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1

1화. 프롤로그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소년이 비춰졌다.
눈가를 찌르는 새까만 머리칼이 거슬려 손으로 쓸어 올렸다.
“힉!”
그 작은 행동 하나 했을 뿐인데, 구석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명백히 나를 두려워하는 반응.
저 여자가 왜 저러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난 내가 만든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검술제일가, 바텐베르크의 막내아들이자 이 몸의 원래 주인.
태어났다 하면 검호(劍豪)가 되는 이 집안의 유일한 낙오자.
열등감에 사로잡혀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망나니로 말이다.
‘하필이면 이딴 놈한테…….’
구석에서 벌벌 떠는 시녀의 반응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애써 상념을 털어 냈다.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해 봐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
그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몇 년 후,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는 죽음을 맞이한다.
가문이 박살 나는 건 덤이고.
하지만 아직 해 볼 만했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니까.
1화 Episode. 01 신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1)
“도련…….”
몽롱함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륜이 느껴지면서도 정정한 음성이었다.
“도련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음성이 어째 날 부르는 것 같아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얼굴의 한 노인이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밤새 잠이라도 설치셨습니까?”
누구일까.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무어라 대답하려다 갑자기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말문이 막혔다.
“도련님?”
어지러운 와중에도 노인의 음성은 잘만 들렸다.
도련님이라고? 내가?
멍하니 노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낯설기 짝이 없는 중세풍의 방이 보였다.
‘꿈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 방이 난데없이 고풍스런 방으로 변모하진 않았을 것이다.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 보니, 벽에 걸린 거울에 눈길이 갔다.
거울 안에는 막 깨어난, 웬 소년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어라.”
새까만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
봉두난발이 되었음에도 어딘가 기품이 흐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귀공자 같은 외모였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리하르트 도련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 그래. 리하르트다.
망나니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어제 게임을 너무 많이 했나.’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망나니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다 해 본다.
내가 가꿔 나가던 게임 속의 캐릭터가 되다니.
정말이지 현실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시스템 재설정 중.』
돌연 눈앞에 영문 모를 글자가 떠오르더니, 정신이 맑아지며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잠깐.”
가면 갈수록, 거울 속 망나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재설정 완료.』
꿈이라고 여긴 이 상황은, 생각보다 너무 생생했다.
◈ ◈ ◈
평소 즐겨 하던 게임이 있었다.
‘The - God.’
천지를 창조하는 신이 되어 피조물들을 굽어 살피는 게임이다.
“그리고 이놈은 그 피조물들 중 하나…….”
이 몸의 주인, ‘리하르트 바텐베르크’였다.
북대륙을 아우르는 검술제일가, 바텐베르크의 멸망에 휩쓸려 죽은 망나니 캐릭터다.
혼란스러운 속내를 가라앉히며 입을 달싹였다.
“상태창.”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재능 [없음]
□특기 [없음]
□비고 [마나 불감증]
이 참담한 정보는 나, ‘리하르트’의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상태창이 하나 더 있었다.
[호르(리하르트)]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 0 □ 신앙 ? 1,000
□ 권능 -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모니터 너머에서나 보던 게임 속 상태창이 띄워졌다.
네모반듯한 창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늘로 사흘째.
나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으나, 골머리만 싸매고 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으니까.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도련님. 주문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첫날에 보았던 노인이 여러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름은 기드 마이어.
‘리하르트’의 전속 집사이자 한때는 한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했던 강자다.
“고마워.”
그에게 책을 받고 하나씩 훑던 와중 기드가 물어왔다.
“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갑자기 역사서는 왜 찾으시는지요.”
“역사를 잊은 배은망덕한 놈들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있죠.
난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고 딴청이나 피웠다.
그나마 이 노인이 ‘리하르트’를 지극정성으로 보필하던 충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의 눈을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속이진 않고 그저 숨길 뿐이었다.
“이 책들이 전부야?”
“예. 말씀하신 대로 역사서 중에서도 특히 신빙성이 높다 알려진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기드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만 가 보겠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라 말하는 그 얼굴에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끝끝내 말하지는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뒤로.
“신도 임명.”
기드를 향해 손을 뻗고 명령어를 내뱉었다.
『대상의 신앙심이 전무합니다.』
『신도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은 탓인가, 어느새 기드가 돌아서 있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됐어.”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고 보내기 위해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내고 난 후.
작게 한숨이 나왔다.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비단 기드에게만 스킬이 통한 건 아니었다. 몇 번인가 보았던 시녀의 경우도 똑같았다.
더군다나 상태창에 적혀 있는 ‘최하급 신격’이란 말.
‘최하급…….’
이 세계의 창조주에게 주어진 직위라기엔 지나치게 비루한 단어였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다시금 책을 들었다.
◈ ◈ ◈
탁-
서적을 거칠게 덮었다.
가지런히 쌓인 책들 위에 내 마지막 희망을 내려놓았다.
“터럭만큼도 없네, 신에 관한 게.”
본의 아니게 이세계의 역사만 열심히 공부해 버렸다.
이 세상의 역사엔 신의 이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본디, 게임 속의 모든 캐릭터들은 나, ‘호르’를 받들었다.
이곳의 주민들에겐 창조주가 곧 아버지고 어머니였으니까.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 오크. 드워프까지.
대륙을 두고 으르렁대던 모두가 신 앞에선 똑같은 경의를 내보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리하르트에게 빙의하기 전의 일이었을 뿐이다.
다섯 권의 서적들이 그를 증명해 주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신에 관한 것은 모조리 도려낸 듯 사라져 있었다.
내가 행했던 갖가지 기적조차 한낱 우연이나 기현상 따위로 서술되어 있었다.
서적의 저자가 지독한 불신론자가 아닌 이상, 그게 이곳의 통념일 것이다.
그토록 투철했던 신앙심은 다들 어디로 갔는가.
“후…… 이러면 안 되지.”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리하르트가 되었단 것이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격을 얻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리하르트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의 일들도 함께 상기되었다.
“곧 난세가 도래한다.”
신이 없어졌을 뿐, 이 세계가 밟아온 역사는 이전과 같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별개는 아닐 것이다.
곧 여기는 전쟁의 불꽃이 수없이 피어오르고, 재앙의 씨앗이 여기저기서 움트는 곳이 된다.
‘마나 불감증’에 허덕이던 망나니 따위가 살아남기엔 더없이 어두컴컴한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사아아-
손끝에서 찬란하고 상서로운 빛이 피어올랐다.
신앙. 다른 말로는 신의 힘이자 모든 것.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시작해야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2화. Episode. 01 신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2)
신앙.
하늘과 땅을 만들고 생명을 탄생시킬 때에도 쓰인 만능의 힘이다.
앞으로 내 생존에 있어 가장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이 신앙이었다.
상태창에 적혀 있던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신앙 ? 1,000]
“일천이라.”
빙의 전에 보유하고 있던 수치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양.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밑천이었다.
신도의 간곡한 기도를 통해 얻는 힘이기에당장 수급할 수 없는 만큼, 최대한의 효율을 내야 했다.
“그렇다고 묵히기만 할 수 없지.”
싸아아-
손끝에 피어오른 상서로운 빛.
그 빛을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바로 이 몸의 족쇄를 풀기 위해.
『대상의 ‘마나 불감증’을 치료합니다.』
『‘마나 불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신앙이 부족합니다.』
『‘마나 불감증’이 ‘마나 둔감증’으로 완화됩니다.』
시스템 창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동시에 심장 쪽에서 기이한 감각이 내달렸다.
꽉 막혀 있던 무언가에 아주 자그마한 틈이 벌어진 기분이었다.
“좋아. 효과가 있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일천 중 삼백의 신앙을 써 버렸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나 불감증.
마나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리하르트를 망나니로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 지독한 것이 마나 둔감증으로 변화한 건 정말 진취적인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차분히 심장의 변화를 느껴 보았다.
그러다 이내 내 몸 안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이게 혹시 마나인가?”
안개가 낀 듯 온통 희뿌연 듯했으나, 분명 커다란 뭔가가 몸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아무리 망나니라 하지만, 이 몸은 대륙 최고의 검술 가문인 바텐베르크의 막내아들이다.
마나 불감증이라는 천형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겠는가.
어릴 적부터 온갖 영약을 먹였을 것이다.
다만,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기에 심장에 쌓질 못하고 몸 전체에 지방처럼 겉돌고 있을 뿐.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기드가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마침 출출했는데. 고마워.”
“별말씀을…….”
기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책에 향했다.
“역사 공부는 잘하셨습니까?”
“음, 그냥저냥.”
“…….”
따끈한 빵을 한 입 베어 무는데, 기드와 눈이 마주쳤다.
심사가 복잡해 보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애정, 안쓰러움, 안타까움, 그리고 실낱같은 기대.
기드가 이 몸의 주인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도 짐작이 갔다.
이 망나니가 그답지 않게 패악질도 멈추고 생전 쳐다도 안 보던 역사책을 들춰 보니, 혹시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싶을 것이다.
실제론 아예 뒤바뀌어 버렸지만.
“마침 잘 왔다. 할 얘기가 있어.”
호록,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단련을 시작할 거야. 주방장한테 앞으론 기력 보충에 좋은 식단으로 준비해 달라고 전해 줘.”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기드가 눈을 부릅떴다.
뻣뻣하니 굳은 얼굴엔 환희와 충격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니까.”
몸속에 덕지덕지 끼인 마나,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선 몸을 뜨겁게 달구는 게 최선이었다.
◈ ◈ ◈
기드는 조용히 리하르트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렇게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귓가엔 리하르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단련이라고…….”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누군가에겐 일과나 다름없는 일.
다만 리하르트에겐 무척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였다.
‘언제였던가.’
기드는 옛 기억을 회상했다.
처음으로 검을 허락받아, 수련용 검을 잡고 뛸 듯이 기뻐하던 리하르트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체력 단련을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는 뭇 기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검에 대한 의욕과 총명함은 셋째 도련님보다 낫다고들 했었지.’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변하게 됐다.
아무리 수련해도, 아무리 영약을 먹어도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북대륙 최고의 의원을 불러들여 알아보니, 마나 불감증이란다.
그리고 마나 불감증은 치료가 불가한 병이라고.
그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몇날 며칠을, 처절하게 울었다.
이후, 그는 검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밝고 열정 넘치던 아이는 미소를 잃었다.
해맑음이 머물던 그 자리엔 분노만이 남았다.
깎이고 깎인 마음은 남을 상처 입히는 짓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용의 알에서 태어난 뱀.
적어도 이무기는 될 수 있었으나, 그 가능성마저 스스로 걷어찬 망종.
리하르트를 두고 바텐베르크의 가신들은 그렇게 칭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던 아이가, 어느새 모두의 손가락질만 받게 되었다.
이제 그 곁에 남은 건 기드 한 명뿐이었다.
‘변하셨다. 아니, 다시 되돌아오셨다!’
기드가 소리 없는 환호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염려했다.
마나 불감증.
리하르트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 이유.
마나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은 기사에게 너무나 잔인한 장애였다.
특히, 대륙에 산재한 무가 중 제일인 바텐베르크에선 더더욱 말이다.
“도련님…….”
이제야 다시금 일어선 리하르트,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이었다.
단련하고 단련하다 또다시 주저앉으시지 않을까?
열의로 가득했던 맑은 두 눈이, 다시 죽어 버리는 걸 다시 지켜봐야만 한다고?
“……안 돼.”
기드가 이를 갈았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인의 얼굴에 결의가 감돌았다.
◈ ◈ ◈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신도부터 모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정확히는 평판.
내가 인식한 것뿐만 아니라, 이 몸의 원주인은 가신들 사이에서도 망나니라 불렸을 정도니 얼마나 인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대뜸 신을 믿으라 외치면 뭐 하나.
미친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다.
우선 당분간은 마나를 흡수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연무장이 어디더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머무는 곳은 소검궁(小劍宮)이라 불리는 궁이었다.
이름에만 소(小)자가 들어가지, 궁의 크기자체는 여느 왕국의 왕성만 했다.
바텐베르크의 저력을 실감하기도 잠시.
‘넓어도 너무 넓잖아.’
우습게도 내 집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도 저 앞에서 한 기사가 걸어가고 있었기에,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리하르트 도련님?”
뒤늦게 날 확인한 기사가 예를 갖췄다.
떡 벌어진 어깨에 멀끔하니 잘생긴 얼굴.
하나 기사라 그런지 우직하다 못해 무뚝뚝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런데 이놈도 어딘가 익숙한 외모였다.
누구더라?
“무슨 일이십니까?”
“아, 연무장에 좀 데려가 줄 수 있나?”
“연무장…… 말입니까?”
“그래.”
“……마침 저도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그가 앞서 걸어갔다.
예상외다. 망나니 주제에 무슨 연무장이냐고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넓직한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 이내 그 뒤를 따랐다.
◈ ◈ ◈
연무장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곧바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곤 몸을 풀기 시작했다.
“저분은…….”
어떤 이는 처음으로, 어떤 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모습을 본 몇몇 기사들이 숙덕였다.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시겠지. 참 안타까워. 어릴 적엔 검재도 뛰어나셨다던데.”
“뭐, 요즘은 그런 생각도 안 들더군. 이 주일 전까지만 해도 거하게 사고를 치셨잖아.”
“그래서 지금 밖에도 못 나가시고…….”
그리 오래가진 못할 뒷담화였다.
“연무장은 잡담이나 나누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무뚝뚝한 음성.
리하르트를 연무장까지 안내해 준 사내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추, 충!”
“시정하겠습니다!”
그렇게 수다쟁이들의 입을 틀어막은 사내는 시선을 돌렸다.
‘리하르트 도련님…….’
기드 마이어의 손자이자,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 조부가 모시는 도련님과 대화를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리하르트에게 향해 눈길이 갔다.
3화. Episode. 01 신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3)
연무장은 드넓었다.
한 눈에 봐도 웬만한 축구장의 두세 배는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두 바퀴만 돌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고민이 될 정도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안일한 생각은 곧바로 접었다.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려야 했다.
곧 리하르트는 외곽을 따라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훅, 후욱!”
세 바퀴를 돌았을 때.
리하르트는 자신의 몸뚱어리가 생각보다 저질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열의에 차 있었으나, 너무나도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호흡이 금세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 많이 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땀이 흘러내렸다.
바텐베르크의 피를 이었다기엔 지나치게 허약한 체력.
수년간 단련을 멀리했던 이 몸의 업보였다.
‘아직이야.’
다섯 바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부를 들락거리며 몸을 식혔지만, 그럼에도 몸은 한없이 뜨거워져 갔다.
“허억…… 컥!”
느닷없이 시작된 혹사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한없이 왕복하는 팔과 다리가 쉼 없이 고통을 전해 왔다.
‘아직…….’
그럼에도 리하르트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감각이 오지 않았어.’
일곱 바퀴.
시간은 하염없이 지나갔다.
열 바퀴를 돈 이후로는 얼마나 뛰었는지
세는 걸 잊어버렸다.
힘차게 흔들었던 팔다리는 휘청거렸고, 숨조차 제대로 쉬질 못해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기약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이럴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포기하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다시 도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잘한 거라고.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유혹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
몸속의 무언가가 스르륵, 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무척 미약한 감각이었다.
하나 그 결과는 미약하지 않았다.
『신체의 부하로 인해 체내에 잔류하던 마나 중 일부가 흡수됩니다.』
리하르트의 눈앞으로 글자가 떠올랐다.
몸속에 눌어붙은 마나 중 일부가 심장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소량의 마나는 몸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후욱, 좋아!”
달음박질하는 다리가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를 지켜보던 사내 몇이 눈을 크게 떴다.
다 쓰러져 가듯 뛰던 리하르트의 안색에 활기가 깃든 것이다.
일반인이 눈치채기엔 보잘것없는 변화였으나, 기사들의 눈에는 그 차이가 훤히 보였다.
“……체력을 안배하신 건가?”
아닌 척 리하르트를 흘끔대던 아론이 의문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에 리하르트의 모습이 비쳤다.
아마 열여섯 바퀴는 돌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껴 둔 체력마저 바닥났는지, 다시 헐떡이며 흐느적거렸다.
이제는 정말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저 망나니 도련님은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잔뜩 지쳤는데, 대뜸 활력을 되찾는다.
그러다 다시 지치고, 또 어느샌가 멀쩡해진다.
그 과정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훅, 후욱……!”
뜀박질을 시작한 지 네 시간이 지났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 눈물겨운 뜀박질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얼굴에 오묘한 빛이 감돌았다.
◈ ◈ ◈
“이전에는 한사코 거절하더니, 왜 이제와 마음이 바뀌었지?”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그 앞에 선 기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견디기 버거운 압도감, 기드는 무거운 고개를 애써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꾹 다문 입과 매서운 눈매.
중년의 얼굴에선 언뜻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바텐베르크의 가주이자 대륙 최강의 검사,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검술제일가의 주인이며, 리하르트의 아버지였다.
“물었다. 어찌하여 제3기사단으로 복귀하려 하는가.”
한층 낮아진 가주의 음성에 기드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리하르트 도련님께서 변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변하고자 한다?”
가주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어쩌면 이 늙은이의 주책일지도 모릅니다. 헛된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 저는 리하르트 도련님께 날개를 달아 드리고 싶습니다.”
기드는 가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창을 내려놓은 지 16년, 그동안 리하르트 도련님의 곁을 단 한 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피력했다.
“지금껏 도련님의 곁에서 희망을 보았고, 깊은 절망을 보았습니다. 다시 일어서려 하시는 도련님께, 새로운 희망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허가해 주십시오-
절절한 요청에 가주는 눈을 감았다.
그의 감은 눈에 막내아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가주에게 있어 리하르트는 아픈 손가락이자 이제는 반쯤 잘라 낸 손가락이다.
다시금 눈을 뜬 가주가 기드를 보았다.
저 백발성성한 노기사가 리하르트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정이 많은 자이니, 리하르트의 노력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가주는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불허한다.”
아들 하나를 위해 충직한 부하를 잃을 순 없는 노릇이다.
“오늘, 제3기사단이 어떤 임무로 출정하는지 너도 알고 있을 터.”
드래곤 토벌.
저 북동쪽의 왕국으로부터 들어온 요청이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털썩, 기드가 무릎을 꿇었다.
용의 심장, 그 지고의 영약을 리하르트에게 바치기 위해서.
“부르트 왕국의 지원은 없어도 됩니다. 저, 기드 마이어. 제3기사단의 전(前) 단장이 출전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마. 너의 출전은 불허한다.”
가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토벌 대상인 드래곤이 어린 용이라 한들, 기드와 제3기사단만으로 어찌할 상대는 아니었다.
토벌을 요청한 부르트 왕국의 지원이 없다면, 제3기사단은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기드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주름진 손에 달려나온 그것은 금색의 동그란 패(牌)였다.
“언젠가 제게 이것을 주시며 원하는 바를 고하라 하셨지요.”
일평생 바텐베르크를 위해 봉사한 기사를 위해 수여한 훈장이자, 약속의 증표.
그 패를 본 가주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지금이 이것을 돌려드릴 때인 것 같습니다.”
노인의 눈에서 각오가 형형히 빛났다.
“이 늙은 몸을 불살라 용을 토벌하겠습니다. 부디 드래곤 하트는 도련님께 전해 주십시오.”
기드는 죽을 각오마저 끝마친 채였다.
“……담금질을 할 셈인가.”
“예.”
“그 늙은 몸으론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육신의 녹을 벗기는 것이지요. 기사로서 쓰일 곳에 쓰이다 부러지겠습니다.”
후-
가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북대륙을 호령하는 대군주이건만, 늙은이 고집 하나 꺾기가 이리도 벅차다니.
아마 기드는 바텐베르크의 자비와 배려조차 받지 않을 터다.
기사란 그런 생물이다.
제 목숨을 하찮게 여기진 않으나, 한번 굳어진 신념을 위해선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제3기사단으로의 복직은 허가치 않겠다.”
가주가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와 복직한들, 기사단에 혼란만 가져올 터. 너는 리하르트의 집사이자 리하르트의 호위 기사로서 임무에 합류하라.”
◈ ◈ ◈
“끄, 끄어어…….”
단련을 끝마치고 침소로 돌아가는 길은 고단했다.
한계의 한계까지 몸을 혹사시킨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단련 내내 날 지켜보던 기사가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기어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방에 들어와 쓰러지듯 누운 나는 그 고마운 기사를 떠올렸다.
나를 연무장까지 안내해 준 것도 그였고, 부축해 준 것도 그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기드의 손자였다.
아론 마이어.
훗날 ‘창귀’라 불리게 될 인재.
“걔가 걔였단 말이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워낙 분위기가 달라 미처 몰라뵜다.
얼굴을 크게 가로지르는 흉터 또한 보이지 않았고.
아무래도 아직 다치기 전인가 보다.
제 할아버지와는 달리 무뚝뚝한 그를 떠올리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은 지쳐 걸레짝이 되었으나 가슴엔 진한 성취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방처럼 몸 안에 박혀 있던 마나들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것이다.
이게 전부 눈앞이 탈색될 정도로 노력한 결과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활력이 넘치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눈을 감고 심장에 담긴 기운을 느껴보고자 했다.
하지만 마나 둔감증을 매달고선 그 티끌만한 마나를 감지하는 건 무리였다.
무언가 심장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있기는 한데, 뿌연 안개가 낀 듯 흐릿하기만 했다.
“역시 이 상태론 안 되겠어.”
가슴께로 신앙을 흘려보냈다.
『대상의 ‘마나 둔감증’을 치료합니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그렇게 50의 신앙을 불어넣다가 손을 뗐다.
어제오늘 350의 힘을 사용했건만, 병이 완치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신앙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 650이 전부인가.”
마나 둔감증 치료에 전부 투자하기엔 언제 어디서 신앙이 필요할지 몰랐다.
더군다나 신앙을 전부 사용하고도 완치가 안 되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신도를 포섭하는 건데.”
신도가 곧 신앙의 획득처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망나니 리하르트의 말을 누가 믿을까.
“급하게 생각 말자.”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힘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이 상태로 단련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면 됐다.
그러다 기회가 오면 덥썩 붙잡으면 되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다.
똑똑-
오밤중에 웬 손님이 찾아왔다.
누군가 했는데, 기드였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채로.
“뭐야. 어디 피난이라도 가? 종일 안 보이더니만.”
내 말에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도련님. 가주님으로부터 받은 임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갑작스레 가겠다는 걸까.
그 주름진 얼굴엔 비장한 기색이 보였다.
“집사가 무슨 임무야? 이젠 기사도 아니면서.”
“후후. 은퇴한 기사라도 쓰일 곳이 있다면 쓰여져야지요.”
지그시 날 바라보는 눈빛은 어딘가 애절한 구석이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막중한 임무가 내려진 모양이다.
“조심히 갔다 와. 나이 좀 생각하고.”
“급하게 떠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단련을 멈추지 마시길.”
기드가 인사를 건네곤 등을 돌렸다.
어째선지 기분이 묘한 탓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소검궁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4화. Episode. 02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다 (1)
다음 날 아침,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시녀가 음식을 세팅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드가 식사를 준비해 줬었는데.’
아침부터 어색한 느낌이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던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시녀의 얼굴이 꽤나 어두웠던 것이다.
처음, 나를 두려워하던 시녀는 빙의 이후 달라진 내 태도에 조금씩 여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 왔다.
하나 오늘은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직 망나니라는 인식이 있는 건가?’
곧 나아지겠지.
식사를 마치고 연무장으로 가려 할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입니다. 기드 경이 복귀하기 전까지 리하르트 도련님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멀끔하니 잘생긴 청년이 허릴 꾸벅 숙였다.
그의 소개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기드가 떠나니 대를 이어 손자가 집사가 됐군.’
마치 오늘이 첫 만남인 것처럼 천연덕스레 인사를 하는 아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또 보네. 기드의 손자인가?”
“예.”
아론이 내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참, 기드는 대체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아나?”
어젯밤, 기드를 배웅하고 나서 그가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 시기에 기드가 나설 일은 없었다.
“……임무 내용은 발설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론이 정중히 답했다.
이리 딱 잘라 거절하니 더 물어보기도 뭐했다.
‘거참, 정말 무뚝뚝하네.’
팔불출 같은 기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론이 화제를 돌렸다.
“단련, 오늘은 안하십니까?”
“……어. 해야지. 연무장으로 안내해.”
◈ ◈ ◈
아론은 어렸을 적의 조부를 떠올렸다.
창 한 자루를 벗 삼아 두려운 것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눈가에 짙은 아쉬움이 맴돌았다.
어떤 이유로 기드가 제3기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아론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그저 기드와 같은 전장에 설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혼자 제3기사단의 임무에서 제외된 이유.
그것은 바로 기드의 부탁 때문이었다.
도련님의 곁에 있어 달라는 그 부탁을, 아론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론은 기드를 존경했다.
어려서부터 창을 쥐기 시작한 것도, 제3 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것도, 전부 기드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기드는 항상 자신보다 완전 남이나 다름없는 리하르트를 챙겼다.
‘그리고 이젠 그를 부탁하신다고요.’
너무나 야속했다.
‘망나니…… 를요.’
아론의 시선이 리하르트를 좇았다.
얼결에 떠맡게 된 도련님이 헉헉거리며 뛰고 있었다.
“후욱, 흐어억……!”
마침 리하르트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났다. 벌써 지쳐 흐느적거리는 모습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아론은 그 달음박질에 슬그머니 동참했다.
천연덕스레 나란히 뛰기 시작하는 그를 본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헤엑! 왜, 헥…… 왜 따라와.”
“무리하다 쓰러지시면 단련을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제가 적당히 속도를 조절할 테니 뒤따르십시오.”
그리 말한 아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나갔다.
◈ ◈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리를 멈추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몸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야지만 마나가 흡수되니까.
“이제 한계이신 것 같습니다. 휴식을 취하시지요.”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아론이 말을 건넸다.
함께 뛰고 있건만, 저 혼자 산보라도 나온 듯 평온한 어조였다.
“아…… 직이야!”
난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그가 그에 맞춰 속도를 올려 따라붙었다.
“무리한 훈련을 하다 영영 쉬게 된 사람들만 해도 한 부댑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자신을 연마한 것이지요. 그 의지만큼은 귀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이거 나보고 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순간 어이가 없어 녀석을 흘겨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마이어 가엔 ‘네 분수를 알라’는 격언이 내려옵니다. 이 경우엔 자신의 한계에 맞춰 훈련을 하라는 의미지요. 정말 한계의 한계까지 말이죠.”
어째 하는 말만 들어선 나를 만류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놈의 표정은…….
정말 쉬실 겁니까?
이대로 포기한다고요?
딱 이런 기색이었다.
나보고 어쩌란 건지.
“좀 떨어져!”
페이스메이커고 뭐고, 이놈이 옆에 있으면 오히려 정신 사납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내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드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 그럴 순 없다더라.
오냐.
내가 널 떨쳐 내고 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응원도 도착했다.
『신체의 부하로 인해 체내에 잔류하던 마나 중 일부가 흡수됩니다.』
땅을 딛는 발에 힘이 실린다.
당장 넘어갈 것 같던 숨도 제법 안정되어 갔다.
“먼저 간다! 그렇게 힘들면 너나 쉬든가!”
아론을 일별하곤 속도를 한껏 올렸다.
그러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바짝 쫓는 그 얼굴에 묘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저 자식. 그러고 보니까 수련광이었지.’
창귀의 또 다른 이명, 수련광.
아무래도 그 성격이 도진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또 힘이 솟으셨군요. 앞으로 세 바퀴는 더 달리실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앞서 나가기가 무섭게 추월한 아론이 고개만 돌린 채 말했다.
“……내가 떨쳐 내고 만다.”
나는 속도를 올리며 오기를 불태웠다.
◈ ◈ ◈
고단한 단련의 나날이 흘렀다.
결론적으로, 며칠간 아론과의 단련은 내게 좋은 동력원이 되어 주었다.
“헉, 허억!”
녹초가 되어 버린 몸을 바닥에 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노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괜찮으십니까?”
굵은 땀방울을 매단 아론이 다가와 물었다.
“끄떡없어.”
난 짐짓 허세를 부렸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으나, 본인의 한계를 넘으려 무리하다 땅을 치고 후회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적정선은 지키라고 아론이 말했다.
지금껏 그 적정선을 넘도록 부추긴 게 누군데.
난 대충 손을 휘저어 그를 물리곤 눈을 감았다.
몸 구석구석 덩어리진 기운들이 느껴졌다.
격한 단련 끝에 차곡차곡 내력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기대만큼 진전이 보이진 않았다.
마나를 흡수함에 따라 체력이 늘어서일까.
‘이제 달리기만으론 부족해.’
하여 오늘부턴 단련의 가짓수를 늘릴 생각이다.
기껏 달궈진 몸이 식기 전에 냉큼 엎드려 자세를 잡았다.
‘팔굽혀 펴기. 이거 다음엔 윗몸 일으키기.’
나는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다.
◈ ◈ ◈
혹사된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고달픈 것은 내 정신이었다.
“팔의 반동으로 올라오지 마십시오!”
“복근에 힘을 주셔야 단련이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시늉만 하시는 겁니까?”
“단련하고자 하는 부위만 사용하십시오!”
아론, 이 자식…….
끊임없이 관리질이다.
분명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팔굽혀 펴기를 할 때부터 조금씩 내게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운동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아론의 조언이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라 묵묵히 따랐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옆에서 쫑알거리니 이젠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큰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다 날 위해서 저러는 것이니 한 번만 더 참았다.
대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때론 말보다 스스로 깨우쳐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응?!”
“큭!”
내 말에 몸을 흠칫 떤 아론이 어째선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까, 이놈은.
“……올바르지 못한 자세는 아무런 효과가 없단 말입니다.”
중얼거리듯 말한 그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곁눈질로 이쪽을 살피는 것은 여전했다.
‘마이어가 사람은 남 챙기는 거 좋아하는 게 집안 내력인가 보군.’
기드도 그렇지만, 저놈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저 우직한 얼굴 뒤편에는 열혈 기사가 숨어 있었다.
괜히 대대로 바텐베르크를 보필해 온 것이 아니구나, 새삼 깨달았다.
나는 아론에게 신경을 끄고, 수련에 집중했다.
이제 윗몸 일으키기 몇 개만 더 하면 끝이난다.
배에 힘을 빡 주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복근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흐으으윽!”
드디어 마지막 한 개.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었다.
점점 몸이 올라가는 걸 느끼며 최후의 최후까지 힘을 더했다.
“끄으…… 으아아악!”
기어코 가슴이 무릎에 닿았다.
진한 성취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썩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런데 평소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육신이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체내에 잔류하고 있던 영약의 기운이 대량으로 흡수됩니다.』
기이한 감각이 지친 몸을 내달렸다.
마치 무언가가 급류에 휩쓸려 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 잔뜩 엉켜 있던 실타래가 일순간에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나 둔감증을 갖고 있음에도 생생히 느껴지는 격한 반응.
드디어 첫 발을 내딛은 기분이었다.
5화. Episode. 02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다 (2)
“흠.”
바텐베르크의 가주, 루드비히가 턱을 쓸었다.
그의 표정엔 여러 감정이 떠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루드비히에게 황금빛 갑옷의 기사가 보고를 올렸다.
“오늘로 한 달째입니다.”
진즉 손을 놓았던 막내아들이 수련을 시작했단다.
모두가 그렇듯, 그도 리하르트가 얼마 안 가 그만두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벌써 한 달.
그 망나니가 수련을 거듭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정말로 리하르트가 변한 것은 아닐까, 루드비히는 꿈틀거리는 묘한 감정을 억눌렀다.
“쯧, 기드의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후후…… 그럴 리가요. 정작 가주께서 입단속을 확실히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실없이 웃는 그의 모습에 루드비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보고를 올린 기사, 레온이 말을 덧붙였다.
“리하르트 도련님께서도 분명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되었다. 놈에 대한 얘기는 그만하지. 그런 반푼이 따위.”
능력도, 성정도 뱀에 불과한, 그런 주제에 권위 의식은 높아서 패악질이나 일삼던 망나니.
그게 바로 가주가 알고 있는 리하르트였다.
“운 좋게 마나 불감증을 치료한다 해도, 그 나약한 정신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
가주가 낮게 중얼거렸다.
“……겨우 심마 따위에 주저앉는 놈은 내 아들일 자격이 없으니.”
레온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가주의 속내가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기색이었다.
마나 따위는 못 느껴도 된다.
그저 검을 놓지 않았다면, 적어도 심마에 꺾여 볼품없는 성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가주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냉랭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이젠 실망하는 일도 지겨울 지경이다.”
『체질이 변화합니다.』
『범골(凡骨)이 강골(强骨)로 변화합니다.』
한 달이 지났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를 이뤘다.
지금 내 몸은 수년간 열심히 단련한 기사에 못지않았다.
키는 족히 한 뼘 이상은 커졌고, 근육은 빠진 데 없이 빈틈없이 들어섰다.
‘이게 다 리하르트가 어릴 적에 먹었던 영약들 덕분이지.’
몸속에서 한데 뒤섞여 숙성 과정을 거친 영약의 기운.
그 결과가 조금 전, 근골(筋骨)의 변화를 일으켰다.
체질의 변화는 이 세계의 기연 중에서도 손에 꼽는 희귀한 일이다.
체질이란 한 사람의 자질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뭘 그렇게 봐?”
한참을 만족해하고 있는데, 아론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달…….”
“뭐?”
“고작 한 달 만에 도련님께 따라잡혔군요.”
땀에 푹 절은 아론이 고개를 숙였다.
“뭐야, 그런 걸로 기분이 상한 거야?”
나는 아론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 마침내 달리기에서 그를 떨쳐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론이 이리도 침울해 할 일은 아니었다.
대련에서 승리한 것도 아니고, 그냥 누가 더 잘 뛰나 경쟁 아닌 경쟁을 했을 뿐이다.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때, 아론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역시 바텐베르크. 위대한 혈통다우십니다.”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되려 내 성취에 기뻐하고 있었다.
“기드 경께서 도련님을 보신다면 무척 감격해하실 겁니다.”
“아. 그래.”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슬슬 검술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확실히 때가 됐지.”
은근히 내 수련에 관심이 많은 아론이었다.
물론 검술을 배우려면 스승이 필요하다.
나는 내 스승으로서 미리 점찍어 두었던 사람을 떠올리며 물었다.
“내일이지? 가주 회의가.”
“그렇습니다.”
가주 회의.
북대륙에서도 특히 명성 높은 명문가의 가주들이 바텐베르크에 모이는 날이다.
남대륙, 특히 마법가들에 대해 논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열릴 회의에는 의외의 인물이 참가한다.
“내일 수련은 오전 안에 끝내자.”
“……회의에 참가할 생각이십니까?”
아론이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제발 그런 터무니없는 짓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가주들 회의에 어떻게 끼어들겠어.”
내가 리하르트가 되고 나선 망나니짓은 한 적도 없는데, 사람의 인식이라는 게 참 오래간다.
“이제 슬슬 가자.”
뻐근한 몸을 움직여 연무장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리하르트……?”
모리츠 바텐베르크.
이 몸의 셋째 형.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나이는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리하르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이었다.
“너 맞냐?”
그가 날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선 물었다.
확실히 내가 변하긴 했나 보다. 피붙이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니.
“어, 형. 안녕.”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모리츠가 황망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혀, 혀엉? 하! 형님이라 해야지!”
놈이 금세 얼굴을 굳히며 눈을 부라렸다.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무슨 형님 소리를 들으려 하나.
대충 보니 견적이 딱 나온다. 어쭙잖게 시비나 걸러 온 거겠지.
“요즘 단련 좀 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모리츠가 성큼 다가오며 얼굴을 씰룩였다.
사아아-
오싹한 기세가 나를 감쌌다.
하는 짓은 동네 양아치 같은 놈이지만, 엄연히 바텐베르크의 혈통이다.
정확히는 모르나 그 힘이 일반인의 범주는 진즉 벗어났을 것이다.
“리하르트 도련님!”
“됐어.”
나서려는 아론을 만류하고 모리츠를 마주 응시했다.
“…….”
날 노려보던 모리츠는 곧 기세를 거두었다.
대신 그 못난 얼굴에 진득한 조소가 그려졌다.
“흥, 이런 반푼이한테 흥분하다니, 나도 참 멀었군.”
그래. 멀었지.
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할 말 다 했으면 간다. 요즘 바빠서.”
“그래그래. 고작 마나도 못 느낄 거면 노력이라도 하며 살아야지.”
결국 저 말을 하러 온 거였군.
아마 리하르트가 제일 싫어하던 말일 테지.
그러나 내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내가 뭐 마나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형도 첫째 형이랑 둘째 형에 비하면…… 흠, 영 아닌데.”
내게서 뒤돌아섰던 모리츠의 몸이 잔뜩 굳었다.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는 그 움직임은 녹이라도 슬은 듯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씨근덕거리며 묻는 그 얼굴을 보아하니 꽤나 아픈 구석을 찔렸나 보다.
“응? 내가 뭐라고 했어?”
“너……!”
“아, 피곤하다. 형도 이럴 시간에 수련이나 하는 게 어때? 난 간다.”
뒤편에서 모리츠의 성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묵묵히 내 뒤를 따르던 아론이 물었다.
괜찮고 말고가 뭐 있을까. 오히려 열받은 건 모리츠일 텐데.
“응. 별거 아냐.”
모리츠는 자기 손으로 제 강점을 버린 천하의 바보니까.
별거 아니라 말한 것도, 신앙만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으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다만 문제는 역시 신앙의 획득이었다.
신앙을 얻으려면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데, 이 집안에서 섣불리 신을 운운하다간 무슨 야단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자니, ‘리하르트’는 숱한 패악질 끝에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
그 덕에 밖으로 나가 순진한 평민들을 꼬드기는 것도 무리였다.
“갑갑하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방에 들어섰다.
곧바로 몸을 씻고 나오자, 시녀가 식사를 준비했다.
‘오늘도 어둡네.’
요 근래 들어 그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밥도 잘 먹지 못하는지 볼이 움푹 파여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 그녀를 불렀다.
“메리.”
“…….”
시녀, 메리는 내가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는지 묵묵히 음식을 늘어놓기 바빴다.
이거 정말 상태가 심각하다.
“메리!”
“히, 히이익!”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창백해진 얼굴은 이제 반쯤은 시체 같았다.
“부,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너 요즘 얼굴이 너무 안 좋잖아.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구먼.
“빨리 말해. 내 방에서 그렇게 죽상 짓는 거 불편하니까.”
안 그래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시녀까지 답답하게 굴자 짜증이 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메리는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홀쭉해진 얼굴로 애쓰는 모습이 한층 더 안쓰러워 보였다.
이거, 뭔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이다.
“명령이야. 말해 봐.”
명령이라는 내 말에 그녀는 히익, 숨을 들이켰다.
그 상태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저희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죄, 죄송합니다. 제 개인사로 도련님께 실례를…….”
“……아.”
그런 거였나.
진작 내게 말하지- 싶다가 지금 나는 망나니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의지가 안 될 만도 하구나.’
오히려 ‘리하르트’였다면, 시녀의 사정을 약점 잡아 질 나쁜 짓이나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망나니일 적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지금 너희 어머니는 어디 있는데?”
“가주님의 배려로 식솔 생활관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며칠 전에 의원님의 진찰도 받았습니다만…….”
뭐야. 이미 가문의 도움을 받은 건가.
그녀가 삼킨 뒷말은 뻔히 짐작이 갔다.
진찰을 받고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것이겠지.
나는 가만히 시녀를 바라보았다.
파리한 얼굴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
대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건지, 오히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그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안타까운 마음과는 별개로 또 한편으로 벅차오르는 기대감이 드는 것은.
“내가 도와줄게.”
“……예?”
“도와준다고. 처음부터 너를 도와주려고 물어본 거였어.”
나는 그녀를 향해 최대한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의 힘이 있다.
이런 힘을 갖고도 나서지 않을 셈이었다면, 애당초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너희 어머니한테 안내 좀 해 줄래?”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더없이 힘든 사람이 있었다.
이건 신도를 만들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그것도 원 플러스 원으로 말이지.’
6화. Episode. 02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다 (3)
리하르트의 전담 시녀, 메리는 혼란스러운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도련님이 자신과 함께 식솔 생활관으로 향하고 있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리하르트가 도와주겠노라 말했을 때,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악명 높은 망나니에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잖는가.
하지만 메리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리하르트가 길 안내를 하라며 등을 떠미는 통에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대체 어쩌시려는 거지……?’
리하르트가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메리로선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
안 하던 수련도 열심히 하고, 근래에 들어선 나쁜 짓도 전혀 하지 않았다.
특유의 포악한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메리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망나니 도련님의 전담 시녀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상처는 깊었고, 흘린 눈물은 수없이 많았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진 못하고,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했다.
방문을 여니 안에는 창백한 안색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으음…….”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음에 깼는지, 여인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머니!”
“메리? 이 시간에 웬일이니…… 콜록!”
여인의 입가에 피가 묻어나왔다.
메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애써 참아 내곤, 멀뚱히 서 있는 리하르트를 소개했다.
“이분이 제가 모시는 리하르트 도련님이세요. 어머니의 상태를 직접 살펴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
리하르트의 정체를 알게 된 여인이 급히 일어서려 했다.
리하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됐습…… 아니, 됐어. 누워 있어.”
어딘가 어설픈 하대.
하지만 여인을 바라보는 표정만큼은 사뭇 진지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의원은 뭐라고 했지?”
급기야는 병세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하였다.
“의원님께서는 가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메리의 어머니, 멜라인이 힘없는 어조로 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았다.
자기만큼이나 수척해진 딸의 몰골이 사무치듯 눈에 들어왔다.
“리하르트 공자님. 저희 메리 좀 잘 부탁합니다. 부디…….”
이미 삶을 포기한 듯 리하르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에 메리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꾹 참던 멜라인도 그때부터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급격히 무거워진 방의 분위기.
약 냄새와 슬픔이 뒤섞인 공기는 너무나 텁텁했다.
“혼자 남을 딸이 걱정되면 죽으면 안 되지.”
리하르트가 멜라인에게 다가갔다.
슥,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그가 제 손을 멜라인의 손 위에 포갰다.
“……도련님?”
무엇을 하려는 걸까.
메리와 멜라인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질 때였다.
새하얀 빛이 리하르트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이 빛은……?”
갑작스런 기현상에 멜라인이 화들짝 놀라기도 잠시, 그녀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에 절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병마에 잔뜩 지친 심신이 안정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때. 좀 낫지? 병세가 아주 조금이지만 호전되었을 거야.”
손을 거둔 리하르트가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메리와 멜라인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평생 검을 쥐어 본 적 없는 그녀들도 마나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었다.
방금 리하르트에게서 흘러나온 빛은 마나 같은 게 아니란 것을.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빛의 정체보단 그것이 갖고 있는 능력이었다.
“벼, 병세가 호전되었다고요?”
메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의원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멜라인의 병세는 심각했다.
한데 그 병세가 한순간에 호전되었다니.
그녀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멜라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백하던 멜라인의 안색에 조금이나마 핏기가 돌아온 것이었다.
“맙소사…….”
한참이나 멜라인을 바라보던 메리가 이내 리하르트에게 무릎을 꿇었다.
“도, 도련님! 부디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무엇이든지 할 테니, 부디!”
간절함이 두려움을 이긴 것일까.
리하르트에게 애걸복걸 매달리는 메리의 눈엔 아무런 주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 어미를 살려 달라 간청할 뿐이었다.
“메리! 그만! 도련님께 무슨 추태를…….”
자신의 딸이 무릎을 꿇은 것을 본 멜라인이 다급히 침상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메리. 일어나.”
리하르트가 주저앉은 메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올렸다.
“네 소원을 들어 주실 분은 내가 아니야. 나는 그저 대신하는 자일 뿐이니.”
싸아아-
따스한 빛이 방안을 밝혔다.
메리가 고개를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봤다.
그의 몸은 후광(後光)을 휘감고 있었다.
“아…… 아아…….”
그것을 바라보자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신, 호르께 빌어라. 네가 할 일은 단지 그것뿐이야.”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허공을 수놓은 시스템 창을 볼 수 있었다.
『메리가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멜라인이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총 60의 신앙을 획득합니다』
『기도를 올린 자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드디어……!”
마침내 내게 신자가 생겼다.
그것도 한 번에 둘이나.
이번 일은 막막했던 신앙 수급에 한 줄기 내려진 광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지.”
나는 곧장 잔여 신앙을 확인했다.
총 660.
어젯밤 메리와 멜라인을 감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50의 신앙을 제외해도 제법 넉넉했다.
똑똑-
“도련님. 메리입니다.”
“그래. 들어와.”
때마침 메리가 식사를 가져왔다.
활력과 행운이 감돈다더니, 오늘은 그녀의 표정이 제법 좋아 보였다.
짐짓 모른 척하고 물어봤다.
“어때, 어제 내가 말한 건 해 봤어?”
“네, 네! 기도했어요. 정말 간절하게, 어머니와 같이 호르라는 신께 몇 시간이나 기도했어요!”
메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간곡하던지.
그녀가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나 할 필욘 없는데.”
기도는 그 안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느냐가 관건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나는 물잔을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해당 물체에 1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미약하게나마 최하급 성수(聖水)의 성질을 품습니다.』
늘 그렇듯, 신앙은 만능의 힘이다.
검에 신앙을 담으면 성검이 되었고, 물에 담으면 성수가 된다.
“신께서 네 소원을 들으셨어. 아직 너희의 신앙심은 사소하기 그지없으나, 그분께선 자비를 베풀고자 하신다.”
“예?”
어리둥절한 표정의 메리.
난 그녀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이건 그분의 힘이 담긴 물이야. 병마에 신음하는 이에게 큰 효과가 있지. 앞으로 스무 날 동안 내가 주는 물을 네 어머니에게 전해.”
메리는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갑자기 웬 물이나 전해주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억지로 물잔을 쥐어 주었다.
“혹시 내가 물에 헛짓거리라도 했을까 걱정되면 네가 직접 마셔 봐도 좋아. 뭣하면 내가 마셔도 좋고.”
나는 지금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망나니의 육신이란 사실도 잊지 않았다.
역시 눈앞에서 들이키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까.
“아, 아뇨! 이 물은 제가 방금 가져온 거니까요. 그런데 정말…… 정말 이걸 마시면 저희 어머니가 나을 수 있을까요?”
“이러고 있을 시간에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어때.”
“…….”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메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방을 나섰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 너머에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어제 내가 확인한 바로는 멜라인의 병을 고치는 데 필요한 신앙이 대략 200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바로바로 효과를 보여 줘야 앞으로도 열심히 기도하겠지.
생각보다 금방 신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이게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지.”
나는 밥을 먹으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우선은 마나 둔감증.
『대상의 ‘마나 둔감증’을 치료합니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신도는 아니라지만, 마침내 두 명의 신자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며 50의 신앙을 사용했다.
안타깝게도 아직 완치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심장 어림에서 꿈틀거리는 마나가 좀 더 선명히 느껴졌다.
신앙도 그렇지만, 마나란 것도 알면 알수록 낯설고 신비했다.
◈ ◈ ◈
연무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가주 회의가 있는 날.
하여 평소보다 일찍 단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몸을 풀고 있는 내게 기사들의 시선이 꽂힌다. 그간 지겹도록 느꼈기에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훅! 후욱!”
적당히 풀린 몸으로 연무장 외곽을 따라 힘차게 달려 나갔다.
잔류하던 영약의 기운을 흡수한 덕에 체질이 개선되어, 몸이 한없이 가벼웠다.
“도련님. 곧 가주 회의가 시작한답니다.”
한참을 뛰고 있는데 아론이 내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대충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나한테 일러 줘. 그리고 와인 한 병도 부탁해, 최고급으로다가.”
“와인을, 말입니까?”
아론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마실 거 아니고. 스승님 될 분을 뵈러 갈 거야.”
“스승님 말씀이십니까?”
어느 샌가 나와 함께 뜀박질을 하는 아론.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발락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역시 맞출 줄 알았다.
떠돌이 검사, 발락.
이번 가주 회의에는 발락이 참가한다. 이번 회의가 거대한 스토리의 시작이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주가 아닌 이가 회의에 참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군요.”
“그만큼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니까.”
영향력만 강할까.
그 무력도 가히 무소불위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괴팍한 성격이기도 했다.
“제가 알기론 발락 경께서는 일평생 제자를 찾아다니셨으나, 정작 제자를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난 말끝을 흐리는 아론을 흘겨봤다.
“하하, 어째 ‘네가 그 까다로운 양반의 눈에 들겠냐’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닌 척 잡아뗀 그가 저 멀리 앞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
발락은 오랜 시간 제자가 될 재목을 찾아다녔는데,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발락의 눈이 얼마나 높은지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눈이 높은 게 당연하지.’
그는 일인전승으로서 대를 이어 오는 검성의 후계자요, 이 집안의 가주와 호각을 이루는 최강의 검사다.
그가 들이는 제자가 곧 일인전승의 후계자일 테니, 결코 아무나 받아들일 순 없을 것이다.
‘하나 난 달라.’
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운명으로.
본래는 성사되지 않았을 발락과 리하르트의 연(緣), 그것을 비트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7화. Episode. 03 무아지경 (1)
“도련님, 술을 가져왔습니다.”
단련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보이지 않던 아론이 와인을 들고 왔다.
“발락 경께선 소문난 애주가니 마음에 들어하실 겁니다.”
“그렇긴 한데…….”
난 와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발락은 술을 좋아한다. 그건 명실상부한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발락 좋으라고 술을 갖다 바치는 건 아니었다.
“역시 이것으론 부족해.”
그 괴팍하고 까칠한 노인네는 술만 쏙 뺏어가고 나는 본체만체할 테니까.
“후우.”
와인병을 쥐고 눈을 감았다.
간질거리면서도 따스한 무언가가 내 손을 통해 와인 병으로 스며들어 갔다.
『해당 물체에 5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최하급 성주(聖酒)의 성질을 품습니다.』
와인은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로 탈바꿈했으니, 발락을 낚을 미끼로는 안성맞춤이 되었다.
“슬슬 회의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 가자.”
아론과 함께 연무장을 벗어나 본궁으로 향했다.
◈ ◈ ◈
“여긴가.”
화려하게 치장된 귀빈실의 문 앞.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방에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나간 건가 싶을 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넌 뭐냐?”
거대한 체격과 험악한 인상.
산적 두목도 울고 가게 생긴 노인이 방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가 바로 발락이었다.
“저는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고 합니다. 발락 경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하르트? 그 허접쓰레기 말이더냐?”
정수리 너머로 들려오는 노인네의 목소리는 한없이 걸걸했다.
사람 면전에 대고 허접쓰레기라 할 건 또 뭔가.
“흥.”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알 만하다는 얼굴이었다.
“귀찮다. 그 술이나 내놓고 썩 꺼져라.”
발락의 시선이 내가 쥐고 있는 와인병에 향했다.
나는 와인을 슬쩍 몸 뒤편으로 숨겼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발락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도 썩 좋아하지는 않는 터라, 냅다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발락 경께선 오랫동안 제자가 될 재목을 찾아다니셨다 들었습니다. 이 바텐베르크의 혈통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
잠시 나를 훑어보던 발락이 이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 형이란 놈도, 그 형의 형이란 놈도. 전부 내게 똑같은 소리를 했지. 하나 내 성에 찬 놈은 없었다. 하물며 너 같은 허접쓰레기에겐 기회조차 아깝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며 문을 닫으려는 그에게 성주를 내밀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애주가답게, 발락은 거의 반사적으로 성주를 받아들었다.
“건강에 좋은 와인입니다. 이렇게라도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가라.”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참으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아론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차피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다른 스승을 알아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발락이 어떤 인물인가.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잊혀진 검성의 검을 계승한 검사가 발락이다.
이것은 루드비히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세간엔 그저 굉장히 강한 검사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
“걱정 말고, 우린 나머지 단련이나 하자고.”
미끼는 던졌다.
그 외에도 성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또 하나 더 던져 봤는데, 그라면 눈치 챘겠지.
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 ◈ ◈
“……흠.”
발락은 굳은 얼굴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와인을 건네주는 찰나, 아주 짧게나마 손이 닿았었다.
“그놈이 마나를 갖고 있다고?”
그 순간 이질적인 감각이 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리하르트가 의도적으로 마나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발락만 느낄 수 있게끔 작정하고선.
“마나 불감증이라더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꽈악-
발락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몸에 급작스러운 활력이 감돌았다.
리하르트가 마나와 함께 흘린 무언가, 그것이 발락에게 활력을 주었다.
요사스러운 기운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밝고 선한 기운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망나니 리하르트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영악한 녀석이었군. 제 나름대로 이빨을 숨기고 있었나.”
발락은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검성의 후계자로서, 제자를 들여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발락의 성에 차지 않았다.
특히 바텐베르크의 혈통은 더더욱.
날 때부터 하늘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들은, 밑바닥부터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검성의 힘과 어울리지 않았다.
“흐음.”
발락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보았던 리하르트는 분명 발락이 알던 망나니가 아니었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했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이라니.’
발락으로선 그 의외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흥미를 끌었다.
“조금만 놀아 줘 보기로 할까.”
리하르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심심풀이 정도의 호기심일 뿐.
늙은이의 여흥에 지나지 않으리라.
한데 그 여흥에 일대 변화가 찾아온 것은, 무심코 리하르트가 건네준 와인을 마셨을 때였다.
쾅!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발락이 기사 하나를 붙잡았다.
“지금 당장 리하르트에게 안내해라!”
발락에게 1순위는 제자요, 2순위는 술이다. 그런 그에게 성주(聖酒)는 참을 수 없는 악마의 술이었다.
◈ ◈ ◈
나는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미끼의 효과는 굉장했군.’
설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찾아올 줄은 몰랐다.
“와인이 입에 맞으셨나 봅니다.”
그의 얼굴이 얼큰하게 달아오른 것이, 이미 성주(聖酒)를 다 마신 게 듯했다.
“그건 대체 무슨 와인이냐.”
발락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봤자 연신 입맛을 다시는 꼴이 영 아니었다.
“큼!”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곧 그의 얼굴이 제 색을 되찾았다.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몰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라고 마나가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검성으로서의 자존심일까. 애써 와인에 관심 없는 척하며 운을 떼는 발락.
“발칙한 놈. 마나를 의도적으로 내게만 흘렸더구나.”
그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게 내가 가진 마나 전부였을 뿐이다.
하도 적어 발락만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내가 일부러 마나를 흘린 것은 이유가 있었다.
떠돌이 검사 발락.
그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제자로 삼을 만한 인재를 물색했으나,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내게 있어선 커다란 기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나와 신앙을 이용해 그를 자극했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단호한 음성에도 나는 덤덤했다.
이미 예상한 일. 평생 대륙을 돌아다녀도 제자를 찾지 못했던 그에게 고작 ‘리하르트’가 눈에 찰 리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동안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지.”
심심풀이라.
그럼에도 난 빙긋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발락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 ◈ ◈
“이제 되었다.”
“하아…….”
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초 체력을 알아보겠다는 명목으로 발락이 연무장 외곽을 따라 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추 서른 바퀴는 훌쩍 넘게 뛴 것 같다.
“확실히 어느 정도 단련은 한 모양이구나.”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냉수로 목을 축이며 대꾸했다.
“받아라.”
그가 내게 목검을 툭 던졌다.
드디어 검술을 수련하는 건가 싶었는데, 발락의 음성이 이어 들려왔다.
“네놈에게 내 검을 가르칠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그저 검의 기초만 알려 줄 것이다.”
발락이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호오. 그냥 수긍하는 것이냐?”
“기초도 없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일순 그의 눈이 이상해졌다. 발락의 시선을 무시하며 목검을 주워들었다.
“쯧.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혀를 차던 그가 자세를 잡았다.
심드렁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진짜 적을 마주한 듯이 진지한 얼굴.
“똑똑히 보거라.”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허공을 가른다.
기초 검술인 만큼 아무런 기교가 없는 베기와 찌르기 뿐이었지만, 발락이 펼치자 그마저도 남달라 보였다.
몇 차례 검을 휘두른 발락이 입을 열었다.
“자세를 취해라.”
“이렇게…… 말입니까?”
어설프게 발락의 자세를 흉내 냈을 때였다.
딱-!
“악!”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부지불식간에 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검 끝을 눈높이에 맞추란 말이다.”
좀 더 친절하게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얼얼한 정수리에 불만이 샘솟았으나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라지.
언젠간 그의 모든 밑천을 털어 버릴 테다.
“어깨에 힘을 빼라! 검을 어깨로만 휘두를 셈이냐?”
그 이후로도 그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자세 하나를 잡는 데에도 많은 심력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검이 내 정수리로 연달아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크윽! 정수리는 이제 그만……!”
이러다가 피라도 날 것 같아 반항의 목소리를 내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김없이 그의 목검이었다.
“역시 네놈은 더럽게도 재능이 없군. 일찍이 검에 대한 관심은 접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까, ‘리하르트’의 문제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쓰읍.’
이제 막 시작했는데 발락은 벌써 그만둘 기세였다.
“혹시 압니까? 제게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동대륙의 옛말을 알고 있겠지. 넌 주머니 속의 조약돌일 뿐이다.”
돌아온 것은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팩트.
“…….”
입술을 씰룩이며 묵묵히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발락이 다음 동작을 알려 주었다.
“이제부턴 횡 베기다.”
그 후로부터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횡 베기 다음은 종 베기, 그다음은 찌르기였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내내, 발락의 잔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덤으로 정수리를 강타하는 목검까지.
횡 베기, 종 베기 등 기초 동작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혹사당한 것은 단연 정수리였다.
주르륵-
“피, 피가!”
결국 내 머리는 버티지 못하고 새빨간 피를 뿜어냈다.
“흥. 호들갑 떨지 마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발락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 머리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싶을 때, 살짝 커졌던 그의 두 눈을 말이다.
“시골 농부를 데려와도 너보단 빨리 배울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의 말에 동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내 눈앞엔 밝게 빛나는 시스템 창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특기 ? 기초 검술을 습득하였습니다.』
『현재 숙련도 - F』
『수련과 신앙을 통해 숙련도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흐흐…….”
얻어맞아 가며 겨우 모든 동작을 완수했을 때 떠오른 문장.
과연 예상한 대로였다.
‘역시 이건 게임 시스템에 중점을 두고 있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게임 속 캐릭터들이 무언가를 배웠을 때 떠오르던 알림과 판박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광명이로다.”
막막할 때마다 나타나 희망을 주는 시스템 창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한편 발락은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무엇이 그리 좋으냐. 드디어 맛이라도 간 게냐.”
이내 발락은 목검을 내려놓았다.
벌써 주변이 어둑해진 것이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기초를 숙달하는 데에만 한 평생이 걸리겠군.”
고개를 저으며 말한 발락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다시 한번 내게 실망했다는 것이 그의 뒷모습에서 팍팍 느껴졌었다.
“일주일이었나.”
내가 기억하기에는 발락이 바텐베르크가에 머무는 기간이 그쯤 되었다.
“신앙이 필요해.”
신앙을 퍼부어서 기초 검술의 숙련도를 상승시켜야 한다.
일주일 안에 발락의 마음을 바꿀 정도로 말이다.
타임어택이나 다름없는 상황.
멀어져 가는 발락의 뒤통수를 보며 의지를 불태웠다.
8화. Episode. 03 무아지경 (2)
“후우…….”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의원의 치료를 받아 붕대를 감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 도련님.”
때 늦은 저녁 식사 거리를 가져온 그녀가 연신 나의 기색을 살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 어머니는 좀 어때?”
“조, 조금이나마 호전되셨다고, 기적이라고 의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이네.”
우물쭈물하던 메리가 내게 물어왔다.
“정말로 호르라는 신께서 제 소망을 들어 주신 건가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거야.”
내 말에도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젯밤과 같은 완전한 불신은 보이지 않았다.
“확신을 가져. 지금 너의 어머니를 낫게 해 줄 것은 오직 믿음뿐이야.”
말로 해서는 안 되겠지.
믿음이란 그리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앗……!”
“가만히 있어.”
화들짝 놀라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힘이야.”
우웅-
반딧불 같은 빛이 내 손을 타고 흘러가 시녀의 손에 머물렀다.
“따, 따스한 느낌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신기한 듯 제 손을 바라보았다.
“어때. 아직도 신을 못 믿겠어?”
내 말에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게 있을 리가……!”
“믿지 않고자 하면 얼마든지 안 믿을 수 있고, 믿고자 하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아…….”
“다만 이거 하나는 알아 둬. 신께서는 네가 신도가 되어 구원받길 원하셔.”
“……!”
그녀의 두 눈이 잔뜩 흔들렸다.
“너뿐만이 아냐. 진실된 기도가 어머니를 살릴 거야. 신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그 말에 몇 차례 주먹을 말아 쥐던 메리.
이내 내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저, 저도 신을 섬기고 싶어요!”
‘나이스! 신도 임명!’
쾌재를 부르던 것도 잠시. 메리의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신도 자격을 내렸다.
『신도를 임명했습니다.』
『신도의 기도로부터 하루 한 번, 최대 100의 신앙을 얻습니다.』
『어린 양에게 당신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그런데 시스템 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초의 신도입니다!』
『한정 보상 ? 당신의 숨겨진 특기를 개화합니다.』
◈ ◈ ◈
메리를 방에서 내보낸 후.
식어 버린 음식을 깨작거리며 허공을 바라봤다.
내 눈높이에 선물 상자 모양의 그림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게 숨겨진 특기라고?”
이건 예상치도 못한 선물인데.
시스템이 말하는 ‘나의 숨겨진 특기’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 몸, ‘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특기일까, 혹은 현실에서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던 본래의 나의 특기인 것일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기본 베이스가 엉망인 몸이다.
특기의 추가는 나쁠 것이 전혀 없는 만큼, 이는 한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후우…….”
나는 한 차례 심호흡하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띠링-
상자 그림에 손가락이 닿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빛이 내뿜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침을 삼켰다.
곧 밝은 빛이 사그라지며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특기 - 초집중을 획득하셨습니다.』
“초집중……?”
본 적이 없는 특기였지만, 직관적인 이름이라 어떤 효과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초집중.
어떠한 것에 그저 집중한다는 것 아니던가.
솔직히 말하면, 기대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성장 가능성도 없는 무(無) 랭크 특기라니…….’
◈ ◈ ◈
『신도 - 메리가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80의 신앙을 획득합니다.』
『메리에게 강한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신자 - 멜라인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30의 신앙을 획득합니다.』
『멜라인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오.”
아침에 눈을 뜨자 반겨 준 것은 모녀의 기도였다. 메리가 신도가 된 덕에 더 많은 신앙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서 멜라인도 신도가 되어야 할 텐데.
식사를 들고 찾아올 메리를 기다리며, 물잔에 신앙을 담아 냈다.
다음은 내 차례다.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금방 결정을 내렸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기초 검술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랭크 F → E』
“후…….”
마나가 아주 약간이지만 좀 더 선명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기초 검술의 랭크까지 상승했다.
그래,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면 될 것이다.
나머지 신앙은 일단 남겨 두기로 했다.
나는 아침을 대충 때우곤 아론과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과였다. 연무장에 도착해 몸을 푸는 내게 아론이 물었다.
“오늘부턴 검을 수련하시는 겁니까?”
“그래.”
무덤덤한 표정의 아론을 보자 문득 우려되는 것이 있었다.
저놈,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 신경 좀 쓰던데.
“제가 옆에서 봐 드리겠습니다. 자고로 검술 수련이란 올바른 걸음걸음으로 드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아…….”
내가 아론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검술에서까지 일대일 마크를 하겠노라 선언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론의 조언이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라 내치기도 뭐했다.
한숨을 푹 쉬고는 목검을 쥐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아론의 말이 들려왔다.
“흠흠. 체력 단련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일단 일주일 동안은 검술 수련만 할 거야. 기껏 배웠으니 몸에 익혀야 하지 않겠어?”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자세를 취했다.
정수리를 희생하며 배웠던 터라 머릿속에는 정확히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우선 횡 베기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손잡이에서부터 느껴지는 검의 무게를 느끼며, 최대한 곧고 절도 있게 한일자로 휘둘러야 한다.
휙-!
“…….”
내가 봐도 어설픈 동작이었다.
그에 맞춰 아론의 추임새를 넣었다.
“발을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하십시오. 하체가 땅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자고로 기사의 하체는 나무와도 같아서 땅의 정기를…….”
“알고 있어.”
물론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몸으로 해내는 것은 영 다른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별 수 없었다.
‘수련만이 살 길이다 생각하고 미친 듯이 해야지.’
오늘 하루를 횡 베기에 쏟아붓겠다고 다짐하며 목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을 휘둘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째서인지 검을 휘두를수록, 점점 주변의 소음이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뭐라 뭐라 떠들던 아론이나, 기합 소리를 내뱉던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호흡 한 번에 횡 베기 한 번.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특기 - 초집중 발동.』
◈ ◈ ◈
“도련님?”
아론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자세를 교정해 줄 때마다 대답을 하던 리하르트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것이다.
반복되는 잔소리에 화가 나신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말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잔잔한 호수 같은 기세를 풍기며.
“이건……?”
그 모습을 본 아론은 두 눈을 수차례 비볐다.
‘무아지경?’
영락없는 무아지경이었다.
숙련된 무인이 깨달음을 얻을 때에야 들어선다는 극한의 집중 상태가 아닌가.
아론은 여태껏 어설프게만 느껴졌던 이 망나니에게서 처음으로 강렬한 기백을 느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리하르트가 검을 잡은 지는 오늘로 이틀 차에 불과했다.
한데 어찌 무아지경에 빠진단 말인가.
이런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리하르트의 기세는 점점 연무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저…… 저건?!”
“쉿.”
각자 수련에 열중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리하르트에게 집중되었다.
기합으로 소란스러웠던 연무장이 점차 침묵으로 뒤덮였다.
척-!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리하르트의 주변을 둘러싸 검례를 취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에 대한, 무인들의 예우이자 보호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오직 리하르트만이 움직였다.
‘점점 자세가 수정되고 있다.’
그를 지켜보는 기사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잘못된 자세로 계속 수련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자칫 그대로 굳어져 다신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달랐다.
뒤틀렸던 검로가 서서히 곧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약했던 디딤발이 뿌리처럼 굳게 땅을 디뎠다.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는 올바른 자세로, 몸의 움직임을 바꿔 나갔다.
“하, 꼴에 바텐베르크라는 건가.”
아론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일까.
발락이 뒷짐을 쥔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에게 예를 갖춰야 했지만, 지금은 리하르트를 지키고 있는 상태.
아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선 무아지경에 빠지셨습니다. 기사들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되었다.”
애초에 발락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예의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온통 관심을 쏟는 것은 리하르트였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지?”
“두 시간쯤 되었습니다.”
발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놈에겐 내가 왔었다는 것을 말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발락이 뒤돌아서 연무장을 떠났다. 한결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쌔액-!
리하르트가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수련은 그렇게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망나니 리하르트.
마나 불감증으로 인해 좌절했던 그가, 지금은 온 기사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몇 시간이나.
검례를 취하고 있던 아론은 검을 멈추지 않는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실핏줄이 불거지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
그의 육체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슬슬 멈추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론이 적당한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다.
콰당-
“도련님!”
어찌할 새도 없이 리하르트가 쓰러져 버렸다.
◈ ◈ ◈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초 검술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현재 숙련 랭크 E → C』
“어…….”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분명 난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난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근육통이 내달린다.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짜릿한 고통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초집중이라는 특기를 너무 무시한 것 같은데.’
조금 전의 그 기묘한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
아마 내가 해낸 것은 흔히들 말하는 무아지경이었을 것이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나, 마음만큼은 성취감에 깃털처럼 가벼웠다.
슬쩍 창밖을 바라보니 어둑한 하늘에 달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수련을 했고,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도 너무 남용하면 안 되겠는데.”
쓰러질 때까지 수련하다니.
제 몸 망치기 딱 좋은 특기였다.
앞으론 아론에게 적당한 선에서 멈추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
9화. Episode. 03 무아지경 (3)
바텐베르크는 북대륙을 지배하는 명실상부 최강의 무가(武家)다.
왕국도, 제국도 이 가문 앞에선 한 발 물러섰다.
더불어 바텐베르크의 현 가주인 루드비히는 대륙 최강의 기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것을 부정한다.
최강의 기사는 루드비히가 아니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내는 바로…….
벌컥벌컥-
“크으!”
와인을 병째로 들이켜는 발락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루드비히가 더 강하다고 세간에 알려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루드비히와 발락은 서로가 인정하는 호적수였으니까.
그 둘의 대결은 언제나 무승부로 끝을 맺었다.
물론, 발락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네놈은 이곳에 술이나 퍼마시러 온 건가.”
“끌, 뭔 소린가. 망할 뼈다귀 놈들 때문에 찾아온 거지.”
성주(聖酒)의 달짝지근한 향기가 루드비히의 집무실에 맴돌았다.
발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놈들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나?”
그가 바텐베르크에 찾아온 이유.
그것은 대륙을 떠돌던 중에 마주친 세 마리의 리치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보통 리치가 아니었다.
새까만 뼈를 휘감고 있는 기운은 마치 검은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놈들은 웬만한 마법가의 가주보다 훨씬 강했다.
“설마 그 순간에 마력을 공명시킬 줄이야.”
발락의 검이 놈들의 목숨을 끝장내려는 순간, 마력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력 공명이었다.
개개인마다 마나의 파장은 다르다.
그러나 간혹, 마법을 수련한 쌍둥이는 마나 파장이 같을 때가 있어 각각일 때보다 더욱 강한 힘을 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특수한 경우에나 사용할 수 있는 공명.
어째선지 발락이 상대한 리치들이 그 마력 공명을 사용했다.
그 폭발적인 힘으로 발락을 떨쳐 내곤, 장거리 텔레포트로 도주해 버린 것이다.
“수배령을 내렸지만, 아직 들려오는 소식은 없다.”
“쯧, 쓸모없군.”
루드비히의 말에 발락이 와인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그는 놈들을 놓친 직후, 곧바로 바텐베르크로 향했다.
마침 가주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주들에게 경고할 겸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끝내기엔 영 찝찝한 감이 있었다.
마법가가 위치한 남부 대륙도 아닌, 북부 대륙에 예사롭지 않은 리치들의 출현이라.
보통 일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고서도 바텐베르크의 힘을 빌려 리치들의 행방을 수소문한 것이었다.
그것도 벌써 내일이면 일주일째다.
늙어 버린 자신에겐 시간이 금이었다. 하물며 아직도 마땅한 제자를 정하지 못한 상태임에야.
결국 발락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겠지. 내일 떠나겠다.”
“늙은 몸으로 잘도 돌아다니는군. 슬슬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놈의 제자는 언제까지 찾아다닐는지.
루드비히는 제 호적수였던 발락이 못마땅했다.
아직 중년인 자신과는 달리 발락은 이젠 노인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대륙을 떠돌며, 제자로 삼을 이를 찾고 있었다.
“젠장, 이 넓은 대륙에 쓸 만한 놈 하나 없다니.”
“네놈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이다.”
아무리 검성의 검이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탓이라 해도, 발락의 기준은 너무나 까다로웠다.
애초에 그는 제 자신과 루드비히를 넘어서는 어떤 자질을 원한다고 한다.
그런 자가 대륙에 존재하기나 할까.
루드비히는 평생을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을 거라 단언했다.
“쯧, 술이 다 떨어졌군.”
“또 리하르트를 보러 가는 건가. 부쩍 관심이 많아졌군.”
빈 와인 병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발락.
그는 이미 성주(聖酒)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이 며칠 내내 성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망나니를 누가! 술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런 것치곤 매일 리하르트가 수련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루드비히는 집무실을 나서는 발락의 등을 보며 말을 삼켰다.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기대심을 가라앉혔다.
그 발락이 리하르트를 제자로 삼을 리가 없었으니.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락은 리하르트에게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젠 저놈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리하르트가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따악-!
연무장에서 아론과 대결을 펼치고 있는 리하르트.
발락이 기초 검술을 알려 준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허.”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발락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첫날엔 자세조차 잡지 못했던 놈이 이젠 제법 능숙하게 검술을 펼친다.
물론 완숙한 기사와 비교했을 때 다방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분명 재능은 없다.’
검을 쥔 지 일주일도 채 안 돼서 이런 성취를 보일 정도라면, 대결에서도 그 재능이 두각을 드러낼 법도 했다.
하나 현재 대결을 펼치고 있는 리하르트에겐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직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저 집중력도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락이 고개를 흔들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치부했다.
검성의 검은 지금에 와서 상당 부분이 손실되었다.
일인전승으로 전수되는 그 특징상, 후계자가 선대보다 자질이 부족할 경우 검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는 놈은 많아.’
발락은 수많은 인재, 대륙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 극찬받던 놈들을 죄 살펴보았다.
물론, 그들의 재능은 하나같이 뛰어났다.
그러나 발락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저들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발락 이상의 것을 가진 자가 있을까.
발락의 눈엔 그들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 정도론 자신의 검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가 그동안 지치긴 했나 보군.’
그런 발락에게 자꾸만 리하르트가 눈에 들어온다.
고작 기초 검술이다.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성취를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 그의 관심을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후우…….”
저 무서운 집중력.
리하르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두 눈은 상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냥 집중력이 강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상대인 아론조차 섬뜩함을 느낄 만큼의 완전한 몰입.
마치 무아지경을 보는 것 같았다.
“나 참, 저런 놈은 처음 보는군.”
뭐든지 처음 보는 것은 색다른 법이다. 그저 그것 때문에 리하르트에게 눈이 가는 것이라고 발락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도 기회는 줘 볼까.”
발락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한참을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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