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6
진정 내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땐 언제고?”
“아앗! 그러고 보니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맞습니다.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어서 엉덩이를 대십시오.”
◈ ◈ ◈
주둔지에서의 일을 떠올리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쁜 놈들. 제 도련님을 정말 걷어차려 들 줄이야.
그래도 그들 덕에 마음을 확실히 다잡을 수 있었다.
한심한 죽음을 맞이했던 망나니 ‘리하르트’는 없다.
이젠 날 따르는 기사들도 여럿 생겼고, 그들을 곧 신도로 맞이할 것이다.
내가 ‘리하르트’가 된 이상, 내 존재 자체가 변수다.
“강해져야 해.”
마차 한쪽에 놓인 커다란 상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 안에 드래곤 하트가 있다.
용의 심장을 섭취하기 위해선 수차례의 가공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효력은 대폭 떨어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의 육신이 버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가진 드래곤 하트는 광룡의 것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세계수의 열매랑 같이 먹는다면…….”
품속에서 나뭇잎에 둘러싸인 열매 부스러기를 꺼냈다.
아델, 이 기특한 것.
처음에 이걸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잠시 손에 쥔 열매와 드래곤 하트를 번갈아 보았다.
‘가능하다.’
심장을 그대로 섭취하는 게.
아델은 이를 위해 열매를 남겨 놓은 것이었다.
“아론.”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곤 아론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생수 한 통만 가져다 줘. 큼지막한 걸로.”
그가 곧 생수를 가져왔다.
『해당 물체에 10,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성수를 제작했습니다.』
나는 아델의 밥을 대략 10일분 정도 만들었다.
“아델을 기드가 있는 마차로 옮기고, 이 물을 하루에 10분지 1만큼씩 먹여.”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내 마차에 들어오지 마, 절대로.”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짐짓 불안한 표정을 짓는 아론에게 그저 웃어 보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 날 뜯어말릴 게 분명했으니.
단호한 내 뜻을 알아챈 걸까.
아론은 굳은 얼굴로 지시에 따랐다.
“신앙이 텅텅 비었군.”
마차에 홀로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남은 신앙은 고작 4천.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 하트를 소화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동안 아델의 밥도 챙겨 줘야 하니까.
“자, 그럼…….”
그 잘난 심장을 먹어 봐야지.
콰직!
열매 부스러기와 함께 커다란 심장을 가득 베어 물었다.
비린내가 코끝과 입안을 괴롭혔지만, 꾹 참아 냈다.
한 입, 두 입.
몇 번을 씹어 댔을까, 전투를 치르는 심정으로 모두 먹어치웠다.
그리고.
“윽!”
강대한 마나가 배 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특기 ? 초집중 발동.』
이대로 있다간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마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을 거듭했다.
42화. Episode. 15 환골탈태 (2)
어디선가 광룡의 포효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용의 마나는 제 주인을 닮아 광기를 양껏 품고 있었고, 리하르트의 몸속을 난폭하게 유린했다.
우득.
온몸의 뼈가 뒤틀린다.
근육이 찢어지고 아물기를 반복했다.
이따금씩은 쾅, 하고 몸속에서 벼락이 쳤다.
‘당황하지 말자.’
이깟 고난쯤이야.
기세 좋게 심장을 씹었을 때부터 예상하지 않았던가.
더불어 열매의 힘이 광기를 중화시키고 있으니 버틸 만했다.
다만, 정말 버티기만 해선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마나 제어에 실패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이를 악문 리하르트는 신앙을 운용했다.
몸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마나를 신앙으로 엷게 감싸 안았다.
그러곤 이 포악하고 거대한 기운을 아주 천천히, 전신에 고루 순환시켰다.
콰아아아-
마나 루트는 수로가 되었고, 방대한 마나는 그곳을 내달리는 물이 되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순환이 거듭될 때마다 마나가 조금씩 마나 하트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우…….”
리하르트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 새까만 연기가 섞여 나왔다.
신앙과 열매 부스러기로도 미처 중화시키지 못한 마지막 광기였다.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강대한 마나가 심장에 자리 잡습니다.』
『강골(强骨)이 성골(聖骨)로 변화합니다.』
리하르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 사이로 새하얀 광망이 일었다.
◈ ◈ ◈
나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힘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팔다리가 이렇게 길었나?”
쭉 뻗은 팔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매끈한 피부에 갑옷 같은 근육이 들어찬 게 보였다.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니, 정말 쇳덩어리를 치는 것 같았다.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환골탈태까지 할 줄이야.
꽉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 신앙을 운용한 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뿐인가, 마나 하트에 자리 잡은 신성력은 태산같이 불어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오러는 물론이고, 검성을 다루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성골은…….”
뼈가 변했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나도 처음 접해 보는 체질이었다.
게임 속 신으로만 활동해서 그런가?
약골에서 강골로 변화했던 것처럼 근골(武骨)의 단계 중 하나일 거라 짐작된다.
어쩌면 뼈 자체에 신앙이 깃든 것일 수도 있고.
“그나저나 9일이나 지났구나.”
시야 한편에서 반짝이는 기도 알림이 아홉 번이나 떠 있었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자, 제3기사단은 야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끼익-
나는 조심스레 마차 문을 열고 나섰다.
“도련님!”
곧바로 귀 밝은 아론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이런.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리, 리하르트 도련님?”
냅다 달려온 아론이 하려던 잔소리를 멈추고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두 손으로 눈을 힘껏 비볐다.
“……등, 등불!”
날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 하나가 외쳤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입을 열었다.
“오오! 등불이다!”
등불?
지금 나는 신성력이나 신앙을 운용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야! 진짜 인간 등불이네?”
내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어둠을 밝혔다.
기사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후광을 둘렀을 때와 똑같았다.
이게 성골(聖骨)의 효과인가?
“……드래곤 하트는 어디 갔습니까?”
어느새 내 마차에 들어갔었는지, 아론이 드래곤 하트를 보관했던 빈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잘생긴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 설마가 맞아.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환골탈태도 해 버렸지 뭐야.”
아닌 게 아니라, 키가 정말 훌쩍 컸다.
장신인 아론과 비교해도 얼추 눈높이가 맞을 정도였다.
“피부도 엄청 좋아진 것 같은…….”
“무모함에도 정도가 있어야지요! 어떻게 용의 심장을 날것으로 드실 생각을 하십니까!”
아론이 빽 내 말을 끊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아론의 잔소리를 피해 모닥불에 빙 둘러앉은 기사들 사이로 달아났다.
“지, 진짜 환골탈태를 하셨습니까?”
“그래.”
“허어……!”
기사들이 숨을 들이키며 내 전신을 훑더니, 이내 경악을 토해 냈다.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소화하시다니!”
“앳된 태를 한 번에 벗어던지셨군요. 이젠 늠름한 성인처럼 보이십니다.”
“그야말로 기백 자체가 달라지셨습니다!”
그들이 활짝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나도 마음이 넉넉해져 설핏 웃음이 나왔다.
“하아…… 잘못되기라도 하면 대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인마, 너는 어떻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뒤따라와서 잔소리를 해 대는 아론이 산통을 깼다. 그를 흘긋 째려보곤 노릇노릇 잘 구워진 짐승의 뒷다리 하나를 집었다.
며칠 내내 굶었기 때문에 허기가 상당했다.
허겁지겁 고기의 살점을 한입 물어뜯었을 때였다.
휴거가 퍽 충격받은 얼굴을 하곤 물어 왔다.
“취익! 저 마차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소? 뭐 이렇게 저 혼자 길쭉길쭉해졌소?”
“넌 왜 당연하단 듯 따라와서 헛소리를 하냐.”
저 돼지는 환골탈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기색이었다.
“뼈를 바꾸고, 태를 벗는다. 신체를 훨씬 더 강하고 단단하게 재구성하는 거야.”
“허, 그런 재주가 있었단 말이오! 역시 대단한 인간 전사는 대단하구려!”
“그보다 넌 어떻게 할 셈이야? 아직 확답을 못 들었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귀환길에 같이 올라탄 휴거.
놈은 아직 내 동료가 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대답을 들어야지.
물론, 그가 무어라 할지는 뻔할 뻔 자였다.
“거,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당연히 동료가 되겠단 거 아니오?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인 줄 알았거늘, 췩!”
“얼마나 봤다고 눈빛 타령이야? 뭐, 앞으로 잘 부탁해.”
“잘 부탁하오!”
퍽!
건배 대신이라고 할까.
서로 들고 있던 짐승 뒷다리와 앞다리를 부딪쳤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설 땐 로브라도 뒤집어쓰고 있어라.”
아무래도 휴거는 오크다 보니 환대받을 순 없을 터.
나와 폴크가 가주에게 잘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디쯤이야?”
나는 배불리 식사를 마친 후,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받았다.
최단거리로 쉬지 않고 달린 마차는 어느새 바텐베르크가 코앞이라고 한다.
내일 중으로 도착하지 않을까 예상되었다.
“아델과 기드 경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론의 말에 흘긋 마차를 바라보았다.
“곧 일어나겠지.”
그저 아무런 탈 없이 푹 쉬다가 깨어나기를 바랐다.
◈ ◈ ◈
루드비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콰직-
그가 짚고 있던 집무실의 창틀이 우그러졌다.
“쯧.”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제1기사단을 비롯한 바렌 왕국의 무가(武家)연합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리치도 그렇고, 저 하늘을 찢고 나타났던 괴물도 그렇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둠이 맥동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루드비히의 심기를 불편케 만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아래를 향했다.
바텐가의 정원에선 가신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낯빛은 결코 좋지 못했다.
‘저 기운이 심신을 갉아먹고 있군.’
이상 사태 이후 가신들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밤마다 비명이 울려 퍼졌고, 개중에는 거품을 무는 이까지 나타났다.
가신에 비하면 기사들은 양호한 편이었지만, 그들 또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임은 매한가지였다.
겁먹은 무인만큼 초라한 것이 어디 있던가.
우중충한 분위기의 집안을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미간을 찌푸렸다.
똑똑-
기사 하나가 집무실을 찾아왔다.
“리하르트 도련님이 제3기사단과 함께 복귀 중이십니다!”
“……어떻게 살아 있긴 한가 보군.”
이 시국에 대륙을 싸돌아다닌 게 바로 리하르트였다.
그것도 마경, 용 토벌 등 위험한 곳만 골라서 말이다.
어디선가 객사하지나 않았을까 했더니 살아서 돌아오고 있단다.
루드비히는 집무실을 나섰다.
물론 제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친히 발걸음을 옮기는 건 아니었다.
큰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기사들을 가주가 나서서 환대해 주는 것이 바텐베르크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하나 루드비히는 자신의 걸음이 유난히 다급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보고에 따르면 제3기사단이 드래곤 토벌에 성공했답니다.”
“그런가.”
그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하필이면 토벌 예정일에 악재가 발생했기에 우려가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투 중에 혼란에 빠지는 건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으니까.
‘기드는…… 전사했을 터.’
리하르트가 무슨 짓을 해도 담금질의 리스크는 피할 도리가 없다.
기드 마이어라는 충직한 기사를 떠올린 루드비히의 입맛이 썼다.
“충!”
그가 정문에 도착하자, 도열한 채로 서 있던 수많은 기사가 예를 취했다.
절도 있지만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한 모습.
좌중을 한차례 훑어본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승전고를 울린 동료들을 그딴 표정으로 맞이할 셈이더냐.”
나직하지만 강렬한 기세를 품은 말이 정문을 뒤흔들었다.
언제부터 바텐베르크의 기상이 이리 약해졌단 말인가.
고작 심마를 벗지 못하는 이들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억지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부터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제3기사단이었다.
태양을 등지고 다가오는 그들은 위풍당당했다.
그 모습은 흡사 개선장군과도 같았고, 기사 하나하나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
가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한층 더 성숙해진 기량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제3기사단,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수고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제3기사단장과 가주 간에 담백한 인사가 오갈 때였다.
마차의 문이 끼익- 열리며 리하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 순간. 정문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은 눈을 의심했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소년이었던 도련님이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결코 범상치 않았고, 몸 주변엔 은은한 빛무리가 맴돌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리하르트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올수록 기사들은 심신을 짓누르던 공포가 걷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빛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가주를 뵙습니다.”
루드비히의 앞에 선 리하르트가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바라보는 루드비히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43화. Episode. 15 환골탈태 (3)
“하.”
루드비히는 헛웃음과 함께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막내아들이 변해도 너무 변해 있었다.
외적으로나 느껴지는 기백으로나,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이런 변화를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기연은 단 하나.
“설마, 환골탈태를 한 게냐.”
“예. 드래곤 하트 덕에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가주의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드래곤 하트를 날것으로 먹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그리했습니다.”
리하르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가주는 리하르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3기사단의 노고를 다시 한번 치하했다.
제3기사단은 가주의 격려에 한껏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3기사단장은 피해를 보고하라.”
명을 받은 폴크가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 5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그 외의 별다른 피해는 없습니다.”
“전사자는 얼마나 되느냐.”
가주는 기드를 비롯한 전사자들의 장례식을 치를 셈이었다.
바텐베르크의 검이 되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그런데 갑자기 폴크가 고개를 저었다.
“전사자는 없습니다.”
“……뭐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곤 해도 용을 상대하는 데 사망자가 없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기드는 담금질에 들어서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게 리하르트 도련님 덕분입니다.”
리하르트가 기드를 살렸단다.
또 그가 미쳐 버린 용으로부터 기사단을 구해 냈으며, 온갖 활약을 해냈다고.
폴크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 ◈ ◈
바텐가에 복귀하고 3일.
나는 일약 대스타가 되어 버렸다.
그래.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 말이 가장 어울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리하르트 도련님!”
“그래. 수고가 많아.”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기사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다 들킨 모양새나 다름없었다.
징그러운 사내놈한테 이런 관심을 받는 건 좀 그런데.
이게 다 폴크가 모두 앞에서 내 얼굴에 금칠을 해 댄 탓이다.
제 집사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한달음에 달려가 구해 낸 도련님.
기사들이 마왕의 마기 앞에 몸을 떨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용맹을 떨친 진정한 바텐베르크의 핏줄.
미쳐 버린 용의 머리통에 검을 꽂은 용살자요, 그 심장을 생으로 먹고 완벽히 소화한 천재.
더불어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
내 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그러했다.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은 내가 몇 달 전만 해도 망나니였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영 부담스러울 때였다.
“리하르트!”
“모리츠?”
휴거를 살짝 닮은 내 형제, 모리츠 바텐베르크가 앞을 막아섰다.
“왜 불렀어? 가주님의 호출을 받은 참인데, 용건만 말해.”
녀석과의 사이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저번의 대련에서 아주 혼쭐을 내 준 이후론 나를 피하기 급급했던 모리츠였다.
“그게…… 있잖아.”
그런 놈이 지금 내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이건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풋풋한 소년 같은 모습이 아닌가.
“미친.”
“가, 갑자기 왜?”
기사들의 시선은 참을 수 있어도 놈의 이런 태도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바쁘니까, 간다.”
“자, 잠깐……!”
신종 괴롭힘이라면 그 잔악함에 박수가 나올 지경이다.
나는 놈이 붙잡을세라 냅다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제3기사단이 지내는 숙소였다.
“오,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잭, 휴거 좀 불러 줘.”
바텐가에 복귀한 당일 마주친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던 루드비히.
그가 조금 전 나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또 언제 볼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휴거를 인사시킬 생각이었다.
“취익! 드디어 이 로브를 벗어도 된단 말이오?”
숙소에 반강제로 감금되어 있던 휴거가 신이 나 외쳤다.
하기야 오크에겐 로브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닐 테지.
“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알았소. 저번에 보니 까딱 잘못하면 썰리겠더군! 췩!”
오크 특유의 감이라고 할까.
상대의 경지를 파악하는 데 능한 휴거는 루드비히가 위험한 남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대기해.”
나는 가주의 집무실 앞에 휴거를 세워 놓고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거라.”
나직이 들려오는 음성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주를 뵙습니다.”
대체 무슨 서류가 그리도 많은지, 산을 쌓아 놓은 가주의 책상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서류를 치우고 펜에 마개를 꽂은 가주가 물었다.
“기드는 어떻지?”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했습니다.”
“그렇군.”
툭, 툭-
가주가 책상을 두드렸다.
“담금질은 육체를 붕괴시킨다. 본래의 격을 억지로 넘어서면 그 끝은 결국 파멸이지.”
“알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담금질의 후유증을 막은 게냐. 마경에서 무얼 발견했지?”
가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후유증을 막는 방법이었다.
담금질을 아무런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지나치게 사기적이니까.
그렇게 되면 마법가는 무가에게 쪽도 못 쓸 터다.
“…….”
나는 그의 물음에도 침묵을 지켰다.
굳이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세계수의 열매는 일 년에 하나 맺을 수 있었고, 그건 나의 밑천이다.
눈앞의 속 모를 남자에게 그것을 털어놓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드래곤 하트도 비슷한 방법으로 섭취했을 터.”
과연.
예리한 통찰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쯧, 비밀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마. 저 하늘이 깨졌을 때, 너는 무엇을 느꼈느냐.”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느꼈냐니.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나는 루드비히의 심중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곧, 바텐가에 도착했을 때 본 기사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여타 사람들과 다름없이 심마에 빠진 얼굴이었고, 그건 모리츠 바텐베르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상컨대 가주는 겁먹은 기사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역겹고 불쾌했습니다. 균열 사이로 드러난 괴물의 눈알을 찔러 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호오. 마기가 두렵진 않았느냐.”
“그 자리에서 두려움에 떨기만 했다면, 저희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놈이 겉만 번드르르해져 온 것인지, 아니면 싹수부터 남달랐던 게 드디어 개화한 것인지.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인지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작 마기에 겁을 먹었다면 각인을 개방시키지 못했을 터.”
“맞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무인은 시련 앞에 성장하는 법이지.”
그의 입가에 흡족함이 걸렸다.
몹시 놀라웠다. 이 인간이 저런 웃음도 지을 줄 알다니.
“너는 모르겠지만 발락의 검술은 실로 대단하다. 내게 견줄 자는 오직 그뿐이었지. 더욱 열심히 정진하거라.”
한층 너그러워진 음성이 나를 향했다.
기특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귓가로 들린 기분이었다.
“이만 가 보거라.”
가주가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내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주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서류를 흘긋 보았다.
『언데드 군단, 스무 번째 전투 보고서』
제1기사단과 여러 무가들이 한창 씨름하고 있을 전장.
내가 가장 빨리 클 수 있으며, 가장 필요한 곳.
“제3기사단과 함께 전장에 참여하겠습니다.”
그곳에 내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어떤 전장인지 알고는 있느냐.”
“대륙에 암운을 몰고 온 리치들과의 전장입니다.”
“……이상 사태 후, 놈들의 마기가 더욱 치솟았다. 제1기사단과 무가 연합 또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지.”
그렇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1기사단이 놈들의 근거지를 발견했고, 생각보다 심각한 규모에 무가 연합이 급히 결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이루어진 대치 상태.
마왕의 마기가 진하게 흩뿌려진 지금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을 터.
호기를 담아 말했다.
“제가 가서 전쟁을 끝내겠습니다.”
“…….”
루드비히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 ◈
나는 집무실을 나섰다.
그 뒤에는 휴거가 꼭 붙어 있었다.
“으으, 저 귀신 같은 양반! 내가 오크란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소. 취익!”
“허가받았으니 됐잖아.”
이야기를 끝내고 난 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휴거를 가주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가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단다.
오크에겐 특유의 기세가 있다나.
처음부터 문제 삼지 않았던 건 그 나름대로의 허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피 튀기는 전장에 갈 생각을 하니 흥분되지 않소?”
“너만 그래.”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장에 참여하는 것 또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제3기사단과 아무런 협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췩! 대단한 인간 전사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간다 했으니, 무어 문제가 되겠소?”
맞는 말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내뺀다고 하면 그것대로 실망이다. 나는 휴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제3기사단 숙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론이 태평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아론? 네가 왜 여기 있어?”
“단련을 마치고 쉬고 있던 참입니다.”
본래 소속이 제3기사단이었다더니, 아론은 이곳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 다들 모여 봐!”
내 외침에 기사들이 빠릿빠릿하게 모여들었다.
“제3기사단, 소집 완료하였습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다가 왔는지 입가에 침이 묻은 놈도 있었고, 수련을 하다 와서 땀범벅이 된 기사도 있었다.
저마다 행색은 달랐지만 날 향한 눈빛은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식들. 눈에서 꿀 떨어지겠네.
“아마 진작 얘기를 들었을 거야. 언데드 군단에 대해서.”
내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용이랑 드잡이질하는 사이 큰일이 있었다더군요.”
“리치 놈들이 그렇게 말썽이라던데.”
짝-!
난 손뼉을 쳐 웅성거리는 입들을 막았다.
“가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았다. 출전은 20일 뒤, 서둘러 준비해야 할 거다.”
“…….”
왜일까.
장내의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눈치 없는 휴거만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우우!”
기사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야유까지 해 댔다.
“이것들이! 기사가 돼서 전장이 그렇게 싫냐!”
기사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 그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전장이 싫은 건 아닙니다!”
“동료한테 전장에 대해 듣자마자, 도련님이 나서실 거란 것은 예상했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요.”
“그야 도련님은 등불이시니까!”
그럼 반응들이 왜 이런 거야.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아론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저, 도련님? 기사들이 기대한 건 연회입니다.”
“뭐?”
“제가 연회에 관한 이야기를 슬쩍 흘리는 바람에…… 아무래도 기사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입에서 연회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애먼 출전 명령이 나와서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드래곤 고기도 못 먹고!”
“연회도 못하고!”
“아이고, 부질없다!”
기사들이 땅에 드러누울 기세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 광경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래도 출전 준비에 밀려 연회가 취소되었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멍청이들아, 내일 연회 열 거니까 징징대지 마.”
“엇……?”
“정말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정도 당근도 없이 부려 먹으려고 했을까.
44화. Episode. 16 모리츠라는 혹이 붙었다 (1)
모리츠 바텐베르크에게 지금껏 겪은 수모 중에 최악을 고르라 하면, 단연코 리하르트에게 패배했던 그 날을 떠올릴 것이다.
자신이 불러 모은 기사들 앞에서 비겁한 수까지 쓰고도 패배해 버린 그 대련!
그날 이후 모리츠는 심마 아닌 심마에 빠지고야 말았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분하고 또 분했다.
저를 따라다니는 기사들의 시선이 마치 패배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리하르트가 가주의 오른팔, 레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하니,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으아아악!”
그래서 모리츠는 가슴에 독을 품었다.
수련 중독자처럼 눈 뜨면 검을 쥐었고, 밤에는 검술 서적을 탐독했다.
설욕!
그는 모두의 앞에서 보란 듯이 설욕해 자신의 입지를 되찾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독기를 품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깨졌다.
-우우…….
깨진 하늘 사이로 빨갛고 커다란 눈이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 끔찍한 시선이 대륙 이곳저곳을 탐할 때, 모리츠는 아주 일순간이지만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불행이었다.
“으, 으그윽……!”
무저갱을 마주하면 이러할까.
그는 포식자의 아가리에 들이밀어진 것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꺄아아악!”
하인과 하녀들은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고, 기사들 또한 몸을 벌벌 떨어 댔다.
하늘에 뚫린 구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메꿔졌다.
하지만 그 사이로 흘러 들어온 마기는 너무나 짙었으며, 빌어먹게 끔찍했다.
대륙에 흩뿌려진 마기.
그것은 자꾸만 그때의 눈알을 떠올리게 했다.
모리츠는 그럴 때마다 손발이 차게 식고 몸이 떨렸다.
이윽고 그의 심마는 더욱 악화되었다.
가슴속에 품었던 독기는 방향을 바꿔, 심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모리츠는 혈통에 어울리는 정신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제대로 검을 쥐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리하르트가 제3기사단과 함께 복귀했다.
“하……!”
기사들 틈바구니에 서서, 모리츠는 리하르트를 두 눈에 한가득 담았다.
몇 달 새에 잔뜩 달라져 버린 동생은, 이미 모리츠가 넘보지 못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굉장히 분했다.
나는 이리 한심하게 나자빠져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빛나는 거냐-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놈을 미워하고 싶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질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랑 같이 수련할래……? 아니, 이건 아니야. 으으!”
그날 이후 모리츠는 방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리하르트를 향한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자기도 몰랐다.
그냥 정신이 맑아졌다고 해야 할까.
제 동생이 뿜어내던 빛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모리츠?”
그러다 곧 기회가 왔다.
리하르트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왜 불렀어? 가주님의 호출을 받은 참인데, 용건만 말해.”
“그게…… 있잖아.”
방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같이 수련하자고.
그동안 괴롭혔던 것을 사과할 테니 용서해 달라고.
그 몇 마디 말이 곧 죽어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자존심은 진작 바스러졌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마기에 벌벌 떠는 지금의 자신이 못 견디게 한심했고, 몹시도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밝게 빛나는 리하르트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미친.”
“가, 갑자기 왜?”
“바쁘니까, 간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바람을 맞고 말았다.
“자, 잠깐!”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 리하르트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매정한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모리츠는 이를 갈았다.
그래. 역시 사과 따윈 필요 없다.
“저 자식이 용서해 줄 리도 없고! 나도 딱히 사이가 좋아지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냥, 저놈의 빛이 필요한 거다.
이 빌어먹을 심마를 벗을 때까지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으면 되는 거다.
“가주님의 호출을 받았다 했지? 내가 어디든 따라가 주마!”
리하르트의 뒤를 쫓는 모리츠의 눈에 오기가 깃들었다.
물론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진 않지만, 자신이 가장 크게 타고난 재능은 검이 아닌 은신술이었으니까.
◈ ◈ ◈
“와아! 마셔, 마셔!”
“취익! 부어, 부어!”
연회가 열렸다.
미리 가주에게 사용 허가를 구해 놓은 연회장에서 제3기사단이 술과 고기를 뜯어 댔다.
“좀 더 이 시간을 고상하게 즐길 순 없는 거야?”
“무슨 소리를! 즐길 때는 확실히 즐겨야 하지 않겠소! 취이익!”
“오크가 뭘 좀 아는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술이 거하게 들어간 놈들이라 당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마침 오늘 굉장히 기쁜 일이 있지 않았소?”
“그렇지, 그렇지! 건배를 들자!”
급기야 저들끼리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치켜들었다.
“깨어난 아델을! 위하여!”
“와아아!”
쨍-!
고급진 술잔들이 서로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머슴들이 이렇게 반겨 주니 나 또한 기분이 좋구나.”
기사들 사이엔 아델이 껴 있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녀가 나를 끌어안은 채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아델! 이리 와!”
“아빠아!”
나는 아델을 내 옆자리에 앉혔다.
저 주정뱅이들과 함께 두기엔 영 불안했다.
“몸 상태는 좀 어때?”
“푹 자고 일어났더니 너무 개운해!”
“또 일부러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니고?”
“진짜로!”
흘긋 표정을 보니 진짜 개운하다는 얼굴이었다.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워낙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무리를 하는 녀석이라 신경이 쓰였다.
“앞으로는 힘에 부치면 바로바로 말해. 자꾸 무리하면 곤란하다니까.”
“으응…….”
아델이 살짝 풀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고마워. 기드를 살려 줘서.”
내 말에 그녀가 활짝 웃었다.
감정이 휙휙 변하는 게, 딱 겉보기로 보이는 것처럼 어린애 같았다.
실은 몇천 년 묵은 나무인데도 말이다.
“아델!”
그때 아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다가왔다.
“고맙다! 진짜로 고맙다! 우리 할부지를 살려 줘서어……!”
“일등 머슴아. 너는 대체 몇 번을 고맙다고 하는 게냐.”
아닌 게 아니라, 아론은 아델이 깨어났을 때부터 쭈욱 고맙단 말을 달고 살았다. 그 모습이 퍽 웃겼다.
“할부지이……!”
쿵!
“으, 으하하하! 이것 봐! 아론이 쓰러졌다!”
어쩐지 과하게 마신다 했더니만. 아론을 둘러싸고 웃어 대던 기사들이 그를 구석으로 치워 냈다.
“일등 머슴이가 웬일로 저렇게 풀어졌대?”
“내버려 둬. 긴장이 이제야 풀린 거니까.”
아론은 기드를 구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아무래도 심적 부담감이 굉장히 심했을 테지.
오히려 지금까지 덤덤한 척했던 게 놀라울 정도였다.
“아델. 남쪽 세계수에 대해 알려 줘.”
나는 기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보다가 아델에게 물었다.
“마르가르텐…… 혹시 너랑은 다른 개체인 거야?”
엘프의 숲은 두 군데.
그중 북쪽의 숲이 아델가르텐이었고, 남쪽이 마르가르텐이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수도 두 그루였고.
“아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린 원래 한 뿌리로 이어져 있었어. 내가 곧 아델가르텐이고 마르가르텐이었지.”
“지금은 다른 개체란 소리네.”
“으응. 아무래도 자아를 나누는 게 힘을 덜 소모하니까.”
쉽게 말해서 아델의 반쪽이 마르가르텐이라는 소리였다.
“우리는 쫄쫄 굶은 상태여서 서로 대화가 단절되는 지경에 이르렀어. 아빠를 만난 이후에 대화를 시도해 봤는데, 역시나 답이 없네.”
“내가 보았던 엘프의 숲이랑 다를 바가 없는 상태란 거군.”
아델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는 게, 마르가르텐에서 지내고 있을 엘프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내 양분을 전달해 보려고 해도, 내 뿌리가 마르가르텐까지 닿질 않아…….”
“이번 임무가 끝나면 어떻게든 해 보자.”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마법가가 즐비한 남대륙이란 게 위험 요소이긴 했지만, 어차피 호르교는 남대륙에서도 착실히 퍼져 나가야 한다.
더불어 남부 엘프들 역시 내 쪽으로 끌어들일 기회였고.
“응응!”
애써 밝게 답하는 아델을 보며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할 일이 참 많다.
‘북쪽 엘프들은 곧 깨어날 테고.’
아델에겐 미리 말해 놓았다.
앞으로 갈 전장에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들이 내 히든카드 중 하나였다.
‘스노우폴의 주민들에겐 기사들을 보냈으니까, 출정 전에 도착하겠지.’
내 신도와 신자들도 이젠 고생할 때가 되었다. 원래 선구자들이 피땀을 흘리는 법이다.
그렇게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휴거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취익! 술도 안 마시고 대체 뭘 하고 있소!”
“야, 저리 가서 놀아라.”
진한 술 냄새가 코를 찔러 댔다.
“으흐흐, 그러고 보니 대단한 인간 전사의 형제는 나랑 닮았더구려!”
“뭐?”
갑자기 그가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었다.
휴거랑 비슷하게 생겼다면……, 모리츠밖에 더 있던가.
“네가 모리츠를 만났다고? 어디서?”
휴거는 쭉 제3기사단 숙소에 박혀 있었다.
가주의 허가를 받았어도, 그가 나돌아 다니기엔 바텐베르크의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으니까.
“취익……, 동포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나는 휴거의 입에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물려 주었다.
“네가 먹고 있는 고기, 물처럼 들이부은 술. 값을 치를 수 있다면 입 다물던가.”
“꾸익! 말하겠소! 우리가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인간의 냄새 하나가 우릴 따라왔소. 냄새만 지웠다면 실로 완벽한 은신술이었지. 췩!”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리츠, 그 기분 나쁜 자식이 내 뒤를 쫓았다니?
놈이 은신의 재능을 타고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가 그 재능을 몹시 싫어해서 맞지도 않는 검술이나 탐하고 있을 터인데.
“왜 바로 말 안 했어?”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지. 그런데 대단한 인간 전사가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에도 계속 한자리에 머물고 있는 거요.”
그래서 몰래 돌아가 뒷덜미를 잡아챘단다.
“취익, 잡고 보니 얼마나 놀랬는지 알고 있소? 그는 오크가 분명하오! 날 똑 닮았어! 어쩌면 내 자식일지도 모르오!”
“헛소린 그만.”
“으음, 아무튼 그가 대단한 인간 전사와 형제라고 하더군. 취익! 그래서 함께 집무실 문 앞에서 대화를 엿들었다오.”
“…….”
이마를 짚었다.
이 돼지 자식이 아주 당당하게 쓸데없는 짓을 했노라 말하고 있었다.
“대체, 왜?”
“따, 딱히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소. 오히려 대단한 인간 전사를 동경하는 것처럼 보이더구려. 날 닮은 얼굴로 부탁을 하니 거절하기도 뭣하고…….”
내가 잠깐 착각하고 있었다. 휴거가 아무리 오크 같지 않아도 결국은 오크다.
명실상부한 돌대가리란 뜻이었다.
그리고 이 연회장엔 돌대가리가 두 덩이나 있다.
기감을 예민하게 돋우자, 여태껏 잡히지 않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와.”
“히익……!”
각자 술을 들이붓던 제3기사단의 시선이 연회장 구석으로 쏠렸다.
그곳에 모리츠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못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이건 죽여 달란 뜻이지?”
“리, 리하르트! 잠깐만!”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감히 미행을 해? 얼굴 붉힐 때부터 알아봤어. 드디어 남색에 눈을 뜬 거냐?”
“그런 게 아니야! 나, 나는 너랑 함께하고 싶어! 가주께 허가도 받았다고!”
“……이 미친놈이!”
더는 못 참겠다.
나는 몸을 날렸다.
45화. Episode. 16 모리츠라는 혹이 붙었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해였다.
모리츠가 날 짝사랑한다거나 하는 역겨운 상황 같은 게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미 신명 나게 두들겨 팬 이후에야 오해가 풀렸다는 것 정도일까.
“설명해. 왜 날 미행했는지, 왜 너까지 전장에 가겠다는 건지.”
“으윽…….”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던 모리츠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시선이 언제나 나를 향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빛…….”
“뭐?”
“너한테서 빛이 나. 그걸 보고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단 말이야.”
나는 슬쩍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놈의 말대로 내 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나고 있었다. 피부가 윤기 있다는 게 아니라, 성골(聖骨)의 효과로 육신이 신성을 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날 따라다녔다고?”
“흥! 그건 눈치채지 못한 네 잘못이지.”
“이것 봐라?”
나자빠진 채로 적반하장을 실천하는 놈에게 발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취익! 그, 그만하시오. 이쯤하면 되지 않았소!”
“넌 꺼져라. 이 배신자 녀석! 사나이끼리의 비밀이라더니!”
“동포여……!”
나를 말리던 휴거가 모리츠의 원망 어린 눈초리에 시무룩해져서 물러났다.
어이가 없는 상황에 한숨을 참고 있는데, 모리츠가 내게 말했다.
“아무튼 나도 가주께 허가를 받았다. 너와 함께 전장에 가기로.”
“그곳은 여기보다 훨씬 더 마기가 짙을 거야. 가서 오줌이나 지릴 셈이면 따라오지 마.”
고작 대륙에 흩뿌려진 마기에도 겁을 집어먹은 놈이 모리츠다.
그런 주제에 언데드가 판을 칠 전장에서 검을 휘두를 수나 있을까.
“나도 바텐베르크의 피를 이었어. 얕보지 마!”
“얕보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래. 보아하니 그간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바텐가의 가신들이 그러하듯, 놈의 눈가는 퀭했다.
결국 모리츠의 정신력은 여타 기사들보다 낮은, 일반인 수준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설마 전장에서도 내 뒤에만 졸졸 붙어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건 사양이다. 어째서 가주가 허락해 주었는지는 몰라도, 못 미더운 혹을 달고 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집에 있어라.”
“리하르트!”
쾅, 모리츠가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곤 한참 분을 삭이더니 입을 열었다.
“네놈에게 무시당하는 건 정말 짜증이 나! 기사들이 비웃는 것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날 바라보는 놈은 화가 났다기보단, 그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분한 건 지금의 내 모습이다! 나는 달라져야 해!”
그를 절벽까지 몰아넣은 것은 심마였다.
심약한 이가 마왕이라는 거대한 어둠을 마주한 대가.
모리츠는 그 심마를 벗기 위해 전장을 진창 구르겠노라 말했다.
“난 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는 중이다!”
“그래. 그럼.”
“……뭐?”
“가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내가 쉽게 태도를 달리해서일까.
모리츠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건 좋은 기회잖아.’
놈은 내 빛, 그러니까 신성에 의지하는 중이다.
바텐베르크의 형제 중 하나를 신도로 만들 기회는 흔치 않았다.
“단, 한 번만 더 내 뒤를 밟거나,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버릴 거야.”
“아, 알겠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형제를 보며 픽 웃었다.
설마 그 포악한 모리츠가 순한 양이 될 줄이야.
◈ ◈ ◈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콰가각-!
허공에 빛의 검이 나타났다.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으며, 손으로 직접 쥐고 휘두를 수도 있는 검의 별.
“와, 와아…….”
개인 연무장에서 한창 수련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리츠가 낸 소리였다.
“수련 안 할 거면 가라.”
한 번 만 더 내 뒤를 밟으면 버릴 거라 엄포를 놓은 지 일주일.
모리츠는 아예 대놓고 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내 개인 연무장에도 발을 들이미는데, 쫓아낼까 하다가 그냥 무시해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녀석을 동료로 받아들인 건 결코 아니었다.
‘쟤가 개과천선하면 또 모를까.’
놈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성정 때문일 테니까.
그렇게 묘하게 거슬리는 시선을 꾹 참으며 수련에 집중할 때였다.
기사 하나가 연무장을 찾아왔다.
“리하르트 도련님. 명을 받았던 기사들이 스노우폴의 주민과 함께 복귀하였습니다!”
“오!”
신자와 신도들이 드디어 도착했단다.
“주민들은 어디 있어?”
“응접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나는 아론과 모리츠를 연무장에 내버려 둔 채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있는 터라 찝찝하긴 했지만, 할 일부터 끝내야 했다.
‘과연 몇이나 신도가 될까.’
스노우폴의 주민은 총 31명.
그중 10명이 신도였고, 나머지가 신자였다.
그간 꾸준히 기도했던 신자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모두 신도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리하르트 도련님을 뵙습니다.”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그곳에 서 있던 기사 다섯 명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수고 많았다. 근데 왜 여기에 서 있어?”
“리하르트 도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무래도 스노우폴에 갔다 오는 길에 마기를 많이 쐰 모양이다.
나를 보며 힐링하겠다는 심산인 듯, 기사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툭, 툭-
그게 부담스러워 각각 50의 신앙을 담아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헉!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그럼, 이제 가 봐.”
“충!”
그제야 불청객들이 사라졌다. 나는 응접실에 들어가려 문 앞에 다가갔다.
한데 문 너머가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슬쩍 귀를 가져다 대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 악이 도래하였고, 어둠의 씨앗이 곳곳에 뿌리를 내렸나니!”
“아아! 절망이로다!”
연설이라도 하듯 잔뜩 흥분한 메리의 음성과 단체로 탄식하는 주민들.
소음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만 가슴속 믿음을 품은 자들은 걱정할 것 없음이라!”
“우오오!”
“우리는 외치리라. 호르시여! 성자시여!”
“호르시여! 성자시여!”
맨정신으론 듣기 힘들었다.
이건 무슨 사이비도 아니고.
벌컥-!
“믿을지어다! 믿을지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바텐베르크의 깃을 쥐고 흔드는 메리와 열렬히 호응하는 주민들.
그야말로 광란의 현장이었다.
“어엇…… 서, 성자님?”
한창 열을 내던 그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안녕.”
내 모습이 많이 변했기 때문일까.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하나. 둘. 셋.
“으헝헝! 성자니임!”
정확히 3초 뒤. 독립 투사처럼 연설을 해 대던 메리가 울음을 터트리며 내 품에 안겨 들었고, 주민들이 울부짖으며 연신 호르를 외쳐 댔다.
‘아…… 정신 사나워.’
이놈들을 괜히 불렀나 싶다.
◈ ◈ ◈
“우리의 성자! 우리의 빛이시여!”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온몸에서 후광이……!”
“아, 좀! 조용히 좀 해 보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주민들이 내가 뿜어내는 빛을 보고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시간이 더욱 지체되었던 것이다.
“일단 메리,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흐윽!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거지요.”
메리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떨었지만, 그녀의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마을 주민 전원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올린 건 메리가 열심히 포교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중에 절반은 기약 없는 기도에 나가떨어졌을 터.
“흐음.”
나는 주민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멀쩡한 상태는 아니야.’
홀쭉해진 얼굴과 퀭한 눈.
여타 일반인들과 별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주민들은 두려움이 커질수록 호르교에 빠져들었다는 것.
그것도 거의 의존에 가까운 수준으로 말이다.
“그간 너희의 기도가 신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고맙다.”
“오오! 정말입니까!”
“쉿. 할 게 많아. 조용히 들어.”
다시금 소란스러워지려는 좌중을 제지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신께서 너희들의 믿음에 감격해 보답하려 하신다. 신도부터 일렬로 서 봐.”
상은 별것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조약돌을 하나씩 쥐여 주는 것뿐이니까.
“자. 성석(聖石)이란 거야.”
“서, 성석(聖石)!”
조약돌을 받아 든 마을 촌장 로먼이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이름만 거창할 뿐, 일반 조약돌에 약간의 신앙을 불어넣어 만든 돌멩이었다.
“항상 지니고 있어라. 신의 가호가 함께할지니.”
“죽어서도 함께 묻히겠습니다!”
하지만 순진한 이들은 눈물까지 흘려 대며 감격했다. 약을 파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신도는 점점 늘어날 텐데 보상을 후하게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 상은 전부 받았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엔 신도 의식을 거행할 차례였다.
“신자들이여! 이번에야말로 신도가 될 준비가 되었나?”
“예! 저희 또한 신도들 못지않게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21명의 신자들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과연 그 말이 허풍이 아니었던 걸까.
『마리아가 신도가 되었습니다.』
『진이 신도가 되었습니다.』
『프리아가 신도가…….』
“오! 모두 축하한다.”
21명 전원 신도가 되었다.
하기야 그들의 독실한 태도를 보면 안 되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호르시여! 성자시여!”
“그만. 아직도 할 게 남았어.”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갈 차례였다.
나는 모두를 자리에 앉히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불러들인 이유는 도움이 필요해서야.”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지금 수많은 기사가 어둠과 대적하고 있어. 역겨운 마기가 넘실거리고, 죽었던 동료가 끔찍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전장에서 말이야.”
어둠이 가장 짙게 깔린 곳.
또한, 나와 신도들이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는 곳.
우리가 갈 전장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신께선 일어날 때를 기다리셨다. 너희 선지자와 함께.”
“그, 그 말씀은……?”
“전장에 가서 신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자.”
“…….”
신도들은 말이 없었다. 저마다 눈을 크게 뜰 뿐이었다.
역시 무보수로 부려 먹긴 힘드려나.
뭐라도 구미가 당길 만한 보상을 내걸어야 할 것 같았다.
“나와 같이 전장에 가는 선지자에겐 큰 답례를 해 줄…….”
“정말입니까?”
그러기가 무섭게 메리가 내게 물어 왔다. 눈을 번뜩이는 것이 보상이 굉장히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성석을 무려 열 개씩…….”
“그, 그게 아니라! 정말 신께서 저희를 선지자라고 여겨 주시는 겁니까? 정말 저희와 함께 일어날 때를 기다리셨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그건 왜?”
메리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을 때였다.
“와아아!”
돌연 신도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이미 펑펑 울어 부은 눈에선 또다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우는 거야?”
나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다.
“신의 계시가 내렸나니! 선지자들은 전장에 우뚝 섰음이라!”
“우뚝 섰음이라!”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줄지어다! 우리는 선지자의 본분을 다할지어다!”
“다할지어다!”
메리가 바텐베르크의 깃발을 미친 듯 휘저으며 소리쳤다.
목에 핏대를 세운 그 모습은 내가 알던 메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지낸 거야.”
나는 이마를 짚었다.
눈앞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건 분명히 내 신도들인데, 어째서 광신도 집단처럼 보이는 걸까.
46화. Episode. 16 모리츠라는 혹이 붙었다 (3)
스노우폴의 주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선지자의 본분을 다하겠노라 말했다.
그들의 신앙심이 투철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예상외의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서울 텐데.’
물론 창칼이 오가는 격전지가 아닌, 아군의 주둔지에서 포교 활동을 하게 할 셈이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 마당에 전장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을 리가.
‘메리 이 녀석.’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휘어잡았길래 그 지경이 된 건지.
응접실에서의 광경을 되새기니 광기의 집단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과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상태창.”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33 □ 신앙 - 40,192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 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스노우폴의 주민들이 바텐베르크에 머문 지 일주일. 21명의 신자까지 모두 신도가 된 덕에 하루에 모이는 신앙은 3,000 이상이 됐다.
신도 하나당 최대치가 100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최고 수준의 신앙심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야 밥값 부담이 좀 덜하네.”
그동안은 아델이 신앙을 하루에 일천씩 먹어 대니 도통 쌓이질 않았다.
그 외에 홀리 오러 특기의 숙련도도 올려야 했고.
똑똑-
“성…… 아니 도련님.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내 방문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익숙한 장면이 펼쳐졌다.
“왜 네가 시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메리를 바라보았다.
“어머. 제가 도련님의 전속 시녀잖아요.”
“그냥 쉬고 있으라니까.”
“에헤헤…… 습관이라 그런지, 일하는 게 더 편하네요.”
참 징하다.
메리는 바텐가에 복귀한 다음 날부터 시녀복을 주워 입었다.
도련님의 밥은 제가 챙겨 주고 싶어요! 라고 했던가.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밝은 얼굴로 날 돌아보는 그녀를 보았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
망나니 리하르트의 기억 속에선 메리는 항상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새삼 처음 빙의했을 때와는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잘 먹을게.”
나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깨작거렸다.
요새는 통 입맛이 없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저희가 출발하는 게.”
오늘, 바텐가를 떠나 언데드와 엎치락뒤치락해야 하는 전장으로 간다. 입맛이 없는 건 긴장감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 긴장감 사이사이로 묘한 흥분과 설렘이 자리 잡았다.
“정말 어머니를 뵙고 가지 않아도 되겠어?”
“음…….”
내 물음에 메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포교 회의를 하느라 시간이 나질 않아서……. 이번 선지자의 임무를 마치고 뵈러 가야 할 것 같아요.”
“……포교 회의는 또 뭐야?”
소시지를 썰던 나이프가 뚝 하고 멈췄다.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곤 메리를 바라보았다.
“맨날 모여서 쑥덕거리더니, 회의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거야?”
“네! 아무래도 어떤 식으로 포교해야 할지 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하는 말만 들으면 정말 기특한 이들이지만, 왜인지 모를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주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다.
“거기 가서는 저번처럼 깃발 흔들어 대지 마. 솔직히 말해서 정상인처럼은 안 보여.”
“아…… 아하하! 안 그래도 회의에서도 얌전히 포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왔어요.”
“뭐, 정말?”
의외였다. 전장에 가자마자 ‘믿을지어다!’하고 소리칠 줄 알았더니만.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면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서서히 세뇌를 건다는 느낌으로…….”
메리가 언뜻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과하지 않게만 해.”
“저만 믿으세요, 도련님!”
◈ ◈ ◈
리하르트는 얼음 왕관을 머리 위에 얹었다.
두툼한 털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아이스 크레센도는 허리춤에, 애검인 드래곤투스는 등에 비껴 맸다.
“…….”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와 아론의 앞에는 기드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더니, 출전의 날이 되었음에도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다.
“아론, 괜찮냐?”
“예.”
그런 것치곤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켜 낸 리하르트가 기드를 응시했다.
그렇게 가만히 노인을 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가자.”
제3기사단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한 리하르트와 아론이 방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도…… 련님? 아론?”
등 뒤에서 끊어질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분명 리하르트와 아론이 기억하는 노인의 인자한 목소리였다.
“기드!”
“조부님!”
두 사내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침상에 누워 있는 기드가 가만히 눈을 끔벅였다.
손자와 손자 같은 도련님의 말소리가 정신없이 귓가를 때렸다.
다시는 못 들으리라 생각한 음성일진대.
“……제가,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담금질에 들어선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길어.”
리하르트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기드에게 말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거하게 타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왜 멋대로 희생을 자처한 거냐, 네 피 묻은 드래곤 하트를 보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았냐…….
수많은 말이 입안에서 머물기만 하다가 사라졌다.
“떠나기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다행이라는 말뿐이었다.
“떠난다니 그게 무슨……?”
“지금 아랫동네에서 언데드와 전쟁이 일어났거든. 이제 우린 가 봐야 해.”
“조부님, 부디 몸조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없음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고 싶은데,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떠날 듯한 두 사내에 기드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에겐 모든 게 꿈같았다.
죽기 직전에 꾸는, 환상 같은 것처럼.
“전, 전장에 가신다니요! 그게 무슨!”
다급히 침상에서 일어난 기드가 휘청거렸다.
육체는 완벽히 회복되었으나, 담금질의 후유증은 정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금 그는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누워 있어. 넘어질 뻔했잖아.”
노인은 제 몸을 단단히 받쳐 준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도련님이 이렇게 키가 크셨던가.
이제야 그의 모습이 이곳저곳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혹 제가 몇 년이나 누워 있었던 겁니까? 어, 어찌 이리 늠름하게 성장하셨는지요.”
“몇 년은 무슨, 네가 잠든 건 두 달 정도 됐나.”
“도련님은 드래곤 하트를 섭취하시고 환골탈태를 이루셨습니다.”
아론의 설명에 기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간 리하르트가 얼마나 변했는지 모를 노인에겐 뜬금없는 소리였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네.”
“이 무지한 늙은이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면서 이야기하지. 일어난 김에 배웅이나 해 줘. 한때 네가 단장으로 있었던 제3기사단도 함께 출정하니까.”
리하르트는 기드를 부축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최대한 간략하게나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마나 불감증은 완화되고 있었다는 것부터.
오러를 다루게 된 아론이 자신의 직속 기사가 되었고.
또 기드를 비롯한 제3기사단과 함께 용을 사냥했다는 것까지.
“……허어!”
모두가 미워하고 기피했던 리하르트가 이제는 어엿한 바텐베르크가 되었다니.
기드에겐 하나같이 믿기 힘든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다름 아닌 제 도련님이 하는 말이었으니.
“리하르트 도련님은 정말 굉장하신 분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도련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리하르트에게 별 감정이랄 게 없던 손자마저도, 그의 직속 기사로서 자부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정문에 도착했다.
“도련님! 이제야 오셨습…… 헉!”
이미 한참 전에 떠날 채비를 갖춘 제3기사단이 이쪽을 돌아보곤 숨을 들이켰다.
“기드 경! 깨어나신 겁니까!”
리하르트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온 기드.
그를 본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에워쌌다.
전 기사단장이 깨어났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들이었다.
“폴크, 잭…… 제3기사단…… 전원 무사한가. 내 아집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터야. 미안하네.”
“용 사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리하르트 도련님의 활약 덕에 모두 무사합니다!”
“기드 경은 괜찮으십니까?”
염려가 담긴 물음에 기드는 그저 푸근하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사들은 안심이 되었다.
“곧바로 전장으로 간다고 들었네. 어디의 어떤 전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쁜 이들을 붙잡고 있을 순 없지.”
“이렇게나마 깨어나신 걸 보니 저희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푹 쉬고 계십시오! 저희 모두 무사히 돌아올 테니 말입니다.”
훈훈한 장면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시간 없어! 어서 채비를 갖춰라!”
“충!”
리하르트가 말에 올라타고, 스노우폴의 주민들은 두 대의 마차에 나눠 탑승했다. 제3기사단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론, 도련님을 잘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툭- 노인과 손자가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 안에 많은 것이 오갔다.
“도련님.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너도 잘 먹고, 잘 쉬고. 다음에 볼 땐 이런 모습이면 안 돼. 명령이야.”
이제 인사는 할 만큼 했다.
곧 제3기사단과 리하르트가 말을 몰고 정문을 벗어났다.
희뿌연 흙먼지가 일어 눈앞을 가리는데도, 기드는 벽을 짚고 선 채로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변하셨구나. 정말 변하신 게야.”
기사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도련님을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리하르트를 향한 제3기사단의 시선엔 존경이 담겨 있었고, 리하르트 또한 그들에게 신뢰와 존중을 내비쳤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기드가 떠나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을 보여 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기드 경.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청년 하나가 다가왔다.
“자네는…… 제2기사단의 중급 기사였던가. 도련님을 배웅하러 온 겐가?”
“옙! 하만이라고 합니다.”
그 청년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런! 벌써 떠나신 건가!”
“어찌 출정식도 없이!”
어느새 정문을 가득 채운 기사들이 말없이 떠나 버린 리하르트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운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도 있었다.
“하하, 리하르트 도련님께서 인기가 대단하시구나.”
“차기 후계자로 지크 도련님과 함께 거론되기 시작하시는 분이지요.”
하만의 말에 기드는 세상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른 회복해야겠군. 우리 도련님은 내가 옆에서 거들어 드려야만 안심이니.”
47화. Episode. 17 산송장과 산송장들 (1)
우리는 바텐베르크의 영역을 떠나 아래로 달려 나갔다.
쉴 틈 없이 이어진 강행군은 고단했고, 점점 옥죄어 오는 마기는 불쾌감을 자극했다.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저쪽만 먹구름 낀 듯 새까만 어둠이 음울한 기운을 뿜어냈다.
분명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격전지는 얼마나 심각할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
“좀 더 서두르지.”
“예!”
우리는 행군의 속도를 높였다.
◈ ◈ ◈
폴린 성. 바렌 왕국의 1차 요새라고 불리는 그 성은 북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동시에 남대륙의 침공을 수차례 막아 낸 방패였으며, 명망 높은 무가인 폴린 가문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었을 뿐.
견고한 방패는 썩어 문드러져 지독한 저주의 근원지가 되어 버렸다.
“레오 사령관! 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자국의 땅 절반을 언데드에게 빼앗겨 버린, 비운의 왕이 절규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거무죽죽했고, 불안 가득한 눈빛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본디 어질고 현명했을 왕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었다.
“바렌티스 국왕 전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어찌 흥분을 가라앉히겠소. 여기 리오 성까지 함락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요! 내 자국의 병사들을 보낼 터이니, 연합군에 자리를 만들어 주시오!”
“병사로서는 적군의 세력만 키울 뿐입니다.”
“레오 사령관!”
그의 날 선 음성에도 사령관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전하. 이곳의 마기는 특히나 사납습니다. 왕도로 돌아가 옥체를 보전하시길.”
급히 결성된 무가 연합의 사령관이자 제1기사단의 단장, 레오.
그의 정중한 되돌림에 국왕이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 해도 바텐베르크의 위상에는 비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부디, 부디 선조들의 왕국을 지켜 주시오.”
바렌티스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아니, 절대 잃어서는 안 될 것만 남아 있었다.
“바텐베르크의 기상을 믿고, 연합군의 용맹함을 믿으소서.”
“부탁하오.”
이윽고 국왕이 돌아갔다. 레오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았다.
상황은 최악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입에 담은 말은 국왕을 안심시키기 위한 감언에 불과했다.
“빌어먹을…….”
제1기사단이 루드비히로부터 리치의 수색을 명받았을 무렵, 놈들은 이미 언데드 군단을 꾸린 상태였다.
폴린 성 일대를 아무런 소음 없이 먹어치운 채로 말이다.
“바렌 왕국이 문제가 아니야.”
국왕의 말대로 이곳, 리오 성마저 뚫린다면 걷잡을 수가 없다.
북대륙 전체가 시체로 들끓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레오가 침음성을 삼키며 대책을 강구할 때였다.
뿌우우-
뿔 나팔과 타종 소리가 리오 성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부터 주변의 공기가 더욱 무겁게 짓눌리고, 시체 썩은 내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단장!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제1기사단의 막내, 애드런이 다급히 레오에게 달려왔다.
“정말 끝도 없군. 가자.”
“예!”
그들은 성을 벗어나 높디높은 성벽으로 향했다.
악취와 마기가 점점 짙어진다.
그에 미간을 찌푸린 레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젠장, 젠장! 이번엔 또 얼마나 온 거야?”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성벽 아래에 모여든 돌격대는 공포와 두려움에 빠졌고.
“드레이크……!”
“아아악! 대체 왜 죽은 놈들이 살아서 움직이냐고!”
성벽 위에 활을 쥔 이들은 언데드가 되어 버린 동료를 보고 절규했다.
생지옥.
현재 이곳을 한마디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였다.
“지금부터 사기를 떨어트리는 자는 내가 직접 목을 베겠다!”
어느새 말에 올라탄 레오가 마나를 한껏 담아 외쳤다. 그러곤 반지를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이 반지를 보라! 그대들의 사명을 생각하라!”
리하르트로부터 받았던 반지.
그것이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 주는 효과가 있음을 깨달은 건 무가 연합이 결성되고 난 이후였다.
여태까지는 그게 톡톡히 도움을 주었지만, 이미 연합군은 너무 지쳐 버렸다.
‘리하르트 도련님…….’
이 자리에 리하르트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가진 바 무력은 상급 기사에 비견될 정도뿐이지만, 이 신묘한 힘을 다룰 수 있는 그라면…….
레오는 문득 떠오른 리하르트의 얼굴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무의미한 가정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성문을 개방한다! 돌격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열린 성문 너머로 시꺼먼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살점이 절반 이상 썩어 문드러진 기사, 농민, 여러 마물까지.
그 끔찍한 놈들을 마주한 돌격대가 이 악물고 말을 박찼다.
“사격 개시!”
“화살 다 쏜 놈들은 바로 돌격을 준비한다!”
성벽에선 지휘관들이 악다구니를 써 댔다.
마구잡이로 발사된 화살비가 언데드 군단에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화살을 탕진한 기사들은 활을 내던지고 성벽 아래로 달려 나갔다.
“으아아아!”
비명과 고함, 언데드의 울음소리가 전장에 가득 찼다.
본래 양상은 무가 연합의 수성전이었지만, 연합군은 수성의 이점을 포기하고 난전을 선택했다.
아니,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울 것을 강요받은 것이다.
적은 언데드였으니까.
이미 죽어 버린 그들은 몸에 화살이 박혀도 움직였고, 지치지 않았으며, 단단한 성벽을 보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대책은 머리를 베어 내는 것뿐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합군의 가장 큰 적은 마기다.
거듭되는 전투에 언데드가 세를 불릴수록, 마기는 짙어졌고 기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돌격대가 올라탄 말들은 마기에 겁을 집어먹어, 통제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졌다.
크에에엑!
울부짖는 오크 언데드의 목을 날린 레오가 전장을 살폈다.
무가 연합의 병력은 고작 이천.
그런데 눈에 보이는 적은 어림잡아도 육천은 넘었다.
“물러서지 마라!”
지독히도 불리한 싸움.
그런 전투가 벌써 서른 번째다.
“으아아!”
이곳에 모인 기사들 하나하나가 무가의 일원이었으며, 무가의 수장 또한 다섯이나 존재했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
결정적으로 바텐베르크의 최고 전력, 제1기사단이 분전에 분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무리인 걸까.
레오의 눈에 스러져 가는 기사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1조! 교대하라!”
레오의 웅혼한 외침이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언데드와 씨름을 하던 돌격대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리오 성의 성벽을 따라 달렸다.
활짝 열린 후문에선 창칼을 꼬나 쥔 2조가 박차를 가했다.
“아, 아악……!”
“샘! 이 멍청이가!”
“난 이미 틀렸어!”
그러나 교대 명령에 따르지 못한 기사들도 여럿 있었다. 말에서 낙마하거나, 언데드에게 물어뜯긴 경우가 그러했다.
아비규환.
떨어진 사기는 본디 하지 않았을 실수를 불러왔고, 그것은 곧 죽음이 되었다.
콰가강-!
전쟁은 뛰어난 장군이 있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레오와 제1기사단이 아무리 애를 써도.
지휘관들이 적재적소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도.
리오 성은 서서히 수세에 내몰리기 시작했다.
“단장! 저희끼리라도 리치를 치러 가야 합니다!”
“그럴 순 없다!”
애드런의 외침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사령관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별동대를 운영해 리치를 친다 한들, 언데드들이 대륙에 풀려나면 재앙이 벌어질 터.
어떻게든 여기서, 아니 최소한 바렌 왕국 안에서 막아 내야 했다.
◈ ◈ ◈
“끔찍하군.”
정말 모든 게 끔찍했다. 욱신거릴 정도로 몸을 두드리는 마기와 악취는 말할 것도 없다.
눈앞에 난장판이 된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전장인데, 어찌 산송장밖에 안 보이네.”
살아 있는 이도 죽은 눈을 하고 있으니,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나는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두려움, 공포, 혼란.
저들이 느끼고 있을 모든 것이 나에게도 몰아쳤다.
“으윽…….”
제3기사단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벌써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 중에서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폴크와 잭 정도일까.
“췩! 뭐 하고 있는 거요. 빨리 참전해서 거들어야 하지 않겠소!”
“기다려.”
두려운 건지, 흥분한 것인지 모를 휴거가 내게 재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나서면 안 된다.
“타이밍을 재는 중이야.”
죽은 이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산 사람을 자신의 동지로 만들었다.
“도, 도련님! 어서 명령을!”
“쉿.”
얼음 왕관에서 뿜어져 나온 한기가 머리를 식혀 주었다. 그 덕에 가만히, 죽어 가는 이들을 보면서도 바라보기만 할 수 있었다.
비록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난전은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야.”
우리가 아무렇게나 끼어들면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이성을 잃은 아군의 창칼에 찔릴 수도 있는 일이고.
나는 현재 제3기사단의 지휘관으로서 이 자리에 왔으니, 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다.
“다들 입 다물고 대기한다.”
전장은 점점 격화되는 중이었다. 미친 듯 몰려온 언데드가 벌써 성문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반면, 몇 번이고 교체되던 돌격대는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도착하지 못했다면…….’
폐허가 된 리오 성을 마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열세인 상황.
몇몇 눈에 띄게 강한 자들과 제1기사단이 언데드를 학살하듯 움직였지만, 그들을 뒷받침해 줘야 할 연합군이 너무나 무력했다.
“쯧.”
그때였다.
전장에 이변이 일어났다.
꾸득, 꾸드득-!
수십의 언데드가 저들끼리 살을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찰흙을 빚는 것처럼.
“시체 뭉치!”
언데드 중에서도 상당히 성가신 개체.
놈의 커다란 육신이 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제3기사단, 참전하라!”
“충!”
우리는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난 그 선두에서 검을 뽑아 쥐곤, 시체 뭉치를 노려보았다.
분위기를 반전시켜 줄 만한 제물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주었다.
파아앗-!
잔뜩 끌어올린 신앙이 온몸에서 밝게 빛났다.
이곳에서의 첫 전투.
“퍼포먼스로는 이게 좋겠지.”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드래곤 투스가 별이 되었다.
신앙으로 이루어진, 어둠을 몰아내는 별이.
48화. Episode. 16 산송장과 산송장(2)
“먼저 간다.”
나는 별을 그러쥔 채로 앞서 나아갔다.
“끄어어억!”
시체 뭉치가 내게 마주 달려들었다.
별이 뿜어내는 신앙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포악한 기세와 함께 날아드는 놈의 주먹.
그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쿵, 하고 시체 뭉치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검게 죽은피가 땅을 물들인다.
나는 쉴 새 없이 놈의 거체를 갈라냈다.
썩은 시체를 엮어 올려 만든 놈의 몸은 둔하고 부피만 클 뿐이라, 지금의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끄르르륵!”
별이 놈을 가를 때마다, 썩은 살덩이에서 매캐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체 뭉치 특유의 재생력이 신앙에 의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괴로울 테지.
죽어서도 고통받는 놈이 한없이 측은했다. 저 구더기 끓는 거체에는 연합군의 기사로 보이는 시체도 엉켜 있었으니까.
안식을 되찾아 주겠다.
“끄어, 끄어어억!”
나는 기세를 올려 공격을 가했다.
놈의 한쪽 다리를 베어 무릎을 꿇렸고, 양팔의 관절을 끊어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내게 아가리를 들이밀며 아귀처럼 이빨을 부딪쳐 왔다.
가여우면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존재.
“편히 쉬어라.”
별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 중간에 놈의 목이 걸렸다.
상급 언데드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도련님!”
목 달아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론이 내게 다가왔다.
두 눈에는 전장의 열기가 가득 담긴 채였다.
“저희도 날뛰고 오겠습니다!”
그러곤 쌩하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언데드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는 걸 보고 흥분한 모양이다.
“왜 지들이 신났어?”
정작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던 연합군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이러려고 무리해서 신앙을 운용한 게 아닌데.
역시 상급 언데드 하나 처치한 거로는, 전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없는 건가.
“쯧.”
나는 리오 성의 성벽으로 나아갔다.
◈ ◈ ◈
“취이익!”
휴거가 거세게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 흉폭한 기세를 온몸으로 받아 낸 언데드는 머리부터 두 쪽이 나 갈라졌다.
“이건 뭐, 쪼개는 맛이 최악이로군! 췩!”
솔직히 말해서 짙은 실망감이 들었다.
휴거가 원했던 것은 투지와 투지가 맞부딪쳐, 누가 더 용맹하고 강대한지 자웅을 겨루는, 진정한 전사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은 자에게 투지가 있을 리 만무했고, 반대로 죽은 자를 향해 투지가 불타오를 일 또한 없었으니까.
“으음?”
그런 그가 돌연 전장의 한쪽을 바라보았다.
제3기사단이 분투하고 있는 와중, 저 혼자만 동떨어져 서 있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동지?”
리하르트를 부득불 따라온 모리츠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선, 부여잡은 검 끝이 덜덜 떨리는 게 꼭 갓 태어난 오크처럼 가녀려 보였다.
“동지! 왜 그러고 있소?”
휴거는 냉큼 달려가 물었다.
“설마 두려운 거요?”
“시, 시끄러워! 두렵긴 뭐가!”
울컥하고 외치는 모리츠는 사실 두려웠다.
리하르트의 활약에 영향을 받아 기세 좋게 달려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애초에 실전 경험이 적은 그였다.
시꺼먼 마기가 심장을 꽉 옥죄어 오는 것도 모자라 눈앞의 적은 끔찍한 언데드다.
모리츠에겐 질 나쁜 농담이었다.
“흐음!”
그를 멀겋게 쳐다보던 휴거는 도끼를 내리쳤다.
동시에 모리츠를 노리던 언데드가 반으로 갈라졌다.
“히, 히익!”
“뭐요, 두려운 거 맞구먼! 취익!”
창백하게 질린 모리츠를 보며 휴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흐, 동지는 겁쟁이구려. 이럴 거면 왜 따라왔소?”
“……겁쟁이 아니야!”
정곡이라도 찔린 듯, 치기 어린 외침이 모리츠에게서 터져 나왔다.
억지로 부릅뜬 눈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 보였다.
두려움은 극복하는 거지, 외면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을.
용맹한 오크, 휴거는 이 미숙한 오크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내려 주고 싶었다.
“동지, 그렇게 두려울 때는 말이오.”
척-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모리츠는 얼결에 휴거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대단한 인간 전사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 거요. 췩!”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리하르트가 있었다.
언제 성벽 위로 올라간 건지.
위풍당당하게 서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의 손엔 웬 깃발이 들려 있었다.
바텐베르크와 바렌 왕국 소속 다섯 무가의 문장이 그려진 연합군의 깃이었다.
“리하르트……?”
저기서 무얼 하는 걸까.
모리츠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 리하르트가 쥔 깃발에서 빛이 폭발했다.
“크흐흐! 진짜 멋있지 않소? 뭐 저리 빛난단 말이오, 횃불처럼!”
모리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고 싶지만, 휴거의 말대로 리하르트는 멋있었다.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빛.
왜 저것만 보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까.
왜 저놈만 저런 빛을 뿌릴 수 있을까.
“큭!”
모리츠는 이런 곳까지 리하르트를 따라온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의 한심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존심마저 굽히지 않았던가.
“젠장, 젠장! 이렇게 한심하게 있을 순 없지!”
그가 눈을 치켜뜨고 검을 들어 올렸다.
언데드를 향해 달려드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비단 모리츠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아!”
“리오 성을 지켜야 해!”
리하르트를 본 연합군의 기세가 달라졌다.
저 빛나는 깃발엔 저마다 충성을 맹세한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공포에 묻혔던 사명감이 제자리를 찾아왔고, 기사로서의 의무가 떠올랐다.
창칼을 휘두르는 손에는 힘이 실렸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싸우냐! 당장 몰아붙여!”
“우오오!”
여태까지 마기에 떨었던 게 꿈인 걸까, 아니면 마기가 두렵지 않은 지금이 꿈을 꾸는 중인 걸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더는 두렵지 않다는 것만이 기사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전장의 흐름이 일시에 뒤바뀐 순간이었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성벽 위에서 살펴본 지휘관, 아발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이 모든 게 자신의 옆에 있는 청년이 벌인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알 수 없는 빛을 품은 남자.
그가 답했다.
“성자.”
“성자……?”
멍청히 되묻는 아발트에게 리하르트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때 레오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연합군!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
연합군이 언데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죽어 좀비가 되어 버린 동료에게 안식을 찾아 주었고, 리오 성을 지키기 위해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래. 이게 기사지.”
조금 전만 해도 산송장처럼 죽어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리하르트는 그 변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 ◈ ◈
사기는 한 번 하향세를 타면 다시 올라가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한 번 드높아진 사기는 또 여간해선 그 기세가 낮춰지는 법이 없다.
오늘의 연합군이 그러했다.
“…….”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합군은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나, 파죽지세로 언데드 군단을 몰아쳤고, 끝내 이번에도 리오 성을 수비해 낼 수 있었다.
“와아아!”
기사들이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포효했다. 그러곤 하나같이 나를 쳐다보았다.
감사, 경의, 호의 등 온갖 게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쉬고 있을 시간 없다! 시체를 한곳에 모아라!”
“빨리빨리 움직여!”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언데드의 시체는 땅을 오염시키고, 부정한 기운을 잔뜩 뿜어내니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화르륵-!
곧 머리 따로 몸 따로 노는 시체 수천이 한데 뭉쳐 타올랐다.
그 안에 동료를 두고 온 자들이 얼굴을 빳빳이 굳혔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그 참혹한 광경을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고 있을 때, 제3기사단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래. 너희는?”
“전원 무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3기사단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번 전투로 기가 죽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모리츠가 눈에 들어왔다.
“모리츠.”
“어, 어? 왜?”
그냥 불렀을 뿐인데 한껏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다.
이런 건 바텐베르크의 둘째, 지크한테나 보이던 반응인데.
“네가 언데드가 되면 나한테 오라고. 친히 성불시켜 줄 테니까.”
“……이 자식이!”
모리츠가 열심히 싸운 건 알고 있는데, 또 예상외로 성실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내가 일행들과 투닥거릴 때였다.
“리하르트 도련님!”
레오가 다가왔다.
뒤에는 연합의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을 잔뜩 이끌고서.
“리하르트 도련님이 맞으십니까?”
입으로는 그리 물으면서 눈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출세하셨습니다, 레오 경. 연합의 사령관까지 되시고.”
“정말 도련님이셨군요…… 하, 그 빛이 아니었다면 못 알아보았을 겁니다.”
훌쩍 커 버린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 듯, 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연합의 수뇌부들도 눈을 크게 치켜떴다.
“도련님.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들을 소집하겠습니다.”
레오가 돌연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었다.
“소집? 한창 뒤처리 중인 이들을 왜 부릅니까?”
“바텐베르크의 혈통이 두 분이나 오셨으니, 합당한 예를 취하는 게 맞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이번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영웅 아닙니까.”
“그런 건 됐습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나는 슬쩍 연합군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 승리했음에도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였다.
굳이 그런 자들에게 인사를 받아 어디에 쓸까.
‘연합군의 병력이라면 큰 피해 없이 막는 게 정상일 텐데.’
이래서 흐름이란 게 중요하다.
싸우기 전에 겁부터 집어먹으니 될 것도 안 되는 거지.
“레오 경, 아니 사령관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편히 부르십시오.”
레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얼굴엔 온갖 궁금증이 한가득 인 걸 참아 내느라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긴, 그는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은 성격이었지.
“그럼 레오 경. 지금 당장 회의를 열 수 있겠습니까?”
“회의를 말입니까?”
“예.”
고된 전투가 막 끝난 참이라 피곤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오가 내게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나도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또 대책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셨으니, 제 비밀도 알려 드려야겠지요.”
레오의 손가락엔 내가 주었던 반지가 끼워진 채였다.
드디어 수확의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49화. Episode. 16 산송장과 산송장 (3)
나는 제3기사단에게 마차를 이끌고 올 것과 전장의 뒷처리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
신도를 한가득 태운 두 대의 마차는 리오 성 근처의 숲속 한편에 대기시킨 상태였다.
혹시 몰라 아델도 함께 두었으니 별일 없겠지.
“갑시다.”
“예. 따라오시지요.”
레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잠깐! 나도 간다.”
모리츠가 내 뒤를 쫓아왔다.
“그냥 기사들이나 도와주지? 네가 따라가서 뭐 할 건데.”
“흥, 나도 바텐베르크야. 자격은 충분해.”
모리츠는 바텐가에서도 그렇고, 정말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기세였다.
그냥 신경 꺼야지.
◈ ◈ ◈
그렇게 도착한 리오 성 내부.
바텐베르크를 제외한 각 무가의 지휘관 대표 다섯과 강대한 기세를 품은 중년의 사내 다섯.
그리고 나와 레오, 모리츠가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
적막이 원탁 위에 맴돌았다.
왜 다들 말이 없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수뇌부들은 내게 발언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듯,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입니다. 가주의 명을 받아 제3기사단과 함께 연합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리츠도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 모리츠 바텐베르크입니다!”
이 자리가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오는지, 얼굴이 빨개진 모리츠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대 바텐베르크의 자제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귀하신 분들께서 직접 나서실 줄이야! 정말 이 이상 든든할 수가 없군요. 바텐베르크의 혜안과 자비에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지휘관들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댔다.
뻔하디뻔한 아첨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그들도 저마다 소속을 밝혔다.
창술과 궁술에 일가견이 있는 린느 가와 오르드 가문.
대검을 다루는 자칼 가문.
쌍검술에 특화된 사이언 가문.
마지막으로 거대한 전투 도끼를 가볍게 휘둘러 대는 헬가 가문.
나는 눈을 감았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며 말했다.
“인사는 이쯤 하죠.”
미팅 나온 것도 아니고, 왜들 이리 인사말이 긴 건지.
더군다나 지금 사안은 굉장히 심각했다.
난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다섯 무가가 힘을 합쳤는데도 밀리는 이유가 뭡니까?”
이변이 일어났으리라곤 짐작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원래 알던대로라면, 무가 연합은 세 가문이었다.
헬가와 자칼, 오르드 가문의 기사들이 협력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남부와의 전쟁이 심화되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벌써 다른 두 가문이 연합에 추가됐고, 심지어는 그 가주들까지 나섰음에도 언데드에게 밀리는 꼴이라니.
‘아무리 연합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마기가 훨씬 짙어졌다 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아.’
나는 수뇌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답을 재촉하려는 찰나, 레오가 말했다.
“……처음 연합은 바렌 왕국의 세 개 가문의 기사단과 저희, 제1기사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해 보였지요. 그러나 도련님도 아시겠지만, 어느 날 이상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균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가 연합 또한 공포와 혼란을 피하지 못했겠지.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
“그날, 리오 성은 함락 직전까지 밀렸고, 큰 희생을 치른 끝에서야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모든 것은 제가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탓입니다.”
“지금 저는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권한도 없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그를 만류했다.
그날의 이변을 대체 누굴 탓하겠는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몸은 빳빳하게 굳지, 정신은 멀어 버릴 것 같지.
그런 상황에 언데드와 마기가 미쳐 날뛰니 정말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레오 경,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 이후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가주들과 린느, 사이언 가문이 연합에 합류했지만, 이미 연합군은 기세가 땅으로 떨어져 제대로 된 대응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레오가 말을 멈추곤 수뇌부를 슬쩍 바라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을 때였다.
누군가가 쾅- 하고 원탁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매번 자칼 가문의 기사들이 몸을 사리니까 우리 가문이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헬가 가문의 가주였다.
그가 산적 같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로 자칼 가주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그건 흘려들을 수 없군. 그쪽의 기사들이 무식하게 달려들다 피해를 입었을 뿐인 것을!”
“헬가의 기사는 용맹하다. 자칼 가문의 겁쟁이들처럼 마기에 겁먹고 내빼진 않지!”
싸아아-
난데없는 두 가주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헬가 가주가 돌연 화살을 돌렸다.
이번엔 오르드 가주에게로.
“활잡이 가문도 순 겁쟁이들뿐이지. 그대들에겐 이 사태가 남 일 같나 보군?”
“헬가 가주. 그대 가문의 피해가 큰 것은 인정하나, 부디 지나친 언행은 삼가 주시오!”
“흥, 연합에 필요한 건 용맹한 기사다. 고작 머릿수나 채우러 온 거면 부디 빠졌으면 좋겠군. 그대들의 병력은 사기만 더욱 떨어트릴 뿐이니까.”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이 모든 걸 직접 본 내 감상은 그랬다.
‘알 것 같네.’
레오가 하려던 말.
이 빌어먹을 꼰대들이 연합군을 죄 망쳐 놓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현재 연합에 합류한 가문들은 리오 성과 바렌 왕도 사이에 영지를 두었다.
엉덩이 무거운 가주들이 왜 연합에 들어왔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리오 성이 함락되면 제 영지도 시체 밭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힘을 합치진 못할망정, 서로 이빨이나 들이미는 광경이 몹시 꼴사나웠다.
그때 레오가 나섰다.
“다들 입 다무십시오.”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커다란 분노가 담겼다.
예의 그 능글능글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뭣……!”
가주들은 고압적인 레오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헬가는 더욱더.
‘어쭈.’
이건 정말 갈수록 가관인데.
“바텐베르크의 자제가 두 분이나 이 자리에 계십니다. 때와 장소에 걸맞은 품위를 보이십시오.”
“레오 사령관! 그대도 모시는 자가 있는 기사라면 타 가문의 수장에게도 예를 갖춰야 함이 마땅하오!”
“……헬가 가주. 저는 지금 사령관으로서 말하는 중입니다.”
쿠구구-
두 거인의 기싸움에 리오 성 전체가 흔들렸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휘관들은 이 난장판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원탁만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모리츠는 고래 싸움에 터진 새우처럼 바짝 쫄아 있었다.
무가 연합의 알맹이가 이렇게 오합지졸이었다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그냥 황당하다는 정도였는데, 보자 보자 하니 기가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열이 솟구쳤다.
연합의 기사들은 언데드가 된 동료에게 칼침을 박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싸우다 죽으면 역겨운 괴물이 되어 또다시 고통받아야 했다.
“……그만.”
그럼에도 가주들은 서로를 헐뜯고 떠밀었다.
심지어 연합의 사령관에게 반기까지 내보이는 자도 있었다.
지금 당장 저들의 집이 통째로 없어질 판인데.
뭐가 어찌 되었든 기사로서, 무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어선 안 됐는데.
“그만!”
내가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던가.
지금 이 상황은 그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연합의 암 덩어리가 여기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추태를 용서해 주십시오.”
“레오 경. 당신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나는 턱짓으로 헬가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분란 종자를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레오가 고개를 숙였다.
바텐가에서 한창 나와 아론을 굴릴 때와는 다른 태도였다.
그때, 헬가가 끼어들었다.
“지금 분란 종자라 하셨습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희 가주들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진작 무너졌을 겁니다.”
이제 그는 아예 막 나갔다.
바텐베르크의 자제인 내게 불경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고, 바텐베르크의 최고 기사인 레오가 이끄는 연합을 깎아내렸다.
더는 내가 참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참아선 안 되었다.
“헬가 가주. 조금 전 연합의 사령관이 입을 다물라 명했소. 그리고 나 또한 그만하라고 하였지.”
“아무리 사령관이라 하더라도 한 가문의 수장을 막 대해선 안 되며, 아무리 바텐베르크의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저를 하수인 취급하실 순 없습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