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7

“전장에 기사가 아니라 정치꾼이 기어 들어왔으니 이 모양 이 꼴이 나지.”
나는 끅끅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웃겨.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헬가 가주의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져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민 준비는 잘 되어 가나?”
“……!”
내 말에 놈이 눈을 부릅떴다.
회의실의 다른 이들은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폴랜드 헬가.
리치와 연합의 전쟁 이후, 제 가문과 사명을 버리고 마법가에 붙어먹은 버러지.
“이민 갈 거면 조용히 가야지, 왜 여태 살던 곳에서 깽판을 부리고 가려 해? 그렇게 하면 꽤 대접해 준다나 봐?”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이미 내가 알던 미래는 몇 차례나 변했고, 그 미래가 좋은 쪽으로 틀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난 폴랜드 헬가도 더욱 악질이 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 가문만 팔아먹고 도망쳤을 놈이 북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쓰레기로 말이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놈의 언행과 뒤를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은 이상은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의 등에 매여진 거대한 도끼, 그게 바로 배신의 증거였다.
“마침 바렌 왕국까지 온 김에 너도 처리하려고 했었어. 그래서 가주한테 이것까지 받아 왔지.”
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을 품은 태양’ 장식이 정교하게 조각된 인장.
바텐베르크 가주의 전권 대리인을 뜻하는 징표였다.
“헉!”
“……!”
인장을 알아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바텐베르크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가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정말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레오.”
“충! 하명하십시오!”
“저놈, 적당히 제압해서 내 앞으로 끌고 와.”
사람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썰어 버리는 것쯤이야, 기본 중의 기본이지.
하물며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고 멍청히 서 있는 놈은 더욱더.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세상 충직하게 외친 레오의 신형이 사라졌다.
50화. Episode. 17 깃발 아래 (1)
툭.
“끄, 끄아악!”
레오는 빨랐다.
폴랜드가 대응하기도 전에 오른 손목을 잘라 버릴 만큼.
하얀 대리석 바닥에 피가 쏟아졌다.
“사, 사령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
“이익! 젠장!”
놈이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는 듯, 도끼를 쳐들었다.
그러나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이상 제대로 된 전투는 성립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놈의 뒤를 점한 레오가 무기를 빼앗고 무릎을 꿇린 것이다.
“헉……!”
레오의 압도적인 무용에 자칼 가주가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가주라 해 보았자 고작 ‘명망 높은’ 수준의 가문을 이끄는 수장일 뿐이다.
바텐베르크와 비교하자면 제국과 소국만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레오는 그 제국의 최고 기사이며, 황제의 오른팔.
폴랜드 헬가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부디 살려 주십시오, 바텐베르크시여!”
압도적인 무력 앞에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폴랜드가 애원했다.
한 가문의 수장치고는 지나치게 긍지가 없었으며, 초라한 모습이었다.
리하르트는 그 비굴한 사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입으로 순순히 불어, 배신자 폴랜드.”
“도, 도련님! 오해입니다! 제가 배신자라니……!”
스릉-
리하르트가 아이스 크레센도를 뽑아 들었다.
냉기가 서린 검날이 폴랜드의 뒷목에 닿자, 피부가 하얗게 얼어 갔다.
“난 두 번 말 안 해.”
“……!”
폴랜드가 몸을 떨어댔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두 눈.
언뜻 고요한 그 눈 속에는 불같은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제 16살 난 소년이 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 계속 입 다물고 있어 봐.”
“으, 으으……!”
지금 이 순간 리하르트는 망나니가 되었다.
난폭한 성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형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
그때였다.
“차,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가주께선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헬가의 지휘관, 아발트.
그가 떨리는 몸을 이끌고 리하르트의 앞을 막아섰다.
죽음을 각오한 듯 굳게 다문 입술.
충성스러운 기사의 얼굴엔 제 주군을 향한 믿음이 가득 차 있었다.
“네놈도 같이 죽고 싶은 건가?”
“죽여 주십시오! 하오나, 저희 헬가는 기사로서 한 점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디 헬가의 기사도를 폄하하지 말아 주소서!”
리하르트가 입꼬릴 끌어당겼다.
비웃음인가 싶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자칼 가주가 옳은 소리를 했지. 헬가의 기사는 용맹하나, 그 수장은 멍청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그의 손이 아발트를 옆으로 밀쳤다.
아발트 뒤에 숨었던 폴랜드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하 앞에서 얼마나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테냐.”
“……말, 하겠습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모든 것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충격적이고 추악한 진실을.
“맙소사! 네놈이 그러고도 한 가문의 수장이더냐!”
“마, 말도 안 돼……!”
그의 자백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타 가주들은 분통을 터트렸고, 충직한 아발트는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수밖에.
믿고 따르던 제 주군이 마법가의 끄나풀이었다니.
근 10년간 폴랜드로부터 새어 나간 무가의 정보는 수없이 많았고, 놈은 그 대가로 막대한 보물을 넘겨받았다.
촤악-!
“끄, 끄아악!”
리하르트가 휘두른 검에 놈의 귀 한쪽이 떨어졌다.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무슨……!”
“고작 보물 따위에 모든 것을 버렸을 리가 없지. 좀 더 대단한 것을 받았을 텐데?”
리하르트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커다란 도끼를 향했다.
“예를 들면…… 마장비라던가.”
곧 그가 도끼를 집어 들었다.
우웅-
신성력을 운용하자 복잡한 마력 수식이 도끼날에 떠올랐다. 더불어 그 마력 수식을 봉인한 마법진까지도.
역시 리하르트가 아는 대로였다.
“맞습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 부디…….”
“지껄여 봐.”
그가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마법가 롤랑으로부터 봉인된 마부(魔斧)를 받았습니다. 끄윽! 계속 마법가에 협조하면, 봉인을 풀어 주겠다는 말도 함께…….”
“고작, 고작 도끼 하나에 모든 걸 버린 겁니까!”
아발트가 절규했다.
마법가의 끄나풀 폴랜드.
놈은 마부라는 마장비에 흠뻑 빠져, 롤랑의 충실한 개가 되어 버렸다.
수많은 정보를 넘겼고, 기사의 긍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런 자를 믿고 따랐던 아발트는 온몸에 오물이 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폴랜드의 자백은 끝나지 않았다.
“어, 얼마 전에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연합이 리오 성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그래서 그는 무가 연합이 하나로 뭉칠 수 없게 일부러 분란을 일으켰다.
가주라는 이름을 내세워 사령관의 권위를 깎아 냈고, 제 가문의 기사들을 최전선으로 떠밀어 연합 내에서의 발언권을 키웠다.
그렇게 키운 발언권으로는 타 가문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하면 마부의 봉인을 풀어 주고, 최상급 마갑과 넓은 영지를 제공하겠다 하였습니다.”
고작 마장비때문에, 고작 재산 때문에.
그는 기사로서의 모든 걸 버렸다.
“널 믿고 따르는 기사들보다, 저런 마장비가 더 중요했단 말이냐?”
“저, 저는 더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었습니다. 도구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렇군.”
“도련님! 살려 주십……!”
서걱-
배신자의 목이 나뒹굴었다.
“…….”
회의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고, 또 누군가는 추악함에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목 없는 시신을 바라본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헬가의 기사는 무고하다. 그들이 불이익을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
“충!”
“이 상황에 회의는 못하겠군. 시신을 정리하고, 이번 사건은 함구하도록. 알려져 봤자 연합의 사기만 떨어트릴 뿐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그는 레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 ◈ ◈
나는 레오와 함께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폴랜드 헬가가 배신자였다니, 그간 여러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런 놈 처리 안 하고 뭐 한 거야?”
“아무리 사령관이라도 함부로 가주를 건들면 연합이 붕괴되니까요. 폴랜드는 일부러 저를 도발했던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주라면 끔뻑 죽는 놈들이 기사였고, 그런 이들이 모인 게 연합이었으니까.
레오 입장에선 꽤 난감했을 터였다.
“도련님은 그가 배신자란 것을 어찌 아신 겁니까?”
“비밀.”
내 단답에 그가 한숨을 삼켰다.
“어쩌면 이번 리치 놈들 또한 마법가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니야.”
물론 그렇게 생각할 법한 상황이었다.
리치가 자리 잡은 폴린 성은 북대륙의 최남단, 마법가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놈들이 공격하는 곳은 바렌 왕국일 뿐, 마법가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놈들은 무가와 마법가의 협력을 방지하려고 그 중간에 똬리를 튼 거야.”
“그럼 어째서 언데드가 이쪽만 습격하는 겁니까?”
“죽은 마법사보단 죽은 기사가 쓸모가 많지.”
“……!”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적의 목적은 하늘에 생겼던 균열, 그것을 완전하게 열어 버리는 거다.”
“그 이상 사태가 놈들의 짓이었습니까?”
“그래. 그건 불완전한 균열이었고.”
지금 리치들은 기사의 ‘담금질’처럼 일련의 의식을 거쳐, 완전한 균열을 개방시킬 준비를 하고 있을 터.
내가 아는 미래에선 그 직전에서야 겨우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가의 기습도 염두에 둬야 해.”
“정보에 따르면 그들도 연합을 꾸려 언데드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 건너 불구경이지 뭐.”
나는 눈을 감았다.
폴랜드의 배신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그러나 그 형태가 변했다.
설마 무가연합의 붕괴를 꾀할 줄이야.
원래는 저 혼자 조용히 마법가로 튈 놈이었는데.
롤랑은 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마법가 자식들…… 언데드에게 큰 피해를 입은 북대륙을 직접 칠 셈인가?’
이변이 쌓이고 쌓여 여기까지 온 걸까.
게임 속과는 다르게 기사들은 마기에 저항할 수단이 전무했으며, 언데드 군단은 더욱 강해진 상태.
마법가에겐 틈을 찌르기 좋은 기회일 터였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레오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역시 도련님은 제 호기심을 자극하십니다.”
“갑자기?”
“그렇잖습니까. 가주께 전권을 위임받질 않나, 확 변한 모습으로 나타나선 전장의 판도를 바꾸고 배신자를 찾아내기까지! 정말 그 망나니 도련님이 맞나 싶습니다.”
“이것 봐라. 나 전권 대리인이야. 모욕죄로 죽고 싶어?”
아까만 해도 깍듯하던 레오가 예의 그 능글능글한 태도로 변했다.
내가 폴랜드에게서 빼앗아 온 도끼를 집어 들자, 그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사실 저는 가주께도 이런 태도라서요.”
“쯧.”
어떻게 된 게 제대로 도련님 취급해 주는 기사가 없다.
그나마 아론이 빠릿빠릿하지만, 그놈도 가끔은 눈치 없이 굴 때가 있었다.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오가 손을 들어 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얼굴엔 그간 숨겼던 호기심이 한가득이었다.
그래. 이제 말할 때가 되었지.
“반지의 힘이 얼마 안남았네. 그동안 요긴하게 썼나 봐?”
“으음, 정말 많은 도움이 되긴 했지요.”
무려 일만의 신앙이 담긴 반지였다.
그게 오백도 남아 있지 않다니.
참 알뜰하게도 썼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힘은……, 마기와는 정반대의 힘인 것 같았습니다.”
“정확해.”
나는 씨익 웃었다.
암. 반대고말고.
“반지를 차고 있으면 힘이 솟았지? 기분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최상이었을 거야.”
“예. 주변에 있던 기사도 그 힘을 느낄 정도였죠.”
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연신 입맛을 다시는 것이, 반지의 힘이 약해진 게 퍽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대체 그건 뭡니까? 마나라고 하기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신의 힘.”
“예?”
그가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듯 눈을 끔뻑였다.
“말 그대로야. 신, 그러니까 호르라고 불리는…… 이 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의 힘이지.”
“도련님. 알려 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씀하십시오.”
예상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는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해당 물체에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아…….”
레오가 입을 벌리고 반지를 쳐다보았다.
“궁금하지 않아? 신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 방법이 없잖습니까.”
“기도 한 번만 해 봐. 그럼 뭔가가 달라질 거야.”
“……가주님이라면 기도 같은 건 나약한 이나 하는 거라고 호통치실 겁니다.”
나는 씩 웃었다.
“여기엔 아버지가 없잖아.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내가 전권 대리인이야.”
사실 이렇게 써먹으려고 인장을 받아온 거였다.
51화. Episode. 17 깃발 아래 (2)
가주에게 인장을 받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를 연합의 가주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내 좋을 대로 써야지.
“아무리 그래도 신은 너무 뜬금없지 않습니까.”
“뜬금없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힘이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거야. 연합군은 신을 믿고 기도해야 해.”
“도련님 말 대로하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내가 가진 힘이 세지는 거지. 신의 계시를 받은 건 나니까.”
사실 메리의 경우를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전도사가 된 그녀도 ‘후광’은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도련님, 연합은 기사가 모이고 모인 집단입니다. 기도 같은 걸 할 리가 없지요. 제3의 무언가에 의지하는 행위니까요. 저들의 긍지에 어긋납니다.”
그게 지금까지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기사가 기사로서의 긍지를 지키는 것…… 그럼, 지금 연합군은 기사다운가?”
“예?”
“마기에 겁먹고, 언데드 앞에서 몸을 떠는 게 기사다운 행동이냐고.”
“…….”
레오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기도가 나약한 행위란 생각 자체가 틀렸어.”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신, 호르의 신도가 되어라. 그리고 우리 선지자들을 도와줘.”
과연 그는 뭐라 대답할까.
이 순간을 위해 많은 말들을 생각했지만,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아무리 거창한 말을 한들, 핵심은 연합군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것.
연합의 사령관, 레오를 설득하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재밌군요. 도련님도 무언가 이유가 있으니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거겠죠.”
그 눈에 일렁거리는 것은 강렬한 호기심.
신의 존재 여부에 흥미가 생긴 걸까.
아니면 내 행동 자체가 궁금증을 유발한 걸까.
뭐가 됐든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도련님의 말씀대로, 저는 전권 대리인의 명을 따를 뿐이죠.”
“빠져나갈 구석은 기가 막히게 찾네.”
“나중에 가주님께 크게 혼쭐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 ◈ ◈
제3기사단이 리오 성에 도착한 지 3일째.
아론은 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높게 쌓아 올린 성벽은 이곳저곳 금이 가 있었으며, 땅에선 마기가 악취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바렌 왕국의 2차 요새라 불리던 나날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싸워 온 건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역시나 마기.
아론은 하늘에 균열이 열렸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내렸던 마기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 이상 사태 당시보단 덜하지만, 이곳은 연합군에게 너무나 불리한 악조건이었다.
‘연합의 분위기가 최악일 수밖에 없지.’
그는 주변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왔고, 표정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리하르트를 볼 때면 표정이 풀어졌지만,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기 바빴다.
그런데 그 어둡기 그지없는 연합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기사님! 사랑과 평화의 주먹밥 드시고 힘내세요!”
“아이고, 어디 다친 데 있으면 저한테 오슈. 사랑과 평화를 담아 붕대 감아 드릴게!”
리하르트가 데려온 스노우폴의 주민들이 리오 성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평범한 민간인들이 여간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사랑과 평화…….’
철인 같던 기사들도 이 땅에선 제힘을 쓰지 못하는데, 주민들은 마기에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항상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애초에 마기의 영향을 덜 받는 것처럼 보였다.
“아론님! 여기 사랑과 평화의 주먹밥! 맛있게 드세요!”
가만히 서 있는 아론에게 여인 하나가 다가와 주먹밥을 내밀었다.
진한 갈색 머리에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
메리였다.
“가, 감사합니다.”
아론은 얼결에 받아 들고는,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진 메리를 바라보았다.
사랑과 평화라.
우적-
그가 주먹밥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왜 주먹밥에서 리하르트 도련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하.”
도련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민간인들을 데려왔나 했더니만.
‘그때 말씀하신…… 전도인가.’
한동안 잠잠하길래 포기한 줄 알았거늘.
입으론 허탈한 듯 한숨이 나왔지만, 한편으론 유쾌하다는 감정도 들었다.
어째선지 예전처럼 그들의 행동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빛.
그저 그것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럴 때면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설마 나도 옮은 건가 싶을 때였다.
“사랑과 평화? 하! 속 좋은 소리만 하는군!”
잔뜩 심통 난 음성이 아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젊은 기사 하나가 중년의 민간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에구! 왜 이리 화가 나셨어유!”
중년은 흙바닥을 나뒹구는 주먹밥을 손으로 긁어 담았다.
“이봐. 이런 곳에 왜 민간인이 있는 거야! 누가 데려왔어?”
“저, 저희는 리하르트 도련님과 왔지유.”
“뭐?”
인상을 와락 찌푸렸던 기사가 몸을 움찔했다.
“리하르트 도련님께서 민간인을 왜……?”
“저기, 일단 저것 좀 보셔유.”
중년은 푸근하게 웃으며 성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기사의 눈에 깃발이 보였다.
리하르트가 전투 중 삼만의 신앙을 부여했던 연합군의 깃.
“아…….”
“어때유. 마음이 확 풀어지쥬?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저걸 보고 풀어유.”
“…….”
기사는 말없이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중년이 새 주먹밥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얼굴 핼쑥한 것 봐. 밥도 잘 안 챙겨 먹은 거 같은데, 이것 좀 잡숴 봐유. 사랑과 평화를 담았으니께.”
밝은 미소도 함께였다.
기사의 눈에는 오직 그 민간인과 깃발만이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봅니다.”
“아유, 괜찮아유! 이런 곳에 있으면 성격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쥬. 그러니 사랑과 평화를 항상 마음에 품어야 해유.”
“사랑과 평화가 대체 뭐길래 다들 그리 말하는 겁니까?”
“신의 축복이고, 신의 은혜유.”
“그렇습니까…… 그, 제가 떨어트린 주먹밥을 주십시오. 그게 먹고 싶습니다.”
그 대화를 엿듣던 아론은 고개를 돌렸다.
이 같은 광경이 리오 성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러다가 뒤처질지도 모르겠는데.”
왠지 모를 유치한 경각심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 ◈ ◈
나는 원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회의의 연속이 고달팠다.
“성벽을 보수해야 합니다!”
“그럴 자재도, 시간도 없는 게 문제 아닙니까!”
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이렇게 진전이 없는 건지.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오르드 가주가 의견을 꺼냈다.
“폴린 성을 먼저 치는 게 어떻소? 이리 수성만 하는 건 연합의 일방적인 소모를 야기할 뿐이오.”
그의 의견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기각합니다.”
나는 단칼에 잘라 냈다.
“전에도 말했듯, 리치들은 커다란 의식을 진행 중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리치라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전력 대부분이 폴린 성에 상주하고 있을 겁니다. 까딱 잘못하면 리오 성마저 지키지 못할 수 습니다.”
담금질에 버금가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놈들.
뻔히 드러난 약점을 가만히 내버려 둘 족속이 아니었다.
리치의 근본은 마법사이니 더더욱.
차라리 그들이 의식을 마쳤을 때, 그 순간에 드러날 틈을 노리는 게 훨씬 더 승산이 높았다.
“으음…….”
수뇌부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맴돌았다.
나는 아발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니었다.
“아발트. 헬가의 기사들에겐 뭐라 했지?”
“폴랜드 헬가가 중요한 임무를 하달받고 자리를 비웠다고 전달했습니다.”
“그런가.”
사실상 헬가 가문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폴랜드의 하나뿐인 자식은 오래전에 죽었고, 더 이상 마땅한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확 내 개인 사병으로 끌어들일까.
“리하르트 도련님.”
잠시 딴 데 가 있던 내 정신을 깨운 건 자칼 가주였다.
“말씀하시죠.”
“현시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엉망입니다.”
내 단답이 당혹스러웠던 걸까.
자칼 가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초에 성을 내버려 두고 난전을 펼쳐야 하는 것부터 넌센스입니다. 상대는 언데드입니다.”
놈들은 몸에 칼이 박혀도 죽지 않는데, 아군은 어디 한 군데라도 물리면 언데드가 되어버린다.
그런 적을 상대로 난전이라니.
“하지만 언데드에겐 수성의 이점이 전혀 통하질 않습니다.”
그건 해결할 수 있었다.
화살에 신앙을 담으면 되고, 성벽에 붙은 놈들에겐 성수를 들이부으면 된다.
무력화는 시키지 못할지언정, 수성의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다.
문제는 내가 그만큼의 신앙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지.
“일단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최우선 과제는 연합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특히 헬가는 구심점을 잃었으니 아발트가 잘 이끌어야 할 테고.”
“맡겨 주십시오.”
깍듯이 고개를 숙인 수뇌부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제 회의실에 남은 건 레오와 나뿐.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입을 열었다.
“레오 경, 기도하겠다면서 왜 안 해? 거짓말이었나?”
“했습니다! 도련님이야말로 거짓말하신 건 아닙니까? 매일 자기 전에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변화가 없다라…….
삼 일 전, 그에게 신께 기도하면 무언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고작 해 봐야 몸에 활력이 감도는 정도일 테지만.
아무튼 제대로 기도를 했다면 내가 알아챘겠지.
“간절함을 담았어야지.”
“간절할 게 없는데 어떻게 담습니까.”
“바텐베르크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봐. 아니면 네 궁금증을 해결해 달라고 싹싹 빌던가.”
구색만 갖춘 기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건 연합을 넘어 모두의 미래를 위한 일이야.”
“하아, 알겠습니다.”
레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영 껄끄럽겠지.
오직 무(武)가 최고라 여기는 기사에게 갑자기 신을 믿으라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이 전쟁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기회는 많고, 상황도 딱 알맞게 만들어졌다.
그때였다.
“음?”
신앙을 획득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런데 무언가 낯설었다.
‘확인.’
평소엔 다음 날 아침에 한 번에 확인했었지만, 지금은 바로 살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로부터 20의 신앙을 획득합니다.』
『기도를 올린 자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어…… 어어?”
이놈이 왜 갑자기 기도를 해?
나는 그 기도의 내용을 듣고자, 손가락을 들어 시스템 창을 건드렸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를 듣습니다.』
- 우선 저는 당신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오해 마시길. 그래도 기사 중에선 첫 번째로 신도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신도로 만들어 주십시오. 호, 호르……?
“풉!”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52화. Episode. 17 깃발 아래 (3)
나는 레오에게 제대로 기도하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우리 아론을 보러 가야지.
리오 성을 잠깐 둘러보자, 성벽 위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 내 직속 기사님이 언제부터 이리 신실하셨을까?”
“……!”
신앙을 품은 깃발을 바라보던 아론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조차도 지금은 깜찍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론, 너 신이라면 질색하지 않았어?”
“가,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기도했잖아. 다 알아.”
그 내용도 파격적이다.
기사 중에서 첫 번째 신도는 제가 하고 싶습니다- 였던가.
“하, 제가 기도한 건 대체 어떻게 아신 것인지……, 설마 신이 그런 걸 일러바치기도 합니까?”
아론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치부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채였다.
‘정말 신이 있다고 믿는 말투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기도를 올릴 리가 없지만. 여태까지의 아론을 생각하면 굉장히 의외였다.
“말해 봐.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거야? 내가 신을 믿으라 할 땐 그렇게나 싫어하던 놈이.”
아론을 향한 나의 포교 활동은 수없이 많았다.
스노우폴에서도 그랬고, 바텐가에서도, 심지어는 마경과 홉슨 산맥에서도 틈날 때마다 기회를 노렸다.
물론 아론의 답은 단호한 거절.
어디 가서 다른 기사들한텐 이런 소리 하지 말란 당부의 말도 덤으로 따라왔었다.
“…….”
그가 곤란한 듯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왔습니다. 그동안 도련님이 이룬 기적을 보아 왔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저도 도련님이나 주민들한테 옮았나 봅니다. 도련님의 빛을 보면 볼수록 신에 대한 믿음이랄까, 괜스레 경건한 마음이 생깁니다.”
후광의 효과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걸까.
나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아론이 깃발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도 신이 눈앞에 있다면 따지고 싶습니다. 왜 세상을 이따위로 만들었냐고, 당신은 누구를 위한 신이냐고.”
“…….”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신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 기도가 등불의 연료가 된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해. 레오도 신도가 되려고 하거든. 그러다 일등 뺏긴다?”
“아니, 무슨 신이 기도 내용도 다 까발립니까? 나 원.”
그 투정 같은 중얼거림에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아론, 네가 얼른 신도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김에 성기사가 되어 주면 더더욱 좋고.
그래서 나랑 함께 세상을 구해 주었으면 한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아론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왜 그래?”
“기도를 하고 난 후로 컨디션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건 기도의 효과야.”
“으음, 그리고 …….”
내 대답에 그가 다시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아빠!”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델?”
아델이었다.
그녀가 성벽의 계단을 뛰듯이 올라와 내게 안겨들었다.
“일등 머슴이도 있었구나!”
“머슴…….”
마침 잘 왔다.
엘프 관련해서 그녀와 나눌 이야기가 있던 참이었다.
“아론, 하루에 한 번씩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해. 나는 아델이랑 얘기 좀 할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론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성벽을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빠. 일등 머슴이도 신자가 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이 샐쭉 웃으며 멀어져 가는 아론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아빠가 신이란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나랑 신이랑 연관 짓기는 힘들지.
“그럴 리가 있겠어? 나는 성자로 쭉 밀고 나갈 건데.”
“일등 머슴이는 내가 세계수란걸 알고 있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세계수인 아델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니, 조금만 의구심을 가져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지금까지야 별생각이 없을 뿐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의구심은 커지겠지.
거기에 아론은 저 혼자 해괴망측한 음모론을 펼치는 게 취미 아니던가.
“……그때 가서 아니라고 대충 우기면 되겠지. 아델, 너도 아론 앞에선 말조심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절대 안 될 일이다.
“걔가 내 욕을 얼마나 했는데? 그리고 신은 미지의 존재일 때가 더욱 신비로운 거야.”
나는 어째선지 뚱해 보이는 그녀의 머리통을 토닥였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엘프는?”
“깨어났어!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전부 이쪽으로 불러들였어.”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칭찬해 달라고 한껏 머리를 부비는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잘했어. 몇 명이나 오는 거야?”
“음, 오십 명 정도?”
오십 명이라.
생각보다 더 적은 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프의 개체 수 자체가 무척 줄어들었으니까.
“아이들이 온전히 회복한 건 아니야. 알다시피 나도 아직 쇠약한 상태라……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아델의 몸 상태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에 일천씩 먹어 대는 신앙도 이젠 현상 유지만 할 뿐이었다.
‘이 정도 신앙으론 이게 한계란 거지.’
그녀 입장에선 영양이 영 꽝이란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 이번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응응! 아빠 옆이면 몇백 년이고 버틸 수 있어!”
기특한 아이로다.
무한한 애정을 보여 주는 그녀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든든한 동료처럼 믿음직스러웠다.
◈ ◈ ◈
이틀이 더 지났다.
그동안 언데드의 습격은 없었다.
“이상합니다. 이상 사태 이후로 놈들이 이렇게 잠잠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 병력이 남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기회에 저희가 먼저 쳐야 합니다!”
“모든 게 함정이라면 돌이킬 수 없소. 지금은 연합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타 가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현명하오.”
수뇌부들은 늘 그렇듯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의견을 피력했다.
가문마다 성향이 다르니, 생각하는 방식도 다른 걸까.
누구는 먼저 공격하자고 외쳤고, 누구는 전열을 가다듬자고 외쳤다.
“리하르트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령관, 레오가 가만히 있는 내게 화살을 돌렸다.
기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찌릿 그를 흘겨보곤 입을 열었다.
“저는 후자입니다.”
폴린 성과 리오 성 사이의 모든 땅을 시체 밭으로 만든 놈들이다.
그 병력이 벌써 다 떨어졌을 리가 없지.
아직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지금 놈들이 잠잠한 건 둘 중 하나입니다. 큰 거 한 방을 노리든가, 우리가 먼저 쳐들어오기를 기다리든가.”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것일 터.
산 자에 대한 원망이 강한 언데드들이 본능까지 억누르며 우리의 습격을 기다릴 이유는 없었으니까.
‘실제로 마기는 계속 짙어지고 있다. 심상치 않아.’
안타깝게도, 나는 남들보다 더욱 마기에 예민했다.
그래서 느껴졌다.
저 멀리, 폴린 성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요동치는 마기를.
“순찰과 경계를 강화하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전투가 있을 겁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나는 수뇌부들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내 말에 속으로 불만을 품는 이도 있을 테고, 동의하는 이도 있을 테지.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먼저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회의라는 게 참으로 답답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매일같이 수 시간 동안 떠드는데 서로 감정만 상하기 일쑤라니.
‘고민한다고 없는 답이 나올 리가.’
그나마 다행인 건 연합군의 분위기가 많이 유해졌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낯빛이 밝은 신도들이 애쓴 덕이었다.
나는 회의실을 나서곤 바로 메리를 찾아갔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주먹밥을 나눠 주고 있었다.
“앗! 도련님!”
“열심이네, 메리.”
“헤헤. 주먹밥 드실래요?”
쪼르르 달려온 그녀가 내게도 주먹밥을 내밀었다.
“괜찮아. 그보다 슬슬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아! 드디어!”
대번에 웃음꽃이 핀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내 히든카드 중 하나, 신도들의 활약이 머지않았다.
“잠시만요!”
메리가 쌩하고 달려나가더니, 쌩하고 다시 달려왔다.
뒤에는 신도들을 잔뜩 데리고서.
“성자님! 벌써 때가 된 겁니까?”
“하긴, 이미 약은 어느 정도 쳐 놓은 상태잖아! 질질 끌 것 없지.”
“오오! 진정한 포교의 시작이로다!”
그들이 잔뜩 흥분한 채로 웅성거렸다.
약이라니.
뭔가 듣기 거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쉿!”
누가 들을세라 구석진 곳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기곤, 미리 쟁여 놓았던 연합군의 깃발 10개를 집어 들었다.
이제 여기에 각각 이천의 신앙을 불어넣으면 준비 끝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신도들을 향해 물었다.
“너희 정말 자신 있지?”
“암요!”
“믿고 맡겨 주세요!”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이었다.
그래. 내가 내 신도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는가.
『해당 물체에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도합 10개.
총 2만의 신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젠 남은 신앙이라곤 팔천여.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건 불가피한 투자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큰 전투가 일어날 거야. 몸 사리면서 해.”
“예! 저희는 호르님의 자산이니까요!”
“옳다. 옳아.”
기특한 소리를 하는 메리에게 깃발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리오 성에 오고 나서부턴 굉장히 하이텐션이었다.
아니, 신도들 모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방팔방에 돌아다니는 예비 신도들이 사랑스러워 죽겠다고.
“메리. 나는 당분간 어디 좀 다녀올 거야. 그동안 네가 잘해 주리라 믿는다.”
“다시 돌아오시기 전까지 전부 다 독실한 신도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오래 다녀올 건 아니야.”
고작 며칠 자리를 비울 셈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기연.
‘더 늦기 전에 얼른 가져와야지.’
원래는 레오가 얻었어야 할 기연이지만, 이대로라면 잔뜩 짙어진 마기에 오염될 판이다.
늠름하고 강대한 사자왕(獅子王)을 떠올리던 나는 입꼬릴 끌어올렸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리오 성으로 돌아올 셈이다.
베스트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거고.
“자, 선지자들아. 기도하자. 호르교에 백만 신도가 가득 차기를…….”
“아아! 백만 신도가 가득 차기를!”
53화. Episode. 18 망자의 군대 (1)
“이 시국에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도련님, 차라리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레오와 아론이 쌍으로 반대를 펼쳐 댔다.
어차피 나도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르 평원에 갈 거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성이나 지키고 있어.”
내 말에 레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르 평원이라 하심은…… 혹, 영물 때문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리오 성의 동남쪽에 있는 나르 평원.
거기에는 영물 혹은 아티팩트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다.
여기서 시간 낭비만 하다가 놓치기엔 아까운 기연이다.
“아무리 영물이라 한들,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언데드가 되었거나, 죽었거나 했겠지요.”
“살아 있어.”
애초에 죽거나 하는 종류의 녀석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마기에 오염되진 않을까 싶은 건데, 그렇게 되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야 했다.
“영물은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평원에 가서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길들일 건데?”
“하…….”
나는 이마를 부여잡는 레오를 보며 말했다.
“가다가 이상한 낌새라도 느끼면 바로 돌아올 거야. 너무 걱정 마.”
“인원을 차출해서 가십시오. 아니, 제1기사단 중 몇 명을 보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혼자 다녀올게.”
내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리오 성에 없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리오 성을 떠났다.
악취가 올라오는 땅 위를 달린 지 한참.
밤낮 구분 못 할 하늘은 온종일 새까맸고, 곳곳에 불쾌한 기운이 가득했다.
푸르르-
“워워.”
나는 난동을 부리는 말을 진정시켰다.
폴린 성에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 살을 에는 듯한 마기가 사방을 짓눌렀다.
‘심각한데.’
전쟁이 끝나도 이 지역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리며 텅텅 비어 버리겠지.
바렌 왕국에겐 국토의 절반이 무주공산이 되는 것이다.
“키에에엑!”
“크륵!”
폐허가 된 영지에 도착하자, 덩그러니 서 있던 언데드 둘이 덮쳐들었다.
열 살 난 여자아이로 보이는 것 하나와 성인 여성의 시체.
서걱-
번개처럼 뽑아 든 검으로 한 번에 목 두 덩이를 베었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시체들이 눈에 띄었다.
“케엑!”
덤벼드는 언데드의 목을 베어 넘기곤 서둘러 영지를 가로질렀다.
오늘로 리오 성을 떠난 지 사흘.
아직 적군에게선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을 뿐.
얼른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히히힝-!”
“……!”
난데없이 말이 미쳐 날뛰어댔다.
신앙을 사용해 진정시키려 해 보아도, 겁에 질린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동시에 내 지척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서걱-!
순식간에 참격이 날아들었다.
내가 어찌 반응할 새도 없이 말의 기다란 목이 떨어져 나갔다.
“누구냐!”
“끄, 어…….”
건물 너머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를 지키던 기사인지, 은색 철갑을 입은 시체였다.
놈이 입을 열었다.
“언데드…… 죽인, 다…….”
구더기가 들끓는 눈두덩이가 나를 향했다.
저 시체의 눈에는 내가 언데드로 보이는 걸까.
생전의 마지막 기억만을 가지고선 행동하는 모양이었다.
저런 놈한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캉-!
허공에서 검이 맞부딪쳤다.
한 번, 두 번.
열댓 번 정도의 검격을 나눴다.
“지킨, 다…… 내, 가족…… 주군…….”
그게 놈의 유언이었다.
깔끔하게 목이 날아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군의 기사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사기에 적잖은 영향이 미쳤을 터였다.
그만큼 끔찍한 광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얼음 왕관의 한기를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 ◈ ◈
“동지! 또 여기에서 죽치고 있소? 췩!”
휴거가 퍽 안타깝다는 눈으로 모리츠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대뜸 떠난 이후로 모리츠는 성벽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멍하니 연합군의 깃발을 바라보는 모습이 꼭 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리하르트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며칠이나 됐다고 그러는 거요. 대단한 인간 전사가 그리도 좋소?”
모리츠는 휴거의 말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좋긴, 개뿔이.
자신은 그저 리하르트의 빛을 이용해 먹기 위해 붙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깃발보다 놈 옆에 붙어 있는 게 더 마음에 안정이 생긴다고.’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리하르트가 온몸에서 은은하게 뿜어내는 빛이 모리츠에겐 더욱 와닿았다.
“휴거. 리하르트 그놈은 용이랑 싸울 때 어땠어?”
“굉장했지! 취익.”
휴거는 추억을 떠올리듯 입꼬릴 끌어올렸다.
그러곤 저를 닮은 어린 오크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과 리하르트의 대결부터, 용과 싸울 때의 상황까지 전부.
“나는 그때 느꼈소. 아! 저 대단한 인간 전사와 함께라면 굉장히 즐겁겠다고 말이오. 취익.”
“…….”
“제3기사단은 그를 등불이라 부르더군. 취익, 꽤 어울리지 않소?”
“흥.”
모리츠는 대꾸 없이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등불이라.
정말 어울렸다.
그도 지켜보았으니까.
전장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꾸고, 연합의 붕괴를 꾀하던 배신자까지 처단하는 모습을.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못 했지.’
배신자 폴랜드 헬가가 바텐베르크의 레오를 무시하고, 불경한 태도를 여과 없이 보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회의실의 분위기에 짓눌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못내 화가 났었다.
“동지는 대단한 인간 전사를 동경하는 것 같구려. 비록 사이는 영 안 좋지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꺼져. 내가 그 자식을 동경한다니, 무슨 헛소리야!”
모리츠의 날 선 말에 휴거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동지는 동지만의 재능이 있잖소. 췩! 굳이 대단한 인간 전사를 따라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소.”
“내가 따라 한다고?”
“호흡부터 걸음걸이까지 전부 따라 하더만.”
사실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모리츠는 이따금 제 동생을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기엔 그는 어렸다.
“따, 따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놈이야!”
“흐흐, 그런 거요?”
“……시끄러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기, 모리츠 도련님! 휴거님!”
뒤에서 가녀린 음성이 들려왔다.
양손 가득 주먹밥을 들고 있는 메리였다.
“오오, 메리 소저!”
그녀를 본 휴거의 붉은 얼굴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헤헤, 휴거님이 부탁하신 주먹밥 스무 개!”
“내가 받으러 가려고 했는데, 굳이 찾아오게 해서 미안하오. 췩.”
“용사님들에게 그 정도도 못해 드릴까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답구려. 전장에 핀 꽃 한 송이 같소.”
흘긋 지켜보던 모리츠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인간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오크라니.
“동지도 드시오. 대단한 인간 전사의 힘이 깃든 물로 지은 쌀 주먹밥이라오.”
모리츠는 순순히 주먹밥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메리를 바라보았다.
“너, 리하르트의 전속 시녀였지? 줄곧 이해가 안 갔는데,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러고 있어?”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니, 리하르트가 괴롭히던 시녀가 아니던가.
“아, 맞습니다! 용사님들께 도움이 되고자 왔습니다.”
“리하르트도 미쳤구나. 민간인들을 데리고 오다니.”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놈이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메리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자…… 아니, 리하르트 도련님의 명령으로 온 게 아닙니다.”
“뭐? 그러면?”
“사랑과 평화를 전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모리츠는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민간인들이 말끝마다 붙이는 저 구호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췩, 사랑은 나에게 주면 안 되오?”
“아하하…… 용사님께는 평화를 드릴게요!”
또 저 여자는 왜 저리 밝은 건지.
마기에 벌벌 떠는 자신이 괜스레 바보처럼 느껴졌다.
“모리츠 도련님. 얼굴에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요.”
“신경 꺼.”
“췩! 동지! 메리 소저에게 무슨 말버릇이오!”
메리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호르를 믿고 광명 찾으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당부했던 대로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한편.
폴린 성 인근의 영지에선 수많은 시체가 모여들고 있었다.
“백작, 각하…… 출정 준, 비…… 완료…….”
“언데드를…… 처단…….”
쿵-! 쿵-!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은 기사 수백과 하급 언데드 수천이 집결했다.
“우, 리의 왕, 국! 바렌, 을…… 점령한…… 언, 데드……! 모, 두…… 처단하, 라……!”
“그, 어어……!”
폴린 성을 지키던 무가의 일각.
포이르 백작가의 기사들이 검을 치켜세웠다.
그들은 정말 살아 있는 기사처럼 전투를 준비했다.
먹지 않을 터인데 식량을 끌어모았고,
자지 않을 터인데 야영할 도구를 챙겼다.
멈춰 버린 심장에는 바렌 왕국을 되찾겠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바렌, 티스 폐, 하께선…… 죽어, 서도 고, 통 받고 계신, 다……! 그분, 께 평안을……!”
그들에겐 살아 있는 자가 언데드처럼 보였다.
무가연합이 지키는 리오 성은 죽은 자의 요새였고, 바렌 왕국은 악의 요람이었다.
“전, 군…… 출정하, 라……!”
망자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이르 백작을 비롯한 기사들이 선두를 달렸고, 그 뒤를 수천의 언데드가 따랐다.산자의 땅으로 향하는 죽은 자들.
리오 성에 진짜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리하르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늦을지도 모르겠군.”
요동치는 마기를 느끼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낌새가 느껴지면 곧바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미 나르 평원에 도착한 뒤였다.
어서 사자왕(獅子王)을 찾고 나서 되돌아가는 편이 현명했다.
“야! 대체 어디 있냐!”
그가 답답함을 한껏 담아 소리 질렀다.
이틀 내내 돌아다녀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는 사자왕.
설마 놈이 영역을 옮겼나- 싶을 때였다.
크어어엉-!
위압감 넘치는 포효가 평원을 울렸다.
동시에 거대한 압박감이 저 멀리서부터 덮쳐들었다.
54화. Episode. 18 망자의 군대 (2)
나는 놈의 포효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평원의 끝자락에서부터 들려온 울음소리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
완전히 마기에 오염되었다면 이런 울음소리조차도 못 내겠지.
크워어엉-!
다시 한번 포효가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꺼멓게 죽은 잡초들이 몸을 떨어 댈 정도였다.
이따금씩 덤벼드는 짐승 언데드를 베어 가며 내달린 지 한참.
드디어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르르…….
바렌 왕국의 수호자로 추앙받던 영물이자, 미래에는 레오의 파트너가 되었을 아티팩트.
사자왕(獅子王)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쯧.”
나는 멀찍이 떨어져 놈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집채만큼 커다란 몸과 용맹함이 물씬 느껴지는 갈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하반신은 까맣게 썩어들어가 몹시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하마터면 정말 늦을 뻔했네.”
마기의 진짜 무서움은 바로 역병과도 같은 성질이다.
한 번 오염되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마인(魔人)으로, 마물은 더욱 흉악한 괴물로.
“이리 온.”
사자왕에게 손을 까딱인 순간.
놈이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눈동자를 보니 이미 영물도 뭣도 아닌, 맹수 그 자체였다.
쾅-!
사자왕의 앞발이 평원을 크게 할퀴었다.
난 침을 삼키며 뒤로 몸을 날렸다.
지금은 내가 무어라 해도 알아듣지 못할 터.
-크르…….
“좀 맞고 시작하자.”
나는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들곤 놈과 마주했다.
잠시간의 정적.
놈은 사냥감의 빈틈을 찾듯, 몸을 낮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런 장단에 맞춰 주기엔 시간이 아깝다.
온몸에 신성력을 둘러싸고 땅을 박찼다.
꽈앙-!
검과 앞발톱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강렬한 충격이 손잡이를 타고 올라온다.
그러나 사자왕은 그 충격을 해소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큭!”
웬만한 명검보다도 날카로울 발톱이 몇 번이고 공간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발톱을 피하면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진 채로 들이밀어졌다.
어쩐지 용과 싸울 때가 떠올랐다.
‘짐승형 마물은 레퍼토리가 비슷하지.’
발톱과 깨물기.
그다음은.
“크아아앙-!”
역시 피어였다.
근처에서 당하면 일순 정신을 잃을 만큼 위협적인 공격.
“우어어-!”
신앙을 담은 외침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둥소리 같은 두 소음이 맞부딪혀 평원을 울렸다.
-크르!
승자는 나였다.
마기에 오염되어 가는 놈에게 신앙은 치명적이었다.
사자왕이 몸을 움찔 떨 때, 나는 홀리 오러를 일으키곤 검을 휘둘렀다.
서걱-
두꺼운 가죽을 갈라내는 저항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약이다 생각해라.”
얼굴에 튀긴 피를 쓱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니었다.
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으니까.
홀리 오러는 마기와는 상반된 속성인 신성력으로 엮은 것이다.
신앙의 외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은, 이성을 잃은 사자왕을 깨우기에 특효약이라는 뜻이었다.
콰앙- 콰앙-
그 뒤로 우리는 한참을 더 부딪쳤다.
사자왕의 발톱이 땅을 그을 때마다 기다란 줄이 평원에 그려졌다.
몸놀림은 또 어찌나 재빠른지, 잠깐 방심하면 빈틈을 잡히기 일쑤였다.
‘오길 잘했어.’
놈의 기습을 가까스로 피해 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봐도 탐나는 놈이다.
“……!”
그때였다.
나는 몸을 굳혔다.
조금 전만 해도 눈앞에 있던 놈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
“……그래. 이만큼 했으면 정신 차릴 때도 됐지.”
고개를 꺾어 사자왕을 바라보았다.
놈은 내 뒤에 꼿꼿이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자기가 승리했다는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눈빛은 영물 특유의 맑은 기운을 품은 채였다.
“제대로 했으면 내가 이겼어.”
-크릉.
어쩐지 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나 참, 다시 싸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찜찜한 기분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야기 좀 나눌까.”
사자왕은 말을 못 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네 몸을 치료해 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사자왕이 줄기차게 흘리던 흉흉한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러곤 슬쩍 제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검게 죽은 털과 녹아내리는 가죽, 그 사이로 흐르는 진물.
“너 그대로 있으면 추악한 괴물이 될 거야. 알고 있지?”
-크르르…….
돌연 놈이 인상을 찌푸리곤 포효를 터트렸다.
분함과 고통이 절절히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척 봐도 프라이드가 높아 보이는데, 그런 녀석이 이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대상에게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나는 놈의 하반신에 손을 얹었다.
질퍽한 진물의 촉감이 불쾌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사자왕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빠른 속도로 하반신을 좀먹던 어둠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고 있었다.
-크르…….
놈이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눈을 감고는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동의한 걸로 안다.”
나 또한 사자왕의 옆에 앉아 오염된 부위에 신성력을 부어 넣었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사자왕의 하반신을 집어삼킨 어둠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삼 일이 더 지났다.
오염의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하루에 한 번 이천의 신앙과 신성력을 부여하면, 사자왕이 그것을 온몸에 순환시킨다.
영물이라는 격에 달한 사자왕이었기에 그나마 치료가 가능했다.
‘신앙은 전투를 위해 남겨 둬야 하니까…….’
이천이 하루에 쓸 수 있는 맥시멈.
그 덕에 신성력을 죄 끌어 쓰느라 기가 허할 지경이었다.
영물이라더니 기 빨아먹는 요물이랑 다를 바가 없다.
‘젠장.’
나는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리오 성을 향하는 적군의 마기는 가까워졌다가 어느 기점부터 멀어져 갔다.
이미 나르 평원을 지나쳐, 리오 성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군 속도가 정말로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기사들이 나선 것 같은데…….
“야. 아직 멀었냐?”
급한 마음에 괜히 사자왕을 재촉했다.
놈은 평원에 드러누워 마기를 몰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반신 일부가 본래 색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삼 일이 또 하염없이 지나갔다.
사자왕은 드디어 마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크워어엉-!
네 발로 굳건히 일어선 놈이 포효를 터트렸다.
자신의 온전함을 평원에 널리 알리겠다는 태도였다.
-크르릉!
그러곤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사자왕.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사자왕이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사자왕이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사자왕이 신수의 자격 조건을 달성합니다.』
과연 영물은 영물.
자존심이 강한 만큼 한 번 약속한 것은 저버리지 않는다.
『사자왕을 신수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좋아, 네 이름은 이제부터 나르다.”
놈이 그르릉거리는 것과 함께 콧방귀를 뀌었다.
좋아하는 건지 마는 건지.
[나르] [사자왕(獅子王)]
□ 특기 - [축지], [피어], [형태변환], [괴력], [불사], [마력동화], [육감]
□ 비고 - [호적수], [호감], [영특]
“흐음.”
눈여겨 볼 것은 형태변환과 축지, 불사 특기였다.
그때 나르의 몸이 연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푸스스-
무언가 재로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르의 거대한 몸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팔뚝만 한 송곳니 하나.
이것이 사자왕의 본모습이었고, 녀석을 아티팩트라 부르는 이유였다.
“형태변환.”
나는 송곳니를 쥐곤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이번엔 송곳니가 연기에 휩싸이며 거대한 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워어엉-!
“옳지.”
다시 나타난 나르의 모습은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새하얀 갈기, 새하얀 가죽.
금빛이었던 눈동자는 묘한 느낌을 주는 은백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마력동화.’
사용자의 마나 특성에 따라 자신도 변화하는 놀라운 힘.
졸지에 백사자가 된 나르가 제 몸을 신기한 듯 살펴보았다.
“그럴 시간 없어. 너도 느껴지지?”
-크르릉…….
적군의 마기가 리오 성 인근과 그 후방에서 요동쳤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바로 출발하자.”
나르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낮췄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라는 듯, 콧방귀도 함께였다.
비고에 호적수라는 게 있던데, 아무래도 나중에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자!”
나는 나르의 등에 올라타곤 전방을 가리켰다.
그 직후, 무지막지한 속도감이 엄습했다.
◈ ◈ ◈
망자들은 지치지 않는다.
강철 같은 기사의 시체를 태운 유령마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밤낮 구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올 수 있었고, 그들은 곧 리오 성이 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꿀꺽-
성벽 위에 서 있던 연합군의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넘실거리는 마기와 시체 썩은 내가 진하게 풍겨 왔다.
“사령관님! 적군의 수는 대략 사백! 하오나, 적은 포이르……, 포이르 백작가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살펴본 지휘관은 비명을 내질렀다.
백작가이자 1차 요새를 지키던 무가의 일각인 포이르.
그들이 얼마나 강맹한 기사단이었는지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데스나이트 팔십, 좀비 나이트 삼백이십……!”
“데스나이트는 상급 이상의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듯합니다!”
“저들은 선두요……! 아직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마기가 수없이 많소!”
지휘관들의 악다구니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질수록, 연합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런 그들에게 레오가 외쳤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선 리하르트의 힘이 담긴 반지가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여과 없이 일으킨 기세가 연합군의 정신을 일깨웠다.
“연합의 깃발을 바라보아라! 너희들의 숭고한 사명을 떠올려라!”
“또다시 겁을 집어먹을 텐가! 아니면 용맹하게 싸울 텐가!”
무가의 수장들도 목에 핏대를 세웠다.
리하르트로부터 받은 지시는 단 하나.
연합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더는 도련님께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그들에게 리하르트는 그저 권력을 가진 애송이가 아닌, 바텐베르크의 마땅한 전권 대리인이었다.
어쩌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건, 리하르트가 가진 신비하고 놀라운 힘일지도 몰랐다.
가주들은 그런 그를 기다리며 목청을 높였다.
“리하르트 도련님……!”
아론이 깃발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제3기사단도 마찬가지였고, 모리츠는 아예 울상을 지었다.
“휴거! 리, 리하르트 그 자식……, 이미 죽은 거 아니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돌아오겠다며!”
덜덜 떨리는 손이 매달리듯 휴거를 붙잡았다.
그런 모리츠에게 휴거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모리츠의 등을 퍽 때렸다.
“큰아빠야, 큰아빠야. 헛소리 하지 말아라.”
“무, 뭐?”
“아델 소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린 아델이었다.
55화. Episode. 18 망자의 군대 (3)
“아빠는 죽지 않았다.”
모리츠를 흘겨보며 중얼거린 아델은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리오 성을 위협하듯 들끓는 마기.
이 정도의 마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연합 내에서도 오염된 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터.
아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쿵-!
돌연 그녀가 성벽 위에서 발을 굴렀다.
직후, 성 주변의 땅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콰드득-!
솟구친 나무줄기 수 갈래가 성벽을 휘감았다.
“뭐, 뭐야?”
연합은 난데없는 나무줄기에 몸을 떨었다.
혹시 적의 공격은 아닐지, 긴장 가득한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그러나 그 불안은 점차 사그라졌다.
“신앙만큼은 아니나, 어느 정도는 마기를 막아 줄 것이다.”
세계수의 뿌리.
기나긴 세월 동안 가뭄 아닌 가뭄에 바짝 메말랐던 그 뿌리는 조금이나마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싸아아-
고동색 뿌리에서 옥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계수가 품은 생명의 빛이었다.
사납게 성을 내던 마기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드루이드가 이런 힘도 갖고 있었나.”
레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자그마한 꼬마가 몹시 커 보였다.
“사령관아. 적들은 당장 쳐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아델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진을 친 시체들은 오롯이 선 채로 이쪽을 노려볼 뿐, 당장 칼을 뽑아 들진 않았다.
“병사를 기다리는 거겠지.”
악취를 풍기는 병사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방을 훑은 레오는 다시금 기세를 일으켰다.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은 제외하고 전투를 대비하라!”
그렇게 외친 그는 수장들을 따로 불러 연합의 사기를 북돋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적군이 쏟아 내는 살기를 저 혼자 맞받아 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연합의 표정이 한결 더 나아졌다.
“잘 싸우기만 하는 바보인 줄 알았더니, 제법 무리를 다룰 줄 아는구나.”
아델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계수로서 수많은 전쟁을 지켜보았던 그녀에겐 처음의 무가 연합은 영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령관의 자질이 의심되던 참이었다.
“리하르트 도련님이 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
“아, 들렸느냐? 혼자 중얼거린 건데.”
“보기완 다르게 건방진 꼬맹이구나.”
레오가 적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머리에 꿀밤이라도 한대 놔주고 싶은데, 아델이 풍기는 분위기가 영 범접하기 힘든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 도련님을 아빠라 부르던데…… 설마 도련님의 숨겨 둔 따님이십니까?”
“하대를 할 건지, 존대를 할 건지 하나만 하거라.”
피식 웃은 아델이 말을 이었다.
“자식은 맞으나,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는 육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못하지. 굳이 말하자면…… 아빠는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너는 기도나 하거라.”
아델은 그 말을 끝으로 성벽을 내려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나타냈다.
“…….”
레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긋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적들을 향한 눈에 힘이 들어갔다.
‘기도라.’
그게 뭐라고 이렇게 힘든 건지.
오직 무(武)만을 갈고닦아 온 일생이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기도란 약한 쥐어 대는 지푸라기요, 나약한 자가 의지하는 헛된 희망일 뿐이다.
뿌리 깊게 박힌 선입견이 그러한 속삭임을 멈추질 않았다.
스윽-
레오가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는 반지를.
“부디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게 해 주십시오.”
호르시여.
이 약하고 또 나약한 기사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아니지, 나 안 약한데.”
레오가 불만스레 중얼거릴 때였다.
몸에 갑작스러운 활력이 맴돌았다.
◈ ◈ ◈
연합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숨 막히는 대치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 온종일 살기를 쏘아 대는구나!”
사령관과 수장들의 노력 덕에 연합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성질을 내며 두려움을 몰아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무가의 기사다!”
“가문의 깃발 아래 내건 맹세는 무엇인가!”
“기사로서 살고! 기사로서 죽는다!”
쿵, 쿵!
지휘관의 외침에 성벽 아래 늘어선 기사들이 가슴을 두드렸다.
긴장이 고조되며, 눈가에 일렁이는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이제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역겨운 괴물들이 가까워졌음을.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리오 성에서 분 것이 아니다.
우습게도 죽은 기사들이 뿔 나팔을 분 것이다.
“하……!”
지휘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데스나이트.
이지를 가진 언데드로서, 무리를 통솔하는 능력은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투 준비!”
저 멀리 수천의 언데드가 검은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놈들은 포이르의 기사들을 지나쳐, 리오 성을 향해 득달같이 덮쳐 왔다.
“성문을 개방하라!”
“우오오!”
성문이 열렸다.
연합의 기사들은 전원 밖으로 나가, 방진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훅 하고 마기가 숨에 섞여들었다.
고작 한 발짝 나아갔을 뿐인데, 세계수의 생명력이 미치지 않는 성 밖은 지옥 그 자체였다.
“으으……!”
공기마저 음습한 전장.
달려오는 수천의 시체들.
그 뒤에서 살기를 쏘아 대는 망자의 군대.
연합은 고개를 돌려 성벽에 내걸린 깃발을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을 애써 목구멍으로 넘겼다.
“1열, 방패 들어!”
“제대로 자세 잡아라! 적들을 막아!”
레오가 벼락같이 외쳤다.
동시에 수장과 지휘관들이 검을 뽑아 들고는 목청을 높였다.
어느덧 전투가 시작되었다.
철제 방패에 썩은 살덩어리가 수없이 부딪쳤다.
미친 듯 달려오던 적의 선두가 그제야 멈췄다.
크에에엑-!
방패 너머로 2열이 창칼을 찔러 시체의 머리를 꿰뚫었다.
1열이 막아 내고, 2열이 급소를 찌른다.
그 뒤로 수많은 기사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콰드득-! 콰앙-!
전장의 중앙에선 유난히 커다란 소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레오와 제1기사단이 적들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단장! 단장은 연합을 통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나는 칼질이 성미에 맞나 보다.”
기사단원은 레오의 푸념 섞인 말에 낄낄거렸다.
그러곤 더욱 바삐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제가 언데드가 되면 단장이 죽여 주쇼!”
그 외침이 선두였는지, 적들에게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단원들이 저마다 목소릴 높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이나 해!”
레오는 한 번 일갈하고는 달려드는 언데드를 베어냈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언데드.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조를 나눠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파도에 손가락 몇 개를 찔러 넣는다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손바닥, 아니 온몸을 던져도 모자랐다.
그 때문에 연합은 성을 텅 비워 두고 전면전에 나섰다.
“으아아악!”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고, 땅은 검은 피에 질퍽거렸다.
“제, 젠장! 물렸어!”
잔뜩 우그러진 방패를 내던진 1열의 기사가 제 목에 칼을 박았다.
그 자리를 3열의 기사가 채웠다.
“방진 유지해!”
통솔 역할을 맡은 지휘관과 수장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론과 휴거를 비롯한 리하르트의 일행도 분전을 거듭했다.
그렇게 싸우길 한참.
언데드는 끝이 없었고, 진짜 적은 아직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굳건한 방패가 되었던 연합은 지치기 시작했다.
“방패 똑바로 들으라고!”
“정신 못 차려!”
패색이 짙어질수록 전장을 가로지르는 고함이 잦아졌다.
죽고자 하면 산다더니.
그 산다는 것이 언데드가 된다는 뜻이었던가.
악취 나는 괴물이 싱싱한 살점을 씹어 댈수록 조금씩, 조금씩 용기와 사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조용히 성벽 위에 서 있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뒤로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새하얀 망토를 깊이 뒤집어쓴 채였다.
“길 잃은 영혼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줍시다.”
움켜쥔 연합의 깃발에서 빛이 일었다.
메리와 신도의 눈에서도 기이한 열기가 일렁였다.
신이시여.
어둠과 맞서는 용사들에게 축복을.
“아아-.”
성벽에 늘어선 신도들이 가느다란 음성을 내뱉었다.
“등불 쥐신 자 있나니.”
메리가 그 가운데에서 읊조렸다.
그러나 전투가 격해진 전장까지는 닿지 못했다.
우웅-
그녀의 뒤로 밝은 후광이 일었다.
이어서 읊조린 목소리는 몹시 묘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등불을 부려 어둠을 밝히고자 하시고]
메리를 둘러싼 후광이 밝아졌다.
신도들이 열 개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린 양을 부려 뜻을 알리고자 하시더라]
그들이 준비한 찬송가.
‘양은 노래하리’.
깃발에서 빛이 솟구쳤다.
자그마한 읊조림에 고운 음률이 섞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전장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듣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음색은, 거듭된 전투에 지친 연합군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저들은…….”
새까만 마기가 불에 덴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신도들로부터 피어난 빛이 다가왔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스노우폴에서 지낼 무렵.
그들은 깨진 하늘 사이로 쏟아져 내린 마기가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보살핌을 갈구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 냈다.
『특기 - 찬송가』
그때의 기도는 점차 노랫말이 되었고.
지금은 메리가 전도사로서 일궈 낸 특기로서 발현되었다.
찬송가의 음색이 마치 공명하듯, 신도의 입에서도 울림이 퍼져 나갔다.
“리오 성을 지켜라!”
“우오오!”
연합군의 지친 눈빛에 활기가 차올랐다.
곧 동이 터 오른다더라.
도대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묘한 믿음이 가슴을 두드렸다.
곧, 정말로 이 고된 전투가 끝날 것만 같았다.
“크, 크에에엑-!”
반대로 언데드들은 괴성을 터트렸다.
머리를 쥐어뜯는 놈,
더욱 광분하여 달려드는 놈.
뿌우우-
심지어는 여태 지켜보고만 있던 망자의 군단마저 움직였다.
그들은 유령마를 타고 언덕을 내달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저 믿을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를 차례이리라]
“더, 러운……!”
포이르 백작이 기함을 토했다.
신앙을 품은 노랫말은 망자의 귀를 괴롭혔다.
이 불협화음을 내는 괴물을 기필코 베겠노라.
포이르 백작이 그리 다짐할 때였다.
크워어엉-!
망자의 군단 뒤쪽에서 웬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지금보다 더욱 밝은 빛이 하늘에 떠올랐다.
『한 자루의 검성 ? 발동.』
56화. Episode. 19 망자의 군대 (4)
하늘 높이 떠오른 별이 떨어졌다.
그 끝은 좀비 나이트의 머리를 향한 채였다.
콰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썩은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 노옴……!”
포이르 백작의 살기 어린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망자의 군단이 서 있던 언덕.
그 위에 발을 디딘 거대한 백사자가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워어엉-!
한 차례의 포효.
그 직후, 사자가 망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번, 두 번.
사자가 세 번째로 땅을 박찼을 때였다.
망자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맹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뭣……?”
사자의 포효가 다시 귓가를 때렸다.
한데 어째서일까.
그 웅혼한 울음소리가 연합의 방진 앞에서 울려 퍼졌다.
땅을 접어 달린다는 축지.
사자왕이 가진 힘 중 하나였다.
“늦어서 미안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연합의 귀에 들려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자를 쳐다보던 사내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리하르트가 사자에 올라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가는 퀭했고, 온몸은 땀에 젖은 채였다.
“최대한 빨리 온다고 서두른 건데.”
리하르트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사자왕, 나르를 신수로 받아들인 것이 하룻밤 전.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단 뜻이었다.
‘물론 직접 뛴 건 나르지만.’
그 원동력인 마나는 리하르트가 부담해야 했다.
정신적인 피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아직 쉴 때가 아니었다.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성벽을 휘감은 아델의 뿌리가 보였고, 그 위에 노래를 부르는 신도들이 보였다.
그다음은 연합이었다.
그들은 언데드의 물량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 낸 티가 역력했다.
◈ ◈ ◈
아직 언데드는 연합보다 많았고, 저 멀리에선 망자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르, 날뛰고 있어.”
나는 나르 위에서 내려섰다.
귓가엔 성가대가 부르는 찬송가가 들려왔다.
지친 몸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감도는 것 같았다.
팟-!
다시금 검성을 뽑아 들곤 몸을 날렸다.
악취를 뚫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한참 언데드를 썰어 대고 있는데, 옆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우거 시체의 목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아…….”
그가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검을 휘두르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었다.
“드디어 기도했더라?”
“그만큼 도련님을 기다렸단 소리죠.”
기도 내용이 뭐였더라.
이 약하고 나약한 기사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였던가.
“그런데…….”
“그런데?”
“기도를 하고 나니, 도련님 생각이 나더랍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말이죠.”
레오가 묘한 눈으로 나를 흘끗거렸다.
기도를 한 거면 한 거지, 왜 심장이 쿵쾅거려.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기분 나쁜 비유였다.
그 헛소리에 몸서리가 쳐졌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취익!”
“리하르트!”
어느덧 내 곁으로 휴거와 모리츠가 달려왔다.
거기에 아론까지 언데드 사이를 가르며 다가왔다.
“방진은 어쩌고?”
“도련님이 타고 오신 사자 덕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아론이 다부진 얼굴을 하고선 눈을 빛냈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 우리 동지가 그대 걱정을 어찌나 하던지, 껄껄!”
“내가 언제!”
휴거와 모리츠는 늘 그렇듯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여기는 전장 한복판인데.
“장난은 나중에 쳐.”
나는 한 차례 검을 털어 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거대한 마기가 요동치며 다가왔다.
“온다.”
곧 눈 앞을 가리던 언데드의 물결이 쩍 갈라졌다.
그 뒤편으로 유령마를 탄 사백 구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추악, 한…… 괴, 물들……!”
선두의 시체가 이쪽으로 검을 겨눴다.
“감, 히…… 리오, 성을…… 점, 령, 했, 는가……!”
그의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듣기 불쾌했다.
“저들 눈에는 저희가 언데드로 보이나 봅니다.”
레오가 검을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그 뒤로 제1기사단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기사단은 한참을 날뛰었을 텐데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나는 눈대중으로 적군과 이쪽의 수를 재 보았다.
“얼추 구도는 맞춰졌네.”
적군은 사백.
우리는 대략 일백.
이 정도 수적 열세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장! 포이르 백작은 내가 상대하게 해 주쇼!”
“두당 네 명씩 처리하면 되려나?”
“생채기 하나라도 난 놈은 빠져. 약골 주제에 머릿수 차지하지 말고!”
시정잡배처럼 떠드는 이들이, 바로 바텐베르크의 첫 번째 검이니까.
하나하나가 최소 상급 이상인 그들은 가진 바 재능도 남달랐다.
일반적인 무가의 기사와는 비교 못 할 천재 집단.
“리하르트 도련님!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쉬는 게 어떠십니까?”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건넸다.
입으로는 우려를 표하면서 눈으론 내 몫을 욕심내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어쭈? 넌 좀비 나이트 당첨이다.”
“악!”
이 자리에 적을 눈앞에 두고 물러설 위인은 없다.
아론과 휴거도 전의를 불태웠고, 모리츠도 떨리는 손으로나마 검을 그러쥐었다.
“미안하지만 백작은 나와 아론이 상대할 거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내 가슴속에 일렁이는 투지가 가장 크고 거셌다.
내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스노우폴의 전투.
우습게도 그때의 적도 데스나이트였다.
“설욕전 해야지. 아론?”
“도련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우직한 아론이 제 충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제1기사단이 기겁하곤 나를 만류했다.
“도련님! 포이르 백작은 소드 마스터에 다다른 실력자입니다. 이번만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각 무가의 수장 중에서도 몇 없는 높디높은 경지인 소드 마스터.
확실히 나와 놈 사이에는 몹시 두꺼운 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무리 아론과 함께라도 그 벽을 뛰어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싫어.”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도련님!”
기사들의 시선이 따갑게 얼굴을 찔러 왔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적과의 실력 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철부지.
좀 강해졌다 하여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바보.
문득 웃음이 났다.
내 걱정을 해 주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싸우다 죽을 일은 없겠네, 뭐.
“지금 웃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레오가 대답을 채근했다.
나는 이미 답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상대하겠다니까.”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두 번 말 안 해.”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아직은 내 검이 저 높은 곳까진 닿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건 기회인데.
욱씬-, 통증이 이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십자 모양의 성흔이 잔뜩 안달 나 울어 대고 있었다.
저 포이르 백작과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계속.
“……그럼 정 위험하다 싶으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이건 결코 양보 못 합니다.”
나와 한참 눈싸움을 벌이던 레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말이…… 많구, 나……!”
자기들을 두고 한눈을 판 게 심기를 건드렸을까.
망자의 군단이 살기를 쏘아 댔다.
나는 선두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그 어떤 놈들보다 훨씬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데스나이트.
놈이 바로 포이르 백작이었다.
투두두두-
사백의 말발굽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주변에는 언데드의 괴성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성가대의 노랫말이 그 소음을 덮어 주었다.
다가오는 적군을 보며 싸울 준비를 할 때였다.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휴거와 눈이 마주쳤다.
“왜?”
“췩, 아니…….”
빨간 돼지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역시 전투를 즐기는구나 싶어서 말이오.”
“그런 거 아냐.”
내가 미쳤다고 무가의 수장이랑 싸우는 걸 반기겠나.
그저 필요에 의한 일일 뿐이었다.
고오오-
적군의 사납고 음울한 마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그에 맞춰 기세를 일으켰다.
손에 쥔 애검에 별 한 자루를 덧씌웠다.
왕관 덕에 차갑게 식은 머리가 앞으로의 싸움을 그려 댔다.
“가자.”
이윽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레오를 비롯한 최상급 기사들이 검을 낮게 흩뿌렸다.
서걱-!
쏘아지는 수십의 참격.
그 어떤 명마보다도 잘 뛰던 유령마들이 다리를 잃고 자빠졌다.
이걸로 귀찮은 기마전은 끝.
제1기사단이 호전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저 뒤편에선 성가대의 응원이 그들을 밀어주었다.
[악몽 꾸는 이를 구원하사]
[어두운 세상 울던 백성 단잠 드네]
노랫말에 깃든 힘과 공명하듯, 별이 키르르 떨었다.
어서 저 악몽에 빠진 기사들을 구원하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론.”
“예. 가시지요.”
팟-
땅을 박찼다.
우리의 살기를 느꼈는지 포이르 백작이 이쪽을 보았다.
“네놈들, 은…… 내 상, 대가…… 못 된, 다……!”
콰앙-!
새하얀 별과 마기를 휘감은 검이 맞부딪쳤다.
한 번 맞대었을 뿐인데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과연 1차 요새를 지키던 무가의 수장.
교차한 검 너머로 죽은 눈을 한 백작을 바라보았다.
콰드득-
힘겨루기에 패한 내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자리에 아론이 파고들어가 창을 찔러 넣었다.
“우, 습구나…….”
백작은 가볍게 검을 털어 아론의 창을 쳐 냈다.
무엇이든 꿰뚫다는 보라색 오러의 일부가 흩어져 비산했다.
쉬익!
자세가 흔들린 아론의 목으로 검이 독살스럽게 기어올랐다.
그것을 내가 다시 달려들어 막아 냈다.
몇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다.
포이르가의 비전 검술은 뱀처럼 이리저리 휘었다.
피했다 싶으면 궤도가 꺾여 급소를 노렸고, 막았다 싶으면 곧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나와 아론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 갔다.
반대로 백작은 처음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살기가 흉흉하던 안광이 사라진 것만 빼고.
“시시하, 군…….”
으득, 이를 악물었다.
놈의 주의가 다른 기사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그 작태에 천불이 솟았다.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몸에 신앙을 둘러 신체를 강화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별 위에 신앙으로 엮은 홀리 오러를 휘감았다.
키이잉-
별이 고음을 질러 댔다.
심장이 쥐어짜는 것 같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신앙을 두른 몸.
신앙으로 짜인 별.
신앙으로 엮인 오러.
육체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한테는 아직 무리인 기예였다.
“도련님. 저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아론이 창을 꽉 그러쥐었다.
보라색의 오러가 창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러 자체가 뿜어내는 포악함이 더욱 거세졌다.
“더, 럽고…… 거슬리, 는…… 기, 운들이, 로다…….”
백작이 자세를 바로 했다.
다른 곳을 넘보던 시선이 다시 우리를 향했다.
그래, 그래야지.
콰아앙-!
시작은 아론이었다.
마기를 둘러싼 검과 창끝이 충돌했다.
“……!”
아론의 창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기를 야금야금 흐트러뜨렸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빛을 줄기줄기 뿌리는 별이 호선을 그렸다.
꽈앙!
어느새 창을 흘려보낸 백작의 검이 별과 마주했다. 신앙과 마기가 맞닿아 거센 충격파가 일었다.
콰앙, 콰앙-!
한 번 부딪칠 때마다 땅이 울고 대기가 떨었다.
팔다리에 깊은 자상이 늘었고, 진득한 마기에 속이 진창 뒤집혔다.
악다문 잇새로 피가 흘러내렸다. 아론의 한쪽 팔은 진작 부러진 채였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폴랜드 헬가와는 비교도 못 할, 진짜배기 수장.
‘쯧.’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자꾸만 속닥거렸다.
지금 네가 저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라고.
얼른 레오에게 맡기고 빠지라고.
알량한 자존심은 작작 부리고 몸을 사리라고.
그건 내 이성이었다.
마침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외에도 제가 맡은 상대들을 처리한 제1기사단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껏 우려를 담은 시선으로.
그들은 내 이성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좆까.”
얼음 왕관을 벗어 던졌다.
헛소리나 해 대는 이성 따윈 필요 없었다.
“난 쓰잘머리 없는 자존심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야.”
검성의 성흔.
이건 내가 이어받은 숙명과도 같은 것.
알면서도 목숨을 내걸 수밖에 없는, 끝없는 시련의 길이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저편에서 떠올랐다.
57화. Episode. 20 기원 (1)
모두가 소년을 미친놈이라 불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소년은 죽음을 찾아다녔으니까.
대륙을 떠돌며 수없이 마물과 싸웠고, 잘난 무가에 찾아가 기사들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미천한 출신에, 제대로 된 검술 한 자락 배운 적 없는 소년은 미치광이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미친 것은 아니었다.
“죽으면 나는 그게 끝인 놈이란 것이고.”
“살아남으면 성장한 것이리라.”
그저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약자와의 싸움은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저보다 턱없이 높은 수준의 상대에게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처음은 고블린.
그다음은 오크.
또 그다음엔 무가의 기사.
소년은 고블린에게 세 번이나 죽을 뻔했으며, 오크 하나를 쓰러트리는 데 죽음의 문턱을 수십 번이나 밟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죽지는 않았다.
마치 소년의 삶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듯, 어떻게든 이어져 갔다.
그렇게 수백 번을 싸우고, 생사를 수백 번 넘나들었을 때.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상대가 생겼을 때.
어느새 청년이 된 그의 손엔 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흉악한 오크 대족장을 홀로 막아섰을 때는 두 자루가.
강대한 마법사의 군대가 펼치는 마법을 갈라냈을 당시엔 세 자루가.
하늘이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별을 내려 주었다.
반대로 소년은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위기에 몸을 내던지고 별을 얻어 냈다.
그의 별이 여덟 자루가 되었을 땐 비로소 최강의 격에 올라섰다.
“너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경지다.”
“대체 어찌 여기까지 올라왔는가.”
오래전 그에게 참패를 안겨 주었던 천재가 물었다.
천재 앞에는 청년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지긋지긋한 재능.”
“토악질이 나오는 출신.”
“그따위 것들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 초월을 위한 검술을 만들었다.”
청년이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한계에 달해 부들거리는 몸을 붙들고 다시 일어섰다.
“보아라.”
“이렇게 또 한 번 한계를 뛰어넘지 않았는가.”
두 발로 일어선 그의 곁엔 아홉 번째 별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
천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에도 희미할 정도로 보잘것없던 자였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강해져서 다시 자신을 찾아왔다.
천재의 메말랐던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
어찌 기껍지 않으랴.
고독했던 정점에 또 다른 이가 올라와 준다는 것이.
“너를 검성이라 부르마.”
“하늘 아래 오직 나, 검황만이 너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두 최강자가 맞부딪쳤다.
◈ ◈ ◈
검황은 바텐베르크의 초대 가주다.
그리고 검성은 그의 유일한 호적수였다.
끝끝내 열두 자루의 별을 다루게 되어, 정점을 넘어 초월에 이르른 두 번째 초월자.
“발락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어.”
리하르트가 욱신거리는 성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몰아쉬는 숨에 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별의 힘을 끌어내는 데에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야.”
물론 초대 검성의 재능도 절대 얕지 않았다.
하나 그래 봤자 최상급 기사 정도의 재능이었다.
애초에 시험의 각인도 ‘자질’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진짜 필요한 건, 압도적인 상대에게 목숨을 내걸고 달려드는 성정.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승리하리라 굳게 믿는 신념.
초대 검성의 의지를 품은 성흔은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계승자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한계에 끝없이 맞서기를 종용했다.
원래 이런 무모한 도전은 리하르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발락에게 각인을 부여받았다.
죽음을 가까이할수록 강해질 수 있으니까.
“포기, 해라…… 네, 놈들, 은…… 날…… 이, 길 수…… 없다…….”
“결국은 내가 다 이겨.”
포이르 백작의 음성에 리하르트가 나직이 답했다.
모니터 너머로 지켜봤던 초대 검성의 입버릇이었다.
우습게도 그 말에 반응하듯, 성흔이 우웅 떨었다.
“아론.”
“예, 도련님.”
“아직 할 만하냐?”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이 짐짓 괜찮은 척하며 허세를 부렸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리하르트는 다시금 별을 치켜들었다.
그의 뺨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왕관을 벗어 던진 리하르트는 더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억눌렀던 두려움이 고개를 치켜들고, 눈앞의 괴물이 뿜어내는 살기에 몸이 굳어 버렸다.
꽈앙-!
순식간에 짓쳐 든 백작의 검이 별을 두드렸다.
아론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틈을 만들어 준 덕에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결국은 내가 다 이겨……!”
강렬한 일격에 주르륵 밀려난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초대 검성이 된 것처럼, 더 이상 죽음이란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이기리라고 세뇌하듯 되뇌었다.“흡!”
땅을 박차고 달려든 리하르트의 별이 백작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포이르 백작은 자세를 낮춰 피하곤 검을 가로로 한 번 그었다.
푸확-!
그 가벼운 휘두름의 여파는 적지 않았다.
검 끝을 벗어난 참격이 뒤로 물러난 아론과 리하르트의 몸을 갈랐다.
“이, 이런!”
싸움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나설 수 없었다.
막내 도련님과 그 직속 기사의 눈에서 타오르는 전의가 여전했으니.
이를 으득 악문 둘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별과 창이 매섭게 백작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 찮다……!”
좌우로 나뉘어 가해지는 공격에 백작의 검이 움직였다.
카가가강-!
찰나의 순간, 별과 창, 검이 수차례나 충돌했다.
무구와 무구가 만나 피어나는 불똥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일반인의 눈으론 쫓을 수도 없는 공격과 수비의 연속.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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