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2
라크락이 자올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자올은 손가락 하나를 꼽았다.
"우선, 신께서는 저희의 위험을 그저 두고 보시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싸운다면, 분명 신께선 부족장님을 도울 겁니다."
"그래, 나도 신을 믿는다. 하지만 저건 몇 년생 드레이크가 아니다. 잠꼬대만으로 지축을 흔드는 걸 봐선, 신께서 내 몸에 드시더라도 호각으로 싸워야 할 거다."
성운은 라크락의 정확한 판단에 놀랐지만, 더 관심이 가는 건 자올의 의견이었다.
성운은 자올의 능력치를 잠깐 확인했다.
『자올(전사 Lv.3/중재자 Lv.1)
힘 26
지능 35
사회성 28
직관력 11』
'중재자 클래스는 부족에서 신임받는다는 의미지. 알고는 있었지만 지능은 라크락보다 높아. 계속 오르는군. 제일 흥미로운 건 특수 능력치인 직관력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능력치였다.
아마 최근의 경험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졌으리라.
자올이 말했다.
"저와 전사들도 있습니다."
"나는 너희 전사들이 강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저런 괴물과의 싸움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자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장, 언덕을 떠나오기 전 쇠붙이 장인이 쇠를 굽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흠..."
라크락은 그 행동을 따라하라면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그런 작업들이 정확히 어떤 의도와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무리의 지도자인 라크락으로서는 쇠를 구울 줄 아는 쇠붙이 장인이 있으니 쇠붙이 장인의 일까지 배울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문명이 발전하며 분업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상 그게 더 무리의 지도자다운 행동이긴 했다.
'그렇지만 자올이 틀린 것도 아니야.'
성운은 관심 있게 자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족장도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는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걸 알 겁니다."
"그렇지."
"지금까지 우리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입으로 바람을 불거나, 손바닥을 흔들거나 커다란 나무껍질을 뜯어 흔들어 댔습니다. 하지만 쇠붙이 장인은 다른 방법을 쓰더군요."
"아, '풀무'라고 부르던가."
자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쇠붙이 장인에게 부탁해 그 물건을 사용해 봤는데 전보다 바람이 훨씬 많이 불어 넣으면서도 편하기도 했습니다. 왜라고 생각합니까?"
"도구를 사용하면 적은 힘으로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풀무 같은 도구가 없다. 그 도구 또한 그 장인이 오래 고민해서 만들었어."
"그렇게 정교한 도구는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상대해야 할 괴물은 저 산비탈 아래에 자고 있고, 저희는 위에 있습니다. 저희는 화구 앞에 앉은 쇠붙이 장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준비하고 행동하면 쇠붙이를 구울 수 있을 겁니다."
그 말만으로는 라크락과 전사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자올은 뒤이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말했다.
그 아이디어에 라크락과 전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응을 보냈다.
성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운은 기적을 사용해 라크락 앞으로 파란색 나비 하나를 소환했다.
'이 정도면 알아차리겠지.'
황야에서 계절도 맞지 않게 갑작스럽게 파란 나비가 나타나자, 전사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라크락은 멍하니 나비의 날갯짓을 바라보다가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라크락이 입꼬리를 올렸다.
"신께서도 허락하셨다. 자올, 그 의견대로 하지."
─┼
산비탈은 경사가 높고 험준했다.
비탈 아래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 잡은 고대 갑충을 기준으로, 대략 70도의 급한 경사가 자리한 것이다.
그 말은 라크락과 전사들이 고대 갑충과 싸울 때,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적당히 운신할 공간도 없이 맞부딪쳐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에 거대한 고대 갑충에게는 수많은 발이 있었고 이보다 높은 경사라도 어렵지 않게 올라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라크락을 제외하곤 고대 갑충 가까이 가지 않을 테니 상관없어.
계획대로라면 라크락이 접근하는 순간도, 고대 갑충의 숨통을 끊을 때뿐이었다.
라크락은 고대 갑충을 내려다보는 산등선 위에 서 있었다.
"이 바위랑, 저 바위, 그리고 저것이라면 되겠나?"
"하나하나가 놈의 덩치에 절반은 됩니다. 충분할 겁니다."
자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락이 가리킨 세 개의 바위 옆에는 전사들이 붙어 있었다.
전사들은 맨손이 아니었다.
주변에 얼마 없는 키 큰 나무를 구해 와 통째로 든 상태다.
'돌을 굴려서 뭉개 죽인다.'
정말이지, 간단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했다.
'라크락만 해도 싸운다고 하면 직접 맞붙어서 숨통을 끊는다는 것밖에 생각 못했으니까.'
반면 자올은 달랐다.
자올은 정확히 무어라 표현할지는 몰랐지만, 작은 힘으로 큰 것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개념을 자신의 지식으로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었다.
성운이 보았을 때 그 지식을 체계화하자면, '물리학'이라 부를 만했다.
'질량과 운동 에너지, 그리고 위치 에너지와 지렛대의 원리를 활용하는 셈이니까.'
그렇다고 자올이 갑자기 물리학자가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쇠붙이 장인의 기술이 자올의 직관력에 영향을 준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여러 인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겠지.'
라크락이 말했다.
"시작해라."
그 말에 자올이 팔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전사들이 산등선 위의 바위 아래 통나무를 끼고 바짝 당겼다.
바로 움직이진 않는다.
자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흡을 맞춰라. 내가 손을 올리면 당기고, 내리면 바위가 흔들리도록 둬라."
자올이 박자를 넣자 바위의 흔들림이 점차 커졌다.
이윽고 바위 하나가 완전히 넘어갔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군.'
되도록이면 세 개의 바위가 동시에 고대 갑충을 덮치는 것이 좋았다.
성운은 라크락에게 강신했다.
성운=라크락은 강대한 힘으로 막 넘어가려는 두 번째 바위를 밀어서 넘기고, 가장 커서 힘에 붙여 들리지 못한 세 번째 바위를 힘껏 밀었다.
"넘어간다!"
성운=라크락의 외침에, 그리고 바위가 흔들리며 만드는, 산세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에 고대 갑충의 머리통이 들어 올려졌다.
고대 갑충은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기민한 동작으로 몸을 바짝 일으켰다.
'그렇지만, 머리가 좋은 생물은 아니지.'
머리가 좋았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갑충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돌덩이를 위험이라기보다 도전자로 생각했다.
고대 갑충은 첫 번째 바위를 향해 달려들었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굴러오는 바위에 머리통이 틀어박혔다.
-캬오오오!
사나운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고대 갑충의 허리를 향해 이윽고 비탈에서 튕겨져 올랐다 떨어지는 두 번째 바위가 틀어박혔다.
고대 갑충 위에 실려 있던 유적은 물론, 갑충의 허리까지 완전히 꺾인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고대 갑충의 생명력은 왕성해 보였다.
고대 갑충은 나머지 바위가 자신의 정면을 향해 온다는 걸 알고 몸을 뒤틀고자 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성운=라크락은 창대를 꼬나 쥐었다.
그리고 삼단뛰기를 하며 산등선에서 도약했다.
삼백여 미터를 날아간 성운=라크락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창을 내던졌다.
-쾅!
거의 빗살과 같이 쏘아진 창날이 몸을 일으키려는 고대 갑충의 외피를 뚫고 틀어박혔다.
표면적만 따지면 작은 상처에 불과하지만, 그 찰나 동안 움직임을 묶어 둔 것으로 충분했다.
'마무리할 것도 없겠어.'
세 번째 바위가 고대 갑충의 머리통에 직격으로 꽂혔다.
「흉물 사냥:당신의 부족이 '흉물:고대 갑충'을 살해했습니다!」
─┼
라크락은 전사를 보내 무리를 불러 모았다.
거대한 괴물이 죽은 것을 보고 무리는 라크락과 전사들, 그리고 '위대한 딱정벌레 신'을 향해 함성을 내질렀다.
성운은 늘어난 신앙 자원을 기적으로 돌려서 먹을 것으로 환원했다.
중요한 것은 늘어난 신앙이 아니었다.
성운의 신성 레벨도 변함이 없다. 이때부터는 레벨업이 더디기도 하고 경험치도 많지 않다.
'하지만 이걸 위해서라도 잡고 싶긴 했지.‘
「흉물 사냥의 보상으로 '흉물의 정수'를 획득합니다.」
신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능력은 역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운이 벌레의 소영역을 가졌기 때문에 리자드맨을 배불리 먹일 굼벵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처럼, 각 신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는 자원들을 신앙을 소모해서 창조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선, 그만큼 흔하지 않은 재료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정수.'
이런 정수는 필드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니까 설정상 떠나 버린 신들이 놔두고 간 영물, 또는 흉물. 그보다 높은 단계의 흉신(凶神) 같은 강한 존재를 잡았을 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수가 있으면 '피조물'을 만들 수 있었다.
신의 피조물은 성장할 수 있고, 높은 단계에서는 '사도'나 '화신'과 같은 클래스를 얻어서 신의 의지를 대신하는 유용한 전략 무기이면서 그 존재 자체로 신의 위명을 널리 알리는 신앙 자원 생성기였다.
'초기에는 유지비가 드니까 바로 만들 지야 않겠지만.'
피조물은 자원이 준비되더라도 만들어야 하는 타이밍이 따로 있었다.
당장은 신앙 자원으로 라크락과 무리를 돕는 것이 먼저였지만, 성운은 로스트 월드에서 지원하는 '피조물 생성기' 프로그램이 여기서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시야 한편에 띄워 두었다.
'시간은 많으니 여유롭게 해도 되겠지.'
머릿속으로 첫 번째 피조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던 성운 앞으로 기대하지 않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라크락의 무리가...」
─┼
라크락은 고대 갑충의 발끝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가 퉤 하고 뱉었다.
"맛없군. 먹지 못할 것 같다."
"화로를 만들어 한번 삶거나 구워 보죠."
"흠..."
라크락은 별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
라크락은 그렇게 말하곤 고대 갑충 위를 걸어 올라갔다.
많은 리자드맨들이 고대 갑충 주변에 자리를 잡고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저 두려운 존재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올 또한 이 거수에 대해 정확히 아는 바가 없으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험합니다, 부족장."
"놈은 죽었다. 신께서 그리 알고 계시니 맞겠지."
"흠...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놈을 죽이기 전에, 놈 위에 무언가 얹혀 있는 걸 봤다. 하지만 돌덩이에 깔렸나 보군. 부서졌거나."
라크락이 고대 갑충의 허리춤에 박살 난 제단을 보고 중얼거렸다.
자올이 웃었다.
"사냥을 했는데 수확물이 없어서 섭섭하신 거군요?"
라크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의 이동을 막는 괴물을 처단하고, 또 다시 신의 위명을 드높이는데 성공했으니 그것만으로 수확이라고 해야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아쉬웠다.
"이렇게 맛이 별로일 줄은 몰랐다."
"걱정 마세요. 다르게 '조리'하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흠."
"그리고 껍데기가 단단합니다. 떼어 내서 가져가면 쓸모가 있을지도요."
"그건 괜찮군."
자올은 성큼성큼 걸어 라크락 옆으로 올라갔다.
"라크락."
"어?"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죠."
"음?"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궁금합니다."
"그게 뭐였지?"
"반려 이야기 말입니다."
라크락은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이 돌아간 곳에 돌덩이로 부서진 제단이 보였고, 그 안에 해질녘의 빛을 받아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게 뭐지?"
"말 돌리지 마십시오."
"아니, 저기 뭔가가 있다."
라크락이 손으로 가리킨 다음에야 자올의 눈에도 들어왔다.
자올은 전사들에게 명령해, 돌을 굴렸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제단의 파편 속에서 예의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냈다.
충격으로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건 황금으로 만든 서판이었다.
라크락은 황금 서판을 집어 들었다.
"자올, 이게 뭘까?"
라크락은 서판 가득히 쓰인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규칙의 그림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라크락의 무리가 '문자'를 발견했습니다!」
011화
성운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문자 발견 자체야 대수로운 건 아니야. 고대 유적은 여기저기 널렸으니까.'
문자를 '발견'하는 것과 문자를 '발명'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거대 문화권에서 한 번 발생했을 때, 그게 빠르게 전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할 때도 내 부족이나 문명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 경우는 많지는 않아.'
게다가 지금과 같은 초반부에는 더 그랬다.
이번에 라크락이 발견한 '황금 서판'도 흔해 빠진 유물이었다.
운 좋게 고대 유적이라도 찾는다면 그 시대에 쓰인 문자가 빼곡히 쌓인 서판 도서관을 발견할 수도 있다. 대체로 이 시기 문명에선 집 짓는다고 쓰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그래도 내용은 괜찮은데.'
라크락과 그 무리야 황금 서판에 쓰인 문자를 알지 못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플레이어에게는 모두 공개되는 정보였다.
『황금 서판:위대한 칼론바 제국으로 가는 길(2)
황금 판 위의 새겨진 글은 과거 '칼론바 제국'이라고 불렸던 고대 문명에 대한 소개입니다. 대체로 칼론바 제국의 위대함과 칼론바 황제에 대한 치적만 쓰여 있어 그리 읽을 만한 내용은 없지만, 단순히 고대 문명의 사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칼론바 제국의 다른 고대 유적에 대한 힌트가 쓰여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하지만 번역을 하려면 문명 수준이 한참 올라가야 해.'
게임 로스트 월드에는 고대 문명이 산적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이집트 상형 문자 해석의 틀을 만들었던 '로제타석'만큼 근대 문명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고고학자와 언어학자, 대학, 그리고 여러 문명에 대한 기반 지식, 등 다채로운 문명 발달 수준이 필요했다.
'그러니 당장은... 쓰레기나 다름없지.'
물론 황금 서판 자체는 번쩍거리는 금속 물질이므로 이 리자드맨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긴 했다.
그렇지만 금은 무른 금속이고, 당장은 철기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귀금속으로서 장식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런 종류의 공예는 다른 종족에 비해 리자드맨들에겐 낯선 것이었다.
'버리고 가려나?'
하지만 라크락은 그러지 않았다.
라크락은 황금 서판이 마음에 들었는지 킁킁거리기도 하고 맛도 보고 이미 손상된 귀퉁이를 이빨로 씹어 보기도 했다. 당연히 이빨 자국이 깊게 남았다.
"무르군."
"아마도 '금'인 것 같습니다."
"금?"
"쇠붙이 장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여러 쇠붙이를 보여 준 적 있습니다. 금은 무겁고 물러서 별 쓸모가 없지만, 대신 반들반들 잘 닦으면 빛을 반사해서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쓸모가 없잖나?"
"아, 그리고 색이 변하거나 썩지 않는다더군요. 그래서 민둥이들은 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흠. 썩지 않는다."
그런 다음 황금 서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자를 손끝으로 훑었다.
"아무튼 자올, 이건 고대인들의 물건인 것 같구나."
"예. 틀림없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이 괴물이 저 스스로 등짝에서 주조되어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럼 고대인들이 제단을 만들고 이 물건을 숨겨 놓았다는 말이지."
자올은 라크락의 말을 잠깐 생각해 보고 의도를 파악했다.
"고대인들에겐 가치가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래. 아마도 고대인들은 '썩지 않기 때문에' 금이란 걸 사용한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건 이게 뭘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여기에 왜 흠집을 냈느냐는 것이지."
그 말에 자올 또한 골똘하게 황금 서판을 들여다보았다.
"규칙이 있습니다. 여기와 여기, 여기에도 같은 모양이 있고, 이것과 이것도 같군요."
"그렇지?"
"우리 전사들의 '사냥 표식' 같은 걸까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원시적인 무리라고 하더라도 문자가 아닌 '기호' 정도는 쉽게 사용했다.
나무줄기를 엮어 길의 방향을 표시하거나, 돌을 쌓아 영역을 표시하거나.
특히나 수렵 채집 문화에서 동물의 이동 방향이나 먹거나 먹지 말아야 할 식물에 대한 지식은 세대를 이어가며 발전했다.
'물론 기록되지 못하니 그리 복잡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성운은 어렴풋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서포트한다면 라크락이 원시적인 문자를 발명해 낼 수 있을지도.'
라크락에겐 '의지' 스탯이 높았고, 이 말은 한 번 꽂힌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둘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크락 옆에 있는 자올은 '직관' 스탯이 높았다.
이미 보여 준 것과 같이 라크락이 놓칠 수 있는 지식을 잡아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신이 그 부족에게 직접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는 건 엄청난 신앙 자원을 소비해야 하지만, 그냥 암시를 주는 것 정도는 일반적인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 암시를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 허튼 비용이 나갈지도 모르지만, 모험 없는 투자는 없지.'
성운은 어떻게 라크락에게 '문자'의 개념과 그 가치에 대해 알려 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라크락은 오크들의 땅을 돌려주었다.
오크 우두머리는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며 절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가 스스로 물리쳐야 할 장애물이었다. 더 지체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여기는 본디 그대들의 땅이라고 했으니."
"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그래."
오크 우두머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작은 무리다. 그래서 더 깊은 곳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큰 짐승이 많이 살고, 더 큰 부족들이 부대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라면 충분히 강성하니 괜찮을 듯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대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을 하고 싶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살았으니 더 넓은 길과 험준하지 않은 산세를 안다. 내 아들이 길을 안내해도 되겠나?"
그 말에 라크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꾼을 더 보내라. 우리가 사냥을 하거나 음식을 구하면 그대의 아들과 짐꾼들에게 들려 보내겠다."
오크 우두머리 또한 환히 웃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지만,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 라크락."
라크락과 그 무리는 서둘러 이동했다.
다행히 자올의 '조리'는 고대 갑충 고기 일부를 먹을 만한 것으로 바꾸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몸과 내장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큼지막한 다리들은 향신료로 덮어 숯 위에 구워 내자 독한 향이 사라져 다소 밋밋한 맛으로 먹기 괜찮았다.
"조리라는 것도 괜찮군. 나도 배워야겠다. 가르쳐 주겠나?"
"물론이지요."
다만 숯이라는 자원은 한정적이었고 갑충이 라크락의 기대보다 빠르게 썩기 시작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고대 갑충 고기를 해체할 수는 없단 것이었다.
300명이 넘는 리자드맨의, 그리 많은 끼니를 보충할 수 없었기에 라크락은 걸음을 서둘렀다.
키 작은 관목과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 사이로 지나는 협곡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크 길잡이 덕분에 큰 사고 없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산세는 완만해졌고, 나무들은 점점 솟기 시작했다.
물소들은 전에 없이 푸른 잡초를 보며 허겁지겁 입을 우물거리느라 전사들이 곤혹스러워했다.
물소 떼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라크락은 멀리서 생전 처음 보는, 네발로 껑충껑충 뛰며 목이 길고, 머리에 뿔이 달린 털 짐승을 보았다.
이 털 짐승은 처음 보는 리자드맨들을 경계하는 듯 싶었다.
라크락은 저 털 짐승은 경계를 위해 앞으로 나왔고, 그 뒤로 작은 무리가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외팔의 별잡이가 말했다.
"사슴이로군."
"맛있나?"
"단 한 번 먹어 봤지만,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하지. 살이 달큼하다."
라크락은 무리에게 휴식을 명하고 전사들과 함께 사슴을 사냥했다.
라크락은 첫 번째 사냥한 사슴을 검은 바위 위에 올려 두고 신에게 바쳤고, 두 번째 사냥한 사슴을 길을 인도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오크들에게 주었다.
이후 나머지 사슴들로 무리의 배를 채웠다.
간만의 만족스런 식사에 라크락은 임시로 정한 바위 제단 앞에 앉아 황금 서판을 가져다두고 제물로 바친 사슴이 썩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라크락은 별안간 생각에 빠졌다.
'이건 썩지 않고, 저건 썩는군.'
자올의 말이 맞다면 황금 서판은 앞으로도 썩지 않을 테고, 라크락이 봐 온 바에 따르면 죽은 것은 썩어서 없어진다.
'그러고 보면 세상 많은 것들이 둘로 나뉘어져 있군. 낮과 밤. 빛과 그림자. 땅과 하늘.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먹는 자와 먹히는 것. 산 것과 죽은 것. ...남자와 여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크락은 도리질 쳤다.
'자올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지. ...대답이라.'
라크락은 죽은 사슴의 머리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미 파리 떼가 잔뜩 나앉은 사슴의 몸통은 피가 난자했고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
'죽은 것 위로 생명력으로 충만하지만 이 또한 사라질 터.'
그때 라크락의 눈에 기묘한 모습이 보였다.
벌레들이 마치 일정한 규칙에 의해, 정확히는 누군가 손을 대어 움직이는 것처럼, 배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크락이 다시 눈을 몇 번 깜짝이자 불규칙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뭐지?'
그러한 환시가 라크락의 눈앞에 몇 번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라크락은 그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낯익다 싶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벌레들의 움직임은 황금 서판 위에 고대인들이 찍어 낸 표식이랑 닮았군.'
라크락은 사실은 모든 게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낮과 밤 사이에는 어스름과 새벽이 있고, 빛과 그림자 사이를 잘 들여다보면 불분명한 경계가 존재했다. 땅은 산으로 높이 솟았고 하늘은 정확히 어디부터라고 부르기 힘들다. 쫓는 자는 쫓기는 자가 되기도 했으며, 먹는 자는 먹히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라크락은 몇 가지 생각하며 나뭇가지로 바닥에 끄적였다.
처음에는 황금 서판의 글자를 베꼈다가, 다음으로는 문자도 기호도 아닌 낙서를 써 내려가고, 이내 손으로 바닥을 지워 가며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이 황금 서판에서 썩지 않는 건 황금이 아니야. 진정으로 썩지 않는 것은...'
라크락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그어 대며, 제단 가까이 불을 지피고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이른 새벽, 자올은 눈을 뜨자 눈앞에 라크락이 있는 것을 보았다.
"부족장, 무슨 일입니까."
"보여 줄 것이 있다."
"보여 줄 것이라니요?"
자올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지만, 라크락은 다소 들뜬 모습이었기에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내가 황금 서판과 제단의 썩어가는 사슴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는데, 아무래도 신께서 내게 은총을 내리신 듯하다. 갑자기 생각이 팍 하고 들었는데, 황금 서판에서 썩지 않는 건 황금이 아닌 것이지. 진정으로 썩지 않는 게 뭐냐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라크락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뭇가지를 들었다.
"이걸 잘 봐라."
라크락은 우선 나뭇가지로 삼각형과 작대기 두 개를 그렸다.
△
┴
"이건 나다."
"이게 라크락입니까?"
"아, 아니..."
"부족장님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남자 리자드맨이다."
"흠. 계속 해 보십시오."
그다음 라크락은 역삼각형과 작대기 두 개를 그렸다.
▽
┴
"이건 너다."
"여자 리자드맨이란 말이군요."
"어, 맞아."
"정확히는 저라는 부분에서 여성이며 리자드맨이라는 부분이군요?"
"그래."
그다음 라크락은 둘 사이에 선 두 개를 그렸다.
△─▽
┴─┴
라크락은 선 두 개를 그리고서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자올이 먼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뭡니까?"
"이건... 서로의 반려가 된다는 뜻이다."
라크락이 말했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자올은 별다른 기색 없이 라크락이 그린 '문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라크락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아, 그림을 그렸다.
○
자올이 말했다.
"라크락,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
─┼
「라크락의 무리가 '문자'를 발명했습니다!」
성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밖으로 내색을 해도 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발전을 거치려면 꽤 많은 세대가 지나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게임 초반.
라크락은 제법 강성한 무리의 지도자고, 이런 문자 활용에 의욕적일 터였다.
그리고 성운이 기대한대로, 험하지 않은 산세에 습하고 들풀이 가득한 땅으로 오자 리자드맨들은 금새 의욕을 고취하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활력이 생겼다.
게다가 물소 떼는 낯선 환경이긴 하지만 배를 가득 채운 이후로는 성격이 온순해져서 전사들이 다루기도 쉬워졌다.
라크락과 자올은 서로의 반려가 되기로 하였고, 이 일은 부족에서 축제로 삼았다.
일종의 사냥 대회가 원시적인 결혼 제의를 대신했고, 라크락은 가장 큰 사슴을 자신의 신부에게 바쳐 반려가 될 자격을 또 다시 증명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성운은 이 게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로스트 월드에 엄청나게 많은 랜덤 인카운터와 부정적 이벤트가 있었던 이유는, 역시 실제 세계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다음 만날 이벤트는... 이미 예견되어 있기도 했고.'
결혼식 이후, 라크락은 주변 숲 속의 위험을 확인하기 위해 전사들을 이리저리 정찰 보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에 대한 목격이 있었지만 당장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라크락이 더 신경 쓰는 것은 다른 부족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라크락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역시나 주변에 위협이 없지 않은지 끊임없이 정찰을 하는 또 다른 부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라크락은 그 발자국에 대해 몰랐지만, 별잡이는 알고 있었다.
"개구리 발자국이군".
012화
"개구리라고?"
라크락도 개구리라면 잘 알고 있었다.
미끈미끈하고 헤엄을 잘 치고, 폴짝 뛰어오르며, 어떤 놈들은 독이 있다.
'신께서 축복을 내린 이후로는 독이 있는 놈들도 잘 먹을 수 있었지만.'
연못에도 꽤나 살고 있었고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이 끝날 무렵 땅을 파고 나오는 것들을 잘 집어 먹곤 했다.
발자국 모양을 보니 닮긴 했지만 크기가 달랐다.
"프로그맨. 두 발로 걷는 족속이지."
"말을 할 줄 아나?"
"우리만큼."
프로그맨의 서식지는 강가나 호수로 제한적인 만큼 넓은 활동 반경을 가진 리자드맨이라고 해도 만나기 힘들었다.
라크락은 수풀을 뒤집으며 발자국 개수를 세었다.
"하나가 아니군. 꽤 많아. 다섯?"
"놈들도 정찰을 하는가 보군."
"호전적인가?"
"먼저 터전을 잡고 있었으니 그럴지도. 하지만 꼭 그렇진 않소. 다른 두 발로 걷는 족속과 비슷하지. 나쁜 놈도 있고, 좋은 놈도 있지."
정찰을 마친 라크락과 별잡이는 임시로 가꾼 마을로 돌아가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상 내정을 관리하는 자올과 전사 중 으뜸인 유르가 포함된 회의였다.
"프로그맨이란 종족이 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지 확신할 수 없고, 당장은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니 좋은 놈들인지 나쁜 놈들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놈들이라 장담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각자 의견을 말해 봐라."
유르가 말했다.
"저는 부족장님 의견대로 하고 싶습니다."
자올이 한숨을 쉬었다.
"유르 너는 사냥 기술은 따라올 이가 없지만 지혜를 더 갖춰야겠구나."
"무슨 말입니까, 자올?"
"우리는 어차피 부족장님 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부족장님의 말이 항상 옳을 수는 없지. 안 그러냐?"
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를 묶어 둘 때 부족장님 매듭보다 제 매듭이 더 낫긴 했죠. 실제로 부족장님도 이후로 제 매듭을 쓰셨고."
그 말에 라크락은 콧김을 흥 하고 뿜었다.
자올이 살짝 웃고 말했다.
"우리는 부족장님 의견을 존중할 테니, 부족장님이 먼저 의견을 꺼내시면 우리는 달리 생각하지 않겠지. 그러니 부족장님이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할 기회를 주신 거다. 그래야지 더 많은 의견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별잡이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유르도 이제야 깨달은 듯 작은 탄성을 냈다.
"아, 알겠습니다. 사실 말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뭐지?"
"딱히 말씀하시지 않고 계셔서 가만히 있었는데, 상대에 대해 더 정확한 전력을 알면 좋을 거 같습니다. 제가 정찰대를 꾸려 더 깊숙하게 가면 어떨까요?"
자올은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반대야."
"왭니까?"
"이 땅은 위험할지 어떨지 몰라도 풍족한 곳이다."
유르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했지만 라크락과 별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프로그맨들이 우리와 비슷한 종족이라면, 우리가 풍족한 환경에서 지낸 만큼이나 강성하겠지. 우리 무리는 300이 넘지만, 상대는 더 클 수도 있다. 상대가 우리 무리보다 훨씬 클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상대가 적대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고 가정을 해야 하지."
유르는 자올의 말을 반쯤 수긍했다.
"하지만 저희에겐 신께서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놈들의 능력이 저희와 비등하다면, 저희 뼈의 전사가 더 강할 겁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다. 더 강하더라도, 상대의 숫자가 더 많다면 싸움에 유리하지 못하다."
라크락이 자올의 말에 동의했다.
"전사들은 무리를 지키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상대를 모른 상태로 있을 수도 없다. 그럼 깊이 보내는 대신 넓게 보내자. 놈들을 만나고 직접 들여다보기보다 어디까지 지역을 점하고 있는지, 또 다른 놈들은 없는지, 다른 위험한 요소는 없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무리를 지켜야 하니 한 번에 너무 많이, 너무 멀리 보내지 않아야 한다. 정찰 방법은 유르, 니가 전사들과 회의를 해서 내일까지 정한 다음 내게 설명해라."
"알겠습니다, 부족장."
부족에 있는 뼈의 전사는 현재 모두 마흔 명 정도로, 기존 무리에 있던 전사들 말고도 푸른 거죽 중 성운이 직접 축복을 내린 이들도 있었다.
무리의 크기에 비하면 전사 계급의 숫자가 많은 편이지만, 직업의 분화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유동적이기도 했다. 전사 개개인을 잘 알고 있는 유르에게 일을 맡기는 건 성운이 보기에도 합리적이었다.
다음으로 의견을 제시한 건 자올이었다.
"부족장, 상대를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상대가 우리를 관찰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자올. 좋은 생각이 있나?"
자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모르는 만큼, 나쁜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좋습니다. 만약, 저들이 우리를 작고 약한 부족이라 업신여긴다면 당장에 공격해 올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그러니 우리는 저들을 겉보기로 속여 무리의 숫자가 많다고 과장을 해야 합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곳엔 나무가 많으니 불을 피우기 쉽습니다. 밤에도 불 지킴이를 여럿 두어 당장은 쓸모없더라도 더 많은 불을 피우면 저들은 저희 무리의 규모를 배로 생각할 겁니다. 밤에 경계를 서기도 좋겠지요. 전사들이 정찰을 나가는 것도 염두에 두고요."
다른 이들도 자올의 의견에 동의했다.
경계를 더 세우면 낮에 피곤한 이들이 좀 더 많아지겠지만, 그 정도의 역량을 소비하는 것치고는 이익이 컸다.
"그 말대로 하자. 하지만 경계를 서는 인원들은 불만 없이 공평하게 일을 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별잡이가 말했다.
"난 별다른 의견은 아니고."
"부담 없이 말해도 좋다."
"집을 짓는 방식을 좀 바꿨으면 좋겠소."
현재 라크락의 무리는 땅을 판 다음 공간을 만들고 그 위로 나무 뼈대를 세워 올린 다음 더 얇은 나뭇가지나 나뭇잎. 갈대 등으로 비가 새지 않도록 덮어 두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땅을 파 두면 보온이 잘되기 때문에 이전 푸른 거죽 무리에서부터 답습하던 방식이었다.
"이유는?"
"이 땅은 전에 있던 곳보다 따뜻하오. 그리고 땅 아래 식물 뿌리가 많고, 습하지. 게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비가 전보다 자주 올 거요."
라크락은 눈앞의 외팔이, 별잡이이자 길잡이, 현명하게 늙은 리자드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별잡이는 본래는 달랐던 비늘색도 이제 라크락처럼 검게 변하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덕일 것이다.
"좋다. 그대는 내 이름을 빌려 무리가 집을 짓는 걸 감독하라."
별잡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새로운 터전에서의 며칠이 지났다.
물소들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고 풍부한 먹이에 만족하는 듯했다. 덕분에 물소치기에 일손이 덜 갔고 무리의 수렵 채집에도 탄력이 붙었다.
리자드맨들 또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착실히 만들어 나갔다.
라크락은 자신이 얼마 전 발견한 '문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라크락은 정찰에 나갔던 전사들이 돌아오면, 언제나 마을 가운데 있는 크고 넓적한 바위 위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쪽으로 가니 해가 떠오를 쯤 출발해서, 해가 하늘 가운데 있을 때 작은 강에 도착했습니다."
"어디서 어디로 흐르지?
"해가 뜨는 방향으로 기준으로 하면... 이렇게... 사선으로 흐릅니다."
"얼마나 넓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 나무 정도 됩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고, 직접 창날에 망치를 들고 넓적한 바위 위에다 강의 모양을 표시했다.
바위 위에는 중심에 마을을, 거리에 따라 나름의 축척을 적용해 주변의 지형이 드러나 있었다.
정확히는 사냥 표식에서 발전된 '지도'인 셈이었지만, 문자처럼 영구적인 기록을 한다는 아이디어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다.
이 기록은 실제로 쓸모가 있어서, 라크락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몇 개 조로 나눠진 전사들이 바위 위에 새롭게 기록된 정보를 보고 주변 지형을 더 자세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기록과 문자의 효용에 대해 무리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생활이 안정되니 무리에 여가 시간이 생긴 덕이기도 했다.
라크락은 무리하게 일을 지시하지 않는 대신에 여러 일을 할 때 문자를 사용하도록 권했다.
이를테면 날마다 채집한 과일을 작성해 두면, 누가 일을 덜하고 누가 일을 더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일러 둔 것이다.
자올은 걱정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손이 느리고 둔한 이들이 책망받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른걸."
실제로는 기록을 시작하자 누가 누구를 책망하기 전에 부지런한 이들은 적당히 일손을 줄였고, 부족했던 이들은 채집량을 늘렸다.
라크락이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라크락은 스스로 예상한 것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기억에 의존할 때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때문에 그 사이에 누군가는 게으르고 누군가는 성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명백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지 못해 감정의 골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다들 주의한다.'
아직 게임 시스템을 통해 드러날 정도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성운은 라크락이 가진 아이디어의 씨앗을 알아차렸다.
단순한 발견은 의미가 없다.
기록 문화, 문자 문화가 시작되면 그 이전과는 다른 더 다채로운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중요성을 깨닫는 것부터가 첫걸음이라 할 만했다.
'생각보다 더 잘해 주고 있어.'
사실 성운은 최근 라크락의 무리에 통 관심을 쏟지 못했다.
현재 성운에 속한다고 할 만한 부족은 라크락의 무리 밖에 없긴 하지만,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도 그렇듯 신이 하는 일이 부족을 관리하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성운은 세 개나 되는 거대한 벌레 떼를 가지고 있었다.
이 벌레 떼는 단순히 성운이 조종할 수 있다기보다, 각각이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하나는 서쪽에 있는 메뚜기 떼로, 라크락과 그 무리가 간접적인 이득을 얻도록 만든 무리였다.
그리고 이 메뚜기 떼는 라크락의 무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또는 불필요한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요소를 방해하고 지워 내는데 주력했다.
다른 하나는 라크락과 그 무리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동떨어진 남쪽의 숲 속이었다.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는 일명 '소영역 경험치 파밍'을 위한 작업 방식이 있었는데, 이곳은 그것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는 성운은 온갖 종류의 곤충을 창조하고 창궐시켜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둥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현재 성운이 가진 '벌레의 소영역'은 3레벨을 넘어 4레벨에 도달한 상태였다. 덕분에 새로운 스킬도 얻었다.
물론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가 가깝게 있다면 이런 종류의 파밍을 눈뜨고 볼 리 없지만, 성운의 시작 지점은 비교적 외딴 반도에 자리 잡은 덕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아직 발견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플레이어가 적은 지역에서 시작한 이점을 어떻게든 챙겨야 하니까.'
주변에 플레이어가 있으면 푸른 거죽과 라크락의 무리가 만났을 때처럼 문명 충돌 이벤트로 얻는 기술적 이득이 많기 때문에 성운이 앞서가고 있다기보다 손실을 보충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아직은 말이지.'
세 번째 벌레 떼 또한 라크락과 그 무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두 번째의 '둥지'와는 달리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성운이 최근에 창조한 벌레 떼로, 성운이 이 땅으로 라크락의 무리를 유도한 이유가 있었다.
'흉물이 나타났을 때는 좀 놀랐었지.'
고대 갑충은 예외 상황이었지만 자올 덕분에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이후 며칠 사이의 라크락의 지도력도 훌륭했다.
'덕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어.'
사실 라크락이 조우하게 될 프로그맨 부족은 성운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부족이었다.
'바로 첫 부족을 선택할 때 라크락의 무리와 두고 고민했던 그 프로그맨 부족.'
당시에도 500명에 이르는 강성한 부족이었기에 성운으로서도 간간이 지켜보았다. 필요하다면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부족으로 삼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프로그맨 부족은 로스트 월드에서도 가끔 보이는 '특별한 이벤트'가 걸려 있었다.
'덕분에 두 번째나 세 번째 부족으로 삼기에는 미묘해졌지.'
현재 프로그맨 부족은 예의 이벤트 덕분에 1천 500명에 이르는 큰 부족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성운에겐 이런 큰 부족과 라크락의 무리를 조우하도록 둔 이유가 있었다.
'성장하기 위해선 부족과 부족은 교류하고 부닥쳐야 하니까.'
성운은 두 부족의 첫 번째 조우를 지켜보았다.
─┼
"부족장! 프로그맨들이 저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마을 가운데 움막에서 전사 하나의 전갈을 받은 라크락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연락을 전할 때는 숫자가 얼마인지, 무장을 했는지, 얼마나 빠르게 함께 전달하라고."
"죄송합니다. 무리는 모두 여섯... 아니 일곱이고, 모두 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그게..."
라크락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놀랐지만, 직접 보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장은 했으나 걸어온다는 건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말. 숫자도 적다.'
라크락은 무장한 전사 열을 이끌고 프로그맨들이 마을에 도달하기 전에 만나기로 결정했다.
전사의 숫자가 열인 까닭은 안전을 위해 더 많은 숫자를 데려가되, 대화에 있어 너무 위압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숲 공터에서 두 부족이 만났다.
전사들이 프로그맨을 관찰하고 그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 프로그맨도 완전 낯설지는 않았다.
피부는 미끈거리고 체구는 리자드맨들 보다 다소 작다.
커다란 눈에 눈꺼풀이 투명한 것이 특징이고, 목이 짧고 단단해 보이는 체구가 평균적이다.
'그리고 저건···'
라크락은 전사가 전달한 '특이사항'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여섯 명의 프로그맨, 그리고 그 옆에는 회갈색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도 함께 있었다.
013화
"나는 위대한 부족장 아울로이의 아들 슈넨. 우리는 너희와 싸울 생각이 없다, 리자드맨."
"부족장 라크락이다. 우리 또한 무기를 들 생각이 없다."
두 사람이 말을 트자 경계를 하던 두 부족 모두 편한 자세로 돌아갔다.
라크락은 자신을 슈넨이라고 밝힌 프로그맨을 살펴보았다.
무리 중 덩치가 큰 편인 데다, 붉은 염료로 염색된 화려한 끈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부족장의 아들이라면 나름 예의를 갖춘 셈이군.'
물론 부족장이 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라크락으로서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너희가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그것을 일러 주러 왔다."
라크락으로선 예상한 말이었다.
저 말 자체를 전면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해야 더 유리하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가? 이 땅 전체가 너희의 영역은 아닐텐데. 이 주변엔 주인이 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표식도 없었다. 우리는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과하겠다."
"흠."
라크락이 깔끔하게 사과를 하자 슈넨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라크락이 선수를 쳤다.
"너희의 영역이었다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다. 이곳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지 결정하진 못했으나 당분간은 지낼 자리가 없어 이곳에 지내야 한다."
"아 그건···"
"위대한 부족장 아울로이의 아들 슈넨, 나는 프로그맨을 처음 보지만, 그대는 강단이 있는 전사처럼 보인다. 충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자격이 있지 않은가?"
슈넨은 뭔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수긍해 버렸다.
"그렇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을 이끌 사람이다. 그대와 그대의 부족에게 우리 영역을 양보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결정할 수 있지."
라크락은 슈넨 옆에 있던 덩치 큰 전사 하나와가 슈넨을 향해 힐끗거리는 걸 보았다.
마땅찮은 눈빛이었다.
'부족장이 제 아들이 못미더워 직접 붙인 전사일 테지. 하지만 리자드맨 쪽은 아직 의아하군.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라크락이 말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 와서 환대를 받는 게 좋겠군. 두 부족이 갈등 없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
"아, 그럼···"
슈넨이 나서려할 때 덩치 큰 전사 쪽이 슈넨의 귀에다 무어라 말했다.
슈넨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건 힘들겠군. 고마운 말이나 아직 상호 간의 신뢰가 그리 쌓이진 않았기 때문에."
"그런가? 우리 리자드맨은 은혜를 입고 그냥 보낼 수 없는데. 그럼 우리가 가진 음식이라도 여기서 나눠 먹으면 어떨지?"
슈넨은 덩치 큰 전사를 돌아보았고, 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겠군. 우리도 가진 음식이 있으니 나눠 먹지.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봐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리자드맨을 아주 좋아한다. 그렇지 않나 오웬?"
"물론이지."
대답한 것은 라크락이 조심스럽게 의식하고 있던 예의 회갈색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이었다.
라크락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관계인지, 어떤 의도로 함께 왔는지 정확히 알아보려면 내가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걸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이 들통나면 상대는 그걸 이용할 것이다.'
라크락은 전사들에게 불을 지피고 음식을 준비하라 이르면서 슈넨에게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이 주변의 땅이 그대 부족의 영역이라는 걸 믿겠지만, 그 근거가 궁금하군."
"흠, 좋다. 여기 장식 끈에 매달린 깃털이 보이나?"
슈넨은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앞섶에 매달린 붉은 장식 털을 가리켰다.
몇 개 달리지 않았는데도 깃털은 굉장히 커서 슈넨의 가슴을 펑퍼짐하게 가릴 정도였다.
라크락이 보기에도 굉장히 컸다.
"이건 이 주변 숲에 살고 있는 코카트리스의 깃털이다."
"코카트리스?"
"두 발로 뛰어다니는 거대한 새다. 키가... 저 나무의 두 번째 가지 정도 되지."
대략 3미터가 넘는 정도.
꽤나 위험한 생물일 것이다.
"깃털을 좀 더 자세히 봐도 되겠나?"
"물론."
라크락은 깃털을 자세히 살폈다.
허언이 섞였을지언정, 이 정도 깃털을 가진 새라면 그 정도 키는 가질 만했다.
게다가 라크락은 이 정도 크기의 깃털은 아니지만, 전사들이 커다란 깃털을 몇 개 발견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럼 아마 이 붉은 깃은 코카트리스의 장식털이나 화려한 부분이겠군. 적어도 코카트리스에 대한 것은 믿을 만한 정보다.'
슈넨이 말했다.
"코카트리스는 덩치가 클 뿐만 아니라 독도 가지고 있지. 위험한 녀석이다. 우리도 놈을 만나면 항상 죽이진 못하고 겨우 쫓아낼 때가 많지. 놈들은 상당히 빠르고 행동반경이 넓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변까지 정찰을 나온다."
"그럼 우리가 아직 놈을 만나지 못한 것도 너희 덕분이군. 고맙다. 그런데 코카트리스는 어떻게 대처하지?"
"놈은 키가 커서 창이 꽤 길어도 가까이선 대적하기 힘들다. 투창을 던지려고 해도 너무 재빠르고, 돌을 던져도 깃털에 보호를 받는다. 보통 드러난 피부 위로 '활'과 '화살'을 써야 하지."
"활과 화살?"
라크락은 새로운 무기의 이름에 관심을 가졌다.
"혹시 그 물건인가?"
"활을 처음 보나?"
"흠, 비슷하게 생긴 물건은 본 적이 있는데."
라크락이 말하는 것은 쇠붙이 장인이 가지고 있던 활대형 풀무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장력을 이용한 활의 본격적인 사용 전에도 유사한 물건의 사용은 있었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활과 그런 물건들은 쓸모와 생김새가 달랐다.
애초에 나무의 수종과 목재의 절대량이 부족한 곳에서 자란 리자드맨들은 활을 처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무기지? 투석처럼 돌을 던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라크락이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자 슈넨은 으스댔다.
"어떻게 쓰는지 보여 줘야겠군. 보자... 오웬."
"불렀나?"
"다른 이들이 바쁘니 부탁 좀 하지. 활쏘기 연습을 할 건데 적당한 나무 판을 저쪽에 세워 주겠나?"
"그렇게 하지."
라크락은 부족장의 아들 슈넨과 리자드맨 오웬 사이의 미묘한 권력 관계를 보았다.
'부탁을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심부름꾼 같군. 하지만 부족장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상대적으로 심부름꾼 같겠지.'
라크락은 별말 없이 오웬이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슈넨의 활쏘기 연습을 보았다.
슈넨이 가진 것은 나무 활로, 프로그맨의 신체 구조상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무는 충분히 장력을 만들어 낼 정도로 튼튼했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시위도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매여 있었다.
슈넨이 먹인 화살이 통 하고 쏘아져 나가자 과녁의 가운데 명중했다.
"오호. 대단하군."
라크락은 감탄하면서도 프로그맨과 싸웠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검토했다.
'세기로 보아 우리 전사들의 투창이 더 강하다. 하지만 이 활은 화살을 여럿가지고 다닐 수 있고, 투창 보다 정확해 보인다. 내킨다면 더 빠르게 쏠 수도 있고. 가져야 하는 무기다.'
슈넨이 말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를 배우지. 나는 부족 내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렇군. 나도 한번 사용해 봐도 되겠나?"
"물론이지. 처음이니 힘들겠지만."
슈넨의 말대로였다.
힘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슈넨은 활 초보자가 겪을 문제를 알고 자신은 물론 다른 전사들도 멀찍이 물렸다.
라크락이 화살을 옆으로 튕기거나, 바닥에 화살을 떨굴 때마다 슈넨은 적당한 조언을 했고 라크락은 몇 대를 쏘고 나서야 과녁 앞에 화살 한 대를 떨굴 수 있었다.
"처음은 늘 어려운 법이지."
라크락은 콧김을 흥 내뿜고 화살을 주우러 갔다.
그러자 슈넨이 오웬에게 말했다.
"뭐 해? 화살 어서 주워 오지 않고."
그 말에 오웬이 달려가자 라크락이 말했다.
"아니, 내가 쐈으니 직접 주우러 가지."
라크락은 그렇게 말하곤 바닥에 있던 화살을 하나 집었다.
슈넨은 그러라는 듯 으쓱하곤, 식사를 준비 중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크락은 화살을 하나 더 집으며 오웬을 향해 다가갔다.
'드디어 둘이서 대화를 할 수 있겠군.'
라크락은 과녁 앞으로 다가가서 오웬에게 말했다.
"이름이 오웬이라고 했나?"
"예? 아. 예."
오웬은 라크락에 대한 태도를 정확히 하지 못한 듯 당황했다.
'왜 당황하지? 이상한 태도다.'
라크락이 캐물었다.
"어째서 리자드맨이 프로그맨과 함께 있지?"
"그건 리자드맨과 프로그맨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죠. 저희는 서로 다른 종족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라크락은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에 의아했다.
종족이 다르면 생활 습관이 다르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라크락의 생각에 프로그맨을 그렇게 느끼진 않았지만, 어떤 종족은 생리적인 단계에서 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공동체는 나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왜지?"
"두 종족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된다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라크락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오웬은 마치 준비한 듯 말했다.
"리자드맨은 프로그맨에게 보호를 받는 대신, 프로그맨들이 물속에서 생활할 때 불편한 일들을 대신 해 줍니다. 프로그맨들은 물 밖에서 너무 오래 생활할 수 없거든요. 과일을 따거나 나무를 오르거나 하는 일도 프로그맨보다 리자드맨이 더 잘합니다. 반면에 리자드맨은 물속에서 나는 물고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상부상조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라크락에겐 이상한 부분이 밟혔다.
"음식을 나누는 건 좋다. 하지만 리자드맨에게 보호는 필요 없다. 리자드맨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있다."
오웬은 깜짝 놀란 것 같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코카트리스 이야기를 들으셨잖습니까? 이 숲은 위험합니다. 아울로이의 프로그맨은 큰 부족입니다. 저희는 프로그맨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라크락은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슬슬 슈넨의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가지. 방금한 대화는 잊어라. 나는 활쏘기를 잘하는 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예...? ...예."
"그럼 아무 요령이나 말해 봐라."
"...저는 활을 쏠 줄 모릅니다."
라크락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그럼 넌 전사가 아니군. 왜 전사 무리에 왜 전사가 아닌 이가 끼어 있는 거지?"
오웬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웬은 대신 활쏘기 요령을 말했다.
"...하, 하지만 얻어들은 이야기는 있습니다. 마지막 시위를 놓기 전엔 호흡을 참고 표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알겠다. 고맙다."
라크락은 오웬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슈넨의 활쏘기 실력을 칭찬하며 활과 화살, 그리고 활쏘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득의양양해진 슈넨은 활을 만드는데 어떤 종류의 나무가 들어가는지에 대해 말하다가, 결국 슈넨을 주시하던 덩치 큰 전사에게 제지당했다.
"그쯤 하시지요, 슈넨."
"아, 오보이. 괜찮지 않나? 활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안다고 해도 금세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야. 우리 활 제작 장인들도 오래 수련했지만 좋은 활을 만들기 위해선 실패를 거듭해야 하지."
"그래도 우리는 이들에게 충분히 베풀었습니다."
오보이라고 불린 전사는 슈넨 다음으로 화려한 장식을 두르고 있었다.
라크락은 이 오보이라는 프로그맨 전사가 아마도 아울로이라 불리는 부족장의 심복이리라 생각했다.
'제일 주의해야 할 대상이군.'
014화
두 무리는 이후 한담을 하며 식사를 했다.
한담 내용 중에는 슈넨이 리자드맨 오웬을 소개하며, 사실은 프로그맨 부족과 리자드맨이 함께 상부상조하고 있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프로그맨들이 환하게 동조하고 리자드맨 전사들과 친밀감을 보이는 터라, 라크락은 먼저 캐묻지 않았다면 오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뻔했다.
하지만 오웬이 라크락에게 그랬던 것처럼, 슈넨도 준비한 것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라크락의 의심을 더 키웠다.
'확실히 알아봐야겠다. 프로그맨의 속셈이 무엇인지. 프로그맨들과 리자드맨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놈들은 뭔가 숨기고 있어.'
라크락은 식사를 마치며 다음 만남을 제의했다.
이런 종류의 부족 간 만남이 그러하듯, 교환할 물건이나 음식을 가지고 만나 나누고 친밀감을 더하는 것이다.
슈넨 또한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그대 부족은 이제 터전에 자리 잡았을 텐데, 그리 바꿀 물건이 있는가?"
"우리는 물소를 데리고 있지."
완전히 의외의 말이었는지, 슈넨은 혀를 약간 내 빼 보였다. 프로그맨에게 있어 크게 놀랐다는 뜻이었다.
"뭐? 물소라고? 한 번 물소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있긴 한데···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하긴 했지만 맛이 좋았지."
"우리가 가진 건 살아 있는 물소다. 원한다면 활 몇 자루랑 바꿔 줄 수도 있지."
"허어... 살아 있는 물소라고? 그게 정말이라면야..."
라크락은 슈넨이 침을 꿀떡 삼키는 것을 보고 다음 만남이 어렵지 않을 거라는 걸 파악했다. 오보이는 활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럼 다음엔 우리가 좀 더 가까이 찾아가도록 하지."
"아, 그럼..."
흔쾌히 수락하려던 슈넨 옆에 또 오보이가 방해했다.
"여기로 하시지요, 슈넨. 여긴 넓은데다 시야가 충분히 트여 있고 서로가 경계하기 적합합니다."
"그, 그런가? 그럼 그냥 여기서 다시 보는 걸로."
"흠,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다."
두 부족은 언제 만날지 정한 뒤 헤어졌다.
라크락은 돌아가는 프로그맨들 사이로 오웬이 자신을 몇 번인가 힐끗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뭔가가 있다.'
─┼
몇 시간 뒤, 아울로이의 프로그맨이 자리 잡은 호수 변.
작은 모래사장 위에 리자드맨 오웬이 쓰러졌다."너, 그 리자드맨 부족장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아울로이의 아들 슈넨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사 오보이가 오웬의 턱을 걷어찼다.
컥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던 오웬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벼, 별 이야기 없었습니다. 활을 잘 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활은 정말 굉장한 무기라고 치켜세우더군요."
"그래서?"
"그러면서 활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프로그맨들은 잘 알려 줄 것 같지 않다면서요."
"흠. 또?"
"저는 프로그맨들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런 걸 함부로 알려줄 수 없다고 했죠. 그러더니 활을 잘 쏘는 방법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오보이는 오웬을 발로 툭 걷어차며 말했다.
"넌 활 쏘는 방법을 모르잖아?"
"그, 그렇죠. 그래서 활 쏘는 방법도 알려 줄 수 없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활을 배우는 건 대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고요. 열매 주머니 하나라도 내놓으면 금세 실력이 좋아지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는데, 당장 가진 건 없다면서 아쉬워하더군요."
"약삭빠른 놈."
슈넨이 오웬을 향해 껄껄 웃었다.
"그쯤 해 둬도 될 것 같다, 오보이."
"예, 슈넨. 제 생각에도 그렇군요."
슈넨은 모래를 털고 일어나는 오웬을 향해 말했다.
"오웬."
"...예, 주인님."
"이번 일에 너의 역할이 크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슈넨은 호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웬의 시선도 따라갔다.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수풀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그 섬에는 몇 개의 움막이 있고, 프로그맨 전사들이 교대로 삼엄한 감시를 하고 있다. 그 움막 안에는 어린 리자드맨들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 리자드맨 중에는 오웬의 자식도 있었다.
슈넨이 말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웬?"
"예?"
슈넨이 혀로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머지않아 우리의 '머리 둘 달린 흉신'께서 어린 제물을 요구하실 거다. 그럼 우리는 너희 리자드맨을 바칠 테지. 그때 너의 자식이 머릿수에 들지 않기 위해선 새로운 제물이 필요했을 텐데, 그렇게나 많은 새 제물이 생겼으니 말이야."
그 말에 오웬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행운이고말고요. 어떻게든 그들을 속이겠습니다."
슈넨은 오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마라, 오웬. 아직 놈들이 얼마나 큰 무리인지, 얼마나 강한지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지만, 정면 대결을 하면 우리는 필요 이상의 피해를 보겠지. 네가 놈들을 적당한 함정에 빠트릴 수만 있다면 나머진 우리 전사들이 해낼 거다."
"물론 믿고 있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대답하면서 오웬은 이를 꽉 깨물었다.
현재 프로그맨의 부족의 숫자는 1500명.
그리고 프로그맨에게 노예로 부려지는 회갈색 리자드맨의 숫자는 200명.
숫자의 차이와 별개로 리자드맨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보살필 보모 노릇을 하는 리자드맨들까지 인질로 섬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리자드맨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에겐 신이 있다.‘
─┼
회갈색 리자드맨들 또한 처음에는 이 근방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황야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남쪽으로부터 여러 세력에 치이며 보금자리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친 회갈색 리자드맨 무리를 따뜻하게 받아 주었던 것이 이 아울로이의 프로그맨이었다.
'피부색은커녕 종족이 다른데도 우리를 환대해 줬지.'
물론, 그건 완전한 속임수였다.
그들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호의를 베풀고, 회갈색 리자드맨들을 살갑게 받아들였다.
리자드맨들은 그들에 감화되어 점점 기껍게 지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두 부족이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하자고 '형제의 의식'을 하기로 했던 날이었다.
회갈색 리자드맨 부족장과 전사들은 프로그맨들과 함께 카약을 타고 섬 가운데로 들어가서 연회를 즐겼다.
그들은 전혀 경계심 없이 아울로이가 건네는 술에 완전히 취해 버렸고, 곯아떨어진 순간 프로그맨 전사들에 의해 모두 붙잡혔다.
프로그맨들에게는 신이 있었고, 신은 산 제물을 원했다.
그리고 그 산 제물은 동물이 아닌 사람, 즉 두 발로 걷는 의식 있는 존재를 원했다.
때문에 부족장과 전사들이 산 제물로 바쳐졌다.
다른 회갈색 리자드맨들은 호수 너머에서, 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많은 프로그맨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찬양했고, 이윽고 신의 존재가 물속에서 드러났다.
그 괴물은 회갈색 리자드맨의 부족장과 전사들을 차례대로 씹어 먹었고, 맛없고 내키지 않는 부위는 되뱉어 내 버렸다.
끔찍한 몰골이 된 부족장과 전사를 보면서도 리자드맨들은 공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오웬도 있었다.
─┼
오웬은 슈넨이 말한 대로 약삭빨랐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웬은 늙고 거대한 아울로이보다, 그 아들인 슈넨에게 접근하는 쪽이 유리할 걸 알았다.
전사는 아니었으나 부족에서 장차 현명한 사람으로 불렸을 오웬은 굴종을 배웠다.
그럼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은 여린 살을 좋아했다.
늙은 리자드맨을 바치면 화풀이로 죽일 뿐, 당장 다음 제물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부렸고, 리자드맨은 가죽이 두껍다며 프로그맨을 몰래 집어삼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프로그맨들이 리자드맨들을 매질하고 급하게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
'머리 둘 달린 흉신이 프로그맨을 지배하고, 프로그맨들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건 바뀌지 않는다.'
오웬의 생각에, 바뀌지 않는 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프로그맨들에게 예속된 이후로 회갈색 리자드맨의 숫자는 급속도로 줄고 있었다.
제물로 바쳐지거나, 맞아 죽거나.
도망간 이들이 생기면 그 숫자만큼 또 제물로 바쳐졌다.
언젠가는 오웬 자신의 자식도 바쳐지리라.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버틴 보람이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리자드맨 부족은 그 숫자가 정확히 파악되진 않지만 적지 않은 듯했다.
'물론 프로그맨들에 대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프로그맨들 전사들의 정보에 의하면 많게는 600명 정도.
오웬은 프로그맨과 새로운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들을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저 숫자라면 전사의 숫자에서 밀리는 건 물론이고,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 모두가 먼저 제물이 된다면 훨씬 긴 시간 살아남을 수 있어.'
전투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활과 화살도 모르는 먼 땅에서 온 야만스런 부족이다.
게다가 프로그맨들은 더 비밀스러운 무기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부족장과 전사들이 제대로 싸웠더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건 정해져 있다.'
오웬이 슈넨에게 사근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슈넨 님."
"뭐냐?"
"아울로이 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흠, 가려움증이 조금 더 도지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혈기는 왕성하시다."
"이걸 한번 써 보시죠."
슈넨은 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뭐냐?"
"채집꾼 하나가 가져온 가려움에 잘 듣는 약입니다."
슈넨은 의심스러워하다가 내용물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슈넨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가려움에 잘 듣는 다섯 갈래로 나뉜 약초가 한 웅큼이나 들어 있었다.
분명 오웬이 채집꾼들을 닦달하거나 훔쳐 낸 것이리라.
"훌륭하구나, 오웬. 당분간 아버지가 역정을 내는 걸 덜 듣겠어."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오보이가 슈넨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도 좀 나눠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도 등에 그 가려움 병이 도진 모양입니다."
"흠, 아버지는 온몸에 펴 발라야 할 텐데..."
그 말에 오웬이 또 나무줄기로 짠 바구니에서 약초를 한 웅큼 꺼냈다.
"오보이 님, 가려움 병 초기엔 이 약초로 충분할 듯한데..."
"녀석, 준비를 잘해 뒀구나. 잘 쓰도록 하지."
오보이는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통째로 빼앗아 제 팔에 걸었다.
오웬은 그저 하하 웃었다.
오웬은 굴종을 배운 뒤 체념도 함께 배웠다.
오웬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
"어때, 이번에는?"
"놈들이 쏘는 물건의 반절 정도는 날아가는군요."
"턱도 없군."
라크락은 불만스럽게 뿌리 식물을 질겅질겅 씹었다.
라크락과 자올이 마을 변두리에 함께 있었다.
자올 앞에는 마을에서 직접 만든 활과 화살이 나란히 있었다.
"활시위에 쓰인 정확한 재료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저번에 보니 생물 힘줄을 찢어서 다시 엮은 것 같은데."
"우리도 물소로 했잖아."
"연습으로 한 마리였죠. 몇 마리 더 잡으면 더 나아질 겁니다."
"안 돼. 너무 많이 교환했어."
"그럼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게 한계입니다. 코카트리스 힘줄이라도 쓴 거라면 저흰 구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라크락은 식물을 꿀떡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맨과 처음 조우한 뒤로부터 수 십일이 지났다.
그동안 라크락의 무리와 프로그맨들은 네 번을 더 만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꽤 풍성하게 교환할 수 있었다.
라크락의 부족은 그 사이 수소 두 마리를 넘겼는데, 라크락이 봤을 때 수소 두 마리 가치의 네 배에서 여섯 배 가량의 공예품과 식량으로 이득을 봤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활만큼은 넘겨주지 않았지. 속 좁은 놈들.'
똑똑하고 눈 밝은 이들이 물건을 교환할 때 활을 들여다보고 빌려보는 것으로 흉내를 내려 했으나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는 알아내야지.'
그리고 오늘, 다섯 번째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은 물소를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 대신 거대한 괴물의 껍데기 조각을 하나 가져갈 생각이었다.
껍데기 조각은 라크락에게 성운이 강신했을 때만 상처를 낼 수 있었을 뿐, 똑같은 철이나 다른 도구로 두들겨도 흠집을 낼 수 없다는 걸 알아냈다.
이 신비한 껍데기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런 괴물을 죽여 봤다고 위세를 전할 수 있었다.
'놈들이 못 믿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경계는 하겠지.'
사실 라크락에게 활은 두 번째 문제였다.
활은 분명 배워 두면 유용한 도구가 되겠지만, 진짜 문제는 어디까지나 거대한 프로그맨 부족이다.
이들은 충분히 가까워졌는데도, 마을을 보여 주지 않았다.
라크락의 무리가 먼저 마을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라크락의 생각에, 상대적으로 프로그맨 부족이 더 큰 무리이므로 양보를 먼저 해야 하는 것도 그쪽이었다.
'오웬 놈의 태도와 같다. 뭔가 더러운 수작을 벌이려는 게 틀림없어. 문제는 그게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거지.'
프로그맨과 교류를 시작했지만 라크락은 언제나 경계 태세는 최상으로 유지했다.
프로그맨들은 함부로 라크락의 무리를 정찰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오늘은 뭔가 성과를 내야겠다. 그 가려움 병에 잘 듣는다는 약은 많이 뜯어 놨던가?"
"예. 약초꾼 하나가 풍성하게 나는 곳을 알았다더군요."
"잘됐군."
라크락이 듣자하니 프로그맨 부족은 현재 가려움 병이 도져 있다는데, 다행히 라크락의 무리에는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흠, 이 또한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은총일지도 모르지.'
015화
"놈들을 꾀어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오웬."
"죄송합니다."
오웬은 슈넨에게 굽실거렸다.
프로그맨 전사들은 라크락과의 다섯 번째 만남을 위해 물건을 등에 묶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가죽이 검고 물소 머리뼈를 뒤집어 쓴 이 리자드맨들은 경계심이 특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먹던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건가?"
"...예. 하하."
오웬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놈이 활만 보여 주면 갓난아이처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걸 보셨잖습니까?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슈넨은 다소 퉁명스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을 모두 노예로 부릴 수 있다면 활 한 자루 정도야 대단한 희생은 아니지. 게다가 그 활 한 자루도 다시 우리 손에 들어올 테니까."
"물론이죠."
오웬은 다섯 번의 만남 동안 공을 오래 들였다고 생각했다.
라크락이라고 불리는 그 젊은 리자드맨은 꽤나 강한 전사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족장인지는 모르겠다. 싸움꾼으로 훌륭하다고 해서 좋은 부족장이 될 수는 없어. 그러지 못하다는 걸 나는 이미 겪어 알고 있다.'
좋은 무기, 새로운 무기인 활에 대한 집착은 전사에겐 좋은 미덕이지만 부족장에게는 아니었다.
'라크락이라는 사내는 머리 둘 달린 흉신은커녕 프로그맨들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슈넨이 말했다.
"활은 한 자루면 되나?"
"예, 아마도... 그, 그래도 놈이 협상을 요구할지 모르니 넉넉히 두 자루는 더 빌려주십사 하는데..."
슈넨은 인상을 썼다.
"겨우 네 번을 만났는데 놈의 활쏘기 실력이 비상해진 걸 봤나?"
"...타고난 전사 같긴 합니다."
"뭐, 날 따라오려면 멀었지만. 저번에 내기 활쏘기를 하자고 했을 때는 큰일 날 뻔했지. 내 생각엔 놈이 우리 활을 흉내 내서 만들어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러니 세 자루는 위험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오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제가 놈들을 꾀어내기만 한다면 몇 자루를 주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놈들이 가진 무기가 고스란히 다시 저희 것이 될 텐데요."
"그래. 너의 역할이 크다. 놈은 우리를 완전히 신용하고 있지 않아. 하지만 같은 리자드맨인 너에게 만큼은 살갑게 굴더군."
"예, 그렇더군요. 아무래도 프로그맨을 보는 건 처음이라 낯선 모양이겠죠."
"그만큼 경험이 적은 놈이란 거지. ...흠."
그렇게 대화를 끝내려던 오웬은 슈넨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캐물어야 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되도록 이번에 놈들에게 많은 정보를 캐내고, 할 수 있다면 그 부족장 놈과 전사들을 우리 마을에 의심 없이 초대할 수 있어야 할 거다."
"왜 그럽니까?"
슈넨은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오웬은 최대한 비굴한 자세로 슈넨의 말을 기다렸다.
'프로그맨들 사이에서만 도는 정보다. 꼭 들어야 해.'
오웬은 주변에 자신의 말을 막을 오보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보이는 선두에서 오늘도 리자드맨 놈들이 물소를 가져오면 좋겠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너 정도라면 들어도 되겠지. 내 아버지, 아울로이 부족장이 산 제물 의식을 서둘러 치르고자 하신다."
"예?"
오웬은 깜짝 놀랐다.
산 제물 의식까지는 기간이 꽤 남아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급하게 의식을 한 번 치렀기 때문이다.
라크락의 무리에 대한 머리 둘 달린 흉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였는데, 제물의 가치에 비해 딱히 소득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 장로들의 병환이 심해지고 있다."
"병환이라니요? 가려움 병 말입니까?"
"...그래."
"그냥 가려운 것이 아닙니까?"
슈넨은 이례적으로 천천히, 진지하게 말했다.
"어제도 사제 하나가 가려움 병으로 죽었다. 너희 리자드맨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려움 병에 걸리면 끈끈한 흰색 점막이 피부를 덮기 시작하고, 그 부위가 가려워진다. 아무리 닦아 내도 점막이 사라지지 않아. 점막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일정 이상 점막으로 덮이면 숨을 쉬기 힘들어진다. 그러다 죽는다."
오웬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 말을 들었다.
기뻐할 수도, 놀랄 수도 없었다.
'슈넨은 날 시험하고 있다. 가려움 병이 죽을병이라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래서 몇몇 프로그맨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군. 모든 게 이해된다. 이미 죽은 프로그맨들도 있겠지.'
오웬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런 병이었다면 제가 채집꾼들을 더 닦달했을 겁니다."
"흥, 그놈들이 뭘 알겠느냐?"
"그리고 이 이야기는 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요. 혈기왕성한 리자드맨들 중엔 프로그맨을 우습게 생각하는 녀석도 나올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원히 숨길 수는 없겠지..."
오웬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야기가 퍼지더라도 리자드맨들을 진정시킬 방법은 있습니다. 그 병이 리자드맨에게도 옮을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진짜로 옮지 않을 텐데?"
"으깨면 흰 거품이 나는 풀, 가려워지는 풀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적당히 속이고 연기하면 될 겁니다."
"하, 오웬, 넌 정말 훌륭한..."
슈넨은 오웬을 칭찬하려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입을 웅얼거렸다.
그는 곧 오웬을 가리킬 말을 생각해 냈다.
"협잡꾼이군."
"...감사합니다."
슈넨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아무튼, 아버지의 가려움 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시니 누구보다 병을 오래 이겨 내시고 계시지만 슬슬 힘에 부치시는 것 같군. 머리 둘 달린 흉신께 제물을 바치고 병을 치료하길 바라신다."
"그럼...?"
"지난번과 달리 대규모의 산 제물을 필요로 하지. 이번에는 꽤 많이 필요할 거다."
오웬은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글쎄? 모르겠군. 될 때까지 하실지도. 섬 가운데 움막에 애들이 제법 들어찼는데 제물로 통 쓰지 않는다고 아까워하시기도 하셨지."
슈넨은 어차피 버려질 리자드맨들의 목숨에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웬의 등골로는 소름이 돋았다.
'될 때까지라고? 그 빌어먹을 머리 둘 달린 흉신은 무능하다. 그저 거대한 덩치로 패악을 부리며 협박하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에 불과해. 우리가 너희의 노예인 것처럼 너희도 그 괴물의 노예일 뿐이다. 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애초에 걸리지 않게 했겠지!'
하지만 오웬은 그런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제물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군요."
"그래."
"이번에 놈들의 정보를 캐내고 마을로 초대해 보겠습니다."
"기대하마."
─┼
리자드맨 전사들과 프로그맨 전사들은 이제 얼굴을 익히고 있었기에 다섯 번째 만남 또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새로 물물교환 물건을 지고 온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흥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잡꾼 오웬은 저 리자드맨들에게 건질 만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부족장 라크락이 어떻게 단속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놈들은 물건 거래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말하지 않는다.'
오웬은 라크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놈은 다르지.'
라크락과의 교환은, 솔직히 오웬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참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인지, 풍성하게 모아온 약초를 넘겨주며 제발 활 한 자루만 달라고 사정을 한 것이다.
'활 세 자루도 필요 없었군.'
이에 대해 오웬이 한 일은 라크락이 슈넨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물물교환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떨어져 서로 이야기하자고 한 것 정도였다.
슈넨은 찬성하고 오보이는 반대했지만, 라크락의 태도가 드러나자 오보이도 결국엔 찬성했다.
그렇게 라크락과 오웬, 둘만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자 라크락이 말했다.
"이 약초들로도 부족한가?"
"흠, 조, 조금 부족한 거 같군요. 이 활을 드리면 금세 비슷한 활을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재료를 모르는데."
"그쪽에도 장인들이 있으니 흉내 내실 수는 있겠죠."
"...흠, 좋아."
활을 보며 눈동자를 빛내던 라크락이 별안간 오웬을 바라보았다.
"더 원하는 게 뭐지?"
오웬은 라크락의 바뀐 태도를 곧장 인식하지 못했다.
단지 오웬은 준비한 말을 할 때가 왔다고만 생각했다.
"믿음입니다, 라크락."
"믿음?"
"예."
오웬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저희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은 프로그맨들과 부족을 합치기 전에 형제의 의식을 지냈습니다. 그 의식을 지내기 전에는 서로 부대끼며 좋은 물건들을 나누었고, 그 이전에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의 부족과 저희는 어떱니까? 좋은 물건을 나누고 있긴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죠."
"그렇지."
"이건 그대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겨우 활 한 자루에도 그만큼 많은 약초를 내놓는 거고요."
라크락은 다소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꼈다.
"그 말도 맞군. 믿음을 주려면 내가 뭘 해야 하지?"
"그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대들은 어디에서 왔고 얼마나 있으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음, 우리가 그 믿음이라는 걸 주면, 그쪽에서도 주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라크락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오웬의 등 뒤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작게 웃었다.
오웬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파란 나비' 한 마리가 퍼덕거리며 날고 있었다.
'아직 날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는데, 나비라니? 애초에 이 주변에 저런 나비가 있었던가? 이상하군.'
하지만 파란 나비를 본 뒤 라크락은 좀 더 오웬에게 협조적으로 변했다.
라크락은 오웬의 질문에 답했다.
무리는 350명 정도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적었고, 해당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살아 있는 물소가 스무 마리나 있다고 했다.
'슈넨이 알면 가지고 싶어서 미치겠군.'
전사의 숫자는 무리의 숫자에 비해 꽤 많은 서른 명이라고 했다. 과장이 있거나 전사의 질에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좀 더 늙은이나 어린이들을 포함시켰을지도. 그래 봤자 80명의 전사를 가진 프로그맨과는 비교해 봤자 크지 않은 전력이다. 몇 명 부풀려 봤자지. 놈들은 활도 쏠 줄 몰라.'
오웬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프로그맨에 대한 가짜 정보를 흘렸다.
라크락이 너무 겁을 먹지 않도록 숫자를 줄여서 말하고, 사실 활은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활도 많지 않고, 그래서 교환하기 까다롭다고도 말했다. 활을 쏠 줄 아는 전사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프로그맨들은 온순한 종족입니다. 저나 당신처럼 강인하지 못하죠."
"그런가?"
라크락의 의문에 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믿음을 주고받고 나면, 슈넨은 당신을 마을로 초대하고 싶어 했습니다. 늘 손님 대접을 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마음을 열지 않아 아쉬워했죠."
"오호."
"어떻습니까? 생각이 있으십니까?"
"전사들을 대동해도 괜찮나?"
"물론이죠. 모두 데려와도 좋습니다."
아니, 프로그맨들에겐 모두 오는 쪽이 좋았다.
라크락의 마을과 프로그맨들의 마을은 거리가 꽤 멀었다.
상대의 마을에 전사들이 남아 있다면, 리자드맨들을 꽤 많이 놓치게 될 터.
'이번에 이 검은 가죽의 리자드맨들을 모두 다 데려와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좋겠지.'
라크락이 말했다.
"그럼 그 부분은 슈넨과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그 초대를 감사하는 의미로 내가 뭘 좀 더 주려고 하는데, 괜찮나?"
"더 주다니요?"
"'믿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라크락은 작은 바위에 앉고서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와서 이것 좀 보지."
오웬은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016화
그러자 라크락은 흙바닥에 이것저것 자신과 자올, 그리고 부족의 여러 사람들이 만들고 공유하는 문자들을 쓰고 그 뜻을 알려 주었다.
이 원시 문자는 그리 많지 않은 데다 간단해서, 머리가 좋은 오웬은 금세 다 외웠다.
'단순한 낙서나... 사냥 표식은 아니군. 이것과 저것을 더하면 다른 뜻이 된다. 마치 말을 하듯이.'
라크락은 조용히 듣고 설명을 듣고 있던 오웬에게 말했다.
"재밌지 않나? 나랑 우리 부족이 같이 만든 거야."
"...재미있군요.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쓸모는 확실히 있지. 우리는 이걸 '문자'라고 부르는데, 이 문자라는 건 알기 전까지는 무슨 뜻인지 모르지."
"왜 당연한 소릴..."
말을 하던 오웬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방금 이걸 배운 나와 라크락은 알지만, 다른 프로그맨들은 모른다는 말이군. 설마 이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은 이걸 알려 주기 위해서 나와 단 둘이 만나고 싶어 한 건가? ...왜?'
라크락이, 마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믿음' 때문이다, 오웬."
"......"
"앞서 말한 이야기들, 우리가 믿음을 위해 나누었던 대화는 너와 나 사이의 믿음이 아니라 나 라크락의 리자드맨 부족과 아울라이라는 프로그맨 부족 사이의 믿음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 믿음을 주고받고 싶은 것은 나와 너다."
"...하하.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저는 프로그맨과 당신들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들 사이에서 그저..."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오늘 믿음을 나누었지만, 나는 프로그맨을 믿지 않는다. 네가 말한 프로그맨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네가 말하지 않고 숨긴 이야기가 더 많을 거라 믿는다."
"호, 혹시 그럼 오늘 했던 이야기는 모두 거짓입니까?"
"아니. 내 부족과 내 이름, 모든 걸 걸고 사실이다."
라크락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고, 눈을 본 오웬은 이 자존심 강한 전사이자 부족장이 오로지 진실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오웬 자신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리라.
라크락은 표정을 풀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믿음이다."
"그게 왜 중요하다는 겁니까?"
"너는 고통받는 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제가요?"
"그래."
오웬은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더듬었다.
리자드맨은 주둥이가 긴 만큼 표정이 그렇게 다양한 종족은 아니다.
라크락이 말했다.
"나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 나도, 내 부족도, 소외받고 내쫓긴 이들에 대해서 잘 안다. 나는 너에게 그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아."
엉겁결에 탄성을 내질렀던 오웬이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이들만이 그렇게 말한다."
둘 사이에 침묵이 있었다.
라크락은 가볍게 나뭇가지를 제 손에서 돌리다가, 말했다.
"자, 몇 가지 더 남았다. 이건 '아니', 또는 '거절'이라는 뜻이다."
라크락은 바닥에 문자를 썼다.
X
"그리고 이건 '거짓말', '가짜'란 뜻이지."
라크락이 손을 움직이자 X 아래에 또 하나의 문자가 쓰였다.
√
오웬은 눈을 껌뻑였다.
"이 둘을 가깝게 붙이면... '아니라는 게 거짓말이다', 즉 '진짜'라는 말이군요."
"오, 잠깐.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너 똑똑하군?"
"...그리고 아까 썼던 것 말인데..."
오웬은 라크락에게 문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몇 개 알려 줬고, 라크락은 그게 상당히 가치 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오웬은 이상하게 이 순간이 기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맨들에게 지배당하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지적인 몰입의 순간이었다.
슬기로운 이들이 새로운 문명의 가치를 찾아낼 때 느끼는 그 감각이었다.
오웬이 아이디어를 내뱉는 와중에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라크락은 인기척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유익한 시간이었군. 저기 오보이가 어슬렁거리는데, 슬슬 돌아갈까?"
"...예."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라크락의 등을 보고 망설이다가 겨우 한 마디 뱉었다.
"더 할 말은 없습니까?"
"그래. 난 우리 사이의 믿음이 오갔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미 징조를 보았지."
"징조 말입니까?"
라크락은 말없이 이를 보이며 웃을 뿐이었다.
오웬은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뭔가 있음을 느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수고했다, 오웬."
"아, 아닙니다."
"겨우 활 한 자루를 주고 얻은 성과로는 굉장하지."
오웬은 슈넨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라크락은 자신의 부족과 마을에 대한 정보를 거의 다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지만, 라크락 자신이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마을에 슈넨의 전사 몇 명을 초대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의심 많은 오보이가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프로그맨 전사들은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진 못했지만, 라크락이 말한 정보는 모두 다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놈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믿을 줄이야. 너의 공이 크구나."
"감사합니다."
"어디 한 번 원하는 걸 말해 봐라."
오웬은 침을 꿀떡 삼켰다.
"그... 일전에 약조하신 걸 기억하시는지..."
"약조? 뭐였지?"
오웬은 눈앞의 기억력 나쁜 프로그맨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제가 큰일을 해내게 되면, 제 아이를 섬에서 빼내 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신다고..."
"아아, 그거. 흠, 그래. 그러지."
슈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보이가 반대하겠지만 내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리자드맨들에게도 말을 잘 듣고, 아니. 잘 듣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봉사할 줄 알면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했지."
"감, 감사합니다."
오웬은 오랜 꿈이 이루어지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라크락을 생각했다.
라크락과, 라크락이 보여 주었던 문자에 대해서.
그리고 문자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부족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프로그맨과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오웬의 생각에, 그 서른 명의 전사들조차도 머리 둘 달린 흉신의 비늘에 작은 상처 하나 입히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괴물을 잡아 본 적 있다고 말했지. 하지만 진짜 괴물을 보며 사는 이들에겐 그런 허풍은 소용없다.'
물물교환 때 라크락은 아주 크고 단단한 껍데기를 가져오긴 했지만, 프로그맨들은 아주 작은 값어치를 쳐주었고, 라크락은 실망스러워하며 교환에 응하지 않았다.
'어디서 귀한 물건이라며 떠돌이가 교환을 요구했을지도 모르지. 프로그맨들에게도 그런 건 많아. 팔뚝만 한 송곳니나 식지 않는 가죽 같은 것. 신기한 물건이지만 대단한 가치는 없지...'
다시 말해 오웬의 생각에, 라크락은 오웬이 처음 추측한 것보다 더 생각이 깊긴 하지만, 여전히 어리숙한 부족장이었다.
'더 의심하고 더 경계했어야지. 나 같은 걸 믿어서는 안 되는 거야.'
오웬은 스스로 마음을 굳혔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걸 믿어서는 안 됐다고.'
하지만 밤중의 오웬은 호수 가운데의 섬을 바라보며,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왜 날 믿으려고 하지? 난 협잡꾼에 불과한데.'
그리고 바닥에 문자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
라크락과 전사들이 오는 날, 슈넨은 기분이 좋았다.
"어서 오게, 친구."
"초대해 줘서 고맙군. 이번 교류를 통해서 우리 두 부족의 우애가 깊어졌으면 해."
"나도 동감이군."
슈넨은 다른 전사들을 이끌고 프로그맨 부족의 마을 앞까지 라크락과 전사들을 마중하러 나갔다.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오보이가 계속해서 마중을 나가는 전사들 숫자를 서른 명으로 맞춰야 한다고 해서 조금 마뜩잖은 구석이 있었지만, 다행히 라크락은 이미 슈넨 자신에 대한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라크락이 말했다.
"아, 혹시 우리가 무장을 하고 온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대들이 코카트리스라는 존재에 대해 너무 겁을 줘서, 우리 전사들 중 몇몇이 꼭 무장을 해야 한다는 거야. 오는 길에 그런 걸 만나면 곤란하지 않겠나?"
"아, 이해한다네."
슈넨은 속으로 웃었다.
'멍청한 놈. 그깟 창으로는 코카트리스를 어쩔 수 없다고 일러 주었거늘.'
그리고 프로그맨들은 활을 쓰니 놈들이 창을 서너 자루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투창은 겨우 서너 번 밖에 못 던지지만 화살은 프로그맨 하나가 열 대는 들고 다닌다.
'연회장 가운데서 술에 잔뜩 취하게 해 주마. 그다음 등에 독화살을 박아 주지.'
지금까지 리자드맨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프로그맨 전사들은 허리에 화살통 말고도 비밀 무기를 차고 다녔다.
그건 바로 살아 있는 독 개구리.
독 개구리 등에서 신경독을 분비했고 화살을 쏘기 전 등의 독을 바르는 것만으로 강한 마비 효과를 냈다.
슈넨은 눈앞의 덩치 큰 검은 리자드맨이 곧 맥없이 쓰러지는 상상을 하자 기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만족하시겠군.'
슈넨은 오웬에게도 제대로 사실을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프로그맨 부족은 호수를 끼고 크게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프로그맨들이 리자드맨을 둘러싸고 감시하며 공존하고 있는 하위 구역으로, 리자드맨들과 전사나 장로가 아닌 하위 계급의 프로그맨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물로 쓰일 리자드맨 아이들과 그걸 감시하는 프로그맨들이 있는 섬 지역.
그리고 마지막은 아울로이와 장로들, 전사 계급과 그 가족이 살고 있는 호수의 반대편이었다.
'병이 하위 계급 프로그맨들에게 많이 퍼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은 아버지만이 문제가 아니니.'
가려움 병으로 알려진, 하얀 진액이 몸에서 묻어나는 질병은 상위 계급 마을 도처에 퍼져 있었다.
이미 죽은 이들도 많다.
이 병만으로 전사가 이미 열이나 죽은 데다, 다른 열 명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이 병은 이상하게 젊고 건강한 이들에게 더 치명적인 것 같았다.
실질적으로 프로그맨들이 두 개의 마을로 나눠 살지 않았다면 남은 리자드맨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슈넨은 혹시라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라크락과 그 전사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라크락은 마을 한 가운데 연회장으로 초대받으며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오웬은 어디 있지?"
"오웬에겐 연회 준비를 맡겼지... 어디 보자... 저기 있군. 오웬! 오웬! 허, 멀어서 들리지 않나 보군. 뭘 하고 있는 거지?"
"바닥에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알겠군. 어디에 앉을지 자리를 정해 두고 있는 모양이야. 저기 피어오르는 연기와 음식 냄새를 맡아 보게. 가서 자리에 앉지. 오웬과 인사도 하고."
"그러지."
"나는 잠시 음식이 잘 준비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가겠네."
그 말에 슈넨이 떠나고, 라크락은 전사들을 이끌고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프로그맨 전사 열 명과 오웬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웬."
"오셨습니까? 라크락?"
"그래."
"제가 '문자'를 쓴 자리가 앉아 계실 자리입니다. 라크락 님과 전사분들이 앉으면 두 부족의 평화와 우애를 다지는 즐거운 연회가 시작될 겁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웬이 각 자리마다 그려 놓은 문자를 보았다.
√
√
√
...
라크락이 뒤를 보며 말했다.
"유르."
"예, 부족장."
"시작해라."
"옙."
유르는 허리춤에 가볍게 꽂아 넣은 창대 하나를 빼냈다.
너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연회장에서 리자드맨들을 둘러싸고 있던 프로그맨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유르가 말했다.
"뼈의 전사들, 프로그맨들을 모두 죽여라."
유르의 손에서 날카로운 투창이 번개처럼 날아가 프로그맨 전사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017화
벌레의 축복을 받은 라크락의 전사들 서른 명은 숨을 한 번 들이킬 시간에 열 명의 프로그맨 전사들을 죽였다.
연회를 준비하던 리자드맨들과 프로그맨들이 순식간에 일어난 피바다에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르가 말했다.
"혼란에 뛰어들지 마라. 침착하게 무기를 든 전사들을 찾아 먼저 죽여라."
전사 중 하나가 물었다.
"회갈색 리자드맨들이 공격하면 어쩝니까?"
"되도록 제압하되, 여의치 않으면 죽여라. 어쩔 수 없다."
"예."
라크락은, 프로그맨들이 리자드맨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을 가능성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때문에 유르와 전사들에게도 충분히 유의를 할 것을 당부해 둔 상태였다.
라크락은 멀리서 함성을 외치며 달려드는 프로그맨 전사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인가?'
라크락은 이미 첫 번째 만남 이후에 프로그맨들과의 싸움을 각오한 상태였다.
라크락은 그때 이미 오웬에게서 그 얼굴을 알아차렸다.
'고통받는 이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본 것은 라크락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굴종을 읽었고, 누군가는 패배를 읽었다.
숨기고 연기한다고 속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같은 리자드맨이라서 읽을 수 있는 것일지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프로그맨은 이미 리자드맨의 적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때와 방법이었다.
라크락만큼이나 프로그맨들도 경계심이 심했다.
겉보기에는 물물교환 자리에서 화기애애했지만, 부족의 정찰대끼리는 신경전이 치열했다.
라크락은 자올과 유르, 별잡이 같은 이들은 물론, 믿을 만한 이들을 단속해서 방법을 강구했다.
때문에 다섯 번이나 되는 물물교환의 시간을 가지며 기회를 엿보았는데, 결과적으로 방법은 단순했다.
"부족장, 놈들이 원하는 대로 빠져 줍시다."
"그러다 위험에 처하면?"
"저희에겐 신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부족장은 그분에게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들면 그분께서도 저지하실 겁니다. 그리고 옳은 길로 가려하거든..."
"...도와주시겠지."
그 말에 유르도 동의했다.
"그리고 저희 전사들은 강합니다. 하나하나가 놈들 셋은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놈들에겐 활이 있는데도?"
"예."
"유르, 자신감만으로 화살을 막을 수는 없다."
유르는 가로저었다.
"화살이 날래더라도 저희가 머리에 두른 물소 머리뼈를 꿰뚫지는 못할 겁니다."
"머리통이야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 맞지 않을 거다. 보다 중한 몸은 어찌 지키려고?"
"저건 어떻습니까?"
유르가 그때 가리킨 것은, 라크락이 가져온 갑충의 외피였다.
"창을 두 손으로 드는 게 제일 좋지만, 저희 전사는 이제 신에게 축복을 받아 한 손으로도 놈들의 맨들맨들한 피부를 찢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한 손으로 저걸 들고 몸을 막으면 됩니다."
이른바 갑충의 외피를 방패로 쓰자는 의견이었다.
갑충의 몸에서 비교적 작은 부분을 떼어 왔기 때문에 몸 전체를 가릴 수준은 아니고, 방패를 들면 상체의 절반 정도를 가릴 수준은 되었다.
라크락은 처음엔 그걸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유르와 창을 맞댄 다음 투창을 막아 내는 걸 확인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좀 더 잘 들 수 있으면 좋겠군. 손으로 잡을 나무를 대거나 손목에 묶거나."
"예, 맞습니다."
"...그래도 전사들이 기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께서 어떤 방법으로 날 도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리하게 되더라도, 나는 우리 전사들의 손실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옆에 있던 자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위태로운 승리가 아닌 결정적인 승리를 손에 넣어야죠."
라크락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올을 바라보았다.
"전사 무리를 나눌까? 하지만 우리 정찰대의 정보가 맞다면 놈들은 우리보다 두 배는 되는 전사들이 있을 거다. 전사 무리를 나누면 그만큼 열세일 테지. 우리에겐 다른 전사들은 없고."
"전사가 아니더라도... 싸울 녀석이 있긴 하죠."
─┼
프로그맨들의 비명이 쏟아졌다.
리자드맨들의 화살 대책은 고대 갑충 방패만이 아니었다.
라크락은 오웬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럴 땐 움직여야 한다.'
라크락은 오웬을 멍청히 있게 두지 않았다.
"오웬! 부탁이 있다."
"예, 예?"
"여기 연회장 주변에 마련된 모닥불을 집어 들고 집을 모두 불태워라."
"예?"
연회장은 마을 중심에 있었고, 감시를 위해 대부분 리자드맨들의 집으로 지어져 있기도 했다.
게다가 잘 타는 건조한 집은 모두 리자드맨들의 것이었다.
프로그맨들은 대체로 진흙집을 선호했다.
"어쩔 수 없다. 놈들이 멀리서 화살을 쏜다면 시야를 방해하는 쪽이 좋다. 마른 집은 불태우면 연기가 나지. 그리고 그게 다른 신호도 될 테고..."
"하지만..."
"서둘러라! 필요하다면 리자드맨들을 설득해라. 저 검은 리자드맨들이 프로그맨들로부터 우릴 구해 줄 거라고 말해라!"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라크락은 손을 쓰지도 않고, 꼬리로 튕겨 냈다.
"놈들은 우리 적수가 되지 못한다. 우리 전사들은 프로그맨들을 상대해야 하니 바쁘다.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
오웬은 불구덩이에서 타고 있는 커다란 장작을 꺼내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웬은 첫 번째 집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불을 놓았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골목으로 쏟아졌다.
프로그맨 전사들인가 싶어 질겁했던 오웬은, 그들이 같은 리자드맨인 걸 알았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뭐 하는 거야? 오웬?"
"너희는?"
"오보이 님이 검은 리자드맨들을 죽이라고 했어. 마을 연회장으로 가는 중이야."
여위고 마른 불쌍한 리자드맨들이 손에 무기도 되지 않을 나무 곤봉을 들고 있었다.
오웬이 말했다.
"나는 집을 불태울 거야."
"뭐라고?"
"슈넨 님의 명령인가?"
"아니. 저기 저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이 부탁했어."
"그게 무슨..."
오웬이 말했다.
"저들이 프로그맨들을 박살 낼 거야."
"...뭐라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그 누구도 머리 둘 달린 흉신을 죽일 수는 없다고."
그 말에 오웬의 마음도 출렁거렸다.
'라크락이 그걸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오웬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건 몰라. 하지만 나는 저들을 돕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저들이 지면? 그때는 어쩔 건데? 저들을 도왔다는 걸 알면 슈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오웬이 그 말에 큭큭 웃었다.
"멍청하긴."
"왜 웃어?"
"우리는 우리의 집을 불태우는 거야. 프로그맨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불태우는데 뭐라고 하겠어?"
"왜 집을..."
"그래야만 프로그맨들이 화살을 제대로 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에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이 침묵했다.
오웬은 이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 사이에서 가장 똑똑했다.
이 협잡꾼이 모든 것을 걸었다면, 자신들 또한 따라서 걸어 볼 만하다는 걸 직감했다.
리자드맨들의 곤봉 끝에 불이 붙었다.
프로그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
아울로이의 심복이자 슈넨의 친구, 프로그맨 전사 오보이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마을은 불타고 있었고, 연회장에 있던 전사들에겐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연회장에 열 명, 연회장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보낸 게 다섯. 이놈들은 죽었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슈넨에게 열다섯 명, 나에게 열 명.'
오보이는 상위 계급 마을에 있는 열댓 명과 섬을 지키는 네댓 명을 어서 하위 계급 마을로 보내라고 심부름꾼을 보내 두었다.
오보이는 현재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 외곽에 있었다.
'놈들이 갑자기 공격해 온 건 틀림없다. 놈들은 모두 서른. 우리의 총 숫자가 더 많더라도, 한 번에 습격하지 않으면 불리하다. 그럼 각개 격파당할 거야.'
하지만 오보이는 상황이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회장에 있던 열 명의 전사들이 호락호락 당했을 리도 없거니와, 다른 회갈색 가죽 리자드맨들에게 포위하라고 보내었다.
'놈들은 발이 묶여 있겠지. 회갈색 가죽의 리자드맨들은 그저 시간만 벌어 주면 된다. 슈넨, 나 그리고 상위 계급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전사들과 섬을 지키던 놈들 모두를 모으면... 마흔 다섯은 된다. 마을이 불타고 있어 활쏘기가 까다롭지만, 어차피 한 발씩만 맞추면 되니까.'
오보이는 초조해하지 않고 전사들을 독려했다.
"모두 독 개구리는 챙겼나?"
"예!"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모른다. 화살을 한 대씩 준비해 둬라. 슈넨 님이 오면 바로 움직일 것이다."
오보이는 당장 있는 열 명의 전사들에게 전투를 준비시켰다.
전사로서의 감각이 위험을 예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코카트리스를 죽였을 때처럼... 심장이 뛰는군.'
오보이는 그 직감이, 단순한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풀 너머에서 뭔가가 옵니다!"
"수풀 너머?"
오보이는 의아해했다.
그곳은 마을의 반대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검은 리자드맨들이 전사 몇 명의 숫자를 속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공격 준비!"
오보이는 수풀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무언가가 드러난 순간 외쳤다.
"쏴라!"
독 두꺼비의 독이 묻은 화살들이 일제히 수풀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수풀 너머에서 등장한 그것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그맨들이 경악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길고, 거대했다.
"자올 님, 마눈이 화살에 맞았습니다."
"저런. 혹시 눈에 맞았나?"
"아뇨. 마눈은 눈이 작잖습니까. 이빨에 한 대 낀 거 같습니다. 이런, 먹어 버렸네요. 아니, 다시 뱉네요."
최근에도 성장을 거듭해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드레이크, 마눈은 화살을 씹어 대다 퉷 하고 뱉었다.
이 어린 드레이크는 제 종족을 기준으로 아직도 이갈이가 끝나지 않은 참이라, 뭐든 입에 들어오면 씹어 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맛없음에 짜증이 난 것인지, 크게 한 번 짖었다.
-크왕!
마눈의 등 위에는 자올과 그 심부름꾼이 타고 있었다.
프로그맨들은 거대한 괴수의 외침에 움찔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그 등 위에 리자드맨들이 타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자올이 가볍게 마눈의 등을 때렸다.
"마눈!"
-크왕?
"넌 투정이 너무 많구나. 저기 저녁 식사가 있잖느냐? 오늘은 그만 먹으라고 안 할 테니, 밥이나 먹어라."
-크와아앙!
마눈이 전면에 서 있던 오보이에게 달려들었다.
오보이는 그래도 노련한 전사였다.
오보이는 뒤로 구르며 화살을 빼 들었고, 마눈은 엉거주춤하며 그 옆에 있던 다른 전사를 낚아챘다.
그리고 어금니 사이에 목이 들어가더니 그대로 뜯어먹었다.
'코카트리스에 비교할 게 아닌 괴물이다!'
오보이는 재빨리 화살에 독을 바르고 활을 매겼다.
'눈을 노릴까? 아니, 독을 먹이려면 입 안에... 아니, 아니다.'
오보이는 자신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독 개구리 발을 뜯어냈다.
독 개구리가 발작을 해 댔다.
"다들 독 개구리를 풀어라! 저 괴물의 입에다 던져 넣어!"
하지만 오보이는 처음 화살을 쏘아 댔을 때, 저 드레이크에게 독이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마눈은 마치 라크락이 먹이를 던져 줄 때처럼, 턱을 날렵하게 놀리며 독 개구리들을 입에 받아 쩝쩝 삼켰다.
등 위에 있던 자올이 심부름꾼에게 물었다.
"저것들이 뭘 하는 것이냐?"
"허리에 개구리를 차고 있던데, 그걸 뜯어서 던졌습니다."
"그건 나도 봤는데. 왜 자기네 간식을 던져 주는가?"
독 개구리라면 자올도 잘 알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후 독 개구리는 리자드맨의 다소 자극적인 식사였다.
그리고 독과 질병의 저항성이라면 드레이크는 축복을 받은 리자드맨들 보다도 더 강했다.
고민하던 심부름꾼이 답했다.
"일종의 호의일까요?"
"그런가? 이제 와서? 마눈, 너무 늦었다고 전해 줘라."
자올은 다시 마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크왕!
마눈이 다시 오보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018화
슈넨은 멀리에서, 연회장의 프로그맨 전사들이 저항할 사이도 없이 단숨에 당하는 것을 보았다.
'놈들이 선수를 치다니!'
아무리 기습이라고 한들, 리자드맨들의 투창은 매서웠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단숨에 꿰뚫렸을 게 틀림없었다.
때문에 슈넨은 두 가지 선택지 중, 두 번째 것을 택했다.
'여기선 맞서 싸우기 보다, 도망친다.'
리자드맨들은 서른 명 중 하나도 줄지 않았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전사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기습을 당한 게 아니라 제대로 정비를 하고 활로 멀리에서 싸울 수 있긴 하겠지만...
'내가 왜 굳이 그런 위험을 각오해야 하지? 나는 아버지가 죽으면 다음 부족장이 될 텐데?'
슈넨은 굳이 목숨을 걸어가며 싸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싸우게 된다면 다른 프로그맨 전사들의 평판 때문에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할 테고, 그럼 죽을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슈넨은 겁쟁이지만, 지금까지 겁쟁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처세술이 있었다.
전사 하나가 말했다.
"슈넨 님! 저놈들이 지금 우리 전사들을 죽였습니다!"
"닥쳐라. 숫자가 불리하잖나? 놈들은 우리가 공격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 지원군을 찾으러 간다."
"전사 오보이 말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슈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슈넨은 오보이를 떠올리긴 했지만, 오보이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었다.
'망할 오웬 자식. 리자드맨 주제에 감히 날 속여?'
슈넨은 방법은 모르지만 라크락이 마을 안으로 들어와 기습을 감행한 것에 분명 오웬의 관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오웬. 너도. 모든 리자드맨들도. 너의 선택 때문에.'
슈넨은 열다섯 명의 전사를 이끌고 하위 계급 마을을 이탈했다.
그들이 가는 곳은 호수 가운데의 섬이었다.
─┼
성운은 흡족하게 마을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질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해서 라크락의 무리는 프로그맨들과 정당하게 정면 승부를 했더라도 별다른 피해 없이 물리칠 정도로 강했다.
라크락의 무리 전사들 레벨이 평균적으로 2는 더 높은 데다, 능력치 차이와 축복 차이가 컸다.
'덕분에 독화살은 통하지도 않는다.'
독 개구리라면 라크락의 무리는 이미 식사로 먹고 있었다.
'게다가 마눈도 있고.'
자올과 그 심부름꾼이 올라탄 마눈은 오보이와 전사들을 완전히 쳐부순 뒤, 마을로 뛰어 들어가 프로그맨들을 신나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어설픈 저항을 하던 프로그맨들이 마눈에게 밟혀 죽었다.
'자올에게 먼저 사육 스킬이 붙을 줄은 몰랐는데. 재능이 좀 있었던 걸까?'
결국은 프로그맨의 이점은 활과 화살이라는 새로운 무기뿐인데, 라크락은 부족원들의 지혜를 모아 잘 극복했다.
어설픈 방패는 보완이 필요해 보이는 데다, 유기물을 영구 보존할 기술이 딱히 없어서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쓸모가 좋았다.
'그래서 당장은 피해가 전혀 없는 셈이군.'
서른 명의 전사는 물론 마눈과 마눈의 등에 탄 둘까지, 프로그맨 마을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웬은 라크락의 말을 충실히 이행했고, 오웬에게 설득된 리자드맨들은 라크락과 그 전사들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고 오웬의 말대로 불을 지펴 댔다.
심지어 라크락의 전사들에게 고취되어 프로그맨들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한 이들까지 나타났다.
'당연한 것이겠지.
자신들을 굴복시키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되자, 마음 아래 깔려 있던 감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라크락은 그런 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아무리 전사가 아니라지만, 프로그맨들은 충분히 숫자가 많았다.
어리고 늙은 것들을 빼더라도 무리를 이끄는 이가 잘 다독이고 고취시킨다면, 지금이라도 라크락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라크락은 그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 온 그 위대하다는 아울로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다못해 슈넨은 왜 돌아오지 않지?"
라크락의 중얼거림에 성운은 멋쩍게 웃었다.
'나 때문이지.'
─┼
로스트 월드는 복잡한 게임이었다.
자연의 복잡한 생태계와 문명 수준이 높아지면 도시와 도시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그리고 여러 사상을 반영하고 자본주의가 가진 복잡한 자본의 움직임, 여기에 더해 마법과 신성까지.
'때문에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술도 전략도 거의 무한하다.'
성운은 대세가 되는 메타를 따라가는 것도 잘했지만, 메타를 부수기 위한 전략을 짜는 것에도 자질이 있었다.
높은 승률을 유지하려면 대세를 따라가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운이 만들어 냈던 무수한 전략 중에는, '질병'을 이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야.'
질병은 어느 시대에서든 유효하게 작용했다.
문명 수준이 낮다면 치료가 어려워서, 문명 수준이 높다면 전파력이 너무 빨라서 강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질병은 복잡한 데다 피아를 가리지 않으니까.'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질병을 이용하는 건 오히려 멍청한 짓이었다.
물론 성운은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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