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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RM의 기간트 라이더 001화
이렇게 살 순 없다.
소년의 삶은 불행했다.
5살.
그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9살. 그의 아버지는 뜨거운 쇳물을 뒤집어 쓰고 타 죽었다.
10살.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기 시작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눈앞에 떠오르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말소리가 귀에 들렸다.
“귀신에 들린 거야. 떨어져. 재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성명식을 치르는 10살 이전에 부모님을 잃는 바람에, 그에겐 이름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냥 미친놈이나 X신이라고 불렀다.
원래라면 가족처럼 친해야 했을 또래 분반원들도 그를 두고 심한 악담을 했다.
“저 미친놈 있잖아? 살처분하는 게 맞지 않아? 식량이 아깝다고.”
“살처분까진 몰라도 죽어버리는 편이 낫긴 하지. X신 새끼가 데이비스 작업반장 덕에 꿀보직에서 꿀을 쪽쪽 빨고 있잖아.”
“근데도 저 새끼는 맨날 죽상이지.”
“저거 실은 데이비스 반장 자식이라는 말도 있던데?”
“어? X발? 그럼 저 새끼 어미랑 데이비스 반장이 뒤로?”
“X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앞뒤가 딱딱 맞네!”
이런 말을 들어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새삼 울지도 않았다.
‘그만 죽을까?’
‘내가 죽으면 다들 행복해질 텐데.’
‘그치만 내가 죽으면 데이비스 아저씨가 슬퍼하겠지.’
그저 미안해서 차마 죽지도 못하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을 뿐이었다.
19살 생일, 그가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우울함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아…… X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불현듯 기억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일단 떠올리고 난 다음에는 이걸 왜 잊어 버렸지? 하고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그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던 순간이 바로 그랬다.
‘X발…… 지금 상황이 아주 X 같은데?’
그리고 일단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여태까지의 상황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 순 없지.’
전생의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트레이너 강거한이었으니까.
‘왕따 인생도 문제지만…… 이건 그냥 세상부터가 문제잖아? 미쳤어? 신분제 사회라니.’
전생을 기억해내자, 평생을 당연하게 여겼던 이 세상이 갑자기 아주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부르조지 남작령. 그의 신분은 영주인 부르조지 남작에게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민(役民).
분반원들이 부러워하는 그의 보직은 ‘조각 쌓기’ 작업이었다.
13살. 처음으로 보직 배정을 받았을 때 데이비스 아저씨는 이렇게 지시했다.
-하얀 금속조각을 맨 밑에 깔아라. 그 위에 초록색 깔고 검은색 깔고 다시 하얀색.
-아저씨…… 여기 너무 더워요…….
-원래 그런 거다. 계속해.
-언제까지요?
-종이 칠 때까지. 대략 15시간이다. 식사 휴식은 15분씩 두 번 있다.
끝도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쏟아지는 스팀.
눈앞을 빙글빙글 돌게 하는 끝없는 단순 반복 작업.
강거한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딴 보직이 부러워서 살처분 운운하는 세상이라니…….’
더 우울한 사실은 분반원들의 불평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강거한을 노려보며 불만을 터뜨렸다.
“X발. 누구는 용광로 앞에서 쇳물을 펄펄 끓이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덩어리를 옮기고, 두드리고 하는데…… 누구는 가만히 서서 철조가리나 쌓고 있고. X나 부럽네 진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강거한이 하는 일은 그들이 하는 일에 비하면 달콤한 디저트와 다를 바 없었다.
사실 강거한의 아버지도 그런 작업을 하다가 쇳물을 뒤집어쓰고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이 더 불행하다고 해서 강거한이 불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강거한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벗어나야 된다. 어떻게든 역민이라는 굴레를 끊어야 돼. 이 엿 같은 동네를 벗어나는 거다.’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에서 벗어나는 것.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 치 떨리는 동네를 떠나는 것.
그게 강거한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었다.
다행히 적절한 방법이 있었다.
‘1개월 뒤에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 테스트가 거행된다.’
기간트.
인류의 운명을 바꿔 버린 최강의 마도병기.
그런 기간트를 조종하는 라이더의 후보생으로 발탁되면 그것만으로도 준귀족 신분인 기사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후보생 테스트만 통과해도 사람 같은 삶이 보장 되리라.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강거한은 계획을 세웠다.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이 된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의지력 : 2.1/18]
강거한은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툭하면 흔들리는 의지.
만성적인 무력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먼저 나오는 마음의 상태.
사람만 보면 심장이 쿵쿵 뛰고 집중이 흐트러지는 긴장 장애.
강거한은 이런 신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도 경험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온 소년 강거한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든 족쇄.
그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난관이었다.
‘한 번 극복했던 것. 또 극복할 수 있다. 더구나 도움이 되는 능력까지 있으니까……!’
필요한 건 두가지였다.
첫째, 충분한 영양과 약성분 섭취.
둘째, 운동.
* * *
부르조지 남작령의 역민들 사이에서는 때 아닌 운동 열풍이 불어 닥쳤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쿵! 쿵! 무거운 공구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소리가 남작령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두고 봐라. 내가 기간트 라이더가 되면, 너네 나중에 다 자유민 만들어 줄게! 너네 빌리 형님 기억나지? 그 형 기프트를 각성해서 어떻게 했냐?”
“그 가족들 전부 자유민 됐잖아.”
“그래. 기프트만 각성해도 그 정도인데 기간트 라이더가 되면 어떻겠냐? 니들은 나한테 절해야 돼.”
신체 건장한 소년, 토마스가 꽉꽉 채운 무거운 공구함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가 쿵! 내려놓고는 친구들에게 으스댔다.
“마성(魔性)의 돌? 그까짓 것도 번쩍 들어줄 테니까.”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 테스트는 간 단했다. 마성의 돌을 머리 위로 들고 3초를 버티면 끝.
이때 중요한 것은 힘보다는 의지였다.
마을 어른들은 ‘마음 굳게 먹어라. 조금만 의지가 약해져도 뒤지는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분상승의 꿈을 꾸는 16세~19세의 소년들에게는 그런 경고가 들리지 않았다.
힘 좀 쓴다 하는 녀석들은 죄다 라이더 후보생이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가며 운동을 할 뿐이었다.
강거한도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또래 아이들의 반응은 싸늘했지만.
“저 X신은 또 뭐 하냐?”
강거한과 같은 9분반 소속의 토마스는 강거한을 같잖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진짜 제대로 미친 모양이더라. 어제도 풀을 잔뜩 뜯어가지고 먹고 앉았더라니까?”
강거한은 너덜거리는 가죽띠로 만든 등짐에 초록색 풀을 잔뜩 짊어지고 그들 앞을 터덜터덜 지나가고 있었다.
“야! X신아!”
토마스는 땅에 침을 탁! 뱉고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나서서 강거한의 옆구리를 발로 내질렀다.
“억!”
숨 막힌 신음성을 들이키며 나동그라지는 강거한. 이번 생의 강거한은 무척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허깨비처럼 몸이 말랐다.
토마스는 볼품없이 땅을 구른 강거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하냐? 귀신 들린 새끼가…… 재수 없으니까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안 했냐?”
강거한은 땅을 구르다가 겨우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비타민…….”
“……뭐?”
“오메가쓰리…… 단백질…… 그리고 항우울제…… 먹어야 한다.”
“뭐, 뭐야? 이 새끼 진짜 돌았나?”
강거한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원래 같았으면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을 것이다. 토마스는 그런 그를 자근자근 밟았을 테고.
하지만 강거한이 대답이랍시고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어떤 광기를 느낀 것이다.
멀어져 가는 강거한의 뒷모습. 등짐에 잔뜩 실린 초록색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누군가 말했다.
“저 새끼 죽으려는 거 아냐?”
토마스가 돌아봤다.
“죽는다고?”
“그래. 저 새끼 주제에 목을 맬 용기도 없을 거고, 독초라도 찾아서 먹고 죽으려고 저러는 거 아냐?”
자살이라니…….
토마스는 묘한 눈으로 강거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땅에 침을 탁 뱉고 말했다.
“아, 재수 없게…… 하여튼 엿 같은 동네야. 빨리 떠야지.”
토마스의 친구들이 히히거리며 끼어들었다.
“야, 야, 진짜 너 라이더 후보생 되면 우리 잊으면 안 된다?”
토마스는 그런 친구들의 관심을 즐겼다.
“아, 당연하지 자식들아! 이 형만 믿어라!”
* * *
시간은 헐떡거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마침내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 테스트가 진행되는 날, 부르조지 남작은 16세 이상 20세 미만의 모든 역민을 한 장소에 불러모았다.
1,000명이 넘는 소년 소녀들. 단상 위에 올라 그들을 내려다보는 부르조지 남작의 등 뒤로는 새하얀 증기를 쉼 없이 뿜어내는 남작성이자, 회로단조강 공장이 보였다.
치익-
치익-
증기가 솟아오르는 남작성 망루에는 마총 저격수들이 총을 품에 안고 앉아, 소년 소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내려다보았다.
조회 시간에 줄을 맞춰 세우는 선생님들처럼 분반장들이 소년 소녀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그중에 데이비스 분반장도 있었다.
대열을 오가던 데이비스 분반장은 강거한의 앞을 지나가며 속삭였다.
“내 말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데이비스 분반장은 강거한이 후보생 테스트에 지원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길길이 화를 내었다.
자식이 없는 데이비스 분반장은 어릴 적 절친의 아들인 강거한을 자신의 아들처럼 신경 써왔다.
물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자상한 모습과는 머리카락과 발가락만큼이나 차이가 있었지만.
“쳐 뒤지기 싫으면 쭈그려 있으라고. 응?”
그는 늘 이렇게 고압적이었고 항상 화가 나 있었다. 그에게 섬세한 마음이 있었다면 강거한이 여태 이름도 없이 살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은 고맙습니다. 아저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거한은 데이비스가 자신을 많이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들밖에 없는 이 영지에서, 분반원들의 불만을 사면서까지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바로 데이비스였으니까.
데이비스 아저씨는 그저 젊은 시절에 후보생 테스트를 본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기에 강거한을 말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강거한은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도 실은 이렇게 살기 싫을 거예요. 아마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겠지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다. 21세기 지구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건 이 라니아케아 대륙에서는 개소리였다.
역민들에게는 행복추구권 따위는 없었다. 이들은 모두 만성적인 도파민과 세로토닌 부족을 겪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감정 자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강거한은 유일한 아군인 데이비스 아저씨에게도 ‘사람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꼭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내,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왕국에서 파견한 시험관이 상자를 열고 커다란 집게로 마성의 돌을 꺼냈다.
치이이이-
후우우.
치이이이익
쿠우우.
상자가 열리는 순간, 탄내가 났다.
고작 달걀만 한 붉은 돌덩이가 풀 숲에 몸을 숨긴 호랑이처럼 으르렁 으르렁 숨을 들이켰다. 내쉬듯 부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 같기도 한 것이 크르르 울어댔다. 그때마다 증기가 뿜어지고 쇠가 지글지글 식는 소리가 났다.
부르조지 남작은 탐욕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소년 소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은 분반장들이 추천한 이들부터 순서대로 나와서 들어보도록 한다. 열심히 해라. 너희 중에 부르조 지의 기상을 떨치는 이들이 있다면 내 따로 크게 포상할 거니까.”
크르르.
치이이이.
쿠우우.
치익-
하지만, 정작 악마처럼 증기를 뿜어내는 마성의 돌을 앞에 둔 소년 소녀들은 겁을 먹고는 표정이 얼었다.
다만 한 명,
강거한만이 홀로 눈을 빛냈다.
결의를 가득 담아서.
1RM의 기간트 라이더 002화
마성의 돌
강거한.
지난 생의 그는 보디빌딩 선수로 활동하며 짧은 전성기를 누렸었다. 하지만 불행한 교통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제발…… 제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주세요.’
간절했다. 그에겐 몸이 전부였다. 더 크게 더 아름답게 키울 수 있는 몸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내가……! 내가 어떻게 이 몸을 만들었는데!’
몇 년을 하루같이 무거운 쇠를 들며 얼마나 큰 고통을 삼켰던가?
그 모든 노력과 꿈이 찰나의 사고로 인해 날아가 버렸다.
‘누가! 보상금! 보험금! 그딴 거 달래? 내 몸 돌려내! 원래대로 고쳐 놓으라고!’
처음에는 분노했고
그다음엔 좌절했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뒤엔 지독하고 끈질긴 재활훈련을 했다.
‘……결국, 여기까진가.’
하지만 현저히 떨어진 근력과 유연성은 결국 어떤 수준 이상으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선수생활은 당연히 포기해야만 했고, 인생의 목표였던 크고 아름다운 몸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허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죽은 게 강거한의 이전 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거한은 행복했다.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어!’
땀을 흘리며 하는 운동.
거대한 근육.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후끈후끈해졌다.
‘지난 생보다도 훨씬 크고 더 멋진 몸에 도전해 볼 수 있어!’
두 번째 기회.
역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호구로 아는 말라깽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강거한은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감을 부채질하는 행운도 있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글로 적혀 있으면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한글을 읽지 못하는 바람에 하늘이 내린 선물을 여태 미쳐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전생을 기억해 낸 지금은 그 선물을 읽을 수 있었다.
가령 길에 흔히 돋아난 잡초를 보면 이런 정보가 허공에 떠올랐다.
[녹티아 그라스]
소량의 비타민 B가 포함되어 있다.
1일 최적량의 비타민 B 섭취까지 300g 남음.
어려서부터 그를 괴롭혔던 눈앞의 환각들이 다 이런 식이었다. 유용한 영양정보로 가득했다!
‘대박! 대박이다.’
강거한은 이 능력에 감동했다.
‘온갖 비타민제와 알약을 대체할 길이 생겼어. 오, 하늘이시여!’
보디빌딩의 절반이 쇠를 들어서 근육에 손상을 주는 거라면 나머지 절반은 손상된 근육이 더욱 크고 단단하게 합성되도록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영양정보창이 눈에 보인다면? 심지어 적정 섭취량까지도 알려준다면?
이제 남는 건 행복한 쇠질과 보람찬 근성장뿐!
‘이런 엄청난 능력이라니…….’
남들은 물건을 공중에 띄운다거나 허공에서 화염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초능력을 좋아할지 몰라도, 강거한에게는 지금 주어진 능력이 최고였다.
‘이걸로 우울증도 치료할 수 있어. 게임 끝이지.’
강거한은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최고야.’
영양정보창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운동 관련 능력과 신체정보도 보였다.
[강거한]
키 : 176cm
체중 : 55kg
의지력 : 4.8(+6)/18
근력 : 6.8/7
지방량 : 6.36kg
근육량(골격근량) : 20.03kg
‘키 176에 체중 55키로. 멸치 중의 멸치군…….’
하지만 그거야 앞으로 개선해나가면 될 것이고, 지금은 이 신비한 능력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바디가 안 부럽다. 아니지. 의지력이랑 근력도 수치화되니까 인바디 보다 훨씬 낫다!’
강거한은 이것을 인바디창이라고 불렀다.
‘영양정보창’과 ‘인바디창’.
강거한은 이 두 가지 능력을 이용해서 빠르게 우울증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는 의지력이 고작 2.1에 불과했다.
우울증 때문에 본래는 18까지 올라갈 수 있는 수치가 2.1까지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영양정보창 덕분에 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약물치료를 할 수 있었지.’
우울증은 결국 도파민이나 세로토 닌과 같은 뇌 속 신경전달 물질이 부족해 생겨나는 질환이었고, 적절한 약성분을 섭취하면 빠른 개선이 가능했다.
강거한은 지난 한 달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데쳐 먹었던 잡초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푸리아 그라스]
뇌 속 세로토닌의 유지를 돕는다.
1일 최적량의 세로토닌까지 2kg 남음.
말이 2kg이지. 고기도 2kg을 먹기가 힘든데 풀은 어떻겠는가? 하지만 강거한은 그걸 해냈다.
의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매일 엄청난 양의 풀을 뜯고 데쳐 먹었다.
그렇게 달성한 의지력 수치였다.
[의지력 : 4.8+(6)/18]
의지력 자체도 올라왔고, 항우울제처럼 복용한 푸리아 그라스가 6포인트를 보조해 주어서 최종적으로 10.8포인트의 의지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제야 강거한은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사람 노릇이 가능하다.’
본래 강거한이 타고난 최대 의지는 18포인트로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처럼 때론 접질리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하는 것.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아버지마저 비극적으로 잃어버렸던 강거한의 마음은 오래전에 부러졌던 것이다.
부러진 다리로 걸을 수 없듯이 부러진 마음으로도 걸을 수 없었기에 의지력은 바닥을 치고 평생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아왔다.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 들어 올리기도 쉽지 않았던 마음의 상태.
하지만 지금, 꾸준히 섭취한 대량의 푸리아 그라스가 강거한의 깁스와 목발이 되어주었다.
이제 강거한은 걸을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나 다시 한번 도전하고 꿈꿀 수 있었다.
영양정보창과 인바디창이라는, 21세기의 지구가 부럽지 않은 능력도 있었다.
무엇이 두려울까?
그렇기에,
‘의지력 10.8포인트. 근력 6.8포인트. 절대 평균보다 그리 나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반드시 들어 올린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아.’
모두가 마성의 돌 앞에서 얼어붙었을 때, 강거한은 오히려 그렇게 투지를 불태웠다.
* * *
부르조지 남작은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뭐 해! 다음!”
분반장들이 추천한 인재 10명 중에 벌써 6명이 실패를 했다.
다들 힘깨나 쓰게 생긴 소년 소녀들이었지만, 마성의 돌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는커녕 무릎까지 올리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피를 토하고 기절하기까지 했다.
모여 있던 소년 소녀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남작은 짜증을 냈다.
역민들 중에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이 나오면 왕국에서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만약 후보생이 나오지 않는다면 얻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공연히 공장만 하루 멈춰 세우고 건장한 역민들만 다치게 만든 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한 명.
한 명만 나와도 큰 보상이 주어질 텐데!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건 단순한 힘이 아니다! 의지! 의지가 가장 중요해! 죽을 각오로 해보란 말야!”
남작의 호령을 들으며 9분반의 토마스가 마성의 돌 앞에 섰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엄마……!’
어제는 친구들 앞에서 으스댔었다.
강거한에게 발길질을 하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오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엄마뿐이었다.
도망친 아빠 대신 매일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밤이면 가끔 흐느껴 우는 엄마. 종일 일하느라 피곤하면서도 토마스가 좋아하는 토마토를 어떻게든 구해와서 스튜를 끓여 주던 엄마.
‘……자유민이 되는 거야.’
빌리 형이 기프트를 각성했을 때, 빌리 형네 엄마가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턱!
토마스는 마성의 돌을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크흡!’
무거웠다. 간신히 복사뼈 위치까지 들어 올렸지만, 거기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걀만 한 마성의 돌이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래도 토마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마성의 돌이 아냐. 이건 황금이야. 근사한 옷이야. 이게 가족이고…… 무엇보다 자유야!’
토마스는 이글거리는 탐욕과 열망으로 마성의 돌을 쥐어짜듯 꽉 잡아 비틀며 들어 올렸다.
의지.
황금을 향한, 가족과 자유를 향한 불타는 의지!
“끄으으읍!”
오오오오!
장내가 술렁거렸다. 처음이었다. 무릎을 지나 가슴까지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린 사람은.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던 왕국 시험관도 관심을 드러내며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당겼다.
토마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이제 팔만 펴면 될 것 같았는데, 마성의 돌은 다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이이이이!
마성의 돌에서 굴뚝처럼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토마스의 코와 귀에서도 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돌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온몸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에 식은땀이 나고 몸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토마스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놓을 거야? 계속 여기서…… 그 X신처럼 살 거야?’
토마스는 강거한을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새끼.
나무토막 같이 살아가는 새끼.
그런데 가장 숨 막히는 건…….
‘그딴 쓰레기 새끼랑 내가 같은 처지라니……! 똑같은 역민이라니……!’
공포. 그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은 공포였다.
‘난…… 난 달라!’
엄마를 위해서.
자신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어도 좋아! 나도! 자유민이 된다!’
그 순간 툭! 하고 무언가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건 한계라는 단단하고 무거운 문이었을까?
“끄아아아!”
토마스는 이를 악물고 마성의 돌을 밀어 올렸다. 땀이 죽죽 흐르고,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팔이, 기적처럼 조금씩 조금씩 마성의 돌을 밀어 올렸다.
마성의 돌이 코끝을 스치고 마침내, 마침내…….
‘……어?’
쿵!
하늘이 보인다 싶더니 뒤통수가 번쩍했다. 팔은 펴져 있고, 마성의 돌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있었다.
‘들어 올렸나?’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파…….’
그러곤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강거한은 뒤로 자빠져 뻗어버린 토마스를 지켜보았다.
‘근성이 대단해.’
그냥 동네 일진 정도로 생각했는데…… 제법이었다. 마성의 돌을 거의 들 뻔했다.
이마 부근까지 들어 올렸지만, 딱 거기서 의지가 다 떨어져서 기절을 해버린 것이다.
‘요령이 있었다면…… 들어 올렸을 거야.’
그의 눈에는 쓰러진 토마스의 인바디창이 보였다.
[토마스. 의지력 : 0.1/15]
처음이었다. 저렇게 살뜰하게 의지를 다 써버린 녀석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의지가 3까지만 떨어져도 다리를 후들거리며 포기하기 일쑤였다.
‘남작의 말도 그렇고 역시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건, 근력보다는 의지인가?’
강거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데 의지력 15짜리가 실패했다. 나는 10포인트가 조금 넘고…….’
단순 계산으로 본다면 강거한은 절대 성공할 수가 없는 스펙이었다.
의지력이 13만 되어도 성공을 자신했을 테지만…….
‘믿을 건 경험과 요령뿐인가.’
하지만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었다.
해본다.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으니까.
“하…… 아깝군. 다음!”
강거한은 부르조지 남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분하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1RM의 기간트 라이더 003화
맨날 하던 것처럼
사실 의지를 다 쓰고 기절한 토마스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7번째로 나선 리셀은 그렇지 못했다.
[리셀. 의지력 : 7.4/11, 근력 : 15.7/16]
덩치도 크고 근육도 우람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크게 긴장을 한 것인지, 겁을 먹은 것인지. 그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의지력이 7.4로 크게 깎여 있었다.
“크아아! 으아아!”
용을 쓰며 마성의 돌을 무릎까지 들어 올렸던 리셀은 갑자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리셀. 의지력 : 2.9/11, 근력 : 10.7/16]
“흐악! 으아아아! 아아아악!”
“이런!”
시험관이 인상을 쓰며 리셀을 바라보았다.
“안 될 거 같으면 포기해.”
하지만 리셀은 포기하지 않았다.
“안 돼에! 안 돼! 이 길밖에는……!! 으아아아!”
그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마성의 돌을 들고 악을 썼다.
어떻게든 의지로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이의 도전은 만용일 뿐이었다.
강거한은 심각한 눈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성의 돌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건가? 이상할 정도로 근력이 빠르게 떨어진다……!’
[리셀. 의지력 : 1.7/11, 근력 : 8.9/16]
[리셀. 의지력 : 1.2/11, 근력 : 6.3/16]
[리셀. 의지력 : 0.8/11, 근력 : 3.9/16]
리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뒤늦게라도 포기하려고 했지만, 조금 늦고 말았다.
쿵!
그가 마성의 돌을 내던진 것과 근력과 의지력이 모두 1 이하가 되는 것은 동시였다.
치이이이!
리셀의 왼쪽 다리에서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더니 그 다리가 종이컵 구겨지듯이 콰직! 찌그러졌다.
구겨진 살과 튀어나온 뼈를 타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끄아아아!”
리셀은 비명을 질렀다.
“음…….”
시험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리셀을 한쪽으로 끌어냈다. 리셀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치료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험관 역시 혀를 쯧쯧 차고 말았을 뿐이었다.
살아서 불구가 되거나, 이대로 죽거나…… 어느 쪽이든 비참한 결말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작은 신경질적으로 ‘다음!’을 외쳤다.
하지만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8번째 9번째도, 그리고 마지막 10번째도 실패했다.
리셀의 충격적인 실패 탓에 소년 소녀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더 빨리 포기를 선언했다.
부르조지 남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제대로 된 놈이 하나가 없군! 의지도 없고 악도 없고 깡도 없어! 분반장들이 아주 널널하게 풀어줬나? 어쩐지 생산량이 예전만 못하다 했지!”
노골적인 질책에 역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없어?”
도박에서 지고 땅문서 가져오겠다는 사람처럼, 남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누구든 나서라! 나서서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자에게는 우리 공장의 회로단조강으로 만든 마법검 ‘샤펜트’를 선물하지. 라이더 후보생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검일 터!”
하지만 포상을 걸었음에도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셀의 다리가 처참하게 구겨지는 장면에 다들 겁을 먹은 것이었다.
남작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좋아. 말로 좋게 권했을 때, 듣지 않은 건 너희다. 날 원망하지 마라.”
치이이이-!
때마침 남작성에서 요란한 증기가 피어올랐다. 남작은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마처럼 등 뒤로 뿌옇게 번진 증기를 두르고 눈을 빛냈다.
“너. 너. 나와라.”
남작은 직접 역민들을 지목했다. 지목당한 역민들은 덜덜 떨면서도 감히 남작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강거한은 그들의 인바디창을 살폈다.
[모리. 의지력 : 6.5/9]
[캐리. 의지력 : 7.8/10]
강거한은 혀를 찼다. 의지력 수치가 너무 낮았다.
‘……이번엔 죽을지도 몰라.’
특히 모리는 아까 다리가 박살 난 리셀보다도 의지력 수치가 낮았다.
하지만 부르조지 남작은 차라리 죽으라면서 그들을 떠밀었다.
“본 남작이 이런 망신을 당하고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한번 해보자. 너희 중 누구라도 통과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하는 거다. 설렁설렁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거라. 들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들지도 못한 놈이 멀쩡히 살아남는다? 그 가족 전부에게 지옥을 보여주마.”
이미 부르조지 남작은 손절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귀족이었고 귀족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존재였다.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분명 성공하는 이가 나오긴 할 것이었다. 다만 그 전에 생겨날 인명피해들이 안타까울 뿐.
소년 소녀들은 남작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그 차갑고 메마른 공기를 느끼며 강거한은 자신이 나서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살펴볼 건 다 살펴봤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질리도록 했다.
남은 건 도전뿐.
강거한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
옆에 서 있던 데이비스 분반장이 강거한을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강거한은 그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품을 뒤질 뿐이었다.
모든 소년 소녀들이 일제히 강거한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머릿속엔 동일한 의문이 피어났다.
‘저 X신이 나선다고?’
‘아무도 못 나서는 이 상황에서?’
그때 강거한이 품에서 젖은 천 조각 하나를 꺼냈다. 코로 가져가 그 냄새를 맡았다.
흐읍-! 강거한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표 정을 일그러뜨리며 물러섰다.
며칠 푹 삭힌 오줌 냄새.
강거한은 오줌을 적셔 삭힌 천을 들고 그 냄새를 맡으며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강거한이 나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진짜로 돌아버렸구나.’
‘지 오줌 냄새를 맡는 미친놈이라니…….’
‘미쳐서 다행인가? 이 상황에서 나서주네.’
‘저거 죽고 나면 그 보직을 내가 맡을 순 없을까?’
하지만 정면에서 보면 강거한의 눈빛은 너무나 선명하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무지 자기 오줌 냄새를 맡는 미친놈이라곤 보이지 않을 정도로.
* * *
스멜링 솔트.
21세기 지구에서는 파워리프터들이 한계에 근접한 고중량에 도전할 때 사용하는 암모니아 고체였다.
암모니아 가스가 코의 점막을 강타하면, 신경계가 흥분상태에 들어가며 각성 효과를 일으킨다.
당연히 강거한은 미친 게 아니었다.
그는 스멜링 솔트 대신 푹 삭힌 오줌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암모니아 냄새로 인해 신체가 각성 상태에 들어갑니다. 의지력 +1 지속시간 30초]
귓가에 들려오는 알림을 들으며 강거한은 냄새나는 천을 바닥에 던져 버리며 최고의 집중 상태로 빠져들었다.
[의지력 : 4.8(+7)/18]
현재 의지력은 여러 약물의 도핑으로 11.8까지 올라왔다.
여전히 아까 실패했던 토마스보다 낮은 수치. 하지만 강거한은 충분한 승산을 보았다.
그때, 남작은 비쩍 마른 강거한을 탐탁지 않게 내려보다가 말했다.
“어설프게 도전하면 네 가족, 네 분반까지 다 책임을 지게 될 거다.”
강거한은 고개를 숙이며, 하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 올릴 겁니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라.”
강거한은 마성의 돌 앞에 서서 생각했다.
‘토마스는 요령이 없었어.’
토마스는 누구보다 높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의지를 단번에 쓰지 못하고 질질 흘리다가 자멸했다.
애초에 단 한 순간의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운동하고 수련한 이들만이 가능한 기술.
‘그리고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지.’
토마스는 너무나 절실했고 큰 중압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몸이 긴장되었고 긴장은 스트레스가 되어 그의 의지를 빠르게 갉아먹었다.
강거한은 토마스와 반대로 접근했다.
그는 마성의 돌을 내려보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돌이야. 조금 무거운 돌.’
지난 한 달간 강거한은 무턱대고 무거운 돌을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의 의지력 수치가 영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이런 돌을 매일 들어 올렸어.’
그는 실제 마성의 돌과 비슷한 크기의 돌을 매일매일 수백 번씩 들어 올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것이다.
‘그냥 맨날 하던 걸 하는 것뿐이야.’
어려운 과제에 짓눌리지 않는 비법.
그건 어려운 과제를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의 한계에 근접하는 무게를 들면 며칠을 앓아눕는다.
하지만 보디빌더들은 매일 자신의 한계까지 무거운 중량을 들어 올리면서도 피로해하지 않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무거운 무게를 든다는 스트레스를 매일매일 반복하여 마침내 그걸 전혀 특별하지 않은 하루, ‘루틴’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강거한은 긴장도, 두려움도 없이 늘 하던 동작처럼 자연스럽게 스쿼트 자세로 앉아 마성의 돌을 두 손으로 감싸 쥘 수 있었다.
‘늘 하던 거다.’
강거한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바닥에서 뽑아 올렸다.
‘데드리프트!’
치이이-!
[의지력 : 4.8(+5.1)]
손이 뜨겁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격렬한 고통이 전신의 근육을 강타했다.
의지력이 순식간에 1.9나 떨어졌다. 하지만 강거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항상 해오던 ‘습관’을 따라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등 세우고!
엉덩이 쪼이고!
배 아래 깊숙이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축 늘어뜨렸던 팔을 쭉 뽑아 올려서 두 손으로 감싼 마성의 돌을 목과 쇄골 사이 깊숙이 오도록 온몸으로 받아냈다.
엄지손가락이 쇄골에 닿는다.
무게중심에 1자로 정렬이 되어 상체에 딱 붙게 견착된 마성의 돌.
일명 역도 동작!
‘파워 클린!’
슈우우우-
[의지력 : 4.8(+1.2)]
마성의 돌이 어마어마한 증기를 뿜어냈다.
의지력이 단숨에 3.9포인트가 날아가고 두 눈에까지 증기가 꽉 찬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하지만 강거한은 배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역으로 마성의 돌에게 짓눌리게 되고 말 터.
강거한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늘 하던 대로. 그냥 맨날 하던 것처럼!’
그러곤 역시 주저함 없이, 마성의 돌을 받아내느라 살짝 굽혀졌던 다리를 쭉 뻗으며 그 힘으로 상체를 튕겨 올렸다.
후드득!
땀이 팍! 터져나가듯이 사방으로 튀고.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양손. 떠오르는 마성의 돌.
강거한은 상체를 마성의 돌 아래로 밀어 넣으며 두 팔을 쭉 펴고 온몸의 힘으로 마성의 돌을 들어 올렸다.
‘저크!’
치이이-! 크르르르
마성의 돌이 강하게 진동했다. 이제 증기는 마성의 돌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강거한의 장딴지에서, 어깨에서, 정수리에서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달걀만 한 마성의 돌이 무시무시하게 무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게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었다.
전신의 근육을 빨래 짜듯 꽉꽉 잡아 비틀고, 뼈와 관절을 지옥의 불길로 태우는 듯한 고통이 문제였다.
1초 1초가 풀 마라톤이라도 하는 것처럼, 의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강거한은 해냈다.
마성의 돌은 이미 그의 머리 위로 번쩍 들려 있었다.
시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3초!”
[의지력 : 3.7/18]
빠르게 떨어지는 의지력.
하지만 강거한은 이미 직감했다.
“2초!”
[의지력 : 2.8/18]
“1초!”
[의지력 : 1.9/18]
너끈히 통과하고도 남는다는 걸.
“합격!”
쿵!
강거한은 시험관의 합격 선언과 함께 마성의 돌을 땅에 던졌다.
거대한 충격이 장내를 휩쓸었다.
“신이시여…….”
“세상에…….”
치이이이-
강거한의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 증기가 무럭무럭 빠져나왔다.
증기를 온몸에 휘감고, 이제 막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한 그 형상으로 강거한은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이었다.
증기로 둘러싸인 강거한의 박력에 놀라기도 했고, 강거한처럼 마르고 음침한 인상을 지닌 소년이 성공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꼬리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갔다.
남작은 기쁨을 숨기지 않고 강거한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모두의 시선이 강거한에게 몰렸다. 그들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강거한은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거한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이전의 이야기.
강거한은 비틀거리려는 몸을 곧게 세우며 남작을 향해 대답했다.
“강거한입니다.”
강거한을 바라보던 수백 쌍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남작의 입가엔 미소가 짙어졌다.
1RM의 기간트 라이더 004화
가족
“강거한! 마음에 든다. 여기 앞에 서라.”
남작은 기분 좋게 강거한을 불렀다.
어떻게든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라며 억지를 부렸고 그 억지가 통했다. 귀족으로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강거한이 남작 앞에 서자, 시종장이 다가와서 필요한 예법을 간단히 가르쳐 주었다.
강거한은 시종장이 알려준 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작이 말했다.
“시험관. 바로 시작하겠네.”
“예. 라인칼 왕국의 이름으로 입회인이 되겠습니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뽑아들고 검면 부위로 강거한의 목덜미에 칼을 내렸다.
“라인칼의 위대한 수호자, 두려움 없는 개척자, 공평한 통치자이신 하논 세로피트 라인칼 폐하께서 나 로코스 부르조지 남작에게 내려주신 권한으로 그대에게 묻는다. 부르조 지의 역민 강거한은 목에 드리워진 이 서늘한 칼날을 항상 기억하고 왕국의 수호와 개척을 위한 칼이 되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느냐?”
강거한은 솔직히 목숨까지 바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시종장이 미리 알려준 대로 대답을 할 뿐.
“예. 맹세합니다.”
남작은 엄숙한 표정으로 목에 드리웠던 칼날을 거두고 칼끝이 땅을 보도록 세워 강거한의 무릎 바로 앞에 꽂아 넣었다.
“강거한을 라인칼 왕국기사로 임명한다. 그대에게 내려지는 기사 성씨는 옐로. 강거한 옐로. 그대는 항상 그대의 맹세를 기억하고 화약 같은 용맹과 증기기관 같은 열정으로 왕국을 섬기라.”
“이 영광을 가슴에 새기고 맹세합니다.”
“축하한다.”
남작은 땅에 꽂았던 칼을 거두며 싱긋 웃었다.
강거한은 남작이 친밀하게 내민 손을 잡고 얼떨떨한 심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보생이 되면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기사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만큼 라이더가 중요하다는 거겠지. 후보생만 되어도 바로 기사 작위를 줄 만큼.’
덕분에 강거한은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릎을 꿇기 전에는 사람이 아닌 도구 취급을 받는 역민이었는데, 무릎을 펴고 일어선 지금은 기사가 된 것이다.
무심결에 눈을 마주친 소년 소녀들이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절대적인 신분제의 사회. 방금까지 강거한을 비웃고 멸시하던 이들조차도 지금은 강거한과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참…… 쉽네.’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뀌었다.
어린 시절의 강거한. 안 그래도 불행했던 그 소년을 더욱더 불행하게 했던 사람들의 따돌림 따위, 굳건히 세운 의지 앞에선 이토록 허망하게 부서지는 것이었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조차도 어쩐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남작이 강거한에게 물었다.
“강거한 옐로? 종자로 누굴 데려가고 싶은지 말하라. 두 명의 종자를 선택할 수 있다.”
기사의 종자. 기사에게 예속되는 몸이었지만 역민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은 신분이었다.
‘종자?’
‘종자를 선택한대.’
‘혹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 소녀들이 살며시 고개를 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평생 공장과 12인실 공동 생활관만을 오가며 살아왔던 소년 소녀들에게 기사의 종자가 되어 넓은 세상을 돌아보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것이었다.
하지만 강거한은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
“9분반장 데이비스를 데려가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살짝 커지는 웅성거림.
‘예전에 빵을 하나 떼어 준 적이 있는데……!’
‘저번에 날 보고 웃었었어.’
‘쟤 나 좋아하지 않았나?’
하지만 강거한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다면 나머지 하나는 나중에 제가 따로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만 데려간다…… 뭐 나야 좋지. 그렇게 하라.”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실망한 소년 소녀들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강거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진짜로 내가 선택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가? 어이가 없군.’
이 영지에서 강거한의 편은 단 한 명뿐이었다.
데이비스 분반장.
“내…… 내가 종자? 꼬, 꼬맹이가 기사?”
강거한의 키가 자신보다 더 커져도 여전히 꼬맹이라고 부르는 데이비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가, 싱긋 웃는 강거한과 눈이 마주치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다.
남작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모두 수고했다. 하루의 휴식을 부여한다. 모두 들어가 쉬도록. 강거한 옐로 경도 방을 마련해 줄 테니 오늘 하루 푹 쉬라.”
강거한은 시종장에게 배운 대로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고 대답했다.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안 그래도 의지력이 바닥을 보이는 상태. 강거한은 슬슬 서 있기도 힘든 참이었다.
강거한은 남작이 마련해 준 방으로 안내되어 가고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던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띠링! 마성의 돌의 영향으로 신체에 마성이 깃듭니다.]
강거한은 낯선, 아니, 익숙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열었다.
햇볕에 뽀송하게 마른 여름 바람이 방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 상태로 간단한 아침 체조를 했다.
이불 개기, 창문 열기, 아침 체조. 이런 사소한 것을 매일 반복해 루틴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의지를 강화하는 비법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아침 루틴을 마치고 나서 강거한은 자신을 깨운 목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눈에 보이던 게 환각이 아니었다면, 귀에 들리던 소리도 환청이 아니었겠지. 이렇게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던 거구나.’
생각할수록 신기한 능력이었다.
덕분에 강거한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그러나 꼭 필요한 정보를 이렇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신체에 마성이 깃든다고?’
그런데 그건 무슨 뜻일까?
강거한은 인바디창을 살폈다.
[강거한]
키 : 176cm
체중 : 55kg 의지력 : 5.2(+4.8)/18
근력 : 6.1/7
마력 : 0.1/0.1
지방량 : 6.21kg
근육량(골격근량) : 19.98kg
마성량 : 1핀뎀
의지력은 원래 그날그날 달랐다.
오늘은 푸리아 그라스의 약발이 잘 안 받는지 보조되는 의지력이 4.8포인트밖에 되지 않았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건 형편없는 체중과 근육량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근육량이 더 줄었다고?’
어제 후보생 테스트에 도전하기 직전과 비교하면 근육량이 5g 정도가 줄었다. 앞자리가 2에서 1로 바뀔 정도로 큰 차이.
안 그래도 없는 근육을 더 잃다니 저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마성(魔性), 그리고 마력(魔力). 이 두 가지 항목이 새로 생겼어.’
1핀뎀의 마성.
그리고 0.1의 마력.
마성은 모르지만, 마력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가 바로 마력이었지. 그게 생겼다고? 마성과 함께?’
그 순간 강거한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마력은 마성에서 비롯하는 거야. 그래서 마성의 돌을 들게 한 거야!’
간단한 이치였다. 역기를 들면 근육이 생겨서 근력이 좋아지듯이,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면 마성이 생겨서 마력이 강해진다.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건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어! 그게 바로 마력을 수련하는 방법이었던 거야!’
자유민들에게는 상식인 이야기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역민이었던 강거한에게는 거대한 깨달음이었다.
무언가를 들어서 키우는 것은 근육만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찾아온 전혀 새로운 개념.
‘마성의 돌을 들어서 마력을 키운다.’
마성의 돌.
문득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역기가 주는 근육 자극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짜릿했다. 터무니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혹시 마성이라는 것은 근육보다도 더 대단한 건 아닐까?
“마성. 마성이라.”
마성이 생긴 탓일까? 강거한은 어쩐지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방안을 걸어 다녔다.
방은 원래 그가 살던 12인의 공동 생활관이 아니었다. 21세기의 쾌적한 호텔방 정도는 되는 크고 깔끔한 장소였다.
귀족의 성에 있는 방인 만큼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신 거울도 한쪽에 놓여 있었다.
서성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강거한은 자연스럽게 전신거울 앞으로 다 가가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옷을 벗었다.
찬찬히 자신의 몸을 살피던 강거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강거한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이게 어떻게……?”
자신의 어깨를 만지고 배를 만졌다.
있었다.
근육이 있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분명히 근육처럼 보이는 것이 몸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분명 어제보다 근육량이 줄었는데 정작 근육의 선명도랑 크기가 더 좋아졌다고?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어제도 해골이고 오늘도 해골이지만 오늘은 근육이 붙은 해골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하룻밤 새에?”
스테로이드를 다발로 꽂아도 이건 불가능했다.
분명 수치상으로는 근육량이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이거 설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강거한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마성의 효과?”
이게 정말, 고작 1핀뎀의 마성이 가져온 변화라면…….
두근.
강거한의 심장이 어떤 기대를 품고 뛰기 시작했다.
* * *
데이비스는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로 인해 반은 설레고 반은 걱정이 되어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어제 남작의 시종장이 지시했던 대로 짐을 챙겨 아침 일찍 강거한의 숙소 앞으로 나왔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뎅- 뎅-
아홉 시 종이 치는 순간 강거한의 숙소 문을 두드리고 외쳤다.
“강거한 옐로 경! 움직이실 시간입니다!”
문을 두드려놓고, 데이비스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이상하다. 남작의 역민이 아닌 기사 강거한의 종자라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평생을 돌보았던 강거한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자신의 삶이, 또 강거한과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막연히 두려웠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기사 정복을 말끔하게 갖춰 입은 강거한이 나왔다.
데이비스는 살짝 놀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이런 건가?’
비쩍 말라 볼품없어 보이던 강거한이 하룻밤 새에 어딘지 건장해진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멸치처럼 비쩍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멸치 같았다.
데이비스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기사님 나오셨습니까?”
그러자 강거한이 손사레를 쳤다.
“존댓말 하지 마요. 서운하게…….”
강거한에게 있어서 데이비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 대신 자신을 돌봐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라니아케아에서의 일생을 생각하나 지구에서의 일생을 생각하나 데이비스에게 존댓말을 받는 건 영 어색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소인이 기사님에게 어찌…….”
“아저씨.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굽실거리던 데이비스가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드는 데이비스의 눈시울이 살짝 붉었다.
‘가족’ 한 번도 서로를 그렇게 불러본 적 없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목이 메었다.
가족.
데이비스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신분도 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가족. 그래…… 고맙다.”
“뭐가요.”
“어제는 놀라서 말도 못 했다…… 종자로 삼아줘서 고맙다고…….”
“종자라는 말도 하지 마요. 아저씨랑 같이 떠나려면 그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한 거니까. 아저씨는 그냥 아저씹니다.”
“그래…… 고맙다.”
데이비스의 눈이 조금 더 붉어졌다. 끅, 하는 울음이 목울대를 때렸다.
부르조지 남작의 역민에서 강거한 옐로의 종자로. 아니, 가족으로.
그제야 데이비스는 걱정과 두려움을 벗고 이 변화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감격의 여운을 오래 즐기진 않았다.
그는 눈가를 훔치고 강거한에게 말했다.
“그럼 가볼까. 인솔 기사님이 기다리시겠다.”
데이비스는 말을 놓았다고 해서 자신의 할 일까지 놓아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 남작의 역민으로 살며 분반장까지 할 정도로 맡은 일은 정확하고 책임감 있게 해내는 사람이 바로 데이비스.
그는 강거한의 짐까지 모두 무겁게 짊어지고 앞장섰다.
“제가 좀 들어도 되는데…….”
“아니. 기사님은 이제 기사님 일 하시고, 내 일은 내가 하고. 일 뺏지 마. 사람이 할 일이 없으면 죽는 거야.”
데이비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고 강거한의 길을 인도했다.
1RM의 기간트 라이더 005화
아직 안 늦었다
어제 시종장에게 전달받은 대로 남작성의 한 모퉁이로 나아가자, 괴수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채, 왼편엔 긴 칼을, 오른편에는 권총을 찬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강거한은 감탄했다.
‘와…… 저게 사람이야? 맹수야?’
체형은 날렵했지만, 숨을 쉴 때마다 근육이 유연하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게 마치 치타나 표범 같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강거한이 그들의 근육을 관찰하는 동안 그들의 시선 역시 강거한의 기사 정복에 머물렀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너냐? 이번에 후보생 테스트에 합격한 녀석이?”
강거한은 아직 기사들 간의 예법은 잘 몰랐지만, 적당히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네. 강거한 옐로라고 합니다.”
“크…… 옐로라니. 파릇파릇하구만.”
평민 출신 기사는 등급에 따라 성이 달라졌다.
가장 낮은 순서대로 옐로, 그린, 블루, 레드, 화이트, 블랙, 실버, 골드가 되었다. 공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을 때마다 성도 따라서 변하는 웃기는 체계.
‘평민 기사도 준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귀족으로서 마땅한 존중과 존경은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성씨, 가문은 바로 귀족의 근간이자 전부.
그런 성씨가 실력과 공헌도에 따라 변한다는 건, 사실상 평민 기사들은 귀족이라기보다는 쓸모 있는 도구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강거한은 가장 낮은 등급인 옐로.
‘그래도 그게 어디냐.’
강거한은 불만을 갖지 않았다. 사실 그에겐 큰 욕심도 없었다. 사람처럼 살면서 운동을 하고 몸을 멋지게 만들 수 있으면 행복할 뿐이었다.
‘옐로 성씨의 기사라도 종자 두 명에 방 두 개, 거실 하나짜리 개인 집을 지급받을 수 있다. 봉급도 나오고.’
그 정도만 되어도 지구에서보다도 오히려 호사스러운 삶이었다.
뒤떨어진 사회제도와는 달리 상당히 발전한 기계공학 수준을 지닌 이 세계에서라면 얼마든지 집에 트레이닝 시설을 갖춰놓고 마음껏 운동할 수도 있으리라.
‘거기에 심지어 마성이라는 미지의 개념도 있지.’
마성을 키우는 것은 근육을 키우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걸 생각하면 또다시 입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아, 얼른 본격적인 라이더 훈련을 받고 싶네.’
그 훈련들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더 강해지고 얼마나 더 변할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에 가슴을 두근거리다 보면 평민기사, 그중에서도 최말단인 옐로라는 사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앞에는 도전과 성장할 일만이 가득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잔뼈가 굵은 기사들은 강거한이 품은 포부마저도 알아보고는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야. 쟤 어깨에 힘 들어간 거 봐라.”
“아, 저 때가 제일 좋지. 당장에라도 기간트 라이더가 될 것만 같고. 팍팍 성장할 거 같고.”
“그렇지. 정작 이제부터가 지옥인 줄도 모르고 말야.”
“야, 야. 안 늦었다. 얼른 자살해라.”
이제 창창한 시작을 앞둔 기간트 라이더 후보생을 앞에 두고서, 선배 기사들의 태도는 꽤나 비관적인 것이었다.
강거한은 그들의 놀림에 그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은근슬쩍 그들의 인바디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와…… 대단하네.’
다들 가장 약한 자가 2,087핀뎀의 마성과 217포인트의 마력을 지녔고 가장 강한 자는 약 3,103핀뎀의 마성과 337포인트의 마력을 지녔다.
단순 계산으로도 강거한의 2,000배 3,000배가 되는 어마어마한 수준.
‘실력도 뛰어난데…… 내가 겪을 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단순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거기서 짐작을 한 강거한이 물었다.
“혹시 기사님들은 기간트 라이더이십니까?”
하지만 이어진 건 어색한 침묵.
대답은 잠시 뒤에 나왔다.
“내 성씨가 레드다. 레드. 정식 기간트 후보생은 화이트랑 블랙이야. 뭔 뜻인지 알겠냐?”
“새꺄. 기간트 라이더 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후보생 테스트를 합격해도 열에 아홉은 선발시험에서 다 낙오해서 평기사로 남는다. 우리처럼.”
“너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임시다. 임시. 정식 선발시험에서 떨어지면 기간트 라이더 아카데미가 아니라 기사 아카데미로 가는 거야.”
“그냥 기사 아카데미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마음 편해.”
“그래 인간적으로 그 선발시험은 사람이 통과하라고 만든 거 같지가 않거든.”
“역민 출신이라면 특히나 더 그렇지.”
강거한이 아픈 구석을 찌른 건지, 기사들이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자 하니 그들도 한때는 강거한처럼 마성의 돌을 들어 올렸던 라이더 후보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거한은 물었다.
“그런데 선발 시험이 또 있다고요?”
“그래. 그래. 그게 진짜지. 석 달 동안 진행되는데…… 아오, 내가 이걸 왜 얘기해. 트라우마 온다. 네 인솔자한테 들어.”
“아,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기사들이 자신들의 뒤편을 가리켰다.
“쭉 들어가. 그러면 제 잘난 맛에 사는 놈 하나가 웃통 까고 있을 거야.”
강거한은 기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그들을 지나쳐서 들어갔다.
꽃과 나무로 장식된 정원을 지났다.
치이익!
칙!
깡깡!
이따금 남작성의 단조공장에서 증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거슬린다기보다는 정원의 풍경과 대조를 이루며 오히려 아름다움을 더 부각시켰다.
평생을 남작성 단조공장에서 일해 왔지만, 그 뒤편에 이렇게 쾌적한 정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흐읍……! 쓰으으으!”
분수가 쏟아지는 정원 한쪽에서 웃통을 벗고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는 남자가 있었다.
강거한은 달걀만 한 마성의 돌을 들어 올리고서 기절할 뻔했었는데, 그는 커다란 수박만 한 마성의 돌을 들고 머리 위로 들었다가 땅으로 던졌다가를 쉼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돌을 들어 올릴 때마다 검은 머리 칼에서 땀이 흩어진다.
강거한은 넋을 잃었다.
첫 번째는 그의 강력함에.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의 근육에.
‘이럴 수가……!’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좌우 대칭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고 해도, 해부학적으로 근육이 존재하지 않는 위치에도 근육이 돋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 징그럽냐고?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맹수를 모두 포함해서, 강거한은 이토록 경이로운 근육을 본 적이 없었다.
‘크기가 크지 않은 게 아쉽기는 하지만…… 형태는 정말 완벽하다!’
이 역시 마성의 힘인 걸까?
강거한은 얼른 그 남자의 인바디창을 살폈다.
그리고 강거한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수치와 마주했다.
[칼츠 블랙]
키 : 183cm
체중 : 78kg
의지력 : 977/987
근력 : 170/172
마력 : 608/608
지방량 : 2.47kg
근육량(골격근량) : 23.12kg
마성량 : 5,873핀뎀
‘체지방량이 3퍼센트대?’
하지만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지방이 그렇게 빠지면 얼굴도 움푹 꺼지고 얼굴도 한 10년은 더 늙어 보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뺨도 붉고 활기 가득한 미남이었다.
‘근육 비율도 말이 안 된다. 저렇게 강력한 근육을 지닌 사람이 근육량이 체중의 30퍼센트밖에 안된다고?’
체중 78kg에 근육량 23.12kg.
눈으로 볼 때는 한 40퍼센트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멸치 중의 멸치인 강거한 본인과 비교해도 고작 3kg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근육량이었다.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수치.
이 불가사의한 수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5,873핀뎀!’
압도적인 마성! 아까 만난 기사들의 두 배에 해당했다.
‘엄청난 실력자……!’
그러고 보니 시선을 끄는 정보가 또 하나 더 있었다.
인바디창에 적힌 그의 이름.
[칼츠 블랙]
‘블랙 성씨는 분명 정식 라이더 후보생에게 주어지는 성씨라고 했었지……?’
강거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능력 있는 선배다.’
그의 인솔기사에게 갑자기 호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 * *
하지만 칼츠 블랙은 강거한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냐?”
수련 중이던 그가 강거한을 발견하고 건넨 말은 그게 전부였다.
“가자.”
칼츠는 옷을 챙겨 입고 남작성으로 향했다. 인사는커녕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태도.
강거한은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데이비스 아저씨는 불안한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부르조지 남작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닫고 앞장서기만 했던 갈츠는 남작에게도 간결하게 딱 할 말만 했다.
“왕국을 향한 남작님의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이만 후보생을 데리고 선발훈련소로 떠나려고 합니다.”
남작은 그런 칼츠와 간단한 인사말 만을 주고받은 후 강거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강거한 옐로 경은 구역 밖의 세상을 보는 것이 처음이겠군?”
“네. 그렇습니다.”
강거한은 어제 기사서임을 받았을 때 배운 대로 열중쉬어 자세로 가슴을 내밀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면 많이 놀라겠군그래. 잘 챙겨주시게.”
“제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칼츠의 대답은 결국 자기 임무 범위까지만 챙기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남작은 웃어버렸다.
“하하. 인솔자가 이리 딱딱하면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강거한 옐로 경. 내 진지하게 조언 하나 해주지.”
남작이 짓궂게 웃었다.
“오줌을 지리더라도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마. 원래 그런 거니까.”
농담처럼 말하지만 뼈가 느껴졌다.
‘그만큼 구역 밖의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건가?’
라니아케아라고 불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온 것도 벌써 19년 차였지만, 무식한 역민으로 자란 터라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저 어른들 이야기로 구역밖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기상천외한 자연현상들이 가득하다는 걸 듣긴 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강거한은 대답했다.
“네. 그래도 가능하면 오줌을 지리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대답에 남작은 큭큭 대고 웃으며, 칼 한 자루를 건넸다.
마법검 샤펜트.
그건 남작이 마성의 돌을 드는 자에게 주겠노라 약속했던 것이었다.
“아주 좋지는 않지만, 임시 후보생에게는 충분히 좋은 마법검이지. 검을 더 튼튼하게 해주고 잘 잘리게 해주는 마법이 깃들었다.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강거한이 검을 받아 허리띠에 차는 것을 지켜본 남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혹시나 기간트 라이더가 되면 또 들리도록. 내가 크게 연회를 열어줄 테니까 말야. 그럼 가봐.”
칼츠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남작의 방을 나섰다.
강거한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 * *
남작성 앞에서 칼츠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인사 나눌 사람이 있으면 인사 나누고 오도록.”
강거한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곤 긴장한 채 서 있는 데이비스를 불렀다.
“아저씨.”
“네?”
데이비스는 칼츠의 눈치를 보며 존댓말로 답했다.
“인사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아니. 딱히 없슴다.”
그는 유능한 작업반장이었지만, 인망 있는 작업반장은 아니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평생 살아왔던 곳을 떠나는 건데.”
그 말에 데이비스는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하루 15시간, 어떤 날은 18시간씩 이어졌던 고된 노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데이비스는 표를 내지 않았다.
“아주 후련함다. 기사님은?”
“아, 저는 설렙니다. 아주아주 설레요.”
강거한은 웃으며 저 앞을 바라보았다.
지구와는 다른 세상.
이차원 라니아케아. 그곳에서는 두 번째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그런 강거한의 옆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근데 강거한이란 이름은 언제 지은 거냐?”
“그냥, 순간적으로 떠오르던데요? 왜요? 이상해요?”
“아니. 어감이 낯설긴 한데 강해 보이고 좋다.”
“흐흐, 강해져야죠.”
강거한은 데이비스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사님. 준비 다 됐습니다. 그런데 기사님.”
“뭐냐?”
“앞으로 함께하게 될 텐데 제가 아직 성함을 몰라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거한은 인바디창을 통해 그의 이름이 칼츠 블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본인의 입으로 소개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 볼 사이도 아니고. 그냥 기사님이라고 불러라.”
하지만 칼츠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가지.”
끼이이익-
운전병이 반자동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1RM의 기간트 라이더 006화
첫걸음, 성공적
“딱 한 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기억해 둬라.”
덜컹거리는 반자동 마차.
일행은 총 네 명.
칼츠, 강거한, 데이비스, 그리고 운전병.
치이이익-
반자동 마차는 증기를 뿜으며 추진력을 발휘하는 물건이었다.
혼자 움직이면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지만, 말이 끌어주면 일반 마차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말이 끌기도 하는 마차.
칼츠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서 선발훈련소까지는 5일이 걸린다. 그리고 우리는 구역 밖을 가로질러서 바로 이동할 것이다.”
칼츠는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구역 밖의 세상은 흉악하다. 걸음 하나 떼는 건 물론이고, 나뭇가지나 돌멩이 하나도 잘못 만졌다가는 죽을 수 있으니 내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른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가는 동안엔 수련을 병행한다.”
칼츠는 상자 하나를 꺼내 무릎에 올리고 열었다.
치이이-
크르르.
상자에는 달걀만 한 마성의 돌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시험에서 들어 올렸던 마성의 돌과 동일했다.
“잘 봐라.”
칼츠는 그 무시무시한 마성의 돌을 한 손으로 휙 들어 올려서는 두 손에 쥐고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 서른 번.”
그러곤 가슴쯤에 잡고 앉았다가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반자동마차는 상당히 넓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운동은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서른 번.”
이번엔 가슴 앞으로 땅과 수평이 되게 마성의 돌을 쭉 뻗었다. 다리도 말타는 자세로 구부렸다.
“기마 자세로 3분간 버티기.”
마지막에는 제자리에서 뛰는 시늉을 했다.
“마성의 돌을 들고 300미터 달리기.”
이 모든 동작을 수행하고 나서도 칼츠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마성의 돌을 강거한에게 휙 던졌다.
“선발훈련 내내 꾸준히 연습해라.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선발훈련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아무 기대감도 실려 있지 않았다.
‘사실 이 훈련은 신체 내부의 마력을 느끼고 사용하게 하기 위한 기초 훈련이지만…….’
거기까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성공할 사람은 성공하고 실패할 사람은 실패한다. 그리고…….
‘내 알 바 아니다.’
칼츠 블랙은 강거한에게 정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설명은 그저 그에게 주어진 임무 범위까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치이이익-
“큭……!”
마성의 돌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비틀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는 강거한을 보고 칼츠는 심드렁하게 한 마디 던졌다.
“나는 훈련법을 알려줬다. 그걸 똑바로 하는지 안 하는지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다. 알아서 하도록.”
그러곤 정말 관심이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칼츠는 그대로 잠들지 못했다.
콰우우우우-
밖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괴물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 반자동 마차가 짜르르 울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드르륵.
칼츠가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그러곤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게 부르조지 광산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데이비스와 강거한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데이비스가 경악했다.
“세, 세상에…!”
강거한은 들고 있던 마성의 돌을 내던졌다.
‘저, 저게 뭐야!?’
강거한과 데이비스는 마차 창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산이었다. 큰 산은 아니고 동네 뒷산 정도 되는 크기.
그런데…… 정말 산이 맞는 걸까?
‘산이 움직이고 있어!’
쿠르르르
피우우우우
산이, 마치 거대한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르르 부풀었다가 막대한 증기를 뿜으며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산에 자라난 나무들도 살아 있는 생물들처럼 바람과 증기를 뿜어내며 꿈틀거렸다.
산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거인이 드러누워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둘의 놀란 모습을 보고 칼츠는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하…… 역민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놀라지 마라. 그냥 평범한 풍경이다. 벌써 놀라면 구역 밖에 나가서는 어찌려고 그러는 건지…….”
그러곤 귀찮다는 듯이 책 한권을 내밀었다. 〈라니아케아의 역사와 모든 것〉이라고 적힌 책이었다.
“……나한테 묻지 말고 이걸 읽어라. 다 읽고 나면 어지간한 건 대충 알게 될 테니까.”
쿠르르르.
피우우우우.
산이 내뿜는 증기와 굉음에 몸을 떨며, 강거한은 칼츠가 내민 책을 받아들었다. 강거한은 조금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런데…… 저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 순간, 칼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글을 가르쳐 주는 것과 그냥 말로 설명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귀찮은지를 저울질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갈등하던 칼츠는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글 읽는 법을 알려주지. 딱 세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듣고 기억해라.”
* * *
* * *
태초에 대전쟁이 있었다.
조각난 대지.
깨어진 하늘.
숨을 쉬는 산과 강.
고중력지대, 폭풍지대, 지진, 벼락…….
세상을 탐험하다 보면 우리는 어김 없이 대전쟁의 증거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세상은 신과 악마 그리고 용들의 시체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마성의 돌과 미라늄, 힘의 물, 이 모든 것들이 한때는 신들의 육신이었다. 어쩌면 마도공학이란 신을 계승하는 학문이고 우리 인간은 신의 자취를 좇는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천족(天族)들은 예전부터…….
〈라니아케아의 역사와 모든 것〉
기원편中
* * *
다행히 라니아케아의 문자는 한글처럼 발음만 배우면, 읽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은 형태였다.
강거한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금방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이구…… 눈이 침침하다. 저걸 어찌 저리 술술 읽는지…….”
똑같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독해력이 떨어져서 책을 읽기 어려워했지만, 지구에서의 경험이 있는 강거한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잘 안 읽혀도 꾸준히 노력해 보세요. 아저씨도 이제 종자인데 글 정도는 읽어야죠.”
“예. 예. 지금은 그냥 눈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평생 일자무식으로 살아온 데이비스는 집중력의 한계가 명확했다.
‘뭐,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강거한은 쓰게 웃고는 혼자서 책을 탐독했다.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동네 뒷산조차 증기를 뿜고 숨을 쉬는 건…… 그게 먼 옛날 신과 악마 그리고 용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라서 그렇다고?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네.’
신들이 죽어서 만든 세상.
이곳은 특별한 힘으로 가득했다.
‘기계공학 기술만 왜 그렇게 발전했나 했더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스스로 움직이고 무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동력원들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 기계기술이 빠르게 발전할 수밖에…….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구역 밖의 세계.’
강거한은 책을 덮었다.
꾸그그극.
방금 전부터 갑자기 온 몸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갑갑해졌다.
“크흡. 흠…… 이, 이건 도대체…….”
옆에 앉아 있던 데이비스가 거칠어진 호흡으로 의문을 표했다.
중력이 두 배는 증가한 느낌. 하지만 강거한은 놀라지 않았다.
“여기는…… 고중력 지대군요.”
그 말에 칼츠가 이채를 띠었다.
“책을 제대로 읽었군.”
“네. 구역 밖에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즐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중력 지대는 상당히 흔하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렇다.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핵’을 해체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살 만한 곳이 못 되지. 그렇기에 구역 밖으로 남아 있는 거다.”
“그래서…… 기간트 라이더가 중요한 거군요.”
칼츠가 이번엔 조금 놀란 눈으로 강거한을 바라보았다. 일자무식인 역민이라고는 볼 수 없는 통찰력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글을 가르쳐줄 때도 느꼈지만…… 꽤 똑똑하잖아?’
칼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구역 밖의 이상 현상을 뚫고 핵을 파괴하려면 기간트가 필수적이니까. 하지만 기간트 라이더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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