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20

인사하고, 대화하고, 마주 웃었던 누군가가 마물에게 희생당하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
비록 얄팍한 인연일지라도.
설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
그것이 세상 모두를 마족의 손에 잃은 윌슨의 집념이었다.
“크르르르-”
고릴라처럼 생긴 마물이 아줌마 앞에서 팔을 들어 올렸다.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앗-!”
윌슨이 바닥을 박차며 가속했다.
가슴에 박힌 마력 융합로가 맹렬히 회전하며 출력을 높인다.
주먹이 아줌마의 머리를 수박처럼 터트리기 직전.
윌슨이 끼어들었다.
왼팔을 들어 놈의 주먹을 막았다.
쾅.
충격으로 무릎이 반쯤 굽는다.
발아래 아스팔트가 저적 하고 갈라진다.
윌슨이 굽은 무릎을 힘줘 세웠다.
왼팔을 민다.
“죽어라!”
오른 주먹으로 마물의 가슴을 쳤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고강도 특수 합금 주먹이 마물의 가슴을 후려쳤다.
푸콰아악-!
마물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등 뒤로 핏물이 치솟았다.
털썩.
곧이어 놈이 쓰러졌다.
윌슨이 발을 들어 놈의 대가리를 밟아 으깼다.
“으으- 육박전은 체질에 안 맞아.”
윌슨이 삐걱거리는 팔을 수습하며 뒤돌아봤다.
양수정이 아줌마를 안아 들고 있다.
‘그래도 뛰어나오길 잘했어.’
아줌마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윌슨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양수정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것은 그때였다.
“뒤를 봐요!”
그녀가 고함쳤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감지 센서가 그제야 무언가를 감지했다.
윌슨이 고개를 돌렸다.
왼손바닥을 내밀어 방비하며 오른손으로는 얼굴을 가렸다.
덥썩.
눈앞이 깜깜해졌다.
곧바로 적외선 모드가 켜지며 앞이 보인다.
윌슨이 상황을 파악했다.
‘물렸어.’
마물의 흉측한 혓바닥이 보였다.
끔찍한 냄새도 올라왔다.
‘상반신이 집어 삼켜진 거야.’
허리쯤에서 통증 센서가 작동한다.
날카로운 이빨이 허리를 끊으려 들었다.
다행히 특수 강화 합금이 절단을 버텨 냈다.
그러나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들썩.
몸이 들리더니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윌슨의 몸이 잘리지 않자, 마물이 윌슨을 문 채 대가리를 흔든 것이다.
퍽.
하체가 딱딱한 곳에 부딪혔다.
윌슨이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제길, 손이 안 움직여.’
끈적한 침이 본드처럼 윌슨의 몸을 결박했다. 손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물의 스킬인 것 같았다.
퍽.
그사이 하체가 몇 번 더 바닥에 부딪혔다.
윌슨이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윌슨에게도 비장의 무기 하나쯤은 있다.
우웅-
윌슨이 왼손이 떨린다.
달아오른다.
그러더니.
콰아아아아앙-!
폭발했다.
몬스터의 입이 폭발에 의해 터져 나갔다.
풀려난 윌슨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아, 부서졌네.’
윌슨의 왼손은 발사해 폭발시킬 수 있는 비장의 무기였다.
하나 자기 얼굴 앞에서 터트리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음성 모듈이랑, 청각 센서, 균형 센서, 에 또…….’
그 탓에 머리 쪽에 있는 여러 기능이 고장 났다.
오른손바닥으로 가린 덕에, 얼굴 피부가 심하게 상하지 않은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았으니 됐어. 아줌마는 무사한가?’
윌슨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양수정이 후다닥 달려와 윌슨을 부축했다.
뭐라고 소리치는데 입 모양만 보인다.
청각 센서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안 죽은 게 천만다행,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짓을. 꺄악- 팔이 떨어졌어! 뭐 이 정도 내용인가?’
윌슨이 양수정의 입술을 읽었다.
그리고 입을 벙긋거려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거 의수義手예요. 의수!’
사실 의수가 아니라 마도 공학으로 만든 로봇 팔이지만, 대충 둘러댔다.
“아…….”
간신히 알아들은 양수정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애매했던 탓이다.
‘들어가요.’
윌슨이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갔다.
슈퍼마켓 아줌마가 윌슨의 팔을 가리키며 울먹였다.
윌슨은 다시 입을 벙긋거렸다.
‘의수예요. 고치면 돼요. 하하.’
웃는 표정도 지어 보였다.
아줌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지만 윌슨은 즐거웠다.
‘날 위해 잠깐이라도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살렸잖아? 그럼 잘한 거지 뭐.’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다?
윌슨이 바리케이드에 기대앉으며 고민했다.
한 자루 남은 총은 아직 식히는 중.
쓸 만한 소모 아이템도 동났다.
‘이럴 때 주인공이 딱 나타나 줘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수호와 대화를 하다 멈췄었다.
중간에 무슨 말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는데…….
여하튼 지금은 대화를 재개할 방법이 없다.
【차원 전음】도 소리의 일종.
청각 센서와 음성 모듈이 부서져 버렸으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뭐, 어떻게든 버텨 보는 수밖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걸려 있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윌슨이 눈을 감았다.
공방의 설비에 원격으로 접속.
당장 쓸 만한 소모 아이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벌떡.
옆에 앉아 있던 양수정이 몸을 일으켰다.
단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아- 이럴 수가.”
양수정만이 아니다.
바리케이드 안으로 대피한 모든 주민이 겁에 질렸다.
“미, 미쳤어. 저게 뭐야?”
“저건, 저건 막을 수 없어.”
“…모두 죽을 거야.”
불안한 분위기가 윌슨에게 닿았다.
윌슨이 눈을 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을 반복하며 윌슨이 무릎에 힘을 줬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수호, 빨리 와야 할 것 같아.’
얼마 못 버틸 것 같거든.
윌슨이 손을 뻗어 기관총을 잡았다.
개머리판으로 바닥을 짚었을 즈음, 양수정이 창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벙긋벙긋.
뭐라 외친다.
여유가 없어 그런지, 입술이 읽히지 않는다.
쿵- 쿵-
지면이 떨렸다.
뭔가 큰 것이 다가오고 있다.
윌슨은 안간힘을 써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적이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총이 터질 때까지 한 발이라도 더 쏴야 한다.
‘어?’
무언가 이질감이 시선을 자극한다.
윌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서쪽 하늘 한구석, 검은 점이 찍혀 있다.
점이 점점 커진다.
‘아!’
윌슨이 바닥에 앉았다.
“부상이 심해요. 당신이라도 피해요. 어서요!”
양수정이 수선을 떤다.
어째선지 입술이 선명하게 읽힌다.
윌슨은 양수정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제 됐어요.’
“뭐라고요? 어서 일어서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죽는단 말이에요.”
윌슨은 오히려 누워 버렸다.
‘됐다니까요. 주인공이 왔거든요.’
윌슨이 하늘을 보며 그렇게 벙긋거리는 순간.
『크롸롸롸롸롸롸롸롸-』
지상 모든 생물을 두려움에 빠트리는 포효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117화 맞서는 자(3)
『늦으면 네 탓이니라!』
발룡이가 한껏 심통 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니야. 안 늦어.”
똑똑하고 집념까지 겸비한 윌슨이라면 어떻게든 버텨 낼 것이다.
분명히 그래야 한다.
『하양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평생 파업할 줄 알아라. 흥!』
“재수 없는 소리 할 여유 있으면, 날개나 한 번 더 휘저어.”
『이익-』
심통을 터트릴 것 같던 발룡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나래 쳤다.
“걱정하지 마. 분명히 괜찮을 거야.”
수호가 바람을 담아 발룡이를 달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수호네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쿠콰쾅- 콰쾅-
폭음이 들려왔다.
『전투다! 마물이 잔뜩 몰렸느니라!』
협회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발룡이가 죽지가 찢어지라 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하양아!』
발룡이가 외쳤다.
발룡이의 너른 감지 범위에 하양이의 존재가 걸려들었다.
하양이는 수호의 방에 있었다.
웅크린 채, 침대 아래에서 벌벌 떨었다.
마기 탓이다.
마기에 잠식당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하양이를 옥죄고 있었다.
발룡이가 분노했다.
『감히!』
어려서부터 홀로 자랐던 발룡이였다.
그랬기에 마인의 손에 떨어졌던,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어린 드래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하양이를 괴롭히는 마물의 무리.
발룡이는 저것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리라 결심했다.
고오오-
드래곤 하트가 맹렬히 회전한다.
솟아오른 마력이 드래곤 피어가 되어 하늘을 뒤흔든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
부르르.
하늘 아래 모두가 몸을 떨었다.
수호가 외쳤다.
“갈겨 버려!”
발룡이가 입을 벌렸다.
두려움에 몸이 굳은 마물들을 향해 브레스가 뿜어졌다.
화르르르르르르르-
[마기에 물든 송곳니 고릴라를 처치했습니다.]
[마기에 물든 송곳니 고릴라를 처치했습니다.]
.
.
.
가게로 몰려들던 마물들이 줄줄이 녹아내렸다.
한 마리만 빼고.
『감히 버텨?』
그것은 거대한 유인원 형태의 마물이었다.
척 보기에도 보스나 이레귤러처럼 보였다.
“잘했어. 저놈은 내가 처리할게.”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드래곤 스탭】을 발동.
퉁-
허공을 박차고 아래로 가속했다.
브레스에 그을린 거대한 고릴라의 모습이 시야 안에서 급격히 커졌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몸을 힘껏 회전시켰다.
후웅-
한 바퀴, 앞으로 크게 돌았을 즈음.
고릴라의 대가리가 코앞에 다가왔다.
원심력에 의해 가속한 망치가 그곳으로 떨어져 내린다.
간신히 브레스의 충격에서 벗어난 고릴라가 손을 들었다.
‘5연격!’
새파랗게 마력을 머금은 망치가 마물의 손바닥에 적중했다.
콰콰콰과광-!
놈의 두꺼운 손이 대번에 짓이겨졌다.
뒤이어 두개골이 산산이 조각났다.
풀썩.
기다란 이빨을 들이대 보지도 못한 채.
대가리가 삭제된 마물이 땅에 몸을 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기에 물든 보스 몬스터 검치 고릴라를 처치했습니다.]
* * *
잔존하는 마기까지 깔끔히 처리한 후.
수호가 바리케이드로 들어섰다.
“오- 맙소사! 거대한 놈이 죽었어!”
“사,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고맙습니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왜 신을 찾아? 저분한테 감사해야지. 감사합니다, 헌터님.”
“헌터님, 정말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 발룡아, 너는 하양이한테 가 봐.
『알았느니라.』
발룡이가 투명화한 후, 가게 안으로 향했다.
수호는 들려오는 인사를 무시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누워 있는 윌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윌슨!”
수호가 투구를 젖히며 윌슨에게 달려갔다.
윌슨이 오른손을 들었다.
왼팔과 얼굴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팔이 부서지는 바람에 사람들한테는 의수라고 둘러댔어, 하하. 음성 모듈이 같이 부서져서, 차원 전음으로 대답하지 못했어. 미안해.’
“미안하긴, 내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
‘아니라네, 친구. 충분히 멋있는 타이밍이었다고.’
수호가 윌슨의 몸을 살폈다.
윌슨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고칠 수는 있는 거지?”
‘물론.’
자신 있는 표정과 함께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수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일단 여기 수습 좀 할게. 잠깐만 기다려.”
‘다녀와, 친구.’
수호는 윌슨을 가게 안 소파에 옮겼다.
가게 바닥에 [미완성 최상급 은폐 결계 생성기]를 설치했다.
우우웅-
가게를 중심으로 반경 30m의 결계가 펼쳐졌다.
누군가 눈빛을 빛내며 다가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 양수정 헌터님. 여기 계셨군요.”
“네, 가게에 들렀다가 일이 터지는 바람에… 근데 방금 그건 뭔가요?”
결계 설치하는 걸 본 모양.
양수정이 [불굴의 마체테]를 볼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히 얻은 결계 생성기입니다. 막 안쪽은 몬스터가 인식하지 못해서 안전해요.”
“대, 대단하네요. 대체 그런 물건을 어디서 구하셨어요? 혹시 팔지는 않나요?”
양수정이 괴상한 소리를 낼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네, 팔지는 않아요.”
“…그렇군요.”
아쉬운 표정을 짓는 양수정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가 윌슨을 데리고 2층에 잠깐 다녀와야 하거든요. 윌슨의 여벌 의수가 거기 있어서요. 그동안 주민들 좀 돌봐주실 수 있을까요? 결계에 대해서 설명하면, 안심할 거예요.”
양수정이라면 제법 믿을 만하다.
아이템에 대한 괴벽이 있지만, 그렇다고 훔치거나 좋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알았어요. 맡겨 주세요.”
양수정이 흔쾌히 대답했다.
수호는 윌슨을 데리고 2층 공방으로 향했다.
.
.
.
얼마 후, 2층 공방.
윌슨이 부서진 음성 모듈과 청각 센서를 교체했다.
다행히 미리 만들어 둔 것이 있었다.
“속이 다 시원하군, 하하. 역시 사람은 말을 하고 살아야 해.”
“다행이야. 팔은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거지?”
“응, 팔은 만들어 둔 게 없어서. 그래도 오늘 안에 다시 만들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잠깐 밖에 다녀올게. 상황 파악 좀 하려고.”
“어서 가 봐.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죽겠다고.”
윌슨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는 맡길게.”
수호가 계단을 내려갔다.
협회로 가는 것이 그나마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에 좋을 터.
가게를 나선 수호가 협회를 향해 달렸다.
* * *
협회 건물 입구.
“왼편 뚫린다! 막아!”
소리친 신성현이 칼을 길게 휘둘렀다.
스으으앙-
칼날을 휘감은 검기가 송곳니 고릴라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한쪽 팔이 땅에 떨어졌다.
신성현이 혀를 찼다.
‘쯧, 얕았어.’
치명상은 아니지만, 전투력을 크게 떨어트릴 만한 상처였다.
하나 송곳니 고릴라가 마기에 물든 지금은 아니었다.
꾸물꾸물.
놈의 어깨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상처를 막았다. 그리고 길게 늘어나 마치 채찍처럼 흐느적거렸다.
마기의 채찍을 팔 대신 휘두르며, 놈이 움직였다.
‘하필 협회장님이 안 계실 때…….’
협회 최고 전력인 진무백은 부재중.
공교롭게도 던전을 닫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신성현의 팀이 협회에 있었다는 점.
비상시를 대비해 협회 건물에 몬스터 디버프 아이템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케케케이나아아인-”
어깨 잘린 송곳니 고릴라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서걱-
신성현이 다시 검기를 쏘아 놈의 목을 날렸다.
칼을 몇 번 더 휘둘러 마기마저 소멸시켰다.
“후우-”
한숨을 내쉰 신성현이 전장을 살폈다.
죽은 마물이 많지만, 이쪽의 피해도 막심했다.
‘이대로는 어려워.’
협회 주변의 민간인은 물론 헌터들까지.
모두가 협회 건물로 몰려왔다.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근처에서 가장 큰 전력이 협회인 것은 맞다.
하지만 마물 또한 대부분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 문제였다.
‘공멸할 거야.’
신성현이 파악한 적아의 전력은 백중지세.
이대로 끝까지 간다면, 양쪽 모두 전멸할 터였다.
‘그 친구라도 던전에 가지 않았으면,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의뢰를 중계하는 바람에…….
신성현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후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마력이 고갈되고 어깨도 아파 온다.
“이길 수 있어! 칼 들어!”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신성현은 오히려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칼 든 팔이 부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퍼억-
그때 몬스터 무리 저편에서 타격음이 들렸다.
핏물이 치솟았다.
퍼억-
퍼억-
연이어 소리가 들렸다.
대가리가 부서진 송곳니 고릴라가 픽픽 쓰러졌다.
두꺼운 마물의 장막 위쪽.
낯익은 무기의 모습이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망치? 저건 분명!’
신성현의 안색이 밝아졌다.
“원군이 왔다! 원군이 도착했다아아-”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헉- 헉- 저, 정말? 정말이다!”
“뒤편의 몬스터가 죽고 있어.”
“진짜로 원군이 왔다!”
헌터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원군의 전력이 예상보다 더 강했던 덕분일까.
얼마 후, 전장의 모든 마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허어- 이렇게 쉽게 끝날 전투였던가?”
신성현이 기쁨과 동시에 실소하고 있을 때, ‘원군’이 마물의 사체를 헤치고 다가왔다.
“신성현 헌터님.”
“고맙습니다, 원수호 헌터. 도와주신 덕에 간신히 살았습니다.”
신성현이 수호에게 고개 숙였다.
“오- 역시 우리 수호 씨 맞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 근처에 혼자서 전황을 뒤엎어 버릴 사람이 수호 씨 말고 누가 있겠어? 협회장님이라도 아니면 말이야.”
“수호 헌터님, 갑자기 난리 나서 놀라셨죠? 가게는 좀 어떻습니까?”
“저번에 협회장님이 만나러 갔었죠? 제가 볼 때마다 들볶았습니다. 흐흐. 이번에도 기대하세요.”
지난 의뢰에서 연을 맺은 신성현의 파티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옷에 피칠갑을 안 한 사람이 없다.
싸움이 치열했던 만큼, 그들의 감사에도 진정이 담겨 있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수호가 마주 인사를 건넸다.
신성현이 수호에게 손짓했다.
“여기 정리는 저 녀석들에게 맡기고,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다.
수호가 옳다구나 하고 수락했다.
* * *
잠시 후.
신성현과 수호는 협회 1층, 빈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수호가 먼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신성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공격당하는 바람에 저희도 아직 정확한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크지 않은 시차를 두고, 전국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방금 협회를 공격한 몬스터… 아니, 마물들도 근처의 던전에서 튀어나온 것들입니다.”
신성현은 몬스터에서 마물로 단어를 바꾸었다. 수호가 마물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호는 자신도 전할 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 일과 관련해서 단서가 있습니다.”
“단서요?”
“네, 의뢰로 간 던전에서 천풍 길드의 이낙길이란 자가 이상한 짓을 벌였습니다. 그 바람에…….”
수호가 천풍 길드 의뢰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이낙길의 이상한 행동.
그의 입안에 열렸던 차원문.
그 뒤 치른 마기에 물든 몬스터와의 전투까지.
설명을 마친 수호가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도,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 일인 것 같습니다.”
“설마! 지금의 변고가 누군가 의도한 일이란 말씀입니까?”
“던전에서 나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럴 수가… 아! 혹시 전에 말씀하셨던, 마족이란 놈이?”
상왕련에서 육경환을 처치한 후, 수호는 마족과 종복에 관해 협회에 전했었다.
“아마 마족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만한 규모로, 그것도 드래곤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정교한 수작이라면, 아무 마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그럼……?”
“종복이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족이 차원을 침공하는 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이 뭔지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임은 틀림없다.
노움 차원에서는 그랬다.
수호가 마기를 발견한 나머지 차원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직은 마족까지 나타날 시기가 아니야.’
아니어야 해.
수호가 염원하듯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방문이 열렸다.
“종복이라고? 그 이야기 다시 한번 자세히 해 보게.”
협회장 진무백이 투기를 줄줄이 뿜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118화 맞서는 자(4)
방안을 휘도는 강렬한 투기.
수호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우우웅-
몸속에서 【차원 호신무】가 흐름을 가속했다.
몸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군. 미안하네. 급히 오는 바람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어.”
협회장이 뿜어내던 투기를 가라앉혔다.
수호의 몸에서도 자연스레 기운이 갈무리됐다.
“괜찮습니다. 근데 오시는 길에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다스리지 못한 투기.
옷 곳곳에 엉겨 붙은 핏자국.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던전을 닫고 나오는 길에 마물이 날뛰는 걸 보았네. 오는 내내 싸웠지.”
“그러셨군요.”
협회장도 수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셈.
단지 협회장은 던전 안에서 이상한 수작에 노출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종복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보게. 자네가 여기 와 있다는 말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해 뭔가 알고 있다는 소리일 테니.”
협회장이 상황을 냉철하게 추리해 냈다.
“천풍 길드 던전에서 이낙길이란 자가…….”
수호가 좀 전에 신성현에게 했던 설명을 재차 반복했다.
“제기랄. 내 언제고 어느 미친놈이 던전 브레이크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방법을 찾을 것 같더라니.”
그게 하필이면 마인이었어.
협회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몸에서 투기가 다시 뭉클 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옆에서 신성현이 끼어들었다.
“협회장님, 원수호 헌터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천풍 길드를 조사해야 합니다. 아키라 길드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래야지. 천풍이든 아키라든, 누구든 이번 일의 배후가 되었다면…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지.”
협회장이 살기를 뿜어 댔다.
신성현이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협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이번 사태를 최대한 빨리 막는 게 급선무겠지. 브레이크가 발생한 던전의 등급과 위치는 파악됐나?”
“협회로도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확실한 파악이 안 됐습니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신성현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협회장이 수호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할 것이 있어 보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수호의 말에 협회장이 입을 뗐다.
“자네, 엄청나게 강해졌군.”
가게에서 만났을 때는 힘을 가늠할 만한 일이 없었다.
한데 조금 전, 다스리지 못한 투기를 방비하는 모습을 본 후.
협회장 진무백은 깨달았다.
‘승패가 가늠되지 않는다니, 허허.’
수호와 싸운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수호를 눈 아래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습니다.”
“강할 거로 예상은 했네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군. 놀라워.”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을 수습하는데 좀 도와주게. 일이 끝나면 뭐든 주겠네. 협회에서 줄 수 있는 거라면.”
협회장이 부탁했다.
수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버스에 탄 유치원생을 구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마음먹은 생각이 있다.
수호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그날’의 꿈.
갑자기 변해 버린 꿈에서 어머니는 말했다.
- 사람들을 지켜 주렴.
그것이 예지몽인지, 수호의 심리가 만들어 낸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수호에게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꿈에서 받은 부탁이라도, 들어드려야겠지?’
게다가 윌슨의 세상이 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수호다.
‘마인이 활개 치도록 둘 수도 없으니,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지구가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수는 없다.
손익도 살아갈 세상이 존재할 때야 따지는 것이니까.
“그 말은… 대가 없이 도와준다는 소리인가?”
“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니까요.”
“고맙네. 내 개인적으로라도 신세를 갚겠네.”
협회장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느껴진다.
수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혼자 다니겠습니다.”
“그러게. 자네 전력이면 혼자서도 충분할 거야.”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상황 파악되는 대로, 브레이크가 일어난 곳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알겠네. 바로 보내 주지.”
수호가 일어섰다.
회의실에서 나오면서 발룡이를 불렀다.
- 발룡아.
『왜 부르는 것이냐?』
- 이쪽으로 와.
『본좌는 하양이를 돌봐야 하느니라.』
- 옆에 붙어 있는다고 다가 아니야.
『무슨 말이냐?』
-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편이 하양이에게도 나을 거야. 주변 한번 쓸어버리자.
『으음, 알겠다.』
수호가 협회 건물 입구로 나왔을 때, 저편에서 발룡이가 날아들었다.
“어, 어어? 저게 뭐야!”
“몬스터다! 전투 준비!”
“젠장 또?”
“일어나, 전투 준비!”
휴식 중이던 협회 헌터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타타타다닷-
수호가 빠르게 달려 그들의 앞을 가로질렀다.
바닥을 박차고 도약.
발룡이의 등에 내려섰다.
『이제 자연스럽게 본좌의 등에 올라타는구나. 쳇, 이래서 애초에 태워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발룡이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수호가 말했다.
“가자, 근처부터 한 바퀴 쭉 돌자.”
발룡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협회 헌터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수호 씨 맞지? 저게 수호 씨 드래곤이었어?”
“언제 저렇게 커졌지?”
“그러게, 저번엔 강아지만 했던 것 같은데.”
“근데 대박 멋있지 않냐?”
“와 씨, 부럽네.”
“어디서 드래곤, 아니, 와이번이라도 한 마리 못 구하나? 나도 소환수 타고 싶다!”
“소나타.”
“…지금 그거 혹시 개그 친 거냐? 설마 아니지? 너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 * *
일본 모처의 빌딩 최상층.
‘어르신’ 무토 다다노리가 소파에 앉아 TV를 응시했다.
외신 기자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국에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로 대한민국 전역이 홍역을 치르는 가운데… 깨어진 던전의 수는 100군데 이상으로 추정… 정확한 사상자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군부대와 헌터들이 사태 진압을 위해 노력 중…….』
다다노리가 웃었다.
자르륵.
좋은 기분을 대변하듯, 호두 알이 손아귀 안을 구른다.
“실험체가 문제없이 잘 작동한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옆에 시립 한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연한 일. 위대한 분의 권능이 담겼으니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시한 부하가, 슬그머니 다다노리의 의중을 물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동을 확인했으니, 지시하시면 언제든 거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낄 것 없지. 내친 김에 바로 진행한다. 나머지 국가에 준비된 것들도 당장 작동시켜.”
“예!”
부하가 방을 나갔다.
다다노리의 눈가에 기이한 열망이 일렁였다.
‘위대한 분이 오실 길은 내가 연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콰직.
손아귀에서 호두가 깨어졌다.
* * *
한강 변, 서울 최고층 빌딩 옥상.
어스름한 하늘을 가르고 칠흑같은 그림자가 날아와 착지했다.
『이젠 더 날기도 힘들다.』
“고생했어. 쉬어 둬.”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차르륵.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도 갈무리했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피로가 약간 풀렸다.
‘각성하고 나서 이렇게 지친 적은 처음이네.’
온종일 전국을 날아다니며 수백 번의 전투를 치렀다.
대상은 주로 3성 이상의 몬스터.
1, 2성은 군부대에게 맡겼다.
도심에 화력을 쏟아부을 수는 없으니, 화력을 제대로 투사하지 않으면 처치하기 힘든 3성부터는 헌터들의 몫이었다.
수호는 그중에서도 까다로운 곳만 골라 지원했다.
서울에서 경기도를 거쳐, 충청, 전라, 경상을 돌고 다시 서울로.
높은 체력과 재생력을 겸비한 수호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헥- 헥-』
그것은 굉장한 맷집을 가진 발룡이도 마찬가지.
녀석도 혀를 길게 빼고 바닥에 축 늘어졌다.
‘슬슬 정리되는 추세인 듯한데, 집에 돌아가도 되려나?’
협회에서는 브레이크가 일어난 던전의 위치를 파악해, 핸드폰으로 전송해 줬다.
한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
사태가 조금씩 진정된다는 증거다.
‘후우- 피해가 얼마나 될지…….’
전국을 돌며 목격한 참상이 떠올랐다.
수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룡이가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있다.』
“응, 알아. 건물 안에… 어?”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진즉 알고 착륙했다. 한데 가만 보니, 빌딩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딸깍.
답답하게 생긴 사각형의 구조물이 열리더니, 안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가 말했다.
“드, 드래곤? 오- 맙소사!”
그러더니 깜짝 놀라며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반응할 틈도 없이 코앞까지 달려온 남자가 말했다.
“팬입니다!”
* * *
휴대폰 화면 안.
영상이 재생됐다.
콰르르르르르-
발룡이가 브레스를 뿜는다.
몬스터가 불타 소멸된다.
콰직!
그사이 움직인 수호의 망치에 보스 몬스터의 대가리가 박살 난다.
영상 아래,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 대박! 드래곤 준나 멋짐!
└ 브레스 엄청 세다.
└ 드래곤 라이더도 멋짐. 저 머리까지 덮는 갑옷, 저거 어디서 파냐? 진짜 간지가 좔좔 흐른다.
└ 팔겠냐? 어디 고레벨 던전 드랍템이겠지.
└ 저런 건 전 세계 어딜 가도 못 만듦.
└ 난 망치가 더 비싸 보이는데. 한 방에 못 부수는 게 없네.
└ 망치도 좋지만, 드래곤 라이더 힘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근력만 해도 내 올 스텟보다 높을 듯?
└ 스탯? 님아, 헌터면 나가서 싸워야지, 왜 여기서 댓글이나 달고 있음?
└ 나 같은 쪼렙은 싸돌아다니다 뚝배기 깨짐ㅠ
팬이라며 나타난 남자는 빌딩 옥상에 설치된 비행 몬스터 감지센터 직원이었다.
10년 전 1차 격변 후 설립된 곳으로, 워낙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수호도 모르고 있었다.
수호는 남자에게 자신의 팬이 된 연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영상과 사진.
오늘 하루 수호와 발룡이가 활동한 증거들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었다.
1. 드래곤
2. 드래곤 라이더
3. 드래곤 라이더 정체
4. 드래곤 얻는 법
포털 사이트 검색어 차트가 저럴 정도니,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노출을 각오하고 벌인 일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더 심한걸?’
던전에서 나와 발룡이의 등에 몸을 실은 순간 노출은 각오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알려질 줄은.
심지어 팬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충 이유는 알겠다만.’
국가적 재난 상황.
희망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어 국민의 시선을 돌리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앞으로 좀 불편해지겠지만 감수해야지. 노출되기 싫다고, 사람들 죽어 나가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진짜 감춰야 할 것은 발룡이가 아니라 차원문이다.
그러니 ‘드래곤 라이더’라는 발룡이 취향의 별명도, 의도치 않게 얻은 유명세도 받아들여야 한다.
‘유명해지면, 얻는 것도 있을 테고.’
마인이 강수를 둔 이상, 수호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외부의 압박과 갈등이 없으란 법이 없다.
오늘 얻은 유명세는 수호의 힘이 되어줄 터였다. 비록 거품과도 같은 대중의 인기일지라도 말이다.
“으흐흐- 드래곤 라이더의 친필 사인!”
연습장에 방금 만든 사인을 받고 좋아하는 팬을 내버려 둔 채.
수호가 핸드폰을 조작했다.
수많은 관련 기사 속에 또 다른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그분이 갑자기 나타나서, 몬스터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아빠가 보낸 졸병 아저씨가 괴물을 팍 때려잡았어요.”
“아저씨,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이 와중에도 재바르게 직업 정신을 발휘한 기자가 있었던 듯.
수호가 구한 유치원 선생님과 아이들의 인터뷰가 떴다.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서 뛰어내려, 몬스터를 처치하는 장면도 첨부됐다.
멀리서 찍은 듯 흐릿했지만, 인터뷰와 조합되자 그럴듯한 영상이 완성됐다.
└ 저는 버스에 타고 있던 아이의 엄마입니다. 드래곤 라이더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는 하나뿐인 아이고,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한평생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 저분이 죽을 뻔한 제 동생도 구해 주셨어요. 학교에 친구들과 함께 고립되어 있었는데, 드래곤 라이더님 덕분에 살아 돌아왔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 아까 해운대에서 몬스터 잡아 주신 분 같은데,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연락처를 가르쳐 주시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
.
.
전투보다 인터뷰에 초점을 맞춘 기사였다.
그 때문인지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 대신, 감사와 칭찬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다행이야.”
던전에서 때맞춰 나올 수 있어서.
발룡이가 등을 허락해 줘서.
내게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고 뭐고, 이제 집에 좀 가자. 배도 고프고 하양이도 보고 싶구나.』
발룡이가 수호의 감상에 초를 쳤다.
“알았어. 앞으로 1주일 동안은 뭐든 시켜 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무제한으로.”
수호가 따뜻한 눈으로 발룡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등에 탔다고 해서 머리를 마음대로 쓰다듬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투덜거리면서도 발룡이는 머리를 빼지 않았다.
피곤해서 머리 치울 힘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란 것을 수호는 알았다.
“그래, 가자. 더는 연락이 없으니 집에 가서 쉬고 있…….”
수호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신성현 헌터?’
왜 직접?
이제껏 몬스터의 위치는 협회 직원이 메시지로 전송했었는데?
‘이제 집에 돌아가란 말을 하려는 건가?’
수호가 전화를 받았다.
“원수호 헌터, 강원도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5성입니다!”
수호의 기대를 산산 조각 내는 소식이 들려왔다.
119화 맞서는 자(5)
5성 던전 브레이크.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수호가 황급히 되물었다.
“5성 던전이라고요? 어째서 5성에서 브레이크가……?”
수호가 생각하는 이번 난리의 원인은 마인의 수작이다. 이낙길이 그러했듯, 코어를 오염시키는 것이 구체적인 방법이고.
‘5성 던전의 코어를 오염시켰다고? 어떻게?’
2차 격변 후, 파워 인플레이션이 생기는 추세다.
하지만 5성 던전은 여전히 만만한 곳이 아니다. 국내에 5성을 공략할 수 있는 길드는 몇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5성 던전 브레이크라니?
수호가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곧 신성현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카루스 길드의 정선 5성 던전이 브레이크를 일으켰습니다. 자세한 원인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카루스 측에서 자체적으로 대처하고 있고, 협회장님도 급히 그곳으로 출발하셨지만… 원수호 헌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강원도까지 가장 빠른 교통편은 헬리콥터다.
그보다 발룡이가 몇 배는 빠르다.
“알겠습니다. 위치 전송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원수호 헌터. 부디…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십시오.”
“예,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룡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어째서 또! 이제 치킨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었건만.』
“미안, 그래도 하던 일은 마무리하자.”
무려 5성 던전이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양이만 아니었어도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을. 쳇, 보상은 제대로 받을 줄 알아라.』
“고마워.”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 올라섰다.
발룡이가 지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화이팅! 힘내세요!”
1호 팬 아저씨가 뒤에서 손을 흔들며 수호를 응원했다.
* * *
두두두다다다다-
헬기 뒷자리.
거친 로터음을 들으며 태양 일보 기자 권인구가 한탄했다.
‘내 신세가 그렇지.’
정치부 기자였던 그는 소신껏 내지르고 보는 성격 탓에 윗선에 밉보였다.
결과는 좌천.
이제 정선의 카지노에서 도박 중독을 취재하는 신세가 됐다.
기자 생활 15년.
남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지위와 텅 빈 통장과 머리숱뿐이었다.
한데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5성 던전 브레이크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에휴…….”
권인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요? 모처럼 특종 기회잖아요!”
권민주.
입사 6개월 차의 신입.
좌천당했지만 취재 능력만큼은 배울 만한 권인구이기에 회사에서 붙인 부사수다.
의욕을 상실한 권인구도 종씨이자 똘똘한 후배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권인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썩 살갑지 않았다.
“특종 같은 소리하네. 저게 무슨 특종이야?”
“강민제잖아요. 대한민국 최강 헌터 강민제가 5성 던전 브레이크를 막고 있다고요. 당연히 특종이죠.”
한국 최초의 5성 던전 공략자.
대중이 생각하는 대한민국 최강자.
대한민국 3대 길드의 하나인 이카루스의 마스터 강민제.
오성이나 백호에도 강민제에 버금가는 강자가 있다. 협회장 진무백도 만만찮다.
직접 붙어 보기 전까지는 누가 더 강한지 모른다.
그럼에도 대중은 강민제를 첫손에 꼽는다.
가장 화려하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빠르게 최고의 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배의 핀잔에도 권인구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헌터가 몬스터 잡는 건, 자기 일하는 거지. 그걸 특종이랍시고 떠들 이유가 어디 있어?”
“자기 일한다고 특종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특종이에요?”
권인구가 물끄러미 권민주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목소리가 한결 무겁다.
“인류를 위해 목숨 걸고 전장에 나서는 위대한 영웅. 넌 정말 강민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그런 숭고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여기 와 있다고?”
“…….”
권민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와, 대박!
강민제 잘 싸운다.
끝내준다.
돈도 많이 벌겠지?
저 아이템은 얼마일까?
나도 각성해서 강민제처럼 되고 싶다.
그녀가 찍어 갈 영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대단한 싸움도, 제삼자에게는 흥밋거리에 불과했다. 그것이 수많은 목숨이 달린 전투라고 해도 말이다.
“아이고, 할머니. 그렇다고 너무 풀 죽지는 마시고요. 할머니가 기운을 차리셔야 이 늙은 손주도 힘을 내죠.”
권인구가 농을 걸었다.
나이는 권인구가 많지만, 촌수를 따지면 권민주가 할머니뻘인 탓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선배!”
“예, 예. 암요.”
두 선후배가 투덕거리는 사이, 헬리콥터가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스톱! 기사님, 여기서 멈추죠.”
권인구가 헬리콥터를 멈춰 세웠다.
“선배, 더 가도 되지 않아요? 저 앞에 다른 방송사 헬기들 많은데요?”
“됐어. 괜히 더 다가가면 위험해.”
“그러다 또 부장님한테 깨지실 텐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 내가 그런 거 겁낼 거 같냐?”
“하긴 선배는 머리숱이랑 겁만큼은 제 주변에서 제일 없는 사람이었죠.”
말을 해놓고 권민주는 의아해졌다.
‘그렇게 겁이 없는 사람이 헬기를 멀리 멈춰 세운 이유가 뭘까?’
어쩌면 정말로 오늘의 취재가 가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일지도…….
권민주가 권인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권인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친! 저거 설마…….”
놀란 권인구의 모습에 권민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민제가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한데 몬스터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서, 선배! 저거 일반 몬스터 아니죠? 보스예요? 보스도 아닌 것 같은데.”
권민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2층 건물 정도 되는 덩치의 검은색 몬스터.
그것은 언뜻 청설모나 쥐를 연상시켰다.
몸에 두른 검은 불꽃과 붉은 눈동자가 사악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일반 몬스터는 당연히 아니고, 여기 보스도 아니야. 저건… 이레귤러야. 제기랄!”
정선 5성 던전은 이미 이카루스 길드에 의해 공략된 곳.
출몰하는 몬스터의 정보도 공개됐다.
정보 속에 저런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레귤러요? 설마 보스보다 더 강한 걸까요?”
“아마도.”
보스 몬스터보다 더 강한 이레귤러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2차 격변이 시작된 뒤에는 빈도가 더 잦다.
“어? 부, 불길이!”
권민주가 미쳐 말을 끝내기도 전.
콰르르르르르르-
굉음이 들리더니 이내 온 시야가 화마에 휩싸였다.
“젠장, 강민제와 몬스터가 화력 대결을 시작했어.”
화신火神 강민제의 불꽃.
척 보기에도 불길한 이레귤러 몬스터의 검붉은 불길.
그 두 화기火氣가 전력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후끈.
열기가 밀려왔다.
“열기가 너무 강한데,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까요?”
권민주가 우려의 소리를 냈다.
권인구가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화르르르-강민제의 전신에서 한층 더 강한 화염이 치솟았다.
그가 마치 불로 이뤄진 거인처럼 보였다.
불 거인의 손에서 한 자루 불의 검이 솟아났다.
그것이 몬스터를 찔러 갔다.
청설모 몬스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스퀴이러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른 몬스터가 꼬리를 휘둘렀다.
솔방울처럼 생긴 검은색 불꽃이 강민제를 향해 발사됐다.
쿠콰아아아아앙-!
두 불덩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백중지세.
어느 쪽도 밀리지 않는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이곳저곳 옮겨붙은 불길이, 산기슭에 지어진 호텔 쪽으로 번졌다.
하지만 헬기에 탄 선후배 기자는 호텔을 걱정할 처지가 못 되었다.
강한 화기가 헬기를 덮쳤기 때문이다.
펑-
퍼펑-
현장에 가까이 있던 헬기들이 차례로 불길에 휘말려 폭발했다.
“으악-!”
권인구가 탄 헬기 조종사가 비명을 지르며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그나마 후방에 위치한 덕분에 폭발은 면했지만 후폭풍 탓에 조종이 안 된다.
“꺄아악-”
“민주야!”
권인구가 권민주를 부둥켜 안았다.
등을 불길 쪽으로 돌렸다.
권인구의 품속에서 권민주가 생각했다.
‘억울해.’
결혼도 못 해 보고 죽게 생겼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은 적당히 하고 연애라도 하는 건데.
‘하필이면 이 머리숱 없고, 겁도 없고, 돈도 없고, 눈치도 없고, 마음만 따뜻한 남자한테 안겨서 죽을 팔자라니.’
권민주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권인구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덜 뜨거워?’
눈꺼풀을 찌르던 열기와 빛이 사그라들었다.
권민주가 눈을 살짝 떴다.
깜깜하다.
‘아, 열기에 눈이 타 버린 건가?’
눈앞이 온통 검었기에, 권민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귓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쳇, 이 하찮은 것들, 앞으로 한평생 본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니라. 떠올라라!』
사정없이 흔들리던 헬기가 허공에 멈췄다.
그제야 권민주는 자신의 눈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래곤?”
새까만 존재가 등진 채 화기를 막고 있었다.
오늘 권민주가 인터넷을 통해 여러 번 본 영웅의 소환수였다.
『본좌는 위대한 심연의 주인이자 검은 불길의… 악! 왜 때리는 것이냐?』
“헛소리 그만해, 인마.”
그런 말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라고!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의 주인이 고개를 옆으로 내밀었다.
“드래곤 라이더!”
놀란 권민주에게 드래곤 라이더가 말했다.
“저쪽에 내려 드릴 테니, 대피하세요. 위험하니까 접근하지 마시고요.”
“예, 예! 감사합니다!”
권민주가 냉큼 대답했다.
헬기가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기슭에 내려앉았다.
“가자!”
드래곤 라이더의 신호에 따라 드래곤이 훌쩍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권민주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선배, 언제까지 사심 채우고 있을 거예요?”
“크흠. 네가 손을 안 풀기에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았지.”
그러고 보니, 권인구의 등 뒤로 돌아간 두 손이 깍지를 꼭 끼고 있었다.
권민주가 손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 이제 떨어져요.”
권인구가 떨어져 나왔다.
뒤를 힐끔 돌아본 그가 물었다.
“찍혔냐?”
“뭐요?”
“드래곤 라이더.”
“찍히긴 찍혔겠죠. 카메라는 계속 돌고 있었으니까요. 근데 아깐 특종이고 뭐고 관심 없다면서요?”
헬기에 고정된 카메라는 다행히 부서지지 않았다.
대답을 들은 권인구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정치권의 비리를 파헤칠 때나 보였던 예기가 그 속에서 번뜩였다.
“글쎄, 아깐 진짜 특종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이번엔 특종이란 소리예요?”
권인구가 강민제와 드래곤 라이더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은 특종이 아닐 것 같은데, 이쪽은 특종 같단 말이지.”
* * *
“뭐 저딴.”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부리나케 날아온 강원도 정선.
전장은 쉽게 발견했다.
환한 빛이 온 정선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 전장에 도착했을 즈음, 한 차례 큰 충돌이 발생했다.
취재 헬기가 줄줄이 폭발했다.
그나마 가장 멀리 있는 하나를 구했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몬스터는 둘째 치고, 저 호텔에 인간들이 다 타죽게 생겼구나.』
발룡이가 산기슭을 가리켰다.
불의 파도가 산기슭 호텔을 향해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왜 저런 방식으로 싸우는 거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몬스터를 유인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강민제의 전투는 그저 압도적인 불길로 적을 태울 뿐.
별다른 요령도, 배려도 없었다.
‘불길부터 막고 봐야 해.’
전투가 더 길어지면 호텔은 불탄다.
그게 끝이면 다행.
사방으로 날리는 불씨가 온 정선을 화마의 입속에 처넣을 기세였다.
“발룡아. 저 불, 끌 수 있을까?”
『본좌는 마력이 바닥이니라. 저 넓은 범위의 불을 진화할 수는 없다.』
온종일 치른 전투.
강원도까지의 강행군.
좀 전에 취재 헬기를 구하기 위해 쓴 마법까지.
발룡이의 마력이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
수호 또한 【5연격】 한 번 쓰지 못할 만큼 마력이 소모된 상태.
‘젠장, 방법이…….’
수호가 고민했다.
지금도 화염이 호텔로 다가가고 있다.
더 이상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그래,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수호가 차원 보따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120화 맞서는 자(6)
수호의 손에 영롱한 액체가 담긴 병이 들려 있다.
[타니아의 눈물]
시험의 거울 3단계를 깨고 얻은 영웅 등급 소모 아이템.
60분간 마력량과 회복률을 무려 5배.
근민체를 2배로 늘려 준다.
꿀꺽.
수호는 망설이지 않고 타니아의 눈물을 들이켰다.
귀한 물건이지만, 수많은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았다.
타니아의 눈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순간.
우우우웅-
【차원 호신무】에 의해 몸속을 휘돌던 마력의 흐름이 변했다. 말라붙기 직전의 개울물이 도도히 흐르는 급류로 바뀌었다.
‘…대박.’
그뿐이 아니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힘을 쓰라고 외치는 듯 몸에 활력이 가득했다.
수호가 뇌까렸다.
“발룡아, 높이 올라가자. 최대한.”
『알겠다.』
발룡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까마득한 위치에 다다랐을 때, 수호가 나직이 이야기했다.
“다녀올게. 쉬고 있어.”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리며 스킬을 시전했다.
먼저 【차원 호신무】에 포함된 【대기 시간 초기화】부터.
다음으로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거대화!’
증폭된 마력이 거인의 격노로 흘러 들어갔다.
수호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하아-’
【거대화】는 단순히 커지기만 하는 스킬이 아니다.
크기에 비례해 수호의 모든 능력을 신장시킨다.
가뜩이나 [타니아의 눈물]로 치솟은 스탯이 거대화로 재차 증폭된다.
아찔한 고양감이 느껴진다.
수호의 입에서 저절로 포효가 터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온 정선이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을 휩쓸던 화마火魔마저 일시적으로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착-
수호가 【차원보】를 발휘.
놀랍도록 고요하게 지면에 내려섰다.
수십 층짜리 호텔 중동이 눈높이에 있다.
‘후우- 아찔하구만. 정신 차리고 불부터 끄자.’
과도한 고양감 탓에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수호가 호텔로 다가오는 불길을 응시했다.
‘아깐 방법이 없어 보였는데.’
티타니아의 눈물을 먹고 거대화하기 전.
밀려드는 화마를 잡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젠 발길질로도 끌 수 있겠는걸.’
크기의 위력이었다.
좀 전까지 지옥 불 같던 화염의 파도도 이제는 수호의 발목 높이.
저 정도면 끄는 게 어렵지는 않다.
‘어서 끄자.’
수호가 불길을 향해 다가갔다.
후끈.
가까이 다가가자 열기가 느껴졌다.
강민제의 스킬과 마물의 마기가 뒤섞인 불길은 지독했다.
‘그래 봐야 불이지.’
수호가 발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휙 휘저었다.
흙이 불길을 뒤덮었다.
약간 주춤하던 불길이 금세 다시 살아난다.
수호가 몸을 숙였다.
거대한 손으로 흙을 움켜쥔 후, 불 위에 뿌렸다.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수호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머잖아 호텔 쪽으로 덮쳐 오던 화마가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이야. 바지춤이라도 내려야 하나 했는데.’
최악의 상황에서는 오줌이라도 쌀 생각이었다.
그 꼴이 되기 전에 불이 꺼져서 천만다행이다.
“부, 불이 꺼졌다! 살았어!”
“헉! 진짜야. 저 커다란 사람이 불을 껐어!”
“거인이다. 거인이 불을 끈 거야.”
“근데 저 거인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생김새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어? 드래곤! 드래곤 라이더다!”
“맞아! 드래곤 라이더의 복장이랑 똑같잖아!”
호텔에 고립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눈에는 수호가 자세히 비췄다. 워낙 커진 탓이다.
‘음, 바지 깠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수호가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발룡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수호, 땅속이다!』
“뭐?”
의아해하던 수호는 금세 눈치챘다.
땅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프차차차차차-
수호의 발치.
바닥이 파이며 어두운 녹색을 띤 나무줄기가 창처럼 솟아올랐다.
그것은 수호의 종아리를 향해 뻗었다.
수호가 한 발 물러섰다.
자연스레 【차원보】가 발휘됐다.
나무줄기 창이 빗나갔다.
‘몬스터? 기운이 보통이 아니야!’
수호가 공격을 피하자, 나무줄기의 공격이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땅을 뚫고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려 수호의 종아리 높이만큼 거대한 나무가.
품은 기운은 저편에서 강민제와 싸우는 놈보다 약간 아래였다.
‘이놈이 원래 5성 던전의 보스 몬스터 같은데?’
수호가 놈의 정체를 추리했다.
오는 길에 이곳에 있는 5성 던전의 데이터를 받았기에 알 수 있었다.
‘나무형 몬스터라더니, 불 때문에 땅에 숨어 있었던 건가?’
정확한 연유야 몬스터와 말이라도 통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하나 별로 상관없다.
수호가 손을 뻗었다.
덥석.
괴상한 얼굴이 그려진 몬스터의 나무 기둥이 수호의 손아귀에 잡혔다.
“트리이이이이익-”
놈이 괴성을 토했다.
줄기와 뿌리로 뱀처럼 수호의 팔을 휘감았다.
수호가 반대편 손으로 거인의 격노를 휘둘렀다.
퍽-
손아귀 윗부분에 적중.
몬스터의 윗동이 부서져 날아갔다.
퍽-
다음은 아래쪽.
뿌리 또한 대번에 박살 나 부서졌다.
수호가 손을 펼쳤다.
“트, 트리히이익-”
이목구비가 새겨진 기둥이 드러났다.
놈이 발악하듯 입을 쩍 벌렸다.
뭔가 발사되려 했지만 의미 없었다.
퍽-
새파란 마력을 머금은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과 망치 사이에 낀 몬스터가 가루가 되었다.
마기도 남김없이 소멸했다.
[마기에 물든 보스 몬스터 후오른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화염 저항이 1 증가합니다.]
.
.
예상대로 놈은 던전의 보스.
경험치를 잔뜩 떠안기고 사라졌다.
‘일단 급한 불은 껐고.’
화재를 진화했고, 숨어 있던 보스 몬스터까지 잡았다.
이제 호텔에 갇힌 사람들의 목숨은 확보한 셈.
수호가 한숨 돌렸다.
호텔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이겼다!”
“드래곤 라이더가 몬스터를 잡았다!”
“이제 정말 살았어!”
“고마워요, 드래곤 라이더!”
안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호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건, 저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어?’
후끈한 열기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 * *
강민제가 고유 스킬 겁화劫火를 시전하면서 적을 노려봤다.
‘끈질기군.’
던전에서 이변이 생긴 뒤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
거기까지는 쉽게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괴물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저 검은 불꽃, 아무리 봐도 마기가 섞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가?’
검은빛 불꽃으로 몸을 감싼 청설모.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기가 분명했다.
그 탓인지 겁화에 맞고도 소멸하지 않았다.
“스퀴이이이이이-”
청설모가 포효를 내지르며 꼬리를 휘저었다.
꼬리에서 검은 불길이 길게 치솟았다.
주황색 겁화와 검은 꼬리 불길이 맞부딪혔다.
꽈르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주변을 떨쳐 울렸다.
불덩이가 날렸다.
겁화의 기운과 마기가 뒤섞인 불똥이 주변을 불태워 나갔다.
이대로라면 사방이 불바다가 될 터.
강민제도 그것을 눈치챘다.
‘큰 것을 얻으려면, 작은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지.’
청설모는 강했다.
인간이고 건물이고 어차피 모두 부서졌을 것이다.
강민제가 없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강민제는 전투로 인한 부차적인 피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저놈만 처치하면, 뒷일은 알아서 수습된다.’
정선을 얼마나 불태우든 상관없다.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닌 이상, 강력한 힘과 팬덤을 가진 그에게 잘못을 물을 사람은 없을 터다.
‘죽어라. 겁화난무!’
강민제가 겁화보다 더 강한 스킬을 시전했다.
치이이익-
이번에는 몬스터의 몸에 대미지가 들어갔다.
강민제가 화력을 더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척.
얕은 울림이 느껴지더니, 하늘에서 커다란 인간이 뛰어내렸다.
‘뭐?!’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마치 코앞에 있는 듯.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인의 모습에 강민제가 경악했다.
‘저건 또 뭐야?’
한데 그 대단한 거인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흙을 퍼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이다.
곧 불이 꺼졌다.
뒤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오른?’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선 던전의 보스 후오른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인에게 제거당했다.
‘후오른을 저렇게 빨리 처치해? 말도 안 되는……!’
그때쯤 강민제는 거인이 헌터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랬기에 경악했다.
자신이 전력을 발휘해도 후오른을 저렇게 순식간에 처치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최강이라 자부하는 자신이 못 하는 일을,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해치운 것이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타니아의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위력이었지만, 강민제가 그것을 알 리 만무.
압도적인 수호의 전력에 강민제의 자존심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스퀴이? 스퀴이이이이러어어-”
그때 강민제를 상대하던 청설모 몬스터가 괴성을 내질렀다.
뒤돌아 수호에게 내달렸다.
온몸에서 시커먼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보여?’
게다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강민제의 자존심이 다시 한번 긁혔다.
‘좋다. 다 죽여 주마. 천겁멸화난무!’
강민제가 스킬을 시전했다.
절반 이상의 마력을 소모하며 24시간의 쿨타임까지 있는.
궁극기라 불러도 좋을 스킬을.
* * *
나무 형태의 보스 몬스터를 죽인 순간.
강민제와 열심히 싸우던 청설모가 수호에게 덤벼들었다.
‘갑자기 왜 나한테 달려드는 건데!?’
혹시 나무가 저 청설모 놈의 집이라도 되었나?
그러기엔 청설모의 불꽃이 나무를 죄다 태워 버렸을 것 같은데….
‘됐다. 일단 잡고 보자.’
이유야 나중에 따져도 된다.
덤비는 놈을 처리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수호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스퀴이이이-”
발치까지 달려온 청설모가 뛰어올랐다.
마기로 이뤄진 털이 불꽃이 되어 수호에게 발사됐다.
수호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한데 그때, 청설모의 뒤편에서 한층 더 강한 화기火氣가 느껴졌다.
“죽어라!”
강민제가 손에서 화염을 내뿜었다.
수호의 종아리 두께는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굵다.
그것이 청설모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미친! 어디로 쏘는 거야?’
강민제의 화염 기둥은 단지 청설모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방향에는 수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뒤에는 호텔이 있다.
피하면?
호텔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사라진다.
‘어쩔 수 없지. 피할 수 없다면 없애는 수밖에.’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기는 취미는 없다.
그러니 소멸시킨다.
‘헤이스트!’
‘근력 폭발!’
‘무기 강화!’
가뜩이나 강해진 능력들이 한층 더 치솟았다.
마력을 머금어 파랗던 망치가 무기 강화 효과로 붉게 일렁인다.
‘이건 정말… 강해.’
수호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각성 후 자신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라고.
후끈.
코앞까지 다가온 청설모의 공격.
그 뒤를 바짝 쫓는 강민제의 화염 기둥.
그곳을 목표로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휘둘렀다.
‘5연격!’
고오오오오-
대기가 신음했다.
망치가 첫 목표에 다가갔다.
푸슥-
청설모가 날린 검은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은 청설모 차례.
망치가 청설모를 후려치기 위해 다가간다.
그 압도적인 화력은 강민제의 눈에도 들어갔다.
강민제가 이를 바득 갈았다.
‘내 거다! 내가 잡는다!’
그는 이제껏 싸우던 몬스터를 수호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강민제가 괴성을 내질렀다.
한층 더 강화된 화염 기둥이 쭉 뻗었다.
그 결과.
5연격과 화염 기둥이 앞뒤에서 충돌했다.
청설모의 몸을 가운데 두고, 동시에!
콰콰콰콰콰아아아아앙-!!!
두 힘의 사이에 낀 청설모가 흔적도 없이 짓이겨졌다.
강력한 여파에 대지가 부르르 떨렸다.
수호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강민제의 화염은 강력했으니까.
‘화염 저항이 조금만 낮았어도 곤욕을 치를 뻔했어.’
거대화 상태가 아니라면, 지금 공격으로 크게 다쳤을지도…….
호텔을 후폭풍에서 지키기 위해 충격을 모조리 떠안았기 때문이다.
치이익-
옅은 화상을 입은 피부가 재생 능력에 의해 회복됐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기에 물든 네임드 몬스터, 아로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화염 저항이 1 증가합니다.]
.
.
.
[고유 스킬 【차원 호신무(중급)】가 【차원 호신무(상급)】로 변화합니다.]
뜻밖의 메시지에 수호가 놀라고 있을 때였다.
화르르-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강민제가 발악하듯, 한층 더 강한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121화 맞서는 자 (7)
[마기에 물든 네임드 몬스터, 아로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강민제는 이를 갈았다. 이레귤러를 처치했음에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던전 브레이크만도 마뜩잖은데, 경험치까지 뺏겼으니…….
오로지 자신의 성장만을 위해 달려온 강민제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
그의 자존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쯤 수호도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가 죽고 나자, 강민제의 화염이 더 강해졌다.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살기?’
살갗을 찌르는 듯한 예기는 살기가 분명했다.
‘왜?’
재난을 막기 위해 몬스터를 처치했다.
뒤에 호텔이 있어 피할 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수호는, 강민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수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먼저 공격하면…….’
이유 불문.
상대가 살의를 품고 덤벼든다면, 수호도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대응할 수밖에.’
평소라면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
하나 [타니아의 눈물]을 마신 데다, 거대화를 완료하고 각종 버프까지 두른 지금이라면?
‘지금은… 내가 이겨!’
이길 수 있다.
대한민국 최강이라 불리는 강민제라 할지라도.
꾹.
자신감과 함께 거인의 격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적막한 가운데, 강민제의 화염이 대기를 불태우는 소리만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두두두-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파스슷-
강민제의 몸에서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가 말없이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음… 다행인가?’
호승심 때문일까?
수호는 찰나간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꼭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자칫 여기서 강민제를 때려죽였다가는, 오늘 얻은 명성이 단숨에 악명으로 바뀔지도 모르고.
‘됐다. 불이나 끄자.’
방금 일전으로 주변에 또 불이 붙었다.
수호가 흙을 퍼 불을 끄기 시작했다.
“화신과 드래곤 라이더가 힘을 합쳐 몬스터를 잡았다!”
“와, 무슨 화력이… 구경만 하는데도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요, 드래곤 라이더!”
“멋있었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는 호텔의 관객(?)들이 수호를 열심히 응원했다.
* * *
곧 도착한 헬기에는 협회장이 타고 있었다.
수호는 그에게 사건 수습을 맡기고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집이구나, 하아-』
집 앞에 도착하자, 발룡이가 한숨을 쉬며 피로를 호소했다.
수호가 발룡이의 등에서 내려섰다.
저편에서 윌슨이 뛰어왔다.
팔은 수리되어 있었다.
“수호, 돌아왔구나!”
“응, 다녀왔어. 양수정 헌터님도 계셨네요?”
윌슨 옆에 양수정이 서 있었다.
“네, 주민들이 불안해해서 조금 전에야 집에 돌아갔거든요. 저는 바리케이드 정리하는 것 도와드리느라 남아 있었어요.”
“그러셨군요. 고맙습니다.”
“뭘요. 큰일은 윌슨 씨랑 사장님이 다 하셨는데요.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사장님 뵈어서 다행이네요. 오늘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 사장님이 물건만 잘 떼 오는 줄 알았는데, 싸움도 그렇게 잘할 줄은 정말 몰랐네요.”
“…과찬이십니다.”
수호가 멋쩍게 웃는 사이, 양수정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윌슨 씨도 또 봐요.”
양수정이 윌슨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표정이 묘했다.
‘어째 양수정 헌터 눈빛이… 마체테 볼 때랑 비슷한걸?’
혓바닥으로 아랫입술도 슬쩍 핥는 것 같다.
설마 윌슨의 몸이 로봇인 걸 눈치채고?
아니겠지?
“자, 잘 가요. 수정 씨.”
윌슨이 인사를 받았다.
양수정이 그제야 가게 밖으로 나갔다.
“들어갈까.”
수호가 윌슨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파닥-
공간 결계로 막아 둔 방 쪽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하양이가 날아왔다.
『하양아!』
발룡이가 이산가족이 상봉하듯 하양이를 불렀다.
펑-
동시에 폴리모프를 시전.
인간형으로 변한 후 팔을 활짝 벌렸다.
휙- 하양이가 발룡이를 지나쳤다.
그리고 수호의 품에 안겼다.
“아이구, 우리 예쁜 하양이.”
수호가 하양이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본좌가 아니라 수호 따위를…….』
발룡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윌슨이 발룡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일단 그 말투부터 좀 어떻게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신없었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 * *
웅성웅성.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수호가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했다.
‘7시?’
고단했던 탓에 평소보다 기상이 늦다.
그래도 아직 아침인데, 벌써부터 가게 앞에 사람이 잔뜩 몰렸다.
귀를 기울이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드래곤 라이더가 사는 곳 맞지?”
“맞아. 확실해.”
“왜 안 나오지?”
“이제 일곱 시잖아. 어제 온종일 싸웠으니, 아직 자고 있겠지.”
“아, 인터뷰 따야 하는데. 어제 무서워서 숨어 있었더니, 부장 놈이 아주 난리야. 오늘 인터뷰 못 따오면 옷 벗을 각오하라네.”
“우리 부장도 똑같이 말하던데. 젠장.”
수호는 집 앞이 시끌벅적한 이유를 눈치챘다.
‘기자들이었구나.’
하긴 어제 좀 화려하게 저지르긴 했다.
잠시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던 수호가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를 띄웠다.
『드래곤 라이더! 대한민국을 구하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 드래곤 라이더, 그는 누구인가?』
화면 가득 기사가 빼곡히 떠올랐다.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수호가 기사를 터치했다.
『단독 영상! 드래곤 라이더 정선을 구원하다!』
- 화신 강민제의 화염과 몬스터의 불꽃에 불바다가 되어 가던 정선. 그곳을 구한 것은 드래곤 라이더였다. 현장에 나타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위기에 빠진…….
기사는 길게 이어졌다.
주로 수호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사 말미에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수호가 그것을 재생했다.
정선에 막 도착한 시점부터 찍힌 영상이었다.
수호는 영상을 찍은 게 누구인지 바로 눈치챘다.
‘헬기에 있던 기자가 쓴 기사구나.’
내용이 굉장히 호의적이다 싶더라니.
수호가 구해 준 헬기에 탔던 기자의 기사가 틀림없었다.
영상은 강민제와의 대치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단독 영상이었기 때문일까.
수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 와, 대박. 저 스킬은 뭐지? 저 크기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겠다.
└ 5성이 아니라 6성도 순삭하겠다ㅋㅋㅋ 먼치킨 탄생이네.
└ 장비도 대단해 보이는데, 도대체 저런 사람이 이때까지 어디 숨어 있었던 거지?
└ 어? 나 저분 아는데. 저분 우리 동네 아이템 가게 사장님인데.
└ ㅋㅋㅋㅋㅋ 드래곤 라이더가 아이템 가게 사장? 우리 동네 횟집 사장은 협회장이다.
└ 우리 동네 불가마 찜질방에는 장작 대신 강민제가 불 피움ㅋㅋㅋㅋㅋㅋ
줄줄이 달린 댓글 중,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었다.
└ 내가 보기에 저거 함부로 못 쓰는 스킬임. 커지기 전에 드래곤 위에서 뭔가 액체를 꺼내 마시는데, 고등급 소모 아이템으로 추정됨. 마시기 전에 망설이는 표정에서 알 수 있음. 그러니까 저 스킬은 특별한 소모 아이템이 필요하든가, 아니면 평소에는 저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든가. 둘 중 하나임. 그것도 아니면, 사용 후에 엄청난 페널티가 있다든가.
‘예리하네.’
감탄하던 수호가 나머지 댓글을 확인했다.
└ 근데 강민제랑 마지막에 왜 저렇게 눈싸움하는 거냐?
└ 그거 아닐까. 사나이 간의 우정? 전우애?
└ 그러기엔 강민제 표정이 너무 띠꺼움ㅋㅋ
└ 그러게. 설마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나?
└ 에이, 강민제가 뭐가 아쉬워서?
└ 아쉬울 만도 하지. 이번 난리에서 주인공은 드래곤 라이던데.
└ 그런가? 근데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 그래도 강민제지. 불 앞에서 크기가 무슨 소용?
└ 아니지. 저 크기면 드래곤 라이더가 그냥 후려치는 순간, 끝날 것 같은데? 마지막에 강민제 스킬에 노출되고도 별로 안 다친 거 보면 드래곤 라이더가 이김.
└ 어? 맞네.
└ 뭐지? 크기 감안해서 죽지는 않더라도, 화상은 잔뜩 입어야 정상 아닌가?
└ 드래곤이 불 저항 마법이라도 써 줬겠지.
└ 그럼 뭐임? 이제 한국 최고 바뀌는 거?
└ 근데 드래곤 라이더는 물약 빨았잖아. 강민제도 풀 도핑 상태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 드래곤 라이더는 드래곤 없이 싸웠는데?
└ 어쨌든 저 자리에서는 드래곤 라이더가 더 강했음.
└ 그래도 비주얼은 강민제지. 화신火神 아니냐, 화신.
└ 드래곤 라이더도 드래곤 타면 간지가 좔좔 흐르던데?
그 뒤로는 누가 강한가, 심지어 누가 더 멋있는가를 놓고도 설전이 오갔다.
어깨를 으쓱한 수호가 휴대폰을 내려놨다.
‘당장 싸우면… 이기기 힘들겠지?’
타니아의 눈물 없이는 승산이 낮다.
괜찮다.
딱히 원수진 것도 아닌데, 싸울 일이 있으려고.
‘그래도 머잖아…….’
수호는 여전히 급성장 중이다.
이번 난리 또한 수호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뛰어난 스승과 천혜의 수련 장소도 있다.
그렇기에 수호는 자신했다.
‘넘어설 수 있을 거야.’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간 결계 안으로 윌슨이 머리를 내밀었다.
“수호, 일어나 있었네?”
“응, 좀 전에. 밖이 소란스럽더라고.”
“기자들이 꼭두새벽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었어.”
“그랬구나. 근데 너도 일찍 일어났네?”
윌슨은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잔다. 식사도 한다.
지구인으로 어울려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응, 아침 먹을까 하고. 네 것도 준비해?”
“그럼 고맙지.”
둘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자들은 늘어났다.
탕탕-
기어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뒤따랐다.
“드래곤 라이더님! 한국 신문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kbc입니다. 드래곤 라이더님.”
“ytm입니다. 인터뷰 부탁합니다.”
어느새 8시가 지났다.
이쯤이면 수호가 깨어났겠거니 생각한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호,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뭐라고 해야 하려나?”
이런 일은 처음이라 상당히 난처하다.
“발룡이 님을 대동하면 어때? 수호 네가 할 말이 상당히 줄어들 텐데.”
“발룡이가 거절할 거야, 아마.”
어제 내내 고생한 발룡이는 귀가 후에도 원하는 것을 먹지 못했다.
난리 통에 치킨집이 죄다 문을 닫은 탓이다.
게다가 하양이까지 수호를 편애하자, 발룡이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쿵쿵-
탕탕-
“기자들이 계속 문 앞에서 기다릴 것 같은데. 가게는 어떻게 해?”
“닫아야지. 어제 그 난리가 났으니, 손님도 없을 거야.”
“그럼 오늘은 집에서 쉬게?”
“선배님한테 안부 인사부터 하고.”
석비룡에게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응, 다녀와.”
윌슨의 배웅을 받으며 수호가 호리병 뚜껑 앞에 섰다.
* * *
잠시 후, 비룡객잔 뒤뜰.
수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석비룡이 입을 뗐다.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말이야…….”
석비룡이 말꼬리를 늘였다.
눈빛이 스산하게 빛난다.
“왜 그러시는지……?”
“자네 세상에 썩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게 금방 끝난다는 보장이 없고?”
마인이 적극적으로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예.”
“그럼 간단하군.”
석비룡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말입니까?”
왠지 서늘해진 수호가 물었다.
석비룡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때일수록 스스로 갈고닦는 수밖에 없지. 위험한 상황에 목숨을 구하는 건 요행이나 운이 아니라 몸에 새긴 실력이거든.”
“안 그래도 차원 호신무가 한 단계 성장하긴 했는데요…….”
[타니아의 눈물]을 먹고, 강한 마력을 운용한 경험.
그리고 온종일 싸우는 사이 오른 레벨의 영향으로, 【차원 호신무】가 성장했다.
수호가 【차원 호신무】의 변화를 떠올렸다.
- 모든 스탯 60% 증가(장비 스탯 제외).
▶ 【정신 방벽】 : 차원 여행자의 정신을 지키는 방어막을 상시로 생성한다. 원할 경우, 정신 계열 스킬에 반격할 수 있다. 대상과 시전자의 마력의 양, 운용 능력에 따라 반격의 성패가 결정된다.
기존보다 스탯이 20% 더 증가했다.
정신 계열 스킬을 방어하는 능력도 생겼다.
수호가 흐뭇해하고 있을 때.
석비룡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됐군. 수련의 강도를 올려도 되겠어.”
“어, 음. 그렇긴 한데…….”
“오늘은 늦었으니.”
“아, 맞습니다. 아무래도 내일부터 하는 편이…….”
수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비룡이 선언했다.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때부터 석비룡은 수호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룡객잔의 영업도 미룬 채, 한참이나.
* * *
지구로 돌아온 수호가 외쳤다.
“와, 진짜 가차 없네.”
오늘 대련은 격렬했다.
어제 온종일 싸운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해 주시는 걸 아니까. 나도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수호가 땀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수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윌슨이 빠르게 다가왔다.
“돌아왔구나. 차원 전음으로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기자들이 밀고 들어오기라도 했나?
그러다가 전격 포획기에 다 감전될 텐데.
그러고 보니, 왠지 밖이 조용하다.
설마 아니겠지?
조용해진 이유는 윌슨의 입을 통해 금세 알 수 있었다.
“밖에 협회장이 와 있어.”
122화 맞서는 자(8)
수호가 가게 밖으로 나섰다.
“어? 나왔다!”
“드래곤 라이더다! 나왔다!”
“드래곤 라이더님! 성함이 원수호 씨 맞습니까?”
“정선에서 보여 준 거인 변신 스킬은 본인의 스킬이었나요?”
“일각에서는 포션의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민제 헌터와는 무슨 말씀을 나눴습니까?”
순식간에 질문이 쏟아졌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플래시 때문에 눈도 부셨다.
뭐라 대답할 틈이 없다.
구웅-
지면이 둔중하게 울렸다.
“어? 어어?”
“으, 으으-”
기자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았다.
그 바람에 셔터를 누르던 손가락이 멈췄고 입도 다물어졌다.
저벅저벅.
기파를 내뿜어 기자들 사이로 공간을 만든 협회장이 수호에게 다가왔다.
“잠깐 협회로 같이 가겠나?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할 말이 있다네.”
“네, 그러죠.”
수호가 냉큼 대답했다.
협회장을 따라가면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피할 수 있을 듯해서였다.
기자 상대하는 법도 좀 물어보고 싶었고.
협회장이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협회에서 보도 자료를 돌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기자 회견도 열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어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협회장이 걸음을 옮겼다.
수호도 그 옆에서 나란히 협회로 향했다.
찰칵찰칵-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셔터를 눌렀다.
기세를 죽여 놓은 덕분인지.
보도 자료를 돌리겠다는 말이 통한 건지.
앞을 가로막고 질문을 던지는 기자는 없었다.
수호가 나직이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협회장님. 플래시 쏟아지는데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껄껄, 직접 오기를 잘했군.”
“덕분에 살았습니다.”
“뭐 나도 괜히 온 건 아니라네. 따지고 보면 내가 감사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것도 일종의 퍼포먼스일세. 협회를 위한.”
이번 난리에서 가장 빛난 영웅과 협회의 친밀함을 대중에게 어필했다고나 할까?
협회장이 덧붙였다.
수호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만한 난리가 났으니, 누구든 질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테지. 협회가 희생양이 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전략인가?’
수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물론 협회만 이득을 보는 건 아니니 너무 마뜩잖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
“명성을 얻었으니 자네에게 날파리가 꼬일 걸세. 자네가 얻은 명성만큼이나 많이. 오늘 내가 자네를 직접 데리러 왔으니 자잘한 놈들은 덜 덤벼들겠지. 그러니 귀찮은 일을 덜었다 생각하고 좋게 봐주게나.”
“괜찮습니다. 제게도 나쁜 일이 아니니까요.”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협회가 고생하는 모습을 어제 충분히 보았다.
수호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껄껄, 고맙네. 자네가 협회 차원에서 대가를 안 받겠다고 선언했으니 강요는 안 하겠네만. 개인적으로라도 신세를 갚겠다는 말은 진심일세. 늙은 몸이라도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다 쓰게나.”
“한동안 그러실 틈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가 도와주면 상황이 빠르게 진정되지 않겠나? 자네라면 몇 년 안에 내 자리도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소속되는 건 좀…….”
“농일세, 농.”
둘은 머지않아 협회 건물에 도착했다.
“근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회담일세. 아마 대한민국 각성자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들은 다 모일 거야. 자넬 부른 목적은 천풍 길드 건에 관한 증언이네만 그건 부차적인 이유고, 진짜는 중요 인사들과 안면이라도 트라는 걸세.”
* * *
수호는 협회장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가운데 커다란 원탁과 뒤편의 작은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원수호 헌터, 오셨습니까.”
신성현이 인사를 건넸다.
수호도 마주 인사했다.
뒤편 작은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원수호 헌터님. 어제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는 천풍 길드 부길드장 정명훈이었다.
하루 사이 얼굴이 수척해졌다.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여기서 또 뵙네요. 정명훈 헌터님.”
수호가 인사를 받았다.
정명훈이 품을 뒤져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수호에게 내밀었다.
“약속한 물건입니다.”
“아, 고마워요.”
“아닙니다.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겁니다.”
정명훈이 내민 것은 영웅 등급 재료 아이템인 [상급 마력 토파즈]였다.
짧은 인사 후, 수호는 원탁으로 안내됐다.
막 의자에 앉았을 즈음, 회의실이 열렸다.
수호도 아는 얼굴이 들어섰다.
상왕련주와 그 딸인 정현아였다.
협회장에게 인사를 건넨 상왕련주가 수호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원수호 헌터, 어제 한 건 했더군.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예, 괜찮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나야 자네가 좋은 걸 먹여 준 덕분에 회춘한 거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네. 늘 자네한테 감사하며 사는 중이지.”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잠시 대화가 오간 후, 상왕련주가 조용히 속삭였다.
“자넨 상왕련의 동맹일세. 이제 명성을 얻었으니 자넬 이용하려는 자, 짓밟으려는 자가 나타날 걸세. 상왕련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힘쓰는 일이야 자네가 낫지만 주먹으로 해결 안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감사합니다.”
협회장에 이어 상왕련주까지 비슷한 조언을 했다.
우려와 더불어 아군의 응원에 든든한 느낌도 들었다.
곧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과 비서가 들어왔다.
수호는 여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윤지수. 오성에서 왔구나.’
동명의 모기업을 등에 업고 국내 3대 길드의 위치를 꿰찬 오성 길드.
그곳의 부길드장이 바로 윤지수였다.
길드장은 오성 그룹 회장의 차남이며 일반인.
길드장의 딸이자, 각성자인 윤지수가 회의에 참석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윤지수는 수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안녕하세요, 원수호 씨. 저는 오성의 윤지수라고 해요.”
윤지수가 수호에게 인사했다.
눈웃음이 고혹적이다.
“안녕하세요.”
“영상 보고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어제는 정말 멋있었어요.”
윤지수는 시종일관 미소 지었다.
그사이 수호의 감각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윤지수로부터 시작된 기운이 향이 퍼지듯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번지고 있었던 것.
‘스킬? 패시브 계열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대에게 호감을 끌어내는 스킬로 보였다.
그것은 수호에게도 영향을 미치려 했다.
수호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정신 방벽에 튕겨 나갈 거야.’
특별히 해롭지 않아 보였다.
악의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수호를 목표로 사용한 스킬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굳이 【정신 방벽】의 반격 기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윤지수로부터 흘러나온 기운은 수호의 몸 바로 앞에서 튕겨 나갔다.
예상대로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 수호가 대답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수호의 담담한 반응이 의외였던지 윤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는 모습 또한 매력적이었다.
곧 표정을 가다듬은 윤지수가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소속 길드가 없다고 들었는데 저희 오성은 언제나 최고의 인재를 원한답니다. 당연히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 드리고요. 특히 수호 씨 같은 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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