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3

나도 정말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신앙심이 부족하다는데.
신도가 된 주민은 딱 10명. 메리와 멜라인까지 포함하면 12명의 신도가 탄생했다.
그나저나 31명 중에 10명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이 사람들, 기도 제대로 안 했군.
◈ ◈ ◈
“메리, 스승님께선 돌아가셨나?”
“네. 상황을 정리하시곤 곧바로 가셨습니다.”
“참 바쁘시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만약 발락이 내 기억과는 다르게 로펀에 있지 않았었다면…….
‘스노우폴 앞마당에 두 동강이 난 채로 굴러다니고 있겠지.’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저을 때, 아론이 다가왔다.
붕대를 감은 오른팔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제법 멀쩡해 보였다.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너도 정신 차렸구나.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그가 보란 듯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아론도 발락에게 치료를 받은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오른팔도 며칠만 푹 쉬면 나을 것 같다고 한다.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몸을 날려 만들어 준 몇 초가 나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메리가 귀띔했다.
“아론 경은 어젯밤에 깨어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도련님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다른 기사님들도 그렇고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기사들의 얼굴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야.”
큰 전투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
안부를 묻는 그들에게 답을 해 주곤, 곧바로 헤센 남작의 막사로 향했다.
메리의 얼굴을 이렇게 만든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도련님…… 혹시 저 때문에…….”
그녀도 그걸 깨달았는지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헤센 남작님께서도 제게…….”
“가만히 따라와. 아론, 너도.”
허둥지둥 입을 여는 그녀를 무시하곤 아론까지 대동해 막사에 도착했다.
휙!
“히, 히익!”
입구를 힘껏 제치자 안에 있던 헤센이 화들짝 놀라했다.
분명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나한테 찔리는 게 많아서 그랬겠지.
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증거였다.
“내가 뭐 빠지게 싸울 때, 뒤에서 내 욕이나 지껄이던 헤센이구나.”
“그, 그게……! 오해십니다!”
“아냐. 그건 참을 수 있어.”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근데 이 자식이 내 시녀를 건드려?”
“아악! 살려 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나 이전에 바텐가에 대한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바텐가가 어떤 가문인가. 이 변방 왕국의 남작 따위는 감히 비빌 수도 없는 최고의 명문가인 것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성을 잃었던 바람에……!”
그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빌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메리에게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깨어나기 전에 그녀에게 입막음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놈은 정말 안 되겠다.
“오늘부로 스노우폴은 너희 영지가 아닌, 바텐가의 소유다.”
순간 남작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저놈이 스노우폴에 미련을 갖을 만한 이유는 딱 하나.
저 설산에 세워진 빙궁을 잃기가 아까운 기색이었다.
‘멍청한 놈.’
나도 웬만하면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다.
“거기에 내 시녀에게 손을 댄 대가로 10만 골드를 청구하겠다. 이의가 있다면…….”
쩌적-
서리 망토의 효과를 발동시키자 헤센 남작의 피부 위로 서리가 내려앉았다.
“끄아악!”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헤센.
그럼에도 그의 호위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놈들이 움직이는 순간, 빼도 박도 못하게 바텐가에 반기를 드는 것이니까.
“아, 아게씁니다! 제바 사려 주시씨오!”
남작이 얼어붙은 입으로 싹싹 빌었다.
비루한 남작에게 10만 골드는 뼈아픈 손실이다.
거기에 헤센이 스노우폴에 보낸 지원품 또한 전부 내 소유가 되었다.
“이 땅에서 당장 꺼졌으면 좋겠군. 골드는 내 본가로 보내고.”
그날, 헤센과 병사들은 곧바로 스노우폴을 떠났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다는 듯, 참 다급한 모습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떠날 채비를 갖추곤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 주변엔 신도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특히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로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열었다.
“이곳이 관광지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 저 궁전은 그럴 가치가 있거든.”
사실 다른 용도로 쓰이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터다.
빙궁의 가치는 아름다운 외관뿐만이 아니다.
신비의 존재인 요정이 저 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 귀족들 사이에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들은 희귀하고 특별한 것에 환장하니까.
비록 변질된 요정이지만, 그건 비밀로 하면 되는 일이다.
“아무튼 너희 마을이 우리 가문의 소유가 된 이상, 그에 걸맞은 모습을 갖춰야겠지.”
“그 말씀은…….”
한마디로 마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 가문의 사람 중에 한 명이 맡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성자님!”
“감사는 무슨. 너희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스노우폴의 주민들의 임무는 아주 막중한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호르교를 전파하기!
“이 마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신자로 만들어라. 귀족들은 건드리지 말고, 낮은 신분의 수행원들을 중심으로 말이야.”
대게 귀족들은 평민을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놈들을 건드렸다간 귀찮은 일만 생길 게 뻔했다.
역시 답은 아래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아주 믿음직스러운 신도가 하나 있었다.
“메리. 네가 잘해 줘야 해.”
“네!”
메리가 힘차게 답했다. 그녀는 마차에 탑승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께서 제게 맡기신 일…… 하늘이 두 쪽 나도 따르겠습니다!”
어젯밤, 나는 메리에게 이곳에 남아 전도 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최하급 전도사가 된 그녀야말로 이 일에 적합한 인재였다.
아직 신도가 되지 못한 주민들도 메리와 함께 있다 보면 신앙심이 투철해지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고.
‘신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하니 좋아 죽는군.’
메리는 처음엔 곤란해하던 기색이었지만, 신의 이름을 꺼낸 이후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전도 활동을 펼칠 기세였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성자님!”
“또 오세요!”
마차는 그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겨우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는데, 참 다사다난한 외출이었다.
“씁.”
초장부터 미래가 틀어졌다.
지금은 습격 한 번으로 끝났지만,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역시 최선의 방안은 무슨 일이 생겨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
이번에 마나 둔감증을 완치시키면, 가주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영약을 왕창 뜯어낼 셈이다.
‘설마 아들의 불치병이 나았다는데 영약 몇 개를 안 사 주겠어?’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부정하고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바텐가에 도착하려면 삼 일이나 걸린다. 그동안은 수련도 불가능하니 마나 호흡이라도 하려 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육안으론 확인할 수 없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껏 활성화된 마나가 생전 처음 보는 길로 흐르고 있는 것이.
그것은 기존보다 훨씬 더 빠르고, 은밀한 운용 방식이었다.
마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온몸 이곳저곳을 활개치고 다녔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충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었다.
설마, 이런 선물을 주고 갈 줄이야.
18화. Episode. 07 신성력 (1)
마나 루트.
그것은 마나가 체내를 순환하는 경로다. 종족마다 그 경로와 특징이 상이한데, 예를 들어 오크의 루트는 굵고 단단해 몸을 쓰는 투사로서의 적성은 최고였다.
마법의 종족인 엘프는 루트가 얇은 대신에 굉장히 탄력적이었다. 복잡한 마법을 엮어 내는 데 최적화된 케이스다.
인간은 그들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뭘 하든 제한이 적고,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하다는 평을 듣는 종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대륙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武)와 마법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강인한 투사인 오크도 마법 앞에선 큰 힘을 쓸 수 없었으며, 마법의 대가인 엘프도 기사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건…….’
나는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 마나 루트가 변했다.
오크보다 훨씬 더 굵으면서도 엘프보다 탄성이 뛰어나도록.
인간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루트.
발락이 개발해 낸 그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손을 쓴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시험의 각인을 개방시키면 루트도 전수해 달라고 떼를 쓸 셈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선물을 주다니.
활성화된 마나는 새로운 루트를 타고 빠르게 순환했다.
처음 마나를 접했을 때처럼 느낌이 새로웠다.
“새로운 루트에 신앙을 순환시킨다면…….”
나는 아직 신앙을 사용하는 방법이 미숙했다.
그저 무식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제 해결할 방법이 보였다.
“도착하면 연습을 좀 해 봐야겠어.”
◈ ◈ ◈
스노우폴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가 떨어진 탓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벌써 내일이면 바텐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따듯한 차를 건네며 묻는 아론에게 고개를 저었다.
화르륵- 피어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 상태창을 열람했다.
[호르(리하르트)]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5,136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스노우폴의 신도들이 기도를 잘 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틀 만에 신앙이 두둑해졌다.
며칠 전만 해도 하루에 180 정도씩 들어오던 신앙이 이젠 1,400~1,600씩은 들어오고 있었다.
‘신도 수가 깡패로군.’
마음 같아선 대륙을 돌아다니며 신도들만 모으고 싶을 정도였다.
신앙 수치에서 눈을 돌려 이번엔 ‘해금된 직위’ 목록을 살폈다.
최하급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아 그 윗단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
손가락을 들어 글자들을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세부 사항이 눈앞에 나타났다.
[최하급 전도사 1/5], [최하급 성기사 0/3], [최하급 사제 0/2]
“흐음.”
난 슬쩍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성기사가 되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러만 다룰 줄 알게 되면 날아다닐 텐데.’
오러 자체가 기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것의 유무가 중급과 상급의 격차라고 봐야 했다.
특히 아론의 경우엔 더더욱 차이가 컸다.
‘오러를 다루고 나선 못 뚫어 내는 게 없었지.’
그가 품고 있는 마나는 무척 특별하기 때문이다.
극히 희박한 확률로 타고나는 마나 특성 보유자. 그게 아론이었다.
후에 기사들은 아론의 오러를 보고 ‘피어싱 오러’라고 불렀다. 상대의 오러마저 비집고 파고들어가 꿰뚫는 기괴한 특성 때문이다.
워낙 특이한 능력인 탓에 컨트롤이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왜 그러십니까?”
이제야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아론이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싶어서.”
아론은 오늘 하루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는 듯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데스나이트와의 일전 이후부터 그랬다.
내 물음에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마나 루트가 변해 있습니다.”
“……뭐라고?”
지금 얘가 뭐라 한 거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설마 발락이 아론에게도 손을 썼던 걸까.
“훨씬 더 굵어졌다거나, 탄력이 강해졌다거나?”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황당함이 몰려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발락, 이 양반!’
이렇게 통이 클 줄은 몰랐다.
아마 나와 아론이 쓰러져 있을 때 같이 해 준 것 같은데.
아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른 수련을 해 보고 싶어 근질거리는 것을 참느라……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창귀가 아니라 창신이 되겠는데…….’
어쩌면 아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상급의 경지에 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지겠지.
‘잡아야 한다.’
욕심이 생겼다.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직 재능이 개화하지 못한 지금 잡을 기회였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도련님.”
“으응?”
아론의 눈빛이 어쩐지 뜨거웠다.
“도련님께 드릴 말도, 들을 말도 많습니다. 하나 지금은 이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상급 기사가 된다면…… 저를 도련님의 직속 기사로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마치 짝사랑하던 상대한테 고백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아서 내 곁으로 와 주겠다니.
나야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지금 당장도 받아 줄 수 있어.”
내 말에 아론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웃는 건 오늘 처음 봤다.
“아직은 저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장 어림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날 탐탁지 않아 하던 그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충신이 되었다.
흐뭇한 감정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어색했다.
물론 그간의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속 기사가 되겠다고 할 정도는 아닐 텐데.’
다른 바텐가의 핏줄에 비하면 아직 나는 약해 빠졌다. 특히 후계자로 확정되다시피 한 둘째 형은 5년 전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셋째인 모리츠는 뭐…… 그냥 그렇다 치고.
‘굳이 이유를 묻지는 말자.’
괜히 말을 꺼냈다가 마음이 변하면 어쩌겠는가.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두말은 없어. 네가 상급 기사가 되면 내 직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다만 단단히 못 박아 둘 뿐.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이기에, 이렇게 다짐을 받아 두면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지.
아론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런 걸 두고 겹경사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 ◈ ◈
이튿날 오후.
바텐가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주일의 외출이었을 뿐인데 침대가 왜 이리도 반가운지.
늘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자, 이제 연습을 해 볼까.”
눈을 감고 신앙을 움직였다.
굵게 확장된 마나 루트를 따라 순환시키자 온몸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이게 훨씬 더 효율이 좋아.’
무식하게 끄집어내 사용하는 것보다 루트를 따라 순환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10의 신앙으로 12, 13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했다.
체내에서 순환시킬 뿐일진대, 몸 바깥으로 빛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마에 물든 이라면 누구든지 감지할 수 있을 터.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끊임없이 신앙을 순환시키며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마나 하트에 신앙이 닿았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10의 신앙이 심장에 먹혔다.
현재 보유하고 신앙은 오늘 들어온 것까지 합해 6,500 정도.
이 정도면 마나 둔감증을 완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일단 이 족쇄부터 푸는 거다.’
우선 100의 신앙을 마나 하트에 투입했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아직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엔 일천!”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많은 신앙을 한 번에 때려 박았다.
설마 이렇게 해도 안 되려고?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완치가 아니라고……?”
뭔가 이상했다. 조금만 투자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신앙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그냥 완치 수준 아닌가?’
눈을 감고 주변의 마나를 느꼈다.
마나 둔감증 치고는 선명한 감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마나를 감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둔감증’ 꼬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영 찝찝한 일.
“후…… 다시 일천 투자.”
어차피 이젠 하루에 1,400 이상의 신앙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
눈을 딱 감고 다시 한번 질렀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
대체 이게 뭔지. 고개를 숙여 가슴을 쳐다보았다.
“하, 좋아. 어디까지 처먹나 두고 보자.”
신앙이 눈물 나게 아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치료를 안 하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먹이고 먹여 2,000의 신앙을 마나 하트에 투자할 때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뭐, 뭐야!”
일으켰던 2,000의 신앙을 먹어치운 마나 하트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던 마나가 루트를 타고 미친 듯이 순환했고, 동시에 제멋대로 신앙이 활성화되었다.
그것도 내게 남아 있는 것 전부.
“스톱! 안 돼!”
그러나 마나 하트가 내 말을 듣는 일은 없었다.
남아 있던 모든 신앙이 순식간에 마나 하트에 먹혀 사라졌다.
황당한 결과에 눈만 끔뻑일 때,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마나 둔감증이 완치되었습니다.』
『마나 하트와 마나 루트가 신앙을 품습니다.』
『특성 - 신성력을 획득하였습니다.』
“…….”
멍하니 손을 들어 올려 마나를 뽑아 보았다.
하얀 빛무리가 반짝인다.
대륙에 몇 없는 특성 보유자.
“하…… 하하.”
이제는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다.
19화. Episode. 07 신성력 (2)
“신성력…….”
마나 아니, 이제 신성력이라고 불러야 하나.
손에 맺혀진 그것은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신앙과도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마나와 신앙을 섞은 느낌?’
밝은 빛을 뿜어내는 신성력은 알갱이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마치 반딧불이들이 손에 모여든 것 같았다.
꽈악-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곤 허공에 몇 번 주먹을 날려 보았다.
팡팡 터지는 파공음은 내 몸이 평소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루트를 순환하며 빛을 밝히는 신성력이 내게 활력과 힘을 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버프라고 해야 할 터.
“하하…….”
아무래도 정말 특성 보유자가 된 모양이다.
재능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날 때부터 축복받은 부류.
‘아무튼 나도 그렇게 됐다, 이거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특성은 선천적인 부분이기에, 기연 같은 것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설정했었으니.
나 참, 신앙의 운용법을 찾으려고 했더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흥분을 가라앉혔다.
우선은 이 능력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신성력을 좀 더 많이 활성화시키자, 루트를 통해 순환하는 신성력이 몸을 뜨겁게 달궜다.
‘상당한 버프 능력이야.’
활성화시킨 신성력이 많아질수록, 버프 또한 강해진다.
온몸에 힘이 넘치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고양감이 느껴졌다.
내가 얻은 특성의 힘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반 마나보다 훨씬 더 고밀도로 압축되어 있어.’
원래 마나는 기체의 형태를 띤다.
때문에 마나는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대기 중으로 산화하는 탓에 끊임없이 소모되는 양이 많았다.
단순히 말하면 연비가 안 좋은 셈.
그것을 이끌어 낸 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몸에 붙들고 있느냐가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척도가 될 정도니까.
그러나 지금 내 손에 머물고 있는 빛의 알갱이는 달랐다.
몸 밖으로 활성화시켰으나, 쓸데없이 소모되는 게 아닌 그저 계속 손 주위를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거라면 오러를 엮기 훨씬 더 쉬워지겠어.’
기체의 형태보다 이런 고밀도의 신성력이 훨씬 다루기 쉬웠다.
게다가 더 좋은 점은 신앙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최고지.’
만능의 힘인 신앙보다는 효과가 덜할 테지만, 저번처럼 마족의 습격을 받을 위험도 적을 터.
그리고 버프 효과 또한 절대 무시 못할 능력이었다.
아주 유용하게 쓸 힘을 얻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도련님. 가주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가주가 호출할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
그에 신성력을 갈무리하고는 방을 나섰다.
◈ ◈ ◈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오, 리하르트 도련님. 간만에 뵙습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일까.
순박하면서도 경쾌한 인상의 기사가 반가운 듯 말을 붙였다.
순간 누구지 싶다가, 금방 그의 이름을 떠올랐다.
“레오 경.”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이자, 가주의 오른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가주의 곁에서 엄청난 공적을 세운 인물이다.
“가주께서 호출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다음을 기약해야겠군요.”
그럼 이만-, 인사를 마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가주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가주를 뵙습니다.”
언제 봐도 험악한 인상의 가주,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 ◈ ◈
“제법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묵직한 중저음이 집무실을 울렸다.
루드비히쯤 되면 그냥 말하는 것만으로도 기백이 장난이 아니었다.
“예. 데스나이트 외 30여 마리의 언데드가 스노우폴을 습격했습니다.”
한 차례 침을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면, 데스나이트는 크롬벨이라는 자에게 습격을 명받았다고 했습니다.”
“크롬벨…….”
“데스나이트를 수족으로 부리는 것을 보아, 마족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겠지.”
루드비히는 표정을 굳혔다.
마계란 약육강식의 세계 그 자체. 그곳의 생명체인 마족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즉, 이름을 가진 자는 약육강식 중 강의 위치에 서 있는 마족이란 말이었다.
크롬벨을 비롯한 현재 대륙에 있는 세 마리의 리치가 그런 존재다.
“발락이 말했던 리치인가.”
그의 중얼거림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그의 손가락이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곧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웠다고.”
“……발락 경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래. 그렇지. 발락에게 큰 빚을 졌어.”
빚이라.
그가 입에 담기엔 영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루드비히는 일순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또 사고를 쳤더구나.”
“헤센 남작과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이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언데드의 습격 당시, 그는 제게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 감히 남작 따위가 바텐가의 사람에게 손을 댄 것은 용납 못할 일이 맞다. 하나.”
나는 묵묵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는 예상이 된다.
“어째서 네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냐. 아직도 가문을 등에 업고 다니는 게냐.”
예상대로였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제 독단으로 결정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헤센 남작이 건드린 것은 제 시녀입니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제가 직접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는 가주.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스노우폴을 빼앗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저는 스노우폴 근처에 있는 설산에서 요정이 만든 얼음성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변질된 요정이었으나, 성의 아름다운 외관과 요정이라는 특별함은 귀족들에겐 큰 가치가 있을다고 봤습니다.”
얼음성의 외관은 진심으로 아름다웠다. 그곳에 한기가 몰아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눌러 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본래는 가문의 위신을 생각해 헤센 남작에게 기증할 생각이었지만, 명분이 생겼고 상황이 달라졌기에 방향을 틀었죠.”
“…….”
루드비히는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변했구나.”
별것 아닌 말 같았지만, 호랑이 같은 가주에게 듣자 기분이 남달랐다.
이제야 망나니 인식이 벗겨졌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그래. 너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건드린 놈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한다.”
어째선지 가주는 빙궁보다 다른 것에 집중했다.
메리가 내 사람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놀라웠던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리하르트’ 이 망나니는 오히려 제 사람을 괴롭히기 바빴으니까.
“기드가 좋아하겠군.”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갑자기 기드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걸까.
“네가 말한 마을에는 관리자와 하급 기사 셋을 붙여 주마. 그 이상의 지원은 하지 않겠다. 스노우폴은 이제 네 소유다.”
“그럼 이후의 수입은 제가 갖는 겁니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푼돈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
역시 대가문의 주인이라고 해야 하나. 여유가 넘쳐흐른다.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마나 불감증이 완치되었습니다.”
내 말에 간헐적으로 툭툭- 두드리던 가주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이제야 말하는군.”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한 얼굴.
하긴, 아론을 통해 보고를 받았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하겠지.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놈이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아론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더구나.”
“…….”
“데스나이트가 어째서 오직 너만을 노렸는지. 네가 어떻게 검성의 힘을 발휘했는지. 보고서엔 그저 알 수 없다고만 적혀 있더군.”
나를 내려다보던 가주가 말을 이었다.
“말해 보거라.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것이냐.”
당연히 의문이 들 것이다. 일부러 극적 효과를 위해 여지를 남겨 놓았으니까.
직접적인 사유는 신앙 때문이지만, 그것만큼은 아직 가주에게 말할 때가 아니었다.
원래 같았으면 마나 불감증의 완치에 관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마침, 딱 둘러 대기 좋으면서도 놀랄 만한 이유가 생겼다.
“제 마나의 특성 때문입니다.”
“……!”
비록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건 자랑을 해 줘야 한다.
숨길 건 숨기고, 내세울 건 내세운다.
그리고 특성은 지금, 내세울 가치가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가주의 눈이 한껏 치켜떠졌다.
그의 표정이 이렇게나 변한 건 처음 봤다.
웃을 때도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엄청난 포커페이스였건만.
덥썩-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곧 그의 손을 타고 마나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매우 정순하고 고결한 느낌의 마나였다.
특성이 아닌, 순수한 마나를 극도로 갈고닦은. 대륙 최강의 기사에게 어울리는 순도 높은 마나.
‘큭!’
그것이 순식간에 내 마나 하트로 직행했다.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신성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채찍질을 당한 말처럼, 신성력이 마나 루트를 타고 내달렸다.
고오오-
그것과는 별개로 몸에 활력이 감돌았다.
나도 될 대로 되라 하고 신성력을 순환시켰다.
“이게 제 마나입니다.”
한술 더 떠서, 내 팔목을 붙잡고 있는 그에게 신성력을 흘려주었다.
확 그냥, 버프에 취해 버리게끔.
20화. Episode. 07 신성력 (3)
“하.”
루드비히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마법가들의 기습을 받았을 때에도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제 아들이 당돌하게 그의 몸으로 흘려보낸 마나.
성스러운 기운을 한껏 품은 그것은 루드비히에게 활력을 주고 있었다.
아니, 활력 정도가 아니라 신체 능력을 증가시키기까지 했다.
‘힘이…… 솟는다.’
주먹을 꽈악 말아 쥔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천지를 울릴 힘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더 강한 힘이 솟았다.
이는 루드비히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주었다.
대륙 최고의 기사,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정상에 오른 이후, 어지간한 영약이나 아티팩트 따위는 그의 무력을 키울 순 없었다.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다에 부어 봤자 티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
그러나 지금 그의 몸속을 맴돌고 있는 신성력은 달랐다.
분명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분명 눈에 띌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게 너의 특성인가.”
극히 희박한 확률로 발견된다는 마나 특성.
그게 여태껏 제 골치를 썩이던 아들, 리하르트가 지니고 있었다니.
루드비히의 시선을 받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신성력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라고 덧붙인 리하르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신체 능력의 증가가 느껴지십니까?”
“그렇다. 확실하게 증가했군.”
가주의 대답에 리하르트는 확신을 굳혔다.
신성력의 버프 효과.
그것은 대상의 능력을 일정 비율로 상승시켜 주는 것이었다.
대상이 얼마나 하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일정한 상승률을 보여 주는 힘.
무력의 격이 높아질수록 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알면 알수록 굉장한 특성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루드비히는 리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제 아들이 품고 있는 마나, 아니 신성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확실히 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양.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사실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것은 오늘입니다. 그동안은 조금씩 증상이 완화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저주와 같은 불치병을 완치시켰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군.’
그저 의심할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아들이다. 그런 만큼 그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수많은 영약을 탐하면서까지 치료하고 싶어 했던 마나 불감증.
그것이 완화되어 마나를 느끼게 되었는데도 여태껏 말을 하지 않았다니.
아무리 지금 리하르트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해도 가주로서는 절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마나 둔감증이었지만, 마나 불감증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애초부터 리하르트가 자신의 성격을 꾸며 낸 것이라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랬다면.
그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기사들의 보고를 통해 들었던 리하르트의 수련 내용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마나 불감증이란 불치병이 어느 날 갑자기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해도, 없던 재능이 생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날 수 없는 새가 아니라 날지 않고 있던 새였다는 걸까.
그것도 아주 커다란 날개를 숨긴 채.
“큭!”
기드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목숨을 걸고 드래곤을 잡으러 갔건만.
루드비히는 지금껏 자기 자신을 숨겨 온 아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재밌어지겠구나.”
그저 후계자를 결정짓는 것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리하르트의 손등에 새겨진 각인.
기이하게 비틀려 있는 그것이 결정을 굳혀 주었다.
“아버지.”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똘망똘망 뜬 눈을 깜빡이는 것이, 척 봐도 뭔가를 바라고 있는 모양새였다.
“제가 이제야 남들과 같은 조건을 얻었습니다만…… 시작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조건이라…….”
되도 않는 소리에 루드비히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의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감정 표현이 다양했다.
“특성 보유자인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리하르트가 뭘 원하는지는 그도 대충 예상이 갔다.
이제야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으니 영약이라도 구해 달라는 것일 터.
그래도 그렇지. 같은 조건이라는 말은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은가.
특성이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로 표현될 만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리하르트의 신성력이라는 것은 더욱이.
“불감증이 완치되고 나서야 느꼈습니다. 제 마나 하트에 쌓여 있는 마나가 얼마나 보잘것없을 정도로 적은지…….”
“말이 길구나.”
루드비히는 발락처럼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리하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영약 좀 구해 주십시오. 덤으로 좋은 무구도 말입니다. 아, 그리고 스노우폴에서의 전투로 제 호위 기사인 아론의 애창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낸 후 멋쩍게 웃음을 터트리는 리하르트.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주의 앞에서 이런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러나 리하르트는 지금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솔직히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너무 늦은 상황이니까.’
금수저를 물고 있으니 금을 떠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아론의 창까지 구해 달라는 건 반쯤은 무리수였다.
그래도 리하르트는 될 수 있으면 그에게 좋은 창을 구해 주고 싶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가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루드비히는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쾌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슬하에 네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흘러나오는 기세에 겁을 먹기 일쑤.
아무리 그가 냉정한 철혈의 기사라지만, 가끔은 씁쓸할 때가 있었다.
“건방지구나. 감히 호위 기사의 것까지 부탁하다니.”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할 때에도 그의 말투는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아론도 제 사람입니다. 최대한 좋은 것을 구해 주고 싶은 욕심에 그랬습니다.”
“흠. 좋다. 드워프들에게 연락을 보내지.”
흔쾌히 떨어진 수락에 리하르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단, 영약은 구해 주지 않겠다.”
“예?”
잘나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영약을 구해 주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리하르트는 의문을 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약만큼은 구해 주리라 예상했는데?’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아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영약이 아닌가.
오히려 안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 무구는 수락했는데, 정작 영약이 안 된단다.
가주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기드가 너를 위해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갔다.”
그 탓에 리하르트에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좀 전보다 훨씬 큰 의문이.
“드래곤 하트를 말입니까? 그게 무슨…….”
단번에 섭취할 수 없어, 수차례에 걸쳐 나눠 먹어야 할 정도로 순도 높은 마나를 품고 있는 지고의 영약을?
갑작스레 떠난 기드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나갔다니. 그것도 자신을 위해?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놈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결심을 한 모양이지. 대뜸 찾아와서 드래곤을 사냥하고 오겠다더군.”
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라고 루드비히가 덧붙였다.
리하르트는 하마터면 가주 앞에서 이마를 부여잡을 뻔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그 노인네가 나이 생각을 못하고…….’
리하르트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어디 동네 똥개인가. 그 이름에 걸맞은 최강의 종족인 괴물을 어떻게 사냥하겠다고.
“어째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고 각오다. 나는 그것을 임무라는 명분으로 존중해 준 것이다.”
“……알려 주십시오. 기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드와 제3기사단은 홉슨 산맥으로 향했다.”
홉슨 산맥.
바텐가에서 북동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홉슨 산맥이라면…….’
가주의 말에 리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에 따르면 그곳엔 어린 드래곤이 살고 있다.
그래도 드래곤쯤 되면 갓 태어나도 상급 기사를 잡아먹을 정도로 강력한 괴물.
리하르트는 기드를 찾아가 뜯어말릴 생각이었다.
“그를 말릴 셈인가.”
“그렇습니다.”
가주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늦었다. 이미 기드는 담금질에 들어섰다. 네 달 간의 준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
“…….”
리하르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담금질까지 하다니.’
물론 그것을 끝마치면 드래곤이라도 승산이 있다.
‘그래도 그 노인네 나이가 몇인데.’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도 수명이 크게 깎일 것이다.
최소한 기사로서의 생활은 불가능하겠지. 더 나아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담금질은 생명을 대가로 큰 힘을 얻는 수단이었다.
마법가에선 이 행위를 ‘무식한 쇠질’이라고도 불렀다.
‘말 그대로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수련을 거듭하는 거지.’
보존식을 씹으며 잠도 자지 않고, 한 번, 한 번의 휘두름에 온 정신을 담아 수련을 거듭한다.
애초에 보통 정신력으론 꿈도 못 꿀 일.
그런 고행을 끝마치면 단기간 동안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단계 더 높은 격에 억지로 발을 들이미는 꼴이었다.
그만큼 강한 부작용과 함께.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담금질에서 억지로 깨우면 정신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가주의 말에도 리하르트는 눈을 빛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드래곤 하트도 얻고, 기드도 잃지 않을 셈이었다.
21화. Episode. 08 못난이 모리츠 (1)
“젠장.”
가주와의 독대가 끝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기드, 이 양반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마음고생을 시키는 건지.
당시 용의 심장도 먹고, 기드의 목숨도 구할 방법이 떠오르긴 했다.
문제는 가주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떠올린 방법을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던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되었다. 어차피 난 너를 도와줄 생각이 없으니, 그를 구하려거든 네가 알아서 해 봐라.’
매서운 눈매에 담긴 감정은 나로서도 알진 못했다.
다만 하나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나 지켜보겠다는 사실이었다.
‘가주가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은 가문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렇게 되면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 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된다.
“후우-.”
오늘따라 말이 좀 통한다 싶었더니, 역시나 기사란 족속들은 죄다 꽉 막힌 놈들이다.
유도리가 없어요, 유도리가.
어찌 되었든, 나 혼자서 그곳까지 도달하기엔 큰 무리가 있다.
바텐베르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동안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벌써 왔나.
문을 열자 아론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거 참, 일단 그를 부르긴 불렀는데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도련님?”
“아, 들어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아론을 방으로 들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 있는 그를 의자에 앉히곤 나 또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말을 고르고 있던 와중에 그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상급의 경지에 오르면 내 직속 기사가 되겠다던 아론.
그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 알고 있었냐?”
“무엇을 말입니까?”
“기드랑 제3기사단이 드래곤을 토벌하러 갔다는 거.”
아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예의 우직함이 묻어나오는 얼굴.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기드 경과 같은 전장에 서고 싶었으나, 그분의 부탁으로 이곳에 남았지요.”
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주에게 듣기론 기드가 담금질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 일주일 전이란다.
즉, 우리가 외출을 나갔을 때 전해진 소식이다.
아론은 아직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드라면 떠나기 직전에도 손자에게 담금질을 할 것이란 얘기는 꺼내지 않았겠지.
내게 드래곤 하트를 바치기 위해 그 자신이 모든 부담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
“내가 너를 부른 건 기드의 일 때문이야.”
“아, 무언가 전해 들은 것이 있으십니까? 요즘 소식을 통 못 받았기에 궁금해하고 있던 차입니다.”
역시 말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건 그에게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입맛이 써, 침을 삼키곤 말을 이었다.
“기드가 담금질을 시작했다.”
방안에 정적이 맴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런 정적이.
“기드…… 경이 말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제3기사단의 임무에 합류한 이유는……, 드래곤 하트를 내게 바치기 위해서다.”
아론은 내게 어떻게 반응할까.
드래곤 토벌이라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 그리고 엄청난 리스크가 확정된 담금질을 하는 것.
두 개의 차이점은 생각보다 크다.
전자는 제 할아버지를 믿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 수라도 있지, 후자는 그것조차 무리였다.
운이 좋아봤자 목숨만 부지한 채, 평생 장애를 떠안고 살아야 할테니.
“……그래서 기드 경이 이번 임무에 참가하신 것이군요. 줄곧 의문이기는 했습니다.”
아론은 덤덤하게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짙은 슬픔과 걱정이 어려 있었다.
“혹시 도련님께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모든 것은 기드 경, 제 조부님의 선택입니다.”
“…….”
그런데 그게 나에게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마이어 가의 원로이자, 창기사 중에 가장 강한 사내. 기드 마이어 경은 진정한 무인입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긍지를 짓밟는 짓입니다-, 라고 아론이 덧붙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바텐가에 소속된 기사가 아니랄까 봐, 가주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다.
기사의 선택을 존중해라.
말의 때깔은 참 곱다.
“그런데 나는 납득을 못하겠다.”
“예?”
“선택이고 나발이고, 납득 못한다고.”
기드를 구할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내 머릿속에 있다. 많은 위험이 따르지만,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
이건 단순히 기드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얻을 수많은 이득 중에 기드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아론, 두 달 준다. 그 안에 오러를 다뤄서 내 직속 기사가 돼라.”
“갑자기 그게 무슨……?”
가주는 내게 가문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내 기사를 데리고 가면 될 일이다.
아니, 그게 훨씬 더 나았다.
“우리는 두 달 후에 엘프의 숲으로 떠난다.”
엘프의 숲에는 세계수가 존재한다. 세계수의 열매는 불로불사의 영약이라고도 불렸고, 그 나무 자체에도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다.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인 만큼, 고작 인간 하나 따위는 원상 복구를 시켜도 차고 넘친다.
“지금 엘프의 숲이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대체 그곳을 왜 가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전에 엘프의 숲은 그 위치가 밝혀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숲의 위치를 알아. 그리고 그곳엔 담금질의 후유증을 치료할 만한 보물이 있지.”
내 말에 아론의 몸이 움찔했다.
“……그것도 스노우폴에서의 결계 때처럼, 그리고 이전에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까?”
“그래. 너도 할 수만 있다면 기드를 구하고 싶잖아.”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인간을 도울 리가 없습니다.”
그건 내가 믿는 구석이 있다.
아론이 해야 할 일은 하루 일찍 상급의 격에 도달하고, 내 직속 기사가 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이대로 포기하겠다고? 선택을 존중한다는 소리만 반복하면서, 정작 너는 가만히 있겠다는 거야?”
“…….”
애써 덤덤한 척하던 아론. 그의 얼굴에 조금씩 감정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갈등과 혼란.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할 수 있다면, 제 조부님을 구하고 싶습니다.”
꽈악 말아 쥔 손이 그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진작에 이렇게 나올 것이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떨어져도 한참 전에 떨어진 듯, 창문 너머는 어두컴컴했다.
“내일부터 빡세게 수련한다. 두 달 만에 오러 다루기, 가능하겠어?”
내 말에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마나 루트가 변한 뒤로, 마나를 운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할 수 있다는 거지?”
“반드시 해 보이겠습니다.”
좋다.
나도 두 달 동안 놀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노우폴을 습격했던 데스나이트.
놈에게 속절없이 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 괴물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결국은 힘이 필요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곤, 아론에게 입을 열었다.
“아론, 그래서 말인데…….”
“예.”
“신을 믿을 생각 없냐?”
“…….”
◈ ◈ ◈
“흠흠.”
모리츠는 거울 앞에 선 채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가주와의 아침 식사는 늘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한참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호위기사인 헨드릭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모리츠 도련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래.”
헨드릭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긴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곤 식당의 문을 열었다.
“모리츠 바텐베르크가 가주를 뵙습니다.”
한껏 예를 갖춘 인사.
애써 평온을 가장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앉거라.”
숙인 고개 너머로 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허리를 펴는 모리츠의 눈에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리하르트?’
제 동생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쓸모없는 놈.
그 못난 놈이 가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외출을 끝내고 돌아왔다더니, 간만에 가주께서 부르신 건가? 근데 저 자식이…….’
모리츠는 식당의 의자를 빼 앉으며,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저보다 먼저 와 있는 꼴도 탐탁지 않은데, 아예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감히 형한테 인사도 하지 않다니.
속에서부터 열불이 끓어올랐지만, 애써 참아 냈다.
가주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 소란을 피우기엔 너무나 좋지 못한 자리였다.
“식사하지.”
가주가 입을 열고 나서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음식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리하르트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곤, 고기를 썰어 댔다.
모리츠의 눈엔 그 모습도 아니꼽게 느껴졌다. 걸신들린 듯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리하르트가 퍽 우스웠다.
‘외출 나가서 쫄쫄 굶기라도 했나 보군.’
하여간, 한심한 녀석.
속으로 리하르트를 한껏 비웃을 때였다.“아버지.”
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단 한 단어. 그런데 그 한 단어의 뜻이 파격적이었다.
“아, 아버지이?”
모리츠가 저도 모르게 나섰다.
아버지라니. 저놈이 정녕 미친 게 아닌가. 감히 바텐베르크의 가주를 격식 없이 칭하다니. 모리츠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가주를 아버지라 불러선 안 된다. 루드비히의 피를 이은 자식들에겐 불문율과도 같았다.
“리하르트. 이 건방진……!”
“왜 그러느냐.”
모리츠의 말을 끊은 것은 루드비히였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평온한 말투. 그에 되려 당황한 것은 화를 내려던 모리츠였다.
“소검궁의 개인 연무장 사용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리하르트는 덤덤히 제 용건을 꺼냈다.
오래전, 사용 금지 처분을 받았던 개인 연무장.
그가 그곳을 입에 담았다. 마치 당연히 허락해 줄 것이라는 듯한 태도로.
“흠…….”
가주의 시선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하, 정말 요즘 기가 살았나 보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리츠는 실소를 머금었다. 몇 달 수련을 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지.
그는 가주가 당연히 호통을 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허가하마.”
귀에 들려온 의외의 대답에 모리츠는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뚝 멈췄다.
가주의 말투가 아주 조금이지만 부드러운 것 같다는 느낌은 그의 착각일까.
분명 큰 차이는 없는데, 리하르트를 향한 평소 말투가 아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 네가 생각한 방법은 잘 될 것 같더냐.”
가주가 리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호기심과 흥미가 묻어나오는 눈빛. 모리츠가 기억하기에는 가주가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은 정말 드물었다.
‘뭔데? 대체 뭔데?’
가주와 리하르트의 대화에 모리츠는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원이 있다면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만.”
어쩐지 리하르트의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알던 모지리가 맞기는 한 건지.
형제 중에서도 유난히 가주를 무서워하던 놈이라기엔 너무 큰 변화였다.
“네 재주껏 해결해 보도록 해라.”
대화는 그게 끝.
모리츠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도, 식사는 계속되었다.
22화. Episode. 08 못난이 모리츠 (2)
“말도 안 돼! 그게 정말이야?”
제 방으로 돌아온 모리츠는 호위기사, 헨드릭으로부터 믿기 힘든 소식을 들었다.
“예에…… 리하르트 도련님을 호위했던 하급 기사들이 말하기를, 빛나는 기운을 흩뿌리며 언데드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 망나니가?
기사들이 정말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단체로 약을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빛나는 기운이 뭔데? 마나? 설마 마나 특성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모리츠의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마나 특성이 무엇인가. 보유자에게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안겨 주는 축복이 아닌가.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제 위치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바텐베르크는 철저한 능력제.
유능한 자는 부각되고, 무능한 자는 도태되는 냉정한 집안이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위기사 헨드릭이 모리츠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마 리하르트 도련님이 자신의 무용담을 과장하도록 부추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이 이렇게 흔들리면 자신 또한 곤란해진다.
그렇게 판단한 헨드릭이 리하르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도련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나 불감증을 갖고 계신 그분께서 어찌 마나를 사용하겠습니까.”
“그, 그래! 마나 불감증!”
모리츠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리하르트가 앓고 있는 마나 불감증.
“하하! 그걸 잊고 있었다니!”
그는 리하르트의 마나 불감증이 나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저주와도 같은 불치병이지 않은가.
“미치겠군, 정말 놈의 호위기사들이 약이라도 한 거 아닌가? 그놈이 빛나는 마나는 무슨!”
“저도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기사들이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헨드릭은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하급 기사를 떠올렸다.
‘거짓말을 할 친구는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리하르트가 마나를 사용하며 언데드와 싸웠다는 소리는 너무 허무맹랑했다.
마음 같아선 더욱 캐묻고 싶었으나, 어째선지 하급 기사는 그 뒤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놈 요즘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리하르트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어!”
모리츠가 쉴 새 없이 리하르트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간 자주 있었던 일인 듯, 능숙하게 맞장구를 치던 헨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럼 확실하게 서열 정리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작 호위기사 따위가 입에 담기엔 지나친 말이었다.
아무리 리하르트여도 도련님은 도련님.
그러나 그와 모리츠 사이엔 리하르트는 시종만도 못한 존재였다.
“도련님께서 리하르트 도련님과 이야기를 나눈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확실히 내가 동생한테 무관심하긴 했어. 리하르트는 주기적으로 밟아 줘야 했는데.”
모리츠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무장에서 자신에게 망신을 줬던 그날.
쏟아지던 기사들의 시선이 어찌나 치욕스럽던지.
까드득-
절로 이가 갈릴 정도였다.
“놈을 기사들 앞에서 철저히 무릎 꿇려야겠어.”
식당에서 보았던 가주와 리하르트의 미묘한 분위기도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참에 단단히 밟아야겠다.
그렇게 한다면 가주도 다시 관심을 접으리라.
결정을 굳힌 모리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 ◈
“제가…… 정말 이곳에서 수련해도 되겠습니까?”
아론이 내게 물어 왔다. 눈망울이 촉촉한 것이 꽤나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고마우면 나한테 기도나 좀 하지.
어제 아론에게 대차게 까였던 것이 떠오른다.
아주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젓더만.
“그렇다니까.”
나는 대충 답하며 몸을 풀었다.
가주에게 개인 연무장의 사용 허가를 받은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다.
공용 연무장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고 쾌적한 공간이란!
수련 욕구가 절로 샘솟는다.
‘리하르트’는 대체 뭔 짓을 했길래 개인 연무장까지 사용 금지 처분을 받은 걸까.
언뜻 그 이유가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 냈다.
어차피 사용을 허가받은 이상, 불필요한 잡념이다.
“어때, 시끄럽고 땀내 나는 공용 연무장보단 여기가 훨씬 낫지?”
“그렇습니다.”
다행히 아론도 마음에 드나 보다.
우리는 빠르게 체력 단련을 끝내 몸을 달구곤, 수련을 시작했다.
“후욱……!”
수련검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스노우폴에서의 실전이 큰 경험이 되었던 건지, 내 스스로 평가해도 나쁘지 않은 검격이 흩뿌려졌다.
‘이 정도면…….’
검술 숙련도 상승이 머지않은 듯했다.
그렇게 한참 수련을 하고 있을 때, 곁에서 창을 휘두르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괜찮으시다면 대련 어떻습니까?”
“오!”
이것 참 반가운 소리다. 확실히 보통 수련으론 영 부족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핸디캡은?”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전력을 다해 주십시오.”
아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보다 내가 필요한데 왜 자기가 필요 없다는 거야.
“뭔 소리야. 핸디캡도 없이 내가 널 어떻게 이겨.”
“도련님이야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러도 엮을 수 있으신 분이…….”
“오러?”
아무래도 아론이 아직도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설왕과 싸울 때, 아이스 크레센도에 신앙을 몽땅 때려 박았던 것을 오러로 착각했었다.
당시의 난 오러가 아니라고 했었지만, 말을 얼버무리다 보니 믿지를 못한 것 같았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지 싶을 때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십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리하르트!”
“……모리츠?”
못난 형제가 기사들을 죄 이끌고 찾아온 것이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건방진 놈. 이젠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그보다 여긴 왜 왔어? 내 개인 연무장인데.”
이제야 막 얻게 된 내 공간. 그곳에 불청객들이 몰려 온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시선을 피했다.
개중에는 익히 얼굴을 아는 자도 있었고, 처음 보는 자도 있었다.
아무래도 기사란 기사는 닥치는 대로 불러온 듯싶었다.
“이들은 내가 데려왔다.”
모리츠가 나서며 말했다.
흉흉한 기세가 느껴진다. 저놈이 이런 일을 벌인 의도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저들 앞에서 나를 한껏 밟을 셈이겠지.
“리하르트. 오랜만에 이 형님이 널 지도해 주겠다.”
한껏 무게를 잡으며 말하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쟤는 왜 뭘 해도 어설프냐.
“핸디캡은?”
아론에게 했던 질문을 그에게 재차 던졌다.
“큭! 무섭나 보지? 네놈도 바텐가의 피를 이었다면 당당히 맞서라!”
“……지금 이거 되게 웃긴 상황인 거 알지?”
검을 잡은 지 3개월도 안 된 나한테 대련을 하자는 주제에, 같잖은 도발이나 하고 앉아 있다.
그렇게 대꾸하자 모리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벌써 몇 년이나 검을 갈고닦은 모리츠가 여기서 물러났다간 크게 체면이 상할 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핸디캡이 필요할까 싶었다.
‘쟤, 약할 것 같은데.’
모리츠 바텐베르크.
검의 수재로 불릴 만큼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못했다.
게다가 놈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적어도 아론보다는 쉬운 상대임이 분명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근거 모를 자신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래. 정 겁난다면 내가 봐줘야겠지.”
이를 악문 채 말하는 모리츠. 동시에 나는 결정을 굳혔다.
“너에게 다섯 수를 양보…….”
“됐고.”
수십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 상황.
그 가운데에서 나는 입꼬릴 끌어올렸다.
모리츠가 판을 아주 잘 깔아 주었다.
“없어도 될 것 같다. 덤벼 봐.”
마침 언젠가 한번쯤 밟아 주리라 마음먹었던 참인데.
“……이 자식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모리츠가 덤벼들었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아론을 제지하고는 검을 치켜세웠다.
카아앙-
두 개의 수련검이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맞부딪쳐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교차된 채로 힘겨루기를 하는 검 너머, 모리츠가 안광을 줄줄 흘렸다.
그 섬뜩한 기세를 보아하니 보통 화난 게 아닌 듯한데.
콰드득-, 하고 흙바닥이 파이는 소리가 들린다.
내 발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여유가 있을지 한번 보자!”
일순, 온 힘을 다해 내 검을 떨쳐 낸 모리츠가 일갈했다.
기선 제압을 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고작 그걸로. 아직도 내가 겁쟁이 ‘리하르트’로 보이는 걸까.
나는 천천히 호흡 조절을 하며 모리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 나는 왕관과 망토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다. 어차피 아티팩트를 사용해 봤자, 정당한 대련이 아니니 뭐니 군소리만 나올 것이 뻔하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피했다. 내가 반격을 가할 틈은 없었다.
모리츠는 빠른 검놀림이 강점이다. 그에 맞게 얇은 검신을 가진 수련검이 허공을 쉴 틈 없이 갈랐다.
모리츠가 흐름을 잡게 되면 걷잡을 수 없다. 지칠 때까지 방어만 하다가 결국 패하게 될 것이다.
중급 기사에게 무승부를 따낼 정도라더니,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더…….’
할 만하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검은 위협적이긴 하지만, 눈에 안 보일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빠르면 더 빨랐지.
캉, 카앙-!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빈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검은 쳐 냈다.
“모리츠.”
“앙?!”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모리츠가 눈을 부라렸다.
저 흉악한 기세는 가주를 쏙 빼닮았다.
문제라면 딱 그것만 닮았다는 정도?
놈의 얼굴은 유전자를 썩 물려받지 못했다.
살짝 들어 올려진 코에 툭 튀어나온 송곳니. 과장 좀 보태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크가 더 어울리는 외모였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 오크 같잖아.”
그리고 그것은 모리츠에게 가장 큰 콤플렉스다. 다른 형제들은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는데, 자신의 얼굴은 그보다 못하니 얼마나 원통할까.
그래서 ‘리하르트’를 그렇게 괴롭혔던 걸지도 모른다.
“너, 너어……!”
작전 성공.
모리츠가 이성을 잃었다.
위협적으로 빈틈을 노리던 검의 궤적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특기 - 초집중 발동.』
반대로 내 이성은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23화. Episode. 08 못난이 모리츠 (3)
카앙-!
연무장의 중심. 모리츠가 난폭한 검술을 선보인다.
그것을 막아서는 것은 리하르트의 기초 검술이었다.
누가 저 모습을 수련 3개월 차라고 볼 수 있을까.
“모리츠 도련님이 이성을 잃으셨어.”
리하르트의 도발에 모리츠가 제대로 넘어갔다.
이미 대련의 구색은 지워진 지 오래였고, 목숨을 두고싸우듯 팽팽한 압박감이 줄다리기했다.
스윽-
둘을 지켜보던 상급 기사 하나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곧바로 둘을 막아설 셈이었다.
지금은 리하르트가 잘 견디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일.
까딱 잘못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수가 있었다.
“그냥 지켜보십시오.”
“음?”
그런 상급 기사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이었다.
그는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다들 알게 될 겁니다. 리하르트 도련님의 본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아론.
그의 얼굴엔 달뜬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자, 모두에게 보여 주십시오!’
오늘의 대련 이후, 망나니라는 오명을 벗고, 천재라는 명성을 입을 리하르트를 생각하노라니, 아론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어느새 대련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평온해 보이는 리하르트에 비해, 모리츠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줄곧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더니, 끝내 체력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적지 않은 구경꾼들의 시선 속에서, 리하르트는 모리츠만을 눈에 담았다.
그는 이 구도를 노리고 모리츠를 도발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반격을 가할 차례.
모리츠가 숨을 들이 마실 때.
파앗-!
리하르트의 다리가 땅을 박찼다.
대련이 시작된 이후 리하르트의 첫 번째 선공이었다.
“헉!”
모리츠의 호흡이 턱, 하고 막혔다.
들숨과 날숨의 틈을 찌르고 들어가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캉, 카강!
다시 한번 연무장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하나 대련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공격 일변도였던 모리츠의 신형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검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갔다.
그에 모리츠가 발작하듯 검을 휘저었으나, 그의 검술은 이미 리하르트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였다.
“크아악!”
제대로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턱턱 막히는 검로.
그리고 쉴 틈 없이 호흡을 가르고 들어오는 리하르트의 수련검.
‘어째서지?’
모리츠는 자신의 사지가 묶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왜 자신이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거지?
그렇게나 무시하고 얕잡아 보았던 머저리에게?
왜? 왜 내가?
“이건 말도 안돼!”
모리츠의 눈빛이 점점 위험한 기색을 띠었다.
이대로 리하르트에게 패배하면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뻔했다.
그 압박감은 모리츠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고오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 불감증인 리하르트와의 대련에서 사용하기엔, 도를 넘어선 행위였다.
이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리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눈앞의 리하르트에게서 승리하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모리츠 도련님!”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그중에서도 모리츠의 충신인 헨드릭이 특히 심했다.
모리츠가 패배하게 되는 것도 큰일이지만, 마나를 사용해 리하르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그에게 줄을 댄 자신까지 불이익이 미칠지 몰랐다.
판단을 마친 헨드릭은 당장에라도 땅을 박찰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기사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서 리하르트는 저리도 여유로운가.
제 코앞에 마나를 휘감은 검이 들이닥치고 있는 와중에도.
그 순간, 빛이 폭사했다.
카가가강-!
연무장에서 지독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형제는 검을 맞대고 서 있었다.
푸른 마나가 흐르는 모리츠의 검과 신성력을 품은 리하르트 검이 뒤엉켰다.
잠시 힘겨루기를 하던 양 검이 한쪽으로 급격히 치우치기 시작했다.
콰드득-
흙바닥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모리츠의 신형이 사정없이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긴 자국을 만들었다.
신성력은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력 자체가 다방면에서 일반적인 마나보다 상격이었다.
발락에 의해 개발된 마나 루트에 그러한 신성력이 질주하자, 리하르트는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이, 이건 대체 뭐야!”
모리츠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저 하얀 빛은 뭐란 말인가.
마나 불감증인 리하르트에게 어째서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사고조차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꽈악 말아 쥔 리하르트의 주먹이 모리츠의 얼굴에 틀어박힌 것이다.
뻐어억!
마치 고무공을 차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그가 땅을 굴렀다.
이내 연무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연무장.
목석같이 서 있는 기사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검을 늘어트린 채 숨을 고르는 리하르트.
“방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 건가?”
“마나 특성……!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적은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뒤바뀌었다.
누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또 누구는 감탄과 존경을 담아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론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리하르트의 진면모가 드디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그에게 ‘망나니’라는 수식어는 따라오지 않으리라.
기드가 지금의 리하르트를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종종 리하르트를 아픈 손가락이라 칭하며 짙은 염려를 내보이던 기드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저도 하루 빨리 상급의 격에 도달하겠습니다!’
아론이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 ◈ ◈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아론의 곁에 있던 상급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론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리하르트의 진면모를 알고 있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앞으로 리하르트 도련님은 더욱 거침없이 성장하실 겁니다.”
“하, 하하! 이거 정말 한 방 먹었군. 저분께서 저런 송곳니를 숨기고 계셨을 줄이야!”
상급 기사의 걸걸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마나 불감증이 치료되신 건가?”
“아니, 어쩌면 마나 특성을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하셨던 걸지도 모르지. 아까 그 모습을 떠올려 봐!”
“맙소사! 바텐가의 혈통에게 마나 특성까지 주어지다니!”
“마나도 마나지만 무척 완숙한 검술이군.”
한편 리하르트는 귓가를 울리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들이 기사가 아닌 호사가 같았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특기 - 기초 검술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숙련도 A → S』
‘잘 가. 넌 좋은 제물이었어.’
리하르트는 바닥에 널브러진 모리츠를 내려보며 묵념했다.
사실 검술로만 놓고 보자면 리하르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승패를 좌우한 것은 냉정한 판단력과 집중력.
모리츠는 이성을 잃었고, 리하르트는 집중했다.
그게 다였고, 그게 가장 중요했다.
리하르트는 승자의 여운을 한껏 만끽했다.
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리하르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사들 또한 화들짝 놀라 하고 있었다.
“레오 경?”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
루드비히의 오른팔이자, 수많은 업적을 세운 믿음직한 전장의 사령관.
그런 대단한 인물이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껏 박수를 치는 그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가주의 오른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레오는 원체 호기심이 많은 사내다.
그런 그에게 바텐가의 핏덩이들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은 참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안 그래도 요새 관심이 가던 리하르트가 그 주역이라니, 레오는 결국 소검궁의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가주로부터 받은 업무까지 뒤로 미뤄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리하르트 도련님.”
짝짝-
손뼉을 치는 레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리하르트가 모리츠에게서 승리할 줄이야.
여태까지 모리츠는 고양이, 리하르트는 쥐의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보니 리하르트가 고양이…… 아니 호랑이었다.
“도련님께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불치라 불렸던 마나 불감증이 치료되었다니?
그 새하얀 마나는 대체 무엇일까?
강렬한 호기심이 레오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리하르트를 파헤치고 싶었다.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레오는 들끓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자신은 늘 이게 문제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루드비히도 언제나 이것을 꾸짖지 않았는가.
표정을 가다듬는 그에게 리하르트가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던졌다.
“레오 경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야 도련님들의 대련을 견식하러 왔지요. 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애들 싸움에 헐레벌떡 달려오기엔, 레오는 너무나 높은 위치에 있는 거물이었다.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서려 하는 자.
바텐베르크의 자제들이 가장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사내.
그게 레오였다.
“그렇습니까.”
덤덤히 대답한 리하르트의 시선이 연무장을 훑었다.
주변의 기사들은 눈만 데구르르 굴리며,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리츠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자들이었다.
레오까지 온 마당에 괜히 이곳에 더 있다간, 어떤 덜미가 잡힐지 몰랐다.
어찌 됐든 지금 이 상황은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대련이었으니까.
그들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지? 여긴 내 개인 연무장인데.”
동시에 들어 올린 손가락은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모두에게 잊혔던 모리츠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 형, 저대로 두면 골병들지도 몰라. 얼른 데리고 가라고.”
그제야 기사들이 잡힐세라, 연무장을 다급히 빠져나갔다.
코뼈가 주저앉은 모리츠는 헨드릭의 등에 업힌 채로 퇴장했다.
이윽고 소검궁의 개인 연무장에는 리하르트와 아론, 그리고 레오만이 남았다.
그에 레오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썹이 까딱였다.
마치 너는 왜 안 나가냐, 라는 듯한 태도로.
“하하! 너무 눈치 주지 마십시오!”
레오는 병적일 정도의 호기심을 제외하면 상당히 유하고 능글맞은 성격이다.
지금도 그는 넉살 좋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리하르트의 눈짓을 언짢아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레오가 리하르트의 몸을 훑었다.
“아까 전의 대련에서 크게 다치진 않으신 것 같군요.”
“뭐, 그렇지요. 조금 지치긴 했지만.”
“역시! 그러시면…… 저와 대련을 해 보시지 않으렵니까?”
24화. Episode. 09 루드비히의 오른팔 (1)
예의를 차린 듯, 안 차린 말투가 들려온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레오의 실실 웃는 낯이 보였다.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린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대련,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눈앞의 기사, 레오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이 틀림없다.
이건 어른이 어린애한테 스파링 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왜입니까? 레오 경께서 얻을 건 전혀 없을 텐데.”
“도련님의 마나 특성, 그리고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모습. 또…….”
레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대련을 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나한테 호기심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과하게 눈을 반짝이는 레오의 모습에 반응한 것은 오히려 아론이었다.
입을 떡 벌린 그를 보고 왜 저러나 싶다가, 이내 떠오른 것이 있었다.
저 웃음이 헤픈 사내는 가주의 오른팔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그리고 자제들의 숱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켜 오던 자였다.
만약 그가 자제 중 한 명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잠잠해졌던 후계자 쟁탈전은 또다시 과열되리라.
“죄송하지만, 저는 수련을 해야 해서.”
“도, 도련님……!”
단호하게 거절하자, 되려 아론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이 레오를 포섭할 엄청난 기회라는 듯이.
물론 그럴 일은 없다.
그는 앞으로도 쭉 루드비히의 충신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게 비치는 저 관심은 정말 호기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후계자 같은 건 관심 없어.’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후계자야.
“그만 가 주시겠습니까, 레오 경.”
“에이, 왜 그러십니까. 수련도 좋지만, 대련만큼 경험을 쌓기에 탁월한 것이 없습니다.”
정녕 이 사람이 바텐가의 기사단장이 맞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치근덕거리는 것이 썩 위엄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것도 실력이 얼추 비슷해야 하지. 괜히 레오 경과 대련했다가 부상만 입으면, 해야 할 수련도 못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그와 대련해서 얻을 것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아론과 자웅을 겨루는 게 백배 나았다.
그러나 레오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나 보다.
“제가 누구입니까! 그 정도 힘 조절도 못할 실력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애가 탔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진심으로 나와 대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저와 대련을 하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럼 그들과 대련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난 관심 없으니 빨리 가 줬으면 좋겠다.
그런 내 마음을 그가 알았던 것일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저에게 단 한 번의 유효타라도 성공하신다면, 제가 며칠간이나마 수련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부상을 입게 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레오가 덧붙였다.
‘……이건 구미가 당기는데.’
그 같은 초고수가 수련을 도와준다는 말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옆에서 아론이 헛숨을 들이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러나 문제는 레오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느냐 없느냐다.
길고 짧은 건 대 보기 전까진 모른다고들 하나, 뱀과 용은 천 리 밖에서 보아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흠…….”
나는 손에 쥔 수련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실금.
모리츠와의 대련 때, 언뜻 불길한 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금이 갔었나 보다.
슬쩍 수련검을 몸 뒤로 숨겼다.
“하아. 레오 경이 그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오! 승낙하신 겁니까?”
해맑게 웃는 레오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레오 경, 지금 바로 시작하시겠습니까?”
◈ ◈ ◈
“그럼 잘 부탁합니다.”
꾸벅-
한 차례 고개를 꾸벅인 레오의 눈에 흥분이 감돈다. 어서 마나를 꺼내 보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바람대로 신성력을 검에 둘렀다.
“오오!”
잔뜩 신이 난 레오를 무시하곤 땅을 박찼다.
카앙-!
선공은 손쉽게 가로막혔다.
키긱, 마주 댄 양 검 사이로 불똥이 튀겼다.
“단련된 근육에 비해 강한 근력이군요. 이것이 도련님의 마나 특성입니까?”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쉬질 않았다.
검보다 입을 더 많이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몇 번 더 검을 휘두르다가, 로우킥을 날렸다.
“어이쿠! 그런 뻔한 수는 안 통합니다.”
뒤로 훌쩍 피해 낸 레오가 입방정을 떨어 댔다.
나는 가만히 검을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예?”
“대련을 신청한 것은 레오 경인데, 어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까?”
이건 대련이 아니라 저급한 조롱에 불과했다. 그도 아니면 제 호기심만 채우기에 급급하던가.
아무튼 의와 예를 중요시하는 기사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그것을 날카롭게 꼬집어 주자 레오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대로 상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마나를 끌어올리는 레오.
이제 구색은 갖춰졌다.
카강! 카가강!
양 검이 수십 번 씩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 수준에 완벽하게 맞춘 실력.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답게 자신의 검을 오롯이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생각보다 더 놀랍군요. 기초 검술의 성취가 상상 이상입니다.”
레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숙련도가 S급에 들어선 기초 검술은 내가 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슬슬 끝내죠. 연달아 대련하려니 힘에 부칩니다.”
고오오-
나는 그 말과 함께 모든 신성력을 검에 다 끌어모았다.
밝은 빛무리가 검날을 타고 내달렸다.
마나 하트가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내 마나량은 결코 많지 않다. 이것도 크게 무리를 한 상황이었다.
“제 마지막 일격. 제대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보십시오.”
좋다.
검을 꼬나 쥐곤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그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들어, 서로의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레오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오 또한 제 검을 마주 휘둘렀다.
그 순간, 신성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 하얀빛에 가려졌던 검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미줄을 친 듯, 금이 쩍쩍 갈라진 검날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다.
모리츠와의 대련에서 생겼던 실금이, 연달아 이뤄진 대련에 감당 못할 정도로 커진 것이다.
“어……?”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가 다급히 검을 멈춰 보려고 하지만, 글쎄.
‘늦었어!’
콰득-
내 수련검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커억……!”
그러고도 모자라 레오의 검이 내 빗장뼈를 강타했다.
우당탕-, 하는 소음과 함께 하늘과 땅이 몇 번이나 뒤집혔다.
그나마 레오가 검을 멈추지 않았다면 중상을 입었을 일격이었다.
“도, 도련님!”
거리를 두고 관전하던 아론이 화들짝 놀라며 뛰어왔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강렬한 통증이 찌르르 울렸다.
“리하르트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잠깐 넋을 놓고 있던 레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물론 이게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수련검이 부러져 부상을 입는 경우는 대련에서 종종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또 이야기가 다르다.
“아악! 뼈가 부러진 것 같아! 이래서 대련을 하기 싫다는 거였는데!”
부상을 입을 일은 없을 겁니다-, 라던 레오에겐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일 테지.
최대한 울상을 지으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호기심은 온데간데없고 당혹만이 남은 레오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후…… 레오 경, 대련의 내기 조건이 뭐였습니까?”
“제, 제게 공격을 성공할 시에…….”
“에헤이. 그거 말고.”
잠깐의 침묵.
왠지 그가 잊은 것 같아, 친절히 알려 주기로 했다.
“이런 불상사가 생겼을 때에도 책임진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윽……!”
문득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러게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괴롭지만, 어째선지 웃음이 나왔다.
“아론, 너도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똑똑히 들었지 말입니다.”
제1기사단장인 레오의 눈치가 보일 법도 하건만, 아론은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반대로 레오의 눈빛은 잔뜩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사고였을 뿐입니다.”
정답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상처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잘 부탁합니다. 레오 경.”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까지 앞으로 두 달.
아주 좋은 가정 교사가 생겼다.
◈ ◈ ◈
툭, 툭-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앞에 시립한 레오는 가만히 주군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리하르트 도련님의 성취에 감복한 바, 그분의 수련에 짧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레오 자신도 떨떠름한 속내는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허기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내걸었던 내기.
그것에 의도치 않게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부러진 빗장뼈를 부여잡고 히죽-, 웃던 리하르트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루드비히의 진중한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위는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고작 적지 않다고 표현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바텐가의 자제들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럼에도 줄곧 중립을 지켜 오던 레오가 리하르트에게 가르침을 주겠단다.
“이는 곧, 리하르트의 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아, 아닙니다. 후계자 구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의사입니다.”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에 루드비히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럼 어째서 리하르트에게 지도를 자처한단 말인가.
그것이 어떤 여파를 일으킬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설마 그놈의 호기심이 또 도진 것이냐.”
30년 전. 막 성인식을 끝마쳤던 루드비히는 구석진 왕국의 빈민촌에서 원석을 발견했다.
한눈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람으로 거둬들였다.
밥을 먹이고, 검을 쥐어 주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자신은 바텐베르크의 가주가 되었고, 거둬들였던 원석은 보석이 되어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만큼 루드비히는 레오의 성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너는 변하지를 않는군.”
정말 변하지를 않았다.
특히나 그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은 더더욱.
무인은 무에 죽고 무에 산다고 하던가.
눈앞의 레오는 호기심에 죽고 호기심에 산다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릴 정도였다.
“하하, 저도 이놈의 호기심을 좀 죽여 보려 했습니다만. 어째 관심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더랍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레오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리하르트와 모리츠의 대련. 그 후에 직접 맞대어 보았던 검격.
리하르트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비록 수련을 도와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내기 때문이었지만, 리하르트를 향한 레오의 흥미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조금 귀찮고 번거롭게 되었어도.
“고작 호기심으로 행동하기엔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을 터.”
북대륙을 지배하는 바텐베르크. 그 가문의 정예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제1기사단.
그런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책은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만약 레오가 리하르트와 엮이게 된다면, 가신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 제1 기사단장 레오가 리하르트를 차기 후계자로 지지한다!
더욱이 중립을 지키던 그였기에, 그 파장은 상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레오는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리하르트 도련님은 저의 지도를 필요로 하셨고, 저는 그분께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저 그것뿐입니다-, 라고 덧붙인 레오가 눈을 반짝였다.
툭, 툭-
루드비히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허가한다.”
막을 이유가 없다.
바텐베르크의 주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헛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세력 싸움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그로 인해 제 집안이 소란스러워진다고 해도.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바텐베르크는 끝없는 경쟁에 내쫓기는 전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또, 앞날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레오가 정말로 리하르트를 지지하게 될 수도 있으니.
25화. Episode. 09 루드비히의 오른팔 (2)
기세 좋게 대련을 신청했다가, 도리어 참패한 모리츠의 이야기에 바텐베르크는 떠들썩해졌다.
그것이 바로 어제였는데도 말이다.
수많은 기사들이 참관한 그 광경은, 비허가 대련을 공식적인 서열 정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동의 서열이 드디어 바뀌었군.”
모리츠는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이제야 리하르트 도련님의 재능이 개화하신 건가!”
그를 짓밟고 올라선 리하르트는 이목을 끌었다.
바텐베르크는 그 혈통들에게 철저한 능력주의를 들이미는 가문.
약한 자는 도태되며, 강한 자는 칭송받는 약육강식의 울타리였다.
“리하르트 도련님이 빛나는 마나를 사용하셨다던데.”
“그거 마나 특성을 말하는 거 맞지? 맙소사!”
하다못해 시종들까지 소곤거릴 정도였으니.
망나니 리하르트라는 수식어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일각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 제1 기사단장, 레오가 리하르트의 수련을 지도하게 되었다더라. 이는 곧, 차기 후계자로 지지한다는 뜻이 아닌가!
“하아…….”
마른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어차피 후계는 가주의 둘째 아들, 지크 바텐베르크가 크나 큰 지지를 받고 있지 않은가.
뭔가 묘한 표정의 아론을 무시하곤, 몸을 풀었다.
어제 레오에게 입었던 부상은 귀하디귀한 포션 덕에 말끔히 나은 상태.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다신 겪고 싶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이득이 너무나 달콤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오늘부터 수련을 도와주겠다더니, 레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양반이 그냥 튄 거는 아니겠지?’
샘솟는 의심을 애써 가라앉히곤, 우선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
레오가 내 개인 연무장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후였다.
“사람 뼈를 부숴 놓고,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당연히 내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다.
눈을 흘기며 바라보자, 레오가 멋쩍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직책이 직책이라, 저도 나름 해야 할 일이 많은 입장입니다.”
정리하자면, 제 할 일을 미리 끝내 놓고 오느라 늦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늦는다고 말을 하던가.
두 달이라는 제한 시간이 걸린 이상, 나와 아론의 시간은 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오 경을 보니 부러졌던 빗장뼈가 다시 아파 오는 것 같습니다.”
“윽…….”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질린다는 표정을 짓던 레오가 곧 바로 마주 잡았다.
“제가 도련님의 수련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삼 주입니다.”
삼 주라. 이왕 하는 거 한 주 더 채우면 안 될까, 싶을 때였다.
레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기간 동안은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 도련님께 궁금한 것이 많으니까요.”
일순 그의 눈이 반짝였다.
내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의 가득한 시선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큼큼- 레오가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우선 어제의 대련을 통해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레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초 검술은 제법 완숙해지셨다고 판단이 됩니다. 집중력도 정말 남다르시더군요.”
그야 당연한 일이다. 기초 검술은 S랭크를 달성했고, 집중력은 초집중 특기가 있으니까.
그것들은 부족한 재능을 채우고도 남았다.
“게다가 도련님의 마나 특성은 신체 능력을 증가시키는 듯합니다. 맞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사실 도련님께선 베이스는 완성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고급의 검술인데…….”
그의 시선이 내 손등을 향했다.
“발락 경의 각인이 있는 이상, 다른 검술을 배우는 것은 썩 좋지 못한 선택이죠.”
“시험의 각인을 알고 계십니까?”
“세상엔 수많은 검술이 있습니다. 개중엔 다양한 형태로 전수되는 검술이 있다고 하지요.”
레오는 발락이 검성의 후예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검술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어떻게 전수되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분은 가주님과도 비견될 엄청난 검사입니다. 함께 전장에 설 때면, 늘 소름이 돋곤 했죠.”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각인을 개방시키라고 레오가 덧붙였다. 안 그래도 그럴 셈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도련님께서 최우선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마나 컨트롤.”
그가 제 손을 앞으로 뻗어 보였다.
“마나 불감증이 완치되신 것은 최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나의 총량은 논외로 쳐도.”
후웅-
레오의 손에 마나가 덧씌워졌다.
극도로 얇은, 천 같은 형태의 마나가.
“마나 컨트롤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별다른 마나 특성을 가진 것이 아닌데도, 레오의 손에 흐르는 마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나의 천은 스스로 움직여 레오의 손을 감싸더니, 이윽고 마치 연푸른색의 장갑을 낀 것 같은 모양새로 변했다.
그야말로 굉장한 컨트롤이었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오러 또한 엮어 내지 못합니다. 수많은 기사들이 그렇게 상급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지요.”
문득 누군가가 생각나, 슬쩍 옆을 보았다.
아론은 한껏 굳어진 얼굴로 레오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러를 엮지 못해 상급의 벽에 막힌 기사 중에 하나가 바로 아론이었다.
“특히 도련님은 지금부터라도 마나 컨트롤을 단련해야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 말한 레오가 마나를 흐트러트렸다.
“레오 경은 마땅한 수련법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죠, 하하!”
호언장담을 하며 외치는 레오.
좋다. 아주 좋다. 마침 딱 필요한 수련이었고, 딱 필요한 스승이었다.
나는 아론의 옆구릴 푹 찔렀다.
“아론, 어서 인사드려.”
이 바보는 왜 멀뚱멀뚱 서 있는 건지.
같이 배우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애걸복걸해야 할 것 아냐.
◈ ◈ ◈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레오는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식하게 마나를 때려 박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리하르트와 아론의 양손에는 수십 가닥의 실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레오가 창안한 마나 컨트롤 수련법.
그 첫 단계는 모든 실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
한 번에 수십 개의 물체에 마나를 부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실 같은 작고 미세한 물체에는 더더욱.
여기에 레오는 한 가지 조건을 더했다.
마나 저항력이 높은 마물, 크리프의 털로 이루어진 실을 쥐여 준 것이다.
그러니 리하르트와 아론이 땀범벅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집중하십시오.”
레오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훑었다.
평소에는 사람 좋은 미소만 짓더니, 수련을 시작하고 나서의 그는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휘릭-!
리하르트가 쥐고 있던 실 중 열 가닥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림과 동시에 실 또한 바닥에 몸을 뉘였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리하르트는 계속해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도련님의 진도가 빠르다.’
레오는 리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명 마나 불감증이 치료된 것은 최근이라 했을 텐데.’
리하르트가 안고 있는 패널티는 치명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나를 느끼고 품어 온 자와, 이제 막 마나 하트에 마나를 쌓기 시작한 자.
후자는 마나 친화력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때문에 리하르트에게 이 수련법을 알려 준 것이었다.
다소 막막하게 보일 수 있는 수련법이라고 생각해 왔거늘, 한데 그의 성장세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마나 특성 덕인가?’
리하르트의 마나, 신성력이라는 것은 확실히 일반적인 마나와는 달랐다.
훨씬 더 다루기 용이하고 얌전한, 동물에 비유하자면 순한 양과도 같았다.
리하르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마나 특성.
축복이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아론, 영악한 도련님이 은근슬쩍 수련에 참가시킨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리하르트에게만 지도할 생각이었다.
이래봬도 기사단장인데,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전수하기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그런데 리하르트의 등쌀에 못 이기는 척, 대충 확인해 본 아론의 마나는 충격적이었다.
언뜻 느끼기엔 일반적인 마나로 보였지만, 레오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주 사납고 흉폭한 무언가가 아론의 마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두말할 것도 없는 마나 특성이었다.
그 희귀하다는 특성 보유자가 눈앞에 하나 더 있었다니!
‘어찌나 놀랍던지.’
레오의 호기심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아론의 특성은 오러의 형태로 빚어졌을 때에서야 힘을 발휘할 겁니다.
놀람에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리하르트가 말했다.
결국, 레오는 아론에게도 흥미가 생겨 버렸다.
물론 그 괴랄한 특성 탓인지, 아론은 마나를 컨트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었는데도 실 열 가닥은커녕, 다섯 가닥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레오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벽만 뛰어넘으면 자네는 몇 단계나 성장할 걸세.’
레오가 아론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휘리릭-!
리하르트 쪽에서 거센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열네 가닥의 실이 허공을 수놓고 있는 게 아닌가.
“허…….”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고작 열 가닥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리하르트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제법 여유롭게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급격한 성장세에 레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론도 아론이지만, 역시 그의 흥미를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것은 저 어린 도련님이었다.
“좀 더 세밀하게 컨트롤하십시오. 실이 흔들린다는 건, 마나가 불안정하다는 겁니다.”
레오의 지적에 리하르트가 말없이 입을 삐죽였다.
그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인지 리하르트의 실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집중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갑자기 왠지 모르게 정신이 사나워져서.”
감고 있던 눈을 뜬 리하르트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시스템 창이 떠올라 있었다.
『특기 - 마나 컨트롤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숙련도 F → E』
수련 5일 차에 마나 컨트롤 특기를 얻었었다.
리하르트의 성장세는 숙련도가 상승한 결과였다.
‘확실히 효율적이군.’
리하르트는 손에 쥐고 있는 실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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