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2

‘곤란하네.’
불덩이 신경 쓰느라, 다른 오크를 방치 중이다.
그렇다고 오크 잡다가 불덩이가 드워프에게 떨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저놈 먼저 처리해야겠어.’
결심한 수호가 손을 쭉 뻗었다.
장도리가 냉동실 벽을 지나, 먼 곳까지 나아간다.
‘안 닿아.’
오크 주술사의 위치가 너무 멀다.
상체를 냉동실에 욱여넣듯 뻗어도 닿지 않는다.
화르르-
오크 주술사의 앞에 새로운 불덩이가 떠올랐다.
‘방법을 찾아야 해.’
장도리질이 멎은 탓에 드워프가 밀리고 있다.
어서 주술사를 처치해야 한다.
고민하던 수호의 시선이 방을 훑었다.
‘저거다!’
오래 쓴 싸리비.
수호가 닳아서 해진 빗자루를 거꾸로 집어 들었다.
손잡이 쪽을 냉동실에 밀어 넣는다.
‘닿는다!’
이제 리치는 충분하다.
수호가 주술사에게 빗자루를 휘둘렀다.
퉁-
저항감이 느껴지며 빗자루가 튕겨 나왔다.
방어 마법이라도 쓴 걸까?
빗자루가 아이템이 아니라, 파괴력이 떨어지나?
상관없다. 계속 팬다.
챙-
두 방째, 뭔가 깨지는 느낌이 들더니.
콰직!
세 방째에 주술사가 뭉개졌다.
‘됐어! 이제 마무리하자.’
수호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장도리질을 재개했다.
파파파파파팍!
소낙비처럼 떨어지는 장도리질에 오크가 우수수 죽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끝났다, 끝났어!”
드디어 마지막 오크가 쓰러졌다.
“이겼다아-!”
“으하하, 살았다!”
“해냈어! 우리가 오크를 막아 냈어!”
“거인님 고마워요!”
드워프들이 환호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긴급 차원 임무 【마을 방어】를 완수했습니다.]
[붉은 망치 일족 드워프의 만족도가 50 상승합니다.]
[고유 스킬 【???】를 획득합니다.]
* * *
수호는 차원 패널을 열어 정체 불명의 스킬을 확인했다.
【???】
- 교류 등급이 낮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뭐지?’
당장 확실한 것은 하나다.
저 스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쓸 수 없다는 것.
‘저걸 확인하려면, 교류 등급을 올려야 하나 본데.’
수호의 차원 교류 등급은 하급.
각성 후 처음 그대로였다.
‘등급을 올리려면 교류 횟수를 늘리고 교류 차원이 많아야 한다고 했지?’
갑자기 냉장실에 엘프라도 나타나 주면 좋겠지만…….
그런 걸 바라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당장은 드워프랑 열심히 교류하는 수밖에 없네.’
상황이 정리되니 붉은 망치 일족의 상태가 궁금하다. 수호는 차원 패널을 열었다.
『붉은 망치 일족 드워프』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257
- 만족도 : 55/100
‘오크 때문에 만족도가 엄청나게 떨어졌었네.’
임무 보상으로 50이 오르고도 55니, 바닥까지 떨어졌었다는 소리다.
‘그래도 인구는 많이 늘었어.’
밥값 부담이 커지겠지만, 일손도 늘 터.
장기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현상이다.
‘일단 타룽가 님이랑 이야기해 봐야겠다.’
수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타룽가가 마침 다가오고 있었다.
“거인님, 계십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타룽가 님.”
타룽가는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인님이 안 도와주셨으면 저희는 분명 전멸했을 겁니다.”
“뭘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래도 번번이 신세만 지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타룽가가 진심으로 감사했다.
수호는 겸양의 말을 전한 후,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어쩌다가 오크 무리가 나타난 건가요. 원래 자주 있는 일입니까?”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리는 타룽가.
잠시 기다리자, 타룽가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곳 발랑카 산맥은 금지(禁地)로 불릴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산맥 전체가 광룡(狂龍) 발랑카르의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광룡이요?”
광룡이면 미친 드래곤 아닌가?
근데 광룡이 사는 영역에 터를 잡았다고?
“예, 2백 년쯤 전에 대륙을 돌며 정신 나간 짓을 잔뜩 저지른 어린 드래곤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곳으로 이주하신 겁니까?”
덕분에 만나서 반갑기는 하다만.
“얼마 전부터 대륙 전체에 난리가 났습니다. 몬스터들이 마기에 물들어 미쳐 날뛰고 있지요.”
“마기요? 그게 뭔가요?”
“마족이 품은 악마의 기운이지요.”
마족은 마계의 주민이고, 마족을 소환하려는 미친놈들이 있다. 다만, 이번 일이 그놈들 때문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타룽가가 그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군요.”
“저희도 버티지 못하고 피난을 결심했습니다. 한데 피난처를 물색하던 중에 망치와 모루의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드워프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신탁이면, 신의 말씀을 듣는 것 아닙니까?”
“예, 제가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른 부족 족장들도 같은 신탁을 들었더군요.”
저쪽 세상에서는 정말 신이 말을 걸기도 하나 보네.
하긴 드래곤도 있는 마당이니…….
“이곳으로 이주하라는 내용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오직 발랑카 산맥에서만 멸망을 피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다른 드워프 부족도 이곳으로 오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부족과는 신탁 내용을 서로 교환한 이후로 연락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주하기에도 급했던지라.”
저간의 사정은 알았지만 궁금한 것이 남았다.
“근데 이곳이 드래곤의 영역인 것과 오크의 공격이 관계 있나요?”
“발랑카르가 활동을 멈춘 지 100년쯤 됐습니다. 그사이 이곳에 몬스터가 둥지를 틀었을 수도 있겠군요.”
“드래곤이 몬스터는 공격하지 않나 보네요.”
“아닙니다. 발랑카르가 죽었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그냥 뒀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타룽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요?”
“발랑카르가 오크를 시켜 저희를 공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거라면… 부디 망치와 모루의 신께서 보살펴 주시길 바랄 수밖에요.”
타룽가의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드래곤의 짓이면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신탁이 내려왔으니, 분명 나쁜 일은 없을 겁니다. 기운 내세요.”
“감사합니다, 거인님.”
다시 한번 고개 숙이는 타룽가.
수호는 심각한 분위기를 털어내고자, 말을 돌렸다.
“근데 인구가 많이 늘었더라고요. 아이들도 보이고.”
“예, 후발대가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늦어도 한 달이면 다 모일 것 같습니다. 아참!”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짓던 타룽가가 곧 말을 이었다.
“거인님, 전에 저희가 만드는 물건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지요?”
“예. 솜씨가 정말 훌륭하시더라고요.”
“후발대가 도착하면 각종 물건을 조금씩 생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오! 드디어!
“그렇군요. 잘됐네요.”
수호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한데 어째선지 타룽가의 표정이 궁색하다.
한참이나 머뭇거린 그가 입을 뗐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라면을 좀 더 얻을 수는 없겠습니까? 아이들이라도 좀 먹여야 하는데 식량이 동이 나서……. 번번이 죄송합니다.”
아, 오크 때문에 아직 라면을 못 줬네.
지속 임무도 완수할 겸 당장 가져다주자.
“괜찮아요. 안 그래도 드리려고 라면 사다 놨습니다.”
웃으며 대답한 수호가 라면 박스를 가지러 갔다.
* * *
냉동실이 시끌벅적하다.
“이게 그 라면이란 거야?”
“그 가루는 뭐야? 도대체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아직 라면 맛을 모르는 걸 보니, 어제 도착했나 보네. 먹고 놀라지나 마.”
“다 됐다! 면 불기 전에 먹자!”
“우와, 얼큰해.”
“다들 거인님께 감사 인사들은 하고 먹어야지.”
“맞다. 거인님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거인님!”
드워프들이 신나게 라면을 먹고 있을 때.
“신제품이다! 이건 거인님이 짜장라면이라고 했어.”
볼드가 솥을 들고 달려왔다.
“헉, 색이 검어. 먹어도 될까?”
“내가 끓였으니까, 내가 한번 먼저 먹어 볼게. 히힛.”
우물우물.
“볼드, 맛이 좀 어때?”
“우움, 좀 더 먹어 봐야겠어. 기다려 봐.”
볼드가 입안 가득 면발을 쑤셔 넣었다.
“어? 저 자식 혼자 다 먹는다. 잡아!”
“히힛, 맛있다. 이거 진짜 엄청나게 맛있어!”
수호가 드워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허, 이거 참.”
헛웃음이 나왔다.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묘한 모양의 아이템 때문이다.
[여행용 헬멧]
- 여행할 때 쓰기 위해 만든 간이 헬멧. 서둘러 만들었지만 장인의 손길이 닿아 단단하고 가볍다. 드워프의 머리 형태에 꼭 맞는 모양.
- 아이템 등급 : 고급
- 물리 방어력 250
- 【중급 충격 완화】
- 민첩 +10
- 내구도 400
드워프 후발대가 쓰고 온 투구.
오크를 막고 라면을 준 보답으로, 수호가 타룽가에게 받은 물건이다.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성능은 참 좋은데.”
【중급 충격 완화】가 달려 있어 머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제일 모자라던 민첩 스탯도 붙어 있다. 하지만.
“생긴 게 꼭 양은냄비 뒤집어쓴 것 같단 말이야.”
폭은 맞는데 깊이가 얕다.
드워프 머리 모양에 맞춰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필 색깔도 노르스름해서, 언뜻 보면 딱 양은 냄비다.
“턱에 고정하는 끈이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그나마 벗겨질 염려는 없으니.
수호가 떨떠름하게 거울을 응시하고 있을 때.
지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정현수였다.
수호가 전화를 받았다.
“형, 잘 지내셨어요.”
“어,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하하, 계약서 완성돼서 연락드렸어요.”
“벌써?”
“이런 일은 빨리 처리해야죠. 오늘은 늦었고, 내일 오전에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럼 제가 11시쯤 형네 가게로 찾아갈게요. 협회 근처라고 하셨죠?”
“응, 근처 도착하면 연락해.”
“예, 그럼 내일 뵐게요, 형.”
“그래.”
내일 드워프 밥값이 들어올 모양이다.
* * *
“앗싸! 수호 형이랑 계약!”
정현수는 전화를 끊고 환호했다.
수호와 계약은 정현수의 꿈에 첫발을 내딛는 일.
협상할 때는 몰랐지만 막상 계약 직전에 이르자 실감이 되었다.
“계약? 수호 형은 또 누구?”
별안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누, 누나가 왜 여기 있어?”
“동생 방에 좀 들어올 수도 있지. 그건 됐고 방금 그 이야기 뭐야? 계약? 너 어디 가서 도장 함부로 찍은 거 아니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누나가 알 건 없어. 으악-! 보, 보지 마!”
정현수가 말하는 사이, 누나 정현아가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휙 낚아챘다.
실수였다.
계약서부터 치웠어야 했는데.
하나 이미 늦었다.
정현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계약서를 살피고 있었다.
“야! 이거 완전 불공정 계약 수준이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계약하겠다고? 그 수호란 사람이랑?”
“…어.”
“미쳤어. 제정신이야?”
“누나가 그 형을 못 봐서 그래. 그 형은 진짜야.”
“하!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자기가 강민제야 뭐야. 설사 어린 강민제가 다시 나타나도, 이제 이런 계약은 못 받아.”
“알아, 그래도 수호 형은 진짜란 말이야. 이건 나중에 가면 완전 이득 보는 장사라고.”
정현아가 눈을 치떴다.
“어림도 없는 소리! 수호라는 자식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순진한 남의 동생 꼬드겨서 등을 치려고.”
“아니야, 3대 길드 스카우트들 다 몰려든 상황에서 내가 겨우 낚아챈 거야. 누나, 제발 내 말 좀 들어.”
“3대 길드?”
“그래, 오성 스카우트는 계약 까이고도 그 형한테 명함 주고 갔어. 혹시나 파투 나면 연락하라고. 하여튼 지금 아니면 수호 형이랑 계약 못 하니까, 누나는 좀 모른 척해.”
정현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몇 분, 정현아의 입이 열렸다.
“이거 아버지 모르시지?”
“응.”
“하긴 아버지가 아시면, 그냥 둘 리가 없지. 알았어, 아버지한테는 나도 입 다물게.”
“정말? 누나 고마워.”
“그래도 이대로 계약서에 도장 찍는 꼴은 못 봐. 스카우트들이 달려들 정도면 기본은 된다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이건 심해. 최소한 내 눈으로 확인은 해야겠어.”
“뭐?”
“내일 오전에 만나러 간다고 했지? 나도 갈 거야. 그렇게 알아 둬.”
“누나!”
“혼자 가면 아버지한테 말할 줄 알아.”
정현아가 계약서를 든 채 방에서 나갔다.
9화 던전(1)
뚱땅뚱땅-
서걱서걱-
오늘도 활기찬 드워프 마을.
볼드는 마을 근처 숲에서 톱으로 나무를 베고 있었다.
“아, 톱질 지겨워.”
톱은 줄창 다뤄도 손에 익지 않았다.
다른 드워프들은 배우지 않아도 뚝딱 다뤄 내는데.
톱만이 아니다.
망치질도, 도끼질도, 풀무질도.
모든 일이 볼드에겐 힘들었다.
볼드는 슬그머니 톱질을 멈추었다.
“쳇, 재미없어. 빨리 밥때나 되면 좋겠다.”
그럼 요리를 도맡아 할 수 있다. 그때는 볼드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한데 요리 생각을 하자 연상되는 게 있었다.
“아, 짜장 라면 진짜 맛있었는데. 물론 국물 라면도 맛있지만, 히히.”
츄릅.
볼드가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았다.
“아, 또 먹고 싶다.”
한참이나 라면을 상상했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라면의 출처로 향한다.
“거인님, 정말 멋있었어.”
오크의 침공.
매사 긍정적인 볼드지만, 어제는 절망을 느꼈다.
한데 거인님이 나타났다.
장도리로 오크를 때려잡더니, 머잖아 주술사까지 해치웠다.
주술사의 집채만 한 불덩이가 자신에게 날아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볼드는 꿈꾸듯 어제의 전투를 회상했다.
그런데 별안간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으면, 나무도 벨 수 있는 거 아냐?’
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채앵-
한데 톱질을 하다 멈춘 상태였던 것을 잊었다.
톱 중동이 뚝 하고 부러졌다.
“이놈 볼드! 또 공구 부숴 먹었냐!”
“앗! 족장님 그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농땡이 피운다 싶더니, 기어이 톱까지 부러트리고!”
“으힉- 아니에요. 제가 엄청난 걸 알아냈다고요.”
“엄청난 거고 자시고, 어서 가서 도끼질이라도 해!”
“칫, 알았어요, 족장님. 도끼 가지고 올게요.”
볼드가 마을 쪽으로 달음질쳤다.
그리고 족장의 시야에서 멀어졌을 즈음, 방향을 틀었다.
거인님이 나타나는 쪽으로!
* * *
수호는 일어나자마자 냉동실 문부터 열었다.
드워프들의 공사 소리가 들려온다.
“부지런들도 하지.”
중얼거린 수호가 시리얼에 우유를 부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인님- 거인니이임- 잠깐만 나와 보세요오오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수호가 시리얼 그릇을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거인니임-!”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볼드였구만.
“볼드, 무슨 일이에요?”
“거인님,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나무 좀 베어 주세요! 거인님은 크니까, 금방 자를 수 있잖아요.”
“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수호가 탄성을 토했다.
‘나도 모르게 드워프 마을에 직접 손대는 걸 꺼리고 있었네.’
각성 첫날.
수호가 무턱대고 냉동실에 손을 넣은 탓에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했다.
그 기억 때문에 수호는 냉동실에 손 넣는 걸 삼가고 있었다.
‘이제는 드워프들이 그렇게 놀라지는 않겠지?’
그럼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네.
수호가 생각하는 사이, 볼드가 다시 부탁했다.
“거인님이 도와주면 마을을 금방 건설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톱질도 그만해도 되고요, 히힛. 도와주세요!”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마을 건설을 돕자(지속)】를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 * *
『마을 건설을 돕자』
- 당신의 큰 손이 돕는다면, 붉은 망치 부족의 이주 작업은 한결 빨라질 것이다. 붉은 망치 부족의 마을 건설을 돕자.
*지속형 임무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개선될 때까지, 반복해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 보상 : 붉은 망치 드워프 만족도.
싹둑-
“진작에 도울 걸 그랬네.”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싹둑-
“가위로 자르면 이렇게 간단한데.”
저쪽 세상 아름드리도 수호에게는 이쑤시개.
가위로 간단히 잘라 낼 수 있다.
드워프들이 몇십 분 걸릴 작업을 3초면 끝낸다.
싹둑-
“와아- 대박! 역시 거인님, 최고예요!”
“진짜 대단하시구나.”
“족장님, 거인님한테 도와 달라고 제가 말했어요. 잊지 마세요.”
“그래, 볼드 네가 이번에 한 건 했구나.”
“히힛, 그럼 저는 라면 끓이러 가요.”
“…다 되면 나도 부르거라.”
볼드가 신나서 달려갔다.
수호가 피식 웃으며 가위질을 이어 갔다.
“거인님, 거듭 도움만 받아서 염치가 없군요. 최대한 빨리 거인님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한테는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거인님이 벌목을 도맡아 주시니, 일손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남는 인원은 대장간을 비롯한 작업 시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머잖아 거인님께 제대로 된 장비를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제대로 된 장비!
기대감이 치솟는다.
“벌목 말고도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거인님.”
싹둑-
* * *
1시간쯤 가위질을 했더니 임무가 완료됐다.
드워프 마을에 목재가 가득했고, 만족도도 30이나 올랐다.
“좀 있으면 현수랑 만나기로 한 시간이네.”
씻어야겠다.
수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 정현수 : 형, 30분쯤 후에 도착할 것 같아요. 형네 가게로 갈까요?
수호가 답신했다.
- 원수호 : 근처 커피숍에서 보자.
드워프를 들킬 가능성은 원천봉쇄하는 편이 좋다.
- 정현수 : 예, 그럼 그쪽으로 갈게요. 형. 이따 봬요.
- 원수호 : 그래.
수호가 외출 준비를 했다.
‘계약금 받으면 삼겹살이라도 먹여 볼까.’
드워프는 그새 300명을 넘었다.
배불리 먹이려면, 수백은 깨지겠네.
고기는 아직 좀 무리려나.
* * *
30분 후, 커피숍.
수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현수를 맞았다.
수호의 표정을 본 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호 형, 혼자 오려고 했는데 누나가 꼭 따라오겠다고 해서… 죄송해요.”
“누나분이셨구나. 안녕하세요.”
수호가 인사를 건넸다.
상대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그쪽이 원수호 씨? 저는 현수 누나 정현아예요.”
“네, 제가 원수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썩 반갑지는 않네요.”
정현아가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
표정을 보고 혹시나 했더니.
계약에 불만이 있나 보구만.
“누나 좀! 그냥 구경만 하기로 했잖아.”
“내가 어떻게 구경만 하니. 동생이 사기당하게 생겼는데!”
“제발. 누나, 내가 다 설명했잖아.”
남매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수호는 기다리지 않았다.
“현수야, 계약 안 할 거면, 굳이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헉! 형,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누나는 이리 따라와 봐.”
정현수가 정현아의 팔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수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길드에 여태 말을 안 한 건가?’
그러다 누나한테 들켰고?
추측이 사실이라면, 수호가 누나였어도 어이없긴 했을 터다.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계약?
하면 좋지만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돈 나올 구멍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곧 정 씨 남매가 자리로 돌아왔다.
“수호 형, 죄송해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누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어요.”
“그래.”
“그럼 잠깐만 앉아 계세요.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누나도 제발 가만히 있어.”
정현수는 카운터로 향했다.
정현아가 수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수호는 모른 척했다.
그러자 하 하는 코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원수호 씨.”
정현아가 수호를 불렀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정현수의 가족이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으니.
수호가 적당히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쎄엑-
정현아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왔다.
목표는 수호의 얼굴.
수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연자약한 표정.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어?”
오히려 놀란 것은 정현아 쪽이었다.
그녀의 손은 수호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애초에 때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손 좀 치워 주시겠습니까?”
수호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미안해요.”
황급히 손을 거두는 정현아.
그녀는 곧 자책했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다니, 바보처럼 무슨 짓이야.’
당황한 나머지 사과까지 했다.
수호의 태연한 반응과 목소리에 완전히 말린 것이다.
‘근데 어떻게 눈도 깜빡하지 않을 수 있지?’
정현아는 헌터다.
각성 4년 차로, 레벨은 37이고 클래스는 레인저.
높은 민첩성과 뛰어난 눈썰미가 그녀의 특기였다.
‘혹시 손이 날아오는 걸 인식도 못 한 거 아냐?’
아니면 몸이 아예 굳어 버렸거나.
그렇다기엔 손 치우란 목소리가 너무 태연했는데…….
‘1렙짜리가 내 움직임을 간파했을 리는 없는데, 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도통 그게 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대로 수호의 능력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걸려 있는 계약이 너무 무거웠으니까.
‘하필 꼼짝도 안 해서는. 이대로는 시험한 의미가 없잖아!’
반응을 보고 수준을 판단하려 했는데.
이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한 번 더 시험해야겠어.’
때마침 정현수가 음료를 들고 왔다.
“커피 드세요, 형. 누나도 단 거 먹고 진정해.”
정현수가 아메리카노와 파르페를 내려놨다.
“내가 어린애니? 단 거 주면 진정하게.”
“어쨌든 먹어. 여기 숟가락.”
파르페용 긴 스푼.
그것을 본 정현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번엔 밝혀내고야 말겠어.’
정현아가 스푼을 집었다.
그리고 내뻗었다.
목표는 전과 같이 수호의 얼굴.
단, 이번에는 훨씬 빠르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스푼이 뭉툭하니 다치진 않겠지만, 피하지 못하면 얼굴을 찔리리라.
까닥-
수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스푼이 빗나갔다.
쎄엥-
스푼이 지나가며 바람 소리가 울렸다.
“피했어? 말도 안 돼!”
“으악-! 누나 돌았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정 씨 남매가 쌍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수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한 번은 참았지만 거듭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더 참으면 호구로 볼 터.
“안 되겠다. 현수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잠깐만요.”
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막 문을 나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타다다닥-
빠른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정현아였다.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하나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예상외였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생의 일이라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게 됐어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투. 고개도 깊이 숙인다.
진심이 느껴졌다.
뭐, 예의를 완전히 밥 말아 먹은 사람은 아닌가 보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헌터 경력도 어느 정도 있는 분 같은데, 헌터 사이의 선공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정현아가 사색이 되었다.
초인적인 헌터의 능력은 언제든 서로를 죽일 수 있다.
그렇기에 선공은 살인 시도나 다를 것 없이 여겨진다.
정현아 자신은 ‘시험’이랍시고 한 행동이지만, 상대가 공격이라 말해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
레벨 차를 생각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저, 정말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공격이 아니라, 원수호 씨의 실력을 알아보려는 의도…….”
수호는 정현아의 말을 잘랐다.
“정현아 씨 속마음까지는 제가 알 수 없지요. 알고 싶지도 않고. 저는 제가 어떻게 느꼈냐가 중요합니다.”
그나마 정현수에 대한 호감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예의를 차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호가 그렇게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현아가 거듭 사과했다.
이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쯤 정현수도 달려왔다.
“형, 정말 죄송해요. 저희 누나가 제 걱정 때문에 약간 정신이 나갔나 봐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수호는 연이어 사과하는 정 씨 남매를 보며 생각했다.
‘다른 길드보다는 현수랑 개인적으로 계약하는 편이 좋긴 한데.’
그렇다고 이런 식의 무례를 계속 참을 수는 없다.
‘정현아든 누구든, 상왕련 쪽에서 계속 이런 식이면 앞으로도 곤란해.’
한번 여지를 주면 사사건건 간섭이 들어올 터.
돈이 필요하다지만, 목줄이 매여서는 안 된다.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어.’
결심한 수호가 말했다.
“이대로는 계약 못 하겠다, 현수야.”
“…형, 죄송해요. 한 번만 다시 고려해 주세요.”
정현수가 참담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정현아도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는지, 아까부터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정 씨 남매에게 수호가 말했다.
“계약서 다시 써야겠다.”
* * *
- 상왕련 측의 어떤 인물도 원수호, 정현수 파티의 행보에 관여하지 말 것.
- 원수호의 클래스 및 스킬, 장비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요구하지 말 것.
- 이를 1번이라도 어길 시, 원수호는 정현수에게 약속한 모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 3년 후 계약 만료 시, 원가대로 정산.
수호는 계약서에 몇 가지 특약 사항 추가를 요구했다.
‘이래야 앞으로 태클이 안 들어오지.’
정산 대금을 원가대로 주는 건 일종의 보너스다. 수호에게는 큰 금액이지만, 저쪽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니까.
‘무작정 요구만 하면, 저쪽에서도 죽자고 뜯어말릴 수가 있으니.’
수호로서도 계약이 이뤄지는 편이 좋다.
특히, 특약 사항까지 추가된 계약은 수호 입장에서는 완벽에 가까웠다.
‘수락할 만한 구실을 약간 줘 볼까.’
수호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앉아 있는 정현아에게 말했다.
“정현아 씨, 조금 전 무례한 행동 때문에 가만히 계시지만, 여전히 계약에는 회의적이시죠?”
“…….”
대답하지 않아도 내심은 뻔했다.
“상왕련에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결국 제 능력이 부족해서 현수에게 해가 갈까 봐 걱정하시는 것일 테고요.”
“…예.”
정현아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특약 사항을 추가하는 대신, 첫 던전에 정현아 씨도 같이 들어갑시다. 가서 보세요. 저 때문에 현수가 위험해질지, 그렇지 않을지.”
“아…….”
능력 검증을 받겠다는 수호의 말에 정현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수호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고렙이 스스로 던전 가이드를 못 해 줘서 안달이구만.’
던전 초행길.
수호도 길잡이가 필요하다.
한데 고렙인 정현아를 가이드로 부려먹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공짜로.
심지어 수호가 신세를 지는 형식도 아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선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단, 계약금부터 받고요. 계약 파투 나도 안 돌려드립니다.”
계약이 어그러져도 당장 드워프 밥값 할 돈은 번다.
수호는 손해 볼 것이 없고, 저쪽도 푼돈(?)으로 검증 절차를 거칠 수 있으니 좋다.
“던전에 들어가는 시일은 그쪽에서 정해도 좋습니다. 오늘 오후에라도 저는 괜찮아요.”
수호가 그렇게 덧붙이며 제안을 끝맺었다.
10화 던전(2)
헌터는 레벨에 따라 활동하는 던전이 나뉜다.
20레벨 이하의 헌터만 1성 던전에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2성 던전은 40. 3성은 60…….
이는 대부분의 던전에서 지켜지는 규칙이다.
그래서 헌터는 자신의 레벨대에 맞는 던전에서만 활동한다.
그 경우 모든 헌터는 동료가 필요하다.
혼자서 깨기 힘든 난이도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던전을 깰 실력이 있다고 해도, 혼자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기도 하고.’
몬스터만 잡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레벨은 던전에 가는 두 가지 목적 중 하나.
나머지는 아이템 및 부산물이니까.
‘부산물을 수거하는 뒤처리 팀이 꼭 필요해.’
그래서 재능 있는 헌터는 거의 길드 소속이다.
무소속 헌터들을 전문적으로 보조하는 업체도 있기는 하지만.‘이번에는 지원이 좋으니 굉장히 편하겠구만.’
훌륭한 수거팀이 대기 중이고, 정현아가 길잡이까지 자처했으니까.
수호가 즐거운 마음으로 용달차에서 내렸다.
짐칸에서 주섬주섬 장비를 꺼낸다.
“원수호 씨 장비가…….”
그 모습을 본 정현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 하하. 수호 형, 냄비가 새로 생겼네.”
정현수가 뻘쭘하니 대답했다.
머리 위에 양은 냄비.
등 뒤에 무쇠 솥뚜껑.
손에는 장도리를 든 수호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호 씨. 저, 입고 있는 것들은…….”
“제 장비입니다.”
“그건 저도 알죠, 근데…….”
“안 묻기로 하셨잖아요. 특약 사항.”
아직 계약이 완전히 체결된 건 아니지만 가계약 상태다.
파투 낼 생각이 아니라면, 계약서의 내용을 이행해야 한다.
정현아가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네,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정현아는 서둘러 사과한 후 앞장섰다.
정현수와 수호가 뒤따랐다.
던전 게이트가 보였다.
허공에 쩍 갈라진 일렁이는 틈.
그 바깥을 한 겹의 빛무리가 감싸고 있다.
‘빛무리가 1겹이니, 1성이 맞네.’
게이트를 둘러싼 빛무리의 수가 던전의 난이도를 나타낸다.
게이트 앞에서 일행이 멈춰 섰다.
“여기 나오는 몬스터는 불꽃 고슴도치예요. 치명상을 입으면 눈이 충혈되면서 광폭화해요. 화염 가시를 쏘니 까다로워지죠. 충혈 후 3초 만에 광폭화하니까, 그사이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리고…….”
정현아가 간단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제가 앞장서 색적 활동을 할 거예요. 전투는 현수랑 원수호 씨 둘이 치르고요. 그게 던전에 온 목적에도 부합할 테니까요.”
위험한 경우를 빼면요.
정현아가 그렇게 덧붙였다.
수호도 바라던 바다.
시스템은 전투 공헌도에 따라 경험치를 지급한다.
색적까지는 몰라도, 그 이상 개입하면 정현아에게 공헌도가 몰린다.
특히, 해당 던전 난이도를 상회하는 고렙.
예컨대 1성 던전에서 20레벨을 초과한 헌터가 전투에 개입하는 경우, 저렙은 경험치를 거의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정현아는 전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응, 알았어.”
정현아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협곡을 따라 끝까지 가면, 마지막에 보스가 있어요. 보스를 잡으면 끝입니다.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없습니다.”
“가자, 누나.”
“아! 마지막으로, 이레귤러가 나올 수 있으니 늘 주의하세요. 현수 너도.”
이레귤러.
낮은 확률로 던전의 수준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가 등장한다.
네임드 몬스터거나, 때로는 보스가 한 마리 더 나오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으로 주의를 준 정현아가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수호도 그 뒤를 따랐다.
* * *
던전에 진입했다.
수호는 주변을 살폈다.
깊은 협곡의 바닥.
덤불이 무성히 자라 시야가 좁다.
브리핑대로 외길이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특별한 것도 느껴졌다.
‘마력 농도가 엄청 높아. 게다가 불규칙해.’
지구보다 마력 농도가 몇 배는 높다.
흐름이 일정치도 않다.
그 탓에 전자기기가 고장 나고, 열병기도 대부분 작동하지 않는다.
‘아이템’으로 인정받는 장비만 제구실을 하는 것이다.
“먼저 갈게요.”
속삭인 정현아가 앞으로 나섰다.
사전에 합의한 움직임이다.
수호가 5미터 정도 뒤처져 그 뒤를 따랐다.
정현수는 수호보다도 1미터 후방.
그가 활을 무기로 쓰기 때문에 정한 진형이었다.
어느 순간, 정현아가 우뚝 멈춰 섰다.
전방의 덤불을 가리키고, 손가락 1개를 펴 보였다.
‘처음엔 1마리인가?’
미리 약속한 수신호로 몬스터 1마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정현아는 슬쩍 후방으로 물러섰다.
동시에 수호가 달려 나갔다.
기척에 놀란 불꽃 고슴도치가 덤불에서 튀어나왔다.
푹-
한 놈의 몸에 화살이 박혔다.
정현수가 날린 것이다.
동시에 수호가 쇄도했다.
통증에 분노한 고슴도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시가 발사됐다.
쎄에엑-
수호는 굳이 막지 않았다.
‘피할 만해.’
가시의 궤적이 감각 스탯에 선명히 읽힌다.
까딱.
목을 움직였다.
가시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수호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퍽-
고슴도치의 대가리에 장도리가 명중했다.
꿰엑-
짧은 비명과 함께 고슴도치가 쓰러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 뭐야!’
정현아는 전투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데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다.
‘한 방에 잡았다고?’
1레벨 헌터가 1성 던전의 몬스터를 딱 한 방에 잡다니.
정현수의 화살이 상처를 입혔지만, 그건 치명상이 아니었다. 광폭화의 조짐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치명상을 가한 건 수호가 분명했다.
‘…공격력은 확실히 인정할 만해.’
정현아는 수호에 대한 평가를 상향했다.
물론, ‘그 계약서’에 기꺼이 사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제없으면 바로 갈까요?”
수호와 정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계속 나아갔다.
잠시 후, 정현아가 멈췄다.
이번엔 손가락 2개.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물러나 전투를 관찰하는 정현아의 표정이 묘했다.
‘내가 고슴도치를 발견하고 멈추는 순간, 원수호 씨도 멈췄어.’
정현아가 고슴도치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지하는 순간 수호가 멈춰 섰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 더 걷다 멈춘 정현수와 확실히 대비됐으니까.
‘설마… 감지한 거야?’
나와 비슷한 수준의 탐색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가? 정현아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정현아는 2성 던전 졸업을 눈앞에 둔 헌터.
1레벨짜리의 감지 능력이 그녀와 동급일 수는 없다.
꿰에엑-
이번에도 전투는 쉽게 끝났다.
정현수가 얼음 화살로 적의 발을 묶고, 수호가 머리에 장도리를 꽂았다.
전투를 마친 수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다.
[레벨 업!]
[민첩이 1증가합니다.]
[감각이 1증가합니다.]
[감각이 1증가합니다.]
‘스탯이 3개나 올랐네.’
레벨 업 시, 스탯은 자동으로 오른다.
무슨 스탯을 얼마나 올릴지는 헌터가 결정할 수 없다.
레벨 업 할 때 오르는 수치는 3 이하.
이번에 3개가 올랐으니 행운이다.
‘게다가 감각 스탯이 2나 오르다니. 운이 좋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수호가 협곡을 전진했다.
* * *
협곡을 7할쯤 가로지른 지점.
일행은 휴식 중이었다.
정현아는 자리에 앉아 이제까지의 과정을 더듬었다.
‘굉장히 순조로워.’
수호의 장도리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고, 어떤 고슴도치도 두 방을 버티지 못했다.
“그거 봐, 누나. 내가 말했지? 수호 형 먼치킨이라니까.”
동생의 말에 정현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호 씨가 보통이 아니란 건 알겠어. 인정할게.”
“그럼 계약해도 되지?”
“…….”
“왜 대답이 없어, 누나. 봤으면 알잖아. 저 형 완전 잘 싸운다니까.”
정현아도 안다.
눈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수호는 정말 잘 싸웠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마리의 고슴도치도 광폭화 상태에 다다르지 못했다.
적재적소. 완벽한 장도리질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현아는 주저했다.
‘잘 싸우는 건 맞아. 하지만 강민제만 한 화력은 없어.’
1렙 때부터 화염을 온몸에 두르고 몬스터를 학살한 것이 강민제다. 아무리 봐도 수호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강민제만큼 크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당장 특별한 스킬도 없었다.
그저 장도리를 정확히 잘 휘두를 뿐.
그렇기에 정현아는 계약을 망설였다.
‘계약 내용을 조금만 조절하면 딱 좋겠는데.’
좀 전에 무례한 일까지 저지르는 바람에 계약 내용이 더 불리해졌다.
‘괜히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에휴…….’
정현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벌떡.
저편에 앉아 있던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소리쳤다.
“전투 준비! 빨리!”
정현아는 당황하여 수호를 쳐다봤다.
갑자기 전투라니.
감지되는 몬스터도 없는… 어?
“이, 이레귤러!”
정현아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수호를 철석같이 믿는 정현수는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정현아가 긴장한 얼굴로 칼을 뽑아 들었다.
‘이레귤러야, 내가 가담해야 해!’
이레귤러는 위험하다.
사망하는 헌터 중 10%는 이레귤러 탓이다.
그것도 이레귤러 발생 빈도가 낮기에 그런 것이고.
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어들지 마! 가자!”
수호가 외쳤다.
앞은 정현아에게, 뒤는 정현수에게 하는 말이었다.
“예, 형!”
놀란 정현아보다 정현수의 반응이 오히려 빨랐다.
그리고 정현아가 개입하기 전, 이미 전투가 시작됐다.
수호는 움직이며 적을 관찰했다.
온몸에 가시가 돋은 2족 보행 고슴도치.
키는 3미터쯤이고, 눈이 벌써 시뻘겋다.
‘이미 광폭화 상태야.’
상처를 입지 않았음에도 놈은 이미 광폭화 상태.
손발의 가시에서 시뻘건 화염이 일렁인다.
“견제만 해!”
정현수에게 외친 후, 수호가 이레귤러 앞으로 달려들었다.
불타는 주먹이 날아온다.
수호가 방패를 들었다.
‘나보다 근력이 훨씬 높아.’
감각 스탯이 경고한다.
직격을 피하라고.
솥뚜껑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콰앙-
이레귤러의 주먹이 솥뚜껑에 부딪혔다가 미끄러졌다.
수호가 장도리를 휘둘렀다.
목표는 이레귤러의 무릎.
빠악!
적중했다.
놈이 휘청였다.
‘안 부서졌어.’
이레귤러의 뼈는 단단했다.
한 방으론 안 된다.
부서질 때까지 친다.
공격하려던 수호가 멈칫했다.
성난 이레귤러의 주먹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쾅쾅쾅-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불타는 주먹.
수호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솥뚜껑으로 흘려 냈다.
‘방어는 되는데, 공격할 틈이 없어.’
한 타이밍만 벌면 되는데…….
쎄엑-
그때 뒤에서 파공음이 들렸다.
정현수의 얼음 화살이 이레귤러의 옆구리에 꽂혔다.
놈의 시선이 정현수에게 돌아갔다.
동시에 놈의 주먹이 멈칫했다.
빙결 효과 탓이다.
‘틈이다!’
수호는 튕기듯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이레귤러가 주먹을 뻗었다.
이번엔 막지 않았다.
무릎을 바닥에 닿을 듯 구부려 공격을 피했다.
후웅-
주먹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수호가 장도리를 휘둘렀다.
콰직-
이레귤러의 무릎에서 파열음이 울린다.
‘됐다! 부러졌어!’
쿠와아아앙-
이레귤러의 입에서 거센 괴성이 터졌다.
눈에서 붉은 광망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뭔가 온다!’
저릿저릿. 감각 스탯이 위험을 경고했다.
수호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레귤러의 몸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놈의 가시 전부가 불에 휩싸이며 사방으로 발사됐다.
수호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문제없어, 나는.’
몸을 웅크리면 솥뚜껑으로 다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정현수는 아니다.
‘막아 줘야 해.’
판단을 내렸다.
수호가 튕기듯 측면으로 점프했다.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빈틈이 생겼다.
화염 가시가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괜찮아. 버틸 만해.’
높은 【화염 저항】 덕에 큰 상처는 없다.
“으아악-!”
정현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화염 가시가 정현수에게 닿기 일보 직전이다.
‘모자라!’
정현수에게 다가가 솥뚜껑으로 막기에는 늦었다. 그 전에 화염이 정현수를 덮친다.
‘어쩔 수 없지.’
든든한 물주를 여기서 잃을 수는 없는 일.
수호가 이를 악물고 솥뚜껑을 집어 던졌다.
절묘한 속도로 날아간 솥뚜껑이 정현수 앞을 막아섰다.
콰콰콰쾅-!
화염 가시가 솥뚜껑에 막혔다.
동시에 수호에게도 화염 가시가 날아들었다.
이제 방패는 없다.
위기 상황.
감각이 극한까지 집중된다.
시야가 확 좁아진다.
어둠 속 손전등을 켠 듯, 눈앞만 보인다.
좁은 시야 안.
화염 가시가 소복이 날아들고 있었다.
수호가 장도리를 휘둘렀다.
팍팍팍-
장도리가 화염 가시를 쳐 냈다.
가시가 터지며 화염이 흩어진다.
하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수호가 장도리를 폭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파파파팍-!
화염 가시가 터져 나간다.
단 하나도 수호의 몸을 침범하지 못하고.
얼마나 흘렀을까.
화염 가시 소낙비가 기어이 멎었다.
팟-
그 순간 수호가 바닥을 박찼다.
헐떡이는 이레귤러가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
‘그만큼 기술을 쏟아붓고 멀쩡할 수가 없지.’
놈의 앞에 도착.
수호가 무릎을 강하게 튕겼다.
물찬 제비처럼 날아오른다.
장도리를 휘둘렀다.
목표는 놈의 턱.
놀란 탓인지, 탈진한 탓인지.
놈의 반응이 늦다.
빠각-!
장도리가 턱에 꽂혔다.
휘청, 놈의 다리가 풀린다.
덕분에 머리 높이가 낮아졌다.
수호가 장도리를 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도 목표는 같다.
빠각-!
공격은 또 성공했다.
이레귤러가 무릎 꿇었다.
눈도 풀렸다.
결정타를 가할 차례.
수호가 몸을 뒤로 젖혔다.
가슴이 활대처럼 활짝 열리고, 등에 기운이 잔뜩 모인다.
“하압-!”
기합과 함께 수호가 상체를 굽혔다.
장도리가 큰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무릎 꿇은 이레귤러의 머리 위로.
콰직!
강한 파열음.
이레귤러의 두개골이 함몰됐다.
칠공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털썩.
기어이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네임드 몬스터 불꽃 가시 고슴괴인을 쓰러트렸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
.
.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 사이로 수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11화 제작&판매(1)
“마, 말도 안 돼! 1레벨이 이레귤러를 잡았어?”
그것도 거의 혼자서!
정현아가 쓰러진 이레귤러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2렙이었습니다. 지금은 5렙이 되었고요.”
수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는 길에 한 번 레벨 업을 해서 2레벨.
방금 이레귤러를 잡아서 5레벨이 되었다.
스탯도 잔뜩 올랐다.
‘감각 스탯은 15나 되네.’
이번 레벨 업으로 감각 스탯이 3 올라 이제는 15다.
수호는 자신했다.
이제 정현아보다도 몬스터를 더 빨리 감지할 수 있다.
수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레벨 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은 이레귤러 앞.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주먹만 한 구슬이 떨어져 있었다.
수호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스킬 룬 【화염 강격】을 획득하셨습니다.]
몬스터는 낮은 확률로 아이템을 떨어트리는데 그중에서도 귀한 스킬 룬이 나왔다.
스킬 룬.
사용하면 일반 스킬을 배울 수 있는 소비형 아이템이다.
수호는 스킬 룬의 정보를 확인했다.
【화염 강격】
- 무기에 화염을 덧씌워 폭발력을 부여한다. 스킬 사용 시, 다음 타격은 강한 폭발을 일으키며 대미지가 100% 증가한다.
‘안 그래도 한 방 대미지가 좀 부족하다 싶었는데.’
수호는 전투 관련 스킬이 없다.
지금껏 보인 모습은 불꽃수를 마시고 오른 스탯발이다.
‘딱 좋은 게 나왔네.’
장도리와 높은 스탯 덕에 괜찮은 파괴력을 보였지만, 스킬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오- 스킬 룬! 수호 형, 축하드려요. 대박!”
정현수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수호가 되물었다.
“이거, 내가 갖는다?”
“당연하죠! 말씀드렸잖아요. 던전에서 나오는 모든 아이템 및 부산물은 수호 형 거! 하하, 전 계약을 확실히 준수합니다. 특약 사항도 걱정 마세요.”
“그래, 고맙다.”
“제가 고맙죠, 형.”
수호에게 대답한 정현수가 고개를 돌려 정현아를 봤다.
“누나, 나 벌써 4렙이야. 봤지? 이 형, 고속버스야. 그러니까 괜히 방해 좀 하지 마.”
정현아는 말문이 막혔다.
실적으로 증명했으니 더는 반대할 수 없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고.
“왜 대답을 안 해. 아직도 수호 형 의심하는 거야?”
“…아니야. 일단 던전 마저 진행해. 계속할 거죠, 수호 씨?”
정현아가 수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수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끝까지 가야죠.”
* * *
보스는 어렵지 않았다.
차분히 준비하고 상대해서 그런지, 이레귤러보다 쉬운 느낌이었다.
보스를 처치하니 커다란 빨간색 광석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던전 코어였다.
코어를 부수면 던전을 아예 닫아 버릴 수 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던전의 몬스터가 다시 생성되고, 사냥터로 재활용할 수 있으니까.
사냥을 마친 후.
일행은 던전 밖, 상왕련 소유의 건물로 향했다.
수호는 응접실에 앉아 생각했다.
‘레벨이 벌써 8이네.’
초반에 비교적 레벨이 잘 오르는 걸 고려해도 높은 수치였다.
수호와 정현수 둘이 경험치를 다 먹었고.
그중에서도 수호의 기여도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정말 어리석었네요. 안목도 없었고요. 수호 씨 능력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정현아였다.
말이 끝날 무렵,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원수호 씨가 얼마나 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식으로 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건 분명해.’
이미 실수는 충분히 했다.
정현아는 더는 자신의 기준으로 수호를 판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잘 풀렸으니 됐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정현수가 끼어들었다.
“누나, 봤지? 이 형 완전 끝내주지? 그러게 왜 참견해서 일만 복잡하게 만들고 그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정현아가 수호를 흘끔 쳐다봤다.
던전에서 나오고도, 정현아의 눈에는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모르면 끼어들지 말았어야지.”
“…….”
방해자를 침몰시킨 정현수가 수호에게 물었다.
“형, 이제 다 해결됐으니 계약해 주실 거죠?”
수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수가 냉큼 달려가 종이 뭉치를 가져왔다.
“여기 새로 추가된 사항까지 다 들어간 거로 계약서 다시 뽑아 왔어요. 읽어 보시고 문제없으면 사인해 주세요.”
수호가 계약서에 사인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저도요. 전 형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니까, 필요하시면 뭐든 말씀하세요.”
정현수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수호는 그런 정현수를 보며 웃었다.
정현아의 방해 덕에 오히려 정현수의 충성심(?)이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지잉-
그때 정현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가 수호에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수거팀 말로는 이레귤러의 사체에서 ‘고급 등급’ 재료가 나왔다네요. 팔아 봐야 알겠지만 대금이 상당히 많이 나올 것 같아요.”
몬스터를 도축하면 가끔 재료 아이템이 나온다.
스킬 룬에 고급 재료까지.
고마운 이레귤러구만.
수호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정현아에게 물었다.
“그 재료, 안 팔고 그냥 넘겨받을 수 있죠?”
“네, 그거야 당연하죠. 혹시 장비 제작하실 거면 상왕련 소속 장인에게 의뢰해 드릴 수 있는데…….”
마음을 확실히 정했는지, 정현아가 친절하게 물어 왔다.
수호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냥 주세요. 따로 쓸데가 있어서요.”
* * *
수호는 용달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계약금은 받았고, 부산물 대금도 며칠 내로 들어올 테고.”
통장이 두둑해지자 수호는 드워프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다른 걸 좀 먹여 줘 볼까?”
수호가 마트로 차를 돌렸다.
* * *
집 앞에 도착한 수호가 박스를 날랐다.
냉장고 앞, 박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이레귤러가 참 효자야.”
수호가 박스 위에 길쭉한 물건을 올렸다.
[화염 가시뼈]
- 불꽃 가시 고슴괴인의 허벅지 뼈. 단단하며 강한 화(火) 속성을 띤다.
- 재료 아이템
- 아이템 등급 : 고급
- 내구도 350
이레귤러가 토해 낸 재료 아이템.
완성형 아이템과 달리 옵션이 간단하다.
‘드워프들이 마을에 생산 시설을 짓고 있으니, 이건 팔면 안 되지.’
정현아의 제안을 거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드워프를 놔두고 상왕련 장인을 택할 이유가 없으니까.
수호가 냉동실 문을 열었다.
“거인님, 언제 오시지. 배고픈데.”
“그냥 육포라도 먹을까.”
“라면 국물에 불려 먹으면 육포도 맛있던데.”
“아, 배고프다.”
볼드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문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강아지처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수호는 웃음이 나왔다.
“배 많이 고파요?”
수호가 물었다.
“헉! 왔다! 거인님 오셨다!”
“앗싸- 육포 안 먹고 기다리길 잘했네.”
“오실 줄 알았어! 히힛. 거인님 배고파요. 쓰러질 것 같아요!”
드워프들이 신나 소리쳤다.
수호는 라면 박스를 드워프들에게 보냈다.
“오옷! 라면이다. 토드, 빅터. 물 떠와!”
신나서 소리치는 볼드에게 수호가 말했다.
“박스 열어 봐요, 이번 건 좀 달라요.”
“앗! 이건 뭐예요? 웬 통이 들어 있네.”
“그건 컵라면이란 거예요. 더 빨리 먹을 수 있죠.”
“헉! 빨리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아셨지?”
“마음을 읽으셨나?”
“역시 대마법사!”
“그건 아니고요. 어쨌든 물만 끓이면 금방 먹을 수 있어요. 그릇도 따로 필요 없고요.”
“히힛, 맛있겠다. 고마워요. 거인님!”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하는 드워프들.
그 뒤로 덩치 큰 드워프 한 명이 다가왔다.
“이놈들 또 거인님 귀찮게 하고 있어?”
타룽가였다.
“안 귀찮습니다. 타룽가 님도 시장하시면, 같이 드세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거인님께서 권하시니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껄껄껄.”
족장 아저씨도 배고팠나 보네.
씩 웃던 수호는 용건이 생각났다.
“타룽가 님, 근데 생산 시설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내일이면 대장간이 완성될 듯합니다.”
“잘됐네요. 근데 타룽가 님, 혹시 이게 쓸모가 있을까요?”
수호가 [화염 가시뼈]를 타룽가에게 전했다.
뼈를 찬찬히 살핀 타룽가가 입을 열었다.
“상급 재료라 할 수는 없지만, 쓸 만하군요. 저번에 거인님이 처치한 오크 주술사에게서 얻은 재료가 있는데, 그걸 섞으면 괜찮은 물건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예, 최선을 다해 만들어 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고마워요, 타룽가 님.”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늘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
어느새 타룽가의 손에 사발면이 들려 있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수호가 냉동실에서 물러났다.
라면 냄새를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은 컵라면이다.’
수호도 커피포트에 물을 얹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수호는 그동안 드워프를 돌보며 지냈다.
그사이 드워프 마을에도 변화가 생겼다.
『붉은 망치 일족 드워프』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920
- 만족도 : 75/100
“곧 천 명이야.”
합류해 오는 드워프의 수가 확연히 늘었다.
후발대가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빨라.”
한데 수호의 예상보다 후발대의 도착이 너무 이르다. 그 탓에 근심이 생겼다.
“밥값이…….”
드워프는 잘 먹는다.
한 끼에 라면 3개는 뚝딱이다.
라면 하나에 천원 꼴로 잡으면 3천 원.
하루 두 끼만 먹어도 6천 원이다.
“천 명이면 하루에 6백만 원.”
심지어 드워프는 2천 명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게다가 계속 라면만 먹일 수도 없는 일이고.”
건강을 생각하면 다른 음식도 먹여야 한다.
필연적으로 돈이 더 든다.
“계약금으로는 생각보다 오래 못 버티겠는데.”
시일이 좀 지나면 드워프 스스로 먹을 걸 구할 줄 알았는데, 아직 별 진전이 없다.
“이대로는 안 돼.”
결정을 내린 수호가 냉동실로 다가갔다.
“타룽가 님!”
몇 번 부르자 타룽가가 달려왔다.
“거인님, 부르셨습니까?”
“네,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드릴 말씀도 있고.”
“경청하겠습니다.”
그간 신세를 진 탓인지, 타룽가가 한층 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혹시 이주하기 전에는 식량을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인간들과 거래를 통해 대부분 충당했습니다. 저희 드워프가 농사에는 소질이 없어서…….”
자꾸 두드리고 개량하고 싶어서 작물이 자랄 때까지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타룽가가 멋쩍은 표정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시군요. 지금은 그 인간들과는 거래가 힘들겠죠?”
“예, 지금은 인간과 연락할 수단이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되고요. …죄송합니다. 그동안 저희가 거인님께 너무 큰 신세를 졌지요. 이제부터라도 사냥하는 인원을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사냥으로 고기를 구해 먹는 건 봤다.
간신히 간식이나 될까 싶은 정도였지만.
사냥 인원을 늘리면 약간이나마 밥값 소모가 줄어들 터.
하지만 그것은 수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혼자서 붉은 망치 부족의 식량을 다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네요.”
“아…….”
“그래도 여러분의 사정을 알면서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본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수호는 그간 궁리한 방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드워프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순간부터 떠올리던 것이었다.
“장비를 만들어 주십시오. 붉은 망치 부족의 솜씨로 만든 장비는 저희 세상에서 훌륭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걸 팔면, 식량은 충분히 공급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타룽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재료가 부족합니다. 거인님이 쓰실 장비 제작도 제대로 된 금속이 부족해서 자꾸 늦어지는 상황이라.”
“음…….”
수호가 침음했다.
마트에서 사다 나를 수 있는 음식과 금속은 다르다.
대량으로 구하기 어려울뿐더러, 냉동실에 집어넣기도 힘들다.
‘그래도 어떻게든 구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비싼 재료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일반 금속이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터.
정 안 되면, 쇠로 된 공구라도 사서 집어넣어 줘야 하나? 녹여서 쓰게?
수호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타룽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쇠붙이라고는 부서진 공구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걸 녹여 봐야 장도리나 만들지, 제대로 된 검 한 자루 만들기 힘듭니다. 그런 걸 만들어 드려 봤자, 거인님께 도움은커녕 폐만 되지 않겠습니까? 팔리지도 않을 테고요.”
잠깐! 장도리라고?
“혹시 볼드 씨가 제게 준 장도리 수준의 물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도 그거보다는 좀 낫지요. 볼드의 것은 부서진 물건 아니었습니까? 다시 생각해도 볼드 이 녀석은 참…….”
장도리보다 더 좋다고?
“그거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성능이 과할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12화 제작&판매(2)
수호는 휴대폰을 들어 헌터 앱을 실행했다.
헌터 앱은 헌터만 사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여러 기능을 포함한다.
그중에 수호가 쓰려는 것은 거래 게시판이었다.
잠시 후, 수호가 작성한 글이 게시판에 등록됐다.
『일반 등급 단검 대바겐세일! 오늘만 특가!』
- 물공 80. 하급 절삭 강화. 내구 100짜리 단검. 오늘만 800만에 모십니다. 하루 5개, 1인 1개 한정 특가!
- 거래 방법 : 저희 가게에서 직거래. 위치는 헌터 협회 정문에서 길 따라 쭉 내려오시면… 상호 : 수호 아이템&잡화.
“이 정도면 됐겠지?”
수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단검을 들었다.
타룽가에게 받아 온 물건이다.
[날카로운 단검]
- 뛰어난 장인이 질 나쁜 철로 만든 단검. 칼날이 예리하다.
- 아이템 등급 : 일반
- 물리 공격력 80
- 【하급 절삭력 강화】
- 민첩 +2
- 내구도 100
“질 떨어지게 만드는 게 오히려 힘들 줄이야.”
수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단검의 성능 때문이다.
타룽가에게 가장 솜씨 없는 장인에게 제작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최대한 대충 만들라고도.
그럼에도 자칫 ‘고급’이 뜰 뻔했다.
“여기서 더 좋아졌으면, 파는 것도 힘들 뻔했어.”
고급 등급 이상의 장비는 대부분 던전 드랍템이다.
그 외에 제작 계열 고레벨 헌터의 수제품인 경우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이템에 출처를 명시하기 때문에 수호가 막 내다 팔기 어려웠다.
“그새 댓글이 달렸네.”
게시글에 벌써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구라 아님? 너무 싼데. 1,000은 받을 물건인데.
┗근데 저거 일반 맞음? 하급 절삭 강화, 고급에 달리는 옵션 아님?
┗일반 최상급에도 가끔 달려요. 근데 내구도도 높고 옵도 좋은데 왜 싸게 팔까요?
┗사기 같은데. 신입인가? 기록 다 남아서, 장난치다 신고 들어가면 헌터 자격 정지될 수도 있는데. 장난이면 빨리 글 내려라.
“너무 싼가?”
가게를 다시 오픈하는 김에 손님 좀 끌 겸해서 싸게 올렸더니, 생각보다 반응이 핫했다.
수호는 얼른 댓글을 달았다.
┗재개업 한정 특가입니다. 내일부터는 천만 원에 팔아요.
┗오! 주인장 등판. 이 정도면 사기는 아닌가 보네요. 가게 위치도 적혀 있고요.
┗그러게요. 난 일단 가 봐야지. 안 그래도 단검 필요했는데.
┗협회에 볼일 있어서 근처에 와 있는데, 바로 가 봐야지.
┗선발대님, 후기 부탁.
수호는 앱을 껐다.
종이를 가져와 매직으로 글자를 썼다.
그것을 쇼윈도에 붙이고, 가게 밖으로 나가 쇼윈도를 확인했다.
[재개업 한정 특가! 일반 최상급 단검 빅 세일!]
문득 특가 판매로 샀던 맥주가 떠올랐다.
그것 덕분에 모든 일이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인생 참,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네.”
수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저, 혹시 영업하나요?”
젊은 여자였다.
복장을 보니 헌터로 보였다.
“아, 네. 영업합니다.”
“헌터 앱에 물건 올리신 분 맞죠?”
근처에 있다던 사람인가?
“네, 단검 사시게요?”
“네. 물건 좀 보여 주세요.”
“들어오세요.”
손님을 가게로 안내한 후, 수호가 단검을 건넸다.
손님이 단검을 받아들고 살폈다.
잠시 후.
“와, 대박! 살게요! 이건 꼭 사야 해!”
뭔가 좀 과하게 좋아한다.
수호는 궁금증을 참지 않았다.
“저 손님, 옵션은 헌터 앱에 올린 그대론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앱 쓰시는 거 보면 헌턴데,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그렇죠.”
“장비는, 그중에서도 특히 무기는 옵션이 다가 아니거든요. 생김새에 따라 활용도가 엄청나게 갈려요. 근데 이 단검은 무게 중심도 완벽하고, 손잡이 형태도 최고예요. 손에 짝짝 감기는 게, 그립감 진짜 끝내줘요.”
“아, 그렇군요.”
직접 써 본 장비가 드워프제밖에 없다 보니 그 정도는 당연한 줄 알았다.
가게에 원래 파는 것들도 소모품 위주의 양산품이었고.
“네, 이거 정말 좋은 물건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
“저한테 2개 파시면 안 돼요?”
그러고 보니, 손님 허리 양쪽에 단검이 달렸다. 쌍 단검을 쓰나 보네.
“그게 1인당 1개씩이라서…….”
“내일도 파신다면서요? 그럼 1개는 천만 원에 팔면 되잖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팔 이유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 고맙습니다. 헤헤.”
손님이 신나서 웃었다.
수호도 웃었다.
물건을 팔고 저런 모습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잊고 있었다.
‘보람 있네.’
손님이 곧 물건값을 지불했다.
수호가 기분 좋게 손님을 배웅했다.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며칠이 지났다.
드워프를 보살피고, 물건을 파는 규칙적인 일상이 이어졌다.
지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 정현수 : 수호 형, 안녕하세요. 던전 일정이 좀 빨리 잡혀서 그런데, 주말에 다음 던전 가실 수 있으세요?
정현수의 메시지였다.
1달에 최소 2번.
그게 계약서상의 내용이다.
1주일 만에 다시 던전이 잡혔으니, 좀 빠르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빨리 강해져서 나쁠 리 만무하니까.
- 원수호 : 혹시 문제 있는 던전은 아니지?
- 정현수 : 물론이죠. 저희 상왕련 소유 던전이고, 여러 번 검증 마친 곳이에요.
- 정현수 : 제가 좀 서두르는 바람에 좀 빨라진 거예요. 형이랑 같이 던전 도니까, 렙업도 빠르고 힘도 별로 안 들어서 빨리 다시 가고 싶더라고요. 하하.
- 원수호 : 그래, 그럼 주말에 가자.
- 정현수 : 네, 형. 그럼 제가 자세한 일정이랑 던전 정보 보내 드릴게요.
- 원수호 : 그래.
“이번 주말에는 가게 닫아야겠네.”
수호는 며칠간 장사 수익을 떠올렸다.
매일 5천만 원어치의 단검을 꾸준히 팔았다.
하루도 남김없이 매진됐다.
물량이 적기 때문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단검을 2자루 산 첫 손님이 게시판에 리뷰를 써 준 덕분이었다.
━이거 대박! 한동안 치느님을 끊어야 했지만, 이거 산 건 후회 안 함! 무게 중심! 그립감! 심지어 디자인까지! 완벽한 3박자의 하모니! 내구도도 딴딴, 쓰다 중고로 팔아도 본전 건질 듯. 근데 안 팔 거임ㅋㅋ
사진은 물론 단검을 휘두르는 영상까지 포함된 리뷰였다.
┗나도 이거 샀음. 진짜 좋음. 가성비 끝판왕.
┗나도 샀는데ㅋㅋㅋ 망설이는 친구들, 그럴 틈이 없다. 얼른 가서 사라. 꼭 사라.
┗서민 헌터 용 명품임. 이건 진짜 2층 졸업할 때까지 쓸 만함.
물건을 사간 손님들이 댓글을 달았다.
그중 수호를 뜨끔하게 만드는 댓글도 있었다.
┗이거 진짜 좋은데, 딱 하나의 단점은 수량이 적다는 점. 늦게 가면 다 팔리고 없다는 점.
┗근데 좀 이상하긴 함. 같은 물건 계속 찍어 내는 거 보니, 제작템이겠지? 근데 물건 등급에 비해 너무 좋아. 제작 계열 고렙이 엄청 공들여 만든 품질이란 말이지. 근데 고렙이 뭐 하러 정성 들여 이런 걸 만들겠어? 비싼 재료로 비싼 물건 만들지. 기왕이면 템에 자기 이름도 좀 박아 넣고.
┗그러게. 수량 보면 누가 혼자 만드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 새로 각성한 제작 계열인가?
┗신입이 이 정도면, 상왕련에서 모셔갈 텐데. 다른 길드도 침 흘릴 거고.
‘하루에 5개씩만 팔기를 잘했지.’
반응을 보면, 수십 자루씩 쌓아놓고 팔았다면 분명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어진 댓글이 쓸데없는 관심을 불식시켜 주었다.
┗물건만 좋으면 됐지, 뭔 출처까지 파고드냐? 주인장이 어디서 드워프라도 주웠나 보지. 신경 끄고 그냥 가서 사.
┗나도 줍고 싶다. 기왕이면 엘프로.
┗난 서큐버스. 하악.
┗이종족하면 묘인족이다냥. 묘인족 줍고 싶다냥.
┗ㅁㅊ갑자기 분위기 왜 이럼ㅋㅋㅋㅋㅋ
‘댓글이 산으로 가네. 고맙게.’
드워프란 말이 나왔을 때는 뜨끔했는데 말이지.
수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가게를 둘러봤다.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 손님이 오간 덕분인지 활기가 느껴졌다.
“모처럼 장사도 잘되고.”
덕분에 어제는 라면 종류를 바꿨다.
좀 더 비싼 푸라면과 오소리로.
넣어 먹으라고 계란도 사서 함께 보내 줬다.
“술술 잘 풀리는구나.”
돈 좀 더 벌면, 영양가 있는 것도 좀 먹여 줘야지.
중얼거리던 수호가 차원 패널을 열었다.『붉은 망치 드워프』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1,045
- 만족도 : 77/100
그새 또 인구가 늘어났다.
전부 2천 명쯤 된다고 했으니, 한동안은 이 추세가 계속될 터.
“이대로만 가자.”
돈벌이도 순조롭고, 드워프들의 이주도 마찬가지.
별걱정이 없다.
“슬슬 점심 시간이구만. 가게 문 좀 잠깐 닫고.”
점심 먹으면서 드워프 마을이나 살펴야겠다.
잠시 후, 그릇에 시리얼을 가득 담은 수호가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드워프들 뭐하나 한번 볼까.”
냉동실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볼드가 앉아 있었다.
“거인님 언제 오시지?”
중얼거리는 폼을 보니 제법 기다린 듯한데.
무슨 일이지?
“저 왔어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앗- 오셨다!”
“네.”
“잠깐만요, 거인님. 족장님이 거인님 오시면 부르라고 해서요.”
잠시 기다렸다.
볼드가 타룽가를 데려왔다.
“타룽가 님, 무슨 일 있습니까?”
“거인님, 또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왠지 너무 순조롭다 했더니…….
“무슨 일이에요?”
“단검 재료가 동났습니다. 오크들이 떨어트린 무기에서 잡철까지 싹 긁어 녹였는데도, 더는 쓸 게 없습니다. 망가진 공구나 장비 등은 진작에 녹였고요. 면목 없습니다.”
아, 맞다!
수호는 자신이 빼먹은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금속 구한다는 게 깜빡했네.’
며칠 전에 한번 비슷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상황이 너무 순조로워 잊어버리고 있었다.
모처럼 느끼는 ‘장사하는 맛’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나 할까. 단검 재료가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도 몰랐고.
‘어떻게 구하는 게 좋을까?’
간단한 방법은, 녹여 쓸 만한 금속 공구를 사다 주는 것이다. 당장 필요한 금속량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그 정도면 될 터였다.
물론,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드워프 자체적으로 소모되는 양도 있을 테니, 나중에 다시 문제가 생길 터.
진짜 어디서 금속 주괴라도 납품받아야 하나?
‘제일 좋은 건 저쪽 세상에서 해결하는 건데.’
그러면 무거운 금속을 사다 나를 필요도 없고, 그걸 구하기 위해 수호가 발품 팔 일도 없으니까.
수호는 행동에 나서기 전에 먼저 타룽가에게 물었다.
“혹시 그쪽에서 금속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요? 광산을 판다던가.”
“사실 근처에 광맥을 여러 군데 파악해 뒀습니다. 어딜 가나 광맥부터 눈여겨보는지라…….”
“그럼 파내면 되지 않나요?”
“그게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손도 많이 필요하고요. 후발대가 다 도착하고 일손이 늘어도, 땅 파는 데만 최소 몇 달은 걸릴 겁니다.”
땅 파기?
그거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광맥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요?”
“철광석을 비롯해 몇몇 광맥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혹시 어디쯤인지 손으로 한번 가리켜 보실래요?”
“저기 저쪽입니다.”
타룽가가 마을 옆 산봉우리 쪽을 가리켰다.
수호가 호쾌하게 외쳤다.
“땅, 지금 팝시다.”
* * *
수호는 침대 아래를 뒤져 공구함을 찾았다.
“못 박을 때 한 번 쓰고 처박아 놔서, 괜히 샀다 싶었더니.”
공구함 안에 잠들어 있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드릴 이걸 이렇게 쓰네.”
수호가 전동 드릴을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 * *
부르르르르-
떨림이 느껴졌다.
부르르르르-
부르르르르-
떨림은 그치지도 않고, 한동안 계속됐다.
온 발랑카 산맥이 흔들렸다.
“크르르르-”
산맥 어딘가의 동굴 속.
몸을 말고 있던 존재가 불쾌한 숨을 내뱉었다.
부르르르-
계속되는 진동.
번쩍-!
칠흑처럼 어두운 동굴 안이 밝아졌다.
셋 노랗고 세로로 금 간, 두 줄기 커다란 불빛 때문이었다.
곧이어 묘한 울림이 담긴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기어이 또다시…….』
13화 야생의 드래곤이 나타났다가… (1)
의정부 외곽, 상왕련 소유 던전 게이트 앞.
낡은 용달차가 멈춰 섰다.
수호가 내렸다.
“수호 형! 오셨어요?”
정현수가 쪼르르 달려왔다.
“응, 일찍 왔네?”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바로 들어가실 거죠?”
“굳이 밖에서 시간 끌 필요 없지. 들어가자.”
“넵!”
수호와 정현수가 장비를 착용했다.
“가자.”
둘은 곧 게이트를 넘었다.
던전 진입 후, 수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감각에 걸려드는 몬스터는 없었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없으니까.’
앞으로 계속 정현수와 둘이 다녀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파티원은 추가하지 않는다.
정보 차단을 위해서도. 부산물과 아이템, 경험치를 위해서도 그 편이 좋다.
‘신경 바짝 써야 해.’
같은 1성이지만 이번 던전은 지난번보다 난이도가 높다.
저번 던전에서 능력이 충분하단 건 확인했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수호는 마음을 다잡고 정현수에게 말했다.
“내가 앞, 네가 뒤. 둘이서는 처음이니까 조심해서 가자.”
“넵! 형만 믿을게요!”
수호가 앞장서 나아갔다.
이번 던전은 높이 10m 정도의 동굴이 이어진 형태였다.
던전의 지도는 이미 전달받아 머릿속에 다 넣어 뒀다.
조용히 걷던 수호가 우뚝 멈춰 섰다.
수호가 손가락 하나를 펴, 우측 벽을 가리켰다.
‘1마리.’
5미터 높이, 벽에 얼룩한 형체가 보였다.
칼날 거미.
8개의 다리 끝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곤충형 몬스터.
잿빛 갑각으로 이뤄진 몸이 단단하다.
지금처럼 벽에 붙어 있다가 기습해 오는 것이 특징이다.
끄덕.
정현수도 칼날 거미를 발견했다.
수호는 공격 신호를 보낸 후, 소리 내지 않고 달렸다.
‘들켰어.’
하나 선제공격은 실패다.
딛고 선 거미줄의 진동을 통해, 거미가 수호의 접근을 파악한 것이다.
칼날 거미가 벽을 타고 수호에게 달려든다.
그러다 입을 벌렸다.
안에서 거미줄이 발사됐다.
“쏴!”
수호의 신호에 정현수가 화살을 발사했다.
날아간 화살이 거미줄에 닿았다.
화르르-
정현수의 2가지 스킬 중 하나, 화염 화살이었다.
불길이 거미줄을 태웠다.
그사이 수호는 거미에게 다가가 있었다.
칼날 거미가 두 개의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일단 막고.’
창처럼 뻗어 오는 앞발.
수호가 솥뚜껑을 내밀었다.
캉!
칼날 앞발이 대번에 튕겨 나갔다.
‘한 번 더.’
반대편에서 또다시 칼날이 찔러 왔다.
그때 정현수의 화살이 칼날 거미의 다리를 맞혔다.
저적-
수호를 노리던 앞발이 얼음 화살에 얼어붙으며 멈췄다.
‘좋았어.’
수호가 바닥을 밀었다.
몸이 소금쟁이처럼 전진한다.
칼날 거미가 입을 쩍 벌렸다.
앞발이 봉쇄당하고 피할 틈이 없으니 물기라도 하려는 모양.
하나 수호가 빨랐다.
장도리가 호선을 그린다.
목표는 거미의 입 위쪽.
징그러운 8개의 눈 한가운데.
빠각-
거미 갑각이 부서지며 머리가 움푹 함몰됐다.
거미의 행동이 멈춘다.
수호는 한 번 더 장도리를 내리쳤다.
빠각!
확인 사살이다.
거미가 바퀴 빠진 짐마차처럼 주저앉았다.
“형, 수고하셨어요.”
“너도. 얼음 화살 타이밍 좋았다.”
“뭘요, 형이 다 잡으셨죠. 하하.”
정현수는 수호의 칭찬이 기쁜지 활짝 웃었다.
수호도 마주 웃었다.
‘충분해. 현수랑 둘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자신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안 지쳤지? 바로 가자.”
“넵!”
수호와 정현수가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 * *
던전 밖.
상왕련 던전 관리팀, 팀장 황병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그냥 쉬면 좀 좋아.”
잡혀 있던 일정이 펑크 났다.
원래 던전에 들어가기로 한 파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데 다른 파티가 나타났다.
덕분에 황병수는 꼼짝없이 일을 해야 했다.
“현아 아가씨가 직접 지시까지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온종일 이러고 있어야겠구만.”
평소라면 부하 직원을 시켰을 일.
한데 정현아의 특별 지시가 내려왔다.
오늘 여기 들어가는 팀을 최선을 다해 서포트하라고.
그 탓에 황병수는 던전 사냥이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대기하는 신세다.
투덜거리던 황병수의 눈에 던전으로 다가오는 트레일러가 보였다.
“수거팀? 빨리 왔네.”
곧 차에서 30대 후반의 남성이 내렸다.
“황 팀장, 여기 있었어?”
차에서 내린 남성.
수거 2팀장이자 황병수와 입사 동기인 정동진이 물었다.
“응, 어쩌다 보니. 근데 일찍 왔네?”
“나도 어쩌다 보니. 근데 왜 표정이 뚱해?”
정동진이 황병수의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황병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오늘 원래 오기로 한 팀이 펑크가 났단 말이야. 자네도 들었지?”
“들었어. 사냥 7팀, 파티원 1명이 사라졌다던가.”
“응, 그래서 모처럼 좀 쉬나 했더니, 현수 도련님이 갑자기 던전에 들어가신다잖아.”
“그거 때문에 뚱해? 현수 도련님 막 각성해서 한창 열정적일 시긴데, 이해해 드려야지.”
황병수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알지. 근데 웬 이상한 떨거지 한 놈이랑 같이 들어갔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들어 보니까, 우리 길드 소속도 아니라던데.”
“맞아. 우리 길드 소속 아니야.”
“도대체 길드원도 아닌데 왜 길드 소유 던전에 들여보내는 거지? 하다못해 좀 번듯하게라도 생겼으면 모를까. 자넨 못 봤지?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
정동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황병수가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저번에 사냥한 사냥감을 수거한 것이 정동진의 팀이었다.
정동진의 기색도 모르고, 황병수는 계속 떠벌였다.
“저기 용달차 보여? 저걸 타고 와서는 웬 양은 냄비를 머리에 뒤집어쓰는데, 내가 얼마나 황당하던지. 혹시 정신병잔가? 도련님이 같이 있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을 텐데. 정신은 살짝 이상하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대장장이라도 되려나?”
“…대장장이는 아닐 거야.”
정동진이 대답했다.
그는 지난주 사냥감을 수거할 때 본 장면을 떠올렸다.
둔기 자국.
그날 수거한 대부분의 몬스터에는 딱 하나씩 둔기 자국이 찍혀 있었다.
치명적인 위치에.
‘심지어 이레귤러의 몸에 남은 상흔도… 화살 자국 하나를 빼면 모조리 둔기 자국이었어.’
정현아가 던전에 함께 들어갔지만, 이레귤러의 사체에 칼자국은 없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현아 아가씨 도움 없이 이레귤러를 잡은 거야. 막 각성한 헌터 둘… 아니, 혼자서.’
수많은 몬스터를 수거한 정동진이다.
이레귤러의 몸에 난 화살 자국은 결코 치명상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도출되는 결과는 하나뿐.
원수호는 절대로 평범한 헌터가 아니다.
“그래? 대장장이 아니야? 뭐 좀 아는 거라도 있어?”
“나도 딱히 아는 건 없어. 그냥 현수 도련님 파티원이고, 현아 아가씨가 잘 지켜보라고 했을 뿐이야.”
“그렇구먼. 그 양반 운 좋네. 정 씨 남매 줄 잡았으면, 먹고살기 편하겠구먼.”
“…….”
정동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근데 자네는 왜 벌써 왔어? 초짜 둘이 들어갔으니, 해 떨어져야 나올 텐데.”
“글쎄. 내 생각엔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
“응? 뭔 소리야? 아! 하긴 입구에서 간만 보다 돌아 나올 테니, 더 빨리 올지도.”
정동진은 대답하는 대신, 깊은 눈빛으로 던전 게이트를 주시했다.
* * *
던전 보스룸 앞.
수호와 정현수가 앉아 있었다.
3시간여의 광속 사냥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레벨이 두 개 올랐네.’
● 상태창
──────────
▶ 이름 : 원수호
▶ 클래스 : 【차원 여행자】
▶ 레벨 : 10
▶ 고유 스킬
- 【소통】【교역】【???】
▶ 일반 스킬
- 【화염 강격】
▶ 스테이터스
- [근력 26(+5)][민첩 10(+10)][체력 25(+5)][마력 8]
- [감각 17] [화염 저항 52]
──────────
스탯도 많이 올랐다.
기본 근력이 높다 보니, 일반 몬스터 상대로는 새로 얻은 【화염 강격】을 쓸 필요도 없었다.
수호는 옆에 앉은 정현수를 돌아봤다.
‘현수 체력도 다 회복된 거 같고.’
보스와의 싸움을 앞두고 만전을 기하기 위한 휴식이었다. 정현수의 상태가 좋아 보이니 그만 쉬어도 될 터.
“이제 갈까?”
“네, 형. 이제 충분히 쉬었어요.”
“가자.”
수호가 일어섰다.
코너를 돌아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저편 넓은 공동이 보였다.
어두컴컴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수호는 보스 몬스터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천장!’
던전의 보스, 칼날 여왕 거미는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수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정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위를 당겼다.
퓽-
화염 화살이 발사됐다.
칼날 여왕 거미가 화살 소리에 반응했다.
사사삭.
놈은 용달차만 한 몸을 움직여, 거미줄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화살은 빗나갔다.
하지만 화살이 노린 것은 칼날 여왕 거미가 아니었다.
화르르-
화살에 맞은 거미줄이 불타올랐다.
칼날 여왕 거미가 발 디딜 곳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8개의 다리로 착지하는 거미.
그곳에 이미 수호가 도착해 있었다.
“하압!”
기합성을 내지른 수호가 전력으로 장도리를 휘둘렀다.
빠각-!
칼날 여왕 거미의 오른쪽 앞발에 장도리가 명중했다.
거미가 휘청였다.
하나 수호의 표정이 시원치 않다.
‘안 부러졌어.’
갑각이 움푹 파였지만, 완전히 부러지지 않았다.
그 탓에 거미의 반격이 빨랐다.
반대편 앞발이 창처럼 찔러왔다.
수호가 솥뚜껑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티잉-
튕겨 냈다.
하나 충격이 있다.
수호가 반보 밀려났다.
다행스러운 점은 한쪽 앞발이 정상이 아니라 아직 공격에 동원되지 않고 있다는 것.
‘사각으로 파고든다.’
수호가 왼편으로 움직였다.
여왕 거미의 다친 오른쪽 앞발을 노리고 장도리를 휘둘렀다.
후웅-
거미가 훌쩍 물러나 수호의 공격을 피했다.
까다롭다.
이레귤러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좀 더 교활하다.
그때 화염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은 거미 꽁무니에 명중했다.
화르륵.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갑각 때문에 상처가 깊지도, 불이 확산되지도 않았지만, 신경을 끌기엔 충분했다.
거미의 고개가 정현수에게 돌아갔다.
‘틈이다!’
수호가 쇄도했다.
목표는 다시 오른쪽 앞발.
수호는 【화염 강격】을 발동했다.
화르르르!
수호의 장도리에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간 장도리가 구부러진 거미 앞다리에 적중했다.
콰아아아앙-!
강한 폭발이 일었다.
앞 다리가 퍽 터져 나갔다.
여왕 거미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수호는 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시계 방향으로 돌며 장도리를 연이어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콰앙-!
순차적으로 들려온 네 번의 폭음.
거미의 한쪽 편 다리가 모두 부서졌다.
끼아아아아아악-
칼날 여왕 거미가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놈의 몸이 한쪽으로 털썩 기울었다.
그사이 정현수도 놀고 있지 않았는지, 거미의 꽁무니에 화염 화살이 빼곡히 박혔다.
‘끝내자.’
수호가 다리에 힘을 주고 펄쩍 뛰어올랐다.
부러진 거미 앞다리를 밟고 재차 도약.
공중에 떠오른 수호의 시야에 칼날 여왕 거미의 대가리가 보인다.
화르르르-
【화염 강격】이 장전된 장도리가 그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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