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6

'그리고 이런 위험은 놈도 마찬가지지. 그렇다고 해서 엘다르란 놈은 소영역을 통한 정찰도 시도해 오지 않았어.'
그렇다면 엘다르 또한 성운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단 말이었다.
현재 소영역을 통해서 정찰할 수 없게 되었거나, 소영역 자체가 정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거나.
성운은 '춤추는 그림자신'이라는 이름을 통해 후자라고 짐작했다.
'아마도 그거겠지. 소영역 뽑기 운은 나보다도 나빴어.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는 건, 다른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야. 플레이를 하면서 처음에 얻은 메이저 소영역 말고 꽤 쓸 만한 소영역을 손에 얻었을지도.'
엘다르는 세 번째 정찰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믿는 개체들을 직접 내려 보내 정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려온 것이 리오나르와 엘프 상인들이었다.
북해안 또한 몇 개의 부족이 있을 수 있는 넓은 지역이기 때문에 성운은 당분간 신경을 꺼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적을 만나야 했다.
성운은 자신이 상대의 요구에 따라 수신 차단이라는 적절한 반응을 했으므로 조만간 엘다르가 먼저 움직일 것이라 판단했다.
성운은 전쟁을 준비했다.
상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성운은 일단 엘다르를 겉보기처럼 우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잘린 귀 부족과 헤게모니아가 북해안에서 나오는데 어떤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커. 자신만만함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우기 동안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전조가 오갔다.
처음에는 시비였다.
자동성 성주인 휘경이 리오나르를 핍박했고 이에 대한 사과를 바란다는 전인(專人)을 보내온 것이다.
전인을 보내온 것은 자신을 '대족장 하사디안'이라 소개한 자로, 녹안 부족이란 엘프의 부족장이었다.
휘경은 상대의 날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전인에게 전할 말에 더 큰 날조를 섞어 보냈다. 겸사겸사 엘프에 대한 모욕도 섞어 보내며 꼭 제대로 전달하라고 당부했다.
하사디안은 다음으로 보낸 전인을 통해 고상한 말로 만남을 요청했는데 휘경은 만나 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휘경은 그냥 그럴 수 있다는 이유로 새롭게 알게 된 엘프에 대한 욕설을 추가로 전인에게 말했다. 몇 개는 사이란이 알려 준 것이었다.
하사디안은 세 번째 전인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직접 휘경의 귓구멍에 대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지, 전사들을 이끌고 우기가 끝나자마자 황야로 내려왔다.
우기가 끝나고 황야에 짧은 시간 동안 풀이 무성해지는 시기였다.
성운은 벌레들을 통해 엘프들이 자신의 지역에 들어서기 전에 정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성운은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놈을 모르는 만큼, 놈도 나를 모르는 건 확실한 거 같군.'
─┼
춤추는 그림자신, 엘다르는 자신을 믿는 엘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숫자면 그 작은 성은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겠지.'
전사만 300명.
이후 문명이 발달하면 300이란 숫자는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문명 단계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가 훈련된 전사였다.
엘다르는 대족장 하사디안을 통해 엘프 상인들과 전인을 내려 보내면서 자동성에 대해 정찰을 성공했다.
300명의 전사면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듯했다.
변수라고 한다면 주변에 커다란 리자드맨 유목 부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우기 때문에 내려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같은 문명 단계에서 정주민 전사들을 데리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엘다르도 잘 알고 있었다. 보급 문제도 있었고, 이런 숫자가 모두 부족에서 벗어나면 부족을 지킬 이들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동성은 고대 유적이면서 불가사의야. 대형 정주민 도시기도 하고. 남하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엘다르를 믿는 부족의 부족장, 하사디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사디안은 자신의 신이 전사들을 데리고 자동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예언을 내렸을 때는 당황했지만, 자동성의 전력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알고는 안도했다.
자동성은 신비로운 고대의 진흙 병정들이 있다. 하지만 그 진흙 병정 외에는 야만적인 인간 무리가 살고 있을 뿐이었다.
'성벽이 제법 높다지만, 결국 흙으로 만들었기에 리오나르는 나무를 잘 타는 전사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기어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 안의 병사는 고작해야 150명 정도. 활도 조야한 것을 쓴다고 했지.'
하사디안은 자랑스러운 자신의 장궁을 바라보았다.
80보가 넘는 과녁도 곧잘 명중하는 활이었다.
'우선은 50보 밖의 과녁도 겨우 맞춘다는 놈들의 활잡이들을 우리가 먼저 쏘아서 숫자를 줄인다. 그리고 몸이 날랜 이들이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고, 성문을 열게 만든다. 그럼 끝이지. 드디어 망할 자동성 성주를 무릎 꿇릴 수 있겠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사디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동성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인간 병사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자동성으로 향하는 좁은 협곡이었다.
하사디안은 당황하며 저들이 누구인지 확인하라 일렀고, 전령이 부대 사이를 뛰어가며 오갔다.
"자동성의 병사들이라 합니다."
"뭐라고? 자동성의 병사들이라면 왜 성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냐?"
"저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성 밖에 나와 있다는 거냐? 우리가 올 걸 알았으면 얌전히 성 안에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한 번 더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전령은 돌아오지 못했다.
상대가 대화할 의도가 없다는 의미였다.
하사디안은 당황했지만, 상대의 병력 숫자가 결국 자신의 전사들보다 적다는 걸 알았다.
상대는 모든 병사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라 겨우 70명 정도였다.
'좁은 길목에서 싸우면 동수로 싸우니 유리할 거라 판단한 건가? 멍청하긴. 자동성주는 전투에 조예가 없군.'
하사디안은 자신이라면 무조건 성 안에서 항전을 할 것이었다.
구태여 성 밖에 나서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렇지. 다른 아군이 성 밖에 있을 때 정도인가?'
하사디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뒤통수가 근질거렸는데, 마침 자신의 등 뒤로 전령이 달려왔다.
"대족장님!"
"무슨 일이냐?"
"큰일입니다! 뒤쪽에 큰 병력이 저희의 퇴로를 막기 시작했습니다!"
"뭐? 인간들이?"
"리자드맨들입니다!"
"뭐라고?"
하사디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들이 엘프들이 지나온 길을 막고 있었다.
"왜 리자드맨들이... 인간과 함께?"
그 사이 하사디안의 신, 엘다르의 앞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종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경고: 상대 종족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다르는 이 상태창을 얼마 전에 봤었다.
자신의 엘프 상인들이 자동성에 막 입성했을 때였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당황한 엘다르는 급하게 성운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신 차단은 풀려 있었다.
"저 리자드맨들은 그, 그대의 동맹인가? 이 리자드맨 종족과?"
"멍청하긴. 나한테 귓말 넣기 전에 로컬 플레이어 목록부터 봐야지."
엘다르는 로컬 플레이어 목록을 확인했다.
「플레이어 목록(1명)」
「성운」
이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는 없었다. 그 말은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엘다르로선 쉽게 추리할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어, 잠깐. 그, 그대는 인간의 신이 아니었나? 난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간의 신이지."
성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동시에 리자드맨의 신이기도 하고."
결국 엘다르의 롤플레이가 부서졌다.
"뭐? 어떻게 벌써 2종족 플레이를 하는 거야?"
044화
엘다르의 절규와 별개로 지상에선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사디안이 외쳤다.
"동요하지 마라! 어차피 적들의 숫자는 우리보다 적다!"
인간 병사는 70명, 리자드맨은 80명. 합쳐도 겨우 150명이다.
반면 엘프 전사들은 300명.
'물론 먼 길을 걸어와 쉬지 못했다. 한쪽은 절벽, 한쪽은 낭떠러지.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협로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우리는 숫자가 충분히 많으니 상대의 협공도 큰 의미가 없다.'
하사디안이 다른 세 백부장들에게 말했다.
"전방 부대는 그대로 채비를 마치고, 후방 부대는 뒤돌아서 리자드맨들의 공격을 대비해라."
"대족장님께선 어느 부대를 맡으시겠습니까?"
"전방을 맡겠다."
그 말에 다른 세 백부장도 동의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후퇴하기는 늦었다.
상대도 단단히 준비한 것을 보면 이번 전투를 끝내면 적들의 주력을 쳐부술 수 있다는 말.
'리자드맨 부족은 강성한 것처럼 보이니 우선 인간 부족을 공격한다. 그다음 인간 부족을 패퇴시키면 이 협로를 벗어날 수 있다. 넓은 장소에서 리자드맨들을 수적인 우위로 압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모든 전투가 하사디안의 뜻대로 풀린다고 해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전투 후 남은 병력으로 자동성을 공격하긴 힘들 테고, 퇴각한 인간 병사들은 자동성으로 들어갔다가 엘프 전사들이 휴식을 취할 때 급습해 올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 지형을 잘 아는 건 엘프들이 아닌 인간들이었다.
물론 전투가 하사디안의 뜻대로 풀릴 수도 없었다.
엘프 활잡이들이 적들이 80보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며 화살을 쟁여 놓았을 때, 머리 위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대족장님! 협곡 위에 인간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화살입니다!"
"맞대응해라!"
머리 위에서 화살이 쏟아지자, 화살을 피하느라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 화살을 막기 위해 몸을 숙인 이들, 몸에 화살이 꽂혀 몸부림치는 말과, 말을 달래지 못하고 낙마하는 이들, 겨우 정신을 차려 대응 사격에 나서는 이들이 혼재했다.
이런 혼란 때문에 천천히 접근하던 리자드맨 적 기병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는 걸 거의 대부분의 엘프 전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돌아보며 하사디안이 외쳤다.
"리자드맨들이 돌격해 온다! 창잡이들은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하사디안의 호통에 전열에 서 있던 창잡이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전술적으로 좋은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리자드맨 중 선두에 선 것은 라크락이었다.
자신의 코카트리스 아낙세에 올라탄 라크락은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엘프 창잡이 몇 명이 라크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힐끔거렸다.
라크락이 하늘에서 엘프 창잡이들에게로, 검지 손가락을 그어 내렸다.
대기를 꿰뚫고 한 줄기 백색 실선이 그려지는가 싶었다.
섬광.
떨림.
빛.
-콰────ㅇ!
번개였다.
빛에 닿은 이들 모두가 선 채로 익어 코와 입, 귀, 터져 버린 안구에서 수증기를 뿜어냈고, 빛에 가까스로 닿지 않은 이들은 충격파만으로 쓰러지고 눈과 귀가 멀었다.
라크락과 함께 코카투에 올라탄 리자드맨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엘프 전사들을 짓밟으며 그대로 엘프의 칼잡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늦게 뒤를 돌아본 하사디안이 외쳤다.
"등을 보이지 마! 이 겁쟁이들아!"
하지만 하사디안의 말은 자기 자신에게도 너무 작고 멀게 느껴졌다. 천둥 때문에 귀가 먹먹한 탓이었다.
첫 번째 돌진으로 코카투 전사들의 창날이 엘프 칼잡이들을 꼬챙이처럼 둘, 셋으로 꿰었다.
코카투 전사들은 미련 없이 창을 버리고 칼을 뽑았다.
코카투 전사들이 적들을 베어 넘기면, 코카투들은 살아남은 적을 짓밟고 두개골을 쪼아 박살 냈다.
엘프 창잡이들이 뒤늦게 후열에서 대열을 가다듬었을 때, 코카투 전사들은 별다른 지시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퇴각을 준비했다.
하사디안은 잠깐 동안 안도했다.
'이걸로 한숨을 돌릴 수 있겠...'
그렇지 않았다. 퇴각하는 코카투 전사들과 교대하는 것은 리자드맨 칼잡이들이었다.
코카투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코카투 전사들과 달리, 리자드맨 칼잡이들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기름을 먹이고 단단하게 굳힌 가죽 갑옷을 두르고 있었고, 고대 갑충으로 만든 방패도 들고 있었다.
창날은 칼잡이들을 상처 입히지 못했고, 창잡이들은 부무장인 단도를 꺼내기도 전에 복부와 가슴에, 목에 칼날을 허용했다.
이미 라크락의 번개에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절벽과 낭떠러지, 그리고 유일한 길은 적들에게 막혀 있었기에 후퇴할 길이 없었다.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라크락은 전황을 돌아보았다.
'다 끝났군.'
아직 적들은 220명 정도 남아 있었지만,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과 맞서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등을 보이며 자기들끼리 밀치고 밟아 대고 있었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아군의 목을 쳐 가며 독려했지만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리자드맨 맞은편에 있는 자동성의 인간들은 역시나 벽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마지못해 달려드는 엘프 전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제 엘프 전사들의 마지막 희망은 낭떠러지를 내려가는 것밖에 없어서, 그나마 약삭빠른 이들이 낭떠러지를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낭떠러지 아래에서 대기 중인 인간 병사들이 있는 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엘프들은 자신들의 신을 향해 엎드려 빌고 있었다.
라크락은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게 엘프한테도 다행일 거라고 판단했다.
"재돌격하겠다."
라크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라크락의 머리 위에 저공비행하던 파지직이 라크락의 말을 옮겼다.
-재돌격하겠다.
그 말을 들어야 할 전사들이 정비를 마치고 재돌격할 준비를 마쳤다.
"돌격."
-돌격.
─┼
성운은 엘다르가 당황한 틈을 타서, 자신이 전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엘다르의 전투 개입도 무마시켰다.
성운은 엘다르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신성 레벨이 높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똑같이 전투에 개입하면 어차피 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신들이 개입하지 않은 전투에서라면 엘프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고. 틀린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나로서는 엘다르가 강신을 해서 리자드맨 전사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막는 게 더 나으니까. 전투야 어찌되었든 이길 테고.'
결과적으로 엘다르는 자신의 엘프 전사들이 몰살당하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엘다르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져, 졌다..."
성운이 말했다.
"이 시점에서 전사 300명이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랄 것까진 없고, 적지 않은 숫자의 엘프 전사들을 잃었으니 너의 엘프 부족의 방호 태세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엘다르는 한숨을 쉬었다.
"원하는 게 뭐지?"
이대로 '원하는 건 바로 너의 목숨이다'라고 외치며 라크락을 부추겨 황야를 내달리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엘다르의 '녹안'이라고 불리는 엘프 부족은 멀리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북해안에 대한 정보가 없지.'
엘다르의 엘프 부족을 정복하는 문제는 엘다르에게 주변 정황을 듣고 나서라도 상관없었다.
역사적으로도 인정된 사실이지만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 공격하는 게 더 성공률이 좋기도 했다.
성운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정보, 기술, 자원."
"전부 다 달라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전부 다'는 아니지."
성운은 엘다르를 가리켰다.
엘다르는 정말로 자신이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거렸다.
"...윽."
엘다르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끼리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 사실상의 승리 상황이라면 패배를 앞둔 플레이어가 다소 비굴하지만 몇 가지 조건 하에 플레이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 중 기술과 자원은 간단했다.
기술은 엘다르의 녹안 엘프 부족이 찾아내고 개발한 기술을 모두 달라는 것이며, 자원은 엘다르가 먼저 요구했던 '공물'과 같은 개념이었다.
정보는 조금 더 특별했다.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 '정보'는, 플레이어가 확인한 온갖 개체와 지역, 지도와 개체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런 정보는 플레이어의 '정보탭'에 자동 저장되어 있었다.
정보를 준다는 건 그런 정보탭에 저장된, 매 순간 업데이트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정보에는 주변 종족과 부족들의 위치나 지금까지 알아낸 숫자나 발전 양상이 드러나기도 했고 좀 더 개인적으로는 플레이어가 혼자 발견한 고대 유적의 위치나, 플레이어가 유심히 지켜보는 개체에 대한 능력치 값까지 모조리 기록되었다.
기술과 자원은 지금까지 얻은 것을 넘겨주는 것이지만, 정보는 앞으로 얻을 것을 넘기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성운은 엘다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일 확률이 반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걸려 있다지만, 도망가면 그만이니까. 그걸 다 넘겨줘서 적을 이롭게 하느니 도망가는 게 방법일 수도 있지.'
하지만 성운의 생각과 달리 엘다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을지도 몰라.'
하사디안과 300명의 전사를 잃은 것은 뼈아픈 패배였다.
하지만 하사디안과 이 전사들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얼마나 오래 그 북해안에서 생존해 있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네뷸라, 이 사람은 이렇게 초반인데 두 종족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까, 줄을 타야 한다면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말도 안 되게 강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엘다르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엘프의 신 엘다르는 인간과 리자드맨의 신 네뷸라 님의 자비에 감복했습니다."
"뭐야."
"따라서 말씀하신대로 정보와 기술과 자원은 물론 이후에도 필요하신 것들을 제공하겠습니다."
"뭔데."
"부디 과거 저의 오만함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뭐냐고."
엘다르가 성운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운은 또 이 자식이 무슨 꿍꿍이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말하는 엘다르의 이야기를 듣고 성운은 엘다르의 롤플레이 말고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자동성의 성주, 휘경입니다."
"인사하기 전에, 이 동작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저희는 악수... 라고 부르는데요. 손을 맞잡고 흔들고 그 다음 서로 껴안습니다. 친밀감의 표현으로요."
라크락은 정말로 그런지 사이란을 돌아보았고, 사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오는 상인들이 곧잘 하는 인사였고 이제 자동성에도 유행하고 있었다. 휘경은 유행을 좋아한다. 유행은 곧 변화였기 때문이다.
라크락은 손을 뻗다가, 한 번 더 멈칫했다.
"내 손과 몸에 피가 묻었는데."
현재 라크락은 엘프들의 피로 칠갑을 한 상태였다. 가장 선두에서 최후까지 싸운 증거였다.
휘경이 어깨를 으쓱한 다음 라크락의 손을 맞잡고 흔들고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끈적한 피가 손은 물론 휘경의 옷과 뺨에 묻어났다.
"개의치 않습니다, 대족장님. 저희를 위해 싸우다 묻은 피지요. 저희가 함께 몸에 묻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렇게라도 묻힐 수 있으니 영광일 뿐입니다."
라크락은 눈앞의 뿔이 난 인간 여자의 말에 크게 혹하진 않았다.
그래도, 말을 잘한다는 건 인정할 만했다. 동맹의 우두머리가 말을 잘한다는 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라크락은 가볍게 웃은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프들을 물리친 이후 라크락과 전사들은, 자동성의 병사들을 따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동성으로 들어와 있었다.
라크락으로서는 얼마 전까지 정찰병들이 전해오는 말로만 듣던 자동성에 들어온 감회는 신기한 데가 있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흠, 그쪽 말마따나 그저 거래일 뿐인데, 영광이고 말고가 중요한가?"
"중요하죠. 사기를 치면 미래의 거래 상대를 잃을 테지만, 덤을 주면 과거의 거래 상대도 다시 찾아오겠죠."
라크락은 휘경을 도마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광조차도 이 인간에겐 거래의 덤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우리와 자주 거래를 하고 싶단 말인가?"
"그럼요."
라크락은 팔꿈치로 옆에 서 있던 사이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대가 바쁘겠군."
"예?"
"놀란 척은."
라크락은 사이란이 답하기 전에 휘경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 친구가 자동성에 상주하게 될 것인데 부족하지 않게 대하면 좋겠군."
"그렇게 될 겁니다."
라크락은 사이란과 휘경이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았다.
휘경이 보기 드문 인물이라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라크락이 보기에 앞으로 해보다는 득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물론 이번 문제를 해결부터 해 줘야겠지만.'
휘경이 연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낼 때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우선 우리의 거래부터 이야기하지. ...가져와라."
거래에는 몇 가지 기술 교류나 대규모 자원 교환에 대한 것이 포함 되어 있었지만, 라크락이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음의 것이었다.
리자드맨 전사 둘이 끙끙대며 수레를 밀고 왔다.
수레에는 커다란 직물 주머니가 실려 있었는데, 라크락이 주머니를 까서 열자 수레 가득 철편이 실려 있었다.
휘경은 철편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그 물건이군요."
"그래. 철인 건 분명하다. 우리가 쓰는 철보다 훨씬 단단하기도 하고."
검은 비늘 부족이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이 철편들은 그 강도에도 불구하고 제련이 극히 힘든 것이 단점이었다.
녹는점이 높고 리자드맨의 능숙한 대장장이가 쉽게 모양을 잡기 힘들었다. 라크락은 좋은 무기의 재료들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휘경은 이 이야기를 자동성의 대장장이가 말해 주었고 대장장이가 워낙 자신 있게 대답했기에 라크락에게 철편을 가져오면 제련해 보이겠다고 말했다.
휘경이 보았을 때 유목을 하는 리자드맨 부족보다는, 오랜 시간 광석을 만져 온 인간 대장장이 솜씨가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휘경은 라크락을 내궁으로 초대한 다음, 직접 철편을 작은 주머니에 옮겨 담아 대장장이에게 들고 갔다.
대장장이는 휘경에게 기다리라고 한 다음, 잠시 자신의 대장간에서 뚱땅거리며 씨름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온 대장장이가 말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성주님?"
045화
휘경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직 모든 희망을 버리진 않은 터였다.
"'안될 것 같다'니? 안 되면 안 된다, 되면 된다, 둘 중 하나로 확실히 하셔야지."
대장장이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안 됩니다."
"될 거라면서?"
"될 것 같다고 했었죠. 그때도 확실히 물어보셨으면 좋지 않았습니까."
휘경은 대장장이에게 자동성에서 대장간을 빼라고 하기 전에 아직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대장간이야 문제가 해결된 다음 빼 버려도 상관없었다.
"뭐가 문젠데?"
"쇠라는 건 열을 받으면 뜨겁게 달궈집니다. 이때 두드려서 모양을 잡지요. 그런데 이건 두드리는 게 퍽 힘이 듭니다. 다른 철편이라면 열 번을 두드리면 될 걸 서른 번, 마흔 번은 두드려야 됩니다."
"철이 아니라는 거야?"
"철은 맞습니다. 하지만 철도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종류가 나뉜단 말입니다. 아마 잘 두드려서 모양을 잡으면 좋은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질 좋은 철입니다. 개인적인 욕심도 나고."
"근데? 대장장이로서의 직업적 자존심을 더 불태워 볼 생각은 안 나는 거야?"
대장장이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가로저었다.
"저만큼은 힘들죠."
"...좋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그냥 녹여도 되잖아? 어때? 그냥 싹 다 녹여서, 틀에 넣고 모양을 굳히는 거지."
대장장이는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이미 해 봤습니다. 사실 해 보기도 전에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었죠. 이미 식은 철편을 다시 녹여서 쓰려고 하면 다른 철편이 됩니다."
"그냥 녹았다 굳은 건데, 왜?"
"그야 저는 모르죠. 그냥 그렇게 됩니다. 아까 어디서 온 철이냐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고 말했었지 않습니까? 어떤 철들은 녹였다가 다시 식히면 더 단단해집니다. 보통 무른 철들이 그렇죠. 하지만 저 철편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괴철로에서 녹였다가 굳히면 쉽게 부러진단 말이죠."
괴철로는 목탄을 통해서 뜨거워진다. 그 과정에서 탄소가 괴철로 안의 철에 들어가게 되니, 괴철로를 통해 녹은 철들은 탄소가 추가로 들어가게 된다.
철 함유량이 낮은 연철이라면 탄소 함유율이 올라 단단해지겠지만, 이마 탄소 함유율이 높은 철이라면 강도가 낮은 선철이 되어 버린다.
휘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에 대장간 안쪽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뛰어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성주님!"
"누구야?"
"제 아들입니다."
휘경은 대장장이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키는 물론 덩치도 아버지보다 크고 팔뚝도 굵었다. 오랜 시간 담금질로 단련된 팔뚝 위로 혈관이 선명히 보였다.
"가능하다고?"
"예. 이것 보시죠."
대장장이의 아들은 두 개의 철편을 내보였다.
휘경이 봐서는 똑같아 보였다.
"이것 보이십니까?"
"보고 있어."
"아니, 오른쪽 말입니다."
휘경이 잘 들여다보자, 망치에 두들겨졌는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정말 단단한 철입니다. 제가 다뤄 본 것 중 최곱니다. 이걸론 정말 좋은 농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리자드맨들은 무기를 선호하겠군요."
"...그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힘이 없어서 약한 소리를 하시는 거니 그냥 저희한테 맡겨 주십시오."
휘경은 대장장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괴철로 옆에서 작업하느라 얼굴에 실려 있던 열기가 휘경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땀이 뚝뚝 떨진 옷은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눈도 퀭한 빛이 돌고 있었다.
"이걸로 창촉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반나절이면 충분할 겁니다!"
질 낮은 연철에 충분히 단단한 강도를 내기 위해서는 철괴를 펴고 접으면서 산소와 결합시켜야 했다. 그만큼 단단한 강철을 같은 방법으로 제련하려고 들면 훨씬 많은 시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휘경은 속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넌 일단 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닙니다, 성주님."
"일을 하더라도 쉬엄쉬엄 할 수는 없고?"
"괴철로를 덥히는 데에는 목탄이 듭니다. 그러니 그 동안 일을 최대한 많이 해내야지요."
"지금 괴철로는 식었나?"
"예."
"방금 한 말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가서 좀 쉬어."
"감사합니다, 성주님!"
대장장이가 아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 아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실 겁니까?"
"아니."
"감사합니다."
휘경은 한숨을 쉬었다.
"엄살 부린 게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문제는 그대로군."
대장장이가 목을 벅벅 긁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불가능한 문제는 아닙니다. 효율이 나지 않는 문제지요. 계속 두드리면 결국 모양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쪽도 죽을 만큼 노력을 하겠다?"
휘경의 말에 대장장이가 헛기침을 했다.
"아니, 아뇨. 그냥 리자드맨들을 여기서 일하게 하면 안 될까요? 그쪽은 대장간이 없으니 쇠를 달구기 힘들어할 테고, 이쪽은 두드리는데 힘이 빠지니."
"그냥 니가 리자드맨들을 부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휘경은 대장장이의 떨떠름해 보이는 눈빛에서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걸 느꼈다.
"게다가 철편은 이게 전부가 아니야."
"그럼..."
"한 수레는 되는데, 아마 그게 끝도 아닐 거야."
"그럼 자동성 대장장이들이 다 들러붙어도 힘들 겁니다."
"일꾼을 늘려 보면?"
"무른 쇠들도 다루려면 몇 년은 배워야 합니다."
"제자를 늘려 보면 어때?"
"열에 아홉은 도망갈 텐데요? 그리고 언제 그 사람들을 다 가르칩니까?"
맞는 말이었다.
'소량이라면 대장장이가 말한 게 그나마의 방법이 되긴 하겠지만, 최선은 아니야.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문제에서도 리자드맨 손을 빌려 협력을 하게 되면 라크락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휘경은 라크락의 의뢰가 아니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휘경은 대장장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아무튼 대장간 뺄 때까지는 수고하고."
"예, 성주님. ...예?"
─┼
"물은 어디서 오나?"
"...예?"
라크락의 말에 휘경이 고개를 들었다.
뿔이 자란 덕분에 머리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멍하니 딴생각을 하면 고개가 기우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자동성 내부의 건물들과 성 주민들이 내려다보였다.
휘경과 라크락이 있는 곳은 절벽 한쪽을 깎아 만들어진 내궁의 식당이었다. 식당 벽 한쪽은 완전히 허물어져 외부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휘경은 라크락이 현인들처럼 이야길 하는 걸 좋아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동성에서 물이 어디서 오는지 물었는데. 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것 아닌가?"
"아아."
"듣기론 하수로라는 게 존재한다고. 위에서 흘러온 물이 내려가는 길이라고. 그럼 우물도 못 팔 테고."
"예, 그렇죠."
"그런데 자동성 위의 협곡 위에서 강은 보지 못했는데. 폭포도 없고."
다행스럽게도, 휘경은 '어라, 듣고 보니 그렇네요. 도대체 물이 어디서 오는 거죠?'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내궁 안쪽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있긴 합니다."
"물길?"
"예."
"아, 폭포가 건물 안쪽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은 거군. 고대 사람들은 참 똑똑해. 다행이야."
"다행입니까?"
"적들이 자동성을 공격할 때 수원지를 더럽히는 방법은 못 쓸 테니까."
그러면서 라크락은 자신이 다른 부족을 공격할 때 수원지를 시체로 더럽혔던 이야기를 자랑했다. 인간으로선 밥 먹으면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휘경도 어지간한 사람만큼 비위가 좋았다.
다행히 라크락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래서 철편은 어떻게 되었나?'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휘경은 밥을 먹고 떠난 라크락 일행 중 유일하게 남은 사이란에게 말했다.
"나 망한 것 같은데."
사이란은 아직 자리에 남아 약초 다린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아직도 그 철편 건으로 고민이십니까?"
"그래."
"방법이 안 떠오르는 겁니까?"
"응."
"대륙에서 상인들이 많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우리 대장장이들은 그 상인들에게 기술을 배우고 있고. 새로운 방법은 딱히 없어."
사이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라크락 님에게 사실대로 말해야죠."
"윽. 라크락이 날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까? '이 사기꾼 녀석 날 속였군' 이러면서."
"아뇨. 라크락 님은 충분히 관대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나도 못했는데, 그럼 그렇지.'"
"...무섭진 않은데, 묘하게 마음이 상하지 않아?"
"실패했으면 그 정도의 대가 정돈 치러야지 않겠습니까? 자동성이 다른 방법으로 값을 치루지 못할 것도 없고요."
사이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 가자."
"'문자' 공부 말입니까? 여기서 하실 줄 알았는데요."
사이란은 비단 꾸러미와 목탄이 든 주머니를 흔들었다. 휘경은 쓸모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검은 비늘 부족의 문자를 배우고 있었다.
검은 비늘 부족의 문자는 이미 꽤나 퍼져 있어서, 자동성에서도 소수의 상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누군가 물건을 빌려갔을 때 그걸 기록해 두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
휘경이 사이란을 데리고 향한 곳은 내궁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내궁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고, 오히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보니 장식이 없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창문이 없고 횃불걸이만 남아 있어 어두웠다.
"고대에는 이 안쪽까지 쓰였었나 보군요."
"아마?"
"그런데 왜 여기까지 들어온 겁니까?"
"자동성이 왜 자동성인지 알아?"
"저절로 움직이는 진흙 병정들 때문 아닙니까?"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휘경의 키보다도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진흙 병정 하나가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이들은 고대인의 갑옷과 투구를 묘사한 외형에 주로 개성 있고 엉성하게 만들어진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벽을 수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그 외에는 자동성 몇 곳의 지정된 자리에서 오와 열을 맞춰 가만히 서 있었다.
사이란은 진흙 병정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며 말했다.
"저것들은 여기까지 들어오는군요."
"응. 저 안쪽에서 만들어지거든."
"예? 그럼 방금 본 게 막 만들어진 진흙 병정입니까?"
"맞아. 저절로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지기도 하지. 하지만 숫자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아. 성 주민들이 부수지는 않지만 비가 많이 오거나 사고로 부서질 때가 있거든. 그럼 저렇게 보충되지."
사이란은 휘경이 태연하게 말해서 당황했다.
"저 진흙 병정들 말인데, 성벽을 고치는 것 말고 다른 명령은 내릴 수 없는 겁니까?"
"가능은 한데, 다른 명령이 날 지키라는 것 하나 밖에 안 돼."
"제일 필요한 명령이긴 하군요."
"아버지 말로는 옛날엔 명령이 더 많았을 거래.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잃어버린 거지. 아무튼..."
휘경은 복도 끝에 도달했다.
복도 끝에는 돌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다.
손잡이가 없었기에 사이란은 한눈에 힘으로 여닫는 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휘경은 목에 걸고 있는 성주의 징표를 집었다.
"여기가 진흙 병정이 만들어지는 '진흙 병정의 방'인데, 지금 보니 아주 중요한 다른 역할도 있어."
"뭡니까?"
휘경이 성주의 징표를 들어 올리자 성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사이란이 처음 들은 것은 물소리였다.
"자동성의 수원지지."
작은 호수였다.
절벽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물은 벽에 달린 물레방아에 물을 가득 채워 냈다. 물레방아는 물이 가득 차면 회전하면서 다음 물레방아로 물을 옮겨 담았고, 그렇게 몇 개의 물레방아가 벽에 박혀 있었다. 마지막 물레방아는 아주 느리게 돌아가 호수 위에 얌전히 물을 쏟아 냈다.
각 수차에는 긴 기둥들이 있어서 수차가 돌 때마다 돌아갔는데, 거기엔 복잡한 톱니바퀴들이 수차가 가진 힘의 방향을 바꾸었고 휘경과 사이란이 이해할 수 없는 더 복잡한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기계 장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계 장치 아래에는 진흙으로 채워진 거대한 항아리가 있었다. 항아리의 내부는 알 수 없는 힘을 근원으로 회오리 치고 있었다.
휘경은 보란 듯이 사이란을 돌아보았다.
"신기하지?"
"정말... 신기하군요. 고대 유적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이 정도는 처음 봅니다."
"하지만 구경시켜 주려고 온 건 아니야. 난 자동이라는 게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사람도 짐승도 뭔가 먹어야 힘을 쓰잖아. 수레도 누군가 밀고 당겨야 움직이고. 그런데 진흙 병정들은 아무것도 안 먹고 누가 밀고 당기는 것도 아닌데 움직인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 병정들도 어떤 힘을 근원으로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휘경은 자동성의 근원을 가리켰다.
"맞아. 물이 흐르는 힘이었던 거지."
휘경이 가리킨 것은 복잡한 기계 장치도, 진흙 병정이 태어나는 신비한 항아리도 아닌, 수차였다.
046화
휘경으로서도 물이 흐르는 힘이 정확히 어떻게 진흙 병정을 움직이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원통형 기구까지는 알겠어. 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기구의 각 바구니에 물을 채우고,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아래로 기울면 기구가 도는 거지. 기구가 돌면서 기구의 축도 함께 회전하고 그리고 축이 돌면서 저 부품들이 돌고...'
각 기계 부품에 시선이 가던 휘경은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에서 멈췄다.
'됐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하면 되는 거야.'
사이란이 말했다.
"그러니까, 물이 흐르는 힘을 이용한다는 겁니까?"
"그래."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휘경이 진흙 병정의 방 한쪽을 가리켰다.
"어차피 여기 수원지의 수량은 충분해. 그래서 저 벽을 뚫어서 물길을 하나 내는 거지. 여기는 자동성에서 꽤 높은 위치니까, 물을 흐르게 하면 물이 떨어지는 힘을 꽤 많이 이용할 수 있을 거야. 저 넓적한 원통 모양 기구를 여러 개 설치할 수도 있겠지."
"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저 기구를 층마다 하나씩 놔둘 수 있을 거야. 축이 돌면, 저기, 축과 축이 만나는 지점의 부품들을 봐. 마치 사람이 서로 다른 손으로 돌리듯이 돌잖아. 실제론 물이 흐를 뿐인데도."
"...구체적인 방안은 없다는 말이군요."
휘경은 머리를 긁었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어때? 분명 나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 거야. 토가 사람들이라던가."
"제 생각에도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족에서도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좋아. 그 대신 라크락 몰래여야 해."
"그러죠."
사이란은 휘경의 구상안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역대 성주 중에 휘경이 이런 생각을 한 첫 사람인 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겁니까?"
"뭐가?"
"왜 지금까지 성주들은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겁니까? 고대의 기술을 이용해 볼 생각. 사실은 이런 고대의 기술에 손을 대면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거나 하는 전승이 있었는데, 중간에 잊힌 건 아닐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고대인들의 경고가 있었다던가..."
"글쎄."
휘경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엔 그냥 겁쟁이들이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옛날에 만들어진 것들이니 이해할 수도 없고, 괜히 손을 댔다가 망가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기도 했어. 지금까지 성주라곤 몇 명 있지도 않았고, 그 전까지는 그냥 잊힌 폐허였는데. 나처럼 생각한 사람이 그냥 지금까지 없었던 거지. 아니면..."
"아니면?"
휘경은 주머니에서 라크락이 의뢰한 철편을 꺼내 들었다.
"이 단단한 철편을 이만큼 녹여야 할 성주는 내가 처음일지도 모르고."
─┼
휘경은 자신의 양쪽 볼을 쥐고 있는 리자드맨을 올려다봤다.
리자드맨은 휘경이 아니라 휘경의 양 뿔에 관심이 있는 듯, 코를 킁킁대거나, 휘경의 머리를 이리저리 밀고 당기며 뿔의 모양새를 살폈다.
휘경은 곁눈질로 사이란을 바라봤다.
"...이분이 누구시라고?"
"자올 님입니다."
라크락의 지어미 자올 또한 자동성에 들어와 있었다.
자동성과 검은 비늘 부족이 대규모 거래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물품을 확인하고 수량을 맞추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자올이 중얼거렸다.
"신기하군요. 뿔이 자라는 인간은 처음 봅니다. 아니, 뿔이 자라는 사람을 처음 보죠. 뿔 비슷한 게 자라는 걸 보긴 했었지만 그건 버섯이거나 질병이었는데, 이건 진짜 뿔이군요."
뿔은 자라나고, 뿔 끝은 그만큼 신경이 무뎌지기 때문에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휘경은 방금 자올이 뿔 끝을 핥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휘경은 사이란에게 말했다.
"자올 님은 이 행동이, 그... 하나의 부족을 이끄는 사람에게는, 조금... 무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
"아마 깜빡하셨을 겁니다."
자올은 사이란의 헛기침에 고개를 돌렸다.
그 다음 자신이 붙들고 있는 휘경과 눈을 마주쳤다.
"미안합니다, 자동성주."
"아닙니다, 자올 님."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아무 이야기도요. 막 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자올은 휘경을 놓아주었다.
"못 보던 걸 보면 관심이 가서 말입니다."
휘경은 자올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작업에도 관심이 많을 터였다.
역시나 휘경이 자올을 진흙 병정의 방으로 데려가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자올은 휘경의 아이디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식당으로 돌아온 그들은, 베껴 그린 기계 장치를 두고 어떤 식으로 설계를 이어나갈 것인지 검토했다.
자올은 목탄을 놓으며 말했다.
"실제로 움직여지는지는 완성품을 확인해야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많은 사람을 써야 할 겁니다. 저 일은 당장 해낸다고 음식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 대체할 만한 임금을 주어야 할 거고요. 그럼 많은 재물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역시나 이 일을 해내는데 많은 나무들이 필요 할 겁니다. 이 주변에서 충분히 단단한 나무는 구하기 어려우니 다른 곳에서 구해 와야겠지요."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돈이 들겠지만, 그것도 계산해 보니 가능합니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값비싸게 치르더라도 자동성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올은 그 말이 아니라는 듯 가로저었다.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이 일에 그만큼의 비용을 치렀을 때, 그만큼의 보상으로 돌아오느냐는 문제지요."
"아."
"감당할 수 있더라도 이 '수차' 공사가 끝났을 때, 자동성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자동성의 막대한 자산이 그냥 사라진 셈입니다.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은 거지요."
자올은 비단 위에 그린 여러 도면들을 정리해서 휘경 앞으로 밀었다.
"과거에 어떤 자동성주가, 아니면 다른 고대인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처럼 계산을 해 보고 수지에 맞지 않다고 여겨 포기했을지도요."
"없는 건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예."
휘경은 자올의 말대로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게 나은지, 아니면 자신이 떠올린 이 공사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강행할지 고민했다.
휘경은 돈이 많았지만 그 돈 중 자신이 벌어들인 것은 없었다. 상인으로서는 초보였다.
'미래를 알 수는 없나?'
-내가 알아차리는 미래는 바로 눈앞의 순간 밖에 없다.
'그럼 내가 보는 미래를 들어 봐.'
휘경은 자신의 뿔에게 말했다.
'첫 번째 수차의 축은 비워둘 거야. 앞으로 다른 자동성주가 쓸모 있다고 판단할지도 모르니까. 두 번째 수차의 축에는 풀무를 달아 둘 거야. 풀무는 괴철로에 바람을 불어넣을 건데, 물은 쉴 새 없이 흐를 테니 괴철로 또한 계속해서 불타겠지. 세 번째 수차의 축에는 망치가 달릴 거야. 사람이 두드리지 못하는 쇠를 납작하게 펼 수 있게. 마지막 네 번째 수차의 축은 맷돌을 돌릴 거야. 곡식을 빻거나 찧을 수 있게.'
-괜찮군.
'그게 다야?'
-내가 볼 수 없는 미래다. 내 생각엔, 괜찮아 보인다.
'괜찮아 보인다고?'
휘경은 창밖으로 자동성을 내려다보며 목탄을 탁상에 툭툭 두드리다가, 자올을 돌아봤다.
"해 보죠."
─┼
성운은 휘경과 자올이 계산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인부를 고용하는데 많은 자산이 들지만, 결국 그 인부들은 자동성 내부에서 돈을 쓰게 되리란 것이었다.
먹고 자고 마시는데 돈을 쓰게 되니, 인부들에게 쥐여 준 재물들은 결국 자동성의 상인들에게 돌아갔다.
자동성의 상인들이 부유해지니 자동성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이 많아졌다.
더 많은 재물들이 거래되니 그에 따른 차익이 휘경의 재물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휘경은 거대한 수차 공사를 위해서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오히려 돈을 벌고 있었다.
'토목 공사라는 게 그렇지. 거대한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면 더 큰 시장이 형성되고 더 큰 돈이 오가는 거야.'
인부들에게 일관된 고용 비용을 지급하기 위해 철편이 지급되었고, 철편을 구분하기 위해 검은 비늘 부족의 문자를 찍어 내면서 일종의 통화로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보이는 노란 상태창, '컨티넌트 메시지'가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제3 대륙 최초의 기축 통화 '편'이 성립되었습니다.」
「(알 수 없음) 부족에 의해 기축 통화 편이 성립되었습니다. 해당 통화는 현재 '6'개 부족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신뢰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컨티넌트 메시지를 치우자 아래에 일반 메시지 창도 떠 있었다.
「당신의 문명이 해당 통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당신의 문명은 통화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고, 통화를 사용하는 문명은 당신의 문명과 거래를 할 때 더 강한 신뢰를 느낍니다.」
성운은 별 감흥이 없었다.
'부족이나 종족들은 신뢰를 느끼겠지.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경계할걸. 다행스러운 점은 당분간은 다른 플레이어들도 누가 만든 돈인지 모를 거란 점이지.'
아직까진 각 부족 사이의 국경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상황이다.
바로 옆에 있는 부족끼리 신경 쓰느라 멀리 있는 성운에게 관심을 쏟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떠오른 컨티넌트 메시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제3 대륙 최초의 문자 '충문'이 성립되었습니다.」
「(알 수 없음) 부족에 의해 만들어진 문자 '충문'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문자는 '표의 문자'로 주로 '돌'과 '정', 또는 '비단'과 '목탄' 위에 쓰이고 있습니다. 해당 문자는 현재 '12'개 부족에 의해 쓰이고 있으며,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문명이 해당 문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문자를 사용하는 문명들은 서로 호의와 유대 관계를 느껴 외교를 할 때 더 강한 신뢰를 느낍니다.」
최초로 만들어 낸 것에 대한 보너스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크다고 할 수도 없었다.
통화와 문자는 하나의 문명이 열심히 사용한다고 이득을 보는 게 아니었으니까.
'통화나 문자,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 줄 게 아니면 경제나 문화를 발달시켜야 한단 말이지.'
다행이라면 성운은 두 쪽 모두 쓸 만한 카드를 얻은 상태였다.
─┼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예상하지 못한 난국들을 넘어야 했다.
최초의 수차는 너무 거대해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했고, 무너진 수차에 깔려 스무 명의 인부가 죽었다. 휘경은 인부들의 가족을 찾아내 보상금을 지급했다.
나무를 사기당하는 일도 있었다. 수십 그루나 되는 곧은 나무를 거래했는데, 정작 수레에 실려 온 것은 다 말라 가는 장작이었다. 사기꾼들을 추적하기 위해 검은 비늘 전사들이 고용되었고, 대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설계상의 실수가 있기도 했다. 세 번째 수차까지 완성되어 올라갔지만, 계산대로라면 네 번째 수차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휘경은 세 개의 수차로 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나, 과감하게 지금까지의 공사를 모두 무르기로 결정한다.
다시 한 번 세 번째 수차가 올려졌을 때, 다음의 메시지가 성운 앞으로 떠올랐다.
「'스킬:제철'이 2레벨로 올랐습니다.」
「당신의 문명은 이제 더 높은 단계의 철을 생산해 낼 기술과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당신의 문명은 강철을 원하는 대로 제련해 낼 수 있고, 더 단단하고 오래가는 철기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해당 기술은 전체 플레이어의 평균 문명 발전 속도 보다 '아주' 빠릅니다.」
목표로 하던 일이 성사되었지만, 성운은 이제 와서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047화
'처음에는 라크락이 강철 철편을 발견해 낸 걸 보고, 좋은 무장이나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강철 철편의 정보를 확인하니, 지금 문명 단계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다루기 불가능한 물건은 아니나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그 사실을 밝히고 값을 낮게 치러 팔거나, 아니면 멀쩡한 철편인 척하고 사기를 치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택해야 했다.
라크락은 두 가지 방법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세 번째 방법을 찾아냈다.
'고대인들은 더 좋은 철을 만들어 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
라크락은 기술 수준이 높은 부족들에게 해당 철편을 보여 주고 제련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자동성은 그런 부족 중 하나에 불과했다. 라크락도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휘경은 특별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었다.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아. 시장 구석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도 좁은 땅에서 더 많은 곡식을 재배할 방법이나, 음식을 더 오래 보관할 방법처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생각 하나 정도는 알고 있을걸. 하지만 나처럼 자산이 많지는 않지.'
휘경은 특별한 아이디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산이 많았고, 그 아이디어를 위해서 가진 그 자산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몇 가지 우연이 겹치자 이 일과 관계된 이들의 의도보다 거대한 사건이 되었다.
「건축물 '네 개의 수차'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건축물은 전체 플레이어의 평균 문명 발전 속도 보다 '월등히' 빠릅니다. 수많은 종족들은 해당 건축물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건축물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 도시의 유명도가 상승합니다.」
유명도가 높은 건축물, 이른바 '명소'가 있으면 그만큼 외교 관계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자동성의 상인이 거래를 하기 위해 먼 땅으로 떠났다고 가정하면, 단순히 북녘땅, 서녘땅에서 왔다고 하는 것보다 '자동성에서 왔다'고 하는 것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유적 또한 그 자체로 명소 취급을 받으니, 자동성의 유명도가 더해지면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더 넓어지는 셈이었다.
'다음은... 전쟁 준비인가.'
─┼
성운은 엘프의 신이자 롤플레이어 엘다르로부터 북해안의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북해안'이라는 용어를 쓰긴 하지만, 제3 대륙을 기준으로 북쪽 해안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꽤나 넓었다.
플레이어는 모두 셋으로, 남쪽에 경계를 걸치고 있는 엘다르가 첫 번째였고, 유목 부족으로 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솔롱고스'라는 두 번째 플레이어가 있었다.
이 두 번째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성운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있었다.
"켄타우르스라고?"
"그렇사옵니다."
로스트 월드에는 희귀 종족이 존재했다.
개체 수는 물론 무리의 개수도 적어서, 첫 종족을 선택할 때 정말 운이 좋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는 종족이었다.
물론 이런 희귀 종족은 이점만큼이나 나쁜 점도 있기 때문에 높은 승률을 노리는 플레이어들이 구태여 찾아낼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켄타우르스는 말의 몸에, 머리 부분은 인간형 종족의 상체를 가지고 있지. 종족 자체가 기마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만큼 개체수를 늘리기 힘들고 자원 소모가 크다. 첫 번째 종족으로는 부적합하지.'
성운이라면 솔직히 말해, 켄타우르스 무리를 발견했더라도 첫 번째 종족으로 정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종족은 정작 남이 하고 있을 때는 상대하기 까다롭단 말이지.'
상대는 모두가 기병인 셈이니 평지에서 전투를 하게 되면 상당히 불리할 것이다.
하지만 성운의 관심을 끈 것은 마지막 플레이어인 '임춘식'이었다.
"플레이어 닉네임이 뭐라고?"
"임... 춘식이라 하옵니다. 크흠."
성운은 분명 엘다르가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자식 한국인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면 성운도 국적이 드러나는 바,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한국인 비율이 높은 게임이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긴 했다.
중요한 것은 임춘식이 다른 두 플레이어, 솔롱고스와 엘다르와 함께 '느슨한 동맹'을 맺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동맹을 맺기 위해선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시스템에서 지원하지 않는 느슨한 동맹 관계가 자주 맺어지고 끊어졌다.
'아니, 동맹이라기보다는 임춘식이 다른 두 플레이어를 부하로 두고 있는 건가?'
헤게모니아는 임춘식을 비롯한 다른 두 플레이어와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싸워야 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고 적들을 방어하면서 문명을 발전시키려고 해도 북해안이란 위치가 좋지 않았기에 도망가는 선택을 했다. 유목 부족이 아니었다면 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헤게모니아는 임춘식과 직접 싸웠던 건가?"
"아닙니다. 헤게모니아는 임춘식과 직접 국경을 맞댄 적이 없었고, 주로 솔롱고스, 그리고 저와 싸웠사옵니다."
"그래서 헤게모니아가 병력을 온존할 수 있었던 거군."
엘다르의 표정을 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지만, 주력 부대가 성운에게 박살이 난 다음이라 딱히 할 말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엘다르와 별개로, 임춘식은 확실히 주의할 만한 플레이어였다.
"오우거는 다루기 힘든 종족인데."
"저도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오우거의 신 임춘식은 오우거 종족의 한계를 극복해 냈습니다."
오우거는 희귀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페널티가 워낙 많기 때문에 로스트 월드가 한창 인기 있을 무렵엔 농담이나 밈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오우거의 특징은 간단하지. 힘은 무식하게 세지만, 그만큼 멍청하다.'
로스트 월드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게임이었다.
지능이 낮다는 결점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가장 나쁜 요소로, 오우거로 플레이하게 되면 문명 발전을 사실상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난이도가 높아서 랭크 게임에서 보기 드문 것은 물론이고, PC와 플레이하는 상황에서도 그다지 추천받지 못했다.
오우거 플레이로 승리하는 것이 게임 스트리머 사이에 유행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최악의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 운만 맞아 떨어진다면 오우거는 최고의 선택 중 하나기도 하니까.'
오우거의 지능이 나쁘다면, 지능을 올려 주면 그만인 것이다.
성운은 리자드맨들에게 벌레의 소영역으로 축복을 내렸다.
덕분에 리자드맨들은 검은 비늘과 함께 단단한 비늘과 강한 힘, 그리고 화학적 독성에 대한 저항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런 영역을 통한 축복은 육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종류가 있었다.
성운은 이번에 인간을 두 번째 종족으로 선택하게 되면서 세 가지 축복을 내려 줄 수 있었다.
하나는 가축의 소영역에서 비롯된 '예민함'이었다.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위협을 빠르게 감지하는 능력으로, 통계를 확인하면 이 축복을 내리는 것만으로 종족 전체의 생존율을 퍼센트 단위로 상승시키는 인기 축복이었다.
다른 하나는 들풀의 소영역에서 비롯된 '활력'. 인간에게 준 축복 중 유일하게 육체적 능력과 관계가 있는데, 축복을 받은 인간 개체의 운동 능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켜 주는 능력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해수의 소영역에서 비롯된 '예측'이었다. 너무 복잡해서 예상이 안 되는 일에 일종의 감을 제공하는 축복으로 정말로 쓸모가 있는지 플레이어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었다. 성운은 '직접 플레이할 때 축복을 내려 보니 쓸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이렇듯 플레이어는 다른 스킬을 사용하면서 얻게 되거나 다른 흉신을 죽여서 얻게 된 소영역들을 통해 개체에게 축복을 내려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는 지능을 상승시켜 주는 축복도 있었다.
"오우거의 평균 지능이 10이라고...?"
"그렇사옵니다. 보통 오우거의 지능이 5이하라 능력치에 표시조차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성운은 지능이 높은 오우거를 생각하며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웃을 일이 아니긴 했다. 평균 지능이 10이라면 편차치에 따라 15에서 20까지 높은 지능의 오우거가 나올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부족의 리더로 문명을 발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지. 외교도 가능하고.'
플레이어 임춘식은 도박수를 걸었고 도박에 성공한 것이었다.
─┼
"그래서 나보고 느닷없이 공물을 보내라고 한 이유가 그거야?"
"그렇사옵니다."
엘다르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흠흠. 임춘식은 헤게모니아가 사라진 뒤 거래 상대를 잃었고, 저와 솔롱고스에게 과한 공물을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위로는 북해안, 아래로는 황야를 끼고 있는 저로서는 그 공물 요구를 맞춰주기 힘들었사옵니다."
"2대 1이잖아. 왜 싸우지 않는 거야?"
"오우거의 신 임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솔롱고스는 임춘식에게 호의적이옵니다."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임춘식이 솔롱고스에게 더 잘해 주는 편이지?"
"어... 그렇사옵니다."
"오우거 부족은 정주 부족이고, 솔롱고스의 켄타우르스는 유목 부족이라 그런 거 같은데."
"그게 관계가 있사옵니까?"
성운이 설명했다.
"정주민들은 유목민을 통제해야 하지. 그 넓은땅에 유목 부족이 켄타우르스만이 아닐 거 아냐?"
"다른 NPC 유목 부족들이 있사옵니다."
성운도 크고 작은 NPC 부족들이 황야와 북해안에 걸쳐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유목민들이 서로 싸우면서 견제를 하고 있지만, 분명 언젠가는 하나의 유목 종족이 통일하는 날이 온단 말이지. 그 경우엔 지능이 높은 오우거라고 해도 위험해질 거야."
그 위험은 이미 실존하고 있기도 했다.
성운의 검은 비늘 부족이 바로 그 통일된 유목민이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은 기병을 대동하고 있고, 가축을 다루고 지킬 전사의 비율도 높다. 또한 부족한 자원을 작은 정주민 군락에서 약탈해야 하기 때문에 전투 경험도 많다.
유목민은 정주민에 비해 강할 수밖에 없다.
"아마 헤게모니아가 있을 때는 두 개의 거대 유목 부족이 견제를 하고 있었겠지만, 헤게모니아가 떠나면서 오우거의 신 ...임춘식은 켄타우르스의 신 솔롱고스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게 되었을 거야."
"그럼 저는 왜...?"
성운이 말하는 정주민과 유목민의 관계는 실제 플레이어의 감정이라기보다, 그 역할 때문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주민과 정주민 사이의 관계도 간단했다.
성운은 가면 위로 코를 긁었다.
"정주민들은 땅이 곧 힘의 척도니까. 정주민들 사이는 나쁠 수밖에 없어. 땅을 많이 가져야 강해지는데, 땅은 항상 제한적으로 존재하지. 언젠가는 빼앗을 땅인데, 굳이 잘해 줄 필요가 있겠어?"
"앗, 그 말은..."
성운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모르겠어? 언제가 될 진 몰라도 너는 결국 배신당할 거야."
"음."
"배신은 아닌가? 지금까지 계속 당해 왔을 뿐이니까?"
엘다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성운은 몰래 미소를 지었다.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성운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도 곤란하지. 북쪽에 큰 세력을 주고 있으면 나도 견제할 곳이 늘어나니까."
"그렇사옵니까?"
"내 생각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하지만 주력 병력과 제사장을 잃은 제가 얼마나 큰 쓸모가 있을지..."
성운은 가로저었다.
"내 생각엔 그 소영역이 아주 쓸모가 많을 거야."
"제 소영역 말입니까? 제가 아직 말씀드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신명이 '춤추는 그림자의 신'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다면, 아마 소영역은..."
048화
북해안, 얼어붙은 대지.
북풍이 불어오고 웅크린 초목만이 겨우 목숨을 건사하는 곳.
켄타우르스 타마리두는 팔짱을 끼고 이방인을 내려다보았다.
이방인은 엘프 예언자로, 타마리두가 지난 몇 주간 찾아다니던 이였다.
이 엘프 예언자는 황야와 북해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녔고, 타마리두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때문에 쇠발굽 부족의 타마리두는 최초의 이야기를 하는 자를 찾아내고 싶었고, 그렇게 되었다.
"예언자야."
"예."
"이 대지에 널리 퍼트리고 다녔던 그 이야기를 내게도 들려다오."
"좋습니다. 이것은 곧 이루어질 예언입니다..."
예언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왕'이 찾아올 겁니다. 왕이 오면 세상의 질서는 새롭게 편성되고, 지금 군림하고 있던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 것이며, 자유롭게 땅을 오가는 이들은 길을 잃을 것입니다."
"왕이라고."
"예."
타마리두가 질문했다.
"왕은 무엇이냐?"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 자입니다."
"각 부족의 부족장들을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부족장들조차도 머리 조아리는 자입니다."
타마리두는 큰 켄타우르스 부족의 부족장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아니하였다.
단 하나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왕이란, 신을 말하는 것이냐?"
예언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신들께선 이 땅에 아니 계시지요. 하지만 왕은 이 땅에 있을 것입니다."
"부족장들의 부족장, 신만을 머리 위에 두는 자란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타마리두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럼 그것은 나를 뜻하는 것이구나."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타마리두는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예언자를 보고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이는 흔치 않았다.
타마리두는 이야기를 좀 더 이어 나가 보기로 했다.
"그럼 리자드맨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타마리두는 생각했다.
최근 남쪽에 검은 비늘 부족이라 불리는 리자드맨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잘린 귀 놀들이 지배하는 넓은 영역 때문에, 그들이 도망가고 나서 최근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된 부족이었다.
타마리두는 과연 세상은 넓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두렵지는 않았다.
'나도 리자드맨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추위를 두려워하고 굼뜨고 느린 이들이다. 여타의 종족과 다름없이 숫자를 앞세워 힘을 과시하는 이들일 터.'
예언자가 말했다.
"분명 그 리자드맨들은 강하고 두려운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이 북해안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가로막을 강자가 있기 때문에."
"하, 그것은 나를 뜻하는 것이로구나."
"예. 맞습니다."
"그럼 왕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예언자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 땅처럼 보였지만 몇 개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오우거들이 지배하는 땅이 나왔다.
"왕이 될 자는 거인입니다. 거대한 체구로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며 돌로 된 반석 위에 앉는다고 합니다. 켄타우르스조차 힘으로 이기지 못하고 그 지혜는 엘프보다 높다고 합니다. 그는 북쪽에 있습니다."
"내가 왕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저 오우거 부족장 카진을 왕으로 섬긴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틀렸다, 귀쟁이."
그 말에 엘프 예언자는 타마리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타마리두를 보기 전에 목이 떨어졌다.
타마리두는 자신의 애병인 거대한 도끼를 허공에 휘둘러 엘프의 피를 털어 냈다.
"나 타마리두는 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
엘프 예언자의 시체 위로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엘프의 신 엘다르는 무감하게 그 예언자를 바라보았다.
엘다르가 처음으로 얻은 소영역은 바로 '예술'이었다.
대부분의 소영역과 달리 극초반에 별다른 가치가 없는 데다 빌드업을 하기 위해 난해한 부분이 있어 낮은 평가를 받는 소영역이었다.
'물론 지금부터는 쓸모가 있어지지.'
성운은 엘다르에게 어떻게 소영역을 사용할지 설명했고, 엘다르는 그 말대로 했다.
다른 소영역들이 첫 번째 레벨에서 '창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술 또한 첫 번째 레벨에서 개체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꿈을 통해 계시를 내리는 것과 다른 점이라면, 영감이 불어넣어진 개체가 자신에게 도취된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영감이 자신이 해낸 생각이라고 믿었고 이야기나 시, 회화, 춤이나 연극 같은 예술적인 행위로 널리 알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런 영감은 전염되었다.
그리하여 엘다르는 떠돌이 엘프에게 거짓된 예언을 불어넣었고, 떠돌이 엘프는 예언자를 자칭하며 여러 부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퍼트렸다.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겨우 이걸로 괜찮겠사옵니까?"
"무슨 말이야?"
어차피 성운의 말을 따라서 본 손해는 떠돌이 엘프 하나와 조금의 신앙 자원뿐이니 별 효과가 없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성운이 자신만만해하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다르가 말했다.
"켄타우르스 부족장인 타마리두의 특수 능력치 중 '자존심'이 높은 걸 확인하고 화를 돋구는 데는 성공한 것 같사옵니다만... 하지만 이것만으로 켄타우르스와 오우거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타마리두가 오우거 부족에게 적개심을 가지더라도 결국 타마리두를 조종하는 이는 신이옵니다."
성운은 엘다르의 말을 쉽게 수긍했다.
"그러니까 더 좋지."
"더 좋단 말입니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부족의 생각이 일치하면, 괜찮은 상태야. 그게 결과적으로 플레이어의 종족과 부족을 패배하는 길로 이끌더라도 괜찮은 길이라는 거지. 하지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부족의 생각이 다르면?"
"아."
엘다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로스트 월드는 각 개체를 조종하고 움직이는 것이 직관적이지 않다.
로스트 월드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소영역을 이용해 부족을 움직이는 방법이 발달하지 않아서 무슨 관상용 게임이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이 게임에서 각 개체를 '강제로' 이동하는 방법은 강신같이 신앙 자원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방법뿐이었고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
성운이 덧붙여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 켄타우르스의 신인 솔롱고스가 무슨 전략을 짜고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솔롱고스는 언제까지고 '느슨한 동맹' 관계에 기대서 성장할 수는 없어."
"왜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성운이 말했다.
"정주민들은 땅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어. 하지만 켄타우르스는 결국 약탈 기반이지. 오우거 부족은 다소 척박한 환경이긴 하지만 땅에서 나는 산물들을 통해서 발전할 거야. 하지만 켄타우르스는 주변에 거대한 정주민이 동맹이지. 그럼 작은 NPC 중소 부족을 털면서 성장해야 되는데 결국 한계가 있지. 그리고 이게 애초에 오우거의 신 임춘식이 택한 전략일 거야."
"아!"
엘다르가 자신이 이해한 것을 정리했다.
"초반에 강할 수 있는 켄타우르스를 우호적으로 만들어 두고, 중반 이후에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 그때 집어삼키는 것이옵니까?"
"그런 셈이지."
성운이 말했다.
"나는 북해안에 새로운 음모를 집어넣는 게 아니야. 잊고 있던 사실을 알려 줄 뿐이지. 아니면, 곧 알게 될 사실을 좀 더 빨리 알려 주거나. 헤게모니아는 그걸 빨리 알아차리고 도망갔지만, 솔롱고스는 아니었지."
켄타우르스 부족장 타마리두는 이미 오우거들을 향해 적개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럼 그들의 신인 솔롱고스는 어떨까?'
성운의 입장에서 솔롱고스가 계속 임춘식을 믿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았다.
임춘식을 계속 믿으면 자신의 제사장인 타마리두와 갈등할 테고, 임춘식을 믿지 않으면 임춘식과 갈등하게 될 테니까.
엘다르가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타마리두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언이라고 하지만 진짜가 아닙니다. 추측일 따름입니다. 당장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진짜로 만들면 그만이지."
"예?"
성운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계속 도와줄 거지?"
─┼
엘프 예언자가 죽은 뒤에도, 그 예언은 쇠발굽 켄타우르스 부족의 부족장 타마리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엘다르가 가진 예술의 소영역이 가진 '영감'의 힘이었지만 그것을 타마리두가 알 방법은 없었다.
타마리두는 왕이라는 단어에 집착했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왕으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그리고 또 다른 부족장들이 왕으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마리두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왕이 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언에 따르면 왕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섬김 받는 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거친 황야에 타마리두의 이름을 알겠는가.'
하지만 운명이 타마리두의 탄식을 듣기라도 한 듯, 세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첫 번째는 녹안 부족의 엘프였다.
엘프는 오랜 동맹이었기에 타마리두는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 엘프 손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예언을 언급했다.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듣다마다."
"예언 속의 왕이 곧 오우거 부족장 카진을 뜻하는 것도?"
그 말에 타마리두는 주먹을 움켜쥐고 천막의 기둥을 후려쳤다. 마구간과 같이 거대한 천막이 크게 흔들렸다.
"너도 카진이 왕이 되리란 이야길 하고 싶은가?"
"아닙니다, 타마리두 부족장님. 저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반대?"
"왕이 되어야 한다면 곧 타마리두 님이 되셔야지요. 카진은 겉보기엔 온화해 보이나 둔하고 힘이 있어 보이나 그 힘을 휘두르기 싫어하는 겁쟁이입니다. 우리는 예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타마리두는 예언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난 지금까지 예언이 이루어지리란 걱정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깟 예언이 무엇인가? 내가 예언을 이겨 내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 손님은 자동성의 인간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곳에서 왔지만, 그 유명함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인간은 예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가 왕인 타마리두입니까?"
"뭐라?"
타마리두는 그렇다고 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왕이 아니다."
"아, 저 자동성에는 켄타우르스 왕이 나타났단 이야기가 있기에 그대가 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나?"
"소문뿐입니까? 저희 자동성 성주님은 왕이 나타났으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타마리두는 진귀한 선물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아쉬워했다.
"하지만 난 왕이 아니니, 이 선물을 되가져가는 게 좋겠군."
"무슨 말씀을."
자동성에서 온 인간 손님은 가로저었다.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말은 곧 왕이 되실 분이란 말 아닙니까? 적어도 왕이 될 만한 자질이 있단 말이지요."
"하지만..."
"그냥 가지고 계시지요. 두 번이나 걸음 하는 건 낭비 아닙니까?"
그 말에 타마리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보물들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타마리두는 세 번째 손님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손님은 검은 비늘 부족의 리자드맨이었다.
다른 두 손님들과 달리, 이들은 켄타우르스와 같이 소를 치는 이들이었다.
전투를 즐기는 데다 둘 다 잘린 귀 놀 부족과 싸웠던 경험도 있었다. 적의 적이기 때문에 아군이라는 말은 정주민들에게나 통하는 이야기다. 유목민들에겐 같은 적을 두었다는 건 언젠간 서로 마주쳐 싸울 운명이란 이야기였다.
타마리두는 세 번째 손님을 돌려보낼까 고민했다.
'그러나 오늘 온 손님들은 모두 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왕이라 이야기하였고. 이것이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고민 끝에 타마리두가 세 번째 손님을 들라 했고, 천막에 비단 옷을 입은 검은 비늘 리자드맨이 걸어 들어왔다.
리자드맨이 말했다.
"반갑소. 오웬이라고 하오."
049화
타마리두는 자신을 오웬이라고 소개한 낯선 리자드맨에게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 손님이 자신에게 왕이 되라고, 왕이 아니냐고 했기 때문이다.
타마리두는 오웬에게 먼저 말했다.
"그대도 내게 왕이 되라고 할 참인가?"
"오..."
오웬은 왕이라는 단어에 눈을 치켜떴다.
타마리두는 '역시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웬의 말은 타마리두가 기대한 그 말이 아니었다.
"그대가 왕이 될 거라고? 솔직히 그건 모르겠소. 미래의 일은 모르는 것이지 않소? 하지만 나는 그대가 왕이 될 생각이라면 그만두라고 하기 위해서 여기 온 거요."
어제까지였다면 타마리두는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면 화를 냈겠으나, 두 손님이 다녀간 지금은 화를 내기보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왜지? 왜 내가 왕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거냐? 내게 자격이 부족한가?"
"자격? 왕이 되는데 어떤 자격이 필요하오?"
"그건..."
타마리두는 생각을 위해 인상을 썼다.
타마리두의 지능은 15였고, 부족장으로서는 조금 부족한 지능이었으나...
"다른 부족장들의 인정인가?"
그래도 나름의 답을 찾아낼 정도는 되었다.
"그 자격을 얻어 냈소?"
"조만간 얻어 낼 것이다. 부족장은 아니지만, 오늘 찾아온 엘프와 인간은 내가 왕이 되기 충분하다고 하더군. 리자드맨은 어떻지?"
"그건 모르겠소. 나는 말릴 생각이지만, 나랑 우리 부족장님은 생각이 다를 수 있을 테니."
타마리두는 의아했다.
'부족과 부족장의 의견이 다를 수 있나? 부족장과 부족의 뜻이 일치단결하지 않아서야 부족을 이끌기는 힘들 텐데. 이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은 소문은 거창하지만, 사실 부족장의 힘은 형편없나 보군.'
타마리두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을 입으로 내뱉지 않을 정도의 교양은 가지고 있었다.
타마리두의 사회성은 22였고, 부족장이 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수치였다.
타마리두가 말했다.
"그래서, 그대의 부족장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나?"
"아니, 반대요."
"반대라고?"
"우리 부족장님은 아마 그대를 왕으로 인정할 거요."
오웬이 타마리두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덧붙였다.
"그딴 허명을 가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가지라고 하겠지. 진짜배기 위세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겠다고 할 테고."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니오."
타마리두는 또 생각이 어지러워졌다.
"아무튼, 엘프도 인간도 그대의 부족장도 나를 왕으로 인정할 터인데, 왜 그대는 내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자격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내 능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자격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오."
오웬이 가로저었다.
"그대는 왕이 되지 않는 게 더 좋소. 그대를 위해 하는 말이지."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그 누구에게도 섬김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게 나쁘단 말인가?"
"나쁠 수도 있소."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의 다음 말이 납득가지 않았더라면, 타마리두는 자신이 자랑하는 도끼를 집어 들었을 것이다.
"그대의 신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
타마리두는 그 단어에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께서... 내가 왕이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고?"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소."
"하지만..."
"아마 그대도 계속 모른 척했을 뿐, 사실은 알고 있지 않소?"
타마리두는 잊고 있던, 정확히는 잊으려고 했던 신의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타마리두는 최근 며칠 동안 끊임없이 같은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타마리두는 북쪽 산 위에 올라서서, 북해안을 내려다보려 한다.
하지만 북쪽 산을 올라가는 건 너무 힘겨운 일이다.
거친 바람이 타마리두를 휘감고, 고블린들이 타마리두를 덮치고,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 떨어진다.
타마리두는 꿈속에서 그 모든 일들을 이겨 내지만, 북쪽 산 정상에 이르는 좁은 외길을 힘겹게 걸어 오르다가 굴러 떨어진다.
타마리두는 꿈에서 깨어나며 깨닫는다.
현실의 북해안에는 그렇게 높은 산이 없다는 것을.
꿈만이 아니다.
타마리두는 '북쪽' 그리고 '오우거', 아니면 '왕'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부정한 일들을 겪었다.
바위가 발목에 채인다던가, 분명 눈으로 봤을 때는 없었던 구덩이에 발목이 빠진다던가 하는 일이었다.
타마리두는 애써 무시해 왔던 일이었다.
엘프와 인간 두 손님을 받고나서도 그가 혈기왕성하게 천막을 뛰쳐나와, 자신의 부족에게 북쪽으로 진군하자고 말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왜 신께선 내가 왕이 되길 바라지 않으시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내겐 나의 푸른 벌레신께서 계시고, 그대는 그대의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이 계시고. 서로 자신이 믿는 신의 뜻도 모르는데 남의 신이라고해서 그 뜻을 알까. 물론 추측해 볼 수는 있겠지만..."
"추측?"
켄타우르스 부족장 타마리두는 이야기꾼 오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웬은 자신의 곰방대에 평소 번개의 힘을 쓰고 태우는 약초가 아닌, 정신을 또렷하게 하는 담배를 태웠다.
타마리두는 오웬의 느긋한 동작에 초조해졌지만, 오웬을 재촉하면 그가 예의 추측을 말하지 않을까 봐서 침묵을 지켰다.
오웬은 담배를 크게 들이 쉬고 코로 연기를 뱉어 냈다.
"여기 지상에 사는 종족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지. 내 말이 맞소? 틀렸소?"
"맞다. 우리 켄타우르스만 하더라도 언제든지 불러 모을 수 있는 오크 부족과 드워프 부족이 있지. 저 북쪽의 오우거들은 고블린들을 노예로 부리고."
"그럼 신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겠소, 없겠소?"
"뭐?"
"내 생각에는, 당신들 켄타우르스의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이, 오우거의 끝없이 내려다보는 신 아래에 있는 것 같소."
그 말에 타마리두가 앞다리를 치켜들어 바닥을 크게 굴렀다.
"이놈! 지금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을 모욕하는 게냐?"
오웬은 가로저었다.
"사람이 아닌 신들의 위계를 이야기했소. 그런데 어찌 한낱 사람이 분노를 하는 거요?"
"하지만...!"
"그리고 그대가 분노를 해야 한다면, 내가 아니라 그대의 신을 억압하는 또 다른 신에게 할 일이지."
금방이라도 오웬을 내려칠 듯했던 타마리두는 씩씩거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너는 정말로 오우거의 신이 우리 신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하겠소?"
오웬이 조용히 읊조렸다.
"무언가 함정이 있었던 것이겠지. 끝없이 내려다보는 신이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을 골탕 먹였던 거요. 그래서 당신의 신은 오우거의 신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소. 그대의 신은 오우거 신의 눈치 때문에 그대에게 왕이 되라고 부추길 수도 없게 된 거요. 오히려 되지 말라고 방해하는 입장이 되었지. 슬프게도."
타마리두는 이제서야 모든 꿈과 암시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만약 사실이라면... 오우거의 신이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을 해야지 않겠소?"
"바라지 않는 일?"
"왕이 되는 것 말이오."
타마리두는 가슴 속 뜨거운 불길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앞선 두 손님은 그저 타마리두의 개인적인 욕망을 일으켜 세운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웬의 말은 달랐다.
이제 왕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에 대한 의무이자 기도였고, 타마리두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임무가 되었다.
타마리두는 이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왕이 되어야만 했다.
오웬이 말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은 그대가 왕이 되고자 한다면 오우거들과 켄타우르스 두 부족이 맞서 싸워야 할 것인데, 그건 동맹을 배신하는 일이고..."
"더는 그대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 돌아가도록 해라."
"...뭐, 그럼 좋소."
"하지만 날 일깨워 준 소중한 현인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타마리두는 돌아가는 오웬에게 인간에게 받은 보물 꾸러미를 주었다.
오웬이 떠난 이후 타마리두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 사이 거침없이 쇄도하는 신이 타마리두의 일을 방해했지만, 아무리 신이라고 하더라도 성스러운 임무를 등에 진 타마리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
북해안.
필멸의 존재들은 엿볼 수 없는 장소에서, 필멸의 존재들은 엿들을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솔롱고스는 고구려 개마무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철갑옷을 입고 복면으로 가려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이 세차게 내리고 있지만 솔롱고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솔롱고스가 임춘식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괜찮다, 아우야."
솔롱고스에 답하는 임춘식은 민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50대 초중반 중장년 남성을 예상하게 만드는 얼굴의 주름들과, 삼선 슬리퍼.
솔롱고스는 임춘식의 캐릭터가 실제 임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닉네임인 임춘식에 어울리는 외형을 갖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외형과 별개로 임춘식은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임춘식이 말했다.
"내 실수다. 그 이상한 컨셉충 엘프 녀석을 무시했던 게 컸어. 놈이 욕심을 내고 결국 다른 플레이어를 끌어들일 줄은 몰랐지."
"저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넌 헤게모니아를 상대해야 했잖냐."
임춘식의 이마와 튀어나온 배 위로 눈이 쌓여 갔다.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지."
"예?"
"곧 타마리두와 카진이 싸울 텐데, 타마리두가 죽으면 너는 중요한 제사장을 잃으니 말이다."
그 말에 솔롱고스가 웃었다.
"허허, 형님. 제가 사과를 드린 건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까닭도 있지만, 제 타마리두가 카진을 죽여 버릴 거라 그런 겁니다."
그 말에 임춘식이 씩 웃었다.
"그건 아닐 텐데."
─┼
타마리두가 전쟁을 하기 위해 휘하의 NPC 부족을 불러 모았고, 그 소식에 카진은 외지에 있는 작은 고블린 마을 주변에 방책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타마리두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고블린들은 오우거의 노예들일 뿐.'
타마리두는 곧장 오우거의 본대, 즉 카진의 목을 베기로 결정했다.
약탈을 위해서라면 고블린 마을을 공격하는 게 더 많은 이득을 줬지만, 이번 전쟁은 오우거 부족을 와해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굳이 방책이 있는 마을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켄타우르스는 모두 기병인 셈, 휘하 부족들 또한 기병만 골라서 진군하면 카진의 마을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진은 고블린들만 믿고 외부 방벽만 세우고 있다. 하지만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고블린 마을들을 충분히 피해서 카진의 마을까지 갈 수 있지.'
타마리두는 자신의 전략에 흠이 없다고 자신했다.
문제가 있다고 한 전사의 목을 하나 따긴 했지만, 자신의 말이 틀렸다고 한 것도 겨우 한 사람 아닌가?
타마리두는 힘이 58이었다.
이 정도 힘이면 부족장으로서 지능도 사회성도 대신할 수 있었다.
부족의 뜻을 하나로 합칠 수도 있었다.
"가자 전사들아! 이 길이 왕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타마리두는 70의 켄타우르스와, 휘하의 부족 기병 각 30, 60을 더해 총 130의 기병으로 카진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을 따라, 간혹 고블린 마을을 피하면서 타마리두는 진군했다.
하지만 타마리두의 진군은 그리 멀리가지 못했다.
"타마리두 님! 전방에 고블린들이!"
타마리두는 카진이 자신의 전략을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할 수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카진은 타마리두가 고블린 마을들을 피해서 진군할 것을 예상하고, 예상되는 진군 경로에 고블린 부대를 준비해 둔 것이다.
하지만 타마리두는 걱정하지 않았다.
"적은 겨우 고블린들이다! 숫자는 제법 많지만 그대로 발굽으로 치고 가면 그만이다! 돌격!"
그 말대로였다.
고블린은 그 수가 300에 이르렀지만, 제대로 된 활도 들지 못했고 심지어 무장하지 않은 놈들도 있었다.
군인이 아닌 글자 그대로 고블린 노예들을 머릿수만 채워 넣은 것이다.
고블린들은 그대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들이 있는 장소는 좁은 언덕길이었다.
피에 취한 타마리두와 그 전사들은 고블린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소수의 고블린들이 저항을 시도했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타마리두는 이대로 승리의 기세를 끼고 진군하면 카진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블린이 길목을 막아선 순간 카진의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말이다.
아무도 숨어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덤불 속에서, 오우거들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덤불과 나무를 부러트리며 등장했다.
키 3.5미터, 체중 1톤.
목이 짧고 배가 튀어나온 거인들이었다.
당황한 켄타우르스와 기병들은 가까이 접근한 오우거들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죽은 고블린과 산 고블린으로 발이 엉켜 있었고,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느라 체력도 소모한 상태였다.
몇몇 기병들이 말을 듣지 않는 말에서 내려 도망을 시도했지만, 켄타우르스들은 그럴 수 없었다.
돌진할 수 있는 켄타우르스들은 오우거보다 강했지만, 돌진할 수 없는 켄타우르스들은 오우거보다 약했다.
망치와 몽둥이로 무장한 오우거들이 켄타우르스의 머리를 까부수기 시작했다.
그래도 타마리두는 제자리에서 오우거 전사 두 명의 목을 따 버렸다.
하지만 세 번째 오우거 전사는 남다른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부족장 카진이었다.
둘은 서로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두 사람의 무기는 엇갈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둘의 싸움은 곧장 맨손 싸움으로 이어졌다.
카진이 결국 타마리두의 목을 붙잡았다.
타마리두는 카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타마리두의 힘은 58이었고, 그 누구와도 힘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카진은 타마리두의 손을 피해 등에 올라탔다.
타마리두는 그 무게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
카진은 손이 아닌 팔목으로 목을 졸랐고, 자세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목을 비틀었다.
-빠드득
켄타우르스의 두꺼운 목뼈가 부러지며 타마리두는 쓰러졌다.
카진은 손바닥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다음 켄타우르스의 목을 부러트리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050화
황야.
우기가 끝나고 다시 풀들이 메마르는 시기.
북풍이 이곳까지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 거친 땅 위에 두 신이 서 있었다.
엘다르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이길 작정이십니까?"
성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시스템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우거 카진과 켄타우르스 타마리두의 전쟁 소식은 널리 퍼져 나갔다.
결과는 오우거 카진의 대승이었다.
"저는 그래도 켄타우르스가 오우거에게 꽤나 피해를 입힐 거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오우거가 강하다곤 하지만, 켄타우르스도 희귀 종족에다가 전투력이 높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노예로 쓰이는 고블린들이 좀 죽고, 오우거는 열 명도 죽이지 못했다고 하니..."
엘다르는 중얼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부터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은 했사옵니다. 최고의 힘을 가진 오우거 종족에 축복을 통해 지능을 올리다니. 우연에 우연을 더해서 나온 조합이니 강할 수밖에요."
성운은 대답 없이 상태창을 휙휙 올렸다가 내리기도 했다.
엘다르는 계속해서 혼자 말했다.
"제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성운 님의 주력 병력은 리자드맨들 아닙니까? 하지만 리자드맨들은 추위에 상대적으로 약하니 북쪽에서 싸울 때 전력을 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인간 병력들은 육체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축복을 받지 않은 데다 그 숫자도 많지 않은 걸로 압니다. 하다못해 제 주력 병력이라도 있었다면..."
성운이 고개를 들며 엘다르의 말을 끊었다.
"필요 없어."
"예?"
"엘프 주력 병력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오히려 있었으면 조금 더 귀찮아졌겠지."
"무슨 말입니까?"
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앞의 상태창들을 내렸다.
"너야말로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절 부른 건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 회의를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딴 일에 왜 회의가 필요해?"
엘다르는 놀란 듯 성운을 올려다봤다.
"솔롱고스와 임춘식 두 신은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강신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임춘식의 지원을 받는 데다 고스란히 전투력을 보존한 오우거들을 상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리자드맨들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성운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말했다.
"전쟁을 하는 건 나랑 임춘식이고, 나는 어떻게 오우거들을 상대할지 판단을 끝냈어. 작전 회의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예?"
"그보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봐. 랭킹이 몇 위였다고?"
엘다르는 자신의 '설정'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외람되지만 3400위 정도였사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말이지."
"예."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어 숫자를 감안하면 3400위도 잘한다고 볼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건가?'
성운은 최초의 서른 두 명의 플레이어가 선별될 때, 랭킹 순으로 끊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두 번째로 만난 플레이어가 2위였던 헤게모니아였기 때문에 엘다르를 만났을 때 엘다르가 랭킹 32위 안에 들지 못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엘다르는 성운의 고민에 대해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냥 무작위로 플레이어를 선별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운의 생각에 랭킹 1위와 2위가 선별된 것은 우연치고는 제법 의도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엘다르 또한 2만 3400위나 4만 3400위가 아니라 미묘하게 등수가 높은 3400위라는 사실도 의아했다.
'단순히 게임 랭킹이 아니라 선별되는 조건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 조건이 뭘까? 왜 그런 조건이 필요했던 거지?'
성운은 고민을 잠시 접어 두어야 했다.
엘다르가 성운이 거북해하는 그 말투로 어떻게 오우거와 임춘식을 상대할 것인지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성운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엘다르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 계속 협조하는 거 맞지?"
"...뭘 말입니까?"
"협조 고맙다."
"...예?"
─┼
임춘식이 게임을 시작할 때 얻은 소영역은 바로 '새'였다.
임춘식은 소영역을 확인하고 자신이 게임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고 판단했다.
새의 소영역은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는 소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새라는 특징 덕분에 넓은 지역을 정찰하기 편리했고, 특히나 '올빼미의 지혜' 그리고 '까마귀의 지능'같이 유용한 축복을 자신의 종족에게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첫 번째 지역에서 오우거를 발견했을 때 임춘식은 승리에 가까워졌다고 판단했다.
'이건 거의 떠먹여 주는 것 아닌가?'
임춘식의 로스트 월드 최종 랭킹은 153위지만 한창 물이 올랐을 때는 20위권을 오가기도 했었다.
국내 스트리머 주최의 대회에선 총 128명 중 4위를 한 적도 있었다. 별난 아바타 덕분에 입소문을 타서 스트리머들과 방송을 몇 번인가 같이 하기도 했다.
'실력도 괜찮은데 운도 있어. 이건 질 리가 없다.'
임춘식은 자신의 확신대로 큰 장애물을 겪지 않고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엘다르와 솔롱고스가 주력을 몽땅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뷸라. 분명 랭킹 1위였지. 방송도 안 하고 대회도 안 나오고 밥 먹고 게임만 한다는 미친놈.'
저 아래에서 얼쩡거리던 리자드맨의 주인이 네뷸라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건 실책이었다.
하지만 임춘식은 흐름에 큰 지장은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운빨 게임인 거지. 소영역은 랜덤, 종족도 사실상 랜덤. 어느 정도 실력이 받쳐 주면 그 다음부터는 운의 문제야. 게다가 벌레랑 리자드맨? 둘 다 추위에 약하잖아.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도록 조합하는 게 기본 아냐?'
임춘식은 리자드맨들의 공격에 대비해 자신의 오우거 부족장 카진에게 물자를 축적하도록 암시했다.
그와 더불어 임춘식은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국경선 부근으로 정찰을 집중했다.
분명 리자드맨들이 겨울이 오기 전, 단기 결전을 노릴 거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자드맨들은 가을이 끝나가도록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엘프 마을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
검은 비늘 부족이 엘프 마을을 불태우고 다닌다는 소식은 자동성에도 전해졌다.
시장에 모인 상인들은 연일 그 이야기를 했고, 더 이상 황야 위쪽으로는 교역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타마리두가 오우거 카진에게 도전해서 죽고 난 뒤, 빈 땅은 검은 비늘 부족이 사실상 차지했다더군. 검은 비늘 부족은 그쪽에선 지나가는 행상들을 모조리 약탈한다고 하고."
"그것뿐인가? 라크락은 지난 엘프의 공격을 보복하기 위해 지금 엘프 마을을 불태우고 있다고 하니."
"황야를 가로지르는 것과, 녹안 엘프의 지역을 가로지르는 것 모두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당분간 오우거들과 거래하기는 힘들지 않겠나?"
대륙 중앙에선 황야를 가로지르면 켄타우르스 타마리두가 지배하는 지역을 지나 오우거들과 거래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길이 끊어진 것이다.
오우거가 있는 땅은 곡식을 기르긴 힘들지만 금속 광산이 있어 좋은 거래가 가능했기에 아쉬워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해안으로 향하는 교역로가 막혔으니 이를 어쩐다."
"거래할 상품이 뭔가? 마침 검은 비늘 부족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동성 남동쪽 길로 가면 비단을 좋은 값에 거래해 준다더군."
"그래? 내 고향에서 비단은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내가 거래하려는 건..."
그리고 녹안 부족 엘프들은 사람들이 걱정한 것보다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엘프의 신인 엘다르가 리자드맨들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미리 경고를 해 준 데다가 리자드맨들은 엘프들이 도망칠 때까지 얌전히 지켜봐 준 것이다.
게다가 엘프들이 황야 아래에 임시로 터를 잡기 시작했을 때도 딱히 공격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목표는 엘프가 아니라, 엘프들이 살던 땅이라는 듯.
처음에 임춘식은 이와 같은 변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엘프는 주력을 잃었으니 당분간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 이상한 취미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엘프를 괴롭힐 이유가 없다.
게다가 솔롱고스의 지역을 점거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켄타우르스도 주력을 잃었다.
NPC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빈 땅이기 때문에 점거하기 위해서 병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약탈을 통해 수익을 벌려고 해도, 예민한 상인들이 금세 교역로를 포기할 것이니 의미가 없었다.
'둘 다 큰 자원이 드는 건 아니지만 굳이 자원을 소모하면서 벌일 일은 아니야. 더군다나 전투를 앞두고 말이지. 아니, 전투를 하긴 이미 늦었어. 곧 겨울이 다가온다. 리자드맨들이 북쪽으로 올라오긴 늦었는데...'
그 말은 네뷸라가 당분간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임춘식은 뒤늦게 네뷸라의 의도를 깨달았다.
"...청야 전술!"
─┼
"다른 말로는 초토화 전술이라고 하지."
성운은 엘다르에게 설명했다.
"상대가 점령할지도 모르는 지역을 몽땅 다 불태워 버리는 거지. 황폐화시키고. 로스트 월드는 실제 전쟁처럼 보급의 중요도가 높으니까, 똑같이 써먹을 수 있어. 아마 너도 몇 번은 써 봤을걸?"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초반에 쓰는 걸 본 적은..."
"그렇지. 보통은 이런 초반엔 안 먹히니까. 하지만 이번엔 조건이 맞아떨어졌어. 운이 좋았다고 해야 되나?"
"운이... 좋았단 말입니까?"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상대의 지역이 북해안이란 점."
"그건 운이 나쁜 거 아닙니까? 리자드맨들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지 않사옵니까?"
"아,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 하지만 북해안은 위도가 높은 만큼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기 힘들어. 논밭 농사가 시원찮을 텐데, 오우거들이 그 높은 지능으로 빠르게 문명을 발전시킨 덕에 무역을 활성화해서 식량을 남쪽에서 수입하고 머릿수를 늘렸지. 무리의 크기가 커졌는데, 무역로가 뚝 끊기고 약탈할 엘프들도 사라진 거야. 그럼 어떻게 보급을 할까. 채집과 사냥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모두의 배를 채울 수는 없을 거야. 게다가 오우거들은 고블린 NPC 노예까지 부리고 있지."
엘다르는 성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NPC를 노예로 삼는 건 게임 초기에 나올 수 있는 무난한 전략이다. 하지만 주인 종족의 상황이 나빠지면, 노예 종족은 언제나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상대가 오우거란 거야."
엘다르는 또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상대는 약점을 극복한 오우거 아닙니까?"
"약점?"
"지능이 높은 것 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긴 하지. 근데 오우거의 진짜 약점은 그게 아니야."
"...그럼?"
"모르겠어? 덩치가 큰 게 약점이야. 힘이 세고 강한 게 약점이고."
"그게... 어떻게 약점이 됩니까?"
성운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로스트 월드는 애초에 현실적인 게임이었어. 덩치가 크면, 기초 대사량이 높고, 결국 먹는 게 많다는 말이야. 당장 겨울을 나기 위해서 버텨야 하는데 근육량도 많고 기초 대사량도 높단 말이야. 로스트 월드에서 적은 다른 플레이어만 있는 게 아니야. 환경 그 자체가 적이기도 하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결국 약점이야. 체구가 작은 종족들은 이쪽이 청야 전술을 하더라도 오래 버틸 거야."
엘다르는 그제야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은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는 엘다르가 아직 이해를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상태창 몇 개를 띄웠다.
"내가 그냥 감으로 이런 말을 하나 싶나 본데, 나름 계산법이 있어. 전략 전술 게시판에 죽돌이로 있던 사람이 청야 전술 쓸 때 상대 종족이랑 기후랑, 문명 발전 정도랑, 지역의 크기랑 이것저것 변수 넣으면 값이 나오도록 만든 게 있거든.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경험이랑 비교하면..."
"그것까지는 알려 주셔도 모릅니다."
"그래? 아무튼 납득한 건 맞지?"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이 상태창을 끄면서 무심히 말했다.
"그리고 너도 내 행운이긴 하지."
"저, 말입니까?"
엘다르는 자신이 언제 행운의 마스코트 같은 것이 되었나 잠깐 설렜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원래 이런 전술은 결국 내 땅을 불태워야 하거든. 그런데 막상 접하고 있는 지역이 내 땅이 아니라 엘프 땅이니까. 게다가 정주민이라서 불타기 전에는 오우거들에게 꾸준히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태웠을 때 효과가 확실한 점도 있고."
"...예에."
"아무튼 내 작전이 통하는지 보라고."
오우거들은 첫 번째 겨울을 전쟁을 위해 비축해 둔 물자들로 버텨 냈다.
하지만 봄이 왔을 때 음식을 얻기 위해 수풀들을 뒤져야 했다. 엘프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 오자 허기진 오우거들이 고블린들을 산 채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가을이 되자 더 이상 노예이길 거부한 고블린들이 오우거들을 공격했다.
겨울에 이르러 오우거들은 고블린들과 싸워 이겼다. 하지만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모두 도망치자, 오우거들은 먹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굶주린 오우거들이 황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성운의 뜻대로였다.
051화
오우거들의 부족장 카진은 현명했다.
지능이 43이었다.
이 수치는 오우거로서 높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족들, 다른 부족장들과 비교해서도 높은 수치였다.
때문에 자신의 끝없이 내려다보는 신께서 적들에게 내려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때 그 뜻을 곧장 이해했다.
리자드맨들은 호시탐탐 북해안을 노리고 있었고, 이미 엘프를 공격하고 자신과 켄타우르스 사이를 이간질해 싸우게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추위에 약한 리자드맨들은 북해안을 노릴 시기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시기가 지나 다시 날이 추워지면 엘프 마을들을 약탈하면서 약해진 리자드맨들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일이 그렇게 좋게 풀리진 않았다.
카진은 현명했기 때문에, 리자드맨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 분노를 잘 풀어낼 줄도 알았다.
카진은 자신의 정예인 오우거 전사들을 후려 패는 대신 숫자도 많고 죽여도 금세 숫자가 불어나는 고블린들을 후려 팼다.
카진은 텅 빈 황야와 몽땅 타 버린 엘프 마을들이 적들의 솜씨임을 알았지만, 마땅한 방책은 없었다.
그런 소모성 싸움이 리자드맨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을 테니 길게 이어지리라 믿을 뿐.
끝없이 내려다보는 신 또한 그저 기다리라고 알려 왔다.
신께서 '기다리라'는 암시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도 카진은 현명했기에, 신께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시련이었다.
카진은 이 시련을 넘기면 다시 영광이 돌아오리란 것을 알았기에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덜 현명한 오우거들은 그렇지 않았다.
꽤 많은 오우거들이 신들이 자신을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실제로 굶고 있었다.
고블린 노예들을 통제할 능력도 잃어버렸다.
카진도 처음에는 그런 이들을 말로 설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많아지자 자신의 몽둥이를 들어야 했고, 종국에는 남쪽으로 도망가는 무리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간 오우거들은 얼마 없는 정찰병들에 의해 시체가 발견되거나 고블린들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봄이 올 무렵엔 카진도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계속해서 버티거나, 무리가 더 약해지기 전에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이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은 임춘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춘식은 연락하지 않았던 솔롱고스를 귓속말로 불렀다.
"솔롱고스야."
"어쩐 일이십니까, 형님."
두 사람은 자신의 두 제사장, 타마리두와 카진이 싸운 이후로 쭉 대화를 하지 않았다.
사실은 대화를 할 것도 없었다.
솔롱고스는 자신의 지역을 오가는 리자드맨들로부터 켄타우르스를 도망 다니게 만드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솔롱고스는 임춘식을 도울 여력도 없었다.
"너 병력 얼마나 되냐?"
"전사는 형님한테 다 잃어서 이제 없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도?
"예."
"쓸 만한 놈들은 있을 거 아니냐."
"쫓기면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씁."
현 문명 단계에서 전사라는 건 결국 능력이 있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다.
그러니 전사가 죽었다고 전사 계급이 갑자기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전사들이 죽으면 훈련받지 못한 더 어린아이들, 아니면 늙어서 더는 전과 같은 재주를 받지 못하는 늙은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이들은 외부의 위협에 더 약해지고, 전사가 죽길 반복하다 보면 얼마가지 않아서 무리가 무너진다.
"...더군다나 켄타우르스는 강인한 종족 아닙니까?"
"...그래."
약한 종족이라면 이 무리의 결속이 더 오래갈 수 있다.
홀로는 생존하기 힘들기에 무리가 더 오래 유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인한 종족들, 정확히는 힘 능력치가 일정 수치 이상 높은 종족들은 가족 단위, 어쩌면 개체 단위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독립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종족은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다.
이런 떠돌이 개체들이 짝을 만나고 무리를 지으면 다시 부족이 될 테니까.
하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았다.
솔롱고스가 말했다.
"안 그래도 형님한테 먼저 연락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뭐 때문에?"
"저한테 제안이 들어왔었습니다."
"뭐? 네뷸라가?"
"예. 아니, 아뇨. 정확히는 엘다르였습니다."
"뭐라고 제안했는데?"
"자신처럼 네뷸라 아래로 들어와서 임춘식 형님을 막는데 협조하면 제 목숨은 부지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임춘식은 침을 삼켰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입니까? 엘다르 꼴 좀 보십시오.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게다가 비록 일이 틀어져서 형님과 싸우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의지해 오지 않았습니까? 단칼에 거절했죠."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솔롱고스는 꽤 오래 고민을 했다.
아마 엘다르가 비아냥거리는 것만 아니었다면 솔롱고스는 네뷸라, 성운의 편에 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강을 건넜으니, 솔롱고스는 임춘식에게 필요 이상으로 솔직해질 필요가 없었다.
임춘식은 그 거짓말 덕분에 감동했다.
"너 이 자식..."
"병력이 없다고는 했지만, 잘 추리면 활도 쏘고 창도 잡을 줄 아는 것들은 열 명 정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전투 한 번은 해 볼 만합니다."
"그래?"
"그걸 위해서 연락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 맞다."
임춘식은 안도했다.
'네뷸라 그놈이 켄타우르스에게 접근하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아니지. 처음 엘다르가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아니야. 리자드맨들이 황야 아래에서 얼쩡거리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임춘식은 최후의 전투를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솔롱고스와 임춘식은 신앙의 기반이 되는 자신의 부족원들을 잃어버려서 신성 레벨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임춘식은 로스트 월드의 전투는 결국 신이 얼마나 개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솔롱고스와 싸울 때처럼 방어전을 하는 게 아니라, 개활지에서 싸운다면 결국 신들끼리의 전투다. 놈의 레벨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확실히 앞설 수 있어.'
임춘식은 자신이 싸울 황야를 새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엘다르는 계산에 넣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놈의 본대만 박살 내면 나머지 지역을 수복할 수 있는 거지. 모두 다시 재건할 수 있다. 고블린 노예들도 다시 부리고, 무역로도 다시 개척하고...'
임춘식은 카진에게 남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일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전쟁!'
카진은 자신의 선택을 대신한 신의 뜻을 기쁘게 따르기로 했다.
카진은 신의 뜻대로 싸울 수 있는 모든 오우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모두 스물.
여기에 너무 어리거나 늙은 것 같은 켄타우르스들이 합류하였다.
오우거들과 켄타우르스 모두 그것이 신들의 뜻임을 알았다.
카진이 보기에는 싸우기에 부적합해 보여 일종의 식량인가 생각했으나, 카진이 가장 어린 켄타우르스를 산 채로 잡아먹기 전에 황야 한가운데에서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정찰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숫자는 50명, 모두 코카투라고 불리는 코카트리스와 닭의 교잡종을 탄 기병이었다.
그중 우두머리가 탄 것은 아주 크고 생김새도 특이했는데, 바로 코카트리스였다.
우두머리가 바로 라크락이었다.
신이 곧 카진의 몸에 강신했다.
전사 서른이란 숫자는 얼핏 적어 보이지만 다른 종족이 아닌 켄타우르스와 오우거의 조합이었다.
임춘식=카진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아니, 최소한 라크락만 죽여도 충분했다.
'거기에 만약 운이 좋아 네뷸라가 강신한 상태라면...'
임춘식=카진이 늙은 켄타우르스에 강신한 솔롱고스에게 말했다.
"가자, 솔롱고스."
"예, 형님!
오우거와 켄타우르스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
성운의 생각에, 전투는 별로 치열하지 않았다.
'강신해서 달려오면 이길 줄 알았나?'
애초에 두 플레이어의 신성 레벨은 각각 6과 5.
합쳐 봤자 11인 성운과 동급이었다.
둘이나 강신을 해서 달려오는 통에 성운도 강신을 해야 했지만, 창조물을 소환하지도 않았고, 다른 기적을 쓸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강신을 해서 달려든 덕분에 생각지 않은 수확도 있었다.
성운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플레이어 '임춘식'이 봉신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임춘식'을 쓰러트린 최고 기여자...」
「...플레이어 '네뷸라(94.3%)'」
「플레이어 '솔롱고스'가 봉신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솔롱고스'를 쓰러트린 최고 기여자...」
「...플레이어 '네뷸라(78.6%)'」
플레이어는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자신을 믿는 신도들을 잃거나, 창조물이 죽거나, 제단이 파괴되거나, 예언에 실패하는 등 많은 조건에서 경험치를 잃는다.
'그리고 가장 많이 잃는 조건은 바로 강신 상태일 때.'
강신은 스킬을 사용할 때도, 그리고 스킬을 해제할 때도 딜레이가 있었고, 스킬을 미처 해제하지 못하고 예기치 못하게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경우 레벨 다운은 각오를 해야 했다.
경험치를 잃으면 레벨 다운이 일어나고, 1레벨 이하로 레벨이 떨어지면 '봉신(封神)' 되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봉신은 사실상의 탈락, 플레이어들은 그냥 '죽었다'고 지칭했다.
게임 로스트 월드의 경우엔, 탈락이 되면 게임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대기실로 튕겨졌다.
그러다가 봉신이 풀리게 되면 게임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보통 그런 경우는 없지. 아마 여기엔 대기실도 없을 테고.'
성운은 자신의 소지품 창을 확인했다.
소지품 창에는 막 생성된 두 개의 아이템이 있었다.
「봉신된 임춘식」
「봉신된 솔롱고스」
가장 많은 경험치를 잃도록 만든 기여자가 봉신 상을 얻게 된다.
게임의 초반인 만큼 두 신 모두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지 않아 성운의 기여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94퍼센트에 78퍼센트인가.'
성운은 봉신 상을 꺼내서 확인해 보려다 둘 다 돌로 만든 작은 동상 형태라서 건드리기가 찝찝했다. 특히 임춘식 쪽이.
'여기에서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완전히 파괴하면 게임에서 제외. 또 다른 과정을 거치면 봉신이 풀리지.'
일반적으로 봉신을 해제하는 것, 죽은 신을 되살리는 건 동맹이 있는 경우였다.
파괴하는 것 또한 봉신한 플레이어에게 동맹이 있는 경우 협박하거나 부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운은 봉신 상태를 해제할 생각이 없었기에 혹시나 시야에 들어올까 두 개의 봉신 상을 소지품 창 구석으로 옮겨 두었다.
'다음은 보상인가.'
레벨 차이가 제법 있지만, 둘 다 성운을 상대하면서 떨군 레벨이었다.
전투의 난이도에 비해 경험치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서 성운은 신성 레벨이 12로 뛰었다.
성운의 경험치만이 아니었다.
전사, 부족장, 제사장의 멀티 클래스를 가진 라크락은 총 합계 레벨이 21을 넘어섰다.
현 문명 단계에서는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레벨이었다.
'지금부터는 경험치가 잘 안 오르니 사실상의 만렙이지.'
경험치 외의 보상도 있었다.
'로스트 월드는 다크 아콘이 마인드 컨트롤하듯이, 적의 자산을 시스템의 차원에서 바로 얻지 못하니까. 여기서 이득을 많이 챙겨야 해.'
신을 죽이면 신이 가지고 있던 '영역'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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