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1

르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대신들은 한쪽의 의견으로 너무 치중되어 있어. 대부분 리자드맨이니까.'
리자드맨이니 결국 리자드맨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고, 많은 리자드맨이 귀족 계급이니 귀족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이미 집단을 이루었으니 이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있다.
안평왕은 이를 쉽게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버렸지만 카일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첫 회의 때부터 날을 세우게 되면 유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신하들도 경각심을 들게 하겠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카일이었지만, 정작 형인 바센이 연관되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말했다.
"제 걱정은 알아맞히셨지만, 그 방법은 아직 말씀하시지 않으셨군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센이 답했다.
"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십시오."
"예?"
"대신들이 원한다면 그리 하란 말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전 괜찮습니다."
바센이 카일의 사랑채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오히려 제 존재가 대업을 이루려는 폐하의 발목을 잡을까 겁이 납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늘 찾아온 것입니다. 오히려 잘되었지요. 사냥을 하려고 해도 저 뒷산엔 제일 큰 것이 멧돼지 아닙니까. 아, 물론 마눈을 제외하고요."
카일은 뭔가 생각한 듯 곰곰이 탁상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사냥, 사냥이라..."
"...음?"
"형님, 기왕 도와주시는 김에 더 도와주시겠습니까?"
바센은 카일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음을 알았다.
"예, 좋습니다."
"아마, 형님께서도 그리 싫어하시진 않을 겁니다."
카일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바센은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다음날, 어전 회의.
카일이 왕좌에 앉은 가운데, 아침 일찍 시작한 회의에는 대신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카일이 왕위에 오르고 첫 회의였으므로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일은 열다섯의 소년 왕이다.
하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왕이 되기 이전에도 이미 정치적 수완을 여러 번 드러냈다.
그러니 대신들 또한 이 왕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아는 얼굴이지만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인 건 처음이로군. 당장 시급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짐이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 주었으면 한다."
어린 리자드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회관에 울렸다.
그 때문일까, 이전의 안평왕 때부터 행정대신의 자리에 앉은 살루신 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바센 왕자를 궁에 둬서는 안 됩니다."
흑린의 최고위 관료는 행정대신이었다.
그 행정대신의 자리에서 십수 년 동안 자리를 지킨 살루신 오.
그가 이 대신들을 대표하는 입이라는 건 카일도 잘 알고 있었다.
살루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바센 왕자는 한때 세자였던 이. 폐하께서 바센 왕자와 절친하신 것은 알고 있으나, 바센 왕자가 궁 안에 있다면 모반을 하려는 이가 그를 말로 홀려..."
"좋다."
"...왕권을 흔들 수도 있으며, 예?"
"내 방금 행정대신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았는가?"
카일이 이렇게 쉽게 동의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살루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살루신은 안평왕 때와 같이 카일이 대신들의 권한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생각에 바센 왕자는 수도인 오라즌 밖으로 내보내고..."
"그건 싫다."
"...허나 바센 왕자가 오라즌에 남아 있게 되면."
"어허."
카일이 가볍게 왕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경은 어찌 짐의 생각을 그리 예단하는가? 형님에 대해 경들만큼이나 짐도 고민이 많았거늘."
대신들이 보기에도 카일이 바센을 내보내자는데 동의한 것은 큰 양보였다.
양보를 크게 했으면 그만큼 대신들도 내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살루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알아 두었으면 하는데, 우리나라에 아직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미개척지가 있음을 알고 있는가?"
"예."
살루신은 고개를 숙였다.
"동부 산맥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래. 여러 왕들께서 탐색을 보내었지만 산세가 너무 험하고 가팔라 중도에 그만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동부 산맥은 흑린의 황야 동쪽에 있는 산맥이었다.
하지만 몇 번인가 운 좋게 북해안과 반도의 땅 끝인 마가넨 사이를 오갔던 배가 있어서 동쪽 산맥 너머에 있는 땅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알려져 개척은 포기되었다.
흑린의 땅 안쪽에 있지만 산맥을 넘어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넘어오는 것도 없으며, 넘어 봤자 큰 이득도 없다고 생각하니 역대 왕들이 쉽게 포기했던 것이다.
카일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지금까지는 동부 산맥은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저 서쪽에 단염과 적과, 금안과 만굴, 그리고 석면까지 다섯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으니 부국 강성할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일. 동부 산맥을 개척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살루신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러니 하고 싶으신 말씀은, 바센 왕자를 동부 산맥으로 보내자는 말입니까?
"그렇다. 내가 아는 큰 형님은 뛰어난 사냥꾼이면서 훌륭한 전사다. 마눈을 찾기 위해 혼자서라도 달려갈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사내지."
살루신은 슬쩍 다른 대신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보기에 동부 산맥은 큰 가치가 없었다.
거기에 사람을 보내 봤자 엄한 고생만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는 아직 어리신 분. 듣자하니 아직도 오웬의 여행일지를 좋아하신다지. 모험에 대한 동경 덕에 형님에게 좋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는 건가?'
바센의 생각을 들어 보긴 해야겠지만, 살루신이 보기에 바센이 즐기는 사냥은 수렵대에서 잘 정비한 숲 속에서 정해진 사냥감을 잡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왕족으로 자랐으니 험한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들 또한 바센을 험지로 보낸다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이자 살루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도 좋은 생각인 듯합니다."
"그리하면 되겠나?"
"예."
"그럼 선단(船團)을 꾸려야겠구나."
"...예?"
선단, 즉 배를 무리 지어 보내겠다는 것.
지금까지 동부 산맥으로 개척을 떠난 이들은 모두 육로로 이동했으므로 살루신으로서는 선단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배 한 척을 가지고 선단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카일은 배를 무리 지어 바센에게 쥐여 주겠다는 뜻.
그런 배 무리를 운용하려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라의 재산이니 당연히 그걸 지킬 군인들도 필요할 것.
살루신과 대신들이 생각한 개척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반문하는 살루신에게 오히려 카일이 핀잔을 주었다.
"뭘 놀라는가? 지금까지 동부 산맥 개척이 실패한 것은 모두 육로로 산맥을 넘으려고 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럼 당연히 배를 타고 산맥 반대쪽으로 가면 될 일일 텐데?"
"하, 하지만 폐하. 지금은 동부 산맥 너머로 이르는 해로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냥 육로로 하시는 게..."
"그러니 그 해로를 형님이 만들러 가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흑린에 놀리는 땅이 있어야겠느냐?"
"그렇게 많은 병력이 있으면 모반의 위험도..."
"어허. 형님을 견제할 사람을 두면 될 것 아닌가. 그걸 대수로운 걱정이라고."
"하지만..."
"경은 왜 한 번 동의한 것을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서 뒤집는가? 이것은 보자... 개척을 하려면 잡다한 맹수나 야수, 괴물들을 만나겠지. 옳지, 수렵대신이 담당하라."
그러자 데아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살루신은 데아닌을 노려봤다가 이대로 물러서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카일도 만만하진 않았다.
"행정대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으니, 조금 이따 더 이야기하지. 지금 대회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살루신은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살루신과 다른 대신들은 카일이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압력만 넣으면 된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카일은 둥글둥글한 성격이었으므로 유하게 반응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카일은 첫날부터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니요?"
"들어오라."
대회관의 문이 열리고, 정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키는 리자드맨보다 작지만, 몸집은 더 컸다.
머리에는 리자드맨들이 장식 털이라고 부르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잔뜩 자랐고, 맨들맨들한 피부 아래로 두터운 지방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드워프잖아!"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저 천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호위는 뭣 하는 게냐? 저 땅딸보를 내보내지 않고?"
드워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와 카일 앞에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하신 대로 왔습니다."
살루신이 한숨을 참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폐하, 도대체, 이게 뭡니까?"
"기술대의 럼프라고 하네. 자네들이 얼굴을 몰라봐도 어쩔 수 없지. 그는 얼마 전까지 노예였으니."
"예? 이 드워프가 노예였다고요? 아니, 폐하. 저는 저자의 이름이나 지위를 물은 게 아닙니다. 왜 저 자가 이 자리에 왔냐는 겁니다."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기술대신 자리가 비지 않았나? 그래서 그를 앉힐 생각이라네."
그 말에 소수의 대신을 제외한 대신 대부분이 입에 침을 튀기며 카일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대회관에 드워프를 들이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왜 하필 드워프입니까? 드워프는 뇌룡대왕께서 흑린의 땅을 넓히실 때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불민한 종족입니다!"
저마다 떠드느라 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카일의 입에는 미소가 걸렸다.
'역시 형님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가는군.'
084화
하지만 카일은 드워프를 기술대신으로 들이는 것 또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행정대신 살루신 오가 말했다.
"지금까지 기술대신의 자리는 초대의 자올 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리자드맨들이 역임을 했사온데 이제 와서 드워프, 그것도 노예 출신이라니요?"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행정대신. 언제부터 기술대신의 자리에 종족이 중요하였나? 그대 말은 마치 기술대신에 있던 이들이 '손재주도 없으면서 리자드맨이었기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자올 님이 그런 분이었나?"
그 말에 살루신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럼 자올 님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기술대신의 자리에 앉았던 이들 모두는 종족과 무관하게 손재주가 뛰어나고 기계에 박식한 이들이 앉던 것에 동의하나?"
"예. 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살루신은 리자드맨이 관직을 이어온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카일이 더 빨랐다.
"...리자드맨이었지. 내 지금까지의 기술대신을 모두 만나 볼 수 없지만 지금까지는 리자드맨이었던 건 당대에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이가 리자드맨이었기 때문 아니겠나? 그저 이번에는 아니었던 것이지."
카일이 나서서 전대의 왕들을 모두 존중하고 나서니 살루신도 더 이상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긴 어려웠다.
"그의 능력도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직접 확인했다."
"...외람된 말씀이나, 우수관의 자리 하나를 정하는 자리에 다른 대신들의 의견도 귀담아 들으셔야 할 줄로 압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행정대신, 그대는 북극 고도에 대해 아는가?"
"...압니다."
"답해 보라."
"천구의 북극성을 지평선 기준으로 올려다 볼 때의 각도로 알고 있습니다."
"오라즌의 북극 고도가 얼마인지 아는가?"
그 말에 살루신 오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북극 고도는 위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결국 이를 통해 해가 지는 시각과 뜨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천문과 산술을 공부하는 것은 귀족의 기본 소양이니 살루신도 북극 고도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카일이 요구하는 값까지는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 중 천문대신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답하라."
"오라즌의 북극 고도는 32도 하고 반입니다."
천문대신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안심했다.
아마 이번에 천문대신이 답하지 못했다면, 저 드워프가 준비해 둔 답을 말했을 테니까.
대신들은 여기까지가 카일의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그대는 자린과 마가넨의 북극 고도도 아는가?"
"...예?"
"북해안 끝에 있는 엘프들의 도시 자린과, 저 남쪽 끝에 있는 마을 마가넨의 북극 고도를 아느냐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는 이 없는가?"
산술에 자신이 있던 천문대신도 이번에는 답하지 못했다.
자린과 마가넨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안다 하더라도 오라즌의 북극 고도 또한 외워 둔 값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럼프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소인이 답해 보겠습니다."
"답하라."
"자린의 북극 고도는 37도 하고 반이며 마가넨의 북극 고도는 30도입니다."
"어찌 그렇지?"
"북극 고도는 250리마다 1도의 차이가 납니다. 이에 1천하고 250리만큼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 자린은 5를 더하고, 5백하고 175리를 남으로 내려가야 하는 마가넨은 2하고 반을 뺀 것입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구나. 너는 여기 대신들이 답하지 못한 것에 답했구나."
그 말에 천문대신이 앞으로 나섰다.
"어찌 대신을 정하는데 한 번의 문답으로 족하려 하십니까?"
이것으로 승복할 수는 없다는 뜻.
카일은 미소를 참으며 또 질문했다.
"좋다. 원형의 논이 있다. 이 논의 지름이 열두 걸음이라면, 이 논의 넓이는 얼마겠느냐?"
천문대신은 잠깐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반지름을 거듭 곱한 것에 3을 곱하고 나온 값이 108보이니 이것을 거듭 곱한 만큼의 넓이입니다."
"럼프 자네는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대략 113보를 거듭 곱하면 됩니다."
서로 다른 답.
그 답에 대해 천문대신이 비웃었다.
"저 드워프는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 비율을 잘못 계산하였습니다."
"아닙니다. 108보가 나온 까닭은 원주율을 3으로 보았기 때문 아닙니까?"
카일이 럼프에게 물었다.
"그대는 원주율을 얼마로 보는가?"
"3보다 크고 4보다 적습니다."
"그대가 옳다."
그 말에 천문대신이 반문했다.
"하지만 폐하, 자올 님의 대수학론에선..."
"3이라고 나오지. 하지만 근래 외국에서 들여온 산술책들은 럼프가 말한 대로 3보다 크고 4보다 적은 수로 값을 들고 그 근거를 수식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대는 산술 공부를 게을리 하나 보군."
이후 몇 번의 문답이 이어졌지만 천문대신이 오래된 수학 지식 때문에 근소하게 틀리거나, 럼프보다 늦게 답했다.
천문대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소신이 소국의 학문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그럼 노력해 공부하면 될 일. 경은 부끄러워하지 말라."
분위기가 침잠한 가운데, 카일이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럼 이야기가 일단락된 것인가?"
"아닙니다, 폐하."
반대하고 나선 것은 역시나 행정대신 살루신이었다.
"이 자가 유별나게 학식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노예 출신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알아보니 럼프의 아버지는 단염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오라즌의 전 기술대신 집 노예였다더군. 아버지는 떠나 버리고 어미 혼자 럼프를 키웠는데 손재주가 뛰어나 전 기술대신이 이리저리 잔심부름을 하느라 궁을 들락거렸다는 거야. 덕분에 정식 공부는 한 적 없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만으로도 기술대 관료들과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으니 어찌 노예인 것만 꼬집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나?"
살루신이 가로저었다.
그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다.
기술대는 말석인 수렵대의 겨우 다음 자리.
궁에서 필요로 하는 잡다한 도구나 기계를 만드는 것으로, 구성원도 대부분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장인들이다.
살루신을 비롯한 귀족 리자드맨들이 양보하라면 못 할 것도 없는 자리긴 하다.
하지만 오늘은 첫 어전 회의였고, 이 작은 양보가 앞으로의 국론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임을 살루신은 직감했다.
"안 됩니다."
"이 자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예."
살루신이 말했다.
"이 드워프가 천하다는 것은 그리 쉽게 논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폐하가 폐하인 것은 위대한 뇌룡대왕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며, 여기 대신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분과 함께 싸운 전사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드워프가 노예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드워프는 이 흑린에서 최후까지 리자드맨의 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나라가 세워지고 난 뒤에도 난을 일으킬 궁리를 했었지요. 이 드워프는 그런 종족의 후손인 겁니다."
그 말에 대신들이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피를 이어서 이 자리에 있다는 논리이니, 카일이 드워프를 여기 두고 싶다면 왕족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일은 그 주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장은 수사법이 중요했다.
"그대는 애민을 모르는가? 과거에 전사 타타르는 하프빈을 구하기 위해 트롤 열과 싸웠고, 뇌룡대왕께선 성문을 열었다. 그가 유별나게 특별하다면 왜 예외를 두지 못하겠는가?"
"한 번 예외를 두면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리자드맨이 아니어도 대신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빈번해지면, 폐하의 곁에 누가 있겠습니까?"
카일은 생각했다.
'리자드맨이 아닌 자들이 있겠지.'
카일이야 리자드맨만이 일을 잘한다는 것에 의문이 있었으며,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중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살루신의 의견은 궁의 살림을 보살피는 좌수관들에게 상당히 무례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족 리자드맨들에겐 동하는 구석이 있었는지 모두가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폐하, 통촉해 주시옵소서!"
"통촉해 주시옵소서!"
카일은 못마땅해 하는 얼굴을 드러내고 말했다.
"그럼 좋다. 내 이번 일은 장고할 시간이 있어야겠구나. 우선은 럼프를 기술대 관료로 앉히려 하는데 여기에도 반대하느냐?"
카일이 양보하자 대신들도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서로 눈을 맞추며 의견을 교환했다.
애초에 기술대는 한직인데다 장인들만 앉는 승진이 어려운 자리.
대신들의 생각에 카일이 쉽게 포기하는 것으로 봐선 본래 속내 또한 드워프를 느닷없이 대신의 자리에 앉히는 게 아니라 적당히 좋은 관직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판단을 내린 것은 살루신이었다.
"아닙니다, 폐하. 기술대는 본래 장인들이 있는 곳이니 그리 재주 있는 자라면 뜻대로 중용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럼 럼프 그대도 그리 알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예, 폐하."
그리고 카일은 곧장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다가오는 일식례에 대해서인데..."
그날 회의에 대신들이 만만하게 보고 넘어갈 안건은 하나도 없었다.
─┼
안평왕의 둘째 왕자 슌 라크 오라즌은 오라즌의 야천교 신전, 넓은 마루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예불을 올리는 시간에는 사제들과 함께 각지에서 올라온 야천교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가득 차는 곳이지만, 지금 같은 한밤중에는 아무도 없는 게 일반적이었다.
평소라면 슌도 잠이 들 시각이지만 지금 슌에겐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
일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식 자체야 그것이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는 이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슌 또한 일식이란 달이 태양을 잠깐 가리는 현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식은 큰 천문 현상이기 때문에 기록도 확실히 남아 있고, 그것을 근거로 계산을 해서 언제 어디에서 일식이 일어나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일식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한 지식을 모두가 갖출 수는 없다.
지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일식은 대낮에도 느닷없이 어두워지는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단순하게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면 다행이지만, 누군가는 확대 해석하기 마련이다.
일식은 신과 관련된 징조나 계시, 또는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고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특히나 야천을 믿는 이들에겐 질서가 어그러지는 것처럼 보이니까.'
심지어 누군가는 일식을 핑계 대고 나라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야천교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천문 현상을 관측해 오고, 백성들에게 예고해 왔다.
야천교의 사제들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려 주고, 그것은 야천의 의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 주는 것만으로 평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천교에서 천문 관측과 그 예보는 정확해야 한다.'
야천교의 천문 관측이 틀리면 백성들의 야천에 대한 믿음도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야천교는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지식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궁과 함께 이러한 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슌은 사제치고 어린 나이이지만 왕족이라는 출신 덕분에 이번 일식을 예보하는 일종의 의식인 '일식례(日食禮)'를 주관하고 있었다.
궁과 야천교가 함께 치르는 행사이니 교단은 그의 출신 성분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식례를 주관하는 사제는 야천교의 역법 사제들과 궁의 천문대 관료들, 그리고 왕이 내놓은 세 개의 값 중 옳다고 생각하는 값을 결정해서 그 시간에 일식례를 열면 되었다.
그리고 그 세 개의 일식 예고 시간은 같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다르지?'
야천교의 역법 사제들이 내놓은 시간과, 천문대의 관료들이 내놓은 시간.
이 두 개의 값은 같았다.
하지만 왕인 카일 라크 오라즌이 내놓은 값만은 다른 두 집단에서 내놓은 예고보다 네 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085화
슌 라크 오라즌은 고민에 빠졌다.
'카일이 틀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본래라면 왕은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예고 시간 중 둘 중 하나를 따르는 것이 관례.
그건 지금까지의 왕들이 천문에 그토록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특한 카일은 저 스스로 계산을 했고, 그 때문에 틀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일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몰랐을 리는 없어.'
슌은 자신의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맏형인 바센보다도 더 빨리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슌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야천교의 사제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쩌면...'
슌은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계산 모두 수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결과.
반면에 카일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혼자 맞는 답을 내놓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일 혼자 옳은 답을 내놓은 것이라면?'
일식례의 시간이 틀리면 벌을 받게 되지만, 슌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어차피 왕족인 만큼 유야무야 넘어갈 것임을 알고 있기도 했다.
'권력 남용인가? 그게 뭐 어쨌다고. 사실상 나는 다른 사람의 매를 대신 맞아 준 것 아닌가?'
슌은 카일이 예고한 시간에 일식례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궁에 혼돈을 가져왔다.
─┼
일식례 당일.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일식 예고 시간으로부터 두 시간 전, 카일의 일식 예고 시간으로부터 여섯 시간 전.
궁 한쪽에선 대신들의 급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천문대신, 말씀하시오. 그 계산이 확실한 것 맞소?"
행정대신 살루신 오의 다그침에 천문대신이 머리를 주억였다.
"저희 관원들과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그 말에도 대신들이 신통찮은 표정이자, 천문대신이 덧붙여 말했다.
"심지어 야천교 역법 사제들과도 대조해 봤습니다. 틀릴 리가 없습니다."
"확신하시오?"
"예?"
살루신은 천문대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천문대신 그 자신이 아니라, 더 멀리 있는 이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일전에 첫 어전 회의에서 그대보다 그 드워프의 학식이 더 뛰어났소. 그리고 폐하께선 정답과 오답을 구분할 정도로 명민하셨지. 그런데도 확신할 수 있는 거요?"
"그건..."
"대답 잘하시오. 그 대답에 우리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니."
천문학자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곧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제가 옳습니다."
살루신은 천문대신의 눈에서 정치적 판단이 아닌 학자의 자신감을 읽어 냈다.
"좋소. 그럼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슌 라크 오라즌은 카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살루신은 달랐다.
살루신은 카일이 둘 중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과 다른 일식 예고 시간을 내놓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폐하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 대국의 학자들 모두가 틀렸는데 폐하 혼자 옳을 수는 없다.'
그러니 살루신이 생각하는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이건... 일종의 기 싸움이라고 봐야겠지.'
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 알력은 라크락이 죽은 이후 끝없이 이어져 왔다.
어쩌면 라크락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살루신은 생각했다.
'뇌룡대왕 같은 분이 엉뚱한 시각을 가리켜 일식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신하들은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뇌룡대왕이 예고한 시간에 맞춰 일식례를 준비할 것이다.'
그 뒤에 일식례가 일식 시간에 맞춰서 열리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히 왕 혼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식례를 주재하는 곳은 야천교이지만 천문대신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도 이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
왕에겐 허물이 있어도 죄가 되지 않지만, 대신들은 달랐다.
제대로 일식례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빌미로 국법을 운운하며 대신들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는 뇌룡대왕이 아니다.'
카일은 라크락처럼 힘이 세지도, 라크락처럼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도, 라크락처럼 존경을 받지도 않았다.
첫째인 바센 라크 오라즌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것은 눈여겨볼 만하지만, 이제 와서는 카일이 유난히 뛰어나기보다 바센이 유난히 세자답지 못했던 것이 문제.
적어도 살루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희를 벌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폐하.'
살루신과 천문대신, 그리고 여러 대신들은 카일을 찾아갔다.
그리곤 카일이 예고한 시간에서 네 시간 당겨 일식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일이 말했다.
"...경들의 말은 알겠다. 그대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시간은 늦지 않겠나?"
살루신은 카일이 순순히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예. 어전 회의도 파하고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일식례이니, 정시에 열 수 있을 겁니다."
"후, 좋다. 그럼 행정대신 그대가 천문대신과 함께 일식례를 준비하라."
살루신 오는 미소를 숨기곤 자리에서 나섰다.
─┼
"기존보다 네 시간 이르게 말인가?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이 정한 시간으로?"
슌이 질문하자 살루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슌은 그것 또한 카일에게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곤 살루신이 말하는 대로 네 시간 빨리 일식례 준비를 끝냈다.
오라즌 궁 앞, 일식례 한 시간 전.
악기들이 연주되고 야천교 사제들과 슌이 장내에서 정해진 기도문을 읽어 가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살루신은 다른 대신들과 함께 자리에 섰다.
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왕이 단상에 오르는데, 그 단상을 정확히 마주볼 수 있는 자리였다.
'머리를 꽤나 쓰셨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이겼습니다.'
지루한 행사지만, 살루신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똑똑하고 명민한 것으로 알려진 왕자였지만, 그래 봤자 열다섯.
어린아이라는 한계를 벗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전 폐하도 그렇고, 이번에도 쉽게 넘어가겠군.'
그리고 일식이 예고된 정시.
카일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카일은 단상 위에서 대신들과 백성들을 슥 훑어보니, 마지막에 살루신을 바라보았다.
살루신 또한 카일과 눈을 맞추었다.
'표정을 숨기는 재주는 뛰어나시군. 하지만 속이 끓어서 어찌하시렵니까?'
살루신은 눈웃음을 참기 위해 몇 번이나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백성들이 하늘을 보고 웅성거렸다.
살루신도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구름이 껴 있긴 하지만, 해가 말갛게 보였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단상 위에 있던 카일은 지루한 듯 등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한숨을 쉬었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군. 담당 사제가 여기 있나?"
슌이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예, 폐하."
"아무래도 일식 시간이 잘못된 것 같으니 다시 알아보시오. 지금 일식례는 폐해야겠군."
"알겠습니다."
그 말에 천문대신이 앞으로 나가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폐하! 소인을 벌하시옵소서!"
"어찌 된 일인가?"
"저희 천문대가 일식 시간을 잘못 계산한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 말에 천문대신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모르, 모르겠습니다."
"그럼 짐이 알려 주겠다."
카일이 단상 위에서 말했다.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 모두 오래된 산술과 천문 서책에 기대어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짐도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럼프라는 드워프가 이것을 발견하고 알려 주었지. 짐은 스스로 못남을 창피하게 여겨 이를 다른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대들도 똑같은 허물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천문대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폐하! 뇌룡대왕님의 저서에는 '하늘은 변치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뇌룡대왕 라크락.
입에 담는 울림만으로도 흑린의 백성에게는 경외심이 생기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아니었다.
"멍청한 것. 그것이 낡은 서책 아니냐? 그분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야 어쩔 수 없지. 그분들은 그 이전까지 다른 서책을 볼 수 없었으니. 하지만 우리는 그분들이 남긴 유산에 더해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저 멀리 만굴에서 쓰인 역법책은 읽어 봤느냐? 시간이 지나면 하늘의 움직임도 바뀐다. 내 이미 단서를 주지 않았느냐?"
그 말에 천문대신이 몸을 덜덜 떨고 살루신은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놈의 드워프! 외국의 서책을 운운하신 것이...'
천문대신이 말했다.
"하오나, 폐하... 저희 흑린이 대국이고 암굴은 소국에 불과한데... 굳이 그런 지식을..."
"흑린이 아무리 대국이라 한들, 이 대륙 전체만 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느냐? 이 대륙 전체의 지식만 하겠느냔 말이다."
카일이 돌아서며 말했다.
"관련된 이들을 국법에 맞게 처벌하라. 일식례 담당 사제는 다가올 일식에 맞춰 의식을 재정비하시오."
일식이 일어난 것은 네 시간 뒤였다.
─┼
바센 라크 오라즌이 배 위에 올라서자, 선상에서 오라즌의 항구가 보였다.
'다녀 오마, 카일.'
바센이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건 카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 산맥 너머를 개척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
3년 전, 카일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 바센은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런 모험은 너무 안온한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라즌을 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섭섭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상선 '해적의 수치'에 올라탄 순간부터 바센은 모험에 대한 열의로 차올랐다.
명목상 바센은 동부 산맥 탐험단의 단장으로, 세 대의 군선에 나눠 탄 150명의 병사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군선에 타지 않는다.'
바센이 타게 되는 배는 상선인 해적의 수치였다.
해적의 수치는 흑린에 고용된 배로, 오랜 시간 궁과 거래를 해 온 이티모 가문에 속해 있었다.
바센은 군선은 비좁고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갖추기 어렵기 때문에 상선을 대장선으로 삼아 타게 되었다.
'그건 명목에 불과해. 내가 멋대로 병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독할 사람이 이 배에 타기 때문이지.'
현재로선 그 감독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센은 해적의 수치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명부를 미리 입수할 수 있었고, 후보를 가늠했다.
'첫 번째 후보는 역시...'
붉은빛이 도는 머리칼을 묶은 여자가 바센을 향해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선장인 티오네 이티모입니다."
"반갑군. 바센 라크 오라즌이다. 엘프였군."
티오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한 번에 알아보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매번 인간이나 엘프나 닉스나 하프빈이나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리자드맨만 봤는데."
"하프빈이랑? 그치들은 아무리 커도 내 허리 반절 밖에 안 오는데."
"웬걸요. 드워프랑 엘프랑 헷갈리는 사람도 있는데요."
"음. 그래도 이해는 해줘야지. 인간 중엔 드워프 같은 사람이랑 하프빈 같은 사람도 있는걸."
"그래도 절 보고 착각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오네 이티모는 엘프 치고도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앞으로 계속 보게 될 텐데, 잘 부탁하지."
"좋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요."
"말하게."
티오네가 헛기침을 말하며 말했다.
"아무리 귀하신 분이라 하더라도 제 배 위에선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이것을 따르시지 않을 거라면, 배에서 내리시고 다른 배를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바센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지만 않는다면야. 이 정도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
바센이 생각보다 별다른 불만 없이 승낙하자 티오네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되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외에는 이번 탐험단의 단장이신 데다, 제 배에 탄 손님이니, 최대한 배려해 드리죠."
"고맙군. 근데 내 짐은 아직 안 왔나?"
"아, 짐은 혜사가 들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혜사? 예쁜 이름이군."
티오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름? 이름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근데 그것 말고 달리 부르진 않으니 이름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긴 하겠습니다."
바센이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티오네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바센이 시선을 따라가자 키 3미터의 웅대한 체격을 갖춘 오우거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1등 황훼사를 불럿나?"
086화
바센은 반사적으로 칼집에 손이 갔지만, 갑판 위의 사람들 모두 아무렇지도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고 칼을 뽑지는 않았다.
티오네 이티모가 말했다.
"오우거를 처음 보시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 보면 칼을 뽑을 생각은커녕 자지러질 테니까요."
"보기보단 험하게 자랐지."
"이쪽은 저희 배의 1등 항해사예요."
바센은 허리를 펴고 훼사에게 말했다.
"반갑군, 오우거. 나는 바센 라크 오라즌이다."
"반갑다, 도마뱀."
바센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우거에게 종족을 구분당하는 것조차 신선했다.
바센이 아는 오우거는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훼사가 말했다.
"나, 나는 1등 황훼사다."
"이름은 없나?"
"이름, 있었다. 하지만 나 1등 황훼사, 맘에 들지 아나서, 버렷다."
그럼 1등 항해사가 이름이지 않느냐 말하려 했지만, 티오네가 눈짓을 줘서 그만두었다.
"오우거가 배를 타는 건 처음 보는군.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글케 생각하나, 도마뱀? 너, 너는 배를 처음 타지 안나? 뱃닐하는 오우거도 처음, 아닌가?"
예상외의 논리에 당황했지만, 바센도 생각 없이 던진 말은 아니었다.
"배는 식료품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적게 먹는 종족이 유리하지 않겠어?"
"마따. 작은 친구, 여럿이따. 하지만 1등 황훼사, 먹는만큼, 이란다."
"배는 나무로 만들잖아. 배가 상하거나 하진 않을까?"
"배, 튼튼하다. 그리고 1등 황훼사, 조심조심 건는다."
티오네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보여도 훼사는 북해안 자린 출신이에요."
"아하."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린은 흑린의 주요 대도시 중 한 곳이면서 엘프들이 모여 사는 종주 도시였다.
하지만 자린은 그 외에도 특징이 있었다.
자린 출신 오우거들은 예외 없이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대략 150년 전, 북해안의 오우거들에겐 신이 있었고, 그 신은 오우거를 똑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면 좋았겠지만.'
그들 중 가장 똑똑한 오우거 왕은 북해안에서 고블린과 엘프, 그리고 켄타우르스를 다스리며 흑린을 위협하였는데 위대한 라크락이 이들을 물리치고 공평한 흑린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이후 엘프들은 북해안을 정복하면서 남은 오우거들을 물리쳤고, 떠돌이 오우거들이 시간이 지나며 흑린에 귀화한 자손들이 자린의 오우거들이란 것이다.
'과거에는 북해안의 오우거들이 더 똑똑했다고도 하지. 하지만 다른 지방의 야생 오우거들의 피가 섞이면서 덜 똑똑하게 되었다고.'
다른 나라에서는 오우거라고 하면 괴물이나 다름없고, 심지어 관군을 몰고 와 오우거 주거지를 해수 퇴치란 명목으로 사냥하기도 하지만 흑린에선 그렇지 않았다.
흑린의 경우엔 오우거라고 해도 복식을 갖춰 입고 있다면 사람으로 대우하고, 자린 출신이라면 고용하고 일꾼으로 쓰는 걸 선호했다. 밥을 좀 많이 먹긴 하지만 그만큼 일을 해 주니까.
다만 바센은 이 오우거가 무려 1등 항해사라는 고급 직종에 종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현재 흑린의 궁에서 오우거를 좌수관으로라도 쓸 수 있을까? 어렵겠지.'
훼사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1등 황훼사, 육지 버렷다."
"육지를 버렸다고? 왜?"
"육지, 더이상 1등 황훼사를 두렵게하지 몬한다. 육지의 생물, 나보다 세지 안타. 그래서 1등 황훼사, 바다 이기기 위해 배탄다."
바센은 이 오우거가 마눈을 만나 보지 못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꼭 바다를 이기길 바라지."
훼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짐을 툭 내려놓고 터벅터벅 걸어가 버렸다.
바센은 훼사가 자신의 감독관이 아니길 바랐다.
'카일은 감독관 없이 날 보내고 싶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지. 그래서 승선자 중에 몰래 감독관을 넣어 두었다고.'
비밀 감독관.
어쩌면 감독관은 명목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카일이 탐험단의 단장으로 병사를 움직일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군선 중 하나에 타게 되는 리자드맨 장군인 '알리카 율'을 통해야만 했다.
알리카 율은 그 유명한 대장군 유르의 후손.
그 후손답지 못하게 우유부단하고 강직한 구석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 때문에 배에 타게 된 것 같았다.
'혼자서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바센은 역적모의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럴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세자 자리를 놓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동생인 카일을 신뢰했기에, 무엇보다도 카일이 왕이 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제 왕의 자리에 대해선 아무런 사욕도 없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주장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 주진 않는다는 말이지.'
어찌되었든 왕이 될 수 있는 라크락의 혈통.
바센을 여전히 의심하는 이, 아니면 바센을 이용하려는 이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카일은 날 엄한 촌구석에 내던져 두는 것보다 차라리 폐쇄적인 공간에 두는 게 안전하다고 보았겠지.'
하지만 그 감독관은 언제나 자의로 바센의 의도를 평가 내릴 수 있었다.
별것 아닌 행동이 모반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가 되었든 날 죽이기 위한 빌미로 삼거나.'
바센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딱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진 않았다.
일식례 때 일어난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일 자체를 잘못한 천문대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랜 시간 행정대신의 자리에 앉았던 살루신 오까지 파직을 당하고 촌락으로 귀양을 가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나?
그 사건은 많은 대신들, 그리고 그 대신들 아래에서 일하는 신하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왕이 되고 나서도 한때 세자였던 바센을 유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카일이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다고 오판했던 대신들은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궁 내부의 암투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지. 어쩌면 날 죽이는 게 카일의 힘을 약화하는 방편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고.'
생각해 보니 꽤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다.
카일은 바센을 믿고 있지만, 감독관이 바센을 죽여 버리고 역적을 모의했었다고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죽은 자는 변명도 할 수 없다.
'생각보다 선단을 꾸리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지도.'
바센은 지금이라도 배에서 내려 카일에게 이 생각을 전하고 올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떠올릴 생각이라면 카일이 이미 생각을 해 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티오네가 말했다.
"참, 왕자님."
"...그냥 바센이라고 부르지."
"귀한 분을 그렇게 부르기는 좀..."
"아니면 단장이라고 부르거나."
"좋습니다. 단장님. 저희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 말에 바센이 티오네를 돌아보았다.
바센이 알기에 오라즌에서 내려가면 항구로 쓰는 촌락이 몇 개 있었다.
리자드맨 마을도 있고, 종주 도시급은 아니지만 특정 종족들이 모여 사는 집종촌도 있었는데 이름을 잘 알지는 못했다.
바센은 항해에 대해서라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정확히는 모르겠군. 남쪽으로 항해하다 남쪽 끝의 마가넨을 지나고, 마가넨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해안선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되는 것 아닌가?"
"전체적인 경로는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저희 다음 행선지는 '바브린'이에요."
"바브린?"
바브린이라면 바센도 알고 있었다.
이 주변에서 오라즌을 제외하면 가장 큰 항구 도시다.
다만 바센이 이 도시의 이름을 아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 아닌가?"
"네. 단염의 항구 도시죠."
"남쪽도, 동쪽도 아닌 서쪽으로 가야 되는데?"
그렇게까지 먼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염은 대륙 중앙에서 가까운 만큼 그 해안선은 오라즌으로부터 정서쪽이었다.
"저희는 상선이니까요?"
"흐음...?"
"자세한 건 출항한 뒤에 알려 드리죠. 우선 지내실 곳을 알려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참, 짐 드는 걸 도와드릴까요? 아니, 훼사가 안쪽까지 들어다 줬어야 했는데..."
"아니, 괜찮다."
바센은 짐을 두 팔로 번쩍 들었다.
오우거는 한 손으로 들었다지만 일반 장정은 혼자서는 들 엄두도 못할 무게다.
티오네가 감탄스러운 듯 바센을 바라보았다.
"앞장서지."
─┼
항해는 순조로웠다.
바센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갑판으로 나와서 뱃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티오네는 육지 사람이었고 바센은 바다에서 배를 타 본 적도 없으니 뱃멀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생각과 달리 바센에겐 뱃멀미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티오네. 배 이름이 왜 해적의 수치지?"
"아, 듣고 나면 시시해서 모르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궁금해 하느라 잠을 설치는 것보다 시시해 하는 게 낫지."
"하하. 별거 아니에요. 해적에게서 빼앗은 배거든요."
"아, 그래?"
티오네가 말했다.
"원래 해적도 어디에서 빼앗은 배였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상인들이 말하길 만든 모양이 꽤 낯설어서 꽤 멀리에서 만들어졌을 거라고 보더라고요. 기술 자체는 저희랑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신기하군."
"아무튼 배는 멀쩡한데 사연이 있는 배다 보니 값이 싸서 제가 살 수 있었죠."
바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상인이랬던가?"
"예."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된 거지?"
티오네가 왜 그걸 모르냐는 듯 당황하며 바센을 바라보았다.
"뭐지?"
"돈이 되잖아요? 흑린은 언제나 후하다고요. 특히 궁이랑 관련된 일이면요. 게다가 신뢰도 확실하죠. 상인들은 대부분 흑린이랑 일하면 착수금을 적게 받고 싶어 해요. 그래야 일 끝나고 받는 대금을 더 높게 받으니까. 어차피 돈을 못 받을 걱정은 안 하거든요."
상인들에게 신뢰받고 있다니 바센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티오네가 계속 말했다.
"이번엔 착수금도 좋게 받았어요."
"뭘 받았지?"
"흑린의 유리 공예품이요."
"그게 돈이 되나?"
바센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궁에는 유리로 만든 집기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별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 많이 깨먹어 좌수관들이 대경실색하는 걸 자주 봤기 때문에 그리 좋은 추억이 없었다.
"농담하세요? 흑린의 유리 공예는 암굴이나 금안보다도 높게 쳐준다고요. 바브린은 중간 유통을 할 뿐이죠. 사티로스 놈들이 석면이나 단리에 얼마나 비싸게 내다 파는지."
"상인 일은 어렵군."
"아뇨. 간단해요.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흑린의 유리 공예품은 흑린에서 나니까, 다른 나라보다 싸죠. 그리고 단염이나 석면이나 단리에선 유리 공예 장인이 없으니까, 그리고 가까운 암굴과 금안의 장식품보다 더 이쁘니까, 더 비싸게 팔리죠. 게다가 이 유리라는 건 쉽게 잘 깨진단 말이죠. 쓰다 보면 소모하게 되니까 자꾸 사게 되는 거예요."
"흠."
"아무튼 유리 공예품 거래는 흑린을 통해서만 거래해야 되니까 거래할 기회가 잘 없어요. 대상들이나 돌아가면서 거래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배에 가득 실을 수 있었죠."
바센은 티오네의 유리에 대한 열정을 보고서 어렸을 때 자주 깨부쉈단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티오네가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팔고 남은 돈 일부는 탐험단과 저기 보이는 세 군선의 병사들, 그리고 노잡이들을 먹이는 데 쓸 거예요. 저쪽은 군선이다 보니 자리가 많이 없어서 저희가 식료품과 물을 채워서 가져가야 되거든요. 물론 마가넨까지는 계속 상거래를 하면서 갈 거지만."
"아, 그럼 바브린에서도 또 뭔가를 사서 돌아가는 건가?"
"당연하죠! 어떻게 배를 비워서 가요?"
바센은 그럼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장인 티오네가 그렇다니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럼 궁금하군. 유리 공예품을 팔고나면 뭘 채워서 가는 거지?"
"아, 보통은 그 지역에서 비싼 물건을 사서 가거든요. 물건의 물가라는 게 그때그때 다르니까요.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더 비싸게 값을 치룰 수 있는지도 다르고."
"그렇겠지."
"그런데 궁과 정해 둔 게 있어서 채울 물건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게 뭐지?"
"어, 비밀로 하라던데... 근데 왕자님이 아니라 단장님이면 괜찮겠죠. 거래하기로 한 물건은 초석이에요. 바브린에서 사서 사시안에 팔기로 했죠."
바센은 뭔지 몰라서 되물었다.
"초석?"
"저기 만굴에서 많이 난다는데, 저도 잘은 몰라요. 농사할 때 좋다던데요? 지력을 올려 준다고."
"그래? 사시안은 리자드맨 마을이지. 평야도 넓고. 농사를 크게 지을 생각인 건가? 연초에 선택받은 자들이 땅에다 번개를 내리꽂는 거랑 비슷한 건가?"
"뇌력제요? 와, 저 어렸을 때 봤었는데. 대단하더라고요."
다만 바센은 왜 그런 물건을 비밀리에 구매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087화
살루신 오가 귀양을 떠난 뒤, 오라즌 궁 안의 많은 신하들이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재정대신 니르각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 살루신은 훌륭한 처세를 보여 주었다.
살루신은 자신만만했고 실력도 있었다.
살루신이 단순히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신하들은 물론이고 대신들이 외국의 학문을 얕잡아 봐 어두웠던 것은 사실이다.'
카일 라크 오라즌은 오래전부터 궁을 출입하는 학자들이 외국의 학문을 경시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왕이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가, 일식례가 일어나는 당일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건 역시 폐하께서 살루신을 꺾기 위해서였겠지. 살루신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 줄 다 아셨으니, 그때까지 침묵하고 계셨던 거다.'
필요하다면 언제까지고 인내할 줄 아는 현명한 왕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특히 니르각은 더 그랬다.
카일이 능력을 보여 준 지금 입단속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이전에 뱉어 놓은 말들이었다.
'젠장.'
카일이 왕이 되기 전, 정확히는 바센이 세자이던 시절 대신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센파와 카일파.
두 왕자 중 누구를 왕으로 만드느냐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센이 세자의 뜻이 없음을 보여 주고 안평왕 또한 카일에게 마음이 기울면서 흐지부지 되었으나, 살루신을 꺾기 위해 몇 년이고 인고했던 왕이라면 몇 년 전의 사건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때 니르각은 완고한 바센파였다.
카일 개인이 싫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니르각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고, 별다른 결함이 없다면 첫째 왕자가 세자인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둘째, 또는 셋째 아니면 또 다른 왕가의 핏줄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며 궁을 뒤흔들 테니까.
규칙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르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규칙은 때론 다르게 적용되기도 하는 것.
결국 카일이 왕이 되었다.
'당시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을꼬?'
살루신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근 몇몇 대신과 신하들이 카일과 대면한 뒤 과거의 치부를 드러내고 처벌을 받았다.
살루신 정도면 오히려 온화하다고 봐야 했다.
대신이란 지위를 이용해 국고에 손을 대거나 백성을 괴롭힌 이들은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숙청이라고 할 만큼 요란하진 않았다.
카일은 이미 백관들이 저지를 죄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증거까지 수집해 둔 상태였다.
다른 대신들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처벌이 끝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니르각에게도 이 조용한 바람이 불어왔다.
"니르각 어르신."
"오, 유청이구나. 무슨 일이냐?"
좌수관으로 일하는 하프빈, 유청이었다.
카일의 또래로 궁에서 놀이 상대도 되어 주어 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카일이 아끼는 좌수관 중 하나였다.
때문에 최근 대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좌수관이기도 했다.
유청이 말했다.
"폐하께서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니르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올 것이 왔군.'
니르각은 이른 저녁 무렵 카일을 찾아갔다.
"재정대신 니르각이 폐하를 뵙습니다."
"앉지."
바닥은 온돌로 따뜻한 데도 니르각에겐 차게만 느껴졌다.
"식사는 했나?"
"예? 아, 아뇨. 아직 못했습니다."
"그럼 다과라도 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청이 들어와 다과상을 내왔다.
카일이 설탕 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양이 이쁘지 않나?"
"예. 장인이 조각한 것 같군요."
"자동성에서 보내온 선물이야. 저 멀리 금안에서 설탕으로 만드는 과자라더군. 실제로 장인 대우를 받는데, 날씨가 더우면 다 녹아 버려서 그냥 설탕 덩어리가 된다더군.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모양이 이쁜 게 더 좋겠지?"
"그렇겠지요."
"어서 들지."
카일의 아이다운 모습에 니르각은 손자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웃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폐하다.'
니르각이 말했다.
"그나저나 폐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카일이 찻잔에 입을 대었다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재정대신."
"예."
"어쩌다 보니 과거 행적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니르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생각에 마땅히 잘못한 일은 없었다.
니르각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관료였다.
재정대는 특히나 국고를 관리하는 만큼 안평왕도 그의 책임 있는 의식을 높이 사서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허물을 만들어 내기도 쉽다.'
재정대신은 위험한 자리였다.
꼭 카일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다른 대신들이 함정에 빠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강경한 바센파였던 것 자체가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르각은 온 신경을 집중해 카일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카일이 말했다.
"얀파이 출신이라던데, 맞나?"
"아, 예. 폐하께서 어찌 그런 촌 동네를 아시는지..."
"이름에 성(姓)이 없는 대신들이 있기에 알아봤지."
"예. 안타깝게도 저희 가문은 변변찮은지라, 이름난 선조가 없었습니다."
니르각은 말하면서 얼굴을 살짝 숙였다.
성이 붙지 않는 이름이라는 건 신분이 천하다는 의미였다.
"아니, 그대는 성이 없어 부끄러운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왜지?"
"저희 선조들은 흑린이 세워질 때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카일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 출신들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명예를 빌려 관료가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것 아닌가? 그건 그대의 유능함이 아닌가?"
그 말에 니르각은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천민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으면서도 제 힘만으로 다른 귀족 출신 관료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궁에서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궁에서 일하는 우수관의 출신 성분은 귀족.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니르각은 늘 급급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이 오늘 그 능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니르각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짐은 재정대신이 수렵대신과도 친하게 지내면 좋겠는데."
"예?"
"수렵대신도 귀족 출신이 아니지 않은가? 둘이 생산적인 설전을 벌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감정을 앞세우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어."
니르각이 수렵대신 데아닌에게 날을 세우는 것도 그 자격지심에서 비롯되었다.
데아닌은 언제나 귀족 출신들을 오히려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니르각은 데아닌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족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니르각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예, 물론입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짐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야."
"예?"
니르각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 이게 끝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또 손주를 봤다고 들었는데..."
이후 이야기는 니르각의 집안 경조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때쯤 해서는 니르각의 긴장도 모두 풀려서 가벼운 농담까지 던질 정도였고 카일의 사랑채를 나설 때는 카일의 명으로 유청이 쥐여 준 설탕 과자까지 한 아름 안고 가게 되었다.
'폐하는 자신이 왕이 될 때 방해하려 했던 대신까지 이렇게 품으려 하시는 건가? 흑린이 참으로 귀한 사람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구나. 모두 야천의 은혜다.'
니르각은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니르각이 나간 직후 카일이 앉아 있던 사랑채의 왼쪽 미닫이문이 열렸다.
카일이 열려 있는 문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도 재정대신이 위험한 사람인 것 같나?"
"...아닙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그대도 이리 와서 맛 좀 보지."
카일의 말에 대답한 이는 주저하다가 일어나 카일의 앞에 앉았다.
비늘이 희고 눈동자가 붉은 리자드맨, 데아닌이었다.
"재정대신은 성실한 사람이야. 그대랑 사이가 조금 좋지 않다고 해서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폐하?"
데아닌의 생각에 니르각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대신이었다.
물론,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미 위험한 대신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가 되었으니 카일의 입지는 더 없이 단단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아닌 생각에 위험한 이들이 처리되었으면 이제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재정대신한테도 말했지만, 그대도 재정대신과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군."
"하지만..."
"하지만?"
카일이 실눈으로 데아닌을 보았다.
"그대는 그대가 칼춤을 즐기고 있다는 자각은 없는가?"
그 말에 데아닌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과거 카일을 왕으로 만드는 것을 돕겠다고 생각한 이후 데아닌은 카일을 위해 매진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로는 그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수렵대신은 여전히 대회관의 말석이었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마눈 관리를 핑계로 얻은 인원과 재원은 착실하게 각 대신들의 치부를 들추고 약점을 찾아내는데 사용되었다.
데아닌은 그 모든 것을 왕을 위해서라고, 카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 스스로를 위해서 아니었던가?'
사실 카일이 니르각에게 했던 말은 데아닌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니르각의 자격지심은 귀족 관료들에게 편입되기 위한 발로로 작용했고, 반면 데아닌의 자격지심은 귀족 관료들을 이기기 위한 발로로 작용했던 것이다.
데아닌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 자리는 니르각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만든 자리였구나.'
카일은 단순히 머리가 좋은 왕이 아니었다.
조숙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늙은 현자 같은 현명함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충성도 폐하께서 불어넣으신 것 아니던가. 그럼 이 칼도 폐하의 뜻대로 사용해야겠지.'
데아닌은 니르각이 사용했던 찻잔에 차를 붓고는 들이켰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재정대신과 잘 지내보도록 하지요."
"좋은 생각이군. 그대는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자꾸 궁 내부의 싸움에만 집중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주전자를 만졌다.
"차가 식었군."
"예. 시간이 오래 되었으니."
"미리 말하지 그랬나? ...유청아, 차가 식었구나."
그러자 곧장 유청이 차 주전자를 달그락거리며 가져왔다.
유청이 떠나자 카일이 데아닌의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뿔이 난 연금술사는 어찌되었지?"
"휘 라비나 무엘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닌이 차의 온기로 입술을 덥힌 뒤 말했다.
"이미 궁에 도착했을 겁니다."
088화
휘문은 좌수관 수장으로 나이는 예순 다섯, 3대에 걸친 왕을 보필한 왕가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했다.
이미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지만 꼿꼿한 허리에 위엄 있는 태도는 좌수관들은 당연하고 우수관들과 왕조차도 휘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휘문이 걸어가면 휘문의 명령을 받는 인간, 엘프, 하프빈, 닉스, 드워프, 코볼트, 프로그맨 등 갖가지 종족의 좌수관들이 뒤따르는 것은 궁의 명물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휘문은 그 소문에 걸맞지 않게 다소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휘가는 흑린에서 유명한 가문 중 하나였다.
특히나 대부분의 알려진 유력 가문이 리자드맨들의 가문인 걸 생각하면, 인간 가문이 다른 가문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건 놀라운 것이었다.
휘가의 자식 중 하나는 꾸준히 자동성의 성주이자 변경백이었으며, 가문에선 좌수관 자리를 한 번도 비운 적 없는 명가이기도 했다.
귀족인 동시에 고위 관료, 무엇보다도 휘가는 대상(隊商)의 가문이었다.
흑린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은 자동성을 거쳐야 했고, 흑린에서 다른 나라로 나가는 상인들도 그러했으니까.
휘가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가문이지만, 그 빛나는 명성만큼이나 어둠이 있기도 했다.
'저주받은 뿔.'
자동성을 크게 일으킨 것은 약 150년 전, 휘경 대의 일이었다.
그리고 휘경은 두 개의 사슴뿔이 머리 위로 자라나 있었는데, 이제 와서는 과거의 일로 치부되고 있었다.
라크락이 악신을 죽였다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전설.
심지어 휘경에게는 리자드맨 사이란 무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있고, 그 피가 휘가에 섞여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인간과 리자드맨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휘가의 뿔 문장을 뻗어 나가는 여러 종류의 힘 따위로 해석했다.
하지만 휘가의 중책을 맡는 어른들은 그 전설 중 일부가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휘가에서는 전설 속 휘경과 같이 뿔을 달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었다.
단지 그 뿔은 가문의 규칙에 따라 감춰지고 있었다.
뿔을 달고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미치광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뿔을 달고 태어난 아이들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거나, 있을 수 없는 재주를 보여 주었다.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비 화살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거나, 수십 미터에서 굴러 떨어져도 전혀 다치지 않기도 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고대의 악에서 비롯되는 힘.
휘가는 야천교의 교세가 넓어지기 전에 그 힘을 봉인하기로 했다.
다행히 봉인 방법은 간단했다.
휘가의 부모들은 뿔을 달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뿔을 주기적으로 자르고 갈아 내도록 했다.
그러면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 핏줄 중 하나가 뿔이 달려 태어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가문에선 더는 대를 잇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보류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휘경은 뿔이 가진 신비로운 힘으로 대상이 될 수 있었다지만, 그 최후가 비참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저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어쩌면 휘경이 쌓아 올린 부와 명예가 모두 고대의 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리자드맨 사이란 무엘 사이에서 자식을 태어나게 만들었다고도 믿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게 하였다고.
때문에 그 치부가 뿔 달린 아이라는 존재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휘가가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죄라고 가문의 어른들은 말하곤 했다.
다만 뿔을 달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여지없이 '무엘'이라는 이름을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무엘 방계는 휘가의 대우는 모두 받지만 언제나 자동성 깊은 곳에 갇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라면 좋았으련만...'
언제나 별종은 태어나기 마련.
휘 라비나 무엘이 바로 그런 아이였다.
겨우 아홉 살 때 성 밖으로 도망친 라비나는 대륙으로 떠나는 상단의 짐차에 올라타 떠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은 '이런 곳에 영원히 살 수 없어'였다.
라비나는 휘와 무엘 두 개의 성을 버린 뒤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사티로스 상단을 따라다니며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코볼트 도적 떼에 사로잡혀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단리의 놀 귀족에게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휘가는 라비나를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사람을 고용했다.
고용한 용병들이 라비나를 따라잡았을 무렵, 라비나는 석면에 위치한 연금술사의 탑에 조수로 들어가 있었다.
용병들은 휘가에 이 사실을 알렸고, 휘가의 어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연금술사의 탑.
산꼭대기에 돌로 거칠게 쌓아올린 성곽, 그 안으로 들어가면 창고에는 세상의 희귀한 약재와 보물들이, 도서관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학당에는 외인들에겐 지켜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금단의 지식을 가르치는 연금술사들이 있었다.
이 연금술사들이 단순히 학자라면 사람들은 이들을 기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불신자'였다.
비록 모든 이들에게 신이 나서지는 않지만, 신의 기적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신의 힘을 빌리는 사제들이야말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사람들 사이에 왈가왈부 말이 오가긴 하지만 과거에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있는 중요한 전투의 순간이라면 신의 수호자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왔고, 많은 이들은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금술사들은 뻔히 있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오로지 자신의 지식만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신을 믿는 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고대의 악에 반쯤 걸쳐 있는 불경한 존재였다.
현 자동성의 성주인 휘도영은 휘경이 연금술사의 탑에 간 것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연금술사의 탑에는 휘 라비나 무엘과 같은 저주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휘도영을 비롯한 휘가의 어른들은 더 이상 라비나를 추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연금술사의 탑은 휘가의 저주받은 뿔을 잊힐 수 있는 많지 않은 곳 중 하나인 데다, 다른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연금술사의 탑이 불신자의 무리인데도 그 자리에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정복되지 않을 만큼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석면의 트롤들조차도 몇 번인가 공격을 보냈지만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신비로운 힘으로 불길을 쏘아 대거나 사람을 녹이는 끔찍한 독액을 쏟아내 병사들을 물리쳤다.
석면에게 그들을 물리칠 힘이 없지는 않았으나, 거기에 소모되는 군사를 생각하면 그들을 그대로 두고 조공을 거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연금술사의 탑과 휘 라비나 무엘, 이 모든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잊히는 듯하였다.
'폐하께서 라비나를 찾지만 않으셨다면.'
휘문은 눈앞의 뿔 달린 여자를 바라보았다.
─┼
휘 라비나 무엘은 겉보기엔 스물 중반 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였다.
자동성 출신임을 보여 주는 검정 머리칼에 짙은 고동색 눈동자, 그리고 엘프에 비하면 짙어 보이는 피부.
같은 가문이므로 휘문의 젊은 시절과 닮은 구석도 있었다.
'저 뿔만 제외한다면.'
휘문도 자동성에서 나고 자라던 시절 저주받은 뿔을 단 라비나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지만 그녀는 뿔을 늘 깎았기 때문에 완연히 자란 뿔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라비나가 말했다.
"신기한가요?"
휘문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다. 오라즌에 있다 보면 각국의 신비로운 것을 보게 되니 그저 신기해서 본 것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뿔을 빤히 바라보곤 하니 말입니다. 일단, 이렇게 크면 쳐다볼 수밖에 없죠. 한 눈에 들어오잖아요?"
크고 거대한 한 쌍의 사슴뿔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휘문은 애써 라비나를 무시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연락을 하자마자 바로 와 줄줄은 몰랐다.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라비나가 답했다.
석면의 끝에 있는 연금술사의 탑에서 오라즌까지는 수개월이 걸리는 여행길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 길에 오를 수 없다.
라비나가 말했다.
"폐하께서 연금술사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휘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린의 왕 카일 라크 오라즌은 연금술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흑린은 석면과 달리 연금술사와 같은 불신자들에게 더 엄격한 나라였다.
불신자나 고대의 악과 관련한 지식이라면 모조리 궁으로 압수하고 처벌을 받았다.
그러니 연금술사를 찾고 싶다면 외국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연금술사들은 숨어 사는 데다, 가장 잘 알려진 연금술사의 탑은 외인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금지였다.
휘문은 카일이 연금술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에 당혹했지만, 다행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연금술사가 일반인은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연금술사의 탑에 숨겨져 있기에 설사 왕인 카일이라고 해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휘가의 누군가가 라비나의 이름을 흘렸다.
곧 카일이 저주받은 뿔과 라비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휘가의 수장이자 성주인 휘도영에게 라비나를 궁으로 부르라는 명이 전해졌다.
휘도영과 휘문, 휘가 사람들은 라비나가 그 명을 무시해 버리길 바랐지만, 놀랍게도 라비나는 그 머나먼 여행길을 거쳐 오늘 오라즌의 궁에 도착해 버렸다.
휘문이라고 해도 라비나는 같은 가문일 뿐 오늘 처음 대면하는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
오히려 궁의 살림을 책임지고 왕을 보필하는 입장에서 라비나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 의도를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대로 폐하와 대면하게 둘 수는 없다.'
금지된 지식을 탐하고 불신자인 라비나는 국법으로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라비나가 불경한 기색을 보인다면 휘문은 당장이라도 금군을 부를 생각이었다.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본론부터 말하마. 왜 온 것이냐?"
"폐하의 명이니까요."
"너는 가문을 버리고 10년을 넘게 떠돌아다녔고, 탑에 속한 인물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연금술사의 탑에 있었다. 하물며 그 어떤 신도 받들지 않는 연금술사. 무엇이 두려워 폐하의 뜻을 운운하는가?"
라비나는 그 말에 의외라는 듯이 휘문과 눈을 마주쳤다.
"예? 폐하는 두려우신 분입니다."
"그 말은 옳다. 하지만 저 멀리 석면의 땅에 사는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설마하니 오라즌으로 오지 않는다고 해서 폐하가 군대를 이끌고 널 찾아갈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면서."
라비나는 당황한 눈으로 껌뻑였다.
"아마, 폐하는 그러셨을 겁니다."
"뭐라고?"
"방법은 다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연금술사의 탑에 들어오려고 하셨을 겁니다. 그게 두려워서 제가 온 거고요."
"넌 폐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그 말에 라비나가 엉뚱한 소리를 던졌다.
"휘문 어르신은 금지된 학문에 어두우시군요."
"허어, 당연한 것을. 가문의 영광을 알고 흑린에 도리를 다할 줄 알면 어찌 그런 지식을 탐하겠나. 그리고 그게 폐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 말을 들으면 폐하께서 섭섭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말이냐?"
라비나는 자신의 옆에 놓아둔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휘문은 흠칫하며 라비나가 연금술사의 도구를 꺼내진 않는지 바라보았지만, 라비나가 꺼낸 것은 그저 편지였다.
"수년 전부터 연금술사의 탑에 날아온 편지입니다. 고대의 금지된 지식에 대한 질문이 빼곡하지요. 편지를 보내오는 위치가 꾸준히 바뀌고 있어 탑의 연금술사들은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탑 밖의 연금술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금번에 마지막 편지가 왔고 그제야 연금술사들은 이 편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두 오라즌을 거쳐서 왔더군요. 그리고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으면서 오라즌에 금지된 지식에 대해 가장 많이 알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휘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너 설마... 감히 감당하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 말아라."
"아뇨. 말해야겠습니다."
"너...!"
"폐하는 이미 흑린에서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최고의 연금술사이십니다."
휘문이 소리쳐 말했다.
"거 밖에 누구 없느냐? 금군을 불러와라!"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리자드맨 하나가 들어왔다.
인간이 보기에도 키가 작고 가느다란 체형이라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휘문, 그쯤 하거라."
카일이었다.
089화
"...폐하?"
휘문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카일에 이어 데아닌이 뒤이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데아닌이 말했다.
"폐하께서 휘 라비나 무엘을 기다리다가 서둘러 만나 보고 싶다 하여 직접 찾아왔습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곤 라비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곤 휘문에게 말했다.
"다 설명해 줄 테니, 일단 그대도 앉지."
"폐하, 이 연금술사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좌수관 그대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폐하의 안위를 살피는 건 좌수관의 일입니다."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내 안위에 문제가 생기진 않아."
"하오나..."
"일단 앉지. 데아닌 그대도 서 있지 말고 어디든 앉아."
"예."
휘문은 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나라는 자신들이 믿는 신들이 내린 축복과 기적으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꾸준히 사제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때문에 불신자들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했다.
흑린에서는 단순히 국법으로 금지하고 형벌을 내리는 정도지만, 단염과 같은 나라에선 불신자가 몰매를 맞고 죽는 일이 빈번했다.
'국법이 지엄한들 폐하를 처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대신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만들어 주는 건 어쩔 수 없어. 많은 대신들이 폐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소수는 그렇지 않아.'
휘문은 카일이 영특함을 넘어 현명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때문에 수렵대신 데아닌이 카일을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도 휘문은 동의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안평왕을 설득하는 데에 휘문의 입김이 적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폐하께서 연금술 같은 사특한 학문에 관심이 기울게 되다니. 모두 저 흰 도마뱀 짓이었구나.'
휘문은 데아닌을 노려보았는데, 데아닌은 시선을 피했다.
카일이 라비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연금술사인가 보군."
"예, 폐하."
카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휘문을 바라보았다.
"휘문 그대에게 비밀로 한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그대는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 사정을 설명해도 괜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칠 듯해서 알리지 않았어."
"...폐하. 걱정해 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연금술이라니요. 선조님들이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옛날에는 연금술 같은 학문이 없었으니 모를 일이지."
"금을 만들고 불사의 약을 만들겠단 이들입니다. 그 말의 허황됨을 모르십니까?"
"금을 만들고 불사의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잘 모르겠군. 하지만 그네들의 지식 중엔 쓸 만한 게 많아."
"하지만 연금술을 공부했다는 것만으로 국법에 위배가 됩니다. 폐하를 벌할 사람은 없겠지만 다른 대신들은 불편해하겠지요. 그 지식이 이런 위험 부담을 질 일입니까?"
살갑게 말을 받아넘기던 카일도 그 질문에는 단답했다.
"그럴 만한 일이다."
라비나가 뒤이어 말을 받았다.
"어르신, 제가 설명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휘문은 입을 꾹 닫고 라비나를 보았다.
라비나가 말했다.
"금지된 지식은 탑에서 연구만 한다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연금술사가 존재하면 탑은 인편으로 여러 물품을 보내 호의를 사고 그 연금술사의 지식을 얻곤 합니다. 그중 적과 북쪽 깊은 산속에 홀로 살아가는 연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어느 날 적과의 연금술사에게서 오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탑에서는 적과의 연금술사에게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보내 일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죠. 심부름꾼이 그 연금술사의 집을 찾아가자 겉보기로는 아무런 문제를 찾지 못했습니다. 집 자체가 숨겨져 있어서 그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거죠."
"그럼 무슨 변고가 있었던 것이냐?"
"심부름꾼은 잠긴 문을 부수고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심부름꾼은 악취를 맡을 수 있었죠. 연금술사는 죽어 있었습니다."
휘문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면 저 혼자 죽었다는 말이더냐?"
"예."
"금단의 지식 때문이더냐?"
"예."
"허어,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고대의 악 중에는 제 영혼을 팔면 힘을 준다는 것이 있던 모양이야. 그 연금술사라는 양반도 그랬던 것 아니냐?"
휘문이 또 연금술을 탓하기 전에 라비나가 말을 이었다.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혼을 팔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고였습니다. 그 연금술사는 황금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질료들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물질들이 더해지고 그게 가열되자 폭발이 일어났던 거죠. 사실, 그런 종류의 사고는 탑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하기 때문에 특별히 괴이한 일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휘문은 영혼을 판 것은 아니라는 것에는 안도했지만 그런 일이 이따금 일어나곤 한다는 이야기까지 안도할 수는 없었다.
"적과의 연금술사가 죽었다, 여기서 건질 만한 이야기가 있느냐?"
"평범한 이야기라면 아니겠지요. 하지만 연금술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릅니다."
이 말에 카일이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기에 휘문은 혼란스러워졌다.
라비나가 말했다.
"그 연금술사는 죽었지만 죽기 전에 그날 어떤 실험을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실험에 어떤 재료를 얼마나 섞을 것인지 꼼꼼하게 기록해 뒀던 겁니다. 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죽는 연금술사들이 있는 만큼 더 꼼꼼하게 적어 두었던 거지요."
"실패의 기록이 의미 있나?"
"어르신, 엄밀히 말하면 연금술사들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연금술사들이 불을 쏘아 대거나 살을 녹이는 물을 만드는 것도 휘문 님이 말한 실패의 과정에서 발견해 낸 거니까요. 그리고 적과의 연금술사가 발견해 낸 '화약'은 지금까지 연금술사들이 찾아낸 그 어떤 발견보다도 대단했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이?"
"예."
휘문은 뒤늦게 라비나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글로 적어 둘 정도로 꼼꼼한 연금술사라면 그 어떤 실험을 하던 간에 조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은...'
라비나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적과의 연금술사가 실험한 화약은 겨우 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불길이 닿아 폭발하자 화약을 감아 두고 있던 납으로 만든 작은 곽이 찢어진 뒤 날아가 연금술사의 목을 찔렀죠."
휘문이 카일을 바라보았다.
"무기인 겁니까?"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다."
휘문은 상상했다.
연금술사의 지식에 대한 것은 잘 몰랐다.
하지만 라비나는 그 가루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으며 동시에 아주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무기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비나와 카일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할 것은 자명해 보였다.
'역시나 연금술은 금단의 지식이다.'
휘문은 카일이 그 위험에 매료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폐하, 흑린은 땅은 작을지언정 그 어떤 나라보다도 지위가 높습니다. 대국임을 자신해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저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휘문."
"예?"
카일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 지식은 대단한 비밀이 아니다. 내가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흑린이 제일 먼저 연금술사를 궁으로 들인 것도 아니다. 연금술사의 탑에 있는 연금술사들은 각지에서 떠나온 저주받은 자들이지.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에 영향력을 받고 있고 그 지식을 가지고 나라로 돌아오길 원한다."
라비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선 그 연금술사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길 바라죠. 저는 여행 중에 열 번은 죽을 뻔했습니다."
데아닌이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 고용한 용병이거나 도적 떼로 분장한 현지 군인들입니다."
휘문이 데아닌에게 말했다.
"...그럼?"
"예. 폐하의 밀명을 받은 병사들이 연금술사의 탑에서부터 오라즌까지 라비나를 호위해야 했습니다. 연금술사의 탑은 이 지식 때문에 전례 없는 해체를 겪었고, 지금쯤이면 석면의 트롤들에 의해 완전히 정복됐을 겁니다."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휘문, 이 시기가 평화롭다고만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각국에 숨어든 흑린의 간자들이 긴박한 소식을 전해오고 있어.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재료들의 가격이 치솟고 비밀스런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라비나가 말했다.
"화약은 분명 연금술이지만 동시에 고대의 지식에 속하기도 합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물건 중엔 화약 비슷한 것도 있었고, 그걸 이용한 고대의 무기도 있다고 하지요."
휘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그럼 전쟁이 일어날 거란 말입니까? 무기가 있다고 해서 꼭..."
"전쟁이 일어나리란 법은 없지."
그러나 카일은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그 무기가 유난히 뛰어나다면 어찌할 테냐? 활도 잡아 본 적 없는 무지렁이가 전쟁터에서 제몫을 해내고, 배를 가라앉히고, 성벽을 무너트린다면? 이 나라엔 있고 저 나라엔 없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
휘문은 고심하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로 마음 깊이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뜻이 올바른 방향임은 머리로 알겠습니다. 소신은 그 일을 부정할 이유가 없으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그 말에 카일은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휘문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엇입니까?"
"휘문 그대가 걱정한 것도 있고, 다른 나라의 간자들을 염려해서 비밀리에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동안은 수렵대의 자금을 융통했는데 이제 그대의 허락을 받았으니..."
"...내탕금을 쓰시겠단 말이군요."
나라의 세금은 재정대에서 관리하지만 왕이 가진 개인의 자산은 좌수관이 관리했다.
일 이야기로 돌아오자 휘문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폐하의 자산임은 분명하지만 그 쓸모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을 줄로 사료되옵니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만큼의 가격으로 사용하실 지는 다 생각해 두셨는지요?"
카일은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그러니까 말이지..."
─┼
성운의 눈앞으로 창이 떠올랐다.
「알림: '흑색화약'의 제작 조건이 완료 되었습니다.」
「탄소: 숯 제조 가능함.
황산: 황산 제조 가능함.
질산칼륨: 제조 가능함(취토법), 해외('암굴') 초석 매립지 알고 있음.
흑색화약 지식: 국내('흑린')에 존재, '1'명 이상이 알고 있음(자세히보기),」
성운은 한숨을 쉬었다.
'됐다.'
발명과 발견은 인구 숫자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고 식량 생산에서 다른 나라보다 뛰어났던 흑린은 충분히 많은 인구를 근거로 여러 가지 기술들을 보완하고 결점을 고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발견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아주 잡다한 물질들을 이리저리 섞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 따위는, 그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만 해내게 된다.
'연단술, 또는 연금술.'
이런 종류의 신비 기술이 발견되는 과정은 로스트 월드에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백성들이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그런 종류의 과학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혐오하게 된다.
우선 '고대의 악'이라고 불리는 배경 자체가 이런 지식 탐구를 혐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고, 게다가 이런 힘과 지식을 가진 이들이 일반적인 백성들 위에 서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을 잘 믿는 사회일수록 신비 기술이 발견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신비 기술을 찾는다는 이유로 불신자들이 더 많은 비율이 되도록 놔두면, 플레이어의 통제력이 약화된다.
어느 빌드로 가게 되던지 일장일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어들은 주로 신을 잘 믿는 사회가 되도록 조성하는 편이었다.
과학 지식이란 건 공평하게도, 한 사람의 플레이어만 연금술사들이 모이는 장소를 조성하면, 거기서 나온 지식을 결국에는 다 같이 쓸 수 있으니까.
'그러니 석면에 만들어진 연금술사의 탑은 님비 현상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거지.'
물론 석면은 자신의 나라에서 화약이 발견된 만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얻을 수 있긴 했다.
거리가 먼 흑린은 비교적 늦게 얻을 수밖에 없는 데다가 운이 나쁘면 화약 지식을 가진 개체가 사망해서 얻는 게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성운이 '뿔'을 가진 아이, 즉 확률 조작의 마성을 가져 생존율이 높은 휘 라비나 무엘을 연금술사의 탑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성운이 만족스럽게 메시지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엘다르가 말했다.
"그나저나 카일과 라비나는 화약에 대해선 이야기하면서 '그 지식'까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090화
성운은 엘다르가 말한 '그 지식'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마법 말이지?"
"예."
연금술사가 알려진 외적인 지식은 신비 기술, 즉 연단술이나 연금술.
하지만 이 기술은 달리 말하면 '과학'이었다.
연금술사들은 과학자였고, 연금술 실험은 과학 실험이었다.
과학적 정합성에 엄밀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있다는 흠결이 있었지만 실패로부터 발돋움하는 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연금술사의 태도는 과학자의 그것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이 더 철저히 숨기는 비밀들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마성.'
이 땅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휘 라비나 무엘과 같은 존재처럼 '저주받은 자'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 설정상 이들은 고대의 악이 가졌던 힘의 잔재로 파지직처럼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거나 휘경이나 라비나처럼 핏줄로 연원되고 있었다.
각 마성은 전기나 화염, 확률이나 중력처럼 다채로운 힘과 관련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성의 정령에게 힘을 받은 이들은 이런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성은 1차원적인 힘, 그저 초능력에 불과했다.
고대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지식에 의하면 이런 초능력을 엮어 더 고차원적인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법이었다.
"마법 자체는 소수만 사용할 수 있지. 그리고 앞으로 화약과 관련한 기술 발전으로 사회 양상이 변하는 것과는 별개니까. 카일이 보기엔 마법 운운을 해 봤자 괜히 휘문을 혼란스럽게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법사는 아직 안 나왔으니까."
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하나의 대륙에서 절반 정도의 고대 유적이 파헤쳐지고 그에 따른 마법 지식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 있어야 했다.
로스트 월드에서 '마법사의 탄생'은 과학 기술로 치자면 산업 혁명과 맞먹는, 시대를 가름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마법사의 탄생이 늦어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게임이 시작되고 100년 내외로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플레이어 모두가 안정적인 플레이를 중시하다 보니 마성과 마법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겠지. ...다른 대륙에선 이미 나왔을지도.'
그나마 마성 중 하나를 종교 체계에 편입시킨 성운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선 마성 중 최소 하나는 갖추고 있어야 했으니까.
엘다르가 말했다.
"위즈덤이 유리할까요?"
"왜?"
"석면이 연금술사의 탑을 가져갔으니까요."
"음, 마법사가 등장할 확률이 제일 높긴 하지."
"걱정해야 될 부분 아닙니까?"
성운은 딴청을 피웠다.
"글쎄. 위즈덤은 자기 땅에서 제발 마법사가 안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걸."
─┼
동부 산맥 탐험단의 단장 바센 라크 오라즌과 그 모험단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선장 티오네 이티모를 태운 해적의 수치는 순항하여 바브린에 도착했다.
사티로스가 주종족인 단염이지만 항구 도시 바브린에는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오가고 있었다.
바브린 자체는 오라즌보다 작지만, 수많은 상선들이 자리한 항구만큼은 오라즌에 비견될 만했다.
갑판 위에서 바센이 티오네에게 말했다.
"배가 정말 많군."
"오라즌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니까요. 여기서 떠난 배들이 계속 서쪽으로 가서 암굴을 지나 단리까지 가죠. 그 다음으로 가는 배도 있고."
"다음?"
티오네가 뭘 물어보냐는 듯이 바센을 돌아봤다.
"서쪽 대륙이죠. 뭐겠어요?"
전설적인 이야기꾼 오웬이 결국 저 서쪽 대륙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다.
"그게 정말 존재는 하나?"
"정기적으로 오고갈 수 있는 뱃길도 없고 떠났다가 못 돌아오는 배들도 많아서 그렇지, 확실히 있긴 있죠."
"아니, 내 말은. 그냥 커다란 섬일지도 모르잖나?"
바센의 의문은 한때 나라의 중심일 수도 있었던 이가 가질 법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티오네는 그 자신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기 서쪽 대륙에선 우리들을 동쪽 대륙으로 부른다더군요."
"그럼 자신들은 뭐라고 부르지?"
"중앙 대륙이요."
"왜?"
"자신들 서쪽에 서쪽 대륙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야 저도 자신이 없지만."
바센은 턱을 쓰다듬고 말했다.
"왜 상인들은 대륙을 건너서 거래를 하지 않지? 위험하더라도 수익이 예상되면 움직이잖아."
"그 위험이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할 때만 가는 거죠."
"그렇게 위험한가?"
"단장님은 배를 많이 타 보지 않아서 모르시는 거예요. 해적이며 암초며 바람 불지 않는 해역이며 높은 파도며 바다 괴물이며 폭풍이며..."
"알겠어. 그만하지."
티오네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거래를 해야 하니 다녀오겠습니다. 배에서 편히 쉬셔도 되고 약속한 시간까지만 돌아오시면 항구에서 재미 좀 보고 오셔도 되고요."
"배는 좁아 찌뿌둥하니 좀 걸어야겠군."
바센은 수행원들과 함께 항구를 한 바퀴 돌면서 이색적인 물건을 살펴보았다.
절반 정도는 신기한 것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흑린에서 온 물건들이라 따분한 구석도 있었다.
바센이 생각해 보니,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면 여기까지 올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오라즌으로 갈 테니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별다른 기색은 없어 보이는군.'
해적의 수치에는 탐험단을 보조할 다른 사람들도 올라타 있었다.
바센은 그들 중에도 감독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는데 따로 바센을 미행하는 이는 없었다.
'하긴 그렇게 눈에 띄게 따라 붙을 리가 없지. 아니면 상부의 명령을 받고 별 관심이 없거나.'
바센이 배로 돌아가려던 찰나 과일 가게를 발견해 멈춰 섰다.
흑린에서는 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바센은 과일 장수와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럼 흑린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거요?"
"그런데?"
"그럼 해적 안 만나게 해 달라고 신에게 잘 비셔야겠군."
"해적?"
노움 과일 장수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곤란한 듯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더니 바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야분 해적단을 모른단 말이오?"
"...모르겠는데."
"참, 오라즌에서 오셨다고 했지. 바브린 주변 일대를 주름잡는 해적단이 있소. 주로 바브린을 빠져나가는 상선을 노린다더군."
"단염은 그걸 보고만 있나?"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온 워낙에 큰 해적단이라 배가 한두 척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요즘도 계속 바브린 일대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시간이 지나면 흑린의 앞바다도 위험해지지 않겠소?"
바센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단염도 결코 병사들이 약하지 않는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이런 큰 항구 도시까지 해적이 올라오게 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다.'
바센은 티오네가 초석을 사서 되팔 사시안에 가게 되면 카일에게 편지를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일이라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보라는 건 거듭 말하면 더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바센은 이 이야기를 당연히 자신이 타는 배의 선장 티오네에게도 이야기했다.
"야분 해적단이요?"
"들어 본 적 있나?"
"전혀요?"
티오네가 웃으면서 말했다.
"항구 상인들은 다 그래요. 이야깃거리를 지어내거나 부풀리는 거죠. 그래야지 사람이 자기 가게에 오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영업 전략이죠."
"그건 나도 안다. 내가 자란 오라즌도 항구 도시였으니."
"궁에서만 지냈잖아요?"
바센은 궁 밖에서 불한당들과 어울려 놀았던 시절이 더 많았다고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체면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티오네는 바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참, 그러고 보니 궁에서 되도록 물건을 많이 실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원하는 물량은 내일이 돼야 도착한다더군요."
"내일까지 기다릴 건가?"
"아뇨. 나머지 군선에 남은 분량을 실을 거예요. 저희는 먼저 출발하고요."
"그럼 군선의 호위를 못 받는데?"
"저희는 내릴 짐이 많은 데다 사시안에서 식량을 또 싣기도 해야 되니까요. 하루 정도 먼저 출발하면 오히려 시간을 아낄 수 있어요."
"하지만..."
"배 위에서 지내는 시간은 식수며 식품이며 선원들 임금까지 전부 돈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니 바센도 할 말은 없었다.
배와 관련된 일은 전적으로 티오네 이티모가 맞기로 했던 것 아닌가?
"해적과 만나지 않길 빌어야겠군."
"걱정 마세요. 저도 해적 이야길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해적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
다음날 바브린 앞바다, 수평선 위를 바라본 티오네는 비명을 질렀다.
"해, 해적이다!"
바센은 티오네 옆에서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티오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채우는 모래주머니와 당장 먹지 않을 식수와 식료품을 재빨리 버리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은 선원 개인이 각자 마련한 엉성한 병장기로 무장할 것을 명령했다.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는 모두 세 척.
바센이 봐서는 해적선이라는 확신이 없었지만, 티오네는 배 모양과 속도, 그리고 명백하게 추격해 오는 모습을 보고 해적으로 확신했다. 다른 선원들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망칠 수 있나?"
"해적의 수치는 해적선으로 쓰이기도 했어요. 비교적 가벼운 나무로 만들어진 데다 돛도 커요. 바람을 잘 받죠. ...이걸론 부족하지만."
해적선도 조건은 똑같을 터였다.
반면에 최소한의 식료품을 제외하곤 아무런 짐도 싣지 않았을 거란 점이 달랐다.
"초석은?"
"그걸 운반하기 위해서 가는 거잖아요? 그걸 다 버릴 거면 저도 차라리 뛰어내리는 게 나아요."
"그래도..."
티오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해적선은 물에 뜨기만 한다면 불필요한 구조물은 다 떼 내는 개조도 해요. 그러니 어차피 따라잡히는 거죠. 약간의 짐이라도 버리는 건 시간을 벌면서 군선들이 따라붙을 시간을 벌려는 거예요. 운이 좋으면 오늘 오전에 초석을 싣는다고 했으니 반나절 정도 밖에 차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여기서 바람만 더 세차게 불어 준다면..."
티오네는 두 손을 쥐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바센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티오네가 한쪽 눈을 뜨더니 바센을 노려보았다.
"뭐 해요? 빨리 기도 안 하고?"
바센은 한숨을 쉬고 엉성한 자세로 티오네를 따라했다.
안타깝게도 야천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성운에게 아직 해풍의 소영역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윽고 가장 작고 날렵한 해적선 하나가 해적의 수치 옆으로 따라붙었다.
해적들의 소리치는 소리가 바센에게까지 들려왔다.
"형님! 저것 보십쇼. 짐을 두둑하게 실어 배가 나가질 못 합니다요!"
"으하하하! 얘들아! 오늘 저녁엔 거나하게 마실 수 있겠구나! 하얀 거미신 님에게 기도한 보람이 있군."
"다른 놈들 오기 전에 저희가 잽싸게 올라타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기다려라. 아직은..."
말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면서 양측에서 화살이 오갔다.
하지만 해적들의 경우엔 갑판이 높아 제대로 쏠 수 없었고 지형이 유리한 해적의 수치에선 활잡이들 솜씨가 형편없었다.
'하얀 거미신? 비슷한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바센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책을 펼쳐 두고 하는 공부는 스스로도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는 자신이 있었다.
바센은 흑린이 자랑하는 각궁을 꺼내 들고 갑판 밖으로 상체를 디밀었다.
-휙!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해적 하나의 미간에 명중했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해적들이 조용해졌다.
바센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취미는 없었다.
멍하니 있던 해적의 관자놀이에 또 화살이 박혔다.
그제서야 해적들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활을 들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바센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지만, 바센은 돛대 뒤로 숨은 뒤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아스타시디안이 소리쳤다.
"배를 옆으로 붙여라! 당장 배에 올라탄다!"
추가 달린 밧줄들이 던져지더니 해적의 수치 난간을 휘감아 고정했다.
반대쪽 끝 또한 고정된 상태.
배가 기우뚱 하더니 해적들이 밧줄을 기어올랐다.
하지만 해적의 수치 위에 있던 선원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겁에 질려서만은 아니었다.
응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려던 바센 또한 잠시 갑판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어떤 놈이 작은 형님을 쏜 거냐!"
해적들이 재빨리 밧줄을 타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바센이 아닌, 크고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1등 황훼사, 해적 실타."
"...헉!"
"해적, 배에서 버린다."
오우거의 발길질 한 번에 해적 셋이 바다로 튕겨 나갔다.
091화
"오, 오우거다!"
해적들의 비명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아스타시디안이 외쳤다.
"겁먹지 마라! 그냥 선원이잖아! 오우거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화살을 쏴라!"
그 말에 화살이 일제히 훼사를 향해 쏘아졌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사격이라지만 해적들의 활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몇 대의 화살이 훼사의 몸에 박혔지만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하고 살갗에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바센 라크 오라즌은 감탄했다.
'역시 오우거는 오우거군.'
이대로 훼사가 난간에 걸린 밧줄만 떨쳐 준다면 해적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적들이 쏴 대는 화살이 문제였다.
"앗, 아얏...!"
훼사가 난간으로 나아갔으나 해적들에겐 거대한 표적에 불과했다.
화살들이 쏟아지자 훼사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우... 1등 황훼사, 아푸다..."
금세 전의를 잃은 모습에, 바센이 황당해하며 티오네 이티모에게 말했다.
"왜 저러는 거지?"
"네? 화살 맞고 멀쩡할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오우거잖나."
"오우거는 사람도 아니에요?"
티오네가 한껏 바닥에 몸을 낮춘 상태로 덧붙였다.
"뭐, 훼사는 고집은 세도 엄살이 좀 있거든요. 저 덩치에 말도 잘하는데 용기도 충만했으면 어디 가서 장군하고 있었겠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바센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적들이 승선하게 둘 수는 없지 않나?"
"그렇죠."
"훼사를 통해 잠깐이라도 시간을 끌어 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왕자님... 이 아니라 단장님이요?"
바센은 뭐 어떠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티오네가 가로저었다.
"안 되죠. 단장님 몸에 생채기라도 나면 제 목은 어떡하고요?"
"아니, 해적들이 올라타면 사람들이 멀쩡하리란 보장은 어디 있고?"
"단장님은 적어도 흑린에서 온 왕자님이라고 하면 목숨은 보장되겠죠. 저 해적들도 생각이란 걸 한다면요."
운이 좋으면 그렇게 될지도 몰랐다.
해적들은 귀한 신분을 잡으면 포로로 잡고 비싼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야 그렇다 치고 그대까지 멀쩡하리란 보장은 어딨어?"
"이때를 위해서 야천 님을 열심히 믿어 왔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
"농담이니까 정색하진 마시고요. 일단은 훼사가 있으니 사람들에게 접근하진 못할 테고..."
바센이 보기엔 안이한 판단이었다.
오우거는 훌륭한 전투원이 될 수 있지만 무적은 아니다.
그리고 오우거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면 오우거의 이점을 살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바센은 활을 매고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왜 칼을 뽑으세요?"
"저 해적선 뒤로 뛰어내릴 생각이다."
"미쳤어요?"
"배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나머지 두 배가 따라붙으면 반대쪽에서도 해적들이 올라탈 거고 오우거라고 해서 더 많은 숫자의 해적을 이길 방법은 없어. 그전에 놈들을 먼저 물리쳐야한다."
"하지만..."
"내가 화살꽂이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훼사 보고 밥값 좀 하라고 해."
바센이 그대로 배 후미로 달려 나가자 티오네가 급하게 훼사를 불렀다.
바센이 진심임을 알았던 것이다.
마침 티오네에게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훼사!"
"왜 부르나, 선장?"
"바다를 이기기 위해서 이 배를 탄 거 아냐?"
"맞다. 하지만 화살 아푸다... 훼사, 패배했다..."
티오네가 의기소침해진 훼사의 등을 때렸다.
"그럼 멀리서 공격하면 되잖아!"
"...멀리서?"
바센은 바짝 엎드리고서 배 후미에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역시나 해적들의 시선은 오우거가 사라진 중앙 쪽으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내려서는 순간 소음이 들릴 거다. 훼사는...?'
그런 생각을 했을 때 훼사가 두 팔을 번쩍 들고 난간을 향해 달렸다.
훼사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식수통이 들려 있었다.
"흡!"
허공을 날아오른 식수통은 해적선 난간을 향해 날았다.
"피해!"
"이쪽이다!"
다만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훼사의 던지는 동작이 워낙 컸기에 사람은 피할 수 있었고, 배끼리의 높이 차이에서 나오는 중력 가속도 정도로는 해적선에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깨져서 나오는 것 또한 뱃사람에겐 익숙한 물.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해적들은 훼사가 던지는 식수통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응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센은 뛰어내리면서 한 바퀴 굴렀다.
가장 뒤에 있던 해적만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응?"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바센이 몸을 일으키며 칼을 꽂아 넣자 칼날이 경추를 부러트리며 관통했다.
바센은 해적이 쓰러지는 동시에 칼을 빼내고, 등을 보이고 있는 다음 해적을 향해 다가갔다.
"형님! 오우거가 또 던집니다!"
"멍청한 놈들아! 화살을 먼저 쏘면 저놈이 던지지 못할 것 아니냐!"
"하지만 놈이 식수통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서..."
-쾅!
누적된 피해 때문에 훼사가 연달아 식수통을 내던진 자리의 해적선 갑판이 내려앉았다.
"일단 밧줄을 쥐고 올라타라!"
"혀, 형님!"
"또 뭐냐!"
"뒤, 뒤에서... 컥!"
말하던 해적의 가슴 앞으로 길쭉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해적이 쓰러지자 바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선장인가 보군."
해적선 선장인 아스타시디안 고단은 화들짝 놀랐다.
바센의 뒤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해적들이 모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남은 해적은 고단 뒤로 서 있는 셋 밖에 없었다.
"이, 이놈! ...어, 어떻게?"
"항복하겠나?"
고단은 무심코 그 제안을 받아들일 뻔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유리한 것은 아직 자신이었다.
다른 해적선 두 척이 지척에 있었던 데다, 이 상선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원이 바센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오우거는 다른 놈들에게 맡기더라도, 이놈만 제거하면 일이 수월해진다. 우리 뒤를 노린 건 영리했지만, 칼싸움이 꼭 뛰어나리란 법은 없지.'
고단은 두 집게손으로 단검을 뽑고 큰 집게를 머리 위로 올리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가재라고도 불리는 아스타시디안 특유의 집게는, 약한 부위라면 단번에 부러트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부러트리지 못하고 그저 붙잡을 수만 있어도 다른 집게손을 통해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아스타시디안이 근접 전투에 자신감을 보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죽어라!'
고단의 머리통만 한 집게가 바센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센은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더니, 꽤 멀리까지 뒤로 물러났다.
'내 집게발에 겁이 난 건가? 등만 노리는 겁쟁이답군.'
고단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며 한 발 걸어 나갔다.
"혀, 형님! 피하십쇼!"
"응?"
고단은 고개를 돌렸다.
훼사가 던진 식수통이 정면으로 얼굴에 꽂혔다.
─┼
"확실히 가재는 가재야. 저걸 맞고도 살아 있다니."
"단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지?"
"리자드맨들은 아스타시디안을 가재라고 부르면 진짜 가재는 뭐라고 부르죠?"
"...먹는 가재?"
"...먹을 수 있냐 아니냐를 진짜 가재와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걸 알면 아스타시디안들이 리자드맨들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겨우 정신을 차린 고단이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그렇다!"
그러면서 고단은 힘차게 집게를 내지르려고 했는데, 당연하게도 밧줄로 묶여 있었다.
해적선 위도 아니었다.
상선 위에 묶인 고단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고, 다른 선원들은 바쁘게 전투 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고단의 부하 셋도 고단 뒤로 묶여 있었다.
"헉, 내 배는 어딨지?"
티오네가 말했다.
"우리 선원 내려보내서 따라오게 하고 있어."
"다른 해적선도 있었을 텐데?"
"도망갔지."
"그럴 리가 없다!"
티오네가 턱짓으로 해적의 수치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느새 따라붙은 군선이 호위하고 있었다.
고단은 충격받은 듯 더듬이를 떨었다.
"우리가 빠르게 너희를 쳐부수고 나니까 다른 해적선들이 서로한테 먼저 배를 붙이라고 떠들면서 눈치를 보더라고. 우물쭈물하는 와중에 우리가 기다리던 군선들이 와 준 거고."
"크윽, 형제들이 나를 버리다니, 그럴 리 없..."
그렇게 말했지만 바센은 고단이 재빠르게 현실을 인식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다음 말을 들어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지만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누님!"
"당장 바다에 안 내버리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흑린 군선의 호위를 받는 데다가 다음 목적지가 사시안이니 거기서 법대로 처벌할 테니."
"흑린 말입니까? 흑린의 법대로 처벌하면 전 죽습니다요!"
"음, 유감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바센이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 준다면 다른 방도도 생각해 보도록 하지."
"질문?"
"나는 야분 해적단에 궁금한 게 몇 가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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