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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쪽이었다.
“이걸 왜 보여 주십니까?”
“그중에 하나 고르세요. 이미 매입이 끝난 건물들입니다. 가게가 약간 협소한 듯하여 준비해 봤어요.”
“네?”
“이주가 싫으면 지금 이 건물을 매입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세금까지 깔끔하게 처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지금 건물을 선물로 준다는 소리야?
수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요즘 들어 벌이가 커졌지만, 어려서부터 서민으로 살아온 수호였다.
건물을 선물로 준다는 발상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음…….”
“받으세요. ‘부탁’보다 이쪽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부탁 쪽을 수락했으니, 건물을 받는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하하.”
상왕련주가 호탕하게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사진만 보고 선택하기 힘들 테니, 직접 둘러봐요. 이 친구가 언제든 안내해 줄 겁니다. 결정되면 이 친구한테 말하고.”
상왕련주가 정장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죠, 감사는 제가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일이 바빠서 그만 가 봐야겠군요. 다음에도 종종 커피 얻어 마시러 와도 될까요?”
“네, 현수 아버님이신데요.”
“오호- 그것참 듣기 좋은 표현이네요. 하하하.”
노인답지 않게 경쾌한 웃음을 남기고, 상왕련주가 떠나갔다.
『드디어 본좌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인가?』
발룡이의 자발머리없는 목소리만 수호의 귓가를 울렸다.
* * *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건물주라니!
수호로서는 짐작도 못 했던 일이었다.
낡은 용달차를 바꿀 생각조차 안 했던 수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 본좌를 이 쉰내 나고 좁아터진 곳에 머물게 할 셈이었느냐.』
“쉰내는 네가 치킨을 하도 먹어서 나는 치킨 무 냄새잖아! 치킨 박스는 왜 재깍재깍 안 버리는 건데?”
『별 상관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고르거라! 본좌는 어서 새 영역을 확인하고 싶구나.』
발룡이는 생각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수호는 며칠 동안 상왕련주가 준비한 건물을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늘 수호는 결정을 내렸다.
‘이사를 가야겠어.’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게.
곳곳에 추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가게를 이어 달라는 유언도, 내가 방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말씀하신 것이니까.’
할아버지는 수호의 방황을 지켜봤다.
그랬기에 수호가 가게를 이어 평온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유언은 그런 의미였다.
‘가게 자체보다 할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하지.’
당연히 가게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건물에서 본격적으로 가게를 키워 볼 생각이었다.
고심 끝에 수호가 건물을 선택했다.
지금 가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3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수호가 휴대폰을 발룡이에게 내밀었다.
건물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여기 괜찮지? 크기도 딱 적당하고, 위치도 가깝고.”
단골을 잃지 않으려면 가까운 편이 낫다.
마인 건이 있으니 협회와 완전히 멀어지는 것도 불안하고.
『좋다. 여전히 본좌의 격에는 못 미치지만 골방보다는 낫구나. 앞으로도 분발하여 본좌의 격에 어울리는 영토를 얻어 오도록 하여라.』
“알겠나이다, 위대하신 헤츨링이시여.”
『이익!』
.
.
.
일사천리.
건물을 고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가 하루 뒤로 다가왔다.
가게 인테리어는 물론, 세간살이까지 새 건물에 모두 준비되었다.
상왕련 측에서 마련해 놓은 것이다.
“사람이 이래서 돈이 있고 봐야 하는구나.”
상왕련의 능력에 감탄한 수호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가자! 짐을 싸라! 아니, 본좌가 마법으로 도와주지. 어서 옮길 물건을 정해라.』
“웬일로 그렇게 부지런을 떠냐?”
『그간 말은 안 했지만, 본좌는 생전에 이런 후줄근한 곳에 몸을 뉘어 본 적이 없느니라.』
“알았어. 이사 가면 유아용 침대라도 하나 사 줄게.”
『유아라니!』
발끈하는 발룡이를 두고 수호는 가게와 집 안을 살폈다.
‘별로 들고 갈 것도 없네.’
진열장과 테이블 등은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새 건물에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까.
‘냉장고와 수트 케이스만 신경 쓰면 되겠어.’
그 외에 컴퓨터와 옷가지 등을 챙기면 된다.
차원 보따리가 있으니, 따로 사람을 부를 필요도 없다.
『이 텔레비전이라는 건 어떻게 할 거지? 근데 왜 이제껏 한 번도 켜지 않은 것이냐? 다른 상점에는 다들 켜 놓았던데.』
그때 가게와 방을 오가며 파닥거리던 발룡이가 TV를 가리켰다.
“그거? 음…….”
아마 각성하던 날 TV가 고장 났었지?
『왜 그렇게 찜찜한 표정인 것이냐?』
“고장 난 것 같은데, 그 뒤로 안 켜 봤거든. 혹시 멀쩡한 거 아닐까 하고.”
『그럼 작동시켜 보면 될 텐데, 뭘 그리 망설이는 거지?』
그때 연기가 났었던 것 같은데.
폭발하지는 않겠지?
“그래, 켜 보자.”
수호가 코드를 꽂았다.
LED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작동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고장인가?』
“잠깐만, 리모컨 한번 눌러 보고.”
수호가 TV를 향해 리모컨을 겨눴다.
전원 버튼을 누른다.
팟-
TV가 켜졌다.
한데 화면에 나타난 것은 뉴스도 예능도 아니었다. 드라마도, 스포츠도 아니었다.
“우주선이야, 뭐야?”
SF영화의 우주선 조종실처럼 온갖 기계 장비와 스크린이 빼곡히 들어찬 공간.
그것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저기 작은 생물이 돌아다니는구나.』
발룡이가 화면 속을 가리켰다.
그곳에 작은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수호가 중얼거리며 눈을 TV에 가까이 가져가는 순간.
[차원 AUFTP-44를 발견하셨습니다.]
놀라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45화 마도 공돌이(1)
[새로운 대상 【생존자 윌슨】을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생존자 윌슨】과 교류를 시작합니다.]
메시지를 본 수호는 의문을 느꼈다.
‘생존자 윌슨?’
붉은 망치 드워프. 온달곰족.
누가 봐도 ‘무리’라는 느낌이 들던 다른 교류 대상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지.’
수호가 옆에서 파닥이고 있는 발룡이를 쳐다봤다.
발룡이는 차원 패널에 ‘광룡 발랑카르’라는 단독 명칭으로 등록되어 있다.
‘발룡이처럼 저 사람(?)도 혼자인 모양인데.’
생존자라는 수식어도 심상치 않고.
수호는 고민을 내려놓고 관찰을 시작했다.
미리 살펴 두는 편이 교류가 원만할 테니까.
‘아무리 봐도 과학이 발달한 문명으로 보여.’
SF영화 속 우주선 내부처럼 생긴 공간.
빼곡히 들어찬 스크린과 전자 장비.
‘과학’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전경이었다.
『저건 난쟁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좀 특이하게 생겼군.』
옆에서 구경하던 발룡이가 말했다.
발룡이는 우주선 같은 전경보다 ‘생존자 윌슨’에게 더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수호의 눈길도 윌슨에게 향했다.
“3등신쯤 되려나? 키는 작은데 팔다리는 드워프보다는 가늘고, 얼굴도 좀 앳되게 생겼네.”
시스템 메시지로 종족명을 알 수 없었기에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윌슨이 특이한 행동을 했다.
“뭐? 정말이야?”
스크린을 보며 깜짝 놀라 소리치더니, 이내 타닥타닥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발룡이가 중얼거렸을 때, 윌슨이 고개를 휙 돌렸다.
수호는 마치 윌슨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원문을 발견했어?’
이제껏 수호가 행동하기 전에 발견한 종족이 없었는데.
놀라고 있으려니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쉘터 안에 차원문이? 설마 마물인가? 마물이 차원문을 뚫은 거야?”
경악해 소리치는 윌슨.
수호는 계속 살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마물 아닙니다!”
윌슨의 몸이 움찔 굳었다.
“……?”
차원문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에 놀란 윌슨이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저는 타 차원에 사는 인간입니다. 우연히 당신 세계와 차원문이 연결됐어요. 저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수호가 변호하자 윌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타 차원? 그럼 마물은 아니란 말이지?”
“당연하죠. 저는 오히려 마물과 싸우는 쪽입니다. 근데 이곳에도 마물이 있는 거예요?”
“있는 거냐고? 마물 말고는 있는 게 없는 세상이야.”
윌슨이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웨에에에엥-
사이렌이 울렸다.
윌슨이 서둘러 스크린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것들! 또 쳐들어왔어!”
빽 소리치며 버튼을 조작하는 윌슨.
같은 시간, 수호의 눈앞에도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차원 임무 【생존자를 도와라!】를 획득하셨습니다.]
수호가 서둘러 임무를 확인했다.
『생존자를 도와라!』
-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윌슨. 그의 쉘터가 마물에게 공격받고 있다. 그를 도와 마물을 물리치자.
- 보상 :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
생존자란 명칭에서 혹시나 했더니, 윌슨이 있는 곳은 쉘터, 일종의 대피소였다.
그런 쉘터에 마물이 침공한 상황.
‘마물이 쳐들어왔다는 말이지? 기회야.’
교류의 시작을 부드럽게 만들 기회.
『무슨 일이지? 시야 좀 움직여 보거라.』
수호는 시야를 움직였다.
티브이 화면이 쉘터 내부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잖아 쉘터 외부의 전경이 화면에 떠올랐다.
“눈밭이네.”
새하얀 설원.
그 위에 높고 두꺼운 콘크리트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성벽 안에 금속으로 만든 직육면체 구조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쉘터였다.
『벽 한쪽이 무너졌군. 그 사이로 마물이 밀려들고 있다.』
발룡이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벽이 무너져 있었다.
마물 떼가 속속 그곳을 통과했다.
지이이잉-
금속 쉘터 벽이 갈라졌다.
틈으로 삐쭉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총이야?”
역시 과학 문명답다고나 할까.
쉘터 벽에서 수십 문의 총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두두두두두두-
총알이 발사됐다.
앞선 마물이 죽어 나갔다.
하나 마냥 쉘터 측이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너무 많군. 저런 식이면 마물이 건물에 도달할 것이다.』
쓰러지는 마물만큼 새로운 마물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마물의 질긴 생명력 때문에 여러 번의 공격이 필요했다.
“내가 나설 타이밍이구만.”
수호는 화염 포마검을 꺼냈다.
쑥-
칼을 쥔 수호의 손이 TV 화면을 통과했다.
화염 강격을 머금은 검이 마물의 무리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대지가 부르르 떨릴 정도의 충격.
그와 함께 박살 난 마물이 천지 사방으로 흩날렸다.
‘한 번 더!’
콰아아아아앙-!
몇 번의 검격이 이어졌다.
마물의 무리가 짓이겨졌다.
투두두두두두-
총알이 남은 마물을 처리해 나갔다.
.
.
.
[차원 임무 【생존자를 도와라!】를 완수하셨습니다.]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가 20 상승합니다.]
새 차원의 첫 임무가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 * *
“대단한데! 거대하고 불타는 검이라니! 근데 왜 그렇게 큰 거지?”
수호가 시야를 쉘터 내부로 돌리자마자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크린을 통해 수호의 전투 장면을 본 것이다.
“저희 세상 사람은 모두 저랑 크기가 비슷합니다.”
“차원이 연결되면서 뭔가 어긋난 거려나? 어쨌든 그건 됐고, 그쪽은 원래 검을 쓰고 마력을 다루는 문명이야?”
“아뇨, 과학이 발달한 문명인데, 20년 전부터 던전이 생기고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됐군. 그런 것치고는 마력을 굉장히 훌륭히 다루는 것 같던데. 아, 내 정신 좀 봐. 난 윌슨이야. 노움이지. 도와줘서 고마워.”
“저는 인간이고 원수호라고 합니다. 근데 노움이란 건 종족의 명칭인가요?”
“우리 세상에 사는 사람의 총칭이야. 우리 스스로 노움이라 부르거든. 이젠 나 혼자만 남았으니, 별 의미는 없지만.”
혼자만 남았다고?
“윌슨 님, 혹시 다른 분들은……?”
“다 죽었을걸? 나도 정확히는 몰라. 여기 갇힌 지 10년도 넘었으니까. 세상은 망했고 통신이 연결된 다른 쉘터도 모두 무너졌으니, 어쩌면 진짜 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윌슨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유감입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야, 이젠 아무 느낌이 없어. 그리고 자꾸 존댓말을 쓰는데, 그러지 말라고. 난 혼자 10년을 넘게 살았어! 모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는데, 딱딱하게 대하지 말아 줘.”
윌슨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그럼 말은 편하게 할게. 너도 수호라고 불러.”
“그래, 그거야. 수호! 그럼 우린 친구인가?”
“친구? 좋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편보다는 훨씬 편하다.
“하하, 드디어 이 윌슨에게 두 번째 친구가 생겼어. 실버, 너도 수호한테 인사해!”
윌슨이 고함쳤다.
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와 윌슨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왕왕-
꼬리치며 짖는다.
아무리 봐도 보통 생명체는 아니다.
“실버, 안녕! 근데 윌슨, 실버는 혹시 기계인 거야?”
“응, 과학 기술과 마법의 융합. 우리는 그걸 마도 공학이라고 부르는데, 윌슨은 그 마도 공학을 이용해 만들어진 마도 생명체야. 귀엽지?”
“귀여워. 마도 공학이라니, 대단하네.”
실버의 모습은 금속이란 점을 제외하면 강아지와 똑같았다.
움직임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 세상에 마력이 생겨난 지 100년이야.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달한 기술이지. 뭐,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다.
“100년? 그럼 그 전엔 마력이 없었어?”
“당연하지. 애초에 마력이 존재했다면, 과학 기술은 발전하지도 못했을걸? 너희 세상에도 20년 전에는 마력이 없었다며.”
수호는 목덜미가 서늘했다.
‘어쩌면 지구도 80년쯤 후에…….’
문득 떠오른 멸망이라는 단어를 얼른 털어낸 수호가 서둘러 물었다.
“근데 어쩌다 세상이 마물에 뒤덮인 거야?”
“빌어먹을 마족놈들 때문이지!”
“마족!”
마기는 마계에 퍼져 있는 기운이고, 마족은 그 마계의 주민이다.
“그래, 마족! 100년 전부터 세상에 던전이란 게 생겨났단 말이지. 그 뒤로…….”
윌슨이 저쪽 세상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참을 들은 수호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30년쯤 전부터 마족이 너희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맞아, 그때부터 빌어먹을 마기가 세상을 좀먹기 시작한 거야. 그전에도 마기에 물든 미친놈들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막을 만했거든. 근데 마족이란 놈들이 나타난 뒤로는 속수무책이었어.”
위기감이 수호의 몸을 감쌌다.
“마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놈들인데?”
“개체마다 달라서 딱히 정의할 수가 없어.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괴상한 기술을 쓰며, 정말정말 죽이기 힘들다는 것만 공통점이야. 젠장.”
그놈들만 없었어도 세상이 망해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윌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수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좀 더 서둘러야 해.’
윌슨의 세상과 지구가 꼭 같은 시간을 두고 움직이란 법은 없다.
당장 내일이라도 마족이 지구에 들이닥칠지 알 게 뭔가.
수호의 마음이 급했다.
“마족은 어떻게 상대했어?”
“우린 마도 공학을 이용해 마족과 맞섰지. 근데 졌어. 마도 공학만으로는, 최소한 우리 수준의 마도 공학으로는 안 된 거지.”
“음, 그럼 마족은 아직 그쪽 세상에 남아 있는 거야?”
“아니. 세상을 이 꼴로 만든 뒤에 홀연히 사라졌어. 또 모르지, 언제 나타나서 내 목을 물어뜯을지도.”
윌슨이 깔깔대며 웃었다.
마음 깊숙이 파고든 외로움과 광기가 느껴졌다.
수호는 더는 윌슨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더 상세한 내용은 차차 관계가 깊어지면 묻자.’
대신 윌슨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야기는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그럼 윌슨한테 필요한 건 뭐지? 그걸 알아야 또 차원 임무가 뜰 텐데.’
잠시 고민한 수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윌슨,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 나한테 원하는 거라든가? 기왕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 이쪽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선물로 줄게.”
“오- 역시 친구! 나한테 가장 좋은 건 친구와의 대화야. 하지만…….”
대화?
10년 넘게 강아지랑 지냈으니 이해는 간다.
근데 대화도 임무 취급을 받을 수 있으려나?
궁금해하는 사이 윌슨이 말을 이었다.
“너도 할 일이 있겠지? 그러니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고, 그래! 여행을 가면 음식부터 맛보라는 속담이 있지. 너희 세상의 음식을 먹어 보고 싶어. 근데 물질을 이쪽으로 전달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 봐!”
수호가 흔쾌히 대답했다.
메시지가 눈앞을 수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원 임무 【윌슨의 고독(지속)】을 획득하셨습니다.]
『윌슨의 고독』
- 멸망한 세상의 유일한 노움, 윌슨. 10년 동안 쉘터에서 혼자 지내 온 그는 뼛속까지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그의 고독을 덜어 주자.
*지속형 임무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개선될 때까지 반복해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 보상 :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
임무를 확인한 수호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수호가 찾던 것이 곧 눈에 들어왔다.
『안 된다! 그것은 본좌의 것이니라!』
발룡이가 남긴 치킨 1마리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알아, 이따 갚아 줄게. 잠깐만 빌려줘!”
『본좌가 밤참으로 먹으려고 일부러 남겨놓은 치킨이란 말이다! 눅눅해도 괜찮게 양념으로!』
“안다고. 윌슨이랑 이야기만 끝나면 바로 다시 시켜 줄게.”
『이자다! 이럴 때는 분명 이자를 받아야 하느니라!』
“알았어. 2마리로 갚아 줄 테니까, 저리 좀 가 봐.”
발룡이가 물러섰다.
수호는 그제야 치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윌슨, 이거 한번 먹어 봐. 닭, 그러니까 식용으로 키우는 조류의 일종인데 그걸로 만든 요리야. 이름은 치킨이고.”
“오, 치킨! 고마워 친구!”
윌슨이 치킨을 받아들었다.
곧 상자를 열고 치킨을 입으로 가져간 윌슨.
근데 표정이 좀 애매하다.
“입에 안 맞아?”
“아니야. 괜찮은 맛이야.”
“맛없으면 말해도 돼. 이쪽은 먹거리가 풍부한 편이니까, 다른 거로 구해다 줄게.”
“친구의 첫 선물을 남기면 쓰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호.”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차원 임무가 완수되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먹지 마. 급하게 구하느라 신경을 못 써서 그래. 내가 더 맛있는 걸 구해다 줄게. 진심이야. 네가 안 먹었으면 좋겠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만 먹을게. 사실 맛이 없지는 않아. 그저 이런 맛에 좀 물렸을 뿐이야.”
“이런 맛? 너희 세상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어?”
“그런 것보다는… 이거 인공 조미료가 들어갔지?”
“아마도?”
“쉘터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인공 재료야. 고기부터 양념까지 모두. 네가 준 치킨에서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나서.”
“아, 그렇구나.”
“솔직히 맛이 없지는 않았어. 그러니 그냥 먹어도 돼.”
윌슨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수호의 머리에 떠오른 해결책이 있었다.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봐.”
수호는 TV 앞에서 물러나 방 안으로 향했다.
수트 케이스 앞에서 소리쳤다.
“바비, 바비! 잠깐만 나와봐.”
인공 조미료가 싫다면 자연산으로 간다!
46화 마도 공돌이(2)
“으압-! 수호? 갑자기 왜 그러납! 또 뭔가 쳐들어왔납!”
배를 까뒤집고 물에 떠 있던 바비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미안. 부탁할 게 있는데, 좀 급해서 목소리가 컸어.”
“별일 없으면 괜찮답. 근데 무슨 부탁인갑?”
“잉어 좀 잡아 줘. 다섯 마리만.”
“그거야 쉽집. 근데 한 며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납?”
한동안 이사 때문에 장사를 접는다.
잉어즙도 짜지 않는다.
“갑자기 필요해져서. 그냥 먹을 거니까 통통한 놈으로 부탁해.”
“알았답! 금세 잡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랍!”
수호에게 대답한 바비가 아이 비바니들에게 외쳤다.
“수호 아저씨가 잉어를 잡아 달란답. 다 같이 도와주잡!”
“앗! 아죠씨, 제가 잉어 잡아 줄게욥!”
“저도 잡아 줄게욥! 저 잉어 잘 잡아욥!”
“난 두 마리 잡아 줘야집.”
퐁- 포포포퐁-
비바니들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언제 봐도 귀엽단 말이야.’
특히 아기 비바니들은 볼 때마다 흐뭇했다.
비바니들을 윌슨이랑 연결해 줄 수 있다면, 윌슨의 외로움이 한 방에 사라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수호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어? 저건 또 뭐야?”
강변에 못 보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이군. 제단이 있는 걸 보니, 사당인가? 크큭-』
뭔가를 깨달은 발룡이가 중2스럽게 웃었다.
찜찜한 표정을 짓던 수호가 그쪽으로 시야를 옮겼다.
때마침 건물에서 누군가 달려 나왔다.
철푸닥.
그러더니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소리쳤다.
“위대한 분이시여! 오셨군요!”
온달곰족 무녀, 온달소라였다.
“소라? 그 건물은 뭐야?”
“위대한 수호신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설마 했더니…….
“그랬구나. 근데 강변에 용케 집을 지었네? 강철 나무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바비 님께서 강철 나무를 잘라 터를 내어 주셨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서로 친하게 지내기로 한 거야?”
“예, 부차 때문이라고는 하나, 저희 온달곰족이 큰 실례를 범했기에, 저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거듭 사과했습니다. 바비 님도 마음이 너그러운 분이라 금세 용서해 주셨고요.”
“잘됐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위대한 분께서 이 숲의 모든 이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천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한 분의 종인 온달곰족은 앞으로도 숲의 다른 종족들과 사이좋게 지낼 것입니다.”
파르르-
온달소라가 털 뭉치 꼬리를 떨며 대답했다.
“그래, 어쨌든 사이 좋게 지내면 좋지. 근데…….”
말하는 사이 궁금한 것이 생긴 수호가 질문을 덧붙였다.
“농사는 잘되어 가?”
“최선을 다해 농사짓고 있습니다. 앞으로 두 달이면 첫 수확이 가능할 듯합니다.”
“잘됐네. 고생했어.”
“다 위대한 분의 은총입니다.”
파르르!
“근데 당장 먹을 만한 것 좀 없을까? 열매도 좋고, 야채도 좋고, 싱싱한 거로.”
“앗!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마을에 연락해서 최고로 좋은…….”
“아니, 그렇게 대단한 것까지는 필요 없고, 그냥 싱싱하고 먹을 만한 거면 좋겠어.”
“예, 금세 가지고 오겠습니다!”
온달소라가 후다닥 마을로 달려갔다.
『크큭- 신도들을 잘 부려 먹는군. 훌륭하구나.』
발룡이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수호는 기다렸다.
어찌나 서둘렀던지 온달소라가 바비보다 일찍 도착했다.
“헥, 헥- 위대한 분이시어. 여기 가져왔나이다.”
온달소라가 가져온 것들을 제단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차원 보따리 속에 야채가 한가득 들어찼다.
“오, 싱싱한 야채네. 이거 나도 먹을 수 있겠는데.”
수호는 만만해 보이는 야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삭!
상큼한 식감과 달달한 풍취가 입안을 감쌌다.
『그런 풀 쪼가리 따위, 쯧. 어서 본좌의 치킨이나 갚거라.』
발룡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수호는 야채를 한 종류씩 맛봤다.
그러던 수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어?”
『그건 저번에 먹었던 곰다래 열매 아니냐?』
“맞아. 한 달에 한 번 먹는 건데, 이게 또 들어 있네. 소라!”
수호가 온달소라를 불렀다.
“예, 위대한 분이시어.”
“곰다래 열매가 들어 있는데, 이거 귀한 거 아니었어?”
“흔하지는 않지만, 위대한 분께는 얼마든 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못 먹는데…….
수호는 그냥 감사히 받기로 했다.
꼭 수호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 고마워. 그럼 다음에 또 부탁할게.”
“예,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응?”
파르르-!
“부디 자주 목소리를 들려주시옵소서.”
“…어, 그래.”
퐁- 포포포퐁-
그때 물속에서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수호, 수호! 다 잡았답!”
“아죠씨, 제가 잡았어욥!”
“저도 잡았어욥!”
“많이 드세욥!”
수호가 얼른 아이스박스를 가져와 과일 잉어를 받았다.
“이거 5마리가 심하게 넘어 보이는데?”
“우리 아이들이 널 위해서 너무 열심히 잡았답. 이해해랍!”
“응, 이해했어.”
물 위에 배를 까고 줄지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아기 비바니들.
저 모습을 보면, 뭔들 이해 못 할까.
* * *
아삭-
“맛있지? 그러니까 너무 툴툴거리지 마.”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잉어를 굽기 위해 발룡킬라를 동원했다.
빠르고 화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수호는 툴툴거리는 발룡이를 달래기 위해 곰다래 열매를 먹여야 했다.
“그래그래, 마력도 오른다며. 앞으로도 곰다래 열매 받으면 나눠줄게. 됐지?”
『협상 타결이다.』
곰다래 열매는 발룡이의 마력도 조금 높여 주었다. 그 덕에 발룡이의 기분이 풀렸고.
수호는 씩 웃은 뒤, TV로 다가갔다.
윌슨은 실버를 무릎에 앉힌 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스크린에 세상이 망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윌슨! 음식 가져왔는데, 먹어 볼래?”
“아까 준 치킨도 괜찮았는데, 정말 다른 걸 가져온 거야?”
“응, 가져오기로 했잖아. 이건 아까랑 맛이 좀 다를 거야.”
유기농 야채와 자연산 잉어다.
농약이라고는 없는 진짜 자연의 산물!
수호가 야채와 잉어구이를 윌슨에게 보냈다.
“생선! 통으로 구운 생선이라니! 흑-”
쉘터 안에 가득 차는 잉어구이의 고소한 풍미.
윌슨은 먹기도 전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서 먹어 봐. 입에 안 맞으면 다른 거 구해 줄게.”
“아니야, 입에 안 맞을 리가 없지. 정말 고마워, 수호. 잘 먹을게.”
윌슨이 잉어구이에 달려들었다.
‘인공 식품만 먹었다고 했으니, 생선구이는 정말 오랜만이겠지?’
수호는 그 모습을 짠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맛이 아니라, 세상이 망하기 전의 추억을 먹고 있을지도…….
수호는 한층 더 각오를 다졌다.
‘지구가 망하게 둘 수는 없어.’
당장 자신의 앞가림부터 해야겠지만, 세상이 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정말 잘 먹었다, 수호. 묘하게 과일 향이 느껴졌지만 어릴 때 먹었던 생선의 맛과 비슷했어. 고마워.”
머잖아 잉어구이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윌슨이 수호에게 인사했다.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윌슨의 고독】을 완수하셨습니다.]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가 30 상승합니다.]
야채는 먹지도 않았는데, 임무가 완료되며 만족도가 올랐다.
마물 처치를 도왔을 때보다 더 많이.
수호는 윌슨의 마음을 느꼈다.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야, 윌슨. 잉어 남았는데 보내 줄까? 보관은 할 수 있지?”
“오- 그럼 나야 좋지!”
수호는 10마리도 넘게 남은 잉어를 보내 주었다.
윌슨이 벽면의 벽을 조작하자 벽에서 문이 열렸다.
“벽에 냉장고가 있네.”
우리 집도 저러면, 타 차원이랑 소통하기 편하려나?
“좁은 공간에 몰아넣기 위해서 대부분의 가구는 벽에 붙박이 형식으로 설치되어 있어.”
윌슨이 대답하며 야채를 집어 들었다.
아삭-!
“어때?”
“이것도 진짜, 흑-”
한동안 폭풍 같은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수호는 윌슨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수호, 우리가 아무리 친구가 되었다지만, 이런 고마움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돼. 최소한 내 기준은 그래. 그래서 나도 네게 선물을 하고 싶어. 혹시 뭐 필요한 것은 없어?”
보상을 물어보다니.
이제까지 없던 패턴이다.
윌슨의 문명이 지구 이상으로 발달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수호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뭘 달라 그러지?’
뭘 받을 수 있는지를 모르니, 대답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솔직하게 묻자.
“특별히 받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야. 네가 뭘 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 그거참 잘 됐군, 그럼 지금부터 너한테 뭐가 필요한지,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 볼까?”
“응?”
“대화다! 대화야말로 문화의 꽃이요, 시초며 지성인의 소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세상과 지금 네 사정에 관해 이야기 해 줘. 나는 너희 세상 이야기가 무지 듣고 싶거든. 그 뒤에 내 이야기도 더 해 줄게.”
“…어, 그래.”
왠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수호는 TV 앞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 * *
맙소사!
[차원 임무 【윌슨의 고독】을 완수하셨습니다.]
[생존자 윌슨의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수다 좀 떨었다고 임무가 또 완수되다니!’
물론, ‘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무려 4시간이나 이야기했으니까.
심지어 아직 안 끝났다.
“그러니까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이지? 근데 넌 차원문을 숨기고 싶고?”
“응, 차원문이 가구나 가전제품 같은 곳에 생기는 바람에.”
“차원문 위치를 이동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돼서 아쉽군.”
“맞아. 가구를 옮기는 건 문제가 없는데, 가구에서 차원문을 분리하는 건 안 되더라고.”
수트 케이스와 냉장고는 움직여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차원문이나 연결된 세상에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소중한 새 친구를 위해 한 가지 선물을 주지! 차원문을 숨기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윌슨이 버튼을 눌렀다.
벽에 구멍이 뚫리더니 주먹만 한 쇳덩어리가 나타났다.
“그게 뭐야?”
“마력 공간 차단 결계 생성기야.”
“공간 차단?”
“이름 길이만큼 대단한 물건은 아니야. 그래도 네 세상에는 없는 물건이니 간파할 사람도 적겠지. 받아서 살펴봐.”
윌슨이 물건을 전송했다.
[마력 공간 차단 결계 생성기]
-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공간 차단 결계 생성기. 설치 시 30제곱미터 범위에 공간 차단 결계를 생성한다. 생성기에 등록되지 않은 인물에게는 시각 및 청각, 후각 등의 감각이 차단된다. 마력을 흘려 넣어 사용자를 등록할 수 있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100
“시각을 차단한다고? 어떻게 작동하는 거야?”
“설치하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벽으로 보여. 통과도 못 하지. 등록된 사람은 통과할 수 있고, 안에서 발생하는 기척도 다 느낄 수 있어.”
“벽으로 느껴진다고?”
“응, 설치해 보면 알 거야. 설치도 쉬워. 그냥 필요한 위치에 내려놓고 마력을 살짝 불어넣으면 되니까.”
이건 확실히 유용한 물건이다.
“고마워, 윌슨. 도움이 될 것 같아.”
“틈나는 대로 나랑 이야기나 나누자고. 그럼 내가 너한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줄 테니까.”
“어, 그래. 윌슨 너 공돌이였지.”
윌슨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저쪽 세상 마도 공학의 권위자였다.
그랬기에 쉘터에서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고.
“크크, 그래 이 공돌이님이 좋은 걸 많이 만들어 줄 테니까, 너도 날 즐겁게 해 줘, 친구.”
“오케이, 콜!”
문명의 발전 방향이 비슷한 탓에 윌슨과는 한층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했다.
덕분에 수호도 윌슨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럼 오늘은 이만 보내 줄게. 가서 이삿짐 싸.”
“그래, 윌슨. 내일 봐.”
막 물러나려던 수호에게 윌슨이 말했다.
“네 능력은 훌륭하고 발전 가능성도 커.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움직여, 친구. 대비는 빠를수록 좋은 법이거든.”
그것을 끝으로 새로운 교류 대상이자, 수다쟁이 친구와의 첫 교류가 끝났다.
윌슨의 충고가 수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좀 더 과감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그럼 뭐부터 해야 할까?
수호는 금세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장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
그것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타룽가 님, 달콩 님, 블톤 님!”
수호가 냉장고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새로운 장비 좀 만들까요?”
47화 마도 공돌이(3)
세 드워프 족장이 냉동실 문 앞으로 모였다.
“거인님! 부르셨습니까?”
“새로운 장비를 만드시겠다고요? 어떤 물건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최고의 장비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타룽가, 달콩, 블톤이 차례대로 소리쳤다.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전에 타룽가 님이 만들어 주신 철창인데, 이 정도 수준의 물건을 좀 더 만들었으면 해요.”
수호는 [보급형 강철창]을 드워프들에게 전송했다.
타룽가가 창을 받아 들었다.
“전에 드린 물건이군요. 근데 뭘 많이 때리신 것 같습니다.”
장인이라 그런가, 그걸 한눈에 알아보네.
“예, 어쩌다 보니. 그 정도 수준으로 무기와 방어구, 액세서리도 만들었으면 해요.”
[보급형 강철창]은 고급 등급 아이템.
수호가 가게에서 팔던 것보다 한 단계 윗급이다.
물론 드워프들에게 어려운 의뢰는 아니었다.
“당연히 만들어 드려야죠. 이 정도는 마력을 강하게 품은 재료도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액세서리는 가공에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래도 문제없습니다. 건설 작업에 동원된 부족원을 차출하면 되니까요.”
세 족장이 차례대로 외쳤다.
수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일주일에 5개 정도씩만 팔 생각이라. 그 정도면 하루 만에 충분히 만드실 수 있을 테니까요.”
“5개요? 2시간이면 뚝딱입니다, 껄껄.”
“2시간? 자네 솜씨가 좀 녹슬었나 보군, 타룽가. 난 1시간이면 충분하다네.”
“쯧쯧, 난 50분일세.”
아웅다웅하는 족장들.
수호는 더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팔 물건은 그렇게 하고요. 타룽가 님, 며칠 전에 말씀드린 제 장비 수리 및 업그레이드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재료로 쓰라고 주신 장비가 많이 훼손되어서 아직은 추출 및 재생 단계입니다. 송구하게도 본격적인 제작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재료는 수호가 박영일의 주검에서 벗겨 온 아이템이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네?”
“지금 가진 재료로는 적회색 수호자 정도의 물건을 만들긴 힘들겠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아마 화염 포마검 수준의 물건이 나올 것 같습니다.”
타룽가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데 어쩔 수 없었다.
박영일의 장비는 대부분 고급 등급.
게다가 부서진 상태다.
거기서 추출한 재료로 화염 포마검 수준의 장비를 만드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적회색 수호자는 오우거의 부산물이 있었기에 만들 수 있었고.
“역시 그렇군요. 제가 재료를 더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제작은 멈추시고 원래 쓰던 장비나 잘 수리해서 보내 주세요.”
“그거라면 내일 아침에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달콩이 냉큼 끼어들었다.
“저도 수리에 한 손 보태겠습니다. 그럼 밤중에라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블톤도 질세라 참가했다.
“밤중이라니! 거인님께서도 주무셔야지. 당장 시작하세! 2시간 안에 끝내는 거야!”
수호가 드워프 족장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루 이틀 여유가 있어요.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곧 더 좋은 재료를 구해볼 테니, 그때 좋은 물건 부탁드릴게요.”
수호는 냉장고 앞에서 물러났다.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이냐?』
윌슨과 긴 대화에 지쳐 침대에 누워있던 발룡이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망한 세상을 봤더니,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잘 생각했다. 어서 힘을 길러서 본좌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거라.』
“그래, 알았다. 그전까진 이 형 말 잘 들어.”
『형? 본좌는 760살이다!』
“우리 나이로 15살이지. 근데 750살이면서 왜 슬그머니 10살 올리냐?”
하는 짓이 딱 미성년자구만.
그렇게 이사 전날의 밤이 저물었다.
* * *
탁탁-
이사를 마친 수호가 손을 털었다.
“끝났다.”
이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죄다 차원 보따리에 넣어 왔더니 간단하네.”
이사뿐 아니라 냉장고, 수트 케이스, TV의 세팅도 끝났다.
“결계 생성기 이거,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그지, 발룡아?”
수호는 카운터 뒤쪽의 벽으로 다가갔다.
쑥-
수호가 벽 속으로 사라졌다.
결계 생성기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벽 뒤 숨겨진 공간.
냉장고와 수트 케이스, TV가 나란히 놓여 있다.
『흥! 그깟 마법, 이 몸이 마력을 조금만 더 되찾으면 눈감고도 시전할 수 있다.』
“이건 마법이 아니고 마도 공학인데? 마력을 되찾아야 할 수 있단 말은, 지금은 못 한다는 소리 아니냐.”
『이익-!』
수호는 가짜 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생성기에 등록된 대상이라 수호는 벽을 통과하고 안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발룡이도 마찬가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벽으로 보인다.
“감각 스탯 덕분에 벽에서 약간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모르는 상태였으면 구분 못 했을 거야.”
『그 정도면 헌터란 놈들은 거의 못 알아볼 것이다. 마력에 썩 민감하지 못하니까.』
발룡이의 말대로 헌터들은 전반적으로 마력에 민감하지 않았다.
시스템에 의해 주어진 힘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
“이사 돕느라 수고했어. 약속은 지킬게.”
발룡이도 마법으로 가구를 날랐다.
『그래, 본좌에게 고개 조아려 감사를 표하거라. 그리고 어서 공물을 바쳐라!』
“공물 같은 소리 하네. 어쨌든 세팅 도와준 건 고마워. 치킨 바로 시켜 줄게.”
『새로운 동네에는 새로운 치킨이 있는 법. 어서 배달 앱을 실행하거라!』
그사이 휴대폰과 앱에 대해서도 깨우친 발룡이었다.
“거기나 여기나 같은 동네구만. 네가 보고 골라. 그러면 시켜 줄 테니까.”
수호는 스마트폰을 발룡이에게 던져 주고 새 가게를 둘러봤다.
‘차원문을 멀리 둘 수가 없으니.’
언제든 차원문을 돌보려면 차원문의 위치를 영업장 가까이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수호의 주거 공간은 이번에도 가게 뒷방이 되었다.
물론, 이전보다 몇 배는 넓고 시설도 좋다.
‘뒷방에서 지내야 하는 건 똑같지만, 가게는 차원이 달라.’
몇 배 넓어진 내부.
깔끔한 하얀색 인테리어.
가지런히 놓인 진열장과 테이블 및 간단한 휴식 공간까지.
‘상전벽해네.’
구멍가게였던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넓어진 만큼 물건 채울 공간도 크다.
당연히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
‘팔 물건이야 금방 조달할 수 있을 테고.’
원래 팔던 일반 등급은 물론, 고급 등급도 금세 만들어질 것이다.
‘개업 전에 홍보부터 해 볼까?’
수호는 헌터 앱을 켜 게시물을 작성했다.
『가게 이전 및 재개업 기념 초특가 세일!』
- 안녕하세요, 수호 아이템&잡화의 사장입니다. 이번에 가게를 확장 이전하게 되어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고객님들 덕분입니다. 이전 기념으로 고객님들께 할인 및 새 제품 판매를 시작합니다.
- 개업 후 1달간 일반 등급 아이템 30% 할인!
- 고급 등급 장비 런칭!
- 자세한 제품 사양은 추후 따로 공지하겠습니다. 이전에 팔던 물건 이상의 가성비를 약속드립니다!
- 이전 장소는 원래 가게 위치에서…….
“이만하면 됐겠지?”
게시물을 등록했을 때 발룡이가 외쳤다.
『골랐다! 오늘은 똥집을 먹어 보겠다. 값은 싼데 치킨보다 더 낫다는 평을 하는 인간도 있어서 전부터 궁금했었지.』
“그새 리뷰도 읽으셨어? 대단하네, 발룡이.”
『흥! 본좌는 하찮은 인간의 의견도 수렴할 줄 아는 깨인 드래곤이다. 그리고 오늘은 본좌가 힘을 썼으니 맥주도 시켜다오.』
“맥주 같은 소리 하네. 미성년자가.”
『본좌는 760살이다!』
“헤츨링이지.”
발룡이는 맥주를 포기하는 대신, ‘심연의 음료’를 큰 사이즈로 시켰다.
수호는 주문을 마치고 헌터 앱을 다시 켰다.
그새 댓글이 잔뜩 달려 있었다.
┗ 그저께부터 가게 문 닫았더니, 확장 이전! 이보시오 사장 양반! 이런 건 미리미리 이야기해 주셨어야지!
어쩔 수 없었다.
워낙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벌어진 일이라.
┗ 폐업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행이다.
┗ 폐업은 웬 폐업? 장사가 얼마나 잘됐는데.
┗ 가성비 맛집들이 원래 잘 망함. 마진이 적어서.
┗ 지금 그런 얘기나 할 때냐? 저기 안 보이냐? 고급 등급!
┗ 이보시오, 사장 양반! 고급 등급 장비 성능은 왜 안 적혀 있소? 말을 꺼냈으면 옵션은 공개하는 게 강호의 도의 아니오?
┗ 이 정도면 유료 전환하고 5연참도 안 하는 웹소설 작가랑 동급인데? 사장님 저랑 다툴래요?
공개하고 싶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다.
‘물건이 안 나왔으니, 공개할 수가 있어야지.’
┗ 대박! 도의고 나발이고 개업하면 달려간다. 사장님 말대로 원래 팔던 물건만큼 가성비 나오면, 진짜 대박of대박임.
┗ 원래 물건보다 완성도 좀 떨어져도, 고급이면 3성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 하악!
┗ 하악 님 등장ㅋㅋ 개업하자마자 리뷰 올라올 듯ㅋㅋ
┗ ㅋㅋㅋ 난 리뷰 보고 사야지.
┗ 그럼 매진ㅋㅋㅋ
“이만하면 홍보는 충분하고.”
애초에 단골들 대상으로 알음알음해 오던 장사라 더 큰 홍보는 필요 없었다.
입소문이 나면 알아서 손님이 늘어날 테니까.
“그럼 다음은 재료를 구할 차례인가?”
수호가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시켜 놓은 치킨은 먹고 가야 할 것 아니냐!』
“같이 가려고?”
『당연하지. 네 안목으로 제대로 된 재료나 고를 수 있겠느냐?』
은근히 친절한 자식 같으니.
피식 웃은 수호가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래, 밥은 먹고 가자.”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즐비했던 골동품 상점은 이제 없다.
그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아이템 상점들.
『여긴 왜 온 거지?』
“재료 살 거라니까.”
『상왕련과 거래하는 편이 낫지 않나?』
대한민국 아이템 시장의 70%를 주무르는 상왕련이다.
하나 인사동 아이템 거리는 상왕련과 무관했다.
상품성 없는 물건.
제대로 가격 측정이 힘든 아이템만 유통되기 때문이다.
“이쪽이 더 싸게 좋은 재료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째서?』
“특이한 걸 살 거거든. 그런 물건은 상왕련에서는 취급을 안 해.”
『도대체 뭘 사려는 거냐?』
“남들 안 사는 물건.”
수호는 죽 늘어선 가게를 둘러보며, 거리를 따라 걸었다.
지루해진 발룡이가 물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본좌에게 정확하게 말해 보거라.』
“재료 아이템 중에 등급은 높은데 가공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거든. 그런 물건은 실험용이나 연구용 아니면 수요가 없어. 잘 안 팔리지. 그걸 사려는 거야.”
『이제 알겠군. 난쟁이들을 이용할 셈이구나.』
“응, 드워프는 다 가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저 가게로 들어가라.』
발룡이가 허름한 간판을 단 상점을 가리켰다.
“왜?”
『저기서 제법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 생명체 특유의 파장이 없으니, 분명 아이템에서 나오는 것이겠지.』
“오! 발룡이 잘했어. 착해.”
『이익! 한 번만 더 본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는!』
수호는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어서 오쇼. 둘러보고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하고.”
사장이 게을러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호는 진열된 물건을 살펴 나갔다.
‘어디 보자, 발룡이가 말했을 정도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수호도 감각에는 자신 있으니까.
예상대로 곧 하나의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다.』
수호는 발룡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진열장에는 2개의 금속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앞에 붙은 종이에 재료의 옵션이 적혔다.
[아이언 터틀 갑각]
- 아이언 터틀의 등껍질.
- 재료 아이템
- 아이템 등급 : 고급
- 내구도 370
“사장님, 이거 좀 구경할 수 있을까요?”
수호는 사장을 불렀다.
손에 직접 쥐어야 시스템 설명을 볼 수 있다. 설명창을 띄워 종이에 표기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들고 봐도 별다를 거 없을 텐데.”
구시렁거린 사장이 느릿하게 진열장으로 다가왔다.
한데 그때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수호가 구경하던 물건을 손으로 가리키면서.“이거 얼마요? 내가 사겠소.”
짤막한 체구에 두꺼운 팔다리를 한, 어딘지 익숙한 외형의 노인이었다.
48화 대장장이인가 기부천사인가?(1)
“양덕수 님, 아시다시피 제작 계열 각성자들은 저희 상왕련에 소속되면 장점이 많습니다. 노하우를 공유할 수도 있고, 서로의 기술을 무도한 무리로부터 지켜낼 수도 있지요, 그리고…….”
“됐습니다. 저는 혼자가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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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수 장인님, 저희 오성은 각성자의 계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클래스, 어떤 유형의 각성자라도,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최고의 지원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성으로 오십시오.”
“됐수다,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라. 그리고 제작이 돈으로 다 될 줄 알면 오산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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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좋은 말로 할 때 우리 천수 길드에 들어오쇼. 물건 잘 팔아 준다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
“거참, 이제 하다하다 별 건달 같은 놈들까지.”
“뭐? 건달? 이 영감이 진짜. 그렇게 배짱 튕기다가 배때기에 구멍 나는 수가 있어!”
“잘됐네. 때마침 나한테 잘 드는 칼이 한 자루 있는데. 자, 여깄다. 구멍 잘 나나 한번 찔러 봐. 여기야 여기. 잘 보이게 티셔츠 벗어 줘? 자, 됐지? 찔러! 뭐 하냐, 안 찌르고?”
“X발, 뭐 이런 미친 영감탱이가 다 있어!”
“나 미친 거 알았으면 괜히 깝죽거리지 말고 꺼져!”
모두 양덕수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꼴통, 광인, 괴짜, 미친 대장장이.
양덕수는 여러 번의 헤프닝을 통해 생긴 자신의 별명이 싫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별명 따위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뛰어난 아이템!
인류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의 뛰어난 아이템을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요, 흥미며, 심지어 성격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부도 명성도, 인간 관계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양덕수였다.
물론, 그런 성격 탓에 그는 궁핍했다.
뛰어난 대장 기술을 가지고도 양산품을 만들지 않으니.
제대로 만든 물건도, 개량한답시고 두들기고 부숴 대니.
그의 수중에 돈이 많을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지금은 어린 손녀에게 얹혀 사는 신세.
그런 양덕수가 돈이 생길 때마다 하는 일이 있었으니.
‘저거다! 저건 분명 훌륭한 잠재력을 품은 재료야!’
가끔 인사동 아이템 거리를 돌며 수요 없는 재료를 사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양덕수는 어느 가게에서 하나의 물건을 발견했다.
재료 앞에 누군가 서 있었지만, 그딴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본능처럼 가서 외쳤을 뿐.
“이거 얼마요? 내가 사겠소!”
한데 양덕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옆에서 누군가 태클을 걸어온 것이다.
“잠시만요, 어르신. 이거 제가 먼저 보고 있던 물건입니다만.”
그제야 양덕수는 옆에 웬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놈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양덕수의 눈이 허우대 멀쩡한 놈, 수호의 손으로 향했다.
‘망치라고는 잡아 본 적도 없는 손이구먼, 흥!’
수호의 손은 깨끗했다.
재생 스탯이 생긴 뒤, 잡티조차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한 일.
‘그런 놈이 이런 훌륭한 재료를 탐내? 이런 분수도 모르는 놈!’
괴짜 양덕수.
그는 투철한 장인 정신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사회성도 모자랐다.
그랬기에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 대뜸 소리칠 수 있었다.
“너는 이 재료를 가질 자격이 없어!”
* * *
수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물건을 구경하는 중에 갑자기 끼어든 노인.
‘재료를 가로채려는 것까지야 기분은 나빠도 이해는 돼.’
좋은 물건을 보면 탐이 나는 법.
욕심 때문에 강짜 부리는 경우야 비일비재하다.
‘근데 자격은 또 뭔 소리야?’
갑자기 자격 유무를 따지기 시작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처음 본 사이에 뭘 안다고.
수호의 말에도 가시가 돋쳤다.
“자격인지 뭔지 모르겠고요. 제가 먼저 사려던 물건이니 좀 기다리세요. 영감님은 제가 일 다 보고 나면, 알아서 하시고요.”
“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수호는 발끈하는 양덕수를 무시했다.
대신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어서 좀 보여 주세요.”
“안 돼! 네 손을 탈 물건이 아니야! 허여멀건 한 손으로 어딜 만지려 들어!”
근데 주인장이 대꾸하기도 전에 양덕수가 끼어들었다.
『별 해괴한 인간을 다 만나는구나. 내가 혼을 내어 줄까? 3마리면 되는데.』
‘됐어, 자식아.’
수호는 흑심을 드러내는 발룡이를 향해 모처럼 눈빛 텔레파시를 쏘았다.
그 뒤 재빨리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구경은 됐고, 제가 그냥 살게요. 이거 얼맙니까?”
발룡이가 보장했다.
수호의 감각에도 재료의 농후한 마력이 느껴졌다.
양덕수가 더 들러붙기 전에 그냥 구매해야겠다.
“천만 원! 두 개니까, 2천!”
사장이 신난 표정으로 외쳤다.
양덕수가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크큭- 외통수군.』
발룡이의 말대로였다.
‘저 영감님 때문에 바가지 쓰게 생겼네.’
이 거리의 물건들은 정가가 없다.
부르는 게 값.
그러니 가게 사장이 신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왜 네가 사 간단 말이냐! 물건에는 그에 걸맞은 주인이 있는 법!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물건을 돈만 있다고 갖는다는 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야!”
양덕수가 빽 소리쳤다.
수호고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사장이 끼어들었다.
“영감님, 그래서 돈은 있어요? 2천만 원만 내면, 난 아무한테나 팔아도 콜인데.”
“……!”
양덕수가 움찔했다.
가진 돈이라고는 5백뿐.
집이든 은행이든 양덕수에게 현금은 더 없다.
‘저 희멀건 녀석만 아니었으면, 분명 5백에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양덕수가 괜히 수호를 꼬나봤다.
그때쯤 수호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저 인간, 돈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이겼군, 수호. 크큭-』
발룡이가 수호의 심정을 대변했다.
수호가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2천만 원, 카드 되죠?”
“현금 하시면 2% DC 되는데.”
“됐어요, 그냥 카드로 해 주세요.”
수호는 카드를 내밀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어쩌다가 이리 무도한 일이 대낮에 버젓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망연자실한 양덕수를 놔두고, 수호가 아이템을 받아 들었다.
[아이언 터틀 갑각]
- 아이언 터틀의 등껍질. 단단하여 가공이 몹시 힘들다.
나머지 성능은 종이에 적힌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공이 힘들다는 문구만 쏙 빠져 있었다는 점을 빼면.
“더 필요한 건 없으쇼?”
“예, 안녕히 계세요.”
수호는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양덕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한데.
『따라온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 * *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노인만 아니었어도 그냥 확!
할아버지 생각만 안 났어도 진짜 마!
“도대체 어쩌자는 말씀입니까?”
인사동 아이템 거리 한구석.
인적 드문 골목에서 수호가 양덕수에게 물었다.
“난 그걸 절대로 자네에게 넘길 수 없네!”
“넘기고 자시고, 내 돈 주고 산 내 물건인데요?”
“그래도! 안 돼! 잘 생각해 보게. 그 재료도 자신을 잘 다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 빛을 발하지 않겠나?”
“그래서 어쩌자고요? 진짜 이게 갖고 싶으시면, 저한테 2천만 원에 사가시든지요.”
수호가 ‘꼬우면 돈 내시든가’를 시전했다.
양덕수가 움찔했다.
하나 그가 괜히 미친 대장장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이익-! 안 돼! 절대로 안 돼. 아이템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한테 절대로 넘길 수 없어!”
양덕수는 수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아…….”
수호가 한숨을 내쉴 때, 양덕수의 땡깡이 이어졌다.
“하다못해 제대로 된 장비라도 차고 다니는 놈이면 모를까. 어디 1성이나 갓 달았을까 싶은 놈한테는 절대로 못 줘!”
응?
뭔가 영 거슬리는 내용이 있는데.
“제대로 된 장비요? 그게 있으면 어쩌시게요? 그럼 포기하실 겁니까?”
장비는 차원 보따리에 들었다.
“흥! 네깟 녀석이 무슨 제대로 된 장비! 제대로 된 물건을 본 적이나 있어? 봐 봐! 이 정도는 돼야 명함이라도 내미는 거야.”
아이템 이야기가 나오자 양덕수가 벌떡 일어섰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척 보기에도 좋은 물건이었다.
단!
‘기준을 지구로 두면 훌륭한 아이템인 건 맞겠지.’
한데 어쩌나.
수호의 안목은 지구 수준을 진작에 초월했다.
“그 정도가 어르신이 말하는 자격이에요?”
수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양덕수가 기대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단검이 무시당하자 기분이 상한 양덕수가 마구 소리쳤다.
“재료를 잘 고르기에 안목이라도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주 눈까지 삐었구먼. 절대 안 돼! 진짜 너 같은 녀석이 그런 재료를 가지는 건 인류에 대한 죄악… 어? 으어!”
한데 어느 순간 말이 뚝 끊겼다.
놀라 입이 떡 벌어져 있었으니까.
“어때요?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물건인가요?”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꺼낸 화염 포마검을 흔들어 보였다.
양덕수가 화염 포마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 한번 보세나. 한 번만.”
“싫은데요.”
수호는 애검이 남의 손을 타게 두지 않았다.
“어르신, 저는 이만하면 차고 넘칠 정도로 양보해 드린 거예요. 어디 다른 데 가서는 그러시지 마세요!”
수호의 말에도 양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인지 부조화로 뒤죽박죽 상태였다.
‘저, 저 때깔! 저건 보통 물건이 아니야.’
양덕수의 눈은 화염 포마검의 대단함을 알아봤다.
‘어째서 저런 귀물이 저런 애송이의 손에 있는 거지?’
한데 머리는 다른 말을 되뇐다.
양덕수가 사력을 다해도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한 물건.
그게 어떻게 저런 놈의 손에 들려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협회장의 허리춤에나, 강민제의 등허리에 걸렸으면 납득이라도 하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아마 스킬 나부랭이로 아이템의 외관과 기운을 조작한 게 분명해!’
양덕수는 자신의 안목과 대장장이로서의 인생을 부정하지 못했다.
차라리 상대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양덕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수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
매운맛을 보여 줄 수밖에.
스릉-
화염 포마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양덕수가 움찔했다.
“영감님, 그럼 자요. 쳐 보세요.”
“뭐?”
“영감님 단검으로 제 칼을 쳐 보시라고요. 영감님 각성자 맞죠? 근력이 일반인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었을 테고요. 제 칼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으면, 그 대단한 영감님 단검에 제 칼이 부서지겠죠.”
양덕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당장 박살을 내 주지. 그 전에!”
“또 뭐요?”
“네 칼이 부서지면, 재료는 내놔!”
“좋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였지만, 수호는 수락했다.
더는 대거리하고 싶지 않았고, 화염 포마검이 부서질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적회색 수호자만 빼면 화염 포마검은 수호의 아이템 중에서도 최고니까.
‘그래도 아무 조건 없이 응할 수는 없지. 기분의 문제니까.’
수호가 손해 볼 일은 없겠지만, 마음은 또 다른 법.
그래서 수호는 재빨리 덧붙였다.
“영감님이 지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왜 그렇게 놀라세요? 영감님이 질 가능성도 있잖아요? 저는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내기를 받아들였는데, 영감님도 뭔가 거셔야죠?”
한동안 고민하던 양덕수가 입을 열었다.
“좋네. 내가 지면 딱 한 번, 자네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해 주지. 칼을 갈라면 갈고, 무기를 만들라면 만들어 주겠네. 이래 봬도 나 모셔 가려고 찾아온 길드가 손가락으로 다 세지도 못 해.”
드워프가 있는데, 굳이 뭐 하러?
“됐고요, 현물 아니면 안 받습니다.”
“이익! 좋다, 그럼 나는 이걸 걸지. 이게 전부니까, 떠들어도 더는 없어!”
양덕수가 5만 원짜리 돈다발을 흔들었다.
전 재산 5백만 원이었다.
씩 웃은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들어 보였다.
“알았습니다. 그럼 치세요.”
“흥!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그렇게 당당한지 모르겠지만, 재료 내놓을 준비나 해!”
빽 소리친 양덕수가 단검을 내리그었다.
후우웅-
파공성과 함께 단검이 떨어져 내렸다.
제작 계열 고렙 각성자의 전력이 담긴 참격.
그것이 화염 포마검에 내리꽂혔고.
채애앵-
양덕수의 단검이 깨끗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어?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내 단검이!
고급 등급에, 절삭력 강화까지 붙은 내 단검이!
이럴 수는 없어!
양덕수의 절규가 인사동 아이템 거리를 울렸다.
49화 대장장이인가 기부천사인가?(2)
‘이건 말이 안 돼. 꿈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양덕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매끈하게 잘린 단검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어째서 내구도 200이나 되는 내 단검이 잘릴 수가 있는 거지?’
대장장이 인생 30년.
제작계열로 각성하여 아이템 제작에 몰두한 지 15년.
한평생 쇠를 만져온 양덕수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이 돈은 제 거 맞죠, 영감님? 그럼 저는 갑니다.”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집어넣고, 돈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자, 잠깐! 이보게 잠깐만!”
양덕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슬슬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생각은 한곳으로 귀결되었다.
‘수작을 부린 게 아니라면, 그 붉은 검! 그건 정말로…….’
그 검이 양덕수의 단검보다 몇 배는 더 좋은 물건이라는 말이 된다.
‘명품! 명품이야! 분명 제작 템으로 보였는데, 어떻게… 누가?’
양덕수가 고민하거나 말거나.
수호는 슬슬 걸음을 옮겼다.
‘공돈도 벌었으니, 손해 본 것도 없고. 이쯤에서 빠지자.’
양덕수가 넋이 나간 지금이 적기다.
한데 수호가 장내에서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 양덕수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리게! 이것 좀 보게나!”
수호는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호오- 아까 돈 주고 산 물건보다 낫구나.』
양덕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 있었다.
수호에게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갈 때 가더라도, 이거 한번 보고 가게.”
양덕수가 다가와 물건을 내밀었다.
수호가 물건을 받아 들었다.
검푸른 색을 띤 주먹만 한 구슬이었다.
[재생의 핵]
- 강한 마력이 응집된 구슬. 단단하며 원래대로 회복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가공이 매우 힘들다.
- 재료 아이템
- 아이템 등급 : 희귀
- 내구도 990
“이건?”
“그건 몇 년 전에 랭커에게 무기를 만들어 주고 대가로 받은 걸세. 4성 던전 보스 몬스터에게서 나온 재료야.”
스킬 룬이 그렇듯 재료 아이템도 비슷하다.
등급이 같을 경우 높은 던전, 강한 몬스터에게서 드롭된 것이 더 좋다.
그러니 저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위급 재료였다.
‘대박인데? 가공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재료는 수호의 관심을 끌었다.
인사동 아이템 거리를 더 돌아도, 저만한 물건을 구하기는 힘들 터다.
“그래서요? 이걸 어쩌시려고요?”
“내기 한 판 더 하세! 난 이번에 그걸 걸지.”
양덕수가 [재생의 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종목은요?”
“내기 종목은… 아까 자네가 산 재료를 하나씩 나눠서 아이템을 만드는 걸세. 나중에 비교해서 더 좋은 물건을 만드는 쪽이 이기는 거야.”
재료 2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다.
“제가 걸 물건은요?”
“자넨 물건을 걸지 않아도 돼.”
“무슨 말입니까?”
양덕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아까 자네가 내어 놓은 칼, 그거 제작 아이템이지?”
“글쎄요.”
“싫으면 굳이 말 안 해도 되네. 자네가 내기에 지면…….”
양덕수의 눈이 화르르 빛났다.
‘누군가 대단한 대장장이가 이 청년 근처에 있어. 분명해!’
은거 기인?
어쩌면 외국에서 온 대단한 제작 계열 각성자가 아닐까?
중국에서 헌터들이 심심치 않게 탈출한다던데 혹시…….
‘어쨌든 만나야 해!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꼭 물어봐야 해!’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대장장이 기술에 도움이 될 터다.
그런 생각으로 양덕수가 말했다.
“자네 칼을 만든 대장장이, 그 사람을 좀 만나게 해 주게.”
수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가 질 경우, 제 아이템 제작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거죠?”
“바로 그 걸세! 다른 건 바라지 않아!”
수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자신 없는데.’
너무나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질 자신이.’
질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하죠. 나중에 딴말하지 마세요.”
“나도 마찬가지야! 혹시나 그때 가서도 의뭉 떨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걸세. 나 양덕수야, 양덕수!”
“예, 양덕수 영감님. 성함은 잘 알았으니까, 그럼 [재생의 핵]은 담보 삼아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괜찮죠?”
“그래. 자네도 아까 산 재료 하나 주게. 그래야 물건을 만들지.”
“여기 있습니다.”
“좋아. 그럼 날짜와 아이템을 비교할 장소는…….”
내기의 규칙이 정해졌다.
연락처도 교환했다.
“그럼 그때 보죠.”
“그래, 그날 보세! 도망가지나 말게!”
양덕수가 으름장을 놓고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
수호가 양덕수의 뒷모습과 [재생의 핵]을 번갈아 쳐다봤다.
‘혹시 기부 천사인가?’
성격이 좀 이상하니, 천사는 아니려나?
* * *
“이 재료로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잘 만들어야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는 안 되고요.”
타룽가가 [아이언 터틀 갑각]을 손에 들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수호는 설명이 더 필요함을 느꼈다.
“예, 적회색 수호자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면 곤란해서요. 근데 그 재료로 적회색 수호자까지는 원래 어렵겠죠?”
영웅 등급이 떠 버리면 양덕수에게 보여 줄 수가 없다.
“원하시면 제가 수명을 깎는 각오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달콩과 블톤도 손을 보태면 어떻게든…….”
“아니요!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니까요. 화염 포마검보다 약간 낮은 수준으로 만들어 주세요. 가능하시죠?”
“물론입니다. 그 정도는 조금만 공을 들이면 만들 수 있습니다. 껄껄.”
“딱 그 정도면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사실 진짜 힘을 쓰셔야 할 곳은 따로 있어요.”
타룽가가 궁금한 눈빛을 빛냈다.
수호가 [재생의 핵]을 전송했다.
“아, 이것은?”
“아까 그 재료보다 더 좋죠? 그거로 만들 물건은 최선을 다해 주세요. 제가 직접 사용할 생각이거든요. 잘 부탁드릴게요.”
“껄껄, 이쪽이 진짜였군요. 알겠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대에 어울리는 물건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달콩과 블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료가 부족하면 몬스터 사냥이라도 나가겠습니다!”
“성벽 및 내부 시설의 설계가 대부분 끝난 상황이라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저도 밤새워 돕겠습니다!”
질세라 말하는 두 드워프.
수호는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세 분이 힘을 합치는 만큼, 저도 잔뜩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적회색 수호자 만한 물건이 나올 것 같다.
기대감이 치솟았다.
“거인님. 전에 말씀하신 판매용 물건 중에, 좀 더 나은 것들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건 언제 드리면 될까요?”
타룽가의 목소리였다.
“완성됐군요. 지금 주시겠어요?”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타룽가가 개업에 맞춰 판매할 ‘고급’ 등급 아이템을 가지러 달려갔다.
나머지 족장들도 주먹을 불끈 쥐고, 작업 준비를 위해 돌아갔다.
『그 영감한테 받은 재료는 내기에 지면 돌려줘야 할 텐데, 바로 제작을 맡겨도 되는 것이냐?』
가만히 구경하던 발룡이가 물었다.
“질 것 같아?”
『크큭- 하긴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를 꿰뚫는 본좌의 예지안으로도 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군.』
“그러니까.”
.
.
.
『수호 아이템&잡화 신제품 런칭 이벤트!』
- 안녕하세요, 고객 여러분! 저번에 가게 이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는 더 좋은 소식으로 찾아왔습니다. 전에 언급했던 ‘고급’ 등급 아이템의 자세한 옵션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아래 옵션과 사진을 첨부하니, 구경하시고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단, 물건 판매는 개업에 맞춰 진행되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수호가 사진을 찾아 첨부한 후, 아이템 옵션을 적어 나갔다.
[불굴의 마체테]
-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만든 마체테. 뛰어난 강도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칼날 덕분에 전투는 물론 벌목, 도축 등 다양한 작업에 유용하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물리 공격력 220
- 【하급 절삭력 강화】【하급 내구도 강화】
- 체력 +10
- 내구도 380
수호가 씩 웃으며 게시글 등록 버튼을 눌렀다.
“좀 과한가 싶기도 한데.”
이제껏 팔던 ‘일반’ 등급에 비해 마체테는 너무 좋다.
“그래도 이 정도는 감당할 만해. 괜찮을 거야.”
수호는 박영일과의 싸움으로 자신의 전력을 깨달았다.
3성 수준의 헌터와는 충분히 싸움이 된다.
한데 4성 이상의 헌터는 국내 전체의 10%를 조금 넘는다.
그러니 웬만한 위협은 물리칠 자신이 생긴 것이다.
“고급 등급 정도면 대형 길드가 욕심낼 정도는 아니니, 그쪽도 괜찮을 테고.”
조심해야 할 것은 드워프의 노출인데.
괜찮을 것이다.
사장님이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실력 있는 대장장이’와 커넥션이 있다.
댓글로 그런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으니까.
“약간의 리스크는 감수해야지.”
윌슨의 세상을 보고 결심한 것도 있고.
수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응? 누가?’
감각 스탯이 가게 앞에 누군가 나타났음을 경고했다.
정확히는…….
‘유리창에 붙어서 뭐 하는 거야!’
누군가 유리창에 얼굴을 박고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악- 가, 갖고 싶어.”
아니?
수호가 깜짝 놀라 가게 문을 열고 나섰다.
“양수정 헌터, 도대체 거기서 뭐 하세요?”
“마, 만지고 싶어.”
리뷰를 써 주는 고마운 단골, 양수정.
그녀는 수호가 가게에서 나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쇼윈도에 눈을 처박고는 어떻게든 가게 안을 들여다보려고 노력 중.
“양수정 헌터?”
수호가 양수정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툭.
“으학-”
양수정이 깜짝 놀라 후다닥 물러섰다.
“도대체 왜 밖에서 그러고 계세요?”
“…마체테.”
“예?”
“마체테가 보고 싶어요.”
“아, 네. 일단 들어오세요.”
“아직 개업 안 하셨잖아요.”
정신 줄을 놓은 것 같더니, 묘한 타이밍에 예의를 차리는 양수정이었다.
“괜찮아요. 단골이시니까, 그냥 놀러 오셨다고 생각할게요.”
“고, 고맙습니다!”
양수정이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가게 내부를 구경할 만도 한데, 양수정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마체테만 찾았다.
수호가 마체테를 가져다 내밀었다.
“여기요, 한번 구경해 보세요.”
“네!”
양수정이 수호가 내민 마체테를 받아 들었다.
손잡이를 꼭 쥐더니, 몸을 부르르 떤다.
부웅- 부웅-
허공에 휘둘러 보더니.
이내 칼날을 눈앞으로 가져가 살폈다.
칼이 자꾸만 얼굴과 가까워졌다.
“하아-”
“뭐 하세요?”
수호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앗! 죄송합니다.”
양수정이 혓바닥을 냉큼 집어넣으며 고개 숙였다.
‘왜 갑자기 칼은 핥으려 드는 건데?’
수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사이, 양수정이 마체테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 사장님, 혹시 지금은 안 파시죠?”
“네, 개업하면 팔려고요.”
“며, 몇 개씩 파세요?”
“1주일에 5개쯤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량이 원하는 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러시군요. 혹시 예약은……?”
양수정이 간절한 눈빛을 빛내며 물어 왔다.
“당일에 먼저 오신 분께 파는 게 원칙입니다만, 양수정 헌터님께는 개업일에 맞춰 예약 판매해 드릴게요. 저희 최고 단골이시고, 매번 리뷰도 써 주시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제가 리뷰 꼭 쓸게요!”
“네, 근데 리뷰는 개업하면 쓰셔야 해요. 지금 쓰지 마시고요.”
“앗! 그렇군요.”
“제값 주고 사시는데, 괜한 오해 받으면 안 되죠.”
“헤헤, 고마워요. 그럼 아쉽지만 개업일에 맞춰서 올게요.”
“네, 그때 뵙죠. 늘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물건 팔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수정이 떠나갔다.
마지막까지 마체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룡이가 말했다.
『네게 특이한 능력이 있었군.』
“……?”
『본좌가 보기에, 네게는 이상한 존재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느니라. 크큭-』
“…너도 그중 하나라고는 생각 안 해 봤냐?”
『뭐라고?』
* * *
수호는 아이템을 받아 들었다.
“타룽가 님, 이거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만들다 보니 흥이 올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종류는 다르지만, 제 눈에는 화염 포마검 이상 가는 수준으로 보이는데요.”
“하하…….”
“내기에 쓸 거라 이 정도로 공들이시지는 않아도 되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것도 제가 사용해야겠어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죠. 고생하셨어요.”
“재생의 핵으로 만드는 물건은 진짜 제대로 공을 들여, 거인님 마음에 꼭 맞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수호가 냉장고 앞에서 물러났다.
‘그럼 끝내러 가 볼까.’
승부를 결정지으러 갈 시간이다.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승부를.
50화 대장장이인가 기부천사인가?(3)
깡-
망치가 쇠를 두드린다.
까앙-
양덕수의 몸에 아지랑이처럼 마력이 피어오른다.
‘지금이다!’
양덕수는 60레벨이 되며 얻은 고유 스킬, 【매조지】를 시전했다.
몸을 휘감은 마력이 응축된다.
모조리 모이고 모여 손끝으로 흘러들더니.
이내 망치로 빠져나갔다.
까아앙-!
청아한 소리가 공방을 울렸다.
새파랗게 일던 기운이 모두 모루 위의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아악-!!
칼날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양덕수는 망치를 내려놓았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선 양덕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땀이 흥건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해냈다.”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모루 위에 빛나는 저 칼을 보라.
저것은 분명 양덕수 인생에 다시없을 작품이다.
“후욱- 후욱-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양덕수가 겨우 몸을 일으켜 단검을 집어 들었다.
[집념의 칼날]
- 어느 대장장이의 오기와 고집이 녹아든 단검. 완벽한 집중 상태의 작업 덕분에 실력 이상의 물건이 완성됐다. 몹시 날카롭고 견고하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물리 공격력 250
- 【중급 절삭력 강화】
- 근력 +5 민첩 +10
- 내구도 290
“내가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희귀 등급 아이템.
사실 이전에도 희귀 등급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희귀 등급 재료 아이템에 고급 이상의 재료를 합쳐 완성했다.
한데 이번엔 달랐다.
“오직 고급 등급 재료만 가지고!”
내기의 조건.
‘아이언 터틀 갑각에 일반 금속만 추가해서 도검류 아이템 제작하기’라는 제한 안에서 완성했다.
그럼에도 무려 ‘희귀 등급’이 떴다.
“희귀 등급 중에 좀 낮은 편이긴 하지만…….”
양덕수는 확신했다.
수호 뒤에 있는 대장장이가 외국인이든 은거 기인이든 상관없다고.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걸 보고도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야.”
붉은 검을 만든 대장장이가 깜짝 놀라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붉은 검이라면 자신의 단검과 견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양덕수는 낙관했다.
“재료의 제한이 있는 한 이것보다 좋은 건 절대로 못 만들 테니까.”
양덕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일어섰다.
공방 구석 냉장고에서 손녀가 가져다 놓은 수박 주스를 꺼내 마셨다.
몸에 힘이 돌았다.
“기다려라.”
양덕수가 결전을 기대하며 외출을 준비했다.
* * *
수호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가까워서 좋네.’
양덕수와 내기의 결과를 가리는 날이다.
굳이 멀리까지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 약속 장소가 가까웠다.
쪼로록.
아이스 녹차 라떼가 빨대를 따라 입속으로 빨려든다.
『어째서 1잔만 시킨 거지? 1인 1잔 이상이라고 저기 적혀 있는데?』
“넌 투명화 상태잖아. 인(人)도 아니고.”
『도의의 문제다. 본좌도 마실 수 있는 입이 있고, 미각을 느낄 혀도, 음미할 마음도 있느니라!』
“치킨도 아닌데 먹으려고? 언제는 마력만 먹는다더니.”
『이미 버린 몸이니라. 분명히 말하는데, 앞으로는 어딜 가든 본좌의 것도 함께 시켜야 할 것이다. 안 그랬다가는 결단코 네 일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야.』
“알았다. 알았어.”
녀석이 치킨에 질리는 날이 오더라도, 발룡킬라를 못 쓰는 일은 없겠구만.
다른 음식에도 흥미를 보이니까.
수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을 때.
커피숍 문이 열렸다.
양덕수가 입가에 웃음을 단 채, 수호의 앞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승부를 앞두고 다정하게 인사나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아, 예.”
“어서 물건을 꺼내게. 과연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재어 보세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는데요.”
“왜? 이제 와 겁이라도 났나?”
수호가 카운터 위에 커다랗게 적힌 문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1인 1잔이요. 가서 주문부터 하세요. 쫓겨나기 싫으면.”
“…….”
양덕수가 카운터로 향하더니, 잠시 후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왔다.
“이제 됐으니 시작하세!”
“그러죠.”
양덕수가 [집념의 칼날]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태도가 자못 당당했다.
“먼저 살펴봐도 좋네.”
그는 자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템을 먼저 내어놓았다.
‘이걸 보고 나면 제 물건은 안 꺼내려 할지도 모르지. 패배를 직감할 테니까.’
양덕수가 허황한 상상을 하는 동안, 수호가 집념의 칼날을 살폈다.
‘잘 만들었네.’
희귀 등급 중에 하급 정도는 될 듯했다.
옵션도 상당히 좋다.
‘고렙 대장장이란 말은 들었는데.’
수호는 헌터 앱 게시판과 제작 계열 커뮤니티에서 양덕수에 관해 검색해 보았다.
꼴통, 괴짜, 미친 대장장이.
그런 키워드들을 바탕으로 양덕수가 일으킨 헤프닝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은 실력보다 괴팍한 성격 쪽이었다.
‘오히려 성격 때문에 실력이 저평가된 느낌이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양덕수가 내놓은 단검은 훌륭했다.
탁.
수호가 [집념의 칼날]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잘 봤습니다.”
“그래. 패배를 인정하겠나?”
양덕수가 대뜸 물었다.
“제 건 꺼내지도 않았는데요?”
“꺼내나 마나지. 고급 등급 재료로는 저거 이상 못 만드네. 나한테 다시 해 보래도 자신할 수 없을 정도야. 자네가 어디서 외계인이라도 주워 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불가능해.”
외계인은 아니고 드워픈데.
따지고 보면 외계인 맞나?
피식 웃은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물건을 꺼냈다.
[석화비도石火飛刀]
- 단검 끝에 가느다란 사슬이 달린 형태의 무기. 팔찌에 사슬을 연결하여 사용한다. 위대한 명인이 흥에 차올라 만들었다. 부싯돌의 불꽃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상대의 목을 파고든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물리 공격력 360
- 【중급 투사체 속도 증가】【하급 명중률 보정】【자동 회수】
- 민첩 +20
- 내구도 320
“한번 보세요.”
금속으로 만든 납작한 팔찌.
그 끝에 가느다란 사슬에 매달린 비도가 달려 있다.
끔뻑.
양덕수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이, 이럴 수가.”
양덕수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손도 벌벌 떨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이게 정말 그 재료로 만든 물건이라고?”
양덕수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수호에게 물었다.
“다른 재료 섞으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다면서요? 어때 보이세요? 뭐가 더 들어간 것 같아요?”
내기가 성립하고 조건을 정할 때, 양덕수는 분명 저런 말을 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다른 재료의 기운은 없어. 아이언 터틀 갑각으로만 만든 게 분명한데…….’
양덕수가 [석화비도]를 꽉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흘끔.
[집념의 칼날]로 시선이 갔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물건이 이제는 초라해 보였다.
“어째서, 어떻게 이런 물건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던 양덕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부르르.
양덕수가 풍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영감님, 왜 그러세요?”
수호가 물었을 때, 양덕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일어나고 그래? 이 양반이 또 뭔 짓을 하려고?’
수호가 걱정하는 찰나.
털썩.
양덕수가 의자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수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보게, 내가 졌네. 졌는데…….”
주변의 시선이 단박에 모여들었다.
“야, 저기 좀 봐. 저 어르신 무릎 꿇었어.”
“뭔데, 뭔데? 남자 바짓가랑이 잡은 거야? 와, 대박. 남자끼리 저러는 건 처음 보네.”
“나이 차도 엄청나 보이는데.”
“예, 예쁜 사랑 하세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호가 어금니를 꽉 물고 양덕수에게 속삭였다.
“아니, 왜 남의 바짓가랑이는 또 붙잡고 그러세요? 그리고 무릎은 왜 꿇는데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보게, 내 부탁함세. 자네가 이겼으니, 재생의 핵은 자네가 갖게. 자네 거야. 그러니 제발…….”
“뭐든 앉아서 이야기하세요. 안 그럼 바로 나가 버릴 테니까.”
양덕수가 그제야 의자로 돌아왔다.
“제발 부탁인데, 그 비도 만든 분을 딱 한 번만 뵙게 해 주게.”
“그건 제가 졌을 때 영감님이 받기로 한 대가잖아요. 제가 이겼는데, 그럴 수는 없죠.”
양덕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도 혼란하게 흔들린다.
곧 다시 무릎 꿇을 듯한 기세.
수호가 재빨리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무릎 꿇으면, 영감님이랑 한마디도 더 안 합니다.”
“아, 알겠네. 안 그러겠네. 그러니까 제발 딱 한 번만 그분을 뵙게 해 주게. 내 영혼이라도 팔라면 팔겠어.”
양덕수는 간절했다.
내기를 제안할 때까지는 상대에 대한 존중도 있었지만, 반쯤은 호기심이었다.
한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솜씨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감복했고, 완전히 패배를 시인했다.
동시에 확신했다.
‘저걸 만든 사람이 분명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야!’
그렇기에 양덕수가 할 일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만나 뵙고 가르침을 청해야 해.’
그래서 무릎 꿇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수치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혼까지 팔 수 있다는 말도 진심이었고.
그런 양덕수를 수호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거 어쩌면… 꼭 필요하던 걸 얻을 수 있겠는데.’
* * *
“신비의 대장장이님을 직접 뵐 수는 없어요. 대신에 한 가지 제안을 할게요. 영감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뭔가?”
“그분께서 제 가게에만 물건을 납품하고 계시거든요. 그분은 사정상 이름을 감춰야 하고요. 근데 이름을 감추려다 보니, 수준 낮은 물건만 가게에 내어놓고 있단 말이죠. 그분께서 원하는 대로 아이템을 만들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물건에 영감님 이름을 붙여서 파는 거예요. 수락하시면 저도 영감님께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가령 영감님이 장비를 만들어 오면, 그분께 보여 드리고 조언을 전해 드릴 수 있겠죠.”
양덕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분의 물건에 내 이름을 붙인다고? 그건 오히려 그분께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장인 된 입장에서 이름을 함부로 빌려준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네.”
“그분이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까요.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 이름을 빌려 봐야, 그분의 물건과는 격이 안 맞죠. 그럼 빌린 의미가 없고요. 영감님쯤 되니까 이름을 빌릴 수라도 있는 거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양덕수의 마음이 슬쩍 물렁해졌다.
“…내 이름이 그분께 도움이 되는 게 확실한가?”
“진짜라니까요. 그분도 크게 감사하실 거예요. 조언도 흔쾌히 해 주실 거고요.”
“정말 그분께 도움이 되고 가르침도 받을 수 있다면… 그리하세. 내 이름을 가져다 쓰게.”
고개를 끄덕이는 양덕수에게 수호는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그리고 가능하시면 재료 아이템 좀 구해다 주세요. 등급은 높은데 가공이 어려워서 유통이 안 되는 종류로요. 대금은 저한테 청구하시고요.”
“아! 알겠네. 그분이 쓰실 재료지? 내 최선을 다해 구해 보겠네. 또 원하는 건 없나?”
“영감님이 아이템을 만들어 오셔야 한다는 것 정도? 물건을 봐야 그분이 조언하실 테니까요.”
“그건 당연한 일이지. 걱정 말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양덕수가 넌지시 말을 보탰다.
“근데 딱 한 번만 직접 뵐 수는 없을까?”
“자꾸 그러시면 다 없던 일로 합니다.”
수호는 단호했다.
“아니네! 절대로 아니야. 더는 떼쓰지 않을 테니, 무르지 말게.”
양덕수가 열심히 손사래 쳤다.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서 가 보세요. 아이템을 만들어야 신비의 대장장이님께 평가를 받죠.”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서둘러야지. 난 그럼 가네.”
양덕수가 후다닥 가게를 나섰다.
『재료를 구해 오게 시키는 거로 모자라 이름까지 뺏어 쓰다니. 크큭- 제법이군, 수호.』
“뺐다니! 드워프한테 조언받는 대가로 그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재료 대금은 물론, 기술에 대한 조언도 확실히 전할 생각이다.
그러니 뺏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부상조에 가깝지.
『하긴 이 세상엔 난쟁이 수준의 장인이 없을 테니까.』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이템이야 보너스고, 진짜는 이름이지.’
가게를 재개업하면서 고급 등급 물건을 판다.
감당할 자신이 있기에 벌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덕수라는 이름을 빌리면, 웬만한 아이템 정도는 의심 없이 넘어갈 테니까.’
성격이 문제지, 실력만큼은 탑 클래스인 양덕수다.
그러니 가게 물건의 출처에 대한 의심은 불식시킬 수 있을 터였다.
‘깔끔하구만.’
재료와 아이템은 물론, 이름까지.
양덕수는 진짜 아낌없이 주는 기부 천사였다.
『집에 가자. 저녁 시간 다 됐다. 저녁은 후반양반이다!』
“넌 삼시 세끼 치킨이 질리지도 않냐?”
『본좌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700살이 넘으면서부터, 삶의 허무함을 깨달았다. 반복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 법이니라.』
“뭔 개소리야?”
발룡이와 투덕거리며 수호는 집으로 향했다.
‘가게 일은 이제 걱정할 게 없으니, 다음은… 레벨을 좀 더 올려야 하려나?’
수호가 그런 생각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델… 은… 모르겠…….”
어렴풋이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벽 뒤에서 나는데.’
공간 결계를 쳐 둔 벽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수호가 서둘러 벽을 통과했다.
곧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TV 쪽이야. 윌슨 목소린가?’
수호가 TV 화면으로 다가갔다.
윌슨은 쉘터에 설치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엄청 근엄한데, 뭐 하는 거지?’
윌슨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한 손은 마치 전화라도 하듯, 귓가에 댄 채였다.
“나는 너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영상이 재생되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데 꼭 같은 순간에 윌슨도 중얼거렸다.
영상 속 남자가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너를 죽일 것이다.”
저거 설마, 영화 대사 따라 하는 거야?
‘얼마나 심심했으면…….’
수호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오후 12:39 2020-07-15
51화 윌슨의 취미
윌슨은 쉘터 안을 순찰했다.
쉘터 점검과 체력 유지를 위해 매일 수행하는 일정이었다.
“실버, 요즘 이 형이 기분이 참 좋아.”
윌슨이 옆을 보며 말했다.
실버가 분주하게 달리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거든. 좋은 친구가!”
왕왕-!
“실버 너도 당연히 좋은 친구지. 화내지 마, 하하.”
윌슨이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물론, 새 친구도 완벽하지는 않아.”
수호는 가게를 운영한다.
다른 이종족과도 교류해야 하고, 헌터로서의 삶도 있다.
“친구에게도 친구의 인생이 있거든. 내가 계속 놀아 달라고 할 수는 없단 말이지. 그게 제일 아쉬운 점이야.”
얼마 전에 근처의 마물을 싹 쓸어버렸더니 긴장이 좀 풀렸다.
반대로 무료함은 심해졌다.
“이만하면 운동은 됐고. 오늘은 뭐 하고 놀아 볼까?”
고민하던 윌슨은 할 일을 정했다.
“오늘은 영화다!”
윌슨이 스크린을 조작했다.
왕-!
“지겹다고? 아니야, 실버. 너도 이 형처럼 명작을 즐기는 법을 깨우쳐야 해. 명작은 100번쯤 봐도 곱씹을 장면이 또 생긴다니까.”
윌슨은 금방 영화를 선택했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미래에서 온 마도 골렘이 전직 킬러의 개를 납치했다가, 킬러에게 역으로 당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이미 100번은 봤지만, 괜찮았다.
다른 영화들도 닳도록 본 건 똑같으니까.
곧, 영화가 재생되었다.
윌슨은 스크린에 집중했다.
왕-
“실버, 조용히 해 봐.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단 말이야.”
영화 최고의 명장면.
납치범 골렘의 연락을 받은 주인공이 단호하게 응대하는 신이다.
스크린 속 주인공이 마도 통신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네 모델명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나직이 뇌까렸다.
동시에 윌슨의 입도 열렸다.
“네 모델명은 모르겠지만.”
다시 주인공이 말하는 순간, 윌슨도 똑같이 대사를 했다.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를 죽일 것이다.”
윌슨이 한껏 목소리를 깔고 대사를 따라 했다.
왕-!
“실버! 중요한 장면인데 꼭 그러더라.”
윌슨은 그렇게 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 * *
수호는 조용히 TV에서 멀어졌다.
‘많이 외롭나 보네.’
짠한 마음이 차오른다.
『감히 치느님을 모욕하기에 언제고 혼을 내주려 했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었군.』
“또 뭔 소리야?”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를 죽일 것이다.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 나쁜 녀석일 리 없지.』
“……?”
이 중2병 환자는 도대체 어디에 꽂힌 걸까.
고민하던 수호는 이내 생각을 그만뒀다.
더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룡아, 집 좀 지키고 있어. 오래 안 걸릴 거야.”
『본좌를 강아지처럼 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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