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8
문제가 생겼으면 그 문제를 타개해야만 했다.
엘다르가 말했다.
"아무튼 나는 비굴하게 그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부디 그대를 돕도록 허락해 주길 바라노라."
"음."
룬다는 크람푸스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냔 의미였다.
크람푸스가 필담을 썼다.
'이게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정보 공유를 요청해요.'
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다르, 당신의 말을 신용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한데요?"
"좋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제공하지. 내가 네뷸라에게 얼마나 당하고 살았는지..."
이 '정보'를 제공한다는 건, 시스템 차원에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말로 속이는 게 불가능했다.
때문에 이 정보 공유는 민감한 부분이 있었고, 일반적으로는 느슨한 동맹 관계에 있더라도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공유하는 일이 없었다.
룬다는 엘다르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흔쾌히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상태창을 통해 실제로 공유받은 정보를 확인하며 더 당황했다.
"...어마어마하게 뜯겼군요."
엘다르가 선공을 하긴 했지만, 룬다의 기준에서 네뷸라의 복수는 정말 가공할 만하다 말할 수 있었다.
룬다는 엘다르가 보내 온 정보를 크람푸스에게 공유했고, 크람푸스도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엘다르가 모든 정보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정보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엘다르의 주력 부대를 박살 낸 다음, 엘프 마을을 불태우고, 자신의 지역으로 도망쳐 온 엘프들을 몇 년도 되지 않아 다시 내쫓고... 거기다 겨우 자리 잡은 정착지까지 따라가서 향후 나올 자원까지 넘기라고 했군. 겨우 목숨을 붙여 놓았을 뿐이잖은가?'
결코 동맹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였다.
동맹은커녕, NPC 속국이라도 저렇게 모질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저런 대우를 받으면 누구나 복수를 꿈꾸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저런 짓을 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쓰다가 내다 버릴 생각이었군. 아마 엘프들을 통해서 북해안을 개척시키면 그 마을을 자신이 가져갈 심산이었겠지.'
크람푸스는 등골 어딘가가 싸늘해졌다.
'악귀 나찰인가? 신이 되고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인가?'
크람푸스는 룬다에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룬다가 말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저희를 도울 겁니까?"
"외람된 말이나... 나는 군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예, 그건, 공유해 주신 정보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프들은 험난한 북해안에서 살아남기에도 힘이 다한 것 같았다.
무기를 들 만한 이들은 고블린과 오우거들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데에도 힘을 다 쓰고 있었다.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엘다르가 이번 전투에서 큰 쓸모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엘다르가 말했다.
"다행히 내 쓸모가 다한 것은 아니다. 내가 비굴하게 굴었기에 네뷸라가 아직은 나를 신용하고 있단 것이지."
"그 말은...?"
"나는 네뷸라의 작전을 알고 있다."
─┼
엘다르가 말한 네뷸라의 작전은 간단했다.
바로 선제공격.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먼저 공격을 나선다.
그렇게 한다면 두 부대를 상대해야 하는 곤란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엘다르와의 연락이 끝난 뒤, 룬다가 말했다.
"저 말을 믿어도 될까요?"
"룬다 님도 공유된 정보 보셨겠지만, 솔직히 엘다르의 말을 못 믿을 이유가 없긴 합니다."
"...그랬죠. 그렇게까지 당했는데도 네뷸라에 대한 호의가 남아 있을 리가 없죠."
"게다가 선제공격이란 작전 자체도 네뷸라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작전입니다. 어색하지 않아요."
엘다르는 네뷸라가 자동성에 병력을 모아 두었다가 크람푸스, 즉 사티로스의 영토로 공격해 갈 거라고 말했다.
자동성에서 수성을 한다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 눈에 밟혔지만, 크람푸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영토가 공격받으면 동맹인 룬다가 회군할 거라 판단한 거지.'
엘다르가 말한 리자드맨 주력 부대는 모두 1천 5백.
크람푸스와 룬다가 이미 확인한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협적인 숫자는 맞다. 하지만 수성전, 즉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싸울 수 있다면 내 힘과 내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사티로스의 수도 데이머릿은 성은 아니었으나 천연 요새라고 할 만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인 데이머릿은 세 개의 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강이고 나머지 하나는 고대 유적인 터널이었다.
'다리와 터널은 언제든 무너트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둘만 막으면 목책을 올린 하나의 길만 막으면 되지. 자동성만큼은 아니지만 일종의 요새가 된다. 수성전을 벌일 수 있어.'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다.
본래 르나르 부대는 리자드맨을 공격하는 시점에 곧장 자동성을 공격하기 위해 국경 마을에 위치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데이머릿은 국경에서 며칠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제대로 된 수성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부대를 뒤쪽으로 물려 수도에 대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티로스들은 과격한 부분이 있다. 리자드맨들이 쳐들어오면 후퇴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특히 파브가 왕이니까.'
크람푸스는 최근까지 계속해서 리자드맨과 네뷸라에 대한 적개심을 기르기 위한 여러 기적을 행해 왔기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겨우 며칠 차이야.'
크람푸스의 생각에 룬다도 동의했다.
"그럼 본래 계획대로 가는 거군요?"
"네. 큰 차질은 없습니다."
"네뷸라가 알아차리진 않을까요?"
"가능성은 낮습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모든 정보를 알 수는 없다.
게다가 다섯 종족의 신들 모두 자신의 종족들에게 벌레와 새를 혐오스러운 생물로 지정했다. 지난 몇 달간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이들이 이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있었다.
게다가 정찰은 신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자동성을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첩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리자드맨 부대가 집결하고 있고 그 위치가 자동성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소비하면서 정찰을 고집해 봤자 가장 고급 정보는 사람을 통해서 들어온다.'
이 정보는 크람푸스와 룬다에게 엘다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더불어서 엘다르는 군대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국경을 넘으면 그때 한 번은 보급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요. 그럼 처음 계획한 것처럼 먼 길이 아닌 가까운 길로 바꿀 수 있어요. 반도로까지 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죠."
"그 조그마한 차이 덕분에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엘다르가 네뷸라를 배신하면서 생긴 차이는 아주 작았다.
사티로스 부대를 며칠 거리로 뒤로 물리고, 르나르 부대가 국경을 넘는 시간을 며칠 앞당긴다.
'작은 차이지.'
크람푸스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큰 차이가 아닌 작은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았다.
'랭킹 1위라고? 하지만 그 고압적인 플레이가 결국 2대 1의 싸움을 3대 1의 싸움으로 만들었구나, 네뷸라.'
─┼
하지만 크람푸스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룬다 옆에서 채팅을 엿들었던 것처럼, 바로 그때 성운이 엘다르의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룬다와의 채팅이 끝났을 때, 엘다르가 성운을 올려다보았다.
"...저, 이걸로 되었사옵니까?"
"응. 좋은 연기였어. 평소에 계속 연기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엘다르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유한 정보가 너무 설득력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061화
생각해 보면 엘다르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성운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승리할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서?'
엘다르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성운과 함께 하는 것이 최악은 아니었고, 앞으로 더 고민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생각하는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왜? 뭐가 문제야?"
"저어... 네뷸라 님이 말하라고 한 '선제공격'이라는 정보만으로는 전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엘다르는 성운이 쏘아붙일 때마다 주눅이 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이제 와선 기분이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엘다르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흠흠. 제 좁은 시야로 말씀드리자면... 상대는 선제공격 받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 병력을 뒤로 조금 물리겠지요. 하지만 네뷸라 님의 계획은 사티로스가 아닌 르나르 부대를 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 경우, 르나르 부대가 후퇴를 하고 그 사이 사티로스들은 서둘러 달려가 비어 있는 자동성을 공격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때 르나르 부대가 뒤돌아서서 리자드맨 부대를 공격하면 결국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셈인데..."
성운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엘다르가 당황했다.
"네뷸라 님, 이 정도면 이론적으로는 맞지 않습니까?"
"틀렸어."
"...죄송하지만 어떤 부분이 틀린 겁니까?"
성운이 말했다.
"사티로스들은 며칠 뒤로 물러났고, 나는 며칠 빨리 르나르의 부대를 치겠지. 그리고 승리할 거야."
"...승리하는 겁니까."
"너도 도와주잖아."
"제가요?"
엘다르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크람푸스와 룬다를 속인 것이 아니라 엘프들은 정말로 군대가 없다.
오히려 눈속임을 위해서 얼마 있지도 않은 자원을 쪼개어 르나르의 군대에 보급을 해 준다고까지 했다.
'그것도 전략에 들어가는 건가?'
성운이 계속 말했다.
"뭐, 안 도와줘도 이길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예정되어 있던 전선을 새로 그려 보면, 너도 알겠지."
성운이 지도를 띄워서 부대의 위치를 그렸다.
그 모습에 엘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
털이 부슬부슬 나 있고 귀 끝과 꼬리 끝이 검은, 옅은 갈색의 생물들이 황야를 걷고 있었다.
르나르였다.
르나르 기병들은 큰족제비에 올라타고, 그 뒤에는 보병이, 후미에는 큰족제비들이 끌고 있는 수레가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기병들 사이에 있던 르나르의 왕 하티가 화를 냈고, 대열이 멈춰 섰다.
하티는 큰족제비에서 내려서 되물었다.
"병사들이 배탈이 났다고?"
"예..."
보고를 올린 르나르 백인장이 고개를 숙였다.
"필시 음식이 상한 것이군. 보급은 자네가 담당했을 텐데?"
"...맞습니다."
"그럼 이 보고를 올릴 때 그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도 알았겠군."
하티는 칼을 빼 들었다.
그때 천인장 유베이가 하티를 말렸다.
"하티 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유베이는 르나르 사이에서 가장 유능하고 용맹한 전사였다.
덕분에 그 누구보다 빨리 백인장이 되었고, 왕인 하티를 이어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천인장의 지위에 올랐다.
하티는 유베이를 신임하고 있었다.
유베이가 말했다.
"식품들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예.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우리가 가져오지 않은 음식을 먹었지."
"예."
하티는 뭐가 문제인지 알아차렸다.
"엘프! 엘프에게서 받은 보급품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유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보급 담당?"
"예. 맞습니다. 적어도 오늘 배탈이 났다고 보고한 병사들 모두 엘프 보급품을 요리해서 먹고 탈이 났습니다."
하티는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어제 내가 직접 보급품을 확인했었다. 그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자네도 함께 확인하지 않았나. 상한 음식은 없었어."
"예. 그 말인 즉..."
유베이가 말했다.
"엘프들이 일부러 문제가 있는 보급품을 줬다는 말입니다. 겉보기로는 상하지도 않고 신선한 식품들 같지만, 독 같은 걸 탔겠죠."
하티가 배탈이 난 병사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하자, 유베이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성운이 벌레의 소영역을 이용한 것이었다.
바로 벌레를 통한 질병 전파.
성운은 물과 음식을 통해 전파할 수 있으면서, 모양이나 냄새 등 외관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 질병을 찾아냈다.
다만 외견상의 문제를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의 약한 박테리아이므로 어느 정도 섭취를 해도 며칠 정도의 배탈이나 설사 밖에 유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운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너무 강한 질병은 통제가 되지 않으므로 성운은 사용하길 꺼렸다.
하티는 배신을 당한 것을 알고 분노로 세모난 귀와 길게 난 수염을 씰룩거렸다.
"이런 제길, 엘프가 우리를 속였다는 이야기는..."
"...엘프가 준 정보 또한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급품을 전달한 엘프들은 리자드맨들이 자동성에서 사티로스의 영토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정찰을 한다는 이유로 기병들을 너무 지치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티는 그것을 믿고 정찰대를 절반으로 줄였다.
하티는 엘프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은지, 중얼거렸다.
"하지만 엘프들이 준 정보는 더 없는 결실의 신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유베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개체라면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엘프들이 배신을 했다는 결론보단, 엘프들이 준 보급품에 엘프들 스스로도 알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을 낼 것이다.
하지만 유베이는, 독특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불신'이었다.
플레이어 사이에선 일반적으로는 디메리트라고 불리는 능력치지만, 룬다는 이 능력치를 가진 유베이를 르나르 종족의 정상 가까이 올려놓았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신께서 틀렸다면요?"
"불경한 소리!"
"하티 님, 제 말을 그렇게 넘겨듣지 마십시오.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엘프들은 배신을 한 것이 맞고, 본래 리자드맨들과 협력하는 엘프들인 만큼 저희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을 겁니다. 정찰대의 숫자와 횟수를 두 배는 늘려야 합니다."
하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베이는 신실하진 못하나 충신이었다.
그리고 하티의 생각에도 유베이의 말이 타당해 보였다.
"좋다. 천인장, 그 말대로 행하라."
유베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찰 담당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정찰대가 알려 온 정보 때문에, 유베이는 다시 하티에게 갔다.
"리자드맨 군대를 발견했답니다."
"...숫자는?"
"1천하고 5백쯤 되어 보인답니다."
거리는 걸어서 겨우 반의 반나절.
적의 기병들만이라면 언제든 공격을 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하티는 흑린의 전투력을 여러 차례 보고받은 적 있었다.
자세한 전투 내용에는 어느 정도 허황된 구석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강하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었다.
'저 숫자로 황야에서 회전을 벌인다면 필시 패배한다.'
르나르는 체격 때문에 동수라도 리자드맨과 불리하다.
그런데도 불리한 숫자.
하티가 흑린에 공격하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사티로스들과 동시에 싸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신의 계시를 받은 뒤로는 리자드맨의 주력 부대와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신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하더라도 적의 본대와 싸울 수는 없다.'
게다가 배탈이 난 병사가 2백 명.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병사는 9백 명인가.'
큰족제비 기병 중에 배탈이 난 병사가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이대로 맞서 싸우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배신당했다는 걸 사티로스들은 아직 모르고 있을 터였다.
하티가 끝내 말했다.
"이대로 돌아간다."
천인장 유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선택입니다."
"사티로스의 왕 파브에게 심부름꾼을 보내라. 리자드맨 본대와 마주쳤고, 우리는 후퇴한다고."
"알겠습니다."
"우리는 사티로스들이 자동성을 공격하는 동안 최대한 뒤로 물러난다."
다행히 르나르의 군대는 황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하루를 꼬박 가면 르나르의 작은 체구를 이용해 유격전을 벌일 수 있는 산과 숲이 펼쳐진다.
소문난 리자드맨의 각궁만큼은 아니지만 르나르의 활도 튼튼하고 멀리 날아가기로 유명했으며, 활잡이 숫자만큼은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거기서부턴 승산이 생긴다. 시간을 끌기 시작하면 사티로스의 공격으로 자동성이 무너질 테고, 파브가 더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면 보급을 받을 수 없는 리자드맨들은 공격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 반격할 기회가 생겨난다.
하티는 그렇게 생각했다.
르나르 군대가 돌아선 순간, 거대한 사마귀의 그림자가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
르나르의 신, 더 없는 결실의 신 룬다는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야!"
─┼
20미터의 거체가, 야트막한 언덕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푸른 외피와 두터운 다리들이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고, 거대한 앞발, 그 뒤로 그로테스크하게 붙은 두 팔이 두 어깨를 맞잡고 있었다.
성운의 창조물, 스라티스였다.
성운이 생각했다.
'세 시간 차이? 창조물로 시간 끌면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지.'
스라티스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르나르 군대에 접근했다.
스라티스가 말했다.
-신실한 자의 영토에 함부로 발을 들이다니...
르나르의 왕 하티가 말했다.
"모든 병사는 전속력으로 도망쳐라! 수레는 버려라!"
-그 죄, 죽음으로 갚음이 응당하다...
스라티스가 멀리서 지면을 내리쳤다.
머리통만 한 돌 파편들이 르나르들을 덮쳤다.
한 번의 공격으로 열댓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유베이가 병사들에게 산개를 명령한 뒤 말했다.
"하티 님! 수레를 버리면 다음 전투가 버겁습니다! 저 괴물을 상대해야만 합니다."
"유베이, 그대는 유능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한 게 문제야."
"예?"
"저건 그냥 괴물이 아니다. 틀림없이 사악한 리자드맨들의 수호자!"
"...아."
하티가 말했다.
"우리에게도 수호자가 있다!"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1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시궁쥐가 스라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
르나르들은 자신들의 수호자가 등장하자 환호하면서도, 그 싸움을 피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룬다는 이를 악물었다.
룬다를 믿는 르나르들의 믿음에 미치지 못해서 아쉽지만, 룬다의 창조물, 시궁쥐의 형태를 한 '네지'는 스라티스의 능력치에 턱없이 못 미쳤다.
'능력치 뭐야? 흉물과 흉신을 죽이고 얻은 정수를 몰빵한 건가? 특성으로 괴력이 붙었어? 미친 거 아냐?'
룬다는 일이 잘 풀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함께 동맹을 맺기로 한 크람푸스는 괜찮은 플레이어였다.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제3 대륙 내에서는 끝까지 갈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 룬다는 자신을 우승까지 데려다 줄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나쁠 거라고 생각했다.
'음침한 그 콤비나 괴팍한 위즈덤 같은 놈보단 성격이 멀쩡하니까.'
게다가 룬다의 판단으로도 크람푸스의 플레이는 정석적이었다.
모든 게 잘 풀릴 예정이었다.
그 다음 상대해야 하는 게 괴물 같은 네뷸라만 아니었다면.
'잠깐, 이대로 도망쳐도 저 창조물이 네지를 죽인 다음 다시 나타나면 헛수고야.'
게다가 네지를 이대로 잃는 것도 룬다에겐 너무 속상한 일이었다.
스라티스만큼 투자를 한 건 아니지만, 네지도 정수를 투자한 창조물인지라 죽게 되면 레벨 다운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래. 반대로 생각하자. 여기서 강신 스킬을 사용해서 네지가 스라티스를 죽이면 네뷸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어.'
적 전체가 다가오려면 세 시간은 걸린다.
적 기병들만 온다고 하더라도 30분.
'유베이에 강신을 하고 싸우면 30분 만에 스라티스를 물리칠 수 있을 거야.'
스라티스의 레벨은 11이지만, 디바인 레벨은 4.
네지의 레벨은 7, 디바인 레벨은 3.
하지만 룬다의 신성 레벨은 9.
'4대 12, 스라티스의 기본 능력치를 계산에 넣어도 압도적인 차이'
그전까지 스라티스만 죽이면 그만이었다.
룬다는 유베이에게 강신 스킬을 사용했다.
─┼
르나르의 왕 하티는, 유베이의 눈이 녹색 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더 없는 결실의 신이여!"
"나는 저 괴물과 싸우겠다. 군대를 후퇴시켜라."
"그대 뜻대로 하겠나이다!"
하티는 고개를 숙인 뒤, 군대를 이끌었다.
룬다=유베이는 뒤로 돌아섰다.그리고 펄쩍 뛰어 스라티스에게 달려들었다.
네지가 말했다.
-신 님!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닥쳐라! 널 잃을 수는 없다!"
-신 님!
네지는 거대한 눈망울로 잠깐 룬다=유베이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스라티스에게 달려들었다.
스라티스는 네지의 등에 칼날을 박아 넣으려다, 룬다=유베이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훌쩍 물러났다.
-......
"말수가 적은 창조물이군. 네놈의 신은 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
-...그래도 상관없다.
"오호."
-...주어진 임무를 다할 뿐.
룬다=유베이는 스라티스의 담담한 모습에 놀랐다.
원래 창조물을 만들 때는 개인의 취향이 들어가는 법인데, 네뷸라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전략적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성격 한 번 알 만하군.'
아무래도 좋을 부분이긴 했다.
적의 본대, 적어도 기병들만이라도 오려면 30분의 시간이 있었다.
'그전에 끝내면 그만이야.'
룬다=유베이는 스라티스가 네지와 힘 싸움을 하는 동안 다리로 달려들었다.
스라티스는 룬다=유베이를 밟기 위해 내려찍었지만, 그야말로 신의 힘 앞에선 무력했다.
룬다=유베이는 자신을 밟은 스라티스의 다리를 머리 위로 쥐고는 그대로 당겼다.
-...이런!
스라티스의 다리가 벌어지더니, 룬다=유베이가 달려 나가 당기자 퍼석 소리와 함께 다리가 끊어졌다.
스라티스는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손으로 네지의 턱을 올려쳤다.
-이 망할 벌레가!
-미물, 신을 위한 고통은... 축복이라 생각해야지 않겠는가?
"미쳤군."
룬다=유베이는 스라티스를 혐오하면서도 칼을 뽑았다.
저 혐오스러운 사마귀의 눈을 도려내 버릴 생각이었다.
룬다의 생각에, 30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룬다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있었다.
기병 전체가 아니라, 라크락이 혼자 온다면.
그것도 자신의 탈것인 코카트리스 아낙세를 타지 않고 뛰어온다면.
그 라크락의 몸에 성운이 강신을 했다면.
"먼저 가 있겠다."
단독 신성 레벨 12, 성운이 강신한 라크락은 아낙세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단 한 발자국에 수십 미터를 뛰어오르는 압도적인 각력.
그리고 그 다음 발자국에 낮은 언덕을 넘고, 그 다음 발자국에 수십 미터를 솟아올랐다.
'보인다.'
성운=라크락의 눈에 거대 시궁쥐와 르나르에게 밀리고 있는 스라티스가 보였다.
지면에 떨어진 성운=라크락은 두 발을 모으고 그대로 지면을 걷어찼다.
-쾅!
땅이 움푹 패이며 성운=라크락을 하늘로 솟구쳐 보냈다. 삼단뛰기였다.
스라티스가 네지와 유베이의 공격에 한 발 물러서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창을 꼬나 쥔 성운=라크락이 들이닥쳤다.
062화
성운=라크락의 창날이 룬다=유베이를 노렸다.
"...미친!"
룬다는 갑작스럽게 나타는 성운=라크락을 뒤늦게 발견했다.
급하게 피하려고 했지만, 성운=라크락이 더 빨랐다.
성운이 라크락의 몸으로 창날을 허공에서 내던졌다.
-콰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룬다=유베이는 펄쩍 뛰어올랐지만, 왼쪽 어깨 위로 창날이 스쳤다.
신이 깃든 몸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강도지만, 동급, 아니 그 이상의 힘이 깃든 투창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악!"
룬다=유베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신 님!
시궁쥐 네지가 펄쩍 뛰어올라 이제 막 바닥에 착지한 성운=라크락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스라티스가 허공에서 네지의 살가죽을 움켜쥐고서,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굉음이 멀리 퍼져 나갔다.
후퇴하는 르나르의 군대와, 돌격해 오는 리자드맨의 군대 모두에게 들려올 정도였다.
대지의 진동 때문에 큰족제비와 코카투들이 웅성거렸다.
성운이 생각했다.
'창조물부터 먼저 죽여야겠다. 파지직. 내 힘을 빌려주마.'
-때를 말하십시오.
성운=라크락의 등 뒤로 파지직이 떠올랐다.
신에게 편입된 마성의 정령은 개체에게 힘을 내려 줄 수도 있지만, 다른 재주도 있었다.
신이 신앙 자원을 빌려준다면, 그 자원에 비례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운=라크락이 뒤집어진 네지를 가리켰다.
'구워라.'
-신의 뜻대로.
즉시 허공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콰광!
전류가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고 열풍이 황야를 휘감았다.
네지는 번개를 맞은 옆구리가 검게 타 버리고 입에서 침을 뚝 흘렸지만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한 번의 벼락만으로는 신의 창조물을 멈출 수 없었다.
-서, 설사 신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으로는 나를 멈출 수...
"흥."
다음 순간 하늘이 찢어졌다.
수십 개로 갈라진 번개가 하나의 점을 향해 내리꽂혔다.
바로 시궁쥐 네지의 정수리로.
"네지!"
-으그그그그극!
시궁쥐 네지가 순간 빛덩이로 변했다가, 쓰러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네지는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이 망할 놈이..."
욕을 내뱉던 룬다=유베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네지에게 들이닥쳤던 번개가 자신에게 쏟아진 것이다.
하지만 신의 힘을 지닌 육체는 날렵할 뿐만 아니라 신과 같은 감지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룬다=유베이가 황야를 갈지자로 내달리자, 지나간 자리에 뒤늦게 번개가 꽂혔다.
룬다가 생각했다.
'...안 되겠다. 강신을 해제해야겠어.'
룬다는 강신 스킬을 해제했다.
다만 강신 스킬은 스킬을 사용할 때도, 해제할 때도 딜레이가 있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10초 뒤, 강신이 해제됩니다.」
룬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강신을 유지한 상태로 죽게 되면 추가 페널티를 받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베이를 살릴 방법은 없었다.
'네지가 죽는 걸로 벌써 1레벨은 떨어졌나? ...하지만 내가 강신한 상태로만 죽지 않으면 다음 레벨로 떨어지진 않을 거야.‘
「9초 뒤, 강신이 해제됩니다.」
룬다는 자신의 종족에게 더 없는 결실의 신이라 불린다.
룬다가 얻은 최초의 소영역은 바로 '열매'.
룬다=유베이는 수풀을 훑어 존재하지 않는 열매를 찾아냈다.
붉고 윤기가 도는 탐스러운 열매로, 그것을 곧장 입에 넣었다.
와작 소리와 동시에 룬다=유베이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좋아, 이제 7초만 버티면... 응?'
다가오던 스라티스와 성운=라크락을 바라보던 룬다는 시야를 가리는 검은 벽에 당황했다.
시야를 돌리자, 여전히 새카만 벽이 있었고, 그 벽은 곧 하늘을 가렸다.
벽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벌레!'
하늘을 뒤덮는 딱정벌레 떼였다.
딱정벌레의 벽은 삽시간에 다가와 룬다=유베이를 덮쳤다.
룬다=유베이는 주먹과 칼로 딱정벌레들을 후려치면서 물러났다.
「5초 뒤, 강신이 해제됩니다.」
'이것들은 공격용이 아니야.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다. 이대로 있으면 죽어!'
다행히 룬다=유베이의 눈에, 무수한 딱정벌레 사이로 스라티스의 그림자가 보였다.
스라티스는 거체를 움직여 룬다=유베이를 향해 낫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발을 내려찍고 있었다.
「3초 뒤, 강신이 해제됩니다.」
'저 공격만 피하면...!'
룬다=유베이는 전력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스라티스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간 유베이의 몸은, 생각과 달리 딱정벌레의 그림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기 있었군."
성운=라크락의 손아귀가 룬다=유베이의 목을 쥐었다.
「1초 뒤, 강신이 해제됩니다.」
"...아."
성운=라크락이 목을 움켜 쥐엇다.
-와직.
유베이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
스라티스를 소환하고, 동시에 강신을 했으며, 마성의 정령을 통해 번개를 비처럼 뿌리고, 대량의 딱정벌레 떼 소환까지.
성운은 한 번의 전투에 신앙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덕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라크락은 강신이 해제된 뒤, 자신을 따라온 코카트리스에 올라타 기병을 이끌고 르나르의 후위를 공격했다.
르나르의 왕 하티는 자신의 신이 패배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성적인 선택을 취했다.
적을 막을 최소한의 병력을 남기고 도주하는 것이다.
하티는 배탈이 나는 바람에 제대로 싸울 수 없는 보병들을 남기고 도주했고, 그 이후로도 조금이라도 전투가 유리할 수 있는 지형이 나타나면 병력들을 남겨 두고 후퇴를 반복했다.
하루 만에 르나르의 1100명의 군사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200으로 줄어들었다.
기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병사를 잃은 것이었다.
반면 라크락의 군대는 사실상의 패잔병을 상대했고 병사를 거의 잃지 않았다.
르나르의 병사 200은 유격전을 위해 겨우 자신들의 고향으로 숨어들었다.
─┼
룬다는 자신의 추락한 레벨을 확인했다.
「신성 레벨: 5」
'9에서 5까지 떨어지다니.'
많이 떨어져도 7일 거라고 짐작했던 룬다에겐 이 한 자리 숫자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크람푸스가 화상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룬다 님? 듣고 있어요?"
"네? 네."
"지금 레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7이요. 생각보다 많이 떨어지진..."
적당히 거짓말을 하려던 룬다에게 크람푸스가 말했다.
"이런, 많이 떨어졌네요."
"...그, 그렇죠?"
"그 정도면 신앙이 모자라서 내정 관리가 어렵겠어요."
"아뇨. ...아슬아슬하게 괜찮아요."
룬다는 표정이 드러나질 않길 바라며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신성 레벨이 높으면, 지속해서 사용하게 되는 기적이나 창조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소모하게 되는 신앙이 존재하는 법이다.
룬다는 레벨이 다운되면서 이번 해에는 열매를 맺게 하는 기적으로 만들어 냈던 르나르의 과수원들이 모두 황폐화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열매를 통해 얻어 들이던 수익도 사라질 것이며, 르나르들은 굶주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터였다.
게다가 제사장인 유베이도 죽었다.
젊은 유베이는 늙은 왕 하티 이후에 나라를 이끌 다음 세대였다.
내정 관리는 이미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이걸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의 전투는 포기하고 신앙과 경험치를 얻기 위한 계획을 짜야 했다.
'절대 이 사실이 들통나서는 안 돼.'
네뷸라는 물론이고, 적대하고 있는 다른 세 종족, 여기에 더해 크람푸스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정보였다.
크람푸스는 동맹이라 해도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사이였다.
크람푸스는 룬다의 세력이 생각보다 더 약해졌다는 걸 알면 태도를 바꿀지도 몰랐다.
룬다가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했다.
"그나저나 사티로스들은 공격을 위해 이동하고 있나요?"
"네."
크람푸스는 지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배신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동을 시작했으니, 내일 모레면 국경 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여기서 다시 나흘을 가면 자동성이죠."
"더 빨리 도착할 수는 없죠?"
"음. 자동성은 텅 비어 있을 테니 기병들로만 공격해도 될 겁니다. 그게 낫겠네요. 파브에게 그렇게 하라고 암시를 줘야겠습니다. 그럼 국경 마을에서 말을 바꿔 타고 기병 150명 정도가 하루 하고 반나절이면 자동성을 공격할 수 있겠죠."
"좋네요. 제가 리자드맨들을 이틀하고 반나절만 붙잡고 있으면 된단 이야기죠?"
"예."
룬다는 르나르들의 유격전에 기대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보병들은 전멸했지만 고급 병종인 기병들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르나르의 큰족제비 기병은 다른 기병들과 달리 길이 아닌 지형에서도 부담 없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리자드맨들의 발을 약속한 기간까지만 묶어 둔다면 수가 생겼다.
'그때쯤이면 나도 신앙이 조금 생길 거야. 그걸로 다시 강신을 하면 리자드맨 군대와 붙어 볼 만해져. 네뷸라는 자신의 부대를 싸우기 위한 싸움보다 자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싸움에 주력할 테고.'
그 반대라면 성운은 자동성을 내줘야 할 텐데, 룬다는 그럴 확률이 낮다고 보았다.
리자드맨 부대는 신의 지원이 있어도 유격전을 벌이는 르나르들을 일격에 격퇴하긴 힘들다.
반면에 자동성은 신앙을 투자한 만큼 막을 확률이 올라간다.
'네뷸라가 신앙을 엄청나게 소비한 건 사실이야. 둘 중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룬다는 가급적이면 그렇게 되길 희망했다.
'나 혼자 망하면 안 돼!'
크람푸스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벨 차이가 극적으로 난다면 플레이어의 관계가 대등할 수 없다. 룬다는 그 사실이 싫었다.
그런 이유로 룬다는 자신의 패배를 축소해서 말했고, 네뷸라에 대해서도 전투에 자신이 없어서 나름 계책을 짰다는 둥의 이야기를 해 두었다.
하지만 룬다의 희망 또한 헛된 꿈이 되었다.
"어?"
크람푸스가 얼빠진 소릴 내자 룬다가 되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발을 묶어 두는 거 아니었어요?"
"네? 네. 그렇죠."
크람푸스는 의아하다는 듯 화면을 띄웠다.
사티로스의 왕 파브가 보고를 받고 있는 장면이었다.
보고의 내용은, 리자드맨 군대가 사티로스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룬다는 문제를 알아차렸다.
병사를 너무 많이 잃었기에 리자드맨들이 르나르들의 전선을 뚫어 버린 것이다.
아니, 그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
엘다르가 준 잘못된 정보 덕분에, 리자드맨 군대가 너무 빨리 등장했다.
그래서 흑린의 국경 안에서 일어날 거라 생각했던 싸움은 르나르의 영토에서, 이제는 사티로스의 영토에서 일어날 판국이었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이건 안 되겠네요. 놈들이 아마 국경 마을로 가는 거 같아요. 여긴 제대로 된 성곽도 없으니 리자드맨을 못 막습니다. 국경 마을을 내주더라도 사티로스 군대를 돌려세워서 수도에서 진을 쳐야겠어요."
크람푸스는 충분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룬다는 사티로스의 수도 데이머릿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있었다.
스라티스는 강력한 창조물이다.
이런 창조물은 그 자체로 공성 병기의 역할을 한다.
성벽이 무너지면 다음은 그야말로 순수한 힘의 싸움.
'사티로스의 병력은 겨우 800이야. 동수라도 불리한데, 리자드맨 군대는 1700, 두 배 이상의 차이.'
네뷸라와 한 번 싸워 본 룬다는 크람푸스가 필시 패배하리란 걸 알았다.
'아니, 오히려 잘됐어. 이건 기회야. 망하도록 두자.'
생각보다 시기가 앞당겨졌지만, 지금 타이밍이 새로운 동맹을 찾을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르나르는 외교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었다.
'역시 다음 동맹은 위즈덤이 좋겠지. 괴팍한 성격이긴 해도 이성적이니까, 재물을 넘겨주면 최소한의 보호는 해 줄 거야.'
룬다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크람푸스가 말했다.
"그럼, 동맹의 지원을 좀 받읍시다. 룬다 님, 병력을 이끌고 좀 내려와 주세요. 놈들이 공성을 시작할 때 양쪽으로 습격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아, 그보다는 제 병력이 자동성을 공격하면 어떨까요?"
"이중 전선을 펼치기엔 시간이 안 맞지 않나요?"
"...그렇겠네요."
룬다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검지로 미간을 살짝 눌렀다.
당장 크람푸스를 돕지 않으면 수상하게 여겨질 테고, 그렇다고 돕게 되면 얼마 없는 병력도 잃게 된다.
중간에 내려가는 척하면서 공격을 하지 않게 하면 좋겠지만, 신이 제사장에게 내리는 계시는 일관성이 있어야 했다.
룬다는 이미 배신을 생각했지만, 르나르들은 사티로스들을 여전히 동맹 관계로 생각할 테니 생기는 오류였다.
'젠장, 어떻게 하지?'
크람푸스가 룬다의 고민을 증폭시켰다.
"근데 그 아이디어도 좋은 거 같네요. 자동성을 공격한다는 거. 어차피 비어 있으니 적은 숫자만으로 공략이 가능하잖아요? 기병은 자동성으로 보내고 보병만 절 지원하면 어떨까요?"
룬다는 당황해서 말실수를 했다.
"그러기엔 제 병력이 부족해서..."
"네? 병력 5백이 있다면서요?"
"...아. 그렇죠."
"어차피 적도 4백 정도 줄여서 1천 3백 정도라고 했고. 르나르 보병 3백에 제 사티로스 8백. 수성전을 하는데 숫자가 엇비슷하니 틀림없이 이길 수 있어요."
"...음."
"게다가 룬다 님은 네뷸라의 창조물도 죽였다고 했으니 성벽도 안전하겠죠."
룬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
그래도 룬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짓말이 들통날 쯤에는, 크람푸스와 동맹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 또한 룬다의 착각이었다.
크람푸스는 상태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또 뭐예요?"
"귓속말 요청이에요."
"누군데요?"
"네뷸라요."
"잠깐, 받지 마세..."
룬다가 말리려고 했지만 크람푸스는 이미 귓속말을 받아들인 뒤였다.
네뷸라, 성운이 말했다.
"슬슬 항복할 생각이 들었겠지?"
063화
크람푸스가 노란 염소 눈동자를 굴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항복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졌나 본데, 전체적인 전황은 우리가 유리해."
"...음."
성운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성운으로서는 룬다가 사실상 전투 불능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룬다의 살아남은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 기병 200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며칠 동안 전력으로 도망치는데 진을 다 뺀 큰족제비들은 크게 무서울 게 없었다.
성운에게 남은 것은 사티로스의 수도 데이머릿 공성전.
그리고 룬다가 예상했던 것처럼, 성운은 큰 어려움 없이 공성전을 승리할 수 있었다.
성운의 생각에 사티로스 군대를 전멸시키고 데이머릿을 빼앗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플레이어가 사실상 탈락 위기를 겪게 되면 나머지 셋이 동맹을 체결하겠지.'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성운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게다가 전선이 불가피하게 확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흑린은 현재의 국경에도 제대로 된 방비를 하지 못했다.
당분간 성운은 더 넓은 땅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리자드맨만이 아니라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인구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세 플레이어의 공격을 막아 내며 크람푸스와 룬다가 반군을 조직해서 탈환을 시도하면 피곤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나머지 플레이어 모두에게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대륙 반대편에는 헤게모니아가 있지. 언젠가는 싸워야겠지만 그렇게 병사를 소모하고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래서 성운은 크람푸스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이다.
크람푸스의 병력을 보존시키면 셋으로 나눠진 진영의 균형은 유지될 것이고, 성운이 내정을 해 나가는 동안 헤게모니아와의 완충 지대 역할도 해 줄 터였다.
'그런데 크람푸스는 저런 식으로 말했어. 마치 내가 룬다와 싸워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둘은 분명 아직 동맹인데도 말이지. 그럼 결과는 하나뿐이군.'
성운은 룬다가 딴생각을 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룬다가 자기 보신을 위해 피해를 축소하고 그걸 알리지 않은 것이다.
성운은 룬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러면... 나야 재미있지.'
성운이 저 혼자 주억거리며 침묵을 지키자 크람푸스가 말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계속 귓속말을 차단하다가 이제 와서 대화를 시도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미안하군.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항복이 정식 요청이라면, 거절한다는 걸로 답하겠다."
"알겠어. 생각해 보고 또 연락 주지."
연락이 끊어지자 크람푸스가 투덜거렸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불길이 툭툭 터져 나왔다.
"아니 이 자식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하하, 그래서 제가 말렸잖아요?"
룬다는 웃으며 대꾸했지만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눈치 깐 건가?'
룬다가 말했다.
"크람푸스 님, 잠깐 제 병력 좀 돌아보고 올게요."
"네. 저도 공성전에 대비해서 데이머릿의 방비를 둘러봐야겠습니다."
룬다는 자신의 땅으로 이동한 다음 네뷸라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네뷸라, 성운은 한참 연락을 받지 않았다.
'제발 좀 받아라.'
끝내 성운이 귓속말을 허가하자 룬다가 욕을 뱉어 냈다.
"야 이 개자식아! 원하는 게 뭐야?"
"화낼 건 없지 않나? 느닷없이 협공을 당해서 기분이 나쁜 건 이쪽인데."
"협공 안 당했잖아?"
"'당할 뻔'한 것도 기분이 나쁘긴 하잖아? 아무튼 말장난하려고 연락한 거면 끊지. 난 바빠서 이만."
성운은 그대로 귓속말을 끊었다.
룬다는 속을 끓이며 재차 귓속말을 걸었다.
"어, 무슨 일이야?"
"네 친구 아니야. 그따위 태도로 굴지 마."
성운은 불리한데도 하나도 굽히지 않는 룬다의 성격에 감탄했지만, 성운으로서도 딱히 화가 나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기에 트집 잡지 않았다.
원래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 미운 말을 들어도 관대해지는 법이었다.
분을 겨우 삭인 룬다가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줄래?"
룬다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참아 냈다.
"...그래. 넌 크람푸스에게 항복을 요청했다가, 크람푸스가 항복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걸 보고 채팅을 끊었잖아?"
"근데?"
"이유가 뭐야?"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 항복을 받아 내고 당분간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다섯 플레이어의 약조와 몇 가지 물질적 이득을 얻는 걸로 끝내려고 했는데, 그냥 귀찮아도 내가 나라 둘을 박살 내고 이 땅 전부를 차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룬다는 성운의 계획을 듣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럼 전선이 너무 커질 텐데? 현재 문명 단계에서는 인구수가 너무 적어서 제대로 국경을 지킬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협상이란 방법도 있어. 사티로스 땅을 내가 먹고 르나르 땅을 다른 세 플레이어에게 나눠 줄 수 있지."
"쉽지는 않을 텐데. 모두가 거대 국가가 나오는 걸 좋아하진 않을 거야."
"아닐걸. 반도와 황야, 북해안은 대륙 중앙에 비하면 좁은 땅이야. 내가 땅을 좀 더 차지한다고 해서 누가 꼭 불만을 가지리란 법은 없지. 게다가 다른 세 플레이어는 가만히 앉아서 땅을 얻게 되니까, 기꺼워할 것 같은데."
"...윽."
성운이 태평하게 말하는 저 계획이 쉽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넓은 땅에 구멍이 많은 건 마찬가지야. 나랑 크람푸스가 반란군을 이끌면? 그 혼란 사이에 다른 플레이어가 공격해 올지도 모르잖아?"
"어, 나는 그런 이야기 안 한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
성운이 말했다.
"내가 언제 너랑 크람푸스를 살려 둘 거라고 했던가?"
룬다는 마음속에서 성운에 대한 정의를 확고히 내렸다.
'미친놈이다.'
로스트 월드는 동맹 승리가 존재하는 만큼 상대 플레이어에 대해 알게 모르게 관대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상위권에 가려면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곧잘 나오긴 했지만, 호혜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게임에 불리해지는 건 아니었다.
룬다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게 협박이란 것 정도는 알아."
"협박은 아닌데. 궁금해하길래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를 나열했을 뿐이지."
"분명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고 말했지?"
"그래."
"그럼 다른 가능성도 생각 중이란 말이고?"
"그럴지도 모르고."
"그럼 첫 질문으로 돌아가지. 뭘 원해?"
성운이 곧장 말했다.
"정보."
"무슨 정보?"
"르나르랑 크람푸스에 대한 정보."
"좋아, 그 정도면..."
"그리고 트롤에 대한 정보."
룬다는 인상을 썼다.
트롤의 신은 위즈덤, 즉 대륙 중앙 세 개의 세력 중 혼자서 거대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네뷸라,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난 위즈덤이랑 동맹이 아니야."
"하지만 곧 할 생각인 거 아냐?"
"...내가 크람푸스를 두고 뭐 하러 적대하던 위즈덤과 동맹을 하겠어?"
룬다가 떨떠름한 척 되묻자 성운이 답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너랑 크람푸스 동맹은 이번 공격으로 타격 때문에 휘청거리겠지. 그런데도 너는 크람푸스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피해 정도를 숨겼지."
"윽."
"그래서 내가 항복하라는 질문에 크람푸스가 무슨 말이냐고 해 왔고. 그건 룬다 네가 딴생각을 하고 있단 거야. 그리고 동맹을 찾는다면 국경이 맞닿은 나나 위즈덤일 텐데, 적대적이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기에는 거리가 떨어진 나보다 위즈덤을 택하겠지. 아니야?"
룬다는 다른 변명을 생각해 봤지만 사실에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 말이... 으흠, 그 말이 맞다고 치자고."
"맞잖아?"
"하지만 위즈덤이 동맹을 맺어 줄지 어떨진 모르잖아? 그러니 르나르와 크람푸스에 대한 정보는 확실히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내 말을 자꾸 오해하는 것 같은데."
"뭐?"
"나는 위즈덤과 동맹을 맺어서 정보를 얻어 오라고 하는 거야. 위즈덤과 동맹을 어떻게 할 건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룬다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무슨 뜻인지는 곧장 알았지만, 그 일을 자신이 해야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보고 크람푸스만이 아니라, 위즈덤에게 접근해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캐내라는 말이야?"
"이제 이해했어?"
룬다는 으르렁거렸다.
이를 드러내고 이마에 주름을 잡고, 화상 채팅창을 뒤흔들었다.
"개자식아, 웃기지 마. 동맹도 뭣도 아니라 그냥 호구잖아!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패악질이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한 번 이겼다고 뭔가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끝까지 개싸움하는 거 보여 줘?"
"착각한 부분이 있군. 내가 이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야."
"무슨 말이지?"
성운은 검지로 룬다의 얼굴을 가리켰다.
"룬다, 그 거짓말하는 입이 문제였을 뿐이지. 나는 더 이상 손을 쓸 필요도 없어. 크람푸스에게 우리 전투 내용을 말하고, 위즈덤에게 룬다는 거짓말쟁이니 동맹을 맺지 말라고 말해 두는 걸로 충분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크람푸스는 룬다와 동맹을 끊고 혼자 살 방도를 찾을 테고, 위즈덤은 룬다를 신용할 수 없으니 동맹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룬다는 신성 레벨이 10과 9를 오가는 대륙 중앙에서 혼자 레벨 5로 살아남아야 했다.
"마음대로 해. 난 절대 협력해 줄 생각 없으니까."
"정말로 그런..."
룬다는 성운의 말을 끊고 화상 채팅을 종료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고민해 보자.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룬다의 발아래로 르나르의 수도 미나인이 보였다.
국경과는 떨어진 곳이라 르나르들의 모습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아마 르나르의 패배를 알려 올 전령이 아직 미나인에 도착하지는 않은 듯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집들 사이로 오가는 르나르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했다.
그리고 신을 위한 작은 사당에서 르나르 하나가 기도를 올렸다.
역시나 전쟁에 대한 것은 아니었고, 목공일을 하는 르나르가 오늘도 다치지 않고 일을 끝마칠 수 있어서 신께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룬다의 신앙 자원이 1 올랐다.
'...제길.'
룬다는 성운에게 다시 귓속말을 걸었다.
성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민은 끝났나?"
"...협력하겠어."
룬다가 생각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감정적으로 생각했다간 다음 기회 따위는 오지 않을 거야. 어쩔 수 없어. 당분간은 납작 엎드리자. 놈도 날 신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했던 것 이상의 과한 요구는 해 오지 않겠지.'
아마 엘다르가 룬다의 생각을 알았다면 큰 착각이라고 말해 줬을 것이다.
성운이 말했다.
"그럼 르나르랑 사티로스에 대한 정보부터 받아 볼까?"
─┼
크람푸스는 다시 걸려 온 네뷸라의 귓속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뭐라고?"
"전쟁 끝내자고."
"이제 와서?"
성운이 말했다.
"사실 내 영역 한 곳에 랍스터들이 있는데 또 난리를 피우고 있어서 말이야.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하겠군."
거짓말이었다.
제도 중앙 섬, 도주가 된 아스타시디안 루보는 바다를 건너온 과일주에 취해 집게를 흔들며 흑린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 결국 불리해지니까 내뺀다는 거잖아?"
"글쎄. 지금 나랑 싸워서 그쪽이 크게 이득 볼 건 없을 텐데?"
"우리가 그쪽 군대를 전멸시켜도?"
"사티로스는 멀쩡할 것 같아? 다른 플레이어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걸."
"먼저 휴전을 제의하는 것치곤 좀 뻔뻔해 보이는데."
"서로 '동등한 입장'이니까."
이때 성운은 미소를 지었는데, 가면에 가려져서 크람푸스가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성운이 덧붙여 말했다.
"그쪽은 둘이지? 합의를 해야겠군. 잘 생각해 보라고."
이후 크람푸스는 룬다와 상의했다.
크람푸스는 휴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성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뒤를 쳐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룬다는 그 말 자체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어렵사리 크람푸스를 말렸다.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며 이쯤에서 휴전을 하는 게 좋겠다고 종용했다.
크람푸스는 정전을 하더라도 뭔가 받아 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룬다는 성운의 신경을 긁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말렸다.
'망할 놈, 굳이 랍스터 이야기는 꺼낼 필요 없었잖아? 괜히 불리한 척해서 나만 설득한다고 열 올리고.'
룬다는 분노로 열을 올렸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벌린 일 때문에 바빠졌다.
패잔병들이 떠드는 전투 내역을 크람푸스에게 어떻게든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
자동성, 만찬실.
열린 창밖으로는 자동성의 자랑인 네 개의 수차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만찬실 안에 있는 이들은 이제 와서 그 수차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만찬실에서 보는 풍경에 익숙했다.
상석에 앉은 휘경이 말했다.
"전쟁이 끝났다고요?"
"네."
대답한 것은 사티로스 상인이었다.사티로스 상인이 계속 말했다.
"제 아들이 오늘 아침 막 도착했는데, 리자드맨 군대가 자동성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흑린의 전령보다 정보가 빠를 줄은 몰랐는데요."
"그야... 상인들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까?"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을 대표로 이 만찬실에 앉힌 것이었다.
이 조직은 최근에 만들어졌지만, 흑린과 다른 두 종족 사이의 전쟁에서 작은 이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상인들을 통해 리자드맨 군대가 자동성에 있다는 가짜 정보를 퍼트린 것이었다.
휘경이 말했다.
"그럼 기도 한 번하고, 본격적인 회의 시작하죠. 다들 징표는 가지고 있죠?"
상인들 모두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과 상인들은 각자의 품에서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금속 청동 징표를 꺼내 들었다.
그 징표는 푸른 벌레신을 상징하는 딱정벌레 모양을 하고 있었다.
064화
이 자동성 만찬실 모임이 만들어진 것은 몇 달 전.
최초의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단순했다.
네 개의 수차를 만들기 위해 대륙 각지의 자원과 기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도움을 주었던 상인들을 휘경이 만찬장에 초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만찬장에서는 완성된 네 개의 수차가 내려다보였기에 완성을 축하하는 자리로는 자동성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그때 식사를 하던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상인들이 힘을 모아 이런 역사(役事)를 이루었으니, 또 대단한 일을 벌일 수도 있겠군요."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휘경의 마음속에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래서 휘경은 그날 저녁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대륙 각지에서 나름 한가락 한다는 큰 손이었으니 휘경으로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유 없이 불려 온 상인 중 하나가 휘경에게 말했다.
"자동성주, 우리를 무슨 일로 다시 불러 모은 거요?"
휘경이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모임을 하나 만들죠."
"우리가? 우리 중엔 상단을 이끄는 이들도 있지만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도 많소. 친목을 도모하려는 건 좋지만 이후로 그렇게 자주 보기는 힘들 텐데..."
"친목 도모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자주 얼굴을 볼 이유도 없죠."
"그럼?"
휘경이 말했다.
"저기 보이는 수차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번과 같은 일을 여기서 끝내기는 아쉽지 않습니까?"
휘경이 말하는 것은 간단했다.
돈만이 돈을 버는 법이다.
이미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더 큰 부를 얻을 수 있고, 그런 이들이 모이면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꼭 저런 거대한 공사가 아니어도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소문을 전하고 듣는 걸로 이윤이 생겨요. 이를테면 북해안에서 내려오는 나무들이 병 때문에 벌목이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면 대륙 북쪽의 대산림의 나무들 가격이 덩달아 뛸 걸 알겠죠. 그 전에 미리 나무를 사둘 수도 있을 겁니다."
나쁜 생각이 아니었기에 상인들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적어도 휘경이 저 혼자 이득을 취하기 위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방법으로 이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희들끼리 거래를 할 때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세금은 나라에서 떼어 가는 것인데..."
"속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서로 이득을 취하려면 그 정도 위험은 부담해야 한다는 거죠."
이제야 초보적인 장부가 작성되고 있었다.
상인들이 충성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이윤이다.
상인들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지역에서 나는 상품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거래되면 얼마나 이득을 볼 수 있을지 계산했다.
상인들이 저마다 아이디어를 냈다.
"금지되는 품목들을 거래할 수도 있겠군."
"그렇죠."
암거래.
"귀한 물건을 우리가 모두 사모아서 가격이 오르면 되팔아도 되고."
"맞아요."
독과점.
"그럴 게 아니라, 특정 상품을 우리가 모두 매수해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면 어떻소?"
"저희가 가진 돈이면 가능하죠."
담합.
"어때요? 괜찮아 보이죠?"
처음에는 의심하던 상인들도 점점 휘경의 이야기에 혹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법 제도나 상도덕이 세워지기 전이다.
반응이 빠른 나라들은 위와 같은 일들을 법적으로 금지시키겠지만, 흑린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법 조항도 없으며, 흑린조차도 거래에 대한 법은 라크락과 전사장에 의해 임의로 정해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 있던 휘경이 생각했다.
'정말 나쁜 일이면 신께서 내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내리치시겠지.'
휘경은 잠깐 불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벼락이 치는 일은 없었다.
상인 하나가 말했다.
"좋습니다, 휘경. 다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눈치를 나누는 걸 보니 다들 그대 이야기에 혹한 것 같군."
"그럼 다들 찬성입니까?"
"다만, 문제가 있소."
"뭐죠?"
상인은 트롤이었다.
그는 과거 돌 가면 부족이라 불렸던 거대 트롤 부족 출신으로, 현재 트롤의 나라는 석면국(石面國)으로 불리고 있었다.
"만약 우리 중 배신을 한다면?"
"음..."
휘경은 트롤의 걱정을 이해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모인 상인들일 뿐이다.
만약 거대한 한탕을 치기 위해서 서로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다면 단순한 피해를 입는 게 아니라, 이 모임 자체에 대한 신뢰도 흔들린다.
하지만 휘경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타당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서로 종족도, 믿는 신도 다르지 않습니까? 서로 신뢰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타고난 종족은 어쩔 수 없더라도, 신앙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상인들이 웅성거렸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 중 하나를 결정합시다. 그리고 모두 가지고 있던 신앙을 버린 다음, 새로운 신을 믿는 겁니다. 그다음, 우리가 벌어들이는 수익 중 일부를 새로운 신과, 그 신을 떠받드는 왕에게 바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신을 믿는 나라의 보호를 받을 테고, 동시에 신의 관심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분노가 두려워서라도 배신자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신앙을 한 번 버렸다가, 또 다시 신에게서 버림받는다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그저 NPC 종족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신의 보호는커녕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들은 제3 대륙의 최하 계급을 이루고 있다.
휘경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휘경의 제안에 상인들은 큰 불만이 없는 듯싶었다.
신앙을 버린다는 건 공포스럽지만, 만약 자신의 신에게 모두가 귀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다들 걸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상인이 말했다.
"다만 그 방법을 어떻게 정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건... 의논해 봐야죠."
휘경은 그렇게 말하고 상인들이 이야기하도록 놔두었다.
모두 자신들의 신에 대해 자랑을 해대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휘경은 상인들이 충분히 피곤해져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한 시점에 말했다.
"모두가 훌륭한 신인 건 알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느 누구의 신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 아닙니까? 주사위를 던져 정하면 어떨까요?"
몇몇 상인이 불만을 터트렸지만 곧 설득되었다.
취미로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상인들 덕분에 각출한 세 개의 육면체 주사위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제일 높은 눈이 나온 사람의 말을 따르는 걸로 하죠. 누구부터 할까요?"
여섯 개의 눈을 가진 주사위 세 개라면 가장 낮은 수는 3, 가장 큰 수는 18.
하지만 확률 분포를 따지면 일반적으로 8에서 13 값이 나오게 된다.
열다섯의 상인 중 가장 높은 눈은 닉스 상인이 던진 16이었다.
휘경의 마지막 차례가 돌아왔다.
휘경은 주사위를 집어 들며 자신의 내면에 말했다.
'뿔.'
-날 불렀나?
'그래.'
-드디어 일할 시간이군.
'부탁해.'
휘경이 주사위를 던졌다.
휘경의 뿔에 깃든, 확률을 조작하는 정령이 탁자 위를 구르던 주사위를 툭 건드렸다.
데굴데굴 구르던 뼈 주사위들이 하나 둘 멈춰서며 값을 드러냈다.
6. ...6.
그리고,
6.
총합 18, 이와 같은 값이 나올 확률은 0.46퍼센트.
하지만 자동성주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찬실 안의 그 누구도 이 조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때문에 휘경의 승리를 다들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운이 좋았네요."
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도 푸른 벌레신의 뜻인 듯싶습니다. ...모두 기도를 위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징표를 불태우는 걸로 모임을 시작할까 하는데, 어때요?"
상인들은 주저하면서도, 앞으로의 이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각자의 신을 상징하는 징표들을 꺼냈다.
다음 수순은 간단했다.
만찬실 한 구석에서 불타고 있는 모닥불에 그 징표를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알림: 개체 휘경의 주도로 상인 조합 '다섯 번째 수차'가 생성 되었습니다.」
자동성의 창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운이 생각했다.
'뻔뻔하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판단이었다.
성운은 휘경이 상인들을 재소집 했을 때부터 관찰했다.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만찬장을 벌레로 뒤엎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휘경의 내면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 조합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야.'
작게는 중세 마을의 길드, 크게는 한자 동맹 같이 자본주의가 성행하지 않던 과거에도 자본은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런 조합을 주도하는 세력이 플레이어의 종족이라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좀 빠르고... 비밀스러운 집단인 건 특이하지.'
성운은 무엇보다 각자의 종교를 버리게 한 것은 아마 휘경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 듯싶었다.
주사위 눈을 조작해 자신이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으니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을 퍼트리는 것도 일종의 이윤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는 결국 어떤 종족이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가 아니라,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소속감과 유대감을 결정하니까.
궁극적으로는 대륙 중앙의 플레이어들을 공격해야 하지만, 당장 그 넓은 땅을 얻어도 관리하기가 어렵다.
성운의 생각에 게임의 초반 동안 이 국경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될 터였다.
'이른바 정체기가 다가오는 거지.'
플레이어들은 각자 왕국을 세웠지만 허울만 좋을 뿐, 인구 숫자도 턱없이 부족하며 내치도 형편없고 각국에 정리되지 않은 NPC 종족들을 흡수하고 랜덤하게 일어나는 천재지변 이벤트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공격은 더 복잡해질 거야.'
칼을 들어야만 전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사제를 다른 나라에 보내 몰래 포교를 펼치는 건 평범한 플레이였다.
이런 상인 조합이 생기지 않더라도 성운이 다른 방법을 썼을 테지만 휘경 덕에 수 하나를 줄인 셈이었다.
'이렇게 밑밥이 깔려 있으면, 더 편하지.'
성운은 다른 나라에 대한 공격과 역공에 대한 방비를 천천히 가늠해 보았다.
─┼
라크락은 자신의 천막에서 희고 하늘하늘한 것을 집어 태양에 비추어 보았다.
이 널따랗고 찢어지기 쉬운 것은 햇빛을 투과할 정도로 얇았다.
라크락이 자올에게 질문했다.
"이게 뭐라고 했지?"
"'종이'입니다."
"종이."
자올이 설명했다.
"얼마 전 르나르 패잔병 중 일부가 길을 잃고 저희에게 붙잡혔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종이 장인이라고 했지요. 덕분에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비단을 쓰면?"
"비단은 비싸고 무겁죠."
"종이는? 일단 가벼운 것 같긴 해. 하지만 비싸진 않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잘게 부수고 빻고 찢어 산산이 분해해 물에 녹여야 합니다. 완전히 죽으로 만들어야지요."
라크락은 그 과정을 상상했다.
"쉽지 않겠는데."
"예. 본래라면 종이도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올은 꼬리 끝을 살짝살짝 흔들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기분이 좋아 가볍게 코를 흥얼거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희에겐 수차가 있으니 말입니다."
흑린의 수도 오라즌에는 큰 강이 있고, 이 강은 조금만 상류로 올라가도 폭은 좁지만 깊어서 수량이 많은 강이 된다.
리자드맨들은 여기에 자동성에서 만드는 법을 익힌 수차를 또 만들었다.
수차는 사람의 힘을 대신하므로, 종이를 생산하는 노동도 대신할 수 있었다.
르나르 종이 장인의 말에 따르면 르나르들에겐 수차 기술이 없어서 종이를 만들 수 있어도 상당히 고가라고 말했다.
"그 외에는 쉽습니다. 촘촘한 망으로 건져 올려서 바짝 말리는 것이지요. 그 외에 르나르 장인이 좀 더 종이를 빨리,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일러 주긴 했지만 전체적으론 그뿐입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차를 사용하는 데다 나무로 만든다면, 비단보다 값이 쌀 수밖에 없다.
종이를 더 보급할 수 있다면 문자의 사용도 흔해지고 사소한 기록도 잦아질 터였다.
라크락은 이미 기록되는 역사를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으리.'
하지만 완벽한 기록이라 할 수는 없었다.
종이는 해지더라도 누군가 옮겨 적으면 그만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상하게 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
외적들에 맞서 나라의 방비를 우선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자올, 나도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
"뭡니까?"
라크락이 종이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자올이 뒤따랐다.
"...나는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같이 지혜로운 반려와, 내 전사들, 그리고 신께서 나를 내려다봐 주신다면 어느 적과도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그대도, 나도, 내 전사도, 심지어 신께서도...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번 전쟁처럼 적이 둘로 나뉘어 온다면, 그래. 내가 더 빨리 달리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이 셋, 넷이라면? 자올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지?"
"...음."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라크락은 목탄을 찾아 종이 위에 슥슥 그림을 그려 나갔다.
자올이 금세 알아보았다.
"지도군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국경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다 선을 죽 그었다.
그 선은 황야는 물론 산과 강을 거침없이 갈랐다.
흑린의 왕인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자신감으로.
자올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라크락이 답했다.
"내가 세울 방벽이다."
065화
"방벽이라..."
"방벽이 있으면 적의 침입을 늦출 수 있다."
"그럴 겁니다."
국경선 전체에 방벽이 쌓여 있고, 각 위치마다 보초들이 오가면 그 누구도 함부로 흑린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올은 라크락의 생각에 빈틈이 있다는 걸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 장벽을 모두 쌓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얼마나 걸리겠나?"
자올은 흑린의 수도 오라즌을 세우는데 거의 모든 일을 맡고 있었다.
개개인으로는 더 뛰어난 건축가들이 있지만, 거대 건축물을 계획하는 데에는 자올만큼 눈이 밝은 사람이 없었다.
"장벽으로서 가치를 하려면 자동성의 성벽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높아야 합니다."
자동성의 경우, 라크락이 손에 넣은 이후로 별다른 침입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자동성의 방벽이 유명해진 것은 이전 시대에 잘 조직된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성의 방벽은 5미터지만, 군대라면 사다리를 급조해서 훌쩍 뛰어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라크락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자동성의 성벽처럼 흙으로 쌓아올릴 수도 없습니다. 자동성을 비롯한 계곡은 돌은 많지만 흙이 적고, 황야로 나가면 겨울에는 흙이 단단히 얼었다가 여름이 되면 안에 스민 물이 녹으며 푹 퍼질 겁니다."
흙이야 산재해 있으니 낮은 성벽을 쌓기에 좋은 재료다.
그렇다고 모든 장소에서 적절한 성벽 재료인 것은 아니다.
"흙만큼이나 흔한 재료는 돌입니다. 돌로 우선 쌓아 올리고 흙으로 지탱하면 자동성보다 높게 쌓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오라즌의 집짓는 장인들은 돌을 고르고 반듯하게 세우는데 이골이 났으니 방벽을 세우는 데에도 재주를 뽐낼 수 있을 겁니다."
"잘되었군."
"문제는 채석장이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 주변이야 산을 끼고 있어 돌이 흔하지만, 위쪽, 황야로 올라가면 채석장에서 돌을 옮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사람을 써야 할 겁니다."
자올이 말했다.
"가용할 수 있는 사람과 돈을 모두 사용해도 1백년은 걸릴 겁니다."
"그런가."
라크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백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자올은 알면서 왜 그러냐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사람은 2백 년씩 살지 못합니다. 리자드맨은 1백 년도 못 살고요."
"자꾸 아는 걸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그럼 뭡니까? 포기하는 겁니까?"
"아니. 최초의 생각이었지만 그대의 지적처럼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그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켰다. ...종이 더 있나?"
자올은 라크락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싸 온 종이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라크락은 종이를 쳐서 이번엔 조금 고민을 하며,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
역시나 지도였지만, 이번에는 훨씬 좁은 지역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였다.
"이번 르나르 공격을 위해 황야를 지나던 중 이 위치에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었다. 강의 하류인데도 물살이 제법 가파르다. 스물 남짓한 작은 노움 무리가 있어 물어보니 겨울에도 표면만 얼어 사람은 지나갈 수 있지만 수레는 지나가기 어렵다더군."
자올은 라크락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라크락의 말대로라면, 그어 놓은 선 중 일부를 제외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도착하기 전까진 몰랐지만 늪을 이루고 있다. 전사 하나가 자진해서 시험했는데 코만 내놓고 머리끝까지 잠겼는데도 바닥에 닿지 않았지."
"수레는커녕 코카투를 타고도 지나가기 어렵겠군요."
"맞다."
자올이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송곳니를 툭툭 건드렸다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황야라고 해도 이런저런 지형이 있고, 사실상의 자연 방벽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지형들이 비슷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고 가정을 해도, 이 사이는 여전히 넓습니다."
"그럼 그 돌 방벽을 기준으로 얼마나 걸릴까?
"80년, 아니... 70년 정도로 생각해야겠습니다."
자올이 말했다.
"이렇게 되면 간신히... 그대가 평생을 매달리면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방벽만 쌓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너무 늦지. 70년이면 적들이 몇 번이나 우리 땅을 침범할 수 있겠지."
"그럼 관둬야겠군요."
"다음 생각이 있다."
자올은 두 번이나 계획이 좌절된 라크락을 비웃지 않았다.
"얼마든지 보여 주시지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는 지도가 아니었다.
"방벽의 역할은 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나나 다른 전사들이 방벽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예를 들면?"
"적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군을 더 빨리 부를 수 있다면?"
"하지만 코카투는 충분히 빠릅니다. 말이나 큰족제비보다 빠르지요. 더 빨리 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코카투보다 빠른 건 코카트리스인데, 모두가 당신처럼 코카트리스를 타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사용할 줄 알면서 코카트리스보다 더 빠른 것도 있다."
"그게 뭡니까?"
"불과 연기."
"하지만..."
불과 연기에 올라탈 수 없다고 말하려던 자올은 감탄했다.
코카투에 타고 달려오는 것은 적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알리러 오는 전령이다.
불과 연기에 전령을 태울 필요는 없다.
불과 연기에 정보만 태우면 되는 것이다.
"여기 끝에서 적을 발견한다면, 불과 연기를 피어 올린다. 그리고 그 다음 위치에 있는 보초가 멀리 있는 불과 연기를 발견하고 또 마찬가지로 불과 연기를 피어 올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코카투보다도, 코카트리스보다도 빠르게 적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라크락이 그려 낸 것은 다섯 개의 돌로 만든 제단처럼 보였다.
각 제단에는 나무를 올려 태울 수 있는 단이 놓여 있다.
봉화대였다.
"황야에 서 있을 때,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까지의 거리가 4천보 정도 되더군. 지대가 높은 곳이라면 더 멀리까지 알아볼 테고, 위험한 숫자의 적 군대라면 그것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왜 다섯입니까?"
"하나는 봉화대에 보초들이 제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늘 불을 지펴 둔다. 평화롭다는 것이지. 둘을 켜 두면 적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그다음은 뭡니까?"
"셋은 단순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적이 이쪽으로 접근해 올 때, 넷은 봉화대를 침범했을 때, 다섯은 이윽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다."
라크락은 단순히 적을 발견하고 말고의 유무가 아니라 경중을 따지려 들었다. 자올은 그에 동의했다.
봉화의 불이 많을수록 시급한 사안이라 판단하고 국경으로 보낼 군사의 숫자를 조절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것만으로도 황야에 대해선 충분히 방비할 수 있다. 애초에 황야는 적들에게 매력적인 침입 지역이 아니다."
자올이 맞장구쳤다.
"예. 북해안으로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지만 오라즌으로 오기 위해선 빙 둘러 오니, 보급선이 길어집니다."
"맞다. 보급을 위해서는 수레를 자꾸 오가야 하는데 자동성을 거쳐 오는 것보다 세 배, 네 배는 멀어지지. 보급을 포기하고 약탈을 하려고 해도, 마을이 거의 없으니 약탈이 힘들고 안으로 들어올수록 물을 구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렇지요. 단순히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물도 못 마시면 제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라크락이 말했다.
"그러니 황야를 통과해 오는 것은, 이번 르나르들처럼 허를 꿰뚫기 위해서거나 많은 숫자의 군대를 우리 몰래 들이기 위해서다. 돌로 방벽을 쌓으면 더 단단한 방비가 되겠지만... 몰래 들어오는 군대를 막아 내는 것만으로 훌륭하다. 이 방법으로는 얼마나 걸리겠나?"
자올은 두 번째 지도와 첫 번째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했다.
"여기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어떻게 됩니까?"
"아마 걸어서 반의 반나절 정도."
"이 사이에 봉화대 하나면 되겠군요."
자올은 목탄을 들고 여기저기를 표시했다.
"자동성 골짜기에도 샛길이 있고, 적들이 봉화의 존재를 알면 자동성에 공격이 집중될 지도 모릅니다. 다른 방비는 없습니까?"
"계획대로 방벽을 세운다. 하지만 상인들이 오가야 하니 단순히 길을 막을 수는 없지. 계곡과 같은 천혜의 지형을 찾아 산성으로 보강한다."
"그 산등성이에는 봉화대도 올리고요?"
"맞다."
자올은 지도 위에 찍어 놓은 점들을 세고, 자동성 골짜기에 지어질 산성들을 또 더했다.
자올은 한밤에 신의 시선으로 이 땅을 내려다보면 어떻게 보일지 생각했다.
흑린의 국경은 머나먼 하늘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야 돌의 방벽이 아닌 불과 연기의 방벽으로 빛나고 있을 테니까.'
라크락이 그어 놓은 목탄의 줄도 하나의 빛줄기인 셈이었다.
하지만 자올은 라크락의 반려로서, 라크락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자올은 자못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봉화대를 짓는 데는 몇 수레의 돌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짓는 것은 신경 써야만 하겠지만, 그곳에 불을 지킬 전사를 둘 테니 비가 오거나 바람에 무너져도 보강하는 건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산성입니다. 아마 봉화대를 짓는 것보다 두 배, 어쩌면 세 배는 걸릴 겁니다. 자동성의 인간들이 그 천혜의 지형을 찾아 주긴 하겠지만, 돌이 많이 나더라도 돌을 직접 캐서 쌓아 올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음. 자동성이 있으니 산성은 다소 늦어도 어쩔 수 없어. 봉화대를 먼저 만들어야겠지. 결국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자올이 담담히 답했다.
"5년 정도 걸릴 겁니다."
─┼
3년 뒤, 오라즌.
돌로 단을 쌓아올리고, 북해안의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흑린의 왕궁.
여름에는 서늘하도록 돌로 만든 단 위에 기둥 넓은 마루가 이어져 있었고,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각 기둥 사이를 막는 문으로 마루들을 갈라 방으로 만들었다.
이 미닫이문들은 처음엔 그냥 나무판으로 만들어졌지만, 자올이 종이를 발라 빛을 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선 모두 창호문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추위를 떨치기 어렵다.
왕궁의 바닥에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길이 존재했는데, 아궁이로 시작해 굴뚝으로 이어졌다.
바로 온돌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떼면, 데워진 온기가 돌로 만들어지고 황토로 메워진 길을 따라 이동하며 왕궁을 뜨겁게 덥히는 구조였다.
왕궁에서 시험적으로 만들어졌던 온돌은 겨울을 한 차례 보냈던 전사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알려졌고, 이미 집을 지었던 이들도 왕궁의 온돌을 따라 바닥을 까뒤집었다. 리자드맨들에게 추위를 이기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라크락은 왕좌가 있는 넓은 공간, 대회관에 혼자 앉아 있었다.
겨울의 이른 새벽, 자올이 모두 창호문으로 바꾸었으나 해가 뜨질 않았으니 대회관은 어둡고 컴컴했다. 가신들이 왕궁 밖에 켜 두는 횃불의 빛만이 들고 있었다.
다행히 왕궁이 자랑하는 온돌 덕분에 왕궁에서 가장 넓은 장소임에도 공기가 차갑진 않았다.
신하들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라크락은 어째서인지 일찍 눈이 뜨여졌다.
"흠."
라크락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자 대회관에 목소리가 울렸다.
흑린은 큰 문제없이 성장 중이었다.
북해안의 엘프들은 이제 자리를 잡았고, 자동성의 인간들은 큰 수익을 내고 있었으며, 남방의 제도에선 아스타시디안들이 리자드맨의 채굴 기술을 배워 채광을 시작했다.
하지만 라크락에겐 고민이 있었다.
라크락은 자신이 나라를 만들 수 있을지언정, 왕이 될 자질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울 줄이야.'
라크락은 자신 앞의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하지만 거대한 흑린은 어디에서나 문제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은 라크락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일어났다.
'외적을 방비하는 것만큼 내부를 단단히 단속해야 하는데...'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하나의 종족, 리자드맨들을 일통하고 그 외의 종족들을 내치는 것은 나라를 세울 때는 좋은 전략이었다.
아군과 적을 명확히 갈라놓으면 모든 것이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는 아니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리자드맨들을 두려워한다.'
다른 종족 모두를 흑린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다.
흑린에 사는 종족 중 많은 수가 다른 종족이었고, 이들도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하고 농사를 짓는다. 리자드맨 마을에 비하면 규모는 적지만 그들의 수입을 리자드맨들은 세금으로 거두고 있었다.
'두려움은 통치에 유리한 것만이 아니다.'
많은 종족들은 리자드맨이 자신 위에 있다는 걸 수긍하고 받아들이지만, 어떤 종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리자드맨을 시험하려고 들었다.
당연히 흑린은 지금까지의 도전을 받아 모두 승리했다.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유능한 전사장들이 전사를 소집해 몇 배가 되는 적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리고 라크락은 신의 돌보심 아래 언제까지고 승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흑린 내부의 이종족들 숫자를 줄여 나가면 결국 국력이 줄어드는 결과가 된다.
굴종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
두려움이 있으면 녹아들지 못한다.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의 백성 숫자를 늘려 나갈 때, 흑린은 그 수를 줄여 나간다면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음.'
라크락은 여러 방법을 생각했다.
특히 그들 모두가 푸른 벌레신을 믿도록 한다면 그런 내란도 잦아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믿음이란 강요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나 수년 전까지 자신들을 겁박했던 신을 이제 와서 추앙하는 것은 어렵다.
푸른 벌레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 방법이 필요했다.
"하나의 땅 위에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라크락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지."
라크락은 목소리를 찾아 눈을 들었다.
리자드맨이었다.
"하나의 땅 위에 살더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니."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 리자드맨은 그저 기둥 뒤에서 나타났다.
외팔이였고, 리자드맨 노인의 특징인 주름지고 빛을 잃은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리자드맨의 실루엣에서 푸른빛이 난다는 것이었다.
라크락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별잡이!"
066화
"어떻게 된 일인가! 그대는 분명 죽었을 텐데?"
별잡이는 검지를 들어서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에 대해 묻지 말라는 뜻으로도 느껴졌다.
"묻지 말라는 뜻인가?"
별잡이는 그렇다고 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라크락이 생각했다.
'별잡이와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가 옳았던 것이구나. 우리가 죽어도 푸른 벌레신께서 거두어 가는 모양이다. 아마 이미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이와 똑같이 대화를 해서는, 죽은 것과 산 것이 구분되지 않겠지. 그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나 보다. 적어도 죽은 이에게 어떻게 돌아왔는지 캐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죽음은 비밀스러운 것일 테니.'
죽은 별잡이가 돌아왔지만 라크락은 별다른 편견이 없었다.
그래서 라크락은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별잡이는 자신의 물음에 답해 나타난 것이니,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보자고 말이다.
라크락이 말했다.
"같은 시간 속에 산다는 게 무슨 의미지?"
별잡이는 말없이 창호문을 드르륵 밀었다.
그러자 복도가 나타났고, 또 창호문을 드르륵 밀자 바깥 마루가 나타났다.
거기서 또 창호문을 밀어서 열어젖힌 후에야 밖이 나왔다.
정원에는 몇 개의 횃대가 놓여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 횃불을 간지럽히고 라크락의 옷소매 사이로 파고들었다.
라크락이 별잡이를 따라나서자, 밤하늘에 별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별잡이가 말했다.
"밤하늘이 어떤가?"
"아름답군."
"내가 알려 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라크락은 굳이 자신을 시험하느냐고 힐난의 눈빛으로 별잡이를 보았다가 말했다.
"저기 푸른 별이 가까이에 노란 별 두 개를 끼고 있는 게 보이는군. 이맘때에 저 별들은 남쪽에 있다가 천천히 돌면서 봄이 올 쯤엔 북쪽 지평선으로 사라지지.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저 북극성과 교차해서 거리를 가늠해야지."
"잘 기억하고 있군. 그럼 이곳 오라즌에서 보는 별과 저 땅 끝 마가넨에서 보는 하늘의 모양이 같은가? 저 북해안의 끝 자린에서도 마찬가지인가? 저 황야를 지나 르나르의 땅과 사티로스의 땅에서는? 다 같은 모양의 하늘인가?"
라크락은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별들의 위치가 다르다."
라크락은 대답을 하고나서 별잡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알았다.
"그대가 가르쳐 준 하늘의 모양만으로는 불충하군."
라크락이 덧붙여 말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대보다 더 넓은 땅을 오갔던 떠돌이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대의 떠도는 삶은 황야와 반도의 북쪽을 오갔을 뿐이지. 그대가 본 하늘은 내가 보아 온 하늘에 비하면 좁았고, 저 동쪽 대륙의 끝, 어쩌면 바다 건너까지의 하늘에 비하면 조막만 할 뿐이다."
"그렇다. 나는 겨우 나의 시간만을 살았을 뿐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살아 낸다. 그대도 최선의 삶을 살았다."
별잡이가 가로저었다.
"내 삶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살아 낸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특히 왕인 그대는."
"...그럼?"
"모두의 시간을 살아 내야 하지."
라크락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별잡이의 가르침이 없던 시절, 소들은 그저 바람을 읽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래서 하늘을 읽고 시간을 읽어, 비가 언제 올 것이며, 풀은 언제 자라고, 또 언제 메마르고, 소들이 버티지 못할 추위가 오는 것은 언제인지 알고 나서야 소치기란 직업이 생겼다.
소치기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흑린 또한 주식이 곡식이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농사야말로 시간을 알지 못하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언제 땅을 갈고, 언제 씨를 심고, 언제 물을 대고, 언제 물을 뺄지, 비가 내리는 때는 언제이며 곡식의 알들이 성글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인지 미리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일꾼을 준비하고 농기구를 만들고 다가올 일을 대비하고, 주어진 일을 언제까지 끝내야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농업만이 아니다.
양잠도 마찬가지며 나무꾼과 약초꾼의 일도 그랬다. 먹고 입고 잠자는 일 모두가 시간을 알아야 했고, 하늘을 봐야만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을 보고 살 것 같지 않은 광부들과 지붕 아래의 목공들도 우기를 피해야 했다.
심지어 전쟁까지도 그랬다. 겨울이 오면 땅이 얼어 수레를 제대로 끌 수 없으니 끝내야만 한다.
별잡이가 말했다.
"모두가 다른 시간에 살고 있으니, 같은 땅 위에 살더라도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왕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 과연."
라크락은 이게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흑린의 리자드맨들이나, 사이란 무엘이 있는 자동성의 인간들이야 별잡이의 가르침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므로 혼란이 적다.
별이 어느 방향에 있으면 때가 된 것이고, 해가 이만큼 기울면 약속한 때가 된 것을 안다.
하지만 흑린에 살고 있는 다른 종족들은 그런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약속이 틀어지고 오해가 쌓인다.
징수꾼들이 마을을 돌아도 세금으로 거둘 곡식이 덜 거둬지는 일이 잦다.
징수꾼들이 라크락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이미 있는 것을 거두면 그 마을은 굶게 되고 리자드맨에 대한 반발이 쌓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사장 하나가 일을 위해 옆 마을의 드워프 젊은이들을 요구했는데, 약속한 날, 드워프들이 모이지 않았다.
전사장은 드워프들이 반란을 하려는 음모라고 생각하고 그 벌로 드워프 마을을 약탈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날짜를 착각했을 뿐이었다.
드워프들은 리자드맨들과 다른 방식으로 하늘을 읽었다.
라크락이 한탄했다.
"어려운 일이군."
문제는 알아냈지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가르치는 것은 더 어렵다.
하늘을 읽을 줄은 알아도 그 지식을 가르칠 만큼 아는 이들은 흑린에도 그리 흔히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정도 지식이 있다면 이미 흑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별잡이가 말했다.
"왜 어렵다고 생각하나?"
"가르치는 일이 어려우니까. 특히나 내가 가르쳐야 할 건 리자드맨들을 적대하는 무리가 될 것이고."
"그래서 내가 온 것 아니겠나?"
"...음?"
별잡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빛나는 푸른 별이 보이나?"
라크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그대야."
"나라고?"
"저 별들을 잘 이어 봐. 자네가 코카트리스 아낙세에 올라탄 모습이지."
"음."
"저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억나나? 봄이 오면 드러나고 겨울이 되면 내려앉지. 그대는 전사이니 겨울이 다가와 잠들러 가는 것이지."
"아. ...그럼 저 별은?"
"오웬이지. 떠돌이잖나?"
"아하."
"하지만 그대를 잊은 건 아니야. 때가 되면 그대를 스치고 지나가지. 오웬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대가 또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올렸을 거라 생각할 테니, 그걸 듣기 위해 돌아오는 거야. 그랬다가 또 떠나지. 이야기를 전해 주기 위해."
"재미있군. 더 있나?"
"물론이지."
별잡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전사들이 얼마나 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 모르겠지. 그대 이야기만으로 저 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붙일 수 있어."
라크락은 정말로 그럴 것인지 고대하며, 별잡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라크락은 물론 자올, 유르, 오웬과 사이란, 휘서와 휘경, 그리고 다른 네 형제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 푸른 거죽의 부족장 뷰에와 프로그맨 부족장 아울로이와 그 아들 슈넨, 전사 오보이도, 잘린 귀 부족의 살카잇과 켄타우르스의 부족장 타마리두, 오우거 부족장 카진, 아스타시디안 루보와 르나르 왕 하티, 사티로스의 왕 파브까지 사사롭게 이름 불렸다.
별잡이의 이야기에는 켄타우르스도, 오우거도, 엘프도, 르나르도 나왔고, 라크락이 아직 제대로 싸우지 않은 트롤도, 닉스도, 코볼트도 등장했다. 자동성도, 자동성의 수레바퀴도, 오라즌도 별자리가 되었다.
흑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위업과 성과들이 별자리가 되었다.
별잡이는 별자리에 더해 하늘을 열둘로 나누고 그 안에 서른 남짓한 하루로 채워 넣었다.
라크락은 별잡이의 방법대로라면 흑린의 모두가 같은 시간 안에 살아갈 수 있으리란 걸 알았다.
라크락은 추위도 잊고서 별잡이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끝내, 마지막 별자리에 이름을 붙이자, 별잡이가 말했다.
"이제 떠나야겠군."
"벌써?"
"이미 오래 있었어. 욕심이 과했지. 신께서 부르시는 게 느껴져."
라크락은 별잡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빛나는 별잡이의 실루엣은 라크락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대에게 내 왕궁을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이미 보았다네. 훌륭하더군."
별잡이는 라크락에게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라크락은 따라갈 수 없었다.
라크락이 아래에서 말했다.
"그대로 가는 건가? 내게 자식이 몇이나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나?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그건 산 사람의 일이니."
"그럼 저세상은 어떤가?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나?"
"그건 죽은 사람의 일이고."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나?"
별잡이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라크락은 더는 욕심내지 않았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군."
별잡이가 고개를 돌렸다.
"옳아."
"...옳다고?"
"산 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된단 말일세."
신을 믿는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흔쾌히 불구덩이 속으로도 뛰어들 것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지. 신께서 허락해 주셔도 내가 귀띔해 줄 수 있는 건 그뿐이야."
"...아."
"산 사람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네."
별잡이는 이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올랐다.
라크락은 별잡이의 등을 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의 위치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라크락이 별들을 눈으로 쫓자 각 별들을 가상의 선으로 이어나가니, 오라즌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의 모습이 되었다.
별로 이루어진 거인은 조용히 손을 뻗고는, 부유하는 별잡이가 올라탈 수 있도록 손바닥을 펼쳤다.
라크락은 감히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소머리뼈를 뒤집어 쓴 듯한 실루엣이었다.
눈은 푸르게 빛났고, 섬광과 같이 터져 나와 라크락과 시선을 마주쳤다.
라크락은 그것이 푸른 벌레신임을 알았다.
라크락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절했다.
─┼
"...크락 님. 라크락 님."
라크락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가신이 말했다.
"회의 시간 입니다. 신하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라크락은 눈을 비비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왕좌 위에 앉아 있었다.
창호지 밖으로는 아침의 태양빛이 들고 있었고, 새의 지저귐도 들려왔다.
"큰 종이와 목탄을 가져와라."
"저, 라크락 님. 죄송하지만 얼마나 큰 종이를 가져와야 합니까?"
가신이 라크락의 갑작스런 요구에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라크락이 종이를 찾자 신하들도 의아한 듯 라크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크락이 무엇을 위해 종이를 찾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라크락이 답했다.
"하늘을 그릴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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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체에 동일하게 퍼지는 컨티넌트 메시지가 성운 앞에 떠올랐다.
「제3 대륙 최초의 역법 '엽성력(獵星曆)'이 성립되었습니다.」
「국가 '흑린'에 의해 만들어진 '엽성력'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역법은 달은 물론 밤하늘의 별자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엽성력은 실제 행성의 공전 자전 주기를 '99.8'%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근대' 문명에서도 그대로 사용 가능합니다. 현재 '3'개 국가에 쓰이고 있으며 '더할 나위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별잡이라는 개체를 발견했을 때부터 성운은 역법을 초기에 만드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별잡이 생전에 역법을 만들 수는 없었으나 사후 세계 연구를 통해
라크락의 이야기는 퍼져 나갈 것이며 최초의 조상님이라 할 수 있는 별잡이의 존재는 흑린의 사후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 단초로 작용할 터였다.
'물론 별잡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신앙 자원이 뭉텅이로 날아갈 때마다 심장 떨리긴 했지만.'
사후 세계의 지식은 결국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신이 직접 과학이나 문명 발전에 관여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조상님을 라크락의 꿈으로 등장시키는 것부터 많은 신앙 자원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사후 세계는 인과율이 강하게 적용받기 때문에, 성운은 그런 인과율에 저촉돼서 신앙 자원을 크게 날려 먹을지도 모르는 발언은 별잡이가 말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걸어 두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별잡이는 성운의 의도대로 라크락에게 역법에 대해 알려 주었으니 적절한 투자인 셈이었다.
성운은 화상 채팅창 너머로 말했다.
"게다가 르나르도 잘 쓰고 있다니 기쁜데."
죽상을 하고 있는 룬다가 답했다.
"그래."
"달보고 만든 음력이 아니라 윤년까지 계산에 넣은 양력이야. 좀 더 기뻐해도 된다고 보는데."
"와, 너무, 기뻐요. ...라고 하겠어? 어떻게든 크람푸스나 위즈덤은 잘 속이고 있는데, 부족한 걸 자꾸 흑린 물건으로 채우다 보니 이대로 지나면 속국 되겠어, 아주."
당연히 성운이 바라고 있는 바였지만 괜히 신경을 긁지 않기로 했다.
성운은 정기적으로 룬다에게서 일방적인 정보 공유를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먼저 연락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룬다는 마지못해 정보 공유에 협조하는 입장이니만큼 친목을 다지겠다며 대화를 걸어올 리가 없었다.
성운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짜증스런 얼굴이던 룬다는 표정을 굳히고는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룬다가 말했다.
"대륙 중앙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 것 같아."
067화
성운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새로운 세력이라니?"
"말 그대로인데."
"흉물을 말하는 거야?"
"아니, 아냐."
"그럼 흉신이군?"
"아니야."
"그럼 마법 역병 이벤트인가? 하지만 우리 대륙에 마법사가 나오긴 이르지 않아? 드래곤은 말할 것도 없고. 영물이랑 관련된 건가?"
룬다가 내저었다.
"아니야."
"그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데."
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인 것 같아."
성운은 가면 뒤로 인상을 썼다.
"...플레이어?"
성운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플레이어면 플레이어지, 플레이어인 것 같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새로운 부족이랑 만나게 되면 '문명 충돌' 알림이 뜨잖아?"
"그렇지."
"그리고 상대가 플레이어면 경고창이 뜨면서 '상대 종족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뜨고."
"근데? 그 플레이어는 안 떴다는 거야?"
"아냐. 떴어."
"그럼 플레이어잖아."
"...하지만 말이 안 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대륙 한복판에서 플레이어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게임이 시작되고 22년 정도가 지났어.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플레이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등장한다고?'
성운이 말했다.
"그렇지만 문명 충돌에서 상대가 경고가 떴으면 흉신일 가능성도 있잖아."
"흉신은 확실히 아니야. 귓속말을 보낼 수 있으니까. 로컬 플레이어 목록에서도 확인이 되고."
"귓속말은 안 받아?"
"차단되어 있어."
성운은 잠깐 고민해 본 다음 말했다.
"정보 출처가 어떻게 돼? 믿을 만한 사람이야? 아니면 또 속고 있는 거 아냐? 아니면 날 속이고 있거나."
룬다는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를 성운에게 보냈다.
"정보 공유 받았지? 에이알이 보내 준 정보야."
"에이알이라면..."
"닉네임 Ar1026. 닉스, 그러니까 현재 금안(金眼)이라고 불리고 있는 나라의 플레이어 말이야. 장완이랑 지금 느슨한 동맹을 맺고 있는."
"이 정보는 너만 받은 건가?"
"아니. 그냥 나한테만 보내 준 게 아니라, 위즈덤이랑 크람푸스한테도 보냈어. 당연히 동맹인 장완한테도 보냈겠지. 보시다시피 새로운 플레이어는 실제로 존재하는 건 맞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해 왔지."
"정말..."
"말도 안 되지?"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룬다가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성운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흉물이 덩치를 키우면 그야말로 괴수가 돼서 마을을 덮치기도 하고, 흉신은 떠돌이 부족들을 규합해서 신 행세를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마법 역병이나 드래곤의 등장같이 문명 수준이 높을수록 발생하게 되는 다른 이벤트들도 '새로운 세력'이라고 부를 만했다.
'하지만 새로운 플레이어라니.'
22년간 잠수를 타고 있다가 이제서야 플레이를 시작하는 건 로스트 월드에서 어떤 전략성도 가지지 않은 플레이다.
'로스트 월드에서야 인터넷이 끊겼다가 뒤늦게 참가한 케이스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플레이어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성운은 공유받은 정보에서 플레이어의 이름을 확인했다.
「癤우삤瑜쇰씪」
'...글자가 깨진 건가?'
플레이어가 일반적으로 이런 닉네임을 정할 리는 없다.
로스트 월드가 나온 후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 플레이에 쏟은 성운으로서도 처음 보는 닉네임 형태였다.
"저걸 뭐라고 부르지?"
"뭘?"
"플레이어 이름말이야."
"아, 첫 번째 한자를 절이라고 발음하는 모양이야. 부스럼 절 자인데, 그 뒤 두 글자를 붙여서 절우비라고 부르고 있어."
"절우비."
'절우비라. 특이하긴 해도, 뭐.'
성운은 닉네임 정도야 정말 특이한 걸 추구하는 플레이어거나, 그저 시스템 상의 오류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런 종족이 있을 리가 없는데.'
성운이 본 것은 에이알이라는 플레이어가 멀리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에이알의 주력 종족은 닉스.
닉스는 엘프와 닮은 종족으로, 귀가 뾰족한 것은 닮았지만 체구가 좀 더 작고 피부가 검은색이었다. 엘프가 고상한 구석이 있다면 닉스는 좀 더 쾌활한 편이었다.
화면에는 두 무리의 닉스가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운은 처음에 단순한 내전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화면을 찍고 있는 Ar1026이 손가락을 움직여 각각의 닉스 무리에 대한 상태창을 띄웠다.
첫 번째 무리는 종족명이 「닉스」라고 떠올랐지만, 두 번째 무리는 아니었다.
「종족: 닉스(뱀파이어)」
─┼
"뱀파이어라고?"
"너도 못 보던 종족 맞지?"
"...음. 처음 봐."
성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로스트 월드에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없었다.
가장 비슷한 것은 '좀비'일 텐데, 이 경우 종족으로 취급되는 게 아니라 그냥 시체로 나온다.
좀비란 시체가 움직이는 것이니까.
그 외에 특정 마법이나 신성을 통해 개체를 조종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상태 이상 취급이 되었다.
성운이 말했다.
"그래서 너희는 뭐라고 생각한 거지?"
"아직 다들 따로 모여서 이야기하진 않았는데, 크람푸스 생각엔 확률이 낮은, '극히 드문 이벤트'라서 자기가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나도 한 번도 못 봤으니 그건 아닐 확률이 높아. 애초에 그렇게 가정하는 것보다는..."
"...보다는?"
성운은 마음에 들지 않는 가정을 해야 했다.
"...DLC 같은 거 아닐까?"
"DLC? 우리가 플레이하는 게 확장 팩이라고?"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했던 로스트 월드가, 지금 하는 플레이와 똑같지는 않잖아?"
"그야 당연한 거 아냐?"
"아니, 실재하는 세계가 된 것 말고도 말이야. 예를 들어..."
성운은 상태창을 띄우고 옵션창을 띄웠다.
옵션창은 에드온을 관리하거나 창 크기를 띄우는 것만 있지, 그래픽과 관련된 옵션은 하나도 없었다.
"...옵션창이 텅 비었지. 그야 그래픽 조절을 할 게 없으니까. 이것 말고도 제일 중요한 게 없고."
"제일 중요한 거?"
"로그아웃을 할 수 없잖아."
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옵션창처럼 로그아웃 버튼도 찾아볼 수 없다.
성운이 말했다.
"아무튼 똑같지 않다는 말은, 있던 게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없던 게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성운은 Ar1026이 공유해 온 정보를 계속 보며 말했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군. 지금쯤이면 정리 끝냈겠지?"
"위험하다고?"
"어? 위험해서 나한테 알려 준 거 아냐?"
룬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게 되는 정보는 제일 먼저 알려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알려준 것뿐이야. 게다가 없던 게 생겼으니 의견이 궁금하기도 하고."
"아닌데. 되게 위험해 보이는걸."
"에이알과 장완은 뭔지 모르니 잠시 놔두는 중이라나 봐."
"나머지는?"
룬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 바 없지 않아? 우리 땅에서 생긴 일이 아니잖아. 위즈덤도 가만히 있고, 크람푸스랑 나도 지켜보기로 했어."
"...음."
"저걸 빌미로 쳐들어가는 건 조금 속보이지."
룬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생각에 별로 위험한 세력은 아니야. 절우비는 고작해야 신성 레벨이 2거나 3 정도일 거고."
성운이 질문했다.
"에이알? 그 친구도 뱀파이어에 대해 모르는 거 아냐?"
"공유한 정보 봤지 않아? 뱀파이어는 좀비처럼 감염시켜서 자신의 종족으로 변화시켜. 하지만 변화하는 기간이 빠르면 하루, 늦으면 며칠이 걸리는데다 변화했을 때 오히려 능력치가 떨어져 버려. 몇몇은 상승하기도 했는데, 아마 랜덤인가 봐."
"음."
성운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뱀파이어가 좀비 역병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좀비 역병은 확실히 무섭지. 늦어도 몇 시간, 빠르면 몇 분 안에 좀비가 되니까. 그에 비교하면 뱀파이어는 아주 약화된 좀비 역병처럼 보일 수 있긴 해.'
하지만 성운 생각에 그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좀비는 그냥 멍청한 시체지만, 뱀파이어는 아니잖아?'
뱀파이어 개체는 지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분명 플레이어가 발견하지 못한 문제를 숨길 수도 있었다.
"그 에이알이란 플레이어는, 뱀파이어 종족의 제사장은 찾아 둔 건가?"
"글쎄? 그것까진 에이알이 공유하지 않아서."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찾지 못했군.'
성운은 룬다 몰래 다른 창을 띄웠다.
성운이 자주 확인하는 수식들이 담긴 메모창이었는데, 그중에 좀비가 퍼지는 속도와 위험도를 계산한 것도 있었다.
성운은 이리저리 변수를 넣어 보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성운이 말했다.
"당분간 지켜본단 말이지?"
"왜?"
"적어도 에이알이란 플레이어에게 제사장 정도는 찾아 두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 이게 특별한 이벤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사장 정도는 알아둬야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가 진짜 플레이어라면 낮은 레벨에서 제사장을 잃으면 어차피 복구도 못할 테고."
룬다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성운을 바라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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