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2

그만큼 상왕련주의 영향력이 크다.
상왕련주만 손에 넣으면 상왕련의 실권을 휘두를 수 있다.
문제는 상왕련주가 협박이나 회유가 통할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육경환은 상왕련주의 심령을 제압하기 위해 방법을 준비했다.
‘음양혈고(陰陽血蠱)만 작동시키면 끝난다.’
음양혈고.
음고陰蠱와 양고陽蠱라는 암수 한 쌍의 독충이다.
‘어르신’에게 받아 온 것으로, 사람에게 복용시켜 사용한다.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었다.
‘심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음양혈고는 인간의 심장에 기생한다.
양고를 먹은 자는 음고를 먹은 자의 명령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변한다.
‘상왕련주의 몸에 이미 양고를 주입해 뒀으니.’
양고를 먹인 후, 그것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섭취해야 할 약물도 있다.
그것이 홍검이 맡은 임무.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 작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상관없다.’
음고와 양고를 먹은 두 사람의 피를 섞어서 나눠 마심으로써, 음양혈고가 작동을 시작한다.
준비는 끝났다.
음고는 육경환이 직접 복용했으니.
이제 상왕련주를 제압해 피를 나눠 마시기만 하면 끝.
‘어려울 것도 없고.’
육경환이 마기를 끌어 올렸다.
고오오-
그의 몸 주변으로 시커먼 마기가 넘실거렸다.
‘흑령옥!’
육경환이 고유 스킬, 흑령옥을 시전했다.
검은 기운이 강당 전체를 휘감았다.
『마기로 만든 결계다.』
발룡이가 경고했다.
육경환의 스킬은 강당을 마기로 둘러싸인 감옥으로 만들었다.
강한 힘으로 흑령옥을 깨거나, 육경환을 죽이지 않는 한 드나들 수 없다.
‘이상해.’
수호는 발룡이에게 대답하는 대신, 육경환을 응시했다.
의아한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육경환이 날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수차례 수호의 목숨을 노린 육경환이다.
한데 투구로 얼굴을 감싼 탓에, 그는 수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어. 좀 더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잠시 눈빛을 빛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윌슨에게 들은 마족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누구의 종복인가? 아니지. 기운을 보니, 종복조차 되지 못한 하찮은 놈일지도 모르겠구나.”
“……!”
육경환이 멈칫했다.
‘어르신’에게 힘을 준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어르신은 그 존재의 종복을 자처한다.
육경환이 어르신에게 들은 내용이다.
그렇기에 육경환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근본도 없는 무지렁이 같지는 않고, 어느 종복 밑에서 일하는 놈이더냐?”
수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누구지?”
“내 질문이 먼저였을 텐데? 그리고 네놈이 감히 내게 질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수호가 발룡이의 말투를 떠올리며 호통쳤다.
움찔.
육경환이 위축되었다.
어르신에게 느낀 압박감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어르신 말고도 그런 존재가 더 있는 건가?
아니면, 저놈도 어르신의 수하인가?
혼란이 육경환을 집어삼켰다.
고착 상태가 이어졌다.
당황으로 흔들리던 육경환의 눈동자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현수? 그렇다면 저놈은!’
상왕련주 옆에 선, 활대를 쥔 청년.
그는 육경환이 아는 얼굴이었다.
‘원수호! 저놈이 원수호였어!’
정보가 어디서 샜나 했더니!
저간의 상황이 단번에 파악됐다.
육경환의 얼굴에서 당황이 지워졌다.
“이제 막 2성에 오른 주제에 감히 내게 하찮다고 했느냐?”
사령을 어떻게 이겼는지.
마족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떠오르는 궁금증을 미뤄 둔 채, 육경환은 분노했다.
농락당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어쩔 수 없지.’
실력으로 버틸 수밖에.
“오래 묵은 머더러라더니,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대꾸하며 칼자루를 움켜쥐는 수호.
분노한 육경환의 몸에 검은 기운이 들끓었다.
“처리해.”
육경환이 명령했다.
명환 길드로 위장 중이던 리빙 콥스의 머더러들이 상왕련주를 향해 쇄도했다.
모두 육경환에 의해 마인이 된 자들.
“막아라! 련주님을 지켜!”
“진형을 짜!”
“빌어먹을! 저 시커먼 기운은 뭐야?”
“물러서지 마! 상왕련을 지키자!”
청검의 지휘 아래, 상왕련 헌터들이 마인에 맞서 갔다.
* * *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 결국 육경환은 내 차지구만.’
육경환이 다가온다.
저릿한 살기.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
도발의 결과였다.
“건방지게 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육경환이 으르렁거렸다.
『강하다. 조심하거라.』
발룡이의 주의를 들으며 수호도 검을 들어 올렸다.
“알아. 그러니까 잘 도와줘. 일 끝나면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대가는 꼭 받을 것이니라. 그러니 죽지 마라.』
화르르.
화염 포마검이 불길에 휩싸였다.
스릉. 육경환도 칼을 뽑았다.
검은 기운이 뭉클 피어올랐다.
가느다란 검신이 마기를 머금어 허벅지만큼 두꺼워졌다.
“죽어라!”
육경환이 칼을 휘둘렀다.
수호는 맞받지 않고 피했다.
마기의 칼날이 공기를 찢고 지나갔다.
‘직격당하면 못 버텨.’
무조건 피해야 해.
수호는 최대한 칼이 부딪치는 것을 피하며 회피에 전력을 다했다.
몇 번의 공격이 빗나갔다.
육경환이 칼을 세웠다.
“쥐새끼 같은 놈. 진짜로 네놈이 사령을 처리한 모양이구나.”
한칼에 수호를 제거하고 상왕련주를 제압하려던 육경환이었다.
한데 수호의 실력이 예상보다 너무 뛰어났다.
‘그렇다면 걸맞은 대우를 해 주마. 폭마검!’
파츠츠츠-
육경환의 칼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싸락눈이 휘날리듯, 칼 주위로 작은 마기의 칼날이 비산했다.
『공간을 장악하는 기술이다!』
발룡이가 경고한 순간, 육경환이 검을 휘둘렀다.
육경환의 검이 수호의 머리를 노린다.
동시에 작은 마기의 칼날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작은 건 다 못 피해.’
감각 스탯이 상황을 전해 왔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아껴 둔 스킬을 사용했다.
‘헤이스트!’
수호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간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감각이 확장된다.
수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후웅-
육경환의 검이 수호의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가고.
화염 포마검이 움직였다.
파삭-
작은 마기 칼날이 화염 포마검에 맞아 바스러진다 싶더니.
화염 포마검이 정면을 난자했다.
파파파파파파파팟-
마기 칼날이 부서진다.
둥그렇게 칼날 비가 멎었다.
그 사이로 수호가 돌진했다.
‘폭마검을 쳐냈어?’
육경환이 경악했다.
하나 놀람은 잠시.
노련한 머더러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짓이겨 버리겠다!’
헤이스트 상태의 수호는 빨랐다.
하지만 육경환도 수호 못지않게 빠르다.
압도적인 마기도 있다.
육경환이 수호를 향해 칼을 뻗었다.
수호도 피하지 않고 스킬을 시전했다.
‘근력 폭발!’
‘무기 강화!’
‘화염 강격!’
동시에 신호했다.
“발룡아!”
육경환의 옆, 허공.
『재로 돌아가거라!』
발룡이가 튀어나오며 브레스를 쏘았다.
콰르르르-
거듭된 전투와 투명화로 발룡이의 브레스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정순한 화기가 마인을 위협했다.
“이건?”
육경환이 칼을 내밀어 수호를 견제하며 브레스를 피했다.
매끄러운 대응이었다.
하나 찰나 간의 머뭇거림이 검격에 묻어났다.
수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후우웅-
육경환의 칼끝을 지나치며 수호가 한 걸음 다가섰다.
훤히 열린 육경환의 상반신.
수호가 칼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강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충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상왕련과 마인의 싸움이 일시적으로 멎을 정도였다.
“뭐, 뭐야?”
“저 사람이 적의 우두머리에게 한 방 먹였어.”
“해치웠나?”
상왕련 헌터들의 경악성이 강당을 울리는 사이.
충격이 멎고 전경이 드러났다.
수호가 혀를 찼다.
“드럽게 질기네.”
육경환은 한쪽 어깨가 움푹 파였다.
중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인에게는 아니었다.
뭉클.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상처를 메웠다.
동시에 육경환의 눈에서 흰자위가 사라졌다.
『마기가 반쯤 폭주했다. 위험한 상태야. 조심해라!』
발룡이의 경고가 수호의 고막을 때렸다.
반쯤 폭주하여 강해진 마기.
힘을 컨트롤하기 위해 남겨진 약간의 이성.
지금 같은 상태의 마인은 굉장히 위험했다.
“크르르, 이 벌레 같은 놈이. 감히! 감히!”
육경환이 분노해 소리쳤다.
마기가 온 강당을 뒤흔든다.
“저, 저게 뭐야? 시커멓게 변했어!”
“괴, 괴물이다.”
“저건, 저건 못 막아.”
모두가 몸을 떨며 두려운 눈으로 육경환을 바라봤다.
하지만 단 한 명.
수호만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왔네, 왔어.”
수호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뚝.
살기를 줄기줄기 뿜으며 다가오던 육경환.
그가 멈춰 섰다.
동시에 고개를 강당 입구를 향해 돌렸다.
흑령옥의 기운에 꽁꽁 봉쇄된 입구.
그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스각.
옅은 절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쿠웅-
잘린 벽이 쓰러져 문이 되었다.
희끗한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노인이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인이 있다기에 왔더니, 진짜 지독한 놈이 있었구나.”
헌터 협회장, 진무백의 등장이었다.
갑작스러운 협회장의 등장에 모두가 멈춰 있을 때.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세상 구경할 뻔했습니다, 협회장님.”
수호는 재빨리 협회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협회장의 등장.
그것이 수호의 노림수였다.
‘상왕련의 일이라면 몰라도, 마인이 엮인 이상 안 나설 리 없지.’
도플갱어, 박영일, 사령.
모든 일의 원흉 육경환.
상왕련으로 향하는 동안, 수호는 모든 이야기를 신성현에게 전했다.
위험한 증거가 넘쳐났으니, 협회장의 등장은 예측된 일이었다.
‘시간 벌이는 성공이구만.’
그것이 수호가 여태 상대를 도발하며 시간을 번 이유였다.
“저건 나도 장담하기 어려울 만큼 지독하구먼.”
“꼭 혼자 하실 필요는 없지요, 협회장님.”
신성현이 강당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그 뒤로 협회 마인 대응팀 헌터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 * *
“크아아아아아아-!”
괴성이 울리고.
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강당이 흔들렸다.
폭주한 육경환이 내뿜는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굉장하구만. 그냥 붙어 싸웠으면 큰일 날 뻔했어.’
수호는 육경환의 모습에 놀랐다.
마족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끈 선택에도 만족했다.
“끈질기구나, 마인.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차분한 신색으로 육경환 앞에 마주 선 남자.
협회장은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마기의 공격을 검 1자루로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협회장님도 진짜 강하네. 괜히 대단한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어.’
검성이라는 협회장의 별명을 떠올리며 수호는 전투를 관전했다.
상왕련과 협회가 협력하여 육경환의 부하를 전멸시켰기에 수호는 구경만 해도 됐다.
『곧 끝나겠구나.』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협회장과 육경환의 전투만큼이나 좌중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게 있다면, 바로 발룡이었다.
“그러게. 협회장님은 혼자가 아니니까.”
남은 마인은 육경환뿐.
하나 협회장의 곁에는 신성현과 협회 헌터들이 있다.
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셈.
수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 너 말이야. 계속 그렇게 나와 있을 거야?”
『나와 있다니? 무슨 뜻이더냐?』
“투명화 안 할 거냐고?”
『이미 한 번 드러내었지 않느냐? 본좌의 위대한 용안을 보려는 미물들이 저렇듯 많은데, 본좌가 어찌 몸을 숨기고만 있겠느냐!』
“하아… 모르겠다.”
중2병에 이어.
어쩌면 관심병도 걸린 게 아닐까.
수호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때 서늘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
신성현과 헌터들이 시선을 끄는 사이.
협회장의 검이 육경환의 목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데구르르.
떨어진 수급이 하필이면 수호의 발치로 굴러왔다.
머리통이 입을 벌렸다.
“후회할 것…….”
콰직.
수호는 수급을 발로 밟아 터트려 버렸다.
“잘했네. 마기가 강한 놈들은 저렇게 목을 베어도 종알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별로 들어 줄 가치는 없네. 헛소리거든.”
협회장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때맞춰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안 그랬으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수호가 협회장에게 인사했다.
“마인이 관계된 일이야. 특히 자네가 들려준 정보를 생각하면 꼭 와야 했지. 저놈 정도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마인 중 몸통에 가까운 놈이 분명하니까.”
“그래도 서둘러 주신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자네 아직 블링크 스크롤 안 쓰지 않았나? 자네 혼자라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었다는 걸 아네만, 껄껄. 자네도 오히려 감사를 하기 보다는 받아야 하는 쪽에 가깝겠지.”
협회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상왕련주를 쳐다봤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상왕련과 협회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수호는 협회장의 생각을 추측하며, 상왕련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데 그때였다.
“크윽-”
상왕련주가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련주님이 쓰러지셨다!”
“무슨 공격에 당한 거야?”
“외상은 없는데? 련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의료팀! 치유 계열 헌터 불러와! 빨리!”
상왕련 헌터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협회장이 상왕련주에게 다가갔다.
“내가 잠시 진맥해 보아도 되겠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현수가 대답했다.
협회장이 상왕련주의 손목을 잡았다.
『마력을 흘려 몸 상태를 점검하는군. 마력 운용이 제법이야. 수호 너도 본좌의 가디언이 되려거든 최소한 저 정도 실력은 갖추어야 할 것이니라.』
내가 왜 네 가디언이냐?
튀어나오려는 말을 아끼며, 수호는 협회장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머잖아 협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뗐다.
“독이군. 그것도 아주 지독한 종류야.”
71화 상왕련에서(3)
상왕련 응접실.
신성현은 협회 헌터들을 지휘해 돌아갔다.
상왕련 측은 쓰러진 상왕련주 때문에 수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현수는 감사 인사와 함께 시간이 되면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응접실을 내어 줬다.
수호는 협회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상왕련도 골치 아파졌군. 련주의 영향력이 큰 단체인데 말이야.”
협회장 진무백이 입을 열었다.
전투의 여파가 있을 텐데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독입니까? 따로 독을 쓰는 모습은 없었는데, 갑자기 쓰러지다니.”
“마력을 흘려 넣어 점검해 본 결과, 심장에 이물질이 있더군. 거기서 흘러나온 기운이 끊임없이 심장을 자극하고 있었네.”
그것은 홍검이 상왕련주에게 주입한 양고였다.
음고가 죽으면 양고가 시술자의 심장에 독을 주입해 죽인다. 음양혈고의 숨겨진 기능이었다.
“그럼 독이 아니지 않습니까?”
“독이 맞네. 심장 부근에 들러붙은 것이 내뿜는 기운이 독기였거든.”
“해독 물약을 먹여도 효과가 없던데요.”
“그럴 수밖에. 독이 주기적으로 주입되고 있으니까.”
“해독 물약과 치유 물약을 계속 들이부어야, 목숨을 붙여 놓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네. 그나마 상왕련이라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걸세.”
상왕련이니까 물약을 퍼부을 수 있는 재력이 있는 거야. 그만한 물량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
협회장이 덧붙였다.
‘곤란하게 됐어.’
상왕련주를 살리기 위해 수호도 상당히 무리했다.
한데 구명지은을 보상받기는커녕, 상왕련주가 위독한 상태.
마인의 수작을 막은 것은 다행이나, 현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다.
‘방법이 없으려나?’
머리를 굴리는 수호에게 협회장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야 자네에 대해 좀 알게 된 기분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비슷한 레벨의 헌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유. 그걸 좀 알 것 같다는 말이네. 드래곤이라니, 허허.”
수호 옆자리에 웅크리고 누운 발룡이를 살피며 협회장이 말했다.
“생각하시는 만큼 대단한 녀석은 아닙니다. 말도 잘 안 듣고요.”
수호는 적당히 대답했다.
확실한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그편이 수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 실력이 노출되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이전부터 상왕련에 수호의 정보가 적잖게 흘러 들어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수호의 이름이 훨씬 더 크게 퍼질 터.
실력의 노출은 예정된 일이었다.
‘타차원의 존재를 숨기는 게 핵심이지.’
그렇기에 수호는 발룡이의 노출이 나쁘지 않았다.
단서는 정현수의 태도였다.
처음 발룡이를 본 정현수가 수호를 소환사라고 오해했던 데서 떠올린 생각이다.
‘차원 여행자보다는 드래곤 소환사나 테이머가 반향이 적을 거야.’
테이머 계열의 헌터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진짜로 드래곤이라니. 작지만 정순한 기운을 품고 있어. 아마 저 상태가 끝은 아니겠지?”
협회장이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 녀석도 성장합니다. 마법도 쓸 수 있고요. 단, 보시는 대로 아직은 작습니다.”
“자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작다고 무시할 생각은 전혀 안 드는구먼.”
“저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요즘 저 녀석 덕을 많이 보거든요.”
발룡이에게서 시선을 뗀 협회장이 수호를 바라봤다.
“나야말로 자네 덕을 많이 보는군. 고맙네. 덕분에 마인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어. 국내에 남은 마인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명환 길드를 조사하면, 마인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신성현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
“괜찮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어쨌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처지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되어서 미안하네만…….”
협회장이 말꼬리를 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어차피 물어야 할 일이니, 묻겠네. 마인에 관해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협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추궁하려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원하는 이야기를 꼭 듣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수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육경환을 속이느라 떠든 내용을 벌써 확보한 건가?’
시간을 벌기 위해.
마족과 마인에 관해 육경환에게 말한 이야기.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
“마족에 대해 궁금하신 거군요.”
“그렇네!”
“저도 많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거라도 이야기해 주게.”
수호가 마족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마족은 마계의 주민입니다.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공통점은 아주 강하고 질기다는 점입니다. 놈들이 세상을 침공하기 전에 마물이나 마인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족은 아직 지구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족에게 직접 기운을 받은 종복은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마인보다 훨씬 강하다.
.
.
.
마족에 대한 정보가 연이어 수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윌슨과 발룡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마족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게 정확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명이 끝났다.
“마인만 해도 골치 아픈데, 마족이라니.”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도 안 지 얼마 안 된 내용이라서요.”
“아닐세. 지금이라도 말해 주었으니 됐지. 고맙네. 덕분에 넋 놓고 당하지는 않겠어.”
『글쎄, 과연 그럴까? 마족이 나타나면, 살아남을 인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군.』
머릿속을 파고든 발룡이의 목소리에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상왕련주의 문제와 더불어 마족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정보는 드래곤에게서 나온 것인가?”
협회장의 목소리가 수호를 고민에서 깨웠다.
“예, 저 녀석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어린 드래곤이라서요.”
『예지안의 주인인 본좌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툴툴거리는 발룡이의 목소리 너머, 협회장의 진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말일세, 왠지 자네가 장차 큰일을 할 거란 예감이 들어. 아주 강해질 것 같기도 하고.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협회장과 가까워져서 나쁠 것은 없다.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이른 시점에 지원이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현수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 * *
“죄송해요, 형. 너무 감사해서 꼭 보답하고 싶은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
정현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수호에게 사과했다.
“괜찮아. 상왕련주님은 좀 어떠셔?”
“간신히 악화되는 것만 막고 있어요.”
“…….”
“치유 계열 헌터들이 죄다 달라붙어 있는데 치료가 안 돼요. 회복되었다가도 다시 중독 상태에 빠져서, 해독 물약을 계속 주입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셈.
“해독 물약으로 완치가 안 돼? 협회장님 말씀으로는 심장에 뭔가 들러붙어 있다던데,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건가?”
“심장에 붙은 게 너무 강하게 접착되어 있어요. 강제로 떼면 심장이 완전히 부서질 정도로요.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요. 독이 워낙 지독해서 상급 해독 물약 정도가 아니면 해독이 거의 안 되다 보니. 하아-”
정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수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상급 해독 물약으로 해독된다고?’
심장에 양고가 박혀 있어 완벽한 치료는 어렵다.
하지만 해독은 된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어!’
수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서둘러 움직인 수호가 집 앞에 도착했다.
‘도토리 열매! 그거라면 상왕련주를 살릴 수 있어.’
어머니의 [영험한 떡갈나무 도토리]는 【상급 상태 이상 면역】 효과를 발휘한다.
지속 시간이 있지만 도토리만 넉넉하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도토리 열매를 얻으려면, 어머니 나무가 제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해.’
어머니 나무는 지금 열매를 맺기 힘들다.
잡초를 막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탓이다.
수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잡초를 박멸할 방법을 찾자!’
차원 임무를 받아 둔 상태라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딸랑-
수호가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수호! 늦었네. 던전이 힘들었던 거야?”
때마침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복잡한 일이 있었어. 그건 그렇고, 윌슨. 있잖아…….”
윌슨은 제초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수호가 그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윌슨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하하, 이것 좀 봐. 친구!”
윌슨이 화분을 내밀었다.
화분은 텅 비어 있었다.
“그건 잡초 심어 둔 화분이잖아. 설마?”
“그래 맞아! 드디어 제초제를 개발했어!”
“역시 위대한 마도 공학자!”
“너무 추켜세우지는 마. 안타깝게도 완성품은 아니니까.”
“……?”
궁금해 하는 수호에게 윌슨이 투명한 상자를 내밀었다.
금속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 금속 가루가 제초제야. 이걸 땅에 뿌리면 근처에 자란 잡초를 죽일 수 있어.”
잡초가 가진 마력의 흐름을 파악.
그것을 막아 버리는 형태의 마력을 금속 가루에 담았다.
조금만 뿌려도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다.
일반 쇳가루에 마력만 입히면 되기 때문에 대량 생산도 가능하다.
윌슨이 설명을 덧붙였다.
의아해진 수호가 물었다.
“그럼 완성된 거 아냐?”
“가루에 담긴 마력에 한계가 있어서 며칠이면 효과가 끝나. 그 뒤에 잡초의 씨앗이 흘러들어오면 다시 잡초밭이 되어 버릴 거야.”
잡초는 며칠 만에 허리 높이로 자란다.
잠시만 제초제의 효과가 사라져도, 잡초가 다시 창궐할 것이다.
“그래도 고마워. 뿌리는 것만으로 한동안 잡초를 막을 수 있으니까.”
“지속 시간을 반영구적으로 늘릴 방법을 찾아볼게. 근데 그 전에 저쪽 이야기도 들어 보는 편이 좋을 거야.”
“저쪽?”
“저기 수트 케이스. 아까부터 곰돌이 아가씨가 틈틈이 자네를 찾고 있어.”
수호는 수트 케이스로 향했다.
온달소라가 제단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제단 위에 조막만 한 열매 같은 것을 놓아 둔 채였다.
“소라, 혹시 불렀어?”
“핫! 위대한 분이시여! 드디어 응답해 주셨군요.”
“무슨 일이야?”
“나쁜 풀을 제거할 실마리를 찾아내었사옵니다!”
파르르.
온달소라가 꼬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수호도 왠지 모를 기대감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떤 방법이야?”
“이걸 받아 주십시오.”
온달소라가 기도했다.
제단에 놓여있던 열매가 【교역】 스킬에 의해 수호의 눈앞으로 전송되었다.
‘설명이 뜨지 않는 걸 보니, 아이템은 아닌가 본데.’
시스템 창이 뜨지 않는다.
아이템 취급을 받지 않는 순수한 ‘식물’이란 소리였다.
어떤 원리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게 뭐야?”
수호가 질문했다.
온달소라가 즉시 설명을 시작했다.
“엉겅퀴 감자라는 것으로,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는 작물입니다. 실험 결과, 엉겅퀴 감자가 자라는 곳에는 나쁜 풀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사옵니다.”
“아! 그럼?”
“네. 나쁜 풀을 뽑은 후 엉겅퀴 감자를 재배하면, 그 땅에서 나쁜 풀을 박멸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오! 잘했어, 소라. 그새 어떻게 이런 걸 찾았어?”
“온달곰족 전원이 실험에 동참했사옵니다. 모두 위대한 수호자께서 베푸신 은혜를 갚고자 함이니, 앞으로도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고마워. 고생했어.”
수호가 온달소라를 치하했다.
온달소라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참, 엉겅퀴 감자는 식용이고, 지력도 크게 소모하지 않습니다. 감자를 심어도 다른 식물의 생장에는 지장이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나이다.”
“정말 잘했어, 소라.”
“그럼 준비해 둔 감자가 더 있으니, 마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자 포대가 전송됐다.
수호는 고마움을 표한 뒤, 수트 케이스에서 물러났다.
“이러면 내가 더 연구할 필요가 없겠는걸.”
윌슨의 목소리였다.
“그러게. 제초제와 감자를 섞어서 사용하면 깔끔히 해결되겠어.”
“맞아. 제초제로 잡초를 죽인 뒤, 그곳에 감자를 심으면 될 테니까.”
“고마워, 윌슨.”
“이 정도로 뭘, 하하. 급해 보이는데, 어서 가서 해결하라고.”
“응, 땡큐.”
수호는 서둘러 냉장고로 다가갔다.
“떡갈나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호 님, 무슨 일인가요?』
“잡초를 박멸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이것 좀 봐주세요.”
* * *
엉겅퀴 감자는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아울러 어머니 나무의 권능으로 제어도 가능했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수호는 덕수를 불러 제초제와 엉겅퀴 감자를 나눠줬다.
온 마을 엘프들이 합심해 제초 작업에 돌입했다.
.
.
.
이튿날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잡초 박멸】을 완수하셨습니다.]
[고유 스킬 【차원 여행】을 획득합니다.]
72화 【차원 여행】(1)
비바니 차원.
바비의 집 위 둔덕.
아기 비바니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죠씨, 따뜻해욥!”
“아죠씨, 매끈해욥!”
“아죠씨는 왜 털이 없어욥?”
“앗! 여긴 털이 있답!”
수호가 난감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잠깐! 거긴 들어가면 안 돼. 으아, 바비! 애들 좀 말려 봐.”
【차원 여행】
- 교류 대상 차원에 진입한다. 진입 시, 크기 왜곡이 사라진다. 단, 차원 시야가 닿는 곳으로만 입장할 수 있으며, 복귀는 차원 시야 밖에서도 가능하다.
잡초 박멸 임무를 완수하고 보상으로 【차원 여행】 스킬을 얻었다.
수호는 스킬 실험을 위해 비바니 차원을 골랐다.
다른 곳보다 혼란이 적을 거란 이유였고 예상은 맞았다.
비바니들이 크게 당황하지 않고 수호를 맞았으니까.
문제는 아기 비바니들이 수호이 몸을 놀이터처럼 여긴다는 점.
올라타고 만지고.
이곳저곳 건드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수호, 육아는 원래 어려운 법이답.”
“그건 알겠는데. 내가 지금 육아 도우러 온 건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집. 그럼 오늘은 처음이니 이쯤에서 물러나 볼깝? 얘들압, 수호 아저씨 너무 괴롭히지 말고 물에 들어가서 놀아랍!”
바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욥!”
“수영하잡!”
“잉어 잡잡!”
“아죠씨, 이따 또 놀아욥!”
아기 비바니들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수호가 한숨 돌렸다.
“스킬 실험하러 왔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다 했으면 돌아가자. 본좌는 아직 아침도 먹지 못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발룡이가 보챘다.
“네가 같이 올 수 있는지 해 보자며?”
수호가 【차원 여행】을 실험하려 할 때, 발룡이가 함께 오길 청했다.
차원을 넘으면 원래 크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실험 결과, 발룡이는 수호와 함께 차원을 넘을 수 있었다. 수호가 원할 때 한해서.
하지만 크기와 힘은 그대로였다.
『확인했으니, 이제 되었느니라.』
“원래 모습으로 못 돌아가서 실망했구만. 너무 상심하지 마, 인마. 언젠가는 원래대로 회복될 거야.”
어쩌면 헤츨링을 넘어, 진짜로 위대한 흑염룡이 될지도 모르지.
수호가 발룡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근 발룡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웬만한 투정은 너그럽게 받아 줄 수 있었다.
『이익! 머리 쓰다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서 돌아가기나 하자!』
“알았어. 바비, 그럼 갈게. 만나서 반가웠어.”
“나도답. 아이들도 좋아하니, 자주 놀러와랍.”
“어, 시간 나면 들를게.”
수호는 바비에게 인사를 마치고, 【차원 여행】 스킬을 시전했다.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곧 집 안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호! 돌아왔구나. 차원 여행은 어땠어?”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수트케이스 앞에서 수호의 스킬 실험을 구경하고 있었다.
“별문제 없었어, 윌슨. 발룡이도 데리고 갈 수 있었고.”
“다행이야. 그럼 들어갈 때는 차원문 근처에서만 가능한 거지?”
“응, 차원문 앞에서 스킬을 시전해야 해. 타 차원으로 넘어가는 지점도, 차원 시야가 닿는 곳 안이고.”
“나올 때는 아무 데서나 가능하고?”
“맞아. 이제 차원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가 볼 수 있게 된 셈이야. 아무 데서나 돌아올 수 있으니 부담도 없고.”
가령 드워프 차원에서 발랑카 산맥을 벗어나 먼 곳까지 가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차원 여행】 스킬을 다시 시전하면 언제든 집으로 귀환이 가능하다.
귀환하고 나서 다시 그 지점으로 단숨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타 차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네.”
윌슨이 눈빛을 빛냈다.
수호는 왠지 윌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응. 다른 차원의 친구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돌볼게.”
“하하, 역시 수호는 좋은 친구야. 나도 지구인으로서 네게 적극 협조하겠어!”
“그래, 고마워. 그럼 나는 일 좀 볼게.”
호기심에 스킬 실험부터 강행했지만,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 * *
엘프 차원.
냉장실 앞에 선 수호는 어머니 떡갈나무 앞으로 시야를 조정했다.
“떡갈나무님, 안녕하세요.”
『드디어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군요. 정말 고마워요, 수호 님. 밤새 혼잣말로 당신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빨리 잡초를 제거할 방법을 알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곧바로 어머니 나무의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에는 감사의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운 좋게 일이 잘 풀렸네요. 타 차원 친구들의 힘을 빌렸으니, 저 혼자만의 공도 아니고요.”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잖아요. 세계수의 딸로서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인사는 받을게요. 그럼 떡갈나무님은 이제 힘을 완전히 되찾으신 건가요?”
수호가 물었다.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잡초를 막는 데 힘을 소진한 탓에 완전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주변을 돌볼 정도는 된답니다.』
“음, 그러시군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네요. 원하는 게 있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하세요. 혹시 도토리 열매라도 필요한가요?』
“네, 도토리가 필요합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수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대량으로 만들 여력은 없지만, 몇 개라면 가능해요.』
어차피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수호는 도토리를 먹어도 효과를 보지 못하니까.
“두어 개 정도만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상왕련주를 살리기 위해 하나.
나머지는 혹시 모를 비상용으로 보관할 생각이다.
『그 정도라면 당장에라도 드릴 수 있답니다. 잠깐만요.』
어머니 나뭇가지에 기운이 맺혔다.
이내 도토리가 생겨나더니, 수호의 눈앞에 전송되어 나타났다.
“아, 3개나! 감사합니다. 꼭 필요한 곳이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모두 당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에요.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어머니 나무가 진심을 담아 목소리를 전했다.
“저도 떡갈나무님과 엘프 세상이 평온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나눈 후.
수호는 냉장고 앞에서 물러났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현수야, 상왕련주님은 좀 어떠셔? 아직 차도가 없으시다고? 다름이 아니고, 내가 어쩌면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전화기 너머에서 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싶더니, 수호가 말을 이었다.
“아니야,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통화는 빠르게 끝났다.
수호가 옆을 돌아보며 외쳤다.
“발룡아, 같이 가자.”
『본좌는 아침을 먹어야 하느니라!』
침대에 쓰러져 배달 앱을 구경하던 발룡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다녀와서 맛있는 거 시켜 줄게. 그러니까 같이 좀 가자.”
『뭐 말이냐? 미리 말하거라.』
“너 혹시 피자나라 치킨왕자라고 들어 봤냐?”
수호가 외투를 걸치며 물었다.
발룡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뜻 본 것도 같은데, 그게 뭐지?』
“무려 피자와 치킨을 동시에 시킬 수 있는 음식점이야. 다녀와서 그걸 시켜 주마.”
발룡이는 아직 피자를 먹어 보지 못했다.
『피, 피자까지?』
“그래, 세트 메뉴! 피자 1, 치킨 1이다.”
『좋다. 단! 귀찮은 일을 시키면 양이 늘어날 줄 알아라.』
“콜.”
* * *
상왕련 본단, 주차장.
수호가 용달차에서 내려섰다.
“형! 오셨어요.”
정현수가 수호를 발견하고 달려오며 외쳤다.
“뭐야? 현수 도련님이잖아.”
“저 사람이 누구길래 저렇게 반기는 거야?”
“차가 엄청 낡았는데, 뭐지?”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수호에게 향했다.
“어? 저, 저거 좀 봐. 저 검은색 날짐승.”
“드래곤이다!”
“설마 저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이번에 개자식들한테서 련주님을 구해 줬다던?”
“그 드래곤 테이머? 대박! 저렇게 젊은 사람이었다니.”
“오, 드래곤 좀 봐. 멋있어!”
“저 드래곤, 왠지 굉장히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
용달차에서 따라 내린 발룡이를 보자, 웅성거림의 방향이 바뀌었다.
의아함에서 경탄으로.
‘예상한 대로네.’
수호가 의도한 바였다.
‘상왕련주를 살리면 결국 소문이 날 테고.’
도토리 열매의 성능은 자칫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정현수가 기밀 유지에 신경 쓰겠지만, 그것이 완전한 비밀을 보장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발룡이 핑계를 대는 편이 나을 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수호가 얻을 명성을 발룡이 덕으로 포장하는 편이 낫다.
타 차원이라는 수호 최대의 비밀을 밝히는 것보다는 그편이 안전하다.
수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정현수가 앞에 도착했다.
“형, 빨리 오셨네요.”
“상황이 급하잖아. 어서 가자.”
수호가 손짓하자 정현수가 앞장서 걸었다.
잠시 후, 둘은 상왕련주의 병실에 도착했다.
“원수호 씨, 저희 상왕련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구할 약까지 찾아오셨다니,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현수의 누나, 정현아였다.
상왕련주의 부상 탓인지, 얼굴이 수척했다.
“괜찮습니다. 인사는 뒤로 미루고, 상왕련주님께 이걸 복용시키도록 하죠.”
수호가 도토리를 꺼내 정현아에게 내밀었다.
“아! 이렇게 귀한 물건을! 정말 고맙습니다.”
고개 숙인 정현아가 서둘러 상왕련주에게 다가갔다.
* * *
얼마 후.
상왕련주의 병실.
수호는 상왕련주와 독대했다.
“고맙네. 현수에 이어 내 목숨까지 구해 줬으니,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상왕련주가 말했다.
여전히 병상에 기댄 채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괜찮습니다. 놈들이 저를 먼저 공격했으니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도 상왕련까지 와서 직접 싸울 필요는 없었지. 청검도 구했고, 놈들의 수괴를 상대로 홀로 버텨 주었어. 덕분에 상왕련 식구들이 많이 상하지 않았네.”
연이은 칭찬에 멋쩍은 수호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상왕련주가 말을 이었다.
“그뿐이 아니지. 협회장도 불러왔지 않나. 그 영감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그런가요? 깊이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마인 건으로 엮인 후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라서요.”
“글쎄, 아무나 부른다고 달려올 사람은 아니지. 우리 상왕련과 썩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고.”
“…….”
“어쨌든 정보 획득부터 전투, 원군 요청까지 모두 자네의 공일세. 보답할 방법을 모르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상왕련주의 대답에 수호의 생각이 깊어졌다.
‘진짜로 뭐든 달라면 줄 기세네. 뭐가 좋으려나?’
먼저 드워프에게 맡길 재료가 떠오른다.
좋은 재료를 넉넉히 쥐어준다면, 얼마나 대단한 장비가 만들어질까?
‘장비 재료도 좋지만, 윌슨의 설비 재료도 필요해.’
동력원으로 쓰이는 마정석을 공급하면, 윌슨의 설비 마련이 앞당겨질 터였다.
수호가 궁리하고 있을 때, 상왕련주가 입을 열었다.
“아이템이 필요하면 차차 생각해 보고 말해도 되네. 굳이 이 자리에서 바로 답할 필요는 없어. 내 생각엔 그런 자잘한 것보다 더 중한 문제를 논해야 할 것 같군.”
“중한 문제요?”
아이템이 자잘한 문제면,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뭐지?
수호의 궁금증은 상왕련주의 이어진 말에서 풀렸다.
“자네는 현수와 계약을 맺었다지? 그럼 나와도, 아니, 상왕련과도 계약을 맺으세나.”
“……?”
“계약이라는 표현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과는 의미가 좀 어긋나는군. 더 정확한 표현은… 그래, 동맹이란 말이 좋겠어.”
“동맹이요?”
“그렇네.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채워 주고, 지켜 주는 관계가 되자는 말일세.”
“……!”
거대한 세력인 상왕련과 개인인 수호의 동맹.
누가 들으면 헛소리로 치부할 만한 말이었다.
하나 그 말이 상왕련주의 입에서 나왔으니…….
“진심일세. 그편이 내가 자네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에 수월할 것 같아서 하는 제안이야. 규칙이 있어서, 상왕련 재산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수호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상왕련주가 말을 더했다.
“어차피 내 목숨이 자네한테 달린 것 같기도 하고 말이네. 껄껄.”
도토리의 효과는 3개월.
그 뒤면 【상급 상태 이상 면역】의 지속 시간이 끝난다.
양고를 제거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상왕련주는 수호에게 의지해야 했다.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도토리를 더 구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만, 나는 상인이라 그런 귀물을 계속 공짜로 받을 수는 없네. 그러니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줄 생각이야. 내 딸내미라도 달라면 주고 싶군. 어떤가?”
상왕련주가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
수호는 왠지 등허리가 서늘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공급받던 식자재나 무료로 제공해 주십시오. 더 필요한 물건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가? 좋네. 장비든 소모 아이템이든, 원하는 건 뭐든 말만 하게.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가 들든 구해 주겠네.”
“고맙습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는군. 고마워하고 있는 사람은 날세. 자네는 내 감사를 받는 중이고. 어쨌든 그럼 우리 상왕련과 자네 사이에 동맹이 체결됐다고 생각해도 되겠는가?”
“네, 좋습니다.”
“고맙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더 논의하세나. 몸이 회복되면 찾아가겠네.”
말을 마치고 상왕련주는 생각했다.
마인의 습격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닐까 하고.
‘이번 일로 이 친구와의 끈이 더 단단해졌으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유례가 없는 빠른 성장.
심지어 드래곤을 펫으로 부리는 헌터.
‘어차피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 저당 좀 잡힌다고 손해 볼 것도 없지. 이 친구 성품이면 나쁜 마음을 품을 것 같지도 않고.’
도토리를 빌미로 협박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쉽게 도토리를 주지도 않았을 터였다.
“고맙네, 정말.”
상왕련주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말았다.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뭐가 좋으려나?”
『뭘 말이냐?』
수호의 혼잣말을 들은 발룡이가 물었다.
“상왕련주한테 뭘 달라고 할지 고민돼서. 갑자기 뭐든 구해다 준다니까, 당황스럽네.”
『쯧쯧, 본좌의 가디언으로서 자질을 갖추려면, 좀 더 그릇을 키우도록 하여라.』
“가디언은 개뿔. 그럼 너는 뭘 달라 하고 싶은데?”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자, 발룡이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잠시 후 발룡이가 소리쳤다.
『치킨 가게! 그중에서… 빕이큐다!』
“뭔 소리야?”
『뭐든 얻을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본좌는 빕이큐를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더니, 치킨 브랜드 고르는 거였냐?”
『당연하지. 본좌의 오랜 삶을 돌이켜 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고심했느니라.』
“어, 그래.”
잡담을 나누는 사이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수호가 가게로 들어섰다.
“수호, 드디어 돌아왔군. 저쪽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이 냉장고를 가리키고 있다.
“어디? 드워프?”
“아니, 엘프.”
윌슨이 대답하는 순간.
“세계수의 정령이시여! 저희에게도 부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냉장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 소리야?”
수호가 서둘러 냉장실로 다가갔다.
안을 살피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세계수 원정대 I】을 완수하셨습니다.]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차원 임무 【세계수 원정대 I】이 【대책 회의】로 연계됩니다.]‘옆 마을로 간 엘프들이 돌아왔구나!’
소식을 전하러 갔던 엘프가 돌아온 모양.
임무가 완수되면서 다른 임무로 연계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이어졌다.
[차원 임무 【고개 숙인 엘프들 II(지속)】를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임무를 확인하세요.]
73화 【차원 여행】(2)
‘고개 숙인 엘프들? 그 임무는 저번에 했었던 것 같은데.’
비아그뤠를 통해 엘프의 자존심을 치료해 준 임무다.
한데 그 두 번째 버전이 생성됐다.
“세계수의 정령님! 저희에게도 성약을 내려 주십시오!”
“자애로운 정령님! 저희 마을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세요!”
저편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엘프들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수호는 차원 임무 패널을 열었다.
『고개 숙인 엘프들 II』
- 세계수의 변고를 알리려 나선 떡갈나무 엘프에 의해 ‘성약’에 대한 이야기가 옆 마을에 전해졌다. 같은 증상에 고민하던 옆 마을 엘프들이 구원의 손길을 바라고 있다. ‘성약’을 내려 그들을 구원하라.
*지속형 임무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개선될 때까지, 반복해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 보상 : 새로운 교류 대상.
‘역시 똑같은 임무였어.’
도움의 대상만 다를 뿐, 해결 방법도 똑같다.
‘보상이 새 교류 대상? 아마 옆 마을 엘프들을 말하는 거겠지?’
임무를 완수했을 때 교류가 시작되는 형식.
온달곰족 때와 비슷했다.
심지어 ‘지속’ 임무다.
그 말은…….
‘계속 다른 마을 엘프들이 몰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자칫하면 떡갈나무 마을이 비아그뤠 특산지가 될 판.
수호는 지금 상황이 퍽 어이없었다.
뭐, 비아그뤠가 딱히 나쁜 약물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절히 빌고 있는 엘프들을 생각해서라도,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
다행히 저번에 산 약이 한 상자 남아 있었다.
“덕수 님,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수호가 덕수를 불렀다.
“헉! 오, 오셨다! 진짜로 하늘에서 목소리가 내려왔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더니! 진짜다! 드디어, 드디어! 크흑-”
“어머니 해냈어요!”
덕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 마을 엘프들에게서 난리가 났다.
“어허, 이 사람들아! 조용히들 해! 정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시끄럽게!”
덕수가 소란을 진압한 후에야 대화가 이어졌다.
“덕수 님, 이분들은 옆 마을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그렇습니다, 정령님. 옆 마을인 밤나무 마을과 고로쇠나무 마을 족장과 일행입니다. 이 친구들이 성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달려왔지 뭡니까? 쯧쯧, 족장이나 되어서는 진중할 줄도 모르고는.”
덕수가 뿌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당신은 더 했거든.
수호는 나오려는 말을 아끼고 용건을 이어 갔다.
“약을 원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잡초 박멸 법이 개발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말을 했는데. 그래도 약을 꼭 받고 싶어 하는군요.”
이해된다.
몸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꼭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확실한 해결책이 눈앞에 있으니 갈구하는 게 당연했다.
“혹시 저분들 마을의 인구는 얼마나 되나요?”
“저희 마을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100명 남짓하단 소리다.
그럼 문제없다.
“일단 이걸 저분들께 나눠주세요.”
수호는 쓰고 남은 비아그뤠를 상자째 전송했다.
“오오- 정령님께서 성약을 하사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약 상자가 나타난 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엘프들.
덕수가 그들에게 약을 나눠주었다.
“자자, 줄 서서 받게! 한 사람당 한 통씩! 분명히 말하는데, 꼭 한 알씩만 먹어야 해. 많이 먹는다고 더 좋지는 않아.”
덕수의 말에 수호가 첨언했다.
“약은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니, 욕심 부리지 말고 일단 꼭 필요한 만큼만 받으세요. 곧 여러분의 마을에 넉넉히 돌아갈 만큼, 약을 더 구해 드리겠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예상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고개 숙인 엘프들 II】을 완수하셨습니다.]
[새로운 교류 대상 【고로쇠나무 엘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고로쇠나무 엘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교류 대상 【밤나무 엘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밤나무 엘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 * *
마을 중앙, 어머니 떡갈나무 앞.
대책 회의를 위해 엘프들이 모였다.
그곳에 시야를 맞춰 놓고, 수호가 찻잔을 들었다.
후룹.
고소한 찻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 차도 괜찮네.’
[묵은 밤차]
- 어머니 밤나무에서 채집한 밤으로 만든 차. 한해 묵은 탓에 특유의 기운이 많이 감소했지만, 풍미는 여전히 훌륭하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하급 낙상 방지】
- 소모 아이템
밤나무 마을 엘프들이 가져온 차다.
이전처럼 덕수의 아내가 끓여 수호에게 전했다.
‘낙상 방지라니, 효능이 특이해.’
5분간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대미지를 입지 않는다.
‘하급’이기 때문에 기능의 한계가 있지만 나름 쓸모 있어 보였다.
‘나중에 어머니 밤나무랑 고로쇠나무도 만나 봐야겠어.’
싱싱한 열매의 성능이 기대됐다.
한동안 차를 음미하던 수호가 차원 패널을 열었다.
『대책 회의』
- 인근 마을 엘프들에게 세계수의 변고가 전해졌다. 당신이 잡초 제거 방법을 발견했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엘프의 대책 회의에 참석하여 세계수를 확인하고 제초법을 널리 알릴 방법을 논의하라.
- 보상 : 인근 마을 엘프 만족도.
‘제대로 된 통신 수단이 없어 보이니, 결국 누군가 소식을 전하러 직접 가야겠지.’
수호가 임무를 되새기는 사이, 시야 안에서는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잡초 제거 방법을 알아냈지만, 그걸 모든 엘프에게 전하는 게 문제네. 우리만으로는 불가능해.”
“우리끼리는 근처 숲을 무사히 벗어나기도 힘들 거야. 빌어먹을 몬스터!”
“숲을 벗어나도 문제네. 우리 인원으로는 모든 마을에 소식을 전할 수 없어. 아무래도 레드우드로 가야겠네.”
레드우드?
수호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드우드는 큰 도시예요. 오래된 어머니 나무가 지키고 있죠. 우리 마을보다 몇 배는 많은 아이가 살고 있답니다.』
엘프들의 회의가 이어졌다.
“레드우드로 가기 위해서는 어디를 통과해야 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해. 숲을 나서는 것과는 천지차이일세.”
“맞네. 얼음 사막을 지나야 해. 맙소사, 얼음 사막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네. 레드우드로 가야만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어. 그곳에는 강한 전사들이 있지 않나? 도착만 하고 나면 뒷일은 그들이 알아서 할 걸세.”
“어차피 세계수도 레드우드를 지나서야 있지. 그러니 레드우드로 가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군.”
그 뒤에도 회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레드우드로 가는 법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됐다.
『수호 님, 부디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오직 당신만이 저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떡갈나무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대책 회의】를 완수하셨습니다.]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가 3 상승합니다.]
.
.
.
[차원 임무 【대책 회의】가 【세계수 원정대 II】로 연계됩니다.]
수호가 차원 패널을 열었다.
『세계수 원정대 II』
- 모든 엘프에게 잡초 제거 법을 알리고, 세계수로 향하기 위해서는 레드우드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인근 엘프의 전력으로는 얼음 사막을 통과할 방법이 없다. 그들을 레드우드까지 안전히 호위하라!
- 보상 : 교류 등급 상승.
‘뭐라고?’
임무를 확인한 수호는 놀랐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호위하라고?’
수호가 직접 엘프 차원에 들어가, 그들을 도우란 뜻 같았다.
‘차원 여행 스킬을 얻자마자 이런 임무가? 왠지 노린 듯한 타이밍이네.’
아무리 봐도 【차원 여행】을 통해 엘프 차원으로 넘어가야만 해결할 수 있는 임무다.
우연이라기엔 타이밍이 공교롭다.
‘그것도 그렇고, 보상이 교류 등급 상승이라니.’
처음 보는 형태의 보상이다.
*등급 상승 시 교류 차원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집니다.
차원 패널에 적힌 문구다.
아직 정확한 의미를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보상이다.
‘빼도 박도 못하고, 레드우드까지 엘프를 호위해야겠네.’
수호가 직접 차원을 넘어가 엘프를 보호해야 한다는 단서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이쯤 되면 ‘시스템’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가자.’
결국, 수호는 결정을 내렸다.
직접 엘프 차원으로 넘어가 문제를 해결하기로.
‘물론, 그 전에 준비부터 해야겠지. 확인할 것도 있고.’
굳이 당장 출발할 필요는 없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엘프 세상의 무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파악해야 해.’
엘프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 사막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들을 알아보는 것이 꼭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수호는 덕수에게 말했다.
“덕수 님, 제가 잠시 그쪽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덕수에게는 수호가 차원을 넘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해 둔 상태였다.
“헛! 정령님께서요? 영광입니다! 정령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고요. 다른 엘프들이 놀라지 않도록 미리 설명이나 해 주세요.”
“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덕수가 회의 중인 엘프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 *
“오오- 위대하신 정령님!”
“대단해. 의복이 굉장히 멋있으시군.”
“그, 근데 좀 작으셔.”
“어허! 작다니! 아담하다고 하게, 아담하다고!”
덕수가 미리 설명했음에도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수호는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엄청 크잖아!’
냉장고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들어와서 보니 엘프는 컸다.
남녀 불문 키가 2m를 훌쩍 넘었다.
‘뭐,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얼마나 강한지가 중요하지.’
수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엘프의 무력 수준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방법은 대련.
그것 또한 이미 덕수를 통해 전해 둔 내용이다.
“자자, 다들 조용하게. 대련해야 하니까, 자리도 좀 비우고.”
“정말 괜찮겠는가? 정령님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작은데, 괜찮으려나?”
“그래도 어딘지 강한 기세가 느껴져.”
“정령님이신데 설마 다치시진 않겠지.”
엘프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호가 덕수에게 신호했다.
덕수는 서둘러 어딘가로 손짓했다.
“영식이, 나오게.”
불려 나온 것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엘프였다.
“영식이라고 합니다, 정령님.”
“반가워요. 잘 부탁합니다.”
영식은 고로쇠나무 족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고로쇠나무 최고의 전사.
근방에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성약을 내려주신 고마운 분이셔. 어머니 나무와도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시고. 잡초 제거 방법도 저분이 발견했다지?’
영식은 수호를 보며 생각했다.
존경스럽고 고마운 존재.
한데 동시에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너무 작아. 저래서야 빠르고 강하게 싸울 수 있을까?’
이길 것 같다.
아니, 이긴다.
영식은 자신했다.
그렇기에 우려됐다.
‘정령님을 다치게 하면 어떡하지?’
조심해야겠다.
영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를 뽑아도 좋아요. 서로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제가 최선을 다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려를 떨치지 못한 영식이 되물었다.
한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대답이 돌아왔다.
“최선을 다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영식의 마음에 약간의 호승심이 생겼다.
‘저 정도로 말씀하시니, 자신 있으시겠지.’
전력으로 간다.
마음먹은 영식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팟-
그리고 빠르게 쏘아졌다.
한데 그 순간.
쿵!
충격이 느껴지더니, 정신이 아찔했다.
곧이어 천장이 보였다.
“어? 어어?”
영식이 칼을 채 휘두르기도 전.
쇄도한 수호가 영식의 다리를 후려 차 쓰러트리고, 무릎으로 가슴을 눌러 제압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저 영식이를 순식간에!”
“영식이가 손 한 번 못 써 보고 당했잖아!”
“역시 정령님! 세계수의 가호를 받는 분이 틀림없어!”
엘프들이 놀라 소리쳤다.
‘이럴 수가! 정령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지도 못했어!’
영식이도 상황을 깨닫고 경악했다.
한데 수호도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약해?’
굳이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칼도 뽑지 않았다.
차원을 넘어올 때부터 이긴다는 생각은 했다.
한데 직접 붙어 보고 알았다.
엘프는 생각보다 더 약했다.
‘움직임은 제법 민첩해. 힘도 아주 약하지는 않아. 근데… 어설퍼.’
싸워 본 적이 별로 없는 티가 났다.
각성 후 여러 전투를 겪은 수호에게는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게다가 더 심각한 부분이 있었다.
‘저 목검은 또 뭐야? 저걸로 몬스터를 잡겠다고?’
척 보기에도 어설픈 나무 칼.
날도 없고, 끝도 무디다.
무게 중심도, 재질도 형편없다.
화염 포마검은커녕, 구타용 강철창에 부딪쳐도 툭툭 부러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수호가 선언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요.”
엉망이다.
수호가 함께해도 여정이 성공하기 어렵다.
“특훈을 합시다!”
전투 훈련이다.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굴려 주겠다!
수호가 마음먹었다.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나마 장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전투 기술이 워낙 엉망이라, 배우면 나아질 부분이 많다는 점.
기본적인 신체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점.
마지막으로.
‘장비발은 확실히 받을 테니까.’
아무거나 쥐여 줘도 목검보다는 훨씬 나을 터.
드워프제를 입히면 환골탈태나 다름없다.
74화 【차원 여행】(3)
“후우, 바쁘겠구만.”
수호가 작게 한숨 쉬며 냉장고 앞에서 물러났다.
엘프들을 이끌고 레드우드로 향해야 할 상황.
처음으로 타 차원에 입장하여 진행하는 임무다.
게다가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되지도 않는 형태였다.
“왜 한숨을 쉬고 그러나, 친구?”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슨이 소파에 앉아 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윌슨, 내려와 있었네?”
“응, 공방에서 할 일은 끝냈거든.”
“벌써?”
“있는 재료로 가능한 부품은 다 만들었고 설비도 몇 가지 추가했어. 미안해, 친구. 재료가 더 필요할 것 같아.”
윌슨이 강아지 귀를 축 늘어트리며 대꾸했다.
“괜찮아. 나한테도 도움되는 일이잖아. 뭐가 필요해? 드워프들이랑 자주 이야기하던데, 그쪽에서 못 만드는 거야?”
“그쪽에도 재료 자체가 없어. 아무래도 네가 구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래, 말만 해. 안 그래도 든든한 물주가 생겼거든. 앞으로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상왕련주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물주가 생겼으니까.
“하하, 고마워. 수호! 근데 무슨 근심 있어?”
윌슨이 수호의 한숨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게 말이야. 일이 생겨서, 내가 이번에 저쪽 세상에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 근데 엘프들이…….”
수호는 레드우드로 가야 하며 엘프들이 얼마나 약한지 설명했다.
“드워프제 장비를 입히면 나아지지 않겠어? 드워프들이 장비를 만드는 사이, 자네가 틈틈이 전투를 지도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기를 바라야지.”
“근데 얼마나 멀리 가는 거야? 듣자하니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글쎄. 숲길을 지나 사막도 횡단해야 한다는데. 엘프들에게 별다른 교통 수단이 없어서 정확히 가늠이 안 돼. 아무래도 가는 데까지 최소 1주일은 잡아야 할 것 같아.”
일생을 숲에서 보내는 엘프는 탈것이 없다.
늘 두 발을 이용한다.
게다가 제대로 된 지도도 없다 보니, 목적지까지 정확한 거리도 알 수 없었다.
“제법 오래 걸리네. 가게는 계속 비울 거야?”
신체 개조만 완료됐다면, 내가 가게를 봐 줄 수 있었을 텐데.
윌슨이 아쉬워하며 덧붙였다.
인간 형태의 몸을 구상 중인 윌슨이지만, 아직은 2족 보행하는 강아지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아쉽네. 장사도 잘되는데.”
“어쩔 수 없지. 너무 멀지만 않기를 바랄 수밖에.”
고개를 끄덕이던 윌슨이 문득 물었다.
“근데 수호. 아까 숲이라고 했지? 그 뒤는 사막이고?”
“그래. 맞아.”
“숲과 사막이라, 흐음…….”
대답을 들은 윌슨이 손으로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잠시 기다리던 수호가 물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윌슨이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그 숲에 혹시 길이 있어?”
“있었어. 옆 마을로 향하는 방향에 나무가 자라지 않은 빈 땅이 길게 이어져 있었거든. 그게 길일 거야.”
“간격이 어느 정도나 되었어?”
“2차선 도로 정도 되겠던데. 왜?”
짝!
윌슨이 손뼉을 쳤다.
“하하, 친구! 자네를 좀 더 빨리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
“……?”
“자네 혹시 차가 필요하지 않나?”
“차라니? 자동차?”
“그래, 자동차! 숲길도 사막도 주파할 수 있는 전천후 마력 자동차!”
짝-!
이번에는 수호가 손뼉을 쳤다.
“공돌이가 최고야!”
좋아하는 수호의 모습에 윌슨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어왔다.
“하하, 근데 재료가 좀 많이 필요한데, 괜찮을까?”
“괜찮아,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해!”
재료?
문제없다.
든든한 물주가 있지 않나!
* * *
가게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
쪼르르.
묵은 밤차가 찻잔을 채운다.
주름진 손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곧 감탄이 터져 나왔다.
“호- 대단하군. 향이 정말 좋아. 몸에도 좋고. 이거 오늘 내 입이 또 호강하는구먼.”
상왕련주가 흐뭇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수호도 마주 앉아 차를 음미했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상왕련주에게 도토리를 먹이고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한데 자동차 재료를 의뢰했더니, 상왕련주가 직접 나타났다.
“허허,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지독한 수작에 당했고,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었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네. 한데 지금은 몸이 아주 생생해. 내게 먹인 도토리는 도대체 뭔가?”
영험한 도토리에는 작은 스탯 추가 효과도 있다.
비전투 계열인 상왕련주에게는 큰 효과일 터.
몸이 외려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제법 귀한 물건이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어쨌든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
“내게 먹인 것도 그렇고, 이 차도 그렇고 심상치 않군. 아마 그 드래곤과 관련이 있겠지?”
“그렇다고 해 두죠.”
수호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상왕련주가 수호의 기색을 눈치채고 급히 말을 이었다.
“캐물으려던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자네 덕에 살았는데, 자네 것을 탐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네. 그저 하도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지.”
“이해합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네만. 나나 상왕련 수뇌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반응이 다를 수도 있네. 이름이 퍼지기 시작하면 드래곤에 흥미를 보일 자들이 나타날 거야. 조심하게. 너무 혼자 해결하려 들지 말고.”
수호에게 또 다른 비밀이 있을 것이다.
상왕련주는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지금도 강하지만 더 강해질 게 분명한 헌터.
상왕련주의 목숨까지 연명시켜 주고 있는 동맹.
그런 수호가 앞으로도 무탈하게 성장해 주는 것이야말로, 상왕련주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왕련주의 충고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한배를 탄 사이 아닌가. 자네 비밀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네만, 위험할 때만이라도 꼭 연락하게나.”
“알겠습니다.”
“허허, 그럼 늙은이 잔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해결하세. 이거 한번 보게.”
상왕련주가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수호는 그것을 받아들고 살폈다.
“부탁했던 마정석이군요. 근데 어째,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요?”
“역시 척 알아보는군. 구명지은을 입은 처지에 생색내는 것 같아 멋쩍네만, 그거 제법 귀한 거라네. 10개 모두 4성 던전에서 나온 것이거든.”
“4성이요?”
마정석에는 따로 등급이 없다.
강한 몬스터에게서 나온 마정석일수록 귀하다. 더 많은 마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5성 던전이 최상위 헌터의 전유물인 상황.
4성 마정석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물건이었다.
“그렇네. 구하느라 발품 좀 팔았지. 이제 한동안은 시장에서 4성 마정석은 구경하기도 힘들걸세. 어쨌든 잘 쓰게나.”
“이렇게까지 대단한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감사합니다.”
“또 그러는군. 감사는 내가 하고 있는 거라니까. 허허.”
상왕련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나머지 재료들도 다 나른 모양이군. 그럼 차도 다 마셨으니, 슬슬 일어나 볼까.”
마정석 외에도 수호가 요구한 재료가 있었다.
상왕련 직원이 그것들을 가게 한구석에 운반해 놓았다.
“가시려고요?”
“용건 끝났으니 가야지. 며칠 누워 있었더니 일이 쌓였어. 늙은이가 계속 있어 봐야 자네도 재미없을 테고. 허허.”
상왕련주가 금세 사라졌다.
수호가 ‘공간 결계 생성기’로 형성된 벽을 향해 외쳤다.
“윌슨! 재료 왔어!”
“오- 드디어 사랑스러운 마정석이 손에 들어왔군!”
벽 뒤에서 튀어나온 윌슨이 마정석 상자를 받아 들었다.
“품질이 좋아.”
“하하, 아주 좋은 자동차가 만들어질 거야. 기대하라고 친구!”
윌슨이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수호가 씩 웃으며 벽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럼 다음 물건도 의뢰해 볼까?’
수호가 냉동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타룽가 님! 달콩 님! 블톤 님! 안 바쁘시면 잠깐 이야기 좀 나눌까요?”
상왕련에서 가져다 놓은 장비 재료.
드워프라면 그것을 훌륭한 엘프용 장비로 만들어 줄 것이다.
* * *
며칠이 흘렀다.
수호는 틈나는 대로 엘프 마을을 방문했다.
이번 여정에 동행하기로 한 엘프의 훈련을 위함이다.
떡갈나무 마을 국진.
고로쇠나무 마을 영식.
밤나무 마을 수철.
수호가 ‘국영수 트리오’라 이름 붙인 세 엘프가 여정의 동행자들이었다.
수호의 의사를 반영하여 인원은 최소화했다.
‘차에 타고 가야 하는데,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윌슨이 제작 중인 차는 6인승이다.
수가 많아서는 안 됐다.
변수를 대비하여 출발 인원은 수호까지 4명으로 정해졌다.
‘그나저나 엘프에 대해 오해했어.’
마을 한편에 마련한 훈련장.
쎄에엑-
푸푸푹!
동시에 쏘아진 3발의 화살이 3개의 과녁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아싸- 명중!”
“나도 한가운데야!”
“활이 진짜 끝내주는 것 같아!”
국영수 트리오가 신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100m도 훌쩍 넘는 과녁을 명중시켰으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수호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엘프의 전투력이 그저 약하기만 한 건 아니었어.’
영식과의 대련 후, 수호는 엘프들의 전투력에 실망했다.
온 마을 엘프가 덤벼도 수호 하나 못 이길 전력이었으니, 실망은 당연했다.
한데 엘프들을 훈련시키면서 수호의 생각이 변했다.
‘그저 경험과 요령이 없었을 뿐이지.’
수호는 헌터 양성학원에서 배운 전투 기술을 엘프에게 가르쳤다.
국영수 트리오는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기술을 흡수했다.
신체 능력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던 터라 금세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게다가 원래 쓰던 장비가 너무 안 좋았고.’
수호는 영식이 쓰던 단검의 옵션을 떠올렸다.
[무딘 나무 단검]
- 나무를 깎아 만든 단검.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지만, 날이 서 있지 않고 무게 중심이 형편없다. 무기보다 장난감에 더 어울린다.
- 아이템 등급 : 하급
- 물리 공격력 8
- 내구도 15
아무리 하급이라도 너무한 성능이었다.
스킬도 스탯도 없고, 공격력은 바닥에 돌멩이보다 못한 수준이다.
저런 걸 무기랍시고 휘둘렀으니, 약할 수밖에.
‘번듯하게 입혔으니, 이제 도움이 되고도 남을 거야.’
며칠 사이, 드워프들이 엘프를 위한 장비를 완성했다.
수호는 그것을 국영수 트리오에게 지급했다.
[명인의 활]
- 뛰어난 장인이 보통의 재료를 다듬어 만들었다. 빠르고 강한 살을 쏘아 낼 수 있으며 내구도도 높다. 정석적으로 잘 만들어져 모든 방면에서 모자람이 없는 활이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물리 공격력 220
- 【하급 투사체 속도 증가】【하급 명중률 보정】
- 민첩 +5
- 내구도 200
수호는 국영수 트리오가 들고 있는 활의 성능을 떠올렸다.
원래 쓰던 단검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상왕련에서 받은 재료가 쓸만했기에, 서둘러 만들었음에도 물건이 좋았다.
활 외에도 가죽 갑옷, 신발 등 전체적인 장비가 주어졌다.
특이한 성능의 화살도 몇 발 지급했다.
『다음 갈까요?』
어머니 떡갈나무의 목소리가 수호를 상념에서 깨웠다.
“네, 부탁합니다! 사격 준비!”
수호가 어머니 나무에게 대답한 후, 소리쳤다.
“준비!”
“준비!”
“준비!”
국영수 트리오가 대답하며 활을 들어 올렸다.
“떡갈나무님, 지금이요.”
수호가 외치는 순간.
팔랑.
한 나무당 5장씩.
저편 멀리 떨어진 세 그루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떡갈나무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발사!”
수호의 명이 떨어졌다.
국영수 트리오가 화살을 연사했다.
슈슈슈슛-
불규칙적인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으아- 3발밖에 못 맞혔어,”
“나도 1발 빗나갔어.”
“정령님, 죄송해요. 이렇게 좋은 활로도 2발이나 빗나갔으니, 저는 멍청인가 봐요.”
국영수 트리오가 엄살을 부렸다.
“됐어. 그 정도면 정말 빠르게 는 거야. 며칠 내로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열심히들 연습해.”
“옙, 정령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령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영수 트리오의 인사를 받으며 수호는 지구로 돌아왔다.
그런 수호의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윌슨이었다.
“수호, 완성됐어!”
기다리던 마도 자동차가 완성된 것이다.
“드디어!”
세계수 원정대가 출발할 시기가 다가왔다.
75화 얼음 사막(1)
수호의 건물 2층, 윌슨 공방.
아직 생산 설비가 많지 않아 썰렁했던 공간을 무언가 채우고 있다.
“대박! 진짜 끝내준다.”
수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하하, 급히 만드느라 고생 좀 했다고, 친구.”
윌슨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을 차체에 턱 얹은 모습이 엔지니어다웠다.
“구경해도 돼?”
“네 건데 당연하지.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한번 훑어봐.”
수호는 자동차의 주변을 돌며, 구경을 시작했다.
“바퀴가 8개나 되네?”
몬스터 트럭을 연상시키는 높은 차체 양측에 4개씩의 바퀴가 달려 있었다.
“다양한 지형에서 달릴 수 있도록 바퀴를 많이 달았어. 다른 곳도 살펴봐.”
수호는 차 외관을 이리저리 살폈다.
재질을 알아볼 수 없는 단단한 범퍼가 앞뒤로 달렸다.
측면에는 언제든 타고 내릴 수 있도록 4개의 문이 보인다.
지붕 위에도 뭔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지붕에 저건 뭐야? 꼭 총같이 생겼네.”
“총 맞아. 사방으로 마력탄을 발사할 수 있는 마력 기관총이야.”
기관총은 운전석은 물론 조수석에서도 조작할 수 있었다.
“대박! 완전 영화에 나오는 차 같아.”
겉을 대강 살폈으니 안쪽도 구경할 차례.
수호는 차체로 다가갔다.
수호가 막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선명한 아이템 창이 시야에 떠올랐다.
[마도 배틀 웨건]
- 뛰어난 마도 공학자가 공들여 설계한 마도 자동차. 훌륭한 품질의 마정석이 동력원으로 쓰였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며 높은 방호력과 지형 적응력을 겸비했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물리 방어력 1,250
- 마법 방어력 770
- 【상급 충격 완화】【중급 이동속도 증가】【중급 지형 무시】
- 내구도 2,500
“어? 이거 아이템이잖아!”
수호가 놀라 소리쳤다.
지구에도 마력을 이용한 차량이 있지만, 시스템에 의해 아이템 판정을 받은 것은 전무했다.
“당연하지. 그만한 재료를 쏟아부었는데.”
“…그런가?”
윌슨이 제작한 마도 공학 물품이 아이템 판정을 받는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자동차까지 그럴 줄이야.
게다가 성능도 심상치 않다.
‘충격 완화와 이속 증가는 익숙한 옵션이지만 지형 무시는 뭐야?’
다른 장비에서 본 적 있는 스킬은 미뤄 두고, 수호는 처음 본 스킬부터 확인했다.
【중급 지형 무시】
- 늪이나 모래, 얕은 개울 등, 차량이 움직이기 힘든 지형에서도 제 성능을 발휘한다.
“어때? 멋지지?”
“윌슨, 진짜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었냐?”
진심으로 감탄한 수호에게 윌슨이 손짓했다.
“타 봐. 옵션에 안 적힌 기능이 있어. 타면 설명해 줄게.”
“여기서 더 있다고?”
수호가 서둘러 차에 탑승했다.
높고 넓은 내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추후 다양한 이종족을 태울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한 설계였다.
“여기 좀 봐 봐.”
윌슨이 앞을 가리켰다.
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둥그런 원판이 달려 있었다.
“이게 뭐야? 핸들은 아닌 것 같은데.”
“손바닥을 대 봐.”
수호가 윌슨의 설명대로 원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든다 싶더니, 원판에 다양한 글자가 떠올랐다.
“계기판인가?”
“마력 패널이야. 마력을 제어해서 운전이나 기관총 발사 등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어. 손을 대고 있으면, 금세 사용법이 느껴질 거야.”
“신기하네.”
“그리고 중요한 기능. 여길 터치하면.”
윌슨이 원판의 한쪽을 건드렸다.
앞 유리 아래쪽에 뭔가 떠올랐다.
“어? 지도?”
“맞아. 주변 지형을 스캔해서 지도화하는 기능이 있거든. 지도에 따라 자율 주행도 가능해.”
“자율 주행? 저절로 움직인다고?”
“응, 지도에 목적지를 설정하거나 방향을 지정하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
“대박이네.”
스캔 능력도 훌륭한지, 근처 1km 정도는 이미 지도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도 할 수 있지.”
윌슨이 또 어딘가를 건드렸다.
차체에서 약한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후우우웅-
바닥을 향해 마력이 분사됐다.
점프하듯 차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철컥!
뒤이어 8개의 바퀴가 방향을 틀었다.
바퀴 휠 부분이 땅바닥을 향했다.
“이거 설마 나는 거야?”
수호가 놀라는 사이, 바퀴가 맹렬히 회전했다.
아래를 향해 마력이 분출되며 차가 허공에 멈춰 섰다.
“응. 저공 비행이지만.”
바닥에서 1m 남짓 떠오를 뿐이지만, 마력을 쏟아부으면 순간적으로 몇 미터 정도는 솟구칠 수 있어.
윌슨이 설명을 덧붙였다.
“와, 진짜 영화에서나 보던 게 현실에서 이뤄지네.”
그 후로도 수호는 윌슨에게 몇 가지 기능을 배웠다.
“이제 한 가지만 빼면, 다 둘러봤어.”
“아직도 남은 게 있어?”
“있어. 비장의 무기. 그 전에 중요한 걸 가르쳐 줄게. 이 차는 모든 기능에 마력을 소모해. 한데 마력은 기름처럼 쉽게 채울 수가 없어.”
“아껴 써야겠네.”
“품질 좋은 마정석을 사용했으니, 제법 버틸 거야. 그만큼 기능을 더 욱여넣는 바람에 마냥 넉넉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수호는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마력은 어떻게 다시 채워?”
“마정석은 가만히 있어도 주변 마력을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어. 그냥 세워 놓으면 조금씩 다시 충전될 거야. 만약에 비상사태가 생기면…….”
“생기면?”
“여기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어. 효율이 엉망이지만, 약간은 더 주행할 수 있을 테니까.”
윌슨이 원판 앞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비장의 무기를 보여 주게나, 친구.”
“알겠네, 친구. 깜짝 놀랄 준비하게나, 하하.”
장난스런 표정으로 윌슨이 어딘가를 눌렀다.
철컹.
작동음이 들리더니, 차 앞쪽에 뾰족한 막대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뭐야?”
“나가서 보자고. 그편이 잘 보일 테니까.”
윌슨이 차에서 내렸다.
수호도 뒤를 따랐다.
앞에 도착하니 막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미사일?”
차체 앞.
깎아 놓은 연필처럼 고개를 삐쭉 내민 것은 미사일이었다.
“맞아. 미사일. 저것도 아이템이니까, 만져 봐.”
수호는 놀람을 미뤄두고 손을 뻗었다.
아이템 창이 떠올랐다.
[폭발형 마력 미사일]
- 최고의 대장장이와 마도 공학자가 힘을 합쳐 개발한 발사체. 마도 배틀 웨건에 맞춰 설계되었다. 강력한 관통력으로 적의 외피를 뚫고, 내부에서 폭발한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물리 공격력 1,700
- 【중급 관통】【최상급 폭발】
- 내구도 500
- 소모 아이템
[관통형 마력 미사일]
- 최고의 대장장이와 마도 공학자가 힘을 합쳐 개발한 발사체. 마도 배틀 웨건에 맞춰 설계되었다. 장애물 돌파에 초점을 맞춘 포탄. 전면을 분쇄하며 길을 여는 용도로 쓰인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물리 공격력 750
- 【상급 관통】【상급 분쇄】
- 내구도 1300
- 소모 아이템
“영웅 등급? 하하.”
수호는 그냥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영웅 등급 소모품.
윌슨의 말대로 그것은 정말 ‘비장의 무기’라 부를 만했다.
“각각 1발뿐이니까, 신중하게 사용해.”
“고마워.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하하, 드워프 친구들에게 인사하라고. 미사일은 그 친구들이 많이 거들었으니까.”
“알았어. 드워프에게도 인사할게. 그래도 고마워, 윌슨. 너도 고생했어.”
“건물주님께 잘 보여야지.”
어느새 지구식 어휘에도 능숙해진 윌슨이었다.
수호는 웃음으로 친구에게 대답했다.
* * *
엘프 마을.
“오- 저 쇳덩이가 탈것이라고?”
“무, 무시무시하게 생겼어.”
“웬만한 몬스터는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가도 되겠는걸.”
배웅을 위해 모인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귀쟁이 놈들, 시끄러워서 성가시구나. 어서 출발하자, 수호.』
조수석에 널브러진 발룡이가 투덜거렸다.
“슬슬 가 볼까. 너희도 타!”
수호가 외쳤다.
“앗싸! 출발한다!”
“으히히, 족장님도 못 타는 걸 내가 탄다!”
“정령님! 어서 달리죠!”
국영수 트리오가 차에 오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호가 덕수에게 인사했다.
덕수도 깊이 고개 숙였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정령님.”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는 인사였다.
와아아아아-
나머지 엘프들도 환호로 일행을 배웅했다.
마도 배틀 웨건이 출발했다.
『무운을 빌어요, 수호 님.』
마지막으로 어머니 나무의 인사를 받으며, 수호는 떡갈나무 마을을 벗어났다.
‘기왕이면 신속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겠지?’
집을 오래 비워 둬서 좋을 게 없으니.
수호가 조종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부와아앙-
배틀 웨건이 숲길을 빠르게 헤쳐나갔다.
한동안 소란하던 국영수 트리오는 흥분이 가라앉자 차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와, 여기 창문 내리고 활 쏘면 딱이겠어.”
“정말 높이가 딱 맞네. 창틀도 몸을 지지하기 편하게 생겼고.”
“어? 천장에 금이 있네. 왠지 열릴 것처럼 생겼는데? 정령님! 이거 혹시 열리나요?”
수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열려. 전투가 벌어지면 몸을 내밀고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둬.”
“옙! 알겠습니다!”
시끄러운 일행과 함께 수호의 첫 타차원 여행이 시작됐다.
* * *
떡갈나무 마을에서 북쪽.
어머니 나무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숲.
그곳에는 얕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수시로 범람하는 강물 탓에 늪지가 길게 이어졌다.
“크르르르르-”
질척거리는 늪지 진흙 속.
거대한 존재가 이를 드러냈다.
번쩍.
세로로 갈라진 노란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몬스터, 진흙 악어왕이었다.
두꺼운 가죽으로 둘러싸인 20m의 거구.
악어보다 훨씬 긴 네 다리와 그 끝에 달린 긴 발톱.
그리고 흉악한 이빨.
그것들이 놈을 늪지의 제왕이자 최고 포식자로 만들었다.
“크르르르-”
진흙 악어왕이 재차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무언가 바닥을 자극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감히 모든 몬스터들이 숨죽여 지나는 악어왕의 영역을 겁도 없이!
진흙 악어왕이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사락.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한동안 움직이던 진흙 악어왕이 멈춰 섰다.
“크르르?”
이번 울음은 불쾌함보다는 의아함과 설렘을 담고 있었다.
엘프.
어머니 나무의 기운 탓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던.
하지만 언제나 잡아먹고 싶었던 먹이의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라라라락-
진흙 악어왕이 한층 빠른 속도로 늪지를 미끄러져 나갔다.
* * *
국영수 트리오의 일인, 국진이 중얼거렸다.
“왠지 지루하네.”
엘프의 명운을 건 여행.
그 일원으로서 대단한 포부를 안고 시작한 여정이었다.
한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 일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
“또 입방정 떤다.”
“맞아,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야지.”
영과 수가 국진을 타박했다.
‘알아서 잘들 노는구만.’
피식 웃던 수호의 귀에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다가온다.』
수호의 감각에도 걸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상당한 마력이 느껴진다.
“이대로 따돌리고 갈 거야.”
수호는 회피를 선택했다.
싸워 봐야 소득이 없으니까.
접근 속도를 보니 충분히 피할 만하기도 했고.
한데 수호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놈이 속도를 올렸다. 따라잡히겠구나.』
다가오던 놈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하필이면 지형도 늪지.
【중급 지형 무시】 덕분에 차가 느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늪에서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주치겠네. 뭐, 적당히 떨쳐 내고 가는 수밖에. 전투 준비!”
수호의 호령에 국영수들이 활대를 들어 올렸다.
눈빛이 반짝 빛났다.
“앗싸, 드디어 전투!”
“또 방정 떤다.”
“헉! 엄청나게 큰 악어다! 국진이 네가 입방정 떨어서 그렇잖아!”
국영수 트리오의 수다 속에서 수호도 적을 눈에 담았다.
측방에 거대한 악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칠게 운전할 테니까 조심해. 틈나는 대로 활로 견제하고!”
후와앙-
배틀 웨건이 악어왕을 피해 급선회했다.
진흙이 튕기며 늪지가 갈라졌다.
하나 상대는 수호 일행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
“쿠와아아아앙-”
괴성이 울리더니.
진흙 악어왕의 동체가 쭉 미끄러지며 빠르게 다가왔다.
진흙 악어왕의 스킬, 【늪지 유영】이었다.
『하찮은 악어 따위가 감히!』
한데 놈의 포효가 발룡이를 자극했다.
변변찮은 몬스터가 덩치를 믿고 덤벼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룡이가 짧은 앞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앞발이 조수석 앞쪽 패널에 닿았다.
『감히 본좌를 보고도 덤벼들다니. 크큭- 허섭스레기 같은 네놈의 안목을 지옥에서 원망하거라!』
중2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투타타타타타타-
배틀 웨건의 기관총이 마력탄을 발사했다.
“얀마! 누가 네 맘대로 쏘래? 마력 잡아먹는다고.”
『그럼 본좌가 저런 저능한 파충류의 도발을 그냥 넘기란 말이냐!』
적당히 떨쳐내고 가려던 수호는 발룡이의 적반하장에 어이없었다.
한데 그때.
수호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투타타타타탓-
발룡이가 쏜 마력탄 몇 발이 빗나갔다.
그것은 소란에 놀라 튀어나온 애꿎은(?) 몬스터를 맞혔고, 허약했던 놈은 즉시 숨이 끊어졌다.
그 순간.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늪지 독거머리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수호가 눈을 크게 떴다.
‘뭐? 경험치를 준다고?’
그러면 말이 달라지는데.
76화 얼음 사막(2)
이제껏 수호는 차원문 넘어 손을 뻗어 많은 적을 해치웠다.
몬스터, 마물, 마인.
심지어 마족까지 수호의 손에 쓰러졌다.
하지만 단 한 차례도 경험치를 획득한 적은 없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선명한 메시지.
그것은 수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시사했다.
‘타차원에서도 레벨을 올릴 수 있어!’
수호로서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어째서 갑자기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된 걸까?
의문도 들었지만, 일단은 뒤로 미뤄 뒀다.
‘안 그래도 그 벌레로 변하던 놈 때문에 2성 만렙 코앞에서 멈췄는데.’
사령의 습격.
당시 만렙까지 2레벨을 남겨 두고 있던 수호였다.
하나 습격 때문에 1렙만 올리고 던전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Comentários

Postagens mais visitadas deste blog

apocalipse 9

magia 10

magia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