처럼 술집이나, 물건들을 거래하는 곳이 있고요."
"그렇군요……. 지금 가는 곳이 거주 지역입니까?"
"맞습니다."
상인은 느릿하게 누우를 이끌었다. 공동은 꽤나 넓었고, 길은 잘 트여있었기에 마차로도 충분히 다닐 수 있었다. 상인은 길가를 다니는 마물들을 살피면서 말했다.
"다른 도시는 여러 개의 거주 구역이 있곤 합니다. 라프타는 좀 작은 편이죠."
"오, 다른 도시도 한 번 가보고 싶은데요."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시죠.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아."
상인은 깜빡 잊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은 가기 힘들겠군요. 내전 중이라서 신분 검사가 엄격하거든요. 노예……, 신분이셨으니, 제대로 된 신분이 없으면 가기 힘들 겁니다."
"무슨 신분이면 들어갈 수 있죠?"
"확실한 건 병사겠죠. 방금 전에 봤던 관문 요새에서 근무하시던가, 아니면 던전에서 근무하시던가. 활약해서 직위가 높아지면 신분 보증은 확실하게 될 테니까요. 다른 길도 있긴 합니다만."
"병사라……."
결국 그 길 밖에 없나. 이성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스토리아에 온 이후로 싸움질만 해대는 것 같다. 그외에는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상인은 어떤 집앞에서 마차를 멈추고 마부석에서 내렸다.
"내리시죠. 도착했습니다."
상인의 집은 그냥 그저 그랬다. 특별히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주변에 있는 다른 돌집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 사실, 이성현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였다. 그로서는 다른 돌집과 상인의 집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상인은 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현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오오."
놀랍게도. 집안은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진 벽지가 붙어있었고, 바닥에도 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놓여있는 가구들. 겉으로 보는 것보단 괜찮았다.
"레피야, 아빠 왔다."
'아빠?'
또다시 놀랍게도. 상인은 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결혼을 했다는 거겠지. 머릿속으로 상인의 딸의 생김새를 상상했다. 상인이 쥐의 얼굴을 가졌으니, 딸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빠!"
집의 안쪽에서 조그마한 여자애가 뛰어나오더니 상인의 품에 안겼다. 정말로 놀랍게도. 여자애의 얼굴은 쥐가 아니었다. 인간과 거의 유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귀 대신에 쥐 특유의 동그라면서 길쭉한 귀를 가지고 있었고, 고양이의 수염과 비슷한, 뾰족한 수염이 몇 개 나 있었지만. 또 코의 생김새도 인간의 것이라기 보다는 쥐의 코와 비슷했다. 여자애는 열 살 남짓해 보였다.
이성현은 상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품안에 안긴 딸을 다독이던 상인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생김새가, 음……. 별로 안 닮았군요."
"생김새 말입니까? 아아. 네. 저희 종족의 특징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김새가 좀 많이 다르죠."
"그렇군요……."
여자들은 보통 저렇게 생겼단 말인가. 상인의 종족은 하프랫이라는 8등급의 종족이었는데, 전투에는 재주가 없는 종족이었다. 대신에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 편이라서 보통 상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빠, 저 아저씨는 누구야?"
"아빠의 은인이란다. 레피, 가서 간단한 마실 것 좀 가져오겠니?"
"네에."
상인의 품안에 있던 레피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귀여운 아이군요. 아내 분은 잠깐 나가신 건가요?"
"아내는 죽었습니다."
"음,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꽤 지난 일이니까요. 좀 일이 있었습니다.."
상인은 쓰게 웃으면서 이성현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을 쓸어내렸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흐려지고, 조금씩 잊혀가더군요.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상인의 말에 이성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지구에 가족을 두고 왔다. 가장 처음 히스토리아에 왔을 때는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족들을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필사적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너무나도 긴 시간이 지났고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가족들의 기억이 흐릿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아 똥매려
19====================
데몬 로드
'가족이라.'
아버지, 어머니. 있을 때는 소중한 지를 모르지만 없어지고 나서야 소중했음을 깨닫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이성현은 이제 자신이 없었다.
'내가 죽는게 더 빠르겠지.'
그는 이제 가족을 만나겠다는 결심을 거의 잃은 상태였기에,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됐겠죠. 일단, 보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성현은 주머니에 있는 보석들을 꺼내 보여줬다. 상인은 보석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법 질이 좋은 보석이군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말씀드리기 좀 곤란하군요. 어쩌다 보니 얻었다고 밖에는……."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다시 감탄사를 흘렸다. 볼수록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루비, 사파이어, 오닉스. 그리고 라테나이트도 있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겠지만 요즘 전쟁으로 보석의 시세가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라테나이트는 많이 팔렸지만.
"그렇습니까? 일단, 더 확실하게 가격을 매기려면 전문가에게 맡겨야될 거 같습니다. 전 계산이 빠르긴 하지만 보석 감정에는 재주가 없거든요."
상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보석을 다시 이성현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딸인 레피가 차를 내왔다. 커다란 쟁반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아둥바둥거리면서 걸어오는게 꽤 귀여웠다.
"차, 가져왔어요."
"고맙다, 레피."
쟁반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있었다. 상인은 찻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런 손길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찻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한 잔 드시죠."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찻잔을 들었다. 차에서는 묘한 꽃향기가 났다. 이성현은 차를 든 채, 상인이 차를 마시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상인이 차를 마시고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도 차를 들이켰다.
"조심성이 깊으신 분이군요."
이성현이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상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죽기 전에 겪었던 일 때문인지, 다른 이가 주는 음식에는 손이 잘 안 갔다. 광산 안에 있을 때도 이랬다. 스프가 나올 때면 받아놓고 한참 기다렸다가, 다른 노예들이 먹고 나서야 먹곤 했다.
순간의 방심이 불러왔던 죽음을 이성현은 잊지 않았다. 그 엘프가 내밀었던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게르그 후작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광산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 후회.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과거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후회만 거듭할 뿐. 이성현은 같은 실수를 다신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상인은 불쾌할 법도 한데 그냥 가볍게 웃고 넘겼다. 이성현의 행동은 어찌 보면 그를 의심하는 행동이었음에도. 상인은 오히려 그런 이성현의 조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신중함을 가지는 건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나쁘지 않죠. 마계에서 그런 조심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요."
"불쾌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전 한순간의 방심으로 가장 소중한 걸 잃었습니다. 그 뒤로는 방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죠. 이번에도 잘 안 됐지만요."
상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화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보석 처리는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고 파는게 나을 거 같습니다. 다음에 저랑 같이 전문가를 만나러 가죠."
"감사합니다."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상인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일단 현재의 마계에 대한 지식을 쌓을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해와서, 별로 아는 게 없거든요."
"그러고 나서는요?"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책을 구매해서 마계에 대한 지식을 쌓는다. 그리고 뭘 할 것인가. 당장 떠오르는 건 전쟁 뿐이었다. 인간계에서도 전쟁터만 돌아다녔었는데, 마계에서도 같은 짓을 하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전선으로 갈까 생각 중입니다. 일단 제대로 된 신분이 없으니, 병사라도 되야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은 생각 중이지만요."
"그럼, 한동안 저희 상인 협회에서 일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상인 협회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프타에는 상인들의 활동을 보조해주는 협회가 있습니다. 제가 끌고 온 마차 같은 걸 대여해주고, 상행을 지켜줄 호위병들을 붙여주죠. 대신에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요."
상인은 목이 마른지 다시 차를 마시곤 말을 이어나갔다. 이성현은 얌전히 상인의 말을 들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요즘 상황이 이래서 말이죠. 호위병들의 숫자가 많이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구하고 있는 중이죠.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호위병으로 일해달라는 거군요."
상인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 겁니다. 실적을 올릴 수록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거고요. 협회에서 신분도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흐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성현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상인 협회라는 것이 뭔지 알아보고 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생각해보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시죠. 그래도 하나 충고해드리자면, 지금 전선은 난전입니다. 당신의 실력이 등급에 비해서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7등급의 마물이면 거의 화살받이로 쓰일 겁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진화를 하고 난 뒤에 전선으로 가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면 조금 더 좋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거든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를 표했다. 상인의 말은 지금은 진실인지 어떤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구한 건 아니었지만. 그를 구한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는 마차를 협회에 돌려주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성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긴 노예 생활과 노숙으로 몸과 정신은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상인 협회가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휴식이 더 급선무였다.
상인은 이해한다는 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쥐가 웃는 모습은 이성현에게는 꽤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럼 조금 쉬고 계시죠. 레피에게 말하면 방을 안내해줄 겁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상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가볍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아빠가 떠나려고 하자, 레피가 조르르 달려와 상인의 등에 달라붙었다.
"아빠, 또 가는 거야?"
"잠깐만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저분은 한동안 우리 집에서 묵을 손님이니까, 방을 안내해주렴."
"으응……."
레피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오물거렸다. 상인은 쓰게 웃으면서 자신의 반밖에 안 오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인도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는데 레피는 그것보다 더 작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져서 이성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상인은 이성현에게 고개를 숙이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집에는 레피와 이성현 단 둘만이 남았다. 아무리 그래도 만난지 얼마 안 된 사람과 하나 뿐인 딸을 같이 지내게끔 하는 건 너무 안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방, 안내해 드릴게요."
조그마한 레피는 수줍은 듯 말하곤 도도도 달려가버렸다. 이성현은 쓰게 웃으면서 레피의 뒤를 따랐다. 레피는 좁은 거실을 뛰어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상인의 집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렇게 넓고 좋은 집은 아니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2층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층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레피는 그 중 계단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방에 이성현을 안내했다. 레피는 발 뒷꿈치를 들어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여기에요."
"고맙다."
이성현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예전에는 침실로 썼던 방인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짐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침실 겸 창고처럼 느껴졌다. 레피는 자신의 볼을 양손으로 가렸다.
"죄송해요. 반쯤 창고로 쓰던 방이라서……. 치워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지금은 그냥 빨리 쉬고 싶거든. 다음에 내가 치울게."
"네에……. 식사는……?"
레피는 조심스럽게 이성현을 올려다봤다. 이성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피는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작은 머리에 비해서 그의 손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 고맙다."
"아, 아니에요. 그럼, 푹 쉬세요."
레피는 그 말을 남기고 도도도, 방을 나갔다. 이성현은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요즘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몇 살이지? 되게 조숙한데.'
겉으로 보기에는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였는데 하는 행동이나 그런게 되게 조숙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상인을 만나면 나이를 물어봐야될 것 같다.
이성현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길게 하품을 했다. 지금까진 못 느꼈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이불을 한 번 털어내곤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아, 포인트 좀 쌓였겠는데.'
이번에 제법 많은 마물들을 죽였다. 그외에도 이것저것 한 행동들이 있어서 제법 포인트가 벌렸을 것 같다. 포인트를 확인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아니, 됐어. 나중에…….'
이성현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은, 너무 지쳤어…….'
그리고 깊은 수마에 빠졌다.
* * *
이성현을 깨운 건 구수한 빵 냄새였다.
"음……."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성현은 몇 번 눈을 꿈뻑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한동안 멍하니 그러고 있던 그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상인의 집에 묵었었지.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잔 건지, 머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사실조차 까먹을 정도로.
'그러고 보니 상인의 이름도 안 물어봤었군.'
자신을 재워준 사람의 이름을 안 물어본 자신도, 이름을 안 물어봤다고 말해주지 않는 그 상인도 웃기긴 매한가지였다. 이성현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따뜻한 이불. 나름 푹신한 침대. 이런 곳에서 잠을 잔 게 얼마만이었더라. 노예 생활을 두 달이 넘도록 했으니 꽤 오랜만이었다. 이성현은 상체를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쉽게 잠이 깨질 않았다. 온몸이 뻐근하고 나른한 게 오랫동안 잔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멍한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면서 시스템으로 포인트 양을 획득했다. 획득한 포인트 양은 총 3200이었다. 이성현이 자세한 상세 내역을 확인하니 마물을 죽인 것, 반란에 성공한 것, 노예 생활을 탈출한 것 등으로 인해 포인트를 획득했음을 알 수 있었다.
'3200이라.'
한동안은 포인트를 모아둘 생각이었다. 적어도 10000은 모아서 한 개의 특전을 상급으로 올릴 때까지. 중급의 특전 여러 개 있는 것보다 한 개의 상급 특전이 있는 게 더 효용성이 컸다.
이성현은 마지막으로 정수를 확인했다. 정수는 처음 진화했을 땐 200이 남아 있었는데 이젠 1300 정도가 있었다. 정수는 생각보다 적게 모인 편이었다. 제법 많은 마물을 죽인 것 같은데도 이 정도라니.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수는 흡수가 안 되는 건가?'
그가 죽인 마물들도 정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정수들은 전부 흡수가 되진 않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노인장이 그런 말을 했었다. 돌 같은 것에 정수를 담으려고 하면 옮기는 과정 중에서 많은 양의 정수가 손실된다고. 이것도 그것과 비슷한 개념이지 않을까.
============================ 작품 후기 ============================
추후에 나오는 내용에 관한 질문은 답변드리지 않습니다.
* 공지
1월 11일 장염으로 입원해있는 상태라서 오늘은 연재가 불가능하고 내일부터 다시 아침, 저녁으로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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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아, 젠장. 머리가 멍하군."
이성현은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온갖 물건으로 엉망인 방을 헤쳐나가 문 쪽으로 가니, 빵 냄새가 더 짙어졌다. 그는 홀린 듯이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상인의 딸, 레피가 웬 종이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거기서 빵 냄새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빵이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레피는 즐거운 표정으로 종이 봉투 안을 들여보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계단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아, 깨어나셨네요."
"어. 빵인가?"
레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빵 냄새를 맡고 있자니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이런 지하 세계에서 어떻게 빵을 구워 먹는 거지. 밀이 자랄 수는 있나?
'……아니지, 나무가 있는 걸 보면 밀도 있을지도.'
이 지하 세계는 여러모로 신기한 곳이었다. 이성현이 계단을 내려가니 레피가 다급하게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릇 두 개를 가져왔다. 뭔가 해서 보니 스프가 들어있었다.
"으음."
이성현의 인상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두 달 동안 스프만 먹어대서 그런지, 이제 스프라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진 걸 알아챈 레피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프는 싫어하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오랫동안 노예 짓을 했는데 거기서 먹은 게 스프 뿐이었다, 라고 어린애한테 말하기는 그랬기에 둘러댔다. 레피는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뒀다.
"그래도 먹을 게 이거밖에 없어서, 드셔야 하는데."
"어, 괜찮아. 먹을게."
얹혀사는 주제에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성현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레피가 건네는 빵을 받으니 빵이 돌처럼 단단했다. 잘못 구워진 게 아니라 이 시대의 빵의 특징이다.
돌처럼 단단하던가, 페이스트리처럼 납작하거나. 많은 사람이 먹으려고 굽다 보니 빵이 커지고 단단해진다. 이 시대에서 빵을 먹으려면 무조건 스프가 있어야 했다.
이성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빵을 스프에 찍어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싫어했을 조합의 음식이었지만 오늘은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그는 빵의 식감을 음미하면서 먹었다.
"내가 얼마 만에 깨어났지?"
"이틀 만에요. 이틀 동안 꼬박 잠드셨어요."
"이틀……."
몸이 무겁게 느껴질 만도 했다. 이틀 동안 침대에 누워서 잠만 잤으니 몸이 결릴 수밖에.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프를 들이켰다. 진한 옥수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옥수수를 삶아 으깨어 걸쭉하게 만든 스프인 듯했다.
"이것도 사 온 건가?"
"아뇨, 그건 제가 만든 거에요. 예전에 엄마가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래?"
이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그마한 여자애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여동생이 생각났다. 이젠 얼굴도 잘 기억 안 났지만, 굉장히 까불거리는 녀석이었다. 오빠를 오빠라고 생각하지 않는 괘씸한 녀석. 그런 여동생이 있어서인지, 이성현은 여자애들한테는 잘해주는 편이었다.
"네. 엄마는 요리를 잘하셨어요. 집에 없는 날이 많았지만, 집에 있을 때면 언제나 요리를 해주셨죠."
레피는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성현은 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알아도 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잠깐 나가셨어요. 금방 돌아오실 거에요."
"그렇군."
이성현은 레피가 빵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귀여운 코를 쫑긋거리면서 빵을 먹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그녀가 빵을 먹을 때마다 양옆으로 길게 자란 수염이 움직였다.
어느새 빵을 다 먹어치운 이성현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직까지 식사 중이던 레피가 그런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더 드실래요? 아직 많이 있는데."
"어? 아니, 괜찮은데."
"사양하지 않으셔도 되요. 아빠의 은인이시라고 들었어요. 이 정도 음식을 대접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닌 걸요."
레피는 그렇게 말하더니 부엌에서 스프를 더 가져오고 빵이 든 종이 봉지를 내밀었다. 이성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스프와 빵을 받아들였다. 이전에 상인과 함께 있었을 때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는데, 오늘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걸 보니 어린애가 아니었다.
"아빠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성현은 당황한 나머지 어, 어. 하고 멍청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시 조신하게 식사를 이어나가는 레피의 모습에 그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넌 몇 살이니?"
"저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피는 잠깐 생각하더니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올해로 스물 한살이에요."
"……말도 안 돼."
이성현은 할 말을 잃었다. 저렇게 작아 보이는데 이성현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그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체형이라서 영락없이 어린애라고 생각했는데, 어린애가 아니었다.
"네? 뭐가 말이 안 돼요?"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너희 종족은……, 그, 다 그런가? 성장 속도라고 해야 하나, 체형이라고 해야 하나."
"아아."
레피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양손을 맞부딪혔다.
"네. 정말 예~전에는 덩치가 컸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덩치가 작아졌대요. 저희 종족이 전투에 능한 종족이 아니라서, 잘 도망치려고 진화한 거라나."
"그래서, 다들 체형이 작은 건가?"
"네. 전부 다 작은 편이죠. 저는 유독 작은 편이긴 해요. 등급이 오르면 체형이 좀 더 커진대요."
"그렇군……."
아무래도 마물들은 외모로 나이를 유추해내서는 안 될 것 같다. 저만한 나이의 딸이 있다면 상인은 대체 나이가 몇 살이라는 건지. 이성현은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 어……. 좀 많아."
이성현은 그냥 둘러댔다. 레피는 그런 이성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계속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여덟이면 지구에선 아저씨 취급을 받을 나이긴 했다. 인간계에서도 스물여덟이면 나이가 많은 편이기도 했고.
이성현과 레피는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고 있으려니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창 말하던 레피가 갑자기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빠!"
상인이었다. 상인은 레피의 말대로 금방 돌아왔다. 돌아온 상인은 외투를 벗다가, 식사를 하는 이성현을 확인하곤 반가운 얼굴을 했다.
"깨어나셨군요.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죽은 듯이 잤습니까?"
"예. 오죽하면 의사를 부를까 했습니다. 정말로 죽은 듯이 주무셔서요."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자서 그런지 푹 잤습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아, 잠깐 알아볼게 있어서요. 요즘 같은 때에는 소식에 밝아야 되거든요. 아, 그리고 보석을 사줄 이도 찾았습니다. 조만간 거래를 할 거 같아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책을 파는 곳은 없습니까? 뭐, 어린이 용 책이라던가……. 있잖습니까, 기초적인 지식이 적혀있는거."
"아아."
상인은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왔으니 기초적인 지식이 없을 테고, 그 지식을 책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나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어쩐지 눈앞의 이성현을 기특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있습니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제가 지금은 또 나가봐야 해서 안내해드리기가 그렇군요. 음……."
상인은 잠깐 고민하듯 생각에 잠겼다가 생각났다는 듯 레피를 바라봤다. 레피는 남은 빵을 오물오물 먹고 있다가 상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레피가 길을 알고 있을 겁니다. 레피가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죠?"
"예? 아, 예. 저는 상관없습니다. 아, 근데 돈이 없는데요."
"레피한테 있을 겁니다. 어차피 제 돈이니, 나중에 보석을 팔고 나서 갚으시면 됩니다."
상인은 앉아있는 레피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길게 자란 진회색 빛의 푸석한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레피야, 이분을 서점으로 안내해주겠니? 네가 책사러 가는 곳 말이야."
"거기? 웅, 알았어. 나, 옷 갈아입고 올게."
레피는 그렇게 말하곤 자기 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귀여운 아이군요. 전에 말했던 거 같지만."
"그렇죠? 레피한텐 미안한 게 많습니다. 유독 몸이 작은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나이가 많더군요. 그쪽 종족의 특징입니까?"
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희 종족의 여자들이 체형이 작은 편이긴 합니다만, 레피는 그중에서도 유독 작죠.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먹고 커야 할 때 많이 못 먹고 자랐습니다."
"흠."
이성현은 혀를 찼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싸구려 동정이 될 것 같아 꺼내지 않았다. 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형이 작아서 그런지, 정신적으로도 조금 어린 면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 지내시는 동안 레피랑 자주 어울려주십시오.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너무 신세를 지는 거 같은데요."
"뭐든 간에 목숨값보단 싸겠죠. 상관없습니다."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상인의 말을 무조건 신뢰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인의 호의는 고맙게 느껴졌다. 둘이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레피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옷이래 봐야 겉에 간단한 망토를 두른 게 다였다. 레피는 만족스런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더니 이성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갔다 올게요, 아빠!"
"그래. 잘 갔다 와라."
그는 레피에게 이끌려 바깥으로 나갔다.
* * *
지하 세계는 신기한 곳이었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낮과 밤이 있었다. 레피의 말에 따르면 천장에 붙은 발광석에서 빛이 나와 낮을 만들고, 밤이 되면 발광석이 소수 만을 남기고 꺼진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낮과 밤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걸 두눈으로 본 이성현은 여기가 도저히 지하 세계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족에게 낮밤이 필요한가?'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인간은 낮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마족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낮밤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정도로 낮밤을 필요로 하는가? 이성현은 알 수 없었다. 먼저 걸어가던 레피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성현을 돌아봤다.
"무슨 책을 사실 거에요?"
"나? 음, 마계에 관한 책. 좀 기초적인 걸로."
"어린애들이 보는 걸로요?"
이성현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처럼 생긴 레피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말든, 레피는 밝은 얼굴로 그를 끌고 걸어갔다.
지금 이성현과 레피가 있는 곳은 라프타의 거주 구역이었다. 돌로 된 집이 살풍경하게 이어져있는 거리. 여기서 번화가로 가려면 터널 하나를 통과해야 했다. 이성현은 거리를 한참 걸어가서 넓은 터널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마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성현은 앞서 걸어가는 레피에게 물었다.
"여기는 마물들이 얼마나 살아?"
"마물들이요? 음, 삼천이었나, 사천이었나……."
"……그래? 그게 많은 거야, 적은 거야?"
"좀 적은 편이죠. 많이 떠났어요. 라프타에는 사건이 많았거든요. 원래는 칠천 명 정도 있었는데, 거기서 많이 줄었어요."
칠천에서 삼천, 사천으로. 사실상 시골 촌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길을 지나는 마물들이 적은 이유가 있었다. 거주하고 있는 이의 숫자에 비하면 쓸데없이 크기만 큰 셈이었다.
"수도는 어때?"
"수도는 한 이 만 정도……?"
"거의 다섯 배잖아. 거긴 왜 그리 많지?"
"수도는 도시가 여러 개에요."
너무 짧은 설명에 이성현의 고개가 기울여졌다.
============================ 작품 후기 ============================
퇴원 시간은 아직인가..
21====================
데몬 로드
"그러니까 라프타 수준의 도시가 여러 개 붙어있다고 생각하시면 돼. 도시가 여러 개 붙어서 만들어진 수도거든요."
"그래? 그럼 던전도 여러 갠가?"
"네. 도시와 도시 사이에도 던전이 있고, 도시 바깥에도 던전이 있고. 그렇대요. 저는 안 가봐서 모르겠어요."
"그렇군……."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이만이라고 해봐야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성현은 어느새 터널을 다 지나고 번화가에 와 있었다. 이름만 번화가지, 번화가래 야 별로 대단한 것도 없었다. 삼천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의 번화가래 봤자 뭐가 있겠는가.
있는 거래 봐야 술집, 생필품점, 조그마한 시장뿐이었다. 예전에 지구에 있을 때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의 한적함이 여기서 느껴졌다. 묘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이성현의 눈에 표지판에 적혀있는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용병 길드라는 글자.
"용병 길드라는 것도 있어?"
"네. 이따가 한 번 가보실래요?"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 길드가 뭐하는 곳인지도 한번 봐두고 싶었다. 이성현은 레피의 손에 이끌려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은 조그마했고, 두꺼비를 닮은 마물이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레피는 익숙한 듯 두꺼비 마물에게 인사를 건네고 서점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자기 멋대로 이것저것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뭔지 알고 고르는 거야?"
"네에. 제가 어렸을 때 봤던 것들이에요. 이 근처에 있는 어린애들도 자주 보는 것들이에요."
일종의 베스트셀러 같은 건가. 이성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레피가 하고 싶은 대로 놔뒀다.
레피는 여기저기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더니, 책 여러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가 알아서 계산을 끝내곤 책 묶음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성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책 묶음을 받아들였다.
"……많네."
책은 여덟 권이었다. 좀 낡아 보이는 책들도 있었고 새것처럼 보이는 책들도 있었다. 레피는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움이 될 거에요. 어린애들이 보는 책인데 설명이 잘 돼있거든요. 여기 다섯 권은 마물들이 보는 책이고, 이 세 권은 마족들이 보는 책이에요."
마물들이 보는 책이 따로 있고 마족들이 보는 책이 따로 있단 말인가. 이성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의 신분제.
레피는 또다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상인 협회라는 곳에 데리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음……."
이성현은 길을 가면서 지나가는 마물들을 관찰했다. 그래도 번화가는 번화간지, 거주 구역보다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조그마한 고블린들, 개를 닮은 마물, 그리고 그가 모르는 마물들이 지나다녔다.
"고블린들은 어딜 가나 보이는 거 같네."
"네? 고블린이요? 아, 지옥 고블린이요?"
"어, 아니. 혼잣말이야. 지옥 고블린?"
혼잣말로 중얼거린 걸 레피가 알아듣곤 뒤돌아봤다.
"아마 지옥 고블린이 마계에서 제일 흔한 마물일 걸요? 제일 약하기도 하지만."
슬픈 이야기였다. 인간계에서도 약한 몬스터에 속했던 고블린은 마계에서도 약했다. 이름만 지옥 고블린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번화가를 한동안 걸어가다 보니 별의별 모습이 다 보였다. 지나가는 이에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마물이나, 시비를 거는 마물, 그런 시비를 거는 마물을 끌고 가는 경비대. 모습만 다를 뿐이지 인간계와 별 차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번화가를 걸어간 이성현의 눈에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 왔어요. 용병 길드."
용병 길드는 번화가에서도 나름 큰 건물이었다. 돌과 나무를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로, 힘 좀 쓰게 생긴 마물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제법 크잖아.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이것저것 다 해요. 전쟁터로 용병들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 영주님이 공고를 내걸면 공고를 붙여두기도 하고. 한 번 들어가 보실래요?"
"아니, 괜찮아. 그것보다 공고라는 걸 보고 싶은데."
레피는 용병 길드의 건물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된 게시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제법 많은 숫자의 종이들이 붙어있었다. 이성현이 종이들을 확인하러 걸어가자 레피가 그를 뒤따랐다.
그는 공고 게시판을 한참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 눈에 띄는 공고 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가스트 산적단 퇴치."
이성현은 레피를 돌아봤다. 때마침 레피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이 공고가 언제 걸렸는지도 알 수 있어?"
"아, 네.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뭐가 궁금하세요?"
"이거. 이 공고 좀 물어보고 와줘."
레피는 이성현이 가리킨 공고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경비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레피는 경비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어제 걸렸대요."
"……어제? 이런."
그때 가스트 산적단이 두 집단의 공격을 받고 궤멸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카스카라는 놈은 가스트가 쫓아냈으니 버텼을 지도 모른다. 이 공고가 어제 걸렸다는 건 아직까지 가스트 산적단이 유지되고 있다는 거겠지.
'부관은 내가 죽였고. 두목이 살아남았나?'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공고의 기한은 일주일 뒤까지였다. 아마도 일주일 뒤까지 사람을 구하고 가스트 산적단을 토벌하러 가는 거겠지.
'……가볼까?'
이전에는 전력상의 도움이 안 되는 노예들과 함께였기에 도망쳐야만 했지만, 제대로 된 토벌대들과 함께 간다면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성현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노인장.'
이성현은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그 동굴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장에겐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빚졌다. 받기만 하고 돌려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장은 바라는 게 없다고 말했지만, 무덤이라도 만들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자기만족일 뿐이라도.
그리고 그를 두 달 동안 노예로 부려먹은 산적단을 박살 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이성현은 공고의 내용을 머릿속에 새겨뒀다.
"왜요, 아저씨? 하려고요?"
"생각 중이야. 여기에 볼일이 있거든."
"……그래요?"
레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곳에 무슨 볼일이 있나 싶었다.
"이제 됐다. 책도 샀으니 돌아가자."
"네, 돌아가요."
이성현은 다시 레피의 손에 이끌려 거주 구역으로 돌아갔다.
* * *
이성현은 자신의 방에서 레피가 추천해준 책을 보고 있었다. 레피가 추천해준 것은 일종의 교과서였다. 어린 마물들이 보는 책. 그리고 몇 개는 마족의 자제들이 보는 귀한 책들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가격이 저렴했고 후자의 경우는 가격이 비쌌다.
"으음……."
문서의 질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게끔 풀어서 쓴 문장과 단어, 그리고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놔서 알아보기가 더 쉬웠다. 책 주제에 더럽게 비쌌지만 비싼 값은 하는 책이었다.
반면에 전자는 그냥 그랬다. 단조롭기 그지 없는 데다가 마족의 자제들이 보는 책과 내용이 다른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닥치는 대로 봤다. 지식이 맞는지 틀린 지는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지식을 습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성현은 어린이들이 보는 책으로 다양한 지식을 배워나갔다. 마계가 만들어진 과정, 먼 과거에 있었던 대개간이라는 역사적인 사건과 마계의 지리, 도덕, 예절 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그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대개간이라는 사건이었다.
마계는 먼 과거에는 말 그대로 동굴이었다. 벽이 막혀있는 갑갑한 동굴. 그런 좁은 동굴에 마신과 마족들이 부둥키면서 살았다고 한다. 마신은 그런 현실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동굴의 벽과 천장을 허물고, 좁은 동굴을 넓혀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굴은 도시가 되었다. 마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시 바깥의 막혀있는 곳을 계속해서 뚫어나가면서 지하를 개간하고, 지금처럼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지하세계를 만들어냈다.
"엄청나군."
거듭 말했지만, 이성현이 보기에 지하 세계인 마계는 인간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무가, 풀이 있고, 도시 바깥에는 해와 달이 뜬다. 작물도 자란다. 바깥으로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지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막힌 곳 없이 탁 트여있다.
그 모든 것에는 마계가 만들어진 초기의 마신과 그 부하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부하 중에는 노인장도 있었겠지.
이성현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중요하다 싶은 부분에 체크 표시를 해두고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어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예절 부분이었다. 인간계에 있을 때부터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예절이었다. 특히 귀족들을 대할 때 그러했다.
예절만 잘 갖춰도 호감을 살 수 있는 경우가 있었으니 잘 배워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필요하다면 상인이나 레피한테 부탁해서 연습하는 것도 괜찮겠지.
"여기 와서 공부만 계속하는 거 같은데.'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지구에 있을 때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이 되고 이제 무엇을 해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이 세계로 끌려왔다.
이렇게 공부하는 노력을 지구에서 썼으면 좋은 대학을 가고도 남았을 텐데. 이성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책을 보면서 또하나 배운 것이 있었다.
바로 진화에 대한 것. 이성현은 진화할 때 종족을 가리지 않고 진화한다. 간티로스라는 계열의 종족에서 핏 워커라는 계열의 종족으로 변화해서 진화했다. 하지만 책에는 일반적으로 마물들은 한 계열의 종족에서만 진화를 반복한다고 나와 있었다.
예를 들자면 고블린 같은 종족들은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10급에서 1급까지 올라가더라도 고블린이라는 종족의 범주 안에서만 진화한다는 것이다. 현재 알려진 가장 높은 등급의 고블린은 4등급이었는데, 그는 고블린 로드라는 이름의 종족이라고 했다.
마물들이 다른 종족으로 진화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4등급에서 3등급으로 오를 때. 즉, 마물에서 마족으로 진화할 때 자신의 종족을 다른 종족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나는 시스템을 사용해서 그런 건가?'
이성현은 시스템을 사용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게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이성현 본인도 아직 잘 알지 못했다.
"후우."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방의 천장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봤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토벌 공고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사실 그의 마음은 전자에 기울어져 있었다. 토벌 공고에 참가하는 것.
노인장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놈들을 박살 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두 달 동안 겪었던 끔찍한 노예 생활은 이성현을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 때 느꼈던 절망감과 무력감, 분노.
노예로 지냈던 생활도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어 이성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놈들을 죽이지 않는 한 이 꺼림칙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은원.'
은혜는 철저히 갚고, 원한에는 철저히 복수한다. 히스토리아에 넘어오고 모험가로 살아오면서 이성현이 자신의 모토로 삼은 것이었다.
"좋아."
이성현은 결의를 다졌다. 용병 길드에서 낸 공고니 참가하려면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인간계에서는 그러했다. 용병이 되려면 별도의 가입비를 내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 거기에 선임 용병과 함께 몇 개의 의뢰를 수행해야만 했고.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려면 그런 작업이 필수였다. 아마도 마계의 용병 길드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상인에게 물어봐야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시스템을 켰다. 무기를 사기 위해서였다.
============================ 작품 후기 ============================
금, 토, 일요일만 한 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편씩 올려볼게요.
요즘 노블레스가 진짜로 미쳤네요. 예전에 올렸을 때는 두 편씩 올리면 됐는데 요즘에는 무슨 기본이 세 편이니..
비축본이 9편 정도 있으니까 비축본이 허락하는 데까지만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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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방인들에게 제공되는 적응 시스템은 사용자에게 인벤토리를 제공한다. 어떤 크기의 물건이든 간에 열 개까지의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일종의 아공간이었는데, 이 아공간에 넣은 물품을 팔 수가 있었다.
시스템에서 제공하는 경매 판매가 있는데, 그걸로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을 가상의 경매장에 올리고 다른 이방인들은 경매장을 살피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매한다. 물건이 판매될 경우 판매자에게 포인트가 대금으로써 지급되고.
그래서 이방인들은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대가를 물건으로 받기도 했다. 마법이 부여된 질 좋은 무구라던가, 뛰어난 명마라던가. 그런 것들은 경매장에 올리면 비싼 값, 포인트에 팔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경매 판매는 포인트를 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의 하나였다.
이성현도 예전에는 자주 이용했었다. 마물이 되고 나서는 인벤토리 안에 들어있던 것들도 죄다 날아간 데다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무기를 사는 것보다는 특전을 구매하는 게 더 급했기에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무기가 하나 있어야 돼.'
가스트를 죽이는 데 쓰든, 용병일을 하는 데 쓰든 간에 쓸만한 무기 하나 정도는 필요한 시점이었다. 계속 상대방이 떨어트리는 싸구려 무기를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마법이 존재하는 히스토리아에는 당연하지만, 마법 부여 기술 역시 발달하여 있었다. 무기나 방어구에 간단한 마법이나 복잡한 마법을 부여하는 건데, 마법의 복잡성과 성능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이성현이 지금 찾는 무기는 강도 강화가 부여된 검이었다. 강도 강화를 하면 검이 잘 부러지지 않았고 날이 잘 빠지지도 않았다. 강도 강화는 굉장히 흔한 마법 부여 중 하나였기에 가격 역시 저렴했다.
2000 포인트 정도면 충분히 구매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성현은 눈앞에 뜬 경매창에서 무기란을 뒤졌다. 2000포인트 남짓한 검. 한참을 뒤지니 몇 개의 검이 보였다.
이성현이 그중에서 눈독을 들인 건 아밍 소드였다. 검끝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테이퍼형 검신의 아밍 소드. 기다란 크로스가드에 고리가 하나 달린 검. 고전적인 군용 검이었지만 가장 사용하기 편한 검이었다.
경매장에서 아밍 소드라 적힌 부분을 누르자 이성현의 눈앞에 아밍 소드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는 홀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이 구매하려는 물건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냥저냥 준수한 수준의 검이었다. 걸려있는 마법 부여는 강도 강화와 샤프니스였다. 샤프니스는 검의 날카로움을 늘려주는 마법 부여였다. 포인트는 1800. 이 정도면 저렴한 가격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성현은 아밍 소드를 사기로 했다. 구매 버튼을 누르자 물품을 구매했다는 말과 함께 포인트가 소비되었고, 그의 인벤토리에 아밍 소드가 옮겨졌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아밍 소드를 빼냈다.
그러자 허공에서 나타나는 검. 이성현은 땅으로 추락하는 아밍 소드를 낚아채고 몇 번 휘둘러봤다.
"나쁘지 않네."
괜찮은 검이었다. 가스트의 도끼가 얼마나 좋은 건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쉽게 부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현을 검을 겁집에 집어넣고 침대 옆에 세워뒀다.
'상급 특전을 구매하는 날은 멀어져만 가는군.'
이성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지만, 가능하다면 포인트는 아껴두고 싶었다. 상급의 특전 하나가 있고 없고가 제법 큰 차이였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이성현은 바로 얘기를 꺼냈다.
"용병 길드에서 공고를 하나 봤었는데요."
"예?"
상인은 스프를 뜨던 숟가락을 멈췄다. 식탁 위에 있던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곤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요?"
"그 공고에 참가하고 싶은데, 뭔가 조건이라도 있습니까?"
"아, 참가하고 싶으시다……. 예, 조건이 있습니다."
상인은 숟가락으로 그릇을 가볍게 두들겼다.
"용병 등록을 하셔야 할 겁니다. 거기 걸린 공고는 용병 길드 소속의 용병들을 위한 거거든요."
"역시. 용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입비가 필요하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시험을 치러야 될 겁니다."
"시험이요?"
이성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용병 길드에 가입하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긴 했다.
"시험이라고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용병 협회의 의뢰 하나를 수행하는 겁니다."
"어려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상인이라서요."
자신의 호리호리한 팔을 으쓱거리면서 상인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용병이라, 흠. 나쁘지는 않죠. 요즘 같은 시기에는 가장 호황인 직업이죠. 좀 위험하긴 하지만요."
"요즘 같은 때 안 위험한 직업이 있습니까?"
이성현의 말에 상인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도시에만 지내는 주민들도 길을 다니다가 살해당하곤 하는 세상인데, 안전한 직업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장비가 필요하시겠군요. 아, 저번에 맡기신 보석값을 어제 받아왔습니다. 지금 드리죠."
상인은 종이 한 장과 함께 마계의 돈, 게헨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종이가 뭔가 싶어서 보니 거래 명세서였다. 이성현은 상인의 철저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시군요. 굳이 이렇게까진 안 하셔도 됐는데."
"돈거래는 철저해야 하니까요. 괜히 돈을 떼먹었다는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흠……."
주머니 안에 든 게헨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성현은 그중에서 어느 정도 덜어내 상인에게 건네줬다. 상인은 처음에는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그가 숙박비 겸 식비라고 하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전에 구매한 책값도 줘야 했고.
"이제 용병 길드로 가실 겁니까?"
식사를 다 끝마쳤을 때, 상인은 그렇게 물었다.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보단 용병이 더 제 체질에 맞는 거 같아서요."
"허어.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상인의 집에서 나온 이성현은 바로 용병 길드로 향했다.
용병 길드의 내부는 단출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장식용으로 놔둔 것 같은 검과 방패가 매달려 있었고, 게시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는 조그마한 접수대가 하나.
그리고 접수대에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이성현에게는 익숙하면서 누구보다도 증오스러운 존재, 엘프. 그 엘프가 타락해서 만들어진 존재, 다크 엘프.
구릿빛 피부에 매혹적이다 못해 고혹적인 몸매는 유려한 라인을 그리고 있고, 얼굴은 다소 날카로워 보이나 누구라도 한 번 보고 나면 반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들은 푸른색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다크 엘프는 특이하게도 붉은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붉은색이 마치 루비를 그대로 녹여놓은 것 같았다.
실제로 용병 길드 내부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마물 몇 마리가 있었는데, 모두가 다크 엘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반면에 다크 엘프는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은 느껴질 테지만 자주 있는 일이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접수대로 걸어가 다크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용병으로 등록하려고 하는데요."
"……등록? 아아, 신입. 응, 자."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더없이 가벼운 여자였다. 다크 엘프는 접수대의 한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이성현에게 건넸다. 이성현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는 이름과 거주지, 등급과 종족명을 적으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이라.'
이성현은 아직 자신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본명인 이성현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자니 마계에서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름이었고, 이런 식의 이름은 이방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이름. 흐음.'
이성현은 머릿속으로 괜찮은 이름을 계속해서 떠올려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다크 엘프는 이름을 적는 란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이성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름 몰라? 이름. 혹시 이름이 없나?"
이성현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벽에는 검과 방패, 그리고 마신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글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마신의 이름.
'가브라헬……, 하고 더럽게 기네.'
마신의 이름은 엄청나게 길었다.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성현은 즉흥적으로 가브라는 이름을 적었다. 마신의 이름의 앞글자만 따온 것이었다. 그가 글자를 적는 걸 한참을 기다리던 다크 엘프는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가브? 가명 냄새가 풀풀 나는데."
"자꾸 성가시게 구는 넌 이름이 뭐지?"
"엘레인. 엘레인 블랙위버. 나쁘지 않은 이름이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름의 뜻을 모르기에 좋다 나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어감은 나쁘지 않았다. 엘레인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볼을 부풀렸다. 이성현은 나머지 란을 다 채워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용병은 보통 무슨 일을 하지?"
"우리?"
엘레인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겼다.
"바깥쪽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지원하러 가거나, 아니면 던전에 용병으로 일하던가. 도시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해결하던가, 필요한 물건들을 배달하거나, 구해주거나."
인간계의 용병이랑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내전이 극심한 시기엔 우리 같은 직업이 가장 호황이지. 여기저기 찾는 데도 많고. 그래서 찾아오는 놈들도 많고. 워낙 되먹지 못한 놈들이 많아서 요즘엔 시험을 치르는 중이지."
"되먹지 못하다……. 인성이 안 좋다는 건가?"
"인성? 우린 그딴거 안 봐."
엘레인은 손톱을 후 불면서 말했다. 말하는 어투가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가 보는 건 당신이 일을 할 수 있나, 없나. 이거뿐이야. 그러니까 시험 대신에 의뢰를 주는 거야. 의뢰를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나를 볼 거거든."
그러면서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글씨가 휘갈기듯 쓰여 있는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마족의 언어로 쓰인 것 같은데, 어차피 이방인은 히스토리아의 모든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깡패를 퇴치해주세요."
"잘 읽네. 이 근방 사람이야?"
이성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러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이 도시가 뒤숭숭해. 치안도 안 좋고. 길 가다가 칼 맞고 지갑 털리거나, 붙들려서 강간당하는 녀석들이 흔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참다못한 사람들이 우리한테 의뢰하는 거지. 날 괴롭힌 이 깡패 놈들을 조져주세요, 하고. 아니면 도시 경비대 측에서 의뢰하던가."
엘레인의 기다란 손가락이 종이를 쓸어내렸다.
"이것도 그런 의뢰 중 하나야. 당신이 해줄 일은 간단해. 종이 뒤를 보면 간단한 지도 하나가 그려져 있을 거야. 거기에 표시되어있는 곳으로 가면 깡패 놈들이 점거한 아지트 하나가 있어."
종이를 뒤집자 그녀의 말대로 이 도시의 지도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다. 친절하게도 현재 있는 용병 길드도 표시되어 있었는데, 목표인 아지트는 용병 길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놈들을 죄다 죽여. 그리고 머리를 가져와. 그러면 난 당신한테 돈을 줄 거고, 용병이란 직위를 줄 거야. 간단하지?"
"간단하군. 마음에 들어."
귀찮게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히 목표물을 죽이기만 하는 의뢰. 이성현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의뢰 중 하나였다. 그는 종이를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놈돌의 등급을 알 수 있나? 몇 놈이나 있는지도."
"제일 높은 놈이 8등급일 거야. 아마 여덟 마리 정도 있을걸. 별로 어렵지 않지?"
"여덟 마리? 그 정도의 인원을 나 혼자서 상대하라고?"
"그래. 필요하면 다른 놈을 구해서 같이 하던가. 그래 봐야 돈이 짜서 같이 하려는 놈이 있을까 싶지만."
이성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악성 재고를 떨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용병들이 잘 하지 않는 의뢰를 입단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떠넘기는 셈이었다.
'뭐, 어쩔 수 없나.'
고작해야 8등급의 마물들에게 질 리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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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성현은 엘레인에게 놈들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놈들이 언제 아지트를 벗어나고, 언제 아지트에 모이는지. 놈들은 네 명씩 무리를 지어서 움직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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