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3

'질병의 전파는 결과적으로 종족 단위로 쉽게 전파되고, 그다음은 유사 종족 단위에서 변종이 일어나니까 말이지. 물론 종이 완전히 달라도 전염될 수 있지만...'
어차피 성운은 목표로 하는 질병이 하나 있었고,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다음은 성운이 가진 수많은 곤충 무리를 이용해서 그 질병을 찾아내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성운은 로스트 월드의 맵이 무작위로 생성되지만, 대륙의 형태나 각종 특수 지형들, 그리고 생물 분포, 무엇보다도 질병의 분포 또한 특정한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운은 예의 프로그맨 무리를 언젠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 질병을 찾아다녔다.
그사이 라크락은 푸른 거죽의 뷰에를 쓰러트렸고, 별잡이를 따라 동남쪽으로 계속 내려왔다.
성운은 너무 늦지 않게 질병을 찾아냈다.
「질병 ACO-023731를 발견했습니다!」
「질병 ACO-023731: 균사체, 양서류 점막에 적용됨, 전염력 높음, 발병 속도 느림, 치명적.」
질병은 늘 변종이 있지만, 이 질병은 성운에게 원하는 코드가 모두 존재했다.
'제일 중요한 건, 균사체 질병은 양서류 점막에만 적용된다는 점이지.'
바이러스라면 모를까, 이 질병은 변종이 되어도 다른 종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양서류에게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단지 양서류가 피부 호흡을 한다는 이유로.
문제는 이 질병이 발견된 곳이 프로그맨의 마을에서 백여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신이 이 질병을 직접 들어서 옮긴다는 선택지 같은 건, 아직 성운이 가진 신성 레벨로는 불가능했다.
'현신은 레벨을 더 올려야 하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성운에겐 무수한 심부름꾼들이 있었다.
오랜 시간 비행할 수 있는 딱정벌레들이, 마치 벌꿀이 몸에 꿀을 묻히듯, 병들어 죽어 가는 도롱뇽의 몸에 부벼 댔다.
균사체들이 딱정벌레들 몸에 옮겨 붙었지만 매끄러운 표면에 정착하진 못했다.
그리고 딱정벌레들은 비행을 시작했다.
수명이 다해 죽은 딱정벌레가 생기자 성운은 비행 거리가 더 긴 잠자리를 창조해 균사체가 묻은 딱정벌레의 다리를 물어 비행시켰다.
지치거나 새에게 잡아먹히거나 나무에 부딪치거나, 벌레들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소수의 균사체는 결국 프로그맨 마을에 도달했다.
성운은 제일 먼저 아울로이를 감염시켰다.
라크락이 머지않은 곳에서 오크들을 발견할 때쯤이었다.
「'소영역:벌레'의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이제 '벌레의 피조물 창조'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슈넨은 섬에 도착했을 때 자신보다 빨리 도착한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
"오오, 슈넨... 오보이가 보낸 심부름꾼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아랫마을이 불타고 있다고? 리자드맨들에 의해서?"
"예! 오웬이라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놈이 우리를 속인 거 같습니다."
"허,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어. 그 꼬리 긴 놈들 중엔 믿을 놈이 하나도 없지."
슈넨 앞에 있는 것은 슈넨의 아버지, 아울로이였다.
늙은 아울로이는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온몸에 흰색 점막으로 뒤덮여 끔찍한 모습이었다.
호흡이 잘되지 않는 아울로이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 뒤로 아울로이처럼 가려움 병에 걸린 장로들과, 전사들이 흰색 점막을 뒤덮은 모습이었다.
슈넨은 아울로이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오보이는 전사를 지원받으려고 불렀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오보이 네가 시간을 끌어 줘야겠다.'
오보이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슈넨은 자신에게 그런 독단을 부릴 정도의 권한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의식을 시작하실 겁니까?"
"그래. 지금부터 그분을 부르겠다. 슈넨, 네가 책임을 지고 제물을 데려와서 준비시켜라. 우선은 여기 있는 제물로 아랫마을의 리자드맨들을 모조리 죽여 달라고 빌겠다. 그다음, 그다음엔..."
"저놈들이 온 리자드맨 마을이 있습니다. 오늘 밤에 제가 전사들을 보내 놈들을 노예로 잡아오죠. 날이 밝기 전에 아버지는 물론 병에 걸린 전사들을 모두 치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슈넨. 넌 역시 믿을 만한 전사로 성장했어."
슈넨은 미소를 지었다.
─┼
프로그맨 하위 계급 마을은 거의 정리가 끝나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리자드맨에게 도전하는 프로그맨들은 없었다.
프로그맨들의 피로 마을의 흙이 붉었고, 라크락은 흥건한 피비린내와 나무 타는 냄새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다.
"라크락! 라크락!"
라크락은 멀리서 시커멓게 그슬린 오웬이 달려오는 걸 보았다.
"훌륭하게 일을 해 줬다, 오웬. 무슨 일이지?"
"다, 당장 호수 가운데 섬으로 가야 합니다."
"왜?"
라크락은 프로그맨 마을이 최소 둘은 더 있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하진 않았다. 승리는 착실히 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
더군다나 첫 번째 승리에서 리자드맨들은 다치기는커녕, 지치지도 않았다.
오늘 새벽 호수를 돌아 남은 마을을 하나 더 박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호수 가운데 섬에 뭔가 있나?"
"제, 제 아들이 있습니다."
"아, 놈들이 그걸로 리자드맨들을 협박했던 거군?"
라크락은 하위 계급 마을에 회갈색 가죽 리자드맨의 어린아이들이 없다는 걸 인지한 상태기도 했다.
"마,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겁니다."
"왜?"
오웬이 절규하듯 외쳤다.
"저들에게는 신이 있습니다!"
"그래?"
"제물을 바치면 신이 와서 저들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 줍니다. 그 병증을 고쳐 주는 덴 도움이 안 되겠지만, 라크락 당신과 당신의 전사들을 공격하는 것 정도는 할 겁니다."
오웬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감정이 라크락에게 전해졌길 바랐다.
하지만 라크락은 한숨을 쉬었다.
"진작 말했어야지."
"예?"
"내 전사들이 방금 프로그맨들을 쫓으며 물가를 뒤졌다. 놈들 대부분이 배를 타거나 헤엄을 잘 쳐서 따라갈 수 없었지. 나는 어차피 놈들이 윗마을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따로 배를 모아 둬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았다. 우리는 섬에 가지 못한다."
"헤, 헤엄을 쳐서 가면..."
"위험하다. 놈들은 활이 있다. 섬에 오를 때 각개 격파당하겠지. 그리고 우리는 놈들처럼 헤엄에 능하지 못한 데다 숨을 쉬는 것도 어려우니 물속에서 공격당할 수도 있다."
"하, 하지만 제 아들이..."
라크락이 오웬의 턱을 때렸다.
오웬은 쓰러지며 코피가 터졌다.
"멍청한 놈! 그러니 더 빨리 말했어야지! 더 빨리 나를 믿었어야지! 나는 이딴 조잡한 개구리들이 믿는 신 따위 우리 힘만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다. 놈이 저 섬에서 나타나 우리에게 달려들면, 나와 우리 전사들이 그 신이라는 걸 박살 내는 걸 보여 주겠다!"
라크락은 화를 내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오웬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네놈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좀 더, 조금만 더 빨리 이야기를 했어야지 않겠느냐?"
그 말에 오웬이 쓰러져 흐느꼈다.
오웬의 생각에, 라크락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다. 슈넨의 의도를 조금만 더 빨리 알 수 있었다면. 아니, 라크락를 다섯 번 만나기 전에, 네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 아니, 아니다. 어쩌면... 라크락을 만나기 전에도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다. 단지 내가 너무 늦었을 뿐.'
라크락의 호통 소리에 전사들과 자올이 다가왔다.
라크락은 전사들에게 큰 괴물과의 싸움에 대비하라며 주의를 주었다.
"뭔가 시작되는군."
호수 변에서 섬의 풍경이 보였다.
프로그맨들은 기괴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고, 횃불을 높게 들며 몸을 흔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있었다.
몸이 묶인 어린 리자드맨들이었다.
"저기 호수 아래 뭔가 있다. 다들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준비해라."
"예!"
곧 물을 헤치고 무언가 나타났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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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물은 성운도 잘 알고 있는 종류의 '흉신'이었다.
'서펜트 흉신이던가? 머리 둘이면 경험치 두 배였던 것 같은데.'
흉신은 설정상 고대의 악 중 하나였다.
고대 갑충 같은 것이 필드 레이드 보스라면, 흉신은 이따금 나타나는 부족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으로, 신이 없는 부족에 비해서 난이도 있는 적으로 등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신성 레벨은 고대 갑충보다도 낮아. 거대 부족이 딸려 오니까 밸런스상 너무 강한 놈을 못 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진짜 세계니까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흉신은 간혹 성장하기도 해서, 중반에 꽤 성장한 흉신에게 게임을 패배하는 플레이어들도 있긴 했다.
'그래 봤자 AI란 말이지.'
흉신을 공략하는 건 결국 얼마나 피해 없이, 놈들이 가진 자원을 고스란히 삼키는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 성운은 이미 완벽하다고 할 만했다.
'밑 작업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
성운은 별다른 피해 없이 라크락의 무리가 경험치와 기술력, 여러 자원을 얻게 돼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 얻은 자원들은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격차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라크락은 할 만큼 해 줬으니, 이제 내가 나서야지.'
신성은 충분히 모였고, 새로운 스킬을 사용해 볼 기회기도 했다.
「'스킬:벌레의 피조물 창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네'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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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락은 15미터 정도 되는 머리 둘 달린 서펜트와의 싸움이 해 봄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곧 뭔가를 발견하고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이봐, 협잡꾼."
"예?"
좌절감 속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기적을 믿나?"
거대한 사마귀의 그림자가 머리 둘 달린 흉신에게 드리워졌다.
019화
피조물 창조.
소영역이 4레벨에 달하면 특정 소영역을 제외하면 신의 뜻을 따르는 피조물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 피조물의 힘과 지능, 스킬은 소영역과 초기에 투자한 신앙, 플레이어의 신성 레벨, 그리고 투자한 재료 등 여러 가지 영향을 받고 그에 비례해서 능력치가 상승했다.
현재 성운은 처음 피조물을 만들 수 있는 단계에서 최고 능력치의 피조물을 만들 자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나보다 빨리 피조물을 만든 플레이어가 그리 많진 않겠지.'
일단 성운은 흉물인 고대 갑충을 죽여 '흉물의 정수'를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흉물의 정수: 고대 갑충(흉물 Lv. 9)
이 정수는 피조물을 창조할 때 사용됩니다.
추가 되는 능력치: 잊힌 신의 축복(알 수 없음)」
'무슨 능력치가 추가 될까? 어차피 첫 번째 피조물이라 큰 기대는 없는데. 그래도 스킬 쪽이면 좋겠다.'
게임을 계속 플레이 해 나가다 보면 피조물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된다.
아무리 신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식할 수 있는 한계선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신의 뜻을 대신하는 존재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신의 피조물 또한 그런 심부름꾼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걸 만들어도 되나?'
성운은 시스템에서 지원하는 '피조물 창조 도우미'를 켜다가 멈칫했다.
이 보조창은 여러 가지 3D 모델로 플레이어가 만들고 싶어 하는 피조물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피조물 창조 도우미가 지원하는 여러 파트를 그냥 더하는 것으로도 무수한 모양새의 피조물을 만들 수 있었고, 원한다면 두리뭉실한 모양에서 시작해 플레이어가 직접 형태를 잡아 나갈 수도 있었다.
'부족 하나를 뒤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존재라는 건 감정을 움직이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성운은 고개를 가로젓고 승리에 대해 생각했다.
감정적인 부분을 밀어 두고 목표를 위해 맹목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성운이 랭킹 1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뭐 어때. 난 이제 진짜 신인데.'
피조물 창조 도우미는 현재 재료가 없어도 형태를 미리 만들어 둘 수 있기 때문에, 첫 번째 피조물의 형태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성운이 게임 로스트 월드를 할 당시에 미리 만들어 뒀던 형상들도 모두 저장되어 있었는데, 성운은 나중에 재료가 모이면 써먹어 보자 싶었다.
'이번에는 벌레의 소영역에 쓸 만한 형태가 없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지만.'
피조물의 외형.
사실 피조물의 형태는 피조물의 능력치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왜냐하면 외형이 중요해지면, 피조물의 형태를 만드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냥 기본으로 주어지는 스탠더드 모델이나, 다른 사람이 만든 멋진 외형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랭커쯤 된다면 나름 특색 있는 피조물의 형태로 어필을 하고 싶어 했다.
'어필이라기보다는, 어그로인가.'
그래서 랭커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의 피조물을 보면 우습게 생기거나, 기괴하게 생기거나, 아니면 아주 귀엽게 생기거나. 보통 세 가지 외형으로 나뉘는 편이었다.
'뭐, 그건 게임이었으니까.'
사실 성운은 귀엽게 생긴 쪽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차이라고해도 이번에는 실용성에 모든 걸 걸어야지.'
성운은 벌레의 소영역에서 통계적으로 봤을 때 가장 강한 물리 능력치를 가진 외형을 알고 있었고, 적지만 추가적인 능력치를 얻는 부속지나 겉날개, 단단한 다리 등을 추가했다.
일단 전투에서 유리한 것은 엎드린 형태보다 설 수 있는 형태가 좋았다.
그리고 무기로 쓸 수 있는 날카로운 앞다리, 그리고 턱니를 단다.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더듬이와 전방위 시야를 볼 수 있는 커다란 겹눈까지.
'다 만들고 보니... 사마귀 같군.'
물론 사마귀와는 전혀 다른 생물이었다.
이 덩치로 비행은 안 되지만 추락에 대비한 활공,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방어로 쓰일 겉날개가 두 쌍 더 있었고, 무기로 쓸 다리 말고도 필요에 따라 움켜쥐거나 상대를 꺾을 수 있는 손과 유사한 기관도 한 쌍 있었다.
'포인트 컬러는 파란색으로 할까. 라크락에게 계속 암시를 줄 때 파란색 나비로 줬으니. 조금 어두운 채도로. 달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마지막으로 이름을 설정해야 했다.
"이름은 어..."
성운은 적당히 게임 속에서 사마귀 하면 생각나는 이름 두 개를 합쳤다.
"'스라티스' 정도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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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스라티스는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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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둘 달린 흉신 님께서 오셨다! 모두 머리를 조아려라!"
아울로이가 남은 힘을 짜내 외쳤다.
호숫가에 서 있던 프로그맨들이 넙죽 절했다.
슈넨 또한 물가에서 일렁거리는 머리 둘 달린 흉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 저 리자드맨들은 모두 죽었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은 서펜트를 베이스로 하는 흉신으로, 일종의 물뱀이었다.
서펜트 자체는 땅 위의 드레이크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생물로, 물속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라고 불릴 만했다.
게다가 신성을 얻은 '흉신'으로서, 분명 괜찮은 지능과 신성까지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 흉신은 성장할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고,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것들을 이용했다.
슈넨은 머리 둘 달린 흉신이 제물들을 향해 다가가다, 주저하는 것을 보았다.
-크르르르르...
제물 앞에서는 언제나 몇날 며칠을 굶은 것처럼 탐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의 두 머리 모두, 슈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흉신께서 뭘 보고 있단 말인가?'
슈넨은 오랜 시간 새겨진 흉신에 대한 복종심조차 무시하고, 흉신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았다.
키가 큰 나무들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슈넨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거대한 눈을 가진 그것은 나무를 가볍게 밀어냈다.
생나무 찢어지는 소리에 엎드려 있던 프로그맨들이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불경하게 외쳤다.
"시, 신이다!"
몸길이라면 머리 둘 달린 흉신도 그리 모자라지 않지만, 땅 위에 우뚝 선 스라티스의 존재감은 큰 차이를 보였다.
스라티스는 일렁거리는 횃불의 빛을 받아 외골격이 푸른색으로 일렁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머리 둘 달린 흉신은 누추한 물뱀에 불과했고, 스라티스는 신의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크르르르르!
머리 둘 달린 흉신은 저것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것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고, 그대로 둔다면 자신은 저 미개한 생물들과 그것들이 주는 제물을 포기해야만 할 터였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비록 상대가 거대하고 강해 보일지라도 흉신은 자신이 모든 생물 위에 강림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임을 알았다.
-캬오오오!
머리 둘 달린 흉신이 해안을 밀어내며 땅 위로 기어 올라왔다.
서펜트의 15미터 체구가 모두 오르자 그 모습 또한 기이했다.
하지만 스라티스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
또 다시 나무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프로그맨 몇 마리가 깔리자, 프로그맨들은 두 괴물이 격돌할 것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은 그런 프로그맨들을 비집고 들어가며 깔아뭉갰다.
목표는 스라티스의 머리였다.
거대하게 벌린 입이, 그저 걸어오고 있던 스라티스의 머리통에게 날래게 꽂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신을 자처하는 물뱀아...
스라티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호수 저편의 리자드맨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캬오오... 옥!
스라티스가 가슴 앞에 접고 있던 움켜쥘 수 있는 팔이, 먼저 달려든 주둥이 하나를 움켜쥐었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입을 벌렸지만, 그 또한 허사였다.
스라티스의 날카로운 윗다리 칼날이 흉신의 두 번째 주둥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너는 그저 미물에 불과함을 깨달으라...
스라티스는 그저 첫 번째 주둥이를 주욱 당겼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은 저항했으나 그 힘에 딸려 갈 따름이었고, 두 번째 주둥이가 그대로 반으로 갈려 나갔다.
주둥이는 스라티스의 팔 길이인 대략 10미터 가량이 도륙됐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의 등골이 젖히며 그대로 드러났다.
-커, 커, 커, 컥...
흉신은 경련을 지속했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내 너를 내 창조주에게 바쳐, 그대의 속죄를 돕겠다. 그대의 아둔함은 죄가 아니니...
이미 전투가 성립하지 않았다.
스라티스의 다음 작업은 도축에 불과했다.
-피와 살로 죄를 사하노라.
스라티스는 흉신을 쥐고, 거대한 살덩이를 산 채로 자르고 분리했다.
거대한 살덩이들이 프로그맨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운도 조금 놀랐다.
'레벨과 능력치 차이 때문에 이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스킬 때문인가?‘
『머리 둘 달린 흉신(서펜트 Lv. 4, 흉신 Lv.3)
힘 163(d+2)
지능 32(d+2)
사회성 8(d+2)
음모 4
소영역:(알 수 없음)』
흉신의 능력치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흉신도 일단은 신.
소영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플레이어들이 처음에 가지고 시작하는 '메이저 소영역'이 아닌 '마이너 소영역'의 것이라, 흉신을 잡는 건 이른바 소영역 파밍에서 꽤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소영역을 전혀 사용 못했지. 그럴 틈도 없었던 걸로 보이지만... 스라티스가 너무 셌나?'
『스라티스(피조물 Lv.11)
힘 220(d+3)
지능 32(d+3)
사회성 22(d+3)
스킬:괴력』
d가 하나 더 붙은 이상 능력치 차이는 압도적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에 붙은 스킬이 너무 이상적인 결과물이긴 했다.
'괴력... 전투용 피조물에 붙을 스킬로는 1티어긴 해. 동급 피조물이랑 치고받으면 압도할 수 있으니까. 전투용 창조물 쓰임새가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밀리는 건 아쉽지만... 운을 이상한데 써 버린 건 아니겠지?'
성운은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목표로 했던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죽였고, 프로그맨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리자드맨 제물을 놔두고 상위 계급 마을로 전원 도망쳤으며, 리자드맨들은 환희에 차서 신을 부르짖고 있었다.
라크락이 외쳤다.
"우리를 위해 내려온 저 '푸른 벌레신'의 수호자를 보라! 수호자에게 감사를 보내라! 푸른 벌레신에게 광명을!"
라크락의 전사들은 신의를 다해 절했고, 기적을 지켜본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 그 누구보다도 오웬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몸을 바닥에 부닥쳤다.
성운은 흐뭇해졌다.
사실 흐뭇한 이유에는 눈앞에 떠오른 창 때문이기도 했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죽였습니다!」
「'흉신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소영역:(알 수 없음)'을 획득했습니다!」
흉물처럼 흉신 또한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흉신 쪽이 더 레어도가 높지만, 육체적 능력에서 어드밴티지를 받는 건 흉물 쪽이라 흉신으로 피조물을 만들 때는 좀 더 주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 파밍에서 제일 중요한 소영역...'
「'소영역: (알 수 없음)'을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재빠르게 '네'를 눌렀다.
020화
「'해수(海水)의 소영역'을 얻었습니다!」
성운은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랬던 건가.'
머리 둘 달린 흉신이 초반이라 레벨이 낮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성운이 질병을 이용해 아무리 약화를 시켰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소영역을 가진 신이었다.
레벨 1이라도 해당 소영역에 해당하는 물질을 창조하거나 조종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신적인 힘을 부릴 수 있을 터였다.
'무작위 생성의 폐해군.'
하지만 머리 둘 달린 흉신이 있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다.
'서펜트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젠될 수 있으니까. 실제 세계라도 거의 게임 로스트 월드와 같은 규칙으로 생성되는 건가. 아니면 이 흉신은 과거에는 바닷가에 살다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아니면 그런 설정?'
아무튼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상대함에 있어 일이 쉬웠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문제는 해수의 소영역은 나한테도 당장은 필요가 없다는건데...'
물을 조종한다는 건 아주 가치 있는 능력이다.
때문에 대영역이 아닌 소영역의 단계에서, 물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가치 있는 건 해수와 강.
'하지만 강 쪽이 좋았을 거야. 치수랑 관련이 있으니까. 당장 유목을 방향으로 잡은 리자드맨들은 몰라도 다음 종족은 강가 주변 부족으로 하는 쪽이 균형이 맞을 테니...'
반면 해수의 소영역을 알뜰하게 써먹기 위해선 여러 조건이 필요했다.
'이 소영역을 쓰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고...? 지금은 완전 내륙 지역이야. 별로 의미 있는 전략이 아니지.'
따라서 소영역을 얻은 건 좋지만 딱히 기뻐할 구석이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괜찮아. 쓸모없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잠깐 향후 전략을 고심하던 성운은 스라티스가 아직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이 직접 개체에 임하는 '강신'과 달리, 스라티스는 유지 비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소환하고, 원할 때 언제든 역소환해서 동결 상태로 전환해 둘 수 있어서 앞으로도 실질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때는 어지간해선 강신보다는 스라티스를 소환하게 될 터였다.
'물론 내 신성 레벨이 반영되는 걸 생각하면 강신 쪽이 더 강한 데다, 필요하다면 둘 다 사용할 수도 있긴 하지.'
스라티스를 전투에 어드밴티지를 받는 성격으로 했더니, 성운은 조금 광신적이거나 중후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을 그대로 따왔다면 스라티스는 성운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영원한 우군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리자드맨들은 밤새 저러고 있겠군.'
성운은 호수 너머의 리자드맨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가, 스라티스에게 다가갔다.
성운은 기본적으로 행성의 모든 존재에게 불가지 상태이지만, 당연히 스라티스만큼은 창조주인 성운을 인식할 수 있었다.
성운이 허공을 걸어 다가가자 스라티스가 마음속으로 울리듯 말했다.
'창조주여, 그대의 뜻대로 행하였나이다.'
말투도 좀 무게가 있나 싶었지만 성운은 모습에 잘 어울려서 그냥 두기로 했다.
'수고했다. 다음까진 쉬어도 좋아.'
'때가 오면 또 창조주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성운이 역소환하자 스라티스는 그림자로 화해 사라졌다.
성운의 소지 목록에 '피조물:스라티스'가 추가 되어 있었다.
'리자드맨들도 이제 잠잠해졌군. ...라크락, 너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자드맨이 아니지 않아?'
성운은 호수 너머를 바라보았다.
─┼
라크락은 스라티스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전사들을 독려했다.
"오늘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섬이 빈 것을 확인했으니 이대로 헤엄을 쳐서 건너겠다. 프로그맨들의 윗마을까지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다. 지원자가 있나?"
그 말에 라크락 앞으로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저마다 나타났다.
온몸에 검댕이 묻고 얼굴이 피로 젖은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넌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제 아들을 만나기 위해선 섬까지 가야 합니다.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라크락은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대가 길을 안내해라."
그 말에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 하나가 라크락 앞으로 다가왔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
"라크락이라고 불러라."
"실례하오. 라크락 부족장."
"무슨 일이지."
"부디 우리도 그대들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시오. 부탁드리오."
라크락은 말을 건 리자드맨을 내려다보았다.
늙고 다친 리자드맨이었다.
"전사가 아니군. 그 몸으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예전에는 전사였소.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전사만 프로그맨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오."
"전사가 아닌 프로그맨을 죽이겠지."
"...이미 그렇게 했소."
라크락은 늙고 다친 리자드맨이 손에 들고 있는 곤봉을 바라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그 점성으로 보아 리자드맨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이 말했다.
"명예롭지 않은 일인 건 알고 있소. 이제와 기회가 생기니 이런 일을 벌였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소. 전사가 아닌 이가 주제를 넘었을는지도... 하지만 그대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니 내 가슴이 타오르는 걸 느꼈소. 하지만 이 불타는 가슴은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 프로그맨들로부터 노예가 되었던 그날부터 타고 있었소."
"울분이로군."
"...울분."
"너무나 억울한 마음."
"그렇소. 이것은 울분이오. 난 이걸 터트려야겠소."
"다른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일어나는 횃불."
"그렇소. 나는 이 횃불로 프로그맨을 태워야겠소."
리자드맨은 울었다.
"내 반려와 내 자식과 내 손주를 잃은 이 분노를. 어떻게든 되갚아야만 하오."
라크락은 도열한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을 돌아보았다.
라크락의 기준에서 옳은 무기를 들고 있는 이들은 잘 없었다.
건강하기는커녕 아픈 이들이었다.
평소에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데다 매를 맞고 제대로 낫지 않은 상처들이 있었다.
'제대로 싸우기 힘들 것이다. 아직 놈들에겐 병력이 있고, 활과 화살도 있다. 나는 더 이상 이 지치고 아픈 이들이 더는 죽거나 다치길 바라지 않는다. 싸우게 되면 분명 누군가는 죽고 다친다. 오히려 우리 전사들만 싸우면 더 안전하게 싸울 수 있을지도. 하지만...'
라크락이 말했다.
"그대 말이 옳다. 그대들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고, 나는 그걸 막을 권한이 없다."
"...정당한 권리?"
"복수를 말하는 것이다."
라크락은 회갈색 리자드맨들에게 말했다.
"복수를 할 이들은 모두 따르라. 결코 자신의 권리를 놓치지 마라."
그 말에 모두 무기를 치켜들고 환호를 질렀다.
라크락은 자올에게 말했다.
"자올, 남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걱정 마시죠. 섬에 있다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실 거죠?"
"수영하고 나면 체력이 바닥날 이들이 있겠지. 배를 태워 같이 돌려보내겠다."
"좋습니다."
전사들이 먼저 물에 잠겼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50명의 복수자들이 따라 잠겼다.
주둥이 윗부분과 코를 내놓은 리자드맨 80명이 호수를 가로질렀다.
라크락의 예상대로 체력이 달려 섬까지 오는 게 한계였던 열 명 가량이 배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자올은 건강한 이들을 지휘해 다친 이들을 살피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라크락은 남은 배들을 가지고 헤엄을 치기 힘든 이들을 태웠고 이들을 유르가 지휘하도록 해 윗마을을 꽤 멀리 돌아가도록 했다.
유르가 질문했다.
"양쪽을 치자는 겁니까?"
"그래. 놈들은 호숫가를 경계하고 있겠지. 이제 우리는 숫자가 모자라지 않으니 둘로 나눠도 된다."
"속임수군요. 제가 데려갈 마흔 명은 제대로 싸울 수 없지만 어둠 속에서 나타나면 놈들을 혼란스럽게 할 겁니다."
"맞다. 놈들의 주의가 흩어지면 내가 전사들을 데리고 호숫가에서 공격하겠다."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놈들 중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열 놈도 안 된다. 그리고 방금 섬으로 헤엄을 치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린 또 다른 축복을 알아냈다."
유르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뭡니까?"
"우리 비늘은 검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면 윤슬처럼 보일 것이다."
라크락의 예상은 맞았다.
윗마을에서 일어난 모든 전투는 라크락이 계획한 대로 일어났다.
─┼
슈넨은 자신의 아버지 아울로이가 창을 몇 대나 찍혀 죽는 것을 보고 곧장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머, 머리 둘 달린 흉신이시여! 어, 어떻게...!"
슈넨은 이미 죽은 신을 부르짖었다.
토막 나서 죽은 신은 대답이 없다.
몸이 성한 프로그맨들은 이미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고, 리자드맨들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가려움 병에 걸려 숨에 벅찬 이들 뿐이었다.
"멍청한 놈들!"
슈넨은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놈들에게 전사가 있더라도 머릿수는 우리가 훨씬 더 많단 말이다. 병자들 중에도 분명 싸울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늙은 이들 중에 활을 당길 힘이 남은 이들도 많아. 어떻게든 추스를 시간만 벌면 반격의 기회가 있는데..."
하지만 슈넨은 정작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인 아울로이는, 그 전성기 때는 분명 용감한 전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 머리 둘 달린 흉신이 호수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흉신이 가진 강한 힘에 매혹되었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은 제물을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아울로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 해 주었다.
아울로이는 그것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고 적대적인 부족을 내쫓고 코카트리스들을 물리쳤다.
그것은 처음엔 괜찮은 거래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울로이는 전사답지 못해졌다.
모두가 아울로이에게 전사의 자질을 배웠기에, 프로그맨에게 있어 전사란 용기 있기보다 남을 어떻게 잘 속이고 약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모두 겁쟁이가 된 거다."
슈넨은 스스로도 깨달았다.
"...나 자신도."
하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슈넨 자신도 머릿속으로는 뛰쳐나가 프로그맨들에게 겁먹지 말라고, 아직 승산은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달려드는 리자드맨들의 머리통에 화살을 꽂아 넣고 프로그맨들을 지휘해 놈들을 물리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환상에 불과했다.
"제기랄... 제기랄..."
슈넨은 한 움막 안에 몸을 숨겼다.
리자드맨 전사 무리가 주변을 뛰어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들은 빠르고 재빨랐으며, 슈넨 자신의 뜀걸음으로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
슈넨은 프로그맨들이 턱을 부풀리며 내뱉는 마지막 비명 소리를 숨죽이고 듣다가, 주변이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 움막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갔나?"
"여기 있었군."
슈넨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화살통에 저절로 손이 갔지만 모두 허투루 써 버린 이후였다.
리자드맨들 몸에 몇 발 꽂아 놓을 수는 있었지만, 모두 치명적이지 못했고, 독 개구리의 독도 의미가 없었다. 이 또한 독에 의지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부위를 노리지 않고 조준하는 습관이 부른 폐해였다.
그림자는 얼굴을 드러냈다.
"...라, 라크락."
"슈넨. 너는 전사가 아닌가? 일어나서 칼을 뽑아라. 그대의 마지막 명예 정도는 지켜 주겠다."
"제, 제발 살려 줘."
"싸우지 않을 건가?"
"제발 살려 주게. 그, 그래도 우리가 보아 온 정이 있잖나? 자네들과는 악감정이 없어."
"악감정이 없었다."
"그래! 프로그맨들도 머리 둘 달린 흉신에게 협박당한 것이지."
"흠."
라크락이 탐탁잖아 하자 슈넨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그렇지. 비밀을 알려 주지. 어때?"
"무슨 비밀 말인가?"
"활 만드는 방법 말이다. 시위의 재료에 대해서 궁금해했지. 그걸 알려 주면..."
"말해 봐. 뭘로 만들지?"
슈넨은 자신이 흥정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등 힘줄이다."
"아."
라크락은 바로 납득했다.
어느 동물의 힘줄이라고 생각했는데, 늘 뭔가 부족했다. 두 발로 걷는 이들의 것이라면 프로그맨이 쓸 만한 길이의 활을 만드는데 적합해 보였다.
"그럼 그 활은 어느 종족의 등 힘줄로 만들었지?"
슈넨은 뒤늦게 낭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리, 리자드맨이다."
"그렇군. 이 활도?"
라크락은 가슴에 메고 있던, 오웬에게 받은 활을 가리켰다.
슈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라크락은 고개를 갸웃했는데, 그 때문에 그 얼굴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겨졌다.
라크락의 눈동자만이 빛났고 슈넨은 라크락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슈넨은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라크락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좋아. 그대와 나 사이에 은원이 있다고 보긴 힘들지. 나는 이미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게다가 그대는 거래를 제안했고 나는 거기에 응하겠다. 가라, 슈넨."
"저, 정말인가?"
"그래."
라크락은 움막의 입구에서 벗어났다.
슈넨은 라크락의 마음이 바뀌기 전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라크락 옆에 익숙한 얼굴의 리자드맨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오웬이 라크락에게 말했다.
"풀, 풀어 주는 겁니까?"
"그래."
라크락은 매고 있던 활을 들고 시위에 화살 하나를 먹였다.
"움직이는 과녁이 필요했거든."
021화
라크락은 슬슬 움직이는 과녁을 향해서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크락은 오웬이 가르쳐 주었던 요령을 떠올렸다.
'마지막 시위를 놓기 전엔 호흡을 참고 표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짜 요령이라고 생각했다.
시위를 놓는 것은 순간에 불과한데.
라크락이 보기에 활의 장점은 빠르게 활을 당겨 쏘는 속사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령은 아주 멀리에, 움직이는 대상을 향해서 유효했다.
라크락이 시위를 놓았다.
활을 떠난 화살이 슈넨의 두 발목을 교차로 관통했다.
슈넨은 볼썽사납게 자빠졌다.
"아악!"
복수할 대상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며 피묻은 곤봉을 휘두르던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슈넨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기 슈넨이 있다!"
"놈을 산 채로 가죽을 벗겨라!"
"내장을 도려내라!"
"뇌를 끄집어 낼 때까지 살려 둬야 한다!"
곧 슈넨은 그들이 말한 대로 되었다.
라크락은 그 모습을 보며 활을 무릎에 대고 분지르고는 바닥에 버렸다.
오웬이 옆에서 말했다.
"왜 활을...?"
"선물을 부수어서 미안하다, 오웬."
"그 말이 아닙니다. 그저 앞으로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활이라서 한 말입니다."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활은 다시 만들면 된다. 당분간 놈들이 만들던 활 보다 더 좋은 제작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프로그맨의 등 힘줄로 활을 만들어 쓸 것이다.'
"라크락...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놈들이 만들어 놓은 많은 활들이 있으니..."
"아니. 오웬, 너는 내게 활을 잘 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보답을 해야겠다."
라크락은 쓰러져 있던 오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웬은 몇 번이나 손을 뻗길 주저했다.
"왜 그러지?"
"...저는 죄가 너무 많습니다."
"오웬, 지금 손을 잡아라. 돌이킬 수 있을 때."
텅 비어 있던 오웬의 가슴에 빛 하나가 차올랐다.
이제 오웬은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오웬은 오늘 협잡꾼을 죽이기로 했다.
'남을 생을 죄사함으로 살리라.'
불타는 프로그맨 마을 뒤로 푸른 여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
많은 프로그맨들을 죽였지만, 그래도 도망친 프로그맨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라크락은 그 숫자가 대강 1천은 넘을 것이라 짐작했다.
서른 명의 전사와 리자드맨들이 하루 밤 사이에 죽일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라크락은 프로그맨들이 주변을 배회하면서 무리를 짓고 다시 되돌아올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자올이 의견을 제시했다.
"시간을 들이더라도 움막을 모두 부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사들을 꾸준히 호숫가 주변으로 정찰을 돌려 프로그맨들이 이 주변에 들지 못하도록 하고."
그 말에 라크락이 걱정했다.
"호수가 생각보다 넓다. 도망친 놈들 중엔 전사도 있고. 우리 전사들의 피로가 생각보다 클 것이다."
자올이 그 말도 맞다며 동의하려는데, 오웬이 말했다.
"아닙니다. 놈들이 주변을 배회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움막을 부수고 주변을 지키면, 아마 전사들이 피로를 느끼기 전에, 많은 프로그맨들이 이 호수를 떠날 겁니다."
"왜지?"
"프로그맨은 물에 오래 들지 않으면 피부에 윤기를 잃고 마르기 시작합니다. 당장은 작은 개울이나 물웅덩이에 만족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 주변에 온몸을 적실 물이 있는 건 호수뿐이죠. 하지만 위험을 매번 감수할 수 없으니 다른 물가를 찾아 떠날 겁니다."
라크락은 오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았다.
실제로 며칠간은 프로그맨들이 빈번하게 나타났지만, 전사들이 정찰을 하며 배회하고 프로그맨 움막들을 모조리 해체해 버리자 더는 미련이 없는 듯 대부분은 떠나가 버렸다.
물론 그럼에도 떠나갈 여력이 없거나, 큰 미련을 가졌거나, 리자드맨에 대해 원한을 가진 프로그맨들이 정찰을 피해 호수 주변에 작은 단위로 남아 있었다.
라크락은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또 오웬이 의문을 제기했다.
"왜 놈들을 완전히 물리치지 않습니까?"
"이제 놈들은 거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공격하는 일도 잘 없지. 반면에 우리는 활을 만들기 위해 놈들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지."
오웬은 프로그맨을 오로지 활 제작 재료로 생각하는 라크락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지만, 다른 의문도 느꼈다.
"그럼 놈들을 붙잡아 노예로 부리십시오. 더 수월하게 활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진 않겠다."
"왜입니까?"
라크락은 모르겠느냐는 듯 뚱하니 오웬을 바라보았다.
오웬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오웬은 스스로 답을 찾았다.
"프로그맨들이 결과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입니까?"
"그래.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고수했고, 놈들은 놈들의 방식을 고수했지.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겼다. 노예로 부리면 편하고 좋겠지. 싸워서 승리했다면 그것은 정당한 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들이 나약해지는 걸 직접 본 이상, 우리는 그 길을 택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오웬은 단순히 라크락이 믿는 신이 더 강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라크락은 신이 없더라도, 머리 둘 달린 흉신과 맞서 싸우려 했다. 기적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맞서 싸울 줄 알았다. 라크락은 부족장이 아니었더라도, 전사가 아니었더라도, 그리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니, 그 어느 때에서라도 맞설 줄 아는 용기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지도.'
라크락은 프로그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라크락의 생각에 이들은 다른 부족에 의해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역시나 복수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열띤 호의를 보이기는 해도 라크락의 부족 전체에 대해서 경계하는 부분이 있었다.
'더 큰 집단에 지배받는다는 공포를 겪어 봤기 때문일까.'
하지만 성운이 보기에 라크락은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을 보호하고 최종적으로는 같은 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뷰에 때와는 다르다. 이들은 완전히 처음 보는 부족이야. 숫자도 대강 200명으로 많지. 문화도 많이 다르고. 게다가 단순한 호의는, 이용당한 경험도 있지. 어떤 방법을 사용할까?'
그 부분에 있어 라크락도 고민이 깊은 듯했지만, 의외로 해결책은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로부터 나왔다.
호숫가 주변 정찰대를 이끌던 라크락은 새롭게 터전을 잡기 시작한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 부족을 지나다, 어린 리자드맨 하나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걸 보았다.
어린아이니만큼 분명 섬의 움집에 붙잡혀 있었던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라크락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긴장하고 말았는데, 아이는 말없이 등 뒤에서 자그마한 목상(木像)을 라크락에게 건네주곤 떠나가 버렸다.
"아니, 저 녀석. 부족장님에게 버릇도 없이... 데려올까요?"
라크락이 가만히 목상을 바라보고만 있자, 전사 하나가 무안해하며 말했다.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아름답구나."
"예?"
"우리 수호자의 모습을 깎은 신상이다."
"아."
목상은 스라티스의 모습이었다.
목상은 쇠로 만든 끌과 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세밀했다.
"보아하니 이걸 만들기까지 여러 번 연습을 했을 것이다. 저 아이가 만들었는지 다른 누군가인지는 몰라도 목상이 이 마을에 좀 더 있을 것 같은데..."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할까요?"
"그래. 만약 교환을 원하는 이가 있다면 내 몫의 재산으로 제값을 치르고 물건을 교환해라. 적당히 손해를 봐도 좋다. 나는 이 물건을 좀 더 가졌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크락이 그러길 원했기에, 스라티스 목상은 값비싸졌다. 라크락의 무리에서도 목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들이 값을 제대로 치르고 목상을 손에 넣었다.
─┼
라크락의 무리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마을을 재건하느라 지쳐 있던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에게 식량에 여유가 생기자 곧 호의도 샘솟았다.
성운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했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여유가 생기지. 그렇다고 해서 라크락이 손해를 봤다고 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이들이 만들어 내는 '스라티스 목상'은 그 자체로 성운의 신성 경험치와 신앙 자원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라티스 목상에 라크락과 그 무리가 높은 값을 치르는 만큼, 목상을 만들고 스라티스의 목상에 기원을 불어넣는 것은 이들의 '푸른 벌레신'에 대한 신앙을 키우는 일이 되었다.
「신성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4 → 5」
「신앙이 상승했습니다!」
「492/500 → 730/2000」
'진행 속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빠른 편이야.'
스라티스 목상 덕분에 리자드맨들 사이도 빠르게 좋아졌다.
작은 가족 단위로 서로가 서로를 초대하는 일이 잦아졌고 다른 교류도 생겨났다.
라크락의 전사들이 젊은이들에게 사냥을 가르치거나, 주변 숲과 지리에 익숙한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약초가 나는 곳을 알려 주는 일들이 그랬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축제가 열렸다.
프로그맨 마을을 완전히 해체하고,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호숫가에 마을을 복원한 기념이었다.
이 자리에는 라크락의 무리가 준비한 훈연된 머리 둘 달린 흉신의 고기와,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준비한 과일 발효주가 대량으로 풀렸다.
훈연된 서펜트 고기는 새로운 숲에서 마련된 여러 향신료와 뒤섞여 잡내를 잡아냈고, 발효주를 처음 먹는 이들은 시큼한 맛에 깜짝 놀랐지만 곧 거나하게 취했다.
리자드맨들은 푸른 벌레신을 찬미하고 그 수호자의 잔혹함과 프로그맨들의 비겁하고 나약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곧 노래가 되었다.
낯만 알고 있던 리자드맨들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숲이 떠나가라 반복되는 운율에 목청을 키웠다.
이날 많은 연인들이 생겼다.
─┼
라크락은 몸이 묶인 채 다 썩어가는 프로그맨의 정수리를 맞춰 냈다.
오래 쓴 과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자올이 말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프로그맨들이 사용하던 활만큼은 날아갑니다."
"우리는 힘이 더 세다. 더 강하게 당길 수도 있어. 하지만 활을 부술 수야 없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놈들이 만들던 활이 이 숲에서 만들 수 있는 최적의 활이었습니다."
"흠, 그건 맞아."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이 숲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겠군."
"...꼭 더 좋은 활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겠죠."
"응."
별잡이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겨울이 오면 이 산지는 많이 추워졌다.
리자드맨들이야 몸이 둔해지긴 해도 불을 피우고 가죽을 껴입으면 겨울을 날 수야 있었다.
문제는 라크락의 무리가 데리고 있는 물소들이었다.
라크락은 황야의 물소들이 추위를 피해 겨울이면 따뜻하고 풀이 남아 있는 쪽으로 내려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물소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이들이 있어야겠지.'
그새 물소들은 새끼를 한 번 쳤고 잘 적응하고 있었다.
유르가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나면 물소 무리는 거대해져서 리자드맨들의 계속되는 양식이 될 터였다.
라크락은 뭔가 생각하다 더 좋은 활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라크락."
고민을 하던 라크락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프로그맨의 머리뼈를 머리에 얹은 리자드맨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라크락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오웬."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에겐 전사가 없었지만, 당연히 전사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이들은 있었다.
라크락은 이들을 직접 시험하고 선별했다.
오웬 또한 여러 시험을 거쳐 새로운 전사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는지, 오웬의 가죽은 남들보다 빠르게 윤기 나는 검은 비늘로 덮여 가고 있었다.
이 새로운 전사들은 물소의 머리뼈가 아닌, 프로그맨의 머리뼈를 쓰길 고집했다.
라크락은 흔쾌히 허락하였다.
"무슨 일이지?"
"얼마 전 작은 프로그맨 무리가 주변을 배회하는 걸 봤고, 추적하라고 명령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놈들을 추적하다 호수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서 놈들이 숨어 있던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프로그맨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모두 죽였지만, 그 동굴이 좀 이상했습니다."
라크락은 흥미를 보였다.
"어떤 부분에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돌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또 다른 입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단한 돌을 깎아냈는지 모르겠는데..."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안으로 들어가 봤나?"
"아뇨. 부족장님에게 먼저 전달할 사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다."
라크락은 자올과 오웬을 대동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라크락은 확인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성운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대 유적이잖아? 벌써 들어가도 되나?'
022화
하지만 성운의 걱정과 달리 라크락은 이미 흥미만만인 듯했다.
모험을 거절하기에는 이미 라크락은 젊은 나이부터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아 온 리자드맨이었다.
부모를 잃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황야로 내쫓겼을 때 무리를 지키기 위해 검치호와 맞섰다.
그 뒤 성운의 눈에 들어 무리를 이끌 부족장의 자질을 보였고 신의 뜻을 대행하는 제사장이 되었다.
신의 힘을 빌려 오래 전의 난폭한 리자드맨 부족장 뷰에를 물리치고, 그가 기르던 드레이크를 맨손으로 넘겼고, 또 다시 황야를 가로지르게 되었을 때 거대한 고대 갑충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어 생전 처음 보는 프로그맨 부족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그들의 저급한 흉신이 자신이 믿는 푸른 벌레신의 수호자에게 토막 나는 것을 보기까지.
자극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다.
라크락에게 새로운 모험이란 위험하다기보다 앞으로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동력에 지나지 않았다.
라크락이 고대 유적에 직접 가겠다고 하자 반대가 있었지만, 라크락의 고집이 꺾이진 않았다.
자올은 라크락이 가는 대신 반려인 자신도 가야 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번엔 라크락이 논리로 이기지 못했다.
다음날 라크락과 자올이 전사 여섯을 대동했고, 길잡이 임무를 맡은 오웬이 함께 이동했다.
성운은 조금 걱정이었다.
'고대 유적은 좀 다르거든? 실망할 수도 있을 텐데.'
일단 플레이어들의 신성 레벨에 어느 정도 비례해 등장하는 흉물과 흉신과는 달리, 고대 유적은 게임이 시작될 때 위치가 정해져 있으므로 도전할 수 있는 난이도 또한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흔히 말하는 '입구컷', 즉 입구에서 틀어 막혀서 라크락이 실망하는 그림이 그려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고대 유적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긴 해. 당장은 쓸모가 없을지라도 라크락은 문자에 관심이 많으니까. 라크락의 무리나 그 후손들이 발견하게 될 수 있으니까.'
고대 유적은 일단 돌입에 성공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몇 종류로 정해져 있었다.
'일단은 고대 지식이 있지.'
고대 지식, 또는 고대 기술.
말이 '고대'지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 고대의 것들은 최첨단 문명에 버금가는지라, 이런 종류의 고대 유적에 들어서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상이 된 첨단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문명 수준이 낮으면 입구를 지나지도 못해.'
아무리 그래도 우연히 문을 여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했다.
여러 고고학 지식을 필요로 하거나, 바로 아랫단계의 기술 문명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운은 사실 로스트 월드의 게임 진행을 돕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기술 파밍 던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 지식을 얻는 유적은 이 시점에 필요가 없는 셈이고. 그럼 등위 지식이나 기술일까?'
등위 지식이나 기술은 목축이나 농경처럼, 현재에도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는 대신 문명 수준이 낮은 걸 의미했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는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꼭 고대 유적에서 발견할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었다.
'당장 보기엔 등위 지식이나 나오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군. 적당히 라크락이나 자올, 오웬의 경험치도 올릴 수 있을 테고.'
반면 나왔을 때 기분은 좋지만, 사용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불가사의.'
고대 유적 중에서도 유적 그 자체가 특별한 힘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
특수한 자원을 자동으로 생성하거나, 특정 생물이 군집을 이루고 있거나, 아니면 특정 자원을 다른 자원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주변 지역에 저주나 축복을 내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소유'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부족이나 종족에게 특정한 상태 이상을 일으키거나.
'불가사의 자체는 좋지. 문제는 불가사의 대부분은 고정형이야. 목축을 생각하고 있는 라크락의 무리는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지.'
무리를 나누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지리적 위치도 문제였다.
불가사의 자체가 항상 좋다고 볼 수도 없거니와, 성운은 이미 라크락의 무리를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거리가 먼 반도 안쪽으로 끌어들인 상태였다.
불가사의 자체가 좋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그 영향력을 제대로 활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초보자들은 불가사의를 먹으면 어떻게든 빌드를 불가사의를 활용하려는 쪽으로 뜯어고치려고 들지만, 실제로 게임 승률에서 불가사의가 유의미하게 작용하는 경우는 적다.'
성운은 언제나 로스트 월드의 통계를 믿었다.
그리고 이런 불가사의 말고, 되도록이면 아니었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뭐, 마성(魔性) 유적만 아니면 되지 않나?'
성운의 생각에 이른바 '마성 유적'만 아니라면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닐 듯 싶었다.
'고유 유적일 확률은 너무 낮고.'
고대 지식, 등위 지식, 불가사의, 마성 유적, 고유 유적 이렇게 다섯 가지를 제외하면 보통 플레이어들이 '잡유적'이라고 불리는 분류가 대부분이긴 했다.
라크락이 이미 얻었던 황금 서판 같은 대단하지 않은 보물들이 좀 쌓여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물건들은 중세나 근세에는 큰 가치가 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뭐, 고대 유물로 마법 아이템 같은 게 나오면 쓸모 있겠지. 앞으로의 전투에서 유리할 테고.'
성운은 라크락의 호기심과 담대함이 생각보다 나쁜 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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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적의 입구는 단순했다.
무거운 원판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충분한 힘을 가진 사람 여럿이서 돌을 옆으로 밀어내면 그만이었다.
들어가는 난이도가 쉽다는 점에서, 고대 지식을 얻는 던전이나 고유 유적이 아니라는 걸 성운은 알 수 있었다.
자올이 입구가 막히지 않도록 모난 돌을 주워와 괴었다.
"어두운 동굴이라 장작을 피워야 할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그렇군. 저건 야광 이끼인가?"
고대 유적의 내부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대강 어림잡아도 수백 미터, 텅 비어 있는 공간 내부는 아찔했으나, 곳곳에 피어난 녹색과 붉은색 야광 이끼들이 곳곳이 피어 있어서 공동의 전체 크기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공동 사이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지그재그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 다리들이 놓여 있었는데, 높이 하나가 수십 미터는 되었다.
"아마 저기 놓인 돌로 만든 길을 다 지나야 할 듯하군요."
"한 번에 뛰어내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신께 기도를 드릴 겁니까?"
"아니 겨우 이런 걸로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진 않은데... 게다가 나만 내려갈 수는 없지."
자올은 기대감에 가득 찬 라크락의 얼굴을 보며 '재미가 없을까 봐요?'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라크락과 자올, 그리고 오웬과 네 명의 전사는 잠시 머리를 맞대었다.
긴 덩굴을 엮어 밧줄을 만들자는 의견이 제일 그럴듯했지만, 그걸 엮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냥 만들어진 다리를 내려가는 쪽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몇 분 동안 뾰족한 방법이 없자, 회의는 되도록 빠르게 끝내는 게 낫다는 라크락의 평소 지론에 따라 바로 다음 행동으로 이행했다.
리자드맨들의 튼튼한 두 다리로 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리 위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이 나타났다.
"저게 뭐지?"
"쥐...처럼 보이는군요. 되게 큰."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던 오웬이 말했다.
"뉴트리아입니다. 몇 번 잡숴 보셨을 텐데요."
"아, 기억나는군. 뭐 이렇게 큰 쥐가 있나 싶었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커 보이는데."
일반적인 뉴트리아는 몸길이가 6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10킬로그램 정도 나가지만, 라크락이 보고 있는 뉴트리아는 몸길이가 1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 말은 몸무게가 수십 킬로는 나갈 거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라크락이 보기에 인상적인 부분도 있었다.
"왜 기억을 못했는지 알겠군. 그 뉴트리아란 녀석들은 저렇게 떼를 지어 다니지도 않고, 저렇게 앞니를 내세우며 사람한테 달려들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흠, 그럼 뉴트리아라고 보긴 힘들군요."
"그냥 괴물쥐라고 불러야겠군."
단순하지만 그럴듯한 이름 짓기였다.
라크락의 생각에 일반적인 동물은 사람에게 적대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보통은 도망친다.
그러나 괴물은 달려든다. 마치 목적을 가진 것처럼.
"이곳을 지키는 놈들일지도 모르겠군. 겨우 쥐일지도 모르지만...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금세 끝이 났다.
괴물쥐는 스무 마리 되는 꽤 많은 숫자였지만, 라크락과 그 전사들은 베테랑이었다.
일곱 명이 바투 서면 꽉 차는 좁은 다리였지만, 괴물쥐들은 달려드는 기세 그대로 전사들의 창에 꼬챙이가 되었다.
라크락은 창날에서 괴물쥐 시체를 빼내며 말했다.
"먹을 수 있겠지?"
자올은 그 말에 괴물쥐 시체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왜 모든 걸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으로 나누시려는 겁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잖나."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지만 조금 달리 볼 수도 있죠."
"어떻게?"
"이것들도 물소처럼 '기를 수 있는가? 아닌가?'"
"흥미롭군... 일단 내장만 제거하고 이동하지."
빠르게 해체 작업을 하는 동안 오웬이 질문했다.
"'기른다'는 게 뭡니까?"
"그러니까..."
대답을 하려던 라크락은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물소를 생각하면 잡아먹기 위한 식량이지만, 드레이크 마눈을 생각하면 또 그렇지 않았다.
마눈을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노예와 같은 것인가?'
그렇다기에는 노예는 자신의 상태에 불만족하는 반면, 길러지는 것들은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반발하므로 계속 억압을 해야 하는 반면에, 길러지는 것들은 아닌 것 같았다.
"잘 모르겠는데."
라크락은 자올이 답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바라봤는데, 자올도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자올 또한 곧 포기했다.
"우리도 뭔가를 기른다는 건 해 본 지 오래되지 않아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 물소와 드레이크 마눈을 기르고 있는데, 물소에게선 고기를 얻지만 마눈에게선 힘을 얻는다. 그 대신 우리는 물소에게 먹을 풀을 찾아 주고 마눈에겐 먹이를 따로 주지. 우리는 이 관계가 오래되길 바란다.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오웬은 그 정도면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럼 물고기를 길러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물고기를? 물고기는 저절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
라크락의 생각에는 그렇게 보였다.
라크락이 살았던 늪이나 연못에서 물고기는 잡아먹다 보면 점차 줄어들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큰 연못에서, 그것도 수생 생물인 프로그맨과 함께 살았던 오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고기들도 알을 낳고 새끼를 칩니다. 프로그맨들은 그것들이 새끼를 치는 계절이면 잡아먹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었죠."
"놈들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었군."
"머리 둘 달린 흉신이 나타나기 전까진 멀쩡했을지도 모릅니다."
라크락 또한 동의했다.
"그럼 기른다는 건 어떻게?"
"크게 자라 잡아먹기 수월한 물고기들이 있지만 어렸을 때 다른 물고기에게 잘 잡아먹힙니다. 하지만 돌이나 나무로 제방을 쌓아 어린 물고기들이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요?"
"물을 가둔다고?"
라크락은 그 거대하고 깊은 호수에 그런 일을 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입으로 말하진 않았다.
현실적으로 어려워도 생각 자체는 특이하고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무리를 둘로 나눌 생각을 하고 있다. 떠나는 이들도 그렇지만 겨울은 남는 이들에게도 잔혹하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한번 찾아보면 좋겠군."
그때 괴물쥐를 손질하던 전사 하나가 "악!"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라크락이 황급히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
전사는 손을 쥐고 고통스러워했는데, 손가락에서 약하게 탄내가 났다.
"괴물쥐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물린 것 같지는 않은데?"
"그저 살아 있는 놈을 만졌는데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몸이 창날에 꿰뚫린 괴물쥐가 눈을 부라리고 있자, 다른 전사 하나가 바로 죽이려고 창을 들었다.
"잠깐!"
라크락은 그 일을 중지시키고 괴물쥐에게 손을 가져다갔다.
"위험합니다!"
"걱정마라. 그 정도 상처라면 나도 견딜 수 있다."
라크락은 괴물쥐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파지직!
그것은 선명한 스파크였다.
겨울철 건조한 털가죽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정전기라는 개념에 대해 라크락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 감각은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라크락은 얼얼한 손가락을 잠시 쥐었다 폈다.
"이게 뭐지?"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성운만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설마 했던 마성 유적이었나?'
023화
로스트 월드에 있는 힘은 신성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성운이 지구에서 마지막 게임을 승리했을 때 사용한 핵과 핵 투발 수단은 신성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었다.
그리고 신성과 과학은 중세까지는 함께 성장할 수 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신실해지면, 사람들은 과학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과학 기술과 지식에 능해지면 신을 덜 믿기 시작하지.'
신이 해 주던 일을 과학이 대신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이 낙폭은 현실 세계, 그러니까 지구보다는 약했다.
'지구에서는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반면에, 로스트 월드에서 신들의 존재는 진짜니까.'
그리고 로스트 월드에는 신성과 과학이 아닌 세 번째 힘, '마법'이 존재했다.
마법 또한 신성에 반비례하지만, 과학과는 달리 고대에서부터 신성과 반비례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럴 수 밖에. 마법은 극히 개인적인 힘이니까. 고대에는 강력한 마법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있으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지. 마법을 가진 개인은 신인 것처럼 떠받들어질 수 있어. 그런 존재가 신을 믿을 이유도 없지.'
이런 마법의 힘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근대쯤 자연스럽게 힘의 크기가 역전되어,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게임마다 근대까지 발전한다고 볼 수는 없지. 나도 마법을 이용해서 승리한 적이 적지는 않으니까.'
때문에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어들은 신성을 가지고 플레이하면서도, 과학과 마법을 잘 저울질하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성운 또한 이런 게임의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나 마법을 이용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마성을 얻을 생각은 없었는데.'
고대 유적 중 '마성 유적'으로 분류되는 던전은 최종적으로 마성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던전을 말했다.
마성을 얻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체질을 갖춘다는 것.
'게다가 단순히 유적을 성취한 개체뿐만 아니라, 그와 가까운 혈족 몇 세대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지금 같이 씨족 사회라면 사실상 부족 전체가 마성을 가질 확률이 있는 거지.'
그래서 위험한 부분이 있었다.
어차피 마성을 얻는다고 해서 바로 마법사가 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마법을 사용하려면 주문을 알아야 하고, 이런 주문 또한 고대 유적이나 각종 고대 지식, 마법 연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마성을 가진 이들은 그 자체로도 힘이 있었다.
작은 불꽃을 피어오르게 만들거나, 물체를 빛나게 하거나, 자그마한 스파크를 튀게 만들거나.
'아무래도 이 고대 유적은 아마도 전기의 마성을 주는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의 마성을 주는지는 힌트가 있었다.
성운이 보는 시스템 창으로는 바닥에 쓰러진 괴물쥐의 이름이 '마성에 휩싸인 뉴트리아'로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기를 선택하자 속성이 '전기'로 떴다.
접촉한 상대에게 전기 공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전기는 언제나 유용하지. 마성 중에선 좋은 편이지만...'
문제는 마성을 얻으면 신앙을 얻는데 페널티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아마 라크락이 이 고대 유적을 돌파하는 개체가 될 테니, 라크락에겐 틀림없이 마성이 깃든다.
게다가 라크락과 관련 있는 부족 350명 정도가 마성을 가질 확률을 얻을 테고, 확률적으로 세 명 정도가 마성을 띄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신비한 힘이라고 생각하겠지. 전기의 마성이니 눈으로 보여지는 화려함도 있고.'
하지만 성운은 그 뒤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마성 유적을 활용하는 건 로스트 월드의 초보자들이 흔히 겪는 실수였다.
초보자들은 '마법'이라는 힘을 얻는다는 것에 집착해서 마성 유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유도해서 마성을 얻게 한다.
그리고 마성을 띄는 개체들에게 자신의 자원을 집중해서 경험치를 올린다.
성장한 개체들은 자신의 마성을 후대에 자손으로 남기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강한 마성을 얻는다.
이윽고 '마법사'가 나타난다.
'게임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마법사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지.'
마법사는 개체 하나가 감당하지 못할 강력한 힘을 가진다.
힘이 강해질수록 무수한 적들을 상대할 수 있고, 권력을 가지고 귀족 계층이 된다.
무엇보다 이 마법사들의 힘의 근원은 신이 아닌 마법이기 때문에 이들은 신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다.
마법의 근원은 로스트 월드에서 이른바 '설정 떡밥'으로 존재하는 고대의 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과 마성이 대립하게 되는 거지.'
이때부터는 플레이어가 사실상 마성을 가진 개체들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신성을 기반으로 하게 되는 플레이어들은 '마녀 사냥', '금기' 같은 이벤트로 마성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어떻게든 컨트롤하는 건 가능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소비된다는 점이지. 초반에 마성과 마법사로 이득을 보더라도 게임 중반에 허튼 곳에 자원을 소비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성운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균형을 잘 잡아 빌드에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피곤한 것이 사실이었다.
게임에서 불필요한 변수를 늘리느냐 마느냐도 중요한 과제였다.
통계를 보자면 초보자들이 마법사에 혹해서 승률을 떨군다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순수 신성'으로 가는 빌드가 '신마 혼합' 빌드에 비하면 승률이 더 높기도 했다.
'물론 나는 변수가 늘어나는 플레이를 지향하긴 하지만... 라크락에게 경고를 해 줘야 할까? 이제 슬슬 마성 유적이 본색을 드러내서 유혹할 거야. 경고하지 않는다면 라크락의 성미상 마성 유적 끝까지 가겠지.'
잠시 고민하던 성운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라크락의 능력치를 다시 확인해 보던 찰나, 최근까지 없었던 고유 능력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능력치는 분명 슈넨과 아울로이의 프로그맨들을 물리치면서 얻게 된 능력치로 보였다.
'이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면 라크락에게 기대를 걸 만하겠는데. 신성과 마성을 둘 다 가지면서 양쪽 모두 페널티를 받지 않는 방법이 없지는 않으니까.'
성운은 그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
찌릿한 통증을 느끼던 라크락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냐? 그 힘을 가지고 싶으냐?'
라크락은 두리번거렸다.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자올이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라크락은 창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던 괴물쥐의 멱을 따면서 말했다.
"괜찮다. 이 괴물쥐들은 확실히 숨통을 끊어야겠군. 그리고 활을 쏠 줄 아는 전사는 활을 들어라. 다친 이는 후위를 지켜라."
라크락은 손질된 괴물쥐들을 내버려 두고서, 무리를 이끌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힘이지 않느냐?'
라크락은 이번엔 눈만 움직였다.
'위쪽이다.'
라크락이 눈을 치켜뜨자 허공에 투명하고 푸르게 스파크를 내며 빛나는 넓적한 생명체가 유영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생명체의 외형은 가오리였는데, 라크락은 바다에 사는 가오리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전기가오리가 말했다.
'내게 말하겠다 생각하면, 나는 들을 수 있다.'
'신기하군. 넌 뭐지?'
'나는 이 유적을 지키는 정령이다.'
'정령? 정령이 뭐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그래. 나는 강한 힘을 가진 이에게만 보인다.'
라크락은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정령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얕은 생각은 전달되고, 깊은 생각은 전달되지 않는군. 정령이라고 자칭하는 네가 정말로 강한 힘을 가진 이를 구분할 수 있다면 이 생각도 읽어 봐라.'
전기가오리는 라크락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라크락이 얕은 생각으로 말했다.
'그래. 난 이중 가장 강하다. 네가 말하는 힘은 무엇이냐?'
'전기를 말한다.'
'전기?'
'생물을 태우고, 빛을 번쩍이는 힘. 불과 같은 열기와 태양과 같은 빛. 나는 너에게 그 힘을 줄 수 있다.'
라크락은 다른 일행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면 고맙게 받겠다.'
전기가오리가 주춤했다.
'...조건이 있다.'
'그냥 주는 게 아닌 것인가?'
'그렇다.'
'그럼 거래로군.'
라크락은 인상을 썼다.
'거래를 할 때는 조건부터 제시해라. 네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내게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은지 정확하게 해야지.'
'...미, 미안하다.'
'미안할 것까진 아니다. 다음부터 주의해라. 그래서 조건이 뭐지?'
전기가오리는 뭔가 아까보단 힘없이 펄럭이며 날아왔다.
'나는 이 유적에 봉인되어 있다.'
'봉인?'
'갇혀 있다는 말이지. 이 공간 안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저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나는 이 구속이 풀리길 원하고, 내 뜻을 이루는 이에게 전기의 힘을 내려 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널 풀어 줄 수 있지?'
전기가오리가 말했다.
'간단하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내 봉인을 지키고 있는 유적지기를 죽이면 나는 풀려나고, 너에게 힘을 줄 수 있다.'
'그럼 내가 그 괴물쥐들이 했던, 파지직, 하는 걸 할 수 있는 건가? 전기의 힘이라는 걸?'
'물론!'
전기가오리는 라크락이 힘에 관심을 가지자 흥분해서 설명했다.
'그것만이 아니지. 너는 그 힘을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점점 더 강해지지.'
'그리고?'
'내 힘은 굉장히 커서 너 혼자에게만 담기지 않는다. 너뿐만 아니라 너의 부족 중 누군가도 그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힘은 너의 자손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 네가 키운 힘만큼 고스란히 전해지진 않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너의 피를 이은 자식 중에는 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이들도 나타나겠지.'
'굉장하군.'
라크락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의문을 느꼈다.
'그럼 넌 왜 갇혀 있느냐?'
'어, 내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 사람들도 위험한 것들은 멀리 두지 않느냐? 독이나, 괴물이나. 피할 수 없다면 가둬야 하는 것이지.'
라크락은 표정을 굳혔다.
'그거 알고 있나?'
'뭐지?'
'넌 방금 스스로 위험하다는 걸 밝혔다.'
'아.'
라크락은 콧김을 내뿜었다.
'넌 뭔가 숨기고 있다. 아니면 그 힘을 가졌을 때 가져올 이득보다 폐해가 더 크거나.'
'아니, 그렇지 않다. 분명 힘을 가지면...'
'더 이상의 거짓말은 하지마라. 경고하는데, 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별 볼 일 없게 잠겨 있던 이 동굴의 입구를 봉인할 수도 있다. 더불어 내 전사들에게 이곳에 사람이 들지 못하도록 지키고, 내 부족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들지 못하도록 경고할 수도 있다.'
전기가오리는 명백히 당황한 것 같았다.
'그, 그럴수가,'
성운이 알기에 정령들의 지능이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마성 유적에 들어온 개체들은 힘의 매혹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성운이 생각했다.
'역시 라크락이 이런 행동을 보여 줄 수 있는 건 이번에 얻은 새로운 능력치 때문이겠지.‘
『라크락(전사 Lv.4/부족장 Lv.3/제사장 Lv.3)
힘 42
지능 35
사회성 38
의지 23
지도력 18
속임수 8
라크락의 무리의 부족장』
라크락의 새로운 고유 능력치는 바로 '속임수'.
슈넨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오히려 역으로 기습을 했던 것이 이 능력치를 발현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성운은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그 힘을 가지고 싶군. 거래를 다시 시작하지, 파지직.'
'파지직?'
'이제부터 그게 네 이름이다.'
'난 파지직이 아닌데.'
'내 거래는 네 이름을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넌 날 속이려고 했으니, 조건은 내가 더 유리해야지.'
파지직이 시무룩해졌다.
'...알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성운은 바로 뒤에서 소리를 죽여 웃었다.
024화
파지직이 말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은 뭐지?'
라크락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물었다.
'네가 왜 위험한지 설명해라.'
'...뭐라고?'
'네가 정말로 거래할 만한 가치를 가진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실을 숨길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거래할 가치도 없는 것이고.'
그 말에 파지직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래. 내 힘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어떤 위험이지?'
파지직은 펄럭이며 어두운 돌다리를 따라 걷는 라크락 일행의 머리 위를 천천히 비행했다.
'나는 고대의 악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악?'
'아주 먼 과거에 이 세계를 지배했던 존재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그 존재마저 잊혀져 신들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 나도 그 기원을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여기 갇혀 있었을 뿐.'
'딱하군. 하지만 나도 고아로 자랐다. 누구에게서 낳아졌는지를 꼭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그보단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그, 그런가?'
파지직은 라크락의 말에 느닷없는 위로를 받아 당황하면서도 말을 이어 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은 사람을 도취시킨다. 근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롯이 제 것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이지. 그저 그 힘을 우연히 얻었을 뿐이면서 말이야. 그런 힘을 휘두르다 보면 자기에게 그런 힘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을 가지지 않은 이들을 얕보게 된다.'
라크락은 조금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뷰에나 슈넨의 사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성이라는 것도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지?'
'그래. 내 힘은 무차별로 퍼진다.'
라크락은 이 힘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해 보았다.
'이 전기의 마성이란 힘은 신께서 내려 주는 것과는 다르겠군. 신의 힘은 결국 신께서 선택하고 판단하신다. 반면에 겨우 파지직 하는 힘이라도 자격 없이 가지고 있다면 누군가의 질시와 부러움을 사겠지. 그리고 그 힘이 점차 커지기까지 한다면... 신을 모멸하려는 이들도 생기겠군.'
라크락은 파지직이 위험한 이유를 이해했다.
'그래서 파지직, 그럼 그런 위험을 안고서 너의 힘을 손에 넣어야할 이유가 뭐지?'
'내 힘은 강하다.'
'흠.'
'파괴적이지.'
파지직은 번쩍거렸다.
라크락은 이 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천둥 벼락이었다.
규모에 따라 작으면 '파지직'에 불과하지만, 힘이 성장하고 커지게 되면 천둥 벼락이 되는 것이라고 라크락은 짐작했다.
라크락은 괴물쥐들처럼 몸에서 전기라는 것을 낼 수 있게 되면 전투에 유용하리란 것도 이해했다.
'매력적이군.'
'그럼 봉인을 풀어 주겠나?'
'조건이 있다.'
'조건? 아, 알겠다.'
파지직은 예상했다는 듯 라크락 가까이 날아들었다.
'힘을 독점하고 싶은 것이로군? 이해한다. 다소 어렵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할 거다. 이 힘을 한 명이 독점하기 위해서는 마법과 같은 수준의 의식 준비가...'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힘을 독점할 생각이 없다.'
'그럼?'
'너는 처음에 전기의 마성이란 힘은 무차별로 퍼진다고 말했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의식을 통해 힘을 한 명이 독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 모두가 사실이라면, 힘을 무차별로 주는 게 아니라 소수의 선택받은 자에게 줄 수도 있겠군?'
파지직은 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보진 않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작은 규모의 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지? 네가 모든 힘을 가지지 않는 이상, 그냥 무차별로 힘이 퍼지도록 두어도 결과는 비슷할 텐데.'
'아니, 다르다.'
라크락이 설명했다.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힘이 주어지면, 마치 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지.'
'뭐?'
'고대의 악 같은 근원이 없는 힘이 아니라, 근원이 있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아니다. 신의 선택을 받는 게 아니야. 이 힘은 신의 힘이 아니다.'
라크락은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신께서 내려 주신 힘이라고 하면 그건 그때부터 신의 힘이 된다. 그게 정말 신의 힘인 것과 뭐가 다르지?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의 힘이 신께서 주셨다고 생각할 테고, 그 신실한 믿음은 신에게 가 닿을 것이다.'
'아니 그런...'
파지직은 반박을 하고자 했지만,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라크락이 하는 말은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으로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마성을 가진 이들이 힘을 휘두를 때, 그저 우연히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신앙 자원을 얻는데 페널티가 생긴다.
반대로 마성을 휘둘러도 그게 신에게 받은 힘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오히려 신앙 자원을 생성한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
'아니, 또 다른 조건도 있나? ...그리고 내 이름을 멋대로 부르는 것을 더하면 세 번째 조건이다.'
'...그리고 세 번째 조건.'
'...그냥 말해라.'
라크락이 파지직에게 시선을 던졌다.
'너도 신을 믿어라.'
'...신을 믿으라고?'
'다른 신이 아닌 우리 푸른 벌레신을 믿고 의지해라.'
파지직은 거절의 뜻으로 번쩍거렸다.
'다른 조건들은 몰라도, 그건 어렵겠다. 나는 마성의 정령이다. 신들보다 더 오래된 존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다.'
라크락은 가볍게 꼬리로 바닥을 때렸다.
라크락의 일행은 라크락이 느닷없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안색을 살폈다.
자올이 무슨 일이냐, 손에 통증이 괜찮으냐 묻자 라크락은 괜찮다고 답했다.
라크락은 파지직에게 집중했다.
'누가 어떻게 왜 널 낳고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가 중요하지. 너는 왜 봉인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성의 정령들은 자신의 마성을 널리 퍼트리고 싶어 한다. 그게 내 삶의 목적이다.'
'내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유용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푸른 벌레신께선 유용한 존재에 관대하다. 너의 염원을 들어주실 지도 모른다. 네가 만들어진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삶의 목적은 자신을 만들어 낸 존재가 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파지직의 비행이 천천히 느려졌다.
'신들은 마성의 정령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을 너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너희의 신께서 나를 정말 받아들여 줄까?'
'내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면야. 내가 그분의 뜻을 모두 알 리는 없지만, 그분을 아는 이들 중에선 내가 제일 그분의 뜻을 잘 알지.'
그 말에 파지직이 결정을 내렸다.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 나는 사실 너에게 몇 가지 거짓말을 했다.'
'뭐지?'
'나는 사실 이 고대 유적에 단순히 갇힌 것이 아니다. 유적의 도전자가 유적지기를 쓰러트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유적지기도 내 수하에 불과하지. 나는 이 유적을 지배하고 있다. 너희에게 마성에 휩싸인 뉴트리아를 보낸 것도 나다.'
'과연.'
라크락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파지직이 계속 말했다.
'그럼에도 유적지기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알 것 같다. 너무 약한 이들이 힘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 아닌가? 너의 힘을 충분히 퍼트릴 수 없을 테니.'
'그렇다. 최근에는 프로그맨 무리가 몇 번 도전해 왔었지. 하지만 놈들에겐 자격이 없었다.'
라크락은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파지직이 말했다.
'나는 너를 속였다. 화나지 않는가?'
그 말에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익히 예상했을 뿐더러, 당장 크게 잃은 것이 없는데 속았다는 이유만으로 분개하는 것은 라크락의 성미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담대하게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전사의 미덕이 아니지만, 나는 부족장이기도 하다. 부족장에게 용서와 화해는 미덕이다.'
'...아.'
'그리고, 나는 전사도, 부족장도, 제사장도 아닌 한 리자드맨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너를 이해한다.'
'이해?'
'이렇게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괴물쥐나 바라보고 살고 있으면 성격이 좀 괴팍해질 수밖에 없겠지. 너는 밖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아름다운 것들을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말에 파지직이 번쩍번쩍거렸다.
라크락이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파지직이 말했다.
'아직 그대의 이름을 모른다. 그대의 이름은?'
'라크락.'
'라크락, 시험은 끝났다. 나는 그대가 말한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이에 동의하는가?'
'물론이지.' 
「마성의 정령 중 하나가 당신에게 복속되길 희망합니다. 이를 받아들이면 '마성영역:전기'를 얻게 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네'를 눌렀다.
'됐다.'
이것이 마성의 페널티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성을 바로 신성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만약 신성 영역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마성은 각 개체가 '마성에 휩싸인'으로 표기 되며 통제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역에 들어온 마성은 통제가 가능했다.
라크락이 파지직에게 조건을 내건 것처럼 특정한 개체에게 마성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신성으로 편입시켰다고 해서 진짜 신성이 되는 건 아니야. 신성에 속하는 영역처럼 원한다고 레벨을 올릴 수 없지. 이것저것 제약이 붙기도 하고. 하지만 페널티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아니겠어?'
단순히 마성 유적을 돌파해서 마성을 얻는 것이라면, 쉽다.
라크락의 일행은 그 괴물쥐가 수백 마리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성운이 언제라도 신앙을 소모해 지원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성의 정령을 복속시키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어렵다기보다, 가능한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캐릭터의 능력치를 통해서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을 뿐이며, 성운은 이번에 운 좋게 성공한 셈이었다.
「'마성영역:전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성운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널 만난 게 서로에게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라크락.' 
─┼
 9년 뒤.
─┼
 "...그렇게 해서, 푸른 벌레신께서 라크락 님에게 천둥 벼락의 힘을 내리셨지."
"오호라."
"여기까지가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들 중 '선택받은 자'가 생겨난 이야기라네."
언덕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물소 뼈와 비석으로 만들어진 탑 앞에 있었다.
비석 위에 회칠을 해서 뼈를 쌓아 올린 이 탑은 황야 저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았다.
이 뼈탑은 오래전 라크락이 처음으로 만들었던 뼈탑 위에 세워진 것으로, 푸른 벌레신에 대한 신앙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길을 잡는 이정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끝마친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은 석비에 쌓인 흙먼지를 가볍게 훑어 냈다.
이 리자드맨은 '비단'이라고 불리는 값비싼 직물을 여러 겹 겹쳐 입어 고아한 신분임을 암시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는데."
반면 의문을 꺼낸 인간 남자는 누추한 모습이었다.
무두질도 제대로 되었는지 의문인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턱수염은 덥수룩했다.
"당신이 믿는다는 신은 벌레의 신인데, 천둥 번개와 무슨 상관이 있지?"
리자드맨은 고개를 기울였다.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의문을 왜 가지느냐는 태도였다.
"번개가 무슨 색이지?"
"푸른색?"
"우리가 신을 뭐라고 부른다고?
"...푸른 벌레신?"
"바로 그거라네."
그러면서 리자드맨은 인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연히 인간은 무엇이 '그거'라는지 알 수 없었다.
'리자드맨들은 이상한 부분에서 잘 납득하고 넘어간단 말이지. 괴짜들 같으니.'
남자는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을 잘 이용할 수도 있겠지.'
남자는 속내를 숨기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이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통성명 한 번을 안 했군. 이름이 뭐지?"
"나 말인가? 오웬이라고 하네."
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런, 거물을 몰라봤군."
"거물? 농담이겠지.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
"나는... 잠깐, 저기 불청객이 오는 것 같은데."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무장한 한 무리의 놀들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025화
놀.
하이에나의 모습을 한 이 종족은 주둥이가 다소 튀어나와 있고 갈색을 바탕으로 검은 점박이 무늬를 띄고 있었다.
성미가 거칠고 서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무리 안에서의 싸움도 잦지만, 로스트 월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그 정도 페널티는 참작할 만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신체적 능력과 지능 모두 고루 높은 편이기 때문에 첫 번째 종족으로 택할 때 플레이어의 소영역과 무관하게 괜찮은 종족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런 게임 플레이어에 대한 사실은 오웬과 오웬 옆의 이름 모를 남자에겐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남자가 오웬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거지? 내가 알기론 현재 이 지역에서 놀과 리자드맨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오웬은 다소 따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놈들이 올라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생각을 좀 해 보지. 놈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고. 자네 생각엔 저놈들이 '살카잇'의 부하들 같나?"
살카잇은 검은 비늘 리자드맨 부족과 적대적인 놀 부족인 '잘린 귀 부족'의 부족장이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검은 비늘 부족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잘린 귀 부족은 황야에서 가장 큰 부족으로, 그보다 작은 부족들은 두 부족의 향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살카잇과 라크락은 서로 믿는 신이 다르다.
두 부족장이 적대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 또한 두 부족이 싸울지, 싸운다면 누가 승리할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이 황야에선 그 어떤 인간 부족도 저 두 강대한 부족에 미치지 못했다.
"글쎄..."
남자는 그렇게 운을 떼긴 했지만 성의 없이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는 '이야기꾼 오웬'이었다.
남자는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놀 무리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그리곤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아닌 것 같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이 지역에 나타난 것 자체가 의아해. 살카잇의 부하이고 잘린 귀 부족 안에 있다면 라크락이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저렇게 겁 없이 돌아다닐 리가 없지. 라크락의 정찰대라도 만난다면?"
"저 놀들은 무리 짓고 있다. 그리고 놀들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지. 정찰대 정도라면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놈들은 언덕 아래에서도 보이는 뼈탑을 향해 오고 있잖아. 운이 나빠서 비석에 '문자'를 새겨 넣는 이야기꾼 오웬이라도 만난다면? 내 생각에 저놈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
오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지?"
"내 생각에 저놈들은 과거에는 살카잇 부족에 속했었지만, 지금은 무리 사이에서의 경쟁에서 떠밀린 녀석들 같군. 놀들에겐 그런 일이 흔하니까 말이지. 다들 무장은 하고 있지만 잘 살펴보면 엉터리야. 저놈은 칼도 없어. 그냥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군."
오웬은 큭큭 웃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놈들이 주변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살카잇의 정찰대라면 능선부터 살펴야 하고 저렇게 번듯한 길로도 오지 않을 거야. 놈들은 지쳤고 피곤하군. 떠돌이들이 맞아."
남자는 오웬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혜가 있다는 말이 아주 허명은 아니군. 이런 자가 따르는 라크락이란 인물은 어느 정도일지.'
남자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내쫓아야지."
"잘린 귀 부족이 아닌데도?"
"잘린 귀 부족의 정찰대라면 오히려 환대를 할 것이다. 적대적이라고 해도 사소한 규모의 전투는 의미가 없어. 그건 놈들도 알 테고. 밥이나 한 끼 먹으며 서로에게 정보를 캐낼 궁리나 하겠지."
"아, 과연."
"반면에 저놈들은... 그냥 배고픈 약탈자잖나?"
남자는 동의했지만, 입이 간지러워 결국 한마디 더 내뱉고 말았다.
"떠돌이 리자드맨이나 떠돌이 인간이었다면 다르게 생각할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 나는 리자드맨은 물론이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놀은 아니라네."
남자는 그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은 무기를 챙기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 있지."
"괜찮겠나? 혼자서?"
오웬은 대답도 없이 손을 내젓고는 설렁설렁 걸어 언덕 아래로 걸어갔다.
남자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남자는 언덕 위에서 오웬이 놀들에게 접근하다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들었다.
남자는 그 활을 바로 알아보았다.
'검은 비늘 리자드맨의 각궁이군.'
검은 비늘 부족이 기르는 커다란 물소들로부터 비롯된 저 각궁은 이 황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활 중 가장 멀리 날아갔다.
검은 비늘 부족은 전사의 숫자에 맞춰서 제한적으로만 생산했고 어지간하면 거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돌고 있는 진짜 검은 비늘 부족의 각궁은 몹시 비싸거나, 조잡한 모조품이었다.
'그런데 왜 벌써 활을 뽑지? 아무리 그래도 이 거리에선...'
그렇게 생각하던 남자에게 반문을 하기라도 하는 듯 , 오웬은 허리춤에 달고 있던 활 통에서 화살을 뽑아내 각궁을 쏘았다.
오웬이 걸어 내려가긴 했지만 놀들과의 거리는 백 보는 넘었다.
놀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기 때문에 오웬을 발견하지도 못한 상황.
오웬이 시위를 놓자, 남자는 순간 빗나갔다고 생각했지만, 놀 하나가 픽 쓰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로 쏘아 죽인건가? 아니, 아니군.'
남자는 눈이 밝았다.
화살은 절묘하게 앞장서고 있던 놀이 팔에 묶어 두었던 방패에 명중했다.
다만 시위를 떠난 화살의 힘이 어찌나 셌던지 그대로 나동그라졌던 것이다.
"저, 적습이다!"
놀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오웬을 겨우 발견했다.
그리곤 적이 겨우 한 명이라는 걸 알고, 다짜고짜 달려오기 시작했다.
놀 중에도 활을 든 이들이 있었지만 나무로 만든 장궁이었고, 오웬이 더 높은 곳에 있었다. 화살은 오웬의 발치에도 닿지 못했다.
"리자드맨! 비늘 비린내 나는 녀석! 무슨 짓이냐!"
오웬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화살을 몇 발 더 쏘았다.
모두 화살만으로는 전혀 부상을 입지 않을 위치였지만, 균형을 잃게 만들 힘은 충분했다. 화살을 맞거나 빗맞거나, 아니면 허겁지겁 엎드려 피하려던 놀들이 죄다 비탈을 굴렀다.
남자는 감탄했다.
'허, 오히려 쏘아 죽이는 게 쉽겠군.'
하지만 결국 세 명의 놀이 오웬 앞까지 당도했다.
놈들은 청동검을 뽑아 들고 오웬에게 들이닥쳤다.
"너 이 자식!"
오웬은 근접한 세 번의 검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화살통에서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꺼내, 속사로 놀들의 발을 노리고 쐈다.
세 개의 화살은 놀의 발이 아닌 신발과 흙바닥을 꿰어 냈다.
순식간에 세 명의 놀이 글자 그대로 발이 묶였다.
당황한 놀들 앞에 오웬이 '빈손'을 뻗었다.
"흥. 너희는 이 성지에 그 누린내 나는 발을 들이댈 자격이 없다."
-우르릉...
세 명의 놀은 물론 비탈에 굴러 떨어진 놀, 그리고 언덕 위의 남자에게까지 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놀 하나가 겨우 검은 비늘 리자드맨에게 있다는 그 유명한 전설을 떠올렸다.
"헉...! 선택받은 자?"
-쾅!
놀들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럼에도 눈꺼풀을 꿰뚫고 들어오는 청색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충격에 의해 쓰러졌던 놀들이 겨우 일어나자 오웬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빗나갔나?"
멀리 있었던 남자만이 그 순간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오웬의 빈손에서 뻗어나간 거대한 벼락 줄기는 놀들 사이를 꿰뚫고 놀들이 달려온 흙바닥을 무수한 나뭇결로 녹이고 있었다.
'미쳤군.'
당연히 놀들은 신발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자마자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오웬은 놀이 도망간 자리로 걸어가서 주섬주섬 부서지지 않은 화살을 회수하고는 남자에게 돌아왔다.
"아이고,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오웬은 비단 겉옷 품에서 기다란 막대를 꺼냈다.
막대의 끝은 원형으로 비어 있었는데, 오웬은 쌈지 하나를 풀어 안에 있던 마른 풀을 빈 구멍에 넣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다음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스파크를 일으켰다.
마른풀에 불이 붙자 오웬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 내뱉은 숨결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남자는 그 물건을 알고 있었다.
'연초와 곰방대로군. 검은 비늘 부족의 선택받은 자들이 쓰는 제사 도구. 그 힘을 쓴 다음엔 저 약초를 태워야 한다던가?'
남자는 오웬이 연초를 모두 태우길 기다렸다.
오웬은 남자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네."
"음... 그만한 힘을 가졌으면서 왜 혼자 다니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만한 힘이 없다면 어찌 혼자 다니겠나?'
남자는 그 말도 맞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좀 더 제대로 하지. 오웬, 당신 정도면 누군가의 '아래'에 있을 정도가 아니잖나? 지금 검은 비늘 부족 안에서도 자네를 따르는 이들은 충분히 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멀리에서 다른 리자드맨들 무리를 이끌고 편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알기로 '이야기꾼 오웬'은 혼자서, 떠돌이로 다니지. 위험하고 외롭게."
그 말에 오웬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큭큭 웃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네. 나는 죄가 많거든."
"그대가 죄인이라고? 하지만 그대를 좋아하는 리자드맨들을 많이 보았는데?"
"아니, 죄인... 죄인인 것은 맞지만 꽤 많은 부족원들에게 용서받은 건 사실이지. 이건 좀 더 개인적인 속죄의 문제야."
"속죄?"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웬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용서받을 길이 생겨났고, 이게 그 길이라네. 푸른 벌레신과 부족장 라크락의 이야기를 널리 퍼트리는 것이지. 이야기와 문자로. 뭐, 가끔은 겁을 주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오웬은 놀들이 혹시 돌아오지 않는지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멀리 놀들이 아직도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오웬은 머릿수를 정확히 확인하고, 놀들이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두 놈을 죽였다면 놀들은 서둘러 도망친 다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그럼 오늘 잠자리가 좀 사나웠겠지.'
오웬은 모두 피운 곰방대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쪽..."
"아, '휘'라고 부르지."
"휘? 흠. 휘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내게 떠돌이라고 지적했지만 그쪽도 그렇게 보이는데.'
"나 말인가?"
휘는 수염을 벅벅 긁고는 말했다.
"사실은 난 떠돌이는 아니야. 나는 '자동성'에서 왔지."
자동성.
황야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외딴 골짜기였다.
솟아나는 샘으로부터 살고 있는 인간들의 부족으로, 골짜기의 입구에는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이 있었다.
토성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곳의 인간들이 쌓아 올린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고대의 불가사의로, 그 토성이 '자동성'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인간 허리 높이의 고대의 진흙 병정들이 끊임없이 부서지는 토성을 수복시키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곳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인간 부족은 다른 큰 부족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자동성은 잘린 귀 놀 부족과, 검은 비늘 리자드맨 부족 모두 탐내는 장소기도 했다.
오웬이 말했다.
"아하, 자동성의 심부름꾼이었나?"
"맞아. 자동성 성주님의 말을 전하기 위해 검은 비늘 부족을 찾아가는 중이지."
"이런, 손님을 몰라봤군. 여튼 잘됐어."
"잘되다니?"
오웬은 휘에게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라크락 님을 찾아뵈려던 참이야. 내가 자네를 검은 비늘 부족까지 데려다주지."
"오, 그렇게 해 줄 건가?"
"물론. 하지만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다음날 새벽 일찍 출발하는 게 어떻겠나?"
"아침이 아닌 새벽?"
"별을 보며 갈 생각이거든."
"그럼 그렇게 하지."
"손님이니 대접도 후하게 해야겠지."
오웬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는 풀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가 2.5미터쯤 되는 거친 인상의 닭이 있었다.
휘가 검을 뽑았다.
"코카트리스?"
"아니, 반쯤 맞췄군. 이건 코카트리스가 아니라 '코루카'라네."
남자는 뒤늦게나마 정체를 파악했다.
'이게 그 소문의 코카트리스와 닭의... 교배종이로군. 리자드맨들이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코루카는 리자드맨 전사들 중 기승에 유능한 일부만이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짐승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코카트리스와 닮았지만 덩치가 더 작고 상대적으로 유순한 편이었다.
검은 비늘 리자드맨들은 코카트리스를 길들일 수는 없었지만, 코루카를 교배로 만들 수 있었다.
선택받은 자와 함께 코루카 전사는 검은 비늘 부족의 명성, 또는 악명을 널리 알린 주범 중 하나였다.
'사람 보다 몇 배나 빨리 달리는 코루카를 타고 백보 밖에서 각궁을 쏘아 댄다. 가까이 접근한다고 겁을 내지도 않지. 검은 비늘 전사들은 오히려 맞서 싸우길 희망한다. ...하지만 겁내진 않겠다.'
두 사람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 뒤 인간과 리자드맨, 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황야 남쪽에서 일어나는 메뚜기 떼 창궐에 대해, 그리고 결국 오웬이 늘 하고 싶어 하는 푸른 벌레신에 대한 이야기로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
다음날 날이 밝기 전, 깨어나 코루카를 타고 길을 나섰다.
휘는 물론 오웬에게도 의외로, 검은 비늘 리자드맨 부족은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오웬의 예상대로라면 라크락의 무리는 좀 더 멀리까지 이동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멀리 물소 떼가 보이는 가운데, 지어진 움막들을 향해 다가가자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장례식인가?"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장례식이라면 오웬에게도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검은 비늘 부족은 지위에 따라 장례식의 규모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택받은 자 하나가 죽은 것 같군."
026화
─┼
한나절 전.
검은 비늘 부족.
라크락에게 심부름꾼이 다가와 무언가 속삭였다.
"그가 날 불렀다고?"
"...예.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말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부족장님과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뒤를 향해 외쳤다.
"행렬을 멈추어라."
그러자 각 행렬 가운데 있던 전사들이 라크락의 말을 복명복창하며 라크락의 목소리를 다른 리자드맨들에게 옮겼다.
"행렬을 멈추어라!"
"부족장님께서 행렬을 멈추라 하셨다!"
"멈춰라! 부족장님이 말씀하셨다."
황야에 먼지 구름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검은 비늘 부족의 행렬이 부족장 라크락의 말 한마디에 멈춰 섰다.
라크락은 '괴조 아낙세' 위에 앉아 행렬이 순차적으로 멈춰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낙세의 큰 키 덕분에 그 위에 앉은 라크락은 어렵지 않게 행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음."
라크락을 본 적 없는 외부의 사람들은 몰랐지만, 검은 비늘 부족은 코카트리스를 길들이는데 완전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괴조 아낙세는 3.5미터를 넘는 커다란 코카트리스로, 부족장 라크락만이 길들이는데 성공한 유일한 개체였다. 고작 한 마리라니 아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낙세를 길들인 덕에 코루카들이 태어날 수 있기도 했다.
라크락이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별잡이에게, 내가 곧 간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때까진 마지막 숨을 꼭 붙들고 있으라고도 전하고."
심부름꾼이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라크락이 아낙세에서 내리자 뒤에서 따라오던 자올도 자신의 코루카에서 내리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별잡이가 날 보고 싶다더군. 곧 자신의 숨이 멎을 듯하다며."
"...아. 오늘은 여기 자리를 잡는 게 좋겠군요. 그리고..."
자올이 말끝을 흐리자, 라크락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늙은 현인은 우리의 앞날도, 제 앞날도 곧잘 맞추었으니 이번에도 틀리지 않겠지. 장례식 준비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슬픈 밤이 되겠군요."
라크락은 유르에게 별도의 경계 지시를 내린 뒤, 별잡이를 향해 걸어갔다.
─┼
떠돌이 노인이자, 외팔이, 길잡이, 그리고 별잡이로 불린 늙은 리자드맨은 라크락과 검은 비늘 부족에게 많은 일을 해 주었다. 이 자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길 거부했고 이제 부족 내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어르신'이었다.
최초의 골탑이 세워진 언덕에서부터 프로그맨이 자리 잡은 호수까지 별을 따라 이동하는 방법을 알려 준 별잡이는, 그 이후에도 더 머나먼 땅으로 라크락을 인도해 주었다.
라크락은 그에게 별 보는 법을 익혔고, 둘은 별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별 보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이름을 붙이고, 전사들은 물론 약초꾼들과 소치기들에게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늘을 배우도록 시켰다.
이들은 늘 땅에게서 배워 왔고, 땅만이 모든 것을 준다고 믿고, 늘 땅으로부터 배워 익혔던 이들이므로 하늘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을 탐탁찮아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 지식이 더 없이 유용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무리를 빠져나갔다 길 잃은 이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고, 강가에 잠들고자 하는 이들은 새들이 얼마나 낮게 나는지 살폈으며,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꽃이 피고 식물이 시드는 때를 알았다.
이제 검은 비늘 부족에서 총명한 이들은 땅은 물론 하늘에게서 지식을 갈구했고 별잡이에게 찾아가 별의 근원에 대해서, 별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리고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 논하고 탐구했다.
그럼 그 자리에는 하루의 피곤한 일과를 끝내고 노곤한 표정으로 앉은 라크락과 구부정하지만 총기가 살아 있는 눈으로 답하고 질문하는 별잡이가 있었다.
라크락은 늙고 지친 몸임에도 자신의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알려 주기를 멈추지 않는 별잡이에게 고마워하며 선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별잡이는 늘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부족장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내 어찌 그걸 받겠나? 이 떠돌이를 받아 준 건 그대인데."
"내게 은혜랄 것은 없지. 그쪽을 받아 준 건 나만이 아니라 부족 전체니까."
"그럼 적어도 한 사람분의 은혜를 입은 것은 맞군. 선물은 되가져가는 것이 좋겠는데."
별잡이는 말을 잘했고, 라크락도 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라크락은 몸놀림이 재빨랐다.
별잡이와 적당히 대화를 하다가 별잡이가 안 보는 틈에 별잡이의 천막에 선물을 스리슬쩍 숨겨 두고 갔다. 별잡이가 다시 선물을 가져다 와서 이게 무어냐 하면 딱 잡아떼며 모르는 일이라 했다.
이런 작은 장난으로 여러 해를 보냈다.
라크락은 이제 다시 그런 일은 없으리란 걸 별안간 깨달았고, 가슴 한쪽이 미어졌다.
라크락이 별잡이의 천막에 들어서자 별잡이의 머리맡에 있던 약초꾼 하나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괜찮은가?"
"부족장, 어르신은... 아주 오래 살았고... 많이 지쳤습니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별잡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피곤하지."
약초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은 많은 공부를 하셨고 또 많은 이들을 가르치셨으며, 저 땅에서 또 다른 땅으로, 제가 본 적도 없는 곳을 오가며 여행을 했고, 팔 하나를 잃었고, 따돌려졌으며, 외톨이로 남기를 오래했습니다. 리자드맨은 언젠가 더 없이 피곤하고 지치는 때가 옵니다. 제가 알기로 이 병을 고칠 방법은 하나입니다."
"영원히 잠드는 것."
"예. 그것입니다."
라크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불편하지 않다면 여기 남아서..."
"난 부족장과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약초꾼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막에서 나갔다.
화톳불과 라크락, 자리에 누운 별잡이만이 남았다.
"그래, 날 보고 싶었다고."
"마지막 가는 길에 사치를 좀 부리고 싶었지."
"사치라니?"
별잡이가 말했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시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평생 욕심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덜 빼앗으려고 살고자 했지만 이제 마지막이니까. 부족 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보기로 했다네."
라크락은 껄껄 웃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 하지만 마지막 농담을 하자고 불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지. 궁금한 게 있어 그대를 불렀지. 그대 말고는 답할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일세."
"자격이라."
"부족장 라크락이 아니라, 제사장 라크락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게. 처음으로 선택받은 자,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
"질문을 듣지."
별잡이는 질문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뒤척였고, 라크락은 어찌할까 생각하다 일으켜 주기로 했다.
라크락이 부축하자 별잡이는 겨우 자리에 앉았다.
별잡이가 이제는 탁해지는 눈으로 라크락을 마주보았다.
라크락은 천천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화톳불이 탁탁 소리를 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라크락은 침묵했다.
라크락 또한 알 수 없었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있긴 했다.
검은 비늘 부족은 지난 몇 년 간 큰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고, 전사들이 죽기도 했다.
하지만 라크락은 그들이 어디로 갔을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며 '좋은 곳'으로 가길 빌었지만, 그들이 정말로 좋은 곳으로 갔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라크락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 잠들었으니 꿈을 꾸는가? 영원한 꿈을?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이해하지도 못할 행동을 하는 꿈같은 것이 영원히 이어질까? 아니면...'
라크락의 불안처럼, 별잡이도 불안해 보였다.
"그대도 우리가 영원히 악몽을 꿀 거라고 생각하나?"
"알 수 없다. 사실..."
라크락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대가 왜 내게 그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의문이군."
"난 이렇게 생각하거든."
"어떻게?"
"푸른 벌레신께서 길 잃은 우리를 거두어 주셨다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방황하는 우리를 거두어 가실 거라고 생각하는 이 믿음이... 신의 뜻과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나?"
라크락은 장고한 뒤 답을 냈다.
"아니. 별잡이, 그대 말이 맞아. 푸른 벌레신께선 우리가 길을 잃을 때 기꺼이 인도해 주실 거야. 우리가 죽은 뒤에도."
별잡이는 조금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별잡이가 질문했다.
"어떤 곳일 거라 생각하나?"
"우리가 죽으면 가는 곳 말인가?"
"그렇지. 지금처럼 우리가 앉아 있고, 신께서 저기 앉아 있고.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 같나?"
"글쎄, 그거보단 덜 따분할 것 같은데."
라크락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우선 내키면 마음껏 달릴 만한 공간이 있겠지. 발을 뻗을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나고 꼬리 끝이 기분 좋게 스치는 풀들이 난 평원으로."
"달리기엔 난 너무 늙었어."
"아마 좋아질 거야. 그 낡은 몸을 버리고 가는 것이지 않나?"
"그것도 그렇군. 나도 젊었을 땐 많이 달리고,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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