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10

하긴 2성 헌터와 싸워서 질 것 같지는 않다.
납득한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죠. 의뢰.”
“잘 생각하셨습니다. 특별히 대금은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신성현이 웃으며 스킬 룬 2개를 내밀었다.
* * *
수호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스킬을 2개나 새로 배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기분 좋은 일이 더 있었다.
“거인님!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수호가 냉장고로 향했다.
“타룽가 님, 무슨 일이세요?”
“만들고 있던 장비 중 하나가 완성됐습니다!”
“아, 드디어!”
“나머지 하나도 다 되어 갑니다만, 완성된 것부터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살펴보십시오!”
타룽가가 장비를 전송했다.
수호의 앞에 검붉은색 신발이 나타났다.
[광룡의 발톱]
- 광룡의 발을 모티브 삼아 만들어진 신발. 세 명장의 열정이 모여 명품을 탄생시켰다. [재생의 핵]과 자이언트 웜의 가죽 등, 재료의 힘을 온전히 담아낸 뛰어난 작품.
- 아이템 등급 : 영웅
- 물리 방어력 640
- 마법 방어력 420
- 【상급 충격 완화】【드래곤 스탭】【중급 이동속도 증가】【자동 복구】
- 근력+10 민첩+30 체력+15 마력+20
- 내구도 1,100
성능을 확인한 수호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스킬이 4개나 달렸어.’
적회색 수호자에도 내장되어 있던 【상급 충격 완화】를 제외하고도 3개의 스킬이 더 달렸다.
【드래곤 스탭】
- 발바닥에서 강한 충격파를 발생한다. 땅을 진동시켜 적을 쓰러트리거나, 허공을 박차고 도약할 수 있다. 재사용 대기 시간 20초.
먼저 드래곤 스탭.
원할 때 발동하는 엑티브 스킬인 탓에 가장 흥미가 동한다.
‘어서 써 보고 싶은걸.’
【중급 이동속도 증가】
- 착용자의 이동 속도를 20% 증가시킨다.
【자동 복구】
- 마모되고 부서진 부분을 자동으로 수리한다.
나머지도 하나같이 유용했다.
‘이속 증가는 당연히 좋고, 자동 복구도 마음에 들어.’
신발을 유독 잘 마모되는 부분이니까.
흡족해하던 수호가 신발을 신었다.
맨발 같이 편안하다.
동시에 스킬과 스탯이 적용되며, 몸이 부쩍 가벼워지는 것도 느껴졌다.
“이거 탐색이 아니라.”
수호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타임 어택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협회의 탐색 의뢰.
어쩌면 그것이 타임 어택으로 바뀌는 것 아닐까.
이 정도 템발이면 클리어는 당연하고.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만 남은 셈이니까.
* * *
협회 의뢰의 날.
“너는 집에 남아 있어.”
『본좌는 납득할 수가 없다. 본좌의 본모습을 되찾으려면,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느니라!』
수호와 발룡이가 팽팽하게 대치했다.
수호가 이번 의뢰에 발룡이를 대동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헌터랑 같이 간다니까. 투명화 못 풀어. 너는 제대로 못 싸운다고.”
『네가 몬스터를 처치해도 본좌의 마력 양은 증가하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어. 기왕이면 집도 좀 봐주고.”
『본좌가 집 지키는 강아지인 줄 아느냐?』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싸움에 도움이 안 될 거면 집이나 봐 달라는 거지.”
『본좌는 거절하겠다!』
발룡이가 완강하게 저항했다.
수호는 당근이 필요한 때임을 직감했다.
“좋아. 일을 공짜로 시키면 안 되는 법이지. 너 혹시 피자라고 들어 봤냐?”
『……!』
피자!
치킨과 함께 세상을 양분하는 음식계의 절대 강자다.
‘한밤중의 웹서핑’ 덕분에 발룡이도 잘 알고 있었다.
“엄청 놀라네. 어쨌든 집에 남으면 피자 사줄게. 분명히 말하는데, 피자가 치킨보다 비싸다.”
『크윽-』
발룡이가 신음했다.
너무나 굉장한 미끼였지만 이번만큼은 물 수가 없었다.
“싫어? 그럼 치킨 중에 따로 먹고 싶은 종류라도 있어?”
『보, 본좌는 다른 것을 원한다!』
“다른 거? 뭐?”
『그거! 본좌도 그걸 갖고 싶다!』
발룡이가 짧은 앞발을 당당하게 내뻗었다.
수호의 시선이 그 끝으로 향했다.
“휴대폰? 이걸 뭐 하러…….”
말을 하던 수호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아침마다 폰 배터리가 닳아 있다 했더니.’
발룡이가 휴대폰을 훔쳐 쓴 것이다.
그런 가정이라면 ‘치느님’ 같은 단어를 알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확실해. 밤마다 폰을 훔쳐 쓴 거야!’
잠시 고민하던 수호가 결론을 내렸다.
‘혼내지 말자. 딱히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니까. 폰이 있으면 적응에도 도움이 될 테고.’
앞으로도 지구에서 살아가야 할 발룡이다.
지구에 적응해야 한다.
지구의 문화를 배우기에 휴대폰만큼 유용한 것도 많지 않다.
“좋아. 하지만 바로 새 폰을 사 줄 수는 없어.”
수호가 책상 서랍을 뒤졌다.
예전에 쓰던 휴대폰 공기계를 꺼내 들었다.
“일단 이걸 써. 이것도 인터넷을 비롯해 기능은 다 되니까. 적응되면 새거 사 줄게.”
와이파이는 연결되지만 통화는 안 되는 폰.
발룡이에게 주기에 딱 알맞았다.
『쩨쩨하구나, 수호.』
“됐고, 할 건지 말 건지 결정해.”
『그것으로도 배달의 동족과 저기요를 실행할 수 있는 건가?』
“당연하지.”
결제는 안 되지만.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그 대신! 저번처럼 그냥 구경하고 있으면 안 돼. 차원문 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돕는 거야.”
『하찮은 미물들이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좋다. 돕도록 하마.』
“오케이, 딜.”
수호가 공기계를 넘기고, 충전 및 사용법을 설명했다.
배달의 동족과 저기요도 깔아 줬다.
『어서 가도록 해라. 본좌는 길게 배웅할 시간이 없느니라.』
“그래, 간다 가. 놀아도 차원문 근처에서 놀아.”
수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 * *
정수찬은 던전 브레이크로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 후, 그는 헌터가 되어 몬스터를 박멸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기어이 각성했다.
하지만 일이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정수찬이 각성한 클래스는 【패스파인더】.
길을 찾고, 지도를 만드는 데 특화됐다.
훌륭한 클래스였지만, 전투에는 썩 뛰어나지 못했다.
‘내 손으로 몬스터를 없애고 싶지만.’
직접 꿈을 이루긴 힘든 상황.
그럼에도 정수찬은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 할 수 없다면,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그가 협회 탐색팀에 지원한 이유였다.
협회에서도 정수찬은 끈기 있게 노력했다.
재능도 있었다.
그 결과 그는 40이라는 낮은 레벨로 탐색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막 들어온 신입이라 아직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단독 임무라니.’
그런 정수찬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레벨 제한 던전을 탐색하는 임무였다.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데 임무에 투입되는 인원을 알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협회 소속도 아닌 헌터와 둘이서 들어가라고?’
내가 뭘 잘못했나?
윗선에 밉보이기라도 한 걸까?
임무 당일, 던전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정수찬은 고민했다.
투철한 사명감 때문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뿐.
“안녕하세요, 원수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 갈 헌터가 인사했다.
꺼림칙함 속에서도 정수찬은 예의를 갖춰 응대했다.
동시에 상대를 살폈다.
‘장비가 보통이 아니야. 모든 부위가 최소한 고급은 될 것 같아.’
상대는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윗선에 밉보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불안이 가시자 궁금증이 생겼다.
‘뭐 하는 사람이지?’
저쪽이야말로 어디 높은 사람과 연줄이 있는 건가?
정수찬은 곧 생각을 접었다.
궁금해하기보다, 함께 갈 헌터가 강해 보인다는 데 안도하기로 했다.
‘부디 무사히만 다녀오자.’
한 번에 다 끝내려 들지 말고, 안전하게 돌아오는 게 우선이다!
탐색팀 선배들에게 늘 듣던 소리였다.
정수찬은 그 말을 되새기며 던전 게이트 앞에 섰다.
그때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어, 협회장님이다.”
“그러게? 2성 탐색에 왜 오셨지?”
“오신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뭐지?”
신성현이 협회장 진무백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그래, 저 친구 저기 있군.”
“예, 어서 가서 인사 나누시지요. 곧 입장해야 할 시간입니다.”
협회장이 다가왔다.
정수찬은 긴장했다.
‘협회장님!’
초대 각성자.
대한민국 헌터 역사의 산증인.
정수찬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꿈꾸는 일을 일부나마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네가 정수찬이군. 탐색팀장이 칭찬을 많이 했어. 오늘도 잘해 주게.”
“예!”
정수찬에게 인사를 건넨 협회장이 옆으로 움직였다.
“원수호 헌터, 의뢰를 맡아 줘서 고맙네.”
“뭘요, 다 저도 이득 보자고 하는 일인데요.”
협회장과 수호가 인사를 나눈다.
정수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해. 협회장님이 오히려 고마워하는 분위기잖아.’
저 사람 뭐지?
미뤄 뒀던 궁금증이 머리를 든다.
뒤이어 들려온 대화 소리가 궁금증에 기름을 끼얹었다.
“요즘 워낙 정세가 뒤숭숭해서 이번 일도 괜스레 불안했다네. 때마침 자네가 의뢰를 맡아 줘서 마음이 놓이는군. 여기 정수찬 헌터는 탐색팀 최고 유망주야. 부디 꼭 살려서 데려와 주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찹니다만.”
“앓는 소리 하기는. 처음 봤을 때보다 2배는 강해진 것 같은데? 그때도 2성 정도는 문제없었을 텐데 말이네. 허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선금을 받았더니 거절을 못 하겠네요. 이래서 신성현 비서님이 대가를 먼저 주신 건가요?”
“성현이가 일을 참 잘하지?”
정수찬은 흘러가는 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 봤을 때도 2성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2배 더 강해졌다고?’
못해도 3성 상위권의 실력이라는 소리다.
한데 이번 던전은 레벨 제한이 있다.
3성 헌터는 들어가지 못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존경하는 협회장님이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니라면, 한 가지 경우밖에 안 남는다.
‘설마, 규격 외라도 된다는 거야?’
극히 희귀하게 등장하는, 레벨로 판단할 수 없는 돌연변이.
오늘 동행하는 헌터가 그런 규격 외의 강자란 소리였다.
58화 타임 어택(2)
던전 탐색에는 매뉴얼이 존재한다.
한 번에 던전 내부를 완전히 탐색하려 욕심 부리지 말 것.
위기 상황에는 탈출을 최우선 순위로 여길 것.
그리고.
‘첫 입장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
정수찬은 던전 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신성현에게 들은 지시와 매뉴얼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모든 일은 원수호 헌터에게 맡기세요. 수찬 씨는 그냥 지도 기록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몬스터 이목만 덜 끌도록 노력하십시오.”
책임자인 신성현의 지시로 파티의 리더는 수호가 되었다.
당연히 행동 방침도 수호의 뜻에 달렸다.
입장을 코앞에 둔 지금.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정 헌터님은 한 10초만 기다렸다가 들어오세요. 저부터 들어갈게요.”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어력이 강한 헌터가 들어가고, 곧바로 파티원들이 전열을 갖춰 뒤따른다.
입장 즉시 몬스터가 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타이밍인데.’
많은 탐색 헌터가 첫 입장에서 부상당하지만 수호는 거침이 없었다.
정수찬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부디 별일 없기를.’
수호가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정수찬은 눈을 감고 수를 셌다.
‘…9초, 10초. 들어가자.’
딱 10초가 됐을 때.
정수찬은 눈을 뜨고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
“어? 어어?”
정수찬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수호가 태연하게 물었다.
“사, 사방에 이게 다 뭡니까?”
“피예요. 생긴 건 안 그런데 터지니까 피를 엄청 흩뿌리네요. 아참, 독성이 있는 것 같으니까, 웬만하면 피에 닿지 마세요.”
“피요? 독이요?”
정수찬이 얼빠진 질문을 던졌지만, 상대는 차분하게 대답해 왔다.
“네, 처치 후에 뜬 메시지를 보니 몬스터 이름은 괴혈 선인장이네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피에 독성이 있는데,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닿았는데 좀 쓰라리다가 말았거든요. 근데 기록은 안 하세요?”
“아! 기록, 해야죠, 기록!”
기록이란 말에 정수찬의 정신이 돌아왔다.
기록!
정수찬이 탐색팀의 일원이 된 이유이자 정수찬의 장기 아닌가.
“그럼 저는 주변 좀 둘러보고 있을 테니, 기록 끝나면 말씀해 주세요.”
수호가 근처를 둘러보는 사이, 정수찬이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스킬이 시전됐다.
‘지도 작성!’
【지도 작성】
스킬을 통해 주변의 3차원 지도를 작성하고, 그것을 언제든 종이 위에 옮길 수 있는 정수찬의 고유 스킬이었다.
스킬이 시전되자, 정수찬의 머릿속에 근처 지형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갔다.
그사이 정수찬은 마음이 복잡했다.
‘완전 피바다야. 도대체 몇 마리나 있었던 거야?’
딱 10초.
수호가 먼저 던전에 들어온 시간이다.
한데 그 짧은 시간, 바닥이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정말 규격 외라도 된다는 건가.’
강하다.
싸우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수호가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강해서 다행이지만 매뉴얼을 완전히 무시하고 괜찮을까 모르겠네.’
탐색 팀에서 배운 내용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수찬.
그는 애써 고민을 끊어 냈다.
‘그래, 기록이나 제대로 하자.’
일의 책임자는 신성현이다.
그다음 책임자는 파티의 리더인 수호이고.
정수찬은 지도 기록만 열심히 하면 될 터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탈출하라는 지시도 받았으니.’
입장 전, 신성현에게 따로 명받았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수호를 돕기 위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정수찬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 쓰라고.
탈출에 도움이 되는 스크롤도 지급받았다.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수찬아.’
정수찬이 다짐하고 있는 사이, 기록이 끝났다.
다음은 몬스터의 정보를 기록할 차례.
정수찬이 다른 스킬을 시전했다.
‘메모 첨부!’
작성된 지도에 정수찬이 듣고 본 내용을 첨부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살아있는 건 못 봤으니, 일단 사체 형태를 첨부하고, 피에 독이 있다는 걸 기록…….’
정수찬이 메모를 첨부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너무 박살을 내 버려서 정보가 부족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 마리 잡아 왔습니다.”
“뭐? 뭐라고요?”
깜짝 놀라 스킬 시전이 취소되어 버린 정수찬.
“여기요.”
그런 그에게 수호가 태연히 손을 내밀었다.
목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몬스터가 들려 있었다.
선인장 윗동에 징그러운 입이 쩍 벌어져 있는 사람만 한 몬스터.
몸통에 촘촘히 박힌 가시가 위협적이었다.
“주, 죽은 겁니까?”
왠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에 정수찬이 물었다.
“기록하기 더 좋을 것 같아서 산 채로 잡아 왔습니다만.”
맞다.
그편이 좋다.
하지만.
‘미친놈아! 그렇다고 누가 몬스터를 산 채로 잡아 와!’
고렙이 저렙 존에서 깽판 치는 것도 아니고.
동렙 수준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덜렁덜렁.
수호가 괴혈 선인장을 정수찬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어, 얼른 기록하겠습니다. 잠깐만 들고 있어 주세요.”
정수찬이 간신히 정신을 잡고 기록을 시작했다.
‘메모 첨부!’
스킬이 다시 시전됐다.
괴혈 선인장의 정보가 지도 위에 표기되었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요? 금세 되네. 그럼 이건 처리할게요.”
“예.”
서걱.
붉은 칼날이 움직이고, 괴혈 선인장의 목이 베였다.
그렇게 첫 번째 기록이 무사히 끝난 후.
“이제 던전을 좀 둘러봐야겠죠?”
“예, 어느 방향으로 가실 건가요?”
정수찬은 수호에게 물었다.
던전 지형은 등장 몬스터에 어울리게 사막이었다.
구불구불한 모래 능선이 시야를 방해했다.
‘원래라면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살피는 게 먼저인데.’
파티의 리더인 수호가 매뉴얼대로 행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매뉴얼을 알 것 같지도 않았고.
“저쪽으로 가죠.”
수호가 대충 왼쪽을 가리켰다.
정수찬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쪽으로 가시려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어차피 아무 데로 가도 똑같아요.”
“똑같다고요?”
“어차피 싹 다 돌아볼 테니까요.”
정수찬은 다시 한번 놀랐다.
‘단번에 다 탐색하려 하는 건 피해야 하는 일인데.’
반쯤 포기한 정수찬은 토를 달지 않았다.
“예, 앞장서십시오. 뒤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정수찬이 수호의 내심을 알았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호는 탐색을 넘어 던전 내 몬스터의 씨를 말릴 생각이었으니까.
* * *
“워, 원수호 헌터님!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뒤로 빠져 계세요.”
“10마리도 넘는데요?”
콰콰콰아아아앙-!
“거 보세요. 괜찮잖아요.”
“…네.”
수호는 기분이 좋았다.
사냥이 몹시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냥이다.
‘탐색이야 정 헌터님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몬스터나 열심히 잡자.’
애초부터 수호는 ‘사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냥은 근래 맛본 것 중에 가장 속 시원했다.
‘영웅 등급 아이템은 확실히 체감이 달라.’
적회색 수호자 때도 그랬지만, 영웅 등급부터는 변화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광룡의 발톱]은 정말 훌륭했다.
‘특히 드래곤 스탭! 이건 진짜 사기 스킬이구만.’
[광룡의 발톱]에 내장된 스킬, 【드래곤 스탭】은 여러모로 훌륭했다.
‘몬스터를 끌어들일 때도 좋고, 밀어낼 때도 좋고.’
발바닥에서 내뿜어지는 충격파.
그것은 몬스터의 시선을 끌기에 좋았다.
과하게 들러붙는다 싶으면, 지면을 흔들어 떨쳐낼 수도 있다.
‘이동에도 활용할 수 있어.’
달릴 때 추진력을 보탤 수 있다.
게다가 한 발짝이지만 공중을 걷는 것도 가능했다.
‘정 헌터님도 잘 따라와 줘서 다행이고.’
정수찬은 간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나 전투가 시작되면.
몬스터의 시선도 끌지 않고 거리도 잘 유지했다.
‘센스가 괜찮아. 탐색팀 최고 유망주라더니, 괜한 소리가 아니었어.’
이래저래 수호는 즐거웠다.
반면 정수찬은 미칠 지경이었다.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어째서 몬스터를 10마리씩 끌어다가 잡는 건데?’
그냥 1마리씩 사냥해도 되잖아.
도대체 왜 몬스터를 일부러 몰아서 잡냐고!
‘게다가 들어온 지 3시간이나 지났잖아. 그 사이 몇 번이나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 이만했으면 쉬기도 해야지!’
3시간을 내리 싸우는 것도 이상한데.
심지어 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기록만 하는 나도 피곤한데, 도대체 뭐 하는 괴물이야?’
혹시 협회의 비밀 병기?
온갖 비약을 먹여 길러 낸…….
괜한 망상까지 떠오르려 하자, 정수찬은 머리를 내저었다.
‘괜한 데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이대로만 가면 무사히 끝날 거야.’
의문과는 별개로 정수찬은 상황을 낙관했다.
하나 사고는 꼭 그런 타이밍에 터지는 법.
“카카칵투스으-”
저편 모래 언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호의 경고가 뒤따랐다.
“정 헌터님, 최대한 물러나세요.”
“네?”
“이레귤러에요. 놈이 우릴 눈치챘습니다.”
“헉! 이레귤러! 하, 하필 첫 입장에서!”
정수찬이 경악해 소리쳤다.
물론 그는 꿈에도 몰랐다.
수호가 진작에 이레귤러를 감지했고, 일부러 기척을 흘려 놈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어서 빠지세요.”
“허, 헌터님. 도망쳐야 합니다!”
“멀리 떨어져서 숨어 있으세요. 명령입니다.”
“크윽-”
정수찬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돌발 상황.
수호만 두고 도망치기 미안했지만, 정수찬은 리더의 지시에 따랐다.
수호는 차분히 기다렸다.
‘슬슬 힘 좀 써 볼까?’
사냥이 순조로웠다.
반대로 말하면, 긴장감이 없었다.
‘이레귤러라면 싱겁지는 않을 거야.’
질 리는 없다.
감각 스탯이 그렇게 전해 오니까.
꾸욱, 수호가 검병을 움켜쥐는 순간.
모래 언덕 너머에서 거대한 선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레귤러, 연사 괴혈 선인장이었다.
다다다다-
연사 괴혈 선인장이 징그럽게 생긴 4개의 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며 달려들었다.
수호도 놈에게 맞서 달렸다.
‘길게 끌 필요는 없어.’
화력을 실험해 볼 절호의 기회.
화끈하게 퍼부어 순식간에 처리한다!
생각하는 사이 연사 괴혈 선인장이 코앞에 다다랐다.
꿀렁.
선인장의 피부가 요동쳤다.
수호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가시를 발사한다.’
예상대로였다.
푸슈슈슈슈슈슈-
수백 개의 가시가 수호를 향해 쏘아졌다.
‘연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시는 끊임없이 발사됐고, 사라지는 족족 채워졌다.
수호는 망설임 없이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
수호의 몸이 빨라졌다.
감각 스탯이 날아오는 가시 하나하나의 궤적을 전해왔다.
수호가 궤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염 포마검이 가시를 마중했다.
팅- 티티티티티티팅-
가시가 튕겨 나갔다.
몸 앞에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듯한 광경.
굉장한 장면을 연출하고도 수호는 만족하지 않았다.
‘막고만 있으면 안 돼.’
선인장의 몸에서 지금도 속속 새로운 가시가 생겨나고 있다.
헤이스트가 끝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생각 즉시 수호의 몸이 반응했다.
팟-
바닥을 박차고 측면으로 이동.
동시에 스킬을 시전한다.
‘드래곤 스탭!’
쾅!
발바닥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몸을 밀어냈다.
헤이스트로 증폭된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스팟-
사라지듯 이동한 수호가 연사 괴혈 선인장의 측면에 나타났다.
‘끝내자.’
근력 폭발!
무기 강화!
화염 강격!
연이어 스킬이 시전됐다.
수호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화력이 검 끝에 응집했다.
화르르르-
불길에 휩싸인 화염 포마검이 선인장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굉음이 사막을 뒤흔들었다.
모래가 폭풍이 되어 휘날렸다.
“좋은데?”
모래 폭풍이 가라앉았을 때.
화력에 만족한 수호만이 전장에 서 있었다.
[네임드 몬스터 연사 괴혈 선인장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
.
.
* * *
“오- 이쪽에도 많네. 잡을게요.”
“네, 그러세요.”
.
.
“여기도 잔뜩 있네. 물러나 계세요.”
“네네.”
.
.
“여긴 좀 흩어져 있네요. 몰아서 잡을게요.”
“편하실 대로 하세요. 다 잡으면 지도 제작하겠습니다.”
.
.
“오- 보스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멀찍이 떨어져 계세요.”
“별로 안 위험할 것 같은데… 어쨌든 빠져 있겠습니다.”
보스가 쓰러졌다.
큰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정수찬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도 제작을 시작했다.
‘이것만 마치면 임무 끝이군. 가만 보자, 시간이… 6시간? 미쳤어!’
괴물 같은 모습에 적응되어 무덤덤해졌던 마음이 자칫 흐트러질 뻔했다.
탐색을 위해 처음 들어오는 던전에서 몬스터 씨를 말리고도 6시간.
정수찬이 알기로 이보다 빠른 적은 없었다.
‘진짜 괴물이구만. 협회장님 태도가 이해가 돼.’
정수찬이 탐색팀 유망주라면, 수호는 헌터계의 초신성일 터.
아직 유명하지 않지만, 머잖아 대단한 헌터가 될 것이다.
정수찬은 그 점이 기꺼웠다.
‘잘 됐지. 강한 헌터가 많을수록 몬스터 박멸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셈이니까.’
그렇기에 정수찬은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었다.
“원수호 헌터님! 그거 마정석 아닙니까? 보스 마정석이라니! 엄청 희귀한 게 나왔군요.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기록 끝나셨으면 이제 돌아갈까요?”
“예!”
그렇게 특별한 일 없이 탐색 임무가 끝났다.
2성 탐색 6시간 클리어라는 최단 시간 기록을 남긴 채.
* * *
수호는 집 앞에 도착했다.
이레귤러가 나온 덕분에 레벨이 8개나 올랐다.
저번 던전과 같은 수치.
갈수록 경험치 요구량이 많아지는 걸 고려하면 훌륭한 성과였다.
“별일 없겠지? 팔찌도 그대로니까.”
경보기 팔찌의 색이 붉게 변하지 않았다.
수호는 편안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헥- 헥- 본좌는 최선을 다했다.』
발룡이가 탈진한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데 어딘가 이상하다.
“뭐야? 너 몸이 왜 그렇게 커진 거야?”
발룡이는 몸집이 2배쯤 커져 있었다.
『어서! 시간이 없다.』
발룡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급한 표정으로 TV를 가리켰다.
59화 각성, 멸망, 죽음 그리고…(1)
“잘했어, 실버.”
윌슨은 복잡하게 생긴 기계에서 내려서며 실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이잉-
실버의 몸에 연결되었던 케이블이 빠져나와 기계 속으로 돌아갔다.
왕왕-
“그래그래, 형은 실버와 늘 함께할 거야. 그러니까 실버도 나중에 형 원망하기 없다?”
왕왕-!
“그럴 일 없다고? 하하, 최고는 이걸 쓸 일이 영원히 없는 거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실버.”
왕-
윌슨은 다시 한번 실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달 주기적으로 하던 일.
최근에 생긴 변화 탓에 매일 하게 된 일.
아울러 지난 10년 동안, 윌슨의 주 연구 과제였던 일은 그렇게 마쳤다.
“오늘 업무는 끝! 이제 뭘 할까나?”
수호는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테고.
그럼 지구 영화나 좀 볼까?
“아임 유어 파더! 캬- 지구 영화가 생각보다 엄청 재밌더라니까.”
윌슨이 실버와 함께, 늘 머무르는 휴게실 겸 제어실로 향했다.
에에에에에엥-
쉘터 벽 스피커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오늘은 쉴 팔자가 아닌가 보다. 가자 실버!”
윌슨이 서둘러 제어실에 도착했다.
담장 너머 물밀 듯 밀려드는 검은 파도가 보였다.
“빌어먹을 마물들! 청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쳐들어온 거야!”
윌슨은 서둘러 스크린을 조작했다.
쉘터 외벽이 열리고, 마도 총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
투타타타타타타-
총탄에 맞은 마물들이 쓰러져 나갔다.
대응이 한결 편했다.
“담장 고친 덕을 많이 보는구나.”
높고 두꺼운 담장.
그것을 단숨에 넘을 수 있는 마물은 많지 않았다.
담장을 넘으려 주춤하는 동안, 총탄이 마물의 목숨을 앗아갔다.
투타타타타타타-
“이대로만 되면 별 탈 없이 막겠는걸.”
윌슨은 낙관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다.
쿠와아아아-!
괴성이 쉘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갑자기 어디서 저런 커다란 놈이!”
거대한 2족 보행 마물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담장 위로 머리가 쑥 올라올 정도로 크고 비대했다.
손에는 커다란 방망이를 쥐고 있었다.
방망이가 담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강한 진동이 쉘터 내부를 뒤흔들었다.
윌슨은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채, 스크린을 응시했다.
“젠장, 또 부서졌어!”
갓 수리한 담장이 다시 부서져 있었다.
거대 마물의 공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른 마물이 통과할 길을 열려는지, 거대 마물은 연이어 담장을 후려쳤다.
몇 번의 굉음이 울린 후.
담장은 보수하기 전보다 더 크게 부서져 버렸다.
“아…….”
망연자실한 윌슨.
왕왕-!
실버의 울음이 윌슨을 일깨웠다.
“그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최후의 순간에 대한 대비는 이미 해 놓았다.
물질적인 대비도, 마음의 준비도.
그러니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버텨 봐야 한다.
윌슨이 이를 악물고 스크린을 조작했다.
구구구구궁-
쉘터 윗부분이 열리고, 송전탑처럼 생긴 구조물이 솟아올랐다.
“이거나 처먹어라, 괴물놈아!”
윌슨이 스크린을 터치했다.
깜빡깜빡.
쉘터 내부 조명이 점멸한다.
동시에 전신주 끝에 새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마도 전자포.
쉘터의 에너지 90%를 모아야 쓸 수 있는 결전 병기.
사용하면 한동안 쉘터의 여러 기능이 마비되지만 지금은 써야 할 때다.
번쩍-!
곧 전자포가 하얀빛을 뿜었다.
빛은 정확히 거대 마물의 가슴에 적중했다.
푸콰아아아앙!
충격파와 함께 거대 마물의 상반신이 사라졌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전자포가 뒤편의 마물까지 녹여버렸다.
“후우, 일단 큰놈은 죽였고, 나머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한숨 돌린 윌슨이 스크린을 조작해 나갔다.
쉘터에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어떻게든 마물을 처치해야 한다.
“한번 해 보자고. 가능성은 있어!”
담장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쉘터 자체의 방어력은 남았다. 그것을 잘 이용하면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그 무렵 전장에 또다시 변동이 생겼다.
윌슨에게는 불행한 쪽으로.
저릿!
저 먼 곳에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듯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쉘터 안 윌슨이 아무런 장비의 도움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진한 기운이었다.
크르르-
실버가 으르렁거렸다.
윌슨은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소유권이 넘어오지 않아 이상하다 했더니.”
고막을 직접 두드리는 듯한 괴이한 목소리.
나직한 음성임에도 그것은 쉘터를 뚫고 윌슨에게까지 와 닿았다.
“한 마리가 계속 살아 있었구나.”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윌슨의 입이 떨어졌다.
“마… 족.”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윌슨은 확실했다.
적은 마족이었다.
윌슨의 시선이 서둘러 스크린으로 향했다.
밀려드는 마물 너머 까마득히 먼 곳.
새까만 날개를 펼친 마족이 허공에 떠 있었다.
‘끝났구나.’
윌슨은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마족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라져라.”
마족의 손가락 끝에 강맹한 기운이 어리더니.
번쩍-!
보라색 광선이 발사됐다.
마물이고 담장이고.
광선에 닿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쉘터는 윗동이 휑하니 날아가, 열어 놓은 생선 상자처럼 변했다.
왕!
실버가 밀친 덕분에 윌슨은 살아 있었다.
쉘터 바닥에 엎드려 윌슨은 생각했다.
‘수호를 만나기는 힘들겠지?’
오랫동안 각오하던 순간이라 그런지 무덤덤했다.
다만, 새로 사귄 친구를 못 볼 것 같아 아쉬울 뿐.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능한 기대였나 보다.
저편에서 다시 보랏빛 광선이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 * *
츄르릅.
짧은 앞다리가 흘러내리는 침을 닦는다.
발룡이는 스마트폰을 응시하며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먹으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시작은 배달의 동족이었다.
음식 리뷰를 구경하며 다음에 먹을 것을 물색하던 발룡이.
『닭볶음탕? 치느님을 국물에 담갔군. 붉은빛을 보니 매콤해 보이는데, 조만간에 먹어봐야겠어.』
『찜닭? 국물 색이 아름답군. 이것부터 먹어야겠어. 검은 것은 위대한 법이니까.』
그렇게 리뷰와 메뉴를 살피던 발룡이의 눈에, 누군가의 코맨트가 들어왔다.
┗ BJ치킨은살안쪄요 님 먹방 보고 주문했는데, 대박 맛있어요. 양도 끝내주게 많음!
『먹방? 그게 뭐지?』
발룡이가 먹방을 검색했다.
간단한 검색 법은 진작에 터득한 터라 어려움은 없었다.
얼마 후.
발룡이는 어느새 뷰튜브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먹으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게다가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발룡이로써는 따라가기 힘든 경지였다.
『본좌는 아직 멀었구나.』
발룡이는 먹방 스트리머의 솜씨에 감탄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은 찜닭을 먹자.』
한데 수호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발룡이는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때였다.
고오오-
심상치 않은 마력 파장이 집 안을 휘돌았다.
발룡이가 파닥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파장의 근원은 TV였다.
『일이 터졌군.』
발룡이는 서둘러 TV로 향했다.
수호가 신신당부하고 갔으니,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찜닭을 못 먹을지도 모르니까.
『뭣?』
TV 앞에 도착한 발룡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박살 난 쉘터.
그 안에 엎어져 있는 윌슨.
저편에서 날아드는 보랏빛 광선.
언뜻 보기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안 돼!』
발룡이가 서둘러 TV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을 벌렸다.
콰르르르르-
용의 숨결이 쏘아졌다.
숨결과 광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쿠츠차차차차차차차-!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이 허공에서 퍼져 나갔다.
마물도, 윌슨도.
모두가 바닥에 배를 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후 광선이 멎었다.
발룡이도 브레스를 멈췄다.
저편 멀리.
날아간 쉘터 윗동 너머, 보랏빛 날개를 펄럭이는 존재가 보였다.
『더러운 마계의 종자가 땅 위로 기어 올라왔구나.』
발룡이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크크크, 신기하군. 이건 분명히 같잖은 도마뱀 놈의 기운인데. 이쪽 세상에 도마뱀이 있었던가?”
비아냥과 궁금증이 담긴 마족의 대답이 돌아왔다.
『닥쳐라! 저주받은 마계의 종자야! 네놈이 사는 더러운 마계로 썩 돌아가라!』
“내가? 크크크,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곳이야말로 내 땅이요, 내 세상인데.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마족 게카르트가 광소를 터트렸다.
한동안 신경 쓰지 못해 소유권 확보가 늦었을 뿐.
진작에 게카르트의 것이 되어야 했을 세상이다.
드래곤의 말은 가당치도 않았다.
『닥쳐라! 닥치고 꺼져라!』
또다시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게카르트는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드래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곤의 존재는 의아했다.
하지만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노움 1마리만 죽이면 끝이다. 굳이 쓸데없는 일에 힘 뺄 필요 없지.’
결심한 게카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보라색 빛무리가 어렸다.
“고이 죽어라.”
번쩍-!
윌슨을 향해 광선이 발사됐다.
『감히!』
발룡이도 마주 브레스를 쏘았다.
파츠츠츠츠츠츠츠-
허공에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이번에도 광선과 브레스는 서로를 꺾지 못했다.
『당장 꺼지거라, 이 더러운 종자야!』
발룡이가 소리쳤다.
번쩍-!
대답 대신 날아든 것은 광선이었다.
『크윽-』
발룡이도 브레스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제길, 마력이…….』
발룡이의 마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게카르트는 여유로웠다.
‘도마뱀 놈이 좀 이상한데?’
브레스의 파괴력을 보면, 고룡급 도마뱀이 분명했다.
한데 갈수록 힘이 빠지고 마력이 흔들렸다.
‘어디 아픈 건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발룡이의 브레스는 딱 헤츨링급.
하지만 차원 간 크기 왜곡을 모르는 게카르트는 브레스의 위력을 오해했다.
그 결과 발룡이가 아프다는 결론을 내렸다.
‘굳이 힘 뺄 필요가 없겠어.’
게카르트의 눈빛이 보랏빛으로 빛났다.
마기의 파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공격하라!”
게카르트의 명령에 따라 마물들이 부서진 쉘터로 진격했다.
『뭐?』
발룡이가 깜짝 놀랐다.
밀려드는 마물의 파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마족은 뒤로 물러났다.
브레스가 닿기 힘든 거리였다.
발룡이는 깨달았다.
이대로면 마물을 처리하다 마력이 동날 터.
외통수였다.
『이런 비겁한 종자가!』
하나 어찌할 방법이 없다.
수호와 달리 발룡이는 차원 시야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크크크흐흐-”
게카르트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발룡이는 반응할 틈이 없었다.
마법을 시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얼어붙어라!』
『불타올라라!』
.
.
『헥- 헥- 빌어먹을. 본좌가…….』
마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발룡이가 한계를 느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밀어붙여 놓았지만 마물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합니다.”
윌슨이었다.
『뭐라고?』
“그만하면 많이 애쓰셨습니다. 고마워요. 이제 그만 쉬세요.”
발룡이가 의아한 말투로 되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럴 수는 없느니라!』
발룡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윌슨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인사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수호에게 꼭 전해 주십시오. 부탁하겠습니다.”
이미 마지막을 받아들인 듯한 태도였다.
발룡이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본좌는 위대한 심연의 주인이자 발랑카 산맥의 군주, 검은 칠흑의 지배자 발랑카르 폰 베르 카이져 마누트 발두르다. 죽음 또한 본좌의 허락 없이는 행차할 수 없느니라!』
한데 윌슨의 대답보다 먼저 날아든 목소리가 있었다.
마족 게카르트였다.
“이제 알았다. 네놈은 목숨이 아까워 타차원에 숨어 있었구나! 그래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이야. 그런 주제에 위대하다는 단어를 잘도 입에 담는구나! 우습구나, 도마뱀 놈아. 크흐흐흐-”
오해였다.
하나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숨어? 본좌가?』
중요한 점은 게카르트의 말이 발룡이의 자존심을, 오기를 완벽하게 자극했다는 점이었다.
『감히… 감히… 감히이이이-!』
두근-
발룡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두근-
그것은 세상을 아우르는 힘에 제약당한 발룡이의 격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드래곤 하트가 맹렬하게 박동한다.
마력이 해일처럼 들끓었다.
우직.
발룡이는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몬스터를 잡으면서 느꼈던 간지러움.
그것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누적된 업적에 의해 광룡 발랑카르의 제약이 일부 해제됩니다.]
[광룡 발랑카르의 격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발룡이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호가 있었다면 경악한 눈빛으로 보았을 메시지가.
60화 각성, 멸망, 죽음 그리고…(2)
고오오오-
발룡이의 가슴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대기가 요동친다.
우드득.
발룡이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2배쯤 커진 몸집.
더는 수호의 어깨에 올라앉지 못할 크기였다.
발룡이가 선언했다.
『본좌가 심연의 주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크롸롸롸롸롸롸-』
자연스레 포효가 터져 나왔다.
심장에서 들끓어 오르는 기운이 한 점에 응축되더니 입으로 향했다.
브레스가 발사됐다.
화르르르르르르-
온 노움 세상을 환하게 밝힐 만큼, 굵고 아름다운 불기둥이었다.
“아니?”
게카르트는 경악했다.
드래곤의 힘이 다했음을 확인한 후에 날린 도발이었다.
한데 돌아온 것은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브레스였다.
“제기랄!”
게카르트가 브레스를 향해 마주 손을 들어 올렸다.
번쩍-!
광선이 발사됐다.
소용없다.브레스가 조금의 반항도 용인하지 않고 광선을 불살랐다.
광선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런 개 같은…….”
게카르트는 욕설을 다 토하지도 못한 채 브레스에 직격당했다.
『헥- 헤엑-』
게카르트가 설원 저 너머로 튕겨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며 발룡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본좌의 마력이…….』
발룡이도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확 끓어올랐던 기운이 가라앉으며, 마력이 다시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줄어들고 있어.』
발룡이는 직감했다.
조금 전 같은 힘을 당장 다시 끌어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제약이 한 꺼풀 벗겨졌기에 원래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말이다.
문제는 당면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크르르-
끼에에-
마물이 윌슨을 향해 몰려들었다.
게카르트를 날려 버렸지만 이미 내린 명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는 방법이 없군. 크윽-』
마물의 파도를 노려보던 발룡이는 마지막 마력을 쥐어짰다.
『보호하라!』
‘보호막’ 마법이 윌슨을 감쌌다.
크기의 왜곡 덕분에 제법 오래 버텨 줄 터였다.
털썩.
마지막 기운까지 소진한 발룡이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수호, 빨리 와라.』
발룡이가 염원했다.
처음에는 그저 핸드폰을 받은 대가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오기였다.
지금은 광룡의 자존심, 드래곤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쪽 세상의 노움을 살려야만 했다.
딸랑-
그렇기에.
문소리가 들리고 수호가 나타났을 때.
발룡이는 수호를 채근했다.
『헥- 헥- 본좌는 최선을 다했다. 어서! 시간이 없다.』
* * *
TV를 들여다본 수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젠장! 이게 또 무슨 일이야!”
쉘터는 박살이 났고 마물에 뒤덮여 있다.
그 한가운데 투명한 막 안.
윌슨이 실버를 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윌슨! 괜찮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호의 목소리에 윌슨이 고개를 들었다.
“오, 내 친구 수호! 드디어 돌아왔군. 드래곤 님한테 감사해야겠는걸? 하하하.”
윌슨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호는 윌슨처럼 차분하지 못했다.
“잠깐만 기다려, 마물부터 처리할게.”
수호가 화염 포마검을 휘둘렀다.
보호막을 두드리던 마물들이 썰려 나갔다.
하지만 마물이 너무 많았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쉘터가 부서진 것이 치명적이었다.
마물의 파도를 막을 방파제가 필요했다.
수호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담장이 보인다.
‘대충 둘러싸 놓기라도 하자.’
수호는 담장 파편을 주웠다.
마물을 쳐내면서 파편을 윌슨 근처에 쌓아 나갔다.
잠시 후, 윌슨을 감싼 보호막 주변에 담장 파편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칼을 몇 번 더 휘둘러 보호막에 달라붙은 마물도 치워 냈다.
‘한동안은 버티겠어.’
그제야 약간의 여유가 확보됐다.
수호가 윌슨에게 물었다.
“윌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신호는 왜 안 보냈어?”
수호의 경보기 팔찌는 윌슨이 만들었다.
당연히 윌슨도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수호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연락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안 됐다.
“처음에는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실제로도 얼추 해결했었고. 모처럼 던전에 간 친구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래도 그렇지!”
“하하, 어쨌든 막아 냈다 싶은 타이밍에 빌어먹을 마족 놈이 나타나 버렸지 뭐야.”
“마족이라고?”
윌슨의 얼굴에 증오가 어렸다.
“그래, 마족. 그 바람에 쉘터가 단숨에 날아가 버렸어. 그 뒤에는 드래곤 님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 고맙다고 꼭 전해 줘.”
윌슨의 이야기를 듣던 수호는 의문을 느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나타난 마족은 그렇다 치고.
이쯤 되면 당연히 있어야 할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왜 차원 임무가 안 뜨는 거지?’
이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면, 집에 들어서는 즉시 긴급 임무가 떴어야 정상이다.
한데 윌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설마 윌슨이…….’
차원 임무는 교류 대상의 욕구를 파악했을 때 얻는다.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면 해결된다.
‘윌슨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거라면?’
수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짧지만 소중한 인연이다.
비슷한 방향으로 발달한 문명 덕에, 가장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한데 그런 윌슨이 삶을 포기한다니.
수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윌슨! 쉘터는 다시 지을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거야. 그러니까 힘을 내. 일단 마물부터 청소할게.”
윌슨이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저편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크윽- 빌어먹을 도마뱀 놈이.”
게카르트였다.
날개가 녹아내리고 한쪽 팔도 사라졌다.
내부에 당한 상처로 마기도 원활치 않다.
빈사 상태였다.
그럼에도 놈은 죽지 않았다.
『더러운 마계의 종자가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발룡이가 안간힘을 쥐어짜 TV 앞으로 날아오며 외쳤다.
수호도 깨달았다.
‘저놈이 마족.’
사달의 원흉.
윌슨이 생을 포기하게 만든 놈.
‘죽인다!’
그래야 윌슨을 설득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다.
한데 게카르트가 한발 빨랐다.
놈이 남은 한 손을 들어 허공을 내리그었다.
공중에 균열이 벌어졌다.
“쿠웨에에엑-!”
“크르르르-”
괴성과 함께 시커먼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계의 마물이다. 애초부터 마계에서 태어난 것들이라 훨씬 더 지독하다. 서둘러라, 수호!』
발룡이가 경고했을 때, 수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헤이스트!’
‘근력 폭발!’
‘무기 강화!’
스킬이 순식간에 시전됐다.
수호가 석화비도를 뽑아 들었다.
어깨 너머로 당겨졌던 팔이 전력을 다해 비도를 던져 냈다.
쎄엑!
벼락 같은 속도였다.
“이게 무슨!”
경악한 게카르트가 몸을 옆으로 날렸다.
하지만.
‘염동력!’
적시에 시전된 【하급 염동력】이 석화비도에 가해졌다.
비도가 휜다.
움직이는 게카르트를 향해.
푸콱-!
비도가 명중했다.
“빌어… 먹을… 어째서…….”
드래곤의 말도 안 되는 브레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손과 손이 내던진 비도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게카르트는 고민할 수 없었다.
쯔어억-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게카르트의 몸이 꽃피듯 갈라졌다.
비도가 세로로 몸을 가르고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었다.
푸콱-
사슬에 의해 회수되던 석화비도가, 다시 한번 게카르트의 몸을 벴다.
게카르트의 마기가 완전히 흩어졌다.
‘끝났다.’
수호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쾅! 쾅!
마계에서 새로 나온 마물들이 담장 파편을 두드리고 있다.
몇몇은 벌써 보호막에 달라붙었다.
어서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윌슨! 마족은 처리했어. 혹시 근처에 몸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곳 없어? 동굴이든 어디든 엄폐할 수 있는 곳으로.”
질문을 던진 수호가 주변을 살폈다.
정 안 되면 직접 땅이라도 팔 기세.
윌슨이 물끄러미 수호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수호의 눈앞에 별안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선물】을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이게 뭐야?’
깜짝 놀란 수호가 서둘러 임무 내용을 확인했다.
『선물』
- 멸망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 윌슨. 오래전부터 그는 자신의 세상과 끝을 함께하기로 다짐해 왔다. 세상의 마지막 순간, 생존자 윌슨은 선물을 준비했다. 우정과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윌슨의 선물을 받자.
- 보상 : ???
보상 항목과 몇몇 단어가 이상했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눈에 틀어박히듯 들어온 문구 때문이었다.
‘세상과 끝을 함께한다고?’
꺼림칙한 예상이 맞았다.
수호가 아득한 심정을 느끼고 있을 때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 나는 노움이야. 이곳이야말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자, 죽을 때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노움으로서 나는 이곳에서 끝이야.”
“윌슨, 하지만…….”
“알아, 어떻게든 날 살리고 싶겠지? 드래곤을 꺼냈던 방법이라면, 어쩌면 나도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수호, 나는 그러기가 싫어. 나는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어.”
수호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을 느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 진짜로 세상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호는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그냥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면 되지 않느냐고.
윌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수호, 부탁인데, 너무 슬퍼하지 마.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순간이거든. 네가 너무 슬퍼하면 나도 제대로 마무리 짓기 힘들 것 같아.”
“…윌슨.”
쿵, 쿠쿵-
담장 파편을 두드리는 마물의 소리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대신 선물을 줄게. 이건 예전부터 준비해 오던 건데, 널 만난 후에야 진정한 의미가 생겼지 뭐야. 그러니 꼭 받아 달라고.”
윌슨이 안고 있던 실버의 머리 부분을 건드렸다.
내장된 기능이 작동했다.
곧 윌슨의 무릎 위에서 실버가 사라졌다.
“실버를?”
교역 스킬을 통해 실버가 수호의 발치에 나타났다.
“잘 돌봐 줘야 해. 나라고 생각하고.”
“알았으니까 한 번만 더 생각을…….”
“수호, 이제 좀 쉬고 싶어. 마무리는 확실히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가서 쉬어.”
윌슨이 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고통 없이 생을 끊어 줄 독약이 담겨 있었다.
이 상황을 오랫동안 준비해 온 흔적이었다.
수호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윌슨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강제로 꺼낼 수도 없다.
윌슨의 단호한 태도가 느껴지는 탓이었다.
기어이 수호의 입에서도 작별 인사가 흘러나왔다.
“윌슨, 고마웠어. 덕분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정말 좋았어. 그럼… 푹 쉬도록 해.”
혼자 감당했을 좌절과 고독은 털어 버리고.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수호는 남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삼켰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내 선물을 나처럼 여겨 달라는 말, 잊지 마.”
“알았어. 실버는 내가 잘 돌볼게.”
“하하, 그래 잘 돌봐 달라고. 그럼 이만 가, 친구. 어서!”
윌슨이 주사기를 들어 올렸다.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수호는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띠링!
전원이 꺼지며 차원문이 닫혔다.
수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교류 대상 【생존자 윌슨】과의 교류가 끊어졌습니다.]
[차원 AUFTP-44로 향하는 차원문이 폐쇄됩니다.]
[차원 AUFTP-44가 차원 패널에서 삭제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윌슨의 최후를 알려 왔다.
“하아…….”
수호가 깊게 한숨 쉬었다.
차원문의 폐쇄.
교류의 단절.
친구의 죽음.
한꺼번에 밀려든 일들 속에서 수호는 아득함을 느꼈다.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발룡이가 수호를 위로했다.
수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데 발룡이의 말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맞아, 친구. 너무 풀 죽어 있지 말라고. 하하하.”
수호의 시선이 황급히 아래로 향했다.
61화 각성, 멸망, 죽음 그리고…(3)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윌슨?”
수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질문의 대상은 금속 강아지, 실버였다.
놀랍게도 강아지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맞아, 나야 친구!”
분명히 윌슨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시스템 메시지도 윌슨의 죽음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눈앞의 강아지는 자신이 윌슨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진짜 윌슨이라고? 어떻게… 아니, 그럼 아까 그쪽 세상의 윌슨은?”
“그쪽도 윌슨이고, 지금 나도 윌슨이야.”
“어떻게?”
“내 기억과 인격을 실버의 전뇌에 옮긴 거야. 그게 내 전공이거든.”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전뇌電腦, 즉 전자 두뇌는 마도 공학자 윌슨의 전공 분야였다.
당황이 덜 가신 수호에게 윌슨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세상이 그렇게 된 뒤에도 나는 전뇌를 계속 연구했어. 노움 문명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거든. 그리고 빌어먹을 마족에 관한 정보도 남겨야 했지. 그래야 누군가 그놈들을 막을 테니까. 근데 어느 날 수호 너를 만난 거야.”
“…….”
“나는 전율했어. 기약 없이, 누군가 흔적을 발견하길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내가 노움의 문화와 문명을 직접 전승할 길이 생겼으니까. 수호 너를 통해서!”
지구 또한 마인이 나타난 상황.
윌슨에게는 문명의 전승과 마족에 대한 복수를 동시에 행할 기회였다.
“그러면 굳이 왜 그… 몸을 포기한 거야?”
페널티가 우려됐지만 저런 각오라면 어떻게든 살려서 지구로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수호는 죽어 간 윌슨이 안타까웠다.
“마족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하지 않았을 거야. 충분한 재료와 설비를 지구로 옮기는 일이 먼저였겠지. 하지만 쉘터가 박살 났고, 준비하던 것들도 부서졌어. 실버를 보내는 게 최선이었어. 실버의 전뇌는 최후의 상황을 대비해, 늘 내 기억을 옮겨 두고 있었으니까.”
“너는 괜찮은 거야?”
갑작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전해 듣고, 새로운 세상에서 강아지의 몸으로 살게 되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했어. 흔적을 남기겠다는 미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었지. 그런데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더니, 때마침 네가 돌아왔어. 마족을 물리친 건 다행이지만 날 살리려면 계속 고생해야 했을 거야. 나도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했을 테고. 하지만 내게는 계속 싸워 나갈 각오가 부족했어. 계기가 필요했지.”
“…….”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지금이야말로 끝을 맺어야 할 시점이라고. 지친 심신을 쉬게 해 줄 수 있겠다고. 그리고 나머지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몸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잠시 숨을 고른 윌슨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나는 ‘노움’이 아니야! 나는 지구인, 아직 인(人)이라고 부르긴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지구에 소속된 존재로서 최선을 다해 지구를 지킬 거야. 빌어먹을 마족 놈들로부터!”
수호는 눈앞의 지구인(?) 윌슨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네 마음은 잘 알았어. 너도 혼란할 텐데 자꾸 질문해서 미안해.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가워, 윌슨.”
“역시 내 친구 수호!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너도 좋은 사람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하하, ‘노움’ 윌슨이 말했지? 나를 ‘나처럼’ 생각하라고? 그러니 평소처럼 편하게 지내 보자고.”
“그래, 알았어.”
“그래서 말인데…….”
윌슨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왜?”
“내가 여기 좀 얹혀 살아도 될까? 밥값은 꼭 할게.”
수호는 피식 웃어 버렸다.
세상의 멸망.
죽음과 삶.
그런 것들에 비하면 친구 한 명쯤 더부살이하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게다가 훌륭한 공돌이인 윌슨이 밥값을 못할 리도 없고.
“당연하지. 환영해 윌슨.”
“역시 넌 좋은 친구야! 하하하.”
윌슨이 팔짝팔짝 뛰었다.
강아지 형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묻어 뒀던 위화감이 고개를 든다.
수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계속 강아지로 살아야 하는 거야?”
윌슨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철컥!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2족 보행 형태로 섰다.
팔다리도 약간 길어졌다.
‘언뜻 보면 사람 같지만, 머리가 강아지라….’
게다가 여전히 은색이고 크기도 작다.
사람이라 하기는 힘든 외형이었다.
“크흠, 에너지도 재료도 부족해. 그래서 지금은 이런 형태가 최선이야. 차차 바꿔 가야지.”
“모양이 더 변하는 거야?”
“자체적으로는 지금이 한계야.”
“그럼?”
“쉘터에 있던 생산 설비를 하나씩 만들어 가야지. 이 머릿속에 100년 마도 공학의 역사가 모조리 들어 있거든.”
윌슨이 자기 머리를 앞발… 아니, 손으로 툭툭 쳤다.
“그렇구나. 근데 설비는 너 혼자 만들 수 있어?”
“하, 하하. 내가 공돌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장비는 있어야 뭘 만들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부탁인데, 드워프들한테 부품을 의뢰해 줄 수 있을까? 생산 설비가 완비되면 드워프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어.”
“그거야 문제 없지. 근데 드워프가 너희 세상 설비도 만들 수 있으려나? 과학에 문외한일 텐데.”
“다는 못 만들겠지만, 나머지는 지구에서 구할 수 있을 거야. 초기적인 수준의 마도 공학 연구는 지구에서도 진행되고 있을 테니까. 수호, 컴퓨터 좀 써도 될까? 좀 알아봐야겠어.”
“안 될 거 없지.”
윌슨은 금세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조작했다.
능숙한 모습이었다.
‘지구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건지, 공돌이라 그런 건지, 엄청 자연스럽네.’
지구 선배인 발룡이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찜닭!』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덜렁 음식 이름만.
수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룡이가 짧은 팔로 팔짱을 낀 채, 수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찜닭? 먹고 싶다고?”
『그래, 본좌가 이번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아느냐? 찜닭이 아니라 찜닭 집을 통째로 바쳐야 마땅할 정도니라.』
수호는 쉘터 쪽 상황이 얼마나 험악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발룡이가 윌슨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도 알았다.
“그래, 고생 많았어. 고맙다.”
『말로 때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라! 어서 찜닭! 아름다운 검은 빛의 찜닭을 대령하거라!』
“알았어, 인마. 자, 네가 주문해. 먹고 싶은 만큼 양껏.”
수호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헉! 양껏? 크큭- 이것이 전설의 골든벨인 것이냐?』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발룡이는 상황에 맞지도 않은 단어를 주억거렸다.
절레절레.
고개 젓던 수호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발룡아, 크기는 왜 다시 줄어들었어?”
집에 도착했을 때 발룡이는 평소보다 컸다.
한데 지금은 평소와 같은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 그냥 이 정도가 움직이기 편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제든 다시 커질 수 있고 마력 소모도 거의 없다. 게다가 마력이 2배로 급증했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도 안 되느니라!』
사실은 몸이 작을수록 치킨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었지만 발룡이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마력이 2배 증가했다고? 어떻게?”
『몬스터를 잡다 보면 본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좌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몬스터 잡을 때만 마력이 느는 게 아니라 불시에 확 늘어나는 건가? 몸도 커지고? 신기한 시스템이네.”
『본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수호 너인데, 왜 자꾸 본좌에게 묻는 것이냐? 본좌는 바쁘다!』
“그래. 방해 안 할게, 주문이나 해.”
컴퓨터 하는 금속 강아지.
스마트폰을 쥔 블랙 드래곤.
수호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따듯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찾았다, 마도 과학 박람회! 수호, 여기 가야겠어.”
윌슨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도 박람회? 그런 것도 있었나?”
지구의 마도 과학은 노움 세상의 마도 공학과 비슷한 학문이다.
연구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아 걸음마 단계였다.
“응, 내일까지야. 여기라면 기본이 될 만한 부품은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내일 일정이 정해졌다.
* * *
“…덕분에 실험체 수급은 늦지 않게 가능할 듯합니다. 그리고 상왕련주 주변에 침투시켜 둔 우리 측 인원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준비가 다 끝났으니 보스께서 원하시는 시점에 언제든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부하의 보고가 끝났다.
머더러 단체, 리빙 콥스의 수장 육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진행 중인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2가지가 모두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한 달 후면 어르신을 만나는 날이야.’
마족의 종복이자 강력한 마인.
육경환은 그런 어르신을 만나 일의 경과를 보고해야 한다.
‘이번엔 확실한 성과를 가지고 가야 해.’
기회는 무한하지 않다.
어설프게 굴다가 언제 머리통이 박살 날지 모른다.
어르신이 늘 먹는 호두알처럼.
육경환이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부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보스.”
“……?”
“정현수가 이번에 1성 던전을 졸업했다고 합니다.”
“정현수? 상왕련주의 아들 아닌가? 그놈은 저번에… 으음.”
육경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들이 실종되어 망가진 박영일.
놈의 마기를 폭주시켜 정현수를 죽이게 지시했었다.
다른 일 때문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결과가 육경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놈이 안 죽었다고?”
“예.”
“박영일 건은 어떻게 됐지?”
“저번에 보고드렸는데 바쁘셔서 신경을 못 쓰신 듯합니다. 그날 정현수와 함께 있던 헌터가 박영일을 처치했다고 합니다.”
“헌터? 한 명이?”
“예, 한 명이라고 합니다.”
“그만한 헌터는 상왕련 통틀어도 몇 없을 텐데.”
무력에 구조적인 약점을 가진 상왕련이다.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3성 만렙.
게다가 마기가 폭주한 박영일을 잡을 헌터는 많지 않을 터였다.
“2성 헌터이고 상왕련 소속도 아니었습니다. 던전 지형을 이용했다는데, 자세한 부분까지는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육경환이 턱을 쓰다듬었다.
‘싸한데.’
정현수를 노린 건 두 번째다.
도플갱어. 그리고 박영일.
두 번 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봤다.
한데 모두 실패했다.
‘뭔가 있어.’
느낌이 안 좋다.
오랜 머더러 생활로 발달한 촉이 말한다.
분명히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육경환이 부하에게 지시했다.
“정현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사소한 것 하나 빼먹지 말고. 그 박영일을 처리했다는 헌터도 제대로 알아봐.”
* * *
마도 과학 박람회로 향하는 용달차 안.
보조석에 윌슨과 함께 앉은 발룡이가 수호에게 선언했다.
『본좌를 경배하라.』
“오냐.”
으스대는 발룡이에게 수호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럴 만했기 때문이다.
“윌슨까지 투명화할 수 있다니, 진짜 마법 실력이 많이 늘었는걸?”
『실력이 늘다니! 왼쪽 날개에 봉인된 힘이 약간 깨어났을 뿐이니라. 본좌의 힘이 모두 풀려나는 날, 온 세상이 본좌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어, 그래. 근데 투명화하면 윌슨은 나한테 직접 말할 수가 없다며? 그 부분이 좀 아쉽네.”
발룡이는 투명화와 동시에 윌슨의 기척까지 지워 버렸다. 윌슨의 존재를 숨기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문제는 수호에게도 윌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차에서 내리면 본좌가 윌슨의 이야기를 듣고 전달해 줄 테니.』
“그게 제일 걱정이다.”
하필 통역사가 발룡이란 점이 문제다.
저놈의 중2병 환자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그나마 발룡이가 말을 전해 주려 할 정도로, 윌슨과 잘 지낸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말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윌슨이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수호, 부품 목록은 잘 기억하고 있지?”
“응, 적어 왔잖아. 마나 모스펫, 마나 서플라이… 그리고 마나 커패시터 50개.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지?”
“맞아, 그게 제일 중요한 부품이야. 필요한 수량은 많은데 박람회 마지막 날이라 다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열심히 발품 팔아야지. 어떻게든 구해 줄게. 걱정 마.”
정 안되면 인맥이라도 동원해야지.
“그래, 어서 가자고, 친구!”
셋은 차에서 내렸다.
다닥다닥 늘어선 부스가 거대한 광장을 메우고 있다.
오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가만 보자, 일단 마나 모스펫이랑, 서플라이랑… 저기다.’
수호가 한 부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예, 그렇게 주세요. 그리고 마나 커패시터도 필요한데요.”
“마나 커패시터요? 몇 개나 필요하세요?”
“50개요.”
“50개나요? 그걸 다 어디 쓰시려고 그러신대.”
“있으세요?”
“무리예요. 한두 개면 옆 가게에서라도 찾아봐 드릴 텐데, 그만큼은 도저히 못 구해 드리겠네요.”
“그럼 아까 말씀드린 것만 결제해 주세요.”
물건을 산 수호가 부스를 나섰다.
그 후로도 수호는 여러 부스를 돌면서 부품을 샀다.
“아이고, 사장님. 50개라니, 지금 여기 남은 거 싹 다 긁어도 그 정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럼 있는 만큼이라도 주세요.”
“저희 가게엔 다 팔리고 없어요. 죄송합니다.”
수호가 부스에서 돌아 나왔다.
『마나 커패시터가 도통 없구나. 마지막 날이라 그런 것인가? 라고 윌슨이 말했느니라.』
“일단 구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사고,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고맙다. 라고 윌슨이 말했느니라.』
“윌슨이 말했느니라는 좀 빼도 되지 않을까?”
그 뒤로도 수호는 여러 부스를 돌았다.
“마나 커패시터 있나요?”
“마나 커패시터 사려고 왔는데요?”
그런 수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는 수호를 먹음직스럽게 쳐다봤다.
‘저놈 호구다!’
실제로도 수호는 어리바리해 보였다.
모르는 물건을 이름만 외워서 사려니 티가 났다.
게다가 투명화한 발룡이와 대화하느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으니…….
‘멍청한 호구는 벗겨 먹어 주는 게 예의지. 흐흐.’
눈동자의 주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한데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100년은 지나야 나올 법한 마도 공학의 대가가 투명화한 채 수호 옆에 있다는 점이었다.
62화 윌슨 공방(1)
조선족 강청필은 비등록 각성자다.
중국에 살다가 각성한 그는 각성 순간 그 사실을 숨겼다.
‘각성 사실을 밝히면 끌려가서 노예 같은 신세가 될 거야.’
각성자 인권이 바닥인 중국.
하필이면 고유 스킬도 【최하급 현혹】에 불과했기에, 좋은 대우를 받지도 못할 터였다.
‘레벨을 올려야 해. 그러면 스킬이 성장할 수도 있으니까.’
강청필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던전에 들어갔다.
갖은 노력 끝에 2성 만렙을 달성했다.
스킬도 【하급 현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등록 각성자가 3성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넓은 중국에서도 큰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가자.’
강청필은 결심했다.
말이 통하고 가까운 나라 한국.
‘한국에서 크게 한탕 하는 거야.’
그곳에서 현혹 스킬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이다.
상황이 나빠지면 중국으로 도피할 수 있으니, 돈을 벌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강청필은 한국으로 왔다.
궁리 끝에 한탕 할 방법도 마련했다.
‘이거다! 마도 과학 박람회!’
각성 전, 강청필은 마도 과학 오타쿠였다.
당연히 마도 과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내 마도 과학 지식에 현혹 스킬이 더해지면, 저긴 내 놀이터나 다름없지!’
강청필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참가한 박람회.
강청필은 드디어 기다리던 대어를 만났다.
“고객님, 마나 커패시터를 구하신다고요?”
강청필이 한껏 친절한 표정으로 ‘대어’에게 접근했다.
“예, 근데 누구신지?”
“당연히 박람회에 입점한 마도 과학자지요. 하하. 본사에서 최고 품질의 마나 커패시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박람회에 출품했습니다. 고객님께서 다른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우연히 듣게 되어서 말을 걸었습니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닌데,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강청필이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근데 마나 커패시터가 있습니까?”
대어가 예상대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
굳이 현혹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암요, 본사의 주력 상품이 마나 커패시터인걸요. 충분한 물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스로 같이 가시죠. 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강청필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박람회 구석에 마련된 부스를 향해 앞장섰다.
* * *
“강 씨, 또 손님 모셔 왔나?”
“강 씨가 워낙 사람이 좋으니까, 손님도 많구먼. 껄껄.”
“이 사람아, 어디 강 씨가 착하기만 해서 그렇나? 똑똑하고 물건도 좋으니까 손님이 꼬이는 거지.”
“그도 그렇구먼.”
주변 부스에 입점한 출품자들이 강청필과 수호를 보며 한마디씩 떠들었다.
언행에 강청필에 대한 호의가 잔뜩 묻어난다.
‘각성자라서 괜찮으려나 싶었더니. 별문제 없겠는걸?’
수호는 처음부터 상대가 각성자임을 눈치챘다.
감각 스탯이 강청필의 마력을 감지해 내었으니까.
반면 강청필은 수호가 헌터임을 몰랐다.
‘아이템을 거의 착용하지 않았으니, 저쪽에서는 내가 헌터인 줄도 모르겠지.’
수호는[광룡의 발톱]만 착용한 상태였다.
착화감과 내구도가 좋아서 평소에도 운동화 대용으로 신고 다녔다.
‘어쨌든 마나 커패시터만 구할 수 있으면 되니까.’
수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강청필도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대어가 어망에 들어왔다.’
이곳 부스 주변은 강청필의 사냥터였다.
박람회 기간 내내 주변 출품자들에게 【하급 현혹】을 걸어 놓았다.
스킬 위력이 약해서 검은 걸 희게 믿을 정도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웬만한 상황에서는 강청필의 편을 들어 줄 터였다.
“이번에는 무슨 손님인가, 강 씨?”
“강 씨가 많이 팔면 이상하게 내가 다 기분이 좋더라니까. 껄껄.”
아군의 응원을 들으면서 강청필이 낚시를 시작했다.
“고객님.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부스 입구에 놓인 테이블 겸 유리 진열장.
강청필은 그쪽으로 수호를 이끌었다.
“물건을 볼 수 있을까요?”
“암요,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강청필이 뒤편 서랍장을 열었다.
수호에게는 안 보이는 각도였다.
‘가만 보자, 마나 커패시터가…….’
그곳에는 각종 부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엉망진창.
작동시키면 금세 망가질 물건이었다.
강청필이 대충 모양새만 갖춰 만들어 둔 탓이다.
강청필이 마나 커패시터를 찾아 수호에게 내밀었다.
“고객님, 여기 있습니다. 한번 구경해 보십시오.”
“예.”
수호가 물건을 받아들었다.
“잘 아시겠지만, 마나 커패시터라고 해서 모두 같은 마나 커패시터가 아닙니다. 같은 규격 같은 출력이라고 말은 하지만, 세상에 같은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고객님이 들고 계신 마나 커패시터야말로,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최고의 물건…….”
강청필이 끝없이 물건 자랑을 늘어놓았다.
마나 커패시터를 든 수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것 봐라?’
강청필에게서 한 가닥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수호의 몸으로 파고들려고 시도하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흩어졌다.
‘스킬의 일종인 것 같은데, 마법 방어력에 막히고 있어.’
[광룡의 발톱]에는 마법 방어력이 붙었다.
상대의 기운은 그 탓에 실패하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러니까 스킬로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말이지?’
직접적인 충격이 없는 것을 보니 정신 계열 스킬인 듯하고.
『하찮은 인간 놈이 수작을 부리고 있군.』
발룡이의 목소리가 수호의 생각을 뒷받침했다.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문득 떠오르는 의문도 금세 해결되었다.
윌슨이 수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입도 벙긋거렸다.
『그건 가짜다. 형편없이 만들어 놓은 모조품이니라. 본좌의 전능안을 피해 갈 수는 없지.』
‘윌슨이 알아낸 걸 왜 네가 알아낸 것처럼 말하는데?’
날개는 또 왜 활짝 펼쳤냐?
텔레파시를 보내 봤지만 발룡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상황 파악은 끝났다.
‘스킬로 사기 치고 다니는 놈이었구만.’
꼴을 보아하니, 저놈에게 제대로 된 물건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입맛이 썼다.
“어떻습니까? 최고지요? 개당 1천만 원! 가격이 타 업체보다 약간 비싸지만 물건은 그 이상으로 좋습니다. 그럼 바로 결제하시겠습니까?”
강청필의 말이 들려온다.
잔뜩 신이 난 듯한 목소리다.
“이거 제대로 된 물건은 맞습니까?”
강청필은 깜짝 놀랐다.
‘이 새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현혹이 안 통한 거야?’
이상하게 정신력이 강해서 현혹이 안 통하는 상대가 있었다.
한데 하필 다 낚은 대어가 그런 놈이라니.
‘안 돼! 어떻게 낚은 놈인데.’
강청필은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고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십시오, 누가 봐도 최고의 물건입니다.”
강청필의 목소리가 컸다.
주변 출품자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뭔데? 설마 물건 안 좋다고 손님이 뭐라 그런 건가?”
“그럴 리가 있나. 강 씨네 물건이 얼마나 좋은데.”
“이때까지 그런 손님은 한 명도 없었잖아. 돈 있는 대로 사 가기 바빴지.”
아군의 지원 사격이 날아들었다.
강청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상대는 주변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별 부품 상태로도 작동되죠? 한번 작동시켜 봐도 됩니까?”
“…그야 다, 당연한 일이지요. 해 보십시오.”
기호지세.
강청필은 물러서는 대신,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현혹을 시전했다.
허사였다.
수호는 전혀 현혹당하지 않았다.
“이거 출력이 엉망인데요? 빛 흐릿한 것 좀 보세요. 이래서 제대로 쓸 수나 있겠습니까? 곧 망가질 것 같은데.”
강청필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스킬이 통하지 않으면 말발로라도 이겨 내야 한다.
강청필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객님, 빛이 흐리다고 출력이 낮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좋은 마나 커패시터일수록 빛이 오히려 옅어요. 모든 마력이 부품의 기능에 오롯이 사용되고 있다는 소립니다. 쓸데없이 빛을 발하는 데 낭비되는 마력이 없다는 뜻이지요.”
개소리였지만 언뜻 일리 있어 보인다.
실제로도 저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속이면 돼. 속이면 넘어올 수밖에 없어.’
처음 봤을 때부터 잘 모르는 티가 팍팍 나던 수호였다.
현혹은 안 통해도 말로 속여 넘길 수 있다.
강청필은 확신했다.
하나 수호는 들리는 말을 따라 하고 있을 뿐.
진짜로 강청필이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멍청한 소리. 마나 커패시터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발룡이가 윌슨의 말을 옮겼다.
수호가 그것을 따라 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마나 커패시터가 빛을 발하는 것은…….”
강청필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 이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아?’
문외한이 분명했다.
한데 갑자기 마력 커패시터의 구동 원리를 줄줄 읊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의아했지만 강청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젠장, 우긴다. 무조건 우겨야 해.’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손님, 어디서 허황한 소리를 듣고 오셨나 본데 틀린 정보입니다. 증거도 없고 증명도 안 된 낭설에 불과합니다.”
“증거요? 마나 커패시터 하나만 더 줘 보십시오.”
“……?”
“증거, 보여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강청필이 마지못해 서랍장으로 향했다.
* * *
잠시 후, 수호는 2개의 마나 커패시터를 손에 넣었다.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품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려라.』
수호는 발룡이의 말에 따라 움직이려 했다.
섬뜩!
그때 수호의 예리한 감각이 경고했다.
‘왠지 불길한데.’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협회의 의뢰로 갔던 던전.
마물의 본체를 태우기 위해 발룡이의 브레스를 빌려야 했다.
그곳에서 수호는 참담한 상황을 겪었다.
‘안 돼. 말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듣고 나서 움직이자.’
심연의 불꽃이여 현신하라!
수호는 당시에 어쩔 수 없이 내뱉었던 대사가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하는 것이냐? 왜 가만히 있는 거지?』
‘1년쯤 굶고 싶지 않으면 어서 뒷 내용을 이야기해!’
강렬한 살기를 담은 텔레파시가 쏘아졌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한 발룡이가 말을 이었다.
『가슴 앞에 들어 올린 다음에 두 부품을 부딪쳐라. 그러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보이느냐, 이 충격의 임펙트가! 이것이 너의 파멸을 알리는 종소리다!』
이 자식이!
발끈하려던 수호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미리 움직이지 않아서. 후우…….’
눈앞의 사기꾼 따위보다 훨씬 큰 함정을 피해 낸 것이다.
‘일단 시작하자.’
발룡이와는 따로 대화를 나누면 될 터.
잠시 멈춘 사이, 사기꾼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다.
수호는 서둘러 두 부품을 양손에 나눠 쥐었다.
“마나 커패시터는 양손에 들고 이렇게 충돌시키면.”
퉁-
마나 커패시터가 서로 부딪쳤다.
“이렇게 서로의 마력이 자극받아 빛이 퍼져 나오죠. 잘 만든 마나 커패시터라면 출력이 같은 것들끼리는 당연히 빛의 크기가 같아야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깜빡거려서도 안 되고요.”
“마, 말도 안 되는…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강청필은 진짜로 모르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어? 저거 진짠데. 이번 달에 발표된 학술지에서 본 내용이야.”
“그래? 정말?”
“그렇다니까. MIT 연구진이 밝혀낸 내용이라던데. 듣다 보니 기억이 나는구먼.”
출품자들이 웅성거린다.
【하급 현혹】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들지는 못한다.
증거가 나오자 여론이 바뀌었다.
“이상하네, 설마 진짜 강 씨네 물건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학술지에 나왔다며?”
“학술지에 나왔으면 진짜겠지.”
“손님이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잖아.”
강청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저런 최신 정보까지 어떻게 아는 거냐고!’
지구에서는 최신 정보지만 윌슨에겐 수십 년 전 기술이다.
오히려 지구의 기술 수준에 맞추느라 고민해야 했다.
웅성웅성.
소란은 줄지 않았다.
강청필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어쩔 수 없어. 힘으로 해결한다.’
그다음에 곧바로 한국을 뜬다.
결심한 강청필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손님. 수량이 많다 보니 불량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필 구경하라고 드린 물건이 불량이라니,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안으로 따라오십시오. 뒤편 창고에서 다른 물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기서도 불량이 생기면 저를 아예 사기꾼으로 고소라도 하십시오. 하하하.”
입으로 안 되니까 몸으로 해 보자는 소리 맞지?
수호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갑시다. 뒤로.”
수호도 남의 말 옮겨가며 말싸움했더니,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63화 윌슨 공방(2)
부스 뒤편에 마련된 작은 창고.
철컹.
수호가 들어서자 강청필이 문을 거칠게 닫았다.
“하, 내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며 노려보는 강청필.
수호가 짧게 대답했다.
“뭐가?”
“뭐가? 이 새끼가 혓바닥을 어디서 잘라 먹었나?”
“됐고, 어서 시작해.”
“뭐? 진짜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강청필이 목을 두둑 꺾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레벨 업을 하다 보면 별의별 상황을 다 겪는다.
그 가운데 2성 만렙까지 찍었으니, 산전수전 다 겪은 셈.
강청필은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너무 태연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웬만하면 몸은 성히 돌려보내 주고 싶었거든? 재미 삼아 사람 죽이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근데 자꾸 뻣뻣하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말과 함께 강청필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나도 그걸 들어 보고 행동 방침을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수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놈이 살인마인지, 자기 말대로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놈은 아닌지 정도는 파악해야 수호도 손속의 정도를 정할 테니까.
“한국 놈들이 그래도 중국 놈들보다 좀 덜 미친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됐고, 가진 거 다 내놓으면 내가 죽이지는 않을게. 털어놔 봐. 마지막 기회야.”
강청필이 단검을 흔들며 물었다.
“일단 죽이고 보는 놈은 아니었구나. 정말 목적은 돈인가 보네.”
그럼 나도 죽을 정도로는 안 할게.
말이 끝나는 순간, 수호의 손에 한 자루 창이 나타났다.
주로 ‘안 죽일 때’ 쓰는 [보급형 강철창]이었다.
“헉! 허, 헌터였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이템.
강청필은 그제야 눈치챘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퍽-!
순식간이었다.
번쩍하는 순간 강청필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윽- 씨발, 똥 밟았다.’
상대는 단순히 헌터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강청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자였다.
‘사, 살려면 무슨 수라도 써야…….’
이대로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데도 없다.
최악의 경우, 중국에 보내져 수용소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강청필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곧 강청필의 입이 열렸다.
“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 내가 상왕련주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야! 상왕련주 아들이 나한테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어이!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박람회를 주최한 곳이 상왕련이었다.
한탕 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기사에서 본 상왕련주의 이야기를 내키는 대로 떠든 것이다.
‘어, 어떻게든 이 자리만 벗어나면…….’
강청필이 염원했다.
한데 상대는 말이 없다.
묘한 표정으로 강청필을 바라보고 있다.
‘토, 통했나?’
강청필은 자신의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흉악한 몽둥이 안 집어넣어? 이, 이 새끼야! 내가 그저께도 상왕련주 형님이랑 밥도 같이 먹고……!”
수호가 강청필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그래? 나는 차는 마셔 봤어도 밥은 같이 못 먹어 봤는데. 근데 당신이 현수한테 삼촌 소리 듣는다고? 그러기엔 당신 나이가 너무 젊어 보이는데.”
“뭐? 그, 그게 무슨?”
수호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현수야. 여기 부품 박람횐데, 어떤 사기꾼이 널 잘 안다네. 네가 자길 삼촌이라 부른대. 너희 아버지랑도 친하다고 그러고. 그런 사람 없다고? 그럴 줄 알았어. 온다고? 안 그래도 되는데.”
전화를 끊은 수호가 강청필을 바라봤다.
“당신 조카가 온다네.”
“뭐?”
놀라고 있는 강청필에게 수호가 덧붙였다.
“근데 당신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한테 사기 치려 든 건 똑같잖아? 그러니까 하던 일은 마저 하자고.”
“자, 잠깐만!”
『소음은 신경 쓰지 말거라. 크큭-』
창고 안에서 강청필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형, 죄송해요. 저런 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정현수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뭘, 네가 사기 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저희 상왕련이 주체한 행사인데 형이 피해 보실 뻔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도 있을 텐데, 범인 잡아 주셨으니 상왕련에 도움을 주신 거죠. 감사해요.”
“괜찮대도.”
거듭 인사한 정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오셨어요?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셨으면 됐을 텐데.”
“번번이 신세 지는 것 같아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건 그냥 내가 사려고 했지.”
반은 사실이었다.
나머지 반은.
‘상왕련에 내 정보가 너무 많이 흘러들어 간다 싶기도 하고.’
생필품과 식자래를 대량으로 납품받는 일.
시멘트 등 건설 재료를 구매한 일.
게다가 마도 과학 부품을 사들이는 것까지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물건 못 구하면 연락할 생각이었으니,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박람회에서 물건을 다 구하지 못하면 정현수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윌슨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형. 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라니까요. 사기꾼 때문에 물건 다 못 구하셨죠?”
“응, 아직.”
“그럼 그건 제가 구해 드릴게요. 말씀만 하세요.”
“그래, 여기.”
수호는 정현수에게 리스트를 넘겼다.
“이 정도면 오늘 안에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바로 보내 드릴게요.”
“고맙다.”
멋쩍게 웃은 정현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저 이번에 1성 졸업했어요.”
“축하해. 열심히 했나 보네.”
“예. 그래서 말인데…….”
“왜? 뭔데 그렇게 말을 끌어?”
“혹시 괜찮으시면, 형이랑 2성에 같이 갈 수 있을까 하고요. 하하. 너무 염치없으려나?”
가만 보자.
‘2성 졸업까지 2렙 남았어.’
던전에 들어가면 어차피 몬스터를 모조리 때려잡고 나올 터다.
정현수를 데리고 들어가도 2성 졸업은 문제없다.
‘안 데리고 갈 이유가 없지. 게다가 말하는 걸 보니, 던전도 이미 준비해 놓은 것 같은데.’
빠르게 생각을 마친 수호가 입을 열었다.
“좋아, 같이 가자.”
“아! 고마워요, 형한테 피해 안 가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넌 인마, 늘 1인분은 잘해 놓고 왜 그리 겸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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