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4
그의 외침 덕분에 조경수도 수호의 정체를 깨달았다.
“김성국 이 병신이 뭔 짓을 한 거야?”
조경수가 지팡이를 뽑아 들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푸른 보석이 빛을 발했다.
그때.
푸슈슛-
조용히 숨어든 발룡이가 독침을 발사했다.
박동식과 조경수를 노리고 독침이 날아갔다.
“으억-”
박동식이 침에 맞아 쓰러졌다.
하지만 조경수는 아니었다.
그는 뭔가 날아오는 것을 느낀 순간, 재빨리 스킬을 시전했다.
‘빙벽!’
얼음벽이 생겨나, 조경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비 독침이 빙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빙벽.
강한 냉기를 뿜는 벽을 만드는 스킬.
빠르게 시전되고, 범위도 넓으며, 공방에 모두 유용한 조경수의 주력 스킬이었다.
빙벽이 길을 가로막은 탓에 수호의 기습도 수포로 돌아갔다.
수호가 조경수를 노려봤다.
그사이 조경수도 수호를 가늠하고 있었다.
‘저놈, 동식이 연수원 동기라며? 뭐가 저렇게 강해?’
침을 막기 위해 몸 앞에 본능적으로 펼친 빙벽.
그때 조경수는 깨달았다.
빙벽을 즉시 펼치지 않았으면, 수호의 칼이 자신에게 닿았을 것임을.
그만큼 수호의 움직임은 민활했다.
‘그렇다고 해도.’
조경수는 겁먹지 않았다.
2성 던전 졸업을 앞둔 자신이다.
저런 애송이에게 위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빙벽은 못 뚫는다.’
조경수는 자신 있었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외쳤다.
“이런 씨발 새끼가, 어디 남의 던전에서 행패야?”
“그건 사람 납치해서 죽이려 들기 전에 해야 했던 소리고.”
“…다 알고 왔어? 김성국이 이 병신 새끼, 가지가지 하는구만.”
조경수가 혀를 찼다.
김성국이 저간의 사정을 토설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수호는 그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적은 원거리에서 스킬을 쓰는 마법사 유형.
접근해야 이길 수 있다.
타타탁-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수호.
조경수가 곧바로 반응했다.
‘빙벽!’
저저적-
얼음벽이 생겨나, 수호에게 밀려들었다.
‘움직이기도 하는 거였군.’
수호가 혀를 차며 솥뚜껑을 들어 올렸다.
막 솥뚜껑이 얼음벽에 닿는 순간.
‘얼어붙는다?’
수호는 재빨리 솥뚜껑을 놓고 물러섰다.
솥뚜껑이 얼어붙으며 얼음벽에 달라붙었다.
“흐흐흐, 애송이.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돼?”
조경수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수호는 대답 대신, 다시 전진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수호의 앞에 다시 얼음벽이 생겨났다.
수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화염 포마검]에 불길이 화륵 치솟았다.
【화염 강격】이 발동된 것이다.
콰앙-!
화염 강격이 빙벽을 후려쳤다.
빙벽 가운데가 깨어져 나갔다.
“미, 미친! 빙벽을 깬다고?”
조경수가 경악해 외쳤다.
수호는 깨어진 빙벽의 틈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저저적-
금세 눈앞에 새로운 빙벽이 나타났다.
‘화염 강격!’
수호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빙벽이 깨어졌지만, 조경수는 이미 물러나 있었다.
‘쯧.’
수호는 혀를 찼다.
전투가 빠르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발룡이는… 지쳤나.’
발룡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력이 다한 듯했다.
‘어떻게든 내 힘만으로 저걸 뚫어야 한단 말인데.’
저저적-
고민할 틈이 없었다.
다시 생성된 빙벽이 수호에게 밀려왔다.
수호는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쾅-!
그 뒤로 비슷한 양상이 계속됐다.
얼음벽이 만들어지고, 수호가 화염 강격으로 때려 부쉈다.
어느 순간, 수호도 조경수도 깨달았다.
‘승패는 마력에 달렸다!’
마력이 먼저 고갈되는 쪽이 진다.
조경수는 수호의 【화염 강격】에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이제 막 각성한 새끼 스킬이 뭐 저리 강해.’
화염 속성도 붙은 것 같고.
칼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조경수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렇긴 하다만, 흐흐흐. 애송이 새끼. 고렙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조경수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고로 헌터란 오래 묵을수록, 장비가 좋아지기 마련.
단순히 주력 장비만이 아니다.
소모 아이템.
언제 생길지 모를 위기를 대비해, 적절한 소모 아이템을 준비해 두는 것 또한 고렙의 힘이었다.
조경수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품을 뒤졌다.
‘찾았다. 마력 물약.’
하급 마력 물약.
치유 물약에 비해 훨씬 희귀하고 비싼 물건이다.
그 탓에 웬만한 헌터는 구비하지 않지만 조경수는 가지고 있었다.
‘언제 뒤치기 당할지 몰라 구해 뒀더니, 이렇게 쓰는구만. 흐흐.’
평소 행실 탓에 적이 많은 조경수였다.
혹시나 하고 1,000만 원이나 주고 마력 물약을 사 놓은 것이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저저적-
다시 빙벽이 시전됐다.
쾅!
그리고 깨어져 나갔다.
“헉, 헉-”
수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기는 조경수도 매한가지.
그는 마력 물약을 쓸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긴 새끼 때문에 기어이 천만 원이 깨지는구나.”
그렇게 뇌까린 조경수가 물약을 들이켰다.
그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한데 그 순간 수호의 칼이 붉게 빛났다.
그러더니.
우우웅-!
손잡이에 박힌 구슬에서 강맹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력은 곧 수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력 충전】
[화염 포마검]의 내장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조경수가 대번에 상황을 눈치챘다.
“이런 빌어먹을!”
수호가 생생한 표정으로 조경수에게 물었다.
“물약 더 있냐? 난 몇 번 더 쓸 수 있는데.”
“…씨발!”
마력 물약 같은 걸 2병이나 준비해 둘 리가 있냐!
조경수가 억울한 마음을 내뱉을 틈도 없이 수호가 달려들었다.
저저적- 쾅!
저저적- 쾅!
.
.
저저적-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혀, 협상하자. 박동식만 살아 있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깔끔하게, 절대로 뒤탈 없이 해결할 수…….”
마력이 바닥난 조경수의 혓바닥이 길어졌다.
수호는 대답 없이 조경수에게 쇄도했다.
콰아앙-!
마지막 빙벽이 뚫렸다.
“씨, 씨발. 영일이 가만 있을 줄…….”
퍼억-!
화염 강격이 조경수의 머리통을 터트려 버렸다.
* * *
“헉- 허억-”
조경수의 사체 앞에서 수호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유로운 척했지만 그도 많이 지쳐 있었다.
『역시 하찮은 것들의 투덕거림이 보기에는 재밌군.』
그때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또 뭔 짓을 한 거야?”
발룡이는 박동식의 몸 위에 앉아 있었다.
한데 박동식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비가 반쯤 풀리려 해서 이놈의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잘했네.”
수호는 박동식에게 다가갔다.
발룡이 말대로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는지, 얼굴을 꿈틀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 이 미친! 네깟 놈이 경수 형님을 이겼다고? 씨발, 말도 안 돼!”
놈은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상황을 자각했는지 크게 소리쳤다.
“너, 너 이 새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딴 짓거릴 하는 거야? 당장 치료해. 치유 물약 가져와, 개X끼야!”
수호는 박동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발룡아, 아까 그거 한 번만 더 하자. 술술 불게 만드는 거.”
『마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이거로 채워. 좀 남았으니까.”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발룡이에게 내밀었다. 발룡이가 칼을 받아 들었다.
잠시 후, 칼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발룡이에게 흡수됐다.
그사이, 수호는 차원 보따리에서 강철 창을 꺼냈다.
『이깟 마력으론 얼마 버티지 못해.』
“괜찮아, 딱 두 가지만 물으면 되니까.”
대답한 수호가 매질을 시작했다.
퍽퍽퍽퍽-
“크윽- 개새끼,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줄 알아!”
퍽퍽퍽퍽-
“씨, X발, 아빠가 널 죽여 버릴 거야!”
퍽퍽퍽퍽-
“그, 그만, 흐윽- 제발 그만.”
『됐다. 시작하지.』
발룡이의 신호에 수호가 물러섰다.
곧 주문이 시전되고, 박동식의 눈이 흐릿해졌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누구 누구지?”
먼저 뒷일을 대비하기 위한 질문부터.
“나, 고민오, 조경수, 김성국 네 명이 전부다.”
“조경수? 방금 같이 있던 놈인가?”
“그렇다.”
김성국에게 물었던 내용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차 검증했으나, 조경수가 끼어들었다는 것 말고는 같았다.
‘다행이야. 뒤탈 걱정을 덜겠어.’
수호는 곧바로 나머지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지?”
“너처럼 하찮고 거지 같은 새끼가 나와 같은 연수를 받는다는 게 어처구니없잖아. 아빠가 그랬어. 너 같은 놈은 괴롭히고 짓밟고 죽여 버려야 한다고. 버러지 새끼, 내가 말하면 고개를 숙이든가, 고분고분 무릎을 꿇든가 해야지…….”
뭔가 말이 계속 이어졌지만, 수호는 더 듣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듣길 잘했네.”
괜한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겠어.
푹-
창이 박동식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번만큼은 입맛이 쓰지 않았다.
‘이 짓도 적응되는 건가.’
수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 뒤 사체를 한곳에 모았다.
김성국과 고민오의 것까지.
『뭐 하는 거지?』
“어차피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수호는 사체에서 아이템을 벗기며 대답을 이었다.
“전리품은 가져가야지.”
『그깟 하찮은 것들을 챙겨 봐야 쓸데나 있을까?』
그게 네가 먹은 치킨 수천 마리 값이다.
…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팔기는 힘들다.
영일 길드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을 테니까.
대신에…….
“강력한 협조자가 있잖아. 쓸데없는 걸 쓸모 넘치는 아이템으로 바꿔 줄.”
얼음벽을 만들던 놈이 쓰던 고급 아이템, [속성 증폭 지팡이]는 분명 훌륭한 재료가 되어 줄 터였다.
『이제 다 챙겼으니 가는 건가?』
“아니, 기왕 털기로 한 이상 확실히 털어야지.”
수호가 눈빛을 빛내며 던전 보스룸으로 향했다.
.
.
.
영일 길드는 보스의 약점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수호는 그것을 김성국에게 이미 들었고.
그 덕분에…….
[보스 몬스터 흑철 골렘을 쓰러트렸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민첩이 1증가합니다.]
[민첩이 1증가합니다.]
수호는 아주 쉽게 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쉽네.’
하필 형태도 골렘.
핵을 파괴하면 쓰러지는 몬스터다.
핵 위치를 알고 시작하니,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이템이 안 나온 건 좀 아쉽지만.’
흑철 골렘은 아이템을 드랍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사체를 통째로 가져가면 되니까.’
대신 핵이 파괴된 흑철 골렘을 그대로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보스가 죽자 던전 코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캉-!
수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코어를 부수었다.
구구궁-
던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체는 던전이 소멸하며 함께 사라질 터.’
수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임을 깨달았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없다.’
물론, 아들이 사라진 영일 길드장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이 일로 영일 길드와 제대로 부딪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나도 훨씬 강해져 있을 테니까. 발룡아, 가자!”
수호가 소리치며 던전 밖을 향해 달리려던 순간.
발룡이가 광소를 터트렸다.
『크큭, 봉인이 느슨해졌다. 크크하하하!』
뭐래?
수호가 차게 식은 눈으로 발룡이를 쳐다봤다.
* * *
“늦잠 잤네.”
수호는 환한 햇빛에 잠에서 깼다.
영일 길드 던전을 닫아 버린 후.
수호는 차원 보따리 속의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이제 눈을 뜬 것이다.
그런 수호의 눈앞에 파닥거리는 존재가 있었으니.
『본좌는 어제 과도할 정도로 힘을 썼다.』
발룡이었다.
봉인이니 뭐니, 떠든 것치고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
‘봉인은 무슨. 그냥 마력 좀 늘어난 것 가지고.’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 순간, 발룡이의 마력 최대량이 조금 늘어난 것이다.
‘어쨌든 몬스터를 잡으면 발룡이가 더 강해진다는 말인데.’
발룡이가 레벨업을 한다거나 경험치를 먹는다는 등의 메시지는 없었다. 하지만 마력량은 확실히 증가한다고 했다.
‘던전에 데려가야 하나?’
발룡이의 유용함을 생각하면 그편이 좋겠지만.
그러려면 정현수에게 많은 걸 설명해야 할 판이니…….
‘나중에 생각하자.’
던전 갈 때 돼서 생각하면 되겠지.
수호는 결정을 미루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눈 뜨자마자 치킨 타령이냐. 알았어, 기다려 봐.”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간신히 문을 연 치킨집을 찾아 주문을 마친 뒤, 시리얼을 들고 냉동실 앞으로 향했다.
“어?”
수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여느 때처럼 공사 소리가 들려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새로운 교류 대상 【잿빛 가죽 드워프】를 발견했습니다.]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기 때문이다.
21화 B-킬라(1)
[새로운 대상 【잿빛 가죽 드워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잿빛 가죽 드워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다른 드워프가 더 나타났어!’
타룽가의 말에 따르면, 붉은 망치 외에도 많은 드워프 부족이 존재했다.
‘올 때가 되긴 했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신탁을 들었다.
그러니 다른 드워프 부족이 발랑카 산맥에 나타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호가 새 드워프의 등장을 납득하는 사이, 또 다른 메시지가 이어졌다.
[교류 등급이 【하급】에서 【일반】으로 상승합니다.]
[새로운 차원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교류 등급이 상승했다.
모처럼 일어난 큰 변화에 수호의 머리가 바빠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발룡이 때문에 늘 염두에 두고 있는 물음표 스킬이었다.
‘물음표 스킬은 바뀌었으려나?’
수호가 【???】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확인이 안 되네.’
궁금증을 풀지는 못했지만, 수호의 안색은 밝았다.
‘그래도 새로운 차원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진다니, 좋구만.’
기대감이 차올랐다.
드워프를 만나고 일어난 변화를 생각하면, 안 그럴 수가 없다.
생각을 정리한 수호는 냉동실로 시선을 돌렸다.
성벽 안, 타룽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처음 보는 드워프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잿빛 가죽 드워프의 족장인가?’
새 드워프는 외형이 약간 달랐다.
키는 타룽가와 비슷했지만, 골격이 가늘고 날렵하게 생겼다.
가죽 갑옷을 걸치고 석궁도 들었다.
‘갑옷에 저건 핏자국인 것 같은데.’
갑옷에 검붉은 얼룩이 졌다.
상처 입은 자들도 보였다.
‘오는 길이 험했나 보네. 근데 몇 명이나 온 거지?’
제법 많아 보이는데.
수호는 차원 패널을 열어 교류 대상 목록을 확인했다.
[교류 대상 목록]
▶ESKHJ-0702L
┗ 붉은 망치 드워프
┗ 광룡 발랑카르
┗ 잿빛 가죽 드워프
*대상의 이름을 응시하면,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상대로 새로운 대상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잿빛 가죽 드워프의 상세 항목을 불러왔다.
『잿빛 가죽 드워프』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1,027
- 만족도 : 30/100
새로운 종족은 수가 많았다.
‘천 명이 넘네.’
한꺼번에 이주해 온 건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이 정도면 차원 패널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알아봤다.
이제는 대화를 해 볼 차례다.
* * *
잿빛 가죽 드워프 족장 달콩은 안도했다.
신탁을 받고 이주를 결정한 지 두 달.
수많은 몬스터를 뚫고 발랑카 산맥에 도착했을 때.
“성벽이다! 사람이 있다! 드워프야!”
“우와- 진짜로 드워프가 있어!”
그곳에는 정말로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담장처럼 나지막했지만, 그것은 성벽이었다.
누군가 살고 있고, 살아갈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신탁이 맞았어.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마물의 침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낙원이다.”
성벽 안에 있는 것이 드워프.
그것도 안면이 있는 붉은 망치 일족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경악했다.
“이걸 붉은 망치 부족이 지었다고? 그새 말인가?”
그렇기에 오랜만에 만나는 타룽가에게 황급히 물었다.
한데 돌아온 대답은 허무맹랑했다.
“붉은 망치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인 거인님이 함께한 일일세, 껄껄껄.”
“거인? 그게 뭐지?”
“드워프의 수호자이자 신탁의 주인공. 그리고 기후를 조절하는 대마법사이자, 저 광룡 발랑카르를 제압한 위대한 전사! 거인님은 바로 그런 분이시네.”
타룽가가 자긍심 가득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달콩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난하느라 힘들어서 정신이 나간 건가?’
그도 그럴 것이, 타룽가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허황되기 그지없지 않나?
‘신탁이야 나도 들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뭐? 기후를 조절해?’
심지어 드래곤을 제압했단다.
정신없기로 유명한 광룡 발랑카르를 제압?
차라리 죽였다면 믿겠다.
“자네 제정신인가?”
달콩은 타룽가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신탁이 내려왔으니, 이곳에 뭔가 있기야 하겠지. 그러니 거인이 있을 수야 있네만… 기후 조절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허허, 그럼 성벽과 건물들은 우리의 힘만으로 지었다는 소린가? 저기 쌓인 목재는? 광산은? 우리도 출발 일자는 자네 부족과 다를 것 없네. 출발 전 회합에서 나와 만났으니,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음…….”
달콩은 침음했다.
붉은 망치의 영역이 이곳과 더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인 거리 차가 있지는 않았다.
‘설마, 진짜 대마법사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인 거인이 있다고?’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혹시… 나쁜 마법에라도 당한 건가?’
달콩의 마음에 의심이 싹텄다.
흘끔.
달콩은 타룽가의 안색을 살폈다.
다른 붉은 망치 부족의 상태도 관찰했다.
하나 별다른 문제는 없다.
‘굉장히 밝아. 세상이 망한다고 하는 판에…….’
오히려 너무 희망에 차 있는 것 같아 이상할 정도였다.
달콩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룽가 님, 새로운 드워프 분들이 도착하신 것 같은데, 소개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달콩은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분명 아무도 없건만.
가만 보니 허공에 뭔가 일렁이고 있긴 했다.
‘설마, 진짜로 마법사?’
달콩이 긴장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타룽가가 환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거인님, 오셨군요! 달콩, 저기 저분이 거인님일세. 보이진 않지만 저쪽에 계시다네. 거인님, 이 친구는 잿빛 가죽 부족의 족장인 달콩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원수호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타룽가의 소개에 수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뜩잖았지만 달콩도 마주 인사했다.
“나는 잿빛 가죽 드워프 족장 달콩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거인입니까?”
“어… 거인은 아닌데, 그쪽에서 느끼기엔 좀 크긴 합니다.”
애매한 대답.
수호로서는 사실대로 말한 것이지만, 의혹에 찬 달콩에게는 의심스럽게 들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마법사입니까?”
“아닙니다. 마법은 할 줄 모릅니다.”
“타룽가가 말하길, 당신이 드래곤을 제압한 위대한 전사라던데, 설마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그건 사실에 가깝네요. 위대한 전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을 제압하긴 했으니까요.”
캐묻는 듯한 말투였지만, 수호는 차분히 대답했다.
교류 대상으로 등록된 마당에 안 좋은 인상을 심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달콩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로군요. 광룡을 제압했다니, 거참. 게다가 날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면서 마법사는 아니라고 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니 다 헛소리로 느껴집니다. 혹시 다른 의도가 있어 우리 드워프들에게 접근한 것입니까?”
“이보게 달콩, 거인님께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인가! 분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일이거늘.”
타룽가가 버럭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달콩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부족의 명운이 걸린 일일세, 타룽가. 정신 차리게.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해서 그런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부족에 주술에 조예가 있는 자가 있네. 그 친구에게 한번 가 보세.”
달콩은 타룽가가 저주에라도 걸린 양 말했다.
“무슨 헛소린가. 이상한 말 그만하고, 거인님께 사과나 하게.”
“겨우 닿은 희망의 땅이 이런 상황이라니. 정신 차리게 타룽가!”
달콩은 오히려 타룽가에게 소리쳤다.
부족의 안위가 걸린 일.
달콩도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수호는 달콩의 마음을 눈치챘다.
‘붉은 망치 부족 때와는 달라.’
식량을 나누고, 마을을 짓고, 성벽을 쌓고.
오크와 드래곤을 막으며 얻은 신뢰를 만나자마자 원할 수는 없는 일.
수천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최대한 주의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행색을 보니 오는 길에 전투도 치른 듯하여 더더욱 이해되었다.
‘성급하게 가까워지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몰라. 천천히 가자, 천천히.’
행동 방침을 정한 수호는 달콩에게 말했다.
“방금 막 도착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일단 좀 쉬신 후에 이야기하죠, 달콩 님.”
뒤이어 타룽가를 보며 말을 이었다.
“타룽가 님, 음식 남은 거 있죠? 잿빛 가죽 분들께 좀 나눠주세요. 음식은 제가 곧 더 구해다 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매번 신세만 져서 죄송합니다, 거인님.”
“아니에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달콩 님도 편히 쉬시고요.”
“…알겠소.”
달콩도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못했다.
부족원들에게 휴식과 식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갈 길이 멀겠어.’
수호는 냉동실에서 물러나 핸드폰을 들었다.
- 원수호 : 현수야, 식자재 건은 어떻게 됐어? 언제쯤 준비될까?
갑자기 식구가 천 명이 늘어 버렸다.
식자재 준비가 늦어지면, 주변 창고형 마트라도 돌아야 한다.
답변은 머잖아 돌아왔다.
- 정현수 :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준비 다 됐어요, 형. 좀 전에 창고에 넣어 뒀다니, 가지고 가시면 돼요.
- 원수호 : 오, 고맙다.
- 정현수 : 고맙긴요.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곧 다음 던전 잡히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 원수호 : 그래, 땡큐.
수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여 주는 사람에게는 호감이 생기기 마련이지.’
수호는 잿빛 가죽 드워프를 밥으로 구워삶을 생각을 하며 창고로 향했다.
* * *
“영계백숙 오오오오-”
수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차원 보따리에 잔뜩 쌓인 식료품 덕에 기분이 좋았다.
라면, 쌀, 밀가루, 감자, 고구마 등의 식재료.
화룡점정으로 생닭 천 마리!
‘그간 라면만 먹여서 신경 쓰였는데, 이제 마음이 좀 편하구만.’
수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습관처럼 냉동실을 바라봤다.
“별일 없겠지?”
상왕련에서 빌린 창고는 왕복 1시간 거리.
넉넉잡아도 1시간 반이 안 걸려 돌아왔으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수호가 그런 생각으로 냉동실에 얼굴을 가져갔을 때.
“찔러! 못 올라오게 막아!”
“수가 많지 않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멍청하게 고블린 따위한테 당하지 마! 안전하게 싸워!”
“저 정도는 부상 없이도 물리칠 수 있다고!”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몬스터 침공 저지】를 획득하셨습니다.]
“또?”
어째 어딜 다녀만 오면 임무가 뜬다.
그나마 긴급 임무가 아닌 걸 보니, 상황이 급박하지는 않나 본데…….
수호는 임무 확인 전에 전황부터 살폈다.
‘적은 고블린인가?’
작은 체구의 몬스터가 성벽에 달려들고 있었다.
한데 특별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성벽 덕을 톡톡히 보는구만.’
성벽 위에서 철창을 든 붉은 망치 드워프들.
그 뒤에서 석궁을 든 잿빛 가죽 드워프까지.
훌륭한 대처에 고블린은 성벽을 채 오르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면 도울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
수호는 일단 임무를 확인하기로 했다.
『몬스터 침공 저지』
- 드워프 마을에 몬스터 무리가 침공해 왔다. 드워프를 도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자!
- 보상 : 잿빛 가죽 드워프 만족도. 붉은 망치 드워프 만족도.
수호는 임무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의미심장한 단어 때문이었다.
‘몬스터 웨이브?’
아무래도 고블린만으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수호가 고민하는 사이, 드워프의 고함이 들려왔다.
“놀이다! 놀 무리다!”
“석궁 쏴! 달라붙기 전에 떨어트려!”
“놀 정도에 겁먹지 마!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우리에겐 거인님이 있다!”
개처럼 생긴 머리를 한 2족 보행 몬스터가 등장했다. 수는 100마리 정도.
놈들은 성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슬슬 거들어야 하나?’
아직 위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수호는 일단 [화염 포마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단,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성급하게 끼어들었다가, 새로 온 드워프들이 놀라 나자빠질라.’
거대한 수호의 손을 보면, 잿빛 가죽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할 수 있다.
붉은 망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
다행히도 드워프들은 선전을 거듭했다.
고블린은 물론 놀까지, 큰 피해 없이 막아 내고 있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헉! 저건 뭔데 저렇게 커?”
전장 저편.
거대한 덩치를 가진 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쿵쿵-
지축의 울림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드워프들이 반응했다.
“으악-! 오우거다!”
“제기랄, 오우거야. 오우거라고!”
“겁먹지 마! 우리에겐 수호신이 있다!”
“거인님이 오실 거다! 드래곤도 물리친 거인님이 계신다!”
수호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알았다.
수호가 칼을 들어 냉동실을 겨누었다.
쾅-
그사이 달려온 오우거가 주먹으로 성벽을 후려쳤다.
성벽 한 귀퉁이가 대번에 터져 나갔다.
그때 수호가 검을 내질렀다.
푸칵-
날카롭게 뻗어나간 검날이 단숨에 오우거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크허어어어어엉-”
괴상한 비명을 터트린 오우거가 몸을 버둥거렸다. 놈은 칼에 찔리고도 아직 살아 있었다.
수호가 칼을 위로 들었다.
오우거를 꼬치처럼 꿴 채 칼을 내리쳤다.
퍽- 퍽- 퍽-
세 번을 내리치자 오우거의 움직임이 멎었다.
“거인님이다! 거인님이 오셨다!”
“드디어 오셨다! 히힛. 몬스터 놈들, 이제 다 죽었어!”
“붉은 망치는 창을 들어라! 성벽을 지켜라! 우리의 뒤에는 거인님이 계신다!”
와아아아아아아-
붉은 망치 드워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뭐, 뭐야?”
“방금 그게 거인? 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드래곤을 잡았다는 소리가 진짜였어?”
“몰라, 어쨌든 우리 편이지? 그럼 됐어!”
“살았어. 이제 살았다고!”
얼떨떨했지만 강력한 아군의 등장이 싫을 리 만무.
잿빛 가죽 드워프들도 환호에 동참했다.
하지만 수호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임무 완료 메시지가 안 뜬다.
뭔가 더 있다.
수호가 성벽 저편, 산기슭을 바라봤다.
‘저게 뭐야?’
시커먼 물결이 스모그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22화 B-킬라(2)
“으앗- 저게 뭐야?”
“매, 맹독 모기다! 큰일 났어. 맹독 모기떼가 밀려온다!”
드워프들이 우왕좌왕했다.
수호도 미간을 찌푸렸다.
‘편하게 가나 했더니, 진짜는 따로 있었어.’
성인 드워프 반 정도 크기의 거대한 모기.
그것이 구름처럼 까맣게 밀려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좀 남았지만, 기껏해야 1, 2분.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막으란 거지?’
수가 너무 많다.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이름이 맹독 모기인 걸 보니, 독도 품은 모양이고.
수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젠장, 불! 불화살이라도 준비해!”
“저 많은 걸 화살로 어떻게 다 잡아. 땔감, 땔감에 불을 붙여!”
“차라리 성벽에 불을 지르자.”
그때 들려온 드워프의 목소리.
수호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불이 약점이면…….’
수호에게는 불에 관련된 스킬이 있다.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든 팔을 냉동실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검 끝이 모기떼에 간신히 닿을 거리.
수호는 스킬을 시전했다.
‘화염 강격!’
화르르!
불길에 휩싸인 칼을 수호가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모기 수십 마리가 단번에 죽어 나갔다.
‘다시!’
콰아앙-
콰아앙-
수호는 거듭 화염 강격을 사용했다.
모기떼가 주춤했다.
하나 그도 잠시뿐.
모기떼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흩어진다!’
큰일이었다.
모기는 작고 수가 많다.
그에 반해 막아야 할 공간은 넓다.
‘이대로는 못 막아.’
상황이 좋지 않다.
이대로면 드워프 마을에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수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마땅한 방법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에프킬라라도 확 뿌려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현실의 모기라면 모기약이라도 뿌리겠건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찮은 것들이 본좌의 옛 영토를 두고 싸우는구나. 크큭, 땅에는 그에 걸맞은 격이 필요한 줄도 모르고. 너희는…….』
발룡이가 신난 표정으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
‘뭔 개소리야, 정신 사납게.’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오냐.
수호는 짜증이 치솟아 발룡이를 흘끔 노려봤다.
그 순간, 수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덥석.
* * *
‘이럴 수가…….’
잿빛 가죽 드워프 족장, 달콩은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기후를 조절하는 거인이라니.
한데 위기의 상황에 나타난 거인이 오우거를 박살 내었을 때, 달콩은 희망을 느꼈다.
‘이곳이라면 부족이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부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붉은 망치 부족의 얼굴에는 근심이라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맹독 모기.
구름처럼 밀려든 그놈들이 기어이 성벽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10초만 더 지나면, 놈들이 성벽을 넘어 날아들 터.
그때는 지옥이 펼쳐지리라.
‘아아, 제발. 화로와 모루의 신이시여. 부디, 부디 우리를 수호하소서.’
달콩은 언젠가 들려온 신의 목소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우웅-
허공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고함이 파고들었다.
『컥-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됐고, 쏴! 안 쏘면 밤새 빗자루 면담이다!”
『그딴 협박에 본좌가 비늘 하나 꿈틀할 줄…….』
“닥치고 쏴! 빨리! 쏘면 치킨 10마리! 안 쏘면 죽을 때까지 빗자루다. 빨리 선택해!”
『10마리? 진심이냐?』
“빨리!”
『좋다, 그리도 간절하게 청하니 본좌가 거대한 힘의 편린을 보여 주지. 보아라, 이것이 용의 숨결이라는 것이다.』
울렁-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일렁이는 공간을 뚫고 거대하고 시커먼 것이 나타났다.
“드, 드, 드래곤?”
달콩이 경악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칠흑색 드래곤이 나타나 있었다.
생김새가 아기자기하고, 거인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있다는 점이 좀 이상했지만.
그리고 달콩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
드래곤이 숨결을 뱉어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발룡이의 브레스가 성벽 너머 쏘아졌다.
불길이 모기떼를 덮쳤다.
숨결에 닿은 맹독 모기가 촌각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됐다!’
수호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기를 죽여 나갔다.
모기약 대신 발룡이의 브레스를 쓰자.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잘한다, 발룡킬라! 치킨 듬뿍 먹여 주마.’
드워프 마을에 닥친 위기가 물러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차원 임무 【몬스터 침공 저지】를 완수했습니다.]
[잿빛 가죽 드워프의 만족도가 60 상승합니다.
[붉은 망치 드워프의 만족도가 15 상승합니다.]
* * *
‘발룡이를 냉동실로 밀어 넣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는데.’
발룡이는 물음표 스킬에 의한 페널티 상태.
차원 패널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생각대로 돼서 정말 다행이야.’
비록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손에 들면 도구처럼 쓸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수호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냉동실을 살폈다.
“와- 모기가 싹 사라졌어.”
“거인님이 광룡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테이밍이라도 하신 걸까?”
“드래곤을 테이밍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걸.”
“거인님은 뭐든 하실 수 있어. 얼어붙은 산맥의 날씨를 녹이신 걸 벌써 잊은 거야?”
“껄껄, 이놈들아. 거인님 들리게 크게 인사라도 드려.”
“맞다! 거인님, 감사해요!”
“정말 고마워요, 거인님!”
“히힛, 나는 믿었어요. 거인님 믿었어요.”
붉은 망치 드워프들이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하하,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수호도 마주 대답했다.
그때 달콩이 멍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가 본 게 꿈은 아니지?”
“뭘 말하는 건가? 거인님이 오우거를 단칼에 때려잡으신 거? 아니면 광룡의 멱살을 잡고 브래스를 쏘게 만든 거? 껄껄껄.”
넋이 반쯤 나간 달콩의 말에 타룽가가 대답했다.
“설마, 그럼 이곳의 날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당연히 사실일세. 난 자네에게 한 마디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네.”
“그럴 수가!”
망연자실하던 달콩은 어느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수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거인님의 능력도 모르고, 불경하게 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털썩.
달콩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수호가 만류했다.
“아! 그러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어서 일어나세요.”
“부디 저희 잿빛 가죽 부족을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치기는 왜 내쳐.
앞으로 날 위해 해 줄 일이 얼마나 많은데.
수호가 씩 웃다가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지내실 공간은 타룽가 님과 잘 협의하셔서 정하시고요.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리고 어서 일어나세요. 저는 드워프 님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데, 달콩 님이 그러고 계시면 제가 불편하잖아요.”
달콩이 일어섰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잿빛 가죽 부족은 앞으로 영원히 거인님의 친… 구가 되겠습니다. 친구라 여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제 인사는 그만하시고, …자자 다들 이리 모이세요!”
수호가 드워프들을 불러 모았다.
차원 보따리에 든 각종 식자재가 그들 앞에 쌓였다.
“우왓- 라면이다! 짜장 라면도 잔뜩 있어!”
“고기! 고기다! 손질까지 되어 있잖아!”
“술! 술! 저번에 마셨던 그 술이다. 으하하하, 술이라고!”
“잔치다! 잿빛 가죽 부족을 환영하고 거인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인다!”
타룽가의 외침과 함께 잔치가 시작됐다.
수호도 기꺼이 그에 응했다.
“오늘 하루는 아끼지 마시고 팍팍 드세요. 달콩 님도 어서 가서 부족원들 불러오시고요.”
달콩이 고개를 숙이고는 부족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다.
수호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낮에 시작한 잔치는 저녁이 되도록 이어졌다.
『본좌의 위업에 경배하라.』
“그래, 경배할게.”
『너는 본좌에게 좀 더 공손해야 할 것이다.』
“오냐.”
『머리를 나무뿌리처럼 바닥에 심고, 이렇게 말해 보아라. 위대하신 어둠의 주인이자 검은 불꽃의…….』
“1절만.”
『…….』
“어쨌든 치킨 10마리는 사 줄 테니, 먹고 싶을 때 이야기해.”
『지금! 후1 양1.』
“…알았다.”
수호는 스마트폰으로 치킨을 주문했다.
‘마력만 먹고 산다더니, 밥값이 제법 드는구만.’
뭐, 먹은 거 이상으로 일을 하니, 불만은 없다.
‘그나저나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수호는 차원 보따리 안을 가늠했다.
텅텅 비기 일보 직전이었다.
방금 벌인 잔치와 새 부족의 합류로 보급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식량 납품량을 더 늘려 달라고 해야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던 수호가 차원 보따리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 전리품을 까먹고 있었구만.’
영일 길드 던전을 털면서 얻었던 각종 아이템과 재료.
그걸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호는 냉동실 앞으로 다가갔다.
“타룽가 님! 안 바쁘시면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이내 타룽가가 달려왔다.
“바쁘지 않습니다. 껄껄껄, 바빠도 달려오겠지만 말입니다.”
“하하, 모처럼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전혀요. 이 모든 게 다 거인님의 은혜 덕분인걸요. 그나저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수호는 말과 함께 전리품을 저쪽 세상으로 넘겼다.
빙벽 스킬을 쓰던 조경수에게 뺏은 [속성 증폭 지팡이].
그 외에도 던전 보스 흑철 골렘의 사체 등이 타룽가 앞에 쌓였다.
“이게 다 뭔가요?”
“어쩌다 얻은 재료인데, 혹시 이것들로 제가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자세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타룽가가 재료를 들고 살폈다.
그때 슬쩍 끼어드는 그림자가 있었으니.
“달콩 님도 오셨군요.”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와서 죄송합니다, 거인님. 우연히 들었는데 뭔가 만들고 싶으신 듯하여…….”
“네, 드워프 님들이 만든 장비는 성능이 아주 좋더라고요.”
솜씨가 워낙 좋으셔서.
수호의 말에 달콩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도 거인님의 장비를 만들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부탁해 달라고 부탁받다니.
뭐 이런 경우가.
수호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때 타룽가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큼큼, 금속 장비 쪽은 저희 붉은 망치가 훨씬 더 낫지요. 그러니 제가…….”
달콩도 지지 않고 덧붙였다.
“가죽은 저희 잿빛 가죽 부족이 몇 배는 뛰어납니다. 아까 낮에 잡은 오우거 가죽과 이 지팡이를 합치면 제법 괜찮은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여기 골렘 사체와 섞어서 갑옷을 만드는 편이…….”
“무슨 소리! 아까 보니 거인님 손에 장갑이 없던데, 가죽 장갑을 만드는 게 낫지!”
“아니지, 아니야. 거인님 팔 못 봤나? 갑옷을 안 입으셨잖아. 당연히 갑옷이 먼저지.”
“갑옷은 가죽으로도 만들 수 있네.”
“허허, 사나이라면 풀플레이트 메일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날렵한 가죽 갑옷이 최고지.”
둘이 서로 하겠다고 난리.
놔두면 싸울 것 같은 분위기라 수호가 얼른 끼어들었다.
“두 분 다 진정하시고요. 일단…….”
둘의 시선이 모였다.
그러자 수호가 말을 이었다.
“저는 투구부터 바꿨으면 싶네요.”
양은 냄비 좀 졸업하자.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강철 헬름을…….”
“오우거 가죽을 쓰면, 가죽으로도 충분한 방어력을…….”
둘은 또 서로 하겠다고 난리.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수호가 끼어들었다.
“일단! 재료는 다 드렸으니 두 분이 상의해서 만들어 주시고요. 투구 만들고 남으면, 다른 장비도 적당한 걸로 부탁드릴게요.”
투구를 제외하면 아이템을 따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재료가 가장 빛나려면, 저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수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타룽가와 달콩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님, 최선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맞습니다. 제가 꼭 훌륭한 가죽 투구를 만들고 말겠습니다.”
“어허, 강철 헬름이야말로…….”
수호는 얼른 냉장고 앞에서 도망쳐 나왔다.
“와, 물건 만드는 일에는 고집이 장난 아니네.”
실소를 흘린 수호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
“근데 이러다 드워프란 드워프는 다 몰려오는 거 아냐?”
식량도 문제지만, 살 곳도 부족하다.
성벽은 2천 명 살기도 빠듯한 범위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마물이란 것들도 날뛰고 있다니.”
언제고 마물이 드워프 마을에 쳐들어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동안 고심하던 수호가 생각을 털어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도 처리하자.”
수호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고, 이내 정현수가 전화를 받았다.
“형, 웬일이세요?”
“납품받기로 한 식량을 좀 늘렸으면 해서.”
“얼마나요?”
“한 2배 정도?”
언제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일단은 좀 넉넉하게 요청했다.
“네, 그렇게 조치해 놓을게요.”
“그리고 혹시 급속 경화 시멘트도 좀 더 구할 수 있을까?”
“죄송해요, 형. 저번에 드린 게 마지막이라, 그건 아예 물량이 없어요. 혹시 얼마나 필요하세요? 적은 양이면, 소매점에 있는 거라도 긁어다 드릴 수 있는데.”“아니야, 없으면 그냥 둬. 식량만 부탁할게.”
“예, 형. 바로 처리해 둘게요.”
“그래, 고맙다. 다음에 보자.”
용건을 마친 수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정현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 근데 혹시, 주말에 시간 되세요”
“왜?”
“이번에 또 던전이 하나 잡혀서 가실 수 있나 하고요.”
“또? 네가 서둘러 잡은 거야?”
“그건 아니고요, 이번엔 어쩌다 보니 상황이 묘하게 되어서… 그 던전이 좀 특이하거든요. 개인 기량만 받쳐 주면 굉장히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인데, 경험치는 많이 주거든요. 어떤 곳이냐면…….”
정현수의 설명이 한동안 이어졌다.
들어 보니, 가서 얻을 게 많아 보였다.
‘안 그래도 던전에서 실험해 볼 것도 있었고.’
생각을 마친 수호가 대답했다.
“그래, 가자.”
23화 누구냐, 너(1)
수호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금세 단어가 완성됐다.
[영웅 등급 아이템]
‘검색.’
곧 검색된 내용이 주르륵 화면을 메웠다.
『영웅 등급 아이템은 과연 실존하는가?』
『미국 리버티 길드 소속 랭커, 크리스 해머워드의 새로운 망치가 영웅 등급?』
『영웅 등급은 없다!』
『얼마를 원하더라도 주겠다! 중동 거부, 영웅 등급 아이템에 백지수표 제안!』
.
.
.
다양한 기사들이 떠올랐다.
수호는 대충 아무 기사나 클릭해 댓글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의견이 오갔다.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실존은 하되 랭커들이 꽁꽁 감추고 있다’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엄청 귀한가 보네. 구체적인 정보라고는 없는 걸 보니.”
그렇기에 수호는 아무리 검색해도 영웅 등급 장비의 옵션을 찾지 못했다.
“근데 그 귀한 게.”
수호가 휴대폰을 책상에 놓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 짙은 회색빛 가죽 갑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요기 있네. 허허.”
[적회색 수호자]
- 두 명의 뛰어난 명인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가죽 갑옷. 상반신은 물론 머리까지 완벽히 보호한다. 명인의 정성이 듬뿍 담겨, 가히 명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재료가 두 명인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 유일한 흠.
- 아이템 등급 : 영웅
- 물리 방어력 790
- 마법 방어력 450
- 【상급 충격 완화】【하급 속성 강화】【근력 폭발】
- 근력+30 민첩+15 체력+15 마력+15
- 내구도 1,200
타룽가와 달콩이 실랑이 끝에 내린 결론은 합동 작업이었다.
달콩은 가죽 갑옷을.
타룽가는 갑옷에 연결된 투구를 만들었다.
그 둘을 합쳐 완성된 것이 [적회색 수호자]였다.
“대박이네, 진짜.”
아이템 설명에 선명히 떠오른 영웅 등급 표시.
수호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솥뚜껑의 2배에 가까운 물리 방어력.
게다가 양은냄비와 솥뚜껑에는 없던 마법 방어력도 달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높은 추가 스탯과 내구도가 따라온다.
“모든 면에서 대단한 물건이지만, 그중에서도…….”
수호는 갑옷에 내장된 스킬들을 훑었다.
【상급 충격 완화】의 경우 격이 높아 그렇지, 양은 냄비에도 원래 붙어 있던 것이라 감흥이 덜했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하급 속성 강화】
- 모든 종류의 속성 공격 및 방어력을 10% 증가시킨다. 상시 적용.
【근력 폭발】
- 10초간 근력을 100% 증가시킨다. 재사용 대기 시간 60분.
“스킬 진짜 미쳤다.”
입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지이잉-
싱글벙글하던 수호의 정신을 휴대폰 진동이 일깨웠다.
- 정현수 : 오늘 던전 가는 날이라 미리 연락드려요. 이따 2시까지 오시기로 한 거 기억하시죠? 그럼 던전 앞에서 뵐게요.
그러마, 하고 답장한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준비해야겠네.”
때마침 새 장비도 얻었겠다.
오늘은 신나게 던전을 털어 보자.
그리고…….
문득 할 일이 기억난 수호가 옆을 돌아봤다.
침대 한편에 누워 배를 까뒤집고 자고 있는 발룡이가 보였다.
“발룡아.”
수호의 부름에 발룡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왜 부르는가, 인간.』
“넌 그 호칭 좀 안 바꾸냐? 어쨌든 오늘 던전 가는 날이니까, 일어나.”
발룡이가 파드득 날아올랐다.
『오- 드디어 본좌를 얽매고 있는 억겁의 사슬이 풀리는 날이 왔구나!』
“헛소리 그만하고, 나갈 준비나 해.”
『크큭.』
수호는 방안을 파닥이는 발룡이를 두고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몸을 빨아들이듯 편안한 착용감이 느껴졌다.
“진짜 편하네. 하긴 등급이 있지.”
수호가 흐뭇한 표정으로 거울을 봤다.
진회색 갑옷이 상반신을 두르고 있다.
“여기 목 뒤를 이렇게 하라고 했던가.”
수호는 타룽가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고, 손을 목덜미로 가져갔다.
목 주변을 두툼하게 두른 옷깃.
그곳에 손을 대고 위로 살짝 끌어 올리는 순간.
차르르르르-
검붉은색 철판이 천산갑의 갑옷처럼 수호의 머리를 타고 올랐다.
철갑은 이내 뒤통수와 정수리를 지나 얼굴까지 덮고서야 멈췄다.
거울 속, 투구 사이 두 개의 눈만이 수호를 마주 본다.
“멋있구나, 크으.”
수호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발룡이가 혀를 찼다.
『본좌의 웃음을 따라 한다고, 본좌처럼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뭐?
발룡이한테 저딴 말을 듣다니…….
밀려오는 수치심에 몸을 떨던 수호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 * *
경기도 외곽, 상왕련 소유 던전 앞.
낡은 용달차가 멈춰 서고, 수호가 내렸다.
“형! 안녕하세요”
“너도 잘 지냈어?”
“저야 형 덕분에 잘 지내고 있죠.”
“그래, 그 나머지 한 명은?”
이번 던전은 특별한 상황이라 한 명이 더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저기 있어요. 소개해 드릴게요.”
수호가 정현수를 따라 던전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여기 이분은 저희 상왕련 사냥 7팀 소속인 채성일 헌터예요.”
정현수가 남자를 소개했다.
수호는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원수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수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흐음, 난 채성일이요. 근데 그 갑옷 때깔 좋네. 뭐 하는 물건이요?”
“…….”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웅 등급임을 밝힐 수도 없을뿐더러, 등급이 낮더라도 저런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거참, 장비 하나 가지고 되게 유세네. 그거 좀 말한다고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고.”
채성일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정현수가 끼어들었다.
“채성일 헌터님, 예의 지키세요. 수호 형은 저희 상왕련에 아주 중요한 손님이니까.”
“예예, 알았수다.”
채성일은 빈정거리듯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 하는 놈이지?’
원래 이 던전은 채성일의 파티가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파티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수호와 정현수가 합류한 것이고.
‘자기 파티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에 괜한 화풀이인가?’
굳이 참아 줘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들이받아?
잠시 고민하던 수호는 이내 생각을 털어 버렸다.
‘됐다. 어차피 같이 다녀야 되는 던전도 아니고, 머릿수만 채우면 그만이니까.’
운 좋은 줄 알아라.
수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정현수가 말했다.
“관련 자료는 미리 드렸지만, 마지막으로 짧게 브리핑할게요.”
“그래.”
“…….”
“이 던전은 세 갈래의 길이 있어요. 진입 즉시 따로따로 갈라지게 되고요. 각자 맡은 길에 나오는 몬스터를 모두 청소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수호는 묵묵히 정현수의 설명을 들었다.
갑옷을 흘끔거리는 채병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최소한 3명이 필요해요. 어쨌든 그 과정을 2번 반복하면 던전이 끝납니다. 보스는 따로 없고요. 세 갈래 길을 각자 클리어하는 게 던전 공략의 핵심인 셈이죠.”
정현수의 설명이 끝났다.
“그럼 가겠습니다.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가자.”
“빨리 좀 갑시다.”
정현수와 채성일의 뒤를 따라, 수호도 던전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 * *
던전에 입장하니 기다란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들은 대로, 나머지 둘과는 갈라졌네.’
여기서부터는 솔플이다.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고, 회랑 끝에 다다르면 된다.
‘그럼 시작해 볼까.’
수호가 마음을 먹는 순간, 발룡이가 투명화를 풀며 나타났다.
『드디어 왔구나. 어서 몬스터를 잡아라, 인간. 본좌의 봉인이 느슨해지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그래, 한번 잡아 보자.”
영일 길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잡을 때, 발룡이의 마력이 증가했다.
수호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몬스터를 처치해서 발룡이가 성장하는 게 확실한지,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것이 수호가 발룡이를 던전에 데리고 온 이유였다.
『오- 저 앞에 웬 쇳덩어리가 온다. 가라! 가서 잡아라!』
“…….”
수호가 걸음을 내디뎠다.
발룡이 말대로 저편 멀리 몬스터 한 마리가 보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로 몸을 감싼 거대한 덩치의 기사.
머슬 나이트.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목구비 대신 울룩불룩한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쿵쿵쿵-
머슬 나이트가 달려들었다.
수호는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갔다.
“쿠와아악-!”
머슬 나이트가 기합을 내지르며 손에 쥔 철퇴를 휘둘렀다.
‘갑옷 덕에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알아봐야지.’
발룡이만이 아니라, [적회색 수호자]의 성능 또한 실험 대상이다.
파워만큼은 1성 최상급인 머슬 나이트이니 실험하기도 좋다.
수호가 솥뚜껑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철퇴가 솥뚜껑을 후려쳤다.
‘만만한데?’
솥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에 부담도 없다.
영웅 등급 장비의 성능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굳이 길게 끌 필요 없겠어.’
이 정도면 성능 실험은 충분하다.
아니, 머슬 나이트 정도로는 애초에 테스트가 불가능했다.
곧 머슬 나이트의 2격이 날아들었다.
수호는 철퇴에 맞서 솥뚜껑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철퇴가 맥없이 튕겼다.
머슬 나이트가 뒤로 휘청였다.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벤다!’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악-
풀 플레이트 메일이 신문지처럼 잘려 나갔다.
“끄어어-”
괴상한 소리가 울리더니, 머슬 나이트가 반으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머슬 나이트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쉽다.’
너무 쉽다.
굳이 피하고 흘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저 베면 될 뿐.
‘1성은 얼른 졸업해야겠어.’
수호가 결심하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심연의 기운이 끓어오른다!』
수호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발룡이를 응시했다.
“마력은 좀 오르냐?”
『그렇다. 드디어 본좌에게 씌워진 억겁의 굴레가 벗겨지려 한다.』
“…그래, 오른다니 다행이다.”
그때 저편에서 새로운 머슬 나이트가 달려왔다.
『가라, 인간!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서 하찮은 몬스터를 잡고, 본좌의 봉인을 풀도록 해라!』
발룡이의 말을 들은 수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참, 실험해 볼 게 더 남았었지.”
덥석.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직접 잡아 봐. 마력 오르나 보게.”
수호가 발룡이를 머슬 나이트에게 집어 던졌다.
* * *
푸콱-
창을 뽑아냈다.
얼굴에 구멍이 난 머슬 나이트가 쓰러졌다.
바닥에 핏물이 흥건히 고인다.
“퉷- 빌어먹을 허접한 몸뚱이, 얼른 갈아타든지 해야지.”
상왕련 소속 18렙 헌터 채성일.
아니, 【아머드 도플갱어】 클래스의 머더러 홍수철이 말했다.
상대의 외형과 스테이터스.
심지어 아이템까지 복사해 내는 고유 스킬 【천면 복사】를 이용해, 홍수철은 이제껏 수많은 사람으로 변해 왔다.
아울러 그때마다 상대를 죽이고, 그 신분을 이용했다.
“어떤 새끼 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홍수철도 요즘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경로로, 그의 정보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름, 본래의 얼굴, 클래스와 스킬.
심지어 습관과 평소의 행동 양상은 물론, 이제껏 몸을 뺏은 대상까지 모두.
덕분에 협회가 홍수철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정보 흘린 새끼, 내가 꼭 찾아서 죽인다. 씨발.”
위기의 홍수철에게 손을 내민 자가 있었다.
모 머더러 집단의 수장.
얼마 전 그가 찾아와 한 가지 일을 의뢰했다.
상왕련주의 아들 정현수의 몸을 빼앗으라고.
힘을 합쳐 상왕련을 집어삼키자고.
“그래도 상왕련주 아들놈만 작업하고 나면 편히 살길이 열릴 거야.”
홍수철은 의뢰를 수락했다.
나날이 압박감을 느끼던 차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상왕련주로 살아가는 것도 꽤 괜찮은 일 아니겠어?”
흐흐흐 하고 비릿한 웃음을 흘린 홍수철이 창을 내뻗었다.
푸콱-
달려들던 머슬 나이트의 얼굴에 구멍이 뚫렸다.
“제길, 이딴 거 몇 마리 잡았다고 삭신이 쑤시는구먼. 퉷-”
홍수철이 짜증 난다는 듯 침을 뱉었다.
그의 고유 스킬 【천면 복사】에도 단점이 있었다.
“저렙을 복사하면, 저렙의 힘밖에 못 쓰는 게 문제라니까.”
그 외에, 한 번이라도 착용한 등급까지만 복사할 수 있다는 제약도 있다.
하지만 홍수철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희귀 등급까진 착용해 봤으니, 아이템 복사야 신경 쓸 것도 없지.”
영웅 등급 아이템은 착용은 고사하고 본 적도 없다.
“두 놈이 설마 영웅 등급을 가지고 있으려고. 흐흐.”
떨거지의 갑옷이 눈에 밟혔지만, 홍수철은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존재조차 불확실한 영웅 등급이 그런 놈에게 있을 리 없다.
“빨리 끝내고 나가서 기다리자.”
기다리다가 떨거지를 죽이고 정현수를 복사한다. 그다음은 상왕련주다.
홍수철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머슬 나이트를 상대했다.
푸콱-
18레벨짜리 하찮은 몸이지만, 홍수철의 기량이 더해지니 위력이 달랐다.
단 한 방.
창격 한 번에 머슬 나이트가 얼굴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다.
.
.
.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홍수철은 회랑의 끝에 다다랐다.
“이제 나가 보실까.”
모든 몬스터를 처치했기에 회랑 끝 문의 자물쇠가 풀려 있었다.
홍수철이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어떤 놈이 먼저 나오려나. 혹시 그 떨거지가 이 채성일이란 놈보다 몸뚱이가 좋으려나?”
그럼 정현수로 변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옮겨 탈까?
상상의 나래를 펴며 다음 층으로 들어서던 홍수철.
움찔.
그가 몸을 굳히며 멈춰 섰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 어떻게 벌써 나와 있는 거지?”
당황하여 묻는 홍수철에게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몬스터 때려잡고 나왔지. 당연한 걸 묻네. 근데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홍수철은 당황이 가시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눈알을 열심히 굴려 상대를 파악하고자 애쓸 뿐.
그런 홍수철에게 수호가 물었다.
“너, 누구냐?”
24화 누구냐, 너(2)
쿵.
마지막 머슬 나이트가 쓰러졌다.
수호는 실험한 결과를 되새겼다.
발룡이가 몬스터를 잡으면 수호에게 경험치가 들어온다.
수호가 잡아도 발룡이의 마력이 증가한다.
“진짜 소환수라도 되는 건가?”
드물게 소환수를 부리는 헌터가 있는데, 그들의 경우와 비슷했다.
『감히 소환수라니! 본좌에게 한 번만 더 그딴 표현을 썼다가는!』
“알았다. 안 할게. 어쨌든 몬스터를 잡으면 서로 이득이란 건 알겠지?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전투에 협조해.”
내가 원할 때 한해서.
수호가 첨언하며 말을 끝맺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면 고려해 보겠다.』
“잘만 움직여 주면 섭섭지 않게 대가를 치르지.”
『정말이냐?』
“그새 치킨을 10마리나 먹어 치워 놓고, 그걸 묻고 있냐?”
『인정하지. 네놈은 제법 신의가 있는 편이다.』
‘발룡킬라’ 건으로 약속한 치킨을 성실히 지불한 덕일까.
발룡이의 태도가 고분고분하다.
내친김에 수호가 쐐기를 박았다.
“알아서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엔 치킨보다 맛있는 것도 많거든.”
『뭐! 그게 정말이냐?』
수호는 대답하는 대신 회랑 끝 문을 열고 나섰다. 어두침침한 공동이 나왔다.
“아무도 없네.”
예상대로였다.
그 어떤 헌터도 20렙 미만이라면 자신보다 빠를 리 없다.
수호는 그렇게 확신했다.
‘올 때까지 좀 쉬고 있을까.’
세 갈래 길이 모두 클리어되어야 다음 통로가 열린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다시 투명화하고 있겠다.』
“그래.”
좀 전에 던진 ‘미끼’ 덕인지, 웬일로 발룡이가 알아서 움직였다.
수호는 피식 웃으며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끼이익-
한동안 쉬고 있으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끝내고 나오는군. 누굴까?’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문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어떤 놈이 먼저 나오려나. 혹시 그 떨거지가 이 채성일이란 놈보다 몸뚱이가 좋으려나?”
저게 무슨 말이지?
‘본인이 채성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직감한 수호는 문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곧 문 뒤에서 채성일이 나타났다.
그가 수호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너, 어떻게 벌써 나와 있는 거지?”
불가사의한 일이라도 본 듯한 표정.
수호의 의심이 깊어졌다.
“몬스터 때려잡고 나왔지. 당연한 걸 묻네. 근데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수호는 상대를 떠보기로 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 누구냐?”
“무슨 말이지?”
“너 채성일 아니잖아.”
“……!”
채성일.
아니, 머더러 홍수철이 몸을 움찔했다.
‘씨X, 들켰나?’
어쩌다가?
방금 떠든 걸 들은 건가?
고민에 휩싸였던 홍수철은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뭐, 들킨다고 내가 당황할 필요 있나.’
어차피 다 죽일 건데.
내가 훨씬 강한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몸뚱이가 허접해도, 저런 애송이쯤이야 일도 아니지.’
잠깐.
그래도 기왕이면 완벽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
‘그래, 차라리 바로 저놈 몸을 복사하자.’
같은 몸과 장비면 질려야 질 수가 없다.
그러니 복사부터 해 놓고 시작하자.
홍수철은 생각 끝에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흐흐흐, 내가 채성일이 아닌 건 맞아. 젊은 친구가 눈썰미 있네. 근데 그게 뭐 어떻다고?”
홍수철이 비릿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호의 귓가에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상대의 몸을 똑같이 구현해 내는 기술이다. 장비도 복사하는군.』
“뭐?”
수호가 깜짝 놀라 홍수철을 응시했다.
홍수철의 스킬이 금세 완성되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수호의 것과 똑같아져 있었다. 심지어 손에는 솥뚜껑과 화염 포마검이 들려 있었다.
『기술 수준이 형편없군. 그 탓에 네가 입은 갑옷은 구현하지 못했어.』
수호는 발룡이의 설명을 들으며 화염 포마검을 뽑아 들었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이 일천한 수호로서는 놈의 정체를 유추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으니.
‘자기 정체를 노출한 이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살인멸구.
놈의 행동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스릉-
수호가 싸움에 대비해 칼을 뽑아 들었다.
홍수철의 입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크하하하- 이거 굉장한데? 내가 길 가다가 보물을 줍는구나!”
홍수철은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복사했을 뿐인데, 상대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감각이 미친 듯이 예민하잖아! 육감이라도 생긴 거야?’
정현수를 잡아먹는 건 재고해 봐야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몸은 대단했다.
“고맙다. 이런 선물을 가져다 바쳤으니, 고통스럽지는 않게 보내 주마.”
홍수철이 비릿하게 웃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수호가 왼손으로 목덜미를 훑었다.
차르르르-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가 수호의 머리를 감쌌다.
홍수철의 눈이 동그래졌다.
“호오, 재밌는 갑옷인걸?”
말과 함께 홍수철의 손도 목덜미로 향했다.
한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게 어떻게……!”
홍수철은 경악했다.
복사되었을 줄 알았던 상대방의 갑옷이 구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뭐가 잘 안되나?”
수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어째서 갑옷이 복사되지 않은 거지? 설마 그거?”
탓!
수호가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상대는 이미 살의를 드러낸 적.
굳이 놀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다.
화염 포마검이 홍수철의 가슴을 찔러갔다.
“씨X! 이 애송이 새끼가!”
홍수철이 솥뚜껑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는 놀란 만큼이나 분노한 상태였다.
‘1성 던전이나 전전하는 새끼가, 감히 먼저 칼을 뽑아?’
수백 명을 학살한 머더러.
20레벨도 안 된 수호가 당당하게 덤벼드는 모습은, 그런 홍수철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건방지게 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홍수철의 살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 순간, 수호의 칼과 홍수철의 방패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강력한 폭음이 공동을 울렸다.
홍수철의 경악한 음성이 뒤이어 터져 나왔다.
“이런 젠장! 뭔 힘이 이렇게 차이 나!”
홍수철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몇 미터나 튕겨 난 상태였다.
얼빠진 홍수철에게 수호가 재차 쇄도했다.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어.’
적은 수호보다 경험 많고 노련한 살인자다.
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몰아쳐야 한다.
쾅-!
다시 한번 둘의 칼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쉽지 않아.’
수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상대의 칼이 절묘한 각도로 꺾이며, 수호가 내리친 힘을 흘렸기 때문.
게다가 홍수철의 솥뚜껑이 칼날처럼 횡으로 휘둘러왔다.
제자리에서는 피할 수 없는 궤적.
수호는 어쩔 수 없이 훌쩍 물러났다.
잡았던 승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애송이 새끼, 죽이고 갑옷도 빼앗아 주마. 크크크.”
선공을 막아 낸 홍수철이 비릿하게 뇌까렸다.
수호의 갑옷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슬슬 깨달은 것이다.
“해 보든가.”
수호가 담담한 말투로 놈을 도발했다.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홍수철이 쇄도해 왔다.
쾅! 쾅! 콰콰쾅-!
검과 방패.
똑같은 무구가 쉴 새 없이 부딪친다.
날 선 감각 스탯이 서로의 목숨을 끊을 틈을 물색한다.
서로 간에 부상은 없다.
하나 유불리는 명확했다.
‘밀린다.’
수호는 적의 칼솜씨가 자신보다 윗줄임을 실감했다.
[적회색 수호자]에 붙은 우월한 스탯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크흐흐흐-”
광소와 함께 홍수철이 계속 칼을 휘둘렀다.
수호는 모든 신경을 쏟아 놈의 칼을 막고 피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수호가 멈춰 섰다.
등이 공동 벽에 닿아 있었다.
“이제 더 물러날 곳도 없네? 크크크, 죽여 주마.”
홍수철이 다 잡은 사냥감을 보듯 도발했다.
“해 보라니까.”
수호가 차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홍수철에게는 그 모습이 죽을 자리도 모르고 까부는 허세로 보였다.
“해 달라면 해 줘야지.”
홍수철이 와락 달려들었다.
놈의 칼이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수호의 방패를 우회한다.
목표는 수호의 심장.
수호의 눈빛이 빛난 것은 그때였다.
‘근력 폭발!’
적회색 수호자에 내장된 【근력 폭발】이 시전됐다.
순간적으로 근력이 2배로 증가했다.
온몸에 활화산 같은 기운이 들끓었다.
홍수철의 칼이 그때쯤 수호의 가슴 앞에 도달했다.
수호는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놈의 칼을 친다!’
단번에 홍수철의 목을 노리지는 않았다.
근력의 우위를 살리려면 어디든 부딪쳐야 한다.
콰아아앙-!
칼과 칼이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홍수철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강한 충격에 발이 허공에 뜬 채였다.
‘끝내야 해!’
스킬 지속 시간 10초.
그 안에 끝낸다.
수호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콰직- 지면을 부서트리며 수호가 전진했다.
홍수철은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으려 노력 중이었다.
한데 그때, 무언가 그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씨X, 뭐야!”
『크큭.』
기괴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 건 덤.
그 탓에 홍수철은 몸을 추스를 여유를 잃어버렸다.
이제 회피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남은 건 오직 방어뿐.
화르르르-
수호가 화염 강격을 발동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아앙-!
압도적인 힘의 격차.
홍수철의 방패가 대번에 찌그러졌다.
“큭, 젠장!”
놈의 욕설을 들으며, 수호는 검을 재차 내리찍었다.
‘부서져라!’
전력이 담긴 일격이 홍수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앙-!
이번에도 홍수철은 수호의 참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끄악- 내 다리! 씨X!”
놈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강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 다리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마무리한다!’
결심한 수호가 칼을 들어 올렸다.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여 힘을 한곳으로 모았다.
세포 한 올에 담긴 힘까지 응집되었다 싶은 순간.
‘갈라져라!’
수호가 칼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앙-!
방패도, 칼도, 심지어 몸뚱이마저도.
홍수철의 모든 것이 단박에 찢어져 나갔다.
“괴… 괴물… 말… 도 안… 되는… 후회… 할…….”
서걱-
수호는 칼을 한 번 더 휘둘러, 마지막 헛소리를 내뱉는 홍수철의 수급을 베어 버렸다.
우두둑.
숨이 완전히 끊기는 순간, 홍수철의 사체에 변화가 생겼다.
『기술이 풀리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군.』
수호의 것과 똑같던 솥뚜껑과 칼도 사라졌다.
그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던 수호의 입이 열렸다.
“이놈, 도대체 뭐지?”
* * *
“으악- 혀, 형!”
정현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단계를 깨고 나왔을 때 정현수가 본 모습은…….
“현수 왔냐.”
“형! 그, 그 시체는 뭐예요?”
수호가 쪼그리고 앉아 웬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있어서 살펴보고 있었지.”
“이상한 일요?”
“응, 이게 채성일이야.”
수호가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현수는 수급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채성일 헌터요?”
“얼굴이 다르지? 갑자기 공격하기에 싸웠는데, 죽이니까 이렇게 바뀌더라.”
수호는 처음 공동에 들어왔을 때부터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놀람이 가라앉은 정현수의 입이 열렸다.
“이놈 설마, 도플갱어?”
“도플갱어? 몬스터?”
언젠가 소설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린 수호가 되물었다.
“아니요, 머더러요. 그중에서 악질적이고 유명한 놈의 별명이에요. 남의 몸을 복사해서 원래 몸 주인을 죽이고 그 사람으로 행세하는… 아!”
정현수의 말이 끊겼다.
뭔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호도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나야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이놈이 복사하려던 건 아마 너 같다.”
“예, 그런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놈 파티에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던 것도? 이 개자식이!”
정현수가 이를 악물고 분노했다.
“잡았으니 좋게 생각해. 안 당한 게 어디야. 싸워 보니까 진짜 보통이 아니더라.”
“네, 형. 고마워요. 형 아니었으면, 저 엄청 위험했을 거예요.”
“그래.”
“괜히 저 때문에 형까지 이런 일 당하신 것 같아 죄송하고요.”
말을 마친 정현수가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잘 해결됐잖아.”
수호는 정현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데 정현수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이놈 어떻게 잡았어요? 잘 싸우기로 소문난 놈인데.”
“어쩌다 보니?”
“하긴 잘 싸우기로 따지면 형이야말로 사기 캐릭이니까.”
납득하는 정현수에게 수호가 뒷일을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계속 가?”
“던전은 진행해야죠. 다음 단계 문은 열렸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형, 돈 좀 버시겠는데요. 협회에서 이놈한테 현상금 걸었거든요.”
“현상금? 얼마나?”
“제보만 해도 3억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잡으면 얼마랬더라.”
이것저것 혜택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현수가 기억을 되짚는 사이.
수호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을 뇌까렸다.
“도플갱어가 아니라, 황금 고블린이었네.”
25화 누구냐, 너(3)
“드워프들 식량도 넣어 줬고.”
수호가 붙박이장 안에서 수트케이스를 꺼냈다.
한 벌뿐인 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좀 귀찮긴 하지만, 돈이 6억이니까 다녀와야겠지?”
도플갱어를 잡은 현상금은 6억이었다.
헌터로서 매년 받아야 하는 소양 교육의 면제권도 포함되어 있었고.
“표창장이니 뭐니, 번거롭지만 않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다만,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표창장을 준단다. 꼭 표창을 수령해야 혜택도 받을 수 있다니, 그 점이 번거로울 뿐.
“다녀올 테니까, 너는 집 잘 지키고 있어.”
준비를 마친 수호가 발룡이에게 말했다.
『감히 집을 지키라니, 본좌를 뭘로 보고!』
“돌아와서 치킨 시켜 줄 테니, 조용히 지내고 있어. 쓸데없이 드워프 괴롭혔다가는 다녀와서…….”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빗자루 손잡이를 슬쩍 꺼냈다.
『난쟁이 괴롭힐 일이 뭐가 있다고. 어차피 이제 이곳이 본좌의 영역인 것을.』
아, 그러세요?
수호는 피식 웃으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타룽가 님, 달콩 님, 다녀올게요. 혹시 발룡이가 괴롭히면 이따 저한테 말씀하시고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거인님.”
“잘 다녀오십시오.”
드워프와 인사까지 마친 수호가 집을 나섰다.
저 멀리 협회 건물이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헌터 협회 건물 최상층.
단단한 인상의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 백무진이었다.
“향이 좋군.”
찻잔을 쥔 백무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협회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맞은편에 앉은 장년의 남자가 물었다.
신성현.
공식적으로는 협회장의 비서이고, 비공식적으로는 백무진의 오른팔.
그리고 80레벨에 이른 헌터이기도 했다.
“그래, 그나마 약간의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는 날 아닌가?”
“또 애송이들을 시험하시려고요?”
신성현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쩌겠나. 믿을 사람이 없으니 젊은 친구들 중에서라도 찾아볼 수밖에.”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협회장님 눈에 찬 사람이라고는…….”
신성현이 말끝을 흐렸다.
백무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강민제밖에 없지.”
“…….”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 생각이네. 섣불리 건드려서, 자칫 ‘그쪽’에서 접근할 빌미를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일세.”
“그것도 그만한 인재가 있을 때나 말이지요.”
“있을 걸세. 꼭 오늘이 아니라도.”
“…….”
“오래 살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는데, 상황이 최악이라도 꼭 망하라는 법은 없다는 걸세. 어떻게든 최소한의 가능성은 생기더란 말이네. 내가 여태 협회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 아닌가.”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투정을 부렸네요. 협회장님 내키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맙네.”
백무진의 진심이 담긴 감사에 멋쩍은 표정을 짓던 신성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내려가시죠.”
“그래, 이번엔 도플갱어 때려잡았다는 친구들도 온다지? 얼마나 대단한 새싹인지 한번 볼까?”
백무진이 찻잔에 담긴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협회 건물 입구.
정현수가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형.”
“일찍 왔네. 기다렸어?”
수호는 정현수와 미리 입을 맞췄다.
두 명이 힘을 합쳐 도플갱어를 잡았다고 하기로.
‘나 혼자 처리했다고 하기엔 도플갱어가 너무 강했어.’
클래스 특성상 일대일에 극단적으로 강한 도플갱어다.
실제로도 놈이 [적회색 수호자]까지 복사해 냈다면, 수호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자칫 내 장비가 특별해서 이겼다는 쪽으로 관심이 쏠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의심의 싹은 미리 잘라 두는 편이 좋을 터.
‘현수와 힘을 합쳐 잡았다고 하는 편이 훨씬 부드럽게 납득이 갈 테니까.’
그래서 수호는 도플갱어를 잡은 공을 정현수와 나누기로 했다.
상대가 2명이라면 도플갱어의 복사 스킬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현상금은 받으면 바로 전해 드릴게요.”
“그래, 들어가자.”
수호가 표창식이 진행되는 회의실로 앞장섰다.
“사람 많네.”
자리에 앉은 수호가 정현수에게 말했다.
“좋은 일한 헌터들 불러서 주기적으로 표창하잖아요.”
“그냥 현상금이랑 소양 교육 면제권이나 주면 좋을 텐데.”
“헌터들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걸 선전하려고 벌이는 일이라, 그냥은 절대로 안 줄 걸요.”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플갱어를 잡은 것이 큰일이긴 하지만, 꼭 표창까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나쁜 놈은 많고, 머더러도 많고, 큰일은 늘 일어나니까.
“협회가 헌터들 인식 개선에 열심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내가 거기 한몫하는 날이 오네.”
“형은 굳이 이런 거 안 해도 조금만 지나면 큰일 하실걸요.”
수호는 찬양을 늘어놓는 정현수를 일별하고는 피식 웃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믿음을 주는 건지.
나중에 원하는 게 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때 되면 말하겠지.’
최소한 딴마음 품고, 나쁜 수작 부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그때 회의실 앞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신사가 들어섰다.
“저 사람이 협회장…….”
“네, 저분이 백무진 협회장님이세요.”
한국 최초 4성 던전 공략자이자, 80레벨 도달자.
정현수가 덧붙인 설명을 들으며 수호는 백무진을 살폈다.
편안한 표정,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한데 수호의 감각 스탯은 다른 느낌을 전해 왔다.
‘별명이 검왕이라더니.’
한 자루 정련된 검처럼.
베일 듯한 예기가 수호의 감각을 자극했다.
‘기세가 장난이 아니구만.’
잠시 후 표창이 진행되었다.
다른 헌터들의 순서가 지나고, 수호의 차례가 왔다.
“정현수 헌터, 원수호 헌터.”
사회자의 호명에 둘은 단상에 올랐다.
먼저 표창을 받은 것은 정현수였다.
그는 백무진에게 표창장을 받고, 웃으며 악수를 한 뒤 물러섰다.
이제 수호의 차례.
한데 수호는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젠장. 이게 도대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감각 스탯이 백무진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살기?’
백무진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 발 더 내디디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감각 스탯이 절규하듯 보내 오는 신호 때문에 수호는 발을 떼지 못했다.
‘현수는 못 느꼈나?’
눈알만 살짝 돌려 정현수를 바라봤다.
정현수는 굳어 있는 수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수호 헌터, 표창장을 받아 주세요.”
사회자가 수호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때.
저벅.
백무진이 표창장을 든 채, 수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빠득. 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왼발이 발가락 한 마디만큼 뒤로 빠진다.
오른쪽 어깨를 내밀어 심장을 숨기며, 언제든 차원 보따리에서 솥뚜껑을 꺼낼 준비를 했다.
‘피하기만 해서는 안 돼.’
오른손은 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으로 내려간다.
찰나 간에 수호의 전투태세가 완성됐다.
“도플갱어를 잡았다기에 늑대를 기대했더니, 호랑이 새끼가 왔군.”
백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주변에 가득하던 기세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하아-”
수호의 팽팽하던 폐가 숨을 토해 냈다.
“받게나.”
수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백무진을 쳐다봤다.
좀 전의 기세는 꿈인 것처럼.
백무진은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할 일이지. 악명 높은 머더러를 잡아 줬으니 말일세.”
수호와 정현수가 단상에서 내려갔다.
그 뒤로도 몇 명의 헌터가 표창을 받았다.
“형,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수호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다.
‘협회장……. 진짜 괴물이구만.’
실력을 시험한 것 같은데.
왜? 도플갱어를 잡아서?
그러기엔 나만 특정해서 시험한 건 또 아닌 것 같고…….
수호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원수호 헌터,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호는 그를 알아봤다.
‘협회장 옆에 따라다니던 사람이야.’
비서쯤 되려나.
그럼 협회장이 만나자는 거겠지?
생각을 마친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죠.”
협회장의 기운에 반응했을 때부터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 * *
쪼르륵-
찻잔에 찻물이 들어찬다.
수호는 찻잔 대신 차를 따르는 손을 응시했다.
저 손이 공격해 오면 피할 수 있을까.
특별한 기세는 느껴지지 않지만, 수호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에게 해코지하려고 부른 건 아니거든.”
백무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용건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껄껄, 젊어서 그런가, 성격이 급하군. 나도 그맘때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지.”
“…….”
“아까는 미안했네. 젊은 친구들만 보면 시험해 보고 싶어서 말일세. 내 오랜 습관이네만, 막상 그걸 눈치채는 젊은이는 거의 없다네. 그러다 보니 자제를 못하게 되었지 뭔가.”
그 정도 기세가 습관이라고?
수호가 어이없는 마음을 다잡으며 백무진에게 되물었다.
“사과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 참에 줄 것도 있고.”
말을 마친 백무진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종잇조각이었다.
“……?”
“받게. 좋은 걸세.”
수호가 흘끔 종잇조각을 살폈다.
“나이를 먹어 그런지, 팔을 오래 들고 있을 기력이 없어. 어서 받게나.”
태도를 보니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다.
수호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종잇조각을 확인한 수호의 눈이 커졌다.
[블링크 스크롤]
- 찢으면 반경 100미터 범위 내, 무작위의 위치로 공간 이동을 한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소모 아이템
“이걸 왜?”
탈출용 공간 이동 스크롤이다.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이라,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하다.
최상위 레벨 헌터들이나 가지고 다닐 만한 귀한 것이었다.
“사과라고 생각해도 좋고, 자네와 친해지고 싶은 선배의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수호는 스크롤을 챙기는 대신 말했다.
“그냥 받기에는 너무 과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만.”
“몇 년 전에 내 시험을 통과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와는 썩 좋은 사이가 되지 못했거든. 자네와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네. 그러니 받아 주게. 진심으로 말하는데, 다른 의도는 없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수호가 스크롤을 주머니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
“이 자리가 그리도 불편한가? 껄껄. 접근 방식이 서툴렀으니, 내 탓을 할 수밖에 없구먼.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말도 없이 시험한 건 다시 한번 사과함세.”
블링크 스크롤도 받았으니, 굳이 뒤끝을 남기지는 않기로 할까.
“괜찮습니다. 스크롤은 잘 쓰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수호가 이내 방을 빠져 나갔다.
“블링크 스크롤까지 줄 가치가 있었습니까?”
그 모습을 확인한 신성현이 백무진에게 물었다.
“예전에 강민제는 내 간격에 들어와서야 긴장하기 시작했지. 한데…….”
백무진이 남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딱 한 명, 저 친구만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더군.”
“그냥 호기심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단상에 올라올 때부터 표창장을 받아 들 때까지, 단 한 번도 내게 정면으로 서지 않았어. 늘 왼발을 살짝 뒤로 빼고 있었지.”
실력 있는 헌터 신성현은 그게 의미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심장을 보호하고, 반격할 준비를 한 거군요.”
“표창장을 건넬 때도, 내 간격 끄트머리에 서서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안 하더군. 껄껄껄, 어떤가? 이래도 블링크 스크롤이 아깝나?”
백무진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맴돌았다.
* * *
‘갑자기 협회장이라니.’
협회장과 따로 자리를 가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뜻밖의 선물까지 받았다.
‘뭐, 손해 본 건 없으니까.’
당황스러운 상황.
하나 이득은 크고 손해는 없으니…….
‘고민해 봐야 소용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만두자.’
협회를 나서 집으로 걷는 동안 수호는 마음을 정리했다.
머잖아 집 앞에 도착했다.
수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정보다 늦었구나. 본좌는 몹시 시장하다. 약속한 치킨을 요구하는 바이다.』
들어서자마자 날아드는 발룡이를 보니, 복잡한 심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로 먹을래? 간장? 양념?”
『…웬일로 본좌의 청에 순순히 응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본좌가 마다할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본좌는 갈릭! 갈릭으로 하겠다!』
치킨 전단지 한번 보여 줬더니, 이제 메뉴도 곧잘 정하는구만.
“기다려 봐, 옷만 갈아입고 시켜 줄 테니.”
수호가 입고 갔던 정장을 벗었다.
그리고 방 한쪽 벽에 설치된 붙박이장으로 다가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