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9
다.
대신 재료 아이템은 쌓이고 있었다.
진무백이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주머니에 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수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마정석이네요. 기운을 보니, 최소한 4성 던전에서 나온 것이고요.”
“맞네. 받게.”
“약속하신 마정석은 이미 받았는데요? 더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날 나온 아이템도 협회 분들이 제게 양보해 주셨고요.”
“이거라도 안 주면, 우리 애들이 날 아주 염치없는 영감이라고 생각할걸? 어서 받게. 팔 아프네.”
수호가 하는 수 없이 마정석 주머니를 받았다.
무게를 가늠하니 10개쯤 들었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우리 애들 목숨 살려 줘서 고맙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하하, 서로 돕고 살 수 있으면 좋죠.”
잠시 덕담이 오간 후, 진무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한테 고마움을 전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긴 했네만, 한 가지 용건이 더 있네.”
“무슨 일인가요?”
“자네에게 의뢰가 들어왔네.”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의뢰가 들어왔다고요? 협회에서 하는 의뢰가 아닌 겁니까?”
백무진의 말은 마치 협회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의뢰를 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맞네. 저번처럼 자네 드래곤의 힘이 필요한 의뢰일세. 의뢰주는 천풍길드, 대가는… 영웅 등급 재료 아이템이라는군.”
111화 실험체(1)
협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수호가 깜짝 놀랐다.
의뢰의 대가 때문이었다.
‘영웅 등급 재료 아이템이라니.’
탐난다.
영웅 등급 재료라면, 드워프들이 솜씨를 발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영웅 등급 재료의 ‘가치’보다 더 수호의 뇌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영웅 등급은 공개되지 않은 것 아니었나?’
소문만 무성할 뿐, 영웅 등급 아이템은 대중에 밝혀진 바가 없다.
한데 갑자기 그것을 대가로 내놓는다니.
이상한 일이다.
“대가가 영웅 등급 아이템이라고요?”
“그렇네. 설마 여태 영웅 등급에 관해 모르고 있었나?”
수호의 물음에 협회장이 반문했다.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 친구,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군. 얼마 전에 미국에서 영웅 등급 아이템을 공표했네. 그 뒤 모든 나라의 협회와 대형 길드들이 그 존재를 인정했지. 그전부터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던 이야기였지만 말일세.”
“영웅 등급을 공표했다고요?”
“안 할 수가 없었지. 2차 격변 후로 영웅 등급 아이템이 쏟아지기 시작했거든.”
고등급 던전에서만 나오니 쏟아진다는 표현에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전보다 생산량이 급증한 건 확실해.
더는 쉬쉬하지 못할 정도로.
‘드워프 차원에 다녀오는 사이 일어난 일이구나.’
협회장이 덧붙인 말을 듣자 수호는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2차 격변 후에 상황이 많이 변했나 보군요.”
“그렇네. 괴상한 던전들이 나타나는 것도 그렇지만, 던전 발생 빈도가 어찌나 높아졌는지, 요즘은 내가 협회장인지 던전 공략팀원인지 헷갈릴 지경이야.”
“협회장님까지 나서야 할 정도인가요?”
“암, 이번 주에만 벌써 던전을 두 개나 닫았다네.”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은 협회장이 슬그머니 덧붙였다.
“자네처럼 유능한 헌터가 협회에 들어와 도와주면 내가 참 마음이 놓일 텐데…….”
“하하, 저는 아직 어디 소속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그런가? 알겠네. 껄껄.”
예상하고 있었는지, 협회장도 깔끔하게 단념했다.
화제를 전환할 겸 수호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천풍 길드는 어떤 곳입니까?”
설립한 지 오래되었고, 규모도 상당한 대형 길드.
수호가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한데 천풍 길드에 대해 떠올리고 나니 의문이 든다.
‘천풍 길드가 협회장에게 심부름을 시킬만한 역량이 있었던가?’
수호의 기색을 읽은 협회장이 입을 뗐다.
“원래는 공식적으로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자네 만나러 온 김에 내가 미리 말한 거라네.”
“그랬군요.”
“어쨌든 궁금해하니 내가 대충이라도 가르쳐 주겠네. 천풍은 1차 격변쯤 생긴 길드네. 역사가 있는 만큼 규모도 제법 큰 길드였는데, 모종의 일을 계기로 최근에는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모종의 일이요?”
차로 입술을 축인 협회장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혹시 아키라 길드라고 들어 봤나?”
수호의 기억에 남은 이름이 언급됐다.
“네, 일본 최대 길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최근 아키라 길드의 자금이 천풍 쪽에 흘러 들어갔네. 길드 간 협력이라는 명목이네만, 사실상 경영권이 넘어간 게 아닌가 하고 추측 중일세.”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헌터의 양과 질이 국력을 가르는 척도로 여겨지는 시대.
외국 길드의 진출은 쉽게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까다롭게 굴었겠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네. 일손이 태부족한 판이니, 외국 길드의 진출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닐세.”
헌터 유출이라면 모를까, 이번 일은 반대의 경우다.
일본의 자본과 헌터가 국내로 들어오는 형식이라, 아직은 그냥 두고 보고 있다고 했다.
“그렇군요. 근데 어째서 협회를 거쳐서 제게 의뢰를 전한 걸까요?”
“그야 자네가 스스로 힘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이니 그런 걸세.”
“……?”
“자네 정보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직접 공개한 적은 없지 않나? 무작정 찾아왔다가 괜히 밉보이기 싫었던 게지.”
폐쇄적인 상왕련보다는 협회가 줄을 대기 쉬웠을 테고.
“그런 거였군요.”
아키라 길드에서 슬쩍 살피고 간 것도 그런 이유였을까?
“이번 일을 수락하든 거절하든 마찬가지겠지만… 조심하게. 겪어 봐서 알겠지만, 2차 격변 후에 세상이 너무 위험해졌어. 절대 방심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자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만, 늙은이 노파심이라고 생각하게. 그럼 할 말도 다 했고 가게 구경도 했으니, 나는 이제 가 보겠네.”
언제 던전에 불려 갈지 모르니 어서 가서 쉬어야겠어.
너스레를 떤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정석은 잘 쓰겠습니다.”
“그래그래. 의뢰에 대해서는 성현이가 따로 연락할 걸세.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듣게.”
그 말을 남기고 협회장이 돌아갔다.
‘영웅 등급 재료라…….’
수호가 눈빛을 빛냈다.
* * *
협회장이 돌아간 뒤 윌슨이 다가왔다.
“방금 그 사람이 헌터 협회장이지?”
“응, 이런 걸 주고 가네.”
수호가 마정석 꾸러미를 내밀었다.
“마정석! 마력 농도도 높아 보이는걸! 이걸 갑자기 왜 준 거야?”
“저번 의뢰에서 협회 헌터들 구해 줘서 고맙대.”
“약속했던 마정석은 이미 받았잖아. 제법 경우를 아는 사람이네.”
“응.”
대화를 나누며 수호와 윌슨이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그럼 용건은 그것뿐?”
“그게 메인이고, 가게도 구경할 겸 왔대. 그 외에 의뢰도 전하고 가긴 했지만.”
“의뢰?”
“천풍 길드라는 곳에서 도와 달라네. 저번처럼 발룡이의 마법 능력이 필요한가 봐. 어떻게 된 거냐면…….”
수호는 협회장에게 들은 의뢰에 관한 내용을 윌슨에게 전해 주었다.
“할 거야?”
“고민 중이야. 아직 던전에 관해 자세한 내용을 못 들었거든. 네 생각은 어때?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닌데, 보상이 훌륭하니 끌린단 말이야.”
“보상? 뭘 준다는데?”
수호가 협회장에게 들은 영웅 등급 아이템의 이름을 떠올렸다.
“마력 토파즈라든가. 보석의 일종인데, 마력을 몹시 많이 머금고 있다나? 어쨌든 영웅 등급 재료 아이템이었어.”
“마… 력 토파즈?”
윌슨의 눈에서 지진이 일었다.
“왜? 아는 물건이야?”
“아, 알긴 알지. 하하.”
웃음소리가 평소랑 달리 어색하다.
몸동작도 안절부절못하는 느낌.
수호는 윌슨의 상태를 대번에 눈치챘다.
“필요해? 필요한 거 맞지?”
“하, 하하. 친구! 꼭 특별한 재료가 있어야만 내 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네.”
“몸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구나?”
“…….”
윌슨이 눈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최근 들어 뭔가 받기만 해서 그런가. 저런 모습은 또 새롭네.’
지구로 넘어온 후, 윌슨이 저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수호는 왠지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너무 부려 먹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갚을 차례지? 걱정 마, 윌슨.”
“부, 부려 먹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야. 그리고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지는 마.”
수호가 싱긋 웃으며 윌슨의 등을 두드렸다.
“아직 원하는 몸 완성하려면 멀었다며? 겉모습이 금발 미남이니까, 속도 꽉꽉 채워 넣어야지. 근데 어쩌자고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만든 거야? 원래랑 너무 다른 것 같은데?”
“무, 무슨 소리! 원래도 노움치고는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였거든!”
농담이 통했는지.
아니면 부담을 덜어 주려는 수호의 마음을 읽어서였는지.
윌슨이 발끈하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나야 노움의 외모까지 알아볼 안목은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네.”
“진짜라니까.”
짧은 투덕거림이 이어졌다.
잠시 후 수호가 말했다.
“자세한 내용을 들어 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마력 토파즈는 구해다 줄게. 그렇게 알고, 뭐든 만들 준비나 해 둬.”
“하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군. 고맙네, 친구. 안 그래도 뭘 좀 준비하고 있었는데, 토파즈 구하기 전까지 마치려면 서둘러야겠어.”
“뭘 준비한다고?”
“가게 보안이 너무 허술한 것 같아서, 보충하려고 준비 중이었거든.”
근데 네가 던전에 간다니, 그때 쓸 만한 물건도 만들어 봐야겠어.
윌슨이 의욕에 찬 표정으로 덧붙였다.
수호가 되물었다.
“보안? 저번에 받은 전격 충격기 설치해 뒀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특히 네가 없을 때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다고.”
수호와 발룡이가 빠지면 집은 무주공산에 가깝다.
“그렇긴 하네.”
“차원문도 집에 있잖아. 그러니 무조건 지켜야지. 2층에 있는 내 공방도 함께 지키면 좋고, 하하.”
“하긴 2차 격변 때문에 어수선하니까, 대비해 놓으면 좋겠다. 고마워, 윌슨. 네가 있어서 든든해.”
뭐든 뚝딱 만들어 주는 데다, 집까지 지키겠다니.
수호로서는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집은 이 윌슨이 책임질 테니, 수호 너는 던전이든 타차원이든 마음 놓고 다녀오라고.”
“고마워.”
수호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윌슨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좀 서둘러야겠어.”
윌슨이 카운터로 돌아가 앉았다.
눈을 감고 원격으로 공방의 설비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그때 수호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호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셨습니까, 원수호 헌터님.”
신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요. 의뢰 때문에 연락하셨죠?”
“그렇습니다. 대강의 내용은 들으셨을 테고, 상세한 부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일단 던전은 4성입니다. 그리고…….”
신성현이 의뢰에 관해 설명했다.
수호도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한동안 통화가 이어진 후.
“제가 아는 내용은 다 전한 것 같군요. 의뢰를 수락하시면 천풍 길드에서 따로 연락할 겁니다. 원수호 헌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며칠 정도는 여유가 있다고 하더군요.”
수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결정했습니다. 의뢰 받아들일게요.”
* * *
대한민국 모처,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넓은 창고 안.
“육경환이 그나마 잘 처리해 놓은 부분이 있었어.”
다행이야.
‘어르신’ 무토 다다노리가 창고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수백 명도 넘는 헌터들이 오열을 맞추어 도열해 있다.
“멍청하게 일을 벌이면서도, 실험체를 따로 숨겨 놓을 생각을 했다는 점만은 기특하군.”
다다노리의 목소리에도 헌터들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흐리멍덩한 눈빛.
유독 창백한 안색이 시체처럼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육경환에 의해 모종의 수법에 당한 상태.
다다노리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회장님,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실험체만 투입하면 계획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부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다노리가 시선을 헌터들 쪽으로 돌렸다.
“위대한 분의 현신에 밑거름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다다노리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뭉클 흘러나온 마기가 헌터들에게 향했다.
쩌억-
헌터들의 입이 기이한 각도로 벌어지며 마기를 빨아들였다.
* * *
며칠 후 새벽, 비룡객잔 뒤뜰.
석비룡이 주먹을 휘둘렀다.
툭.
주먹이 수호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 안에 담긴 내공이 수호의 몸속을 뒤흔들었다.
“크윽-”
수호가 신음을 토하며 비틀 물러섰다.
“집중! 공격을 받더라도 움직임에 실리는 내력이 끊어져서는 안 돼.”
“예!”
석비룡의 불호령에 수호가 크게 대답했다.
때맞추어 석비룡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툭.
이번에도 주먹은 적중했다.
물론, 수호를 상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호의 몸을 자극해 내공을 북돋우고, 전투 중의 타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 수련의 목적.
“시야를 열어 두되 발은 가볍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야!”
석비룡의 외침이 뒤뜰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석비룡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수호가 딱 피하지 못할 만큼만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후웅-
주먹이 빗나간 것이다.
‘피해?’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오른 석비룡이다.
수호의 수준은 손바닥처럼 파악하고 있다.
한데 그런 석비룡의 주먹이 빗나갔다.
석비룡이 순식간에 수호를 관찰했다.
그리고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거 참, 또 무아지경에 빠졌군.’
남들은 평생 가야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것을.
석비룡이 실소를 참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이번에도 주먹은 허공을 쳤다.
더 이상 똑같은 수준으로는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괄목상대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눈앞에서 이리 변할 줄이야.’
괄목상대도 사흘이 필요한 것을.
후웅-
다시금 석비룡의 주먹이 빗나갔을 때.
이번에는 수호가 망치를 휘둘러 반격했다.
우웅-
망치에 푸른빛이 어린다.
별다른 스킬의 도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마력이 발휘된 것이다.
‘이제 공격까지? 허허.’
슬쩍 발을 움직여 공격을 피한 석비룡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후웅-
주먹이 빗나가고, 망치가 빗나간다.
한동안 그렇게 주먹과 망치가 허공을 오가며 서로를 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쾅!
석비룡이 주먹으로 망치를 후려쳤다.
“헉-!”
충격에 수호가 정신을 차렸다.
“내공이 다했네. 정좌하고 내기를 가다듬게.”
얼른 바닥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석비룡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제야 가르칠 만한 자를 만나는구나.’
무림을 종횡하던 시기.
무공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자가 수없이 많았지만, 석비룡은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의 사람이니 무림의 법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로, 수호를 제자로 받지 않은 것도 반쯤은 구실.
나머지 반은 수호 또한 제자로 삼기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석비룡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제자라. 어쩌면 이날을 위해 그간 제자를 받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군.’
이 세상에 없었기에.
자신의 무공을 이을 자가 무림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동안 제자를 받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석비룡의 머리를 스쳤다.
“후우……. 오늘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석비룡이 생각에 잠긴 사이, 수호가 긴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닐세. 나도 아침마다 즐겁다네.”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무인의 하루는 범인의 것과는 달라야 하는 법이지. 만족하지 말고 늘 정진하게나.”
“예.”
석비룡의 충고에 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내일 그 던전이란 곳에 간다지?”
“맞습니다.”
천풍 길드의 의뢰 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럼 내일은 못 보겠군. 자네라면 웬만한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늘 조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 몸 성이 돌아와야 할 걸세. 나도 이 나이에 다른 세상까지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수호가 몸 성히 돌아오지 못하면, 지구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겠다는 말 아닌가?
“하, 하하. 생채기 하나 안 입고 돌아오겠습니다.”
등골이 서늘해진 수호가 멋쩍게 웃었다.
농이란 걸 알면서도, 석비룡이라면 왠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다.
“죽지만 않으면 되네, 죽지만.”
그렇게 석비룡의 따뜻하고 살벌한 배웅을 받으며 수호가 지구로 돌아왔다.
112화 실험체(2)
진회색 카시트 등받이가 보인다.
향수鄕愁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우리 아들, 어쩜 이리 기특해. 그죠, 여보?”
“맞아. 제 생일 선물로 부모한테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니. 허허.”
“그러니까요. 다른 애들 같았으면, 게임기다 옷이다, 사 달라고 졸랐을 텐데.”
앞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곧바로 깨달았다.
‘아, 꿈이구나.’
지난 10년간 반복되어 오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꿈이다.
근래 들어 뜸하다 했더니…….
부우웅-
차가 영화관을 향해 달린다.
“영화 예매까지 해 놓을 줄 누가 알았겠소. 근데 이거 어쩌나? 나 회사 가서 끝도 없이 자랑하다가, 욕먹을 것 같은데. 껄껄.”
“이이도 참. 우리 착한 아들, 엄마가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고 딱 맞춰서 예매했대?”
한마디 한마디.
외울 수도 있는 부모님의 대화가 이어진다.
‘…왠지 좀 덜 답답한 것 같아.’
잘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까.
이때쯤 늘 가슴을 죄어 오던 답답함이 이번에는 덜하다.
감정과는 별개로 꿈은 계속됐다.
보고 싶지 않은.
하지만 깨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마지막 장면이 다가왔다.
“우리 아들, 엄마가 미안해. 착하게 살아야 해.”
어머니가 애처롭게 웃으며 말씀하신다.
이제 곧 뒤돌아 달려가시겠지.
몬스터를 유인하기 위해 크게 소리 지르며.
차에 갇힌 아들을 대신해 흔쾌히 죽음을 택하시겠지.
한데 아니었다.
“사람들을 지켜주렴. 네 이름처럼.”
아.
꿈이 변했다.
어째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 것 같다.
차창 밖에서 하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께 대답을 들려 드릴 차례다.
노력하고 있어요. 더 노력할게요.
고맙습니다.
푹 쉬세요.
그 모든 마음을 담아서.
열리지 않을 입으로, 목소리를 내어 본다.
* * *
“걱정하지 마세요.”
수호가 잠에서 깼다.
목소리 때문이다.
‘내 목소리였구나.’
자기 잠꼬대를 듣고 깬 셈.
수호는 눈을 감은 채 마음을 다스렸다.
‘꿈이 변했어.’
꿈은 현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던가?
윌슨과 발룡이, 새 식구 하양이.
선배님, 드워프들, 비바니…….
꿈이 변했다면, 수많은 인연이 수호의 마음을 보듬어 준 덕분 아닐까?
‘이번에는 땀도 덜 흘린 것 같아.’
‘그날’의 꿈을 꿀 때면, 늘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고는 했는데 오늘은 상쾌하다.
그저 가슴이 좀 무겁고 답답할 뿐.
‘가슴은 진짜로 무거운 거 같은데?’
무언가 가슴을 누르고 있다.
심리 상태나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다.
수호가 눈을 떴다.
깜빡깜빡.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양이구나.”
하양이가 가슴에 엎드려 수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짝.
수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을 핥는다.
“어?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몇 달 전, 오늘과 같은 꿈을 꾼 날.
그때도 지금처럼 땀이 나지 않았다.
발룡이가 마법으로 식혀 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발룡이가 마법으로 땀을 말려 줬나?”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고로롱- 고로롱-
발룡이는 몸을 말고 자고 있다.
“아니네. 그럼 설마?”
수호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깜빡깜빡.
하양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하양이가 마법을 쓴 건가?’
지능이 퇴화했지만 드래곤이다.
그 정도 마법은 쓰지 못할 리 만무.
물론, 대답을 안 하니 확인할 방법은 없다.
“뭐, 안 젖었으면 됐지.”
수호가 하양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발룡아, 일어나. 던전 가자.”
발룡이를 깨운 수호는 간단히 씻고 식사도 마쳤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
『꼭 본좌까지 가야만 하느냐.』
발룡이가 뚱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당연하지. 네 능력 때문에 가는 거잖아.”
『본좌의 능력을 꼭 그런 곳에 써야 하는 것이냐?』
“싫어? 딸린 입이 생겼으니, 바짝 벌어야 할 입장일 텐데?”
딸린 입은 하양이를 뜻한다.
며칠 전.
윌슨이 인간형의 외형을 완성한 날.
수호는 배달 음식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하양이는 음식을 잘 먹었다.
몹시!
발룡이의 손에 들린 닭다리까지 빼앗아 먹을 정도로!
『진짜로 하양이의 밥값까지 본좌에게 떠넘길 셈이냐?』
수호가 며칠 전을 회상하는 사이, 발룡이가 너무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수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네가 다 책임진다고 말했잖아. 설마 하양이 앞에서 한 입으로 두말할 셈이야?”
『크윽- 좋다. 가자. 대신 본좌가 일한 만큼 꼭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니라.』
“알았어, 인마. 언제 내가 치킨값 떼먹은 적 있어?”
수호가 나갈 채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헥- 헥- 수호, 스톱! 잠깐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헐떡대던 윌슨이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뗐다.
“후우- 너 주려고 뭘 좀 만들었거든. 출발하기 전에 주려고 서둘렀는데, 간신히 시간을 맞췄네, 하하.”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놀랐잖아.”
“자, 이것 받아.”
윌슨이 뭔가를 한 보따리 내민다.
받아 들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이템이네?”
소모품 아이템으로 보였다.
“응, 시간 되면, 확인하고 출발해. 설명이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몇 분쯤은 여유가 있다.
수호가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손거울처럼 생긴 동그란 금속판.
[몬스터 탐지기]
- 마력을 감지해 몬스터의 위치를 찾아내는 장치. 반경 5km 이내의 몬스터 위치가 표시된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내구도 : 150
“레이더인가?”
“맞아. 근데 마력 은폐 계열의 스킬까지 잡아내기는 힘들어. 그냥 위치 파악용이니까, 너무 맹신하지는 마.”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나머지 아이템을 확인했다.
빠르게 제작할 수 있으면서, 쓸 만한 것들은 죄다 만들어 온 모양.
이전에 쓴 [도발용 마력탄]과 [마력 백린탄].
그리고 상대방의 마력 감지를 방해하는 [마력 산란탄]의 업그레이드 버전, [강화 마력 산란탄]이 보인다.
그러던 수호의 눈에 A4용지만 한 은박지가 들어왔다.
그것도 5장이나.
[미완성 최상급 은폐 결계 생성기]
-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종합 차단 결계 생성기. 설치 시 반경 30m 범위에 마력, 시각 등 모든 감각을 차단하며, 준수한 방호 능력까지 갖춘 공간 결계를 생성한다. 단, 안정화 장치가 부착되지 않은 상태. 사용 전 약한 충격에도 오작동하거나 부서질 수 있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5
수호가 물건을 살피고 있을 때 윌슨이 설명했다.
“그건 던전에서 잘 때 쓰면 좋아. 웬만하면 몬스터한테 들키는 일은 없을 거야. 에… 시간이 모자라서 부품을 하나 빼먹었지만 말이야.”
“이번 던전에서 자고 올 것 같지는 않아. 근데 부품 하나 없어도 별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맞아. 차원 보따리에 넣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 그래서 덜 만들었지만 가지고 온 거라고. 하하.”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아이템들을 차원 보따리에 쓸어 담았다.
“고마워, 윌슨. 괜히 하던 일에 방해된 것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야, 몸 만드는 작업과 가게 방비는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친구! 그러니 마음 놓고 다녀오게나.”
“알았어. 그럼 이따 저녁에 봐.”
인사를 마치고 수호가 가게를 나섰다.
발룡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뒤돌아봤다.
『크윽- 하양아…….』
하양이와 떨어지기 싫은 마음 때문인지.
하양이가 윌슨의 어깨에 편히 올라앉은 모습이 질투가 나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경기도 부천시 외곽.
높은 가림막으로 둘러놓은 던전 게이트 앞.
수호가 용달차를 멈추고 내려섰다.
던전 앞에는 일련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가 수호에게 다가왔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원수호 씨?”
“예, 맞습니다.”
“나는 이번 일의 지휘를 맡은 정명훈입니다. 천풍 길드의 부길드 장을 맡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드래곤은 안 보이는군요?”
수호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 넘긴 정명훈이 대뜸 물었다.
“때 되면 부르겠습니다.”
발룡이는 투명화 상태.
굳이 구경거리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뭐, 알아서 하세요. 어쨌든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 뒤에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시고요.”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뒤따라오라고? 구경만 하라는 말인가?’
의뢰 수락 후, 천풍 길드 측 실무자와 협의했다.
그때 들은 수호의 역할은 ‘기이한 글자가 쓰인 비석의 해석’과 전투 보조.
“듣기로는 전투에 가담해 달라고 하던데요?”
수호의 물음에 정명훈이 입을 뗐다.
얼굴에 가당찮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손발도 안 맞춰 본 사람이 끼어들어 봐야 방해만 되겠지. 그냥 뒤에서 구경이나 하세요. 여긴 내 앞마당처럼 다니는 던전이니 도움은 필요 없어요. 괜히 끼어들지 말고, 서로 편하게 갑시다.”
“음…….”
수호가 침음했다.
애초에 경험치 욕심은 없었다.
굳이 던전이 아니어도 레벨 업할 곳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미리 협의한 내용이 바뀌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아시고, 진입 준비하세요. 곧 들어갑니다.”
수호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승낙으로 여긴 정명훈이 몸을 돌렸다.
“가뜩이나 낙하산 때문에 골치 아픈 마당에 외부인까지 설치게 뒀다가는 될 일도 안 될 거야.”
정명훈이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서도 안 들릴 작은 소리였지만 수호의 감각에는 걸렸다.
‘낙하산?’
외부인은 수호를 뜻할 터.
낙하산은 뭐지?
사람을 가리키는 건가?
석연찮다.
그렇다고 의뢰를 그만둘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뭐, 받기로 한 물건만 받으면 되니까. 이제 내 한 몸 지킬 힘은 충분하기도 하고.’
최근 들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던전에서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몸을 뺄 자신은 있었다.
수호가 의문을 품는 사이에도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잠시 후, 수호와 천풍 길드 헌터들이 던전에 입장했다.
* * *
이번 던전은 4성 던전답게 몹시 광활했다.
지형 또한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입구 인근의 습지.
한참 안쪽에 위치한 바위산.
오늘의 목표인 ‘기이한 글자가 적힌 비석’은, 바위산에 위치한 보스 몬스터 근처에 있다.
‘구경하라고 했으니, 쉬엄쉬엄 따라가 볼까.’
수호는 천풍 길드 헌터들 뒤에서 여유롭게 걸었다.
천풍 길드 헌터의 수는 모두 열 명.
전위에서 몬스터의 눈길을 끌고 공격을 막아 내는 탱커 계열이 둘.
근거리, 원거리, 마법, 치료 계열 헌터까지 고루 갖춰진 썩 훌륭한 조합의 파티였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몬스터가 나타나고 전투가 시작됐다.
처음 만난 몬스터는 습지 뿔 멧돼지.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크기가 용달차만 하고 맷집이 좋아 까다롭다.
“꾸에에엑-!”
[습지 뿔 멧돼지를 처치하셨습니다.]
[습지 뿔 멧돼지를 처치하셨습니다.]
머잖아 멧돼지가 쓰러졌다.
‘앞마당처럼 다녔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구만.’
천풍 길드는 어려움 없이 사냥에 성공했다.
훌륭한 솜씨였다.
한데 수호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낙길! 똑바로 안 해? 정신 안 차릴 거냐고? 근거리 딜러가 자꾸 공격선 가리면서 움직이면 뒤에 파티원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파티장 정명훈이 한 헌터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이낙길이란 헌터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만 조아렸다.
수호는 의아했다.
‘별문제는 없어 보였는데.’
정명훈의 말대로 이낙길이 뒤편의 시야를 가렸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수호가 보기에 반응이 과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 혹시 저 사람이 낙하산?’
이낙길은 주눅이라도 든 건지 얼굴이 창백했다.
짧게 죄송하다는 말을 되뇔 뿐.
“정신 똑바로 차려. 또 그러면 그냥 돌려보내 버리는 수가 있어.”
외부인까지 있는데 파티원이란 놈이 정신을 못 차려서야, 쯧.
혀를 찬 정명훈이 뒤돌아섰다.
잠시 후, 던전 공략이 계속됐다.
세 시간 후.
일행은 바위산 앞에 도착했다.
“휴식하고 간다. 이낙길, 주변 정찰해!”
정명훈이 휴식을 명했다.
헌터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수호도 한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묵묵히 따라오던 발룡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것은 그때였다.
113화 실험제(3)
수호가 발룡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주변 경계 중인 이낙길이 보였다.
- 이상해? 이낙길 헌터가?
차원 전음으로 들려온 수호의 목소리에도 발룡이는 고개만 갸웃했다.
‘뭘 보고 그러는 거지?’
이낙길은 얼굴이 좀 해쓱한 것을 빼면 특별한 점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 또한 파티장인 정명훈에게 질책당한 탓일지도 모르고.
발룡이는 한참 고민한 후에야 대답했다.
『묘하게 거슬리는구나.』
- 어디가? 어떻게 거슬리는데?
『…모르겠다.』
웬만해서는 모른다는 말을 안 하는 발룡이다.
진짜로 뭔가 있다면, 발룡이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무언가란 소리였다.
- 음, 일단 눈여겨 살펴 줘. 나도 계속 신경 쓸게.
이낙길을 겁박해서 알아낼 수도 없으니 당장은 관찰이 최선이었다.
부스럭.
수호가 발룡이에게 당부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길드장님이 좀 사납게 굴죠?”
돌아보니 수호 또래의 헌터였다.
‘윤정호라고 했던가?’
던전 앞에서 인사를 나눌 때 들은 이름이 떠올랐다.
클래스는 치료계.
오는 길에 보기로는 실력도 제법 괜찮았다.
“이해합니다. 2차 격변 후로 돌발적인 변수가 늘었잖아요. 외부인이 끼면 아무래도 호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사실 부길드장님이 원래부터 저렇게 까칠한 분이 아니신데, 최근 길드 내에 사정이 생겨서 많이 예민한 상태시거든요.”
근래에 생긴 사정이라.
‘아키라 길드와 관련 있는 건가?’
아키라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상황이라더니.
그 과정에서 길드 내 권력 싸움에서 밀렸다든가.
수호는 떠오른 생각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랬군요. 저는 일만 잘 끝나면 되니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안 거들어도, 던전을 빠르게 돌파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정명훈에 대한 두둔이 목적이었는지, 윤정호는 곧 돌아갔다.
‘흐음, 정명훈이 수하들에게 인망은 있나 보네.’
이낙길에게는 유독 엄해 보이긴 한다만.
뭐, 사정이 있겠지.
수호가 저편에 앉은 부길드장 정명훈을 쳐다봤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쿵-
[바위 사자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마지막 바위 사자가 쓰러진 순간, 정명훈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정지! 여기서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간다.”
일행이 자리 잡고 앉아 점검을 시작했다.
석판을 멀지 않은 곳에 남겨 둔 지점.
던전 공략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정명훈은 입맛이 썼다.
‘제기랄, 어쩌자고 남의 손에 길드를 넘긴 거야.’
의형이자 오랜 동료인 길드장.
그가 길드 경영권을 아키라 길드에 팔아 버린 일 때문.
그것도 부길드장인 정명훈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게다가 이딴 임무나 떠맡겨서는…….’
사냥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이번 임무는 길 안내.
효율적인 사냥이 불가능하다.
진행 경로 또한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비석의 위치가 평상시에는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쪽에 있는 비석은 누가, 어떻게 발견한 거야?’
아무리 2차 격변이라지만, 새 던전이 나온 것도 아니고, 뻔히 있던 던전에서 새로운 뭔가가 발견된다니.
생각할수록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다.
사실 꼭 없으란 법도 없는 일이지만, 이미 기분이 틀어진 정명훈에게는 모든 것이 마뜩잖았다.
멀뚱히 앉아 있는 드래곤의 주인도 마찬가지.
‘나도 드래곤이나 얻었으면, 이런 고민 안 하고 세상 좀 편하게 살 텐데.’
누구는 10년을 바친 길드를 강탈당한 판에, 누군 편하게 사는군.
정명훈의 심사는 뒤틀려만 갔다.
‘게다가 신입은 도대체 왜 끼운 거야?’
외부인이 낀 파티.
가뜩이나 불안한데, 신입인 이낙길이 끼어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명훈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뿐.
‘이낙길 저 자식, 아키라 쪽 끄나풀이 분명해!’
정명훈이 협조적이지 않음을 눈치챈, 아키라 길드가 보낸 스파이.
그게 아니면 의뢰 직전에 길드에 가입한 이낙길을, 정명훈의 파티에 억지로 끼워 넣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후우- 저 녀석들만 아니었으면, 무시하고 뒤엎어 버렸으련만.’
장비를 점검 중인 파티원들을 봤다.
자신은 먹고살 만큼 모아 뒀지만, 저들은 아니다.
미래가 창창한 파티원들을 생각하니, 함부로 일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이번까지야.’
사생결단을 내는 한이 있어도, 이딴 임무에 자신과 파티원을 내돌리는 일에 동참하지는 않겠다.
은퇴하든, 파티원을 데리고 나가 새로 길드를 차리든 말이다.
간신히 기분을 털어 낸 정명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검 마무리해. 출발한다.”
* * *
바위산에서는 바위 사자가 나왔다.
습지 멧돼지보다 더 크고 강하지만, 일행을 막지는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가파른 비탈을 옆에 낀 오르막길.
그 끝에 비석이 있다.
정명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비탈 아래, 보스인 바위 사자왕의 둥지가 있다. 우리는 비탈 위쪽 길로 조용히 들어가서 비석부터 확인한다.”
보스를 잡을지 말지는 비석을 확인한 후 판단한다.
미리 전달한 내용이기에 토를 다는 일행은 없다.
“전진.”
정명훈이 나직이 신호했다.
일행이 숨죽이고 나아갔다.
그렇게 몇 분쯤 자갈길을 더 올랐을 때 수호는 보스를 발견했다.
‘저게 이 던전의 보스구나.’
길옆 수십 미터 아래.
분지처럼 푹 파인 자갈밭.
바위로 몸을 두른 커다란 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거의 다 왔나 보네. 보스가 보이는 곳에서 조금 더 가면 비석이 나온다고 했으니.’
수호가 일행의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쪽에 비쭉 튀어나온 바위가 시야를 가리고 있다.
바위 뒤가 비석이 있는 위치.
여기까지 왔으니, 의뢰는 탈 없이 끝날 듯싶었다.
‘구경만 하고 영웅 등급 재료라니, 거저구만.’
수호가 의뢰를 수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저놈, 어디 가는 거지?』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 이낙길? 그냥 걷고 있는데?
이낙길은 일행과 나란히 이동 중.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니야. 조금씩 길 가장자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느니라.』
그것은 진즉부터 이낙길을 주시하고 있던 발룡이만 깨달은 일이었다.
- 확실해?
『확실하다!』
길옆은 자갈이 쌓인 비탈.
저리 가 봐야 떨어지기밖에 안 할 텐데.
- 뭐 하러 그러겠… 어?
이낙길의 움직임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던 순간.
비틀.
뭐라도 밟았는지, 이낙길이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그러더니 비탈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주르륵.
이낙길과 함께 자갈이 굴러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으아악-”
비명은 덤.
획!
엎드려 있던 바위 사자왕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르르르-
낮은 그로울링이 산비탈을 타고 들려왔다.
그제야 일행도 이변을 눈치챘다.
“낙길 씨!”
“이낙길이 떨어졌다!”
“미, 미친! 갑자기 왜?”
“저 자식,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일행이 이변에 당황하고 있을 때, 정명훈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젠장, 온다! 전투 준비! 이낙길을 구한다.”
화딱지 나는 낙하산이지만,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정명훈은 서둘러 지시를 이어 갔다.
“김지수, 윤정호는 원수호 헌터 지켜! 원수호 헌터는 후방에서 거리 유지. 신호 전에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 것!”
소리친 정명훈이 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쾅! 칼과 방패를 부딪쳐 바위 사자왕의 시선을 끌었다.
파티원들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이런 상황에 구경만 해도 되려나?’
수호는 앞을 가리고 선 두 헌터를 봤다.
궁수 계열인 김지수가 천천히 전진하면서 시위에 살을 쟀다.
윤정호도 아래를 심각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보폭을 맞춰 내려간다.
수호는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 이낙길, 일부러 떨어진 거 맞지?
『맞다. 본좌가 확실히 보았느니라. 떨어지기 전부터 길 가장자리로 다가가고 있었다.』
발룡이에게 재차 확인한 뒤,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속셈이지?’
발룡이가 찜찜함을 느낀 이낙길.
정확한 원인을 모르기에 지켜보고 있었더니, 그가 진짜로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의도를 모르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쯤 되면, 이낙길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 넋 놓고 있으면 안 되겠어. 여차하면 너도 힘쓸 준비해 둬.
『알겠느니라. 공짜가 아니란 것은 잊지 말도록.』
- 알았어, 자식아. 하양이 밥값은 두둑이 챙겨 줄게.
『콜!』
수호가 슬쩍 한 걸음 내디뎠다.
자연스레 【차원보】가 발휘된다.
몸이 소리 없이 움직여 앞을 가린 두 헌터 측면으로 비켜났다.
언제든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위치.
두 헌터는 수호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수호는 바로 튀어 나가는 대신, 다시 한번 전장을 살폈다.
‘굴러떨어진 사람을 쫓아가서 때려누일 수는 없으니 일단은 준비만.’
이낙길이 수상하지만, 당장 때려잡을 수는 없다. 그럴 만한 증거가 없으니까.
대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우웅-
수호가 【차원 호신무】를 발휘, 마력의 흐름을 가속한다.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게, 발끝에 마력이 집중됐다.
그때쯤 바위 사자왕과 천풍 길드 헌터들의 전투가 시작됐다.
* * *
“돌진한다! 탱커, 막아!”
콰아앙-
“오케이. 놈이 딜레이에 걸렸다. 화력 쏟아부어!”
콰콰콰콰쾅-!
‘잘하는데?’
바위 사자왕의 몸에서 돌조각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그 아래 숨겨진 가죽에서 검붉은 핏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저 정도면 곧 잡겠어.’
정명훈과 헌터들은 바위 사자왕을 무난히 상대해 냈다. 수호가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하긴 수십 번을 들락거렸다고 했으니.’
닳도록 드나든 앞마당.
괜히 방해하지 말라고 정명훈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
‘보스 쪽은 신경 끄고 이낙길에 집중해도 되겠어.’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어딜 다쳤는지, 이낙길은 비탈 아래 쓰러져 있었다.
『놈이 움직이느니라.』
그러고 보니 이낙길의 위치가 조금 변했다.
잠시 더 살피자, 이낙길이 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은밀한 움직임.
전투 중인 헌터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딜 가는 거지?’
이낙길 앞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바위 사자왕이 웅크렸던 둥지뿐.
별다른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 발룡아, 저 사람 기어가는 방향에서 뭐가 좀 느껴져?
『아무것도 없느니라.』
발룡이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수호가 의아함을 느끼는 사이, 이낙길이 정지했다.
그저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도대체 뭐지?’
그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얼마 후.
“롸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위 사자왕이 쓰러졌다.
“다가가지 마! 죽기 전에 자폭할 수도 있다. 마무리는 원거리로 처리해!”
정명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도 미리 전달받은 바위 사자왕의 특성이었다.
‘이대로 끝인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사자왕이 죽으면, 이낙길이 뭔가 저지를 여지는 없을 것 같은데.
콰콰쾅-!
폭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스 몬스터 바위 사자왕을 쓰러트렸습니다.]
‘진짜 기우였나?’
차라리 잘됐다.
굳이 이변이 생겨서 좋을 게 없다.
수호가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그그그긍-
던전이 약하게 진동했다.
‘코어가 나오는군.’
코어 생성 조건은 던전마다 천차만별.
이곳의 코어는 보스를 잡으면 나타난다.
브리핑 때 들은 내용이기에, 특별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발룡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어! 저놈이 엎드린 곳이 코어가 있는 곳이니라!』
코어는 조건이 갖춰져야 생성된다.
때문에 사자왕이 죽고 나서야, 발룡이도 코어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뭐?’
수호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이낙길은 코어를 마주 보고 선 상태.
입을 기이할 정도로 크게 벌리고 있다.
‘저건?’
벌어진 입속.
수호는 낯익으면서도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차원문이잖아!’투명하게 일렁이는 수호의 것과는 달리, 짙은 자주색으로 꿈틀거리는 차원문.
그것이 이낙길의 입속에 열려 있었다.
114화 실험체(4)
『마기다!』
발룡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수호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입속의 차원문 너머에서 마기가 느껴져.’
코어 앞에서 선 이낙길.
그의 입안에 열린 차원문에서 농후한 마기가 느껴졌다.
‘막아야 해.’
이낙길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마기가 관련된 이상, 좋은 의도일 수가 없어.’
수호가 막 이낙길 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꿈틀꿈틀-
이낙길의 입속 차원문에서 검은색 촉수 다발이 뻗어 나왔다.
촉수로부터 진한 마기가 느껴진다.
수호가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자연스레 【차원보】가 발휘되며, 수호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그사이에도 촉수는 코어에 다가가는 중.
‘늦어.’
이대로는 촉수가 코어에 닿는 것을 못 막는다.
헤이스트를 쓰더라도 불가능하다.
판단을 내린 수호가 달리는 자세 그대로 손을 어깨 뒤로 넘겼다.
곧이어 더 빠른 속도로 손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속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거인의 격노가 손을 떠났다.
쯔아아악-
망치가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촉수를 짓이기고 들어가 이낙길의 안면을 강타했다.
퍽-!
파열음이 들린다.
체액이 사방으로 튄다.
촉수도 이낙길의 머리도.
그리고 입속 차원문도 망치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됐다.
보스를 쓰러트리고 안도하던 헌터들이, 이제야 이변을 감지했다.
“뭐, 뭐야?”
“이낙길 씨!?”
“주, 죽었어! 머리가 박살 났잖아!”
“어떻게 된 거야?”
헌터들의 당황한 목소리를 뚫고, 수호의 시선이 던전 코어로 향했다.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잘못 생각했어.’
오판이다.
촉수를 터트린 것은 썩 훌륭한 판단이 아니었다.
곧 들려온 발룡이의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코어가 마기에 잠식당한다!』
촉수가 터지며 체액이 흩날렸다.
체액에 닿은 코어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수호가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코어를 부숴야 해.’
지금 상황에서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다.
그런데 수호는 코어를 부술 수 없었다.
채애앵-
코어가 스스로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 미친! 코어가 저절로 깨졌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낙길 씨는 도대체 어쩌다 죽은 거고. 코어는 또 왜?”
“코어에서 이상한 느낌이 났어. 원래 저런 기운이 느껴진 적이 없는데…….”
헌터들이 혼란에 빠졌다.
수호가 석화비도를 던져 망치를 휘감아 회수했다.
천풍 길드 부길드장 정명훈이 다가왔다.
“원수호 헌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낙길이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신은 왜 이낙길을 죽였냐.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
정명훈은 속에서 올라오는 고함을 꾹 눌러 참았다.
오히려 수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이낙길을 예의 주시하던 그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수호가 손을 쓰는 장면을!
‘랭커급이야.’
이 바닥에서 십 년 넘게 굴러온 정명훈은 확신했다.
방금 수호의 움직임은 단언컨대, 일반적인 헌터의 수준이 아니었다.
‘함부로 떠들었다가는…….’
그런 강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다.
게다가 방금 사람의 머리를 터트린 상태.
따지고 들 배짱이 있을 리 만무했다.
‘머리 하나 더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하나를 터트렸으니, 그게 둘, 아니, 열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정명훈이 정중한 표정을 연출하고 있을 때 수호가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단 대형을 갖추고…….”
전투에 대비하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덜덜덜덜-
던전이 떨렸다.
그리고 이변이 시작됐다.
* * *
“모, 몬스터다!”
누군가 외쳤다.
깜짝 놀란 헌터들이 전투 대형을 갖췄다.
수호의 귓가로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물, 아니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는 몬스터라고 하는 편이 옳겠구나.』
수호가 내린 판단도 같았다.
마기에 잠식당하기 시작한.
머잖아 완전히 마기에 먹혀 마물이 될 몬스터.
코어가 있던 자리 근처에서 생겨난 것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원수호 헌터, 처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명훈이 물었다.
시커먼 기운을 흘리는 몬스터는 그가 여태 본 것과는 달랐다. 그것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수호뿐.
수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황은 또다시 변했다.
던전이 계속 진동하는가 싶더니.
불쑥- 불쑥-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리젠됐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제, 젠장! 전투 준비!”
정명훈이 소리치며 파티원들을 향해 달렸다.
수호도 몬스터를 향해 쇄도했다.
“그르르르르-”
바위 사자가 수호를 눈치채고 그로울링 했다.
수호는 놈이 덤벼들 틈을 주지 않았다.
쾅-!
[바위 사자를 처치하셨습니다.]
단 한 방.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휘둘러 바위 사자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수호, 적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느니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발룡이가 투명화를 풀고 몸을 크게 키웠다.
“너도 도와!”
발룡이에게 외친 수호가 서둘러 망치를 휘둘렀다.
쾅! 쾅!
연달아 두 마리의 바위 사자가 죽어 나갔다.
하나 죽는 것보다 생기는 게 더 빠르다.
“우리도 싸운다! 포위당하지 않게 조심하고, 하나씩 처리한다!”
정명훈이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몰라. 어쨌든 몬스터를 잡아야 살아 나갈 수 있을 거야.”
“젠장, 기운 한번 불길하네.”
당황을 감추려 중얼거린 헌터들이 무기를 꼬나쥐었다.
몬스터와의 전투가 시작됐다.
쾅!
또 한 마리 바위 사자의 머리를 터트리면서 수호가 생각했다.
‘잡는 속도와 생겨나는 속도를 얼추 맞출 수 있겠어.’
헌터들이 가세한 덕분에 몬스터가 쌓이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한데 그때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수호! 던전이 깨어질 것 같다!』
수호가 망치를 휘두르며 차원 전음을 시전했다.
- 뭐? 언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운의 흐름을 읽어 보건대…… 코어가 던전을 유지하는 힘까지 긁어 몬스터를 생산하고 있느니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수호는 퍼뜩 깨달았다.
- 던전 브레이크!
발룡이의 설명은 던전 브레이크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풀려나는 것은 마기에 물든 몬스터.
‘이것들이 풀려 나가기라도 하면…….’
참담한 일이 벌어질 터다.
한데 던전 브레이크를 걱정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부르르르-
던전이 한 차례 거세게 진동했다.
코어가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 미친! 사자왕이다! 보스가 리젠됐어.”
“제기랄,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짓거리야!”
헌터들이 경악해 외쳤다.
비보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꿈틀.
천풍 길드 헌터들이 처치한 바위 사자왕의 사체가 움직였다.
어느새 색깔이 검게 변했다.
“헉! 주, 죽였던 놈도 일어난다.”
“젠장!”
“…씨발, 우린 다 죽을 거야.”
모두의 눈에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수호는 결단을 내렸다.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여유 부릴 틈이 없다.
수호가 내달렸다.
목표는 방금 리젠된 바위 사자왕.
“크르르르-”
마기와 살기가 뒤섞인 사자왕의 시선이 수호를 향한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이미 마족과도 대면해 본 터.
수호는 주눅 들지 않고 속도를 더했다.
사자왕이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때쯤 수호가 바닥을 박차며 몸을 띄워 올렸다.
‘한 방에.’
전력을 담아 단숨에 처리한다.
마음이 일자 마력이 반응했다.
고오오-
차원 호신무의 흐름이 격류처럼 가속하더니, 이내 거인의 격노로 흘러 들어갔다.
‘거대화!’
허공에 뜬 수호의 몸이 변한다.
3할의 마력을 흡수한 거인의 격노가 수호를 거인으로 만들었다.
‘모자라. 더 높이.’
쾅-!
수호의 발바닥이 허공을 박찼다.
【드래곤 스탭】이 발동, 수호의 몸을 더 높이 띄워 올린다.
그럼에도 원하는 위치까지는 한 발 부족하다.
그때 도움의 손길이 뻗어 왔다.
『얼어붙어라!』
허공에 얼음으로 만든 발판이 생겨났다.
수호가 그것을 밟고 재차 도약.
사자왕의 대가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도달했다.
‘근력 폭발!’
‘무기 강화!’
버프 스킬을 모조리 발동한다.
동시에 몸을 활처럼 젖히며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거인의 격노가 마력을 머금고 환하게 빛난다.
“크와아아앙-”
바위 사자왕이 앞발을 휘둘렀다.
밀대만 한 발톱이 수호를 저미려 든다.
‘5연격!’
거인의 격노가 떨어져 내렸다.
콰드득-
사자왕의 손톱이 부러진다.
다음은 앞발과 그에 연결된 앞다리.
눈 깜빡할 사이 어깨까지 짓이긴 망치는 멈추지 않고 밀고 들어가, 사자왕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콰콰콰콰쾅-!
거침없는 일격이 폭발했다.
망치는 사자왕을 짓이기고도 모자라, 바닥에 박히고서야 멈췄다.
“저, 저럴 수가…….”
가공할 광경.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심지어 마기에 되살아난 또 다른 사자왕조차도 움직이지 못했다.
정지한 세상 속에서 수호만이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콰아아아앙-!
【십격필살】을 발동.
남은 마기까지 깔끔히 지워 버린 후에야 수호의 입이 열렸다.
“후우-”
짧게 숨을 토해 낸 수호가 다시 움직였다.
‘아직 쉴 때가 아니야.’
휴식은 모조리 처리하고 나서 해도 되니까.
* * *
수호네 가게 안.
카운터에 앉아 원격으로 설비를 조종하던 윌슨이 눈을 떴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네.”
수호의 가게는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물량이 많지 않기에 특히 오전 손님이 많다.
그런데 오늘은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손님이 거의 없다.
“그럼 잠깐 슈퍼나 다녀올까?”
수호의 아침 식사(시리얼)를 위한 우유가 떨어져 간다.
인간 형태의 겉모습을 확보한 후, 자잘한 바깥일은 윌슨이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영상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사람들이랑 부대끼고 살아야지. 하하.”
- 볼일 보러 갑니다. 5분 안에 돌아올게요.
문에 푯말을 걸어 둔 윌슨은 슈퍼를 향해 달렸다.
후덕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반긴다.
“아이템 가게에 새로 온 총각이네. 어서 와요.”
“네, 안녕하세요.”
냉장고에서 우유를 집어 든 윌슨이 계산대로 향했다.
“5천 8백 원이에요.”
값을 치른 윌슨이 비닐봉지에 담긴 우유를 집어 들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봉지에 뭔가를 더 넣었다.
“어? 그건 뭔가요?”
“우리 시골에서 딸기를 키우는데, 너무 많이 보냈지 뭐예요. 생긴 게 좀 들쑥날쑥이라 그렇지, 맛은 달아요. 가져가서 먹어요.”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잘 먹을게요!”
윌슨이 아주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외국에서 온 총각이 어째 우리말을 그리 잘하나 모르겠네. 호호호.”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윌슨은 슈퍼를 나섰다.
‘따듯하네.’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는 시원했지만, 윌슨의 마음은 따듯했다.
앞으로도 우유는 꼭 내가 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게로 돌아왔을 때, 쇼윈도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 저 손님.’
쇼윈도에 얼굴이 닿을 듯 달라붙어 있는 여자.
윌슨은 자세만 보고도 손님의 정체를 눈치챘다.
‘양수정 헌터라고 했던가?’
단골이다.
1주일에 최소 3번은 들를 정도로 자주 온다.
수호와도 제법 친한 듯했다.
“하악-”
왠지 위험한 소리를 내는 손님에게 윌슨이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금방 문 열어 드릴게요.”
“꺅- 네, 여, 열어 주세요.”
놀라는 손님을 두고, 윌슨이 서둘러 가게 문을 열었다.
양수정이 가게로 들어갔다.
냉장고에 우유와 딸기를 넣은 윌슨이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사이 양수정은 진열장 앞에 붙어서 있다.
‘저 손님도 참, 또 저러고 있네.’
윌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짝.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양수정은 올 때마다 [불굴의 마체테]를 비롯한 진열된 장비를 간절한 눈으로 응시한다.
처음엔 갖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러나 했다.
아니었다.
‘마체테는 벌써 3자루나 사 갔다던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수호 왈, 발매한 날 가장 먼저 사 간 사람이 양수정이라고 했다.
할짝.
그사이 양수정이 얼굴을 전시용 마체테에 가까이 가져갔다.
‘도대체 혀는 왜 가져다 대냐고!’
나름 생각이 열려 있다 자부하던 윌슨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어이없어 하던 윌슨은 금세 양수정에 관한 고민을 접었다.
‘수호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뭐라 그럴 필요는 없지.’
윌슨이 눈을 감았다.
‘장비나 만들자. 우리 주님의 건물을 지키려면, 여유 있을 때 미리미리 만들어 둬야 하는 것 아니겠어?’
조물주 위에 건물주.
줄여서 주님!
인터넷에서 배운 문구를 써먹고는, 혼자 키득거린 윌슨이 2층 공방의 설비를 조작했다.
건물 방어를 위해 설계한 물건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몇 분쯤 지났을 때였다.
‘어?’
윌슨이 멈췄다.
몸에 장착된 감지 센서가 좋지 못한 것을 포착했다.
‘마기!?’
깜짝 놀란 윌슨이 가게 밖으로 달려갔다.
“맙소사! 마물이잖아!”
멀리서 잿빛 기운을 흘리며 날뛰는 괴물.
그것은 마물이 분명했다.
한평생 마물과 싸운 윌슨이니 잘못 봤을 리 없다.
콰콰쾅-
그사이 협회 방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마물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게 도대체…….’
윌슨은 협회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투의 소음. 마물의 으르렁거림. 비명…….
폭음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알아봐야겠어.’
마음먹은 순간.
우웅-
가슴에 장착된 마력 융합로가 가속, 마력을 감지 센서로 집중시켰다.
감지 범위가 확장된다.
협회 건물을 넘어 주변 일대가 감지의 범위에 들어왔다.
윌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온 사방에 마물이 널렸잖아!”
소리친 윌슨이 부리나케 2층 공방으로 달려갔다.
115화 맞서는 자(1)
부르르르-
온 던전을 뒤흔드는 진동이 인다.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난, 두 번째 바위 사자왕이 핏물이 되어 흩어졌다.
‘…무시무시하군.’
천풍의 부길드장, 정명훈이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수호가 일반적인 범주의 헌터라는 생각은 진즉 접었지만, 방금 연출한 장면은 그런 예상조차 아득히 초월했다.
“원수호 헌터, 진짜 어마어마하네.”
“그러게. 저분 없었으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었어.”
“혼자서 몇 명 몫을 하는 걸까? 저 정도면 거의 랭커 수준 아냐?”
“랭커 뺨치겠는데?”
“대박이네. 드래곤이 정말 대단하긴 한가 봐. 소환자를 저렇게 강하게 만들다니.”
“드래곤보다 원수호 헌터가 더 대단해 보이는데?”
“보스랑 우리가 죽인 몇 마리 빼면, 나머진 드래곤이 다 태워 죽였어. 드래곤도 보통이 아닌 건 분명해.”
천풍 길드 헌터들이 수군거린다.
정명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 큰일이다. 사과해야 해!’
던전 입구에서 괜히 심통 부렸던 것이 떠오른 탓.
자칫 수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정명훈이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망치를 갈무리한 수호가 다가왔다.
정명훈이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소리치는 정명훈.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맙다는 건 알겠는데, 미안하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던전 입구에서 원수호 헌터님께 괜히 심통을 부렸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길드 내에 사정이 있어서, 심사가 불편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정명훈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저희 길드장이 얼마 전부터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굴더니, 길드 운영권을 외국 길드에 냉큼 팔아 버렸지 뭡니까? 10년을 몸 바쳐 온 저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요. 게다가…….”
정명훈이 사연을 풀어놓았다.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다가 슬슬 넋두리로 변해갈 무렵 수호가 말을 끊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새로 온 외국 간부 놈들과 사생결단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의 대가로 약속했던 재료 아이템은 꼭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 근데…….”
“……?”
“아직 비석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명훈의 물음에 수호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원래 일행이 있던 장소.
어느새 그곳에 가 있던 발룡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낙서다.』
수호가 정명훈에게 대답했다.
“가짜랍니다.”
“아……. 하? 이런 젠장. 빌어먹을 놈들이!”
허탈한 표정을 짓던 정명훈이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한동안 씩씩거리던 그가 수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길드에서 저를 제거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제거라고요?”
“눈 밖에 난 저와 파티원들을 해치우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호는 대답 대신 생각에 잠겼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기가 관련된 일이다.
게다가 발룡이가 눈치채지 못한 정교한 술수가 동원됐다.
고작 정명훈과 파티원을 죽이겠다고 저지를 만한 일이 아니다.
‘천풍 길드와는 던전 밖에서 꼭 따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길드장을 비롯해 이번 일과 연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만나 봐야겠다.
덜덜덜-
수호가 눈을 다짐하고 있을 때, 던전이 거세게 떨렸다.
수호가 생각을 멈췄다.
“곧 던전이 닫힙니다. 이야기는 나가서 하죠.”
“아, 알겠습니다. 퇴각한다! 서둘러!”
몬스터는 물론 이낙길의 사체까지 깔끔히 태워 버렸기에 따로 챙길 것도 없다.
일행이 곧바로 던전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 * *
열심히 달린 끝에 던전이 닫히기 전에 입구를 통과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호가 생각했다.
‘협회에 연락해야겠지?’
마기가 관련되었으니 협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
여차하면 천풍 길드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할 터. 그러려면 협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차원 보따리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려던 순간.
수호가 손을 멈췄다.
멀리서 기이한 느낌이 흐릿하게 감각을 자극한다.
발룡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도 표정이 심상치 않다.
- 발룡아, 혹시 마기 느껴지지 않아?
발룡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물, 아까 상대했던 것과 비슷한 것들의 기운이다. 사방에서 느껴진다.』
수호가 황급히 차원 보따리를 뒤졌다.
[몬스터 탐지기]를 꺼내 작동시켰다.
“미친!”
수호가 욕설을 내뱉었다.
탐지기 화면에 수백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곳은 부천시.
인구 80만이 넘는 번화한 도시다.
저렇게 많은 몬스터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장소다.
놀란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잉-
지잉-
차원 보따리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긴급 재난 문자였다.
『전국적인 던전 브레이크 발생. 국민 여러분께서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시고, 비상 행동 지침에 따라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외부 활동 중인 분들은 가까운 대피소로…….』
비슷한 내용의 문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수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전국에서? 도대체 몇 개나?’
집이 걱정된다.
수호가 바로 차원 전음을 시전했다.
- 윌슨! 윌슨!
대답이 없다.
수호가 반복해 말을 걸었다.
- 윌슨! 대답 좀 해! 혹시 위험한 거야?
몇 번쯤 더 불렀을 때 대답이 돌아왔다.
- 아직은 괜찮아. 벌써 던전에서 나왔어?
다행이다.
근데 거슬리는 단어가 있다.
- 아직은? 집에 무슨 일 생겼어?
- 동네에 몬스터가 나타났어. 가게를 지키고 있는데 당장 큰 문제는 없… 으아! 또 온다.
말이 뚝 끊겼다.
- 윌슨! 괜찮아? 윌슨!
몇 번을 더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수호가 정명훈을 돌아봤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겠습니다. 핸드폰 확인하세요!”
말을 마친 수호가 용달차를 향해 달리려다가 우뚝 멈췄다.
‘차로는 늦어.’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으니, 도로 상황은 뻔하다.
‘배틀 웨건을…….’
윌슨이 위험하다.
집에 두고 온 차원문이 위태롭다.
남의 눈을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상황.
수호가 막 차원 보따리에서 배틀 웨건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펑-
발룡이가 투명화를 풀고 체형을 키웠다.
『달려갈 시간 없느니라. 타라!』
뭐?
머리 쓰다듬는 것만 해도 질색하는 녀석이 등을 허락하겠다니!
깜짝 놀란 수호는 그제야 발룡이의 표정을 확인했다.
녀석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양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수호가 서둘러 대답했다.
“부탁할게. 가자.”
발룡이가 등을 내밀었다.
수호가 훌쩍 뛰어 목덜미에 올라섰다.
자세가 썩 편하지 않다.
사람을 태우기에는 발룡이의 크기가 애매한 탓.
목을 붙잡고 어깻죽지를 밟고 섰다.
그러자 서퍼가 보드를 타듯, 제법 그럴싸한 자세가 나왔다.
『꽉 잡거라!』
후우웅-
발룡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와- 드래곤을 탔어!”
“끝내주잖아!”
“멋있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천풍 길드 헌터들이 수호의 모습에 환호했다.
그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드래곤 라이더.”
* * *
발룡이는 집을 향해 전력으로 날았다.
후우웅-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매섭다.
수호는 바람을 뚫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던전에서 나왔을 때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발아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으니까.
콰앙!
마기에 물든 몬스터가 건물을 들이받았다.
대신 건물이 부서져 나갔다.
빠른 속도 탓에 뒤 장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뻔했다.
콰아앙-!
곧이어 또 다른 놈이 하는 짓을 볼 수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런 일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믿기 힘든, 아니, 믿기 싫은 상황이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설마 아까 던전에서와 똑같은 수법으로?’
이낙길이 코어를 폭주시켰듯.
전국의 던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들어갔던 헌터가 몰살당하고, 던전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온 거라면?
대처가 늦는 이유.
몬스터가 거리를 장악한 상황이 설명된다.
‘제기랄.’
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가정이 사실이라면, 수호 혼자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
‘일단 윌슨부터…….’
집의 안전부터 확보해 놓고, 뒷일은 그때 생각하자.
“발룡아, 더 빨리!”
발룡이가 전력을 다했다.
둘은 빠르게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들어섰다.
30초쯤 지났을까.
아래를 살피던 수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스? 몬스터가 다가가고 있어.’
노란색 버스가 건물을 들이받고 멈춰 있다.
심하게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문이 건물 잔해에 끼어 열리지 않는다.
선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버스 옆에 붙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옷에 혈흔이 비쳤다.
‘창문으로 아이들을 꺼내려는 거야.’
문이 부서진 버스.
아이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다친 채로 안간힘을 쓰는 여자.
차 안에서 울먹이는 아이들.
그리고 멀리서 접근하는 몬스터.
수호의 입이 열렸다.
“멈춰.”
오는 길에 이미 많은 장면을 목격했다.
헌터와 몬스터의 전투.
민간인의 주검.
군부대가 몬스터와 교전 중인 것도 봤다.
그럼에도 수호는 멈추지 않았다.
집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 장면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냐?』
발룡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발룡이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렸을 뿐.
* * *
부서진 버스 안.
승우는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아빠, 도와주세요.’
유치원 버스를 벽에 처박아 버린 괴물.
도망친 버스 기사 아저씨를 쫓아간 그놈은 몬스터가 분명했다.
어리지만 승우는 몬스터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 전, 하늘나라를 지키러 간 아빠가 헌터였기 때문이다.
‘도와줘요!’
그랬기에 승우는 기도를 반복했다.
- 세상에서 제일 강한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승우를 지켜 주실 거야.
엄마가 늘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아빠는 하늘나라 지키느라 바빠서 크리스마스 때도 못 왔잖아? 또 바빠서 못 오면 어떻게 해?
언젠가 승우가 물었을 때, 엄마는 승우를 꼭 안아 주면서 대답했다.
- 아빠가 우리 승우, 분명히 지켜 주실 거야. 걱정하지 말렴.
- 너무너무 바쁘면?
- 그럼 졸병이라도 보내 주실 거야. 그러니까 우리 승우는 아빠 못 본다고 울지 말고 씩씩하게 지내야 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승우는 기도를 계속했다.
어느 순간, 감은 눈 위를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무언가 승우 앞쪽에서 해를 가렸다.
‘아빠?’
승우가 눈을 떴다.
버스 창을 통해 커다란 털북숭이가 보였다.
“꺄아아악-”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몬스터가 선생님에게 다가간다.
착하고 예쁘고, 간식도 잘 챙겨 주시는 선생님.
다치는 건 싫다.
“도와줘요!”
승우가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몬스터가 선생님을 잡아먹기 전에 도와 달라고.
아빠가 바쁘면 졸병이라도 보내 달라고.
번쩍-
하늘에서 새파란 빛줄기가 떨어져 내린 것은 그때였다.
콰직!
빛은 몬스터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머리통이 박살 난 몬스터가 바닥에 쓰러졌다.
승우가 소리쳤다.
“왔다! 졸병이다!”
아빠가 아니니 졸병이 분명할 터다.
거인의 격노로 몬스터를 박살 낸 수호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지?’
의아했지만 그걸 따질 겨를이 없다.
수호가 쓰러진 선생을 일으켰다.
“선생님, 애들 인도해 주세요.”
수호가 석화비도를 꺼내 버스 벽을 오려 냈다.
문이 생겼다.
쿠당탕-
잘라 낸 버스 벽이 떨어지는 소리에 선생님이 정신을 차렸다.
“새, 새싹반 여러분, 지금부터 줄서기 놀이를 할 거예요. 승우부터 한 명씩 줄 서세요. 예쁘게 서는 어린이는 칭찬 스티커 두 개!”
아이들이 구멍 쪽으로 다가와 줄을 섰다.
선생이 아이들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내렸다.
그사이 수호는 발룡이에게 부탁했다.
- 발룡아, 애들 숨어 있을 곳 좀 만들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쳇. 떠올라라!』
투명화한 채 따라온 발룡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불평을 멈추고, 금세 마법을 시전했다.
건물 잔해가 움직여 컨테이너만 한 방을 만들었다.
“선생님, 아이들 데리고 들어가세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도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호가 [미완성 최상급 은폐 결계 생성기]를 꺼내 건물 바닥에 놓았다.
마력을 불어넣었다.
화르르-
은박지처럼 생긴 결계 생성기가 불타듯 사라졌다.
결계가 생겼다.
“저기 흐릿하게 막 같은 거 보이죠? 막 안에 있으면, 몬스터가 알아보지 못하고, 설사 눈치채더라도 들어올 수 없어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여기 머무르세요.”
“아…….”
선생님이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내렸다.
수호가 떠날 것을 눈치채고,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은 것이다.
선생님과 달리, 수호의 사정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으앙- 아저씨 가지 마요.”
“가지 마요, 무서워요.”
아이들이 줄지어 울기 시작했다.
난감한 상황.
그때 승우가 외쳤다.
“아저씨는 하늘나라 지키러 가야 해! 졸병이라 바쁘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쳐. 뚝!”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
‘얜 진짜 뭐 하는 애지?’
어이없어 하던 수호가 승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펄럭-
수호가 채 타기도 전에 발룡이가 떠올랐다.
‘발룡이 녀석 심통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수호가 발룡이의 목덜미에 내려섰다.
후웅-
거센 날개바람과 함께 발룡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졸병 아저씨, 하늘나라 꼭 지켜요! 아빠한테 빨리 돌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승우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수호를 열심히 응원했다.
116화 맞서는 자(2)
수호네 가게 앞 도로.
쿵웅!
건물 2층 공방 창문이 열리며, 잿빛 쇳덩이가 떨어졌다.
곧이어 윌슨이 창문을 넘어 뛰어내렸다.
한쪽 어깨에 자신보다 더 큰 가방이 메여 있다.
윌슨이 쇳덩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한숨 쉬었다.
‘하아- 왜 하필 오늘…….’
며칠만 더 있었다면, 가게의 방비를 위한 시설이 완성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아주 간단한 몇 가지 장비뿐이다.
‘어쩔 수 없어. 있는 거라도 총동원해서 집을 지켜야 해!’
집은 상황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 불문.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
한동안 마력을 불어넣자, 쇳덩이가 변하기 시작했다.
차르르르-
철컹. 철컹.
몇 초 후.
건물 전면에 완만한 호를 그리며 철벽이 세워졌다.
[소형 마도 바리케이드]
윌슨이 수호의 가게에 맞춰 새로 개발한 물건이다.
어른 어깨 정도 높이의 철벽.
상단부에는 시야 확보를 위해, 투명한 패널이 붙었다.
강도는 경찰 방패를 수백 배 웃돌며, 특수 기능도 있다.
[대對 몬스터 이동 방해 마법진]
바리케이드 전면을 향해 몬스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마력 파장이 발현된다.
범위는 전방 20m 남짓.
대형 선풍기 앞에 선 것처럼, 몬스터의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몬스터를 완전히 멈춰 버릴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철컹.
바리케이드의 설치가 끝났다.
윌슨이 가방에서 쇳덩어리 몇 개를 더 꺼내 조립했다.
잠시 후, 어른 키만 한 총 2정이 완성됐다.
[미완성 설치용 마력 기관총]
- 마정석의 에너지를 이용해 마탄을 발사하는 기관총이다. 성벽, 담장 등에 설치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안정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남용 시 고장의 위험이 있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물리 공격력 310
- 【중급 관통력 강화】【하급 명중률 보정】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30
‘한 시간만 더 있으면, 완성됐을 텐데. 쳇.’
윌슨이 혀를 찼다.
단 1시간이면, 기관총을 완성하고 건물에 장착까지 할 수 있었을 터였다.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가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지.’
윌슨은 금세 생각을 떨쳤다.
마력 기관총을 바리케이드 위에 턱 걸쳤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하악?!”
아차.
마기를 느낀 후, 모든 신경이 그곳으로 향해 버렸다.
윌슨은 가게에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했다.
윌슨이 고개를 돌렸다.
양수정이 놀란 눈으로 바리케이드와 마력 기관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윌슨이 양수정에게 말했다.
“손님, 헌터시죠? 전투 준비하세요. 곧 싸워야 할 거예요.”
양수정의 시선이 멀리 헌터 협회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전투의 소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몬스터? 아! 설마 던전 브레이크가?!”
“아마도요.”
“…협회에서 나선 것 같으니, 차라리 조용히 숨어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망설이다 되묻는 양수정.
윌슨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러긴 힘들 거예요.”
추측하듯 말했지만 윌슨은 확신했다.
‘마물이 곧 이곳으로도 몰려들 거야.’
지성체로부터 탄생하는 마인과 달리, 몬스터 태생의 마물은 훨씬 노골적으로 마기의 본질을 따른다.
인류 말살.
마기를 지니지 않은 모든 지성체를 공격해 죽이려는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다.
특히 마기에 막 잠식당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마기가 아닌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일수록 타깃이 된다.
‘협회가 주의를 끌 테지만, 이곳도 마물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어.’
수호의 가게에는 각종 아이템과 설비 그리고 차원문까지 있다.
장담컨대 머잖아 마물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하아,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양수정이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푹-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불굴의 마체테]가 바닥에 박혔다.
‘주머니에 마법 배낭을 넣어 뒀어?’
마법 배낭은 비싸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것은 훨씬 더.
‘보통 사람이 아니었나?’
윌슨의 얼굴에 뜻밖이란 표정이 떠올랐다.
푹- 푹- 푹-
그사이 양수정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바닥에 박아 넣었다.
수십 자루나 되었다.
“…무기가 무척 많으시네요.”
어이없어진 윌슨이 물었다.
양수정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리고 여기 물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꾸 사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근데 기대하지는 마세요. 솜씨는 별로니까.”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럴듯하게 생긴 활을 꺼냈다.
뒤이어 화살이 우수수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족히 수백 발은 되었다.
뜻밖의 상황에 윌슨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준비를 마친 양수정이 말했다.
“양수정이에요.”
“아, 윌슨입니다.”
그렇게 둘이 통성명을 한 순간.
“크르르르르르-”
저편에서 마침내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엄살과 달리, 양수정의 솜씨는 썩 훌륭했다.
푹-
날아간 화살이 원숭이를 닮은 마물의 미간에 적중했다.
화살이 뒤통수를 꿰뚫고 튀어나왔다.
양수정이 새로운 살을 시위에 걸며, 또 다른 마물을 겨냥하려는 찰나.
“아직 안 죽었어요!”
고함친 윌슨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굉음과 함께 발사된 마력탄이 원숭이 대가리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아? 하악.”
왠지 들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무시하고 윌슨이 말을 이었다.
“엄청 질기니까, 완벽히 부숴야 해요.”
마물은 일반 몬스터보다 훨씬 끈질기다.
완벽히 파괴해야 죽일 수 있다.
“알았어요.”
양수정이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일부러 마물의 발목을 노렸다.
쿵.
발목에 화살이 꽂힌 마물이 바리케이드의 이동 저항 마법에 밀려 바닥에 쓰러졌다.
콰앙-!
윌슨의 크고 아름다운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마물의 대가리가 파괴되었다.
“나이스.”
마무리한 윌슨이 양수정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꿀꺽.
양수정이 윌슨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딘지 동작이 건성이다.
시선도 묘하게 어긋났다.
‘…지금 기관총 보면서 군침 삼킨 거 맞지?’
실소하던 윌슨은 그래도 양수정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솜씨도 훌륭했고, 윌슨과 합도 잘 맞았다.
덕분에 한동안은 상황이 낙관적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한 시간쯤 지난 후부터였다.
“사, 살려 줘요! 들여보내 주세요!”
근처 주민이 바리케이드로 다가왔다.
“달려요!”
윌슨이 바리케이드를 조종했다.
한 귀퉁이가 벌어지며 문이 생겼다.
주민이 헐레벌떡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섰다.
“헉, 헉- 고, 고맙습니다.”
주민이 인사했다.
윌슨은 인사를 받을 틈이 없었다.
“크르르르-”
주민을 뒤쫓아온 마물이 바리케이드로 달려들고 있었다.
푸슉.
다행히 양수정의 화살이 마물을 쓰러트렸다.
윌슨이 마력탄을 날려 놈을 처치했다.
상황이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뒤로 몇 분쯤 지났을까.
“들여보내 주세요!”
“사람 살려!”
“으악- 몬스터다! 살려 줘!”
근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가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윌슨은 수시로 바리케이드를 열어 그들을 받아들였다.
“하아- 살았어.”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헉- 헉- 덕분에 살았습니다.”
주민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윌슨의 표정은 딱딱했다.
‘좋지 않아.’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파국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이 이렇게 모였다가는… 마물이 잔뜩 몰려들 거야.’
마물은 인류 말살의 본능에 충실하다.
사람이 모일수록 마물의 이목을 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변 마물이 모조리 덤벼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윌슨이 이를 악물었다.
멸망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윌슨.
그는 마물을 피해 찾아온 주민들을 내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윌슨이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 윌슨! 윌슨! 대답 좀 해! 혹시 위험한 거야?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슨이 반색했다.
됐다.
수호가 던전에서 나왔다.
이제 버티기만 하면 된다.
한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윌슨이 수호에게 대답했다.
- 아직은 괜찮아, 수호. 벌써 던전에서 나온 거야?
- 아직은? 집에 무슨 일 생겼어?
- 동네에 몬스터가 나타났어. 가게를 지키고 있는데 당장 큰 문제는 없… 으아! 또 온다.
윌슨이 급히 말을 끊었다.
식히던 기관총을 집어 들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편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은?’
동네 슈퍼마켓 주인아줌마.
바로 뒤에서 몬스터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고 있다.
쾅-!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몬스터가 쓰러졌다.
“꺄악-”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아줌마가 충격에 휩쓸려 넘어졌다.
윌슨이 황급히 외쳤다.
“일어나 달리세요! 빨리!”
멀리서 또 다른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다.
아줌마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도로 쓰러졌다.
“악! 발목이…….”
아줌마의 발목이 이상한 각도로 돌아갔다.
“이런!”
윌슨이 총을 다시 겨눴다.
쾅!
다시 폭음이 터졌다.
몬스터의 대가리가 부서졌다.
안타깝게도 부서진 것은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기관총 코어가 깨졌어.’
마정석으로 만든 기관총의 코어가,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윌슨이 총을 던져 버렸다.
바닥에 놓인 나머지 한 자루를 짧게 바라봤다.
‘안 돼. 지금 쏘면 저것도 망가질 거야.’
젠장!
윌슨이 이를 악물고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었다.
“윌슨 씨, 위험해요!”
양수정이 만류했다.
윌슨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는! 마물에게 아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Comentários
Postar um comentá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