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5

아닌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대련은 중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 폴크가 리하르트와 잭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습격인가?”
“음, 이것을 습격이라 해야 할지…….”
“일단 가 보지.”
하필이면 가장 달아올랐을 때 오크가 나타날 게 뭐람.
대련을 방해받은 리하르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목책으로 향했다.
“취익!”
주둔지의 목책 너머, 저 멀리에 정말 오크 하나가 서 있었다.
온몸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가 인상적인 오크였다.
놈의 옆에는 웬 멧돼지 3마리가 목이 따인 채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네 이놈! 정녕 죽고 싶어서 또 찾아왔구나!”
“취이익, 인간 전사들이여! 그간 잘 지냈는지 궁금하구려!”
오크는 기사들의 적개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어?’
그를 바라보는 리하르트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세상에, 인간들한테 반갑게 인사하는 오크라니.
그때였다.
돌연 오크가 옆에 쌓아 놓은 멧돼지를 이쪽을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안 그래도 예민한 기사들이 경계를 드높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하르트도 드래곤 투스의 검자루를 잡으려 했다.
“이, 이건 공격이 아니오! 취익!”
그런데 정작 오크는 양손을 휘저으며 거리를 벌렸다.
“내 일용할 양식을 가져왔으니, 부디 반갑게 맞이해 주길 바라오. 취익!”
정말이지 웃음도 안 나왔다.
리하르트는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놈은 대체 뭐야?”
“……한 달 전부터였을 겁니다. 저 오크가 대뜸 찾아와서 손을 잡자고 떠들어 댄 것이.”
“손을 잡아? 그건 또 뭔 소리야.”
“홉슨 산맥의 드래곤에게 원한이 있답니다.”
폴크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놈이 한두 번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취익…… 이야기라도 좀 나눠 주면 안 되겠소!”
리하르트는 오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가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제법 간절해 보이는데. 잠깐 다녀올게.”
“도련님!”
“명령이야. 여기서 대기해.”
그는 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취이익! 드디어 대화할 마음이 생긴 것이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저에게 다가오는 리하르트를 본 오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처음 보는 인간이구려! 취익. 나는 핏빛 나무 부족의 마지막 전사, 휴거라고 하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스릉-
리하르트가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오크가 뒷걸음질 치며 손을 휘저어 댔다.
“취, 취이익! 검은 왜 뽑는 거요!”
“원래 오크는 몸으로 대화하는 걸 좋아할 텐데?”
“나는 싸울 생각이 없소!”
이게 정녕 오크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리하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같이 드래곤을 토벌하고 싶다면서?”
“췩, 그렇소만…….”
“네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힘을 합치자는 거야?”
그 말에 오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대련 한번 하자.”
리하르트는 채 가라앉지 않은 대련의 열기를 일깨웠다.
한창 좋을 때 흥이 깨져 버렸으니, 오크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34화. episode. 12 거, 눈총 쏘지 말고 (3)
핏빛 나무 부족의 마지막 전사, 휴거.
홉슨 산맥을 누비고 살던 휴거의 부족은 난데없이 나타난 드래곤이라는 재앙 앞에 허무히 쓰러졌다.
눈앞에서 가족과 전우가 용의 아가리에 집어 삼켜졌고, 번창했던 보금자리는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 참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휴거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휴거는 복수를 다짐했고, 증오스러운 용을 찾아가 도끼를 들이밀었다.
뒤떨어지는 오크의 지능으로도 그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가슴은 복수를 외쳤다.
긍지를 잃고 숨어 사느니 용맹을 떨치다 죽는 게 백배는 나았으니까.
하지만 휴거는 용의 잔악함을 얕보았다.
놈은 자신에게 덤벼든 휴거의 살갗을 발톱으로 헤집었다.
그의 붉은 피부를 불길로 더욱 붉게 달궜으며, 아가리에 머금었다가 뱉어 내기까지 했다.
드래곤은 숨을 헐떡거리는 휴거를 살려 돌려보냈다. 마치 다음에 또 덤벼 보라는 듯이.
이는 전사의 긍지와 용맹을 나락으로 떨궈 버리는 극악무도한 짓거리였다.
놈에게 휴거는 한낱 심심풀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또다시 살아남은 휴거는 절망에 빠졌다.
바짝 날을 벼렸던 복수의 칼이건만, 그 대상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쥔 무기를 놓지는 않았다.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동안 휴거는 수없이 많이 덤볐고, 그럴 때마다 끔찍한 흉터가 온몸에 아로새겨졌다.
붉은 오크는 죽지 못해 살며, 죽지 않아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백이 넘는 인간들이 홉슨 산맥을 찾았다.
휴거는 인간들의 목적이 용이라는 것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그에게 있어선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취익, 대련에서 이기면 정말 약속을 지켜야 하오.”
대화를 시도하려다 기사들에게 내쫓기기를 수어 번.
마침내 교섭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의 비실비실한 인간이 대련을 청했다.
자신을 꺾으면 힘을 합치는 걸 고려해 보겠단다.
제 입으로 약속했으니 응당 전사라면 지켜야 할 것이다.
휴거가 거대한 전투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인간 뒤편에 선 기사들의 살기가 피부를 저릿하게 찔러 왔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도련님! 어찌 독단으로 그런 결정을! 이 원정대의 지휘관은 저입니다!”
그 와중에 폴크는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리하르트를 나무랐다. 분노한 그의 음성은 매서웠다.
“이야기만 나눠 보는 게 뭐 어렵다고.”
정작 리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방해 말고 지켜나 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아우성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휴거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끼어들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약속이나 지키시구려, 취익.”
짧은 대화를 끝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휴거의 굵은 다리가 터질 듯 팽창했다.
곧 그가 땅을 박차고 덤벼들었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앞세워 달려드는 붉은 오크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풍겼다.
쾅!
그의 도끼가 리하르트가 서 있던 자리를 거칠게 파헤쳤다. 과연 덩치에 걸맞은 괴력이었다.
하지만 큰 공격이 실패했을 땐 빈틈이 생기는 법.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휘둘러졌다.
“취익!”
휴거가 땅에 박힌 도끼의 자루를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피했다.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가 발을 내뻗었다.
뻐억-!
다급히 검을 회수한 리하르트가 검면으로 막아 냈지만,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뭔 놈의 오크가!”
저렇게 날렵하냐- 라는 말을 삼켜 낸 리하르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도끼를 뽑아 낸 휴거가 곧바로 공격을 재개했다. 넙적한 도끼날이 리하르트를 스쳐 갈 때마다 끔찍한 파공음이 귓가를 때렸다.
웬만한 오크 족장의 힘을 뛰어넘는 흉흉한 괴력.
그리고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민첩성과 유연성.
“최소 상급 기사 이상……!”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잭이 억눌린 신음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도련님은 도련님.
저 오크의 도끼에 반 토막 나 버리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크워어어!”
돌연 휴거가 괴성을 질렀다.
그것을 들은 성벽의 기사들이 한껏 인상을 썼다.
오크들 사이에선 ‘워 크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상대를 압박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표정은 평온했다. 얼음 왕관은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빈틈을 포착한 리하르트가 휴거의 품을 파고들었다.
카드득!
전력으로 찔러 넣은 드래곤 투스는 도끼의 넙적한 날에 가로막혔다.
사방으로 튀기는 불똥 사이로 휴거와 리하르트가 서로를 노려봤다.
“크하하하하!”
잠시간의 대치. 난데없이 휴거가 웃음을 토해 냈다.
다시금 지르는 워 크라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우렁찬 성량이었다.
“이거, 이제 보니 전투를 즐기는 참된 전사였구려, 취익!”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닌 척 마시게. 이 대련이 즐겁지 않소!”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휴거와의 싸움은 조금 전 기사들과 했던 대련의 연장선이었다.
목적은 조금 바뀌었지만 결국은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것.
‘……사실 조금 재밌긴 하지만.’
어느 새부턴가 전투가 좋아졌다.
피땀 흘려 수련한 검으로 마물을 쓰러트릴 땐 성취감을 느꼈고, 기사와의 대련에서 승리하면 심장이 뛰었다.
이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이를 애써 억눌렀다.
평범한 일반인 ‘이지훈’과 게임 속 주민인 ‘리하르트’사이의 괴리감.
전투를 반기고, 승리에 열광하는 것은 ‘이지훈’에겐 아주 낯선 것이었으니.
“췩, 뭐 아무래도 좋지.”
휴거는 짧게 도끼를 휘둘러 리하르트를 떨쳐 냈다.
이미 휴거의 몸은 한껏 달아올랐다.
원만한 협상을 위해 접어놓았던 전투 본능이 치솟았다.
쿠우우-
금빛 기류가 솟아올라 그의 육신과 도끼를 휘감았다. 오크 특유의 금색 오러였다.
“안 돼!”
그것을 본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쇳소리를 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들이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였다.
쿠구궁!
어디선가 작은 발구름 소리와 함께 땅에서 거대한 나무가 솟아올라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무슨……!”
“그리 난리 피울 것 없습니다.”
당황한 기사들을 진정시키려 나선 것은 아론이었다.
그는 우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보십시오.”
폴크를 비롯한 기사들이 다급히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오러……?”
묵빛의 검날에 엮인 새하얀 빛무리. 그 검을 치켜든 리하르트의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리, 리하르트 도련님이 어떻게?”
그는 마나 불감증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저 하얀빛은…….”
“도련님은 마나 특성 보유자입니다.”
아론의 말에 기사들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론!”
아론은 저를 향해 물어 오는 폴크에게 씩 웃었다.
제3기사단.
그의 조부가 전(前) 기사단장으로 있었으며, 아론이 리하르트의 직속 기사가 되기 전까지 속해 있던 바텐베르크의 세 번째 검.
때문에 아론은 이들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머잖아 경들도 도련님께 흠뻑 빠질 겁니다.”
“뭣이?”
뜬구름 잡는 소리에 폴크의 미간이 찌푸려졌을 때였다.
“우, 움직인다!”
한 기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리하르트와 휴거로 향했다.
콰앙-!
금빛 오러를 휘감은 도끼와 새하얗게 물든 검이 맞부딪쳤다.
검과 도끼를 중심으로 땅이 울리고 굉음이 일었다.
“취익! 돌연변이였구려!”
휴거가 말하는 돌연변이는 마나 특성 보유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휴거의 도끼와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허공에서 서로를 밀어 냈다.
본래라면 결코 성사되지 않았을 오크와 인간의 힘겨루기.
마나 특성 앞에선 종의 차이에서 오는 힘의 격차가 무색했다.
“아직은 미숙한 오러건만, 굉장한 힘이구려. 취익!”
결국 물러선 것은 휴거였다.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완숙한 자신의 오러와 비교하면 저 인간의 오러는 어설펐다.
하지만 그것이 품은 위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쾅! 콰앙!
곧바로 달려든 리하르트가 공격을 이어 나갔다.
허공에서 연신 굉음이 터졌다. 그 충격파로 땅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허어!”
기사 하나가 탄식을 내뱉었다.
잭과 폴크는 침만 꿀꺽꿀꺽 삼켜 댔다.
확실히, 그들이 알던 철부지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변해도 너무 변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사들의 눈에 기묘한 빛이 어렸다.
“취익! 그대와 싸우는 건 참으로 즐겁소! 이런 전투가 대체 얼마만인지!”
물경 이백에 달하는 인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휴거가 잔뜩 달아올라 외쳤다.
언제 인간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포위할지 모른다는 불안 따윈 없어 보였다.
자신의 상대가 그럴 자가 아니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크는 머리가 아닌 심장에 이끌리는 종족.
그 덕에 날카롭게 벼려진 본능과 감각은 다른 이의 진심을 읽어 내는 데 탁월했다.
눈앞의 전사는 전투를 즐기는 강인한 수컷이었다.
콰앙!
애써 그것을 숨긴다 해도, 검을 휘두르는 리하르트의 몸은 정직했다.
얼음 왕관의 냉정 효과로 딱딱히 굳은 얼굴 속에 희열이 일렁였다.
“후욱…… 후욱……!”
리하르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휴거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기사로 치면 상급을 넘어, 최상급을 바라볼 정도의 경지였다.
“취익, 아무래도 승패는 정해진 것 같소만.”
휴거의 말대로였다. 리하르트의 검을 휘감은 오러는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휴거의 오러는 굳건했다.
오러를 다루는 숙련도의 차이가 승부를 가른 것이다.
“아쉽소. 오러를 좀 더 능숙히 다뤘다면 더욱 즐거운 싸움이었을 텐데.”
리하르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등 뒤를 찔러 오는 기사들의 시선이 절절히 느껴졌다. 예의 냉랭하고 싸늘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대련을 자신의 패배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러를 다루게 되었고, 트롤 서른 마리와 그 우두머리를 처치했으며, 기사 대여섯과의 대련에서 승리했다.
참으로 알량한 몇 번의 성공.
그 이력에 눈앞의 오크도 추가하고 싶었다.
패배를 직면하노라니, 이제껏 모른 척해 왔던 승부욕이 들끓었다.
다시금 머리가 차게 식었다.
“후우…….”
말하는 법조차 잊은 듯, 숨만 내쉬던 리하르트가 눈을 떴다.
텅 비어 버린 마나 루트에 신성력 대신, 신앙이 질주했다.
쿠구국-!
드래곤 투스에 다시 오러가 맺혔다. 압도적인 기운을 줄기차게 내뿜는 신앙의 오러였다.
리하르트로서도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기예(技藝).
“취, 익!”
눈을 부릅뜬 휴거가 반사적으로 도끼를 쳐들었다.
그의 두뇌론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재간이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경각심이 종을 울려 댔다.
이윽고, 리하르트가 검을 내리그었다.
콰가가각-!
강렬한 굉음과 함께 빛이 폭사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주둔지가 한순간 밝게 물들었다.
“…….”
휴거는 말없이 도끼를 내렸다.
죽음이 그를 피해 갔다.
그가 디딘 땅 바로 옆에 크게 할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직격했다면 도끼와 함께 몸이 갈려 나갔으리라.
“맙소사…….”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손을 떨었다. 한순간이나마 어둠을 몰아내었던 빛이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어째선지 모를, 적어도 리하르트에겐 평생 느낄 리가 없을 거라 여긴 경외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35화. Episode. 13 용 사냥 (1)
아델가르텐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리하르트가 오롯이 담겼다.
“도련님!”
아론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가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리하르트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리하르트는 그저 무리했을 뿐이다.
신성력이 아닌, 신앙 그 자체로 오러를 엮는 것은 지금의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리하르트를 응시하던 아델가르텐이 눈을 감았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었다.”
높낮이 없는 독백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잃어버린 믿음은 회복할 수 없음이라.”
오랜 기간의 공백. 세계의 주민들은 더이상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믿음이 생겨날지니.”
두터운 불신을 깨트리고 피어날 신앙.
그 씨앗은 이미 저들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 ◈ ◈
폴크는 혼란스러워하는 기사들을 수습했다.
직책에 어울리는 통솔력을 발휘해, 어지러워진 군기를 다잡았다.
휴거는 사지를 쇠사슬로 묶어 거대한 바위에 단단히 몸을 고정시켰다.
놈은 껄껄 웃으며 그에 따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리하르트가 정신을 잃기 전 내린 명령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한편 쓰러진 리하르트와 아론, 그리고 정체 모를 소녀는 새로 지어진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후…….”
폴크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혼란은 수습했다지만, 정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본인을 숨기고 계셨다고…….”
그는 제3기사단의 노고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우선 예상치 못한 기드의 합류로 인해 당초 수립했던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홉슨 산맥을 얼마나 오르내렸던가.
뿐만 아니라, 드워프로부터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를 공수해 오기 위해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고달팠던 것은, 기드가 담금질에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것이었다.
오래전에 은퇴한 노기사가 이제 와 다시금 창을 쥔 이유, 그게 전부 리하르트를 위해서라니.
기사들은 기드를 존경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기드는 기사들에게 드래곤을 땅으로 고꾸라트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하면 자신이 홀로 담판을 짓겠다고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존경하는 이가 죽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며 싸우는데, 기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기드와 함께 싸우다 죽는 것은 기사단 누구나 반겼다.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다만, 그가 어째서 리하르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그를 비롯한 제3기사단의 노고가 가치 없이 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마냥 가치 없진 않겠구나.”
폴크는 그간 품어 온 생각을 정정했다.
리하르트는 소문과 달랐고, 그의 기억 속 모습과도 달랐다.
어찌 되었든, 임무는 당연히 속행할 것이다.
제3기사단은 바텐베르크가 뽑아 든 검이었다.
응당 목표를 향해 휘둘러져야 함이 옳다.
다만 좀 더 가치 있는 전장에 설 수 있게 됐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 ◈ ◈
몽롱한 정신 속에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녹색 천막이었다. 날이 밝았는지 천막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으윽…….”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근육통이 이곳저곳을 쑤셔 댔다. 빨래 짜듯 근육이 비틀리는 감각이었다.
‘신앙으로 오러를 엮는 일은 두 번 다신 못할 일이구나.’
고작 대련 한 번 이기겠다고 아까운 신앙을 3,000이나 소모했다.
나 또한 내가 이렇게나 승부욕이 강한 줄은 몰랐다.
“미친 거지. 미친 게 분명해. 이렇게나 무리하다니.”
혼자 혀를 차며 반성하고 있을 때, 아론과 아델이 막사에 들어왔다.
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도련님!”
“아빠아!”
방긋 웃으며 달려드는 아델을 저지했다.
그대로 냅두면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할 게 뻔한데, 지금 나는 근육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도련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죽을 맛이야.”
아론에게 답하며 신앙을 끌어올렸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신앙 아니겠는가.
과연 왜 진작에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통증이 가라앉았다.
“……또 그 힘이군요.”
“왜?”
아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앞에서 신앙을 사용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반응이 영 이상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말을 해.”
그는 그냥 웃으며, 무사하시니 다행이라는 말만 했다.
싱거운 놈.
한결 나아진 몸을 이끌고 막사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저마다 시선을 보내 왔다.
개중에는 어색하게나마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다. 어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깨어나셨군요.”
폴크가 다가오며 말했다. 무뚝뚝한 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됐어. 뭘 그렇게까지.”
대뜸 고개를 숙이는 폴크를 만류했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어색한 것은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보다 오크는 어디 있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폴크의 안내를 따라 주둔지 뒤편으로 걸어 나갔다.
한눈에 봐도 큼지막한 바위.
거기에 사지를 결박당한 휴거가 있었다.
“충!”
놈을 감시하던 기사 셋이 우리에게 예를 표했다. 그 중엔 잭도 포함되어 있었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구려!”
“그 꼴을 하고선 넉살도 좋아.”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로 인사를 건네는 휴거가 퍽 우스웠다.
놈도 껄껄 마주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대련에서 승리했으니 패자는 그에 따라야겠지. 그래, 내 처우는 이제 어찌 되는 거요? 취익!”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초탈한 기색이었다.
정말 봐도 봐도 신기한 오크였다.
대개 오크는 흉포한 야성을 주체하지 못할 텐데, 눈앞의 휴거는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희 부족은?”
“췩, 이젠 존재하지 않소. 부족 모두가 드래곤에게 당했지.”
“그래서 복수를 하려는 거였군.”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통하게 떨군 두 눈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놈은 사악하고 잔악한 놈이오. 취이익! 씹어 죽일 도마뱀 자식!”
절로 피어나는 휴거의 살기에 기사들이 검을 쥐었다. 허튼짓이라도 하면 즉각 대응하겠다는 경고였다.
“확실히 용은 성격이 파탄 난 놈들뿐이지.”
나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설정을 왜 그렇게 해놓았을까-
심히 후회될 뿐이었다.
“쇠사슬 풀어.”
“도, 도련님?”
기사들이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부디 저들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 반대로 휴거는 눈을 반짝였다.
“뒤통수 칠 놈은 아닌 것 같아. 토벌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야.”
“맞소. 참으로 맞는 말이오! 취익,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리다!”
휴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쉬이 설득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련님.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십시오. 녀석은 오크입니다.”
폴크가 완강하게 거절 의사를 피력했다.
“설령 이놈이 진심으로 협력을 원한다 해도, 저희는 오크의 도움 따윈 필요 없습니다.”
“전력 하나가 늘면 그만큼 기사들이 입을 피해가 줄어들어.”
“이건 긍지의 문제입니다. 기사가 오크와 손을 잡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폴크와 기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역시 기사란 놈들은 죄 꽉 막혔다.
도대체 이게 긍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우습구나.”
내 옷깃을 쥐고 있던 아델이 입을 열었다.
입가엔 삐뚜름한 미소가 내걸린 채였다.
“다른 종족과 협력하는 것이 긍지를 저버리는 일이더냐.”
난데없이 설전에 끼어든 아델에게 시선이 모였다.
“성마대전의 영웅들은 모든 종족을 하나로 규합했다. 그럼 그들은 긍지 없는 것이더냐?”
기사들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아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성마대전은 옛적에 잊혔으니까.
그들에겐 아귀다툼 같던 대전쟁의 기억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델의 음성에는 세계수의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반박의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 아이는 누굽니까?”
폴크가 내게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지만, 지금까지 아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아델가르텐. 아빠의 딸…….”
“강력한 드루이드야.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아델의 말을 얼른 끊었다. 괜히 딸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나는 상황을 중재시키곤, 붉은 오크를 바라보았다.
“휴거.”
“말하시구려, 취익.”
“나에겐 기사들과 논쟁을 하면서까지 너를 두둔할 이유가 없어.”
붉은 오크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그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끝내 남은 것은 체념이었다.
“취익, 면목 없소. 나 때문에 불화가 일었나 보오. 애초에 내 아집이었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마시구려.”
오히려 놈은 결박된 상태에서도 내게 미안함을 표했다. 이거 참. 마음에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나는 아론에게 시선을 보냈다.
묵묵히 서 있던 그가 휴거의 쇠사슬을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췩……?”
“그러니까, 너는 그냥 내 동료가 돼라.”
이놈은 이대로 놓치기에 아까운 인재였다.
오크는 지배종의 자리를 두고 다퉜던 주축 중 하나. 타고난 전사인 그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오크들만의 기연을 얻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기회였다.
36화. Episode. 13 용 사냥 (2)
음산한 어둠 속, 세 쌍의 안광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왕의 어둠이 도래한다.”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불러올 것이며.”
“이 나약한 세계는 검게 물들고 말 것이다.”
덜그럭,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
그중 하나, 리치 크롬벨은 문득 일전에 느꼈던 이질적인 기운을 떠올렸다.
어둠과 대비되던 그 기운.
언데드를 보내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실패로 돌아가 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제 동지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기운은 매우 이질적이고 불쾌했지만, 그 크기가 무척 작고 보잘것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곧 불어닥칠 삭풍에 사그라들고 말 터.”
◈ ◈ ◈
“취익, 동료라고 그랬소?”
눈을 동그랗게 뜬 휴거가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는 태도였다.
“그건 좀…… 솔직히 말해 어렵소.”
“왜?”
“췩! 그대가 원하는 것은 토벌 이후에도 함께할 동료 아니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의 적을 앞둔 동지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료는 경우가 다르다오.”
요컨대 내가 정확히 어떤 놈인지 모르니, 섣불리 동료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제안을 거절하는 이놈은 눈치가 없는 걸까, 멍청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신념이라도 갖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발을 쭉 뻗었다.
퍽!
“꾸이익! 왜 걷어차는 거요!”
한껏 엄살 피우는 놈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곤 속삭였다.
“멍청아. 여기서 거절하면 어쩌자는 거야. 목 따이고 싶어?”
“하, 하지만!”
“일단은 같이 용 잡는 데까지만 생각하자고. 그때까지라도 동료가 되는 거야.”
말을 마친 나는 빤히 휴거를 바라보았다.
그 흉터 가득한 얼굴에 내적 갈등이 실시간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곧,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취익, 잘 부탁하오. 이게 정말 얼마만의 동료인지 모르겠구려.”
고민이 짧고 굵은 것이 딱 오크다웠다.
“후회는 없을 거야.”
놈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안이 벙벙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들었지? 휴거는 이제부터 내 동료야.”
나는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맞잡은 휴거의 손을 흔들어 댔다.
정적이 정확히 3초 흐른 뒤.
기사들이 아우성쳤다.
“도련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반쯤 협박이었는데!”
“목 따이고 싶냐 물어보시는 거 다 들었습니다!”
나는 유난히 목소리가 큰 폴크와 잭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동료가 된 건 맞지, 암.
“아론. 자네도 뭐라 말 좀 해 보게나! 자넨 도련님의 직속 기사라 하지 않았는가!”
폴크가 돌연 화살을 아론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아론의 반응이 무척 가관이었다.
“직속 기사의 덕목 제1항. 주군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른다.”
난데없이 괴상한 조항을 읊어 대는 것이었다.
“제가 이번에 만들기 시작한 조항입니다. 하나하나 쌓아 갈 요량이죠.”
“오, 아주 좋아. 바람직해.”
아론과 마주 보며 낄낄거릴 때였다.
이번엔 화살이 아델을 향했다.
“이봐, 꼬마야! 너도 저 무서운 오크와 함께하고 싶은 거냐? 그건 싫지? 부디 싫다고 말해 다오!”
폴크가 아델의 어깨를 부여잡고 애원을 했다.
치사하게 어린애를 인질로 삼으려 하다니.
“상대를 잘못 골랐군요.”
아론의 말에 나는 긍정을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폴크는 계속 입을 열었다.
“혹시 오크에 대해 모른다면 내가 설명해 주마. 저놈들이 얼마나 무섭고 흉한 놈들인지!”
“취익, 거 듣는 오크 속상하구려.”
휴거가 어깨를 추욱 늘어트릴 때, 아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크는 강맹하고 또 용맹한 종족이지. 적으로 만나면 버거우나, 함께할 때는 누구보다 듬직한 이들이다.”
아쉽게도 아델도 폴크의 편이 아니었다.
“뭐, 뭣……!”
“폴크.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더는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 차례 눈을 질끈 감았던 폴크가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예를 갖춰라. 오크이기 전에, 리하르트 도련님의 동료이시다.”
폴크의 항복 선언에 기사들도 마지못해 경례를 올렸다.
나는 한 발 물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다 휴거에게 물었다.
“일개 오크에서 신분 상승한 기분이 어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지만, 뭐, 부대끼다 보면 친해지지 않겠소? 취익!”
정론이었다.
◈ ◈ ◈
“드래곤은 홉슨 산맥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잭이 산맥의 지도 중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가위 표시들은 뭐야?”
잭이 펼친 산맥의 지도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열댓 개의 가위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를 설치한 구역입니다.”
“오.”
드워프가 설계한 그것은 꽤 유명한 물건이다.
그걸 열다섯 기나 공수해 오다니.
“만만치 않았을 텐데.”
“예. 드워프들이 어찌나 괴팍하게 굴던지. 하나라도 망가지면 가만 안 둘 거라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잭은 그들에게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토벌 계획은 간단합니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먼저 기드 경께서 담금질을 끝마칩니다.”
툭-
그의 손가락이 산맥 중 어딘가를 짚었다.
그곳에 위치한 깊은 동굴 속에서 기드가 담금질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직후 기드 경이 투창을 가해, 드래곤을 자극합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 먼 거리에서 드래곤의 봉우리까지 창을 던진다니.
하지만 담금질은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생명력을 불태우는 그 힘은 잠시나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 줄 터.
“하늘에 떠오른 용을 향해 발리스타를 발포. 놈을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잭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공격은 기드가 맡고, 기사단이 보조를 한다. 최소 상급 기사의 전력이 아니라면, 드래곤에게 어정쩡한 공격은 무용지물이었다.
“정말 계획은 간단하네.”
“애초에 놈에게 잔머리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나마도 어린 용이라 다행이죠.”
고개를 끄덕였다.
홉슨 산맥의 드래곤은 아직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유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췩, 기드라는 인간 전사가 그리도 강하오?”
“최고의 창기사요.”
휴거의 물음에 아론이 답했다. 그 단호한 어투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껄껄! 다음에 한번 겨뤄 봐야겠구려!”
눈치 없는 오크 하나가 해맑게 웃었다.
이 바보는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
“취익? 다들 눈초리가 왜 그러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휴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야?”
“이미 준비는 전부 끝마쳤습니다. 기드 경의 일이 끝날 때까지, 주변의 토벌과 주기적인 순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나는 눈을 감았다.
기드의 담금질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열흘.
거센 긴장감과 한 줌의 불안이 심장을 두드렸다.
◈ ◈ ◈
리하르트가 주둔지에 도착한 지 엿새가 지난 날.
결전을 앞두고 간단한 식사 자리가 열렸다.
명목은 리하르트의 합류를 기념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기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연회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힘이 넘치는구먼! 이 고기 누가 구웠어?”
멧돼지의 뒷다리를 단숨에 먹어치운 기사가 입맛을 다시며 외쳤다. 다른 기사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손에 들린 음식을 바라보았다.
“내 손맛이 이렇게 좋았던가?”
정작 고기를 구웠던 하급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앙 좀 쓴 보람이 있네.”
남들 몰래 고기에 신앙이라는 조미료를 뿌려 주었던 리하르트가 슬쩍 웃었다.
“아빠. 신도는 왜 안 만들어?”
아델이 리하르트의 품을 파고들며 물었다.
“서두르면 큰일 나거든. 아주 위험한 양반이 하나 있어서.”
리하르트는 꼬장꼬장한 루드비히를 떠올렸다.
그간 아론이 보여 준 반응으로 유추하건대, 조심성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어떤 평지풍파가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튼, 어중간하게 하면 앞날이 꽉 막혀 버릴 거야.”
물론 제3기사단 전원이 신도가 되면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위험성이 너무나 컸다.
혹여 루드비히가 직접 나서서 종교를 금지시켜 버리면, 바텐베르크에서 전도 활동은 물 건너가는 셈이니까.
아직 제 위치를 다잡지 못한 리하르트에겐 그런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대체 누구야? 내가 혼내 줄게!”
“아서라. 그러다가 장작 신세 된다.”
리하르트가 아델의 머리통을 토닥였다.
문득 세계수로 장작을 만들면 특별한 효과가 있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지났다.
“바, 방금 아빠가 무서운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아무튼 씨앗은 뿌려 뒀으니 때를 기다리면 돼.”
리하르트는 제1기사단장, 레오를 떠올렸다.
곧 있으면 리치와 기사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수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이고, 절망에 빠진 이들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 법이지.”
언젠가 했던 말인 것 같지만, 그때가 되면 정말 많은 게 변할 것이다.
리하르트가 머릿속으로 앞날을 그릴 때였다.
“오, 대단한 인간 전사! 나의 임시 동료여!”
배를 든든히 채운 휴거가 리하르트에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냥 리하르트라고 부르라니까. 그보다 땀내 나니까 떨어져!”
“취익, 너무하구려.”
리하르트의 질책에 휴거가 익살맞게 울상을 지었다. 그동안 휴거는 기사들과 친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리하르트의 입장에선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보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기사들 틈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너 진짜 오크 맞아? 뭔 놈의 오크가 이렇게 붙임성이 좋냐.”
“나에게 이들은 그냥 인간이 아니오. 취익, 공동의 적을 처단할 동지이지. 오크는 동지끼리의 화합을 중요시한다오.”
“…….”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정작 인간들은 저들끼리 기사와 마법사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건만.
그 말에 아델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돼지야, 제법 멋진 말을 하는구나.”
“돼, 돼지라니! 뀌이익!”
휴거가 펄쩍 뛰며 멱따는 소리를 내자, 이쪽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맥주가 가득 담긴 컵 세 잔을 들고 있는 아론이 있었다.
“아론.”
“머슴 왔구나.”
“취익. 머슴이 왔구려.”
졸지에 머슴이 되어 버린 그가 피식 웃으며 손에 들린 맥주잔을 내밀었다.
전투를 앞두고 과음을 피하기 위해 인당 한 잔씩만 허락된 맥주였다.
“건배사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건배사는 무슨, 그냥 마셔.”
리하르트가 질색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결코 사교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솔직히 말하면 휴거보다도 못한 리하라트에게 건배사는 큰 난제였다.
“취익, 이런 자리에서 빼면 쓰나!”
“맞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십시오!”
휴거와 주변의 기사들까지 거들었다. 그 성화에 결국 리하르트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주목! 도련님의 건배사다!”
신이 난 폴크가 끼어들어 기사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게 전부 아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라고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좌중을 훑었다.
공터에 자리를 깔고 앉은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며칠 전과는 다른, 아주 적대적이기만 한 시선은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직 내가 껄끄러운 이들이 있겠지.”
어렵사리 입을 연 그가 기사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맞췄다.
“날 좋아하든 말든. 죽지 마라. 죽을 것 같으면 그냥 뒤로 빠져.”
기드는 결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세계수의 열매라면 능히 살려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아델이 맺을 수 있는 열매는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한다.
“살아남은 놈들은 내 엉덩이를 걷어찰 기회를 줄게.”
어영부영 말을 마친 그가 어색하게 건배를 외쳤다.
참으로 사기를 뚝뚝 떨어트리는 건배사였다.
“무슨 건배사가 그럽니까!”
“우우!”
기사들이 장난스레 야유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다.
리하르트가 어떤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엿새간 리하르트는 열심히 기사들의 업무를 거들었다.
아니, 매번 앞장서 궂은일을 도맡으려 했다.
말을 몰아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순찰을 나가기도 했고, 주둔지에 얼쩡거리는 마물 여럿을 직접 베어 넘겼다.
심지어는 조용히 사라졌다가, 멧돼지 몇 마리를 사냥해 오기도 했다.
휴거가 기사들과 함께 어울리려 노력했다면, 리하르트는 혼자 묵묵히 짐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사내들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에잉, 도련님을 위하여! 건배!”
“위하여!”
때문에 그들은 되려 텐션을 높이며 분위기를 띄웠다. 입가엔 저마다 나름의 흐뭇함이 걸려 있었다.
“취익, 내 생애 최악의 건배사였소!”
“시끄러워.”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리하르트가 맥주를 홀짝였다.
드래곤을 마주하기까지 나흘을 앞둔 날이었다.
37화. Episode. 13 용 사냥 (3)
노인은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끝이 허공을 찌를 때마다 거센 파공음이 동굴을 울렸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던 팔의 고통도, 수없이 반복된 고행에 지쳐 버린 정신도 이제는 없었다.
남은 것은 무의식뿐.
“후욱, 후욱!”
결코 노인의 몸이라 할 수 없는 근육이 터질듯 부풀었다. 비정상적으로 솟은 핏줄 속엔 혈액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담금질.
수천, 수만 번을 때려 제련한 강철과도 같이, 기드는 자신의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드래곤을 죽인다.
놈의 심장을 뽑아 도련님께 바친다.
오직 그 목표만이 담금질의 원동력이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기드를 말렸다.
대체 어째서 리하르트 같은 망나니를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냐고.
그에 대한 기드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거창한 미사여구 따윈 필요 없었다.
정말 그냥, 그 아이에게 마나라는 신비를 알려 주고 싶었다.
모두에게 멸시받는 그 핏덩이에게 뒤늦게나마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차피 늙어 쓸모없어진 몸뚱어리.
한 번쯤은 불살라 볼 만하지 않겠느냐-
기드는 그리 말하곤 떠났다.
그렇게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넉 달이 흘렀다.
우뚝-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의 몸이 멈췄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쿠드득!
잔뜩 부풀었던 근육이 더욱 터질 듯 팽창했다가 돌연 수축했다.
그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며 기드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은 혈액과 함께 온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붉게 달아오른 육체 위로 새빨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담금질.
나약한 인간의 육신이 가진 한계를 강제로 깨부수는 금술.
지금 이 순간, 기드는 잠시나마 초인의 격에 오를 수 있었다.
◈ ◈ ◈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리하르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상태창.”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54,772
□ 권능 -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5만 4천밖에 못 모았다니…….’
신격이라기엔 지나치게 빈약하고 초라한 신앙이었다.
“역시 전도 좀 할걸 그랬나.”
그렇게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기사들 앞에서 신을 외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고, 다른 마을에 들러 전도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차라리 천천히 뜸을 들이는 것이 백배는 나은 선택지였다.
다만, 결전을 코앞에 둔 입장으로선 신앙의 양이 적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마다 쌓이는 신앙은 대략 1,500 포인트.
그중에 무려 일천 포인트가 아델의 밥값이었고, 나머지 500 중에서 300은 홀리 오러의 숙련도 상승을 위해 꾸준히 소모했다.
근 한 달간은 신앙을 거의 모으지 못한 것이다.
“아델. 너 정말 열매 맺을 수 있지?”
“응응! 나만 믿고 맡겨 주라아!”
조막만한 두 손을 불끈 쥔 아델이 콧김을 내뿜었다.
평소보다 과한 그녀의 애교는 그녀 나름대로 리하르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툭, 툭-
그에 리하르트가 기특함을 담아 아델의 머리통을 토닥였다.
‘그래. 어차피 써야 할 곳에 쓴 거지.’
사실 5만 포인트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상대가 드래곤인 게 문제일 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홀리 오러가 E랭크로 승급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렇게 긴장되시면 주둔지에서 쉬고 계시지요. 놈의 심장은 금방 뽑아 오겠습니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리하르트의 귓가를 때렸다. 고개를 돌리니 폴크가 히죽 웃고 서 있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 없을 때 홀라당 먹어치우려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하십니까!”
“왜, 나 주기 아까울 수도 있지.”
암묵적 합의라 해야 할까. 그들은 일부러 몇 마디 잡담을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오랜만에 기드를 보겠네.”
“이미 당부해 드렸지만 절대 기드 경에게 다가가지 마십시오.”
“알았다니까.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리하르트가 질색을 함에도 폴크의 표정은 단호했다.
마치 드래곤보다 기드를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어조였다.
“기드 경은 이미 이성을 잃으셨을 겁니다. 피아 구분을 못하게 되는 거지요. 토벌 계획은 미리 거듭해서 숙지해 두셨으니 괜찮겠지만…….”
한마디로 눈먼 창에 맞아 죽지 말라는 뜻이다.
뼈도 못 추릴 테니까.
“그나저나, 여기가 용과 싸울 곳이란 말이지?”
폴크의 잔소리에 서둘러 화제를 전환한 리하르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기사들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곳은 주둔지가 아니었다.
용의 봉우리와 기드의 동굴 중간 지점에 위치한 넓은 공터.
제3기사단이 지난 몇 달간 고르고 고른 최적의 사냥터였다.
“탁 트여 발리스타로 쏘아 맞추기 용이하고, 기사들도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음…….”
공터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로 수많은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서 있었다.
긴장으로 굳은 그들의 표정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너희들, 죽지 마라!”
“아, 도련님! 대체 죽지 말란 말을 몇 번이나 하시는 겁니까?”
대뜸 외치는 리하르트의 말에 잭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기사들도 저마다 입을 열었다.
“도련님 엉덩일 걷어차기 전까진 못 죽습니다!”
“맞습니다! 안 죽을 거니까 도련님이나 몸조심하십쇼!”
이 불경한 놈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리하르트는 그냥 픽 웃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엔 충실한 직속 기사, 아론이 있었다.
리하르트가 아론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아론, 기드는 걱정하지 마. 아델의 열매라면 후유증이고 뭐고, 반드시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 말씀도 이미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한 열댓 번쯤은 말이죠.”
“아 진짜. 너까지 그러기냐?”
어찌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이들이 없는지.
뚱한 리하르트에게 휴거가 다가왔다.
“췩, 뭘 그리 긴장하시오? 둘 중 하나일 뿐이라오. 오늘 이 자리에서 도마뱀 새끼가 죽든지, 죽지 않든지! 물론 나는 놈을 쳐 죽일 거라오! 취이익!”
그렇게 말하는 휴거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별로 긴장 안 했거든.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아니야. 드래곤은 오늘 반드시 죽는다.”
이렇게나 고생했는데 용을 처치하지 못하면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았다.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리하르트는 왕관을 고쳐 썼다.
냉기가 머리에 스며들자, 그의 분위기도 점차 차분해져 갔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도 흐트러트렸던 기세를 날카롭게 세웠다.
이제 전투를 시작할 때다.
산맥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바텐가에 돌아가기 전에, 우리끼리 용 고기로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꾸이이익!”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구-!
그들이 대열을 갖춘 공터 뒤쪽, 기드가 있는 동굴 방향에서 압도적인 기운이 솟구쳤다.
온몸의 털이 쭈뼛거리며 전율이 일었다.
여과 없이 내뿜어지는 초인의 격에 산이 몸을 떨어 대는 것 같았다.
“생명이 불타오르고 있어. 이건 정말 내 열매가 아니고서야 어쩔 방도가 없겠네.”
“아델. 너는 꼭 열매를 맺을 여력을 남겨 둬야 해.”
“아빠는 아빠 몸만 조심해. 그 사람은 내가 꼭 구할 테니까.”
믿음직한 아델의 말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기드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쐐애애액-!
동시에 굵기가 팔뚝만 한 거창(巨槍)이 하늘을 찢어 버릴 듯한 파공음을 내며 날았다.
콰앙!
그것은 순식간에 용의 봉우리에 틀어박혔다. 아니, 틀어박히다 못해 봉우리를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
분노에 가득 찬 괴물의 포효가 산맥을 휩쓸었다.
“으아아악!”
드래곤 피어.
그 끔찍한 포효를 들은 기사 몇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만,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리하르트가 신앙을 끌어올렸다.
마나 루트를 타고 오른 신앙이 성대에 도달했다.
“제3기사단-!”
그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신앙을 가득 담은 그 음성엔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라-!”
외침이 산을 울렸다.
공터의 기사들을 넘어, 발리스타를 다루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하급 기사들에게도 닿을 정도로.
■■■■■■-!!
붕괴하는 봉우리에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어를 줄기차게 흘려 대는 놈이 날개를 펼쳤다.
파충류의 눈알이 한 점을 향했다.
공터의 나약한 인간들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목표는 오직 하나.자신의 단잠을 깨운, 굉장히 거슬리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만을 노려보았다.
“온다!”
놈이 포악한 기세를 뿜으며 기드가 있는 동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폴크는 숨죽인 채 타이밍을 쟀다.
하나, 둘, 셋.
“도련님!”
“발포-!”
신앙이 가득 담긴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쾅! 콰앙!
그 직후, 리하르트에게 응답하듯 숲 곳곳에서 굉음이 일었다.
그것은 발리스타가 발포될 때 이는 소음이자, 용을 땅으로 고꾸라트릴 선전포고였다.
“크라아악-!”
거침없이 날아가던 놈을 향해 흉악한 쇳덩어리들이 쏘아졌다.
촤르륵!
쇳덩어리에 연결된 쇠사슬이 허공에 거미줄을 쳤다.
발포된 것은 도합 아홉 발.
몇 개는 놈의 거체에 적중했지만, 단단한 비늘을 뚫지 못했다.
나머지는 아예 스쳐 지나기만 했을 뿐, 놈에게 닿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나를 주입해라!”
리하르트의 네 번째 외침.
그 외침에 발리스타 한 기당 다섯 명씩 배치된 하급 기사들이 눈을 빛냈다.
이내 그들은 발리스타 본체에 부착된 동력 장치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본체와 연결된 두터운 쇠사슬이 꿀렁거리며 마나를 빨아들였다.
촤르륵!
그리고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 크라아아-!”
어린 용이 울부짖었다.
제 몸을 순식간에 옥죄는 다섯 가닥의 쇠사슬이 비행의 자유를 억제했다.
활성화된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그물이자, 드워프의 신기가 집약된 포승줄이 바로 그것이었다.
쿠웅-!
곧 드래곤이 땅에 떨어지며 귀가 멍할 정도의 굉음이 일었다.
희뿌연 흙먼지 속 커다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기드의 기운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기 - 초집중 발동.』
“가자.”
리하르트와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비로소 용 사냥이 시작되었다.
38화. Episode. 14 등불 (1)
■■■■■-!
용이 울부짖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걷어지며 거체가 드러났다.
세로로 찢어진 놈의 동공과 마주한 기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오금이 저려 당장에라도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제 상관인 폴크와 잭은 물론이고 리하르트와 그 동료들이 당당히 맞서고 있었으니까.
“취이익!”
첫 공격은 용의 좌측으로 달려든 휴거의 몫이었다.
금빛 오러를 가득 머금은 도끼가 녹색 비늘을 강타했다.
그 뒤를 이어 리하르트와 아론이 용의 우측에서 공격을 펼쳤다.
“2소대! 돌격하라!”
정면에서 시선을 끌던 폴크가 소리쳤다.
그 명령에 각기 무구를 꼬나 쥔 기사 스물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러를 완숙하게 다루는 상급 기사들이었다.
“으아아아!”
스물의 기사가 반으로 갈라져 드래곤의 양측에 달라붙었다.
쩌엉-!
하지만 그들의 공격으로도 비늘에는 별다른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되려 어마어마한 반탄력으로 기사들의 손아귀만 저려질 뿐이었다.
-크라아악!
잔뜩 성난 용이 꼬리를 휘둘렀다.
기사들에겐 커다란 녹색 파도가 덮쳐 오는 것처럼 보였다.
“5소대!”
비명 같은 폴크의 외침에 큼지막한 방패를 움켜잡은 서른의 중급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우오오오!”
그들이 덮쳐 오는 용의 꼬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갔다.
마나로 한껏 육체를 강화한 서른의 기사들이, 우그러진 방패와 함께.
하지만 그 덕에 리하르트를 비롯한 우측의 기사들이 뒤로 빠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콰가각-!
그사이 휴거와 기사들이 놈의 왼쪽 옆구리를 쉴 새 없이 강타했다.
폴크와 잭은 놈의 발톱과 비늘 사이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
다시 한번 분노를 가득 담은 피어가 울려 퍼졌다.
코앞에서 터진 피어.
기사들의 몸은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용이 잭을 씹어 삼킬 듯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잭의 시야가 새까만 색으로 가득 찰 때,
콰아앙-!
동굴에서 공터까지.
그 먼 거리를 단번에 달려온 기드가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용이 포효를 내질렀다.
분노와 당혹, 그리고 고통 섞인 울부짖음이었다.
“기드!”
리하르트가 기드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몸과 핏빛 기류가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노인.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2소대, 후퇴!”
리하르트의 상념을 폴크의 외침이 깨부쉈다.
그 말에 미친 듯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물러났다.
“크라아악!”
용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울었다.
평생토록 느껴 본 적 없던 고통이 정수리를 찌르르 괴롭혔다.
간식거리조차 되지 않는, 왜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고통을 느끼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쩌엉!
기드의 창대가 놈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고개가 쳐들린 용이 눈을 끔뻑였다.
후두둑-
영롱한 녹빛의 비늘 몇 점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련님!”
리하르트는 폴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2소대는 뒤로 물러났지만, 지휘관인 폴크와 잭, 리하르트와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1소대였으니까.
“놈의 시선을 끌어!”
신앙을 담은 리하르트의 외침이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기드에게 모든 위험을 끌어안게 할 수는 없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 줘야 했다.
1소대는 목숨을 버린 듯 움직였다.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비늘과 비늘 사이를 우악스럽게 비집고 들어갔다.
휴거의 도끼는 꼬리 끝을 연신 찍어 댔으며, 피어싱 오러를 휘감은 아론의 창은 비늘을 끊임없이 두들겼다.
■■■■-!
“겁먹지 마라!”
용이 피어를 내지를 땐, 어김없이 리하르트의 외침이 뒤따랐다.
카드득-!
얼마 지나지 않아 기드가 또다시 비늘 하나를 깨트렸다.
용은 죽을 맛이었다.
놈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반격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코앞에서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는 인간.
그에게 신경을 집중하면 다른 나약한 인간들이 쉼 없이 몸을 두드렸다.
별다른 위협이 안 된다고 한들, 자신의 육체에 손상을 입히려는 놈들을 당장 짓밟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면 눈앞의 인간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하니까.
감히.
인간 따위가.
어린 용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정확히는 마법이라는 이적을 행하기엔 아직 지혜가 여물지 못했다.
아직 놈은 지고의 생명체인 드래곤보다는, 마물에 가까웠다.
카각-!
기드가 땅을 박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창격이 등을 타오르고 비늘을 깨트렸다. 깨진 비늘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놈에겐 기회였다.
용이 고개를 한껏 젖혀 기드를 삼키려 들었다.
그 순간.
아래턱에서부터 끔찍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크라아악!”
어느새 놈의 몸을 기어 오른 리하르트가 상처투성이인 아래턱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홀리 오러가 억센 근육을 가르며 상처를 헤집었다.
“3소대, 돌격!”
잭의 외침에 스물의 기사가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용의 양 측면이었다.
그 와중에 기드가 놈의 등에서 공격을 쏟아부었다.
촤르륵-!
거체의 자유를 속박한 쇠사슬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 쇠사슬부터 끊어야 한다-
겨우 정신을 차린 용이 쇠사슬 하나를 짓씹었다.
그때, 부릅뜬 놈의 시야에 붉은 무언가가 가득 들어왔다.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흉터.
익숙한 얼굴.
붉은 오크가 도끼를 쳐들었다.
“취익! 죽어! 죽어어어!”
콰직-
용의 왼쪽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눈에서부터 느껴지는 격통에 용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아래턱에 통증이 일었다.
이번엔 피어싱 오러를 휘감은 아론의 창이 아래턱에 깊이 틀어박힌 것이다.
“3소대, 후퇴!”
전황을 살피던 폴크가 외쳤다.
탁월한 판단이었다.
쾅, 콰앙-!
기사들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용의 꼬리가 제 몸 양측을 번갈아 때렸다.
쿠구구-!
압도적인 마나가 용의 아가리에 몰려들었다.
물론 브레스라는 고절한 마법이 아닌, 무식하게 끌어모은 마나의 덩어리였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가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
“8번 발리스타, 발포!”
숲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콰앙-!
그 직후 굉음이 일었다. 전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설치된 발리스타의 발포음이었다.
흉악한 쇳덩어리가 마나를 가득 머금은 아가리를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쇳덩어리에 달린 사슬이 위턱과 아래턱을 휘감았다.
꽈아앙!
응축된 마나가 놈의 입 안에서 폭발했다.
용의 하나 남은 눈깔이 뒤집어질 듯 위아래로 요동쳤다.
“우오오오!”
그사이 분기탱천한 1소대가 끈덕지게 달라붙어, 비늘이 깨지고 드러난 상처를 찔러 댔다.
콰직! 콰지직!
등을 헤집던 기드는 어느새 왼쪽 옆구리를 맹렬히 강타하고 있었다.
용이 춤을 추듯 몸을 뒤틀어 댔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방심하지 마! 상대는 용이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악다구니를 쓰듯 외친 그가 놈의 몸을 다시 기어올랐다.
이미 난장판이 된 등판을 필사적으로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꾸준히 기드를 따랐다.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던 기드의 기운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불사지르던 그의 생명이 끝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전에 끝내야 해.’
아무리 놈의 체력을 깎는다 해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기드뿐이다.
기드가 쓰러지면 이 싸움의 결과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돌격!”
그 안에 끝장을 봐야만 한다.
이를 악문 기사단이 총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좀 더 기드가 편히 날뛸 수 있도록.
땅을 할퀴듯 휘두른 놈의 발톱 앞에 6소대, 방패를 쥔 중급 기사들이 달려들어 시간을 벌었다.
단 한 번의 여파로 그들은 멀리 나가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상급 기사로 이루어진 2소대, 3소대, 4소대는 한 몸이 된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용을 괴롭혔다.
막바지에 달한 기드의 공격은 더욱 막무가내가 됐다. 이성을 잃고 용을 사정없이 강타하는 그의 창격이 쇠사슬 여럿을 끊었다.
“13번 발리스타, 발포!”
그럴 때마다 또 다른 발리스타의 쇳덩이가 굉음과 함께 날아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랄 때는 아델의 나무가 솟아올라 녹색의 거체를 옭아맸다.
-크그그극!
쇠사슬에 감싸인 아가리 사이로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죽어어!”
리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마나는 진작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지금은 다시금 신앙으로 엮어 낸 오러가 깨어진 비늘 사이로 파고들었다.
기사들이 용을 흉내 내듯 포효를 내질렀다.
저 멀리 발리스타에 배치된 하급 기사들도 동참해 목청을 높였다.
승기는 기울었다.
용의 눈이 불안함을 가득 담고 사방을 훑었다.
이제 놈에게선 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을 오시해야 될 용이, 고작 이백의 인간 앞에서 겁먹은 도마뱀이 되고 만 것이다.
기사들은 승리를 예감하고 더욱더 가열차게 공격을 이어 나갔고, 복수의 화신이 된 휴거는 놈의 하나 남은 눈알을 마저 터뜨리려 도끼를 쳐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깨지기 전까지는.
◈ ◈ ◈
덜그럭-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뒤를 따라 격양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왕의 어둠이 온다!”
리치들에게서 기운이 솟구쳤다.
그 기운이 한데 모여 복잡한 수식을 이루자, 하늘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
이 참람한 세상을 검게 물들일 지옥문.
그 너머로 붉디붉은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39화. Episode. 14 등불 (2)
쩌적-
너무나도 불길한 소음이 모두의 귀에 틀어박혔다.
“뭐야, 이건…….”
폭풍같던 전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던 용도.
미친 듯이 창칼을 들이밀던 기사들도.
심지어 이성을 잃은 기드마저 몸을 바싹 굳혔다.
“으, 으으……!”
멈춰버린 전장에 아델의 신음 섞인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 푸른 하늘에 금이 갔던가.
“왜, 왜 균열이 벌써……!”
리하르트는 ‘저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이 사태는 결코 지금 벌어져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렷다.
- 우우우…….
음울하고 기괴한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균열 너머로 새빨갛고 커다란 눈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의 시선이 하늘 아래를 훑었다.
흡사 눈으로 맛을 음미하듯, 불쾌하고 끈적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지독스러운 기운이 온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아아!”
기사들이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렸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새어 나온다.
푸르렀던 하늘은 놈이 흩뿌린 마기로 검게 물들었다. 그건 마치 이 세상 전부를 제 영역으로 삼겠노라 선포하는 것 같았다.
“미친!”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니,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전투 중에 얼음 왕관을 떨어트렸던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올린 그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감촉. 얼음으로 이루어진 왕관은 온전히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그때, 폭급함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세상을 훑어보던 눈알이 멈췄다.
“아.”
리하르트와 괴물의 눈이 마주쳤다.
◈ ◈ ◈
- 우으……?
푸른 하늘이 균열을 중심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붉고 거대한 눈은 집요하게 리하르트를 응시했다.
리하르트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고 외쳤다.
“모두 정신 차려!”
그러나 기사들의 시선은 균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를 자극하는 마기에 정신이 먹혀 버린 것이다.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드!”
털썩-
기드가 무릎을 꿇었다.
담금질의 시간이 끝나고야 만 것이다.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는 탈색된 듯 순식간에 잿빛이 되어 버렸다.
거의 다 왔는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풀렸을 텐데.
단번에 기드에게 달려간 리하르트가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나 열기를 분출하던 몸이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아델!”
빨리 열매를 먹여야만 한다.
세계수의 열매도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는 없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외침에도 아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수인 만큼, 균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드를 등에 업은 그가 아델 앞으로 달려왔다.
“아델!”
“아, 아빠…….”
“우선 정신 차려.”
그녀의 양 뺨을 감싼 손에서 신앙이 빛을 발했다.
“부탁해. 기드를 살려 줘.”
다급한 리하르트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 바로 열매를 맺을게. 이 사람은 꼭 살릴 테니까…….”
“믿을게.”
아델을 뒤로한 리하르트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새빨간 눈은 아직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며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모두가 몸을 웅크리고 겁을 집어먹은 전장에서, 오직 그만이 움직였다.
‘우선 용을 죽여야 해.’
균열은 크지 않다. 세계와 마계 간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균열은 조금씩이나마 메꿔지고 있었다.
저 눈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덜덜-
리하르트는 새빨간 눈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검을 들었다.
고작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얼음 왕관과 신앙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졌을 것이다.
“크르르…….”
고개를 땅에 박아 넣은 용이 몸을 웅크렸다.
한껏 말려들어간 꼬리는 놈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우우…….
리하르트가 놈의 앞에 다가섰을 때, 기괴한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런 망할.”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쳐든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촤아악-!
시뻘건 핏물이 웅크린 용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균열 너머의 눈알에서 쏟아진 피눈물이었다.
-크, 크라아악-!
피를 뒤집어쓴 용이 울부짖었다.
무언가 불안하다.
저게 그냥 평범한 피일 리 없었다.
“제3기사단! 정신 차리라고!”
리하르트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헛수고였다.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론과 휴거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 미치겠군.”
리하르트는 용을 바라보았다.
녹색이었던 거체는 어느샌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광룡의 상징인 검붉은색.
쇠사슬이 끊어질듯 요동쳤다.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용이 포악한 기세와 함께 리하르트를 향해 포효했다.
위험하다.
정신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균열 저편의 시선도, 하나둘 쇠사슬을 끊어 내는 미친 용도,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리하르트는 신앙을 아낌없이 끌어올렸다.
‘생각하자. 방법을 생각해 내자.’
얼음 왕관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지금 싸울 수 있는 기사는 없어.’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포, 혼란.
이미 모두가 전의를 상실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은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균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지독스러운 기운은 ‘마기’였다.
마기 중에서도 진정 흉악한 마기.
현재의 인간들에겐 그것에 대한 면역이 전무했다.
■■■■■-!
광룡의 피어가 전장을 울렸다.
옴짝달싹 못할 땐 언제고. 피눈물을 뒤집어쓴 광룡이 쇠사슬을 단숨에 끊어 냈다.
광룡이 되며 더욱 강해진 것이 분명하다.
놈이 리하르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크라아아악!”
짓쳐 드는 발톱을 가까스로 피해 낸 리하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캉-!
공격은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리하르트는 물러서지 못했다.
“아론!”
애타게 아론을 불렀다. 휴거와 폴크, 잭을 연이어 불렀다.
답은 없었다.
“컥!”
용이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리하르트가 저 멀리 날아갔다. 몇 차례 땅을 구른 그는 한 기사 옆에 몸을 멈췄다.
“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는 리하르트에게 광룡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주변의 기사 또한 휩쓸릴 터.
“이봐, 얼른 물러나!”
“종말, 종말이야……!”
상급 기사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리하르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욱, 후욱……!”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최대한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게 지금 리하르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크라아아!
쿵- 쿵-
용이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광기에 잠식된 눈이 번들거린다.
- 끄흐.
하늘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리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살고 싶었다.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나 허무했다.
쾅!
떨어져 내려오는 용의 발톱을 겨우겨우 막아 냈다.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땅을 굴렀다.
“크으.”
한 차례 신음을 내뱉은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 도련님…….”
이번엔 아론의 앞까지 날아간 걸까. 고개를 돌리자 충성스런 직속 기사가 보였다.
툭, 그의 손을 잡은 리하르트가 신앙을 흘려 넣었다. 아론의 눈빛에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주변을 둘러본 그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아론. 너라도 도망가.”
“……제,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
아론은 리하르트의 뒷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을 쥐어 잡곤 광룡을 향해 덤벼들었다.
카각-!
용의 비늘 위를 창이 긁어 내려갔다. 미친 듯 난동부리는 광룡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아론이 눈짓을 보냈다.
제발 도망치라고.
정신을 놓았던 것을 속죄하듯 아론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창끝은 흔들리고 있었다. 억지로 밀어 냈던 두려움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다.
“취이이익!”
그때 휴거가 합류했다. 도끼로 제 허벅지를 찍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발악한 흔적이 남은 채였다.
콰드득-!
거대한 나무줄기가 솟아나 광룡의 아래턱을 찔렀다.
기드에게 열매를 먹인 아델의 지원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누군가가 리하르트 곁을 스쳐 지나갔다.
폴크와 잭이었다.
한 줌의 이성. 그것을 겨우 부여잡은 이들이 광룡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퍼억-
꼬리에 얻어맞은 잭이 땅을 굴렀다.
잭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푹-
휴거가 용의 발톱에 꿰뚫려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아…….”
곧이어 폴크와 아론도 당했다.
광룡이 아론을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 모습이 리하르트의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리하르트가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멈춰.”
저들이 죽는 게 두려웠다.
지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위선적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내 동료야.”
여태껏 잘 이해되지 않던 기사란 족속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들에겐 저마다 신념이 있었다.
‘이지훈’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내 것에 손대지 마.”
절망 가득한 최악의 상황.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강대한 적.
리하르트는 그 시련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검을 들었다.
자신이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해.
그때였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험의 각인이 개방됩니다.』
돌연 손등에 빛이 일었다. 육각형의 각인은 사라지고, 십자(十) 모양의 성흔이 자리 잡았다.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리하르트가 쥐고 있던 검이 둥실 떠올랐다.
드래곤 투스가 축이 되었다. 그 위를 신앙이 질주했다.
쿠구국-!
이윽고 완성된 검의 별.
데스나이트 때와는 달리 그것은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하지 못할 빛이 별에서 뿜어져 나왔다.
-우으으…….
세상을 내려다보던 눈이 동공을 확장시켰다. 광기에 휩싸인 광룡도 몸을 멈칫거렸다.
전장을 뒤덮은 공포를, 검성의 빛이 조금씩 몰아내고 있었다.
“이건…….”
드디어 각인을 개방했다.
멍하니 서 있던 리하르트가 검을 집었다.
‘힘이…… 넘쳐흐른다.’
감상을 늘어놓을 시간은 없었다. 신앙이 미친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으니까.
■■■■■■-!
광룡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모든 걸 뒤로하고,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꽈앙!
쩍 벌린 용의 이빨과 별이 부딪쳤다.
강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까드득-!
연이어 휘둘러 오는 발톱에 검을 마주 대었다. 거센 반발력과 함께 리하르트가 뒤로 밀려났다.
“크윽!”
치열한 대치가 이어지면 곤란한 것은 그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검성의 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단 한순간.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리하르트가 땅을 박찼다.
초집중이 발동된 그의 시계(視界)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찔러 들어오는 꼬리 끝을 피했다. 공간을 찢을 듯 할퀴는 발톱을 비껴 냈다.
마침내 드러난 것은 이제 약점이 된 놈의 아래턱.
집중적인 공세로 완전히 박살이 난 부위였다.
“흐읍!”
리하르트가 전력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별이 빛을 내뿜으며 솟구쳤다.
푹!
용이 고통에 찬 울음을 내뱉었다. 아래턱을 뚫고 들어간 별은 멈추지 않았다.
거침없이 입천장을 가르며 위로 나아갔다.
콰직!
그리고 마침내.
별은 광룡의 뇌까지 도달했다.
40화. Episode. 14 등불 (3)
쿵.
광룡이 뇌수를 뿜으며 쓰러졌다.
『강대한 적, 드래곤을 살해했습니다.』
『업적 달성 2/3』
나는 눈앞을 가리는 시스템 창을 치웠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 호…… 르……?
균열에 눈깔을 들이밀던 거대한 존재가 놀람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놈은 나를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끔찍한 존재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마왕.”
부정(不正)한 자들의 왕이요, 병든 숨결을 내뱉는 역병 군주이자, 더러운 기생충을 품은 괴물.
현기증이 일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눈앞이 흐려졌다.
그것이 놈의 시선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용과의 싸움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꽉 그러쥐었다.
“뭘 꼬나 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덤덤한 표정으로 놈과 마주했다.
고작 눈깔 하나 본 것으로 마음이 꺾여선 안 됐다.
콰드득-
그사이 균열이 서서히 닫혀 갔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이 어째서 불완전한 균열을 열어 가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 것이다.
‘신이 사라진 세계다, 이거지?’
놈에게 이곳은 호화스러운 만찬장이었고, 주인 없는 보물단지였다.
어서 손에 넣고 싶은 갈급함을 못 이겨 침이라도 발라 놓을 생각이었겠지.
인간들이 저항할 의지조차 품지 못하도록, 놈은 이 세계에 진득한 공포를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근데 너, 실수한 거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급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 겁을 집어먹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떨까.
지금 대륙은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까.
사람은 힘들 때 비로소 신을 찾는다.
역설적이게도 놈의 등장으로 호르교의 세를 펼칠 무대가 준비되었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그만 꺼져.”
- 우, 으……!
콰득-!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균열이 닫혔다.
하나 구멍이 메꿔진 하늘은 아직도 시커먼 마기가 잔류하고 있었다.
털썩, 돌연 뒤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땅바닥이 보였다.
아, 쓰러진 거구나.
긴장이 풀린 걸까.
그대로 눈이 감겼다.
◈ ◈ ◈
제3기사단은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심연을 마주했던 공포는 가시질 않았으나, 애써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해 가며 움직였다.
그 원동력은 리하르트의 검에 있었다.
“빛…….”
새까만 색의 드래곤 투스에 희미한 빛무리가 남아 있었다.
신앙으로 타올랐던 별의 잔해였다.
하지만 기사들에겐 그것은 등불이었다. 작디작은 불씨가 어둠을 몰아낸 것이다.
“휴거! 당신 괜찮소?”
“취익…… 용, 용은 죽었소?”
“도련님께서 처리하셨소.”
“그렇소……? 낄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오.”
“헛소리 말고 쉬시게나. 포션을 줄 테니.”
부상자들이 하나둘 수레에 실려 나갔다.
놀랍게도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델이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아빠.”
그녀가 멈춘 곳은 리하르트의 앞이었다.
조막만 한 손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죽은 사람은 없어. 아빠가 말한 노인도 목숨은 무사해. 바로 일어나진 못하겠지만.”
왜냐면 내가 열매 조각을 남겼거든-
뒷말을 삼킨 그녀가 손에 쥔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다.
‘정수’와 ‘생명’이 조합된 그것은 일 년에 단 한 번 맺을 수 있는 보물이었다.
“아빠한테도 이게 필요할 거야.”
아델은 고운 나뭇잎으로 부스러기를 감쌌다. 그러고는 리하르트의 품속에 넣었다.
“나 잠 좀 잘게. 두고 가면 안 돼!”
풀썩-
쓰러진 그녀의 몸이 반투명하게 물들었다.
◈ ◈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전투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들 정수리를 보여 주는 거야?”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허리까지 접어 사과하는 걸까.
기사들 중에는 아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불안한 마음이 싹을 틔웠다.
혹시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닌지.
“기사가 되어 모시는 자를 지키진 못할망정, 겁에 질려 도련님 홀로 위험에 맞서게 하는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벌하여 주십시오!”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난 또 뭐라고.
“됐어. 그건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였지.”
“하, 하오나!”
나는 기사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아직 혼란과 공포는 남았지만, 그때처럼 희망까지 저버리진 않은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회복이 되었나 보군.’
그 경지가 하급이든 상급이든, 모두 바텐베르크의 기사다. 하나같이 심지가 범상치 않은 이들이란 뜻이었다.
“……하나 묻지.”
“하명하십시오!”
문득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의 말투는 집어치우고,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내가 왕족인가?”
“왕족보다 더 고귀하고 영광스런 바텐베르크의 혈통이십니다.”
“그 고귀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이 어디에서 기인해 온 것이지?”
그러자 기사 하나가 대뜸 답했다.
“바텐베르크의 업적과 무(武)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화초 취급하는 거냐. 바텐베르크가 너희에게 있어 지켜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따라야 할 대상인가?”
간만에 후광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빛에 기사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난 내친김에 검까지 뽑아 치켜세웠다.
“내 앞에 서려 하지 마라. 너희는 나의 뒤를 따라라. 어둠이 몰아치거든 내가 등불이 되어 줄 터이니.”
말을 마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저 혼자 분위기에 심취해 낯부끄러운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어 버렸다.
그런데 기사들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등불!”
“우리의 등불!”
사내들이 굉장히 감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럽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 빛을 똑똑히 보아라! 추악하고 역겨운 기운을 몰아낼 등불이다!”
“오오오!”
기사들이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깊어졌으며, 경외가 일렁였다.
‘이만하면 쇼는 성공이지.’
저들에게 있어 나는 지켜 줘야 할 철부지 도련님이 아니라, 믿고 따를 수 있는 주군이어야 한다.
지금은 딱 그 정도가 적당했다.
나는 좌중을 훑어보다가 무리를 해산시켰다.
우르르 몰려 왔다가 우르르 흩어지는 기사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아론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휴거까지 얼굴을 비췄다.
“너희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내 생명줄이 꽤 질긴가 보오. 취익.”
그들은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었었다.
아론이야 용의 아가리에 들어갔다 나왔고, 휴거는 복부를 꿰뚫렸으니까.
그들이 무사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발락 경의 검술을 깨우치신 것,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정말 굉장했소! 내 태어나서 그런 것은 처음 봤구려.”
“아.”
그러고 보니 나, 각인을 개방시켰구나.
눈 뜨자마자 정신이 없던 탓에 잊고 있었다.
손등을 내려다보자 십자(十) 형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성흔, 별의 흔적이라 했던가.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쿠구국-!
들어 올린 손 위로 마나가 뻗어 나갔다.
“오오!”
휴거가 야단법석을 떨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제 할 일을 하던 기사들도 별에 시선을 빼았겼다.
“음.”
확실히 크기는 좀 작다.
용과 싸울 때보다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아마 신앙이 아니라 신성력으로 빚었기 때문일 터.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힘이었다.
“어째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려. 그 무시무시한 눈알이 나타난 뒤부터 숨이 턱턱 막혔는데, 지금은 조금 옅어진 느낌이오. 취익!”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눈을 화등잔 만하게 키운 아론과 휴거가 연신 감탄했다.
“대충 이 정돈가.”
서둘러 힘을 갈무리했다.
역시 유지하는 데에 오러보다 더 많은 신성력이 소모되었다.
발락에게 제대로 된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거기에 드래곤 하트까지 섭취한다면 별 무리 없이 검성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아론을 향해 물었다.
“기드는 어디 있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아론의 뒤를 따라 막사에 들어섰다.
그곳엔 노인 하나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야윈 몸.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거지?”
“예.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하셨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다행이다.
애써 덤덤히 답하는 아론의 말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도 날이 다르게 육체가 회복되고 계십니다.”
“그렇군.”
기드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뭐가 좋다고 담금질까지 해 가며 무리한 건지.
아직도 그가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보답은 한 거다.’
가치로만 따지면 드래곤 하트보다도 더 대단한 것이 세계수의 열매였다. 그런 보물을 먹었으니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전성기 시절의 육체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델은 어디 있지? 안 보이던데.”
“그것이…….”
아론이 말을 골랐다.
“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걸까. 말끝을 흐리는 아론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론이 향한 곳은 또 다른 막사였다.
“……이런.”
그곳엔 아델이 누워 있었다. 작고 가냘픈 체구가 당장 사라질 것처럼 반투명해진 채로.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이 상태입니다.”
무리를 한 건가. 열매를 맺는 것은 쇠약해진 아델로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기드를 살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정작 자기가 쓰러져 버렸다.
힘이 부족했으면 나한테 신앙을 더 달라고 하던가.
『세계수 - 아델가르텐에게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아델의 팔목을 잡고 신앙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반투명해진 몸이 살짝 색을 되찾은 것 같았다.
“수고했다. 아델.”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였다.
상태를 보니 당분간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델에게 정말 큰 빚을 졌군요. 혹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아론이 내게 물어 왔다.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꽤 고심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엘프 만나면 살갑게 대해 주기나 해.”
“예?”
“엘프와 세계수의 관계는 특별하니까. 저번처럼 으르렁거리지 말란 소리야.”
언젠간 엘프도 일행에 합류할 거거든.
나는 뒷말을 삼키곤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용의 사체는?”
“우선 심장만 뽑아 놓았습니다. 나머지는 부르트 왕국과 협력해 바텐가로 운송할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자리에서 드래곤을 도축하려면 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용은 어디 하나 버릴 구석이 없는 존재이니까.
“고기 파티는 못하겠네. 기사들이 아쉬워하겠어.”
“어쩔 수 없지요. 광룡을 먹는다는 게 영 찝찝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론의 얼굴도 내심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입맛이 쓰다.
“뭐니 뭐니 해도 집밥이 최고지. 안 그래?”
“그 말씀은……?”
“돌아가자. 바텐가 요리사한테 진수성찬을 준비하라고 일러야겠어.”
용의 고기만큼은 아닐지라도, 바텐가 요리사의 실력은 내가 보장하는 바다.
연회로나마 우울해진 기사단의 마음을 달래야겠다.
41화. Episode. 15 환골탈태 (1)
4일 뒤.
홉슨 산맥 근처에 위치한 부르트 왕국에서 자국의 기사단을 보내 왔다.
“이야, 뭘 이렇게 많이 챙겨 왔대?”
고급진 마차 두 대와 수레까지 잔뜩 끌고 온 기사들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저희가 압박을 좀 넣었지요.”
옆에서 잭이 으스댔다.
바텐베르크가 부르트 왕국의 큰 우환이었던 드래곤을 토벌해 주는 것이 이번 임무였으니까.
그것참 뜯어먹기 괜찮은 명분이다.
“짐을 실어라!”
폴크의 지시에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왕국에서 가져온 커다란 수레에 용의 사체를 실었다.
저놈을 네 등분으로 토막 내느라 몇 날 며칠을 고생했던가.
비늘이야 기드 덕에 깨진 곳이 있다 쳐도, 뼈를 가르기 위해선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대 바텐베르크의 자제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흡사 용역 현장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와중,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부르트 왕국의 강철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파비안 뮐러라고 합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썹이 부리부리한 것이 척 봐도 군인상이었다.
‘그런데 기세는 영 아니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부르트 왕국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죽어 있었다.
그 꼴이 꼬리를 만 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의 공포는 바텐베르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도처에 깔린 마왕의 마기 때문이었다.
고작 눈 하나.
고작 몇 분.
아주 잠깐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 마왕은, 대륙 전체에 제 마기를 흩뿌렸다.
하늘은 오물이 묻은 듯 시커매졌고, 땅엔 마기로 인한 공포가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난세가 도래한 것이다.
“흙먼지가 일고 있습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나는 아론의 권유에 따라 마차로 향했다.
“기드는 다른 마차에 싣고, 아델은 나랑 같은 마차에 실어 줘.”
“알겠습니다.”
아델은 내 곁이 가장 정기가 넘쳐서 좋다 했으니, 붙어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더 빠르게 기운을 차릴 것이다.
나는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스노우폴은 괜찮으려나.’
평균 1,500의 신앙이 들어오던 것이 균열 사태 이후로는 2,000 즈음으로 껑충 뛰었다.
신에게 더욱 의지하는 것을 보아, 그곳 주민들도 혼란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일 터.
‘조만간 불러들여야겠어.’
안타깝게도 신도를 더는 놀게 둘 수는 없었다.
특히 그곳에는 유능한 인재인 전도사가 있으니까.
이제 슬슬 뼛속까지 부려 먹을 때가 왔다.
“도련님. 짐은 다 실었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어차피 용의 사체를 비롯한 갖가지 짐은 강철 기사단에서 끌고 가기로 했다.
나는 기사들에게 최단거리로 달릴 것을 명했고, 그들은 내 명에 착실히 따랐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혀를 찼다.
“엉망이군.”
눈에 보이는 초목은 죄 죽어 가고 있으며, 짐승들마저 지독한 마기에 움츠러들었다.
균열이 열린 시간은 고작해야 10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여파가 이렇게나 대륙을 괴롭히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라.”
아델에게 신앙을 불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세계수라는 존재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으니, 세상이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 ◈ ◈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와 제3기사단은 한 대도시에 도착했다.
“여기는 왜?”
“이쪽이 최단 거리라, 곧바로 가로질러 갈 셈입니다.”
아론이 우직한 얼굴로 답했다. 이런 대도시를 사전 통보도 없이 가로지를 수 있는 세력은 바텐베르크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북대륙의 깡패다.
“그나저나…….”
이곳도 엉망이었다.
창밖에 비친 대도시의 정경은 내 예상과 딱히 틀리지 않았다.
거리에 나와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주민들.
눈가가 퀭하고 피부는 창백했다.
마음속에 공포와 혼란이 가득한 모양새였다.
“으아앙!”
이쪽을 바라보던 어린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서슬 퍼런 기사들의 모습이 퍽 무서워 보였던 걸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더욱 겁을 준 꼴이 되었다.
으음, 그냥 지나치기엔 울음을 터트린 꼬마가 영 신경 쓰이는데.
“잠깐 멈춰.”
나는 마차를 세웠다.
끼익, 문을 열고 나서자 주민들이 술렁거렸다.
“리, 리하…… 흡!”
누군가가 내 얼굴을 아는지,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헉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을 터트렸던 아이의 어머니는 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누굴 잡아먹기라도 했나.
나는 아직도 저들에게 망나니인가 보다.
짧게 한숨 쉬곤 마차에 꽂아둔 바텐베르크의 깃발을 집었다.
『해당 물체에 1,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바텐베르크의 문양인 검을 품은 태양.
세계의 하늘을 뜻하는 그림이 빛을 발했다.
“아…….”
주민들이 입을 헤 벌린 채 깃을 바라보았다.
콰득!
나는 깃발을 뽑아 땅에 박아 넣었다.
조금이나마 저들에게 도움이 될 터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가자.”
마차에 다시 올라타며 출발할 것을 명했다.
“이 도시를 정복하겠다는 포부 아닙니까?”
창밖에서 아론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정말 모양새가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영지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다른 가문의 깃발이라.
이곳의 영주에겐 미안하지만 별 뜻이 없음을 알아 줬으면 좋겠다.
“다들 잘 보아라! 이 빛이 바텐베르크의 등불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다! 리하르트 도련님의 배려에 감사하라!”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제3기사단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 그냥 두시지요. 저들 나름대로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겁니다.”
“아닌 거 같은데. 저놈들 콧대를 봐라. 빨리 출발시키자.”
곧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도시를 가로질렀고, 평야를 내달렸다.
나와 기사들은 스쳐 지나가는 주변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았다.
◈ ◈ ◈
언제였던가.
주둔지에서 기사들이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하늘이 깨지고 나타난 그 괴물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래서 아는 대로 답해 주었다.
그놈은 마왕이라고.
지금 대륙에 자리 잡은 리치 놈들은 지금 균열을 열기 위해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그럼 그 마왕이라는 괴물이 다시 나타나는 겁니까?”
“그래. 그때는 완전히 끝나는 거지.”
성마대전에서 놈은 용사들에게 패해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이후로는 마계에 처박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달라.’
마왕은 상처 때문에 약해져 있어야 한다. 내 기억상으론 그게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잠시나마 균열이 열렸을 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성마대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다.
‘이유는…….’
마기를 억누르는 신성이 없어졌으니, 마왕의 힘이 더욱 커진 것일 터.
생각지 못했던 변수에 골치가 아팠다.
과연 마왕이 내 기억대로 움직일까?
리치, 마룡, 악마 군단…… 대륙을 덮칠 커다란 위협들이 그대로일까?
결코 아니다.
그 재앙들은 더욱 강대해진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마왕의 마기가 짙어질수록 그 수하 또한 강해지는 법이니까.
더 이상 내가 아는 미래를 맹신할 수 없었다.
더불어 신경 써야 할 것은 마계뿐만이 아닌, 마르크스 가문의 그 녀석도 있었다.
사방에 적이 도사리고 있다.
문득 그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와 속이 갑갑했다.
그때, 기사들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 어떤 괴물과 대적하든, 저희 제3기사단은 도련님과 함께하겠습니다.”
“뒤를 따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음엔 결코 떨고 있기만 하진 않을 겁니다.”
기사들이 말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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