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5
충분했다.
오보넴은 분주하게 방진을 지위하는 근위대장에게 외쳤다.
"대포! 대포는 어찌 되었나?"
근위대장은 땀을 줄줄 흘리다가 외쳤다.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폐하!"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왕좌 앞으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 달린 대포였다.
근위대장이 말했다.
"적이 지척에 다다랐다! 일제히 장전해라!"
-쾅!
굉음과 함께 내성 외벽이 무너졌다.
오보넴은 창밖으로 솟아오르는 먼지를 보았다.
먼지는 해를 가려 버렸다.
"...횃불, 횃불을 켜라!"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 없다."
걷어차이는 소리와 함께 3미터 크기의 나무판자를 쇠로 엮은 문이 경첩째로 부서지면서 오보넴의 발아래까지 파편이 나부꼈다.
목소리의 주인이 말한 것처럼 불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온몸이 검은 리자드맨은 황금을 덧대고 붉은 비단으로 엮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선 전기 스파크가 쉴 새 없이 튀면서 넓은 대회관을 번쩍번쩍 비추었다.
오보넴이 비명처럼 쥐어짜듯 이름을 외쳤다.
"사, 사도 라크락!"
그 말에 근위대장이 외쳤다.
"지금이다! 발사!"
나열되어 있던 대포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창을 들고 있던 근위병들이 라크락이 대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양옆에서 달려들었다.
라크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콰과과광!
거의 동시에 불을 품은 대포와, 흑색 화약이 만들어 낸 흰 연기 사이로, 여전히 몇 번이나 전기가 번쩍였다.
라크락은 연기를 뚫고 그대로 걸어 나왔다.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근위대장은 더 이상 라크락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걸 알았다.
"폐하! 피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나머지 근위병과 근위대장은 라크락을 향해 달려갔다.
라크락은 주먹을 가볍게 쥐고 근위대를 맞이했다.
싸움이라고는 보기 힘든 광경이 그려졌다.
한 주먹에 한 명씩 대회관 벽과 천장을 향해 처박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보넴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이놈아. 어디로 피하란 말이냐?"
오보넴은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라크락은 걸어오는 동안 한 걸음도 지체하지 않았다.
라크락은 왕좌 앞에서는 멈췄다.
그리곤 바로 뒤에 쓰러진 근위병의 검을 꼬리로 튕겨 올린다음 한 손으로 잡아 냈다.
오보넴 왕이 말했다.
"내 국왕으로서 흑린의 불민함을 참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이 일이 이렇게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별 유감은 없다고 말하고 싶소."
"동감이군."
"아니, 라크락께서도 이 몸을 알고 계셨던 건가?"
"아, 그 부분 말고."
라크락이 손을 내저었다.
"일을 하는데 개인적인 유감은 없는 부분 말이야."
그 말에 오보넴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오보넴의 데스마스크가 되었다.
라크락의 손에 들린 칼이 오보넴의 목을 잘랐다.
─┼
멀리서 성운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회의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117화
"사도 고이 모셔 두면 뭐 할 거야? 사도가 된장이야 삭히게?"
"그렇지만..."
성운은 로스트 월드 플레이어들에게서 '안전한 플레이 스타일'이 자리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는 플레이 타임이 길었고, 덕분에 패배가 가져오는 감정적인 후유증이 컸고 그에 비례하여 승리에 대한 욕구도 컸다.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운은 언제나 '적당히'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운이 그렇게 운을 떼자 엘다르가 무슨 말이냐고 물어왔다.
성운이 말했다.
"그러니까, 플레이 스타일이란 걸 크게 둘로 나누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엘다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명의 포커 플레이어가 있다고 치자. 이 포커 플레이어의 실력은 사실상 같아. 하지만 플레이 스타일에서 위험하지만 큰 이득을 바라는 사람과, 안전하지만 작은 이득을 바라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치자고."
"예."
"그럼 계속해서 포커를 했을 때 두 사람 중 누가 이길까?"
그 말에 엘다르는 눈을 깜빡였다.
"정답이 있는 문제이옵니까?"
"그래."
"실력이 같다고 하셨으니... 비기지 않을까요?"
성운은 잠깐 침묵했다.
"정답이 있다곤 했지만 그냥 간단한 퀴즈잖아. 그렇게 부담을 가지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럼 비기는 선택지는 없다고 치고요?"
"응."
엘다르는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여기서는 제가 '안전한 플레이어가 이긴다'고 말하고 네뷸라 님이 그건 틀렸다고 말할 타이밍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그렇다고 스스로 납득하지 못할 답을 낼 필요는 없지 않아?"
"...안전한 플레이를 한 사람이 최종적으로 이기지 않겠사옵니까? 저는 포커를 거의 안 해 봐서 잘 모르긴 한데, 그래도 과감한 블러핑을 시도하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지는 경우는 제법 본 것 같기도 하고..."
성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위험한 플레이를 한 사람이 이겨."
엘다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성운을 바라보았다.
성운은 뻔뻔하게 재촉했다.
"뭐 해? 빨리 왜냐고 물어봐."
"...왜지요?"
성운이 답했다.
"안전한 플레이는 눈에 보이잖아."
"네?"
"포커는 계속해서 카드가 돈다고. 자기 손에 무슨 패가 들어올지, 상대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을지,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높은 패를 가지고 있을지 없을지는 예측하는 수밖에 없어. 그런데 여기서 안전한 수만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어?"
"읽히겠지요."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뷸라 님, 제 생각엔 반대로 위험한 플레이를 고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계속해서 낮은 패에도 판돈을 키우길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읽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안전한 플레이를 하는 사람과 대결 중이잖아."
"그렇사옵니다만."
"그럼 안전한 플레이를 하는 사람은 상대의 위험한 플레이에 호응하지도 않겠지. 만약에 진짜 높은 패라면 낭패니까."
엘다르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말장난은 아닌 거죠?"
"그 길쭉한 귀 놔두고 설명을 뭘로 들은 거야?"
엘다르는 자기 귀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건 그냥 생긴 것만 그런 건데요."
성운이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포커라는 게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안전한 플레이를 고집하다 보면 레이즈 부르며 따라가다 가도 마지막에 받는 패가 별로라서 소심하게 콜이나 부르고 있으면 손 패를 알 만한 거지. 안전하게 플레이한다는 건 그런 거야. 물론 그 자체가 속임수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겠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건 그 부분이 아니고."
잠깐 엘다르는 생각했다.
포커는 경험이 없지만 다른 게임에 대입해 보자면 아주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안전한 플레이를 한다는 건 뻔히 보이는 기회도 놓치는 것이고, 위험한 플레이를 한다는 건 여러 번 시도 끝에 기회를 붙잡는 것이다.
"흠, 그러니까 네뷸라 님 말씀은 포커가 안전한 플레이를 하는 사람보다 위험한 플레이를 하는 사람에게 더 유리하게 설계된 게임이라는 거지요?"
"어? 아니."
성운이 답했다.
"대부분의 게임이 다 그래. 불확정 요소가 있어서 예측하고 확률을 계산해야 되는 종류의 게임들은."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렇죠?"
성운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 더 재밌으니까 그렇지."
"아."
성운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위험하게 플레이하라는 말은 아니야."
"분명 '적당히'라고 하셨지요. 그 적당히의 기준은 어떻게 되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그 말에 성운이 즉답했다.
"어려운 질문인데."
"역시."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 게임 실력을 올리는 과정 아니겠어?"
이제서야 엘다르는 성운이 라크락을 왜 단독으로 단염의 수도로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다르가 보기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물론, 성운은 다행히 다섯 동맹이 최근 들어 꽤나 자주 회의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 회의에 룬다가 참여하고 있으므로 모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일단 회의가 시작되면 룬다는 별도의 시스템 조작으로 성운과 연락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므로 회의가 언제 끝날지, 회의에 다섯 사람 모두가 제대로 참석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오늘 회의에 크람푸스가 참석하지 않았다면?'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장소, 즉 수도를 관찰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기 마련이다.
그럼 라크락이 등장했을 때 자신의 창조물을 풀고 신앙 자원을 쏟아 냈을 테고, 그럼 라크락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라크락을 잃게 된 경우, 성운에겐 너무 큰 손실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엘다르가 보기엔 거의 도박 수에 가까웠는데, 그 도박의 위험성에 비해 판돈도 시원찮아 보였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
그도 그럴 것이, 엘다르가 보기에 크람푸스의 주요 병력은 단염의 수도 데이머릿에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수도의 왕성을 무너트리고 왕을 죽인 건 그야말로 나라를 무너트리기 위한 단계 중 마지막 단계를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로스트 월드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의 진짜 지휘자는 왕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과율이라는 벽이 있는 이상 왕과 같은 권력을 앉혀 두고 경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명령 체계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미 존재하는 군대가 느닷없는 파국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상대해야 할 3만의 군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럼에도 성운은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설명하며 그것이 위험하지만 승리를 위한 플레이였다고 한 것이다.
엘다르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성운도 동의했다.
"그렇긴 해."
"그럼 무리한 도박 수긴 한 거군요?"
"음, 그래도 하이 리스크인 건 맞는데 로우 리턴은 아니지."
"그럼 제가 생각한 것 말고 다른 이득이 있나요?"
성운이 말했다.
"여러 가지 있는데 일단, 내가 정석적인 플레이만을 좋아하는 유저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득이야."
"네?"
"생각해 보라고."
성운이 검지로 자신의 가면 위 관자놀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포커를 하기로 했어. 다들 가진 칩을 확인하고, 서로 카드를 돌려서 확인하지. 다들 손 패를 보는데,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일단 다음 카드를 봐도 될 것 같아. 그래서 다들 콜을 하는 거지. 근데 마지막 놈이 벌떡 일어나서 말하는 거야. 올인이라고.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손 패는요?"
"그럭저럭."
"...첫 판에 판돈을 다 잃을 수는 없으니, 일단은 죽어야겠지요?"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야."
"휴."
성운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손 패는 여전히 그럭저럭인 끝에, 벌떡 일어선 그놈이 다섯 게임을 연속해서 올인을 던지면 어떻게 할래?"
"...어라?"
엘다르는 잠깐 멍 때렸다.
"그럴 수 있사옵니까?"
"어떤 부분이?"
엘다르가 말했다.
"아니, 그 사람은 손 패가 잘 나와서 올인을 했던 게 아니었던 것입니까?"
"그건 모르지. 확률적으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손 패가 다섯 번 연속 정도는 나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도 틀린 건 아니야. 중간 중간에 블러핑이 꼈던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전부 블러핑일지도 모르고."
"그럼..."
고민 끝에 엘다르가 말했다.
"저는 승률이 높은 패가 나올 때까지 죽는 게 좋겠어요."
성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야."
"역시 그런가요?"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져. 내가 손 패만 잘 나와 봐라 하고 두고 보자고 할 수도 있고, 다음에도 그러면 무슨 패가 나오든 받아 보자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하지만 포커는 칩이 많을수록 유리해. 그 올인 플레이어는 그 사이에도 콜했다가 폴드한 작은 판돈을 받아 가면서 조금씩 격차를 벌릴 테니, 이후 플레이에서 그런 과감한 플레이를 하지 않더라도 유리한 시점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뷸라님이 한 것도..."
"올인까진 아니지."
성운이 말했다.
"단지 해 볼 만해서 했다는 말이야."
─┼
위즈덤은 크람푸스에게 간결한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전쟁을 위한 준비와 단독으로 움직이는 라크락에 대해 주의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네뷸라가 이렇게까지 할지는 몰랐군. 사도를 암살에 사용하는 건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지만, 흑린은 라크락 말고 별도의 다른 전략 자원이 없는 데다 일반적인 플레이에선 다른 사도의 백업이 없는 이상 사도를 쓰지 않아."
크람푸스 또한 정신적 충격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났다.
"놈이 무리한 게 맞아. 왕족이 전멸한 것도 아니고 왕성이 완전 무너진 것도 아니야. 명령 체계는 건제하지. 군사 3만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론 크람푸스가 말하는 것보다야 단염에 데미지는 강하긴 했다.
사도 라크락이 신벌을 내렸고, 사티로스의 신조차도 그걸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라크락이 그야말로 '번개처럼' 데이머릿에 내리쳤다고도 말했다.
무수한 소문들이 퍼지면서 흑린에 대한 두려움이 번져 나갔다.
그 때문에 동요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었다.
이미 내전을 시작해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는 석면을 제외하고도, 금안과 적과, 만굴까지 내부 단속을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계시를 내려야만 했다.
AR1026과 같은 플레이어는 창조물을 수호자로 붙여 두기까지 해야 했다.
다섯 동맹은 정기적으로 소식을 나누기로 했던 회의 자체도 전쟁을 하는 동안은 그만두기로 했다.
룬다는 이런 변화를 보면서 당황스러웠다.
'이래도 되나? 회의 자체가 약점이 될 수 있는 건 맞았어. 하지만 이 회의가 동맹의 결속을 모으기 위해서 아니었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부의 배신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단속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텐데. 애초에 우리가 제일 걱정해야 한다고 한 것도 동맹이 무너지는 것이었잖아?'
모두가 라크락이 벌인 사건을 축소하려고 안달이었지만 룬다가 보기에는 모두가 수도에 발이 묶여서 라크락이 언제 공격해 오지 않을지 걱정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물론 나야 오히려 마음 졸일 일이 줄어들었으니 다행이지만.'
룬다의 마음은 슬금슬금 다섯 동맹에서 성운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118화
데이머릿에서 전해져 온 비보에 단염의 군대는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염의 대장군 유바임 돌란은 각 부대의 장군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장군들은 모두 사티로스 출신 귀족들로 단염의 개국 공신들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 상석에 앉은 유바임 또한 그러했다.
염소처럼 빳빳한 털로 뒤덮인 하체와 발굽 다리도 대단한 근육이지만 갑옷을 입기에 더 커 보이는 두터운 상체에 염소수염까지. 사티로스의 기준으로 미학적인 아름다운 사내였다.
유바임이 두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군의 사기는 어떤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은 말이기에 장군들은 저마다 입을 열었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성군이셨던 폐하가 돌아가신 것에 슬퍼하는 이가 많습니다."
"데이머릿은 단순히 수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격당한 적 없는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들 운을 띄운 장군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다른 장군들이 말하기 주저했던 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덕분이었다.
"적들에게 혈혈단신으로 왕궁을 부수고 들어가 왕을 죽일 수 있는 신의 사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포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유바임이 담담히 말했다.
"이 땅에 라크락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잘 없을 텐데."
"옛날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라크락의 위명에 대해선 모두가 옛이야기로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야기 속의 모습과 다름없을 줄은 몰랐던 거지요. 당연히 흑린의 과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정말로 악신을 죽인 그 천둥 도마뱀의 모습일 것이라곤..."
유바임은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경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싸늘해진 목소리에 장군들은 살짝 눈치를 봤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바임은 원했던 대답을 들어서 표정이 풀어졌지만, 정도 이상으로 좋아지진 않았다.
사도 라크락의 존재가 이야기 속에 있을 때는 상관없었다.
마왕에게 승리를 거두고 악신을 죽여도 괜찮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건 곤란했다.
"사제단에서 연락이 왔다."
"사제단이요?"
"계시가 있었다더군."
그 말에 장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바임은 장군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폐하를 지키지 못한 것에 신벌이라도 내릴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무진(無眞)께서 말씀하시길, 야천의 계획이 교묘하여 다섯 동맹의 신들이 뒤쳐져 있다는군. 하지만 무진의 수호자들이 우리 군대를 특별히 보살피고 있으니 야천의 사도를 두려워 말고 전쟁에 힘쓰라 하셨다."
그 말에 장군들은 밝은 표정이 되었다.
"무진께서 저희를 내려다보고 계시단 말입니까?"
"이번 전쟁의 성패를 대단히 중히 여기시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 전쟁의 첨단에 서 있는 셈이고."
그 말에 장군 중 몇몇은 회의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대장군 유바임은 장군들의 흥분을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신의 사도는 신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그러니 당장은 우리 사람의 군대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적 부대의 동향은 어떠한가?"
그 말에 외곽 수비와 정찰을 겸하는 부대의 장군이 간결한 보고를 전했다.
"적 1만 모두 강을 끼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오고 있습니다.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뒤에는 저희가 있는 딜파 협곡으로 올 겁니다."
딜파 협곡은 적과와 흑린 모두의 경계에 있는 협로였다.
길은 좁지만 지형이 험하지 않아 예전부터 상인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었다.
딜파 협곡의 경우 흑린에서 단염으로 올 경우 지나게 되는 관문 중 하나로 흑린의 군대가 통과하게 될 경우, 별다른 저항도 업이 수도 데이머릿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때문에 유바임은 이 딜파 협곡에 대해 둘 중 하나의 판단을 해야만 했다.
하나는 딜파 협곡의 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에 있었다.
협곡인 관계로 화약을 통해 협곡을 부수어 길을 막거나 병사들을 이용해 잡다한 목재와 모래, 흙을 퍼 날라 길을 막아 버릴 수 있었다.
이 경우 전쟁 이후의 복구가 문제될 수 있지만, 그 복구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상대 또한 군대인 만큼 많은 인원으로 길을 복구해서 협곡을 지나갈 수 있지만, 또 군대인 만큼 지속적인 보급을 받아야만 했다.
유바임이 최선을 다한다면 흑린은 길을 복구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판단할 테고,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어차피 먼 길을 돌아가야 하고, 몇 개의 성을 지나야 한다.'
다른 하나는 딜파 협곡의 길을 열어 두되, 딜파 협곡에서 흑린의 군대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유바임이 선택한 것은 이 두 번째 방법이었다.
딜파 협곡을 막았다가 복구하는 비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흑린은 길을 막더라도 어떻게든 진군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할 텐데, 이 경우 흑린이 어디로 진군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군사를 나누어야 한다. 오랜 시간 평화가 이어졌다지만, 흑린의 군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최대한의 전력으로 적과 맞붙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딜파 협곡에 성이 지어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딜파 협곡 자체가 자연이 만들어 낸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흑린의 리자드맨들은 요새라고 할 만한 지형에도 구태여 산성을 쌓아올리긴 했지만, '성(城)'이라고 한다면 성주가 있고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장소였다.
사람이 살기 때문에 성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딜파 협곡은 사람이 살기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를 적을 대비하느라 괜한 수고를 들이고, 평시에 병사만 놔두는 건 그리 효율적이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딜파 협곡은 적을 상대하기 좋은 땅이다. 이후 수도인 데이머릿 또한 함락하기 어려운 거대한 성벽을 가지고 있지. 너희 오만한 도마뱀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유바임이 말했다.
"...그럼 아직 의문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적 지휘관이 누구인가 하는 것 정도인가. 아직 알아낸 정보는 없나?"
그 말에 장군들 모두가 침묵했다.
어째서인지 흑린은 적 지휘관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
유바임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어차피 그 누가 지휘를 한다고 한들 중요하지 않다. 전쟁에서 진짜 중요한 건 숫자일 뿐.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보급. 이와 같은 것들이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다.'
─┼
사흘 뒤, 딜파 협곡.
단염군이 예상한 것과 같은 속도로 흑린이 도착했다.
딜파 협곡의 앞은 딜파 강이 흐르는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이 평야 때문에 적군의 움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도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흑린은 무리해서 진군하지 않았고, 멀리 단염군이 보임에도, 아주 적절한 거리감으로 천막을 치고 휴식을 취했다.
당장 단염군이 달려오더라도 방비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거리였다.
흑린의 지휘관이 장군들에게 말했다.
"적의 전력은?"
"저희 예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다른 점은 없나?"
지휘관의 말에 장군 하나가 말했다.
"없습니다."
"그럼 되었다. 휴식이 끝나면 태세를 갖춰라."
그 말에 장군이 말했다.
"하지만 아직 계시 사제의 연락이 없습니다. 이 싸움이 만약 야천의 뜻이 아니라면..."
지휘관은 가로저었다.
"가만히 앉아서 야천께서 다 해 주시길 바라나? 칼도 대신 휘둘러 주시면 칼 맞는 것도 대신 맞아 주실 것 같나?"
"아, 아닙니다."
그 대화에 장군 몇몇이 낄낄 웃었다.
지휘관이 말했다.
"우리가 싸우는 때는 야천께서 원하시는 그때가 아니라, 싸움에서 이기기 가장 쉬울 때이다. 적들은 우리가 눈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았으니 잠깐이나마 마음이 풀어졌을 테고, 우리 병사들은 무리하지 않고 행군했으니 피로가 많이 쌓이지 않았다. 싸워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아니, 죄송합니다. 바센 장군님."
지휘관, 바센 라크 오라즌은 왼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두 제 일을 하러 가거라."
"예!"
바센은 돌탄 섬을 구한 것을 계기로 다시 궁으로 들어올 계기를 얻었다.
'엄밀히 말해 궁은 아니지만... 그보다 낫지 않나? 군권을 쥐다니.'
당연히 동생이자 왕인 카일 라크 오라즌의 입김이 있을 터였지만, 후에 함께 돌탄 섬까지의 해적 소탕을 도왔던 이얀 타타 장군과, 결국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예의 감독관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들었다.
겨우 첫 발만 떼었던 동부 산맥 모험단은 해산되었지만 티오네 이티모는 흑린의 궁으로부터 예상보다 더 많은 위약금을 받아 내 배를 한 척 더 받았다고 하니 잘된 일이었다.
'뭐, 언젠가는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아직도 바센을 염려하는 이들이 있지만 만약 이번 전쟁까지 잘해 낸다면 그런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바센은 기대했다.
'잘 끝낸다면 말이지만.'
바센은 곧 싸움이 닥칠 전장을 내다보았다.
단염군은 딜파 협곡을 끼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흑린군은 그 안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숫자는 물론 지형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숫자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
바센의 명령대로 휴식이 끝나자 병사들이 곧장 전투 채비를 갖추었다.
그 모습에 멀리서도 단염군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하니 별다른 동태 파악의 시간도 가지지 않고 덤벼드는 셈이니까.
그리고 흑린군이 기대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르릉...!
대기가 울리며 허공에서 흑린군 앞으로 무언가가 내리꽂혔다.
라크락이었다.
영웅의 등장에 기세가 솟은 흑린군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신성의 등장은 흑린군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염의 진형에서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의 수십 미터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염의 수호수이자 플레이어 크람푸스의 창조물들이었다.
수가 다섯이나 되는 이 괴물들은 엄청난 속도로 라크락에게 쇄도했고, 라크락은 이들을 피하며 양 군대가 돌격할 장소를 피해 강 너머 숲으로 피했다.
세 괴물들이 라크락을 쫓아 강을 건넜다.
나무가 그루째로 비산하고 번개가 떨어지고 비와 같은 피가 튀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됐다!"
탄성을 내지른 것은 사티로스 대장군 유바임이었다.
유바임은 기대에 차서 말했다.
"이제 사람의 군대만으로 싸울 수 있다. 우리의 승리다."
─┼
한편, 바센 또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이군."
그 말에 옆에 있던 부관이 당황했다.
"다행...인 겁니까?"
"그래. 설마하니 라크락 님이 내 지휘를 들어주실 리는 없고. 그럼 나는 계산할 수도 없는 걸 싸울 때 가늠해야 하니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일 것 아닌가?"
부관은 듣고 보니 그럴듯한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군님, 적은 저희보다 수도 많고 지형도 유리합니다."
"그래 봤자 사람의 군대 아닌가?"
"예?"
바센이 말했다.
"난 아직 사람의 군대를 상대로 패배한 적이 없다."
119화
단염을 수호한다는 다섯 수호수들의 위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 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사람의 정강이만큼 파이고, 앞발을 내지르면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넘어간다.
흙먼지는 수호수들의 머리 위까지 솟구치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옅은 산들바람이 되어 흑린군의 병사들의 살결에 닿았다.
그리고 그 다섯을 모두 상대하는 라크락은 살아 움직이는 전설이었다.
창날을 휘두를 때마다 수호수들이 거체를 뒤틀며 피하기 바빴고, 그야말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그 위치가 바뀌어 눈으로 좇기도 어려웠다.
수호수의 피 냄새가 대기에 옅게 깔리자, 이미 전쟁을 치루고 있기라도 한 듯 흑린군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신화적인 싸움을 배경으로 흑린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군대를 상대로 패배한 적이 없다'는 바센 라크 오라즌의 자신만만한 말에 부관 수헌이 입을 가리고 미소 지었다.
자동성의 네 가문 중 하나라는 배경이 있긴 했지만, 수헌은 이전 흑린의 군에서 보기 드문 인간이었다.
리자드맨과 비교해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능력으로 자신 실력을 증명해 왔다.
'재밌는 사람이군.'
처음 바센이 임의 명칭 된 갑군을 지휘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는 걱정이 컸지만 바센이 왕자라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남쪽 바다에서의 실적만으로도 바센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능력이 있고 자신감도 있다면 더는 가릴 것이 없지.'
수헌이 말했다.
"하지만 장군, 일단 형세로 보아 저희는 저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적들은 협곡을 막아선 데다, 협곡 위에도 궁수들을 배치했습니다. 저희 병사들이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용맹함이 있다고 하나 창칼을 맞으면 피를 흘리는 사람인데,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더 많은 아군으로, 더 적은 적을 상대한다.
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은 아군과 적이 동수일 때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였다.
비록 아군과 적이 숫자가 같더라도, 좁은 길목을 지나오는 적을 상대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아군의 숫자가 유리해진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엔 지형의 유리함을 가진 것은 적인 단염군이었다.
바센이 말했다.
"진형은 별 탈 없이 내가 말한 대로 갖춰질 예정인가?"
"아, 네."
바센이 요구한 진형은 적을 에워싸는 지형이었다.
언뜻 보면 유리해 보이지만, 협곡을 지나야 하는 건 적군이 아닌 아군.
어차피 협곡 안에서 전투를 해야 하므로 협곡을 에워싸는 형태는 수헌이 보기에 위협적이긴 해도 별 효용이 없어 보였다.
"장군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오늘은 진군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아니. 저기 사도 라크락과 단염의 수호자들이 싸우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당연히 라크락 님이 이기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그 뒤에는 사티로스들의 신 무진이 남아 있다. 신이 가진 기적으로 무슨 획책을 쓸지 모르니 서두르는 게 낫다."
"그럼 진형을 쐐기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쐐기 모양은 전형적인 돌격 진형이고, 이런 협곡을 돌파해야 한다면 보편적으로 다루는 진형이었다.
하지만 바센은 혀를 찼다.
"아까도 장군이 세 사람이나 왔다가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더군."
"...죄송합니다."
"그렇진 않다. 설명이 부족한 내 탓이지."
수헌이 말했다.
"그럼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쭤 보아도 되겠습니까?"
바센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멀리 협곡을 바라보았다.
협곡 자체가 그리 좁지는 않다. 만약 1만 전부가 리자드맨이었다면 바센은 해 볼 만한 승부라며 쐐기 대형을 갖추고 들이박게 했을지도 모른다.
야천의 축복을 받은 리자드맨들은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수 미터 협곡 정도는 빠르게 기어오를 수도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개인 무장의 정도도 뛰어난지라 화살에 의해 피해를 덜 받기도 했고, 백병전은 다른 종족에 비교하자면 달인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별다른 전술을 생각하지 않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만 병사 중 리자드맨은 겨우 2천.
나머지는 몸이 튼튼하고 정신이 강건한 사람을 가려 받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병사 구실을 하고 있긴 하지만 뛰어난 군대라고 보긴 힘들다.
강대 강으로 맞붙게 시키는 건 위험했다.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적의 약한 부분을 천천히 도려내는 전술이 필요했다.
"수헌, 자네가 저 협곡이 주둥이 같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게워 내게 만들면 그만이지."
"예?"
"강아지풀로 코를 간질이면 어떻게 되겠나?"
"...예?"
바센은 한숨을 쉬었다.
"보기나 하게."
바센은 수헌과, 다른 장군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들은 아직 '옛 군인'이었다.
그러니 전장은 이미 새로운 것이 도입되었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과거의 방법을 택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익히고 나서도, 여전히 과거의 방법을 고집하는 게 문제일 뿐이지.'
다행인 것은 흑린군만이 아니라 단염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형을 저렇게 잡았겠지.'
바센이 보기에 단염군의 진형은 완벽한 실패였다.
3만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있다면 얼치기일리는 없으니, 분명 바센이 상상하는 대로라면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군인일 터였다.
'이럴 거라면 협곡 입구가 아닌 협곡 끝에 진을 치거나, 차라리 협곡을 등지고 회전을 준비하셨어야지.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않나? 숫자도 더 많은데.'
물론 바센으로선 상대가 무지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바센은 흑린군이 협곡의 입구를 둘러싸는 것을 확인했다.
각 병종 또한 바센이 말한 그 위치 그대로였다.
다행히 바센의 지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한들, 명령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명령한다."
바센은 명령 체계를 통해 말했다.
"협곡 입구를 향해 대포를 조준해라."
곧이어 폭음과 함께 협곡 안쪽으로 돌덩이들이 비산했다.
─┼
"뭣 하는 거냐! 어서 우리도 대포로 맞대응해라!"
단염의 대장군 유바임 돌란이 외치자 장군 하나가 답했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사오나, 보병 부대가 너무 촘촘하게 정렬해 있어 대포를 끌고 오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협곡 위로 대포를 올려라!"
"이대로 협곡 위로 대포를 올리다간 대포나 사람이 상할 겁니다. 그러니 길을 우회하여야 할 텐데, 그럼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유바임은 책상을 내리쳤다.
"그럼 서편에 선 부대 중 하나를 뒤로 물려라!"
그 말에 다른 장군이 말했다.
"재고해 주십시오, 대장군!"
"왜 그러나?"
"적 진영의 대포들이 멀리 있어 당장 피해가 극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아군이 대응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병사들의 동요가 큰데, 이 중 한 부대만 뒤로 물리면, 물리지 못한 부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이런!"
단염군이 느릿느릿 대포를 전방으로 옮기고 있을 때, 흑린은 멈추지 않았다.
거리를 재어 보고, 상대의 전방에 대포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습에 수헌은 바센이 말한 '코를 간질이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포가 있다면 협곡 밖에서도 이 진형이 더 유리했던 겁니까?"
바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과 창을 든 병사라면 당연히 협곡을 둘러싼 진형은, 협곡에 들어선 적을 상대할 때 쓸모가 없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가할 수 있는 대포라면 달랐다.
오히려 화력을 한 점에 집중할 수 있으니 '더 많은 아군으로 더 적은 적군을 상대한다'는 병법의 기본이 지켜지는 것이다.
"적 장수도 대포를 쓰는 걸 생각하긴 했겠지. 하지만 협곡 안에선 전방을 향해 대포를 쏘기 어렵다."
그럼 아군이 맞을 테니까.
"그렇다고 협곡 위에선 협곡 안쪽으로 쏠 수 없고."
현대 대포 기술은 전장식 대포, 즉 포구를 통해 대포알을 집어넣는 형식이다.
아래를 향해 쏘아 봤자 대포알이 흘러내릴 뿐이고, 포물선을 기대하고 전방으로 쏘아 봤자 협곡은 그렇게 넓지 않으니 아군에게 겨냥될 뿐이다.
"그럼 단염군은..."
"애초에 협곡에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되었던 거지."
"하지만 단염군의 대포 기술도 저희와 비등합니다. 적들이 전방으로 대포를 가져오면..."
"잘된 것 아닌가?"
"네?"
바센은 계속해서 흑린의 대포를 전진 배치시키며 발사했다.
한 발 한 발의 타격으로 적 보병을 많이 죽일 수는 없지만, 순차적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에 보병들은 이미 공황 상태였다.
"바로 뒤에 대포가 왔다! 자리를 내라!"
그 말에 단염군 보병들이 환호를 지르며 길을 냈다.
그때, 바센이 기병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흑린의 마지막 포격이 끝남과 동시에, 흑린이 자랑하는 경기병인 코카투 기병이 돌격을 시작했다.
단염의 창병들이 급하게 진형을 정비했지만, 이미 보병대의 절반 정도는 대포에게 자리를 내준 상태였다.
협곡 양옆에 있던 궁수들이 코카투 기병을 노리고 사격했지만, 이제 흑린의 포수들이 노리는 것은 협곡 위였다.
코카투에서 떨어진 기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너진 적 진형 사이로 코카투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창으로 방진을 갖추면 기병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단염의 장수들이 애처로울 정도로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전방의 창병들은 어설프게 대항하려다 코카투 기병에게 목이 잘리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가다 등이 찔렸다.
단염의 장수들이 급하게 그 다음 열의 창병들을 진정시켜 방진을 짜자 코카투 기병들이 후퇴 명령에 급하게 돌아섰다.
다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 더 반복되자 유바임이 명령했다.
"진군해야겠다."
그 말에 즉각 반발이 있었다.
"안됩니다, 대장군! 아직 피해가 많지 않은데 지형의 유리함을 포기한다니요!"
"이놈! 눈이 있으면 보아라. 이게 무슨 유리함이냐? 협곡을 끼고 안전하게 싸우려 했지만 정작 우리는 수적 우위를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장군이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적은 이미 진형을 갖추었습니다. 이대로 나아가게 되면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그 말에 유바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진형을 갖추고 아가리로 적이 들어오길 기다린 건 우리인데 일이 어찌 이리 되었는가?'
대장군 유바임이 말했다.
"그럼 경들은 어쩌잔 말인가? 후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 말에는 묵묵부답이었다.
딜파 협곡의 끝까지 후퇴를 하더라도, 그 다음 수도 데이머릿까지 흑린을 막아 낼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유바임이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비록 형세의 불리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수적 우위를 노려 보아야지."
앞선 전투에서 손실이 있었다고 하나 협곡에서의 싸움인 탓에, 어림잡아도 몇 백 정도라고 판단했다.
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여전히 수적으로는 우위였다.
"진군하라!"
유바임의 명령에 단염의 보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흑린의 대포가 불을 뿜었지만, 적어도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동요가 덜했다.
유바임은 걱정 때문에 평시보다 빠르게 보고를 받았다.
"진군에 문제는 없나?"
"예, 없습니다. 대포 옆으로 각 보병 분대가 진영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후퇴하지 않고 저희 부대와 맞서 싸우려는 것 같습니다."
그대로 진군을 이어 가라고 하려는 유바임에게 다른 장군이 말했다.
"적 기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바임이 잠깐 생각에 잠기자 다른 장군이 말했다.
"적 기병은 앞선 전투로 피로가 쌓여서 후방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타당한 것 같았다.
단염의 진군이 이어졌다.
단염군은 부채꼴 모양으로 진형을 짠 흑린군을 상대로 정면을 향해 쐐기 형태로 나아갔다.
유바임은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흑린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먼저 쳐부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쐐기 대형과 흑린의 보병대 한 축이 맞붙은 순간,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바센이 칼을 뽑았다.
"돌격!"
이 갑작스런 외침은 단염군의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그곳에 단염이 발견하지 못했던 기병대가 나타났다.
바센은 지친 코카투 기병을 후위에 두고, 그 대신 다양한 종족으로 혼합된 말 기병을 전위에 두고서 자신은 기병대 선두에 서 있었다.
코카투에 올라탄 바센이 외쳤다.
"적의 허리를 끊어라!"
120화
흑린의 기병대가 단염군의 보병의 옆을 공격해 들어갔다.
말보다 코카투가 빠르다.
하지만 흑린의 주된 탈것은 코카투가 아닌 말이었다.
코카투가 워낙에 험한 동물이기에 야천의 축복을 받은 리자드맨 정도가 아니면 길들이기가 어려운 것과 별개로, 말은 지구력이 뛰어난 데다 무엇보다도 힘이 좋았다.
무거운 하중을 견디기 어려운 코카투와 달리 말은 중무장이 가능하다.
더 큰 질량을 싣고도 달릴 수 있다는 건, 들이박았을 때 그 충격도 크다는 말이다.
단염의 창병들은 급하게 방진을 짜려고 했지만 이동 중인 데다, 촘촘하게 짜이지 않은 상태였다.
대기병 방진은 양옆은 물론 후열과 제3 열, 어쩔 때는 제4 열까지의 빽빽한 창날로 탈것과 기수를 막아서기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조금의 허점이라도 있다면 방진은 옆에서 부서지고, 양옆에 구멍이 생기면 그런 방진도 의미가 없었다.
-퍽!
말에 튕겨 나간 사티로스 하나가 수 미터는 붕 뜨더니 나가떨어졌다.
어설프게 짜인 방진 사이로 흑린 기병 하나가 파고들자 단염 창병들이 급하게 창날을 돌렸고, 그 때문에 더 큰 구멍이 생겼다.
각 자리의 장수들이 창날을 고정하고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병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무시하긴 힘들었다.
기병들은 창과 검으로 기병대 사이를 파고들면서 베어 죽이기 시작했다.
멋모르고 계속해서 창을 들고 기병을 향해 내지르려는 이들은 서로서로 창이 얽히며 제대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훈련을 받아 검을 뽑아 든 이들이 있었지만 말발굽에 나가떨어지거나 코카투의 부리에 쪼이거나 기병의 칼날에 죽어 나갔다.
허리가 끊어진 단염의 전방 부대는 돌아서서 흑린의 기병을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들 앞에 있는 흑린의 보병 부대에 그대로 돌격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실제로 현장의 장수들도 허리가 끊긴 탓에 지휘부의 명령을 볼 수 없어 각자가 다른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돌격!"
일이 계획대로 풀리자 흑린의 보병대가 오도 가도 못하는 적의 전방 부대를 그대로 둘러쌌다.
단염의 보병대를 향해 전방위에서 몰아치는 공격이 쏟아지는 사이 흑린 기병대는 그대로 적의 허리를 관통해 별다른 피해 없이 빠져나가 버렸다.
유바임 돌란이 멀리서 외쳤다.
보병대는 아직 절반도 협곡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멍청한 놈들아! 기병대를 위해 길을 열어라! 전방 부대를 구원해야 할 것 아니냐?"
그 말에 다른 장수가 말했다.
"하지만 대장군, 기병들만 앞으로 나아가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유바임으로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맞는 말이었다.
단염의 기병대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적의 두터운 보병대를 뚫고 전방 부대를 구원하기엔 늦을 지도 몰랐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다시 적들을 협곡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 말에 또 다른 장수가 입을 열었다.
"멍청한 소릴! 이미 부대의 후열에서 전진을 시작했소. 뒤로 물리려면 다시 한참이 걸릴 텐데, 그 사이 전방 부대가 모두 죽어 나가는 꼴을 봐야겠소?"
유바임은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있느니 어떤 선택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 번 나아가기로 한 이상 멈출 수는 없다. 또한 명령의 일관됨을 보여 줘야 병사들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을 터. 다소 속도가 늦더라도 방진을 유지한 상태로 전진한다."
"적에게 둘러싸인 전방 부대는 어찌합니까?"
유바임은 잔뜩 얼굴을 찡그리곤 마지못해 말했다.
"포기한다."
"대장군, 하지만..."
"닥쳐라! 아직 우리 숫자가 우세하다."
단염의 전방 부대가 사실상 전멸하는 사이 흑린은 다치고 지친 병사들이 있는 부대를 뒤로 물리고, 앞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를 앞으로 당겨왔다.
그 명령에 부관인 수헌이 말했다.
"장군, 몸이 성한 병사들을 보존해야 이후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당장 다친 병사들을 물린다고 하더라도 다음 전투까지 회복하긴 어렵습니다."
수헌의 생각은 장군들에겐 보편적인 생각에 속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에, 불필요한 부대 이동 명령은 괜한 소요를 만들 수 있었다.
별다른 설명이 없다면 전방으로 당겨진 병사들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바센이 답했다.
"그 말대로 지친 병사는 몰라도 다친 병사들은 곧장 회복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한 번 전투를 겪은 병사들을 완전히 소모할 때까지 계속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평시에는 백성의 마음이 평화로운 것이 좋겠으나, 전시에도 그것이 도움이 됩니까?"
"몰지각한 말이군, 수헌."
수헌은 잠시 생각했다.
수헌이 답을 내지 못하자 바센이 말했다.
"그래야만 병사들이 나를 믿고 내 명령을 따를 것 아닌가? 우선 병사가 살아남는다면, 다음부터 나를 신뢰하고 따르겠지."
"아."
"그나저나, 단염군의 대장군이란 자는 배움이 부족한 것 같군."
바센은 단염군의 전방 부대를 몰살시킨 뒤, 아까와 같은 거리로 후퇴했다.
그리고 다시 방진을 짜고 천천히 다가오는 단염군을 향해 다시 대포를 발사했다.
-쾅!
후방까지 들려오는 흑색 화약의 거대한 폭음을 재차 듣고 나서야, 유바임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거대한 미로에 빠진 것 같았다.
"이래서야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잖은가!"
적은 협곡을 부채꼴 모양으로 둘러싸고 대포를 쏜다.
이 대포에 단염군의 보병대가 피해를 입는다.
여기서 보병대를 물리고 대포를 끌고 가면, 깨어진 방진을 기회로 삼아 적의 기병대가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그렇다고 보병대를 전방으로 빠르게 이동시키면 기병대가 허리를 끊고 전방 부대가 보병대에게 잡아먹힌다.
방진을 유지하고 느린 속도로 보병대를 전진시키면, 다시 대포에 의해 피해를 본다.
장군 하나가 말했다.
"아, 아닙니다. 대장군. 저희 보병대가 느리지만 착실하게 적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 저렇게 대포에 숭숭 구멍이 나서야 적에게 도달할 쯤엔 다시 기병대의 먹이가 될 것 아닌가?"
유바임의 지적에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최선이란 말인가?"
바센이 보았을 때 그것이 단염군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아니었다.
바센의 판단으로, 단염군은 애초에 자리를 잘못 잡은 이상 후퇴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후퇴를 하기에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병을 너무 많이 잃었다. 물론 이제라도 손실을 각오하고 후퇴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불필요한 고집이 있군."
손해를 계속해서 보면서도 단염군은 꿋꿋하게 협곡 우측 절벽을 끼면서 빠져나왔다.
이 경우 전방으로 쐐기 모양의 진영을 갖추는 것보다 두터운 보병 방진을 구성할 수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염려도 없으니 기병에 대한 대응으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하면 기병이 끊어 내기도 어렵긴 하지. 그렇지만..."
바센의 대응은 간단했다.
적의 진영이 두터워졌다는 말은 표면적이 넓어졌다는 말이기도 했다.
바센은 흑린의 보병진을 돌격시켰다.
흑린은 코카투 경기병과 함께 리자드맨 보병 또한 강했다.
라크락과 유르로 이어진 전사 문화는 무예를 발전시켰고, 무기술을 사용한 대인 무예의 경우 가장 발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염의 대장군 유바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 중 리자드맨 비율은 겨우 2할. 그중에서도 일부는 기병대에 속하니 겨우 북쪽만 막아설 수 있는 숫자뿐이구나. 보병진이라면 우리 사티로스 또한 자신이 있다."
사티로스의 경우 무거운 무게의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보병진이 알려져 있었다.
대기병으로서는 민첩함이 부족하지만 궁수의 화살비를 해치고 보병을 잡는 보병으로서는 뛰어났다.
단염군의 창병들 뒤에서 사티로스 중보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나타나며 흑린의 보병대를 조금씩 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희생 끝에, 드디어 유바임과 단염의 장수들이 그리고 있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동쪽을 유지하면서 중보병들로 서쪽을 열어라!"
유바임이 기대했던 대로, 서쪽이 열리기 시작했다.
일단 적을 밀어내어 길을 열기만 한다면, 협곡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을 모두 평야로 밀어내고 수적 우위로 적 전체를 감싸 안을 수 있을 터였다.
"흑린군, 서쪽 진영이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됐다!"
유바임이 외쳤다.
"이대로 진형을 굳혀야 한다! 중보병 부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켜라!"
서편으로 길이 열리기 시작하자 사티로스 중보병들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바센은 그 모습을 간결하게 평가했다.
"조심성이 부족하군."
열린 길을 향해 달려간 사티로스 중보병들을 맞이한 것은, 후방에서 꾸준하게 이동해 온 대포들이었다.
갑옷을 입고 있던 중보병들은 대포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잠시 황망하게 얼어붙었고, 흑린의 포수들이 그 표적들을 향해 대포알을 쏘았다.
수십 년 동안 쇠를 만져 온 장인들이 오랜 시간 망치로 다듬어 만든 고가의 갑옷들이 돌덩이를 맞고 우그러졌다.
중보병들이 전방을 달려갔지만 제2 열에서 발사된 대포에 또다시 나가떨어졌다.
유바임은 피해 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동시에 안도할 만한 내용도 들었다.
"...에잇, 이제 서쪽은 됐다! 동쪽! 이제 동쪽에도 길이 열린다!"
하지만 길이 열린다고 해서 일방통행이란 말은 아니었다.
동쪽 흑린군이 물러나자 나타난 것은, 후방에서 충분히 휴식과 정비를 마친 기병대였다.
유바임은 조용히 읊조렸다.
"신이시여."
─┼
성운은 라크락의 전투를 서포트하는 한편, 바센이 이끄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모루와 망치군."
더 많은 아군으로 더 적은 적군을 공격하라는 것이 전투 지침이라고 한다면, 모루와 망치는 이에 대응되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 바센이 사용한 것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모루와 망치 전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방은 보병대, 그중에서 단단한 모루라고 할 수 있는 리자드맨 보병을 끼워 넣어 적들을 붙잡아 둔다.
그러면서 양옆에선 중보병의 갑옷을 종잇조각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망치인 대포와, 보병대를 종횡무진할 수 있는 기병으로 후려치는 것이다.
라크락의 싸움 또한 끝나 가고 있었으므로, 승부의 행방은 거의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긴 힘들지."
성운은 아주 멀리, 단염군 위에서 빠르게 시스템 창을 조작하고 있는 크람푸스를 보았다.
─┼
"질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한 것은 화상 채팅 창 너머의 위즈덤이었다.
크람푸스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래. 도와줘야겠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서포트를 했을 것 아닌가?"
"그야... 라크락을 잡는데 신경을 집중했지."
잡는다기보다는 창조물들이 죽지 않도록 하는데 집중했다고 봐야 했다.
라크락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면 필패일 테니까.
하지만 잡아 둘 수만 있다면 전쟁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스트 월드는 멀티태스킹을 요구했지만, 멀티태스킹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깐 사이 이 사단이 나 버렸어."
"아직 전멸은 아닌가?"
"...아직은."
3만 중 4천 정도가 박살 났다.
하지만 후퇴를 하게 될 경우 좁은 협곡에서 계속해서 피해가 발생할 것을 감안한다면 절반도 남지 않을 테고, 그 남은 절반 중에도 계속해서 이탈자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사티로스 종족이 광신자인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아무튼 백업이 조금만 있어도 할 만할 것 같은데. 어때?"
그 말에 위즈덤은 잠시 침묵했다.
"...위즈덤?"
위즈덤이 말했다.
"미안하군, 크람푸스. 널 도와줄 수는 없다."
121화
"왜지?"
크람푸스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자 위즈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를 '마지막 전장'으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음."
위즈덤이 말한 마지막 전장은 로스트 월드에서 종종 나오는 전투 경향을 말했다.
한쪽에서 신앙 자원을 투입해서 창조물이나 사도 따위를 내놓는다면, 반대쪽에서도 그 창조물과 사도를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신앙 자원을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격차는 근소할수록 좋다.
승리를 거두더라도 신앙 자원을 많이 투자해서 승리하게 되면 낭비니까.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플레이어의 신앙 자원이 투입되는 싸움은 그 결과가 나더라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일은 잘 없다.
비록 패배하더라도 근소한 차이로 졌다면 다음 전장에서 설욕전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이미 패배해 가는 싸움에 남은 자원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양쪽 다 신앙 자원에는 여력이 남아 있지만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있는 개체에 한계가 온 경우엔 남은 신앙 자원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할 때가 온다.
그럼 그게 마지막 전장이었다.
크람푸스가 유바임 돌란에게 강신해서 전장을 이끌지 못한 것도 성운이 같은 수로 맞대응했을 경우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큰 패배를 각오하기보다는 작은 패배를 이어 나가는 쪽이 크람푸스의 성미에 더 맞기도 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다른 동료들이 있었기에 혼자 모험을 하는 건 좋은 선택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체념한 크람푸스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위즈덤이 말했다.
"크람푸스 너도 수도 데이머릿이 남아 있고, 아직 우리도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네뷸라는 아직 라크락 밖에 꺼내지 않았어. 다른 창조물들, 특히 스라티스는 보이지도 않는데 우리가 굳이 여력을 쏟아부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특히 위즈덤은 사도 레딘 비알 오서가 준비되지 않았다.
레딘은 이제 반란군과 최후 교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위즈덤의 힘으로 별문제 없이 승리하겠지만 위명을 떨치기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고민을 거듭한 크람푸스가 말했다.
"후퇴하겠어."
"수도 데이머릿에서 시간을 끄는 쪽으로 하지. 어차피 흑린도 1만 병력으로 단염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크람푸스는 사제들에게 계시를 내렸다.
아직 창조물들이 살아 있을 때 부대를 후퇴해야 했던 것이다.
─┼
"적들이 도망간다!"
"단염군이 후퇴합니다!"보고가 올라오자 바센 라크 오라즌이 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적을 베어 죽여라! 그래야 다음 싸움이 순탄해질 것이다!"
단염군이 협곡을 빠져나가는 동안 기병들이 집요하게 단염군의 등을 쫓았다.
단염군의 낙오된 이들과 협곡 위에서 포위된 병사들이 그대로 죽어 나가자 협곡에 사람의 시체가 굴러 쌓이고 피가 협곡을 따라 흘렀다.
해가 지고 나서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을 만큼 단염군이 도망가기 전까지 딜파 협곡에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상자는 1천 정도로 교환비로 보면 압도적이긴 했지만, 앞으로 겪어야 할 전투를 생각한다면 마냥 좋게 볼 수는 없었다.
바센은 수헌을 불러 단염의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여기가 저희가 있는 딜파 협곡이고... 여기가 단염의 수도 데이머릿입니다."
바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헌이 계속해서 설명했다.
"데이머릿까지는 지금의 행군 속도로 대략 닷새 정도 걸릴 겁니다. 적들이 숨어 있을 만한 마을 몇 개가 있으니 확인을 하며 가야 할 테니 며칠은 더 걸리겠지요."
"이 사이에 유의할 만한 성은 없다고 했던가?"
"예.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도 그렇고 상인들을 붙잡아 말을 들어 보아도 갑자기 생겨난 성 같은 건 없습니다."
"왜라고 생각하나?"
"성이 없는 이유 말입니까?"
"그래."
수헌은 고심했다.
이전 전투에서 익히 알고 있는 대로 답했지만 바센을 상대로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재차 생각하니 바센이 답을 내놓을 것이라면 자신은 오답을 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이번에도 아는 대로 말했다.
"딜파 협곡을 너무 믿었던 거지요. 실제로 단염은 역사에서 작은 소수 부족을 상대로 딜파 협곡에서 좋은 결과를 냈었습니다. 아마 흑린에게 패배한 것은 단염에게 치욕스러운 역사가 되겠지요."
"흠."
"제가 또 말실수를 했습니까?"
"말실수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럼?"
"단염이 앞으로도 남아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건가 싶었지."
수헌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센을 바라보았다.
현재, 흑린의 전쟁 명목 중 하나는 동맹이 요구한 사과와 배상을 취소하란 것이었다.
그에 더해 단염이 병사를 모으고 있는 정황을 미리 포착하고 전쟁 준비를 멈추라고 요구했는데도 단염이 멈추지 않은 것도 있었다.
만약 적과와 단염 모두 공격을 받을 경우 흑린은 대비가 힘들기 때문에 선제공격에 나섰다.
물론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신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단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세 번째 이유야말로 모두가 진실로 납득하는 이유이긴 했다.
'하지만 흑린이 단염을...?'
바센은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적의 수도를 공격하러 가는 거 아니었나?"
"하지만... 단염은 큰 나라입니다."
"나도 알아. 수도를 공격한다고 해서 그대로 사라지진 않겠지."
"그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바센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왕이 없지 않은가? 아마 우리가 데이머릿에 도착할 쯤엔 누구든 적당히 앉혔겠지만, 그뿐이지. 우리가 수도를 정복했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나?"
"그야..."
수헌이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이랬다.
"저희가 수도를 정복하더라도 지방에 많은 사티로스 귀족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아마 왕족들도 저희가 오기 전에 도망가겠지요. 훗날을 도모하며 지방의 유력 지역에서 힘을 모으다가 기회를 엿볼 겁니다. 저희는 당장 1만... 이제 9천의 병사뿐이니 그들 모두를 감당하긴 어렵고 데이머릿을 방어하는데 집중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흑린에서 원군이 오긴 하겠지요."
바센이 핀잔을 줬다.
"수헌, 너는 단염을 흑린처럼 생각하는군."
"...예?"
"뭐, 나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했었다. 시야가 넓지는 못한 것이지."
바센이 말했다.
"수헌, 단염의 3만 병사는 숫자가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흑린보다 인구가 조금 더 많다고 듣긴 했지만, 오래전부터 전쟁에 대비했다면 가능한 숫자라고 봅니다."
"하지만 무리한 것도 맞아. 단염군이 패배한 것은 대장군의 잘못된 판단도 있었지만, 훈련 상태가 조야한 부분도 있었다."
"아, 그건 맞는 듯합니다."
흑린의 경우 무기술을 다채롭게 익히지만, 단염의 경우 창병과 궁병 모두 적재적소에서 검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여 차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어차피 병사라는 건 지휘관의 명령대로 제 위치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하고, 창병이라면 방진을 유지하고 궁수라면 앞사람 뒤통수만 쏘지 않아도 제 몫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좀 더 유능한 병사라면 상황에 맞게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법이었다.
"기병들이 달려들 때 창이 얽히는데도 창대를 꾹 잡고 있는 이들이 많이 보이더군. 잘 써 본 적도 없는 검을 뽑는 대신 창을 잡고 있겠다는 거지."
"급조한 병사들이라는 겁니까?"
"그렇지. 폐하께서 일러 주시더군. 단염은 병사를 불리기 위해 상당히 무리를 했다고.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곤란하다고. 그런데 이미 단염은 한 번 패배를 했지. 그리고 또 한 번 패배할 예정이고."
벌써 데이머릿을 정복한 것처럼 구는 바센의 태도에 수헌은 황당했다.
다만 그것은 바센의 자신만만함이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째서인지 자신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흑린과 단염의 상황이 그렇게나 다릅니까?"
"그래."
바센이 카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옮겼다.
"우리가 데이머릿을 정복하면 단염은 내부의 문제가 터질 거라더군."
"이를테면?"
"단염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 보니 병사들 모두에게 무장을 넉넉히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차이를 보였지."
"사티로스와 그 외의 종족은 무장 수준이 다르더군요."
"사티로스 외의 종족이 얼마나 홀대받는가가 드러나는 거지.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단염 내부에는 독립을 바라는 종족들이 다수 있다고 한다."
그 말에 수헌이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건 흑린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반역을 꿈꾸는 역도들은 어디에나 있지요."
"하지만 흑린은 이겼고 단염은 졌지."
그 말에 수헌은 아직 납득되지 않은 부분을 언급했다.
"하지만 단염의 귀족은 사티로스들입니다. 정작 사티로스들이 여전히 부와 권력을 쥐고 있다면, 그 외의 종족들이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해 버려도 단염이란 나라에 큰 타격을 주진 못하는 것 아닙니까?"
"사티로스들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지 않나?"
"예?"
바센이 쓴웃음을 지었다.
"왕이 죽었지 않은가?"
"아차, ...그렇군요."
모두의 예상대로 급히 왕이 앉혀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왕의 급사, 전쟁의 혼란, 반역 도당이 각지에서 나타나는 혼란 속에서 왕족이라는 정통성이 끝까지 지켜지리란 보장은 없다.
수헌이 말했다.
"그럼 데이머릿을 공략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겠군요."
데이머릿은 성채 도시로 잘 알려져 있었다.
흑린 또한 과거에 데이머릿 앞까지 도달했다가 돌아섰단 이야기가 있었고, 뱀파이어 마왕 샤이븐 또한 데이머릿의 두터운 성벽을 보고 감히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바센이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겠지."
당연히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던 바센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수헌은 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센을 바라보았다.
수헌은 일주일 뒤 단염의 수도 데이머릿 앞에서 바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딜파 협곡 전투에서 흑린이 승리하고 이틀 뒤, 데이머릿에 있는 간자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
단염의 재상이 왕족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왕자를 왕에 앉혔다는 이야기였다.
이 재상은 왕족이 아니지만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나흘 뒤에는 두 개의 소식이 반나절 사이로 왔다.
첫 번째 소식은 대장군 유바임 돌란이 병사들과 함께 데이머릿에 입성했다는 이야기였다.
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함께 있는 병사들은 무려 1만 5천.
이건 흑린의 장군들이 기대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였다.
바센은 유바임이 대포를 이용한 신식 전술에는 미숙했지만, 병사들을 잘 달래 이탈자를 줄이고 독려하는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는가 판단했다.
흑린의 장군들은 딜파 협곡 전투에선 쉽게 승리했으나, 유바임이 무능하기만 한 장수가 아닌 이상 더 적은 수로 공성전을 벌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판단했다.
두 번째 소식은 그런 유바임 돌란이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유는 반역죄였다.
1만 5천이나 되는 병사를 데리고 입성을 했으니 반역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데이머릿의 귀족가는 물론 흑린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다.
유바임 돌란은 충성스런 장군으로 보였고, 패배의 죄를 물은 것도 아닌 반역의 죄를 물은 것은 의아했다.
엿새 뒤에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내성이 폐쇄되고 병사들이 움직인다는 이야기였다.
내성 안에도 간자가 있었지만 소식이 끊어졌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레 뒤, 바센의 흑린군 9천은 데이머릿 앞에 진영을 잡았다.
데이머릿을 바라보던 바센은 멀리 성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일련의 사신단으로 보였다.
최소의 호의를 받으며 나온 것은 귀족으로 보이는 사티로스 여성이었다.
바센은 사신단을 진영 안쪽으로 들여보내 맞이했다.
사티로스가 말했다.
"나는 유바임 돌란의 딸 아란주 돌란이다."
"...그 대장군의?"
"...동시에 어제부터 수도성 데이머릿의 주인이자, 단염의 왕이 되었지."
바센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란주가 말했다.
"단염은 흑린에게 항복한다."
122화
항복.
이 시점에서 듣기에는 다소 이른 말이었다.
아란주 돌란의 말에 바센 라크 오라즌 또한 놀란 눈치였지만, 곧 수긍했다.
흑린군이 단염군의 무장 해제를 확인하고 데이머릿에 입성했다.
데이머릿으로 들어서며 바센의 부관 수헌이 말했다.
"성벽 위에 병사가 없고 모두가 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함정은 아닌 모양이군요."
"함정이더라도 이 시점에선 늦은 셈이지."
"이리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바센은 가로저었다.
"미리 듣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거라고 믿진 않았다."
"듣긴 했다는 말은..."
"그래. 폐하께서 언급은 하셨다."
급기야 흑린군은 무장 해제한 단염군 전체를 모아서 경계하는 동시에, 정예를 이끌고 내성까지 들어갔다.
내성 정문 앞에서 침묵하고 있던 아란주가 돌아서서 바센에게 말했다.
"바센 장군. 현재 데이머릿의 내성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정리가 되지 않았다. 흑린은 이에 대해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겠습니다."
아란주 스스로가 왕임을 공표하였으니 바센은 일국의 왕에게 계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바센은 궁금해하며 내성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코를 찌르는 시체 냄새에 바센은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사티로스 재상 바비카 톨로는, 라크락에 의해 왕이 죽자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건 기회다.'
바비카는 왕이 죽기 전까진, 자신에게 이런 야심이 숨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권모술수 부리기를 즐겼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지만, 재상이 된 이후에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왕족이 아니니 왕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비카 톨로는 유능했고, 그 유능함 덕분에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역모를 꾸몄던 이들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왕이 죽자, 잠들어 있던 욕망이 꿈틀거렸다.
바비카는 자신의 권력을 총동원해 왕의 자리에 넷째 왕자를 앉히고 자신이 나라를 대신 다스릴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저절로 머릿속에 그렸다.
'불가능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쉽다. 이 기회를 놓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왕은 죽었고 데이머릿을 지키는 많은 병력과 장수들이 딜파 협곡으로 가 버린 상황이다.
바비카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어차피 전쟁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야천이 왕을 죽였다지만 흑린이 다섯 동맹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음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의 문제.'
바비카는 빠르게 내성을 장악했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여 사병으로 반대파를 축출했다.
넷째 왕자를 올리고 나자 한숨 돌릴 틈이 돌아왔다.
하지만 끝은 아니었다.
유바임 돌란 대장군이 딜파 협곡에서 대패를 한 것이다.
수도 데이머릿을 장악한 것은 좋지만 이것을 고스란히 흑린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만약 데이머릿이 흑린의 손에 떨어진다면, 왕족인 왕이야 그 책임을 질 일이 없겠지만 재상인 자신은 이야기가 다를 수 있었다.
현재 데이머릿에서 바비카를 추종하는 귀족이라고 해도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이제 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물릴 수는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의 추종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죽거나, 모든 것을 가지거나.'
바비카는 추종자들이 돌아설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권력이라고 해도 단염에서 실상 최고의 자리 위에 올랐으므로 더는 올라갈 자리가 없으니, 그 권력이라는 것은 자리가 아닌 무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귀족 사병들과 데이머릿의 수비군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바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
'유바임 돌란, 미안하게 되었군.'
유바임이 익히 알려진 것보다 많은 숫자의 병사들을 데이머릿으로 생환시킨 것에 놀라긴 했다.
하지만 유바임은 순진하게도 새로운 왕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명령들에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명령 체계가 늦어지도록 병사들을 나누어 배치하라든가, 유바임이 딴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아직 전쟁 중임에도 장수들에게 공과 과를 따지도록 하는 일에도 그 명령에 따랐다.
만약 유바임이 조금만 더 정치적인 상황에 익숙했더라면 이러한 명령들에게서 수상함을 눈치채고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 내성을 포위하고 바비카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바임은 자신의 부하 장수이자, 딸인 아란주 돌란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하지만 유바임은 오히려 화를 내며 아란주를 나무랐다.
"이 녀석...! 아니, 아란주 장군! 지금 흑린군이 코앞에 들이닥쳤는데 왕실의 소란을 늘려서야 되겠는가? 내 익히 알기를 재상 바비카 톨로는 지혜롭고 어진 사람이다. 사사로운 권력에 취해 허튼 짓을 하진 않을 테니 걱정마라."
하지만 그것이 유바임과 아란주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바비카는 왕의 이름으로 독려하겠다며 유바임을 내성으로 불렀다.
유바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소수의 호위병만 대동하고 내성으로 들어갔다.
바비카가 유바임에게 역모죄를 묻고 처형하기까지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바비카는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고 생각했다.
유바임의 휘하 장수들을 구워삶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란주 돌란은 동료 장군들에게 자신의 아버지 유바임 돌란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계속해서 경고했었다.
그리고 그 경고가 현실이 되자 아란주와 장군들은 분노했다.
"난 단순히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 망할 재상 놈은 우리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정치 놀음에 빠져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대들은 이 모든 것을 두고 볼 셈인가?"
두고 보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수의 보수적이고 나이 많은 장군들을 제외하고, 아란주는 다른 장군들과 합세해 내성을 습격했다.
은밀히 움직이기 위해 많은 병사를 대동할 수 없었음에도, 내성의 병력들은 수준이 낮고 보초를 서는데도 안일한 측면이 있었다.
아란주와 장군들은 내성을 장악하고, 그 안에서 연회를 즐기던 바비카와 그 추종자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바비카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무식한 년! 이런다고 네가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장군 중 하나가 그대로 바비카의 목을 치려고 하자, 아란주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슨 말이지?"
"나와 다른 귀족들을 죽이고 나면 뭘 할 거지?"
"뭘... 할 거냐니? 더러운 너희 귀족을 죽이면..."
"모든 게 정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너희 마음대로 될 거라고?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왕족이 어디 이 내성에만 있느냐? 여기저기 지방에는 날 따르는 추종자들이 없으려고?"
"...음."
"너희의 계획은 안 봐도 뻔하지. 모든 걸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절차는 항상 중요한 거다. 너희는 나를 역모를 꾸몄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절차적으로도 역모를 꾸민 적이 없다. 내성에 병사들을 이끌고 피를 쏟게 만든 너희가 바로 역모 도당들이지. 절차가 곧 정통성을 만든다. 너희는 절대 오래 살아남을 수 없어."
아란주는 바비카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아란주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바비카의 자리에 자신이 앉고 나면, 바비카처럼 일을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지?"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이 아란주를 깨어나게 했다.
"우선 이걸 풀고 날 살려 주면..."
아란주는 손날로 자신의 목을 쳤다.
"죽여라."
그 말에 곧장 바비카의 목이 날아갔다.
아란주의 얼굴에 피가 흥건하게 튀었지만, 아란주는 얼굴을 닦아 내지도 않았다.
다른 장군이 말을 걸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바비카의 말이 틀렸다고 보긴 힘듭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둘 중 하나지."
"둘 중 하나, 말씀입니까?"
아란주는 입술 안으로 흐르는 바비카의 피를 퉤 하고 뱉고 말했다.
"죽거나, 모든 걸 다 가지거나."
아란주의 생각은 단순했다.
절차가 정통성을 만든다면, 그 절차도 정통성도 부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아란주 돌란은 그날 새벽, 내성은 물론 데이머릿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왕족과 그 외가의 귀족들을 찾아 모두 죽였다.
단염에 새로운 왕가가 탄생한 것이다.
아란주 돌란은 병사들의 사기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걸 알았다.
자신의 목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뿐이었다.
아란주는 항복을 결정했다.
─┼
크람푸스는 이 모든 일이 마치 도미노처럼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멈추지?'
모든 것은 라크락에 의해 기습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크락의 습격부터 시작된 일인가? 아니, 아니야.'
재상인 바비카 톨로의 히스토리는 크람푸스도 잘 알고 있었다.
'야심', 또는 플레이어끼리 권력욕이라고 부르는 능력치가 유난히 높았기에 상황이 따라 준다면 역모를 꾸밀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바비카는 유능한 개체였다.
오히려 야심이라는 능력치 덕분에 바비카가 그 위치까지 올라가 자신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로스트 월드에서 하나의 능력치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보다 상황과 위치에 따라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바비카의 야심은 좋은 능력치였다.
하지만 라크락에 의해 왕이 어이없이 살해당하면서 그 능력치가 칼날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크람푸스가 바비카를 멈춰 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왕이 사망한 이상 단염엔 혼란을 잠재울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명령 체계가 존재한다면 전투에서 이길 승산도 더 높았다.
하지만 크람푸스가 성운으로부터 전투에 패배하면서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재상 바비카 톨로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유바임 돌란을 죽여야만 했다.
크람푸스는 이 일 또한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바비카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유바임이 남아 있다면 바비카의 추종자들이 흔들리면서 내부에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는 걸 이 시점에선 알 수 없었다.
아란주 돌란은 크람푸스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캐릭터였다.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특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귀족 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무관 또는 문관이 되는 건 흔한 일이었으므로 유별난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란주는 아버지의 죽음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버렸다.
아란주가 동료 장군들을 설득해 내성까지 쳐들어갔을 때는 크람푸스는 또 다시 늦었다.
라크락에 의한 왕의 죽음, 그리고 딜파 협곡의 전투 패배가 알려지면서 단염 전체에서 크람푸스가 신경 쓸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란주가 결국 바비카를 죽이는 시점에서 크람푸스는 머리를 싸매야 했다.
'망했군.'
바비카 톨로도, 유바임 돌란도, 아란주 돌란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수를 행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흑린의 데이머릿 무혈입성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 대체?'
분열을 걱정해야 된다면, 당연히 플레이어들 사이의 분열을 생각했다.
하지만 통일되어 있는 왕가의 같은 종족끼리 분란이 이렇게 쉽게 일어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모두 신실한 무진의 신자들이었다.
'네뷸라의 개입은 없었다는 말인데도.'
누군가 화상 채팅을 걸어왔다.
화면을 확인하고 크람푸스는 한숨을 쉬었다.
"뭐지?"
성운이 말했다.
"항복할 생각 있나?"
123화
'항복이라.'
크람푸스는 성운의 말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섯 동맹과 흑린의 싸움 중, 단염과 흑린의 싸움은 부분에 불과했다.
단염은 다른 나라들이 병력을 준비하기 전,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진 못한 것 같지만.'
시간을 끈다는 전략적 목표가 좌절된 것과 별개로, 단염은 흑린에게 사실상 패배한 셈이었다.
왕이 된 바비카 돌란이 수도인 데이머릿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센 라크 오라즌의 군대를 들인 시점에서 이 싸움은 끝이 났다.
만약, 최종적으로 흑린이 다섯 동맹에게서 승리한다면 이렇게 패배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크람푸스도 로스트 월드를 꽤 많이 플레이했다.
전쟁은 사실 참여한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다.
안 하는 것이 제일 좋고, 한다면 피해가 적을수록 좋다.
'피해를 내야만 한다면, 이기는 게 좋긴 하지만... 이미 패배한 게임이니까.'
하지만 크람푸스는 성운의 가면을 보자마자 별안간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네뷸라."
"뭐지?"
크람푸스가 말했다.
"넌 내가 게임을 못하는 거 같냐?"
성운은 삐딱하게 크람푸스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의도를 살피려는 것 같았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듯 답했다.
"아니. 내 생각엔 나쁘지 않은데."
"그래? 그럼 내가 왜 진 거지?"
성운은 자신의 가면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아직 진 건 아니지. 항복한다고 안 했으니까."
"했다고 치고."
"항복한 건 아니고, 했다고 친다고?"
"그래."
"곤란한데."
크람푸스가 말했다.
"가끔은 승자의 입장에서 여유를 좀 부려 보는 거 어때? 이미 끝난 부분에 대해서 말한다고 노하우가 새어 나가진 않을 거 아냐."
"그런가?"
성운이 말했다.
"그럼... 내가 더 잘해서?"
크람푸스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성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거 말고는? 내가 널 이길 기회가 없었나?"
"자세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없었지."
"보여 주지 않은 카드가 아직 있었다는 뜻이군."
"난 아직 상대할 사람이 넷이나 남았잖아?"
크람푸스는 그 부분은 납득하기로 했다.
"그럼, 좀 더 시야를 좁혀 보자고."
"어떻게?"
"다른 변수가 없다고 가정할 때, 라크락이 단염의 왕을 죽인 뒤부터 딜파 협곡 전투, 그리고 아란주가 바센에게 항복하기까지 일주일 사이에 널 이길 방법이 없었나?"
성운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있었지."
"뭔데?"
"왕이 죽자마자 바비카를 처형하고, 유바임 돌란 대장군을 딜파 협곡에서 후퇴시키는 거지."
크람푸스는 성운의 아이디어를 가늠해 보았다.
바비카 톨로를 죽인다고 하면, 바비카 만큼의 다른 유력자가 없으므로 그 죽음은 신탁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바비카라고 하더라도 신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름의 저항이 있겠지만 바비카를 죽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신벌'을 내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소영역이 충분히 오르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신벌은 플레이어를 신앙으로 삼는 개체들을 조건을 걸고 피해를 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크람푸스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위즈덤의 경우에는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크람푸스도 그런 플레이가 효율적이라는 건 인정해야만 했다.
어찌되어든 바비카 톨로를 처리하고 나면 내성은 안정되기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언뜻 보기엔 좋은 수처럼 보이지 않지만, 대장군 유바임 돌란이 후퇴하여 데이머릿으로 돌아오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유바임에게 어떻게든 권력이 집중될 것이다.
유바임은 왕가를 걱정하는 충신이나, 당장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란 명목이라면 내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할 테고, 적어도 흑린군이 데이머릿에 도달하기 전까진 끝낼 터였다.
'그리고 딜파 협곡에서 실패한 전략이 아닌, 이상적인 공성전을 이어나간다고 가정하면...'
성운이 무슨 수를 숨겨 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의 결과보다는 좋을 것 같았다.
성운이 말한 아이디어는 충분히 그럴듯했다.
"하지만..."
"뭐지?"
"난 그때그때 최선의 수를 선택한 거다. 왕이 죽었으니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바비카 톨로에게 맡겼고, 유바임 돌란이 돌아왔으니 위기를 넘기기 위해 바비카가 유바임을 죽이는 걸 넘어가 줬고. 아란주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생각을 깊게 하진 못했던 패착이 있긴 하지만... 꼬인 건 그 이전부터니까."
성운은 딱히 반론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기 위해선 그때그때 최선의 수로는 부족하다는 말이지."
크람푸스가 질문했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계획."
"...생각해 둔 건가? 즉답인데."
"대응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게임에서 못 이기니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지."
크람푸스가 흥미롭다는 듯 염소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럼 너는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 뜻이야?"
성운이 설명했다.
"우선, 계획대로 풀린 건 바비카 톨로가 권력욕에 취했다는 점이야. 각국마다 요인들은 파악하고 있는데, 바비카는 그 권력욕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지. 왕이 죽으면 움직일 거란 계산이 있었어."
크람푸스는 성운이 라크락을 통해 단염의 왕을 죽인 것이 단순히 과시 행위나 일종의 테러가 아니라 계산된 일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너무 과격한 행동이기 때문에 충동적인 부분이 없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유바임은?"
"내 생각엔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생각한 그림은 바비카와 유바임이 데이머릿에서 마찰을 빚는 그림이었거든."
"...과연."
그렇게 될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바비카가 유바임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경우 바비카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바임에게 끊임없이 권력을 확인하려 들 테고 명령 체계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성운이 계속 말했다.
"그 경우에 바비카 또는 유바임이 상대를 처리해 버리기 전까진 흑린군이 유리할 거라고 봤지. 그 사이 속전속결로 입성하는 게 목표였어."
"...음."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는 말이지?"
"더 말해 뭐 하겠어?"
두 플레이어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운이 말했다.
"그래서 항복할 생각은? 지금 항복하면 조건을 썩 괜찮게 맞춰 줄 수 있는데."
크람푸스는 쓰게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복 안 해."
크람푸스는 곧장 성운의 화상 채팅창을 꺼 버렸다.
─┼
"크람푸스 님은 무슨 생각이실까요?"
"아직 게임 안 끝났잖아? 끝까지 해 보겠단 거지. 난 좋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저라면 포기했을 텐데요."
성운은 엘다르를 바라봤다.
엘다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니,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라, 저라면 저를 믿는 엘프들이 가여워서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음."
"그것도 나쁜 태도라고 생각하진 않아."
성운은 엘다르와 함께 데이머릿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머릿은 높은 성벽 안에도 농지가 있는 데다, 강을 끼고 있다.
단염이 수성전을 제대로 벌였다면 흑린으로서는 난전을 각오했어야 했다.
'전투 없이 입성하긴 했지만, 이걸 또 무작정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
성운의 반대편 멀리에는 크람푸스가 있었다.
크람푸스 또한 성운처럼 시스템 창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자신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진 알겠어. 하지만 당장 손을 댈 수는 없으니...'
성운은 우선 필요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바로 단염의 항복을 문서화하는 과정이었다.
단염의 항복은 빨랐다.
이 말은 단순히 단염의 새로운 왕 아란주 돌란이 겁이 많았다거나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바센 장군, 당신이 가진 군대보다 단염 내부의 군대가 더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피해를 입었으리란 건 자명해."
"...음. 하지만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건 단염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현재 단염군은 모두 무장 해제가 끝났다. 맨손으로 봉기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우리를 성에 먼저 들인 건 그쪽이니 후회는 없으리라 보는데."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되면 단염의 민심을 살피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텐데. 또한 우리의 말은 결국 다른 동맹에게도 알려질 테고. 흑린이 가혹하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우리와 같이 항복하는 이들이 또 있겠나? 흑린은 계속해서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고 싶은 건가?"
항복했지만 아란주 돌란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자신이 왕이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기라도 한 것처럼.
바센은 내부자를 통해 아란주 돌란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칼싸움을 즐겼고 동네 아이들과 왈패를 이루어 들판을 돌아다니다 머리가 굵어졌을 때 아버지의 추천으로 무관이 되었다.
따지고 들면 왕족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바센 자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이였다.
'며칠 전까진 왕이 될 꿈을 꾸기는커녕, 자신이 왕이 될 것도 몰랐을 텐데.'
답을 아는 건 성운이었다.
'왕이 되는 건 개인에게 있어 정말 거대한 사건이지. 심지어 왕족도 아니라면. 왕이 되면서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어. 그리고 보이지 않던 스탯인 매력과 지도력도 준수한 수준으로 올랐고. 잠재되어 있었던 거야. 단지 플레이어로서는 알 수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아란주 돌란은 강국인 흑린과 유능한 장군인 바센을 상대로 단염의 권리를 쉽게 빼앗기지 않고 잘 해내고 있었다.
물론, 성운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바센은 원래 이런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건 잘 해낼 능력치가 아니었다.
바센 뒤에는 카일 라크 오라즌이 있었다.
'어차피 오라즌에서 올 소식을 기다려야 할 테니까.'
당장 필요한 간단한 조약은 이미 맺어진 상태긴 했다.
흑린군은 전투 승리에 대한 보상금과 별도로 체류 비용을 모두 데이머릿에서 받는 대신, 약탈은 금지되었다.
다행히 흑린군 또한 딜파 협곡에서는 대승을, 데이머릿에 입성하면서는 피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약탈이 금지되었다고 해서 큰 불만이 나오진 않았다.
군대의 구성 대부분이 전쟁 경험이 적은 이들이란 점도 다행이었다.
흑린군이 체류하면서도 심각한 치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내성에서 암투가 이어지는 동안 경직되었던 데이머릿 또한 어느 정도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활기 사이에 두 플레이어의 손길이 오가고 있었다.
성운의 부탁으로 엘다르 또한 손을 거들었지만, 성운은 이 싸움만큼은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지요?"
"응. 이건 군대가 싸우는 것과는 달라. 데이머릿은 이미 크람푸스가 차지한 구역이니까,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흑린군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데이머릿 외곽의 외딴 숲속, 무너져 가는 폐가, 어두운 골목길.
데이머릿의 활기 사이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새벽 중에 은밀히 모였다.
그런가 하면 단염의 귀족들이 등에 칼을 맞고 죽거나, 잠자는 중에 심장에 찔려 죽기도 했다.
오라즌에서 오는 사신단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데이머릿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성운은 다른 일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가도 틈틈이 데이머릿으로 돌아왔다.
"이제 끝나 가는 것 같군."
이 며칠 사이 일어난 일은, 플레이어들끼리 '가지치기'라고 부르는 일이었다.
불분명한 것들은 떨어져 나가고 자신의 편과 아닌 편을 가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플레이어에 의해서 일어났다.
플레이어들은 각 개체들 중 신앙이 불분명하거나 약한 이들을 시험하고, 선명하게 한쪽으로 기울도록 했다.
그러다가 다른 쪽으로 넘어갈 것 같으면 다른 신도를 시켜 살해하도록 계시를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적과 아군이 선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제 숨겨져 있던 신앙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지."
성운의 말대로였다.
이른 아침.
단염과 사티로스의 신, 무진을 추종하는 이들이 데이머릿의 광장에서 흑린과 야천을 모욕해 댔다.
모여선 군중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연신 동의를 했다.
광장의 무진을 추종하는 선동꾼이 말했다.
"밤중에 무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흑린에게는 항복할 수 있지만, 야천에게 항복해선 안 된다고!"
그 말에 군중들이 열띤 환호를 보냈다.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잠깐, 이렇게 되면... 벌써 그 이벤트가 나오는 건가요?"
"그래."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분리(政敎分離)야."
124화
지구의 역사에서 정교분리는 정치 세력이 종교를 끊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단순히 그러하다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의 세태나 미국이 독립 이후 국교를 정하지 않는 등 일련의 세속화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이 실재하고, 그 신의 영향력이 적지 않은 로스트 월드에서는 모습이 조금 달랐다.
엘다르가 말했다.
"시기상 조금 빠르긴 하지만 복잡해질 수 있겠네요."
"확실히 게임을 못하는 건 아니야."
"네?"
"아니, 그냥 혼잣말."
성운은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했다.
가지치기 덕분에 정치냐 종교냐, 또는 야천이냐 무진이냐 줄타기를 하고 있던 개체들은 솎아져 버렸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정하지 않는 이들은 제일 빨리 사라지기 마련이다.
양쪽 모두에게 첩자로 의심받기 마련이니까.
각각의 편이 확실히 정해졌으니 무진의 추종자들이 할 일은 단순했다.
단염과 사티로스의 신인 무진, 즉 크람푸스가 원하는 대로 지금의 왕인 아란주 돌란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제일 당황스러운 것은 왕이 된 아란주 돌란이다.
아란주에게 데이머릿 내부에서의 반란은 예상할 수밖에 없다.
정통성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 정통성을 유지시키는, 150여 년 전 단염을 세웠던 혈통을 끊어 버린 당사자였으니까.
아란주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아란주는 흑린의 바센 라크 오라즌에게 양해를 구하고 반란의 조짐이 보일 시 움직일 수 있는 소수의 무장 호위대를 갖추었다.
그리고 예상하듯 나타난, 아란주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선동꾼을 예의 주시하다가, 사람이 드문 새벽 중에 그들을 끌어내 고문해서 배후를 확인하고 곧장 사형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아란주에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점점 선동꾼들이 많아졌고, 아란주가 가진 소수의 무장 호위대로는 처리가 곤란할 정도가 되었다.
아란주는 흑린군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무장 세력이 봉기한다면 당연히 흑린이 자체적으로 무마시킬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선동꾼들은 광장에 모여 떠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란주는 이런 일조차 흑린에 의지한다면 흑린에게 얕보일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신변에 어느 정도 위협이 되더라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그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다.
따라서 아란주가 믿을 것은 신앙이었다.
대대로 단염의 왕가는 다른 나라의 왕가처럼 신탁을 받거나 신의 왕가에 대한 호의를 증명하는 의식을 치렀다.
아란주는 그 의식을 이룬다면 충분히 선동꾼들을 무마시킬 거라고 믿었다.
"서둘러 의식을 준비해라."
단염은 사제들을 불러 이러한 의식을 집행했고, 아란주 돌란은 왕으로서 그 자리에 임했다.
의식의 끝은 단염의 신을 상징하는, 왕가에 내려오는 상서로운 거울을 아란주가 양손으로 들어 올려 백성들을 비추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란주가 거울을 들어 올린 순간, 거울이 부서졌고, 날카로운 파편이 아란주의 안면에 상처를 냈다.
아란주의 무장 호위대와 사제들 덕분에 어떻게든 의식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어린아이들조차도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염의 신 무진은 아란주 돌란을 버렸다."
아란주가 그토록 막으려고 했던 소문은 데이머릿의 장벽을 넘어 단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아란주 그 자신이었다.
거울에 의한 얼굴의 베인 상처는 흉터로 남았는데,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실이 있었다.
평생을 믿어 온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란주는 신실한 신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단염에서 무진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짐승이 공기를 들이켜고 물고기가 아가미로 물을 거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짐승이 공기에게서, 물고기가 물에게서 거절을 당한 셈이니 아란주의 고통은 클 수밖에 없었다.
아란주는 기도를 올리며 신의 응답을 기다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신이시여, 제가 틀렸단 말입니까? 나라를 보존할 길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무진을 믿고 있는데, 그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성운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무진, 크람푸스는 아란주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아란주를 용인하게 되면 단염은 실질적으로 항복한 것 이상의, 절차상으로도 흑린에 항복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절차상의 항복도 중요한 문제다.
크람푸스는 동맹의 다른 플레이어를 생각해서라도 철저 항전을 해야 하는데, 단염이 저항도 없이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게 되면 단염의 흑린에 대한 저항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내부에 흑린에 대한 분노에 차 있는 단염의 백성이 있더라도, 왕이 이미 그 항복을 명백히 했다면 저항 정신도 하락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란주가 항복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만 국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란주 입장에선 항복 선언을 되돌릴 수도 없는 시점이다.
흑린으로부터 오라즌의 답신과 지원 부대, 보급 부대가 출발했고 데이머릿 안에서 며칠 만에 9천의 흑린군을 성곽 밖으로 몰아내는 신묘한 재주가 없는 이상 데이머릿은 안과 밖 두 개의 흑린 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성운은 아란주가 항복을 번복하지도, 그렇다고 신에게 거절당한 좌절감 때문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강해. 의식 때 거울이 깨진 이후로 오히려 능력치가 성장했어. 인내가 많이 올랐군. 아란주 돌란이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저 능력치 때문이겠지."
그 말에 엘다르가 말했다.
"하지만 저 능력치는 크람푸스 님도 보고 계실 텐데요. 죽길 바란다면 스킬이나 다른 창조물을 통해서 살해하는 쪽이 좋지 않을는지요?"
"그야, 크람푸스가 진짜 바라는 건 그게 아닐 테니까."
"네? 그럼 왜..."
성운은 흥미롭다는 듯 아란주 돌란을 내려다봤다.
아란주의 깊은 생각에 빠진 눈동자는 염소를 닮아 일자 동공이다.
"내가 아란주를 도와주길 바라는 거지."
"네? 네뷸라 님이요?"
"그래. 지금 아란주에게 신앙을 전하기 좋잖아? 아란주는 도움이 필요하니까. 진정으로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만약 나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이용하고 싶어 하겠지."
"...안 하실 건가요?"
성운은 끄덕였다.
엘다르는 더 당황했다.
"어라, 왜죠? 진정으로 믿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한 번 신앙이 생기고 호의가 이어지면 아란주의 마음도 열릴 텐데요."
"그게 크람푸스의 의도라니까."
성운이 계속 말했다.
"아란주 돌란이 나, 그러니까 야천을 믿는다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단염에서 축출하기 쉬워질 테니까."
"글쎄요? 가만히 놔두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아란주가 네뷸라 님을 믿으면 아란주를 보호할 수도 있고, 만약 그 보호가 이어지면 단염에서 크람푸스, 즉 무진의 세력을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종교와는 별개로 흑린에 호의적인 여론도 있고요."
성운은 가로저었다.
"크람푸스가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은 거 같군."
"무슨 말이신지...?"
"내가 간단히 조언을 몇 가지 했었거든."
성운의 머릿속에 크람푸스의 계획이 그려졌다.
아란주의 항복 번복이 A안, 아란주의 사망이 B안, 아란주가 야천을 믿는 것이 C안이고, 야천이 아란주를 끝까지 지켜 내는 것이 D안일 것이다.
"아란주를 지켜 내는 과정 자체가 문제야."
"왜죠?"
"그만큼 내 리소스를 써야 하니까. 단염은 이미 내가 정복한 곳인데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 줘야 한다는 점이 문제인 거지. 이것도 크람푸스가 바라는 결말 중 하나야. 비록 크람푸스가 가진 여력과 싸워야 한다고 해도 전장은 다른 장소인 쪽이 좋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죠?"
성운이 가면 아래에서 씩 웃었다.
"단순히 '계획이 많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알려 줘야지."
"부족한가요?"
"엘다르."
"네?"
성운이 엘다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획은 '적보다' 많아야 하는 거야."
─┼
잠에서 깨어난 아란주는 자신의 침실 구석, 그림자 아래 누군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 새벽녘이었다.
아란주는 머리맡에 놓아둔 검집을 쥐고 빠르게 일어났다.
"누구냐?"
"얀이라 한다."
"...얀?"
아란주는 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얀은 노움이자 단염 출신이지만, 많은 시간을 떠돌이로 지냈다.
저주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족과도 닮지 않은 검은색 귀를 가지고 있었고, 이명으로 악마 귀라 불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란주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얀은 연금술사였다.
그리고 연금술사의 지식을 탐했던 단염의 이전 왕가는 얀을 사로잡아 지식을 얻고자 했다.
아란주는 얀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얀을 사로잡기 위한 임무에 투입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연금술사군?"
"연금술사? 하, 이젠 아니지."
"연금술사 일은 그만둔 건가?"
"아니."
얀은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째서인지 악마 귀의 침입은 더 심해져서 오른쪽 안면을 덮을 정도였다.
우측 안면이 기괴하게 변해 늘 웃는 얼굴이 된 것 같은 얀이 말했다.
"나는 더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
"위대한 존재?"
"나는 마법사다."
마법이라면 아란주도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숲을 불태우고 산을 깎으며 강을 마르게 하며 바다를 가르는 힘.
드래곤을 죽이고 신에게 대항하는 힘.
"...옛날이야기잖나?"
"젊은 장군이 왕이 되었다더니, 이야기를 잘 모르는군."
"날 무시하는 건가?"
"그래."
아란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얀은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말했다.
"나는 흑린과 단염의 병사들이 지키는 이곳까지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다. 그리고 널 죽이고 걸어 나갈 수도 있지."
"넌 노움 노인일 뿐이다."
"시험해 보겠나?"
아란주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허세를 시험해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란주의 칼끝이 빠르게 얀의 목을 향했다.
칼끝이 얀의 목을 꿰뚫었다.
얀이 허세를 부렸다고 생각하고 혀를 차려던 아란주는, 아란주가 끌끌 웃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얀은 칼날이 목에 박힌 상태로 한 걸음 더 아란주에게 다가왔다.
아란주는 깜짝 놀라며 칼을 뽑고 뒤로 물러났다.
얀이 웃었다.
"너무 놀랄 것 없어. 이게 마법이다."
아란주는 얀이 허깨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칼끝이 살을 꿰뚫는 느낌을 알았고, 얀의 칼날이 꿰뚫렸던 목에서 피가 천천히 흐르는 것을 보았다.
아란주는 낭패라고 생각하면서도, 침착하게 손수건으로 칼날의 피를 닦아 낸 다음, 그 손수건을 얀에게 던졌다.
"닦아라."
아란주의 호의에 얀의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고맙군."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온 거지?"
얀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 내곤 말했다.
"그대를 도와주겠다."
"날 돕는다고?"
아란주는 의심스럽게 얀을 바라보았다.
"...그 대가는?"
얀이 말했다.
"신들이 간섭하지 않는 나라."
아란주가 팔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된다. 신을 믿지 않아 쇠멸한 종족의 역사를 봐라. 신들의 창조물들이 지배하는 전쟁터를 보고. 사도 라크락에 의해서 왕이 죽었다. 신들의 보호 없이는 그 어떤 나라도 존속될 수 없어."
"신을 대신할 힘이 있다면?
아란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설마."
"그래."
얀이 완연한 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이 나라의 중심에는 마법이 있을 것이다."
125화
"...대단한 자신감이군."
"내가 본 것이 맞다면 마법이야말로 역사를 바꾼 힘이니까."
아란주 돌란은 마법사의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아란주의 관심은 지금의 단염, 당장의 데이머릿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이라면 흑린을 몰아낼 수는 없나?"
얀은 예상한 질문이라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겠군."
"왜? 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 마법이란 게 얼마나 많은 병사들을 대신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당장에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이 있다."
"사기가 바닥을 치고 무장도 하지 않은 이들 말이지."
얀이 부연했다.
"당장의 흑린은 나라고 해도 감당하기 힘들다. 게다가 야천은 두려운 신이지. 그는 마법과 마법사들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쉽게 움직이지 못해."
"...흠."
아란주는 얀을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딱히 지적할 부분을 짚지 못했다.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단염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흑린에 대해서도?"
"그 질문은 어렵군."
"어떤 부분이?"
"이를테면 흑린이 대륙 전체를 정복한다고 가정해 봐라. 단염만이 그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긴 힘들지 않겠나?"
아란주가 답했다.
"패배주의적이군."
"허황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
다섯 동맹에 속해서 흑린과 싸워야 할 때는 다섯 동맹의 승리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흑린에게 한 번 패배하고 일이 꼬여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단염이 패배했을 뿐이지만 다섯 동맹이 승리할 거라고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단염이 내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흑린의 행운에 불과할까?'
자신할 수 없었다.
사도 라크락은 건재했고 흑린의 군대는 역시나 강성했다.
이제 나머지 동맹이 합공해서 흑린을 공격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얀이 말했다.
"그래도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다."
"그럼?"
아란주가 눈을 마주쳤다.
얀이 계속 말했다.
"다만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지."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단염이라는 국명이라면 지키기 어려울 거다."
"그렇겠지."
"무진이라는 신을 아직도 섬기고 있나?"
"...아직은."
"흠. 어찌되었든 나는 신들 사이의 싸움을 막을 여력은 없다."
"그럼 뭘 지킬 수 있단 거지?"
얀이 답했다.
"이 나라의 백성들."
아란주는 의외의 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침음을 삼켰다.
"...나라는 사라져도 백성들은 어디로 가진 않을 텐데? 왜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거지?"
"넌 잘못 이해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단염의 역사를 배웠다면 알고 있겠지. 대륙의 나라들은 모두 신의 이름으로 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받고 핍박당하며 살아왔다. 우리 종족도 그랬지. 만약 나라가 빼앗기고 너의 신이 아닌 자가 지배하는 땅에서 너와 너의 자손들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렇다면, 어떻게 백성을 지킨다는 거지?"
얀이 주먹을 쥐었다.
"힘이다."
"...힘이라."
"힘이 있다면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지켜야 할 것은 나라도 신도 아닌 결국 사람이다. 우리가 바로 사람이니까. 사람은 힘을 가져야 한다."
아란주가 천천히 말했다.
"그 힘이 마법이라는 건가?"
"그래."
아란주는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얀이 재촉했다.
"생각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널 만나기 위해 신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한 마법을 써야 했다. 해가 뜨기 전에 선택해야 한다."
아란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 밤의 선택이 많은 것을 가름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참 뒤, 아란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고민은 끝났다."
─┼
"오랜만입니다, 바센 장군."
바센은 오라즌에서 카일의 답을 들고 온 사신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오랜만이군, 수렵대신. 그대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바센 앞에 선 것은 붉은 눈에 백색 비늘을 가진 데아닌이었다.
"전쟁 중이니 제가 바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연회나 사냥에 신경을 쓰는 대신이 있다면 폐하의 꾸지람을 듣기 좋겠지요. 그러다 보니 궁에 일손이 비는 사람이 아무래도 바쁜 사람들 대신 밖으로 나돌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데아닌의 말에 바센이 웃었다.
바센은 데아닌이 암중에서 카일의 손발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데아닌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카일의 관심이 크고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란주 돌란이라고 했던가요? 단염의 새로운 왕은 이제 신경을 더셔도 됩니다."
"흠."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센은 장군으로서 딜파 협곡 전투에서 승리를 하는 등 궁에서 좋은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 주었다.
하지만 바센은 여전히 왕족이었고, 한때 세자이기도 했다.
외교적인 임무까지 맡게 되면 대신들은 불안해할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카일이 데아닌을 보내 사절로서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일종에 바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이 일을 바센보다는 데아닌이 더 잘할 것이기도 했다.
"전투를 치르시는 동안 병사들을 더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단염의 왕과 대화를 통해서 단염의 병사들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고, 여러 나라들이 군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머릿에 흑린이 입성한 이후 이미 여러 나라에서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단염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적과에서 2만, 그리고 거리는 꽤 멀지만 만굴에서 2만 4천, 금안에서 1만 8천, 모두 합쳐 6만 2천이라는 대군이 데이머릿을 향해 슬금슬금 진군하고 있었다.
각각의 군대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하는 만큼 도착 일정을 맞추기 위해 서로의 진군 속도가 달랐지만 한 달 이내에는 도착할 터였다.
"석면은 아직 내전 중인가?"
"최근 소식을 제가 더 빨리 받은 모양이군요. 석면은 아버지를 죽인 그 패륜아의 승리로 끝날 거랍니다."
"흠."
바센은 레딘 비알 오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
패륜을 저지른 것이야 바센은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왕이 되고 싶었다면야.'
게다가 레딘의 아버지 데르말딘도 그리 좋은 성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 정돈 소문으로 들어 봤으니까.
특이한 것은 그 이력이었다.
레딘은 왕을 죽이기 전에 아주 시시한 기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단신으로 다른 귀족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자리를 공고하게 다지고 있었다.
데아닌이 말했다.
"마치 신의 총애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보이는군."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자신이 속선의 사도라고요."
"과연."
데아닌은 내전을 끝낸 석면이 병사를 준비할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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