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7

꿈인가?
눈을 질끈 감아 보는 조팽석.
그사이 칼날 소낙비가 멎었다.
조팽석의 귀에 섬찟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을 수 있어. 너 같은 새끼도 사는 세상인데.”
수호였다.
조팽석이 경악한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수호가 조팽석의 옆에 도착한 것이다.
“자, 잠깐! 일단 이야기를…….”
조팽석이 소리치며 뒷걸음질 쳤다.
전의는 진작에 사라졌고 공포만이 남아 있었다.
수호는 멈추지 않았다.
콰아아앙-!
“크악-!”
공포 때문에 몸이 굳은 조팽석은 채 반응도 못 하고 절명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씨, X발. 항복! 항복!”
“사, 살려만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나머지 머더러들이 무기를 바닥에 버렸기 때문이다.
김진성과 송제구에게도 당했는지, 놈들 중에 멀쩡한 놈이 없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은 머더러들.
송제구는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 끝에는 수호가 서 있었다.
치이이익-
혹사한 근육을 회복하느라 허연 김을 내뿜는 수호가.
“허허,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송제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 * *
“크윽,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발랑카르 산맥 중턱.
드워프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부서진 방패. 피와 땟물로 얼룩진 갑옷.
몸에도 상처 없는 부위가 없다.
“꼭 도착해야 한다. 신께서, 신께서 말씀하셨다. 이곳에 분명히 있을 거야.”
그는 푸른 보석 부족의 전사.
부족의 명운을 건 특명을 등에 지고, 발랑카르 산맥을 올랐다.
“있어야만 해. 드워프의 희망이…….”
신탁.
이곳에야말로 드워프가 살아갈 유일한 낙원이 있다는 신의 목소리.
그것에 희망을 걸고 전사는 수많은 고비를 넘으며 이곳으로 향했다.
마지막 한 구비.
산등성이만 오르면 드디어 발랑카르 산의 정상이 보인다.
전사는 사력을 쥐어짜 능선을 넘어섰다.
그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서, 성이다. 성이야! 진짜로 있었어!”
단단한 성벽이 보인다.
전사의 몸에 기적처럼 기운이 돌아왔다.
그는 달렸다.
소리쳤다.
“푸른 보석을! 푸른 보석 부족을 구해 주십시오!”
* * *
던전 밖, 헌터 협회에서 설치한 검문소 건물.
수호는 그곳에 있었다.
“제법 오래 걸리네.”
항복한 머더러를 끌고 나와 협회 직원에게 인계한 뒤,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
지루한 시간이지만 수호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던전에서 얻고자 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혼자 다닐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소기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지.’
2성까지는 수호 혼자서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다.
발룡이를 대동하면 이레귤러에도 대처할 수 있을 테고.
“슬슬 끝날 때가 됐을 텐데.”
수호가 지루해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형님! 다 처리됐습니다. 이제 가셔도 된답니다.”
김진성이 들어오며 말했다.
일 처리는 백호 길드의 대리인이 맡았고, 덕분에 협회 직원과 직접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가도 된대?”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김진성이 그를 말렸다.
“형님, 잠깐만 앉아 보세요. 드릴 게 있습니다.”
“줄 거라니?”
“이거 받으십시오. 머더러들 짐에서 나온 건데, 이런 건 보통 잡은 사람 소유입니다.”
몇몇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머더러를 잡고 나온 물건은 ‘부산물’ 취급한다.
머더러 근절을 위한 규칙이었다.
수호는 김진성이 내민 물건을 받았다.
[염동력 스크롤]
- 주변 공간에 3분간 염동력을 발휘한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소모 아이템
“어, 이거?”
“머더러 대장 놈 소지품에서 나왔습니다. 전투에는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함정 해제 등에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염동력 스크롤은 파괴력이 떨어진다.
몬스터를 죽일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나 던전에서 가끔 발견되는 함정 해제에 제법 유용하다.
“그렇구나. 근데 내가 가져도 돼?”
“당연하죠. 송제구 선배와도 다 이야기 끝났습니다. 그건 당연히 형님이 가지시는 게 맞습니다.”
“그래, 고맙다. 잘 쓸게.”
수호는 스크롤을 챙겼다.
실제로도 싸움의 공을 따지자면 자신이 으뜸이었으니.
“이것도 있습니다.”
김진성이 또 다른 물건을 내밀었다.
푸른 빛이 도는 엄지손톱만 한 구슬이었다.
[머쉬룸 봉봉]
- 머쉬룸 복서의 체내에서 희귀한 확률로 생성되는 정수. 머쉬룸 복서의 마력과 생명력이 진하게 농축되어 있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재료 아이템
- 내구도 120
“재료네. 근데 이것도 나 가지라고?”
“예, 형님. 그리고 자잘한 부산물은 저희 길드에서 매입하기로 했습니다. 정산되면 가게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형님 덕분에 정말 얻은 게 많습니다.”
수호는 의아했다.
“얻어? 뭘?”
“전에 말씀드린 막힌 듯한 느낌이 싹 사라졌습니다.”
수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진성이 덧붙였다.
“형님 싸우는 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애초에 1성이니 2성이니,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요. 제가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니고요. 깨닫고 보니 알겠더군요.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노력할 겁니다.
“롤 모델을 눈앞에서 봤으니, 이제 노력만 남은 거죠. 형님한테 뒤처지지 않도록, 언젠가 형님한테 이길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해 보려고요.”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김진성에게 좋게 작용했다니.
뭐, 나쁠 것 없지.
“응원할게. 나도 안 따라잡히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네.”
“네, 형님이 달려가 주셔야 뒤쫓는 저도 더 높이 갈 수 있겠죠. 형님도 파이팅하십시오.”
“그래.”
수호가 김진성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송제구가 들어왔다.
그는 머뭇머뭇, 수호에게 다가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수호가 묻자 송제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백호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예, 굳이 길드에 소속될 생각이 없어서요. 들어갈 거면 진작에 들어갔겠죠.”
“그렇죠? 그럼 말이죠…….”
“……?”
“혹시 다음번에도 같이 협회 던전에 가실 생각 있으세요? 괜찮으시면 다음에도 같이 갔으면 싶은데… 하하.”
37레벨 헌터 송제구.
그는 빨리 2성을 졸업하고 싶었다.
눈앞의 수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하나 송제구가 기대하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혼자 왔지만, 저도 따로 파티원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송제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호는 기분이 좋았다.
“전력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목표 달성인데 아이템까지 얻었네.”
수확이 쏠쏠하다.
“이번에 얻은 재료로는 뭘 만들어 달라고 할까?”
타룽가랑 그 이야기하는 김에 광산도 새로 파면 되겠네.
가게에서 판매할 새 아이템도 건네받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사이,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수호가 차에서 내렸다.
“발룡이까지 남겨 뒀으니, 이번에는 별일 없겠지?”
집을 비울 때마다 일이 터졌었다.
애써 불안감을 떨쳐 내며 수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돌아왔나? 어서 저길 봐라.』
발룡이가 앞발로 냉장고를 가리키고 있었다.
39화 드워프 구조대(1)
“힘을 내라! 버텨! 저기까지만 물러나면 된다!”
푸른 보석 드워프 족장 블톤이 고함을 내질렀다.
“버텨라! 쓰러지지 마! 다 왔다!”
입으로 희망을 외쳤지만, 블톤의 속에는 절망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마물들! 많기도 하구나.’
신탁을 받고 떠나온 길.
하지만 출발이 너무 늦었다.
마물이 꼬리에 붙었고, 산 아래에 와서는 기어이 따라잡히고 말았다.
‘붉은 망치처럼 해야 했었는데.’
신탁을 받고 모인 회합.
붉은 망치 족장 타룽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이주할 거라고 천명했다.
당시에 블톤은 타룽가를 어리석다 생각했다.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하다 여겼다.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둘렀어야 했는데.’
한데 이제 와 그때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심지어 챙겨온 짐도 도주 중에 모두 버렸다.
그럼에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쪽 막다른 계곡에라도 들어간다면, 한동안 농성이라도 해 볼 수 있으련만.’
밀려드는 마물의 기세를 보아하니 그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버텨! 힘을 내라! 다 왔다!”
“버텨라! 살 수 있다! 발랑카 산맥이 바로 코앞이다!”
“희망의 땅이 기다리고… 켁-!”
희망을 외치던 드워프 하나가 마물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트, 트롤이다. 빌어먹을 트윈헤드가 또 나타났어!”
“제기랄! 물러나, 족장님이 놈을 물리치실 거다!”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섰다.
블톤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도끼와 방패가 들렸다.
“죽어라!”
블톤이 도끼로 방패를 두드렸다.
고오옹-
두 장비 사이에서 공명이 일어나더니.
파지지직-!
강렬한 전격이 발사됐다.
전격은 트롤에게 명중했다.
“쿠뤠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른 트윈헤드 트롤이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블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못 죽였어.’
온몸이 전격에 그을렸지만 트롤은 죽지 않았다.
다른 마물이 트롤을 뒤편으로 옮겼다.
‘회복되면 또 덤벼들겠지.’
부족 최고의 장비.
전격의 방패와 도끼.
둘을 공명시켜 발사하는 전격도 트윈헤드 트롤을 해치우지 못했다.
‘빌어먹을 마기!’
마기 때문이다.
마기에 잠식당한 트롤은 그전의 몇 배는 뛰어난 맷집과 회복력을 발휘했다.
‘장비도 한계야.’
블톤의 양손이 뜨끈뜨끈했다.
도끼와 방패가 고열로 달아올라 있었다.
‘스킬을 너무 써서 과부하가 걸렸어.’
훌륭한 대장장이인 블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장비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어째야 하나.”
트롤은 물리쳤지만, 자잘한 마물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결국 블톤이 한 일은 똑같았다.
“버텨! 조금만 더 물러나면 계곡이다! 계곡에만 도착하면 산다!”
안타깝게도 블톤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크르릉, 컹컹-”
“왕왕-”
개처럼 생긴 대가리에서 시커먼 침을 흘리는 마물이 빠르게 들이닥쳤다.
“측면이다! 제길, 옆을 봐!”
“놀 마물이야! 도망칠 수 없어. 완전히 포위당할 거라고.”
“이럴 수가, 발랑카 산이 코앞인데.”
좌절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이 탁 풀린다.
블톤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놀이라도 물리쳐야 한다.’
블톤이 안간힘을 짜 도끼와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와아아아- 푸른 보석을 구해라!”
“마물을 죽이자!”
거센 함성이 들려왔다.
무언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푸슈슈슈슉-
푸슈슈슈슉-
하늘을 빼곡히 메운 화살 비가 마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블톤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산등성이 위.
수많은 드워프가 나타나 있었다.
“블톤! 서두르게! 계곡으로 물러나!”
“시간이 없어! 빨리! 부족원들 챙겨서 달리게!”
타룽가와 달콩이었다.
원군의 등장에 블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구조대다! 구조대가 왔다. 푸른 보석은 힘을 내라!”
쏟아지는 화살 비 사이로 블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 살았다!”
“살 수 있어!”
“물러서라, 계곡으로 물러나!”
푸른 보석 부족이 계곡으로 들어섰다.
타룽가와 달콩을 위시한 구조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덤불에 불을 붙여 계곡 입구를 틀어막았다.
수호에게 보급품으로 받은 난방용 기름도 끼얹었다.
불의 장막이 생겨났다.
마물들이 불길에 막혀 아우성쳤다.
* * *
“뭐? 드워프들이 어쨌다고?”
수호가 으르렁거리듯 발룡이에게 물었다.
『보, 본좌는 말렸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다. 동족을 구하겠다는데 본좌가 어쩌겠느냐.』
“무슨 수든 썼어야지!”
집 지키는 대가로 치킨도 받기로 했으면서!
『그럼 난쟁이들을 억지로 붙잡아 뒀어야 한다는 말이냐? 본좌는 저쪽의 시야를 움직일 수도 없으니, 도울 수도 없는데.』
수호는 혀를 차며 발룡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발룡이와 실랑이할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냉동실로 다가간 수호가 안을 들여다봤다.
성벽 안이 허전하다.
노약자를 제외하면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 있었다.
“드워프들 어느 방향으로 갔냐?”
『모른다. 성벽 맞은편으로 그냥 사라졌다.』
“그 정도는 봐 놨어야지!”
수호가 호통치고 있을 때, 냉동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인님! 오셨어요, 거인님?”
볼드였다.
그는 수호와 소통을 위해 남아 있었다.
“볼드, 어떻게 된 일입니까?”
“푸른 보석 부족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말했어요. 마물에 쫓기고 있다고요. 그 사람이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우리 족장님이랑 달콩님이 부족원들 데리고 구하러 가셨어요.”
“얼마나 됐어요? 방향은요?”
“2시간쯤 됐죠. 방향은 저쪽이에요. 저기 계곡 보이시죠? 저 계곡이 아래쪽에서 작은 개울로 바뀌는데…….”
볼드가 산 아래 지형과 드워프의 이동 경로를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드워프 구조대】를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드워프 구조대』
- 신탁을 듣고 발랑카 산맥으로 향하던, 푸른 보석 드워프 부족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출동한 붉은 망치와 잿빛 가죽 드워프를 돕고 푸른 보석 부족을 구하자.
- 보상 : 새로운 교류 대상(푸른 보석 드워프), 푸른 보석 드워프 만족도.
재빨리 임무를 확인한 뒤, 수호가 시야를 움직였다.
계곡을 따라 시야가 움직였다.
‘없어! 여기까지 못 온 거야.’
수호가 시야를 끝까지 움직였음에도 드워프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해.’
수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
발룡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난쟁이들이 네 능력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래, 맞아!”
수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수호는 새 광산 건을 논의하면서 【차원 시야】에 관해 타룽가와 달콩에게 말해 뒀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범위를 알고 있어. 그러니 어떻게든 그곳까지 오려고 노력할 거야. 어쩌면 방법을 미리 마련해 뒀을 수도 있고.”
『그래, 아무 생각 없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종족의 명운이 달린 일이잖느냐.』
수호가 할 일은 명확했다.
“기다린다! 시야에 들어오는 즉시 도울 수 있도록!”
수호가 냉장고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수호의 얼굴에 각오가 활활 타올랐다.
* * *
계곡 안.
세 드워프 족장이 한자리에 급히 모였다.
“이보게, 블톤. 다친 데는 없나?”
“고생 많았네, 블톤. 몸은 좀 괜찮은가?”
“괜찮네. 구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맙네.”
블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썩 밝지 못했다.
“왜 그리 기운이 없나, 블톤?”
“언제까지 계곡에서 버틸 수 있겠나. 산을 오르려면 이곳에서 나가야 할 텐데. 밖에는 마물이 진을 치고 있으니… 오히려 자네들까지 사지로 끌어들인 게 아닌가 걱정이네.”
타룽가의 질문에 블톤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우려가 가득했다.
“괜찮네, 다 방법이 있어.”
“그래, 우리가 그냥 이 막다른 계곡에 들어왔겠나. 껄껄.”
달콩과 타룽가가 대답했다.
블톤은 그들의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다.
“무슨 방법인가? 강력한 무구라도 가지고 온 건가?”
“그럴 리가. 아무리 강력한 무구라도, 저 많은 마물을 어떻게 다 물리치겠나.”
“맞네, 무구로는 안 되지. 하나 우리에겐 무구보다 훨씬 대단한 친구가 있다네.”
둘의 대답은 블톤의 예상 밖이었다.
“친구? 그게 무슨 소린가?”
“거인님일세. 드워프의 친구지. 껄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분이시지. 하하.”
“설마 발랑카 산맥에 거인족이라도 살고 있나? 그들과 동맹이라도 맺은 건가?”
“껄껄, 거인족이 아니고, 거인님일세.”
“암, 세상 그 어떤 거인족도 거인님만큼 위대하실 수는 없지.”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가. 알아듣게 좀 설명해 보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설명하겠네. 잘 들어 보게. 그러니까 우리 붉은 망치 부족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타룽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럴수록 블톤의 표정이 당혹에 물들었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당연하지. 달콩을 보게나. 저 친구는 처음에 자네보다 더했네. 내가 나쁜 주술에라도 걸린 줄 알더라니까. 그래도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거인님을 존경하게 되었지. 껄껄. 그러니 나만 믿고 준비한 대로 따라오게. 아니지, 거인님을 믿게나. 그럼 다 해결될 걸세.”
“허허, 어찌…….”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블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 *
계곡에서의 하룻밤이 지났다.
“이게 정말 잘하는 일인가 모르겠군.”
블톤이 중얼거렸다.
계곡을 가로막은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다.
머잖아 탈출 작전이 개시된다.
“뭘 그리 걱정하나. 괜찮대도.”
“맞네, 거인님이 집에 돌아오실 시간이 진작에 지났거든. 그러니까 이제 산등성이까지만 올라가면 되네.”
두 족장의 태평한 태도에 블톤도 의심을 내려놨다.
지금 와서 고민해 봐야 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네, 우린 준비 다 됐어. 신호하면 출발하겠네.”
푸른 보석 부족원들은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조대로 온 붉은 망치와 잿빛 가죽 또한 만전의 상태.
“그럼 시작하겠네. 작전 준비이이-!”
타룽가가 신호했다.
“기름통 던질 준비들 해!”
“냅다 던지고 튀는 거야.”
“냅다 던지면 안 돼. 넌 추적을 막기 위해 뒤편에 던지는 역할이잖아.”
“알아, 알아.”
작전에 동원된 드워프들이 직육면체 철통을 들어 올렸다.
수호가 난방용으로 지급한 등유에, 불이 잘 붙도록 몇 가지 재료를 첨가한 것이었다.
“간다, 길 뚫어!”
앞장선 드워프들이 사그라드는 불의 장벽에 모래를 끼얹었다.
파스스.
불길이 죽었다.
저편에서 마물이 덮쳐들기 시작했다.
기름통이 하늘을 날았다.
“됐다, 쏴!”
마물들 앞에 기름통이 떨어졌다.
불붙은 화살이 발사됐다.
콰아앙-!
콰콰콰쾅-!
폭발이 일었다.
마물의 파도가 주춤했다.
“가자! 달려라!”
“머뭇거리지 마! 간닷!”
드워프들이 일시에 계곡에서 뛰쳐나갔다.
“마물이 온다! 뒤! 뒤에 기름 뿌려!”
“던졌어. 불붙여!”
“쏜다!”
뒤편으로 기름통이 날고, 석궁이 발사됐다.
콰콰콰앙-!
다시금 폭발이 일었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덕분에 마물의 추격이 주춤했다.
“달려, 달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산등성이다! 거인님이 우릴 기다리신다!”
“달려라!”
드워프들이 짧은 다리를 분주히 놀렸다.
“쿠와아아아앙-!”
괴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달리던 블톤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제기랄, 저 트롤 놈이 또!”
늘 도주를 방해하던 트윈헤드 트롤.
그놈이 다시금 나타나 있었다.
“쿠퀘케케케게-”
달려들던 트롤은 블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계곡에서 커다란 바위를 집어 들었다.
‘던진다. 젠장!’
저 바위가 떨어지면, 못해도 몇 명은 즉사다.
블톤은 도끼와 방패를 움켜쥐었다.
트롤이 더 빨랐다.
후우웅-
집채만 한 바위가 날아든다.
‘바위를 깨야 해!’
블톤이 도끼를 방패에 부딪쳤다.
전격이 터져 나왔다.
목표는 하늘에 떠 있는 바위.
파지지직-!
‘됐다.’
전격은 명중했고 바위는 부서졌다.
하나 블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갔다.
트롤이 또다시 바위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저놈! 사거리를 눈치챈 건가. 제길!’
심지어 전격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낸 듯했다.
후우웅-
또다시 날아드는 바위.
블톤은 달리다 말고 다시 전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블톤, 서두르게! 저기까지만 가면 돼!”
타룽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블톤은 앞으로 향할 수 없었다.
부족원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후우웅-
파지직-!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사이 블톤도 산등성이 근처에 다다랐다.
“족장님! 빨리 오세요!”
이제 마지막 무리가 남았다.
블톤은 뒤편에 남아 그들을 기다렸다.
후우웅-
거대한 바위가 날았다.
블톤은 다시 한번 전격을 날리려 했다.
한데.
파캉-
소음과 함께 손끝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격도 발사되지 않는다.
‘이런 제길! 전격석이 부서졌어!’
도끼와 방패에 박힌 동력원, 전격석이 깨어졌다.
혹사당한 장비가 기어이 파괴된 것이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블톤은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내가 죽더라도.’
이제 와 목숨에 미련은 없다.
다만, 부디 그 거인이 진짜로 존재하기를.
‘살아남은 아이들이라도 살길을 찾기를….’
블톤은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화로와 모루의 신이시어. 제발.’
끝없이 기도하던 블톤은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안 죽는 거지?’
어째선지 바위가 떨어져 내리지 않는다.
트윈헤드 트롤의 비웃는 소리도 끊겼다.
블톤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어두운… 헉!”
바위는 하늘에 멈춰 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트롤의 괴성이 들리지 않은 이유도 깨달았다.
놈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거대한 손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 진짜로 있었어. 거인이!”
블톤이 놀라 외치는 순간.
파삭-
그렇게도 무섭던 바위가 과자 부스러지듯 바스러졌다.
40화 드워프 구조대(2)
‘크르르- 죽인다. 죽이고 잡아먹는다.’
트윈헤드 트롤.
아니, 마기에 물든 마물의 머릿속에는 살의가 들끓었다.
‘크르르르- 나는 죽지 않는다. 뭐든 잡아먹을 수 있다.’
검은 기운에 몸을 침범당한 뒤, 트롤은 변했다.
원래부터 강하던 회복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판단력도 크게 성장했다.
심지어 다른 마물들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강하다!’
트롤은 푸른 보석 부족을 뒤쫓는 마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트롤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저 번개, 저것이 문제다.’
맞으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친다.
죽지 않기에 계속 덤볐지만, 잡아먹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순간 트롤은 깨달았다.
‘번개는 멀리까지 쏘지 못한다. 계속 쏘지도 못 한다.’
마기에 의해 한층 더 교활해진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던 생각이다.
트롤은 계획을 짰다.
바위를 거듭 던져 번개를 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됐다. 이제 번개를 못 쏜다. 잡아먹는다.’
블톤의 전격이 멎었을 때, 트롤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포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바위가 막혔다! 저 손은 뭐지?’
거대한 손이 바위를 잡았다.
생명체라면 응당 공포를 느끼고 도주를 생각해야 할 터.
하지만 마물이 된 트롤의 행동은 달랐다.
“죽여라! 모조리 잡아서 찢어 죽여라! 잡아먹어라!”
트롤이 주변 마물들에게 외쳤다.
거대한 손에 놀라 움츠러들었던 마물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런, 어쩌지?”
제때 등장하여 바위를 막아 냈지만, 수호는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멈춰 있던 마물의 파도가 다시 밀려든다.
‘손이 끝까지 안 닿아.’
행렬의 제일 후방.
마물과 뒤섞인 드워프들이 있다.
수호의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칼로 어떻게 하자니 뒤섞여 싸우는 중이라.’
칼로 해결하기에는 드워프와 마물이 너무 엉겨 있다. 생사를 건 탈출 중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없어. 빨리!’
수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수호는 머잖아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이게 최선이야.’
차원 보따리를 뒤져 아이템을 꺼냈다.
[염동력 스크롤]
수호가 스크롤을 곧바로 찢었다.
찌익-
수호는 느낄 수 있었다.
‘염동력! 된다, 이거면 할 수 있어!’
손닿는 곳을 너머.
저 멀리까지 보이지 않는 손이 뻗어 있는 느낌.
지구에서라면 몬스터를 죽일 위력이 없겠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저쪽 세상과는 압도적인 크기 차이가 있으니까.
‘일단 모두 멈춰라!’
수호가 허공에 손을 뻗으며 염동력을 발휘했다.
우뚝-
수천 마리의 마물.
마물과 뒤섞인 드워프.
모든 것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으학! 발이 땅에 붙었어!”
“이, 이게 뭐야? 몸이 안 움직여!”
“마물도, 마물도 멈췄다!”
드워프들이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수호는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은 분리.’
수호가 보이지 않는 손을 정교하게 조종했다.
둥실.
마물에 뒤섞인 드워프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어-! 어어억-?”
“뜨, 뜬다. 나른다아아-!”
“사, 사, 살려 줘!”
놀란 드워프들이 소리쳤지만 그것까지 배려해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어? 사, 산등성이로 움직인다.”
“마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살았다, 살았어! 저 거대한 손이 마법으로 우릴 구해 준 거야!”
“대마법사다!”
“정말이었어. 구조대가 한 말이 사실이었다고!”
구조된 드워프들이 안도의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산등성이에 오른 드워프들도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 마무리하자. 일단 마물을 모으고.’
수호가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염동력이 한계까지 발휘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대기가 진동하나 싶더니, 수천 마리 마물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물이 난다!”
“떠올랐어! 거인님이 마물을 한 덩이로 모으셨어!”
마물이 허공에서 둥글게 뭉쳤다.
‘터져라!’
수호가 명했다.
콰직-!
주르르르-
마물들이 토마토처럼 짓이겨졌다.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 죽었다! 마물이 모조리 죽었어.”
“즙이 되었어.”
넋 나간 듯한 드워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의 눈앞을 시스템 메시지가 수놓았다.
[차원 임무 【드워프 구조대】를 완수하셨습니다.]
[새로운 대상 【푸른 보석 드워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푸른 보석 드워프의 만족도가 60 상승합니다.]
* * *
콰직!
노인의 손안에서 호두가 깨어졌다.
노인은 껍질 속에서 호두알을 골라낸 뒤 입으로 가져갔다.
노인의 맞은편, 테이블 건너.
누군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 조아리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껍질이 단단할수록 속살은 영양가 있는 법이지.”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남자.
한국에서 활동 중인 머더러 단체, 리빙 콥스의 수장 육경환이 몸을 떨며 대답했다.
노인에게 완전히 압도된 모습이었다.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네. 그중에 나는 이렇게…….”
콰직!
또 다른 호두가 노인의 손에서 깨어졌다.
육경환이 움찔했지만, 노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 가장 좋아해. 그게 우리의 본성이지. 우월하니까.”
“…예.”
“근데 한국은 상황이 묘해서 힘으로 찍어 누르기가 힘들어. 당장은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그건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고.”
육경환은 식은땀을 흘렸다.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신 머리를 굴릴 사람, 그러니까 자네 같은 사람을 부리는데. 어째 영 신통치 않아.”
부르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떤 육경환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죄송합니다. 협회 던전에 마인을 심은 건은 협회의 대처가 너무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형 길드에서 파견한 인원들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도 있고.”
“그 건만이 아니지 않나?”
“상왕련 건은 도플갱어가 너무 멍청하게 일을 처리하다가… 죄송합니다.”
콰직.
다시 호두가 깨어졌다.
육경환은 자신의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실험체 확보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실험체 확보를 위해 회유한 길드의 마스터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들이 실종되었다는군요.”
“그래서?”
“대신할 길드를 물색해 놓았습니다. 회유한 길드 마스터는 어르신께 보고 후 바로 처분할 생각이었습니다.”
노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놈한테도 기운을 심어놓았다지?”
“예. 언제든 원하실 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기껏 공들여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를 그냥 버리면 쓰나. 쓸모가 다 한 쓰레기도 태우면 땔감이 되는 법이야.”
“죄송합니다.”
“쯧, 그래서 그놈 아들은 왜 실종됐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범인을 알 수 없습니다.”
“잘 됐군.”
“무슨 말씀이신지?”
“범인을 모르면 범인을 하나 만들어 주면 해결될 일 아닌가?”
“아!”
노인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육경환이 탄성을 터트렸다.
“기왕이면 저번에 실패한 상왕련 쪽과 엮어서 처리하면 되겠군.”
“대단한 기책이십니다, 어르신.”
“공치사는 되었고, 이번엔 확실히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육경환이 물러났다.
마족 헤즈루의 종복從僕이자 마인.
그리고 육경환에게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최선을 다할 게 아니라, 최고의 결과를 가져와야 할 거야.”
머잖아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서도 살아남고 싶다면.
* * *
염동력에 의해 허공에 뜬 몸이 바닥에 착지했다.
블톤은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기후를 바꾸고 광룡을 부리는 거인 이야기.
듣는 순간 거짓이라 생각했다.
‘진짜였어.’
타룽가와 달콩이 한목소리를 내기에, 완전히 거짓이란 생각은 버렸다.
하지만 결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과장일 거로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으리라.
극한 상황이 그들의 기억을 왜곡했으리라.
블톤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아니었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던 거야.’
타룽가도, 달콩도.
나머지 구조대원들도 전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콰직-!
허공에서 한 덩이가 되어 짓이겨지는 마물을 보고, 어찌 거짓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 망치와 모루의 신이시여.”
블톤은 신의 이름을 불렀다.
“감사하옵니다. 저희에게 종말을 피할 땅을 가르쳐 주시고, 거대한 아군을 보내 주시어 감사합니다.”
블톤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블톤에게 타룽가와 달콩이 다가왔다.
“블톤! 몸은 괜찮은가?”
“다친 데는 없나?”
“괜찮네, 괜찮아. 그나저나…….”
블톤은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손을 일별한 후 말을 이었다.
“정말이었군. 거인이, 위대한 거인님이 계신다는 말이.”
“껄껄, 내 뭐라고 그랬나? 자네도 겪어보면 알 거라 그러지 않았나?”
“맞네, 블톤. 이제 자네도 알겠지? 우린 그저 거인님의 말을 잘 따르면 된다네. 가 보면 알겠지만, 성벽과 건물도 지어져 있어.”
안도와 경악을 동시에 느끼던 블톤.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단어가 있었다.
“성벽? 산에 성을 지었단 말인가?”
“아, 그러고 보니 자네 부족이 성벽 건설에 일가견이 있다지?”
“이거 부끄러운 걸, 급한 나머지 대충 지어서, 자네 보기엔 엉망으로 보일 텐데. 껄껄.”
달콩과 타룽가가 한마디씩 보탰다.
블톤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나도, 우리 푸른 보석도 역할이 있었던 거야!’
드워프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구해 놓기는 했는데, 이제 어쩐다. 마을로 옮기고 싶은데.”
염동력 스크롤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공중에 띄워서 데려갈 수는 없다.
『대충 손바닥에 태워서 옮기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기엔 좀 많은데. 가만 보자.”
수호가 방을 둘러봤다.
눈에 띄는 게 있다.
“저거면 되겠네.”
『크큭- 본좌에게 고마워하거라.』
“어휴.”
* * *
“차례대로 신속하게!”
“밀지 말고, 조심조심!”
“으히히, 재밌겠다!”
“난 무서울 것 같은데.”
“아까 먼저 간 애들 소리치는 거 못 들었어? 완전 신났던데?”
“안전하겠지?”
“당연하지, 거인님이 태워 주시는 건데.”
“근데 여기 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그러게, 되게 맛있는 냄새네. 라면 냄새랑은 좀 다른데.”
떠들썩한 목소리를 내며 드워프들이 상자로 들어갔다.
납작하고 널찍한 상자.
바로 발룡이가 시켜 먹은 치킨 박스였다.
“이걸 이렇게 쓰네.”
『먹고 바로 내다 버리지 않은 본좌에게 감사해라.』
“으이그.”
마지막 남은 드워프 무리가 치킨 박스 안에 자리 잡았다.
“자, 갑니다. 꼭 잡으세요.”
수호가 치킨 박스를 들어 올렸다.
수평을 유지한 채, 조심조심.
“우오옷- 난다!”
“신난다! 날고 있어!”
“맛있는 냄새와 함께 날아간다!”
잠시 후, 치킨 박스가 성벽 안에 안착했다.
“도착했어요. 다들 내리세요.”
수호의 신호에 드워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후우, 어쨌든 이번 일도 잘 마무리됐네.’
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가온 그림자가 있었다.
“거인님,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저희 드워프들을 구해 주셨군요.”
“맞습니다, 거인님이야말로 역시 드워프의 구원자이십니다.”
타룽가와 달콩이었다.
“때를 맞출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저희는 거인님이 꼭 오실 거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껄껄, 그렇기에 일을 감행한 것이지요.”
“제가 외출에서 돌아올 시간이 지나긴 했죠.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 주세요.”
“아무렴요. 거인님의 말씀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수호가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처음 보는 드워프가 엉거주춤 서 있다.
마치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개만 숙여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자세였다.
“근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거인님께 감사드리느라 깜박하고 있었군요. 이 친구는 이번에 합류한 푸른 보석 드워프의 족장, 블톤입니다. 블톤 어서 인사드리게.”
타룽가의 소개에 블톤이 나섰다.
여전히 고민 많은 자세였지만 재빠르기는 번개 같았다.
“거, 거인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푸른 보석 드워프를 이끄는 블톤이라고 합니다. 거인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저희 부족이 결초보은하는 마음으로 갚아 나가겠습니다.”
털썩.
블톤이 기어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블톤 님이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근데 그러고 계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어서 일어나세요.”
“예!”
블톤이 벌떡 일어섰다.
수호가 과한 예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제법 눈치도 빨라 보여. 일 잘하겠는데?’
움직임이 재빠르고 눈썰미도 있어 보인다.
수호는 블톤을 어디다 써먹을지 고민했다.
‘푸른 보석이라.’
붉은 망치. 잿빛 가죽.
부족 이름에서 어느 정도 유추되는 바가 있었다.
‘보석이면, 뭘 잘하려나?’
굳이 수호가 길게 궁리할 필요는 없었다.
블톤 스스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41화 드워프 구조대(3)
“거인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푸른 보석 드워프 족장 블톤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예, 말씀해 보세요.”
“저희 푸른 보석 드워프는 대대로 너른 평원에 성채를 짓고 살아왔습니다. 그 덕에 다른 드워프에 비해 축성과 건축에 능한 편입니다. 이곳의 성벽을 보니 단단한 재료로 지었습니다만, 송구하게도 공법은 최고 수준에 이르지 못한 듯합니다.”
“맞아요. 좀 서둘러 짓느라.”
최근에 확장한 부분은 그나마 나은데, 초반에 만든 쪽은 허술했다.
“앞으로도 성벽을 확장할 생각이시면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맡겨만 주시면 열과 성을 다해 완벽한 성벽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맡길게요.”
수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물이 산 밑에 등장했으니, 언제 이곳까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야.’
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
전문가의 손을 빌릴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고.
블톤에게 축성을 맡긴 수호는 남은 용건이 더 있음을 떠올렸다.
“아 참, 이것 좀 봐 주세요. 여러분.”
수호가 [머쉬룸 봉봉]을 저쪽 세상으로 전송했다.
타룽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력을 품은 재료군요. 괜찮은 물건을 만들 수 있을 듯합니다.”
한데 달콩이 타룽가의 손에서 [머쉬룸 봉봉]을 냉큼 낚아챘다.
“거인님, 이번에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회심의 역작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어허, 이 친구 갑자기 왜 그걸 가져가고 그러나. 거인님이 내게 주신 건데.”
“자네한테 주신 게 아니고, 그냥 이쪽으로 보낸 거 아닌가. 그걸 자네가 먼저 집은 거고.”
“어쨌든 차례가 있지 않나. 내가 먼저 집었으니 내 차례가 먼저일세. 게다가 저번에 못 만든 건틀릿을 만들어야 하네. 적회색 수호자와 꼭 어울릴 디자인을 생각해 뒀어.”
“적회색 수호자 때는 내가 크게 양보했지 않나? 이번엔 내 차례일세. 자네가 양보하게, 타룽가!”
“뭐? 적회색 수호자 때는 내가 양보한 거지. 오우거 가죽을 자네에게 넘기지 않았나.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내 차례가 분명하네.”
타룽가와 달콩이 재료를 들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수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블톤도 엄청 끼어들고 싶은 눈치네.’
끼어들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블톤도 눈빛을 이글이글 빛내고 있었다.
‘한번 물어나 볼까?’
수호가 냉동실을 향해 말했다.
“잠깐만요, 스톱!”
두 드워프가 우뚝 멈췄다.
수호가 말을 이었다.
“저 블톤 님, 혹시 푸른 보석은 장비는 안 만드시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비 제작이야말로 드워프의 본업, 축성은 그저 부업에 불과합니다.”
“그럼 주로 어떤 종류에 자신이 있으세요?”
“모든 종류의 아이템에 자신이 있습니다만, 특히 액세서리 제작에는 그 어떤 부족보다도 앞서 있음을 확신합니다!”
오, 저 아저씨도 만만치 않네.
그럼 살짝 경쟁을 붙여 볼까?
“근데 블톤 님, 축성과 동시에 제작도 할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축성의 경우, 제가 전체적인 틀만 잡아 놓으면 부족원들이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이템 제작도 블톤 님이 맡아 주세요. 종류는 상관없고 재료를 잘 활용해서 가장 뛰어난 액세서리를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천명을 다해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블톤이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어째 부탁하면서 감사받는 느낌이 묘하단 말이야.’
몇 번 겪었음에도 영 익숙지 않은 감정이다.
“이, 이럴 수가! 블톤 너마저.”
타룽가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다. 내가 호랑이를 집 안에 들였어.”
달콩도 목소리를 보탰다.
수호는 씩 웃으며 말했다.
“타룽가 님, 전에 판매용으로 만들기로 한 철창은 어떻게 됐나요?”
“아이들에게 맡겨 두었는데, 다 만들어졌을 겁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타룽가가 서둘러 달려갔다.
기합이 바짝 든 모습이다.
“달콩 님, 손이 좀 비시죠? 제가 생각해 봤는데, 판매용으로 꼭 무기만 팔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래서 간단한 방어구를 만들어 팔았으면 하는데요.”
“맡겨만 주십시오! 재료도 굳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는 짐승 가죽으로도 충분합니다.”
달콩도 달려갔다.
수호는 마지막으로 남은 블톤에게 말했다.
“블톤 님, 그럼 성벽 재료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수호는 구할 수 있는 건축 자재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일반 시멘트란 것과 강철 나무만 넉넉히 공급해 주시면 됩니다. 성벽은 물론 각종 편의 시설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네. 그럼 재료는 곧 구해 드릴 테니, 일단 액세서리부터 만들어 주세요.”
“예, 그럼 바로 가 보겠습니다!”
블톤도 뛰어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수호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재료를 좀 구해 볼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곧 정현수가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셨어요, 형.”
“어, 너도 잘 지냈어?”
“저야 열심히 레벨 업하고 있죠. 얼른 1성 졸업하려고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건설 자재 좀 더 구할 수 있을까?”
“급속 경화 시멘트는 물량이 아직 없고, 나머지는 말씀만 하세요.”
“그냥 시멘트면 돼. 그리고…….”
통화 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수호가 덧붙였다.
“2성 던전도 잡아 줘.”
“알았어요, 형. 안 그래도 언제 말씀하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준비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수고해.”
지구에 마인이 존재한다.
드워프 세상에 마물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가진 기운이 똑같다.
‘분명히 뭔가 있어. 어쩌면 내가 차원 여행자로 각성한 것도…….’
수호가 타차원에 간섭하게 된 것도, 어쩌면 마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동안 고민하던 수호가 생각을 멈췄다.
당장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하루빨리 강해져야 해.’
강해져야만, 자신과 타차원의 작은 친구들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드워프들 못지않게 수호도 각오를 다졌다.* * *
콰장창-
영일 길드 하우스, 길드장실.
재떨이가 거울과 함께 박살 나 떨어졌다.
“X발! 이 개 같은 놈들이 다 도망쳤다는 말이지?”
죽여 버린다.
영일 길드장 박영일이 살기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길드장을 놔두고 다 날라?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는.”
부드득.
이를 간다.
하나 그의 화를 받아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인 박동식이 실종된 지 2달.
그사이 박영일은 온갖 패악질을 다 부렸다.
뒷골목 시절부터 따르던 부하마저 질색하고 떠나갈 정도.
결국, 영일 길드에 남은 것은 박영일 혼자뿐이었다.
똑똑-
한데 반쯤 열린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누구야?”
박영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납니다.”
머더러 단체 리빙 콥스의 수장, 육경환이었다.
“…무슨 일이오?”
박영일도 육경환에게까지 화풀이하지는 못했다.
“길드가 완전히 개판이 됐네.”
“뭐요?”
박영일을 무시하고, 육경환은 소파로 다가갔다.
툭툭 먼지를 털고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할 말 있으니, 좀 앉아 봐요.”
“지금 이야기할 기분 아니니, 다음에 다시 오쇼.”
“다음은 무슨 다음. 물건이 안 온 지 2달이야. 일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박영일 씨.”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 좀 더 기다리쇼. 저번에 보내 준 것들 아직 있을 거 아뇨. 그거나 잘 쓰라고.”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엄연히 계약이 있는데, 받은 게 있으면 일을 제대로 하셔야지.”
계약서는 없는 계약이지만, 어길 경우 리스크는 훨씬 크다.
목숨으로 갚아야 할 테니까.
박영일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연고 없는 헌터, 잡아도 뒤탈 없을 헌터가 어디 잘 있는 줄 아쇼? 기다리라면 좀 더 기다리쇼. X발,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기어이 욕설이 흘러나왔지만, 육경환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쯧쯧, 저러니 길드가 이 꼴이 되지. 아들이야 하나 다시 낳으면 그만일 텐데, 뭘 저리 호들갑인지.”
“뭐야?”
박영일의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아슬아슬 붙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지려 했다.
“뭐 내가 못할 말 했나? 박동식이랬던가? 그거 어차피 사람 구실 못하는 놈이었잖아. 망나니로 유명하더구먼. 개새끼라도 제 새끼는 예뻐 보인다는 건가?”
툭-
박영일은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 씨X놈이!”
박영일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하나 그것은 육경환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됐다.”
육경환이 손을 활짝 펼쳤다.
손에서 묘한 기운이 뿜어져 박영일의 얼굴을 덮쳤다.
“흡!”
재빠르게 물러나며 호흡을 멈춘 박영일.
베테랑다운 노련한 대처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뭉클.
박영일의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움직였다.
꿈을 꾸는 듯 머리가 몽롱해지고, 몸은 통제를 벗어났다.
“미리 작업해 둬서 그런가, 맨탈이 박살 나 있어서 그런가. 크크, 생각보다 쉽구먼.”
육경환은 품에서 사진을 꺼냈다.
누군가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자, 여길 봐. 여기 이놈이 박동식을 죽였어. 던전 안에서 박동식을 잔인하게 때려죽이고, 몬스터 밥으로 먹인 거지.”
“크르르-”
박영일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괴성이 흘러나왔다.
“이놈이야. 네 원수라고. 이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이걸 먹어. 그러면 놈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육경환이 내민 것은 한 줌의 머리카락이었다.
박영일은 홀린 듯 그것을 받아 삼켰다.
번뜩!
박영일의 눈에서 시뻘건 광망이 치솟았다.
“그래그래, 바로 그 느낌이야. 그 기운이 흐르는 곳에 원수가 있는 거야. 넌 그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면 되는 거고. 단!”
달려 나가려던 박영일의 몸이 우뚝 굳었다.
“지금은 안 돼. 며칠 이따 신호를 받으면 하는 거야. 내가 흔적을 다 지워 놓은 후에 말이지. 오늘 일은 다 잊어버려. 그때까지는 평소처럼 지내면 돼. 아니지, 평소보다 좀 더 예의 바르게 지내는 편이 좋으려나?”
비릿하게 웃은 육경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르르-”
그때까지도 박영일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내가 가고 나면 정신 차리고. 그럼 잘 있어, 영일 씨.”
그 한 몸 바쳐서 상왕련을 흔들어 놓으라고.
육경환의 목소리가 끝날 때쯤, 박영일의 정신이 돌아왔다.
“뭐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 * *
“슬슬 출발해 볼까.”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장비를 꺼내 착용해 나갔다.
적회색 수호자, 화염 포마검 등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역시 드워프!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수호가 블톤에게 받은 새 장비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전격의 반지]
- 부서진 전격석 조각을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재생시켜 머쉬룸 봉봉과 조합해 만든 반지.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며 손에 닿는 물건에 전격을 가할 수 있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근력+10 민첩+10 체력+10 마력+10
- 【전격의 손길】
- 내구도 150
【전격의 손길】
- 손에 닿은 대상에게 전격을 가한다. 전격이 적중하면, 대상은 1초간 기절 상태에 빠진다. 재사용 대기 시간 1분.
‘단점은 있지만, 스킬도 쓸 만하고.’
사거리와 지속 시간 등이 단점이었지만, ‘기절’이라는 효과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파닥파닥-
발룡이의 날갯짓이 수호의 감상을 방해했다.
『그깟 물건에 헤벌쭉하지 말고, 어서 던전으로 가자.』
“알았어, 가자.”
오늘은 2성 던전에 가기로 한 날이다.
이번에는 발룡이도 대동한다.
대가로 치킨 3마리가 걸렸고 마력도 올릴 수 있으니, 발룡이도 의욕이 가득했다.
『그깟 던전 10분 만에 해치워 주마. 본좌만 믿거라.』
“그래, 열심히 한다니 좋네.”
피식 웃은 수호가 집을 나섰다.
투명화한 발룡이가 수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
.
.
용달차가 인적 드문 산길을 나아간다.
‘터널 안에 던전이 생기는 바람에 도로 공사는 물 건너갔네.’
산을 뚫어 길을 만들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공사가 멈췄다.
하필이면 공사 중이던 터널 안에 던전이 생겨난 것이다.
던전이 보이는 위치까지 이동한 수호가 차에서 내렸다.
상왕련 던전 관리팀 직원 몇이 보인다.
그 옆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현수? 여긴 왜 왔어?”
“형, 오셨어요? 2성 들어가신다길래 배웅하려고 왔죠.”
“그런 건 메시지로 해도 되는데.”
“혼자 들어가신다고 해서 걱정은 되는데, 형이시니까 잘하실 것도 같고, 하하. 그래서 이거라도 드리려고 왔어요.”
말과 함께 정현수가 손가락만 한 병을 내밀었다.
【상급 치유 물약】
수호는 살짝 감동했다.
수호도 가게에서 파는 물약을 가지고 왔다.
하나 정현수가 내민 것이 훨씬 비싸고 효과가 좋았다.
‘값어치가 문제가 아니지.’
굳이 그걸 따로 챙겨 와서 건넨 마음.
그것이 고마웠다.
“고맙다.”
감사는 짧게 건넸다.
마음은 길게 기억하기로 하면서.
“고맙긴요. 늘 말씀드리지만,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다 계약에 나와 있는 거예요. 최선을 다한 서포트!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잖아요.”
“자식.”
수호가 정현수의 어깨라도 한 번 두드려 주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우뚝.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갑자기 느껴진 불길한 기운 때문이었다.
발룡이도 경고했다.
『마기다!』
42화 악연을 끊다(1)
두근-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박동한다.
두근-
심장은 아니다.
박영일은 그 정도는 눈치챌 능력이 있었다.
두근-
‘이상해. 분명히 뭔가 이상해. 왜 내가 이곳으로 온 거지?’
두근-
경기도 외곽, 산길.
길이 막혔다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더 나아간 곳.
박영일은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본능은 박영일이 이곳으로 꼭 가야만 한다고 속삭였다.
저편, 산을 뚫어 놓은 터널이 보인다.
두근두근-
박동이 좀 더 빨라졌다.
박영일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저기다, 저기 그놈이 있다!”
박영일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놈? 그게 누구지?”
신기하게도 질문을 한 순간 정답이 떠올랐다.
그놈!
내 하나뿐인 아들, 동식이를 죽인 바로 그놈!
영일 길드의 던전을 클리어해 버린 그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박영일이 욕설을 내뱉었다.
살기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죽여 버리겠다.”
중얼거리며 박영일이 걸었다.
그동안 찾아 헤맨 범인을 어떻게 상상만으로 떠올려 냈을까?
범인이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길도 모르는 곳을 단지 느낌만으로 어떻게 찾아왔지?
으레 떠올렸어야 할 의문은 박영일의 머릿속에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대신 살기만이 가득했다.
육경환이 걸어 놓은 술법 때문이지만, 완전히 술법에 빠진 박영일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박영일이 터널로 걸어갔다.
다가갈수록 박영일의 마음속에 살의가 농축된다.
한데 그런 박영일의 앞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사유지예요.”
상왕련 소속 관리팀 직원이었다.
던전의 출입을 관리하는 그들은 던전의 경비도 책임지고 있었다.
“비켜라.”
박영일이 관리팀 직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유지입니다. 경고했어요. 더 다가오시면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리팀 직원이 손을 허리에 올렸다.
테이저건이 메여 있었다.
직원의 경고에도 박영일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저벅.
관리팀 직원이 기어이 테이저건을 뽑았다.
“멈추세요!”
“죽여 버리겠다.”
경고에 살의로 대답한 박영일.
그를 향해 테이저건이 쏘아졌다.
파지지지직-
테이저건은 쉽게 명중했다.
그리고 전류를 내뿜었다.
“미, 미친! 끄떡없잖아!”
헌터에게도 최소한의 위협을 가할 수 있게 강도가 조절된 물건이다.
한데 박영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방해하지 마라!”
두근-
박영일은 눈앞의 직원이 잘 인식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날파리 같은 게 가로막는다는 느낌뿐.
박영일이 검을 뽑았다.
촤악-
칼날이 망설임 없이 직원의 목을 베었다.
직원은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그대로 절명했다.
두근두근두근-
살인을 저질러서일까.
박동이 더 거세어졌다.
박영일의 걸음도 더 빨라졌다.
‘다 죽여 버리겠다.’
범인을 죽여버리겠다던 마음이, 어느새 모든 인간에 대한 살의로 변해 갔다.
박영일은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육경환이 새겨 놓은 수법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여긴 누구 허락받고… 컥!”
“미, 미친! 살인이다! 헌터야! 협회에 연락… 크악-!”
통로를 지키던 관리팀이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박영일은 통로 저 안, 자신을 부르는 ‘범인’의 기운을 향해 나아갔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박영일의 몸 안 어딘가에 심어진 마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찾았다!”
박영일의 머릿속에 심어진 범인의 얼굴.
그것이 저편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 *
‘마기?’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수호도 마기를 느꼈다.
협회 의뢰 때와 달리 너무도 노골적인 기운이었다.
“크악-!”
“빠, 빨리 신고를… 컥!”
터널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멎었다.
『순식간에 모조리 죽여 버렸군. 마인이다. 대비해.』
발룡이의 목소리에 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왜지? 어째서 이곳에 마인이 나타난 거지?’
갑자기 왜?
설마 협회 의뢰 때문에 앙심을 품고?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저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흐흐, 찾았다.”
마인은 척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섰고, 입에서는 침이 흐른다.
손에 든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박영일? 도대체 무슨 짓을?”
옆에서 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영일? 영일 길드 마스터?”
“예, 그 박영일 맞아요. 근데 어째서? 상왕련과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정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영일 길드가 제법 잘나가는 중견 길드지만, 한국의 아이템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상왕련과는 체급이 다르다.
상왕련이 무력에서 약세를 보이는 것도, 대형 길드와 비교해서나 그렇지.
영일 따위는 돈으로 짓눌러 버릴 수도 있다.
정현수가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하나 수호는 달랐다.
‘설마 박동식을 죽인 일이 들킨 건가?’
이쪽으로 쏘아지는 저 살기.
광기 어린 눈빛.
강렬한 원한이 없고서는 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근데 어째서 마인이 된 거지?’
수호는 머리가 복잡했다.
박동식 건이 들켰다면, 복수를 위해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한데 갑자기 마인이라니.
마인과 박동식 건 사이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지 않나.
궁금증은 곧 조금이나마 풀렸다.
박영일이 직접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 내 아들을 죽인 범인! 크흐흐흐흐- 죽여 버리겠다.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정현수. 네놈을 죽이고 네놈과 관련된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겠다. 크흐흐흐-”
박영일이 광기에 차 떠들었다.
“뭐? 무슨 소립니까? 내가 왜 박동식을 죽여요?”
정현수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대꾸했다.
수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수호가 아니었다.
박영일의 살기는 확실히 정현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째서 현수가 박동식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육경환의 술법 때문이다.
육경환은 당연히 진범 따윈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정현수를 죽여 상왕련을 흔들 수 있으면 그뿐.
설사 일이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용도 폐기 상태인 박영일을 직접 처리하는 대신 벌인 일일 뿐이니까.
물론, 이 자리의 누구도 일의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크흐흐흐, 죽어라!”
박영일이 양손을 휘둘렀다.
촤라라라락-
시커먼 마기가 손끝에서 죽 늘어나 창처럼 뻗어 왔다.
수호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수호가 주르륵 뒤로 밀렸다.
손이 저릿했다.
한데 수호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크흑-”
뒤에서 신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제기랄! 현수가 당했어!’
머리가 복잡했던 탓이리라.
미처 정현수까지 챙기지 못했다.
그 결과, 마기의 창 하나가 정현수의 배에 박혀 있었다.
“크흐흐흐- 잡았다. 범인을 잡았다! 이제 찢어 죽이는 거야.”
박영일이 정신 나가 소리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안 죽었어.’
고통을 줄 생각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정현수는 배가 관통됐지만 살아 있었다.
『수호, 역부족이다!』
발룡이의 경고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한 번의 공방으로 발룡이는 적의 전력을 파악했다.
발룡이의 말대로 박영일은 수호보다 강했다.
60레벨 헌터, 박영일.
거기에 마기까지 더해지자 정면으로 승산을 점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현수를 두고 도망칠 수는…….’
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박동식을 죽인 것은 수호다.
이대로 등을 돌리면 두고두고 이날이 기억날 터.
수호는 평생 잊지 못할 나쁜 기억이 또다시 생겨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 싸운다!’
물론, 대신 죽어 줄 생각은 없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볼 뿐.
‘최악의 상황이라도 구명줄은 있으니까.’
블링크 스크롤.
정 안되면 스크롤을 사용해 혼자서라도 도망친다.
생각은 길었지만 흐른 시간은 찰나였다.
마음이 정리되자 수호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화염 강격!’
퍼어어억-!
박영일의 가슴에 손쉽게 화염 강격이 명중했다.
정현수의 배에 창을 박고 즐거워하느라 가슴이 훤히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호는 공격의 성과를 살피지도 않고 소리쳤다.
“이거 현수한테 먹여!”
좀 전에 정현수에게 받은 물약이 발룡이에게 날아갔다.
『알았다.』
발룡이가 물약을 앞발로 낚아채고 정현수에게 향했다.
수호는 시선을 박영일에게 돌렸다.
“넌 뭐지? 왜 날 방해하는 거지?”
박영일은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저런 하찮은 버러지가 어째서 우월한 내 공격을 버틴 거지?
마땅히 죽었어야 했는데.
왜 안 죽고 반격까지 하는 걸까?
두근두근두근-
의아함은 곧 살의로 바뀌었다.
“크흐흐- 죽인다.”
수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격이 안 통해.’
화염 강격이 적중한 박영일의 가슴은 움푹 파였다.
한데 검은 아지랑이가 파인 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마기가 신체를 복구하고 있어. 내 힘으로는 치명상을 가하기 힘들어.’
수호는 깨달았다.
근력 폭발을 쓰든 헤이스트를 쓰든.
박영일을 단숨에 무력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해.’
수호는 곧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도박에 가까웠지만 승산은 있다!
“발룡아, 현수 데리고 들어가!”
수호가 던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쩔 생각이지?』
“어서!”
『쯧, 알았다.』
발룡이가 혀를 차더니 정현수의 옷을 물고 날아올랐다.
“크흐흐- 어딜 간다고?”
박영일이 양손에서 마기 창을 쏘았다.
수호는 서둘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콰앙!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두 개의 창을 모두 막아 냈다.
수호의 몸이 주르륵 밀렸다.
‘따라와라, 마인!’
충격을 거스르지 않고 수호가 몸을 날렸다.
수호의 몸이 던전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후끈.
던전 안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열기였다.
당연했다.
사방에서 펄펄 끓는 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용암 위로 흐르는 강.
그 위를 배처럼 떠다니는 여러 개의 돌섬.
그것이 이 던전의 지형이었다.
‘내 힘으로 죽일 수 없다면 던전을 이용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발룡이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 왔다.
하지만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크흐흐흐- 여기 있었네? 죽인다.”
박영일이 곧장 던전에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호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푸슈슛-
푸슈슛-
수호의 손목에서 거미줄이 발사됐다.
잔여 소모 횟수를 모두 사용한 덕분에 박영일의 몸에 거미줄이 휘감겼다.
“이건 뭐지?”
서걱, 서걱-
박영일이 마기 창을 휘둘러 거미줄을 잘랐다.
그사이 수호가 쇄도했다.
‘헤이스트!’
동시에 스킬을 시전했다.
시야가 집중되며 박영일의 움직임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줄을 잘라낸 박영일이 창을 휘둘렀다.
치익-
창이 갑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수호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박영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크흐흡- 이 버러지가!”
박영일이 양손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츠차차차차차차-
몸 앞에 마기로 만든 믹서기가 생겨났다.
‘앞으로는 안 돼.’
우회한다!
수호가 막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뭘 할 거면, 본좌에게 미리 말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콰르르르르-
박영일의 머리 옆에서 브레스가 발사됐다.
“크흑- 날파리가!”
브레스에 얼굴을 그을린 박영일이 창을 휘둘렀다.
퍽!
발룡이가 창에 맞아 날아갔다.
‘발룡아!’
걱정이 치솟았다.
수호는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분명히 괜찮을 거야. 맷집 하나는 최고니까.’
발룡이를 살피러 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발룡이가 한 일이 무의미해진다.
대신 발룡이가 벌어준 틈을 이용한다.
수호가 계속 달렸다.
화염 포마검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근력 폭발!’
그리고 스킬을 시전했다.
활화산 같은 힘이 끓어올랐다.
수호는 그 상태로 박영일을 들이받았다.
퍼억-
충돌음이 들리더니.
풍덩-!
수호와 박영일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끄응,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발룡이가 그 모습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43화 악연을 끊다(2)
‘이 던전에는 용암수가 흐르는 강이 있고.’
용암에 물이 섞여 적당히 묽어진 액체, 용암수.
용암의 성분을 생각하면 존재할 수 없는 물질이지만 던전에서는 가능했다.
높은 마력 농도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니까.
용암수 속에서 튀어나와 헌터를 공격하는 양서류, 용암 두꺼비.
‘몬스터는 던전 입구 쪽에는 나타나지 않아.’
이 던전의 주요 몬스터인 용암 두꺼비는, 던전 입구에서 돌섬을 하나 건너갔을 때야 등장한다.
모두 수호가 미리 숙지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수호는 무모해 보이는 승부를 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제발 죽어라!’
수호는 박영일에게 등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치이익-
용암수에 의해 피부가 녹는다.
60에 다다른 【화염 저항】과 재생 스탯.
그리고 적회색 수호자를 믿고 벌인 일이다.
‘크윽- 아파. 그래도…….’
그런 조건 속에서도 온몸에서 작열통이 느껴졌다.
하나 상황은 수호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놈이 더 큰 대미지를 입고 있어.’
치이이이익-
마기가 상처를 재생하지만, 온몸에 가해지는 열기를 모두 감당할 수는 없다.
그 결과 박영일의 몸에서는 피와 살이 녹아내렸다.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열기에 대한 내성 외에도 수호가 승부를 위해 염두에 둔 것이 또 있었다.
【수중 호흡】
황금 잉어를 먹고 얻은 이 스킬 덕분에, 수호는 용암수 속에서도 숨 쉴 수 있었다.
‘마인이든 뭐든,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숨은 쉬어야 할 테니까.’
본체인 마기의 덩어리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마인은 엄연히 사람의 형태를 띤다.
더 질기고 강하더라도, 숨 쉬고 먹어야 산다.
그것이 수호의 두 번째 노림수였다.
‘슬슬 발악하겠지?’
박영일의 몸부림이 거세어졌다.
이대로는 죽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푸르르르르-
박영일의 몸이 사정없이 떨리더니, 몸에서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숙주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은 본체가 마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낸 것이다.
‘기다렸다. 전격의 손길!’
그 순간 수호도 아껴 둔 한 수를 사용했다.
파지직!
수호의 손끝에서 전격이 흘러나왔다.
움찔.
박영일의 몸이 굳는다.
‘기절’ 상태에 빠진 것이다.
‘됐어. 이 틈에 더 깊이 끌고 가야 해!’
수호는 사력을 다해 발을 움직였다.
발이 물을 밀어 내며, 수호와 박영일을 깊은 곳으로 끌어 내렸다.
부르르.
박영일이 정신을 차렸다.
마력이 뭉클 뿜어져 나왔다.
‘크윽-’
박영일의 몸에서 강력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수호는 안간힘을 써가며 박영일을 붙잡고 늘어졌다.
우직.
발버둥 치는 박영일을 제어하느라, 수호의 팔에서 근육이 찢어졌다.
아찔한 고통이 엄습했다.
‘절대로 놓지 않아!’
수호가 결사적으로 다짐했다.
수호의 의지에도 몸은 차츰 수면으로 향했다.
하지만.
‘쿨탐 돌았다. 전격의 손길!’
파지직!
수호의 손에서 다시 전격이 발사됐다.
지속 시간이 짧은 대신, 재사용까지 1분밖에 걸리지 않는 전격의 손길.
그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었다.
수호와 박영일의 몸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후 같은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움찔.
어느 순간 박영일의 몸이 굳었다.
수호는 직감했다.
‘곧 본체가 튀어나올 거야!’
박영일을 숙주로 삼은 마기의 본체.
그것이 곧 튀어나올 것임을.
‘더는 버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수호의 예상대로였다.
“쿠웨에에에엑-”
용암수 속에서도 느껴지는 괴성과 함께, 박영일의 입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협회 의뢰에서 본 것보다 2배는 컸다.
덩어리는 재빨리 수면을 향해 솟구쳤다.
‘어딜 도망치려고!’
수호가 손을 뻗었다.
덥석.
덩어리가 손에 잡혔다.
다른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꼭 쥐고만 있어도 용암수가 덩어리를 녹여 갔기 때문이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용암수를 진동시키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어이 수호의 손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끝났다!’
수호는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 * *
부글부글.
용암수가 요동친다.
마력도 강하게 유동한다.
발룡이는 싸움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음을 눈치챘다.
『본좌에게 진 빚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죽음을 허락하지 않겠다.』
발룡이가 이번 던전의 대가로 받기로 한 치킨 3마리를 떠올리며 독백했다.
촤아아악-!
그 순간 용암수가 갈라졌다.
수호의 머리가 수면 위로 나타났다.
『수호! 살아 있었구나!』
“후우… 이제 좀 살겠네. 걱정했어?”
『걱정? 본좌가 네놈을?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올라와서 몸에 묻은 것이나 좀 털거라.』
뻔한 거짓말에 수호가 피식 웃으며 뭍으로 올라왔다.
용암수가 흘러내려 바닥을 달구었다.
추르륵-
그런 수호의 뒤로 무언가 끌려 나왔다.
박영일의 사체였다.
피부가 녹아 곳곳에 뼈가 드러나 있었다.
『끔찍한 꼴로 변했군. 마기에 먹혔을 때가 차라리 보기 나았을 지경이야. 네놈은 괜찮은 것이냐?』
“좀 쓰라리긴 한데, 괜찮아. 지금도 낫는 중이고.”
재생 스탯이 지금도 수호의 몸을 열심히 회복시키고 있었다.
털썩.
수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로가 몰려온 탓이다.
쉬고 있자니, 멀리 돌바닥 위에 쓰러진 정현수가 눈에 들어왔다.
“발룡아, 현수는 좀 어떻디?”
『안 죽었다. 치료만 잘하면, 금세 일어날 것 같더군.』
다행이다.
모험하길 잘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정현수도 살렸고 수호도 살았으니…….
“그럼 챙길 것 좀 챙겨 볼까?”
수호는 옆에 누운 박영일의 사체에서 아이템을 수거했다.
녹아서 못 쓰게 된 것들이 태반.
하지만 다 쓸데가 있다.
‘드워프한테 맡기면 재료로 쓸 수 있겠지.’
수호가 아이템을 다 챙겼을 무렵, 발룡이가 말했다.
『누가 온다. 본좌는 투명화하겠다.』
수호의 감각에도 여러 사람의 기척이 감지됐다.
머잖아 장내에 사람들이 도착했다.
“현수야-”
“도련님이 저기 계신다. 어서 모셔!”
“범인은? 범인은 어디 있지?”
정현아와 상왕련 소속 헌터들이었다.
* * *
던전 밖, 트레일러 안에 마련된 휴게실.
수호는 정현아와 마주 앉았다.
‘지원이 빨리 왔다 싶더라니, 헬기를 동원했구나.’
정현수는 지원팀이 타고 온 헬기를 이용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원수호 씨. 저희 상왕련에서 따로 보상해 드리겠지만, 개인적으로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어요.”
박영일이 정현수를 노린 이유가 떠올라 수호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놈이 저도 죽이려 들었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었거든요.”
“나중에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 봐도 될까요?”
“전투 후유증도 있으실 텐데, 헬기로 모셔다 드릴게요. 차는 따로 집까지 가져다 드리고요.”
배가 좀 고플 뿐 후유증은 없지만, 수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헬기 좀 얻어 탈…….”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누구죠?”
정현아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수호의 안정을 위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해 뒀을 텐데.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원수호 헌터를 잠시 만나 보고 싶은데요.”
“음,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협회 소속 신성현이라고 합니다.”
“아! 협회장님의……?”
“예, 협회장님의 비서입니다. 원수호 헌터 또 뵙네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째 자주 만난다고 생각하며 수호도 대답했다.
“좀 피곤해서 그렇지 몸은 괜찮습니다.”
“그러시군요. 조용히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신성현이 정현아를 쳐다봤다.
“이야기 나누세요. 말씀 끝나시면, 서울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수호 씨.”
정현아가 나갔다.
신성현이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박영일이 마인이었습니까?”
“네, 어떻게 아셨어요? 여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오셨고요?”
“처음에는 헌터들 간의 분쟁인 줄 알았습니다. 한데 원수호 헌터의 이름이 보이길래, 혹시나 하고 신고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검은 기운을 비롯해 마인에게서나 보일 법한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수호를 비롯해 마인과 관련된 인물의 정보는 따로 관리된다.
신성현이 빠르게 도착한 이유였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건 아니었군요.”
수호는 혹시나 했었다.
박영일이 원래부터 마인이었고, 협회에서 그의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
“예. 방금 원수호 헌터한테 대답을 듣는 순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인에 관해 상왕련 측에 말씀하셨습니까?”
“안 했습니다. 저번에 비밀을 유지하라고 하셔서요.”
“잘하셨습니다. 상왕련 수뇌부 측에는 협회에서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근데 원수호 헌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블링크 스크롤을 쓰셨습니까?”
“아니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거기까진 안 갔습니다.”
신성현의 눈이 커졌다.
‘밖에서 들으니 용암수에 빠트려 죽였다던데. 블링크 스크롤 없이 그게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원수호 헌터가 60레벨의 헌터, 그것도 마기가 폭주한 마인과 싸울 수 있다는 소리겠지.’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전투’가 성립하는 수준 말이다.
말없이 눈만 크게 뜬 신성현에게 수호가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협회장님의 안목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것 같군요.”
“……?”
“원수호 헌터의 실력에 감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협회를 대표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번 의뢰 후에 마인의 습격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거짓말이 되어 버렸군요.”
“알겠습니다. 근데 도대체 박영일은 어떻게 마인이 된 겁니까?”
“그 점은 지금부터 조사해 봐야겠죠. 출발 전에 영일 길드에 대해 조사를 지시해 둔 상태입니다.”
박영일 관련해서는 뭔가 냄새가 났다.
갑자기 마인이 된 것도.
정현수를 원수로 여긴 것도.
‘찜찜해. 분명히 뭔가 더 있어.’
그렇기에 수호는 신성현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단서가 발견되면 저도 좀 알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될 사안이 아니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신성현은 한동안 대화를 더 나눈 후에 돌아갔다.
“우리도 집에 가자.”
『그래, 본좌는 배가 고프다.』
“언제는 마력만 먹는다며?”
『자꾸 먹다 보니, 안 먹으면 허전하다. 이것이 치느님의 위대함인가?』
“그런 단어는 언제 배웠냐?”
『본좌는 모르는 것이 없느니라.』
“…….”
.
.
.
수호가 상왕련 헬기 앞에 섰다.
정현수도 구했고, 수호도 살아남았다.
박영일의 아이템을 챙겼으니 소득도 있는 셈이다.
찝찝함은 남았지만 이곳에서 할 일은 남지 않았다.
‘가자, 가.’
뒷일은 집에 가서 생각하자.
수호가 마음을 털어내며 헬기에 오르려 할 때 누군가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원수호 헌터님.”
던전 앞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예, 무슨 일이신지?”
“저는 던전 관리팀장인 황병수라고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개자식을 죽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크흑-”
“아…….”
“이번에 저희 팀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원수호 헌터가 그 개자식을 죽여 주신 덕분에, 그나마 그 친구들이 구천에서라도 눈을 감을 것 같습니다. 유가족들한테 크흡- 한마디라도 할 말이 있을 것 같고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황병수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 숙였다.
수호는 용암수에 뛰어든 보람을 느꼈다.
“예, 저도 그놈을 처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와 의문으로 찜찜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수호가 헬기에 올랐다.
* * *
며칠이 흘렀다.
[수호 아이템&잡화]
수호의 가게 맞은편.
검은색 최고급 차량 뒷좌석에서 누군가 수호의 가게를 응시하고 있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겠지.”
단단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쇼윈도 안으로 비치는 가게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듣던 대로 가게가 협소하군. 선물을 준비하길 잘 했어.”
건물이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노인이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44화 악연을 끊다(3)
박영일 사건 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가게에서 새 물건을 런칭했는데 리뷰가 올라왔다.
[신제품 창 내가 써 봤다!]
- 이번에 새로 나온 창 써 본 결과, 이것도 대박! 완벽한 그립감, 뛰어난 내구도, 창날도 진짜 날카로움. 특히 【하급 관통력 강화】 요거 기가 막힘! 몬스터 가죽이 쑥쑥 뚫림.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안 뛰고 뭐 하냐? 어서 가서 사라. 두 번 사라. 매진되고 물량 적다고 징징대지 말고. 하악-
┗ ㅋㅋㅋ 이분 또 물건 출시하자마자 샀네.
┗ 출시하면 곧바로 동영상 리뷰 올려 주니 좋네. 옵션만 보는 것보다는 확실히 물건 질이 느껴지니까.
┗ 이 집 물건은 동영상으로도 다 못 담음. 직접 휘둘러 봐야 앎.
┗ 어쨌든 이번 물건도 좋다는 소리네.
┗ 근데 왜 창이지? 사장님, 롱소드 좀 주세요, 젭알!
┗ 요일마다 물건 바꿔서 파는 것 같던데.
┗ 곧 롱소드도 판다고 했음.
┗ 대박! 저렙들의 성지 될 판ㅋㅋㅋ
댓글이 잔뜩 달렸다.
‘반응 괜찮네.’
호평 일색.
좋은 댓글을 읽는 수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건이 좋지만, 리뷰 덕도 제법 보는 것 같아.’
처음에 단검을 사간 헌터, 양수정.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물건을 사 가곤 했는데 빼먹지 않고 리뷰를 올렸다.
‘양수정 헌터, 고맙네.’
처음엔 도적 계열 헌터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헷갈린다.
창은 물론 새로 나온 모든 아이템을 사 갔으니까.
뭐 하는 사람이지?
당연하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고객 신상까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겠지. 다음에 오면 서비스라도 챙겨 주자.’
수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거인님!”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수호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냉장고로 다가갔다.
타룽가가 입구 쪽에 다가와 있었다.
“타룽가님, 웬일이세요?”
“장비 수리가 끝났습니다.”
용암수 탓에 장비가 많이 상했다.
돌아온 즉시 타룽가에게 수리를 맡겨 뒀었다.
“보내 주세요.”
“예, 받으십시오.”
차원 보따리에 적회색 수호자가 들어왔다.
꺼내 보니, 처음 만들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완전 새것 같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그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죄송하게도 나머지 장비는 아직 제작이 덜 되어서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수호는 박영일의 아이템을 재료 삼아 새 장비를 의뢰했다.
“괜찮아요. 빨리 만드는 것보다 잘 만드는 게 중요하죠. 세 분이 힘을 합쳐 만드신다니, 어련히 잘 나오겠지만요.”
“껄껄, 재료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천히 하세요. 괜찮아요.”
험한 일을 겪은 탓에 힘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하나 서두른다고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수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타룽가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에서 나갔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네며 손님을 살폈다.
단단한 인상의 노인.
덩치는 작지만 눈빛이 범상치 않다.
‘물건 사러 온 분위기가 아닌데.’
노인의 입이 열리며 수호의 예상이 맞았음이 드러났다.
“원수호 헌터 되시지요?”
* * *
수호가 믹스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접대를 위해 최근에 준비해 놓은 것인데.
눈앞의 인물에게 대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괜찮아요. 믹스 커피 좋아합니다.”
노인이 편안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대한민국 아이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상왕련주치고는 소박한 입맛이었다.
한동안 차 마시는 소리만이 가게 안을 울렸다.
차를 다 마셨을 즈음, 상왕련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느라 좀 늦었네요. 먼저 감사부터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원수호 씨. 아들의 목숨을 살려 줘서.”
상왕련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목숨을 지키려고 싸운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목숨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요.”
상왕련주가 심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는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수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청년인데.’
불합리한 계약 조건, 정현아와 던전행, 소매치기 검거…….
정현수는 몰랐지만 상왕련주는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호가 보여 준 능력도 정보에 포함되었고.
‘실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실력은 종종 배신당한다.
실력이 있음에도 실패하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꾸준히 반복된 실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상왕련주가 수십 년간 상계에서 활동하며 깨우친 진리였다.
‘현수 녀석이 그저 치기로 벌인 일인 줄 알았더니…….’
눈앞의 청년은 상왕련주가 보기에도 분명히 뭔가 있었다.
아들인 정현수도 아마 그것을 보았을 터.
‘녀석이 제법 안목이 있었구나.’
상왕련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동시에 그는 오늘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결정했다.
상왕련주의 입이 열렸다.
“빚을 졌으면 갚는 게 도리입니다. 내 철칙이지요. 그래서 원수호 씨한테 물을게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습니까?”
상왕련주가 질문했다.
뭐든 말만 하라는 뉘앙스였다.
‘이거 참, 백지수표도 아니고.’
수호는 대답이 궁했다.
마음이 완전히 떳떳했다면 쉽게 입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한데 복잡하게 얽힌 사정 때문에 마음 편히 요구하기 힘들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알겠습니다. 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니…….”
가볍게 웃은 상왕련주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준비해 온 선물이 있어요. 현수와 계약을 했지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어떤 던전이든 원수호 씨를 빌려주기로 했던가요?”
“예.”
“저도 비슷한 걸 하고 싶군요. 원수호 씨가 원할 때, 저한테 뭐든 원하는 바를 부탁하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수호의 눈이 커졌다.
상왕련주의 약속이다.
범인의 약속과는 의미도, 효과도 다르다.
“으음.”
수호가 침음했다.
“괜찮습니다. 과하지 않아요. 저한테는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원래는 수호가 납품받는 식자재와 생필품을 무료로 해 주려 했었다.
한데 상왕련주는 생각을 바꿨다.
‘굳이 인연을 느슨하게 할 필요는 없지.’
상왕련주에게 거래는 인연의 끈이었다.
그렇기에 체결된 거래를 공짜로 바꿔 주기보다 새로운 이득을 주는 편을 택했다.
‘이 친구와는 끈을 이어 놓는 편이 좋을 테니까.’
한 가지 부탁.
그것이 수호와의 인연을 더 끈끈히 만들어 줄 터였다.
“알겠습니다.”
수호가 대답했다.
정 마음에 걸리면 부탁하지 않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한데 상왕련주의 선물은 끝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도 한 가지 더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상왕련주가 밖을 향해 손짓했다.
딸랑-
정장을 입은 남성이 가게로 들어왔다.
손에 태블릿PC가 들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련주님.”
“설명해 드리게나.”
남자가 태블릿 화면을 수호에게 보여 줬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여러 건물의 사진이었다.
‘상가 건물이잖아. 이걸 왜?’
주소와 작은 약도도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 협회 근처였고 몇몇은 상왕련이 있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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