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2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형제들을 팔아넘길 수는..."
"대답하고 말고는 너의 자유일 텐데."
고단은 생각하는 듯하더니 더듬이를 흔들었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좋다."
그것만으로도 바센은 해적들에게 신의 따위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우선 첫 번째 질문이다."
"뭐지?"
"아스타시디안들은 바닷속을 걸어 다닐 수 있는데 왜 배를 타고 다니지?"
티오네가 뭐 하냐는 듯 눈을 홉뜨고 바센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일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원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바센은 당황하며 말했다.
"궁금하지 않나? 나는 늘 궁금했는데."
"단장님이 평소에 얼마나 다른 종족에 무관심했는지는 알겠네요."
고단도 바센의 질문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그, 뭐냐. 당연하지만, 바닷속을 걷거나 수영하는 것보다 배를 타는 게 더 빠르다. 게다가 힘을 덜 들이기도 하지. 무엇보다 좋은 점은 짐을 잔뜩 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하. 방금은 개인적인 질문이었어. 다음 질문."
"...그래."
바센이 말했다.
"너희가 말한 '하얀 거미신'은 어디에서 온 종교지?"
"내가 태어난 곳에서 믿는 종교다."
"어디서 태어났는데?"
"흑린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 아스타시디안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우리는 각자 섬마다 이름이 있지만, 흑린에서는 남방 제도라고 부르더군."
"아, 거기 말인가."
흑린이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발견된 섬들로, 명목상의 도주도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얀 거미신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보지. 어떤 신이지?"
고단은 조금 고민했다.
바센이 보기에 설명하기 싫어한다기보다 이런 경험이 얼마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얀 거미신은 백 년 전에 크고 흰 거미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시 족장님을 꼬리 셋 달린 땅뱀으로부터 구해 주셨다. 그것 말고도 우리 부족이 굶주렸을 때 새우를 땅 위에서 창조해 주셨지. 하지만 이런 기적은 섬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하고, 섬마다 같은 신을 다르게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면?"
"가장 북쪽에 있는, 흑린과 가까운 섬의 경우 푸른 벌레신으로 부른다더군."
그 말에 바센이 웃었다.
티오네가 어리벙벙해서 질문했다.
"왜요?"
"푸른 벌레신은 야천 님의 옛 이름이지. 이자 또한 우리와 같은 신을 믿고 있었던 거야."
"네?"
"오라즌에서 거리가 워낙 먼 곳이다 보니 체계가 통일되지 못한 거지. 하지만..."
바센의 눈이 다소 싸늘하게 변했다.
"야천의 다른 이름을 부르면서 해적질을 하다니 더 용서할 수가 없군. 바브린 주변으로 야분 해적단이란 이름이 떨쳐지고 있다는데, 설마하니 너희 부족 전체가 모두 해적질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고단이 허둥지둥 더듬이를 흔들었다.
"아, 아니다. 다른 아스타시디안들은 남방 제도에서 잘 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해적단에 붙잡혔다가, 내가 길러진 해적단이 야분 해적단에 흡수되어 야분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럼 야분도 남방 제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 그분은 다른 대륙에서 오셨다."
그 말에 바센은 의아해졌다.
다른 대륙에서 왔다면 흑린을 기준으로는 서쪽 대륙 밖에 없다.
동쪽에선 그 어떤 배도 찾아오지도 않았으니까.
서쪽 대륙을 다녀왔다는 상선조차도 동쪽을 향해 떠났다가 돌아와 망망대해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대륙... 이라고?"
그런데 서쪽 대륙 출신이 단리와 암굴을 지나쳐서 단염과 흑린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한다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바센 생각에 다른 대륙을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 야분이라는 자는 그럼 서쪽 대륙에서 온 건가?"
고단이 말했다.
"아니, 그분은 남쪽 대륙에서 왔다."
092화
남방 제도.
흑린에서 가장 먼 남섬의 남쪽 해안 절벽.
이 해안 절벽은 수십 미터에 이를 정도로 가팔랐는데, 그 결과 밀물과 썰물의 풍화 작용으로 아주 깊은 수평 침식 동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침식 동굴은 해상뿐만 아니라 지표로도 연결되어 있어서 과거에는 아스타시디안 부족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타시디안 부족이 성장함에 따라 문명을 이루는 각종 철기와 공예품들이 바닷물에 취약했기에 모두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스타시디안들도 집을 만들어 짓기 시작했다는 점이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바닷물이 빠져나간 이 동굴 깊은 곳에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성운이었다.
성운이 가볍게 인터페이스를 조작하자 여섯 개의 화상 채팅창이 떠올랐다.
순서대로 크람푸스와 룬다, 장완과 AR1026, 위즈덤, 그리고 엘다르였다.
별 머리를 한 위즈덤이 먼저 말했다.
"네뷸라, 네가 먼저 대화를 거는 건 처음인 것 같군. 거기다 '긴급 호출'이라니."
로스트 월드에선 일반적으로 긴급 호출과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다.
게임을 진행하는데 있어 동맹이나 음모 같은 다른 플레이어와의 교류는 이미 게임에서 지원하는 시스템과 인터페이스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운은 다른 플레이어와 거의 대화하지 않으면서도 랭킹 1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와의 대화는 대체로 상대의 플레이 방식에 대해 질문하는 등의 친목, 아니면 상대의 빌드를 떠보기 위한 좀 더 복잡한 외교, 아니면 상대의 부모님 안부를 묻기 위한 용도였다.
긴급 호출이란 개념을 제안한 것은 성운이었다.
이미 몇 세기를 몇 시간의 압축된 시간으로 플레이 하는 것이 아닌, 신의 몸을 가지고 실제 시간과 동일한 흐름으로 플레이하는 것만으로 더 이상 일반적인 로스트 월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성운이 경계한 것은 바로 '악신'의 존재 때문이었다.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이 절우비로 명명한 '癤우삤瑜쇰씪'은 여러모로 꺼림칙한 존재였다.
라크락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대륙에 더 큰 피해를 입혔을 테고, 그랬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기술 지체는 많이 심각했을지도 몰랐다.
'흑린도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같은 대륙의 다른 나라에서 기술 발전이 늦으면 덩달아 피해를 보는 셈이니까.'
어찌되었든 절우비의 등장과 사망은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어느 정도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성운은 이미 제2 대륙으로 넘어간 헤게모니아에게 연락을 해서 다른 대륙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고, 그 결과 제1 대륙에서도 게임 중간에 '늑대인간'이라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종족, 그리고 이름이 깨져서 등장한 플레이어가 등장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늑대인간 종족은 뱀파이어와 비슷한 '질병'으로 존재했다.
이 질병은 뱀파이어와는 조금 다르게 인간과 유사 인간종, 즉 인간과 엘프, 드워프, 닉스 같은 종족에게만 퍼진다는 제한이 있었지만 은에 약하다는 약점을 제외하면 변신을 통해 모습을 숨기거나 햇볕 아래에서도 데미지를 입지 않는 등 뱀파이어보다 나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당시 제1 대륙에는 유사 인간종이 주류 종족이 아닌 덕분에 큰 피해가 일어나기 전에 패퇴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제1 대륙의 플레이어들 또한 소통하지 않는 '깨진 닉네임'을 가진 플레이어의 존재는 석연찮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늑대인간 또한 뱀파이어처럼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고 각 종족들이 과거부터 전승되어 온 고대의 악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제2 대륙의 플레이어들도 두 대륙에서 언급된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모든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발전 양상에 대해서는 숨기면서, 최소한의 정보 공유가 진행되었다.
각 대륙의 플레이어 숫자에 대해서였다.
'게임 시작했을 때 포기한 인원을 제외하면 총 플레이어는 분명 27명이었다.'
제1 대륙 10명.
제2 대륙 8명.
그리고 제3 대륙,
네뷸라
헤게모니아
엘다르
솔롱고스
임춘식
룬다
크람푸스
위즈덤
장완
AR1026
癤우삤瑜쇰씪
11명.
총 플레이어는 모두 합해 29명이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맞지 않는다.'
여기서 늘어난 2명은 제1 대륙의 늑대인간과 제3 대륙의 뱀파이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다고 모든 플레이어가 경쟁적인 게임을 중단하고 합동할 수는 없었다.
제2 대륙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이런 변수로 인한 피해가 없었고, 제1 대륙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피해가 적었다.
제1 대륙과 제2 대륙 플레이어 중에도 경쟁적인 게임에서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도 거절했다.
미지의 변수가 무엇이든 감당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중앙의 다섯 플레이어 또한 성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쓸 수 있는 마지막 변수 정도는 있었던 상황.
여기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게임이 요구하는 승리에서 멀어진다는 계산이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대양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를 돕기에는 아직 문명 수준이 많이 낮았다.
플레이어들 중에 극단적인 과학 기술 발전 빌드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그렇다고 밝히는 플레이어도 없었다.
결국 전체 플레이어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연대한다는 안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같은 대륙에서라면 다른 이야기지.'
성운이 보기에 제1 대륙의 늑대인간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 뱀파이어보다 더 빠르게 등장했다가 사라졌는데, 문명 발전 단계가 낮아 늑대인간 전염이 더 느렸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제3 대륙의 뱀파이어도 운이 좋았다.
'절우비가 현대 문명 수준까지 버티고 있다가 등장했다면?'
현대 문명은 그 어떤 위협도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인구 밀집과 수많은 운송 수단 같은 문제로 질병에도 취약한 구석이 있었다.
뱀파이어 같은 전염 방식이라면 현대 문명에선 제3 대륙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로 퍼질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성운이 경계한 것은 적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다음 적도 늑대인간과 뱀파이어 같은 수준일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아무 이유 없이 더 강한 적이 나오게 된다면?'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은 성운의 생각에 대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틀린 말이 아니라는데 동의했다.
성운이 제안한 긴급 호출은, 제3 대륙의 모든 플레이어가 채팅을 열어 두고 '악신'과 관련되어 보이는 정보가 발견되면 그에 대한 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긴급 호출은 룬다의 실수를 제외하면 사용된 일이 없었다.
성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헤게모니아까지 오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말에 사자탈의 장완이 말했다.
"헤게모니아는 늦거나 오지 않을걸. 지금 제2 대륙의 다른 플레이어와 전투 중인 것 같더라고."
"제2 대륙에 화약 나왔던가?"
"아닐걸?"
"근데 또 싸우나? 조금만 기다리면 화약 나올 텐데."
"걔가 그런 걸 따지겠어?"
성운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헤게모니아는 전투에 자신이 있으므로 어차피 이기면 이득이라는 생각으로 전투를 걸 때도 있었다.
양면 전투가 될까 봐 제3 대륙에서 국경을 맞댄 장완과 싸우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성운은 간결하게 사실을 전달했다.
"제4 대륙이 발견되었다."
그 말에 반응이 각각 달랐다.
룬다는 "우왁" 하며 소리를 냈고 위즈덤은 앉아 있던 의자에 등을 붙였다. 에이알은 면사포 앞으로 부채를 펼쳤고 장완은 사자탈의 눈을 끔뻑끔뻑 떴다 감았다.
크람푸스만이 놀라지 않고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넌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겠지, 크람푸스."
"그래. 요즘 남쪽에서 야분 해적단이라고 올라오잖아. 그중에 야분이라는 해적단 두목이 동쪽도 아닌 남쪽 대륙 출신이라고 하더군."
성운 또한 야분이 동쪽에서 왔다고 한다면 제1 대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시디안 고단은 야분 해적단이 남쪽에서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륙이라고 확신하고 있진 않았어. 근거가 있나?"
"나도 확신하는 건 아냐."
성운이 이어 말했다.
"나도 첫 번째 정보를 듣고 남방 제도로 내려왔어. 가재들이 사는 지역인데 그다지 신경을 써 주지 않았더니 최근에 해적단에 점령을 당했더라고."
"피해는?"
"피해 자체는 크지 않아. 가재들이 거의 안 싸웠거든. 해적단 숫자가 많아서 지레 겁먹은 거 같은데. 해적들도 정기적으로 공물을 헌납하면 봐준다는 식이라."
그 말에 위즈덤이 말했다.
"네뷸라, 아스타시디안들은 말을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알기론 게임 플레이에서 주요 거점이 아니라서 그렇지 남반구에도 큰 섬이 몇 개 있어. 녀석들이 그걸 대륙이라고 착각한 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성운은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일단 남방 제도의 섬들도 작은 수준이라고 하긴 힘들어. 내가 여길 방치하다시피 한 이유는 아직은 개발 여건이 안 되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딱히 눈독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었어. 가재 종족이 날 믿고 있어서 흑린 체제에 무리해서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그런데 이 남방 제도 전체를 제압할 정도의 선단을 꾸리려면 꽤 큰 규모여야 해."
"아, 그렇군."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섬 단위에서 자연 발생한 종족은 인구수는 물론이고 기술 발전에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엄청나게 낮은 확률로 뛰어난 개체들이 태어나 발전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나는 낮다고 봐."
에이알이 질문했다.
"그럼 네뷸라 님은 다른 플레이어가 등장한 것처럼 그 야분 해적단의 우두머리도 다른 플레이어라고 생각하시나요?"
"맞아."
"하지만 크람푸스 님은 지금까지 야분 해적단을 많이 만나 보신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왜 지금까지 이야기를..."
"아, 그건..."
크람푸스가 말했다.
"내 이야기니 내가 설명하지. 야분 해적단을 만나긴 했지만 그건 전부 야분 해적단의 산하 해적단이었습니다. 우두머리가 대부분 아스타시디안인 걸 보면 남방 제도 출신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야분 해적단이 정말로 악신과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해적 습격 이벤트는 원래 간간이 뜨기도 하고요."
"아, 그래서 긴급 호출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주억이던 에이알이 부채를 탁 접으며 말했다.
"그럼 아마 네뷸라 님은 다른 증거가 더 있나 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야분 해적단은 악신이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남방 제도를 손에 넣었는데, 그럼에도 남방 제도엔 아스타시디안들이 살고 있으니 네뷸라 님의 영역이기도 하니까요."
"맞아."
"게다가 제 생각에 네뷸라 님은 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봐 준다니 고맙군."
크람푸스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했다.
"증거가 있나?"
"그래."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종족을 만났어. 그래서 문명 충돌 메시지가 떴지. 로컬 플레이어로 이미 다른 플레이어가 나왔어."
"뭐지?"
성운이 인상을 쓰곤 말했다.
"이번 플레이어의 이름은... 뭐라고 읽는 거야? 그냥 정보 공유해 주지."
여섯 플레이어에게 다음의 이름이 공유되었다.
「?щ챸?멸컙」
위즈덤이 말했다.
"물음표 다음에 오는 글자는 키릴 문자인 거 같군. 기억이 맞다면 샤 정도로 발음한다."
"그럼 '샤차' 정도로 부르지."
다들 이견이 없어 보였다.
장완이 말했다.
"샤차, 틀림없이 악신의 이름처럼 보이는데. 이 녀석은 무슨 종족을 데려왔지?"
"지금 보여 주지."
성운은 고개를 살짝 돌려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룬다가 검지로 성운을 가리켰다.
"앗, 네뷸라! 뒤, 뒤에! 빨리 뒤 좀 봐!"
"룬다, 혹시 내 뒤에 보이는 게 거대한 흰 거미면 그만 놀라도 된다."
"...아, 네 꺼야?"
성운은 한심하게 룬다를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흰 거미가 옅은 빛을 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흰 거미는 성운의 창조물이었다.
남방 대륙을 지키기 위한 창조물이었는데, 정작 아스타시디안들이 아무런 항거를 하지 않아서 쓸 타이밍을 놓친 상태였다.
거미의 입에는 무언가의 사체가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다.
"수고했다, 힐로브"
-아닙니다. 그저 네뷸라 님을 도울 수 있어 영광일 뿐입니다.
성운은 시체를 향해 몸을 숙였다.
다른 화상 채팅창의 플레이어들 또한 시체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체의 머리는 아무리 봐도 물고기였다.
"인어가 아니라 어인...?"
로스트 월드에는 물속과 지상을 오가는 프로그맨이나 아스타시디안 말고도 물속에서만 사는 종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표적인 종족은 사이렌.
사이렌은 흔히 인어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로 상체는 인간, 하체는 물고기인 종족으로 플레이어들은 보통 인어라고 불렀다.
하지만 눈앞의 종족은 분명 인어와는 다른 개체였다.
몸은 전체적으로 인간처럼 팔과 다리가 달려 있는데, 정작 머리는 물고기인 데다 정수리에는 촉수 같은 게 매달려 있다.
룬다가 질문했다.
"그래서, 종족명이 뭐야?"
성운이 답했다.
"'딥원'으로 나오는군."
093화
엘다르가 말했다.
"그럼 저희 다음 상대가 데이곤이나 크툴루라는 겁니까?"
그 말에 룬다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데이곤? 크툴루? 그게 뭐죠?"
"아, 러브크래프트 모르시는구나. 제가 설명하자면..."
성운이 말을 끊었다.
"내 생각에 러브크래프트니 뭐니 하는 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어차피 대륙의 지성체들이 사용하는 '공용어'는 우리가 쓰는 말이 아니야. 우리 시스템 창으로는 적당히 번역돼서 등장할 뿐이니까."
신나서 설명하려던 엘다르는 입술을 살짝 내밀긴 했지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뱀파이어가 나왔다고 이 땅에 브램 스토커가 관계된 유물이 나온 것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진 않사옵니다."
"어째서?"
"여러분이 상대했던 뱀파이어는 구체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뱀파이어의 특징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제1 대륙에서 정확히 알려 주진 않았지만 늑대인간도 그랬을 것 같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성운도 동의할 수 있었다.
"이름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다는 건 아니란 이야기지?"
"네."
"그럼 이름 자체가 힌트가 되어서 놈들의 특징을 유추할 수도 있고?"
엘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이 말했다.
"타당한 이야기긴 한데, 이 세계, 즉 로스트 월드가 게임이듯 이것도 결국엔 지구의 영향을 받는 게임이라는 건가?"
그 말에 위즈덤이 말했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네뷸라."
"반대로라니?"
"지구가 이 게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성운이 답했다.
"흥미로운 가설이군."
"로스트 월드를 하면서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 지구의 고대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었지만, 인간을 주종족으로 한 플레이어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거지. 그리고 '최고 효율'을 위해서 인간 외 종족을 모두 멸종시킨 거야."
최고 효율은 로스트 월드에서 종종 나오는 플레이 방식이었다.
종족 다양성은 그 자체로 가치 있지만, 끊임없이 갈등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자원이 계속 소모된다.
그래서 게임의 후반부에 다다르기 전에 종족주의와 우생학을 내세워 다른 종족을 모두 멸종시켜 버리면 갈등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후반부 게임 전개를 적은 갈등으로 쾌적하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물론 성운이 보기에 멀쩡한 플레이는 아니었다. 갈등을 무마시키는 데 비용이 꾸준히 들어도 최고 효율 달성을 위한 멸종에 드는 비용보다는 적다. 최고 효율은 재미로 하는 컨셉 플레이일 뿐이었다.
성운이 말했다.
"지구의 역사가와 지질학자, 고인류학자를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구에서도 로스트 월드와 같은 게임이 벌어졌다면 틀림없이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겠지."
"...최고 효율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 행성도 지구나 다름없이 실재하는 세계라는 건 인정해야겠지. 그런 면에서 이곳은 지구와 동등하다."
성운은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엘다르, 보아하니 여기서 딥원이란 단어를 제일 잘 아는 것 같은데 설명해 볼 수 있나?"
"물론이지요!"
엘다르는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엘다르가 설명했다.
"딥원이 최초로 등장한 건 P. H.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소설 '데이곤'에서였지만, 본격적으로 그 특징이 나온 건 같은 작가의 '인스머스의 그림자'로..."
"말 끊어서 미안한데, 본론부터 말해 줄래?"
엘다르가 다소 시무룩해져 말했다.
"물속에서 살아요."
"특징이 그것만은 아니겠지."
"딥원에 영향받은 다른 콘텐츠에서는 잘 나와 있지 않은 설정인데, 이 종족과 교류하거나 저주를 받으면 딥원으로 변하기도 해요."
"교류? 단순히 교역만 해도 그렇게 된다는 거야?"
"...어, 아뇨. 그러니까, 피가 섞이면요?"
크람푸스가 끼어들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처럼 질병의 특성을 가진 건 똑같은 건가?"
"그건 확신하기 어렵긴 하네. 엘다르 또?"
"어, 광신도일까요? 데이곤이나 크툴루 같은 고대 신을 섬겨요."
"그건 쓸모 있는 정보라고 하긴 어렵군. 별로 그런 속성이 없었던 뱀파이어들도 그랬으니까. 또 없어?"
엘다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떠올렸다.
"아, 작품 속에선 들키지 않게 숨어 살아요."
"어떤 방식으로?"
"주인공이 평범한 마을인 줄 알고 방문하지만 알고 보니 딥원에게 점령당하고 딥원과 협력하는 마을이었던 거죠."
성운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돌아보았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저건 중요한 문제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침입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니까."
"플레이어가 인식하지 못했다면 문명 충돌 이벤트도 없었을 거야."
"해안가 전체를 전수 조사하는 식으로 해야겠군. 사제들에게 어떤 계시를 줘야 하지?"
"'바다 속에서 새로운 마왕의 간자들이 나타났다'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장완이 말했다.
"우리 암굴 쪽까지 영향이 왔을까?"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건 나쁠 것 같지 않은데."
잠깐 동안 남쪽 해안을 끼고 있는 플레이어들 사이에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위즈덤이 말했다.
"괜찮다면 제4 대륙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겠나?"
"아직은 밝혀진 게 없잖아. 더 이야기할 게 있을까?"
성운이 답하며 등 뒤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흰 거미 힐로브가 딥원의 사체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를테면 네 번째 대륙은 심해에 있을지도."
"그건 확신하긴 어렵겠는데. 일단 대륙이라는 말을 쓴 거 보면 수면 위에 있다는 거 아냐? 난 오히려 다른 부분을 지적하고 싶은데."
"다른 부분?"
성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건 가정일 뿐인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게임의 제한 인원은 32명이었지. 그중 27명이 지구에서 온 플레이어고. 그런데 이미 새로운 두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탈락했고 세 번째가 등장했지."
"...그 말은 샤차 말고도 새로운 플레이어, 즉 악신이 두 명은 더 등장할 거라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 새로운 대륙에 말이야. ...그게 정말 대륙이라면 땅이 많이 남잖아?"
그 말에 플레이어 모두가 침음을 내거나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나쁜 가정이었다.
샤차는 어떨지 모르지만 절우비만 하더라도 독특한 종족을 가져오고 플레이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NPC라고 무시할 만한 요소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 내지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대륙을 안정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게다가 플레이어가 셋이라도 사실상의 동맹일 가능성이 높으니 대륙 전체의 자원을 별다른 갈등 없이 얻어갈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에이알이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모든 플레이어가 단합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성운이 말했다.
"일단, 난 반대야."
"왜죠?"
"남쪽 대륙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진 몰라도 일단 우리와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 현재 문명 발전 단계에선 다른 대륙의 도움을 받기가 힘들어. 생색내기 수준으로 도와주고 우리에게 더 큰 걸 요구할지도 몰라. 정작 피해는 우리가 볼 테고."
에이알은 주저하다 또 말했다.
"저희라도 동맹을 하면요?"
"미안한데, 그것도 반대야."
"왜요?"
"당장은 내가 제일 가깝잖아? 생색내기 식으로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
그 말에 크람푸스가 웃었다.
"그게 아닐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니?"
"제4 대륙과 제일 가까운 위치잖아. 나는 방금 샤차와 딥원에게 승리하고 다음 대륙으로 넘어가겠다는 야망을 엿본 것 같은데."
성운이 답했다.
"완전 아니라고 답하긴 어렵군."
제4 대륙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제일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성운이었지만, 달리 말해 제일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것도 성운이었다.
느슨한 동맹을 한다고 치더라도 그 경우엔 피해를 나누듯 이득도 나눠야 한다.
크람푸스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장완이 말했다.
"고집을 부릴 거라면 그러라고 해. 나서서 파도를 막아 주겠다면 나는 사양하지 않겠어."
에이알이 말했다.
"저도 장완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위급해진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위즈덤이 말했다.
"그래. 네뷸라, 너라면 혼자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룬다가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엘다르가 말했다.
"저, 저요? 저도 네뷸라 님을 안 돕겠단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사옵니까?"
"아니."
"...그럴 줄 알았습니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나도 딱히 반대하진 않아. 하지만 놈들과 다음으로 가까운 건 나고, 당장은 해적단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도 보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조금 받고 싶은데, 네뷸라 넌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 해."
성운의 대답 후에 잠깐 침묵이 있었다.
성운은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돌아본 다음 말했다.
"당장은 할 이야기가 없어 보이는군. 헤게모니아한테는 장완이 바로 옆이니 말해 주면 될 것 같은데."
"알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위즈덤은 곧장 대화를 껐고, 에이알과 장완은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크람푸스도 수고하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룬다와 엘다르였다.
룬다가 말했다.
"그럼 나도 간다. 안녕."
"무슨 소리야? 넌 남아야지."
엘다르가 말했다.
"전 가도 되겠사옵니까?"
"너도 남아."
"...끙."
룬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왜? 이야기 끝난 거 아냐?"
"이제부터 시작이지."
"내가 끼고 있는 해안은 북쪽 해안인데?"
성운이 한숨을 쉬었다.
"에이알이 아까 힘줘서 한 말 못 들었어?"
"뭐 중요한 말 했었어? 나 안 졸았는데? 엘다르 너는 뭐 기억나?"
"글쎄요. 잘 모르겠사옵니다."
성운이 말했다.
"에이알은 '언제라도' 돕겠다고 말했어."
"아, 그 사람 착해 보이긴 하더라."
"그게 아니라, 언제라도 돕겠다는 말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나와 샤차의 싸움 사이에 끼어들겠다는 말이잖아. 결정적으로 나 말고 크람푸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겠다고 말했고."
"어?"
성운은 충분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랍거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모두 계획 안쪽에 있었다.
"이번에는 절우비 때랑 사건 경향이 많이 달라. 일단 등장과 함께 플레이어 모두가 긴장하고 있으니 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테고 놈들의 무력 수준도 당장은 해적단 수준으로 보여."
"감당할 수 있는 적이라는 거지?"
"그래. 물론 미지수가 많이 남아 있지만 우리 모두가 100년 넘게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도 플레이어가 이 시점부터 다룰 수 있는 최고의 무기 두 개가 등장할 거야."
성운이 말한 것은 마법사와 화약이었다.
룬다와 엘다르 또한 그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을 정도의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그러니 드러난 정보가 적은 적이라도 상대해 볼 만하다고 판단할 수 있어. 아니, 솔직히 상대가 화약이 없다면 딥원이거나 말거나 박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나도 나 혼자 상대하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은 왜 주의해야 한다는 거야?"
성운이 설명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샤차를 앞두고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진 않겠지만, 샤차와 야분 해적단, 남방 제도를 비롯한 남쪽의 섬들은 제4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가 되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내가 독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올 거야."
룬다가 말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널 공격한다고?"
"그래. 예를 들어서, 지금 야분 해적단에게 점령당한 남방 제도를 되찾아 주겠다는 빌미로 공격해 올지도 모르지. 그럼 이곳의 아스타시디안들은 점령한 플레이어의 종교 영향을 받겠지. 그리고 그 플레이어는 어찌되었든 샤차에겐 땅을 넘겨준 게 아니지 않냐고 할 수 있고."
엘다르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동맹을 한다고 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겠군요."
"맞아. 그러니까 나보고 동맹을 강요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거지. 그게 서로에게 더 속 편하기도 하고."
동맹을 하겠다고 했다면 좀 더 음습한 싸움이 되었을 터였다.
'어차피 샤차가 아니었더라도 화약이 발명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싸움은 일어났을 테지. 육지에서 해상으로 장소가 바뀌고 샤차라는 변수가 추가되었을 뿐.'
성운이 말했다.
"결국 이번 악신 공략은 우리, 그리고 크람푸스와 다른 플레이어, 그리고 샤차. 이렇게 세 개의 세력에 의한 삼파전이 될 거야."
094화
오라즌의 야천교 신전.
야천교의 최고 사제는 흑린의 왕이지만, 몇 세대에 걸쳐 왕이 선택받은 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목뿐이라고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럼에도 야천교는 흑린의 왕정과 선명한 구분을 지을 수 없는 지점이 있었고, 둘 사이엔 뚜렷한 갈등도 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 선택받은 자 때문이겠지.'
슌 라크 오라즌은 신전의 회랑을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선택받은 자.
야천이 자신을 믿는 이들 중 특별히 믿음이 크고 그 힘을 부여받아 마땅한 자는 야천의 힘을 내려 받았다.
바로 벼락의 힘.
연중 봄이 되면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라즌 주변 농토에 그 힘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흑린의 시골의 신실한 백성들은 물론이고 야천을 믿지 않는 외국의 사신이나 여행자들까지 찾아와 그 모습을 보기도 했다.
사제들은 그것이 단순한 야천교의 힘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행사로 알고 있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오라즌의 백성들이 원리를 알지 못할 뿐, 실제로 번개를 맞은 땅은 질소가 환원되어 지력이 오르기 때문에 농사가 더 잘되었다.
물론 이 행사가 매년 반복된 끝에 이제는 봄 축제 기간이 다가오면 오라즌에선 축제를 준비하는 사제들이나 일을 시작하는 농사꾼들보다 장사꾼들이 더 바쁘다는 농담이 있었다.
아무튼 이런 강력한 힘을 받는 선택받은 자들이지만 그들 중 힘을 허투루 쓰거나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겁박하는 일은 야천교 백여 년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야천 님께서 직접 선택한 사람들이니까.'
출신 성분은 물론 리자드맨이라는 종족에도 한정되지 않고 나타나는 선택받은 자들은 발견되는 흑린 각지에서, 가끔은 해외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극진히 모셔져 사실상의 야천교의 성인 대우를 받았다.
물론 하나같이 자신들이 대우받는 만큼 그 힘을 이타적으로 쓰고자 했다는 사실은, 야천에 대한 믿음을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사제가 되면 선택받은 자만큼은 아니라도 힘을 쓸 수 있지만...'
로스트 월드에는 특정 소영역이 11레벨 이상이면, 해당 소영역의 힘을 사제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제사장 또는 사제가 그저 신이 주목하는 대상에 가까웠다면 플레이어의 소영역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신의 힘을 대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제들은 신의 힘을 빌리기에 신앙이 소모되지만, 일반적으로 기적이 백성들에게 보여지면 더 믿음이 강화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들도 사제들이 이런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의 힘에 비하면 미미한 편이지.'
현재 흑린의 사제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은 겨우 몇 가지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전기를 이용한 기적은 가벼운 스파크로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거나, 벌레 무리를 물리거나 다가오게 하는 기적, 새와 가축 무리를 진정시키게 하는 정도였다.
물론 이런 힘마저도 범인의 눈으로 보자면 놀라운 것이긴 했다.
'그렇긴 해도 그 힘들은 중요한 힘은 아니야. 이런, 불손한 생각인가? 야천 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속으로 생각을 거듭하던 슌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신전 가장 깊은 자리에 있는 계시전(啓示殿)이었다.
'야천교의 최고 권력, 계시 사제.'
야천교의 사제들은 저마다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역할을 정하지 못한 수행자 신분인 수행 사제나 역법에 밝아 천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역법 사제,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거나 백성들에게 야천의 말을 전하는 설법 사제 등이 그런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중 큰 권력을 가졌다고 보는 건 역시 계시 사제였다.
계시 사제는 야천이 남기는 기적을 남기고 그것을 해석하고 해석한 말씀을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 지까지 선택했다.
아주 중요한 자리인 만큼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바로 계시 사제가 될 수는 없었고, 대부분의 사제들이 말년이 되어 속히 '장로'로 취급되는 경우에만 계시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슌은 권력 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야천의 말씀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자리인 것에는 흥미가 있었다. 선택받은 자야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젠가는 계시 사제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수행 사제 슌 라크 오라즌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후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슌이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정원과 마루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보였다. 계시 사제들이었다.
계시 사제들은 슌을 향해 등져 앉은 상태로 무언가를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야천의 말씀이라는 것 정도는 슌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계시전의 규칙대로 슌이 고개를 한껏 숙이고 들어가자 계시 사제 중 하나가 말했다.
"슌,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했더니 둘째 왕자님이셨군."
"이미 버린 지위입니다."
"속명을 그대로 쥐고 있는데 어찌 버렸다 할까."
"그건 아직 수행 사제인지라..."
"그럼 아직 왕자님인 것도 맞군."
슌은 무안해하며 말했다.
"야천 님의 계시를 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왔습니다. 해석이 끝났습니까?"
"지금 막. 마침 알맞게 도착했지."
계시 사제 하나가 마루에서 마당으로 걸어 나와 슌에게 다가왔다.
계시 사제의 손에는 계시문, 즉 야천의 말씀과 그것을 풀이한 해설지가 들려 있었다.
"폐하께 들고 가시게."
"내전이 아니라 궁으로요?"
"그렇대도."
"전 내당에서 심부름을 온 건데요."
"허, 젊은 사람이 고지식하긴. 급한 것이니 궁으로 가져가게. 내전이야 소식이 없으면 사람 또 보내겠지."
슌은 얼떨떨하지만 계시 사제들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인사하고 돌아선 슌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회랑에서 주변에 다른 인기척이 없는지 살폈다.
'어차피 봉인도 되지 않은 것이니 누가 봐도 상관없으렷다.'
수행 사제라고해도 사제는 사제.
청소나 물건 채우기, 화초 가꾸기 따위의 신전의 잡일은 수행자라고 하는 아직 사제가 되지 못한 이들이 하게 되지만 계시문은 그 중요도 때문에 수행 사제 하게 되는 얼마 되지 않은 잔심부름이었다.
'그러니 계시 사제 다음으로 야천의 말씀을 보는 즐거움 정도는 즐겨도 되겠지. 어디 보자...'
계시문을 펼친 슌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황급히 궁에 있는 자신의 동생을 향해 달려갔다.
─┼
"새로운 마왕이라."
카일 라크 오라즌은 오랜만에 본 슌의 얼굴을 보고 반가웠지만 슌이 계시문을 들고 온 것과 그 내용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이야."
카일은 슌이 있는 자리에서 곧장 새로운 행정대신을 불렀다.
새로운 행정대신은 과거 카일의 선생이었던 라뷘이었다.
비록 명망 높은 학자였다지만 라뷘은 행정대신이란 자리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게 굴었는데, 그럼에도 그 능력의 출중함 덕에 인정받고 있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야천께서 계시를 보내셨다."
"야천께서요?"
"차후 계시문을 공표할 것이지만, 그전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왕명을 내리겠다."
"하명하소서."
카일은 잠깐 고민했다가 곧 마음속에서 말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해안을 끼고 있는 모든 지방관들에게 알려라. 해적 또는 물고기를 닮은 종족과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하는 마을이나 단체, 인물이 있다면 봉쇄 또는 구금하라고. 이 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방관들은 모든 재량을 사용해도 좋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지방관이나 궁에 지원을 요청해도 좋다."
다사다난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겉보기의 평화를 백여 년 넘게 지켜온 흑린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거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라뷘은 카일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따져 드는 것은 명을 행하고 나서 할 일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라뷘은 잰걸음으로 대회관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것은 야천의 말씀 중 일부를 이룬 것에 불과했다.
슌이 걱정스런 말로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라니! 평화로운 시대로만 생각했는데 걱정이 큽니다, 폐하."
야천의 계시문에선 단순히 마왕만이 나타난다고만 하지 않았다.
바로 마왕과의 싸움을 빌미로 단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 흑린에 시비를 걸어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걱정하는 슌의 모습에 카일은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염려할 일이긴 하지만 또 과하게 걱정할 것은 아닙니다, 작은 형님."
"폐하, 둘뿐이라도 말씀은 조심하시지요."
카일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알겠다."
"그리고 지금 흑린의 병사들은 백 년 전의 라크락 님과 함께 싸우던 전사들이 아닙니다. 그저 흑린을 대국으로만 알고 다른 나라를 얕보기만 하던 이들이지요. 오랜 평화가 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독이 있다고 모두 독 잔을 들이킨 것도 아니지."
"그 말은...?"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왕이 아니었더라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은 여기저기 있었다. 오히려 야천께서 마왕이 나타났다고 하셨으니 다른 신들도 자신의 나라에 그 사실을 알려 줄 테니, 잘되었지. 마왕이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도 몰랐을 테니."
슌에게 그 말은 반가운 소리였다.
카일이 계속해서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남방에서의 싸움을 이제부터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지."
"흑린의 배는 단염이나 암굴에 비하자면 으뜸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단리만큼은 아니지. 단리는 아마 이 싸움에 관심을 기울이진 않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다섯 나라 모두가 흑린과 경쟁하려 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린이 대국이라고 해도 대륙 전체를 더한 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슌이 보기에 카일은 자신이 처음 계시문을 봤을 때처럼 크게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
카일이 말했다.
"지금쯤이면 이미 휘 라비나 무엘이 이미 사시안에 도착했을 거다."
"사시안?"
슌이 알기로는 그저 작은 항구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른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카일의 밀명을 받은 이들이 사시안을 갔다가 돌아오곤 한다고.
무언가가 있는 건 틀림없지만, 한때 카일을 지지하지 않던 대신들이 사시안에 암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시안은 대신들의 눈속임용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휘 라비나 무엘이라면, 그 연금술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비나라는 연금술사가 궁에 들어온 것 자체가 기밀이었다.
물론 야천교에는 워낙 많은 귀가 있으니 지위가 높은 사제거나, 왕족인 슌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휘가에서 버린 자식이 돌아왔고 연금술사라는 소문만 있었는데 최근에서 궁에서 보이지 않는다 정도가 슌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라비나는 평범한 연금술사는 아니지."
"연금술사가 평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마는... 그 연금술사의 사특한 지식이 저희를 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음, 역시 사제인 그대는 연금술사를 탐탁지 않게 보는 건가?"
그 말에 슌이 가로저으며 말했다.
"설마요, 아닙니다."
"그럼?"
"모든 것이 야천의 뜻대로 행하여지는데, 그 가운데 연금술사가 있다면 그 또한 야천의 뜻이겠지요."
슌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라비나 혼자 사시안까지 보내신 겁니까? 연금술사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아니다. 기술대신 럼프와 호위를 딸려서 보냈지."
"아, 과연."
"그리고 혼자 보냈어도 상관은 없었을 거다."
"예?"
"라비나는 혼자서 석면에서 오라즌까지 수개월을 여행해 왔으니까."
카일은 남쪽을 바라보았다.
"라비나는 이 대륙에서 가장 마법사에 가까운 사람 중 하나다."
095화
가루다는 희귀 종족으로 제3 대륙의 북서쪽 끝에 살았다.
높지 않은 산들로 이루어진 북해안과 달리 하늘 산맥이라고 불리는 제3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맥에 살고 있던 가루다들은 플레이어들이 등장하고 나서도 꽤 오래 발견되지 않았다.
가루다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하늘 산맥을 자신의 땅으로 삼은 트롤 돌가면 부족과 위즈덤이었다.
이 시점에서 위즈덤은 희귀 종족인 가루다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가루다는 새를 닮은 종족이었다.
얼굴은 틀림없이 매를 닮아서 부리가 날카로웠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제외하고도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신체 능력과 지능 둘 다 여타의 종족과 비교해 높은 종족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희귀 종족인 만큼 대륙 내에 다른 부족이 존재할 확률은 적었으므로 위즈덤이 가루다를 독점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위즈덤은 가루다를 자신의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종족으로 삼지도 않았다.
"새 종족이지만, 날지 못하는 날개를 달고 있어서야 낭비 아닌가?"
이것이 위즈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가루다는 제 몸을 덮을 만큼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었지만 그 날개로 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스트 월드에서 가루다의 별명은 '닭'이었다.
날개는 달렸지만 날 수 없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물론 가루다에 대한 성운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날지 못하긴 해도 날개 자체는 쓸모가 많아. 초기에 의복 수준이 낮을 때 보온을 해 주기도 하고 전투에서 타격을 하거나 공격을 쳐 낼 수도 있지."
하지만 성운이 북서쪽에서 스타팅을 했어도 위즈덤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희귀 종족을 굳이 선택할 필요성은 없지 않나?"
가루다의 문제는 종족 자체가 유능하긴 하나 희귀 종족이 가진 일반적인 단점, 즉 아이를 가질 확률이 낮다는 것에 있었다.
성운이 데이터를 통해 보았을 때 능력 자체는 가루다와 인간이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인간은 아이를 가질 확률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종족이 늘어나는 속도도 훨씬 빨랐다.
초기 부족 수준에서는 가루다가 평균적인 역량에서 우위를 보이지만, 인간은 인구 숫자가 늘어나면서 가루다만큼 전투에 유능하거나 가루다만큼 똑똑한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는 데는 단순 머릿수도 중요했다.
무능한 인간이라고 해도 적당한 훈련만 받으면 셋이서 가루다를 하나쯤 상대할 수 있었다.
애초에 모두 유능하고 똑똑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단순히 위즈덤이 낭비로 본 날개라는 요소를 제외하고도 가루다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로 충분했다.
당시 돌가면 부족은 신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가루다 부족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가루다 부족은 돌가면 부족과 항복하고 원하는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고 보호를 받자는 쪽과 마지막 가루다가 죽을 때까지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위즈덤은 전투에 나서게 되면 어느 정도 피해가 예상되는 바, 보호를 받자고 주장하는 이들을 신의 힘으로 잘 꼬드겼다.
그러자 가루다 내부의 배신자들이 결사 항전을 다진 부족장 아후란을 비롯한 그의 혈족 모두를 붙잡아 죽이고 돌가면 부족에 투항했다.
가루다 부족장 아후란은 최후를 맞기 전 슬퍼하며 말했다.
"우리는 또 신들에게서 버림받았구나."
가루다들은 이후 돌가면 부족에 협력했다.
돌가면 부족이 요구하는 것은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를 맡을 가루다 전사들이었고, 가루다들은 이것을 명예로운 자리로 받아들였다.
돌가면 부족이 영역을 확장하는 동안 젊은 가루다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젊은 가루다들이 소진될 무렵에서야 돌가면 부족은 왕을 세우고 석면이라고 나라를 공표했다.
하지만 트롤들은 가루다들에게 어떠한 대우도 해 주지 않았다.
이후에 가루다들은 이것이 돌가면 부족 트롤에게 속았음을 알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엔 뒤늦은 때였다.
가루다들은 명예를 중시했지만 이미 석면에 적대하기엔 가루다 부족은 너무 약해져 있었고, 석면에게서 명예를 구하기엔 너무 구차해져 있었다.
많은 가루다들이 '또 버림받았다'는 부족장 아후란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로스트 월드의 많은 종족들에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고대의 악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마저도 분절되어 있거나 가치 있는 정보를 담고 있지 않았기에 플레이어들은 별 관심이 없었는데, 특정 종족은 자신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가루다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황제의 종족'으로 불렸으며 지금은 거추장스러울 때가 더 많은 두 날개 또한 하늘을 날 만큼 강인했다고 한다.
고대의 악이 나타났을 때 가루다들은 고귀로운 혈통임에도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싸움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신들은 도망가 버렸고 신의 힘을 잃어버린 탓인지, 아니면 고대의 악의 저주 때문인지 가루다들은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 결과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계의 끝'을 맞이한 뒤 가루다들은 날지 못하는 날개를 등에 지고서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이것이 가루다들의 종족 전승으로, 아후란의 말은 가루다들이 새롭게 나타난 신들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의미였다.
물론 가루다들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건 아니었다.
흑린이 그러했듯이, 석면 또한 국가가 안정적인 체제를 갖춰 가자 통합 시기에 이용하거나 내버렸던 수많은 종족들을 자신의 체계 안에 편입시키려고 들었다.
이미 약해져 있던 가루다들은 집종촌을 이루고 석면이 지배하는 대륙의 북서부, 하늘 아래 산맥에서 이어 나가고 있었다.
위즈덤은 가루다 같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희귀 종족을 잘 다뤘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신들을 믿지 않으리."
가루다 '썩은 손' 마즈다리는 눈 덮인 산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썩은 손은 마즈다리의 별명으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를 보자마자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별명이었다.
마즈다리의 왼팔은 검었다.
가루다라면 깃털로 뒤덮여 있어야 하는 손이지만 왼손과 왼손으로 이어지는 팔뚝까지 마즈다리의 왼팔은 털이 모두 빠졌고 야위었으며, 까맸다.
태어날 때부터 새카만 왼팔이었기에 부족 사람들은 마즈다리가 저주받았다며 두려워했다.
그의 부모조차도 마즈다리를 집종촌에서 키우지 않고, 마을에서 추방되어 혼자 지내는 늙은 가루다에게 자식을 맡겼다. 문명이 조금만 덜 발달했더라도 마즈다리는 산속에 버려져 죽었을 것이다.
마즈다리는 그러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주받은 것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오, 하지만 그 불쌍한 운명도 이제 끝을 맞이하는가.
'닥쳐라, 마물아.'
-마즈다리, 난 마물이 아니다. 정령이지.
'내 공부에 따르면 고대의 악을 섬기던 하수인이라면 정령이거나 마물은 별 차이가 없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마즈다리는 자신의 내면, 정확히는 왼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관심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놈은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하지만 추적대를 따돌리긴 힘들걸. 가루다는 자신의 신체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던데, 아무리 그래도 눈길 속에서 엘크보다 빠를 수는 없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마즈다리는 쫓기고 있었다.
가루다의 평균 키는 2미터 50센티. 마즈다리는 그보다도 큰 2미터 70가량으로 어지간한 오우거와도 맞설 만한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즈다리의 뒤를 쫓는 엘크 기사는 석면이 자랑하는 최정예 전투원들이었다.
모두가 고도의 전투 기술을 배운 트롤에다가 트롤을 태울 수 있는 전쟁 엘크들은 사실상 괴수나 다름없었다.
'이 숲만 빠져나가면 강이 나온다. 얼마 안 남았어.'
-얼어붙은 강? 강은 엘크 기사들도 건널 수 있어.
'강을 녹일 거다.'
-너의 힘만으론 부족할 텐데.
'......'
마즈다리는 생각을 멈추고 걷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강을 지척에 앞두었을 때, 거대한 짐승이 나무를 가르며 머리를 디밀었다.
가루다의 얼굴을 덮을 만큼 크고 두꺼운 뿔, 길쭉한 주둥이에 커다란 코를 가진 엘크였다.
엘크의 등 위에는 흉갑을 입고 투구를 쓴 트롤이 앉아 있었다.
숫자는 두 명이었다.
엘크 기사가 외쳤다.
"거기, 가루다! 멈춰라."
"기사님, 그 가루다가 맞습니다. 왼손이 썩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대의 이름이 '썩은 손' 마즈다리인가?"
내면의 목소리가 큭큭대며 웃었다.
-뒤가 아니라 앞에도 있었군.
'하지만 추적자가 아니다. 놈들은 내가 아직 누군지 정확히 몰라.'
-그럼 너의 허리춤에 있는 약병들이 뭘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하겠지.
마즈다리는 두 손을 펼쳐 보여 주며 말했다.
"마즈다리? 저는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제 이름은 아후란이고 가루다 집종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왼팔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고 검게 그슬렸습니다."
"화상 입은 자리 같지는 않은데."
"트롤과 가루다가 생긴 것만큼 화상의 모양도 다른 거지요."
"흠."
"마즈다리라는 이름의 가루다를 찾으시는 겁니까?"
엘크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금술사의 탑은 알고 있겠지?"
"네? 네. 저 하늘 산맥 뒤에 있다는 탑 말이지요? 연금술사라는 괴짜들이 모여 산다는."
"있다는 탑? 이제는 '있었던 탑'이겠지. 아무튼 석면의 기사들이 탑을 완전히 점령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연금술사들 중 일부가 도망쳤지. 우리는 폐하의 명을 받고 도망친 연금술사들이 금지된 지식을 퍼트리지 못하도록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
"연금술사 가루다? 하하. 가루다들은 수가 많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 이름을 가진 가루다를 찾으면..."
엘크 기사는 마즈다리의 말을 끊었다.
"너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니 이리 다가와라."
"전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약초꾼이지요. 옆 마을에 폐병 걸린 환자가 있다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보내 줄 테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마즈다리는 두 손을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우선 가방을 내게..."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마즈다리가 움직였다.
마즈다리는 과거의 조상들이 하늘을 날 때처럼, 두 날개를 번쩍 펼쳤다.
그러자 마즈다리를 덮고 있던 망토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기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놈!"
망토를 꿰뚫고 막무가내로 칼이 내질러졌지만 마즈다리는 이미 한 발 물러난 상황이었다.
마즈다리는 허리춤에서 유리 약병 하나를 뽑아내고, 망토가 떨어지며 시야가 드러난 순간 기사의 얼굴로 그 약병을 던졌다.
"아악!"
기사가 얼굴을 부여잡자 흰 연기가 솟았다.
유리 약병에 든 것은 황산.
트롤의 얼굴이 녹아들고 있었다.
"연금술사, 이놈!'
두 번째 기사가 엘크의 고삐를 당기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루다의 신체 능력은 충분히 재빨랐다.
몸을 구르며 공격을 피해 낸 마즈다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엘크의 뿔과 앞발을 피하며 엘크 기사의 칼날을 쳐 내기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마즈다리의 편이 아니었다.
"저기다!"
"썩은 손이 저기 있습니다!"
이번에는 추적자들이었다.
그들도 당장 맞서 싸운 엘크 기사들과 다름없었지만, 이미 마즈다리와 싸워 충분히 경계하고 있는 적들이었다. 마즈다리에겐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숫자도 다섯.
-허리춤에 뭐가 남았지?
'황산 하나, 연막 하나, 기름 둘.'
-슬슬 내 힘을 빌려야지 않나?
'...젠장.'
-어차피 강을 녹일 때 내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 않나?
'어쩔 수 없지.'
마즈다리는 품에서 두 개의 약병을 꺼냈다.
"놈이 약병을 꺼냈다! 방패로 막아라!"
우수한 신체 능력에서 발휘된 뛰어난 구속의 약병이 순서대로 기사들의 방패를 때렸다.
방패를 확인한 기사들은 냄새를 통해 약병의 내용물이 뭔지 알아차렸다.
"...기름?"
마즈다리가 왼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향했다.
어딜 봐도 빈손이었기에, 기사들은 경계심 없이 접근했다.또한, 손바닥에 집중되는 열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마즈다리의 손바닥을 꼭짓점으로 하는 원뿔 모양의 불기둥이 기사들에게 쏟아졌다.
트롤 기사들의 폐가 팽창하는 공기를 내뱉으며 삐익 하고 맥 빠진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마즈다리가 손을 거두자 새카맣게 타오른 엘크와 기사들이 시커멓게 그을린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즈다리와 방금까지 검을 다투던 살아남은 엘크 기사가 강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여야 하는데.'
-유감스럽지만 내 화염은 저기까지 닿긴 힘들어. 좀 더 내게 의지했더라면 내가 성장했었겠지만...
하지만 마즈다리는 자신의 후회도 강변에 닿자 쓸모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강변에는 이미 마즈다리를 잡기 위해 삼백이 넘는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엘크 기사가 외쳤다.
"마즈다리! 궁수들이 널 겨누고 있다! 허리띠를 풀고 짐을 내려놓아라!"
"젠장."
096화
-아직 싸워 볼 만하지 않나?
'......'
-날아오는 화살이라면 불태워 버릴 수 있다.
마즈다리는 마성의 정령 '썩은 손'이 떠드는 소리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변에 도열한 병사 전부를 죽일 수도 없고, 그들을 따돌릴 수도 없었다.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즈다리는 후방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엘크 위에 올라탄 트롤 기사에게 눈길이 갔다.
갑옷 자체는 실용성을 우선했고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썼다.
하지만 기사가 엘크 옆구리로 늘어트린 물방울 모양 방패 위로 그려진 문장이 낯익었다.
'내가 아는 그 문양이 맞다면 항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마즈다리는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항복하겠다."
마즈다리는 허리띠를 풀고 매고 있던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병사 하나가 마즈다리의 발치까지 와서 허리띠와 거기에 매여 있는 약병과 검, 그리고 가방을 가져갔다.
마즈다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저것들이 없어도 위험한 사내인데, 괜찮겠나?"
그 말에 마즈다리가 주목하고 있던 엘크 기사가 엘크를 탄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기사의 입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 위험하다는 이들보다 안전한 이들은 없지."
"허세라고 생각하나? 나는 너를 구워 버릴 수도 있다."
기사는 엘크에서 내리더니 말없이 전진했다.
가신으로 보이는 이가 기사에게 외쳤다.
"가,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위험한 자입니다!"
하지만 기사는 아랑곳 않고 전진했다.
기사는 투구를 벗었다.
트롤의 얼굴은 어느 종족의 심미안을 가져다 대더라도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종족이 보더라도 공포스럽다고 느낄 얼굴이긴 했다.
마즈다리는 그 얼굴을 보고도 표정을 움직이지 않는데 성공했다.
'용기 있는 가루다나 흑린의 리자드맨 전사 정도나 도망치지 않겠지.'
트롤이 말했다.
"나는 석면의 왕, 데르말딘 부사. 속선(束線)께서 주목하시는 자다. 연금술사들은 늘 신과 겨루어 보고 싶어 하니 그대의 힘으로 날 태우는 게 빠를지, 그대가 신벌을 받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볼 기회로군."
이번에는 마즈다리도 입을 벌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왕족일 거라고 짐작했지, 진짜 데르말딘일 줄이야.'
-흠, 왕이거나 말거나. 나는 저자가 말한 겨루기가 기대되는데. 어때, 도전할 건가?
'멍청한 놈. 불길이 데르말딘에게 닿기도 전에 내 몸이 수십 갈래로 동강 날걸?'
속선은 과거 얽고 설키는 신으로 불렸던 석면의 신을 말했다.
신벌을 내리길 즐겨서, 신벌을 받는 이들이 갈가리 찢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실제로 그렇게 발견되는 시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시체의 배후를 찾다 보면 정말로 악인이었던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석면이 법치주의, 혹형주의로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런 신의 관심을 받는 이라는 것과, 목숨을 걸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저주받은 자에게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용기는 별개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광기에 가깝다면 또 모르겠지만, 마즈다리가 보았을 때 데르말딘 부사는 눈빛과 태도에서 이지적인 면모가 보였다.
'트롤의 대부족장이자, 북부 대공, 석면의 왕이라 불릴 만하군.'
-감탄할 때는 아닌 것 같군.
마즈다리는 내키지 않지만 썩은 손에게 동의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시험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잘 생각했다, 가루다 연금술사."
"하지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한낱 연금술사를 붙잡는데 이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가? 일국의 왕이 직접 나선다고? 지금까지 연금술사의 탑을 내버려 두었으면서?"
데르말딘이 말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외부에 쓸모없어 보이길 바란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 지식들이 쓸모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흠."
"연금술사의 탑을 지금까지 내버려 둔 건 너희가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너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지. 사람들이 불신자를 싫어한다고 해서 불신자가 만들어 낸 유용한 것까지 싫어할 리는 없지 않느냐?"
마즈다리가 말했다.
"화약 이야기로군."
"......"
"화약 제조법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다. 그 기술은 막 발견되었을 뿐이니 자원만 있다면 충분히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을 거야. 그걸 어디 쓸지는 몰라도."
데르말딘이 고개를 저었다.
"화약이 아니다."
"아니라고?"
"넌 몰랐겠지만 이미 내통하는 연금술사가 있었지. 우리는 이미 화약의 제조법을 안다. 아니, 그 이상이지."
내통자가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연금술사의 탑이 석면의 기사들에게 침략당하게 된 주요 원인은 새벽 중에 열린 도개교 때문이었다. 그 도개교로부터 기사들이 암습을 해 온 것이다.
분명 내부에 범인이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연금술사들은 기사들을 피해 급하게 도망치느라 범인을 잡을 겨를 따윈 없었다.
"그럼 뭘 원하는 거지? 그냥 불신자들을 사냥하길 원하나? 신이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아니."
데르말딘이 말했다.
"나는 마법을 원한다."
마즈다리가 황당해했다.
마법은 수위에 오른 연금술사들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이었다.
"마법은 원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얻을 필요는 없다. 마법이 정확히 뭔지도 궁금하지 않고."
"그럼?"
"단지 그 힘이 필요할 뿐이지. 그 내통자가 짐작하기론, 마법은 마치 신과 같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더군. 이미 붙잡은 연금술사들도 그리 말했고."
"미신에 불과해. 고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너희는 그 고대의 이야기를 믿지 않느냐?"
마즈다리는 부리를 부딪쳐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를 원하는 거군? 너의 말에 굴종하는?"
데르말딘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루다라서 그런가? 이해가 빠르군. 다른 연금술사들은 그렇지 못하던데."
"...다른 연금술사들은 어떻게 되었지?"
"다들 몸이 약하더군. 말 몇 마디 하고 죽어 버렸지."
마즈다리는 일어나서 데르말딘의 목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붙잡힌 연금술사들은 악명 높은 트롤 고문을 겪은 것이다.
연금술사의 탑에서 연금술사들은 학파에 따라 서로 경쟁했고 마법과 같은 귀중한 지식은 서로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 무력으로 빼앗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하지만 탑 밖의 존재가 이제 와서 그 모든 규칙을 깨 버린 것이다.
데르말딘이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법사가 될 만한 이들이 누구인지 귀띔 정도는 해 주더군. 최고의 연금술사는 단연 마즈다리라고."
"나보고 마법사가 되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수집한 연금술사들의 모든 지식을 주겠다."
"그 다음은?"
"마법사로서 힘을 사용해 석면의 위대함을 널리 알려야지."
"......"
마법사가 되는 건, 정말이지 끌리는 이야기였다.
데르말딘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마즈다리는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한다면 대륙 각지로 흩어진 연금술사들을 찾아다니며 지식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해서라도 말이지. 큭큭.
탑은 무너졌으니, 탑의 규칙도 깨어진 셈이니까.
애초에 마즈다리는 자신의 지식이 거의 마법사에 근접했다고 보고 있었다.
겨우 몇 조각이 부족한 것이다.
그 애달픔이 그를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즈다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연금술사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가루다라는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데르말딘이 말했다.
"물론 너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 너희 가루다들은 우리 트롤들이 나라를 세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더군. 이번이 다시 그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아니겠나?"
저주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밖에서 자란 마즈다리에겐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여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유쾌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생각해 볼 시간은 있나?"
"넌 이것이 제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내 선택이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던 데르말딘이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좋다. 하지만 긴 시간은 줄 수 없어. 너와 같은 마법사 후보가 막 우리 땅을 빠져나갔으니까."
마즈다리는 포박당한 뒤 성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연금술사는 누가 있을까? 얀? 아니면 탈레이? 그것도 아니면 휘 라비나 무엘?'
-궁금하다면 간수를 불러 마법사가 되겠다고 해라. 데르말딘 폐하의 충성스런 수하가 되겠다고.
마즈다리는 자신의 왼손이 떠드는 소리에 또 부리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통로를 지나가고 있던 간수가 철문 뒤에서 힐끗 바라보고 지나갔다.
-아니면 탈출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 창문은... 좀 좁나?
마즈다리는 힐끗 위를 바라보았다.
천장 꼭대기에 비죽 난 창문은 그저 밤낮이 바뀌는 것을 알려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지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면 저 철문 정도면 녹이고 갈 수도 있겠는데.
'속선이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아무거나 선택을 하란 말이다. 난 지루하다고.
마즈다리는 왜 자신이 이런 망할 것을 손에 달고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자조했다. 머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자주했던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썩은 손. 나도 내가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뭐라고? 좁은 곳에 있다고 정신이 나간건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저기.
'잠깐만 조용해 볼 생각 없나? 지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멍청아, 창문을 보라고.
마즈다리는 다시 고개를 올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에 가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사람의 머리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메뚜... 기?"
하지만 저것이 메뚜기의 얼굴이라면 그 몸집이 결코 작지 않을 것 같았다.
마즈다리가 당황하는 가운데 메뚜기가 말했다.
"이대로 말하긴 좀 그렇군. 안으로 들어가겠다."
그렇게 말한 메뚜기는 창문에서 멀어지는가 싶더니, 도움닫기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 순간 마즈다리가 있는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마즈다리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었다.
"두려워 마라, 나는 신의 심부름꾼이니."
그 말에 마즈다리는 손을 치우고 메뚜기를 천천히 살폈다.
메뚜기는 옷가지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두 발로 서 있었다.
하지만 옷 사이로 드러나는 몸은 곤충의 근육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순간이동.
커다란 메뚜기가 그저 뛰었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크기의 창문을 관통할 수는 없다.
마법이 아니라면 기적뿐이다.
"그렇다. 나는 혼고, 야천의 창조물 중 하나다."
"야천? 흑린 리자드맨들의 신 야천을 말하는 거냐?"
"그래."
"왜 야천이...?"
"그분은 모든 곳을 지켜보고 계신다."
연금술사들은 불신자지만, 그만큼 신들을 노골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다.
많은 신들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야천의 영역은 상당히 넓다고 판단되긴 했다.
야천의 힘 또한 그저 입소문에 불과하지만 몇 가지 알려져 있기도 했다.
야천의 첫 번째 사도인 라크락, 그리고 야천의 힘을 대변하는 괴수 스라티스, 그리고 메뚜기 떼를 다스리는 황폐함의 혼고.
"속선은 데르말딘을 이용해 내게 접근하더니 야천은 자신의 수호자를 보내는군. 이곳은 야천의 영역이 아닌데 두렵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속선이 이곳을 지켜보지 않는다."
"자신하나?"
"자신하냐고? 확신한다. 야천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성운이 긴급 호출을 통해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을 불러들인 순간이었다.
성운은 모든 플레이어의 시선이 대륙에서 거둬지는 시점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즈다리가 물었다.
"심부름꾼이라면, 뭘 전하기 위해 온 것이지?"
"야천의 예언."
마즈다리는 흥미가 동했다.
"말해라."
"이는 야천의 예언이다. '그대는 석면의 마법사가 된다.'"
그 말에 마즈다리가 웃었다.
"지금 당장 이 지하 감옥을 탈출하면 신의 예언을 깰 수 있겠군."
"내가 이곳에 잠입할 수 있는 건 신이 나에게 부여한 힘 때문이다. 넌 이곳을 탈출할 수 없다. 속선이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리고 예언은 끝나지 않았다."
"남은 예언은 뭐지?'
혼고가 말했다.
"'마법사가 된 너는 석면을 배신한다.' ...여기까지가 예언이다."
097화
가루다 마즈다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내가 마법사가 된 뒤에 석면을 배신한다고?"
"그렇다."
"이건... 야천의 명령인 건가?"
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이건 예언에 불과하다."
마즈다리는 야천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대리인을 보내 예언을 알려 주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야천은 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건가?'
마즈다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석면의 왕 데르말딘이 넘겨주는 자료들을 모아서 마법사가 된다면, 석면의 힘은 분명 무시할 수 없어질 것이다.
본래 트롤들은 강인한 종족이지만 과거에는 식량이 부족해 아이를 제대로 기르기 힘들었다.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잡은 지금은 트롤의 수도 부쩍 늘었다. 석면은 언제나 대륙 최고의 국가 지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미 나라의 크기만 보자면 대륙에서 석면이 가장 큰 국가기도 했다.
거기다 조만간 만들어질 화약 무기와 마법사의 힘까지.
어쩌면 석면은 흑린보다 더 강성한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야천은 속선을 경계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지는 마즈다리의 연금술적, 마법적 지식으로도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만큼, 마즈다리가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마즈다리는 마침 그런 궁금증을 풀어 줄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왜 야천은 내게 강제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혼고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야천께선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
"자유 의지?"
"다른 누군가에게 강제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예언을 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야천이 별로 좋아하지 않겠군."
"그건 모른다. 야천께선 자신의 예언이 맞거나 틀리는데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으신다."
혼고가 말했다.
"그리고 예언을 전하는 나의 임무는 끝났다. 예언을 이루거나 말거나, 선택은 너의 몫이다. 다만 이번에 들은 이야기는 잘 갈무리해 두는 게 좋겠군. 속선이 너의 생각을 엿들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넌 배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
그 말과 함께 혼고는 다리를 굽히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사라져 버렸다.
창문 너머로 풀 소리가 나더니 곧 멀어졌다.
마즈다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가 버린 건가?'
마즈다리는 꿈이라도 꾼 것인가 싶었지만 그렇진 않았다.
-정말 징그럽게 생긴 놈이군. 그렇지 않나?
'너만큼은 아니지.'
마즈다리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면 검게만 보이는 손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 흉측했다. 생긴 것과 달리 큰 고통이 없다는 점만이 위안이었다.
-나도 너다. 우리는 단순히 몸을 공유하는 게 아니야.
'그럼 나만큼은 아니라고 하지.'
-뭐? ...좋다. 기괴하게 생긴 놈이긴 했지만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갔으니.
'선물?'
마즈다리의 되물음에 썩은 손이 타박했다.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까먹었나?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속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 테니, 지금이 탈출할 절호의 기회잖아?
마즈다리는 이상하게 썩은 손의 말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 느꼈다.
-잠깐, 너...
'생각이 바뀌었다.'
썩은 손이 이죽거렸다.
-신을 그토록 증오하더니 결국 신의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건가? 이대로 마법사가 되면 너는 배신을 하지 않게 되면 속선의 뜻대로 되고 배신을 하게 되면 야천의 뜻대로 하게 되는 셈이다.
마즈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마즈다리는 혼다에게서 예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신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함정이었다.'
-함정이라고?
'내가 탈출하는 것도 신의 뜻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마성의 정령은 신들의 위대함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긍정했다.
-그야... 그렇지.
'신의 뜻에 맞춰서 생각을 한다는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
-그럼?
'날 가두고 다른 연금술사들을 고문해 죽인 그 자식에게 엿을 먹여야지 않겠어?'
그 말에 썩은 손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마즈다리가 문으로 다가가 외쳤다.
"간수! 날 데르말딘에게 안내해라! 고민은 끝났다고 전해!"
─┼
사시안은 흑린의 오라즌과 마가넨, 그 중간쯤에 위치한 한적한 항구 마을이었다.
그 위치 자체는 북쪽과 남쪽에 있는 다른 항구 마을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었고, 종족 구성 또한 리자드맨이 주류가 아닌 여러 종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평야가 넓고 흙이 좋아 농사를 짓기에 좋다는 점이지만 사시안으로부터 강을 끼고 이어지는 평야가 있었기 때문에 사시안만의 특징이라고 들긴 힘들었다.
"...라고 알려져 있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술대 대신 럼프였다.
그 말에 휘 라비나 무엘이 말했다.
"비밀 병기창이란 말이죠?"
그 질문에 대해 럼프는 쉽게 답하기 힘든 듯 눈가에 힘을 주고 먼 곳을 바라봤다.
럼프의 풍성한 턱수염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렸다.
오라즌에서 사시안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잘 닦여 있지 않았다.
사시안의 인구가 많지 않은 만큼 경제적인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라즌과 사시안 사이에는 정비된 수로가 존재했고 배를 이용한 수상 교통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배에 올라타 있었다.
"단순히 무기를 만들기 위한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럼?"
"음."
"제가 맞춰 볼까요?"
럼프가 답하기 전에 라비나가 말했다.
"불신자들의 지식이 갖춰져 있는 거죠?"
"어허, 불신자라니."
"기술대신 님도 불신자의 지식에 관심도 많고 배우기도 하시면서, 왜요?"
"야천께서 듣겠소."
"별로 신경 안 쓰실 것 같은데."
럼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비나는 이 드워프 남자가 기술을 논하기엔 너무 고지식하지 않나 싶었지만, 능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라비나는 화약에 대한 제조 방법과 고대에 화약을 통해 사용했던 무기를 대략 설명했는데, 이 드워프는 그 정보를 기반으로 이미 시제품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다만 그 위험성 때문에 궁에서 실제 화약을 넣고 사용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모양을 봐서는 라비나는 별다른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럼프가 강 끝을 보며 말했다.
"다 왔군."
─┼
같은 시각, 해적의 수치 또한 사시안에 도착했다.
티오네 이티모는 작은 항구에 배를 정박하고 물건을 내리는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가, 짜증을 내며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고 바센 라크 오라즌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실을 물건이 있다고 며칠 더 정박해 달라는데요?"
"실을 물건? 궁과 관계된 건가?"
티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저희 일이랑 관계된 것 같지는 않아요. 남쪽으로 내려갈 배들을 수배하고 있나 봐요."
"뭘 실어야 하는 거지?"
"그건 아직 알려 줄 수 없다고 하네요."
"그냥 며칠 쉬었다 간다고 생각하면 어때?"
티오네는 인상을 썼다.
"이렇게 되면 일정이 늦어지죠. 사실 초석 말고 거래 물건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다른 항구에 가서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걸 여기서 다 팔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바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결국 돈 때문이었군.'
하지만 바센이 보기엔 해적의 수치는 할 일이 있었다.
"저것들도 어차피 넘겨야 하지 않나?"
바센은 묶여 있는 해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죠. 그런데 그건 훼사에게 맡기면 될..."
그 말에 훼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느닷없이 선언했다.
"1등 황훼사, 결심해따."
"뭘?"
"육지 밟지 않기로."
바센은 황당한 듯 말했다.
"바브린에선 땅을 밟지 않았나? 분명 화물 내리는 걸 봤는데."
"결심을 잊고 이써따."
티오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오네는 바센에게 속닥거렸다.
"가끔 이래요."
"1등 항해사라는 지위 이대로 괜찮은 건가?"
"네? 당연하죠. 우리 배에는 유능한 2등 항해사가 있거든요."
바센은 유능한 하프빈 선원을 떠올렸다.
그가 사실 이 배에서 실질적인 1등 항해사였던 모양이다.
"음..."
"아무튼 해적들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수밖엔 없어 보이는군."
고단을 비롯한 해적들은 모두 팔은 물론 다리가 좁은 간격으로 묶여서 바센과 바센의 수행원들 정도로도 충분히 끌고 갈 수 있을 터였다. 아마 바센이 원하기만 한다면 혼자서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다른 병사들을 대동할 수도 있었지만 겨우 넷 밖에 없는 해적들을 인솔하는데 병사들을 끌고 가는 건 바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단과 그 부하들을 관청으로 데리고 가는 동안 고단은 자신이 있는 대로의 사실을 다 말해 주었으니 좋게 봐주는 게 맞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끝까지 무시하려던 바센도 마지막에 가선 너무 피곤해져 그러겠노라 건성으로 답했다.
관청에 도착하자 리자드맨 현감이 이미 소식을 듣고 관청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이고 왕자님, 여행길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대가 사시안의 현감인가? 여행 도중에 해적들이..."
"아차! 들었습니다. 예끼, 이놈들아. 너희가 감히 흑린의 왕족을 무얼로 알고..."
"인솔했으니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다."
"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시면 현감인 제 면이 어찌되겠습니까? 왕자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간단히 자리를 마련했으니 들어가시지요."
"......"
바센은 현감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센은 오라즌에서야 궁 밖으로 내쳐진 왕자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왕과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은 권력인 것이다.
다만 바센이 알고 있기에 사시안이 카일의 입김이 닿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현감 자리만큼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현감에 아무나 앉혀야 했던 건가? 그래야 다른 대신들의 눈도 속일 수 있을 테니.'
그렇다면 바센은 이 현감의 아부에 적당히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럼 한번 여독이나 풀고 가야겠군."
"좋으신 생각입니다!"
"아, 하지만 저기 해적 우두머리는 고단이라 하는 자인데 보시다시피 아스타시디안이다. 그리고 놈은 남쪽 해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야분 해적단 소속으로 중요한 정보를..."
"예이예이, 저만 믿으십시오. 우선 들어가시죠. 얘들아! 저 해적 놈들을 얼른 옥에 쳐 넣거라!"
바센은 현감의 태도가 믿음직하지 못했지만, 현감이 워낙에 등을 떠미는 터라 제대로 돌아볼 틈도 없었다.
만약, 바센이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아스타시디안 고단이 자신의 등껍질의 꺼끌한 부위로 밧줄을 거의 다 끊어 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현감이 주최하는 바센을 환영하는 잔치 자리에서 현감 옆으로 병사 하나가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현감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술에 취해 있던 바센이 말했다.
"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 저... 별일 아닙니다. 그냥 마을의 일이니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예, 맛 좋은 술이 더 있습니다. 더 드시지요!"
"아, 잠시. 술을 너무 마셨는지 요의가 오는군. 뒷간에 좀 다녀오지."
"아, 그러시지요."
바센은 비틀거리며 손을 흔들고 걸어 나오다 그대로 담벼락을 넘었다.
바센의 수행원이 옆에 서 있었다.
바센이 술을 마시는 동안 주변 동태를 알리기 위해 남겨 둔 자였는데, 방금 담벼락 너머에서 바센에게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해적 놈들이 도망쳤습니다."
"아, 이런 무능한 현감 놈이! 내 경을 칠 것이다."
"다행히 그리 멀리 도망가진 않았습니다."
"어서 가자, 안내해라."
"하지만 술을 드셨는데..."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이군."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은 마을의 광장.
바센은 똑바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뿔이 난 인간 여자를 붙잡고 있는 해적 고단이었다.
098화
"우, 움직이지 마라! 인간!"
"전 가만히 있었는데요?"
"마, 말대꾸하지 마!"
휘 라비나 무엘은 자신을 붙잡은 아스타시디안이 벌벌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스타시디안의 커다란 집게발이 라비나의 목을 쥐고 있는 동안, 그 더듬이가 볼썽사납게 마구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도 더듬고 있었지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
사시안에 도착한 라비나와 럼프, 그리고 다른 기술대의 관료들은 배에서 내렸다.
럼프와 관료, 다른 일꾼들은 짐을 내리느라 분주했고 라비나는 그 시간 동안 마을을 돌아볼 요량이었다.
라비나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제3 대륙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자신이 태어난 흑린의 평범한 마을은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모여서 사는 장소는 지형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크고, 그런 마을에는 고대에도 마을이나 도시 비슷한 것이 형성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고대 유적과 관련되거나, 아니면 자동성처럼 고대 유적 그 자체인 경우도 있었다.
라비나로서도 흑린에도 학자가 없는 게 아니니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고, 그저 작은 고대의 비석 정도만 남아 있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라비나가 만난 것은 고대의 비석이 아니라 감옥을 탈출한 해적이었다.
"고단? 이름이 고단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진정 좀 해라!"
그렇게 외친 것은 고단을 놓친 포졸인 듯 싶었다.
포졸 넷이 빙 둘러 서서 고단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지만 아스타시디안의 툭 튀어나온 눈은 전방위를 살필 수 있었다.
"진정? 나는 바센에게 속았다! 분명 참작을 해 주겠다더니 목을 베겠다고!"
고단이 라비나의 목을 쥐고 흔들었다.
"켁."
그 모습에 포졸들이 깜짝 놀라 한 발 물러섰다.
고단은 조금 더 의기양양해져서는 소리쳤다.
"당장 바센을 내게 데려와라! 놈과 대화하기 전까지는 이 여자를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라비나는 이 아스타시디안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이 해적에게 잘 봐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것이 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놈아! 사람 물건 뺏고 못살게 굴던 해적 놈이 무슨 떳떳함으로 약속을 운운하느냐!"
라비나는 그 말을 받고 더해서 감옥에 아스타시디안을 가두면서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현감의 잘못이 가장 커 보였다.
하지만 고단은 자신의 논리가 먹히지 않자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아닌가! ...인간! 내가 가만히 있으라지 않았나?"
"제가..."
쉰 목소리가 나와 라비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움직인 게 아니라 당신이 제 목을 잡고 흔든 겁니다."
"...그랬나? 미안하다. 아무튼 이놈들, 꼼짝도 하지 마라. 이 인간 여자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라비나는 고단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집게발에 힘을 꽉 준다면 그런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비나는 그럴 확률이 적다고 판단했다.
고단은 긴장과 흥분했지만 목을 조인 것이 아니라 쥐고만 있는 수준이고, 틈틈이 라비나를 흘겨보는 것으로 봐서는 인질의 안위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말로 죽일 각오를 했다면 인질의 감정적 상태를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다른 근거도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설마, 그럴 리가.'
-그럼 적당히 하고 빠져나오지 않겠나? 럼프라는 드워프는 일을 끝냈을 텐데.
라비나는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선조들, 휘경이 그러했던 것처럼 뿔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뿔 안에는 확률을 조정하는 마성의 정령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리 마성의 정령이라도 이 상황에서 날 살리긴 힘들어 보이는데?'
라비나의 '뿔'은 확률을 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마성의 정령이 조정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가 놓여 있어야 한다.
라비나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은 고단이 '집게손을 움켜쥔다', '집게손을 움켜쥐지 않는다' 두 개의 상황뿐으로 보였다.
-틀렸다.
'그럼 어떻게 날 구해 낼 거지?'
-그냥 그대로 걸어 나오면 된다.
'이 가재는 내 목을 분지르려고 들 텐데?'
-하지만 지금까지 손에 힘을 너무 많이 주고 있었지. 언제든 근육 경련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럼 놈은 비명을 지르면서 오른쪽 집게손을 펼치고 너한텐 관심도 없을 거다.
라비나는 언제나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힘 덕분에 수없이 많은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졌다.
'언제든 날 구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그럼 조금 더 있을래.'
-왜?
'인질이 되어 보는 경험이 흔하지는 않잖아?'
-세상엔 꼭 겪어 봐야 할 필요가 있는 일만 있는 건 아니지.
'모든 경험은 다음 경험을 위한 연습이야. 언제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널 보니 휘경이 떠오르는군.
라비나는 관심을 가지고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자신의 내면을 통해 대화하기 힘들었다.
이 인질극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멀리서 날 부르고 있더군, 고단."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이었다.
라비나는 고단의 반응 덕분에 그 리자드맨이 바센 라크 오라즌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센! 너, 너는 약속을 어겼다."
바센은 눈가를 찡그리며 생각했다.
바센은 고단이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바센은 그 약속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바센은 분명 현감에게 최근 나타나고 있는 해적단 출신으로 중요 정보를 알고 있으니 정보를 더 캐내기 위해서 살려 두라고 이야기했지만, 현감은 바센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흘렸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바센에게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고단이 고래고래 외쳐댔던 억울하다는 상황은 일종의 사고였다.
'이렇게 말을 해 나가면 놈이 이해를 할까?'
하지만 바센은 말이 길어지는 것이 피곤했다.
그래서 짧게 말했다.
"고단, 너는 법을 어겼다."
"......"
"그 인간을 죽인다면 이 자리에서 널 죽이겠다. 그냥 순순히 잡힌다면 좀 더 대화의 여지를 열어 보도록 하겠다."
바센은 진심이었다.
보아하니 고단은 탈옥하긴 했어도 인질을 잡는 것 말곤 아직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상해를 입히거나 한 거 같진 않았다.
고단은 멈칫 했다가 말했다.
"이 인간을 풀어 준다고 해서 내가 살아날 보장이 어디 있느냐?"
"그건 없지. 하지만 흑천에 맹세코 그 인간을 죽이면 넌 틀림없이 죽는다."
바센은 술은커녕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흔들림 없이 진중한 말투였다.
라비나는 자신의 목을 잡고 있던 집게손의 힘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내, 내가 죽지 않게 도와줄 수 있나?"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야천과 흰 거미신은 같은 신이다. 야천께선 자신의 계획에 쓸모 있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너도 살고 있다면 쓸모 있음을 입증해라."
"...어떻게?"
"내 말을 잘 듣는 거지."
라비나는 고단이 저런 허울 좋은 말만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단은 라비나의 목을 풀어 주고는 등을 툭 밀었다.
"가라, 인간. 나는 항복하겠다."
그러자 포졸들이 기합과 함께 고단에게 달려들어 꽁꽁 묶어 압송했다. 뒤늦게 용기가 생긴 듯했다.
라비나가 목을 문지르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바센이 다가왔다.
"괜찮나?"
"의외군요."
"의외라니?"
"저는 리자드맨이라면 제 힘을 믿고 달려들 줄 알았거든요."
바센은 라비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인질이었던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시조이신 라크락 님의 지혜지."
"'되도록' 대화로 해결하라고요?"
"되도록? 아니. '일단은' 말로 해 보고 안 되면 주먹을 쓰라고."
라비나는 바센이 말로 잘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정말 액면 그대로의 말을 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말로 고단이 인질을 풀어 주면 좋은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인질이 죽으면 그대로 되돌려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질의 안위는 계산에 넣지도 않은 거군요?"
"그럼 복잡해지니까."
"복잡해진다고요?"
"그 상황에서 내가 너한테 뭘 더 할 수 있겠어? 널 걱정하면 내 마음이나 불안해지겠지. 그래서 불필요한 건 배제했을 뿐이다."
뿔이 이야기했다.
-명료하군.
그때 골목에서 검은 쇳덩이를 끌어안은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럼프였다.
─┼
"정말 다행이오! 마침 왕자님이 계셨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운이 좋았던 걸까요?"
"그렇지 않을 리 있겠소?"
럼프가 달려왔을 때, 럼프와 바센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둘이 친밀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단순히 대신과 왕족의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 카일을 경유해서 안면은 있었기 때문이다.
라비나와 바센은 럼프의 초대를 받고 마을 외각에 있는 큰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겉보기에는 관청 보다는 귀족이 지은 집처럼 보였지만 안에는 얼굴과 손에 검정 떼가 묻은 기술자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바센이 말했다.
"그나저나 들고 왔던 그 검은 쇳덩이는 뭔가?"
"아, 이건 라비나 님을 구하기 위해 들고 온 무기입니다."
"무기라고? 한번 봐도 되겠나?"
그 말에 럼프는 흔쾌히 넘겨주었다.
겉보기보다도 무게가 상당해서 바센은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바센은 철 덩어리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굉장히 무겁군. 게다가 너무 커. 여기 구멍을 파 놓은 건 무게를 줄이기 위해선가? 흠. 물론 이걸로 한 방 내려치면 아스타시디안이라고 해도 머리통이 박살 나긴 하겠지만..."
"사실 그리 쓰는 무기는 아닙니다."
"그럼?"
옆에 있던 라비나가 말했다.
"럼프 님, 이럴 게 아니라 직접 시연을 보여 주시면 좋지 않겠어요?"
"아, 그러죠. 뒷마당으로 갑시다."
뒷마당에는 지저분하게 부서진 나무판들이 놓여 있었다.
럼프가 기술자 하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자, 기술자가 건물 뒤로 사라졌다가 널찍한 나무판을 들고 나타났다.
"저게 표적이 될 겁니다."
"표적? 멀리서 쏘아 내는 무기란 말인가?"
"네."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바센이 생각하는 원거리 무기는 활이 대표적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돌을 가죽 끈에 놓고 뱅뱅 돌리다 던지는 투석, 그리고 단창을 던지는 투창 정도가 전부였다.
"화약 무기입니다."
"화약?"
"연금술사들이 만들었죠."
그 말에 바센이 뒤늦게 생각난 듯 라비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머리에 뿔이 달렸군. 인간은 보통 뿔이 없는 게 맞지?"
"참 빨리도 발견하시는군요."
럼프가 철 덩이를 나무로 만든 받침 위해 올려놓으며 말했다.
"화약은 불을 붙이면 폭발하는 가루입니다. 처음에는 나무나 대나무로 만들어 봤는데 너무 약해서 버티질 못하더군요. 항아리로 만들어도 금세 깨져 버리고."
"화약 양을 줄이면?"
"무기로 쓰기가 힘들죠. 그래서 질기고 튼튼한 강철을 쓰게 된 겁니다. ...이게 화약입니다."
럼프는 품에서 검은색 가루를 꺼내 보여 준 뒤, 철 덩이의 파인 구멍 안으로 가루를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그다음 바닥에 놓여 있던 둥글게 깎인 돌덩이를 들었다.
"이게 탄환입니다. 이게 앞으로 튕겨져 나가 쏘아지는 거죠."
"흠. 이걸로 사람을 상하게 하기에는 너무 작지 않나?"
"사람이 던질 때는 그렇겠죠. 그리고 이건 저희가 만든 '대포' 중에서 가장 작은 겁니다."
"대포라고 부르는군. 계속 하지."
럼프는 그다음 포구를 꾹꾹 눌러 대며 무언가 작업을 하더니 대포의 막힌 끄트머리에 붙은 심지에 불을 붙였다.
포구는 표적을 향해 있었다.
"이제 물러서시죠. 심지가 다 타면 발사될 겁니다."
"위험한가?"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만... 소리가 클 겁니다."
바센은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라 생각되는 라비나가 이미 멀찍이 도망쳐 버린 것을 발견하고 얌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심지가 모두 다 타들어 간 순간, 대포에서 탄환이 발사되었다.
-쾅!
대기를 울리는 소리가 나고, 표적은 물론 뒷마당의 담장도 깨진 것이 보였다.
포구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사이로 럼프가 다시 걸어왔다.
"어떻습니까?"
멍하니 서 있던 바센이 감탄했다.
"굉장하군! 마치 야천의 벼락 같은 굉음이 나지 않는가?"
뒤이어 귀를 꾹 막고 있던 라비나가 걸어 나왔다.
"훌륭하네요. 전쟁 무기로 손색이 없겠어요."
"전쟁 무기?"
바센이 되묻자 라비나가 말했다.
"해적의 수치를 타고 오신 거 맞죠? 어떤 물건을 실어야 된다는 이유로 여기서 계획에 없던 정박을 하시게 됐고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이것 때문이니까요."
라비나는 앞을 가리는 연기를 손부채로 지워 내며 말했다.
"그 물건이 이 대포예요. 해적들을 잡을 무기죠."
099화
'파괴력은 굉장하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전투를 바꿀 수 있지?'
바센 라크 오라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화약을 넣은 다음 포알을 넣고, 나무 막대를 꽂아 다듬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대포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선 시간이 들어. 혼란한 전쟁터에선 분명 적군 몇을 죽일 수 있지만, 그러는 사이 적들이 이미 도달해 버릴 거다. 하지만...'
바센은 대포가 가진 전력을 높게 평가했다.
'하나가 아닌 많은 수의 대포라면 멀리 있는 적을 쳐부술 만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전사도, 하물며 아스타시디안은 물론 오우거라고 해도 대포알을 맞고 살아남긴 힘들어 보이는군. 기병은 또 어떻고? 달려오는 기병을 보병대에 닥치기 전에 거꾸러트릴 수 있단 것만으로 굉장한 성과다.'
다른 장점도 있었다.
'공성전에선 어떤가? 약한 성곽이라면 이 정도 크기의 대포로도 충분히 부술 수 있어. 단지 무거운 무게 때문에 이동이 힘들고, 그 때문에 원하는 장소에 대포들을 배치하는 작업을 적보다 빨리 해내느냐가 관건이군.'
하지만 휘 라비나 무엘의 말에 따르면 먼저 사용하게 되는 장소가 있었다.
'해상? 두말할 것도 없지. 화살로는 승부를 낼 수 없으니 어찌되었든 사람이 배에 올라타야 한다. 하지만 대포가 있으면 구멍을 내서 가라앉힐 수 있을지도 몰라.'
배의 구조와 강도에 대해선 정확히 아는 바가 없으므로 바센의 평가는 조심스러웠지만, 정확한 평가기도 했다.
땅 위에서라면 적은 대포를 향해 달려올 수 있지만, 바다 위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바센은 대포가 가져올 변화를 직감했다.
'전투의 풍경이 뒤바뀐다.'
─┼
사시안의 비밀 병기창, 지붕 위에 앉아 바센의 생각을 엿듣는 이가 있었다.
"저 말은 다 맞아.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지."
성운이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엘다르가 말했다.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전장식 대포도 대단하긴 하지만... 후에 등장하는 무기들에 비하면 그렇겠지요?"
"장전 속도가 너무 느리고, 발사 후에 포강을 닦아 내기도 해야 해. 무엇보다 대포가 너무 무거워. 대포 하나에 몇 사람이나 들러붙어야 하지. 정식 훈련을 받아야 하고."
"게다가 비가 오고 습해지면 쓰기 힘들잖습니까?"
"흑색 화약은 물기를 잘 머금으니까 굳어 버리지. 굳은 화약을 억지로 떼어 내려다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고."
엘다르가 말했다.
"흠, 하지만 카일은 천재고 저 럼프라는 드워프도 재주가 대단하옵니다. 어쩌면 다음 단계의 화약 무기를 만들어 낼 지도요?"
고민하던 성운이 가로저었다.
"아니. 안될 거야."
"어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당장은 저기서 만족할 테니까."
"아."
이미 대포의 등장만 하더라도, 대포를 가지지 않은 이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전술적 가치를 손에 넣은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방향의 기술 발전을 이루기보다는 이미 있는 기술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릴 것이다.
"기술을 최적화시킨다고 해서 다음 단계의 기술이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
"역시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다음 기술이 나타나기까지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긴 해. 대륙 곳곳에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이 놓여 있으니까."
"발판 말입니까?"
성운은 시스템 창을 조작했다.
"이런 거."
성운이 띄운 창에는 꽤 여러 모습을 가진 대포의 시제품들이 나와 있었다.
"아하. 적이 우리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최적화된 것 이상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려고 하겠지."
"네뷸라 님은 저들이 저희와 전쟁을 한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거의."
연금술사의 탑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었던 흑린이 뒤쳐지지 않게 만들었을 뿐, 제3 대륙의 각국에서도 이와 같은 대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흑린은 황야 지역 아래에서 황도 많이 난다. 속이 들어찬 질 좋은 나무도 북부에 있지. 게다가 초석 구매로도 있어. 휘 라비나 무엘이 화약 제조 비율을 조정해서 성능을 끌어 올리면 나머지 4개국보다는 나을 거야.'
성운이 말한 나머지 4개국은 룬다의 적과, 크람푸스의 단염, Ar1024의 금안, 장완의 만굴이었다.
성운은 위즈덤의 석면만큼은 쉽게 보지 않고 있었다.
'아주 작정을 한 것 같단 말이지.'
위즈덤은 최근 석면 내부의 소수 종족들을 강하게 압력하면서 자원을 뽑아내고 있었다.
장기적인 측면에선 각 종족 내부의 불만이 쌓이게 되므로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단기적인 측면에선 쓸모가 있다.
전쟁 물자를 확충하는 것이다.
'이제 게임은 중반부에 들어섰다고 할 만해. 계속 현재 진영을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만, 그렇게 되면 대륙 간 싸움에서 밀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성운은 위즈덤이 승부수를 띄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손을 안 써 둔 게 아니지.'
하지만 당장 급한 불은 남방 제도에 있었다.
"당분간은 지켜보자고."
─┼
며칠 뒤, 해적의 수치 선상.
티오네 이티모가 멀리 난간에 기대 있는 라비나의 등을 바라보며 바센에게 중얼거렸다.
"단장님, 저기 머리에 뿔 난 인간이 위험하진 않겠죠?"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먼저 물어봐도 되나?"
"말씀하세요."
"내가 보기에 엘프와 인간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왜 인간, 인간 하고 부르는 거지?"
"그걸 농담이라고 하세요?"
"음?"
"제가 보기에도 리자드맨이랑 프로그맨은 별 차이가 없다고요."
"아니, 그건 아니지. 일단 생긴 것부터 다르다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티오네가 자신의 길쭉한 귀를 가리켰다.
"저희도 완전 달라요."
"...아니 그건 좀."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두 종족 사이에선 자식이 안 나오죠. 그런 면에서 인간과 엘프는 리자드맨과 프로그맨만큼 다른 거예요."
바센은 리자드맨과 프로그맨은 도마뱀과 개구리만큼 다르며, 반면에 인간이 점토로 귀를 만들어 붙이면 엘프와 다름없지 않은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설명하기도 피곤한 데다 자신의 종족을 굳이 도마뱀으로 비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간단히 말했다.
"...알겠다."
"그래서 라비나 씨는요?"
"멀쩡한 사람이다. 저주받았다곤 하지만 미친 건 아냐."
"아니, 머리에 달린 뿔은 아무래도 좋고요.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잖아요."
"뭐지?"
"저 사람, 불신자잖아요?"
바센이 퉁명하게 되물었다.
"불신자가 뭐 어때서 그런가?"
"...동생분 중에 사제가 있지 않나요?"
바센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 부분은 다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해적의 수치와 군함에는 이미 대포와 화약, 그리고 해당 기술을 병사들에게 가르쳐 줄 기술대 관원들이 타고 있었다.
카일은 바센과 티오네에게 흑린의 남쪽 해안에서 군 병력과 합류하라는 밀명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 밀명을 전한 것이 바로 라비나였다.
그러니 바센은 라비나에 대한 티오네의 불만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지만 바르지 않은 생각은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티오네 이티모 선장."
"네?"
"나는 사소한 불신 정도는 누구나 겪는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불신?'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대장간에 돈을 주고 칼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려 멋진 쇠칼이 만들어졌지."
"궁에도 칼 만들 사람 정돈 있잖아요?"
"그때 나는 아주 어렸다. 위험하니 진검을 잡을 수는 없었지. 그래서 좌수관 하나를 보내서 부탁을 했던 거야."
"그래서요?"
"그런데 정작 들고 온 칼이 엉터리였던 거지. 나무를 몇 번 내리쳤을 뿐인데 날이 상하질 않나, 얼마 못 가 금이 가서 쓸 수 없게 되었다. 아무튼 시시한 일일 뿐이지만 나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신은 없는 건가, 하고 후회했지."
"몇 살이었다고요?"
"아홉 살쯤이었나?"
"......"
"그 좌수관이 형편없는 장인에게 칼을 맡겼던 게 후회스러워서 그 뒤로 되도록 남에게 일을 맡기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이게 사소한 불신이다. 사소한 일로 신이 없다고 한탄할 수는 있지만 잠깐인 거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티오네가 말했다.
"근데 그 이야기랑 라비나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라비나는 한탄할 일이 좀 많았던 것뿐이라는 말이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자신의 설득을 시원찮게 받아들이자 바센은 다소 무안했지만, 다행히 침묵은 길어지지 않았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선원이 수평선을 보며 외쳤다.
"선장님! 신원 미상의 배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돛 모양을 잘 봐! 군기는 아니야?"
"아닙니다. 속도가 빠릅니다! 이제 아래에서도 보일 겁니다."
그 말대로 수평선 멀리에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두 척이 아니었다.
"여섯? 일곱? 아니야. 그보다 많은데."
그때 배 위에서 누군가 자지러지게 놀랐다.
"야, 야분 해적단이다!"
그 말을 꺼낸 사람을 향해 티오네와 바센의 시선이 향했다.
아스타시디안 고단이었다.
해적질에 인질을 잡기까지, 법대로 따지면 목숨이 붙어 있을 수도 없지만, 바센이 예상한대로 고단은 야분 해적단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바센은 현감을 잘 타일러서 고단을 남방 제도까지 데려가기로 말했다. 현감은 그것이 죄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을 봐주기 위한 거래라고 생각하며 흔쾌히 승낙했는데, 안타깝게도 바센은 그날 저녁 궁에다 현감을 법대로 처벌해야 된다며 편지를 부쳐 두었다.
바센이 고단에게 말했다.
"뭘 보고 야분 해적단이란 거지? 그냥 해적일지도 모르지 않나?"
"배 모양을 본 적이 있습죠. 저희가 타는 배랑은 모양이 크게 다릅니다. 저놈들은 흑린이나 단염 출신의 산하 해적단이 아닌, 저 대륙에서 온 본선입니다!"
그 말에 티오네가 수평선의 배들을 자세히 살피곤, 선원들에게 본 적 있는 배인지 물었다.
정말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 모양이었다.
티오네가 말했다.
"정말인 거 같아요. 전투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음, 잘됐군."
"네?"
"아니, 혼잣말이야. 전투에는 예의 대포를 써 봤으면 하는데, 어때?"
티오네는 의심스럽게 배 위에 올라선 대포들을 바라보았다.
실제 사격을 보긴 했지만, 신무기에 대해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기에 기대를 걸어 보긴 해야겠네요. 적은 전부 열 척이니 저희 두 배가 넘으니까요."
고단이 겁에 질려서 난간 앞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난 망했다. 그냥 해적할걸."
티오네가 호쾌하게 고단의 뒤통수를 때렸다.
"멍청한 놈아, 넌 해적한다고 했으면 그전에 죽었어."
"아, 그렇지."
"저기 포 옮기는 것이나 도와라."
"옙, 누님."
바센은 고단의 호들갑이 신경 쓰이긴 했다.
다른 대륙에서 온 데다 생긴 것이 특별히 기괴하다고 불렸다.
마치 해안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딥원이란 종족과 닮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싸우기도 전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선 부닥쳐 볼 일이지.'
해적의 수치와 군함들은 도망치기보다 배를 돌려세워 최대한 많은 포들이 해적선을 향하도록 배치했다.
첫 발이 장전되자 배 위로 긴장감이 엄습했다.
해적선들이 다가오니 해적들이 저마다 약탈에 대한 기대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좋군! 네 척이나 되다니!"
"오늘은 야분 님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겠구나! 하하!"
"움직이질 않는군. 겁먹은 거냐, 땅벌레들아?"
그리고 실제 보게 된 해적단의 선원들 모습은 고단이 묘사한 것과 똑같았다.
어두운 심해에서나 살고 있을 것 같은 퉁퉁 부운 얼굴에 거무죽죽한 비늘, 그리고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는 뾰족뾰족한 이빨까지 사납고 공포스러웠다.
"조준!"
병사들이 모험단에 속해 있었으므로 전투 지휘도 단장인 바센의 몫이었다.
이 선단의 대장으로 보이는 붉은 두건을 두른 딥원이 선수에서 외쳤다.
"항복하는 놈은 고통 없이 죽여 주마!"
바센이 생각했다.
'이 거리면 충분하다.'
바센은 수기를 내렸다.
"발사!"
-쾅!
첫 번째 탄환이 쏘아지더니 붉은 두건을 두른 딥원의 머리통을 그대로 으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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