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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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네가 마지막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인간?"
소의 머리와 꼬리를 가진 덩치 큰 마족이 쓰러져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는 옆에 있는 검을 쥐려고 했지만, 마비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생존자.'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는 건가.
'망할 아인종 새끼들.'
남자는 쓰게 웃으며 아인종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이 괴물 새끼들아."
냉정하게 휘둘러지는 할버드.
그렇게, 이성현은 죽었다. 일말의 단말마도 없이, 죽을 때 본다는 주마등도 없이.
허무하게.
[마신의 낙인이 당신의 몸을 집어삼킵니다.]
============================ 작품 후기 ============================
회귀물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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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방인.
히스토리아의 세계에 소환된 지구인들을, 토착민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이방인은 인간, 혹은 아인종의 도시에서 소환되고, 이방인들은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특전과 각종 보물을 포인트로 구매해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토착민.
히스토리아의 세계에 원래 살고 있었던 히스토리아의 사람들을, 이방인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그들은 마족과 아인종과 전쟁 중이며 열세에 처해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방인이라는 존재의 등장은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토착민이 이방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후우."
이성현은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근처의 기사들이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하지만 그 시선에 우호적인 기색은 담겨있지 않았다. 귀족 계층에 속해있는 기사들은 이방인들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귀족을 존경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신분 제도가 사라진 지구에서 평생을 살다 온 이들이기에, 히스토리아의 계급 제도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이방인과 귀족들 사이에는 많은 다툼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그들의 힘은 마족이나 아인종과의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됐고, 병사들이나 기사들의 희생을 줄여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방인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활약 덕분에 작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에게는 평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이방인이 순식간에 귀족이 되어 그들의 경쟁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 참, 뚫어지겠다, 뚫어지겠어.'
망할 귀족 놈들. 이성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귀족 놈들 때문에 병사들도 이방인들을 꺼리는 편이었다. 병사들이야 이방인 덕분에 살아남는 경우가 많아서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귀족들의 눈치 때문에 이방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이방인은 어딜 가든 외톨이 신세라는 거다.
"흐으."
이성현은 새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대륙의 가장 남쪽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법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있음에도 추위는 망토를 뚫고 들어왔고 바람에 살갗이 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혹한기 훈련이라도 하는 느낌이군."
추위에 떨면서 오와 열을 맞춰서 행군하는 건 군대에서 겪는 게 마지막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세계에 와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니. 거의 며칠 동안 이 지긋지긋한 추위에 시달려온 탓에 인내심이 바닥난 그가 투덜거렸다.
"……혹한기? 별로 춥지도 않은데 너무 투덜거리는군. 이방인.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화염 마법을 사용하면 되는 거 아니오?"
그의 옆에 있던 기사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이성현의 시선이 기사의 갑옷을 훑었다. 그는 스터디드 레더 아머를 입고 있었는데, 제법 두터워 보이는 게 꽤 따뜻해 보였다.
거기에 가죽 갑옷의 문제점인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한 보호 마법과 보온 마법까지 부여되어 있었다. 저런 갑옷을 입을 정도의 재력이 있다면 틀림없이 귀족일 것이다. 이성현은 짜증스런 말투로 내뱉었다.
"보온 마법이 걸린 가죽 갑옷을 입는 새끼가 뭔 개소리야."
그는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고, 그걸 본 기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현은 퉁명스런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난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야. 나에 대해서 못 들었나?"
"……못 들었소만."
"그럼 네가 그런 정보도 못 들을 정도로 쓸모없는 잔챙이라는 거지. 됐나? 이제 꺼져."
그는 노골적인 축객령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기사는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면서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근처의 전사가 말리는 탓에 얌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사는 말리는 전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이성현이 그런 기사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전사가 한숨을 내쉬면서 다가오니 이성현이 혀를 찼다.
"말 좀 조심해라. 뭐하러 사서 적을 만드냐, 넌."
"시골뜨기 기사 놈이 주제도 모르고 시비를 거는데, 뭐하러 참고 넘어가? 수도에 있는 귀족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죽겠는데, 여기서까지 당하고 살고 싶진 않다."
"그 심경을 모르는 건 아닌데……."
전사, 김백현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현은 용병 길드 소속의 이방인이다. 용병 길드는 일종의 신분증인 용병 자격증을 부여해주는데, 그 자격증이 있으면 전쟁, 몬스터 사냥, 요인 호위 등의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의뢰를 달성하면 달성할수록 용병의 등급이 올라간다.
현재 히스토리아의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러웠기에 용병 길드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나라든 용병 길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힘은 큰 전력이 되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용병 길드에 속해있는 용병 중 높은 등급에 속하는 이들은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A등급의 용병이었다. A등급의 용병이면 거의 기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게 이방인이라면 더더욱 높은 대접을 받았다. 이성현은 이런 시골 동네에 있는 기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게 귀족의 자제일지라도.
김백현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기사를 말렸다. 괜히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일이 많아 힘든데. 이성현은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놈들은 언제쯤 오는 건데?"
"글쎄다. 정보에 따르면 지금쯤이면 여길 지나갈 텐데. 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김백현은 입김을 내뿜으면서 수풀 밖으로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이성현도 그를 따라 바깥을 살폈다.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고블린과 오크들이 짐이 한가득 든 수레를 호위하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김백현은 다급하게 부대의 지휘관을 불렀다. 우락부락한 신체의 기사가 다가와 몬스터 무리들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은 끝이다. 전투 준비!"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제각각 병장기를 챙겼다. 지휘관은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지시하면 공격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지휘관은 몬스터들이 다가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손을 들어 올렸다.
"공격하라!"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성현 역시 병사들과 함께 뛰쳐나갔다. 수레를 호위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병사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한 님의 이름으로! 이 괴물들을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
병사들 쪽에서 미친 듯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삼십 남짓한 병사들이 육십 남짓한 몬스터들과 충돌했다. 조용했던 숲속은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성현은 어깨에 매달아둔 검집에서 검을 빼내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블린에게 접근했다.
인간의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의 고블린. 작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고블린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를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몸을 낮게 숙인 채, 순식간에 고블린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성현의 허리가 활처럼 크게 휘고 상체가 한쪽으로 젖혀졌다. 이후 발해지는 강력한 베기. 그는 손에 쥔 검에 온몸의 힘을 싣고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일순간 섬광이 번쩍이고, 고블린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이런 놈을 죽이는 것보단…….'
이놈들을 이끄는 대장을 죽이는 게 낫다. 지휘선에 혼란을 주는게 병사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호송대를 이끄는 몬스터들의 대장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한 오크에게 머물렀다. 그는 몇몇 오크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카아! 싸워라! 죽여라! 인간 놈들의 시체를 잡아먹어라!"
유독 덩치가 큰 오크 하나가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외침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었다. 대장급의 오크들이 사용하는 워 크라이였다. 워 크라이를 들은 오크와 고블린들이 거친 함성을 내지르며 더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저놈이군.'
이성현은 손을 귓가로 올렸다. 그리고 팔에 온 힘을 싣고 앞으로 내뻗었다. 그 손끝에서 날카로운 흉기가 쏘아졌다.
쉬익.
스로잉 나이프가 공기를 찢어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쏘아졌다. 쏘아진 스로잉 나이프는 대장을 지키고 있던 오크들의 머리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너무나도 빨라서 미처 반응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머리에 스로잉 나이프가 박힌 오크들이 허무하게 땅으로 허물어졌다. 족장이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려는 순간, 이성현이 다시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서 보기만 해도 불길해지는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마력이 느릿한 속도로 족장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의 영혼의 주인이 명한다. 일어나라."
이성현의 명령이 내려지자 검은 마력이 방금 죽은 오크들에게 쏘아졌다. 검은 마력이 죽은 오크들의 몸 안으로 스며들고, 죽은 오크들의 몸이 누군가가 억지로 일으키는 것처럼 느릿하게 일어났다. 오크 대장은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히 방금 죽은 오크들의 시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시체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신음을 흘렸다.
"으우우……."
"으아아……."
그리고 되살아난 시체들이 오크 대장의 몸을 물어뜯었다.
"뭐, 뭐냐, 이건! 크아아악!"
오크 대장의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려 퍼지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오크들이 오크 대장을 도우려 했다. 허나 오크 대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움을 거부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난 됐다! 흑마법을 부리는 인간이니, 저놈을 먼저 쳐라! 저놈을 죽이면 이 흑마법도 사라질 거다!"
"아, 알겠습니다!"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이성현을 포위했다. 아주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면서 이성현을 조여왔다. 그는 포위망이 좁혀지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어깨에 매달려있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크아아아!"
섬광이 번쩍였다.
제일 먼저 달려든 오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성현을 공격하려던 팔은 찢기듯이 절단되어 단면에서 피를 내뿜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휘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검격에 오크들의 몸이 저절로 굳었다.
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무기로 베어낸 거겠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오크의 피부는 인간의 피부보다 질기고 단단해서 어지간한 힘으론 베어내기 힘들다. 그런 오크를, 별다른 마법도 부여되지 않은 검으로 한 번에 베어내다니.
저 남자가 생각보다 뛰어난 강자라는 증거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압도적인 강자라는 것을 깨달은 오크들이 순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걸 알 리가 없는 오크 대장이 자신을 공격하는 시체들을 상대하면서, 돼지 멱 따는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뭐하냐, 이 멍청이들아! 저 새끼를 죽여! 저놈의 머리를 내 깃발에 장식하겠다!"
그들의 대장은 성격이 포악스럽기로 유명하다. 지금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다음에 죽느니만도 못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오크들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이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가!"
제일 앞에 있는 오크가 머뭇거리자 뒤에 있는 오크들이 독촉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오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그의 뒤를 따라 남은 오크들도 이성현을 향해 돌격했다.
그때, 근처에서 병사들을 지원하고 있던 이방인들이 개입했다. 김백현은 한쪽 어깨를 앞세우면서 온 힘으로 내달려 오크 하나의 옆구리를 들이박았다.
"카악!"
"이놈들이 마지막이다! 죽여라!"
김백현과 다른 이방인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근처의 오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성현은 이방인들을 한 눈으로 흘깃 쳐다봤다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오크들에게 다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힘을 한가득 싣고,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푸욱.
매서운 속도로 쏘아진 찌르기가 오크의 심장부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아니, 으깼다. 심장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오크가 허망하게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 뒤를 따라 돌격하던 오크들은 동료가 저 검사의 일격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멈췄다간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는 대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카아아!"
반쯤 자포자기한 채, 오크들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수직으로 휘둘러지는 검이 머리를 가르고, 일직선으로 내지르는 찌르기가 목을 관통한다. 허물어지는 오크의 시체의 너머에 있는 오크에게 스로잉 나이프를 투척하고, 이성현의 검을 무기로 막아내려는 오크를 무기 채 베어버린다.
"크아!"
그건 단순한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동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하고 있는 이성현의 모습에, 제일 후미에 있던 오크가 비명을 질렀다. 동료들의 목이 베어지고 지지대를 잃은 머리가 허공을 비행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동료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오크 대장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는 손을 덜덜 떨면서 검을 세웠다. 이성현은 온몸을 피로 칠갑한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손에 쥐어져 있는 이가 다 빠진 검에서는, 검신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오크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투검했다. 뱅그르르,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는 검이 오크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어찌나 힘이 가득 실렸는지, 오크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듯이 쓰러졌다.
"칵!"
짧은 신음. 이성현은 걸음을 옮겨, 오크의 목에 박힌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저 너머, 사지에서 피를 흘리면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대장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마지막인 거 같군, 대장."
이성현은 주변에 있는 오크와 고블린들의 시체를 일으켰다. 그걸 본 대장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아침 저녁 하루 두 편씩 올라갑니다.
3====================
데몬 로드
"별 피해 없이 끝났나."
이성현은 주변의 병사들을 돌아봤다. 다친 이들은 있었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그는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뚜둑, 뼛소리가 울렸다.
"고생했다. 실력이 더 늘었던데."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김백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히스토리아에 들어온 지 사 년 차가 되지만, 이성현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김백현 본인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뭔가 고유 특전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이성현이 사용하는 강령술도 시스템의 상점에서는 구매할 수 없는 특전이다. 그가 이 년 차 이방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강해진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김백현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성현은 지휘관 근처에서 사지를 구속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오크 대장을 바라봤다. 그가 제압하고 지휘관에게 넘겨준 몬스터. 오크 대장은 이성현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오크는 영지로 데리고 가나?"
"그래. 적당히 굴려서 정보 좀 빼내야지. 망할 몬스터 놈들. 요즘 이 근방이 뒤숭숭하거든. 한적한 곳이라서 왔더니 개판이야, 아주."
김백현은 오크를 몬스터라고 칭했지만, 몬스터와 아인종 사이의 경계는 굉장히 모호했다. 아인종이라는 말은 인간 외의 종족을 뜻하는 것인데, 몬스터 역시 따지고 보면 인간 외의 종족이기에 아인종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현재 몬스터와 아인종을 구분하는 경계는 인간에게 협조적인가, 아닌가였다. 오크나 고블린 같은 종족은 인간을 적대하기에 몬스터라고 불렀고, 엘프나 드워프 같은 종족은 인간과 손을 잡곤 했기에 아인종이라고 불렀다.
'내가 보기엔 다 같은 몬스터로밖에 안 보이지만.'
이성현은 아인종이라는 종족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용병으로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아인종들의 부정적인 모습들도 많았다.
"바빠서 죽겠다. 망할 귀족 놈은 죽어라 부려먹고."
김백현은 이 영지, 카르한을 다스리는 귀족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성현처럼 용병으로 여기저기 방황하는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김백현처럼 귀족의 밑에 들어가 일하는 이방인들도 많았다. 안정적으로 포인트를 벌 수 있고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김백현과는 다르게 온갖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포인트를 모았지만.
"그웬 성 때문이지?"
김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토리아는 인간과 아인종, 마족 셋이서 치고받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마족을 제외한 인간과 아인종들의 구역에서 소환되고, 인간이나 아인종의 소속이 되어 각자의 나라를 위해 싸운다. 그게 싫으면 이성현처럼 용병이 되는 것이고.
이성현이 있는 곳은 히스토리아의 남쪽의 헤렌이라는 나라로, 그웬 성은 마족들의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함락된 곳이었다. 마족의 침공이 십 년 전쯤에 일어났으니, 꽤 오래된 셈이었다.
"맞아. 젠장, 한참 전에 점령당한 성을 왜 인제 와서 탈환하겠다고 난리들인지. 그놈의 공고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인종들도 많고?"
김백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헤렌은 이번에 아인종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으면서 입을 열었다.
"동맹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동맹을 맺는들 서로를 믿긴 힘들 텐데. 알잖아, 오랫동안 전쟁했던 거."
"그만큼 이번 탈환에 공을 기울인다는 거겠지. 나도 이제 와서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흠, 뭐, 높은 놈들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냐. 너도 거기로 가는 중이었지?"
이성현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웬 성으로 향하던 도중, 안면이 있는 김백현에게 잠시 들렸었다. 그러다가 그가 몬스터 퇴치를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고 있었던 거였고. 그게 아니었으면 바로 그웬 성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 왕이 길드에 의뢰했거든. 통행증도 주더라."
"호, 그래? 대단한데. 그래서, 몸값은?"
"골드. 장비들. 명마 두 필. 작위. 활약상에 따라 추가로 보상도 주고. 일만 잘 풀리면 포인트는 확실히 벌 거 같아."
"근데 그 정도로 주는 걸 보면 위험한 거 아냐?"
"위험하겠지."
그웬 성은 오래전에 함락된 곳이었기에 마족들의 방비 역시 탄탄했다. 긴 세월을 거쳐 탄탄해진 마족들의 방비선은 돌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참, 작년이랑 변한 게 없구먼. 죽을 자리만 골라서 찾아다니는 거."
김백현은 이성현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는 만났을 때부터 저랬다. 미친놈처럼 싸워대고,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를 돌아다니고. 안전한 걸 선호하는 그로서는 위험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이성현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위험한 곳만 찾아다녀서 포인트를 번 덕에 그가 그만큼 빨리 강해졌겠지만.
이성현은 일을 가리지 않는다. 포인트를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히스토리아라는 세계에서 이방인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토착민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이. 히스토리아로 넘어온 초기,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배운 진리 중 하나였다.
"김백현! 어디 있나! 김백현!"
저 뒤에 있던 지휘관이 갑자기 김백현을 찾았다. 김백현은 고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욕을 내뱉었다.
"망할 새끼. 잠잠하다 싶더니 또 불러대는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 출신의 기사들은 괜찮은데,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사람 부리는 게 너무 심했다. 짜증 날 정도로. 이성현은 혀를 찼다.
"가봐야겠다. 나중에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 가기 전에 보상받아가는 거 잊지 말고."
김백현은 그 말을 남기고 지휘관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이성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근처의 모닥불로 걸어가 앉았다. 어차피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 * *
부대와 함께 영지로 귀환한 이성현은 보상을 받고, 대장간에 들려 적당한 검을 하나 사고 난 후 숙박하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방해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요 몇 주 동안 모아온 포인트로 특전의 등급을 올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스템 가동."
[적응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이성현, 환영합니다.]
무기질적인,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홀로그램에는 몇 가지 목록들이 적혀 있었다. 상태 확인, 특전 관리, 물품 관리.
이성현은 그중에서 상태 확인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이번 의뢰를 완료하고 받은 포인트가 얼마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상태 확인이라 적힌 곳을 누르자 안내음이 다시 들렸다.
[사용자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있어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1500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홀로그램이 변했다.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14,000P
·보유 특전
1. 마력순환 (중급)
["가부좌를 튼다고 마력이 잘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무기나 육체에 마력을 두르고 순환시킴으로써 능력을 향상합니다.]
2. 신체 강화 (최상급)
["당신은 인간 병기나 다름없습니다!"]
[신체가 더욱 강인해지고 힘이 늘어나며 더 오래 그리고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3. 검술 (하급)
["일단 검을 꼽으면 꼼짝도 못 할 겁니다."]
[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생깁니다. 검을 조금 잘 다룹니다.]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2. 영혼 흡수 (하급)
["네 영혼은 내 것이다……."]
[마신의 낙인이 당신의 영혼에 남긴 흔적 중 일부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을 흡수해 포인트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는 당신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3. 강령술 (하급)
["겉으로 보면 살아있는 줄 알 겁니다. 정말로요."]
[죽은 이를 다시 일으키는 마법. 등급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시체를 일으킬 수 있으며 시체를 다른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홀로그램에 나타난 자신의 상태를 훑어보던 이성현의 눈이 마신의 낙인이라는 글자가 적힌 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마신의 낙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다른 특전들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그 특전이 뭔지 설명해주는 설명문이 나왔다. 하지만 이 마신의 낙인이라는 특전은 눌러도 어떤 설명문도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왜 생긴 건지."
이성현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특전은 이성현 본인도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모른다. 마신의 낙인이라는 특전이 생기자 고유 특전이라는 새로운 칸이 생겨났고, 부가적으로 영혼 흡수라는 특전과 강령술이라는 특전이 생겨났다.
이 고유 특전이라는 것은 시스템의 특전 구매로는 구매할 수 없는 고유한 특전들을 뜻했다. 특별한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는, 한 마디로 희귀한 특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유 특전은 포인트로 등급을 올릴 수 없었다. 뭔지 알 수 없는 특별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등급이 올라갔다.
고작 이 년 차에 불과한 이성현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이런 고유 특전의 힘이 컸다. 영혼 흡수를 통해서 추가적인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고, 그 포인트를 특전들에 투자해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이성현 외에도 고유 특전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각각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 보였다. 전투든, 마법이든, 학문이든, 뭐든.
'그런 것 치곤 강령술은 너무 계륵이지만.'
강령술은 제약이 너무 많았다. 되살아난 시체는 생전의 힘의 절반에 못 미치는 힘 밖에 못 내고, 지속 시간이 있다. 거기에 조종할 수 있는 시체의 수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충 여덟 개 정도. 사실상 상대방의 발을 묶는 용도밖에 되지 않았다.
"흐음."
이성현은 눈앞에 뜬 홀로그램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특전의 등급은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영웅, 전설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특전의 등급은 시스템에서 포인트를 지불해 상위의 등급으로 올릴 수 있다.
하급에서 중급으로 올리는데 천 포인트가 필요하고, 중급에서 상급으로 올리는데 만 포인트가 필요하며, 상급에서 최상급으로 올리는데 십만 포인트가 필요하다. 최상급에서 영웅으로 올리는 데는 백만 포인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건 특전에 따라서 또 달랐다. 어떤 특적은 배우는데 오백 포인트가 들었고, 그 뒤로 오천, 오만, 오십만, 이런 식으로 증가하는 특전들도 있었다. 이방인들은 특전의 성능에 따라서 구분하는 게 아닌가, 하고 추측했지만 확실한 답은 없었다.
전설 등급은 단순히 포인트를 지불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특전이 아니었다. 영웅 등급의 특전을 가진 이방인이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얻을 수 있는데, 그 조건이 이방인마다 달랐다. 애초에 특전의 등급을 영웅 등급까지 찍은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전설 등급의 특전과 관련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이성현은 검술을 상급까지 올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나.'
최상급 등급의 특전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은 어딜 가든 높은 대접을 받는다. 상급 특전은 그에는 못 미치지만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는다. 지금의 이성현은 어딜 가든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특전을 습득하는 것보다 핵심적인 소수의 특전만을 집중적으로 연마해나가는 그의 선택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이성현은 A등급까지 오를 수 있었다.
"후우."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때, 그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이성현은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한 소녀가 음식이 든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묵고 있는 여관의 종업원이었다. 종업원이래 봤자, 여기 주인장의 딸이지만.
"저, 저기. 저녁 식사, 가지고 왔어요."
소녀는 눈에 띄게 겁에 질려 있었다. 이성현은 그녀에게서 음식 바구니를 받았다. 안에는 딱딱한 빵과 허여멀건 스프가 들어 있었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지만, 이런 싸구려 여관에서 이 이상의 음식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실버 두 개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원래 이런 싸구려 여관에서는 따로 식사를 배달하지 않는다. 이건 이성현이 추가로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해주는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소녀는 실버 두 개를 받으면서 고개를 연신 숙였다.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으려고 했는데,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봤다.
"왜?"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소녀는 이성현이 말을 걸자 까무러치듯이 놀라더니 도망쳐버렸다. 그는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망치는 소녀의 등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귀족은 이방인을 경멸하고, 질투한다. 병사들은 이방인이 크게 활약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길 바란다. 평민들은 이방인을 두려워한다. 이방인들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방황한다.
'정말로 이방인 신세군.'
이성현은 바구니에 있는 빵을 꺼내 한 입 깨물면서 방문을 닫았다. 딱딱한 빵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4====================
데몬 로드
이성현은 다음 날 영지를 떠나 그웬 성 쪽으로 향했다. 헤렌은 그웬 성에서 하루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 야영지를 꾸렸다. 그리고 용병들과 병사들을 야영지로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야영지에 도착한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야영지는 넓게 펼쳐져 있었다. 천막이 먼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야영지를 목책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병사들과 용병들로 가득했다.
그는 바로 근처를 지나가는 병사를 붙잡았다.
"이봐요,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병사는 야영지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천막을 가리켰다. 이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천막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른 천막과 비교해서 유독 화려한 걸로 보아 아무래도 지휘관이 머무는 천막인 듯했다.
이성현은 지휘관 천막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통행증과 함께 징표를 보여줬다. 용병 길드에 속해있는 용병들의 등급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A등급은 이성현의 징표는 고급스럽게 장식된, 금으로 만들어진 징표였다. 병사는 금색으로 빛나는 징표를 보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징표와 통행증을 확인했다.
"지금 회의 중이시라 잠시 기다리셔야 할 거 같습니다. 용병들은 저쪽에 모여 있으니, 저쪽에 가셔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병사는 모닥불이 피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성현과 같은 이방인들이나 토착민 용병들이 모여 있었다. 이성현은 고맙다고 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모닥불에 가까워지자 남쪽 특유의 매서운 추위에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녹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성현은 길게 숨을 내뱉고 근처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의 근처에 있던 용병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도 용병으로 온 거요?"
"……응? 아, 맞아."
남자 용병은 토착민인 것으로 보였다. 용병은 이성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방인인 모양이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그의 장비를 살피더니 흥미없다는 듯 코를 울리고는 모닥불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왔소?"
"수도. 어제까지는 카르한에서 몬스터를 잡았고."
"수도라. 먼 곳에서 오셨군."
용병은 손에 들고 있는 컵을 홀짝이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짙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당신은 언제 왔지? 온 지 얼마 안 됐나?"
"아니. 난 좀 됐수다. 한 열흘 됐나."
"그럼 여기 상황을 좀 알겠군. 전황은 어때?"
용병은 코를 훌쩍이더니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안 좋지."
문뜩 용병이 입고 있는 갑옷에 눈길이 갔다. 가벼운 마법이 걸려있는 두꺼운 가죽 갑옷이었다. 가죽 갑옷은 저지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보통 가죽을 단단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여해서 사용했다. 활동성이 좋아서 용병들이 선호하는 장비였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은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찢어지고, 베이고, 물어뜯긴 흔적이 가득했다. 이성현은 그제야 용병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성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했소. 서로 소모전만 벌이고 있지. 돈을 많이 주니 사람들이 많이 오기는 하지만."
"아인종들이랑 동맹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흥, 말만 동맹이지. 놈들은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싸우는 시늉만 하지. 그것 때문에 괜히 공성전이 더 길어지고 있어. 오늘 놈들의 대표랑 회의를 한다던데, 의미 있는 짓인가 모르겠군."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상황이 안 좋아져도 내 몸 하나는 뺄 수 있겠지. 따뜻하게 데운 술을 연신 홀짝이던 용병은 그를 곁눈질했다.
"당신은 얼마나 받았소?"
"뭐? 보상?"
용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장비들. 말 두 필. 잘하면 더 주겠다더군."
"그것뿐이오? 이방인들은 잘 받는 줄 알았는데."
이성현이 자신이 받는 보상의 가치를 좀 낮춰서 말하자, 용병은 그를 이상한 놈 보듯이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잘 생각해 보쇼. 잘못하면 이방인이라도 죽을 수 있으니.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소."
"음."
"저기 병사가 당신을 부르는군. 용건이 있는 거 같은데."
용병은 턱으로 이성현의 뒤를 가리켰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리니, 방금 통행증을 확인한 병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성현은 용병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휘관 천막으로 걸어갔다.
"회의가 끝났습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죠."
통행증에다가 A등급의 징표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병사의 태도는 꽤 정중했다.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휘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휘관 천막 안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귀족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기사가 셋 있었다. 그는 기사들과 가볍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들여다보니, 그웬 성의 내부 지도로 보이는 것을 가운데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사 중 하나가 천막 안으로 들어온 이성현을 알아챘고, 귀족에게 그를 가리켰다. 귀족은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무래도 그가 지휘관인 모양이었다.
"자네는 누구지?"
"이성현입니다. "
이성현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웬 성을 탈환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을 정도의 귀족이라면 제법 명망 높은 귀족일 것이다. 작위도 제법 높을 테고.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귀족의 눈에 이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갑다. 난 게르그 후작이라고 한다. 이방인들은 예의를 모르는 이들이 많던데, 의외군."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것뿐입니다."
"그런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지. 자네들, 이방인 중에는."
이성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많은 이방인이 히스토리아의 계급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족들과 자주 문제를 일으키곤 했으니까.
"뭐, 이런 얘기는 이방인인 자네 앞에서 해봤자 험담밖에 안 되겠군. 환영하오, 이성현. 자네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네. 빨리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이라던데."
게르그 후작의 짖궃은 농담에 이성현은 쓰게 웃었다. A등급이 되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전쟁터를 가리지 않는 것뿐입니다. 보상만 제대로 준다면요."
"마음에 드는군. 내 약조한 보상은 확실히 주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지금 전황은 어떻습니까?"
게르그 후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좋네. 보급은 한계에 달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고 있지. 아인종들은 도울 기색이 안 보이고. 노움이랑 드워프 놈들은 야영지를 만드는 걸 도와준 이후론 나타나지도 않는군."
"아인종들과 동맹을 맺었다 들었습니다. 어떤 아인종들과 동맹을 맺은 거죠?"
"엘프, 드워프, 노움. 우리처럼 마족들에게 고향을 빼앗긴 이들이지."
이성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맹을 맺은 아인종 중에서 의외의 종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프라니, 정말입니까? 그 종족은 믿을 만한 종족이 못될 텐데요."
"그런가? 엘프 같은 아인종은 많이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그리 믿음직스러운 종족은 아니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알려져 있는데다가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 사이에서 평은 좋은 종족이 엘프였다. 하지만 의뢰 때문에 그들과 만나고 어울렸던 이성현은 그들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자종족 우월주의자들. 그들은 엘프라는 종족이 타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다른 종족들을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 중에서 인간은 더더욱 혐오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역사는 타종족과의 전쟁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닫.
그런 엘프와 동맹을 맺는다는 건 이성현에게는 그리 좋은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독 발린 단검을 등 뒤에 달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지금은 마족들한테 고향을 빼앗긴 신세잖나. 그웬 성을 탈환하는 걸 도와준다면 고향을 되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약조했네. 그동안은 믿을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군요."
이성현은 게르그 후작의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실제로 엘프를 만나보고, 엘프들을 겪어봤던 그로서는 너무 안일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네.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으니까."
헤렌은 갑작스런 마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인해 그웬 성을 빼앗겼다. 그웬 성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른 영토로 갈 수 있는 길목이 되는 곳이었기에 헤렌은 앞으로 상황이 어려워질 거로 생각했다.
허나 어쩐 일인지, 마족은 그웬 성을 빼앗고 난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웬 성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마족들은 그웬 성을 점령하고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지금, 이 기회에 그웬 성을 탈환해야 하네."
"흠. 저야 보상만 준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 용병들에겐 상관없는 일이겠군."
뒤에 있는 기사들이 불만스런 눈빛으로 이성현을 바라봤다. 그들로서는 일개 모험가과 이렇게 길게 문답을 나누고 있는 게르그 후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A급 모험가라고는 하지만.
게르그 후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지도를 손으로 짚었다.
"아인종들과 일정을 맞췄네. 이틀 후에 총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야."
"더는 전쟁을 이어나갈 여력이 안 되니, 단기 결전을 노리는 겁니까?"
"그렇지. 이젠 보급선이 유지가 안 돼. 죽든 살든, 이번 달 안으로는 전쟁을 끝내야 하는 상황이네."
"저는 뭘 해야 합니까?"
게르그 후작은 멋스럽게 자란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포탈을 닫아주게."
"포탈 말입니까?"
"그래. 그웬성 근처에는 세 개의 탑이 있네. 거기에 포탈이 생겼고, 그 포탈에서 마족들이 지속적으로 소환되고 있지. 자네는 그중에서 한 개만 닫아주면 돼. 나머지는 다른 용병들이 처리해줄 거야."
"감시가 심할 텐데요. 탑이면 위로 올라가야 될 텐데, 그러면 놈들의 지원이 오면 버틸 수가 없습니다. 고립돼잖습니까."
게르그 후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웬 성이 있는 부분이었다.
"자네들이 포탈을 닫는 동안 우리는 그웬성을 포위할 걸세. 자네들이 성공하면 합류한 뒤 그웬성을 공격할 거고. 놈들이 지원하지 못하게끔 막을 거야."
이성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마족들은 지하 세계에서 살아간다. 먼 과거, 마신이 마족을 이끌고 인간계를 침공했고 인간들은 아인종들과 힘을 합쳐 마신을 막았다. 패배한 마신은 봉인 당한 채 마족들과 함께 지하 세계로 쫓겨났다.
그 당시의 인간들은 그걸로 마신의 위협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몇백 년 동안 마족은 지하 세계를 개척해 나라를 만들고, 더 나아가 마족들 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마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지하 세계에서만 살았고 인간계로는 나오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십 년 전쯤이었던가. 하지만 세계 곳곳에 포탈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포탈에서 마족과 몬스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족들에 의한 대대적인 침공이 일어난 것이다. 마족들은 순식간에 몇 개의 지역을 점령했다.
마족들은 파죽지세로 다른 지역들을 점령하고, 나라들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침공은 멈췄다. 점령했던 많은 지역을 다시 인간들에게 빼앗기고, 포탈이 있는 지역 만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포탈이라.'
포탈은 마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일종의 매개체인 셈이다. 마족 역시 그런 포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방어선을 갖춘다. 점령했던 다른 지역들은 다 포기하고, 포탈이 있는 지역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 그 증거였다.
"위험하겠군요. 포탈은 누가 닫습니까? 마법이 필요할 텐데. 전 강령술 말곤 다룰 줄 모릅니다."
"걱정말게. 엘프 측에서 지원해주기로 했어. 그들이 닫을 거야."
"흠."
걱정되는 점은 많았다. 아인종들은 믿을 수 없는 종족들이다. 아인종 중에서는 인간과 협력하는 종족들도 있었지만, 협력하지 않는 종족들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종족들. 인간들은 그런 종족들을 아인종이라 부르지 않고 몬스터라고 칭했다. 오크나 고블린 같은 종족들이 대표적인 몬스터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인종과 몬스터의 경계선은 굉장히 모호하고 흐릿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에게 협력적인가, 협력적이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 종족들에게 작전의 성공 여부를 맡기고 있는 한, 이번 탈환은 불안정한 요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해보죠."
그리고 그런 사실은 게르그 후작 역시 잘 알고 있겠지. 이성현은 뒷머리를 긁었다.
5====================
데몬 로드
"고맙네. 잘 부탁하지."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그 후작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엘프들이 연회를 열겠다던데. 참가할 텐가?"
"연회요? 이 상황에 말입니까?"
"음. 오늘 저녁에 아인종의 대표들이 찾아오기로 했거든. 연합군끼리 친목을 다질 겸 간단하게 연회를 열자고 하더군. 지금 병사들도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라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수락했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용병이 오늘 회의가 있다고 했었지. 이성현은 턱을 매만졌다.
"한 번 생각해보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게르그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성현은 지휘관 천막을 나섰다.
"후우."
그리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현대인의 감성을 가진 이가 귀족들과 대면하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게르그 후작 정도의 직위를 가진이라면 더더욱. 이성현이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고 있으려니,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말을 걸어왔다.
"용병분들의 천막은 저쪽입니다. 아무 데나 빈 곳을 쓰시면 됩니다."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짐은 없었지만 일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제법 길어서인지 지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으려니, 문뜩 주변이 소란스러운 게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감탄 섞인 탄성이 들려왔다. 탄성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한 무리의 엘프들이 야영지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엘프.'
한 무리의 엘프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으로 드워프가, 그다음으로는 노움이 들어왔다. 그리고 각 무리의 선두에는 대표로 보이는 이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야영지 안에 있는 병사들은 엘프의 미모를 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이성현은 한 구석으로 물러나 그들의 행진을 지켜봤다. 엘프의 가장 선두에 있는 여자는 아름다운 엘프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미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 엘프는 이성현 역시 잘 알고 있는 엘프였다.
'리프레나.'
엘프 여왕에게 가장 신임받고 있는 사령관. 이성현이 예전에 의뢰 때문에 엮인 적이 있는 엘프였다.
'성격 더러운 년이 왔군.'
그녀는 엘프 중에서 가장 성격이 더럽고 독한 엘프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본성을 잘 숨기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잘 활용하는 여자였다.
리프레나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세운 채 걸어가고 있었다. 이성현은 그 꼴을 혀를 차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리프레나의 시선이 이성현에게로 향했다.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프레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면서 그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성현은 인상을 일그러트리면서 몸을 돌렸다.
"미친년."
저 엘프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는 이를 갈면서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야영지에서 가벼운 연회가 열렸다. 인간은 인간들이 먹는 요리를 해오고, 아인종들은 아인종들이 먹는 요리를 만들어 서로 나눠 먹었다. 그 식사에 술이 곁들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막 안에서 쉬고 있었던 이성현은 잠깐 밖으로 나와 연회를 지켜봤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나치게 술을 마신 병사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고, 다른 병사들은 그런 병사를 비웃으면서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방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방인들도 병사들 틈에 섞여서 먹고 마시면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엘프들은 지금까지 공성전을 도와주지 못한 것을 사죄하면서 인간들과 뒤섞여서 놀고 있었다. 아름다운 엘프들이 옆에서 술을 따라주면서 어울려주자 병사들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작고 귀여운 노움들은 모닥불 근처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게르그 후작이 노움들의 재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는 리프레나가 붙어 있었다. 리프레나는 게르그 후작과 술을 나누면서 가볍게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 술이 맛있군. 이게 엘프들의 전통주요?"
"네, 그렇답니다. 맛이 꽤 괜찮죠? 약초가 들어있어서 건강에도 좋답니다. 숙취도 없구요. 후후."
"으음. 꽤가 아니라 엄청 맛있군. 계속 들어가는데. 이런, 적당히 마셔야 되는데."
게르그 후작은 노움들의 재롱을 지켜보면서 연신 술을 들이켰다. 술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드워프가 안 보이는데.'
엘프랑 노움은 있는데 드워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근처에 있던 병사를 붙잡았다.
"이봐. 드워프는 어디로 갔어?"
"엉? 드워프? 몰라. 준비할 게 있다고 먼저 갔다고 들었는데."
"……그래?"
이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그는 한동안 연회를 지켜보다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그를 한 엘프 여자가 붙잡았다.
"병사님. 저희 엘프들의 전통주랍니다. 한 잔 드셔보시겠어요?"
엘프는 이성현에게 술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됐어. 다른 놈들한테 줘."
"어머, 제가 드리는 술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 마음에 안 들어."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엘프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주변에 있던 병사 하나가 엘프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더니 이성현을 꾸짖었다.
"야! 아름다운 여성 분이 술을 권하는데, 그거 한 잔 마시는게 그렇게 힘드냐!"
"그래, 마셔라, 마셔!"
그 말을 듣자 다른 병사들도 소리 높여 마셔라, 라고 외쳐댔다. 엘프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이성현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에게는 더없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성현이 여전히 술을 마실 생각이 없어보이자, 근처에 있던 이들이 야유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커져서 리프레나와 술을 마시던 게르그 후작이 뒤돌아볼 정도였다.
게르그 후작은 상황을 눈치챘는지, 눈짓으로 그에게 술을 마시라고 전했다. 그가 얼떨결에 그 술잔을 받아들자, 엘프가 꽃이 만개한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망할, 마시고 싶지 않은데.'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몸매. 그러면서도 나올 곳은 나온 몸.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엘프 특유의 아름다운 얼굴. 병사들이 정신을 못 차릴 법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고맙다."
이성현은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엘프가 갑자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다.
"크, 젠장."
"병사님. 다른 분들도 즐겁게 놀고 계시는데, 같이 노시는게 어때요?"
엘프는 은근슬쩍 이성현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이성현은 엘프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내고,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그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이성현의 귀에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현은 한숨을 내쉬고 침낭에 누웠다.
* * *
다음 날 새벽. 이성현은 잠에서 깼다. 시끄러운 폭발 소리가 그를 잠에서 깨웠다.
'……폭발 소리!'
이성현은 다급하게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옆에 놔둔 검을 챙겼다. 그리고 서둘러서 천막 밖으로 나갔고, 경악했다.
"이게, 무슨……."
바깥은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땅을 나뒹굴고 있었고, 아인종들이 그런 병사들을 하나씩 죽이고 있었다. 아인종들은 저녁에 봤을 때보다 숫자가 더 늘어있었고, 저녁에는 안 보였던 드워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대항하고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씩 죽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이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인종들이 이 야영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도망치려면 저 아인종들의 포위를 뚫어야 하는데, 혼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걸음을 옮기려는 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허리를 숙여 확인하니, 거기에는 문자가 새겨진 돌이 있었다.
'룬. 제길, 무슨 글자가 새겨진 건지 모르겠어. 룬 마법은 드워프들의 전매특헌데.'
이성현의 눈에 또 다른 폭발이 들어왔다. 설마 저 폭발이 이 룬 때문인가. 도대체 언제 이 룬을 설치했지하는 의문을 품은 순간, 게르그 후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노움이랑 드워프 놈들은 야영지를 만드는 걸 도와준 이후론 나타나지도 않는군.]
"……설마."
야영지를 만드는 걸 도우면서 룬을 설치했다는 건가?
'그럼 애초부터 동맹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잖아. 젠장, 게르그 후작은 어디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의 귀에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이성현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포이즌 프로그!"
거기에는 사람만 한 크기의 두꺼비들이 있었다. 땅바닥에 혀를 질질 끌면서, 벌어진 입 사이로는 끈적한 침 같은 것을 흘리고 있는 두꺼비. 두 마리의 두꺼비들은 사람처럼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마족인데, 왜 여기에!'
포이즌 프로그들은 혀를 날름거리면서 이성현을 경계하고 있다가, 그가 접근하자 혀를 무기처럼 휘둘렀다. 땅바닥까지 늘어질 정도로 기다란 혀가 채찍처럼 이성현의 몸을 내리쳤다.
"제길!"
이성현은 다급하게 땅을 굴러 채찍 같은 혀를 피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있던 천이 푸시익, 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강한 산성을 가지고 있는 독 두꺼비의 독 때문이었다.
'젠장, 몸뚱아리가 버텨주려나!'
이성현은 이를 빠득 악물며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혀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팔에 힘을 한가득 담아 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동시에 다른 포이즌 프로그에게 스로잉 나이프를 투척했다.
"키아아악!"
그러자 포이즌 프로그가 괴성을 내지르며 끌려왔다. 신체 강화 특전의 효과를 받는 이성현의 힘은 포이즌 프로그가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이즌 프로그를 강제로 끌어와 거리가 좁혀지자, 이성현은 망설임 없이 손에 든 검으로 포이즌 프로그의 혀를 잘라냈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포이즌 프로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입에서 침을 토해내 이성현의 몸을 녹이려고 들었다.
이성현은 순간 멈칫한 포이즌 프로그의 턱 부분을 걷어차 강제로 입을 닫게 하였다. 그리고 땅을 박차 도약하고, 그대로 떨어지듯 포이즌 프로그의 머리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낙하하는 가속도를 더해서 놈의 머리 깊숙이 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하고 검이 막힘 없이 놈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끼이익!"
포이즌 프로그는 짧은 단말마를 남기고 즉사했다. 놈의 몸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축 늘어져 땅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성현은 독 두꺼비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크윽!"
그는 한쪽 손이 아릿하게 저림을 느꼈다. 조금 전 포이즌 프로그의 혀를 붙잡았던 손바닥의 피부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포이즌 프로그의 산성을 띈 독 때문이었다.
이성현은 손의 고통을 씹어 삼키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의 눈에 리프레나가 보였다. 리프레나는 한 남자의 등을 발로 짓밟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게르그 후작!'
리프레나는 게르그 후작을 짓밟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짙은 비웃음이 드러나 있었다.
"후후. 엘프의 전통주는 어땠나요? 말했죠? 숙취는 없을 거라고."
"큭. 제길, 술에 뭔갈 탔……."
"네에. 마비독을 탔죠. 반나절 동안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 거에요."
게르그 후작은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려 리프레나와 눈을 마주쳤다. 리프레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턱을 손으로 붙잡았다.
"무슨, 독이라고? 분명 너희들이 마시는 걸 봤는데!"
"후후. 우리 엘프들에겐 약초지만, 당신네 인간들에겐 독으로 작용하는 식물이 있죠. 그걸 썼답니다."
그녀의 근처에 있던 엘프가 그녀에게 검을 건넸다. 리프레나는 게르그 후작의 목에 검을 겨눴다. 그걸 본 이성현이 게르그 후작을 구하기 위해서 땅을 박차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왜 우리를 배신한 거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거든요. 후작님."
"제안, 이라고? 무슨?"
속도를 높이던 이성현의 발이 갑자기 멈췄다. 갑자기 온몸이 마취된 것처럼 나른해졌다. 이성현은 달리고 있던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땅을 나뒹굴었다. 리프레나가 그를 슬쩍 흘겼다.
"당신들을 죽이면 우리의 고향을 돌려주겠다는 제안, 말이에요."
게르그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 그래서 배신한 건가? 우리를!"
"합리적인 선택을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가장 피를 덜 보는 선택을."
"너희 종족들이 피를 덜 보는 선택이겠지! 인간은, 우리……, 크륵……!"
리프레나의 검이 게르그 후작의 목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이성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검이 게르그 후작의 목을 베었다.
"멍청한 인간들. 거기, 마족 분. 당신 옆에 쓰러져있는 인간을 데려와주겠어요?"
이성현의 옆에는 소의 머리와 꼬리를 가진 마족, 미노타우르스가 서 있었다. 미노타우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성현을 들쳐멨다. 그리고 리프레나의 옆에 쓰레기 버리듯이 내팽개쳤다.
"오랜만이군요, 이성현. 인사했었는데 무시하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
"후후. 물론 아니죠."
조소하는 리프레나의 모습에 이성현은 이를 빠득 갈았다.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나?"
"아뇨. 처음에는 진심으로 협력할 생각이었어요. 마족이 제안하기 전까지는. 아시잖아요? 우리 엘프는, 엘프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는 거."
리프레나는 그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엘프는 잊지 않아. 당신들, 인간이 우리 종족에게 한 짓을. 우리는 되갚아주고 있을 뿐이야. 우리가 당한 짓을."
이성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인간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리프레나는 그의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드워프와 노움이 다가왔다.
"뭐하나, 리프레나. 인간 하나 붙잡고."
"노리개로 삼으려는 건가요? 또 그 악취미적인 취향을?"
드워프의 군대를 이끄는 므뇨르라는 드워프와 카샤안이라는 이름의 노움이었다. 둘은 리프레나가 붙잡고 있는 이성현을 보면서 의아함을 나타냈다. 리프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취향이 악취미긴 한데요. 인간을 상대로 그 짓거리는 하고 싶지가 않네요."
"그럼 뭘하고 있는 건가. 빨리 죽이게. 인간 따위를 살려둘 필요는 없잖나."
"맞아요."
므뇨르든, 카샤안이든. 인간에 대한 증오심은 리프레나와 같은 수준이었다. 인간을 적대하는 둘은 이성현이 빨리 죽기를 바랐다. 리프레나는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둘을 제지했다.
"아뇨, 기다려요. 이 인간이 더 고통스럽게 죽게할 거니까."
"……고통스럽게?"
"지켜보시죠. 그리고 그놈의 머리는 좀 버려요. 왜 들고 다니는 거에요?"
리프레나는 므뇨르의 손에 쥐어져있는 인간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핀잔을 줬다. 므뇨르는 인간의 머리를 쥔 손에 힘을 한가득 실어 터트렸다. 둘은 리프레나와 함께, 인간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병장기 소리가 멈추고, 인간의 비명이 멎었을 때. 리프레나는 옆에 있던 미노타우르스에게 손짓을 했다.
"이 인간이 마지막이죠?"
"그렇다. 포로로 삼을 건가?"
리프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잔혹한 미소를 띠면서 이성현의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죽이세요."
미노타우르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인간?"
미노타우르스가 쓰러져있는 이성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성현은 옆에 있는 검을 쥐려고 했지만, 독에 마비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생존자.'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는 건가. 이성현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리프레나, 므뇨르, 카샤안. 엘프, 드워프, 노움.
'망할 아인종 새끼들.'
그는 쓰게 웃으며 리프레나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이 괴물 새끼들아."
냉정하게 휘둘러지는 할버드.
그렇게, 이성현은 죽었다. 일말의 단말마도 없이, 죽을 때 본다는 주마등도 없이.
허무하게.
[마신의 낙인이 당신의 몸을 집어 삼킵니다.]
============================ 작품 후기 ============================
늦잠 자서 늦었습니다;
이번 편은 에피소드 하나를 더 넣으려다가 그냥 질질 끄는 것 같아서 전개시켰습니다.
6====================
데몬 로드
[강해져라. 약탈해라. 진화해라.]
[마계를 하나로 만들어라.]
[그리고, 나를 찾아라.]
* * *
"……헉!"
이성현은 기함하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 안의 살점을 벌레가 갉아먹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무력감이었다.
"난, 분명히 죽었는데."
죽기 전, 미노타우르스의 할버드가 목을 내리찍는 끔찍한 촉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성현은 자신이 죽었음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자신은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살아있다?"
그는 목소리를 내뱉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그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기묘할 정도로 높은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가……."
이성현은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랜턴이 밝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막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던 그의 눈에 자신의 손이 들어왔다. 거뭇한 피부. 날카롭게 자란 손톱. 당연하지만 이성현의 손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이건……."
거적때기나 다를 바 없는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는 하반신. 작은 키와 빈약한 몸. 찢어진 천 틈새로 검은 털이 삐져나와 있다. 이성현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금니가 도드라지는 날카로운 이빨. 이마의 양쪽에는 작은 뿔이 솟아나 있다. 이 생김새는 그에게 익숙한 생김새였다.
"간티로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마족의 생김새였다. 크게 당황한 이성현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마신의 낙인 특전이 조건을 만족해 발동되었습니다. 마물, 간티로스로 환생합니다.]
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죽기 전에 시스템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마신의 낙인이 발동했다는 거였나.
"이게 무슨, 뭔 개소리야."
그는 어지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혼란스러운 기억을 필사적으로 정리했다.
'우선, 난 죽었다.'
그건 확실하다. 죽기 전의 광경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프의 모습. 내 목을 내리치는 미노타우르스의 할버드.
'그리고 깨어나 보니 간티로스가 됐다.'
환생? 빙의? 온갖 단어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성현은 침착하게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머리의 통증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으윽……."
이성현은 묘하게 아파지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처음에는 어지럽던 게 이제는 아프기 시작했다. 그가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고통에 신음하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를 찾아라.]
"미친, 환청이라도 듣는 거야, 뭐야! 큭……!"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엄청난 두통이 찾아왔다. 이성현은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신음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땅에 연신 머리를 박을 정도였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으리라.]
"이런 개같……. 아악! 흐, 좋아. 해줄게!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이 망할 새끼야!"
이성현이 그렇게 고함을 내지르자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두통이 사라졌다.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그는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제길,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두통은 사라졌지만 바로 일어날 순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성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 있던 홀로그램이 다른 메시지를 띄웠다. 그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새로 나타난 메시지를 읽었다. 그의 귀로 시스템의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종족이 변화하면서 시스템의 메뉴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변화가 생겼다고?'
이성현은 눈을 찌푸렸다. 일단 확인해보자는 생각에 그는 입을 열었다.
"시스템 가동."
익숙한 말. 하지만 익숙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는 시스템의 메뉴를 확인했다.
- 상태 확인
- 종족 관리
- 특전 관리
- 물품 관리
종족 관리. 이성현은 종족 관리라고 쓰인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나타나는 새로운 화면. 그의 눈이 커졌다.
·현재 종족 : 간티로스 (10등급)
·보유 정수 : 0
·진화 가능 종족 : 간티로스 씨어 (9등급)
눈앞에 나타난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수는 뭐고, 진화 가능한 종족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인간계에서 마족에 대한 지식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10등급이면 높은 거야, 낮은 거야? 아니, 낮은 거겠군.'
간티로스는 그가 상대해본 적이 있는 마족이었다. 마족 중에서도 최약체의 마족. 잡졸 중의 잡졸. 히스토리아로 소환된 지 얼마 안 된 이방인들도 어느 정도의 수련을 거치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녀석이었다. 그걸 생각해본다면 10등급은 최하 등급이거나 그에 준하는 등급일 것이다.
'그럼 올라갈수록 높은 등급이라는 건데. 젠장.'
이성현은 종족 관리를 끄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새로 나타난 화면을 본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0P
·보유 특전
1. 신체 강화 (하급)
["당신은 인간 병기나 다름없습니다!"]
[신체가 조금 강인해집니다.]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2. 영혼 흡수 (하급)
["네 영혼은 내 것이다……."]
[마신의 낙인이 당신의 영혼에 남긴 흔적 중 일부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을 흡수해 포인트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는 당신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3. 강령술 (하급)
["겉으로 보면 살아있는 줄 알 겁니다. 정말로요."
[죽은 이를 다시 일으키는 마법. 등급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시체를 일으킬 수 있으며 시체를 다른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종족 특전
1. 악의의 손톱
[간티로스는 길게 자란 날카로운 손톱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이 손톱은 부서져도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자라납니다. 손톱의 길이는 자유롭게 늘이고 줄일 수 있습니다.]
"하……."
가지고 있던 특전을 모두 잃었다. 남은 건 하급의 신체 강화뿐. 아까부터 몸에서 느껴지던 무력감은 특전을 잃었기 때문이었나. 신체 강화는 특전 중에서 등급을 올릴 때마다 성능이 변화하는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특전 중 하나였다.
하급과 중급, 중급과 상급의 성능이 크게 차이가 나고, 그걸 사용자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 하급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상급의 신체 강화를 가지고 있다가 하급의 신체 강화를 가지게 되니 무력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온몸에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쟁터를 뒹굴면서 악착같이 벌었던 포인트와 특전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허탈감이 느껴졌다.
'마신의 낙인 설명은 또 왜 이래?'
아무 설명도 없던 마신의 낙인에 설명문이 생겨 있었다. 그 설명문은 이성현에게 익숙한 문구였다. 니체의 인용구 중 하나였다. 지구의 사람인 니체의 인용구가 히스토리아의 시스템에 왜 적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적응 시스템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으니까.
"……제길."
이성현은 허탈해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돌로 된 벽이었다. 천장에 있는 조명이 약한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누더기처럼 헤진 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동굴 같은 곳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습기가 피부로 전해졌다.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동굴? 던전에서 이런 냄새를 맡이 맡았었는데.'
이성현은 무릎을 구부려 바닥의 천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악!"
"이 새끼, 이런 데서 농땡이나 부리고 앉았어!"
그는 아픈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박쥐의 얼굴과 날개를 가진 작은 체구의 마족, 래트뱃이 두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 노예 새끼야! 안 일어나면 내 손으로 죽을 줄 알아라!"
이성현은 무슨 일인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래트뱃의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했기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래트뱃 따위는 가볍게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이 육체의 성능도 제대로 몰랐을뿐더러 상황 파악도 안 된 상황이었기에 래트뱃의 말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래트뱃은 이성현의 팔을 붙잡고 끌고 나가려다가 안색을 굳혔다. 그는 이성현의 발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족쇄는 어쨌냐? 설마 탈옥하려고 했던 거냐?"
이성현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당연하지만 족쇄 같은 건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니, 어디서 구했는지 래트뱃이 그의 발목에 족쇄를 덜컥 채웠다.
"이번은 봐준다.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공개처형이야. 네 얼굴, 기억해뒀어."
위협적인 말에 이성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래트뱃은 족쇄에 달린 쇠사슬을 잡아 이성현을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는 손목의 압박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끌려나갔다.
'동굴? 아니, 여긴…….'
이성현은 래트뱃에게 끌려가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숙소 같아 보이는 동굴을 나오니 제법 넓게 트인 공동이 나왔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마족들이 곡괭이로 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뭘 두들기고 있나 싶어 안력을 집중해보니, 광석 같은 것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광산이잖아.'
래트뱃은 이성현을 한참 동안 끌고 다녔다. 넓은 공동을 지나고 좁은 터널을 지나,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성현을 그 안으로 밀어 넣고 곡괭이를 하나 던져줬다. 그는 곡괭이를 받아들고 래트뱃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기서 일해! 오늘 할당량은 광물 스무개다. 못 채우면 밥은 없을 줄 알아!"
래트뱃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이성현은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더러 광물을 캐라는 거야?"
그는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아인종들의 배신으로 죽어서 마족으로 환생했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 되는데 이젠 광물을 캐란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었다. 그가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자 그가 오기 전부터 광물을 캐고 있던 마족이 말을 걸어왔다.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군."
이성현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기묘한 짐승이 있었다. 늑대처럼 생겼지만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인간과 비슷하지만 기과하게 비틀려있는 몸. 이성현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눈앞의 짐승이 무슨 마족인지 알 수 없었다.
짐승은 이성현의 가슴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장이 있는 부분. 짐승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짐승은 다시 곡괭이를 휘둘렀다.
"이보게, 젊은 친구. 빨리 일하지 않으면 할당량을 못 채울 거야. 서두르게."
"할당량……. 할당량을 못 채우면 불이익이라도 있습니까?"
"불이익? 뭐야, 신입인가? 운도 없군."
짐승은 크게 혀를 찼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밥을 못 먹어. 밥이래 봤자 스프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액체밖에 안 주지만. 그리고 감독관들이 두들겨 팰 거다. 며칠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곡괭이를 휘두르는 게 나을 걸."
"……여긴 어디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나? 이런, 자다가 납치라도 당했나?"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가스트 산적단이 점령한 광산이야. 자기 산적단의 이름을 따서 가스트 광산이라고 이름을 지었지."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겁니까?"
"놈들에게 붙잡힌 노예니까.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고."
짐승은 일그러진 얼굴에 쓴웃음을 띄웠다. 그는 말하는 동안에도 팔을 쉬지 않고 놀리고 있었다. 깡, 깡. 곡괭이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동굴을 울렸다.
"환영하네. 짐승만도 못한 노예가 된걸."
짐승은 곡괭이질을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가스트 광산에서 탈출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네나 나나, 죽을 때까지 여기서 곡괭이질이나 해야 하는 신세라는 거지."
이성현은 곡괭이를 움켜잡은 채, 허망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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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그 짐승의 말대로였다. 가스트 광산은 지옥 그 자체였다. 매일 같이 채광을 하고, 매일 저녁 감시관들에게 채광량을 확인받는다. 감독관이 미리 정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면 저녁 대신에 몽둥이찜질을 받아야 했다.
이성현은 자신이 부활한 이유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감독관의 몽둥이가 무서워서 몸을 움츠려야 했고, 허여멀건한 물인지 스프인지 알 수 없는 음식를 먹으려고 필사적으로 광산을 캐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광석이 뭔지 구분할 줄 몰라서 곡괭이로 광석을 깨 먹었다가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지독한 경험이었다. 그 끔찍한 경험 때문에 채광에 좀 더 능숙해지게 됐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화위복은 개뿔이.'
이성현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욕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이유는 말할 기운조차 없어서였다. 강인한 신체 특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하급의 특전은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었기에, 그냥 몸에 약간 활력이 도는 정도였다. 그는 순수하게 10등급의 마족, 아니, 마물인 간티로스의 힘으로 채광을 해나가는 중이었다.
코를 타고 흐르는 땀이 이성현의 입가를 적셨다. 그는 혀를 날름거려 땀을 핥았다. 이 광산으로 들어온 지 어느새 일주일. 이 마계가 무슨 세계인지, 어떤 구조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작업이 끝나고 나면 온몸이 물을 머금은 솜처럼 무거워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는 것밖에 없었다. 그건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덜 피곤해서 누군가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깨어있는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몇 가지 알게 된 건 있다. 마족, 마수, 마물이라는 개념.
이성현은 마족이 모든 마계의 생물을 통틀어서 칭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족은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등급이 있고, 그 등급은 태어날 때마다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높은 등급으로 태어나 금수저 같은 인생, 아니, 마생을 누리는 이들이 있었고, 이성현처럼 낮은 등급으로 태어나 흙수저를 넘어 모래수저 같은 인생을 누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흙수저의 인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정수라는 것을 모아야 한다. 모든 마족은 정수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죽을 때 그 정수를 토해낸다. 토해낸 정수는 그 마족을 죽인 이에게 자동으로 흘러들어 가고. 다만 그 와중에 상당량의 정수는 허공에 흩어지고, 소량의 정수 만이 흘러들어 온다.
그렇게 모은 정수가 일정량에 도달하면 다음 등급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낮은 등급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드물다고 했다. 정수를 모으는 방법은 전쟁이나 전투 뿐인데, 낮은 등급의 마물은 도중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흙수저는 평생 흙수저란 말인가.'
지구에서나 느꼈던 계급 이론을 이런 곳에서까지 느끼다니. 이 세계에는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를 부르는 칭호도 따로 있었다.
1~3등급의 금수저는 마족이라고 불렀다. 마계의 생물은 대부분 고유한 능력을 가진다. 시스템은 종족 특전이라고 부르는 능력이었는데, 마족들은 굉장히 강력한 종족 특전을 가지고 있었고 육체의 성능도 아랫등급의 것들과 비교해서 우월했다. 그들은 이 지하 세계의 귀족으로 군림했다.
거기에 대부분의 마족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족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외모가 무엇인지는 짐작도 안 갔지만.
4~10등급의 이들은 마물이라고 불렀다. 같은 마물이지만 그 안에서도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
4~7등급의 이들은 소위 말하는 은수저다. 적당히 쓸만한 종족 특전에 적당하게 강한 몸을 가진 종족이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어느 정도의 활약은 할 수 있었기에 간혹 마족으로 진화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마생역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8~10등급은 흙수저였다. 있으나 마나 한 종족 특전에 탁 치면 억하고 죽는 허약한 몸을 가진 종족, 그게 바로 이 등급의 마물이었다. 대다수의 마물은 평생을 마물로써 흙수저 라이프를 즐기다가 죽는다. 마물이 4~7등급까지 올라간 경우는 거의 없었고, 마족으로 올라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성현은 10등급의 마물이었다. 마물 중에서도 최약체인 10등급.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기가 차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것도 서러운데, 죽고 나니 가지고 있던 모든 특전을 잃은 데다가 최약체의 몸으로 태어났다. 누가 그를 살려냈는지는 몰라도, 이런 몸으로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짐작조차 안 갔다.
'마신의 낙인이라고 했으니 마신인가? 그럼 좀 좋은 몸으로 부활시켜줄 것이지.'
왜 하필 10등급이란 말인가. 조금이라도 높은 등급으로 부활했다면 희망이라도 있었을 텐데.
'시스템의 특전을 이용하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성현이 인간일 때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미친놈처럼 전쟁터를 굴러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영혼 흡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포인트를 쓸어담을 수 있었다. 근데 지금은 전쟁터는 커녕 광산에 처박혀서 노예 짓이나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날이 캄캄하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갇혀있던 일주일, 아니, 정확하게는 일주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 동안 이성현은 끝도 없이 불안해지고 우울해졌다.
횃불이나 등 몇 개 만이 불을 밝히는 어두컴컴한 광산에서 종일 곡괭이질만 하고, 두들겨 맞고, 음식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스프 만을 먹고 있으니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도망칠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산은 생각보다 경비가 탄탄했다. 감독관들이 노예들을 상시 살피고 있었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경비가 지키고 있었다. 여길 나가려면 이성현이 그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가져야 한다.
이성현은 시스템을 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총 300. 일주일 동안 곡괭이질을 하면서 모은 포인트였다. 이방인은 무슨 활동을 하든 포인트를 얻는다. 얼핏 보면 많이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종일 곡괭이질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 없이 적은 양이었다.
'포인트를 모을 방법도, 탈출할 방법도 없군.'
일단 한동안 이 노예 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성현이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니, 그의 옆에서 일하고 있던 짐승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그리 한숨을 쉬나, 젊은 친구."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요."
이 광산이 어디인지 그에게 알려준 그 짐승이었다. 그리고 이성현이 지금까지 얻은 지식의 출처가 바로 그였다. 이성현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봤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없다고 했다. 원래는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던가.
그래서 이성현은 그를 노인장이라고 불렀다. 말하는 투나 느껴지는 분위기나 오래 산 노인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 마물이라는 게 신기했지만.
"포기하면 편해질 거야. 여기 처음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자네처럼 굴지. 그러다가 포기하고."
"……노인장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겁니까?"
"나 말인가? 글쎄. 난 정말 오랫동안 있었다네. 정말 오랫동안."
"오랫동안이요? 가스트 산적단이란 놈들이 여길 점령한 게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가스트 산적단이 이 광산을 점령한 건 이제 일 년 정도 됐다. 그렇기에 노인장의 말이 잘 이해가 안 갔다. 노인장은 이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며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깡! 깡!
"오, 광석이군."
"축하하네."
이성현은 광석을 캐내 뒤에 있는 수레에 실었다. 오늘의 할당량은 스무개였다. 지금까지 열한 개를 캤으니, 지금의 페이스대로 캔다면 무난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워봐야 거지 같은 스프나 먹을 뿐이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왔군요."
이성현은 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에 비하면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그와 노인장이 그만큼 곡괭이질을 열심히 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광석을 캐기 위해서 돌을 부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이 길어진 것이다.
"노인장. 이 광석은 뭐하는 광석이죠?"
이성현은 막 캐낸 광석을 들어 올렸다. 은은한 보랏빛을 붐어내는 광석은 얼핏 보면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인장은 광석 하나를 수레에 넣으면서 말했다.
"라테나이트라고 하네. 가공하면 마족들의 정수를 담을 수 있는 정수석이 되지."
"정수석이라. 이름 참 단순하게 지었군요."
"마족들은 이름 짓는 게 형편없거든. 뭐, 단순해서 알아듣기 좋잖나."
"그렇긴 하겠네요. 흐음, 정수를 담을 수도 있다니."
노인장은 계속해서 곡괭이질을 이어나갔다. 개의 주둥아리와 비슷한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수는 돌이나 보석에 담을 수 있네. 평범한 돌에도 담을 수 있긴 한데, 그러면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정수가 허공에 흩어지지. 대신에 보석에 담으면 그렇게 흩어지는 정수가 줄어들고. 질 좋은 보석이면 별다른 손실 없이 담을 수 있지."
"이 라테나이트도 보석 같은 겁니까?"
"가공하면 보석 비스름하게 생기긴 했지만 보석은 아니야. 보석처럼 거의 손실 없이 정수를 옮길 수 있긴 하지. 가격도 보석에 비하면 저렴하고 말이야. 일반적으로 정수를 옮길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광석이네."
노인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노인장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한 번 말을 걸면 멈추기 전까지는 쉴 새 없이 말하곤 했다.
노인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돌에 담은 정수는 마족들에게 팔아서 게헨이라는 마계의 화폐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수는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돌 같은 경우에는 적은 양의 정수만 옮길 수 있고, 라테나이트는 중간 정도의 양을, 보석은 많은 양의 정수를 옮길 수 있었다.
그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보석에 정수를 담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그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됐다. 많은 정수를 옮기기 위해서는 보석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적당한 양의 정수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옮기려면 정수석을 사용하는 거고.
"어차피 우리하곤 관계없는 일이지만."
"그렇네요. 당장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센데. 노인장은 나가고 싶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여기 계셨으면 답답할 법도 한데."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런 감정도 무뎌져. 한때의 바램도, 다짐도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이성현은 곡괭이질을 하다 말고 노인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노인장의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엿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검은 눈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노인장은 이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노인장은 종종 저런 식으로 이성현을 관찰하곤 했다. 마치 그를을 평가하고, 품평하는 것처럼.
"자네는 나가고 싶나?"
"예. 누군들 안 나가고 싶겠습니까? 게다가 전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해야 될 일이라. 해야 될 일이 있어도, 10등급의 마물의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살다 보면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여기를 탈출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죠."
노인장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지, 살다 보면 방법이 있겠지. 걱정 말게. 자네는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언제는 자네나 나나 죽을 때까지 곡괭이질이나 해야 되는 신세라더니?"
"흐흐, 난 귀가 밝거든. 기다려보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는 찾아올 거야."
이성현이 그 말의 뜻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감독관이 들어왔다. 감독관은 이성현과 노인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보더니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일하랬더니 이야기나 처하고 있어? 여기가 놀이턴 줄 알아!"
감독관은 늘 다니고 다니는 채찍으로 이성현의 등을 후려쳤다. 짝,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끔찍한 통증이 등을 타고 전해져왔다. 이성현은 신음을 씹어삼키면서 곡괭이질을 다시 시작했다.
'망할 박쥐 새끼. 저 새끼는 내가 죽이고 만다.'
그 감독관은 이성현을 여기로 데리고 온 래트뱃이었다. 래트뱃은 이성현을 유심히 지켜보겠다는 자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켰다. 속된 말로 찍혔다고 할까. 래트뱃은 이성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채찍으로 그를 두들겨 팼다.
"똑바로 일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여버릴 테니까!"
"크윽!"
또다시 등을 내리치는 채찍. 이성현은 래트뱃 감독관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면서, 분노의 곡괭이질을 이어나갔다.
============================ 작품 후기 ============================
등급 설정을 수정 전의 걸로 올려서 바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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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그리고 이 개월이 지났다.
이젠 광산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곡괭이질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서 감독관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잘하게 되었다. 물론 칭찬을 한다고 해서 때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이! 무능한! 노예 새끼가!"
"크윽……!"
다만 래트뱃 감독관의 무자비한 폭력은 여전했다.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 래트뱃 감독관은 사소한 것을 빌미로 이성현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무자비한 채찍질이 이어졌다. 채찍이 이성현의 등을 후려치고, 살점이 터져나갔다.
"똑바로 일하라고! 밥 처먹는 값을 하란 말이다! 10등급 쓰레기 마물 새끼야!"
"아악!"
신음을 억누르던 이성현은 결국 비명을 터트렸다. 그 뒤로도 래트뱃 감독관은 계속해서 이성현을 두들겨팼고, 어느 정도 만족하고 나서야 떠났다.
"넌 볼때마다 마음에 안 들어. 기다려라, 기회만 생기면 내가 죽여줄 테니까."
'망할 새끼.'
이성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래트뱃 감독관이 그를 두들겨 패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보통 자기가 누군가한테 욕 먹었거나 갈굼을 당했을 때, 화풀이할 용도로 그을 불러서 채찍질했다.
'개 같은 새끼.'
이성현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광산 노예들의 숙소였다. 숙소래 봐야 거창할 건 없다. 그냥 광산에서 벽을 파내 동그란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누적 데기 같은 천을 이불이랍시고 던져놓은 정도다.
거기에 노예들을 억지로 욱여넣는다. 마치 돼지우리에 돼지들을 밀어 넣는 것처럼. 그것 때문에 잘 때마다 불편하게 몸을 웅크린 채 잠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면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피곤하니 불편함이고 뭐고 간에 기절하듯이 잠들 수 있었다.
이불은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데다가 너무 얇아서 덮어도 따뜻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광산의 저녁은 이상하게 추워서 이런 이불조차 아쉬운 상황이었다.
보통 광산은 덥기 마련인데 추운 게 이상해서 노인장에게 물어봤더니, 노인장은 라테나이트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테나이트는 차가운 기운을 가지고 있는데, 평소에는 그 기운을 주변으로 내뿜는다고 한다. 그래서 광산에 한기가 감도는 것이었다.
'개 같은 라테나이트.'
온 마계에 있는 라테나이트라는 라테나이트는 죄다 모아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요 두 달 동안 얼마나 많은 라테나이트를 캤던가. 그 라테나이트를 팔았으면 진작에 부자가 됐을 것이다. 망할.
이성현은 욕을 내뱉으면서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리고 늘 하듯이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을 확인하는 건 무료한 광산 생활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500P
·보유 특전
1. 신체 강화 (중급)
["당신은 인간 병기나 다름없습니다!"]
[신체가 강인해지고 힘이 늘어나며 재빨라지고 좀더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2. 생기발랄 (중급)
["당신은 건강함 그 자체입니다!"]
[신체의 재생력이 향상됩니다. 몸의 피로가 빠르게 회복되고, 상처의 재생 속도가 빨라집니다.]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2. 영혼 흡수 (하급)
3. 강령술 (하급)
·종족 특전
1. 악의의 손톱
이성현은 두 달 동안 곡괭이질을 하면서 번 포인트를 신체 강화와 생기발랄에 투자했다. 두 달 동안 번 포인트는 2700 정도였는데, 딱 두 개의 특전을 중급까지 올릴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고 500 포인트가 남았지만, 하급의 특전은 사봐야 의미도 없었기에 남겨뒀다. 적어도 중급의 특전까지 올릴 수 있는 만큼의 포인트는 모으고 난 뒤에 살 생각이었다.
이성현이 광산의 생활에서 익숙해지게 된 데에는 이 두 가지 특전의 영향이 컸다. 신체 강화 특전 덕분에 곡괭이질을 좀 더 오랫동안, 그리고 빠르게 할 수 있었고 생기발랄 특전 덕분에 지친 몸이 좀 더 빠르게 회복됐다. 감독관에게 맞아서 나는 상처가 빠르게 재생되는 건 덤이었다.
"이런 특전들을 곡괭이질이나 하는 데 쓰고 있다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새로운 특전들도 배웠겠다, 탈출을 도모해볼까 해서 몇 주간 탈출 방법을 고민했지만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일차적인 문제는 경비랑 감독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돈을 벌어다 주는 광산이라서 그런지 방어가 꽤 튼튼했다. 광산 안에는 상시 여섯 명 이상의 감독관이 있었고, 거기에 경비들까지 지키고 있었다.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다음 문제는 간티로스의 육체가 너무나도 구리다는 것이었다. 방어가 튼튼하므로 탈출은 불가능하니, 남은 방법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탈출하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간티로스는 너무나도 약했다. 중급의 특전으로도 감당이 안될 정도로.
특전은 신체의 성능을 올려준다. 하지만 그건 절댓값이 아니다. 신체의 성능을 딱 정해진 만큼의 고정값으로 올려주는 게 아니라 퍼센트로 올려준다. 신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능력치를 퍼센트로 계산해서 올려주는 것이다.
애초에 신체의 능력치가 너무나도 낮은 간티로스는 특전을 배워도, 고정값이 낮기에 그 효율이 너무나도 떨어졌다. 예전에 인간일 때는 중급의 특전을 배웠을 때 제법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정말 쓰레기 같은 몸이야.'
이성현은 손톱을 길게 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광산 내에서 무기 소지는 엄금되어 있기에 가지고 있는 공격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으려니, 옆에서 자고 있던 노인장이 깨어났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나."
"우울해서요. 사육되는 동물의 기분이 이럴까요. 신나게 채찍질 당하고 오니 더 기분이 더럽군요."
"사육되는 동물이라면 주인의 사랑도 받고, 제대로 된 밥도 먹을 수 있지 않겠나.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가축이지."
"현실을 깨닫게 되는 냉정한 말이군요. 후우."
두 달. 두 달의 시간 동안 햇빛이라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음울한 동굴에 갇혀서 곡괭이질만 해댈 뿐이었다. 햇빛에 익숙한 이성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언젠간 방법이 생기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버티고 있었지만 그 희망도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다.
이성현은 눈가를 매만졌다.
'제길, 이 동굴에 있으면 잡생각만 느는군.'
곡괭이질을 하다 보면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아마 노인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한계가 왔을 것이다. 그나마 노인장이 얘기 상대가 되어주니 버티는 거였지.
"그나마 우연히 만난 게 당신이라서 다행입니다. 노인장이 없었으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거에요."
"우연? 흐흐."
노인장은 이성현의 말을 듣더니 재밌다는 듯 웃었다.
"세상에 우연은 없네, 젊은 친구. 자네가 여기에 온 것도, 자네가 나와 만난 것도. 모든 것은 필연이고, 운명이지."
"또 시작입니까? 노인장은 가끔씩 너무 어려운 말을 해서 탈이에요."
이성현은 혀를 찼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노인장은 때때로 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곤 했다. 노인장은 그저 입을 기괴하게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이성현은 주변의 노예들이 잠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노인장에게 말했다.
"노인장,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의 기회는 언제쯤 옵니까. 귀가 밝다고 하시더니."
"자네와 나의 인내심의 기준이 달라서 그래. 말했잖나, 난 여기서 오랫동안 있었다고."
"……설마 그 기회라는 게 몇 년 후에 오는 건 아니겠죠?"
노인장은 기괴하게 비틀린 어깨를 으쓱거렸다. 노인장의 몸은 전체적으로 까맣다. 사람의 그림자를 그대로 끌어와서 몸으로 만들면 저런 느낌일까. 그런 몸에 늑대와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비슷하다고 하는 건 얼굴이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란 어디나 있고, 어디도 없는 것이지. 자네가 붙잡아야 생기거든. 광석을 캐면서 소리 같은 거 못 들었나?"
"소리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그러면 자네는 아직 기회를 못 붙잡은 거지. 나중에 확인해보게."
노인장은 구멍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의 공동에서 요란스런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취침 시간의 끝을 알리는 소리이자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성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곡괭이질이나 하러 가죠, 노인장."
"으음."
* * *
가스트 광산의 식사는 단출하다. 오전의 작업이 끝나고 나면 일단 넓은 공동에 모인다. 그리고 감독관들이 커다란 냄비를 하나 들고 와서 노예들에게 음식을 퍼준다. 음식이래봐야 대부분은 허여멀건 한 스프였고, 정말로 가끔, 아주 가끔 고기가 나오곤 했다. 고기래 봐야 잘 뜯기지도 않는 질긴 싸구려 고기였지만.
"이 스프는 뭐로 만들었을까요?"
이성현은 스프를 숟가락으로 떠올렸다가 다시 흘렸다. 보통 스프라면 어느 정도의 점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 스프는 마치 물처럼 흘러내렸다. 이걸 스프랍시고 만든 요리사의 면상을 한번 보고 싶었다.
"고기가 들어갔겠지."
"고기라고요? 제 눈에는 이상한 건더기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고기라고 생각하고 먹게. 그러면 고기처럼 느껴질 테니."
"참 긍정적이군요, 노인장. 큰 위안이 됩니다."
이성현은 쓰게 웃으면서 스프를 한 입 떠먹었다. 아무런 간도 되지 않은 밍밍한 맛. 아마도 영양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광산의 노예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데에는 이 음식 탓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도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 버틸 수 있으려나.'
기회는 보이지 않았고, 조금씩 지쳐갔다. 이성현과 노인장은 공동의 구석진 곳에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이성현의 귓가에 다른 노예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젠장, 이딴 걸 음식이라고 주다니……."
"흐, 힘든 걸 떠나서 배고파서 죽을 거 같다."
이성현은 이야기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노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었냐? 레시스가 죽은 거. 그놈, 거의 팔 개월 동안 버텼던 놈이었잖아."
"저번에 만났을 때 보니 몸이 반쪽이더니, 결국 죽었나 보군. 크크,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노예들의 분위기는 절망적이었다. 이 가스트 광산을 살아서 나가는 사람은 없다.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지옥이 바로 가스트 광산이었으니까. 노예들은 비어가는 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들기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들어온 노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여길 뒤집어 엎는 건 어때요?"
"뒤집어엎다니? 어떻게?"
"반란을 일으키자고요. 저 망할 감독관 새끼들도 다 죽이고, 경비들도 다 죽이고. 여길 탈출합시다."
주변의 노예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감독관은 때마침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말을 꺼낸 노예가 열기가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해봐요. 저 새끼들이 하는 말을 계속 들어봤자 그 레시스란 놈처럼 개죽음만 당할 뿐이라고요. 계속 고생하다가 짐승처럼 뒤질 바에야, 되든 안 되든 여길 뒤집어엎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아요.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고요. 가만히 죽는 걸 기다리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어요?"
"하지만, 무기가 없잖나. 우리한텐."
광산으로 들어오는 노예들은 종족 특전이 전투와는 관련 없는 종족들이다. 신체 능력도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데다가 종족 특전마저 전투와 관련 없는 이들은 무기가 없는 한 감독관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노예는 다른 노예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성현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스프를 다 마신 노인장이 이성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모양이군."
"그런가 보네요."
"뭐야, 생각보다 시큰둥한데? 자네는 참가하지 않을 건가?"
"실패할 게 뻔히 보이는데 뭐하러 참가합니까. 개죽음이지."
노인장의 눈에 이채의 빛이 떠올랐다. 노인장은 빈 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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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호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긴 세월 동안 제대로 영양도 공급받지 못한 데다가 장비도 열악한 노예들. 먹을 것도 잘 먹으면서 장비도 잘 챙겨입은 감독관들. 누가 이길 거 같습니까?"
"당연히 후자겠지. 하지만 노예들이 숫자가 많잖나."
이성현은 코웃음을 쳤다. 숫자는 아무 의미 없다.
"약한 놈들이 숫자만 많아봤자죠. 그리고 설령 여기를 나간들, 광산 밖에도 놈들이 깔려있을 건데. 결국 죽을 겁니다. 전 저기에 낄 생각 없어요."
그가 예전에 용병 생활을 할 때, 반란을 진압하는 의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귀족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소수의 훈련받은 기사와 이방인들이 다수의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죽였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성현은 저 노예들의 생각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았고, 성공할 확률은 너무나도 낮으니까.
"흐흐, 한동안 시끄러워지겠군. 재밌어지겠어."
"참 성격이 나쁘시군요, 노인장. 같은 노예들이 죽어나가는데 재밌어지겠다니."
"그러면 자네가 저들을 도와서 성공할 수 있게끔 해보던가. 이 광산은 오락거리가 작아서 심심하거든."
이성현은 식어서 미지근한 스프를 입안으로 들이켰다. 노예들은 아직도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잠깐 자리를 비웠던 감독관이 들어왔다.
"식사 시간은 끝이다! 오후 작업을 시작한다. 움직여! 이 게으른 새끼들아!"
감독관은 바로 근처에 있는 노예에게 채찍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그걸 본 다른 노예들의 눈에 반감이 떠올랐다. 방금 전 노예의 말을 들은 데다가 감독관의 횡포를 보고 나니, 아무래도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개죽음일 뿐인데.'
이성현은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켰다. 조만간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 *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이성현은 노예들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란을 도모하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돌 무기라니. 무슨 석기시대도 아니고."
제일 처음 제안을 꺼낸 신입 노예에겐 재주가 하나 있었다. 돌을 날카롭게 가공할 수 있는 재주. 알아보니 신입 노예의 종족들은 돌을 가공하고, 그걸 팔아서 살아나간다고 했다.
돌을 가공하는 과정도 엽기적이었다. 특이하게 생긴 이빨로 돌을 갉아대는데, 그러다보면 돌이 무슨 무처럼 깎여나간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날카로운 석기 시대의 간돌검 같은 무기가 하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말로 저 무기로 저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감독관이든 경비든 제법 괜찮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산적단의 두목이 이 광산에서 나오는 라테나이트를 판 돈으로 무장을 시켰는지, 제대로 된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고 검이나 창 같은 것들을 가지고 다녔다. 날카롭게 갈았을 뿐인 돌로 저 가죽 갑옷을 뚫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곡괭이를 무기로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광산의 노예들이 쓰는 곡괭이에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곡괭이 따위에 마법을 부여하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곡괭이들에는 내구도를 유지시키는 마법과 주인을 인식하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어서, 감독관이나 경비를 향해서는 아예 겨눌 수도 없었다. 겨누거나 휘두르려고 하면 곡괭이가 스스로 반발한다.
'그러니 저런 무기를 쓰는 거겠지.'
말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노예들은 이미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성현이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노인장이 끌끌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낮은 등급의 마물들은 지능이 그리 높지 않네. 꽤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녔지. 자네랑은 다르게 말이야."
"저랑 다르다니.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노인장."
"흐흐, 감출 생각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성현은 입을 다물었다. 노인장은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가끔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할 때면 기묘한 빛을 띤 눈으로 이성현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자신에게 닿을 때면, 그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꺼림칙했다.
"들어보니 오늘 시작할 거라더군. 내게 와서 동참할 건지 물어보던데."
"저한테도 물어보더군요. 전 거절했지만요. 노인장은 동참하기로 했습니까?"
"이 늙은이가 저런데 참가해서 뭐하겠나. 저 반란엔 동참할 필요가 없는데. 기회는 찾아올 걸세."
"그놈의 기회 타령은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제게도 좀 가르쳐주시죠. 저한텐 기회라는 게 도통 보이질 않네요. 앞날도 캄캄하고요."
이성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들어온 지 삼 개월이 다 돼간다.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조금씩 사라져가고,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불안감은 그의 몸을 좀먹고, 그다음으론 정신을 좀먹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성현은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자신을 비웃는 리프레나의 모습. 목을 내리치는 미노타우르스의 할버드. 순간 낮아지면서 회전하는 시야. 그 복수심을 일깨우면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다.
이성현은 물을 들이켰다. 물이래 봐야 먼지가 한가득 들어간 물이었지만.
"힘든가?"
"힘들다기보다는 지치는군요. 매일 같이 똑같은 공간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려니 돌아버릴 것 같아요."
"조금만 더 버텨보게, 젊은 친구."
이성현은 노인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노인장은 늘 기회가 올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 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기회가 올 거라는 미약한 희망이라도 품지 않으면, 이 광산은 버티기에 너무 힘든 곳이었으니까.
땡, 땡, 땡!
시끄러운 종소리가 공동에서 들려왔다. 매일 같이 들은 소리.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좁은 굴 안에 있는 노예들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카롭게 벼린 돌을 몸에 숨겼다.
노예들은 속에 검을 품고 공동으로 나갔다. 이성현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뒤따랐다.
* * *
깡! 깡!
벽을 두들기는 무기질적인 곡괭이 소리. 광석을 캐는 소리였다. 이성현은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이 넓은 광산에는 무수히 많은 노예가 들어왔고, 무수히 많은 노예가 죽은 채로 나갔다.
광산에서 두 달의 시간을 보내면서 안면을 익힌 노예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광산의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었다. 노예들이 오늘 반란을 일으키려는 이유이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인지, 감독관들도 오래 살아남은 노예들에게는 나름 배려를 하는 편이었다. 배려래 봐야 물 같은 스프에 고긴지 의심스러운 고깃조각을 좀 더 넣어주거나, 덜 때리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물론 이성현이 찍힌 래트뱃 감독관은 예외였다. 그 자식은 그을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이성현은 힘있게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후우."
처음 곡괭이질을 할 때는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광산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끝없는 노동이 계속되자, 오히려 곡괭이질을 할 때면 정신이 맑아지고 가만히 있을 때면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광석을 캐는 시간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잡생각도 안 들고, 포인트도 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크크, 내가 미쳐가는군."
이성현은 자신을 조소하면서 다시 곡괭이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때, 이성현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곡괭이 소리. 벽을, 땅을 파는 소리. 광산에 있으면서 신물이 날 정도로 들은 소리였다.
"……맞은 편에서 들려오는 거 같은데?"
이성현은 벽에 귓가를 가져다댔다. 그가 있는 곳은 다른 노예들이 일하는 곳과는 동떨어진 곳인 데다가 개발이 덜 된 곳이었다. 그래서 이성현과 노인장 둘이서 광석을 캐나가면서 길을 뚫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맞은 편에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다. 거긴 막힌 곳이니까.
깡……, 깡…….
"환청은, 아니야. 이 소리는 뭐지……?"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곡괭이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성현이 그 소리를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그와 노인장이 있는 굴속으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놈들을 죽여라!"
"우리는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이성현의 얼굴이 굳었다. 예정되었던 반란이 지금 거행된 모양이었다.
"노인장! 들었습니까?"
"들었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이군."
당황한 그와는 다르게 노인장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운이 좋은 노예들이군. 정말 좋은 때에 반란을 일으켰어."
"예? 운이 좋다뇨. 무슨 말입니까?"
"흐흐, 자네가 말했었지. 저 반란이 실패할 거라고."
이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을 직접 진압해본 경험이 있기에 나온 말이었다. 노인장은 일그러진 얼굴에 흐릿한 미소를 띄웠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설마요. 전 잠깐 밖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노인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현은 다급하게 굴밖으로 튀어나갔다. 가스트 광산은 넓은 공동을 중심으로 곳곳으로 터널과 굴이 뚫려있는 구조다. 광산의 길을 개척해나가면서 광석을 캐나가가기에 그런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 터널과 굴에서 노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노예들은 근처에 있던 감독관들을 무차별적으로 덮쳤다. 좁은 공간에서 감독관들과 노예들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바, 반란이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크악!"
"젠장! 지원을 불러! 위에 있는 놈들을 불러오라고!"
감독관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노예 하나가 그런 감독관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돌이 있었다. 노예는 돌로 감독관의 등을 연신 찍었고, 곧이어 다른 노예들도 동참했다. 바닥에 쓰러진 감독관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다른 감독관은 그 모습을 보곤 달아났다.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저놈이 지원을 부르러 간다! 죽여!"
노예들은 달아나는 감독관을 죽이려고 했지만 모든 감독관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노예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대장쯤 되는 이가 혼란을 정리하고 진형을 다잡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몰아붙이던 노예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이런, 밀리는데."
감독관들이 냉정함을 되찾고 진형을 갖추기 시작하니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노예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성현은 혀를 차면서 다시 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의 뒤에 노인장이 서 있었다.
"어후, 놀랬잖습니까. 왜 나오셨어요, 위험한데. 같이 들어가시죠."
"아니. 들어가면 안 돼."
"……예?"
노인장은 다시 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성현을 만류했다.
"소리, 들었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말이야."
"굴의 벽에서 들리던 소리 말입니까? 곡괭이 같은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게 왜요?"
"생각해보게. 벽 너머에서 곡괭이 소리가 들리는 이유가 뭐겠나."
이성현의 인상이 굳었다. 아직 파내지 않은 벽 너머에서 곡괭이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곡괭이 소리는 누군가가 벽을 파내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벽을 파내고 있다. 설마, 여기가 공격당한다는 겁니까? 외부의 적에게?"
"눈치가 빠르군, 젊은 친구. 맞네. 라테나이트는 누구든 눈독을 들이는 광석이지. 돈이 되거든. 누구든 욕심을 내지."
벽 너머에서 누군가가 벽을 파내고 있다. 가스트 광산의 노예들이 아닌 다른 세력이. 돈이 되는 라테나이트 광산을 점령하기 위해서.
"허, 누군지는 몰라도 인내심 한 번 대단하군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거 같은데. 노인장은 도대체 어떻게 들은 겁니까? 전 이제야 들리는데."
"말했잖나, 난 귀가 밝다고. 그래, 젊은 친구. 내가 말했던 기회가 이제 찾아왔군. 아직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인가?"
이성현은 곡괭이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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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건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외부의 세력까지 가담한다면, 그 혼란을 틈타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탈출해야죠. 전 여기서 죽을 생각 없습니다."
"좋군. 따라오게."
노인장은 곡괭이를 버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이 있는 굴을 지나, 넓은 공동으로. 공동에 있던 감독관들이 이성현과 노인장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중에는 평소 이성현을 괴롭히던 래트뱃 감독관도 있었다.
"저 노예들이 도망친다! 쫓아!"
노인장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걸어갈 뿐이었다. 거기에 더 화가 난 래트뱃 감독관이 날카로운 검을 겨누면서 다가왔다. 이성현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그때,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뻐엉!
이성현은 폭발음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그가 있었던 굴이었다. 그 폭발음을 시작으로 연달아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광산 여기저기에서. 이성현에게 다가오던 감독관은 깜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뭐야, 무슨 소리야!"
다른 감독관들과 경비들도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음이 들려온 곳. 흙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곳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라아! 가스트! 카스카가 여기 왔다! 오늘 네 목을 가져가리라!"
검은 피부의 고블린, 리저드맨과 오크들, 그리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웨어울프 하나가 광산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을 카스카라고 칭한 웨어울프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감독관을 붙잡아 목을 뜯어버렸다.
"기, 기습! 기습이다!"
끼이익, 투웅!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 곧이어 줄이 튕기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고블린들이 활을 쏴 감독관과 노예들을 맞추고 있었다. 화살을 맞은 감독관들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이들은 가스트 산적단과 노예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선택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모두 죽여라! 노예든, 산적들이든!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젠장!"
이성현은 욕을 내뱉었다. 놈들은 이 광산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일 속셈이었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광산의 탈출구는 하나뿐이다. 평소에는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
'저기론 나갈 수 없어.'
광산 안의 소란을 눈치챘는지, 바깥에 있던 경비들이 모조리 입구를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저곳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길, 어쩌지? 어떻게 하면…….'
이성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지만,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상 방법은 없었다. 이성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노인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지."
"예? 가다니, 어디로 말입니까?"
노인장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리 따라오게."
"노, 노인장! 어디로 가는 겁니까!"
"따라오면 알게 될 걸세."
노인장은 주변의 혼란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성현은 다급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아아악!"
"젠장, 빨리 위에 가서 알려! 적들이 쳐들어왔다고!"
"안돼! 지상도 공격받고 있어!
주변은 아비규환이었다. 평소에 노예들을 악랄하게 괴롭히던 감독관들은 카스카와 그의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감독관들과 싸우고 있던 노예들은 포위당한 상태였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쇼! 저는 산적이 아닙……. 아악!"
그들은 간절히 애원하는 노예들도 일말의 자비 없이 죽였다. 산적에게 강제로 끌려와 원치 않는 노역을 한 이들이 쓰레기처럼 죽어나가고 있었다.
'망할 새끼들.'
어쩌면 이성현도 저런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위험하다. 그렇기에 저 노예들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었다.
"흠, 여전하군."
노인장은 어떤 굴로 들어갔다. 광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예전에 버려진 굴이었다. 얼마나 사람이 안 다녔으면 온갖 쓰레기들이 거미줄이 친 채 버려져 있었다.
노인장은 그 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노인장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이성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노인장의 주문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굴 바깥의 소란은 점점 커져갔다. 이성현의 마음이 조급해질 때쯤, 굴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기 있었군, 이 노예 새끼!"
"……헉!"
이성현은 굴 안으로 들어온 이를 보고 경악했다. 그는 평소 이성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래트뱃 감독관이었다.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시나? 응?"
"……우릴 따라온 거냐?"
"따라온 거냐? 허, 노예 새끼가 감히 반말을 해?"
감독관은 들고 있던 채찍을 버리고,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 검으로 이성현을 겨누었다. 그런 감독관의 모습을 본 이성현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 감독관은 그에게 맹목적인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다. 근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 미워하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즉결 처분이다, 이 새끼야. 도망치는 노예는 바로 죽여도 되거든. 반란이 일어났다고 도망칠 수 있을 거 같더냐? 응?"
"미친 놈이냐, 너?"
이성현은 기가 차서 혀를 찼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외부의 침입자가 처들어온 상황에 그들을 상대할 생각은 안하고 노예 하나를 쫓아오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아니면 병신인가? 아니, 뭐든 잘 됐군. 잘 걸렸다."
감독관은 검을 위로 들어 올린 채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이성현은 혀를 차면서 손톱을 빼냈다. 손톱의 강도나 길이 등은 여러 번 사용해서 미리 익혀뒀기에 익숙했다.
"넌 뒤졌어, 개자식아."
감독관은 달려들면서 곡도를 휘둘렀다. 곡도의 궤적은 정확하게 이성현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성현은 오른 손톱을 일자로 세워 곡도를 받아냈다.
캉!
"큭!"
손톱이 철과 맞부딪히자 그의 손이 순간 저릿해졌다. 이성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저릿한 손을 털었다. 그가 알기로 감독관의 종족인 래트뱃은 8등급의 마물이라고 했다.
"크하하! 죽어라!"
래트뱃이 그런 이성현에게 달려들었다. 래트뱃은 한쪽 팔을 뒤로 크게 젖히고 이성현의 몸을 곡도로 베어넘기려 들었다. 이성현은 거의 앉듯이 몸을 숙여 손톱을 피해낸 뒤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는 기세를 팔에 실어 래트뱃의 턱을 올려 베었다.
"어림없다!"
래트뱃은 한쪽 손목에 메고 있던 조그마한 방패로 이성현의 일격을 흘려냈다. 래트뱃은 광소를 터트리면서 곡도를 아래로 휘둘렀다.
"큭!"
이성현은 다급하게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낙법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몸을 던졌다. 래트뱃의 검이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갔고, 이성현의 몸이 땅을 나뒹굴었다.
"카아아!"
래트뱃은 날카로운 혀를 드러내면서 땅에 쓰러진 이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이성현의 몸을 곡도로 내리찍었다.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로.
카앙!
이성현은 누운 채로 양손의 손톱을 교차시켜 망처럼 만들어내 곡도를 받아냈다. 이성현은 순간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특전의 힘을 받곤 있다고 하더라도 8등급과 10등급의 차이는 꽤나 컸다.
'제길!'
이성현의 손톱이 끼릭, 끼릭거리면서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의 손톱을 밀어내려고 했던 래트뱃은 뜻대로 되지 않자 곡도를 든 손을 다시 높이 들어 올렸다. 지나치게 높이.
"훕!"
이성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굴린 뒤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래트뱃의 허벅지를 손톱으로 베어 넘겼다. 세 갈래로 베인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키아아악!"
래트뱃은 고통스러워하며 휘청거렸다. 이성현은 다시 손톱을 휘둘러 다른 쪽 발목을 베었다. 그러자 래트뱃의 몸이 땅으로 허물어졌다. 이성현은 땅을 기어가 쓰러진 래트뱃의 위에 올라탔다.
"이, 노예 따위가!"
이성현은 바둥거리면서 발악하는 래트뱃의 팔을 손톱으로 베어냈다.
"흐아아아아!"
끄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남은 래트뱃의 팔까지 베어내고, 손톱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무시하던 노예 새끼한테 당하니까 기분이 어때! 엉!"
이성현은 래트뱃의 얼굴을 주먹으로 계속 내리쳤다. 계속해서. 이성현의 주먹이 까지고 래트뱃의 얼굴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코가 내려앉고, 입술이 터지고, 눈이 내려앉고. 고통을 견디지 못한 래트뱃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바둥거렸지만, 이성현은 결코 래트뱃을 놓지 않았다.
"악, 크악! 아악!"
"이! 망할! 죽어! 죽으라고!"
연신 튀어 오르는 피가 이성현의 얼굴을 적셨다. 이성현은 손등으로 얼굴의 피를 닦아내면서 래트뱃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계속해서.
더이상 래트뱃은 아무런 신음을 흘리지도,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성현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울분을 모조리 풀어내고 있었다.
"이미 죽었네. 그만하게."
"……헉, 헉."
그런 그를 노인장이 말렸다. 이성현과 래트뱃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가 이성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이성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 후우. 좀 도와주시지 그랬습니까, 노인장."
"오랜만에 주문을 외우는 거라서 시간이 좀 걸리더군. 그리고 신나 보이길래 그냥 놔뒀네."
"신나 보인다? 흐, 예. 신나긴 하네요.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십 년 묵은 체증?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성현은 래트뱃의 시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시체에서 곡도와 손목 방패를 챙겼다. 이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물품을 다 챙긴 그는 죽은 래트뱃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꼴 좋다, 망할 새끼."
이성현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걷어찼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들어오게."
그걸 지켜보고 있던 노인장은 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현은 그 뒤를 따랐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벽을 넘어서 들어오니 희미한 빛이 눈을 찔렀다. 벽 안에는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소복이 쌓인 침대와 책장, 그리고 이성현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여긴……?"
이성현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아지랑이처럼 요동치던 벽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홀린 것처럼 멍하니 앞으로 걸어갔다.
"내 방이네. 예전에 썼던 방이지만."
"방, 이라고요? 노인장,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방의 가운데에는 피로 새겨진 마법진이 있었다. 노인장은 마법진 위에 주저앉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일한 왕을 섬겼던 자. 그림자 속에 숨어 시간의 지평선을 속이는 자.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영락한 존재."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성현은 그저 노인장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공간은 당신이 만든 겁니까?"
"그래. 아주 먼 과거에, 저 산적 놈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만들었었지."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산 겁니까?"
노인장의 늑대처럼 생긴 얼굴의 입가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웃고 있는 듯했다.
"먼 과거. 세 개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고, 유일한 왕이 지하로 쫓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득히 긴 세월을 살아왔지."
이성현의 얼굴이 굳었다. 정말로 아득히 먼 과거, 거의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히스토리아의 세계는 원래 마족들이 사는 마계와 아인종들이 사는 요정계, 인간들이 사는 인간계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통합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 세 개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 뒤로 지금 이성현이 아는 히스토리아라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그건 거의 신화시대의 이야기다. 신들이 인간과 함께하던 시대. 그럼 눈앞의 노인장은 도대체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건가.
============================ 작품 후기 ============================
수정 ) 웨어울프의 이름은 아길레라가 아니고 카스카입니다. 이름을 바꿨는데 실수로 수정 전의 버전이 올라갔네요.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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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당신은, 신 같은 겁니까?"
"아니, 신은 아니네. 신을 섬기는 이 중 하나였지."
바깥의 소란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함성과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비명에 노인장의 말소리가 제대로 안 들릴 정도였다. 노인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밖이 소란스럽군."
그러면서 노인장은 바닥의 마법진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세상이 멈췄다. 말 그대로. 허공을 떠다니던 먼지가 그대로 멈추고, 시끄럽게 불던 바람 소리가 멈췄다. 뒤의 벽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이성현은 입을 벌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노인장을 둘러싼 마법진은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노인장은 입을 일그러트리면서 말했다.
"시간이 멈춘 건 아니야. 이 공간을 바깥과 잠깐 격리한 거지. 걱정 말게. 자네와 조용히 얘기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
"얘기할 시간이요? 아니, 공간을 멈췄다니, 대체……."
노인장은 이성현과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기이한 열망이 요동치고 있는 강렬한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당황하고 있던 그의 몸이 순간 굳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들어보게."
노인장의 말에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이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그가 하는 얘기를 경청했다.
"나는 한때 유일한 왕을 섬겼었다. 그분은 몰락하면서 내게 자신의 조각을 맡기셨지. 이 조각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해주라고."
아득히 먼 과거. 마족들의 세계를 다스리던 이가 패배하고, 지하 세계로 쫓겨나고, 믿었던 신하들에게 배신당했을 때. 마신은 지하 세계를 개척하고, 죽었다. 믿었던 신하는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고 마계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이 넓은 마계를 오랜 세월 동안 방황하고, 자격에 맞는 자를 찾아 헤맸지. 정말로 긴 세월이었네."
기괴하게 일그러진 노인장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나는 지치고, 분노하고, 절망했다. 시간의 흐름은 내가 가진 사명감을, 충성심을 무뎌지게 만들더군.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동굴에 틀어박혔지. 내가 나 자신을 잃을 때까지. 내 정수가 흩어지고, 내 몸이 뒤틀릴 때까지."
노인장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방의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조그마한 상자와 큼직한 주머니가 나타났다.
"그래, 나는 늘 의문을 가지고 살아온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언제쯤 그분께 받은 내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건지."
노인장은 상자와 주머니를 낚아채고 이성현의 앞으로 걸어왔다.
"어쩌면 자네가 내가 가진 의문에 답을 할 자일지도 모르겠군. 자네야말로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을 마침내 가치 있게 할 자인지도 모르지."
이성현은 노인장이 들고 있는 상자를 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고, 눈앞의 노인장이 하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전 10등급의 마물일 뿐입니다. 제가 그런……."
노인장은 소리내어 웃었다.
"자네가 이 마계의 생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네. 더 나아가서,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이방인이라고 부르던가, 자네 같은 이들을."
이성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노인장은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자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마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가까워. 자네는 모르겠지만, 10등급의 마물은 지적인 능력이 아주 떨어지거든."
이성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광산 안에 있는 노예들도 지적인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그는 뒷머리를 긁었다.
"자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 왜 자네가 마물이 되었고, 이 동굴에서 태어났는지는 나도 모르네. 어쩌면 그분의 뜻일지도.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전언을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네."
노인장은 가지고 있던 상자와 주머니를 이성현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게."
상자에서는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보고 있으니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상자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하고 있었다.
"뭡니까? 이건.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데요."
"자네 안에 있는 낙인과 같은 걸세."
"낙인……."
이성현이 가지고 있는 고유 특전, 마신의 낙인. 노인장은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분의 흔적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노인장은 손가락으로 이성현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분의 낙인을 가지고 있는 자네가, 그분의 조각을 가지고 있는 내게 왔네.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이건 필연이야. 운명이지."
"당신이 말하는 유일한 왕, 그분이라는 게, 설마 마신을 뜻하는 겁니까?'
노인장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성현은 그가 대답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상자를 열자 안에 있는 피처럼 붉은 보석이 보였다. 이성현은 보석의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주먹만 한 크기의 훌륭한 루비 같은 보석이었다. 다만 루비와는 다르게 그 색이 진한 핏빛에 가까웠지만. 이성현이 홀린 것처럼 그 보석을 들어 올리자, 보석이 그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 안에 많지는 않지만, 정수가 들어있을 거야. 내 흩어지는 정수를 그 안에 조금 담아뒀네."
노인장의 말대로 몸 안에 뭔가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보석이 흡수된 손바닥에서부터 어떤 기운이 올라와 온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이성현의 심장이 있는 부분으로 도달하더니, 이내 멈췄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있는 부분을 매만졌다. 조금 전 상자를 처음 봤을 때도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성현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노인장에게 물었다.
"노인장. 왜 저입니까? 제 안에 있는 이 낙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겼습니다. 낙인은 왜 생긴 겁니까?"
"자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거야.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
"……알고 있다고요? 제가?"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된 건지 기억하고 있나? 마계가 아니라, 히스토리아라는 세계 말이야."
이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히스토리아로 넘어온 이방인은 넘어온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모두는 그저 우연히 넘어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는 기억을 잃은 거네. 자네 몸에 있는 그 낙인이 언제, 어디서 새겨졌을까. 그 해답은 자네의 잃어버린 기억에 있을 거야. 세계를 넘나들면서 기억을 잃은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가 자네의 기억을 일부러 지웠을지도 모르지. 우선 기억을 되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이성현은 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은 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멈췄던 공간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먼지가 조금씩 움직였다.
"슬슬 시간이 다 돼가는군.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나?"
"……노인장은 제게 뭘 바라는 겁니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죠?"
"바라는 건 없네. 자네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게. 어차피 운명이 자네의 길을 인도할 테니."
"그래도 바라는 게 하나 쯤은 있으실 거 아닙니까."
노인장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굳이 내 개인적인 숙원을 말하자면, 현재 마왕을 자칭하고 있는 놈들을 죽여주게.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직 살아있을지는 모르겠군."
"어려운 일을 부탁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왕을 축출한 놈들. 과거의 잔해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성현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갈 준비를 하게."
"당신은 같이 안 갈 테죠?"
"자네를 위한 기회일세. 날 위한 기회가 아니라. 이제 내 역할은 끝났네. 이제 이 늙은이도 쉬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 좀 무리했거든."
노인장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림자처럼 흐릿하고 일렁거리던 몸이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일어서있던 그림자가 땅으로 꺼지는 것처럼, 몸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멀쩡했을 텐데. 나이는 못 속이는군."
"죽는 겁니까?"
"해방되는 거지.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노인장은 웃었다. 그 웃음은 처연하면서도, 후련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빨리 떠날 준비를 하게. 자네가 진화할 때까진 이 공간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으니."
"……고맙습니다, 노인장.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나야말로 자네에게 큰 빚을 진 셈이지. 고맙네, 이 긴 생을 끝낼 수 있게 해줘서. 주머니 안에는 여비로 삼을 것들하고 지도가 있으니 잘 쓰게."
이성현은 시스템을 가동했다. 노인장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읉조렸다.
"조심하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도록."
그 말을 들은 이성현이 고개를 들었지만, 노인장은 이미 눈을 감은 뒤였다. 이성현은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종족 관리를 열었다.
·현재 종족 : 간티로스 (10등급)
·보유 정수 : 10200
·진화 가능 종족 : 간티로스 씨어 (9등급)
이성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노인장이 흩어지는 자신의 정수를 불어넣었다고 해서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200이라는 어중간한 숫자는 래트뱃 감독관을 죽이면서 얻은 모양이었다.
이성현은 간티로스 씨어라고 적혀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그리고 들려오는 무기질적인 시스템의 목소리.
[간티로스 씨어로 진화하는 데 필요한 정수는 1000입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이성현은 주저할 것 없이 예스를 눌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몸에 있던 뼈가 부서지고 다시 조립되고, 피부가 벗겨졌다가 다시 재생되고, 근육이 줄어들었다가 다시 부풀었다. 이 정도면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의 변화가 멈췄을 때, 눈앞의 홀로그램이 변화했다.
·현재 종족 : 간티로스 씨어 (9등급)
·보유 정수 : 9200
·진화 가능 종족 : 핏 워커 (8등급)
이성현은 자신의 몸의 변화를 확인하지도 않고 핏 워커를 눌렀다. 지금의 목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로 가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진화할 수 있는 데까지는 진화해둘 생각이었다.
이번에 필요한 정수는 3000이었다. 정수를 소모한 이성현의 몸이 또다시 변화했다. 부서지고, 변화하는 몸. 이성현은 잠자코 자신의 몸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리고 다시 홀로그램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변화하는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현재 종족 : 핏 워커 (8등급)
·보유 정수 : 6200
·진화 가능 종족 : 핏 가드 (7등급)
홀로그램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핏 가드를 눌렀다. 이번에 필요한 정수는 6000이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진화. 그리고 이번의 진화는 지금까지의 진화와는 다르게 극적이었다. 그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나와 사방으로 튀었다가, 다시 몸안으로 들어갔다. 피부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꺾이고. 만약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면 정신을 잃었을 법한 끔찍한 광경이 이성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변화했음을 직감했다.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시야의 변화였다. 간티로스일 때는 인간일 때에 비해서 시야가 너무 낮았다. 핏 워커는 그나마 인간과 키가 비슷해서 시야가 낮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새빨간 피부. 부풀어있는 근육. 이전의 간티로스 때와는 다르게 몸에서 활력이 느껴졌다. 10등급에서 7등급으로 올라간 것에 불과했지만, 그 3등급의 차이가 꽤나 컸다. 핏 가드의 몸은 간티로스와 비교해서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그래 봐야 아직도 7등급의 마물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이성현은 노인장에게 감사했다. 그는 이어서 종족 특전도 확인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저녁에는 올라올 수도, 안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있어서 나갔다와야 되는데 언제 올 지 모르거든요.
예약 아이템을 쓰자니 마나가 없고, 그거 하나 사자고 결제하기도 좀 거시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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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로드
·이름 : 이성현
·나이 : 28세
·보유 포인트 : 500P
·보유 특전
1. 신체 강화 (중급)
2. 생기발랄 (중급)
·고유 특전
1. 마신의 낙인 (전설)
[<추적> 당신은 이제부터 마신의 낙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2. 영혼 흡수 (중급)
["네 영혼은 내 것이다……."]
[<정수 흡수> 마족은 죽은 마족에게서 정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수를 상실하고 극히 일부의 정수 만을 흡수합니다. 당신은 정수를 조금 더 적게 상실하고 더 많은 양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강령술 (중급)
["겉으로 보면 살아있는 줄 알 겁니다. 정말로요."]
[<검은 갑옷> 되살아난 시체의 육체를 마력이 보호합니다. 시체가 더 많은 공격을 버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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