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9

“와서 치킨 시켜 줄 테니까, 일일이 태클 좀 걸지 마. 잠깐,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야?”
『…….』
가게를 나선 수호가 서둘러 가까운 전자 상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 * *
“윌슨, 윌슨!”
수호의 목소리에 윌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주인공이 마도 골렘의 핵을 용암에 빠트리고 납치됐던 강아지를 구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수호! 오늘은 무슨 일이야?”
“친구끼리 무슨 일이 있어야 말 거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하하.”
윌슨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 주려고 준비한 게 있어. 네 감성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성?”
“그래, 받아 봐.”
윌슨의 눈앞에 몇 개의 전자 장비가 나타났다.
“이건?”
“태블릿PC랑 보조 배터리야. 태블릿은 어떻게 쓰는지 척 보면 알겠지? 배터리도 당연히 알 테고.”
“당연하지. 비슷한 게 이쪽에도 있거든. 근데 배터리는 굳이 안 보내 줬어도 될 뻔했어. 충전기야 규격만 알아내면 금세 만들어 낼 수 있거든.”
“오, 대단한데.”
“이 몸이 나름 마도 공학의 권위자였다니까, 친구. 하하. 근데 이건 뭐 하러 보내 준 거야?”
“태블릿에 이쪽 세상의 영화를 넣어 뒀어. 문화가 달라서 재밌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봐 봐. 색다른 맛이라도 있을 테니까.”
윌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수호…….’
잉어구이가 어린 시절의 밥상을 떠오르게 했다면.
태블릿은 친구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유년기 생일날의 기분을 일깨웠다.
“왜 그래, 윌슨? 괜찮아?”
꾸벅.
수호가 물었지만, 윌슨은 고개만 숙였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아서였다.
수호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왕왕-!
잠시 후, 실버의 짖는 소리 덕분에 윌슨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수호, 정말 고마워. 영화 잘 볼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블릿에 든 영화보다 새 친구의 마음이 더 감동적이었다.
“전에 받은 공간 결계로 충분해. 나중에 내키면 아무거나 만들어 주고, 지금은 영화나 봐.”
“…그래, 정말 고마워.”
“난 개업 준비해야 해서, 가 볼게. 준비 끝나면 또 이야기하자.”
수호는 TV 앞에서 물러났다.
[차원 임무 【윌슨의 고독】을 완수하셨습니다.]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가 30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눈앞을 수놓았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서 파닥이는 발룡이를 흘끔 살핀 수호가 말을 이었다.
“이쪽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 스킬은 여전히 내용을 알아볼 수도, 사용할 수도 없다.
“방법이 마땅찮아.”
발룡이처럼 강제로 꺼내려다가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발룡이는 그나마 목숨이라도 멀쩡하지, 이번에는 어떤 페널티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윌슨에게 스킬을 실험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윌슨이 지구로 올 생각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물음표 스킬이 개방되거나 혹은 다른 방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수호는 생각을 잘 기억해 두고, 개업을 준비했다.
* * *
개업 당일.
오전 영업을 마친 수호가 헌터 앱을 실행했다.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는데, 예상대로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불굴의 마체테 사랑합니다!]
- 진짜 이건 하악- 너무 사랑스럽다. 오늘 이거 못 샀으면 밤에 잠도 못 잤을 거야. 하악- 옵션, 그림감, 무게 중심, 실용성. 어디 하나 빠지지 않아. 하악- 에이, 모르겠다. 영상이나 보세요! 하악-
┗ 개업 10시에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10시 10분인데, 리뷰 속도 보소.
┗ 지나가면서 보니까, 줄 서 있는 사람 있던데. 그중 한 명인 듯.
┗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리뷰 좀 봐라. 하악이 몇 번이냨ㅋㅋㅋㅋ
┗ 몇 마디 적다가 안 되겠으니까, 동영상만 올려놓은 듯ㅋㅋ 근데 동영상에도 계속 숨소리 들림ㅋㅋㅋ
┗ 완전 흥분한 것 같은데;;
┗ 그만큼 물건이 대박이란 소리겠지? 원래 팔던 물건도 좋았는데, 반응이 저 정도면 얼마나 더 좋다는 거야?
┗ 지금 가 봐야 매진이려나?
몇 시간 전에 작성한 댓글에 매진을 걱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수호도 고민 중이었다.
‘매진은 물론이고 이대로 영업을 종료해야 할 판인데.’
물건이 동났다.
고급 등급은 물론, 일반 등급까지 싹 다 팔려 나갔다.
‘드워프들한테 더 많이 만들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양덕수의 이름을 내세웠으니, 질적인 부분은 문제가 없다.
하나 양덕수 또한 유명한 외톨이.
물량을 쏟아내서는 안 된다.
┗ 진작에 매진됐음. 오전 영업 끝나기도 전에 진열장이 텅텅 비었던데.
┗ 수박 주스 떨어져서 사야 되는데. 수박 주스도 매진?
┗ 그것도 진작에 동났음. 근데 언제부터 공식 명칭이 수박 주스로 변한 거임? 그거 잉어즙인데.
┗ 내 입에 수박 주스면 수박 주스지ㅋㅋ 근데 그 정도로 성황이면, 고급 등급은 언제 살 수 있는 거? 예약도 안 받는 것 같던데.
┗ 때 되면 사장님이 물량 좀 더 푸시겠지.
┗ 아닐걸요? 그거 대장장이 1명이 다 만드는 거라.
┗ 어떻게 앎?
┗ 사장님이 말해 주던데요. 양덕칠이던가. 어떤 대장장이가 혼자 만든답니다.
┗ 양덕칠? 양덕수 아닌가? 그 돌+아이 영감.
┗ 미친 대장장이? 그 영감 작품이었어? 하긴 물건이 좋긴 좋더라.
┗ 그 영감이 성격이 지랄맞아서 그렇지, 실력은 있음. 근데 우리 사장님 수완 좋네. 그 영감을 어떻게 구슬렸지?
┗ 대형 길드도 다 까였다던데. 어떻게 물건 납품받나 모르겠네.
┗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쯤 되면 예약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사장님이 뭔가 방법을 만들어야 할 듯.
┗ 안 그럼 아침마다 가게 터져 나갈 거 같은데.
그 뒤로도 예약에 관한 댓글이 이어졌다.
“예약을 받아야 하려나.”
이 정도로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가게 인지도가 높았던지 사람이 몰렸다.
‘어쨌건 그 영감님 이름을 빌린 건 좋은 판단이야.’
이 난리에 이름도 안 빌렸으면 대번에 의심을 샀을 것이다.
‘예약에 대해서도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고. 음… 오후 영업은 어떻게 한다?’
물건이 더 없으니 열어 놓기도 민망하다.
“그래, 문 닫자.”
수호가 [영업 종료] 푯말을 걸기 위해 문으로 다가갔다.
부릉.
가게 앞에 차가 멈춰 섰다.
“형!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낯익은 얼굴이 내렸다.
* * *
“화환 고맙다. 그냥 몸만 와도 되는데.”
“아니에요. 형 덕분에 살아 있는 목숨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정현수가 화환을 가게 입구에 세우며 대답했다.
“들어가자.”
“예, 형. 바쁘실 것 같아서 점심시간 맞춰서 왔는데, 괜찮으세요?”
“응, 영업 끝났어.”
“벌써요?”
“물건이 다 팔렸거든.”
“우와- 대박!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둘이 마주 앉았다.
수호는 잉어즙을 대접했다.
“잘 마실게요.”
“근데 몸은 괜찮아?”
“완전히 나았어요. 곧 던전에 가려고 준비 중이에요. 강해져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다행이다.”
“정말 고마워요. 은혜는 죽을 때까지 안 잊을게요.”
“됐어, 그만하면 충분해. 이 가게도 네가 준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야말로 갑자기 건물주가 돼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건물은 아버지가 드린 거니까요. 아, 맞다! 형, 이거 받으세요.”
정현수가 액체가 든 병을 내밀었다.
[상급 치유 물약]
“이건?”
“저번에 드렸는데 저한테 먹이셨잖아요. 그래서 다시 가지고 왔죠.”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어서 받으세요.”
수호는 물약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고맙죠. 근데…….”
수호의 인사가 멋쩍었던 정현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2성 던전은 언제 가시려고요?”
“안 그래도 이야기 하려던 참인데. 최대한 빨리 잡아 줘. 주말로.”
평일에는 가게 때문에 시간이 없다.
“마침 잘됐네요. 오기 전에 확인했더니, 이번 주말에 2성 던전이 하나 비더라고요.”
“그럼 그때로 잡아 줘.”
“예, 던전 정보는 메시지로 보내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이야기는 이따 더 하고 밥 먹자. 배달 음식 괜찮지?”
“좋죠.”
“뭐 먹을래?”
“치킨 괜찮으세요?”
“치킨? 가만 보자, 쿠폰이 어디 있었을 텐데.”
치킨을 하도 시켰더니, 쿠폰이 잔뜩 쌓였다.
한데 수호의 귓가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본좌의 쿠폰에 손을 대는 순간,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전쟁의 서막이 오를 것이다.』
녀석이 쿠폰의 용도를 어떻게 눈치챘지?
잠시 고민하던 수호는 쿠폰 찾기를 포기했다.
* * *
『수호, 가자. 늑장 부리지 말고.』
던전에 가기로 한 주말이 다가왔다.
발룡이가 집 안을 파닥이며 성화를 부렸다.
“넌 던전 가는 게 그렇게 좋냐?”
『본좌의 본 모습을 되찾을 유일한 실마리이니라.』
“그러냐.”
『게다가 마력이 증가할 때마다 간질간질한 것이, 뭔가 변화가 일어날 듯한 느낌이 든다. 본좌가 심연의 왕좌를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져.』
“어, 그래.”
수호가 차원문을 둘러봤다.
냉장고, 수트 케이스, 텔레비전.
‘다녀올 동안 문제없어야 할 텐데.’
집을 비울 때마다 걱정이지만 어쩔 수 없다.
좋은 장비만큼이나 레벨 업도 등한시해서는 안 되니까.
『계속 꾸물거릴 참이냐!』
“그래, 가자.”
근심을 떨쳐낸 수호가 몸을 돌렸다.
“수호! 수호! 벌써 가 버린 거야?”
TV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았다.
수호는 서둘러 TV 앞으로 향했다.
“윌슨, 무슨 일 있어?”
“오! 아직 안 갔군. 겨우 시간을 맞췄어. 이거 받아 봐. 집 나갈 때마다 불안하다며?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새 친구의 선물이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52화 지렁이를 죽이는 방법(1)
[마도 경보기]
- 팔찌 형태의 경보기. 마력 신호로 연결된 구슬이 깨어지면 팔찌의 색이 붉게 변한다. 마력 파장이 강하고 혼란한 곳을 제외하면, 거리의 제약 없이 신호를 수신할 수 있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내구도 80
윌슨이 준 선물은 팔찌 하나와 손톱만 한 구슬 3개였다.
“구슬을 깨면 팔찌 색깔이 변하는 거야?”
수호가 물었다.
“맞아, 마력 파장을 발생시키는 형식이라 차원문 밖에서도 감지할 수 있어. 차원문이 열려 있는 상태라면 말이야. 네 이종족 친구들에게 구슬을 하나씩 주고 가라고.”
“고마워, 윌슨.”
“내가 더 고맙지. 태블릿에 넣어 준 영화는 정말로 재밌게 보고 있어. 감성이 다른 점이 오히려 흥미롭더라고.”
“재밌다니 다행이야. 다 보면 다른 것도 더 넣어 줄게.”
흥미가 식으면 코리안 막장 드라마가 출동할 것이다.
“기대되는걸. 아참, 그 경보기 주의할 점이 있어.”
“……?”
“거리의 제약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던전에서는 안 통해. 강한 마력 농도 때문에 신호가 교란되거든. 그리고 급히 만드느라 내구성에 신경을 못 썼어. 미안해. 다음에 튼튼한 거로 다시 만들어 줄게.”
“괜찮아. 던전에서는 차원 보따리에 넣어 두면 되니까.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한결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오가는 길에라도 집의 변고를 미리 알 수 있을 테니까.
인사를 나누고 수호는 TV에서 물러났다.
드워프에게 하나, 바비와 온달소라에게 하나씩.
3개의 신호용 구슬이 분배되었다.
『구슬 다 나눠 줬으면 어서 가자! 본좌의 마음속에 억눌러 놓은 혼돈이 풀려나려 한다.』
발룡이가 보챘다.
“그래, 가자.”
수호가 서둘러 집을 나섰다.
* * *
상왕련 관리팀장 황병수.
그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상왕련 2성 던전 앞에 서 있었다.
‘오실 때가 다 됐지?’
팀장이 던전 앞에 대기하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자처해서 던전 앞에 나와 있었다.
부르릉.
저 멀리 용달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병수가 후다닥 차 앞으로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헌터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황병수.
부하 직원들이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의 헌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호 헌터가 계셔서 억울하게 죽은 녀석들이 그나마 눈이라도 감았지.’
유가족에게 한마디 위로라도 건넬 수 있었던 것도 다 수호 덕분이었다.
“황 팀장님, 안녕하세요.”
수호도 황병수를 기억했다.
“저야 헌터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바로 입장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한데 수거팀은 어떻게 할까요? 1구역까지 준비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협회 소유 2성 던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상당히 넓다.
그렇기에 한 파티가 한 번에 완전히 클리어하는 경우는 없다.
몬스터의 이동 경로를 따져 구역을 정한 후, 해당 구역을 클리어하면 돌아 나온다.
해당 구역의 몬스터가 재소환되기 전에 수거팀이 부산물을 수거하는 식이다.
물론, 수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한테 마법 배낭이 있거든요. 가는 데까지 제가 직접 수거해 올게요.”
차원 보따리가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수거팀은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겠습니다. 도축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네. 그럼 갈게요.”
황병수가 던전 게이트 앞까지 수호를 배웅했다.
“원수호 헌터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수호가 던전에 몸을 던졌다.
황병수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황 팀장, 여기 있었어? 웬일로 직접 나왔어?”
수거 2팀장 정동진이었다.
수호가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 수거를 맡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정 팀장, 빨리 왔네.”
“웬일로 길이 안 막히더라고. 근데 오늘 들어간 사람이 원수호 헌터지?”
“맞아, 원수호 헌터 님이시지.”
“굉장히 정중한 말투네?”
“은혜를 입었으니까.”
정동진도 들었다.
수호가 60레벨 헌터 박영일의 난동을 막았다는 것을.
‘용암수를 이용해 박영일을 처치했다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은 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대단한 일을 해냈다.
“내가 처음부터 보통 사람 아닐 거라고 했잖아.”
“그래. 정 팀장, 자네 말이 맞았어.”
“그래도 혼자 들어갔으니, 한참 걸리겠지?”
“모르지. 원수호 헌터님이시니까.”
“아주 추종자가 되셨구만.”
“보통 사람이 아니시거든.”
“허허.”
자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정동진이 실소를 흘렸다.
“그럼 가서 준비해, 정 팀장.”
“그래. 팀원들 천천히 준비시키고 있을게. 원수호 헌터 나오면 바로 연락 줘.”
정동진이 수거팀의 트레일러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황병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님한테 마법 배낭 있으니까, 기다렸다가 도축만 하면 돼. 대신 자네 생각보다 빨리 나오실 수도 있으니, 준비 서두르고.”
“얼씨구, 진짜 추종자가 다 되셨군.”
* * *
던전 안.
수호의 눈앞에 수풀이 펼쳐졌다.
숲이 우거진 3개의 섬.
그것이 이번 던전의 지형이었다.
“투척 원숭이라고 나무 위에서 솔방울이나 특이한 열매를 던지는 몬스터가 나타날 거야. 투척이 위협적이라니까 주의하고.”
『본좌에게 원숭이 따위를 주의하라고 한 것이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어쨌든 이번엔 기대가 커. 잘 부탁할게.”
『크큭- 위대한 힘의 편린을 보여 주마.』
수호는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전과 달라진 점은 딱 하나.
거미줄 팔찌가 사라지고, 왼손 팔목 아래에 석화비도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새 장비가 덜 만들어져서 아쉽지만.’
드워프 족장이 힘을 합쳐 만드는 장비는 완성이 안 됐다.
방패와 바지도 원래 쓰던 것을 수리해서 그대로 입고 온 상태.
‘그래도 석화비도가 있으니 좀 수월하려나?’
성능 테스트도 할 겸, 석화비도를 잘 활용해 봐야겠어.
마음먹은 수호가 숲속으로 향했다.
“저기 나무 위에 한 놈 있다. 가자.”
수호가 달렸다.
타다닥-
기척을 숨기지 않았기에 투척 원숭이도 수호를 눈치챘다.
“우끼-!”
원숭이가 솔방울을 집어 들었다.
수호가 한발 빨랐다.
쎄에에엑-
석화비도가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푹-
【중급 투사체 속도 증가】와 【하급 명중률 보정】이 적용된 비도가 투척 원숭이의 배에 명중했다.
‘안 죽었어.’
원숭이는 살아 있었다.
한 방에 죽이기에 비도는 작았고 원숭이는 맷집이 좋았다.
‘이럴 때 쓰라고 달린 기능이 있지.’
수호가 석화비도의 사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숨겨진 기능이 발휘됐다.
푸콱.
비도에서 미늘이 삐져나오며 원숭이의 몸을 속에서 얽어맸다.
‘와라!’
수호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힘에 못 이긴 원숭이가 떨어져 내렸다.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내질렀다.
퍼억-!
원숭이의 머리가 깨어지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투척 원숭이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간단하네.”
전투가 어렵지 않다.
석화비도의 성능도 훌륭했다.
특히 원거리에서 유용한 공격 수단이 생겼다는 점이 좋았다.
『몰려온다.』
수호가 첫 전투의 소감을 느끼고 있을 때 발룡이가 경고했다.
“일부러 기척을 감추지 않았으니까 부탁할게.”
『좋다. 본좌가 심연의 힘을 보여 주마.』
나뭇잎이 소란하게 요동치더니 투척 원숭이 3마리가 나타났다.
수호는 곧바로 석화비도를 날렸다.
푸콱-
이번에도 명중.
수호는 또다시 사슬을 잡아당겼다.
원숭이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쎄에엑-
다른 놈의 투척 공격이 날아들었다.
『위대한 심연의 주인이 명하노라. 멈추어라!』
발룡이의 몸에서 뭉클 마력이 흘러나왔다.
허공에 투명한 마력의 방패가 생겨났다.
‘실드’ 마법이었다.
티팅-
솔방울이 튕겨 나갔다.
“발룡이 땡큐!”
수호가 원숭이 머리를 터트리며 외쳤다.
쎄에엑-
다시 석화비도가 날고, 원숭이 한 마리가 끌려 내려왔다.
수호는 화염 포마검을 휘둘러 원숭이를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한데 수호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얼어붙어라!』
아이스 에로우가 시전됐다.
퓨슛-
저저적-
쏘아진 얼음 화살이 원숭이의 심장에 명중.
놈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우리 발룡이, 투명화 푸니까 날아다니네!”
『경배하라. 본좌의 힘이 해방되는 날, 온 세상이 본좌의 앞에 무릎 꿇게 되리니.』
발룡이가 날개를 활짝 펴며 높이 날아올랐다.
근엄한 모습을 연출하려 했지만 귀여울 뿐이었다.
‘귀엽게 굴기는.’
수호가 투척 원숭이 사체를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발룡이는 그때까지도 자아도취한 상태로 주변을 파닥였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감히 본좌의 힘을 보고도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저놈의 기고만장한 성격.
가만히 두면 끝도 없겠구만.
“근데 너 마법 쓸 때마다 ‘얼어붙어라’ 라느니, 자꾸 한마디씩 외치던데. 그거 꼭 해야 되냐? 그냥 시전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그것은 용언 마법이니라. 당연히 언령을 매개로…….』
아니었다.
발룡이의 마력 양으로 아직 용언은 꿈도 못 꾼다.
간신히 ‘실드’나 ‘아이스 에로우’ 등을 사용하는 것이 한계.
“말이랑 마력 움직임이랑 따로 놀던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괜한 트집 잡지 말고 네 비루한 감각을 탓하거라!』
“후후, 그래 알았다.”
『뭐지, 그 웃음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됐고, 가자. 저기 또 몰려온다.”
수호가 저편,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달려나갔다.
.
.
.
2시간 후.
[투척 원숭이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재생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끝났다.”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며 수호가 바닥에 앉았다.
『본좌를 경배하라!』
발룡이는 여전히 기운차게 눈앞을 파닥거렸다.
“그래, 경배할게.”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싸울수록 더 도움이 되네.’
몬스터를 잡을수록 발룡이의 마력이 늘어난다.
이제 아이스 에로우를 한꺼번에 2방씩 날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2시간 만에 섬을 하나 털었구만.’
쉼없이 싸운 2시간.
수호는 3개의 섬 중 하나를 완전히 청소했다.
레벨도 3이나 올랐다.
협회 2성 던전에서 올린 레벨이 2였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밖에서는 섬 하나 청소하면 나올 줄 알고 있을 텐데.”
너무 빨리 끝났고 수월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본좌는 아직이다.』
“그래, 이대로 나가기는 아쉽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수호가 눈빛을 빛내며 다음 섬을 응시했다.
* * *
“크- 좋구나.”
마족 아르투르의 종복.
마인 코자크가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았다.
“맞습니다, 대장님. 갓 잡은 인간의 피라 그런지 정말 싱싱하고 좋습니다.”
“크흐흐, 저는 이 내장이 좋습니다. 쫄깃쫄깃하거든요.”
“인간 고기는 다리지. 근육이 있는 부분의 살이 맛있는 법이거든.”
부하 마인들이 저마다 인간 고기를 들고 잔치를 즐겼다.
‘크크크, 잘 되고 있군. 이대로 대륙 북동부는 내가 말살시킨다! 모조리 마기에 물들이는 거야.’
아르투르에게 명받은 인류 말살 작전은 잘 수행되고 있었다.
흡족해하던 코자크는 문득 깨달았다.
‘트윈헤드 트롤을 보냈던 건은 어떻게 됐지?’
한 가지 소식만은 아직 보고받지 못한 것이다.
코자크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발랑카 산맥 쪽으로 보냈던 마물은 어떻게 되었지?”
“…….”
“…….”
부하 마인들이 벙어리가 되었다.
“트윈헤드 트롤과 고블린, 놀 등을 잔뜩 보냈을 텐데, 왜 아직 보고가 없어? 드워프의 흔적을 발견했다지 않았나?”
코자크가 마기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제야 한 놈이 입을 열었다.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트롤 놈이 머리가 나빠서 드워프를 다 잡아먹고 거기 눌러앉은 게 아닌가 하는…….”
“턱도 없는 소리!”
코자크가 화난 목소리로 부하의 말을 끊었다.
“트롤이 멍청하지만 마기에 새겨진 명령은 어기지 못한다. 나는 분명 드워프를 말살하라고 지시했고, 그 후 돌아오라고 명했다. 그러니 드워프를 다 죽였으면 돌아왔어야 해!”
“그렇다면 드워프에게 당했다는 결론이…….”
부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오오-
코자크의 몸에서 마기가 새어 나왔다.
평소에는 이성을 유지하는 마인이지만, 감정이 극에 달하면 살의만 들끓는 존재가 된다.
코자크가 발작하면 살의가 풀릴 때까지 부하가 몇이나 죽을 터.
부하 한 놈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 대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한테 마물을 내어 주십시오!”
코자크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심산이었다.
놈의 의도는 먹혔다.
“크르르- 좋다. 혼 보어 무리를 내어 주마. 그것들을 이끌고 발랑카 산맥 쪽으로 도망친 드워프 무리를 쫓아라. 멍청한 트롤도 찾아보고.”
뿔난 멧돼지 몬스터, 혼 보어.
코자크는 얼마 전, 대규모 혼 보어 무리를 마기에 물들이는 데 성공했다.
한데 명을 받은 부하 마인, 조르보가 대답을 미적거렸다.
“저 대장님.”
“크르르르- 뭐지?”
“트윈헤드 트롤이 고블린과 놀을 잔뜩 이끌고 갔다가 소식이 끊겼습니다. 제가 혼 보어만 데리고 가는 게 의미가 있을지…….”
쾅-!
화난 코자크가 발로 바닥을 찍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건물이 부르르 떨렸다.
한동안 씩씩거리던 코자크의 입이 떨어졌다.
“자이언트 웜을 내어 주겠다. 이래도 못하겠다면 네놈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다른 놈에게 시키지.”
“아, 아닙니다, 대장님.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자이언트 웜이라면 트윈헤드 트롤 10마리가 덤벼도 못 이기는 괴물.
웜과 함께라면 조르보는 자신이 있었다.
“좋아. 가라!”
“옙!”
조르보가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크와아아아앙-!”
나무 위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어깨에 석화비도가 박힌, 두목 투척 원숭이가 내지른 소리였다.
부르르.
석화비도의 사슬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힘이 굉장한걸?’
던전의 보스답게 두목 투척 원숭이의 힘은 강했다.
이대로는 놈을 끌어 내리지 못할 터.
하나 수호에게는 아껴 둔 기술이 있었다.
‘힘이 모자라면 힘을 더 내면 되는 거지. 근력 폭발!’
불끈, 수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쿠왕-?”
두목 투척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크큭- 본좌의 차례인가?』
발룡이의 주변에 얼음 화살이 생겨났다.
수는 모두 다섯.
동시에 발사된 화살이 두목 원숭이의 몸을 난타했다.
저저적-
몸이 반쯤 얼어붙은 두목 원숭이가 발악하려는 순간.
수호는 놈 앞에 도착해 있었다.
화르르-
화염 포마검이 불길에 휩싸이고.
“하압-!”
기합과 함께 칼이 두목 원숭이의 무릎을 후려쳤다.
퍼억-!
“끄워어어엉-”
고통과 함께 두목 원숭이가 무릎 꿇었다.
수호는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압도적인 근력이 수호의 몸을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
‘마무리다.’
화염 포마검이 두목 원숭이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놈이 팔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멈추어라!』
적시에 발휘된 발룡이의 ‘홀드’ 마법이 원숭이의 팔을 묶었다.
콰직-!
화염 포마검이 두목 원숭이의 두개골을 쪼갰다.
[두목 투척 원숭이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
.
.
“우리 발룡이, 오늘 저녁엔 형이 두 마리 쏜다. 콜라도 큰 거로!”
『받고 똥집 더!』
3개의 섬을 클리어하고, 보스까지 잡은 데에는 발룡이의 도움이 컸다.
수호도 치킨 값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콜!”
기분좋게 대답한 수호의 눈에 두목 원숭이 옆에 떨어진 물건이 보였다.
‘아이템도 나왔네.’
운이 좋군.
집에 문제만 없으면 더 바랄 일이 없겠어.
수호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템을 향해 다가갔다.
53화 지렁이를 죽이는 방법(2)
수거팀장 정동진이 던전 게이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늦는데?”
수호가 던전에 들어간 지 이미 7시간.
혼자라고는 하나, 섬 하나를 청소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7시간은 전투를 지속하기 쉽지 않은 긴 시간이었으니.
“헌터님은 괜찮으실 거야. 어쩌면…….”
관리팀장 황병수의 목소리였다.
정동진이 돌아보자 황병수가 말을 이었다.
“2번째 구역까지 처리하고 계실지도 모르지.”
“무리야.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졌어도 혼자서 섬 2개라니. 전투 실력 문제가 아니야. 지구력 때문에라도 힘들어.”
정동진은 처음부터 수호의 부산물을 수거해 왔다. 그랬기에 수호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인지 안다.
그럼에도 혼자서 두 구역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다.
그의 경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원수호 헌터님은 달라.”
대답하는 황병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도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수호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때 게이트가 일렁였다.
“나온다!”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원수호 헌터님!”
황병수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좀 오래 걸렸죠?”
“괜찮습니다. 몸 성히 돌아오셨으면 된 거죠. 하하.”
“네, 근데 몬스터 사체는 어떻게 할까요?”
수호의 물음에 정동진이 다가오며 대답했다.
“사체는 저쪽 트레일러 수거 칸에 담아 주시면 됩니다.”
“바로 담을게요.”
수호가 트레일러로 향했다.
웬만한 집 안방보다 큰 수거함이 달려 있었다.
마법 배낭에서 꺼내는 척 수호가 차원 보따리를 열었다.
몬스터 사체가 쏟아져 나왔다.
후두두둑-
“와- 많네.”
“그러게, 설마 두 번째 섬까지 간 건가?”
감탄의 목소리는 점점 경악으로 바뀌었다.
“어? 너, 넘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잡으신 겁니까?”
수거함에 투척 원숭이 사체가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쳤다.
“넘쳐서 죄송합니다.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아닙니다. 주워 담는 거야 던전에 들어가서 수거하는 거보다 훨씬 수월하니까요.”
정동진의 대답에 수호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데, 던전에도 들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법 배낭이 가득 차서 사체는 그대로 남겨 두고 왔거든요.”
사냥 중에 차원 보따리가 꽉 차 버렸다.
약간의 식자재와 자잘한 아이템들까지 들어 있다 보니, 3개 섬의 몬스터를 모두 담을 수가 없었다.
“더 있다고요?”
“2번째 섬 초반쯤부터는 못 담아 왔으니까, 아마 지금 가져온 거보다 2배쯤 더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수거팀 진입… 어? 2배요?”
정동진이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2배요.”
“첫 번째 섬에서 가져온 사체의 2배가 저 안에 더 있다고요?”
“그렇죠. 왜 그러세요?”
“그 말씀은 섬 3개를 모조리?”
“네, 한 마리도 안 흘렸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수거팀은 어차피 잔여 몬스터 유무를 꼼꼼히 점검하며 움직인다. 그를 위해 늘 정찰과 탈출에 유용한 아이템을 가지고 다닌다.
그러니 정동진이 묻는 것은 몬스터 유무가 아니었다.
“그럼 별다른 문제가 있나요?”
“…….”
정동진의 말문이 막혔다.
문제야 없다.
그저 놀라울 뿐.
“그럼 저는 가 봐도 될까요?”
놀라 굳어 있는 정동진 대신에 황병수가 나섰다.
“아이고, 우리 원수호 헌터님. 고생하셨는데 얼른 쉬러 가셔야죠. 뒷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예, 그럼 가 볼게요.”
수호가 용달차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정동진이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더한 괴물이군.”
“괴물이라니! 훌륭하신 헌터님께!”
정동진이 황병수를 바라봤다.
추종자가 되어버린 황병수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 * *
용달차 운전석.
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레벨이 8개나 올랐네.’
이번 던전의 가장 큰 목표는 레벨 업이었는데 생각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다른 헌터들은 던전에 혼자 들어가지 않으니…….’
1성, 2성 할 것 없이 솔플을 하는 헌터는 굉장히 드물다.
‘게다가 던전 하나를 완전히 털어 버렸으니.’
2성부터는 던전의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한 파티가 완전히 클리어하지 않는다.
한데 수호는 혼자서 그 일을 해냈다.
‘경험치를 많이 못 얻는 편이 이상하겠지.’
이 추세면 얼마 지나지 않아 2성도 졸업할 것이다.
‘게다가 아이템도 얻었고.’
잔뜩 오른 레벨 외에도 괜찮은 수확이 있었다.
아이템.
보스 몬스터인 투척 원숭이 두목의 드랍 템이었다.
[소금레몬 스프레이]
- 특정 던전에 자생하는 소금레몬 열매의 액기스가 담긴 덩어리. 꾹 쥐어짜면 몹시 시고 짠 액기스를 전방으로 분사한다. 후각, 미각 등을 강하게 자극하여 고통을 유발한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잔여 사용 횟수 5
- 내구도 50
노란색 주먹만 한 덩어리.
언뜻 오렌지나 한라봉을 연상시킨다.
“두목 원숭이가 가끔 이걸 집어 던진다던데, 그 전에 잡아서 다행이네. 근데 이것도 어디 쓸데가 있겠지?”
『몬스터 중에 특정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놈들이 있느니라. 그런 놈들에게 뿌리면 제대로 먹히겠지.』
“역시 심연의 주인! 모르는 게 없으시구만!”
『아부해도 치킨은 안 깎아 준다.』
“깎기는 뭘 깎아. 그냥 오늘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야, 인마.”
『그럼 어서 집에나 가자. 본좌는 출출하구나.』
“그래, 가자.”
너스레 떨던 수호가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차원 보따리를 뒤졌다.
경보기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 팔찌 색은 그대로네.”
다행히 집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은 모양이다.
안도한 수호가 차를 출발시켰다.
부릉-
용달차가 움직였다.
한데 던전을 둘러놓은 차단막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
차창 밖으로 고함이 새어 나왔다.
“젠장! 왜 갑자기 빨개지는 건데!”
* * *
“오늘은 신나는 컵라면의 날-!”
대장일에 서툴지만 요리는 잘하는 특이한 드워프 볼드.
그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이 요리사님은 오늘 점심 시간에 한가해요! 히힛!”
볼드가 콧노래를 불러 가며 성 밖으로 향했다.
“볼드, 밖에 나가도 괜찮아? 족장님한테 혼나는 거 아냐?”
“맞아, 혹시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해?”
마을에 사람이 부쩍 늘었다.
덕분에 요리를 전담할 인력이 필요했고 요리사로는 볼드가 뽑혔다.
보조도 여럿 생겼는데, 그중 2명이 볼드를 뒤따르고 있었다.
“토드, 빅터! 너희 둘은 보조면 보조답게 이 요리사님의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거야. 요리사님이 오늘 천상의 맛을 보여 줄 테니, 그렇게 알고 따라만 와.”
“성 안에서는 못 해?”
“성 안에서 하다가 누가 보면? 모두들 달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재료는 이게 전부란 말이야.”
“알았어. 꼭 맛있어야 해.”
“먹고 나서 더 해 달라고 난리 부리지나 마. 히힛.”
볼드는 산등성이를 넘었다.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다른 볼드가 자리를 펴고 앉았다.
“우린 이제 뭐 하면 돼?”
“일단 화로에 불부터 피워. 난 요리 준비할 테니까.”
볼드가 간이 화로를 내려놓으며 지시했다.
빅터와 토드가 불을 피웠다.
그사이 볼드는 가져온 재료를 꺼냈다.
설탕 한 봉지와 국자.
그리고 의문의 하얀 가루.
‘우연히 발견한 가루를 설탕에 넣었더니… 히힛, 그런 맛있는 게 만들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식자재 상자 바닥에 깔려 있던 손바닥만 한 봉지.
그 안에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런저런 실험 끝에 볼드는 가루가 설탕에 닿으면 부푼다는 것을 발견했다.
“볼드, 불 다 피웠어.”
“이제 뭐 하면 돼?”
볼드는 둘에게 국자를 들도록 했다.
“국자에다 설탕 녹여. 타지 않게, 멀찍이 들고.”
잠시 후, 국자에서 보글보글 설탕물이 끓어 올랐다.
볼드는 비장의 하얀 가루.
소다를 나뭇가지에 찍어 국자에 넣었다.
벙글벙글.
설탕물이 덩어리지며 피어올랐다.
지구에서 달고나라 불리는 것이 볼드의 손에서 재창조된 것이다.
“우왓- 이게 뭐야? 부풀어 오른다아-”
“오옷- 달콤한 냄새가 나!”
“히힛, 이 볼드 님을 찬양하라. 그리고 거인님도!”
이게 다 거인님이 보내 주신 식량 덕분이니까!
요즘 바빠서 거인님과 대화가 뜸했지만 감사한 마음만은 잊지 않는 볼드였다.
“볼드, 이거 어떻게 먹어?”
“뜨거울 것 같은데? 숟가락으로 퍼먹어?”
“아냐. 그건 굳힌 다음에 먹는 거야.”
꿀꺽.
토드와 빅터의 목에 침이 넘어갔다.
볼드도 달고나가 굳기를 기다렸다.
“히힛, 맛있겠다.”
볼드가 입맛을 다시며 국자를 만지작거렸다.
한데 그때 눈에 뭔가 거뭇한 것이 들어왔다.
‘응? 눈가에 재라도 붙었나?’
손으로 눈을 비볐다.
검은 것은 그대로였다.
그제야 볼드는 깨달았다.
검은 것은 재가 아니고, 얼굴에 붙은 것도 아님을.
“어? 저거?”
볼드가 산맥 저 아래를 가리키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나머지 둘의 시선이 볼드의 손끝을 바라봤다.
“헉! 괴물이다!”
“거, 검어! 마기야! 마물이 나타났어.”
세 드워프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볼드는 재빨리 둘에게 소리쳤다.
“달려! 족장님한테 빨리 알려야 해!”
“응, 가자!”
“마물이야! 마물이야!”
둘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볼드도 그 뒤를 쫓으며 외쳤다.
“어째서 여기만 올라오면 이러는 거야!”
하- 인생.
* * *
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산등성이를 뒤흔든다.
머리 중앙에 거대한 뿔이 돋은 멧돼지 몬스터.
마기에 물든 혼 보어들이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석궁 들어!”
“준비!”
“발사아아-!”
각 전투 조장들의 명령이 떨어졌다.
성벽 위에 도열한 드워프들이 석궁을 발사했다.
쎄에에엑-
새까만 화살 비가 허공을 수놓았다.
푸슛-
푸슈슈슉-
혼 보어의 몸통에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화살에 맞은 놈들이 쓰러졌다.
주변의 혼 보어들이 쓰러진 동료를 짓밟으며 달렸다.
“2열 발사!”
푸슈슈슈슈-
“3열 발사!”
“빨리 재장전해!”
“서둘러! 성벽에 못 닿게 해야 해!”
성벽 위, 드워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 족장은 한자리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타룽가, 거인님께 신호하게.”
“맞네, 마물이 너무 많아. 우리끼리 다 처리할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저 뒤편에 홀로 서 있는 놈은…….”
“굉장히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군. 보통 괴물이 아니겠지. 알겠네, 신호를 보내겠네.”
파각-
타룽가가 수호에게 받은 신호용 보석을 깨트렸다.
마력의 파장이 생겨나 멀리 퍼져 나갔다.
“그럼 준비해 둔 걸 활용해서 어떻게든 버텨 보세나. 거인님만 오시면 저깟 놈들이야 문제없을 테니.”
“그래, 달콩 말이 맞네. 힘내서 놈들을 물리치세나!”
타룽가는 두 족장을 바라봤다.
수천의 마물이 달려들고 있음에도 그들의 얼굴에 절망은 없다.
성벽 위, 마물에 맞서는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거인님 덕분이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에겐 구세주가 있다.
그런 믿음이 발랑카 산맥 드워프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거인님!’
타룽가는 석궁을 들어 올렸다.
“가자! 붉은 망치는 석궁을 들어라! 거인님이 오고 계신다! 우리는 승리한다!”
뒤질세라 달콩과 블톤도 소리쳤다.
“잿빛 가죽도 승리한다! 마물을 죽이고 성을 지키자!”
“푸른 보석을 위해! 드워프를 위해! 거인님을 위해!”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이 퍼져 나갔다.
드워프들의 기세가 바짝 올랐다.
하지만 기세만으로 물리치기엔 혼 보어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렇게 화살에 맞고 쓰러지고도, 혼 보어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혼 보어 물결이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드워프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이거 놀라운 일인걸? 산꼭대기에 성벽이 있어?”
그것도 광룡이 산다던 발랑카 산맥에?
마인 조르보가 저편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단 한 번도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콰콰콰아아아앙-!
강력한 폭음에 조르보가 의문에서 깨어났다.
“난쟁이 놈들로 보이는데 준비를 많이 했군. 흥! 트윈헤드 트롤 무리를 처리한 건 저놈들이 맞는 모양이야.”
저편에서 혼 보어가 잔뜩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조르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야 뭐 코자크 님의 명령만 완수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조르보가 바닥을 발로 툭 내리찍었다.
한 가닥 마기가 땅속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뒤집어엎어 볼까?”
구구구구궁-!
산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54화 지렁이를 죽이는 방법(3)
두두두두두두-
검은 파도가 되어 밀려드는 혼 보어 무리.
성벽 위의 타룽가는 물결이 적당한 위치에 다다르기를 기다렸다.
‘됐다. 지금이야.’
혼 보어 무리가 원하던 위치에 다다랐다.
“작도오옹-!”
타룽가의 고함이 성벽 끝까지 퍼져 나갔다.
“작동!”
“작동!”
이곳저곳에서 구호가 울린다 싶더니.
푸콱!
성벽 앞 30m 지점.
바닥에서 거대하고 검은 창날이 대각선으로 솟아올랐다.
강철 나무 창이었다.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하여 세 족장이 준비해 둔 한 수였다.
“꾸에에-!”
“꿰에에에엑-!”
달리는 기세를 멈추지 못한 혼 보어들이 강철 나무 창에 꿰였다.
질긴 마물의 피부도 강철 나무 창을 부러트리지는 못했다.
“달콩, 준비하게. 저것만으로는 안 돼.”
타룽가는 다음 작전을 맡은 달콩에게 신호했다.
강철 나무 창만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곧 넘어오겠군. 준비는 끝났네.”
예상대로 혼 보어는 강철 나무 저지선을 뚫고 넘어섰다.
숫자의 힘이었다.
찔리고 꿰뚫린 혼 보어 무리를 나머지가 짓밟고 타고 넘은 것이다.
두두두두두-
검은 물결이 산등성이를 물들이며 밀려든다.
그것은 성벽 앞에 파인 해자(垓字)까지 다다랐다.
첨벙- 첨벙-
혼 보어가 해자로 뛰어들었다.
깊이 파인 고랑에 물이 잔뜩 고여 있었지만 전혀 아랑곳 않는 모습.이번에도 먼저 뛰어든 것들이 빠지고 깔렸다.
나머지가 그것을 밟고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달콩이 신호한 것은 그때였다.
“불을 붙여라!”
“붙여라!”
“붙여라!”
신호가 전달되고.
화르르르르-
해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꾸에에엑-!”
“꿰에에에에엑-!”
한층 더 큰 비명이 성벽 앞을 뒤흔들었다.
“통하는군!”
“역시! 신께서 축복하신 불꽃은 달라!”
“오- 망치와 모루의 신이시어.”
세 족장이 쾌재를 불렀다.
해자에 담긴 것은 특수하게 조작된 기름.
준비된 성분을 섞으면 강한 발화성을 띤다.
그 기름에 ‘망치와 모루의 신’이 축성한 화로의 불을 옮겨 붙였다.
“신성이 담긴 불꽃이니 마물에게 통할 줄 알았어. 껄껄.”
혼 보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고 있었다.
마기도 불꽃에 타 사그라졌다.
“그나마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이 아니라 다행일세.”
“맞네. 할 줄 아는 게 성벽을 들이받는 것뿐이라 다행인 셈이지.”
“그래도 수가 워낙 많으니, 태워도 태워도 계속 몰려드는구먼.”
혼 보어들은 죽어 가면서도 성벽으로 돌진했다.
시멘트가 푹푹 파였지만 성벽 속에 들어찬 강철 나무가 성벽의 붕괴를 막았다.
“블톤, 자네 공이 커. 성벽 개조가 완벽한 덕분에 버틸 수 있었네.”
“하하, 앞으로도 이 블톤만 믿게. 오- 이제 슬슬 마물의 수가 줄어드는군. 그렇지 않나, 달콩?”
“맞아. 이 정도면 거의 다 해치웠나?”
달콩이 대답한 순간이었다.
움찔.
블톤과 타룽가의 몸이 굳었다.
“이보게, 그, 그 말은……!”
블톤이 달콩에게 소리쳤다.
타룽가는 달콩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산등성이 저 멀리, 아까부터 불길한 기운을 뿜던 존재를 향했다.
‘설마…….’
불행은 예상을 비껴 가지 않았다.
우르르르릉-
땅이 흔들렸다.
“지, 지진이다!”
“뭐야? 갑자기 왜 땅이 흔들리는 거야?”
“앉아! 자칫하면 성 아래로 떨어질 거야!”
“서로 붙잡아!”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그때 저 멀리서 땅을 뚫고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지렁이처럼 길쭉한 몸통.
머리만 땅 밖으로 튀어나왔음에도, 성벽을 내려다보는 크기.
몸 끝에 달린 입에는 믹서기 같은 이빨이 빼곡히 돋아나 있는 몬스터.
“워, 웜이다!”
“자이언트 웜이야! 빌어먹을!”
“웜이 마기에 잠식됐어. 저, 저걸 어떻게 막아!”
부르르.
타룽가의 무릎이 떨렸다.
나머지 두 족장도 이를 악물고 웜을 노려봤다.
“타룽가, 저건, 저건 막을 수 없네.”
블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잘 만든 성벽이라도 웜을 막을 수는 없다.
저만한 크기와 질량은 성벽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땅속을 공략당하면…….”
지난 트윈헤드 트롤과의 전투 때, 수많은 마물이 몰려드는 상황을 경험했다.
그 경험 덕분에 혼 보어에게는 잘 대응할 수 있었다.
하나 웜 같은 규격 외 몬스터까지 공격해 올 줄은 몰랐다.
“으음…….”
타룽가는 침음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일렁이는 차원문이 보였다.
‘거인님.’
믿을 것은 이제 유일한 구원자, 거인님뿐이었다.
‘부디…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타룽가가 염원하는 순간, 웜이 괴성을 토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 * *
수호가 허겁지겁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공간 결계로 막힌 벽을 달려서 통과했다.
‘어느 세상에 문제가 생긴 거지?’
경보기는 신호를 줄 뿐, 정확히 어느 세상의 문제인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끼에에엑-!
냉장고 쪽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메시지도 떠올랐다.
[차원 임무 【마물 침공】을 획득하셨습니다.]
“마물?”
수호가 황급히 냉동실로 달려갔다.
거대한 지렁이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탓에 성벽 위의 드워프들이 몸을 덜덜 떤다.
『웜이군. 하찮은 미물 나부랭이지만, 생명력이 강하지.』
발룡이가 지렁이의 정체를 알려 왔다.
상황을 파악한 수호가 재빨리 화염 포마검을 뽑아 들었다.
웜이 한발 빨랐다.
쿠구구구-
웜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핏줄이 돋아나는 것처럼 땅거죽이 일렁인다.
꿈틀꿈틀 호선을 그리며 성벽으로 가까워졌다.
“어딜 다가오려고!”
화염 포마검이 땅을 내리찍었다.
푸욱-
칼끝이 지표를 관통해 웜의 몸에 틀어박혔다.
‘잡았다.’
칼끝에 감각이 느껴진다.
수호는 웜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갔다.
꿈틀.
칼끝에서 저항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웜의 몸이 움직였다.
‘칼에 박혔는데도 움직여? 저러면 몸통이 완전히 베일 텐데?’
지이익-
수호의 생각대로 웜의 몸이 길게 베어졌다.
중상임이 분명할 상처였다.
쿠구구궁-
곧 땅이 심하게 요동쳤다.
웜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재생력이 탁월하던 놈인데 마기에 물들었으니, 그 정도 자상은 금세 회복될 것이다.』
“이런!”
워낙 거대한 탓에 몸이 찢어지고도 웜은 살아 있었다.
심지어 땅거죽을 맹렬히 밀어내며 성벽으로 다가가고 있다.
‘태워 죽이는 게 최곤데.’
화염 강격을 난사하기도 힘들다.
성벽과 드워프 마을에도 영향이 갈 테니까.
최선은 발룡킬라인데 그러자니 웜이 땅속에 있다.
“땅에서 끌어내야 하는데, 방법이…….”
짧은 시간, 수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발룡이의 조언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땅속을 다니는 놈이라 눈이 퇴화했지. 상대적으로 촉각과 미각이 발달했다.』
그거다!
지렁이에게 소금물을 뿌리면 죽는다던가?
“땡큐, 발룡아!”
수호가 재빨리 소금레몬 스프레이를 꺼내 들었다.
꿈틀거리는 지표를 향해 열매를 꽉 움켜쥐었다.
소금레몬 열매 액기스가 뿜어졌다.
퓨치치치치칫-
땅바닥이 액기스에 물들어 간다.
‘지구에서라면 땅을 적시긴 힘들겠지만, 저쪽 세상에서라면 충분할 거야.’
워낙 크기의 왜곡이 심하니까.
액기스만으로도 충분히 땅 깊숙한 곳을 적실 수 있을 터였다.
수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쿠에에에에엑-!”
땅이 뒤집히더니 웜의 대가리가 솟아올랐다.
소금레몬 액기스의 시고 짠 맛 때문이었다.
예민한 촉각을 자극받은 웜이 발광하려는 듯 머리를 떨었다.
‘괜히 설치게 둘 필요 없지.’
수호는 손을 내뻗었다.
덥석.
웜의 대가리 아랫부분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튀어나와라!”
수호가 손을 잡아당겼다.
묵직한 손맛이 느껴진다 싶더니.
끼에에엑-
괴성과 함께 웜의 몸통이 땅에서 뽑혀 나왔다.
“발룡아, 부탁할게.”
수호의 반대편 손이 발룡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대가는 제대로 치러야 할 것이다!』
발룡이가 툴툴거렸다.
하나 말만 그렇게 할 뿐, 브레스는 곧잘 뿜었다.
콰르르르르르-
용의 숨결이 웜을 태워 나갔다.
끼에에에엑-!
한동안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잘 굽는다, 발룡이.”
곧 웜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웜 속의 마기도 브레스에 녹아내렸다.
『됐다. 웜도 마기도 완전히 처리됐다.』
발룡이가 브레스를 멈추고 말했다.
“기왕 시작한 거, 깔끔하게 하자. 발사!”
수호가 전장 곳곳에 남은 혼 보어 무리를 향해 발룡이를 들이밀었다.
『이익! 한두 마리로 안 될 줄 알아라!』
발룡이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번에도 브레스는 순순히 발사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각 작업이 깔끔하게 끝났다.
『헥- 헥- 본좌는 이제 마력이 동났다. 쉴 테니 부르지 마라.』
“그래. 고마워.”
『흥! 저기 한 놈 도망가고 있으니, 그거나 처리해라!』
한 마디를 남긴 발룡이가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수호는 발룡이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저 멀리 있는 저놈, 강한 마기를 품고 있어.’
마기의 기운만 놓고 보면 웜보다도 진했다.
수호는 서둘러 【차원 시야】를 움직였다.
검은 기운에 물든 놈이 등을 돌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마인 조르보였다.
‘어딜 도망치려고.’
수호가 석화비도를 던졌다.
푸콱!
명중했다.
비도에 등을 찔린 조르보가 꼬치처럼 바닥에 꽂혔다.
비도가 커서 몸통이 절단되기 일보 직전.
그럼에도 조르보는 죽지 않았다.
“크윽- 비, 빌어먹을! 어째서 너 같은 괴물이 이곳에 있는 거지? 넌 도대체 뭐야!”
조르보는 소리쳤다.
혼 보어가 아무리 죽어 나가도 여유가 있었다.
웜을 동원했을 때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손이 모든 것을 망쳤다.
“게다가 그 드래곤! 그건 광룡이 아니었나? 도대체 뭐지? 뭐냐고!”
조르보가 발악하고 있을 무렵, 수호도 적잖이 놀랐다.
‘말을 해? 설마 마인이었어?’
겉모습이 인간과 흡사하다고 생각은 했다.
한데 진짜 마인이었다.
‘언어가 통한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죽이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마물은 네가 부린 건가? 여긴 왜 온 거지?”
수호가 물었다.
아쉽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크르르르- 크아아악-!”
조르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기의 본체가 조르보의 육신이 죽어 간다고 판단.
마기를 폭주시킨 것이다.
뚝.
간신히 달려 있던 하체가 조르보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상체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쯧, 안 되겠네.”
수호는 미련을 접고 화염 강격을 시전했다.
조르보이 몸이 조각 나 흩어졌다.
마기의 덩어리도 화기에 불타 사라졌다.
차원 임무 완수 메시지도 떠올랐지만, 수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보를 캐 보려 했더니.’
말이 통하는 마인을 만난 김에 산 아래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려 했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혹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지.
다른 드워프를 공격한 적이 있는지.
궁금한 것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발광하는 마인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수호가 한숨 돌리고 있는 사이, 성벽 위에서도 난리가 났다.
주저앉아 있던 모든 드워프가 일어섰고.
우와아아아아아아-!!!
환호했다.
“거인님이 웜을 처치했다!”
“남은 혼 보어도 태워 버리셨어!”
“대박! 진짜로 광룡을 부리시잖아! 난 이번에 처음 봤어.”
“거인님! 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히힛.”
수호의 귀에도 환호가 전해졌다.
‘저들을 지켜냈으니… 됐으려나.’
아쉬운 마음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안도가 들어찼다.
수호가 성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수호의 목소리에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이어졌다.
그사이 3명의 부족장이 달려왔다.
“거인님, 와 주실 줄 알았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 웜 따위는 가볍게 해치워 버리시는군요!”
환한 표정으로 고개 숙이는 세 드워프.
수호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늦어서 다행이에요.”
“껄껄, 저희끼리 막아 보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번거롭게 해 드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타룽가 님. 신호 제때 잘하셨어요. 신호 구슬 더 가져다 드릴 테니, 다음에도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사용하세요.”
타이밍을 잡던 달콩과 블톤이 냉큼 끼어들었다.
“혼 보어까지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는데, 웜이 나타났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광룡을 부려 브레스를 쏘게 하시다니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믿고는 있었지만, 그런 기적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
특히 발룡킬라를 처음 본 블톤의 놀람이 컸다.
수호는 블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블톤 님, 성벽을 다시 보수해야 하나요? 강철 나무 더 필요하세요?”
“완전히 파손된 부분은 없어서 보수는 당장 있는 재료로 가능할 듯합니다. 시멘트만 조금 더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곧 준비해 드릴게요.”
수호는 슬슬 물러나려 했다.
고민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워프 세계에 마물에 이어 마인까지 나타났어. 대책을 마련해야 해. 특히…….’
웜은 정말 위협적이었다.
때마침 소금레몬 액기스를 얻지 못했다면, 이겨도 마을에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을 터.
‘땅속으로 움직이는 마물에 대한 대비도 필요해.’
성벽만으로 땅속 방어는 불가능하다.
‘윌슨에게 한번 물어보자.’
수호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을 좋은 친구가 있었다. 공돌이 친구가.
55화 전격 포획기(1)
“웜이 나타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겠습니다. 껄껄.”
타룽가의 목소리가 냉장고 앞에서 물러나려던 수호를 붙잡았다.
“전화위복이요?”
“예, 덕분에 거인님의 새 장비를 더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을 듯하군요.”
재료가 애매했다.
장비 하나를 만들기엔 남고, 2개를 만들기엔 부족했다.
어떻게든 2개를 만들려다 보니 작업이 지연되던 참이다.
그런 상황에 새로운 재료가 생겼으니 타룽가는 기분이 좋았다.
반면 수호는 의아했다.
“어떻게요? 웜을 재료로 쓸 수 있나요?”
웜은 발룡킬라에 불태워졌다.
그전에 마기에도 물든 상태였다.
“마기에 침범당했지만 드래곤의 브레스로 정화되었으니, 쓸 만한 부위가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저 정도 몬스터라면 응당 마정석을 품고 있겠지요.”
마정석.
마력이 몬스터의 체내에 응축되어 생기는 결정이다.
강한 마력을 품고 있어 다양한 방면에 쓰이지만 발견 확률이 희박하다.
수호가 마정석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을 때 타룽가가 말을 이었다.
“물론 마정석도 마기 탓에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재생시켜 보겠습니다. 모루와 망치의 신께서 내린 불꽃이 있으니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어쨌든 잘만 만들어 주세요.”
“아무렴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약간의 대화를 더 나눈 후, 수호는 냉장고에서 물러났다.
TV 앞으로 향했다.
“윌슨,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수호! 던전은 잘 다녀왔나?”
윌슨이 수호를 반갑게 맞았다.
“잘 다녀왔지. 와서 문제가 좀 생겼지만.”
“문제? 집에서 말이야?”
“드워프 마을에 마물이 나타났어.”
“마물? 이런 불행한 일이!”
윌슨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물과 마족에 대한 증오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윌슨이었다.
“응, 어떻게 된 거냐면…….”
수호는 드워프 마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인이 나타나다니! 혹시 이야기는 못 해 봤어?”
“정보를 캐보려 했는데 발광하는 바람에 실패했어.”
“그저 최선을 다해 방비하는 수밖에 없겠군. 드워프의 건축 기술이 뛰어나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웜이 나타났다는 점이 신경 쓰여. 마인이 또 무슨 마물을 부려 침공할지 모르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
“……?”
“땅속 몬스터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당장 드워프들 스스로 방비하기는 힘들어 보이더라고.”
“으음.”
윌슨이 침음했다.
쉘터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수호 개인에게 뭔가 만들어 주는 일은 가능하지만, 드워프 성벽 전체를 방어할 물건을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힘들까?”
“미안해, 친구. 쉘터의 자원과 동력은 한계가 있어. 생산 시설도 한정적이고. 부서진 담장도 몇 달째 보수 중이지만, 아직 반도 못 고친 상태야. 드워프 성벽 전체를 방비할 물건을 만들려면 나머지 작업을 모두 멈춰야 할 거야.”
“아, 그렇구나. 괜찮아, 윌슨. 미안해하지 마. 당연히 쉘터가 먼저지.”
“담장 수리만 끝나면 어떻게든 해 볼게. 그전에도 자잘한 물건은 만들 수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윌슨이 대답했다.
수호는 그 말에서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잠깐, 담장 수리?’
윌슨을 처음 만났을 때.
부서진 담장을 통해 마물이 쳐들어왔었다.
‘그게 그날 부서진 게 아니었구나.’
수호는 재빨리 쉘터 외부로 시야를 옮겼다.
수리용 로봇 몇 대가 담장을 고치고 있다.
한데 느리다.
담장이 워낙 높고 두껍다 보니, 부서진 부분을 메울 재료도 부족해 보인다.
‘저래서는 완전히 수리하는 데까지 몇 달은 걸리겠어.’
게다가 수리하는 사이 마물 침공이라도 받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될 터.
‘근데 담장 구조가 그리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데.’
수호는 부서진 부위를 자세히 살폈다.
담장 내부에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수호는 시야를 쉘터 내부로 돌렸다.
“윌슨, 담장 말이야. 마도 공학적으로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단단하고 두꺼운 벽이야. 특별한 장치들은 모두 쉘터 외벽에 설치되어 있지.”
수호가 쾌재를 불렀다.
“그럼 내가 담장 수리 좀 도와줄까?”
“네가?”
“응, 내가 도우면 금방 끝날 거야.”
“정말? 그래 주면 고맙지!”
윌슨이 대답한 순간,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쉘터 담장 보수】를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 * *
“바비, 고마워. 급하게 부탁했는데도 들어줘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답. 언제든 말만 해랍.”
“수호 아죠씨, 언제든 나무 잘라 드릴게욥!”
“맞아욥, 언제든 도와드릴 수 있어욥!”
“또 도와드릴게욥!”
바비에 이어 아기 비바니들이 소리쳤다.
“다들 고마워. 그럼 다음에 또 올게.”
“안녕히 가세욥!”
“안녕히 가세욥!”
비바니의 배웅을 받으며 수호는 냉동실로 향했다.
“블톤 님!”
수호의 부름에 블톤이 달려왔다.
“예! 블톤 여기 있습니다!”
성벽 보수 작업 중이었는지, 옷에 흙과 시멘트가 잔뜩 묻었다.
“바쁘신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하나도 안 바쁩니다. 낮잠 자다 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하하, 제가 커다란 담장을 좀 보수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담장이요? 거인님 집 말입니까?”
“저의 집은 아니고, 친구 집요.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담장의 크기와 형태만 말씀해 주시면 보수할 방법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일단 담장 두께는… 그리고 부서진 곳이 어느 정도냐면…….”
수호가 담장 크기와 형태를 설명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을 메워야 하는군요. 재료가 필요할 듯합니다.”
“안 그래도 강철 나무를 준비해 왔어요.”
“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럼 맡겨 주십시오. 다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수호가 냉장고에서 물러났다.
차원 임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쉘터 담장 보수』
- 생존자 윌슨이 사는 쉘터의 담장이 부서졌다. 쉘터의 역량 중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지만, 거대한 담장을 보수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몇 달째 지지부진한 쉘터 담장 수리를 돕자.
- 보상 : 생존자 윌슨 만족도.
담장 수리에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담장 보수를 도와주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겠지? 그러면 땅속 몬스터 방비를 위한 장치를 윌슨에게 부탁할 수 있을 거야.’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종소리가 수호의 생각을 끊었다.
“어서 오세요.”
수호가 손님을 맞았다.
.
.
.
손님이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마체테를 사고 싶었지만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라도 예약을 받아야겠어. 헌터 앱에 글부터 올려야 하려나?’
수호가 스마트폰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 * *
며칠 후.
“윌슨, 준비 다 됐어. 그럼 시작한다?”
“응, 스크린으로 보고 있을게.”
윌슨의 승낙을 얻은 수호는 시야를 담장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수호가 가져다 놓은 ‘블록’들이 놓여 있었다.
강철 나무로 틀을 짜고 시멘트를 부어 만든 거대한 직육면체들.
‘블톤 님이 고생했지.’
수호는 블록을 만드느라 고생한 블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 후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담장부터 깎아 내고.’
화염 포마검이 TV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가가각-
부서져 우둘투둘한 담장을 칼날이 긁어냈다.
몇 분쯤 다듬자 담장의 뚫린 부분이 반듯하게 갈려 나갔다.
“이제 끼워 볼까.”
수호가 블록을 들어 담장에 끼웠다.
아래쪽부터 차곡차곡 블록들이 쌓여 나갔다.
- 굉장히 정교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벽돌인걸?
- 벽돌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말이야, 하하하!
수리 로봇의 스피커에서 윌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크린을 통해 수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드워프의 솜씨니까 너도 직접 보면 깜짝 놀랄걸? 과학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있다니까.”
- 진짜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은 심정이야.
그래. 나도 만나게 해 주고 싶어, 외로운 친구.
수호는 속마음을 묻어 둔 채 작업을 이어 나갔다.
딸깍!
블록과 블록 사이의 격자 형태 이음매가 딱 맞아떨어지며 담장이 메워져 갔다.
작업이 반복됐다.
몇 분 후.
성벽이 완성됐다.
- 이럴 수가! 노움이 100년간 갈고닦은 마도 공학보다 네가 더 위대한 것 같아!
“커서 그런 거야, 커서.”
- 크기만 한 건 아니지. 다정하고 친절하며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고 있기도 하지.
“너도 그 좋은 친구 중에 하나고?”
- 눈치도 빠르군!
윌슨과의 너스레가 끝나는 순간,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쉘터 담장 보수】를 완수하셨습니다.]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가 20 상승합니다.]
담장 보수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시야를 쉘터 안으로 돌린 수호에게 윌슨이 물었다.
“수호, 저번에 드워프 마을 성벽의 약점을 보완하고 싶다고 했지?”
“응, 혹시 무슨 수가 있을까?”
수호가 기대를 안고 대답했다.
“네가 담장을 보수해 주는 바람에 쉘터에 일손이 좀 남았어. 아니, 로봇 손이 남았다고 해야 하나?”
혼자 깔깔 웃던 윌슨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뭘 좀 만들어 봤거든. 물론, 드워프 성벽을 커버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고 시제품이야. 작은 범위에 사용할 수 있는 시제품!”
“뭔데?”
“일단 받아서 살펴봐.”
윌슨이 쉘터 벽에서 뭔가를 꺼내 수호에게 전송했다.
폭이 넓은 접착테이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설치형 전격 포획기]
- 테이프 형태의 함정. 바닥에 접착시켜 설치하며 압력이 가해지면 전격을 발사한다. 주기적으로 전격을 내뿜어, 한번 걸린 대상을 계속 마비시킨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240
“전격 포획기?”
수호의 물음에 윌슨이 설명을 시작했다.
“드워프 성벽에 쓰기 전에 네 가게에 쓸 물건을 먼저 만들어 봤어. 성벽용은 만드는 데는 한참 걸릴 테니까.”
“그래서 시제품이라고 한 거구나.”
“그래. 그 테이프를 가게 바닥에 붙여 둬. 침입자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켰다 껐다 할 수 있으니까, 밤이나 집 비울 때만 작동시키면 돼.”
좋다.
수호의 가게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윌슨, 고마워. 근데 이건 땅 위로 오는 적에게만 유용한 거 아닐까? 가게에는 딱 맞지만, 드워프 성벽에는 어떨지 모르겠네.”
“시제품이잖아. 일단 위쪽의 압력에만 반응하는 걸 만들어 본 거야. 잘 작동하면 다음엔 땅의 진동과 전 방향 압력에 반응하는 거로 만들면 돼. 케이블 형태로 만들어서 땅에 묻는 물건을 구상 중이야.”
역시 마도 공돌이!
마음먹고 덤비니까 금세 결과물이 나온다.
“고마워, 윌슨. 정말 대단해.”
“칭찬은 그만하고, 얼른 가서 설치해 봐.”
“그래, 바로 설치해 볼게.”
수호가 TV 앞에서 물러났다.
* * *
깜깜한 밤.
번뜩-!
방 안에 두 개의 샛노란 불빛이 켜졌다.
발룡이는 눈뜬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여 수호를 살폈다.
『크큭- 완전히 곯아떨어졌군.』
발룡이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침묵하라!』
발룡이가 자신에게 ‘사일런스’ 마법을 걸었다.
『떠올라라.』
플라이 마법도 시전했다.
평소처럼 날개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수호가 잠에서 깰 수도 있으니까.
스르르.
발룡이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미끄러지듯 침대를 가로지른 발룡이는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여기부터 조심해야 해. 떠올라라!』
발룡이는 다시 한번 마법을 시전했다.
플라이 마법이 협탁 위 스마트폰을 띄워 올렸다.
『한결 순조롭군.』
밤마다 수호의 스마트폰을 훔쳐 쓰기 위해 땀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덕분에 치킨을 ‘치느님’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보람은 있었지만.
매일 밤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크큭- 던전에 다녀온 보람이 있어.』
한데 던전에 다녀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력 양이 증가한 덕분에 다양한 마법을 거듭 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휴대폰 훔쳐 쓰기’가 훨씬 쉬워졌다.
『그럼 한번 즐겨 볼까.』
휴대폰이 손에 들어왔다.
발룡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아닛?』
한데 그때, 발룡이의 감각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누군가 가게 문을 따고 들어온 것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웬 날파리들이 집에 침입한단 말이냐!』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예민한 수호가 잠에서 깨어날 터.
『돌아가라!』
발룡이가 서둘러 마력을 운용했다.
스마트폰이 협탁 위로 돌아갔다.
동시에 수호가 눈을 떴다.
“으음, 안 자고 뭐 하냐?”
『휴유… 널 깨우려던 참이었다. 웬 놈들이 가게에 침입한 듯하구나.』
“맞지? 왠지 찜찜하더라니. 근데 왜 한숨이야. 몰래 이상한 짓이라도 한 거야?”
『보, 본좌는 몰래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
나쁜 짓이라고는 안 했는데?
수호가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56화 전격 포획기(2)
[수호 아이템&잡화에서 새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고객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불굴의 마체테】가 예약 판매를 실시합니다. 아울러 판매 수량도 1주일에 7개로 증가합니다.
- 물량 증가가 성에 안 차실 수도 있으나, 해당 아이템은 본 상점의 전속 대장장이께서 혼자 만드는 터라 대량 공급이 불가능합니다. 전속 대장장이님을 최대한 지원하여 생산량을 순차적으로 늘려나가겠습니다.
- 예약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아래 링크에 첨부된 문서를 작성하셔서…….
┗ 드디어! 예약 판매!
┗ 앗싸! 줄!
┗ 나 사흘 연달아 물만 먹고 돌아왔는데 드디어 살 수 있겠다!
┗ 진작 이랬어야지. 매일 가게 앞에서 줄 설 수도 없는 일이고.
┗ 근데 예약도 빨리 안 하면, 물건 받는데 한세월 걸릴 것 같은데?
┗ 갑자기 댓글 실종. 나도 예약하러 가야지.
┗ ㅋㅋㅋㅋㅋ 나 예약하고 올 동안 댓글 하나도 안 달린 거 실화냐?
헌터 앱을 살피던 남도일.
그가 의형(義兄)인 김전일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일 형님, 이거 좀 보세요.”
“뭔데?”
“헌터 앱 판매 게시판인데요. 이 집 물건이 완전 대박이에요. 전에 형님 맛있다고 드신 수박 주스도 여기서만 파는 물건이거든요.”
“수박 주스? 그걸 여기서 팔았어?”
김전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동업자이자 의동생인 남도일이 얼마 전 가져온 수박 주스.
그것은 굉장히 상큼하고 맛있었다.
심지어 효과도 좋았기 때문에 기억에 확실히 남아 있었다.
“네. 얼마 전부터 고급 등급 칼도 팔기 시작했는데 계속 매진이었거든요. 근데 아까 전부터 예약 판매한다고 공지가 떴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김전일은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근데 왜? 우리가 누구랑 싸울 것도 아니고 칼은 뭐 하려고?”
수박 주스는 그들이 하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칼은 크게 쓸모가 없다.
김전일과 남도일은 헌터지만, 사람도 몬스터도 죽이지 않으니까.
그들은 ‘도둑’이었다.
협회에서 현상금까지 건 잘나가는 도둑!
“형님, 가게가 저렇게 잘되면 돈이 많지 않겠어요? 현금이 없어도 물건은 있겠죠. 저 불굴의 마체테,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프리미엄 붙여서 팔 정도라니까요.”
“그 정도로 잘 팔린다고?”
“네, 그러니까 다음번 목표는 여기로 하죠.”
“근데 거기 수박 주스 맛있던데. 너도 좋아하지 않았냐? 괜찮겠어?”
“이 형님이 잘 나가다가 또 이러시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전일 형님.”
“뭐,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다. 그럼 일단 조사부터 해 봐.”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별문제 없으면 바로 작업하죠.”
“그래. 알았다.”
* * *
며칠 후, 새벽.
김전일과 남도일, 두 도둑은 목표로 삼은 상점 앞에 도착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김전일이 앞장섰다.
살금살금.
가게 앞에 도착한 김전일.
‘열려라! 만문개방!’
그가 고유 스킬 【만문개방】을 시전했다.
세상 모든 문과 자물쇠를 흔적 없이 열 수 있는 스킬이었다.
툭.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이제 제가 앞장 설게요, 형님.”
남도일이 앞으로 나섰다.
그에게는 【기척 차단】과 【기록 방지】라는 훌륭한 고유 스킬이 있었다.
소리와 마력 파장을 줄여주고, 영상 매체에 기록되지 않도록 해 주는 스킬이었다.
게다가 마력을 소모하면 동료까지 스킬을 적용받기 때문에 도둑질에 굉장히 유용했다.
잠시 후, 남도일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살피던 남도일이 뒤로 손짓했다.
“형님, 들어오세요.”
김전일이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저쪽이야. 앞장서.”
김전일이 한쪽을 가리켰다.
오랜 도둑 생활의 감이 정확히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을 감지해 냈다.
고개를 끄덕인 남도일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사박.
옆에 누가 자고 있어도 깨지 않을 발걸음이었다.
한데 남도일은 예상치 못했다.
그가 걷는 곳 바닥에 한 줄 테이프가 붙어 있음을.
사박.
결국 그의 발이 테이프를 밟았다.
파치지직-!
바닥에서 전격이 튀어 올랐다.
전격은 그물처럼 남도일의 몸을 휘감았다.
“으악-!”
남도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몸이 의지를 벗어나 부들부들 떨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야?’
뒤따르던 김전일은 다행히 전격에 걸리지 않았다.
깜짝 놀랐지만, 노련한 도둑답게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함정이야!’
흘끔.
김전일이 쓰러진 남도일을 훑었다.
‘구해야 하는데…….’
손을 대면 자신도 남도일 꼴이 될 것 같았다.
김전일의 마음이 도주로 기울었다.
‘미안하다, 도일아. 내가 나중에 꼭 빼내 줄게.’
【만문개방】을 이용해 어떻게든 탈옥시키리라.
그런 생각으로 김전일이 몸을 돌리려 했다.
한데 갑자기 들려온 말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성능이 괜찮은걸.”
목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김전일이 소리의 근원을 살폈다.
그곳에는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저놈 짓이구나.’
헌터인 가게 사장이 분명했다.
사장까지 나타났으니 더는 주저할 시간이 없다.
‘튀자! 튀는 건 자신 있으니까.’
【기록 방지】 덕분에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고 보자.
김전일이 재빨리 스킬을 발동했다.
【만문개방】에 이은 그의 고유 스킬, 【부스터】였다.
뭉클- 마력이 몸속을 휘젓는 순간, 김전일의 민첩이 30% 증가했다.
팟-
그가 뒤돌며 바닥을 박찼다.
한데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빠르잖아.”
그러더니.
덥석.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퍽-!
아찔한 충격과 함께 김전일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김전일은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 낙하 지점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남도일이 밟았다가 전격을 얻어맞은 위치였다.
‘빌어먹을!’
파지지직-!
김전일의 의식이 끊겼다.
* * *
“일단 잡기는 잡았는데, 어째야 하나?”
수호가 쓰러진 두 도둑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지는 일단 꺼내 놓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파지직-
간헐적으로 뿜어지는 전격에 지금도 두 도둑이 찜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게. 배터리 다 닳겠다.”
『…….』
핸드폰 빌려 쓸 때, 한층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구나.
발룡이가 다짐하고 있을 때.
수호는 전격 포획기를 끄고 도둑들을 끌어냈다.
“일단 묶어 두고.”
덕 테이프를 가져온 수호가 도둑들의 몸을 꽁꽁 싸맸다.
이러면 단숨에 찢고 도망가지는 못할 터.
“이제 깨워야겠지?”
수호가 물을 떠 와 김전일의 머리에 부었다.
전격을 덜 맞은 김전일이 상태가 좀 나았기 때문이다.
“어푸푸- 뭐, 뭐야?”
김전일이 깨어났다.
수호는 질문을 던졌다.
“너희 뭐 하는 놈들이야? 도둑?”
눈알을 굴리던 김전일이 모르쇠를 부렸다.
“아, 아니다. 사람을 갑자기 이렇게 만드는 법이 어디 있어? 그, 그냥 건물을 좀 잘못 찾아 들어온 것뿐이라고!”
“그렇게 나오시겠다?”
수호는 길게 입씨름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을 향해 말했다.
“발룡아, 그거 좀 하자.”
『그거?』
“응, 이거.”
차원 보따리에서 [보급형 강철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그거로군. 좋다, 협조하지.』
발룡이가 대답했다.
“웬일로 순순히 협조하네. 어쨌든 준비해. 금세 적당한 상태로 만들 테니까.”
『…알겠다.』
수호가 창대를 움켜쥐고 김전일에게 다가갔다.
.
.
.
심문은 어렵지 않게 끝났다.
“좀 너무했나?”
수호가 누워 있는 김전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명을 해치지는 않으나, 남의 재물을 탐하는 놈들이다. 그 정도 벌은 괜찮으니라.』
“그건 그런데 좀 불공평한 것 같아서 말이지.”
수호가 누워 있는 남도일을 보며 중얼거렸다.
김전일이 순순히 분 탓에 남도일은 굳이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한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신고나 하도록 하여라. 현상금도 걸려 있다지 않느냐.』
“그래. 괜히 고민할 필요 없지. 협회에 넘기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각성자 수용소로 보내든 어쩌든.
협회에서 절차대로 처리하겠지.
수호가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협회 내 응접실.
수호는 협회장의 비서인 신성현을 만났다.
“어째 자주 뵙네요.”
“원수호 헌터님은 특별 관리 대상이라서 제가 직접 나왔습니다. 물론, 헌터님이 뭔가 잘못이 있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아시죠?”
“예, 마인 때문이죠. 근데 새벽에 잡은 놈들이 제법 대단했나 봐요? 현상금까지 걸렸다던데.”
신고를 받은 협회 직원이 도둑들을 데려갔다.
그들은 가면서 협회에 방문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주로 아이템을 훔치는 절도범입니다. 범행 횟수는 많은데 흔적을 워낙에 안 남겨서 각성자로 추정하고 있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범인을 제대로 특정하지도 못하고 있던 실정입니다.”
“…….”
“이번에 원수호 헌터님이 잡는 바람에 정체가 밝혀진 셈이지요. 도통 어떻게 잡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밤에 가게에 침입하기에 잡았죠, 그냥.”
“그냥이요?”
“네, 어쩌다 보니 딱 마주쳤거든요.”
이제껏 흔적조차 남기지 않던 놈들인데…….
신성현의 의문은 길지 않았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캐물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이번에 또 협회가 원수호 헌터께 신세를 지는군요. 번거로워하실 테니 표창장은 생략하고, 현상금으로 걸린 스킬 룬이라도 수령해 가십시오.”
“스킬 룬이요?”
“예. 2성 던전에서 나온 스킬 룬 한정이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보상이지요.”
스킬 룬이라니.
호박이 절로 굴러들어온 셈인가?
즐거운 생각을 하던 수호는 신성현에게 들을 이야기가 더 있음을 떠올렸다.
“혹시 저번에 말씀해 주시기로 한 거, 기억하십니까?”
“박영일과 관련한 정보 말씀이시지요?”
“예, 뭔가 발견된 게 있습니까?”
잠시 침음을 흘리던 신성현이 입을 열었다.
“영일 길드를 전수 조사했습니다. 이제까지 해 온 일, 소유 던전의 상태, 소속된 길드원들의 과거 이력까지. 그런데… 다 사라졌습니다.”
“……?”
“영일 소유였던 던전은 모두 클리어되어 사라졌고, 소속 길드원도 모두 실종됐습니다. 아주 단편적인 관계였던 몇몇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몇 명조차 박영일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요.”
“으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밝혀낸 사실이 있지요.”
수호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신성현이 말을 이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뒷정리를 했다는 것은, 박영일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에 관련되었다는 방증이겠지요. 마기를 폭발시켜 난동을 부리게 만드는 꼭두각시,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인들이 한국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겠군요.”
수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예, 협회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박영일 건에 대해 협회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깔끔하게 해결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협회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잠시 숨을 고른 신성현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현상금을 수령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들른 김에 바로 받아 갈게요.”
신성현이 일어섰다.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
협회 창고 깊은 곳, 스킬 룬 보관소.
수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둘 다 탐이 나.’
2성 던전에서 나온 스킬이다 보니, 압도적인 성능을 가진 것은 없었다.
하나 그중에서도 수호의 눈길을 끄는 스킬이 있었으니.
【무기 강화】와 【하급 염동력】이었다.
【무기 강화】
- 10초 동안 무기의 물리 공격력을 20% 강화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 10분.
【하급 염동력】
- 주변 공간에 약한 염동력을 발휘한다.
‘무기 강화는 근력 폭발과 잘 어울리고, 염동력은 차원문 너머에 힘을 발휘할 때 좋을 거야.’
개별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가진 스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호에게는 분명히 유용했다.
‘뭘 골라야 하지.’
안타깝게도 선택권은 단 하나뿐.
한데 그때.
수호의 귓가에 솔깃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수호 헌터, 혹시 스킬 룬이 2개 다 필요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예, 고르기 힘드네요.”
수호의 대답에 신성현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혹시 협회 의뢰 하나 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57화 타임 어택(1)
“의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수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난번 협회 의뢰에서 생긴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성현도 수호의 기색을 눈치챘다.
“저번처럼 ‘그놈들’이 관계될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절대로요.”
“자세한 내용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잠시 회의실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러죠.”
신성현이 두 개의 스킬 룬을 모두 챙겨 들고 창고를 나섰다.
잠시 후 회의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번에 부탁드리고 싶은 일은 던전 탐색입니다.”
“탐색이요?”
“새로 생긴 던전에 들어가서 던전 내부의 몬스터, 지형 등을 조사하는 일이지요.”
탐색이 끝나면 던전의 처분이 결정된다.
길드에 판매할지, 협회 소유로 남길지.
혹은 위험하다는 판단하에 곧바로 닫을지.
“협회에 탐색을 전문으로 하는 팀이 있을 텐데요?”
“있습니다. 한데 이번 던전도 입장에 레벨 제한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탐색팀이 제대로 입장할 수가 없습니다.”
협회 탐색팀은 대부분 4성에서 활동하는 헌터였다.
“40레벨을 넘으면 못 들어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번에 듣기로는, 레벨 제한이 있는 경우가 처음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 또 제한이 있다고요?”
“으음… 그때 이후 세계 곳곳에서 레벨 제한 던전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이미 여러 차례 비슷한 곳이 발견되었고요.”
“갑작스럽네요. 원래 이런 변화가 자주 있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10년 전부터 던전 발생 빈도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것을 ‘격변’이라 부르고요. 원수호 헌터도 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때쯤, 수호 인생에 가장 기억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저희는 레벨 제한 던전의 등장이 두 번째 격변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10년에 한 번씩 격변이 일어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것 외에는 짐작 가는 것이 없으니까요. 전 세계적인 추세이니, 마인의 수작이라 보기도 힘들고요.”
마인은 끔찍한 놈들이지만 그 정도 역량은 없다. 그런 힘이 있었다면, 진작에 인류가 멸망했을 것이다.
신성현이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군요.”
“예, 그럼 의뢰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던전은 브레이크가 임박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진행 중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되돌아 나오셔도 됩니다. 던전에서 확보한 부산물도 모두 원수호 헌터께 드리겠습니다. 진행한 부분까지 기록만 확실히 해 주십시오.”
수호가 생각에 잠겼다.
‘얻을 게 많아.’
하루빨리 2성을 졸업하고 싶은 수호였다.
그러나 상왕련의 던전 공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레벨을 올릴 수 있을 테고.’
공짜로 2성 던전에서 레벨 업 할 수 있는 기회다.
부산물도 오롯이 수호의 차지.
‘스킬 룬도 보장받는 셈이지.’
포기하기 아까운 2개의 스킬 룬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득은 크고, 손해는 없어.’
곰곰이 따져 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수호가 반쯤 승낙한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몇 명이나 같이 가게 됩니까?”
“원래는 팀 단위로 움직여야 하지만, 원수호 헌터가 수락하면 최소한의 인원만 함께하게 될 겁니다. 전투는 원수호 헌터가 전담하면 되니까요.”
수가 적은 것도 마음에 든다.
경험치 분산도 적고,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테니까.
“근데 도대체 왜 접니까? 협회에도 2성 헌터가 있을 텐데요.”
수호의 마지막 질문에 신성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워낙 당연한 일이라.”
“……?”
“제가 아는 2성 헌터 중에 원수호 헌터가 가장 강하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으로요.”
“제가요?”
“예, 확실합니다. 협회장님께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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