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3
100화
바센 라크 오라즌이 생각했다.
'역시 선상을 노린 게 옳은 판단이었군.'
해적들은 당장이라도 뛰어들 태세로 갑판 위에 대기 중이었다.
덕분에 고스란히 대포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해적 중 누군가 외쳤다.
"피, 피해라!"
두 번째, 세 번째 대포가 순차대로 발포되었다.
둥글게 깎은 돌덩이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난간을 박살 내고도 운동 에너지는 거의 줄지 않는다.
딥원 하나의 어깨에 부딪자, 딥원은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동시에 떠밀리듯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돌덩이는 포물선을 이루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돌덩이에는 여전히 힘이 남아 있다.
갑판 위를 구르던 돌덩이는 이번에 해적의 정강이를 휘어잡는다.
와그작, 소리와 함께 딥원은 바닥에 엎어지고, 돌덩이는 정강이를 물어뜯고서 반대편 난간 사이로 빠져나간다.
비명이 난무했다.
"아악!"
해적들이 대포알을 피할 수는 없다.
그저 포구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기를 빌 수밖에.
전방에 있던 여섯 척의 선상에서 아비규환이 일어나자, 뒤따르던 네 척의 해적선에서 웅성거림이 있었다.
그때 분명 우두머리의 다음가는 권력자로 보이는 덩치 큰 딥원이 호령했다.
"기이한 무기에 당황하지 마라! 저런 무기를 바로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당장 배를 붙여라!"
그 말을 듣고 바센은 감탄했다.
'우연히 알아맞힌 건가?'
바센은 어쩔 수 없이 포수들에게 외쳤다.
"바로 장전을 준비해라!"
바센은 해적선의 돛대 사이로 덩치 큰 딥원이 씨익 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아니었군. 그보다는 놈들에겐 맞붙는 것 말고 다른 방법 따윈 없는 거야. 어떻게든 혼란을 잠재우고 독려해야 할 테니 되는 대로 말했던 것뿐이다.'
상대의 지능이 낮지 않다는 건 전투를 지휘하는 바센에게 중요한 정보였다.
생긴 것이 추악하긴 하지만 상대 역시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니까.
바센은 선상을 돌아보며 외쳤다.
"겁먹지 마라! 허둥지둥대지도 말고! 우리가 이기고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지금까지 잔뜩 기가 죽어 있던 선원과 병사들이 바센에게 호응하며 소리쳤다.
여섯 척의 해적선 뒤로 네 척의 해적선들이 사이를 비집고 전면에 나타났다.
배 측면이 부대끼며 고래 울음 같은 마찰음이 이어졌다.
덩치 큰 딥원이 외쳤다.
"배를 가까이 붙여라! 선상에서라면 우리가 이긴다!"
바센이 생각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바센이 수기를 들어 올렸다.
"제2열 조준!"
덩치 큰 딥원이 중얼거렸다.
"...2열?"
바센의 명령에 첫 번째 줄에 있던 포수들이 장전을 하다말고 뒤로 이동하고, 두 번째 줄에 있던 포수들이 포를 앞으로 끌고 왔다.
애초에 첫 번째 발사는 전체 대포의 절반만 쏘았던 것이다.
'장전 시간이 길어서 약점이 생긴다면, 격차를 두어 사격하면 그만이지.'
바센이 수기를 내렸다.
"발사!"
대포에서 짧게 튀어나온 심지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심지가 모두 타들어 가는 잠깐의 지연 시간 동안 딥원들이 일제히 동요했다.
"...안 돼!"
-쾅!
또 다시 태풍이 해적선의 갑판 위로 휘몰아쳤다.
포탄들이 해적선 위를 휩쓸고 지나가며 비산하는 나무 파편과 시체 조각, 그리고 아직 숨이 붙은 해적들의 뼈와 살들이 나부꼈다.
바센은 잠깐의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티오네.'
"아, 네."
"지금 다소 거리를 벌리지. 그럼 2열까지 장전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거 같군. 다른 대비도 가능할 테고."
"알겠습니다. 다른 배에도 수기로 신호를 주죠."
해적들이 대포알로부터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해저의 수치와 군함들은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바센이 생각했다.
'우리 목적은 대포와 화약을 무사히 가져가는 것. 구태여 더 덤벼들지 않는다면 굳이 저 해적들을 다 섬멸할 필요는 없어.'
우선 바센이 가진 배와 병사에 비해 해적과 해적선의 숫자가 많았다.
무리해서 선상 싸움을 벌여 해적선을 점령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물론 우리가 도망치는 놈들을 쫓는 게 아니라, 놈들이 달려든다면야...'
마치 바센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덩치 큰 딥원이 해적들을 다그쳤다.
"살아 있는 놈들은 부서진 돛의 방향을 바로 잡아라! 줄을 제대로 매서 당겨! 당장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갑판 아래로 몸을 숨겨라! 전진해!"
바센이 생각했다.
'역시 생각이 없는 놈들은 아니군.'
선상 위의 표적 중 가장 단단한 것은 돛대 정도였다.
하지만 배의 측면은 거친 파도와 암초를 견디도록 만들어져 있다.
바센은 현재 크기의 대포로 배의 측면을 부수려면 완전히 근접하더라도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바센이 말했다.
"왕 대포를 준비해라."
바센이 말한 왕 대포는 배에 실린 가장 큰 크기의 대포를 말했다.
배마다 두 척뿐인 데다 단련된 선원들조차도 여섯 사람이서 받들어야 옮길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
그리고 그만큼 파괴력도 강했다.
다시금 달려드는 해적선들에게 왕 대포가 불을 뿜어내자 해적선 측면을 부수고 들어가더니, 와지끈 소리와 함께 반대편 측면을 뚫고 나왔다.
해적선 구멍에서 비명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보지 않아도 해적선 내부가 곤죽이 되었다는 걸 짐작할 만했다.
갑판 위로 다시 해적들이 튀어나왔다.
'간단하군.'
재차 선상 위로 대포들이 발사되었다.
두 번째 열까지 발사가 끝났을 무렵, 해적선 네 척에서 해적들이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중 한 척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센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흠, 구멍에 물이 들어찰 정도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 대포알에 용골이 부러진 것 같은데요?"
티오네가 왕 대포의 포신을 두드리며 말했다.
"노리고 쏘긴 힘들겠지만 성능은 확실하네요. 이제 놈들도 도망치겠죠?"
"아니. 내 생각엔, 놈들에게 한 가지 노림수가 더 있을 테니."
"노림수요?"
바센이 외쳤다.
"각 배는 선체를 올라타는 딥원들을 주의해라! 놈들은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바센에겐 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단정적으로 말했다.
딥원과 같은 종족이 아니더라도 선체를 올라설 수 있는 해적은 흔하다.
좀 더 경계해서 나쁠 이유는 없다.
그 말에 포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 선원과 병사들이 창과 활을 들고 선상 난간을 향해 경계하기 시작했다.
바센 또한 활을 들고 활을 먹이더니, 옆에 있는 군함의 아래를 향해 날렸다.
물갈퀴를 가진 손이 군함에 화살로 틀어박혔다.
"크악!"
딥원 해적이었다.
딥원이 손에 박힌 화살을 빼내려는 순간 바센의 두 번째 화살이 딥원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역시.'
바센은 처음부터 배를 버리고도 해적들이 생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생긴 것이 물고기를 닮았다면 그 능력도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경계만 충분하다면 상관없었다.
한 척의 배는 바다를 기준으로 하자면 일종의 성벽인 셈.
기습을 노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바다 깊숙이 숨어 있다 생환할 녀석들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사기를 잃은 패잔병이다. 그건 육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야.'
야분 해적단은 야습까지 간단히 파훼당하자 더 이상의 노림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젠장! 후퇴해라!"
바센은 혀를 찼다.
후퇴를 결심할 것이었다면 대포에 맞은 직후, 아직 배 열 척이 모두 성했을 때가 좋았다.
지금 남은 배는 사실상 여섯 척, 게다가 잇따른 포화로 해적의 수도 많이 줄었다.
지금이라면 선상 싸움이 일어나도 해 볼 만했다.
"놈들을 추격한다! 조준!"
해적의 수치와 군선들이 후미의 해적선 네 척에 나란히 따라붙었다.
"...발사!'
-쾅!
최후까지 살아서 도망친 해적선은 두 척뿐이었다.
─┼
"좋군."
해적의 수치가 대포를 사용한 선상 싸움은 성운에게 흥미로웠다.
대포를 가진 아군이 그렇지 못한 적군과 싸울 때 해상에서 얼마만큼의 역량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싸움을 성운이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성운은 해적들이 해적의 수치와 세 척의 군함을 노릴 수 있도록 조종했다.
이제 와선 성운에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유도였다.
남방 제도에 주둔 중이던 해적들을 흰 거미 힐로브로 일정보다 빠르게 내쫓고, 해적들이 노리고 있던 마을에 스라티스를 등장시켰다.
정기적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 해로가 만들어지는 법이니 해적질이 고픈 해적들이 우연히 마주친 네 척의 배에게 달려드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상의 싸움이 보고 싶어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예방 접종이 필요했으니까.'
야분 해적단은 규모가 컸다.
남방 제도에도 해적 주둔지가 몇 곳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큰 규모의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면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작은 싸움부터 차근차근 이기게 하려는 성운의 배려였다.
'어차피 라비나도 타고 있었고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었어. 여차하면 내가 나서도 되고. 그렇지만 바센이 기대 이상의 역량을 보여 주고 스킬까지 붙을 줄은 몰랐군.'
바센에게 붙은 스킬은 '지휘'였다.
전쟁과 같은 아랫사람을 다룰 때 말을 이해시키고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를 포괄하는 스킬이었다.
그 밖에도 지도력 또한 눈에 보일 수 있을 만큼 상승했다.
'라크락 시절에도 전략과 전술은 필요했지만, 그만큼 전사 개개인의 전투 능력이 중요했어. 하지만 화기가 나타난 이후로는 전투력이 평준화된다. 그러니 부하들을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지. 좋은 스킬이야.'
그리고 바센은 성운이 생각하는 대로 좋은 결과를 내주었다.
마가넨에서 흑린의 해군과 조우한 바센은 대포를 사용한 선상 전투에 대한 교리를 장군과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방 제도의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도우라는 카일의 밀명을 받고 다시 모험단을 이끌고 남방 제도로 나아갔다.
바센이 남방 제도를 점령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수는 없어."
흑린이 남방 제도를 탈환해 낸 뒤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아직 섬 곳곳에 소규모 딥원 해적 무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스타시디안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같은 숫자라면, 아니, 딥원의 숫자가 조금 많은 정도라면 아스타시디안이 전투로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센은 카일의 밀명이 더 이상 없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말에 티오네가 퉁명스럽게 질문했다.
"왜요?"
그러자 라비나가 말했다.
"남방 제도는 해적들이 가진 가장 큰 점령지였지만, 정작 주된 기지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바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들이 왔다는 남쪽 대륙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해적들은 다른 섬들을 자신들의 주된 기지로 남겨 두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지금 남방 제도에서 가까운 곳에 두 섬이 있다더군. 하나는 오르무르 섬이라는 곳."
티오네가 말했다.
"여기 남방 제도 북섬에서 서쪽에 있는 섬 말이죠? 단염과 가까운 걸 생각하면, 아마 단염 바브린 앞바다에서 나타난 해적들은 그곳을 기지로 쓰고 있었겠죠."
바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탄 섬."
이번에는 라비나가 말했다.
"남방 제도의 남섬보다도 훨씬 아래에 있어요. 남방 제도의 아스타시디안들도 최근에서야 존재를 알았다는 걸 보면 아주 멀리 있겠죠. 무엇보다 남쪽 대륙과 가까울 테니, 아마 야분 해적단의 본거지일 가능성이 클 거예요."
바센이 말했다.
"남방 제도는 큰 피해 없이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섬에도 해적이 이만큼 있다면, 병력을 둘로 나누긴 힘들어. 다른 한 쪽을 먼저 제압해야 하지."
바센의 생각에는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하느냐는 각각 이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축제의 소란을 뚫고 바센 뒤로 다가왔다.
"걱정마라, 오르무르 섬은 우리가 점령했으니."
바센은 고개를 들었다.
왼쪽 손이 검게 썩은 것 같은, 키가 큰 가루다가 서 있었다.
101화
"누구냐?"
바센 라크 오라즌의 말에 가루다가 부리를 열었다.
하지만 휘 라비나 무엘이 조금 더 빨랐다.
"마즈다리?"
"아, 오랜만이군, 라비나."
바센이 라비나를 돌아봤다.
"아는 사이인가?"
"네. 이 사람은..."
라비나는 마즈다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도 곧장 떠올리지 못했다.
불신자인 자신이 바센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흑린에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바쳤고 카일이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즈다리가 떠돌이 연금술사라면 정체를 속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저하는 라비나 앞에서 마즈다리가 바센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연금술사다, 바센 왕자."
"연금술사? 날 알고 있나, 가루다 마즈다리?"
"얼마 전까진 몰랐지."
"저 친구들이랑 한 패거리인 모양이군."
바센은 턱으로 해안선을 따라 걸어오는 일련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트롤들이었다.
모두 무장하고 있었지만, 무기를 뽑지도 않았고 달려들지도 않았다.
시끌시끌하던 아스타시디안들이 눈치를 봤다.
아스타시디안 도주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긴히 드릴 말씀이..."
"트롤들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라면 이미 늦었다."
"아이고."
도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단염의 상선인 줄 알고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수수 내리는 게 전부 무장한 트롤이라..."
"장군에겐 말했나?"
바센이 말한 장군은 티오네 이티모가 수송한 대포와 화약을 나누어 받고 바센과 함께 남방 제도에서 해적들을 몰아내는데 힘쓴 이얀 타타 장군을 말했다.
이얀은 동섬에서 마지막 승전보를 알려 온 뒤 축제를 즐기지 않고 혼자 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뇨, 아직..."
"그럼 이얀 장군에게 일러 주고 병력을 이끌고 이리 오라고 해라. 전투에 대비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그리 경계할 건 없는데"
"흠, 경계라.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당연한 채비를 하는 것이지. 야밤을 틈타 상선으로 꾸며 나타난 트롤 부대이니. 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평범하지."
그 말에 마즈다리가 어깻죽지를 긁고는 말했다.
"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야밤에 도착한 것이야 이곳 남방 제도에 남아 있을 해적을 한 시라도 빨리 몰아내기 위해서였고, 단염의 상선을 빌려 탄 것은 저희 나라에 남쪽 바다에 띄울 배가 없기 때문이었지."
"연금술사라면 연금술사의 탑에서 라비나와 만났고, 그럼 석면 사람이란 말이군."
"맞아."
"석면에서 이 머나먼 남방 제도까지 무슨 일이지?"
그 질문을 마쳤을 때 마즈다리 뒤로 트롤들이 다가왔다.
장군으로 보이는 트롤이 말했다.
"마즈다리, 여기 있었군."
마즈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장군, 너무 가까이 오진 마라. 여기 흑린의 왕자님이 계시고, 저희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니."
"바센? 그쪽이 바센 왕자님입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석면의 장군 올도르 마옌입니다."
"올도르, 그대가 책임자인가?"
올도르 마옌과 마즈다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분위기가 잠깐 맴돌았는데, 바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는 아니군. 라비나랑 비슷한 건가? 왕에게 선택받은 연금술사라면 지위는 높겠지만 전투를 지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바센의 생각대로였다.
"예. 심려를 끼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희는 흑린과 다툴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야밤에 상선을 타고 온 이유는 마즈다리가 이야기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석면에서 구태여 남방 제도까지 온 건 이해하기 힘들군."
올도르가 말했다.
"단염이 야분 해적단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해적들에게 시달리고 계셨다는 걸 아십니까?"
"그래. 최근에는 '우리 흑린의' 남방 제도에도 손을 뻗었지."
바센은 아직 정말로 상대가 석면에서 왔다는 걸 곧이곧대로 믿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상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하는 대화는 일종의 외교였다.
바센은 남방 제도가 흑린의 땅을 명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올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알기론 흑린은 남방 제도에 간섭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아스타시디안들의 고유문화가 있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공물을 받아 왔지."
"흠. 석면도 중부 황무지의 떠돌이 부족들에게 공물을 걷지만 그들을 석면에 속했다고 하진 않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들은 야천을 믿는다."
그 부분을 공격할 생각이었던 올도르가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제가 알기로 남방 제도의 각 섬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신들을 믿는다고 들었는데요."
"신의 이름을 달리 부르긴 하지만, 정말이다.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일로 정확히 알게 되었지. 본단의 사제가 내려올 거다."
남방 제도가 흑린에 속하는가 아닌가는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흑린의 움직임이 늦고, 석면이 빨라서 흑린이 남방 제도에서 해적을 모두 몰아내기 전이었더라면 보다 중대한 문제가 되었을 터였다.
바센은 눈앞의 트롤 장군을 노려보았다.
'그랬더라면 분명 해적들을 몰아내서 해방시킨 섬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을 테지. 애초에 아스타시디안들은 그저 야만인들이었다고 말이야.'
하지만 바센이 공고히 막아선 덕분에 올도르가 공격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올도르는 한 발 물러났다.
"...좋습니다. 어찌되었든 저희 석면은 단염의 동맹국으로 군대를 보내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단염의 배를 탔던 것이기도 하죠."
본래 석면은 단염과 적과와 적대 관계였다.
하지만 그것도 수십 년 전 이야기.
라크락이 악신을 물리친 이후 흑린의 영향력은 자꾸만 커져 갔고, 그러한 영향력은 다른 땅과 다른 종족은 물론, 다른 나라의 궁정에까지 끼치기 시작했다.
흑친에 친화적인 귀족들은 물론이고 리자드맨 관리들은 그나마 좋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남몰래 야천을 믿고 있었던 이들까지 나타나자 대륙 중앙의 다섯 나라들은 경계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석면은 단염과 적과, 그리고 금안과 만굴과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바센이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단염이라고 하여 군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더 가깝기는 적과와 만굴이 있지 않은가?"
"그건..."
마즈다리가 부리를 열었다.
"자꾸 말을 말아 뭐 하겠나? 바센 왕자 그대도 알고 있듯 남쪽 대륙의 존재 때문이지."
"그런가."
바센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야분 해적단은 물리쳐야 할 적이라지만, 남쪽 대륙과의 관계는 아직 미정에 가까웠다.
야분 해적단이 전설 속에 나오는 고대의 악이라지만 대륙 전체의 대변자인지 아니면 그 일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대륙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화약 기술 발전으로 얻은 전투 능력은 각국에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길 수 있다면 땅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바센은 카일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른 나라의 왕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크게 다를 것이라 보진 않았다.
현재 서쪽 대륙과의 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해로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단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단리는 괜찮은 이익을 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남쪽 대륙과 무역이 활발해진다면 그에 대한 이익도 클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럼 내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겠군.'
바센은 석면이 단염에 협조를 한 것이 특이하다고 보았다.
단염이 더 가까운 적과와 암굴을 놔두고 석면에게 구원을 요청할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한다면, 적과와 암굴은 물론 금안과 석면, 다섯 나라가 모두 이 싸움에 뛰어들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었다.
'남쪽 바다에 배를 댈 수 있는 단염과 암굴이 배와 선원들을, 나머지 나라에서 군사와 자원을 대는 식으로 분담했다면 효율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흑린은 결국 다섯 나라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셈인가?'
바센이 생각하기에 다행스러운 점은 이것이 직접적인 전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올도르가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단염의 땅이었던 오르무르 섬의 해적들을 소탕한 뒤 한시 바삐 남방 제도로 온 겁니다. 흑린을 돕기 위해서였지요."
바센은 남방 제도가 흑린의 것인지 아닌지 방금까지 떠들지 않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괜한 심력 낭비였다.
"고맙군. 그럼 그대들은 돌탄 섬까지 갈 생각이 있다는 것인가?"
"필요하다면 더 멀리까지 갈 생각입니다."
"...그래. 잘되었군. 해적들을 해치울 우군들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곧 있으면 이얀 장군이 올 텐데 그 전까진 여기 술과 고기를 즐기지. 오르무르 섬의 해적들은 남방 제도에도 위협이었으니 그대들도 자격이 있어."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축제가 계속되었다.
─┼
돌탄 섬은 남방 제도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야분 해적단이 계속해서 수세에 밀렸던 이유는 활동 영역이 지나치게 넓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집중되어야 하는 힘이 흩어져 있었고, 흑린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배들에게 각개 격파를 당한 셈이었다.
실제로 야분 해적단은 제3 대륙에서의 힘이 분산되지 않고 돌탄 이라는 작은 점으로 모이자 쉽게 볼 수 없는 위협으로 뭉쳤다.
성운은 남방 제도 남쪽 바다의 해상에서 중얼거렸다.
"저놈들은 어디서 이렇게 배를 찍어 내는 거야?"
야분 해적단의 위협은 숫자였다.
남방 제도로 모여든 병력만을 계산한 것이지만 흑린 군함이 모두 합쳐 스물다섯 척, 단염의 군함이 모두 마흔 척으로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야분 해적단은 남방 제도 앞까지 백여 척을 내보내고도 꾸준히 줄어드는 숫자를 보충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대포로 열 척을 반파시키더라도 나머지 아흔 척이 배를 붙이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제3 대륙의 군함들이 꾸준하고 빈번한 승리를 이어갔지만 정작 남방 제도로 후퇴해야 하는 것은 해적이 아닌 군함들이었다.
더불어 병사들의 피로도가 쌓이고 무엇보다도 대포를 사용하는 데에 지속적인 보급이 필요하기도 했다.
성운은 직접 남쪽 대륙까지 건너가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플레이어의 이동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과 동맹의 땅에 원하는 지역, 아니면 자신이 사제가 있는 위치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능력, 다른 하나는 꽤 빠른 빠르기의 비행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순간 이동을 선호하지만 자신의 땅이 아닌 지역에선 비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법 빠르다고 한들 비행 속도는 플레이어들에게 대단히 느리게 느껴졌다.
성운에겐 철새들을 이용한 정찰 방법도 있었지만 이 또한 플레이어의 신성 레벨에 근거한 제한이 있기 때문에 어렴풋한 대륙 형상의 흔적을 보았는가 하면 공유되는 시야가 끊어졌다.
'아니면 신성 차단일지도.'
신성 차단은 플레이어의 관측을 차단하는 스킬로 플레이어의 신성 레벨이 19에 도달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성운의 레벨인 21이었고, 성운은 아마 같은 대륙의 위즈덤과 헤게모니아가 19를 넘겼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범위가 넓어지고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신성력 소모가 심한 데다, 일단 그런 식으로 차단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사용하지는 않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 순간도 길지는 않았다.
단염의 군함에 이어 암굴의 선단 서른 척이 대포를 싣고 나타나자 소모전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야분 해적단도 배를 보충하는 속도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해적은 약탈 사회니까.'
애초에 각국이 해적에게 수적으로 밀리고 있음에도 그리 급급하지 않고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해적들이 활동하는 지역을 모두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에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
돌탄 섬은 규모가 있는 섬이지만, 그럼에도 백여 척이 넘는 많은 배들에 타는 해적 모두를 먹여 살릴 만큼의 자원이 나올리는 없었다.
그리고 남쪽 대륙의 보급을 받기에 돌탄 섬은 거리가 있었다.
해적들이 글자 그대로 말라 죽기 시작한 것이다.
흑린 해군과 동맹 해군은 남방 제도 앞바다에서 두 달 만에 큰 승리를 거두고, 그대로 돌탄 섬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성운은 돌탄 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텅텅 비어 있음을 눈치챘다.
해적들이 섬에서 최후의 일전에 대비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배를 보여서 군선의 속도를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색한 행동이다. 뭔가 있다. 어쩌면...'
흑린의 배와 군함에는 야천의 축복을 내린다는 명목으로 군종 사제들이 타고 있었다.
성운은 해적의 수치에 타고 있는 사제를 찾아서 계시를 내렸다.
간결했으므로, 그 계시를 어렵게 해석할 것은 없었다.
사제는 갑판 위로 허겁지겁 달려와 바센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야천께서 계시를 내렸습니다."
"뭐라고?"
"감히 그분의 뜻을 입에 담습니다. 야천께선 '주의하라', 고 하셨습니다."
동맹 해군과 함께 전진하던 흑린의 함선들은 대장선으로 삼은 해적의 수치의 명령에 따라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다른 동맹 해군들은 무슨 일인가 하며 그 모습을 보았지만, 잠시 회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가장 앞서던 동맹 해군의 배를 덮쳤다.
거대한 촉수가 갑판을 내리쳤고, 난간이 부서지며 파편이 하늘로 솟구쳤다.
수많은 빨판들이 배를 움켜쥐자, 나무들이 부대끼며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크, 크라켄! 크라켄이다!"
102화
로스트 월드 플레이 중 최악의 이벤트라 할 만한 것은 드래곤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바다를 중점으로 놓는다면 크라켄의 등장도 드래곤에 비견될 만했다.
크라켄은 일종의 자연재해였다.
게임의 초반까지는 배를 타고 가는 이벤트에서 이따금 등장할 뿐이지만, 항해가 주력이 되는 중반부부터는 활동량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빈번하게 선박에 피해를 주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근해에서 물고기를 잡는 낚시 배 따위는 물론이고 많은 화물을 실은 상선이나 아직은 등장하지 않는 거대 범선들도 크라켄의 촉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신의 도움 없이도 크라켄의 재해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증기선과 같은 철로 만들어진 몸체가 등장한 이후지만 그것도 요행을 바라야 할 때가 많았다.
크라켄을 큰 위협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요인은, 크라켄의 본체를 공격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크라켄은 길고 수많은 촉수로 수면 위의 배를 털어 내고 사람을 골라내어 잡아먹기를 즐기는데, 그 사이 본체는 바다 깊은 곳에 잠긴 상태다.
'본체 크기만 어림잡아도... 500미터는 되는 건가?'
성운은 상공이 아닌 바닷속에 들어와 있었다.
심해 관찰은 많은 플레이어들이 간과하는 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많은 관찰이 가능하지만, 바다 속에 생물이 존재하는 경우 플레이어도 함께 바닷속에 있어야 생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의 신체(神體)는 물속에 있어도 아무런 저항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빛 한 점 없더라도 생물과 비생물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보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관성적인 플레이를 하느라 심해 정찰을 도외시했고, 성운 또한 종종 그랬다.
대부분의 게임 플레이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어쩌다 일어나는 해양 손실은 재수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때 잘 들여다보긴 했는데.'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가 수면의 배를 향해 나아가며 성운을 그대로 통과했다.
플레이어의 몸은 세계와 상호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무언가와 몸이 겹쳐 있다는 사실은 불쾌했기에, 성운은 물러나면서 촉수가 솟아오르는 방향을 보았다.
다행히 성운의 경고가 제때 도착했기 때문에 흑린의 배들은 아직 공격 범위 안에 포함되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성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운 옆으로 화상 채팅창이 떠올랐다.
염소 눈을 가진 크람푸스였다.
"네뷸라! 알고 있었나?"
"아, 방금 발견해서.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다들 발견할 줄 알았거든."
크람푸스가 성운을 노려봤다.
"설마하니 네놈이 꾸민 일은..."
"그럴 리가 있겠어? 로스트 월드를 하는 동안 크라켄을 움직이는 조종 방법 따윈 없었어."
"...그럼?"
"유인당한 거겠지."
성운은 크라켄이 바닥에 들러붙은 깊은 물속 너머에서 다른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떼를 이루고 있기에 얼핏 봐선 물고기 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잠영을 하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람푸스가 성운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수영해 오는 이들을 확인했다.
"딥원인가!"
성운은 딥원들이 크라켄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라켄이 위협인 이유는 단순히 큰 덩치를 가진 동물이라서가 아니었다.
크라켄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배를 흔들고 뒤집어서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린 뒤 하나씩 심해로 집어 당겨 제 입에 집어넣고, 그래도 배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촉수를 집어넣어 끄집어낸다.
'그러고 보면 크라켄도 고대의 악 어쩌고와 관련이 있다는 설정이었던가?'
성운은 관찰 결과 크라켄이 딥원들에게 촉수를 뻗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크라켄이 딥원을 구분할 줄 알거나, 딥원들이 크라켄에게 공격받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흥미로운데.'
성운이 말했다.
"첫 번째 공격에 대한 경고는 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공격에 대한 경고는 할 수 있겠군. 크라켄의 촉수 사이로 딥원들이 공격해 올 거야."
"그래? 그럼 해상에 떠 있는 우리도 세 번째 공격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데."
성운은 화상 채팅창 너머로 크람푸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야분 해적단의 해적선들이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크라켄 해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거군."
크람푸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성운은 그 말에 떨떠름해졌다.
"설마 이딴 시시한 문제까지 도와 달라고 할 건 아니지? 심지어 너희 배엔..."
그 말에 크람푸스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혀를 차곤 성운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화상 채팅을 종료했다.
─┼
"촉수를 잘라라! 도끼로 끝을 내리쳐!"
"아아악!"
"멍청한 놈들아! 붙잡힌 놈들은 포기해라!"
"선장님! 돛이...!"
가장 첫 번째로 촉수에 붙잡힌 단염의 군함 '고래수염'.
고래수염의 돛대가 지름이 1미터는 되는 거대한 촉수에 휘감겼다.
촉수가 돛대를 당기자 처음에는 배가 기울었지만, 어느 순간 돛대가 배 전체의 부력을 이기지 못하고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쩌적!
치밀하게 차 있는 단단한 돛대가 부러지며 폭발하듯 나무 파편이 튀기고 돛대가 촉수와 함께 배의 우측 난간을 따라 넘어갔다.
마즈다리는 아직 선내에 남아 있었다.
"이런 난리가 없군."
-겁나지 않나?
"당연히 두렵지. 하지만 두려움은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즈다리는 바닥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루다의 크기에 맞는 어색할 정도로 거대한 붓인 것도 눈에 띄었지만, 그보다는 마즈다리가 그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원형 안에 또 다시 원형이 있고 그 테두리에는 고대 문자가 쓰여 있었다.
고대 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형상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마즈다리가 달필이라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즈다리는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제 발톱을 선상 바닥에 끼워 넣고, 다른 한 손으로 천장을 떠받치듯 몸을 고정했다.
분명 검은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데도 마즈다리가 하나의 원을 완성시킬 때마다 은은한 빛을 띠었다.
"마즈다리! 마즈다리 어딨습니까? 마즈..."
문 밖에서 소란스럽게 들리던 소리는 마즈다리의 방문을 열자 멈췄다.
마즈다리는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온 사람을 보았다.
"올도르 마옌. 마침 잘 왔군."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석면의 왕 데르말딘이 날 고용한 이유, 그리고 이 머나먼 남쪽 바다로 보낸 이유, 그대가 날 찾고 있었던 이유."
올도르는 배 위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함과 비명, 배가 부서져 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위협보다 더 큰 불쾌감을 느꼈다.
"마법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그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물론 암굴의 배들도 모두 크라켄의 촉수와..."
순간 마즈다리가 단검을 뽑아냈다.
당황한 올도르가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들자, 마즈다리가 단검을 내던졌다.
단검은 올도르가 방어하거나 피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올도르를 스쳐 지나갔다.
올도르가 돌아보자 단검이 박힌 촉수가 꿈틀거리더니, 단검에서 제 몸을 빼고는 황급하게 갑판으로 되돌아갔다.
"가, 감사합니다."
마즈다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올도르는 순간 마즈다리의 양쪽 눈동자에서 번쩍임을 보았다.
'...방금 그건 뭐지?'
하지만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아직 올도르 앞에서 마법이란 걸 보여 주진 못했지만, 마즈다리는 데르말딘이 인정한 마법사였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바깥 상황을 잘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우리 배를 중심으로 3백보 이내에 몇 척의 배가 있지?"
"3백보 말입니까? 저희가 선두에 있었으니 그 정도라면 저희가 빌린 단염의 선단의 반의반쯤 될 겁니다. 열 척 정도요."
"열 척 '정도'라..."
마즈다리는 중얼거리며 고대 문자를 그림 위에 써넣었다.
"종족 구성은?"
"트롤이 대부분이지만, 엘프도 있고, 르나르도 있고, 홉고블린도 있죠. 아 물론 선원들 중에 많은 비중은 사티로스고요."
"더는 없나? 인간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인간도 있습니다. 노예를 구성하는 종족은 잡다해서 잘은 모릅니다."
마즈다리는 말없이 자신을 가리켰다.
"아, 가루다. 가루다가 있죠."
마즈다리가 재빨리 글자를 더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그대가 책임자이니 그대가 책임지라고."
"네? 뭘 말입니까?"
"이제 나가 봐. 집중할 시간이야."
"죄송하지만, 오래 걸립니까?"
"아니. 갑판에 다시 올라가 있을 때는 끝났을걸."
올도르는 마즈다리를 믿기로 했다.
당장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도 없었다.
올도르가 올라가자 썩은 손이 말했다.
-시작할까?
'그러지.'
썩은 손이 마즈다리의 내면에서 알 수 없는 고대의 문자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즈다리 또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의 주문이었다.
썩은 손의 속 주문과 마즈다리의 음성 주문에 마즈다리가 그린 동심원 그림, 마법진이 검붉게 변하며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반응을 시작했다.
이것이 마법의 비밀이 우연히 발견되기 힘든 이유이자, 저주받은 이들만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이유였다.
마법은 내면의 생각과 그 행위가 모순되어야만 주문으로서 가동할 수 있었다.
고대의 유적이 발견된 이후부터 자료들이 축적되고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백오십여 년.
마즈다리는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지식과 더불어 다른 연금술사들의 결손된 지식을 모아 몇 개의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마즈다리가 찾아낸 고대의 역사에 따르면 열 개도 안 되는 마법을 가진 마법사는 견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즈다리는 그 견습 마법사조차도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을...'
마즈다리가 마법진 위에 손을 올리자 마법진이 분열되며 분리되고 진동했다.
가벼운 힘의 파동이 마법진 안에서 퍼져 나갔다 좁혀지길 반복했다.
마즈다리의 눈동자 위로도 마법진이 떠올랐다.
'...보여 주마.'
마법을 시동시키기 위한 마법사의 문신이었다.
어디에든 새겨 놓을 수 있었고, 마즈다리는 제 동공에 그것을 그려 넣었다.
이윽고 마즈다리의 손바닥이 마법진에 닿았다.
─┼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가던 올도르는 바람도, 촉각도 아닌 무언가가 제 몸을 등 뒤에서 통과해 멀리 뻗어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함 소리로 가득한 선상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깨지고 부서지는 전투의 소음이 아니라 혼란함에 말미암아 두서없는 중얼거림들이 들려왔다.
올도르는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올도르는 멍 때리고 있는 병사의 어깨를 쳤다.
"이봐, 무슨 일이지?"
"장군님! 저, 저걸 보십시오."
방금이라도 배 위의 선원과 병사들을 후려칠 준비를 하는 촉수가 하늘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남쪽 바다의 뜨거운 햇살을 맞아 반짝이기까지 했다.
-덜커덩!
기울어져 있던 배가 중심을 잡으며 흔들리자 촉수가 그대로 쓰러지더니, 그대로 파편이 되며 부서졌다.
다행히 그 거대한 파편에 깔린 이들은 없었다.
다만 파편 하나가 날카롭게 쪼개져 올도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올도르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얼어... 붙은 건가?"
올도르는 병사들이 왜 선상에서 멍하니 있었는지 이해했다.
"저희 배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저걸 보십시오."
올도르는 병사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갔다.
촉수뿐만이 아니라 바다의 표면까지 얼어붙어서, 주위 십여 척 배의 모든 촉수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 범위는 대략 3백 보.
"...굉장하군. 폐하께서 저 자에게 그렇게 목매신 이유를 알겠어."
하지만 얼어붙은 것이 촉수만은 아니었다.
올도르가 시선을 돌리자 도끼를 높게 들고서 얼어붙은 사내가 있었다.
오크 노예였다.
"설마..."
뒤에서 마즈다리가 다가왔다.
"다행히 마법은 제대로 이루어졌군. 그대가 노예 중에 오크도 포함되었다는 걸 알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얼떨떨해하며 대답하지 못하는 올도르를 놔두고, 마즈다리는 누군가를 찾고 있기라도 한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
"'얼어붙은 시간'인가."
온도를 조종하는 마법 중 하나였다.
효과와 범위는 훌륭하지만 준비 시간이 길다는 점 때문에 초급 마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종의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마법에 속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 맞는 더 좋은 마법도 있을 텐데. 일종의 쇼맨십을 노린 건가?'
그럴 지도 몰랐다.
얼어붙은 시간만으로도 집중 공세를 받던 군선들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으니까.
얼어붙은 바다도 따뜻한 온도 때문에 곧장 금이 가고 부서지고 있었다.
성운은 마즈다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너도 노리는 게 있을 테니 말이지.'
103화
쇠는 녹슨다. 하지만 금은 그렇지 않다.
딥원의 머리 가운데 달린 촉수 끝은 심해에서도 빛이 나는데, 어둠 속에서도 금은 빛난다.
그래서 문명을 이룬 딥원들은 금 공예품을 귀하게 여겼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힘으로 그것을 빼앗는 해적들은 그 힘이 강할수록 많은 금 공예품으로 자신을 장식했다.
야분 해적단의 대장 야분 또한 그랬다.
서로 다른 굵기의 목걸이와 손가락마다 끼여진 반지, 거기다 팔찌와 발찌 입술을 꿰는 수많은 링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너는?"
야분의 몸에 걸쳐진 공예품들이 들썩거렸다.
그 말에 딥원 부하가 몸을 움추렸다.
"놈들이 크라켄의 영해를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빠져나오고 있다고?"
야분은 부하의 어휘 선택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 맞습니다.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놈들은 크라켄에게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놈들에겐 신의 은총도 없거늘!"
부하가 주저하며 말했다.
"기이한 힘을 쓰는 이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부하가 설명했다.
"크라켄은 제때 놈들을 습격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배가 박살 나기 직전, 그 주변의 바다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얼어붙었다?"
"예. 바다만이 아니라 촉수들도 얼어붙었고, 습격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저희 애들도 휩쓸렸습니다. 꽁꽁 얼어붙어서는, 충격을 받으니 깨져 버리더군요. 마치... 만다 님 같은 힘이었습니다."
"만다?"
야분은 탁자를 쾅 하고 때렸다.
"신의 힘이라고 보긴 힘들다. 신들은 그만한 힘으로 간섭하기가 힘들다. 그만한 힘을 쓸 수 있더라도 겨우 크라켄에서 선단을 빼내기 위해서 쓰진 않겠지. ...만다와 같은 마법사로군."
부하가 알고 있기에, 만다는 야분의 라이벌이었다.
둘 다 최고 공의회 참석 권한을 가진 대사제였지만, 각각의 점령 지역이 겹치는 바람에 사사건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야분의 패배였다.
집단의 규모라면 야분의 혈족이 훨씬 더 컸지만, 만다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족속이었고, 마법사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 사제들은 없었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야분은 사략 해적의 권한을 얻어 냈다.
그리고 그 권한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노릴 수 있었다.
야분은 이 진출로 대륙의 일부를 점령해 새로운 세력을 키워 내 본 대륙으로 돌아가 만다를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부하가 보기에 그 뜻을 이루긴 힘들어 보였다.
'줄을 한참 잘못 탔지만, 손절을 하기엔 늦은 것 같군. 이를 어떻게 한다.'
부하는 야분이 이쯤에서 겁을 먹고 본토로 돌아가길 바라며 말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라면 놈들을 여기 돌탄 섬 앞바다에서 상대해야만 합니다. 놈들에겐 기이한 무기도 있고, 만다 님 같은 마법사도 있습니다."
"흥, 겁쟁이 같기는."
야분이 말했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두렵지? 놈들은 물 아래에선 숨도 쉬지 못하는 땅벌레들이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만다를 상대해야 한다. 땅벌레 마법사 정도는 연습 상대로 삼을 수 있겠지."
"어떻게 상대합니까?"
야분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비밀리에 불렀던 교왕님의 기사들이 도착했다."
"교왕님의 기사라면...?"
"그래. 그분들이 맞다. 교왕님이 기사를 빌려주신다는 건 심광(深光)께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지. 나는 그들과 함께 내 배를 이끌고 승리를 할 것이다."
부하는 어쩌면 아직 야분을 손절하긴 이를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
"심문을 끝냈습니다."
이얀 타타 장군이 갑판으로 걸어 올라와 말했다.
이 덩치 큰 리자드맨의 두 손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바센 라크 오라즌은 이 리자드맨이 우군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별다른 정보는 없는 건가?"
"예. 이미 저희가 알고 있는 정보와 대동소이합니다."
크라켄의 바다를 빠져나오는 과정이 쉬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딥원들은 앞서 나간 단염과 만굴의 군선들이 크라켄에 의해 전멸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공격 대부분이 후위에 있던 흑린의 군선들을 향했다.
흑린의 배들은 빠르게 정렬해 2열로 사격을 했지만 일흔 척이나 되는 선단의 일부에게만 타격을 주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해적선들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크라켄의 해역에 있던 단염과 만굴의 군선들이 돌아 나와 지원을 했기에 해적선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만약 그 가루다가 마법이란 걸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힘겨운 전투를 해야 했겠지.'
흑린과 동맹 해군은 해역 넓은 지역에 정찰선들을 보내 둔 뒤 서로의 대장선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전투 중에 붙잡은 딥원들을 심문해서 얻은 돌탄 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석면에서 숨기고 있었던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이 건의 경우 외교적 문제도 있었다.
가루다의 마법이 피아를 가리지 않은 만큼, 바다에 떨어졌던 만굴의 뱃사람 몇몇이 마법에 휘말린 것이다.
이 또한 올도르가 마즈다리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한 정보였다.
하지만 만굴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항의를 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힘이 강대하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후였다.
그런 힘이 있는 이상, 그 마법사는 트롤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다면 여기 있는 모든 배들을 상대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석면의 장군 올도르는 그러한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숨기려고 했던 힘을 드러낸 이상 그것으로 권력으로라도 삼으려는 듯 굴었다.
"앞으로 동맹 해군의 전체 지휘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흑린은 예외였다.
정확히 하자면 마즈다리의 힘이 드러난 이상 두 집단 사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바센은 배로 돌아온 뒤 티오네 이티모와 이얀 타타에게 말했다.
"해적들과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사소한 시비나 트집을 잡아 싸우려고 들지도 모른다. 선원과 병사들을 단단히 단속해라."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분 해적단은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
"돌탄 섬입니다!"
망루꾼의 외침에 바센이 배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바센의 눈으로도 선명하게 섬의 모양이 보였다.
이얀 장군이 바센에게 말했다.
"병사들과 포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겠습니다."
"그러지. 전투 중 차질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예."
"아니, 잠깐."
이얀은 눈가를 찡그린 바센의 시선을 따라갔다.
망루꾼이 외쳤다.
"뭔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에 반쯤 잠겼습니다!"
바센은 저것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물에 반쯤 잠겼다면 배는 분명 아니고 잠영해서 다가오는 딥원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적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는 것이다.
"티오네! 배를 멈춰라! 이얀, 적으로 상정하고 포로 놈을 노려라!"
해적의 수치를 시작으로 흑린의 선단이 가장 먼저 정지하자, 앞서 가고 있던 동맹 해군의 선단도 눈치를 보며 하나둘 정지했다.
앞서가고 있던 고래수염에 타고 있던 올도르 마옌 장군도 배를 돌리며 속도를 줄였다.
"...저게 뭐지?"
위에서 성운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한숨을 쉬었다.
성운은 이미 달려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걸 경고하는 것은 너무 까다로웠다.
'어차피 흑린은 뒷줄에 있으니까, 보고 방법을 대처하길 바라야지.'
수면에 잠겼다 떠오르길 반복하며 다가오는 것들은 지척에 이르러서도 거품 때문에 그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올도르는 방패와 검을 들고 경계했다.
거품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물고기?'
몸길이가 3미터에 이를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의 비늘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였고 트롤 기사들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물고기의 몸 양쪽으로 한껏 펼쳐진 한 쌍의 날개 지느러미, 그리고 그 날개 지느러미에 가려져 한껏 움츠리고서 올라탄 딥원을 발견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딥원의 손에 삼지창이 들려 있단 것도 말이다.
"아악!"
거대 날치가 튕겨져 올라 군선 위를 활공하면서, 딥원이 삼지창으로 트롤 기사 하나의 어깨를 꿰고는 반대편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올도르는 그제서야 저 거품 속에 있는 것들 정체가 자신들과 같은 기사라는 걸 알았다.
올도르가 외쳤다.
"거대 날치 위에 딥원이 올라타고 있다! 난간에서 물러나라! 몸을 숙여!"
하지만 올도르의 외침은 물살을 헤치고 튕겨져 오르는 거대 날치가 수면을 때리고 솟아오르는 소리에 묻혔다.
현란한 빛에 시선을 빼앗긴 트롤 기사 몇몇이 거대 날치와 함께 그대로 바다 속으로 처박혔다.
'젠장! ...아니지. 갑옷만 벗으면 수영으로 배에 올라탈 수 있을 터.'
올도르는 몸을 한껏 숙이고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수면 위에는 올도르의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진 기사들을 몇 개의 조로 나뉜 딥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창으로 꿰어 죽이고 있었다.
올도르가 급하게 화살을 들었지만, 수면 아래의 딥원을 맞추기엔 힘이 부족했다.
'이런!'
올도르는 거의 기다시피하며 배 안쪽의 마즈다리를 찾아 달렸다.
한편, 바센은 앞선 배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협적인 공격이었고 그 공격은 제대로 채비를 하지 못한 다음 배로 이어지고 있었다.
"거대 날치를 탄 기사들이 갑판 위의 있는 이들을 재빨리 바다로 떨구고, 바다에 빠지면 보병들이 죽이는 건가. 자신들 종족을 잘 살린 유별난 전술이군."
이얀 장군이 말했다.
"그렇담 모든 병력이 갑판 아래에 숨으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방법이지만... 저걸 봐."
바센은 이얀 장군과 같은 생각을 가진 앞선 배를 가리켰다.
병사들이 모두 갑판 아래로 도망치자, 배 측면으로 딥원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대포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졸지에 백병전을 하게 된 것이다.
"백병전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적의 숫자가 많아지면 전투가 길어진다. 그럼 적의 본대가 나타났을 때 배를 움직일 수도 없을 거다."
"...그럼?"
"이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여긴 지상도 아니고 저것들이 코카투나 말을 탄 건 아니지만, 엄연히 기병이야. 임기응변이랄 것도 없지. 하던 대로 상대하면 된다."
그 말에 이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모든 병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
거대 날치 기사는 딥원의 주력이었다.
특히나 배를 상대할 때 최고의 전력으로, 길들여진 거대 날치는 딥원을 등에 태우고도 종으로는 10미터, 횡으로는 40미터까지도 뛰어서 활공할 수 있었다.
수백 킬로그램의 거대한 체구를 버틸 수 있는 종족은 많지 않으므로 적을 삼지창으로 꿰어 바다로 찍어 누르는 것만으로 단련되지 않은 병사라면 기절해서 그대로 익사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본래라면 교왕의 사병으로만 활동하지만, 신의 뜻이 있다면 다른 최고 사제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다음은 저 배다."
이미 몇이나 되는 배를 거쳐 오며 적들이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자, 거대 날치 기사들은 한껏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다음 배의 경우 갑판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 날치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다들 갑판 아래로 숨은 모양이지. 하지만 가끔은 겁을 상실한 바보들이 남아 있기 마련이지. 그다음 보병들에게 배를 제압하라고 신호를 보내면 된다.'
거대 날치 기사가 솟아올랐다.
"공격!"
하지만 딥원 기사는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을 알았다.
거대 날치가 선상을 가로지를 때,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병사들이 창을 45도 각도로 들어 올렸다.
'...이런!'
기사는 거대 날치의 고삐를 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아슬아슬하지만, 피했다!'
착각이었다.
둥근 그림자가 기사의 시야를 가렸다.
"1등 황훼사!"
몸을 일으킨 오우거 훼사가 팔을 들어 기사를 향해 크로스라인을 날렸다.
"바다에게 지지 안는다!"
104화
사람 머리통보다도 굵은 훼사의 팔뚝에 딥원의 머리통이 작렬했다.
자연스럽게 거대 날치는 제 주인을 놔두고 난간 건너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딥원 기사는 갑판에 내동댕이쳐졌다.
훼사는 그대로 딥원의 머리통을 밟아 으깨 버렸다.
"다 박살 낸다!"
그 말과 함께 거대 날치 기사들이 해적의 수치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훼사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온다."
바센 라크 오라즌 또한 창날을 쥐고 있었다.
날카롭게 입을 벌리며 거대 날치가 달려들어도, 바센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건 겁주기 위해서다. 진짜는 저 거대 날치의 이빨과 그 뒤에 있는 삼지창.'
바센은 움직이지 않았고, 거대 날치는 45도 각도로 솟은 창날에 그대로 꿰뚫렸다.
-우직!
나무 창대가 거대 날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순간 바센은 한 발 물러나며, 거대 날치가 허공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꼴을 보았다.
그 위에는 딥원 기사가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놈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흥."
바센은 콧김을 내곤 검을 뽑아 그대로 달려들었다.
딥원의 목을 잘라 내는데 두 번 검을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바센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욕심내지 마라! 움직일 필요 없다! 피해 간다면 그다음 창날 앞으로 달려들게 내버려 둬라!"
바센의 지시대로,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거대 날치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얀 타타 장군은 바센의 명령을 재차 반복하며 생각했다.
'그렇지. 새로운 종류의 공격이라고 한들, 잘 사유한다면 다른 공격의 변형에 불과하다. 놈들은 더 강한 것에 올라타 그 힘을 통해 공격하는 것이니 실상 기병과 다르지 않지.'
이얀은 어쩌면 땅 위의 기병보다도 더 상대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병을 상대로 창병을 내세우는 것은 기본적인 병법이지만, 코카투는 몸이 가는 데다 두터운 깃털 때문에 창날 사이를 잘 피하고 말 또한 지축을 울리는 위압감에 방진이 부서지기 일쑤다.
'하지만 이놈들은 몸만 잘 숙이고 있다면 삼지창이 닿기 전에 먼저 거대 날치를 꿰어 죽일 수도 있지. 게다가 땅 위의 기병과 달리 굴러 떨어진 딥원은 다른 기병의 호위를 받는 게 아니라 우리 아군 방진에 떨어지니.'
흑린의 군선들이 거대 날치 기사들을 효과적으로 대항해 내자 뒤늦게 다른 군선들 또한 이 대항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바센은 전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초기에 공격받은 배들 중 피해가 큰 배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해적들과 싸우기 바쁘다. 그리고 해적들이 이 정도에서 공격을 멈출 리가 없지.'
바센의 예상대로였다.
돌탄 섬으로부터 해적선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해적들입니다! 대략 120척 가량!"
숫자가 많긴 하지만 평시에 그대로 붙는다면 선상 전투를 각오하고라도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앞선 군선들이 이미 거대 날치 기사와 바닷속 딥원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배들도 있다. 저대로 두면 배들끼리 엉킬 위협도 있어.'
그렇게 되면 해적들은 배들 사이로 습격해 올 것이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없는 흑린이 해적들을 노리기도 힘들 터였다.
아직 대포의 명중률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망루꾼의 외침에 바센이 티오네 이티모에게 말했다.
"선장, 우리가 앞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동맹 해군의 군선들을 돌아서 앞서 나가야 된다."
"저희만으로요?"
"조금 늦긴 했지만 거대 날치 기사들을 내쫓는 데 성공했다. 배 위에서 싸움이 있긴 하지만 딥원 해적 하나하나는 그리 위협적인 적이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동맹 해군은 전투력을 되살릴 거다."
"...그러니까, 그 전까진 저희뿐이라는 거군요."
바센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 말해 뭐 하겠나?"
흑린의 군선들이 전진을 시작했다.
바센은 예상대로 동맹 해군들이 딥원들을 내쫓기 위해 서로 배를 맞붙여 선상 전투를 이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지도 모르겠군.'
해적의 수치가 동맹 해군의 고래수염을 지나칠 때, 고래수염의 돛대 위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뛰어내려 왔다.
날개를 한껏 펼쳐 덩치에 맞지 않게 부드럽게 착지한 것은 가루다, 마즈다리였다.
병사들이 긴장하는 모습에 바센은 일단 손을 올려 저지했다.
"무슨 일이지? 가루다?"
마즈다리는 곧장 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의외군."
"의외라니?"
마즈다리가 바센의 말에 능글맞게 웃었다.
"저 백여 척의 해적선들은 우선 동맹 해군과 맞붙게 될 거다. 그 사이 흑린은 도열해서 함포 사격을 하면 좀 더 수월하게 해적선들을 쳐부술 수 있겠지."
"아군을 공격하란 말인가?"
"아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흑린과 나머지 나라는 적국일 텐데."
바센은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마즈다리가 이어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해적선과 동맹 해군을 둘 다 박살 낼 수 있을 테니까. 심지어 변명의 여지도 있지."
바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너에게서 들으니 제발 그래 줬으면 했던 것 같은데?"
"내 힘이 두려웠단 말인가?"
"아니, 너에게 아무런 힘이 없었어도 나는 마찬가지의 선택을 했을 거다. 우리가 적국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장의 싸움도 이기지 못했는데 다음 싸움을 논할 수는 없다, 가루다."
"흠."
"게다가 저 해적 120척이 전부라고 장담할 수 없지. 전력은 어느 때가 되었든 아낄 필요가 있다. 아, 물론 너의 목숨도 귀하게 여겨야 할 전력이긴 하지."
마즈다리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바센의 말을 반박할 말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 같았다.
바센이 말했다.
"아무튼, 돌아가려면 옆의 배로 올라타라. 귀한 신분이니 돌아갈 기회를 주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넌 내가 필요할 테니."
"필요할 거라고? 왜지?"
가루다가 손끝으로 해적선의 선두에 있는 배를 가리켰다.
"위험한 놈이 오고 있거든."
바센은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바센의 눈에도 무엇인가 눈에 보였다.
"저건..."
─┼
해적선 선단의 선두에는 가장 크기가 큰 해적선이 있었다.
거대한 배라면 자연히 속도가 빠르지 못할 것이지만 그 배는 다른 배들보다도 훨씬 빨랐다.
배 앞머리에 선 야분이 외쳤다.
"달려라! 그대로 놈들의 배를 박살 내란 말이다!"
야분이 외치고 있는 대상은 다른 해적이 아니었다.
바로 배 앞에 묶인 채 배를 끌고 나가고 있는 거대한 시서펜트였다.
땅에는 드레이크, 바다에는 시서펜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거대 괴물.
몸길이는 어림잡아 40미터, 머리 크기만 하더라도 사람 몇 명은 한 입에 삼킬 거대한 크기다.
형체만 따지자면 팔다리가 없는 거대한 물뱀처럼 느껴지지만 척추를 따라 나 있는 날카로운 돌기와 거친 비늘은 크기만이 아니라 모습만으로도 격이 다른 존재임을 드러냈다.
심지어 해적선에 사슬로 묶인 이 시서펜트는 평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저놈들을 죽이면... 너도 죽일 것이다!
시서펜트의 말에 야분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네놈 따위가 위대하신 심광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가?"
시서펜트는 눈동자만 굴려 야분을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해상에는 신들이 서 있었다.
다만 이제 와서는 서로의 대화가 들리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고, 성운 옆에는 엘다르 밖에 없었다.
성운이 시서펜트를 보고 말했다.
「고대의 반짝이는 꼬리 시서펜트」
성운이 중얼거렸다.
"흉신이군."
"흉신이요?"
그 말에 엘다르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딥원들은 흉신을... 길들인 건가요?"
성운도 의아했다.
"그러게. 어떻게 한 거지?"
흉물, 그리고 흉신은 일반적으로 물리쳐야 할 적이었다.
물론 지능이 높은 개체는 대화할 수 있었고, 문명 수준이 높아지면 흉신도 몸을 사려야 하기 때문에 교섭의 여지가 있었다.
그 경우 특정한 마을이나 도시의 수호신이 되는 등 이점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금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그다지 자발적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성운은 생각했다.
'설마하니 영역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그러면서 성운은 과거, 이른바 악신으로 불리는 절우비를 죽이고 얻었던 영역을 확인했다.
「시체의 영역」
소영역도 아닌, 그냥 영역.
'종족 영역이나 대영역도 아닌 그냥 영역. 그러니까 고유 영역에 속한다는 말인데...'
소영역은 처음 플레이어들이 가지는 메이저 소영역 32가지, 흉신들이나 고대 유적 등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마이너 소영역 32가지를 더해 모두 64가지 소영역이 있었다.
이러한 소영역의 특징은 자연과 문명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기술과 지식을 포괄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이런 영역은 시간이 지나면 플레이어들이 공통적으로 들게 되는 영역이 즐비했다.
'이 시점에서 가축의 소영역이나 곡식의 소영역 같은 걸 가지지 않은 플레이어는 없겠지. 물론 스타팅에 따라 레벨 차이는 좀 있겠지만.'
그리고 종족 영역 또한 이러한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편이었다.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종족 이후로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여러 종족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이나 엘프는 인기 종족이니 인간의 영역이나 엘프의 영역은 이제 하나 정돈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가 많겠지.'
아직은 얻을 수 없는 대영역을 제외하면, 고유 영역이라고 부르는 범주가 있었다.
이런 고유 영역은 게임 플레이에서 아주 랜덤하게 발생하고 그 숫자도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플레이어와 공통으로 얻는 게 불가능했다.
한 게임에 무조건 하나.
'어느 정도 고유 영역을 얻는데 조건이 필요하다고 알려졌지만,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
공통되는 소영역과 종족 영역에 따른 레벨 차이에 더해, 어떤 고유 영역을 가지고 있는 지야말로 플레이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셈이었다.
때문에 성운은 악신을 죽이고 고유 영역을 얻은 것에 기뻐했다.
특히나 '시체의 영역'은 성운이 처음 보는 고유 영역이었다.
아마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그리고 딥원처럼 이번 플레이에서 처음 등장한 영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쓰레기였지.'
잘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시체는 움직일 수 없고, 만들어진 이상 썩기 바쁘다.
실제로 절우비는 플레이 도중 영역의 힘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기도 했다.
성운은 시체의 영역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적어도 당장은 쓸모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백 년 전의 일이었다.
'살아 있는 건 죄다 죽으니 영역 레벨이야 꾸준히 오르지만, 올라 봤자 쓸모가 없으니.'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랐다.
'절우비는 고유 영역을 가지고 있었지. 그럼 샤차 또한 고유 영역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운은 흥미를 가지고 야분과 시서펜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고유 영역이 흉신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라면?'
105화
이미 많은 흉신들이 성운을 비롯한 플레이어에 의해 휩쓸려 나갔다.
그럼에도 성운은 아직 숨어 있는 흉신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문명 발전은 이제 초입 단계. 강 유역과 도시와 마을을 잇는 길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수많은 종족이 개체수를 늘리고 있지만 그래도 200년도 지나지 않은 세계야. 고대 유적조차도 발견된 것보다 발견되지 않은 게 훨씬 많지.'
하지만 정말로 흉신을 조종하는 고유 영역이 존재한다고 장담하긴 힘들었다.
절우비나 샤차 같은 악신들은 뭔가 특별한 힘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샤차는 저 돌탄 섬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딥원 해적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인구수가 적지만 대부분이 전투 인원으로 존재하고, 자원과 인력 대부분을 약탈과 선박 건조 등에 사용해서 편중되어 있을 뿐, 엘프들이 모여 사는 북해안과 비견할 만했다.
"굳이 따지자면 엘다르를 상대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옆에 있던 엘다르가 화들짝 놀랐다.
"네? 저요?"
"아니, 혼잣말이야."
성운은 무슨 맥락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엘다르를 무시하고 다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흑린의 배 앞으로 시서펜트가 가깝게 접근하고 있었다.
엘다르가 말했다.
"돕지 않는 것인지요?"
"필요하면 그러겠지만, 내 생각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시서펜트인데요? 대포 정도는 맞아도 꿈쩍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마치 엘다르의 말을 증명이라고 하듯, 흑린의 뱃머리에서 정면으로 놓인 대포가 발사되었다.
두 발은 빗나간 데다 한 발은 딥원의 배 측면을 때리며 튕겨져 나갔지만, 한 발은 시서펜트의 머리를 정통으로 때렸다.
하지만 시서펜트는 그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머리를 휘휘 흔들고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속도가 잠깐 느려진 정도였다.
엘다르는 다시 흑린의 선상을 들여다보았다.
"마즈다리를 믿으시는 건가요?"
"그래."
성운이 말했다.
"흉신 정도는 견습에 불과한 마법사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엘다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성운은 엘다르가 진짜 지적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결국 마즈다리는 동맹 해군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군을 돕기보다 흑린의 배에 올라탄 것은, 단순히 시서펜트가 위험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납득하긴 힘들었다.
무엇보다 마즈다리가 선의만으로 행동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건 뻔해 보였으니까.
"그 부분은, 이미 움직였어."
엘다르는 성운의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
포수들을 지휘한 럼프가 바센에게 외쳤다.
"왕자님! 대포가 전혀 안 먹힙니다!"
바센 라크 오라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당황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런 속내를 내보이는 건 지휘관의 일이 아니었다.
"최대 거리에서 쏜 것이지 않나? 왕대포를 준비해라! 그리고 포 각을 낮춰서 준비해라. 다음은 코앞에서 저것을 명중시킨다!"
바센의 명령에 불안감을 보이던 포수들도 허겁지겁 움직이며 잡상을 떨쳐 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가능성이 낮다고 보지 않나?"
"무슨 말이지?"
"저 괴물이 얌전히 대포를 맞아 줄 거란 보장도 없고, 더 큰 대포를 맞는다고 상처를 입을 거란 확신도 없지."
그 말에 바센이 피식 웃었다.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흑린의 군법에는 사기를 떨구는 말을 지껄이고 다니면 목을 내놔야 하는데."
마즈다리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도와주지."
"마법을 쓸 건가?"
"그래. 그러기 위해서 이 배에 올라탄 거니까."
바센은 당장은 마즈다리를 믿는 것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야천께서 이 상황을 돕는 것이지만, 야천교의 교칙에는 노력 없이 신의 도움을 구가하지 말라 했다.
'신이 모든 것을 해 줄 거라면 왜 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셨겠나? 팔다리도 야천께서 움직이도록 두고 숨도 야천께서 불어넣으시도록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이지.'
바센이 말했다.
"어떻게 할 계획이지?"
"우선 저 괴물의 몸에 내가 닿아야 한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는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둬야 해."
"그게 전부인가?"
"아니."
마즈다리가 가로저었다.
"저 괴물의 주위를 돌며 선상에다 마법진을 그릴 거다. 하지만 이 마법진은 손상되면 안 돼서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 놈들이 마법을 모른다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마법을 안다면..."
"알겠다. 또?"
"마법은 최후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나는 무방비하니 누군가 나를 지켜야 해."
바센이 마즈다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냐고? 내 생각에 내가 말한 조건들이 쉽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저 괴물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답이 필요하다."
마즈다리는 이제 거의 지척에 다다른 괴물을 보았다.
"가능하다. 모든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저 괴물은 죽는다."
그 말에 바센이 부하가 들고 있는 수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양옆의 배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마즈다리는 그 신호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티오네 이티모만이 알아차리고 곧장 외쳤다.
"단장님! 미쳤어요?"
바센이 티오네에게 돌아서서는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럼 왜...? 아니, 일단 저희도 속도를 줄여야겠어요. 이대로 가다간 들이박을 거예요."
티오네가 돛을 접으라고 명령하기 위해 돌아서자, 바센이 팔을 잡았다.
"티오네 선장, 그럴 필요 없다..."
"...!"
넘실대는 파도로 요동치는 두 척의 군선이, 해적의 수치 양옆으로 바짝 붙었다.
양옆의 배는 수기를 통해 바센에게 신호를 보냈다.
-명령:충각. 속행?
바센이 수기로 답신을 보냈다.
-속행.
티오네가 멍하니 바센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우리도 이대로 들이박는다."
그 말에 마즈다리가 밧줄로 제 손목을 한 번 휘감았다.
마즈다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미쳤군."
바센이 말했다.
"훼사!"
"1등 황훼사, 든는다!"
"모두에게 충격에 대비하라고 전해라!"
훼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배 전체에 힘껏 외쳤다.
"충-격-에-대-비-해-라!"
바센은 티오네를 붙잡고 몸을 한껏 낮췄다.
바센이 배 전면부의 럼프에게 말했다.
"럼프!"
"알고 있습니다! ...전원, 발사!"
바센은 충격 직전 거대하게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시서펜트와, 시서펜트가 끌고 온 배 위에 놀란 표정의 딥원들의 얼굴들을 보았다.
세 척의 배가 시서펜트를 들이박았다.
-콰앙!
뱃머리와 시서펜트가 들이박는 소리인지, 왕대포가 불을 뿜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왕대포에서 솟아오른 새하얀 연기가 해를 가릴 정도였다.
바센은 연기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포수들, 전부 피해라!"
바센의 명령은 늦지 않았지만 시서펜트가 너무 빨랐다.
연기를 흩트리며 나타난 시서펜트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냈으나, 잠깐 멈칫했을 뿐이었다.
시서펜트는 머리를 숙여 가장 가까이 있던 포수 하나를 집어 삼켰다.
"저런. ...모두 활을 들어라! 괴물을 피하고 해적부터 노려라! 괴물은 뱃머리에 끼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리자드맨 병사들과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센 왕자."
바센이 돌아보자 마즈다리가 다소 초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지?"
"이 배에는 다 그렸다."
바센이 바닥을 내려다보자 이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빠르군."
바센의 칭찬에도 마즈다리는 신통찮다는 듯 퉁명스러웠다.
"다른 위치에 셋은 더 그려야 한다. 다행히 둘 정도는 아군의 배 위에서 그릴 수 있겠군."
"내 이름을 대고 보호를 청해라. 그때까지 적의 본선에 올라타 길을 열어 두겠다."
마즈다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해적의 수치 옆에 있는 군선으로 달려갔다.
바센은 병사들에게 마법진을 지키라고 명령하곤, 티오네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티오네는 충각 당시의 충격으로 들이박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뭐가요?"
"배에서는 그대 말을 듣기로 했었잖나?"
"됐어요. 신경도 안 써요. 지금 이 배는 배의 역할이 아니라 바둑판 위의 돌멩이 같은 거니까요."
"이해해 주니 고맙군."
"가서 할 일이나 하세요. 저 가루다가 징징거리기 전에."
바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린의 나머지 배들이 거리를 두고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하지만 그건 접근하는 다른 해적선들을 저지하는 정도였다.
그 저지 덕분에 나머지 해적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시서펜트가 끌고 있던 해적선의 크기가 워낙 컸기에 난간을 뛰어넘어 도착한 딥원들이 배를 넘어오고 있었다.
바센은 걸어가면서 딥원 둘을 베어 넘기고 병사들을 가리키며 자신을 뒤따르도록 명령했다.
'여긴 훼사만으로 지킬 수 있겠지.'
바센은 네 개의 뱃머리에 끼여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시서펜트를 지나치고 다음 배에 올라탔다.
"단장님."
바센을 부른 것은 휘 라비나 무엘이었다.
라비나는 바센처럼 이미 딥원을 베어 죽인 듯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쥐고 있었다.
"연금술사? 당신은 폐하가 아끼는 사람 아닌가. 여긴 위험하다. 해적의 수치로 돌아가라."
라비나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가 아끼기는 저보다 단장님을 더 아끼겠죠. 무엇보다 저는 이 순간을 위해서 머나먼 남쪽 바다까지 온 겁니다."
"...폐하가 보낸 건가?"
라비나가 말했다.
"아니요."
"그럼...?"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날카로운 도끼가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왔다.
하지만 궤도가 미묘하게 엇나가더니, 라비나와 바센 둘 사이의 발치로 떨어졌다.
바센이 도끼를 던진 이를 바라보았다.
"하! 운이 좋구나, 도마뱀."
사략 해적 야분 해적단의 우두머리이자 심광교 최고 사제 야분이었다.
바센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센이 알기에 야분은 일개 해적이었다.
대화를 나눌 격이 맞지 않았다.
바센은 단번에 난간을 넘어 적선에 올라탔다.
딥원들이 몰려들었지만 뒤이어 리자드맨 병사들과 라비나가 바센의 뒤를 따랐다.
바센은 몇 번 칼날을 부딪쳐 본 다음 생각했다.
'만만한 놈은 아니군.'
야분은 여유를 부리며 슬쩍 물러났다.
야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그대로 드러났다.
"시간을 끌고 싶은 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마법을 사용하고 싶을 테니."
바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법에 대해 알고 있나?'
야분이 말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늘 그렇지. 남에게 칼이며 화살이며 맞추면서 시간을 끌게 하고 자기는 느긋하게 그림이나 그리고 있단 말이지. 억울하지 않나?"
"그렇게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가? 아무튼 유감이지만, 마법사에겐 늦었다고 전해라."
"...?"
야분이 손을 들자 철커덩 소리가 들려왔다.
바센이 돌아보자 시서펜트를 묶어 둔 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바센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제길, 저러면 시서펜트가 빠져나가겠군!'
그때 야분이 바센의 등 뒤를 보고 말했다.
"어, 언제 배에 올라탔지?"
바센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마즈다리가 돛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
"걱정마라, 바센 왕자. 늦지 앉았으니."
마즈다리의 눈동자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이 시작되었다.
106화
-우우웅...
대기를 울리는 떨림이 있었다.
정말로 공기가 떨린다기보다는 환청에 가까웠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해역에서 모든 개체들이 떨림을 들었다.
아주 거대한 존재가 불쾌한 듯 몸을 뒤틀며 신음을 내뱉는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해 검과 창을 휘두르던 병사들도 잠깐이지만 마법이 일어나는 배의 각 뱃머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야분이 말했다.
"하, 그럼 그렇지! 실패했군!"
바센 라크 오라즌은 야분과 대적하면서도 괴물이 있는 뱃머리로부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야분이 바센을 보며 말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군? 마법은 쉽게 실패한다. 마법진을 그리는 문양이 한 끗만 틀려도, 주문을 조금만 더듬어도 실패하지. 이런 전장에서 성공할 리가..."
-크롸롸롸롸...!
순간 바센은 거대한 괴성에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리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바센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쓰러지지 않았지만, 갑판 위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많았다.
다행히 놀란 것은 바센만이 아니었다.
야분 또한 급하게 뒷걸음질 쳤고, 마법을 행사한 마즈다리 또한 비틀거리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마법으로 쓰러트려야 하는 괴수는 멀쩡해 보였다.
다행이라면 뱃머리에 끼인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경계하는 태도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바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마즈다리를 보았다.
"도대체 뭘 한 거냐, 가루다? 이래서야 적뿐만 아니라 우리도 싸울 수 없잖은가?"
마즈다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기다려라.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쾅!
바센의 반대편, 해적의 수치 마법진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카만 그림자 기둥이 솟았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다.'
팔이었다.
특정한 종족의 팔이라고 알아보긴 힘들었다.
서너 사람은 끌어안을 만한 거대한 팔뚝 끝에 손이 달려 있었다.
나타난 손은 뱃머리를 두드리고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저건... 뭐지? 거인의 손 같은데."
마즈다리가 답했다.
"잘 알아보았군. 저건 소환 마법이다."
"소환 마법?"
"마법진은 변화를 일으키는 신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세계와 세계 사이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는 고대에 탈라진이라고 이름 붙여진 다른 세계의 존재를 위해 문을 열었다."
탈라진의 손은 거칠게 뱃머리를 두들겨 댔고 이윽고 딥원 하나를 붙잡았다.
"이것 놓아라!"
하지만 딥원의 반항은 길지 않았다.
콰직 소리와 함께 딥원은 통째로 탈라진의 손 안에서 으깨졌다.
탈라진은 그대로 딥원의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 다음 대상을 찾기 위해 더듬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뱃머리에서 두 번째, 세 번째 탈라진의 손이 나타났다.
병사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바센이 손을 보면서 말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군. ...뭘 찾는 거지?"
마즈다리가 웃었다.
"놈들은 나를 찾고 있다."
"너를?"
"이 '탈라진의 손' 마법은 탈라진을 화나게 하는 마법이다. 상상해 봐라, 바센."
바센이 마즈다리의 마법진으로 빛나는 눈을 바라보았다.
"너는 가을날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햇볕은 따뜻하고 더울라치면 가볍게 산들바람이 불어와 열을 식힌다. 그런데 개미 하나가 너의 귓가를 부스럭거리며 지나가면서 잠을 깨운 거지. 너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넓은 언덕에서 이 작은 개미가 굳이 내 귓가를 지나갈 일인가?"
마즈다리가 딥원들의 배에 그려 넣은 네 번째 마법진을 가리켰다.
"그래서 너는 바로 옆에 개미굴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쑤셔 넣는 거지."
마법진으로부터, 네 번째 탈라진의 손이 솟아올랐다.
이 네 번째 손은 솟아오르는 순간 돛대 끝을 부러트렸고, 화살을 쏴 대던 망루꾼 딥원을 잡아 터트렸다. 딥원의 입으로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바센이 말했다.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
"모든 마법은 위험하지."
"...흠."
"하지만 어느 정도 대비는 되어 있어. 마법은 규칙을 정하거든. 하나, 저 탈라진의 손들은 지금 사람 중엔 '딥원'만 인식한다."
바센이 선상 위를 바라보자, 실제로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간혹 탈라진의 손에 의해 튕겨져 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탈라진의 손들이 움켜쥐거나 화가 나서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는 건 모두 딥원들이었다.
"둘, 탈라진은 저 괴물을 나로 인식한다."
각 뱃머리에서 더듬어 가던 손 중 하나가, 난간을 넘어섰다.
시서펜트는 그 손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그런 손 따위는 물어뜯어라!"
바센이 목소리를 향해 돌아보자, 야분이 이미 손은 전혀 닿지 않을 안전한 거리까지 멀찍이 도망친 것을 볼 수 있었다.
탈라진의 손이 시서펜트에 닿으려는 순간, 시서펜트는 몸을 틀면서 거대한 입으로 탈라진의 손목을 물었다.
"그래! 그거다!"
하지만 야분이 통쾌해하는 순간도 잠깐이었다.
첫 번째 손목이 물리자 나머지 손들이 시서펜트의 위치를 알아냈다.
탈라진의 손 하나가 시서펜트의 머리를 움켜쥐자 시서펜트가 비명을 질렀다.
-쿠오오오!
탈라진의 손 하나는 거대하긴 하지만, 시서펜트의 머리를 겨우 움켜쥘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 힘은 상대적인 크기와 무관한 것 같았다.
탈라진의 손이 시서펜트의 머리 가죽을 뜯어냈다.
-크오오...!
가죽과 살, 피가 순간 비가 쏟아지듯 튀었다.
시서펜트의 입에 물려 있던 탈라진의 손과 다른 손이 시서펜트의 입을 벌렸다.
시서펜트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자 턱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찢어지는 섬뜩한 파열음이 이어졌다.
시서펜트의 찢겨 나간 턱이 딥원들을 향해 내던져졌다.
-고오오...
네 번째 손이 시서펜트의 목구멍을 파고들어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손들이 시서펜트의 가죽을 산 채로 뜯어냈다.
엄폐물 뒤에서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본 바센이 말했다.
"마법은 위험하군."
"그래. 그래서 마법진을 너무 크게 그려서는 안 되지."
"왜지?"
마즈다리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손과 팔 다음에 있는 것까지 나와 버릴 것 아닌가? 그럼 감당할 수 없어지지."
"흠. '감당할 수 없다'라."
바센은 마법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탈라진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영원히 알 필요가 없는 것도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바센은 고개를 돌려 야분이 있는 선미를 바라보았다.
"배에 올라탄 이상, 놈을 잡는 게 좋겠군."
"이제 와서 뺄 수는 없지. 난 당분간 저 손을 감독해야 된다. 놈들이 그렇게 오래 즐길 것 같지는 않지만."
"나중에 바라보지."
바센은 이미 피떡이 되어 찢기고 있는 시서펜트를 힐끗 보았다가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시서펜트가 저지당하며 전황 전체가 흑린과 동맹 해군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다.
흑린의 함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해적선들이 접근했지만, 시서펜트가 공격당하기 시작하자 그 용기도 주춤해졌다.
이후 동맹 해군이 배 위에 올라탄 딥원들을 처리해 내고 흑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망할...!"
교왕에게 빌린 기사들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최고 사제가 되었을 때 심광으로부터 그 증거로 받은 시서펜트도 마법에 당해 버렸다.
야분은 패색이 짙어지자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생각했다.
'전략과 전술이 모자랐나? 놈들이 가져온 신무기 탓인가? ...아니다. 모든 건 내가 외해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야분은 약자로서의 숙명을 감지했다.
그 숙명에 최후를 내릴 전사가 야분 앞에 나타났다.
"해적, 야분. 흑린의 왕 카일 라크 오라즌의 뜻에 따라 너를 벌하겠다."
야분은 가로저으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죽더라도 그건 심광의 뜻. 너의 별 볼 일 없는 왕 따위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심광?"
"우리 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야분이 달려들었다.
바센은 어쩌라는 것인가 싶었지만, 야분의 공격이 날카롭고 매섭다는 사실은 무시하지 않았다.
'해적단의 수괴인 것은 우연이 아니군. 무수한 싸움을 거친 전사다. 나보다 힘이 세고, 나보다 노련해. 강한 적이다.'
바센은 야분을 죽이기 위해 단독으로 달려든 이 싸움이 실수는 아니었는가 자문했다.
'...아니다. 지금 기회가 아니면 이 해적단의 수괴를 공격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럼 놈은 저 멀리 있는 남쪽 대륙까지 도망칠지도 모르고, 몇 번이고 남방 제도를 공격할 기회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위험하더라도 뛰어들었어야 했다.'
이 문답으로부터 바센은 자신이 야분에게 앞서는 것도 있음을 알았다.
바센은 야분과 칼날을 부딪치며 겨루다 큰 동작을 내질렀다.
그러자 야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센의 다리를 걸어 쓰러트렸다.
바센은 날렵하게 몸을 뒤로 굴렸다.
하지만 검을 놓쳐 빈손이었다.
"큰소리치더니 겨우 이 정도였나!"
하지만 야분은 바센을 향해 곧장 달려들지 못했다.
바센의 등 뒤로 딥원을 죽이며 리자드맨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제길, 다음 한 칼이면 놈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 다른 리자드맨들도 상대해야 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불리했다. 언제까지고 발이 묶여 있다가는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 이 배에 올라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순 없지.'
당장 다른 배로 옮겨 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으로 생각되었다.
바센은 도망치는 야분의 등을 보았다.
'야분, 넌 강하지만...'
그리곤 품속에 꽂아둔 단도를 꺼냈다.
이것이 바센이 생각했던 야분보다 유리한 점이었다.
야분에겐 보조 무기가 없었다.
'겁쟁이로군.'
바센이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그대로 날아가 야분의 허벅다리를 찔렀다.
야분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너 이놈! 비겁하게...!"
"그럼 등을 보이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바센은 장검을 집어 들고 야분에게 달려들었다.
야분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바센이 야분의 머리를 창대에 꽂아 들어 올리자 해적선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흑린은 해적의 수치와 다른 배들을 호위했고, 다른 동맹 해군은 빠르게 해적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겼나?"
아직 완벽하진 않았다.
배 위에선 해적들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특히나 난간을 등지지 못한 딥원들은 등을 보였을 때 바다에 빠지기 전에 창에 꿰일 것을 걱정한 것 같았다.
물론, 바센은 리자드맨 병사들이 이 딥원 해적들을 얌전히 도망칠 수 있게 놔두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았다.
"...마법은 어떻게 되었지?"
바센은 야분의 머리가 꽂힌 창대를 다른 병사에게 맡기고 딥원 해적을 베면서 다시 뱃머리로 돌아갔다.
뱃머리에는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이제 시서펜트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었다.
단지 시서펜트 시체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육체적 기관들이 배 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이 손들도 지능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의 야만적인 힘으로 시서펜트를 찢어발긴다고 생각했지만, 이 손들은 시서펜트를 이루는 여러 가죽 부위와 내장, 신체 기관들을 겹치지 않게 자신만의 규칙으로 나열한 것 같았다.
그 이상한 정렬로부터 광기가 느껴졌다.
"...가루다?"
바센은 조심스럽게 마즈다리를 불렀다.
하지만 마즈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손들의 작업은 끝나지 않은 듯, 각자의 자리에서 손을 구부려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지능을 가진 것이... 끄적인다?'
바센은 병사들과 해적들 사이를 해치며 뱃머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마즈다리 어딨나?"
하지만 바센은 우선 마즈다리를 찾기보다 탈라진의 손들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
시서펜트의 피와 체액으로 젖은 손들은 뱃머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원형이었고,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도 은근한 빛을 품고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탈라진의 손 하나가 검지를 치켜들더니, 마법진의 가운데를 찍어 눌렀다.
'...늦었나!'
바센이 그 손가락을 끊어 버릴 작정으로 달려든 순간, 누군가 바센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휘 라비나 무엘이었다.
"제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마법을..."
"괜찮습니다. 보세요."
바센은 라비나의 말대로 마법진을 다시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우우...
탈라진들은 실망스러운 울음을 냈다.
그리곤 다시 화가 난 듯 마법진을 후려쳤다.
뱃머리가 마법진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
바센이 질문했다.
"실패한 건가?"
"네."
라비나가 답했다.
"마법은 규칙을 만들지요. 그리고 그 규칙이라는 건 아주 섬세합니다. 저 해적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주 정교하고 세밀한 기술이 필요하죠. 미세한 실수만 있어도 마법은 시작되지 않고 무너져 내립니다."
라비나는 자신의 뿔을 톡톡 쳤다.
"그리고 저는 그런 미세한 실수를 유발할 수 있지요."
107화
바센 라크 오라즌은 휘 라비나 무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바센이 이해한 것은 '탈라진의 손이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고, 라비나가 그것을 막을 힘이 있었다' 정도였다.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한 문제였다.
-마법을 실패시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지.
마법진을 꼼꼼히 따져 보면 불필요한 정보는 없다.
마법진에 그려진 모두는 마법사가 목표로 하는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때문에 마법진을 이루는 각 요소마다 실패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마법은 부분적으로나마 발동될 수 있었다.
-그 경우에는 마법사는 물론 마법 방해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뿔의 중얼거림에 라비나가 대꾸했다.
'어차피 바센 왕자님이 알 필요는 없는 정보지. 자세히 이야기해 봤자 금세 지루해할걸.'
탈라진의 손들이 마법을 실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라비나 또한 마법에 대해 정교한 시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저주받은 자, 즉 마성의 정령과 함께 하는 이라서 마법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에 가장 가까운 이였기 때문에 마법을 막을 수 있었다.
라비나는 지식의 미비함 때문에 마법을 이루기 위한 의식 전체를 깨닫지 못했기에 견습 마법사조차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은 규칙과 절차를 따른다.
고대 문자는 특정한 값이나 개체를 설정하는 요소로 쓰였고, 라비나는 마법진을 이루는 각 구성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확률을 조정하는 마성의 정령은 라비나의 의도에 따라 탈라진의 손 근육에, 바다의 바람, 부러지는 돛대 파편에,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넘실거림에, 마법진을 그리는데 쓰인 피와 살들에 간섭했다.
그래서 탈라진의 손이 그려 낸 마법진은 규칙보다 줄을 길게 빼거나 바르게 그어지지 못하고 실선이 튀어나가거나 글씨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개졌다.
'다만,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다행히 싸움이 잦아들고 탈라진의 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들 알아차리고 있었다.
탈라진의 손이 범위에 닿는 자리까지는 딥원 시체로 선상이 피 칠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손들이 딥원만 노리도록 했다는 마즈다리의 말도 사실이긴 한 것 같아.'
하지만 라비나가 주변을 돌아보고 왔을 때, 마즈다리는 모습을 숨긴 뒤였다.
라비나가 바센에게 말했다.
"배를 옮겨 타는 게 좋겠네요."
"왜?"
"저 마법은 저대로 두면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진 배에 사람을 남기지 않는 쪽이 안전할 겁니다."
"그래?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바센은 대단치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배 장식이 되겠군."
"저, 그게 아니라..."
라비나는 뒤늦게 리자드맨의 입가의 미소를 보고 농담이란 걸 깨달았다.
"보셨던 것처럼 저 손들은 위험합니다. 마즈다리가 규칙을 적용해 딥원만을 인식하도록 만들었지만, 저대로 놔두면 피아 구분 없이 마음대로 팔을 휘두르다 사람들이 다치겠지요."
"흠."
"게다가 저건 평범한 괴물의 손이 아닙니다. 의식도 있고 욕구도 있는 이계의 존재지요. 심지어 저것들은 저희가 모르는 비전 지식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마법을 쓰는 걸 보셨잖습니까?"
무슨 마법인지는 라비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즈다리의 말대로라면 저 손은 분노하고 있었고, 실제로 분노로 가득 찬 행위를 보여 주었다.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극도로 위험한 존재라는 건 이미 바센도 알고 있었다.
바센이 말했다.
"그럼 더 옮겨 타기 곤란하겠는걸. 저대로 놔둔다면 저건 야분 해적단보다도 위험하다."
"제가 남아 감시할 겁니다."
"혼자서?"
"네."
바센은 두리번거렸다.
"마즈다리는?"
"마즈다리는... 없습니다."
"전투 중엔 원래 사람을 찾기 힘든 법이야."
라비나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게 아닙니다. 마즈다리는 오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그냥 마법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라비나가 설명했다.
"석면의 기사들이 연금술사의 탑을 공격했을 때, 연금술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많은 연금술사가 죽기도 했죠. 저는 운 좋게 흑린까지 도망치는 걸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연금술사는 석면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마즈다리도 마찬가지였겠죠."
바센은 탈라진의 손들이 손가락만으로 걸어 다니듯 갑판 위를 두드리며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저 손장난을 치는 것 같지만 손의 주인이 가졌을 초조함과 짜증이 느껴졌다.
"마즈다리도 결국 석면의 마법사란 말이군."
"네. 무엇보다 그만이 마법사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 주의를 해야겠지요. 그는 다른 연금술사들을 팔아넘기고 마법사가 되었을 겁니다."
바센은 이해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의도로 고개를 저었다.
라비나가 계속 말했다.
"폐하는 저를 남방 제도로 내려올 다른 나라의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렀지요. 제 지식과 능력이 마법에 대항할 많지 않은 수단이기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저 탈라진의 손은 막을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왜?"
"마법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마즈다리가 설명한 대로 그려졌단 걸 알았거든요. 하지만 거기엔 함정이 있었습니다."
라비나는 탈라진의 손이 직접 그리려고 했던 마법진을 가리켰다.
이제는 탈라진의 손이 일으킨 파괴로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는 자리였다.
"바로 탈라진의 손 자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죠. 무엇인지는 몰라도 흑린을 위험하게 만들 마법이었을 테고, 마즈다리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마즈다리는 지금쯤 안전하게 배로 돌아가서 저희 배에서 소란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라비나는 바센이 서둘러 동맹 해군과 대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길 바랐다.
해적들이 돌탄 섬을 지나 도망가 버렸으니 이제 사실상 대치하게 되는 것은 흑린과 동맹 해군이었다.
다음 싸움에선 대포 사격에 유리한 진영을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할 터였다.
하지만 바센은 라비나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말을 내뱉었다.
"그럴 필요는 없겠어."
"...네?"
바센은 라비나의 등 뒤를 보고 턱짓했다.
라비나가 돌아보았다.
"무례하군, 라비나."
가루다 마즈다리가 절뚝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
"난 우리 우정이 그렇게 시시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마즈다리의 말에 라비나가 황당해했다.
라비나는 자신의 뿔과 마즈다리의 머리를 순서대로 가리켰다.
"우리는 그야말로 '소, 닭 보듯'하던 사이 아니었나?"
"아니, 이렇게 신통한 비유를... 수석은 다른 건가? 진심이었던 건 나뿐이었나?"
"무슨 진심을 말하는 거야?"
바센이 끼어들었다.
"감탄도 좋지만, 이야기를 들었다면 설명해 보지 않겠나, 마즈다리?"
"흠."
"라비나의 말을 거의 믿었어. 자네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마즈다리는 머리를 살짝 짚었다.
실제로 실 피가 흐르는 상처가 있었는데, 얼핏 봐서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센 왕자. 나는 마법을 부릴 줄 아니 마법사라고 할 만하지만, 아직 내가 사용하는 모든 마법에 통달할 정도는 아니야."
"그런가? 하긴 마법으로 소환해 낸 것들이 또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겠군."
"그 부분 빼고."
"...음?"
"내 스승에게 직접 받은 책이라 라비나나 다른 마법사들이 읽어 보진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고대 문헌엔 탈라진의 손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많아. 특히나 저 손을 결코 오래 두지 말라고도 경고하지. 저들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수위에 오른 마법사들이라서, 팔 하나만 소환해도 주변에 재료만 풍족하다면 마법진의 크기를 넓혀서 이 땅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더군."
라비나가 경계했다.
"그럼 마즈다리 당신은 역시..."
"아니, 아냐."
마즈다리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라비나 네가 탈라진의 손이 사용할 마법을 막을 거란 걸 알았다."
"실패할 수도 있었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 정도의 도박은 해 볼 필요가 있었지."
바센이 되물었다.
"도박?"
"그래, 도박."
"자세히 설명해 봐라."
마즈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센 왕자, 흑린의 배에 다른 나라와 내통하는 간자가 몇 명이나 타고 있을 것 같나?"
라비나는 황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센이 한 명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신원을 확신할 수 없는 이가 다수 있다. 그럼 열 명 정도 되겠군."
"그럼 충각 전술을 해서 바다 괴물을 들이박고, 내가 마법을 사용해서 바다 괴물을 물리치고, 하지만 내 마법이 폭주해서 탈라진의 손이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까지 본 사람은 몇 명 정도일까?"
"한 명에서 두 명."
"다행이군."
라비나가 질문했다.
"간자가 있는데 왜 다행이라는 거야?"
"그 간자는 분명 내가 석면의 마법사로서 흑린을 속이고 흑린의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주려고 했다는 걸 보고 그 사실을 증명해 줄 테니까."
"뭐?"
바센은 이미 이해가 끝난 것 같았다.
"라비나, 마즈다리가 말한 간자는 우리 병사를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즈다리를 감시하기 위해서 존재했다는 말이다. 라비나 너의 말대로 마즈다리는 '흑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배에 탔던 거지."
"...아."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는지,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라비나 너에게 탈라진의 손이 사용하는 마법을 해제할 기회를 주었지. 덕분에 마즈다리는 성공적으로 간자를 속이면서, 동시에 흑린의 병사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내 말이 맞나, 마즈다리?"
마즈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센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럼 우리 둘은 싸워야겠군."
"그래."
마즈다리가 마찬가지로 칼을 뽑자 라비나가 당황했다.
"자, 잠깐만요?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마즈다리는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냥 석면에게 우리를 공격하려는 흉내만 낼 생각이었다고 방금 말했잖아요?"
마즈다리가 검을 치켜들고 말했다.
가루다의 몸길이에 맞는 거검이다.
일반적인 체구의 병사들이라면 양손으로 들어야겠지만 마즈다리는 한 손으로 충분하다.
"적군 사이로 숨어든 마법사가 적들을 해치울 마법을 부렸다. 하지만 그 마법은 적의 방해로 실패해 버렸고, 그것마저도 들켜 버렸지. 그래서 그 마법사는 최후의 저항을 한다는 거다."
바센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 연극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지."
라비나는 두 사람을 말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논리로도 물리적인 힘으로도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연극이긴 하지만, 내가 널 제압하는 이야기로 가도 상관없다는 거 알고 있겠지? 살살 해 줄 테니 걱정은 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마법사?"
바센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봐주는 건 나다. 한 수 양보해 주지."
마즈다리는 양보를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가루다의 거구가 리자드맨에게 달려들었다.
─┼
돌탄 섬, 모래사장.
근해에 흑린과 동맹 해군의 배들이 서로에게 대치해 있었고, 해안가에 두 무리로 나뉜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각 무리의 수장은 흑린의 바센 단장, 그리고 석면의 올도르 장군이었다.
바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법사 포로에 몸값으론 싸지 않나?"
"동맹 해군이 흑린보다 두 배는 더 크다는 걸 명심하시지요. 화포 기술도 비등하단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받은 목숨의 위협은?"
"...넘겨받는 게 결코 작다고 하실 수는 없을 텐데요."
바센은 콧김을 내뿜고 밧줄로 꽁꽁 묶인 마즈다리를 석면의 장군 올도르에게 보냈다.
마즈다리와 바센의 싸움에서 바센이 승리했고, 석면은 마법사를 다시 넘겨받기 위해 포로의 가격을 불렀다.
마법사에 해당하는 몸값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의는 질질 끌렸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래할 물건은 바로 앞에 있었다.
"바로 갈 건가? 돌탄 섬이 이제 우리 땅이라고 해도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는 않을 텐데."
"...흠, 다음을 기약하지요. 이제 저희는 우군이 아닌데 자꾸 기꺼워해서 되겠습니까?"
흑린은 마즈다리를 넘기는 대신 몇십 일 간의 휴전, 그리고 돌탄 섬을 받았다.
돌탄 섬은 남쪽 대륙으로 가는 통로이므로 함께 노력해서 해적을 무찌른 동맹 해군 입장에선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마법사는 그저 석면의 것이니, 석면은 다른 나라의 보상을 또 되갚아야 한다.
물론 올도르를 비롯한 동맹 해군은 휴전 기간만 지난다면 다시 돌탄 섬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손해만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번 야분 해적단과의 싸움은 마법사의 힘을 보여 주는 무대였다.
올도르는 마법사라는 가치가 제대로 정립되기 전에 값싸게 구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걸로 되었다. 이 마법사만 있다면 싸움은 언제라도 이길 수 있어.'
며칠 뒤, 동맹 해군은 정비를 위해 바브린으로 이동했다.
휴전 기간 잠깐의 휴식이 지나면, 더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었다.
'곧장일까? 그건 모르겠군. 하지만 흑린은 이번 마법사의 공격을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
올도르는 혹시나 흑린이 휴전을 어기고 군선을 끌고 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주의를 주기 위해 마즈다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며칠 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마즈다리의 방에는 기괴한 마법진들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뭡니까, 이 마법진은?"
"어? 아, 올도르였군."
뭔가 작은 마법진을 그리는데 열중하던 마즈다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올도르가 마법진을 경계하며 말했다.
"뭘 놀라는 겁니까?"
"아니, 혹시 속선의 사제가 들어온 건가 싶어서."
"사제, 말입니까?"
올도르는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질문을 이어 갔다.
마즈다리는 의자에 앉고는 나른한 태도로 답했다.
"몇 가지 마법진을 시험하고 있었거든."
"배에서 위험하게 무슨 짓입니까?'
"아니, 꼭 필요한 거라서."
꼭 필요하다는 말에 올도르가 흥미를 보였다.
"어떤 마법이기에 그런 겁니까?"
마즈다리가 말했다.
"신의 눈을 속이는 마법이지. 그저 '눈속임'이라고 불리여. 속인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건 아냐. 잠깐 동안만 신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정도인데,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제대로 작동은 한다는 거겠지. 이게 아니었다면 바센과 연극을 했을 때 속선이 개입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거든. 야천이 도와줬을지도 몰라서.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멀쩡한 거 보면 이 마법진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고대의 마법사들이 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았다는데, 확실히 이유가 있군."
"그게, 무슨...?"
"아."
"...?"
마즈다리가 올도르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건 '자연 발화'의 마법이야."
올도르의 전신, 피부 아래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108화
올도르는 환한 불길에 타오르며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
하지만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불길은 올도르의 폐 안에서도 타올랐고 팽창한 공기는 성대를 울릴 만큼 힘을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올도르는 손을 뻗어 어떻게든 마즈다리를 공격하려 했다.
마즈다리는 그저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올도르의 공격을 피했다.
올도르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걱정 마라, 올도르. 그 불은 마법으로 만들어져서 배에 옮겨 붙지 않으니까."
마즈다리의 썩은 손이 말했다.
-조금 이르지만, 시작해야겠군.
'어차피 이것만 그리면 끝이었어.'
올도르가 밟은 마법진은 속선의 사제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것이었다.
현재 마즈다리가 그려 놓은 '눈속임' 마법진은 신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신의 사제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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