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3
늦었지만 이제라도 만렙을 달성할 방법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 2성을 넘어 3성에서도 레벨을 실컷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잡고 가자. 전투 준비!”
기대감과 함께 수호가 외쳤다.
“앗! 전투 준비!”
“저,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저, 저걸 진짜 잡는다고요?”
국영수 트리오가 활대를 진흙 악어왕에게 겨눴다.
『당연히 그래야지!』
투타타타타-
발룡이는 진작부터 신나서 마력탄을 쏘고 있었다.
“그래, 발사!”
수호가 명령했다.
국영수 트리오가 화살을 쐈다.
“정령님이 이럴 땐 눈을 노리라고 했어!”
“눈을 쏴!”
“앗싸! 맞혔다!”
하나 작은 화살은 거대한 진흙 악어왕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화살이나 마력탄으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때려잡아야 하나?’
아래는 걸쭉한 늪지.
기왕이면 안 내리고 잡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수호가 궁리하는 사이.
진흙 악어왕은 잔뜩 화가 났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감히 이곳에서 악어왕을 공격한 상대는 없었다.
한데 지금.
자그마한 것들이 악어왕의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단숨에 짓이겨 버리겠다!
그것이 이 땅의 지배자로서 보여야 할 위엄이다.
진흙 악어왕의 뇌가 명령을 내렸다.
악어왕의 몸에서 마력이 들끓었다.
푸쾅-!
거대한 4개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늪지 폭주】가 시전됐다.
악어왕의 거구가 황소처럼 돌진했다.
『부딪힌다!』
발룡이가 황급히 경고했다.
수호가 조종간에 꺾었다.
차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딱!
거대한 입이 차가 있던 곳을 물어뜯었다.
공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진흙 악어왕의 【늪지 폭주】가 연이어 시전됐다.
수호도 차를 급격히 움직여 공격을 회피했다.
같은 상황이 두어 번 반복됐다.
악어왕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짓씹어 버리겠다!’
이곳 늪지에서 이렇게 자신을 애먹인 사냥감이 있었던가.
진흙 악어왕의 분노는 다른 형태로 표출됐다.
고오오-
끓어 오른 마력이 놈의 입으로 향했다.
악어왕의 스킬 【늪지 왕의 포효】가 시전됐다.
크와아아아아아앙-!
그것은 일종의 피어였다.
강한 기운을 담은 소리가 연약한 생명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으악!”
“어? 으어어?”
“저, 정령님!”
국영수 트리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하나 수호는 영향받지 않았다.
【상급 상태 이상 면역】이 적용되고 있는 덕분이다.
그리고 차 안에 탄 나머지 한 존재.
발룡이는 분노했다.
『감히 하찮은 미물 따위가! 지금 본좌의 앞에서!』
감히 드래곤 앞에서 피어라니!
비록 본래의 힘을 잃었지만, 저런 미물에게까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본능에 새겨진 자존심이 광룡의 분노를 일깨웠다.
우드득.
자그마하던 몸이 2배로 커지고.
가아앙-
드래곤 하트가 맹렬히 회전했다.
발룡이가 입을 열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
드래곤 피어.
분노한 광룡이 모든 마력을 모아 터트린 외침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진흙 악어왕에게만 쏘아져 나갔고.
놈의 심령을, 마력을, 정신을 뒤흔들었다.
움찔.
거대한 악어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가속하던 몸은 그대로 차를 향해 미끄러졌다.
‘기회다!’
수호는 발룡이가 만든 틈을 포착했다.
푹.
쏘아진 석화비도가 큰 바위에 틀어박혔다.
비도의 미늘이 바위를 움켜쥔다.
불끈.
수호의 팔 근육이 꿈틀거리는 순간.
비도의 사슬이 팽팽히 당겨지고.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차가 바위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주르르륵-
차 뒤에서 미끄러지던 악어왕이 차를 앞질러 나아갔다.
수호가 석화비도를 회수했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타다다다다닷-
악어의 꼬리를 밟고 올라선 수호가 척추를 따라 달렸다.
발룡이의 피어에 넋을 놓은 악어왕은 그때까지도 반응하지 못했다.
‘근력 폭발!’
‘무기 강화!’
스킬을 시전하며.
팡.
수호가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악어의 정수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화염 강격!’
화르르-
수호가 불타는 화염 포마검을 역수로 틀어쥔다.
악어의 머리 위에 착지.
전력을 다해 검을 내리찍었다.
푸콰아아아앙-!
늪을 들썩이는 폭음이 터지고.
후두두두둑-
악어왕의 뼈와 살점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네임드 몬스터 진흙 악어왕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근력이 1 상승합니다.]
[화염 저항이 1 상승합니다.]
[재생이 1 상승합니다.]
.
.
.
기분 좋은 메시지가 줄지어 떠올랐다.
* * *
악어왕의 주검 앞에서 수호가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 개이득이네.”
고급스럽지 않은 어휘였지만, 그 외에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 마리 잡았다고 레벨이 5나 오르다니.”
덕분에 2성은 깔끔히 졸업.
그러고도 레벨이 4나 더 올랐다.
피하지 않고 잡은 선택이 주효한 셈이다.
“때려잡기를 잘했구만.”
그냥 지나쳤으면 두고두고 아쉬웠을 뻔했다.
흡족해하던 수호의 머릿속에 미뤄 뒀던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어째서 경험치가 오르는 걸까?’
이제까지는 분명 경험치를 얻지 못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타차원으로 진입했다는 점이었다.
‘타차원으로 완전히 넘어와서 그런 건가?’
그렇기에 이쪽 세상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차원 여행자 클래스의 숨겨진 기능일지도.’
어쩌면 얼마 전에 얻은 【차원 여행】 스킬의 기능일 수도 있고.
수호가 그럴싸한 추측을 이어 가고 있을 때.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느냐?』
발룡이의 목소리가 수호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경험치가 오르길래 좀 이상해서, 왜 그런가 생각하고 있었지.”
『괜한 데 신경 쓰느니, 챙길 거나 빨리 챙기고 가자. 서둘러 몬스터를 더 잡으란 말이다.』
수호가 경험치를 먹는 만큼 발룡이도 마력이 증가한다.
흥이 오른 발룡이가 수호를 보챘다.
한데 말속에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챙겨? 뭘?”
『뭐긴 뭐냐? 저기 저 돌멩이. 너한테 중요한 물건일 텐데?』
발룡이가 악어왕의 턱 쪽을 가리켰다.
자그마한 구슬이 턱 아래에서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어? 저건!”
수호가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집어 들자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스킬 룬이잖아!”
수호는 서둘러 스킬 룬의 성능을 확인했다.
【상급 도축】
- 마력을 소모해 몬스터의 사체에서 재료 및 아이템을 추출한다.
도축.
타차원을 여행할 수호에게 요긴한 스킬이었다.
몬스터 사체를 통째로 챙기기에는 차원 보따리가 좁기 때문이다.
“이걸 여기서 먹네.”
심지어 ‘상급’이다.
더 강한 몬스터를 더 빠르게 재료화 할 수 있을 터.
수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리 만무했다.
‘이런 건 바로바로 익혀야지.’
아끼다 뭐 된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스킬 룬을 사용했다.
‘그리고 익혔으면 써먹어야지. 상급 도축!’
뒤이어 스킬을 시전했다.
몸에서 마력이 뭉텅 빠져나갔다.
몬스터가 워낙 컸기 때문에 생긴 일.
그러나 ‘상급’답게 마력 소모는 클지언정 성능은 훌륭했다.
“헉! 모, 몬스터가 사라졌다!”
“정령님이 몬스터를 땅으로 돌려보낸 거야.”
“저, 절대로 작은 정령님을 화나게 해서는 안 돼.”
국영수 트리오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수호는 대답 대신 도축의 결과물을 살폈다.
발톱, 가죽, 뼈 등 다양한 부위가 떨어져 있다. 대부분이 고급 이상의 재료였다.
‘쏠쏠하구만.’
경험치부터 스킬 룬.
그리고 재료 아이템까지.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악어왕이었다.
* * *
그 뒤로 몇 시간이 흘렀다.
일행은 덤벼드는 몬스터를 족족 처치해 가며 북진했다.
해가 질 무렵, 숲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수호의 레벨은 무려 50이 되어 있었다.
‘하루 만에 11레벨을 올리다니.’
지구의 헌터들이 보았다면 기가 찰 광경.
하지만 수호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
물론, 레벨이 한없이 오른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렙업 속도가 느려졌고, 이제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에게서는 경험치를 거의 얻지 못했다.
『언제까지 멈춰 서 있으려는 거냐. 어서 사막으로 들어가자.』
발룡이가 보챘다.
녀석도 마력이 잘 오르지 않고 있었다.
“곧 해가 질 거야. 여기서 하루 묵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게으름 부리기는! 사막에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한 뒤에 쉬어도 충분하느니라. 어차피 야영 준비도 해 오지 않았느냐?』
차원 보따리에는 텐트를 비롯한 야영 용품들이 준비되어 있다.
사막이라고 딱히 꺼릴 필요는 없었다.
“알았어. 보채기는.”
수호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윌슨의 장담대로 차는 모래 위에서도 잘 나아갔다.
“으으, 결국 얼음 사막에 들어와 버렸어.”
국영수 트리오 중 국진이 중얼거렸다.
수호가 그에게 물었다.
“진작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왜 얼음 사막이야? 얼음은 안 보이는데.”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빙하로 덮여 있기라도 한 줄 알았다. 한데 전형적인 모래사막이었다.
“가끔 얼음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국진이 대답했다.
영 미진한 대답에 수호가 되물으려는 순간 영식이 뒤이어 덧붙였다.
“게다가 엘프가 사라집니다.”
이것들아, 맥락 좀!
수호가 묻기 전에 이번에는 수철이 말을 이었다.
“멍청이들아 말을 똑바로 해. 정령님, 이곳 얼음 사막에서는 생명체가 갑자기 실종됩니다. 가끔가다 거대한 얼음덩이가 떨어져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엘프를 잡아먹는 얼음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오는데?”
“누구도 괴물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본 엘프가 아무도 없거든요.”
국진과 영식이 몸서리치며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본 엘프는 모조리 실종되었으니까요.”
“으으, 무서워.”
수호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발룡이의 기감이 뛰어나니 몬스터가 접근하면 미리 알 수 있어. 차가 빠르니까 언제든 도망칠 수도 있고. 그러니 너무 겁먹지들 마.”
『당연하지. 본좌의 감지 능력을 피할 몬스터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느니라.』
“옙, 정령님만 믿겠습니다!”
“이참에 얼음 사막의 괴물도 퇴치해 주세요.”
“이 멍청아, 그런 건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국영수 트리오의 대답을 들으며, 수호는 차를 사막 안으로 진입시켰다.
차는 모래 위에서도 잘 움직였다.
한참을 이동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몬스터가 나타날 기미는 없었다.
『왜 몬스터가 없는 거지? 차라리 숲으로 돌아가자!』
발룡이가 투덜거렸다.
수호는 적당한 능선 아래에 차를 멈춰 세웠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배틀 웨건의 지도화 능력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밤새 사막을 횡단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체력도 보충해 둬야 했고.
“돌아가긴 뭘 돌아가. 우리가 사냥하러 나왔냐?”
『쳇. 본좌는 하루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니라.』
“으이그, 알았어. 오늘은 여기서 저녁 먹고 야영한 다음,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자. 너도 챙겨 온 건 먹어야지?”
차원 보따리에 발룡이가 맡긴 다양한 치킨이 들어 있다.
『좋다. 그럼 본좌는 강정을 먹겠다.』
“알았어, 인마. 내려서 자리 좀 잡고.”
잠시 후, 수호와 일행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타차원에서 첫 번째 밤이 저물었다.
.
.
.
“이런 젠장! 네 감지 능력을 피할 수 있는 몬스터는 세상에 없다며!”
『감지는 했다. 그러니까 네가 살아 있는 것 아니냐!』
“그럼 뭐 해? 잡아먹혔는데!”
『안 죽었으면 됐다. 어서 나갈 방법이나 찾도록 하여라.』
눈을 떴을 때.
일행은 어느 거대한 몬스터의 뱃속에 들어와 있었다.
77화 얼음 사막 (3)
적을 미리 포착해도 도주에 실패하는 때가 있다.
적이 너무 빠르거나.
적의 공격 범위가 넓어 피해 낼 방법이 없는 경우.
혹은 아군을 지키기 위해 회피할 수 없는 경우 등등.
이번에는 몇 가지 경우가 겹쳤다.
그 탓에 일행은 몬스터 뱃속에 들어와 있는 신세.
‘그나마 발룡이가 미리 경고한 덕분에 저 녀석들을 살리긴 했지.’
엄청나게 큰 몬스터가 지하로부터 솟아오르며 일행을 집어삼켰다.
피하기에는 놈의 입이 너무 컸다.
그나마 발룡이의 경고 덕분에 간신히 국영수 트리오를 차에 실을 수 있었다.
‘배틀 웨건의 비행 모드 덕분이기도 하고.’
차를 비행시켜 몬스터의 위액에 녹지 않고 떠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나가느냐인데. 너무 커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적이 너무 크다.
어딜 공격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크다.
지금 배틀 웨건이 떠있는 공간도 16차선은 됨직한 거대한 통로였다.
심지어 멀지 않은 곳에 그런 통로가 잔뜩 얽힌 교차로가 보인다.
어마어마한 공간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몬스터기에 이렇게 큰 거야? 게다가 이 냉기는 또 뭐고.”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엄청난 냉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배틀 웨건의 난방 기능이 아니었다면, 일행도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은 슬라임의 것이다. 냉기를 보면 아이스 슬라임이겠지.』
“슬라임? 그게 이렇게 커질 수도 있어?”
슬라임이면 점액질 덩어리 아닌가?
통로가 얽힌 내부 구조도 이해되지 않았다.
『본좌도 이렇게 큰놈은 본 적이 없느니라. 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비정형 몬스터인 슬라임의 특성상, 뭔가를 끊임없이 먹어 치우면 터무니없이 거대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상황에 따라 바뀌는 형태 탓에 내부 구조 또한 어떻게든 변할 수 있고.
“이론은 됐고, 어떻게 나가야 할지나 한번 생각해 봐.”
『슬라임을 처치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바로 핵이다.』
“핵?”
『비정형 몬스터는 마력으로 형태를 유지하느니라. 당연히 마력의 근원이 되는 핵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살아 있을 수가 없느니라.』
“그걸 부수잔 말이지?”
『그렇다. 이 정도 크기면, 크큭- 본좌가 본모습을 회복하는 데 훌륭한 양분이 되겠구나.』
양분이고 뭐고, 잡을 수 있을 때 이야기고.
자칫하다가 도시락 될 판이구만.
혀를 찬 수호가 물었다.
“핵이 어디 있는지 파악돼?”
수호의 감각으로도 핵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이 안 됐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방향은 파악되느니라. 저쪽이다.』
발룡이가 앞다리로 한쪽을 가리켰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자. 얼어붙기 전에.”
배틀 웨건이 돌풍 속을 전진했다.
* * *
한동안은 순탄했다.
배틀 웨건의 마력이 동나기 전에 길을 찾기만 바라면 되었으니까.
“젠장! 쉽게 가는 법이 없구만!”
한데 상황은 금세 변했다.
안 좋은 쪽으로.
『기생 몬스터다. 침입자를 처치하고 싶나 보구나. 이런 초대형 몬스터의 체내에는 으레 저런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지.』
전방에서 비행 몬스터가 날아들었다.
박쥐의 형상에 독수리의 크기.
쩍 벌어진 입에는 단검을 연상시키는 이빨이 돋았다.
그런 놈들이 통로를 가득 메우며 몰려들었다.
“지식 자랑 그만하고 마력탄이나 쏴!”
『크큭- 본좌의 사격 솜씨를 보여 주마.』
투타타타타탓-
발룡이가 배틀 웨건의 마력 기관총을 발사했다.
다행스럽게도 몬스터가 죽어 나갔다.
“으악- 정령님! 어, 어떻게 합니까?”
“뭘 정령님께 묻고 있어! 쏴!”
“맞아, 정령님 바쁘시잖아. 활이나 쏴!”
국영수 트리오가 사격을 시작했다.
수호는 운전에 집중했다.
감각 스탯이 극한까지 발휘된다.
차가 곡예처럼 움직이며 얼음 박쥐 떼를 뚫고 나아갔다.
‘너무 많아. 이대로는 안 돼.’
날아드는 박쥐 떼가 너무 많았다.
그나마 통로가 워낙 넓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둘러싸였으리라.
하지만 회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격렬한 비행과 마력탄 사용으로 배틀 웨건의 마력이 빠르게 소진된다.
이대로는 머잖아 마력이 고갈될 터.
수호는 결단을 내렸다.
“발룡아! 운전대 맡아!”
『뭣? 본좌는 총을 쏘고 있지 않느냐!』
“총도 쏘고 운전도 해.”
자율 주행 모드로 돌려 뒀으니, 적당히 방향만 정해 주면 된다.
운전석에서도 마력 기관총을 쏠 수 있으니 사격도 문제없다.
『좋다. 너는 본좌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치우거라!』
발룡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수호는 보닛 위에 올라서 있었다.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빼 들며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
수호의 모든 속도가 빨라진다.
상대적으로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
화르르.
불길에 휩싸인 화염 포마검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콰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전방이 불바다가 됐다.
날아들던 얼음 박쥐들이 불길에 휩싸여 녹아내린다.
수호는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밟아! 더 빨리!”
부와아아앙-
발룡이가 배틀 웨건을 전력으로 전진시켰다.
헤이스트의 지속 시간이 끝날 때쯤.
차는 얼음 박쥐 떼를 떼어놓고 통로를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계속 쫓아올 거야.’
앞에서 다른 박쥐 무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대로 떠도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수호가 고민하며 차 안으로 돌아왔을 때, 발룡이가 통로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쪽에 뭔가 있다.』
“저쪽? 어, 저긴 왜 냉기가 없어?”
벽 사이 교묘하게 뚫린 구멍이 보였다.
유독 그곳에서만 냉기가 흐르지 않았다.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저기로 들어가라!』
머잖아 박쥐 떼가 다시 쫓아올 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 보자.”
수호는 냉기가 흐르지 않는 통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
* * *
“일단 떼 놓은 것 같긴 한데.”
다행히도 박쥐 떼는 이곳까지 쫓아오지 못했다.
『일종의 결계군.』
“결계?”
『그래, 인공적인 결계니라.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법 쓸 만한 실력이구나. 물론, 본좌에게는 한참 못 미치지만.』
발룡이가 저 정도로 말한다면, 대단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몬스터 뱃속에 결계를 칠 정도면, 범상치 않은 사람이겠지.’
결계 덕분인지, 이곳에는 몬스터의 위액도 흐르지 않았다.
수호는 차에서 내렸다.
“바닥이? 땅이 아니었구나.”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수호는 깨달았다.
그것은 흙도 돌도 아니었다.
아이템.
수많은 장비가 녹아 뭉친 덩어리.
그것이 쌓여 이뤄진 땅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아먹은 거야?’
망가져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이템이 이렇게 퇴적될 정도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쯧, 저기부터 살펴보자.’
수호는 걸음을 옮겼다.
통로 가장 깊은 곳.
처음부터 눈길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군.』
통로 가장 깊은 곳.
마치 이 통로가 존재하는 목적이라도 되는 양, 천조각 위에 정성스럽게 놓인 것.
그것은 가죽을 엮어 만든 책이었다.
“일기장 같아.”
【소통】 스킬 덕분에 수호는 책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결계를 설치한 사람이 쓴 일기였다.
「나는 레드우드의 22대 제사장 진호다. 누군가 발견하기를 바라며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여기는 희생자의 장비가 쌓여 형성된 퇴적지다. 나는 운 좋게 이곳에 떨어져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가진 바 재주를 동원하여 결계를 쳤다. 그리고…….」
일기는 길게 이어졌다.
「자이언트 아이스 슬라임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그 핵을 부수어야 한다. 핵의 위치는 이곳 결계의 끝에서부터 우측으로…….」
수호는 바라던 내용을 발견했다.
‘핵의 위치다!’
핵의 위치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바닥에 쌓인 아이템에서 기운을 뽑아내어 조금씩 결계의 범위를 넓혔다. 핵이 있는 곳까지 결계를 넓힌 후, 그것을 부수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시도는 실패했다. 핵으로 향하는 통로를 두꺼운 피막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얼음 박쥐를 막으면서 피막을 부술 힘이 없었다.」
‘피막?’
「…피막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결계를 형성해 두었다. 당신에게 얼음 박쥐 떼를 막으며 피막을 부술 힘이 있다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그것으로 끝.
그 뒤로는 일기 주인의 사연이 적혀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수호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그리고 내 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부디 레드우드로 가 진실을 밝혀 주길 바란다.」
탁-
수호가 일기장을 덮었다.
[차원 임무 【망자의 부탁】을 획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일기의 내용을 읽으면서 예상한 일이었다.
수호가 차원 패널을 열었다.
『망자의 부탁』
- 엘프 도시 레드우드의 전대 제사장 진호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는 몬스터의 뱃속에서도 레드우드와 어머니 나무를 걱정했다. 레드우드의 어머니 나무에게 소식을 전하고, 진호의 원한을 풀어 주자.
- 보상 : 레드우드 어머니 나무의 보답.
수호가 임무 내용과 일기를 비교하며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잠시 후, 발룡이가 말했다.
『본좌는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느니라. 이제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수호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잠깐만, 그 전에 찾을 게 있어.”
수호는 일기장이 놓여 있던 천 조각을 치웠다.
그 아래를 발끝으로 헤집었다.
작은 아이템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사장의 반지]
- 레드우드 제사장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반지. 초대 제사장이 어머니 나무와 협력하여 만든 뒤 제자에게 전했다. 경지에 이르지 못한 제사장이 어머니 나무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착용 시 재능 있는 엘프에 한해, 어머니 나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단, 엘프 종족만 착용 가능.
- 아이템 등급 : 희귀
- 마력+20
- 【하급 정령 소통】
- 내구도 200
수호가 반지와 일기장을 차원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이제 출발하는 것이냐?』
“그래, 가자. 그 전에 대책부터 세우고.”
『대책?』
“얼음 박쥐 떼가 덮쳐 오면 다시 여기로 도망쳐야 되잖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투명화로 놈들을 속일 수 있을까?”
『안 된다. 놈들은 시각 대신 마력의 움직임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놈들의 감각을 속이면서 저 귀쟁이들까지 한꺼번에 보호하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동날 것이니라.』
“역시 그랬어. 잘 됐네.”
『잘 됐다고? 무슨 말이냐?』
“가자. 가면서 설명해 줄게.”
수호가 배틀 웨건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 * *
결계를 벗어난 후.
수호는 조용히 차를 몰아 핵으로 향했다.
“그래,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지.”
목표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얼음 박쥐 떼가 나타났다.
“으악- 정령님! 이대로는 둘러싸여요!”
국진이 소리쳤다.
수호는 차원 보따리를 더듬어 하나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마력 산란탄]
윌슨이 처음 설비를 만들었을 때, 시범 삼아 만든 물건.
마력 감지 능력에 혼란을 일으키는 소모 아이템이다.
운전석 뚜껑을 열고 수호가 상체를 내밀었다.
마력 산란탄이 야구공처럼 날아갔다.
챠르릉-
마력 산란탄이 특이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반짝이는 가루가 공중에 휘날렸다.
얼음 박쥐의 움직임이 변했다.
『호오- 감지 능력에 혼선이 왔군.』
얼음 박쥐들은 우왕좌왕.
배틀 웨건을 포착하지 못했다.
수호가 차를 전력으로 가속했다.
부와아아앙-
허공을 가르며 배틀 웨건이 쏘아졌다.
얼음 박쥐 떼가 뒤편으로 사라졌다.
“앗! 이상한 벽이다!”
이번에는 영식이 소리쳤다.
통로 저편이 푸른빛 벽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핵 앞을 막고 있다는 피막이 분명했다.
‘피막이야! 저것만 뚫으면 핵이… 제길! 저건 또 뭐야?’
이전보다 100배는 큰 박쥐가 나타나 피막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잠시 후면 뒤에서도 얼음 박쥐 떼가 들이닥칠 터.
빠르게 놈을 해치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으악-! 큰 놈이다!”
“쏴! 정령님이 주신 특수 화살을 쏘라고!”
“쏘고 있어. 근데 안 통해!”
드워프에게 받아 온 [폭발 화살]은 거대 얼음 박쥐를 처치하지 못했다.
수호가 외쳤다.
“발룡아! 녹여 버려!”
『크큭- 기어이 심연의 힘을 빌리는구나.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대가는 치킨이겠지, 이 자식아!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수호가 조수석 뚜껑을 열었다.
발룡이가 보닛 위로 내려서며 입을 벌렸다.
화르르르르르-
드래곤의 숨결이 뿜어져 나갔다.
여태 본 것 중에 가장 굵고 강한 불기둥이었다.
엘프 차원에서의 사냥으로 발룡이의 마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끼아아아아아악-”
거대 얼음 박쥐가 괴성을 내질렀다.
놈은 몸이 녹는데도 피하지 않고 피막 앞을 지켰다.
하나 상관없었다.
이미 놈의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렸다.
배틀 웨건이 지나가고도 남을 크기.
수호는 그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동시에 조종간을 조작했다.
철컹.
차 앞쪽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삐죽한 것이 머리를 내밀었다.
“이거나 처먹어라!”
푸슈슈슈우-
[폭발형 마력 미사일]이 피막을 향해 날아갔다.
거대 얼음 박쥐가 몸을 꿈틀했지만 늦었다.
푸콱!
미사일은 정확히 목표에 적중했다.
피막 사이로 완전히 파고든 미사일은 그제야 폭발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온 사방을 흔드는 충격파가 지나간 후.
피막에 둥근 구멍이 뻥 뚫렸다.
배틀 웨건이 그 속을 빠르게 통과했다.
『핵이다! 부숴라, 수호!』
조수석으로 돌아온 발룡이가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푸른빛 머리통만 한 구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부와앙-
배틀 웨건이 핵 옆으로 붙었다.
수호가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화르르.
각종 스킬을 머금은 화염 포마검이 슬라임의 핵을 후려쳤다.
챙-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네임드 몬스터 자이언트 슬라임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민첩이 1 증가합니다.]
[재생이 1 증가합니다.]
.
.
.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줄지어 떠올랐다.
78화 레드우드 (1)
“헉- 흙이 쏟아진다!”
“생매장당하겠어!”
“저, 정령님!”
국영수 트리오가 호들갑을 떤다.
수호는 혀를 찼다.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지하에 살던 슬라임이다.
놈이 죽었으니, 그 위에 얹혀 있던 흙이 쏟아져 내리는 게 당연했다.
예상했던 일인 만큼 대책도 생각해 두었다.
‘좀 아깝지만.’
철컹.
배틀 웨건 앞에서 또다시 미사일이 고개를 내밀었다.
[관통형 마력 미사일]
앞을 뚫는 데 특화된 미사일이다.
영웅 등급 소모 아이템인 만큼 귀한 물건.
‘그래도 생매장보다는 낫지.’
푸슈왕-
수호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 앞이 우산처럼 펼쳐지더니, 드릴처럼 회전했다.
배틀 웨건 앞에 통로가 생겨났다.
“간다!”
수호가 전속력으로 미사일 뒤를 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에요, 정령님!”
멀리 푸른 하늘이 수호 일행을 반겼다.
푸확-
기어이 배틀 웨건이 모래 더미를 뚫고 지상으로 솟구쳤다.
하룻밤 만의 귀환이었다.
“후우- 파란만장하구만.”
수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도 잔뜩 올랐고 차원 임무도 받았으니, 고생이 헛되지만은 않아.’
쏟아지는 흙더미 탓에 슬라임의 부산물을 챙기지 못했다.
아쉽지만 얻은 게 적지 않으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레드우드로 가는 일만 남은 건데.’
최소한 레드우드까지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얼음 사막을 공포의 땅으로 만든 슬라임이 죽었으니까.
‘일기장 내용을 보아하니, 도착한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수호가 레드우드가 있는 북쪽을 응시하며 조종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부와앙-
배틀 웨건이 가속했다.
얼음 사막이 수호 일행을 고요히 배웅했다.
* * *
반나절 후.
수호 일행은 순조롭게 사막을 벗어났다.
숲을 따라 얼마간 이동한 후, 어느 언덕에 올랐을 때.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오- 레드우드다! 진짜로 레드우드에 도착했어!”
“맙소사! 이틀 만에 이곳에 도착하다니! 정령님이 가지고 오신 자동차가 없었으면, 한 달이 걸려도 힘들었을 텐데.”
“자동차가 있어도 정령님이 안 계셨으면 어림없었지. 으으, 그 슬라임 좀 생각해 봐. 우리끼리 왔으면 분명 그놈의 영양분이 되었을 거야.”
국영수 트리오의 호들갑을 보며 수호도 레드우드를 응시했다.
‘듣던 대로 도시야. 떡갈나무 마을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나무로 쌓아 올린 성벽.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
그 사이로 반듯하게 뚫린 도로도 보였다.
‘역시 떡갈나무 마을이 두메산골이었던 거야.’
신체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엘프의 전투력.
그것은 그들이 ‘촌민’이었기 때문이다.
탈것이나 지도가 없었던 것도.
장비가 허접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고.
의문은 풀었으니 임무를 해결해야 할 차례.
수호는 일행에게 신호했다.
“가자.”
잠시 후.
수호 일행은 레드우드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배틀 웨건은 미리 차원 보따리에 넣었다.
발룡이는 투명화 상태.
수호도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상대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경비병이 수호 일행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날카로운 창날이 찌를 듯 겨눠왔다.
미리 약속한 대로 국진이 나섰다.
“저는 떡갈나무 마을에서 온 국진이라고 합니다. 저 풀과 관련해서 꼭 전해 드릴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성벽 바깥을 온통 뒤덮은 잡초를 가리키며 국진이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 온 명패도 내밀었다. 떡갈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명패를 살피던 경비병이 물었다.
“풀과 관련한 말? 그게 뭐지?”
“저 풀을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제 일행은 밤나무와 고로쇠나무 마을 엘프입니다. 그 방법을 통해 우리 세 마을 주변의 잡초를 완전히 박멸할 수 있었습니다.”
“으음…….”
경비병이 침음을 흘렸다.
잡초의 기이함은 경비병도 느끼고 있던 터.
하나 도시 밖 잡초에 대해서는 상부의 지시가 없었다.
오히려 제사장은 잡초가 이로운 풀이라 떠들고 다녔고.
고민하는 경비병에게 국진이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셨습니까? 가령, 밤만 되면 갑작스럽게 자신감이 떨어진다든가.”
“……!”
경비병이 깜짝 놀라 국진을 바라봤다.
국진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것도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령님과 함께라면!
뒷말을 숨긴 채 국진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 시장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소.”
경비병이 후다닥 달려갔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 경비병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들 마시고, 이리들 오시오. 앉아서 기다립시다. 하하하.”
경비병은 성벽 밖에 설치된 위병소 앞 벤치를 가리켰다.
왠지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엘프 도시 레드우드.
2천 명이 넘는 엘프 중에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명은 선예라는 이름의 젊은 엘프였다.
그녀는 도시의 제반 업무를 책임지는 시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현석.
그는 어머니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엘프.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레드우드의 두 수장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보시오, 시장. 언제까지 억지를 부릴 생각이오? 내 분명 말하지 않았소! 어머니 나무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현석이 시장, 선예를 다그쳤다.
고집스러운 눈매로 버티던 시장이 입을 뗐다.
“도시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그 풀을 도시에 들일 수는 없어요. 성벽 밖을 보시면 아시지 않나요? 성벽 안에 풀을 자라게 두는 순간, 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거예요.”
몇 달 전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기이한 풀.
그것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선예는 시민에게 명을 내렸다.
도시 내부에 그 풀이 보이면 즉시 뽑아 버리라고.
인구 밀도가 높다 보니, 풀이 도시 안에 자라는 것만은 방지할 수 있었다.
한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제사장이 찾아와 보채기 시작했다.
“풀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내 몇 번을 말하는 거요! 저 풀은 어머니 나무께서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키워 낸 풀이란 말이오!”
제사장이 빽 소리쳤다.
선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 풀이 등장하고부터 어머니 나무께 이상이 생겼어.’
선예의 기억으로는 분명 풀의 등장이 먼저였다.
그 후에야 어머니 나무의 이파리가 떨어지고 가지가 말라 갔다.
그전까지는 분명히 생생했었다.
‘왜 선후 관계를 뒤집어 말하는 걸까?’
한데 제사장은 선예가 본 것과 다른 말을 했다. 앞뒤를 자꾸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마냥 무시할 수도 없고.’
어머니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엘프가 제사장이다.
선출직인 시장과 달리, 사승에 의해 승계되고 오래도록 지위를 유지한다.
도시에서의 영향력은 오히려 시장보다도 컸다.
선예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제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 진정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어길 참이오!”
선예는 반사적으로 맞받아치고 말았다.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을 안 하고 계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지금 어머니 나무의 뜻이 어떨지는 제사장께서도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뭐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요?”
“제가 언제 무시한다고 했습니까? 그저 질문한 거지요.”
꿈틀.
현석은 가슴 속에서 치미는 기운을 간신히 수습한 후 대답했다.
“어머니 나무께서 몸의 이상을 치료하느라 지금은 말씀을 안 하고 계시지만, 그전에 내게 언질을 주셨소. 저 풀을 널리 퍼트려야 한다고 말이오.”
“하아…….”
도통 이해되지 않는 제사장의 행보에 선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선예의 눈에 제사장의 울긋불긋한 얼굴이 보였다.
‘전대 제사장께서는 저렇지 않았는데.’
전대 제사장 진호가 사라지고 난 뒤.
그 제자인 현석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한데 현석은 전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폭급한 성미.
제멋대로인 행동.
얼굴에 붉게 화장을 하고, 치렁치렁한 옷으로 온몸을 두르기까지 했다.
‘제사장인 걸 뽐내기라도 하려는 걸까?’
겉보기부터 일반적인 엘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선예는 그런 현석을 예전부터 신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선예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예의 미적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쾅!
제사장이 탁자를 내리쳤다.
“끝까지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어기려거든, 흥! 내 대제사를 열 것이오. 그 자리에서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모든 시민에게 전할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대제사.
제사장의 주도하에 어머니 나무의 고마움을 기리는 행사다.
그날은 모두가 일을 멈추고 행사에 참여한다.
대제사에서 제사장이 하는 말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조금만 상황을 더 지켜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 나무께서도 성치 않으신데, 꼭 대제사를 여셔야 하겠습니까?”
대제사의 개최는 제사장의 권한.
선예는 제사장을 만류했다.
하지만 제사장은 선예의 말을 무시했다.
“흥! 어차피 시장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지 않소? 그러니 나도 내 알아서 하리다.”
제사장이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똑.
한데 제사장이 나가기 전에 노크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곧 경비병 엘프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외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자기들 말로는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뭐? 어머니 나무! 무슨 헛소리야!”
제사장이 빽 소리쳤다.
주춤거리던 경비병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나무로 만든 명패를 가지고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들이 도시 밖의 풀을 박멸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몸에 일어난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시장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예,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불러오세요. 아니! 같이 가죠, 앞장서세요!”
시장이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꿈틀.
다시금 끓어오르는 기운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제사장 현석은 이를 악물고 그 뒤를 쫓았다.
* * *
다다다다닷-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호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편에서 경비병과 함께 두 명이 엘프가 달려왔다.
선두에 선 것은 격조 있는 가죽옷을 입은 여성 엘프.
늘씬하고 아름다운 것이야 엘프의 공통점이지만.
유독 기품 있어 보였다.
‘저 얼굴에 이상한 꼴을 한 놈은 뭐야?’
수호는 후미에 달려오는 자를 눈에 담았다.
얼굴에 분칠을 한 남성 엘프.
왠지 썩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싶은 찰나.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게 잡초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굉장히 감춰져 있지만. 흥! 본좌의 전능안을 피할 수는 없지.』
수호의 감각으로 확신하기 힘든 미약한 기운.
하나 발룡이의 기감에는 걸렸다.
‘잡초와 같은 기운?’
당연히 좋은 기운일 리 없다.
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엘프들이 일행 앞에 도착했다.
여성 엘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레드우드의 시장, 선예에요. 당신들이 저 풀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나요?”
이번에도 국진이 앞으로 나섰다.
“예, 잡초를 제거하고 다시 자라지 않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버럭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잡초라니! 저것은 어머니 나무께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불러온 신묘한 풀이니라! 어디서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서슬 퍼런 기세.
“그, 그게 아니고. 자, 잡초가 맞는데.”
놀란 국진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동시에 흘끔 수호를 쳐다봤다.
도움을 구하는 눈빛.
한데 수호가 나서기 전에 시장이 먼저 말했다.
“그렇게 다그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제사장님. 일단 안으로 모셔서 정확한 이야기를 들어 보죠.”
“저딴 헛소리를 뭐 하러 자세히 듣는다는 말이오!”
“헛소리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자세히 들어 봐야죠. 만약, 헛소리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면 될 테고요. 아닌가요?”
시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사장은 반박할 말이 궁색했다.
“흥! 신묘한 풀을 어머니 나무 근처에 자라게 하지는 못할 망정, 괴변에 귀 기울이려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머니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제사장의 말을 안 믿는 것부터가 문제요. 문제!”
불만을 터트리는 제사장이었지만, 수호 일행을 내쫓지는 못했다.
“알았으니, 일단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 눈구멍.
수호가 묘한 눈빛으로 실랑이를 관찰했다.
‘저놈이 문제인 것은 분명한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으려나.’
그리고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순조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나.
수호가 고민하는 사이 시장이 말했다.
“따라오세요. 이야기는 제 집무실에서 마저 듣도록 할게요.”
“흥! 안목이 없어도 저렇게 없어서야.”
제사장이 빈정거렸다.
시장은 개의치 않고 앞장섰다.
일행은 묵묵히 시장의 뒤를 따랐다.
막 성벽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세계수 원정대 II】를 완수하셨습니다.]
[교류 등급이 【일반】에서 【고급】으로 상승합니다.]
[새로운 차원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호위 임무라 언제 끝나나 했더니, 성 안에 들어오니 완수되는구나.’
그런데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차원 임무 【세계수 원정대 II】가 【의혹의 레드우드】로 연계됩니다.]
[교류 등급에 따라 고유 스킬 【차원 시야(하급)】이 【차원 시야(중급)】으로 변화합니다.]‘어? 스킬 등급이 올랐어!’
임무의 연계는 예상했다.
한데 보상으로 교류 등급이 상승하면서 덩달아 스킬이 변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확인부터.’
【차원 시야】의 변화가 몹시 궁금하다.
수호는 서둘러 스킬 정보를 확인하려 했다.
움찔.
그런데 수호가 갑자기 어깨를 떨었다.
스킬 창을 열지도 못했다.
『이런 시러베 잡놈의 새끼! 말도 못 알아듣는 등신 놈이! 전대 제사장들을 봐서 그냥 두고 있었더니, 감히 나를 말려 죽이려 들어!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 내가 힘만 되찾으면 네놈은 한 줌 흙으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 이 개나리 십장생 같은 새끼야!』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그곳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욕설이 끊임없이 고막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79화 레드우드 (2)
수호는 귓가에 울려 퍼지는 욕설의 진원지를 살폈다.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 맞지?’
레드우드시 중앙에 솟은 거대한 어머니 나무.
욕설은 분명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욕이 많이 섞여서 알아듣기 힘들지만, 일기장에서 본 내용과 관련이 있어.’
죽은 전대 제사장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망자의 부탁】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은 보는 눈이 많아서 어머니 나무와 대화를 나누기 힘들 테니.’
어머니 나무 건은 일단 뒤로 미룬다.
마음을 정한 후, 수호는 시장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곧 시장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집무실 안까지 경비병 몇이 따라붙었다.
‘일단은 시장을 통해서 잡초 제거 방법부터 전하자.’
자리에 앉은 뒤, 시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풀을 제거하실 수 있다고요?”
국진을 향한 물음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국진이 대답했다.
“그럼요, 제거할 수 있습니다. 저희 떡갈나무 마을 주변은 깨끗하게 제거된 상태고, 근처의 밤나무 마을과 고로쇠나무 마을도 제초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시장의 눈빛이 빛났다.
“풀을 제거했다는 말은, 그 풀이 해로운 것이라 확신한다는 뜻인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풀 때문에 어머니 나무가 힘들어하셨는데. 남자 엘프들 몸에도 그… 좋지 못한 현상이 발생했었고요.”
국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잡초의 유해성에 대해 질문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연한 질문을 하는군. 저것도 아마…….’
수호의 눈빛이 제사장을 향했다.
그는 붉게 칠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쾅!
제사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낯빛이 말해주듯, 잔뜩 화난 목소리가 뒤따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본 제사장이 분명히 어머니 나무께 들었다! 저 풀은 어머니 나무께서 몸을 회복하시기 위해 키워 낸 풀이란 말이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촌무지렁이 따위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그,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저 풀은 나쁜 잡초가 맞는데요? 어머니 떡갈나무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증거로 여기, 어머니 나무께서 자신의 가지를 떼어 주셨고요.”
국진이 떡갈나무 가지를 내밀었다.
여행 전 떡갈나무에게서 받아 온 것으로, 어머니 나무 특유의 영험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흥, 그딴 나뭇가지가 어떻게 증거가 된다는 말이냐!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이보시오, 시장. 당신은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언제까지 듣고 있을 생각이오?”
“저건 분명히 어머니 나무의 가지가 맞군요. 확실히 어머니 나무 특유의 기운이 느껴져요.”
시장은 제사장과는 생각이 다른지, 떡갈나무 가지를 자세히 살피더니 말했다.
제사장이 화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저게 설사 어머니 나무의 가지가 맞더라도, 그게 저들의 말이 사실이란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야! 어디서 가지를 꺾어 왔을지 알게 뭔가?”
제사장의 말은 억지였다.
강제로 가지를 꺾어도 그 기운까지 담기지는 않는다.
어머니 나무는 가지에 기운이 담기는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호 일행이 가지를 꺾지는 않았더라도, 다른 용도로 받아 왔을 수는 있는 법.
제사장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시장이 재차 질문했다.
“그 가지 말고는 당신들의 말을 증명할 수단이 없나요?”
“…어떻게 하죠, 정령님?”
국진이 수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전에 약속한 대답이 동났기 때문이다.
“정령?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수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제사장이 국진을 추궁했다.
국진이 호쾌하게 소리쳤다.
“정령님은 정령님이죠. 온갖 기이한 능력으로 우리 엘프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세계수의 정령님!”
* * *
‘그게 이 타이밍에 신나서 소리칠 말이냐.’
국진이 자식, 맹한 건 알았다만…….
수호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참았다.
장내의 시선이 모두 수호를 주시했다.
나서야 할 때였다.
차르르.
수호가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를 갈무리했다.
얼굴이 드러났다.
“어? 뭐야?”
“귀, 귀가 짧잖아!”
“키가 작기에 어린아이인 줄 알았더니, 설마 엘프가 아니었던 거야?”
경비병들이 술렁거렸다.
시장이 재빨리 나섰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세계수의 정령이란 말은 또 뭐죠?”
잠시 말을 고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타차원에서 온 인간입니다. 원수호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떡갈나무 마을에서 엘프들의 어려움을 몇 번 해결했더니 저를 정령이라 부르더군요. 가령 잡초를 제거한 일이라든가. 자신감이 떨어진 남자 엘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일이라든가 말이죠.”
다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타차원에서 왔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방금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잖아!”
“설마, 저 인간에게 치료법이 있는 거야? 진짜로?”
“나, 난 왠지 저 사람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탕탕!
시장이 테이블을 두드려 장내를 조용히 시켰다.
“방금 그 풀을 제거한 것이 당신이 한 일이라고 했나요?”
“네, 제가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풀이 나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혹시 그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있나요?”
증거는 있다.
증명할 방법도 넘친다.
하지만.
‘귀가 이렇게 많은 곳에서 굳이 모든 이야기를 떠벌릴 필요는 없지.’
수호는 좀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잡초의 해로움은 모든 남자 엘프가 직접 겪고 계실 텐데요. 안 그런가요?”
수호가 경비병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리고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문제, 제가 당장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요. 그거라면 저희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수호가 선언하듯 말했다.
경비병 사이에서 격렬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뭐? 당신이 정말 그,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똑바로 대답해야 할 거야. 만약 거짓말이면, 네놈은 대머리가 될 것이다!”
탕탕탕-
시장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란이 가라앉았다.
“그 문제를… 이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요? 사실인가요?”
‘그 문제’는 심각한 문제다.
아직 짝이 없는 여성이지만, 시장도 그것이 남자에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정도는 안다.
그렇기에 앉은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수호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 사실입니다. 30분 안에 당장 해결해 보이지요.”
수호가 선언했다.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오기 전, 시장이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요?”
“치료받을 분을 1명만 골라 주시겠습니까?”
시장이 경비병들을 돌아봤다.
정체 모를 인간의 제안.
쉽사리 응할 엘프가 있을까?
시장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레드우드의 미래를 위한 일, 제 한 몸 아낄 수는 없습니다.”
“저야말로 대대로 레드우드를 위해 일해 온 집안의 장남, 꼭 제가 실험 대상이 되겠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 4달 됐습니다. 하필 그때쯤부터… 크흑-”
결국, 마지막 경비병이 선발됐다.
수호는 차원 보따리에서 ‘성약’을 꺼냈다.
“이 알약을 물과 함께 드세요. 그럼 머잖아 반응이 올 겁니다.”
“…정말 그걸로 됩니까?”
“네, 믿고 드세요. 어차피 몇 분 안에 판가름 날 테니까요.”
경비병이 약을 먹었다.
잠시 후.
“되, 된다. 진짜로, 진짜로 된다고! 여, 여보!”
바지 앞이 불룩해진 경비병이 창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남자 엘프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내 수호를 향해 불타는 시선을 던졌다.
수호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나 당장 약을 건네지는 않았다.
“자, 이 정도면 제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봐도 되겠죠?”
끄덕끄덕.
남자 엘프들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동의하지 않았다.
쾅!
제사장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네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흥분해서 숫제 수호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시장이 나섰다.
“제사장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좀 더 대화를 나눠 보면, 명확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대화?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하지? 내가 말했잖아! 저건 잡초가 아니라고! 저건 꼭 어머니 나무 근처까지 자라도록 둬야 한다는 말이다! 이 멍청한 것들!”
“진정하시라니까요. 그렇게 소리 지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거듭된 만류에도 제사장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내일 당장 대제사를 열 것이오. 그리 아시오. 내 온 시민 앞에서 어머니 나무께서 하신 말씀을 널리 알릴 것이며, 저 사특한 무리를 벌할 거요! 흥!”
고함을 내지른 제사장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수호가 시장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조용한 곳에서 따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겁니다.”
레드우드의 시장으로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엘프로서도.
“…알겠어요.”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쾅-
문이 부서질 듯 덜렁거렸다.
제사장 현석이 거처로 들어섰다.
“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제사장의 어린 제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들어오지 마라!”
현석은 제자를 밀쳐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뒤진 현석이 붉은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크윽.’
현석은 신음을 삼키며, 액체를 얼굴에 칠했다.
그제야 현석은 가슴속에 꿈틀거리던 기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빠득.
현석이 이를 갈았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계속 미적거리던 시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증스러운 년.’
갑자기 나타나 ‘정령’이니 뭐니 떠들며, 헛소리를 늘어놓던 놈들도 생각났다.
‘개 같은 놈들.’
꿈틀.
감정이 격해진 탓일까.
가슴속 기운이 다시 용트림했다.
현석은 액체를 다시 얼굴에 발랐다.
기운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대로 둘 성싶으냐?’
현석의 눈에 광기가 일렁였다.
‘모두 네놈들 탓이다. 네놈들이 자초한 일이다.’
한동안 웅얼거리던 현석이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스, 스승님?”
안절부절못하는 제자에게 현석이 소리쳤다.
“대제사를 열 것이다. 내일 당장! 너는 얼른 가서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해라.”
* * *
레드우드 시장 공관, 어느 방.
수호 일행은 머물 곳을 안내받았다.
『식어도 맛있다니! 본좌는 뼈가 있는 편이 좋지만, 순살 닭강정도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이니라.』
발룡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차원 보따리에서 꺼낸 닭강정을 먹었다.
“윽- 제 코에는 냄새가 완전 이상합니다, 드래곤님.”
“맞아요. 그런 걸 어떻게 먹습니까?”
“신선한 과일과 채소야말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드래곤님. 이 당근을 좀 드셔 보십시오.”
『이 시끄러운 귀쟁이 놈들! 치느님을 모욕할 셈이냐! 아니면 본좌를 우롱하는 것이냐? 그 주황빛 흉악한 물건을 저리 썩 치우거라!』
국영수 트리오의 주접력(?)과 발룡이의 중2력이 합쳐지자, 볼 만한 광경이 연출됐다.
‘잘들 노는구만.’
피식 웃은 수호는 적당히 식사를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과는 쉽게 풀려서 다행이야.’
수호는 어렵지 않게 시장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시장은 말이 통하는 엘프였다.
게다가 원래부터 잡초에 대해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기장과 [제사장의 반지]를 보여 주자, 시장은 수호의 일에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이제 다음 대상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텐데… 그 전에.’
수호는 차원 패널을 열고 임무 창을 띄웠다.
『세계수 원정대 II』에서 연계된 임무를 살폈다.
『의혹의 레드우드』
- 당신은 잡초와 세계수의 이변에 대한 소식을 레드우드로 가져왔다. 하지만 레드우드 엘프들은 당신의 말을 쉽사리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잡초’를 이로운 풀로 왜곡하여 시민을 속인 제사장 때문. 제사장의 거짓을 밝혀, 시민들이 미혹에서 벗어나도록 돕자.
- 보상 : 레드우드 엘프와 교류. 레드우드 엘프 만족도.
이번에도 임무를 완수해야 교류가 시작되는 형식.
한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레드우드의 모든 시민을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임무 달성의 조건이야.’
한데 제사장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성약’의 효과를 본 경비병들조차, 여전히 잡초의 해로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으니…….
아마 일기장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는 대중의 확실한 지지를 받기 힘들 터.
오히려 일기장의 진위를 증명하는 과정만 더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호는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사장의 가면을 완전히 벗겨 버려야 해.’
온 시민 앞에서.
제사장이 거짓말쟁이이며, 나쁜 짓을 저질러 왔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일행만 따로 떨어진 지금이 적기였다.
『…이끼보다도 열등한 새끼. 한 줌 흙으로 돌려보내 버리겠어! 너 같은 놈을 낳고 네 어미가 내 열매로 차를 끓여 먹었었다, 이 천하의 후레자식 놈아.』
지금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어머니 나무의 욕설.
수호는 말이 끊기는 틈을 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죠? 정말 나쁜 자식이에요. 개나리 같은 새끼.”
『그건 개나리에 대한 모욕이지. 개나리만도 못한 새끼라고 불러! 말도 못 알아듣는 새끼가 욕심만 많아서는! 으으- 열불 터져!』
“역시 그 제사장은 어머니 나무님의 목소리를 못 듣는 거였군요? 하긴 반지를 노리고 스승을 배신한 놈인데, 막상 반지는 못 얻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네요.”
『스승을 배신했다고? 이 천하의 쓰레기 같은… 잠깐! 근데 지금 설마……?』
갑자기 목소리가 끊겼다.
어머니 나무의 놀람이 전해졌다.
수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무를 직접 만나는 건 두 번째인데, 이번 분은 성미가 화끈하시네요. 하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머니 나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차원 보따리에서 도토리 열매를 꺼내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전에 만난 떡갈나무님과도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열매도 얻었고요.”
『정말이었어!』
어머니 나무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수호가 웃으며 제안했다.
“제가 그 빌어먹을 놈을 족칠까 하는데, 같이하시겠습니까?”
80화 레드우드 (3)
어머니 나무의 말투가 변했다.
『하도 억울한 일을 당했더니, 화가 나서 그랬지 뭐예요. 호호호. 말이 거칠어서 미안해요. 이해해 줘요.』
내숭 떠시기엔 좀 늦으신 것 같습니다만.
수호는 떠오르는 말을 삼키고 인사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어쨌든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구라는 타차원에서 온 원수호라고 합니다. 수호라고 불러주세요.”
『아, 수호 님이셨군요. 호호. 저는 이곳 레드우드의 어머니 나무인 세쿼이아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세쿼이아 님이시군요.”
워낙 크게 자랐기에 혹시나 했더니.
정말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의 종인 세쿼이아였다.
『그렇답니다. 근데 아까 말했지요? 똥멍청, 호호, 제사장 놈을 때려잡으시겠다고요.』
“네,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제사장은 나쁜 놈이니까요.”
『맞아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놈은 잡초를 이로운 풀인 양 속여서 시민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이란 걸 시민들 앞에서 까발릴 생각입니다.”
제사장이 스스로 대제사를 열기로 했으니 그때가 기회였다.
세쿼이아가 고민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레드우드에서 제사장의 말은 그리 가볍지 않아요. 수천 년 동안 여러 제사장이 제 말을 전해 왔으니까요. 눈앞에 진실을 보여 줘도, 놈의 말을 뒤집기는 어려울 거예요.』
어머니 나무는 엘프들에게 생명의 요람이며 종족의 목숨과도 같다.
그런 어머니 나무를 대변하는 것이 제사장이다.
그 권위를 단숨에 부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제사장의 힘은 어머니 나무와 소통하는 데서 나오죠. 그러니 어머니 나무께서 도와주시면, 놈의 영향력을 단박에 부정할 수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몸이 정상이 아니랍니다.』
예상하던 바다.
떡갈나무 때도 그랬으니까.
한데 왠지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잡초를 막느라 기운을 소모하셔서 그런 겁니까?”
수호는 떡갈나무 때와 같은 이유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지금처럼 앙상한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그 개나리… 제사장이 내 뿌리에 이상한 씨앗을 박아 넣었어요. 잡초의 것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씨앗을요.』
“씨앗이요?”
『그 씨앗이 제 기운을 모조리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나는 씨앗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하고 있답니다. 그 탓에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고요.』
성벽 밖의 잡초가 너무 무성하다 했더니.
어머니 나무가 손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군요. 근데 그 씨앗의 기운이 잡초와 비슷하다고 하셨나요?”
『네. 은밀하고 음흉하죠. 겉보기엔 해롭지 않아 보이고요. 잡초의 것과 똑같은 기운이 분명해요.』
그렇다면 해결 방안이 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호는 차원 보따리에서 윌슨의 제초제를 꺼냈다.
잡초가 가진 기운의 흐름을 틀어막아 잡초를 고사시키는 금속 가루.
‘씨앗이 잡초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다면 제초제가 통할 거야.’
수호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발룡아, 일 하나만 하자.”
『뭣? 본좌가 식사 중인 것이 안 보이느냐?』
“위대하신 흑염룡께서 약간의 힘만 발휘하면 끝나는 일이야. 이 하찮은 가디언 후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위대한 존재가 해야 할 책무 아니겠니?”
『흥!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소용없다. 무슨 부탁이냐?』
발룡이가 닭강정 상자를 내려놓고 앞으로 날아왔다.
소용없다며?
수호는 웃음을 참으며 제초제를 건넸다.
“도시 중앙에 세쿼이아 님 보이지? 뿌리에 이상한 씨앗이 박혀 있을 거야. 네 기감이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겠지? 거기 제초제를 뿌려 줘.”
『그 정도도 혼자 못 한단 말이냐? 그래서야 어디 훌륭한 가디언이 될 수 있겠느냐?』
툴툴거리면서도 제초제를 받아 드는 발룡이.
수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참, 투명화해서 가고.”
자칫 제사장한테 들키면 곤란하니까.
『흥,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아느니라. 하나, 둘, 셋…….』
“안 가고 뭐 하냐?”
『다녀오는 사이 본좌의 닭강정이 하나라도 줄어든다면, 그때는 이 차원의 명운도 그것으로 끝인 줄 알거라.』
“어, 그래.”
수호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파다닥.
발룡이가 창밖으로 날아갔다.
.
.
.
잠시 후.
『아아아아아아-』
세쿼이아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온 도시를 울렸다.
수호는 서둘러 소리쳤다.
“아직 힘을 되찾으신 걸 티 내면 안 됩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어요, 수호 님. 큰 은혜를 입었으니, 당신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드리겠어요. 그럼 이제 그 개… 제사장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내일 대제사에서 말입니다…….”
수호가 계획을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놈이 놀랄 표정이 너무 기대되네요.』
“네, 그다음에는…….”
『내가 내일 말라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모습은 꼭 보고 말겠어요. 호호호.』
밤이 깊도록 수호와 세쿼이아의 작전 회의가 계속됐다.
* * *
현 제사장 현석은 어린 나이에 22대 제사장 진호의 제자가 되었다.
진호의 뒤를 따라다니며 제사장으로서 갖춰야 할 기술과 소양을 배워나갔다.
한데 그 과정에서 현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제사장이야말로 레드우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엘프야.’
엘프는 어머니 나무 없이는 살지 못한다.
어머니 나무와 대화할 수 있는 제사장이야말로, 레드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한데 제사장은 레드우드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특히, 소탈한 성격이던 스승 진호는 모든 이를 친구처럼 대했다.
현석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시장의 존재도 거슬렸다.
‘어째서 시장처럼 쓸데없는 직책이 있는 거지?’
제사장 아래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가면 될 것 아닌가?
현석의 불만은 나날이 쌓여 갔다.
한계를 넘어선 불만은 기어이 나쁜 쪽으로 분출됐다.
배신.
스승을 배신하고 스승이 가진 [제사장의 반지]를 빼앗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스승인 진호는 현석이 준비한 함정에 빠지고도 죽지 않았고, 오히려 사막으로 도주했다.
[제사장의 반지]와 함께.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석의 배신을 아무도 모른다는 점.
어머니 나무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벌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현석은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왜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냐고!’
[제사장의 반지]는 미숙한 제자를 보조하기 위한 기구.
완숙의 경지에 오르면, 반지 없이도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 현석의 귀에는 끝까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나야말로 레드우드의 지배자야. 지배자가 되어야 해!’
스승을 배신하고.
시장도 없애고.
장차 레드우드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던 현석의 꿈이 물거품이 되려 했다.
그때 현석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 힘이 필요한가?
뭐? 이게 무슨 소리야?
- 힘이 필요한가?
.
.
.
목소리는 끊임없이 현석의 머릿속을 울렸다.
처음에는 환청이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목소리는 계속되었고, 현석은 어느 순간 목소리에 대답하고 있었다.
“넌 누구지? 힘을 준다고? 무슨 힘을 준다는 말이야?”
- 세상을 모조리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힘을 주겠다.
- 세상의 모든 존재가 네 앞에 벌벌 떨게 될 것이며.
- 모든 생명의 생살여탈권이 네 것이 될 것이다.
달콤한 유혹은 계속됐다.
현석은 물었다.
“…대가는?”
- 풀을 널리 퍼트려라. 마력이 강하게 흐르는 곳, 생명력이 강한 곳, 생명이 밀집한 곳에.
- 풀이 널리 퍼지고, 기운이 충분히 모이면.
- 내가 현신하여 세상을 정화할 것이다.
“정화?”
- 너는 정화된 세상의 왕이 될 것이다.
한 단어가 현석의 뇌리에 푹 틀어박혔다.
“왕!”
엘프들이 쓰지 않는 용어지만 그 뜻은 안다.
군주. 임금. 절대 권력의 상징.
그것은 현석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조, 좋다. 좋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현석이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기이한 기운이 현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
.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현석은 마음 한구석에 미뤄 둔 욕망을 떠올렸다.
‘왕!’
꿈틀.
가슴 안에서 ‘힘’이 꿈틀거린다.
하나 아직은 터트려서는 안 된다.
힘을 쓰는 것은 최후의 수단.
그전에 풀을 온 세상에 퍼트리는 것이 먼저다.
현석은 얼굴에 화장을 덧칠했다.
몸속에 꿈틀거리는 기운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화장을 하는 사이.
분노가 가라앉고, 다행히 기운도 잠잠해졌다.
“오늘 대제사에서 레드우드를 손에 넣는다.”
쓸데없는 말을 퍼트리는 이방인을 처단하고, 시장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하여 풀을 도시 안으로 들일 것이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중얼거린 현석이 방을 나섰다.
* * *
레드우드 시 중앙.
어머니 나무 앞에 마련된 높은 단상.
제사장이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어머니 나무를 마주 본 자세.
온 시민이 삼삼오오 모여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수호도 단상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장과 몇 명의 경비병이 함께였다.
“레드우드를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어머니 나무시여!”
제사장의 기도가 시작됐다.
『이 말라 죽을 새끼가 염치도 없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세쿼이아가 노성을 터트렸다.
수호가 재빨리 속삭였다.
“세쿼이아 님, 아직 나서면 안 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호호. 제가 추태를 보였군요. 한동안 혼자 떠드는 게 습관이라 그만,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듣는다는 걸 깜빡했어요, 수호 님.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동안 참은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이죠. 저는 입 다물고 수호 님의 신호를 기다릴게요. 호호.』
세쿼이야가 대답했다.
수호는 단상을 바라봤다.
제사장이 열띤 목소리로 기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사장이 일어섰다.
“여러분! 저는 레드우드에서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듣는 유일한 엘프입니다.”
제사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호소하듯 외쳤다.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시민 누군가가 소리쳤다.
제사장이 대답하듯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나무의 유일한 대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비통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끌었다.
“제사장님이 왜 저러시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건가?”
“어머니 나무께서 뭔가 말씀하신 걸까?”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을 때, 제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어머니 나무께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장에게 말했지요. 그런데! 분명 어머니 나무께서 지시하신 일을 시장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시민들 사이로 동요가 인다.
“뭐? 시장님이?”
“시장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레드우드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 분인데.”
“제사장님이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들었다잖아.”
“난 어쨌든 어머니 나무의 말씀은 따라야 한다고 봐.”
웅성거림은 갈수록 커졌다.
‘흐흐흐,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제사장의 힘이야!’
말 몇 마디로 엘프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
이것이야말로 제사장의 힘이었다.
‘그래, 그렇게 모두 내 말을 따라라. 흐흐흐.’
제사장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마을 밖에 자라난 풀은 다들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 풀이 왜 생겨났을까요? 몇몇 분은 제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저것은 어머니 나무께서 아픈 몸을 치료하시기 위해 싹 틔운, 신묘한 기운을 가진 풀입니다!”
“아! 들은 적이 있어. 제사장님이 저번에 하신 말씀이야.”
“어머니 나무께서 길러 내신 풀이라 그렇게 빨리 자란 거였나?”
제사장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런데! 시장은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무시하고, 풀을 도시 내에서 뽑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머니 나무께서는 지금도 하루하루 말라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이라도 풀을 들여와 어머니 나무를 치료해야 합니다!”
“맞아. 어머니 나무께서 너무 힘들어 보이셔.”
“앙상하게 마르셨어. 이파리도 많이 떨어졌고.”
“시장님은 도대체 왜 그러신 거지?”
“빨리 풀을 가지고 오자.”
몇몇 엘프는 도시 밖으로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래, 가라! 가서 풀을 가지고 와라.’
뿌리에 씨앗을 박아 둔 것만으로는 어머니 나무를 제압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을 온통 풀밭으로 만들면, 어머니 나무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기운을 토해 낼 것이다.
제사장은 비릿한 미소를 숨기며 시선을 돌렸다.
멍청하게 서 있는 시장의 모습이 보였다.
‘흐흐흐, 시장. 보고 있나? 이게 네년과 내 차이다.’
제사장이야말로.
바로 나야말로 레드우드의 진정한 지배자다!
제사장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한데 그때.
“거짓말이 청산유수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함도 외침도 아니었지만 신비롭게도 온 도시로 퍼져 나갔다.
『확성 마법이 잘 걸렸군. 온 도시의 귀쟁이들이 네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니라.』
발룡이의 속삭임을 들으며 수호가 단상으로 올라섰다.
81화 레드우드 (4)
“저 사람은 뭐지?”
“저 귀 좀 봐!”
“귀가 짧잖아! 엘프가 아니야!”
“거짓말이라는 말은 누구한테 한 거지? 설마 제사장님한테 한 말인가?”
엘프들이 웅성거린다.
제사장은 단상에 올라선 존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자칭 타차원에서 온 존재.
풀을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놈.
아울러 처음 볼 때부터 꺼림칙한 느낌을 주던 놈이었다.
“네놈은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지?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야. 경비병! 저놈을 끌어내라! 어서!”
제사장은 불길함을 느끼고 소리쳤다.
경비병이 움직였다.
한데 제사장이 원하던 움직임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지? 왜 저놈을 끌어내지 않는 거야!”
포위하듯 단상을 에워싼 경비병들을 보며 제사장이 외쳤다.
대답은 시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기 전까지, 누구도 단상에 접근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오, 시장! 당신 감히 외부인과 결탁하여 나를 해치려는 것이오?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듣는 제사장을?”
제사장이 버럭 소리쳤다.
시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수호가 입을 열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구만.”
제사장이 수호를 노려봤다.
“뭣이? 이 쥐방울만 한 놈이! 아까부터 계속 거짓말이니 뭐니 하는데, 감히 본 제사장을 모욕하는 것이냐? 네놈이야말로 무슨 권한으로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이냐?”
“전부 거짓말 맞잖아. 그리고 자격이라…….”
수호는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엘프들의 의아한 시선이 수호를 향했다.
수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걸 가지고 있으니, 진실을 말할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사장의 반지]였다.
“그, 그것은?”
제사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부를 시해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물건.
도주하던 사부가 슬라임에게 잡아먹히는 바람에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아이템이었다.
“역시 알아보는군. 당신 말고도 알아볼 사람이 있겠지?”
수호는 반지를 사방으로 들어 보였다.
“어? 전대 제사장님이 끼고 계시던 반지다.”
“맞아! 진짜야!”
“저거, 아마 대대로 제사장님께 물려 내려오는 반지일걸?”
“근데 저게 왜 저 이방인의 손에 들린 거지?”
군중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왜 네놈의 손에 있는 것이냐? 설마! 사부님이 갑자기 실종되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네놈 짓이었구나!”
제사장이 소리쳤다.
거짓말쟁이다운 대응이었다.
군중이 다시 웅성거렸다.
반면에 수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수호의 손이 품을 뒤졌다.
얇은 책이 들려 나왔다.
수호는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믿었던 제자의 배신은 끔찍했다. 하지만 제자의 경지가 낮았기에, 나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도주할 수 있었다. 놈은 끈질기게 추격해 왔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들인 얼음 사막에서, 나는 아이스 슬라임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발룡이의 확성 마법이 걸린 수호의 목소리는 온 엘프의 귓가에 또렷이 전달됐다.
“저게 무슨 말이야? 제자에게 배신?”
“반지가 전대 제사장님의 것이라며. 그럼 저 책도 혹시 그분이 남기신 거 아닐까?”
“뭐? 그럼 지금 제사장님이 설마?”
“그, 그런 무서운 일이…….”
제사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 네놈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제사장이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이건 레드우드의 22대 제사장인 진호가 아이스 슬라임의 뱃속에서 남긴 일기입니다. 유서이기도 하고요.”
수호가 시민들을 향해 설명했다.
몸을 부르르 떨던 제사장이 황급히 외쳤다.
“네, 네놈이야말로 거짓말쟁이다! 어디서 주워 온 책 쪼가리로 감히 거짓말을 지어 내느냐! 쥐방울만 한 놈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레드우드와 어머니 나무를 우롱하려 드는구나!”
간신히 정신을 되찾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빌어먹을 스승 같으니. 뒈질 거면 곱게 뒈졌어야지! 어쨌든 우긴다! 저딴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고, 풀을 어머니 나무 근처로 가져다 심는다.
영원히 제사장 노릇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분’이 강림하실 때까지.
풀이 충분한 생명력을 빨아들일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제사장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나무를 우롱하는 건 오히려 당신일 텐데?”
“무슨 헛소리냐! 어머니 나무의 뜻을 대변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제사장이다! 네놈은 제사장의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냐!”
다시 고래고래 소리치는 제사장.
수호가 심유한 눈빛으로 추궁했다.
“말을 지어내어 시민들을 현혹하고, 어머니 나무를 우롱한 쪽은 당신 아닌가?”
“뭐라고!”
“잡초가 어머니 나무를 위한 것이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게다가…….”
이를 바득 가는 제사장.
뜻밖의 사태에 긴장한 채 단상을 주시하는 엘프들.
모두의 시선이 쏠렸을 즈음.
수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잖아?”
* * *
제사장의 눈이 경악으로 치 뜨였다.
그것은 오직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한데 이방인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제사장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증거는 없다. 증명할 방법도 없어.’
빌어먹을 이방인 놈.
이 자리만 벗어나면 꼭 죽여 버리고 말겠다!
이를 부드득 간 제사장이 재빨리 소리쳤다.
“개소리! 내가 어째서 어머니 나무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말이냐!”
“개소리라니. 지금도 당신을 욕하고 있는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좌중이 적막에 잠겼다.
제사장은 석상처럼 굳었고, 나머지 엘프들은 수호의 충격적인 발언에 당황했다.
그때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역시 정령님! 완전 멋지시다니까.”
“맞아, 싸움만 잘하시는 게 아니야. 말발도 최고셔. 하하.”
“정령님, 저 사기꾼을 박살 내 버리세요. 화이팅!”
국영수 트리오였다.
그들의 응원 덕분에, 경악으로 멈춘 듯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수호가 제사장을 추궁했다.
“당신, 안 들리지? 그러니까 그렇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어머니 나무께서는 몸을 회복하시기 위해, 얼마 전부터 목소리를 내지 않으시거늘.”
“아니야. 지금도 말하고 계셔.”
“헛소리하지 마라!”
“증명해 줄까?”
“뭐라고!”
수호가 시선을 어머니 나무로 돌렸다.
“세쿼이아님, 당신이 지금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레드우드의 시민들에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저 개나리만도 못한 놈의 얼굴이 기대되는군요. 지금도 제법 보기 좋지만요. 호호.』
수호에게만 들리는 대답이 돌아온 후.
바스스스-
바람도 없는데 어머니 나무의 가지가 떨렸다.
“헉! 어머니 나무께서 움직이셨어.”
“저 이방인의 목소리에 반응하셨다고!”
“그럼 정말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이었던 거야?”
사방에서 경악성이 들려왔다.
제사장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된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어머니 나무가 반응하다니!”
어머니 나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없어야 한다.
‘그분’이 주신 씨앗을 뿌리에 박아 뒀다.
힘을 쓸 수 없어야 정상이다.
한데 어째서 어머니 나무가 움직인단 말인가.
하물며 이방인의 목소리에!
‘수십 년을 노력한 나조차도 어머니 나무와 대화하지 못하건만, 엘프도 아닌 네놈 따위가!’
말이 안 된다.
제사장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이어진 수호의 말은 제사장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시네요. 당신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고. 재능 없고 욕심만 가득한 쓰레기라고. 들리나요?”
“마, 말도 안 돼! 그딴 일은… 가지 한번 흔들렸다고 진짜 네놈의 말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발악하는 제사장.
수호가 치명타를 가했다.
“그럼 이러면 될까요? 어머니 나무님, 이제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수호의 말이 떨어진 순간.
화아아악-
어머니 나무에서 강력한 생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어머니 나무의 모습이 변했다.
“어, 어머니 나무께서 변하신다!”
“이파리가 돋는다! 가, 가지에도 생기가 돌아오고 있어!”
“저렇게 생기 있는 모습은 몇 달 만에 처음이야.”
“헉! 꽃이다! 가지 끝에 꽃이 폈다!”
놀라는 엘프들에게 수호가 소리쳤다.
“어머니 나무는 끊임없이 말하고 계셨습니다. 단지 저 무능한 제사장이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죠.”
끓는 물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소란이 폭발했다.
“정말 저 사람의 말이 맞았어. 이때까지 한 말 중에 실현되지 않은 게 없잖아!”
“그럼 제사장이 진짜 배신자란 말이야?”
“풀도 정말 나쁜 풀이었던 거고?”
“이때까지 한 번도 어머니 나무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는데. 그럼 여태 한 말이 다 꾸며 낸 거였어? 그럴 수가.”
엘프들이 경악에 빠져 있을 때.
어머니 나무가 수호에게 말했다.
『내친김에 잡초도 제거해야겠군요. 지금이라면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참느라 고생하셨어요.”
수호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엘프들의 의혹을 확실히 떨치기 위해 미뤄 둔 일이 시작됐다.
어머니 나무의 꽃에서 꽃가루가 흩뿌려진 것이다.
“꽃가루다!”
“어? 멀리 날아가는데? 뭐 하시는 거지?”
“도시 밖까지 가겠는걸?”
꽃가루는 어머니 나무의 권능에 의해 멀리 날아갔다.
도시 주변을 뒤덮은 잡초 위로 내려앉았다.
잡초가 조금씩 말라붙기 시작했다.
‘제초제를 꽃가루에 실어서 저 넓은 공간에 뿌리다니.’
커서 그런가?
권능이 떡갈나무보다 더 대단한걸?
수호는 세쿼이아가 실현한 이적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그런 수호와 극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엘프가 있었으니.
제사장이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럴 수 있지? 어떻게 어머니 나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냐고.”
왜 내가 아니라 저딴 이방인 놈이.
심지어 말하는 족족 부탁을 들어주기까지 하잖아!
꿈틀.
제사장의 가슴에서 불길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이건 말이 안 돼.
불공평해.
이딴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야.
꿈틀.
레드우드는 내 거라고.
모든 엘프는 내 말에 복종하고, 내 말을 들어야 해.
꿈틀.
내가 왕이니까.
‘왕’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제사장의 머릿속에 연관되어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왕이 되려면, 충분한 생명력을 모아서 그분께 전해야 해. 풀이 말라 버리면 왕이 될 수 없어.’
안 돼.
안 돼!
나는 왕이 되어야 해!
제사장이 얼굴로 손을 뻗었다.
화장이 닦여 나갔다.
푸콱-
간신히 억눌러 놓은 마기가 터져 나왔다.
우두둑.
제사장의 뼈마디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어? 저기 좀 봐! 제사장님이.”
“제사장님은 무슨, 배신자지. 헉! 왜 저래?”
“미, 미친! 괴물이다! 제사장이 괴물로 변했어.”
“피해야 해!”
제사장은 달라져 있었다.
제사장의 심장 어림에서 튀어나온 잡초가 온몸을 뒤덮었다.
잡초를 엮어 빚어낸 거인 같은 형상.
문어 다리 같은 촉수가 발을 대신했고.
가슴과 팔에서도 수백 가닥의 잡초 다발이 길게 뻗어 나와 있었다.
“스, 스승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가까이 있던 제사장의 제자가 놀라 외쳤다.
제사장이 풀 촉수를 휘둘렀다.
퍼석!
촉수에 맞은 제자의 머리가 단번에 박살 났다.
“경비대는 괴물을 막아라!”
시장이 명령했다.
하나 마족에게 직접 내려받은 이능은 경비대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파라라라라락-
촉수가 사방을 쓸었다
“크억-”
“너무 강해.”
“제, 제길. 갑자기 저런 괴물이라니.”
“어머니 나무시여.”
경비대고 시민이고 할 것 없이, 절망을 느꼈다.
그때 바닥을 찢고 나무뿌리가 솟구쳤다.
콰드드드득.
뿌리가 괴물의 몸을 족쇄처럼 포박했다.
“어머니 나무께서 나서셨다!”
“어머니 나무께서 괴물을 잡았어!”
“이제 살았어.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무시여!”
엘프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어머니 나무의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기운이 많이 상한 탓에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 같네요. 수호 님, 부탁할게요.』
어젯밤부터 최선을 다해 힘을 회복한 어머니 나무였다. 하나 원상태를 회복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적은 마기가 폭주한 마족의 종복.
만전의 상태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수호에게도 버거운 상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맡겨 주십시오.”
그럼에도 수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완벽한 승리 공식이 준비됐기 때문이다.
‘그럼 처리해 볼까. 차원 여행!’
수호가 스킬을 시전했다.
팟-
수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이어.
불쑥.
레드우드 상공에 거대한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82화 레드우드(5)
수호의 가게 안.
수호와 발룡이가 나타났다.
“수호, 돌아왔구나! 생각보다 빠른걸?”
때마침 근처에 있던 윌슨이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윌슨, 안녕. 근데 지금은 바빠서 이야기할 틈이 없어.”
“알았어. 일 봐.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되니까. 하하.”
“응.”
수호가 냉장고에 다가갔다.
열린 냉장실 문틈으로 ‘레드우드’의 모습이 보였다.
윌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돌아오면 떡갈나무 마을로 시야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원래라면 그게 맞다.
수호가 귀환하면, 차원문이 열린 곳으로 시야가 돌아가야 하니까.
한데 지금 냉장실 안에 비치는 것은 분명 레드우드다.
윌슨이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여행하면서 능력이 성장했어. 자세한 건 이따 이야기해 줄게.”
【차원 시야(중급)】
- 타 차원을 살피는 시야를 움직인다.
- 각 교류 차원마다 한 곳의 시야를 더 지정할 수 있다. 단, 한번 정한 시야는 변경하지 못한다.
【차원 시야】의 등급이 오르며 새로운 기능이 생겼다.
수호는 지구에서 레드우드에 간섭할 수 있게 됐다.
괴물이 된 제사장을 보고도, 수호가 승리를 확신한 이유였다.
“그럼 해치워 보실까.”
수호가 냉장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 *
화가 난다.
불공평해.
어째서 내게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거지?
제사장 현석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분노가 차올랐다.
꿈틀.
동시에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다시 한번 마기가 용솟음쳤다.
“모두 저 빌어먹을 어머니 나무 때문이야! 크르르르-”
제사장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푸콰콰콰콰콰콰-
제사장이 딛고 선 땅에서 잡초 다발이 치솟았다.
몸에서 생겨난 것보다 몇 배는 많다.
주변에 흩뿌려진 잡초의 씨앗이 제사장의 마기에 반응한 것이다.
“괴물이 어머니 나무의 뿌리를 뜯고 있어!”
“막아야 하는데, 다가갈 수가 없어.”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잡초 촉수가 제사장을 결박한 세쿼이아의 뿌리를 갉았다.
우직.
기어이 뿌리가 뜯겨 나갔다.
자유를 얻은 제사장의 시선이 어머니 나무를 향했다.
“그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크르르- 흡수하는 거야.”
한 몸이 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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