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8

다.
‘발룡이에게 브레스라도 쏘라고 해야 하나?’
그 외에 대응할 방법이 안 떠오른다.
한데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본좌가 이런 선택을 할 줄이야. 수호, 시간이 필요하다. 막아라!』
“뭐? 뭘 하려고?”
콰르르르르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았다.
수호가 방패를 앞세운 채 브레스 앞으로 뛰어들었다.
치이이이익-
방패가 녹기 시작했다.
곧 구멍이 뚫릴 기세.
‘버틴다.’
뒤에 드워프가 있다.
물러설 수 없다.
머잖아 방패에 구멍이 뚫리고, 브레스가 수호의 손바닥과 팔을 두드렸다.
뜨겁다.
그러나 높은 화염 저항이 치명상을 막고, 재생 스탯이 상처를 회복한다.
‘버틸 수 있어!’
하나 무작정 버티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발룡이는 뭐 하고 거야?’
수호가 재빨리 발룡이를 살폈다.
뜻밖의 장면이 보였다.
“으어- 떠, 떠오른다!”
“난다! 드래곤 님이 마법으로 우릴 옮기려나 봐!”
“으아악-”
아직 절벽을 건너지 못한 드워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고 있었다.
‘드워프를 옮긴다고?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비행하는 적에게 공격받고 있는데?
사실 수호의 도주 작전은 실패에 가까웠다.
애초에 웜이나 드래곤을 상정한 작전이 아니었다.
지형을 무시하는 괴물들이 나타난 이상, 절벽을 넘는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없다.
‘어쩔 생각이야?’
한데 발룡이가 갑자기 드워프를 옮긴다.
그것도 브레스가 날아오고 있는 상황에, 방어를 수호에게 도맡겨 놓은 채로.
강한 의문을 느낀 수호가 소리쳐 물었다.
“뭐 하려고?”
『잠깐만 더 버티거라! 피할 데가 있다!』
“피할 데라니?”
『마물이 다가온다!』
“제기랄!”
대화를 계속할 틈이 없었다.
수호가 브레스를 막는 사이 마물들이 절벽 길로 밀고 올라왔다.
발룡이는 드워프 운반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마물은 수호의 몫이었다.
‘젠장! 이판사판이다!’
수호가 왼손을 뻗었다.
석화비도가 절벽 위쪽에 푹 틀어박혔다.
오른손으로는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그 사이 텅 빈 수호의 가슴을 브레스가 강타했다.
하지만 적회색 수호자와 화염 저항 스탯이 치명상을 막았다.
“누가 죽나 한번 해 보자!”
소리치며 수호가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앙-!
“무, 무너진다!”
“절벽을 무너트린다.”
마인과 마물들이 허둥거렸다.
수호가 절벽 길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서진 파편을 마물 쪽으로 걷어차기까지.
“쿠엑-!”
파편에 맞은 마물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때맞춰 힘이 다한 드래곤이 브레스를 멈췄다.
수호는 쉬지 않고 망치를 휘둘렀다.
쾅- 쾅- 콰쾅-!
절벽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더니.
우르르르-
어느 순간 길이 완전히 끊겼다.
심지어 수호가 딛고 선 곧 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되었다. 수호, 뛰어넘어라!』
발룡이가 건너편에서 외쳤다.
드워프들도 모두 이동을 완료한 상태였다.
수호가 점프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절벽에 박아 넣었던 석화비도를 회수, 건너편으로 던졌다.
푹-
석화비도가 맞은편 절벽에 박혔다.
비도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수호의 몸이 가속한다.
타닥. 수호가 무사히 건너편 절벽에 내려섰다.
“도대체 어쩌려는 거야?”
수호가 숨 고를 새도 없이 발룡이에게 물었다.
『위기를 피할 방법이 있느니라.』
한 마디를 남긴 발룡이가 절벽을 바라봤다.
마력이 뭉클 솟아오르더니, 절벽에 동그란 마법진이 나타났다.
저저적.
“헉! 우, 움직인다, 절벽이 움직여!”
“저, 절벽이 갈라진다!”
“동굴이 생겼어!”
벽에 생겨났던 마법진이 사라지고, 그곳에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거대화한 수호가 여유롭게 드나들만큼 큰 동굴이었다.
『들어가라, 난쟁이들아!』
발룡이가 꽥 소리쳤다.
“들어가세요! 어서!”
수호도 드워프들을 재촉했다.
발룡이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을 터.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들으면 된다.
“으악- 드래곤이 다시 오고 있어!”
“또 공격할 거야. 어서 들어가!”
“빨리빨리! 달려!”
깜짝 놀란 드워프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허공을 선회한 드래곤이 다시 날아든다.
이번에는 몸으로 들이받을 작정인 듯,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됐다! 수호, 너도 어서 들어 오거라!』
수호가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동하라!』
발룡이가 뇌까렸다.
한 가닥 마력이 동굴 바닥으로 흘러들어 갔다.
콰아아아아앙-!
드래곤의 충돌로 절벽이 뒤흔들리는 순간, 동굴 바닥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났다.
잠시 후, 빛이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 드워프는 없었다.
발룡이도 수호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절벽 길에서 모습을 감춘 수호와 일행이 나타난 곳은 넓고 어두컴컴한 공동이었다.
“공간 이동은 어떻게 한 거야?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좀 쓰지. 왜 그 지경이 되고 나서야 쓰는 건데.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디야?”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에 어이없어진 수호가 발룡이에게 다그쳐 물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눈동자를 떨던 발룡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이곳이 본좌의 집이니라.』
105화 신의 목소리(3)
도색되지 않은 벽과 어두컴컴한 조명.
운동장 몇 개는 들어갈 듯한 넓은 공간.
수호와 드워프 일행이 전송된 곳은 그런 장소였다.
“여기가 진짜 네 레어라고?”
발룡이는 우물쭈물한 후에야 대답했다.
『그, 그렇다. 이곳이 본좌의 레어이니라.』
삭막하다.
보물의 산이 쌓여 있다는 이야기 속 드래곤의 둥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드래곤 레어가 원래 이런가?
차라리 어느 흑마법사의 지하 던전이라면 믿겠는데…….
수호는 곧 생각을 떨쳐내고 물었다.
“레어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진작에 여기로 피했으면 좋았잖아.”
『방금 본좌의 마력이 한 단계 크게 늘었느니라. 그 덕분에 레어의 문을 열 마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성장하는 장면은 수호도 목격했다.
“성장하기 전에는 여기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는 말이야?”
『그, 그렇다.』
어딘지 켕기는 듯한 태도.
저런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다.
“혹시 지금 거짓말하는 거야?”
『보, 본좌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거짓말을 하겠느냐. 본좌는 떳떳하기 그지없는 드래곤이니라.』
그런 것치고는 눈동자가 좌우로 춤을 추는데?
잠시 발룡이를 응시하던 수호가 재차 물었다.
“혹시 여기에 두고 간 보물 같은 거 없어? 마물들을 몰살시킬 굉장한 무기라던가.”
『젠장!』
“갑자기 왜 욕이야?”
『그래, 없다! 본좌의 레어에는 보물 따위 없다는 말이다. 이제 속이 시원하느냐?』
발룡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날개를 파닥거리는 모양새가 굉장히 분해 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아! 혹시?’
눈을 가늘게 뜨고 발룡이를 훑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개털이야?”
『…….』
“전에 드워프가 만든 장비 보고, 그런 하찮은 물건은 레어에 넣지도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어?”
발룡이와 만난 초창기의 일이다.
화염 포마검을 보고 발룡이가 그런 말을 했었다.
화염 포마검의 놀라운 성능과 발룡이의 태도가 인상 깊었던 탓에 그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그건 사실이니라.』
“하긴 안 넣었으니 아무것도 없겠지. 근데 그렇게 큰소리친 것치고 너무 텅 빈 거 아니야?”
이해가 안 가는데.
아무리 헤츨링이라도, 이렇게 괴상한 레어에 살 수가 있는 건가?
『…….』
발룡이는 대답이 없다.
수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채 주변을 관찰했다.
말 그대로 넓기만 한 공동이다.
이곳저곳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저 중에 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수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 냄새가 왜 이렇게 쿰쿰하지?”
『무, 무슨 말이냐. 본좌의 코에는 상쾌하기만 한데.』
“아니야. 음식이 썩다 못해 말라붙을 냄새가…….”
말을 하던 수호가 발룡이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발룡이는 버텼다.
하나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지는 못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지 않느냐! 네가 본좌를 잡아가는 바람에 놓아 둔 음식이 썩은 것 아니냔 말이다!』
“설마 여기 음식 저장해 뒀다가 먹었어?”
『그렇느니라.』
“보존 마법 같은 건 할 줄 몰라? 왜 다 썩었어?”
『그딴 걸 걸면, 음식 본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느니라.』
그랬다.
발룡이는 지구로 끌려가기 전부터 ‘미식 드래곤’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만 먹고 산다더니?”
『지,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니라!』
“그래, 마음 같아서는 샅샅이 조사해 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안전은 확보했으니, 드워프부터 마을로 데려다주고, 그다음에 마물을 쓸어버릴 방법을 찾아야겠지. 혹시 들어올 때처럼 드워프 마을 근처로 문을 열 수는 없어?”
『없다. 그리고 안전이 확보된 상태도 아니니라.』
“무슨 소리야?”
레어로 피신했는데 아직 위험하다고?
『문을 열고 이곳으로 드워프들을 이동시키면서 마력이 동났다. 그 바람에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허.”
어이없어 허탈한 소리를 내는 수호에게 발룡이가 덧붙였다.
『통로에 리치의 함정이 있으니, 마물들이 길을 뚫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그나마 시간이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수호는 문득 발룡이의 말에서 거슬리는 단어를 포착했다.
“리치? 혹시 라이프 베슬에 영혼을 담아서 영생한다는 그 리치?”
『…리치라니? 본좌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방금 분명히 들었거든.”
『쳇, 좋다. 다 말해 주지. 이곳은 원래 본좌의 레어가 아니었느니라. 먼 옛날에…….』
.
.
.
“그러니까 리치가 버린 던전을 네가 꿀꺽해서 레어로 삼았다 그 말이지? 귀찮아서 함정은 그대로 뒀고. 너는 공간 이동으로 들락거리면 되니까?”
『그렇다.』
“드워프 마을 쪽에 문을 열지 못하는 것도, 네가 여길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거고.”
『파악 못 한 것이 아니니라. 귀찮아서 그냥 둔 것이지.』
“지금은 마력이 딸려서 못 한다며?”
『…그렇다.』
짧게 한숨을 내쉰 수호가 물었다.
“혹시 리치가 남긴 것 중에 우리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드워프들을 마을로 이동시킬 수 있는 도구라던가.”
이 정도 던전을 만든 리치라면, 대단한 아이템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수호의 기대는 곧바로 부정당했다.
『모른다. 뒤져 본 적이 없느니라. 있다고 해도, 지금 상태로 함정을 해제하며 찾아다닐 수는 없고.』
“하긴 문도 못 여는데, 보물을 어떻게 찾겠어.”
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건 뭐, 총체적 난국이구만.’
리치의 유산이야 욕심나면 나중에라도 와서 찾으면 된다.
하지만 당장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다.
자칫하다 던전에 갇힌 신세가 될 판이다.
골치가 아파진 수호가 발룡이를 추궁했다.
“한동안 이 근처로 안 오겠다고 버티더니, 쪽팔린 줄은 알았나 보네. 또 뭐 숨기는 거 없어?”
『어, 없다! 그래도 난쟁이들 죽을 뻔한 것을 본좌가 살려서 데려오지 않았느냐? 계속 본좌를 추궁할 것이냐!』
하기야 발룡이가 레어를 연 덕분에 당장의 위기는 모면한 셈.
“하긴 네 탓도 아니지. 웜에다 드래곤까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하아-”
『그래. 갑작스러운 변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그러니 더는 본좌를 추궁하지 말도록.』
“알았어. 미안. 드워프들 살리느라 애써줘서 고마워. 돌아가면 보상할게.”
『되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라.』
웬일로?
수호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구구구궁-
레어가 떨려왔다.
『함정이 뚫리고 있느니라. 몇 시간 못 버티겠구나.』
“뭐? 그렇게 빨리?”
『아무리 대단한 함정이라도 그 많은 마물을 감당하기는 힘든 법이다.』
하긴 평원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마물이 많았으니. 게다가 드래곤까지 있고.
“방법이 없을까?”
『본좌 혼자라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만. 배틀 웨건이 있으니, 몇 명쯤은 데리고 갈 수 있겠군.』
“무슨 말이야?”
『날 수 있다면, 레어를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발룡이가 공동 한쪽 편을 앞발로 가리켰다.
『저쪽 통로 전체에 함정이 깔려 있다. 걸리면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날려 버리는 함정이니라. 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동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그렇지!』
함정을 설명하던 발룡이가 갑자기 탄성을 터트렸다.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수호가 황급히 물었다.
“왜 그래?”
『되었느니라. 이번 일은 본좌가 해결하지.』
어느새 거만한 눈빛을 회복한 발룡이가 턱을 치켜들며 선언했다.
“뭐? 어떻게?”
『본좌가 이번 일을 깔끔히 해결해 주겠다. 그러니 수호 너는…….』
“나는?”
『나중에 본좌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되느니라. 크큭-』
* * *
화르르르르르-
“크아악-!”
“뜨겁다! 뜨겁다! 끄억-”
바닥에서 갑자기 치솟은 불길에 마물과 마인이 타들어 간다.
“전진하라.”
코자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진을 명령했다.
마물의 파도가 통로를 따라 밀려들어 갔다.
수십 마리의 마물이 더 죽은 끝에 함정이 파괴되고 불길이 멎었다.
“크흐흐흐- 좋다. 더 밀어붙여!”
마물들이 통로를 따라 전진해 나갔다.
드래곤의 머리에 탄 코자크가 그 뒤를 쫓았다.
눈에 탐욕의 빛이 일렁거린다.
“거인으로도 모자라 블랙 드래곤이라니! 보물 창고나 다름없구나.”
거인만 해도 갖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인데 검은 드래곤까지 나타났다.
“놓칠 수 없지. 다 내 거다.”
마물을 모두 소모하더라도 거인과 블랙 드래곤을 손에 넣는다.
천운이 따라 얻은 드래곤 덕분에 그간 얼마나 많은 인간의 성을 함락했던가.
“천금 같은 기회니까 말이야.”
상대는 코자크가 침을 흘릴 정도로 강하다.
드워프라는 짐이 얹혀 있는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
“차려 놓은 밥상을 걷어차서야 안 되지. 흐흐흐-”
탐욕과 자신감이 웃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쿠쾅-!
앞쪽에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소음의 원인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놈이다! 거인!”
망치를 든 거인.
수호가 나타나 선두의 마물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놈을 잡아라! 공격해!”
코자크가 명령을 내렸다.
마물들이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퍼퍽-
다시 마물 몇을 뭉개 놓은 수호가 뒤로 내뺐다.
“시간이라도 끌 셈인가? 좋다. 마음껏 날뛰어 보아라. 크흐흐- 결국, 내 손에 떨어지게 될 테니.”
코자크가 마물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수호가 나타나 마물을 공격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물의 파도가 공동에 다다랐다.
수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은 왜 드워프를 해치는 거지?”
수호가 코자크를 노려보며 물었다.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코자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 명받았으니 그러하는 것이지. 굳이 네가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너는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될 테니까. 크크크.”
“미친 마족의 종복 놈아. 마물을 부리는 꼴을 보니, 네놈이 마족한테 얻은 권능이 세뇌 계열인가 본데. 날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냐? 아니지, 네놈 주인의 이름이 뭐냐? 만나면 내가 아주 골통을 빠개 놓을 텐데.”
코자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마족과 종복의 관계를 거인이 알고 있다니.
코자크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네가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곧 지옥불에 타 죽을 테니까.”
코자크의 말을 빌려 비아냥거린 수호가 몸을 돌렸다.
공동에 연결된 한 통로가 수호의 몸을 삼켰다.
“잡아! 놈을 잡아라!”
코자크가 마기를 담아 명했다.
* * *
‘시간은 넉넉히 끌었고, 이만하면 도발도 충분하겠지?’
따라오는 꼴을 보면, 애초에 도발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말이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수호는 쉬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마물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까지 쫓아오고 있으니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몇 분쯤 달렸을까.
수호는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거인님이 오셨다.”
“준비해.”
“으으- 무서운걸.”
“걱정 마. 거인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그래, 거인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괜찮은 거야. 맛있다고 하시면 맛있는 거고!”
드워프들이 긴장을 풀고자 너스레를 떤다.
그들에게 손짓해 준 수호가 통로 구석을 돌아봤다.
발룡이가 통로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다.
몸 주변에 강한 마력이 넘실거린다.
『준비는 끝났느니라. 때 되면 신호하도록.』
수호의 시선을 느낀 발룡이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통로 입구를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통로 저편에서 마물이 나타났다.
드래곤에 올라탄 코자크도 모습을 드러냈다.
“기껏 도망친 곳이 여기냐? 크흐흐, 모조리 잡아서 노예로 만들어 주마.”
코자크가 광소를 터트렸다.
수호가 망치를 빼 들고 결연한 표정을 연기했다.
‘곧…….’
속으로 때를 기다린다.
마물의 파도가 원하던 곳에 다다를 때까지.
몇 걸음만 더.
됐다!
수호가 【차원 전음】을 시전했다.
- 발룡아, 지금!
『꽉 잡아라!』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은 순간.
화악-
공동으로부터, 이곳까지.
통로의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
코자크가 놀라 소리쳤다.
대답은 없다.
대신 반응한 것은 통로였다.
화아아아아아악-!
은은하던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진다 싶더니.
팟-!
통로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드워프들이 사라졌다.
팟-!
수호와 발룡이도 사라졌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팟-!
다음은 선두의 마물과 놀란 소리를 내뱉던 코자크, 그리고 드래곤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팟-!
마지막으로 통로에 들어찬 모든 마물이 그곳에서 사라져 갔다.
106화 신의 목소리(4)
발랑카 산맥 어딘가의 까마득한 상공.
“으헉! 어, 엄청 높아!”
“으아아아아- 떨어진다아아아아-”
“아하하하하- 신나!”
뚜껑을 열고 튀긴 팝콘처럼 드워프들이 하늘 가득 치솟았다.
수호와 발룡이도 쏘아졌다.
공중에 뜬 채, 수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확인한 후, 쾌재를 불렀다.
‘됐다! 차원 시야 범위에 들어왔어!’
침입자를 허공으로 날려 버리는 함정,
그것을 조작하여 목적지를 【차원 시야】의 범위 안에 넣는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계획이 성공했으니, 이제 마무리할 순서겠지? 차원 여행!’
발룡이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이제 수호가 마지막을 장식할 차례.
수호는 즉시 지구로 귀환했다.
‘헤이스트!’
가게 안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즉시 스킬을 시전.
냉동실로 바짝 다가갔다.
드워프들은 최고점에 올랐다가 낙하하는 중.
그 아래 마물과 마인들이 발사되어 치솟고 있다.
드래곤도, 마족의 종복도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드워프부터 건지고.’
수호가 염동력을 발휘, 떨어지는 드워프들을 멈춰 세웠다. 그 뒤 시야 한구석, 산봉우리에 내려놓았다.
쿵, 쿵, 쿠쿠쿠쿵-
그때쯤 마물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수가 너무 많았기에 수호는 떨어지는 마물들까지 염동력으로 묶지 않았다.
굳이 전처럼 뭉쳐서 죽일 필요도 없었다.
“크아아악-!”
“끄엑- 크르르르-”
압도적인 높이에서 떨어진 마물들은 부서졌다.
마기까지 사라진 경우는 드물었지만, 대부분 움직이기 힘든 상태.
예외가 있다면 비행하는 드래곤과 그 위에 탄 코자크뿐이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군대가, 나의 위대한 군대가…….”
코자크가 어안이벙벙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십, 수백의 마물도 아끼지 않는 그였지만, 그것도 수호를 손에 넣기 위한 일.
성과 없이 모든 마물을 잃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망연자실하던 코자크의 눈에 산봉우리가 들어왔다.
드워프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코자크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저 하등한 것들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죽여! 저것들을 녹여 버려라!”
분노한 코자크가 드래곤에게 명령했다.
드래곤 하트가 맹렬히 회전하고, 마기가 힘을 보탰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검붉은 불길이 산봉우리를 향해 뻗었다.
수호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 미친놈이!”
손을 뻗었다.
브레스가 손바닥에 막혀 흩어진다.
코자크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헉! 뭐, 뭐냐?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허공에서 나타난 압도적인 크기의 손.
코자크는 그것이 자신이 탐내던 거인의 손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수호는 대답 대신 망치를 휘둘렀다.
드래곤은 ‘헤이스트’까지 적용된 수호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퍼어억-!
망치가 드래곤을 후려쳤다.
드래곤과 코자크가 산등성이에 처박혔다.
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 이거지?”
제대로 짓뭉개 주마.
우우우웅-
수호의 몸에서 마력이 요동치며 망치가 발랑카 산맥 높이 치솟았다.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잠깐! 수호, 저 아이를 죽이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발룡이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기에 잠식당했어. 안 보여?”
『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란 말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너도 모른다며?”
『내가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 분명 어딘가에 방법이 있을 것이니라. 저 가여운 아이를 살려 다오. 부탁이다.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수호는 망치를 멈췄다.
“나머지 처리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고맙다, 수호!』
수호가 손을 뻗었다.
땅에 반쯤 파묻힌 드래곤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깔렸던 코자크가 드러났다.
검은 마기가 뭉클뭉클 피어난다.
그것이 코자크의 부서진 뼈와 살을 메우고 있었다.
시야가 트이자, 코자크가 이를 빠득 갈았다.
‘빌어먹을! 좋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부서져 버린 내 군대를 대신해라!’
코자크의 손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가늘게 늘어난 마기가 드래곤의 목을 쥔 수호의 손으로 뻗었다.
수호는 코자크의 기운을 감지했다.
‘이 쓰레기가 무슨 수작이야?’
은밀하게 찔러 오는 마기의 침.
일반적인 마기보다 덜 광폭하지만, 훨씬 음침한 기운이 느껴진다.
수호는 코자크의 술수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안 닿는 편이 낫겠어.’
마기를 피해 손을 뒤로 빼려던 순간이었다.
‘어? 마력이?’
【차원 호신무】의 흐름에 따라 몸을 휘돌던 마력이, 자연스럽게 가속해 수호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출됐다.
우웅-
얇지만, 청아한 푸른빛을 띤 막.
그것이 수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파지직!
마기가 막에 닿아 소멸했다.
막도 곧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내 권능이? 위대한 분께서 내린 권능이 파괴당할 리가 없다!”
코자크가 경악한 눈빛으로 외쳤다.
“있어.”
수호가 대꾸했다.
갑자기 일어난 현상에 대한 궁금증은 미뤄 둔 채 망치를 들어 올렸다.
【5연격】이 코자크의 몸을 내리찍었다.
쿠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아아악-”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진 몸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었던지, 코자크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 아직도 숨이 붙어 있다.
“끈질긴 자식, 그만 죽어라.”
수호가 재차 【5연격】을 시전했다.
쿠콰콰콰콰아아앙-!!
【십격필살】이 발동했다.
온 산을 뒤흔드는 충격이 코자크의 몸을 짓이겼다.
비명이 그쳤다.
마족의 종복 코자크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놈을 지탱하던 마기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
* * *
“후- 종복은 처치했고, 이제 두 가지만 처리하면 끝인가.”
수호가 손에 쥔 드래곤과 바닥에 떨어진 마물들을 노려봤다.
『마물은 본좌가 처리하겠다!』
냉큼 끼어든 발룡이가 마력을 움직였다.
드래곤 하트가 맹렬히 회전했다.
발룡이가 장롱만 한 크기로 커졌다.
“으헉- 깜빡이 좀 넣고 들어와!”
밀려난 수호가 소리쳤다.
발룡이는 대답 대신 머리를 냉동실에 들이밀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땅에 떨어진 마물들 위로 브레스가 쏘아졌다.
2차 성장(?)에 이어, 차원 간 크기 왜곡까지 더해진 발룡이의 브레스는 압도적이었다.
온 산맥이 화염에 뒤덮인 듯 보일 정도.
“끼아악-”
“끄아아악-”
“크헉-!”
마물과 마인이 비명을 지른다.
하나 곧 잠잠해졌다.
한 마리 마물도, 한 점 마기도 남기지 않고 타 버렸기 때문이다.
『헥- 헥- 끝났느니라. 앞으로도 성심을 다해 힘을 빌려줄 테니, 그 아이를 죽이지 말거라, 수호.』
발룡이가 수호에게 부탁했다.
오만함과 간절함이 뒤섞여 이상한 표정이었다.
수호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대꾸했다.
“이거 어떻게 할 건데? 네가 떠미는 바람에 튀어나와 버렸잖아!”
대롱대롱.
수호의 손에는 마기에 물든 드래곤이 들려 있었다.
『작아졌으니,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니라.』
이 자식, 설마 고의였어?
어이없어하는 사이, 손아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드래곤이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강아지만 한 크기.
동글동글한 이목구비.
마기만 빼면 발룡이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때와 달리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그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버둥버둥-
『헤헤- 귀엽구나.』
“얀마, 지금 그렇게 넋 놓고 있을 때야? 도대체 어쩔 거냐고.”
대책이 없으면 죽일 수밖에 없다.
『본좌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느니라. 잠깐만 그렇게 붙잡고 있거라. 아니, 좀 살살. 아이가 아파하지 않느냐!』
“살살 같은 소리 하네. 놓으면 당장에라도 브레스를 뿜을 기세구만.”
『큭- 하지만.』
“닥치고 빨리 방법이나 찾아!”
『아, 알겠다.』
발룡이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기에 대해 특별히 깊게 알지 못했으니까.
결국, 공은 다시 수호에게로 넘어왔다.
“제길, 한계야. 더는 못 버티겠어.”
워낙 버둥거리는 데다가 드래곤답게 힘이 좋다.
슬슬 손아귀가 저렸다.
『아, 안 된다. 죽이지 말거라. 본좌가 방법을…….』
“비켜!”
수호는 엉겨붙는 발룡이를 밀어내고, 호리병 뚜껑 앞으로 달렸다.
병뚜껑 너머 비룡객잔의 모습이 보인다.
수호가 접근하자, 설거지하던 석비룡이 고개를 돌렸다.
“빨라도 닷새라더니, 일찍 왔군.”
수호는 차원문으로 드래곤을 집어넣었다.
“어쩌다 보니, 빨리 왔습니다. 근데 혹시 이것 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석비룡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용이로군. 그것도 마기에 물든 용이라니, 어디서 이런 신기한 걸 주워 왔나?”
“마기를 아시는군요!”
“마교 놈들 중에 몇몇 종자들이 이런 기운을 품고 있었지. 이제는 세상에 없네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마교에 대해서 묻고 싶지만, 수호는 질문을 미뤘다.
“죽이지 않고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요?”
“죽이는 게 가장 편하네만, 자네 부탁이니 힘을 한번 써 볼까.”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장담은 못 하겠네만.
덧붙인 석비룡이 손을 뻗었다.
한 가닥 기운이 흘러나와 드래곤을 옭아맸다.
공중에 둥둥 뜬 드래곤.
페널티가 적용된 탓에 석비룡의 세상에서는 손톱만 하다.
“작군.”
중얼거린 석비룡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았다.
내공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노랗게 빛난다.
석비룡이 그것을 던졌다.
퍽퍽퍽퍽퍽-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더니 드래곤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퍽퍽퍽퍽퍽-
퍽퍽퍽퍽퍽-
“…저기 선배님, 저렇게 패도 될까요?”
드래곤이 맞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했다.
대련할 때 석비룡이 얼마나 봐 주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마기는 지독한 기운이네. 몸에서 나가란다고 순순히 나가 주지 않거든. 기운인 주제에 마치 의지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힘으로 해결하기가 힘드네. 억지로 제거하려는 순간, 용의 몸을 터트리려 들 걸세.”
“아! 그럼?”
“패다 보면, 아마 도저히 못 버티고 나가려 들지도 모른다네.”
고개를 끄덕이던 수호는 이상한 부분을 느꼈다.
석비룡의 말투가 석연치 않았던 것이다.
“혹시 예전에도 마기를 내쫓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네. 마기를 내쫓는 데까지는 성공했지.”
“……?”
“근데 맞은 놈들 중에 버틴 놈이 없었어. 진짜 죽을 때까지 패야 마기가 나가거든.”
“헉! 그럼 죽는 거 아닙니까?”
“저놈은 용이니까, 다르지 않을까?”
사람보다야 훨씬 질기겠지.
석비룡이 중얼거렸다.
퍽.
수호는 어깨에서 충격을 느꼈다.
발룡이가 머리로 들이받은 것이다.
『저 미친 영감에게 하양이를 맡길 셈이냐!』
“그럼 어쩌라고? 방법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드워프에게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
그렇다고 엘프 세상이나 바비네 집에 풀어놓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젠장, 이러다가 우리 하양이가 죽기라도 하면…….』
그새 이름도 붙였냐?
혀를 차는 수호에게 석비룡이 말했다.
“금방 될 일이 아니네. 하던 일 있으면 처리하고 오게나.”
“알겠습니다.”
수호가 호리병 앞에서 물러났다.
퍽퍽퍽퍽퍽-
구타 소리를 등지고, 수호는 다시 냉동실로 향했다.
* * *
수호가 염동력으로 드워프들을 띄웠다.
목적지는 당연히 드워프 마을이었다.
“우호- 또 난다!”
“으히히. 거인님, 너무 신 나요!”
“우웁- 난 토할 것 같아.”
“지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흐윽-”
드워프들이 중구난방 떠든다.
소란스러운 행동 속에 안도와 기대가 섞여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던 광경이 나타났다.
“서, 성이야! 진짜로 성이 있었어!”
“당연하지. 있다니까, 하하하.”
“저기 집 좀 봐. 깔끔하게 잘 지어 놨잖아. 도대체 언제부터 공사를 시작한 거야?”
“이 높은 산에 어떻게 성과 집을… 아!”
“이제 깨달았어? 다 거인님 덕분이지.”
“그렇구나. 너희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거인님을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어!”
“으히히- 밥을 먹어 보면, 성벽보다 더 놀랄걸?”
“다 왔어! 도착했다!”
그때쯤 성 안 광장에 다다랐다.
타룽가를 위시한 드워프들이 그곳에 나와 있었다.
“드워프다. 드워프야!”
“날아오고 있어!”
“달콩 님과 블톤 님이다. 정찰대가 무사히 귀환했어!”
“앗- 누나! 뾰족 투구 부족으로 시집간 우리 누나야!”
“각진 어깨랑 강철 발바닥 부족도 있어.”
“거인님께서 드워프들을 구해 오셨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함성이 터졌다.
온 성이 기쁨에 가득 찼다.
붉은 망치. 잿빛 가죽. 푸른 보석.
세 부족 모두 진심으로 동족을 반겼다.
이곳이 오롯이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이곳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안전지대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환호가 잦아들었을 때, 수호는 눈앞을 수놓은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차원 임무 【발랑카 마을로】를 완수하셨습니다.]
[뾰족 투구 부족의 만족도가 80 상승합니다.]
[각진 어깨 부족의 만족도가 80 상승합니다.]
.
.
.
“후우… 끝났다.”
이렇게 드워프를 구하기 위한 여정이 마무리됐다.
수호는 성취감과 안도와 약간의 아쉬움을 긴 숨으로 갈무리했다.
“거인님! 거인님!”
타룽가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타룽가 님. 새로 오신 분들 묵을 곳 마련해 주시고요. 음식도 대접해 주세요. 식재료는 넉넉히 채워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그 전에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요?”
타룽가가 당황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망치와 모루의 신께서 거인님을 이곳으로 청하셨습니다.”
107화 신의 목소리(5)
“신탁이요?”
수호가 되묻자, 타룽가가 놀라움이 담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예, 거인님을 이쪽으로 모시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이미 신탁을 경험한 타룽가다.
애먼 소리를 듣고 헷갈린 것도 아닐 터였다.
“알겠습니다. 가 보죠.”
드워프의 신이라면, 안 그래도 의문을 느끼고 있던 참이니까.
팟-
수호가 차원 여행 스킬을 시전, 드워프 성안으로 이동했다.
‘왔는데, 어떻게 되는 거지?’
수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백기사. 반가워요.』
발룡이나 어머니 나무의 것처럼, 머릿속으로 그대로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였다.
수호는 상대가 망치와 모루의 신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백기사?’
왜 저런 호칭으로 부르는 거지?
【소통】 스킬이 있으니, 말이 잘못 전달될 리는 만무.
분명히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터였다.
백기사가 보통 어떤 의미로 쓰이는 단어였지?
수호는 곧 고민을 그만뒀다.
그냥 묻는 편이 빠를 테니까.
“저를 왜 백기사라고…….”
한데 수호가 질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수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이럴 수가, 어째서 벌써 간섭── 말이 안─ 미안── 대화할─.』
다급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느낌도 든다.
게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다 전해지지도 않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보답─』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그것은 빛으로 이뤄진 망치였다.
망치가 수호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우우우웅-
한 가닥 상서로운 기운이 수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아…….’
석비룡의 도움으로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진다.
몽롱한 가운데, 수호는 목소리를 들었다.
『궤(櫃)를 찾으세요.』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짜 외친 듯, 선명한 음성.
그것이 끝나자 몽롱함도 사라졌다.
‘궤를 찾으라고?’
백기사에 이어 궤(櫃)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궤짝 할 때 쓰는 그 궤다.
상자나 함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니,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텐데.’
제반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라 그런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추측뿐.
궤는 뭐지?
왜 날 백기사라고 불렀을까?
수호를 고민에서 일깨운 것은 이번에도 목소리였다.
“하늘에서 빛의 망치가 내려왔어!”
“망치와 모루의 신께서 이적을 행하신 거야.”
“거인님께 축복을 내리셨어!”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환성이 온 드워프 성을 뒤흔들었다.
특히 인질로 잡혔던 드워프들은 감회가 더한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그래, 단서는 차차 찾아보자.’
아주 불가능한 일을 청하지는 않았을 터.
단서는 저절로 발견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수호는 드워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새 식구를 맞은 드워프 마을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 * *
잠시 후, 수호는 가게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세쿼이아 씨앗이 심어진 화분에 천천히 마력을 주입했다.
요즘 들어 생긴 버릇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면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수수께끼투성이구만.”
백기사부터 궤까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 외에 예전부터 품던 의문도 있었다.
가령, 발랑카 산맥으로 피난하라는 신탁부터가 이상했다. 그때는 수호가 각성하기도 전이었으니까.
‘망치와 모루의 신이 지구의 시스템에도 간섭할 수 있는 건가?’
어떻게?
드워프 차원에서는 시스템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는데…….
게다가 드워프의 신이 그토록 강력한 존재라면, 어째서 말조차 끝까지 전하지 못한 걸까?
한동안 고민이 계속됐다.
씨앗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즈음이 되어서야 수호가 생각을 멈췄다.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겠지. 그만두자.”
어차피 손해 본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아주 큰 보상을 받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망치가 바로 【발랑카 마을로】 임무의 보상이었던 것이다.
▶ 비고
- 【상급 상태 이상 면역】 적용 중.
- 【벌모세수】 적용 중.
- 【망치의 축복】 적용 중.
망치를 맞은 후, 상태창 비고 항목에 한 가지 문구가 추가되었다.
【망치의 축복】
- 착용 중인 장비의 공격력, 방어력 및 추가 스탯 등, 모든 이로운 수치가 30% 증가한다.
- 영구 지속.
신에게 받은 ‘보답’답게 성능이 어마어마하다.
덕분에 [거인의 격노]는 공격력이 1800이 넘었다. [화염 포마검]의 공격력이 400이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파닥파닥-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수호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괴물 같은 늙은이가 우리 하양이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언제 끝난다는 말이더냐.』
어느새 날아온 발룡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채근했다.
“죽이긴 뭘 죽여? 그나마 선배님이 덕분에 치료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그러는 것 아니냐. 저 작은 것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리는 게 아니고, 마기를 몰아내기 위해 작업하는 거지.”
『조금 더 부드러운 방법이 있을 지도…….』
“그만 보채고 가만히 있어 봐. 안 그래도 한번 가 볼 생각이었으니까.”
드워프 쪽 상황도 마무리했고, 시간도 적당히 흘렀다. 석비룡에게 확인해 볼 때가 되었다.
『그래, 어서! 어서 가 보거라!』
수호가 화분을 내려놓고 호리병으로 다가갔다.
“선배님,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수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네.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잘 왔군.”
“어떻게 되었나요?”
“마기는 처리했네.”
“아! 드래곤은 무사한가요?”
“직접 보게.”
석비룡이 손을 들자, 찬장에 떨어져 있던 용이 차원문 앞으로 떠올랐다.
“살아 있군요!”
“살아는 있네만, 마기에 침식당했던 게 육체만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릇 용이라 하면 영물의 으뜸, 그 영성靈性 또한 고아해야 마땅하겠지. 하나 저 용은 강아지 정도의 지성만 남은 듯하네.”
드래곤은 혀로 자신의 몸을 핥고 있었다.
하는 짓만 보면 강아지와 다름없었다.
“정말이군요.”
수호의 목소리에 석비룡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리 될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네.”
“아닙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죽었을 목숨이니까요. 마기에 물들고도 살아남았으니, 오히려 감사해야죠.”
수호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윌슨에게도 마기에 물들고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드래곤 아닌가.
자라는 동안 지성이 회복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스템의 도움으로 상태가 나아질 수도 있고.’
발룡이가 사냥을 통해 성장하듯, 저 드래곤도 어쩌면 시스템의 도움으로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용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석비룡이 물었다.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하양이는 당연히 본좌가 키운다! 수호, 어서 저 괴상한 영감에게서 하양이를 받아 오거라. 어서!』
그래, 네가 책임져라.
발룡이에게 눈빛으로 이야기한 수호가 석비룡에게 말했다.
“이쪽에서 어떻게든 키워 보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데리고 가게.”
수호가 차원문 너머로 손을 뻗어 드래곤을 데리고 왔다.
그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 인해 【???】가 ──── 적용됩니다.]
[비정상적인 ─────입니다.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하양이의 ────가 임시로 ────됩니다.]
[교류 등급을 높여 ────를 ───할 수 있습니다.]
* * *
대롱대롱.
드래곤이 수호의 손에 목덜미를 쥐인 채 매달려 있다.
발룡이의 반 정도 되는 작은 크기.
마기가 빠지면서 변한 상아색 피부.
게다가 지성을 반쯤 잃어버린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순진무구하게 빛난다.
‘인형 같구만.’
드래곤은 귀여웠다.
발룡이를 처음 끄집어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나저나 냉동실에서 꺼냈을 때는 시스템의 반응이 없더니. 역시 마기에 물든 상태여서 그랬던 모양이야.’
마물과 같은 상태였기에, 【???】 스킬이 적용되지 않았던 모양.
지금은 【???】에 의해 페널티를 받고, 교류 대상으로 등록되었다.
『하양이』
- 소속 차원 : ESKHJ-0702L
- 구성원 수 : 1
- 만족도 : 50/100
*【???】의 대상입니다. 차원 여행자를 공격하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교류 등급이 낮은 상태에서 【???】하여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대상의 외형이 변화합니다.
┗대상의 능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대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소속 차원에 귀환할 수 없습니다.
차원 패널에는 발룡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름은 하양이.
발룡이가 지은 것이다.
‘하양이라……. 원래 이름이 없었던 건가?’
어쩌면 이름을 짓기도 전에 종복의 수중에 떨어졌을 지도…….할짝할짝-
생각에 잠겼던 수호는 묘한 감각에 눈을 돌렸다.
하양이가 수호의 손을 핥고 있었다.
“아…….”
수호가 목덜미를 쥔 손을 움직여 하양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 본좌도 한 번만 안아 보자.』
“그 짧은 팔로 어떻게 안으려고?”
발룡이가 하양이보다 크지만 기껏해야 약간이고.
안아 들만 한 차이는 아니다.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펑-
발룡이가 냉큼 장롱 사이즈로 변신했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커지고 그래?”
『어서!』
“그래, 안아라, 안아.”
수호가 하양이를 건넸다.
발룡이가 두툼한 손으로 하양이를 안아 들었다.
버둥버둥.
한데 하양이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다.
『오- 역시 이 오빠를 좋아하는구나. 수호 따위 보다는 위대한 본좌가 당연히 좋겠지. 크큭-』
아닌 것 같은데.
눈에 뭐라도 씌었나?
수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꽈득-
하양이가 발룡이의 손을 물었다.
『악- 오, 오빠가 너무 좋다고 깨물어서는 안 되느니라.』
발룡이가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다.
하양이가 발룡이의 손을 뿌리치고 수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너를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그럴 리 없다. 본좌를 안 좋아하는 드래곤이 있을 리가… 게다가 본좌가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너 하양이한테 브레스 쐈잖아. 그래서 싫어하는 거 아닐까?”
『헉- 아니다! 너는 비도를 던졌지 않느냐!』
하긴 차원문 너머에서 망치로 후려치기도 했다.
“그럼 뭐, 그냥 네가 싫은가 보지.”
『그럴 리 없다!』
한동안 끙끙거리던 발룡이가 생각을 쥐어짜 냈다.
『어쩌면 위엄 넘치는 본좌의 모습이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어린 하양이에게는 위대한 본좌보다는 곰 인형 수준인 네가 편할지도 모를 일이지.』
“뭐래?”
『그렇다면 다 방법이 있느니라. 크큭-』
발룡이가 음흉하게 웃었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발룡이의 몸에서 한 가닥 마력이 움직였다.
펑-!
발룡이의 모습이 다시 변했다.
소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삐쭉한 머리와 반항적인 눈빛이 인상적인 남자아이였다.
수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폴리모프?”
『크큭- 그렇다. 이번에 마력이 회복되면서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게 되었느니라.』
“…잘됐네.”
발룡이가 손을 내밀었다.
『하양이를 다오. 본좌가 하찮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니라.』
원래부터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수호는 말을 삼키고 하양이를 건넸다.
꽈득-
『악- 어, 어째서!?』
“노력하다 보면 좋아질 날도 오지 않겠니?”
『말도 안 되느니라. 어째서 위대한 본좌보다 수호 따위를 좋아하는 거지?』
이 자식이 아까 전부터 자꾸 ‘따위’라니.
“크큭- 하양이는 이 몸을 택했느니라. 질척거리지 말고 비키거라.”
말로 본때를 보여준 수호는 좌절한 발룡이를 두고 소파로 향했다.
하양이가 수호의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반려동물 입양한 기분이구만.’
스슥.
수호가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양이가 수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발룡이가 폴리모프 하는 바람에 사람이 늘어난 느낌도 들고.’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 수호,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군!”
“응, 사정이 생겨서 좀 빨리 돌아왔어. 공간이동 비슷한 방법으로 움직이게 되었… 헉! 누, 누구?”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수호가 깜짝 놀라 말을 멈추었다.
시선의 끝.
웬 금발 미남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108화 보법步法(1)
“나야, 친구. 설마 진짜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금발 미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호들갑을 떤다.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몸을 빨리 완성했네. 축하해, 윌슨.”
“하하, 역시 내 친구! 알아볼 줄 알았어.”
“당연하지. 2층에서 내려올 때부터, 눈치챘는걸. 근데 오래 걸릴 거라더니, 빨리 완성됐네?”
“일단 겉모습만 먼저 만든 거야. 생각 중인 기능을 다 채워 넣으려면 아직 멀었어. 근데 너도 일찍 돌아왔네? 아무리 빨라도 닷새라더니, 드워프 쪽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나 봐?”
윌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수호가 드워프를 구하며 겪은 일을 말해 주었다.
윌슨이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나 빌어먹을 마족 놈들이 문제야! 종복에게 마물을 세뇌하는 능력을 주다니, 하필 까다로운 놈이 걸렸었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수호.”
“고마워. 종복은 어찌어찌 처치했는데, 마족이라도 나타날까 봐 걱정이야.”
한동안 마족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 뒤, 수호가 윌슨에게 질문했다.
“윌슨, 혹시 신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신? 우리 세상에도 종교가 있긴 했지만, 신이 나타난 적은 없어. 지구와 비슷했지.”
“역시 그랬구나. 이번에 내가 드워프 세상에서 신을 만났거든. 거긴 신이 진짜로 있더라고.”
“헉, 정말? 어땠어? 막 신성스러움이 느껴지고 그래?”
“잘 모르겠어. 뭘 느끼기도 전에 대화가 끝나 버렸거든. 한마디 말만 남기고 가 버리더라고. 궤를 찾으라나?”
수호가 망치와 모루의 신과 나눴던 짧은 대화를 전했다.
“궤? 이름을 보니, 뭔가를 담는 물건 같네. 신의 말이라면, 그것도 마족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드워프의 신이 말했다면, 마족과의 싸움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아닐까?”
“아마도? 근데 단서가 없어서, 그냥 기억만 해 두고 있어.”
“너라면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낼 거야. 우주는 널 중심으로 돈다고, 친구!”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딘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웃은 윌슨이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너는 마족의 손에서 우주를 구해 내는 주인공. 나는 주인공을 돕는 친구. 나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마족 놈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거든. 그러려면 한 번 실패한 나보다는 네가 주인공인 편이 나을 거야. 하하.”
“으음…….”
심정을 이해하기에 수호는 윌슨의 말이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괜히 심각한 이야기를 했나? 어쨌든 새 식구도 들어왔으니, 오늘을 파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윌슨이 수호에게 안겨 있는 하양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럴까? 근데 얘가 뭘 먹으려나? 아니, 그전에 너는? 음식은 먹을 수 있는 거야?”
“당연하다네, 친구. 이 몸은 이제 먹을 뿐 아니라, 싸기도 한다네.”
“아…….”
“물론,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친구와의 파티라면 마다할 필요가 없지!”
“좋아. 그럼 내가 쏠게. 뭐 먹을까?”
“그건 발룡이 님 전공 아닌가? 근데 왜 안 보이지?”
“발룡이? 방에 있을걸. 좀 좌절했거든.”
“좌절?”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하양이가 녀석을 싫어하더라고.”
“으음, 나도 싫어하려나?”
윌슨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파닥.
하양이가 날아올라 윌슨의 손에 올라섰다.
“오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이름이 하양이라고? 우리 집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것 같군.”
“응, 보고만 있어도 즐겁다니까.”
고개를 끄덕인 윌슨이 하양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때 저편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럴 수가. 윌슨, 너마저! 크흑-』
파닥파닥-
날갯짓 소리가 멀어져갔다.
“발룡아, 어디가? 저녁 먹자. 돌아와!”
수호는 한참이나 발룡이를 달래야 했다.
* * *
다음 날 새벽, 비룡객잔 뒤뜰.
투웅-
교묘하게 움직이는 석비룡의 손바닥에 거인의 격노가 튕겨 나갔다.
자세히 보면, 손에 직접 닿기도 전에 미끄러지듯 망치의 방향이 비틀리는 것이 보인다.
손을 감싼 내공이 만들어 내는 광경이었다.
‘제대로 한번 부딪히기라도 해 보자.’
수호가 이를 악물고 망치를 휘둘렀다.
투웅- 퉁-
연이은 공격 실패.
전력을 기울인 공격조차 석비룡의 손바닥에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무기에 내공을 싣게.”
석비룡의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근육을 쥐어짜 전력을 발휘하던 수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내공… 마력. 마력을 싣는다. 마력을 담는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코자크가 발한 ‘세뇌’의 권능을 막아 냈던 순간.
그때는 수호의 마력이 저절로 움직여 손에 막을 만들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묘한 감각이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내공을 담는다. 강하게. 손바닥을 맞춘다.’
수호가 ‘그 순간’을 강하게 상상하며 망치를 휘둘렀다.
우우웅-
몸속에서 【차원 호신무】의 흐름에 맞춰 회전하던 마력이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담겨라!’
손끝에 다다른 마력이 수호의 강한 염원에 반응.
[거인의 격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과 망치 사이에서 울린 소리.
‘호오, 벌써?’
석비룡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수호는 자신이 한 일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계속!”
석비룡이 내공을 담아 일갈했다.
정신이 번쩍 든 수호가 망치를 휘두른다.
쾅- 쾅- 쾅-
연달아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망치에 지속적으로 내공이 담기고 있다는 증거.
“더! 전력을 다해서!”
석비룡이 수호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쾅- 쾅- 콰아아앙-!
비룡객잔 뒤뜰에 폭음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헉- 헉-”
수호가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러면서도 망치를 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 이제 되었네.”
“아…….”
석비룡의 목소리에 수호의 손이 멈췄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공이 다했어. 자칫 몸을 상할 수 있으니, 휴식을 취하게.”
“알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자리에 앉은 수호는 깜짝 놀랐다.
진짜로 마력이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스킬을 쓰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마력이 다 소모됐어.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각성자도 마력을 움직일 수는 있다.
강하게 집중하여 힘을 조금 더 낸다든가, 스킬의 위력을 미세하게 강화한다든가.
제한적이지만 그런 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스킬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력을 고갈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위력도 스킬 못지않아.’
직접 망치를 휘둘렀던 수호는 확신했다.
방금 거인의 격노가 발휘한 파괴력은 웬만한 스킬보다 위였다.
【5연격】이면 모를까, 【화염 강격】보다는 확실히 강했다.
‘그냥 근력을 쥐어짜 휘두른 것과는 천양지차였어.’
기쁨과 동시에 얼떨떨하기까지 한 기분.
‘시스템의 보조를 받지 않고도 진짜로 힘을 발휘할 수가 있구나.’
석비룡이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인정하기 힘들었던 진실.
수호는 직접 체감한 후에야 그것을 자인했다.
“허허, 이거 꼼짝없이 선물을 줘야 하겠군.”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석비룡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전, 대련 중에 했던 약속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받은 것만 해도 차고 넘쳐서 다 수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과가 있었지만, 그것도 선배님이 떠먹여 주신 거나 다름없고요. 하하.”
수호가 손사래 쳤다.
【차원 호신무】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며, 매일 치르는 대련은 보물과 다름없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도 힘을 쓸 수 있다는 것마저 깨닫게 해 주었으니, 받은 게 많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일세.”
석비룡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때때로 보여주는 고수의 기세가 언뜻 드러나자 수호가 대번에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뭐 저렇게까지 준다는데, 계속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근데 도대체 뭘 주려는 걸까?
객잔에 딱히 대단한 물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궁금해하고 있으려니, 석비룡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서 한 줄기 기운이 뻗어 나와 땅으로 향했다.
푸푸푸푸푹.
땅이 파였다.
‘발자국?’
석비룡이 무공으로 바닥에 새겨 놓은 것은 발자국이었다. 수호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발자국.
“내공이 회복되면 순서에 따라 걷게. 무기에 내공을 담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발에 내공을 담아야 하네.”
“순서라면… 아!”
발자국에는 각각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발자국 깊이가 깊은 것은 강하게, 얕은 것은 그만큼 약하게 발을 구르면 되네.”
강하고 약하게.
그저 몸에 힘을 주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마 마력을 몸에 싣는 정도를 말함이리라.
‘성과를 얻어야 선물을 주신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마력을 움직여 몸에 담을 수 없다면, 애초에 전할 수 없는 선물인 것이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 자네가 열심히 한 덕분이지. 좀 더 쉬고, 내공이 회복되면 움직이게.”
“예.”
잠시 후.
내공이 회복된 수호가 발자국을 따라 훈련을 시작했다.
“집중! 의념을 잃으면 힘이 담기지 않아!”
“예!”
“느려! 더 빠르게!”
“예!”
“더 빨리! 몸에 힘이 남아도는데, 어째서 그것밖에 담지 못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수호의 몸이 점차 가속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바바바바바밧-
수호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쫓기도 힘든 속도.
연신 수호를 몰아붙이던 석비룡이 입을 다물었다.
‘또 무아지경에 빠졌군. 허허.’
석비룡은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말년에 얻은 후배의 재능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거로 생각했거늘. 그새 성취를 얻더니, 이제 보법步法까지 단숨에 익혀 내는군.’
수호의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기에 발자국 깊이를 파악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발자국 깊이에 딱 맞춰 몸에 내공을 실을 수 있을 줄은 석비룡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불과 몇 분 만에!
‘이제 막 무공에 입문했다고는 믿지 못할 움직임이야.’
무림 역사상 누구보다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자신하는 석비룡이다.
그럼에도 수호의 변화는 믿기 힘들었다.
‘밑천이 바닥나지 않으려면, 나도 가르칠 것을 부지런히 준비해야겠어. 허허.’
각성자인 수호에게 가르칠 무공은 따로 준비해야 한다.
은퇴 후 여유롭던 삶이 분주해지게 생겼음에도, 석비룡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그 무렵, 수호네 가게 안.
“수호가 늦는걸?”
묵은 밤차를 즐기던 윌슨이 벽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아지경에 빠져 버린 수호의 아침 수련이 평소보다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 열 시간이 다 되었는데, 흐음.”
잠시 고민하던 윌슨이 찻잔을 놓고 일어섰다.
“사장님이 바쁘시니, 종업원이 대신 준비해 볼까? 하하.”
뭐가 재밌는지 방긋 웃은 윌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열장에 빠진 물건을 채우고 가게 안팎을 비질.
쇼윈도도 마른 헝겊으로 꼼꼼히 닦았다.
지구인으로서 첫 직장(?)이기 때문일까?
실제로 취업한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사장에게 허락 맡지도 않았지만, 윌슨은 신나는 기분으로 영업을 준비해 나갔다.
“서비스로 내놓을 활력수도 빼먹으면 안 되지. 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영업을 준비하는 윌슨.
그가 막 준비를 마쳤을 때쯤 오픈 시간이 되었다.
“자, 종업원 윌슨의 첫 손님은 누가 되시려나. 하하.”
윌슨이 가게 유리문에 걸린 푯말을 ‘영업 중’으로 뒤집었을 때.
딸랑-
곧바로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긴 남자가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수호 아이템입니다.”
윌슨이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남자의 눈이 윌슨의 얼굴에 꽂혔다.
“…혹시 원수호 사장님 되십니까?”
“저는 종업원이고요, 사장님은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바쁘시면 제가 사장님께 말씀을 전해드릴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남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품에 넣었다.
“저는 미야베 게이고라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나왔고요. 원수호 헌터님께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오실 때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만.”
남자가 품에서 꺼낸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109화 보법步法(2)
수호의 발이 지면을 박찬다.
고무줄로 당긴 것처럼.
공간을 접듯.
수호의 몸이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빠르게 미끄러진다.
스슷-
그럼에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스슷-
스스스슷-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가 멈춰 섰다.
“후우…….”
긴 숨을 토해 낸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고유 스킬 【차원보次元步】를 획득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또 고유 스킬을 얻다니. 이렇게 쉽게…….’
고유 스킬은 해당 클래스만이 얻는, 말 그대로 고유의 기술.
절대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차원 호신무】를 얻었던 과정이 상당히 길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정말 석비룡의 표현대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차원보次元步】
- 지극히 높은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 차원 여행자의 몸에 맞춰 고안한 무공. 마력을 이용해 차원 여행자의 이동을 은밀하고 빠르게 만든다.
- 이동 속도 30% 증가.
- 이동 시 소음 감소.
‘아, 대단해. 역시……!’
수호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그것은 시스템에 적힌 【차원보】의 성능 때문이 아니었다.
‘시스템에 적힌 내용이 전부가 아니야.’
시스템 설명에 표시된 성능도 몹시 훌륭하다.
하지만 【차원보】에는 숨겨진 성능이 더 있었다.
‘단지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야.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떤 동작이 회피에 가장 적합한지 몸에 새겨 놓았어.’
석비룡이 바닥에 남긴 발자국은 편하게 따라 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힘껏 점프해야 했고, 어떨 때는 안간힘을 써서 몸을 뒤틀어야 했다.
그런 과정이 몸에 익자 수호는 깨달았다.
‘발자국 사이에서 취한 동작이 모두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는 회피 동작이었던 거야.’
수호의 시선이 석비룡을 찾았다.
놀라움과 감사가 담겼다.
한데 감사의 인사를 건넬 틈이 없었다.
후웅-
강한 기세를 담은 주먹이 날아든다.
노란 강기가 주먹을 감싸고 있다.
속도도 어찌나 빠른지, 수호의 감각으로도 완벽히 포착이 안 되었다.
“헛!”
한데 경탄성을 내는 순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차원 호신무】의 흐름에 따라 몸속을 돌던 마력이 의식하기도 전에 발바닥으로 향했고, 【차원보】의 수많은 동작 중 하나가 발휘됐다.
수호의 몸이 접히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스슷-
수호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안착하고 난 뒤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군. 가르친 보람이 있어.”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석비룡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조금 전, 석비룡의 주먹은 웬만한 고수도 피하기 힘든 수준.
그것을 방금 배운 무공으로 완벽히 피했으니, 기껍지 않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물론, 수호도 기껍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
“아니야. 자네는 내 두 번째 삶을 평화로이 만들어 주지 않았나?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네.”
게다가 재능 넘치는 후배를 가르치는 것 또한 두 번째 삶의 큰 즐거움이지.
석비룡은 뒷말을 삼켰다.
혹여 수호가 자만할까 하여서였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는 생각 또한 동시에 들었다.
“선배님께서 마다하시니, 인사는 그만하겠습니다.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흑주나 넉넉히 가져다주게. 성주에게 보내야 하는데, 손님들도 빼놓지 않고 주문하는 바람에 곤란하네. 허허”
“예, 내일까지 창고 가득 채워 놓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석비룡이 손을 흔들었다.
“아침 수련은 끝났으니 가 보게. 나도 가게를 열어야 하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선배님.”
인사를 난긴 수호가 차원문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비룡이 나직이 읊조렸다.
“정말 그걸 몇 시간 만에 익힐 줄이야.”
무공과 관련해 놀란 일이 얼마 만이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란 소리.
석비룡이 다시 한번 읊조렸다.
“진정으로 신기한 인연이구나. 허허.”
* * *
지구로 건너온 수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시간이 벌써 저렇게 됐어?”
차원보를 익히느라 무아지경에 빠진 사이, 흘러간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가게 오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서두르자.”
눈 깜빡할 사이, 샤워 및 환복을 마친 수호가 가게로 나섰다.
한데 예상 못 한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어? 문을 열었어? 물건도 다 준비되어 있잖아!’
가게가 열려 있고, 손님 몇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게다가 어제 팔린 후 비어 있던 자리에 물건이 들어찼다.
수호의 의문은 머잖아 풀렸다.
“너무 놀라지 말라고, 친구. 자네가 바쁜 것 같아서, 가게는 내가 열었어. 하하.”
금발 미남, 윌슨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윌슨! 네 일도 바쁠 텐데…….”
“안 바빠. 나머지는 설비가 알아서 한다네. 한참에 다 할 수 없는 일이라, 천천히 하나씩 해나 갈 거라고 전에 말했잖아.”
“그랬었지. 어쨌든 고마워.”
안 그래도 가게 문 닫는 경우가 잦아서, 헌터 앱에 불평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가게는 내게 맡겨. 하하.”
환하게 웃는 윌슨.
재밌게도 그 모습에 마주 웃은 것이 수호만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여자 손님들이 많다 했더니… 설마 윌슨 때문이었어?’
가게에 여성 손님들이 윌슨의 얼굴을 보며 따라 웃고 있었던 것이다.
수호가 실소를 터트리고 있을 때, 윌슨의 말이 이어졌다.
“아참, 누가 찾아왔어.”
“찾아와? 나를?”
“응, 널 꼭 만나고 가겠대서,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이런 사람이라네.”
윌슨이 명함을 건넸다.
한글과 일어가 병기된 명함이었다.
[아키라 길드, 대외업무팀장. 미야베 게이고]
‘아키라 길드?’
헌터 업계에 해박하지 않은 수호도 들어 본 이름이다.
일본 최대 길드의 이름이었으니까.
“여기서 날 찾아왔다고?”
“오픈 시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어.”
“음, 알았어.”
수호는 휴게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30대 중반의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원수호입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안녕하십니까. 아키라 길드에서 온 미야베 게이고라고 합니다. 미야베라고 불러 주십시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미야베의 인사를 받으며 수호가 자리에 앉았다.
미야베의 눈이 수호를 예리하게 훑었다.
“아키라 길드에서 저를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나요?”
“사업을 제안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에서 파는 불멸의 마체테란 무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품질이 몹시 훌륭하더군요. 그래서 저희 길드에 납품해 주실 수 있나 알아보러 왔습니다.”
이상한데?
미야베의 말을 듣자마자 수호는 의아함을 느꼈다.
‘마체테가 좋은 무기인 건 맞지만, 그게 한국까지 굳이 찾아와서 수입할 만한 물건은 아닐 텐데?’
한국보다 헌터의 수도 질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이다. 5성 던전도 이미 여럿 공략한 상태.
그런 일본 최대 길드인 아키라에서 굳이 마체테를?
의문은 일단 미뤄 두고, 수호가 미야베에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길드에 납품할 만큼 대량 생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지금도 예약 손님이 잔뜩 밀려 있는 상황이에요.”
“저희 쪽에서 훨씬 비싸게 팔아 드릴 수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손님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장사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미야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 건은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근데 드래곤의 주인이시라고 하던데, 드래곤은 보이지 않는군요?”
미리 조사하고 왔다는 말이지?
상왕련과 협회를 통해 수호의 소문이 퍼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늘 옆에 함께 있는 건 아니라서요. 그런데 그 질문도 업무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잠시 묘한 눈빛을 빛내던 미야베가 대답했다.
“사실 마체테 건은 부차적인 이유였습니다. 원수호 헌터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가 온 진짜 이유에 가깝습니다.”
“음, 일본까지 제 소문이 났던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한국에 업무차 들렀던 터에, 소문을 듣고 궁금하여 조금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헌터로서 솜씨도 대단할뿐더러 드래곤이라는 특별한 소환수도 부리시더군요. 게다가 훌륭한 아이템을 판매하고 계시기까지 하고요.”
“…….”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혹시 저희 아키라 길드와 업무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실 의향이 있으신지.”
업무적으로 긴밀한 관계라.
말을 복잡하게 하고 있지만, 결국 길드에 들어오라는 소리 같은데.
뭐, 아니라도 상관없고.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굳이 길드에 소속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길드 소속은 아니지만, 이미 협력 관계인 길드가 있기도 하고요.”
“상왕련과 가까운 사이라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저희 쪽은 상왕련 이상의 지원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무력 쪽으로도 말씀이지요.”
“괜찮습니다. 딱히 변화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야베가 단념했다.
생각보다 끈질기지 않다.
“혹시 하실 말씀이 남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원수호 헌터님. 또 뵙지요.”
미야베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가세요.”
수호의 시선이 문을 나서는 미야베의 등을 좇았다.
또 뵙자는 말이 어쩐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묶고 있는 호텔 방에 도착한 미야베가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가 가고, 곧 통화가 연결됐다.
미야베의 입이 열렸다.
“만나 봤습니다, 회장님.”
수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야베가 고개를 숙였다.
“예. 예. 아닙니다. 드래곤은 보지 못했습니다.”
미야베는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로 통화를 이어 갔다.
“알겠습니다. 원수호 건은 계획의 시작과 함께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산을 불태우면 도마뱀도 죽는 법이지요.”
.
.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통화가 끝났다.
미야베가 눈빛을 스산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제 곧 시작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 * *
찜찜한 만남을 끝낸 수호는 ‘공간 결계’ 너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화분을 들었다.
“덕분에 시간이 많이 남은 건 고마운데.”
가게는 윌슨이 보고 있다.
손님들은 의리 없게도 윌슨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
심지어 윌슨은 2층 공방 설비와 무선으로 연결된 터라, 가게와 설비를 동시에 운영할 수 있었다.
수호는 옳다구나 하고 소파에 앉았다.
화분에 마력을 주입하려던 것이다.
한데 평소 일하던 시간에 멍하니 있다 보니 느낌이 묘했다.
“꼭 백수라도 된 기분이구만.”
새벽에는 석비룡과 대련.
낮에는 가게 운영.
그리고 저녁에는 마력의 호수에서 【차원 호신무】를 수련하는 것이 수호의 일과다.
윌슨이 가게를 봐준 덕분에 낮 시간이 텅 비었다.
‘레벨 업이라도 하러 갈까?’
수호가 방 쪽을 고개를 돌렸다.
하양이를 돌보는 발룡이가 보였다.
정확히는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것에 가깝다.
『으악- 하양아, 깨물지 말거라. 아프지 않느냐.』
꼴을 보니 잘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안 가려고 하겠네.’
발룡이가 당장 사냥하러 갈 것 같지는 않다.
혼자 갈까?
잠시 고민하던 수호가 벌떡 일어섰다.
“아! 그걸 까먹고 있었구나.”
진즉 했어야 하는 일인데!
수호가 화분을 내려놓았다.
차원 보따리에서 장비를 꺼내 착용하면서, 차원문이 늘어선 벽 쪽으로 향했다.
“3단계 깨야지.”
수호가 시험의 거울 앞에 섰다.
* * *
『3단계를 시작합니다.』
『바알라흐의 종복, 데몬트리를 해치우세요.』
시험이 시작됐다.
저편에서 이번 단계의 적이 나타났다.
이미 한 번 싸웠고, 패배했던 적이다.
“한번 해보자 자식아.”
수호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검은색 나무 형태의 괴물.
그것이 데몬트리의 정체다.
“키키키키킥-”
수호가 다가가자, 데몬트리가 괴상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놈의 발아래에서 원형의 검은 기운이 땅을 따라 확 퍼졌다.
반경 100m는 족히 될 듯한 넓이였다.
온 콜로세움을 다 뒤덮은 탓에 피할 수 없었다.
‘쯧, 알고 당하는 거지만, 기분이 참 더럽단 말이지.’
추욱.
순식간에 몸이 무거워진다.
착용한 장비에 붙은 스탯이 적용되지 않는다.
아울러 장비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
▶비고
- 【상급 장비 무효화】 적용 중.
비고 항목에 새로운 내용이 떠올랐다.
검은 기운의 범위에 들어온, 적의 장비를 무효화하는 것이 데몬 트리의 권능.
안타깝지만 【상급 상태 이상 면역】으로도 방어되지 않았다.
‘뭐, 이제 상관없다.’
장비쯤 없어도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타탁-
수호가 데몬트리를 향해 달린다.
데몬트리의 가지가 움직인다.
새까만 나뭇잎이 수호를 향해 발사됐다.
파스스스스-
소나기처럼 시야 가득 쏟아지는 마기의 나뭇잎.
수호가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110화 보법步法(3)
이전에는 데몬 트리의 공격을 피하기 힘들었다.
헤이스트를 쓰고서야 마기로 된 나뭇잎을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는데, 그조차 사방팔방 몸을 날려야 가능했다.
결국, 헤이스트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수호는 도전을 포기했다.
‘이젠 달라.’
눈앞을 가득 메운 나뭇잎의 소나기를 보면서도 수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우웅-
몸속을 휘돌던 마력이 발바닥으로 향한다.
퉁- 수호가 바닥을 밀었다.
굳이 과하게 힘을 주지도 몸을 날리지도 않았다.
‘피한다.’
【차원 호신무】의 흐름에 따라 가속된 마력이 【차원보】의 형태로 발휘된다.
수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빠르고 유려한 움직임.
떨어지는 낙엽이 가을바람을 피하는 것처럼 수호의 몸이 데몬 트리의 나뭇잎 사이를 거닐었다.
프샤샤샤샤샤샷-
나뭇잎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역시! 될 줄 알았어.’
헤이스트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헤이스트를 썼던 저번 시도 때보다 훨씬 쉽다.
【차원보】의 위력이었다.
‘대단해.’
수호가 감탄했다.
차원보도, 차원보를 가능케 하는 차원 호신무도 진심으로 훌륭했다.
스슷.
그사이에도 수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데몬 트리 코앞. 손 뻗으면 닿을 거리.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적의 기술 때문에 그저 단단한 쇳덩어리 신세지만 상관없다.
‘강하게!’
수호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몸속을 휘돌던 마력이 팔로 향한다.
팔꿈치를 지나 손으로, 그리고 [거인의 격노]로 스며든다.
지이잉-
잔 떨림이 이는 순간, 거인의 격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코자크의 마기를 막을 때보다 훨씬 진한 푸른빛의 막.
그것이 망치 대가리를 두껍게 감쌌다.
‘부서져라!’
쏟아지는 나뭇잎을 피해 내며 수호가 망치를 휘둘렀다.
콰직-
데몬 트리의 기둥이 움푹 파여 나갔다.
스사사사사샤-
데몬 트리가 발악하듯 나뭇잎을 쏟아 냈다.
수호가 여유롭게 발을 움직였다.
데몬 트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달렸다.
【차원보】는 이번에도 쉽사리 나뭇잎 공격을 피해 냈다.
훤히 드러난 데몬 트리의 옆구리.
다시 한번 망치가 파고들었다.
콰직-
“끄르아아아아아-”
데몬 트리가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기가 확 터져 나온다 싶더니, 바닥에서 뿌리가 창처럼 솟아오른다.
나뭇잎도 여전히 떨어져 내린다.
‘아래위로 난리구만.’
수호는 상하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공격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스슷.
수호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밟는 순간.
나뭇잎도 뿌리도 목표를 잃고 허공을 관통했다.
수호가 다시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만 쓰러져라.’
맹렬하게 가속한 몸속 마력이 망치 손잡이로 빨려든다.
화악-
주변을 밝히는 푸른빛이 망치에서 퍼져나오는 순간 수호가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스킬이 아님에도 망치는 강력한 기세로 데몬 트리를 후려쳤다.
그 결과.
저저적-
중동이 뚝 부러진 데몬 트리가 쓰러졌다.
곧이어 데몬 트리의 사체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3단계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목소리가 싸움의 끝을 알렸다.
* * *
시험이 끝나자 콜로세움 한편에서 상자가 나타났다.
“이번엔 뭘 주려나?”
수호가 상자를 열었다.
예의 석판이 보인다.
마족과 마물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석판의 내용을 기억해둔 수호는 상자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3단계 돌파의 진정한 보상이 놓여 있었다.
“스킬 룬이 아니네?”
손가락만 한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
수호가 손을 뻗어 병을 집어 들었다.
[타니아의 눈물]
-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정족 여왕 타니아가 흘린 눈물이다. 마력의 정수가 담겨 있다. 복용자의 마력을 완전히 회복시키고, 각종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킨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최상급 마력 증폭】
- 【상급 근력 증폭】
- 【상급 민첩 증폭】
- 【상급 체력 증폭】
- 소모 아이템
“영웅 등급 소모 아이템?!”
궁금증이 인 수호가 서둘러 아이템의 세부 성능을 확인했다.
【최상급 마력 증폭】
- 복용자의 최대 마력 및 마력 회복률을 400% 증가시킨다. 지속 시간 60분.
【상급 근력 증폭】
- 복용자의 근력을 100% 증가시킨다. 지속 시간 60분.
.
.
.
옵션을 다 확인한 수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어마어마하네.”
마력은 5배로, 근력, 민첩, 체력은 2배로 올려 주는 물약이다.
마력을 소모한 만큼 더 커지고, 더 강해지는 【거대화】와 찰떡궁합.
게다가 소모 아이템 치고 지속 시간도 제법 긴 편이었다.
『도전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거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선택을 위한 홀로그램도 떠올랐다.
“당연히 도전해야지.”
체력이나 마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았다.
재사용 시간에 걸린 스킬도 없다.
도전하지 않을 리 만무.
수호가 칼이 그려진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4단계부터는 난이도가 급증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흠, 난이도는 매번 급증했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한 번만에 두 단계 이상을 연달아 돌파한 적이 없다.
그만큼 단계별 난이도 증가가 컸다.
도전자에게 일부러 카운터라도 날리듯 까다로운 상대가 나오기도 했고.
수호는 잠시 고민했다.
하나 선택이 바뀌지는 않았다.
“안 되면 도망치는 거지.”
다른 도전자들과는 달리, 언제든 지구로 탈출할 수 있는 수호였다.
도전을 미룰 필요가 없었다.
『4단계를 시작합니다.』
수호의 손이 홀로그램을 터치하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덜덜-
뒤이어 콜로세움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단지 떨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저릿한 마기가 온 콜로세움을 뒤덮었다.
‘이게 무슨……?’
놀란 수호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족 라코이 디 아벨을 처치하십시오.』
“마족!”
느껴지는 기운이 워낙 강력해서 혹시나 했더니 상대는 진짜로 마족이었다.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며,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쿠저저저적-
콜로세움 중앙 바닥이 갈라지며 거대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바위?’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한 보랏빛 바위.
그것에는 모아이 석상처럼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모아이의 것과는 달리 몹시 사악하게 생겼을 뿐.
번뜩.
석상이 눈을 떴다.
붉은 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눈동자가 희번덕 주위를 살핀다.
움직이던 시선이 수호에게 닿았다.
바위의 입이 열렸다.
“제물인가?”
듣는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로 사이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에서 풍기는 마기를 통해서 수호는 느꼈다.
‘쉬운 상대가 아니야.’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종복이 나오던 전 단계와 달리, 이번 상대는 마족.
힘의 차이가 나는 게 당연했다.
‘길게 끌면 안 돼.’
당장에 사생결단을 내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상대의 역량을 가늠해 보고, 안 되면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수호가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
‘근력 폭발!’
막 두 스킬을 썼을 때, 마족이 다시 말했다.
“제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지.”
말이 끝나는 순간.
마족의 눈에 번뜩였다.
번쩍-!
보랏빛 광선이 쏘아졌다.
수호가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광선이 빗나갔다.
광선에 맞은 콜로세움의 벽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뭐가 이렇게 빨……!’
번쩍-!
수호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발동된 【차원보】가 수호의 몸을 밀어낸다.
‘이건 어려워.’
다시 한번 광선을 피해 낸 뒤, 수호는 확신했다.
헤이스트나 차원보,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못 피했다.
게다가 눈으로 쏘는 광선 외에도 마족에게 다른 힘이 더 있을 터.
이대로는 승산이 희박하다.
[타니아의 눈물]을 마신 뒤, 거대화를 쓰고 덤벼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떨쳐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석비룡에게 배우면서 수호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굳이 귀한 소모 아이템까지 써 가며 무리할 필요가 없다.
“다음에 보자, 돌덩아.”
그때는 꼭 때려 부숴 주마.
결정을 내린 수호가 마족을 노려보며 차원 여행 스킬을 시전했다.
* * *
털썩.
수호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종복과는 차원이 다르구만.”
마족이라면 한번 만나 본 적이 있다.
윌슨의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마족.
놈은 발룡이와 수호의 연이은 공격에 소멸했다.
하지만 그때는 차원문을 사이에 둔 전투.
크기 왜곡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진짜 마족은 그 정도였구나.”
직접 맞닥뜨린 마족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
전투력 또한 예상을 초월했다.
방심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강한 적을 맞닥뜨렸음에도 수호의 얼굴에 절망은 없었다.
오히려 오기와 옅은 자신감조차 엿보였다.
“이길 수 있어.”
머잖아.
지금처럼 무공을 배우고 수련을 계속해 나간다면, 분명히 마족도 꺾을 수 있다.
수호는 확신했다.
“마력의 호수에라도 다녀올까?”
마족을 만났더니 수련의 열의가 더 샘솟는다.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한데 수호의 발길을 잡는 것이 있었다.
지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수호가 화면을 확인했다.
‘협회장님?’
헌터 협회장, 진무백의 번호였다.
무슨 일이지?
잠시 고민한 수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원수호 헌터, 진무백이네. 오랜만일세.”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자네 혹시 지금 바쁜가?”
“음, 급한 일은 없습니다만.”
“잘됐군. 잠깐만 기다리게.”
전화가 끊겼다.
수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봤다.
“뭐지?”
1분쯤 지났을 때였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수호 헌터, 안 바쁘다니 이야기 좀 하세나.”
전화기에서 듣던 목소리가 가게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 * *
가게 휴게실.
엘프에게 받은 묵은 밤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으며 수호가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진무백이 찻잔을 들었다.
“호오- 재밌는 차로군. 향도 구수하고.”
“우연히 얻었는데, 향이 좋아서 가끔 마시고 있습니다.”
“우연히 이런 차를 얻다니, 자네에게는 행운의 여신이라도 함께하는 것 같군. 껄껄. 앞으로 자네와 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런가요?”
“다음에도 맛있는 차를 얻어 마시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인사를 겸한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수호가 물었다.
“근데 어쩐 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가게가 협회와 이렇게 가까운데, 자네한테 오라 가라 하기가 미안해서 말일세. 신세 진 일도 있는 마당에.”
“신세라면……?”
“우리 애들이 그러는데, 자네 아니었으면 몰살당할 뻔했다더군. 찾아가서 뭐라도 주고 오라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던지. 성현이 그놈까지 그러니, 내가 안 찾아오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지난 의뢰 때 말씀이군요.”
“맞네, 자네 아니었다면 모두 개미 밥이 되었을 거라더군.”
“…….”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치사하기도 뭣했던 수호가 입을 다물었다.
진무백이 빙긋이 웃으며 품을 뒤졌다.
“요즘 상황이 상황이라, 협회 창고에 물건이 남아나질 않아. 그나마 쌓이는 게 재료 종류뿐인데, 전에 보니 자네한테 필요한 것 같아서 가지고 왔네.”
2차 격변이 시작된 후 던전 발생 빈도가 늘었다.
이레귤러 던전도 자주 발견된다.
그 탓에 장비나 소비 아이템의 소모량이 급증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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