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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구냐.”
“하하. 형이랑 다니면 진짜 보조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죠. 그리고 2성 처음 가는데 형이랑 같이 가는 거면, 목숨 여분으로 하나 가지고 가는 거잖아요. 무슨 일 생겨도 죽을 일 없을 테니까 당연히 고마워해야죠.”
박영일 건을 떠올린 정현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무슨 일 없는 게 최선이지. 그리고 이번 주는 일이 있어서 힘들고, 다음 주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한 며칠은 윌슨의 지구 적응을 돕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일정은 형 편하실 대로 하시면 돼요. 생각해 보시고, 며칠 내로 연락해 주세요.”
“그래, 생각해 보고 연락할게.”
* * *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네요, 타룽가 님! 하루 만에 이 정도로 정교한 부품을 뚝딱 만들어 내실 줄이야!”
윌슨이 냉장고 앞에서 탄성을 터트렸다.
손에는 타룽가가 만들어 낸 부품이 들려 있었다.
“윌슨 님이라고 하셨소? 내 생에 본 가장 정교한 설계도였소, 껄껄. 완성품이 궁금해 잠이 안 올 지경이오. 언제든 시간 날 때 와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냉동실 안에서도 감탄이 되돌아왔다.
윌슨이 부품을 의뢰하며 보낸 설계도를 보고 타룽가 또한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하하, 시간 나는 대로 꼭 들를게요. 타룽가 님과는 왠지 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군요.”
“당신이라면 내 망치 잡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지. 껄껄.”
최고의 마도 공학자와 최고의 대장장이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죽이 척척 맞는구만. 잘됐네.’
앞으로도 서로 힘을 합칠 일이 많을 테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수호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근데 윌슨이 타차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정상인가?’
윌슨은 발룡이처럼 냉동실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데 발룡이와 달리 차원 패널에 등록된 존재가 아니다.
페널티를 받고 지구로 넘어온 것도 아니다.
의아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마지막 차원 임무의 보상.’
차원 임무 『선물』의 보상은 ‘???’였다.
당시 정신이 없어 보상은커녕 임무 완료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 물음표 보상이 윌슨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때문에 윌슨이 시스템의 보조를 받게 된 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수호는 왠지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잘됐지, 뭐.’
수호가 납득하고 있을 때, 윌슨이 냉동실에서 물러났다.
“수호, 드디어 부품이 다 모였어. 이제 조립만 하면 돼!”
“잘됐네. 그럼 가자.”
“근데 정말 내가 2층을 써도 될까? 한 층을 통째로 내어 준다니, 얹혀사는 처지에 너무 미안한걸?”
“아니야, 비워 두는 것보다는 나아.”
수호의 건물은 3층짜리였다.
한데 차원문 때문에 수호는 1층에 살아야 한다.
찜찜한 마음에 건물에 세를 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을까?”
“괜찮다니까. 3층도 비었는데, 뭐.”
“고마워 친구! 밥값은 꼭 할게. 하하.”
“됐으니까, 어서 올라가자.”
수호와 윌슨이 2층으로 향했다.
책상과 테이블 등 간단한 가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호가 부품을 받을 때, 정현수에게 함께 부탁한 것들이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줬으니, 나도 솜씨를 보여 줘야겠지? 잠깐만 기다려 봐, 수호.”
윌슨은 가져온 부품들을 조립해 나갔다.
잠시 후.
기이이잉-
기계음과 함께 복잡하게 생긴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부품 이름만 들었지, 정작 만들려는 게 뭔지는 못 들었네. 이건 도대체 뭐 하는 기계야?”
“간이 마도 프린터!”
“마도 프린터?”
“일종의 3D 프린터라고 생각하면 돼. 설계도를 넣으면 마력이 담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야. 대단한 건 못 만들지만, 기초적인 부품은 만들 수 있어. 그 부품을 조립해서 설비를 하나씩 갖춰 가는 거지.”
“부품을 만들 생각이었구나.”
“맞아. 드워프 님들 손을 빌리고, 안 되는 건 이쪽에서 만들려고. 잠깐만 기다려 봐. 시험 삼아 간단한 물건을 만들어 볼 테니까.”
말을 마친 윌슨이 마도 프린터를 작동시켰다.
위이잉.
한동안 기계음이 울리더니.
프린터 앞에 엄지손톱만 한 구슬이 생겨났다.
“수호, 이거 한번 봐 봐.”
수호는 윌슨이 내미는 구슬을 받아들었다.
[마력 산란탄]
- 마력이 코팅된 쇳가루가 든 구슬. 사용 시 자극에 쉽게 반응하도록 조작된 마력이 빠르게 확산하여 마력 감지 능력에 혼란을 일으킨다. 포함된 마력 양이 많지 않아 지속 시간이 짧고, 효과가 강하지 않다.
- 아이템 등급 : 일반
- 【하급 마력 감지 무효】
- 소모 아이템
수호는 깜짝 놀랐다.
“이거 아이템이잖아!”
제작 계열 헌터만이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재료 자체가 아이템인 것을 조립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예외는 없다.
마력이 포함된 물건을 재료로 써도, 제작 스킬이 보조하지 않으면 ‘아이템’ 판정을 받지 못한다.
박람회에서 사 온 부품도 그런 경우였다.
한데 지금 눈앞에 예외가 생겼다.
“왜?”
“제작 계열 각성자도 아닌데 아이템을 만드는 건, 지구에서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거든.”
“하하, 이제 시작인데, 뭘 벌써 놀라고 그래?”
윌슨이 별거 아니라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이 정도면 가게에서 팔아도 되겠는걸?”
“그건 좀…….”
“왜?”
“대량으로 만들려면 제대로 된 동력원이 필요해. 프린터도 더 크게 만들어야 하고.”
“그렇구만. 근데 동력원으로는 뭘 써? 전기?”
“마력이지. 마정석을 이용하는 편이 제일 좋아. 그렇지만 마정석은 희귀하니까 마력이 들어간 재료를 이용해서 마나 서플라이를 만들어야 해.”
이야기를 듣던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 손을 넣었다.
“이 정도면 돼?”
협회 탐색 의뢰에서 보스를 잡고 나온 마정석이었다.
“헉! 마정석!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뚝딱 생겨나. 내가 진짜 대단한 친구를 사귄 것 같아.”
“그거면 된다는 말이지?”
“되고 말고! 고마워 수호, 설비 준비가 한결 더 빨라질 것 같아. 그리고 아까 만든 산란탄도 하루에 100개쯤은 만들 여유가 있을 거야.”
“잘됐네. 오늘 당장 만들 필요는 없고 조만간에 따로 이야기할게.”
예전에 비해 가게에 물건이 제법 다양해졌다. 한데 손님은 그보다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잘됐어. 가게에 무슨 물건을 추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윌슨이 만들 물건은 가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수호가 쓸 물건이 우선이겠지만.
“그럼 나는 부품부터 만들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 청력이 좋아서 다 들리니까.”
윌슨이 강아지 귀를 팔랑거렸다.
“알았어. 이 산란탄은 내가 가져도 되지?”
“당연하지.”
“그래, 그럼 일 봐.”
막 문을 나서려는 수호에게 윌슨이 말했다.
“아참, 드워프 세상에 연결된 냉장고 말이야. 작동은 안 시켜 뒀지?”
“응, 코드 뽑아 놨어.”
이사 오면서 커다란 새 냉장고가 생겼다.
드워프 냉장고는 전원을 꺼 두었다.
“혹시 냉장실에 뭐 넣어 뒀어? 곰팡이가 핀 것 같던데.”
“이사 올 때, 비우고 깨끗이 청소했는데?”
“문 옆으로 푸르스름한 게 번져 나왔더라고. 꼭 곰팡이 같았는데. 청소했다니 곰팡이는 아니려나.”
세척제로 빡빡 닦아 뒀는데 그새 곰팡이라니.
음식을 넣지도 않았는데.
“다시 청소해야겠… 어? 설마!”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수호가 황급히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64화 떡갈나무 마을의 위기(1)
후다닥 달려 내려온 수호는 냉장고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수호의 눈이 빠르게 냉장고를 관찰했다.
꼭 닫힌 냉장실 문과 본체 사이에 고무 자석이 틈을 메우고 있다.
한데 냉장실 중간 정도 높이.
고무 자석 사이로 푸르스름한 것이 삐져나와 있었다.
‘진짜 곰팡이처럼도 보이네. 이끼 같기도 하고.’
분명한 것은 수호가 저런 것을 냉장실에 넣어 둔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열어 보자.’
냉장실 외부를 관찰하며 마음을 다잡은 수호가 손을 뻗었다.
툭-
고무 자석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냉장실 문이 열렸다.
동시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TLADPFDUD-010】을 발견하셨습니다.]
[새로운 대상 【떡갈나무 엘프】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떡갈나무 엘프】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역시 차원문!’
수호는 속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냉장실의 변화는 차원문 때문이 맞았다.
등장한 종족의 명칭이 낯익으면서도 심상치 않다.
‘게다가 엘프라니!’
드워프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이종족 아닌가.
아름답고 숲을 사랑하는 자연의 종족!
‘말 걸기 전에 좀 살펴보자.’
미리 정보를 얻어 두는 편이 초반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터.
수호는 조용히 냉장실 안을 살펴 나갔다.
차원문이 열린 곳은 어느 건물 안.
형태로 보아 가정집이었다.
‘엘프다! 정말 귀가 뾰족하구나.’
집 안에는 한 쌍의 엘프가 있었다.
그들은 귀가 뾰족하고 얼굴도 아름다웠다.
심지어 둘의 성별이 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양쪽 다 잘생긴 외모였다.
한동안 엘프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
엘프들이 색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저렇게 끔찍한 일이…….’
* * *
떡갈나무 엘프 마을 촌장 덕수.
막 몸을 씻은 그가 거울 앞에 섰다.
‘언제 봐도 훌륭한 몸매야.’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
밭고랑처럼 파인 슬림한 근육.
늘씬한 체형임에도 유독 넓은 가슴까지.
‘얼굴도 최고지.’
완벽한 좌우 대칭에 뚜렷하면서도 여린 듯한 이목구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덕수는 그렇게 한동안 자아도취에 푹 빠져 있었다.
안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여보, 다 씻었어? 안 들어오고 뭐 해?”
흠칫.
아내, 두심의 목소리에 덕수의 몸이 굳었다.
‘아직까지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별로 할 말도 없는 마을 회의를 밤늦게까지 진행했다.
일부러 최대한 느리게 씻었다.
거울을 보고 감탄한 시간도, 그가 꼭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보? 왜 대답이 없어요?”
부르르.
한동안 몸을 떨던 덕수는 어쩔 수 없이 안방으로 향했다.
“물기 좀 말리느라 그랬어.”
덕수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두심에게 대답했다.
“금방 또 씻을 건데, 뭐 하러 꼼꼼히 말려요? 호호.”
“……!”
“이리 와요, 여보.”
두심이 침대를 톡톡 두드렸다.
덕수는 교수대에 끌려가는 듯한 심정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
“괜찮아요.”
“…….”
덕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떨구고 침대만 바라볼 뿐.
“그럴 수도 있죠. 어쩌다 보니, 몇 달간 잘 안 될 수도 있는 거죠. 분명히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죠? 안 그러면 굳이 달고 다녀서 뭐 하겠어요? 아참, 근데 여보. 옆집 순덕이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소변 볼 때 앉아서 보기로 했다나 봐요. 쓸모도 없는 놈이 화장실까지 더럽힐 자격이 없다나 뭐라나…….”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덕수의 고개는 아래로 처박혔다.
‘빌어먹을. 어째서, 어째서…….’
덕수는 몇 달 전부터 정상적인 밤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덕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을 남자 전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어.’
온 마을의 모든 남자가 다 고개 숙인 상태.
지지부진한 마을 회의를 길게 끈 것도, 모두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결책이 있을 거야. 있어야 해. 꼭 있어야만 한다고!’
덕수는 생각했다.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귀라도 잘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 * *
“저렇게 끔찍할 수가…….”
수호는 기어이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 차원문 속까지 소리가 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호의 마음은 참담했다.
“해결해야만 해!”
문제를 파악한 순간, 여느 때처럼 차원 임무가 발생했다.
한데 이번만큼은 임무가 중요치 않았다.
‘남자로서 저런 문제를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한 마을이 통째로 고자라니!
한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수호는 차원 임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개 숙인 엘프들』
- 떡갈나무 마을 엘프들은 몇 달 전부터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을 전체에 큰 불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을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떡갈나무 엘프 남성들이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도와주자.
- 보상 :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
‘역시 예상한 대로네.’
임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예상했던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해.’
문제 해결 방법은 임무를 획득했을 때부터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수호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잠시 후, 동네 약국.
약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조제실에서 나왔다.
“비아그뤠 여기 있습니다, 손님. 마음 급하다고 한꺼번에 많이 드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약사였다.
수호가 약국에 있는 비아그뤠를 죄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던전이 생기고 다양한 약품이 새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었던 비아그뤠였다.
복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전문약품인 것이다.
“예, 걱정 마세요. 환자한테 그렇게 꼭 전할게요.”
약사의 우려와 동정 섞인 시선.
수호는 ‘내가 먹을 거 아닙니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곧 결제를 마친 수호가 약국을 나섰다.
“화이팅입니다.”
뒤에서 약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엘프 마을 촌장, 덕수네 집 마당.
“후우…….”
담장에 기대앉은 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에 도저히 집에 있기 힘들어 나왔는데, 밖에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잡초 때문에 더 답답하군.”
몇 달 전부터 마을을 뒤덮은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나더니, 덕수네 마당에도 가득했다.
키도 커서 앉은 덕수의 시야를 모조리 가렸다.
하늘이라도 보면 마음이 좀 풀릴까.
덕수는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세계수의 정령이시여.’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인 세계수.
그런 세계수 꼭대기에 사는 신비한 존재 세계수의 정령.
긴 수명을 가진 엘프에게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지만 덕수는 기대했다.
‘부디 저희를 고개 들게 해 주시옵소서.’
세계수의 정령이라면.
생명의 근원인 세계수 꼭대기에 사는 그들이라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덕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한데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원수호라고 합니다. 나쁜 마음은 없으니, 놀라지 말아 주세요.”
“헉!”
놀라지 말라고 한들, 안 놀랄 수 있으랴.
덕수가 눈을 찢어질 듯 뜨며 탄성을 토했다.
“놀라지 마세요, 절대로 해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하늘의 목소리, 수호가 서둘러 덧붙였다.
덕수가 워낙 심하게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진 덕수의 반응은 수호의 예상과 달랐다.
“이, 이럴 수가! 세계수의 정령님이 응답해 주셨어! 저, 정말 기도가 통했어!”
흥분한 덕수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소리쳤다.
“위대한 세계수의 정령이시여, 부디 저희를 예전처럼 다시 우뚝 서게 해 주십시오!”
절절한 음성이 냉장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수호가 서둘러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우… 뚝 서게 해 드릴 테니, 일단 진정 좀 하세요.”
덕수가 행동을 멈췄다.
“지, 진짜로 저희를 다시 우뚝 서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정 그리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네, 그렇게 해 드릴게요.”
비아그뤠가 통한다는 확신은 없다. 세상이 다르고 종족이 다르니 어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수호는 일단 덕수의 말을 긍정했다.
비아그뤠로 안 되어도,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생각이었으니까.
“오, 위대한 세계수의 정령이시여.”
태도를 보아하니 첫 대면치고 나쁘지 않다.
엘프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지만, 적대적인 것보다는 낫다.
‘이 문제만 해결해 주면, 매끄럽게 교류를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수호가 긍정적인 예상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약을 드릴 거예요. 약을 드시면 상태가 약간 호전될 겁니다.”
혹시나 비아그뤠가 통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소극적인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수호.
하지만 덕수의 귀에는 말투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오, 위대한 성약을 어서 내려 주십시오!”
‘성약’ 같은 게 아닌데…….
어쨌든 수호는 상자에서 비아그뤠 1통을 꺼냈다.
그 안에서 다시 6알짜리 한 판을 꺼내 덕수에게 전송했다.
“알약 보이죠? 꼭 누르면 뒤가 뚫리면서 약이 나올 거예요. 그걸 섹…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알만 드세요.”
“오- 지금 당장 먹어도 되겠습니까?”
이미 눈이 뒤집힌 덕수는 허공에서 갑자기 비아그뤠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한시 빨리 우뚝 서고 싶을 따름이었다.
“네. 집에 들어가서 물과 함께 드세요. 그래야 약이 잘 녹아서 효과가 제대로 돌아요.”
“예! 알겠습니다!”
“욕심내지 말고, 꼭 한 알만 드시고요.”
“예!”
덕수가 달리면서 대답했다.
이미 현관문에 반쯤 발을 걸친 상태였다.
얼마 뒤.
집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하하하하- 내가 바로 덕수다! 위대한 떡갈나무 마을의 촌장! 덕수다!”
“여보, 여보오오오-”
수호는 서둘러 냉장고 문을 닫았다.
봐서도, 들어서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약효는 있는 것 같네.”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겠구만.
이 차원의 정보,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과 생활 양상.
좀 전에 언뜻 들은 세계수 등 궁금한 것이 많다.
하지만 질문은 덕수의 사정을 고려해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수호는 아침 일찍 냉장실 문을 열었다.
웅성웅성.
덕수네 집 앞이 붐빈다.
온 동네 어른 엘프들이 모조리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자자, 다들 세계수의 정령님께 기도 합시다. 어서!”
덕수의 호령에 따라 엘프들이 기도를 시작했다.
“위대하신 세계수의 정령님, 부디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어 성약을 내려 주시옵소서.”
“부디 저희를 가엽게 여겨 주시옵소서!”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서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합니다. 낙이 없어요. 제발 약을 내려 주십시오.”
“자존심이 상해서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흑-”
울컥해서 눈물짓는 엘프도 나왔다.
“자자, 너무 흥분들 하지 마시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어제 이 덕수가! 귀한 성약을 혼자 숨겨 두고 먹는 대신, 옆집에 나눠준 이 촌장이! 세계수의 정령님께 기도했습니다. 바로 귀를 잘라가도 좋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랬더니 위대하신 세계수의 정령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보답 받을 것입니다.”
덕수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촌장이었다.
비아그뤠를 혼자 먹는 대신, 고통받는 이웃 주민에게 나눠준 것이다.
그로써 약의 존재와 효능이 엘프 마을 전체에 퍼졌다.
덕분에 덕수의 집 앞에 온 마을 엘프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오오- 위대한 세계수의 정령님! 부디 제 귀를 가져가시고, 성약을 내려 주시옵소서!”
“제 귀도 가져가십시오!”
수호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거 참, 촌장한테 한번 실험해 본다는 게 이렇게 되네.’
비아그뤠를 1판만 내어 준 것은 약효를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위험성을 알아보기도 해야 했고.
한데 효과를 본 덕수가 그날 밤에 약을 나눠 먹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잘된 건가?’
덕수를 비롯해 약을 먹은 엘프들이 모두 효과를 봤다.
온 마을 엘프가 약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
수호에 대한 거부감이나 놀람도 없다.
‘이렇게 모여 줬으니, 후딱 해치워 볼까.’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수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수호가 여태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함성이었다.
65화 떡갈나무 마을의 위기(2)
『떡갈나무 엘프』
- 소속 차원 : TLADPFDUD-010
- 구성원 수 : 134
- 만족도 : 5/100
수가 많지 않다.
100명이 좀 넘는다.
한데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냉장고 밖을 벗어나 온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냐?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자고 있던 발룡이가 깜짝 놀라 날아오를 정도였다.
“별일 아니야, 계속 자.”
발룡이를 달래 놓고, 수호는 냉장실에 시선을 고정했다.
난리가 나 있었다.
“진짜야! 진짜 세계수의 정령님이 응답하셨어!”
“됐어! 이제 우린 살았다.”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더는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이제 아침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거야!”
광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로 엘프들은 들떠 있었다.
‘저럴 만도 하지.’
한시 빨리 약을 줘서 임무도 해결하고 저들의 마음도 달래 주자.
수호는 남자로서 깊은 공감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촌장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세계수의 정령님!”
덕수가 냉큼 무릎 꿇으며 외쳤다.
다른 엘프들도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저는 타차원에 사는 원수호라고 합니다. 세계수의 정령이 아니고, 인간이죠. 그리고…….”
한동안 수호가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엘프들은 수호의 신상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었다.
“정말 모두 약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정령님, 부디 약을 내려 주십시오.”
심지어 정령이 아니라고 말을 했음에도 계속 정령이라 불렀다.
‘당장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야. 어서 문제부터 해결해 주자.’
수호는 서둘러 약부터 보내 주기로 했다.
“일단 어제 드렸던 약을 더 보내 드릴게요. 모두에게 돌아가고 남을 정도로 양이 많으니까, 천천히 받아 가세요.”
수호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다시 한번 소란이 일었다.
“지, 진짜다! 진짜로 정령님이 성약을 내려 주신다!”
“사, 살았어. 이제 어깨 펴고 살 수 있을 거야!”
엘프들이 더 흥분하기 전에 수호는 【교역】 스킬을 사용해 비아그뤠를 상자째 전송했다.
덕수의 발치에 약 상자가 나타났다.
“한 통씩 나눠 가지세요. 모자라면 언제든 더 드릴 테니까, 욕심 내지 마시고요!”
수호는 불상사가 발생할까 우려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줄 서!”
“잠깐이면 돼!”
“그래, 이제껏 견뎌 온 시간을 기억하는 거야.”
이등병보다 더 각 잡힌 태도로 엘프들이 줄을 섰다.
보채지 않고 약을 한 통씩 받아 갔다.
“오오, 이게 그 성약!”
“나는 어제 촌장님한테 한 알 얻어먹어 봤지. 정말 대단한 약이야. 정령님 감사합니다.”
“정령님, 감사합니다!”
“저… 지금 먹어도 될까요?”
누군가 외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수호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수호는 서둘러 대답했다.
“약 받으신 분은 집으로 돌아가세요. 약은 알아서 드시고요. 단, 한꺼번에 여러 알 먹으면 큰일 날 수 있으니까, 한 알씩만 먹어야 합니다!”
우르르.
엘프들이 각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덕수의 집 앞이 순식간에 휑해졌다.
“거참, 사람들하고는.”
어젯밤 자신도 똑같았다는 것을 모르고, 덕수가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뒷짐 진 손에 약 상자를 꼭 쥔 채였다.
[차원 임무 【고개 숙인 엘프들】을 완수했습니다.]
[떡갈나무 엘프의 만족도가 80 상승합니다.]
수호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족도가 엄청나게 올랐어.’
이제 만족도 수치가 85가 되었다.
‘하지만 곧 다시 떨어질 거야.’
임무를 받을 때부터 생각했었다.
지속형 임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원인을 제거해 준 상황도 아니니까.
‘한 마을이 다 그런 상태였으니, 분명히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거야.’
그 원인은 마을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을 터.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수호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수호는 덕수를 불렀다.
“촌장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희 떡갈나무 엘프는 정령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끓는 물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요.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참, 혹시 집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곧 온 마을이 떠들썩해질 것 같아서, 집 안이 이야기하기 좋을 듯합니다.”
“아! 그러죠. 집 안으로 들어가세요.”
* * *
덕수 집 거실.
“질문하십시오, 정령님.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수호는 생각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혹시 거기 말고 몸에 다른 이상은 없습니까?”
“예, 그곳 말고는 아직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아직?
역시 저들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진행되고 있음은 인식하고 있었다.
“어째서 마을 전체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한 겁니까?”
“으음, 원인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만 해결 방법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지요.”
“원인이 뭔가요?”
“그걸 말씀드리려면, 저희 엘프의 생활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괜찮겠습니까?”
“예, 말해 주세요.”
급한 일을 해결하느라 기본적인 생활과 문화에 관해 묻지 못했었다.
안 그래도 엘프의 생태에 대해 궁금하던 참이다.
덕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엘프는 어머니 나무 주변에서 탄생합니다. 어머니 나무 곁에 마을을 이루고 한평생 살아가게 되죠.”
“어머니 나무요? 혹시 세계수를 뜻하는 건가요?”
엘프들이 자신을 지칭하던 호칭이 떠올라 수호가 질문했다.
“아닙니다. 세계수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온 세상을 아우르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저도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 설명해 드릴 수는 없군요.”
어머니 나무가 세계수의 묘목이란 설도 있습니다만,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덧붙인 덕수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어머니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저희 마을의 어머니 나무가 떡갈나무라, 저희는 떡갈나무 엘프라 불리지요.”
“그럼 다른 엘프도 다 나무 이름을 따 불리겠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 엘프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아갑니다. 다른 것을 먹어도 배고픔을 면할 수는 있습니다만, 주기적으로 꼭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혹시?”
수호는 문제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예, 어머니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 탓에 저희도 싱싱한 열매를 먹지 못하고 있고요. 그것이 몸에 이상이 생긴 이유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장해 둔 열매는 없는 겁니까?”
“어떤 방법으로도 열매에 담긴 어머니 나무의 기운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습니다. 묵은 열매를 먹으며 버티고 있습니다만, 기운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덕수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실례가 안 된다면 정령님께 혹시 차를 대접해도 되는지 여쭤 보실 수 있을까요?”
덕수의 아내, 두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라던 수호의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리고 ‘성약’을 건네줄 수 있다면, 차를 가지고 가는 것 또한 가능할 거로 생각했다.
“정령님, 혹시 차를 대접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덕수의 물음에 수호가 대답했다.
두심이 차를 가져다 내려다 놓았다.
수호는 덕수에게 【교역】 스킬로 물건을 주고받는 요령을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물건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정령님.”
덕수는 금세 요령을 익혔다.
수호의 눈앞에 차가 담긴 찻잔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나무 찻잔.
한데 수호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묵은 도토리 차]
- 어머니 떡갈나무에서 채집한 도토리로 만든 차. 한 해 묵은 탓에 특유의 기운이 많이 감소했지만, 풍미는 여전히 훌륭하다.
- 아이템 등급 : 고급
- 【하급 중독 면역】
- 소모 아이템
【하급 중독 면역】
- 복용 시 10분 동안 하급 이하의 독에 완벽히 저항한다.
‘아이템이잖아!’
덕수가 건넨 차는 아이템이었다.
바비가 잡아 주는 잉어가 아이템이기에, 그것을 가공한 잉어즙도 아이템의 성능을 유지한다.
그런 것처럼 도토리 차 또한 아이템 판정을 받았다.
‘성능도 괜찮고.’
기운이 감소했다는 문구가 있음에도 성능이 좋다.
묵은 것이 이 정도면 싱싱한 도토리는 굉장할 터.
‘도토리 때문에라도 어머니 나무를 꼭 고쳐야겠어.’
생각을 마친 수호가 입을 열었다.
“차향이 좋네요.”
“햇도토리 차를 대접해 드렸어야 하는데 묵은 도토리뿐이라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덕수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문제의 원인은 저희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안다고?
그럼에도 문제가 진행 중이라면, 엘프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수호는 진한 임무의 냄새를 맡았다.
“원인이 뭔가요?”
“잡초 때문입니다.”
수호도 봤다.
엘프 허리 높이의 풀이 마을을 빼곡히 뒤덮고 있었다.
길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역 대부분이 풀밭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잡초가 온 마을을 뒤덮고 있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몇 달 전 갑자기 잡초가 생겨나더니, 어머니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바뀐 부분이 없으니 문제의 원인은 잡초가 분명합니다.”
수호는 의아했다.
“그럼 왜 제거하지 않으십니까?”
“뽑고 있습니다. 원래는 전 마을 주민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잡초만 뽑았습니다. 하지만 뽑아도 며칠이면 허리까지 자라는 통에 다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급한 김에 마을은 방치하고, 어머니 나무 주변만이라도 잡초를 제거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게다가….”
한숨을 푹 내쉰 덕수가 말을 이었다.
“잡초 제거에 온 힘을 쏟다 보니, 주민들에게 피로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마을 업무도 계속 쌓여 가고 있고요. 몸에 생긴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압박이 심한 가운데 그 문제까지 겹쳐서 그런 것이지요.”
남자 엘프들이 유독 ‘성약’에 환호한 것은, 그간 쌓인 스트레스에 대한 복합적인 반응이었다.
‘풀 베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 없는데.’
베는 것만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겠지만, 엘프들이 쉴 시간이 생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찾을 시간도 벌 수 있을 터.
생각 끝에 수호가 제안했다.
“그럼 제가 풀 베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저, 정령님께서 말입니까?”
“예, 마을 근처 정도라면 금세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그럴 수가!”
덕수가 놀라 외치는 순간,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잡초 베기】를 획득하셨습니다.]
【잡초 베기】
- 떡갈나무 엘프 마을에 이상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잡초로부터 어머니 나무를 지키기 위해 마을의 모든 일손이 동원된 상태. 그 탓에 마을 업무가 마비되고 엘프들의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엘프 마을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잡초 베기를 돕자.
- 보상 :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
* * *
위이이이잉-
떡갈나무 엘프 마을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오, 잡초가 베이고 있어!”
“수, 순식간에 마을이 깨끗해지고 있잖아!”
“세계수의 정령님이 마을을 정화하신다!”
몇몇 엘프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위이이잉-
수호는 손에 쥔 전기이발기를 움직여 잡초를 베었다.
‘이발기로 충분하네.’
집에서 쓰던 이발기로 안 되면, 예초기라도 사 올 생각이었다.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발기가 지나갈 때마다 잡초 밑동이 깨끗이 잘려 나갔다.
‘몇 분 걸리지도 않겠어.’
차원 간 크기 왜곡 탓에 이발기는 거대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쓱쓱 움직이면, 근처 잡초가 죄다 사라졌다.
‘이만하면 다 된 것 같은데?’
얼마 후, 마을에 잡초가 대부분 잘려 나갔다 싶을 무렵.
[차원 임무 【잡초 베기】를 완수하셨습니다.]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예상했던 메시지가 수호의 눈앞을 수놓았다.
“진짜 순식간에 잡초를 다 베어 버리시다니!”
덕수가 감탄한 표정으로 수호의 손을 쳐다봤다.
수호도 뿌듯한 표정으로 마을을 내려다봤다. 면도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한데 또 다른 메시지가 눈앞을 수놓았다.
[차원 임무 【잡초 베기】가 【어머니 나무의 부름】으로 연계됩니다.]
66화 떡갈나무 마을의 위기(3)
‘잡초를 베어 내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잡초는 빠르게 자라난다.
곧 문제가 재발할 터였다.
그렇기에 임무의 연계를 예상했었는데 생각이 맞았다.
‘의아하다 싶더라니, 처음부터 이쪽이 진짜 의도였을지도 모르겠어.’
수호는 임무 창을 띄웠다.
【어머니 나무의 부름】
- 떡갈나무 엘프 마을의 어머니 나무인 떡갈나무의 정령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그녀는 타차원에서 나타난 당신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거로 생각한다. 마을 중앙에 있는 어머니 나무를 만나러 가자.
- 보상 : 어머니 떡갈나무의 보답.
‘보답?’
임무 내용이야 제목과 다를 바 없었다.
한데 보상이 유독 눈에 띄었다.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보답을 한다고?’
불꽃수, 황금 잉어 등.
보상 항목에 ‘보답’이라 적혀 있을 때, 받은 것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물건이었다.
‘어서 가자.’
수호는 덕수와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했다.
그 후 시야를 마을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떡갈나무.
언뜻 보기에도 보통 나무가 아니었다.
『드디어 왔군요. 어제부터 당신과 대화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호의 시선이 머무르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발룡이의 목소리처럼 수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구에 사는 원수호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곳과 차원문이 연결되어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네요.”
『나는 이곳 엘프 마을의 어머니 나무이자, 근처 숲을 조율하는 떡갈나무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반갑다는 말도 진심으로 들렸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근데 숲을 조율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제가 근처 모든 식물의 생을 주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요.』
어머니 나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호의 시야 한구석이 붉게 변했다.
‘어? 꽃이 폈어?’
수호의 시야 앞에 위치한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났다.
‘식물의 생명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건가? 굉장한데?’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수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잡초가 엘프 마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데, 왜 그냥 두고 보시는 건가요?”
『그것이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 중 하나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세계수에 대해 먼저 말씀드릴게요. 모두 연관된 문제이니까요.』
“경청하겠습니다.”
『어머니 나무라 불리는 저희는 모두 진정한 세상의 어머니, 세계수의 자손입니다. 그분의 씨앗으로 태어나 오랜 세월을 살며 영성을 얻은 것이 바로 어머니 나무죠.』
“그래서 정령이라고 불리는 거군요.”
차원 임무에 떡갈나무가 정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그래요. 저처럼 영성을 얻어 정령이라 불리는 나무들이 존재하고, 그 근처에 엘프들이 모여 살지요.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생겼어요.』
“……?”
『세계수께서는 틈틈이 자식들에게 말씀을 거시며 세상을 굽어살피세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분의 목소리가 끊겼어요.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해요.』
“직접 말을 거실 수는 없나요?”
『저의 영성으로는 먼 곳에 있는 그분께 직접 목소리를 보낼 수가 없어요. 마을 근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부죠.』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 저를 부른 이유가 세계수에 말을 전해 달라는 뜻입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도 자유로이 차원을 오가지는 못하는 것 같군요.』
영성을 얻은 존재답게 떡갈나무는 수호의 능력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예. 이 근방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먼 곳은 힘듭니다.”
『그래서 엘프들을 보내 세계수께 무슨 변고가 생겼나 알아보게 할 생각이에요. 수호 님께 드릴 부탁은 엘프들에게 제 생각을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의아한 말이었다.
“직접 말씀하시면 되지 않나요?”
『엘프들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답니다. 마을에 제 목소리를 듣는 아이가 태어난 지도 벌써 1천 년이 넘었어요. 제 말을 알아듣는 것은 오롯이 수호 님의 능력입니다.』
수호의 고유 스킬 【소통】의 기능이었다.
“그럼 제가 엘프들에게 말을 전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요. 아이들에게 세계수께 다녀오라고 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세계수께 닿지 못할 거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계수께 가는 길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존재합니다. 마을 엘프의 힘만으로는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예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주변 마을에 소식을 전해 힘을 합치도록 해 주세요.』
그거라면 어려울 것 없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출발은 주변 마을 엘프들이 모인 다음이 되겠군요.”
『다 모이더라도, 아직은 그들을 보낼 수 없어요.』
떡갈나무의 목소리가 왠지 불안했다.
수호는 떡갈나무가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 풀의 존재가 너무나 불길해서, 이대로는 아이들을 보낼 수가 없어요.』
“도대체 그 풀은 왜 그냥 두고 보시는 겁니까?”
수호가 재차 질문했다.
『그 풀은 제 능력으로 제어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풀에 저와 숲의 기운을 뺐기고 있죠. 그것을 막기 위해, 제 대부분의 영성이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에요.』
“으음.”
수호가 침음을 흘렸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잡초였다.
『가만히 두면 모든 숲이 그 풀에 뒤덮일 거예요. 나머지 식물은 모두 고사하고 말겠죠. 그 풀은 기이한 존재에요. 식물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아이들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도, 세계수께서 목소리를 전하지 않는 것도, 분명 그 풀 때문일 거예요.』
다 연결된 이야기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리길 원합니까?”
『조금 전에 한 것처럼 마을의 잡초만이라도 꾸준히 베어 주세요. 그리고 잡초를 완전히 박멸할 방법을 찾아 주세요. 왠지 당신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구의 과학과 윌슨의 마도 공학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겠지.
『고마워요, 수호 님. 보답을 해야겠어요.』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잡초를 제어하기도 벅찰 테니.
보상을 꼭 당장 받을 필요는 없다.
『당신의 진심이 느껴져요. 하지만 저도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답니다. 그러니 이것을 받아 주세요.』
화아악-
떡갈나무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가지 끝에 꽃이 피더니 사그라졌다.
그 자리에 열매가 맺혔다.
잠시 후, 열매가 수호에게 전송됐다.
[영험한 떡갈나무 도토리]
- 방금 수확한 싱싱한 도토리. 어머니 나무의 영성이 듬뿍 담겨 있다. 복용자의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며, 3개월 동안 각종 질병과 상태 이상으로부터 복용자를 지켜 준다. 단,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재복용하더라도 중첩 적용되지 않는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복용 시 3개월간 【상급 상태 이상 면역】 적용.
- 근력 +5 민첩 +5 체력 +5 지혜 +5
‘대박이다!’
수호는 숨죽여 감탄했다.
‘보답’ 문구가 적힌 보상답게 성능이 대단했다.
‘상태 이상 면역이라니!’
상태 이상은 몬스터는 물론, 헌터 간의 싸움에서도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독이나 마비 등은 모르고 당하면 속수무책.
한데 도토리를 복용하면 3달 동안은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다.
“감사합니다, 떡갈나무님.”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수호 님. 힘을 회복하면, 열매를 넉넉히 보내 드릴게요.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평생 상태 이상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겠다.
물론, ‘상급’ 상태 이상 면역으로 막을 수 없는 경우는 제외해야 되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호가 대답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어머니 나무의 부름】을 완수하셨습니다.]
[차원 임무 【어머니 나무의 부름】이 【세계수 원정대 I】로 연계됩니다.]
[차원 임무 【잡초 박멸】을 획득하셨습니다.]
동시에 2개의 임무를 얻었다.
수호가 서둘러 임무를 확인했다.
【세계수 원정대 I】
- 어느 날부터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어머니 떡갈나무는 세계수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엘프를 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떡갈나무 엘프의 힘만으로는 세계수까지 닿을 수 없다. 엘프들을 시켜 다른 마을 엘프에게 말을 전하자.
- 보상 : 떡갈나무 엘프 만족도.
【잡초 박멸】
- 어머니 떡갈나무는 엘프의 몸에 생긴 이상과 세계수의 변고까지, 모든 일이 갑자기 나타난 잡초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잡초를 완전히 박멸할 방법을 찾아내자.
- 보상 : 고유 스킬.
임무를 확인한 수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유 스킬!”
* * *
“…그러니까 도플갱어부터 박영일 건까지, 전부 그놈 짓이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머더러 단체의 수장 육경환이 되물었다.
“예, 상왕련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과정까지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수호의 개입으로 일이 틀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에게 도플갱어가 당하고, 박영일도 죽었단 말이지?”
“조사 결과 그 외에는 경우의 수가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어난 일이다.
육경환은 그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있다.
‘어르신을 처음 봤을 때도 이해할 수 없었지.’
그렇지만 ‘어르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마기도 마인도 마찬가지다.
‘원수호란 놈이 어르신만큼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세상에 그런 불가사의한 존재가 둘이나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래도 그냥 둬서는 안 되겠지.’
사사건건 부딪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미 2번 일어났으면, 몇 번이고 더 반복될 수 있다.
생각 끝에 육경환이 입을 열었다.
“원수호를 처리한다. 사령死靈을 보내도록.”
“사, 사령을 말입니까? 너무 과하지 않을는지.”
“됐어, 보내.”
일을 할 요량이면 제대로 해야 하는 법이다.
한데 명이 떨어졌음에도 부하의 대답이 늦다.
육경환이 부하를 쳐다봤다.
“저, 보스. 정현수가 곧 원수호와 함께 던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령을 동원할 생각이시면, 던전에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그거 괜찮군. 상왕련 일을 진행하려면 정현수도 미리 처리해 두는 편이 좋을 테니까. 아니지. 차라리 그때 맞춰서 상왕련 쪽도 시작해야겠어.”
육경환이 부하에게 연이어 지시를 내렸다.
* * *
잡초가 심어진 화분 앞에서 수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네.”
【세계수 원정대 I】에 대해서 촌장 덕수에게 알렸다.
옆 마을로 사람이 파견됐다.
거리가 멀어 아직은 소식이 없다.
“세계수 원정대 임무는 곧 완수될 거야. 연계 임무일 게 분명하니, 완전히 끝은 아니겠지만.”
【세계수 원정대 I】의 경우, 이름부터 연계 임무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완전한 마무리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첫 단계는 쉽게 끝날 터.
“오히려 잡초 박멸 쪽이 문제야.”
한데 【잡초 박멸】은 달랐다.
임무를 확인한 즉시, 수호의 머릿속에 해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온갖 제초제를 다 써 봐도 안 통할 줄은 몰랐는데, 쯧.”
지난 며칠.
수호는 시판 중인 모든 제초제를 사다 실험했다.
효과가 전혀 없었다.
“다른 방법을 마련해 봐야겠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 봉쇄됐으니, 다른 수를 찾을 수밖에.
“수호, 이게 웬 풀이야?”
오랜만에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비 제작에 심취한 윌슨은 며칠씩 2층에 처박혀 있었다.
그 탓에 이제야 잡초를 보게 된 것이다.
“엘프 세상에서 자라는 잡초야.”
“근데 왜 그러고 있어?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게 말이야…….”
수호는 사정을 설명했다.
“아, 설마?”
이야기를 들은 윌슨이 잡초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눈을 빛내며 풀을 살폈다.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윌슨은 한참이나 풀을 살피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우리 세상… 아니, 노움 세상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
“어느 나라가 원인 불명의 재난으로 완전히 박살이 났어. 인간이고 동물이고, 생명체가 모조리 죽어 버렸지. 그 뒤, 그 땅에 잡초가 빼곡히 자랐다는 보고가 있었어.”
노움 세상에 일어난 일이라면 범인은 뻔하다.
“마족이 관련된 거야?”
“몰라.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거든. 기록도 거의 없고, 풀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지 못했지. 온 세상이 마족에 침공당하던 시기였으니, 망해 버린 게 그 나라만이 아니기도 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연중에 마족이 범인이란 뉘앙스가 느껴졌다.
“연구가 안 되었으니, 해결책도 없겠네.”
“응, 하지만 곧 생길 거야.”
“……?”
“내가 본 이상, 이대로 둘 수는 없지! 꼭 이놈에게 적합한 제초제를 만들고 말겠어! 수호, 이거 한 뿌리만 내가 가지고 갈게. 괜찮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윌슨이 화분을 집어 들었다.
“당연하지. 근데 설비 만드느라 바쁘지 않아?”
“괜찮아. 전부 마족놈들을 족치기 위한 일이니까.”
윌슨이 2층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윌슨이 마도 공학으로 방법을 찾겠지만, 마냥 맡겨 놓을 수는 없어.’
이론적인 접근은 윌슨에게 맡기면 된다.
하나 윌슨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
‘이왕이면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해답을 구해 보는 편이 좋겠지?’
수호의 시선이 수트 케이스로 향했다.
“훌륭한 농사꾼이라면 잡초 제거하는 비법이 있을 거야.”
일은 기왕이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67화 사령(死靈)(1)
수호가 수트 케이스 안 전경을 살폈다.
강변에 놓인 제단 앞, 오늘도 누군가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소라! 이야기 좀 할까?”
온달곰족 무녀, 온달소라.
파르르.
그녀의 궁둥이에서 솜뭉치처럼 생긴 꼬리가 떨렸다.
“위대한 분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온달소라의 요란한 환영에 수호가 멋쩍게 웃었다.
간간이 들러 말을 걸었음에도, 올 때마다 저렇게 반가워하니…….
“소라, 농사에 관해 궁금한 게 있는데, 좀 물어보려고 왔어. 괜찮지?”
“수, 수확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무조건! 어떤 수를 쓰더라도 1달 안에 곡식을 수확해 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여.”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강변의 넓은 땅에서 짓는 농사는 아직 첫 수확이 이뤄지지 않았다.
‘농사’란 단어를 듣고 지레 놀란 온달소라가 뜻을 곡해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확할 때가 다 됐구나. 근데 물으려던 건 그 이야기가 아닌데.”
“앗! 그러셨군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뢰겠나이다.”
연신 파들거리는 하얀 솜뭉치가 눈길을 끈다.
수호는 애써 꼬리에서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농사에 방해되는 잡초는 어떻게 처리해?”
“잡초라면 저희의 손톱으로 이렇게…….”
파파파파팟-
온달소라 앞에 있던 작은 풀이 사정없이 파헤쳐져 날아갔다.
“이렇게 파내 버리면 됩니다, 위대한 수호자시여.”
“…간단하네. 근데 만약에 그런 풀이 엄청나게 많고, 뽑아도 금세 다시 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그 풀의 씨앗을 먹고 사는 벌레를 밭에 잡아다 놓을 수도 있고,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토질을 바꾸는 방법도 있습니다.”
역시 농사 전문가.
대번에 그럴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나 듣는 것만으로는 수호가 실현하기 힘든 일이었다.
“소라, 받아 봐.”
수호는 잡초를 뽑아 온달소라에게 전송했다.
“앗! 풀이군요.”
“혹시 그 잡초를 죽일 방법이 있을까? 다른 식물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아참, 그 풀 엄청나게 잘 자라니까 다른 곳에 퍼지지 않게 조심해.”
“이 풀 때문이었군요! 위대한 수호자께서 하시는 일이니, 분명히 이 나쁜 풀이 어느 세상에 해악을 끼치고 있겠지요?”
“어, 뭐 그렇지.”
역시 맞았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온달소라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제가 목숨을 걸고 이 풀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온달소라가 사명감에 가득 차 소리쳤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고. 어쨌든 맡길게.”
“감사합니다, 위대한 수호자시여!”
온달소라가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호가 생각을 정리했다.
‘마도 공학의 거장과 농사의 달인이 나섰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지.’
즉시 해결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수호는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는 물론 세계수까지 얽힌 일이야.’
엘프 세상 전체가 휘말린 일이 분명했다.
잡초 구제법을 발견하더라도,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는 힘들 터였다.
‘차분하게 해결해 나가자.’
지이잉-
수호가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였다.
- 정현수 : 내일 던전에 가기로 한 날이라 연락드렸어요. 혹시 따로 궁금하신 점 있거나, 던전에 가기 힘든 상황이면 말씀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내일 던전 가기로 했었지.”
약속을 잡고 던전에 관한 정보를 전달받은 것이 지난주였다.
잡초 구제에 매진하는 바람에 깜빡하고 있었다.
수호는 바로 답신했다.
- 원수호 : 아니야, 별일 없어. 내일 던전 앞에서 보자.
* * *
다음 날, 아침.
“부디 잘 다녀오십시오, 위대한 드래곤님.”
『오냐, 본좌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본좌의 영역을 잘 돌보고 있거라, 노움.』
“마땅한 말씀입니다만, 송구스럽게도 저는 이제 노움이 아니옵니다. 그 호칭은 거두어 주십시오, 드래곤님.”
『그렇군. 본좌가 실언했구나. 너는 이제 분명 지구인이니라. 심연의 주인이자 장차 지구를 다스릴 본좌가 인정했으니, 누구도 감히 그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발룡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선언했다.
“아주 꼴값을 떨어요.”
집이 왜 네 영역이냐?
장차 지구를 왜 네가 다스리고?
수호는 나오려는 말을 가슴에 묻었다.
대신 고개를 윌슨에게 돌렸다.
“윌슨, 대단한데? 그 정도로 언변이 훌륭할 줄은 몰랐는걸?”
평소 발룡이가 윌슨과 잘 지내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데 방금 본 장면에 이유가 담겨 있었다.
“친구! 이 윌슨이 마도 공학 다음으로 잘하는 게 바로 말이야. 물론, 잘하기보다 많이 하는 쪽에 가깝겠지만 말이야, 하하.”
“그래, 어쨌든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집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말고 던전이나 잘 다녀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타차원에 문제가 안 생기게 해 둘 테니까.”
“믿을게. 급하면 경보기 꼭 작동시키고.”
무력만 따지면 발룡이보다 부족한 윌슨이다.
하나 상황 파악 및 대처 능력은 몇 수 위.
그렇기에 수호는 발룡이를 남겨 두고 갈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어서 가자. 늑장 부리지 말고!』
발룡이가 보채며 끼어든다.
한 번 각성하며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터라, 마력 상승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싸울 필요도 없다.
정현수가 있기에 투명화 상태로 대기하면 된다.
“알았다. 간다, 가. 윌슨, 그럼 다녀올게.”
수호가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
.
.
잠시 후, 용달차가 던전 앞에 도착했다.
“형, 오셨어요?”
“일찍 왔네.”
“방금 도착했어요. 따로 준비하실 거 있으세요?”
“아니, 바로 들어가자.”
“옙!”
수호와 정현수가 던전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사사삭-
멀리서 아주 작은 생명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머더러 단체 리빙 콥스의 간부, 사령死靈.
그는 던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제 도착했군. 던전에 곧바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야.”
사령은 그곳에서 수호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발룡이의 기감과 수호의 감각을 피해 염탐에 성공한 것이다.
“제법 강해 보이긴 한다만, 그래 봐야 2성. 게다가 던전 안이라면, 이 사령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크흐흐.”
사령이 음충한 목소리로 웃었다.
한참이나 자리에서 시간을 끌던 그가 일어섰다.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가는 편이 유리할 테니.”
사령이 차에서 내렸다.
느릿한 걸음으로 던전 게이트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 볼까.”
동시에 사령의 몸에서 시커먼 것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빠가 귀찮지 않게 너희가 입구를 좀 치워 놓으렴.”
사령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시커먼 것들은 그림자처럼 바닥을 기어 던전 쪽으로 미끄러졌다.
잠시 후.
“컥-!”
“크헉!”
던전을 지키던 관리팀원들이 동시에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 * *
‘수호 형, 많이 강해지셨겠지?’
같이 던전에 다니던 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2성 만렙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오른 레벨만큼 강해졌을 것이다.
‘나도 강해졌어.’
그동안 정현수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정현수는 자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형한테 보여 드리는 거야.’
정현수가 오늘을 생각하며 다져 온 각오였다.
물론, 수호를 낮잡아 보거나, 경쟁 상대로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저 수호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나도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수호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음을. 그리고 그만큼 성장했음을.
연수원 동기지만 수호는 정현수에게 스승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온다. 여섯. 준비해!”
“옙!”
수호의 신호에 씩씩하게 대답한 정현수가 활을 들어 올렸다.
힘들게 마련한 희귀 등급 활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타탓-
수호가 앞장서 달렸다.
맞은편에서 곰의 몸에 올빼미 머리를 한 몬스터 무리가 달려왔다.
플라잉 아울베어.
3m를 훌쩍 넘는 거구가 육상선수처럼 두 발로 달려왔다.
‘일단 형이 어그로를 끌면 바로 한 마리 처리하고 시작하는 거야.’
이전에 함께할 때 늘 쓰던 전술이다.
수호가 앞장서 시선을 끌고 정현수가 보조하는 방식.
이번에도 전술 변경은 없었다.
‘여섯은 좀 버겁겠지만.’
아울베어 여섯에게 둘러싸이면 위험하다.
일반적인 2성 파티라면 4명 이상이 진형을 갖춰 싸워야 하는 적이다.
하지만 수호이기에 정현수는 믿었다.
‘수호 형이니까 다치시지는 않겠지.’
한데 수호의 움직임은 정현수의 상상을 초월했다.
쾅-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칼이 휘둘러지고.
아울베어 한 마리의 머리가 사라졌다.
나머지 아울베어가 수호를 포위하며 달려든다.
‘역시!’
수호의 모습에 감탄하며 정현수도 서둘러 시위를 놓았다.
‘관통 화살!’
발사 직전 시전된 스킬이 화살에 힘을 실었다.
쎄엑-
아울베어 한 놈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쿠에에엑-”
비명을 지른 아울베어가 쓰러졌다.
그사이 수호도 한 놈을 더 처리한 상태.
한데 나머지 셋 중 하나가 정현수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수호가 바닥을 박찼다.
【드래곤 스탭】이 시전됐다.
콰아아아앙-
강력한 충격파가 퍼졌다.
아울베어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헉! 다른 스킬 또 익히셨네?’
아울베어의 움직임에 물러설 준비를 하던 정현수는 후퇴를 멈추고 시위를 당겼다.
쎄에엑-
화살이 발사됐고 한 놈이 다시 쓰러졌다.
그사이 굉장한 속도로 움직인 수호가 나머지 둘의 머리를 모조리 박살 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싶은 순간.
뽁- 뽀옥-
괴상한 소리가 울리더니.
죽은 아울베어의 사체에서 올빼미 머리 2개가 떨어져 나왔다.
푸드득-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현수가 잡은 머리통이 부서지지 않은 놈들이었다.
‘아차, 머리! 너무 놀라서 깜빡했잖아!’
수호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놀란 나머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몸이 죽으면 플라잉 아울베어의 올빼미 머리가 분리되어 도망친다.
그것이 몬스터 이름에 ‘플라잉’이 들어간 이유다.
‘놓치면 잔뜩 몰려올 거야.’
도망친 머리는 무리를 잔뜩 이끌고 공격해 오기 때문에 꼭 처치해야 했다.
‘내 역할이야. 내가 처리해야 해!’
원거리 클래스인 정현수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
정현수는 황급히 새 스킬들을 시전해 나갔다.
‘관통! 유도! 연사!’
거금을 주고 구매한 스킬들이 동시에 시전되었다. 화살이 소나기처럼 쏘아졌다.
“꾸엑-”
한데 화살에 꿰뚫린 것은 한 놈뿐.
나머지 하나는 화살의 궤도에서 사라졌다.
촤르르르-
진작에 명중한 수호의 석화비도가 놈을 꿴 채 돌아갔기 때문이다.
푸칵!
곧 휘둘러진 화염 포마검이 아울베어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대박! 이제 원거리 공격 수단까지 갖추셨네.’
성장을 보여 주고 인정받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기상조인 듯했다.
‘역시 수호 형이셔.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어.’
그렇다고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수호는 어떨지 몰라도, 정현수는 수호를 정말 스승처럼, 형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고생했어.”
수호의 목소리에 정현수가 멋쩍은 얼굴로 다가갔다.
“형, 도망치는 올빼미는 제가 다 처리해야 했는데, 죄송해요.”
“놔뒀으면 네가 다 잡았겠지. 손이 남아서 거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헤헤, 고맙습니다. 근데 형 진짜 엄청나게 강해지셨네요? 레벨 오를수록 강해지기 더 힘들어야 정상 아니에요? 진짜 신기하다니까. 하하.”
정현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한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정현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어? 형 표정이 왜……?’
수호가 딱딱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형, 왜 그러세요?”
정현수가 나직이 물었다.
그제야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이다.”
정현수가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살벌한 목소리였다.
68화 사령(死靈)(2)
『몰려오는군. 수가 많다.』
발룡이가 알려 오는 정보를 들으며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의 감각에도 수많은 발걸음이 감지되고 있었다.
“현수야, 가자.”
수호가 등을 돌리고 달렸다.
“어? 예.”
수호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정현수도 토를 달지 않고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어느 동굴 앞에 도착했다.
정현수가 보낸 던전 정보에 적혀 있던 곳이었다.
“적이 오고 있어. 한 놈이 아닌 것 같아. 여기서 싸우자.”
“예, 저는 형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수호가 잰걸음으로 동굴에 진입했다.
“쿠와앙!”
아울베어 무리가 나타났다.
정현수가 활을 들어 올렸다.
퍼퍽- 퍼퍼퍽-!
한데 화살을 쏠 필요가 없었다.
수호가 아울베어의 머리를 모조리 터트려 버린 것이다.
‘…수호 형이 전력을 다하면 저 정도구나.’
이전의 전투에서 느꼈던 것은 그저 몸풀기에 불과했던 모양.
하나 정현수는 오래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현수야, 저기 올라가 있어.”
“알겠습니… 으억!”
대답하는 정현수를 수호가 집어던져 버렸다.
정현수의 몸이 동굴 천장 아래, 구석진 바위 위로 날아갔다.
“거기서 활로 지원해.”
파티 사냥 때 활용되는 장소다.
원거리 헌터가 자리 잡고, 나머지 파티원들이 몬스터를 끌어와 사냥하기 좋다.
이 또한 던전 정보에 적혀 있던 것이다.
“예, 형. 조심하세요.”
정현수가 대답하는 순간.
두두두두둑-
동굴 입구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 *
사령(死靈), 전구독은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새끼들은 어디까지 기어들어 간 거야?”
일부러 시차를 두고 던전에 입장한 전구독이었다. 그 후에도 목표에 곧장 다가가지 않고 우회했다.
스킬 특성상 그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데 그것도 어느 정도지.
입장한 시간 차이와 비교해 목표물이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다.
“보통 놈은 아니란 말이지? 육경환 개X끼, 또 엿 같은 일을 나한테 떠맡겼구나.”
전구독은 리빙 콥스의 수장, 육경환을 욕했다.
육경환을 진심으로 따르는 머더러도 있었지만 전구독은 아니었다.
“약점만 안 잡혔어도, 씨X. 확 뒤엎어 버리는 건데.”
전구독은 치명적인 비밀을 육경환에게 들켰다.
그 뒤로 육경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쿠와앙-!”
괴성이 들려온다.
투덜거림이 아울베어를 불러들였지만 전구독은 오히려 웃었다.
“가라.”
전구독이 명령했다.
두두두두-
그의 뒤를 따르던 아울베어 수십 마리가 방금 나타난 놈에게 달려들었다.
“꾸에에엑-!”
새로 나타난 아울베어가 쓰러졌다.
그때 전구독의 마력이 움직였다.
‘사망 연가시!’
전구독의 발밑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뻗어 나갔다.
푹-
연가시는 죽은 아울베어의 몸을 파고들었다.
꿈틀.
죽었던 아울베어가 일어나, 전구독의 뒤편에 줄 섰다.
“튀어 봐야 벼룩이지.”
기분이 나아진 전구독이 시선을 저편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기군. 가자, 얘들아.”
전구독이 동굴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50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울베어가 뒤따랐다.
.
.
.
전구독은 동굴 끝자락에 다다랐다.
목표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 구석까지 기어들어 왔나 했더니, 내가 오는 걸 미리 눈치챈 모양이야?”
전구독이 수호와 정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높은 곳에 올라간 활쟁이.
앞장선 칼잡이.
자리 잡을 꼴을 보니, 전투를 대비한 것이 분명했다.
“뭐 하는 놈이냐?”
수호가 물었다.
“겨우 머리 굴린 게 이거야? 네가 아마 원수호라는 놈이고, 저 위에 있는 게 활잡이니까 정현수겠네. 어쨌든 괜한 저항 하지 말고 죽는 편이 어떨까? 나도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서 귀찮거든.”
“누가 시킨 거지?”
“귀찮게 자꾸 질문하지 말고, 그냥 죽어.”
전구독은 ‘사망 연가시’에게 명령을 내렸다.
연가시가 아울베어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동굴을 가득 메우고 아울베어 무리가 밀려들었다.
수호가 이를 악물고, 아울베어를 향해 맞서 달렸다.
전구독은 뒤편에서 느긋이 그 장면을 구경했다.
‘제법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장비 때깔이 좋다.
아울베어 수십 마리를 보고 평정을 유지한 걸 보면 보통 놈이 아니란 증거.
‘그래 봐야 2성이지.’
65레벨에 다다른 전구독이다.
상황만 갖춰지면 4성 만렙과 싸워도 승리를 자신한다.
그렇기에 패배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 많은 아울베어를 어떻게 처리할 거야?’
설사 아울베어가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
전구독의 진짜 힘은 아울베어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한데 채 1분도 흐르기 전에 전구독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쾅! 쾅쾅쾅!
‘씨X, 저 새끼 뭐야? 아울베어가 한 방에…….’
거침없이 달려든 수호가 벼락처럼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불에 휩싸이더니, 단 한 방에 아울베어가 파괴되었다.
움직임이 어찌나 정교한지, 빗나가는 법도 없었다.
‘어디서 저딴 새끼가…….’
좁은 동굴을 따라 2마리씩 다가가던 아울베어는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줄어들었다.
‘귀찮게 구는군. 어쩔 수 없지.’
전구독은 이대로 가 봐야 아울베어만 낭비할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몸에서 한 줄기 마력이 일었다.
‘광폭화!’
연가시에 조종당하는 숙주를 광폭화시키는 기술.
힘과 속도가 증가하는 대신, 숙주의 생명력이 빠르게 고갈된다.
“쿠와아아아앙-”
눈빛이 시뻘겋게 변한 아울베어 무리가 수호를 향해 쇄도했다.
* * *
‘많아.’
아울베어가 너무 많다.
미리 유리한 지형을 잡았고 정현수도 열심히 지원하고 있지만, 수호도 사람인 이상 지친다.
자칫 아울베어가 추가될 수도 있다.
‘저 뒤에 있는 놈을 처리해야 끝이 나는 싸움이야.’
그것이 승리를 위한 확실한 방법이다.
문제는 적의 옆에도 경호하듯 아울베어가 늘어서 있다는 것.
쾅!
수호는 침착하게 한 놈씩 아울베어를 처치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쿠와아아앙-”
아울베어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폭주시켰다. 강하고 빨라졌느니라.』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수호는 전구독을 살폈다.
광폭화 탓에 호위하던 아울베어까지 수호 쪽으로 달려들고 있다.
‘지금이다.’
수호는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화염 강격이 앞선의 아울베어를 날려 버렸다.
공간이 생겼다.
‘뛰어넘는다.’
짧게 도움닫기 한 수호가 바닥을 박찼다.
몸이 떠올라 아울베어 머리를 넘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아울베어는 많고 목표는 멀다.
‘드래곤 스탭!’
수호의 발이 허공을 박찼다.
팡!
발바닥에서 터진 충격파가 수호의 몸을 밀어냈다.
수호가 허공을 가르며 쭉쭉 미끄러졌다.
“물러나! 막아!”
깜짝 놀란 전구독이 소리쳤다.
아울베어 무리가 주춤 멈춰 섰다.
몇 마리가 뒤돌아서며 전구독과 수호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다.
“지금!”
수호가 소리쳤다.
『얼어붙어라!』
발룡이가 마법으로 허공에 얼음 덩어리를 만들었다.
팟-
수호의 발이 얼음을 박찼다.
탄력을 받은 몸이 기어이 마지막 아울베어까지 넘어섰다.
“빌어먹을 놈이!”
발악하듯 소리치는 전구독.
수호가 왼손을 뻗었다.
석화비도가 날았다.
푸욱-
비도가 전구독의 어깨에 박혔다.
‘잡았다!’
수호는 마력을 흘려 비도의 미늘을 작동시키는 동시에 사슬을 힘껏 당겼다.
허공에 뜬 수호의 몸이 전구독에게 쏘아졌다.
뭉클.
전구독의 발아래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나 수호가 빨랐다.
‘화염 강격!’
불길을 머금은 화염 포마검이 전구독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털썩.
머리통이 사라진 전구독이 뒤로 쓰러졌다.
벼락 같은 기습이 성공했다.
“우와! 형, 끝내줬어요!”
정현수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아직 안 끝났다.』
수호가 생각하는 즉시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크허어엉-”
등 뒤에서 아울베어의 포효가 들려온다.
놈들은 여전히 수호를 목표로 여기고 달려들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명령이 유효해. 저놈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어.’
적이 내린 명령이 아직 아울베어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렇다면 놈이 생존해 있는 게 아닐까.
예상은 맞았다.
파스스.
전구독의 시체가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바닥을 따라 뒤로 미끄러지더니, 다시 인간의 형태를 갖추었다.
꿈틀꿈틀.
한데 실루엣만 인간일 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벌레 무리로 몸을 만들었다.』
발룡이 말대로 수많은 벌레가 뒤엉켜 인간이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하나 때문에 의태가 깨지다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갈아 마셔 버리겠다!”
전구독이 소리쳤다.
사령 전구독.
죽은 몬스터를 부리는 탓에 사령술사라 소문났지만, 그의 클래스는 사령술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독충술사毒蟲術士.
각종 맹독성 곤충을 다스리는 것이 전구독의 클래스였다.
전구독이 육경환에게 잡힌 약점도 그의 클래스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지금.
전구독의 궁극 스킬이자 여분의 목숨, 의태체가 파괴됐다.
많은 독충과 마력을 투자해 다시 의태체를 완성하기 전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맹독의 파도에 절여 버리겠다!”
광분한 전구독이 소리쳤다.
‘맹독의 파도!’
동시에 스킬을 시전했다.
전구독의 몸에서 독충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사사사삭-
새까만 파도가 바닥을 따라 밀려들었다.
맹독을 가진, 독충의 파도가.
한데 수호의 표정이 이상했다.
『실성했느냐?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니라!』
“방금 저놈이 맹독의 파도 어쩌고 했지?”
말과 함께 수호가 달려나갔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발룡아, 신호하면 발룡킬라 부탁해!”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 투명화가 풀릴 것이다.』
최근들어 성장한 발룡이지만, 적이 만만치 않다.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려면 투명화를 풀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
“괜찮아.”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룡이를 숨기는 것도 살아 있을 때나 의미 있는 일.
‘일단 이기고 보자.’
화르르-
화염 포마검이 타올랐다.
‘헤이스트!’
‘무기 강화!’
‘근력 폭발!’
아껴 둔 스킬들이 순식간에 시전되고.
수호가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파팟-
벼락같은 검격이 이어지고.
수호의 전면에 불의 장벽이 생겨났다.
헤이스트로 증폭된 속도 때문에 가능한 신기였다.
파지직.
장막에 닿은 벌레들이 타들어 갔다.
불의 장막을 유지한 채 수호는 전진했다.
‘멍청한 새끼. 그딴 칼질이 무슨 소용이냐!’
수호의 기세에 놀라던 전구독은 곧 안심했다.
벌레는 총알이 아니다.
앞을 막는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콱.
바닥을 우회한 독충이 수호의 다리를 물었다.
벌레와 연결된 전구독은 즉시 그것을 감지했다.
전구독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쓰러져라!”
수호는 멀쩡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험한 떡갈나무 도토리]의 효능 【상급 상태 이상 면역】이 수호의 몸에 적용되고 있었으니까.
“맹독의 파도가 안 통한다고? 말도 안 돼!”
전구독이 경악했다.
맹독의 파도가 어떤 기술인가.
랭커라도 물기만 하면 쓰러트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전구독의 필살기였다.
‘빌어먹을! 기어이 이것까지 동원하게 만드는구나.’
전구독은 쓰고 싶지 않던 마지막 스킬을 꺼내 들었다.
‘충왕의태!’
사용하면 한동안 변신한 벌레 형태로 지내야 하기에 전구독이 사용을 꺼리는 기술.
하지만 파괴력만큼은 최고인 스킬이었다.
촤르르-
전구독의 몸을 이루던 벌레 무리가 형태를 바꿨다.
거대한 사슴벌레였다.
“죽어라!”
사슴벌레가 집게를 벌리고 수호에게 돌진했다.
수호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발룡아!”
수호의 어깨 위에 발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벌레 주제에 심연의 불꽃에 몸을 불사름을 영광으로 알거라.』
콰르르르르르르르르-
브레스가 발사됐다.
수호가 본 가장 크고 아름다운 숨결이었다.
파지지직.
독충의 물결을 녹여버린 브레스가 계속 뻗어 나갔다.
“뭐?”
깜짝 놀란 전구독이 소리쳤다.
하나 피할 틈은 없었다.
사슴벌레의 집게와 브레스가 부딪혔다.
치이이익-
집게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생명체.
그것이 쏘아 낸 상서로운 불길.
상상조차 못한 일에 전구독은 경악했다.
하나 놀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너나 죽어라, 이 벌레 같은 놈아!”
브레스 아래로 달려온 수호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각종 버프가 적용된 화염 포마검이 사슴벌레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재가 되어라!』
그 뒤를 발룡이의 브레스가 다시 한번 휩쓸었다.
치이이이익-
얼마나 지났을까.
브레스가 멈췄다.
맹독의 파도도, 사슴벌레도 모두 사라졌다.
브레스에 녹고, 화염 포마검에 연신 두드려 맞은 탓이었다.
『헥- 헥-』
발룡이가 바닥에 내려앉아 숨을 헐떡였다.
수호도 무릎을 짚고 섰다.
“고생했어. 고맙다.”
수호가 발룡이를 칭찬했다.
한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헥- 헥- 아직 남았다.』
또?
수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감지되는 것이 있었다.
팟-
전력을 쥐어짠 수호가 몸을 날렸다.
동굴 밖으로 움직이던 작은 그림자가 수호의 손에 잡혔다.
“벌레? 설마……?”
『그게 아까 그놈 본체이니라. 헥-』
벌레가 꿈틀거린다.
수호는 그것을 터트리지도, 짓밟지도 않았다.
“죽이는 건 차차 하면 될 일이고. 발룡아, 힘들겠지만 그거 한 번만 하자.”
『또 뭐 말이냐?』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보급형 강철창을 슬쩍 꺼내 보였다.
“자백 스킬 말이야. 이번엔 이놈이 너무 작아서 몽둥이는 필요 없겠다만.”
수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손가락 사이의 벌레, 전구독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시 후.
“상왕련을 어떻게 한다고?”
수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69화 상왕련에서(1)
정현수는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마력은 진작에 동났고, 마법 배낭에 채워 둔 화살도 바닥이 보인다.
이 정도로 쉼 없이 화살을 쏘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수호 형을 도와야 해.’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살의만은 명확한 적.
놈은 아울베어를 수십 마리나 끌고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수호가 없었다면 저항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한데 곧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화살이 기어이 동났을 즈음, 수호가 번개처럼 아울베어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몇 번의 격돌.
적의 끔찍한 변신.
그러더니.
‘드, 드래곤?’
수호의 곁에 작은 드래곤이 나타나 불길을 뿜었다.
이야기로나 듣던 드래곤 브레스가 분명했다.
잠시 후.
전장에는 수호와 드래곤만이 서 있었다.
‘이겼어!’
정현수는 안도했다.
마음속에 수호에 대한 감사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호의 강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기도 했고.
‘수호 형 덕분에 또 살아남았어. 형은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하시구나.’
문득 수호의 옆에 있는 존재에게 시선이 향했다.
정현수는 신비한 비밀을 눈치챈 기분이었다.
‘그래, 그거였어. 형은 드래곤 소환사였던 거야!’
정현수가 보기에 수호의 강함은 기이할 정도였다.
드래곤이 수호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다면, 그런 수호의 강함이 설명된다.
‘식자재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드래곤의 식량이다.
드래곤이라면 그 많은 식량을 먹어 치우는 것도 말이 된다.
‘분명해. 드래곤의 먹이일 거야!’
그럼 시멘트 등의 건설 자재는 어디 쓰는 거지?
자잘한 의문이 들었지만, 정현수는 무시했다.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비밀이겠지?’
정현수 자신이었어도 드래곤을 함부로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수호 형이 길드에 들어가지 않으려던 것도, 드래곤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굳이 대형 길드에 들지 않아도 강해질 자신이 있었을 테니까.
오늘 수호가 보여 준 강함이 그것을 증명한다.
‘절대로 발설하면 안 돼!’
또다시 수호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런 주제에 수호의 비밀까지 알게 되었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것뿐.
‘비밀을 지켜 드리자.’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죽어도 비밀을 지키자!
그렇게 다짐하며 정현수는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형! 괜찮으세요?”
소리치며 수호에게 달려갔다.
수호는 생각에 잠겼는지, 대답이 없다.
정현수가 재차 외쳤다.
“대박! 뭔가 비밀이 있으실 것 같았는데 그게 드래곤이었군요! 드래곤을 소환수로 부리시다니, 역시 형이에요!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소환수? 감히 본좌에게 소환수라고 했느냐!』
“헉! 마, 말까지?”
소환수란 표현에 발끈한 발룡이.
발룡이의 목소리에 놀라는 정현수.
생각에 잠겼던 수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현수야, 상왕련으로 가자.”
* * *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수호는 사령 전구독이 자백 스킬에 당해 토설한 내용을 되새겼다.
- 도플갱어와 박영일, 그리고 전구독의 습격은 모두 리빙 콥스의 수장, 육경환의 짓이다.
- 육경환이 상왕련을 노리고 있다.
- 상왕련주 측근 중에 육경환의 협력자… 즉, 상왕련 측에서는 배신자가 존재한다.
- 일의 결행 시기는 바로 오늘이다.
전구독은 리빙 콥스의 간부였지만, 육경환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전구독이 마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확실한 계획을 모른다는 점이 문제야.’
그 탓에 전구독은 자세한 계획을 몰랐다.
그저 오늘 뭔가 일을 벌인다는 것만 알 뿐.
결국 상왕련에 가야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돕기로 결심했으니, 가자.’
정현수와는 제법 돈독한 관계다.
박영일 건을 통해 상왕련주와도 인연을 맺었다.
식자재 등도 아직 상왕련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수호는 이번 일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인이 관계된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어쩌면…….’
육경환은 마인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박영일을 폭주시켜 꼭두각시로 쓴 것이 육경환이니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일의 추이를 생각하면, 육경환은 단순한 마인이 아닐 확률이 높다.
‘마족까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라.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윌슨의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본 수호였다.
마족의 발호를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부우웅-
차가 가속했다.
수호는 운전 중인 정현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모전이라고 했지?”
공모전.
상왕련에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물었을 때, 수호가 정현수에게 들은 대답이었다.
육경환이 일을 벌이려면, 뭔가 계기가 필요할 터.
분명 공모전에서 사고가 터질 것이다.
“네, 매년 제작 계열 각성자들을 모아 공모전을 열어요. 다음 주에 열릴 예정인데, 리허설이 오늘이에요.”
정현수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리허설에 상왕련주님도 참석하셔?”
“아버지의 연설로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보통은 참석하세요. 얼마 전에 경호 업무를 맡긴 길드가 바뀌어서 이번엔 꼭 참석하신다고 했어요. 실력 점검도 할 겸 해서요.”
상왕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소속 각성자의 친인척에 한해 전투 계열 각성자를 받아들인다.
이는 지속적으로 외부 세력의 침입을 받아 온 상왕련의 역사에 기인한다.
그 탓에 상왕련은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상왕련이 택한 방법이 바로 ‘용병’ 고용이다.
대가를 주고 몇몇 중견 길드를 고용하여, 경호, 육성 등의 업무를 분담한다.
상왕련이 제어 가능한 규모의 길드.
1년 단위의 계약.
그 2가지 조건을 통해 외부 세력의 간섭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인력을 충원하는 것이다.
이는 외부에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수호도 알고 있었다.
“새로 계약했다는 그 길드에 문제가 있을 거야.”
“아마도요.”
“서두르자. 일찍 도착할수록 좋아.”
“예, 형!”
부우웅-
차가 빠르게 달렸다.
상왕련이 있는 동대문 아이템 거리를 향해서.
* * *
제작 계열 헌터들이 모여 만든 단체답게 상왕련의 본단은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은 형태였다.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편.
새로 지은 크고 높은 건물이 있다.
오늘 공모전 리허설이 펼쳐질 대강당이었다.
강당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상왕련주.
이번 행사와 관계된 몇몇 상왕련 간부.
그리고 이번에 상왕련과 새로 계약하고, 공모전의 경호 임무를 맡은 ‘명환 길드’의 헌터들이다.
명환 길드 마스터, 성명환은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제법 까다로웠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상왕련의 수뇌부는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길드도 그들만큼 강한 결속력을 보이지 않는다.
상왕련의 재산을 노리는 외부 세력에 맞서온 역사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이었다.
그 탓에 성명환이 꾀하던 일의 진척이 느렸다.
‘그래도 결국 성공했으니 됐지.’
한 달 뒤면 중요한 일이 있다.
그 전에 원하는 바를 이뤄야 했던 성명환이었다.
늦지 않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성명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르신께 할 말이 있겠군, 흐흐.’
성명환이 비릿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장내를 훑었다.
‘준비는 완벽해.’
부하들은 완벽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전에 모의한 대로였다.
‘슬슬 시작해 볼까?’
성명환의 생각을 부추기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하게.”
상왕련주였다.
경호 임무에 관한 브리핑 후, 공모전 식전행사를 미리 진행해 보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었다.
“그럼 시작하지요.”
성명환은 상왕련주가 있는 쪽을 향해 대답했다.
한데 성명환의 시선이 묘하게 어긋난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상왕련주가 아니라 그 뒤에 선 두 사람이었다.
청홍쌍검.
각자 푸르고 붉은 검을 사용하는 2명의 헌터.
그들은 상왕련 최고의 전투 계열 각성자이자, 상왕련주가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호위무사였다.
성명환의 시작 신호가 들리는 순간.
그 청홍쌍검 중, 홍검이 칼을 뽑았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동작.
무슨 수법을 쓴 건지, 조금의 소음도 없다.
‘이제 홍검이 청검을 처리하고 나면.’
시작 신호와 함께 장내의 시선이 모두 성명환에게 몰렸다.
덕분에 누구도 홍검의 발검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은 한치의 예상도 없이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성명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머지는 허수아비지.’
홍검의 칼이 청검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은밀하지만 벼락처럼 빨랐다.
“헉! 이게 무슨!”
청검이 이변을 눈치챘다.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실력은 백중지세.
하지만 심리적 사각을 완벽히 찔렸다.
대처가 늦다.
죽는다!
청검은 죽음을 예감했다.
‘홍검이 설마 배신을?’
‘아니면, 련주님이 날 제거하려는 걸까? 왜?’
‘그럴 리 없어! 누구보다 련주님께 충성해 왔다!’
‘도대체 뭐야?’
주마등처럼 눈앞에 여러 생각이 흘러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쎄에엑-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마치 예상하고 미리 쏘아 낸 것처럼.
청검의 목을 취하려면 홍검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젠장! 어떤 놈이!”
기습의 실패를 예상한 홍검이 노성을 터트렸다.
동시에 검을 비틀었다.
팅!
홍검의 심장을 노리던 화살이 튕겨 나갔다.
한데 홍검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팟-
날아온 화살 아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술처럼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영의 손에 든 칼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헉!”
붉은 칼날.
홍검의 손에 들린, 상왕련 장인이 공들여 만든 것보다 훨씬 날카로워 보이는 칼.
서걱-
그것이 홍검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툭.
홍검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헉! 뭐야?”
“호, 홍검이 죽었다!”
“적이다! 경호팀!”
“아니야, 홍검이 청검에게 먼저 칼을 휘둘렀어! 저 사람이 청검을 구한 거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이, 이게 무슨? 당신 누구요?”
청검도 물었다.
당황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질문의 대상.
얼굴까지 뒤덮은 검붉은 갑옷을 입고, 허공에서 나타나 홍검의 목을 베어 버린 헌터.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배신자가 있다기에 혹시나 했더니, 그게 홍검이었을 줄이야.”
대신 대답한 것은 상왕련주였다.
청검이 상왕련주에게 질문했다.
“련주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상왕련주가 눈빛을 형형히 빛내며 대답했다.
“늘 그래 왔지 않나? 이번에도 강도 놈들이 우리 상왕련에 이빨을 들이댄 걸세. 안타까운 일이네만, 이번엔 홍검이 놈들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점이 좀 다르겠군.”
“설마! 누군가 련주님을 노리고?”
“나만 노린 게 아니고, 상왕련 전체를 집어삼키려 들고 있어. 그러니 자네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자네 임무를 다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청검이 결연한 표정으로 상왕련주 앞을 막아섰다.
상왕련주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이번에는 유독 더 더러운 놈들이 꼬인 것 같아. 10년 넘게 함께해 온 홍검을 어찌 구슬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겠지. 어떻게 생각하나, 성 길드장?”
상왕련주의 시선이 성명환에게 향했다.
성명환은 대답 없이 상왕련주를 쳐다봤다.
상왕련주가 재차 질문했다.
“성 길드장이라 부르니 못 알아들은 건가? 그럼 머더러 육경환이라 불러주면 되겠나?”
성명환.
아니, 성명환으로 위장한 육경환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70화 상왕련에서(2)
홍검을 쓰러트린 후, 수호는 안도했다.
‘아슬아슬했어.’
사령에게 뽑아낸 정보는 단편적이었다.
배신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아냈지만, 그 정체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린 덕분에, 배신자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청검을 구할 수 있었다.
‘이제 버텨야 해.’
수호가 전의를 다잡고 있을 때, 육경환이 수호를 응시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놈이지?’
수호는 발룡이의 투명화 마법으로 은신해 있다가 홍검을 막았다.
육경환의 눈에는 허공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더니, 귀찮게 구는군.’
미리 알고 준비한 게 분명한데.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육경환은 시선을 상왕련주에게 돌렸다.
상왕련 헌터들이 상왕련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급히 모으느라 대단할 것 없는 세력이었지만, 육경환 입장에서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달라질 건 없어. 상왕련주만 제압하면 돼.’
상왕련은 수뇌부의 결속력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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