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6

“어, 아이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진짜였구나. 그럼 그 수박 주스 가게에서 파는 거예요? 나 그거 사고 싶은데.”
“수박 주스 아니고, 잉어즙이야.”
“뭐든요. 그거 한 병에 얼마예요?”
“30만 원.”
“오- 가성비 좋다! 100병쯤 사서 재어 놓고 마셔야지.”
“1인당 하루 10병까지야.”
“왜요?”
“안 그러면 금세 동나거든. 물량이 얼마 없어서.”
“저한테만 어떻게 안 될까요? 우리 사이에.”
“아무 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와- 생사를 함께한 전우를 이런 취급이라니! 아저씨 너무해!”
철컥.
너스레를 떠는 사이, 문이 열리고 신성현이 들어왔다.
“위험한 일에 솔선하신 분들을 잡아 둬서 죄송합니다. 꼭 필요한 절차였던지라 양해해 주십시오.”
고개 숙인 신성현이 말을 이었다.
“소속 길드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지만, 던전에서 있었던 일은 외부로 발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 보셔도 좋습니다.”
김진성과 윤미래가 일어섰다.
“다음에 뵐 때는 제가 이길 겁니다, 형님.”
“아저씨, 가게로 놀러 갈게요!”
두 헌터가 나갔다.
수호는 밖으로 향하지 않았다.
‘받을 건 받아야지.’
이번 일을 통해 수호는 협회에서 2가지를 받아야 했다.
예상대로 신성현이 입을 열었다.
“원수호 헌터는 협회로 같이 가실까요?”
“그러죠, 집이 협회 근처니, 차만 세워 두고 곧바로 가겠습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 * *
발룡이를 집에 두고, 수호는 협회로 향했다.
곧 협회장 백무진과 마주했다.
“이번 일은 자네에게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추천한 것이라네. 1성 던전인 이상,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자네를 위기에 빠트릴 일은 없다고 생각했거든.”
백무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것이 끼어들었을 줄은 몰랐다네. 심지어 협회에서 파견한 헌터가 그런 상태일 줄은……. 협회장으로서, 자네를 이번 일에 추천한 선배 헌터로서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하네.”
말을 마친 백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협회장님! 그렇게까지!”
대한민국 헌터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백무진이다.
그가 신입 헌터에게 고개를 숙였으니 측근인 신성현이 놀랄 수밖에.
하나 백무진은 손을 저어 신성현을 만류했다.
수호는 백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받으려던 두 가지 중에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쪽을 먼저 받았네.’
사과와 대가.
그중 사과는 받기가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백무진이 도리를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수호도 굳이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솔직히 사과보다도 궁금증을 풀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된 겁니까? 그 흉악한 기운은 뭐고요?”
마기.
마계의 주민인 마족이 가진 기운.
타룽가는 마기를 그렇게 정의했다.
한데 지구에서.
그것도 협회 소속 헌터가 마기를 품고 있었다.
꼭 알아봐야 한다.
‘도대체 어째서 마기가 지구에 있는 건지. 협회를 비롯한 고위 헌터들은 마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수호가 눈빛을 빛냈다.
백무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나. 아직 이르건만…….’
아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르는 수도 있는데.
백무진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접점이 생겨 버렸으니까.
백무진은 세상에 감춰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던전이 생긴 뒤, 세상에 풀려난 인류의 적은 몬스터만이 아니라네.”
“…….”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자네가 본 그 검은 기운이 나타났네. 그 기운은 사람의 몸을 잠식하지. 그리고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네. 우리는 그 기운을 마기라 부르네. 마기에 감염되어 괴물이 된 존재를 마인이라 부르고.”
마기가 맞았다.
심지어 명칭도 같다.
백무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가 본 것처럼 마인은 인간을 증오하네. 인간에게 무한한 살의를 품지.”
“네, 서현석 헌터는 갑자기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덤벼들더군요.”
“마인도 여러 종류가 있어. 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놈도 있고,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놈도 있지. 사실 후자 쪽이 훨씬 위험하다네.”
수호가 묵묵히 듣고 있는 사이, 백무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데 마인 중에 마기를 완벽하게 다스리는 데다가, 큰 힘까지 갖춘 놈들이 있네. 그들이 마인을 모아 몇 개의 조직을 만들었지. 각자 활동 반경은 다르지만, 놈들이 원하는 건 하날세. 인류 말살.”
“인류 말살이요?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겁니까?”
“마기에 물들었기 때문이지. 그게 그들의 본능이 되어 버린 거야.”
무거운 마음을 다잡으며, 수호가 물었다.
“그럼 서현석 헌터는 어째서 마인이 된 겁니까? 그리고 마기가 옮기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서현석은 던전에서 생환했다가 죽은 헌터에게 감염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네. 그리고 자네가 본 것은 마기가 옮겨 가는 방식 중 한 가지에 불과해. 검은 덩어리에 침식당하지 않더라도, 마인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가령…….”
백무진은 몇 가지 방법을 설명했다.
그 탓에 뿌리 뽑기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괜찮은 겁니까?”
“10년쯤 전부터 한국에서는 마인의 활동이 드물다네. 마인의 수도 적고. 아마 자네에게 직접 해를 가할 일은 없을 걸세.”
“확실한 겁니까?”
“잘 생각해 보게. 놈들의 목적이 얼마나 거창한가. 굳이 자네를 콕 집어 해코지할 필요가 있을까? 설사 이번 일에 앙심을 품는다고 해도, 이번 일이 자네 혼자 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백무진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첨언했다.
“협회가 타깃이 되겠지. 이번 일의 주체는 결국 협회니까. 애초부터 협회를 노리고 벌인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수호는 애송이 헌터다.
대외적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수호의 비밀이 까발려지지 않는 한, 굳이 누군가 수호를 노릴 이유가 없다.
수호의 불안감이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백무진이 덧붙였다.
“저번에 준 블링크 스크롤.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걸 쓰게. 한 번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거야. 그 뒤 곧바로 협회로 오게. 내가 책임지고 지켜 주겠네. 혹시 그래도 불안하면 따로 경호원을 붙여 줄 수도 있고.”
경호원이라니 안 될 말이지.
“경호원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럼…….”
드워프 세상과 연관해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이만하면 들을 건 다 들은 셈이다.
“이제 약속한 걸 받고 싶은데요.”
“그래, 자네에게 주기로 한 게 있었지. 가 보세나.”
백무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호도 흔쾌히 따라나섰다.
스킬 룬을 받을 시간이다.
* * *
협회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된 내밀한 공간.
그곳에 수호와 백무진이 들어섰다.
“자네도 알겠지만, 스킬 룬에는 시스템이 규정한 등급이 없네. 모두 그저 스킬 룬일 뿐이지.”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 모든 스킬이 같은 가치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헌터들끼리 임의로 가치를 나누곤 한다네. 그 가운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높은 등급의 던전에서 나온 스킬일수록 위력이 좋다는 것일세.”
“구하기도 힘들고요.”
“맞네. 어쨌든 협회에 보관된 스킬 룬 중에 아쉽게도 4성 던전 이상에서 얻은 것은 없네. 잘 나오지도 않지만, 나오는 족족 헌터들이 사용해 버리거든.”
“…그렇군요.”
“그래도 3성 던전에서 나온 건 몇 개 있어. 그중에서 자네에게 잘 어울리는 스킬이 하나 있지. 애초에 그걸 자네에게 줄까 하고, 이번 일을 의뢰한 것이었다네.”
백무진이 금고를 열었다.
3개의 스킬 룬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라 보게나.”
수호가 얼른 다가가 세 스킬의 옵션을 확인했다.
그 순간 수호는 확신했다.
‘저거다! 저게 협회장이 말한 스킬이다!’
세 룬 중 하나는 수호가 보기에도 자신에게 딱 알맞은 것이었다.
* * *
협회에서 나와 집으로 걷는 길.
‘그래, 이게 내게 지금 딱 필요한 거였어.’
수호는 새로 얻은 스킬을 살폈다.
【헤이스트】
- 30초 동안 시전자의 모든 속도를 100% 상승시킨다. 재사용 대기 시간 60분.
다른 스킬 룬은 눈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꽂혀 버린 스킬.
【헤이스트】였다.
‘감각 스탯과 궁합이 기가 막힐 거야.’
레벨 업을 하며 감각 스탯이 많이 올랐다.
파악되는 정보도 방대하고 세밀해졌다.
하나 얻은 정보를 오롯이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몸이 안 따라 줘서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못했으니까.’
신체 능력.
그중에서도 속도의 부족 때문이었다.
‘헤이스트를 쓰면, 감각 스탯이 전해 오는 정보에 완벽히 대처할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만큼 기대도 컸다.
수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얼른 집에 가서 실험해 보자.’
머잖아 집에 도착했다.
가게를 통과해 곧바로 뒤편 방으로 향했다.
『오, 드디어 돌아왔군. 본좌는 치킨이 급하다.』
“오자마자 치킨 타령이냐.”
아, 그러고 보니 대가를 치러야지.
내게 중2병 대사를 내뱉게 한 대가를.
‘복수의 시간이다.’
수호가 스산한 눈빛을 빛내는 순간, 발룡이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어서 치킨을 다오. 본좌는 싸움을 관전해야 하느니라. 크큭. 하찮은 미물의 싸움이야말로 싸움 구경 중에 으뜸이니라.』
“뭐? 싸움?”
수호의 눈이 발룡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녀석은 수트 케이스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불길하다.
수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긴급 임무 발생!]
[긴급 임무 발생!]
.
.
[차원 임무 【야수 침범】을 획득하셨습니다.]
[서둘러 임무 내용을 확인해 주십시오!]
‘이런 젠장! 빨리!’
서둘러야 한다.
마음먹은 순간, 수호는 자연스럽게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
찰나, 수호는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세상이 멈췄어?’
감각 스탯이 전해 오는 정보.
빨라진 수호가 정보를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덕분에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주변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굉장한 시너지였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
경이로운 감각을 즐길 시간이 없다.
쾅-
방바닥을 박차고 수호가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 수트 케이스 앞에 도착.
안을 살핀다.
야수가 보였다.
‘곰이다!’
바비의 10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곰.
그것이 강을 헤엄쳐 바비의 집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바비가 맞서 싸우고 있었어.’
바비가 집어던진 것인지.
강철 나무 조각이 멀리 떨어진 곰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
‘곰이 뭔가 하려 한다!’
일반적인 곰은 아닌 듯, 곰에게서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화염 포마검을 꺼내 들었다.
“쿠와아아아앙-!”
곰이 포효를 내질렀다.
놈의 털이 바짝 일어서더니.
푸콰콰콰쾃-
발사됐다.
“으헙!”
하늘을 빼곡히 매우며 날아드는 털 화살.
바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갑. 우리 아기들은 어떻게 되는 거집?’
아이들을 홀로 남겨 둘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바비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삶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바비는 기억 속에서 손을 떠올렸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그러나 따뜻하고 고마운 손을.
‘수호, 아이들을 부탁한답.’
강변으로 피신시켜 놓은 아기 비바니들을 떠올리며 바비는 최후를 준비했다.
한데 그때.
티티티팅-
곰이 쏘아 낸 털들이 커다란 칼날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압-!”
깜짝 놀란 바비가 눈을 떴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비, 가서 아기들부터 챙겨. 여긴 나한테 맡기고.”
바비는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강물로 씻어 내며 소리쳤다.
“고맙답! 맡기겠답!”
퐁-
바비가 강변으로 헤엄치는 순간.
수호는 가차 없이 검을 내뻗었다.
‘몬스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푹-
곰의 몸에 칼날이 꽂혔다.
‘내 식구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둬!’
수호가 칼을 강변에 내리찍었다.
쿵-!
꼬치처럼 꿰인 곰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파스스.
곧 곰의 사체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어? 사라져?’
수호가 의문을 품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야수 침범】을 완수하셨습니다.]
[고유 스킬 【차원 시야(하급)】를 획득합니다.]
[차원 임무 【야수 침범】이 【시끄러운 이웃】으로 연계됩니다.]
33화 시끄러운 이웃(2)
보송보송 갈색 털이 오른 얼굴.
머리 위로 솟은 동그란 귀.
가슴팍에 솟은 보름달 모양의 흰색 털.
곰 인형처럼 생긴 귀여운 외모의 온달곰족 무녀(巫女), 온달소라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울컥.
기어이 그녀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무, 무녀님! 괜찮으세요?”
시녀인 온달소소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괜찮아. 잠깐만 쉴게.”
온달곰족의 무녀는 먼 조상의 영령(英靈)을 불러오는 재주를 타고난다.
영령은 무녀의 기운을 빌려 세상에 나타나고, 온달곰족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는 했다.
조금 전 그 영령과의 연결이 강제로 끊겼다.
‘도대체 뭐였지? 뭔가 거대한 것이 영령님과의 연결을 단번에 끊어 버렸어.’
온달소라는 고통을 참으며 고심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도, 일이 실패한 지금도.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이래서는 안 돼. 마을에… 온달곰족에게 큰 재앙이 닥칠 거야.’
할머니, 어떻게 해야 해요?
온달소라는 전대 무녀인 할머니를 떠올렸다.
벌컥.
그때 대뜸 방문이 열리고, 건장한 덩치의 온달곰족 남자가 들어섰다.
온달곰족 족장, 부차였다.
“어떻게 됐지?”
부차는 온달소라의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실패에요. 말했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안 돼요. 마을에 큰 재앙이…….”
“닥쳐. 이 멍청한 년. 비바니 몇 마리 족치는 걸 못해? 이 병신 같은 년.”
온달소라가 분노한 눈으로 부차를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부차는 그녀에게는 강도였고 도둑이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던 온달곰족의 마을.
부차의 패거리는 1년 전 마을에 갑자기 나타났다.
영령을 한꺼번에 다섯 분이나 불러올 수 있는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부차는 씩씩하고 적극적인 마을 청년이었다.
한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변했다.
부차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패거리를 동원해 마을 사람을 핍박했다.
심지어 마을에 있지도 않던 ‘족장’이란 감투를 만들어 스스로 뒤집어썼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온달소라는 좌절감에 몸을 떨었다.
숲 너머 비바니를 절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지금도 무녀의 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비바니를 꼭 공격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지 않고도 그동안 잘 살아왔단 말이에요.”
“무슨 병신 같은 소리야! 그놈들 때문에 매번 홍수에 시달리느라 마을 농지가 늘어나지를 않는데. 그것들을 그냥 두고 보라고? 내가 족장이 된 이상, 그런 꼴은 못 봐!”
“홍수랑 상관없이 먹고살고 남을 만큼 충분히 수확할 수 있잖아요. 식량은 지금도 남는데, 왜 굳이 누군가를 죽이려 드는 거예요!”
부차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에게는 지금의 생산량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년 말하는 꼴을 보니, 제대로 하지도 않았겠군. 대충 흉내만 내고, 실패한 척 연기하는 거지?”
부차가 온달소라를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무녀님 피 흘리고 계신 거 안 보이세요?”
참다못한 시녀가 끼어들었지만.
“시녀 따위가 감히!”
짝-
따귀를 맞고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만! 그만하세요, 부차! 연기 따위가 아니에요. 진짜로 영령님과의 연결이 끊겼단 말이에요. 뭔가 거대한 것의 공격을 받았어요.”
“흥, 네년의 말을 내가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네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밝혀졌으니, 어쩔 수 없다. 마을 주민을 모두 모아 이제 총공격이다.”
“안 돼요. 마을 주민들이 다칠 거예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네년 동생이 다치는 건 괜찮다는 말이지?”
“……!”
온달소라가 이를 악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부차가 처음 한 일은 온달소라의 동생을 납치한 것이었다.
어떻게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란 걸 알았을까.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 마을을 장악하고 동생을 납치했을까.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온달소라는 참았다.
동생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까.
‘영령님을 한 분만 더 소환해 낼 수 있다면 승산이 있어. 그 전까지는 저놈의 말을 따를 수밖에.’
그녀의 영력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다.
머잖아 한꺼번에 영령을 두 분 불러낼 수 있을 터.
그때가 되면, 동생을 구하고 부차 패거리를 마을에서 몰아내리라.
‘부디 그전에 마을에 재앙이 내리지 않기를.’
온달소라가 간절히 빌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차가 한껏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년은 어서 가서 마을 주민들을 모아라. 싸울 준비 시키고. 바로 출발할 테니 그리 알고.”
쾅!
방을 나선 부차의 뒤, 온달소라가 귀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고유 스킬? 연계?”
수호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새로운 스킬을 얻은 건가? 어서! 어서 살펴봐라! 본좌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어서!』
옆에서 구경하던 발룡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 그래. 잠깐만.”
수호는 새로 얻은 고유 스킬의 설명을 띄웠다.
【차원 시야(하급)】
- 타 차원을 살피는 시야를 움직인다.
- 등급이 오를수록 시야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아!”
수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뭔데? 뭔데 그러느냐? 본좌를 되돌릴 수 있느냐?』
“아니. 저쪽 세상을 구경할 때, 시점을 움직일 수 있나 봐. 비켜 봐, 한번 실험해 보게.”
수호는 엉겨 붙는 발룡이를 떨쳐내고 수트 케이스로 다가갔다.
댐, 바비의 둔덕 집.
그리고 강변에 늘어선 강철 나무숲이 시야에 들어온다.
‘스킬을 쓰면, 시야가 변한다는 말이지?’
수호는 곧바로 【차원 시야】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뭔가 간질간질 느낌이 왔다.
‘옆으로!’
수호가 강하게 마음먹었다.
그러자 수트 케이스 속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진짜로 시야가 옆으로 움직이는군. 강철 나무숲 너머까지 보여.』
근데 본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구나, 쳇!
콧방귀를 뀌며 발룡이가 침대에 쓰러졌다.
수호는 새 스킬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강 상류로.’
시야가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폭포가 나오더니 계곡을 거쳐 물줄기가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 여기가 한계구나.”
1km쯤 움직이자 더는 이동할 수 없었다.
원래 시야가 몇백 미터에 불과하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넓은 범위를 볼 수 있게 된 셈.
“신기하네. 근데 이 스킬은 어디에 쓰는 게 좋으려나.”
타 차원을 좀 더 원활히 구경할 수 있다.
더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하지만 당장 크게 쓸 일이 있던가?
“드워프 쪽에 다른 광산이라도 뚫어 볼까?”
멀리 있어 못 뚫었던 다른 광물 광산.
그것을 드릴로 뚫어 주면, 더 훌륭한 장비를 만들 수 있겠지?
수호가 차원 시야를 활용할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스킬은 이만하면 다 알아봤고.”
수호는 궁금증을 유발하던 나머지 항목을 떠올렸다.
“연계 임무라. 이것도 알아봐야지.”
『시끄러운 이웃』
- 비바니를 공격해 온 온달곰족. 그들은 내부에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시끄러운 이웃의 사정을 알아보고, 근방의 평화를 위해 그들의 문제를 처리하자.
- 보상 : 새로운 교류 대상(선택적 보상). 새 교류 대상의 만족도(선택적 보상).
의문스러운 내용투성이의 차원 임무였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방금 공격해 온 놈이 온달곰족이란 말인데.”
바비를 공격한 거대한 곰.
그놈을 보낸 것이 온달곰족인 듯했다.
‘사라질 때 연기처럼 없어지던 모습도 그렇고. 분명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수호는 임무를 더 살폈다.
온달곰족의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보였다.
“문제 해결이야, 일단 살펴보고 나서 처리할 방법을 정하면 돼.”
해결 방안은 온달곰족과 제대로 접촉한 후, 생각해 볼 문제였다.
한데 보상 항목은 도통 가늠이 안 되었다.
“근데 선택적 보상은 또 뭐지?”
저 온달곰족이란 자들과 교류하게 된다는 말일까?
아니면 다른 대상이 있다는 소리?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리는 없으니.”
접촉 전까지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일단 만나야 한다.
“때마침 차원 시야도 얻었겠다, 한번 살펴봐야겠지?”
상대를 관찰할 방법은 마련됐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수호는 온달곰족 정찰을 조금 미룰 수밖에 없었다.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살았답! 아죠씨가 악당 곰을 물리쳤답!”
“아죠씨! 수호 아죠씨! 고마워욥!”
“멋져욥! 최고예욥!”
아기 비바니들이 빙글빙글 헤엄치며 소리쳤다.
“수호,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살았답. 나는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답.”
바비도 조막만 한 손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친구끼리 도와 가면서 살아야지. 나도 네가 아침마다 주는 잉어 덕분에 도움 많이 받고 있어.”
“…그거로는 내 마음이 편치 않답. 어쩌집? 황금 잉어라도 찾아 나서야 하납.”
“그거 한 마리밖에 없었다며. 됐으니까, 일단 애들이나 잘 챙겨.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할게.”
“흑- 그랩. 뭐든 말만 해랍. 이 바비는 은혜를 모르는 비바니가 아니답!”
한동안 달래고서야, 바비는 아이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시끄러운 이웃을 한번 만나러 가 볼까.”
수호가 시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온달곰족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기슭.
교묘하게 숨겨진 동굴이 있었다.
그 앞에 두 명의 온달곰족 청년이 서 있었다.
“흐흐, 이번에 낚은 온달곰족 놈들은 쉽네. 무녀만 휘어잡으니 마을이 거저 손에 들어오는구먼.”
그중 한 명의 입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할망구 무녀 살아 있을 때는 어쩌나 했는데. 대장이 할망구 독살한 뒤에는 술술 풀리네. 그 온달소라란 년은 마음씨가 여려서, 크크크.”
나머지가 맞장구쳤다.
“다 좋은데, 홍수가 문제야. 홍수만 해결하면 식량을 폭발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아. 이 좋은 땅에서 저희 먹을 거 한 움큼만 생산하고도 좋다고 그냥 살고 있으니. 등신이 따로 없지, 등신이.”
“근데 그 비바니인지 뭔지, 그걸 왜 못 잡는 거야? 그냥 우리 둘이 가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덩치도 작고 허약하다며?”
“그놈들 집이 물 안에 있잖아. 잡으려면 잠수해야 하는데, 물속에서는 재빨라서 이기기 힘들다나 봐.”
“그래? 저번에 대장이 나무에 뭘 어떻게 해서,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나?”
한 놈이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나머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거 실패했어. 철갑 하마 피를 땅에 뿌려서, 철 나무를 강철 나무로 만들면 비바니가 못 자를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럼 댐을 못 만드니 수위가 낮아질 테고, 놈들의 집으로 언제든 쳐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왜 그냥 뒀대?”
“이상하게 그놈들이 여전히 나무를 자르더란 말이지. 그래서 계획이 실패한 거야.”
“한동안 대장 심기가 불편해 보이더라니 그 때문이었구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해결하려고? 어차피 물속에서는 못 잡는다며?”
“무녀한테 시켜서 영령으로 죽이려고 한 거지. 근데 또 실패했다나 봐.”
혀를 차며 하는 대답에 이야기를 듣던 놈이 되물었다.
“이제 어쩌려나?”
“별수 있나. 마을 등신들 몇 놈쯤 물고기 밥으로 던져 주더라도 머릿수로 밀어붙여야지. 영령도 동원하고. 그러다 보면 비바니 몇 마리쯤 못 죽이겠어?”
“하긴 마을 놈들 죽어 나가는 꼴을 보면, 무녀도 정신 차려서 열심히 하겠지. 게다가 동생도 여기 잡아 뒀으니, 반항도 못 할 테고.”
“크크크, 진짜 우리 대장이지만 비열한 쪽으로는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간단 말이야.”
“야야, 혹시라도 대장 들을라. 크크.”
“오히려 좋아할걸?”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기슭.
그들은 무료함을 달랠 겸.
끝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온달곰족이 문제가 아니고, 저놈들 패거리가 원흉이었구만.’
하늘 높은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34화 시끄러운 이웃(3)
‘할머니?’
하얀 눈썹이 볼까지 내려온 온달곰족 노파.
그녀는 전대 무녀이자 온달소라의 할머니였다.
‘할머니! 저 어떻게 해요. 호동이가 납치당했어요. 사람들이 부차 패거리한테 괴롭힘당해요. 어떻게 해요, 할머니?’
온달소라가 서럽게 외쳤다.
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말이 되어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외쳐도.
그제야 온달소라는 깨달았다.
‘꿈… 이구나. 흑-’
꿈속이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그런 온달소라를 자애롭게 내려다봤다.
‘너무 힘들어요.’
온달소라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할머니의 입이 열렸다.
“거대한 분께서 굽어 보고 계신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분께서 선택하실 게야.”
온달소라는 이것이 마냥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녀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물었다.
‘할머니, 알아듣게 말씀해 주세요. 제발요. 우리 온달곰족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대한 분의 선택을 믿으렴. 할미가 보기에 그분은 분명 훌륭한 판단을 내려 주실 게야.”
그윽한 미소를 지은 할머니가 뒤돌아섰다.
‘할머니! 할머니!’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손짓에 온달소라가 깨어났다.
“아, 졸았구나.”
극단적인 스트레스 때문일까.
온달소라는 강철 나무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든 것이다.
“무녀님, 부차가 오고 있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시녀의 목소리에 온달소라는 몸을 일으켰다.
“무녀, 시간 됐다. 사람들 이끌고 앞장서라.”
부차가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진정 비바니를 공격해야겠어요?”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냐.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영령 불러. 나머지 마을 놈들도 싸울 준비 시키고. 1분씩 질질 끌 때마다, 네 동생놈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주마.”
“…큭, 알았어요.”
온달소라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단지 동생에 관한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저들은 더 크고 강해.’
부차 패거리는 마을 주민보다 덩치가 컸다.
신체 능력도 강했다.
굳이 동생을 볼모로 잡지 않아도, 싸우면 저쪽이 승리할 터였다.
‘어쩔 수 없어. 영령님을 두 분 한꺼번에 소환할 수 있을 때까지는…….’
비바니에게 미안했다.
무녀로서의 감이 공격하면 안 된다고 계속 경고해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온달소라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바니를… 공격해야 해. 마을 사람들과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야.’
그냥 내쫓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온달소라의 머리는 갈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
.
.
잠시 후, 온달소라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강변에 섰다.
“어서 영령 불러. 물속에서는 영령이 힘을 써 줘야 마을 놈들이 덜 죽을 거야.”
패거리를 거느리고 뒤편에 선 부차가 떠들었다.
“알았어요.”
온달소라가 정신을 집중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부족을 굽어살피는 영령이시어, 부디 이곳에 현신하시어 힘을 빌려주십시오.’
주문을 외우자 눈앞에 거대한 곰의 형상이 나타났다.
온달소라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영령에게 부탁하려 했다. 공격해 달라고.
한데 그때, 저편 물속에서 동그란 것이 튀어나왔다.
“네놈들, 또 처들어 왔구납! 이곳은 우리 비바니의 영역이답!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바비와 수호신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답!”
* * *
『크큭, 제법이구나. 수호신이라니.』
구경 중인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낯이 화끈거렸다.
‘바비! 왜 시키지도 않는 대사를 치고 그래!’
바비가 나선 것은 수호의 의도였다.
적들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수호신이라는 대사는 약속에 없었다.
‘영령을 불러낸 것을 보니, 저 흉내 성성이란 놈들이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게 확실하구만.’
흉내 성성이.
잡아먹은 종족으로 의태 하는 능력을 지닌 종족.
능력을 이용해 다른 종족을 장악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다.
부차 패거리는 그 흉내 성성이족이었다.
수호는 무녀의 동생이 갇힌 동굴에서 그것을 알아내었다.
“멍청하게 뭘 듣고만 있어! 어서 공격해!”
부차가 버럭 소리쳤다.
온달소라가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섰다.
“영령이시여, 부탁하나이다.”
거대한 곰이 첨벙, 앞발을 물에 담갔다.
그 순간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하늘을 검게 물들이는 비닐봉지라니.』
“괜한 내레이션 집어넣지 마, 인마.”
수호는 발룡이를 타박하면서도 손을 재바르게 놀렸다.
차락-
“잡았다!”
장바구니용 두꺼운 검은색 비닐봉지.
수호는 그것으로 온달곰족의 영령을 잡았다.
‘이제 이건 묶어서 치워 두고.’
수호가 비닐을 묶어 강철 나무숲에 던졌다.
영령이 버둥거렸지만, 비닐봉지는 찢어지지 않았다.
‘이제 저 흉내 성성이 놈들을 치워 볼까.’
강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저, 저게 뭐야! 검, 검은 괴물이 영령님을 집어삼켰어.”
“이럴 수가. 천벌, 천벌을 받는 거야! 죄 없는 비바니를 죽이려 하다가, 천벌을 받는 거라고.”
마을 주민 온달곰족이 겁에 질려 떨었다.
애초에 농사만 짓고 살던 순박한 사람들.
이런 기사奇事에 겁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분! 저분이 선택하신다고 했어!”
반면 온달소라는 오히려 침착했다.
꿈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로 침착할 수 없는 자가 있었다.
부차였다.
“이, 이익, 도대체 저 괴물은 뭐야? 네년! 네년 짓이지? 네년이 사특한 주술로 악신을 불러낸 거지?”
부차는 겁을 내는 대신 악을 내질렀다.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불가사의에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부차! 당신이 기어이 신의 분노를 산 거예요!”
온달소라가 맞받아쳤다.
그러는 사이 수호는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흉내 성성이부터 걷어내야겠지?”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두 번째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건 잠자리채라고 했던가? 재밌겠군.』
그 말대로 수호의 손에는 잠자리채가 들려 있었다.
‘담아 보실까.’
수호가 잠자리채를 휘둘렀다.
어려울 건 없었다.
온달소라와 대거리 중인 부차를 제외하면, 흉내 성성이는 뒤쪽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니까.
텁석-
잠자리채가 흉내 성성이를 뒤덮었다.
“으헉! 이게 뭐야? 제, 젠장!”
“그물이다! 그물에 갇혔어.”
“안 끊겨! 제기랄, 너무 두꺼워.”
“빌어먹을, 무녀가 저주를 내린 거야!”
잠자리채에 갇힌 흉내 성성이들이 난리를 쳤다.
‘잘 담겼구만.’
휘리릭-
흉내 성성이를 한 방에 쓸어담은 수호가 잠자리채를 들어 올렸다.
“끄억-! 사, 살려……!”
“쿠에엑-”
잠자리채 안에서 난리가 났다.
수호는 개의치 않고 잠자리채를 움직였다.
‘그 안에서 고이 잠들어라.’
풍덩.
잠자리채가 물속에 처박혔다.
어디를 돕고 어디를 칠지.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할지.
일이 시작되기 전에 생각이 많았다.
지성을 가진 이종족과의 분쟁은 발룡이를 제외하면 처음이었으니까.
하나 결국 결론을 내렸다.
‘남을 죽이고 빼앗으며 살아온 놈들이야. 살려 두면,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킬 거야.’
그렇기에 수호는 잠자리채를 물속에 넣어 버린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이 안 돼. 어째서 저딴 괴물이 존재하는 거냐고!”
부차가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부하들이 죄다 죽었으니, 일은 이미 그르친 거나 마찬가지.
부차에게 남은 것은 광기뿐이었다.
“온달소라! 어서 영령을 불러! 네년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영령을 부르란 말이다! 전대 무녀처럼 영령을 잔뜩 불러서 저 미친 괴물을 쳐 죽이란 말이야!”
부차가 온달소라에게 달려들었다.
눈동자가 시뻘건 것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공격할 기세.
“미, 미쳤어, 부차가 미쳤다.”
“막아! 무녀님을 지켜!”
온달곰족 주민들이 앞을 막아섰다.
“네놈들이 감히 날 막아! 크와아아앙-!”
부차가 괴성을 내질렀다.
우두둑.
부차의 몸이 변해 갔다.
“호, 호인족이다! 호인족으로 변했어.”
“이게 무슨 일이야? 부차가 왜 호인족으로!”
“미친! 그럼 저놈은 우리 온달곰족이 아니었던 거야?”
온달곰족이 놀라 소리쳤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악-”
“끄악- 너무 강해.”
“무, 무녀님을 지켜야 하는데, 꾸엑-”
온달곰족은 부차의 손에 한 방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크르르- 무녀! 모든 것이 네년 탓이다. 네가 저주를 걸어서 그런 거야. 죽여 버리겠어. 네 동생도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줘 버리겠다!”
부차가 온달소라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일은 없을걸?”
수호였다.
깜짝 놀라 공중을 바라보는 부차와 온달소라.
수호는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건너편 강둑을 가리켰다.
“누나- 난 괜찮아! 수호신께서 구해 주셨어!”
포동포동한 꼬맹이 온달곰족이 소리쳤다.
온달호동.
무녀의 동생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수호가 미리 구해 둔 것이다.
“어째서 저놈이 멀쩡히 풀려나 있는 거야! 내 부하들은?”
부차가 넋이 나가 소리쳤다.
“호동아! 호동아아!”
온달소라가 강을 건널 기세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부차의 눈에서 불이 치솟았다.
“네년만, 네년만 일을 제대로 했어도!”
사실과 다른 이야기였지만, 상관없었다.
부차에게는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부차는 발톱을 세우고 달렸다.
온달소라의 등을 찢어발겨 버리리라 생각하며.
부차의 발톱이 온달소라의 등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덥석.
수호가 놈을 낚아챘다.
“네놈이 두목이라지?”
잘 됐다.
안 그래도 확실한 시범 케이스가 필요해 보였는데.
쾅.
수호가 부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크악-!”
비명을 내지르는 부차를 내려다보며 수호가 외쳤다.
“앞으로 또 비바니를 공격하면!”
그리고.
“이곳에서 남을 해치려 들면!”
온 숲이 쩌렁쩌렁 울렸다.
“누구든 이렇게 될 줄 알아!”
수호가 주먹 쥔 손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악-! 지진이다!”
“헉-! 신이 노하셨다.”
강변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 한가운데, 부차였던 것이 핏물이 되어 고여 있었다.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시끄러운 이웃】을 완수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온달곰족】과 교류를 시작합니다.]
[온달곰족의 만족도가 60 상승합니다.]
* * *
‘선택적 보상은 역시.’
메시지를 보며 수호는 ‘선택적 보상’의 명확한 의미를 확인했다.
‘흉내 성성이와 온달곰족 중에 하나를 택해서 교류하는 거였어.’
흉내 성성이가 온달곰족과 다른 종족임을 밝혀냈을 때, 예상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흉내 성성이를 택했다면…….’
그랬다면 온달곰족은 그들의 노예가 되었을 터.
그 뒤는…….
‘게임처럼, 정복 전쟁이라도 해 나가는 건가?’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나 수호는 결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들을 게임의 유닛으로 여길 생각은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차원이고.
그 속을 살아가는 생명이니까.
‘좋은 선택을 한 거야.’
그렇기에 수호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하늘도 땅도 모두 내 것이니, 나의 땅에서 소란 피우지 마라! 크큭-』
“뭐?”
발룡이의 목소리에 수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느냐. 제법이었다. 본좌의 곁에 머물더니, 훌륭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구나.』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하-”
수호는 고개를 내젓고는 수트 케이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위대한 수호신이시여. 저희 온달곰족을 가엽게 여기시어, 부디 당신의 품에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무녀를 필두로, 모든 온달곰족이 오체투지 한 채 소리치고 있었다.
“이게 다 바비 때문이야.”
괜히 수호신이니 뭐니,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해서는.
하나 수면에 배를 까고 아기들과 함께 누워 있는 바비를 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본좌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냥 신 행세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저들에게는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거든.』
신 행세라니, 도대체 어떤 인생… 아니, 용생을 살아온 거냐.
근데 가끔 예리한 말을 한다는 말이지.
온 마을의 극단적인 위기.
그걸 초월적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 해결했으니.
“하긴 저들의 처지면 숭배하려 드는 게 당연할지도.”
『그래, 네가 저들을 수탈할 성격도 아니니, 그냥 적당히 맞장구쳐 주어라.』
고개를 끄덕인 수호는 수트 케이스 안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고개들 드세요.”
“아-! 드디어. 감사합니다, 수호신이시여. 부디, 부디 저희를 당신의 품에…….”
무녀가 똑같은 소릴 내뱉으려 한다.
수호는 얼른 말을 잘랐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하문하시옵소서.”
“도대체 왜 자꾸 나한테 위대한 분이니 뭐니 하는 거예요?”
“전대 무녀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수호신께서 모두의 생과 사를 선택하실 것이니라!”
아니다.
전대 무녀는 ‘거대한’ 분이 훌륭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광신의 상태에 빠진 온달소라의 뇌는 기억을 원하는 대로 각색했다.
“그렇군요. 예지몽이라니. 대단하네요.”
“위대한 수호신의 권능에 비하면 하찮은 능력입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거 너무 과해도 불편하네.
발룡이의 말도 있고 하니, 일단은 넘어가자.
“그러면 비바니를 공격한 이유는 뭔가요?”
홍수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엿듣기는 했는데, 좀 더 확실하게 듣고 싶다.
“송구하오나 그것은 흉악한 부차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필요도 없는데, 더 많은 곡식을 얻으려 한 것이지요.”
“곡식요?”
“예, 주기적인 홍수로 강에 가까운 농지는 쓸 수가 없습니다. 강에서 먼 곳도 수확량이 떨어지지요. 하지만 저희 마을을 먹여 살리고도 많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욕심 많은 부차가…….”
설명을 듣던 수호는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홍수만 막으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는 말이지?’
이거 어쩌면…….
35화 시끄러운 이웃(4)
『온달곰족』
- 소속 차원 : DITOD-0624B
- 구성원 수 : 57
- 만족도 : 70/100
“예순 명이 채 안 되네.”
온달곰족의 차원 패널을 확인한 수호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강변에 모인 수가 서른이 좀 넘었으니, 나머지는 아무래도 노약자겠지?”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수호의 생각은 이랬다.
홍수를 막는다.
더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잉여 식량이 발생하면 수호가 받아서 드워프를 먹여 살린다.
“흐음, 저 숫자로 더 넓은 농지를 경작할 수 있으려나?”
아쉬워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곰탱이들이 농사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을 지도 모를 일. 그런 건 시켜 보고 나서 결정해도 되는 것이다.』
“네 말이 맞네. 보지도 않고 판단할 필요는 없겠지. 그 전에 먼저 밭부터 좀 살펴볼까.”
수호는 차원 시야 스킬을 사용했다.
수트 케이스 안, 전경이 움직였다.
어느 순간 텅 빈 터가 넓게 펼쳐졌다.
“여기가 홍수 때문에 비워 놓은 땅인가?”
『상당히 넓군. 여기만 잘 경작해도 몇천 명은 너끈히 먹여 살리겠어.』
시야를 조금 더 이동시켰다.
반듯하게 정리된 밭이 나타났다.
“밭이다! 곡식이 자라고 있어.”
『오, 곰탱이들이 제법이군. 저 정도로 깔끔한 농지는 본좌의 깊은 경륜으로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야.』
발룡이의 말대로, 눈앞에 펼쳐진 경작지는 굉장히 훌륭했다.
칼같이 각을 잡아 파인 밭고랑.
멀리서 보기에도 건강해 보이는 농작물.
그 끝에 알알이 맺힌 이삭.
“대단하네.”
수호도 감탄을 터트렸다.
『저 정도면 농사에 소질이 있는 건 확실하군. 나머지는 더 넓은 곳을 경작할 여력이 있느냐겠지.』
“그래, 그건 여기서 구경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수호는 시야를 강변으로 다시 옮겼다.
그곳에는 온달곰족 주민들과 무녀가 여전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수호가 무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녀님,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온달소라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부디 그냥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호칭도 그저… 소라라고 부르시면 족합니다.”
“어, 그래. 그럼 소라라고 부를게. 뭐 좀 물어도 될까?”
파다닥.
온달소라의 솜뭉치 같은 꼬리가 떨렸다.
“무, 물론입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래, 너희 온달곰족은 혹시 더 너른 땅을 경작할 여력이 있어?”
“예, 지금 농사짓는 땅의 몇 배 더 넓은 농토라도 충분히 경작할 수 있습니다.”
“방금 보고 왔는데, 홍수 때문에 비워 둔 곳이 굉장히 넓던데. 그걸 다 책임질 수 있다고? 너희 인원이 채 예순 명이 안 되던데.”
온달소라의 꼬리가 다시금 떨렸다.
‘역시 위대하신 분! 우리가 몇인지, 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손금 보듯 알고 계셔! 역시 할머니의 말이 맞았어!’
전대 무녀가 알았으면 어이없어 했을 생각을 하며 온달소라가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숙이더니, 손을 땅으로 가져갔다.
파파파파팍-!
바닥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와우- 농기계 저리 가라네.’
찰나지간, 땅에 밭고랑을 새겨 놓은 온달소라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희 온달곰족은 이렇게 땅을 잘 파옵니다. 황송하오나 농작물을 돌보는 데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대단한 솜씨네. 잘 봤어.”
저 정도면 비워 둔 땅을 경작하고도 남겠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께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부려만 주십시오.”
그럼 판은 깔렸고.
수호가 슬쩍 제안했다.
“혹시 내가 홍수를 막아 주면, 비워 둔 땅을 경작해 볼 생각이 있어?”
“오오-! 위대한 분의 치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희 온달곰족은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대답이 들려온 순간.
[차원 임무 【홍수를 막아라!】를 획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응? 이게 임무가 뜬다고?’
쟤들한테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닌데?
수호가 서둘러 임무를 확인했다.
『홍수를 막아라!』
- 온달곰족은 홍수로 인해 너른 농토를 놀리고 있다. 홍수 피해를 막아 그들이 더 많은 농작물을 수확하도록 돕자.
- 보상 : 온달곰족 만족도
* * *
쉰 명이 넘는 온달곰족 주민.
그들 모두가 공터에 모였다.“할머니, 뭐 하는 거야? 우리 여기에 왜 온 거야?”
“위대한 분이 기적을 일으킬 거라고 하더구나. 무녀님이 꼭 봐야 한다고 모두를 불러모으셨단다.”
“위대한 분, 그게 누구야?”
“부차 패거리를 내쫓아 주신 아주 훌륭하신 분이란다. 이 할미도 본 적은 아직 없지만.”
노약자들은 비바니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수호를 본 적이 없다.
“웅, 그럼 착한 사람이야?”
꼬마 온달곰족의 목소리에 할머니보다 먼저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시란다. 위대하고 거대한, 앞으로 우리 온달곰족을 지켜 주실 수호신이시란다. 그러니 너도 앞으로 그분을 잘 섬겨야 해.”
“앗, 무녀님! 정말요? 정말 그분이 신이에요?”
“그럼, 곧 뵙게 될 거다. 그러니 이제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구경하거라.”
“예!”
조손이 뒤로 물러섰다.
온달소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이윽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시작할게요. 다들 앞으로 나오지 마세요. 다칠 수도 있으니.”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서 거대한 창날이 나타났다.
수호가 [보급형 강철창]을 꺼내 든 것이다.
‘어째 이 창은 무기로 쓰는 일은 없네.’
주로 누굴 패는 데 쓰인다 싶더니, 이제는 땅 파는 데까지 쓰는구만.
수호가 이내 창을 바닥에 꽂았다.
쿠쿵-!
그것만으로도 온달곰족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으앗! 할머니! 지진이야!”
“괘, 괜찮다. 겁내지 말고 자리에 앉자꾸나.”
“으응.”
온달곰족 주민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이적을 구경했다.
콰드드드드득.
그사이 수호는 창대를 움직여 땅을 팠다.
‘수로를 파 놓는 거야. 그러면 강물이 넘쳐 홍수가 나도, 밭으로 물이 밀려들 일이 없을 테니까.’
강과 평행한 방향으로.
길고 깊게.
수호가 거듭 창대를 움직여 땅을 파 나갔다.
몇 분쯤 작업하자, 농지를 가로막는 깊은 고랑이 파였다.
‘고랑 끝을 강 하류 쪽으로 연결해 놓으면 일 단계는 완성이고.’
고랑을 완성한 수호가 창을 집어넣었다.
“소라, 사람들 뒤로 더 물려. 지금부터 좀 위험할 수 있어.”
“네! 명을 받잡습니다!”
크게 대답한 온달소라가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할머니, 이제 어떻게 돼? 수로는 다 판 것 같은데.”
“글쎄다. 할미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순식간에 계곡을 만들어 내시다니. 정말 위대한 분이시다. 무녀님 말씀이 맞았어.”
“응, 정말 대단하셔.”
조손이 소곤거리는 순간.
수호가 손을 뻗었다.
덥석.
『이, 이거 왜 이러느냐. 갑자기 본좌의 목을 왜 움켜쥐는 것이냐?』
“발룡아, 협조 좀 하자.”
『무슨 말이냐? 본좌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저기 수로 말이야. 기왕이면 바닥을 좀 녹였으면 좋겠거든. 한번 녹였다가 굳혀서 튼튼하게 만드는 거지.”
『시, 싫다! 본좌는 아직 받기로 한 치킨 3마리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본좌를 자꾸만 불쏘시개로 쓰려 들지 마라.』
수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나는 네가 지난 던전에서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네놈 때문에 내가 겪은 수모.
결코 잊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거절하면 큰 불행이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할 거지?”
『알았다. 그럼 약속한 치킨 3마리라도 꼭 지급해 다오.』
씩 웃은 수호가 외쳤다.
“오케이, 가라 발룡킬라!”
그리고 발룡이를 움켜쥔 손을 수트 케이스로 밀어 넣었다.
『본좌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꽥 소리친 발룡이가 입을 벌렸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브레스가 발사됐다.
수호는 손을 요령껏 움직여 수로의 바닥을 녹여 갔다.
“저, 저, 저럴 수가! 용이다. 전설의 용이야!”
“위대한 분이 검은 용을 소환했다.”
“용이 불길을 내 쏜다!”
“헉! 할머니! 용이 나타났어!”
“용이구나! 위대한 분이 용을 부리는구나. 허허, 이 할미가 죽기 전에 정말 귀한 장면을 보는구나.”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사이 수호는 열심히 손을 놀렸다.
『됐다. 다 녹였다.』
“잘했다, 발룡킬라. 그럼 다음에 또 부탁하마.”
『…….』
수호가 발룡이를 수트 케이스에서 꺼내는 순간.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홍수를 막아라!】을 완수했습니다.]
[온달곰족 만족도가 20 상승합니다.]
* * *
‘오- 위대하신 분! 역시 저분이야말로 온달곰족의 수호신이셔!’
온달소라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부족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뻔한 부차를 처치하고.
납치당한 동생을 구해 줬으며.
이제는 늘 부족을 고생시키던 홍수까지 해결했다.
온달소라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나는 무녀야. 부족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결심한 온달소라가 움직였다.
“소소야, 가서 곰다래 열매 좀 가져오렴. 어서.”
“무녀님, 곰다래 열매는 뭐 하시게요? 이번 달에 수확한 건 딱 하나 남았는데요.”
“기도를 드려야지. 어서 가서 가져오렴.”
시녀가 달려갔다.
온달소라는 주변 사람들을 부려 다른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수로 변에 급하게 만든 제단이 완성됐다.
『크큭- 훌륭한 신도들을 얻었구나, 수호. 축하한다.』
“…도대체.”
아니, 갑자기 웬 제단?
살아 있는 사람한테 제사라도 지내려고?
『진짜로 네게 제사를 지낼 모양이군. 저 봐라, 제물도 가지고 왔구나.』
발룡이의 말대로, 간이 제단 위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열매가 올라갔다.
온달소라가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의 수호자이자, 강의 주인이시며, 검은 용의 사역자이신 위대한 분이시여…….”
수호는 차마 자신을 찬양하는 말을 들을 엄두가 안 났다.
“으, 오글거려서 계속 듣고 있지를 못하겠… 어! 이게 뭐야?”
수호가 막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던 순간.
눈앞에 뭔가 생겨났다.
덥석.
발룡이가 앞발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이거 제단에 놓여 있던 열매 같은데?』
“설마 공물이라고 바친 게 정말 나한테 온 거야?”
아마도 교역 스킬 탓이리라.
수호는 실소를 흘리며 열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이게 웬 횡재야?”
* * *
[곰다래 열매]
- 한 달에 한 번 열매를 맺는 곰다래 나무 열매다. 복용자의 신체를 자극하여 좋은 효과를 유발한다. 단, 무슨 효과가 발생할지 먹기 전까지는 알 수 없으며, 한 달에 2번 이상 복용할 수 없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복용 시 무작위로 보유 스탯 중 하나를 선택해, 1~3 상승시킨다.
수호는 곰다래 열매를 보며 감탄했다.
“한 달에 한 번, 공짜로 레벨 업 하는 거나 다름없어.”
등급이 높지는 않다.
비약류치고 오르는 스탯이 많은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곰다래 열매만의 장점이 있었다.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내 몫 정도는 매달 구할 수 있다고 하니.”
곰다래 나무는 온달곰족 마을 뒷산에 자생한다.
인공으로 번식이 불가능한 종이며, 1달에 1개씩만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매달 하나씩, 수호가 먹을 정도는 충분히 받아 올 수 있다.
“연금 타 먹는 느낌이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분께서 기분이 좋으시군.』
“…치킨이나 먹어라. 뭐로 할래?”
수호는 발룡이의 발호를 치킨으로 틀어막았다.
『오! 정말이냐? 오늘은 힘을 썼더니 목이 칼칼하구나. 볼케이노! 볼케이노로 하겠다.』
“그래.”
수호가 곧 주문을 마쳤다.
“그럼 나도 한번 먹어 볼까.”
파닥파닥-
발룡이가 날아다니는 동안 수호는 곰다래 열매를 깨물었다.
상큼한 과즙과 함께 열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근력이 3 상승합니다.]
‘3이다!’
첫판부터 최고 수치가 떴다.
수호가 흡족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딸랑-
가게 문이 열렸다.
『치킨인가?』
아니었다.
“역시 여기가 맞았군요. 형님.”
응?
온다던 애는 안 오고, 쟤가 먼저 찾아왔네?
36화 생각보다 더 강하다(1)
수호가 잉어즙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협회 의뢰에서 만났던 김진성이 손사래를 쳤다.
“이건 그냥 마시기는 좀 비싼 거 아닙니까?”
“괜찮아, 원가는 싸. 대접할 게 이거밖에 없어서 그러니까, 이거라도 마셔.”
“예,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수호도 잉어즙을 한 병 들고 김진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근데 웬일로 왔어?”
“미리 말씀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형님.”
“탓하는 게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온다던 미래는 안 오고 네가 먼저 왔길래.”
김진성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형님도 보셨겠지만, 제가 좀 특이한 클래스입니다.”
“어,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거?”
“예, 세계적으로도 변신 능력자는 드물고, 그중에서도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경우는 더 적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백호 길드에서도 변신 능력자가 저밖에 없어서 전투 훈련이 좀… 성에 차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제힘을 다 발휘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제약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던전에서도 페널티를 안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변신하면 좀 빨리 지치는 것 같긴 하더라.”
“네, 그것도 그렇고 전투 방식도 좀 마뜩잖아서요.”
“그렇구나. 근데 왜 날 찾아왔어? 내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형님은 마검사시잖습니까? 하이브리드 클래스인데도, 워낙 전투를 잘하셔서요. 전투 시에 움직임도 정말 자연스럽고요.”
“…마검사 아니라니까.”
김진성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저번 던전에서 1성을 졸업했습니다. 근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원하는 대로 잘 안 풀리는 것 같아서요. 마음이 답답해서 바람 쐴 겸 나왔다가, 어쩌다 보니 왔습니다.”
그래, 왠지 그런 것 같더라.
“1성 졸업했구나. 축하해. 나도 저번 던전에서 졸업했는데, 졸업 동기네?”
“아! 형님도 축하합니다.”
“그래, 2성에 다니다 보면 막힌 게 금세 뚫릴 수도 있어.”
당장 해결 못 하면 죽을 것 같은 문제도,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경우도 있더라.
수호가 덧붙였다.
김진성이 대답하려 할 때였다.
지이잉-
수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 현수. 너도 잘 지냈어?”
“네, 근데 형, 혹시 주말에 던전 가실 수 있으세요? 1성 던전 잡혔는데.”
아차.
수호는 혀를 찼다.
‘현수에게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협회에 들렀다 오는 길에 온달곰족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1성 졸업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야, 이번에는 못 가겠다.”
“그럼 다음에 시간 되실 때 가죠. 근데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아니고, 내가 1성을 졸업했어.”
나름 파티원인데, 너무 무심했다.
영원히 계속될 파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통보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우와- 대박!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형, 진짜 축하드려요. 형이라면 금세 졸업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고맙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아니에요. 제가 여력이 없어서 그동안 형한테 드린 던전에 꼽사리 낀 거죠. 형 덕에 그동안 렙업도 잔뜩 했잖아요.”
“그래도 고맙다.”
“하하, 그럼 나중에 제가 1성 졸업하면 또 데리고 다녀 주세요. 열심히 해서 1인분은 꼭 하겠습니다!”
“넌 원래도 1인분은 충분히 했어.”
화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소요소 속성 화살을 잘 써 주었으니까.
“그럼 2성 던전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로 잡아 드려요? 혼자 들어가시면 위험할 것 같은데.”
아, 그것도 미처 신경 못 쓰고 있었네.
“내가 말할 때까지는 잡지 말아 줘. 필요하면 연락할게.”
“알았어요, 형.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래.”
통화가 끝났다.
수호에게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2성은 어떻게 한다?’
지구에 마기가 있고, 마인이 있다.
그러니 던전을 뒤로 미룬다는 선택지는 없다.
어떻게든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도 혼자 가기는 좀 위험하겠지?’
가장 좋은 건 솔플이다.
발룡이도 있으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2성 던전에 혼자 들어갈 수는 없다.
‘최소한 한 번이라도 견적을 내어 보고 싶은데.’
1성 때 정현아를 데리고 갔었던 것처럼.
특별한 상황에 보험이 되어 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은데.
딱 1번만이라도.
고민하는 수호에게 김진성이 물었다.
“형님, 2성 던전에 가실 생각입니까?”
“그래야지. 근데 원래 같이 다니던 파티원이 아직 졸업을 못 해서 고민 중이야.”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가시겠습니까?”
“길드는 어떻게 하고? 넌 어차피 길드에서 갈 거 아냐?”
“저도 파티원들보다 먼저 졸업했습니다. 파티원들 레벨 올릴 때까지 놀기도 그렇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답답해서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그래도 돼? 길드에서 뭐라 안 그래?”
“괜찮습니다. 규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미리 보고한 뒤에 갈 거니까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모양.
김진성은 흔쾌히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길드 선배한테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그 선배랑 형님이랑 저, 셋이서 같이 가 보죠.”
“그럼 나야 고맙긴 한데.”
수호야 좋다.
백호 길드 2성이면 최소한 기본은 할 터.
계속 같이 다닐 것도 아니고, 한 번 길잡이로 쓰기에는 차고 넘친다.
“그럼 같이 가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그래. 던전은 어떻게 하려고?”
꼽사리 끼는 주제에 백호 길드 2성 던전에 들어갈 염치는 없다.
수호는 여차하면 정현수에게 던전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원래부터 협회 쪽 2성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저희 길드 던전은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요.”
“그렇구나.”
차라리 잘된 셈.
협회 던전이면 부담도 없다.
“그럼 제가 던전 잡아 놓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 * *
“이 선배만 믿어, 인마. 알겠냐?”
”곤란한 일 있으면 선배한테 다 이야기하라고.”
“내가 누구냐? 송제구 아니냐, 송제구!”
백호 길드 36레벨 궁수 클래스 헌터, 송제구.
그가 평소 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송제구는 모처럼 자신의 말버릇을 후회했다.
“아 씨, 진짜 부탁할 줄 누가 알았나.”
평소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던 길드 후배 김진성.
그 눈치 없는 녀석이 대뜸 던전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 그냥 거절했어야 했는데.”
체면, 가오, 폼.
송제구가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
“하필 파티원들까지 있는 데서 부탁하니, 쯧.”
그런 송제구가 후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데 막상 가려니 귀찮다.
2성 졸업이 얼마 안 남은 자신.
이제 2성에 갓 들어온 신입.
“나만 진탕 고생할 텐데, 씁.”
던전 공략이 어떻게 진행될지, 안 봐도 뻔했다.
송제구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협회 던전은 익숙지도 않은데.”
하필이면 던전도 백호 길드 소유의 것이 아니다.
협회 던전.
공개된 지 오래된 곳이라 공략은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백호 소유 던전처럼 익숙하지는 않다.
“게다가 외부인까지 한 명 같이 데리고 가자니.”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2성에 막 오른 무소속 헌터를 데려가잔다.
실력은 김진성이 보장한다나.
“하아… 실력 보장 같은 소리 하네. 그래 봐야 막 1성 졸업한 헌터지. 무소속이라니, 장비나 제대로 갖추고 오려나 모르겠네.”
던전의 난이도는 2성부터 치솟는다.
폐쇄된 공간인 1성 던전과 달리 2성은 넓다.
산과 들과 강이 있고.
생태계가 형성된 곳도 존재한다.
몬스터의 수와 질도 1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제법 굴러먹은 헌터들은 1성을 튜토리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대로 못하기만 해 봐.”
송제구가 이를 갈며 별렀다.
후배인 김진성은 물론, 외부 헌터 또한 마찬가지.
제대로 못하고 얼타면 가차 없이 혼내 주리라.
업계 선배의 권위로!
단단히 마음먹은 송제구가 발걸음을 뗐다.
협회 던전이 있는 포천을 향해.
* * *
김진성과 함께 던전에 가기로 한 날.
“집 잘 지켜.”
『본좌가 강아지인 줄 아느냐.』
“알았으니까, 집 잘 보고 있으라고. 특히 냉장고랑 수트 케이스!”
『걱정 마라. 다녀와서 약속한 대가나 잘 지불하도록.』
발룡이는 두고 간다.
집을 비울 때마다 문제가 생기니, 아예 발룡이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흉내 성성이도 숲 어딘가 더 있을 테고.’
드워프 쪽에도 언제든 몬스터가 공격해 올 수 있다.
발룡이를 두고 가면, 그나마 대처가 가능할 터다.
“저번처럼 누가 쳐들어왔는데 구경만 하고 있었다가는, 다녀와서 진짜 혼꾸멍 날 줄 알아 둬!”
발룡이에게 으름장을 놓은 뒤, 수호가 집을 나섰다.
‘오늘 확실히 파악하자. 2성에서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아울러 실전에서 연습해야 하는 것도 있다.
‘전투 중에 헤이스트도 사용해 보고.’
헤이스트는 집에서 틈틈이 연습했다.
하나 전투 중에 쓰는 건 또 다를 터.
실전에서 사용하면서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수호가 생각하는 사이에도 용달차는 달렸다.
머잖아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포천 2성 던전.
협회 소유 던전 중, 특별히 모든 2성 헌터에게 개방된 곳이다.
“사람 많네.”
던전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헌터, 수거팀.
부산물을 사기 위해 몰려든 아이템 상인까지.
“2성 중에서 제일 큰 곳이라 그런가, 붐비는구만.”
이곳은 수도권에 있는 2성 던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적당한 난이도 덕분에 많은 헌터가 몰려든다.
협회가 인정한 공식 사냥터인 셈이다.
“이런 곳은 여러 팀이 한꺼번에 들어가니까 더 조심해야지.”
워낙 넓어서 깨끗이 청소하고 몬스터가 다시 생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한꺼번에 여러 파티가 입장한다.
사람이 많은 만큼 사건 사고가 뒤따른다.
‘그래도 2성 시작으로 나쁜 곳은 아니야.’
많은 사람이 몰리는 던전이다.
보편적인 2성을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다.
“형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진성이 용달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왔네.”
수호가 대답하며 차에서 내렸다.
김진성의 옆에는 다른 헌터가 함께 있었다.
“형님, 이쪽은 저희 길드 송제구 선배예요. 원거리 딜러세요.”
등에 멘 활대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원수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서로 열심히 합시다, 열심히. 왔으면 허탕 치지는 말아야 하니까. 하아…….”
눈에 힘을 주고 말하던 송제구가 나직이 한숨 쉬었다.
수호의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낡아 빠진 트럭에서 내릴 때 알아봤다만, 왜 맨몸이야? 갑옷은 그렇다 치고 무기는? 설마 트럭에 뒀나.’
송제구가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수호는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곳에는 힙색이 걸려 있었다.
‘그럼 연기 한번 해 볼까.’
힙색은 수호가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일명 ‘가짜 마법 배낭’이었다.
“장비 금방 착용할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수호가 힙색에 손을 넣었다.
“어, 어? 장비잖아?”
“형님! 아이템이 안 보인다 했더니, 거기 넣어 놓으셨군요. 그거 혹시 마법 배낭입니까?”
송제구와 김진성이 놀라 외쳤다.
마법 배낭.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수납용 아이템.
오직 던전에서 드롭되는 완성품으로만 구할 수 있다.
당연히 비싸다.
2성 헌터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일은 드물다.
“응, 이번에 하나 샀어.”
시장에서 만 원에 샀다.
남들 앞에서 차원 보따리를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다.
“대단하시네요, 형님. 저희도 길드에서 마법 배낭 빌려 왔는데.”
“아, 그렇구나.”
수호가 송제구의 등 뒤를 봤다.
그곳에 진짜 마법 배낭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 수거팀 못 데리고 가니까, 길드에 말해서 빌려왔죠. 형님이 가지고 오실 줄 알았으면, 그냥 올 걸 그랬네요.”
“그러게. 내가 미리 말할 걸 그랬네.”
수호가 힙색에 손을 넣었다.
동시에 차원 보따리를 열고, 물건을 꺼냈다.
적회색 수호자와 화염 포마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제구의 눈이 커졌다.
‘저, 저 마법 배낭만 해도 몇천은 할 텐데. 갑옷이랑 검 때깔이…! 설마 금수저였어?’
그럼 용달차는 뭔데!
사람 헷갈리게 왜 저딴 걸 타고 다니냐고!
송제구가 당황하는 사이.
수호가 장비 착용을 마치고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그러면서 손을 들어 목 뒤를 훑었다.
촤르르르륵-
갑옷 목덜미에서 투구가 솟아올라 수호의 얼굴을 감쌌다.
‘미, 미친! 저건 도대체 얼마짜리야?’
투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2개의 눈동자를 보며, 송제구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37화 생각보다 더 강하다(2)
첫 2성 던전.
미리 조사했음에도 수호는 놀랐다.
‘넓어.’
동굴이나 건물 내부였던 1성과 달리, 2성 던전은 숲이었다.
하늘도 있고, 바람도 분다.
‘길잡이를 데려오길 잘했지.’
썩 내켜 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김진성의 선배와 함께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수호가 2성 던전에 대한 소감을 느끼고 있을 때, 송제구도 만만찮게 동요한 상태였다.
‘비싼 갑옷에 칼에 마법 배낭까지. 쳇, 부자라 좋으시겠어.’
수호를 허투루 보다가 놀랐기 때문일까.
송제구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 봐야 풋내기, 장비만 그럴듯하다고 다가 아니지. 이 선배가 실력으로 기를 팍 꺾어 주겠어.’
송제구가 김진성과 수호를 향해 말했다.
“던전 정보들은 숙지하고 왔겠지만, 간단하게 브리핑할게요.”
김진성과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제구가 말을 이었다.
“이 던전은 보다시피 굉장히 넓고 수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자칫 몬스터에게 기습당하거나, 포위될 수 있으니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이동하세요.”
“네, 선배.”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오는 것은 머쉬룸 복서, 사람만 한 버섯에 주먹이 달린 몬스터입니다. 가끔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제외하면 펀치만 주의하면 됩니다.”
“단, 놈이 죽고 나서 1초 뒤에 포자 흩날리기라는 마법이 발동됩니다. 반경 2m에 마력으로 만든 작은 조각을 흩뿌리는 마법입니다. 제대로 뒤집어쓰면 사망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브리핑이 끝났다.
송제구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스톱. 저 앞에 머쉬룸 복서 셋. 내가 화살로 선공합니다. 둘이서 집중 공격해서 화살 맞은 놈부터 잡고, 뒤로 빠지면서 나머지 상대하세요.”
송제구가 화살을 쏘았다.
쎄엑-
날아간 화살이 머쉬룸 복서의 머리에 명중했다.
“꾸엥-”
비명을 내지른 머쉬룸 복서가 통통 튀며 달려들었다.
나머지 2마리도 따라왔다.
수호와 김진성이 맞서 달려 나갔다.
같이 출발했지만 먼저 도착한 것은 수호였다.
‘2성 몬스터는 얼마나 단단한지 한번 볼까?’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들어 올렸다.
화르르-
화염 강격이 장전되고.
수호가 칼을 휘둘렀다.
머쉬룸 복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칼날이 놈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푸콰아아앙-!
버섯 머리가 단박에 박살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말랑한데?’
생각보다 몬스터가 강하지 않다.
수호는 이내 뒤로 물러섰다.
머쉬룸 복서의 사체에서 뭉클 마력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푸와아아앙-!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손톱만 한 마력 바늘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으헙-!”
달리던 김진성이 놀라 훌쩍 물러섰다.
수호가 그렇게 빨리 몬스터를 처리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뒤에서 화살을 재던 송제구도 눈을 부릅떴다.
‘뭐? 머쉬룸 복서를 한 방에?’
송제구가 날린 화살은 유인용.
제대로 힘을 실은 공격은 아니었다.
고로 머쉬룸 복서를 처치한 것은 오롯이 수호의 파괴력이었다.
‘뭐 저딴 파워가…….’
놀라던 송제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비 좋다 이거지? 쳇, 나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업계 선배의 노련함을 보여 주마.’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 송제구.
그가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송제구의 특기, 【멀티샷】이 발사됐다.
화살이 허공에서 4갈래로 갈라졌다.
푸퓻- 푸퓻-
머쉬룸 복서 둘에게 공평하게 두 발씩 화살이 박혀 들었다.
그쯤 포자 흩날리기가 끝났다.
“저도 안 집니다!”
김진성도 승부욕을 불태우며 달려들었다.
수호도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죽이면 포자 흩날리기가 발동하겠지?’
그러면 피하느라 김진성이 싸울 수 없다.
‘일단 옆으로 유인한 다음에.’
수호는 날아오는 머쉬룸 복서의 주먹을 방패로 흘렸다.
그 후 칼로 놈의 배를 쿡 찔렀다.
“꾸웽-!”
괴상한 소리를 내는 머쉬룸 복서.
수호는 놈을 달고 옆으로 움직였다.
‘이제 죽어라. 화염 강격!’
칼날에 불길이 어리고.
수호가 칼을 내질렀다.
푸콰아아앙-!
이번에도 마찬가지.
머쉬룸 복서의 머리통이 단박에 박살 났다.
수호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포자 흩날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쪽도 끝났네.’
김진성과 송제구가 한 마리를 처치했기 때문이다.
평온한 김진성과는 달리 송제구는 동요한 상태였다.
‘저 자식 뭐야? 뭐가 저렇게 강해!’
수호는 움직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전투 중에도 김진성의 동선을 배려했고 화살이 날아갈 공간을 비워 뒀다.
그저 아이템만 번지르르한 금수저라 생각했는데.
절대로 아니었다.
‘진짜 2성 던전이 처음이라고?’
혹시 깜짝 카메라는 아니지?
어이없는 생각마저 떠오른 송제구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뿐.
송제구는 곧 송제구다운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선배 입장에서 얼타고 있을 수는 없지.’
가오가 있지, 가오가!
마음을 다잡은 송제구가 근엄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자자, 부산물 모읍시다. 제 가방에 먼저 담고, 가방 다 차면 수호 씨 가방에 담죠.”
셋은 죽은 머쉬룸 복서의 사체를 마법 배낭에 집어넣었다.
머잖아 수거가 끝나면서 첫 번째 사냥이 완료됐다.
“안 지쳤지요? 바로 갑시다. 나는 그 레벨 때는 잠도 안 왔어요.”
송제구가 애써 당당하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하하, 알겠습니다, 선배.”
“가죠.”
.
.
.
2시간이 지났다.
‘레벨 업이라고?’
고작 2시간 만에 레벨이 올랐다.
송제구는 간신히 기쁨을 참으며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길드 던전에서 풀 파티로 사냥해도 며칠은 걸릴 텐데.’
그것도 후하게 쳐줬을 때 얘기다.
길드 던전에 들어가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하니까.
‘저 사람, 진짜 정체가 뭐지?’
송제구는 빠른 레벨 업의 원인인 수호를 슬쩍 쳐다봤다.
혹시 우리 길드가 키우는 비밀 병기?
그게 아니라면 굳이 김진성이 저렇게 붙어 다닐 이유가 없는데.
‘설마 3대 길드 마스터의 공동 전인?’
소싯적에 무협 소설 좀 읽은 송제구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부산물 수거 끝났는데, 좀 쉴까요, 선배?”
김진성이 송제구의 상상을 멈췄다.
“어? 그래 좀 쉬자. 거기 수호 씨도 고생했는데, 좀 앉아요.”
“선배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새 송제구의 성향을 파악한 수호였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호칭 정도로 자원 봉사자가 즐거워지면 수호에게도 나쁠 게 없다.
“하하, 그럽시다. 수호 씨가 사람이 참 바르네. 지금처럼만 하면, 정말 크게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송제구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체면을 중시하는 만큼,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잘 넘어가는 송제구였다.
휴식이 시작됐다.
수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부터는 누굴 데려올 필요는 없겠는데.’
신중하게만 움직이면 혼자서도 충분하다.
그때는 발룡이도 적극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한동안은 혼자 다녀야겠어. 나중에 봐서 현수나 데리고 다니든지 하고.’
정현수는 센스가 좋다.
적시에 쏘아지는 속성 화살은 여러 번 도움이 되었다.
데리고 다니면 1인분은 충분히 할 것이다.
‘어? 사람?’
그 무렵 수호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부스럭.
곧 수풀 헤치는 소리와 함께 저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다른 파티였다.
수는 총 6명.
그들은 수호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송제구가 앉은 자세에서 뒤꿈치를 세웠다.
내려놓은 활대를 집어 들었다.
“스톱, 스톱! 서로 괜한 오해 안 사게 서둘러 갑시다.”
그리고 저편에서 다가오는 파티를 향해 말했다.
김진성과 수호도 자세를 잡았다.
곧 대답이 들려왔다.
“여어, 안녕들 하십니까. 너무 경계 안 해도 됩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사냥은 많이들 하셨습니까?”
“쉬는데 미안합니다요. 크크.”
몇 명이 연달아 떠들었다.
그러면서 걷던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송제구가 활을 슬쩍 가슴 앞으로 옮겼다.
“더 다가오지 맙시다. 마지막이에요.”
말투는 차분했다.
그러나 여차하면 바로 활을 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거 엄청 날카로우시네. 알았어요, 알았어. 가까이 안 갈게.”
“형님, 저쪽으로 갑시다.”
“가자, 가.”
그들이 수호 일행을 흘끔거리며 멀어졌다.
“하여튼 이래서 협회 던전은… 쯧.”
송제구가 혀를 차며 자세를 풀었다.
김진성이 송제구에게 질문했다.
“선배, 방금 저 사람들 안 좋은 의도가 있었던 겁니까?”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그냥 제대로 못 배워서일 수도 있고.”
다른 파티를 인식하면 눈에 띄지 않게 우회하는 게 불문율이다.
불현듯 마주치더라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다.
한데 방금 만난 자들은 불문율을 어겼다.
“괜찮을까요?”
“정신 바짝 차려야지. 어차피 몬스터나 헌터나, 동료 아니면 다 경계 대상이야. 저 사람들 안 마주쳤어도, 조심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렇네요.”
대화를 나누는 둘과 달리 수호는 미간을 펴지 못했다.
‘아까 그 사람들,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어.’
좀 전에 본 헌터들이 이목이 안 닿는 곳에 멈췄기 때문이다.
김진성과 송제구는 몰랐지만, 수호의 감각은 그들의 위치를 포착했다.
‘피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수호가 서늘한 눈빛으로 저편을 응시했다.
* * *
“형, 어떻게 할 거야. 털어?”
언더독 길드의 부길드장 조팽현.
그가 친형이자 길드장인 조팽석에게 물었다.
“아까 활쟁이 새끼 등에 멘 거, 마법 배낭이다. 들고 있는 활도 싸구려는 아니었고.”
조팽석이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맞지? 앉아 있던 놈 갑옷도 때깔 죽이던데. 털자, 형.”
언더독 길드.
그들은 겉으로는 멀쩡한 헌터였지만, 사실은 머더러였다.
정확히는 헌터와 머더러의 겸업.
몬스터를 잡다가 기회가 되면 사람도 잡았다.
“흐음, 군침은 도는데…….”
조팽석이 턱을 쓰다듬었다.
먹음직스러운 먹이인 것은 틀림없다.
한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왜 그래?”
“활쟁이 그놈, 분명 제대로 배운 놈이야. 대응하는 게 딱 대형 길드에서 가르치는 매뉴얼대로였거든.”
“대형 길드? 그놈들이 여길 왜 와?”
“글쎄다. 옆에 있던 놈들 키워 주러 왔을 수도 있고…….”
조팽석의 생각이 길어지자 조팽현이 형을 채근했다.
“형, 겁먹을 필요 있어? 내 스킬 알잖아. 실패할 일 없어. 그리고 성공만 하면 대형 길드고 나발이고 뭔 상관이야. 다 몬스터 밥으로 줘 버리면 그만인데.”
“하긴 증거만 없으면, 누가 뭐라든 어쩔 건데.”
“맞아, 슬슬 던전 옮길 때도 됐잖아. 우리도 3성 가야지.”
“그래, 털자. 팽현이 너는 평소처럼 정찰하고 와. 준비하고 있을게.”
“어, 좀만 기다려. 크크크.”
장비를 챙겨 일어선 조팽현이 스킬을 썼다.
‘반투명!’
고유 스킬인 반투명이었다.
딱 반만 투명해지고, 딱 반만큼 기척을 지워 준다.
‘반투명과 미니맵 스킬이면, 절대로 들킬 리 없어.’
반경 30m 내의 헌터와 몬스터를 감지하게 해 주는 스킬, 미니맵.
조팽현은 2가지 스킬을 이용해 이제껏 머더러 짓을 해 왔다.
‘몬스터랑 싸울 때 뒤치기하면 낙승이지, 흐흐흐.’
반투명해진 조팽현이 수호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이번에는 4마리네요. 다들 준비하세요.”
송제구가 머쉬룸 복서 무리를 파악한 뒤 신호했다.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다가오는 거지?’
좀 전에 마주친 무리.
그중 한 놈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멈췄어?’
놈은 3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정지했다.
“자, 시작합니다.”
신호와 함께 송제구가 화살을 쐈다.
“꾸에엥-!”
괴성을 지르며 머쉬룸 복서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호는 머쉬룸 복서에 맞서 가면서도 뒤편의 기척을 신경 썼다.
그런 수호의 감각에 뒤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걸렸다.
‘무리로 돌아가는군. 정찰인가?’
다가와서 지켜보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부리나케 돌아갔다.
그것은 딱 한 가지 경우를 뜻했다.
‘몬스터와 싸우는 틈에 뒤를 치려는 거야.’
대비해야 한다.
수호는 결심했다.
‘서두르자.’
머쉬룸 복서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
쾅!
수호가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김진성을 훌쩍 앞지르며 튀어 나갔다.
‘화염 강격!’
머쉬룸 복서의 주먹을 방패로 쳐 낸 수호는 곧바로 화염 강격을 날렸다.
푸콰아아앙-!
[머쉬룸 복서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수호가 움직였다.
‘화염 강격!’
푸콰아앙-!
이번에도 단 한 방.
머쉬룸 복서의 숨이 끊겼다.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형님, 물러서십시오. 터집니다!”
처음에 처치한 머쉬룸 복서의 사체에서 포자 흩뿌리기가 발동했다.
‘피할 시간 없어.’
수호는 김진성의 경고를 무시했다.
화르르-
화염 포마검이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콰아아아아앙-!
흩날리는 마력 포자 사이에서 수호가 방어를 도외시하고 날뛴다.
푸콰콰콰아앙-!
겹치듯 들려오는 폭음.
비산하는 머쉬룸 복서의 머리통과 마력 포자.
전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형님! 형님! 괜찮으세요?”
송제구와 김진성이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외쳤다.
시간이 지나고, 먼지가 가라앉았다.
전장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치이이익-
수호의 몸.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한 팔뚝에서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어.’
수호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쩡했다.
마력 포자의 공격은 적회색 수호자의 ‘마법 방어력’을 뚫지 못했다.
팔뚝의 부상은 【재생】 스탯에 의해 회복되고 있었고.
“수, 수호 씨.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몸은 괜찮습니까?”
송제구가 경악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머쉬룸 복서 4마리를 한순간에 처치할 줄이야.
심지어 포자 흩날리기를 맞고도 멀쩡해 보였다.
‘맷집이 도대체… 저 허연 김은 또 뭐고.’
놀람은 곧 궁금증으로 변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두를 이유가 없을 텐데.
송제구가 의문에 빠져 있을 때.
“전투 준비.”
수호가 뒤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전투라니,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부스럭.
수풀 헤치는 소리가 났다.
송제구가 놀람이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송제구 못지않게 놀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무리가 있었다.
“뭐, 뭐야! 지금 막 싸우기 시작했다며?”
38화 생각보다 더 강하다(3)
‘전투가 벌써 끝났잖아! 어떻게 된 거야?’
언더독 길드의 조팽석이 동생 조팽현을 눈빛으로 추궁했다.
‘막 시작했었다고! 정말이야! 제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조팽현이 억울한 눈빛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팽현은 진짜로 딱 싸움이 시작하는 순간에 맞춰 물러났으니까.
게다가 수호 일행이 상대한 몬스터는 4마리.
3명인 수호 파티가 단숨에 처치할 수 없는 숫자였다.
‘젠장, 어쩔 수 없군. 플랜 b다.’
조팽석이 동생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이미 여러 번 머더러 짓을 해 오던 일당이다.
일이 어긋날 때를 대비해 준비한 작전도 있었다.
‘알았어.’
신호를 알아들은 조팽현이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조팽석이 너스레를 떨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이거 또 마주치네요.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나. 아니면 전생에 깊은 인연이라도 있었나? 껄껄.”
“개수작 부리지 마!”
송제구가 버럭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며 활대도 들어 올렸다.
궁수가 뒤로 물러섰으니, 전투를 준비한 셈이다.
‘씨발, 안 통하는군. 병신은 아니라 이거지.’
조팽석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긴 처음 마주칠 때부터 저 활쟁이는 제법 노련한 티를 냈으니까.
‘괜찮아. 잠깐만 시간을 끌면 되니까.’
조팽석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사이.
뒤로 빠졌던 조팽현은 전장을 우회했다.
【반투명】을 건 상태였다.
‘한 놈만 조지고 시작하자.’
그러면 필승이다.
안 그래도 6 대 3이다.
한 놈 죽이고 시작하면, 극도로 유리해진다.
“개수작이라니요? 이거 같은 헌터들끼리 너무 날 세우지 맙시다. 레벨도 비슷해서 오다가다 자주 만날 텐데. 거참, 우리 언더독 길드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조팽석이 떠드는 헛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시간 잘 끌어 주네. 이제 됐어.’
조팽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목표물의 등이 보이는 위치까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조팽현이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상대는 눈치도 못 채고 죽어 나갈 것이다.
하나 조팽현에게는 불행하게도 상대는 진작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찰하고 간 놈이구나. 이번에는 기습하려고?’
장내 누구도 수호의 감각을 피하지 못한다.
당연히 조팽현의 움직임도 손바닥 보듯 읽혔다.
‘가까이 오면 처리하고 시작하자.’
상대의 의도가 기습이라면, 그것을 박살 내며 전투를 시작한다.
그 편이 기세 측면에서도 유리할 터다.
쎄에엑-
조팽현의 칼이 수호의 등을 찔러 왔다.
수호는 이미 빙글 돌아서 있었다.
“뭐야?”
조팽현은 공격 중에도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게 조팽현의 유언이 되었다.
콰아앙-!
조팽현의 가슴이 함몰되어 뒤로 날아갔다.
조팽현의 칼을 고개만 까딱해 피해 낸 수호.
그가 화염 강격으로 조팽현의 가슴을 후려친 것이다.
“팽현아! 씨발! 저 새끼 죽여, 죽이라고!”
동생의 죽음에 조팽석이 소리쳤다.
언더독 길드의 머더러들이 병장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푸슈슛-
송제구의 화살이 한발 빨랐다.
우두둑.
그리고 김진성 또한 진면목을 드러냈다.
“시, X발, 저게 뭐야?”
“웬 늑대 인간이……!”
갑작스러운 변신에 머더러들이 움찔했다.
그 틈에 벼락처럼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화염 강격!’
어느새 쇄도한 수호가 머더러에게 칼을 내질렀다.
“끄아악-!”
머더러가 요단강을 건넜다.
이번에도 두 번의 칼질은 필요 없었다.
‘이런 개 같은…….’
조팽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활쟁이는 저 파티의 핵심이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저딴 괴물이 섞여 있었다니.’
때깔 좋은 갑옷만 보고 오판했다.
놈은 어디 잘사는 집 아들래미가 아니었다.
갑옷에 어울리는 진짜 강자였던 것이다.
동생의 죽음은 이미 잊히고.
저릿한 위기감이 조팽석의 몸을 사로잡았다.
‘X발, 그래도 이길 수 있다.’
조팽석은 품을 뒤졌다.
머더러 짓을 하며 모은 돈으로 사놓은 비장의 무기.
【블레이드 샤워 스크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 마법이 내장된, 무려 고급 등급의 스크롤이다.
“죽여! 멍 때리지 말고 죽이라고!”
부하들에게 소리친 조팽석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찌익-
스크롤이 찢어졌다.
뭉클, 마력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허공에 수백 개의 칼날이 생겨났다.
수호가 이변을 눈치챈 것도 그때였다.
‘스크롤? 마법이야, 공격 마법!’
상황을 파악한 수호가 튀어 나갔다.
곧 수백 개의 칼날이 전장을 뒤덮을 것이다.
늑대 인간 김진성은 어쩌면 버틸지 모른다.
하나 송제구는 최소한 중상이다.
‘막는다!’
수호가 【헤이스트】를 시전했다.
블레이드 샤워가 완전히 발동한 것도 이때였다.
푸슈슈슈슈슈슈슈-
칼날이 소나기처럼 밀려들었다.
‘보인다. 할 수 있어!’
수호의 시야에 수많은 칼날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호가 방패와 칼을 들었다.
팔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실제로 세상이 느려진 것은 아니니까.
‘근력 증폭!’
수호는 근력 증폭마저 사용했다.
조금의 속도.
조금의 힘이라도 더 얻기 위해.
2배로 뻥튀기된 근력이 수호의 바람에 응답했다.
칼날이 방패에 닿았다.
투우웅-
튕겨 나갔다.
둔탁한 울림을 들으며 수호가 손을 연이어 움직였다.
투우웅- 투웅- 퉁-
투투투투투투투투퉁-
“이, 이, 이런 미친!”
조팽석은 입이 떡 벌어진 채 굳었다.
저건 말이 안 된다.
피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터였다.
방패 뒤에 숨었다면 납득할 수 있었으리라.
“칼날 수백 개를 다 쳐냈다고?”
한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칼날을 일일이 다 쳐내다니.
조팽석이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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