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6

저쪽 세상이 큰 건가?
아니면 차원 왜곡에 변화가 생긴 건가?
물건 크기를 비교함으로써, 교류 시작 후 줄곧 느끼던 의문이 풀렸다.
“이 좁쌀 같은 건 뭔가?”
“음료인데, 너무 작아서 노야께는 쓸모가 없겠네요. 아 참, 물건을 주고받으려면…….”
수호는 【교역】 스킬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잠시 후.
“그럼 오늘은 되었으니, 내일 보세나.”
석비룡의 축객령과 함께 수호가 호리병 뚜껑 앞에서 물러났다.
* * *
다음 날 아침.
수호가 2층으로 향했다.
윌슨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호, 웬일이야. 공방에 다 찾아오고.”
윌슨이 수호를 반갑게 맞았다.
“밤새 일했어?”
“응, 어쩌다 보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네, 친구. 이 몸은 튼튼해서 별로 안 피곤하다네. 전기와 마력만 제때 공급해 주면 되지.”
통통.
윌슨이 기계 몸을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와- 근데 눈 깜빡할 사이에 많이도 들어찼네.”
수호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썰렁했던 공간이 절반쯤 설비로 들어차 있었다.
“새로 가져다준 마정석 덕분에 신상 설비가 여럿 완성됐어. 드워프 성벽에 깔 전격 충격기도 만들어지고 있다네.”
웬 기계가 열심히 돌아간다 싶더라니.
그걸 만들고 있었구만.
수호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윌슨이 말을 이었다.
“수호, 근데 아침부터 웬일이야?”
“뭐 좀 물어보려고. 혹시 쥐와 바퀴벌레를 몰아낼 방법이 없을까?”
“으으- 집에 그런 게 있었어?”
“우리 집 말고, 타차원 이야기야. 어떻게 된 거냐면…….”
수호가 석비룡과의 일을 이야기했다.
“또 새로운 차원이라니! 잘됐어. 다음에 나도 인사하러 가야겠군. 소개해 줄 거지?”
“그거야 당연하지. 어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근데 바퀴벌레약이나 쥐덫 같은 건 마트에도 팔지 않아?”
윌슨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호는 미처 설명하지 않은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쪽이 커.”
“응?”
“이제까지처럼 내가 큰 게 아니라, 그쪽이 더 크다고. 훨씬!”
“음, 그럼 약을 풀어서 해결하기는 힘들겠네.”
“맞아, 너무 많은 양이 필요할 거야.”
게다가 워낙에 크다 보니, 양을 늘린다고 시중의 약이 효과를 볼지도 미지수다.
“알았어. 찾아보면 해결책이 있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 봐.”
윌슨이 자신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마도 공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곳을.
* * *
몇 시간 후.
“수호, 이것 좀 봐.”
윌슨이 1층으로 내려오며 수호를 불렀다.
손에 금속 큐브를 들고 있었다.
“완성했어?”
“응.”
수호가 큐브를 받아 들었다.
【마도 유해 동물 퇴치기】
- 마력을 이용해 바퀴벌레와 쥐가 싫어하는 소리를 발생시키는 장치. 반경 50m 내의 바퀴벌레와 쥐를 쫓는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30
“소리를 이용했구나.”
“맞아, 크기 때문에 먹이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역시 공돌이가 최고다.
수호가 웃으며 윌슨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윌슨.”
“하하, 별거 아니라네, 친구. 나는 올라가 볼 테니, 또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시게나.”
윌슨이 2층으로 돌아갔다.
수호도 호리병 뚜껑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 내공을 주입해서 집 가운데 설치하란 말이지?”
퇴치기를 건네받은 석비룡이 신기한 눈빛으로 그것을 관찰했다.
“예.”
수호가 대답했다.
내공의 근본이 되는 ‘기(氣)’와 마력의 성질이 똑같다는 것은 이미 알아낸 후였다.
지잉-
퇴치기가 활성화되었다.
석비룡은 가게 바닥을 뜯어 퇴치기를 설치했다.
잠시 후, 석비룡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주변의 바퀴벌레와 쥐가 집에서 멀어지는군.”
곧 임무가 끝났다.
[차원 임무 【부엌을 지켜라】를 완수하셨습니다.]
[투왕 석비룡의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메시지를 본 수호의 생각이 깊어졌다.
‘10이라, 많이 오르지 않았어.’
경험상, 각 차원의 첫 임무는 제법 높은 만족도를 올려 줬다.
보통 간절한 문제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선 간단한 문제를 맡겨서 시험하는 느낌이야.’
뭐, 괜찮다.
수호가 원하는 것을 얻자면, 상당한 신뢰 관계가 필요할 터.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된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석비룡이 말했다.
“고맙네. 원하는 것이 있는가?”
“가게 뒤쪽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수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미리 생각해 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구경?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네, 구경이면 됩니다.”
아직은 거창한 걸 요구할 때가 아니니까.
“자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게나.”
대답이 떨어지자 수호가 차원 시야를 움직였다.
주방 뒤편.
석비룡에게 제지당해서 못 봤던 쪽으로.
‘여긴 노야의 방이고, 객실도 몇 개 있네. 흐음, 여긴 텃밭인가?’
차원 시야의 범위가 끝나갈 즈음, 건물 뒷마당이 나타났다.
한편에 텃밭이 보인다.
무언가 수호의 눈길을 강하게 잡아 끌었다.
‘저거… 대왕 병정개미잖아!’
텃밭을 돌아다니는 개미.
그것의 생김새가 이레귤러 몬스터, 대왕 병정개미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개미가 호리병 뚜껑을 주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상관없는 아이템을 떨어뜨리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여기 사는 놈이었구나. 그럼 던전은 텃밭 아래에 연결되어 있겠네.’
작은 미스터리가 풀렸다.
하나 궁금증이 남았다.
‘근데 어째서 이곳과 던전이 연결된 거지?’
수호가 고민하고 있을 때, 텃밭으로 따라온 석비룡이 물었다.
“이 개미도 처치해 줄 수 있겠나?”
“어, 네. 해보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새로운 차원 임무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개미 구제】를 획득하셨습니다.]
메시지를 보며 수호가 생각했다.
윌슨, 조금만 더 구르자.
* * *
[차원 임무 【개미 구제】를 완수하셨습니다.]
[투왕 석비룡의 만족도가 5 상승합니다.]
“개미까지 금세 내쫓다니, 솜씨가 훌륭하군.”
석비룡이 말했다.
수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능한 친구가 있거든요.”
윌슨은 개미 퇴치기를 뚝딱 만들어 냈다.
비슷한 일을 해 봐서 그런지, 시간도 덜 걸렸다.
‘근데 이번에도 만족도가 조금밖에 안 올랐어.’
수호가 차원 패널에서 석비룡과 관련된 부분을 확인했다.
『투왕 석비룡』
- 소속 차원 : WWWDPRTMFK-99
- 구성원 수 : 1
- 만족도 : 45/100
딱 한 명뿐인 구성원 수를 지나, 수호의 눈이 아래를 향한다.
‘여전히 만족도가 낮아.’
두 번의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50이 채 안 된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석비룡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욕구가 있다.
그것이 뭔지 알아내야 한다.
한데 수호가 석비룡의 문제를 찾아내기 전에 다른 문제가 먼저 발생했다.
“귀찮은 손님이 오는군.”
석비룡이 중얼거렸다.
“손님이요?”
짧은 시간이지만 수호는 식당에서 손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네. 음식을 팔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개미를 퇴치한 보상은 차차 생각해 보게나.
한마디 덧붙인 석비룡이 안으로 향했다.
수호도 시야를 움직였다.
쿠당탕-
그때, 입구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장사하는 거야?”
뒤이어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94화 은거 기인(3)
철두파 두목 철두는 인상을 잔뜩 쓴 채 걷고 있었다.
귀찮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깟 객잔 하나쯤 별 상관도 없을 텐데. 여편네가 엄살은, 쯧쯧.’
철두파는 흑도다.
삼류인 철두와 부하 몇이 모인 동네 깡패 무리에 불과했다.
작은 시장 거리에서 걷는 보호비가 철두파 수입의 전부.
얼마 전, 시장 거리에 새 객잔이 들어섰다.
작은 동네라 사람 수는 뻔하고 손님도 뻔했다.
거둬 봐야 몇 푼 나오지도 않을 터.
철두는 보호비 수금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한데 철두파의 돈줄인 홍금루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우리 기루 망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놈의 객잔, 가만 놔둘 거냐고요!”
홍금루는 기루다.
여성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파는 술집이다.
시장 거리에 단 하나뿐인 기루인 홍금루는 식당도 겸했다.
근처에서 주류 및 요식업을 독점하는 셈.
철두파의 수입은 대부분 홍금루에서 나온다.
철두로서도 항의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돈보다 더 큰 문제도 있었으니.
“여보! 계속 내 말 무시할 거예요? 이러다 기루 망하면 길바닥에 나앉을 거냐고요!”
홍금루의 주인이 바로 철두의 마누라라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여편네가 목소리만 커서는… 쯧.’
결국, 잔소리에 못 이긴 철두는 부하들을 달고 비룡객잔으로 향했다.
쿠당탕-
나무문이 철두의 발길질에 거칠게 열렸다.
귀찮은 심정을 담아 철두가 우렁차게 외쳤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장사하는 거야? 주인 나와!”
움찔.
한데 소리를 내지른 철두의 몸이 일순 굳었다.
‘제, 젠장,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눈앞에 거한이 서 있었다.
철두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다.
“관아에 허락은 받았다.”
거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두는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떨쳐 내며, 철두가 다시금 외쳤다.
“과, 관아의 허락? 지금 관아라고 했냐?”
“그래. 세금도 꼬박꼬박 낼 생각이다.”
“잘 생각했어. 괜히 세금 미루다가 관원들한테 찍히면 귀찮아지니까.”
대답한 철두가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병신 같은 말을 한 거야?’
귀신에라도 씐 걸까?
눈앞의 거한이 나타난 순간부터 이상하게 정신이 아득했다.
몸도 자꾸만 떨렸다.
‘제길, 이대로는 안 돼!’
철두는 배에 힘을 꾹 주고 버텼다.
부하들이 보고 있다.
이대로 멍청하게 굴다가는 언제 등에 칼이 꽂힐지 모른다.
그것이 비정한 흑도의 생리니까.
보호비 내놔!
안 내면 가게 문 닫을 줄 알아!
확 불 질러 버리는 수가 있어!
철두의 머릿속.
이제껏 늘 해 왔던 으름장들이 떠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카, 칼이라도…….’
허리춤에 걸린 칼이라도 뽑아 볼까.
허공에 몇 번쯤 휘두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객잔 주인이 겁먹지 않을까?
그런 마음은 떠오르자마자 사라졌다.
번쩍!
객잔 주인의 눈에서 맹수 같은 안광이 번뜩였기 때문이다.
‘제, 제길, 뽑았다간 죽을 거야.’
또르르.
철두의 반들반들한 정수리에서 땀이 흘렀다.
떨어지는 땀방울이 마치 목이 베여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문은?”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두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아, 아침은 먹고 왔다.”
“그럼 왜 왔지? 세금 잘 내라고, 충고하러 온 건가?”
“그, 그렇다. 세금 똑바로 내도록!”
안간힘을 써서 소리친 철두가 몸을 돌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그가 비룡객잔을 빠져나갔다.
‘두목이 미친 건가?’
‘어제 술을 너무 마시더라니.’
‘암만 봐도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부하들이 수군거리며 철두의 뒤를 쫓았다.
* * *
수호는 감탄했다.
‘대박! 기백으로 사람을 쫓아내다니.’
흉악하게 생긴 대머리 건달 두목.
기세등등하던 등장과는 달리, 놈은 헛소리만 지껄이다가 도망쳤다.
모두 석비룡의 기세 때문이었다.
‘정말 기세만으로 저런 게 가능하구나.’
말로 겁박하거나, 힘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를 압도해서 도망치게 만들다니.
수호는 거듭 감탄했다.
‘근데 표정이 왜 저렇지?’
한데 석비룡의 얼굴이 이상했다.
손도 까딱하지 않고 건달을 쫓아낸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의기소침해 보이는데.’
‘강한 인간’ 그 자체 같았던 석비룡의 표정이 왠지 처량했다.
수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야,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으음…….”
석비룡이 침음했다.
“제가 고민 상담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저한테 한번 털어놔 보십시오.”
저렇게 풀 죽어 있을 정도면, 분명 뭔가 고민이 있다.
힘으로 될 문제면, 석비룡이 해결했을 터.
하나 힘으로 안 되는 문제라면, 수호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석비룡의 입이 열렸다.
“손님인 줄 알았더니.”
“네?”
이해가 잘 안 됐다.
수호가 되물었다.
“주문을 안 했어.”
“…아까 그 건달들 말인가요?”
“며칠 만에 첫 손님인데, 아무것도 안 시키다니.”
평범한 손님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석비룡이 뇌까렸다.
수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혹시 장사가 안 돼서 고민이십니까?”
끄덕.
석비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씩 웃은 수호가 홈쇼핑 호스트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장사 잘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 * *
한동안 대화가 오간 후, 석비룡은 수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예상대로 차원 임무가 생성됐다.
『비룡객잔을 부흥시켜라!』
- 개업한 지 며칠, 비룡객잔의 손님이 뚝 끊겼다. 은거 기인 석비룡의 평안을 위해서는 비룡객잔의 영업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문제점을 파악, 수정하여 비룡객잔을 부흥시켜라!
- 보상: 투왕 석비룡의 보답.
임무를 살피던 수호의 눈길이 보상 항목으로 향했다.
중요 임무에만 주어지던, ‘보답’이 적혀 있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영업이 문제였구나.’
이미 2개의 임무를 완수했지만, 만족도 상승이 더뎠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룡객잔의 영업 자체가 문제였다.
“어떻게 도와줄 생각인가?”
석비룡이 넌지시 물어왔다.
언뜻 기대감이 비쳤다.
쥐나 개미를 쫓아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재차 확신하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인지 파악부터 해야죠.”
“으음, 문제라…….”
“그래서 말인데, 혹시 평소에 장사가 안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석비룡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답답하다는 표정은 덤.
어쩔 수 없이, 문제점 파악은 수호의 몫으로 남겨졌다.
수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일단 위생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위생이 큰 문제였다면, 쥐를 쫓았을 때 만족도가 더 올랐을 테니까.
수호가 계속 궁리했다.
‘객잔이면 기본적으로 식당이지?’
숙박업도 병행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기본은 음식점이다.
‘혹시 음식 맛이 없어서……?’
개업 초기에는 손님이 있었다.
며칠 사이 손님이 뚝 끊겼으니, 그사이 음식이 맛없다는 소문이 난 것 아닐까?
추측을 마친 수호가 입을 뗐다.
“노야, 요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좋다. 주방으로 가지.”
석비룡이 성큼성큼 부엌으로 들어갔다.
촤르르-
사사사사삭-
현란한 칼 솜씨.
재료가 자로 잰 듯 잘려 나간다.
분자 단위로 썰어 낸 듯, 표면이 매끄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요리가 진행될수록 수호의 표정이 썩어 갔다.
잠시 후.
“다 됐다. 맛을 보겠느냐?”
“…네, 조금만 주십시오.”
석비룡이 음식 한 점을 종지에 담아 수호에게 전송했다.
수호가 요리를 내려다봤다.
‘이건… 안 되겠어.’
몸을 부르르 떤 수호가 외쳤다.
“발룡아!”
* * *
멀쩡한 재료로 요리한 결과물이 진녹색 걸쭉한 독극물로 변하는 경우.
만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다.
한데 수호의 눈앞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하면 닭고기가 초록색이 되는 거지?’
재료는 닭이었다.
익히기만 하면 맛있다는 닭!
요리 전에 미리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분명한 사실이다.
한데 수호가 보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초록색덩어리였다.
경악하는 것도 당연한 일.
한데 수호보다 더한 표정을 짓는 존재가 있었으니…….
『지금 본좌에게 이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먹으란 거냐?』
발룡이가 수호를 노려봤다.
의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차마 직접 먹어 볼 엄두가 안 난다는 말은 아낀 채 수호가 입을 뗐다.
“정체불명이라니. 엄연히 요리야, 요리. 치킨이라고.”
『뭐? 그게 무슨 헛소리냐!』
“치킨 맞다니까. 잘 봐, 닭다리 살이잖아.”
『으힉! 이,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감히 누가 신성한 치느님을 모욕한 것이냐!
발룡이가 버럭 소리쳤다.
순순히 시식해 줄 태도가 아니었다.
수호가 아껴 둔 패를 꺼내 들었다.
“미식가가 시식을 거부하다니. 쯧쯧. 허명이군. 허명이야.”
『뭐라고! 감히 본좌에게 그딴 망발을!』
발룡이가 발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 배달 앱에서 리뷰를 엄청나게 달고 다닌다지?’
닉네임은 무려 미식 드래곤.
남겨 놓은 리뷰들도 가관이었다.
─ 미식 드래곤 : 양념 맛이 속살까지 배지 않았구나. 그럼에도 먹을 만한 것은 치느님의 은혜이니라. 경배하라.
─ 너무 튀겨서 속까지 퍽퍽해졌어. 겉바속촉! 후라이드의 기본도 모르는 놈 같으니, 쯧쯧.
오만한 말투.
대단한 요리사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기까지.
우연히 본 발룡이의 리뷰를 떠올린 수호가 실소를 참으며 말했다.
“조금 특이한 음식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다니, 미식 드래곤이라는 닉네임이 아깝구나.”
미식가로서 빵점이야.
일부러 크게 중얼거린 소리는 당연히 발룡이의 귀에도 들렸다.
『뭣이!』
발룡이가 굳었다.
충격받은 표정으로 멈춰 있던 발룡이는 몇 분이 지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 그럴 수가. 미식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었구나.』
그러더니 초록색 다리 살을 집어 들었다.
덥석.
살점이 발룡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화르르르-
발룡이의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건 브레스로 정화해야 하느니라!』
화르르르-
연신 불길을 쏘아 대는 발룡이를 보며 수호가 안도했다.
‘내가 안 먹길 잘했네.’
그리고 깨달았다.
‘역시 문제는 음식 맛이었어!’
겉보기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었지만.
확실해졌으니 됐다.
수호는 장렬히 전사한 발룡이를 남겨 두고, 밖으로 향했다.
‘내가 대단한 요리사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똥손을 금손으로 만들 수는 없어.’
수호는 제법 쓸 만한 요리 기술을 익혔다.
긴 자취 생활 덕분이었다.
하지만 석비룡 같은 똥손을 고칠 자신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호가 내린 판단은 간단했다.
‘마법의 가루!’
‘고향의 맛’이야말로 석비룡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단, 크기 차이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할 터.
용달차에 오른 수호가 식료품 도매상을 향해 차를 몰았다.
* * *
도매상으로 향하던 길.
수호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조미료가 있다고, 석 노야가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닭을 독극물로 만드는 똥손에게 어려운 요리는 불가능하다.
MSG만 준다고, 요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최대한 간단하게!
‘MSG로는 안 될 것 같아.’
그런 사고의 과정을 거쳐, 수호는 구매 물품을 변경했다.
일반적인 MSG에서 대용량 라면스프로!
아쉽지만 면은 구매하지 못했다.
저쪽 세상에서 쓰기에 시중의 면은 너무 가느니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수제비.
모양낼 필요 없이 그저 반죽해서 떼 넣으면 되니까.
* * *
그날 늦은 밤.
‘역시 생각을 바꾸길 잘했어.’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수호가 자신을 칭찬했다.
“다 익었군. 한번 먹어 보겠는가?”
석비룡이 국자를 내려놓고 물었다.
“네, 조금만 주세요.”
석비룡이 수제비를 종지에 담아 전송했다.
이번에는 수호가 직접 시식에 나섰다.
“됐어! 이 맛이야!”
칼칼한 라면 국물에 뜬 꾸덕꾸덕한 수제비의 식감!
수호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맛있는가?”
석비룡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노야도 드셔 보셨으니 아시잖습니까, 하하.”
“그래, 내가 큰 은혜를 입었군.”
석비룡의 감사에도 수호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임무 완수 메시지가 뜨지 않는 것이 그 방증.
잠시 생각을 정리한 수호가 입을 뗐다.
“아직입니다. 음식만 만들 줄 안다고 가게가 돌아가진 않거든요.”
음식 맛은 해결했으니, 이제 손님을 끌어모을 차례다.
95화 은거 기인 (4)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수호의 말에 석비룡이 물었다.
“뭘 더 해야 하는가?”
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면, 손님은 절로 오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
맞다.
기다리면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어날 터였다.
하나 수호는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손님을 기다릴 게 아니라, 불러야죠.”
“부른다고? 어떻게?”
“일단 가게 입구를 활짝 열고, 탁자를 가져다 놓으세요. 화로도 준비하시고요.”
객잔은 입구 쪽 벽면을 활짝 열 수 있는 구조였다. 가게 뒤에 이동식 화로가 있는 것도 미리 보아 두었다.
“자네가 그러라니, 그러겠네만.”
“저는 잠깐 다녀올 테니, 말씀드린 것 부탁할게요. 화로에 불 피울 준비도 하시고요.”
말을 남긴 수호가 병뚜껑에서 물러났다.
“수호, 새 차원 때문에 바쁜가 봐?”
때맞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와 있었네?”
한동안 2층에 처박혀 살던 윌슨이 가게로 내려와 있었다.
“드워프네 지하 방어용 장치가 완성되어서, 가져다주고 오는 길이야.”
“벌써? 고생했어.”
“괜찮아, 이쯤이야 문제없어.”
“그럼 이제 일은 끝?”
“중요한 일이 남았어.”
윌슨이 자신의 몸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아! 몸 만드는구나!”
“응, 어차피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라서, 쉬엄쉬엄하려고.”
몸 만들기는 여타의 장비 제작보다 난이도가 확연히 높다. 윌슨조차도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렇구나. 어서 사람 형태로 변하면 좋을 텐데.”
“하하, 곧 될 거야. 기대하라고, 친구!”
잠시 대화를 나누던 수호는 윌슨에게 용건을 말했다.
“아참, 혹시 선풍기 같은 것 좀 만들 수 있을까? 커다랗게 말이야.”
“선풍기도 아니고, 선풍기 같은 거? 용도가 뭐야?”
눈치 빠른 윌슨이 단번에 핵심을 짚었다.
“음식 냄새를 가게 밖으로 멀리 퍼트리는 용도야.”
객잔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음식 냄새에 이끌리도록!
“흐음, 그거야 어렵지 않지.”
공기를 멀리 보내면서, 퍼지지 않고 오래 머무르게 하면 되겠어.
마정석 가루가 남았으니 동력원도 충분하고.
윌슨은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설계도를 그려 나갔다.
잠시 후, 윌슨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한 시간이면 될 거야.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렇게 빨리?”
“여러 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딱히 품질이 좋을 필요도 없잖아.”
하긴 냄새만 좀 풍기면 된다.
“그럼 부탁할게. 고마워.”
“건물주께 충성을!”
너스레를 떤 윌슨이 2층으로 올라갔다.
수호가 윌슨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집에 램프의 요정이 사는 것 같아.’
이왕 지구인이 되기로 한 거, 지니로 개명하는 편이 나을지도…….
* * *
윌슨의 말대로 물건은 금세 완성됐다.
[마도 집풍기]란 이름의 고급 등급 아이템이었다.
크기는 방문만 했고,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목재를 쓴 것이 특징.
윌슨에게 감사를 전한 후, 수호는 호리병 뚜껑을 열었다.
석비룡이 탁자와 의자를 객잔 입구 쪽에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수호가 나타나자, 석비룡의 시선이 곧바로 차원문을 향했다.
“벌써 준비 다 끝내 놓으셨네요.”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니까. 자네도 갔던 일은 잘 해결했나?”
석비룡이 되물었다.
발치에 화로와 땔감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 준비 끝났습니다. 시작하죠.”
수호가 [마도 집풍기]를 전송했다.
석비룡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안에서 미약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게 뭔가?”
“음식 냄새를 퍼트리기 위한 장치입니다. 일단 불부터 붙이시면, 제가 작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석비룡이 화로에 손을 가져갔다.
화르르.
화로 속 땔감에서 저절로 불길이 치솟았다.
혀를 내두른 수호가 작전을 설명해 나갔다.
“작전명 시식! 지나가는 손님에게 냄새를 풍겨 다가오게 한 뒤, 음식을 공짜로 주는 겁니다. 딱 한 입만 말이죠.”
“호오- 맛있으면, 돈 내고 사 먹으란 말이군?”
“바로 그겁니다.”
자잘한 설명이 이어졌다.
석비룡이 문득 물었다.
“그럼 가게의 그릇으로는 너무 크지 않겠나?”
맞다.
시식에는 보통 작은 종이컵이나, 이쑤시개를 쓰니까.
내놓을 음식은 수제비, 작은 그릇이 필요한데.
없다.
‘아! 저 양반 솜씨면 그걸 가공할 수 있으려나? 크기는 딱인데.’
수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차원 보따리를 뒤졌다.
예전에 바비에게 받아서 쓰고 남은 강철 나무가 몇 그루 들어 있다.
“이거로 그릇을 만들 수 있을까요?”
수호가 강철 나무를 전송했다.
석비룡 손에 들린 강철 나무는 종이컵 굵기의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신기할 정도로 단단한 나무로군.”
석비룡이 손을 뻗었다.
휘리릭-
주방에 있던 식칼이 날아와 손바닥에 안착.
그 즉시 석비룡의 손이 움직였다.
츠파파파팟-
눈 깜빡할 사이.
잔가지가 잘려 나간 강철 나무가 매끈한 기둥이 되더니.
곧이어 적당한 길이로 잘렸다.
석비룡이 종이컵 크기로 잘린 나뭇조각을 집어 올렸다.
“속을 파 내면 딱 적당하겠어.”
석비룡이 손을 뻗었다.
척-
이번에는 숟가락이 날아와 잡혔다.
석비룡이 강철 나무에 숟가락을 가져갔다.
‘강철 나무를 키위 다루듯 하는구먼.’
무른 과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듯한 모습.
속이 파인 강철 나무는 곧 작은 그릇으로 변했다.
수호의 마음속에서 열망의 불길이 치솟았다.
‘무공!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무공이야!’
임무를 몇 번 완수하면서도 내비치지 않은 수호의 내심.
그것은 바로 석비룡에게 무공을 전수받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임무가 계속되니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터.
‘꼭 배우고 말겠어.’
수호가 의지를 불태웠다.
머지않아 석비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했네. 이제 점심시간도 다가오니, 시작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물 끓이세요.”
화로에 커다란 솥이 올라갔다.
작전명 ‘시식’이 시작됐다.
* * *
포목장수 왕 씨가 옆 가게 이 씨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이봐, 이 씨. 이게 무슨 줄이야?”
“킁킁.”
“응? 왜 개 같은 소리를 내고 그러나?”
“냄새 한번 맡아 보란 말일세.”
“어? 이게 무슨 냄새야?”
“맛있겠지? 다들 그 냄새 맡고 몰려든 걸세.”
왕 씨는 의아했다.
“음식 사 먹겠다고, 이렇게 줄을 섰어?”
“그건 아니고, 여기 줄 서면 공짜로 준대.”
“공짜?”
“한 그릇을 다 주는 건 아니고, 맛만 보여 준다나 봐.”
“근데 이렇게 줄을 섰어? 그냥 아무 데서나 먹고 말지.”
“자네도 방금 냄새 맡아 봤지 않나?”
“하긴, 그것참 입맛 당기는 냄새긴 하더군.”
왕 씨가 어영부영 이 씨 옆에 자리 잡고 섰다.
이 씨가 킬킬대며 물었다.
“아무 데서나 먹고 만다더니, 어째 내 옆에 섰나? 줄 서려면 뒤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어허, 이 사람아. 친구끼리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게.”
왕 씨가 능청을 떨었다.
그들의 대화는 석비룡의 귀로 흘러 들어 갔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근방 모든 소리가 석비룡의 귀를 피하지 못했다.
“맛보기는 딱 한 번뿐이야.”
“이 맛이면 당연히 돈 내고 먹어야지.”
“가게 안에 손님이 가득하네. 그렇게 맛있나?”
“암, 난 먹고 나오는 길이야. 너도 줄 서지 말고, 그냥 돈 내고 사 먹어. 후회 안 해.”
“캬아- 국물 맛이 기가 막히는구나.”
“주인장. 잘 먹고 갑니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석비룡은 전에 없던 감회를 느꼈다.
‘저리 맛있게 먹어 주다니.’
석비룡.
천하제일 고수이며, 손짓 한 번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 그였다.
돈도 명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딱 하나, 음식 솜씨만 빼면 말이다.
그런 석비룡에게도 은퇴 후의 삶은 어려웠다. 어쩌면 객잔을 선택한 것부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한데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됐다.
‘내가 이 나이에 기연을 만난 건가?’
기연이라면 숱하게 겪어 봤다.
영물의 내단도 먹어 봤고, 천년설삼이니 공청석유니 하는 절세의 보물을 취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엊그제 나타난 다른 세상의 청년은 달랐다.
수많은 경험을 한 석비룡에게조차 신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신비함 이상으로 석비룡의 마음에 들어차는 감정이 있었다.
‘고맙군. 은혜를 입었어.’
은원(恩怨)이 확실한 석비룡.
그는 수호에 대한 마음을 가슴에 새겼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이 빠져 나갔다.
가게가 한산해지더니, 어느 순간 텅 비었다.
저녁 손님이 오기 전까지, 한동안 조용할 터.
석비룡이 가게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차원문으로 몸을 내밀 수 있다고 했지?”
“네, 왜 그러십니까?”
“손을 내밀어 보게.”
허공에서 자그마한 손이 튀어나왔다.
석비룡의 손이 작은 손에 가 닿았다.
* * *
객잔이 손님으로 가득 찼을 때, 임무 완수 메시지가 떴다.
수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곧 보상을 받게 될 테니까.
이윽고 석비룡이 손을 내밀라고 했을 때.
‘뭘 주려나?’
아껴둔 영약이라도 건네려나?
수호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데 ‘보답’은 물건이 아니었다.
‘헉! 미친!’
수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근력이 1 상승합니다.]
[마력이 1 상승합니다.]
[감각이 1 상승합니다.]
[화염 저항이 1 상승합니다.]
.
.
‘스탯이 오르잖아!’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수호가 경악했다.
하나 놀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손끝으로 밀려든 석비룡의 기운이 몸속을 헤집는다.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이내 온몸이 노곤했다.
정신까지 아득하다.
곧 수호의 생각이 멎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가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는 몇 개인지 모를 스탯 상승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상태창!’
수호가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 상태창
──────────
▶ 이름 : 원수호
▶ 클래스 : 【차원 여행자】
▶ 레벨 : 67
▶ 고유 스킬
- 【소통】【교역】【???】【차원 보따리(중급)】【차원 시야(중급)】【차원 여행】
▶ 일반 스킬
- 【화염 강격】【수중 호흡】【헤이스트】【무기 강화】【하급 염동력】【상급 도축】【5연격】【차원 전음】
- 【근력 폭발】【전격의 손길】【드래곤 스탭】【거대화】
▶ 스테이터스
- [근력 69(+105)][민첩 60(+140)][체력 65(+105)][마력 56(+95)]
- [감각 57] [화염 저항 94][재생 45]
▶ 비고
- 【상급 상태 이상 면역】 적용 중.
- 【벌모세수】 적용 중.
──────────
여러 가지가 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비고’ 항목에 새롭게 떠오른 문구였다.
‘벌모세수?’
수호가 【벌모세수】의 정보를 확인했다.
【벌모세수】
- 정순한 기운으로 몸속의 노폐물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다. 경험치 획득량과 마력 회복 속도가 10% 증가한다.
- 지속 시간 24개월.
뛰어난 성능은 물론 지속 기간도 길다.
한데 놀랄 일은 더 있었다.
‘도대체 스탯이 얼마나 오른 거야?’
수호는 확장 스탯을 보유했다.
레벨 업 할 때 오르는 스탯이 분산된다.
그 탓에 장비를 뺀 각각의 스탯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 합하면 100도 넘게 오른 것 같아.’
석비룡은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 수호의 몸을 정화했다.
그 과정에서 수호의 스탯이 크게 성장했다.
덕분에 수호의 스탯은 비슷한 레벨의 헌터를 압도했다. 장비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야.’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노야, 감사합니다.”
수호가 차원문 너머 석비룡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노야는 너무 딱딱하니, 이제 선배라고 부르게나.”
무림에서야 은퇴했지만, 100년을 넘게 살았어. 인생 선배라 불러도 부족하지는 않을 걸세.
석비룡이 덧붙였다.
수호는 석비룡과 한층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도 고맙네.”
석비룡도 마주 인사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혹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 볼까?’
지금쯤이면 부탁해 볼 만하지 않을까?
수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데 수호가 미처 입을 떼기 전에 상황이 급변했다.
콰당탕-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주인장 나와!”
다시금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96화 무공을 배우다(1)
철두파 두목, 철두.
그는 무식하다.
무식한 자가 으레 그렇듯 겁이 없다.
한데 그런 철두가 무서워하는 것이 2가지 있었으니.
“아니, 여보!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는 말이에요?”
첫 번째가 눈앞에서 쌍심지를 켜고 있는 마누라다.
‘처녀 때는 안 저랬는데…….’
마누라는 기녀 출신이었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철두는 무뢰배답지 않게 순수하게 구애했고, 기어이 그녀와 혼인까지 올렸다.
한데 아줌마가 된 뒤 마누라가 달라졌다.
‘아니, 첫째 낳기 전까지만 해도 무섭지는 않았어.’
애를 낳고 조금씩 억척스러워지더니.
어느 순간, 자신이 몸담았던 기루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는 철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상투를 쥐고 흔들었다.
‘저 눈빛, 으으-’
마누라가 저런 눈빛을 보일 때면, 철두는 이상하게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철두의 머릿속에 비슷한 눈빛이 떠올랐다.
‘객잔 주인! 그놈 눈빛도 꼭 저랬어.’
적당히 어르고 돌아오길 잘했지.
철두는 비룡객잔에서 깽판 치지 않고 돌아온 자신의 행동에 만족했다.
“여보! 지금 내 말 듣고 있어요?”
마누라의 잔소리에 밤새도록 시달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이튿날.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그놈의 객잔 문을 닫게 만들겠다!”
철두가 씩씩거리며 비룡객잔으로 향했다.
잠이 모자라 충혈된 눈이 자못 결의에 차 있었다.
쿠당-
“주인장 나와!”
* * *
“주문할 건가?”
석비룡이 물었다.
태연한 태도,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철두는 무릎이 후들거렸다.
“이, 이 거리에 식당은 하나로 충분하다!”
철두가 반항적으로 소리쳤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석비룡이 여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문은 안 할 거란 말이지?”
주문을 안 하면 손님이 아니다.
손님이 아니면 어떻게 될까.
썰어서 수제비에 넣어 줄까?
철두에게는 석비룡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수, 수제비 하나… 아니, 일곱!”
이끌고 온 부하들 머릿수까지.
반사적으로 주문한 철두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제, 제기랄. 이게 뭐야!’
흘끔.
주방 쪽을 살폈다.
주인장은 태연한 표정으로 요리 중.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부하들이었다.
‘형님이 어디 아프신 건 아닐까?’
‘머리에 고뿔이라도 걸린 건가? 남들보다 머리 쪽이 더 추울 거 아냐?’
‘저러다가 또 형수님한테 쥐 잡듯이 잡힐 텐데 어쩌시려고.’
부하들의 눈빛이 바쁘게 오갔다.
귀로 듣지 않아도 철두는 그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제길, 이대로 가다가는 마누라는커녕 부하들한테까지 무시당할 거야.’
때마침 석비룡이 수제비를 가지고 왔다.
철두가 벌떡 일어섰다.
“난 용납 못 해!”
“뭘?”
석비룡이 눈도 깜빡 않고 물었다.
부르르.
다시 무릎이 떨려 왔지만, 철두는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이, 이 거리에 식당이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랬다가는 두 집 다 망하고 말 거야. 두 가게를 다 채울 만큼 손님이 없단 말이다!”
철두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논리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급박한 상황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지?”
석비룡의 물음에 철두가 움찔 굳었다.
눈 깔아, 이 자식아!
가게 닫아!
내 구역에서 꺼져!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못했다.
대신 철두의 돌머리만 팽팽 돌았다.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속도로.
잠시 후, 철두는 또다시 뜻밖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스, 승부다!”
“……?”
“식당이니 요리로 승부한다!”
“요리?”
“그렇다. 요리 대결! 열흘 뒤, 서로 자신 있는 요리를 내걸고 승부를 펼친다. 내가 이기면 개, 객잔의 문을 닫아라.”
“호오- 그럼 내가 이기면?”
움찔.
잠시 굳었던 철두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금홍루에서 식당을 그만두겠다!”
부하들이 웅성거렸다.
“혀, 형님, 어쩌시려고.”
“형수님 아시면 진짜 큰일 납니다요.”
“아이고, 우리 형님. 형수님한테 머리 다 쥐어뜯기겠… 아, 원래 없었지.”
철두가 버럭 외쳤다.
“닥쳐, 이것들아!”
한바탕 촌극을 구경하던 석비룡의 눈꼬리가 슬쩍 휘어졌다.
“승부라.”
무림 출도 후, 한 번도 승부를 피한 적이 없던 석비룡이었다.
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승부 근성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그래. 승부다! 식당의 명운을 건 승부!”
내친걸음.
철두가 꽥 소리 질렀다.
“받아들이지.”
석비룡이 대답했다.
입가에 완연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몇 대 쥐어박으면 쉽게 끝날 일을…….’
수호가 어이없는 눈으로 석비룡을 쳐다봤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아하니, 석비룡의 내심이 짐작됐다.
‘즐기고 있구만.’
고개를 내저은 수호가 눈앞을 확인했다.
[차원 임무 【승부의 전제조건】을 획득하셨습니다.]
석비룡이 승부를 받아들였을 때 떠오른 임무였다.
수호가 임무 창을 띄웠다.
【승부의 전제조건】
- 철두파 두목 철두가 객잔의 명운을 건 승부를 요청했다. 석비룡은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상대는 비겁한 수작을 마다치 않는 건달 무리. 정당한 승부가 이뤄지도록, 철두파의 수작을 미연에 방지하라.- 보상 : 투왕 석비룡 만족도.
수호는 곧바로 임무의 성질을 파악했다.
‘이건 요리 승부로 가기 위한 연계 임무쯤 되겠네.’
결국, 요리 대결에 승리를 거둬야 끝날 일이니까.
‘그럼 이번 임무부터 후딱 해치워 볼까?’
수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철두가 일어섰다.
“가게 문 닫을 준비나 하시지, 흥!”
한마디를 남긴 철두가 밖으로 향했다.
“수제비 냄새 죽이던데. 밥은 먹고 가죠, 형님!”
“닥치고 따라와! 이 돌대가리야!”
“헉! 형님한테 저런 말을 듣다니… 난 이제 끝인가 봐.”
문밖에서 소리가 멀어졌다.
수호가 석비룡에게 말했다.
“선배님, 잠시 건너가겠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게.”
수호가 【차원 여행】 스킬을 발동하여 비룡객잔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식당 내부가 보였다.
‘크기 차가 심하구만. 객잔이 운동장 같아.’
직접 넘어오면서 차원문으로 인한 크기 왜곡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슨 용무로 직접 넘어온 건가?”
석비룡의 목소리가 수호를 상념에서 깨웠다.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다녀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게나.”
찬장을 붙잡고 바닥으로 내려선 수호가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잠시 후.
수호는 철두를 쫓아 기루에 들어섰다.
‘여기가 금홍루구나.’
1층은 식당.
2층부터는 기루를 운영 중이었다.
철두와 부하들은 곧장 2층으로 향했다.
술상이 차려지고 술이 돌았다.
술기운이 오르자 부하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형님, 진짜로 요리 대결을 펼치시려고요?”
“평소처럼 탁자나 몇 개 때려 부수고 으름장 좀 놓으면 될 걸, 왜 그러세요?”
“그러다 형수님한테 머리 다 쥐어뜯… 아, 없지, 참.”
수호는 창틀에 앉아 철두와 부하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작은 크기 덕분에 따로 은신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몇 분쯤 지났을 때, 부하 중 한 놈이 의견을 냈다.
“형님, 정 요리 대결을 하고 싶으면, 확실히 이길 방법을 써야죠.”
“무슨 소리냐?”
“제가 아까 수제비 국물을 맛봤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더라고요. 잘못하다 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으음…….”
철두가 침음했다.
깽판 치기 무서워서 요리 대결을 제안한 것뿐.
뒷일까지 생각해 두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리 손을 쓰죠.”
“……?”
“비룡객잔에 들어가는 음식 재료도 근처에서 사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뭘 좀 섞어 버리면…….”
놈이 비릿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차라리 대결 당일에 완성된 요리에 섞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실수인 척, 돼지 오줌을 확 끼얹어 버리는 겁니다. 흐흐흐.”
그 이후에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아예 재료를 사지 못하게 하자든가.
비룡객잔의 요리 도구를 훔치자든가.
각종 비겁한 방법을 들은 철두의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크흐흐, 됐어. 질 리는 없겠군. 좋아.”
철두가 술병을 집어 들고 호쾌하게 병나발을 불었다.
부하들도 신나서 술을 들이켰다.
수호는 커다란 머저리들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저것들을 어떻게 한다?’
쥐어박는 거라면 어렵지 않다.
철두파의 실력이라야, 삼류.
【거대화】를 시전한 뒤 패면, 일은 금세 끝날 터.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폭력을 동원할 거였으면, 굳이 내 손을 빌리지도 않았겠지.’
저런 동네 건달쯤이야, 석비룡이 콧김만 뿜어도 날아갈 터.
번거로운 요리 대결에 응한 것은 문제를 칼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석비룡의 의지였다.
그러니 수호 또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두들겨 패서 해결할 수는 없으니, 겁이라도 줘 볼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열흘이라는 여유가 있기에 시도해 볼 만한 방법.
‘차원 여행!’
생각이 정리되자 수호가 서둘러 지구로 돌아갔다.
간단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며칠 후, 아침.
“으헉-”
철두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굴 가득 식은땀이 흘렀다.
“비, 빌어먹을!”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철두는 황급히 움직였다.
털썩.
철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도 조아렸다.
“귀, 귀신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절대로 비, 비겁한 수작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비룡객잔의 재료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음식에도 손대지 않겠습니다.”
쿵쿵.
철두의 철두鐵頭가 바닥을 찧었다.
“정당하게 요리로 승부할 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쿵쿵.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철두의 이마를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수호였다.
‘이만하면 됐으려나?’
수호가 휴대폰을 조작했다.
철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흘 걸렸네. 생각보다 담이 작아서 다행이야.’
수호는 철두의 귓속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집어넣었다.
미리 녹음한 음성 파일을 밤새 재생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으면, 네놈을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 으흐흐흐흐흐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유황불에 끝없이 태워질 것이야. 으흐흐흐흐흐흐-』
각종 음향 효과가 더해져 괴기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것이 사흘 내내 이어졌다.
철두는 평정을 잃었다. 수호의 의도대로 목소리의 정체를 오해했다.
‘귀, 귀신이야!’
귀신!
바로 철두가 마누라 다음으로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철두의 두려움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밥은 입에도 못 대고, 사흘 내내 술만 마신 철두.
쿵쿵-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정정당당하게 겨루겠습니다.”
그가 기어이 백기를 든 것이다.
‘저놈 안색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그러면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수호가 생각하는 순간, 예상대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승부의 전제조건】을 완수하셨습니다.]
[투왕 석비룡의 만족도가 5 상승합니다.]
[차원 임무 【승부의 전제조건】이 【요리 대결】로 연계됩니다.]
‘역시 연계 임무였어.’
애초부터 요리 대결과 연관된 문제.
연계 임무가 뜨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임무 내용도 예상대로겠지?’
수호가 새 임무의 내용을 확인했다.
예측한 대로 석비룡을 도와 요리 대결에 승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눈여겨볼 점이라면 하나.
‘이번에도 보상이 보답이야.’
보상 항목에 명시된 ‘보답’이란 문구.
그것을 보는 순간 수호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왠지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수호가 할 일은 뻔했다.
석비룡의 요리 실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동시에 승리를 위해 준비한다.
이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비장의 한 수를.
* * *
대륙의 3할을 지배하는 광활한 청룡성의 성주 하후명.
전대 성주인 아버지가 요절한 후.
하후명은 젊은 나이에 자리를 물려받았다.
급히 얻은 성주 자리였지만, 그는 몇 년째 청룡성을 잘 다스려 오고 있었다.
그런 하후명에게 한 가지 훌륭한 취미가 있었다.
암행(暗行).
변장하고 성내를 시찰하는 것이다.
백성의 문제를 직접 파악하겠다는 좋은 취지였다.
하나 내심은 약간 달랐으니.
‘이때만큼 마음 편한 순간이 없구나.’
암행에 나설 때만은 성주로서 위엄을 내려놓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하후명이 오늘 들른 곳은 어느 마을의 시장 거리.
한데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리가 붐비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앞에서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홍루에서 대단한 숙수(熟手:요리사)를 불러왔어. 성주님의 숙수라니.”
“어허- 이 사람아. 성주님의 숙수가 아니라, 성주님의 요청을 거절하고 낙향한 숙수라 하지 않는가.”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자신의 요리를 위해 청룡성을 거절했다니, 우리가 오늘 횡재했군.”
“그러게 말일세. 헐값에 대단한 요리를 얻어먹겠구먼.”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승부는 해보나 마나인 것 같네.”
“새로 생긴 객잔이 불쌍하게 되었어.”
하후명은 의아했다.
‘내 청을 거절했다고? 그런 기억은 없는데.’
변복한 채 하후명을 수행하던 호위 무사가 슬쩍 다가왔다.
“알아볼까요?”
“조용히 알아보게.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잠시 후, 호위 무사가 돌아왔다.
“요리 대결이 펼쳐진다고 합니다.”
“요리 대결?”
“예, 금홍루란 기루와 비룡객잔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요리 대결로 승부를 겨루기로 했다는군요.”
“호오- 승패는 어떻게 가린다는가?”
하후명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재료와 요리 방식은 자유고, 승패는 음식을 먹은 사람들의 투표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호패를 내보이면 음식을 살 수 있으며, 그때 투표용 목패木牌를 얻을 수 있다.
음식값이 매우 저렴하여 사람이 몰렸다.
호위 무사가 알아 온 내용을 설명했다.
허술한 판정 방식이다.
하나 하후명은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하긴 작은 마을에서 사사로이 행해지는 승부, 먹을 사람에게 판정을 맡기는 편이 나을지도…….’
하후명이 인파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호위 무사가 다급히 만류했다.
“저희가 조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괜찮아. 기껏해야 민초들 아닌가. 자네와 친구들 실력이면, 나를 지키기에는 차고 넘치네. 그리고…….”
하후명은 뒷말을 속으로 감추었다.
‘가게를 걸고 요리 대결이라니! 이런 행사를 그냥 지나칠 수야 있나.’
마음의 피로를 해소할 절호의 기회!
하후명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인파 사이로 들어갔다.
97화 무공을 배우다(2)
지난 며칠, 수호는 석비룡의 요리 솜씨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석비룡은 요리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다행히 배운 대로 정확히 움직일 줄은 알았다.
‘이 정도면 승산은 충분해.’
어차피 상대도 동네 기루의 요리사.
대단한 수준은 아닐 터.
수호가 준비한 메뉴와 비장의 무기가 합쳐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수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결장으로 향했다.
오늘 수호가 맡은 역할은 석비룡의 보조.
【거대화】를 최대로 시전하니 간신히 어린이 크기가 되었다.
잠시 후, 도착한 대결 장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변수군. 성주의 숙수를 초대하다니.’
겁을 더 줘야 했었나?
수호가 스산한 눈빛으로 철두를 응시했다.
불안한 눈빛,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수호의 감각에 철두의 중얼거림이 잡혔다.
‘으으으- 귀신님, 저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다 마누라 짓입니다.’
수호의 시선이 움직였다.
철두 옆에 선 앙칼진 인상의 여성.
아마 오늘 일에 변수를 일으킨 장본인이리라.
‘어쩔 수 없지. 지금 와서 뒤집어엎기도 힘들고.’
【승부의 전제조건】 임무가 완수된 탓에 마음을 놓았다.
한데 설마 철두가 아니라 그 부인이 움직일 줄이야.
‘요리로 이기는 수밖에 없군. 뭐, 요리사 초빙까지 비겁한 수작이라 단정 짓기도 그렇고.’
떨떠름했지만, 납득했다.
화낸다고 뒤집힐 상황이 아니니까.
지금 할 일은 준비한 요리를 완벽히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면 상대가 누구든 승산은 있다.
수호가 석비룡을 쳐다봤다.
석비룡도 때마침 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네. 신세는 이기고 갚도록 하지.”
석비룡이 당당한 걸음으로 대결장으로 들어섰다.
* * *
숙수 막평은 한숨이 나왔다.
‘하아- 내가 어쩌다가…….’
철두의 부인에게 금화 5냥을 받기로 하고 참가한 요리 대결.
급전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이따위 일은 맡지도 않았을 텐데.
‘청룡성 주방에서 일하던 내가 어쩌다가.’
막평은 소문처럼 정말 청룡성에서 일했었다.
하지만 소문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막평은 청룡성 숙수 아래에서 허드렛일을 맡아 하던 막내 숙수였다.
말이 막내지, 사실상 잡일꾼 신세.
어느 날 성주가 죽고 숙수가 바뀌었다.
“허드렛일이라도 계속하겠느냐?”
새 숙수가 막평에게 제안했다.
“계속 잡일이나 하라고? 더는 못 해먹겠다.”
그렇게 제안을 뿌리치고 나온 것이 이야기의 전말.
문제는 막평의 입이었다.
술에 취해 허세를 부리는 사이, 이야기에 자꾸 살이 붙었다.
그러더니 막평은 어느새 성주의 청을 뿌리치고, 요리의 길을 걷는 대단한 숙수가 되어 있었다.
‘흥! 허명만 가득한 놈들보다 내가 훨씬 낫지.’
하나 막평은 거리낌이 없었다.
요리 실력만큼은 자신이 성주의 숙수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막평의 눈에 승부의 상대가 보였다.
‘저 기본도 안 된 놈 같으니, 쯧쯧쯧.’
칼도 제대로 못 잡는구먼.
막평이 혀를 찼다.
엄지는 칼 옆구리에, 검지는 칼등에.
칼을 잡는 손은 응당 그래야 한다.
그래야 재료를 썰면서 칼이 옆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데 석비룡의 손은 무사가 검을 쥐듯 손잡이를 감싸고 있었다.
막평이 어이없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막평은 시작도 전에 승리를 확신했다.
‘긴장할 필요도 없겠어.’
한 번 더 혀를 찬 막평이 요리를 시작했다.
촤르르르르-
잘 달궈진 냄비에 닭이 볶아진다.
오늘 막평이 준비한 요리는 궁보계정.
각종 채소와 함께 닭을 매콤하게 볶아 내는 요리였다.
요리가 완성되어 갈수록 막평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하필 날 만난 걸 불운으로 여겨라.’
금홍루 숙수가 나섰다면 석비룡에게도 승산이 있었을 터.
하지만 막평 자신이 상대인 이상, 그럴 일은 없다.
충만한 자신감과 함께 막평이 석비룡을 흘끔 쳐다봤다.
‘흐흐흐- 볼 것도 없어. 내가 이겼다.’
석비룡의 요리를 본 막평의 자신감이 한층 더 솟구쳤다.
석비룡의 요리는 튀김이었다.
튀김은 맛있다.
하나 단점이 분명하다.
‘하필이면 느끼한 걸 들고 왔군. 흐흐.’
튀김은 기름지다.
느끼한 것이 순리.
자연스레 매콤한 음식이 당길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느끼함을 잡아 준 매콤한 궁보계정이 남을 터.
막평은 승리를 10할 자신했다.
잠시 후, 시식이 시작됐다.
“오- 궁보계정이야. 빛깔이 죽이는걸?”
“청룡성의 숙수라더니, 역시!”
막평 쪽에 먼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쪽 튀김도 먹음직스러워.”
머잖아 석비룡의 요리를 먹는 사람도 나왔다.
사람이 잔뜩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흐흐, 그래 봐야 결국 다 이쪽으로 오게 되어 있지.’
그럼에도 막평은 걱정하지 않았다.
저런 느끼한 닭튀김을 얼마나 오래 먹고 있겠는가.
“튀김옷이 기가 막히게 바삭하네.”
“고소해. 맛있다.”
“근데 기름져서 자꾸 먹으니까 좀 물리는군.”
슬슬 예상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한데 그때, 상대 요리사 옆에 보조로 따라온 꼬맹이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양념?’
색색의 양념 통이 종지에 담겼다.
소년은 그것을 닭튀김을 든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이건 무슨 양념인가?”
궁금증을 느낀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누군가 소년에게 물었다.
“드셔 보시면 압니다.”
소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뒤로 상황이 바뀌었다.
“어? 이게 무슨 맛이지?”
“매콤달콤하면서 이상한 향이 나. 맛있는 향이.”
“도대체 무슨 양념이지?”
“무슨 맛이면 어떤가, 맛있으면 그만이지.”
느끼함을 못 이기고 궁보계정으로 다가오려던 사람들이 제자리에 못 박혔다.
석비룡 앞에 줄이 생겨났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막평이 소년을 노려봤다.
* * *
‘오케이, 1단계는 성공이야.’
수호가 안도했다.
대결이 성사된 후, 가장 고민한 것이 메뉴 선정이다.
똥손인 석비룡이 해낼 수 있으면서도 맛있어야 하니까.
수호는 발룡이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라고 생각해?”
잠시 고민하던 발룡이가 대답했다.
『후라이드 치킨이다. 갓 튀긴 후라이드를 소금에 살짝 찍어 먹는 그 맛. 바삭한 식감과 나트륨의 조화! 그 어떤 맛도 기름에서 막 건져 올린 치느님의 고소함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라.』
미식 드래곤이란 닉네임이 아깝지 않은 표현이었다.
메뉴는 그렇게 정해졌다.
‘튀김옷은 크리스피 형식으로 최대한 바삭하게. 튀김옷 자체에 매콤한 양념을 넣어…….’
레시피를 검색하던 수호는 문제에 봉착했다.
‘느끼해. 결국 느끼함이 발목을 잡을 거야.’
느끼함을 해결해야 승부에 이길 수 있다.
수호는 다시 고민했다.
장고 끝에 수호가 떠올린 첫 번째 해결책.
그것은 각종 소스를 곁들이는 것이다.
칠리소스부터, 머스타드, 치즈 가루까지.
석비룡의 세상에 없을 만한 소스가 총동원되었다.
그리고 지금.
해결책은 훌륭히 통했다.
“이 가루는 뭐지? 굉장히 담백하고 고소한걸?”
“이 노란 양념은 달콤하고 맛있어. 칼칼한 향도 좋고.”
“붉은색은 매콤하군. 찍어 먹으니 느끼함이 한결 가시는구먼.”
“하나같이 처음 보는 맛이야. 질릴 틈이 없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호가 미소 지었다.
반면 막평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제기랄, 대체 저깟 양념이 뭐기에 저러는 거야!’
어째서 저쪽에 사람이 더 많은 거냐고!
말이 안 된다.
칼도 제대로 못 쥐는 놈의 요리가 맛있을 리 만무.
결국, 꼬맹이가 내놓은 양념 때문일 터였다.
하나 양념을 못 쓰게 할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뒤집는다.’
이를 악문 막평이 요리용 술병을 집어 들었다.
촤악-!
달궈진 냄비에 술이 들어가자 불길이 치솟았다.
막평이 손목을 경쾌하게 움직였다.
“저기 좀 봐! 냄비에 불이 붙었어.”
“불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군.”
“역시 청룡성 숙수라더니, 기술이 엄청난걸.”
시선이 모인다.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이 는다.
막평은 떨리는 손목을 참아 가며 불쇼(?)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수호가 막평을 쳐다봤다.
‘유명한 요리사라 그런가, 확실히 만만치 않아.’
좌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퍼포먼스.
수호는 그 또한 요리사의 솜씨임을 인정했다.
물론, 인정과 승부는 별개.
‘이쯤 해서 나도 비장의 무기를 꺼내 볼까.’
수호가 준비해 온 상자를 열었다.
얇게 깔린 얼음 위에 호리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음료예요. 닭이랑 같이 드세요.”
수호가 손님들에게 병을 건넸다.
“음료? 병이 시원하네. 마셔 볼까.”
“억- 이게 무슨 맛이야? 입이 따끔거려.”
“개운해! 입안에 기름이 싹 걷히는 느낌이야.”
“이보게, 이건 도대체 무슨 음료인가? 혹시 술인가?”
누군가 기어이 수호를 붙잡고 물었다.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비룡객잔 특제 음료입니다. 색깔이 검어서 흑주(黑酒)라고 부르고요. 지금 드신 것은 주정이 안 들어가서,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합니다.”
음료의 정체는 콜라였다.
“흑주? 그러고 보니 색이 검군.”
“무슨 색이면 어떤가, 이렇게 맛있는 것을.”
“그러게. 신기할 정도로 이 닭튀김과 잘 어울리는구먼.”
호평 일색이 이어진다.
그러던 중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이건 주정이 안 들었다고? 그럼 혹시 주정이 든 것도 따로 파는가?”
수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주정이 든 것도 있지요.”
수호가 호리병을 내밀었다.
콜라에 소주를 섞은 것으로, 맛은 콜라와 거의 같았다.
“이건 약간 알싸한데.”
“으흐흐- 맛있는 음식에 술까지. 완벽하구만. 난 아무래도 비룡객잔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아.”
“자네도? 나도 그렇네.”
“나도! 닭튀김도 좋고, 이 흑주도 끝내주는군.”
“비룡객잔이 내기에 지면, 흑주를 다시는 못 마시는 거지? 그렇다면 나도 무조건 이쪽 편일세.”
사람들이 속속 석비룡 쪽으로 몰려든다.
‘이겼다.’
수호는 승리를 예감했다.
* * *
머잖아 대결이 끝났다.
승부의 결과를 알아볼 차례.
각 가게에서 받은 목패(木牌)의 수를 헤아려 보면 된다.
- 금홍루 18표.
- 비룡객잔 95표.
‘이겼어!’
수호가 쾌재를 불렀다.
석비룡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데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사람이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칼도 못 쥐는 머저리 따위에게 졌다고?”
막평.
그는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뭐래? 저 양반 왜 저러지?”
“결과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비룡객잔의 요리가 훨씬 색다르고 맛있었어. 당연한 결과야.”
“대단한 숙수라더니, 자존심이 상했나 보군.”
사람들의 반응은 막평의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존심’ 운운하는 말은 더더욱.
“이, 이 빌어먹을! 아무것도 모르는 촌무지렁이들이!”
막평의 눈이 뒤집어졌다.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모금씩 집어 마신 요리용 술 탓일지도 모른다.
막평이 식칼을 집어 들었다.
“헉! 미친! 칼을 휘두른다!”
“왜 저러는 거야?”
“아까 보니 술을 마시던데, 취해서 정신이 나간 건가?”
부웅- 부웅-
막평이 식칼을 허공에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저딴 놈에게 내가 질 리 없어!’
성주의 청을 거절한 대단한 숙수.
하나 현실은 허드렛일 하던 잡일꾼.
비밀을 합리화하기 위해 막평은 늘 자신을 세뇌했다.
자신은 주방 잡일꾼이었지만, 요리 솜씨만은 성주의 숙수 못지않다고.
한데 그런 막평의 자존심이 뭉개져 버렸다.
“이익- 맛도 제대로 못 느끼는 병신들! 네놈들은 내 요리를 먹을 자격이 없어! 성주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단 말이다!”
막평이 허공에 마구 칼을 휘두르며 울분을 토했다.
“추하군.”
그때 누군가 막평을 꾸짖고 나섰다.
젊은 남자였다.
손에는 흑주가 담긴 병을 들고 있었다.
“입맛은 정직한 법. 더 맛있는 음식에 더 많은 표가 몰렸을 뿐이니라.”
말을 마친 남자가 보란 듯 호리병을 기울였다.
막평의 눈이 희번덕 돌아갔다.
“넌 또 뭐야!”
막평이 막 허공에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채채채채챙-
사방에서 나타난 칼날이 막평의 목을 겨눴다.
꿀꺽-
막평의 울대가 움직였다.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상했던 자존심도 어느새 뒷전으로 물러났다.
“누, 누구냐… 십니까?”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탓이다.
상대 남자가 겉에 두른 도포를 벗어 던졌다.
안에 입은 푸른 옷이 드러났다.
“성주님의 푸른 용포다!”
“성주님? 청룡성주님이라고?”
“예전에 한번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어! 저건 진짜로 성주님의 용포가 맞아.”
호위무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분은 청룡성을 다스리는 이 땅의 주인, 청룡성주님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쩌렁쩌렁 퍼져 나간다.
털썩, 털썩-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이 성주를 대하는 이 세상의 예법.
수호도 냉큼 엎드렸다.
단, 한 명.
목에 칼이 겨눠진 막평만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런 막평을 향해 성주 하후명이 물었다.
“내 청을 뿌리치고 성을 나갔다고?”
“……!”
막평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하후명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차차 듣도록 하지.”
하후명의 고갯짓에 호휘무사가 막평을 끌고 갔다.
장내가 단박에 정리됐다.
하후명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무리가 볼썽사나웠다고는 하나, 오늘의 일은 본 성주에게도 훌륭한 여흥이었다. 그렇기에 상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고자 한다.”
백성들이 쥐 죽은 듯 귀를 기울인다.
하후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비룡객잔에 금 30냥을 내리고, 시장 거리의 세전을 3달간 면제토록 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하후명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철두 쪽으로 고정한 채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룡객잔의 음식은 본성의 훌륭한 자산! 오늘 이후로 비룡객잔에 쓸데없는 시비를 벌이는 자가 있다면, 청룡성주의 이름으로 벌하겠노라.”
명백한 경고.
호위무사의 조사로 인해 하후명은 이미 저간의 사정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헉!”
철두가 헛숨을 토했다.
옆에 엎드린 부인도 몸을 떨었다.
‘호오- 앞으로 귀찮아질 일은 없겠네.’
수호가 겁먹은 철두를 보며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난 성주의 선언 덕분에 비룡객잔의 미래는 순탄할 것이다.
“성주님 만세!”
“성주님 만세!”
“성주님 만세!”
환성이 울려 퍼졌다.
세금을 면제받은 백성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동시에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요리 대결】을 완수하셨습니다.]
[투왕 석비룡의 만족도가 30 상승합니다.]
‘됐어.’
혹시 무공을 배울 수 있으려나?
수호가 즐거운 기대를 하고 있을 때.
하후명의 호위무사가 조용히 다가왔다.
“성주님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네.”
98화 무공을 배우다(3)
문 닫힌 비룡객잔 안.
하후명이 석비룡과 수호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긴장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문을 연 하후명이 곧이어 덧붙였다.
“흑주가 훌륭하더구나. 독특하면서도 풍미가 있어. 성에 들이고 싶은데, 가능하겠느냐?”
석비룡이 대답 대신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석비룡이 입을 열었다.
“흑주는 이 아이가 만드는 것으로, 방법 또한 이 아이만이 알고 있습니다. 혼자 만들다 보니, 많은 양을 준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후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기특하구나. 하나 양의 문제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본 성주가 간간이 즐기려는 것이니, 그다지 많은 양은 필요 없느니라.”
“날짜를 미리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하후명이 시선을 수호에게 돌렸다.
“어린 녀석이 혼자 흑주를 빚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여 그냥 갈 수가 없구나. 원하는 것이 있느냐?”
원하는 것?
당연히 있지.
무공!
하지만 수호는 입을 떼지 못했다.
소탈해 보이긴 하나, 처음 보는 성주.
함부로 내심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기왕 배울 거면, 최고에게 배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수호가 고민하는 사이, 석비룡이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였습니다. 몸을 보할 영약을 내려 주십시오.”
“얼굴 생김새에 비해 덩치가 작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좋다. 영약을 내릴 테니, 먹고 맛있는 흑주를 만들도록 하거라.”
말이 끝나자, 호위무사가 품에서 주먹만 한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 * *
하후명은 곧 돌아갔다.
수호는 그가 놓고 간 상자를 열었다.
[청룡보신단]
- 수백 가지 약초를 청룡성 특유의 비법으로 고아 만들어 낸 영약. 상처 치료 및 원기 회복에 효과를 보인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복용 시 체력 +30 마력 +30
- 복용 시 【중급 치유】 효과 적용.
‘비상약이었구나.’
달라는 즉시 내놓기에 의아했는데, 하후명이 가지고 다니는 상비약인 듯했다.
치유 효과에 스탯 상승까지.
성능도 훌륭하다.
‘보너스는 이 정도면 됐고, 진짜 보상을 받을 차롄데.’
수호가 석비룡을 쳐다봤다.
일전에 받은 【벌모세수】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번 보답 또한 가볍지 않을 터.
‘이제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수호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 석비룡의 입이 열렸다.
“수호.”
“예, 선배님. 말씀하십시오.”
석비룡이 수호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하게.”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석비룡의 눈빛이 심유하게 빛났다.
수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좋네.”
석비룡이 흔쾌히 대답했다.
한데 그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단, 사승 관계는 맺지 않겠네. 그저 지금까지처럼 선배로 부르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자네에게 이쪽 세상의 법도를 강요할 필요는 없지. 따로 중요한 이유도 있고 말이네.”
“중요한 이유요?”
“자네는 내 무공을 익힐 수 없거든.”
“……?!”
무슨 말이지?
방금 분명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했었는데.
“각성자라고 했던가. 벌모세수를 하면서 살펴보니, 자네 몸이 몹시 특이하더군. 그대로는 내 무공을 익히지 못할 것이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무공을 가르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닐 터.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네 몸에 맞는 무공을 새로 만들 생각이야. 정확히는 자네와 내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셈이지.”
“아!”
하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석비룡쯤 되면 그럴 만하다.
어쨌든 수호에게는 바라던 결과였다.
“그럼 어떻게 할지 설명해 주지.”
석비룡이 무공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 * *
석비룡의 말은 이랬다.
“자네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품고 있어. 내공을 품는 그릇으로는 훌륭하네만, 그것을 움직이는 요령은 형편없어. 마치 누군가 정해 놓은 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더군.”
수호도 공감했다.
‘스킬을 익히는 것도, 시전하는 것도 모두 시스템의 보조로 가능한 일이니까.’
석비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꼭 나쁘지만은 않네. 자네 몸에는 상당히 큰 기운이 흐르고 있어. 그것을 올바른 경로로 움직여 주기만 해도, 훨씬 큰 힘을 쓸 수 있을 걸세.”
단전을 형성해 내공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스템이 더하는 기운이, 어디에 어떻게 쌓일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몸 전체에 큰 흐름을 만들어 새 기운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한다.
설명의 골자는 그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치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수호는 석비룡의 방식에 따르기로 했다.
‘잘 모르면 그냥 선배님한테 맡기는 편이 나아.’
드워프와 윌슨을 겪으며 깨달았다.
괜히 어설프게 참견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그냥 맡기자.
거장(巨匠)이 괜히 거장이 아닌 법이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석비룡이 말을 이었다.
“내부의 기운은 그렇게 다스리면 되고, 몸의 움직임 쪽은… 역시 몸에 직접 새기는 것이 좋겠군.”
“……?”
“나와 손속을 나눠 보자는 의미네. 그편이 가장 빠를 거야.”
“아!”
구르다 보면 는다는 소리였다.
“일단은 대련으로 시작하고, 내공이 자리 잡으면 제대로 된 수법도 가르쳐 주지. 매일 들르도록 하게. 그나저나 자네가 조금 더 컸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
커야 두드리는 맛이 있는 법인데.
덧붙인 석비룡의 말에 수호는 등골이 서늘했다.
“마력이 부족해서, 당장은 어린아이 크기가 한계입니다.”
“부족하면 채우면 되겠지. 내기를 다스리다 보면, 마력도 금세 늘 걸세. 아까 성주에게 얻은 영약도 있지 않나?”
“…그렇군요.”
석비룡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하지. 등 돌리고 정좌하게나. 영약도 바로 먹고.”
“예.”
수호가 석비룡의 말대로 준비를 마쳤다.
석비룡이 수호의 등에 손을 댔다.
한줄기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크윽-’
내공이 몸을 헤집는 충격에 수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 정신 차려! 흐름을 기억하게!
석비룡의 목소리가 수호의 머리를 울렸다.
수호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몸 안을 돌아다니는 기운의 흐름을 읽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그것을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잡아 냈다.
얼마 후.
수호가 무아지경에 빠졌다.
석비룡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첫날부터 제법이군.’
석비룡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무공이라고는 익혀 본 적도 없을 텐데. 내가 이끈 대로, 흐름을 완벽히 파악하고 기억했군.’
석비룡은 각성자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고한 경지에 오른 무인의 감각이 속삭였다.
저토록 완벽하게 기를 읽어내는 것이 모든 각성자의 특징은 아닐 거라고.
오직 수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귀한 인연을 얻었어.’
덕분에 새 인생을 즐겁게 시작했는데.
이제는 가르치는 기쁨도 얻게 된 셈이다.
석비룡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 * *
[고유 스킬 【차원 호신무】를 획득합니다.]
‘뭐야!’
수호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내 깨달았다.
“아! 무공을 익히고 있었지.”
무아지경에 빠진 수호를 메시지가 깨운 것이다.
“득공을 축하하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비룡이 몇 시간째 수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무도의 길은 끝이 없네. 이제 시작이니 정진하게나.”
“예.”
흐뭇한 표정으로 수호를 바라보던 석비룡이 이내 물었다.
“그래, 성과는 좀 어떤가?”
“아! 잠깐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수호가 서둘러 스킬 창을 띄웠다.
【차원 호신무(하급)】
- 지극히 높은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 차원 여행자의 몸에 맞춰 고안한 미완의 무공. 이제 막 몸속에 마력의 흐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수련 및 차원 여행자의 성장 방향에 따라, 무공 또한 그 특색을 발현하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 단계가 상승할수록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다.
- 모든 스탯 20% 증가(장비 스탯 제외).
‘미쳤어!’
몸이 가볍다 했더니.
새 스킬 덕분에 스탯이 급격히 상승했다.
‘성장형 스킬이야.’
수련을 하면 단계가 상승한다.
아울러 단계가 상승할수록 추가적인 효과까지 생긴다는 설명이 있다.
“표정을 보니 마음에 드는가 보군.”
“예, 정말 감사합니다.”
“서로 감사할 일을 주고받았으니, 인사는 그만하기로 하세.”
“예.”
석비룡은 마지막으로 충고를 더했다.
“모름지기 초기에는 성장이 빠르다네. 그러니 집중해서 열심히 수련하게. 조금 성장했다고 해서, 방심하지도 나태해지지도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내공은 그것으로 되었으니, 이제 몸 쓰는 법을 배울 차례군.”
그러고 보니 대련도 하기로 했었지.
“날이 늦었는데, 괜찮겠습니까?”
“천 명의 마두에게 둘러싸여, 열흘을 꼬박 싸운 적도 있네. 하룻밤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그것도 자네가 밤새 버틸 수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네만.
수호가 으스스한 기분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하하,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럼 뒷마당으로 가세나.”
“예.”
* * *
며칠이 숨 가쁘게 흘러갔다.
석비룡과의 대련은 힘들었다.
수호의 강한 스탯으로도 1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대련 후에 운공하고 가게 좀 보고, 세쿼이아 씨앗에 마력 불어넣고…….’
하루가 눈 깜빡할 새 지나간다.
한데 충실한 나날 속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었으니.
‘다 좋은데, 몸이 작으니까 대련이 성에 안 차는구만.’
석비룡의 말대로였다.
그나마 【차원 호신무】를 새로 익힌 덕분에 조금 더 커지긴 했지만, 어른의 몸까지는 여전히 멀었다.
‘마력이 조금만 더 늘면 좋겠는데.’
키가 석비룡의 어깨 정도만 되어도 좋을 텐데.
방법이 없을까.
수호는 곧 해결책을 떠올렸다.
‘부족하면 늘려야지.’
수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발룡아, 레벨 업 하러 가자!”
레벨 업하면 마력도 오른다.
게다가 굳이 던전에 가지 않고도, 레벨을 올릴 방법도 있다.
『뭐? 갑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발룡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너도 빨리 마력 올려야지.”
『그, 그렇긴 하다만…….』
왠지 우물쭈물한다.
수호는 개의치 않고 질문했다.
“그래서 말인데, 발랑카 산맥에 강한 몬스터 좀 없을까?”
『저, 전에 말했지 않느냐, 그쪽에는 강한 몬스터가 전혀 없느니라. 차라리 숲으로 가거라.』
또 저러네?
“너 진짜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심연의 주인인 본좌가 무엇이 무서워 비밀을 감춘다는 말이냐!』
비밀이라는 말은 한 적 없는데…….
잠시 발룡이를 응시하던 수호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뭐, 이번에는 숲으로 가자.”
제대로 탐색해 본 적이 없기는 숲도 마찬가지.
발랑카 산맥은 드워프 정찰대가 정찰 중이니, 궁금하면 나중에 물어보면 된다.
『잘 생각했느니라!』
발룡이가 그제야 파닥 날아올랐다.
수호가 장비를 챙겨 입고 수트케이스로 다가갔다.
* * *
바비의 집 위, 둔덕.
수호와 발룡이가 나타났다.
“앗! 수호 아죠씨답!”
“아죠씨 오셨답!”
“수호 아죠씨 안녕하세욥.”
“안녕하세욥.”
아기 비바니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넨다.
“안녕. 그동안 잘지냈어?”
“옙! 아죠씨. 보고 싶었어욥!”
“저도욥!”
“아죠씨, 놀아줄 거예욥?”
비바니들이 수호의 몸 위로 올라섰다.
때마침 바비가 나타났다.
“수호 왔납? 무슨 일인갑?”
“수련 하려고. 혹시 근처에서 강한 몬스터 본 적 있어?”
“수련? 몬스터를 때려잡을 생각인갑?”
“응, 맞아.”
잠시 고민하던 바비가 대답했다.
“일단 상류 쪽으로 가 봐랍.”
“왜?”
“강의 상류로 갈수록 강한 기운이 흘러 나온답. 그러니 뭐가 있어도 상류 쪽에 있을 것이답. 전에 잡아 준 황금 잉어도 상류에서 떠내려온 놈이었답.”
수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재생】 스탯과 【수중호흡】 스킬을 얻게 해 준 황금 잉어.
귀한 아이템이었던 덕분에 설명이 기억에 남았다.
- 마력의 호수에서 태어난 잉어 중 극히 드문 확률로 탄생하는 황금빛 잉어. 특별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어, 먹으면 몸에 몹시 이롭다.
‘마력의 호수라…….’
상류 어딘가에 마력의 호수가 있을 터.
바비의 말대로, 그 주변에 뭐가 있어도 있을 것이다.
한데 수호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위대한 수호자시여!”
고함이 들리더니.
타다다닥!
저편에서 몽클한 덩어리가 덮치듯 달려왔기 때문이다.
온달곰족의 무녀, 온달소라였다.
“소라, 안녕. 근처에 있었네?”
“위대한 분이시여. 드디어 헌신하셨군요.”
【차원 여행】에 대해 설명은 해 두었지만, 직접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르르-
파르르-
온달소라의 꼬리가 끊임없이 떨린다.
‘이럴까 봐 후딱 가려고 했는데.’
신을 영접한 신도의 모습이 저러할까.
온달소라의 반응이 너무 격렬했다.
예상하고 있었기에, 온달소라 앞에서는 차원 여행을 쓰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딱 걸린 셈이다.
“수련 좀 하려고.”
“수련 말씀이십니까? 제가 모시겠나이다!”
꼬리를 떨어져 나갈 듯 흔들어 대며 온달소라가 외쳤다.
“농사짓느라 바쁘지 않아?”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일은 마을 주민들이 하니까요. 저는 무녀, 위대한 분을 모시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렇구나.”
수호가 고민하는 사이, 온달소라가 행동에 나섰다.
“선대의 영령이시여, 힘을 빌려주소서.”
펑-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곰의 형상을 한 영령이 나타났다.
한데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한 분 늘었네?”
나타난 영령이 두 마리였던 것이다.
온달소라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위대한 분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에, 영령을 한 분 더 소환할 수 있었나이다. 감사합니다.”
“딱히 내 덕은 아닌 것 같은데…….”
수호가 떨떠름해하고 있으려니.
온달소라가 영령을 수호 앞으로 이끌었다.
“타십시오. 가시는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타라고?”
“예, 어디든 말씀만 하십시오. 끓는 물 속이라도 제가 앞장서겠나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망설이는 수호에게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큭- 좋은 신도를 두었구나. 신도가 바치는 공물은 기분 좋게 받아 주는 편이 좋느니라.』
수호도 적당히 납득했다.
강철 나무가 빼곡해서 배틀 웨건은 무리.
기왕이면 탈것이 있는 편이 나으니, 영령을 타자.
마음을 정한 수호가 영령의 등에 올랐다.
“고마워, 소라. 상류로 가 줘.”
“맡겨 주십시오!”
당차게 외친 온달소라가 나머지 영령에 탔다.
99화 마력의 호수
수호는 곰 영령을 타고 강변을 따라 이동했다.
한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
“몬스터는 없고 짐승뿐이군요. 죄송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게 소라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상류로 계속 거슬러 가던 어느 순간, 강철 나무 숲이 끝났다.
변화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마력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경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니라.』
“응, 나도 느끼고 있었어.”
상류로 향할수록 주변에 흐르는 마력이 짙어졌다.
수호는 주변 기척에 집중하며 이동을 계속했다.
『몬스터다.』
“오케이! 소라, 뒤로 빠져!”
수호가 영령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온달소라가 영령 하나를 대동한 채 물러섰다.
나머지 영령은 수호를 돕기 위해 앞에 남았다.
부스스.
풀숲이 떨리더니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컹컹-”
개를 닮은 다섯 마리의 몬스터였다.
‘들개? 하이에나?’
그것들은 수호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을 보면 이종족은 아니었다.
“컹컹-”
두어 번 더 짖은 몬스터 무리가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반갑다, 멍멍아.”
수호가 망치를 뽑아 들고 마주 달려갔다.
잠시 후.
[수풀 하이에나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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