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4

'아직 올도르가 죽은 것도 들키지 않은 것 같군.'
마즈다리는 배를 점령하기 위해 며칠 동안 시간을 들여 배 여기저기에 마법진을 그려넣었다.
속선과 속선의 사제를 속이기 위해서 눈속임 마법을 곳곳에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시작하겠나?
'그래.'
마즈다리는 썩은 손과 함께 주문을 외웠다.
돌탄 섬에서부터 돌아온 이후 꾸준히 준비한 안배가 뜻을 이루는 시간이었다.
마즈다리의 방 안 마법진들은 마즈다리가 만들어 낸 규칙을 다른 마법진으로 옮기며 발동시켰다.
가장 마지막에 발동된 마법진은 배의 바닥에 있었다.
이따금 보존된 물과 식량을 챙겨 가기 위해 내려오는 보급 담당을 제외하면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선창.
그 선창 구석 보이지 않는 자리에 마법진이 붉게 빛나더니, 그 위에 쓰러져 있던 쥐 시체가 꿈틀대며 움직였다.
시체 쥐는 배가 크게 부풀었고 움직일 때마다 구멍에서 체액이 흘러나왔지만, 살아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가지고 코를 킁킁댔다.
허기가 진 것처럼 보였다.
시체 쥐는 배를 채우기 위해 선창에 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나무를 갉았다.
본래라면 몇 시간은 갉아야 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시체 쥐의 힘은 생전보다 몇 배나 강해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저장된 곡식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 쥐는 곡식으로는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없음을 알았다.
시체 쥐는 본래 가지지 못했던 대담함을 가지고 별빛이 닿는 선창 위의 선원들의 공간으로 올라갔다.
곤히 잠든 선원들 사이를 누비던 시체 쥐는 이불 삼아 덮은 얇은 천 가지 밖으로 솟은 트롤 선원의 발을 발견했다.
시체 쥐는 신이 나서 달려가 트롤 선원의 새끼발가락을 그대로 우직 뜯어먹었다.
비명과 함께 트롤 선원이 깨어났고, 동료들이 불을 밝혔다.
시체 쥐는 도망간 뒤였고, 트롤 선원의 새끼발가락이 있던 자리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선의 겸 고참 선원은 상처를 지혈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우선 부위를 동여맨 뒤 날이 밝으면 다시 보자며 발가락이 잘린 선원에게 독한 술을 먹였다.
하지만 트롤 선원은 다른 이들이 다시 눈을 붙이며 잠들 무렵 다시 깨어났다.
잠들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트롤 선원의 심장은 멎어 있었다.
죽은 트롤 선원은 이지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뇌는 이미 혈류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기능을 정지했고 박테리아와 세균이 과하게 활성화되면서 체세포를 뜯어먹고 있었다.
선원은 잠들었을 때 자신의 발가락을 뜯어먹은 고통도, 잠들기 위해 먹었던 독한 술의 맛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 공허를 가득 채운 것은 식욕이었다.
트롤 선원은 자신을 봐주기 위해 방금까지 새끼발가락을 지혈해 준 고참 선원을 발견했다.
그는 옆자리에 목을 내놓고 잠들고 있었다.
다시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고참 선원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렸고, 기사들이 내려왔다.
트롤 선원을 묶어 두는 과정에서 몇 명의 선원과 기사들이 물렸다.
야수같이 울부짖기만 하는 트롤 선원이었지만 사실 관계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이상 즉각 처벌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주변 선원들이 사정 청취를 듣는 사이 고참 선원이 과다 출혈로 사망하자, 트롤 선원을 바로 처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기사 하나가 올도르를 찾아 올라갔지만, 올도르는 깨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명령 보고는 마즈다리에게 전해졌다.
"군법이 있는데 임의로 처리하다니? 그러지 말고 그 선원을 가둬 두고 잘 감시해라. 다음날 올도르 장군이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그 말대로 되었다.
트롤 선원을 가두기 위해 또다시 선원들이 물렸다.
상황이 진정되는가 싶더니 트롤 선원에게 물렸던 이들이 열병으로 앓아누웠다.
얼마 가지 않아 숨이 멎는 이가 또 나왔다.
기사들은 느닷없는 돌림병에 겁을 먹고 갑판으로 올라오는 공간을 걸어 잠궜다.
선원들의 공간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물어 죽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선원 중 몇몇이 선체 측면에 포를 쏘기 위해 내놓은 임시 구멍으로 갑판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이미 병에 감염된 이가 있었다.
몇 시간 뒤.
아직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항해가 이어지는 군선 고래수염에는 걸어 다니는 시체들만이 즐비했다.
마즈다리는 이 시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법진을 두르고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마즈다리가 사용한 것은 '좀비 역병' 마법이었다.
'탈라진의 손'과 같이 통제할 수 없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위험한 주문이었지만, 마즈다리는 나름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이 주문을 사용할 거라면 반드시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라, 고 했던가.'
바다 위의 배라면 그 조건을 충실하게 지킨 셈이다.
마즈다리는 좀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 몸 위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배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즈다리는 선장이 무슨 명령을 내리고, 선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유심하게 지켜보았기에 어렵지 않게 흉내 낼 수 있었다.
마즈다리는 항해도를 보고 바다 안개가 드리우는 지역을 확인했다.
대장선인 고래수염은 뒤따르는 군선들을 향해 항로 변경을 명령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유령선을 성공적으로 운용한 뒤 해운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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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마법사 마즈다리는 석면을 배신한다'가 성사되었습니다.」
성운은 상태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잘될 거라고."
그 말에 룬다가 입술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예언이야? '나는 오늘 사과를 먹을 것이다'라고 말한 다음 사과 따 먹으면 그게 예언을 성공시키는 거야?"
"...아닌 건 아니지 않나?"
엘다르가 말했다.
"그건 자충적 예언이라고 하옵니다. 예언 그 자체가 예언을 이루기 위한 요소로 쓰이면 말이지요."
"뭐, 그렇다고 하네."
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되면 신이라 하더라도 그 사고 능력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다.
마법사는 단순히 마법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는 없다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이 모여 내면에 체계적인 마법학적 지식을 갖추게 되는 걸 의미했다.
이러한 과정은 마법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고 명상을 통해 내면화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마법사의 행동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마법사가 불손한 행동을 한다면 알 수 있었다.
마법사를 통제하지 못하고 배신하도록 놔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인 만큼,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마법사가 존재하면 마법사를 요주의 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주된 일과에 포함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 자체가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는 게임이야. 이런 요소는 한둘이 아닌데, 마법사에 끊임없이 신경을 쓸 수는 없지.'
게다가 마법사로 인해서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 말은, 다른 플레이어가 방법을 잘 조절한다면 마법사가 성공적으로 배신하도록, 그리고 살아 돌아가 마법사만의 영향력을 가지도록 놔둘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마법사는 기질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반항적이니까.'
특정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마법사는, 자신만의 공방을 세우고 제자를 들여서 자신만의 권력을 차례차례 세워 나가는 법이었다.
마법사는 단독으로도 수백, 어쩌면 수천의 병사에 필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통제되지 않는 순간 신앙 자원을 갉아먹는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성운은 그렇게 했다.
첫 번째는 플레이어 모임을 호출해서 마법사에게 접근했다.
그런 다음 마법사의 히스토리를 확인하고 그 마법사가 배신할 수 있도록 '예언'을 내린다.
이 기반 작업이 끝나면 다음은, 마법사에게 배신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어느 날 마법사가 홀연히 사라져 버려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상대 국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마법사를 섬기고 따르던 개체들이 마법사의 힘에 대해 공포를 느낄 테니까.
또한 플레이어들은 마법사를 주시하고 있으므로, 그런 신들의 시선으로부터 마법사가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할 필요도 있었다.
다행히 성운은 레벨이 충분히 높아 '신성 차단' 스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스킬에만 의지하지는 않았다.
성운은 마즈다리가 좀비 역병을 퍼트리던 그 새벽 동안 위즈덤을 불렀다.
"왜 불렀지, 네뷸라?"
"아니. 당분간 휴전이기도 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바둑이나 장기나 체스 같은 걸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루함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몸이라지만, 꼭 무용하게 보낼 필요는 없잖아."
"...엘다르가 있지 않은가?"
"엘다르? 장난해? 내 상대가 되겠어?"
성운은 위즈덤이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엘다르 말고도 너희 전부와 다 붙어 봤는데, 시시하더라고. 근데 뭐, 자신 없으면 됐어."
"자신 없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그럼 도전할 건가?"
위즈덤이 웃었다.
"도전하는 건 그쪽이겠지. 뭘로 할 건가?"
"바둑으로 할까?"
"잠시 기다려라, 게임 판을 창조해야겠군."
그리고 실제로 위즈덤의 실력은 우수했다.
성운과 거의 비등한 실력이었는데, 성운의 실수 때문에 마지막 판을 따내며 최종적으로 이겼다.
"그럼 이번엔 내 승리인가?"
"음, 그래. 제3 대륙 바둑왕은 너야."
"로스트 월드 랭킹 1위께서 인정해 주다니, 영광이군."
"별 말씀을."
성운도 실제로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 사이 마즈다리가 배를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이었다.
위즈덤은 마즈다리가 탄 배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깨달았겠지만.'
룬다가 말했다.
"네뷸라, 훌륭하게 예언을 성사시킨 건 알겠지만 문제가 있어."
"뭐지?"
"이제는 마법사가 마즈다리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야."
그 말은 맞았다.
석면이 제일 빨랐고, 마법적 지식을 가장 많이 축적하는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마즈다리가 가장 먼저 마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마법을 주목하고 있던 건 위즈덤과 석면만이 아니었다.
금안과 단염 또한 연금술사의 탑에서 도망친 저주받은 자들을 사로잡고 지식을 끌어모았다.
그들의 협력을 받는 마법사가 둘은 더 있었다.
하지만 성운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언제 마즈다리'만' 배신시킬 거라고 했어?"
"응?"
"방법을 알고 기회가 있는데 구태여 놓칠 이유가 없잖아."
성운은 조금 전 먼저 떠올랐던 상태창을 다시 켜서 룬다 앞에 내놓았다.
「'예언: 마법사 얀은 금안을 배신한다'가 성사되었습니다.」
「'예언: 마법사 탈레이는 단염을 배신한다'가 성사되었습니다.」
성운이 말했다.
"이미 제3 대륙의 마법사들은 다 독립했다고."
109화
아나팍시오 화산호.
대륙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 아나팍시오는 휴화산으로 아주 오래전 화산 폭발로 정상이 움푹 팬 분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분지 지형만 하더라도 직경이 수 킬로미터, 화산호 가운데서 고개를 올려다보면 하늘을 담은 거대한 그릇 안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절경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모인 다섯 플레이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당했군."
위즈덤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순간에도 네뷸라를 신용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곧잘 보기도 하니 친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바둑을 하는 동안은 순수하게 즐거웠고, 네뷸라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파악하지 못했다."
그 말에 장완이 말했다.
"그딴 감상적인 푸념은 아무래도 좋아. '바둑이 재밌었다' 따위 알 바냐고."
장완은 사자탈의 눈썹을 치켜올리고 마구 흔들어 댔다.
"이제 어쩔 거야? 마법사야말로 우리 비밀 무기였던 거 아냐? 그런데 그걸 잃어버렸으니 흑린과 전쟁을 해도 딱히 내세울 무기가 없잖아? 화약을 가진 건 상대도 똑같아."
"어..."
룬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분위기 안 좋은데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마법사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어차피 네뷸라도 마법사는 없잖아?"
"라비나라고 있지 않아? 뿔 달린 애."
"마법사는 아직 아닐걸."
크람푸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아니야. 그리고 나중에라도 마법사가 될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 말에 장완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가 되지 않는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히스토리에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어."
"그래? 의외인걸."
"그리고 무엇보다 네뷸라의 전략이 '안티매직'인 것 같아서."
"...안티매직인가?"
안티매직 또한 전략 중 하나였다.
마법사를 컨트롤할 수 있다면 마법사를 전투에 투입시키는 건 충분한 이점을 제공한다.
문제는 마법사라는 개체는 플레이어가 쉽게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떠나, 마법사 자체가 플레이어의 종족을 공격하는 등 마이너스 요인이 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실제로 다섯 국가의 동맹에 속했던 세 마법사 얀, 탈레이, 마즈다리는 모두 플레이어 국가에 피해를 입힌 다음 도망친 상태다.
이런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마법과 마법사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그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종족에게 새겨 넣어야 했다.
이런 플레이 방식은 마법이라는 이점을 저버리는 대신 마법이 채워 주지 못하는 기술에 대한 요구로 과학 발달에 어드밴티지를 얻고 마법을 지지할 때 생기는 신앙 자원에 대한 디메리트도 없어진다.
장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안티매직인 것치곤 흑린은 마법사와 마법에 관대한 편이야. 국법으로 처벌하고 있지만 왕은 그런 마법의 발생에 관대한 편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흑린은 여분의 마법 지식을 얻을 수단이 존재했어. 연금술사의 탑에서 도망친 연금술사들이 꽤 많으니까 그중 하나에 접촉할 만도 했는데, 필요했던 건 휘 라비나 무엘뿐이었는지 다른 연금술사의 지식을 찾지 않았지. 라비나 그 자신도 마찬가지고."
장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를 만들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다면 인정해야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이알이 검은 면사포 뒤에서 말했다.
"그나저나 크람푸스 님, 위즈덤 님. 여러분은 마법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내셨습니까?"
AR1026과 크람푸스, 위즈덤은 각자 자신이 유도해서 만들어 낸 마법사가 있었다.
금안의 얀, 단염의 탈레이, 석면의 마즈다리까지.
크람푸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경험상 이렇게 잃어버린 마법사는 찾기가 어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나, 위즈덤?"
위즈덤 또한 동의했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눈속임' 마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법사 가까이에 사제가 있다면 실체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이 거대한 게임 판에서 직접 마법사를 찾으러 다닐 수도 없고."
로스트 월드에는 검색 기능 같은 건 없었다.
마법사가 아니라 임의의 사람 한 명의 정보를 쥐여 주고 찾으라고 해도 꽤나 공을 들여야 하는데, 작정하고 숨을 의도를 가졌으며 동시에 신의 눈을 피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이를 찾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그건, 저희가 직접 찾을 때 그렇겠지요."
그 말에 위즈덤과 크람푸스가 에이알을 바라보았다.
위즈덤이 말했다.
"아, 혹시..."
"네."
AR1026이 시스템 창을 하나 띄우며 말했다.
"창조물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AR1026이 띄운 시스템 창에는 마치 돼지처럼 생긴 짐승이 보여졌다.
크람푸스가 질문했다.
"왜 돼지지?"
"돼지가 냄새를 잘 맡지 않나요?"
"...보통 개 아닌가?"
"개보다 돼지가 냄새를 더 잘 맡는답니다. 트러플, 서양 송로버섯을 찾는데 돼지가 쓰인다고 하지요."
"그랬나?"
"이름은 다사무입니다."
"...이름은 아무래도 좋은데."
AR1026이 말했다.
"아무튼 추적 관련 기능을 잔뜩 붙였고, 운 좋게 '뛰어난 후각' 스킬이 붙었습니다."
그제서야 위즈덤이 감탄했다.
"잘됐군. 그거라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언젠간 찾을 거야."
플레이어가 개체를 직접 찾아내는 건 많은 시간이 들지만 창조물을 사용한다면 아무래도 좋은 법이다.
또한 마법사가 사라졌다고 해도 마법사가 가지고 있었거나 손을 댄 물건들은 남아 있었다.
뛰어난 후각 스킬이 달린 창조물이라면 마법사를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사를 찾아내고 그걸 처리하는 건, 마법사를 잃은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위즈덤이 말했다.
"마법사들만 처리할 수 있다면 변수가 제거된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룬다의 말처럼 크게 걱정할 건 없지 않은가?"
"그렇지?"
위즈덤이 말했다.
"네뷸라는 잠정적으로 안티매직이라고 할 수 있고 단순하게 보자면 우리와 전략이 비슷하다. 반면에 우리는 몸집이 다섯 배는 더 크지."
영토의 크기만 따진다면 각각의 국가가, 상대적인 크기만 따진다면 가장 크기가 작은 AR1026의 금안조차도 흑린보다는 컸다.
흑린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강국이 된 것은 성운이 전략적 성공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다를 수 있었다.
전쟁은 문화나 정치, 외교와 달리 엄연히 수학의 문제였다.
더 넓은 영토에서 더 많은 곡식을 거두고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으므로, 인구도 더 많다.
"단순 비교만 해도 전투에 동원 될 수 있는 병력은 여덟 배까지 차이가 난다. 조금 더 무리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장완이 가로저었다.
"'단순 비교'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말라고. 난 경각심을 다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계속 상대를 랭킹 1위라고 치켜세워 주는 꼴을 해서 배알이 꼴리지만... 아무튼 우리보다 잘하는 건 맞지 않아?"
"하지만 네뷸라와 우리를 비교하자면, 기술도 동등하며 똑같이 마법도 없다. 반면에 병력은 우리가 많지."
"음..."
"물론 흑린은 방어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기회가 아니면 화포 기술이 더 발전했을 때 병력의 비대칭성이 우위를 점하기 점점 어려워지니 최상의 타이밍은 지금이야. 네뷸라가 그걸 모를 리는 없지. 하지만 대포가 있는 지금 공성전 교환비를 가늠해도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어떤 부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장완은 고민을 거듭하다 가로저었다.
"내 말은 주의를 해야 된다는 말이었어."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불안을 키울 필요도 없다고 본다. 우리가 약점이라면 바로 그 부분이 약점이겠지."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위즈덤이 말했다.
"네뷸라를 상대해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네뷸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적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네뷸라의 플레이를 보았으니까. 네뷸라는 자신보다 체구가 큰 적을 상대할 때 일관된 플레이 양식이 있다."
장완이 말했다.
"아, 알겠어. 상대를 분열시키는 것 말이지?"
"그래."
위즈덤이 계속 말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네뷸라의 승산은 우리가 분열해서 서로 싸우길 바라고 있을 텐데, 자연히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아닐 거야. 적극적으로 개입하겠지."
"그러니 우리 동맹만 굳건하다면..."
"문제없이 이길 수 있다."
그 말에 룬다는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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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불곡.
야천교 성지 중 하나로 뱀파이어들이 야천을 믿고 앉은 채로 굶어 죽은 협곡.
본래 먹을 것이라곤 나지 않는 메마른 땅이고 지금도 뱀파이어 시체들이 동굴마다 안장되어 있는 스산한 장소라 인적을 찾기 드물었다.
하지만 좌불곡 안쪽엔 이름 붙여지지 않은 깊은 통로가 있었다.
그 통로 끝,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마법사였다.
가루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드디어 모두 모였나."
노움 얀이 말했다.
"그 탑으로부터 셋밖에 모이지 못했다니, 안타깝군."
엔트 탈레이가 말했다.
"휘 라비나 무엘은?"
그러자 라비나에 대해 알고 있는 마즈다리를 두 사람이 바라보았다.
"라비나는 마법사가 되는데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더군."
"뭐, 그럴지도 모르지. 이미 저주를 받고 태어났는데 더 깊은 고통을 받을 필욘 없잖은가?"
마즈다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저주받은 자는 마성의 정령과의 대화로 끊임없이 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시험을 받아야 했다.
물론 정령 중에는 특별한 의도가 없는 이들도 있지만, 어떤 정령들은 고약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걸 넘어 고통을 주거나 죽이려고 드는 욕망을 지니기도 했다.
마성의 정령이 가진 의식과 저주받은 자 자신의 의식을 동화시키게 되면 그 사람은 타락하게 된다.
악인이 되거나 미쳐 버리는 것이다.
연금술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사한 끝에,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기피 현상이 그런 이유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자신 내면의 마성의 정령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 욕망을 잠재우고 달래는 방식으로 마음을 단련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 마성의 정령과 자신을 동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세 마법사는 라비나가 자신의 길을 잘 이겨 나가길 바라며 회의를 시작했다.
각 마법사는 혼자서도 일가를 이룰 수 있을 테지만, 먼 과거에서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다시 만날 장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들에 의해서 무너진 탑을 복원하되, 이제는 연금술사의 탑이 아닌 마법사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그 힘과 지식을 전파할 생각이었다.
계획에 열중하고 있던 그때 탈레이가 말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비가 오는 것 같은데..."
얀이 돌아보자 마즈다리가 가로저었다.
"아니, 빗소리 사이로 다른 뭔가가 있다."
뒤이어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오자 마법사들은 모두 무기를 뽑았다.
동굴 입구에 그려 둔,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한 마법진이 발동한 것이다.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것은, 리자드맨이었다.
"넌 누구냐?"
얀의 질문에 리자드맨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자드맨은 제 몸보다도 큰 돼지로 보이는 동물을 끌고 들어왔다.
리자드맨이 말했다.
"너희가 마법사인가? 흠. 맞는 거 같은데. 노움, 엔트, 닭."
"가루다다."
"아, 가루다. 미안하군. 내가 생전엔 본 적이 없다 보니."
'생전'이라는 단어에 마즈다리가 반응했다.
"다시 한 번 묻지, 넌 누구냐?"
"내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우선, 야천의 심부름꾼이라고 해 두지."
마즈다리는 다시 한 번 듣게 되는 야천의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얀이 말했다.
"어떻게 우릴 찾은 거지?"
"너흴 따라온 게 아니다. 내가 따라온 건 여기 이 돼지였지."
리자드맨은 한 손으로 제 몸보다도 큰 돼지 시체를 들어보았다.
"보자마자 자연스러운 돼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 너희를 찾기 위한 다른 신들의 창조물이라는 걸 알았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으면 부주의해지기 마련이지."
리자드맨의 말은 마치 마법사들을 나무라는 것 같기도 했다.
마법사들 자신이야말로 신을 속였다는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자만했던 것이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그대가 누군지 알겠군. 신의 창조물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리자드맨의 모습을 한 야천의 사도."
리자드맨이 고개를 들었다.
말해 보라면 말해 보라는 투였다.
"라크락, 그대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우릴 죽이기 위해서인가?"
110화
라크락이 웃었다.
"그럴 리가."
라크락은 AR1026의 돼지 창조물을 휙 던졌다.
가볍게 뜬 다사무의 시체가 세 마법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희는 죽었을 텐데. 왜 귀찮게 손을 쓰지?"
마즈다리는 다사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짜 신의 창조물인가?'
알려진 괴물이나 신수는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은 흉물이나 흉신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신이 만든 창조물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살이 부드럽고 온기가 남아 있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느닷없이 나타난 흉물과 흉신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겠군.'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마법사들은 마즈다리와 생각이 같은 것 같지는 않았다.
노움 얀이 말했다.
"흥, 이딴 돼지 정도는 우리도 처리할 수 있었다."
얀은 늙은 노움으로 노화에 따른 근시를 유리 세공품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얀은 특별히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를 말한 적이 없지만, 노움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긴 종족에 속하므로 마즈다리는 얀이 100살 안팎일 것이라 짐작했다. 인간이나 하프빈으로 치면 60살 내외일 것이다.
이 노움의 저주받은 자리는 오른쪽 귀였다. 검고 비죽비죽하게 생겨 그 어떤 종족과도 닮지 않은 귀는 '악마 귀'라고 불렸다.
"난 돼지를 말한 게 아니다, 노움."
라크락이 말했다.
"내가 말한 건 이 돼지 이후에 찾아올 다른 녀석들을 말하지. 신들을 우습게 보는 것치곤, 이 동굴이 그리 쾌적해 보이진 않는데."
그 말에 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는 엔트 탈레이가 말했다.
"도움에 감사한다. 하지만 이 돼지가 우리를 찾지 못하고 죽었다한들, 이 돼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위치가 파악된 건 아닌가?"
엔트는 실루엣만 보자면 이족 보행을 하는 여타의 종족과 다르지 않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가장 이질적이었다.
엔트는 몸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다른 종족과 교류하지만 영양분의 대부분을 일광욕과 수분을 섭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플레이어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가루다와 같은 '희귀 종족'에 속했는데, 가루다보다도 인기가 없었다.
식량 자원을 특별히 소모하지 않는 것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었다.
식량이 필요 없으니 더 넓은 영토도, 더 많은 자원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종족과의 경쟁을 통해서 기술을 발전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요구인 만큼 일종의 컨셉 플레이가 아니라면 특별히 선택하는 편이 아니었다.
엔트 탈레이의 저주받은 자리는 겉보기엔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그 이명이 섬뜩했다.
'육식 엔트' 탈레이의 말에 라크락은 손을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째서?"
라크락은 인상을 썼다.
이 전설적인 리자드맨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법사들을 압도하고 있었고, 표정을 잠깐 바꾸는 것으로도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라크락은 그저 복잡한 설명을 어떻게 이어 나갈지 잠깐 고민했을 뿐이었다.
"벌레신께서도 개입하셨다."
야천의 옛 이름에 마즈다리는 잠깐 의아해졌지만 금세 기억을 떠올렸다.
라크락이 계속 설명했다.
"우선 창조물과 신의 연결을 끊어 버렸지. 간혹 그런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저 창조물과 연결된 신은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 내가 저것을 죽였고, 그 다음 벌레신께선 저것과 닮은 녀석을 창조해 냈지. 지금 저 창조물과 연결된 신은 엉뚱한 돼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다."
탈레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라크락의 설명을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마즈다리가 재차 질문했다.
"그럼 라크락, 다시 한 번 묻지. 그럼 그대는 왜 우리를 찾아온 거지?"
"...흠."
라크락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로 말했다.
"다들 밥은 먹었나?"
─┼
요리를 전담한 것은 라크락이었다.
세 마법사들도 연금술사 출신인 만큼 요리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연금술이란 건 결국 못 먹는 요리일 뿐이니까.
하지만 라크락이 할 줄 아는 요리와는 또 별개의 장르였다.
라크락이 한 것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고 장작을 피우고 구워 내는 유목민의 요리였다.
'집채만 한 고기를 손질하고 구워 내는 재주는 또 별개로 봐야겠지만.'
다른 두 마법사는 요리 과정을 지켜보며 불안하게 속닥거렸다.
얀이 말했다.
"마즈다리, 어떡할 건가? 우리가 이대로 저걸 먹어도 되는 건가?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닌가?"
마즈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가 신의 사도와 대적할 수 있는가?'
마즈다리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마법을 복원하고 생각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한다면, 어쩌면.
하지만 '당장' 가능하냐면, 아니었다.
마법사는 전투를 위해선 사전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마법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고 마법진을 준비하고 컨디션을 갖추기 위해 마법을 사용할 시간과 장소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에 눈앞에 있는 신의 사도는, 만약 과거의 전설이 모두 사실이라면, 마법사 셋의 목을 떨구는데 검을 세 번 휘두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좋게 생각해. 라크락이 뭔가 일을 하려고 했다면 이미 저질렀을 텐데, 호의적이잖아?"
이번에는 탈레이가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군."
"뭐지?"
"'신이 창조한 고기' 같은 걸 먹어도 되는가 하는 부분이지. 저주 같은 것에 걸릴 일은 없겠나?"
"...어, 흥미로운 지적이군. 글쎄, 내가 읽어 본 고문헌 중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라크락이 말했다.
"걱정 마라. 고기는 고기일 뿐이니."
라크락은 잘 구워진 돼지의 살을 큼직하게 잘라 내 몇 번 씹지도 않고 삼켰다.
"음, 잘 구워졌군. 다들 먹지."
불안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마법사는 라크락 앞으로 다가왔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세 마법사는 신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활용했고,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자연히 끼니를 줄이고 되도록 생식을 하는 등의 과정도 포함되었다.
오랜만의 화식, 그것도 고기 굽는 냄새는 취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콤했다.
라크락이 칼로 잘라 고기를 나누자 세 마법사는 체면을 잊고 뼈에서 살을 뜯어 내며 고기를 씹었다.
마즈다리가 알고 있기에 라크락은 신성을 띄고 있으므로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을 텐데도, 배가 고픈 세 마법사처럼 고기를 먹었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자 라크락이 말했다.
"아, 죽음 너머에선 이런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거든."
"왜 그렇지?"
"영원히 산다면 누가 고기 역할을 하고 싶어 하겠나?"
마즈다리는 그 말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대단하지 않은 문답이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짚고 있었다.
신을 믿고 사후 세계에 가더라도 그곳이 완벽하진 않은 것이다.
배가 어느 정도 채워져 다들 배를 채우는 속도가 느려질 무렵, 라크락이 말했다.
"그래서, 얼마나 오래갈 것 같나?"
"무엇 말이지?"
"너희들 목숨."
얀이 사레에 들려 켁켁 거렸다.
엔트 탈레이가 물주머니를 쥐여 주는 사이, 라크락이 재차 말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날 만났지. 하지만 다음에도 그런가? 더 조심하고 주의하면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 세 사람이니 각지로 도망가면, 시간을 세 배로 끌 수 있겠군. 그 사이에 너희가 제자를 들여서 마법사로 만들 시간이 있다면 조금 더 시간이 있는 셈이고."
마즈다리가 말했다.
"도박에 가깝다는 건 안다. 신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도 반역한 건가?"
여기서 마즈다리는 물론, 얀과 탈레이 세 마법사는 야천이라는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다.
야천이 부추겼기 때문에 신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세 마법사가 자신의 뜻을 말했다.
"신이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살아 있었다."
"그건 신이 그저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서 우리를 돕는다는 말이지."
"마법이야말로 신의 도움이 없더라도 자립할 수 있다는 증거다."
마즈다리가 덧붙였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건 없다. 오히려 신에 의해서 죽는다면, 신이 우리의 힘을 두려워했다는 증거로 남겠지. 마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라크락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맞다."
"...신의 사도인 라크락, 당신이 우리 말에 동의한다고?"
"그래. 신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바보 천치지. 신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안다면 왜 당신은..."
"그걸 알기 때문이지."
라크락의 말에 마즈다리가 무슨 말장난인가 싶어 얼굴을 구겼다.
"신이 없어도 우리가 자립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우리는 그 장기판 위에 서 있더라도 신의 장기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않겠나?"
"궤변이다. 신의 뜻을 부정할 수 있어야 증명할 수 있다."
"신의 뜻과 나의 뜻이 항상 같았다면? 그럼 증명하기 위한 부정이 무슨 의미가 있나?"
"넌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라크락이 또 긍정했다.
"그럴 지도 모르지."
"뭐?"
"그렇담 이건 행복한 속임수로군."
마즈다리는 라크락의 말뜻을 모두 헤아리진 못했다.
하지만 라크락이 신의 사도임을 재차 인식했다.
'...사제도 아닌 신의 사도와 신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무얼 하겠나?'
마즈다리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 가지 못할 테니, 야천을 믿으라는 말인가? 호의로서 우리를 지켜 주겠다고? 이때를 위해서 우리가 각자의 나라와 신을 배신할 것이란 예언을 내렸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우리는 그 어떤 신의 수하로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
라크락이 가로저었다.
"야천을 믿지 않는데 호의를 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
"그럼?"
"하지만 계약 관계라면 다르지."
"...말했지만, 우리는 신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다."
라크락은 예상한 답변인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야천께선 너희에게 한 가지 요구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데, 너희가 거절할 것 같지도 않군."
"...뭐지?"
"살아남아라."
마즈다리는 부리를 부딪쳐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무슨 의미인지..."
"그게 전부다. 살아남기. 물론 야천께선 도움을 주시는데 한계가 있고 흑린도 이제 전쟁에 들어갈 테니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이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보단 목숨을 붙여 놓는 데 좋겠지."
마즈다리가 뭔가 알아차린 듯 말했다.
"알겠군. 우리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 신들에게 위협을 주니, 가치가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게 아니면?"
라크락이 말했다.
"그게 아니면? 저주받았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세상을 떠돌며 핍박을 받다가 의지할 이들을 만나지만 그것마저 무너져 내렸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비를 맞으며 어두운 동굴에 모여, 끼니도 굶으며 어두운 미래를 논하고 있다."
라크락이 다시 말했다.
"연민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마즈다리는 침묵하며 다른 두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오랜 동료다.
눈만 보아도 의견을 알 수 있다.
'이미 넘어가 버렸군.'
마즈다리는 자신의 선택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내려다보자, 손에는 먹고 있던 고기가 들려 있었다.
'이것 참, 우리 배를 불린 건 협상이었기 때문인가.'
우선 대접을 받으면 협상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마즈다리는 허탈해졌다.
라크락의 등장은 교묘한 계획의 일환이 아니었다.
보편적이고 기초적인 협상의 기술이었다.
"...알겠다, 라크락. 야천의 첫 번째 사도. 그 계약을 받아들이겠다."
111화
"엘다르, 너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질문해 온 것은, 느닷없이 연락을 해 온 룬다였다.
룬다는 평소와 같이 어깨와 다리를 드러낸 복장이었는데, 북쪽 설산을 배경으로 서 있기에 상당히 추워 보였다.
엘다르는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냈다.
"안경을 쓰셨군요?"
"어? 응. 조금 이지적으로 보일 생각으로. 어때? 그렇게 보여?"
"방금 설명한 이유, 네뷸라 님에게도 그렇게 말하실 수 있사옵니까?"
"...아니."
"...그 이유가 뭔지는 룬다 님 스스로도 잘 아실 테지요."
룬다는 안경을 접어서 등 뒤로 집어던졌다.
"아무튼 처음에 한 질문 어떻게 생각해?"
엘다르는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그런지 대어 보기 전까진 쉽게 답하기 어려운 답일뿐더러, 룬다의 속내가 어느 정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엘다르도 마찬가지지만, 평소에 룬다는 엘다르에게 따로 대화를 걸어오는 일이 잘 없었다.
두 사람은 네뷸라, 즉 성운을 중심으로 묶여 있는 관계였으니까.
'넓게 보자면야 저희 둘 다 네뷸라 님의 느슨한 동맹에 속했사옵니다마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았다.
엘다르는 느슨한 동맹에 속하게 된 계기가 성운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분적으로 약탈을 당하고 억압을 당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엘다르는 이제 와선 모두 전술적인 부분이었던 것 아닌가 좋게 생각했다.
반면 룬다는 처음부터 약점을 잡힌 상태였다.
'그런 것치곤 꽤나 협조적인 데다 네뷸라 님한테도 살갑게 구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 룬다를 보았을 때 그것이 꾸며낸 태도라기보다는 진솔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대화를 걸어왔다는 건 이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걸까?'
엘다르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므로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상황이 어렵긴 하지요?"
"그렇지."
룬다가 말했다.
"아직 동맹의 총 병력이 모인 게 아닌데도 이미 10만을 넘겼어. 반면에 흑린은 겨우 2만. 물론 이게 적은 숫자는 아니야. 방어전이라고 생각하면 해 볼 만하다고 볼 수 있긴 해. 하지만 흑린은 병력을 모으는 시간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니까 더 이상의 병력을 모을 수 있을는지는 조금 의문이지."
엘다르는 동의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숫자만 보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요. 방어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죠. 게다가 병력 개개인을 따질 경우, 병력비에서 동맹군의 5분의 2는 '작은 체구'죠."
엘다르가 말한 '작은 체구'는 르나르와 코볼트를 말했다.
르나르와 코볼트 또한 체구 차이가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르나르는 '작은 체구', 그리고 코볼트는 '아주 작은 체구'에 속했다.
르나르의 평균 키는 140센티미터, 코볼트는 110센티미터 정도로 물리적인 힘도 그만큼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룬다는 가로저었다.
"하지만 종족비로 따지자면 5분의 1은 '큰 체구'잖아?"
룬다가 말하는 큰 체구는 '트롤'을 의미했다.
평균 키가 230센티미터로 육체적으로 강력한 종족 중 대표적이었다.
물론 육체만 따지자면 그 이상으로 '오우거'가 있긴 했다. 이 경우 3미터에 가까운 평균 키와 수백 킬로의 체중으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가졌지만 문제는 전쟁이란 걸 수행할 만큼의 지능이 없기 때문에 주요 종족에 속해도 논외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룬다가 계속 말했다.
"물론 다 감안했을 때 뛰어난 육체 축복을 받은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 게다가 선택받은 자들도 드문드문 있고."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유리한 점이지."
엘다르가 의아해하다가 무슨 말인지 알고 "아"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화기가 등장한 이상, 선택받은 자들은 그렇게 유리한 이점은 아니야."
선택받은 자.
전기의 마성을 통해 번개의 힘을 공격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능력을 무한히 쓸 수는 없었다.
그 힘은 심력을 소모하고 심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약초를 흡입해야만 했다.
때문에 성운 또한 선택받은 자를 고평가하지는 않았다.
엘다르가 성운의 평가를 떠올렸다.
'일시적으로 달려드는 적의 기병대를 와해시키거나, 적 보병대의 방진을 무너트리는 데 가치가 있으니 사실상 달리는 대포, 즉 전차의 역할을 하긴 해. 하지만 그 전차는 열 대 남짓 있을 뿐이고, 적 숫자가 수만 명이라면 전술적 가치는 상당히 제한적이지. 몇몇 전투에서야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지만 그 정도는 적들도 감수할 거야.'
엘다르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 다른 유리한 점이 또 있네요."
"뭐지?"
"신성 레벨이요."
엘다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성운의 신성 레벨은 21이었다.
반면 동맹에서 가장 높은 신성 레벨의 플레이어인 위즈덤이 19.
엘다르가 말했다.
"신성 레벨이 높으니 부릴 수 있는 창조물의 수도 더 많죠. 전투에 특화된 창조물의 경우에는 사실상의 공성 병기고 수백 명의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잖아요."
"하지만 이쪽은 신이 다섯 명인데?"
"아뇨, 하지만 사도 라크락에..."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엘다르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 다섯 명이요?"
"그래. 동맹은 위즈덤, 에이알, 장완, 크람푸스,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잖아."
룬다의 표정은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엘다르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 그러니까 '일단은' 동맹에 속하신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일단은'이 아니야. 애초에 나는 동맹이라고. 처음부터 크람푸스와 동맹이었고, 이후에 이 동맹에 에이알과 장완, 위즈덤이 더해진 거지."
"그럼 지금까지 네뷸라 님에게 협조한 건..."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약점 잡힌 거잖아!"
소리를 지른 룬다는 약간 울상이 되었다가 돌아섰다가 다시 엘다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다듬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일단 엘다르 너는 흑린에 거의 흡수되어 있잖아."
"...흡수. 단어 선택이 좀 그렇긴 한데 맞는 말이죠."
엘프들이 사는 북해안의 도시 자린은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흑린인가 아닌가를 따지면 다들 흑린에 속한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니지. 솔직히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동맹과 네뷸라 사이에서 이득을 보면 상관없었다고. 하지만 전쟁이 나면?"
"아하."
엘다르가 룬다의 고민을 알아차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군요?"
"...맞아."
엘다르가 답이라도 적혀 있길 바라는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네뷸라한테 붙었는데 네뷸라가 패배하게 되면? 지금까지 열심히 정보를 퍼다 나른 나를 크람푸스나 다른 사람들이 용서해 줄까?"
엘다르가 말했다.
"그렇다고 다섯 동맹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 어... 예의 약점이 노출되지 않을까요? 네뷸라 님이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아니지. 그때는 크람푸스를 넘기고 위즈덤에 붙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니까. 물론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용서는 받을 수 있을걸."
"하하... 그렇군요."
"약점이 잡혀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네뷸라와 이야기했으니 동맹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네뷸라도 나한테 서슴없이 계획을 이야기하곤 했으니까. 그거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겠지."
엘다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룬다가 인간관계를 상당히 계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어디가 이익이고 손해라고 판단하는 수준을 떠나서 자신의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상대의 태도를 계산해 내는 것이다.
'...이것도 재능 아닌가?'
하지만 룬다는 인간관계와 달리 전쟁은 계산해 내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룬다가 말했다.
"솔직히 당장 봤을 때는 내가 네뷸라에게 붙어서 4대 2의 싸움으로 네뷸라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보다, 내가 동맹에 붙어서 5대 1의 싸움으로 동맹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커 보여. 나는 이기는 쪽에 붙고 싶다고."
"저, 뭐랄까..."
"추하다고? 나도 알아. 원래 승리를 향한 길은 추한 법이야."
엘다르는 그렇게까지 비장감 있게 할 대사인지 고민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긴 합니다만, 이 이야길 저한테 하는 이유가 뭐죠?"
"우리 같은 처지 아냐?"
"네?"
룬다는 몰랐냐는 듯 말했다.
"엘프들은 북해안을 장악하고 있으니 언제든 독립을 요구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렇지만 흑린의 지배하에 있는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전쟁이 나면 지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 절호의 기회지. 그리고 지금까지는 네뷸라에게 협조를 했다지만 진짜 동맹도 아니었잖아? 조금이라도 네뷸라에게 피해를 줬다면 동맹은 긍정적으로 보고 널 받아들일걸."
엘다르는 그 말을 듣고 나자 타당한 말이라는 판단이 섰다.
제3 대륙 신들의 권력 관계가 완전히 뒤바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저는 네뷸라 님을 배신하지 않을 건데요.'
엘다르는 성운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잡담이라도 하려고 들면 어김없이 게임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로 빠졌다.
딴 일이라고 해 봤자 결국 바둑, 장기, 체스 같은 다른 게임이었다.
자기 이야기라곤 일체 하지 않으므로 엘다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일상이란 게 없이, 평생 로스트 월드만 하다가 이 세계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성운은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성운이라는 사람 개인을 보았을 때는 알 수 없다.
엘다르가 본 것은 성운이 그려 내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서였다.
모든 것이 승리를 위한 과정이라지만, 엘다르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감지했다.
'아직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엘다르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지.'
엘다르가 말했다.
"저한테도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한데요."
"...그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시간 좀 주시겠어요?"
"알겠어."
엘다르는 룬다와의 화상 채팅을 종료하고 바로 다음 사람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곧 화상 채팅창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엘다르, 뭐야?"
성운이었다.
엘다르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룬다 님이 고민이 좀 있어 보이던데요?"
─┼
"고민? 고민은 무슨. 그냥 너보고 자기한테 붙으라는 거잖아. 6대 1의 게임을 하자고."
성운이 단정하자 엘다르가 말했다.
"그래도 설득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없지야 않겠지. 하지만 설득할 생각 없어."
"네? 왜요?"
성운은 곧장 답하는 대신 손을 내저었다.
"애초에 룬다는 게임의 전황을 잘못 보고 있어. 내가 유리한 이유로 방어전을 꼽았다며."
"네. 그런데요?"
"두들겨 맞다가 끝날 일 있어?"
"네?"
성운이 설명했다.
"방어를 하긴 해야겠지. 적들은 모든 공격로를 활용할 테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면 적들이 모든 공격로를 활용하도록 놔둔다는 말이야. 그러니 우리는 빈약한 공격로에 대한 적의 공격을 저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가야 해."
"아."
"게다가 전면전이야. 막고만 있다가 적이 제풀에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긴 힘들어. 그 사이에도 적들은 더 넓은 땅에서 곡식을 기르고 무역을 할 테니까. 고립된 쪽이 힘들 뿐이지."
성운의 말에 엘다르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나저나 룬다 님은요?"
"설득은 괜한 일이야. 룬다는 머리가 단순하잖아."
"복잡한 게 아니라요?"
"단순한 게 맞아. 답을 모르니까 자기 딴엔 계산한다고 복잡한 거지. 그냥 놔둬도 상관없어. 오히려 잘됐지. 그렇게 단순한 머리니 설득을 하니 마니 귀찮게 굴 필요가 없어서."
"그러다 동맹에 붙으면 어떡하죠?"
성운은 가로저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결정 못 할 거야."
"그럼 어떻게 말할까요?"
"음, 이렇게 하지."
성운이 말했다.
"첫 전투의 승패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해. 그럼 룬다도 그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있겠지. 그걸로도 충분해."
"네?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성운은 가로저었다.
"엘다르, 어차피 전쟁은 간단한 거야. 계산이 중요해 보이지만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 아무리 한쪽이 유리하고 많은 준비를 했더라도..."
"했더라도...?"
성운이 웃었다.
"잘 싸운 쪽이 이기는 거야."
─┼
한 달 뒤.
황야에서 출정한 흑린의 1만 병력이 첫 전투에서 단염의 3만의 병력을 대패시켰다.
112화
"석면의 마법사가 배신한 것이 어떻게 우리 흑린의 탓이 되는 거요?"
한 달 전, 흑린.
오라즌, 대회관.
카일이 오기 전 대신들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센 왕자님께서 마법사를 제압했을 때 회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소."
"그게 정말이요?"
"정말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
오라즌은 가만히 있어도 흑린의 모든 소식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중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이었다.
"어쩌다가 바센 왕자님이 거기까지 가게 된 거요? 처음에는 동쪽 산맥을 탐험한다는 명분 아니었소?"
"얼마 전에 시연한 대포라는 신무기를 봤소? 그걸 남방 제도로 운반했다더군. 군함이 부족하니 탐험단이 포함되었고."
"그럼 폐하께서 이 모든 걸 알고 계획하신 건가?"
"하지만 당시에는 반대가 많지 않았소? 그래서 감독관을 붙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늘 상황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던 흑린의 대신들이지만 대륙에 유례없는 사건이 찾아오면서 혼란은 커지기만 했다.
"바센 왕자님 이야기는 그쯤 합시다. 중요한 건 다섯 동맹이 우리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거지."
"'탐탁지 않아 한다'니. 말을 너무 곱게 쓰시는군. 놈들은 노골적으로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소. 그리고 바센 왕자님은 이 일의 중심에 있는 셈이고. 이야기를 그만둘 수는 없지."
"그건 핑계뿐이라는 거요. 언제나 명분이 필요했을 뿐 다섯 동맹이 흑린을 건드리려고 했던 건 잊으셨소?"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명분이 정리만 되면 저쪽도 시비를 걸 수는 없을 테고..."
그때 대회관의 바깥문이 열렸다.
"카일 라크 오라즌 폐하 납시오!"
좌수관들이 우르르 들어섰고 가운데 길로 카일이 걸어왔다.
카일은 왕좌에 앉은 다음 말했다.
"바쁘니 별도 절차는 생략해야겠군. 경들도 모두 소식은 들었겠지."
그 말에 행정대신 라뷘이 말했다.
"석면에서 자신들의 배를 불사르고 도망친 마법사에 대한 책임을 흑린에 물은 것 말입니까?"
"그래."
"마침 대신들도 이른 시간부터 모여 회의를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소득이 있는가?"
그 말에 라뷘이 주요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말했다.
"우선 석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고, 사실이라면 그 책임이 정말로 바센 왕자님을 비롯한 해적 토벌에 나선 이얀 타타 장군에게 있는지 알아야겠으며,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석면의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 판단해야 할 줄로 압니다."
꼭두새벽부터 이어진 회의에 다들 신경이 날카로웠지만 라뷘의 정리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주제는 논하지 않은 것 같군."
"예? 중요한 주제라 하오시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않겠나?"
그 말에 대신들이 불안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석면이 제시한 조건은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다섯 동맹과 흑린이 지난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사사건건 시비를 붙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를 너무 오래 보냈기에,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안이한 판단이 앞섰다.
하지만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섯 동맹과 싸우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시조 왕이신 라크락 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싸우면 이겨야 하지."
그 말에 재정대신 니르각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폐하, 아직은 모를 일 아닙니까?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흑린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피해야 할 일입니다."
왕의 의견을 완전히 반대하는 말이지만 대신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눈치였다.
카일은 안타까웠다.
"나도 그랬으면 하는군."
"그런데 어찌하여...?"
카일은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회관의 여닫이문들은 셋 중 하나가 열려 있다.
해는 아직 낮게 떠올랐을 뿐이지만 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신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면 한낱 땅 위를 걷는 이들이 그걸 막아설 수 있겠나?"
─┼
흑린의 귀족 계급은 군인 신분으로 전쟁에 나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본래 리자드맨의 종족비가 많고, 리자드맨의 특성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기에 병종의 높은 비중이 리자드맨이었다.
이런 경향은 다른 나라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일반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추고 전투 기술을 배우는 고급 병종은 나라가 세워질 때의 주요 종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병은 일종의 계급이기도 해서 수도인 오라즌을 지키거나 해적들의 침입을 막고, 국경을 지키는 등 상설 군대를 이르고 있었고 이 숫자만 하더라도 1만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그 군대를 다 움직일 수는 없지.'
성운은 엘다르가 전한 룬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최종적으로, 룬다가 다섯 동맹에 속하게 되더라도 큰 그림은 변하지 않지만,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룬다는 단순해. 강한 쪽에 붙는다.'성운으로서는 쉽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오히려 의아한 쪽은 엘다르였는데, 성운은 엘다르가 배신을 하려는 기미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마음이 꿉꿉한 상태였다.
'이 타이밍에 배신을 안 한다고?'
물론 성운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게임 플레이에 반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상비군이 아니라 소집병인데.'
겨우 1만의 병력으로 다섯 동맹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있는 상비군 전체를 전쟁을 위해서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정 비율은 지역을 지켜야 하고 일정 비율은 밖으로 내보내야 해. 상비군은 정예병이니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소모되면 군 병력 전체의 질이 떨어질 거야.'
다행히 성운은 이 부분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로스트 월드는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특히나 이런 종류의 국정과 관련해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나서서 이런저런 제도를 간섭하긴 힘들었다.
단지 궁정 안에 들어갈 신하들의 능력이나 경향성을 파악해서 궁정 안으로 들어오게, 또는 내보내도록 만드는 간접적인 조종이 필요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실질적인 병력이 원하는 만큼 모이지 않거나, 전쟁에서 싸우게 되는 병력의 질이나 병력 구성이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까지 궁정 안의 구성을 플레이어가 의도한 대로 꾸며 내는데 성공했다면 잘될 것이며, 아니라면 엉터리 군대를 가지고 싸워야 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성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역시 똑똑한 게 최고야.'
카일 라크 오라즌은 앉은 자리에서 사리에 맞는 병력을 구상해 냈다.
우선 카일은 상비군을 둘로 나누었다.
중앙군과 지방군.
이 중 지방군은 지역 방비를 위해 남겨 두었고 중앙군은 오라즌을 중심으로 반란군과 치안 부재 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던 병력을 재편한 것이었다.
카일의 설명에 따르면 이 중앙군은 외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첨병이었다.
카일은 이 중앙군과 별개로 병력을 추가로 소집하도록 했다.
이 추가 소집 병력도 중앙 소집과 지방 소집 둘로 나뉘었는데, 이는 상비군을 둘로 나눈 이유와 같았다.
'중앙군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서 차출한다. 반면에 지방군은 방어전을 펼쳐야 할 때 급하게 추가 병력을 소집해야 할 테니. 하지만 기초적인 훈련과 의무를 적어 두고 그 전까지는 농사를 짓는 등의 일과를 보내도록 해서 전시에도 최대한 자원을 축적할 수 있도록 한다.'
이에 따라 중앙군 4천과 1차 중앙 소집군 8천이 모였다.
병력을 순차적으로 모집하는 것은 당장의 백성들의 불만을 줄이고 차후에 더 많은 병력을 소집하기 위해서였다.
'당장 전쟁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끌어들이면 초기에는 유리한 지점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해가 된다. 성비가 맞지 않아서 인구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건 전쟁이 길어질 때 흔히 있는 일이야. 그리고 이 전쟁은...'
성운은 구체적인 숫자를 가늠해 보다가 가로저었다.
'...엄청나게 길어질 테니까.'
지구의 역사에서도 하나의 대륙을 걸고 일어나는 전쟁은 흔하지 않았다.
문명의 차이로 압도적인 승수를 쌓아 나간 정복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평생을 걸었다. 그 자손이 뒤를 이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성운은 자신이나 카일이 그 정도까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같은 대륙이니만큼 문명 수준이 유사하잖아.'
아무튼 빠르게 모인 1차 중앙 소집군 8천은 속성으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 사이 외교 상황은 빠르게 나빠졌다.
흑린에서 부드러운 입장을 가진 대신들이 있었던 만큼, 석면이 요구한 사과만큼은 아니더라도 화해를 바라며 사신을 보냈지만 석면은 자신들을 조롱하지 말라며 사신의 목을 잘라 내보냈다.
가만히 있어도 일어날 전쟁이었지만 이런 태도가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양국, 그리고 대륙 전체에 전쟁에 대한 기류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카일은 이 중앙군 중 2천, 그리고 1차 중앙 소집군 8천을 더해 1만의 병력을 갑군으로 이름 붙였다.
갑군은 오라즌의 북부로 향했다.
─┼
어느 누구도 모르는 땅.
"꼭 이 방법을 해야 되겠나?"
"보이는 전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위즈덤은 자신의 별 모양의 머리를 천천히 회전시켰다.
그 앞에는 혼자서 큼직한 사자탈을 머리에 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장완이었다.
위즈덤이 말했다.
"정말 괜찮겠나?"
"괜찮지 않다."
"...그런데 왜?"
그 말에 장완이 답했다.
"나는 네뷸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대륙을 놈이 제패하도록 두고 싶지 않아."
위즈덤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게임일 뿐이다. 나도 네뷸라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고 패배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 말대로다, 위즈덤."
장완은 사자탈의 눈을 껌뻑거리다가, 무언가 귀찮아진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제 상체를 덮고 있던 거대한 사자탈을 집어 던졌다.
키가 위즈덤의 가슴께 정도 오는 검은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건 게임일 뿐이야. 나는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의 전략을 행할 뿐이고."
"...흠."
"너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봤지만 배신은 어디서나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안전한 책략도 하나 가져가야 해."
"하지만 이 일을 행하면 너의 힘이 약화되는데. 꼭 이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니라는 거 알잖아?"
위즈덤은 사실, 장완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뷸라와 다른 플레이어 사이에는 아직 좁히기 힘든 격차가 존재했다.
"사도."
"모든 준비가 철저해도, 사도가 있냐 없냐만으로 승패는 갈릴 수 있어. 난 솔직히 잘 몰라. 하지만 적어도, 통계가 그렇게 말해 주지."
"맞다."
"그럼 이야기 끝난 걸로 알겠어. 마음의 짐은 지지 마. 이건 어뷰징 같은 것도 아니야. 모두를 위한... 전략이지."
위즈덤이 내려다보자,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수많은 코볼트 사제들이 보였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코볼트 대제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현기로 반짝였다.
장완이 강신한 상태였다.
"와라."
위즈덤은 자신의 종족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를 불렀다.
석면의 왕 데르말딘의 숨겨진 아들 중 하나인, 레딘이었다.
위즈덤은 레딘의 몸에 강신했고, 단도를 뽑아 들었다.
훗날 '피의 날'이라고 불릴 학살이 시작되었다.
─┼
위즈덤은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자신 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보았다.
「신성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20→21」
「이제 '사도'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113화
피의 날로부터 몇 년 전.
위즈덤은 석면의 왕 데르말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능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금세 자만심에 빠진다. 나한테 필요한 건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전쟁 기계다.'
하지만 데르말딘 비알 오서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데르말딘은 24년 전 왕이 되던 당시부터 유별났다.
첫째 왕자로 이미 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았지만 다른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암살과 독살 기회를 노렸고 대부분 성공했다.
지나친 잔혹함을 지적하는 이들은 궁 밖으로 내쫓기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왕이 된 데르말딘은 백성들에겐 딱히 암군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귀족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견제할 만한 힘을 잃은 귀족들은 데르말딘에게 바짝 엎드리고 있었고, 중앙 귀족들이 손을 뻗기 어려운, 다른 나라의 국경이 닿는 외곽 영주들은 힘이 약했다.
데르말딘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 사촌 동생을 왕비로 삼았고, 최근에는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반역의 혐의를 몰아서 산 채로 불태웠다.
재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아들들을 경쟁자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위즈덤으로서도 큰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위즈덤이 만들어 낸 이 트롤 국가는 효율적인 선택을 위해서 잔인해졌다.
독재자는 언제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선택을 할 수는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선택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시간보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빠르게 선택하는 것이 낫기도 했다.
물론, 위즈덤은 그러한 독재를 좋아하진 않았다.
위즈덤은 지구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독재를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건 게임이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비롯된 실제 세계라지만, 이제 위즈덤은 자신이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신은 무한한 권리가 있었고, 책임은 없었다.
때문에 위즈덤은 단지 트롤들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들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트롤들은 속선이라는 얽힌 실뜨기를 상징하는 자신들의 신에 굴복했고, 그 잔인함을 배웠다.
트롤들은 그 잔인함을 자신이 지배하는 땅의 다른 종족들에게 마찬가지로 행했다.
공포에 질린 수많은 종족들이 트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트롤들은 제3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넓은 땅에도 불구하고 그 잔인함이 강국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제3 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는 석면이 아닌 흑린이었다.
단순히 차이가 나는 것을 넘어, 흑린은 나머지 국가들과도 한 번 겨루어 볼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차이가 났는지는 차근차근, 부분 부분을 떼어서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0년이 넘는 시간 전체로 보았을 때는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위즈덤은 네뷸라가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기록을 세웠고, 플레이 또한 훌륭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차이를 낸다는 걸 납득하기 힘들었다.
위즈덤은 자신 또한 모범적인 플레이를 해냈기 때문이었다.
위즈덤은 생각했다.
'뭐가 문제일까?'
흑린과의 전쟁을 앞둔 위즈덤은 낙관론을 펼쳤고,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음을 믿었다.
다섯 동맹이 더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설사, 누군가 한 명이 배신을 하더라도 말이다.
위즈덤은 자신의 방법론에서 답을 찾아냈다.
'부족했던 건가? 효율이?'
위즈덤의 회전하는 케플러-푸앵소 다면체 중 큰 십이면체가 정지했다.
'아니, 잔인함이.'
게임 플레이는 괜찮았다.
위즈덤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탁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도, 준수한 편이었다.
어째서인지 중간 성장이 늦었던 룬다나 절우비에게 대패한 AR1026과 같은 플레이어랑 비교하면 준수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까닭은, 트롤들이 위즈덤의 뜻을 정확히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잘해 주고 있지만 부족했다.
흑린이라는 나라를 마치 제 손발을 다루듯 하는 네뷸라를 생각하면 차이가 있었다.
'나는 네뷸라의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행할 수밖에.'
위즈덤은 전쟁이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소 늦어질지라도, 왕을 갈아 치워야겠다고 판단했다.
위즈덤은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이를 찾아냈다.
데르말딘의 아들 레딘이었다.
─┼
트롤의 피부는 대체로 회색에 가까운 녹색이다.
하지만 간혹 돌연변이로 붉은색 피부를 가진 이들이 태어나곤 했는데, 대체로 잠성을 띄고 태어나서 몸이 약하고 수명이 길지 못했다.
트롤들은 녹색 피부의 건강한 트롤들에 대비하여 붉은 피부의 트롤을 '시든 자'라고 불렀다.
데르말딘의 스물한 번째 자식인 레딘 비알 오서는 시든 자였다.
왕족이었지만 첩의 자식인 데다 피부가 붉었기에 궁 밖에서 자랐다.
사실상 레딘이 왕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에, 그저 뒷바라지를 해 줄 하인 하나와 살았나 죽었나 소식이나 전해 줄 왕가의 심부름꾼 하나가 붙었다.
레딘의 어머니 또한 평민에 불과했기 때문에 레딘을 도와줄 그 어떤 바탕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위즈덤은 레딘을 주목했다.
레딘은 각각의 능력치는 상위 1% 정도로, 유능하지만 특별하진 않았다.
상위 1%라는 말은 우수해 보이지만 플레이어의 어떤 선택을 받기에는 지나치게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힘과 지능, 사회성이 모두 1% 이내라는 것은 눈여겨볼 만했다.
'데르말딘의 자식 중에선 가장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궁 밖으로 내쫓겨져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출신이 비천할수록 신이 개입해 끌어올릴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그 힘의 격차가 극적일수록, 개체의 믿음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레딘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왕 사이에서 태어났다지만 자신의 위로 형제가 열 댓 명이나 있고 처지만 돌아보아도 왕이 되라고 부추길 사람도 없었다.
차라리 왕족이 아니더라도 배경이 있는 남작이 역적을 모의하는 쪽이 왕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무지렁이라면 그런 꿈을 꿨을지도 모르지만, 레딘은 아니니까.'
그래서 위즈덤은 레딘에게 왕이 될 기회를 불어넣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인 쉬트레히너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레딘의 어머니를 죽여라. 하지만 흔적을 남겨야 한다.'
-흔적이라 하시오면? 제가 죽인 것을 알립니까?
'아니. 왕족 중 누군가가 저지른 것으로.'
쉬트레히너는 위즈덤의 뜻대로 했다.
여기에는 위즈덤의 신앙 자원이 소모되었다.
특정 캐릭터를 직접 죽이는 것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위즈덤이 인식하기에, 인과율은 거칠게 쥐어뜯지만 않는다면 많은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다.
'왕이 될 가능성도 없는 버림받은 왕족의 어머니. 인과율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게 흔들리는 것도 있었다.
레딘이었다.
레딘은 낮 동안 마을 상인에게 장사를 배웠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레딘은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왕족의 단검이 자리에 남은 것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왕가와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던 레딘은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지침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복수심이었다.
'쉬트레히너.'
-부르셨습니까?
'이제 가짜 범인을 만들어야 한다. 왕족 중 적당한 이를 물색해라.'
-그 다음은 어찌합니까?
'레딘이 복수를 성립할 수 없도록, 가짜 범인을 죽여라.'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위즈덤은 자신의 창조물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신선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답했다.
'복수가 성립되면 레딘의 이야기는 끝난다. 그 복수심이 충족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갈 곳 없는 복수심은 어찌합니까?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켜야지.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레딘은 석면의 수도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알현하기 전날 밤, 왕궁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된 것은 레딘이 찾고 있던 단검의 주인이자 데르말딘의 여섯 번째 자식.
레딘은 자신이 복수를 할 기회를 놓친 것에 허망해하지만, 또 다른 증거를 찾아낸다.
죽은 레딘의 형제 또한 다른 형제의 손에 죽었다고 의심할 만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레딘은 여섯 번째 자식을 살해한 용의자로 발각되고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위한 변론한다.
그 변론 과정에서 레딘의 출중한 능력이 드러나고 레딘의 혐의는 벗겨진다.
그리고 데르말딘의 눈에도 띄게 된다.
-이제 어찌합니까?
'쉬어라.'
-아직 제 일이 끝나지 않은 것 아닌지?
'끝났다.'
위즈덤이 덧붙였다.
'남은 건 내 일이지.'
레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왕의 호의와 관심을 받으며 궁에서 지내게 된다.
호화스런 생활 사이로 레딘은 조사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 있는 암투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레딘은 이 모든 것이 대단히 부조리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신데 이런 잔인한 싸움을 이어갈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찰나에 떠오른 생각을 낚아챈다.
이 모든 사건 뒤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아버지. 당신이 범인이었습니까?'
그때 위즈덤이 형이상학적이고 복잡한 꿈으로서 나타난다.
레딘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위즈덤의 계시는 선명하고 단순하다.
'저 유약한 사내는 왕좌에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저 사내는 겁에 질려 왕좌에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까지 칼을 휘두른다. 이제 그를 편안하게 쉬도록 만들어 줄 이가 필요하다.'
이제 레딘의 복수심은 다른 감정으로 치환된다.
레딘은 신의 뜻을 받들게 된다.
레딘은 우선 데르말딘의 밑에 들어가 잡다하고 더러운 일을 도맡는다.
그러며 천천히 신임을 얻어 데르말딘이 원하는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들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첩의 자식이자 가신들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스물한 번째 자식이자, 심지어 트롤 사이에서 천대받는 시든 자인 레딘은 그렇게 왕의 충복이 되었다.
레딘은 기회를 노리는 사이, 화약이 발명되었고 마법사들이 나타났으며 전쟁은 코앞까지 닥쳤다.
위즈덤은 적당한 때에 계시로서 신호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연락을 취해 온 것이 플레이어 장완이었다.
─┼
'당신과는 관계가 없었어야 할 터인데.'
위즈덤이 상태창을 확인하는 사이, 장완이 다시 다가왔다.
예의 사자탈은 여전히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다소 초조한 표정의 장완이 말했다.
"계산은... 정확했나?"
코볼트 사제들은 모두 죽었지만 신은 레벨 다운을 제외하면 죽지는 않는다.
장완 또한 레벨이 높았기에 봉신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레딘을 사도로 만들 수 있다."
"그럼 됐네. 우리도 카드가 생긴 거야."
그 말에 위즈덤이 말했다.
"일이 끝났으니, 이제 물어봐도 괜찮은가?"
장완은 어뷰징이 끝날 때까지 가능한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부탁했고, 위즈덤은 그 뜻을 따랐다.
이제 끝이 났으니 위즈덤은 자신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장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즈덤이 질문했다.
"왜 그렇게 네뷸라를 싫어하지? 플레이하는 동안 연결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다른 인연은커녕 악연이 쌓이기도 어렵다. 너의 감정은... 이해하기 어렵군."
그 말에 침묵하던 장완이 또박또박 내뱉었다.
"난 네뷸라를 아니까."
"안다고?"
"네뷸라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 본명은 최성운, 맨날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는 폐인 새끼."
장완이 이를 악물었다.
"네뷸라는 내 사촌 오빠야."
114화
위즈덤은 오랜 시간 동안 소리 내어서 말해 보지 않았던 생경한 단어를 말했다.
"사촌?"
"그래. 내 아버지의 형의 아들이지."
"그걸 몰라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단지..."
"알아."
플레이어 장완, 최서윤이 말했다.
"우연치고는 얄궂지."
위즈덤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뭔가 있다니?"
"처음에는 단순히 모든 플레이어를 랜덤으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뷸라와 헤게모니아가 둘 다 있는 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1위와 2위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플레이어 중에 꼽힐 확률이 더 높아지진 않을 테니까. 마침 네뷸라는 반대로 생각했었다더군."
"반대라면?"
위즈덤은 손가락을 반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렸다.
"우리를 알기 전까지는 1위부터 27위까지 순위를 끊었다는 줄 알았다는 거다"
장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자기 밖에 생각할 줄 모르지."
"그 의견에 동조해 주길 바라나?"
"...아니, 됐어."
위즈덤의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아무튼 완전히 랜덤도 아니고, 특정한 규칙을 따른 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다른 이유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장완 네가 방금 그 사실을 밝힌 덕분에 그 확률이 더 높아진 것 같군."
"다른 이유라니?"
위즈덤이 말했다.
"누군가 게임을 할 사람을 '선별'한 거지."
그 말에 장완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위즈덤이 계속 말했다.
"이제 와서 그다지 놀랄 건 없다. 우리는 게임이 시작될 때 '알딘'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게임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는 걸 알지 않는가?"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 거란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러면?"
위즈덤의 머리가 회전을 멈추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보단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가 하는 거지. 당시 실제로 모였던 건 서른 두 명의 플레이어였고, 그중 다섯 명이 참가하지 않았지. 알딘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되돌아갔다. 너는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래. 사실 그 사람들이 평범한 선택을 한 거지. 누가 게임 안에 남는 선택을 하겠나? 우리는 이 게임에 남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정상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른 두 명 중에 스물일곱은, 꽤 많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
장완은 위즈덤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 게임에 참가할 사람들을 노렸다는 거군?"
"아마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조건 중에 하나였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나는 그랬고, 아마..."
위즈덤은 검지손가락으로 장완을 가리켰다.
"너도 그럴 테니."
장완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바위 사막 위 수많은 코볼트 사제들의 시체 위로 독수리들이 활공하고 있었다.
좀 더 용감한 독수리들은 이미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맞아. 나는 내가 선택되었다면 '당연히' 그 인간도 왔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인간은 분명 잘할 테니까, 누군가 훼방을 놓지 않으면 우승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참가한 거야."
"흠."
이야기를 들은 위즈덤이 말했다.
"더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는 건 실례겠지?"
"프라이버시야. ...아직은."
장완이 돌아섰다.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아직 굳지 않은 신선하고 비린 피 냄새와 함께 장완의 머리칼이 동쪽으로 세차게 흐트러졌다.
장완은 앞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위즈덤을 향했다.
"그보다 다음 이야기를 해 봤으면 하는데."
"다음이라 하면?"
"네뷸라의 사촌 동생이란 존재를 전략적으로 써먹을 수는 없어?"
위즈덤은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잠시 팔짱을 꼈다가, 이어 머리에 손을 괴었다.
"왜 없겠나?"
─┼
레딘 비알 오서는 처음에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만굴에선 처음엔 데르말딘 왕을 초대했다.
만굴에서 십여 년의 주기로 찾아오는 거대한 축제 날이었고 관례에 따라 만굴의 왕이 각국의 왕들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관례는 관례일 뿐, 왕들이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만굴은 대륙의 끄트머리에 가까웠다.
그나마 국경이 닿은 금안이나 단염이라면 모를까, 거대한 나라를 가로지르기까지 해야 하는 석면으로서는 왕에게 그런 여행을 하라는 것 자체가 무례한 요구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데르말딘은 그게 만굴의 왕이 의도했다기보다 사제들이 주도하는 행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제들이 하는 일의 신성함은 대륙의 왕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했다.
그러니 최소한의 성의를 갖춰야 하기도 했다.
때문에 만굴의 '빈 하늘' 축제에는 각 왕들이 왕족을 보내어 축하했다.
흑린처럼 매년 봄에 열리는 축제라면 모를까 십여 년의 불규칙한 주기로 정해지는 축제이기 때문에 만굴과 외교적 협력을 구한다면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레딘이 만굴로 향한 것은, 당시에 레딘이 금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석면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너무 먼 거리기 때문에 데르말딘은 자신의 충성스런 아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딘은 또 다시 데르말딘의 뒤가 구린 일을 귀족과 백성들에게 들키지 않고 처리하는 와중이었다.
금안의 귀족 하나가 데르말딘의 수많은 치부 중 하나를 들추고 있었고, 데르말딘은 외교적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일을 조용히 처리할 수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레딘에게 귀족을 처리하라 명령했다.
일을 끝마친 레딘은 외교 행사에 참석하라는 명령에 시큰둥해하면서도 기껍게 받아들였다.
레딘은 평소 자신의 부하들에게 어렵고 힘든 일에 종사할수록 휴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딘은 다른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그리 관심이 없었고, 만굴의 빈 하늘 축제가 자신이 바라는 것과는 다소 다른 종류의 축제라는 걸 알지 못했다.
암굴의 신, 창류(蒼流)를 믿는 코볼트들은 기도 방식이 특별했다.
흑린과 같은 신들이 오래전 썩은 고기를 바치면 그것을 받아가는 식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했으나 최근으로 오면서 점점 그런 종류의 행사보다 법회를 여는 것으로 바뀌어 왔다.
하지만 창류는 여전히 오래된 옛 전통을 따랐다.
바로 굴을 파는 것이다.
처음 이 굴 파기는 물을 얻기 어려운 만굴 지역에서 식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그다지 의미는 중요해지지 않았다.
만굴의 코볼트들은 그저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굴을 팠다.
그리고 이런 굴을 파는 코볼트들 중에서도, 더 담대한 시험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었다.
창류의 사제들이었다.
창류를 믿는 코볼트들은 10년에 한 번 정식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을 거쳐야 했다.
처음에는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횟수를 거듭하면서 최근에는 수백 명까지 늘어난 창류의 사제 후보들은, 눈을 가린 채 다른 사제들의 지시를 받고 만굴 어딘가의 외딴 땅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다른 사제들이 깊이 파 놓은 지하에서 가린 눈을 푼다.
마실 물과 단출한 음식을 제외하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땅을 팔 곡괭이고, 다른 하나는 망로초(忘路草)다.
망로초는 만굴에서 나는 희귀한 약초 중 하나로, 특이한 약성이 있었다.
바로 방향 감각을 잃는 것.
본래 땅 속에서 살아가기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가진 코볼트들임에도 좌우는 물론 앞뒤, 심지어 위와 아래까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망로초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발에 땅을 딛고 있는데 어떻게 위와 아래를 분간하지 못하냐고 하지만 몸에 닿는 모든 곳이 몸을 딛을 수 있는 땅 속에서, 망로초를 먹고 몸이 계속해서 회전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단순한 방향 감각만이 아니라 시간과 자아감까지 희박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곡괭이를 들고 망로초를 먹은 사제 후보들이 하는 일은 '하늘을 찾아 땅을 파는 일'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하늘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데다, 방향을 확신하더라도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굴속에서 자신이 똑바로 가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 빈 하늘, 즉 땅 위로 굴을 파는데 성공하면 행사가 끝이 났다.
그날이 빈 하늘 축제 날인 것이다.
창류의 선임 사제들이 철저히 감독함에도 탈락자와 사망자들이 속출하며, 한 번 시작해서 끝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는 큰 행사였다.
길게는 수년씩 어두운 토굴 안에서 어떤 희망도 없이 땅을 파며 지내는 것은 제 아무리 코볼트라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단단한 토대를 무너트리며 결국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으로 손을 뻗을 때의 쾌감이 창류의 사제들을 매력적으로 붙잡았기에 이 행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창류, 즉 플레이어 장완이 효율적인 신앙 자원 획득 방식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다.
다른 종족과 다른 소영역들은 쉽게 따라 하기 힘든 기도 방식이었으니까.
아무튼 만굴의 코볼트들은 자신들의 기도 방식이 진심으로 좋다고 생각했고,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너는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라며 등을 떠미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니 빈 하늘 축제에 각국의 손님들에게 굴을 파는 체험을 시키는 것을 레딘은 예측했어야 했다.
─┼
레딘은 차가운 굴속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레딘은 어쩌다 굴속에 들어왔는지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코볼트들은 절차에 대해 수차례 설명했고, 레딘은 그 횟수만큼 거절했다.
하지만 코볼트 사제가 마지막 요구라는 말에는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보여 주기식 행사일 뿐입니다."
"난 왕자다. 굴이 무너져 내가 죽으면?"
"사제들이 모두 확인한 굴입니다. 무너질 리 없죠."
"음."
"여러분과 같은 손님들에게 수련 사제와 같이 진짜로 굴을 파게 놔둘 리가 없잖습니까? 두세 시간이면 끝나지요. 정말 싫다면 탈출하셔도 됩니다. 들어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나오면 되니 말입니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할 이유가..."
"혹시 '진짜'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레딘은 정색하고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코볼트 사제는 허허 웃었다.
"굴 파는 것도 귀찮으시다면 그냥 가만히 앉아 계셔도 됩니다. 행사가 끝나면 저희 사제가 찾아올 테니까요."
"흠."
"하지만 레딘 왕자님은 트롤이시니 저희보다 힘도 좋고, 금세 올라오실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번 손님들 중 가장 빨리 올라오실 지도요."
"그 약초를 먹으면 위아래 분간도 못한다지 않나?"
그 말에 사제가 말했다.
"그건 지혜가 부족한 이들이 그렇지요."
레딘은 어째서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물어볼 시간도 없이 사제가 등을 떠밀었다.
"어서 저 사제들을 따라가십시오. 땅 위로 올라왔을 때는 모든 게 잘되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가십시오."
그렇게 해서 레딘은 눈을 가리고 창류의 수련 사제들이 치른다는 의식을 흉내 내어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곡괭이 하나와 망로초 꾸러미를 받았다.
망로초를 꾸러미로 받는 까닭은, 망로초는 방향을 잃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에 기력을 불어넣고 영양도 충분한지라 끼니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딘은 행사에 협조할 생각도 없이 한숨 잠들었다가 깨어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허락도 맡은 거잖아? 잠깐 자고 일어나면 행사도 끝나 있겠지. 그럼 흙이랑 먼지 좀 털어 내고, 저녁에는 그 유명하다는 암굴의 온천에서 몸이나 녹여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레딘은 잠에서 깨었다가 기이함을 깨달았다.
분명 땅속이지만 땅 위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레딘은 축제의 소음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레딘은, 땅 위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제가 끝난 건가?'
레딘은 사제가 기어코 자신을 잊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야겠군.'
횃불을 들고 자신의 등 뒤에 있던 구덩이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다시 움직이진 못했다.
일곱 갈래로 갈라진 굴 중에 무엇이 밖으로 나가는 출구인지 알 수 없었다.
115화
"어처구니가 없군."
레딘 비알 오서는 다소 황망한 기분을 느끼며 굴속을 걷고 기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레딘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창류의 사제들과 코볼트들이 벌인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게다가 레딘은 자신이 트롤이라는 것에 언제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코볼트들도 손쉽게 해내는 일을 트롤이 해내지 못할 게 무어냐고도 생각했다.
"망할 코볼트 놈들, 굴 파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하지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레딘의 생각과 달리 굴속을 걷거나 기어 다니는 일이 쉽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걷다가 굴이 좁아지면 무릎을 대고 기어서 간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반복하며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써야 한다.
트롤이라는 강건한 신체임에도 체력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레딘이 의지하고 있던 횃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아직 굴을 다 확인하지 못했는데..."
레딘은 이미 좌수법과 같은 고대 유적 탐사 방식이 너무 오래 걸릴 거라고 판단했기에, 통로를 걸어갔다가 돌아 나오는 식으로 확인했는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레딘은 등골이 아찔해지는 감각 이후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사타구니 사이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니, 아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레딘은 어두운 굴속에서 잠깐 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신분을 자각했다.
스물한 번째 자식이기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던 과거는 이제 없었다.
이제는 왕의 대리인으로 외교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레딘은 데르말딘 비알 오서의 자식 중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설마하니 석면의 이름을 무시하진 않겠지."
레딘은 이제라도 창류의 사제들이 허겁지겁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긴장이 풀리고 입가에 실소가 걸릴 정도였다.
"갓난애도 아니고, 어둠을 두려워해서 되겠나."
하지만 레딘은 횃불이 꺼지고 창류의 사제들이 찾아오는 것과 별개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위로 굴을 파고 올라가면 될 일 아닌가?"
어차피 종교 의식을 체험하는 과정에 가까울 뿐, 사제가 말했던 것처럼 조금만 파고 올라도 되지 않겠냐는 판단이 섰다.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는 것이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레딘은 굴속에서 가장 지표에 가까울 거라고 판단한 자리로 가서 굴을 파기 시작했다.
굴 때문에 다소 건조된 흙들이 나무 토대 사이에서 가볍게 곡괭이에 무너졌다.
"이럴 거면 진작 움직이는 게 나았겠군."
그리고 레딘은 이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았다.
검을 내려치는 것과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은 달랐다.
동작에 쓰이는 세세한 근육의 차이는 물론이고 검은 한 번 전투에서도 열댓 번 휘두르면 이길 수 있지만, 곡괭이는 열댓 번은커녕 수백 번을 휘둘러도 소용이 없었다.
"아직 멀었나?"
횃불이 완전히 꺼졌다.
"...아직도?"
몸을 식히고 땀을 닦아 내는 짧은 휴식을 몇 번이나 가졌다.
굴 아래로 내려가 소변을 두 번이나 보고 왔다.
팔이 뻐근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레딘은 곡괭이질을 멈추었다.
눈꺼풀까지 무거워져 한 번 감기자 레딘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제는 정말 레딘도 인정해야만 했다.
"이상하군."
잠깐 잠들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을 가능성은 있었다.
횃불도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금세 꺼졌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딘은 스스로 옛 전사의 피를 이은 전사라고 생각했고 몸을 쓰는 일에 대해서라면 제법 잘 알았다.
빛 한 점 없으므로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정도로 피로하다면, 굴을 파기 시작한 지 적어도 한나절은 지났음이 분명했다.
"거대한 농담 같군."
사실 레딘은 자신이 제대로 하늘을 향해 굴을 파고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굴은 구불구불하게 팔 수 밖에 없었다.
간혹 레딘이 가진 트롤의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기도 하고, 흙이 너무 질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피해 가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물질은 아래를 향해 떨어지니까."
레딘은 흙을 한 줌 부수어 떨구었고, 자신의 발등에서 떨어지는 흙을 느꼈다.
그럼 머리 위를 부수어 굴을 만들어 가면 올라가고 있긴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레딘은 땅 속에 있었다.
"...함정인가?"
함정이라면 누가 만든 함정이란 말인가?
아버지의 함정이라고 해도 석면에서 만굴은 너무 먼 땅이었다.
게다가 너무 허술했다.
레딘이 졸지도 않고 의욕적으로 굴을 팠다면?
애초에 레딘은 축제에서 흙에 몸을 묻힐 생각도 없었다.
창류의 사제가 마지막까지 권했을 때도 레딘은 그만둘 생각이 절반이었다.
"...그럼 왜?"
레딘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다.
몇 시간, 어쩌면 몇십 분 뒤 깨어난 레딘은 허기가 몰려왔다.
레딘의 주머니에 풀 같은 게 집혔다.
망로초였다.
"...이걸 먹으면 힘이 난다고 했던가?"
레딘은 주저하다가 망로초를 씹었다.
다른 누군가가 구해 주러 온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레딘 스스로 땅을 파서 밖으로 나가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언가를 먹으면서 버텨야 했고, 아직 힘과 체력이 남아 있는 지금 꾸준히 땅을 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딘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놀라운 활력이 몸속을 돌았다.
역시나 망로초에 대한 소문처럼 어지러움이 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는 버틸 만했다.
레딘은 꾸준히 굴을 파고 들어갔다.
다시 레딘의 팔이 무거워질 시점에서, 레딘은 또 한 줌 흙을 들었다.
"확실히 위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망로초는 코볼트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트롤인 나에겐 효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은 한 번 해야겠지."
레딘은 흙을 부수어 떨구었다.
그러자 흙 알갱이는 레딘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뭐?"
입을 벌린 레딘의 입으로 흙 알갱이가 쏟아졌다.
거꾸로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앞으로 굴러 버렸다.
지금까지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벽에 거꾸로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레딘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저 피곤하다는 이유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모든 것이 땅을 향해 떨어지는 진리가 바뀔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가 일어난 것은 흙 알갱이가 몸에 닿는 감각 자체의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레딘은 망로초가 소문보다 더한 물건이라고 확신했다.
망로초는 단순히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약초가 아니었던 것이다.
촉각 이상을 넘어, 환촉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겠군.'
망로초의 효과와 별개로 레딘은 자신이 창류의 수행 사제들이 겪는다는 '빈 하늘의 시험'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상황은 좀 더 나빴다.
먹을 음식은 망로초뿐이고 지쳐 쓰러져도 도와줄 선임 사제가 없었으니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레딘의 몸을 가로질렀다.
"아무도 모르는 허망한 죽음. 이보다 나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레딘의 그 생각조차도 틀렸다.
레딘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땅을 팠다.
배가 고플 때마다 길을 잃게 만드는 망로초를 먹어야 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만으로 땅을 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딘을 휘감는 공포는 끔찍해졌다.
이렇게 위로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최선을 위한 노력임에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죽음을 위한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실존적인 공포였다.
지금 이 순간 레딘의 자유의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레딘은 욕설을 내뱉으며 곡괭이로 굴을 파다가도 멈춰 서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가 관습적으로만 믿고 있던 신의 이름을 절실하게 불렀다.
─┼
-행자여.
지쳐 쓰러졌던 레딘은 자신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어둠 속에선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였다.
-행자여.
어둠 속에서 몇 번의 환청을 경험했던 레딘은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 마음속의 말은 부지런히 레딘을 불렀다.
레딘은 이번 환청은 다르구나 생각하며 답했다.
-행자여.
"난 행자가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창류의 시험을 겪고 있으니 행자가 맞다.
"그렇다고 치자. 넌 누구지?"
목소리가 말했다.
-난 아직 이름이 없다. 나는 속선에 의해 모습이 다듬어졌고 창류에 의해 의식을 부여받았다. 두 신의 창조물이 내 정체성이다.
"...황당한 이야기군."
레딘은 자신이 단단히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
두 신 사이에서 만들어진 창조물, 즉 이것은 속선과 창류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두 신은 야천을 상대하려 한다. 하지만 다섯 신의 힘으로도 야천은 강대한 적이다. 여러 가지 방편이 필요한 것이지.
이것은 또 사리에 맞는 말이었다.
"내게 왜 나타났지?"
-널 도와주러 왔다.
"그런 환청이 몇 번이나 나를 다녀갔다. 여전히 난 거기에 있고."
-널 이 시험에 빠트린 것이 자신이라고도 하던가?
"뭐?"
목소리가 말했다.
-너를 내가 함정에 빠트렸다. 나는 속선으로부터 서로를 엮을 힘을 이어받았고, 창류로부터 거짓을 비추는 힘을 내려 받았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이상하게 레딘은 분노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기이한 일이었고, 그럼 신들의 조화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신들이 하는 일에 화를 내어 무엇 하겠는가?
샘솟은 것은 의문이었다.
"왜?"
-답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정면을 곡괭이로 파라.
"뭐?'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건가?
"아니, 왜 머리 위가 아니라 정면을 파라는 것인지..."
-그곳이 위다.
레딘은 주저했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곡괭이를 휘두르고 나서야 레딘은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아래.
레딘은 이번엔 물구나무 서 있었음을 알았다.
-이번에는 등 뒤.
레딘은 이 모든 것 또한 허상이며 자신의 본능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말도 안 되는 지시에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레딘에겐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었다.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만이 레딘의 의지였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무릎 꿇고 앉아, 바닥으로 손을 뻗어라.
"음."
레딘은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레딘이 나아가려 할 때마다 막아서던 단단한 밀도는 없었다.
손목 사이로 빛의 고리가 걸렸다.
"설마."
레딘은 곡괭이를 집어 던지고 양손으로 허겁지겁 땅을 팠다.
아래가, 곧 위였다.
레딘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빈 하늘이었다.
레딘이 한 번도 없는 광야의 풍경.
해가 떠오른 지 시간이 꽤 지난 아침인 것 같았고, 아침의 열기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찼다.
레딘은 흘린 줄도 몰랐던 땀을 차게 식혔다.
레딘은 자신을 도와준 목소리에게 감사를 표할 요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목소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알겠나?
그 말에 레딘은 각성의 순간에 도달했다.
목소리의 힘이 분명했다.
레딘은 자신의 삶을 아우르던 모든 순간을 자신의 눈이 아닌 제3 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번 굴속에서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 신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자신이 꿈꿔 온 어머니의 복수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죽음으로부터 공포도, 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모든 행위들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레딘은 신들의 비의를 엿보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감정도, 감각도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오직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신의 뜻만이."
─┼
위즈덤이 중얼거렸다.
"개체의 조종이 불편한 게임이라면, 편하게 조종할 수 있도록 고치면 그만이지."
장완이 호응했다.
"우리 둘이 플레이 방식이 닮아서 다행이야."
─┼
-앞으로 걸어가라.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레딘은 수많은 창류의 사제들이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음을 알았다.
-저들 또한 그대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니, 믿는 신은 달랐으니 그대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런가."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결합을 시작한다. ...신을 받아들여라.
─┼
사도가 된 레딘 비알 오서는 코볼트 사제들의 시체 사이에서 일어났다.
망로초의 효력이 다했다.
레딘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레딘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116화
위즈덤을 위시로 하는 다섯 동맹은 아나팍시오 화산호 위에 모여 있었다.
경관은 아름답지만 고지대인 데다 춥고 괴물들이 살고 있어 인적이 드문 장소였기에 모임 장소로 좋았다.
게다가 제3 대륙의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섯 동맹에 속하는 모두가 모이기도 좋았다.
"위즈덤."
"왜 부르지?"
위즈덤은 고개라고 부를 것이 없는 만큼 어깨를 틀어서 크람푸스를 바라보았다.
크람푸스는 오히려 자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떨떠름하게 질문했다.
"정말 괜찮은 것 맞나?"
"어떤 부분 말인가?"
"석면의 왕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아."
크람푸스가 보기에, 아니 크람푸스가 아니더라도 전쟁을 앞두고 왕이 교체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야 전쟁 준비 자체가 나라의 화근이 되어 반역을 불러오곤 했지만, 이곳에서 진정한 선택을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플레이어였다.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를 미루어 볼 때 크람푸스가 염려하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위즈덤은 양 손바닥을 보이고 가볍게 흔들었다.
"의도한 바야. 문제없지."
"그래?"
그 자리에 눈썰미가 좋은 이가 있었다면 장완이 사자탈 안에서 스리슬쩍 위즈덤을 바라보았다는 걸 알겠지만, 이 자리에 그 정도 날랜 이는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당장 특별한 스킬을 쓰지 않는 한 시스템과 상태창을 제어하는 캐릭터로 존재할 뿐이니까.
장완이 생각했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장완 스스로는 별 문제가 없는 작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약점은 분명 있었다.
장완의 현재 신성 레벨은 고작 8.
위즈덤의 신성 레벨 상승을 위해서 바친 경험치였다.
반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위즈덤을 제외하더라도 대부분 16을 넘긴 상황이다.
병력 자체의 문제는 없더라도 정말로 중요해질 수 있는 신성을 통한 전투에서 장완의 존재 자체가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네뷸라... 아니, 최성운이 모르면 그만이잖아.'
만굴은 성운과의 다섯 동맹의 전쟁에서 최후방이었다.
만굴까지 성운이 도달한다면 이미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렇지 않다면 만굴에서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진 않을 터였다.
'그 외에는 병력을 차출해서 보내면 되니까.'
만굴의 뒤에는 단리, 즉 헤게모니아가 있지만 다섯 동맹은 물론, 전쟁이 고조되기 전까지의 성운 또한 제3 대륙에는 이미 관심을 끊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단리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섯 동맹과 흑린이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별도의 움직임이 없었고 헤게모니아 또한 연락이 없었다.
'잘되었다고 봐야겠지.'
장완의 걱정은 성운이 느닷없이 배를 몰고 와 최후방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럴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장완은 성운이 아니었고, 성운만큼 게임을 잘하지도 않았다.
무슨 전략을 구사할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해안을 끼고 있는 만큼 그럴 확률이 존재하므로 경계는 해야 했다.
'다행히 단리의 상선은 만굴과 단염을 지나 흑린까지 오고간다. 전쟁 때문에 만굴과 단염이 막혀도 단리까지 막긴 힘들 거야. 그럼 단리에 박아 둔 간자들로 배가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알 수 있겠지.'
게임 초반부에 자신들이 가진 소영역을 통해 정찰을 해 나가는 것이 전쟁의 첫 번째 목표였다면 게임 중반부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소수의 부족이 듬성듬성 있던 세계 안에 인물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면서 뻔한 것을 보고 놓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나무는 숲에 숨기는 법.
플레이어들이 쏟아지는 정보량에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놓치는 경우도 많아졌으며, 신성 차단과 같은 스킬로 눈속임을 해내는 것까지 가능해졌다.
마법사를 가지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마법사를 잃은 것 또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니 네뷸라의 솜씨인 것이 분명했던 것처럼.
아무렴 장완은 어떻게든 해안만 사수해 낸다면 자신의 레벨 다운이 동맹에 손해를 입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불어 장완은 자신의 레벨 다운에 비해 위즈덤이 사도를 얻은 것이 진정으로 더 큰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사도야말로 로스트 월드의 꽃이니까.'
다른 창조물들처럼 사도도 현현하는 데는 신앙 자원에 유지비가 든다.
하지만 사도는 그 자신이 신앙 자원을 벌 수 있었다.
창조물들이 신앙 자원을 끊임없이 빌려 와야 하는 것에 비하면 단독해서 존재하며 신앙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개체는 창조물과 구분이 되었다.
물론 위즈덤의 판단에 레딘 비알 오서는 별다른 명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스킬도 없고, 따라서 라크락과 정면 대결할 정도의 캐릭터는 될 수 없었다.
다만 사도가 된 이후 석면의 왕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명성을 쌓아 올릴 예정이었다.
극단적인 반란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도 그 이유였다.
데르말딘 비알 오서는 개인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정통성이 있었기에 석면은 흑린을 대적하기 이전에 당장 반란군부터 제압해야했다.
'하지만 당연히, 사도 레딘이 반란군 전체를 제압할 거다. 그럼 그 명성이 커지겠지. 흑린의 군대와 마주할 쯤에는 라크락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상대는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정도라면 충분했다.
'성운은 라크락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거다. 온갖 스킬로 덕지덕지 붙은 라크락이 전선에 서면...'
장완은 사자탈 안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두 발 달린 전차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저급의 마법사들이 병사 수백 명 분의 역할을 해낸다면 라크락은 단신으로 국가 하나를 상대할 수 있었다.
'국가 하나도 너무 낮게 잡았지. 라크락 같은 캐릭터면 당장 신 하나가 만들어 낸 창조물들과 동시에 싸울 수도 있을 거야. 아니, 이런 예시도 의미가 없나.'
라크락은 사도가 된 동시에 현신한 플레이어를 이길 수 있었다.
전장에서 라크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는 것이 다섯 플레이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는 크람푸스, 너는 괜찮나?"
"왜?"
"너야말로 네뷸라를 직접 상대해야지 않나."
오랜 세월 많은 간자들이 서로의 국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1만이나 되는 병사가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보다 많은 물자와 그만큼의 지원이 움직이는 것이니 그 행로를 모르기 힘들었다.
플레이어 네뷸라는 어째서인지 르나르들이 있는 적과가 아닌 사티로스들의 단염을 노리고 있었다.
이 선택에 대해 룬다는 성운이 자신을 버린 것인가 걱정도 했지만, 나머지 네 플레이어들은 성운의 의도대로 좋게 해석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르나르들과 리자드맨들은 상성이 그렇게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르나르들은 숲과 산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을 노릴 테고 대포와 같은 중장비를 끌고 가야 하는 리자드맨들에겐 고역이다.
그리고 전쟁에 나선 이상 단기 결전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비교적 가까운 적과가 아닌 단염을 노리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크람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고 있지. 나는 애초에 내가 처음 흑린과 대면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과연."
룬다는 그렇게 생각해 줬다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룬다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입장이었지만, 비록 성운과 함께 하게 되더라도 성운과 전쟁을 하는 연기를 해야 했을 것이다.
'연기라지만 손해 보는 건 싫으니까.'
따지고 들자면 연기를 위한 것 자체가 남을 속이기 위한 비용이었지만, 룬다 생각에 성운은 불필요하게 남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분명 가학적인 취미가 있을걸.'
크람푸스는 계속해서 자신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해 왔으며, 이에 대한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를 말했다.
일견 크람푸스의 계획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3만으로 흑린의 1만을 꼭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네뷸라의 실력을 얕보지 않는 거지."
"패배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는 것인가?"
"그래.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지."
"최악이라면?"
"...음. 군대가 전멸할 수도."
그 말에 위즈덤과 다른 플레이어는 조금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크람푸스는 손을 내저었다.
"네뷸라를 과대평가하는 건 아냐. 단지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비슷하게 적용해 보려는 거지."
"흠, 그 경우에는 너의 준비가 별 쓸모없는 것 아닌가?"
"그렇진 않아."
"어째서지?
"어떻게든 내가 시간을 번 것이 되니까. 그 시간 동안 나머지는 병력을 더 준비할 수 있을 테고, 네뷸라의 신앙 자원을 조금이라도 더 소모시키면 우리에게 조금 더 유리해지지 않겠어?"
"...흠."
위즈덤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위즈덤이 다음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크람푸스가 상태창을 보더니 "엇"하고 목소릴 내었다.
그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룬다가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저, 그게..."
"네?"
"잠시만요. 가 볼게요."
크람푸스는 그야말로 창백한 안색으로 급하게 사라졌다.
의아해하던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곧 각자의 방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
단염의 수도, 데이머릿.
왕 오보넴은 왕좌에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외성에서부터 연속해서 끝나지 않는 폭음, 그리고 비명은 왕이 된 자라고 해도 공포를 느끼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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