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5
뒷문의 문지기가 휘경을 알아보고 또 무슨 사고를 쳤냐고 핀잔을 줬고, 휘경은 무시하고 문을 지나갔다.
사이란이 말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다 아는 사이 입니까?"
"친한 척하는 사람은 적지만, 적어도 얼굴은 알지. 계속 살았으니까."
"당신 말고도 성 주민들도 다 그렇겠군요?"
"그렇지. 그건 왜 물어?"
"아닙니다."
사이란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비단을 팔기엔 늦은 것 같은데."
"시장은 아직 열려 있긴 할 텐데... 그전에 교중부터 만나야겠어."
"교중?"
"아마 너도 한 번 만났을 거야. 나한테 수레 빌려 준 녀석."
"아, 비보를 전해야 되는군요."
"괜찮아. 비단만 팔면 충분히 갚아 줄 수 있으니까. 비단을 보여 주면 화가 식겠지."
'게다가 이런 든든한 전사가 일을 도울 거라고 하면, 소금을 좀 꿔 줄지도 모르지.'
교중은 소금 장수였다.
교가는 성주에게 소금 거래를 허락받은 자동성의 교, 상, 토, 수 네 개의 가문 중 하나인데, 교중은 소금장수 중 나이가 제일 어린 편에 속했다.
때문에 남들이 하지 않는 도전적인 일에 뛰어들곤 했는데 요즘엔 재물을 빌려줬다가 이자를 쳐서 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동성 내부의 집은 계곡 사이의 무른 암반을 캐서 지은 집들로, 교중이 있는 소금 시장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계단 앞에서 휘경이 멈칫했다.
계곡 사이에 있는 자동성이기에 하늘은 더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이란이 말했다.
"그 발목으로 오르기엔 부담이 될 겁니다. 내일 다시 오죠."
"아니. 오늘 안 가면 이자를 더 내놓으라고 할 거야."
"흠.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이란이 말리는 것과 별개로 휘경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때 날카로운 바람 소리 하나가 휘경의 발소리에 묻혔다.
-휙!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휘경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왔다.
피곤하고 지친 휘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와직!
휘경의 등 뒤에서 손을 움직인 것은 사이란이었다.
얇게 두드려 편 비수가 사이란의 손에서 뭉개졌다.
사이란이 손을 펼치자 피가 뚝뚝 떨어졌다.
휘경은 한 발 늦게 피 냄새를 맡았다.
"잠깐, 피 나는 거야? 역시 저주가..."
"저주가 아닙니다. 쇠붙이가 날아왔습니다."
사이란이 발아래를 가리켰고, 휘경은 뭉개진 비수를 발견했다.
"쇠붙이? 비수?"
사이란은 비단 꾸러미를 풀어 던지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라크락 님이 말한 대로 당신의 목숨이 노려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업자 중 하나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두 발설했을 테고, 문지기나 다른 누군가가 당신이 성에 돌아왔다는 걸 알렸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성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뭔지 알려 주었겠지요. 당신은 재물 귀하게 여기니 빚을 진 교중을 찾아갈 거라고요. ...후계자 싸움이 시작 된 겁니다."
그리고 습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성운은 자동성의 상공 위에서 사이란 무엘이 휘경을 지키며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쪽은 이제 문제가 없겠어.'
사이란 무엘은 라크락이 보낸 전사답게 습격자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다.
어차피 자동성 안에 많은 리자드맨들을 들여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자동성 성주의 이목을 끌 테고, 그럼 의심을 받겠지. 의심받게 되면 견제를 받을 테고. 견제를 받으면? 그럼 헤게모니아만 유리하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단 한 명 정도는 괜찮아. 게다가 볼품없는 넷째 자식에게 붙은 괴짜 떠돌이 정도로 생각할 테니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자동성에 많은 리자드맨을 보내서 사실상의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헤게모니아 또한 똑같은 일을 할 터였다.
'그렇데 되면 결국 서로의 전력을 소비하는 일이 되겠지. 모순 예언을 사용한 이유가 없게 돼. 상대가 먼저 무리수를 던지지 않는 이상 이쪽이 먼저 나설 이유는 없어.'
성운은 드넓은 황야를 오가며 자동성의 상황을 그때그때 챙겼다.
역시나, 성운의 예상 밖을 나가진 않았다.
'후계자 싸움이란 게 다 그렇지 뭐.'
사이란은 습격자들의 정체를 캐묻고 이들이 복면을 쓴 남자에게 의뢰를 받은 성 밖의 떠돌이 고블린들이란 걸 알게 된다.
사이란은 고블린들이 쓸모 있을 거라고 판단한다. 그리곤 고블린들을 회유하기 위해 휘경에게 비단을 내놓으라고 하고, 휘경은 마지못해 조금의 비단을 내놓는다.
휘경은 습격을 의뢰한 것이 교중과 교가의 지원을 받는 첫째 휘단이라고 의심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휘경이 습격당한 바로 다음날 가장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휘단은 자동성에서 실종된다.
휘단을 지지하던 교가와 상가는 서로를 의심하고 사이란은 휘단의 방을 살펴보고 휘단이 이미 죽었으며, 두 가문을 서로 공멸하기 위해 시체를 숨긴 것이라 추리한다.
하지만 휘단이 이미 죽었다면 자동성 내부에 부패하는 시체를 숨길 만한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휘경은 깜짝 놀랄 발상으로 휘단의 시체를 발견해 내고, 범인이 의외의 인물임을 유추해 낸다.
...매일같이 피로 물든 흉악한 사건이 벌어졌다.
다섯, 아니 네 형제와 그들을 일부 지지하는 네 가문,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잘린 귀 부족과 검은 비늘 부족의 외압이 자동성을 오갔다.
형제들의 음모가 자동성 내부의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토성 위를 오가며 무너지고 부서진 자리를 보수하는 진흙 병정들뿐이었다.
─┼
3주의 시간이 흐르고, 암행을 떠났던 자동성의 성주 휘서가 돌아왔다.
036화
어두운 방 안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벽과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값비싼 양모 카펫들은 방의 주인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드러냈는데, 방문을 마주보는 상석에 앉은 것은 다름 아닌 휘경이었다.
휘경의 뿔은 지난 3주간 계속해서 자라서 손바닥 하나만큼은 뻗어 있었다. 휘경은 뿔을 잘라 내고 싶어 했지만, 사이란은 잘라 낼 때 피가 철철 흐르는 걸 보고 자신은 휘경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며 막아섰다.
휘경은 다소 낯선 자신의 뿔을 살짝 건드렸다가, 그보다 더 낯선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이란과 교중, 고블린 두목과 수가의 늙은 광부 적, 시장의 물고기 장수 요까지.
휘경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이란이 그 말을 들었다.
"음? 거사를 치루기 전에 지금까지의 일을 복기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우선 자동성 안에 두 개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 부족의 부족장이신 라크락 님이 저에게 휘경을 지키라고 했고요."
'휘경.'
휘경은 평생 들어 볼 일 없었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이 3주간 다 들은 것 같았다.
첫 주에는 몇 번이나 찾아오는 습격자들이 확인을 한답시고 불러 댔는데, 둘째 주에는 동맹을 맺고자 하거나 그런 척하며 배신을 하려는 이들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셋째 주에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가짜 이름이었던 맹지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휘경 생각에는 이제 동네 골목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휘경이라는 진짜 이름을 다 알고 있을 법했다. 다만 자동성 내부의 분위기가 너무 흉흉해서 그런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뿐.
우기 한 가운데에서도 닫은 적 없었던 시장이 열리지 않은 것도 일주일 째였다.
평생을 지켜 온 비밀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자동성에 오자마자 교중을 만나러 갔죠. 그 때문에 습격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습격자들을 회유할 수 있었고, 덕분에 더 큰 이득을 봤지요."
그 말에 구석에 있던 고블린 하나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블린 떠돌이 무리를 이끄는 자인데 목을 다쳤는지 말을 하지 못했다. 고블린들은 그저 '두목'이라고 불러서 다른 사람들도 두목이라고 불렀다.
"처음엔 고블린 무리가 교가의 의뢰를 받은 습격자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지요. 다음날 첫째인 휘단이 실종되었습니다. 휘단의 실종에 대해 쉬쉬하는 교가와 상가 사람들이 수상해 휘단의 방에 숨어들었더니..."
"피가 튀었다가 닦아 낸 자리를 찾을 수 있었지."
"리자드맨이 인간보다 코가 좋은 덕이었지요. 피 웅덩이의 크기를 보아선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양이었으니 죽었다는 말인데,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암반을 파내 집을 만드는 데다 우기가 다가와 날이 더워지는 지금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자동성에서는 시체를 숨길 장소가 마땅찮다는 점이었죠. 휘경의 추리가 아니었다면 제때 휘단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 했을 겁니다."
휘경의 추리는 단순했다.
시체를 숨기는 건 간단하다. 단지 시체는 냄새가 많이 나고 벌레가 꼬이기 때문에 발견된다. 시체가 냄새가 나고 벌레가 꼬이는 건 썩기 때문이다. 그럼 썩지 않게 보관하면 된다.
"...그리고 썩지 않게 보관하려면, 절이면 된다는 거죠. 인간을 통째로 절여 버리기 위해선 그만큼 커다란 항아리가 필요하고, 그만큼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도 어색하지 않은 장소는 사냥꾼 움막 밖에 없었습니다."
"언니가 제일 먼저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휘진은 사냥꾼이었지 않습니까? 본능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위험이 될 만한 인물을 제거하는 거지요."
"하지만 결국엔 동생에게 당했지."
"휘민은 모략가였습니다. 기회가 보이면 놓치지 않죠."
"그럼 휘민이 결국 작은 오빠에게 당한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게 '사냥꾼을 잡는 함정'입니다, 휘경."
"사냥꾼을 잡는 함정?"
사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락 님이 저에게 해 주신 이야깁니다. 라크락 님이 아주 어렸을 때, 심부름꾼 역할로 전사 하나와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그 전사는 아주 자신만만해하며 오늘 큰 멧돼지를 잡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정말로 큰 멧돼지를 발견했죠. 라크락 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리를 내지 말라며 사냥에 실패하면 네 탓이 될 거라며 엄포를 놓더랍니다. 전사는 한 번의 투창으로 멧돼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숨까지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머지않은 수풀에서 아주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라크락 님은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지만 전사의 엄포가 생각나 입을 닫고 있었지요. 그리고 전사가 창을 던지려는 순간, 수풀 속에서 검치호가 뛰어들어 전사의 목덜미를 물었습니다. 검치호는 라크락 님을 한 번 보고는 전사의 목을 비틀어 부러트리고 가 버렸지요."
"아, 사냥감을 노리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단 말이지?"
사이란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말을 골랐다.
"음, 간단히 줄이면 그 말도 맞지만... 너무 오만하지도 말고 사냥을 혼자서 하지도 말고 동료가 있으면 가능한 도움도 구하라는 말입니다. 검치호는 등 뒤와 목을 노리니 조심하란 말이기도 하고요. 단순하게 한 마디로 줄여서야 길게 이야기한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교중이 한숨을 쉬었다.
교중은 휘단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그리고 휘경이 사실은 휘서의 넷째 자식이며 성주의 후계자로 다음 자동성의 성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깨달은 직후, 자신이 끌어다 모을 수 있는 물적 자산과 인적 자산을 휘경에게 걸었다.
사실 그의 본성은 상인이라기보다 도박사였다.
"너의 리자드맨 이야기는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중요한 건 휘준을 어떻게 잡냐는 거다. 상가는 결국 배신해서 휘준에게 붙었으니 놈은 상가와 토가 두 개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고, 휘진을 지지하던 수가는 아직 묵묵부답이지."
"본론으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좋습니다. 제 의견은, 수가의 지지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큰 싸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각 가문은 성주에게 용인되는 만큼의 병사를 부릴 수 있어. 상대는 둘이고 우리는 하나니 불리하다."
"어차피 싸움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재물에 여유가 있다. 수가의 가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수가의 가주를 만나 봤지 않습니까? 강직한 사람입니다. 재물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넌 리자드맨이라 잘 모르겠지만, 원래 그런 인간들이 뒤로 잘 해먹는다."
휘경은 토론에서 점점 수준이 낮아지는 말싸움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운이 좋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3주였다.
몇 번이나 사이란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셀 수 없는 도움을 받았다.
사이란만이 아니었다.
늘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희생하기까지 했다.
'아니면 저주받은 3주일지도.'
휘경은 목숨을 잃은 세 형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큰오빠 휘단은 늘 휘경을 안타깝게 여겼다.
저주를 두려워해서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없었지만 휘경이 어려움에 처하면 사람을 써서 몰래 도와주곤 했다.
'아마 큰오빠는 내가 성주 후계자 싸움에 낄 능력도 없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언니 휘진은 휘경의 저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부터 숲으로 휘경을 데려나가 함께 사냥을 했고 사냥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물론 나이가 차자 어린 동생이랑 노는 건 금세 질린 것 같았지만.'
동생인 휘민은 배우는 게 빨라서 휘경에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외로워서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니 질려 했지.'
잘 판단을 해 보니 다들 썩 좋은 형제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아서 휘경은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곧 마지막 형제를 떠올렸다.
'휘준.'
휘준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휘경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휘준이 내성적이고 유약하다고 말했지만, 휘경이 보기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휘경은 이 3주를 겪으며 휘준이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빨. 너무 날카롭고 위험해서,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이빨.'
휘준은 괴물이었다.
휘경의 생각에 휘준은 언젠가 일어날 이 싸움을 미리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단순히 휘단처럼 힘을 비축한 것이 아니라, 마치 바둑 놀이에서 수 싸움을 하듯이, 누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모두 염두에 두고 미리 포석을 깔아 둔 것 같았다.
휘준은 어쩔 수 없이 두는 미적지근한 수를 두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최선의 수를 놓았고, 그 실력 앞에 휘단과 휘진과 휘민, 세 명의 형제가 패배했다.
'첫날 고블린 떠돌이들을 고용해서 날 죽이라고 한 것도 결국 휘준이었지.'
휘경이 다시 방 안으로 집중을 돌리자 사이란과 교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검은 비늘 부족의 꿍꿍이는 뭐지?"
"그런 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적어도 저는 모릅니다. 제가 맡은 임무는 휘경을 지키는 겁니다."
휘경이 둘의 싸움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 방안으로 달려왔다.
"성 밖의 소식입니다."
교가의 심부름꾼이었다.
"무슨 일이죠?"
"저희 정찰대가 성주님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암실에 앉은 사람들이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휘경과 휘준 모두 성주인 아버지가 성 밖으로 나가고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지난 2주 동안에도 자동성 외부의 일에 신경 쓰느라 후계자 싸움에 그만큼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어찌나 급했는지 자동성 내부의 소식을 간간이 알릴 부하도 모두 데리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 일주일 사이에 숨겨졌던 휘단의 죽음이 공개되었고 두 명의 형제가 더 죽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후계자 싸움을 가속시킨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후계자가 어떻게 결정될지 알 수 없어. 상황이 유리한 휘준은 반드시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결판을 지으려고 할 거야.'
후계자로 삼을 자식이 하나뿐이라면, 휘서는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휘경이 말했다.
"언제쯤 도착하실 것 같아요?"
"저희 정찰대는 발 빠른 말을 쓰고 성주님은 그리 속도를 내고 계시지 않으니, 내일 아침은 되어야 도착하실 겁니다."
"아."
"그리고 정찰대에서 휘경 님에게만 전하라고 한 소식이 있는데..."
"네?"
심부름꾼은 방 안을 가로질러 휘경에게 다가갔다.
심부름꾼이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귓속말을 암시하자 휘경도 귀를 가져다 댔다.
뜨거운 액체가 휘경의 얼굴에 튀었다.
휘경이 고개를 돌리니 사이란이 칼날로 심부름꾼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어?"
"칼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사이란이 심부름꾼의 품속에 들어간 칼을 빼내자 철 칼이 툭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심부름꾼이 쓰러지자 등에 비수가 박혀 있었다.
모두가 두목을 바라봤고, 두목은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란이 교중에게 말했다.
"교가 사람입니까?"
"맞아. 아니었다면 내가 먼저 의심했겠지."
"매수된 교가 사람이 더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제 교가도 믿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교중이 반박하려던 때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쇠붙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사이란이 말했다.
"단순히 매수당하기만 한 게 아니군요. 휘준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봅니다."
"...우리 가문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너희는 피하도록 해. 여기 사람들이 각자 다른 길로 도망 나가면 놈들도 눈치채지 못할 거다. 어디로 나가면 좋을지 생각해 봤나?"
"예."
─┼
사이란이 택한 길은 하수로였다.
하수로가 없다면 비가 오면 물 빠져나갈 곳이 없는 자동성은 비가 들어찰 것이지만, 고대에 지어진 하수로가 이 자동성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쉬운 도주 경로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수로에는 오물이 무릎까지 들어차 있다는 것이고, 길이 너무 복잡하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비가 오지 않는 하수로에는 그 오물을 바탕으로 생태계를 이어가는 벌레가 득실거렸다.
사이란은 혼자서 이 도주 경로를 발견해 냈지만, 결코 사용하는 일이 없길 바랐다.
게다가 사이란은 휘경이 벌레를 질색할까 봐 걱정한 것도 있었는데, 휘경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하수로로 먼저 뛰어들었다.
걸어가는 동안 파리와 같은 날벌레들이 휘경과 사이란의 얼굴을 때려 댔다.
"벌레는 익숙해."
"익숙... 하단 말입니까?"
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똥간에 들어갔더니 아마 나무 바닥이 헐거웠던 것 같아. 바닥이 부러지면서 난 굴러떨어졌고, 당연히 똥 무더기에 처박혔지. 아마 하수로까지 떨어졌을 거야."
"그때도 굴러떨어졌던 겁니까?"
"응. 용케 다친 곳 없이 살아 있었지. 하수로까지 떨어졌으니 당연히 빛도 한 점 없고, 길도 찾을 수 없었지. 오물은 가득하고. 그래서 이제 진짜 죽었구나 싶었는데..."
"싶었는데?"
"정말 신기하게 빛 덩이들이 떠다니고 있는 거야. 그 빛을 따라갔더니 하수로의 어렴풋한 윤곽이 보이더라고. 물론 그것만으로는 하수로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 빛 덩이의 정체가 궁금해서 빛을 따라갔는데, 따라가서 잡고 보니 웬걸, 벌레인 거야. 배에서 빛이 나고 있더라고."
뒤따라가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이란은 눈을 잠시 깜빡였다.
"아마 그건... 반딧불이일 겁니다."
"반딧불이?"
"그리고 그건 이곳에 사는 종류의 벌레가 아닙니다."
"하지만 진짜 있었는데? 덕분에 하수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흠, 그럼 제가 아는 종류의 벌레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딧불이가 아닐 지도요."
하지만 휘경의 그 빛나는 벌레에 대한 묘사를 들어 보니, 사이란의 생각에 그건 반딧불이가 맞았다.
'신기한 일이군.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말은...'
다행히 하수로를 길게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출구는 수가의 사냥꾼 움집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출구 계단 앞에서 사이란은 앞서 걸었던 휘경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먼저 가지요."
"소리도 없고 빛도 없어. 아무도 없을 텐데?"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일이 생기면 뒤돌아 달리십시오."
휘경은 지난 3주간 몇 번이나 있었던 실랑이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휘준이 공격해 왔지만 그 말은 휘준 또한 마음이 조급하다는 말이야. 여기서 나가면 반격의 기회가 있을 거야.'
잠시 기다렸던 휘경은 이제 따라 올라가도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계단에 한 발을 올렸을 때 저 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경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칼을 뽑아 들고 다음 계단으로 발을 올린 다음이었다.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
달도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모두가 희미한 윤곽에만 의지해서 쇠붙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유일한 리자드맨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이란이 올라온 휘경을 향해 말했다.
"도대체 왜 올라온 겁니까?"
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싸우는 사내들 뒤로 메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휘준이었다.
"...너무 늦었군. 저 리자드맨은 다 죽은 셈인데."
"무슨 말이야?"
"닥치십시오, 휘준."
사이란이 휘준에게 돌아서자, 휘경은 창대 하나가 사이란의 등을 꿰뚫은 것을 보았다.
037화
"흠, 아직도 말할 수 있나."
휘준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중상.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빈틈을 노려 사이란의 정면과 등 뒤로 두 명의 병사가 달려들었다.
사이란은 정면으로 달려드는 병사의 창대를 한 손으로 잡으며 몸을 회전했다.
창대를 내지른 병사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사이란은 검을 든 손으로 뒤를 노렸던 병사의 목울대를 베고, 넘어진 병사의 목을 밟았다.
-우득.
비명 없이 뼈 부러지는 소리만 들렸다.
"...멀쩡히 싸울 수도 있습니다."
구름 사이에 상현달이 모습을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목울대가 베인 병사가 손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다가 끝내 쓰러졌다.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의 외피가 잠깐 번쩍이는 듯했다.
열댓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사이란의 박력에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움찔했다.
사이란은 겁먹은 인간 병사들이 우습다는 듯 ‘흥’하고 콧김을 내고는 등 뒤로 뻗은 창대를 한 손으로 쥐고, 꼬리로 창대를 감았다.
-와직!
사이란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거추장스럽게 박혀 있던 창대를 부러트렸다.
사이란은 창대를 집어 던지며 자신과 휘경 사이의 적들을 물렸다.
"휘경. 돌아서서 도망치지 않을 거라면, 이리로 오십시오."
"응."
휘경은 사이란의 등 뒤로 가서 섰다.
사이란이 적들을 노려보았다.
"도망치는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압니까?"
"그래."
"그런데 왜 틀린 선택을 한 겁니까?"
"나도 몰라."
사이란이 휘경을 힐끗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휘경이 재차 말했다.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 인간들이 가끔 틀린 선택을 한다는 거야. 그게 틀렸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더라도."
"인간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합시다."
"왜?"
"부족장님은 저에게 당신을 지키라고 했지만, 목숨을 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하면 언제든 포기하고 돌아와도 된다고 했지요."
휘경으로선 의아했다.
지난 3주간 휘경 자신 뿐만 아니라 사이란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도 너무 많았다. 휘경은 말하진 않았지만, 사이란에게 의지하게 된 뒤로는 잠을 자고 나면 다음날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왜 남아있는 거야?"
"휘경 당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가끔 틀린 선택을 한다고요. 틀렸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더라도 하게 되는 선택이 있다고."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있던 휘준은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휘준이 말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놈들을 죽이지 않고?"
병사 중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 리자드놈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게다가... '선택받은 자'라는 이야기도..."
"멍청하긴. 등에 창이 꽂힐 때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리가 있느냐?"
그 소문은 휘경이 퍼트린 것이었고, 아직까진 유효했었다.
하지만 휘준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리자드맨! 네놈이 그 벼락을 내리칠 수 있다면 내게 해 보아라."
"......"
"그럴 줄 알았지."
휘준은 뜬소문을 입에 담았다.
그 자신도 명백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된다면 언급할 만했다.
"내가 알기로 선택받은 자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저런 말단 전사한테까지 그 푸른 벌레신이 관심을 기울일 리는 없지."
"......"
사이란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휘준은 자신감을 얻고 말했다.
"봐라! 놈이 전혀 반박하지 못한다는 걸! 놈들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 비단 한 수레를 더 내리겠다."
공터에 있던 병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병사들이 달려들고, 사이란이 막아 냈다.
하지만 사이란이 병사들을 쓰러트려도, 둘 또는 셋씩 짝지은 병사들이 충원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휘준에게 유리해졌다.
사이란이 휘경에게 속삭였다.
"오른쪽으로 도망칠 겁니다. 당신을 안고 돌파하긴 힘드니, 잘 따라와야 합니다."
"오른쪽은 벽인데?"
"휘준의 말처럼 저는 벼락으로 길을 낼 재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놈의 말처럼 말단 전사는 아닙니다."
휘경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그럼 몇 번째라고 생각합니까?"
"그, 글쎄..."
휘경은 이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유치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족장님은 부족장님이니 강함을 논하지 않습니다. 저희 부족의 으뜸전사는 유르 님입니다."
"그건 알고 있어."
"...그리고 제가 버금전사입니다. 사람들은 두 번째를 잘 기억해 주지 않지요."
휘경은 강직한 사이란에게서 내면에 있는 작은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최고만을 칭송하는 전사들 사이에서 두 번째로 남아 있다는 건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금 같은 순간이 아니면 그 여린 자존심을 드러낼 일도 없었겠지.'
사이란이 오른쪽을 흘기며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오른쪽입니다."
"그러니까, 거긴 벽이라니까?"
"곧 아니게 될 겁니다."
"뭐라고?"
"바투 붙으십시오."
휘경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고, 휘준의 병사들은 그마저도 떠올리지 못했다.
사이란이 가리킨 퇴로에 있는 것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벽이었다.
벽을 이루는 물질은 질 낮은 철로 만든 끌로도 쉽게 부서지는 무른 암석인데다, 그 안쪽은 누군가의 집일 테니 분명 안이 비어 있긴 하지만, 벽은 벽이었다.
인간들에겐 오랜 시간 지형지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옮겨지거나 변형되지 않는 것, 가로막고 있다면 돌아갈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
아마 벽이 생각을 할 수 있었더라면, 벽 자신도 앞으로 수백 년의 시간이 자신을 허물기 전까진 그 자리에 단단히 붙박여 불변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란의 생각에는 아니었다.
사이란은 검은 비늘 부족의 버금전사였다.
버금전사는 상호 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탈출구가 없다면...'
사이란은 오른팔을 왼쪽 어깨로 올린 뒤, 몸을 숙였다.
한 명의 병사가 사이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사이란과 벽 사이를 가로막았다.
'...만들면 된다.'
사이란은 태클 자세 그대로 달려 나갔다.
검을 들어 올리던 병사가 사이란에게서 튕겨져 나갔다. 병사는 사이란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못했다.
-쾅!
사이란은 벽을 뚫고 사라졌다.
무너진 벽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그나마 얼마 있지 않은 시야를 암흑으로 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휘경이었다.
휘경은 재빨리 흙먼지를 뚫고 사이란이 사라진 구멍 속으로 달려들었다.
병사 하나가 휘준에게 외쳤다.
"노, 놈이 벽을 뚫었습니다!"
"나도 안다! 어서 쫓지 않고 뭘 하는 거냐?"
휘준은 소리치며 명령했고, 새카만 어둠 때문에 병사들은 횃불 숫자를 늘린다며 서로의 횃불을 옮겨 붙이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누가 보더라도 사이란의 뒤를 쫓는 첫 번째가 되고 싶지 않아서 꾸물거리는 게 분명했다.
'망할 겁쟁이 놈들.'
휘준은 3주 전 놀들이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나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어야 했나? 그럼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나?'
모두 다섯이었는데, 이 놀들은 자동성 내부의 상황은 물론 휘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억센 손끝의 발톱하며 강건한 다리며 놀 기준에서 보더라도 거세고 강한 전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돕겠다고 했다.
하지만 휘준은 이들을 거절했다.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내쫓았다.
'놈들은 내가 다음 성주가 되면, 자동성 안에 분노하는 이빨의 신을 믿는 이들로 가득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 자기들이 바라는 건 그것뿐이라고.'
그들은 휘준에게 분노하는 이빨의 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휘준이 신을 믿지 않고 그걸 막으려고 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거란 말이기도 했다.
'내가 성주가 된다면 다음 적은 놀과 리자드맨이다. 그런 놈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놈들에게 도움을 받는 녀석을 성주가 되도록 지켜볼 수도 없고.'
이미 다른 형제들은 분노하는 이빨의 신과 푸른 벌레신 둘 중 하나를 믿고 있었다. 그들이 보다 빨리 떨어져 나간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음모와 계책 같은 휘준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오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내야 한다.'
휘준은 자신의 마지막 형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쪽으로 도망갔다면, 오래 걸리진 않겠군.'
─┼
"아무래도 도주 경로를 정하는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내 실수지. 여기서 살았던 내가 길을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길을 알아보기엔 너무 어두웠습니다. 게다가 휘경이 광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휘경은 그 말에 더 이상 자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책을 하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두 사람이 도망친 경로는 소금 광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막다른 길이란 이야기였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소금 광산의 내부는 복잡하지 않아 추적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길이 점차 협소해지므로 인간들보다 덩치가 더 큰 사이란이 움직이기 불편했다. 깊은 곳에 숨어 봤자 불리해지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사이란의 상처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광산 안쪽으로 걸어가던 사이란이 절뚝거리기 시작하자 휘경은 이쯤에서 멈춰 서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은 외투를 벗어 사이란의 상처에 대고 눌렀는데, 피가 계속 비어져 나왔다.
"이, 이걸 뽑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 별다른 처치 없이는 피가 쏟아질 겁니다. 그럼 저는 휘준이 아니라 수마와도 싸워야할 테고요. 아마 패배하겠지요."
"젠장, 어쩌면 좋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휘경."
사이란의 말에 휘경은 아주 오래전에 모두 쏟아 버려서, 더 이상 나올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것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었다.
"휘경, 우는 겁니까?"
"놀리지 마. 그럴 때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좋아서 그런 겁니다. 날 위해서 우는 게 맞습니까?"
"그래. 이 덩치 산만 한 도마뱀아. 다 죽어 가면서 뭐가 좋다는 거야?"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적이든 아군이든 창을 맞아 죽어 가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만큼 움직일 수 있다면, 적절한 치유를 받아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망할 남 이야기하듯이 좀 말하지 마.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적절한 치유를 받을 거냐고."
사이란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는데, 피가 부족해서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직까진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버금전사인 자신을 믿지 못하고 울상을 짓고 있는 휘경이었다.
사이란이 말했다.
"저주를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
"일이 다 이렇게 된 게 저주 때문이라고요?"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많은 추리를 해 봤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한번 해 보죠. 답부터 말하자면, 휘경 당신은 저주받은 게 아닙니다."
휘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당신이 지난 3주간 받은 습격이나 함정을 생각하십시오. 그 배후에는 항상 당신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건 우연의 산물이나 어딘가의 저주를 내리는 신이 존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적의를 가진 누군가가 휘경을 공격한 겁니다."
"그건 알지만..."
"물론 그 모든 적의가 어디서 샘솟았는가, 그것이야말로 저주라고 하고 싶겠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죠. 어떻게 휘경이 살아남았습니까? 저와 휘경이 만난 것, 두목이 휘경의 비단을 받고 도움을 주기로 한 것, 교중이 지금까지의 빚과 상관없이 휘경을 돕기로 한 것, 수가의 늙은 광부가 우리에게 진실을 털어놓은 것,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준 물고기 상인의 비밀까지... 모두 우연의 산물 아닙니까? 휘경, 이렇게 우연히 일어난 선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휘경이 답했다.
"행운이라고?"
-그래, 행운이다.휘경은 잠깐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지난 3주간 뜸했던 마음속의 목소리였다.
-너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받아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 힘을 두려워했지...
'닥쳐.'
휘경은 자신의 양 뿔을 잡았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이란은 휘경 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맞습니다. 행운입니다."
사이란이 말했다.
"휘경과 처음 만나 비단을 가지러 내려갔을 때 교중의 수레를 한번 살펴봤었습니다. 수레바퀴가 고장 난 이유는 누군가 축을 고정하는 장치에 상처를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고, 교중이 우리 편이라는 걸 알고 난 뒤로는 형제 중 한 사람의 짓일 거라고 짐작하기만 했지요."
"뭐? 하지만 교중에게 수레를 빌린 건 본격적인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기 전이야."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까지의 후계자 싸움은 서로를 견제는 하더라도 형제들끼리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으니까요. 더군다나 형제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낮은 휘경을 고의로 죽이려고 드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수레를 고장 낸 흔적은, 누군가 그 이전부터, 어쩌면 꾸준히, 휘경의 목숨을 노려왔다는 걸 암시하기도 합니다."
휘경은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너는 사실 답을 알고 있지 않나?
'닥치라고 했지?'
휘경이 두통을 느끼자 사이란이 걱정했다.
"휘경?"
"아니, 아무것도 아냐. 지금 날 걱정할 때도 아니고..."
"제 걱정도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아니지. 제발, 내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그 말만 하지 마. 알겠지?"
사이란은 기어코 그 말을 했다.
"저는 휘경의 행운을 믿습니다."
휘경은 제발 그 행운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믿었다.
하지만 휘경은 그것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금 동굴 안쪽으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일자로 뚫린 광산 복도의 백보 밖에서 휘준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다!"
병사의 외침에 사이란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병사를 지휘하는 휘준이 말했다.
"리자드맨은 피를 많이 흘렸다. 그리고 여긴 소금 광산이다. 아까처럼 벽을 부수고 도망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는지, 병사들은 창대를 높이 올린 채 진열을 유지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휘경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사이란의 옆에 섰다. 행운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주간 사이란의 옆에서 방해가 되지 않으며 싸우는 법 정도는 익힌 상태였다.
'그래. 적어도 저주 탓을 하며 죽지는 않겠어. 내가 죽는다면, 그건 그냥 내 탓이겠지. 사이란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면서도 내 곁에서 도망가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휘경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병사들이 불과 서른 보 정도 다가왔을 때, 병사 무리와 사이란 사이에 번쩍하고 푸른빛이 발했다.
행운이라고 부를만한 녀석이었다.
사이란과 휘경, 그리고 병사들과 휘준 모두 소금 동굴 내부를 환하게 비추는 푸른빛에 잠시 넋을 잃었다.
빛은 번쩍거리는 광구를 이루고 있었고, 밝은 빛과 어두운 빛이 교차하며 사람들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일부 눈이 밝은 이들은 그 광구 안에 사각형처럼 생긴 기이한 생물이 펄럭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광구가 천천히 옅어지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생물체를 인식할 수 있었다.
광구는 이내 사라지자, 모두의 마음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쩍거리는 푸른 가오리가 말했다.
-파지직이라고 한다.
놀랍고 신기한 일에 익숙한 휘경이 이름을 듣고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이름이 파지직이라고?"
파지직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랜 연습 덕이었다.
파지직이 사이란을 향해 말했다.
-사이란 무엘, 너는 '선택'받았다.
038화
하지만 선택받았다는 말에 사이란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넘겨짚었을 뿐이지만 휘준의 말이 맞았다.
검은 비늘 부족에 선택받은 자는 라크락과 자올, 유르, 오웬과 별잡이까지 모두 다섯 명.
이유는 모르지만 신께서는 아직 선택받은 자를 다섯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이란이 선택을 받았다는 말은...
"누가 죽은 겁니까?"
파지직은 대답하며 번쩍이는 대신 빛을 줄였다.
-별잡이.
사이란은 잠시 눈을 감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애도를 했다.
그사이 휘준의 병사들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한 듯 파지직 곁으로 다가가길 꺼리고 있었다.
휘준이 뒤에서 닦달해도 마찬가지였다.
"망할 겁쟁이들 같으니. 활과 화살을 가져와라. 활잡이들은 도대체 어딨느냐?"
파지직은 자신 뒤에 있는 병사와 휘준을 돌아봤다가 말했다.
-귀찮은 방해물들이 있군. 거기 인간 여자는...
"네?"
-...아니, 됐다. 나는 신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 온 것이니 저들에게 관여할 수 없다.
사이란이 답했다.
"저 스스로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대행자 파지직 님, 왜 저입니까?"
-신께서 선택하셨으니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너 스스로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그대는 부족의 버금전사가 아닌가?
그 말에 사이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걱정할 건 없다. 너는 이제 신의 뜻을 대행할 것이며, 그 의지를 행할 때, 신의 힘을 빌릴 수 있으리라.
"언제부터 말입니까?"
파지직이 번쩍였다.
-바로 지금.
파지직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을 뿜어내며 사라졌다.
소금 광산 내부는 다시 얼마 없는 횃불로 어두워졌다.
휘경이 작게 속삭였다.
"그럼 저 기이한 생물이..."
"벼락의 힘을 주관하는 신의 대행자십니다."
"그래서 방금 너는 신의 선택을 받은 거고?"
"예."
사이란이 휘준을 향해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좀 더 복잡한 의식이나 절차가 있고, 그 과정에서 힘을 익히고 배우는 과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그럼?"
"그 힘이 제 안에 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잘 알겠습니다."
사이란이 왼손으로 배를 뚫고 나온 창날을 잡았다.
그리고 창날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꿰뚫린 등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파직!
스파크가 사이란의 상처를 지졌고 살타는 냄새가 났다.
"사이란!"
"괜찮습니다. 힘을 받은 뒤부터 활력이 돕니다. 그리고 이 정도 고통은..."
사이란은 이번엔 배에서 창날을 모두 뽑아내고 피가 쏟아지기 전에 상처를 지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휘경은 일그러지는 사이란의 표정을 보고 아무것도 아닐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전사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휘준이 외쳤다.
"뭣들 하느냐! 괴물이 사라졌다! 지금 공격해라!"
휘경이 말했다.
"저놈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이해를 못한 거 같은데."
"그럼 이해를 시켜 주고 와야겠군요."
사이란은 오른손에 검을 들고 왼손 손바닥을 펼쳤다.
펼쳐진 손가락 사이로 전깃불이 수없이 오가며 명멸했다.
그 불빛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휘준이었다.
"젠장, 설마...?"
휘준은 머리 회전은 물론 몸동작도 빨랐다.
아직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전열의 창잡이들이 사이란에게 들이닥쳤을 때, 휘준은 사이란의 시야에서 벗어나 복도 밖으로 도망쳤다.
-쾅!
가까이 선 이들에겐 그저 시야 가득한 빛만 보였다.
멀리 선 이들에겐 한 줄기 벼락이 사이란의 왼손에서 뻗어나가, 휘준이 사라진 소금 광산의 모퉁이를 박살 내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벼락에 관통당한 이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천둥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던 병사 중 벼락에 관통당한 십수 명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살 익는 냄새와 몸에서 피어오르는 흰 수증기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흐느낌과 비명 사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서, 선택받은 자다!"
"도망쳐!"
겁에 질려 창을 놓고 도망치거나 그대로 실신한 이들도 있었다.
사이란은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가지 않고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휘경이 다가왔다.
"괜찮아?"
"아, 네. 괜찮습니다. 단지, 이 힘은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이 다루기엔 너무 큰 힘입니다. 왜 신께서 이 힘을 소수에게만 내리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휘경은 번개에 타죽은 시체들을 잠깐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힘이 있는데 검은 비늘 부족은 잘린 귀 부족과 싸우지 않는 거지?"
"최근까지 오웬 님을 따라다니느라 잘린 귀 부족에 대해선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잘린 귀 부족도 이에 대응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 힘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이런 힘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종의 심력이 소모되는 걸 느꼈습니다. 휴식을 취하며 심력을 회복할 수 있는 약초를 피워야 될 것 같습니다."
휘경이 말했다.
"...그 심력이라는 게 다 소모되면 어떻게 되는데?"
"걱정 마십시오. 그저 피곤해질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피를 덜 흘리니 좀 낫군요."
휘경이 보기에 사이란의 몸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 광산 내부에서 몇 차례 격돌이 더 있었다.
휘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도망쳐 온 병사들을 재정비시켜 광산의 입구를 막아서기도 했고, 느닷없이 광산 안에서 길을 잃은 듯한 검치호가 습격해 오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사이란은 그 모든 것을 천둥 번개의 힘을 사용해 물리쳤다.
기어이 휘경과 사이란이 소금 광산 밖으로 나오자, 남아 있는 것은 휘준과 얼마 남지 않은 열댓 명의 병사뿐이었다.
"...결국 이렇게까지 날 몰아세우는구나."
휘준은 억울하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 쥐고 휘경을 바라봤다.
휘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일을 벌인 게 누구인지 생각해야지."
"그 사특한 도마뱀을 우리 성에 끌어들인 건 너였다. 형제들만의 싸움이어야 할 후계자 싸움도 결국 놀 누린내와 리자드맨 비린내로 오염시킨 것도 너였고."
"내가 무슨... 아니,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규칙이 있었다는 거야?"
"멍청하긴. 넌 예전부터 생각이 짧았다. 외부의 힘을 빌려 후계자가 되면 자동성이 멀쩡할 것 같으냐? 인간은 밀려나고 어느 한쪽 종족에게 집어삼켜지겠지. 운이 좋아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잘린 귀 부족이나 검은 비늘 부족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동성은 위험에 처하겠지. 기어코 성벽이 공격당하는 걸 보고 싶은 거냐?"
휘경은 한숨을 쉬었다.
사이란 옆에 있던 휘경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휘준. 멍청한 건 너야. 아버지는 제 몸을 깎아서 자동성을 지켜왔지만 그만큼 자동성이 주변 정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어. 세계는 크고 넓어. 저 대륙과 북해안에는 잘린 귀 부족이나 검은 비늘 부족 같은 큰 세력이 많은데도, 아버지는 자동성이 그런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힐까 두려워서 거래를 하지 않았지. 그게 이 결과고."
"...하지만."
휘준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휘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이 결과가 나쁜지도 모르겠어. 모든 관계는 거래야.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 성벽이 공격받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내가 아는 한 이 주변에서 자동성은 가장 높은 성벽을 가지고 있어. 자신 있다면 공격해 오라고 해.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가장 뛰어난 가치를 지닌 거래 상품을 너무 아끼고 사랑스러워해서 저울에 올리지 못했지. 난 아버지처럼 겁쟁이가 아니야. 내 저울에 자동성을 올리는 대신, 더 큰 걸 얻겠어."
휘경은 그때 휘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등 뒤를 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이란? 아니, 아니야. 그보다 더 뒤쪽이야.'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늦었다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휘준의 손가락은 이미 신호를 보낸 뒤였다.
휘경은 휘준이 최후의 수를 준비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이란에 휘말려서 제 본성을 잊고 우격다짐으로 습격을 해 왔지만,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사이란이 아닌 휘경의 목숨이었다.
'방금 저 손가락 신호는, 내 등 뒤에 있는 암살자에게 보낸 거구나.'
아마 화살일 것이다.
누군가 숨어 있는 위치에서 비수를 던지기엔 너무 멀다.
소금 광산 입구에 있는 작은 창고 위에 소금 자루를 쌓아 뒀는데 그 뒤쪽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사이란이 아마 화살이 쏘아진 순간 반응하겠지만 조금 늦을 터였다.
'그럼 화살은 내 등에 박히겠군.'
어째서인지 휘경은 날아오는 화살의 모양새는 물론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도 그릴 수 있었다.
'촉은 뭘로 만들었지?'
-쇠로 만든 촉이다. 재질의 단단함으로 봐선 대륙 쪽에서 왔군.
'깃은?'
-수탉 깃털 세 개.
'어디에 박힐까?'
-심장 한 가운데. 마지막에 손이 떨린 걸 봐서 노련한 활잡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 떨림이 운 좋게 너의 심장을 맞히는 거지.
휘경은 뒤늦게 자신이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와 대화하고 있음을 알았다.
'넌...'
-또 내게 닥치라고 할 건가?
'아니.'
-이대로면 너는 죽는다. 그리고 나도.
'너도?'
-화살을 멈출 수 있겠나?
'아니, 난 너무 느려. 사이란도 간발의 차이로 놓칠 테고.'
-어떻게 해야 화살을 멈출 수 있겠나?
'이미 쏘아진 화살을 어떻게 멈추겠어?'
-상상력을 발휘해라. 시위를 당길 때, 암살자가 호흡을 할 때, 너를 겨냥을 할 때, 너의 뿔이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덕에 모두 놓쳤다. 뭐든 생각해라.
'몰라. 바람이라도 분다면...'
그 말에 성이 난 것 같던 내면의 목소리는 온화해졌다.
-바람? 바람이라. 좋군. 바람은 언제나 나의 편이지.
휘경은 느낄 수 있었다.
등 뒤의 허공에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휘경이 내면의 목소리에게 말했다.
'넌 대체 뭐야?'
-내 이름을 물은 건가?
'아니.'
-그럼 내 종족을 물은 건가? 나는 마성의 정령이다. 우리는 창조주와 탄생의 시기에 대해 기억을 잃을 정도로 오래 살아남았고, 낡은 사원이나 타락한 신들 옆에서, 너처럼 오래된 핏줄 안에 살아가고 있지.
'아니... 그런 설명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야. 넌 도대체 뭐냐고. 나를 괴롭힌 저주야? 아니면...'
-내 본질을 물은 것이군. 나는 네가 오랜 시간 착각해 온 것처럼 저주가 아니며, 그에 따른 불운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 내 동료에게 힘을 부여받은 리자드맨이 말한 것처럼 행운이라고 하기엔, 조금 설명이 불충분하군.
'...동료?'
내면의 목소리가 계속 말했다.
-나는... 복잡한 존재다. 나는 미래를 향해 무한하게 펼쳐지는 수많은 경로 중에서 나는 적절한 것을 선택한다. 나는 가능한 경로와 불가능한 경로를 파악하고, 그중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해 줄래?'
-나는 확률을 조작한다.
휘경을 향해 날아온 화살은, 난데없이 나타난 돌개바람을 맞고 힘을 잃었다.
화살은 맥없이 휘경의 등 뒤에 떨어졌다.
─┼
자동성을 내려다보는 수백 미터 상공.
성운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마성에 휩싸인 휘경'이 마성을 자각했습니다.
숨겨져 있던 마성이 공개 됩니다.」
「마성: (알 수 없음) → 마성: 확률」
성운은 화상 채팅을 통해 헤게모니아의 외침을 들었다.
"말도 안 돼! 저주가 아니었다고?"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저주에 걸린 개체를 선택하겠어?"
"하지만 내가 봤을 때 휘경의 캐릭터 히스토리에서는 분명 저주받은..."
말하던 헤게모니아는 답을 알고 침묵했다.
성운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누가 그 히스토리를 만들었겠어?"
039화
로스트 월드의 모든 고유 개체에는 '자세히 보기'를 눌렀을 때 확인할 수 있는 '히스토리' 탭이 있었다.
히스토리는 해당 개체가 나타나거나 태어난 이후의 간략한 정보가 기록되는 시스템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주목하고 있는 캐릭터들, 이를테면 라크락과 같은 캐릭터는 신과 관계되거나 무수한 위업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무 정보나 기록되는 것은 아니라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직업이나 누구를 배우자로 맞이했고 아이를 언제 몇이나 가졌는지 같은 내용이나 죽을 뻔한 위기 정도만 기록되었다.
따라서 히스토리라는 건 일종의 약력이 기록되는 것인데, 휘경의 히스토리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
13세, 자동성 시장, 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다.
14세, 자동성 내궁, 변소에서 하수로로 굴러떨어지다.
자동성 골목길, 가면을 쓴 불한당에게 공격당하다.
자동성 남서부 3km, 또래 아이들과의 시비가 걸려 맞서 싸우다.
자동성 소금 창고, 도둑질을 했단 혐의로 4일간 갇히다.
자동성 시장, 물을 가득 채운 항아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다.
15세, 자동성 남동부 5km, 하룻밤 동안 들개 무리의 공격을 받다.
(...)
21세. 자동성 남서부 12km 지점, 비단을 실은 외발 수레와 함께 7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다.
자동성 교가의 계단, 떠돌이 고블린 무리로부터 습격을 받다.
자동성 사냥꾼의 움집, 수가의 사냥꾼들에게 습격을 받다.
(...)
자동성 소금 광산 입구, 등 뒤의 암살자에게 공격당하다.」
아직 통일된 기년법과 역법이 없어 정확한 일시가 떠있지 않았지만, 지구 기준으로 자동 환산되는 나이 덕에 대강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휘경의 히스토리를 스크롤로 올리고 내리며 짜증내는 것을 보았다. 뿔 투구에 안광을 뿜어내는 위엄 넘치는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없잖아? 내가 잘못 본 게 아닌데?"
"뭐가 없다는 거야?"
"딱히 개입한 흔적이 없다고. 그냥 운이 좋았는데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그럼 그렇게 생각하던가."
"아, 제길."
성운이 자동성에 개입한 것은 오래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은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 세계에 소환되기 전에 휘경은 태어난 뒤였다.
'8년 정도인가.'
성운은 로스트 월드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정찰이라고 생각했다.
종족과 부족, 흉물이나 흉신, 고대 유적을 미리 발견해 내서 이후의 접촉에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판을 미리 짜는 것이 결국 승리와 가까워지는 방법이었다.
문제가 없진 않았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생각은 혼자서하고 눈도 한 쌍뿐이다.
자신이 관장하는 소영역을 통해서 시야를 빌리지 않으면 신체(神體) 그대로를 이동해서 관찰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다행히 벌레의 소영역은 예의 정찰을 하는 데는 유리한 소영역 중 하나였다.
'그래도 정찰을 하는데 최고는 새의 소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간에 성운이 보기에 헤게모니아가 '마성에 휩싸인 휘경'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 건 이상하지 않았다.
마성을 얻는 방법은 로스트 월드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등장한다.
그중 고대 유적은 마성을 얻는 가장 모범적인 방법이지만, 통상적으로는 이미 '마성에 휩싸인' 개체를 수중에 두는 것이다.
종족마다 편차치가 있지만, 마성에 휩싸인 개체는 랜덤하게 태어나는데 휘경의 '뿔'과 같이 외관으로 구분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특별한 능력치 '마성'이 추가된다.
'하지만 마성 중에는 라크락이 얻은 전기의 마성처럼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지.'
부정적인 마성은 특별히 '저주'로 구분되는데 헤게모니아가 착각한 것은 바로 '불운의 저주'였다.
'저주도 나름 쓸모가 있지만 덩치를 키워야 하는 초반부터 가지고 있기는 부담스러워. 특히 불운의 저주는 최악의 저주 중 하나니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온갖 불운이 들어오니까.'
사실 성운은 실력이나 경험이 모자라다고 할 수 없는 헤게모니아가 확률의 마성을 불운의 저주로 착각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나조차도 그렇게 착각했으니까.'
8년 전, 성운은 자동성의 여러 개체들을 관찰했고, 당연히 휘서와 그 자식들이 주요한 관찰 대상이었다.
자동성은 향후에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될 테니 라크락의 무리에게는 먼 미래의 일일지라도 언젠가는 이들에게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인 휘서는 평균적인 능력치가 높은 편이었고, 그 자식들 또한 어느 정도 유전을 이어받아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운의 눈길을 끈 가장 특이한 캐릭터는 휘경이었다.
'히스토리를 처음 살펴봤을 때는 굳이 더 챙겨 볼 필요도 없이 불운의 저주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성운은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속단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분명 로스트 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세계였고,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관찰할 시간도 길었다.
성운은 메뚜기 떼를 관리하면서 라크락의 무리를 들여다보고, 다른 세력들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자동성과 같은 향후 손에 넣어야 할 목표, 즉 자동성과 같은 주요 거점들을 관찰했다.
그 결과 발견한 것이 휘경을 노린 암살이었다.
내성의 화장실에 하인 중 하나가 발판을 망치로 내려쳐 밟기만 해도 부러지도록 헐겁게 만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휘경이 그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건 휘경을 노린 암살이었다.
'하수로로 떨어져 죽으면 그만이고, 떨어지지 않아도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질 테고, 캄캄한 하수로에서 길을 찾지 못하면 또 굶어 죽을 테니. 만에 하나 살아오더라도 범인은 누군지 찾을 수 없어.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히스토리를 봐도 사고처럼 보이지만 모두 누군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럼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 아니, 일단은 살리자.'
하지만 휘경에 대한, 성운의 파리 떼를 이용한 첫 번째 경고는 통하지 않았다. 휘경은 그저 성가시다고 생각했고, 예의 부러진 발판 위로 올라서고 말았다.
휘경은 화장실에서 구르고 굴러 오래된 하수로로 떨어졌다.
또 저주가 자신을 후려갈겼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인 휘경보다 성운이 더 놀랐다.
'...이걸 살아? 하나도 안 다치고?'성운은 다음으로 반딧불이를 창조해 휘경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인도했다.
하지만 성운은 사실 반딧불이가 없었더라도 살아나오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성운이 휘경의 능력이 저주가 아닌 확률의 마성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
사이란은 휘경의 등 뒤로 떨어진 화살을 보고 의아했다.
손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벼락을 쏘아낼 결심을 굳혔는데, 정작 화살이 느닷없는 돌개바람을 맞고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큰 동굴 앞이니 바람이 불거나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쏘아진 화살을 거꾸러트릴 정도로 거센 것은 기이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사이란의 다음 동작은 정해져 있었다.
암살자가 두 번째 화살을 들기 전에 사이란의 손에서 벼락이 쏘아졌다.
-쾅!
대기 전압의 차이를 한 몸으로 받아낸 암살자는 시커멓게 타올라 쓰러졌고, 체내 지방이 연소하며 갈라진 피부 사이로 불길이 피어오르고 지글지글 익었다.
사이란이 휘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습니까?"
"아, 어. 고마워."
휘경은 시간이 제대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휘경은 이제서야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경이 고개를 들자, 휘준은 마지막 한 수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 옆으로 마지못해 서 있던 병사들 또한 방금의 천둥소리 때문에 창대를 들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휘경이 말했다.
"나는 널 죽이고 성주가 되겠어."
"웃기지 마라! 뿔난 괴물 주제에! 넌 처음부터 우리 형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휘준은 기어코 속에만 담아 두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했고, 휘경은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은 검을 들고 걸어 나가며, 사이란을 돌아보았다.
"사이란, 도와줘."
"물론입니다."
그때 멀리서 여명의 푸른 하늘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단 한 명, 누군가의 심부름꾼이라도 휘경은 멈출 생각이 없었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말을 타고 온 사내는 아침 하늘을 등지고 걸어왔다.
"멈추라고 했다. 휘준, 휘경."
"...아버지."
말을 타고 온 것은 휘서였다.
휘서 뒤로 휘서의 부하들과 수가의 병사들이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
헤게모니아가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됐다!"
"무슨 말이야?"
"검치호 소환해 대면서 치졸하게 시간을 끈 보람이 있었어."
"...치졸한 건 알고 있었나 보지? 아무튼 뭐가 됐단 거야?"
헤게모니아가 투구 안쪽으로 웃었다.
"모르겠어? 어떻게든 시간을 질질 끈 내 쪽이 결국 이겼다는 말이지."
"그래?"
성운은 가면 안쪽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나 보자."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넌 휘서의 자식들 싸움에 집중하느라 까먹었나 본데, 우리가 내기를 걸었던 모순 예언은 결국 휘서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자리라는 거지. 우선, 자동성의 휘서가 온 이상 모든 병사들은 휘서의 명령을 들을 거야. 각 가문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성주가 없을 때만, 성주의 의지를 반하지 않는 한해서 휘두를 수 있는 무력이란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휘서는 무조건 휘준을 다음 후계자로 결정할 거야. 아마 아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텐데, 후계자가 결정된 다음 휘경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이지. 자동성의 성주 자리는 특별해. 그저 휘서를 죽인다고 해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게다가 정통성을 잃으면 다른 가문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성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전제가 잘못되어 있는데? 왜 휘서가 휘준을 후계자로 정한다는 거야?"
"무슨 말이야? 당연한 거 아냐? 지금까지 봐 왔잖아. 휘서와 정치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건 휘준이야. 휘경의 생각이 옳은지는 몰라도, 휘서와는 생각이 다르지. 휘서는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테고."
성운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다.
"야, 잠깐. 너 방금 웃은 거야?"
"아니? 안 웃었는데."
"방금 웃는 소리 들렸는데."
"아니라니까."
"뭐지? 왜 기분이 싸하지?"
─┼
휘서가 휘준과 휘경 둘 사이로 걸어왔다.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동성의 후계자를 결정하겠다."
휘준은 내심 당황한 것 같았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휘준은 헤게모니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성주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휘경은 휘서를 보자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아버지, 그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휘서는 그 말을 자주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습관적으로 말할 뻔했다.
하지만 휘경의 두 눈을 보자 그저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뿔이 많이 자랐구나."
"네. 아버진 수염을 깎았네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휘경은 다음 말을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털어지듯 나왔다.
"왜 그렇게 저를 죽이려고 한 건가요?"
사이란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휘준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라렸고, 휘서는 침묵했다.
그리고 멀리, 헤게모니아는 당황했다.
성운은 당황하는 헤게모니아를 비웃었다.
'휘경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였던 건 휘서 때문이었지. 휘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휘경을 죽이고 싶어 했어. 물론 자신의 손을 직접 쓰진 못했지. 다른 가문의 눈치가 보이니까. 사적인 복수심, 아니 사적인 앙심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겠지. 그래서 암살 시도는 비교적 드물게, 아주 조심스러웠어. 하지만 그 덕분에 휘경이 가진 마성이 어렵지 않게 그런 시도들을 막아 낼 수 있었지.'
휘서가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느냐?"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는데, 저 자신을 속여 왔던 것 같네요. 믿고 싶지 않아서요."
"...넌 려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휘경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세 여자와 혼인했지만 마음으로 사랑한 것은 려뿐이었다. 자동성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었지만 돌아보니 상처가 가득하더구나.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려가 옆에 다가와 주었지. 려가 있다면 더한 일도 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죠."
휘서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너 때문에 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망할 그 뿔을 달고 태어나서. 그래서 빌어먹을 저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죠."
휘경은 가볍게 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완전히 자라지 않은 여린 뿔이라 감각이 느껴졌다.
"제 뿔은 그런 저주를 담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심지어 아버지는 제가 뿔로 어머니의 배를 찢으며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잖아요. 뿔이라는 건 자라나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길었을 리가 없죠. 그것도 거짓이죠?"
"...그래. 려는 너를 낳을 때 죽은 게 아니다. 산열이 심했다. 산파는 려의 몸이 애를 낳기엔 너무 약했다고 말했지."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휘경은 어딘가 홀가분해졌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짊어지게 만들었던,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반면에 휘서는 더 없이 피곤하고 노곤하게 보였다. 휘준과 휘경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들이 더 나이가 든다면 알아차릴 지도 몰랐다.
"어머니 이야기는 이제 됐어요. 후계자를 정하세요."
이야기 내내 말하고 싶은 걸 참고 있던 휘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설마 개인적인 죄책감으로 자동성의 성 주민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성주 자리를 결정하시진 않겠지요?"
"...준아, 걱정 마라. 성주의 후계자를 정할 때,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동성의 성주로서 말할 테니."
휘준은 그나마 안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휘경은 그렇지 않았다.
휘서가 보기에, 휘경은 자신이 말을 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다 결정한 것 같은 단호한 모습이었다.
'어째서냐, 경아? 결정을 하는 것이 내가 아닌 너처럼 보이는구나.'
휘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으니, 결정하겠다. 나를 이은 다음 자동성의 성주는..."
─┼
한편, 헤게모니아는 상황이 급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헤게모니아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통하겠냐고."
040화
모두가 휘서의 입을 주목하고 침묵했을 때, 휘경의 주위로 시간이 멈추었다.
휘경은 자신의 뿔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입모양을 봐.'
-'휘'를 말하고 있다.
'다음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입모양을 더 잘 들여다 봐.'
-이제 보인다. 휘를 말한 다음, ...입모양이 바뀌려 한다. 알겠군. 준이라고 할 것이면 입모양이 바뀌지 않겠지. 윗입술이 아주 천천히 벌어진다. 경을 말하려고 한다.
'그럼 내가 다음 자동성의 주인이란 말인가?'
-그래.
휘경은 무언가 생각했다.
마성의 정령이 말했다.
-뭔가 마뜩찮아 보이는군.
'아버지는 도망치려고 해. 공정을 기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죄책감을 성주 자리를 내려 주는 것으로 해소하려는 것이지.'
-너의 말이 맞다.
'그리고 소문이 퍼질 거야.'
-소문?
'자동성 안에 아버지가 뿔이 난 자신의 자식을 죽이려고 했고, 그 때문에 다른 자식이 아닌 그 자식에게 성주 자리를 주었다고.'
-그렇게 되겠군.
'그럼 네 가문은 내 능력에 의문을 가지겠지. 그리고 성 주민들도. 아버지의 죄책감과 외부 세력과 결탁해 우연히 성주가 되었다고 생각할 테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망하는 거야.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않을 테고 성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자동성이 활기를 잃으면 네 가문은 다음 성주를 운운하겠지. 암살을 시도할까? 그럴지도 모르지. 자동성의 성주가 죽으면 자동성 내의 누군가가 성주가 되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일은 막아야 하겠군.
휘경이 말했다.
'이봐 뿔.'
-...내 힘이 너의 뿔에서 비롯되는 건 맞지만 나는 뿔이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건 알잖아.'
-...그래.
'너는 확률... 이란 것을 조작한다고 말했지. 그건 아마 가능성이라는 뜻이고. 그럼 너는 아버지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나? 그럴 가능성도 있잖아.'
-아니.
'그럼 아버지의 입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상대로는 조작할 수 없다.
'...그래?'
-나는 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 해결사가 될 수 없다. 나는 너에게 불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끝이 피할 수 없는 파국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그건 아냐.'
휘경의 시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힘을 빌려서 좀 더 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어.'
-좋다.
─┼
"나를 이은 다음 자동성의 성주는 휘..."
"아버지."
휘서는 말을 멈추고 다소 피곤한 눈으로 휘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생각해 보니 저는 성주 자리를 이어받아야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성주 자리를 저한테 넘기세요."
"...협박 하는 것이냐?"
"네."
그 말에 휘준이 소리쳤다.
"아버지, 보셨습니까? 저 아이는 이제 후계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성주의 자리를 두고 아버지에게 협박을 하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휘서는 손을 들어 휘준을 제지했다.
"좋다. 들어나 보자. 지금 경이 넌 검은 비늘 부족의 전사 하나와 함께 있다. 검도 한 자루씩 들고 있군. 하지만 나는 성을 지킬 수 있는 네 가문의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 창과 칼은 물론이고 말을 탄 이도 있고 활을 든 이도 있지. 이 상황에서 경이 넌 나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휘경은 사이란의 손목을 쥐고 들어 보였다.
"이 리자드맨은 그냥 검은 비늘 부족의 전사가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죠."
사이란은 휘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손바닥 위로 전기를 일으켰다.
휘서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지만 도열한 병사 중에는 탄성을 내는 이도 있었다.
"이 리자드맨이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버지를 죽이고 저를 데리고 도망칠 능력은 됩니다."
"아버지, 저 말은 거짓말입니다. 저 리자드맨은 이미 다치고 지쳤습니다."
휘서는 휘경의 말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래서? 나를 죽이면? 자동성의 성주 자리는 어찌하려고? 내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죽으면 다음 성주는 자동성 안에 있는 아무나에게로 돌아간다. 그걸 바라진 않을 텐데?"
"그렇겠죠. 하지만 이 전사가 이미 저에게 약속했습니다. 검은 비늘 부족은 저를 성주 자리에 올려 주겠다고요."
거짓말이었지만 사이란은 휘경의 맥락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비늘 부족의 선택받은 자가 보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전혀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한 것처럼 내가 죽으면 다음 성주 자리는 알 수 없는 인물에게 돌아가는데..."
휘서는 말을 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휘경이 말했다.
"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검은 비늘 부족의 전사들이 성 주민들을 몰아내고 성을 비워 버리면 됩니다. 성주의 권한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떻게 검은 비늘 부족 전사들과 싸워 이기겠어요?"
휘서는 생각에 잠겼고, 휘준은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서 있는 휘서의 부하들도 당황한 것 같았다.
휘경의 말은 지어낸 것이지만 사실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검은 비늘 부족을 막아 내고 있던 건 잘린 귀 부족이었지만, 정작 자동성 내부에는 잘린 귀 부족의 영향력이랄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휘준이 잘린 귀 부족과의 연관성을 끊어 내려고 하면서, 동시에 검은 비늘 부족 출신인 사이란의 존재가 부각된 덕분이었다.
휘서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나."
휘준은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휘서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자동성의 성주는 휘경, 바로 너다."
─┼
자동성의 성주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자동성 안에 곧바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다른 형제들이 아닌, 망나니 소리나 듣던 휘경이란 것도.
놀라운 사실은 휘경이 검은 비늘 부족과 결탁을 했으며, 더 기이한 것은 보이지 않게 자동성을 지배해 온 공포스러운 존재인 휘서를 협박해서 성주 자리를 얻어 냈다는 이야기였다.
자동성의 성 주민들은 모든 일들이 그저 우연일 뿐이며, 사실은 자동성의 성주조차 아니며 휘서의 계략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보였던 휘경의 모습이 그저 꾸며 낸 가짜였고, 아주 오래전부터 자동성의 성주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일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냐 속닥였다.
정작 그 모든 소문의 주인공인 휘경은 자신의 아버지 휘서로부터 성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익히기 위해 며칠 동안 내궁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휘준은 며칠간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네 가문은 모두 휘경이 성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재력을 가진 성 주민들 또한 휘경이 성주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당분간은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도마뱀과 붙어먹는 그런 년을 가만 두고 본다고?"
휘준은 자동성을 떠나기로 했다.
떠돌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대륙 안쪽으로 들어가면 검은 비늘 부족이나 잘린 귀 부족만큼은 아니지만 큰 인간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곳에 가서 힘을 키우겠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정보는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어. 아버지,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겁니다.'
휘준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의 말이 매여 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휘준은 마구간 안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품 안의 단도를 쥐었다.
'마구간지기인가 보군. 유감이지만 내일 아침까지 날 발견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휘준은 조심스럽게 그림자 안의 사람을 불렀다.
"이봐."
그림자는 그 부름에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휘준은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자기가 기대했던 마구간지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횃불 빛 아래로 사이란이 걸어왔다.
"휘준, 나라는 걸 알았습니까?"
"망할 도마뱀."
"아니었나 보군요."
"비켜라. 나는 내 말을 살펴보러 왔다."
"그렇게 짐을 싸들고요?"
사이란이 휘준의 짐을 가리키자 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어딜 가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휘준은 그렇게 말하며 사이란을 지나쳤다.
근접한 거리지만, 휘준은 사이란을 죽일 자신이 없었다.
휘준은 그저 사이란이 자신을 막아서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난 3주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사이란은 휘준이 말을 타는 것까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휘준은 말에 짐을 실어 올린 다음 자신까지 올라타고 나서 말했다.
"막지 않는 거냐?"
"저는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휘준. 제 생각에 당신은 자동성에 남아 있어도, 어딘가로 떠나가더라도, 제대로 된 일을 성취할 수 없을 테니까요."
"같잖은 저주로군."
휘준은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가, 사이란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휘준은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그 뒤에서 사이란이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더군요. 당신같이 같잖은 화근이라도 휘경 주변에 남겨 둘 수 없다고요. 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사이란은 마구간의 횃불을 들고 흔들었다.
멀리 물고기 장수가 그 횃불을 보고 지붕 위에서 파란색 깃발을 흔들었다.
수가의 광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신이 서 있던 골목길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두드렸다.
그 안에 앉아 있던 고블린 하나가 달려 나가 자동성의 성벽 위로 달려갔다.
고블린은 성벽 위에 앉아 있던 두목에게 다가갔다.
고블린은 자신의 두목에게 수어를 통해 말했다.
'두목, 놈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알겠다.'
두목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 성곽 위에 서서 칼을 뽑았다.
성벽은 휘준이 매수한 문지기가 말 하나가 지나갈 만큼 열어둔 상태였다.
휘준은 자신을 노리는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문을 지나갔다.
두목이 뛰어내리며 칼을 휘둘렀다.
말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검은 물체를 보고 놀랐다가, 그것이 다가와 자신을 쓰다듬자 금세 진정했다. 말은 자신의 등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바닥을 향해 구르는 것을 보았지만, 그리 놀라지 않았다.
두목은 바닥에 떨어진 휘준의 머리를 집어 들고, 말 위에 올라탔다.
고블린인 두목은 떠돌이인 자신을 살려 주고 온정 있게 대해 준 휘경과 사이란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고, 이 일은 그 보답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휘준이 죽었다는 소식이 자동성에 퍼지면 휘경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 걸 두목은 알았다.
때문에 두목은 휘준이 제 발로 도망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휘준은 이대로 실종될 예정이었다.
두목은 자동성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시체와 함께 말을 타고 달렸다.
─┼
헤게모니아가 화상 채팅창 너머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투구 안쪽으로 안광이 이글거렸다.
"그래. 내가 졌다."
"패배한 사람 같지가 않아. 엄청 당당한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어."
"왜 갑자기 명언 제조기가 된 거야?"
"평소에 나를 생각하고서 패배하면 화내고 소리치고 다시 하자고 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래.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했네."
성운은 실제로 조금 걱정했던 만큼 헤게모니아의 칼 같은 태도가 반가웠다.
"조금 분하기는 하지만..."
"......"
성운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운이 말했다.
"페널티는 어때?"
"버틸 만해. 돌발 이벤트로 내 잘린 귀 부족에 우기가 끝나고 한파가 시작되긴 했지만 별 문제 없을 거고. 제일 큰 문제는 신성 레벨이 다운되긴 했지만... 앗, 아니, 아니.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반대로 성운의 신성 레벨 경험치는 물론, 휘경, 사이란의 능력치도 대폭 상승했다.
아직 발생하진 않았지만 예언에 성공한 만큼 긍정적인 이벤트도 예고되어 있는 데다,
'레벨이 다운됐다고?'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주력인 잘린 귀 부족과의 전투 경로를 따져 보았다가 그만두었다. 이제와선 현실적으로 따라잡기 힘든 거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게모니아의 다음 행보는 성운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그쪽에 남아 있지는 못할 텐데."
"...맞아. 그러니 서쪽으로 갈 거야."
"대륙 안쪽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군."
"맞아."
실력을 자신 할 수 없다면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대륙은 현재 정주 부족들이 대부분으로 남아 있으니, 현재는 부족끼리 싸우고 있더라도 유목 부족이 등장하면 적대감을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헤게모니아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어 말했다.
"쭉 달려서... 반대쪽까지 갈 거야."
"대륙 서해안까지?"
"그렇지. 당분간은 보기 힘들 거야."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나름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륙을 횡단하며 다른 종족들에게서 기술을 얻은 다음 해안 문명으로 발전시킬 생각인가? 항해와 관련한 기술이나 스킬을 얻었다는 말이군.'
어찌되었든 성운에게는 이득이었다.
헤게모니아가 가진 잘린 귀 부족은 현 시점에서 거대 부족이다. 대륙의 여러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대륙의 동쪽 일에는 그만큼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다.
'자동성도 가졌겠다 그만큼 대륙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써도 된단 말이지. 그 사이 나는 이득을 취하면 되고. 남은 건 북해안과 반도의 나머지 절반인가.'
성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이득'은 시작되고 있었다.
─┼
자동성의 시장.
상인들은 얼마 전까지의 소란도 잊고서 저마다 흥정하며 물건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런 비단은 처음입니다."
"그렇지는 않을 텐데. 우리 부족에선 양이 적긴 했지만 조금씩 팔긴 했었어."
"아니, 정말입니다. 저는 이런 물건은 처음 봅니다. 기술이 대단하군요."
"어디서 왔다고 했지?"
"서쪽에서 왔습니다."
"서쪽?"
"해가 지는 방향 말입니다."
"아."
검은 비늘 부족의 리자드맨 상인은 눈앞의 트롤 상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자드맨 상인은 트롤이란 종족을 처음 보았다.
새로운 종족과 마주하는 것 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서쪽에서 왔다는 말 때문에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트롤 상인이 말했다.
"저희는 계속 동쪽으로 오는 길을 찾고 있었는데, 찾았다 싶었을 때 잘린 귀 부족의 놀들이 길을 틀어막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상단은 꽤 오래 거래를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이쪽으로 올 수 있게 됐습니다."
리자드맨 상인은 '동쪽'이란 단어가 서쪽의 반대, 즉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낯선 이들이 사용하는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리자드맨 상인이 말했다.
"그래서, 이 비단들을 얼마에 살 생각인가?"
041화
키가 2m에 넙적하고 표정 없이, 가면 같은 얼굴을 가진 트롤 상인은 얇은 나무 덩굴로 엮인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로 거래할 생각이 있나?"
트롤이 꺼낸 것은 철편이었다.
철편은 녹여서 다른 농기구나 무기로 쓰일 수 있어서 소금이나 비단같이 원시적인 화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철편은 향후 실제 금속 화폐로 발전했다.
'철은 언제나 부족하지.'
리자드맨 상인은 철편 자체는 언제나 거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래 상품을 골랐으니 다음은 분량이었다.
"우선 내가 가진 비단은 눈에 보이는 이만큼이다. 철편을 얼마나 줄 수 있나?"
"보이나?"
트롤은 자신의 가방 안쪽을 보여 주었다. 철편이 가득 있었다.
"모두 주지. 비단이 워낙 훌륭해서 그래."
"오."
리자드맨 상인은 감탄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그대로 거래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때 인간 상인 하나가 다가와서는 리자드맨 상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봐."
"음?"
"비단은 나랑 거래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다른 사람이랑 거래를 하겠다는 거야?"
"...으음?"
리자드맨 상인은 당황한 것 같았다.
인간 상인이 트롤 상인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친구랑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트롤 상인은 거래의 방해자가 나타나 다소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시죠. 저도 거래 후에 탈이 나는 것보다야 거래 전에 탈이 나는 게 좋습니다."
인간 상인은 잠깐 트롤 상인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적어도 서쪽에서 왔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반면 검은 비늘 부족의 리자드맨 상인은 인간 상인을 알아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동성의 성주님...?"
리자드맨 상인은 말끝을 다소 흐렸다. 이마 위로 자라난 한 쌍의 사슴뿔 때문에 휘경을 알아보았는데, 한 부족의 대표답지 않은 범상한 옷차림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저만큼의 비단을 고작 철 한 바구니랑 교환하려고 한 거야?"
"예. 그렇습니다마는..."
"그게 타산이 맞다고 생각해?"
"음..."
리자드맨 상인도 상인이었으므로 타산을 따지면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 있었다.
"저는 라크락 님과 함께 왔고 수레에 얹어서 왔기 때문에 비단을 운송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변 부족들과도 이 정도로 거래를 해 왔는데, 저 트롤 상인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철편을 더 많이 내놓았습니다."
휘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저 트롤도 그걸 알아?"
"예?"
"저 트롤은 이런 비단을 처음 봤다고 말했지. 내 생각에 그건 거짓말이지만, 상품 가치가 높은 물건이란 건 나도 알아. 저 트롤은 이 물건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 비단의 가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비단을 운송해 온 너의 수고로움은 가격을 더 받아도 된다는 말이지."
"그 말은..."
"검은 비늘 부족의 비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면, 아주 멀리서 왔다고 말해. 들고 오는데 아주 고생했다고."
아직 중간 유통에 대한 개념과 원산지 표기 의무화가 없는 시대였다.
리자드맨 상인이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 아닙니까?"
휘경은 이마 사이를 좁혔다.
'그놈의 정직! 거짓말 안 하고 살면 누가 밥 먹여 줘?'
휘경은 성주가 된 이후 라크락의 검은 비늘 부족에 대한 교류를 늘렸고, 기존에 알던 자동성의 리자드맨들과 사이란 말고도 많은 리자드맨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리자드맨들을 만나자 종족의 특징이 눈에 보였다.
전반적으로 정직한 편이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피하려고 든다는 거지.'
특히 휘경은 검은 비늘 부족에게서 좀 더 그런 경향이 잘 나타난다고 느꼈는데, 부족이 가진 자신감에서 비롯된다고 봐서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문제는 상인들 사이의 거래였다.
'어차피 다 사기꾼들인데!'
휘경은 어쩌면 푸른 벌레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필요로 한 것은 이런 경향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검은 비늘 부족의 비단은 반도 북동쪽에서 만들어진다며? 편하게 가져왔다고 한들 수고를 들인 건 사실이잖아. 그에 대한 값을 받아야지 않겠어?"
"그 말은 사실입니다마는..."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실이 있지."
리자드맨 상인은 휘경의 상인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뭡니까?"
"철편의 질."
"아."
"다 똑같아 보이는 철편이지만 잡다한 불순물이 많이 섞였으면 무르고 약하지."
"하지만 겉보기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사이란 님 같은 전사가 아니면 철편을 꺾어서 무르기를 판단할 수라도 있겠지만."
"'저울'을 사용해. 같은 크기의 질이 좋은 철편과 비교해서 무게 차이가 많이 난다면, 그건 순수하지 않다는 뜻이지. 적어도 트롤 상인은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그 부분을 찔러서 뭔가를 더 얻어 내라고."
리자드맨 상인은 휘경 덕분에 시장 곳곳에 놓여 있던 흥미로운 기계 장치의 이름과 쓸모를 알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휘경."
휘경은 웃으며 리자드맨 상인을 떠나보낸 다음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가 호구 잡히면 내가 곤란하단 말이다.'
─┼
휘경은 자동성 성주가 되는 날 꿈을 꾸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다.
휘경이 주로 꾸는 꿈은 복면을 쓰고 자신을 쫓는 사람을 피해 도망 다니는 꿈이나, 온갖 야채와 돼지고기를 푹 삶은 국물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원 없이 말아 먹는 것 정도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휘경은 텅 빈 자동성에 혼자 있었다.
밤이라면 모를까, 해가 하늘 가운데 떠 있는데도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집집마다 들여다봐도 사람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야. 다들 어디로 갔지?'
휘경은 소금 광산 안쪽과 내궁, 그리고 성곽 위로 올라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성곽 위로 올라가 밖을 내다보자 사라진 성 주민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성 주민들은 성벽 밖에 도열해서는 화가 난 표정으로 휘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휘경은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성주가 되어서 그렇구나.'
휘경은 이번엔 내궁으로 걸어갔다.
성주와 그 가족이 기거하고 네 가문의 가신들이 업무를 보는 내궁도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성주민이나 다른 가신과 대화를 하는 대회관으로 걸어가자, 의외로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 휘서와 다른 네 형제였다.
휘서와 네 형제들은 성 밖의 성 주민들처럼 휘경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성주의 자리는 비어 있어. 저기가 내 자리란 말이지.'
휘경은 끝으로 소금 광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둡고 캄캄해서 앞을 볼 수 없었는데, 횃불을 들고 와야겠다 생각한 순간 반딧불이들이 나타나 불을 밝혔다.
휘경은 반딧불이를 끝까지 따라갔고, 소금 광산 가장 깊은 곳에 벽을 보고 뒤돌아선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휘경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구시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남자는 휘경이 뒤에 서 있는 것도 모르는 듯, 검지를 살짝 들어 올렸다. 검지 위에 반딧불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휘경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푸른 벌레신 님이시군요."
휘경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예의 있는 방식으로 절했다.
"예의가 없어 보이더라도 용서하세요. 워낙에 막 자라서..."
남자는 휘경이 뒤에서 말하거나 말거나 반딧불이가 신기한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푸른 벌레신 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곤 있지만 결과적으론 푸른 벌레신 님에게 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이제 손바닥을 펼쳤고, 반딧불이들은 춤을 추며 남자의 손바닥 안으로 사라져갔다.
휘경은 푸른 벌레신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
휘경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든 반딧불이가 사라졌다.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휘경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엎드린 채 신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저를 돕지 않아요."
휘경은 그 말을 내뱉고서 등 뒤가 밝아 옴을 느꼈다.
돌아보자, 누군가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사이란 무엘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사이란은 휘경의 손목을 쥐고 일으켰다.
사이란은 횃불을 치켜들고 어두운 소금 광산 안을 걸어 나갔다.
"찾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겁니까?"
"아니, 글쎄, ...잘 모르겠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요."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사이란, 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
"누굴 봤습니까?"
"내가 누굴 봤냐면..."
─┼
그리고 휘경은 꿈에서 깨어났다.
제대로 된 침상에서 잠을 잔 것도 아니라, 내궁 성주 의자 위에서 까무룩 잠이 든 것이었다.
휘경은 처음엔 그게 여타의 다른 꿈처럼 개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푸른 벌레신 님은 사이란이 있으니까... 가 아니라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들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가?'
휘경은 의도를 알아차리자 정말로 심적인 부담이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푸른 벌레신만이 지지해 주겠다고 하면 그 믿음은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크락과 그 부족은 실재했다.
검은 비늘 부족은 잘린 귀 부족을 내쫓는 것으로 그 힘을 증명해 내기도 했다.
'신님, 어차피 그 친구들이 없으면 저는 빈털터리라고요. 계시를 주시지 않아도...'
휘경은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신앙을 통해서도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동성은 지금 혼란한 상황이었다.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성주가 바뀌었고, 네 가문의 가주들은 휘경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상인들이 오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예전만큼의 활기를 띄지는 못했다.
이런 혼란은 안정될 필요가 있었다.
'푸른 벌레신을 믿으면 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어. 실제로 그 안정감이 라크락의 검은 비늘 부족에게서 온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스라라크 목상 같은 걸 팔면서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하면 어떨까?'
휘경은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에 빠졌다.
─┼
멀리서 내려다본 성운은 조금 당황했다.
'나는 조금 감동해서 신앙을 퍼트리길 기대한 건데...'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원하는 목표를 얻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성운의 앞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하나의 부족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이제 이들 부족은 당신의 영역에 속합니다.」
「영역:인간」
「Lv. 1」
이제 성운은 두 종족에게서 모두 신앙 자원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두 종족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겠어.'
─┼
호구를 당하는 리자드맨들을 지키기 위해 시장을 오가던 휘경은 특이한 종족을 발견했다.
인간과 닮은 외모지만 키가 더 크고 귀가 뾰족하다.
머리칼은 대체로 밝은 색으로 화려하며 눈이 커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도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엘프잖아?"
자동성에서 트롤도 보기 드문 종족이긴 했지만, 더 보기 드문 것은 엘프였다.
대륙 쪽엔 강성한 트롤 부족이 존재해 자동성까지 상인들이 오갔지만, 엘프 부족은 황야를 건너서 있는, 자동성을 기준으로 북동부의 대륙 북해안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큰 상단이 황야를 건너 온 것인지 엘프는 열댓 명 가까이 되었고, 시장에 큰 좌판을 열려고 준비 중이었다.
마침 또 다른 리자드맨 상인 하나가 비단 꾸러미를 들고 엘프와 거래 중이었고, 휘경이 내용을 엿들었다.
"고운 비단이군! 아주 상등품이야."
"철편으로 거래한다고 했지? 얼마나 줄 수 있나?"
리자드맨 상인의 말에 엘프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커다란 상자에서 주먹만 한 주머니를 꺼냈다.
"흠, 이 정도면 되겠나?"
042화
리자드맨 상인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주머니가 워낙에 작았기 때문이다.
"주머니 안을 확인해 봐도 되겠나?"
"물론."
엘프 상인이 자신있게 대답하자 리자드맨 상인은 그 자신감의 근거를 주머니 안에서 찾을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은 그냥 철편이었다.
"...음. 미안하지만 이 정도의 철편으로는 거래하기가 힘들 것 같군."
"...그래? 어느 만큼의 철편을 원하나?"
"적어도 여덟 배는 가져와야지."
"뭐라고?"
엘프 상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고작 옷가지나 만드는데 쓰는 비단의 가치가 그렇게 크단 말인가?"
리자드맨 상인은 비단이 고작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비단으로 만든 옷은 그만큼 입기도 좋고 옷의 수명도 오래간다.
무엇보다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비단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옷을 잘 짓는 이가 비단으로 옷을 만들면 그 사람을 고귀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때문에 신분이 높은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시시때때로 증명할 필요가 없도록, 좋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하지만 리자드맨 상인은 그러한 사실을 엘프 상인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리자드맨들은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리자드맨들은 자신 앞에 멍청이가 있다면 자신의 멍청함에 나자빠지도록 놔두는 편이었다.
리자드맨 상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주변에선 그 정도 가치를 가지지."
"이건 그냥 철이 아니야. 우리 지역에서만 나오는 아주 상등품의 철이지."
"유감이네만, 난 그걸 알아볼 재주가 없어."
"아니, 저기 저울이 있더군. 자네가 가진 가장 좋은 철편이랑 비교해 보면 어떻겠나?"
리자드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좋은 철편이라도 그 정도 양으로는 거래할 생각이 없어."
"두 배를 주지."
"비단을 사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지."
지켜보던 휘경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호구라도 저런 저급한 놈들한텐 안 넘어간다 이거지?'
리자드맨은 비단 꾸러미를 들고 그냥 떠나 버렸고, 엘프 상인은 리자드맨이 떠난 다음 작게 욕을 지껄였다.
'그거랑 별개로 저 엘프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는 좀 지켜봐야겠는데.'
휘경은 엘프들과 접촉하지 않고 오가면서 힐끗 바라보거나 사람을 써서 어떤 거래를 하는지 알아보게 했다.
하루를 꼬박 지켜본 결과 휘경은 엘프가 어떤 종류의 상인인지 알 수 있었다.
엘프들은 거래를 시도한 횟수는 많지만, 실제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하지만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에는 아주 큰 이득을 봤다.
'완전 개호구만 낚고 있잖아?'
상인들끼리는 알게 모르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엘프 무리에 대한 악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퍼졌지만, 그런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인 일을 막 시작했거나, 아주 멀리서 와서 이 지역의 물건과 시세에 대해 정보가 어두운 이들을 상대로 완전 사기나 다름없는 비율로 물건을 거래했다.
'좋지 않은걸.'
휘경은 엘프들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주변에서 볼 수 없는 복식을 입고 있는데다 낯선 종족이라는 건 그만큼 멀리서 왔다는 말이다. 멀리서 온 이상 거래를 할 수 있는 물건이 제한되어 있으니, 결국 그리 많지 않은 거래에서 높은 이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이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특산품을 통해서 차익을 내는 쪽이 일반적이다.
'저 자식들은 뭔데 초짜들 물을 먹이는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휘경도 상인으로서는 초짜긴 매한가지였으나, 자동성 성주는 성 주민들에게는 물론, 외부인이라면 통행증을 발급하기 위한 비용, 시장에서 좌판을 깔기 위한 비용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전 자동성 성주인 휘서는 위기의 때를 위해 꽤 많은 물품들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휘경은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있는 상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부자였으므로, 사실 초짜인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초짜 상인이지만 부자인 휘경이 거래하는 물건은 자동성의 시장 그 자체라는 부분도 있었다.
휘경은 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저런 엘프들이 성공적으로 거래를 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저런 종류의 상인이 더 많아질 테고, 그럼 초짜 상인들이 자동성에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시장에 들어서는 상인의 숫자가 줄어들 것이고...
'그럼 내 수익이 줄어든다는 말이지.'
휘경으로선 심각한 문제였다.
─┼
성운 또한 엘프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종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경고: 상대 종족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엘프들 뒤에도 플레이어가 있다는 말이군.
문명 충돌 이벤트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떠돌이 한둘의 만남이 아니라, 일정한 숫자 이상의 개체가 만나야 했다.
'엘프는 북해안에 있었지. 하지만 북해안은 정찰을 제대로 못하긴 했어.'
성운이 주로 정찰한 것은 반도와 대륙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성운이 조종할 수 있는 벌레들은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리자드맨들 또한 추위에 강하다고 보긴 힘들었고, 유목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황야를 지나서 대륙 북해안 위까지 올라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북해안에서도 황야를 건너오긴 힘드니까, 당분간은 신경을 끄고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성운은 '로컬 커뮤니티' 탭을 눌렀다.
「플레이어 목록(1명)」
「엘다르」
닉네임을 확인한 순간 바로 다음 상태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엘다르'가 귓속말을 요청했습니다.」
이전 헤게모니아와 달리 성운은 이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화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
헤게모니아와 대화를 해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두 사람이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퉈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운이 입을 꾹 닫고 있었더라도 전면전까지 갈 확률은 낮았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전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반면에 이 엘다르라는 플레이어는 황야 너머에 있단 말이지. 적어도 이 주변에서 위협이 될 만큼 가까이에 병사를 두고 있거나 하지는 않아.'
하지만 성운은 결국 귓속말을 받기로 했다.
'북해안의 정찰이 미흡한 게 마음에 걸려. 시시껄렁한 대화로라도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성운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화상 채팅이 추가 요청되었다.
성운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엘다르가 말했다.
"반갑구나, 인간아."
"......"
성운은 엘다르를 바라보았다.
엘다르는 아름다운 엘프처럼 보였다. 엘프답게 중성적인 외모 때문에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사실 신의 외형을 설정할 때 성별은 그리 중요한 점도 아니었으므로 성운은 이미 그런 부분에 대해선 신경을 꺼 두고 있었다.
일부러 끔찍한 외형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곧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엘다르의 외형 선택은 오히려 준수하다고 할 만했다.
문제는 말투였다.
'...설마.'
성운은 플레이어가 지구에서 온 것이 아닌 진짜 엘프... 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도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성운이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엘다르가 말했다.
"하, 내 아름다움을 보고 말을 잃은 것인가?"
"미친 건가?"
"......"
"아, 미안. 의도치 않게 생각한 게 입 밖으로 막 튀어나오는 버릇이 있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성운이 방금 만들어 낸 버릇이었다.
"...이 엘프의 신 엘다르는 겸허히 용서하겠노라."
성운은 방금의 대화를 통해 엘다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RP플레이어구나.'
RP, 즉 RolePlay를 하는 이들, 게임 안에서 특정한 역할로 자신을 정체화해서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컨셉충이었다.
그런 플레이를 한다고 해서 그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다른 플레이어들과 대화하기 불편하고 RP플레이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기 십상이라 오히려 피해를 보는 플레이 방식이었다. RP플레이를 하는 이유는 그냥 자기가 그렇게 플레이하는 게 재밌어서였다.
이 엘다르라는 플레이어는 엘프들의 신이라는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운은 RP플레이에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단지 성격이 그런 플레이에 맞춰 줄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마침 대화를 걸어 왔으니 물어보는데, 자동성에 들여 놓은 엘프들이 가당찮은 거래를 하는 건 널 닮아서 그런 건가?"
"...신이라고 하나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진 못하느니라."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렇노라."
성운의 생각에 그건 거짓말이었다.
엘프 상인들의 능력치는 높은 편이었고, 플레이어의 손을 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능력치였다.
하지만 어떤 거짓말은 당장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면 속아 넘어가 주는 척하는 것이 이득을 볼 때도 있었다.
성운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부분은 내가 신경을 꺼도 되겠고. ...혹시 헤게모니아라는 플레이어 알아?"
"그... 무엄하고... 무지식한... 신 말인가."
성운은 어째서인지 엘다르가 '싸가지 없고 무식한'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것 같았다.
"그 신과 야만적인 놀 무리는 내가 신성한 북해안에서 내쫓아 버렸지. 다행히 넌 '아직은' 그 헤게모니아만큼 무례하진 않구나."
"흠."
성운은 이것은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헤게모니아는 북쪽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는데,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아마 모순 예언을 통한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퍽 꼬였나 보지.'
하지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 이득 없이 정보를 공유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저 말이 맞다고 하면 이 RP플레이어가 헤게모니아만큼 강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헤게모니아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가 설명이 안 되고.'
엘다르가 말했다.
"질문은 다했느냐?"
"당장은?"
"그럼 본좌가 왜 그대에게 대화를 요구하고, 무례한 질문을 받아 주었는지 밝혀야겠구나."
"그래. 용건이 뭐야?"
"나의 엘프들은 대륙을 지배할 준비를 해 가고 있으나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노라. 나의 엘프들은 유능하지만 북해안은 춥고 황량한 것이다. 그러니 부족한 자원을 다른 종족들에게서 얻어야만 하노라."
"그래서?"
엘다르의 등 뒤에서 황금색 광휘가 솟아올랐다.
"내게 공물을 바쳐라."
성운이 버릇대로 말했다.
"돌겠네."
─┼
다음날, 휘경은 성주답게 옷을 차려입은 다음 엘프들을 만나러 갔다.
다행히 엘프들은 충분히 분별력이 있어서 휘경을 알아보았다.
가장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던 남자 엘프가 말했다.
"자동성의 성주 휘경 님이시지요?"
"그래. 너는?"
"상단을 이끌고 있는 리오나르라고 합니다."
휘경은 리오나르를 바라보았다.
리오나르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낯을 띄고 있었는데 때문에 마음을 읽기가 어려웠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내가 물건 파는 상인들 그냥 얼굴 구경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니라는 걸 알겠지?"
"그래도 구경할 만한 얼굴들 아닙니까?"
리오나르의 말에 휘경은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엘프들은 인간과 유사 인간 종들에게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외견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성에서 어드밴티지가 붙었다.
리오나르가 말했다.
"농담입니다. 저희도 성주님이 왜 저희를 찾아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제 했던 거래들 때문이지요?"
"그래."
"그리고 그 거래에 불만을 가지고 계시고요."
"맞아."
"사실 저희는 성주님이 찾아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둔 물건이 있죠."
"뭐라고?"
리오나르는 엘프 상인 하나를 불렀고, 엘프 상인은 수레 안쪽에 실린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상자 그 자체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쇠로 만든 경첩이 쓰인 보기 힘든 물건이었는데, 그 상자를 열자 휘경은 깜짝 놀랐다.
리오나르가 설명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고대의 보석입니다. 빛을 받으면 깎여진 면에 따라 수십 갈래로 빛을 찢어 냅니다. 눈으로 보고만 있어도 황홀하지요. 하나의 부족을 이끄는 수장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움입니다. 무엇보다 고대의 보석인 만큼 현재 이런 물건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 주시고 저희 거래를 눈감아 주실 수 있는지요?"
휘경은 말없이 보석이 든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런 종류의 보석은 쉽게 거래되는 물건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 값어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귀함과 아름다움은 진짜였다. 휘경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분명 상당히 높은 값어치로 팔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꼭 팔 필요도 없었다. 이런 물건을 내보이는 것만으로 성주의 고귀함을 대변할 수 있을 터였다.
휘경은 한 번 더 가까이서 상자 안의 보석을 확인해 보고는 상자를 닫았다.
리오나르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훌륭한 물건이야. 하지만..."
휘경은 바닥에 툭 떨구었다.
"나 부자야. 뇌물? 이걸론 택도 없어."
043화
리오나르가 미소를 잃어버리고서 황급히 상자를 주웠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경도 그 모습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다행이다. 안 깨졌나 본데.'
휘경이 짐작하기로서니, 상자 안의 보석을 물어줄 돈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화내는 모습 한 번을 보여 주고 날리기엔 아까울 돈이었다.
리오나르는 상자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 내곤, 다른 엘프 상인에게 상자를 넘겼다.
리오나르가 아까보단 차가워진 어조로 말했다.
"얼마를 원하시는 겁니까?"
"글쎄..."
휘경은 손톱으로 손거스러미를 뜯어내며 말끝을 흐렸다..
리오나르는 휘경의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휘경은 잘 손질된 손등을 내려다본 다음 리오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이렇게 뇌물까지 건네주면 정작 너희가 얻는 이득은 크지 않을 건데? 게다가 이 지역에서 제일 힘이 강한 건 나야. 언제든지 약속을 뒤집을 수도 있어. 이 주변에 엘프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지. 저런 보석은 먹고 째도 그만이라고."
리오나르는 다시 눈가에 미소를 되찾았다.
"그야...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지요. 그걸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
휘경은 더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나랑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앞으로 계속 거래를 하게 될 거라서? 하지만 엘프는 그 이전까지도 자동성까지 오는 일이 잘 없었어.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나?'
북해안과 자동성은 정보가 교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휘경은 정보를 보류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빛나는 돌멩이에는 관심 없어. 비싸게 되팔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저런 걸 구매할 사람을 수배하기도 어렵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음... 좋습니다."
"그 전까진 법도를 지켜. 과하게 굴지 말고."
"알겠습니다."
휘경은 겸손해진 리오나르를 보고 흐뭇해하다가 무언가를 생각해 냈다.
"참, 그리고."
"예?"
"내게서 작은 호의를 사고 싶다면 이걸 사는 건 어때?"
휘경은 자신의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리오나르는 상당히 의심쩍어하며 물건을 받아들었다.
"뭡니까, 이게?"
"푸른 벌레신의 수호자를 묘사한 목상이야."
"...푸른 벌레신? ...수호자?"
"내가 믿는 신인데 우리를 믿고 지켜 주시지."
리오나르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하지만 제게도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
"춤추는 그림자신이라고 하지요."
"춤추는 그림자신? 흠. 신을 둘 다 믿으면 축복도 두 배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휘경의 말에 리오나르가 난색을 표했다.
"아닐 것 같습니다만..."
"그럼 믿지 않더라도 사 봐. 다른 사람한테 팔면 되잖아."
"곤란합니다. 제가 알기로, 신들께선 질투가 심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가? 내 신님은 관대하신 것 같던데. 어차피 팔 물건이면 괜찮다고 생각하실걸."
물론 순전히 휘경의 해석이었다. 성운은 자신이 관대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휘경이 결국 선심 쓰듯 가방 안에 있는 모든 목상을 털어 내며 떨이에 가까운 가격을 제시했다.
리오나르는 물건의 가치와 가격에 혹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휘경과 대화하는 것이 낭비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목상들을 구매해야만 했다.
─┼
성운은 곧장 엘다르를 수신 차단했다.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전략적인 이유가 더 컸다.
성운은 엘다르와의 대화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내가 놈을 모르는 것처럼, 놈도 나를 모른다.'
성운이 놈을 모르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곤충의 소영역'을 통해 이루어지던 정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없진 않았다. 신체가 직접 상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자신의 지역을 비웠다는 사실도 드러내는 데다가, 상대의 지역에서는 순간이동이라고 할 만한 '빠른 이동'이 불가능했다. 신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하는 상태로 빠르게 비행할 수 있지만, 자신을 믿는 개체에게 즉시 이동 가능한 '빠른 이동'에 비하면 의미 있는 이동 수단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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