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4
이 걸었지."
"피곤하면 누워 쉴 만한 바위 둔덕도 있을 테고."
"날씨는 어떨 것 같나?"
"늘 좋겠지. 아니, 한결 같아선 재미가 없으니 가끔 흐리고 비도 올 거야. 생각해 보니 강도 있으면 좋겠군."
"난 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마, 당연히 있겠지. 흙으로 지었을까? 나무? 아니면 천막?"
"사실, 난 천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 노인네는 코카투를 타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 자체가 질려 버렸거든. 천막을 쓴다는 건 또 어디론가 떠날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몰랐군."
길잡이라고도 불렸던 이였기에 라크락은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별잡이는 가로저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정주할 곳을 찾았으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불만이 없어. 죽은 다음이 문제지."
"그대가 원하는 집이 그곳에 있을 거야.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돌로 된 집일지도 모르겠군."
"음식은 어떨까."
"늘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겠지."
"모든 게 다 있는 셈이군. 그 넓은 곳에 혼자 있으면 외로울지도 모르겠어."
라크락이 으쓱했다.
"혼자라니? 이미 앞서 간 이들이 있고,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갈 거야. 그대는 외롭지 않을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나면 별에 대해서 또 이야기하지. 아직 못 끝낸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곳에도 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긴가민가하며 사후 세계를 그리던 라크락은, 이번만큼은 명백하다는 듯 대답했다.
"별은 우리에게 길을 찾아주지 않았나? 그곳에서도 헤매는 이들이 있을 테니, 분명 신께서는 별들을 붙박아 두셨을 거야. 쉽게 찾아오도록."
"그대 말이 맞군."
길잡이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기운이 빠지는 듯 휘청였다.
"슬슬 졸립군. 누워야겠어."
라크락은 별잡이가 눕는 걸 도왔다.
그때 라크락은 푸른 나비 한 마리가, 손등 위에 앉는 것을 보았다.
"아."
징조였다.
푸른 벌레신의 응답.
긍정의 신호.
라크락은 웃었다.
푸른 벌레신께서 대화를 듣고 계셨던 것이다.
"별잡이, 이것 보이나?"
라크락은 푸른 나비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이 별잡이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누워 있는 별잡이는 응답이 없었다.
"...별잡이?"
라크락은 별잡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몸을 흔들려다, 별잡이가 웅얼거리듯 작게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대 아직 거기 있나?"
"여기 있지."
"눈앞이 캄캄하군."
라크락은 별잡이의 눈이 멀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별잡이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런."
라크락은 안타까웠다.
검은 비늘 부족 안에서 푸른 나비가 긍정의 징조이자 기적의 징후라는 건 이제 잘 알려져 있었다.
정말 이 신비한 푸른빛을 스스로 내는 나비가 아니더라도, 리자드맨들은 파란 나비만 봐도 길조로 여기며 좋아라했다.
'필시 별잡이도 알아볼 것인데...'
라크락은 고민하다가 별잡이와 했던 작은 장난이 생각났다.
"...그대 아직 거기에 있나?"
"있다네."
라크락은 별잡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지."
"선물?"
"그래. 여기 두고 가지."
"...또 장난을 칠 셈이군."
"또 사양할 텐가?"
"...이번에는 곧장 찾을 수 있을걸..."
별잡이가 웅얼거리더니, 미소 지었다.
별잡이의 마지막 숨결이 푸른 나비에 닿자, 푸른 나비는 날개를 파닥이며 라크락의 손등에서 날아올랐다.
라크락은 어째서인지 그것이 마지막 숨이라는 걸 알았다.
라크락이 가볍게 별잡이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고, 숨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자 약초꾼을 불렀다.
푸른 나비는 천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야영과 장례식을 분주하게 준비하는 검은 비늘 부족의 위로 날아올랐고, 땅거미가 내려오기 시작하는 거친 황야 위로 날아올랐다.
기어코 푸른 나비는 또 다른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성운의 손등이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성운은 잘 알고 있었다.
「'사후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조건이 완료되었습니다. 사후세계를 창조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네'를 눌렀다.
027화
성운은 언젠가 '사후세계'를 만들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 부족을 정하고, 주변 적대 NPC들을 밟아 나가기 시작하면, 신성은 11레벨에 도달한다.
신성 레벨 11은 사후세계를 만드는 조건 중 하나로, 초반에 제대로 플레이하기만 했다면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이때부터 플레이어는 준신격이라고 불리는데, 경험치가 상당히 오르지 않는 구간이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 게임 승리에 레벨은 부차적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니까. 게다가 지금 나보다 빠른 사람은 없을 테고.'
물론 성운에게 거슬리는 플레이어가 있긴 했다.
'놀을 부리는 놈도 11레벨 정도인 것 같긴 하던데... 당장 유의해야할 건 그놈이긴 하지.'
최근 몇 년간 성운은 상당히 바빴다.
라크락을 보조하면서 주변 NPC들을 박살 내는 동시에,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오는 플레이어들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벌레의 소영역에 투자를 많이 했지만.'
라크락의 부족이야 워낙 멀리에 있어서 알지 못했으나 성운에게는 세 개의 벌레 무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리로 불렀지만, 성운은 태그 설정으로 이름을 지어 두었다.
하나는 '군집'으로 명명된, 메뚜기 떼였다.
라크락만을 보조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메뚜기 떼는 하나가 아니었다.
반도는 물론 반도와 이어지는 황야, 황야에서 뻗어 나가는 대륙과 산간 지방들, 북쪽으로 흐르는 강들까지, 메뚜기 떼가 활약할 수 있는 장소와 계절이라면 이 곤충 무리는 곡식을 멋대로 탐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운이 그간 파밍해 온 정수를 통해 메뚜기 떼를 조종하는 '피조물'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었다.
군집은 성운이 만들어 낸 피조물의 명령을 받으며, 성운이 접촉한 적도 없는 온갖 플레이어들을 훼방 놓았다.
다만 성운은 기회가 있더라도 이런 공격을 치명적이지 않도록 조절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게임 이벤트로 자연 발생하는 메뚜기 떼 습격과 구분이 안 갈 테니까.'
로스트 월드는 단순한 돌발 이벤트의 경우 그게 시스템적으로 발생한 이벤트인지, 플레이어가 신성을 통해 만들어 낸 이벤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노련한 플레이어라면 어느 정도 심증을 굳힐 수 있겠지만, 그 정도라면 성운도 괜찮았다.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메뚜기 떼의 악명은 대륙 중앙과 북해안에 자리 잡은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플레이어들에게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누군가는 벌레의 소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지만, 다들 서로 주변의 플레이어만 의심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동 떨어진 지역에서 당장의 이득을 볼 수도 없는 성운이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의심하도록 두는 것만으로도 신뢰에 손실이 가고 동맹을 맺을 확률을 떨구지. 게다가 농경은 길이 개척되면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견제만이 답이야. 충분히 신앙을 투자할 만한 일이지.'
또 다른 하나는 '숙주'로 명명된 잡다한 벌레 떼였다.
과거 호숫가의 프로그맨 부족을 공격할 때 성운이 사용했던 벌레 집단으로, 당장은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성운이 피조물로 창조해 낸 군집의 대장이 있었으며, 이 숙주 집단의 대장은 끈기를 가지고 성운이 원하는 질병의 목록을 하나씩 채워 나가고 있었다.
성운은 이 벌레 떼야말로 시간이 지날수록 큰 쓸모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마지막은 '둥지'로 명명된, 역시나 잡다한 벌레 떼였다.
성운이 가진 벌레의 소영역의 경험치 파밍을 위해 마련된 집단으로 주로 거대한 개미 둥지와 벌집으로 이루어져 황야 아래의 남쪽 반도의 생태계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들이 별다른 방해 없이 새끼 치고 영역을 키워 나가는 것만으로 성운은 벌레의 소영역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당장은 둥지를 운영하는 피조물이 없지만, 성운은 언젠가는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탈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지난 몇 년 간 큰 문제는 없었다.
성운은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리자드맨들 전체를 규합할 생각이었고 시간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규합된 리자드맨들은 자연히 다른 부족과의 우위를 차지하고, 동시에 영향력도 발휘한다.
힘이 약한 종족들은 자연스럽게 검은 비늘 부족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느닷없이 북쪽에서 놀 무리가 등장했다.
성운은 반도 공략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라크락을 북쪽으로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놀 무리는 NPC나 이벤트가 아닌, 플레이어가 부리고 있는 부족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잘린 귀 부족은 성운으로서도 상당히 경계할 만했다.
무리의 규모도 규모니거니와, 농경 부족이 아닌 유목 부족으로 전투력도 약하지 않았다.
리자드맨들에게 코카투가 있다면 놀에게는 검치호가 있었고, 활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금속 제련 기술이 리자드맨들 보다 좋았다. 분명 성운이 탐색하지 못한 곳에서 전해 받은 기술일 터였다.
'단순히 발전 정도를 봐서는 내 레벨과 비슷할지도 몰라. 사후세계를 이미 만들었을지도.'
성운은 가늠되지 않는 상대 플레이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도 상정은 하고 있었고, 상대할 방법도 여럿 있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사후세계였다.
'그래도 조건이 꽤 빨리 갖춰진 편이지. 레벨, 자원, 신앙. 그리고... 충분한 죽음.'
사후세계를 만들기 위한 조건은 네 가지였는데, 레벨과 흉물과 흉신 등 NPC를 죽여서 얻는 고급 자원, 그리고 신앙은 조건을 맞추기가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인 '죽음'은 아직도 아리송했다.
일단은 플레이어를 믿는 개체가 충분히 많이 죽게 되면 조건을 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는 게임 내의 공식을 특별히 알려 주지 않아서 플레이어들이 계산을 통해 직접 알아 내야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개체가 죽어도 마지막 조건이 거의 오르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개체가 하나만 죽어도 눈에 보일만큼 상승했다.
'해당 개체가 그동안 신앙을 얼마나 생성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 비례하진 않아. 역시 잘 모르겠단 말이지. 어쨌든 조건을 갖췄으니 상관없나?'
그러면서 성운은 '세계 창조 도우미 ver.2'를 켰다,
성운은 언젠가 사후세계를 만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에서 지원하는 세계 창조 도우미 ver.2를 사용해 틈틈이 사후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보곤 했다.
성운이 스라티스를 만들 때 사용했던 '피조물 창조 도우미'처럼 세계 창조 도우미에도 성운이 예전에 사용했거나 다른 플레이어가 만들었던 수많은 세계들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이번 역시 새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본 틀은 이미 만들어져 있긴 해. 그나마 다행이군.'
성운 지금까지의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각 종족이 선호하는 사후세계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리자드맨들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했다.
특히나 문명을 막 일으킨 리자드맨들이라면야.
'촉촉하고 습기 있는 공기에 푸른 들판,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는 평야.'
성운은 라크락과 별잡이가 사후세계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름 안도했다.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작업은...'
성운은 세계 창조 도우미의 탭을 여기저기 누르면서 준비를 했다.
플레이어에 대한 신앙을 가진 상태로 죽은 '영혼'들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것을 회수할지 여부는 플레이어에게 달려 있었는데, 그야 당연히 대부분은 그 영혼들을 회수하는 편이었다. 그래야만 사후세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
성운은 지금까지 수집한 동결 상태의 영혼들을 확인했다.
이 영혼들은 성운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에 첫 번째로 발을 들일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죽은 이들 중에 제일 레벨이 높은 건 역시 별잡이인가.'
사후세계는 로스트 월드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우선, 사후세계는 신앙을 믿는 이들의 '사후세계관'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이를테면 '지옥'이라는 사후세계를 만든다면, 신은 자신의 사제들에게 지옥의 풍경을 꿈을 통해서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사제들은 지옥의 풍경을 통해 악인은 끝없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신도들에게 퍼트리는 것이다.
'그걸 통해서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지만,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지.'
이 지옥이라는 개념은 플레이어의 역량과 활용 유무에 따라 바꿀 수 있었다.
꼭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족'을 공격하면 지옥에 간다거나, '특정한 신'을 모욕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신앙을 믿는 종족 전체에 일종의 거짓된 도덕률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플레이는 로스트 월드에서 흔했다.
또한 '지옥'을 쓰는 경우 '천국' 개념도 같이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길 밖에 없다면 신을 믿을 이유가 없으니까.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따라서 '특정한 종족'을 공격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게 만들거나, '특정한 신'을 모욕하면 천국에 가는 식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후세계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므로, 단순히 믿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는 지금 만들 수 없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두 개의 사후세계가 필요하니까. 지금은 하나 밖에 만들 수 없어. 윤회도 어렵지. 심판관들이 필요하니까.'
결국 지금 성운이 만들 수 있는 사후세계는 '다른 세계'라고 불리는 분류 밖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세계 또한 유서 깊고, 쓸모가 많은 사후세계였다.
'발할라, 삼도천, 스틱스 강, 림보... 성격은 많이 다르지만 죽어서 가게 되는 독립된 공간이라는 개념이지.'
이런 세계들은 사후세계관이 확장되면 단독 공간이라기보다 다른 사후세계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쓰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쓰이는 건 아니었다.
'발할라만 해도 사후세계는 라그나로크를 대비한 전사들의 훈련 장소 같은 곳이었으니까. 사후세계는 정말로 플레이어가 사용하기 나름이야. 생각해 보면 사후세계관을 잘 짜 넣는 것만으로 승리한 적도 있었고. ...그건 운이 좋긴 했지만.'
사후세계가 존재하는 이상 영혼들은 불멸이었다.
그 영혼들이 가진 지식이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막대한 신앙이 소모되기 때문에 활용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게임이 초반을 지나 후반으로 갈수록 영혼들은 플레이어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성급할 필요는 없어. 아직 많은 일들이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유연하게 생각하자.'
성운은 사후세계의 이름을 '태초의 초원'으로 이름 지었다.
앞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 둔 일종의 가제였다.
그러자 세계 창조 도우미에서만 봤던 태초의 초원이 성운의 발아래 나타났다.
성운은 자신의 소지품 창을 열어 영혼들을 손에 쥐고서 넓게 흩뿌렸다.
수백의 영혼들은 정처 없는 푸른 나비가 되어 초원 위에 내려앉았다.
저 스스로 나비인 줄 알았던 영혼들은 풀잎과 꽃과 흙바닥에 닿자 곧 자신이 리자드맨이었음을 기억해 내고, 죽어 있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이 태초의 초원에서는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며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며 끝없이 지친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리자드맨들이 잠시 눈을 감고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가늠했다.
햇볕에 따듯하게 몸이 데워진 리자드맨들은 다시 잠들었고, 아닌 이들도 꿈이면 깨어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기어코 눈을 뜨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바라보게 될 풍경이 무엇일지 기대하면서.
성운은 몸을 숨겼다.
성운이 직접 인도해야 할 영혼이 하나 있었다.
028화
별잡이는 눈을 껌뻑였다.
"이것 참."
끝도 없이 졸린가 싶었는데, 눈을 뜨자 몸이 개운했다.
팔과 다리를, 꼬리를 쭉쭉 펼치니 뜻하는대로 뻗어졌다.
별잡이는 언젠가부터 관절이란 관절은 언제나 쑤시고 아파서, 꿈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꿈은 아닌 셈이로군."
그리고 대자로 누워 있던 별잡이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니 더 황당한 풍경이 보였다.
"허어..."
초록색 초원이었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초원을 한 번 훑으며,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별잡이의 코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코가 차다 싶었는데 초원에 내리쬐는 햇볕의 온기가 금세 머리를 덮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별잡이는 어렵지 않게 라크락과의 마지막 대화를 기억해 냈다.
그것은 꿈결처럼 멀었지만 방금 전의 일 같기도 했다.
"라크락, 그대가 옳았군. 우리가 함께 그린 그 초원이야. ...별도 없고, 돌로 된 집도 없지만 말이지."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곳은 집 따윈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이곳에는 별잡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초원의 드문드문한 자리에 리자드맨들이 하늘을 천장 삼고 초원을 바닥 삼아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인가?"
별잡이는 주변을 맴돌며 리자드맨들을 깨울지 말지 여러 번 망설였다.
이들은 정말이지 단잠을 자는 것 같았고, 때문에 잠을 깨우는 것은 실례처럼 느껴졌다.
개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아, 이 아이는...'
전사 중 하나였다.
검은 비늘 부족이 산 속에서 고블린 부족에게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검은 비늘 부족의 네 배나 되는 숫자로, 대열의 허리를 두 곳이나 끊으며 두 개의 고블린 연합 부족이 쏟아졌다.
앞서 있던 라크락과 후미에 있던 유르가 각각 대열을 정비해 응전을 시작했지만, 무리 가운데에 있던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그럴 채비를 할 수 없었다.
'...검은 비늘 부족 전사들 중 일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부족장의 명령을 어기기도 하지.'
소수의 전사들은 대열이 망가지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양옆의 동료에게 사죄를 구하고, 수십 명의 고블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고작 고블린이라고 한들, 제 아무리 검은 비늘 부족의 전사라고 한들, 그 일이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모험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영웅적인 희생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희생으로 고블린 부족을 퇴패시킬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지만, 어떤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 리자드맨은 살아남지 못한 리자드맨이었다.
라크락은 살아남은 이들은 물론 죽은 전사들의 장례식에서도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냈다.
심지어 별잡이에게도 그렇게 했다.
'망할 산수 때문이군. 당신이 그걸 전사들에게 가르친 거 아닌가?'
'아니, 산수 때문이라고 했나?'
'그래. 이번에 똑똑하고 셈을 잘하는 전사들이 내 명령을 듣지 않고 다 뛰어들었다. 멍청한 놈들!'
'그게 왜 산수 탓인가?'
라크락이 답했다.
'목숨 하나로 목숨 둘을 구한다. 이걸 좋은 산수라고 생각한 거지.'
'...아.'
'하지만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다른 이를 지키지 못한다. 전사들은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뛰어든 전사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한참 침묵한 뒤 라크락이 말했다.
'아니.'
'그런데 왜 화를 내나?'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들이 틀리지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화를 내는 것밖에 없어서.'
이후에 벌어진 일은 라크락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라크락과 별잡이의 대화를 누군가 엿들었는지, 산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전사들도 셈하는 법을 배우겠다며 별잡이를 찾아오곤 했다.
지난한 싸움들이 있으면 셈을 잘하는 자가 먼저 죽었다.
그리고 누군가 셈을 배우러 왔다.
별잡이는 목소리를 낮춰 몰래, 라크락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들에게 셈을 가르쳤다.
눈앞의 곤히 잠든 전사는 부족의 많은 전사들이 셈하는 법을 배우도록 만든 이였다.
별잡이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사의 어깨를 짚었지만, 흔들어 깨우지 않고 손을 뗐다.
'그래. 더 푹 자고 나서 깨우자. 이곳에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별잡이는 자신이 죽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눈이 뜨인 것이고, 다른 이들은 죽음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나저나... 신께선 아니 계신가?"
목소리를 내어 보았지만 풍성한 초록 들판에 목소리는 부서져 흩어졌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별잡이는 말끝을 흐렸다.
본래 라크락이나 다른 전사들처럼 대범한 성격도 아니거니와 정말로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쑥스러웠다. 라크락이 별잡이를 선택받은 자로 점지할 때에도 몸 둘 바를 몰랐다.
'왜 우리였을까?'
별잡이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푸른 벌레신께서는 왜 리자드맨들을 거두고 보호하고 기적을 일으켜 도왔을까?'
'유르는 리자드맨이 다른 종족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정말 그런가? 어떤 종족들은 단지 신이 없어서, 우리의 신보다 강하지 못해서 패배한 것 같은데.'
별잡이는 고민에 빠져 천천히 걸었다.
'오웬은 신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종족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기에? 다른 종족은 우리보다 덜 선한가?'
볕을 오래 쬐니 더워지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들판 머지않은 곳에 그늘진 숲이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갖춰진 장소였다.
'자올은 리자드맨에게 어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신께서 선택하신 거라고 말했지. 그럼 우리가 그런 신에게 기대도 되나? 만약 그 쓸모가 어느 날 없어진다면?'
별잡이가 그나마 나은 대답이라고 생각한 것은 라크락의 것이었다.
답은 아니더라도, 마음에 드는 답을 내는 사내.
'라크락은 우연일 수도 있다고 했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더 나은 땅에서 더 나은 종족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처럼. 신께서도 그저 최선을 다하신 것일지 모른다고.'
어떻게 보면 불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잡이는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가 최선의 결과라는 말이니까.'
그늘로 들어서자 별잡이의 몸이 천천히 식었다.
별잡이는 기분이 좋아져 나무에 기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과거에 검은 비늘 부족이 프로그맨들을 물리친 이후 마을을 재건하고 불렀던 운율이었다.
좋은 리듬이라 다들 좋아했는데, 별잡이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 늘 콧노래로 작게만 흥얼거렸다.
그마저도 부끄러워 남들이 없을 때만 그랬다.
-부스럭.
별잡이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봤다.
"거, 거기 누구요?"
별잡이가 돌아보자 나무 사이로 리자드맨 꼬리 하나가 툭 삐져나와 있었다.
대답은 없이 꼬리는 살랑거리다 사라졌다.
"깨어 있는 사람이 있었군! 누구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
별잡이는 상대가 대답이 없자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새 꼬리는 저 멀리 나무 사이에서 보였다.
"이보오."
별잡이가 부르자 꼬리는 사라졌다.
별잡이는 따라잡지 못하겠단 생각에 천천히 걸음을 빨리했다.
사실 '빠른 걸음'이라는 건, 얼마 전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별잡이는 가볍게 뜀걸음을 할 수 있었고, 이내 더 빠르게 사라졌다 보이기를 반복하는 꼬리를 잡기 위해 달릴 수 있었다.
"이봐!"
별잡이는 아주 오래전에 이런 달리기를 즐겼다는 걸 기억했다.
별잡이가 소년이었을 적,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함께 이런 뜀박질을 했었다.
"멈춰! 어딜 가는 건가!"
별잡이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저 꼬리는 별잡이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다.
마침내 수풀 사이를 헤치고 지났을 때,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돌로 된 건물이 있었다.
별잡이로서는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이었다.
원통형이었고, 직사각형 돌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천장은 돔 형태였다.
입구에서 꼬리가 살랑거리더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놈, 안으로 들어간 이상 도망치진 못하겠구나."
별잡이는 데워진 몸으로 걸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 끝에 푸른빛이 발하고 있었다.
별잡이에게는 익숙한 빛이었다.
'이 빛은...'
별잡이가 복도를 걸어가자 마주한 것은 밤하늘이었다.
천장은 별잡이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밤하늘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 별들은 단순히 천장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빛을 발했고 검고 어두운 하늘의 깊이 또한 실제와 다름없었다.
"아니... 라크락 그대가 맞았군. 돌로 된 집도, 별들도."
별잡이는 꼬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는데, 건물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허어,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하지만 이미 별잡이의 관심은 꼬리가 아니라 밤하늘에 가 있었다.
이 위치에서, 저 위치에서 한참을 바라보던 별잡이는, 심지어 하늘이 자신이 기억하는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신께서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았구나."
뿐만이 아니었다.
방 한 가운데에는 고대 유적에서나 볼 법한 기괴한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놋쇠로 만든 듯 누런빛을 내는 몇 개의 태와 둥근 수정이 앞뒤로 박힌 원통,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자가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별잡이는 한참을 서성이다 자신이 이런 물건을 만져도 되는지 의심했다가,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겠다 생각했다.
별잡이는 기계 장치를 이리저리 만져 대다 수정에 눈을 가져다 댔다.
"세상에, 이럴수가."
별잡이는 수정에서 눈을 떼었다가 맨눈으로 밤하늘을 보길 몇 번이나 반복하고, 원통 막대에 있는 손잡이를 풀었다 조였다.
"이게 진정한 별의 모습인가? ...그랬군. 그랬던 거야. 저 별은 저리로 가고, 이 별은 이리로 가는가. ...이건 내 계산이 맞았다. 하지만 다시 확인해야겠어... 저건 또 뭐지?"
별잡이는 질릴 줄 모르고 기계 장치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 지식을 살아 있는 이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정말 굉장할 텐데.'
별잡이의 생각에 별에 대한 지식은 곧 셈을 하는 법이었고, 셈을 할 줄 알게 되면 세상만물에 제 크기와 위치를 알게 되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게 된다.
하지만 별잡이가 기억하는 한, 죽은 이가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죽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신께선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 주신 걸까? 그저 이 늙은 리자드맨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기 위해서?'
별잡이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다.
별잡이는 기계 장치를 쓰다듬었다.
'신께선 항상 최선을 다 하신다. 허투로 무언가를 하시는 일이 없어. 이 지식은 분명 훗날 쓸모가 있다.'
별잡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성운은 지금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잘 따라와 줬어, 별잡이.'
별잡이의 짐작은 맞았다.
사후세계는 결국 사후세계관과, 그 신을 믿는 이들의 가치관 그 자체에 영향을 준다.
사후세계에 전사들을 밀어 넣으면 그 종족은 발할라를 꿈꾸고, 신선들을 밀어 넣으면 그 종족은 도원향을 꿈꾸는 법.
'그럼 학자들을 밀어 넣는다면?'
사후세계는 다른 플레이어의 공격으로 바뀐다던가 하는 변수가 제법 있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당장 스타팅은 완벽했다.
성운은 별잡이의 등을 바라보다, 단상을 내려와 최초의 천문대를 빠져나왔다.
별잡이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른 아이들을 깨워 별 보는 법과 셈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또 죽은 리자드맨들 중에는 나보다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이들이 올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조금만 더...'
별잡이가 다시금 수정에 눈을 가져다 댔다.
저 밤하늘이 최초의 천문학자의 동공에 담겼다.
─┼
오웬은 지나가는 리자드맨을 붙잡고 누가 죽었는지 물었고, 곧 답을 알아냈다.
"별잡이가 죽었군."
휘가 말했다,
"그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나는 잠시..."
오웬은 가로저었다.
"괜찮다네. 우리는 장례식에 길손이 오는 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길조로 생각하지."
"왜지?"
"슬픔을 나눌 이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다행이잖은가? 오늘은 밤을 새며 별잡이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 내일 해가 밝으면 자네도 우리의 슬픔을 이해할 테니, 그냥 들어오게."
휘는 잠시 고민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과 휘가 천막 사이를 지나 장례식이 벌어지는 장소로 걸어갔다.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들이 모두 오웬을 알아보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 없이 장례식 장소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천막 사이에 있는 리자드맨들을 보자 휘는 단상 위에 곧게 누워 흰 비단으로 꽁꽁 매인 시체 한 구를 보았다.
그 앞으로 물소 뿔을 쓰고 있는 체격이 좋은 리자드맨이 서 있었다. 복색이 유난하거나 화려한 장식술을 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변 리자드맨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그가 높은 신분임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휘가 알아맞히었다.
"저 사람이 라크락 부족장인가?"
"맞아."
"음, 부족장이 눈물을 흘려도... 괜찮은가?"
그 말에 오웬은 무슨 말을 들은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인간은 그러지 않는가? 슬퍼도 눈물 흘리지 않는다고?"
029화
"아니, 보통은 흘리지. 부족장도 흘릴테고. 하지만 인간 부족장이라면 남들이 보는 곳에서 흘리진 않을 거야. 체면이 있으니까."
"체면?"
"그러니까..."
휘는 조금 한숨을 쉬었다.
서로 다른 종족 사이에는 서로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있는 법이다.
'멀쩡히 똑같은 말을 쓰는데도 이렇단 말이지.'
다행히 휘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웬은 떠돌이로 인간을 많이 만나 봤다.
"아니, 체면에 대해선 알고 있다네.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아. 부족장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휘하의 전사들이 부족장이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란 말이지? 하지만 다른 리자드맨들에겐 그렇게 말하지 말게. 이해하지 못할 테니."
"왜?"
"적어도 우리는 체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어."
오웬과 휘는 라크락이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르다 바닥에 뚝 떨어지는 걸 보았다.
휘가 그게 무어냐고 물으려고 할 때, 라크락이 오웬과 휘를 돌아보았다.
라크락이 가볍게 엄지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런, 오웬 아닌가?"
"늦었습니다."
"아니, 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별잡이를 배웅할 기회는 잡았으니."
두 사람이 라크락에게 다가갔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낫군요, 부족장."
"그대 옆에 있는 인간 친구는 누구지?"
"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자동성의 심부름꾼 휘입니다. 자동성 성주의 말을 전하러 왔다는군요."
휘가 예를 갖춰 부복했다.
"자동성의 휘라고 합니다."
라크락은 휘를 내려다보다가, 손짓으로 오웬을 불렀다.
라크락과 오웬은 잠시 귓속말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눈만큼이나 귀 밝은 휘가 엿들으려고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은데.'
라크락이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테지만, 유감이군. 우리도 긴 밤을 지새워야 하지. 그래서 용무를 먼저 보고 싶은데, 어떻겠나? 휘?"
"좋습니다."
"좋아. 따라오지."
휘는 어느 정도 각오를 했다.
천막 양옆에서 리자드맨 전사들이 뛰쳐나온다거나, 라크락이 검을 뽑아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휘는 라크락과 함께 가장 큰 천막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용무는?"
휘는 낮은 자세로 임하며, 주머니 하나를 풀어서 라크락에게 건넸다.
"우선 이 선물을 받으시죠."
"음."
라크락은 주머니를 받아 풀었다.
안에 든 것은 어두운 백색의 돌조각처럼 보였다.
라크락은 손에 들고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암염이군."
"예."
"이것이 자동성 성주의 선물인가?"
"예."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소금 자체는 귀한 물건이지만 주먹만 한 암염 덩어리 하나를 부족장간 선물이라고 하면 모욕일 것이다.
라크락은 이것이 자동성의 성주가 모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암염에는 맥락이 존재했다.
일단, 자동성은 현재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짜배기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농경 종족들이 목책을 통해 마을을 방비하는 경우는 있지만 나무 목책은 허술하고, 흙을 쌓아 올린 토성들도 유지 보수를 해야 하는 인력 소모를 감안할 때 크게 뛰어난 성벽이라고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건축 기술과 축성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농경 종족들을 보호하기엔 이런 종류의 성벽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반면 고대에 지어진 유적인 자동성은 토성이지만 무려 5미터가 넘는 높이였으며, 불가사의기도 했다.
토성에는 진흙 병정들이 성이 무너지는 경우 자가 수복하는 기능이 있었고, 둔하고 느리기에 전투에 그리 유능하진 않지만 유사시에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동성은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반도 북쪽에서 북서쪽으로 가기 위해선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황야를 지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아래에 있는 험한 산골짜기를 지나는 것이었다.
두 길 모두 떠돌이들에게 좋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두 길을 모두 알고 있는 이들은 대체로 산골짜기를 선호했다.
첫 번째 이유는 험하다한들 쉽게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는 황야보다는 길을 따라가면 되는 산골짜기가 덜 위험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거리가 많이 단축되기 때문이었으며, 세 번째는 자동성 때문이었다.
황야에선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떨어지면 기적처럼 샘이 나타나길 기도해야 하지만, 자동성은 떠돌이에게 최소한의 마실 물 정도는 제공했다.
'그 말인 즉...'
자동성이 대륙으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는 셈이었다.
자동성 자체가 산골짜기 가운데를 틀어막은 것은 아니지만 자동성에 충분한 병력이 있다면 그 길을 지날 때 언제나 뒤가 불안할 터였다.
라크락은 비록 자동성이 검은 비늘 리자드맨과 현재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더라도, 단 한 번의 배신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자동성의 인간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그 넓은 땅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푸른 벌레신께서는 대륙과 북쪽을 경계하고 계신다. 그럼 산골짜기로 통하는 길의 안전을 보장할 필요가 있어.'
산골짜기를 지나는 길을 빠져나가면 북쪽과 북서쪽의 대륙의 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길만큼 중요한 문제도 있지.'
자동성은 단순히 외딴 곳에 지어진 고대 유적이 아니었다.
자동성 안에는 소금 광산이 있었다.
'소금.'
자동성 안의 인간 부족이 그리 강성하지 않아 채굴량이 많지는 않지만, 소금이었다.
특히나 목축에 소금은 필수 요소였다.
육식 동물이나 잡식 동물은 다른 동물을 먹음으로써 체내 나트륨 용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초식 동물은 그러지 못했다. 식물만으로는 체내 나트륨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초식 동물들은 미네랄 섭취를 겸하며 염분기가 있는 돌을 핥아 대며 흙을 삼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음식을 주게 되고 먼 길을 계속 이동하게 되는 가축의 경우 그럴 기회가 적거나 없게 된다.
체내 나트륨이 부족한 초식 동물은 저나트륨 혈증으로 인한 구토나 배탈부터, 종국에는 신장 기능 손상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특히나 목축에서 가장 중요한 임신 개체의 경우 더 많은 소금을 필요로 했다.
검은 비늘 부족의 목축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이후엔 지속적이고 많은 양의 소금을 필요로 했다.
목축이 아니더라도 소금은 수많은 곳에 쓰인다.
요리의 간을 맞추는 건 물론이고, 검은 비늘 부족의 경우 규모가 커지면서 기초적인 훈연 기술만으로는 고기 저장이 어려워 염장 기술을 발달시켜야 했고, 또한 염료 기술이나 가죽 무두질 같은 화학적 처리, 무언가를 썩지 않도록 할 때, 무언가를 씻을 때, 장례를 치룰 때, 검은 비늘 부족이 그와 같은 용도로 쓰지는 않으나 비료로서, 그 자체로 돈으로서의 쓸모도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양의 거래가 자동성에서 온다는 걸 알았지.'
먼 해안가에서 가져오는 소금은 내륙까지 오면 값이 비싸지므로 수지에 맞지 않았고, 많지 않은 염호에서 끊인 소금은 양이 많지 않았다. 자동성은 이 부근의 최대 소금 생산 산지였다.
'그런 곳에서 암염 한 덩이를 건네 왔다는 말은...'
휘가 말했다.
"이것은 자동성의 성주가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는 첫 번째 암염입니다."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말이겠지."
"그 다음도 있을 겁니다."
휘는 머리에 뒤집어 쓴 가죽 두건 아래에서 턱수염이 잔뜩 난 얼굴로 씩 웃었다.
"받으시죠."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곤 암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암염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암염이 부스러지며 라크락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라크락이 손을 털며 말했다.
"잘 받았다고 전해라."
휘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입니까?"
"아, 너희는 신이 없으니 모르겠군. 이건 그냥 뭐... 제사 의식 중 하나다. 작은 암염 덩이 하나를 바닥에 뿌리면... 음, 신께서 기뻐하시지. 대충 그렇게 알고 있어라."
자동성의 인간들에겐 신이 없지만, 휘는 그게 뻔뻔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자동성 성주의 선물이었습니다."
"작은 암염 덩이 하나일 뿐이지. 그리고 나는 잘 사용했다. 그걸로 된 것 아닌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게다가 자동성 성주는 두 번째, 세 번째 암염도 말씀하셨다고 제가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런 조막만 한 덩어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동성 성주가 재물이 많다고 듣긴 했지만 사람 하나를 써서 겨우 저 정도 암염을 보내는 건 사치스럽긴 하군. 자네 말이 맞아. 다음부턴 거래할 물건을 좀 더 많이 가져왔으면 좋겠어. 우기가 아니라 다행이군."
휘는 화를 낼 뻔했다.
하지만 이건 종족이 서로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라크락은 휘가 건넨 암염 한 덩이의 맥락을 뎅겅 잘라 냈다.
다소 거칠지만, 완전히 무례하지는 않게 외교적 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겉보기로는 라크락은 소금을 받았고, 그걸 사용했다.
자동성 성주는 뭐라고 할 수 없을 터였다.
'노련한 도마뱀 같으니.'
휘는 화를 참아 냈다.
"좀 더 제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왜 거절한 겁니까? 당신들에게 소금은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라크락은 심드렁하게 앉아서 천막 밖을 바라보았다. 별을 보고 있는 듯했다.
"슬슬 돌아갈 생각은 없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라크락이 돌아보았다.
"...그래, 자동성에서 온 인간, 휘. 이야기를 좀 해 보지. 나는 사실 뭐랄까, 인간들처럼 이것저것 체면을 차려서... 말 속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이걸 뭐라고 하지?"
"외교 말입니까?"
"그래. 난 그런 건 잘 모르겠군.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더 좋아하지."
"...좋습니다, 라크락. 이야기를 하죠. 왜 거절한 겁니까?"
팔짱을 끼고 있던 라크락이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첫째, 나는 다른 사람이 거절한 제안을 주워 섬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무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이 한 번 거절했다면, 그만큼 그 제안이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다른 사람보다 내게 더 유리한 제안일 수 있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해야 된다는 말이야."
"...그 말이 아닙니다. 이 제안은 성주님이 당신에게만..."
"아니. 그대는 오웬이 정말로 그대를 '우연히' 만나서 '운 좋게' 데려온 거라고 생각하나?"
휘는 잇소리를 냈다.
라크락이 계속 말했다.
"오웬이 말하길 그대는 서쪽이 아닌 북쪽에서 왔다는군. 자동성에서 온 게 아니라 황야를 거쳐 왔다는 말이지. 그리고 황야 너머에는 잘린 귀 부족이 있고. 장담하는데 그대는 살카잇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을 거야. 하지만 거절당했지."
"...맞습니다."
"아마 이제 내가 말할 두 번째 이유 때문에 거절했겠지."
휘는 대답 없이 라크락의 말을 들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둘째, '대가 없는 선물'은 없어. 난 그런 말에 속지 않는다. 탐욕스런 살카잇도 그 정도 분별은 하는 모양이지."
"...그것만큼은 아닙니다. 자동성 성주는 소금을 주려고 합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말입니다."
"아니."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너희에게서 소금을 얻으면, 우리는 너희를 지켜야 한다. 내 말이 맞지 않나?"
"......"
"너희가 자동성 안에 틀어박혀 포위되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소금의 안위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할 것이다. 너희가 좋을 대로 '외교'를 해 대며 위험을 자초하더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와 관계없는 싸움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지."
휘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라크락, 그게 외교라는 겁니다."
"안다."
"대가 없는 선물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당한 거래를 하는 겁니다."
"그것도 안다."
"그럼 왜 두 번째 이유 때문에 거절하는 겁니까?"
라크락이 웃었다.
"정말 모르겠나? 살카잇에게 이미 들었을 것 같은데?"
"......"
휘는 잠자코 라크락의 대답이 괴팍한 놀 부족장의 대답과 겹치는 것을 들었다.
"왜 우리가 자동성을 가지면 안 되나? 인간을 내쫓고 나면 소금 광산은 물론이고 자동성도 우리 것이 되는데? 그렇지 않나?"
030화
"지금 자동성을 공격하겠다고 한 겁니까?"
휘가 분노를 억눌렀다.
"아니. 그저 질문했을 뿐이야. 그 외교라는 거래를 하는 것보다, 그냥 그게 우리에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이지."
"인간은 당신들 생각처럼 나약하지 않습니다."
"나약하다고 한 적 없다."
"그럼 자동성을 공격했을 때 당신의 전사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 아니, 자동성을 점령할 수는 있을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라크락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대에게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내 산수가 맞다면 자동성을 공격해서 우리 전사들이 피해를 보긴 해도 점령할 수는 있을 거야. 확실히."
"장담하는 겁니까?"
"자동성 안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좀 더 있다는 건 알아. 그러니 꽤 오랜 시간 인간이 자동성을 빼앗기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지. 그 비밀 때문에 자동성을 점령할 때 우리 전사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게 될지 걱정이 되긴 하는군. 하지만 점령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겠지."
"왜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겁니까?"
휘는 라크락의 확신이 궁금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우리는 푸른 벌레신을 따른다. 신께서 도우신다면 그 높은 성벽도, 진흙 병정들도 한 줌 부스러기가 되겠지."
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휘는 '스라티스'라는 수호자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 있었다.
검은 비늘 부족이 어려운 싸움에 들면 그들을 도와 싸우고 홀연히 사라진다는 거대한 사마귀 괴물이었다.
그것은 푸른 벌레신의 모습 중 하나로 여겨져 그 목상을 자동성 시장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스라티스가 아니더라도 문제는 많다. 코카투 전사는 물론이고 저들에겐 선택받은 자가 있지. 그 힘을 얼마나 많이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만 한 번만 그 힘을 드러내도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 눈앞에서 터지는 천둥 번개에 오금이 저리지 않을 이는 많지 않으니까.'
그런 변수들을 모두 제외하더라도 문제는 많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금 당장 있는 라크락의 전사만 해도 그 숫자가 80은 될 거야. 그리고 이게 전부도 아니겠지...'
당장 황야에서는 '검은 비늘 리자드맨' 또는 '검은 비늘 부족'으로 부르고 있지만 라크락이 휘하에 두고 있는 리자드맨은 하나의 단일한 무리가 아닌 여러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난 9년 동안 반도의 위쪽을 정복했던 라크락은 발견하는 리자드맨 부족을 모조리 규합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정주 부족으로 남았지만, 대부분은 목축 부족으로 필요하다면 라크락의 부름을 받고 하나의 무리 전체가 이동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잘린 귀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라크락이 서둘러 올라왔을 뿐이겠지. 라크락은 이미 이들을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황야는 곧 우기를 맞이한다. 황야에도 잠깐이나마 풀이 잔뜩 자라는 시기지. 물소를 치는 부족은 그리 멀리 있지도 않을 것이다. 전사들 일부만 차출해서 보낸다면 더 빨리 모이겠지.'
휘는 자동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인구는 많지만 싸울 이는 적다.'
성주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네 가문의 사병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병사가 있지도 않았다. 이 병사들은 당장에야 검은 비늘 리자드맨 전사들 보다야 숫자가 많겠지만, 신의 축복은 받지 못했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다.'
싸움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들리면 꽤 많은 이들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성벽 안의 많은 이들이 자동성의 성벽을 믿고 그 몸을 의탁한 농사꾼과 행상인, 광부, 그리고 그 가족이다. 그들이 자동성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재물만으로는 자동성을 지킬 수 없었다.
이들이 떠나기 시작하면, 정확히는 떠나려는 조짐을 보이기만 하더라도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잘린 귀 부족의 흉포함도 이제 퍼지기 시작했지만...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오웬 같은 이들 때문이지. 진작에 경계했어야 하건만.'
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 전쟁은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셈이었다.
라크락은 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 번째 이유를 말했다.
"게다가 소금! 소금이 귀한 재산이긴 하지. 값비싼 것이기도 하다. 오만 곳에 다 필요하지.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다들 그것을 찾아다니고, 어디에선가는 구할 수 있다. 꼭 자동성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좋습니다. 성주님께서 검은 비늘 부족이 생각보다 소금 거래를 할 수단과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걸 간과하셨군요. 이게 끝입니까?"
"아니, 제일 중요한 네 번째가 남았지."
"좋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라크락이 네 번째 이유를 말했다.
"나는 거짓말쟁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저는 거짓말한 적이 없습니다."
"했다. 너는 자동성의 심부름꾼이 아니다."
"그럼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라크락이 답했다.
"자동성의 성주, 휘서."
휘는 부정도 긍정도 않았다.
라크락이 그 이유를 말했다.
"'휘'라는 이름을 드러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드러낸 이유는 아마 리자드맨이 자동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맞나?"
휘는 대답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현재 자동성 성주는 모습은 물론 이름마저 숨긴 채 그저 '성주'라고 불리고 있다고 하지. 하지만 이건 자동성 밖에서의 이야기. 자동성 내부에, 성주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네 가문이 있다더군. 그들은 성주의 손과 발이 되어 따르는데 이들 중에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주의 이름을 알고 있다더군. 그중 '휘'는 성주의 핏줄을 이어 받은 이들이 공유하는 이름인데, 성주에게는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너는 아낙이 아니고 손의 주름을 봐선 인간치고 젊지도 않지. 따라서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휘서."
"...대단하군."
예를 갖춘 자세로 라크락을 향해 앉아 있던 사내는, 가죽 두건을 벗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짓놀음은 끝났으므로, 이제 그는 하나의 무리를 이끄는 책임을 진 이로서, 라크락과 대등한 관계로 마주해야만 했다.
"...그렇소. 내가 자동성의 성주 휘서요."
가죽 두건이 벗겨지자 휘서의 얼굴이 드러났다.
덥수룩한 턱수염 위로 사납게 생긴 눈주름을 가진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소 메말랐고, 콧등 위로 크게 베였다 아문 흉터가 있었다.
라크락은 얼굴을 읽었다.
'주름. 손등에서부터 알아봤지. 인간들은 늙으면 주름이 진다. 나이는 있지만 허리가 굽지 않고 눈동자가 선명하다. 거짓말을 했다지만 신분을 숨긴 것이 더 위험할 수 있지. 겁이 없지만 멍청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흉터. 자동성 뒤에서 암약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 자는 모든 걸 제 손으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다. 자동성의 많은 문제들이 이 자의 손으로 직접 해결되었겠지. 위험을 자처하지만 그는 꽤 오래 살아남았다. 그것이 강함의 증거지. ...나는 인간이 나약하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분명 인간 스스로가 퍼트린 이야기일 것이다.'
휘서가 말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소? 내가 가까이 있는 이들 중에 리자드맨은 없는데."
"그런가? 그럼 인간 내통자가 있는 모양이지."
"음. 자신 있다는 말이군."
"글쎄, 어떨 것 같나?"
휘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리자드맨은 내게 과제를 남기는군. 한번 찾아볼 테면 찾아보라는 것인가.'
라크락이 말했다.
"나도 궁금한 점이 있군. 우리가 중립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있긴 하지만, 혼자 이렇게 들어오는 건 두렵지 않은가?"
"두렵소."
"그런데?"
"그대가 자동성을 힘으로 빼앗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정체가 들키거나 말거나, 그대가 나를 곱게 보내줄 것을 알고 있소."
"정체가 들키지 않았다면?"
"검은 비늘 부족이 객에게 친절하단 걸 알고 있소."
"...흠."
라크락은 그런 문화를 고쳐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봤지만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잘 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정체를 들켰으니, 이제 내가 휘서 그대의 생각대로 움직여야겠군? 내가 어떻게 움직일 것 같나?"
"날 그냥 보내줄 거요."
"이유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당신은 별잡이란 자를 떠나보낸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싶어 하오. 그래서 이 대화가 끝나면 내가 돌아가길 바라고 있지."
"그건 맞다. 하지만 자네를 사라지게 만들 방법이 그것만은 아닌데."
라크락은 위협적으로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나는 자동성을 공격하면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말했고, 내 생각에 성주가 죽으면 자동성에 있다는 네 가문도 혼란스러워하겠지. 지휘관이 없는 전투는 쉽게 이길 수 있고. 자네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건가?"
"아니, 난 틀리지 않았소."
휘서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날 죽이게 되면, 나의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라크락은 흥미로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꼬리 끝을 살짝 말았다.
"재미있군. 그런데 우리 검은 비늘 리자드맨에게 외딴 성에 사는 성주의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아무런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라크락, '바둑'에 대해 알고 계시오?"
"...바둑?"
"자동성에서 유행하는 놀이요. 흙바닥이나 반상 위에서 즐기지."
"잘 모르겠군."
휘서가 바둑에 대해 설명했다.
"바닥에 줄을 교차해서 여러 줄 그어 두고 흰 돌과 검정 돌을 모아서, 서로 차례대로 놓기 시작하오. 교차된 줄 위에 놓는데, 네 개의 돌이 상대의 돌 하나를 완전히 감싸면, 그 돌은 죽은 것이 되오. 끄집어내어지지. 그렇게 계속 두다 더는 돌을 둘 곳이 없으면 끝을 내는데 그때 내가 가진 상대의 돌과 돌이 들어내진 자리가 상대보다 많으면 이긴 것이 되오."
"설명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걸."
"미안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소."
"그럼 왜 설명한 건가?"
"내가 돌멩이이기 때문이지."
라크락은 뭔가 깨달은 듯, 동공이 작게 수축했고, 그 때문에 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휘서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이미 놀이판이 시작된 걸 알고 있소. ...황야를 끼고 두 신이 두 부족을 가지고 벌이는 놀이지. 한 신은 놀을 데려왔고 한 신은 리자드맨을 데려왔소. 그리고 그 판 위에 앉아 놀과 리자드맨이 또 놀이판을 벌렸소. 그 놀이판의 이름은 자동성이지."
라크락은 침묵으로서 긍정했다.
"...좋소. 그대들이 나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나도 그대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고 있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후계자를 정해야 하고, 그대들은 내 자식들에게 접근했지. 어느 사이에 내 자식들은 분노로 가득한 이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창백하게 푸른 나비에 대해서 말하더군. 내 자식들이 신을 믿기 시작한 거요..."
라크락은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게 자동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피해가 덜 가는 일이니 말이지."
031화
라크락은 자동성 점령을 쉽게 보지 않았다.
흙으로 지어 올렸다지만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높은 성벽은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하물며 성벽을 공격한다는 건 성벽으로 다가가기 전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고, 성벽 앞에 놓인 목책이며, 성벽 아래로 쏟아지는 돌덩이와 돌팔매질, 그리고 무방비하게 찔러 댈 창질을 극복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소금 광산을 취해야 한다면, 그렇게 피를 흘릴 게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을 쓰는 게 더 이득이다.'
반도의 북부를 점령하는 동안 라크락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검은 비늘 부족은 그리 큰 규모의 부족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 비늘 부족은 성장해야 했고, 다른 부족들의 기술을 습득하고 자원을 빼앗고, 땅을 점령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이런 적대적 행위는 다른 종족들에게 푸른 벌레신에 대한 반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푸른 벌레신을 믿으라고 강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크락, 그리고 다른 리자드맨들도 그런 일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이미 적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았는데 그들의 신념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도덕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라크락이 보기엔 강제로 신을 믿게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신을 믿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라크락은 수호자 스라티스의 목상 앞에 절을 올리는 행위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오는 것이고, 거짓된 신념은 결국 더 강한 반감으로 돌아오리란 것을 알았다.
─┼
성운은 그 이유에 추가해서, 또 다른 이유로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운은 자신의 두 번째 종족을 탐색 중이었다.
쓸데없는 종족에 신앙 자원을 낭비할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라크락에게는 리자드맨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포교하는 일을 권하지 않았다.
신성 레벨이 오르면서 신앙 자원에 여유가 생겼고, 유연한 빌드를 선호하는 성운의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2종족 체제로 옮겨 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선택해야 했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든 쓸 만한 종족과 부족을 찾아야 했던 첫 번째 부족과 달리, 두 번째 부족은 플레이어의 상황에 따라 전략적 가치와 향후 빌드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플레이 방법에 따라 첫 번째 종족은 두 번째 종족을 발견하기 위한 오프닝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 두 번째 종족을 발견한 다음 기술을 모두 전수하고 첫 번째 종족을 쇠퇴하도록 내버려 둔다거나 말이야.'
그럴 전략이 필요한 게임도 종종 있긴 하지만, 이번엔 당연히 예외였다.
첫 번째 종족인 리자드맨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 성장해 줬기 때문에, 두 번째 종족은 리자드맨들을 보조할 수 있으면서 향후 확장 가능한 종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반도의 북부는 검은 비늘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반도 북부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지형이 유목 형태와 잘 맞는 게 다행이었지. 일부 산간 지역에는 검은 비늘 부족의 정주민들이 자리하고 있고.'
이들은 모두 같은 리자드맨이라는 점, 그리고 같은 신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잡다한 종족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통제 가능한 선에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반도 남부와 반도 북부 위의 황야 지역. 황야는 너무 넓어서 대륙, 북해안으로 맞붙는다. 반도 남부를 다 점령하고 난 뒤에도 대륙과 북해안은 이중 전선이나 다름없어. 이중에서 문제가 되는 건 대륙이 아니라 북해안이지. 리자드맨은 추위에 약하니까.'
상대적으로 추위에 강한 종족은 '털'이 있는 종족이었고, 다음으로 추위를 버티는 종족은 리자드맨들이 '민둥이'라고 부르곤 하는 오크, 엘프, 인간 같은 아인종이었다. 꼭 리자드맨만의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블린처럼 체구가 작거나 양서류인 프로그맨들은 추위에 더 약한 편이었다.
'사실 의복과 관련된 기술이 발전되면 리자드맨들이라고 문제될 건 없지만, 당장은 아니지.'
겨울 한 번을 나는 정도야 리자드맨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여름 잠깐을 제외하면 언제나 눈발이 내리는 지역에 리자드맨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털이나 민둥이들인데... 털 달린 애들은 상대적으로 야수성이 강하단 말이지. 피지컬이 강하다는 면에서 리자드맨과도 포지션이 겹치고.'
로스트 월드에서 전투, 전쟁은 좋은 해결책 중 하나고 성운도 자신 있었지만,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 리자드맨들의 머리는 평균보다 좀 더 좋지만 전투와 대결에 치중된 측면이 있었다. 종족들은 외형을 제외하면 엇비슷해 보이지만 종족간 격차가 확실히 있었다.
'오크? 최고의 번식 속도와 빠른 성장. 홀리오크 빌드 이전까진 스타팅 종족으로 쓰다가 버린다던가, 야만스럽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오크의 지능은 실제론 그렇게 낮진 않아. 언제나 쓰기 나름이지. 실제로 홀리오크는 메타를 장악했고. 하지만 피지컬 부분에서 리자드맨과 겹치니 탈락.'
성운은 후보가 될 만한 종족을 더 꼽아 보았다.
'드워프? 육체 능력도 안 밀리는 데다 동굴과 산 지형에서 유리하지. 세공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고집이 너무 강해. 동맹조차 거스를 수 있는데, 리자드맨도 한 고집이 있으니 궁합이 안 맞아. 노움은 어떨까. 노움은 체구가 작지만 과학 기술에 대한 선호를 생각하면 극복 가능성이 있고, 지금까지 기술을 꽤 많이 발견해 낸 검은 비늘 부족과 궁합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종족과의 연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개인주의적이야. 되도록 확장을 해야 하는 내 스타일과는 안 맞지. 엘프는 뭐, 최악이니 넘어가고. 하프빈은 다른 종족과도 잘 어울리는 데다 호기심이 많지. 여러모로 훌륭하지만, 체구가 작은 게 감점 요소다. 추운 곳을 싫어하는 게 종족 약점이기도 하고. 그럼 일반 종족 중에 선택할 만한 건 역시... 인간인가.'
성운은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모든 종족과 마찰을 벌이기 일쑤인 데다 오늘 동맹이었다 내일 적이 되는 일이 빈번하지. 그렇다는 말은...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육체 능력은 평균보다 낮지만 지능은 평균, 사회성은 높다.'
때문에 성운은 인간 종족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반도 안에는 인간 부족을 찾기 어려운 데다, 찾더라도 너무 작은 부족이거나 초점을 맞출 만한 괜찮은 개체를 찾기 어려웠다. 시간을 꽤나 들인 뒤에야 '자동성'을 발견했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자동성은 너무 큰 부족이었다. 라크락에게 기적을 이끌던 방식으로는 인간 부족에 신앙을 전파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성주가 성내 인간들에게 강력한 세속주의를 펼치고 있군. 플레이어, 아니 신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 여긴 라크락의 도움 없이는 신앙만 낭비하겠군. 다행스러운 점은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가 여기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단 점이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반도 남부까지 완전히 정리해서 배후의 위험 요소를 없애 두고 싶은데.'
하지만 라크락의 검은 비늘 부족이 남부로 내려가기 전에, 잘린 귀 놀 부족이 북해안으로부터 나타났고, 성운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자동성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성운이 라크락에게 계시를 통해 황야 아래까지 부족을 올려 보냈을 때 검은 비늘 부족과 잘린 귀 부족의 정찰대가 몇 차례 마찰을 겪었고 그 때문에 문명 충돌 이벤트가 발생했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종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경고: 상대 종족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운은 이 메세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상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종족이란 말이었다.
상대 부족의 크기나 목적성을 띄고 있는 움직임으로부터 당연히 예상된 결과이므로 성운은 놀랄 게 없었다.
성운이 '로컬 커뮤니티' 탭을 누르자 다음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목록(1명)」
「헤게모니아」
이 주변 성운과 대화 가능한 플레이어가 한 명 있고, 그 플레이어의 닉네임은 헤게모니아였다.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잠깐, 이 이름은...'
성운이 불안감을 알아챈 순간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헤게모니아'가 귓속말을 요청했습니다.」
성운은 잠시 고민했다.
사람들마다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되면 채팅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가 있는 법인데, 성운은 언제나 수신 차단을 선호했다.
말로 떠드는 것도 전략이 될 수는 있지만, 말로 떠드는 시간에 그냥 개체를 하나라도 더 컨트롤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가 좀 필요해 보여. 어쩔 수 없지.'
성운은 귓속말을 받은 다음, 화상 채팅 요청을 보냈다.
'이러면 단순한 채팅보다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으니까.'
다만 화상 채팅이라고 하지만 보여지는 것은 '신 외형 도우미'로 만든 서로의 캐릭터일 뿐이었다.
헤게모니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응답이 없다가, 곧 화상 채팅을 받았다.
성운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나 얼굴은 완전히 가리는 뿔 투구를 쓴 모습이었다. 쇠로 만들어진 투구 안쪽은 어두컴컴한 그림자로 덮여 있지만 두 눈만이 불꽃으로 타올랐고, 관자놀이에서 뻗어져 나온 한 쌍의 뿔은 위로 꺾이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투구 아래로는 그에 어울리는 흉갑이, 등 뒤쪽으로는 붉은 오라가 쉼 없이 이글거렸다.
헤게모니아가 먼저 입을 뗐다.
"앗, 깜짝이야."
쇠 투구 안쪽으로 울리는 근엄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뭐야 왜 놀라? 귓속말은 그쪽에서 걸었는데?"
"당신 캐릭터가 그렇게 생겼는데 안 놀라게 생겼어?"
"그쪽도 만만찮은데."
"아무튼..."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네뷸라."
성운이 생각하기에, 캐릭터가 상대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니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도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다.
성운이 편하게 대꾸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성운은 성격이 좋지 않았다.
헤게모니아가 다소 당황했다.
"...아니, 네가 맨날 수신 차단이라 대화는 못했지만 게임도 많이 했고, 그, 로스트 월드 마지막에 나랑 게임했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긴 하는데, 우리 여기서 10년 넘게 지냈거든? 가물가물할 만하지 않아?"
"아니지. 그건 완전 명승부였다고.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데?"
성운은 그 말이 맞는지 검토해 봤다.
"아닌데. 완전 시시했는데. 메타 따라가는 홀리오크 전략에 내가 카운터했고 그냥 그대로 먹혔던 거 아닌가? 명승부라고 하려면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냥 시시하게 끝났잖아."
"...음."
헤게모니아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투구를 붙잡았다.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생긴 것과 달리 마음이 여린 친구겠거니 짐작했다.
헤게모니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 좋아. 마음의 정리는 끝났다. 이번에야말로 승부다, 네뷸라. 기필코 끝장을 내주지."
"또 멍청한 소릴."
"뭐?"
"누구 좋자고 치고받자는 거야?"
헤게모니아가 멈칫했다.
"로스트 월드는 기본적으로 프리 포 올, 다전제 게임이다. 만인이 만인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랭킹 1위랑 랭킹 2위랑 초반에 나가떨어지잔 말이야?"
초반부터 강대강으로 전멸전을 하는 건 생각해 볼 문제였다.
로스트 월드는 결과적으로 스타팅을 어떤 식으로 플레이 했느냐가 중반과 후반의 모양새를 결정짓는데, 초반의 작은 손해 하나가 최후에는 막심한 피해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반의 손해를 만회한다고 해도 상대는 빠른 기술 발전으로 멀찍이 멀어졌다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도 많은 게임을 할 거라면 호승심에 불타서 한번 붙어 볼 수도 있겠지. 걸어볼 만한 도박이야. 강력한 라이벌을 없애고 기술과 영토를 얻고 영역 일부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한다면, 다른 플레이어보다 더 유리한 지점에 서겠지. 하지만 우린 다음 게임이 없다, 헤게모니아. 이 한 판이 끝이야."
헤게모니아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뒤통수를 긁었다.
"나도 알아. 기분 좀 내 본 거야."
성운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헤게모니아의 플레이 스타일은 성운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무식해 보이지만 미세 전투에서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고, 멀티태스킹에 능했다. 그리고 성운이 실재로 통계 사이트에서 헤게모니아를 검색하면 '초반에 치고받아서' 이익을 낸 경우도 많았다.
성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상대의 유리한 점을 따라가 줄 이유는 없지.'
채팅도 결국 게임의 일환이었다.
032화
성운의 속내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승부를 보자는 말이지?"
"그래. 이번엔 우리 둘 다 원하는 게 뭔지는 명명백백해 보이니까."
"자동성과 인간."
잠시 두 사람은 침묵하고 서로의 표정을 읽었다.
왜곡된 두 캐릭터의 모습으로는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그럼 '모순 예언'인가?"
"그게 제일 편하지."
헤게모니아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은 신성 레벨이 6을 넘어서면 가질 수 있는 스킬이었다.
「스킬:예언」
「자세히 보기:
한 왕은 눈 먼 예언자에게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와 동침하여 왕국을 멸망시키리란 신탁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예언이 두려웠으나 차마 제 손으로 죽일 수는 없어 부하로 하여금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부하 또한 갓난아이를 죽일 수 없어 들판에 내다 버리고, 아기는 한 목동에게 발견 됩니다.
아이는 성장하며 청년이 되고, 그는 지금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는 답을 찾기 위해 예언자를 찾아가지요. 예언자는 그에게 질문에 답하는 대신 '너는 어미와 동침하고 아비를 죽일 것이다'라고 합니다.
친부모가 아니나 지금의 부모를 사랑했던 그는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모험을 합니다. 가도에서 마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비켜 주지 않는 왕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왕국을 위협하던 인간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가진 괴물과 지혜를 겨루어 이기기도 합니다. 괴물과 싸워 이긴 공로로 그는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왕국의 왕비와 결혼해 왕이 됩니다.
그는 수년 뒤, 자신이 그토록 피해 왔던 예언이 이미 성사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가도에서 만나 죽인 왕이 자신의 친아버지였으며, 결혼하게 된 자신의 아내가 친어머니였습니다. 그의 아내이자 친어머니는 목매달아 자살했으며, 그는 그 앞에서 두 눈을 스스로 파낸 뒤 궁에서 걸어 나갑니다. 왕국은 결국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아리송한 스킬의 예시와 달리, 스킬 자체는 간단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종족과 자신에게 내리는 퀘스트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뒤, 그 예언이 충족될 경우 신탁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한 신앙 자원과 신탁을 성사시키기 위한 난이도에 따라 보상을 얻는 형식이었다.
'예를 들면, 라크락이 흉물을 죽이게 된다는 예언을 내린 뒤, 라크락은 그 예언을 따라 행동하면서 내가 그걸 도와 예언을 성사시키면 썩 괜찮은 경험치가 들어온다는 말이지.'
하지만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어들은 이 스킬을 결코 남발하지 않았다.
'...예언을 성사시키지 못했을 때 페널티가 있으니까.'
많은 신앙 자원을 소비해 큰 예언을 내릴수록 그 예언을 성사시키지 못했을 때의 페널티가 상당했다. 투자한 신앙 자원이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경험치가 깎여서 레벨이 떨어질 수 있고, 운이 나쁘면 관련한 개체들에게 저주 같은 페널티가 붙거나 부정적인 돌발 이벤트가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이라는 작자가 운명이란 걸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그만큼 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겠지.'
때문에 아무리 쉽고 단순한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주의를 기울였다. 어차피 너무 간단한 수준의 예언은 신앙 자원을 투자하는 것에 비해 더 적게 돌아오므로 빈번하게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꺼내 드는 카드기는 하지. 자신만 있다면야.'
성운이 볼 때 예언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바로 지금이었다.
'모순 예언'이란, 두 플레이어가 서로 상반된 예언을 하는 경우였다.
'이를테면 플레이어 A와 플레이어 B가 개체 C를 두고 예언을 하는 거지. 플레이어 A는 C가 3일 안에 죽는다고 예언하고, 플레이어 B는 C가 3일 뒤에도 살아 있다고 예언하는 거야.'
그럼 플레이어 A는 어떻게든 3일 안에 C를 죽이기 위해서, 플레이어 B는 C가 죽지 않도록 각자가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플레이어 A와 플레이어 B 중 한 명만이 예언을 성사시키고, 한 명은 예언을 실패하게 된다.
누군가는 보상을 받고, 누군가는 페널티를 받는다.
'이런 종류의 내기는 예언 없이도 가능은 하지만, 모순 예언은 시스템에서 직접 지원해서 허점이 없는데다 다른 한쪽이 확실한 페널티를 받지.'
그냥 말로만 내기를 하는 것과 달리 모순 예언의 경우 승부가 났을 때, 상대가 승부에 불복하더라도 페널티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승부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성운으로서는 상대가 불복하거나 말거나 승리했다면 전투를 통해 확실한 이익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어. 나라고 해도 패색이 짙어지면 라크락을 퇴각시키겠지. 헤게모니아의 잘린 귀 부족은 상당히 멀리 자리 잡았고, 이건 확실히 모순 예언을 염두해 뒀던 것 같군.'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그럼 어떤 예언으로 할까?"
"자동성에 성주가 후계자를 정하려고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떠보는 건가? 자동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것도 있고. 알면 모순 예언을 설정하는데 편할 것 같아서."
헤게모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성은 일정 주기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하지. 그 사람이 성주가 되고. 성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기는 아무래도 랜덤하게 정해지는 것 같은데, 언제 끝나는지는 자동성의 성주 자신만 안다고 해."
"정보 공유를 해 주자면, 그 때문에 이번 자동성 성주 휘서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을 한 것 같더군. 어떤 식으로든 성주의 후계자가 정해지는 시기를 미리 알게 되면 그때 성주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까."
"알고 있는 정보야."
"뭐, 다 듣고 나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성운은 화면으로 헤게모니아가 건틀릿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성운은 무시하고 말했다.
"아무튼 자동성 성주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기가 돌아왔단 게 중요하지. 성주는 자신의 자식 중 하나에게 성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하고."
"후계자는 모두 다섯 명."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그중에 한 명을 서로가 정하고, 우리가 정한 휘서의 아들딸이 후계자가 될 거라고 예언을 내리면 될 것 같은데? 후계자는 한 명만 정해지니 필연적으로 모순 될 수밖에 없어. 설마하니 둘 다 멍청하게 실패하면... 그냥 받아들이는 걸로 하고."
"좋아. 마음에 들어."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역시, 이 녀석도 미리 손을 써 뒀나?'
하지만 성운은 자신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성운은 꽤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휘서에게 다섯 명의 자식이 있지. 잘 모르면 내가 설명해 줄까?"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성운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헤게모니아의 시점이 궁금했다.
"첫째, 이름은 단, 서른 초반의 남자. 건장한 체격에 휘서에게 신임받고 있어. 머리도 괜찮은 편인 거 같고. 무려 네 가문 중 두 가문이 지지하고 있는 데다, 가장 후계자로 유력하지."
"좋군. 우리가 둘 다 같은 사람을 고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 그건 그때 정하자고."
헤게모니아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둘째, 이름은 준, 스물 후반의 남자. 첫째와는 어머니가 달라.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후계자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어. 한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가문일 뿐이지."
"흠. 다음은?"
"셋째, 이름은 진, 스물 후반의 여자. 첫째와 같은 정실부인의 딸이고, 밖으로 나도는 편이야. 신분을 속이고 있긴 하지만, 사냥꾼이나 거친 사내들과 잘 지내지. 남은 한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어."
"사냥꾼이라. 그리고?"
"넷째, 이름은 경, 스물 초반의 여자. 첫째와 둘째와 또 어머니가 달라. 어머니는 이미 죽은 것 같고, 저주를 받았다는 것 같아. 외형적으로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 때문에 성주는 물론 가문 사람들에게도 소외받고 있지."
"그럼, 마지막이군."
"다섯째, 이름은 민, 여자, 십대 중반이야. 머리가 비상하고 여러모로 많은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성주가 늘그막에 보게 된 막둥이라, 성주에게 사랑받는 것 같아."
헤게모니아가 되물었다.
"어때, 선택해도 되겠어? 아니면 시간을 두고 정보를 수집할 시간을..."
"아니. 이대로 정하지."
시간을 주게 되면 어차피 성운으로선 헤게모니아에게도 시간을 주게 되는 셈이었다. 불필요한 일이다.
성운이 말했다.
"모순 예언 창을 띄워서 서로 예언을 적어서 확인하지. 어차피 같은 예언이면 모순 예언 성립이 안 되고, '아니오'를 누르면 그만이니까. 서로 다른 후계자를 골랐으면 깔끔하게 '네' 누르고 시작하는 거지. 어때?"
"콜."
성운이 시스템 창을 조작했다.
「모순 예언」
「플레이어 헤게모니아와 '모순 예언'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경고: 모순 예언에 실패하게 되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한 번 더 확인하신 다음 진행해 주세요.」
「플레이어 헤게모니아의 예언:
"휘서의 둘째 아들 휘준이 자동성의 다음 성주가 된다."」
「플레이어 네뷸라의 예언:
"휘서의 넷째 딸 휘경이 자동성의 다음 성주가 된다."」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표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당황했군. 손가락이 굳었어.'
성운이 말했다.
"다르군. 잘됐어. 나는 방금 '네' 눌렀어."
"그... 좋아. 그래. ...시작하자고."
헤게모니아는 곧 자신만만함을 되찾고, 건틀릿을 낀 주먹으로 상태창 메시지를 내려쳤다.
어디에서인지 알 수 없는 두 개의 예언이 자동성에 퍼지기 시작했다.
─┼
성주인 휘서는 처음엔 예언을 무시하려고 했다.
'또 가문 중 어딘가 손을 썼나 보군.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뜬소문이다.'
그러나 예언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하여 준이와 경이란 말인가? 게다가 왜 하나가 아니지?'
물론 휘서는 가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직 첫째인 단을 후계자로 점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첫째인 단과 셋째인 진이 후계자가 될 거라고 수근거리고 있었으므로, 뜬소문으로 퍼지는 예언은 어딘가 미심쩍었다.
'누군가 퍼트린 이야기는 틀림없는데.'
휘서는 결국 사람을 써서 예언의 진원지를 찾아내려 했다.
꽤 시간을 들였고, 몇 번인가는 휘서가 직접 손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진원지는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휘서의 생각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 후계자를 정할 시기가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는 자식들과 가문들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자동성에서 뜬소문을 잠재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번엔 외부에서 무언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네 가문은 잘린 귀 놀 부족과 검은 비늘 리자드맨 부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고, 지나가는 행상이나 떠돌이로 보이는 놀과 리자드맨들이 성문을 더 오래 지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오리라고 생각했던 놈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기가 겹친다는 말은...'
최악의 가능성은 두 부족이 동맹을 하고 합심하여 자동성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휘서는 사람을 풀어 두 부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캐냈고, 서로의 믿는 신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두 부족은 서로를 증오하진 않지만, 충분히 적대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맞붙어야 할 호적수로 보고 있었다.
'둘 다 내가 완전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부족이다. 그들에겐 저 넓은 황야마저도 좁게 느껴져 둘 중 하나만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우리는 겨우 이 자동성 안에서의 삶도 고달프거늘.'
휘서는 자동성에서의 마지막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목숨을 걸어 보기로 했다.
'후계자와 소문, 저 두 부족의 움직임엔 분명 관련이 있다.'
휘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두 부족의 부족장을 만나고도 죽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것은 절망에 대한 확신이었다.
'...내가 놀이판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
─┼
그렇게 해서 휘서는 라크락 앞에서 그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033화
온기가 식어 가고 있는 것을 먼저 느낀 것은 휘서였지만, 휘서는 차가워지는 천막의 온도를 그저 감내하고 있었다.
화톳불이 죽어 가고 있었다.
라크락이 뒤늦게 식어 가는 화톳불을 바라보았다. 라크락은 불가 옆에 쌓인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쥐고 부러트리고 손바닥 안에서 으스러트린 다음 던져 넣었다.
화톳불은 기지개를 펴듯 되살아났다.
뜨거운 불길은 부족한 열기로 마저 태우지 못했던 굵은 나뭇가지 안쪽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외교니 체면이니 다 제쳐 두고 이야기를 하면, 이토록 쉽지. 모든 게 간단하지 않나?"
휘서는 동의하지 않는 듯 침묵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그대는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살카잇인가, 나인가. 놀인가, 리자드맨인가. 분노하는 이빨의 신인가, 푸른 벌레신인가."
"아니. 간단하지 않소."
휘서는 양반다리의 양 무릎 위로 손을 얹고 가슴을 폈다.
"이건 단순히 둘 중 하나를 정하는 게 아니지. 누가 보면 귀한 선물 둘 중 하나를 골라잡으라는 줄 알겠소. 그보다는 검치호와 코카투가 나타났는데 머리통을 어느 아가리에 집어넣어야 덜 아플까 하는 문제에 가까워 보이는데."
"흠,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지만, 기왕이면 코카투 아가리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는 게 좋지 않겠나?"
"살카잇도 검치호가 나을 거라고 말하더군."
라크락은 휘서의 상황을 이해하기로 했다.
어차피 휘서 입장에서는 살카잇과 라크락이 얼마나 달콤한 말로 회유를 하더라도 전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 의심 덕분에 자동성이 지켜지고 있을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일단 한 발 물러나야지."
휘서는 왼손으로 자신의 턱수염을 긁었다.
"그러면 검치호와 코카투가 날 잡아먹기 위해 다투지 않겠소?"
"그렇겠지. 그 다음엔?"
"어찌되던 간에 승부가 날 거요. 하지만 지치거나 다쳤겠지. 기분 같아선 반쯤 죽었으면 좋겠지만... 그럼 그때 가선 선택지가 늘어날 거요. 그때 가선 본색이 드러나긴 하겠지만, 지친 만큼 상대할 방법이 없진 않겠지."
라크락은 휘서의 비유를 쉽게 이해했다.
'후계자가 추려지고 나면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말이군. 우리와 후계자 사이의 거리보다 후계자와 자동성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 테니, 인질을 삼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할 테고. 하지만 후계자는 어떻게든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지.'
휘서가 말했다.
"어떻소?"
"나빠 보이진 않아. 살카잇과 나, 놀과 리자드맨, 분노하는 이빨의 신과 푸른 벌레신, 둘 중 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다'는 말은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 같은데. 그냥 돌멩이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지금은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었지. 조금 더 빨리 알아보고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지 알아보는 게 좋지 않았겠나? 둘 중 하나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조금 더 빨리 인식했다면."
라크락의 말이 휘서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라크락은 털어내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래. 맞다. 필요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좋은 선택이지. 그대는 현명하군."
"...칭찬 고맙소."
천막 안으로 바람이 불어 화톳불이 흔들렸다.
화톳불을 곁에 두고 마주보는 두 사람의 그림자도 불길을 따라 크게 움직였다.
휘서에게는 두 번째 고통이었다.
때문에 좀 더 잘 갈무리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쯤하면 된 것 같군. 떠나기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얼마든지."
휘서는 몸을 기울였다.
"결국 나만이 아니라 그대 또한 놀이판 위의 돌멩이오. 좀 더 큰 판 위에 있을 뿐이지. 그대는 그 사실이 두렵거나 분하지 않소? 무력감을 느끼거나 고통스럽진 않는 거요?"
휘서는 라크락 또한 신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라크락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휘서는 라크락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질문은 이번 일이 끝나면 답해 주도록 하지."
"...좋소. 개인적으로는 살카잇과 당신 모두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길 바라고 있지만."
"배웅이 필요한가?"
"됐소. 나는 심부름꾼 휘로 왔으니, 떠날 때도 휘로 떠나겠소."
휘서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죽 두건을 뒤집어쓰고선 천막을 걸어 나갔다.
이미 라크락의 언질이 있었는지 리자드맨 부족의 유일한 인간인 휘서를 붙잡거나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휘서는 문득 이런 상황이라면 리자드맨들을 염탐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이제 더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것도 함정일지 모르지. 아니... 아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라크락의 말로 사기가 꺾인 탓일지도 몰랐다.
휘서는 과거에도 이런 일을 몇 번 겪었고, 이럴 때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보다 정해진 일들을 순차적으로 처리해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휘서는 천막 사이를 걸어 나와, 황야로 걸어 나갔다.
휘서는 별을 보았다. 방향을 보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방향을 잡고 두 시간을 걸어가자 야트막한 둔덕이 나타났다. 말똥 냄새가 나자 휘서는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았다.
부관이자 조카인 휘우와 부하 네 명, 그리고 여섯 필의 말이 휘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가 말했다.
"성주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성히 돌아왔다고 다행이 아니다."
"그래도 저희 성에서 성주님 목숨만큼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농담은 됐다."
휘서는 가죽 두건을 벗고 여행으로 낡은 옷들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부하 하나가 작은 물 항아리를 가져왔고 휘서는 그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옆에서 우가 질문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변한 건 없다. 계획대로 한다."
휘서가 말한 '계획대로'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이었다.
거대한 두 부족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든 끝날 때까지, 불똥이 튀지 않도록 모가지를 내빼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이었다.
우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서가 우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너희는?"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잘린 귀 부족도 그랬지만, 검은 비늘 부족도 경계가 삼엄합니다."
휘서는 자신이 검은 비늘 부족에 들어가 라크락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부하들에게 검은 비늘 부족을 정찰하도록 시켰다.
단순히 전체 숫자는 얼마냐, 전사는 얼마냐, 가축은 또 얼마냐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
자동성 내부에는 상인이며 떠돌이며, 아니면 오랜 주민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리자드맨들이 있었다.
분명 그들 중에 검은 비늘 부족과의 내통자가 있었고, 예의 '후계자 싸움'을 지지하고 있을 터였다.
'분명 내부에 연결된 끈이 있다.'
이렇게 연결된 끈을 짚어 나가야만 그 끈을 잘라 내고 자동성은 게임 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자동성 내부의 놀과 리자드맨들 모두를 처형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성 안에서 원망을 사겠지.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어. 끈을 찾아 잘라 내야 한다.'
휘서는 남은 물을 제 얼굴에 쏟아 부었다.
그 뒤 빈 항아리를 부하에게 넘겨주고 말했다.
"불을 밝혀라. 거울도 좀 가져오고."
부하들이 대답하고 그 말을 수행하는 사이, 우가 마저 말했다.
"눈 밝은 이들로 며칠 지켜봤지만 저희가 이미 얼굴을 익혀둔 전사들을 제외하곤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드나드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지난 며칠간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 리자드맨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겠지. 분명 외부에 우리 자동성에 명령을 내리고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정찰 범위를 넓혀야겠군."
"정찰대로 병사를 더 빼면 성을 지킬 수단이 부족해집니다."
"상관없다. 당분간 자동성의 흙벽은 안전할 거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벽이겠지."
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거대 부족이 양쪽 길을 버티고 있는 이상, 물리적 방비는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자동성은 그 높은 성벽과 무너져도 저 스스로 고쳐져 외부의 침입을 불허해 왔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그것은 비물리적 방비를 의미했다. 휘서로서도 그것의 현대적 개념인 정보와 심리까지 짚어 내진 못했지만, 어렴풋하게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 사이 불이 밝혀지고 청동 거울이 휘서 앞에 놓였다.
휘서는 품에서 흑요석 단도를 꺼냈다.
한쪽 면이 길고 날카롭게 쪼개어진 단도를 든 휘서는 그것을 목으로 가져다댔다.
그리고 천천히 피부 위를 긁으며, 물에 젖은 수염을 깎았다.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휘서는 이 일을 오래 해 왔고, 능숙했다.
수염은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주고, 변장을 할 때 언제나 유효한 작업이었다.
상처 없이 수염을 모두 밀어낸 휘서는 거울을 보며 턱 좌우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가 들고 있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몇 겹 껴입었다.
수염을 밀고 제대로 된 의복을 챙겨 입은 휘서는 자동성의 성 주민들이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던 자동성 성주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돌아가자. 할 일이 많겠구나."
"예."
"...할 일이 많겠어."
휘서가 자신의 말에 올라탄 뒤 말했다.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으니 앞서 달리겠다. 너희는 충분히 떨어져 따라오거라.
"알겠습니다."
우는 그렇게 했다.
휘서가 앞서가고 그 다음 우가, 다른 부하들이 따라 달렸다.
우는 별안간 얼굴에 물방울 하나를 맞았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밝았다.
우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물방울 하나가 또 다시 우의 볼을 때렸다.
앞서 달리고 있는 것은 휘서 뿐이었다.
우는 오웬이나 라크락 같은 리자드맨과 달리 체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리자드맨들의 생각처럼 쉽고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너무 붙지 않았느냐? 조금 더 속도를 늦추거라."
휘서와 부하들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우는 더는 물방울을 맞지 않았다.
─┼
3주 전, 두 신의 예언이 자동성 안에 퍼져 나가던 때에...
─┼
여자 하나가 맨손으로 암반을 오르고 있었다.
"망할 개자식들."
손바닥은 이미 터지고 찢어져 피가 팔뚝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르는 모습이 능숙한 것을 보면 암반 오르는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당장은 두 손 말고도 불편한 점이 있어 보였다.
여자의 왼쪽 발목은 크게 부풀어 있었다.
여자는 손에서 배어나는 피를 제 얼굴에 닦은 다음, 눈에 보이는 툭 튀어나온 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턱은 교묘하게 숨겨진 바위였고, 바위는 여자의 몸무게가 충분히 실린 순간 몸을 기울였다.
다행히 여자는 균형 감각이 좋았다.
걸치고만 있던 왼쪽 발목에 무게 중심을 옮겼고, 바위 아래 숨겨져 있던 제대로 된 턱으로 손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은 발목에 무게를 올리자 잊고자했던 거대한 통증이 여자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여자는 울부짖지 않았다.
단지 침착하게 이마를 암반에 맞대고 얼굴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젠장, 시팔, 개 같은 거..."
여자의 이름은 휘경, 휘서의 넷째 자식이었다.
휘경은 처음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듣던 저주받은 자식이니, 제 어미를 잡아먹었느니,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듣고 자랐으므로 외톨이로 자라는 건 익숙했다.
아버지는 물론 어느 가문의 지지도 없이 자라면서 동시에 성주의 자식이라고 떵떵거리며 살 수도 없었던 것 또한, 휘경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휘경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았다.
저 밖은 황야였고, 수많은 종족들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부닥치며 싸워 댔다.
반면에 자동성 안에는 질서가 있었다.
비록 성주와 네 가문이 주도하는 질서이긴 해도.
자동성 안이 비록 낙원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성 주민으로서 성벽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성 주민으로 있기 위해선 자동성을 위해 큰 봉사를 하거나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바쳐야만 했다. 특히 인간 종족이 아니라면 그 일은 더 어려웠다.
때문에 휘경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이점을 살려서 살아갈 생각이었다.
바로 장사였다.
성벽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말은 자동성 밖에서 싼 물건을 자동성 안에서 비싸게 팔 수도 있고, 자동성 안에서 싼 물건을 자동성 밖에서 비싸게 팔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장사를 하려면 성주에게 일정 분량의 재물을 바쳐야 하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날 만드는데 기여를 하셨으니, 나도 그 정도는 드릴 수 있지. 너무 억울해할 거 없어.'
하지만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망할 수레바퀴가 고장나 있었다니. 교중 이 자식, 이딴 걸 나한테 빌려 줘? 암만 내가 소금을 안 갚기로서니...'
암반을 계속 오르던 휘경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 미터 아래에 외발 수레가 박살나 있었다.
휘경이 수레와 함께 굴러떨어지고도 겨우 몸 곳곳에 타박상과 발목이 삔 정도로만 다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휘경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행이다. 교중에게 수레를 빌린 건 실수지만, 장사할 물건으로 비단을 택한 건 좋았어.'
휘경은 암반을 오르면서 동시에 박살 난 수레에 담긴 비단을 어떻게 회수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때문에 자신이 오르는 암반 위에 꼬리 달린 누군가가 서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034화
휘경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암반의 마지막 턱에 손을 올렸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휘경에게 피로감이 밀려왔다. 몸이 더 좋은 상태였더라도 목숨을 걸어야했던 등반이었다.
비교적 멀쩡한 오른발을 디딤발로 쓰면 좋으련만, 이 마지막 구간엔 그런 곳이 없었다.
'그래. 참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지.'
휘경은 충분한 각오를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퉁퉁 부은 왼발에 무게를 실으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으시죠."
"어?"
휘경은 고개를 들었다.
암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손을 뻗고 있었다.
리자드맨이었다.
리자드맨은 비단 옷을 몇 겹 껴입고 있었는데, 휘경은 그 복식이 리자드맨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리자드맨은 온도에 민감하니까.
'하지만 비단으로 만든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을 만큼 부유한 부족은 하나 밖에 없지.'
사실 휘경은 옷이 아니더라도 이미 리자드맨이 어느 부족인지 알았다.
리자드맨은 검은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 비늘 부족의 리자드맨이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말했다.
"제 손이 외롭습니다."
휘경은 곧장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휘경은 자신의 경계심이 늘 목숨을 지켜왔다고 믿었다.
"너 뭐야?"
"그대로 계실 겁니까?"
"계속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제 생각엔 이대로 대화를 하는 것보단 올라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마는, 일단 대답하자면 그렇습니다."
휘경은 상대가 떠돌이 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찮은 작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도와준다고 해도, 난 줄 수 있는 거 없어. 빈털터리야."
리자드맨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서 하는 소리가 그겁니까?"
"나 혼자서도 올라갈 수 있으니까."
"그건 압니다. 하지만 다친 발을 디딤발로 쓰려는 걸 봤습니다."
"...젠장."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리자드맨의 몸이 훅 숙여졌다.
휘경은 리자드맨 특유의 비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비리다고 코를 막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물과 수풀을 떠올린다. 휘경은 후자였다.
휘경이 멈칫하는 사이 리자드맨의 손이 휘경의 손목을 쥐고 당겼다. 휘경이 "앗" 하고 놀란 다음 순간 이미 휘경은 단단한 땅 위에 내려지고 있었다.
"오른발부터 짚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휘경이 오른발을 바닥에 짚고 벽에 기대서자 리자드맨은 손목을 놓았다.
'이 자식 방금 한 손으로 날 들어 올린 거야? 검은 비늘 부족은 죄다 장사라더니,'
휘경이 내심 놀란 것과 별개로 리자드맨 또한 황당해하고 있었다.
리자드맨은 절벽 위의 길을 앞뒤로 보면서 말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폭입니다. 길 한쪽은 언제든 낙석이 떨어질 수 있고 반대쪽은 수 미터 계곡이고. 이런 길에서 수레를 가득 채워서 밀고 갈 생각을 한 겁니까? 정말 그 정도 밖에 다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수레바퀴만 고장 나지 않았으면 문제없었어."
"바퀴라는 녀석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염두에 뒀어야지 않습니까?"
현재의 기술적 한계를 감안하면 리자드맨의 지적은 타당했다.
휘경은 곤란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넌 누구야?"
"흠,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검은 비늘 부족의 사이란 무엘이라고 합니다."
"사이란 무엘?"
"무엘 부분은 잊으셔도 됩니다. 이어져 오는 이름인데 저도 제 아버지도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셨습니다. 리자드맨들이 자주 쓰는 이름은 아닌데 아버지는 제가 그 이름을 잇기 원하셨으므로 그냥 소개할 때 함께 말합니다. 그냥 사이란이라고 부르시죠."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튼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사이란."
그렇게 말한 휘경은 절뚝거리며 사이란을 지나치려고 했다.
사이란은 막아섰다.
"죄송한데, 제 이야기는 안 끝났습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지. 나 가진 거 하나도 없다고."
"그게 아닙니다, 휘경."
휘경은 사이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허리춤에 꽂아 넣은 흑요석 단도로 손을 가져갔다.
휘경은 자신의 정체가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휘서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자동성을 이어받은 뒤, 암살로 삶을 마감한 어머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동성을 다스리기로 했다.
정체를 철저히 숨기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네 가문의 가주들과 가주의 혈족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어 가문이 자신의 손발이 되도록 했고, 그와 동시에 네 개의 가문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다.
위태로운 부분이 있었지만 휘서는 자신의 역량 안에서 일을 잘 수습해 나갔다. 위태로워 보이는 일도 수 십년 이어지면 묘기로 생각될 따름. 그리고 수십 년 경력의 묘기장이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휘서의 자식들 또한 정체를 숨기는 건 당연했고, 아버지 휘서의 명령을 따라 정체를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이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성주의 후계자 자격도, 아버지의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목숨도 없을 터였다.
검은 비늘 리자드맨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흑요석 또한 날카롭고, 단도는 충분히 심장에 이를 만큼 길다.
휘경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려했으나, 당장은 참았다.
휘경은 생각했다.
'후에 손을 쓰더라도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는 알아야 해. 모든 정보를 캐고 난 다음이라도 상관없어. ...절대로 이놈이 날 도와줘서는 아니고.'
게다가 사이란은 대항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 두 손바닥을 내보인 상태였다.
사이란이 말했다.
"저는 당신을 찾으러 온 겁니다"
"날 찾으러? 내가 누구인지 알고? 어떻게 날 알고 있지?"
"저도 당신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라크락 님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라크락?"
휘경은 가물가물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그 이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떠올리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거수 사냥꾼 라크락을 말하는 거야? 그 천둥 도마뱀? 최초의 선택받은 자? 검은 비늘 부족의 대족장?"
"...저희는 그냥 부족장님이라고 부릅니다만."
휘경도 주변 소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잘린 귀 부족과 검은 비늘 부족이 황야를 끼고서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중간에 낀 자동성의 성 주민들이 술렁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사이란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알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검은 비늘 부족이라면 어떻게든 알았을 테니까.
다음 질문이 더 중요했다.
"그 사람이 왜 날 찾으라고 한 거지?"
"흠. 솔직히 저도 완전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반쯤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반쯤이라도 해 봐."
사이란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가 입을 열었다.
"최근 자동성에 퍼지는 두 가지 소문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뭔데? 토 가문의 둘째 아들이 말타기에 성공한 거? 아니면 수 가문의 둘째 딸이 쌍둥이 낳은 거? 시장의 물고기 장수가 드디어 살아 있는 물고기를 공수해 왔다는 거?"
"...마지막은 진짭니까?"
"아니. 확인해 봤는데 거짓말이었어. 전부 소금절임이지."
"아무튼 전부 아닙니다. 모를 수 없는 소문이고 외지인인 저도 들을 수 있었는데... 최근 자동성에 안 계셨군요?"
"그래. 비단을 사야 했어. 싸게 사려면 최대한 멀리 가야 했고. 운 좋게 인간 상단을 만났고 비단도 사고 수레도 살 수 있었지. 지금은 저 바닥에 있지만. 도대체 무슨 소문이길래 그러는 거야?"
사이란이 말했다.
"정확히는 두 개의 소문입니다. 하나는 성주의 둘째 자식이 자동성의 성주가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주의 넷째 자식이 자동성의 성주가 된다는 것이죠."
휘경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헛소문이네."
"당신이 휘서의 넷째 자식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휘경은 가로저었다.
"인간도 아니고 자동성에 살지도 않아서 잘 이해를 못하나 본데, 꼭 싸움이란 게 주먹다짐을 하고 칼을 빼 드는 건 아니거든. 그 소문은 자동성 성주의 다음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나 이외의 형제들이 벌이는 싸움의 일환이야. 이유는 잘 몰라도 작은 오빠랑 내가 엮인 것 같은데, 분명 이 소문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겠지."
사실 휘경은 후계자 싸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무 관계도 없는 리자드맨에게 설명해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헛소문을 퍼트리는 건 큰 오빠나 언니 성향은 아니지. 가능성이 낮아. 그럼 작은 오빠나 막내일까. 막내는 기반이 약하니 이런 헛소문으로 이득을 취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느끼겠지만, 이 소문으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힘들어. 그럼 작은 오빠일 확률이 높아. 늘 뒤에서 일 꾸미기를 좋아하니까. 자기 자신을 헛소문의 피해자로 놓고 싶은데 혼자서는 너무 주목을 받으니까 관계없는 나를 끌어들인 건가? 유치하긴.'
휘경이 말했다.
"아무튼 그 소문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너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그냥 검은 비늘 부족에서 자동성의 정보를 캐기 위해 왔다고 하지 그래? 어떻게 내가 성주의 자식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낸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완전 내놓은 자식이라서 건질 게 없을 거야. 다른 형제를 알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
휘경은 그렇게 말하며 사이란의 태도를 살폈다.
정보를 다 캐냈으니, 이 리자드맨은 죽어야 했다.
휘경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이란은 그저 서 있을 뿐이지만 손의 위치나 몸의 기울기 모두 빈틈이 없었다.
키 차이 때문에 힘이 잘 실릴 것 같지도 않았다. 힘이 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재빠르단 말이기도 했다.
휘경은 이미 이 리자드맨을 공격해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았다.
'실패하면 어쩌지?'
그럼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의 분노를 온몸으로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사이란을 보낼 수도 없었다.
외부에 정보가 퍼지고 그것을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어차피 죽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이미 죽은 형제도 있었다.
'...아버지의 실망을 감내하는 것보단, 그냥 리자드맨의 분노가 낫겠지.'
마음을 다잡은 휘경에게, 사이란이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당신을 찾으라고 한 건 라크락 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저는 첫 번째 명령에 이은 두 번째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명령?"
"저는 당신의 목숨을 지켜야 합니다."
휘경은 어처구니없게도, 마음 한 구석에서 불편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휘경이 아주 오래전부터 무시하고 매몰차게 굴었던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휘경에게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 감각은 이제와선 낯설게만 느껴져서 감각이 떠오르자 휘경은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잊고 있었다.
휘경은 이대로 떠올리지 말았으면 생각했지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알려 줄까?
'닥쳐.'
-'온정'이라고 부르는 녀석이지.
'닥치라고 했지?'
목소리는 금세 사라졌지만, 휘경으로선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지금 난생 처음 보는 리자드맨한테 저런 말을 들었다고 마음이 약해진 거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휘경이 기억하는 한 휘경을 지켜주겠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흑요석 단검을 쥐고 있던 손에는 힘이 다 빠졌다.
휘경에게 지켜 주겠다는 사람을 찌를 의지는 없었다.
휘경은 자신이 늘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휘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정에 약하다고 기억했다.
휘경이 더듬더듬 말했다.
"너,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이란은 인간의 감정에 둔했다.
때문에 담담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만 늘어놓았다.
"당신은 헛소문이라고 했지만 당신의 형제들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다른 가문 사람들도요. 저희 라크락 님이 말씀하시길, 자동성에 후계자 계승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두 앞으로 일어날 큰 변화에 주목하고 있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작은 소문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테고, 불필요한 변수들을 줄이고 싶어 할 겁니다. 이럴 때는 가장 약한 것부터 도태되기 마련이지요."
휘경은 사이란이 말하는 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그 말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내 목숨은 내가 지킬 수 있어. 돌아가. 내가 검은 비늘 부족의 도움을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나는 빈털터리기도 하고. 다른 형제를 알아봐."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부족장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른 형제가 아니라 넷째, 휘경을 지키라고요. 그리고 저는 물론이고 저희 부족장님도 당신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휘경은 한숨을 쉬었다.
논리로는 이 사이란이라는 리자드맨이 자리를 비켜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감정을 움직여야 했다.
'이것까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휘경은 품에서 손을 빼고 사이란에게 다가갔다.
맨손으로 다가가자 사이란은 의아한 것 같았다.
"뭡니까?"
"이걸 봐."
휘경은 손으로 앞머리를 올렸다.
휘경의 이마 위쪽,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원통 모양의 혹이 나 있었다.
단면이 상당히 거칠어서, 눈썰미가 있다면 인위적으로 잘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시다시피, 뿔이야. 정확히는 뿔이 있던 자라지. 뿔 그루터기라고 해야 되나."
"...계속 자라는 겁니까?"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길게 자랄 때마다 잘라. 이 뿔 때문에 날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저주받았다고 말하지. 그냥 사람한테서 뿔이 난다는 게 기분 나빠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있지만?"
"정말 날 잘 아는 사람들은 더 많이 혐오하고 피해. 난 정말로 저주를 받았거든."
사이란은 팔짱을 끼고 휘경을 이리저리 살폈다.
"지저분하긴 해도 저주받은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마는. 그 앙증맞은 뿔 때문이라고요?"
"농담하는 거 아니야."
휘경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뿔 그루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이 뿔로 어머니의 배를 찢으며 태어났어. 어머니는 그 때문에 돌아가셨고. 형제 하나도 결국 내 뿔 때문에 죽었고. 그것 말고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내가 외톨이인 진짜 이유도 그거야."
사이란은 잠시 무표정하게 휘경을 내려다보았다.
"유감입니다, 휘경. 애도를 표하지요. 하지만 당신이 진짜로 저주를 받았거나 말거나 저의 제안은 바뀌지 않습니다. 저의 제안은 제 부족장 라크락 님의 것이고, 저는 검은 비늘 부족의 의지를 대신하러 온 겁니다."
"거절한다면?"
사이란은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
"강제로 하겠지요. 저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035화
저주로 겁을 주는 것도 통하지 않자, 수를 다 써 버린 휘경은 고민을 거듭했다.
'직접 저주를 겪게 하는 수밖에 없나?'
휘경은 그 경우 사이란과 함께 다닐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내 목숨을 지켜 준다고 하는, 이 덩치 크고 힘센, 그리고 유력한 리자드맨 부족의 남자와 함께 다녀야 한다고?'
휘경은 사이란을 바라보았다.
사이란은 무슨 뜻으로 바라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리자드맨이라면 자동성 내부에도 있으므로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미학을 가진 휘경이 보기에도 사이란은 그저 그런 리자드맨들과는 달랐다.
단순히 귀한 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비늘 아래의 근육은 그 단단함이 눈으로 알 수 있을 정도에, 휘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품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품위라니.'
어디 가서 드러낼 수는 없는 데다, 성주의 딸이라는 사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면서도, 나름 귀한 신분이라고 자신해 온 휘경은 사이란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쑥스러워질 정도였다.
'...사실은 나쁘지 않은 거 아냐?'
휘경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일어났다.
이대로 사이란을 보낼 수는 없으니 죽여야 했는데, 사실 그게 성공할 확률은 희박했다. 만약 사이란이 자신을 살려두고 가 버린다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위험이 있었다.
반면에 그냥 사이란을 곁에 둔다면, 죽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필요도 없고 입단속도 시킬 수 있었다.
나쁘기는커녕 좋기만 했다.
'게다가 목숨을 지켜 준다고 했지? 그 말은 내가 위험을 자처하는 상황이라면 나서서 도와줄 거라는 말이야. 그럼 이 방법이 통할지도...'
휘경이 침묵하고 있자 사이란이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휘경,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비단 생각."
"예?"
"생각해 보니 저기 쏟아진 비단을 저대로 둘 수는 없을 거 같아. 다시 내려가는 게 좋겠어."
휘경이 휘청거리며 절벽 끄트머리에 서자 사이란이 한숨을 쉬었다.
휘경의 얕은 수는 금방 들통 났다.
"그 발로 암반을 오른 건 사람들이 놀랍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 발로 다시 암반을 내려가겠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 겁니다.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죠. 저는 당신을 막아설 테고, 당신은 꼭 저 비단이 필요하다고 떼를 쓰겠죠. 하지만 사람을 움직일 거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휘경."
"...?"
"그냥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마음을 읽히자 휘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사이란이 말했다.
"당신이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면, 그 첫 번째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접근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결국 저주 때문에 만들어진 성격일 테니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일러 드리는 겁니다. 저는 당신의 목숨을 지키러 왔고, 당신의 목숨을 정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배곯지 않게 하는 것도 포함되고, 그러기 위해선 저 비단을 회수해야겠지요."
휘경은 고개를 숙이고 비척비척 걸어와 절벽에 기댔다.
"부탁할게. 비단 좀 가져와 줘."
"그러지요."
사이란은 암반을 짚고 내려가더니, 높은 경사를 주욱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곤 비단 꾸러미를 어깨와 옆구리 사이로 묶어 매고는 암반을 성큼성큼 올라왔다. 다시 휘경 앞으로 올라서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휘경은 커다란 비단 꾸러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매고 있는 사이란에게 말했다.
"음, 그럼 자동성까지 들고 가 줄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쪽 상처부터 치료합시다."
휘경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다 그냥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차피 이 리자드맨에게 거짓말과 거절은 통하지 않을 듯했다.
사이란은 허벅지 주머니에서 약초를 꺼내 짓이긴 뒤 휘경의 상처 여기저기에 펴 발랐고, 발목에는 진통 효과가 있는 연고를 바르고 나무로 임시 부목을 만들었다.
"이러면 걷기 편할 겁니다."
"아니,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우리 성의 약초꾼보다 나은데?"
휘경이 한결 걷기 좋아진 왼쪽 발목을 신기해하며 걸었고, 사이란이 뒤따랐다.
사이란이 답했다.
"자올 님에게 배웠습니다."
"자올?"
"라크락 님의 지어미 되시지요."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은 부족장 라크락이 전사들을 맡아 외부의 적에 방비하고, 그의 아내가 심부름꾼들을 데리고 내부의 문제를 조율한다고 했지. 그럼 사이란은 자올의 심부름꾼인 건가?'
휘경은 정보를 좀 알아야겠다 생각하고 질문했다.
"그럼 넌 전사는 아닌 거야? 그러고 보면 검은 비늘 부족 전사들은 물소 머리뼈를 머리에 쓴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저도 전사입니다. 이제 물소 머리뼈는 의식이 아니면 잘 쓰지 않습니다. 라크락 님은 어지간하면 쓰고 다니시는 편이지만. 하지만 자올 님의 심부름꾼이었던 건 맞습니다. 자올 님 아래에서 약초 구분하는 법과 병자 다루는 법을 배우다가 나이가 차서 전사 시험을 치렀고 유르 님 아래에서 창이랑 활 쏘는 걸 배웠습니다."
"유르?"
"저희 부족의 으뜸 전사이십니다."
휘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라크락이 보낸 이 사이란이란 인물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인식했다.
'부족의 내정을 다스리는 사람의 심부름꾼이었고 최고의 전사에게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야?'
정보를 더 캐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안 거야?"
"그냥 자동성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자동성까지 가는 길이야 오웬 님을 따라다닐 적에 익혔고요."
"오웬? 이야기꾼 오웬을 말하는 거야?"
"예. 오웬 님을 아십니까?"
휘경은 인간 사이에서도 유명한 리자드맨인 오웬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당장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자동성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어?"
"일정한 재물을 자동성에 헌정하면 통행증을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게다가 재물도 많단 말이지. 뒷배가 부족장이니 당연한 건가.'
"물론 당신의 가짜 이름으로 찾아다녔습니다. '맹지'라고요? 뭔가 더 어울리는 이름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나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쉽게 팔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내 인간관계는 나쁘지만 사업 동업자들은 분명 나를 쉽게 팔지 않았을걸."
사이란이 하하 웃었다.
"그랬다면 제가 어떻게 찾아왔겠습니까? 물어보는 사람마다 소금 주머니 하나 안 받고 줄줄 말해 주던데요. 얼마 전부터 비단 장사를 하겠다더라, 곧 우기가 오니 비단 상단도 오가지 않을 텐데 어디서 비단을 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혼자서 어떻게 수익을 남길 만큼 비단을 가져올 건지, 비단 장사 하겠다고 수레 빌려 갔는데 오질 않는다, 사기를 당한 거 같다, 자동성 뒷문으로 사라진 게 며칠 전이다... 등등. 인간관계 이전에 동업자들한테도 너무 신뢰를 깎아 먹은 거 아닙니까?"
"윽."
휘경은 귀까지 벌게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
자동성으로 가는 길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사이란은 다시 한 번 자동성의 성벽을 볼 수 있었다.
휘경이 굴러떨어졌던 암반보다도 낮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반듯한 토성이라는 건 자연물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주었다.
토성은 길게 이어지다 양 계곡의 절벽으로 맞붙어 사라졌다.
정면은 성벽에 막히고, 양옆은 가파른 절벽에 감싸인 자리에 자동성이 자리했다.
성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정문과 그보다 작은 뒷문이 있었고, 사이란과 휘경이 걷는 길은 뒷문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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