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7

「플레이어 임춘식으로부터 '소영역: (알 수 없음)'을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 솔롱고스로부터 '소영역: (알 수 없음)'을 획득했습니다!」
'...랜덤으로 말이지.'
성운은 그 부분이 아쉬웠지만 임춘식의 경우 얻게 될 때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운은 우선 임춘식의 것을 확인했다.
「'소영역: (알 수 없음)'을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이 '네'를 누르자, 몇 장의 엎어진 카드가 나왔다.
성운이 한 장을 뽑아 들어 확인했다.
'운이 좋군.'
052화
「'소영역:새'를 얻었습니다.」
새는 괜찮은 소영역이었다.
플레이어들이 흔히 '정찰'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영역을 통한 지역 탐색에 유리했다.
그리고 '까마귀의 지능'과 '올빼미의 지혜'라는 지능을 올려 주는 두 가지 축복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축복을 받은 캐릭터들에게 축복을 다시 내리는 건 낭비야.'
따라서 새로운 축복은 새롭게 태어나는 다음 세대에게 적용될 터였다.
'리자드맨은 독 저항을 까마귀의 지능으로, 인간은 활력을 올빼미의 지혜로 교체해야겠다.'
성운은 그 다음 솔롱고스의 소영역을 확인했다.
'바위'의 소영역을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었기 때문에 바위가 나와 주길 기대했지만, 정작 나온 소영역은 '늪'이었다.
'늪? ...쓸모없다고 하진 않겠지만 활용도는 낮아.'
아마 솔롱고스가 흉신을 통해서 얻은 마이너 소영역으로 보였다.
켄타우르스를 지배하고 황야를 돌아다녔던 솔롱고스에게도 큰 쓸모가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가치가 없어 보이는 소영역들도 중반이 지나 플레이어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쓰임새가 생겨나곤 했다.
'다음은...'
성운은 우선 서쪽을 바라보았다.
성운은 메뚜기 떼를 통해 대륙 중앙에서 거대한 싸움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모두 파악한 것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눠진 싸움이었다.
그들은 서로 접한 국경을 통해서는 서로 싸우면서도, 뒤로는 대륙에 점령되지 않은 빈 땅들을 하나하나 점거하고 있었다.
'조만간 이쪽으로 오는 놈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얌전히 놔둘 생각이었다.
서로 싸우며 힘을 빼고 있는 좋은 상황에서 괜히 성운이 외부 세력으로 끼어들 경우, 운이 나쁘면 이들이 힘을 합쳐 성운에 대항해 싸울지도 몰랐다.
성운은 북해안을 바라보았다.
성운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반도 북쪽의 경우,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이 부족들을 모두 파괴하거나 내쫓았기에 다른 종족은 없었다.
하지만 솔롱고스와 임춘식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NPC 부족들을 복속시키거나 노예로 부렸기에 북해안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들었다.
'어차피 고블린 무리들이 대부분이니 상관은 없어.'
성운은 이번엔 동쪽을 바라봤다.
동쪽에는 야트막한 산맥이 있었고, 그 너머로 대륙의 동쪽 해안이 존재했다.
아마 몇몇 NPC 부족이 있겠지만, 플레이어가 자리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이쪽은 산맥을 건너기보다 바다로 진출하면 배를 통해서 해안선을 점령하는 식이지. 상인이나 모험가들을 통해서. 고대 유적이 좀 나오겠지만 당장 별로 중요하진 않아.'
초반에 중요한 건 역시 땅의 넓이였다.
지구의 역사가 보여 준 것처럼, 특정한 나라들이 그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보통 그 지역에 계속 나라가 남는다.
이 게임의 '초반'이 끝나는 시기가, 더 큰 전쟁으로 발전하기 전 대략적인 국경선이 정해지는 때였다.
이후로는 전쟁이 아니면 극적인 확장이 어려웠다.
성운은 마지막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반도의 북쪽은 이제 성운의 땅이었다.
성운이 라크락을 통해 자동성과 황야, 북해안에서 싸움을 치루는 동안에도 정주민인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들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아래가 완전한 미답지인 것도 아니었다.
성운의 종족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벌레 창조물들은 그 땅에 있었다.
몇 개의 NPC 부족들이 있었는데, 문명 정도는 낮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정복하기 위해서는 라크락을 데려와야만 했다.
'동쪽이나 서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지만, 북쪽과 남쪽은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데 라크락은 두 곳에 존재할 수 없단 말이지.'
고민하던 성운은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냈다.
"이래서 팀플이 필요한 거지."
화상 채팅 너머로 엘다르가 맹하니 물어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냐."
"뭔가 기분 나쁜 예감이..."
"착각이야."
─┼
성운은 엘프들을 다시 올려보냈다.
겨우 새로운 정착지에 적응하기 시작했으므로 반발이 있었지만 리자드맨들의 창날 앞에 딱히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직 고향을 잊지 못한 엘프가 많았기에 엘프들은 얌전히 북쪽으로 향했다.
다만 엘프가 살던 지역은 이미 리자드맨들이 점령 중이었다.
반도 북쪽에 살던 정주민들 중 일부가 이주한 것이었다.
이들은 신이 점지한 비옥한 땅을 찾아 온 것이었는데, 실제로 엘프가 살던 마을은 강 하류 마을에 두 개의 큰 산이 찬 공기를 막아 기후도 위도에 비해 따스한 편이었다.
당연히 리자드맨과 엘프 사이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자드맨들은 그들의 신이 기적을 보여 주고 재해로부터 보호해 주는데, 엘프의 신인 엘다르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엘프들은 더 북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엘프들은 북해안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는 추위에 약하진 않았지만, 역시나 겨울이 긴 땅이었다.
오우거들은 농경 기술을 발달시키기보다 고블린 노예를 부리거나 문명 정도를 발전시켜 다른 종족에게서 얻는 방식을 택했기에 땅도 새로 개간해야 했다.
게다가 방해꾼도 많았다.
노예였던 고블린들은 새로운 정주민들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무리를 잃은 오우거 개체도 떠돌고 있었다.
이 오우거들은 특히 위험했다.
신이 사라져도 축복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들은 자신의 신인 엘다르에게 기도를 올렸다.
왜 자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엘다르는 답을 줄 수 없었다.
자신이 욕심을 내서 자동성을 공격하게 했고, 그게 성운의 심기를 거스른 결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임춘식과 솔롱고스를 격퇴하고 난 이후에는 성운의 뒤끝이 남아서라기보다 그냥 땅을 개간하고 개척하는데 자기 부족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아서 엘프들을 북쪽으로 보낸 것이었다.
엘다르 생각에 다른 신의 강압에 휘둘리는 게 들통 나면 그날로 모든 신앙을 다 잃고 석상이 될 터였다.
하지만 신이 되어서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엘다르는 성운의 다음 행동에 따라 신탁 하나를 자신의 제사장에게 내렸다.
새로운 부족장이자 새로운 제사장으로 선택된 녹안 부족 엘프 리오나르는 제단 앞에서 신탁을 받았다.
엘프를 도울 귀한 존재가 남쪽에서 온다는 것이다.
리오나르는 이 소식을 엘프들에게 알렸다.
곧 엘프 정찰대가 돌아와 소식을 알렸다.
"인간들 무리가 오고 있다고?"
리오나르는 자신의 이전 부족장이 인간 부족을 공격하려다 무리를 비참하게 만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의 말을 믿었다.
'하사디안은 오만한 멍청이었다. 분명 춤추는 그림자신께서 그런 거친 공격을 명하셨을 리 없거늘.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 나는 그런 전처를 밟지 않겠다.'
리오나르는 그리 많지 않은 엘프의 형편에도 인간 무리를 제대로 대접할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날 쯤 해서 말을 탄 인간 무리가 도착했다.
리오나르는 말에서 먼저 내리는 이의 얼굴을 바로 알아봤다. 구면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성... 성주?"
"오, 그러니까... 누구더라? 아니. 분명 만났던 사람인데. 기억해 낼 수 있어요. 잠시만요. 리오나르. 리오나르, 맞죠?"
"예, 맞습니다."
리오나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휘경은 몇 년 전 시장에서 만났던 리오나르를 기억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된 장소도, 두 사람의 처지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 좀 야위었군요? 별 탈 없냐고 묻고 싶은데 저도 소식을 들어 알음알음 알고 있으니 그건 넘어가죠. 아, 참고로 저는 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고 싶어 한 상인들이 많았는데, 무역로가 막힌 걸 알고 자동성에서 거래를 끝내고 가 버렸거든요. 그네들은 손해를 좀 봤겠지만... 미안합니다. 너무 내 이야기만 했죠?"
"아뇨. 일단 안으로 드시죠."
"그러죠. 여긴 추우니까. 잠깐만요. 내 친구 좀 불러오죠."
휘경이 뒤를 돌아보자 리오나르의 시선도 뒤를 향했다.
이제 보니 말이 아닌 코카투가 한 마리 있었다.
코카투에서 내리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 아닌 리자드맨이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그 모습에 엘프들 사이에선 작게 비명이 터져 나와, 리오나르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단속했다.
리자드맨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엘프, 이 움막 안에 다른 자객이 없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리자드맨."
움막으로 들어가던 리자드맨이 돌아보았다.
"제 이름은 사이란 무엘입니다. 사이란이라고 부르시죠."
"좋습니다, 사이란."
리오나르는 사이란이라는 리자드맨이 엘프를 싫어하기 때문에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걸까 걱정했다.
하지만 움막 안의 온기에 표정이 풀리는 걸 보고 그냥 추위 때문인 것을 알았다.
리오나르는 차를 마시는 휘경을 바라보았다.
휘경의 뿔은 이제 완전히 자라서, 옆에서 보기에도 무거워 보일 정도였다.
각 가지에서 갈라져 나온 뿔들은 최종적으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오나르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어떤 일이랄까, 글쎄요. 엘프들도 신을 믿고 있죠?"
신에 대한 이야기에 리오나르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예. 저희는 춤추는 그림자신을 믿습니다. 그쪽, 사이란과 휘경 당신은 푸른 벌레신을 믿고요."
"네. 저는 사실 신과 신앙에 대해선 잘 모르는데요, 가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신탁이란 게 오거든요?"
"신탁, 말입니까?"
"예예. 신께서 정확히 뭐라곤 안 하시는데 뭘 하라거나 아니면 저기 뭐가 있다고 모호하게 말씀하시고 가 보면 돈이 될만한 게 있다거나."
리오나르 생각에 휘경은 너무 세속적인 부분이 있어 보였지만, 아무튼 신탁을 받는 이로서의 유대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탁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뭐, 그런 셈이죠?"
"구체적인 내용은...?"
"신탁이란 게 또 해석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뭔가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넘어가고."
"아, 네."
"아무튼 중요한 건, 저희 푸른 벌레신께서는 약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도우신다는 겁니다."
"예에..."
리오나르는 움막 주변을 돌아보며 이 결과물을 만든 게 바로 당신의 신이라고 쏘아붙일까 고민했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휘경의 말에 따르면, 신의 뜻이 어땠는지는 별개로 눈앞의 인간은 자신을 돕겠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도움이라고 한다면...?"
"무기랑 농기구, 추운 데서도 잘 자란다는 곡식 종자를 좀 가져왔어요."
예의 곡식 종자는 휘경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엘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본래 엘프 마을에서 곧장 이 위로 올라왔다면 모를까, 당장 엘프들이 가진 것은 반도 북쪽에서 얻은 추위에 약한 종자들이었다.
운이 좋다면 이번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그 씨앗들뿐만 아니라 엘프들도 함께 죽을 터였다.
그것을 보고 리오나르가 화색을 띄었다.
"정말 감사합..."
"가격은 싸게 쳐줄게요."
"...예?"
리오나르의 황망한 물음에, 휘경이 또박또박 답해 주었다.
"엘프들이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니까, 값을 싸게 준다고."
053화
휘경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아, 그렇지. 엘프들은 편이 없구나. 편, 다른 말로 돈이 뭔진 알죠?"
"...자동성에서 찍어 내는 그 철편들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요즘엔 주로 그걸로 거래를 하거든요."
"예. 압니다."
리오나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부족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인이었다.
휘경이 뭘 말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돈이 될 만한 다른 건 없어요? 공예품이라던가. 옷 같은 건 엘프 것도 인간이 입을 수 있잖아요."
"...없습니다."
엘프들은 오래 떠돌아다니느라 무거운 짐은 다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휘경은 사이란을 돌아봤다.
"사이란, 뭔가... 돈이 될 만한 게 없었나?"
"겉보기엔 전혀 없었습니다. 엘프 자신이 상품이 되는 게 아니라면."
그 말에 리오나르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리오나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휘경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일할 사람도 부족해 보이니 사람을 거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죠?"
"마, 맞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휘경이 곡식 종자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리오나르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신께서 여러분을 도우라기에 오긴 했지만, 아무리 신의 말씀이라도 저희도 아무런 수익이 되지 않으면 곤란하죠. 리자드맨들처럼 열렬하게 신을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희는, 적어도 저는 아니거든요."
그 말에 사이란이 꼬리로 휘경의 어깨를 때렸다.
휘경이 맞은 부위를 주무르며 사이란을 노려보자 사이란은 천장을 바라보며 모른 척했다.
휘경은 어깨로 사이란을 살짝 치고 다시 리오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유감이지만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손을 바닥에 짚자, 리오나르가 말했다.
"적당히 하시지요, 자동성주 휘경. 저도 상인이었습니다."
"뭘 말이죠?"
"한 부족의 부족장이 가능할지 어떨지도 모를 거래를 위해 이 먼 땅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검은 비늘 부족의 선택받은 자를 데리고 말입니다."
휘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계속 해 봐요."
"저희한테 받아 가고 싶은 게 있어 왔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가진 게 없다고 직접 말했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뭘 가져가죠?"
리오나르가 일어서더니 구석에서 흰 비단을 꺼내왔다.
얼마 없는 비단은 죄다 옷을 해 입었지만, 리오나르는 비단 위에 그려 놓은 정보들이 더 소중했다.
휘경이 비단 위에 그려진 것들을 알아보았다.
"지도로군요."
"오우거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저희가 다시 확인한 것들을 합쳤습니다. 이쪽이 올라오신 길이고, 저희는 이쯤에 있지요."
"잘된 일이네요. 다만, 지도 값은 그쪽이 만족스러울 만큼은 안 될 것 같은데요."
"지도는 팔지 않을 겁니다."
"그럼?"
리오나르는 지도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노천 광산이 있습니다. 철이 나오죠. 자동성에 오우거들 철이 돌기도 했으니 질은 이미 아실 겁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강 하류에 땅이 좋습니다. 농사꾼들 말로는 종자가 날씨만 버텨 준다면 곡식이 잘 자랄 거라고요. 무엇보다 이쪽은 나무들이 곧고 올바르게 자랍니다. 속이 단단하죠. 이 모든 것들을, 자동성과 거래할 때는 더 싸게 내놓겠습니다. 얼마나 더 싸게 내놓을지는 좀 더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휘경이 코웃음 쳤다.
"리오나르, 그런 자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도를 그려 두고 여기에 뭐가 있고, 뭐가 있는데, 여기서 큰 수익을 낼 수 있다고요.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사기꾼에게 된통 속는 거죠. 아닙니까?"
"제 말은 허황된 사기꾼들의 입바른 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와 엘프 리오나르의 신뢰를 파는 겁니다."
휘경의 이마에 주름이 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뭐? 제정신인가요? 미래와 신뢰를 팔겠고요?"
"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지금 여기,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고, 냄새도 맡고 심지어 맛을 볼 수도 있는 종자들과 거래하겠다는 겁니까?"
"예."
휘경은 쥐고 흔들던 종자가 든 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었다.
휘경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답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오나르는 담담했다.
예상했고, 믿고 있는 구석도 있었다.
휘경이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옆에 앉은 리자드맨은 담담했기 때문이다.
휘경이 말했다.
"미래와 신뢰를 산다고요? 제가 들어 본 바로 이런 거래는 없어요."
"누군가는 괴팍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희가 옳아요. 사이란. 비단이랑 목탄, 있어?"
사이란이 비단과 목탄을 꺼내자 휘경이 그 자리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충문은 아직 각 개인의 이름을 완전히 묘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계약은 자동성의 인간, 북해안의 엘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되었다.
휘경이 계약서를 쓰는 동안 진지한 언변이 오갔다.
철은 얼마나 싸게 내놓을 것이며, 나무는 앞으로 얼마나 오래 벌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리오나르는 후하게 내놓으면서 동시에 더 많은 요구를 했다.
거래를 위해서는 길이 넓어져야 하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선 다리가 놓여야 하며, 고블린과 오우거의 위협을 더 떨쳐 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휘경은 몇 가지는 받아들이고, 몇 가지는 거절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둘의 거래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손님맞이를 위해 잡은 사냥된 사슴 피에 서로의 손을 흠뻑 적셔 찍어 냈다.
리오나르가 손바닥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 계약은 반드시 지켜질 겁니다. 신에 맹세코."
"신에 맹세코? 좋네요. 저도 그렇게 하죠. 계약은 지켜질 겁니다. 신에 맹세코."
리오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신을 따르는 건 옳은 일이다. 비록 미래에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이 거래가 아니었다면 당장 다가올 미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건 당연하지. 세상에 그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거래야.'
리오나르의 생각을 읽은 엘다르는 그게 아니라 자신에게 능력이 없을 뿐이라며 괴로워했다. 리오나르는 당장이 급하니 미래의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보다 먼 미래를 보는 엘다르는 또 자신의 엘프가 길게 호구가 잡힌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성운은 그런 엘다르를 보고 놀리긴 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알림: 제3 대륙 북해안에서 최초의 신용 거래가 성립했습니다!」
'신용거래가 시작되었다. 그 말은 각자의 신용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도 시작되었다는 거지.'
신용 거래를 먼저 찾아내고 시작한 건 좋은 점이었다.
이런 거래는 무형의 토지를 자산으로 생각하게 되고, 훗날에는 가치 그 자체를 사고파는 거래로 발전한다.
이전까지는 신용 거래가 불가능했다. 계약서를 쓸 수도, 거래했던 상대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 버리면 피해만 보니까.
하지만 정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유목민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하며, 서로의 계약 내용은 문자로 남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로스트 월드의 각 개체에게 세계라는 건 그냥 자신의 부족을 의미했어. 나머지 부족은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위협에 불과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길은 지도 위에 그려지고, 누구와 누구가 싸웠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평판과 신용이 중요해지지. 세계는 더 넓어졌다.'
성운에게 이 넓어진 세계야말로 앞으로의 진행을 위한 큰 과제였다.
'...이 넓어진 세계를 어떻게 통치하지?'
─┼
반도의 남쪽, 드워프들은 끈질기게 항전했지만, 라크락은 또 다시 승리했다.
이미 계속해서 샘솟는 개미 떼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하던 드워프 주력 부대는 라크락이 이끄는 코카투 전사 100명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전사들을 모조리 잃은 드워프들은 살길을 찾아 마을을 버리고 도망갔다.
신의 축복은 물론이고 전기의 마성까지 휘두르는 전성기의 육체였다.
라크락은 드워프 마을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곧 수풀이 끝나고 백색의 모래알들이 가득한 땅에 들어섰다.
라크락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모래알로 가득한 땅에는 소라며 말라 죽은 불가사리며, 알 수 없는 생선의 뼈다귀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라크락은 더 걸어갔다.
흰 거품을 일으키는 잔파도가 라크락의 발가락 앞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라크락은 잠시 서 있었다.
보다 센 물결이 밀고 모래사장을 밀고 들어오더니 라크락의 발목을 한 번 휘감았다가 돌아갔다.
"여기가 끝이군."
라크락은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라크락이 서 있는 곳이 반도의 끝이었다.
이제 자동성의 동쪽, 황야와 황야의 위쪽 북해안과, 황야의 아래쪽 반도에서 라크락과 검은 비늘 부족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라크락은 그 동안 신의 뜻대로 해냈다.
라크락은 신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라는데 별다른 의심이 없었다.
흉악한 풍습을 가진 부족들도 있었고, 감히 검은 비늘 부족에 대항하는 부족들도 있었다. 그 외에는 검은 비늘 부족에 대한 오해로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진 부족들도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선 라크락이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라크락은 푸른 벌레신이 원하는 대로 반도의 끝까지 정벌해 냈다.
다만 언제나 자신이 일을 끝내기 전에 새로운 일을 내려 주는 신께서 이번만큼은 특별한 요구가 없었다.
라크락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은 정복할 땅이 없으니.'
자동성의 서쪽으로 가면 많은 부족들이 있다는걸 알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라크락은 그 때문에 푸른 벌레신의 뜻이 늦게 전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땅을 어떻게 통치하지?'
라크락의 영향력이 닿는 검은 비늘 부족의 땅은 넓었다.
반도 전체와 황야, 자동성, 그리고 북해안에 이르기까지.
북해안 끄트머리는 엘프들에게 내놓았고, 자동성은 인간들이 산다지만 라크락은 모두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크락은 모두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고, 검은 비늘 부족도 의견을 같이하며, 자동성의 휘경이나 북해안의 엘프 리오나르도 그리 생각할 것이며, 심지어 신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텐데, 가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라크락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누가 라크락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그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라크락은 그런 이들을 이미 몇 번 만나 보았고, 대체로 말과 창날로 잘 설득을 할 수 있었다.
라크락은 앞으로도 그런 이들을 만나면 지금 밟고 선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설득해 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 설득을 언제까지 해야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피곤해졌다.
'영원히 코카트리스를 타고 달려야 한단 말인가? 음...'
라크락은 잘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막 나쁘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으뜸전사 유르 또한, 라크락이 가는 곳이라면 언제까지고 따라가겠다고 말해 왔다.
다만 반려인 자올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가끔 잊어버리곤 하지만, 라크락은 낭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유르, 그리고 전사들은 언제까지고 달릴 수 있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리 전체에는 어린아이도 있고 늙은이도 있었다.
그들 없이는 전사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가?'
─┼
성운은 나름의 답이야 가지고 있었다.
"엘다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통치해야 할까?"
"음... 보통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지요."
"말해 봐."
엘다르는 성운이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뻔히 알고 있을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운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상 딱히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엘다르가 말했다.
"봉건제와 군주제입니다."
054화
봉건제는 왕이 제후를 정하고 땅을 내려 준다는 말이다.
너무 넓은 땅은 왕이 혼자서 관리할 수 없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지킬 의무도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게 왕에 의해 임명되거나 혈족으로서 승계된 제후들은 필요하다면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계약 관계에 있었다.
"봉건제는 중세 유럽이나 초기 중국, 그리고 일본이 이와 비슷한 국가 형태를 갖추었었지."
"전부 다 한데 묶어서 설명하긴 너무 광의의 개념 정리지만, 아무튼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엘다르, 엘프가 지구의 나라 이름을 아는 건 이상하지 않아?"
"저는 차원을 넘나드는 엘프이옵니다."
"...그런 설정이었나."
봉건제의 장점은 왕의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왕에게 받은 땅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지만, 제후들에겐 왕의 땅이 아닌 자신의 땅이었다.
그런 만큼 제후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장원들은 제후들이 지어 올린 성벽으로 단단하게 지켜졌고, 축성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반면에 눈에 띄는 단점이라면...'
봉건제를 도입하는 시기에는 괜찮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신들이나 혈족으로 뽑힌 제후들과 왕과의 관계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나마 왕과의 관계는 계약으로 묶여 있다한들, 제후들끼리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제후나 왕이 중재하지 않으면 각각의 제후들은 서로를 다른 나라처럼 취급했다. 실제로 같은 나라이면서도 많은 제후들은 서로 전쟁을 했기에,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력을 소모시키는 셈이었다.
'물론 공성 전략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지. 사실상 전투력이 유지되기도 하고. 잦은 전쟁은 기술 발전을 부채질한다.'
일장일단이 있어 보이지만, 성운은 로스트 월드에서 봉건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개판이야.'
강력한 제후들은 여러 왕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필요하다면 서로 다른 왕에게 제후로 지지를 받고 봉토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거대해진 제후는 왕보다도 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국제 관계와 외교에서 큰 힘을 썼다.
힘의 균형을 줄타기하고 다른 제후와 왕들을 견제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제후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선 아니지."
"그렇사옵니다."
엘다르는 과거의 게임이 생각나는지 눈을 좁게 떴다.
"중세 시대에 거대한 도시 국가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제사장이 왕으로 있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 도시 국가는 주변국들의 왕들에게 모두 봉토를 받더니, 결국 저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렸지요."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트 월드에선 신정 일치 사회가 가장 컨트롤하기 쉬웠다.
반면에 신앙과 정치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해당 국가가 전체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도한 결과를 내기 힘들어졌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컨트롤할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지.'
봉건제가 나쁜 건 아니었다.
도시 국가는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게다가 주변 나라들이 봉건제를 실시하고 있다면, 똑같이 봉건제를 따라가는 쪽이 이득이기도 했다.
영향력을 넓히며 제후들을 돌려세워 자신의 나라에 속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나라의 종교가 파고들어서 문제지, 왕과 제후들 사이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으니 종교가 파고들 여지도 커.'
그럼에도 성운이 생각하는 것은 다른 한쪽인 군주제였다.
봉건제 또한 왕이 있긴 하지만, 로스트월드의 플레이어들이 부르는 군주제는 정확히 하자면 전제 군주제, 다른 말로 중앙 집권식 관료제를 말했다.
성운이 말했다.
"군주제에 대해 설명해 봐."
"수도에 왕이 있고, 왕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료를 정한 다음 지방에 내려 보내 행정을 보게 하는 것이지요."
봉건제에겐 각 제후들에게 그 땅에 모든 권력을 쥐여 주는 것이지만, 관료는 전혀 달랐다
여러 행정 업무에 따라 일이 나뉘어져 있었으며, 서로 견제했다.
또한 직무의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다른 직무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런 행정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소모되지만 그럼에도 많은 전근대 국가들은 전제 군주제였다.
'일관된 국가 기조 덕분에 혼란이 덜하고, 분업을 하니 행정 업무가 전문성을 띄고, 중앙의 힘이 강하니 군사를 동원하기 쉽다.'
성운은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신정 일치에 전제 군주제면 왕의 말 한 마디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
물론 군주제에도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여러 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봉건제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군주제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잘 닦인 길과 항구 같은 여러 사회 시설망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어떤 방식으로 관료를 뽑을 것이며 왕의 정통성은 어떻게 확보하고 여러 종족들이 각자가 하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정체감까지 필요했다.
"엘다르, 그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엘다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왜 성운 당신은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보느냐는 뜻이었다.
─┼
반도 전체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라크락은 부족을 데리고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대해 유르가 말했다.
"우리는 또 황야로 떠나는 겁니까?"
"아니."
라크락은 부족의 주요 인물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많은 이들이 곧장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건 지도였다.
지도를 그리며 라크락이 말했다.
"어제 꿈을 꾸었다."
이 말에 리자드맨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라크락은 진중한 회의 시간에도 신에게 계시를 받은 척 꿈을 꿨다고 해 놓고 다 듣고 보니 계시도 예지몽도 아닌 그냥 개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개꿈 이야기는 다른 리자드맨들을 웃기는 데에는 쓸 만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나는 내 육신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떠오르는가 싶더니 내 의지와 무관하게 빠르게 날았다. 발아래 땅들이 쏜살처럼 지나가는데, 드문드문 내가 알고 있는 땅들이 보였다. 드워프에게서, 오크에게서, 고블린에게서, 엘프에게서 빼앗은 마을들도 보였다. 우리가 힘을 합쳐 몰아낸 그 마을에 우리와 같은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황야를 가로질러 저 북해안까지."
자올은 라크락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가 쟁취한 땅이로군요."
"그래."
라크락은 바닥에 그림 그리기를 멈추었다.
라크락은 그림의 끄트머리에 가서 서더니 점을 찍었다.
"여기에 우리가 있다."
"그렇군요."
"여기를 뭐라고 부르지?"
라크락이 질문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전사 하나가 말했다.
"드워프들은 이 땅을 마가넨이라고 불렀습니다."
'끝의 땅'이라는 뜻이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찍은 점 옆에 마가넨이라고 썼다.
그 모습을 보고 자올은 심부름꾼을 시켜 비단과 목탄으로 베껴 그리라 일렀다.
라크락은 한 걸음 걸어가서 또 점 하나를 찍었다.
"여기는 우리가 붉은 피부 오크들을 몰아낸 곳이다. 여길 뭐라고 부르는지 기억하는 자 있나?"
"부족장님, 오크들은 그곳을 사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깊은 숲'이란 뜻이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사몬이라는 이름은 많다. 다른 사몬과 구분할 수 있나?"
또 다른 전사가 말했다.
"그럼 남쪽의 사몬으로 하지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이름을 썼다.
그런 식으로 라크락은 자신이 정복했던 땅에 이름을 호명하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반도는 많은 종족들이 부대끼며 살고 있었고, 검은 비늘 부족은 많은 마을을 정복했으므로 라크락이 황야 끝까지 올라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라크락이 프로그맨들이 살았던 땅이자 '넓은 호수'라는 뜻의 카마이루를 지났다.
리자드맨들은 이제 라크락이 황야로 나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크락은 그러지 않았다.
라크락은 반도의 위쪽이면서 황야의 아래, 바다가 접하는 곳에 점을 찍었다.
"여기는 이름이 뭐지?"
리자드맨들은 조용해졌다.
라크락이 말했다.
"아무도 모르나?"
"부족장님, 죄송하지만 저희 중 이름을 아는 이가 없는 듯합니다."
라크락은 주변을 한번 돌아봤다.
"기억하는 이는?"
"제 기억에, 그곳에선 저희가 어느 종족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라크락은 그림을 그리던 나뭇가지로 바닥을 탁탁 때렸다.
"알고 있는 이도 없나?"
"산지라서 그쪽으로 길이 닦이지 않았습니다. 코카트리스들이 살고 있어 다른 종족들이 접근하길 꺼리는 땅입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자드맨 대부분은 라크락의 의중이 무엇일지 생각했고, 몇몇은 이게 거대한 농담의 도입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을 준비를 하고 있기도 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난 이곳을 안다. 산지지만 넝쿨과 잔나무들이라 길을 개척하기 어렵지 않다. 이미 이어진 길 몇 개만 정비하면 모두 이곳으로 갈 수 있다. 숲이 우거져 길을 잃을 염려가 있지만 신께서 길을 안내해 주실 거다. 산세 깊이 들어가면 계곡 깊은 곳에서 흐르는 강을 볼 수 있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이 낮아진다. 강이 하류에 이르면 넓어지는데 바로 옆에 평탄하고 넓은 땅이 있다. 강은 바다와 만나고 해는 동쪽 산 위로 떠올랐다 서쪽 바다로 진다."
자올이 물었다.
"꿈속에서 보신 땅입니까?"
"그래."
라크락이 덧붙였다.
"그 땅의 이름은 오라즌이다."
이름을 듣고 리자드맨들이 웅성거렸다.
신이 서 있는 땅이란 뜻이었다.
"나는 오라즌에서 왕이 될 것이다."
그 말에 리자드맨들이 함성을 질렀다.
라크락은 이제 대족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다른 족장들과 비교되는 존재라 할 수 없었다.
명성이 드높은 이들은 그에 걸맞은 칭호를 가져야만 했다.
"우리는 오라즌으로 간다. 짐을 챙겨라."
흥분과 기대로 가득한 리자드맨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라크락은 무리 사이를 지나쳐 자신의 움막으로 들어갔다.
자올이 따라갔다.
"그게 신께서 하신 결정입니까?"
"그렇겠지."
"길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들을 그냥 놔둬야 합니까?"
"아니."
"하지만 각 부족들을 그대로 놔두면 다른 종족들 중 세를 키우는 놈들이 나올 겁니다. 다른 종족에서 나온다면 차라리 낫지요. 리자드맨들 중에서도 라크락 당신의 힘을 잊은 자들, 보지 못한 이들이 힘을 의심해 올지도 모릅니다."
"안다."
라크락은 오라즌에 가는 것으로 꿈이 끝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방법을 찾았다."
─┼
라크락은 길을 닦고 토지를 닦을 이들을 먼저 오라즌으로 보냈다.
그다음 지도를 그리며 점을 찍었던 마을을 돌면서 다시금 자신의 힘과 권력이 건재하다는 걸 증명했다.
다행히 리자드맨들 중에는 감히 대항하는 이들이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부족장을 라크락이라고 생각했다.
라크락은 오라즌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렸고, 원하는 이들은 따르라고 일렀다. 많은 이들은 그저 자신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가길 원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라크락을 따랐다.
라크락은 새롭게 무리를 부풀리며 오라즌으로 향했다.
라크락은 오라즌에 새로운 마을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황야와 북해안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리자드맨들에게도 오라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자동성의 동쪽에 있는 모든 리자드맨이 라크락이 왕이 되었으며, 수도가 오라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3년이 지나기 전에 자동성 동쪽에 있는 대부분의 부족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라즌은 발견되자마자 새로운 교통 요충지로 작동했고 넓은 길이 닦였다.
라크락은 모든 리자드맨 마을에 '전사장'을 파견했다.
전사장들은 리자드맨 마을의 일반적인 부족장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마을의 대소사에 관여하고 죄인을 심판하며, 외부의 위협에 대응해 전사들을 소집할 권한이 있었다.
이 전사장들은 라크락 아래에서 전사로 활약한 정예들이며, 라크락이 석판 위에 직접 새긴 법전을 지니고 있었다. 돌로 된 법전은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으로, 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희귀하고 눈에 띄는 금속인 금으로 장식되었다.
한 손에는 강철 검,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지닌 것이 이들의 특징이었다.
전사장은 휘하에 다른 전사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서로 다른 출신으로 무리를 이루고, 되도록 자신의 출신 마을에서 전사장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라크락은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전사장이 파견되지 않는 땅도 있었다.
바로 자동성과 북해안 끄트머리의 녹안 엘프의 마을이었다.
이곳엔 성주와 부족장이 제후로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라크락은 크게 개의치 않고 자동성주 휘경에게는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의 직위를, 녹안 엘프의 부족장 리오나르에게는 엘프 마립간의 직위를 내려 주었다.
휘경은 위급하면 라크락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운 마음으로 직위를 받아들였다.
리오나르는 다소 복잡한 심경이었으나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오라즌에서 외무관이란 직위를 가진 리자드맨들이 변경백과 마립간에게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제후와 왕인 라크락 사이에 의견을 수월하게 주고받기 위함인 동시에, 변경백과 마립간을 감시하는 복합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전사장과 외무관 모두 원시적인 관료로 개인이 맡기엔 너무 많은 직무를 띄고 있었지만 그만큼 다뤄야 할 문제가 적기도 했다.
느린 데다 어설픈 부분도 있었지만 라크락의 말과 뜻은 변경백과 마립간에게, 그리고 반도 끝의 마가넨의 전사장에게까지 정확히 전달되었고, 그 반대도 확실히 작동했다.
「알림: 당신의 나라 중 하나가 '초기 군주제'에 돌입했습니다.」
봉건제와 군주제의 절충안이긴 하지만, 비율로 따지면 군주제의 비중이 더 컸으므로 알림은 '초기 군주제'로 떠 있었다.
성운은 알림창을 껐다.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결국엔 '둘 다'였던 겁니까?"
"그렇지. 장단점을 적당히 절충하고 현재 상황에 맞는 걸 선택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엘다르가 말했다.
"근데 저는 왜...?"
"어? 거기도 원래 내 땅이잖아."
엘다르는 더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
몇 년 뒤, 반도의 끝자락, 마가넨.
라크락이 밟고 서서 자신의 나라를 구상하던 그 자리에, 어떤 존재들이 딛고 섰다.
바닥을 딛는 다리는 모두 네 개였고, 구부정하게 선 가슴에는 네 개의 팔이 달려 있었다.
그중 두 개의 팔은 큰 집게였고, 다른 두 개의 팔은 어설프게 손을 흉내 낸 것 같았다.
얼굴이라고 할 만한 곳에는 툭 튀어나온 한 쌍의 눈, 눈 위로는 또 한 쌍의 더듬이가 흔들거렸다.
가장 특이한 점은 몸 전체를 뒤덮은 딱딱한 껍데기였다.
청록색의 껍데기는 윤기 나게 빛나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금속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고, 허리끈에는 돌로 만든 몽둥이를 묶어두기도 했다. 지성이 있는 존재라는 건 확실했다.
마침 성운은 그 부근을 정찰중이어서, 이들이 리자드맨들과 접촉하기 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을 발견한 성운이 중얼거렸다.
"...랍스터잖아?"
055화
로스트 월드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갑각류, 정확히는 가재를 닮은 종족도 있었다.
정식 명칭은 '아스타시디안'이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그냥 랍스터라고 불렀다.
'육체 능력이 높고 수중 호흡이 가능한 종족이지만...'
지능이 꽤 낮은 편이었다.
개체 대부분이 지능 능력치가 표기도 안 되는 오우거보다야 낫지만, 컨트롤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능력치로는 표기가 되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
'혐오 결점.'
보통 인간류라고 지칭하는,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하프빈 같은 족속들에게서 혐오당하는 생김새였다.
곤충이나 갑각류를 닮은 종족들이 혐오 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명 초기 단계에선 교류가 상당히 어려워서 아스타시디안의 플레이 난이도를 올리는 주범이었다.
'그래도 수중 호흡 때문에 재미있는 플레이가 가능하니까 시작 종족으로 플레이해 보긴 했었지.'
다만 성운의 의문은 아스타시디안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들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반도 남동쪽에 섬이 있긴 해.'
정확히는 제도라고 부를 만한 장소로, 몇 개의 섬이 흩어져 있는 지역이었다.
모두 합치면 반도 크기고, 몇 개의 주 섬은 문명을 개별 문명을 발달시킬 정도로 크긴 했다.
'거기서 온 건가? 어떻게 왔지? 랍스터들이라면 바닷속을 걸어서 오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성운은 랍스터들이 해변을 정찰하는 걸 무시하고 해안선을 죽 돌았다.
'역시.'
배가 세 척이나 있었다.
나무를 엮은 단순한 뗏목이 아니었다.
뗏목의 경우엔 현 시점에서도 해안가나 강가에 사는 부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뗏목은 이동보다는 낚시나 작살질, 물속에서 나는 어패류를 채집해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성운이 보는 배들은 꽤 그럴듯한 형상이었다.
마감이 거칠긴 하지만 나무를 엮어 선수와 선미를 구분할 수 있었고, 노와 돛도 있었다.
바람을 타고 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노를 저어 이동하기도 하는 제대로 된 배였다.
'남동쪽 제도에서 배 제작과 항해 기술이 발달하는 건 자주 보긴 했어.'
다만 이런 기술이 가까이에 있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플레이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성운은 남동쪽 제도에 플레이어가 있을 확률이 낮으며, 있더라도 문명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대륙 중앙으로 접근하지 이런 반도로 접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 일단 정찰을 보내 놓자.'
성운은 새의 소영역을 통해 알바트로스 몇 마리를 창조해서 제도를 향해 날려 보냈다.
그 사이 아스타시디안들이 천천히 반도 끝의 리자드맨 마을, 마가넨을 향해 걸어갔다.
─┼
마가넨에 파견된 전사장 타타르는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타타르가 전사장에 임명되고, 마가넨에 파견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였다.
그날 함께 임명받은 다른 전사장이 타타르에게 말했다.
"자네는 편하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나?"
"마가넨은 땅 끝에 있지 않나?"
"그런데?"
"다른 종족들이 귀찮게 하는 일도 적을 테고, 오라즌에서 거리도 있으니 전사 소집이 있어도 제일 늦게 불려 올 것 아닌가."
타타르는 꼬리로 바닥을 때렸다.
"그럼 자네는 라크락 님이 내가 쓸모없어서 마가넨으로 보냈다는 말인가?"
"아니, 그 말이 아니지."
"그럼?"
"음, 내 생각엔... 자네는 항상 라크락 님 옆에서 싸웠잖은가? 자네가 최고의 전사 중 하나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
"그런데?"
"그런데가 아니지! 열심히 일했으니 라크락 님도 자네가 이제는 편한 생활을 하길 바라기 때문에 마가넨으로 보내는 것 아니겠나?"
"뭐?"
타타르는 반문했다.
"자네 말은 결국 라크락 님이 내가 노쇠해서 쓸모가 없어져서 마가넨으로 보낸다는 말 아닌가?"
"아니 말을 그렇게 알아듣나? 쓸모가 없으면 전사장으로 자네를 뽑을 이유가 없잖은가?"
"그럼 전사장 중에 가장 쓸모가 없단 말이겠지."
타타르는 결국 자신의 잃어버린 왼쪽 눈을 가리키고야 말았다.
"한쪽 눈을 잃은 전사가 얼마나 쓸모 있겠느냔 말 아닌가?"
"이 친구 정말..."
"흥."
타타르는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전사장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마가넨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타타르는 이제 와서는 그 전사장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긴 한가로운 곳이 맞다.'
날씨는 따뜻했고 비는 적당히 내렸으며 겨울에도 너무 춥지 않았다.
기후가 그렇다 보니 리자드맨들의 성품도 따라서 온화해지는지 범죄도 거의 없었고 다투는 일이 있어도 말로 사근사근 잘 풀렸다.
주변에 드워프 무리가 얼쩡거리고 있긴 했지만, 타타르가 드워프의 신임 부족장과 잘 이야기한 덕분에 더 이상의 싸움은 없었다.
가끔 상인들이나 오라즌의 세리들이 오는 것 말고는 외부에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타타르는 정말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로운 장소라도 라크락 님의 땅이다. 누군가는 지켜야 해.'
타타르가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모두 라크락 때문이었다.
라크락은 일견 한가해 보이는 곳이라도 결코 방심을 해서는 안 되며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크락이 그 예시로 든 곳이 바로 마가넨이었다.
'하지만 라크락 님... 무엇으로부터 이곳을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이런 타타르에게 전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정말이지 기쁜 일이었다.
─┼
"저놈들이라고?"
"예."
타타르는 무장을 하고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임시 움막을 짓기 시작한 아스타시디안들과 정박한 배들이 보였다.
전사가 타타르에게 말했다.
"놈들은 저희 마을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갔습니다."
"저 가재들이랑 싸워 보진 않았나?"
"예."
"대화를 해 보지도 않았고?"
"예."
"잘했다."
타타르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기묘하게 생긴 종족이 해안선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방금 심부름꾼을 통해 오라즌으로 보냈다.
급한 전갈이니 마을마다 코카투를 갈아탈 것이고 이제 며칠 뒤면 라크락도 저 존재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이들을 어떻게 할지는 모두 내 손에 달렸다.'
젊은 전사는 고민하는 타타르를 보며 싸움을 각오했다.
라크락과 함께 싸웠던 코카투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퍼져 있었고, 타타르도 유명인 중 하나였다.
라크락의 심부름으로 황야를 지나가던 중, 트롤 강도들이 힘없는 무리를 습격하는 걸 보고 단신으로 물리쳤고 그 와중에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젊은 전사는 타타르가 충성스럽고 호전적인 전사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라크락의 땅을 침범한 새로운 종족들을 힘으로 내쫓을 거라 판단했다.
젊은 전사가 기어코 '오늘 내가 영광스럽게 죽을 날이로구나' 생각했을 때 타타르가 말했다.
"내려가지."
"예?"
"그냥 걸어 다니는 가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거보니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군. 내려가서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타타르가 터벅터벅 비탈을 내려가자, 아스타시디안들이 그 모습을 보고 더듬이를 흔들었다.
타타르가 그들 한가운데까지 걸어가서 말했다.
"너희들 중 대장이 누구지?"
아스타시디안 하나가 걸어 나왔다.
"나다."
덩치가 좀 더 크고 금속을 엮어 만든 벨트를 차고 있었다.
타타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이곳 마가넨의 전사장 타타르다. 너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밝혀라."
아스타시디안들이 웅성거렸다.
젊은 전사 하나가 타타르 옆으로 달려왔다.
젊은 전사가 속삭였다.
"타타르 님, 조금 있으면 마을의 전사들이 올 텐데 무리로 뛰어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들은 분명 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다. 전사들을 몰고 와서 대화를 시도하면 더 크게 경계하겠지. 게다가 이들이 모두 덮쳐 온다고 해도 한 몸 빼낼 자신은 있다."
젊은 전사는 차마 자신은 어떡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내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대장 아스타시디안이 말했다.
"우리는 청록빛 아스타시디안 부족이다. 우리는 저 바다 건너에서 왔다. 그리고 목적은..."
"목적은?"
─┼
성운은 막 떠오른 상태창과, 알바트로스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보고서 안심했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종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세 번째 줄에 경고 멘트가 추가될 텐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성운 생각에, 상대가 플레이어라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들의 문명 발전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제 겨우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건가?'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고,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고립된 상태라면 문명 발전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청동기 제작만이 아니라 농사를 짓지도 않고 무언가를 기르지도 않았다.
남쪽의 섬들이다 보니 생물 자원이 풍부한 덕에 수렵 채집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사냥 기술도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흉신이 나타난 것 같지도 않고. 눈여겨 볼 건 숫자 정도인가.'
성운은 제도의 상황을 쭉 살펴보았다.
다른 종족 몇 개와 몇 개의 아스타시디안 부족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런 싸움 때문에 제도의 섬과 섬 사이를 오가기 위한 배 제작 기술이 발전한 듯 싶었다.
아스타시디안 부족들이 연합을 했기에 상황은 이들에게 유리했는데, 그래도 별로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아스타시디안 부족들 사이에도 분열의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신을 믿거나 하지 않으니, 껍데기 색이 다르면 아무래도 같은 부족이란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위협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마 통일되지 못하고 오래 싸울 거야. 그쪽이 편하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제도의 아스타시디안들이 거리가 꽤 떨어진 반도까지 온 이유는 성운의 생각에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건 역시...'
─┼
대장 아스타시디안은 꾸물거렸고, 타타르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대장 아스타시디안이 겨우 말을 꺼냈다.
"우리는..."
"말해라."
"조난당했다."
"조난이라고?"
"...그렇다."
배 제작 기술은 그렇다 쳐도 이들은 서로의 섬이 보이는 곳으로 배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항해 기술은 아직 초보적이었다.
타타르는 아스타시디안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확인했다.
이들은 정말로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타타르는 대장 아스타시디안이 부끄러워서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음을 알았다.
젊은 전사가 생각했다.
'절호의 기회구나.'
얼마 전 다른 마을의 전사장이 전사 무리를 이끌고 마을을 위협하는 부족을 소탕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곧장 라크락의 귀에 들어갔고, 라크락은 직접 그 마을까지 내려가서 전사장과 전사들을 독려했다.
'이놈들을 물리치면 왕께서 포상을 내리실 거야.'
감히 라크락의 땅을 밟은 놈들을 내쫓는다면 라크락이 크게 칭찬할 것이 자명했다.
건장해 보이긴 하지만 며칠씩 굶은 상대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라크락 님과 함께 싸웠던 전사장들은 모두 전투의 열기를 그리워한다고 들었어. 역시 타타르 님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시겠지.'
마침 젊은 전사가 돌아보니 비탈을 따라 전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스타시디안들은 무기를 뽑아 들진 않았지만 한껏 경계하며 모여드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젊은 전사도, 대장 아스타시디안도 타타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타타르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056화
이어지는 타타르의 말에 젊은 전사는 귀를 의심했다.
"...이들을 도와 거주할 임시 거처를 만들어라. 그리고 마을에 남은 식량을 가져와야겠군."
전사장의 권위는 왕인 라크락에게서 온다.
전사들은 군말 없이 타타르의 말을 따랐다.
대장 아스타시디안이 타타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리자드맨 전사들이 돕기 시작하자 아스타시디안들의 거처가 재빨리 완성되었다.
식량까지 나누어 주자 아스타시디안들은 안도하면서 리자드맨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루보'라고 밝힌 아스타시디안이 타타르에게 말했다.
"타타르라고 했나? 정말 고맙다."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라고? 우리 제도에선 이런 경우는 잘 없다. 조난당한 이들이 발견되면 가진 걸 모두 빼앗고 내쫓긴다. 죽는 이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니다."
"오..."
루보는 감동한 것 같았다.
루보는 타타르에게 궁금한 것을 계속 물었고, 타타르는 민감하지 않은 선에서 모두 말해 주었다.
"이 섬은 얼마나 큰가?"
"여긴 섬이 아니다. 북으로 걸어가면 백일을 넘게 걸어가야 땅의 끝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걸어가면 백일을 걸어도 땅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오."
루보는 작은 집게손으로 타타르의 소매를 살짝 건드렸다.
"그대가 걸치고 있는 옷은 매끄러운데 난 이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무엇으로 만든 건가?"
"이건 비단이라고 한다."
"비단?"
"누에는 나방이 되기 전에 고치를 만드는데, 그 고치를 만드는 실을 뽑아내 만든다. 이곳에서는 누에를 기르지. 북쪽으로 가면 누에를 기르고 실을 뽑아내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은 돈이나 재물을 받고 비단을 판다."
"오오."
그 외에도 루보는 돈이 무엇인지, 문자가 무엇인지, 왕이 무엇이며 리자드맨의 나라 안에 또 다른 종족들이 얼마나 많이 사는지를 물어왔고 타타르는 아는 한도 안에서 성실하게 답을 해 주었다.
며칠 뒤 루보가 떠나갈 때에도 타타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길을 잃었을 때 하늘을 보면 된다고?"
"그렇다."
타타르는 별잡이에게 별을 보는 법을 성실히 배웠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칠 재주가 되었다.루보는 곧 타타르에게 별을 보는 법과 자신의 바람을 타는 기술을 더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떠나가는 날 루보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타타르 님.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타르와 다른 전사들, 그리고 아스타시디안을 도운 마을의 리자드맨들은 그 감사 인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호의가 꼭 호의로 돌아오란 법은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스타시디안들이 상륙한 첫 날 타타르 옆에 있었던 젊은 전사가 타타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저들을 도와준 겁니까?"
"흠."
"저라면 저들을 내쫓고 라크락 님에게 해안에 침입한 무리를 물리쳤다고 했을 겁니다."
"음."
"그런데 전사장님은 그들을 내쫓지 않고 오히려 저들을 도와주어서 마을의 자산이 줄었습니다. 나중에 왕께서 이 일을 알면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으음."
이야기를 듣던 타타르는 턱을 긁었다.
"그래서 그대는 불만인 건가?"
"...아닙니다. 단지 궁금한 겁니다."
"무엇이?"
"저는 전사장님을 위대한 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피를 봐야 할 때는 볼 줄 아는 분으로요. 하지만 이번 일의 경우엔 싸우기를 두려워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혹시 그 전사장이라는 자리 때문에 저희 모두를 걱정하신 건가요?"
타타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군.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타타르는 오래전 라크락과 했던 대화를 천천히 되새겼다.
─┼
타타르가 라크락의 명령으로 황야를 지나던 중 떠돌이 무리를 만났다.
타타르의 일화를 잘 모르는 이들은 이 떠돌이 무리가 리자드맨이라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프빈 무리로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의 영역을 피해 도망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하프빈 무리를 트롤 도적들이 쫓고 있었고, 때마침 타타르가 그들과 마주쳤다.
타타르는 싸움을 피할 수 있었지만 부닥쳤다.
타타르는 열 명의 트롤 도적을 모두 죽였지만 그 대신 왼쪽 눈을 잃고 말았다.
타타르는 눈을 잃은 뒤 라크락에게 돌아갔다.
라크락의 천막에 들어서며 타타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라크락."
"무엇이 죄송하지?"
"제 욕심 때문에 신의 전사이자 부족장님의 전사로서 아껴야 할 몸을 상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전사에게, 특히 리자드맨에게 눈을 잃는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단두종들과 달리 리자드맨처럼 주둥이가 나온 장두종들은 눈이 두개골의 양옆으로 달려 있어 입체적으로 보기 힘든 반면 시야각이 넓다. 하지만 한쪽 눈을 잃으면 그 넓은 시야각의 이점도 잃어버리는 셈이다.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아니, 타타르. 넌 여전히 훌륭한 전사다. 눈을 싸움 도중에 잃었다고 들었다. 우리 전사 중에 눈을 잃고 트롤 열 명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자신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저는 한쪽 눈을 잃었고..."
"나와 다른 전사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가 그대의 왼쪽 눈이 되어 줄 것인데 뭐가 두렵나?"
다른 사람을 믿으라는 말에 타타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르, 너야말로 후회하지 않느냐?"
"뭘 말입니까?"
"넌 우리 부족도 아니며, 하물며 리자드맨들도 아닌 것들을 지키다가 눈을 잃었다. 그 때문에 그대의 생활은 불편해지겠지. 본래 그대여야 할 것을 잃었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타타르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저는 라크락 님이 최초의 기적을 발견했던 때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라크락 님의 무리는 황야를 떠돌고 있었고, 굶주렸고, 라크락 님은 상처 입은 채였다고요. 그때 푸른 벌레신께서 딱정벌레로 인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따르면 푸른 벌레신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라크락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너는 감히 신과 같이 행사를 하였다는 것인가?"
"예."
라크락은 침묵 후에 말했다.
"그대가 옳다."
라크락은 천막을 덥히기 위해 나무 조각을 던져 넣었다.
"그대는 앞으로도 이번과 같이 행동하라. 누군가 그대가 그르다 하거든 오늘 대화를 기억했다 일러 주어라. 라크락 또한 그대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고지식한 전사 타타르는 라크락의 말대로 했고, 단 한 번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
타타르가 이야기를 마치자 젊은 전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미처 전사장님께서 신의 뜻과 같이함을 몰라보고..."
"아니다."
타타르는 젊은 전사의 어깨를 두드리곤 지나쳤다.
"그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번에는 결정할 권한과 책임을 가진 것이 나일 뿐이지. 그대가 생각한 것처럼 싸움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니 걱정마라."
그렇게 말은 했으나 타타르도 이번만큼은 걱정이 없지 않았다.
리자드맨들은 아스타시디안이란 종족을 처음 만나 봤고, 허황된 상상이지만 이들이 타고난 거짓말쟁이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모든 것이 공격을 위한 계략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타타르는 마을에서 사람을 써서 해안을 경계할 사람을 뽑아서 날마다 배가 오지 않는지 지켜보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아스타시디안들이 나타났다.
타타르가 해변에서 만난 것은 지난번 조난당했던 루보였다.
"또 조난당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번에는 그 비단과 철이란 걸 사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타타르는 안도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비단과 철은 우리에게도 꽤 비싼 물건들인데 굳이 자네들한테 필요할까? 게다가 자네들은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비단은 젖을 테고 철은 금세 녹슬 텐데."
아스타시디안들의 대장 루보는 더듬이를 흔들었다.
목이 있는 종족이 가로저은 것과 같은 의미였다.
"젖고 녹스는 건 생활 방식을 바꾸면 그만입니다. 말리고 기름을 칠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비단은 아름답고, 그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다른 아스타시디안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철과 같은 단단한 재질의 무기를 사용하면 적들을 더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적이라고?"
"예. 저희는 전쟁 중입니다."
루보가 큰 집게를 접었다 폈다.
타타르는 마을에 남는 비단들을 팔았다.
주로 받은 물건은 해조류와 어패류 같은 먹을 것과, 각종 희귀하게 생긴 해양 생물의 뼈, 그리고 진주라는 보석이었다.
타타르는 진주의 가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단히 낮게 평가했고 루보도 자기네 제도에선 많이 나오는 물건이기 때문에 가격을 낮게 잡았다.
타타르는 다소 실망스러운 거래가 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장사꾼이 아니었다.
타타르가 비단을 넘겨주고 받는 물건들에 대해 실망스러워하자 루보 또한 초조해했다.
타타르가 고심 끝에 말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저런 배가 있으면 좋겠는데."
"음... 배는 만들기가 무척 어려운데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장인들만 기술을 공유합니다."
"난 상인이 아니라 그런 것까진 몰라. 그럼 이번 거래까지만 하고..."
"으으음... 아닙니다. 다음 거래까지 배를 만들 시간은 없지만, 적들의 것을 빼앗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배 한 척을 비워서 오는 약속으로, 비단과 철을 넘겨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그렇게 몇 번의 거래가 있었다.
─┼
라크락은 슬슬 오라즌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내 생활은 좁고 답답했다.
그나마 만족할 만한 크기의 성은 아직도 지어지고 있는 중이어서, 라크락은 성 안이나 집보다 오라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때문에 언덕에는 라크락의 유목 시절 쓰이던 천막이 그대로 설치되어서 사실상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었다.
라크락은 자신의 나라 각지에서 올라오는 심부름꾼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거나, 비단에 목탄으로 작성된 글들을 읽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라크락은 이야기를 좋아하므로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특히 최근엔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배가 몇 척이라고?"
"네 척입니다."
라크락 눈앞에 있는 심부름꾼은 멀리 마가넨에서 올라온 자였다.
마가넨은 아스타시디안이란 특이한 종족이 계속 나타나는 중이었는데, 전사장인 타타르가 이들과 계속 거래를 하고 있었다.
라크락은 처음엔 타타르가 잡다한 것들과 진주, 배를 받았다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들고 온 진주라는 보석은 라크락이 보기에 별 쓸모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크락이 아는 배라는 건 뗏목뿐이어서, 나무를 엮으면 금세 만들 수 있는 잡동사니를 타타르가 왜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가치는 라크락의 생각과 달랐다.
얼마 전 회의를 위해 자동성에서 온 휘경이 진주를 보고 감탄을 한 것이다.
"그 물건이 가치가 있나?"
"있다마다요. 이렇게 둥글고 광택이 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대륙 중앙엔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물건은 비싸게 팔리거든요. 이게 얼마나 있다고요?"
"세 주머니 정도 가득."
"...뭐라고요?"
휘경이 가격을 말하자 라크락은 타타르가 한 번 거래에서 열 배에서 스무 배 정도 이득을 보았다고 판단했다.
배 또한 라크락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라크락은 배를 직접 보고 싶었기에 오라즌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타타르는 배에 아스타시디안 선원과 뱃일을 배운 전사들을 태워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다지만 첫 항해인 데다 암초 같은 위험이 있었지만 배는 무사히 오라즌까지 항해를 마쳤다.
배를 보고 라크락은 타타르가 거래 한 번으로 얻은 이득을 수정해야 했다.
'백 배는 넘게 이득을 봤군.'
늘 땅 위에서 살아왔던 라크락이지만, 바다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쭉 바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땅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땅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 배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도 편해 보인다.'
배는 걷는 것보다 빨랐고 코카투나 말을 이용하는 것보다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라크락은 배가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오라즌의 해안에서 즉시 배를 똑같이 제작해 보도록 했다.
그런 라크락에게 또 마가넨의 심부름꾼이 올라온 것이었다.
라크락은 타타르가 또 어떤 거래를 해냈나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거래가 아니었다.
기묘한 요구였다.
"그 가재들이 비단에 도장을 찍어 달라 했다고?"
057화
마가넨에서 온 전사가 답했다.
"예."
라크락은 도장을 쓰고 있긴 했다.
자신의 이름을 양각한 나무 도장으로, 목탄을 푼 물을 적셔 찍어 냈다.
라크락이 말했다.
"그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도 '루보'라는 가재인가?"
"아닙니다."
"아니야? 그리고 도장은 왜 찍어 달라는 건가?"
"그게..."
마가넨에서 온 전사는 타타르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
타타르는 해안 너머에서 아스타시디안의 배를 보았다.
타타르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루보가 다섯 번째 거래를 끝내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보가 되돌아 온 건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루보는 청록빛 아스타시디안 부족이었는데, 새로 나타난 아스타시디안들은 파란 아스타시디안이었다.
다행히도 이들 또한 리자드맨들에게 적대적인 의사를 보이진 않았다.
해안에 서 있던 타타르에게 다가온 우두머리 아스타시디안이 말했다.
"반갑습니다. 듣자하니 그대가 뇌룡국(雷龍國)의 타타르 대인이십니까? 저는 푸른빛 부족의 아스타시디안 마랑입니다."
"...뇌룡국? ...타타르 대인?"
타타르가 생경한 용어에 대해 되묻자 아스타시디안이 말했다.
"저희 아스타시디안 사이에선 뇌룡국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저 바다 너머에 용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그 후손들은 번개의 힘을 가졌으며, 아름다운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고, 그 무엇도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쇠붙이로 검을 만들어 쓴다고 말입니다."
타타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록빛 부족의 아스타시디안 루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라크락의 위명을 모르는 이들에게, 라크락이 무엇을 해냈는지, 그리고 이 나라가 왜 위대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타타르로서도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용의 후손이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야기의 즐거움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각색은 있는 법이지만, 타타르는 용의 후손이라는 건 허풍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몇 번인가 다른 나라와 외교 문서 같은 게 오갈 때가 있었다, 그때 라크락이 사용한 국명은 뇌룡국에 비하면 훨씬 점잖은 흑린(黑鱗)이었다.
하지만 타타르가 그걸 지적할 시간도 없이 마랑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푸른빛 부족과도 거래를 하시면 어떨지..."
"음, 좋다."
"그리고 또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마랑은 비단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대인께서 여기에 뇌룡대왕 라크락 님의 증표를 찍어 주실 수 있을는지..."
타타르는 '뇌룡대왕'이라는 거창한 칭호, 이색적인 요구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냥 도장을 찍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타르에게도 어렵지 않았다.
라크락은 왕이긴 하지만, 타타르에게 있어 함께 싸운 맹우기도 했다.
타타르는 라크락과 함께 전장에서 싸우며 물과 음식을 나누었으니, 도장 하나 찍어 달라는 요구야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빈 비단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말은 수상하다.'
도장은 왕이 그것을 보고 긍정하고 확인했다는 증표였다.
빈 비단에 찍으면 그 비단의 가치에 대한 보증이 되겠지만...
'도장이 찍힌 비단에 다른 무언가를 써 넣는다면, 그 글에 대해 라크락 님이 긍정하신 것이 되지.'
따라서 타타르는 마랑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뭐지?"
"그... 이유는..."
마랑은 초조하게 집게발들을 앞으로 모았다.
타타르가 아스타시디안의 몸짓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고민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랑이 말했다.
"저희가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저희 제도에서는 오랜 시간 싸움이 있었습니다. 여러 종족들은 물론 저희 아스타시디안들도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희 부족이 싸움을 끝냈습니다."
"잘됐군.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마랑은 발을 접어서 몸 전체를 낮춰 보였다. 타타르가 보기에 인사인 듯 싶었다.
"하지만 저희의 승리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소수 있습니다. 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저희 제도에서 인정하는 가장 큰 나라의 왕, 즉 뇌룡국의 뇌룡대왕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겁니다."
"......"
"뇌룡대왕이 비단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저희의 힘을 인정해 준다면, 저희는 분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타타르는 조금 더 당황스러워졌다.
'도대체 저들에겐 우리나라 이야기가 어떻게 퍼진 건가?'
우선 타타르는 비단에 도장을 받으려면 라크락에게 심부름꾼을 통해 비단을 보내야만 하니 오래 걸릴 것이라 일렀다.
마랑은 더 많은 어패류와 진주를 가져오겠다며 다음에 자신이 올 때까지 꼭 그 도장 찍은 비단을 부탁한다며 떠나갔다.
타타르는 마랑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저들에게 라크락 님의 도장이 쓸모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모든 말들이 뭔가 어설펐다. 문서에 도장을 원한다면, 빈 비단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연유가 있다고 글을 쓰는 게 좋지 않았나?'
다른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나와 거래를 가장 많이 한 루보가 떠나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뇌룡국... 이 아니라 흑린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 건 분명 루보일 것이다. 그런 루보가 아닌 다른 가재들이 승리했다는 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타타르는 이런 고민들을 비단과 함께 라크락에게 전달했다.
─┼
라크락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라크락이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그럼 직접 가서 확인을 하면 되겠군."
"예? 라크락 님이 직접?"
"아니. 이 일은 전사장 타타르에게 일임한다."
"하지만 가재들의 제도는 바다 넘어 멀리 있습니다."
"그래서 배 개수를 묻지 않았나."
라크락은 무슨 대수냐는 듯 말했다.
"어차피 교류를 하게 될 것이라면 가재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고, 이들에게서 얻어 낼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마가넨의 심부름꾼은 내 말을 그대로 타타르에게 전하라."
라크락의 의지는 며칠 뒤 타타르에게 전해졌다.
타타르 또한 이미 각오한 내용이었다.
타타르와 전사들은 루보의 부하인 아스타시디안 선원들에게 배 모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타타르와 전사들에게 있어서 배를 모는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라크락과 함께하며 만나 보지 못한 적들과 싸우는 것도 모두 처음 겪는 일들이었다.
지배하는 땅이 넓어지며 새로운 생물과 땅이 늘어났고 알지 못했던 기술을 배워야 했으며 새로운 제도까지 나타났다. 전사들은 이 모두를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모험은 익숙한 일이었다.
─┼
도중에 풍랑을 만나긴 했으나 타타르는 무사히 제도의 섬에 도착했다.
루보가 족장으로 있는 청록빛 부족 아스타시디안의 섬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타타르는 루보를 만날 수 있었다.
"뇌룡국 타타르 대인! 어쩐 일이십니까?"
"음..."
타타르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본론을 꺼냈다.
마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푸른빛 아스타시디안이 빈 비단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루보는 큰 집게를 머리 위로 들고 접었다 폈다. 화가 난 것이다.
"이런...! 마랑! 무례한 놈 같으니!"
"왜 그러지?"
"그 마랑이란 놈은 저의 숙적인 푸른빛 아스타시디안의 부족장입니다!"
"그자는 자신이 아스타시디안을 통일했다던데."
"거짓말입니다!"
타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다.
"놈은 뇌룡대왕의 도장을 통해 그 위명을 업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가?"
"그런 겁니다! 우리 아스타시디안들은 아직 하나의 큰 부족으로 합쳐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뇌룡국의 뇌룡대왕 도장을 들고 나타난다면? 거기다 뇌룡대왕이 그 부족을 지지한다는 글을 들고 나타난다면? 많은 부족들이 그 부족을 편들려고 할 겁니다. 그럼 오랜 시간 결착을 내지 못한 이 싸움에서 유리해지겠지요."
"그렇군."
타타르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나라가 이런 작은 섬에서 경외시되고 있다는 건 흥미로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누군가 라크락의 이름값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타타르나 라크락에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가재들의 싸움이다.
타타르가 이런 생각을 말하자 루보가 또 화를 냈다.
"대인! 대인께서는 거래에 대해 잘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맞다. 난 전사지 장사꾼이 아니다."
"그럼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대인. 생각해 보십시오. 마랑이란 작자가 도장을 찍어 주는 대가로 무엇을 주겠다고 했습니까?"
"다음 거래를 신경 쓰겠다고 하더군."
"보십시오. 겨우 그겁니다. 제대로 무엇을 주겠다 약속도 하지 않은 것이지요! 마랑이란 작자는 대인에게 뇌룡대왕의 도장을 아주 헐값에 사들이려고 한 겁니다!"
타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랑이란 작자는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날 속이겠다고 생각하니 그런 미덥지 못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타타르는 마찬가지의 의문을 다른 아스타시디안에게도 던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눈앞의 루보에게도.
"그럼 그대는 얼마에 사 줄 수 있지?"
"...예?'
타타르는 품에서 비단을 꺼냈다.
거기엔 라크락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라크락 님께서 혹시 모르니 들고 가라고 하시더군. 어차피 필요 없어지면 불태워 버리면 그만이니까."
"아이고 세상에나! 불태우다니요?"
"그리고 라크락 님은 이 일을 나에게 일임하셨다. 필요하다면 뇌룡대왕이란 허명이 아니라, 진짜 라크락 님의 위세를 등질 수 있는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타타르가 말했다.
"그러니 말해라. 이것을 얼마에 살 것인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보는 동족들에게 가서 더듬이를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돌아왔다.
하지만 타타르는 값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거절했다.
루보는 값을 올려서 두 번 더 말했는데, 타타르는 다 거절했다.
타타르는 잘 몰랐지만 그것만으로도 라크락이 흡족할 만한 값이었지만, 타타르는 고지식했다.
'나는 장사치가 아니다. 그러니 라크락 님이 알려 준 대로 해야겠다.'
루보가 우물쭈물하자 타타르가 말했다.
"값을 치룰 수 없다면 다른 아스타시디안 부족을 찾아가야겠군."
"헛걸음입니다. 저희가 타타르 님과 가장 많이 거래를 했지 않습니까? 다른 부족은 저희만큼 부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너의 말만 믿어 왔다. 그리고 너는 우리가 용의 후손이라는 허풍으로 우리의 물건을 팔아 왔겠지.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득을 얻었을 거고."
"...으음."
타타르의 말이 맞았기에 루보는 우물쭈물하며 변명했다.
"맞습니다. 비단과 철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 그냥 리자드맨의 비단, 그냥 리자드맨의 철보단 용의 후손이 만든 것이 더 가치 있게 팔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완전 거짓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저희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타타르는 진실을 말하는 루보를 보며 내심 라크락이 가르쳐 준 것이 잘 통하는 것 같아 기뻤다.
'우선은 다짜고짜 거절을 하고... 다음이 뭐였더라?'
사실, 타타르가 기억하는 이 방법도 온전히 라크락의 지식은 아니었다.
라크락 또한 휘경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휘경이 이전 거래에서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 아냐며 자랑을 하고 갔기에, 라크락도 언젠가 써먹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휘경의 지식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휘경 또한 자동성에 오는 다른 장사치들로부터 그것을 익혔다.
말하자면 사람의 지혜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신뢰를 회복할 방법은 있다, 루보."
"그, 그게 뭡니까?"
타타르는 사람의 지혜를 떠올렸다.
"루보, 이 값을 치룰 수 있는 부족장들을 모두 불러라."
"예?"
"가장 비싼 값을 치루는 이에게 이 비단을 넘기겠다."
058화
루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내 의도를 납득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그걸로 저희 사이에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야. 대인께서는 결국 제가 가장 비싼 값을 치루는 걸 보게 되실 겁니다."
타타르는 루보가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으나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루보는 리자드맨이 제도에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타타르의 부하 전사를 데리고 제도를 한 바퀴 돌았고, 다음날 아스타시디안 부족장들이 루보의 섬에 나타났다.
부족장들은 물론 부족장을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심부름꾼들이 타타르와 전사들을 보고 술렁거렸다.
"저들이 용의 후손인가?"
"역시나 강인해 보이는군. 저 번들거리는 검은 비늘 좀 보게."
"나는 저 비단 옷에 눈이 가는데."
"차고 있는 칼 좀 봐. 우리 쇠붙이와는 색이 완전 다르다고."
"번개는 언제 보여 주는 거지?"
"그건 보지 않는 쪽이 좋지."
"왜?"
"그걸 본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타타르는 그럼 누가 그걸 보고 이야기를 퍼트린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경우에는 풀어 나가야 할 타래가 너무 많아지기에 그만두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루보가 말했다.
"부족장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라. 누가 타타르 대인의 비단을 가장 비싸게 값을 치를지 이야기하자."
루보를 제외한 네 명의 아스타시디안이 걸어 나왔고, 그중 타타르와 구면인 마랑도 있었다.
마랑은 반석 위에 올라선 타타르를 보고 무어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타타르가 마주 보고 있으니 결국 시선을 피했다.
부족장들은 처음엔 크지 않은 값어치로 값을 치르려고 했다.
그것만으로 비단을 사는 게 가능할 거라고 믿은 듯, 모임 자리에 보따리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타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네 명의 부족장들이 적당한 가치를 말했을 때 루보가 말했다.
"겨우 그뿐인가? 우리 부족은 타타르 대인에게, 배 열 척을 줄 수 있다."
그 말에 부족장들이 당혹스러워하며 더듬이를 떨었다.
루보가 우쭐해하며 타타르를 바라보았을 때, 마랑이 말했다.
"...우리 부족은 배 열 척에 더해 진주 꾸러미를 둘 더 줄 수 있다."
또 이들이 웅성거렸다.
진주는 제도의 화폐로 쓰이고 있었다.
대륙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제도에서도 결코 작은 가치는 아니었다.
루보 덕분에 값이 한 번 솟아오르자 부족장들이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엔 값을 치룰 수 없게 된 부족장들이 나오더니, 루보와 마랑의 대결로 이어졌다.
"우리 부족은 당장 타타르 대인에게 다섯 척의 배를 주고, 해가 바뀔 때마다 열 척의 배를 줄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럼 나는 거기에 더해 우리 섬 노천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 절반을 타타르 대인에게 드리겠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루보였는데, 마랑은 집게발을 들어 올려 부들부들 떨다가 툭 떨구었다.
"...우리 섬에는 노천 광산이 없다."
루보는 두 집게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다른 아스타시디안들이 집게발을 서로 두드려 소리를 냈다. 타타르에게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몸짓이었다.
루보가 타타르에게 말했다.
"저의 승리입니다."
"...축하한다."
타타르는 품에서 라크락의 도장이 찍힌 비단을 꺼내며 이 천 쪼가리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만족한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적어도 라크락이 가르쳐 준 거래법은 충분히 그 쓸모를 증명한 것 같았다.
타타르는 계약 내용을 비단에 옮겨 적고, 계약 내용에 대해 루보에게 재차 확인을 받았다. 꽤 과한 가격인 것 같지만 다른 부족장들이 증인이 되어 줄 테고, 루보 자신도 그 정도는 낼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했다.
타타르가 도장 찍힌 비단을 루보에게 주려고 할 때, 마랑이 부들부들 떨다가 외쳤다.
"멈춰라!"
루보가 돌아보았다.
"뭐냐, 마랑? 설마하니 이제 와서 더 높은 가격을 부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흥! 이건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은 싸움이었다."
마랑이 청동 칼을 빼 들자, 가까이 있던 루보와 부족장들이 물러났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랑의 행동이 신호였는지, 해안 아래에 숨어 있던 푸른빛 아스타시디안들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부족장들과 그 호위들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루보가 칼을 빼 들며 외쳤다.
"마랑 이 자식, 처음부터 불복할 생각이었나!"
"그렇다. 어차피 재물로는 너희 부족과 싸울 수 없다. 그래도 혹시나 이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역시나였지. 그럼 두 번째 계획으로 전환할 수밖에. 이렇게 부족장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니, 이게 어찌 기회가 아닐까!"
루보가 당황했다.
"역시 '꾀 보따리 마랑'이었나."
"그래. '장사치 루보'. 이 싸움은 나의 승리다!"
타타르는 이들이 꽤나 별명 붙이길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보는 등을 떨었다.
"멍청한 것."
"모르겠나, 마랑? 나와 대인과의 '계약'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어차피 용의 후손이니, 번개를 쓴다느니 하는 것이 다 허세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후후, 그렇게 생각하나?"
타타르는 반석 위에서 작게 신음을 흘렸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타타르는 반석 위에서 그대로 달려가 마랑을 힘껏 차올렸다.
-퍼석!
껍데기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마랑이 1미터 정도 떠올랐다가 바닥을 굴렀다.
마랑은 일어서려다 한 번 나자빠져서 뒤로 또 굴렀다.
타타르는 마랑의 배 부분이 움푹 패도록 금이 간 것을 확인했다.
타타르가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단단하다. 관절 부위를 노려라."
"알겠습니다."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열 명의 전사들이 푸른빛 아스타시디안 부족을 향해 걸어갔다.
푸른빛 아스타시디안 부족은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을 보고 당황했다.
마랑이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났다.
"뭣들 하는 거냐! 저들을 죽여라! 그럼 우리가 제도의 주인이 된다!"
싸움이 일어났다.
─┼
타타르는 마지막 마랑의 머리를 옆구리에 낀 다음 거세게 조였다.
이미 큰 집게 두 개를 잃은 마랑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해 보지 못했다.
-와직!
마랑의 머리가 찌그러지자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타타르는 체액과 덩어리를 툭툭 털어 냈다.
"그리 대단할 건 없군."
타타르는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아주 쉬운 싸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스타시디안의 육체적 능력은 꽤 강한 데다, 무장을 하지 않아도 타고난 집게는 그 자체가 무기였다. 더불어 전사들의 숫자가 더 적기도 했다.
하지만 타타르도 아스타시디안을 만난 뒤 그저 구경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스타시디안과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싸울지, 약점은 무엇인지를 연구했고 그 정보를 전사들과 공유했다. 타타르는 신의 축복을 받은 힘으로 관절을 공략해 부수거나 꺾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결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가벼운 상처만 입고 승리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루보가 외쳤다.
"역시 용의 후손이다! 다들 보았나? 다들 이 승리를 축하하자!"
그 말에 아스타시디안들이 한 쌍의 큰 집게를 번쩍 들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집게 부딪는 소리가 해변에 울려 퍼졌다.
타타르는 이제 와서 들어 보니 용의 후손 이야기도 썩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라크락은 오라즌이 내려다보이는 천막 앞,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타타르가 올려 보낸 심부름꾼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군."
타타르는 아스타시디안들에게 사실상의 공물을 받으면서도 그와 별개로 마가넨에 상인들이 온다면 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알려 왔다.
제도라고 말했지만 타타르가 며칠이 걸려도 배를 타고 섬을 다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넓은 땅이며, 발견되지 않은 광산이나 고대 유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타타르는 틈틈이 제도를 둘러보며 왕에게 진상할 보물이나 국고에 보탬이 될 자원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라크락은 타타르를 외무관으로, 루보는 도주(島主)로 임명했다.
도주는 라크락이 콧등을 긁으며 만든 명예직이지만, 외무관은 전사가 아닌 전사장을 소집할 권한이 있으므로 타타르에게 쓸모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좋아. 다음 심부름꾼은 어디에서 왔지?"
라크락 옆에 있던 시중꾼이 말했다.
"멀리 '자린'에서 왔습니다."
"엘프들이? 흠."
자린은 녹안의 엘프들이 사는 북해안 끝의 마을이었다.
역시나 심부름꾼도 젊은 엘프였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라크락 님."
"자린에서 무슨 일로 날 찾았지?"
엘프가 말했다.
"저희 정찰대가 흑린의 침입자를 발견했습니다."
─┼
성운은 최근 아스타시디안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이들이 서둘러 통일하지 못하도록 가벼운 장난을 쳤다.
강력한 부족이 배를 타고 이동하면 해수의 소영역으로 멀리 떠내려 보내거나, 늪의 소영역을 사용해 개흙에 발이 푹푹 빠지도록 해서 싸움에 불리하도록 만들었다.
타타르가 라크락의 도장이 찍힌 비단을 들고 내려갈 때까지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장난을 친 것이다.
제도가 빈 땅이란 걸 알아차린 시점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자원을 얻어 내야겠다고 성운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월드에서 지형은 랜덤이 아니야. 제도에는 은 광산이 많이 있어. 당장은 화폐로 많이 쓰이지 않지만 지금 같이 세계 무역이 활발하다면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금과 은은 주요 화폐로 쓰이기 시작할 거야.'
이 중 은 광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향후 제3 대륙의 경제 주도권을 흑린이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수를 좀 써야 하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아. 환전 사기라던가. 아니, 사기는 아니지. 아직 그런 법은 없으니까.'
성운은 뜻하는 대로 제도의 광산 일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스타시디안은 물론 타타르와 라크락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미래의 수익이었다.
다만 성운은 은 광산을 손에 넣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덜 쓴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흑린의 주요 거점 마을과 오라즌, 그리고 자동성과 자린을 둘러보고 상태창을 확인하던 성운은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숫자가 줄었군.'
성운이 보고 있는 창은 '기적' 창이었다.
정확히는 벌레의 소영역으로 만들어 낸 기적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창으로, 이른바 '메뚜기 떼'였다.
그리고 창조물 중 하나가 급히 성운을 향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숫자가 줄어든 메뚜기 떼를 통솔하는 창조물 '혼고'였다.
-나의 창조주여... 들리나이까?
"말해라."
혼고는 대륙 중앙에서 활약 중이었고, 메뚜기 떼를 이끌면서 정주민들의 곡식과, 유목민들의 가축이 먹을 수풀을 착실하게 뜯어먹고 다녔다.
반도에서 워낙 멀리까지 이동한 메뚜기 떼라서 대륙 중앙의 플레이어들은 그게 몹쓸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돌아봐도 벌레의 소영역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다른 플레이어들의 곡식을 소모시키면 자연히 인구도 줄고 문명의 발전 속도도 늦출 수 있다. 성운으로서는 가치 있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런 메뚜기 떼 컨트롤은 신경을 써 줘야 한다는 점인데, 성운은 극초반 이후 혼고를 창조한 덕분에 이 메뚜기 떼를 직접 컨트롤하지 않아도 돼서 남는 시간 라크락을 지원하는데 쓸 수 있었다.
'혼고에게는 별 다른 일이 없으면 내게 말을 걸지 말라고 일러 뒀다. 그런데 말을 걸어온다는 건...'
혼고가 말했다.
-저의 불찰로 인해 메뚜기 떼의 정체가 탄로 났나이다...
059화
성운이 말했다.
"걱정할 건 없다."
성운은 이번 게임이 시작되고 창조물을 대하기가 조금 꺼려지는 편이었다.
성운은 로스트 월드에서도 창조물들과 딱히 대화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그래 봤자 AI니까. 로스트 월드는 플레이어가 창조물과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지만 언제나 판에 박힌 대사만 뱉어냈다.
하지만 이번 게임은 그렇지 않았고, 또 다른 이유로 성운이 대화를 꺼리게 되었다.
-무엇이 말이옵니까?
성운은 잠시 생각했다.
'게임이 현실이 되고 나서는 너무 말이 많아졌단 말이지.'
마치 영혼을 가지게 된 것처럼.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대하기가 곤란해졌을 뿐이다.
성운은 원래 창조물들을 자신의 또 다른 손발로,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사용했는데 이제 와서 그 매크로 프로그램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완전히 무시해도 상관없겠지. 시스템적으로 내 창조물들은 완전히 내 말만 따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충성하니까.'
하지만 그러자니 성운은 뭔가 찝찝했다.
간단한 의문에 답하는 친절을 베푼다고 손해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래."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어 치운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의 발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성운은 메뚜기 떼가 플레이어의 행동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 범위와 효과, 빈도를 줄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메뚜기 떼가 활동하기 어려운 높은 위도에서의 경작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연 현상이겠거니, 이벤트이겠거니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쯤 오면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어. 앞으로 만나게 될 대륙의 다른 플레이어들을 하나 둘 체크하다 보면 소영역을 벌레로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알아차렸겠지.'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어차피 메뚜기 떼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다. 걱정할 건 아니야."
-다행이옵니다.
"걱정을 해야 한다면 널 걱정해야겠지. 괜찮나?"
-예. 다른 신의 이적으로 메뚜기들은 많이 잃어버렸지만, 아직 저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성운의 창조물 혼고는 스라티스와 달리 작은 개체였다.
전투에 쓰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히 메뚜기 조종용이었으니 값비싸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전체적인 외형은 이족 보행을 하는 갈색 메뚜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머리는 메뚜기지만 그 신체는 곤충의 피막과 껍데기로 재조립된 인간의 실루엣이었다. 머리까지 거적때기를 뒤집어쓰면 체격이 좋은 인간 남자처럼 보였다. 이 시대에 떠돌이는 흔하므로 들킬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너까지 잃으면 손실이 있다."
메뚜기 떼와 달리 창조물은 제작하는 데에 신앙 자원만이 아니라 흉물 또는 흉신의 정수가 소모된다. 그리고 혼고는 메뚜기 떼 조종으로 착실히 레벨을 올린 창조물이기에 레벨은 다운되지 않아도 경험치가 꽤 떨어질 터였다.
성운이 명령했다.
"임무는 끝났다. 내가 다음 임무를 줄 때까지 남은 메뚜기 떼는 교란용으로 사용해서 최대한 생존을 보장하며 숨어 있어라. 필요하다면 지역을 이탈해도 상관없다."
-...알겠나이다.
성운은 혼고와의 연락을 끊은 뒤 정찰을 시작했다.
성운 앞으로 수많은 벌레와 새의 시야가 창으로 떠올랐다. 옆으로는 각 시야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타내는 미니맵이, 그리고 성운이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해당되는 벌레와 새의 청각까지 성운에게 공유되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이어져 온 공식 애드온 세팅이었다.
'역시 사티로스와 르나르인가.'
현재 대륙 중앙엔 다섯 플레이어가 세 팀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성운은 각 플레이어를 대표되는 종족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그중 사티로스와 르나르는 성운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종족들이었다.
사티로스는 반인반수로, 하체가 염소인 자들이었다. 성미가 사나운 구석이 있지만 음악과 노래, 춤,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종족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인간과 크게 능력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종족 전체에 광신 속성이 있어 한 번 신앙을 결정하면 바꾸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이 광신 속성이 강한 개체는 신앙을 위해서 희생을 불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장점 같지만 상황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했다.
한편 르나르는 이족 보행하는 여우 종족이었다. 신체 크기가 일반적인 사이즈보다는 작고 소인보다는 큰 종족으로, 힘 능력치가 적은 대신 지능이 높았다.
지능이 장점이지만 그 외에도 특징이 있었다. 게임 초반 전투에선 열세를 보이지만 총기가 개발되는 시점부터는 작지만 날랜 몸을 통한 이점을 얻었다.
'당장 봤을 때 움직임을 보이는 건 이 두 종족뿐이다.'
분명 메뚜기 떼의 공격은 다섯 종족에게 골고루 피해를 입혔다.
이 다섯 플레이어가 세 팀으로 나뉘어 적대하고 있더라도 채팅을 통해 성운에 대한 정보는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성운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성운도 저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세 종족은 날 공격하기 위해선 사티로스와 르나르의 땅 둘 중 하나를 지나야 한다. 서로 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성운을 공격한다는 빌미로 군대를 움직였다가 비어 있는 사티로스와 르나르를 공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티로스와 르나르를 지배하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허용할 리 없었다.
'자신들 배후에 있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잠정적인 전투를 중지하자고 요청했겠지. 그리고 사티로스와 르나르의 병력으로 나를 공격하는 대신 여러 가지 물적 지원을 받는 조건일 테고. 어찌되었든 나를 공공의 적으로 생각할 테니까.'
직간접적으로 플레이어 다섯을 상대하게 된 상황은 유감이었다.
다행인 것은 성운이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운의 생각에 다섯 플레이어가 아직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 충분히 이점으로 보였다.
'자, 그럼...'
성운이 행동에 나섰다.
─┼
사티로스들의 수도 데이머릿.
산 속 계곡에 자리 잡은 이곳에 두 명의 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늙어서 털이 뿌옇게 희어진 르나르의 왕 하티가 말했다.
"그대는 저들을 믿을 수 있겠소?"
하티가 말하는 '저들'이란 대륙 중앙의 다른 세 종족의 우두머리들을 말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젊지만 턱수염을 잔뜩 기른 사티로스의 왕 파브가 말했다.
"그렇다고 리자드맨들을 가만 두고 볼 수만도 없습니다. 신들께서 일제히 저 리자드맨들이 그 끔찍한 메뚜기 떼의 주범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푸른 벌레신에게 빌어 우리를 굶주리게 만들고, 그 대신 자신들의 배를 불려 왔습니다."
"으음..."
흑린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사티로스들과 르나르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이들은 시장에서 사용하는 편이라는 화폐를 직접 찍어 내고 있었는데, 그 주조 기술이 뛰어나서 다른 곳에서 만든 편은 자동성에서 만들어 내는 것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상인들은 분명 자동성 너머로 가서 이득을 벌고 있지만, 흑린은 이들이 벌어들이는 이득보다도 더 큰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사티로스와 르나르의 땅도 자동성처럼 라크락의 손아귀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사티로스의 왕 파브가 말했다.
"우리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흑린의 경계에 더 가까우니... 게다가 다른 세 종족의 군대가 우리 땅 위로 지나가게 둘 수도 없습니다. 결국 저희가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티 님의 걱정은 저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건 다섯 신 모두가 동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언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올해가 끝나기 전에 사티로스와 르나르가 힘을 합쳐 흑린의 수도 오라즌을 불태우리란 것이었다.
이 예언은 사티로스와 르나르만이 아니라 다른 세 종족에게도 퍼져 있었다.
이는 실제로 플레이어들이 합의를 위해 시스템 차원에서 '예언' 스킬을 사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언은 사티로스와 르나르의 플레이어가 최대한 빨리 오라즌을 점령해 리자드맨을 물리치거나 힘을 빼 놓고, 이를 위해 다른 세 종족이 돕는다는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들의 합의지만 예언이 퍼져 나가자 다섯 종족 모두가 신들의 뜻을 알아차렸다.
르나르의 왕 하티가 말했다.
"그대도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믿는 '푸른 벌레신'은 다섯 신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시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소문이긴 하지만 리자드맨들은 명예도 없고 교활하게 싸운다고 합니다. 푸른 벌레신에게 바치는 제단에는 썩은 고기가 올라가고 벌레가 꼬이도록 둔다지 뭡니까?"
"더럽고 추하군."
소영역 벌레의 약점이었다.
다른 신을 믿는 이들에겐 신성과 관련된 행위가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고개를 흔들던 하티가 말했다.
"그럼 공격 경로는 어떻게 취하면 좋겠소?"
"흠..."
파브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대륙의 동부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길은 하나뿐이다.
자동성으로 가는 길. 그 다음은 지명만이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고민을 끝낸 파브가 말했다.
"해안선을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곳은 저주받은 지역이오. 벌레들이 득실거리지. 벌레? 어쩌면 그곳도..."
"게다가 길도 없지요."
"길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자동성으로 가는 길뿐이오. 하지만 자동성은 몇 번의 공략이 있었지만 점령당한 적이 없지."
"리자드맨들을 제외하곤 말이죠."
자동성이 어떻게 점령당했느냐는 이야기는 대륙 중앙에도 많이 퍼져 있었다.
사악한 리자드맨들은 성벽을 넘지 못하자 비겁하게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후계자를 내세워 꼭두각시 성주로 삼았다.
상인들은 10년 전 큰 환란을 일으킨 놀이 관계있다느니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은 단순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파브가 말했다.
"누군가는 자동성을 라크락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지도요."
"사티로스만으로 말인가?"
"예."
그 말에 하티가 생각했다.
'역시 사티로스는 욕심이 많군. 자동성을 손에 넣겠다? 하지만 자동성을 공략하는 대신 이점을 얻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결국 흑린의 수도는 오라즌이니까.'
하티가 말했다.
"그럼 나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군사들을 데리고 황야를 지나야겠군."
"좋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전략을 구상해 봅시다."
─┼
파브와 하티가 군대를 모은 것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사티로스가 800, 르나르가 1100으로 제3 대륙 최대 단위 원정군이었다.
두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그 위에서 두 명의 신 또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마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지만 피부는 불그스름했고, 눈은 노랗게 빛났으며, 눈동자는 염소의 그것과 같았다.
머리에는 여섯 개의 뿔이 위와 옆, 아래로 굽어서 났고, 입을 열 때마다 붉은 불길이 솟았다.
사티로스의 신, 플레이어 크람푸스는 허공에서 초조하게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보급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보급이요?"
대답한 것은 평범한 인간 여자처럼 보였다.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길었고 어깨를 드러낸 흰색 미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신처럼 보이지 않을 터였다.
르나르의 신, 플레이어 룬다였다.
"황야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까진 보급을 받다가 북해안을 끼고 돌 거예요."
"약탈하면서 가겠다?"
"그렇죠. 르나르는 아무래도 체구가 작다 보니 일반적인 부대보다 보급량이 적기도 하고. 북해안에서 내려가는 길 같은 경우에는 중간 중간 오아시스 마을들이 있고."
"알겠습니다."
거기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기에 크람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르나르가 먼저, 그 다음 적 부대와 조우하게 될 시점에 사티로스의 군대가 자동성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부대를 둘로 나누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수 있었다.
적에게 각개 격파당할 위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로스트 월드에서는 상대에게 서로 다른 두 장소의 전투를 강요할 수 있다면 부대를 둘로 나누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계획대로만 싸울 수 있다면 상대는 자신의 신성과 신앙을 쪼개서 전장에 투입해야 하는 데다가, 양 전투 지역을 오가면서 혼란스럽게 싸워야만 했다.
크람푸스는 룬다를 몇 번 힐끔거렸고, 룬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다.
"왜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 아뇨. 아니, 그렇지. 네뷸라랑은 아직 연락이 안 되죠?"
"네. 계속 수신 차단 상태네요. 크람푸스 님은요?"
크람푸스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귓속말을 넣으려고 시도했지만 네뷸라, 성운은 차단 상태였다.
"네, 뭐, 저도."
처음에는 크람푸스도 네뷸라와 연락이 된다면, 지금까지의 피해를 보상한다면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 보상이 결코 적지는 않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를 괴롭힌 대가라면 관점에 따라 적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뷸라는 그러기는커녕,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대비하겠다는 듯 군사 훈련을 집중하고 정찰대를 늘렸다.
다섯 플레이어 모두 화날 수밖에 없었다.
룬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제 저는 내정 보면서 부대를 관찰해야겠는데요. 오늘은 이만 헤어질까요?"
"아,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죠?"
크람푸스가 말했다.
"그 모습은 직접 제작한 거죠? 실제 모습이 아니라."
크람푸스는 이번 게임이 시작된 뒤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룬다를 만난 뒤에 그것이 외로움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들이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크람푸스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느꼈다.
특히나 필요에 의해 느슨한 동맹을 결성한 뒤부터 크람푸스는 같은 플레이어인 룬다에게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룬다의 눈물점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룬다의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고, 크람푸스가 생각하기에 불필요한 재현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옮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룬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크람푸스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답하려고 했을 때는, 룬다가 자신의 시스템 창에 관심을 돌린 다음이었다.
룬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무슨 일이죠?"
"귓속말 요청인데요."
"네뷸라가요?"
"아뇨."
룬다는 가로저었다.
"'엘다르'... 인데요?"
060화
크람푸스의 최종 랭킹은 1430위, 룬다는 3만하고도 8702위.
실제로 크람푸스가 게임에 관해 더 많은 요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작전의 주도권은 크람푸스가 쥐고 있었다.
적어도 크람푸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이야기해 보죠."
"괜찮을까요?"
크람푸스는 룬다의 걱정을 이해했다.
크람푸스가 알고 있기에 엘다르는 네뷸라와 '느슨한 동맹'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엘다르 또한 크람푸스와 룬다의 공격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사실은 엘다르가 크람푸스가 아닌 룬다에게 귓속말을 건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룬다의 여우 종족, 르나르는 황야를 가로질러 가고 이동하고 있으니 북해안에 있는 엘다르가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면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이 채팅은 이간질을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스트 월드에서 시스템으로 지원하는 동맹은 플레이어들이 임의로 맺고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러 신들이 하나의 신화로 편입되면 그러한 사실이 휘하의 종족들에게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상호 신뢰에 의존해 느슨한 동맹을 맺는다.
'그런 느슨한 동맹은 언제나 깨질 위협이 있지.'
로스트 월드에서 플레이어간 이간질은 흔하기 때문에 크람푸스는 물론 룬다도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룬다 님이 혼자 연락을 취하세요. 저는 여기 없는 걸로 하고요."
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엘다르가 제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공물 따위로 회유하려고 들어도 크람푸스 님이 알아차릴 수 있겠군요."
"네. 제 생각에는 확률이 높아 보이거든요."
"얼마나요?"
"적어도 반은 되지 않을까요?"
"반이요."
크람푸스는 북해안에서 벌어진 싸움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플레이어 둘이 사라진 것은 알고 있었다.
혼자서 둘 이상의 플레이어를 상대하려면 반간계(反間計)는 필수다.
"그럼 저희가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거죠."
"역으로요?"
크람푸스가 말했다.
"우선 엘다르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방심시키는 거죠. 그러면서 놈에게 기습할 기회를 노렸다가 한 방 먹이는 겁니다."
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에 북해안에 있는 엘다르를 두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게 찝찝했는데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승리를 굳힐 수 있겠죠."
"알겠어요. 시작해 보죠."
룬다가 엘다르의 귓속말을 받았다.
엘다르가 말했다.
"반갑다, 르나르의 신 룬다."
"...안녕하세요?"
"나는 엘프의 신 엘다르라고 한다."
"그건 닉네임이 뜨니까 알고 있는데요."
룬다의 표정이 '뭐 하는 인간이지?'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크람푸스는 엘다르의 말투에서 곧장 답을 알았다.
크람푸스는 메모장을 켜서 필담을 썼다.
'롤 플레이어 같은데요?'
그 말에 룬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룬다가 말했다.
"엘프의 신께서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는지요?"
엘다르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말하기를 주저했다.
엘다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
룬다는 당황해서 크람푸스와 눈을 마주쳤다.
크람푸스도 이런 상황은 상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룬다가 천천히 말했다.
"...도움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나 엘다르는 네뷸라의 강압에 못 이겨 동맹을 하고 있지."
"네뷸라와의 동맹을 원치 않는다고요?"
"그렀노라. 그는 압도적인 전략으로 솔롱고스와 임춘식이라는 켄타우르스의 신과 오우거의 신을 물리쳤지."
"당신의 도움 없이 말인가요?"
"그러하다."
룬다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로저었다.
"보통 2대 1의 싸움이면 두 명인 쪽이 이기잖아요. 특히 로스트 월드 초반에는 물량이 중요한데."
"레벨 차이가 컸다. 전투에서도 압도적이었지. 네뷸라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나?"
"어, 설마..."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세계에서 신들과 싸워 이겨 온 지고의 위치에 도달했다."
"...다른 말로는 랭킹 1위를 말하고요?"
"그렇게 표현하기도 하지."
그 말에 룬다는 침음을 삼켰고, 크람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크람푸스와 룬다는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오랜 랭킹 1위가 '네뷸라'라고는 하지만 로스트 월드는 중복 닉네임이 허용된다.
애초에 크람푸스와 룬다 또한 최상위권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랭킹 1위보다는 등수가 낮은 동명의 다른 플레이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크람푸스가 생각했다.
'얼마 전의 헤게모니아도 랭킹 2위였잖아. 같은 게임에, 그것도 같은 대륙이라니.'
하지만 운이 없다고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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