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2
“수고했어, 아론.”
대련이 끝났다.
아론의 어깨를 두드린 리하르트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기초 검술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숙련 랭크 B → A』
수련 6일 차의 결과치고는 굉장한 성취였다. 이게 다 신앙과 초집중 덕분.
신앙으로 숙련도를 상승시키고, 초집중 특기를 이용해 수련하자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무의식에 각인된 동작이 저절로 나온다고 해야 하나.’
수련에 완전히 몰입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새에 더 나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빠르게 실력이 느셨습니다.”
아론이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와 리하르트의 대결을 지켜보던 기사들도 놀란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바텐베르크의 피가 개화하신 건가.”
기사 한 명이 중얼거리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들의 눈에 리하르트가 똑똑히 담겼다.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은 강자를 숭배한다. 그런 그들에게 리하르트의 성장은 기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리하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지금쯤이면 성주(聖酒)를 다 마셨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락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리하르트가 인사와 함께 미리 얼음물에 담가 놓았던 성주(聖酒)를 건넸다. 이번에는 특제 성주였다.
무려 30의 신앙을 부여한 귀하디귀한 술이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으니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다.
“놈, 누가 스승님이라더냐. 다만, 눈치가 늘었구나. 얼음물에 담가 놓다니.”
“하하! 날도 더운데 쭉 들이키시죠.”
리하르트의 성화에 발락이 못 이기는 척 와인의 마개를 땄다.
그 순간이었다.
“……!”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진하고 끈적한 향기가 연무장에 퍼져 나갔다.
“오늘은 특등품이지 말입니다.”
“허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는 발락이었지만, 유독 술 앞에서는 약한 그였다.
벌컥벌컥-
특제 성주가 발락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맛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건, 악마의 술이다.”
“기왕이면 성스러운 술, 성주(聖酒)가 어떻습니까.”
리하르트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발락은 연신 입가에 병을 갖다 대었다.
결국 특제 성주는 그 자리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더 없느냐?”
“죄송합니다. 이건 특등품이라서.”
더 없다는 리하르트의 말에 발락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쉬워 죽겠지만 어쩌겠는가.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리하르트를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이 와인이 뭔지, 어디서 구했는지. 눈앞의 핏덩이는 당최 알려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승님, 혹시 제 성취를 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되었다. 대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럼 얘기가 빠르지. 리하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면 제가 내기에서 이긴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내기를 했었지.”
수련을 시작한 지 삼 일 차의 이야기다.
발락에게 기초 검술의 성취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한 가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흥, 내가 언제까지 머물 줄 알고 그런 내기를 한 것이냐.”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리하르트는 그가 왜 바텐베르크를 찾아왔는지, 언제 떠나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막 소원 내용을 말하려던 참이었다.
“잠깐 네 방으로 자리를 옮기지.”
발락이 선수를 쳤다.
◈ ◈ ◈
발락은 리하르트에게 기회를 줘 보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그냥 떠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숱한 전장에서 발락의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 준 ‘감’이었다.
키잉-
그의 손바닥 위로 푸른 마나가 자그마한 검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체 없이 리하르트의 손등에 찔러 넣었다.
“헉!”
리하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바람구멍이 뚫렸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손등은 멀쩡했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손등에 육각형의 작은 문신이 생겼다는 것.
“시험의 각인이라고 한다. 만약 네게 합당한 자질이 있다면, 그 각인을 개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발락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너를 내 제자로 받아 주마.”
“아……!”
그제야 리하르트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멍하니 손등의 문신을 바라보았다.
물론, 리하르트는 검성의 후예가 ‘각인’과 ‘성흔’으로써 검을 전수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락이 먼저 나서서 각인을 새겨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죽어라 단련해야 할 것이다. 각인이 네놈에게 자질이 없다 판단되면 사라질 테니 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쓰디쓴 고배를 마셨지.”
“……알겠습니다.”
죽어라 하고말고.
당연한 소리다.
리하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주 큰 기연을 얻었다.
역시 아무래도 성주를 계속 찔러 준 것이 효과가 컸던 모양이다.
“나는 내일이면 떠난다. 그전에, 그…… 성주 좀 챙겨 줬으면 좋겠군.”
특등품이면 더 좋고- 라고 덧붙인 발락이 리하르트를 뒤로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안 될 소리였다.
리하르트는 아직 그에게 볼일이 남아 있었다.
“저는 아직 소원을 말하지 않았는데요.”
발락은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쳤을 뿐이었다. 내기의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내놓다니.
이렇게 빌미를 주시면 안되지요-, 라며 리하르트가 능글맞게 웃었다.
10화. Episode. 04 스노우폴 (1)
이 게임 속엔 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귀한 아티팩트일 수도, 특별한 인연이나 기술일 수도 있다.
낫을 든 평범한 농부라도 기연을 통해 일개 기사쯤은 눈 아래로 볼 실력을 가질 수 있다.
그만큼 기연은 효과적이고 빠르게 힘을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의 복권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기연들의 위치와 정보를 모두 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자였으니.
지금 그의 머릿속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정보들이 저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제라면, 현재 그는 가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발락은 떠났느냐.”
“예.”
리하르트는 가주의 물음에 답했다. 발락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
제 아들,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가주의 눈이 흔들렸다. 리하르트의 손등에 각인이 새겨져 있던 것이다.
발락이 리하르트에게 관심을 내보이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텐베르크의 혈통에 대한 미련일 것이라 치부했다.
분명 어젯밤 다시 저를 찾아온 발락에게 들었던 일이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웠다.
“그에게 들었다. 근신 처분을 풀어 달라고?”
“그렇습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을 보며 가주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를 보면 항상 겁먹은 채로 피하던 리하르트가 아니었다.
시험 삼아 기세를 끌어올려 보아도, 제 아비를 바라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리하르트’의 몸에 ‘이지훈’이 빙의된 순간부터 달라진 것이지만,
“변했구나.”
이제서야 한 꺼풀 벗겨진 것이다. 리하르트에 대한 가주의 인식이 말이다.
“이번엔 어디서 무슨 짓을 벌일 셈이냐.”
그리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가주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또 패악질이나 부리려 하진 않겠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 패악질이란건 전부 그 몸의 옛 주인이 벌인 일이었으니까.
‘그 똥을 내가 치우고 있는 거고.’
속으로 작게 탄식하고 있을 때, 가주의 입이 열렸다.
“허가하겠다.”
성공했다!
발락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리하르트가 말한 소원. 그것은 자신을 자유롭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근신을 풀게 도와 달라고.
“큭, 발락이 부탁이란 것도 할 줄 알더군.”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굉장했다.
철혈이라고 불리던 가주답지 않게 피식 웃을 정도로.
그 뒤로 가주는 리하르트와 짧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이내 축객령을 내렸다.
집무실을 나서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는 상념에 잠겼다.
“기드가 돌아오면 재밌어지겠군.”
가주가 알고 있는 리하르트는 결코 날 수 없는 새였다.
최악의 체질로 인해 날갯짓할 의지조차 영락해 버렸던.
그런 리하르트에게 날개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날개가.
◈ ◈ ◈
며칠 뒤, 나는 마차에 짐을 실었다. 나로서도 시간이 금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외출을 준비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아론을 포함한 하급 기사 다섯과 전속 시녀인 메리가 수행원으로 따라붙었다.
“도련님, 근신이 풀리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나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실은 메리가 홍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요 근래 눈에 띄게 얼굴이 좋아졌다.
그 이유는.
“이게 전부 신님의 축복이겠죠!”
신……. 그러니까, 내 덕분이었다.
그녀는 신께 구원을 받았다며, 행복 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오, 신이시여. 부디 도련님의 앞길을 굽어살피시길…….”
“제발. 기도는 하루에 한 번만 해.”
느닷없이 내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녀가 독실한 신도가 된 건 흡족하지만…….
“어째서죠? 저희의 기도는 그분께 힘이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역시 이건 조금 과한 것 같다.
“신께서도 쉬셔야지…….”
“앗, 그…… 그렇네요! 지금까지 하루에 수십 번씩 기도했는데!”
음, 조금이 아니라 많이 과했다.
이번에는 잘못했다며 재차 기도를 해 대는 메리를 보고 있노라니 골이 다 아파 왔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좀 어떠시지?”
“완전히 쾌차하셨습니다. 의원께서도 깜짝 놀라실 정도로…… 아아, 이것은 구원입니다!”
또 지뢰를 밟았군.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메리였다.
메리의 어머니, 멜라인은 성수 스무 잔을 마시고 완전히 쾌차했다.
그녀도 내 신도가 된 덕에 현재 하루에 얻는 신앙은 180정도.
그럼에도 수련에 성주에, 워낙 쓸 곳이 많아 모이는 족족 써 버린 탓에 현재 모은 신앙은 220이 전부였다.
“메리, 다른 사람들한텐 따로 말 안 했지?”
“그렇긴 합니다만…… 어째서 그분의 은혜를 숨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긴, 널 생각해서지.
듣도 보도 못한 신을 저렇게나 외쳐 댔다간,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았다.
망나니 도련님에, 미친 시녀라니.
“신께서는 절박한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려 하신다.”
내 말에 그녀가 깊이 감명받은 듯 두 손을 모았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 낸 공략법은 바텐가 바깥의 순진한 시골뜨기들부터 꼬드기는 것.
특히나 영세한 마을들은 언제나 몬스터나 짐승들에게 시달린다.
이 얼마나 좋은 예비 신도들인가.
게다가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스노우폴 마을. 여긴 아주 꿀단지나 다름없지.’
이두 마차로 삼 일 거리인 헤센 영지의 작은 마을. 거리는 조금 멀지만 그만큼 갈 가치가 있었다.
최북단도 아니면서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기이한 마을이 스노우폴이다.
덕분에 항상 흉년에, 굶주린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는다.
‘훗날 북부 대륙을 떠돌던 마법가의 ‘그놈’이 얻게 될 기연…… 아티팩트들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스노우폴 바로 뒤의 설산에 잠들어 있었다.
◈ ◈ ◈
마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벌써 저 멀리 눈 덮인 거대한 산이 보였다. 기온도 급격하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도련님, 여기 외투입니다.”
“고마워.”
메리가 건네는 외투를 껴입었다. 추위에 강하기로 유명한 마물, 호르그의 가죽이라 굉장히 따듯했다.
손사레를 치며 사양하는 메리에게 억지로 외투를 떠밀었다. 비단 메리 말고도 밖에서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에게도 하나씩 쥐여 주었다.
어차피 외투는 많았다. 이 넓은 마차에 한가득 쌓아 놓았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마차가 뚝 멈췄다.
똑똑-
“도련님, 헤센 남작이 마중 나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론의 목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바텐베르크의 혈통! 리하르트 도련님을 뵙습니다!”
반달 모양의 수염을 기른 남자가 바닥에 붙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있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추워 죽겠는데 저게 뭐하는 짓이람.
외투 앞섶을 단단히 여미며 창문을 닫았다.
망나니라는 인식은 이럴 때 편하지.
다시 출발한 마차 바깥에서 남작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마차를 호위해라! 개미 한 마리 접근 못하게 막아!”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수행원으로 붙었는데 병사의 호위가 웬 말인가.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참 애를 쓴다.
이게 바텐가의 위대함이다. 왕국, 제국을 떠나 북부대륙에선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최고의 가문.
정복 활동을 펼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무(武)였으니.
‘그래도 이렇게 대우해 주니, 기분은 좋네.’
마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는 곧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의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스, 스노우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하르트 도련님!”
촌장으로 보이는 이가 눈 덮인 땅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지 그의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0명도 채 되지 않는 주민들이 전부 그 상태였다.
“이놈들! 지금 누구 앞에서 몸을 떨어 대는 것이냐!”
헤센 남작이 추위에 떠는 주민들을 다그쳤다.
죄 해진 옷을 입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남작의 옷은 두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새삼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마을에 고위 계층이 방문할 시, 이런 식으로 온 주민이 예를 표하는 게 이쪽의 관습이었으니.
수행원으로 따라 온 기사들도 당연한 것을 본다는 듯,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내게 이 상황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이건 그냥 미친 거지!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인데!
“리, 리하르트 도련님? 불편하신 점이라도……?”
화들짝 놀라 굽실거리는 남작을 무시하곤, 주민들을 훑어봤다.
그 몰골들은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먹지 못해 삐쩍 마른 것은 둘째 치고, 옷에 난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바람막이 따위의 기능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아론.”
“예.”
“마차 안의 옷을 저들에게 나눠 줘.”
살짝 눈이 커졌던 아론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말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왔다.
값비싼 호르그 가죽 외투가 마차 안에서 줄줄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헤센 남작에게서였다.
“헉! 도, 도련님! 이들에겐 저것의 가치를 지불할 만한 재산이 없습니다.”
“그럼 너에겐 있나?”
내 말에 헤센의 눈알이 데구르르 굴렸다.
비싸기로 소문난 호르그의 가죽이 무려 30여 벌이다.
척박한 땅의 남작가에서 선뜻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액수는 아닐 터였다.
“자, 모두 일어나서 외투를 걸쳐라.”
“그게…….”
“너희에게 주려고 직접 챙겨 온 건데,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
주민들은 선뜻 일어나지 못했다. 헤센의 눈치가 보이는 것인지, 정말 내가 돈을 받을까 봐 겁먹은 건지.
예비 신도님들께 받을 것은 신앙이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을 쭉 훑었다.
못 먹고, 춥고, 아픈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것 참.
“메리. 신께 기도를 올리자.”
신의 자비가 필요한 환경이었다.
◈ ◈ ◈
스노우폴의 촌장, 로먼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에는 척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호르그 가죽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다름 아닌 북부 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망나니, 리하르트에게서 받은 것이다!
‘정말…… 정말 강매를 하시려는 건 아닌가.’
로먼은 그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선행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늙은 촌장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콜록!”
그때, 마을의 아이가 억눌린 기침을 내뱉었다.
아직 어리고 연약한, 더불어 잘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그 아이에겐, 스노우폴의 추위가 혹독했던 모양이다.
기침 소리를 들은 리하르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순간 로먼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누구인가?”
11화. Episode. 04 스노우폴 (2)
‘큰일 났다!’
고위 계층의 사람들은 천민의 숨소리를 듣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물며 리하르트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내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낸 리하르트의 발걸음이 아이를 향하자, 로먼은 경각심에 종을 울렸다.
잔뜩 경직된 늙은 몸은 당장에라도 리하르트의 앞을 가로막을 듯 움찔거렸다.
“열이 심하네.”
그러나 로먼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리하르트에게 집중되었다.
리하르트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입을 열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냐.”
“프, 프리아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프리아의 입술이 새파랬다. 이 추운 눈밭에서 줄곧 엎드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프리아는 리하르트의 손에서부터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포근하고 따듯한 무언가. 볕 좋은 날의 따사로움이 자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아…….”
“이제 좀 괜찮지?”
한결 나아진 안색의 아이를 보며 리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 주민 중 몸 상태가 멀쩡한 이가 거의 없었다.
콜록거리는 이, 비쩍 마른 몸.
개중에는 동상에 걸린 듯 해진 천으로 어디 한 군데를 꽁꽁 둘러 싼 이도 있었다.
‘치료하기엔 신앙이 부족하겠는데.’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로먼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먹을 것은 좀 있나?”
“그게…… 없습니다.”
대답하는 로먼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로서는 리하르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집은 추위를 잘 막아 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마물이나 짐승으로부터 안전한가?”
“아, 아닙니다.”
“너희는 헤센 남작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건가.”
스노우폴은 일 년 내내 혹한이 불어 닥치는 마을이다. 아무리 북부 지역이라 해도, 오직 이 마을의 주변만 기이할 정도로 추웠다.
“그, 그것이…….”
로먼은 눈동자만 굴렸다. 지금 이 자리엔 헤센 남작도 서 있었다.
리하르트의 물음에 그러하다 대답했다간,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앞으로 나선 것은 남작이었다.
“리하르트 도련님. 이 마을은 워낙에 혹독한 환경이기에…….”
“너한테 물은 적은 없는데.”
싹둑 말을 끊는 리하르트에 남작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헤센 남작.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마을의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추위를 피할 땔감도 없고, 보아하니 마을을 지키는 병력도 전혀 없군.”
마을을 훑어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리하르트.
“그런데 마침 헤센 남작이 이 마을에 있네? 대단해! 마을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행차하시다니. 귀족들의 훌륭한 귀감이야.”
“예, 예?”
“앞으로 스노우폴은 남작의 배려를 받게 되겠구나.”
으득-
남작은 아무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망나니 자식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긴 하는 걸까.
그러나 그는 불만을 내비칠 수 없었다. 눈앞의 철부지가 업고 있는 배경은 한낱 남작이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단지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리하르트가 남작에겐 너무나 얄미울 수 없었다.
“아론. 기사들과 함께 필요한 지원품 목록을 적어 와. 일손을 덜어 주자.”
“알겠습니다.”
대체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부산스러워진 마을을 보며 남작은 치솟는 분노를 억눌렀다.
‘후…… 이깟 영웅 놀음 따위, 얼마 못 가 질릴 것이다.’
잠시 장단만 맞춰 주면 탈 없이 끝난다. 그가 그렇게 속으로 되뇌일 때였다.
“앞으로도 이 마을에 놀러 올 일이 많을 것 같은데, 그땐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줬으면 좋겠네.”
리하르트가 남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마을을 남작의 돈으로 먹여 살리라고?
‘그럼 네가 직접 지원을 해 주던가! 빌어먹을 자식이……!’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다.
◈ ◈ ◈
“젠장, 정말 이 집이 가장 따듯한 곳 맞아?”
나는 외투를 한껏 여미며 중얼거렸다.
촌장은 자신의 거처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의 집은 다른 곳보다 상태가 아주 약간 나을 뿐, 허름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이 사람 사는 집이라고 보기엔 심히 어려울 정도.
“죄, 죄송합니다.”
겁먹은 노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들을 위해 남작한테 갑질도 해 줬건만, 아직도 나를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도련님.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도련님의 호의에 보답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어째서 내가 꼭 뭔가를 뜯어낼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이런 다 쓰러져 가는 마을에도 ‘리하르트’의 인식은 널리 퍼져 있는 듯했다.
“하아…… 됐다. 메리, 너는 이곳에 남아 있어.”
어차피 안이나 밖이나 추운 것은 매한가지이니, 돌아다니기라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메리에게 속삭였다.
“신이니 믿음이니, 아직 그런 얘긴 하지 말고. 저 양반 경계심만 어떻게 좀 풀어 봐.”
“알겠습니다!”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메리는 두 눈을 빛냈다.
밖을 나서니 기사들과 헤센 남작가의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히나 지원 품목들을 알아보고 있는 남작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자식이, 자기 땅이면 제대로 관리해야 할 것 아니야.’
물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이럴 때라도 망나니 이미지를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마을은 앞으로 내 신도들이 살아갈 곳이니까.
“도련님. 추운데 왜 나오셨습니까.”
“야, 집안도 추워.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낫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아론과 잡담을 나눴다.
“……그러게 대체 이곳엔 대체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음, 나름의 생각이 있어.”
내 말에 아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주위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도련님께선 평소 추위를 매우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오신 것을 보면 따로 생각이 있으실 텐데…….”
그의 표정은 더없이 진중했다.
“단순한 호의로 이러시는 거라면, 이 마을 주민들은 크게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섣부르게 나섰다고 말했다. 마치 심심풀이로 헤센 남작을 핍박했다는 것처럼.
그래서 이 마을이 남작의 눈 밖에 나 버렸다는 듯이.
“도련님이 이 마을에 관심을 접는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다 무너져 가는 마을을 가리켰다.
“너는 이 꼬라지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거야?”
“예?”
아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마 정상일 것이다. 이 세계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인권에 대해서 무감각했다.
“이 마을은 영지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방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원은 항상 유한하고,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런 마을에 투자하는 건 손해일 테지.
“그럼 내가 가치 있게 만들어 주면 되겠네.”
내가 특별하게 정의심 넘친다거나, 공감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필요에 의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니.
“……?”
고개를 갸웃하는 아론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오른손에 새겨진 각인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각인은 소유자의 자질을 알아보기 위한 표식.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연으로 소유자의 기량이 오른다면, 그것도 자질로 포함되는 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론. 내일은 설산을 오를 예정이다.”
◈ ◈ ◈
아론 마이어는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론으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동정심은 아니었다는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그가 보기에, 리하르트의 표정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치 미래를 예견한 듯,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아론이 기드를 대신해 리하르트를 보필한 지가 두어 달쯤 되었다.
그동안 아론이 지켜봐 온 리하르트는 언행이 경박한 감이 없잖아 있을 뿐 망나니라고 불릴 짓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련에 목을 매는 그 모습은 다른 기사들의 귀감이 될 정도였고, 무아지경에 빠졌던 그날은 아직도 간간히 회자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리하르트의 성장은 재능이 없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단 두 달 만에 하급 기사 수준으로 단련된 체력과, 능숙해진 기초 검술이라니.
어찌 된 게 망나니라는 악명에 맞아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자신을 숨겨 오셨다거나…….’
순간, 아론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가설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마나 불감증…… 그것 때문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텐베르크의 혈통이 마나를 못 느낀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저주다.
바텐베르크의 핏줄들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경쟁을 치렀다.
지금은 후계자가 정해졌다시피 했으나, 리하르트가 어릴 적엔 그 경쟁 구도가 한참 과열되어 있을 때였다.
‘만약 리하르트 도련님이 이 재능을 숨기지 않았다면, 위기감을 느낀 다른 도련님들이 어떤 대응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론이 얼굴을 굳혔다.
아론은 제가 모시고 있던 도련님의 진면모를 일별한 기분이 들었다.
송곳니를 숨긴 채, 기회를 노리는 맹수.
‘그래. 지금까지는 마나 불감증 때문에 본인의 재능을 숨겨 왔던 거야.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진 것이고.’
“정말 무서운 분이시군…….”
◈ ◈ ◈
스노우폴에서의 하룻밤은 혹독했다.
“하아…….”
나는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추위를 피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선택한 내 안식처였다. 물론 마차도 추위를 완전히 막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도련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먼저 일어나 있던 메리가 홍차를 내밀었다. 그러곤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호-르.”
“……그래.”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이는 얼마 전에 메리가 직접 만든 호르교의 인사법이었다.
이 정도 정성이면 교주 자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도 신앙은 180 정도 들어왔군.’
메리와 멜라인이 착실히 기도하는 모양이다. 나는 더 이상 기초 검술에 신앙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효율의 문제라 해야 할지, A랭크에 들어선 이후론 보이지 않는 벽에 단단히 막힌 기분이었다.
‘마나 둔감증에 100 투자.’
가슴어림이 간질간질하다. 본래 마나는 심장에 있는 기관(器官)을 통해 감지하고 저장하는 것.
마나를 느끼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심장에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도 얼마 안 남았다.’
벌써 적지 않은 양의 신앙을 잡아먹은 심장.
조금만 더 투자하면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았다. 하루 빨리 완치가 되길 빌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설산을 오르는 날이니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12화. Episode. 04 스노우폴 (3)
“아이고, 도련니임!”
“아, 좀!”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헤센 남작을 노려봤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애원해 대는 남작은 곧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저 위험한 설산엔 왜 오르신다는 겁니까!”
“그 말은 바텐베르크의 호위 기사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냐? 역시 후자겠지?”
“저, 저는 그저 도련님이 걱정되어…….”
그의 말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걱정은 개뿔.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덤탱이 쓸까 봐 그러겠지.”
그 증거로 남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그는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너희는 얼른 돌아가서 지원품이나 보내라니까.”
“도련님이 헤센 영지에 머무시는 동안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원품은 병사를 시켜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허튼 짓 그만하고 얼른 가라-, 고 그의 얼굴에 쓰여 있는 듯했다.
“아무튼, 아론과 나는 설산에 오른다.”
통보를 가하고, 그의 막사를 나섰다. 그러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모리츠 도련님께서 얼마 전에 중급 기사와 호각으로 겨루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얘는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냐.
“모르는데.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양아치도 바텐베르크의 피를 이었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나?”
“…….”
어딘가 묘한 눈빛인 그를 보다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지금은 중급 기사였지.
자길 무시했다고 창으로 찌르려 드는 건 아니겠지?
먼 미래엔 아론이 ‘창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약간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창만 잡으면 눈에 뵈는 게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니.
“얼른 가서 등산 준비나 해.”
“저와 도련님만 가는 겁니까?”
“그래.”
둘만 가는 건 위험하다며 반대를 펼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아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쟤 뭔가 좀 이상한데.’
오늘따라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아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렴 어쩌랴, 저 설산에서 내 몸만 잘 지켜 주면 될 일이다.
◈ ◈ ◈
아론의 등산 준비는 빠르고 완벽했다. 리하르트가 무슨 일로 설산을 찾는지, 그것이 궁금해 서둘러 짐을 싼 것이다.
‘분명해. 도련님께선 무언가 속셈이 있으시다.’
아론은 설산을 올려다보는 리하르트를 보며 확신을 굳혔다.
단순히 등산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터였다.
오늘, 기필코 리하르트의 편린을 알아내고 말리라.
“그럼 출발하지.”
그들은 열심히 눈 덮인 산을 올랐다.
이따금 씩 나타나는 짐승이나 마물은 아론의 손에 숨이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새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마물의 피.
평범하게 살다 ‘리하르트’가 되어 버린 그로서는 상당히 역겨운 광경이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실전을 거듭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더 쉬운 길,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싸늘히 굳어 가는 마물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손등의 각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각인의 문양이 아주 약간이지만 옅어져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 망설임을 느낀 것은 각인이 판단하기에 자질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거였구나.’
비록 각인은 조금 옅어졌으나, 리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대충 감이 잡혔다.
‘결국 잘 싸우고 빨리 강해지면 된다는 것 아냐?’
그의 발목을 붙잡던 마나 불감증. 그것은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미증유의 힘으로 극복하고도 남았다.
꽈악-
리하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곤, 목적을 상기했다.
그의 목표는 누릴 것을 전부 누리며 걱정 없이 잘 사는 것.
‘물론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더욱 좋고.’
원초적이라면 원초적이고, 평범한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이 세계는 수없이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었으니,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꿈이기도 했다.
어중간한 힘으로는 실현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았다.
“빨리 강해져야지.”
작게 중얼거리던 리하르트는 저를 바라보는 아론의 시선을 느꼈다.
“뭘 봐?”
“……아닙니다.”
그 후로도 두 사내는 산을 올랐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산의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계속 올라간다. 어차피 찾지도 못해.”
흠칫하며 경계심을 높인 아론에게 리하르트가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알고 계신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그들을 향한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동시에 엉클어진 마나의 배열이 아론의 기감에 잡혔다.
그것은 결계 특유의 기척이었다.
아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론. 저 커다란 나무 보이지?”
그때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유난히 큰 나무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과연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도련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산에 나무라니, 참 이상하지도 않아?”
“……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아론이 말문을 닫고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리하르트가 씩 미소 지었다.
“말하려던 거 말아. 저 나무가 결계의 중심이야. 네 마나라면 어렵지 않게 파훼할 수 있어.”
“……!”
아론은 귀를 의심했다.
중급 기사인 그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상급의 결계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결계의 파훼법을 리하르트가 알고 있다니?
한데 그보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마나를 느끼고 계신다고……?’
이미 결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리하르트가 재촉했다.
“으, 춥다. 빨리 해.”
“……예.”
우선은 도련님의 명령에 따른다.
마음을 정한 아론이 커다란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칵, 창을 찔러 넣은 뒤 마나를 쏟아부었다.
키기긱-
그러자 정상을 가득 채우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론은 잡념을 지우고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뿌지직-
나무의 전체에 균열이 가며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져 갔다.
‘결계가…… 무너져 가고 있어.’
과연 도련님의 말대로였다.
확신을 느끼자, 아론의 창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압!”
콰창!
아론이 기합과 함께 마나를 터뜨리자,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며 그와 동시에 주변의 광경이 일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론은 난데없이 펼쳐진 풍경에 절로 입을 벌렸다.
“저건…….”
궁전이었다.
마을에서도 아주 잘 보일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빙궁(氷宮).
이 시대의 건축 기술로는 꿈도 못 꿀 최고의 성이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들어가자.”
리하르트는 급격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외투를 여몄다. 그의 진짜 볼일은 저 안의 몬스터에게 있었다.
◈ ◈ ◈
“후우-.”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체감상 바깥보다 두 배는 더 추운 것 같은 얼음 성의 안.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곳은…….”
아론이 성 내부의 광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얼음으로 조각된 성은 감탄사를 절로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도련님은 이런 곳을 어찌 알고 계셨던 겁니까?”
“묻지 마. 말해도 못 믿어.”
내 대답에 아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마 전부터 그가 자꾸만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말했다가 무슨 취급을 받으려고.’
구태여 아론에게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더 이상 미친놈 취급받기도 싫었다.
“이제 움직인다.”
“예?”
검을 그러쥐었다.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 잡념은 불필요하다.
“그어어…….”
1층의 홀 중앙에 발을 딛자, 곳곳에 세워져 있던 얼음 동상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가디언.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거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인공의 존재들이다.
즉, 그 말은 이곳의 주인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의 주인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였지.’
하나 마법사는 죽고, 새로운 주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아론이 내 앞을 막아섰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
“이놈들 정도는 괜찮아.”
퍼걱-!
가디언의 목덜미에 검을 쑤셔 박았다.
실제 진검으로 무언가를 베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가디언들은 그 부담감이 적었다.
물론 일반적인 가디언이었으면 내가 상대도 하지 못하겠지만…….
‘목만 노리면 금방 끝난다.’
난 놈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제작된 지 오래되어 움직임이 어설프기도 했고, 애초에 강한 무력을 가진 가디언은 아니기에 하급 기사 정도만 되어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끝인가.”
이십여 기의 가디언들은 금방 정리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아론이 처리한 거지만.
그는 놀랐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의 성장이 빠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디언도 쉽게 처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입 바른 소리를 하는 그에게 대충 답하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음 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끝입니까?”
아론의 실력은 역시 출중했다. 젊은 나이에 중급 기사, 그리고 상급 기사의 자격을 넘보는 천재다운 솜씨였다.
“3층은.”
나는 검을 늘어트리며 답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2층을 돌파해, 3층의 가디언들까지 모두 쓰러트렸다.
층을 거듭할수록 놈들의 무력도 강해졌지만, 아론에 비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건 장난 수준이야. 놈은 방심하면 안 돼.’
얼음 성의 군주.
모니터 너머로만 보았던 그놈을 떠올리며 아론에게 경고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 이 앞에 있는 놈은 위험하니까.”
“……예.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아론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서 있는 3층의 끝에 있는 거대한 문. 그곳에서부터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진짜 얼어 죽겠네.”
성능 좋은 냉동고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추위에 약한 나로서는 최악의 환경. 꽁꽁 언 손가락이 아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흘끗 쳐다본 아론이 입을 열었다.
“견디기 힘드시면 밖에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
정곡을 찔렀을까. 아론이 입을 달싹였다.
“저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적어도 3성급 이상의 마물입니다. 역시 도련님께선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4성이야.”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4성이라면 중급 기사인 아론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일 터.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토벌대를 구성해야만 큰 피해가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놈이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론이 생각하기에 나는 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숨어 있던 4성의 마물을 발견했으니, 도련님께선 아주 큰일을 해내신…….”
“이미 늦었어. 저놈이 우릴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
내 말을 증명하듯, 거대한 얼음 문이 끼익- 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
침음성을 흘린 아론이 이내 각오를 굳혔다. 창을 꽉 그러쥔 손에 핏줄이 솟았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부디 도련님께선 이 성을 벗어나 주십시오.”
고집 부리지 말라는 듯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아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는 몸을 돌려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준비를 해 볼까.’
물론 내가 그냥 물러날 리가 없다. 저 혼자 각오를 굳힌 아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디언들의 얼음 검이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다.
13화. Episode. 05 설왕의 아티팩트 (1)
아론은 입안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그만큼 위험한 놈이었다.
-인간…… 내 친구…….
새하얀 얼음으로 이루어진 인간 형태의 괴물.
녀석은 제가 왕이라도 되는 양 고풍스러운 얼음 왕관과 털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변질된 요정인가.”
아론은 입맛이 썼다.
자연 곳곳에 거주하는 요정은 성격이 온순해 인간과 아주 우호적인 관계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눈앞의 설왕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괴물은 본디 눈의 요정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사나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4성급이라던 리하르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콰드득-
기이하게 몸을 뒤트는 설왕을 향해 아론이 땅을 박찼다.
쾅!
마나를 잔뜩 머금은 아론의 창끝이 설왕의 팔에 가로막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 조각들이 시야를 가렸다.
“……!”
그것을 확인한 아론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쩌저정!
그와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자연을 조종하는 요정의 능력이었다.
“퉤!”
입안에 들어간 얼음 조각을 뱉어 낸 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중급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게 한이군.’
한 단계 격의 상승을 눈앞에 뒀지만, 어찌 됐든 현재 그는 중급의 기사다. 조금 전 한 번의 격돌로 깨달았다.
제대로 된 오러를 엮어 내지 못하는 이상, 설왕의 몸을 뚫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적어도 도련님께서 완전히 벗어나실 때까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쾅! 콰쾅!
아론과 설왕의 격돌로 폭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인간…… 친구하자…….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설왕을 보며 아론이 빈틈을 노렸다.
그의 어깨가 순간 흐릿해지며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의 창격이 가해졌다.
파파파팍!
다만.
“큭!”
설왕은 아론의 맹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을 향해 얼음 조각이 솟구쳐 올랐다.
아론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그는 제 손을 바라봤다.
반탄력으로 인해 손이 욱신거렸다.
‘너무 단단해.’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가디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방어력이었다.
마치 고블린을 상대하다가 오우거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도련님께선 안전하실 것이다.’
아론은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리하르트만큼은 무사히 벗어났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문제는 자신.
눈앞의 마물을 어떻게 따돌려야 할 것인가.
이대로 도망친다면 스노우폴까지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물론 기회는 있었다.
단 한 번, 절기를 사용한다면 승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터.
하지만 실패한다면?
뒷일을 감당하기엔 만만치 않을 일이었다.
아론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였다.
“아론!”
뒤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서 고개를 돌리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지만, 아론은 제 본능을 막을 수 없었다.
“도련님……?”
“미안. 늦었다.”
태연하게 답하는 리하르트.
그의 손엔 가디언들이 사용하던 얼음 검이 들려 있었다.
“어, 어째서 돌아오신 겁니까!”
황당하다는 듯한 아론의 음성이 리하르트의 귓가를 때렸다.
“널 버리고 내가 도망치면 기드를 어떻게 보냐.”
아론은 기가 막혔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왔다는 말인가.
“저는 기사입니다! 도련님을 지키는 게 제 사명이란 말입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아론의 말을 단번에 끊어 낸 리하르트. 그가 얼음 검을 몇 차례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는 기드 대신으로 집사 역할을 맡은 거잖아. 기사는 무슨. 내 직속도 아니면서.”
그것은 절기까지 꺼낼 생각을 하던 아론에 비해서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론은 리하르트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했다.
“도련님. 제가 다시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까진 리하르트가 도망칠 시간을 벌 자신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절기를 아끼지 않고 사용하리라.
한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느샌가 다가온 리하르트가 아론의 팔을 붙잡은 것이다.
“……!”
“가만히 있어 봐.”
그 순간, 아론은 자신의 팔을 타고 뭔가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얼음 궁전의 한기를 몰아내는…… 굉장히 포근한 기운이었다.
-그아아-!
그때 지척까지 몸을 옮긴 설왕이 팔을 휘둘렀다.
“위, 위험합니다!”
대경실색하며 외친 아론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리하르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서걱-!
아론이 전력을 다해도 뚫어 낼 수 없었던 설왕의 팔이 잘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 것이다.
아론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리하르트가 휘두른 검날에 새하얀 빛무리가 타오르고 있었다.
‘저건…… 오러……?’
◈ ◈ ◈
리하르트는 검을 치켜세웠다. 하얀 얼음 검을 타고 흐르는 빛 무리가 눈을 어지럽혔다.
“이럴 수가…….”
그것은 아론이 보기엔 영락없는 오러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리하르트가 상급 기사들만의 전유물인 오러를 뽑아낸단 말인가.
리하르트는 검을 수련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사용하기엔, 오러는 터무니없이 높은 격의 기술이었다.
“잘 봐.”
힐끔 아론을 바라본 리하르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 그가 보였던 것과는 다른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어어-! 인간! 친구! 적!
쾅-!
리하르트와 설왕이 충돌했다.
빛을 휘감은 검이 놈의 몸에 닿을 때마다, 커다란 얼음 파편들이 깎여 나갔다.
‘정말 리하르트 도련님이 맞단 말인가!’
아론은 자신이 창을 놓은 줄도 모른 채, 리하르트의 싸움에 집중했다.
리하르트는 첫 실전이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고 여유롭게 설왕을 상대했다.
공격은 피하고.
서걱-!
빈틈이 생기면 날카롭게 베어 낸다.
정석이었다.
아론도 그렇게 설왕을 상대했었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어…… 이기긱……!
설왕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물러설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리하르트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스터 에그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아론이 시간이 벌 동안, 리하르트가 놀고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가디언들이 사용하던 평범한 얼음 검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지만, 실제 성능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 얼음 성에 숨겨진 유니크 무기의 조합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조건은 쓰러트렸던 가디언들의 검 열 자루를 한데 모아 깨부수고, 눈으로 다시 뒤덮는 것.
‘아이스 크레센도(Ice crescendo).’
반쯤 재미 삼아 설정했기에, 게임 속에서는 등장하지 못했던 명검의 이름이었다.
서걱-!
하지만 지금은 리하르트의 손에서 빛을 발하며 설왕의 몸을 가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그가 4성의 마물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싫어……! 기분 나쁜, 빛이 자꾸……!
리하르트의 검에 휘감긴 빛은 당연히 오러가 아니었다.
단지 신앙을 긁어모아 검날에 때려 박은 것이었다.
하나 정신이 변질된 요정족에게 성스러운 기운인 신앙은 치명적이었다.
마치 뜨거운 불에 데인 것처럼, ‘변질된’ 한정으로는 오러보다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변질되었다는 것만큼 어중간한 것이 없다.
리하르트가 첫 외출을 이곳으로 정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얻을 것도 많거니와, 상성적으로 아주 유리한 위치였기에.
“자, 빨리 끝내자.”
리하르트가 상태창을 힐끗 바라봤다.
오늘을 위해 남겨 둔 신앙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이 빛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3분.
어떻게든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각오를 굳힌 리하르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특기 - 초집중 발동.』
그때부터, 그의 세상이 달라졌다.
시야엔 오직 설왕의 모습만이 담겼다.
놈의 움직임과 호흡, 동선까지. 그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쾅! 콰앙!
불규칙적으로 솟아오르는 얼음 송곳들을 가뿐히 피해 냈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껏 그의 수련을 도와주었던 초집중 특기.
그것의 진가는 수련보다 전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목숨이 오고 가는 전투에서 저런 집중력을 보이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으니.
리하르트의 검격이 매섭게 설왕의 몸을 갈랐다.
그에 반해 설왕의 공격은 덧없이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4성의 마물이 리하르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아론의 눈엔 이제 혼란만이 가득했다.
‘……바텐베르크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것은 리하르트 도련님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아론이었다면 코웃음 쳤을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젠 그 생각을 쉬이 부정할 수 없었다.
◈ ◈ ◈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설왕은 자리에 풀썩 쓰러져 자잘한 얼음 파편으로 변해 버렸다.
곧 놈의 시체는 흩날려 날아가 얼음 왕관과 털 망토만이 남게 되었다.
리하르트는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후…… 드디어 얻었군.’
설왕 세트.
이스터 에그, 아이스 크레센도와 설왕이 지니고 있던 얼음 왕관, 그리고 서리 망토까지.
이로써 그가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아티팩트들은 모두 얻은 것이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계신 겁니까.”
주섬주섬 왕관을 제 머리에 얹는 리하르트를 향해 아론이 물었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말 제 도련님이 그동안 실력을 숨겨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넌 어디 다친 곳 없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펄럭-
리하르트가 말없이 서리 망토를 두르며 말했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예.”
아론은 입을 다물었다.
워낙 큰 충격에 바로 알아채진 못했지만, 갑작스럽게 리하르트에게 이질감이 느껴진 것이다.
“제법 어울리지?”
새까만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고풍스러운 왕관과 털 망토는 리하르트에게 냉혹한 왕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해 주었다.
“……왕자님 같습니다.”
아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직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하, 정말 왕자 같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리하르트가 아론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볼일은 다 보았으니, 괜히 더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나 아론은 달랐다.
‘그런 거였나……!’
그의 눈에 열망이 서렸다.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은 곧, 하나의 기대감을 자아냈다.
◈ ◈ ◈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오는 길.
첫 전투를 마치자 몸이 굉장히 무거웠다.
‘아론 앞이라서 무리하긴 했지만…….’
4성급 마물, 설왕.
게임에서야 그 위압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실제로 마주했을 때는 몸을 옥죄어 오는 기운에 침을 꿀꺽 삼켰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전투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아무리 공략법을 알고 있다 한들, 결국 직접 싸우는 것은 나였다.
‘초집중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꿨겠어.’
정말 그랬다.
경험도 없는 내가 최대한 효율적인 움직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초집중이라는 특별한 힘 덕이었다.
설왕의 공격이 눈 깜짝할 새에 코앞에 당도했을 때도, 내 뒤통수를 향해 얼음이 솟구쳤을 때에도.
초집중은 내 몸을 즉각적인 수준으로 움직이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곰에게 쫓기는 사람한테나 일어날 법한 극한의 집중 상태.
그 효과는 전부터 쓸 만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겪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이게 내 밥줄이었어.’
그것도 아주 두껍고, 단단한 강철 밥줄!
묵묵히 산을 내려가던 아론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상급 기사 시험은 언제 치르실 겁니까?”
“상급 기사?”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보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도련님께선 4성의 마물을 쓰러트리셨고, 오러마저 사용이 가능하시니 충분히 합격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텐가에 엄청난 파란이…….”
아, 그것 때문이었나.
이해했다.
내가 설왕과의 싸움에서 갑자기 오러 비슷한 걸 사용했으니,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4성급을 쓰러트린 건 순전히 운이었어. 그리고 내가 검에 씌운 것도 오러가 아니야.”
“그럼……?”
아론의 얼굴에 의문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여기서 더 말했다간 결국은 난 미친 사람이 되기에, 여기서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거기서 얻은 검의 힘으로 해낸 거니까,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린 하지 말라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론이 뒤늦은 대답을 해 왔다.
내가 보여 준 모습이 평소와는 많이 달라서일까.
“조금 더 힘을 기른 이후에 두각을 드러내시겠다는 겁니까.”
“뭐?”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아론이 눈을 번뜩였다.
“계승의 상징인 왕관…… 도련님의 야망을 알리기엔 더없이 적합한 심벌입니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4화. Episode. 05 설왕의 아티팩트 (2)
“아이고, 리하르트 도련님! 어디 계신 겁니까!”
마을 지척에 도달했을 쯤이었다.
헤센 남작의 목소리가 산기슭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댄 건지, 잔뜩 갈라져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이동하니 남작과 그가 대동한 병사들이 보였다.
“도, 도련님! 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신 겁니까!”
이내 나를 발견한 남작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 영지 내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노심초사했던 게 분명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분의 고하를 잊은 건지, 울컥- 하고 목소리를 높이려던 남작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내 왕관과 망토에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마. 산 위에 있는 얼음 성도. 내 왕관과 망토도.”
“아, 알겠습니다!”
과연 아티팩트 효과가 잘 통하고 있는지, 헤센 남작이 군기가 바짝 든 채로 대답했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설왕의 얼음 왕관과 털 망토는 바텐가를 멸망시킨 마법가의 ‘그 녀석’도 요긴하게 사용했을 정도로 훌륭한 것들이다.
이제 스노우폴의 주민들을 신도로 끌어모으면 완벽하다.
내 머릿속에서 행복 회로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어두운 숲속, 마기를 휘감은 리치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이 무슨 불온한 기운인가…….”
마기를 진득하게 머금은 그로서는 느껴 본 적 없는 기운, 그것이 리치의 심기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저 북쪽의 작은 마을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기운을 내뿜는 것일까. 리치 특유의 탐구욕이 이는 동시에, 본능적인 살심이 일렁였다.
“내 직접 가서 알아보고 싶지만, 대업이 우선이니 어쩔 수 없군.”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낸 그의 손짓에 땅속에서 시체들이 솟구쳤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언데드, 그 선두에서 데스나이트가 몸을 일으켰다.
“이 역겨운 기운을 흘리는 자를 찾아 죽여라.”
마계에서 넘어온 세 마리의 리치.
그중 일각인 크롬벨의 명령에 죽은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주민 하나가 내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호, 호-르! 호르 만세!”
그에 주변의 주민들도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이것들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노우폴에 온 지도 나흘째.
얼음 성에서 아티팩트도 얻고, 아주 만족스러운 외출이 될 줄 알았건만.
“호오르으으!!”
난관에 봉착했다.
나를 볼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호르의 이름을 외쳐 댔다.
심지어는 촌장까지 그 모양이었다.
물론, 종교를 전파해 신도를 모아야 하는 나에겐 좋은 일이지만…….
“시끄럽다! 믿지도 않으면서 뭔 놈의 호르야!”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없었다.
그들이 백날 신의 이름을 외쳐도 한 푼의 신앙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은 신을 믿는 척하며, 내 비위를 살살 맞춰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거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냐.
“꺄! 여러분, 신께 기도를 올립시다!”
“호르! 호르!”
메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저놈들은 왜 또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벌게지는 건지.
“하아…… 생각보다 쉽지 않군.”
오히려 설왕과의 전투가 훨씬 쉬웠던 것 같다.
아니, 분명히 그랬다.
피 같은 신앙을 사용해 주민의 병을 완화시켜 줘도, 기사들을 부려 저들이 먹을 식량을 구해다 줘도.
그들이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아니야. 기회가 있을 거다.’
여기서 내가 아무리 신을 믿으라 외쳐 봤자, 지금 보이는 바와 같이 가짜 신앙이나 얻겠지.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
아론이었다.
“아론, 내가 눈 그렇게 뜨지 말라 했지.”
“제가 무엇을 말입니까?”
아무것도 안 한 척 시치미를 뚝 떼는 아론이었다.
아론에게는 직접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전부터 아무래도 나와 메리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간혹 메리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꼭 저렇게 눈을 게슴츠레 뜨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 메리를 앞세워 전도 활동을 하자, 아론은 본격적으로 불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런 행위는 앞으로 도련님의 길에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호오, 얼마나 알고 있지?”
“신이란 허구를 믿으시다니. 바텐가의 후계자로서 절대 안 될 일 아닙니까.”
바텐가의 후계자라니. 그것은 이미 둘째 형으로 확정되다시피 한 자리 아닌가.
그러나 아론은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사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바텐가에 큰 위협이 찾아오기 때문이야.”
“……!”
내 말에 아론이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른 기사들이 들었으면 큰 문제가 될 발언이었다.
나는 다 알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꽉 막힌 무가 놈들을 보자 속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남대륙에 산재한 마법가들이 다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치들은 또 마법만을 탐하고 있을 테지.
플레이어 시절에 이 대륙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안타까웠다.
무(武)도 좋고, 마법도 훌륭하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북대륙과 남대륙, 그리고 무(武)와 마법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바빴다.
“계속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간, 크게 후회할 거다.”
북대륙을 지배하던 바텐가는 남대륙의 마르크스에게 멸문당한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다.
그러나 그게 끝일까?
이 대륙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내가 ‘리하르트’에게 빙의되지 않았다면, 마계의 침공에 피바다가 되는 대륙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난세를 코앞에 둔 대륙은 힘을 모아야 했다.
무인과 마법사를 떠나, 인간과 이종족의 화합까지 끌어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나는 ‘호르교’를 화합의 연결 고리로 삼고자 했다.
“……설마 혁명을 꿈꾸시는 겁니까?”
신앙심이 사라진 이 세계에선 혁명이 맞을 것이다.
하나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냥 좀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길 바란다, 이 말이지.”
아론의 오른팔에 새겨진 상처가 시야에 들어왔다.
설왕과의 전투에서 생긴 자그마한 생채기였다.
나는 그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신앙을 끌어올렸다.
“…….”
아론의 눈빛이 흔들렸다.
“되게 신기한 느낌이지? 신앙이란 거다.”
“정말, 신이란 것이 존재합니까?”
얼마 전 메리가 했던 질문을, 그가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렇다면 신이란 존재는 어째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뭐?”
이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싸움과 혼란이 끊이질 않고, 추악한 마물들은 인간의 땅을 침범하려 합니다.”
“…….”
“5년 전, 롤랑 마법가와의 전투에선 수많은 민간인이 휘말렸습니다. 그중엔 어린아이도 존재했지요. 그들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신은 그들을 돕지 않았느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신에 대한 반감을 내비치던 아론이 돌연 사과를 했다.
내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곤 걸음을 옮기는 그를 바라보았다.
◈ ◈ ◈
“저, 리하르트 도련님.”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던 와중, 헤센 남작이 나를 찾아왔다.
“곧 마을에 지원품들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와 함께 지원 품목들이 적힌 문서를 내게 내밀었다.
대충 훑어보니 제법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옷부터 식량, 땔감 등 꼭 필요한 것들이 적혀져 있다.
이놈이 이렇게 순순히 도와줄 것 같지는 않은데.
“흠흠! 저 성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설산의 얼음 성.
마을에서도 한 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얼음 성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헤센 남작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저것이 얼마나 큰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아름답지? 귀족들은 저런 것에 사족을 못 쓴다던데.”
“그, 그렇습니다. 스노우폴을 관광지로 만든다면……!”
그가 미끼를 물었다.
“관광지? 저거 내 건데?”
“예, 예?”
“내가 발견했고, 그 안에 살고 있던 마물도 내가 처리했어. 그럼 누구의 소유물이지?”
내 말에 헤센 남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 성이 제 영지에 세워져 있다고 소유권을 주장하기엔 내 신분이 지나치게 높다.
“우선은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풀죽은 듯 힘없이 대답하는 그를 뒤로했다.
애당초 스노우폴의 가치를 높여 줄 생각이긴 했지만, 그건 주민들이 내 신도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직은 남들 배만 불리는 짓이다. 헤센 남작을 닦달해 얻은 지원품이야 내 호의로 칠 수 있어도, 얼음 성은 그 정도가 과했다.
“음……?”
그때 희미한 소음이 귓가를 찔렀다.
그것은 마을 밖의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만 들은 것이 아닌지, 기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잠깐 가 보지.”
남작과 기사 몇을 데리고 마을 입구로 다가갔다.
낡아빠진 목책을 지나니 눈에 덮인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소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엄습했다.
소음은 발소리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
썩어빠진 시체들의 발소리.
숲을 빠져나오는 그것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성급부터 3성급의 수많은 마물들.
놈들은 하나같이 심장 부근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은 언데드의 표식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언데드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들의 뒤쪽.
그곳에서 역겨운 기운이 느껴졌다. 왜 이제야 알아챈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의, 소름이 끼치고 헛구역질이 날 듯한 더러운 기운.
그것은 마기였다.
“도련님! 자리를 피하십시오!”
어느새 내 곁으로 달려온 아론이 기사들을 불러 모으며 내게 말했다.
그는 창을 힘껏 그러쥔 상태였다.
기사들 외에도 헤센 남작의 병사들이 입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남작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리하르트 도련님, 어서 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대피하시지요! 서둘러야 합니다!”
“됐어.”
“예……? 그게 무슨…….”
“너는 마차로 대피하든가, 마을에 숨어 있든가 마음대로 해.”
“도, 도련님?”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뒤로 주민들이 보였다.
소란을 눈치채고 모여든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마물의 모습에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나는 허리춤에 차여진 아이스 크레센도를 뽑아 들며, 아론의 옆에 다가가 섰다.
“전투에 참여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주의하십시오.”
의외로 아론은 그 말을 끝으로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절대 안 된다고 뜯어 말릴 줄 알았건만.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설산에 오르기 전까지의 나였다면 겁을 집어먹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이런 불가피한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아티팩트가 있지 않은가.
얼음 왕관에서 차가운 냉기가 내뿜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지고, 이성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전투와 피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가장 필요한 효과였다.
그리고.
쩌저적-!
설왕의 시린 한기가 서리 망토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15화. Episode. 06 스노우폴의 위기 (1)
“키에엑!”
썩어 문드러진 살덩어리를 베어 넘겼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불쾌한 감촉. 그리고 역한 냄새가 연신 나를 괴롭혔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설왕 세트를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머저리같이 겁에 질려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전장을 지켜보고 있는 마을 주민들도 속을 게워 내기 바빴으니까.
“마을을 지켜라! 놈들을 한 마리도 보내지 마!”
아론이 창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바텐가의 기사들이 이런 언데드들에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기사들에 대한 걱정을 지우곤 눈앞의 적들에게 집중했다.
쩌저적-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설왕의 한기가 내 마나를 연료로 삼고선 휘몰아쳤다.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언데드의 몸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놈들은 잔챙이다.’
시체의 목을 베어 내며 숲 쪽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서부터 아주 불쾌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변질된 요정인 설왕의 것보다 훨씬 더 진득한 느낌.
‘고위 언데드이거나, 최악의 상황으론 마족일지도 모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둘 중 하나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 정도의 마기는 ‘변질된’ 놈들 따위가 품을 수준이 아니었으니.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지금 시점에선 스노우폴에 사건이 일어날 일은 없어야 했다.
있어 봐야 몇몇 약해 빠진 마물이 습격하는 정도일 터.
‘일단은 상황 해결부터.’
자꾸만 들고 일어서는 잡념을 털어 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뀌이익……!
덤벼드는 돼지 머리의 시체. 오크 언데드를 베었다.
잘린 단면이 콰드득- 하고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전장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는 중이었다. 아론을 제외하더라도 바텐가의 기사는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 실력자니까.
그러나 그들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흉악한 마기를 느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부상자들 있냐!”
첫 번째 웨이브라고 할까.
30여 마리의 시체들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 숨을 고르며 혹시라도 부상을 입은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가 상대한 하급 언데드들은 좀비와 같았다. 물리기라도 하는 순간 똑같은 언데드가 되어 버리고 만다.
다행히 기사들의 활약으로 감염된 이는 없었다.
“와아아!”
그 순간 주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 저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모든 사태가 끝났다는 것처럼.
개중에는 선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그때 아론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저들과 함께 대피하십시오.”
“아니. 이 주변에 존재하는 마을은 이곳뿐이다. 저들을 이끌고 도망쳤다간 낙오될 거야.”
그들을 두고 퇴각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차분해진 머릿속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바텐가의 하급 기사 넷과 중급 기사 하나.
남은 신앙은?
오늘 들어온 것을 합해도, 절망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부족한 상황이다.
‘그나마 가망이 있는 선택지는…….’
짧은 시간.
그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판단을 마쳤다.
“메리!”
“네, 네!”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느낀 것이다. 자신들을 옥죄어 오는 마기를.
진득하고 음습한. 새까만 안개 같은 것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쿵-!
반듯하게 잘려 쓰러지는 거목들 사이로 무언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거물이네, 젠장.”
나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묵갑의 기사였다.
그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까만 두개골이 자리했다.
“……데스나이트.”
6성급의 무력을 갖춘 상급 언데드.
그나마 마족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놈의 뒤로 열다섯 구의 언데드가 매서운 마기를 흘려 대고 있었다. 놈들 또한 중급 언데드였다.
하급 기사 넷과 중급 기사 하나로는 턱도 없는 수적 열세였다.
쿵-, 하고 발을 구른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놈이 풍기는 마기가 어찌나 흉한지, 그가 밟고 있는 땅 주변이 거뭇하게 물들었다.
“더러운 기운을 풍기던 것이 네놈인가! 크롬벨 님의 명을 받아, 네놈의 목을 치러 왔다!”
크롬벨.
데스나이트가 지껄인 그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마계에서 넘어온 세 마리의 리치 중 하나였다.
놈들은 일반적인 리치가 아니라, 마계에서도 한 축을 담당하는 마족이다.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언데드의 습격을 받은 이유. 그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신앙과 마기는 서로 상성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마족들은 신앙에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설왕과의 전투에서 뿜어낸 신앙이 놈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꽈앙-!
데스나이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긴장을 놓지 않았던 덕에 가까스로 막을 수는 있었지만.
“큭!”
몸 내부가 진탕 흔들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놈과 검을 맞부딪친 순간, 마기가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온 것이다.
고통은 둘째 치고, 오물 한 사발을 거하게 들이켠 것 같은 불쾌함이 엄습했다.
“도, 도련님!”
안타깝게도 기사들이 나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머지 언데드들이 짓쳐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난전이 다시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데스나이트는 오직 나만 노렸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비껴 흘려 냈다. 직후 반격을 가했지만, 놈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아.’
데스나이트는 설왕과는 딴판이었다.
설왕만큼의 방어력은 없지만, 오랜 기간 갈고닦은 검술과 강인한 육체는 내가 상대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정말 상급 기사와 전투라도 하는 듯한 기분.
‘거기에…… 마기도 질적으로 너무 높아.’
데스나이트가 줄기줄기 흘려 대는 마기는 ‘변질된’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검에 신앙을 덧씌워 부딪쳐 봐도 오히려 먹히는 것은 내 쪽.
상성 싸움에서 지고 만 것이다.
『특기 ? 초집중 발동.』
하지만 나는 악착같이 버텨 내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내게 필요한 건 신앙이었으니까.
◈ ◈ ◈
“우린 다 끝났어!”
언제 환호성을 질렀냐는 듯, 마을 주민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쾅!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땅을 갈랐다.
그것을 용케 피한 리하르트는 반격할 틈도 없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놈의 검격이 뒤쫓았다. 간신히 막아 냈음에도 리하르트는 땅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절망에 빠졌다.
헤센 남작의 경우는 더 심했다.
“나…… 나를 지켜라. 멍청한 병사 놈들아!”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연신 병사들을 불러 댔다. 귀족의 품위 따위는 공포 앞에 내버린 지 오래다.
“이,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이냐! 왜 빌어먹을 언데드 놈들이 이곳을 습격해!”
귀족인 그가 겁에 질리자, 스노우폴의 주민들은 더욱 큰 공포에 빠져 버렸다.
“다들 기도하세요! 도련님께 신의 힘을 보태 드려야 합니다!”
그때 메리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 또한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지만, 힘겹게 부르짖는 음성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자신이 모시는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자애로우신 신께서 저희를 구원하실 겁니다!”
그렇게 외친 메리가 이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짜악-
이성을 잃은 헤센 남작이 메리의 뺨을 때렸다.
“시끄럽다! 이런 상황에서 신 따위나 찾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처음부터 웃기지도 않았다. 신이 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았어야지!”
신을 찾는 것은 과대망상, 정신병이라는 그의 막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헤센 남작에겐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 공포를 잊기 위한 정신적 도피처로 말이다.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쏠리자, 남작은 모두 들으란 듯이 외쳤다.
“우린 여기서 다 죽게 될 거라고! 빌어먹을! 저 망나니 새끼가 이곳에 오는 바람에 나까지 휘말렸어!”
이미 눈이 돌아가, 저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지도 모르는 헤센 남작.
그 모습을 코앞에서 봐야 했던 메리는 평소 같았으면 두려움에 눈물을 터트렸겠지만,
으득-
지금은 이를 갈았다.
헤센의 말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지금 도련님께 망나니라 하셨습니까?”
메리가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모습을 보십시오! 귀족이라는 감투를 쓴 당신이 오줌이나 지리고 있을 때……!”
리하르트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데스나이트와 대적하고 있었다.
초집중 특기가 최대한으로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온전히 피할 순 없었던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힘겨운 싸움을 하는 상황.
“도련님과 기사님들은 저런 괴물과 싸우고 계십니다.”
메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작 신도라는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녀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평소 추위를 굉장히 싫어하던 도련님이 어째서 이런 곳에 행차하신 걸까.
2년 만의 첫 외출인 만큼 더 좋은 관광지도 많을 텐데.
그리고 그 의문은 스노우폴이 언데드의 습격을 받았을 때 풀렸다.
“어떻게 저 숭고한 마음을 보고도 그따위 막말을……!”
리하르트는 신의 계시를 받아 이곳으로 온 것이라고.
이 마을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을 알고선,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메리는 피투성이가 된 리하르트를 보며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부디 저에게도 힘을 주소서!’
그 순간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 시스템 창을 볼 수 있었다면 얼빠진 소리를 냈을 것이다.
『신도 ? 메리,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특기 - 후광(E) 습득.』
“아…….”
전장의 소음이 멈췄다. 주변을 환히 밝히는 후광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이스, 메리.”
쿨럭. 피를 뱉어낸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곧 그도 신앙을 쥐어짜, 메리와 똑같이 후광을 밝혔다.
“신께서 그녀를 통해 증명하셨다! 제발 좀 믿어 봐라. 이 멍청이들아!”
“가, 가엾은 저희를 위해 그분께서 후광을 내리셨습니다! 모두 기도를 올립시다!”
그와 메리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그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제발……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신이시여!”
주민들 몇몇이 손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내 순식간에 믿음이 퍼져 나갔다.
『프리아로부터 기도를…….』
『로먼으로부터 기도를…….』
『한슨으로부터…….』
시스템 창이 리하르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순간, 허점을 보인 그를 향해 데스나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카드득-!
빛을 듬뿍 머금은 리하르트의 검이 놈의 공격을 막아섰다.
기도를 받았음에도, 상성 싸움은 열세였다.
빛이 조금씩, 마기에 깎여 나갔다.
6성급 데스나이트의 마기는 고작 조그마한 마을의 신앙 정도로는 무리였다.
‘역시 이걸론 부족해.’
지금 주민들은 신도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기도를 올린 상태.
한 명당 얻을 수 있는 신앙의 양은 최대 30뿐이었다.
결국 총 신앙은 일천 남짓.
‘실패하면 죽는다.’
리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주사위를 던져야만 했다.
모든 이들이 숨 죽여 바라보는 상황에서, 그는 모든 신앙을 끌어올렸다.
파아앗-!
그의 온몸에서 밝은 빛이 피어나더니, 서서히 그의 손등으로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에 있던 정육각형의 각인에 억지로 밀어 넣는 모양새로.
빛을 빨아들이던 ‘각인’이 조금씩 뒤틀려 갔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각인에 대한 신격의 간섭.』
곧 리하르트가 일천 남짓의 신앙을 모두 밀어 넣었을 때.
『일시적인 각인 개방.』
『한 자루의 검성(劍星) - 강제 발동.』
빛이 폭사했다.
16화. Episode. 06 스노우폴의 위기 (2)
리하르트의 몸에서 마나가 치솟아 올랐다. 그 마나들이 엮이고 엮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리하르트의 등 뒤에 떠 있는 마나의 검.
그것은 ‘한 자루의 검성(劍星)’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말 그대로 검의 별이었다.
‘저건……!’
아론이 눈을 부릅떴다.
‘분명해…… 저건, 발락 경의 검술!’
바텐가의 가주 다음 가는 검사로 정평이 나 있는 발락.
그런 것치고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그였지만, 아론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어난 큰 전쟁에서, 여덟 자루의 빛나는 검으로 마법사들을 도륙하던 발락을.
그때의 그것을 리하르트가 엮어냈다.
비록 볼품없을 정도로 작고 흐트러진 모양새였으나, 틀림없는 검성(劍星)이었다.
아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오러 블레이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쿠구궁!
검의 폭력이었다.
푸른빛을 내뿜던 별이 길게 꼬리를 남기며 데스나이트를 향해 떨어졌다.
“크, 크아아!”
데스나이트도 그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던 묵색 오러를 뽑아냈다.
콰가가각!
충돌한 두 검의 여파가 주변을 헤집었다.
땅이 쩍쩍 갈라지고, 마나는 격류가 되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 데스나이트가 절규를 내뱉었다.
불안정한 검의 별이라도 검성은 검성.
데스나이트의 몸이 사정없이 뒤로 밀렸다. 더 이상 놈에게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이윽고, 검의 별은 묵색 오러를 깨부수고 단단한 갑옷까지 뚫어 냈다.
그 직후 거대한 폭발이 뒤를 이었다.
“허억, 허억……!”
리하르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 한 번이지만, 그가 행했다고 믿기엔 지나치게 압도적인 공격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던 마나가 전부 소진된 것은 물론, 무리한 마나 활성화로 신체가 비명을 질렀다.
“쿨럭!”
리하르트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흩날리는 눈바람과 흙먼지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그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안 끝났어.’
리하르트에겐 분명하게 느껴졌다.
데스나이트의 진득한 살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흙먼지가 걷히고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다. 놈은 큰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 굳건히 서 있는 상태였다.
키긱, 키기긱-
“위험해…… 너는 위험한 놈이다……!”
온몸에서 기이한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는 데스나이트.
놈의 안광이 불길하게 빛났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크게 갈라진 가슴팍에서 새까만 마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이 한 몸 바쳐, 주군의 적을 처단하겠다!”
그건 광폭화였다.
이미 큰 상처를 입은 데스나이트가 죽음을 담보로 한 최후의 보루였다.
놈은 리하르트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죽어라!”
리하르트를 향해 데스나이트가 신형을 날렸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몸놀림이었다.
“도련님!”
아론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미 리하르트는 모든 힘을 소진한 후였다.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놈의 검을 피하기란 요원한 일.
털썩 주저앉은 리하르트를 쪼갤 듯,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떨어져 내렸다.
아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상대하던 중급 언데드를 떨쳐 내곤, 땅을 박찼다.
동시에 끌어올린 마나가 창을 내달렸다.
아론이 데스나이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야를 가르듯 떨어져 내리는 거검을 보며 아론은 정신을 집중했다.
단 한 번, 현재로서는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절기를 쓸 때였다.
아론의 창을 타고 마나가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곧 창과 거검이 충돌했다.
콰아앙-!
굉음이 울리고 아론의 마나가 뒤집혔다.
창은 거검을 뚫을 기세로 치고 올랐지만, 데스나이트는 중급 기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놈이 진심으로 휘두른 검을 막아 낸 것도 대단한 일.
그러나.
“아론, 너……!”
리하르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아론의 옆구리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자신이 상대하던 언데드를 급하게 뿌리치기 위해 무리하다 생긴 상처였다.
더불어 그의 오른팔은 뒤틀려 있었다.
뼈는 물론이고, 절기의 사용으로 찢어진 근육에서 새빨간 피가 흘렀다.
“방해하지 마라!”
데스나이트가 일갈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아론은 힘없이 창을 들어 올렸다.
창이 너무도 쉬이 잘려 나갔다. 그다음은 그의 몸이었다. 어깨부터 허리춤까지 커다란 상처와 함께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즉사는 아니지만 틀림없는 치명상.
쓰러지는 그를 향해 데스나이트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아론과 리하르트를 한 번에 베어 낼 요량인지, 꿀럭이며 끓어오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였다.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아론……! 네 덕에 살았어.”
리하르트는 데스나이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향한 곳은 놈 뒤편의 허공.
무언가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콰앙-!
그것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아론과 리하르트의 신형이 저 멀리 날아갔다.
◈ ◈ ◈
왈칵, 쏟아져 나오는 핏물을 틀어막았다.
데스나이트의 검에 동강 나기 직전, 무언가에 얻어맞은 나와 아론은 어느새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도와줄 거면 곱게 도와주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끝났군.”
구세주 발락이 보였다.
허공을 밟고 달려온 그는 데스나이트의 검날을 두 손가락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네, 네놈은 뭐냐!”
데스나이트가 경악을 하며 검을 빼내려 했지만 글쎄, 놈의 검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대신에 발락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입 다물고 있거라.”
콰득-
그가 왼손으로 데스나이트의 어깨를 붙잡자, 그 단단했던 갑옷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건…… 정말 검성의 흔적이로군.”
발락의 시선은 온통 놈의 가슴팍을 향하고 있었다.
커다란 검상을 중심으로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 갈라져 내린 상처.
판별을 마친 발락의 기세가 바뀌었다.
“네놈이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렸구나.”
데스나이트의 마기보다 훨씬 흉악한 살기가 그에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던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제자로 안 받아 준다고 할 땐 언제고, 부지불식간에 둘도 없는 제자가 되었다.
“휴…….”
어찌 됐든, 도박이 성공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놈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검성(劍星)은 이 세계에서 톱 클래스를 달리는 초고등 검술.
지금의 나는 그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대신 저 영감을 불렀지.’
각인은 발락이 새겨 준 것.
그렇다면 각인에 변화가 생길 경우, 그가 모종의 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웬만한 변화로는 당장 그를 호출할 순 없었겠지만,
‘각인 개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도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는가.
물론 도박이었다.
예상이 틀렸다면, 혹은 발락이 조금만 늦었다면 나와 아론은 진작에 두 동강이 났으리라.
“아론! 너 괜찮냐?”
아론은 미동이 없었다.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숨은 붙어 있었다.
만약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뒤틀린 오른팔이 눈에 들어온다. 어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무인으로서의 생이 끝날지도 몰랐다.
하나 지금은 검성을 만들어 내느라 일말의 신앙도 없었다.
방법이 없는 상황.
으득, 이를 갈며 발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배! 제발 빨리 좀 끝내 줘!’
콰가가가-!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는 발락의 뒤로 세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짙은 남색의 거대한 대검들. 마치 무협지의 이기어검술을 보는 것 같았다.
꼬리만 길게 남긴 채, 허공을 휘젓는 별들은 언데드들을 도륙했다.
그와 언데드의 전투는 전투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일방적인 학살이란 말이 어울렸다.
발락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언데드를 쓰러트렸다.
그가 오기 전까지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였다.
◈ ◈ ◈
“원통하…….”
콰직-
이내 발락이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짓밟아 으깼다.
그게 끝이었다.
“진짜 죽다 살았네.”
끝을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온몸의 상처가 격통을 일으켰다.
“와아아아!”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그 순간 주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로를 부둥켜 껴안거나 오열을 하는 사람들.
개중에는 신의 이름을 외치는 자도 있었다.
“도련님! 괘, 괜찮으신지요!”
메리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왔다. 헤센 남작에게 맞았던 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채였다.
“아니, 나보단 아론이…….”
“세상에! 무, 무슨 피가……! 흐아앙!”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메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환호성을 외치던 주민들도 메리의 곡소리에 화들짝 놀라 뛰어왔다.
“안 됩니다. 도련님!”
피 칠갑을 한 내 모습에 주민들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환호성은 온데간데없이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쿨럭!”
그때 목구멍을 넘어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앞섶을 적신 것은 새까만 피. 생각해 보니 나도 아론만큼이나 무리하긴 했다.
나를 둘러싼 오열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 그만…….’
골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아, 어쩌면 진짜 죽을지도.’
저 멀리 뒷짐을 쥔 채 다가오는 발락을 바라보며,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
◈ ◈ ◈
“흐윽……! 도련니임!”
발락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 큰 성인들이 울고 있는 장면은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비켜라.”
발락은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치고 리하르트의 앞에 다가가 섰다.
피투성이 소년의 모습이 발락의 눈에 가득 찼다.
발락이 바텐가를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상황.
다시 말해서 ‘각인’을 새긴 것 역시 최근이다.
“대체, 어떻게?”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발락.
로펀 왕국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그는 똑똑히 느꼈다.
자신이 새긴 각인이 개방되는 그 감각을 말이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허공을 밟아 달려왔다.
로펀 왕국과 스노우폴의 거리가 말을 타고 하루 거리란 것을 생각하면, 정말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늑장을 부렸다면 리하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까득-
하마터면 평생을 찾아다닌 재목을 잃을 뻔했다.
이미 데스나이트도 죽은 마당, 발락의 분노는 기사들을 향했다.
“바텐가의 기사들이 언제부터 이리 약해졌지?”
“…….”
“네놈들 상전은 피 칠갑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아주 멀쩡하구나. 갑옷에서 윤이 날 정도야.”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던 발락의 시선이 아론을 향했다.
리하르트 옆에 쓰러져 있는 그의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하급 기사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기드 경을 대신해 리하르트 도련님을 보필하는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 경입니다.”
“쯧! 제법 재능은 있어 보이던데…….”
잠깐 혀를 찬 발락은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였으니까.
‘완전히 개방을 한 것은 아니었군.’
리하르트의 손등에 그려진 각인은 그 모양새가 일그러져 있었다. 강제로 비틀어 버린 듯한 기이한 문양.
결코,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방한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나 발락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했다.
“이제까지 이런 놈은 없었다!”
그 누가 각인을 비틀 수 있단 말인가.
리하르트가 대체 어떻게 해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정말 다행인 점은, 발락이 리하르트와 아론의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니고 있던 약초와 포션으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둘의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곧 다시 만나겠구나.”
과연 다음엔 또 얼마나 놀라운 것을 보여 줄지.
나이를 먹은 후,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흥분이 발락의 흥을 돋웠다.
“선물을 주도록 할까.”
발락이 리하르트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문득. 그의 눈에 아론도 함께 들어왔다.
잠시 멈칫했던 발락은 씨익 웃었다.
“너는 덤이다.”
그 둘에게 노인의 손이 닿았다.
17화. Episode. 06 스노우폴의 위기 (3)
“으음…….”
얼머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촌장의 집이었다. 밖이 조용한 것을 보니 상황은 전부 정리된 모양이었다.
『최하급 전도사 - 메리…….』
『로먼으로부터…….』
『프리아로부터…….』
『기도를 올린 자들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시스템 창이 눈앞을 한가득 메웠다.
이틀이나 누워 있던 건지 신앙이 총 두 번씩 들어왔다.
다 합해서 약 1,800정도 되는 신앙.
성스러운 기운이 온몸에 가득 충만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뻐근하면서도 개운한 게, 무언가 변한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디가 변한지를 모르겠다.
한참 동안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성자님! 깨어나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촌장, 로먼이 나를 보곤 호들갑을 떨어 댔다.
방금 저 할배가 뭐라 한 거지?
“성자라니?”
로먼은 내 말에 답도 않곤,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보게들! 성자님께서 깨어나셨다네!”
집 안에 있는데도 밖에서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들려 왔다.
이렇게 있다가는 이 좁은 집에 사람으로 가득 찰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입었던 상처는 전부 나은 상태였다.
분명 발락이 포션이라도 뿌려 준 거겠지.
덕분에 약간의 근육통만이 느껴졌다.
“성자님이시다!”
문을 열고 나오니 역시나 온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손에는 각각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무사히 쾌유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이건 저희들이 성자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촌장이 깡마른 몸으로 넙죽 엎드리곤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말린 육포였다.
“가난한 마을이지만…… 이렇게라도 성자님과 신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주민들이 갖고 온 것도 땔감이나 헤진 천 옷 등 내겐 별 필요 없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이 마을에 내가 뜯어 갈 것이 뭐 있다고.
황당함이 몰려 왔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던 신자들 아닌가.
“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건 물질로 대체할 수 없어.”
말린 육포를 밀어내며 말했다.
굳이 소중한 신자들에게 부담을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 역시 성자님……!”
“성자님 만세! 호르 신님 만세!”
“호르! 호-르!”
연신 호르를 외치는 주민들.
촌장의 집 앞이 소란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구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메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뺨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 메리!”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난 분명 보았다.
헤센 남작이 고함을 지르며 메리의 뺨을 후려치고 욕을 하는 것까지도.
“성자, 아니…… 도련님!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는 제 뺨이 부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저 다행이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말 굉장히 멋있으셨습니다! 빛나는 검으로 그 해골을 아주 그냥……!”
잔뜩 흥분한 메리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평소 소심한 그녀는 뭔가에 꽂히면 꽤나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덕에 전도사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헤헤, 많이 놀라셨나요? 로먼 촌장님께서 도련님을 성자님이라 칭하라고 하셨어요.”
슬쩍 로먼을 바라보자 그가 수줍게 두 손을 모았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민들께서 신도가 되길 원하고 있어요! 어서 신도 의식을 거행하시죠!”
“신도 의식?”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신도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그냥 신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면 되는 거니까.
가만 보니 메리는 신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스노우폴의 인구수는 31명.
자, 과연 여기서 몇 명이 신도가 될 수 있을까.
줄 맞춰 서 있는 주민들의 면면을 바라보니 하나같이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신도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진심으로 신앙을 품은 자만이 신과 함께할 수 있다.”
내 말에도 그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신도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듯한 기색이었다.
언데드로부터 구해 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신을 믿는 척하기만 하던 그들이 이렇게나 변하다니.
아니면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메리가 열심히 전도해 준 걸까.
“그럼 시작한다.”
첫 번째는 로먼이었다.
줄의 선두에 선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신도 임명.”
『로먼이 신도가 되었습니다.』
『어린 양에게 당신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축하한다. 넌 이제부터 신도가 되었다.”
“아아!”
감격스러워하는 로먼을 뒤로하고 다음 주민을 맞이했다.
순번을 기다리는 이들이 31명이나 되다 보니, 일일이 격려해 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대상의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안타깝게도 마을 주민 전부가 신도가 될 수는 없었다.
“너는 신앙심이 부족하군.”
“예, 예!? 아닙니다!”
절망 어린 표정을 짓는 젊은 청년에게 고개를 저었다.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