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3

쓰러지는 칼날 거미 여왕의 몸에서 수호가 뛰어내렸다.
[보스 몬스터 칼날 여왕 거미를 쓰러트렸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
.
.
“형, 저번에 드신 스킬 룬, 그거 맞죠?”
정현수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일반 몬스터에게는 굳이 쓸 일이 없어, 【화염 강격】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응, 제법 쓸 만하네.”
“제법이요? 한방에 다리 한 짝씩 뚝뚝 떨어지던데. 저거 5인 파티로도 기본 30분은 각오하고 덤벼야 되는 놈인데, 하… 하하.”
“그런가?”
“예, 여기가 저번보다 난이도가 높다니까요. 뭐, 형한테는 별 차이도 없어 보이지만.”
수호는 씩 웃고 말았다.
근데 정현수가 죽은 칼날 여왕 거미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저기 또 뭐 나왔어요, 형!”
수호와 정현수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팔찌?”
잿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둥근 링.
주워드니 예상대로 팔찌가 맞았다.
[거미줄 팔찌]
- 칼날 거미 여왕의 거미줄을 담은 팔찌. 마력을 주입하면 거미줄을 발사한다.
- 잔여 사용 횟수 : 5/5
- 아이템 등급 : 일반
- 【거미줄 사출】
- 내구도 30
‘쓸 만하긴 한데, 사용 횟수 제한이 있네.’
좀 아쉽지만, 괜찮다.
애초에 1성 던전에서 대단한 걸 얻기는 힘든 법이니.
“형, 운 엄청 좋으시네요. 이거 잘 안 나오는 건데.”
그러고 보니, 원거리 클래스인 정현수에게도 쓸모 있는 물건이다.
“갖고 싶어?”
“아뇨, 무슨 그런 말씀을! 계약서상에 아이템은 다 형 거라고 적혀 있거든요. 저 고소미 먹이실 생각 아니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래.”
볼수록 괜찮은 녀석이다.
“필요한 거 나오면 제가 제값 치르고 살 테니, 그때는 저한테 팔아만 주세요.”
“알았어. 나가자 그만.”
수호가 정현수의 어깨를 툭 쳐주고 걸었다.
“네, 형!”
정현수가 그 뒤를 따랐다.
* * *
“슬슬 점심 먹으러 가야겠네.”
황병수가 휴대폰을 들었다.
팀원을 불러 자리를 맡기려는 생각이었다.
한데 저편 게이트가 일렁였다.
“어? 벌써? 중도 포기했나 보네. 그러면 그렇지.”
차라리 잘됐다.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황병수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관리하며 게이트로 달려갔다.
“도련님! 아이고,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황 팀장님. 저흰 멀쩡해요. 수거팀 불러주세요.”
정현수가 대답했다.
“예, 아까부터 대기 중입니다. 얼른 호출하겠습니다. 근데 어디까지 갔다 돌아오셨습니까? 그걸 말씀해 주셔야 수거팀이 맞춰서 준비를 하는데.”
“돌아오다뇨?”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신 거 아니세요?”
“보스 잡고 나온 건데요.”
황병수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네? 입장하신 지 4시간도 안 지났는데요?”
“보스까지 말끔히 처리했으니 그렇게 아시고, 수거팀 부르세요. 형, 가죠. 점심 같이 드세요.”
정현수가 수호를 이끌고 사라졌다.
황병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가 그랬잖아. 그렇게 오래 안 걸릴 수도 있다고.”
정동진이 소란을 듣고 다가오며 말했다.
황병수가 멍하니 그에게 되물었다.
“현수 도련님이 불세출의 천재였나?”
“그러면 뭐 하러 길드원도 아닌 사람을 달고 다니겠어.”
“설마 그럼 저 솥뚜껑이? 정말?”
정동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직접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동진이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 저분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 이로울 거야. 길드원 아니라고 괄시하지도 말고.”
정동진이 멀어지는 수호를 눈짓하며 말했다.
황병수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상하로 왕복했다.
* * *
수호는 정현수와 식사를 한 뒤, 창고형 마트에 들렀다.
드워프 수가 급증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라면을 사다 날라야 했다.
‘슬슬 마트에서 사는 것도 한계야.’
대량의 라면을 계속 구매하다 보니, 마트에서도 좀 이상하게 보는 눈치.
‘사는 것도 문제지만, 집 안으로 옮기는 것도 큰일이고.’
라면 박스가 너무 많아서 집 안에 들여놓기가 어렵다.
이사라도 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집 앞에 도착했다. 수호는 가게 앞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잘들 지내고 있으려나?’
귀가했으니 드워프 상태 확인이 급선무.
수호가 뒤편 방으로 향했다.
서둘러 냉장고 앞에 다가갔을 때.
[긴급 임무 발생!]
[긴급 임무 발생!]
[긴급 임무 발생!]
메시지가 떠올랐다.
14화 야생의 드래곤이 나타났다가… (2)
뚱땅뚱땅-
서걱서걱-
활기찬 드워프 마을.
“으아, 지겨운 톱질.”
“이놈 볼드야, 그러다 또 톱 부서트릴 생각이냐!”
투정 부리는 볼드에게 타룽가가 호통을 쳤다.
볼드가 고개를 타룽가에게 홱 돌렸다.
“족장님! 이제 시간 됐잖아요.”
“무슨 시간?”
“저녁 먹을 시간이요!”
“아직 안 됐다.”
“저는 요리 담당이니까, 미리 준비해야죠!”
볼드가 라면을 잘 끓이긴 한다.
타룽가가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대답했다.
“꾀부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군. 가서 맛있게 끓여 보아라. 볼드가 식사를 준비한다. 다들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밥 먹자!”
볼드에게 대답한 타룽가가 다른 드워프들이 듣도록 크게 소리쳤다.
“라면! 푸라면!”
“난 오동통통 쫄깃쫄깃 오소리!”
“오소리는 다 좋은데, 오크 가죽 잘라 놓은 것처럼 생긴 네모난 조각이 들었어. 그건 별로야.”
“바보야, 그건 국물 우려내는 용도라고.”
“아닌데, 그거 먹는 건데?”
“그걸 왜 먹어, 맛없는데.”
“맛없다고? 난 왜 맛있지?”
“그거 먹는 거 아니라니까.”
드워프 마을이 떠들썩했다.
타룽가는 그 모습이 기꺼웠다.
발랑카 산맥은 금지(禁地).
이주를 결정하고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부족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마을 건설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
부족민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 것은 모두 새롭게 얻은 귀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게 다 거인님을 만난 덕분이지.’
부디 이 평화가 깨어지지 않기를.
타룽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볼드는 개울가로 향했다.
손에 커다란 솥이 들렸다.
라면 끓일 물을 뜨기 위함이다.
“후루루짭짭, 후루루짭짭 맛 좋은 라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솥을 개울에 담갔을 때였다.
“응? 왜 갑자기 어두워졌지?”
볼드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직 해 질 녘은 멀었는데…….
볼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다.
“으, 으아악-”
깜짝 놀란 볼드가 개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드드드드 드래곤이다아-!”
그리고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 위.
거대한 검은색 비행 물체가 날개로 해를 가리고 있었다.
그때쯤 다른 드워프들도 드래곤을 발견했다.
“드, 드래곤이다!”
“발랑카르다! 발랑카르가 나타났다!”
“으악-! 광룡이다. 도도, 도망쳐!”
혼비백산.
드워프들이 난리가 났다.
그런 그들의 머릿속으로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하찮은 난쟁이들이 감히 누구의 허락을 받고 본좌의 땅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냐.』
목소리에 담긴 기운이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드워프들이 얼음이라도 된 듯 굳었다.
『본좌가 이미 한 번 네놈들에게 경고를 했음에도 이 땅을 떠나지 않음은 물론, 땅을 파고 나무를 베고 있구나.』
부르르.
볼드는 몸이 떨렸다.
도망쳐야 하는데.
하다못해 아이들이라도 피신시켜야 하는데.
드래곤의 기운에 노출된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경고를 무시했으니, 대가를 치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마. 받아 보거라. 발랑카 산맥의 지배자, 검은 어둠, 심연의 흑염룡, 영혼을 불사르는 업화의 주인 이 발랑카르 폰 베르 카이져 마누트 발두르 발칸의 분노를!』
드래곤이 노성을 내지르더니 입을 벌렸다.
드래곤의 주변에 거대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볼드는 고개도 들지 못했지만, 깨달았다.
‘브레스를 쏘려는 거야.’
안 돼.
마물을 피해 겨우 도착한 곳인데.
겨우 부족민들의 웃음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신! 신은 어디에 있지?
신탁을 내려 이곳으로 향하게 했으면, 우리를 보살펴 줘야지.
도와줘, 도와줘, 도와주세요!
“거인님!”
볼드는 문득 떠오르는 이름을 힘껏 외쳤다.
오크 주술사를 때려잡던 때처럼.
다시 한번 거대한 손이 나타나 마을을 구원해 주기를 염원하며.
불쑥.
그 순간, 허공을 찢으며 거대한 장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차원 임무 【광룡 침공】을 획득하셨습니다.]
[서둘러 임무 내용을 확인해 주십시오!]
“이런 젠장!”
임무 내용을 확인할 틈은 없다.
수호는 냉동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소형견 크기의 시커먼 무언가가 드워프 마을 상공에 떠 있다.
저놈이 광룡 발랑카르가 분명했다.
고오오오오-
발랑카르의 입에서 마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냉동실 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기운.
‘브레스다!’
저대로 두면 드워프 마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터.
‘막아야 해!’
드래곤의 입에서 한 줄기 새까만 불길이 응축된다.
수호는 장도리를 뽑아 드래곤에게 뻗었다.
콰르르르르르르-
브레스가 뿜어진 것은 그때였다.
‘늦었다.’
브레스를 쏘기 전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실패했다.
차선책.
브레스가 드워프 마을을 덮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수호가 장도리를 드래곤 입 앞까지 쭉 들이밀었다.
브레스가 장도리에 부딪혀 휘어지더니 마을을 빗겨가 산기슭을 녹였다.
드래곤은 흠칫 놀랐지만, 브레스를 멈추지는 않았다.
‘장도리가 녹고 있어!’
브레스는 강했다.
장도리 대가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수호는 자루만 남은 장도리를 버렸다.
‘버텨라 제발!’
대신 손바닥을 드래곤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치이익-
손바닥에서 연기가 솟는다.
작열통이 느껴졌다.
‘크윽- 그래도…….’
하지만 구멍이 뚫리거나, 손이 녹아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버틸 수 있어!’
50을 넘어선 【화염 저항】 덕분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브레스가 끝났다.
드래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어떻게 내 암흑의 숨결을 막아 낼 수 있는 거지?』
중얼거리던 드래곤은 이내 알았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알겠다! 네놈은 고대에 세상을 멸망시키려다, 신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사라졌다는 악신惡神이 분명하구나! 오늘 위대한 흑염룡, 심연의 어둠 발랑카르 님이 네놈을 단죄하겠다!』
“이 미친!”
뭔 개소리야.
괜히 광룡이 아니구나.
수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드래곤은 전투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압해야 한다.
결정한 수호가 손을 휘둘렀다.
파라락-
날개가 팔락이더니, 드래곤이 수호의 손을 피했다.
‘빠르잖아!’
수호가 거듭 손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드래곤은 수호의 손을 잘도 피했다. 감각 스탯의 뒷받침을 받는 수호의 정교한 손짓도 드래곤을 잡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고오오-
드래곤의 입에서 또다시 강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젠장, 또 쏜다.’
수호가 손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기세에 놀란 드래곤이 급히 움직이느라 브레스가 취소됐다.
하지만 손은 번번이 빗나가기만 했다.
‘잡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체급 차이가 있으니, 손에만 들어오면 패대기라도 칠 수 있을 터.
한데 잡을 수가 없다.
그때 문득 손목에 착용한 팔찌가 수호의 눈에 띄었다.
‘거미줄 팔찌! 이거다!’
수호가 [거미줄 팔찌]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거미줄 사출】이 시전됐다.
슈슈슉-
거미줄이 허공에 확 펼쳐졌다.
『뭣?』
깜짝 놀란 드래곤이 몸을 회피했다.
‘잡혀라!’
수호는 연달아 거미줄을 쏘았다.
슈슈슉-
슈슈슉-
두 번 더 거미줄을 발사했을 때.
드디어 거미줄이 드래곤의 날개를 휘감았다.
쿠쿵-
드래곤이 추락했다.
『그물 따위!』
드래곤이 몸을 격렬하게 뒤틀었다.
하나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체급 차가 있는데, 쉽게 끊어지겠냐.’
수호가 쾌재를 불렀다.
『이 악신 놈이!』
그사이 드래곤이 다시 브레스를 장전했다.
거미줄을 끊는 대신, 수호의 손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수호가 손을 뻗었다.
‘못 날면 잡는 거야 쉽지.’
드래곤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커, 커헉! 이, 이거 놓아라!』
드래곤이 숨 막혀 하며 소리쳤다.
장전됐던 브레스도 뚝 끊겼다.
‘이제 이걸 어쩌나.’
죽여, 말아?
수호가 고민하는 사이, 드래곤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입을 벌려 수호의 손등을 물려고 들었다.
‘일단 패고 보자.’
수호는 드래곤을 번쩍 들었다.
땅에 몇 번 내리찍으면, 고분고분해지겠지.
아니면 기절이라도 하던가.
한데 그럴 수 없었다.
‘바닥에 내리치면, 마을 다 부서지겠는데?’
이대로 내리찍으면 드워프 마을이 박살 날 터. 진동 때문에 빈 곳을 쳐도 소용없다.
문득, 좋은 수가 떠올랐다.
‘이놈은 차원을 못 넘겠지?’
수호는 드래곤을 쥔 손을 힘껏 당겼다.
냉동실 밖으로 뺀다는 마음가짐으로.
덜컥.
냉동실과 방의 경계.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예상대로 드래곤이 차원을 넘지 못하고 걸린 것이다.
『커억-』
차원의 벽에 막힌 충격은 고스란히 드래곤의 몫.
놈이 비명을 질렀다.
‘됐다. 몇 번 더 부딪치자.’
보아하니 맷집이 무진장 좋아 보인다.
제대로 안 하면, 죽이기는커녕 기절도 못 시킬 터.
수호는 냉동실 안으로 드래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잡아당겼다.
쾅!
『크헉! 이, 이놈!』
역시 한두 번으로는 안 된다.
수호는 동작을 반복했다.
쾅!
『감히!』
쾅!
『크헉- 네놈이 이러고도.』
쾅쾅쾅!
『그, 그만! 그만둬라!』
쾅쾅쾅쾅쾅콰쾅!
『그만! 제발 그만해!』
수호는 그쯤 멈추려고 했다.
한데 관성이 붙은 손이 저절로 한 번 더 움직였다.
뭉클.
감촉이 좀 이상했다.
‘어? 뭐야?’
그러더니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 인해 【???】가 ──── 적용됩니다.]
[비정상적인 ─────입니다.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발랑카르의 ────가 임시로 ────됩니다.]
[교류 등급을 높여 ────를 ───할 수 있습니다.]
주르륵-
눈앞을 가린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그것을 제대로 살필 틈도 없이, 수호는 면전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을 깨달았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냉동실을 벗어난 수호의 손아귀.
소형견 크기의 새까만 드래곤이, 목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15화 야생의 드래곤이 나타났다가… (3)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하지만 수호는 확인할 틈이 없었다.
번쩍-!
손에 쥔 새까만 드래곤이 눈을 떴다.
샛노란 눈빛이 수호를 노려본다.
“헉!”
깜짝 놀란 수호가 드래곤을 집어 던져 버렸다.
퍽!
날아간 드래곤이 벽에 부딪히더니 방바닥에 떨어졌다.
크르르-
드래곤이 으르렁거렸다.
‘이런……!’
수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드래곤을 던지다니!’
죽이든 제압하든 무력화부터 시켰어야 하는데.
깜짝 놀라 놈을 풀어 준 꼴이다.
‘저놈이 냉장고라도 부수면 큰일이야.’
수호가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도리는 이미 브레스에 녹았다.
무기를 찾아야 한다.
‘저거다!’
수호의 눈에 낡은 빗자루가 들어왔다.
오크 주술사를 때려잡은 그것이다.
덥석.
수호가 빗자루를 거꾸로 들었다.
『네놈 감히, 본좌에게 무슨 짓을 한… 컥!』
빗자루 손잡이가 드래곤을 후려쳤다.
『이 하찮은 피조… 크헉!』
퍽퍽퍽퍽퍽-
이불 빨래를 털 듯, 수호는 빗자루를 연신 휘둘렀다.
뜬금없는 차원 이동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빗자루 공세가 너무 거센 탓인지.
드래곤은 도망칠 생각을 못 했다.
퍽퍽퍽퍽퍽-
『그만! 그, 그만해라, 인간!』
퍽퍽퍽퍽퍽-
『이, 이 빌어먹… 악!』
퍽퍽퍽퍽퍽-
『아파! 아프다고! 그만해!』
퍽퍽퍽퍽퍽-
『자,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광룡이 용서를 구하다니.
드워프가 봤으면 경악할 만한 상황.
하지만 수호는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퍽퍽퍽퍽퍽-
『잘못했습니다, 으악!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드래곤이 짧은 앞발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제야 빗자루가 멈췄다.
“헉- 허억-”
매질이 워낙 맹렬했던 터라 수호도 호흡이 거칠었다.
『젠장, 본좌가 이런 참담한 꼴을 당하다니. 흑-』
드래곤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호는 여전히 빗자루를 움켜쥔 채, 드래곤에게 물었다.
“너 뭐야?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지?”
드래곤이 억울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걸 본좌가 어떻게 아느냐? 네놈이 날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았더냐?』
듣고 보니 그랬다.
‘그 물음표 스킬 때문인 듯한데… 그건 일단 차차 알아보고.’
수호는 질문을 바꿨다.
“드워프 마을은 왜 습격한 거야?”
『그 하찮은 난쟁이들이 본좌의 땅을 어지럽히고 본좌의 경고를 무시했다.』
“무슨 말이지?”
『감히 허락도 없이 본좌의 영역에 들어온 주제에 인사도 안 하고, 심지어 경고 차원에서 보낸 오크를 다 때려 죽여 버렸지.』
오크 무리를 보낸 게 정말 드래곤 짓이었구만.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땅을 어찌나 뚫어 대던지. 진동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흥! 이번 기회에 아주 혼꾸멍을 내주려고 했는데, 네놈 때문에…….』
아, 진동.
드릴 때문인가?
수호는 드래곤의 난동에 자신의 지분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놈을 어쩐다?’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만, 광룡이다.
냉동실로 돌려보낼 수도, 이대로 둘 수도 없다.
‘죽여야 하나?’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다.
한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니 망설여진다.
가만 보니 생김새도 바뀌었다.
머리는 커지고 팔다리는 짧아졌다.
게임에 나오는 SD 캐릭터 같다.
눈은 또 어찌나 큰지.
보고 있자니 살심이 생기질 않는다.
수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본좌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째서, 어째서 본좌가 이런 모습으로… 게다가 왜 네놈을 공격할 수 없는 것이지?』
응? 공격을 못 해?
“방금 그 말 사실이야?”
수호가 빗자루를 겨누며 질문했다.
『무, 무슨 말, 말이냐?』
드래곤이 움찔했다.
“나 공격 못 한다며. 그 말 진짜냐고.”
『네놈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지금 본좌에게 되묻는 것이냐! 본좌가 어쩌다가 이렇게 참담한 꼴을… 흑-』
엄청나게 억울한 표정.
저건 진짜다.
드래곤의 외형 변화.
수호를 공격하지 못하는 점.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수호의 생각이 한군데로 모였다.
‘이유가 있다면 시스템 때문이겠지. 그래, 아까 떠올랐던 메시지!’
수호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되새겼다.
[───로 인해 【???】가 ──── 적용됩니다.]
[발랑카르가 원수호의 ──────.]
[비정상적인 ─────입니다.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발랑카르의 ────가 임시로 ────됩니다.]
[교류 등급을 높여 ────를 ───할 수 있습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추측되는 바가 있었다.
‘저 페널티란 말, 그게 내가 아니라 드래곤에게 부과된 건가?’
드래곤의 변화가 시스템의 페널티 때문이라면 이유가 설명된다.
‘뭔가 변했으면 차원 패널에 나타나겠지?’
수호는 재빨리 차원 패널을 열었다.
‘있다!’
차원 패널에 명확한 변화가 생겨나 있었다.
[교류 대상 목록]
▶ESKHJ-0702L
┗ 붉은 망치 드워프
┗ 광룡 발랑카르
*대상의 이름을 응시하면,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이 교류 대상이 됐어!’
교류 대상 항목에 떡하니 자리 잡은 드래곤의 이름.
수호는 재빨리 그것을 응시했다.
드래곤의 정보가 떠올랐다.
『광룡 발랑카르』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1
- 만족도 : 1/100
*【???】의 대상입니다. 차원 여행자를 공격하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교류 등급이 낮은 상태에서 【???】하여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대상의 외형이 변화합니다.
┗대상의 능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대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소속 차원에 귀환할 수 없습니다.
‘저 물음표 스킬은 도대체 뭐지?’
소환쯤 되려나?
수호는 잠시 고민하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놈이 작아진 건 페널티 때문이 맞는 것 같아.’
냉동실에 있을 때와 똑같은 크기.
변해 버린 생김새.
모두 페널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날 공격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가장 신경 쓰이던 부분을 시스템이 보장했다.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한 셈이고.’
수호가 드래곤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 눈빛에 드래곤이 움찔했다.
‘이놈 이거… 쓸 만하겠지?’
본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지구에 풀어놓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무해한 상태니, 죽이기도 뭐하고.
그럼…….
‘키워 볼까?’
명색이 드래곤.
힘이 약해졌어도 자기 밥값은 하겠지?
“그래, 결심했어.”
『뭐? 도대체 무슨 소리냐? 방금 그 눈빛은 뭐지?』
『제, 제대로 대답해라. 본좌를 어떻게 할 속셈이냐!』
수호는 저 말투 이상한 드래곤을 일단 키워 보기로 마음먹었다.
* * *
드래곤을 냉장고 밖으로 꺼낸 순간.
뜻을 알 수 없던 메시지에 뒤이어 떠오른 내용이 더 있었다.
[긴급 임무 【광룡 침공】을 완수했습니다.]
[붉은 망치 드워프의 만족도가 70 오릅니다.]
[고유 스킬 【차원 보따리(중급)】을 획득합니다.]
긴급 임무를 완수했다는 메시지였다.
수호는 보상으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차원 보따리(중급)】
-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차원의 틈에 만들어 둔 공간. 생명체를 제외하면 무엇이든 넣어 둘 수 있다.
- 차원 통로가 근처에 있으면, 【교역】 스킬을 통해 해당 차원과 바로 연결할 수 있다.
- 등급이 오를수록 크기가 커진다.
“인벤토리 같은 거네.”
그것은 게임의 인벤토리와 비슷했다.
스킬을 인식하자 차원 보따리의 크기가 가늠됐다.
“원룸 크기 정도 되겠고.”
당장 쓰기엔 충분한 크기다.
“특히 타 차원과 바로 연결되는 점이 좋아.”
라면 박스를 일일이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차원 보따리에 넣어 곧바로 【교역】하면 될 테니까.
새 스킬도 얻었겠다.
이러면 전화위복인가?
“드래곤이 여기 있으니, 드워프 마을도 평안해질 테고.”
장도리 날려 먹은 것만 빼면 훨씬 이득 같은데?
수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턱도 없는 기대를 하는군. 이제 드워프 마을은 큰 환난에 휩싸일 것이다.』
“또 뭔 수작이야?”
수호가 빗자루를 들었다.
드래곤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아니다. 본좌가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라…….』
드래곤이 사정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그때, 냉동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인님-!”
* * *
“다들 정신 차리고, 아이들 챙겨서 피신할 준비 해!”
타룽가는 드워프들을 움직였다.
거인님이 드래곤을 잡아갔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언제 드래곤이 돌아올지.
‘부디 거인님이 무사하셔야 할 텐데.’
타룽가는 걱정됐다.
거인님이 날씨를 바꿀 정도로 대단한 존재지만, 진짜 거인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안다.
이제껏 교환한 물건을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마법을 통해 이쪽 세상에서만 거대하게 현신할 뿐일 터였다.
만약, 저쪽 세상에서 드래곤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기라도 했다면…….
‘드래곤이 커졌다면, 거인님이 위험하실 수도 있어.’
문득 드래곤의 브레스에 장도리가 녹아내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무기라도 가져다 드려야 해!”
타룽가는 재빨리 대장간으로 달렸다.
막 완성된 칼이 놓여 있었다.
칼을 챙긴 타룽가가 냉동실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쳤다.
“거인님-! 거인님!”
머잖아 응답이 들려왔다.
“네, 타룽가 님.”
“거인님 빨리 받으십시오! 저번에 만들어 드리기로 한 무기입니다!”
타룽가는 서둘러 칼을 내밀었다.
“아! 완성됐군요. 고맙습니다.”
수호가 칼을 받았다.
이레귤러를 잡고 나온 재료 아이템으로 만든 무기. 붉은빛을 띤 검날이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이러면 장도리 부서진 건 전혀 아쉬워할 필요가 없겠어.’
수호가 아이템 성능을 확인하려는 찰나, 타룽가가 급하게 덧붙였다.
“거인님, 아까 장도리가 부서지는 걸 봤습니다. 곤란하실 것 같아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그거 보고 걱정해서 달려왔구만.
수호는 타룽가의 말에서 저간의 사정을 파악했다.
“고맙습니다, 타룽가 님. 무기 잘 쓸게요. 근데 드래곤은 이제 걱정하실 것 없어요.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뒀거든요.”
타룽가는 수호의 대답에 경악했다.
“고분고분이요? 광룡을 말입니까?”
광룡 발랑카르가 어떤 존재던가.
어린 용임에도 온 대륙에 그 미친 짓으로 악명이 자자한 말썽쟁이 아닌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고분고분이라니! 역시 거인님!’
타룽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네, 어쩌다 보니 일이 잘 풀렸어요. 근데 다른 분들은 좀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수습해서 피신할 준비 중이었습니다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드래곤은 이제 그쪽으로 못 돌아갈 테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 고개 숙이는 타룽가.
수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타룽가 님.”
“안 좋은 소식이요?”
“네, 드래곤의 말로는 앞으로 마을에 몬스터가 몰아닥칠 거라고 하더군요. 드래곤의 영역에 살던 몬스터들이 제약에서 풀려나 날뛸 거라고.”
“아…….”
드래곤이 죽은 자리.
그 지배를 받던 몬스터는 자신의 영역을 형성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다.
생태계가 다시 자리 잡기 전까지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타룽가도 들어 본 이야기였다.
근심에 빠진 타룽가에게 수호가 말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려고 합니다. 나머지 일은 모두 멈추고, 성벽부터 쌓으세요. 마을을 요새화해야 해요. 앞으로 식량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간 조금이나마 사냥과 채집을 하던 드워프였다. 수호는 그것조차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안 그래도 거인님께 너무 큰 폐를 끼치고 있는데.”
“그게 최선이에요. 대신 성벽을 쌓으면서 대장 시설이나 최대한 확충하세요. 마을을 지키려면 무기가 필요하잖아요. 제가 가져다 팔 것도 좀 만드시고요.”
그래야 밥값 하지.
“대장일은 드워프의 천직이니,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인님께 너무 큰 빚을 지는 것 같아…….”
“괜찮다니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마을 외부에 임시로 목책이라도 두르세요. 어서요.”
“예,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위험하면 부르시고요.”
“예!”
타룽가가 달려갔다.
한동안 그도, 다른 드워프들도 몹시 바쁠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까.
여유가 없기는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머잖아 따로 납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식량을 마트에서 사다 나르는 건 한계다.
양도 양이지만, 라면만 계속 먹일 수도 없는 일이고.
이제 전문 업체에 공급받아야 한다.
“바로 준비해야겠네.”
내일이라도 도매 업체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수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지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현수의 전화였다.
수호는 전화를 받았다.
“형,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들어오긴 잘 들어왔지. 그 뒤에 한번 난리가 났을 뿐.
“응,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그건 아니고요. 좀 전에 수거팀에서 전화가 와서 몬스터 부산물 리스트를 보냈더라고요. 그것도 살펴보고 정산도 할 겸, 내일 식사나 같이할까 하고 연락드렸어요.”
“그건 메시지로 보내 줘도 되지 않아?”
“그렇긴 한데, 내일까지 가게 문 닫으신다면서요. 그래서 시간 되시면 식사하면서 직접 드리려고 했죠. 하하.”
“오전엔 일이 있어서 힘들고, 저녁에는 괜찮을 것 같아. 한 6시쯤?”
“아, 잘됐네요. 저도 낮에는 할 일이 좀 있거든요. 그럼 제가 저녁에 형네 가게 앞으로 갈게요.”
그러라고 대답하려던 수호는 말을 멈추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였다.
“그러지 말고, 내가 너희 동네로 갈게.”
“저희 상왕련 쪽으로요?”
“응, 그 근처에 일이 좀 있거든.”
상왕련이 자리 잡은 동대문.
그곳은 아이템을 비롯해 온갖 물건이 유통되는 도매 거리다.
식량을 위해 수호가 내일 가려던 곳이기도 했다.
16화 소매치기(1)
수호와 드래곤과 빗자루는 어젯밤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수호는 드래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저 녀석이 헤츨링이었다니.’
헤츨링.
성체(成體)가 되지 못한 어린 드래곤을 일컫는 말이다.
한데 광룡으로 불리던 놈이 고작 헤츨링이었다.
얼마나 사고를 쳤으면, 헤츨링 주제에 광룡이라 불린 건지.
‘게다가 나이도 750살. 우리 나이로 치면…….’
저쪽 세상 기준, 드래곤은 1,000살부터 성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대충 20살부터 성인이니.
750살을 우리 나이로 치환하면…….
‘15살, 중2잖아!’
입만 열면 이상한 소리를 해 대는 게,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래도 생각보다 악독하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광룡이란 악명을 얻게 한 숱한 업적.
그것들은 나쁜 짓보다는 정신 나간 짓 쪽에 치우쳐 있었다.
생명을 해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종(種)이 달라 생긴 인식의 차이 때문일 뿐.
악의를 품고 행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고.
데리고 다니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수호가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6시에 현수랑 약속이니까, 그 전에 식자재 거래처 뚫어야겠다.’
드워프 수가 1,200명을 돌파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가는 김에, 가게에서 팔 잡다한 물건들도 좀 사고.’
단검이 잘 팔린 덕에 가게에 손님이 늘었다.
치유 물약이나 화살 등, 잡다한 소모품이 함께 팔려 나갔다.
덕분에 모처럼 아이템 거래처에도 들러야 할 상황이었다.
수호가 곧 환복을 끝마쳤다.
막 방을 나서려던 찰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차원 보따리가 있으니, 아이템을 두고 갈 필요가 없겠네.’
솥뚜껑과 투구를 집어 들었다.
‘들어가라!’
강하게 생각을 집중하자, 두 아이템이 허공에서 쓱 사라졌다.
수호는 나머지 하나.
진녹색 검집에 든 장검을 들었다.
스릉.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붉은빛을 띤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염 포마검]
- 훌륭한 대장장이가 화염 가시뼈를 날카롭게 벼려 만든 검. 장인의 정성이 담겨 몹시 예리하고 단단하다. 손잡이에 박힌 매직 오브가 사용자의 마력을 보조한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물리 공격력 390
- 【중급 절삭력 강화】【마력 충전】
- 민첩 +15 마력 +20
- 내구도 450
“좋다.”
검을 뽑아 본 수호는 감탄을 터트렸다.
타룽가에게 새로 받은 검이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깟 하찮은 물건에 감탄하다니, 본좌의 레어에는 그런 쓰레기는 들이지도 않았건만, 쯧쯧.』
그때 옆에서 드래곤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빗자루와 몸으로 나눈 대화가 부족했나?
“이게 하찮다고? 우리 세상에서는 이 정도면 최고 수준의 장비인데?”
5성 던전에서 나온 가시 채찍의 공격력이 320이었는데, 그보다 더 높다.
스킬도 두 개나 붙었고, 스탯도 잔뜩 오른다. 내구도는 거의 솥뚜껑에 버금가는 수준.
【마력 충전】
- 오브에 담긴 마력을 이용해 사용자의 마력을 충전한다. 오브의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른다.
- 잔여 마력량 100/100
내장된 스킬인【마력 충전】 역시 훌륭하다.
실험해 보니, 마력이 바닥났을 때 서너 번쯤 가득 채울 수 있는 분량이었다.
『난쟁이 놈들의 솜씨면 그보다 훨씬 좋은 것도 만들 수 있을 터. 대충 만들었거나, 재료가 형편없었을 테지.』
대충 만들었을 리는 없고.
“…재료가 좀 부실하긴 했지.”
1성 던전에서 얻은 [화염 가시뼈]와 오크 주술사의 지팡이에서 뽑은 오브가 검의 재료다.
드래곤의 눈에는 안 찰 만도 했다.
적당히 납득한 수호는 검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드래곤을 빤히 바라봤다.
『뭐? 검 좀 박하게 평가했다고, 또 그 흉악한 작대기로 본좌를 괴롭힐 생각이냐! 보, 본좌가 말하지 않았느냐, 말로 하라고! 본좌는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을 가진 블랙 드래곤 일족, 말로 하면 다 이해하는 드래곤이니라!』
“그건 아니고, 밖에 나가야 하는데 널 데려갈지 말지 고민 중이야.”
집에 두고 가자니 불안하다.
데리고 가자니, 눈길을 너무 끈다.
『외출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본좌도 함께 가겠다. 앞으로 본좌가 머물 세상이, 그딴 날붙이가 최고로 평가받는 곳이라니. 얼마나 낙후됐을지 심히 걱정이구나. 본좌의 용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드래곤이 파닥 날아오르며 말했다.
“넌 너무 눈에 띄어. 혹시 너 인식 장애 마법이나, 뭐 그런 거 없냐?”
『그딴 하찮은 마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보아라, 이것이 본좌의 투명화 마법이니라.』
드래곤이 주문을 시전했다.
드래곤의 몸에서 마력이 뭉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몸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응? 보이는데?”
『보인다고? 마법은 분명 성공했는데?』
“반투명하지만 보여. 혹시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이, 이럴 수가. 어째서, 어째서 네놈에게는 본좌의 마법이 하나도 안 통한단 말이냐!』
아마도 시스템의 제약 때문이겠지.
“몰라, 어쨌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인단 말이지? 능력이 대폭 하락했다더니, 그래도 제법이네.”
드래곤은 페널티 때문에 힘의 대부분을 봉인당했다.
마력 양도 새 발의 피라고 할 정도로 줄었다.
그 탓에 쓸 수 있는 마법도 몇 안 되고, 효과도 지속력도 형편없어졌다고 했다.
『이 정도에 감탄하다니, 쯧쯧. 안목이 하찮구나, 인간.』
드래곤이 거만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수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호는 반투명한 드래곤에게 요구했다.
“따라 해 봐. 크와앙-”
드래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수호가 한 번 더 반복했다.
“크와앙- 해 보라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놀림당하는 기분이군. 당장 그만둬라!』
“…뭐 됐다. 혹시나 했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어깨를 으쓱인 수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투명 드래곤이 되었으니 데리고 다니는 데는 문제 없겠네. 그럼 가자, 발룡아.”
수호가 새로 지은 드래곤의 이름을 부르며 방을 나섰다.
『보, 본좌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본좌의 이름은 발랑카르 폰…….』
“됐고! 이름 문제는 어제 빗자루와 셋이서 다수결로 결정했을 텐데?”
수호가 벽에 기대 서 있는 세 번째 유권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드래곤, 아니, 발룡이가 입을 다물었다.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 * *
“자, 이것도 좀 챙겨가. 활력수야. 손님들 서비스로 하나씩 주면 좋아하더라고.”
도매상 사장 영감님이 수호에게 박스를 내밀었다.
수호가 손사래 쳤다.
“아이고 어르신, 물건값도 깎아 주셨는데, 이런 것까지 주시면 뭐가 남는다고 그러세요.”
“자네가 한동안 안 보여서 가게 문 닫은 줄 알았단 말이야. 내가 자네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얼마나 미안하던지. 어쨌든 이렇게 얼굴 보니, 얼마나 좋아. 장사 잘돼서 자주 좀 와.”
동대문 아이템 거리에 위치한 도매상.
이곳은 할아버지 때부터 연이 있던 거래처다.
오랜만에 들렀는데, 뜻밖에도 너무 크게 환대받았다.
수호는 따뜻한 인심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장사 열심히 해서 물건 많이 팔아 드릴게요.”
수호도 진심으로 인사를 건넸다.
“허허, 나야 뭐, 이제 다 늙어서 더 팔고 덜 팔고 욕심도 없네. 그저 먼저 간 원 씨 늙은이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하게.”
“예, 그럼 가 볼게요. 건강하세요.”
“응, 어여 가봐. …아참!”
수호는 나서려던 걸음을 멈췄다.
“요즘 소매치기가 기승이라니, 자네도 조심해. 물건을 어찌나 기막히게 훔치는지 난리도 아니라네. 상왕련에서 현상금을 건다느니 말은 많은데, 아직 잡았다는 소식이 없어.”
“예, 주의할게요.”
수호는 사장 영감님에게 고개 숙인 후, 가게를 나섰다.
『하찮은 아이템 나부랭이나 파는 주제에 말이 왜 저렇게 많은 거지? 끼워 준 물건은 또 뭐고. 마력이 티끌만큼 섞였는데, 맹물인가?』
수호가 서늘한 눈빛으로 발룡이를 응시했다.
활력수는 마력이 섞인 피로 회복제.
극적인 효과는 없지만 마시면 스태미나가 충전된다.
도매상 영감님 말대로, 손님에게 서비스로 내놓으면 효과가 좋다.
‘저놈의 못돼 먹은 말본새.’
역시 하룻밤 깊이 있는 대화로는 부족했어.
돌아가면 ‘빗 교관’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 줘야겠다.
수호의 눈빛을 느낀 발룡이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긴 했다. 늙고 약했지만 괜찮은 피조물이야.』
“…말이야 방귀야.”
수호는 주변을 살폈다.
그 후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 구매한 아이템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차원 보따리, 이거 정말 좋네.’
없을 땐 몰랐는데, 이젠 차원 보따리 없이 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드워프들 먹일 식량 구하러 가야지.”
덤으로 시멘트를 비롯해 건설 자재도 구해 볼 생각이다.
동대문은 한때 던전 브레이크에 의해 싹 쓸려나갔다.
황폐해진 이곳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상왕련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템 거리가 생겨났다.
이제 아이템은 물론 대한민국 모든 물류가 이곳으로 모인다.
수호는 아이템 거리에서 나와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식료품 골목이었다.
몇몇 몬스터 고기도 취급하는 탓에 아이템 골목과 가까이 있었다.
‘어디가 좋으려나.’
수호가 도매상을 물색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가게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거래량이 만만찮을 것이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좀 둘러보자.’
수호가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중간쯤 다다랐을 때, 발룡이가 속삭였다.
『웬 놈이 접근한다.』
수호의 감각에도 걸렸다.
누군가 따라온다.
* * *
‘흐흐흐, 병신들.’
김수택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소매치기에 대한 소문이 났는지, 지갑이며 주머니며 잔뜩 신경 쓰고 있다.
‘숨긴다고 안 털릴 줄 아나?’
절도 전과 3범인 김수택.
그는 최근 큰 행운을 맞았다.
각성한 것이다.
클래스는 소매치기.
그의 본업과 똑같았다.
한데 김수택은 헌터로 등록하지 않았다.
몬스터와 싸우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다 훔칠 수 있는데. 뭐 하러 몬스터랑 싸워?’
대신 자신의 특기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소매치기로 나선 것이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고유 스킬 덕분에 확장 스탯을 얻다니.’
확장 스탯.
그것도 김수택에게 딱 맞는 【손끝 감각】이라는 스탯을 얻었다.
그 수치도 무려 5나 된다.
‘게다가 장물 창고까지. 흐흐흐.’
【장물 창고】는 아공간 창고였다.
크기는 승용차 트렁크만 했지만, 언제든 넣고 뺄 수 있다.
훔친 뒤 넣어 버리면 완전 범죄가 성립한다.
소매치기로서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셈.
그렇기에 김수택은 자신 있었다.
상왕련이든, 정부든.
누가 나서도 절대로 잡히지 않을 자신이!
‘이번엔 어떤 놈을 털어 볼까?’
김수택은 행인들을 살폈다.
‘저놈은 개털이고, 저놈도 별 볼 일 없군. 저놈도 꼴이… 어? 호오- 손목에 저 팔찌는 제법 돈이 되겠는데?’
김수택은 먹잇감을 발견했다.
별거 없어 보이는 놈인데, 손목에 낀 팔찌만은 제법 귀티가 났다.
‘그럼 오늘은 저거다, 흐흐흐.’
김수택이 비릿하게 웃으며 먹잇감을 뒤쫓았다. 잠시 후, 그는 무사히 사냥감의 뒤편에 다다랐다.
‘팔찌만 슬쩍 벗겨 내 보실까.’
타인의 손목에 찬 팔찌를 착용자 몰래 벗겨 내는 일.
다른 소매치기들은 힘들겠지만, 김수택은 할 수 있다.
【손끝 감각】 스탯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김수택이 손을 슬그머니 뻗었다.
손은 김수택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한데 손이 막 팔찌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덥석.
사냥감이 김수택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 뭐야! 어떻게?”
놀란 김수택이 되물었다.
사냥감, 수호가 김수택에게 대답했다.
“네가 그 소매치기구나.”
사냥꾼의 눈빛을 한 채로.
17화 소매치기(2)
소매치기 김수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놈 대체 뭐야?’
자신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소리도 없었고 시선 끌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팔찌에 살짝 손끝이 닿았을 뿐이다.
한데 손목이 잡혔다.
‘어, 어째서 잡힌 거야? 완벽했는데!’
절대로 들킬 리 없는데.
김수택이 놀란 사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매치기 놈한테 현상금이 걸렸다고 했던가?”
사냥감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김수택은 정신이 들었다.
‘제, 젠장. 잡힌 건 잡힌 거고.’
그에게는 잡혔을 때를 대비한 계획도 있었다. 그걸 실행해야 할 때다.
‘훔친 물건도 없는데 어쩔 건데?’
증거는 없다.
팔찌는 훔치지 못했고, 그전에 훔친 장물도 【장물 창고】에 넣어 뒀으니까.
김수택은 애써 당황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뭐? 무슨 헛소리야!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소매치기니, 뭐니 하는 거야!”
최대한 크게.
소란이 일도록 소리쳤다.
행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뭔데? 소매치기?”
“저기 손목 잡힌 사람이 소매치기인가?”
“아니라는데?”
“그럼 도둑놈이 자기가 도둑놈이라 그러겠어? 아니라고 하지.”
“그래도 표정은 정말 억울해 보이는데? 목소리도 크고. 보통 도둑이면 저렇게 큰소리 안 치지 않나?”
“모르지, 진짠지 가짠지. 요즘 하도 말이 많으니까, 생사람 잡는 걸 수도 있고.”
김수택은 주변 반응에 흡족했다.
‘자 이제 이 자식한테 증거 있냐고 큰소리치면 끝이다.’
증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을 터.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수호는 그런 김수택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소매치기 놈, 뭔가 있어.’
팔찌에 손을 뻗었을 때부터 묘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감각 스탯이 없었다면 대처하기 어려웠을 움직임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잡힌 후의 태도도 이상했다.
처음에 놈은 분명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더니, 지금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
궁리 끝에 수호는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그냥 모르쇠로 나올 생각인가?’
그러고 보니 물증이 없긴 한데…….
팔찌 훔치고 나면 잡을 걸 그랬나?
수호가 생각하는 사이 주변에 사람이 더 늘어났다.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이 왜 거기 있어요?”
* * *
동대문 아이템 거리.
이곳은 상왕련의 땅이다.
물류도 상가도 사람도, 상왕련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랬기에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공권력보다 먼저 상왕련을 찾았다.
이번 소매치기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심화되자 상왕련이 나섰다.
상왕련이 마련한 방법은 함정 수사였다.
정현수의 역할은 미끼.
부자로 변장한 정현수의 뒤를 상왕련 헌터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한데 저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소매치기가 잡혔다고?’
정현수는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누군가 손목을 잡힌 채 고함치고 있었다.
자신은 소매치기가 아니라고.
한데 손목을 잡아챈 사람의 얼굴이 낯익었다. 정현수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 형이 왜 거기 있어요?”
곧 수호가 대답했다.
“현수? 너, 꼴이 왜 그러냐?”
정현수는 깨달았다.
미끼가 되기 위해 금붙이를 몸에 치덕치덕 휘감고 있음을.
“아, 그… 어쩌다 보니 좀 차려입었어요. 근데 형, 진짜 뭐 하세요?”
함정 수사 중임을 노출할 수는 없는 일.
정현수는 적당히 둘러대고 되물었다.
“물건 좀 떼러 왔는데, 이놈이 내 팔찌에 손을 대려고 하잖아. 그래서 잡았지.”
“아, 그 팔찌요?”
“그래, 어제 던전에서 얻은 거.”
“그럼 그 사람이 진짜 소매치기예요?”
“응, 분명 내 팔찌 훔치려 들었어. 솜씨를 보니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아.”
오가는 대화에 김수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적거렸다가는 상황이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
김수택은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애먼 사람 도둑놈 만들고 그래? 당신이 손목만 잡으면 소매치기야?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수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수택을 노려봤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척 봐도 이제껏 훔친 물건은 안 가지고 있을 것 같고.
순순히 죄를 인정하지도 않겠지?
‘쥐어패서, 상왕련에 넘겨?’
증거야 상왕련에서 찾겠지.
정현수라면 수호의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을 테니.
그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크큭, 위대한 진실의 눈을 가진 본좌에게는 다 보인다.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는 바로 이곳에 있다!』
수호가 흘끔 발룡이를 쳐다봤다.
이 중2 드래곤이 또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수호는 발룡이처럼 머릿속으로 말을 전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물론, 본좌가 하찮은 네놈을 위해 사건을 해결할 이유는 없겠지. 다만, 네놈이 어젯밤의 죄과를 뉘우치고 오체투지 하여 빈다면, 본좌가 약간의 도움을 내려 주도록 하마. 크크크… 헉!』
발룡이의 웃음이 뚝 끊겼다.
이곳에 있지 않아야 할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그 빗… 흉악한 물건이 여기 있는 거지? 그, 그럴 수는.』
수호의 손바닥 안쪽.
차원 보따리에서 끄트머리만 꺼낸 빗자루 손잡이가 살짝 노출되어 있었다.
‘제대로 안 하면 집에 가서 보자.’
수호는 텔레파시라도 보내듯, 속으로 되뇌었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큭. 제, 제길. 좋다. 정의를 사랑하는 본좌가 저런 쓰레기 같은 좀도둑 놈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본좌가 놈을 입 다물게 할 방법을 가르쳐 주마.』
뭔데?
수호의 눈빛에 발룡이가 말을 이었다.
『저놈 팔뚝에 보이는 문 모양 문신. 그것에서 특별한 형식의 마력이 느껴진다. 다른 차원과 연결하는 형태의 마법술식이 분명해.』
다른 차원과 연결 한다고?
『네놈의 차원 보따리 스킬과 비슷한 것이지만 수준이 낮다. 그 탓에 저놈의 것은 타 차원과 연결이 상당히 불안해. 그러니 저 문신 부위에 충격을 주면, 속에 든 것을 토해 놓을 것이다.』
발룡이는 김수택조차 모르는 스킬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수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 빗자루 면제.”
『당연하지!』
김수택은 수호가 뜬금없는 말을 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론과 기세.
좀 더 목소리를 높이는 데 힘썼다.
“증거 있냐고, 증거! 내가 소매치기라는 증거! 없으면 이거 놔! 당장 안 놓으면 당신 내가 고소할 거야.”
수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증거라.”
수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김수택이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철썩-!
수호의 손바닥이 김수택의 팔뚝을 후려쳤다.
“악! 지금 무고한 사람 쳤어? 여기 사람들이 다 봤어, 당신이 나 때리는… 어? 어어?”
우당탕탕-
촤르르르르-
김수택의 팔뚝 근처 허공에서 갖가지 물건이 쏟아져 내렸다.
“누가 무고하다고?”
수호가 스산하게 물었다.
김수택이 사색이 되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창고가 열린 거야?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정현수가 상왕련 소속 헌터들에게 소리쳤다.
“잡으세요, 저놈!”
* * *
퍽-
박동식은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문득문득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솥뚜껑 새끼. 죽여 버릴 거야!’
헌터로서 성대한 출발을 위한 연수원이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놈 하나 때문에 박동식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
‘그 개자식 때문에 헌터 등록도 반려되고, 아버지한테도… X발!’
헌터 등록이 3달간 미뤄졌다.
상대를 해칠 의도로 스킬을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박동식이 수호에게 처절하게 얻어맞은 탓에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칼이 문제였다.
훔쳐 간 칼이 부서지는 바람에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뺨까지 맞았다.
“X발!”
박동식이 그때를 떠올리며 욕설을 뱉었다.
똑똑-
노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고민오입니다.”
“들어와.”
고민오가 들어오자 박동식이 서둘러 질문했다.
“어떻게 됐어. 좀 알아봤어?”
“예. 알아보니까, 그놈 진짜 초짜 맞던데요?”
“뭐? 그게 말이 돼?”
“진짭니다. 그냥 아이템 잡화점 운영하던 놈입니다. 쥐똥만 한 가게도 망하기 직전이었고요. 게다가 길드 가입도 안 했던데요?”
“정말이야?”
“예. 확실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통해서 알아봤습니다. 3대 길드는커녕, 중소 길드에도 가입 안 했더라고요.”
박동식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별다른 뒷배는 없단 말이지?”
“근데 상왕련과 가까이 지낸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야?”
“형님도 아실 텐데, 우리랑 같은 학원 다니던 정현수 있잖습니까. 상왕련주 아들이요. 그놈이 원수호랑 어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박동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현수라면 기억하고 있다.
학원에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몇 안 되는 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길드에는 안 들었다며?”
“네, 상왕련 소속은 또 아니더라고요. 아마 그 원수호란 놈이 정현수를 어떻게 구슬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현수는 돈이 많을 테니까요.”
“호오, 그러니까 솥뚜껑 새끼가 그렇게 강한 건 정현수한테 뭔가 받아먹어서다?”
“그거 말고는 도무지 상황 설명이 안 됩니다.”
“어쨌든 정식으로 상왕련 소속은 아니란 거지?”
“예, 그건 정말 확실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박동식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이게 말이 돼?”
정현아는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낸 곳은 던전 관리팀.
내용은 정현수와 수호의 던전 출입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두 번째 들어가는 던전에서 4시간 도 안 돼서 클리어할 수가 있는 거야?”
그것도 고작 둘이서.
정현아는 보고서를 믿을 수 없었다.
정현수와 수호가 칼날 거미 던전을 3시간 반 만에 클리어했다는 것이다.
처음 갔던 고슴도치 던전보다 난이도도 높은데…….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원수호에 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치솟았다.
한데 알아낼 수가 없다.
이게 다 특약 사항 때문이다.
“그때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정현아는 자신의 무례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것만 같았다.
“좀 더 친절하게 대했더라면, 상왕련에 가입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현아가 헛된 망상에 빠져 있을 무렵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야! 노크도 없이!”
정현아가 소리쳤다.
한데 들어온 사람의 목소리가 더 컸다.
“누나! 대박! 수호 형이 또 해냈어!”
“뭐? 수호? 원수호 씨, 또 던전 갔어?”
“뭔 소리야, 누나. 수호 형이 소매치기 잡았다고!”
“소매치기를 왜 원수호 씨가 잡아?”
정현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소매치기 때문에 작전을 벌이기는 했다.
근데 아무 상관도 없는 원수호가 왜 갑자기 튀어나온단 말인가?
“몰라. 어쨌든 수호 형이 잡았어. 도난품도 다 찾았어. 하하. 회의실에 있으니까 가자.”
“…그래, 가 보자.”
정현아는 동생을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호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원수호 씨, 소매치기를 잡았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또 보는군요.”
정현아는 그제야 인사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정현아가 급히 인사를 건넸다.
곧바로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는 과정은 현수가 대충 다 봤으니 현수한테 들으시고요. 듣자 하니, 현상금이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현상금을 걸기로 결정됐지만 아직 발표는 안 했다. 오늘 함정 수사가 실패하면 곧바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또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정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현상금을 걸기로 결정된 상태에요.”
“그렇군요. 게다가 제가 장물도 무사히 찾아다 드렸네요?”
정현아는 수호의 말투에서 그가 원하는 게 있음을 눈치챘다.
“현상금 달라고 하는 말씀 같지는 않은데, 따로 원하시는 게 있어요?”
정현아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현상금은 됐고요. 식자재 좀 납품받을 수 있을까요? 대량으로, 주기적으로. 기한은 미정이고요.”
“식자재요? 그걸 어디 쓰시려고…….”
수호가 싱긋 웃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짓던 표정과 꼭 같았다.
정현아는 웃음의 의미를 파악했다.
‘캐묻지 말고 할 일이나 하자’는 뜻이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기한이 한정 없으니 완전히 공짜로는 안 돼요. 최대한 이문 없이 보내 드리긴 하겠지만요.”
대신 장물 값이랑 현상금만큼은 제하고 받을게요.
정현아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일단 식량 문제는 해결했고.
수호는 나머지 용건을 떠올렸다.
“……?”
“급속경화 시멘트도 좀 구했으면 하는데요.”
드워프 마을의 건설을 돕기 위함이다.
금세 마르고 단단한 급속경화 시멘트.
구하기만 하면 크게 도움이 될 물건이다.
단, 제조에 특정 몬스터의 부산물이 필요해 생산량이 극히 적다. 가격도 몹시 비싸고.
“…어디 극빈국에 학교라도 세울 셈이에요?”
“뭐, 비슷하다고 해 두죠. 나쁜 일은 아니니까 찜찜해하지는 마시고요. 가능할까요?”
“네, 양이 얼마나 되는지 좀 알아봐야겠지만, 저희 창고에 비축 물량이 어느 정도 있을 거예요.”
“잘됐네요. 있는 대로 보내 주세요.”
“알았어요. 실무자 연결해 드릴 테니, 식량 건까지 해서 자세한 부분은 따로 의논하셔야 해요.”
“예, 고맙습니다.”
수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18화 한밤의 불청객(1)
철퍽-
거대한 숟가락이 움직인다.
목책 위에 걸쭉한 무언가가 뿌려졌다.
철퍽-
드워프들이 그 장면을 구경했다.
철퍽-
이윽고 목책이 걸쭉한 것에 충분히 뒤덮였을 즈음, 수호가 지시했다.
“다 된 것 같네요. 이제 아까 나눠 드린 거 뿌리세요.”
“네, 거인님!”
“가자, 스트레이 뿌리러!”
“스트레이가 아니고, 스프레이랬어.”
“뭐든 뿌려, 팍팍!”
드워프들은 뿌리는 모기약처럼 생긴 통을 들고 목책에 달려들었다.
치이이익-
사방에서 스프레이 분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우와! 굳는다! 굳고 있어!”
“진짜 순식간에 굳어 버렸잖아! 대박!”
“히힛, 거인님이 굳을 거라고 했으면 굳는 거야!”
목책에 뿌린 걸쭉한 것이 스프레이에 닿는 순간 단단하게 굳었다.
수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급속 경화 시멘트.
몬스터 부산물이 함유되어 일반적으로 낼 수 없는 강도를 자랑한다.
딸려 온 스프레이를 뿌리면 금세 굳기까지 하니, 일손 급한 드워프 마을에 최고였다.
‘급속 경화 시멘트, 역시 비싼 값을 한다니까.’
드워프 마을에 단출한 성벽이 완성됐다.
차차 보강이 필요하겠지만, 저것만으로도 일차적인 방어선 역할은 충분할 터였다.
‘어제는 참 얻은 게 많아.’
식자재를 구매하려고 갔다가 뜬금없이 소매치기를 잡았다. 그 바람에 일이 술술 풀렸다.
‘식량도 원가에 납품받기로 했고.’
물건을 쌓아 둘 창고도 공짜로 빌렸다.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으면 되니 운반도 쉽다.
‘급속 경화 시멘트를 즉시 받아 온 점이 금상첨화야.’
시멘트는 상왕련에 보관된 물건을 그 자리에서 받아 왔다. 덕분에 드워프에게 바로 전했고, 눈앞의 결과가 완성된 것이다.
“오, 성벽이 단숨에 완성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물건이군요.”
타룽가가 다가와 말했다.
“일단 한숨 돌리겠네요. 잘 됐습니다. 타룽가 님.”
“예, 모든 것이 거인님의 덕분입니다. 분골쇄신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뭐 분골쇄신까지야.
수호 본인도 드워프 덕을 보려고 하는 일이라 과한 표현이 멋쩍었다.
“나머지 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거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장 시설에 최대한 인력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몬스터 사태에는 무기가 필요할 테니까요. 급한 김에 품질은 좀 떨어지더라도 생산부터 시작했습니다.”
“벌써 만드셨다고요? 금속 수급은 문제없나요?”
“저번에 뚫어 주신 광산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껄껄.”
타룽가는 또다시 감사 인사를 덧붙였다.
수호는 새로 만들었다는 물건에 관심이 갔다.
“새로 만든 무기는 뭔가요?”
“성벽 위에서 싸우려면 장병이 유리하겠지요. 그래서 창부터 만들었습니다. 차후 석궁을 추가하고, 여유가 되면 대형 몬스터를 대비해 발리스타를 만들고자 계획 중입니다.”
“석궁과 발리스타라,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구조가 제법 복잡하고 재료도 다양하게 들어가는 편이라, 일단은 철창부터 보급하고 있습니다.”
철창이라.
드워프제니까 훌륭하겠지?
“혹시 철창 완성품 있나요?”
“물론입니다. 필요하시면 몇 자루든 말씀만 하십시오. 최대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마을에 보급부터 하셔야죠. 저한테 다 주면 되나요. 그냥 한 자루만 구경 좀 할게요.”
“껄껄,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타룽가가 금세 창 한 자루를 가져와 내밀었다. 교역 스킬로 그것을 받아든 수호는 재빨리 성능을 살폈다.
[보급형 강철창]
- 뛰어난 장인이 양질의 강철을 사용해 찍어 내듯 서둘러 만든 창. 몬스터의 가죽을 관통하기 쉽도록 날카롭게 만들어졌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물리 공격력 170
- 【하급 관통력 강화】
- 근력 +5 체력 +5
- 내구도 250
‘이게 찍어 내듯 만든 거라고?’
서둘러 만들었는데, 등급은 ‘고급’.
심지어 같은 등급이던 장도리보다 모든 면에서 더 좋다.
수호가 감탄하고 있을 때, 타룽가가 말했다.
“서둘러 생산하려다 보니, 그 정도가 한계더군요. 차차 더 좋은 물건으로 교체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이거 한 자루는 제가 가져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10자루든 100자루든 말씀만 하십시오. 어떻게든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다니까요. 참, 혹시 전에 만들던 단검은 더 생산해 두셨나요? 좀 내다 팔아야 할 것 같아서요.”
물건을 싸게 납품받게 되었지만, 완전히 공짜는 아니다.
시멘트 값만 해도 3억이다. 현상금 및 장물값으로 퉁치긴 했지만.
그러니 돈을 꾸준히 더 벌어야 했다.
“그건 아이들에게 맡겨 놨는데…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아이들이요?”
“예, 거인님께서 저번에 일부러 품질을 떨어뜨리라고 하셔서, 일손이 부족한 김에 아이들에게 맡겨 봤습니다.”
“…그렇군요.”
저런 아이템 제작 실력을 갖췄으면서, 급속 경화 시멘트 따위에 놀라다니.
두 세상의 문명 발달 방향이 참으로 달랐다.
타룽가가 곧 단검을 가지고 왔다.
마흔 자루. 품질은 팔던 것과 같았다.
‘한동안은 이 정도면 충분할 테고, 이거 굉장히 순조로운걸?’
그때, 수호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좌는 심히 불쾌하다.』
발룡이었다.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왜 또?”
『본좌는 어제 분명 큰 공헌을 했다. 한데 어째서 본좌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더냐. 어째서, 어째서 그것을 네놈들이 모조리 먹을 수가 있다는 말이더냐!』
수호가 어이없어 하며 되물었다.
“네가 안 먹는다며? 음식 같은 건 하찮은 인간 따위나 먹는 거라며? 고귀한 드래곤은 마력만 먹어도 살 수 있다며?”
발룡이가 움찔했다.
실제로 저런 말을 하긴 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분명 어제 소매치기 검거에는 본좌가 최대 공헌자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인간 네놈은 그 치킨이라는 음식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웠지! 분명 그중에는 본좌의 몫도 있었음이야!』
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모든 일을 끝낸 뒤, 정현수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치맥.
발룡이의 존재를 밝힐 생각이 없었던지라, 수호는 발룡이가 투명화 마법을 풀지 못하게 했다.
발룡이는 당연히 음식을 먹지 못했고.
그게 심통의 원인이었다.
‘분명 제 입으로 음식 따윈 안 먹는다더니.’
치킨집에 들어가기 전, 분명히 들었던 말인데.
‘뭐, 치킨이니까 이해는 한다만.’
치느님이니까 군침 도는 게 당연하겠지.
게다가 발룡이는 중증 중2병 환자.
정상적인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흐음, 어쩐다? 계속 패기만 해서는 효율성이 떨어질 텐데.’
지금이라도 빗자루를 들면 발룡이를 조용히 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채찍만 가해서는 좋지 않다.
‘그래서는 발룡이 능력을 오롯이 쓰지 못할 것 같단 말이지.’
어제 일도 발룡이 덕분에 쉽게 해결했다.
시스템의 제약으로 능력이 떨어졌음에도 드래곤은 드래곤.
상당히 유능했다.
마냥 패기보다는 잘 구슬려 써먹는 편이 나을 터.
‘슬슬 당근도 필요하겠지?’
그러려면 적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채찍과 당근이야, 역사가 보장하는 수법 아닌가.
게다가 어떤 당근이 잘 먹힐지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바에야.
어려운 것이 없다.
“좋아, 발룡이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분명 일을 했으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지.”
『당연한 일이다. 이제야 미개한 네놈이 본좌의 말을 이해하는구나.』
저놈의 말본새!
참자. 당근 차례니까, 참아야 한다.
잠시 마음을 다스린 수호가 발룡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어제 못 먹은 치킨을 사 주도록 하지.”
『오! 그게 정말인가? 그 바삭거리는 날짐승 요리! 거기 가서 그걸 사 올 생각이냐?』
“사 오긴 뭐 하러 사와.”
수호는 휴대폰을 들어 배달 앱을 켰다.
‘일단 처음엔 후라이드만.’
처음부터 보상이 크면 곤란하다.
갈수록 역치가 올라갈 테니까.
『지금 뭐 하는 거지? 내 요리는 어쩌고 그 물건을 조몰락거리고 있느냐?』
“됐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올 거야.”
파닥파닥-
정신 사나운 발룡이의 움직임을 참으며 기다렸다.
곧 치킨이 도착했다.
『맙소사! 갑자기 요리를 가지고 오다니, 이런 일이!』
“어서 먹기나 해.”
이게 네가 살아갈 낙후된 세상이다.
이 미개한 도마뱀 놈아.
수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발룡이가 치킨에 달려들었다.
『이런 맛이! 이렇게 고소하고 바삭할 수가! 육즙! 육즙을 껍질 안에 가두었구나! 마법인가? 마법인 것이냐? 마력은 느끼지 못했는데?』
발룡이가 치킨을 허겁지겁 삼켰다.
수호가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맛있어?”
『당연히 엄청나게 맛있… 는 건 아니고,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구나.』
“그래? 그럼 더 먹을 필요는 없겠네? 지금 먹는 후라이드 말고도 수십 가지 종류의 치킨이 있는데 말이지.”
『수십 가지?』
“네가 내 일에 잘 협조해 주면, 수십 가지 치킨을 하나씩 맛보여 주려 했는데. 입에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지.”
『혀, 협조하겠다. 물론, 치킨 때문은 아니고, 네 형편이 어려워 보이니 측은지심이 들어서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그럼 치킨은 필요 없어?”
『…네가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굳이 거절하지는 않으마. 남의 성의를 무시하는 건 고귀한 드래곤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아, 그러세요?
뼈나 좀 뱉어가며 말하시지.
수호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내 말 잘 들으면, 그때마다 치킨을 사 주마.”
드래곤 조련을 마친 수호가 활짝 웃었다.
* * *
“초짜 하나 납치하는 거야 껌이지.”
영일 길드 소속 35레벨 헌터 김성국.
그가 껌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 길드장의 아들이자 김성국과 호형호제하는 박동식이 부탁을 했다.
막 각성한 헌터 하나를 납치해 달라고.
제법 강하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김성국의 특기가 뭔가.
잠입과 납치!
“잠든 틈에 들어가서 마비시키면 끝이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일은 무조건 성공한다.
한데 김성국 같은 납치의 베테랑이 초짜에게 들킬 리는 없으니, 일은 하기 전에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흐흐, 그럼 가 볼까.”
늦은 밤.
불 꺼진 상가 건물.
김성국은 목표가 사는 건물에 다가가 손바닥을 벽에 붙였다.
‘통과!’
스킬이 시전됐다.
스르르-
김성국의 몸이 천천히, 소리 없이 벽을 파고들었다. 마치 유령처럼.
발동이 느려 전투에는 쓸모없지만, 잠입에는 최고인 김성국의 고유 스킬이었다.
잠시 후, 김성국은 목표의 방에 침입을 완료했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이미 낮에 위치를 파악해 둔 터, 어려울 것 없었다.
김성국이 방 안을 살폈다.
목표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잘도 자네. 이제 침만 한 방 놓으면 오늘 일도 끝인가.’
마취당한 목표를 박동식에게 가져다주면 일은 끝난다.
‘껌이구만.’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해 본 김성국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일이 실패할 리가 만무했다.
목표물은 침대에 잠들어 있고,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김성국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침대로 다가갔다.
[마비 독침]을 꺼내 이불 위로 겨누었다.
이불을 들칠 필요도 없다. 이대로 쏴도 침이 이불을 뚫고 목표를 맞힐 터다.
‘발사!’
김성국이 마비 독침을 발사했다.
한데.
팅-
기대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이불이 벌컥 젖혀지고, 목표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할 말인데? 한밤중에 남의 집에 몰래 기어들어 와서 침을 쏘다니. 너 뭐야?”
일어선 목표물의 가슴 앞을 시커먼 쇳덩어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X발! 눈치 까고 있었잖아.’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질 모양.
그럼에도 김성국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는 초짜.
싸우면 이기는 건 당연히 자신이다.
게다가 마비 독침도 있다.
어떻게든 맞히기만 하면 끝이다.
‘소란 피우기 전에 처리한다.’
그렇게 생각한 김성국이 막 한 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목표물의 입에서 이해 못 할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후반양반.”
“……?”
김성국이 주춤했다.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한데 등 뒤에서 으스스한 기척이 느껴지더니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받아들이지.』
깜짝 놀란 김성국이 돌아서려는 찰나.
퍽-!
김성국의 의식이 끊어졌다.
19화 한밤의 불청객(2)
깜깜한 밤.
발룡이가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잠들었군.』
발룡이는 파닥 날아올라 수호의 침대로 향했다.
공중에서 수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익… 도대체 왜!』
이상하게도 수호를 공격할 수도, 해를 끼칠 수도 없다. 심지어 멀리 도망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된 거지?』
발룡이는 비슷한 상태를 본 적이 있다.
정령이 정령사에게.
펫이 테이머에게.
소환물과 소환사가 갖는 관계가 발룡이에게도 적용되었다.
무언가 거대한 법칙이 발룡이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나 어찌 하찮은 정령 따위와 자신을 비교할까.
『감히 위대한 관조자이자 심판자이며, 심연의 주인인 본좌에게……!』
발룡이가 막 분노에 휩싸인 순간.
번쩍-
수호가 눈을 떴다.
이불이 젖혀지며 손에 쥔 것이 보였다.
빗자루!
어째서 그런 흉악한 물건을 잘 때조차 들고 있느냐!
하찮은 인간 따위가 왜 이렇게 감각이 민감하냐는 말이다!
…라고 호통치는 대신, 발룡이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어떤 놈이 아까부터 밖에서 서성거린다. 왠지 찜찜해서 널 깨우려던 중이었다.』
“묘한 살기 같은 게 느껴진다 했더니… 뭐 하는 놈이지?”
수호도 밖의 이변을 감지했다.
발룡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침입자가 건물 외벽으로 바짝 붙어서는 게 느껴졌다.
『놈이 들어오려 하는군.』
“들어와? 어떻게?”
『벽이라도 통과하려는 모양이지.』
하긴 그럴 수도 있다.
세상에는 별 기상천외한 스킬도 존재하니까.
중요한 것은 놈의 의도.
그리고 놈을 처리할 방법이다.
‘일단 잡아 놓고 물어봐야겠지?’
수호가 느끼기에 제대로 싸우면 이긴다. 감각 스탯이 그렇게 전해 온다.
‘방에서 싸우는 건 안 좋은데.’
하지만 냉장고가 있는 방 안에서 투덕거릴 수는 없다.
최대한 깔끔하게, 완벽하게 제압해야 한다.
하나 수호의 힘만으로 그건 어려웠다.
수호가 발룡이에게 말했다.
“놈을 제압하는 걸 도와.”
『본좌가? 왜 그래야 하지?』
“치킨을 사 주마.”
『감히 치킨 한 마리 따위로 본좌를 부리려 드는 것이냐?』
대답에 포함된 ‘한 마리’란 구체적인 수치.
수호는 발룡이의 속셈을 눈치챘다.
‘거절은 아니고, 더 많이 내놓으라는 소리지?’
하나 처음부터 그래서는 역치가 치솟아 버릴 터.
“한 마리 이상은 안 돼. 설마 치킨을 그렇게 하찮게 보는 건가? 다시는 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인 거냐고.”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나 본좌는 위대한 검은 용이자….』
“됐고, 놈이 들어온다. 싫으면 관둬.”
말과 함께 수호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발룡이가 이를 악물고 방구석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그 양념치킨이란 것도 한번 먹어 보고 싶군. 후라이드 한 마리와 양념 한 마리면 본좌가 도와주마.』
발룡이는 치맥 회식 자리에서 수호와 정현수가 양념치킨을 먹는 것을 봤다.
발룡이는 그것도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물론, 후라이드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때 침입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놈은 침대 앞에 이르러, 대롱 같은 것으로 수호를 겨누었다.
푸슛-
침이 발사됐지만 솥뚜껑에 막혀 튕겼다.
수호는 침입자와 잠시 실랑이한 후, 발룡이에게 제안했다.
“후반양반.”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거래는 파투 날 터.
발룡이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발룡이의 용언을 들은 침입자가 놀라고 수호가 기습하여 놈을 가격.
뒤이어진 발룡이의 박치기가 침입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털썩.
침입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암만 봐도 그냥 도둑질하러 들어온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보통 도둑놈이 마비 독침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겠지.』
수호의 말에 발룡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역시 심문해 봐야겠어. 혹시 최면을 걸어서 묻는 걸 다 불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못 하냐?”
『본좌는 뭐든 할 수 있다.』
“그럼 좀 협조하자, 발룡아.”
『…싫다.』
“욕심 부리다가 가진 것까지 다 잃는 수가 있다.”
‘후반양반’이 없던 게 되는 수가 있어.
『그런 게 아니다. 마력이 부족해 할 수가 없다.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마법은 높은 수준의 마력을 요한다. 지금 상태로는 시전하기 힘들다.』
“음, 위대한 흑염룡도 생각보다 별거 없네.”
『이익! 할 수 있다. 단, 네놈이 먼저 협조를 해야 한다.』
“협조?”
『정신 방벽이 약해지도록, 저놈의 의지를 부서트려야지.』
“어떻게?”
『패라. 정신이 반쯤 나갈 때까지.』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제법 잘하는 편이지.”
왠지 부르르 떠는 발룡이를 두고, 수호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덕 테이프 묶음을 찾았다.
수호는 그것으로 침입자의 몸을 누에고치처럼 둘러쌌다.
‘이 정도면 쉽게 찢지는 못할 거야.’
찢더라도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럼 그 전에 다시 제압할 수 있다.
찰싹.
수호가 침입자의 뺨을 때렸다.
몇 번쯤 반복하자 침입자가 눈을 떴다.
“크헉- 뭐, 뭐야?”
수호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회가 많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대답해. 너 뭐 하는 놈이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네, 네놈 각성한 지 며칠 안 됐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거지? 게다가 방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또 뭐고.”
침입자는 대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짝!
수호가 침입자의 뺨을 후려친 후 물었다.
“마지막 기회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이 씨발, 너, 너 분명히 말하는데, 이거 당장 풀어. 당장 풀면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어. 아니면 분명히 후회한다.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수호가 침입자를 차갑게 노려봤다.
“기회 끝.”
그러더니 덕 테이프를 찢어 침입자의 입을 막았다. 뒤이어 차원 보따리에서 [보급형 강철창]을 꺼냈다.
“읍읍- 읍-”
침입자가 뭐라 웅얼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립감이 좋네.”
드워프제가 확실히 다르다.
수호는 창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다.
퍽-
“으읍-!!”
“타격감도 훌륭해. 언제 몽둥이나 하나 만들어 달라 그래야겠어.”
중얼거린 수호가 매질을 계속했다.
퍽퍽퍽-
사정없이.
퍽퍽퍽-
부위 가리지 않고.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이, 이제 그쯤 하면 됐다. 그만!』
“어? 벌써?”
『아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만 패라. 충분하다.』
“레벨도 제법 높아 보이던데, 생각보다 심지가 약하네.”
그냥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수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지.
곧 발룡이가 마법을 시전했다.
침입자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됐다. 필요한 거 있으면 빨리 묻도록 해라. 마력이 계속 소모되니까.』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침입자의 입에서 덕 테이프를 뗐다.
“이름?”
“김성국.”
“내 집에 침입한 목적은?”
“박동식이 너를 납치해 오라고 시켰다.”
“박동식? 그 영일 길드 박동식?”
“그렇다.”
“뭐 그딴 미친놈이 다 있어!”
수호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박동식이라니.
“그래서 납치해서 뭐 어쩌려고?”
“길드 소유 던전에서 너를 괴롭히고 죽일 생각이었다.”
“죽인다고?”
“그렇다. 원래 그런 용도로 쓰이는 던전이다. 주변을 텅 비워 둬서 증거가 남을 일이 없고, 시체를 깔끔히 없앨 수 있어 좋다.”
어이없어 되물었는데, 곡해한 김성국이 던전에 대해 상세하게 대답했다.
수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영일 길드.
질이 안 좋은 놈들이란 말은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쓰레기였다.
“던전 위치는?”
“경기도 평택시…….”
“몇 놈이나 있어?”
“박동식과 그 똘마니인 고민오 둘이 기다리기로 했다.”
“이 일을 아는 놈은?”
“박동식, 고민오, 나. 세 명이다.”
그 뒤로도 던전의 상황과 영일 길드에 대해 질문했다.
김성국은 빠짐없이 성실히 대답했다.
5분쯤 흘렀을 때.
『마력이 고갈되기 직전이다.』
“됐어. 끝내.”
수호가 발룡이에게 말했다.
한데 그 순간.
콰직-!
발룡이가 김성국의 목을 밟아 부러트려 버렸다.
“뭔 짓이야?”
『……?』
“왜 죽인 거냐고.”
『마법 해제에도 마력이 소모되니, 마력도 아낄 겸 처리했다. 왜, 문제 있나? 설마 이 꼴로 만든 뒤에 살려 둘 생각이었던 건가? 이해할 수 없군.』
수호가 김성국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차피 살려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
살려 주는 순간 보복이 들어온다.
김성국은 개인이 아니라 영일 길드의 길드원이다.
게다가 길드장의 아들인 박동식의 치부를 고스란히 들킨 상황이기도 했다.
‘무조건 보복당했겠지.’
어쩌면 수호가 해야 했을 일을 발룡이가 대신한 셈이다.
‘살인이라…….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당하고만 살 생각은 없다.
아무 잘못도 없이 당해 줄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러니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마음 단단히 먹자.’
수호는 각오를 다졌다.
적의 피를 손에 묻힐 각오를.
* * *
경기도 평택시 외곽, 영일 길드 소유 던전.
이곳은 동굴형 던전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띤다.
긴 복도 건너, 보스룸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입구 근처에 몰려 있는 일반 몬스터만 처치해 두면, 그곳을 휴게실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쇼파, 테이블 등 휴식을 위한 가구들이 갖춰진 그곳.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수 형님 잘 부탁합니다.”
“나만 믿어라, 동식아. 형 별명이 뭔지 아냐? 발가락 살인마 아니냐.”
“발가락 살인마요?”
“그래, 인마. 얼음 마법으로 발가락을 얼리는 거야. 그리고 눈앞에서 하나씩 똑똑 떼는 거지. 3개만 떼잖아? 흐흐흐, 그럼 백이면 백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빌게 되어 있어.”
“오- 역시 경수 형님! 형님만 믿습니다.”
박동식.
그리고 영일 길드 소속 36레벨 헌터, 조경수였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 아이템 하나 장만했는데, 그놈한테 써먹어 봐야겠다.”
“새 아이템이요?”
“그래, 이거. 속성 증폭 지팡이. 속성 공격력을 10%나 증폭해 주는 물건이야. 이번에 큰맘 먹고 하나 질렀지.”
“발가락 더 잘 떨어지겠네요, 크크.”
“아직 개시도 안 했는데, 발가락부터 떼게 생겼네, 흐흐. 근데 동식아.”
“예, 형님.”
“이거 길드장님 모르시지?”
“당연하죠. 형님이랑 밖에 있는 고민오밖에 모릅니다.”
냉혹한 길드장도 아들에게는 약하다.
박동식의 비밀 하나쯤 쥐고 있으면, 앞으로 길드 생활에 제법 도움이 될 터.
조경수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이런 일은 믿을 만한 사람만 알아야 해.”
“아, 맞다. 그놈 작업하러 간 성국이 형도 알긴 알겠네요.”
“아, 성국이? 그 새끼 싸움은 더럽게 못 해도, 납치 하나는 잘 하지.”
김성국 정도야 언제든 제어할 수 있어.
조경수가 생각했다.
“그래서 납치를 부탁했죠. 그리고 사람 조지는 건 경수 형님이 훨씬 잘하시니까, 형님께 부탁드린 거고요.”
“흐흐, 당연하지. 그나저나 성국이 그 새끼, 저번에 까불다가 나한테 처맞았거든. 그 뒤로 피해 다니던데, 나 보면 깜짝 놀라겠다?”
“그래요? 성국이 형한테는 경수 형님 오신다고 말 안 했는데, 잘했네요.”
“그래. 근데 이 새끼 올 때 안 됐어? 왜 이렇게 늦어?”
“곧 오겠죠. 좋은 술 준비해 뒀으니, 그전까지 한잔하시고, 푹 쉬고 계십시오.”
“오냐. 우리 동식이밖에 없다.”
* * *
수호는 택시를 잡아 타고 평택에 도착했다.
먼 곳에서 내린 뒤,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었다.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군.』
“아까 그놈 말대로, 정말 작정하고 치워 뒀나 본데.”
건물도 차도 없다.
덕분에 CCTV 걱정은 덜었다.
『납치를 사주한 놈만 죽이면 깔끔히 끝나겠군.』
“그러면 좋겠다만.”
수호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잠시 후, 던전이 보였다.
희끗한 빛무리 한 겹.
들은 대로 1성 던전이었다.
『던전 앞에 누가 있다.』
“그놈 똘마니야.”
실루엣만 보이지만 수호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박동식의 부하, 고민오였다.
『어떻게 할 거지?』
“조용히 처리하고 들어간다.”
수호는 측면으로 우회해 고민오에게 접근했다. 고민오는 수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 씨발, 더럽게 안 오네. 다리 아파 뒤지겠네. 대충 빨리 잡아다가 적당히 죽이고 치우지, 씨발. 하여튼 병신 새끼 하나 처리하는데 오래도 걸려요.”
투덜투덜.
고민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너희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 들었으니.’
수호가 바닥을 박찼다.
차원 보따리에서 빠져나온 [화염 포마검]이 고민오의 등을 찔러 갔다.
‘억울해하지 마라.’
푹-!
“컥-”
고민오가 단숨에 절명했다.
수호는 사체를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기분 더럽네.”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각오했다고는 하나, 첫 살인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때 발룡이가 수호에게 질문했다.
『치킨은 언제든 배달시킬 수 있는 건가?』
뜬금없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약속한 치킨은 언제 받을 수 있지?』
“이런 미친! 내일! 내일 치킨집 문 열면!”
『본좌는 공물을 빨리 받고 싶구나.』
“하아… 고민할 기분도 안 드는구만.”
발룡이와 대화를 하니, 수호는 고민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덕분에 살인의 더러운 기분이 한결 가시는 느낌.
“가자. 일 잘 끝나면, 콜라도 큰놈으로 시켜 줄게.”
『그 심연의 색을 띤 음료 말인가?』
“그래.”
『크큭, 본좌의 예지안이 말하건대, 일은 완벽히 해결될 것이다.』
수호가 한숨을 내쉰 뒤, 던전으로 뛰어들었다.
20화 한밤의 불청객(3)
『던전 밖에서 한 놈을 처리했으니, 안에는 한 놈만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발룡이의 물음에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두 놈이지?”
수호의 감각에도 분명 2명이 감지되고 있었다.
『변수군. 어쨌든 본좌는 마력이 거의 동났다는 것만 알아 두거라.』
자백 스킬로 발룡이의 마력이 바닥났다.
“생각보다 별 도움이 안 되는구만.”
『이익! 본좌 덕분에…….』
“됐고. 저쪽이 눈치채기 전에 기습한다. 일단 이거 받아 봐.”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손바닥만 한 막대를 꺼냈다.
[마비 독침]
- 마비 독이 묻은 독침을 발사하는 장치. 독침을 충전하여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아이템 등급 : 일반
- 물리 공격력 20
- 【독침 사출】
- 잔여 독침 수 2/5
『침입자가 쓰던 물건이군.』
“그래. 두 번 쓸 수 있으니까, 내가 기습하면 넌 이걸 발사해. 한 놈당 한 방씩.”
『괜찮은 작전이군. 좋다. 본좌가 힘을 보태 주지.』
“바로 간다, 준비해.”
발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가 땅을 박차고 달렸다.
타다닥-
수호는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시선을 자신 쪽으로 끌기 위함이었다.
“어?”
“저 새끼 뭐야?”
경호성이 들려왔다.
‘박동식은 발룡이에게 맡긴다.’
박동식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옆에 있는 놈이다.
수호는 감각 스탯이 전해 오는 느낌에 따라 조경수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 솥뚜껑 새끼가!”
박동식이 그제야 수호를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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