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9

"그리고 에이알한테 그런 말 해 주고 싶진 않아."
"적이라서?"
"그래.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나와 크람푸스가 한 팀, 위즈덤이 혼자서 한 팀, 그리고 에이알과 장완이 한 팀이라고. 그리고 이 세 팀이서 전쟁 중이고."
"그리고 한 팀은 최근에 대단한 타격을 입었고 말이지."
룬다는 오른쪽 눈썹을 씰룩거렸지만 화를 참는데 성공했다.
"잘... 알고 있네. 그런 이유로 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어.""뭐, 강요할 생각은 없어. 도의적인 책임을 느꼈을 뿐."
"너한테 그런 마음을 느낄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성운은 가볍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가면 안쪽에서 울려서 음산하게 들려왔다.
"그럼 조만간 또 보자고."
룬다는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르나르의 나라, 적과(赤果)에서 생긴 정보는 마침 다 공유했기 때문에 한동안 성운을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높은 산 위.
네 개의 화상 채팅창이 떠 있었고, 각각이 한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이 다섯 화상 채팅창은 원을 그리며 서로를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사자탈을 뒤집어 쓴 사내가 말했다.
"꼭 그 자식 도움을 받아야겠어?"
검은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검은색 로코코풍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답했다.
"그렇다고 헤게모니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도와준다는 핑계로 군대를 보낼 놈이니까."
옆에 있던 악마, 크람푸스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둘 다 똑같은 인간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룬다 님?"
채팅창에 속하지 않은 룬다는 다리를 꼬고 앉아선 심드렁하게 다리를 흔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뭐, 헤게모니아보다는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은 해요."
"룬다 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크람푸스는 턱을 긁적였다.
그때 네 번째 화상 채팅창의, 기괴한 별 모양 도형 머리를 한 사람이 말했다.
"접속했다. 네뷸라다."
룬다 앞으로 다섯 번째 채팅창이 나타났다.
성운이었다.
"다들 날 찾고 있었다니,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플레이어들 모두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메뚜기 떼로 인한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장본인들이었고, 특히나 크람푸스와 룬다는 전쟁에서 손해를 본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유일하게 표정을 드러낼 수 없는 별 모양 도형의 머리를 가진 사람, 위즈덤이 말했다.
"네뷸라, 우리가 왜 불렀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글쎄? 내 추측이 꼭 맞으리란 법도 없잖아?"
룬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임을 하기 전 이미 성운에게 모든 정보를 다 말해 주었기에, 저건 뻔뻔한 연기였다.
'그게 아니라도 대륙 중앙에 정찰 자원이 넘치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어!'
룬다가 성운에게 시원하게 욕을 박은 다음 이미지 변신을 꾀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위즈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위즈덤은 인내심이 좋은 플레이어였다.
"너도 대륙 중앙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조금은."
"우리가 절우비라고 부르는 플레이어가, 뱀파이어라는 새로운 종족을 데리고 나타난 것도 알고 있나?"
"그래."
"그리고 처음에는 금안의 땅에만 퍼져 있던 뱀파이어가 이제 우리 다섯 플레이어 모두의 땅에 퍼져서 큰 세력을 일군 것도...?"
"알고 있지."
"그럼,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는 셈이군."
위즈덤이 덧붙여 말했다.
"네뷸라, 우리를 도와주겠나?"
068화
닉스 샤이븐은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닉스 종족은 모계 사회였고, 샤이븐의 어머니는 황금 눈 부족의 부족장이었다.
샤이븐은 자신이 어머니를 이어 새로운 부족장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운이 생겨났다.
저 북동쪽에서 잘린 귀라고 불리는 놀 부족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 눈 부족은 지역의 패자였으므로 보이지 않는 근원신의 뜻에 따라, 잘린 귀 부족과 맞서 싸웠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패.
수많은 전사들은 물론 부족장이었던 샤이븐의 어머니까지 죽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잘린 귀 부족은 승리에 만족을 했는지 약탈을 하고 떠나 버려 남은 닉스 종족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샤이븐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응당 샤이븐이 이어받아야 할 부족장의 자리였지만, 샤이븐의 핏줄은 잘린 귀 부족과 싸워 참패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샤이븐은 자신의 고향 땅에서 내쫓겼고, 부족장 자리는 보이지 않는 근원신이 새롭게 선택한 제사장에게 돌아갔다.
샤이븐은 수치스러움에 치를 떨며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고 끝내 보이지 않는 근원신에 대한 분노를 품었다.
'이 분노는 내가 죽을 때까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샤이븐의 분노는 황금 눈 부족이 '금안(金眼)'이라 불리는 나라를 세우고 부족장이 아닌 왕이 생기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금안은 샤이븐을 비웃듯이 성장을 이어갔다.
샤이븐은 절망했다.
'결국 내 분노는 허망한 것이 되겠구나.'
샤이븐은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기로 하고, 별들이 모두 구름에 가리워진 밤, 깊은 숲 속에서 자신의 손목을 베었다.
샤이븐은 흩어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자신 가까이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그림자는 샤이븐 옆에 말없이 서 있었는데, 샤이븐은 아무리 똑바로 보려고 해도 그림자 밖에 보이지 않았다.
샤이븐은 갑자기 목이 말라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합니다만... 물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림자는 품에서 물주머니를 꺼내더니 샤이븐에게 주었다.
샤이븐은 물주머니를 입에 대자마자 청량함으로 입안과 목구멍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맑아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목마름이 가시니 허기가 몰려왔다.
"혹시, 먹을 걸 가지고 계시진 않는지요?"
그림자는 또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큰 잎에 싸인 갓 구운 빵이 들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은 뭉실하게 찢어졌고, 입에 넣자마자 배가 차는 게 느껴졌다.
샤이븐은 목마름과 허기가 채워지자, 눈물이 솟는 걸 느꼈다.
샤이븐이 자조하며 말했다.
"왜 우냐고요? 목을 축이고 배를 불리고 나니 죽고자 했던 마음이 달아나서 그렇습니다. 저는 죽을 용기도 없는 겁쟁이지요."
또 그림자가 샤이븐의 발치에 길쭉한 무언가를 던졌다.
"...!"
칼이었다.
샤이븐은 저항하려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이 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샤이븐은 이제서야 그림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며, 그림자가 준 물과 빵이 기이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샤이븐은 왼손의 물주머니를 던졌다.
그러자 물주머니에서는 피가 꿀렁대며 쏟아져 나왔다.
샤이븐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붙잡으며 빵을 살폈다.
잎사귀에 싸여져 있던 것은 썩은 고기였다.
"제발!"
샤이븐은 결국 칼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어느새 샤이븐을 휘감던 공포는 사라졌다.
샤이븐의 내면에는 편안만 남았다.
샤이븐은 자신이 도대체 왜 겁에 질려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에게 칼을 주었는지 이해했다.
그림자는 샤이븐이 섬길 새로운 신이었으며, 주어진 칼은 단순히 자살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샤이븐이 새로운 신의 종으로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였다.
샤이븐은 미소 지으며 칼을 높게 들었다.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시여, 그대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그리고 그림자 앞에서 그 칼을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샤이븐은 어두운 숲 속에서 눈을 떴다.
손목의 피는 이미 굳어 있었지만, 그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샤이븐은 이제 그 정도 상처로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두웠던 숲 속은 빛 없이도 환히 보였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활력이 몸에 가득했다.
동시에 문제도 있었다.
목이 말랐던 것이다.
곧장 냇가를 찾아 물을 마셨지만, 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었다.
샤이븐은 숲 속을 헤매다가 해가 뜨자 온 몸이 타오르는 느낌을 받아 가까운 동굴로 숨었다.
동굴 안에는 다른 떠돌이가 있었다.
샤이븐은 떠돌이의 친절로 물주머니를 받아 마셨지만, 역시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결국 샤이븐은 자신의 본능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샤이븐은 떠돌이의 목을 물어뜯었고, 동맥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배불리 마셨다.
그제서야 목이 마르지 않았다.
그 피가 샤이븐의 몸이 원하던 것이었다.
샤이븐은 자신이 닉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었음을 알았다.
샤이븐은 이후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 내려 주는 계시를 따랐다.
가장 많이 한 일은 떠돌이들의 목을 물어 자신의 송곳니로부터 독을 쏘아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떠돌이 또한 자신의 종족에서 벗어나, 샤이븐과 같은 종족이 되었다.
그렇게 샤이븐에게 물린 이는 정신적으로 샤이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샤이븐은 그런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세력이 금안이나 만굴 같은 국가들의 눈에 크게 띈다는 걸 깨닫고, 샤이븐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 신께서는 우리 종족을 널리 퍼트리시길 바란다. 그러니 너희는 따로 흩어져 마을에 숨어들어 우리 종족을 퍼트려라."
샤이븐은 이를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샤이븐이 끌어안아 독을 주입한 2세대들은 샤이븐만큼 강해지지 못했고, 3세대들은 더 약했다. 4세대에 가서는 오히려 독이 주입되기 전보다 약해져 버렸다.
다른 약점도 있었다.
햇빛을 쬐는 것만이 아니라 은을 만지면 살이 타들어 갔다. 이런 약점은 세대가 지날수록 약해지긴 했지만, 4세대는 워낙 약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샤이븐이 떠나보냈던 이들 중에 샤이븐에게 돌아와 정보를 제공한 이도 있었다.
한 지방에 구전되는 고대의 악 이야기가 있는데, 이 중 뱀파이어라 불리는 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새로운 신도 고대의 악이란 말인가?'
하지만 샤이븐은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힘을 내려 준 것이 고대의 악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자신의 뜻이 곧 신의 뜻이었으며 그 역 또한 그대로 성립했다.
샤이븐은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섬긴 지 1년이 지나기 전에 닉스의 금안만이 아니라 코볼트의 만굴, 트롤의 석면, 르나르의 적과, 사티로스의 단염에 이르는 다섯 나라에 모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 두게 되었다.
─┼
성운이 말했다.
"내가 왜 너희를 도와야 하지?"
다섯 플레이어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룬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망할 놈, 또 시작이네.'
위즈덤의 별 모양 도형이 느리게 회전했다.
위즈덤이 말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량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 있는 비옥한 토양 지대에서 나타나는 메뚜기 떼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 메뚜기 떼를 일으킨 범인이 너란 건 이미 알고 있다."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크람푸스와 룬다가 날 공격해 왔지. 나는 그 공격을 막아 냈고. 끝난 일 아냐?"
장완이 사자탈의 커다란 입을 여닫으며 끼어들었다.
"야 이놈아! 제대로 된 전쟁도 못 해 보고 끝냈을 뿐이잖아. 우리가 봐주고 넘어간 거라고 생각해 보진 못했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내가 할 말을 하난데."
"뭔데?"
"꼬우면 덤벼."
장완의 사자탈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악! 저 자식이 미쳤나!"
위즈덤이 손을 뻗으며 장완을 제지했다.
"장완, 네뷸라는 일부러 시건방지게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화내지 마라."
"일부러 저런다고?"
"우리가 기분을 탓하며 놈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가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우리끼리 절우비의 뱀파이어를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운이 좋지 않으면, 뱀파이어의 세력이 더 커지게 될 거다. 그때 가서는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협의가 아니라 비굴하게 도움을 구걸해야 될 거고. ...그렇지 않은가, 네뷸라?"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네. 가만히 있으면 너희가 똥볼 차다가 망할 수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뭐 하러 너희를 도와야 한단 말이야?"
룬다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냥 놀리러 온 거 아냐?'
룬다는 성운의 성격상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즈덤은 그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너지면 너에게도 곤란한 일이지, 네뷸라."
"왜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다섯이고, 절우비는 하나지. 분열된 다섯 보다 통일된 하나를 상대하는 게 더 어렵지 않겠나?"
성운은 말없이 위즈덤을 보았다.
'위즈덤. 다른 닉네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쟤는 확실히 기억나. 같이 게임을 했던 적도 있고. 랭킹은... 한창 잘했을 때 10위 안쪽으로 몇 달 붙어 있었던가.'
성운 생각에 10위권 랭커라면 헤게모니아나 자신처럼 사실상의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위즈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로스트 월드에선 같은 규모라면 거대한 국가를 가진 플레이어 하나보다, 여러 국가를 운영하는 플레이어가 더 상대하기 쉬웠다.
'플레이어가 여럿이면 이간질하고 분열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성운은 가로저었다.
"글쎄. 그건 네 생각 아닐까. 난 하나인 쪽이 더 상대하기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협상을 하는데 굳이 상대의 말이 다 맞다고 해 줄 이유는 없다.
당장 아쉬운 건 위즈덤을 포함한 네 플레이어였다.
위즈덤의 돌아가던 머리가 속도를 늦추더니, 정지했다.
"결국 그 말은, 네뷸라 너는 우리를 도와야 할 어떠한 당위도 없다는 말이군."
"그래."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냐."
성운이 말했다.
"단지 나는 너희를 도와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고, 심지어 미래의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너희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
룬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었고, 크람푸스는 이를 드러내며 인상을 썼다. 이 사이로 불꽃이 새어 나왔다.
장완은 사자탈의 두 눈을 부라렸다. 옆에 있는 에이알은 검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멈춰 있던 위즈덤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요구하는 게 뭔지 들어 보지."
성운이 말했다.
"유리 장인, 양초 장인, 벽돌 장인 세 명씩. 그리고 금 열두 수레."
또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너 이 자식, 일이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던 거 아냐? 애초에 절우비랑 너랑 동맹이거나 한 건 아니지?"
크람푸스의 과격한 태도를 성운은 이해했다.
유리 공예는 에이알과 장완이, 양초 생산은 위즈덤이, 벽돌 굽는 법은 크람푸스와 룬다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기술이었다.
금 또한 현재 시장에 나도는 금의 양을 생각하면 흑린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준이었다.
'물론 다 땅에 묻어 버릴 거지만.'
성운이 말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꼬우면..."
"그쯤 해라, 네뷸라. 아무래도 상의가 필요할 것 같군. 채팅방을 나가 주겠나?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부르지."
"그래."
성운은 상의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뻔히 보였다.
그리고 금세 다시 화상 채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위즈덤이 말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오늘 저녁에 각 제사장에게 계시를 내려 장인들을 보내겠다. 금은 양이 많아 바로 준비하기 어렵다. 수레 하나라고 해도 금을 그만큼 실어서 흑린까지 보내긴 힘들고. 모이는 대로 순차적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이해해 줄 수 있겠나?"
"그 정도야, 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도록 하지."
위즈덤이 말했다.
"그럼 말해 봐라. 어떻게 절우비와 뱀파이어들을 공략할 것인지. 그런 구체적인 보상을 생각해 뒀다면, 분명 나름의 방안도 생각해 뒀겠지?"
"...생각해 뒀냐고? 아니."
성운이 말했다.
"이미 시작했어."
069화
뱀파이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고,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샤이븐은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고 생각했다.
'아직 몸집을 더 불려야 해.'
샤이븐은 영리하게도 자신이 만들어 낸 최초의 부하들과 함께 가장 공략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세 요새를 차례대로 공략할 수 있었다.
신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이었고, 이들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샤이븐과 뱀파이어들은 구걸하는 떠돌이로, 별 볼 일 없는 하인으로, 주인 잃은 노예로서 요새에 잠입해서 요새의 주인을 죽이거나 자신의 부하로 만들었다.
뱀파이어들은 그 후 대륙을 점거하고 있는 다섯 국가 곳곳에 몰래 숨어 있다.
그럼에도 샤이븐은 불안했다.
'전면적인 공격을 받으면 위험하니까.'
첫 3개월, 뱀파이어들은 세력을 빠르게 불리고 있지만, 다섯 국가의 합공을 받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샤이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다섯 나라들 모두가 공격을 미뤘다.
다른 종족들은 어디가 뱀파이어의 중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모아 뱀파이어를 공격했을 때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뱀파이어들이 튀어나온다면, 그리고 그 공격으로 각국의 중요한 거점이 공략당한다면 곤란했다.
때문에 각국은 확실히 입증된 뱀파이어 요새에서 뱀파이어들이 공격해 나오지 않도록 방어할 병력만 두고, 나머지 병력들은 각 나라에서 발견되는 뱀파이어 집단을 습격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위즈덤의 아이디어였다.
위즈덤이 가장 불안하게 생각한 건 '뒤통수'였다.
일반적으로 위험 부담이 큰 플레이를 즐기지 않는 성향 때문에, 위즈덤은 알려진 뱀파이어 요새들을 방어할 병력으로 둘러싸고 나머지 병력은 각자의 나라에서 방어하자고 말했다.
이 아이디어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일반 종족이 소비하는 식량이 아닌, 다른 종족을 통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때문에 요새를 조금만 조여도 뱀파이어들이 말라비틀어질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군을 내부로 돌리면 각자의 나라에서 뱀파이어의 증가세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의 뱀파이어가 확실히 줄어들었을 때 뱀파이어 요새를 공략하고 숨어 있는 제사장을 죽이면 끝이 날 것이라 본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겁쟁이의 방식이었지.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을 뿐.'
물론 위즈덤의 아이디어는 타당했다.
샤이븐에겐 전면전에 일어났을 때,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숨겨 놓은 뱀파이어 후속 부대들이 존재했으니까.
떠돌이나 마을의 유지, 수도의 숨은 귀족 계층으로 잠입한 이들은 점조직으로 존재했다.
플레이어들조차도 각 개체를 하나하나 확인해 봤자 뱀파이어가 늘어나는 속도 이상으로 찾아낼 수는 없으므로 의미가 없었다.
위즈덤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가장 군대가 약한 르나르의 나라, 적과부터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늦고 빠르고의 차이일 뿐. 결국 내가 피와 썩은 고기의 신에게 승리를 안겨다 드릴 것이다.'
각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제사장들에게 명령해서 뱀파이어를 찾아내려고 했다.
알려진 뱀파이어의 약점은 두 가지.
바로 태양과 은.
하지만 이 약점은 3세대에겐 단순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뿐이며, 4세대에게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1세대는 샤이븐 혼자이며 2세대는 그 숫자가 많지 않으므로 그 방법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뱀파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감춰져 있는 뱀파이어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샤이븐은 6개월 차에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 요구한 숫자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수는 무려 6천.
각 뱀파이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모으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뱀파이어는 자신보다 한 세대 높은 뱀파이어를 주인으로 섬기는 점조직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말은 반대로 샤이븐이 2세대 뱀파이어 하나에게만 명령을 내려도, 2세대 뱀파이어는 열 명의 3세대 뱀파이어를, 3세대 뱀파이어 또한 열 명의 4세대 뱀파이어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샤이븐이 2세대 뱀파이어 하나에게 명령하면 대략 100여명의 뱀파이어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샤이븐은 2세대 뱀파이어 중 능력 있는 이 여섯을 선별해, 장군으로 호명하고 각 장군이 1천명의 뱀파이어 병사를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세 장군은 배후에서 발호를 기다리고, 다른 세 장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각국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뱀파이어가 되면서 능력치가 다소 하락하는 4세대가 뱀파이어 군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3천의 숫자라 하더라도 다섯 나라가 합심하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숫자였다.
게다가 이 군대라는 것은 뱀파이어 중 신체가 건장한 젊은이를 추려 냈을 뿐, 그 이전까지 무기를 쥐어 본 적 없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다섯 나라의 주력 부대는 각국과의 잦은 전투로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다섯 플레이어는 사태의 심각함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각 요새를 지키고 있던 병력은 대략 500으로 뱀파이어 1천을 막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새를 둘, 하다못해 하나라도 포기하고 연합했다면 뱀파이어 부대 1천을 각개 격파해 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세 개의 요새는 서로 다른 나라에 위치했으므로, 하나를 포기한다는 건 플레이어 하나가 손해를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플레이어 사이의 사나운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으나 각 팀들은 자진해서 손해를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운은 이때쯤 멀리서 추이를 보며 자신이 조언을 해야 할 때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깨져 봐야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까?'성운은 침묵했고, 샤이븐은 세 개의 요새를 포위하던 병력들을 모두 몰아내고 요새를 점령했던 병사로 소모된 병사들을 보충했다.
샤이븐은 그와 동시에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의 뜻을 받들어 트롤의 나라, 석면과 르나르의 나라, 적과에서 각 1천의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했다.
그리고 샤이븐은 3천의 군대와 남은 1천의 군대를 더해 자신의 숙원이었던 닉스의 나라, 금안의 수도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숫자는 무려 4천이나 되고 금안의 군대는 겨우 1천 3백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안의 왕은 신의 힘을 내려 받아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금안을 수호하는 거대한 괴물 또한 이겨 내기 힘든 적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신의 힘 앞에 수백의 병사가 휩쓸려 죽었다.
아무런 수를 쓰지 않는다면 4천의 병사를 가지고도 패배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피와 썩은 고기의 신 또한, 샤이븐을 버리지 않았다.
금안의 왕에게 보이지 않는 근원신이 깃든 것처럼, 장군 중 하나인 로베인에게도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 깃든 것이다.
로베인은 그 힘으로 금안의 왕을 죽이고, 금안의 수호자에게까지 큰 타격을 입힌다.
상처 입은 수호자가 병사들의 공격으로 죽으면서 금안은 수도를 잃어버린다.
그로 인해 플레이어인 Ar1026은 레벨이 4까지 떨어지게 된다.
샤이븐은 부하들에게 병사들을 늘리도록 지시하고 건장한 닉스들을 자신의 부대에 합류시켰다.
금안은 항복하지 않았으나 주력 1천 3백이 괴멸하고 지방에 흩어진 병사가 2백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이 승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석면에서 일으킨 1천은 꽤 타격을 주었으나 트롤에 의해 전멸했으며, 적과는 겨우 4백의 병사로 적을 지연시키며 사티로스의 나라, 단염의 구원을 받아 수도를 지켜 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금안은 괴멸적인 타격을, 석면과 적과, 단염은 상당수의 부대를 잃었다.
반면에 뱀파이어는 여전히 4천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샤이븐은 자신을 흡혈왕(吸血王)으로 자칭하고 백아(白牙)라는 나라를 세웠음을 선포한다.
9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흡혈왕 샤이븐의 백아는 대륙의 패자로 떠올랐다.
샤이븐은 자신의 부하들, 2세대와 3세대 그리고 4세대 뱀파이어들에게 미래를 제시했다.
"우리는 상처 입고 방황했다. 우리를 버린 과거의 동족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최후엔 버린 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이 땅에 열 것이다."
샤이븐의 장군들, 즉 2세대들은 대부분 샤이븐과 같은 떠돌이들이었으므로 샤이븐의 뜻을 이해하고 호응했다.
샤이븐은 이제 다른 나라와의 국경을 확실히 나누어 백아의 존재를 명확히 하고, 동시에 군대를 1천 씩 나누어 각 국경으로부터 다른 나라들을 압박했다.
병력을 나누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백악은 대륙 중앙에 위치해 다섯 나라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각국은 총 병력을 동원해도 대부분 1천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샤이븐의 예상대로 플레이어들은 1천으로 나누어진 병력들이라 하더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백아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백아의 국경을 넓혀 갔다.
위즈덤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성운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늦은 시점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샤이븐은 플레이어들의 토론 따위 알 방법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위화감을 느꼈다.
샤이븐이 뱀파이어가 된 지 10개월, 각 장군과 이어진 파발이 오가고 있었는데, 넷으로 나눠진 군대 모두가 일정 시점에서 정지한 것이었다.
각 장군은 나름의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샤이븐이 보기에는 정말 타당한지 의심스러웠다.
'...왜 장군들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
성운이, 다섯 플레이어에게 말했다.
"뱀파이어에겐 세 가지 약점이 있지."
의문을 표한 것은 크람푸스였다.
"...세 가지? 두 가지가 아니라?"
"일단 두 가지를 말해 봐. 그거라도 알고 있는지 보게."
"...다 아는 거잖아? 햇빛이랑 은."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람푸스는 손을 들고 말했다.
"잠깐, 기다려. 남은 한 가지를 알 것 같기도 한데."
"뭐라고 생각해?"
"...세대를 지날수록 능력이 열화된다는 점?"
성운은 가로저었다.
"그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잖아."
"...그렇지."
플레이어들은 상급, 중급, 하급으로 뱀파이어들을 나뉘어 보고 있었다.
상급은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햇빛과 은에 강한 타격을 입고, 하급은 반대로 약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햇빛과 은에 거의 타격이 없었다.
이 상중하의 단계는 누가 물고 누가 물렸는가로 나뉘므로, 자연스러운 추론으로 첫 번째 뱀파이어는 강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몇몇은 이미 드러난 뱀파이어 장군 중 하나가 첫 번째라고 생각했지만, 성운 생각에 아직 첫 번째 뱀파이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았다.
위즈덤이 말했다.
"네뷸라, 굳이 우리를 놀려먹을 게 아니라면 수수께끼 풀이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
"기분 나쁘게 했다면 사과하지."
"...퍽이나. 뭘 이제 와서."
위즈덤은 크람푸스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래서, 뭘 시작했단 거지? 너라면 딱히 문제라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지만... 내 정찰 자원으로 볼 때 흑린은 딱히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아니라 백아에서 시작되었단 말이지."
"네뷸라, 넌 뱀파이어의 플레이어가 아닐 텐데."
성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뱀파이어는 스스로가 약점을 내재하고 있어. 그리고 그 세 번째 약점을 알아본 건 나뿐인 것 같고."
"그게 뭐지?"
"우선 최근 며칠 사이 백아 군대의 진군 현황을 보자고."
성운은 준비해 둔 창을 띄웠다.
날짜별로 나열된 지도에는 백아의 군대 위치가 적혀 있었다.
"어때?"
룬다가 말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다 똑같은 지도 같은데요?"
"그게 의미하는 바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
"그렇지."
"그게 약점이라고요? 하지만 그냥 정비를 위해서 멈춘 걸 수도 있잖아요?"
"네 개의 군대가 전부 한 번에?"
성운은 가로저었다.
성운은 창을 조작했다.
성운의 화상 채팅 창이 몇십 배 커져서, 성운이 서 있는 알 수 없는 산맥의 황량한 풍경이 드러났다.
뒤이어 이번에는 수십 개의 창을 띄웠다.
"각 창은 보시다시피 백아 군대의 이동 경로야. 이 군대가 정비를 위해서 멈출 일은 잘 없어. 식량 공급이나 부대원 보충 같은 걸 마음대로 못하거든. 그래서 정비를 할 때는 일정한 주기로 마을을 약탈할 때 단 한 번이야. 마침 네 개의 부대는 식량 공급을 위해 멈춰 섰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어."
크람푸스가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이 멈춰선 이유가 꼭 당신이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와 관련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엔 충분히 상관관계가 깊다고 봐."
위즈덤이 질문했다.
"그게 뭐지?"
"간단한 거야. 너희는 처음에 뱀파이어를 좀비 대하듯이 상대했지. 좀비 역병에 대한 전략이라면 충분히 훌륭했지만, 문제는 뱀파이어와 좀비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성운은 자신의 가면을 툭툭 건드렸다.
"바로 지능이 있다는 거지."
"지능."
"그래. 좀비는 그냥 명령을 받는 존재니까 개체별 차이가 없지만, 뱀파이어는 달라. 종족도 다르고 상중하의 계급 차이도 있어. 심지어 이들 중 대부분은 '강제로' 뱀파이어가 되었지. 하급 뱀파이어는 중급에게, 중급 뱀파이어는 상급 뱀파이어에게 복종하는 것 같지만 이 복종조차도 하급 뱀파이어라면 질이 떨어져. 이게 뭘 의미할 것 같아?"
위즈덤이 말했다.
"그랬던 건가."
위즈덤이 혼자 납득을 하자 룬다가 물었다.
"뭐가 그랬다는 거예요?"
"놈들에겐 명분이 없다."
"명분?"
"네뷸라, 내가 설명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위즈덤이 네 플레이어에게 말했다.
"뱀파이어의 결속력은 내재된 복종심으로만 이루어진다. 지금까지는 그게 통했다. 우선 뱀파이어가 되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해쳐야만 했지. 하지만 백아는 큰 나라가 되었다. 더 이상 남을 해치지 않아도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지. 더 이상 싸워야 할 명분은 없고 복종만이 남아 있다. 그러니 뱀파이어 장군들 중 몇 명은 분명..."
위즈덤은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해. 그렇지. 뱀파이어 장군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부하들로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아 할 거다. 우리 군대는 타격을 입었지만 신성은 남아 있으니 충분히 1천의 군대는 상대할 수 있다. 장군들은 그걸 알고, 다른 장군이 먼저 움직여 주길 바라는 거다."
성운이 덧붙였다.
"배가 고플 땐 몰랐지만, 배가 부르고 나니 딴생각이 시작되는 거지. 눈치 게임이 시작된 거야."
070화
뱀파이어의 나라, 백아의 왕 샤이븐.
그 샤이븐의 장군 중 하나인 주엔르는 과거에 트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뱀파이어다.
주엔르는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닉스의 나라, 금안에서는 노예 제도가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노예들은 적대국인 르나르의 나라, 적과와 사티로스의 나라 단염은 물론 트롤의 나라 석면의 사람들로 채웠다.
주엔르 또한 마을에서 평범한 트롤의 삶을 살다가 닉스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와 노예로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금안 깊숙한 땅에 팔려 와 닉스가 높은 계급으로 살고 있는 땅에서 자유를 되찾기는 어려웠다.
함께 팔려 왔던 동료들도 반란을 모의하다 살해당하자 주엔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당연히 앞으로의 삶에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문명이 개화하지 않은 시기였다.
개인의 삶은 단조로웠다. 주엔르가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달 넘게 걸어가야 했는데,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주엔르에겐 사실상 돌아갈 수 없는 땅으로 생각되었다. 말과 같은 탈것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였고,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이는 더 적었다.
주엔르는 자신의 삶에서 노예라는 큰 변화를 이미 겪었으므로, 그와 같은 일을 또 겪을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주엔르의 착각이었다.
문명이 개화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제 피어나는 시기임은 틀림없었으니까.
주엔르는 닉스의 지방 귀족 집안에서 몸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귀족은 닉스를 세우는 데 관여한 전사 중 하나로 높은 신분이었는데, 성격이 괴팍한 데다 닉스가 아닌 다른 종족에게는 유난히 모질게 대했다.
주엔르는 닉스에게 습격을 당하는데도 구해 주지 않았던 얽고 설키는 신을 잊었다.
한때는 닉스의 신인, 보이지 않는 근원신을 믿으며 자유롭게 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뀌는 게 없었으므로 더는 신을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라는 존재가 알려졌고, 그 신의 대행자가 귀족들을 습격해서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엔르는 그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다.
'나는 더 이상 신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새롭게 나타난 그 피와 썩은 고기의 신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신도 기도에 응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 신이 먼저 나를 돕는다면... 그 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살 것이다.'
그러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커지니까.
하지만 주엔르가 소란 때문에 자신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장소인 마구간 구석에서 눈을 떴을 때, 열린 마구간 문으로 서 있는 닉스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주엔르가 본 닉스는 닉스 귀족의 시체를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있었고,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에 흠뻑 젖어 들고 있었다. 피 냄새에 주엔르는 그 모습이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의 사도라고 생각했다.
주엔르가 횡설수설하며 피와 썩은 고기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 그 닉스가 다가왔다.
"넌 누구인데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찾지?"
"저는 그 닉스 귀족의 노예입니다."
"그럼 이 닉스 귀족의 죽음이 슬퍼서 그런가?"
"아닙니다."
주엔르가 가로저었다.
"저는 그 닉스 귀족의 죽음이 기뻐서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찬미하였습니다."
피를 뒤집어 쓴 닉스가 말했다.
"...좋구나. 너는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의 힘을 내려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닉스는 주엔르를 끌어안고 목을 물었다.
그 닉스의 이름이 샤이븐이었으며, 주엔르는 이후 샤이븐을 따라다니며 대륙에 뱀파이어를 퍼트리는데 일조했다.
각지에 있는 세 요새를 공격할 때도 함께했으며, 이후 장군으로 명받아 4천의 병사를 이끌고 닉스의 수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닉스의 수도를 공격할 때는 영광스럽게도 신의 힘이 주엔르의 몸에 임하기도 했다.
주엔르는 샤이븐의 가장 신임받는 장군이 되어 있었다.
현재 샤이븐은 4천의 병력을 나누었다. 북과 남으로 향하는 2천의 병력은 나머지 다섯 나라를 집어삼켜 복종하게 만들고, 동과 서로 향하는 2천의 병력은 다섯 나라의 국경을 지나치며 각각 리자드맨의 나라, 흑린과 놀의 나라, 절리(絶耳)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중 주엔르는 뱀파이어의 나라, 백아의 다음 목표인 흑린을 공격하기 위한 선봉대를 맡았다.
하지만 주엔르가 보기에 다른 장군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뱀파이어 군대는 정기적인 '보급'을 위해 마을을 약탈할 때마다 파발을 받게 된다.
샤이븐을 거친 정보는 각 군대의 현황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다른 세 군대가 거의 진군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당연히 샤이븐은 진군을 재촉하고 있었고, 장군들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적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거나 병사의 피로도가 많이 쌓였다거나 지형을 돌아가야 하는데 고민이 있다는 등의 핑계를 대고 있었다.
주엔르 또한 군대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진군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적들을 전체 압박하는 효과가 낮고, 전선을 너무 밀고 나가면 적들의 합공을 당할 수 있었다.
'지금 승기가 올랐을 때 대륙의 나라들을 모두 휘어잡아야 하는데, 다른 장군들은 무슨 생각인 거지?'
주엔르는 약탈을 끝낸 마을에 주둔하며 잠시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한낮이었다.
2세대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의 기준으로 상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태양과 은에 강한 영향을 받기에 해가 떠올라도 해가 닿지 않는 곳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주엔르는 진군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이 열렸을 때, 즉각 반응했다.
"...누구냐? 상환인가?"
주엔르는 자신의 인간 출신 부관을 불렀는데 답이 없었다.
덕분에 주엔르는 목숨을 건졌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 순간, 쨍한 햇볕이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진 것이다.
다행히 주엔르는 손등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 재빨리 피했다.
그리고 머리맡의 검을 뽑아 그대로 빛줄기를 향해 내던졌다.
빛줄기는 사라졌다.
칼에 심장이 꿰뚫려 죽은 것은 어느 사티로스 여성이었다.
주엔르는 사티로스의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보고 그 빛줄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차렸다.
"...거울이었나."
매끈하게 닦인 청동 거울이 그 정체였다.
천으로 온 몸을 가린 부관 상환이 뒤늦게 도착했다.
상환이 주엔르에게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장군. 식량 하나가 도망을 쳐서 잠자리를 어지럽게 만들었군요."
"아니다. 아직 잠들기도 전이었고."
"잠들기가 어려우십니까?"
상환은 밖의 병사들에게 시체를 치우라 명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둘은 장군과 부관 관계였지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주엔르가 말했다.
"다른 장군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역시 그 부분이 걱정이셨군요."
"그래. 혹여 다른 장군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데리고 반역을 모의한다거나..."
상환은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물고 독을 불어넣은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이 생기는지?"
"그건 그렇다만... 혹시 넌 다른 짚이는 이유가 있느냐?"
그 말과 함께 4세대 뱀파이어 병사들이 문가의 사티로스 시체를 들고 사라졌다.
상환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모두가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뜻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건 안다. 방금 저 사티로스 여자만 하더라도 분명 목숨을 증명하는 신을 따르고 있었겠지."
"아뇨, 그 말이 아닙니다."
"그럼?"
상환은 고민하는 듯하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뱀파이어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뭐?"
주엔르는 정말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어떻게... 그런 이들이 존재하느냐? 우리는 신들이 우리를 기만하며 산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한 번 버림받았던 이들도 있지. 오직 피와 썩은 고기의 신만이 우리를 다시 보살펴 주셨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되었으면서도 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상환이 말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명 흡혈왕께서는 주엔르 님을 비롯해 장군들, 그리고 첫 번째 독니 받은 이들을 누구로 정할지 세심하게 결정하셨을 겁니다.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따를 이들만 선택하셨겠지요. 하지만 그 장군들과 첫 번째 독니 받은 이들은 흡혈왕님만큼 세심하진 않았을 겁니다. 두 번째 독니 받은 이들은 더 그렇겠지요. 모두가 장군님과 같은 일을 겪은 게 아닌 겁니다."
안타깝게도 '모두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는 주엔르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주엔르가 벌떡 일어서 분노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럼 어서 그놈들을 찾아야겠구나. 그놈들이 이리저리 부대가 진군하지 않도록 훼방을 놓고 있단 말이니. 흡혈왕님에게도 서둘러 파발을 보내고..."
"진정하십시오, 장군님."
"왜 그러느냐?"
"꼭 그런 이들만의 문제도 아닐 겁니다."
"그럼 장군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는 거냐?"
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 모두인지, 아니면 둘 정도인지, 아니면 하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장군들 중에는 그런 병사들에 공감하며 더 이상 진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너도 뱀파이어라면 알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를 문 이빨의 주인을... 사랑한다."
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환의 목에 영원히 남을 상처를 낸 것이 바로 눈앞의 주엔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군님,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걸 복종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럴 리가."
"다들 흡혈왕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는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뱀파이어가 되었으니 모두의 적이 돼 버린 거죠. 하지만 이제 백아라는 나라가 세워진 이상, 그 다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 겁니다."
"다음의 세계?"
"예. 백아가 통치하는 대륙을 상상해 보시지 않은 겁니까? 그때가 되면 더 좋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뱀파이어 장군들과 경쟁해야 할 거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자연히 더 많은 병사를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미적대고 있는 것을 이용해 이런저런 핑계로 흡혈왕님에게 진군을 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고요."
주엔르는 반발을 하고 싶지만, 상환이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다른 장군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자신이 너무 멍청했던 것이다.
"그랬나. 너의 말을 들으니 모두 이해가 되는구나. 다른 장군들을 모욕한 것은 벌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그 대신..."
주엔르가 말했다.
"...해가 지는 대로 전 부대원에게 알려라. 우리는 진군을 시작할 거라고. 흡혈왕님에게 그런 장군만이 있다는 걸 보여 주진 않겠다."
─┼
"뱀파이어에게 약점이 있다는 건 알겠다."
크람푸스가 성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약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지? 그 약점이 있다고 해도 놈들이 혼란해하면서 잠깐 멈춰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야. 언젠가는 움직일 거 아냐?"
"맞아. 조만간 부대 중 하나가 움직일 거다. 다른 부대가 멈추는 걸 보고 멈춘 것 같았어. 개체의 히스토리를 확인해 보니 장군 중에 하나가 좀 더 투철한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
크람푸스가 질문했다.
"다시 움직인다고? 그럼 역시 그 약점은 쓸모없는 게..."
"아니지."
말을 받은 것은 성운이 아닌 위즈덤이었다.
위즈덤이 말했다.
"우리는 뱀파이어의 행동을 알게 되는 것으로, 뱀파이어의 다음 행동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기적을 통해서 뱀파이어의 장군들을 잘 조작하면 원하는 장소로 이동시키거나 다시 이동을 멈추게 할 수도 있지. 장군들에게 핑계를 지급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뱀파이어의 보급을 늦추면, 그것만으로도 군대가 와해될 수 있겠지. 하나의 군대가 아닌, 각 장군의 사병이 되는 것이다."
"대신 설명해 줘서 고마워, 별 대가리."
성운의 말에 위즈덤이 조금 화난 말투로 말했다.
"이건 별이 아니다."
"그럼?"
"케플러-푸앵소 정다면체 중 큰 십이면체다."
성운은 잠깐 침묵하고서 말했다.
"...음. 미안. 다음부터는 주의하지."
성운은 다음부터 절대 위즈덤의 머리에 대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성운이 말했다.
"위즈덤이 말한 방법도 있어. 우리가 계속해서 놈들의 분열을 조장하면 각 장군들, 그리고 장군 아래의 중급 뱀파이어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하급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겠지. 어차피 백아의 국경 안쪽이라면 무장한 적 군대를 만날 일도 없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이 방법을 쓰진 않을 거야."
"왜?"
"너무 오래 걸려. 흩어진 놈들은 아직 백아 땅 안에 정복되지 않은 수많은 너희 종족들의 마을을 약탈해 댈 테고, 그러면 나중에 백아 땅을 수복해도 피해가 막심할 거야."
위즈덤이 십이면체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방법을 쓸 거지?"
"나는 반대가 좋다고 생각해."
"반대?"
"놈들을 다시 하나로 뭉칠 거야."
사자탈을 쓴 장완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나로 뭉친다고? 이유도 궁금하지만 우선 방법이 궁금한데."
"간단해. 놈들은 여기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잖아. 정신없이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있겠지. 그러니 나만 보도록 집중을 시키면 돼."
"집중?"
성운이 주먹을 쥐어 올렸다.
"꿀밤 한 번 세게 때리는 거지."
─┼
"장군님! 일어나십시오!"
"...무슨 일이냐? 아직 때가 이른 듯한데."
상환에게 군사 소집을 명령해 두고 겨우 잠들었던 주엔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상환이 말했다.
"적군입니다!"
"적군? 누구냐? 아니, 단염의 국경 안에 있으니 당연히 사티로스들이겠군."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흑린의 리자드맨입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멀리, 리자드맨 군대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백아의 뱀파이어 군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낮에도 시력에 큰 저하가 없긴 하지만, 신체 리듬이 밤에 맞춰진 터라 이 보초들은 다소 몽롱했다. 흑린의 군대는 뱀파이어들이 알아차렸을 무렵 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마을에서 소란을 피워 대자,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유르가 옆에 있던 전사에게 말했다.
"타타르에 대해 들어봤나?"
"아, 예. 물론입니다."
트롤 열을 혼자서 해치운 전사.
지금은 남방의 제도에서 라크락 님의 명령으로 더 큰 일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유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늘 열심히 하는데, 대단한 일을 해내는 전사가 많단 말이지. 한둘이 아니다. 노력해도 잘 안 된단 말이지.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고. 그런데 오늘은 저기 트롤들이 몇 있으니 타타르의 명성을 빼앗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 말에 전사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아니, 유르 님은 대장군이자 으뜸전사지 않습니까? 그런 별명 정도는 양보하시지요."
"흥. 모르는 소리. 넌 으뜸전사가 되려면 어때야 하는지 아느냐?"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유르가 껄껄 웃고 말했다.
"욕심이 많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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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유르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했다.
리자드맨 전사 모두가 유르의 말을 듣고 자신도 타타르와 같은 명성을 쌓겠다며 너 나 할 것 없이 트롤을 나서서 죽여 댄 것이다.
유르는 자신이 노린 트롤을 다 빼앗겼다.
결국 유르가 죽인 트롤은 모두 아홉.
유르는 마지막으로 죽인 장군 주엔르의 시체를 들고 전사들에게 투덜거렸다.
"이건 대장이잖아. 머리 두 개짜리로 안 쳐주나?"
그 말에 지나가던 전사들이 웃으며 말했다.
"머리가 하난데 어떻게 둘로 칩니까?"
"대장군님! 어차피 뱀파이어입니다. 포기하시죠."
"젠장."
리자드맨 군대의 대승이 대륙에 퍼져 나갔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샤이븐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071화
"뭐라고?"
샤이븐은 보고를 받으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파발꾼이 말했다.
"주엔르 장군이 죽고, 4백 명가량이 전사했습니다."
1천 명 중 4백이 죽었다는 건 철저히 분전을 했단 말이므로 샤이븐은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단지 적이 강했을 뿐.
"적은 흑린이었다고?"
"예."
"도대체 얼마의 군사를 데려왔기에..."
"3백이었습니다."
"3백!"
"모두 코카투 전사였습니다. 게다가 주엔르 장군의 부대는 주둔 중에 기습을 받았고 마을은 방어하기 좋은 거점이 아니었던 데다..."
"닥쳐라!"
샤이븐이 책상을 내리쳤다.
코카투는 말만큼 크지만 좌우 이동이 자유로운 측면이 있다. 마을의 좁은 길목에서라도 싸우기는 용이하다.
게다가 3백 정도의 숫자라면 각 부대를 나누어 재빠르게 침입해 올 수 있을 법했다.
기습을 사전에 저지하지 못한 건 이미 죽은 주엔르의 잘못이었으니 더는 탓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죄는 샤이븐 자신에게 있는 셈이다.
기습이 일어날 가능성을 사전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기병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주엔르의 부대를 치기 위해선 군량을 줄여야 했을 것이다.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겠지. 흑린과 단염... 아니, 나머지 나라들도 동맹을 맺은 것인가?'
물론 샤이븐은 흑린과 놀의 나라 절리도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자신과 소수의 장군들뿐이니, 계획이 사전에 알려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흑린과 나머지 다섯 나라는 적대하고 있었으니 샤이븐의 계산으로는 흑린이 이들 나라를 도울 이유가 딱히 없었다.
'흑린의 왕은 큰 나라가 생기는 게 두려웠던 건가?'
샤이븐은 나머지 세 장군에게 흑린의 기병들이 나타났음을 알리고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알렸다.
다만 각 부대의 위치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흑린의 기병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샤이븐이 있는 곳으로 주엔르 휘하에 있던 병사 중 1백 명 가량은 이탈하고, 5백여 명의 병사들이 생환했다.
이 병사들에게서 들어오는 보고는 황당한 것이었다.
흑린의 코카투 전사들이 적의 부대를 쫓기보다, 이미 백아가 지배하고 있는 땅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얼핏 봐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큰 부대를 움직이는 건 국가적으로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여야 했다.
하물며 땅을 수복하더라도 흑린의 땅이 아닌 그저 사티로스의 나라 단염의 땅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샤이븐은 정찰대를 더 보낸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리자드맨들은 사티로스들에게서 무한정에 가까운 보급을 받고 있구나.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싸움을 즐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를 위해서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 줄이야.'
심지어 겨우 3백에 불과한 숫자지만 영토를 수복하는 속도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뱀파이어 병사는 다른 나라의 젊은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결국 그 숫자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이미 점령해서 소수의 주둔 병사만 남은 마을의 경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흑린에게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 사이 다른 세 장군이 지속해서 진군을 해 나가기라도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마저도 지지부진했다.
이제 샤이븐으로서는 선택을 해야 했다.
'패잔병 4백을 재정비해서 리자드맨 3백과 부닥치느냐, 아니면 나머지 병사 3천을 다시 데려와 3천 4백으로 흑린을 공격하느냐군.'
하지만 전자의 경우 유리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피와 썩은 고기의 신께서는 분명 날 도와줄 것이다. 적이 정예병이라고 해도 분명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적은 모두 기병. 싸움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에게 달렸다.'
후자도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분명 3천 4백의 숫자라면 흑린을 공격하는데 충분한 숫자다. 게다가 흑린을 공격하면 새롭게 병사들을 보충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다섯 나라의 기세를 꺾어 놓은 이때 마무리를 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샤이븐의 고민에 결정을 내려 준 것은 역시나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이었다.
샤이븐은 꿈속에서 동쪽으로 향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잠에서 깬 샤이븐은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모든 장군과 병사를 불러 모아라. 이제 흑린을 칠 것이다."
─┼
위즈덤이 말했다.
"적들을 하나로 모으면 모두가 협공을 하는 건가?"
성운은 가로저었다.
"...그럼 좋겠지만, 그럴 병사들이나 있나?"
성운의 반문에 다들 당황했다.
닉스의 신인 에이알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주력 부대는 물론이고 수도까지 완전 점령당해 그야말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
어떻게든 숨기고 있지만 르나르의 신 룬다도 성운에게 받은 타격에 더해 뱀파이어까지 상대하느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티로스의 신 크람푸스와 트롤의 신 위즈덤 정도가 군대다운 병력을 낼 수 있지만, 그 숫자는 각각이 5백과 3백 정도.
그나마 거의 타격을 받지 않은 건 코볼트의 신 장완 정도였다.
장완이 말했다.
"우리 부대는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
"안 돼. 너무 멀어."
흑린을 기준으로 대륙 정반대 쪽에 있는 건 절리지만, 만굴 또한 바로 그 다음이었다.
"어차피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거야. ...협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실질적으로 위즈덤이랑 크람푸스 정도겠군."
그 말에 위즈덤은 담담하게 "알겠다."고 말했고 크람푸스는 마지못해 하겠다는 듯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뱀파이어들은 당연히 황야가 아니라 자동성 쪽 산성들을 공략해 올 거야."
황야를 통하면 한낮의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기 까다롭다는 점,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피 보급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햇빛을 피할 그늘이 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드문드문 이어져 있는 산맥을 통해 공격해 올 거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내 기병 3백과 위즈덤과 크람푸스 둘 다 거리를 두고 뱀파이어 군대를 쫓는 게 좋겠지. 협공을 눈치채면 생각이 있는 이상 자신의 꽁무니에 붙은 놈들부터 떼어 내려고 할 테니까."
위즈덤이 질문했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면 협공의 이득을 보기 힘들어질 텐데? 백아의 후위 정찰대는 길게는 이틀 가까이 늘어지기도 한다. 그 거리라면 첫 공격은 흑린 혼자서 받아 내야 할 거다."
"못 막을 것 같나?"
성운은 믿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즈덤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 있다면 상관없지."
"그리고 협공은 평지에서 이루어져도 상관없어. 어느 정도 병력을 소진했을 시점이니까."
성운이 말했다.
"나머지는 자기 세력 내에서 뱀파이어를 내쫓는데 주력해야 할 거야. 장완 너도 그 병력을 에이알의 지역을 수복하는데 써야 할 거고."
뱀파이어 숫자를 줄이는 건 단순한 영토의 문제가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믿고 있을 테니 계속해서 신앙이 생성되고 있을 터였다.
전선 밖에서 뱀파이어 숫자를 줄여 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될 터였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일단락이 된 가운데, 성운이 다른 플레이어에게 말하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일명 절우비, '癤우삤瑜쇰씪'는 분명 플레이어다.
하지만 플레이어라면 응당 사용해야 할 신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유가 있긴 해.'
절우비는 시종일관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승리하고 있는데 구태여 아깝게 신앙 자원을 소비할 필요가 없긴 할 테니, 꼭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한 번은 사용했었다.
바로 닉스의 수도를 공략할 때 주엔르에 강신했던 것인데, 강신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성운은 신앙 자원이 많이 소비되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현재 백아의 영토는 제3 대륙에서 가장 크다. 게다가 병사들이 유난히 눈에 띌 뿐, 뱀파이어 종족 자체도 상당히 많이 늘었다. 이 뱀파이어들은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을 믿고 있지. 그 말은 절우비의 신성 레벨이 꽤 높을 수도 있단 말이야.'
성운의 생각에 절우비가 뱀파이어라는 꽤 강력하면서 기존에 없는 종족을 가져오긴 했지만, 플레이어로서의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뱀파이어가 단순히 '사기 종족'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계산기를 두들겨 보면 놈의 레벨은 최고 17인가.'성운은 16레벨에 얻게 되는 신성 스킬을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절우비가 끝까지 합리적인 플레이를 하고 레벨이 정말로 16 이상이라면 조금 곤란할 수 있었다.
'뭐... 그렇더라도 방법이 있으니까.'
─┼
샤이븐은 라크락이 지은 산성에 대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산성은 더 끔찍했다.
산성 주변 수백 미터의 나무는 모두 벌목되어 있어 몰래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며, 산성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지그재그의 형태로 수레 한 대가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정도였다.
하물며 성벽은 더 심각했다.
성벽은 성문 옆으로 대략 60도에 가까운 비탈을 타고 올라야 했고, 그 옆으로는 9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였다.
그 비탈을 타고 올라가도 7미터가 넘는 성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이븐은 자신의 장군에게 말했다.
"...어떨 것 같나?"
"탈것 중엔 큰족제비 밖에 못 오를 것 같습니다."
"르나르와 트롤 출신을 중심으로 성벽을 공략하게 해라."
"성문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문을 부술 큰 망치를 나누어서 성문 앞까지 지고 간다."
"병력의 손실이 클 겁니다."
"시체를 밟고 가면 성문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 완만해지겠지. 아니 잠깐..."
"좋은 생각이라도 나셨습니까?"
샤이븐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계단을 만드는데 굳이 우리 뱀파이어를 소모해야 되나?"
"예?"
샤이븐의 시선이 부대 뒤쪽으로 향했다.
뱀파이어는 식량으로 산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뱀파이어 부대를 효율적으로 꾸릴 수 있게 만들었다.
전투를 치르는 군대라면 그만큼 짐을 나르고 따라다닐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전투 물자가 줄어들어 일손이 비는 일꾼은 자연히 식량이 된다.
샤이븐의 부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샤이븐이 말했다.
"우리 부대는 그저께 사티로스 마을에서 보급을 마쳤지. 전투가 너무 길어지지 않는 이상 노예는 불필요하다."
"아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노예들을 우선 화살받이로 쓰잔 말씀이시군요. 그럼 놈들의 전투 물자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샤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노예들 사이에 소문이 돈다더군."
"어떤 소문 말입니까?"
"다섯 신들이 모두 자신들을 포기했지만, 단 하나 포기하지 않은 신이 있다고."
"예? 피와 썩은 고기의 신 말입니까?"
"아니."
샤이븐이 가로저었다.
"푸른 벌레신."
"네? 푸른 벌레신이라면..."
"저기 저 리자드맨들의 신 말이다. 그러면서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생각하더군. 놈들을 줄 세워서 저 산성으로 뛰어가게 해라. 반항하는 놈들이 있겠지만 그런 놈들은 그 자리에서 피를 빨아 죽이고, 리자드맨들이 정말 구원을 준다면 성문을 열어 줄 거라고 속여라."
"예,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뒤 샤이븐의 천막을 나서던 장군은,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그런데 샤이븐 님."
"뭐지?"
"만약에... 놈들이 정말로 성문을 열고 노예들을 받아 주면 어떻게 합니까?"
샤이븐이 "흥"하고 코웃음 쳤다.
"놈들이 문을 열고 구원자 흉내를 낸다고? 그럼 잘됐군. 그때가 우리가 총공격을 나서는 때다."
샤이븐은 이 땅의 구원자는 피와 썩은 고기 신뿐이라 생각했다.
─┼
"...벌써 세 번째야."
"그래."
뱀파이어 군대의 노예로 끌려온 하프빈 종족의 아이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노예로 새로 만난 코볼트 친구는 겁이 꽤 많은 듯했다.
둘은 키가 비슷한 계기로 친해졌는데, 그 우정도 그리 오래가진 못할 듯싶었다.
"다음은 우리고."
"나도 알아."
아이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볼트 친구가 말한 세 번째는, 뱀파이어들이 끌고 간 노예가 세 번째라는 말이었다.
코볼트 친구와 아이잔, 그리고 아직 대화를 해 보지 않은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그 네 번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이잔을 비롯한 손이 묶인 노예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뱀파이어 병사가 몇 번이나 설명하기도 했다.
저 앞에는 산성이 있고, 그 산성은 흑린 리자드맨의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적의 전투 물자를 줄이고 산성에 오르는 길을 완만하게 만든다는 핑계로, 그리고 적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노예들 또한 그 구원 밖에 믿을 것이 없으니 미끼로 쓰이는 건 당연했다.
코볼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왔다. 우리 차례야."
아이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말했다.
"이야기는 생략하지. 너희의 목표는 간단하다. 리자드맨의 성문으로 달려가는 것. 너희들의 생각대로 리자드맨이 정말 구원자라면, 문을 열어 주겠지. 안 그래?"
어설프게 항변하는 이는 없었다.
그랬다가 목이 잘린 이가 이미 노예들 발치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잔은 생각했다.
'지금 무리를 이탈해서 달리는 것과, 산성을 향해 달리는 것 중 뭐가 더 살 확률이 높을까.'
아이잔은 갈등하며 아무런 행동을 못했지만, 산성 앞에 서자 전자가 높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산성 아래에는 한밤중임에도 정확한 사격 솜씨로 화살에 꿰인 노예들이 즐비했다.
'성문까지 길이 세 번 꺾이는군. 그런데 두 번째까지 간 사람도 없나...'
아이잔은 속으로 웃으며 흑린의 리자드맨이 구원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대로 명사수인 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 병사가 말했다.
"등 뒤에 우리가 화살을 겨누고 있다. 다섯을 세지. 산성을 향해서 달려라. 하나, 둘, 셋..."
셋을 셀 때까지 모두가 주저했다.
아이잔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 바로 옆에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미 본보기로 누군가를 죽였었구나. 지금 달려야 한다!'
아이잔이 달려 나갔다.
그때 아이잔 뒤에 서 있던 뱀파이어 병사가 주저하던 코볼트 친구의 목을 내리쳤다.
"...다섯! 달려!"
아이잔은 마을에서 별명으로 통했던 빠른 발이 여전히 먹히길 기도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발!'
어처구니없게도 샤이븐의 생각처럼 이미 누운 시체가 첫 몇 걸음의 경사를 다소 완만하게 만들었다. 얼마가 죽든 산성까지 닿기에는 크게 부족하겠지만.
아이잔의 발이 엇갈려 헛디뎠을 때 화살 한 대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발을 헛디딘 우연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아이잔이 산성에 오르는 두 번째 길을 꺾었을 때, 산성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이잔은 고개를 들었다.
산성에서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푸르게 빛나는 나비였다.
'...나비?'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나비보다 더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072화
전사 하나가 성가퀴 사이로 밖을 내다보다가 성벽 안쪽을 향해 외쳤다.
"놈들이 또 무장하지 않은 놈들을 줄 세우고 있습니다."
라크락이 부관 퀘즐에게 말했다.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언덕 경사라도 줄여 보려는 걸까요. 저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그저 다른 종족의 목덜미를 물면 되는 것이니 다른 종족에 비해서 병력을 늘리는 게 더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력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저들은 노예들인가 봅니다."
퀘즐은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라크락과 대항했던 리자드맨 부족의 족장이었다.
하지만 패배 후 라크락의 뜻에 감화되었고 퀘즐의 부족은 큰 피해 없이 검은 비늘 부족에 흡수되었다. 이제는 퀘즐 또한 검은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노예라고 해서 저런 식으로 대하는 건 좋지 않을 텐데."
"제 생각도 같습니다만, 아마 뱀파이어들은 저들을 노예 이하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하라면?"
"식량이지요."
"식량."
"예. 저희도 필요 이상의 군량은 버리지 않습니까. 저들은 이전 사티로스 마을에서 배를 불렸을 테고, 여기 산성을 지나 자동성, 그리고 오라즌에 이르기까지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여분의 식량은 쓸모가 없으니..."
"그 이유만은 아니다, 퀘즐."
퀘즐은 고개를 돌려 라크락을 보았다.
라크락이 말했다.
"저 대륙의 나라들이 리자드맨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 알고 있나?"
"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를 괴물로 생각했었지요."
"듣자 하니 우리 대장군이 일을 잘해 주었다더군. 단염과 적과의 땅을 오가며 많은 뱀파이어들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단염과 적과뿐만 아니라 석면과 금안, 만굴에도 리자드맨이 뱀파이어들을 물리쳐 줄 거란 이야기가 퍼졌다는 거야. 흑린이 백아를 이길 거라고 말이야."
"아."
그때 성벽을 향해 노예들이 달려왔다.
비무장한 사람을 쏘는 것은 전사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요소긴 했다.
하지만 라크락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수비대장은 그대로 사격을 지시했다.
성가퀴 뒤에 숨어 있던 궁수들이 재빠르게 활을 쏘고 다시 성가퀴 뒤로 숨었다.
노예 하나가 즉사하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수비대장이 직접 활을 들고 노예의 숨통을 끊었다.
퀘즐이 라크락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노예들을 우리가 직접 쏘게 만들고 있군요."
"그래."
"저희는 성문을 열고 노예를 받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노예들은 우리에게 걸었던 기대를 저버리겠죠. 그럼 남은 노예를 통솔하기가 편할 겁니다. 뱀파이어들은 노예를 바로 식량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노예의 반발을 크게 살 수 있을 텐데, 저렇게 희망이 없다고 인식시키면 노예들도 절망하겠군요. 영리합니다."
"그건 아니지."
"예?"
라크락이 웃고는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나한테 졌던 것이다."
퀘즐은 라크락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벙벙하게 바라보았다.
성곽 위의 수비대장이 라크락에게 말했다.
"라크락 님, 놈들이 세 번째로 비무장한 병사들을 대기시켰습니다. ...계속 화살을 쏠까요?"
"대기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퀘즐이 라크락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라크락 님. 안됩니다. 놈들이 노예가 아니라 뱀파이어면 어떻게 합니까? 손이 묶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닐 수도 있고,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가리기 위해 앞서 두 번을 모두 쏘아 죽인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라면 구분할 방법이 있지 않은가?"
"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가장 하급의 뱀파이어들 중에는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퀘즐, 그대는 그 정도 저급한 뱀파이어도 두렵단 말인가?"
퀘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 모욕하지 마십시오. 저 개인의 용기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져 봤자 지금 문을 열고 구할 수 있는 건 열댓 명뿐입니다!"
"눈을 좀 더 크게 떠라, 퀘즐. 그대는 셈이 빠르고 생각이 정연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해서 멀리 보지 못한다."
그 말을 반박하려 했을 때, 퀘즐의 눈이 글자 그대로 크게 떠졌다.
성 안으로 푸른 나비 떼가 나타나더니 부드럽게 나선을 돌며 솟아오른 것이다.
성 안의 전사들의 시선이 나비에 꽂혔다.
푸른 나비는 분명 길조로 해석되었으므로, 전사들의 사기가 고양되었다.
하지만 라크락과 퀘즐은 그 나비가 단순히 전투 전의 고양감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께서 허락하셨으니 이견은 없겠지. ...문지기. 성문을 열어라."
"예!"
"무장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받아라. 마지막 하나가 들어오면 문을 닫는다."
"예!"
문지기가 대답함과 동시에 열린 성문으로 하프빈 하나가 뛰쳐나왔다.
라크락이 퀘즐의 허리춤에서 은검을 뽑았다.
"직접 노예들을 확인해라, 퀘즐. 은에 상처를 입으면 주의할 만한 뱀파이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별 볼 일 없는 뱀파이어거나,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달려온 사람이겠지."
"...알겠습니다."
성벽 위의 수비대장이 외쳤다.
"라크락 님! 놈들이 몰려옵니다!"
"전투를 개시해라!"
궁수들이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수비대장이 외쳤다.
"성문으로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비무장한 이들은 모두 들어왔나?"
"성문 틈으로 보이십니까? 저기 닉스 여자가 마지막입니다."
라크락이 문지기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오면 문을 닫아라."
"예?"
라크락은 문지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닉스 여자의 손을 잡아 성문 안쪽으로 던져 넣으며, 동시에 몸을 반회전하면서 반대쪽 손을 달려오는 르나르에게 향했다.
흉포한 큰족제비가 적의를 알아차리고 라크락에게 펄쩍 뛰었다.
라크락의 손에서 벼락이 쏘아져 나갔다.
─┼
-쾅!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 출신 뱀파이어가 성문 앞에서 벼락을 맞는 걸 보고 샤이븐이 중얼거렸다.
"하! 아깝군."
라크락은 곧장 성문 안으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어렵사리 달려갔던 기병들은 모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장군 하나가 샤이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불찰입니다. 정말로 성문을 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니다. 나 또한 성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운이 더 좋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어쩔 수 없지. 본래 계획대로 간다."
흑린의 리자드맨이 가진 각궁, 그리고 산성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쏘기 때문에 뱀파이어들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적 산성은 2천 명의 병사 밖에 수용할 수 없으니 수적 우위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성을 상대해 본 경험은 많다. 심지어 적의 병력이 같았을 때도 이긴 적이 있어.'
샤이븐은 과거의 경험을 믿었다.
"계속 진격해라!"
샤이븐은 뱀파이어 군대는 다른 부대와 구분되는 강점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종족 구성이 다양하다는 것.
르나르 기병은 큰족제비라는 공격적인 탈것을 탄다.
속도와 지구력은 말에게서 밀리고,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코카투에게 밀리지만 큰족제비는 그 자체로 사나운 맹수다.
르나르 궁기병은 다재다능한 전력이다.
코볼트 탈것은 주로 큰두더지를 키우지만 전투에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그 대신 체구가 작기 때문에 적 궁수들에게 까다로운 과녁이 된다.
일반적인 평야에서의 회전이라면 숫자 말고는 전투에서 믿을 구석이 없지만, 공성전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적의 화망을 뚫고 성벽에 사다리를 놓거나, 성문을 부수기 위한 큰 망치를 조립할 도구들을 들고 달려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트롤은 큰 체구 때문에 제대로 탈 수 있는 동물이 없다.
하지만 체구가 큰 만큼 힘이 강력하다.
뱀파이어가 되면서 특유의 재생 능력은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가죽은 질기고 뼈는 튼튼하다.
르나르가 빠른 속도로, 코볼트가 작은 체구 때문에 적의 공격을 피하기 용이하다면 트롤은 적의 공격을 맞으면서도 전진할 수 있는 터프함이 있었다.
그리고 닉스와 사티로스는 부대의 전투를 책임지는 중심 병력이 된다.
공성전에서는 말을 탄 기병의 역할이 제한되지만, 닉스와 사티로스는 제대로 활도 쏠 수 있고 창도 내지를 수 있다.
비록 4세대 뱀파이어라 신체 능력이 일부 저하가 있더라도 각자 출신 종족의 특성을 살린 분업을 살린 전투가 지금까지 샤이븐을 승리로 이끈 주요한 원인이었다.
'여기에 뱀파이어의 힘을 더하면...'
3세대, 즉 십인대장만 하더라도 체구보다 한 단계 높은 힘을 가졌다.
십인대장이 코볼트라면 르나르만큼의, 르나르라면 닉스와 사티로스만큼의, 닉스와 사티로스라면 트롤만큼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더 무거운 장구를 갖추고 더 무거운 무기를 드는 것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전사가 된다.
'...틀림없이 이긴다.'
물론 그건 샤이븐의 착각이었다.
─┼
성운은 전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샤이븐은 산성을 공략하는 방법을 몰라. 지금 세대의 지휘관 중에 산성을 끼고 싸운 개체는 거의 없으니까.'
경험 비슷한 것이라면 역시 산성을 쌓도록 명령한 라크락과 그의 전사들 정도였다.
라크락은 자올과 함께 지금 전투가 일어나는 첫 번째 산성을 지을 때 꼼꼼하게 지시했다. 첫 번째 산성을 모델로 해서 뒤이어 산성을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자올이 산성이 가지는 물리적 환경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라크락은 자신이 성을 공략하기 위한 지휘관이라면 어떤 부분이 난점이 될 것인지를 따졌다.
심지어 성이 완성된 다음에는 직접 전사들을 데려와 모의전을 치르기도 했다.
결과는 간단했다.
라크락은 아주 만족했다.
'산성을 상대로 단기 결전은 좋은 선택이 아니지.'
성운의 생각대로 전황이 드러나고 있었다.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 트롤 출신과 르나르 출신 기병들이 앞장서서 달려가고, 뒤이어 다른 종족 출신 병사들이 달려 나간다. 사이사이 코볼트 출신 뱀파이어들이 껴 있다.
그 조합 자체는 괜찮았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산성에서 화살비가 쏟아지자, 닉스와 사티로스 궁수들이 반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리자드맨들의 각궁이 더 멀리 쏘아지고, 무엇보다 산성이 가지는 높이 차이가 절대적이라는 게 드러난다.
산성 아래까지 닿기도 전에 높은 각도의 비탈 때문에 뱀파이어들이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진다.
얼마 안 되는 힘 좋은 화살들이 산성의 성벽에 닿지만, 궁수들은 성가퀴 뒤로 숨은 다음이다.
쏟아지는 화살비 공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트롤과 르나르 기병이 성벽을 기어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성벽이 가지는 높이 차이는 적들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 이상의 용도가 있다.
전사들이 성벽에 올려놓은 머리통만 한 돌을 들어, 성벽 아래로 내던진다.
트롤은 물론이고 르나르가 타고 있는 큰족제비의 머리통이 돌을 맞고 으깨진다.
코볼트 따위는 트롤과 큰족제비를 죽이고 비탈의 경사면을 타고 굴러가는 돌에 맞고 날아가 버린다.
화살과 돌이 부족할 리는 없다.
흑린의 전사들은 적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규모도 정확하게 파악했었으니까.
적에게 남은 것은 높은 세대의 뱀파이어.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그런 특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지...'
높은 신체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 십인대장, 백인대장들이 화살을 몸에 박고서, 돌덩이를 피하면서 성문 앞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문에 손이 닿을 수 있는 놈도 하나 없었다.
'이쪽은 천둥 도마뱀이 있다고.'
-쾅!
라크락이 손을 뻗자, 운 좋게 성문 앞까지 달려온 뱀파이어도 하얀 수증기를 눈 코 입에서 내면서 쓰러졌다.
라크락은 향초를 곰방대로 피워 대면서 뱀파이어들을 우습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큰 힘을 갈무리하며 필요한 곳에만 사용한 만큼 정신력에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3천 4백의 병력 중 6백의 병력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산성의 비탈 아래로 쌓인 시체가 몇 겹이나 되어서, 샤이븐이 기대했던 대로 경사가 완만해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경사가 더 완만해지더라도, 나머지 2천 8백의 병력을 그대로 성벽을 향해 돌진시키더라도 산성을 함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진 것이다.
이윽고 후열에 떠밀려 달려가다가도, 주저하더니 돌아서는 병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대 이탈은 안 된다! 도망치는 놈들은 바로 목을 베겠다!"
샤이븐의 장군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대로 도망치려던 뱀파이어의 목이 아군에 의해서 잘려 나갔다.
샤이븐 입장에선 한 번 시작한 진격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해해. 후퇴해서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진격을 하게 되면, 방금 전 전열이 겪은 피해를 똑같이 입어야 하니까. 지금은 겨우 성벽 아래까지는 올 수 있으니 그 피해를 또 감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샤이븐이 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면 지금이라도 이대로는 산성을 공략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후퇴했겠지.'
성운이 당장 경계하는 것은 플레이어 절우비가 이 전투에 가세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볼 생각인 듯싶었다.
'최후의 병력으로 샤이븐이 움직일 때 힘을 쓸 작정인가? 그럼 부대의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성운은 뱀파이어 군단의 뒤를 바라보았다.
샤이븐의 시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
샤이븐은 전황이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이대로 밤을 지새우면 병사를 다 잃는다.'
그때 샤이븐을 향해 달려온 파발꾼이 말했다.
"샤이븐 님! 급보입니다."
"뭐냐?"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에서 트롤과 사티로스, 그리고 흑린의 코카투 전사들이 연합해 우리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뭐?"
멀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의 전투가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었다.
'병력을 후퇴시켜야 하나? 아니, 안 된다. 병사를 이미 너무 많이 잃어서 후퇴시켜 봤자 뒤에서 오는 적과 산성의 적이 합공한다면 막기 힘들다. 이제 와서 산성을 포기할 수는 없어. 차라리 산성을 어떻게든 공략해 내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샤이븐은 파발을 떠나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별안간 샤이븐은 자신의 입술과 턱을 타고 흐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샤이븐은 깜짝 놀라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코피잖아?'
샤이븐은 뱀파이어가 된 뒤로 한 번도 코피를 흘린 적이 없었다.
뱀파이어의 심장은 느리고 둔하게 뛰기 때문에.
'설마... 계시인가? 불길하군.'
샤이븐은 신의 뜻을 헤아리려 했다.
"샤이븐 님! 큰일입니다!"
샤이븐은 자신의 생각을 방해한 병사를 향해 소리쳤다.
"뭐냐?"
"죄, 죄송합니다."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에서 적 부대가 오고 있단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돌아가라."
"아, 아닙니다."
"뭐?"
"다른 문제입니다."
"뭐지?"
"노예들이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
뱀파이어 노예들은 손이 묶인 채 각자 정해진 장소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뱀파이어 병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전투에 차출된 이들 때문에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뱀파이어 노예들은 병사들을 피해 조그맣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 속에서 나누어지는 대화는 누가 누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야."
"끌려 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다 죽었을걸."
"아니. 아니야."
"뭔가 아는 것 있나?"
"아, 저 친구가 네 번째로 끌려갔던 친구 같은데. 끌려갔다가 방금 돌아왔잖아. 맞지?"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조그마하게 움직인다.
"그래. 난 봤어."
"뭘 봤단 말인가?"
"성문 말이야."
"성문?"
"뱀파이어들이 뭘 하는지 봤어. 뱀파이어들은 사람들을 줄 세워 두고 흑린의 산성을 향해 달려가라더군."
"세상에."
"죽을 게 뻔하잖아? 아무리 흑린이라고 해도 적이랑 노예는 구분 못할 텐데."
그림자가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이었던 사람은 다 죽은 것 같아. 하지만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어떻게 됐지?"
"성문으로 들어갔어. 리자드맨들이 성문을 열어 준 거야. 푸른 나비들이 성 위로 맴돌더니, 문이 열렸어."
잠시 노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짓말이지?"
"리자드맨들이 왜?"
"이유는 몰라. 그래서 세 번째는 모두 살았어. 그대로 전투가 시작돼서 네 번째 줄이었던 나는 돌아온 거고. 그러니 나도..."
이야기를 하던 노예는 벌떡 일어섰다.
"이봐, 앉아. 뭐 하는 거야?"
"저기 보초가 있다고. 안 보여?"
"...난 맞서 싸워야겠어. 리자드맨들이 우리를 구해 주기 위해 적 앞에서 성문을 열었다고. 이야기는 모두 진짜였던 거야."
그 말에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나 또 실망할까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생명을 얻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어선 노예가 그림자 속에서 말했다.
"일어나."
"그,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아? 리자드맨들은 우리를 위해 싸워 주는 거잖아"
"하지만 뱀파이어가 이긴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죽는다. 노예로서 비참하게."
"리자드맨이 이길지도 모르잖아?"
"그럼 우리는 노예로서 구원받겠지. 비참하게."
"...비참해지지 않을 방법이 있나?"
"흑린의 리자드맨들처럼 싸우는 거지. 싸우다 죽으면 전사니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이들을 위해서 싸운 셈이니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옳군."
그 말에 하나, 둘 노예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파이어 병사 하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노예들을 돌아봤다.
"뭐 하는 거냐, 너희는?"
뱀파이어 병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뱀파이어 병사가 들고 있던 횃불에 노예들을 비추자, 그 순간 노예들이 뱀파이어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073화
"소란을 일으키는 노예가 얼마나 있지?"
"샤이븐 님, 소란 정도가 아닙니다. 노예 전체가 다 일어섰습니다."
샤이븐은 너무 분노가 커지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체라면 1천 2백 전부 다란 말인가?"
샤이븐의 부관이 답했다.
"예. 노예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무장도 하지 않은지라 어떻게든 놈들이 야영지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서고는 있습니다만..."
"그런데?"
"병력이 부족합니다."
"무장도 하지 않은 노예들을 창과 칼로도 어찌하지 못한다고?"
샤이븐의 물음에 부관은 주저하며 말했다.
"야영지를 지키는 병사의 숫자보다 노예들이 훨씬 많습니다. 게다가 이 노예들은 이상하게... 호전적입니다."
"호전적이라니?"
"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병사들이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놈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진영이 흐트러져서 난전이 됩니다. 난전 속에서 저희 병사들이 노예를 여럿 죽이더라도 노예들은 겁먹지 않고 달려들어 병사를 죽이고 무기를 빼앗습니다."
샤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부관이 노예들을 잘못 보았다.
그것은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용기라고 부른다.
'라크락... 성문을 열 때 여기까지 생각했나?'
라크락은 무모한 것도 아니고 운에 기댄 것도 아니었다.
샤이븐은 기병 하나가 성문 안쪽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라크락의 계산 안에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반도 구석에서 힘없는 부족만 상대하며 커 왔던 게 아니었던 건가.'
샤이븐은 노예들을 화살받이로 쓴 것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의미가 없었다.
"샤이븐 님?"
"뭐냐?"
"코에서 피가..."
샤이븐은 한숨을 쉬었다.
병사 하나가 린넨 수건을 가져왔고 샤이븐이 피를 훔쳐 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관과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불안한 눈빛을 띄었다.
뱀파이어에게 피를 흘리는 건 다른 종족보다 더 의미가 깊었다.
뱀파이어는 다른 종족이 그토록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피를 빨아서 살아남는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뱀파이어는 강인한 생명력을 얻고, 첫 번째 독니를 가진 샤이븐에 가까울수록 우수한 신체 능력도 가진다.
뱀파이어는 피를 흘릴 일이, 다른 종족보다 줄어드는 셈이다.
그런데 그 피를 아무런 상처 없이 흘린다는 건 샤이븐이 아니더라도 신앙과 관계된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아니다. 이게 신께서 보내는 징조일 리가 없다. 신께서 날 탓하신다고? 그럴 리가 없지.'
샤이븐은 피 묻은 수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성을 빼앗아야 한다. 아주 느리지만 아까보다 성벽까지 도달하는 병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몇몇은 성벽을 올라가기도 했지. 모든 병력은 성벽을 공격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 말씀은... 병력을 내줄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예들을 그냥 도망치게 둬야 한단 겁니까?"
부관은 샤이븐의 명령에 반발했다.
"하지만 산성을 빼앗더라도 짐을 옮기고 허드렛일을 할 노예들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은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노예들은 식량입니다. 저긴 그냥 요새가 아니라 산성입니다. 거주하는 병력이 전부일 테니, 적들이 요새를 포위하게 되면 저희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이 아니다."
"그럼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샤이븐은 마치 연인처럼 부관을 끌어안았다.
부관은 이 포옹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샤이븐 님 안됩니... 헉!"
샤이븐의 송곳니가 부관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대동맥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 피가 세차게 튀어 올라 샤이븐의 입천장과 목젖을 때렸다.
샤이븐은 부관의 피를 빨고 꿀떡대며 마셨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뛰고 있던 부관의 심장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샤이븐은 심장이 멎은 부관을 밀쳐 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맑아지는군. 코피를 흘려 피가 모자랐던 모양이다."
입가에 피칠한 샤이븐이 돌아보자 그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종족을 식량처럼 취급할지언정 뱀파이어에게도 동종 포식은 금기였다.
샤이븐은 피로 붉어진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아닌가? 하지만 다들 동의할 거야. 무장도 하지 않은 노예들 때문에 병력을 내놓으라는 이놈은..."
샤이븐은 쓰러진 부관의 머리를 걷어찼다.
목에 있던 커다란 송곳니 구멍이 찢어지며 크게 벌어진다.
찢긴 혈관 사이로 피가 울컥 쏟아지며 흙을 적셨다.
"더는 내 병사가 아니다. 노예들을 저지할 장군이 있나? ...아무도 없나?"
장군 중 하나가 겨우 일어섰다.
"제, 제가 가겠습니다."
"병력은?"
"괘, 괜찮습니다. 주둔지에 있는 병사들로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좋다. 그래야지. 가라."
장군이 서둘러 달려간 뒤, 샤이븐은 내키는 대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뱀파이어를 가리켰다.
"너."
"예!"
"너는 이제부터 내 부관이다."
"가, 감사합니다."
"내 무구를 가져와라."
샤이븐은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산성을 노려보았다.
"내가 직접 성문을 열겠다."
─┼
라크락은 성벽 위에서 전사들을 독려하던 중이었다.
산성의 꼭대기에 있던 망루꾼이 라크락에게 기대하던 소식을 가져왔다.
"적들의 야영지 쪽에서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라."
"제가 본 바에 의하면 놈들 천막 사이로 군중이 이동하고 병장기들이 달빛에 번쩍였으며, 횃불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밤중이라 어둡고 놈들이 숲 안쪽에 자리해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 정도면 괜찮다."
퀘즐이 말했다.
"...혹시 저희가 적의 병력을 잘못 세었던 것일까요? 놈들의 원군이 도착한 건 아닙니까?"
"그건 아니다."
라크락이 말했다.
"병장기들이 달빛에 번쩍였다는 건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싸움이요? 단염과 석면, 그리고 유르의 군대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싸움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니, 싸움이 맞아. "
"그럼 누구와 누가...?"
"뱀파이어의 노예들이지. 횃불이 왜 더 늘었겠나? 뱀파이어들은 최소한의 불빛이면 충분한데."
퀘즐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라크락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상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희의 전황은 더 유리해질 겁니다. 왜 이렇게 운이 좋게 노예들이 뱀파이어를 향해 저항하기 시작한 겁니까?"
라크락은 쓰게 웃었다.
이 퀘즐이란 부관은 충분히 똑똑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더 해야 했다.
라크락은 퀘즐의 물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코카투 전사들을 준비시키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예?"
"퀘즐, 내 말이 사실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퀘즐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노예만 해도 1천 2백입니다. 아무리 무장하지 않았다고 한들 모두가 들고 일어났다면 병사 3백은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저 비탈을 달려오려는 병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죠. 사기가 떨어질 겁니다. 만약 눈앞의 적들이 이 상황을 알면 어떨지 불안하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노예들을 제압할 병사들을 보내야 합니다. 절충안이 있다면, 사기를 북돋기 위해 공격을 잠깐 멈추기라도 해야죠. 아, 하지만, 라크락 님 보십시오. 저들은 공격을 멈추고 있지 않습니다."
라크락이 또 질문을 던졌다.
"노예를 제압할 병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예?"
"답해라."
"...말도 안 되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어떻게든 '당장' 결판을 내려고 할 겁니다. 노예 모두가 돌아선 게 확실하다면 적들은 앞과 뒤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놈들이 어떻게든 성문을 뚫을 방법은, 아마도 신에 의지하는 것뿐일 텐데..."
라크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락의 시선은 성벽 밖으로 향해 있었다.
"봐라."
라크락은 성벽 아래로 고갯짓했다.
흡혈왕 샤이븐이 걸어오고 있었다.
샤이븐을 향해 화살이 쏘아졌지만,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화살이 두 동강나며 널브러졌다.
샤이븐과 라크락의 눈이 마주쳤다.
샤이븐이 검 끝으로 라크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라크락! 겁먹은 게 아니라면 이리 나와 덤벼라!"
어처구니없는 도발이지만, 신의 힘은 실재하므로 허세는 아니었다.
라크락이 시종에게 코카트리스 아낙세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싸움에 응하실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저 뱀파이어는 신의 힘으로 성문을 부술 것이다."
퀘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노예들이 적의 뒤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코카투 전사들을 내보내라. 합공해서 놈들을 전멸시킨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
한편, 샤이븐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크락이 나오기 위해 문이 열리는 순간, 숨겨 놓은 큰족제비들을 성문으로 몰아넣는다.'
전투가 계속 된 결과 비탈 아래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 시체 더미 뒤에는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 출신 뱀파이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샤이븐의 명령을 받고 혼란을 틈타 숨어든 이들은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성문을 열어 두면 놈들은 지형과 성이라는 이점을 잃어버린다.'
난전이 되면 샤이븐은 뱀파이어가 유리해질 거라고 믿었다.
샤이븐이 생각하는 뱀파이어 최고의 무기는 바로 독니였다.
하루에 몇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독을 불어넣는다고 바로 복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죽고 죽이기를 각오한 적이라면 가장 강한 독을 가진 샤이븐이 물더라도 장군들과 같은 복종심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독은 강한 통증을 유발하고 몸을 마비시킨다. 리자드맨들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마 그것은 뱀파이어가 적개심을 가진 상대를 우호적으로 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독의 특성이겠지만, 전장에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벽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진 않겠지. 라크락에겐 탈것이 있다고 들었다.'
샤이븐이 비탈을 중간 쯤 올라갔을 때, 라크락이 코카트리스 아낙세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대한 것처럼 성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라크락을 태운 아낙세는 가볍게 날갯짓해, 성벽 위에 올라섰다.
성벽 위에서 상현달을 등진 라크락의 모습에 샤이븐이 한 발 물러섰다.
"어, 어떻게?"
"모르나?"
라크락은 창대로 아낙세의 날개를 툭툭 쳤다.
"날개 달린 것들은 하늘을 난다."
샤이븐은 그런 소리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황당한 나머지 그 반례를 얼른 답하지 못했다.
-캬오오오!
아낙세가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내세우며 샤이븐에게 내리꽂혔다.
─┼
성운이 둘의 싸움을 내려다보았다.
'압도하는군.'
노예들이 후방에서 나타나지 않았기에, 퀘즐은 아직 코카투 전사들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라크락은 성벽 위의 궁수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들, 적진 한 가운데 떨어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낙세를 탄 라크락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샤이븐의 칼과 라크락의 창이 맞댄 순간 물러난 것은 샤이븐이었다.
샤이븐의 육체 능력은 분명 말을 탄 기병과도 충분히 맞설 수 있겠지만, 라크락이 일반적인 기병일 리 없었다.
아낙세는 어지간한 사냥꾼 열이 붙어도 쉽게 잡을 수 없는 코카트리스였고, 그 위에 올라탄 라크락은 21레벨의 영웅 개체였다.
샤이븐이 자신했던 독니는 써 볼 기회조차 없었다.
뱀파이어들은 라크락의 창대 길이만큼 접근할 수도 없었다.
샤이븐은 어찌어찌 라크락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있었지만, 성문을 열기 위해 준비해 둔 큰족제비 기병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라크락은 포위당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라크락이 적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예들도 결국 뱀파이어 장군을 쓰러트렸군. 이제 무장을 하고 적의 뒤를 치겠지. 문제는...'
생각하던 성운은 다음 메시지에 눈을 의심했다.
「플레이어 癤우삤瑜쇰씪 님이 귓속말을 요청했습니다.」
074화
'이 타이밍에 귓말을 걸어?'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성운은 귓속말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거의 다 이겨 가는 전투였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대화를 건다는 건 일종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성운이 대화를 원한다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어도 샤이븐을 죽이고서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존재 자체가 수상한 플레이어지. 이상한 닉네임, 게임이 시작되고 한참 뒤에 등장한 데다, 지금까지 없었던 뱀파이어라는 종족까지.'
성운은 귓속말을 허락한 뒤 평소처럼 화상 채팅으로 전환했다.
癤우삤瑜쇰씪, 절우비가 화면 너머로 등장했다.
'취향이 고약하군.'
처음엔 얼굴이 상당히 어색해서 제대로 만들지 않은 모델링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것이었다.
뻥 뚫린 가죽 안쪽으로 우윳빛으로 탁한 눈동자가 성운을 향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또 여러 사람의 얼굴 가죽을 기워 만든 넝마를 옷으로 해 입고 두개골과 빗장뼈로 장식하고 있었다.
癤우삤瑜쇰씪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운이 말했다.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나는 그쪽을 절우비라고 부르는데, 괜찮나?"
"......"
"대화는 그쪽이 먼저 걸었는데. 할 말 없으면 끊고."
그제야 얼굴 가죽의 열린 입 사이로 거무튀튀한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癤우삤瑜쇰씪가 내리깔린 음산한 목소리로, 서툴게 말했다.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데?"
"틀렸다... 너는, 패배하게... 된다."
성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야. 내가 이겨. 애초에 공성전이 아니라 그냥 회전이었더라도 내가 이겼을 거야. 산성에서 싸우기로 한 건 피해를 덜 보기 위해서였지. 병력 숫자는 절반이라고 해도 흑린의 리자드맨은 십년 넘게 정예 병력을 거의 손실 없이 이어왔어. 반면에 복합 종족군은 기량에 맞는 지휘관이 있다면 훌륭하지만, 샤이븐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나는... 아둔하고, 미천한... 두 발, 달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아둔하고 미천하다고?'
성운은 상대가 최소한 롤플레이어라고 가정했다.
성운이 말했다.
"아니면 지금 라크락과 샤이븐의 싸움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당장은 혼자서도 라크락이 분전하고 있어. 내가 걱정하던 것 중 하나는 그쪽이 강신 스킬을 사용하는 거라서 요주의하고 있었지. 하지만 강신은 나도 함께 강신해서 카운터를 쳐 주면 그만이거든."
"그 말도, 아니다..."
"그럼?"
癤우삤瑜쇰씪가 더듬더듬 말했다.
"너는, 이 세계에서...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성운은 그 말뜻을 생각했다.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정확히는 상대가 성운과 같이 지구에서 온 인간이라면 '자신이 게임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 무엇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성운은 상대를 더 도발해 보기로 했다.
"아냐. 내가 이길 거야. 지금은 리자드맨과 인간만이 나를 믿고 따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아니게 될걸. 문명을 발전시켜서 모든 대륙을 바닷길과 하늘 길로 잇고, 내키면 대양 아래에 해저 터널도 지을 거야. 도시 마다 신전을 세우고 고대 유적은 싹 다 발굴해서..."
"그만!"
癤우삤瑜쇰씪가 분노했다.
"그 힘은, 본래... 너희의 것이, 아니다!"
성운은 또 엉뚱한 단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플레이어를 '너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상대는 확실히 플레이어가 아닌 셈이다.
"그럼 원래 누구 것이었는데?"
"우리, 것이었지!"
"우리? 우리가 누구야?"
성운의 질문이 난처했는지, 癤우삤瑜쇰씪는 침묵했다.
성운이 말했다.
"너 사람 아니지?"
癤우삤瑜쇰씪는 잠깐 주저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운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반응은 긍정인데. 사람이 아니면 뭐란 말이지?'
癤우삤瑜쇰씪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었다."
"세상의 주인?"
"이제, 너희로부터... 돌려받을 것이다."
화상 채팅창이 사라졌다.
'매너하고는.'
성운은 투덜거렸다.
그리고 허공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건?'
─┼
라크락의 은창 날이 샤이븐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아악!"
날아오른 오른팔을 코카트리스 아낙세의 부리가 잡아 냈다.
아낙세는 고개를 들더니 단번에 샤이븐의 오른팔을 집어삼켰다.
'끝인가?'
샤이븐을 지키던 큰족제비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샤이븐은 팔이 잘린 채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지만 승부는 결정이 났다.
라크락은 샤이븐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낙세의 옆구리를 두 발로 치면서 돌진시켰다.
'...!'
라크락은 순간 소름이 돋는 걸 느끼고 고삐를 당겼다.
라크락보다 빠르게 아낙세가 하늘 위를 보더니 괴성을 질러 댔다.
-캬오오오!
샤이븐과 라크락 사이로 거대한 은빛 벽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라크락은 아낙세를 몰아 비탈 위로 뛰어올랐다.
그제서야 라크락은 방금 보았던 것이 은빛 벽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거대한 칼날이었다.
허공을 찢고 수십 미터 크기의 검이 라크락을 향해 떨어졌던 것.
라크락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아낙세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을 터였다.
라크락은 고개를 들었다.
"저건 틀림없이..."
검의 끝에는 손이 있었다.
거대한 손 뒤로 그 주인이 드러났다.
그 키는 백여 미터는 될 듯하다.
머리는 횃불의 빛조차 닿지 않을 만큼 멀어, 그림자로만 보이지만 스산하고 어두운 붉은 안광만큼은 선명하다.
"...놈들의 신이군."
─┼
성운은 거인의 모습을 살폈다.
전체적인 모습은 성운이 방금 전까지 화상 채팅창으로 보았던 癤우삤瑜쇰씪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특히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부분은 거의 같은데, 목 아래가 좀 달랐다.
이 거인은 모두 세 쌍의 팔을 가지고 있었고 팔마다 칼과 창, 도끼와 망치,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있었다.
'현신(現身).'
신성 레벨 16에 얻게 되는 스킬이었다.
제사장의 몸을 빌리거나, 창조물을 소환하는 게 아니라, 신 그 자신이 직접 지상에 내려오는 것이다.
'현신의 모습'은 플레이어가 직접 설정이 가능했는데 전투 능력은 신이 가진 영역을 기반으로 했다.
'전술 자체는 좋지만, 뭔가 게임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미숙해 보여서 사용할 줄 몰랐으면 했는데. 거기까지 바란 건 욕심이 컸겠지.'
성운은 癤우삤瑜쇰씪의 레벨을 16에서 17까지 감안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별다른 신앙 자원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크기로 설정했군. 스라티스를 소환해도 겨우 허벅지나 긁겠어. 하지만 저 경우엔 신앙 자원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역시 이 시스템을 꿰고 있는 건 아냐.'
성운은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았다.
이미 아낙세를 통해 성벽 위에 올라선 라크락이 부대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당연히, 도망치라는 것.
산성 문을 열고 비탈의 동쪽 샛길로 내려가면 적 부대를 지나쳐서 자동성을 향해 갈 수 있었다.
본래는 샛길을 지키는 뱀파이어들이 있었지만, 공성전에 너무 많은 병력을 소비한 바람에 그 길은 텅 비어있었다.
'좋아, 상식적이야.'
한 눈에 보아도 저 모습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 그리고 용기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도전해 볼 만하다고 여기는 건 십여 미터의 괴수 정도.
백 미터에 가까운 거인은 수천 명이 화살을 쏜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
'그래.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현신 스킬은 16레벨에 바로 사용하게 될 경우 강신보다도 많은 신앙을 소모한다.
이 소모량이 얼마나 많은지, 현신을 유지하기 위해선 실시간으로 제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놈은 진행 중인 의식이 없다. 제물이 바쳐지지 못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니 결국 놈은 현장에서 직접 제물을 받아 내야 하는 거지.'
그리고 癤우삤瑜쇰씪가 성운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샤이븐은 자신의 신이 당장 요새를 향해 뛰어가 검을 내려칠 거라 생각했지만, 癤우삤瑜쇰씪는 그러지 않았다.
겨우 몇 걸음을 걷는 것만으로도 신앙이 바닥난다.
그래서 癤우삤瑜쇰씪는 몸을 숙이곤 빈손을 뻗어 노예와 그 노예와 싸우고 있는 뱀파이어 병사들을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을 열고 그들을 산 채로 입에 털어 넣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갔다.
샤이븐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휩쓸어 가는 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저것이 자신이 선택한 신이며, 자신이 사실은 저 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신의 모습을 보고 노예와 뱀파이어 병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한들 신의 품에서 빠져나가긴 힘들었다.
신은 가장 멀리 도망친 이들부터 가볍게 양손을 그러모아 쥐었다.
겁에 질린 이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거나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샤이븐은 주저앉아 자신의 차례가 마지막이길 기도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리자드맨을 좀 잃긴 할 거야. 그래도 놈이 노예와 뱀파이어 군대로 배를 채워 신앙을 겨우 회복할 쯤엔, 산성에 남은 병력은 별로 없겠지.'
유감스럽게도 이번 전투는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끝나게 될 것 같았다.
아마 샤이븐은 살아남을 테고, 癤우삤瑜쇰씪는 남은 병력으로 빈 산성을 탈환하게 하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뱀파이어 군대를 박살 내고 癤우삤瑜쇰씪의 신앙을 바닥내는 건 훌륭한 성과였다.
어차피 뱀파이어는 산성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
'절우비는 바보가 아냐. 그걸 알고 일부 병력만 남긴 채 산성을 포기할 거다. 그래도 산성에 병력을 어느 정도 남기면 조금의 시간이라도 끌 수 있을 테니. 그 사이 샤이븐에게 다시 대륙을 주유하게 만들면서 병력을 어떻게든 늘리려고 하겠지.'
하지만 뱀파이어 군대가 떠난 사이 다섯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마을을 탈환해 내고 있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피해가 좀 더 가겠지만, 내 책임은 아니지.'
그리고 성운과 비슷한 결론을 낸 이가 있었다.
라크락이었다.
하지만 라크락은 성운과 다르게 행동했다.
─┼
"서둘러라! 저 악신이 언제 우리에게 돌격해 올지 모른다!"
라크락의 외침에 리자드맨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최소한의 무기만 지닌 리자드맨 전사들이 성문을 빠져나와 비탈의 동쪽 면으로 달려갔다.
퀘즐이 말했다.
"라크락 님, 이제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먼저 비탈을 내려가십시오."
"멍청한 놈. 어떤 우두머리가 제 전사들을 놔두고 제일 먼저 도망친단 말이냐?"
"이번엔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라크락 님은 단순한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왕'이지요."
"왕이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넌 왕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혹시 겁쟁이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퀘즐이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가장 귀하신 분입니다."
"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저희의 본이 되시고 저희가 어디로 갈지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 목숨이 너희보다 중하다고 생각하느냐?"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퀘즐이 어처구니없어 웃었고, 라크락도 따라 웃었다.
이번에는 퀘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왕이 죽으면 분명 혼란이 온다.
라크락은 알고 있었다.
자신 앞에 무릎 꿇었으나 내심 자신처럼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적어도 라크락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허나 내가 죽는다면?'
075화
라크락이 죽는다면 그들은 숨겨 놓았던 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라크락과 자올 사이엔 지금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셋 모두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리하고 용기 있었다. 아직은 누가 후사를 이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퀘즐."
"예?"
"난 역시 왕의 자질이 부족한 듯싶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대륙에 라크락 님 같은 분은 앞으로도 없었고 뒤로도 없을 겁니다."
"그런 말 마라. 이 땅에 태어날 후손들이 있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라크락은 창날로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악신은 노예와 뱀파이어를 가리지 않고 제 입에 쳐 넣고 있었다.
"이제 반절도 안 남았다. 반면에 산성을 빠져 나간 전사는 아직 반도 안 되는군."
"예?"
퀘즐은 반사적으로 라크락의 손목을 잡았다.
"라크락 님."
"난 몇 번이나 봤다. 분명 신의 힘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이 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안 됩니다."
"하지만 저 흡혈왕도 살아남을 것이다. 산성으로 우리를 막고 그 사이 대륙으로 내빼겠지. 아직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마을이 많이 남았다. 저 악신의 힘도 건재할 테니 그 사이 대륙은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전쟁을 겪겠지.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라크락의 시선은 비탈 아래로 향해 있었다.
퀘즐은 라크락의 시야 앞으로 걸어갔다.
"라크락 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찌되었든 저희의 승리입니다."
"수많은 희생 끝에 얻게 되는 승리지."
"그것도 승리입니다."
라크락은 그제야 퀘즐을 바라보았다.
"퀘즐."
"예?"
"넌 산수를 좀 더 배워야겠다."
라크락은 퀘즐의 멱살을 잡고 메쳤다.
퀘즐은 세상이 빙글 도는 듯싶었다가 눈이 캄캄해졌다.
퀘즐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라크락 님!"
하지만 라크락은 옆에 없었다.
퀘즐이 성벽을 내려다봤다.
아낙세에 올라탄 라크락이 비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앞에 거대한 악신이 천천히 라크락을 돌아보고 있었다.
─┼
"안 돼!"
성운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라크락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저런 바보 같은 짓을! 강신으로 라크락의 몸을 이동시켜야겠다.'
하지만 성운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신의 제사장이 강신 스킬에 저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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