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7
* * *
‘소라와 함께 오길 잘했네.’
수호가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소풍이라도 온 양,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온달소라가 보인다.
“핫- 죄, 죄송합니다. 위대한 분께서 수련하시는데, 제가 너무 방만한 태도로…….”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리는 온달소라.
수호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소라.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
“앗! 가, 감사합니다.”
수호의 말대로 온달소라는 몬스터 사냥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영령이 도움을 주는 거지만.’
타다다다닥-
멀리서 네발짐승 특유의 경쾌한 발소리가 들린다.
수호가 앉은 자세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높이가 쑥 올라간다.
다 자란 나무들이 발아래 잡초처럼 보인다.
수호가 【거대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령님이 돌아왔어요!”
온달소라가 외쳤다.
“컹컹-”
뒤이어 수풀 하이에나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부스스-
곧이어 수풀을 헤치고 영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편.
수십 마리의 수풀 하이에나가 영령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후딱 처리해 볼까.’
수호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마력을 반쯤 투자하여 【거대화】한 상태.
집채만 해진 [거인의 격노]가 목표를 겨눈다.
‘5연격!’
망치가 수풀 하이에나 무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아아앙-!
압도적인 충격이 지면을 강타한다.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숲이 덜덜 떨렸다.
땅과 망치 사이에 낀 하이에나는?
당연히 모조리 쥐포가 되었다.
[수풀 하이에나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수풀 하이에나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
.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수호가 시선을 내렸다.
한구석에 피해 있는 온달소라 옆, 곰 영령이 자리하고 있다.
‘영령이 효자구만. 몬스터 한번 기가 막히게 몰아오네.’
영령은 몹몰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속도도 빠르고 영혼이라 부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치면 사라질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를 수 있다.
‘거인의 격노 덕도 있고.’
【거대화】 덕분에 망치가 커진다.
【5연격】이 광역 마법처럼 넓은 범위를 타격한다.
덕분에 한 방이면 전투는 끝.
처치한 몬스터의 사체에서 마력을 빼앗는 【마력 흡수】 옵션도 도움이 됐다.
‘경험치 안 오를 때까지는 여기서 계속 사냥해야겠어.’
사냥은 완벽했다.
굳이 찾자면, 하이에나가 박살 나는 바람에 【상급 도축】을 쓸 일이 없다는 정도가 아쉬울 뿐.
“영령이시여, 다시 다녀오십시오.”
온달소라가 몹몰이를 지시하는 소리를 들으며 수호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소, 송구하옵니다.”
“아니야, 소라 잘못이 아니잖아.”
“영령이 몬스터를 더 몰아오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옵니다.”
“아니라니까.”
몬스터 씨가 말라서 그래.
‘그새 레벨을 2개나 올렸으니, 씨가 마를 만도 하지.’
몇 시간도 안 되어 두 번이나 레벨 업했다.
그 탓에 주변에 하이에나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놀면서 마력을 올린 발룡이가 모처럼 탐색 마법을 썼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상류로 더 올라가 봐야겠어.”
“예, 그럼 영령에 타시… 지는 못하시겠군요. 죄, 죄송합니다.”
“내가 커져서 그런 걸 왜 네가 죄송해. 너라도 타.”
“위대한 분께서도 걷는데 제가 어찌…….”
“난 커서 그냥 걸어도 빨라.”
“그래도…….”
“어서.”
“핫- 아, 알겠사옵니다.”
수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온달소라가 영령의 등에 올랐다.
일행은 상류로 나아갔다.
드문드문 몬스터를 마주쳤지만, 몰이할 만큼 무리 지어 나오지는 않았다.
‘흐음, 한번 몰이 사냥을 했더니, 그냥 잡기는 영 아쉽네.’
더 올라가 보자.
수호는 계속 상류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룡이가 말했다.
『호오- 상당한 기운이군.』
“그러게. 신기할 정도로 진한 마력이 느껴져.”
수호도 막 변화를 감지한 터.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수호가 되물었다.
“위험할까?”
『몬스터는 없다. 살아 있는 것이 발하는 기운이 아니니라.』
“그럼 가 보자.”
위험하면 지구로 돌아가면 그만.
온달소라의 안위가 문제지만, 그 또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소라, 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제발 저를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위험할지도 몰라서 그래. 별일 없으면 부를게.”
“하오나…….”
“기다려!”
“네엣!”
짧은 실랑이가 오간 후, 수호는 소라를 떼 놓고 이동했다.
몇 분쯤 걸었다.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수로구나.』
연못이라기엔 큰.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물웅덩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력의 호수.”
[황금 잉어]의 설명에 나온 문구를 중얼거린 수호가 조심스레 호숫가로 다가갔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고.’
감각을 끌어 올려 살폈지만 주변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물에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건가?’
수호가 손 바가지로 물을 퍼 올렸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특수효과 【마력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물에 닿는 순간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수호는 상태창의 비고 항목을 열어 특수 효과를 확인했다.
【마력의 가호】
- 마력 회복률 500% 증가.
놀라운 효과였다.
“이거 대박인… 어?”
[특수효과 【마력의 가호】가 해제됩니다.]
수호가 감탄하며 몸을 일으킨 순간, 특수효과가 사라졌다.
수호의 상태를 눈치챈 발룡이가 말했다.
『물이 아니라 땅, 아니, 호수 자체에서 기운이 흘러나오느니라.』
수호가 한 걸음 걸었다.
찰방-
발이 호수에 닿았다.
[특수효과 【마력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게, 호수에 닿아야 적용되네.”
발룡이의 말대로, 특수효과는 물이 아니라 호수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이상하군. 보통 기운의 근원이 되는 물질이 존재하기 마련이거늘…….』
발룡이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녀석의 능력으로도 확실히 감지가 안 되는 듯했다.
“혹시 물속에 뭔가 있는 것 아닐까?”
물 밖에 특별한 점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느니라, 흥!』
발룡이가 콧김을 뿜으며 대답했다.
호수의 신비를 밝혀내지 못한 점이 마뜩잖은 모양.
수호는 발룡이를 내버려 둔 채, 호수를 관찰했다.
‘발룡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데…….’
그럼 뭐지?
그냥 이곳의 땅 자체가 마력을 띠고 있는 걸까.
아니면 따로 특별한 이유가 있으려나?
고민하던 수호는 곧 생각을 접었다.
“꼭 정체를 파헤칠 필요야 없지.”
맛있는 건 먹으면 되고, 좋은 건 쓰면 된다.
꼭 왜 맛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필요는 없다.
『무슨 말이냐?』
“여기 말이야. 완전히 최적의 장소 같거든.”
『최적?』
“그래. 수련하기 최적의 장소.”
* * *
수호가 호수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달소라도 옆에 데려다 놓았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나이다. 위대한 분께서는 편히 수련하시옵소서.”
“괜히 무리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수호가 눈을 감았다.
석비룡에게 전수받은 대로, 마력이 수호의 몸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잖아 수호는 경악했다.
‘미친! 마력 흐름이 몇 배는 빨라!’
마력 회복률이 증가한 것만이 아니었다.
몸속을 흐르는 마력의 기세가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그럼에도 제어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예상대로 이곳은 정말 수련의 명당이 맞았다.
‘아…….’
몸속을 따라 거세게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느끼며, 수호는 차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가 눈을 떴다.
번쩍!
샛노란 안광眼光이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어슴푸레한 호숫가가 일순 밝아질 정도.
“아앗- 위대한 분이시여, 깨어나셨군요?”
온달소라가 수호에게 달려왔다.
“별일 없었어?”
“네, 제가 눈을 부릅뜨고 지켰나이다. 결코 어떤 이변도 없었나이다!”
그렇게 결연한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는데.
“고마워.”
“아, 아니옵니다.”
파르르.
온달소라가 환하게 웃으며 솜뭉치 꼬리를 떨었다.
실소를 터트린 수호는 온달소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유 스킬 【차원 호신무(하급)】가 【차원 호신무(일반)】로 변화합니다.]
조금 전의 수련으로 【차원 호신무】가 한 단계 성장했다.
‘초반에 성장이 빠를 거라더니, 진짜였어.’
석비룡이 말했다.
초기 단계에는 효과가 빠를 테니, 수련에 집중하라고.
게다가 ‘마력의 호수’의 특수효과까지 더해지자, 단숨에 한 단계를 뛰어오른 것이다.
수호는 서둘러 스킬의 변화를 확인했다.
【차원 호신무(일반)】
- 지극히 높은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 차원 여행자의 몸에 맞춰 고안한 미완의 무공. 이제 막 몸속에 마력의 흐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수련 및 차원 여행자의 성장 방향에 따라, 무공 또한 그 특색을 발현하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 단계가 상승할수록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다.
- 모든 스탯 40% 증가(장비 스탯 제외).
▶ 【대기 시간 초기화】 : 최대 마력의 1할을 소비하여, 스킬 하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초기화, 곧바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하루에 1번 사용 가능.
수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스탯 증가에 새 기능까지!’
단계가 오르며 모든 스탯이 20% 더 증가했다.
새로운 기능도 생겼다.
【거대화】 등 재사용 시간이 긴 스킬과 궁합이 좋을 듯했다.
‘역시 무공을 배우길 잘했어.’
공들여 차원 임무를 수행하며, 석비룡에게 무공을 배운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흡족해하던 수호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근데 발룡이 녀석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진작에 배고프다고 툴툴거렸어야 하는데.
수호는 곧 발룡이를 발견했다.
‘물에 누워서 뭐 하는 거야?’
발룡이가 눈을 감고 호숫가에 누워있다.
“발룡아, 뭐 해?”
『수련 중이니라.』
웬 수련?
“그냥 누워 있는 것 같던데?”
『본좌는 너처럼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크큭- 가만히 있어도 위대한 드래곤 하트가 온 세상의 마력을 끌어들이기 때문이지.』
“설마 너도 호수에 들어가면 마력이 늘어나?”
『그렇다. 간질간질한 기분이니라.』
“간질간질? 아!”
수호는 발룡이가 간질간질하다고 했을 때 생긴 일을 기억했다.
‘저러고 얼마 안 있다가, 몸이 커졌었지?’
한 단계 성장할 조짐이 분명했다.
수호에게도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늘 얻는 게 많네.”
수호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다 좋은데, 밥은 먹고 다시 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래, 웬일로 끼니를 빼먹나 했다.
“알았어, 돌아가자.”
온달소라에게 귀환하자는 말을 하려던 수호가 멈췄다.
‘여긴 꾸준히 들러야겠지?’
수련의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한데 그러면 오가는 시간이 아깝다.
‘자주 올 거니까, 차원 시야를 저장하자.’
【차원 시야】가 성장하면서 차원당 한 군데의 장소를 더 지정할 수 있다.
수호는 수련을 위해 기꺼이 그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차원 시야!’
수호가 스킬을 시전해 시야를 지정했다.
한데 지정이 끝난 후, 수호는 뜻밖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야 범위가 맞닿았네.’
원래의 시야와 새로 지정한 시야의 범위 끝이 서로 닿았다.
바비의 집부터 마력의 호수까지.
수호가 그 경로의 모든 곳을 지구에서도 간섭할 수 있게 된 셈.
“소라, 영령 돌려보네.”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올 때 신세 졌으니, 갈 때는 내가 태워 줄게.”
“……?”
온달소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기다려.”
팟-
수호와 발룡이가 사라졌다.
곧이어 허공에서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수호가 온달소라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
.
.
“가, 감사하옵니다. 흣-”
바비의 둔덕 근처 강변.
바닥에 내려선 온달소라가 고개를 조아렸다.
“됐어, 갈 때는 소라가 영령을 태워 줬잖아.”
“그, 그래도 감사하옵니다. 가, 감히 위대한 분의 손으로 옮겨 주시다니.”
“됐다니까. 고생했으니 가서 푹 쉬어. 기도니 뭐니 하지 말고.”
“노력해 보겠사옵니다.”
그걸 노력씩이나 해야 되냐?
실소를 터트린 수호가 수트케이스 앞에서 물러났다.
“나도 좀 쉬어 볼까.”
수호가 나른한 표정으로 장비에 손을 가져갔다.
벗어서 차원 보따리에 넣어 두려는 생각이었다.
우뚝.
갑자기 수호의 손길이 멎었다.
- 거인님, 도와주십시오!
【차원 전음】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100화 신탁의 전사(1)
“와라아아아-!”
푸른 보석 드워프 족장 블톤이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츠파파파파파팟-
예기를 머금은 깃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블톤이 방패를 들어 깃털을 막아 냈다.
“블톤, 조금만 버티게!”
달콩이 외쳤다.
달콩의 활에 마력이 어리더니, 곧 화살이 발사되었다.
쎄에에엑-
붉은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갔다.
기어이 목표에 명중.
“끼아아아아아악!”
심장에 화살이 꽂힌 하피 퀸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블톤이 서둘러 내달렸다.
서걱.
목을 잘라 확인 사살까지 마쳤다.
“후욱- 후욱-”
블톤이 숨을 고르는 사이,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우두머리를 잃은 하피들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피 퀸이 죽었다. 나머지 하피가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라!”
달콩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명령을 들은 드워프들이 하피에게 달려들었다.
“막아라! 들러붙어!”
“날지 못하게 날개를 공격해!”
드워프 전사들이 하피의 발을 묶는 사이 궁수들이 화살을 쐈다.
“끼아악-”
“꺄아악-”
하피의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끝났군.”
블톤이 전투의 끝을 알렸다.
달콩이 다가왔다.
“고생했네, 블톤. 자네가 퀸을 붙잡은 덕에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어.”
“달콩 자네도 고생 많았네. 퀸을 잡은 화살은 정말 훌륭했네.”
두 드워프 족장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지난 며칠.
연이은 행군과 야영, 그리고 전투가 그들 사이에 끈끈한 전우애를 만들었다.
전투의 호흡도 일품.
손발이 척척 맞았다.
“족장님들, 하피 퀸에게서 이게 나왔습니다.”
한 드워프가 달콩과 블톤에게 다가왔다.
달콩이 드워프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아 들었다.
“마정석!”
“오- 퀸의 것이라 그런지, 기운이 제법 강하군.”
“이거 운이 좋군.”
“그러게 말이네. 며칠 새 마정석을 3개나 얻었으니, 으허허.”
“돌아가면 제법 쓸 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걸세.”
“거인님의 무기는 만들었으니, 다음번에는 뭘 만들지 같이 고민해 보세나.”
블톤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제안했다.
달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 아, 거인님이 배틀 웨건의 미사일을 사용하셨다지? 미사일을 다시 채워 넣는 것도 괜찮겠군.”
“그거 좋군. 이제 웬만한 장비로는 거인님께 도움이 되기 힘들 테니 말이네.”
두 족장이 수확물을 사용할 방법을 놓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때 한 드워프가 다가왔다.
“족장님,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두 족장은 드워프의 뒤를 따라나섰다.
전장의 끄트머리.
바닥에 금속 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건!”
금속을 본 블톤의 눈이 커졌다.
달콩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방패 조각이네. 둥근 방패 부족의 것이야.”
둥근 방패 드워프.
달콩과 블톤은 부서진 방패 조각에서 동족의 흔적을 발견했다.
“좀 더 살펴보세. 흔적을 더 찾을 수도 있으니.”
“그러세나.”
두 족장은 부족원들을 수습해 흔적을 추적해 나갔다.
“여기도 부서진 방패가 있습니다.”
“바위가 파였습니다. 도끼 자국입니다.”
“이건 오래된 핏자국 같습니다.”
속속 전투의 흔적이 발견됐다.
달콩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두 번째 목적도 달성한 모양이네.”
정찰대의 첫 번째 목적이 사냥이라면, 두 번째는 소식 없는 드워프 부족에 관한 조사였다.
“그런 것 같군. 흔적이 이어지니 계속 따라가 보세.”
두 족장이 부족원들을 이끌고 흔적을 쫓았다.
추적은 하루가 넘도록 계속됐다.
“이런, 뾰족 투구 부족의 투구네.”
“이쪽의 것은 각진 어깨 부족의 갑옷일세.”
흔적은 갈수록 다양해졌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은밀하게 이동한다.”
찜찜한 느낌이 든 달콩이 부족원들에게 지시했다.
드워프 정찰대가 조심스럽게 언덕을 올랐다.
머잖아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언덕 너머는 분지였다.
드워프들의 시선이 분지 아래로 향했다.
달콩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물!”
블톤이 눈을 치뜨며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좀 보게! 드워프야!”
“이럴 수가! 드워프들이 마물에 사로잡혔어.”
두 족장의 시선이 한참이나 분지 안을 오갔다.
어느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입이 열었다.
“우리끼리는 해결할 수 없네.”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즉시 도움을 요청할 수단이 있었다.
수호가 드워프 족장들을 【차원 전음】의 대상으로 지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 * *
“달콩 님, 왜 그러세요? 정찰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수호가 서둘러 대답했다.
“소식이 없던 드워프를 발견했는데, 마물 무리에 잡혀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발랑카 산맥 북쪽능선을 따라 내려가 사냥하던 중에 드워프의 흔적을 발견하여…….”
달콩이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수호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잠시 후, 설명이 끝났다.
수호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로잡힌 인원은 얼마나 되던가요?”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가 많다.
그만한 수를 잡아 뒀다면 상대의 전력 또한 만만치 않다는 뜻이 된다.
“제가 가겠습니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예, 정찰만 하겠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저희 드워프를 도와주십시오.”
“백 번이라도 도와드릴게요. 친구잖아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그분들을 구해 낸 뒤에 받을게요. 바로 출발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대화를 끝마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인질 구출】을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내용은 가는 길에 살펴도 될 터.
수호는 임무 확인조차 뒤로 미룬 채, 황급히 움직였다.
『저녁 먹기는 글렀구나.』
발룡이가 처량한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 * *
퉁박은 각진 어깨 드워프 족장의 동생이었다.
형을 제 손으로 죽이고, 마인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크흐흐- 진작에 이랬어야 해. 이렇게 좋은 것을.”
그동안 왜 열등한 드워프로 살았을까.
마인이 된 후 퉁박은 즐거웠다.
부럽던 족장의 자리도 하찮게 느껴졌다.
하등한 드워프 따위, 이제 먹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퉁박에게는 2가지 임무가 있었다.
첫 번째는 드워프 족장을 겁박해, 마인용 장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드워프 인질의 관리였다.
마물을 부려 드워프를 감시하고, 광산에서 노역을 시키는 것.
바로 지금 퉁박이 하려는 일이었다.
“크흐흐, 그럼 오늘도 즐겁게 일해 볼까?”
퉁박이 마인으로 변하며 커진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드워프를 부려 지은 나무집 밖.
급히 뚫은 광산이 보인다.
오크 마물 무리가 드워프를 감시하며 일을 시키고 있다.
짜악-
그때 소리가 들려왔다.
퉁박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광산 입구 바로 안쪽에 오크 하나가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상은 어린 드워프.
인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노역에 처했기에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
“일해라. 크르르- 일하지 않으면 죽인다.”
짜악-
“아악-”
채찍이 다시 어린 드워프의 등을 후려쳤다.
등에서 피가 번졌다.
“일하지 않으면 죽인다.”
오크가 재차 경고했다.
당장 일어나 일하지 않으면, 오크는 정말 아이를 죽일 것이다.
이곳의 마물들은 명령대로 움직이게 세뇌되어 있었는데, 명령권자인 퉁박이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후웅-
채찍이 다시금 휘둘러졌다.
짜악-
이번에도 살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크윽- 내, 내가 대신하겠다. 일은 내가 두 배로 할 테니, 그만.”
한 어른 드워프가 아이를 등으로 가리고 있었다.
오크가 드워프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받은 명령이 없었다.
잠시 후 오크가 말했다.
“일해라. 두 명이니, 두 배다.”
오크가 낮은 지능으로 상황을 적당히 수습한 셈.
드워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미없군. 명령을 다시 내려야겠어.’
구경하던 퉁박에게는 마뜩잖은 광경이었다.
곧 오크가 물러났다.
드워프가 아이를 둘러업고, 힘겹게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시시해진 퉁박이 오크에게 다른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아파요. 힘이 없어요.”
“조금만 참으렴, 조금만.”
“버티면 되는 거죠? 그럼 신께서 말씀하신 구원자가 나타나는 거죠?”
“그래, 신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러니 조금만 참아. 알았지?”
뾰족 투구 족장 바순이 들은 신탁이다.
바순은 그것을 모두에게 전했다.
희망을 잃어 가는 드워프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화를 들은 퉁박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뭐? 신이 말을 해?’
신탁.
퉁박도 예전에 발랑카 산맥으로 피난하라는 신탁은 전해 들었다.
그러나 방금 오간 대화는 그가 모르는 내용이었다.
“아빠, 언제까지 참아야 해요? 등이 너무 아파요. 흐윽-”
아이가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한데 그 순간.
덥석.
퉁박이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무, 무슨!?”
아빠 드워프가 깜짝 놀라 뒤돌아 봤다.
아이는 퉁박의 손에 목이 잡혀 매달려 있었다.
퉁박이 아빠 드워프에게 물었다.
“구원자? 그게 무슨 말이지?”
“…….”
드워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퉁박이 재차 질문했다.
“또 다른 신탁이 내려온 건가?”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 아이를 돌려다오.”
아빠 드워프가 소리쳤다.
퉁박의 눈에 슬슬 붉은빛이 돈다.
가슴속에서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 순순히 대답하면 재미가 없겠지. 크르르.”
히죽 웃은 퉁박이 손을 움직였다.
아이의 팔을 거머쥐었다.
“무, 무슨 짓이야!”
아빠 드워프가 깜짝 놀라는 순간.
우드득.
아이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아악!”
아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퉁박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야. 크흐흐흐- 그럼 다시 묻지. 신탁이 다시 내려왔나? 구원자는 뭐지?”
아빠 드워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탁의 내용을 마인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곳의 관리자인 퉁박에게는 절대로.
“대답을 안 하겠다는 말이지?”
콰직!
한 번 부러졌던 팔이 반대편으로 꺾였다.
뼈가 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피가 주르륵 흘렀다.
“으악- 흐윽- 흐아으아아-”
아이의 입에서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미친! 악귀 같은 놈아!”
아이의 피에 아빠 드워프의 눈이 뒤집혔다.
그가 퉁박에게 달려들었다.
한데 피에 자극받은 것은 아빠 드워프만이 아니었다.
뭉클.
피를 본 퉁박의 가슴속에서 마기가 꿈틀거린다.
눈에서 흰자위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한다.
“그래, 그깟 신탁 따위 들어서 무엇할까. 크르르르- ”
짐승 같은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싶더니.
퉁박이 손을 휘저었다.
마기에 휘감긴 팔이 아빠 드워프를 후려쳤다.
퍼억-!
아빠 드워프가 날아가 처박혔다.
머리통이 반쯤 깨어졌다.
즉사였다.
“크흐흐흐-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야.”
뼈 부서지는 소리에 즐거워진 퉁박이 소리 높여 웃었다.
퉁박의 눈이 오른손으로 향한다.
“으으으-”
작은 얼굴이 겁에 질려 떨고 있다.
콰직-
움켜진 손아귀에서 아이의 목뼈가 으스러졌다.
“크흐흐흐흐하하하-”
퉁박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가 일하던 드워프들의 시선을 끌었다.
“저, 저럴 수가…….”
“개자식이 딜튼과 딜런을 죽였어!”
“아, 악마 같은 놈.”
드워프들이 경악한 눈으로 퉁박을 쳐다봤다.
“이대로는 안 돼. 모두 저 미친놈의 손에 죽게 될 거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외쳤다.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저 개새끼한테 한 방이라도 먹여야겠어.”
“제기랄. 이대로 마인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어.”
누군가 곡괭이를 든 채 퉁박에게 돌진했다.
곡괭이는 퉁박의 손에 잡혔다.
콰직-
뒤이어 곡괭이의 주인이 죽었다.
“젠장! 저 악마 같은 배신자 놈이! 죽여 버리겠어!”
누군가 뒤따라 달려들었다.
그 또한 곧 주검이 되어 쓰러졌다.
하나 드워프들의 분노는 동족의 죽음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간 쌓인 울분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아이가 잔인하게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젠장! 신께서 구원자를 보내셨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었어야 해. 이제 됐어. 나는 더 못 기다리겠어.”
또 누군가가 달려갔다.
“같이 가.”
“저 배신자 놈을 죽여!”
뒤이어 수많은 드워프가 퉁박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 죽여라! 모조리 죽이고 씹어 먹어라!”
퉁박이 마물에게 명령했다.
기다리던 마물들이 드워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참혹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끄아아악-”
“죽여!”
“망치와 모루의 신이시어!”
“크르르르- 죽인다. 먹는다.”
드워프와 마물의 고함이 사방을 울린다.
그것은 대장간에서 일하던 바순의 귀에도 들어갔다.
바순이 창밖을 살폈다.
“마, 맙소사!”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 살육, 죽음…….
모든 참혹한 것들이 드워프들을 덮치고 있었다.
“크르르- 일하지 않으면 죽인다.”
그때 옆에서 감시 중이던 마물이 바순을 재촉했다.
바순은 깨달았다.
‘아아- 참지 못했구나.’
신께서 참고 버티라 했다.
기다리면 구원의 손이 올 거라 일렀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싸움이 시작됐다.
부르르.
바순의 가슴에서도 울분이 터져 올랐다.
‘신이시여, 저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나이다.’
바순이 만들고 있던 장검을 들어 올렸다.
날은 서지 않았지만 끝은 뾰족하다.
푸욱-
그것이 마물의 뱃가죽을 파고들었다.
“크르르-”
마물이 피가래를 토하며 손톱을 뻗었다.
콰직!
그때 무언가 마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대가리가 박살 나며 마물이 쓰러졌다
만들고 있던 망치를 든 채, 강철 발바닥 족장이 말했다.
“더는 못 참겠어. 가세나.”
“그래, 오늘 죽는 걸세.”
옆에서 일하던 다른 부족장이 뒤이어 외쳤다.
그들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순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
.
.
“헉- 허억- 끄르륵-”
옆에서 거친 소리가 들린다.
마물의 발톱에 배가 길게 찢어진 드워프가 숨이 넘어간다.
‘아아- 망치와 모루의 신이시여.’
바순이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는 죽을 자리에 뛰어들 용기를 줬다.
그러나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끄아아아악-”
“크흐흐흐흐- 듣기 좋은 소리구나.”
그나마 초반에는 어느 정도 싸움이 되었다.
하지만 퉁박이 마기에 물든 오우거를 5마리나 불러들인 후, 전장에 남은 것은 일방적인 학살뿐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옵니까?’
이제 되었지 않습니까.
이만큼 피를 흘렸으면, 구원의 손길을 보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부디 제발 저희를 구해 주시옵소서.’
바순이 피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소원했다.
사샤샤샤샤샤샤샷-
그 순간 하늘을 수놓으며 화살 비가 떨어져 내렸다.
101화 신탁의 전사(2)
“젠장! 저것 좀 보게, 블톤.”
“갑자기 왜 싸우는 거야?”
달콩과 블톤이 동시에 외쳤다.
경악한 눈빛.
은신한 상태라는 것도 있고, 소리마저 크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만큼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큰일이네. 저러다 떼죽음 당할 걸세.”
분지 안에서 갑작스럽게 전투가 벌어졌다.
한두 명의 고함이 들리더니, 어느새 모든 드워프가 싸움에 달려들었다.
곧이어 마물도 모조리 전투에 가담.
분지 안이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제기랄, 거인님께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크윽, 하지만.”
“그래, 이대로 기다리다간 저들은 전멸하겠지.”
두 족장의 눈이 마주쳤다.
둘 모두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달콩이 입을 열었다.
“가세. 저들이 죽는 꼴을 손 놓고 구경하지는 못하겠네.”
“그러세. 도저히 못 참겠네.”
마음이 급하기는 예전부터 바순과 친분이 있던 블톤이 더했다.
뛰쳐나갈 작정인지 이미 도끼도 뽑아 들었다.
한데 정찰대 드워프들도 모두 이미 무기를 꼬나 쥐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또한 두 족장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가자! 활을 들어라! 도끼를 휘둘러라!”
“빌어먹을 마물을 죽이고 동족을 구하자!”
달콩과 블톤이 외쳤다.
드워프 전사들이 전장을 향해 뛰어들었다.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사샤샤샤샤샤샤샤샷-
화살 비가 내렸다.
명인의 솜씨로 활과 마력을 머금은 화살은 위력적이었다.
꿰뚫린 마물들이 쓰러졌다.
“어? 와, 와, 왔다!”
누군가 소리쳤다.
“왔어, 왔다고!”
“신께서 구원자를 보내셨다!”
“싸우자! 괴물을 죽이자!”
언덕 아래, 혈전을 벌이던 드워프들이 줄지어 소리쳤다.
뾰족 투구 족장 바순이 서둘러 외쳤다.
“노약자부터 뒤로 물리고, 나머지도 언덕 쪽으로 물러난다! 정신 차려! 이제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또 다른 족장이 뒤이어 소리쳤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우린 이긴다! 마물을 죽이고 쓰레기 같은 배신자에게 천벌을 내리자!”
절망으로 죽음을 택했던 드워프들에게 희망이 싹텄다.
힘이 솟았다.
사기가 들끓었다.
우와아아아아-
전장에 드워프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처음에는 전황이 나쁘지 않았다.
치솟은 사기 덕분이었다.
하나 오래지 않아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드워프에게 나쁜 쪽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드워프를 겁박하여 노역을 시킬 정도로, 애초부터 마물의 전력이 월등했으니까.
핍박과 학대로 드워프의 몸 상태가 나빴던 것도 원인이었다.
거기에 100명 남짓한 정찰대가 가세한다고 해서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어, 어째서…….”
누군가 언덕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구원자라면서? 왜 저것밖에 없는 거야?”
“이러다 다 죽겠어.”
드워프들의 마음에 다시금 절망이 싹텄다.
그때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크흐흐흐- 신탁이라더니 별것도 없구나.”
퉁박이 광소를 터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닥 마기가 뒤편 수풀로 뻗어 갔다.
“나와라! 나와서 다 찢어 죽여 버려라!”
퉁박이 외쳤다.
쿵쿵쿵쿵-
둔중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마물이 뛰쳐나왔다.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
소를 닮은 2개의 머리와 4개의 팔을 가진 괴물이었다.
마기에 물든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는 오우거의 3배는 됨직한 거대한 크기였다.
“우워어어어어엉-”
놈이 전장을 둘러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미, 미친! 갑자기 저딴 괴물이 어디서!”
“아, 이제 끝장이야.”
드워프들이 겁에 질렸다.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의 두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먹이 많다.”
“나눠 먹는다.”
쿵쿵쿵-
놈이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언덕 쪽으로 피신하던 드워프들이 혼비백산했다.
“도망쳐! 언덕을 올라라!”
바순이 사력을 다해 드워프들을 피신시켰다.
하나 자신은 피하는 대신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내달렸다.
‘누군가는 시간을 끌어야 해.’
잠깐이라도 미노타우로스의 발을 묶는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언덕을 오를 수 있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살 수 있다.
“먹이!”
“맛있겠다!”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가 도망치는 드워프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순이 몸을 날렸다.
퍼억-!
괴력이 담긴 손이 바순의 방패를 후려쳤다.
바순이 대번에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바순!”
블톤이 깜짝 놀라 소리치더니,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블톤! 안 되네!”
달콩이 말렸지만, 블톤은 친구의 죽음을 두고 보지 못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굉음이 터졌다.
간신히 도착한 블톤이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막아 낸 것이다.
블톤은 바순처럼 쓰러지지는 않았다.
몸 상태도 장비도 바순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
“바순, 어서 일어서게! 뒤로 물러나!”
“크윽-”
블톤이 재촉했다.
바순은 신음만 흘릴 뿐, 일어서지 못했다.
“제기랄!”
블톤은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바순 앞에 버티고 섰다.
쾅- 쾅- 쾅- 쾅-
네 개의 팔이 방패를 강타했다.
기어이 방패가 부서져 날아갔다.
“쿨럭-”
블톤이 피를 토했다.
방패가 부서지며 충격이 그의 몸을 뒤흔들어 놓았다.
간신히 서 있는 블톤을 향해 미노타우로스가 손을 뻗었다.
덥석.
블톤의 사지가 미노타우로스의 4개의 팔에 하나씩 잡혔다.
놈이 팔에 힘을 줬다.
블톤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먹이다.”
“맛있겠다.”
“맛있는 먹이.”
“반씩 나눠 먹는다.”
4개의 팔이 블톤을 양쪽으로 잡아당긴다.
“족장님이!”
“안 돼.”
“구, 구해야 해!”
정찰대 드워프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화살도 쏜다.
그러나 화살은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을 뚫지 못했고, 도끼는 닿으려면 멀었다.
곧 벌어질 끔찍한 상황을 예측하며, 정찰대 드워프들이 부서지라 이를 악물었다.
“크흐흐흐- 신탁? 구원자? 꼴좋구나. 천벌을 내린다더니, 이게 그 천벌이냐?”
퉁박의 비웃음만이 온 전장으로 울려 펴졌다.
절망이 드워프들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먹이가 안 찢어진다.”
“팔이 안 움직인다.”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의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블톤을 찢을 듯했던 4개의 팔이 가만히 멈춰 있었다.
아니다.
팔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블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족장님이 떠오른다.”
바닥에 떨어진 블톤의 몸이 공중에 떴다.
그러더니 허공을 가로질러 언덕 위로 날아갔다.
그 순간 정찰대 드워프들은 깨달았다.
“오셨다.”
“이제 살았어.”
드디어 진정한 구원자가 도착했음을.
* * *
‘싸우지 말라고 했건만.’
부와아앙-
달리는 배틀 웨건 속에서 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달콩의 차원 전음이 날아든 것이 1시간 전.
그 뒤로 말을 걸어 봤지만, 대답이 없다.
‘제발 살아만 있으세요.’
수호가 간절히 염원하며 배틀 웨건을 전속으로 몰았다.
『마기다.』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러고도 몇 분 후였다.
수호의 눈이 발룡이의 손끝을 따라간다.
그곳에는 언덕이 있었다.
‘저기다!’
수호는 대번에 눈치챘다.
저 언덕 너머야말로 달콩이 말한 분지다.
이제 수호에게도 마기와 살기, 전장의 소음이 느껴진다.
‘차원 시야!’
수호가 【차원 시야】를 시전, 곧바로 새로운 장소를 지정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오는 길에 이미 구상해 둔 전술이기 때문이다.
“발룡아, 간다!”
신호한 수호가 배틀 웨건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스킬을 사용했다.
‘차원 여행!’
팟-
수호와 발룡이의 모습이 드워프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구에 돌아온 수호는 냉동실에 바짝 다가섰다.
차원 시야를 움직였다.
‘빨리!’
분지가 보인다.
수호의 감각 스탯이 분지 안, 수많은 정보를 잡아낸다.
수호를 경악게 할 만한 것이 포착됐다.
‘블톤 님!’
블톤이 트윈헤드 미노타우로스의 손에 잡혀 있다.
미노타우로스의 근육이 움직인다.
블톤의 몸이 찢어질 듯 당겨졌다.
‘안 돼!’
수호의 손이 망치로 향한다.
뽑아서 미노타우로스를 짓이기려 했다.
하나 날카로운 감각이 그것을 말렸다.
‘늦어.’
망치로는 늦다.
블톤이 죽는다.
찰나지간.
수호의 머리가 번개처럼 회전하며 방법을 찾는다.
머잖아 답을 발견했다.
다행히 이럴 때 꼭 맞는 스킬이 있었다.
‘염동력!’
【하급 염동력】이 시전됐다.
미약한 힘이지만 콩알만 한 미노타우로스를 묶어 두기에는 충분했다.
‘모두 멈춰라!’
수호가 마력을 더 끌어 올렸다.
염동력이 확산되며 전장의 모든 것을 옭아맸다.
‘블톤 님부터 구하고.’
수호가 염동력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몸을 조종했다.
손아귀가 풀리고 블톤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호는 블톤을 띄워 언덕 위로 옮겼다.
‘다른 드워프들도.’
언덕 아래.
수많은 드워프가 마물과 뒤섞여 있다.
수호는 그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언덕 위로 날랐다.
“후우- 일단 한숨 돌렸고.”
급한 불은 껐다.
그제야 눈이 주변으로 돌아갔다.
보이지 않던, 아니, 급해서 미뤄 뒀던 정보가 인식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피, 내장, 뼈와 살.
수많은 드워프의 주검이 조각나 전장에 흩뿌려져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지금도 드워프의 다리를 씹는 마물이 보였다.
‘이런 개 같은…….’
분노가 차오른다.수호에게 드워프는 단지 이야기 속의 존재가 아니기에.
스스로 그들과 친구이기를 천명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도대체 왜 싸운 거야?
원망과 자책이 밀려든다.
그것은 곧 분노로 치환되었다.
‘빌어먹을 마물놈들!’
모조리 짓이겨 버리겠다.
우둑.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인의 격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이건 뭐야? 왜 몸이 안 움직이는 거지?”
수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똑같은 목소리! 저놈이야.’
신과 구원을 비웃은 목소리.
천벌 운운하며 드워프를 조롱한 목소리.
수호가 차원 시야를 움직여,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 들었던 음성이 분명했다.
‘저놈이 원흉이야!’
수호의 눈이 목소리의 주인공, 퉁박을 응시했다.
‘드워프?’
마기에 물들어 동족을 학살한 드워프.
그 모습에 수호는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노여움이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변해 흘러나왔다.
“나는 신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어서.”
적막이 찾아온 분지 안.
모두가 눈알만 움직여 하늘을 바라본다.
불쑥.
허공에서 거대한 망치가 나타났다.
동시에 퉁박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천벌은 못 내리지만.”
퉁박이 마기를 움직여 저항했다.
하지만 괜찮다.
벌레처럼 꿈틀거릴 뿐, 놈은 염동력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런 퉁박을 차갑게 노려보며 수호가 천명했다.
“인간으로서 너를 벌하겠다.”
우웅-
강한 마력을 머금은 [거인의 격노]가 수호의 마음에 공명한다.
‘5연격!’
수호가 퉁박을 후려쳤다.
콰콰콰콰쾅!!!
천지를 울리는 충격이 퉁박을 휩쓸었다.
뼈도 살도, 몸속의 마기조차도.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퉁박은 분쇄되었다.
‘아직이야.’
원흉을 처치했음에도 수호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고오오오-
가공할 기운이 분지 안을 장악한다.
염동력이 모든 마물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마, 마물이 떠오르고 있어.”
“둥글게 뭉친다!”
“거인님의 염동력이야!”
“거인님! 마물들을 다 해치워 버리세요!”
드워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호가 망치를 휘둘렀다.
공처럼 뭉쳐져 바닥에 놓인 마물의 무리.
그 위로 망치가 직격했다.
쾅! 쾅! 쾅! 쾅! 쾅!
연이은 망치질에 마물들이 짓이겨진다.
그럼에도 수호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마물의 피륙은 부서졌지만, 마기의 본체는 살아남았다.
새 숙주를 찾으려 꿈틀거린다.
‘부서져라!’
【5연격】이 재차 시전됐다.
다섯 번의 공격이 마물의 잔해 위로 더해진다.
그것은 【십격필살】의 발동 요건을 충족시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분지를 뒤흔든다.
흙과 나무와 광물.
피와 뼈가 뒤섞여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 남은 것은 깊이가 두 배쯤 깊어진 분지뿐이었다.
102화 신탁의 전사(3)
【십격필살】이 분지 안을 초토화했다.
염동력이 충격을 막아 준 덕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드워프들은 모두가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충격이 멎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야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마물이 사라졌어.”
옆에서 또 한 명이 머리를 들었다.
“진짜야! 마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헉! 가루조차 안 남은 건가?”
“저길 봐, 분지가 훨씬 깊어졌잖아. 저런데 어떻게 살아남았겠어?”
드워프들이 속속 고개를 든다.
얼굴에는 기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살았다는 안도가 가득했다.
“후우…….”
그 모습을 보며 수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보다는 참담한 심정이 더 담긴 한숨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어.’
살아남은 드워프만큼이나 많은 드워프가 죽었다.
수호는 죽음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죽은 드워프마저 놓치지 않고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호는 드워프들을 구해 놓고도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이니라.』
발룡이가 바로 옆에 날아와 있었다.
“…그래.”
웬일로 드래곤다운 말을 다 하는구나.
그래도 장하네.
위로도 할 줄 알고.
슥슥-
수호가 손을 뻗어 발룡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룡이는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니까 본좌는 이제 가겠느니라.』
“가?”
『저쪽으로.』
발룡이가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자신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수호는 그제야 발룡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웬일로 멀쩡한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결국, 일이 끝났으니 치킨 먹으러 가겠다는 소리였다.
“허, 그래. 가라 가.”
실소한 수호가 손짓했다.
딴에는 오래 참았다.
마력의 호수로 가는 길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테니.
파닥.
발룡이가 침대로 날아갔다.
‘단순해서 좋겠다, 자식아.’
짧은 앞발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참담했던 심정이 가라앉는다.
헛웃음이나마 웃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수호가 냉동실 안을 보며 외쳤다.
“달콩 님, 블톤 님. 띄워서 이동시킬 거니까, 놀라지 않도록 다른 분들한테 미리 말씀해 주세요.”
분지 안쪽 언덕 부근에 올려 두긴 했지만 그곳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달콩과 블톤이 분주히 움직였다.
잠시 후, 수호가 염동력을 시전해 드워프들을 분지 밖으로 옮겼다.
평평하여 쉬기 좋고, 개울도 흐르는 곳이었다.
“아, 진짜로 저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났어.”
“살았어. 진짜 살았다고.”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망치와 모루의 신이시여, 신의 전사를 내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의 전사 님.”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린 걸까.
인질이 되었던 드워프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거인님, 감사합니다!”
“거인님,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내가 말했지? 이제 다 끝났다고! 거인님만 오시면, 다 끝난 거라니까!”
정찰대 드워프도 소리쳤다.
그 무렵 수호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차원 임무 【인질 구출】을 완수하셨습니다.]
[새로운 교류 대상 【뾰족 투구 드워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뾰족 투구 드워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교류 대상 【각진 어깨 드워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각진 어깨 드워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
.
.
여러 부족과의 교류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질 구출】 임무의 보상이 그것이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뒤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인질 구출】이 【발랑카 마을로】로 연계됩니다.]
일이 아직 남았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 * *
드워프들이 잡혀 있던 분지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어딘가.
“크흑- 비, 빌어먹을…….”
성을 지키던 기사이자, 성내 최고의 실력자인 소드 마스터가 이를 갈았다.
하나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
“사지가 잘리고도 아직 살았군. 크흐흐, 잘 됐어. 덕분에 싱싱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푹-
마기 촉수가 소드 마스터의 잘린 어깨를 찔렀다.
“끄악-”
소드 마스터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나 그도 잠시뿐.
촤아악-!
휘둘러진 칼에 그의 몸이 두 동강 났다.
“크크크, 빛깔이 좋군. 먹음직스러워.”
소드 마스터를 베어 버린 마인.
마족 아르투르의 종복, 코자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바로 성을 침략한 마물의 우두머리였다.
드워프를 잡아 퉁박에게 맡긴 장본인이었으며, 언젠가 ‘웜’을 보내 드워프 마을을 공격한 것 또한 코자크였다.
“꺄아악-”
“사람 살려! 제발 누가 좀 도와줘!”
“나, 난 죽기 싫어!”
“엄마-”
처절한 비명이 난무한다.
피비린내가 온 성안을 뒤덮는다.
“크하하하하, 식사 시간에 듣기에 딱 좋은 음악이구나.”
광소를 터트린 코자크가 마기 촉수를 움직였다.
잘린 소드 마스터의 주검 조각이 둥실 떠올랐다.
코자크의 입이 벌어진다.
턱이 고무줄이라도 되는 양, 비정상적인 각도로 늘어났다.
우득우득- 우물우물-
소드 마스터의 몸이 코자크의 입안에서 씹혀 사라졌다.
코자크가 즐거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매끈하게 잘린 나머지 조각이 보인다.
“드워프 놈들이 확실히 손재주가 좋군. 크흐흐, 모두 먹어 치우지 않기를 잘했어.”
드워프를 협박해 무기를 얻어낸 선택은 훌륭했다.
촉수가 다시 움직였다.
소드 마스터의 나머지 몸 조각이 떠올랐다.
“응?”
코자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쿠당탕.
먹으려고 집어 올린 조각도 던져 버렸다.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방향은 남쪽.
드워프 인질을 남겨 두고 온 쪽이다.
“신호가 끊겼어?”
마물의 마기를 컨트롤하여 지배하는 것이 코자크의 특기.
마족 아르투르에게 하사받은 코자크의 권능이다.
대상이 죽거나 코자크가 연결을 끊기 전까지는, 지배한 대상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방금 연결이 끊겼다.
“하나도 아니고, 두고 온 것들 모두?”
무슨 일이 생겼다.
두고 온 모든 마물의 연결이 끊겼으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크르르르-
분노와 함께 마기가 들끓는다.
코자크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간다.”
코자크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콰직.
소드 마스터의 잔해가 짓밟혀 으스러졌다.
* * *
【발랑카 마을로】
- 당신이 구출해 낸 드워프들은 심신이 미약한 상태다. 그들을 잘 수습하여 발랑카 산맥의 드워프 마을로 인도하라.
- 보상 : ???의 보답.
호위 임무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내용이기도 했다.
보상 항목만 빼면 말이다.
‘???의 보답?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보상 항목 자체가 물음표였던 적은 있었지만, 보상을 주는 대상의 정체가 숨겨진 적은 없었다.
‘뭐 그건 임무를 완수하면 저절로 알게 될 테고. 중요한 건 드워프들을 어떻게 데려가느냐겠지.’
드워프들은 막 위기를 벗어났다.
마물에게 잡혀서 고통받다가 처참한 전투까지 경험했다.
당장 출발은 무리.
마음을 다잡고 부상자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겠어.’
출발은 내일 상황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달콩 님, 블톤 님!”
수호는 달콩과 블톤을 불렀다.
한데 다가온 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달콩이 옆을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거인님, 소개해 드릴 친구가 있어 데리고 왔습니다.”
“혹시 다른 부족의 족장님이신가요?”
“예, 이 친구는 뾰족 투구 부족의 족장인 바순이라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남은 부족의 족장들은 모두 화를 당했다고 합니다.”
“아…….”
수호가 탄식했다.
부족의 수에 비해 전체 인원이 너무 적다 싶더라니.
얼마나 희생이 컸으면, 그 많은 부족 중에 살아남은 족장이 단 한 명뿐이었다.
모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떼지 못했다.
털썩.
갑자기 바순이 무릎을 꿇었다.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바순의 입에서 절규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신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신의 전사께서 어리석은 결단을 내린 저를 벌해 주십시오.”
“신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발 저를 벌해 주십시오. 저 때문에 수많은 형제자매가 죽었습니다. 제가 말렸어야 했습니다. 제가 차라리 신탁을 퍼트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바순은 자신을 벌해 달라는 말만을 계속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호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신탁의 내용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달콩 님과 블톤 님은 그런 말이 없었는데. 신탁이 저 바순에게만 내려진 건가?’
어째서?
게다가 망치와 모루의 신은 왜 수호를 자꾸 거론하는 걸까.
그럴 거면 차라리 수호나 달콩 등에게 직접 말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적시에 상황을 알았다면, 피해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깊어지려 할 때 바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신의 전사께서 저를 벌해 주십시오.”
드워프들은 끝없는 노역과 학대에 시달렸다.
수호라고 해도 참기 힘들었을 터.
수호는 바순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저는 바순 님을 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신의 전사가 아니니까요. 제가 정말로 신의 전사였다면, 여러분을 모두 구해 냈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제게 벌을 청하신다면… 용서할게요. 벌을 내릴 자격이 있다면 용서할 자격도 있겠죠.”
“아…….”
바순의 눈동자가 떨렸다.
수호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더 많은 분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신의 전사님 덕분에 많은 드워프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흐흑-”
바순의 눈에서 자책과 참회와 감사가 뒤섞여 눈물로 흘러나왔다.
수호는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바순이 감정을 추스르고 말문을 열었다.
“발랑카 산맥에 세 부족이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이 지어졌다는 것도요. 모두가 신의 전사님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저희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무조건 신의 전사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설사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하셔도 말입니다. 그러니 저희를 그곳에 받아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내칠 생각은 없다.
“당연하죠. 애초에 여러분을 발랑카 산맥으로 데려가려고 온 걸요.”
바순이 고개를 뻔쩍 들었다.
수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말을 따르시겠다고 하니, 한 가지만 부탁할게요. 신의 전사 대신에 그냥 거인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제 그만 일어나시고요.”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거인님.”
바순이 꿇었던 무릎을 폈다.
“여러분! 제가 먹거리를 내어 드릴 테니, 다 같이 나눠 드시고 기운 좀 차리세요.”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 든 식료품을 나눠주었다. 담요 등, 간단한 도구도 전했다.
새 식구를 맞이한 첫날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 * *
사흘 후 새벽, 비룡객잔 뒤뜰.
퉁-
[거인의 격노]가 힘없이 튕겼다.
“내공이 한 단계 성장했다 하여 기대했더니, 아직도 무기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하는구나.”
손바닥으로 간단히 망치를 튕겨 낸 석비룡이 수호를 꾸짖는다.
수호가 이를 악물며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퉁-
“이것밖에 안 되는가? 전력을 다하라고 일렀거늘.”
“큭, 조심하십시오!”
수호가 버프 스킬을 모조리 발동.
온 힘을 담아 망치를 휘둘렀다.
그럼에도 수호는 한 번의 유효타도 성공하지 못했다.
퉁- 후웅-
튕겨 내고 피하고, 흘리고.
공격이 연이어 실패하던 어느 순간.
파직.
[거인의 격노]에서 미묘한 파동이 일었다.
파동은 석비룡에게 파고들려 했다.
‘경직이다!’
[거인의 격노]의 여러 옵션 중 하나.
10%의 확률로 상대를 1~5초간 기절시키는 【상급 경직】이 발동했다.
찰나 지간, 수호는 망설였다.
‘기절 상태에 빠질 텐데, 진짜로 공격해도 될까?’
그런데 고민이 무색한 일이 벌어졌다.
우웅-
석비룡의 단전에서 한 가닥 기운이 일더니, 몸 주위에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파츠츳-
【상급 경직】의 기운이 막에 부딪히더니 불타듯 사라졌다.
“헉! 말도 안 돼!”
장비의 옵션은 시스템의 보조로 현실화된다.
한데 석비룡이 자력으로 그 시스템의 힘을 막아 낸 것이다.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버릇부터 고쳐야겠구나.”
퍽-!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다.
수호는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생각했다.
‘하긴 무공으로 차원문을 붙잡아 버린 사람이었지.’
기절하든 말든, 죽으라 하고 망치나 휘두를걸.
잠시 후.
석비룡이 내공을 불어넣어 수호를 깨웠다.
“헉!”
“이제 정신이 드는가?”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신을 차린 수호는 석비룡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 시스템이란 것 때문에 행동이 하나하나 부자연스러워. 그 정도 기운을 품고 있으면서도 망치에 담기는 힘은 얼마 안 되는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수련하다 보면 차차 나아질 거야. 어쨌든 그 시스템 덕분에 기운을 쌓기는 편하지 않나.”
“예.”
레벨 업을 하면 스탯을 얻는다.
석비룡의 눈으로 보면 굉장히 편하게 강해지는 셈.
수호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한동안 움직임과 기운에 대한 충고를 더한 후, 석비룡이 수련을 끝마쳤다.
“그럼 여기까지 하세.”
“벌써요? 평소보다 이른데요.”
“오늘 출발한다지 않았나?”
“예, 맞습니다.”
드워프들은 아직 발랑카 산맥으로 떠나지 못했다. 심적인 충격이 컸고, 부상자를 돌볼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흘이 지난 오늘에야 출발 준비가 되었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나?”
“빨라도 닷새는 걸릴 겁니다.”
배틀 웨건으로 밤새 달려 당도한 거리다.
천 명 넘는 인원이 산길을 걸어야 하니 닷새도 짧다.
그조차 차원 시야가 닿는 곳까지는 염동력으로 옮기는 걸 참작한 시간이었다.
“그렇군. 조심해서 다녀오게. 오가는 동안에도 수련을 잊지 말고. 성과가 있으면, 내 한 가지 선물을 줄 수도 있네.”
“선물요?”
“그래, 성과가 있을 때 이야기네. 안 그러면 내가 줘도 자네가 못 받을 거거든.”
“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물이 내심 궁금했지만, 질문은 하지 않았다. 수련의 성과가 있다면 어련히 알게 될 테니까.
“그럼 잘 다녀오게.”
“예.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수호가 석비룡의 차원을 벗어나 드워프 세상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드워프가 인질로 잡혀 있던 분지 근처.
우두두두두두두두-
수많은 마물이 달린다.
들소 떼의 질주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물결은 곧 능선을 넘어 분지 안으로 들어섰다.
물결의 선두.
커다란 마물의 머리를 딛고 선 자가 땅에 내려섰다.
마족 아르투르의 종복, 코자크였다.
“모조리 박살이 났군.”
광산도 대장간도 흔적도 없다.
심지어 남겨 두고 간 마인과 마물마저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마기라도 남아 있어야 하건만.
그 어디에서도 한 가닥 마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진이라기엔 너무 분지만 깔끔히 파괴됐다.
바닷가라면 해일이라도 의심하겠건만…….
코자크가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부하 마인이 달려왔다.
“분지 밖에서 드워프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흔적?”
“예, 언덕 너머 평원 쪽에서 야영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수가 족히 천은 되어 보였습니다.”
분지 안이 이 모양이 됐는데, 바깥에 흔적이 있다? 그것도 많은 수가?
코자크는 단서의 냄새를 맡았다.
“이동한 흔적은?”
“그, 그것이…….”
부하가 우물쭈물거렸다.
“크르르- 한 번 더 묻게 했다가는 네놈을 씹어 먹어 버리겠다.”
코자크의 광기가 터지려 하자, 부하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사, 사라졌습니다. 머문 흔적은 있는데, 이동한 발자국은 전혀 없습니다.”
“천 마리도 넘는 드워프가 하늘을 날아서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차라리 무너지는 분지 속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말을 믿겠다.
“하, 하지만 흔적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 컥!”
마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코자크가 목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다.
흘러 내리는 피와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마기를 보며 코자크가 뇌까렸다.
“천 마리나 살아서 도망쳤다는 말이지?”
차라리 잘됐다.
수가 많을수록 정보를 떠들 입도 많아질 테니까.
더불어 드워프제 장비도 계속 얻을 수 있을 테고.
“가라! 가서 드워프를 찾아라.”
쿵-
코자크가 발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우두두두두-
새까만 마물의 파도에서 한 무리가 떨어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103화 신의 목소리(1)
천 명이 넘는 드워프가 행렬을 이루며 걷고 있다.
일행 앞뒤에는 정찰대가,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혔던 드워프가 위치했다.
선두 근처에는 노약자를 태운 배틀 웨건이 달린다. 제작에 관여한 달콩과 블톤이 번갈아 운전을 맡았다.
‘별문제는 없군.’
수호는 수시로 행렬의 앞뒤를 오가며 일행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는 후미를 살필 차례.
걸음을 늦춰 뒤쪽으로 천천히 쳐졌다.
“앗, 신의 전사님이다. 고맙습니다, 신의 전사님!”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야, 신의 전사님이 거인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거인님이라고 불러야 해.”
“거인?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그 끔찍한 놈들을 박살 내 버린 망치 못 봤어? 지금도 거인님 허리에 걸려 있잖아.”
“앗, 맞아. 그랬었지. 거인님, 고맙습니다!”
드워프들이 수호를 보며 고개를 숙인다.
수호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인님이 손 흔들어 주셨어!”
“우왓-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소란이 인다.
수호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했는데…….’
이번 일로 수천 명이 죽었다.
그전에도 꾸준히 학살이 자행됐다.
수호는 걱정했다.
저들의 마음이 꺾여 버리는 것 아닐까.
실의에 빠져 영영 일어서지 못하지 않을까.
‘드워프들이 마음을 추슬러서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드워프들은 강했다.
사흘 만에 다시 일어섰고, 발랑카 산맥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천성적인 명랑함 덕분인지도 모른다.
정찰대가 꾸준히 희망을 이야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수호로서는 흡족한 일이었다.
그때 마뜩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려. 이래서는 1주일은 걸리겠구나.』
“어쩔 수 없잖아. 부상자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는데.”
수도 천 명이 넘는다.
느린 게 당연했다.
차원 시야의 경계까지는 염동력으로 옮겼기에, 그나마 여기까지라도 온 것이다.
『이러다가 치느님의 얼굴을 까먹을 판이란 말이다.』
“얼씨구, 아까도 차원 보따리에 담아온 닭강정 먹었잖아.”
『갓 튀긴 치느님과는 비교할 수 없느니라.』
어련하시겠어.
수호가 실소를 터트리는 사이에도 행렬은 계속 이동했다.
“거인님! 말씀하신 곳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블톤에게 배틀 웨건을 맡긴 달콩이 후미로 달려와 외쳤다.
앞쪽에 가파른 절벽이 나타나 있었다.
“아, 여기 맞네요. 경로를 정해야 하니, 그전에 잠깐 휴식하고 가죠.”
“예, 휴식하라 이르겠습니다. 한데 어느 쪽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드워프 마을까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눈앞에 보이는 절벽 길.
나머지는 평원을 따라 돌아가는 우회로.
절벽 길이 빠르지만 훨씬 험하다.
오는 길에 겪어 보았기에 잘 알고 있다.
“음, 둘러 가도 안전한 편이 낫겠죠? 아이들도 있으니…….”
“저희는 그저 거인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하, 그럼 일단 쉬고 계세요. 결정해서 휴식 후에 알려 드릴게요.”
달콩이 드워프들에게 휴식을 전하러 돌아갔다.
발룡이가 곧바로 입을 뗐다.
『안전이 최고이니라. 저 절벽은 너무 험해.』
응?
갑자기 드워프의 안전에 신경을 쓴다고?
“웬일이야? 그런 말을 다 하고.”
발룡이가 아주 정 없고 막돼먹은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워프 등의 이종족을 특별히 아끼지도 않는다.
종(種)의 차이에서 오는 근원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수호도 그 점을 과하게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쳐지기를 바랄 뿐.
그런 관점에서 방금 발룡이가 한 말은 의아했다.
『웨, 웬일이라니. 당연히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라. 게다가 부상자도 있고, 아이도 있지 않느냐.』
“집에 언제 도착하냐고 보채던 드래곤은 어디 가고, 갑자기 성인군자께서 납셨냐?”
요 근래 들어 자꾸 뭔가 숨기는 눈치란 말이지.
수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발룡이의 반격이 날아왔다.
『흥, 자꾸 과거를 들먹이니, 네가 여친이 없는 것이다.』
“뭐? 그딴 말은 어디서 배웠어? 휴대폰을 압수하든지 해야지.”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수호가 아찔해하고 있을 때, 발룡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라!』
“죽긴 왜 죽어. 여친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
『죽으란 말이 아니고, 죽이란 말이다! 저쪽! 마기다!』
“아!”
그제야 수호도 눈치챘다.
행렬 뒤편 먼 곳에서 자그마한 마기가 느껴진다.
팟.
수호가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석화비도를 뽑아 던졌다.
“끄엑-”
비명과 함께 마물의 숨이 끊겼다.
마물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정찰병이니라. 추격당할 수도 있겠군.』
“뭐? 젠장!”
수호는 막 휴식에 접어든 일행의 선두로 내달렸다.
“휴식 그만! 전진한다!”
수호의 목소리가 일행의 귓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 * *
분지 안.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코자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곧이어 눈이 번쩍 뜨였다.
“찾았다!”
정찰을 위해 마물을 퍼트렸다.
그중 하나에 연결된 마기의 끈이 끊어졌다.
벌떡.
코자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기가 들끓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남쪽이다. 찾아라. 가서 죽여라!”
목소리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근방에 흩어진 모든 마물들이 남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히 내게서 도망친 대가를 받아 내러 가 볼까.”
코자크가 중얼거렸다.
구구구궁-
그의 발밑에서 거대한 것이 솟아올라 코자크의 몸을 떠받쳤다.
“가자.”
코자크의 몸이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따라 난, 좁고 가파른 길.
중국에 있다는 잔도(棧道)를 연상시키는 곳을 드워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훅- 후욱- 힘들어.”
“어쩔 수 없지. 끔찍한 것들이 쫓아올 수도 있다잖아.”
“으으- 그놈들 손에 또 잡히는 것보다야 힘든 게 낫지.”
“상상하기도 싫어.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고 말지.”
한 드워프가 절벽 길 옆을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아찔했던지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 옆을 따라 걸으며 수호는 의문을 느꼈다.
‘마물은 더 없다고 했는데.’
바순에게 들었다.
근처에 있는 마물은 분지에 있는 것들뿐.
나머지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몇 달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나마 갈림길 근처에서 발견한 건 다행인가?’
평원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면 진즉 따라잡혔을 터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마물을 따돌릴 만한 구간도 있었다.
‘거기만 지나면…….’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이동은 계속됐다.
머잖아 수호가 염두에 둔 장소에 도착했다.
“헉! 여긴 어떻게 지나가는 거야?”
“난 다리 떨려서 못 건널 것 같은데.”
“거인님께 방법이 있을 거야.”
사람 한 명 걷기 힘든 좁은 길.
그것이 구름다리처럼 절벽과 절벽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기를 지나면, 대규모 부대가 추격하기는 힘들겠지.’
마물 몇 마리쯤 언제든 처치할 수 있다.
마족의 종복이라도 해볼 만하다.
하나 그것도 혼자일 때 이야기.
천 명이 넘는 드워프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의 수라도 줄여야 한다.
구름다리처럼 생긴 절벽 길은 대부대가 이동할 수 없다.
이곳만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호가 절벽 길을 택한 이유였다.
“달콩 님, 배틀 웨건의 비행 모드로 드워프를 건너편으로 이동시키세요.”
“아! 맡겨 주십시오.”
“서둘러 주세요.”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구불구불.
이미 지나온 절벽 길이 시야에 담긴다.
그곳을 바라보며 수호가 염원했다.
‘몇 시간만 이따가 나타나라.’
아쉽게도 바람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절반 정도의 드워프가 건너편으로 넘어갔을 무렵.
『마물이다!』
발룡이가 경고했다.
마물이 절벽 길을 새까맣게 덮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쯧, 많기도 하네.”
혀를 차던 수호는 망치를 뽑아 들었다.
‘거대화!’
마력을 빨아들인 거인의 격노가 커진다.
수호의 몸도 뒤쫓아 커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3할쯤 주입했을 때, 수호가 변신을 멈추었다.
길을 가로막기 딱 알맞은 크기였다.
“저기 있다! 크르르르- 죽여라!”
“드워프다! 죽여라!”
“먹이다. 잡아먹는다!”
수호가 준비를 끝마쳤을 즈음, 적들은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마물이다!”
“제기랄! 올라온다! 쏴!”
“활을 쏴!”
드워프 정찰대가 화살을 날렸다.
마물 몇이 화살에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졌지만, 빈자리는 즉시 다른 마물로 메워졌다.
“중지! 뒤로 물러나세요! 여긴 제가 막습니다!”
수호가 드워프 정찰대를 만류하며 절벽 길 가운데를 막아섰다.
“하, 하지만 거인님. 마물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분들을 보살펴 주세요.”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수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정찰대가 위쪽으로 향했다.
정찰대가 모두 빠졌을 즈음.
마물들이 코앞까지 당도했다.
‘한 마리도 못 지나간다!’
수호가 망치를 휘둘렀다.
퍼억-!
망치에 맞은 마물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퍼억-
수호가 연달아 망치를 휘둘렀다.
공터가 생겼다가 마물로 메워지기를 반복했다.
절벽 길을 꽉 채운 수호의 몸 덕분에, 마물들은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했다.
구구구구궁-
그때 절벽이 떨렸다.
아래쪽에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웜이다!』
발룡이가 먼저 적의 존재를 파악해 냈다.
마물을 상대하던 수호도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마물의 파도 후미.
거대한 지렁이 형태의 마물이 꿈틀거리며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젠장, 최악이야.”
전에 한번 상대해 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놈이 절벽을 뒤흔들기라도 하면…….’
수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 * *
마물 무리 최후방.
오우거의 머리 위에 선 채, 천천히 절벽 길을 오르던 코자크가 수호를 발견했다.
‘거인? 그래, 전부 저놈 짓이었군.’
분지의 초토화.
남겨 둔 마물의 전멸.
모두가 저 앞에 있는 커다란 인간의 짓이 분명했다.
느껴지는 기세도, 크기도, 모두 저놈이 범인임을 말했으니까.
콰아아앙-!
보라.
지금도 거인의 망치에, 수십 마리 마물이 단숨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않나.
“흐흐흐흐흐흐.”
한데 부리는 마물의 죽음에도 코자크는 웃고 있었다.
“탐나는군. 저놈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마물 따위 몇을 잃든 상관없다.
코자크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거인을 마기에 물들여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러자면 쓸데없는 것들부터 떼어 내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지. 가라!”
코자크가 명했다.
콰드드드득.
웜이 땅을 파고들었다.
코자크는 오우거의 어깨에 몸을 실은 채, 절벽에서 벌어질 광경을 기대했다.
* * *
『온다! 땅속이다!』
발룡이가 경고했다.
수호도 눈치채고 있었다.
덜덜덜덜덜-
온 절벽이 떨리고 있어 모를 수가 없다.
“제기랄!”
수호의 입에서 기어이 욕설이 흘러나오는 순간.
푸콰앙-!
굉음과 함께 절벽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그곳에서 거대한 웜이 대가리를 내밀었다.
둥그런 입안, 믹서기처럼 달린 이빨이 흉악하다. 그 사이로 산성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으악- 떨어진다!”
“살려 줘어어-”
진동에 드워프 몇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발룡아!”
수호가 외쳤다.
『기어이 본좌가 나서야 하는 것이냐. 떠올라라!』
발룡이가 플라잉 마법을 시전했다.
떨어지던 드워프들이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발룡이가 드워프를 구해내는 사이, 수호도 움직였다.
‘단숨에 처리해야 해.’
웜이 설치게 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싸움에 이겨도 피해가 클 것이다.
결심한 순간, 수호는 연이어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
‘근력 폭발!’
‘무기 강화!’
몸에 기운이 차오른다.
쾅.
수호가 절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살살 좀 하거라! 떠올라라!』
그 바람에 드워프가 떨어졌는지, 발룡이가 툴툴거렸다.
수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단 하나만 신경 써야 할 때다.
‘웜이 공격하기 전에 끝낸다!’
단호한 마음만큼 수호가 빠르게 쏘아졌다.
촌각 후.
웜이 대가리를 내민 절벽 앞 공중에 다다랐다.
“쿠우워어어어-”
괴성과 함께 웜이 입을 벌린다.
초록색 산성 침이 들끓는다.
하나 상관없다.
산성 침이 토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5연격!’
수호가 온 힘을 담아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가 웜의 대가리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콰콰콰쾅-!
딱 한 방이었다.
거대화에 각종 버프까지 두른 수호의 【5연격】은, 단숨에 웜의 대가리를 터트려 버렸다.
촤아아아악-
징그러운 체액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호가 석화비도를 던져 절벽에 박아 넣었다.
떨어지던 수호의 몸이 사슬에 이끌려 절벽 길 위로 올라섰다.
『살살 하라니까! 떠올라라! 떠올라라! 떠올라라!』
발룡이가 빽 소리치며 연이어 플라잉 마법을 시전했다.
“후우… 발룡아, 드워프 안 떨어트렸지?”
한숨 돌린 수호가 발룡이에게 물었다.
한데 발룡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너 왜……?”
고오오오오오오오-
발룡이의 가슴에서 강한 마력의 파동이 일었다.
『감히, 하찮은 마인 따위가 감히……!』
발룡이의 입에서 노여움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뭔가를 느낀 수호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크롸롸롸롸롸-
거대한 형체가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104화 신의 목소리(2)
거인이 날뛴다.
온 절벽이 뒤흔들리는가 싶더니, 대가리가 부서진 웜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이 부리는 마물이 죽었음에도 코자크의 얼굴에는 웃음이 어렸다.
“크흐흐흐- 대단하구나. 저놈만 손에 넣는다면, 인간 왕국도 대번에 무너트릴 수 있겠구나.”
코자크는 마족 아르투르에게 받은 명령을 떠올렸다.
지성체를 멸망시키고 마기로 세상을 뒤덮는 일.
그것을 이뤄 낸다면, 코자크는 아르투르의 휘하에서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거인을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
“웜을 저리 쉽게 처리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비장의 무기를 동원하는 수밖에. 크흐흐-”
비릿한 웃음을 흘린 코자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닥 마기가 어딘가로 뻗어 나갔다.
“와라! 드워프를 죽여라!”
먼 곳에서, 검붉은 빛을 띤 거대한 형체가 날아올랐다.
* * *
발룡이는 분노했다.
『감히! 하찮은 마물 따위가 감히 위대한 존재에게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은 헤츨링이었다.
발룡이보다도 훨씬 어린, 이제 갓 태어난 게 분명한 드래곤.
동족이기에 느끼는 동질감 때문일까.
어린 용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까.
발룡이의 분노는 끝없이 치솟았다.
『용서할 수 없다.』
두근-
발룡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박동한다.
분노가 발룡이를 옥죄는 제약을 흔들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맹렬한 박동이 계속되더니.
우지끈.
발룡이를 얽매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기어이 한 가닥 뜯겨 나갔다.
[누적된 업적에 의해 광룡 발랑카르의 제약이 일부 해제됩니다.]
[광룡 발랑카르의 격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발룡이의 성장을 증명했다.
화악-!
한 줄기 빛이 번뜩이더니, 발룡이의 모습이 변했다.
동글동글하던 이목구비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강아지만 하던 체구는 장롱만큼 커졌다.
광룡의 모습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만화 캐릭터 같은 귀여운 외형은 사라지고 위엄 넘치는 드래곤의 모습이 되었다.
발룡이의 입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크롸롸롸롸롸롸-』
드래곤 피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발룡이가 품은 분노만큼이나 강렬했다.
전장의 모든 존재가 정지했다.
마기에 오염된 드래곤마저도 허공에 멈춰 섰다.
하지만 곧 한 줄기 마기가 오염된 드래곤의 머리로 흘러 들어갔다.
드래곤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 드워프를 죽여라!
- 드워프를 죽여라!
- 드워프를 죽여라!
반복된 목소리가 드래곤의 심령을 장악했다.
드래곤의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 워프를 죽인다-』
눈 아래 절벽 위.
위태롭게 매달린 드워프들이 보인다.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고오오오오-
강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이내 브레스가 발사됐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마기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어린 헤츨링의 것이지만 브레스는 약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 브레스다!”
이대로라면 드워프들이 몰살당할 판.
수호가 깜짝 놀라 드워프들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본좌가 막겠다!』
발룡이가 앞으로 끼어들며 외쳤다.
수호가 황급히 비켜서는 순간, 발룡이의 입이 열리고 브레스가 뿜어졌다.
콰르르르르르르르-!!
브레스와 브레스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두 용의 숨결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백중지세.
팽팽하게 맞선 두 불기둥에서 강한 열기가 흩날렸다.
“크윽- 뜨, 뜨거워.”
“아악- 머리털이 탄다!”
드워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브레스의 충돌 여파가 드워프들에게 화상을 입히고 있었다.
수호가 드워프들 앞을 가리고 섰다.
‘뜨거워.’
어찌나 열기가 강하던지, 화염 저항이 100에 육박한 수호조차 작열통을 느꼈다.
‘이대로 계속 싸워서는 안 돼.’
싸움의 승패는 중요치 않다.
이대로는 승패와 상관없이 드워프의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다.
판단을 내린 수호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쎄에엑-
석화비도가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드래곤이 급히 회피했다.
‘일단 브레스는 멈췄어.’
비도는 빗나갔지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덕분에 브레스가 끊겼고, 드워프들을 위협하던 열기도 멈췄으니까.
“발룡아! 브레스끼리 부딪히지 마! 드워프들이 못 견뎌!”
수호가 서둘러 외쳤다.
발룡이가 브레스를 멈추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느니라.』
단지 드워프가 피해를 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 차례 격의 해방을 겪어 본 발룡이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힘은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
머잖아 고양감이 멎고, 힘도 줄어든다.
그때가서는 브레스끼리 부딪히는 방법으로도 막아 낼 수가 없다.
『시간이 없어.』
뭔가를 시도하려면 지금 해야만 한다.
발룡이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절벽 길 저편.
강한 마기를 품은 존재가 마물에 둘러싸여 있다.
『저놈을 죽이면 끝난다!』
발룡이가 온 힘을 끌어모아 브레스를 발사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
“막아!”
갑작스러운 공격에 코자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물들이 코자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세 마물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브레스가 그 위를 두드렸다.
“끄어어억-”
“크헉-”
마물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사이, 코자크가 몸을 뒤로 날렸다.
마물들이 그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발룡이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마인 놈이!』
격렬하게 끓던 기운이 차츰 가라앉고 있다.
그에 따라 브레스 또한 조금씩 약해진다.
『제기랄, 방법이…….』
브레스를 멈추고, 발룡이가 고민했다.
원흉을 죽여 상황을 끝내려던 시도는 실패.
마기에 물든 드래곤을 제압할 힘도 없다.
『결국 그 수밖에 없는 건가.』
* * *
수호도 발룡이 만큼이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종복을 처치하지 못했어.’
수호는 발룡이의 브레스가 마물의 장벽에 막히는 장면을 보았다.
코자크는 뒤로 몸을 빼 버렸고, 놈을 죽여 상황을 타파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드래곤을 처리하는 수밖에.’
하늘 위의 적에게 등을 내보인 채 도주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석화비도도 사거리의 제한이 있고, 크기로 찍어 누를 수도 없다.
‘제기랄, 또 온다.’
석화비도에 놀라 물러났던 드래곤이,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드래곤이 허공에 멈췄다.
석화비도의 사거리를 아슬아슬 벗어난 지점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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