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8
그 날붙이의 폭풍 속에 웬 주먹 하나가 백작의 갑옷을 때렸다.
독기를 한가득 품은 리하르트의 주먹이었다.
“감, 히!”
백작의 노기 어린 검격이 리하르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초집중 특기 ? 발동.』
무아지경(無我之境).
리하르트의 시계가 느려졌다.
멈춘 것만 같은 세상에 백작의 검만이 빠르게 찔러 오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리하르트가 전력을 다해 고개를 꺾었다.
픽- 하고 그의 볼에서 피가 뿜어졌다.
“노옴!”
백작이 일갈하며 그를 걷어찼다.
리하르트가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피를 한 움큼 뱉어 내며 날아갔다.
그때였다.
보라색 오러를 줄줄이 휘감은 창이 백작의 미간을 노렸다.
백작은 이깟 공격 따위 눈 감고도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콰직-!
그러나 이상하게도 백작의 얼굴 절반이 뜯겨 나갔다.
마지막에 고개를 비틀지 않았다면 그대로 결판 날, 위험한 일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검을 휘둘러 창의 진로를 비틀었건만.
백작의 한쪽 남은 눈이 흔들렸다.
아론이 다시 창을 찔러 넣었다.
카드득!
올곧게 뻗어 오던 창대를 검으로 걷어 내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비틀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창을 휘감았던 보라색 오러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쏘아졌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백작의 어깨.
콰직!
그 흉포한 오러는 어깨를 갑옷째 씹어 삼키듯 뚫어내곤 사라졌다.
“젠장!”
아론이 숨을 몰아쉬었다.
창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더는 오러를 유지할 재간도 없다.
주군이 원하는 적을 반드시 꿰뚫는 수족 같은 기사.
마경을 떠나 홉슨 산맥으로 향하며 들었던, 리하르트가 원하는 기사의 모습.
그 이후로 아론의 목표가 된 기사의 상(狀).
그러나 아직은 멀기만 했다.
겨우 두 번의 찌르기로 여력이 하나도 남지 않다니.
그의 표정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제법, 이구나…….”
백작이 짧은 감탄을 토로했다.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 이런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창기사는 드물다.
필시 조금만 더 여문다면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창을 구사할 터였다.
검을 타고 마기가 솟구쳤다.
새까맣게 물든 검이 그대로 아론에게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폭음이 울렸다.
어느새 아론의 앞에 선 리하르트가 검을 막아 냈다.
힘겨루기하는 별이 쉴 새 없이 떨려 왔다.
“이젠 내 차례야.”
리하르트의 눈에서 진득한 독기가 번들거렸다.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성흔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두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그리고 두 번째 별이 리하르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쳤던 몸에 거짓말처럼 활력이 깃들었다.
꽈앙-!
◈ ◈ ◈
[모든 의심을 내버려라]
[너희가 믿을 때 광명을 얻으리]
신도들의 노랫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새까맣게 몰려들던 언데드는 어느새 끝을 보였고, 제1기사단과 격전을 치렀던 망자의 군단은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남은 건 포이르 백작 하나.
“크아아악!”
부하를 모두 잃은 망자가 분노를 터트렸다.
당장 저 흉악한 놈들을 죽여야 하는데.
왕국을 괴물들로부터 되찾아야 하는데.
눈앞의 역겨운 괴물이 역겨운 빛을 뿜으며 물고 늘어졌다.
빛이 하나 더 늘고 나서부턴 더욱더 역겨워졌다.
빠르고, 강맹하다.
태양같이 밝은 빛은 한여름의 그것처럼 기승을 부렸다.
꽈앙-!
검과 별, 두 개가 부딪쳤다.
분명 막았는데도 빛의 파동이 백작을 휩쓸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백작은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괴물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콰앙, 콰앙-!
양손에 두 별을 쥔 괴물이 미친 듯 공격을 가했다.
제 몸의 어디가, 얼마나 잘려 나가던 상관없다는 듯, 무식한 공격 일변도.
백작이라면 능히 그를 죽일 수 있었고, 당연히 그리하려 했다.
그런데 왜 죽지를 않는 것일까.
왜 자꾸만 공격이 빗나가는 것일까.
목을 노리면 어깨를 베었고, 팔을 자르려고 하면 겉가죽을 가르는 선에서 그쳤다.
백작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만큼 신앙을 쐬었는데, 아직도 눈치 못 챘어?”
역겨운 괴물이 공격을 멈추고 말을 건넸다.
“네가 어떤 꼴인지 직접 봐 봐.”
“무, 슨…… 소, 리를…….”
백작이 입을 멈췄다.
어째선지 자신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것처럼 보였다.
“괴물은 우리가 아니야.”
역겹기 짝이 없는 시체가 백작에게 다가왔다.
“포이르 백작, 너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줄곧 귀찮게 하던 끔찍한 괴물이 생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백작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저가 즐겨 입던 갑옷.
애지중지 다루던 소중한 검.
극도로 단련된 신체.
모든 게 그대로였다.
역시.
저 괴물이 간악한 혀를 놀린 것뿐이다.
더러운 언데드답게 기이한 사술을 부린 것뿐이다.
“웃기, 지…… 마라……!”
데스나이트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나는 이쪽, 너희는 저쪽이라고.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검이 리하르트를 향해 뻗어 나갔다.
검 끝은 그대로 미간을 꿰뚫을 것처럼 나아가더니, 직전에 탁 멈췄다.
“것 봐. 너도 아니까 날 안 죽이는 거잖아.”
안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못 죽였다.
검을 더 이상 뻗지 못했다.
육체가 눈앞의 괴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
파각-!
딱딱히 굳은 백작의 몸을 역겨운 빛의 별이 갈라냈다.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몸에 흐르는 것은 산 자의 피일 텐데, 죄 새까맸다.
응당 느껴져야 할 고통도 없었다.
“귀를 기울여라.”
괴물이었던 청년이 차분히 말했다.
백작의 귓가로 아름다운 노랫말이 들렸다.
[먹보다도 검게 물든 이여]
[등불이 너의 색을 되찾아 주리라]
[웅혼한 영혼이여]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
[너는 위대했고 찬란했으니]
조금 전만 해도 끔찍한 괴물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죽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서걱-!
찬란한 별이 다시 한번 그의 몸을 갈랐다.
성스러운 기운이 백작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주변을 살펴봐라.”
백작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포이르가의 기사를 모조리 죽였던 괴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되려 괴물과 용맹히 싸워 승리한 기사들만이 존재했다.
“아…… 아아…….”
왕국을 되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병사들은 끔찍한 언데드였다.
자신이 이끌었던 이들이, 모두 다 언데드였다.
그가 떨리는 눈으로 다시 제 몸을 살폈다.
갈라진 갑옷 사이로 구더기 들끓는 살점이 드러났다.
거기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흘렀다.
58화. Episode. 20 기원 (2)
이제야 떠올라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폴린 성을 잡아먹은 어둠.
그때부터 시작된 지옥도.
긍지 높은 기사들의 절규는 어떠했던가.
철그럭-
백작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린 검이 애처롭게 울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전장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에게선 잘 벼려진 검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저들은 위대한 바텐베르크를 지탱하는 첫 번째 기사단인 것을.
분명 괴물일 리가 없을 텐데.
이번엔 고개를 돌려 리오 성을 보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 너머 연합군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오르드, 린느, 자칼, 사이언, 헬가…….
믿음직스러운 무가들이 리오 성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 다행, 이도다…….”
끔찍한 악몽이 바렌 왕도와 리오 성을 덮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악, 몽에…… 빠진, 건…… 우리였, 구나…….”
백작이 짙은 안도감을 내비쳤다.
왕도가, 리오 성이 건재하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죄악감이 그를 괴롭혔다.
저들에게 검을 들이민 것은 백작을 비롯한 포이르가의 기사들이었으니까.
“어둠이 너희를 속이고 우롱했다.”
리하르트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
“그대, 의…… 이름, 을…….”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백작의 몸이 흠칫 떨렸다.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부디…… 죽여, 주, 십시오…….”
겨우 내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백작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다.
눈에 비친 산 자들이 기괴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저주에 저항하던 백작의 정신이 다시 저물어 갔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최소한 기사로서 죽을 수 있도록.
굳은 발걸음으로나마 리하르트에게 다가가 목을 내밀었다.
“우리가 왕국을 지키고 있으니 편히 쉬길 바라지.”
별을 꽉 그러쥔 리하르트가 백작을 위로했다.
믿어 달라는 듯, 잔뜩 지친 몸을 일부러 곧게 펴고선 백작을 마주했다.
고오오-
별과 별이 하나가 되어 공명했다.
한 줌 남았던 신앙이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척-
포이르 백작은 말없이 바텐베르크의 혈통 앞에 검례를 취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고된 전투가 끝났다.
이번에도 성을 지켜 낸 연합은 소리를 질렀다.
환호성이라기보단, 승리했음을 알리는 의식에 가까웠다.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오늘의 전투에서 희생된 기사들과, 포이르가의 기사들을 한데 모아 화장을 실시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신도들이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껏 쉰 목소리였으나 최선을 다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렸다.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불꽃이 이리저리 춤을 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떠나보낸 동료의 검을 쥐어 든 기사는 연신 궁시렁거렸다.
이게 그렇게나 명검이라고 자랑하더니만…… 바보 같은 자식- 이라고.
슬픔을 잊으려는 서툰 발버둥이었다.
“기름 더 가져와!”
“널브러진 무구는 모두 챙긴다!”
노래가 끝나고, 묵념을 하던 연합은 다시 바빠졌다.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 휴거와 리하르트는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찬송가가 아니라 진혼곡 같았어. 저 녀석들 목소리가 다 갈라졌네.”
“취익, 동감이오. 그나저나, 역시 소저는 아름답구먼…….”
휴거의 시선은 메리에게 떠날 줄을 몰랐다.
헤벌쭉 풀어지려던 얼굴 근육을 가다듬은 그가 돌연 표정을 굳히곤 물었다.
“아론은 좀 어떻소? 많이 다친 것 같던데.”
“어떻긴.”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깃발을 휘감은 채로 누워 있는 기사가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은 것처럼 보였다.
“취, 취익! 아론이 죽은 거요!?”
“그래.”
“맙소사……!”
충격적인 사망 소식에 휴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단한 인간 전사의 충직한 기사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다니…….
그때였다.
“저 안 죽었습니다, 도련님!”
깃발에 감싸인 시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으잉? 대단한 인간 전사, 이게 어떻게 된…….”
“젠장, 결국 언데드가 된 건가!”
“어, 언데드라니……!”
리하르트의 경악 어린 음성에 휴거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서둘러 아론을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언데드가 맞나, 싶던 휴거가 등에 맨 도끼를 뽑아 들었다.
“대단한 인간 전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췩!”
“크흡…… 휴거, 부탁한다. 저런 모습의 아론을 보는 건 내겐 너무나 잔인한 일이야.”
“맡겨 주시오. 정말 하늘도 무심하구려…….”
그 대화를 듣던 아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멍청한 오크가 도끼를 쥔 채 다가오는 작태가 유난히 공포스러웠다.
“휴거어! 도련님이 장난을 치시는 것뿐이다! 나 안 죽었다니까!”
“문답무용이라오!”
리하르트는 그 해프닝을 지켜보며 낄낄거렸다.
좀비에게 물린 것도 아니고, 데스나이트의 검에 베인 걸로는 언데드가 되지 않는다.
아론이 깃발을 휘감고 있는 이유는 깃발이 품은 신앙의 효과를 받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도 꽤 무리했으니까.
“참 짓궂으십니다.”
레오가 리하르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말은 그러했으나, 레오도 피식 웃으며 휴거와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축 처질 것 같아서.”
리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포이르 백작의 목을 베었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선명했다.
무언가를 베는 것에 나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이번의 감각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한 레오가 리하르트가 벗어 던졌던 왕관을 그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요.”
“고맙다. 한결 낫네.”
그 뒤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오였다.
“적지 않은 기사가 전사했습니다.”
“적의 수가 그만큼 많았으니까.”
“원래는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오늘도요.”
그가 이를 꽉 깨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아직도 연합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립니다.”
하나같이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단련해 온 기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툭하면 겁먹고, 또 툭하면 허둥지둥 실수를 남발한다.
이 모든 게 마기 때문이었다. 근성 따윈 이 빌어먹을 어둠 앞에선 허울 좋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웬만한 자가 아닌 이상 마기에 괴로워하는 게 당연하지.”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오의 시선이 신도들을 향했다.
일반인에 불과한 저들이 연합의 기사들보다 활기차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정말 신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봅니다.”
레오가 뜨거운 눈길로 주군의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기도를 성공적으로 올린 이후부터 리하르트에게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아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무언가.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냐.”
리하르트는 작게 웃으며 레오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그것을 끝으로 그의 육신이 뒤로 허물어졌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으니, 거하게 잠이나 잘 셈이었다.
◈ ◈ ◈
시끌벅적한 소음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사실 잠이 아니라 기절이었지만.
“아으…….”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나를 성채 안의 방으로 옮겨 준 게 분명했다.
그건 고마운데, 제발 잠 좀 자고 싶다.
백작과의 전투에서 너무나 무리를 한 탓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내겐 휴식이 필요했다.
“아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걸까.
소음은 끝이 날 줄 몰랐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머리끝까지 덮었던 이불을 걷어 내곤 귀를 기울였다.
소음의 정체는 노랫소리였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성채 밖에서부터 신도들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여기까지는 좋다.
조화롭게 얽힌 그들의 음성에선 성스러운 기운이 풍겨 나왔다.
문제는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두 남정네였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잔뜩 악에 받친 외침이 귓가에 때려 박힌다.
음정도 뭣도 없는 괴성에 가까운 그것은 아론과 레오의 목소리였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이 와중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삭신이 쑤시는 몸을 이끌고 괴성의 근원지로 향했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를 듣습니다.』
- 부디 바라옵건대 도련님이 무사히 깨어나시게 살펴주시고, 기사된 자로서는 제가 첫 번째 신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적어도 레오 단장님보단 빨리! 호-르!
『레오의 기도를 듣습니다.』
- 우리 막내 도련님이 쓰러진 것은 알고 계실 테지요. 그분의 옥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선 아니 될 겁니다. 후후…… 제가 당신을 위해 이천의 신도를 준비할 터이니, 당신도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이십시오. 참, 아론 마이어라는 놈팽이보다도 저를 먼저 신도로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호-르.
“허.”
밖으로 나오는 길에 기도 내용을 확인하는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단 내가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기도가 두 번씩 들어왔으니까.
문제는 최근의 기도 내용이 가관이라는 것이다.
“아니, 아론은 그렇다 치고, 레오는 뭐야? 기도랑 협박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아픈 골이 더욱 당겨 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경쟁이 붙은 건지.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두려워 마라!”
곧 성채 밖 넓은 공터에 도착한 내 눈에 난장판이 들어왔다.
깃발을 치켜들고 노래를 부르는 신도들.
그 앞에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는 레오와 아론.
그리고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연합군들까지.
“아빠아!”
근처의 나무 위에서 깔깔거리던 아델이 먼저 날 발견하고 달려왔다.
와락 안기려 드는 그녀를 제지한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게 있지! 들어 봐, 완전 웃겨!”
잔뜩 신이 난 아델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지고 하루 지난 날, 레오가 신도들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기도하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던 그를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서?”
“근데 아론이 끼어들어서 같이 노래를 부르더니, 문제의 발언을 내뱉은 거야!”
“문제의 발언?”
“응응. 큼, 크흠!”
그녀가 목을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아론의 말투를 따라 하며.
59화. Episode. 20 기원 (3)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신도들은 리오 성의 공터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성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기사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끄는 이가 있었다.
“왜 사령관님께서……?”
신도 틈바구니에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는 레오였다.
연합의 사령관이 함께 찬송가를 불러, 포교 활동의 기반을 다진다.
그가 생각해 낸 묘안은 굉장히 그럴듯했다.
신도들도 제 목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
그때 아론이 끼어들었다.
“레오 단장님. 기사 중에서 첫 번째 신도는 제가 될 겁니다.”
한차례 노래가 끝난 후, 아론이 했던 말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다음 발언이었다.
“성자이신 리하르트 도련님의 직속 기사가 바로 저, 아론 마이어니까요.”
마치 자신이 리하르트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듯한 말투.
레오의 귓가엔 그렇게 들렸다.
물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리하르트가 누구를 더 중요히 여기든 알게 뭐란 말인가.
머릿속으론 그렇게 생각했는데,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
“미안하지만, 연합의 사령관으로서 첫 번째는 내가 되어야겠네. 도련님께서도 분명 그리 생각하실 걸세.”
“전혀 아닙니다. 도련님께선 저를 몇 번이나 설득하셨죠. 신도가 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첫 번째가 되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그 수차례의 기회를 날린 건 자네 아닌가? 뒤늦게 떼를 쓰는 건 보기 좋지 않네만.”
“아, 제가 오해를 샀군요. 떼를 쓴 것이 아니라 통보였습니다.”
빠직.
둘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아론은 생각지도 못한 강적의 등장에 경각심을 가졌고, 레오는 묘하게 지기 싫다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그 둘의 대치는 노래를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 ◈ ◈
“하아…….”
아델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대체 왜?”
아론은 둘째 쳐도, 레오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첫 번째 신도는 메리인데, 기사 중에서라도 첫 번째가 되겠다고 괴성을 질러 대고 있다니 말이다.
저 양반이 언제부터 저리 독실했다고.
“혹시 저 머슴들이 아빠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닐까? 풉.”
“헛소리 하지 마.”
나는 실실 웃어 대는 아델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정말로 그딴 이유는 아니겠지.
나중에 진지하게 왜 그랬느냐고 물을 셈이다.
“우선 지금은 말려야겠다.”
레오의 아이디어는 좋았다.
그런데 그 좋은 아이디어를 제스스로 망치고 있었다.
더불어 사령관의 위엄도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일보직전이고.
지끈거리는 몸을 이끌고 두 남정네에게 다가갈 때였다.
“꾸이익!”
어디서 잔뜩 성이 난 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꾸익, 꾸이익! 좀 닥치시오! 그대들 때문에 메리 소저의 지저귐이 안 들리잖소!”
다름 아닌 휴거였다.
그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아론과 레오 사이를 갈라놓았다.
“췩, 내가 불러도 그대들 고성방가보단 낫겠다오!”
“뭣이?”
“크흠! 잘 들으시오. 메리 소저와 이 몸의 듀엣을!”
빨간 돼지가 목을 가다듬더니 신도들의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정말 당연하게도, 휴거는 음치였다.
더불어 오크 특유의 콧소리와 걸걸한 음성까지 합쳐져, 몹시 듣기 힘든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 자식들이 진짜.”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노래를 부르는 것까진 괜찮은데, 굳이 메리와 눈을 맞추며 추파를 던지는 꼴이 참 우스웠다.
젠장,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나의 근사하고 멋진 찬송가를 모욕하고 있었다.
당장에 달려가서 한 대씩 후려치자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강 건너 불구경하던 폴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뒤로 잭을 비롯한 제3기사단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그들이 씨익 웃었다.
어쩐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었다.
“뭐야. 또 뭘 하려고.”
내 불안한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그들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등불.”
“등불!”
급기야는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그 와중에 찬송가가 다시 반복되었다.
그때부터 제3기사단이 나서기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시선은 올곧게 나를 향한 채.
경건한 음색도, 웅장한 느낌도 없는 음치들의 행진.
칼 밥 먹는 이들이라 그런지 노래에는 소질이 부족한 녀석들 천지였다.
“맙소사.”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시장판이었던 공터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뭐가 어찌 되든 제 노래에만 집중하는 신도들.
음공(音攻)을 단련하듯 괴성을 질러 대는 아론과 레오.
거기에 돼지 멱따는 소리와 제3기사단이라는 음치 집단까지 더해지자 소음 공해 수준을 넘어섰다.
이래선 안 된다.
모처럼 깔린 판이 난장판이라니, 이게 웬 말인가.
이런 분위기에선 나와 신도들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그 노래를 선보일 수가 없었다.
“아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자.”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데, 아델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조금 전만 해도 깔깔거리기 바쁘던 그녀의 눈이 자애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저 애들 좀 봐 봐.”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연합의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내 눈에도 그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당장 이틀 전에 큰 전투가 일어났고, 또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기사들의 멘탈 이곳저곳에 금이 간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 그들이 난장판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순수하게 즐거운 기색으로.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그치, 그치!”
이렇게 되니 눈 앞에 펼쳐진 난장판이 또 다르게 보였다.
듣는 이를 괴롭게 하는 소음 공해였던 것이, 체면치레 따윈 신경 안 쓰는 즐거운 연회처럼 말이다.
“꼭 찬송가가 진중하고 경건한 분위기일 필요는 없잖아?”
“……그렇긴 한데.”
아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냥 내 욕심이었을 뿐이다.
위엄 있고 숙연한 장내. 그곳에서 부르는 기도의 노래.
지금은 물 건너갔지만, 뭐.
“이봐! 너희들도 따라 불러!”
“샌님처럼 빼지 마!”
한껏 흥이 오른 폴크와 잭이 연합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기사 몇이 수줍게 구절을 읊었다.
[악몽 꾸는 이를 구원하사]
[어두운 세상 울던 백성 단잠 드네]
“드, 등불 비춰 밝힌 눈물 자국.”
“그분 숨결이 어루만지네……!”
목소리 열이 곧 백이 되고, 백이 또 천이 된다.
그 노래는 공터를 넘어, 리오 성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어째선지 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사들이 읊어 대는 노랫말에는 깊고 깊은 염원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소중한 동료가 죽어 나가지 않기를.
기사로서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옥죄이는 마기에 당당히 맞설 수 있기를.
고오오-
성을 뒤덮은 마기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기사들의 음성에 미약하지만 성스러운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기도가 꼭 구색을 갖추고 빌어야만 기도인가.
지금 리오 성을 울리는 저들의 노래도 기도가 아닌가.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참 바보 같았다.
“……애써 준비한 노래가 쓸모없어졌네.”
“아빠, 솔직히 그 노래는 너무 별로였어. 호-르! 호-르! 행복하게 해 주시오, 호-르! 이게 뭐야, 대체?”
“시끄러워.”
쫑알거리는 아델을 밀어내곤 내면을 관조했다.
육신에 충만감이 잔뜩 차오른다.
아니,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천 칠백여 명의 기사들이 간절하게 올린 기도.
그 안에 담긴 신앙이 내 영혼에 차곡차곡 쌓였다.
한순간에 차오른 양이 총 오만에 달할 정도였다.
과연 이들이 모두 신도가 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을까.
“잘됐다, 아빠!”
“그래. 드디어 과실을 맺은 거야.”
쥐꼬리만 한 신앙을 악착같이 모으던 나날이 떠오른다.
사실 신도를 늘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내 눈앞에 비춰지는 저들을 얻기 위해서.
“두 번째 템플나이츠가 탄생하려나?”
아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노린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
템플나이츠.
천 년 전, 나의 종교 아래 모여들었던 강대한 기사단.
용사와 함께 마계의 침략을 막아 낸 성마대전의 주축 중 하나.
“아래에서 차근차근 시작하면 너무 늦으니까.”
벌써부터 마왕이 눈깔을 들이밀고, 더러운 마기가 땅에 내려앉았다.
그런 마당에 대륙을 나돌며 세력을 키울 시간 따윈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머리부터 공략하기였다.
머리만 얻으면, 그리고 그 머리를 크게 키워 내면 나머지는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 내 눈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신도 프리아 - 호르교(敎)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신도 로먼 - 호르교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신도 아이란 - 호르교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신도 찰스 - 호르교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특기 후광(E) 습득.』
『최하급 전도사 5/5』
이런 걸 겹경사라고 하던가.
신도 중에서도 신앙심이 두드러지던 넷이 선택받았다.
아마 인원 수 제한이 없었다면 스노우폴의 모든 신도가 전도사로 승급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일은 대단히 진보적인 성취였다.
“아…… 아아!”
새로이 탄생한 네 명의 신도들은 자신이 내뿜는 후광에 탄성을 흘렸다.
두 눈 가득 감격에 젖은 그들이 기쁨의 노래를 불러 댔다.
“자, 그럼…….”
나는 좌중을 한 번 훑어보았다.
과연 오늘, 아론과 레오 둘 중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어쩌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기사 중에서 첫 번째 신도가 나올지도 모르고.
“우선 아론부터.”
『대상의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쯧.
그렇게나 설레발 치더니만, 아직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럼 다음은 레오인가.
『대상의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역시나 이놈도 무리.
기도랑 협박을 헷갈리는 녀석이 신도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음, 이렇게 빨리 신도가 되길 바라는 건 욕심인가.”
나는 애써 고개를 주억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였다.
“아빠. 저 녀석한테 기회를 줘 봐.”
아델이 붉은 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60화. Episode. 21 기사와 엘프의 노래 (1)
“휴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저놈이 신도가 될 리가 없을 텐데.
저 생각 없는 오크가 아론이나 레오보다 낫다니.
저것 봐라. 메리한테 정신 팔려서 안면 근육이 죄 흐물흐물해져 버린 멍청이가 아닌가.
“씁. 그래도 뭐.”
확인하는 데에 돈 드는 게 아니지.
빨간 돼지에게 손을 뻗고선 외쳤다.
“신도 임명!”
『휴거가 신도가 되었습니다.』
“…….”
삼 초.
뻗었던 손이 정확히 삼 초간 정지했다.
“꾸익, 메리 소저!”
휴거는 제가 신도가 된지도 모른 채 어깨춤을 추기 바빴다.
왜일까.
대체 왜 저 돼지가 신도가 된 걸까.
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길래…….
『휴거의 기도 내용을 듣습니다.』
- 취이익! 나의 허니, 나의 피앙세! 이 노래의 ‘그분’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제발 우리 사이를 이어주시오! 그리하면 내 모든 것을 주겠소!
“웩.”
헛구역질이 절로 나는 구애의 글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건 기도가 아니라 러브레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안에 담긴 염원이 이들 중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기도가 미약하다는 건 전혀 아니다.
‘오크라서 그런 건가.’
오크는 용맹한 종족.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규칙이나 격식을 차리는 이들은 아니다.
싸움을 좋아하고 강자를 숭배하는, 몹시 단순한 전사들.
그 원초적이며 직선적인 성정은 인간처럼 이것저것 재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기도에 자신의 소원을 확실하게 담아낼 수 있었을 터.
“웃기는 놈이네. 진짜로.”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휴거가 기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신도가 되다니.
아니, 이놈을 기사로 쳐도 되는지는 의문이지만.
짝!
나는 공터의 중심으로 걸어가, 크게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제야 날 알아본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인사를 해 왔다.
“음.”
신나게 노래를 부른 기사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된 채였다.
개중 눈치 빠른 이들은 제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몸에 감도는 활력이 낯설게 느껴질 터.
“취익! 왜 그렇게 빤히 보시오?”
정작 휴거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신도가 되어 가장 많은 활력이 감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니다. 그보다 레오 경, 아론.”
“옛!”
내 부름에 으르렁대던 둘이 동시에 답했다.
그 반응이 평소보다 과하고, 평소보다 부담스러웠다.
역시 무언가 이상한데.
“너희는 신도가 되기엔 아직 수양이 부족해.”
누가 먼저 되네 마네를 따질게 아니라, 열심히 기도나 했어야지.
충격받은 얼굴의 두 사내를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메리와 눈을 맞췄다.
끄덕.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끄덕이더니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성자님.”
휜 천이 둘둘 말린 봉.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곤 천을 풀어헤쳤다.
펄럭-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천이 봉 끝에서 나부꼈다.
메리와 신도들이 이곳에서 주먹밥만 나눠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전도 계획을 세우고 노래를 작곡하는 등 굉장히 열정적으로 포교 준비를 해 왔다.
“이건 우리의 심벌이다.”
손에 쥔 깃발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깃에 그려진 문양은 바텐베르크의 ‘천하제일검’도, 무가 연합의 것도 아니었다.
나의 선지자들이 밤잠을 지새우며 만든, 호르교(敎)의 상징.
깃엔 내가 다루는 검성(劍星)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모습이 현대의 어떤 종교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쿵!
나는 깃발을 땅에 박아 넣을 기세로 내리찍었다.
신도들이 그 뒤에 서서 경건히 두 손을 모았다.
“리하르트 도련님?”
난데없는 퍼포먼스에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기도를 올린 직후였으니까.
“이제부터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지 마라.”
신앙 섞인 음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센스 좋은 전도사 다섯이 동시에 후광을 펼쳤다.
우웅-
나도 질세라 후광을 켜곤, 깃발에도 일만의 신앙을 담았다.
입에선 침이 바싹 마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겼던 몇 마디 말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께서 쥐고 계신 등불이며.”
“아아-!”
쿵! 쿵!
서른의 신도가 발을 구르며 하모니를 내었다.
“또 나는 그분께서 다루시는 성자일지니.”
발구름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에 맞춰 목소리에 더 많은 신앙을 섞었다.
“나는 위대한 계시를 받아 이 땅에 왔도다.”
“왔도다!”
“악몽 꾸는 양들은 들으라.”
“들으라!”
멍하니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며.”
“너희는 더 많은 이를 구원하게 될 터이니.”
“신께선 양의 믿음을 양분 삼으시고, 양은 믿음을 이정표 삼을 것이다.”
“믿고 기도하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덤덤히 좌중을 훑어보는데, 고개를 돌리고 입을 틀어막은 아델이 보였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이게 얼마나 오글거리고 우스운 짓거리인지.
성자니 위대한 계시니, 전부 다 구라였으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미리 말을 맞췄던 아론이 내 앞에 서서 외쳤고, 뒤늦게 레오가 따라붙었다.
그러자 기사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믿을게, 아니! 믿습니다! 저에게도 빛을 주십시오!”
“취익. 호르라는 신이 정말 있다면 내 소원도 이루어 주지 않겠소? 이거 믿어야겠구려!”
허겁지겁 달려온 모리츠가 철퍽 엎드리며 소리쳤고, 휴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광경을 보던 연합의 표정이 묘한 빛을 띠었다.
적잖게 갈등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사로서 자신의 무(武)와 신념을 중히 여겼다.
신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종교 같은 건 나약한 이나 믿는 미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사령관이 믿으면?
또, 그들 중에서 믿는 이가 나타난다면?
이미 마기에 지칠 대로 지친 터가 아니던가.
연합이 맛본 신앙은 결코 미신이라 폄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앞으로 오후 열두 시 정각에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진행토록 하겠다. 참고로 불참은 불허한다.”
저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던 자들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신도가 되는 이에겐 성수 한 모금을 내려 주마.”
신도 하나가 재빠르게 유리병 하나와 나무잔을 가져왔다.
일천의 신앙을 담은 성수와 아델의 나무로 만든 한 모금 크기의 잔이었다.
아론과 레오의 눈이 번뜩였다.
둘 다 자신이 먼저 마시게 되리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둘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휴거. 이리 와 봐.”
“췩?”
쪼르륵-
나는 나무잔에 성수를 따라 냈다.
“몸에 큰 활력이 느껴지진 않아?”
“어…… 그러고 보니, 질 좋은 고기를 양껏 먹은 것처럼 울끈불끈하오. 아까 노래를 부를 때부터 말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밀었다.
멀뚱히 바라보던 아론과 레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한다. 네가 연합에선 첫 번째로 신도가 되었다.”
“꾸, 꾸익? 내가 말이오?”
“그래. 너의 기도엔 아무런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원초적이고 간절했지.”
스윽, 나는 휴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메리와 이어지고 싶다고? 호르께서 톡톡히 들으셨으나, 아직은 너의 신실함이 부족하다.”
“그, 그, 그럼 더 열심히 기도하면……?”
“혹시 모르지. 하지만, 메리 또한 인격체란 것을 잊지 마라. 과하게 들이대지 말란 소리야. 그녀가 마음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며 기도해라.”
입을 떡 벌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잔을 쥐어 주었다.
“마셔. 영광의 첫 잔이다.”
“취이익…….”
그런데 휴거는 잔을 내려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입가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다.
“왜 그래?”
“이 물의 효능이 뭐요?”
효능이라.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신앙을 일천이나 담은 성수를 마신 적도 없고, 딱히 마실 필요도 없었다.
“신의 은총을 받게 되겠지. 이 물에 담긴 축복만큼. 너의 걸음걸음에 호르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췩, 그리 빙빙 돌려 말하면 나는 이해 못 하오.”
“한마디로 좋은 거라고. 몸에도, 정신에도.”
대답을 들은 휴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누렁니를 자랑했다.
그러더니 곧 걸음을 옮겼다.
“메리 소저.”
“휴, 휴거 님?”
휴거의 음성이 무척이나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붉고 두터운 손가락 사이에 끼인 잔이 메리에게 내밀어졌다.
“취익, 나보다는 그대에게 필요할 것 같소.”
“안 됩니다! 이건, 호르께서 휴거 님에게 내려 주신 은총……!”
메리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메리. 네가 마셔도 괜찮아. 자기가 주겠다는데 뭐.”
어차피 기존의 신도들에겐 따로 성수를 줄 생각이었다.
다만 탐욕의 대명사인 오크가 제 것을 남에게 양보한다는 게 퍽 놀라울 따름이었다.
“흐흐, 팔 떨어지겠소.”
“휴거 님…….”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잔을 받아 들었다.
곧 한 모금의 성수를 조심스레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자그마한 목 넘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아!”
몸을 부르르 떠는 메리에게서 후광이 터져 나왔다.
성수의 효과인지, 평소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
“도련…… 아니, 성자님. 두 번째론 꼭 저를 신도로 받아 주십시오!”
“사령관인 제가 먼저 되는 것이 더욱 이득 아니겠습니까?”
일등을 빼앗긴 두 남정네가 금세 목소리를 키웠다.
그게 못내 흐뭇하면서, 한편으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론도, 레오도 신에 대해 유난히 회의적이던 놈들이었으니까.
기도 몇 번 했다고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그런데 그 둘이 끝이 아니었다.
“성자님. 성자님께선 신을 믿고 섬기시는 겁니까?”
제3기사단장, 폴크가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저희가 그 호르교(敎)의 신도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래.”
그러자 눈빛이 바뀌었다.
비단 폴크만 아니라 제3기사단과 여타 기사 몇몇의 눈빛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왜일까.
그들이 굳센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 ◈ ◈
리오 성으로 가기 위해선 바렌 왕도를 지나쳐야 한다.
그러나 왕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신원이 불분명한 당신들을 보내 줄 수 없소.”
창을 꼬나 쥔 경비병이 눈을 부라렸다.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고된 심문을 받게 될 것이오.”
가면을 쓴 일단의 무리들이 난감한 태도를 취했다.
“사정이 있어 가면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는 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증거를 대라 이 말이오!”
대단히 훌륭한 경비병이로다-
가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가 속으로 감탄을 토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 상황이 곤란했다.
‘분명 어머니께선 이 이름을 밝히면 될 거라 하셨는데…….’
뭐가 되기는커녕 의심의 눈빛만 짙어질 뿐.
이제는 아예 손에 쥔 창을 내지를 기세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법으로 잠재우는 것은 쉬우나, 올바르게 제 할 일을 하는 경비병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비슷한 업을 행하는 이들로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가면을 쓴 존재들이 내적 갈등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지금 리하르트라고 했는가?”
“……!”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초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묻잖느냐. 리하르트라고 했느냐고.”
“……그렇습니다.”
대체 어느 틈에 온 건지 모를 노인이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킁킁-
그가 돌연 코를 움찔거렸다.
“호…… 풀내음이 진동을 하는데, 내 제자 놈이 의외로 발이 넓나보구나.”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노인, 발락이 흥미롭다는 듯 씨익 웃었다.
61화. Episode. 21 기사와 엘프의 노래 (2)
열흘이 지났다.
“믿을지어다!”
“미, 믿을지어다!”
신도들을 뒤따라 기사들이 어색한 목소리로 외쳤다.
번쩍 들린 두 손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제법 잘해 준단 말이야.”
나는 턱을 쓸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그마치 일백.
열흘 동안 신도가 된 기사의 수가 일백이다.
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믿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레오랑 아론은 아직 턱도 없고.”
참 우습게도 제일 목청 크던 놈들이 2등, 3등은커녕 100등 안팎도 물 건너가 버렸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꽤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현재 신도가 된 기사들의 경지는 대부분 하급에서 중급.”
그렇다면 일신의 경지가 낮을수록 수월히 신앙심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연합의 기도만 살펴봐도 상급 이상의 기사들은 그 자존심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신을 믿고 섬기는 행위 자체에 마음을 열지 못한 느낌이다.
사실 최상급 기사의 일부는 첫날 이후론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 전의 레오처럼.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지.”
그러나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최상급 기사보다는 상급 기사가 많고, 또 상급보단 중급과 하급이 많다.
게다가 저들은 내 신도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호, 호르시여!”
“광명…… 광명을 주십시오!”
벌게진 얼굴로 외쳐 대는 기사들을 보자 웃음이 났다.
나는 곧 몸을 돌려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괴물들에게서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음.”
회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시작부터 콱 막혔다.
포이르가와의 전투 끝난 지 열흘.
그 이후로 적의 습격은 없었다.
전시 상황에서 변화란 긴장을 가져오는 법.
“혹시 신…… 의 기운이라던가, 그러한 빛 때문에 습격을 꺼리는 것은 아닐런지요.”
아발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자 장내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발트, 이 기운이 거슬려서 쳐들어오면 쳐들어왔지, 피할 놈들은 아니야.”
“그럼 성자님께선 어떤 이유로 습격이 멈췄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물어보죠. 언데드들이 왜 꼭 습격을 해야 할 거라 믿는 겁니까?”
내 질문에 수뇌부들이 꿀을 한 움큼 퍼먹었다.
“공격을 또 다른 말로는 방어라고 하죠. 녀석들은 우리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역공을 하고 있던 겁니다.”
바렌 왕국의 절반을 집어삼킨 어둠에 희생된 자들만 대체 얼마일까.
이미 ‘산 제물’은 충분히 바쳐졌다.
남은 건 마계와 이쪽의 경계를 허무는 커다란 의식뿐.
“그럼 서둘러 출정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 기다리는 건 놈들에게 시간만 주는 짓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굳이 성을 놔두고 적진에 쳐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알다시피 이제야 수성의 이점을 갖추게 되었는데요.”
“그럼 어떻게…….”
리치들은 영악하고 또 영악한 마족이다.놈들이 비축한 병력이 과연 얼마나 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섣불리 쳐들어갔다간 좋은 꼴 못 보는 게 당연지사.
“오지 않으면 오게 해야지요.”
우선 폴린 성과 그 주변을 탐색하는 게 급선무다.
마침 이 임무에 찰떡인 녀석이 하나 있기도 하고.
“왜, 뭐?”
저도 바텐베르크의 자제라며 꼬박꼬박 회의에 참석하는 모리츠.
그가 내 은근한 시선에 움찔하며 물어 왔다.
이 녀석이 연합 내에서 탄생한 두 번째 신도라니…….
“신께서 네게 특명을 내리셨다.”
“뭐야!?”
“나중에 말해 주마.”
“드디어 나도 그분께 선택받은 거냐! 어서 말해 봐, 무슨 명령이지?”
“쉿. 나중에 말한다고 했다.”
안달이 난 모리츠가 엉덩이를 달싹여 댔다.
참 웃기는 녀석이다.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신도가 되어, 이제는 기존의 신도들만큼이나 독실해졌다.
“아무튼 언데드와 관련된 사안은 일단 넘기기로 하고, 다음은 호르교.”
그렇게 말한 나는 장내를 훑어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수뇌부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된 게 이 중에 신도가 하나도 없어?”
신도만 없으면 다행이게.
제대로 기도를 하는 놈도 드물었다.
“매일매일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조금 거북하다고 해야 할지…….”
“저도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론…….”
하여간 자존심은 천하제일이다.
대개 기사란 게 그랬고, 잘나신 기사님들은 더 그랬다.
“성자님. 저는 좀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뭐를?”
돌연 레오가 내게 말을 건넸다.
얼굴 한가득 불만을 품은 채였다.
“왜 그분께선 저를 신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까?”
“왜긴 왜야. 네 믿음이 부족하니까 그렇지.”
“매번 종교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열흘 전부터 선지자들은 종교 의식을 진행했다.
이름만큼 거창한 건 아니고, 모여서 기도나 하자는 의미의 모임이었다.
“좀 더 열심히 해. 너는 네 생각만큼 신을 믿는 게 아니야.”
그러자 레오의 얼굴에 더욱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인걸.
◈ ◈ ◈
회의가 끝난 후.
리하르트는 수뇌부들을 데리고 리오 성의 후문으로 나섰다.
그 행렬에 어느샌가 아델이 끼어들었다.
“히히! 아이들이 곧 올 거야!”
리하르트의 손을 꼭 잡은 아델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수뇌부 몇의 입가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누가 온다는 거니? 드루이드 숙녀께서 동물 친구들이라도 사귀셨나?”
“뭐라는 게냐. 내 아이들은 동물이 아니다.”
난데없는 온도 차에 말을 걸었던 수뇌부가 머쓱하니 볼을 긁적였다.
“지원군이 올 거야.”
“성자님. 그게 무슨…….”
그때였다.
저 너머에서부터 들짐승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후문에 선 일행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쓴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늑대를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어떠한 마법이라도 부린 것인지, 사람을 태운 늑대의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척-
그들이 곧 후문 앞에 발을 디뎠다.
그리곤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수뇌부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들은 누구고, 위대하신 어머니는 또 누구인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재간이 없었다.
“어찌 그런 가면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렸느냐. 나는 너희를 보고 싶단다.”
그때 입을 연 것은 아델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끌어모은 그녀가 발을 옮겨, 가장 앞에 무릎 꿇은 가면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타사르.”
자그마한 손에 나무 가면이 끌어내려졌다.
곧이어 머리를 뒤덮던 후드도 벗겨졌다.
“에, 엘프?”
“성자님! 이건 대체…….”
수뇌부가 술렁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들의 눈앞에 있는 가면인들이 죄 엘프였으니까.
“네가 족장이었지? 몰라보게 변했네.”
“변한 건 자네 같은데. 인간이 빨리 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네는 유독 빠른 것 같군.”
리하르트가 엘프 족장 타사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봤을 적엔 말라비틀어진 도라지 같던 엘프들은 아름다웠던 제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그 미모가 가히 경국지색.
여성이고 남성이고 하나같이 빼어난 외모를 뽐냈다.
물론 리하르트가 엘프를 필요로 한 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잘 들어라. 이들은 이제부터 연합과 함께 리오 성을 지킬 것이다.”
충격적인 말에 레오를 비롯한 기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프가 발 벗고 나서서 인간을 돕는다니.
두 종족 간의 깊디깊은 골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자님!”
대체 어떻게 엘프와 친분을 갖고있는 걸까.
아델이라는 꼬마의 정체가 무엇일까.
샘솟는 궁금증에 레오가 입을 열 때였다.
“가면 안 벗으시면 맛좋은 성주(聖酒)는 없습니다.”
통증이 이는 성흔을 부여잡은 리하르트가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직 가면을 벗지 않은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지막 가면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스승이 이렇게까지 하면 속는 척이라도 하지. 에잉, 건방진 놈.”
가면인의 정체는 발락이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성채에 마련된 방으로 장소를 옮긴 리하르트가 말했다.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가 약간은 싸늘했다.
“내가 늦게 찾아와서 계집처럼 삐친 것이더냐?”
“알고는 계십니까?”
그가 각인을 개방한 게 용과 혈투를 벌이던 당시였다.
그 뒤로 시간이 적잖게 흘렀고, 이제는 두 번째 별마저 얻었다.
“별을 다루는 게 쉽지만은 않더군요.”
“당연하지. 쉬울 리가 있나.”
으득-
리하르트가 슬쩍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퍼뜩 와서 수련법이나 알려 줬어야지-,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참아 냈다.
발락에게서 얻어야 할 게 참 많았으니까.
“그보다 이놈 참 재밌어졌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발락은 리하르트의 이곳저곳을 뜯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환골탈태를 했음에 한번 놀라고, 마나 특성을 보유했음에 두 번 놀랐다.
“검성의 후계자가 마나 특성을 갖고 있다니! 크하하!”
사실 발락도 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체 귀쟁이들과는 어떤 사인지,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또 뭔지 등등.
그러나 지금은 그저 웃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으므로.
“자…… 어서 성주(聖酒)를 내오거라.”
성주.
온 대륙을 돌아다녀도 그것보다 깊은 맛을 내는 술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맛보게 될 최상의 술을 떠올린 발락이 입을 달싹였다.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려 해 봐도, 그는 성주만 생각하면 당과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술보단 물이 건강에 좋습니다. 물이나 한잔 드시겠습니까?”
다만 리하르트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
일 초, 이 초, 삼 초.
둘 사이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곧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최고의 성주를 내어 드리지요.”
“미리 말하지만, 나는 이 전쟁에 참가할 생각이 없다.”
“예.”
“…….”
너무도 평온한 대답에 발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묻지 않는 게냐?”
여덟 자루의 별을 다루는 그는 루드비히와 같은 경지에 선 최강자였다.
발락이 참전하면 아군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적군의 수장인 세 리치에겐 재앙과도 같은 존재일 터.
그런 유용한 아군이 불참 선언을 하는데, 리하르트는 너무도 덤덤해 보였다.
“세상을 뒤덮은 어둠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인류는 지금부터라도 어둠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을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되는 거죠.”
설령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호오.”
발락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그렇지. 때문에 나와 네 아비가 나서지 않는 것이다. 다만, 네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니 놀랍구나.”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세상은 곧 너를 중심으로 뭉치겠구나.”
성채로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깃발이 떠올랐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이 리하르트의 것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기와는 상반된 속성의 힘이라니.
이 시국에 이보다 더 눈에 띄는 녀석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럼 네가 말한 부탁은 무엇이더냐.”
“신을 믿으십니까?”
“허, 갑자기 무슨 신 타령이냐.”
멈칫,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굳었다.
“호르교의 신도가 되어 주십시오. 그전까진 성주는 없습니다.”
반면 리하르트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62화. Episode. 21 엘프와 기사의 노래 (3)
“신? 그깟 게 있다고 한들 나완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발락은 완고했다.
거듭하여 설명해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기색이었다.
“나는 이루고자 한 것은 반드시 이루며 살아왔다. 내 삶과 신념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은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미련 없이 포기했다.
애초부터 그가 신도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발락은 그런 사내였으니까.
“그럼 안타깝지만 성주는 못 드리겠군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느냐는 시선이 내 얼굴을 찔러 왔다.
“성수는 있습니다. 그거라도 한잔하시렵니까?”
“흥! 나도 네게 줄 것이 있다만, 이런 식이면 곤란하구나.”
줄 것이라.
한마디로 교환을 하자는 소리였다.
내가 발락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품을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각인의 시험에 통과하리라고는 예상했다. 내 감이 그리 외쳤으니까.”
“……예.”
“그러나 빨라도 너무 빨랐어.”
촤르륵-
그가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금색의 십자가 장식 6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죽 혁대였다.
“이 여섯 개의 금속은 네게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정확히 뭡니까, 이게?”
“네놈은 별을 검 위에 덧씌워 간신히 유지했을 테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중 검성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고단한 일이다.
진짜 검을 중심축으로 삼지 않으면 마나 소모가 극심해지는 것은 물론, 컨트롤 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건 드래곤의 발톱과 오리하르콘이라는 마법의 금속으로 제련한 ‘코어’다. 한번 이 위에 별을 씌워 보아라.”
발락이 혁대에서 장식 하나를 떼어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별 한 자루를 덧씌웠다.
쿠우우-
“오!”
“오오!”
우습게도 감탄사를 터트린 것은 나와 발락 모두였다.
나는 훨씬 더 다루기 쉬워진 별 때문이었고, 발락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별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얀 별이라니…… 크하하! 어디 강도 좀 알아보자꾸나!”
급기야는 발락도 별을 뽑아 들었다.
당장에라도 부딪쳐 올 것 같은 작태에 나는 힘을 갈무리했다.
“방 박살 낼 일 있습니까?”
“에잉, 김 새게 만드는구나.”
“그보다 이거 굉장한 물건이군요.”
나잇값 못하는 발락을 뒤로한 채 코어를 살펴보았다.
오러를 다루는 난이도가 5라고 했을 때, 검성은 8에 수렴한다.
그런데 이 코어란 물건을 사용하면 3~4라고 쳐도 무방했다.
“코어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단 한 명뿐이다. 그 빌어먹을 난쟁이를 찾느라 시간을 다 써 버렸지.”
“그래서 이제야 오신 겁니까?”
“그래. 후계자에게 새로운 코어를 전해 주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다. 원래는 네가 각인을 개방하자마자 찾아가야 했지만,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않겠느냐.”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는 아직 별 한 자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내가 수련을 도와주마.”
“반가운 소리입니다.”
◈ ◈ ◈
엘프들이 리오 성에 합류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미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깡말랐던 몸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되찾았고, 목재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옥구슬 흘러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대체 어째서 엘프가…….”
“리하르트 성자님께서 지원을 요청하셨다더군.’
“그분이 엘프와도 연이 있으셨단 말인가!”
기사, 아니 인간과 엘프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그것도 평상시와 같은 상황에서나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저자들이 도와준다면 좀 더 수월히 막아 낼 수 있겠어.”
“검과 마법의 조합이라…… 어릴 적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인데?”
지금은 공동의 적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연합의 기사들이 수군덕거렸다.
향긋한 풀내음에 코를 벌름거리는 자도 있었고, 몇몇은 앞으로 펼쳐질 전투를 상상하기도 했다.
엘프들이 자리를 옮겼다.
한참 수련에 매진하는 리하르트에게로.
“호르 신의 성자를 뵙습니다.”
“왔어?”
리하르트는 그들을 흘긋 보고는 허공을 부유하는 별 두 자루를 지워 냈다.
“마부(魔斧)는 어떻게 됐지?”
“머지않아 봉인을 완전히 해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좋아. 조금만 더 수고해 줘.”
“별말씀을.”
엘프 족장 타사르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머니인 아델을 대하듯, 깍듯하고 조신한 태도였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자님의 명이 곧 신의 명이라 하셨습니다.”
털썩-
타사르가 무릎을 꿇자 다른 엘프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 달라는 기색이었다.
‘기사들보다 낫군.’
리하르트는 땀을 닦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아델에게서 신도가 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신도가 되었다.
‘아델이 돌보고 금이라 하면 곧 대로 믿을 녀석들이야.’
가만 보면 인형 같기도 했다.
저들의 자아 위에 아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었으니까.
“찬송가는 다 연습했나?”
“예. 메리 신도의 지도에 따라 모든 찬송가를 숙지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굳이 들을 것까지야.
리하르트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깍듯한 건 좋은데, 그게 과할 정도라 마주 보고 있으면 부담스럽기도 했다.
“고놈 참, 귀쟁이 녀석들을 잘도 구워삶았구나.”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끌끌. 수련이나 더 해라.”
발락은 요 일주일간 리하르트의 수련을 도와주었다.
코어를 이용해 별의 모양을 더 수월히 유지하는 법부터, 별 자체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법까지.
“검 위에 별을 씌우는 건 검을 낭비하는 짓이고, 별을 쥐고 싸우는 건 손을 낭비하는 짓이다.”
휘리릭-!
세 자루의 별이 발락의 주변을 자유롭게 나돌아다녔다.
아마 저 궤도에 무언가가 걸리기라도 하면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별의 개수가 아니다.”
“예예, 별 한 자루라도 제대로 다루는 거겠죠. 벌써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에잉, 건방진 놈.”
그때였다.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리오 성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저 멀리 드높은 마기가 치솟았다.
“아무래도 습격인 것 같구나.”
포이르 백작과의 전투로부터 17일 만의 습격.
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뿔 나팔이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늘에 닿을 듯 기세등등한 마기도, 코를 찌르기 시작하는 악취도.
신앙을 품은 리하르트라면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었어야 했다.
“설마, 기척을 숨겼다고?”
데스나이트라면 뒤틀린 자아로나마 그럴 순 있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고 있는 마기의 파도가 전부 데스나이트의 것이라면 더욱 악질이었다.
“가시죠.”
“그러자꾸나. 어디 연합의 실력 좀 봐야겠다.”
둘은 수련장을 벗어나 성벽으로 향했다.
연합의 기사들은 날듯이 계단을 타고 올라, 성벽 위에 자리 잡았다.
그 외에 지휘관들도 악다구니를 쓰며 명령을 내렸다.
화살이 이곳저곳에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고, 기사 몇몇은 물을 끓였다.
“우리는!”
“무가의 기사!”
“우리는!”
“등불이 될 자!”
쿵, 쿵!
가슴을 두드리는 기사들의 표정은 굳건했다.
긴장은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고, 혼란스러웠으나 몸이 굼뜨지는 않았다.
“호오. 이 정도 마기라면 패닉에 빠질 법한데.”
“저들의 마음에 신앙이 싹튼 이상, 마기에 쉽게 절망하진 않을 겁니다.”
지켜보십시오-
중얼거린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등불 쥐신 자 있나니!”
“어둠을 밝히고자 하시고!”
“뜻을 알리고자 하시더라!”
찬송가가 노동요라도 된 것처럼 기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흐음…….”
리하르트는 성벽에 찰싹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적군 추정 병력 일만.”
“데스나이트 백 기와 리치 다섯이 확인되었습니다.”
레오가 그 옆에서 보고했다.
개떼처럼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던 리하르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리치?”
“예. 물론 폴린 성을 장악한 리치로는 안 보입니다.”
과연 그런 거였나.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놈들은 최고위 리치고, 저 녀석들은 그냥 리치. 그래도 방심할 순 없지.”
마법을 부리는 놈들이라면 능히 마기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일만의 언데드가 내뿜는 마기를 말이다.
쿠웅-!
리하르트의 몸에서 신앙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264 □ 신앙 - 330,632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5/5, [최하급 성기사] 0/3 [최하급 사제] 0/2
그가 현재 가진 신앙은 약 삼십삼만.
약 보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발사 준비!”
오르드 가주의 외침에 기사들이 시위에 살을 걸었다.
그들이 쥔 화살에선 밝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호르가 이르시기를]
[내 눈 닿는 곳을 밝힐지어다]
호르교의 깃을 치켜든 신도들이 노래를 불렀다.
기사들도 열과 성을 다해 따라 불렀다.
고오오-
성스러운 기운이 리오 성에서 들끓었다.
그때였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저들은 우리를 해하지 못할지어다.”
“오늘이 역사가 될지어다.”
스산하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는 음성이 노래 위를 덮었다.
엘프들의 목소리였다.
성을 휘감은 신앙이 춤을 추듯 몸을 비틀었다.
주변은 죄 새까만데, 성 혼자 빛을 내뿜으니 이곳이 곧 등불이었다.
“취익, 이것이 그대가 원하던 광경이오?”
어느새 리하르트의 곁으로 온 휴거가 물었다.
그렇다 답했더니, 그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역시 대단한 인간 전사를 따라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오.”
“갑자기 왜?”
“나는 신 같이 본 적도 없는 것에 경의를 표하진 못하겠구려. 다만 그대에겐 내 신뢰와 경의를 바쳐도 될 것 같소.”
이처럼 근사한 전장을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오-
씨익 웃은 그가 도끼를 그러쥐었다.
“…….”
리하르트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벽 위의 모든 기사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엔 휴거와 다를 바 없는 기색이 담긴 채였다.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리하르트에게 보내는 찬사.
“바보들.”
참 바보 같고 단순한 사내들이다.
그는 피식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적이 몰려온다.
수는 일만.
더불어 강대한 마법사인 리치까지 다섯이나 포함되어 있다.
쉽지 않을 전투가 될 것은 자명했다.
“자신이 없네.”
질 자신이.
리하르트의 몸에서 다시 한번 신앙이 솟구쳤다.
그게 신호였다.
싸아악-!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신앙을 품은 기름, 성유(聖油)를 듬뿍 바른 화살이었다.
“마, 이게 진짜 수성전이란 거다.”
63화. Episode. 22 신의 시련 (1)
썩은 살덩이에 빛나는 살이 꽂혔다.
“크에엑!”
고작 성유(聖油)를 묻힌 화살촉으론 놈들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약화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물론 한 번으로는 조금의 티도 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어찌 될까.
“발사 준비!”
“발사!”
일련의 과정이 재빠르게 반복되었다.
폭우라도 내리는 것처럼 화살비가 연신 하늘을 갈랐다.
“키, 키에에엑!”
언데드에게 신앙은 독과도 같다.
틀어박힌 촉 주변으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앞서 달리던 놈이 뒷 놈에게 밀려 고꾸라졌다.
그렇게 선두를 차지한 녀석도 곧 뒷 놈들에게 짓밟혀 머리가 터져 나갔다.
신앙 묻은 살이 꽂힐수록 몸이 굼떠지니, 정작 저들을 죽이는 건 몸 성히 달려드는 언데드들이었다.
“좋아! 효과가 있다!”
“다 쏴 버려! 화살은 아직 발에 챌 정도로 많아!”
오르드가의 기사들이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창만큼이나 활을 잘 다루는 이들이니, 오랜만에 쥔 활대에 들뜰 법도 했다.
피잉-
한껏 당겨졌다가 튕긴 시위가 몸을 떨며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아군에겐 듣기 좋은 악기와 같았고, 적군에겐 사나운 쇳소리와 같았다.
“성자님, 물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기사 하나가 리하르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여기도 물이 끓는다고 외쳤다.
“어서 축복을!”
“난 성수 마셔 본 적도 없는데, 저놈들은 이걸로 목욕을 하겠구먼.”
“부러우면 너부터 해 봐.”
입은 놀았지만, 손으론 열심히 땔감을 밀어 넣는 기사들.
하나하나가 눈에 정광이 깃들어 있었다.
[대상에 5,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리하르트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끓는 물에 신앙을 불어넣었다.
이로써 얼추 대비는 끝났다.
“준비해!”
곧 화살 비를 뚫어낸 괴물들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쿵, 쿠웅-!
성벽에 썩은 살덩이가 부딪쳤고, 살덩이 위에 또 살덩이가 밀려 들어와 탑을 쌓았다.
그저 미친 듯 달려들어 물어뜯기만 할 줄 아는 녀석들.
“안녕.”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리하르트가 인사를 건넸다.
죽은 자도 얄미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걸까.
담을 넘으려던 불청객들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아그작거렸다.
“부어!”
촤아아악-!
그의 신호에 맞춰 솥이 들어 올려졌다.
화살비를 뚫어 낸 언데드를 기다리고 있던 건 뜨겁디뜨거운 열탕이었다.
그것도 신앙을 양껏 머금은.
“키, 키엑? 끄르르륵!”
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났다.
울부짖던 괴물의 주둥이가 눌어붙고, 죽은 눈이 녹아내렸다.
겉가죽과 속살이 뒤집히듯 안쪽을 연신 게웠다.
◈ ◈ ◈
화살이 끝없이 하늘을 갈랐다.
뿐만이 아니었다.
화살보다 많은 건 왕도에서 공급받은 물이었고, 또 그보다 많은 건 리하르트의 신앙이었다.
저급한 언데드로는 리오 성의 두터운 벽을 허물 수 없었다.
결국 진짜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들이 움직입니다!”
“리치의 움직임도 포착하였습니다!”
백의 데스나이트와 다섯의 리치.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참격이다!”
죽은 기사들이 검을 그었다.
그 끝에서 피어난 참격이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제1기사단이 성벽을 뛰어넘어 벼락처럼 검을 뽑았다.
콰앙!
폭음이 울렸다.
성벽에 닿은 공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참격을 막아 낸 기사들이 적군의 본진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 적들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우웅-
다섯 리치에게서 흉악한 마기가 요동쳤다.
복잡한 수식을 엮어낸 의지가 기적을 일으켰다.
그 기적이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서릿발처럼 시린 폭풍이 될 수도 있다.
특히나 기사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는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흥.”
놈들을 유심히 살피던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엔 더 솜씨 좋은 녀석들이 있거든.”
뒤따라 성채의 꼭대기에서 유동적인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화르륵-
허공에 피어난 불꽃이 순식간에 몸을 불렸다.
오십여 개의 불덩이.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 짜여진 정교한 수식과 마나는 엄청난 위력을 내포했다.
콰과과광-!
마법과 마법이 부딪쳤다.
리치들이 쏘아낸 고위 흑마법, ‘다크 플레임’이라는 불꽃은 순수히 타오르는 파이어 볼과 만나 폭발했다.
“끼에에!”
그 여파는 중간에 끼인 괴물들의 몫이었다.
콰광, 콰과광!
더불어 이쪽의 마법사는 오십 명.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불덩이는 멈추지 않고 쏘아졌다.
“와아아아!”
연합의 기사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몇 번이고 싸워 왔던 언데드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역겨운 마기는 리오 성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비단 리하르트가 내뿜는 신앙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오오!”
기사들의 마음속에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잊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용맹했고, 얼마나 열심히 단련해 왔는지.
“성문을 열어라!”
칼 쥔 사내들이 거칠게 내달렸다.
화살과 마찬가지로 성유 바른 철검은 부패한 살점을 쉽게 갈랐다.
죽은 자들의 눈먼 공격 따윈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샤아악-!
명사수들이 쏘아내는 화살은 적을 알맞게 맞추고, 엘프의 마법은 리치보다 강대하다.
든든한 원호를 받는 기사들은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으하하하!”
겁쟁이 모리츠마저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쾅- 하고 별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으억!?”
그는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별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시선을 위로 올렸다.
“모리츠.”
리하르트가 별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 뭐야?”
“저번에 말했던 신의 특명. 지금 알려 주마.”
씨익 호선을 그린 리하르트의 입꼬리가 모리츠에겐 사무치듯 불안하게 다가왔다.
“적의 본진에 다녀와. 정찰 임무야.”
“무슨 소리야? 지금 기사들이 본진을 휩쓸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흠칫.
오크를 닮은 모리츠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아니겠지.
“폴린 성과 그 인근.”
“야, 리하르트!”
“영지마다 병력이 얼마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와. 지금처럼 대대적인 습격이 진행되고 있을 때가 기회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모리츠는 얼결에 받아 든 웬 송곳니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잠시만…… 나 혼자 거길 쳐들어가라고? 이건 너무하잖아!”
“신의 명령이라니까. 그분께선 불가능한 시련을 내려 주시지 않아.”
툭툭, 리하르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곳곳에 검은색 구슬이 달린 조형물이 있다면 꼭 깨부숴라.”
“……그럼 어떻게 되는데?”
“별일 없어. 조형물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별일 있다. 조형물도 분명 있다.
모리츠는 스산히 웃는 리하르트를 보며 확신했다.
“참고로 신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
덧붙여진 말도 그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모리츠는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전쟁의 소음도 안 들리고, 손발만 덜덜거렸다.
“뭐야. 다시 예전의 겁쟁이 모리츠로 돌아간 거냐?”
“시끄러워……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리하르트.”
이게 신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믿기 힘들다.
이 잔악한 임무는 리하르트 저놈이 주는 시련이 아닐까.
모리츠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기 싫어? 그럼 말던가.”
“으으!”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할게, 한다고!”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신의 계시라면 그는 해야만 했다.
지금의 모리츠는 신을 믿고 광명 찾은 독실한 신도였다. 성수를 마셨을 때 벅차올랐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바텐베르크다. 그 위상에 금이 가는 짓은 더는 할 수 없어! 설령 죽더라도!”
정신력이 나약했기에 보다 수월히 신을 섬기게 되었다.
스스로 변하고자 원했기에 보다 빠르게 변했다.
굳센 각오를 마친 모리츠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뜨거운 시선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형은 목숨을 걸었는데 그 동생은 히죽 웃고 있었다.
“넌 정말 나쁜 놈이다, 동생아.”
내가 널 존경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라는 속마음은 애써 씹어 삼켰다.
◈ ◈ ◈
모리츠가 언데드 사이를 가로질러 나갔다.
“휘유.”
나는 별 위에 올라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짜식. 제법 깡다구가 생겼다.
확실히 변하기는 한 모양이다.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듯 잔뜩 겁에 질렸지만.
물론 나는 그가 쉽게 죽지 못하도록 대비를 해 놓았다. 게다가 모리츠는 은신에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이번 정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저것 봐. 소질 있잖아.”
언데드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리츠를 인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데스나이트도, 영악한 리치마저도 눈 뜬 장님 이었다.
저런 대단한 재주를 썩히는 건 참 아까운 짓이 아닌가.
크워어어엉-!
리오 성을 한참이나 벗어나서야 모리츠가 나르를 소환했다.
대뜸 울려 퍼지는 맹수의 포효에 괴물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찮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뒤늦게 발견한 리치가 마법진을 엮어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내가 별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콰아아!
마법진으로부터 검은 불꽃이 쏘아졌다.
그 앞을 내가 막아섰다.
“흐읍!”
곧바로 일검을 그어 냈다.
검은빛 불의 파도가 몰려오던 기세 그대로 갈라졌다.
“마법사 나리랑 싸우는 건 처음이야. 반갑다.”
“……네놈이 이 악독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구나!’
나는 반가움을 담아 말했는데, 지팡이 쥔 뼈다귀는 노호성을 터트렸다.
[두 자루의 검성 ? 발동.]
코어를 머금은 두 번째 별이 떠올랐다.
첫 번째 별도 공중에서 찬란히 빛났다.
“성자님. 거들겠습니다.”
“취이익! 나도 마법사랑 자웅을 겨루고 싶었다오.”
데스나이트와 드잡이질을 하던 아론과 휴거가 금세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몇몇 기사들도 이쪽으로 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적잖게 리치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건방지구나. 정말 건방져.”
“우리는 다섯이자 하나인 존재. 감히 우리와 대적한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어차피 너희는 폭풍 앞의 촛불이지.”
“곧 끝 모를 심연이 온 세상을 덮을 터! 공포에 떨다 죽어야 함이 마땅하도다!”
시끄럽게 지껄여대는 모습에, 나는 입을 열었다.
“질질 끌 생각 없다. 빨리 뒤져.”
64화. Episode. 22 신의 시련 (2)
꽈르릉-!
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려진 마법진.
그 중심에서 검은 번개가 몸을 비틀며 떨어졌다.
“제가 막겠습니다!”
리하르트를 노리고 떨어지는 번개를 향해 아론이 몸을 던졌다.
꽉 쥔 창을 휘감고 맹렬히 회전하는 보라색 오러.
그것을 번개에 꽂아 넣었다.
응당 울려 퍼져야 할 굉음은 없다.
피잉,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휘유.”
아론의 활약을 본 리하르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피어싱 오러는 마나의 구성을 꿰뚫고 흐트러트리는 마나 특성.
마나를 흐트러트리니, 마나로 구성된 마법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마법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콰아아아-!
리치들이 부리는 마법은 계속 이어졌다.
불꽃과 번개, 바람 따위가 죄 어둠을 품고선 덮쳐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론이 나섰다.
피잉, 피잉-
요란한 소리를 내던 마법들이 흩어진다.
흩날리는 마나의 기류 사이에 선 아론이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곧 뜀박질로.
뜀박질은 곧 적을 향한 돌격이 되었다.
그의 뒤를 따라 리하르트와 휴거가 땅을 박찼다.
“크악!”
리치 하나가 배리어를 펼쳤다.
동시에 리하르트 일행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푹, 아론이 재빨리 땅에 창을 박아 넣어 불기둥을 꺼트렸다.
그사이 휴거와 리하르트는 리치의 코앞에 당도했다.
“취이익!”
휴거가 한껏 치켜든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지지직-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는 배리어.
한 장의 장막으로는 휴거의 무식한 도끼질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 사이로 리하르트의 별이 찔러 들었다.
“컥!”
리치의 하얀 두개골에 빛이 틀어박혔다.
뼈마디 앙상한 손을 들어 뽑아내려 해도, 더욱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취익, 뭐요. 생각보다 쉽지 않소?”
조금씩 바스러져 가는 뼈다귀를 내려다보던 휴거가 머리를 긁적였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점점 어려워질 거야.”
다섯이자 하나인 존재.
싸움이 일기 전, 리치들은 분명 그리 말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오오-
남은 리치들에게서 더욱 강력한 마기가 솟구쳤다.
◈ ◈ ◈
성을 습격한 리치들은 서로 저주로 얽혀들어 있었다.
한 명이 죽으면 남은 이들이 죽은 이의 업을 짊어지는, 최악의 저주였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경우였고, 마기를 받아들인 리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네놈들!”
싸움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콰앙-
연신 전장을 울리는 폭음.
최후의 일인이 된 리치의 마법은 하나하나가 강대했다.
더는 아론의 오러로도 꿰뚫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자 엘프들이 나섰다.
“크아아악!”
마법과 마법이 부딪친다.
강렬한 폭발 너머 또 다른 마법이 날아들었다.
리치는 강했으나, 오십의 엘프가 펼치는 마법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더불어 그들만이 적이 아니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리하르트 일행에 리치가 치를 떨었다.
최고위 마법을 쓰고자 하면, 엘프들이 빈틈을 노렸다.
반격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오러를 휘감은 날붙이가 배리어를 두드렸다.
태산 같던 마나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치 하나론 이미 한껏 기운 승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역시 쉽지 않네. 그래도 덕분에 연습이 됐어.”
몸 이곳저곳이 그을린 리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앞엔 리치가 주저앉아 있었다.
“…….”
한순간이나마 대마도사의 경지에 들어섰던 리치.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그는 가만히 전장을 둘러보았다.
인간은 강했다.
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확실한 대응 수단을 갖춘 채였다.
새까맣게 몰려든 괴물들은 전부 처리된 지 오래.
칼 쥔 인간들의 얼굴엔 성을 지켜 냈다는 자부심이 그득했다.
전투의 끝.
리치는 홀로 남아 턱을 부딪쳤다.
“크흐흐. 무엇이 그리 기고만장하느냐.”
애초에 자신은 고귀한 분의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전령이었다.
이런 성 따위 함락시켜 어디에 쓸까.
“어둠이 고작 너희 앞에 가로막힌 줄 아느냐.”
이들은 죽을 때까지 모를 터다.
고요한 어둠이 저들을 방패 삼아 몸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에 틀어박혀 버티기만 하면 악몽이 끝나리라 믿는 어리석은 족속들.
“너희의 끝은 파멸이고 절망이다. 곧 하늘이 찢어지고 위대한 왕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바스라져 가는 리치가 킬킬 웃었다.
인간들의 절규 어린 비명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콰득-
그의 두개골을 뚫고 별이 우뚝 솟았다.
그 앞에 선 리하르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균열은 열리지 않아. 내가 막을 거거든.”
“뭣…….”
“결국 악몽은 꿈으로 끝날 뿐이다.”
붉게 타오르는 리치의 안광이 흔들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는 무엇인가.
“네놈은…….”
정체가 뭐냐-, 라고 묻기엔 시간이 남지 않았다.
리하르트를 노려보던 리치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 ◈ ◈
성을 떠나고 밤낮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과연 전투는 무사히 끝났을까.
분명 우리가 이겼겠지.
사상자는 얼마나 될까.
많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땅을 내달리는 나르 위에서, 모리츠는 저 혼자 주절거렸다.
그렇게라도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으, 으으…….”
그는 큰 시련을 부여받았다.
이겨 내면 큰 의무를 수행한 것이고, 꺾이면 헛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리라.
물론 모리츠는 꺾일 생각이 없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리하르트가 뿜어내는 빛을 떠올렸다.
참으로 따스하고, 아름다운 빛.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이라더라.
“나도……!”
나도 갖고 싶다.
모리츠의 눈에 열망이 서렸다.
“빌어먹을 리하르트!”
분명 저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고 깔봤는데, 눈 떠 보니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 버린 동생.
머잖아 다시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자신은 저 아래로, 아우는 한참이나 더 위로 진일보했다.
이제는 수긍해야 했다.
자신은 리하르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그렇게나 괴롭히고 우습게 여기던 놈에게 말이다.
“겨울바람 시리고 어둔 밤 두려우면.”
“그분께서 안아 주실지니.”
“나는 나아가리라. 나아가 해내리라.”
리하르트의 진면모를 깨닫고 인정한다는 건, 모리츠 바텐베르크에겐 지극히 고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을 섬기고 나니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저가 믿고 기도를 올린 건 신인데,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리하르트에게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분명 존경과 경외.
기사로서 모시는 자에게 느낄 법한 감정이기도 했으며, 신을 향한 신도의 지극한 마음이었다.
‘다른 놈들은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지만.’
이따금 씩 리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휘잉-
역한 마기 섞인 바람이 불어와, 모리츠의 상념을 일깨웠다.
부르르 떠는 몸을 붙들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에서 멀어지니 저 혼자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만큼 성 밖은 죄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호르시여, 앞길을 밝혀 주소서!”
그는 간곡한 기도를 올리며 내달렸다.
우습지만 머릿속에 그려진 신의 모습은 리하르트를 쏙 빼닮아 있었다.
크워어엉-!
드문드문 마주치는 언데드는 나르가 씹어 뱉었다.
리하르트가 길들인 영물이라더니, 그 영험함과 강맹함은 결코 짐승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저긴…….”
그렇게 한참을 달려, 평원을 건넜을 때였다.
모리츠의 눈에 숲이 들어왔다.
폴린 성과 리오 성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이 선만 넘어서면 폴린 성을 지키는 무가들의 영지가 나올 것이다.
으득 이를 악문 모리츠는 멈추지 않고 숲으로 향했다.
◈ ◈ ◈
“취익, 모리츠 동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요새 통 안 보이는구려.”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휴거가 대뜸 찾아와 물었다.
두 눈 가득 담긴 무료함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생각 없는 오크란 참 부러운 존재다.
누군 앞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임무를 보냈어. 당분간 못 돌아올 거야.”
손짓으론 빨리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휴거는 기어코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임무는 무슨 임무요? 췩.”
“하…… 정찰 임무. 폴린 성과 인근 영지를 정찰하고 오라 했다.”
“껄껄! 우리 겁쟁이 동지가 퍽 고생하겠구려!”
배를 두드리며 웃는 휴거를 무시하곤 기도 내용을 훑어보았다.
여느 날과 딱히 다를 바 없는 염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모리츠의 기도 내용을 듣습니다.]
- 호르시여, 앞길을 밝혀 주소서!
그중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모리츠의 기도.
이 담백한 염원에 담긴 신앙이 95나 된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무섭고 두렵다는 거겠지.
“동지가 성장하긴 했나 보구려, 췩! 아기 고양이처럼 벌벌 떨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혼자 정찰도 나가다니!”
“시끄러워. 나가서 떠들어.”
방안에 오크의 걸걸한 음성이 울려 퍼지니 골까지 울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 말동무를 해 줄 사람이 그대밖에 없다오. 상대 좀 해주시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메리는 어쩌고- 라고 말하려 했으나 도로 입을 다물었다.
리치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 그녀는 내게서 엉망이 된 망토와 옷을 빼앗아 갔다.
수선해 준다고 하더니,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자님의 옷이니 뭐니 하며 바쁜 모양이다.
“대단한 인간 전사.”
“왜.”
“혹시 모리츠 동지에게 악감정이라도 있소?”
오크 놈이 대뜸 아픈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취익, 물론 난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오.”
“그럼 신경 꺼.”
“그대와 모리츠 동지를 보면 나와 메리 소저가 겹쳐 보이는구려.”
“……뭐?”
휴거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갑자기 지 짝사랑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게 딱…….”
“나가.”
퍽, 그의 얼굴에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걸 재주 좋게 잡아챈 휴거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 농담이라오. 취익!”
“계속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지금 당장 나가.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데.”
내가 그 녀석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을 이유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 모리츠의 첫인상은 비호감이다.
그게 다다.
인정하고 말 것도 없는 하찮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비호감이든 아니든, 모리츠는 이미 내 신도가 되었다.
놈은 내 힘에 굴복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도 아니었다.
기도를 들어 보면 그 포악한 성정이 교화되었다는 것을 절절히 알 수 있었다.
독실한 신도인 그를 차별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동지가 그대의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워서 그랬소. 혹시 이번 정찰도 그대가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닐까 하고, 췩!”
“부디 네가 메리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이 덜 안쓰럽기를 바란다.”
“꾸이익!”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혼자 옛일에 찔려서 눈치 보는 걸 고쳐줄 필욘 없지.”
바보 같은 놈.
한창 고생하고 있을 모리츠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웬만하면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한 대비는 해 두었으나, 나머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툭, 툭-
왜일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흐흐…… 뭐요, 동지가 걱정되나 보오? 췩!”
휴거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역시 이 오크 놈은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
65화. Episode. 22 신의 시련 (3)
거멓게 썩어 비틀어진 나무는 새벽의 허수아비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니, 모리츠의 얄팍한 담력이 한계를 맞이했다.
“호르시여, 호르시여, 호르시여, 호르시여, 살려 주십시오, 호르시여, 호르시여……!”
나르의 등에 철푸덕 엎드린 그가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숲은 자그마한 풀벌레의 울음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아, 정말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더불어 마기까지 기승을 부리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밖이다!”
그런 모리츠의 눈에 숲 너머가 들어왔다.
장장 두 시간 만에 숲을 가로지른 것이다.
“하아…… 하아……!”
나무의 시체 더미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좀 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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