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4
처음엔 별것 아닌 줄 알았더니,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무척 고되고 난이도 높은 수련법이었다.
그런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마나 컨트롤이 꽤 달가웠다.
신앙을 투자하며 수련을 이어 나가면, 더 빠른 시일 내에 A랭크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려 아론을 살폈다.
이를 악문 채, 실에 마나를 부여하는 아론의 온몸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픽-
어렵사리 고개를 치켜들던 네 가닥의 실이 털썩 쓰러졌다.
두 달 안에 오러를 다뤄야 한다.
아론이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할 터.
잠시 그를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레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레오 경.”
“예.”
“잠깐 장소를 옮기시죠.”
26화. Episode. 09 루드비히의 오른팔 (3)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제 방으로.”
나는 레오와 함께 개인 연무장을 벗어났다.
어차피 내 마나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으니, 사실상 오늘 수련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론은 오늘도 연무장에서 밤을 지새울 거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고 수련에 매진하는 그였다.
“아론의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뒤에서 따라오던 레오가 내게 물어 왔다.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씩이지만, 그 또한 확실히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별로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론을 믿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래의 창귀를 걱정한다니. 그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을 것이다.
“드시지요.”
레오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의자에 앉히곤, 책장 옆의 책상에 다가갔다.
분명 여기에 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책상의 서랍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치를 즐기던 예전의 리하르트가 비싼 돈 주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공예품.
아티팩트가 아닌, 정말 예쁘기만 한 쓰레기였다.
“으음?”
난데없이 반지를 꺼내 든 모습에 의아해하는 레오를 뒤로하고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슬슬 이야기를 해 볼까.
“삼 주…… 아니, 이 주 뒤에 일이 있으시다고.”
“그렇습니다만.”
“혹, 제1기사단이 리치 추적에 나서는 겁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시기에 기사들과 세 리치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
레오는 말이 없었다.
툭, 툭-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둥그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제 임무를 발설하고 다니는 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뭐가 그리 비밀스러운 거라고. 저도 놈들의 수하에게 습격을 받았던 입장입니다.”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며 레오를 빤히 응시했다.
입을 꾹 다물었던 그가 한숨을 내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마계에서 넘어온 리치들과의 전쟁은 머지않아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게 큰 기회였다.
“설마, 임무에 동참하시려는 겁니까?”
레오가 질색하듯이 물어 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몸이다.
굳이 결전도 아닌, 추적에 낄 이유는 없었다.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상태창을 펼쳐 보였다.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12,832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남은 신앙이 1만 2천이라…….’
일일 평균 1,500의 신앙이 적립되니,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이후론 신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이젠 마나 컨트롤의 숙련도에도 투자해야 하고, 여행길에 올랐을 때를 대비해 비축도 해야 했다.
물 쓰듯이 펑펑 쓸 수는 없는 노릇.
“흐음…….”
손에 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얼마큼이 적당하려나.
“왜 그러십니까?”
“반지, 좋아하십니까?”
“예?”
그의 시선이 반지를 향했다.
“뭐…… 아티팩트라면 착용하겠지만, 일반 장신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제 비밀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비밀 말입니까?”
레오의 눈빛이 삽시간에 반짝였다.
나한테 궁금한 것이 그렇게나 많았던 걸까.
“마나 불감증을 완치시킨 비결이라도 알려주시는 겁니까?”
“…….”
“아니면, 그 망나니 같은 성정이 변한 이유라도?”
말실수를 아주 부담 없이 하는군.
“……둘 다 포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나는 레오의 몸에 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미량의 신앙을 밀어 넣었다.
“제 성격이 변한 것, 마나 불감증을 치료한 것. 모두 이 힘과 관련이 있습니다.”
“……!”
레오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에 흘러들어간 신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마나는 아니군요. 대체 뭡니까?”
‘설마, 새로운 이능입니까?’ 라고 레오가 쉴 틈 없이 물어 왔다.
이능이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물음에 지금 당장 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한 결정이랄까.
기사라는 놈들이 얼마나 꽉 막혔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을 믿는 건 나약하단 증거니, 뭐니.
참으로 웃기지도 않지만, 종교를 향한 이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감화시켜야 했다.
나는 반지를 쥔 손에 신앙을 끌어올렸다.
그것도 아주 듬뿍.
『해당 물체에 1만 포인트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지이잉-!
빛을 한 움큼 머금은 반지가 부르르 떨었다.
한순간에 커다란 지출을 해 버렸다.
그래도 이게 전부 미래를 위한 투자 아니겠는가.
“앞으로 이 반지를 매일, 빠짐없이 착용하십시오.”
빛나는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레오에게 말을 건넸다.
“제1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할 때에도, 리치의 추적에 나설 때에도.”
신앙을 줄기차게 흘려 대는 반지는 착용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불어 리치들의 이목을 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미끼겠지.
“다시 만나는 날까지 그리하신다면, 그때 이 힘에 관련된 것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땐, 정말 많은 것이 바뀔 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답은 없었으나 나는 확신을 가졌다.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호기심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삼 주가 지났다.
정말 쏜살같다는 말이 어울리는 나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눈을 뜨면 실을 쥐었고, 눈을 감았을 때에도 실을 쥐고 낑낑대는 꿈을 꾸었으니. 하루하루 밤낮없이 지새운 기분이었다.
“집중하십시오, 집중.”
아마 이 삼 주 동안 레오가 가장 많이 내뱉은 단어는 집중일 것이다.
정작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바로 그거였는데.
『특기 - 초집중 발동.』
양손에 쥔 새까만 실 가닥들.
하도 많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이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그것들이 꿈틀거렸다.
‘아직이야.’
신성력이 조심스레 마나 루트를 타고 올라왔다.
금세 손끝까지 도달한 힘은 제 짝을 찾듯 수십 갈래로 나뉘어, 실 한 가닥 한 가닥에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휘릭-
처음엔 열 가닥, 다음엔 서른 가닥.
그리고 그다음엔 손에 쥔 실들 전부.
양손 도합 백팔십 가닥의 실이 허공을 수놓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중간에 엉킨 것들도 많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레오가 말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공중에서 실이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컨트롤이 미숙하다는 겁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솟구쳤던 실들이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보란 듯이 오러를 들이밀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아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 이 개망나니 같은 마나를 다루는 데에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일주일 전, 아론이 대뜸 눈을 빛내며 했던 말이었다. 과연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그 이후로 성장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휘릭-!
몇 가닥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실을 허공에 띄울 정도였다.
수련 초반에 현저하게 벌어졌던 나와의 격차를 순식간에 좁힌 것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마나 부족으로 피를 토해 가며 수련한 결과였다.
마나 루트가 개발된 덕도 컸지만, 그만의 근성과 재능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리라.
“좋습니다. 좋아요.”
레오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손뼉을 쳤다.
“그래도 제가 떠나기 전에 두 번째 단계를 알려 드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진심이라는 듯 활짝 웃던 그가 내게서 실을 받아 갔다. 하도 쥐어 대서 닳고 닳은 실의 끝자락을 내려다본 레오가 마나를 일으켰다.
“잘 보십시오.”
그가 쥔 실 가닥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새까만 가시 수십 개를 쥐고 있는 듯한 모양새.
대체 얼마나 정순한 마나, 얼마나 굉장한 컨트롤을 갖고 있어야 저런 기행이 가능한 걸까.
과연 기사단장이라는 감투를 허투루 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허공에 솟구쳤던 실가닥이 몸을 뒤틀었다.
순간 그의 마나가 흐트러진 걸까 싶었는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마나 수십, 수백 가닥을 엮어 날을 벼리는 것이 오러입니다.”
서로 엉키고, 서로 엮인다.
양손의 실들이 한데 엉켜 기다란 실 뭉치를 만들어 냈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뭉쳐진 것 같지만,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두 번째 단계, 실 엮기입니다. 크리프의 실로 이 정도가 가능하다면, 기초적인 오러는 엮어 낼 수 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보는 입장에선 그저 신기하고 특이한 묘기였다.
그런데 저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속이 쓰려 왔다.
그냥 신앙으로 무식하게 숙련도를 올릴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앙에만 의존하는 건 효율이 안 좋아.’
직접 몸으로 하는 수련이 병행되어야만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레오가 빙긋 웃으며 은근히 도발하는 어조로 물어 왔다.
“도련님.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이 호기심의 화신은 상당히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슬아슬하게 사람 속을 긁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그를 바라보다가, 아론의 반응이 궁금해 시선을 옮겼다.
“오오. 아주 불타오르는구먼.”
레오의 실 뭉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모습에서, 기필코 해내고 말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엘프의 숲으로 향하기로 한 날이 앞으로 한 달.
그 안에 저 단계까지 오르지 못하면 오러를 다룰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 없던 의지라도 불태워야 할 것이다.
나도 놀 수만은 없지.
“하하, 반년은 실을 붙잡고 있어야 몇 가닥 꼬기라도 할 겁니다!”
그 모습에 레오가 방정맞게 웃으며 말했다. 콧대가 한껏 높아진 게 어지간히 우쭐해진 모습이었다.
“반드시! 한 달 안에 해 보이고 말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아론이었다.
아론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곧바로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잠시 아론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레오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뵙지 못하겠군요.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도련님.”
“다음에 만났을 땐 훨씬 더 즐거울 겁니다.”
연무장 벽에 등을 기댄 레오가 씨익 웃었다. 꽤 기대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궁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그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투박한 손가락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반지가 꿰여 있었다.
이 주 전, 그는 내가 내민 반지를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에 끼우고만 있으면 될 일이니까.
부정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반지를 찬 이후로 달라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몸에 활력이 넘친다든가, 운이 좋아졌다던가,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아, 그렇습니까.”
과연 1만 신앙을 투자한 게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레오는 반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간에 단 한 번이라도 반지를 빼면 안 됩니다.”
제1기사단이 맡은 임무는 세 리치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
어쩌면 반지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지도 몰랐다. 고유 이름을 가질 정도의 리치들이라면, 반지 안에 담긴 신앙을 똑똑히 느낄 테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였다.
“제1기사단의 앞길에 언데드가 수없이 들이닥쳐도 말이죠.”
“하하! 임무를 나가는 사람한테 불길한 소리를 하십니다?”
레오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내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봤다.
레오는 그제야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깟 언데드 따위, 바텐베르크의 검 앞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지요.”
“좋습니다.”
리치들이 신앙을 느끼고 달아날 일은 없다. 그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까.
“그럼 다음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레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연무장을 나섰다.
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론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까지 대략 한 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비단 아론뿐이 아니다.
숲을 둘러싼 마경을 뚫기 위해선 나 또한 최대한 아등바등 강해져야 했다.
27화. Episode. 10 마경으로 (1)
레오를 필두로 한 제1기사단.
바텐베르크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막중한 임무를 떠안고 말을 몰았다.
“마지막으로 위치가 파악된 곳은 바렌 왕국의 하이텔 자작령.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향한다.”
바텐가의 영지를 떠나, 도시와 마을을 수차례 건넜다.
리치가 발견되었다는 곳들은 하나같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니, 놈들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고 다녔는지는 명확했다.
“더러운 마족 놈들이 왜 넘어와서 행패인지, 나 참.”
기사단의 막내, 애드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은 참혹, 그 자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듯 거무죽죽하게 물든 땅.
역한 시체 썩은 내가 코를 찌르는데, 정작 그 시체는 온데간데없었다.
“단장! 놈들이 언데드 병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임마, 단장이 그걸 모르겠냐!”
대단한 것을 깨달은 양 외치는 막내에게 고참 기사가 면박을 주었다.
폐허에 내려앉은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이 고달플 텐데도, 그들의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단장, 혹시 무슨 페로몬 향수라도 뿌린 거요? 괜스레 단장을 보니 심장이 뜁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몇 주 전부터 달달한 향이 나는 것 같은데, 자꾸 시선이 가지 뭡니까!”
일행의 최선두를 달리는 레오에게 단원들이 농을 건넸다.
“왜,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것 같은가?”
그를 받아치는 레오의 입가에도 장난기가 다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과 주의는 날카롭게 곤두섰으니, 임무를 대하는 자세가 풀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장이 정말 페로몬 향수를 뿌렸나 본데.”
애드런이 담담히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1기사단의 시선이 향한 것은 전방 1시 방향.
그쪽에서부터 죽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 준비!”
기사들이 침착하게 기세를 끌어올렸다.
하루에 한 번 꼴로 놈들의 습격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당황할 것도 없었다.
“보나 마나 또 단장만 노릴 테지, 낄낄!”
아무래도 단장이 언데드의 취향에 맞나 봅니다? 라며 농담을 지껄이는 애드런.
그의 검에서 오러가 넘실거렸다.
아무리 막내라고 한들, 그는 바텐베르크 최고 전력의 일부를 담당하는 기사였다.
26살의 나이에 상급의 격에 올랐으니 그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
그런데 그는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고달파지겠네.”
미친 듯 달려오는 수십의 언데드 무리.
그 뒤편으로 다시 수백여 마리의 언데드가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머금어 창백해진 피부에, 썩은 눈두덩이에선 불길한 안광이 일렁인다.
죽었으되 죽지 않은 괴물들.
“오크, 트롤, 오우거…… 빌어먹을 놈들이 죽어서도 민폐를 끼치는군.”
“애드런, 쫄았으면 뒤로 빠져라!”
“누가 쫄았다는 겁니까!”
기사들이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명을 하달받아 바텐베르크를 나선 지 한 달여.
하루가 멀다 하고 습격해 오는 언데드는 생각보다 많았고, 이미 폐허가 된 마을들은 보고받은 것보다 심각했다.
‘놈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인데.’
바텐베르크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활개를 쳤을 줄이야.
아마 가주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리치의 손길이 닿은 곳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레오가 침음성을 흘렸다.
놈들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서둘러 대비하지 않으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 ◈ ◈
두 번째 단계의 수련법을 알려 준 레오가 떠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다른 말로는 나와 아론이 엘프의 숲으로 향하기로 한 날까지 딱 하루가 남은 상황이었다.
“기어코 해냈구나.”
눈앞을 어지럽히는 보라색 오러가 피부를 따끔하게 찔러 왔다.
“……예!”
우직하게 답하는 아론의 뺨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직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힘든 모양이지만, 정말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다.
그의 창끝에 보라색 오러가 맺혀 있던 것이다.
저 혼자 폐관 수련을 하듯, 보존식을 잘근잘근 씹으며 수련에 수련을 반복하던 그다.
기드의 손자 아니랄까 봐, 하마터면 그 또한 담금질에 들어선 줄 알았다.
“마나 루트가 변한 것과 제1기사단장님의 수련법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꿨을 겁니다.”
“그런 거 없어도 언젠간 닿았을 경지였어.”
겸손을 떠는 아론에게 답했다.
실제로도 내가 아는 그는 피 튀기는 전장에서 오러를 깨우쳤다.
다만 그 시작이 훨씬 앞당겨졌으니, 아론의 가능성은 실로 무궁무진해졌다.
“갑니다.”
그가 돌연 자세를 갖췄다.
나를 향한 창끝의 오러가 불길하게 꿀렁거렸다.
레오는 아론의 오러를 보곤 사납고 흉폭한 마나라 했다.
정말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오러의 형태로 빚어진 아론의 마나는 독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와 봐.”
나 또한 검을 치켜세웠다.
아론이 수련하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고오오-
수십 갈래의 빛이 검날을 타고 올라왔다.
이내 그것들이 하나둘 엮이더니, 날카롭게 날이 벼려졌다.
마나 컨트롤의 숙련 A랭크를 달성한 날 얻었던 특기, ‘홀리 오러’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설마 나도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될 줄이야.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신앙을 소모하게 되었다지만, 어찌 되었든 엄연한 오러 아닌가.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뒤로하고 아론을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보랏빛 궤적이 다가왔다.
그의 공격에 맞춰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앙!
소검궁 지하의 개인 연무장에 굉음이 울려 퍼지며 흙먼지가 일었다.
욱신거리는 손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겼어.”
“제가 이긴 것 아닙니까? 수련검이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습니까.”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제야 내 손에 들린 수련검이 보였다.
검날 부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게 정말 산산조각이 난 모양이다.
무엇이든 꿰뚫는 아론의 특성.
피어싱 오러와 마주한 결과였다.
“네 창은 어떻고?”
아론의 창은 절반 이상이 곧게 갈라진 채였다.
제 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힘줬으면 네 손도 같이 갈라졌을걸.”
“저도 중간에 창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떤 참상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아론이 그답지 않게 자존심을 부린다.
그래. 속을 썩이던 오러를 이제야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쁠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줘야겠지.’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아론이 표정을 굳히고 다가왔다.
“도련님.”
“응?”
그가 서서히 무릎을 꿇고, 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텐베르크의 제3기사단 소속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 비록 상급 기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 격을 갖춘바. 약속에 따라 리하르트 바텐베르크의 직속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스노우폴을 떠나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했던 기사 서약이었다.
마음 같아선 호화롭게 서약식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아론을 일으켜 세웠다.
“잘 부탁한다.”
◈ ◈ ◈
“내일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말이냐.”
보고서에 눈을 떼지 않던 가주가 되물었다.
“귀곡성을 흘리는 숲으로 갑니다.”
“……마경을 말하는 것이냐?”
그가 그제야 내게 시선을 돌렸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보아하니,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허한다.”
“어째서 말입니까?”
“네 실력으로 가 보았자 목숨만 낭비할 뿐이다.”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더구나 리치들이 어둠을 몰고 왔다. 그런 상황에서 마경이라니, 당치도 않다.”
“놈들과 얽힐 일은 없습니다.”
지금 시기라면 리치들은 북대륙 중에서도 남측의 왕국에 똬리를 틀었을 터.
바텐가보다 북쪽에 있는 마경과는 동선이 겹치지 않았다.
“네놈 혼자서 마경으로 향하겠다는 게냐.”
“아론 마이어도 함께입니다.”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텐베르크의 지원은 기대 말라고 했을 터인데.”
“그는 오늘부로 서약을 맺어, 제 직속 기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텐베르크의 기사이기 전에, 제 기사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는 내 기사를 데려가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
가주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이 아저씨가 그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건지.
“저 또한 적지 않은 성취를 이뤘습니다.”
허리춤에 찬 아이스 크레센도를 뽑아 들었다.
새하얀 검날에 더욱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미숙하게나마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오.”
조금이나마 감탄하는 가주를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간의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혹여 그 앞에서 오러를 뽐낼 일이 있을까 싶어, 아이스 크레센도를 챙겨 온 것이 나름 선견지명이 되었다.
“정말 미숙하기 짝이 없는 오러군.”
감탄할 땐 언제고.
가주는 곧 허가를 입에 담았다.
사실 내가 갈 곳은 마경 속 엘프의 숲인데.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날 집 안에 가둬 두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땐 드래곤 하트와 기드도 함께일 겁니다.”
처음엔 사람 숨을 턱 막히게 했던 가주의 기세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너스레를 떨었다.
“흥.”
건방지다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던 그는 코웃음을 한번 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때를 맞춰서 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주가 어디선가 커다란 목함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드워프들이 보내 온 물건이다.”
“……!”
꿀꺽, 침이 삼켜졌다.
지난 두 달간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었다.
◈ ◈ ◈
독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웬 쪽지가 와 있었다. 스노우폴에 두고 온 메리에게서 온 것이었다.
[호-르! 리하르트 도련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스노우폴은 오늘도 하얀 눈이 내린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자기는 스노우폴에서 잘 지내고 있으며, 신도와 신자들을 데리고 매일매일 기도를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고생이 많네.”
괜히 나 때문에 그 추운 마을에서 지내게 된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즐기고 있는 듯하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추신이 눈에 들어왔다.
[P.S - 벤 하이르 관리인께선 마을의 개발에 힘쓰고 계십니다만, 마을 상태가 워낙 노후되어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벤 하이르.
스노우폴의 관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가주가 보내 준 남자였다.
‘원래는 바텐가의 보조 재무관이었던가?’
반평생을 보조로 지냈다길래, 스노우폴의 관리인 겸 재정 담당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센 남작으로부터 받은 10만 골드를 쥐여 주곤, 냅다 스노우폴로 보내 버렸다.
거금을 받아들곤 당황해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 픽 웃고 있을 때였다.
똑똑-
“도련님.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론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아, 일단 앉아.”
맞은편의 의자를 빼 앉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일전에 데스나이트에게서 날 구해 내느라 애창을 잃었지?”
“으음, 혹시 그걸 신경 쓰고 계셨습니까?”
“별로 신경 쓴 건 아니고.”
아론이 강해져야 나도 덕을 보지.
나는 가주에게서 받았던 목함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무척이나 길고, 나머지 하나는 그에 비해서 조금 짧았다.
그중에서 긴 목함을 아론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건……?”
“가주에게 새로운 무구를 부탁하는 김에 네 것도 말해 놓았지. 그게 이제야 왔더라고.”
“도, 도련님……!”
삽시간에, 아론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아닌 척해도 애창을 잃은 게 내심 속상했던 것 같았다.
“무려 드워프제 무기야. 내 직속 기사가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치자고.”
사실 나도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다. 가주에게 건네받곤 바로 방으로 향했으니까.
설마 출발 하루 전에 새 무기가 도착하다니,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만큼 기쁨도 배가되었다.
“그럼 열어 볼까?”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내 앞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고급진 원목에 기름을 칠해 한층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목함.
그것에 손을 뻗었다.
28화. Episode. 10 마경으로 (2)
끼익-
“허.”
그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론도 제 목함은 열어 보지도 못한 채 내 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 꽤 좋은 검을 보냈더구나.
가주가 목함을 건네주며 한 말이 떠올랐다.
이게 고작 ‘꽤 좋은 검’이라니.
그럼 대체 무엇이 명검이고 걸작이란 말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인데.”
알 수 없는 재질의 가죽으로 마감된 검자루.
그 위로 묵빛의 검날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보였다.
기다란 검신에 비해 그 무게감은 결코 과하지 않아, 한 손으로 쓰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아론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드워프가 제작한 무구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더니…….”
직접 쥐어 보니 알겠다.
어째서 기사들이 그토록 좋은 무구에 목을 매는지.
빛을 흡수할 듯, 어두운 검신에 새겨진 음각이 눈에 띄었다.
드래곤 투스(Dragon Tooth).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함께 보관되어 있던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마치 영혼의 짝을 만난 듯 마음이 든든해졌다.
내가 검 하나에 이렇게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축하드립니다. 아무래도 인연을 찾으신 듯 보입니다.”
아론이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들어 보니, 무릇 기사들은 한 번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무구를 만나게 된다고.
“그래. 용의 심장을 뽑는 데엔, 용의 이빨이 제격이겠지.”
물론 그전에 엘프의 숲으로 가야겠지만.
숲을 둘러싼 마경을 뚫는 게 불가능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엘프들과의 만남이 기대될 뿐이었다.
“어서 시험해 보고 싶군.”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어금니를 그러쥐었다.
◈ ◈ ◈
날이 밝자마자 나와 아론은 애병을 꼭 끌어안고 바텐가의 정문을 나섰다.
“도련님, 정말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팔에 단단히 둘러싸인 아론이 걱정스레 물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바텐가에서 마경까지 가는 길은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니다.
몇 달을 내리 걷기만 할 셈이 아니라면 말은 필수로 타고 가야 했다.
문제는 내가 말을 전혀 탈 줄 모른다는 것이다.
뭐, 말이란 동물을 만져 본 적도 없는데 승마를 배웠을 리가.
“일단 그냥 출발해.”
결국 승마에 능숙한 아론의 뒤에 같이 타는 수밖에 없었다.
다그닥-
힘센 발길질로 땅을 박차는 말에 떨어질세라, 아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처음엔 나름 편했다.
아론이 배려라도 해 준 건지, 생각보다 승마감은 나쁘지 않았다.
“윽!”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엉덩이가 얼얼해지는 것이…….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는데.’
말 타는 게 이렇게 고된 일일 줄이야.
아직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는데.
“조금 쉬고 갈까요?”
“……됐어.”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시간 가고 찔끔찔끔 쉬어 버리면, 어느 세월에 마경에 도착하나.
“며칠만 버티면 될 거야.”
물론 나도 쭉 이렇게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아론의 넓은 등짝을 보며, 그가 어떻게 말을 모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험난한 나날이 며칠간 반복되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특기 - 승마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숙련도 - F』
드디어.
나는 아릿한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눈앞의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거 빨리 좀 나타날 것이지.
“다음 마을에선 말 한 필 더 구하자.”
그 뒤부턴 엉덩이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제법 큰 마을에서 구해 온 말에 박차를 가했다.
“……승마를 할 줄 아셨던 겁니까?”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아론이 묘한 눈을 하곤 물었다.
설마, 내가 일부러 자기랑 합석하고 싶어 했던 걸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네가 하는 거 보고 배웠다, 왜.”
내 대답에도 아론의 눈빛은 여전히 게슴츠레했다.
직속 기사라는 놈이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그렇게 또다시 몇 날 며칠을 달렸다. 북대륙의 밑동네는 언데드로 사달이 났는데, 그 위쪽은 정말 평화로웠다.
흔한 마물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라니.
“평소엔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만, 이번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군요.”
아론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창을 써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
드워프가 제작한 아론의 창의 이름은 ‘혼테일’.
별다른 장식 없이 날카롭게 창날을 세운 게, 아론의 평소 성격과 잘 어울리는 실용적인 창이었다.
아론은 정곡을 찔렸는지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나도 얼른 새 검을 휘둘러 보고 싶던 터라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 ◈ ◈
마물이 나타나 우리의 앞길을 막은 건, 보르헴 왕국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내가 처리…….”
“도련님,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론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눈을 희번덕 뜨며 창대를 그러쥐는 게, 언뜻 창귀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미친놈 같다는 말이었다.
나도 드래곤 투스를 휘두르고 싶었는데.
가엾은 마물은 어찌 말릴 새도 없이 아론의 돌격에 꼬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진짜! 직속 기사라는 게 내 말도 안 듣고!”
내 말에 아론은 ‘어찌 주군이 포악한 마물을 상대하도록 냅두겠습니까-’ 하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 우직한 기사도 새로운 애병 앞에선 애나 다름없었다.
헝겊으로 창을 닦아 낸 아론이 물어왔다.
“그건 그렇고, 보르헴 왕국에 들리실 겁니까?”
“아니. 그냥 바로 마경으로 향한다.”
보르헴 왕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경에서 내려오는 마수들과 싸워 왔다.
보르헴 왕국과 가까워졌다는 건,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말 엘프의 숲이 마경 중심부에 있습니까?”
“그렇다니까.”
이미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아론의 표정엔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당연한 생태계의 순리야.”
생명의 정기로 가득 찬 엘프의 숲.
그리고 그곳을 둘러싼 마경.
언뜻 보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실은 정말이지 당연한 인과 관계로 짜여져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마물들은 세계수가 뿜어내는 생명력에 이끌렸고.
그 포악한 짐승들이 모이고 모여, 종내에는 마경, 마물의 숲이라고 불리게 된 거니까.
엘프들에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생태계였다. 저들의 안식처를 숨기기에 마경만큼 탁월한 가림막은 없으니.
“저기 보이는군.”
한참을 말을 타고 달리자, 저 멀리 울창한 대수림(大樹林)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진 녹빛의 물결을 보아하니, 과연 평범한 숲은 아니란 게 느껴졌다.
◈ ◈ ◈
“하암…… 으음?”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보르헴 왕국의 병사, 왈슨.
그의 눈에 저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눈을 좁혀 자세히 바라보니, 두 인영이 말을 타고 마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왈슨을 봤는지, 곧바로 말머리를 틀었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코앞까지 다가온 둘을 향해 왈슨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의 낯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수고가 많군. 보르헴의 병사인가?”
머리에는 웬 관을 쓰고, 두툼한 망토를 몸에 두른 소년이 입을 열었다.
왈슨은 그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얇고 긴 눈매에 새까만 머리카락의 미남.
척 봐도 귀티 나게 생긴 얼굴에 왕관을 쓴 것을 보니, 어느 왕국의 왕자인 걸까.
‘우리나라에 타국의 왕족이 방문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왈슨은 조심스레 말을 높였다.
“가시던 방향은 마경입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이분은 바텐베르크의 혈통,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도련님이시다.”
정작 입을 연 것은 소년의 옆에 있던 기사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바텐베르크의 자제는 왕족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하고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제야 왈슨은 왜 소년의 얼굴이 낯이 익었는지 깨달았다.
언젠가 그의 초상화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소문도 함께.
“바, 바텐베르크의 자제,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도련님을 뵙습니다!”
왈슨이 냅다 허리를 숙였다.
신원 확인이고 뭐고, 북대륙에서 바텐베르크의 자제를 사칭할 만큼 간 큰 놈은 없다.
게다가 저만큼 잘생긴 얼굴도 흔치 않다.
“잘되었군. 우리 말 좀 맡아 줘. 나중에 찾으러 가지.”
“예, 예?”
리하르트와 아론이 말 위에서 훌쩍 내리며 고삐를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쥔 왈슨은 황망히 눈을 끔뻑였다.
눈앞의 도련님이 하는 모양새가 꼭 마경에 들어갈 것 같은 건 그만의 착각일까.
“저, 저어……!”
“고맙다. 그럼 수고하도록.”
리하르트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곧바로 지나쳤다.
그러다가 돌연 뒤를 돌아 왈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나를 본 건 비밀이다. 행여, 나를 찾는답시고 너희 왕국의 병력이 마경을 들쑤시는 일은 없길 바라. 진심으로.”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매서웠다.
수틀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태도.
과연 소문대로였다.
“리, 리하르트 도련님! 안 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왈슨이 애타게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리하르트의 걸음걸이엔 거침이 없었다.
“도련님, 여독을 풀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뒤를 따르는 아론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경은 하나의 왕국이 틀어막고 있어야 할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들이 그곳으로 곧바로 향하기엔, 몸에 쌓인 피로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리하르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마경에 간다는 걸 알면, 보르헴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럼 곤란하지.”
◈ ◈ ◈
“긴장을 늦추지 마.”
마경의 초입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울창하고 고요한 숲속.
언뜻, 평화로운 풍경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숲에 맴돌고 있는 고요는 평화가 아닌, 명백한 긴장이었으니까.
리하르트와 아론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돌기가 이곳저곳 난 흉측한 녹색 피부. 다리 굵기가 성인 남성의 허리보다 굵은 괴물.
보르헴 왕국의 속을 썩이는 단골 중 하나인 트롤이었다.
“아론, 너는 끼어들지 마.”
여느 중급 기사도 상대하길 버거워하는 트롤을 보며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등에 차고 있던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든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혹한의 한기가 몰아쳤다.
-쿠워어어!
트롤이 휘두른 주먹을 피해 낸 리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단 한 번.
한 번의 휘두름으로 트롤의 목덜미가 쩍 벌어져, 두터운 목뼈를 내 보였다. 그리고 진득한 녹색 핏물이 흐르기도 전에, 상처 부위가 얼어붙었다.
-쿠, 쿠헥!
목을 부여잡는 트롤에게 무자비한 참격이 이어졌고, 설왕과 동급인 4성의 마물이 금세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에 낭자한 상처 위에는 얼음 꽃이 피어난 채로.
“이거 완전…….”
무기빨 아닌가?
리하르트가 검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휘둘러 본 드래곤 투스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고,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는 손에 맞았다.
오러도, 신앙도, 심지어는 신성력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휘둘렀을 뿐인데, 질기디 질긴 트롤의 가죽을 손쉽게 갈라 냈다.
“그 정도의 검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명품이라 불릴 겁니다.”
“그렇지?”
감탄하는 아론에게 리하르트가 동조했다. 만약 드워프가 이런 검을 찍어 내듯 만들 수 있었다면, 대륙은 그들의 세상이 되었으리라.
‘그들이 바텐베르크와 동맹을 맺었다지만, 턱하고 내놓을 만한 검은 아닌데.’
샘솟는 의구심은 뒤로하고, 리하르트는 트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르륵!
녹색 괴물이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새 온몸의 상처는 대부분 아문 뒤였다.
아무리 드래곤 투스의 예기가 대단하다고 한들, 그저 휘두른 것만으로는 가죽과 근육을 가르는 데 그친 것이다.
“트롤은 마석을 부숴야 죽습니다.”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마석을 부수기 위해선, 단단한 뼈부터 갈라 내야 했다.
쿠우우-
빛줄기가 어금니를 타고 올랐다.
리하르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트롤을 보며 웃어 보였다.
쿵!
트롤의 오른팔이 말끔하게 잘려 저만치 날아갔다.
그것이 일검(一劍)이었다.
쿵-!
재차 검을 휘두르자, 이번엔 트롤의 왼팔이 떨어졌다.
오러. 그것도 일반적인 오러가 아닌, 홀리 오러는 그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 날카로움은 완숙한 상급 기사의 것보다 매서웠고, 육체에 전해지는 버프는 왕가의 가보급 아티팩트보다 탁월했다.
-그워어억!
사지가 잘린 트롤이 흙바닥에 몸을 뉘였다. 놈은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오로지 리하르트만 노려보며 이빨을 딱딱거렸다.
“운이 좋았어. 바로 트롤이 나타나다니.”
중얼거린 리하르트가 연신 손을 움직였다.
“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트롤을 죽이기 위해선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 마석을 파괴해야 하는데, 리하르트는 대뜸 손을 박아 넣은 것이다.
“마석을 채취하려고.”
이윽고 트롤의 가슴팍에서 손을 빼낸 그가 씨익 웃었다.
그의 손에 달려 나온 마석에선 짙은 생명력이 요동쳤다.
29화. Episode. 11 아델가르텐 (1)
* * *
13. 보라, 이 잔에 사흉(四凶)을 담으니
14. 하늘 아래 모든 흉이 모여들리라
15. 하여 성녀에게 이르되 성스러운 피를 담아 정화를 명하노라
…….
20. 흉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성유물이 탄생했나니
21. 이를 성배라 칭하라
창세신화 제5장, 성유물
* * *
세상엔 천금보다도 귀한 보물이 있는 법.
그중에서도 성유물은 어떠한 것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다.
고대에 활약한 용사의 성검이 그러했고, 성창과 성부를 비롯한 신물들이 그러했다.
그 앞에 탐욕에 눈 먼 자들로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졌던가.
성유물이라 불리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것들은 피를 몰고 오는 요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이 모든 건 내가 ‘리하르트’에게 빙의되기 전, 게임을 플레이할 적의 이야기다.
영문도 모른 채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버린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신이란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하나 나는 그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혹여 성유물이 존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당장 일희일비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이니까.
……비록 신도 수 12명의 잡신이라 해도 말이다.
“어째서 트롤만 노리시는 겁니까?”
서른 개째 트롤의 마석을 품 안에 넣을 때였다.
아론이 지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 땟물이 말라붙은 것이, 그간의 고달픔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벌써 5일째 트롤만 주구장창 사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굳이 이 위험한 마경에서 말입니다.”
5일이나 지났던가?
그러고 보니 해가 다섯 번쯤 떨어졌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마경이 왜 마경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독충을 비롯해 밤낮없이 습격해 오는 마물과 짐승들은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나마 트롤이 주로 서식하는 구역은 마경 중에서도 바깥쪽에 속해 다행이었다.
나는 뻐근한 팔다리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엘프들이랑 거래를 틀 거야. 그러니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물건을 준비해야지.”
엘프들과의 거래.
내가 알던 게임 속 미래에, ‘마르크스의 그놈’이 행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성유물 중 하나를 엘프들에게 대여해 주었다.
그 대가로 엘프들은 마르크스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본인은 세계수의 요정과 계약을 맺었다.
‘그 시점부터 마법사들의 전력은 수직 상승했지.’
북부와 남부의 균형을 깨트린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멍청이나 할 짓이다.
“난 성유물을 만들 거야.”
“……?”
다시 말하지만, 없으면 만들면 된다.
◈ ◈ ◈
“찾았다.”
우리는 수풀에 숨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트롤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놈은 두 개의 머리와 네 개의 팔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녀석은 근방을 주름잡는 우두머리 트롤이자 돌연변이 개체라는 것이다.
“저게…… 트롤이 맞습니까?”
아론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지막을 장식할 놈이지. 일단 지켜보자.”
놈은 한창 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그 식사거리가 무려 오우거였다.
촤악-!
질기디질긴 오우거 가죽이 종잇장처럼 찢기는 광경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심장은 하나란 거지.”
“……참 다행이군요.”
냉정하게 판단해서 저놈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악수다. 절호의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쿠워어억!”
식사 중이던 트롤을 향해 또 다른 마물이 달려든 것이다.
오우거의 피 냄새를 맡고 온 짐승형 마물이었다.
“아론, 투창 좀 할 줄 아냐?”
“이 정도 거리에서 빗맞힌 적은 없습니다.”
“좋아.”
나는 침착하게 두 마물의 싸움을 지켜봤다.
짐승형 마물이 트롤의 몸뚱어리에 몇 번이나 이빨을 박아 넣었다. 하나 트롤에게 그깟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될 뿐이었다.
쾅!
트롤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 개의 팔이 짐승형 마물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크워어어!”
제 식사 시간이 방해받은 게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마물을 향한 트롤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쾅, 쾅!
주먹질 하나하나에 땅이 울리고 숲이 몸을 떨었다.
등골을 서늘케 하는 흉폭함, 과연 우두머리다웠다.
“준비.”
내 신호에 아론이 창대에 힘을 주었다.
쿠구국-
보라색 오러가 창대를 타고 뱀처럼 기어올랐다.
“목표는 심장. 전력으로 던져.”
“예.”
나는 자세를 잡으며 펼친 세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셋, 둘, 하나.
쐐액-!
아론이 창을 던진 것과 내가 땅을 박찬 것은 동시였다.
보랏빛 궤적을 남기며 트롤을 향해 날아가는 창의 뒤를 쫓았다.
“쿠억!”
놈의 두 머리통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재빨리 치켜든 팔이 심장을 보호한 것 또한 동시였다.
콰드득-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론의 피어싱 오러를 머금은 창은 두터운 팔을 손쉽게 뚫어 내며 전진했다.
이에 다급히 들어 올린 두 번째, 세 번째 팔도 마찬가지.
창은 네 번째 팔까지 꿰뚫고 나서야 기세를 잃고 멈춰 섰다.
『특기 - 홀리 오러 발동.』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놈의 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이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트롤이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어깨를 내 보였음에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서걱-
목 위에 달려 있던 머리 중 하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쿠아아악!”
트롤의 남은 머리통이 위협스럽게 울부짖었다.
“다른 마물이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서 끝내야겠습니다.”
미리 건네준 아이스 크레센도를 꼬나 쥔 아론이 수풀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
마경이 위험한 점은 마물 분포도가 너무나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팔이 묶인 놈에게 붙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트롤이 짐승형 마물에게 폭력을 가했듯, 이제 놈 또한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쿡, 쿠어억!”
깔끔하게 마석을 뽑아 주려 했건만, 놈은 온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구차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쿠웅-
돌연변이 트롤은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렇게 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6성급 이상의 마물이었는데…….”
“팔 묶어 놓고 다굴 놓았으니 장사 없지.”
일등 공신은 역시 아론의 기습 공격이었다.
이 흉악한 트롤의 팔뚝 네 개를 투창으로 꿸 수 있는 창기사가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역시 도련님은 굉장하십니다.”
“응?”
그런데 아론이 난데없이 존경 가득한 시선을 보내 왔다.
그의 손엔 트롤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이놈 머리가 두 개라 그런지, 목 부위가 유난히 발달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격에 날려 버리시다니, 웬만한 상급 기사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팔 네 개를 꿰뚫은 네가 할 소리는 아닌데.”
“베어 내는 것과 꿰뚫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가자고.”
돌연변이 트롤의 마석을 품에 넣곤, 자리를 옮겼다.
목적지는 그동안 은신처로 삼았던 동굴.
그나마 주변에 마물이 적고, 수풀이 무성해 몸을 숨기기엔 좋은 장소였다.
“이제 트롤 사냥은 끝이야.”
“정말입니까?”
내 말에 아론이 반색하고 되물었다.
하긴, 영문도 모른 채 마경에서 고생해야 했던 그로서는 달가운 일이었다.
“재료는 얼추 모았으니까. 얼른 만들어야지.”
더 이상 마경에 볼일은 없었다.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은신처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짐을 풀었다. 트롤의 마석 서른 개와 돌연변이 트롤 마석 한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나무잔이었다.
바텐베르크를 떠나기 전, 근처의 잡화상에 들러 사 온 잔이었다.
언뜻 보면 작은 트로피처럼 생긴 그것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콰득-
마석 하나를 집곤 나무잔에 통째로 박아 넣었다.
본래 성배는 사흉(四凶)이라 불리던 악명 높은 마물들의 마석으로 장식해 만든다.
‘그만한 마물은 지금 나한테 턱도 없고.’
꿩 대신 닭, 아니 참새라 해야 하나. 다른 마물의 마석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트롤의 마석만을 고집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트롤의 탁월한 재생력은 마석에서 비롯된다.
재생력은 곧 생명력. 적어도 잡다한 마물의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다.
“됐다.”
“성배…… 라는 이름에 어울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아론이 아픈 곳을 찔렀다.
딴엔 제법 멋을 부린다고 노력했건만, 아무래도 내게 손재주라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잔에 검은 돌기가 돋아났군요.”
“시끄러워.”
커다란 돌연변이 마석을 중심으로 손톱만 한 마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잔.
아론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 돌기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부디 엘프가 외적인 것보다 그 효과를 중히 여기기를 바랄 뿐이다.
『마석 돌기 나무잔에 5만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빛이 폭사했다.
『성배의 최하급 모조품을 제작합니다.』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변화는 그 후부터 시작되었다. 나무 잔 표면에 박힌 마석들 사이로 가느다란 홈이 파였다.
그리고 그 홈을 따라 빛줄기가 내달렸다.
『매개체의 격이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재현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성배의 최하급 모조품이 제작되었습니다.』
“……된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찌르던 빛이 멎었다.
그러나 그 여파가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쪽 세계수, 아델가르텐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챕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애타게…….』
『아델가르텐이 당신…….』
『아델가르텐이…….』
“……뭐지?”
눈앞을 한가득 메우는 시스템 창.
단지 글자일 뿐인데도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30화. Episode. 11 아델가르텐 (2)
“아! 미치겠네, 진짜!”
보르헴 왕국의 일개 병사, 왈슨은 마경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 마경의 한 구석이 새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빛이 가라앉을 때부터 본격적인 이변이 벌어졌다.
쿠궁, 쿠구궁…….
대체 무슨 소란인 건지.
한동안 잠잠하던 마경에서 끊임없는 진동이 일었다.
‘그 망나니, 바텐베르크의 망나니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며칠 전 갑작스레 나타나, 막무가내로 마경에 몸을 들이민 망나니.
그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기엔 시기가 너무도 딱 맞아떨어지는 이변이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랐건만!'
왈슨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외부인이 마경에 발을 디딘 것이 발각되면 일개 병사인 그는 처벌을 피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보고를 올릴 수도 없다고!’
리하르트가 마경에 들어가기 전 내뱉었던 살벌한 경고.
수틀리면 사지를 분쇄해 버릴 듯한 그 서슬에 보고도 올리지 못한 채 며칠간 전전긍긍했다.
부디 아무도 모르게 온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떠나 주기를 바랐지만……
“소집 명령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왈슨의 바람은 대차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기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 ◈ ◈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품에 단단히 끌어안은 성배가 혹처럼 거추장스러웠다.
“도련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그냥 뛰어!”
옆에서 나란히 뛰는 아론의 목소리 또한 지쳐 있었다.
며칠간 내리 진행된 마경 탐험은 쉴 틈을 주지 않았으니, 그간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만도 했다.
아무튼 이건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키에에엑!
-이기기긱!
음, 곧바로 후회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세계수의 알림 테러 이후.
마물 몇 마리가 은신처에 기웃거린다 싶더니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십, 수백의 마물에게 쫓기고 있었다.
나는 품 안의 성배를 내려다보았다.
마석 사이사이로 새겨진 홈을 따라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배라는 성유물이 지닌 힘 중에 하나, 주변 마물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그것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개 숙이십시오!”
푹!
달려드는 원숭이 마물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이기가 무섭게, 아론의 창이 그 위를 가로질렀다.
“제가 놈들의 이목을 끌겠습니다!”
“제발 그냥 뛰어!”
자살을 자처하는 아론에게 소리쳤다.
희생정신이야 감격스럽지만, 애먼 체력을 낭비하게 둘 순 없었다.
그때였다.
『아델가르텐이 길을 인도합니다.』
싸아아-
종아리까지 올라오던 무성한 잡풀이 바닥에 누웠다.
거대한 나목들이 제 가지와 몸뚱이를 비틀었다.
하나같이 다 일정한 방향으로, 마치 숲 자체가 길을 터주는 것만 같았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세계수의 초대를 받을 것이란 건 예상했지만, 숲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와 아론은 쉴 새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
우리가 지나치고 나면, 식물들은 뒤틀었던 제 몸을 바로 했다.
덕분에 마물의 추격이 조금씩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얼마나 뛰었을까.
바쁘게 놀리던 발을 슬그머니 멈춰 섰다. 기감을 날카롭게 세워도 뒤쫓아 오는 마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성배에는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데.
“후우, 숲에 들어온 건가.”
마경을 말하는 것이 아닌 엘프의 숲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숲은 초대받지 않은 자는 들여보내지 않으니.
제아무리 수많은 마물이 마경을 헤집어도 이곳은 안전하리라.
“여기가 엘프의 숲……!”
아론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물에게 쫓길 때보다 한층 더 날을 세운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겠지.
인간과 엘프의 사이는 썩 좋지 못하니까.
“그런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엘프의 숲이라기엔 영 초라한데.”
사시사철 따사롭게 내리쬔다는 햇볕도, 생명력을 머금어 만개한 꽃밭도. 나와 아론 앞에 펼쳐진 숲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고개 숙인 풀잎만 있을 뿐. 이건 오히려 마경보다 못하지 않은가.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풀숲 너머의 인영을 응시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과 쭉쭉 뻗은 팔다리. 결정적으로 뾰족한 귀까지. 완벽한 엘프였다.
다시 봐도 틀림없는 엘프다.
그런데…….
“그냥 말라비틀어진 도라지 같습니다.”
홀쭉하게 패인 볼, 퀭한 눈두덩이를 비롯해 온몸이 삐쩍 마른 것이, 도저히 아론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어디 몇 년간 쫄쫄 굶은 게 아니고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따라오십시오.”
엘프의 입에서 날 선 음성이 들려왔다. 인간과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그녀.
그토록 고생해서 마침내 조우한 엘프가 저런 도라지라니.
부디 저 엘프만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 ◈ ◈
엘프의 뒤를 따라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그들의 거주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바람은 대차게 무너져 버렸다.
‘젠장, 여긴 그냥 빈민촌 아니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엘프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도라지가 하나, 둘, 셋…….
본래는 찬란한 미모를 발했을 그들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건 말랐다기보다는 ‘시들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
이들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란 것을 누가 믿을까.
경계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세계수까지 저 모양일 줄이야.”
확실히 크기는 무척 크다. 다만 말라비틀어진 것은 세계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이여, 숲의 정원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엘프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삼백 살은 된 엘프였다.
“북쪽 엘프들을 이끄는 타사르라고 하네.”
그나마 그는 초라한 행색과는 다르게 형형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다.”
일순, 주변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대전쟁 시절, 바텐베르크는 엘프들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이름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악랄하고 추잡한 바텐베르크의 핏줄!”
“어머니께선 어찌하여 저런 극악무도한 이를……!”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눈빛에 사나운 기색이 스며들었다.
“도련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솟구치는 살기에 아론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며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게임 속 정기 넘치고 고고했던 엘프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바텐베르크의 이름에 발작하듯 경기를 일으키는 그 모습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머릿수도 고작 수십.’
이곳이 무인들의 땅인 북부라 해도, 세계수의 가호 아래 모여든 엘프들이라 하기엔 너무나 적은 수다.
마법가의 그놈이 동맹을 맺었던 남부 엘프들이 몇 명이었던가.
가물가물하지만 적어도 일천에 달하는 수였던 건 분명하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살기에 반응한 얼음 왕관이 스스로 효과를 발동한 것이다.
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프는 손님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되도록이면 원만한 거래를 취하려 했으나 이야기가 달라졌다.
저들에게 있는 거라곤, 죄 말라비틀어진 것뿐이니.
굳이 내가 저자세를 자처할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를 이끈 것은 세계수, 아델가르텐이다. 불만 있으면 그쪽에 가서 따져.”
그 말과 함께 품에 안고 있던 성배를 슬쩍 내보였다.
“……!”
모조품이니, 최하급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곤 해도 성배는 성배.
그 안에 담긴 성스러운 기운에 모든 엘프들의 이목이 쏠렸다.
“너희들 이게 필요하지 않아?”
성배를 흔들어 보였다. 어느새 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들의 시선에 담긴 것은 절실함과 간절함.
성배가 무엇인지 모를 텐데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우리가 큰 실수를 범했군. 상황이 상황이라, 다들 예민해졌을 뿐일세. 부디 노여워하지 말게나.”
타사르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신다네. 따라오겠는가?”
“가지.”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던 세계수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세계수의 열매와 생명의 샘물.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는 열매는커녕, 앙상하기 짝이 없는 가지만 내보이고 있었다. 보나 마나 생명의 샘 또한 다를 바 없는 상태겠지.
“미치겠군. 대체 왜 이 꼴이 된 거지?”
그간의 고생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답답함에 역정을 내 보았지만, 타사르는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곧 세계수의 앞에 도착했다. 타사르와 나머지 엘프들은 아론을 뒤로 물리곤,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사르르-
바람이 불었다.
세계수의 앙상한 가지가 가늘게 떨어 댔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가만히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세계수의 감정이 내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보며 기뻐합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싸아아-
'뭘 하려는 거지?'
앙상한 가지들이 내 쪽을 향해 몸을 뒤틀었다. 마치 나를 감싸 안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이 감정,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가지 하나가 기어코 내 몸에 닿았을 때였다.
- 아…….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설마 지금 말을 걸어온 건가. 나는 다시 귀를 기울여보았다.
- 아, 아…….
잔뜩 갈라진,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
- 아빠…….
“…….”
31화. Episode. 11 아델가르텐 (3)
“지금, 뭐라고?”
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빠라니…… 아니, 그전에 말을 했어?’
애초에 세계수가 말을 한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지훈’은 그것에 인격을 설정하지 않았으니까.
성배를 만들고 아델가르텐의 시스템 창이 나타났을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리하르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엘프의 숲, 통칭 정원이라 불리던 요람은 엉망이 되었다.
그곳에 터를 잡은 주민, 엘프는 정기를 잃은 채 시들었다.
이것은 모든 이들이 신을 잊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험한 또 다른 이변이었다.
리하르트가 가장 꺼리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러한 사건이었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자신이 손에 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으니까.
“대답 좀 해 보지 그래.”
그리고 이렇게 된 모든 정황을 눈앞의 나무가 알고 있을 터.
날 선 리하르트의 물음에 겁을 집어먹은 걸까.
사르륵- 가지 끝이 흔들렸다.
이내 리하르트의 몸에 닿았던 가지 하나가 그의 손에 들린 성배를 향해 천천히 뻗어졌다.
기력이 다한 이가 생명줄을 향해 손을 뻗듯, 아주 힘겨운 모습이었다.
툭-
보다 못한 리하르트가 가지 끝에 성배를 가져다 댔다.
『아델가르텐이 최하급 성배 모조품에 내재된 격과 신앙을 요구합니다.』
별안간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본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격과 신앙을 요구한다라.’
어차피 엘프들과의 거래를 위한 모조품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꾸드득-
성배가 피를 빨리는 것처럼, 급속도로 말라비틀어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나무로 된 잔이 가지를 타고 세계수에게 흡수되어 갔다.
투두둑-
그간 애써 모았던 마석 서른 여 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델가르텐이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자 리하르트를 감싸 안은 가지들이 등을 떠밀었다.
꼭 저를 마주 안아 달라며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았다.
- 이리 와아아…….
한결 기력을 되찾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눈앞의 나무에선 적대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리하르트는 순순히 걸음을 옮겨 세계수에게 다가갔다.
곧 그의 손바닥이 세계수를 짚었다.
“윽!”
시계(視界)가 뒤바뀌었다.
리하르트는 어느새 꽃이 만개한 드넓은 초원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따스한 햇볕이 눈을 따갑게 찔러 왔다.
‘이건…… 내가 아는 엘프의 숲의 모습이야.’
초원의 중심엔 거목이 있었는데, 이는 그가 알던 세계수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기도 잠시.
거목의 옆에서 한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내 심상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싱그러운 나뭇잎처럼 연녹색의 머리칼과 햇볕을 품은 듯한 금안의 소녀였다.
“네가 아델가르텐인가?”
“응!”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리하르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 어린 여자애가 세계수란다.
‘저런 것을 만든 기억은 조금도 없었는데.’
하지만 리하르트는 일단 부정 대신 긍정을 택하기로 했다.
이미 자신이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불가사의인 것을.
“보고 싶었어, 아빠.”
소녀가 리하르트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그리움과 애절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이내 그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스며들었다.
“모두가 아빠를 잊었어.”
그 말에 리하르트가 눈을 감았다.
어째선지 소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빠를 잊지 않았어.”
소녀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칭찬해 달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를 잊지 않았다고?”
“응!”
그가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잊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빠가 이 세상을 창조했잖아!”
유일하게 그를 기억하는 게임 속 피조물.
눈앞의 소녀는 스노우폴에 거주하는 신자나 신도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 ◈ ◈
이후 아델가르텐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성마대전 이후로 내가 사라졌다고?”
기사와 마법사 간의 대립이 시작되기도 한참 전, 검황과 대마도사가 태어나기도 이백 년 전.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훌쩍 지난 성마대전.
모든 이변은 그 까마득한 세월을 지나며 생겨났다고 한다.
“으응. 성마대전이 교단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부터, 아빠의 기적은 더 이상 없었어.”
그럴 리가 없다.
‘이지훈’은 쭉 게임을 했었다.
성마대전은 그의 게임 로그를 나열하면, 상단 부분에 적힐 정도로 오래 전에 지나간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 세상에선 그 이후의 모든 것이 싹둑 잘렸다고 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들의 기억과 역사를 조작한 것처럼.
“대체 뭐가 뭔지…….”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러나 아직 들어야 할 건 산더미였다.
“그럼 너는 뭐야?”
“나는 당연히 세계수지!”
그걸 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너한테 인격을 준 적이 없어.”
그러자 아델가르텐이 리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자그마한 머리통에 달린 두 눈이 젖어 들었다.
“내 인격은 결핍에서 태어났어.”
“결핍?”
“응…… 아빠의 힘 없이 세계를 유지하려면, 내 자율적인 판단이 필요했으니까.”
그 말에 리하르트는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어째선지 애꿎은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빠가 원한다면 지울게. 아빠가 왔으니 이젠 필요 없을 테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리는 모습에 리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것 같았다.
“안 해도 돼. 그보다, 엘프들과 정원은 왜 저 모양이 된 거야?”
“아…….”
아델가르텐이 숙였던 고개를 더 숙였다.
한없이 쪼그라든 모양새가 제 잘못을 고하는 어린애 같았다.
“내가 수백 년 동안 굶었으니까…… 덩달아 그 아이들의 생태계도 무너져 갔어.”
듣자 하니, 세계수의 양분은 신앙이라고 한다.
한데 세상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 이가 사라지니,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하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했다.
“세상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어. 내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곳에선 어떤 이변이 벌어졌을지 몰라.”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소녀가 돌연 눈을 빛냈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지겠지? 아빠가 돌아왔으니까!”
“…….”
정작 리하르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 아빠라는 신의 신도는 고작 12명이었으니까.
‘미치겠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변이 나타날지.
알맹이는 평범한 인간인 그로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리하르트가 한참 골머리를 싸맬 때였다.
“이젠 나 버리지 마.”
“뭐라고?”
“나, 버리지 말아 줘. 부탁이야.”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소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델가르텐이 애정을 요구합니다.』
『아델가르텐이 안정을 요구합…….』
『아델가르텐이 위로를 요구…….』
수많은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렸다.
『아델가르텐이 신수의 자격 조건을 달성합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띠는 것은 마지막에 떠오른 문구였다.
“신수……?”
신수라 함은, 신의 동물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상상하지 못한 이변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게 불이익이 될 것은 아니었다.
“나 안 버릴 거지……?”
리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큼지막한 무언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위대한 격을 지닌 존재를 복속시켰습니다.』
『업적 달성 1/3』
[아델가르텐] [북쪽 세계수], [신수]
□ 특기 - [근간], [정수], [생명], [위대한 나무], [?], [?]
□ 비고 - [응석받이], [불안], [초조], [쇠약]
뭔가 척 보아도 범상치 않은 시스템 창.
혼란스러운 비고는 그렇다 쳐도, 특기에 새겨진 것들이 하나같이 대단했다.
‘하긴 세계수잖아.’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에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눈앞의 정신 사나운 여자애는 세계수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세계를 유지하는 기둥. 즉 신을 제외하면 가장 그에 가까운 존재.’
물론 지금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 안 버리는 거지? 그치?”
“안 버려.”
리하르트의 손이 아델가르텐의 머리칼을 쓸었다.
갑자기 그녀가 어여뻐 보였다.
‘이거 최고의 기연이잖아?’
이런 변수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이었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아델가르텐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제부턴 아델이라 부를게.”
“아델…… 아델……! 너무 좋아!”
아델이 리하르트의 품에 와락 안겼다.
◈ ◈ ◈
“오오, 어머니……!”
아델은 좌중을 훑었다. 그녀의 한쪽 손은 리하르트를 꼬옥 붙잡은 채였다.
“세계수께서 현신하셨도다!”
이 소란이 일어난 것은 리하르트가 아델의 심상 세계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아델이 속삭였다.
“이건 내 정신체야. 아빠와의 연결로 구현할 수 있었어.”
심상 세계에서 봤던 소녀의 모습을 한 아델이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엘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아아……!”
타사르를 비롯한 모든 엘프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녹색 빛을 품은 소녀가 세계수라는 것을.
엘프들에겐 세계수가 신이자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델이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나의 아이들아. 참으로 많이 야위었구나.”
‘……허.’
리하르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엘프들을 향해 말을 거는 아델의 모습이, 아까와는 영 딴판이었다.
저건 영락없는 어머니의 태도가 아닌가.
“미안하다. 내가 세계수로서 너희를 보살피지 못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머니시여!”
아델의 시선이 안타까운 빛을 띠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따르던 아이들이 굶어 스러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그것은 제 굶주림 따위보다 수십 배는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겐 리하르트가 있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제 조금은 쉬어도 된단다.”
그녀의 말에 엘프들이 의문을 표했다.
“가여운 것들. 그동안 정원은 너희를 보듬어 주지 못했구나.”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어가는 아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내 품속에서 잃어버린 정기를 회복하거라. 시들었던 꽃을 다시 피우거라.”
스윽-
조막만 한 손이 타사르의 뺨을 쓸었다.
그에 감격스러워 몸을 부르르 떠는 한편, 타사르는 슬픈 예감을 느꼈다.
왜 세계수께서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들까.
그의 시선이 아델의 뒤편, 멀뚱히 서 있는 리하르트를 향했다.
“위대한 의지시여. 혹여 저자와…….”
“너는 여전히 감이 좋구나.”
쿡쿡, 하고 웃는 아델을 본 엘프들이 대경실색했다.
“아니 될 일입니다! 정원 밖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립니다!”
“어차피 이 몸은 정신체인 것을,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라.”
아델은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쏴아아-
꽃과 식물이 정원을 뒤덮었다. 엘프들은 제 몸을 감싸고 차오르는 식물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너희를 해하지 못하리라. 그저 푹 자고 일어나면 된단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이내 그들의 모습은 식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리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적지 않은 면적의 정원이 순식간에 울창한 숲이 되어 버렸다.
“그럼, 아빠!”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한 아델이 돌연 리하르트를 돌아보며 외쳤다.
조금 전까지의 위엄 있는 모습과 비교하면 엄청난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얼른 떠나자. 우리 둘만의 여행을!”
32화. Episode. 12 거, 눈총 쏘지 말고 (1)
리하르트는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명백히 미련이 남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을 신도로 만들지 못해서 그래?”
그의 손을 꼬옥 붙잡은 아델이 물었다.
리하르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의 계획에서 가장 고대하던 것 중 하나가 엘프들을 감화시켜 신도로 만드는 것이었으니,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 아이들에겐 휴식이 필요해서…….”
“괜찮아. 어차피 네 힘만 회복되면 해결될 일이라며. 그래서 이렇게 같이 가는 거고.”
“으응. 아빠 옆이 제일 정기 넘치니까.”
아델은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룩하고 고결했던 신격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육신에 갇혀 버린 가엾은 아버지.
‘아버지한테 도움이 돼야 해.’
안 그러면 또 떠날지도 모른다.
아델은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빠가 말한 기드라는 사람, 내가 수백 번은 더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만 믿어!”
물론 기력을 충분히 되찾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아델은 그 말은 꼬옥 삼켜 냈다.
“그래그래. 네 머리에서 세계수의 열매가 맺힌다고 했지?”
세계수의 특기 중 정수와 생명을 조합해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리하르트가 원하던 열매를 뜻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는 가만히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 작고 둥그런 머리통에서 열매가 맺힌다니. 조금 웃겼다.
리하르트의 입꼬리가 올라가서일까. 아델도 덩달아 웃었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하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도련님? 저에게도 이 상황을 설명해 주시지요.”
한참 전부터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아론이었다.
그는 리하르트와 아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계수와 이야기를 나누겠다더니, 대뜸 꼬마애를 데리고 왔다.
근데 그 애가 세계수라더라.
그리고 앞으로 동행하게 되었다고.
아론이 파악한 사실은 이 정도였다.
“잘 파악했네. 그게 맞아.”
“아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뭐가 이렇게 얼렁뚱땅입니까!”
그때 아델이 끼어들었다.
“머슴아. 나는 아빠의 딸이니라.”
“머, 머스음?”
아무래도 여행길이 조금 북적거리게 되었다.
◈ ◈ ◈
“운이 좋았네.”
나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운이 좋았다.
마경의 초입에 달했을 무렵,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 마리의 말과 그 말들을 지키는 일개 병사, 왈슨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양 어버버 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곤 말 두 필을 얻어 냈다.
마경에 들어오기 전, 그에게 똑같이 말 두 필을 맡겼으니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나저나 조금 미안하긴 하네.’
보르헴 왕국의 병력이 마경을 들쑤시는 이유는 성배의 영향 때문이겠지.
마경에서 난리가 났으니까.
그나마 아델이 숲을 조종해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다고 한 덕에 걱정은 덜었다.
그렇게 내 품에 감싸여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아델이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빠! 인간들은 무사히 마경을 벗어났어!”
“오, 잘했어.”
아델의 능력은 여러 모로 대단했다.
그것도 아주 매우.
콰드드득-!
집채만 한 나무가 흙바닥에서 솟구치더니, 달려들던 마물을 꿰뚫었다.
아델의 특기 중 하나인 ‘위대한 나무’였다.
식물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능력으로, 우리를 정원으로 인도한 것도, 왕국의 병력을 마경에서 내보낸 것도 그 능력 덕분이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수쯤 되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이거 완전 고속도로인데?”
마경을 벗어나 또 다른 숲에 진입한 우리는 달리는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야, 눈앞의 모든 나무와 식물들이 길을 터 줬으니까.
원래라면 빙 둘러서 가야 할 길을 쭉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허어…….”
아론이 멍하니 아델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동공이 잘게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델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줬다.
“아델이 아주 효심이 가득하구나? 이렇게 편하게 해 주고.”
“히히…… 더 쓰다듬어 줘!”
오냐.
정했다.
이제부터 아델은 내 딸이다.
처음의 경계심은 허물어진 지 오래.
내 눈에 아델은 영락없는 복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달렸다.
숲이 있으면 그대로 가로질러 통과하고, 강이 있으면 나무를 타고 건너니, 이동 속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수배는 빨라졌다.
“이 상태라면 홉슨 산맥에 순식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음.”
마경을 떠난 지 어느덧 몇 날 며칠이 지났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홉슨 산맥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영향인지, 마물들의 격도 한층 상승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입니다!”
쿠웅!
산중 제왕이라 불리는 마물.
거기서도 한층 더 강력해진 머리 두 개의 오우거가 진로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맡겨 줘!”
이번에도 나선 것은 아델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콰드드득!
트윈 헤드 오우거의 양측에서 거대한 나무줄기가 쇄도했다.
-크그극?!
힘으로 따지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괴력을 지닌 오우거가 잇새로 비명을 토했다.
양팔로 힘껏 막아 보지만, 고작 버티는 것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놈의 발밑으로 또 하나의 나무가 솟구쳤다.
콰직!
가랑이를 뚫고 위로 나아간 나무줄기는 오우거의 두 머리통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허무히 스러지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아빠, 나 배고파…….”
그와 동시에 아델이 힘없이 등을 기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게 무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델가르텐에게 1,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그녀가 식사로 삼는 것은 신앙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일천씩.
상당히 부담스러운 양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신앙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무리하지 마. 아직 몸 상태가 나쁘다며.”
그간 지켜본 아델은 심각한 애정 결핍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딱했다.
몇 번이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델은 그것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미안…… 내가 힘을 온전히 회복하면, 백 배는 더 잘할 수 있어…….”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건지.
아델은 끝까지 더 잘하겠다고 중얼거리다가 잠들었다.
나와 아론은 말없이 쭉 트인 길을 내달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론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아이가 저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얜 또 왜 이러는 거람.
덤덤한 듯 말하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론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제가 도련님의 직속 기사인데…….”
살다 살다 세계수한테 열등감 느끼는 기사는 처음 본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쭉 함께할 사이인데, 고작 이런 걸로 심마에 빠지면 큰일이었다.
오글거리지만, 격려 좀 해 줄까.
“내가 원하는 기사는, 내가 원하는 적을 꿰뚫는 수족 같은 기사야.”
슬쩍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넌 그런 기사고. ……잘하고 있어.”
우직한 아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
곧바로 사기충천하여 외치는 그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단순해서 다행이군.’
기합이 잔뜩 들어간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 ◈
저 멀리 홉슨 산맥의 웅장한 풍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 상당한 규모의 무리가 주둔지를 이루고 있었다.
기드가 참가한 바텐가의 제3기사단이었다.
몇몇 얼굴은 낯이 익었다.
“멈춰라! 이곳은 바텐베르크의 제3기사단이 주둔하…….”
정교하게 지어진 목책 위에 올라선 기사가 떠들어 대던 입을 멈췄다.
부릅떠진 두 눈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리, 리하르트 도련님?”
“들어가도 되지?”
주변의 기사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둔지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다.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이들까지 합하면 이백여 명은 될까.
이 사내들이 바로 드래곤을 잡기 위해 몇 달간 개고생을 하고 있는 인재들이었다.
“리하르트 도련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상급 기사 하나가 나서서 말을 걸어왔다.
제가 모시는 가문의 자제에게 보이는 태도라기엔 너무나 불퉁한 말투였다.
애초에 이중에 합당한 예를 갖춘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바텐가에선 내게 호감을 표하는 기사가 많이 생겼다지만…….
‘이들한텐 나는 아직 몇 달 전의 망나니일 뿐이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시선들이었다.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사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아델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그녀는 나를 향한 적대감에 몹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태도를…… 읍읍!”
“야야, 그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걸쭉한 욕을 구사하려는 아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론의 눈이 치켜뜨였다.
쿵!
아론이 창을 내리찍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흙바닥인데도 굉음이 일었다.
“경들은 제 주군의 핏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마나까지 실은 아론의 음성이 주둔지를 가득 메웠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이분은 찬란한 바텐베르크의 정당한 후손,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도련님이시다! 바텐베르크를 모시는 자라면 합당한 예를 취하라!”
잠시간의 정적.
그 후에 기사들이 일제히 태도를 바로 했다.
“리하르트 도련님을 뵙습니다!”
두 눈에 나와 아론에 대한 불만이 어려 있을지언정, 심하게 엇나간 자는 없는 듯했다.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직속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기합이 단단히 들었나 본데.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상급 기사를 향해 물었다.
“기드는, 담금질 중인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스무 날 뒤에 끝마치실 예정입니다.”
그가 무언가를 억누르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기드가 제3 기사단의 전(前) 단장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기드 이야기를 꺼내자 사내들의 눈총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애써 한숨을 삼켜 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스무 날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길 봐도 기사, 저길 봐도 기사 천지다.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한테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닌 것 같은데.”
차게 식은 분위기 속, 더더욱 싸늘한 한기가 머리에 감돌았다.
“고추 달린 놈들이 그렇게 눈총만 쏘아 대지 말고, 어디 자웅이나 한번 겨뤄 보자.”
같이 큰 전투를 헤쳐 나갈 동료들이다. 불화는 불필요했다.
그리고 이럴 때는 대련만 한 게 없었다.
33화. Episode. 12 거, 눈총 쏘지 말고 (2)
호기롭게 외친 것과는 달리, 대련은 곧바로 성사되지 못했다.
“지금 기사들은 시간이 넉넉지 않습니다.”
자신을 제3기사단장이라 소개한 폴크 하이머가 내뱉은 말이었다.
“정 원하신다면, 해가 지고 날이 선선해졌을 때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여독부터 푸시지요.”
바쁘다는 이들을 붙잡을 수도 없다. 지금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좋아. 그럼 숙소로 안내해 줘.”
폴크가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막사 하나를 새로 지으라는 명령이었는지 하급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은 제 막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어째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법이 없다.
엘프의 숲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소 어수선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막사에 도착한 폴크가 곧장 고개를 꾸벅 숙이곤 사라졌다.
차라도 한 잔 내주는 과분한 대접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껄끄러운 혹 취급이다.
먼 길을 달려온 도련님을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감히…….”
아델이 이를 박박 갈아 댔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언짢은 모양이었다.
“도련님. 대련 때 진가를 보여 주겠습니다!”
아론은 오히려 분기탱천해서 내게 외쳤다. 주먹을 꽉 그러쥔 게, 꼭 저도 대련에 참가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련은 나 혼자 할 거야.”
“어, 어째서입니까?”
“굳이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드래곤과의 격전이 코앞이다. 의미 없는 대련은 쓸데없이 체력만 갉아먹을 뿐.
다만 나는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손등에 새겨진 각인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지 반년은 지났을까.
이제 난 오러까지 다를 수 있게 되었다.
이만하면 무언가 변화라도 생길 줄 알았건만, 예상과는 다르게 각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드래곤을 사냥해도 그대로라면 발락에게 물어봐야겠어.’
언제까지고 기초 검술만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인데.
답답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 ◈ ◈
해가 떨어졌다.
넓은 공터로 걸음을 옮기자, 수많은 시선이 얼굴을 찔러 왔다.
“도련님. 기사들은 그리 섬세한 자들이 아닙니다. 부상을 입으실지도 모릅니다.”
“계급장 떼고 붙는 거야. 부담 갖지 마.”
나를 둘러싼 기사들에게 말했다.
“뭐 해. 퍼뜩 안 나오고.”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만 주고받을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 철없는 도련님을 누가 떠맡을지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내가 불씨를 지펴 줘야 할 것 같다.
“나한테 불만 있는 놈들 다 나와. 이 중에서 꽤 많은 것 같던데.”
제대로 찌른 걸까.
장내의 분위기가 소리 없이 들끓었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거야.”
저들에게 나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전(前) 기사단장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 있는 최악의 망나니다.
설령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말이다.
원색 짙은 감정들이 내 피부를 쿡쿡 찔러왔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도련님과 검을 마주해 보겠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하급 기사 하나가 나섰다.
“바로 시작하지. 덤벼 봐.”
그에게 수련검을 흔들어 보였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하급 기사가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컥!”
저만치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
침묵에 휩싸인 장내에 우두커니 서서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이것은 나의 자격을 증명하는 대련.
그리고 저들이 맡은 임무의 가치를 증명하는 대련.
“이번엔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들끓는 분위기에 나는 검을 그러쥐었다.
◈ ◈ ◈
쿠당탕!
중급 기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가떨어졌다.
그의 상대였던 리하르트는 숨을 거칠게 내쉴지언정,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무슨…….”
폴크는 제 눈을 의심했다.
하급 기사 셋. 중급 기사 넷.
리하르트 앞에 검이 꺾인 기사들이었다.
“다음 상대는 없는 건가!”
언제부터 리하르트가 이런 용맹한 외침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나.
마나 불감증으로 인해 일찍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탕한 일상을 되풀이하던 망나니였을진대.
충격과 혼란이 뒤섞인 공터에서 리하르트는 당당히 모든 시선을 받아 냈다.
그는 대련에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상대가 하급이든, 중급이든 모두 전력을 다해 검을 맞대었다.
“내 엉덩이를 걷어찰 기회야. 옹졸하게 뒤에서 씹어 대지나 말고 남자답게 덤벼.”
제3기사단원들은 알게 모르게 속이 곪아 있는 상태였다.
누구도 제 입으로 주군의 핏줄을 폄하하지 않았지만, 리하르트에 대한 불만은 쌓이고 쌓이던 중이었다.
거만하고, 오만하며, 나약하기 짝이 없는 망나니.
그런 망나니를 위한다며 담금질도 마다하지 않은 기드의 모습이 너무나 비통했다.
기사들에겐 제 설움을 토해 낼 욕받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역시나 리하르트가 제격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뜸 당사자가 찾아와선 대련을 입에 담았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시 없을 기회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앞에 또 다른 기사가 예를 취했다.
기사는 뭉툭한 수련검을 쥐었지만, 마음속으론 칼을 갈고 있었다.
카가각-!
리하르트는 그 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결코 피하는 법이 없이 우직하게 받아 냈다.
“다음!”
이후, 중급 기사 둘이 더 쓰러졌다.
인파로 만들어진 대련장은 대련이 이어질수록 과열되기 시작했다.
서로 앞다투어, 저 건방진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차겠노라 검을 치켜세웠다.
“제3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잭 슈웨거라 합니다.”
급기야는 상급 기사까지 나섰다.
“대련에 앞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뭐지?”
리하르트에게 궁금한 것이라야 한가득이다.
잭 슈웨거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러다 이내, 그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도 됩니까? 전력으로.”
잭의 눈빛은 진지했다.
허가만 내려진다면 인정사정없이 발길질할 기세였다.
“물론. 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중급과 상급 기사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좀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이 리하르트를 엄습했다.
“갑니다.”
그와 동시에 잭이 순식간에 짓쳐들어왔다.
일순 그의 신형이 사라진 것만 같은 재빠른 속도였다.
하나 그 정도는 리하르트도 반응할 수 있었다.
카가강-!
순식간에 수십 합이 얽혀 들었다.
허와 실이 절묘하게 뒤섞인 쾌검.
잭의 검은 폭풍과도 같이 휘몰아쳤다.
반면 그에 맞서는 리하르트의 검술은 단순하기만 한 기초 검술이었다.
“어찌 잭 경의 검을 기초 검술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기초 검술은 기사에게 아주 중요한 기본기와도 같다.
그러나 일정 수준 단련하면, 좀 더 상위의 검술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100층 탑을 쌓아야 하는데 1층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리하르트의 기초 검술은 하루 이틀 수련한 실력이 아니었다.
대련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얼굴에 갖은 감정이 스쳐 지났다.
그런 기사들의 반응에, 아론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선 저 기초 검술로 모리츠 도련님까지 꺾으셨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경들은 모르겠지만, 리하르트 도련님의 재능은 시시각각 개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찬란하게 말이지요.”
아론은 그 이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게 나을 테니.
“흐읍!”
리하르트가 흩뿌린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잭이 역공을 취했다.
싸악-!
허릴 숙여 간발의 차로 피해 낸 리하르트는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빠르다.’
잭의 검은 정말 빨랐다.
마나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나 빠른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대 못할 것도 없었다.
『특기 - 초집중 발동.』
리하르트의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정신 사나운 구경꾼들은 사라지고, 오롯이 잭만이 시야에 담겼다.
“큭!”
그때부터는 상황이 일변했다.
카가강!
잭이 연신 뒷걸음질 치며 리하르트의 공격을 막아섰다.
빈틈을 노려 재빨리 검을 휘둘러 보지만, 리하르트는 모두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허와 실이 보인다.’
이미 수십 합을 넘게 검을 맞댄 잭의 검술.
초집중은 그 검술의 허초를 어설프게나마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빠각!
기어코 리하르트의 수련검이 그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크윽!”
“내가 이긴 거지?”
“……아직 안 끝났습니다!”
호기롭게 외치는 잭의 모습에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든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차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럼 이제부턴 마나를 사용해 볼까-, 하고 리하르트가 화두를 던지려던 참이었다.
목책 위에서 보초를 서던 기사 하나가 산통을 깼다.
“다, 단장! 붉은 오크가 또 나타났습니다!”
한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붉은 오크?”
마물의 습격인가?
리하르트는 좌중을 훑었다.
“젠장,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속이 답답했는데 마침 잘됐어. 이번에야말로 그 빌어먹을 돼지의 목을 따야겠군.”
기사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를 갈아 댔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두 번 습격해 온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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