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9

해졌다.
죄 새까맣긴 매한가지였으나, 죽은 숲보다는 탁 트인 밖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숲 다음엔 강이 나타났다.
검게 죽은 강에선 지독한 악취가 났다.
“미친.”
한참 만에 입을 연 모리츠의 안색은 창백했다.
리오 성과 그 밖이 별세계처럼 느껴지듯, 숲의 안쪽과 바깥쪽도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공기는 찐득하고, 바람엔 시체 냄새가 풍겼다.
마기가 하늘과 땅을 뒤덮으니 여기가 곧 마계이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 빌어먹을 곳을 정찰해야 하고.”
그는 코를 감싸 쥐었다.
이 역겨운 공기를 마시면 오염이라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의 정신은 어딘가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떨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운다.
나르의 윤기 나는 털을 잡아 뽑듯 쥐어 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갈 수는 없다.
정찰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모리츠는 눈물을 머금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텅텅 빈 작은 마을 몇 군데를 돌아다닌 그는 마침내 대도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성을 습격해 왔던 포이르 백작가의 영지.
대대로 폴린 성을 지키던 바렌 왕국의 자랑거리.
“…….”
익숙한 깃발이 내걸린 대도시를 바라보며, 모리츠는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정찰을 나선 지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다만 경계선을 건너고 하루가 지났단 것은 확실하다. 지금 나는 포이르 백작가의 영지에 들어서고자 한다. 아, 일단 그전의 얘기부터 할까. 경계선 밖의 상황은 최악이다. 그래. 정말 최악이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는 그것은 일기였다.
애처롭게 떨리는 펜 끝을 따라오는 글자는 엉망진창이었다.
[리하르트가 한 아름 안겨 준 식량은 육포와 물이 전부다. 그런데 조금 전에 먹어 보니 맛이 전부 이상했다. 육포도 그렇고, 물도 그렇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일단 배는 채워야 하니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먹다 보니 먹을 만했다. 어라, 가만 보니 색도 까맣게 변색 되어 있었다.]
[……잡설이 길었다.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정찰 일지와 겸하기 위함이기도 하거니와, 허물어지려는 의지와 사명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한참이나 끼적이던 모리츠가 수첩을 품에 넣었다.
다 쓰고 나서야 깨달은 건데, 백작가의 영지를 정찰하고 나서 적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뭘 그렇게 봐?”
크릉-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깊게 가라앉은 맹수의 눈동자엔 자그마한 염려가 언뜻 보였다.
“싱겁긴. 넌 리하르트를 닮아서 재미가 없구나. 출발하기나 하자.”
맹수와 인간 하나가 백작가의 영지에 발을 디뎠다.
그간 지나쳐 온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진동하는 악취와 금이 간 건물들.
땅엔 딱딱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몸을 긴장시켰던 모리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가는 말 그대로 유령 도시가 되었다.
지겹게 보았던 시체 하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언데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전부 이쪽에서 쳐들어온 거겠지.
실제로 쳐들어왔었고.
그럼 혹시 다른 곳도 전부 이렇지 않을까.
지금껏 리오 성을 습격한 언데드만 해도 산을 두세 번은 쌓을 터이니.
행복회로를 돌린 모리츠의 얼굴에 희망이 맴돌았다.
“빈집털이는 쉽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정찰에 탄력이 붙었다.
나르 위에 올라타 재빠르게 영지 한 바퀴를 돌아본 모리츠가 고개를 쳐들었다.
영주성 꼭대기에, 웬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재질의 탑 끄트머리엔 웬 구슬이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저건 분명…….
“역시 있었네. 빌어먹을!”
리하르트가 보이면 꼭 깨부수라 했던 그것이 틀림없었다.
저걸 부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한참을 갈등하던 모리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까라면 까야지.
젠장.
고오오-
고급진 검을 타고 모리츠의 오러가 내달렸다.
그가 최근에 보인 나름의 성과였다.
콰장창-
힘껏 휘두른 검을 따라 쏘아진 참격이 구슬을 깨부쉈다.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 ◈ ◈
[정찰 2일 차. 여기서 2일 차라 함은 경계선을 넘었을 때부터를 뜻한다. 나는 어제 포이르 백작가의 도시를 정찰했다. 한때 웅장하고 활력 넘쳤을 그곳은 이제는 공허만이 남은 유령 도시가 되었다.]
[……리하르트가 말한 조형물이란 것을 결국 발견하고야 말았다. 놀랍도록 성장해 버린 내가 오러를 엮어 내니, 조형물에 달린 구슬 따윈 드래곤 앞의 휴거였다. 이 나이에 오러를 다룰 줄 안다는 건 나 또한 바텐베르크의 피를 이었음을 증명하는 성취였다.]
[……구슬을 깨면 분명 무슨 변화가 일 줄 알았건만, 변화는커녕 참새 한 마리도 울지 않았다.]
[정찰 5일 차. 사흘 만에 일기를 작성한다. 아닌가, 어제 썼던가. 확인해 보니 쓰지 않았다. 지금 나는 라덴 가문의 영지를 앞에 두고 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또 크고 작은 마을을 거쳐 왔다. 전부 폐허뿐이고 시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더는 언데드가 남아 있지 않은 건 아닐까. 우선 라덴의 영지를 정찰해 보겠다.]
[정찰 6일 차. 헛소리를 취소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 지옥에 있다. 온통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시체…….]
[……정신이 혼미하다. 다행히 내 은신 능력이 뛰어난 탓에 들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데스나이트는 위험하다. 금방이라도 내 존재를 알아차릴 것 같다.]
[……마찬가지로 영주 성에 새까만 구슬이 있길래 어떻게든 깨부쉈다. 그러자 이번엔 변화가 일었다. 눈을 까뒤집은 시체들이 영지를 벗어나 활개를 쳤다. 문제는 그 방향이 리오 성을 향한 것 같다. 아무래도 리하르트는 이것을 노린 모양이다. 미친 자식.]
[정찰 7일 차. 영지를 빠져나왔다. 그 데스나이트, 라덴의 가주만큼은 구슬이 깨지든 말든 제자리를 지켰다. 작은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자의 검에 베였다.]
[……상처가 깊다. 벌어진 살점 사이로 마기가 흘러 들어온다. 배가 고파 육포를 한 주먹 집어삼켰다. 미치도록 맛있었다. 육포가 이 정도라면 싱싱한 살덩이는 어느 정도일까.]
[정찰 8일 차. 정찰을 한다. 정찰. 정찰. 정찰. 정찰. 시체. 시체. 시체.]
[정찰 14일 차. 리하르트가 원망스럽다. 내가 이상하다. 호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 ◈ ◈
“호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모리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곧,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 며칠간 기도를 한 적이 없잖아.”
맙소사.
대체 어떻게 그걸 잊는단 말인가.
안색이 창백해진 그가 허겁지겁 일기를 훑어보았다.
1일차부터 14 일차의 지금까지.
등골이 섬뜩해지는 광기가 글자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모리츠는 이번엔 육포를 꺼내 들었다.
언데드의 살덩이로 만든 것처럼 썩어 문드러진 말린 고기.
그런데 이게 미치도록 맛있다고 한 주먹이나 처먹었다.
“우, 우웩……!”
당장에 모든 것을 게워 냈다.
미친 게 틀림없다.
정찰 중 이따금 씩 해 오던 이상 행동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한참 토악질을 해대고 있는데, 라덴 가주에게 당한 상처가 왈칵 터졌다.
후드득, 검은 피가 쏟아졌다.
“어……?”
옷을 들춰 환부를 확인했다.
상처 주위가 새까맣게 썩어 악취를 풍겼다.
그 외의 크고 작은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언데드 같았다.
“나는 살아 있는데…….”
모리츠의 얼굴이 공포에 짓눌렸다.
“호르시여! 이 어린양을 보듬어 주소서! 부디 악몽에서 깨워 주소서!”
간곡한 기도의 대답은 자그마한 활력뿐이었다.
지고하고 전지전능한 신이라더니.
지금 필요한 건 활력이 아니란 것을 모르는 걸까.
“으으……!”
모리츠가 떨리는 손으로 품을 더듬었다.
곧 꺼내든 것은 자그마한 씨앗.
정찰을 떠나기 전, 식량과 함께 건네받았던 것이었다.
- 정말 죽겠다 싶을 때, 포기하고 싶을 때 씹어 삼켜. 그리고 바로 돌아와. 이게 네 구명줄이다.
맞다.
리하르트가 분명 그리 말했었다.
씨앗을 바라보는 모리츠의 눈빛이 일렁였다.
이것만 먹으면 언데드가 되지 않는 건가.
미쳐 돌아가는 내 정신이 멀쩡해지는 건가.
“그럼 당장……!”
멈칫, 입에 씨앗을 털어 넣으려던 손이 정지했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머릿속에 나돌아다녔다.
이걸 먹으면 돌아가야 한다.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채, 패잔병처럼.
드디어 적의 본진 앞까지 왔는데.
씨앗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으득, 악다문 잇새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킥…… 킥킥!”
신음이 웃음으로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낄낄거리더니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신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턴 변한 줄 알았다.
이른바 광명이라고 하던가.
그래, 그런 걸 신으로부터 찾은 줄로만 알았다.
정말 간절히 원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아직도 나약하구나.”
신도가 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바텐베르크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내가 되겠다더니, 뭐만 하면 신을 찾는 머저리가 되어 버렸다.
신은 옆에서 거들어 주실 뿐, 대신 행하시는 분이 아닌데.
진짜 바텐베르크는 올곧고 단단하다.
아버지 루드비히처럼.
또,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다.
리하르트가 그러한 것처럼.
그 둘과 자신의 위상은 얼만큼의 차이가 있는가.
머리를 땅에 처박은 모리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변하기 위해선, 변한 것처럼 행동해야 해. 가만히 빌기만 하면 될 리가 없잖아.”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렸다.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러자 씨앗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떨다 죽을 바엔, 신념을 따르다 죽는 게 나아. 내가 짊어진 사명을 잊지 말자. 연합에게 적들의 모든 정황을 상세히 알려야만 한다.”
모리츠는 성미 고약하다 여긴 리하르트가 더는 야속하지 않았다.
이 임무를 받아들인 건 자기 스스로의 의지였고, 자신이 보기에도 이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호르를 위하여.”
씨앗을 품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지금 당장 먹을 필요가 없어졌다.
어느새 정신이 맑아졌고, 심장은 웅혼히 뛰고 있었으니까.
남은 수색지는 폴린 성 하나.
최악, 최흉의 마기를 울컥울컥 뱉어내는 악의 요새.
모리츠는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걸음걸음에, 옹졸하고 치졸했던, 나약한 과거를 내버렸다.
◈ ◈ ◈
[신도 모리츠 바텐베르크 - 호르교 최하급 성기사 자격 충족.]
[특기 - 신성력 변환(E) 습득.]
[최하급 성기사 1/3]
리하르트는 물끄러미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하아…….”
한참 만에 터져 나온 한숨엔 숨길 수 없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
기도가 끊긴 지 6일째.
그동안 리하르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게 대체 죽은 건지, 마기에 범벅이 되어 마인으로 변모한 건지 알 턱이 없었다.
아니, 오늘에서야 들어온 염원을 살펴보면 마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기사가 되었다더라.
“씨앗을 삼킨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낌새는 없다.
즉 모리츠는 혼자 힘으로 오염을 벗어났고, 그걸 넘어 이러한 쾌거를 이뤘다는 뜻이었다.
“설마 첫 성기사를 이렇게 얻을 줄이야.”
큰 시련을 이겨 낸 자에겐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오는 법.
아무래도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66화. Episode. 22 신의 시련 (4)
폴린 성은 더 이상 성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벽은 눈길 닿는 곳마다 회색빛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표면엔 핏줄이 꿈틀거렸다.
흡사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
모리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른 곳보다 배는 지독한 악취와 마기.
그는 직감했다.
이곳엔 절대 오래 못 있는다고.
그건 자신과의 타협 같은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였다.
“우으…….”
“크에엑-!”
성채 밖에는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돌아다녔다.
각기 모양새는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있었으니.
저들은 언데드 따위가 아니란 것이었다.
‘뭐야. 저 괴물 놈들은?’
잔뜩 기척을 죽인 모리츠가 입을 틀어막았다.
부릅뜬 눈에는 괴물들이 비쳤다.
어떤 놈은 집채만큼 커다랗고,
또 어떤 놈은 그림자처럼 새까맣다.
개중엔 박쥐 같은 날개가 달린 녀석도 있었다.
녀석들은 죽어서 만들어진 언데드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저쪽’의 생명체인 무언가였다.
혹시 리하르트는 저놈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뭐든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그놈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모리츠는 나중에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체 얼마나 끔찍한 생명체인지, 수백 마리가 뿜어내는 기세가 전부 웬만한 최상급 기사보다 강렬했다.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란 걸까.
‘우읍…….’
속이 메스껍다.
당장에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급기야는 멀쩡해진 정신이 다시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안 된다.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더더욱 기척을 죽였다.
“크에에엑!”
성을 괴물들이 가득 채우니, 숨어 들어갈 틈따윈 없었다.
그래서 모리츠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해야 할 정도의 은신 능력.
놈들은 제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모리츠를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리츠도 죽을 맛이었다.
엄청난 심력 소모는 물론이요,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라는 긴장감이 심장을 꽉 조였다.
곧 그는 기적적으로 성채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쳐들어 바라보니, 성 꼭대기에 온 세상의 마기가 몰려 있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저기에 리하르트가 말한 리치들이 있는 건가.’
모리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기가 터질 듯 모여든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냥 딱 봐도 끔찍한 재앙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선 구슬부터 찾아야 해.’
그가 애써 시선을 내렸다.
저 혼자로는 저것을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악의 요새를 나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성채 밖도, 더욱 끔찍한 안쪽도 마찬가지.
최악의 경우 리치들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일의 진전은 없다.
조금만 더 이곳에 있는다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보이지도 않는 구슬을 찾을 바엔, 그만큼 위험해 보이는 ‘저것’을 파괴하기로.
모리츠의 시선이 성채 밖 한 군데를 향했다.
거대한 회색 살덩어리.
언뜻보면 거인의 심장처럼 보이는 그것은 이따금 꿈틀거리며 박동했다.
꾸드득-!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곧 살덩어리를 찢고 나타난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양수로 추정되는 누런 액체를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찢긴 살점은 다시금 재생해, 꿈틀거리기를 반복.
지켜본 바로는 저 살덩어리는 괴물을 낳는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이 성을 가득 매운 괴물들이 저기서 태어났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모리츠는 역겨움과 두려움을 꾹 참으며 나아갔다.
극도로 줄인 기척.
호흡조차 멈추고, 발은 땅에 닿지 않는 듯 조용하다.
딱히 배운 적도, 연습한 적도 없으나 모리츠의 은신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이건 하늘이 그에게 내린 재능이었다.
‘침착, 침착하자.’
침을 뚝뚝 흘리는 괴물의 밑을 파고들었다.
몸에 웬 칼날이 달린 녀석을 스쳐 지났다.
“키에에!”
개중 감 좋은 괴물은 돌연 괴성을 질러 댔다.
눈 먼 팔다리가 모리츠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살덩어리와 남은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그는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발을 옮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딱 두 걸음만 더 가면 된다.
그러면 단숨에 오러를 일으켜 저 살덩이를 죄 찢어발길 수 있다.
그 뒤 씨앗을 삼키고 신속히 복귀한다.
참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조악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요 며칠간 두 눈으로 본 것을 연합에게 알려야만 했으니까.
표정을 딱딱히 굳힌 그가 발을 뗄 참이었다.
“우으……?”
모리츠의 앞에 거대한 눈알이 들이밀어졌다.
온몸에 눈알 수십 개가 달린 괴물.
놈이 웃었다.
퍼어억!
직후, 오우거보다도 두터운 팔이 모리츠를 후려쳤다.
“끄에에엑!”
“키르륵!”
터져 나오는 신음마저 꾸역꾸역 삼켰건만,
땅에 몇 번이나 구른 채로 은신을 유지할 재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괴물들이 모여들었다.
콰앙, 콰앙-!
전후 사정 없이 곧바로 쏟아지는 폭력.
“커, 커억……!”
우악스럽게 짓씹긴 왼팔이 너덜거렸다.
온몸의 뼈가 바스라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산더미처럼 제 몸을 뒤덮은 괴물들 아래에서, 모리츠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살아서 모든 걸 전해야 해.
저 미친 살덩어리를 없애 버려야 해.
죽음보다도 사명이 먼저 떠오르는 건,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일까.
까드득-,
겨우 입안에 털어넣은 씨앗을 짓이겼다.
엄습해 오는 고통 사이에 알 수 없는 맛이 입에 감돌았다.
달다, 쓰다 따위의 감각이 아니다.
이 맛은 찬란한, 성스러운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파아앗-!
죄 새까만 괴물들 틈에서 빛이 솟구쳤다.
놈들은 불에 데인 듯 몸을 움찔하며 물러섰다.
“꺼져,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아!”
그사이로 모리츠가 튀어 나갔다.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부러졌던 뼈도, 날카로운 이빨에 갈려 나간 살과 근육도 재생되었다.
그가 씹어 삼킨 씨앗은 아델의 힘, ‘생명’을 구현화한 것이었다.
더불어 그 안에 담긴 20만의 신앙이 힘을 더해 주었다.
구명줄이라더니, 정말 그 이름에 알맞았다.
꽉 쥔 검에서 밝은 빛이 폭사했다.
리하르트의 마나 특성, 신성력을 똑 빼닮은 빛이었다.
왜 갑자기 특성이 나타난 걸까- 같은 의문이 떠오를 새는 없었다.
모리츠는 신성력을 역고 또 엮어, 홀리 오러를 뽑아내었다.
평상시의 오러보다 배는 많은 마나를 소모했지만 괜찮았다.
지금은 힘이 넘쳤으니까.
“으아아!”
괴물의 손톱이 팔뚝을 갈랐다.
마기가 넘실대는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몇 개는 피했고, 또 몇 개는 검을 들어 막았다.
나머지는 몸으로 받아 내, 거친 흙바닥을 몇 번이고 굴러야 했다.
“꺼져! 꺼지라고!”
모리츠는 벌떡 일어나 역겨운 살덩어리를 향해 달려갔다.
몸을 사리지 않는 의지가 통한 걸까.
그는 마침내 목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푸욱-!
물컹하고 불쾌한 감촉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모리츠가 으득, 이를 악물곤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쾌검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빠르게 펼쳐졌다.
끈덕진 살 속을 몇 번이나 헤집었을까.
콰직, 하며 칼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러자 살덩어리가 부글거리며 녹아내렸다.
“아!”
되었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다.
이제야 리하르트 앞에서 떳떳하게 임무를 완수했노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안색이 환해진 모리츠가 냅다 성벽 밖으로 달려갔다.
손으로는 나르의 송곳니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으, 으하하! 역겨운 괴물 새끼들! 너흰 나중에 다 뒤졌다!”
◈ ◈ ◈
“호르를 위하여!”
와아아-!
리오 성에선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어느새부턴가 불규칙적으로 습격해 오는 언데드.
죽은 자들이 언제는 규칙적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무언가 낌새가 달랐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았다.
“잘해 주었어.”
한창 시체와 엎치락뒤치락하는 기사들을 보며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모리츠가 깨부쉈던 구슬.
그 결과가 지금의 광경을 불러일으켰다.
슬슬 최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척, 치켜든 손 위에서 커다란 별 두 자루가 떠올랐다.
곧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언데드가 뭉쳐 있는 곳을 가리키자, 두 별이 쏘아졌다.
콰과광-!
폭음이 울리며 빛이 연신 폭사했다.
그럴 때마다 기사들은 힘이 나는 듯, 사기를 크게 드높였다.
“어차피 잡놈들 뿐이다!”
“호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거기 너무 앞으로 나서지 마! 대열 지켜, 새끼야!”
분기탱천한 기사들을 통제하는 지휘관의 외침.
전장의 처절함을 위로하듯,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찬송가.
기사들의 무구에 어려 있는 빛무리.
리오 성은 다시금 제2요새라는 옛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신앙심을 품은 자들이 하나둘 모이니, 성 자체가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
어차피 승기는 이쪽으로 단단히 기울었다.
리하르트는 성벽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저 멀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길 한참.
“온다.”
저 혼자 멈춘 듯 가만히 있던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한달음에 성벽을 뛰어넘은 그는 별을 타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열심히 칼을 휘둘러 대던 기사들이 시선을 보냈다.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리츠가 돌아오고 있다. 길을 열어 주자.”
“충! 괴물 하나 없도록 정리하겠습니다!”
기사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시체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처리되기 시작했다.
고오오-
더불어 리하르트의 위에 높이 떠오른 두 자루의 별.
두 검성을 이룬 신앙이 태양처럼 타올랐다.
67화. Episode. 23 악몽의 끝을 향하여 (1)
“아…….”
모리츠는 저 높이 떠오른 두 개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빛이 저기에 있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경건한 찬송가가 그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해 주었다.
리오 성은 한창 전투를 벌였는지 성 앞이 엉망진창이었다.
이곳저곳에 쌓인 시체며, 아직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기사들의 얼굴까지.
그러나 얼마 전까지 지옥 한가운데에 있던 모리츠로서는 이곳이 낙원이었다.
피곤에 잔뜩 찌든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리하르트!”
시체더미 사이, 오연히 서 있는 리하르트가 보였다.
모리츠는 나르를 채근했고, 나르는 곧 땅을 접어 달려 리하르트의 앞에 나타났다.
“야, 임마! 이 형님께서 살아 돌아오셨다! 으하하!”
감동적인 재회.
제딴엔 그렇게 생각했던 모리츠가 리하르트를 와락 끌어안곤 소리쳤다.
그러다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뒤늦게서야 자신이 무슨 추태를 부리고 있는지 알아챈 것이다.
안타깝게도 동생과 형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기도 했고.
“수고했어. 진짜 큰일을 해 주었어. 모리츠.”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일까.
리하르트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 어……?”
그 예상외의 반응에 모리츠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모리츠 바텐베르크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큰 임무를 홀로 수행하신 바텐베르크의 존귀하신 분께 경의를!”
“기사의 귀감! 역시 모리츠 도련님께선 어엿한 바텐베르크이십니다!”
왈칵-, 하고 터져 나오는 기사들의 우렁찬 음성들.
그게 승전보라도 된다는 것처럼, 전투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내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으어어? 내, 내가 어엿한 바텐베르크라고……?”
두눈을 휘둥그레 뜬 모리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에게 쏠리는 뜨거운 시선이 그제야 와닿았다.
“모리츠! 모리츠!”
“바텐베르크여, 영원하라!”
“와아아-!”
아,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린가.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그래. 나는 이런 환대를 받을 만큼 커다란 일을 해낸 용사다.
저들이 내 노고를 알고 이렇게 축하해 주는구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빛을 한 채로, 모리츠는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곤 소리쳤다.
“내가 바텐베르크다! 내가 모리츠 바텐베르크다!”
“우와아아-!”
쿵!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쓰러졌다.
긴장이 탁 하고 풀리니 눈꺼풀이 천근보다도 무거워졌다.
“내가…… 바텐베르크다…….”
그는 모두의 환호성을 들으며 정신을 놓았다.
그럼에도 기사들의 호응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모리츠가 워낙 기뻐하는 게 뻔히 보이니, 더욱 열심히 환대하는 것이었다.
“거 맞춰 주기 힘드네. 야! 그만, 그만!”
결국, 성대한 환영을 해 주자- 라고 넌지시 일렀던 리하르트가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 ◈ ◈
“으음…….”
모리츠가 눈을 뜬 건 모든게 정리되고 나서였다.
간만에 느끼는 이불보의 부드러운 감촉에 감격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간호인일까, 싶어 고개를 돌린 모리츠는 까무러칠 뻔했다.
“리하르트……? 너 여기서 뭐 해?”
“아, 일어났어?”
이놈이 왜 여기 있는가.
그가 이해 안 된다는 기색을 비췄다.
간호 같은 걸 해 줄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리하르트의 손에 웬 수첩이 들려 있었다.
익숙한 크기에 익숙한 겉표지.
“으악, 너 그거! 당장 이리 내!”
그건 모리츠의 일기이자 정찰 일지였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광기가 어려 있는지는 본인 스스로가 잘 알았다.
또 그 당시 느꼈던 두려움도 여과 없이 적힌 채였다.
“자.”
리하르트는 의외로 순순히 수첩을 내밀었다.
그것을 다급히 건네받은 모리츠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봤냐?”
“정찰 1일차던가. 첫 줄밖에 안읽었다. 남 일기 훔쳐 보는 건 취향이 아니라.”
다행이다.
기필코 이 수첩을 태워 없애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거기서 뭘 보았는지 들어야 해. 지금 당장 회의실로 갈 수 있겠어? 마침 시간도 맞는데.”
“그래. 어차피 씨앗 덕에 몸은 멀쩡해.”
“잘됐네.”
둘은 곧장 방을 나서 회의실로 향했다.
가는 길엔 침묵이 맴돌았다.
모리츠에겐 퍽 불편한 침묵이라, 애써 말을 건네 보았다.
“나 없는동안 이곳엔 별일 없었냐?”
“많았지. 꽤 많은 게 변했어.”
“어떤거?”
“그건 나중에 직접 보면 알아.”
“쳇…….”
결국 입 다물고 회의실로 가야 했다.
그곳에는 이미 레오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오오! 모리츠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는지요.”
각 무가의 지휘관들은 벌떡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마치 영웅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모리츠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아니, 나 정도면 영웅 맞잖아?’
그 지옥에서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는데.
내심 고개를 주억거리던 참이었다.
어느샌가 다시 자리에 착석한 수뇌부들이 모리츠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의 보고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흠흠, 제가 적군의 본진에서 보고 온 것은…….”
길고 긴 일대기가 모리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폴린 성 쪽에 위치한 마을들의 상태가 어떠한지부터 시작해서 폴린 성에서의 활약까지.
반은 자신에 대한 찬사였고, 또 반은 적들의 끔찍함을 표하는 묘사였다.
“허어……!”
모리츠의 보고가 끝나자 회의실이 탄식으로 채워졌다.
“그 구슬이란 게 정말 언데드를 통제하고 있었단 건가.”
“잠깐 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망가질 정도의 마기라니!”
“폴린 성을 가득 매운 괴물이라…….”
곧이어진 웅성거림.
수뇌부들이 심각한 얼굴로 저마다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모리츠 도련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리오 성을 습격하는 언데드는 통제에서 벗어난 놈들이군요.”
“진짜배기는 빠졌으니 적의 머릿수를 줄일 기회요.”
“그 진짜배기가 폴린 성에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주급 데스나이트도 그쪽으로 몰릴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누구는 기회라 말하고, 누구는 강대한 괴물이 한데 모였다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모리츠. 정말 괴물을 뱉어 내는 살덩어리가 있었다고?”
“그래. 아주 역겹게 생긴…… 아우,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야.”
“흐음…….”
리하르트의 얼굴이 상념에 잠겼다.
괴물을 뱉어 내는 살덩어리.
그건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엔 없던 것이었다.
‘이것도 변수 중 하나였나.’
물론 살덩어리 자체의 존재는 알고 있다.
우습지만 그것의 이름은 ‘꽃봉오리’였다.
마계의 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괴물을 낳는 모체.
“잘했다. 그걸 파괴한 건 정말 칭찬할 수밖에 없겠네.”
리하르트가 모리츠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따라서 손바닥을 부딪쳤다.
“좋아. 칭찬은 이만하면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예!”
◈ ◈ ◈
회의는 유의미한 진전과 함께 끝이 났다.
모리츠가 들고 온 적들의 정보가 앞길을 제시해 준 덕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예상한 대로였으나, 딱 한 가지만은 변수가 존재했다.
“폴린 성에 마수들이 가득 찼단 말이지. 그냥 냅다 쳐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툭, 툭-
나는 홀로 회의실에 남아 테이블을 두드렸다.
회의에 나온 의견들을 다시 복기하며 가장 나은 선택지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좋아. 이제 그만 끝을 볼 때가 되었다.”
결국 나온 답은 슬슬 이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애당초 내가 연합에게 바라던 것은 이미 전부 이뤘으니 말이다.
연합은 템플나이츠가 될 싹을 찬란히 틔웠고, 더 이상 마기가 낯설지 않은 베테랑이 되었다.
미래를 위한 사전 연습은 충분히 한 셈이다.
지금의 기사들은 폴린 성을 장악한 적들을 괴멸시킬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물며 머릿수가 유일한 장점이던 녀석들이 알아서 갈려 나가 주고 있는 판국 아닌가.
대비해야 할 건 폴린 성의 마수들과 가주급 데스나이트들.
어쩌면 리치들 곁에는 더욱 강한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고.
“뭐, 변수는 그쪽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이쪽도 아주 아주 무서운 변수가 있다.
물론 웬만해서는 나서지 않겠지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회의실로 나섰다.
곧장 수련장으로 향하려는데, 이상하게 성채 밖이 시끄러웠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소음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노라고! 내가 누구더냐!”
“아이고! 바텐베르크의 세 번째 혈통, 모리츠 바텐베르크 님이십니다!”
그러자 웃기는 광경이 공터에 펼쳐졌다.
모리츠가 기사들을 죄다 끌어 모아 놓은 채,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게.
얼굴은 시뻘게져 갖곤 기사들이 호응해 줄 때마다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저게 핏줄상으로는 내 형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래! 나는 바텐베르크. 모리츠 바텐베르크로소이다!”
아마 저놈은 모르는 모양이다.
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태에 기사들이 열심히 환호하는 이유를.
모리츠는 아직 열여덟 살 난 어린애였다.
물론 나보다는 형이지만 그건 제쳐 두고.
그런 어린 애가 한껏 자기 자랑을 해 대는데, 어느 어른이 찬물을 끼얹겠는가.
하물며 지금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이었으니.
그 증거로 모여든 기사들의 얼굴엔 모리츠가 퍽 귀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곤 못난 형에게 다가갔다.
그가 큰일을 해냈다는 건 사실이나, 조금만 점잖게 있으면 더 멋있지 않았을까.
“성자님! 신의 가호가 있기를, 호-르!”
나를 본 기사들이 성호를 그으며 인사했다.
메리가 연합에 퍼트린 호르교의 인사법이었다.
“그래. 너희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호-르.”
대충 대꾸해 주곤 멀뚱히 서 있는 모리츠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에게 줄 게 있었다.
“모리츠. 네 검 좀 줘 봐라.”
“뭐? 왜?”
“신께서 너한테 선물을 하사하겠노라…….”
말도 끝마치기 전에 모리츠가 검을 찌를 기세로 내밀었다.
깜짝이야.
“무, 무슨 선물인데? 빨리!”
“기다려.”
채근하는 그를 밀어 두곤 검을 살펴보았다.
누가 금수저 집안 아니랄까 봐 좋은 명검이었다.
이 정도면 품질은 합격.
나는 그의 검에 신앙을 밀어 넣었다.
평소 오러처럼 쓰던 방식이 아닌, 축복의 방식으로.
일만, 오만, 십만…….
밑 빠진 독처럼 게걸스럽게 빛을 탐하던 검이 어느 순간 밝게 반짝였다.
[최하급 성검(B+)이 제작되었습니다.]
“받아. 호르 신의 축복이 깃든 성검이다.”
“어……?”
얼빠진 모리츠에게 다시 검을 내밀었다.
대략 오십만의 신앙을 먹어치운 최하급 성검.
상당한 출혈이 있었지만 괜찮다.
“잘 들어라! 모리츠는 호르 신의 기사, 성기사가 되었다! 그에 이 성검을 하사받은 것이다!”
반짝이는 성검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에 열기가 일렁였으니.
좋은 무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기사인데, 신의 축복이 깃든 애병은 오죽할까.
저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엔 신앙이 아깝지 않았다.
“하, 하하하! 성검이라니……!”
모리츠는 제 검을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그런 그에게 기사들이 몹시 부럽다는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모리츠 도련님.”
“이야…… 성기사까지 되셨군요. 가히 리오 성의 두 번째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으십니다.”
쫑긋, 모리츠의 귀가 움찔거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방방 뛰던 그가 의문스럽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그럼 첫 번째는 누군데?”
“그야…….”
“성자님이시죠. 빛을 이끌고 오신 등불이자 영웅!”
갑자기 왜 내게로 시선이 쏠리는 건지.
나는 가만히 서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실 맞는 소리지.
내가 이곳에서 한 게 몇 갠데.
모리츠가 정찰을 나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지난 며칠간 리오 성은 변해도 한참 변했다.
“참고로 나는 성검도 필요 없어. 신께 특혜를 받는 몸이라.”
파앗, 손바닥 위에 신앙을 밝히며 못난 형에게 웃어 보였다.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 적잖게 눈꼴 시려서.
68화. Episode. 23 악몽의 끝을 향하여 (2)
리오 성에 또다시 언데드 무리가 쳐들어왔다.
구슬의 통제를 벗어난 시체들이 성스러운 기운에 이끌린 것이다.
개중엔 기사였던 자도 대거 눈에 띄었다.
물론 지금의 연합에겐 그리 위험한 놈들은 아니었다.
“방심하지 말고 처리해.”
나는 당장에라도 돌격할 듯 콧김을 내뿜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기도 수천 마리가 모이면 천둥소리가 난다고,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추웅! 저들에게 안식을 찾아 주고 오겠습니다!”
“자, 성문을 열어라!”
쿠구궁-
철판을 덧댄 거대한 성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사이로 대열을 갖춘 기사들이 진군했다.
이제는 화살도 아깝다고 칼로 처리하겠다는 용맹함을 보이며.
“좋아, 좋아! 드디어 내 성검을 휘둘러 보겠구나!”
“잠깐.”
나는 대열에 합류하려는 모리츠를 붙잡았다.
전날 받은 성검을 품에 꽉 끌어안은 모습이 참 우스웠다.
어제까지는 불공평하다며 툴툴거리기 바쁘지 않았던가.
“아, 왜! 나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그 성검 사용법은 알고 있냐?”
내 말에 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용법 같은 것도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줘 봐.”
그의 품에서 검을 빼앗곤 휙휙 휘둘러 보았다. 별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음, 역시 최하급 성검으론 크게 눈에 띄는 능력은 없는 건가.
이 수준의 성유물이 품고 있을 능력은 단 하나였다.
“자, 검에 마나를 실어 봐.”
다시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모리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말에 따랐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며 제 몸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몸에 힘이 넘쳐……! 이것이 신의 축복인가!”
최하급 성검이 지닌 능력은 다름 아닌 버프.
신앙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나에겐 별것 아니지만, 이놈에겐 큰 도움이 될 터다.
그를 증명하듯 모리츠가 은은한 빛이 타오르는 성검을 쥐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냅다 전장으로 달려갈 기세라 나는 다시 한번 붙잡았다.
“아, 또 왜!”
“이게 사용법 알려 줬더니 어디서 성질을 내?”
확 씨.
눈을 부라리자 그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성기사가 됐다고.”
성기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특기, 신성력 변환.
내 생각대로라면 마나를 신성력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렷다.
관건은 그 비율.
마나와 신성력이 몇 대 몇으로 변환되는 건지 알아야 했다.
혹시 신성력을 써 본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모리츠가 입을 열었다.
“딱 한 번이지만 폴린 성에서 네 마나와 똑같은 마나를 사용했었어. 그게 성기사의 힘이란 말이야? 맙소사!”
“그래. 비율은 어느 정도나 돼?”
“대충 마나 2에 신성력 1정도. 그 언저리쯤 될 거야.”
썩 좋은 효율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질이 다른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신성력이라면 더더욱.
수많은 성기사가 신성력을 내뿜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장관이겠군.
“알았어. 가 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리츠가 쌩 하고 달려 나갔다.
신성력 이야기까지 듣자 더욱 흥분한 모양새였다.
“리오 성의 영웅이 납셨다! 이 몸의 성검을, 신성력을 두려워하라!”
“취이익! 동지, 참으로 멋진 검을 얻었소!”
바보 하나가 추가됐을 뿐인데, 여느 날보다 전장이 배는 시끄러웠다.
기가 살아도 너무 산 느낌이었다.
저러다 언제 한번 큰코다치지.
“아빠.”
성벽 위에서 가만히 전장을 내려다 볼 때였다.
아델이 다가와서 내 팔을 끌어안았다.
웬일인지 표정엔 의문이 가득했다.
“저게 진짜 성검이야? 그런 것치곤 너무 비루한데.”
“최하급 성검이니까 어쩔 수 없지.”
“저 정도면 이제 막 자격을 얻은 성녀가 축복을 내린 수준이야.”
“그거 참 정확한 표현이네.”
아델의 본의 아닌 팩폭에 입맛이 쓰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내 신격은 곧 성장할 테니까.
고위 마족 리치들을 제물 삼아서.
그럼 또다시 많은 게 변할 것이다.
“와아아!”
갑작스레 울려 퍼진 환호성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장을 바라보니 어느덧 전투가 끝나 있었다.
참 긴장감 없는 싸움이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아.”
나는 땀에 젖은 기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연합은 쉽게 말해, 살 맛이 나는 상황이었다.
신앙이 등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신도가 노래도 불러 주고, 줄곧 괴롭혔던 언데드도 이젠 우습다.
모든 게 순조로이 풀려 가니 알게 모르게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다.
하나 그래선 안 됐다.
아직 진짜 적들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방심이 웬 말인가.
“짐 바리바리 싸들고 마기 속을 헤쳐 나가면 정신 차릴 거야.”
옆에서 아델이 옳은 소리를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가득 찬 리오 성은 저 바깥에 비하면 지상 낙원이다.
이곳을 벗어나 매운 맛을 볼 때가 된 것이다.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해야겠어.”
때마침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내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준비를 서두르겠다고 입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역시 사령관 자리는 아무나 꿰차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난 성을 쭉 훑어보았다.
이제는 모두 내 신도가 된, 천칠백의 기사들이 보였다.
더불어 엘프와 성가대까지.
요즈음 날마다 들어오는 신앙은 대략 십사만여.
그리고 현재 내 영혼에 담긴 양은 백삼십만 정도다.
여기저기에 아끼지 않고 썼음에도 이만큼이나 축적할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고, 결코 우습지 않은 무기였다.
“치사한 짓거리나 하는 놈들을 골탕 먹일 방법도 떠올랐고.”
아, 기대된다.
아델과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 ◈ ◈
폴린 성은 고요했다.
수백의 마수들은 강대한 강제력 아래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침입자를 제거하라-
고귀한 마족들이 내린 명령은 그것뿐이었으니.
쿠구국-
세 리치가 똬리를 튼 성의 꼭대기에선 불길한 기운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균열을 열기 위한 의식은 얼마 전 막바지에 들어섰다.
그들은 계획을 완벽히 실행하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고작 왕국의 절반을 제물로 바친 걸론 일을 수월히 진행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왕국 하나는 마기에 집어삼켜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큰 불길은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이끌 테니.
자칫 잘못하면 그들로서도 상대하지 못할 강자들이 나설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별을 휘두르던 노인이라던가.
다만 이제는 전부 다 끝난 일이다.
이 의식만 제대로 마무리되면, 마왕이 강림해 세상을 불길로 휘감을 터.
저 멀리 불쾌한 기운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미약하기 짝이 없는 빛이다.
마기에 움츠러들 뿐인 겁쟁이들론 이곳을 지키는 마수들에게조차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일부러 함락시키지 않고 있던 성이 아니던가.
놈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은폐하기 위한 방패일 뿐.
세 리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에 완전히 몰입했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그것은 가히 무아지경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를 넘어 담금질의 수준이었다.
수십 일 동안 모든 잡념을 끊은 채 의식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크나큰 실수란 것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얕보았던 리오 성에선 미약했던 불꽃이 이제는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마기가 더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기사들과 협력해야만 합니다!”
한 소년이 강하게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몹시 적었다.
“앨런 도련님. 무식한 기사 놈들과 협력이라니, 절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오래전부터 공을 들였던 폴랜드 헬가와의 연락이 두절된 지가 한참입니다. 이미 기사들도 저희의 속셈을 알아차렸겠지요.”
폴린 성의 반대편, 마법사들이 모인 이곳에서만큼은 기사를 두둔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이 기회를 살려 기사들을 골탕 먹일 궁리만 하는 자들이었다.
“기사가 승리해도, 저 마기의 주인이 승리해도. 저희는 어부지리만 노리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깟 기사 놈들이 기습을 예상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그 작태를 바라보던 앨런이 입술을 짓씹었다.
무식한 기사라면 치를 떠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건 무언가가 달랐다.
“오오! 저 강대한 마기 좀 보시오! 마치 밤하늘 같지 않소?”
마법사들은 제 눈에 시력 강화 마법을 걸면서까지 폴린 성에 시선을 던졌다.
마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언뜻 황홀함이 스쳐 지난 건 착각일까.
‘미쳤어. 이자들은 미친 게 분명해.’
앨런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멍청한 칼잡이들에게 한 방 먹여 주기 위해 이곳, 롤랑가를 필두로 한 마법 연합에 친히 합류했건만.
‘기사도 짜증 나기 짝이 없지만, 미친 마법사는 더 혐오스럽다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분명 이들도 마기에 몸서리치던 때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결계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펼쳤을까.
그러나 그것으로도 무리였나 보다.
결계를 뚫고 흘러 들어온 소량의 마기를 몇달간 쐬더니,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것 같았다.
까득, 이를 악문 앨런이 발을 굴렀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진정 올바른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란 말입니까!”
마력이 가득 실린 그의 음성이 마법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넋 놓고 마기를 바라보던 이들이 헛기침을 해 댔다.
마법제일가, 마르크스 가문에서도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의 외침을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아마 실력만으로 따지면 이 어린 소년이 연합의 톱을 달릴 것이다.
“죄송합니다, 앨런 도련님. 저희가 추태를 부렸습니다.”
연합을 주최한 롤랑 가주가 앨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굉장히 깍듯하고 공손한 태도였으나, 앨런의 표정은 더욱 딱딱히 굳었다.
저 멀쩡한 가면 속에 얼마나 많은 뱀이 살고 있는지 뻔히 보인 탓이었다.
“……기회나 제대로 잡으시길. 그대들 말대로 기사와의 협력은 이미 물 건너간 듯하니, 어부지리라도 잘 노리라는 말입니다.”
앨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거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안에선 원대한 포부가 맴돌았다.
‘이 세상에서 기사를 모조리 지우면, 내 다음 적은 모든 마법사이리라.’
또 그다음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이종족이 될 것이다.
“칼과 마법이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
69화. Episode. 23 악몽의 끝을 향하여 (3)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연합은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드디어 마지막 전장으로 가는구나.”
“빌어먹을 놈들. 대체 어떤 상판을 하고 있는지 봐야겠어.”
기사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거의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들을 괴롭힌 장본인이었으니, 이가 갈릴 만도 했다.
“호르시여!”
개중 몇몇은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부디 이 싸움에 함께 해 달라고.
물론 나는 그 기도를 들어 줄 생각이다.“물자는 넉넉하게 챙겼어?”
“예. 짐마차 서른 대가 전부 꽉 찼습니다.”
레오가 내 옆에서 우직하게 답했다.
그 태도가 처음과는 너무도 딴판이어서 웃음이 났다.
‘얼마 전에서야 알았지만, 이 녀석들이 신앙심을 품을수록 나한테 충성심을 느낀다는 말이지.’
어째서일까.
내가 신이면서 ‘리하르트’이기 때문인 걸까.
아무튼 정말 놀라운 일이다.
기사에게 충성심이란 건 아주 중요한 거라, 나에게 터럭만큼이라도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 어떤 기연보다도 값진 결과를 낳을 터다.
물론 레오는 신앙심이 그리 깊지는 않다.
신도는 되었지만, 끽해 봐야 기도 한 번에 4~50이나 들어올까.
“도련님! 이 아론에게 딱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가만히 웃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아론이 달려와선 간절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갑자기 무슨 약조?”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걸까.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에서 제가 활약을 한다면…… 저에게도 성기사 자격을 내려 주십시오. 도련님의 직속 기사인 제가 성기사가 아니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그래. 호르께서 너를 살펴보실 거다. 그러니 열심히 해 봐.”
다행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아론이 결연한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옆에 있던 레오가 딴지를 걸기 전까지는.
“863번째 신도에겐 무리이지 않을까 싶네만. 하하!”
아픈 곳을 제대로 찌르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아론은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신도가 되려고 했던 거지, 딱히 큰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레오도 마찬가지.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신도가 되겠노라 말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내였으니까.
“1691번째 신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어쭈? 이래봬도 나는 연합의 사령관이라네. 말이 경솔한 감이 없잖아 있군.”
어느새 신경전을 벌이는 둘을 뒤로하곤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덩그러니 서 있는 짐마차가 반이요, 마갑(馬甲)을 둘러멘 전투마가 나머지 반이었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었던 리오 성이 좁아진 기분이다.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지루한 연설 같은 건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지난 일주일간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을 사내들에게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 ◈ ◈
대규모 군단이 이동을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성가대를 태운 마차 안에선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음성은 더욱더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성수를 물처럼 마시고 있기 때문이었다.
“믿을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르리라!”
기사들이 진군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엉망진창인 음정에 제법 좋은 기운이 섞여 들었다.
“흐음.”
나르에 올라타 선두를 달리던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굳센 사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각오, 자신감, 전의.
전투에 있어서 온갖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표정들.
과연 저게 얼마나 갈까.
물론 사기가 높으면 좋다.
하지만 저 앞에 펼쳐진 지옥의 마기가 내 감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마 진군조차 쉽지 않을 테지.
해이해진 긴장감을 조이기엔 그만큼 좋은 환경이 없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촤아악-!
겁 없이 달려들던 시체 무리는 단숨에 갈려 나갔다.
통제를 벗어난 언데드는 어차피 우리에게 몰려들게 되어 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같은 격이다.
그렇게 마을을 수차례 건너자, 곧 숲이 앞을 가로막았다.
또 다른 말로는 경계선.
모리츠의 증언대로 저 너머부터는 격이 다른 마기가 느껴졌다.
“가자.”
◈ ◈ ◈
죽은 숲을 건넜다.
곧이어 죽은 강을 건넜다.
“…….”
세상 힘차게 나아가던 연합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경계선 밖의 마기는 뭐랄까.
그래, 모리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랬다.
안쪽의 마기가 마나라면, 바깥쪽의 마기는 오러다.
참 알맞은 비유였다.
너무나도 찰떡같아서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내심 의심했던 기사들 몇몇은 모리츠에게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런 곳을 혼자서, 더불어 적진 한복판을 정찰하고 돌아오다니.
“히, 히익!”
정작 모리츠도 익숙해질 수없는 공포에 몸을 떨어 댔지만.
“도련님. 이쯤에서…….”
“아니.”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레오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물리적인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끌끌. 독한 놈일세.”
“스승님은 괜찮으십니까?”
너털웃음을 짓는 우리의 든든한 변수.
발락에게 그리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오우거의 방귀를 맡아 보았느냐? 그거나 이거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구나.”
“아, 예.”
비유하고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갈 때였다.
히히힝-!
결국 혈통 좋은 명마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아무리 찬송가를 불러 주어도, 마갑에 성유를 덧칠해 주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잘 버텨 준거지.”
마기가 이렇게나 기승을 부리는데, 한낱 말에게 열정을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었다.
나는 재차 연합을 훑어보았다.
기사들 하나하나가 굳은 얼굴을 해 보였다.
다행이랄 점은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굳센 각오가 눈가에서 활활 타올랐다.
내가 딱 바라던 상태였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똑똑히 느껴야 했다.
파아앗-!
조용히 후광을 펼쳤다.
죄 칠흑처럼 어두운 주변이 한순간에 밝혀졌다.
나를 향한 기사들의 시선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자.”
이 정도의 빛이라면 말도 다시 움직일 터.
우리는 진군을 이어 나갔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우리를 해하지 못할지어다!”
“오늘이 역사가 될지어다!”
찬송가 ‘이르시길’이 행진가가 되어 터져 나왔다.
괴물이든 뭐든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악다구니를 쓰는 목청이었다.
“오오오! 호르 가라사대!”
“신앙은 널리 퍼질지어다!”
우렁찬 행진가 속, 연합은 수많은 마을과 영지를 지나쳤다.
◈ ◈ ◈
“다 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날 며칠을 행진하던 연합이 일시에 멈춰 섰다.
제1요새, 폴린 성의 모습이 코앞에 있었다.
그 모양새는 도저히 성이라 보긴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 일반인이 봤다면 토악질부터 할 모습이었다.
“하아…… 내가 어떻게 혼자 쳐들어갔는지 새삼 의문스럽다.”
모리츠가 아련한 눈으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하, 하하! 모리츠 도련님은 정말 사나이셨군요. 저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그거 인정이지. 너라면 숲을 건너다 오줌 세 방울 정돈 지렸을 거야.”
적진을 눈앞에 둔 기사들이 잡담을 주고받았다.
나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저들 나름대로의 텐션 조절이었으니까.
“취이익, 대단한 인간 전사! 언제 쳐들어갈 거요? 이거 몸이 달아올라서 못 참겠다오!”
이중에서 가장 신난 건 휴거였다.
오크의 신경 줄이 무쇠 줄이라더니, 특히 이놈은 아다만티움 줄로 되어 있는 듯했다.
“쳐들어가는 건 우리가 아니야.”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굳이 적진에 쳐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성의는 표한 거지.
“아델.”
“응!”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신앙을 거의 쏟아붓듯 밀어 넣어 주었다.
신앙을 양껏 받아들인 아델이 발을 굴렀다.
쿵!
커다란 나무줄기 네 가닥이 땅을 뚫고 치솟았다.
그것이 구불구불 꼬여, 흙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그 모양새가 꼭 성벽처럼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고오오-
더불어 나무줄기에서 연녹빛이 흘러나왔다.
아델의 ‘생명’과 신앙의 조합이었다.
“자리를 잡아라!”
“저쪽이 쳐들어오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들자!”
미리 계획을 전해 들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수성에 이골이 난 그들이었으니,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어둠은 실낯 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결국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마차에서 내린 성가대와 엘프가 뿌리 뒤편에 저만치 떨어져 노래를 불렀다.
“너희 곁에 무엇이 있느냐!”
“등불 있도다!”
“너희 앞에 무엇이 있느냐!”
“어둠 있도다!”
쿵, 쿵!
기사들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곧 사그라들 어둠이더라!”
“와아아아!”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몹시 웅혼한 포효를 들으며, 나는 애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라고 꼭 머리가 좋은 건 아닌가 봐.”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리치 녀석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을 해 놓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큰일 하신다고 결계라도 몇 겹 쳐 놓았겠지.
“후회할 텐데.”
이쪽을 너무나 얕보았다.
또, 자신들의 계획을 너무나 과대평가했다.
어쩌면 마왕의 닦달에 허겁지겁 떠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게 뭐란 말인가.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외쳤다.
“공격하라-!”
직후, 성유 바른 화살이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 뒤를 따라 엘프들의 마법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콰과과광!
순식간에 폭격을 맞은 폴린 성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가라앉을 새도 없이, 또다시 폭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적들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과연 마수들의 얄팍한 인내심이 얼마나 갈까.
“참, 타이밍도 완벽하군.”
나는 희뿌연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성의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마기가 저 정도나 모였으면 정말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원래 모든 일은 끝맺음이 중요한 법.
즉, 리치 녀석들은 습격을 알아차려도 옴짝달싹할 수없는 상황이란 거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졌다간, 그동안 공들인 의식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70화. Episode. 24 종전 (1)
자욱한 흙먼지가 몇 번이나 일었을까.
끼에에에엑-!
반파된 성벽 너머로 흉포하고 괴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직후,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전장을 짓누르는, 더없이 불길하며 끈적한 살기.
“역시 마수다, 이건가.”
리하르트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고위 마족의 통제를 받는다고 해도, 본래가 사나운 본성을 가진 괴물이다.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통제고 뭐고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끄에에에!”
놈들이 흙먼지를 헤치며 성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 붉고 누런 눈빛에 분노와 살의가 쏘아져 심장을 콱 옥죄였다.
이것이 마수.
약육강식의 마계에서 당당히 한 축에 자리 잡은 짐승들이었다.
“제1군!”
사령관이 소리쳤다.
그러자 최상급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곤 뿌리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마계의 짐승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들뿐이었다.
치켜든 검과 창에서 오러가 넘실넘실 치솟았다.
곧 그들이 마수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쏴! 화살을 아끼지 마라!”
피슈슈슉-
쉼 없이 빗발치는 화살과 땅거죽을 뒤집는 마법 세례.
그 정신 사나운 폭풍 속에서, 기사와 마수가 맞부딪쳤다.
“크아아악! 죽여, 다 죽여! 망할 놈의 괴물 자식들!”
오러 특유의 빛이 어둠을 갈랐고,
마수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피륙을 갈랐다.
비명, 비명, 비명, 비명…….
죽음, 죽음, 죽음!
으레 그렇듯 전쟁은 혼란 속에서 이어진다.
피 냄새 물씬 나는 비명이 인간의 것인지, 괴물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젠장! 화살이 박히질 않잖아!”
“그래도 그냥 쏴!”
뿌리에 자리 잡은 기사들은 손가락이 터지도록 시위를 당겼다.
“어머니의 적은 우리의 적!”
엘프들이 목이 터져라 마법을 영창했다.
콰앙, 콰아앙-!
눈 먼 화살에 눈을 잃은 마수가 울부짖고, 마법에 직격한 놈의 팔다리가 공중을 날았다.
오러 머금은 칼날에 목을 잃은 녀석도 있었다.
“끄악!”
반면 인간의 피해도 늘어만 갔다.
우악스럽게 짓이겨 떨어져 나간 기사의 팔.
뒤에서 덮쳐드는 마수에 가슴이 뚫린 사내.
막 한 놈을 베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습당해 절명한 백전노장.
여느 때보다 확연히 적은 수의 적들이었지만, 그 흉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망할, 차라리 언데드가 나은 편이었구먼.”
연신 시위를 당기던 사내 하나가 궁시렁거렸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최상급 기사들이 스러지는 모습에 울분이 차올랐다.
그러나 어쩌랴.
겨우 중급인 자신이 나섰다간 개죽음만 당할 것을.
그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 강하게 시위를 당기리라.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데, 데스나이트다! 가주급 데스나이트야!”
“라덴, 발리오, 발렌트, 크레이튼가의 가주들 확인!”
떼 지은 마수들의 머리 위를 날듯 달려오는 묵갑의 기사들이 보였다.
온몸에 줄기줄기 휘감은 마기가 과연 궤를 달리했다.
“우리가 나서겠다.”
그들을 막아선 건 연합의 네 가주였다.
꽈아앙!
고절한 검술이 맞부딪쳤다.
◈ ◈ ◈
“성마대전을 보는 것 같군.”
나는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살점과 피가 난무하고, 비명이 끊이질 않는 참혹한 싸움.
실제로 보게 된 마수는 생각보다 더 끔찍하고 추악한 존재였다.
놈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또, 고통을 모른다.
눈에 보이면 달려들고,
거슬리면 같은 편의 살가죽도 파헤칠 정도로 사나웠다.
“취익-!”
치열한 전투를 반기던 휴거도 이골이 나는 듯한 모습으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흉터 가득한 붉은 몸엔 수십 개의 상처가 새로이 그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3기사단의 최상급 기사들이 피와 땀 섞인 액체를 주륵주륵 흘렸다.
개중엔 싸늘한 주검이 되어 흙바닥에 몸을 누인 자도 여럿 있었다.
저놈들, 나랑 친했는데.
“…….”
죽지 않기로 했으면서 결국은 죽었다.
같이 드래곤도 토벌했으면서 왜 저깟 놈들한테.
알고는 있었다.
마수의 상대를 오롯이 최상급 기사들한테 맡긴 이상, 그들 중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그 누군가가 나와 친하지 않은 이가 될 수도 있고, 또 지금처럼 친근한 기사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전부 다 알고 최선의 수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저도 가서 싸우겠습니다!”
“안 돼. 넌 가지마.”
“도련님!”
아론이 눈을 부릅떴다.
의문과 원망이 담긴 시선이었다.
“저 또한 오러를 다를 줄 아는, 최상급 경지의 기사입니다. 어찌 저만을 1군에서 빼 놓으신 겁니까?”
그래.
나는 그를 제외시켰다.
물론 그 이유가 아론을 잃기 싫다는,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비롯된 건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뺀 거다. 그때까지 닥치고 기다려.”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 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론의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었다.
“누군 이렇게 구경만 하는 게 좋은 줄 알아?”
그런데 정작 내 입이 열려 버렸다.
“나도 당장에 내려가서 싸우고 싶어. 근데 적들이 저게 끝이야? 저것들만 다 죽이면 끝이냐고.”
우리의 진짜 적은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리치 세 마리였다.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우리도 전력을 남겨 놓아야만 했다.
때문에 나와 아론, 레오를 비롯한 제1기사단의 주요 전력을 1군에서 빼 놓았다.
기사들이 갈려 나가는 걸 까닭 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침묵을 유지하던 아론이 한참 만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차피 그에게 화난 것도 아니다.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 뿐.
그에게 되었다며 대꾸하곤 전장을 살펴보았다.
콰앙, 콰앙!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바로 가주와 가주급 데스나이트들의 전투였다.
결판은 쉽게 나지 않고 있었다.
한 번씩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주위의 땅이 과자처럼 부서지고, 뭣 모르고 달려들던 마수들이 갈가리 찢겨졌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어 폴린 성의 성채를 눈에 담았다.
수 차례의 폭격에 성벽은 반파되어 엉망이 되었는데, 성채는 조금의 그을림도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결계.”
저 크고 넓은 성채를 완전히 휘감은 붉은 장막이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척 봐도 단단해 보이는 결계였다.
리치들이 마음 놓고 의식에 몰두하는 이유가 저것이다.
발락과 같은 규격 외의 강자가 아니라면 저 결계를 뚫기란 요원해 보였다.
또, 결계 너머 성채엔 수많은 함정과 마법이 걸려 있을 터다.
어쩌면 마수보다도 더 흉측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고.
“이미 예상했던 바다.”
놈들 또한 사활을 걸고 실행 중인 계획이다.
설마 멍청한 마수들만 믿고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
음흉하기 짝이 없는 흑마법사가 무려 셋이나 틀어박혔을 때부터, 폴린 성은 하나의 ‘던전’이라고 봐야 했다.
아주 위험하고, 악질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던전 말이다.
그때, 모리츠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리하르트, 붉은 장막은 오로지 공격을 막는 것에 특화된 결계란 뜻이야!”
“알아. 갑자기 왜?”
“왜라니! 마수들이 온통 정신 팔려 있을 때 냉큼 쳐들어가야지! 저놈들 무슨 의식 같은 걸 하고 있다며, 얼른 방해해야 할 것 아냐.”
모리츠가 답답하다는 기색을 띄우며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젓곤 놈을 뒤로 물렸다.
마법사는 다른 말로는 거미라고들 표현한다.
거미줄이 덕지덕지 쳐져 있는 저곳에 쳐들어가는 건 최악의 판단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왼쪽이 비었다! 얼른 가서 막아!”
그사이 싸움은 점점 더 격화되었다.
집채만 한 괴물이 쿵 하고 쓰러지고, 오러를 흩뿌리던 검날이 동강 났다.
지독한 소모전.
그럼에도 기사들은 승기를 다잡고 있었다.
◈ ◈ ◈
마기를 머금어 새까맸던 흙바닥이 붉게 덧칠되었다.
그 위에 마수의 피가, 또 그 위에 인간이었던 것의 살점이 나동그라졌다.
마지막으로 장식된 것은 거대한 괴물의 머리통.
“와아아아!”
끝끝내 모든 마수를 처리한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환호성 따위의 기분 좋은 외침이 아닌, 승리했음을 알리는 상처투성이 승전보였다.
누군가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어떤 이는 동료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한 번의 격돌로 죽은 기사만 2백여.
제1군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명을 달리했다.
전사자들의 넋을 달래듯, 전장의 소음에 가려졌던 찬송가가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고작 병사만 처리했을 뿐, 적들의 수장이 저 성채에 있었다.
기사들은 핏물 흐르는 검을 꼬나 쥐곤 눈을 부라렸다.
동료 잃은 슬픔은 적의로, 두려움은 사명으로 이겨 냈다.
돌격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에 가서 쑥대밭을 만들리라.
“1군! 전열에서 물러나 재정비 실시!”
그런데 떨어진 건 사령관의 후퇴 명령이었다.
격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기사들이 나무줄기 뒤로 물러섰다.
얼굴엔 의문이 떠올랐지만 밍기적거리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쿠가가각-!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두 별이 신앙을 뿜어냈으니까.
지금껏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밝고, 거센 빛을 둘러싼 검의 별이었다.
“우리는 쳐들어가지 않는다. 적을 이끌어 낼 뿐이다.”
그렇게 말한 리하르트가 두 별을 하나로 합쳤다.
콰아아아아!
활활 뿜어지던 빛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총 100만의 신앙이 담긴 별.
한 번의 일격으로 소모하기엔 너무도 많은 힘이었다.
‘이거라면 저 붉은 결계를 깰 수 있을까.’
아니, 무리였다.
그래서 아론이 필요했다.
“도, 도련님?”
갑자기 제 앞에 내밀어진 별에 아론이 눈을 꿈뻑였다.
그러다가 곧, 표정을 굳히곤 손을 내밀었다.
고오오-!
전력으로 엮어 낸 보라색 오러가 새하얀 별을 타고 질주했다.
“……장관이군.”
뒷짐 지고 서 있던 발락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검성을 다루는 이로써, 이러한 별을 직접 보게 된 것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의 힘에 더해 특수한 마나가 더해진 별!
폴린 성에서 치솟는 어둠과, 별이 뿜어내는 빛이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결계는 깰 수 없을 게다. 제자야.”
“알고 있습니다.”
최하급 신앙으로 대적하기엔, 저쪽이 울컥울컥 뱉어 내는 어둠은 너무나 짙었다.
질적 차이가 압도적으로 컸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입꼬릴 끌어올렸다.
“어차피 이건 못입니다.”
저 빨갛고 짜증 나는 결계를 파고들어갈 못이다.
그의 시선이 레오를 향했다.
챙-!
사령관이 검을 뽑아 들었다.
곧게 뻗은 칼날에서 짙은 남색의 검광이 터져 나왔다.
소드마스터.
그 고절한 경지에서도 끝자락에 다다른, 더 높은 곳을 앞둔 기사, 레오.
그가 망치가 되어 줄 터다.
71화. Episode. 24 종전 (2)
“간다.”
짧은 한마디.
직후, 보라색 별이 쏜살같이 허공을 갈랐다.
유성우의 그것처럼 꼬리를 길게 남기며.
쩌어어엉-!
곧 성채를 둘러싼 붉은 장막과 별이 부딪쳤다.
흉험하고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강렬한 충격의 여파가 대기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콰드득, 별이 계속 장막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장막은 크게 요동칠 뿐, 미세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레오!”
“하압-!”
리하르트의 외침을 들은 레오가 검을 휘둘렀다.
검끝에서 쏘아져 나간 검광이 별의 뒤편을 때렸다.
콰앙!
폭음이 한 번.
콰앙!
폭음이 두 번.
그 우악스러운 망치질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입을 벌렸다.
레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저 멀리 떨어진 성채의 결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하르트 성자님!”
“레오 사령관님! 힘내십시오!”
기사들의 응원이 사기와 함께 들끓었다.
우직하게 장막을 밀어붙이던 별이 한 점에서 회전을 시작했다.
레오가 쏘아낸 검광이 더욱 크고 밝아졌다.
“하아압!”
쩌적- 쩌엉!
금 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 붉디붉은 장막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와아아!”
고작 결계 하나 깼을 뿐인데, 기사들이 기뻐 날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악을 쓰는 응원이 이어졌다.
“성을 완전히 무너트려 버려!”
“마법, 마법을 쏴!”
그에 맞춰 하늘 이곳저곳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수많은 마법진에서 온갖 기적이 일어나 맨몸의 성채를 수없이 때렸다.
“허억, 허억……!”
무리한 기예(伎藝)에 숨을 몰아쉬던 리하르트가 성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허물어져 가는 성채에선 여전히 마기가 기승을 부렸다.
‘의식을 완성하고자 발악을 하는구나.’
눈을 부릅뜬 그가 다시금 별을 일으켰다.
“아쉽겠어. 거의 다 되었는데 말이야.”
별 한 자루가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날았다.
목표는 마기가 넘실대는 성의 최정상.
콰앙-!
역겨운 살점으로 뒤덮인 성채에서 굉음이 일었다.
곧 폭발할 것처럼 들끓어 대던 마기가 눈 녹듯 사그라졌다.
연신 소란스럽던 전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게 끝일까.
리치들은 죽은 걸까.
모두의 긴장 어린 시선이 무너진 성채에 쏠렸을 때.
끄어어어-!
영혼까지 뒤흔드는 비명이 울렸다.
한순간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리치들의 울음소리였다.
◈ ◈ ◈
“감히, 감히이!”
성채의 잔해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아래에서 세 마리의 리치가 허공에 떠올랐다.
녀석들의 텅 빈 안구에선 새빨간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재앙의 주동자.
“감히 버러지들이!”
그들이 연합을 씹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두렵고 위대한 왕의 행차가 저 버러지들에게 가로막혔다.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거의 다 되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잠잠해졌던 마기가 그들로부터 터져 나와, 다시금 공기가 무겁게 짓눌렸다.
분노에 잡아먹힌 고위 마족들의 힘은 흉악하고 또 흉악했다.
순식간에 불길한 마법진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곳에서 새까만 마법이 발현되어 연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콰아앙-!
씹어 죽여도 모자랄 것들.
마계의 심연에 처박혀야 할 쓰레기들.
분노, 분노, 분노…….
원색적이고 적나라한 분노가 마법으로 화해 땅을 울렸다.
“죽이고 또 죽여 영혼까지 더럽혀 주리라!”
한 리치가 마법을 외었다.
폴린 성과 그 일대를 집어삼켰던 저주가 다시 한번 펼쳐졌다.
연합이 올라선 나무줄기가 꺼멓게 썩어 들어갔다.
또 한 리치가 마법을 외었다.
“크워어어…….”
죽은 흙바닥에선 망자들이 기어올랐다.
목 달아난 마수의 시체가 다시금 움직이고,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던 기사들마저 언데드가 되어 검을 쥐었다.
썩은 뿌리를 타고 오른 언데드가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쾅! 콰아앙!
다른 리치는 강대한 마법을 연합의 중심부에 쏟아부었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재앙.
연합이 비명을 질렀다.
단 세 마리의 마족이 만들어 내는 대참사.
하지만 그것조차도 성에 차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균열을 열겠다.”
리치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둘이 안광을 빛냈다.
“마계의 왕을 위하여!”
“지옥을 모르는 잡것들에게 천벌을!”
“자격 없는 자에게 심판을!”
앞으로 나선 리치에게 둘의 마기가 모여들었다.
의식은 분명 실패했다.
하지만 그건 마왕이 강림할 만큼의 크고 완전한 균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상응하는 대가만 치르면, 어느 정도의 균열은 능히 만들 수 있다.
쩌저적-!
감당치 못할 마기를 받아들인 리치의 뼈가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쩍쩍 갈라진 뼈 위로 룬 문자들이 떠올랐다.
자기희생.
그 대가로 펼쳐지는 공간의 뒤틀림.
“똑똑히 느끼거라. 마계의 두려움을!”
퍼석- 리치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 ◈ ◈
“하.”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건 온통 절규.
그토록 경건하던 찬송가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성가대를 바라보자, 눈을 꼭 감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보였다.
부르고는 있었구나.
소음에 완전히 먹혀들어 안 들릴 뿐이지.
“싸워, 싸워라! 두려워하지 마라!”
“엘프들은 마법을 요격해!”
버럭버럭 소리치는 지휘관과 절규 섞인 언데드의 울음소리가 한데 섞였다.
그 사이사이 비명과 피륙 가르는 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으아아! 호르시여!”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리츠가 성검을 휘둘러 댔다.
죄 새까만 곳에서 신앙 섞인 검을 쥐고 있다 보니, 언데드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취익, 동지! 혼자 무리하지 마시오!”
그런 모리츠를 휴거가 지원에 나섰다.
저쪽은 알아서 살아남을 테고.
“성가대와 엘프를 지켜라!”
“줄기 뒤에서 싸워!”
“이봐, 겁먹고 떨고 있을 거면 뒤로 꺼져!”
연합은 혼란 속에서도 대열을 가다듬었다.
피로와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었으면서도 눈가엔 전의가 타올랐다.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 싸움이야! 결코 져선 안 될 것이다!”
마나 실린 레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기사들이 검을 치켜들었다.
잔뜩 떨리는 손으로나마.
“너희 곁에 무엇이 있느냐!”
“등불 있도다!”
“너희 앞에 무엇이 있느냐!”
“어둠 있도다!”
입으로는 구호를 외쳤다.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주먹엔 흉갑이 우그러질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다.
“곧 사그라들 어둠이더라!”
내가 마지막 구호를 외쳤다.
외침은 곧 신앙이 되어 그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벗겨 주었다.
“호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용맹히 싸워라!”
“와아아!”
전투가 다시 격해졌다.
찐득한 피를 머금은 드래곤 투스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검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온몸에 신앙을 둘러싸고, 언데드 사이를 누볐다.
아가릴 쩍 벌린 채 덤벼드는 괴물을 베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물 사이로 죽은 기사의 검이 날아들었다.
쾅-
순식간에 엮어 낸 별이 그 검을 걷어 냈다.
“편히 쉬어라.”
활짝 열린 시체의 가슴팍에 드래곤 투스를 꽂아 넣곤 올려 베었다.
갈라진 사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제3기사단의 기사였다.
“끄에에엑!”
비통함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시체는 이 땅에 차고 넘쳤다.
베고, 베고, 또 벤다.
한껏 일으킨 설왕의 한기가 일순간에 터져 나와, 시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흐읍!”
검을 가로로 긋자 퍼석 하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시체 세 구가 나동그라졌다.
허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별 두 자루로는 위험에 빠진 기사들을 지원했다.
“도련님! 하늘이!”
그때였다.
피어싱 오러로 마법을 꿰뚫어 내던 아론이 하늘을 가리켰다.
“…….”
나는 말없이 검을 늘어트렸다.
왜 저기에 균열이 열리고 있을까.
분명 의식은 실패하지 않았던가.
“젠장.”
변수였다.
나는 하늘에 한눈 팔린 기사들에게 정신 차리라 외치곤, 리치들을 노려보았다.
어째선지 하나가 줄어 둘이 된 리치들.
놈들은 몹시 지친 듯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쩌저적-
갈라진 하늘에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에서 붉고 붉은 왼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설마……!”
눈이 절로 커졌다.
저 붉고 커다란 손의 주인을 알 것만 같았다.
『한심한…… 균열조차도 제대로 열지 못했느냐.』
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온 음성이 전장을 짓눌렀다.
그 안에 담긴 비난과 살의는 리치들을 향했음에도, 이쪽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뭐야, 저건 대체 뭐냐고!”
쩔그렁.
모리츠가 떨어트린 성검이 애처롭게 울었다.
전투 중 검을 놓는 행위는 자살 행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관없었다.
인간이든 언데드이든, 모두가 넋 놓고 붉은 마족을 바라보았으니까.
곧 양팔, 머리를 비롯한 거대한 상체가 드러났다.
“군단장 칼고스…….”
리치 세 마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없는, 먼 훗날에나 등장할 강적.
그게 벌써부터 대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호오…… 나를 알고 있…….』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붉은 거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런데 놈의 흉흉한 목소리가 돌연 뚝 끊겼다.
『끄흐, 끄흐흐……!』
이것은 흐느낌일까, 웃음일까.
나를 향한 두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 걸 보면 웃음이 분명했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빌어 처먹을 아버지!』
“큭!”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골을 울렸다.
내게 무어라 소리치는데, 울분인지 희열인지 모를 감정이 잔뜩 뒤섞여 발음이 뭉개진 터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빨갱이 자식이.”
역한 마기에 반항하듯 신앙을 일으켰다.
지금 연합에게 칼고스는 끔찍한 재앙이다.
그러나 전혀 두려울 것 없다.
우리에게도 변수는 있으니.
“저건 정말 위험하구나.”
여태 방관만 하던 발락이 나섰다.
나서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연합이 초전박살 날 판인데도 그럴까.
“쯧, 말을 번복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발락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췄다.
그 주위로 여덟 자루의 별이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빚어졌다.
◈ ◈ ◈
“뭐냐, 뭐냐아!”
“왜 저놈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 리치들도 마찬가지였다.
크나큰 출혈을 감수하고 일으킨 균열에서 칼고스가 튀어나온 건 의도대로였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은 전혀 의도치 않은 대로 흘러갔다.
난데없이 별을 다루는 노인이 튀어나와 칼고스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노인은 리치들도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마왕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그들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인간.
자신들을 상대하면서도 줄곧 여유롭던 기사였다.
“저런 강자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그토록 조심했건만.”
『끄워어어-!』
군단장이 잔뜩 악에 받쳐 포효했다.
하나 여덟 자루의 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칼고스의 강철보다도 단단한 육신을 쩍쩍 갈라내고 있었다.
까득-
리치의 새하얀 턱뼈가 억세게 갈려 나갔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균열을 좀 더 크게 열어야 한다.”
“동의한다.”
작심한 그들이 마기를 부풀렸을 때였다.
콰앙!
또 다른 별 한 자루가 날아들어 배리어를 두드렸다.
“……!”
고개를 돌린 리치, 크롬벨이 몸을 굳혔다.
대체 어느새인지, 수십의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뒤에서 잔머리만 굴리지 마, 개뼈다귀 자식들아.”
선두에 선 인간,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 덤덤한 어조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72화. Episode. 24 종전 (3)
『끄어어어-!』
붉은 거인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목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은 하나의 폭력이 되어 전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겁먹고 두려워하지만은 않았다.
“으아아아-!”
마주 소리치며 언데드와 싸우는 이도 있었고,
“떠, 떨지 말지어다!”
찬송가의 구절을 되새기는 이도 있었다.
붉은 거인, 칼고스는 감히 제 앞에서 기승을 부리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들을 한 움큼 쥐어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끌끌, 온전히 튀어나왔으면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퍽 아쉽구나.”
다 늙은 노인.
발락이 다루는 여덟 자루의 별이 칼고스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거인인 칼고스가 막기엔 지나치게 작은, 바늘과도 같은 별.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바늘 따위가 아니었다.
촤아악-!
쩍 벌어진 상처에서 불같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상처인지, 칼고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인간 따위가……! 내가 누구인줄 알고 덤벼드느냐!』
“내 제자가 칼고스라 했던 것 같다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발락이 말을 이었다.
“다음엔 제대로 건너오거라. 괜히 오늘처럼 고생하지 말고.”
여덟 개의 별이 폭발할 것처럼 팽창하며 한데 뭉쳤다.
마나를 줄기줄기 휘감은 별은 더 이상 칼고스에게도 바늘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흡사 거인의 검.
칼고스의 상체만큼 커다란 검의 별이었다.
그것이 놈에게 쏘아졌다.
콰아아앙-!
검성과 거인의 양팔이 부딪쳤다.
웅혼하고 정순한 마나와 흉흉한 마기가 부딪쳤다.
저 밖으로 다시 밀어내려는 자와 버티는 자의 싸움이었다.
◈ ◈ ◈
“허, 허어!”
넓게 펼쳐진 평원 너머를 바라보던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고상한 척 체통을 지키던 이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끄워어어-!』
저 멀리 깨어진 하늘에서 삐죽 튀어나온 붉은 점.
보기엔 점처럼 보이는데, 울부짖는 포효는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중 삼중 쳐 놓은 결계를 두드려 대는 마기는 또 어떠한가.
느긋이 차나 마시던 마법사들은 안색을 굳혔다.
“대체 뭡니까, 저건!”
“젠장…… 불똥이 튀기 전에 어서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어부지리를 노리기 전에 싹 다 죽을 것이다.
남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마법사들이 엉덩이를 들썩여 댔다.
당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기세였다.
“잠깐! 모두들 멈추십시오!”
넋 놓고 저쪽을 바라보던 롤랑 가주가 대뜸 소리쳤다.
어째선지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안색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이대로 연합을 해산하겠단 말입니까? 겁쟁이처럼?”
롤랑이 그리 말하자, 마법가의 가주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섰다.
“그럼 어쩌잔 겁니까. 이대로 쳐들어가는 건 메테오 앞에 뛰어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척 보니 무가 연합이 승리할 턱이 없소. 어부지리는 얼어 죽을, 저건 용과 지렁이의 싸움이오! 우리가 괜히 끼어들어 피 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거친 언사였지만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무식하기로는 오크보다도 더하다는 기사들이, 저 끔찍한 마기를 뒤집어쓴 채 괴물과 싸워 이길 리가 없다.
스스로 말하면서 확신을 더한 가주들이 재차 입을 열었다.
“무가 연합은 전멸하고 괴물들은 북상할 것이오. 북대륙에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지만 결국 바텐베르크의 선에서 정리가 될 거요.”
“차라리 우리에겐 잘된 일이지. 놈들이 알아서 기사들을 죽여 준다는데. 이거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아니겠소?”
급기야는 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방향을 틀기까지.
잠자코 듣던 롤랑 가주는 눈을 감았다.
“당신들이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가십시오.”
“하, 롤랑 가주는 다르게 생각하나 보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떠진 눈빛엔 겁쟁이 가주들을 향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만에 하나, 무가연합을 전멸시킨 괴물들이 방향을 튼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빌슨 가주. 지금 그럴 리가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저 괴물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쿵!
롤랑이 발을 구르자, 겹겹이 펼쳐져 있던 결계가 일시에 사라졌다.
동시에 훅 덮쳐 오는 처절한 마기에 마법사들이 대경실색했다.
“지금 무슨 짓을!”
“끄, 끄르륵!”
집결해 있던 마법사 중 심약한 몇은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이토록 사특한 기운을 내뿜는 괴물들입니다. 그래요, 어부지리는 확실히 무리겠지만, 저희 마법 연합이 모인 게 헛수고는 아니란 겁니다.”
적들의 혹시 모를 남하에 대처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자는 얘기였다.
그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 준 건 앨런 마르크스였다.
“동감하는 바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물을 앞에 두고 해산할 순 없는 법이죠. 자칫하면 우리 쪽 민간인들이 희생될 겁니다.”
어린 천재의 영향력은 이중 최고였다.
롤랑의 주장에도 당장 떠나고 싶어 하던 가주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앨런 도련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되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을 뿐.”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롤랑을 향해 앨런은 차갑게 대꾸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빛이 일렁였다.
‘그렇게나 마기가 좋아진 거냐, 질리언 롤랑.’
폴린 성 방면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두는 그를 보며, 앨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하를 막기 위해 이곳에 있자고?
명분은 좋으나 그 밑에 깔린 저의는 완전히 개인적인 사심이었다.
롤랑은 마기에 완전히 중독된 것뿐이었으니까.
‘이자를 주의 깊게 살펴야겠군.’
어린 천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워진 결계를 다시금 펼쳤다.
◈ ◈ ◈
“말이 없네?”
나는 리치들을 바라보며 검을 쥐어 들었다.
놈들은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났나 봅니다.”
옆에서 레오가 피식 웃으며 검집을 두드렸다.
그러자 보스 공략조에 참가한 기사들이 낄낄 웃으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개뼈다귀 새끼들!”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대?”
“뒤졌으면 곱게 사그라질 것이지, 뭘 하겠다고 저 꼴이 돼서 움직이나 몰라.”
“마법사가 마법사 한 거지 뭐. 음침하기 짝이 없어가지곤. 아, 우리 연합의 엘프들은 빼고.”
기사들이 품위를 벗어던진 채 손가락 욕까지 해 보였다.
참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나와 레오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기 좋았다.
심지어는 흐뭇하기도 했다.
“그래. 기사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겁먹고 떨어 대는 것보다야 좋았으니까.
새삼 그들이 많이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분노로 몸을 떨어 대는 리치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보였다.
노인과 거인의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밑에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저들 중에서 두렵지 않은 이가 있을까.
이토록 끔찍한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창칼을 쥐고, 적 앞에 몸을 내던졌다.
처절히, 용맹히 싸우는 그들을 보며 검을 다잡을 때였다.
“가장 기사다운 건 우리 막내 도련님 아니십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레오인가 싶어 고개를 바로 하니, 웬 젊은 청년이 씩 웃고 있었다.
제1기사단의 막내.
이름이 뭐였더라.
“애드런이라고 합니다요.”
“너도 빈민 출신이냐? 말투가 아주 자유로워.”
낄낄대는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온몸에 상처가 그득한 걸보니, 제1군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득바득 이쪽으로 넘어온 게 참으로 기특했다.
“우리 막내가 막내 도련님께 작업을 거는군.”
“애드런, 너랑 같은 막내가 아니야. 끕이 다르다고 끕이!”
기사들이 시시콜콜 잡담에 끼어들었다.
이 전쟁의 주동자를 앞두고 있다기엔 너무도 여유롭고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감히 우리에게 시간을 주다니.”
“멍청한 인간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무리하게 균열을 여느라 지쳤던 리치들이 마기를 일으켰다.
동시에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제야 움직이네.”
“하,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미소 지으며 검을 잡았다.
몸은 달아올랐는데 싸우질 않으니 참는 게 고역이었다.
[디스펠]
리치들이 그려낸 마법진이 가장자리부터 지워졌다.
[그래비티]
줄곧 저 하늘 높이 떠올라 있던 놈들이 꽝-,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이랴.
[스트렝스]
[헤이스트]
[큐어]
…….
[세계수의 가호]
오색찬란한 빛이 전장을 내달렸다.
인간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빛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건 우리 쪽 엘프들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들은 강대한 마법사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버퍼였다.
더군다나 그 곁엔 세계수가 함께하지 않던가.
성채가 무너졌을 때부터 준비해 온 마법인 만큼, 그 효과가 전장을 뒤덮었다.
[설왕 세트 효과 ? 발동.]
[특기 초집중 ? 발동.]
[두 자루의 검성 - 발동.]
◈ ◈ ◈
애써 발동한 마법이 웬 창에 찔려 흩어졌다.
곧이어 짓쳐드는 공격에 배리어를 몇 겹이나 펼쳤건만, 한 사내의 남색 검광이 타오르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크아악!”
크롬벨이 재차 마법을 부렸다.
순식간에 좌표를 설정해 복잡한 수식을 그려 블링크를 발동했다.
기사 무리의 뒤편에 나타난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곧, 대경실색하며 흙바닥을 굴렀다.
콰앙-!
그가 있던 자리에 별과 인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크롬벨은 없던 심장의 고동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이!”
말은 버러지라고 했으나, 눈앞의 밝게 빛나는 인간은 위험했다.
이 거슬리는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만.
“그때 데스나이트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가야 했거늘.”
“설마 스노우폴에 시체들을 보낸 게 너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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