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0
'...뭐라고?'
라크락은 제사장이다.
성운, 푸른 벌레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신실한 개체이므로 성운의 뜻을 거스를 리 없었다.
다음 메시지가 떴다.
「강제로 사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아니오'를 눌렀다.
'젠장. 강신 스킬을 저항하는데 강제로 사용하면 잠깐 동안 경직이 걸려.'
일상적인 상황에선 큰 페널티가 아니다.
하지만 신을 상대하고 있는 순간에는 이보다 큰 페널티가 없었다.
癤우삤瑜쇰씪는 거체를 돌려 긴 창으로 라크락을 향해 내리꽂았다.
창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아름드리나무가 내리꽂히는 수준.
하지만 코카트리스 아낙세가 재빨리 가속하며 창날을 피했다.
창을 뽑아내면서 흙먼지가 솟았다.
아슬아슬한 모습에 성운이 손을 불끈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도망가라고!'
성운은 기적을 사용했다.
붉은 나비 떼가 라크락의 주위를 맴돌았다.
푸른 나비는 긍정의 의미니, 보색인 붉은 나비는 분명 부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라크락은 걸리적거린다는 듯 나비 떼를 헤치고 나와, 癤우삤瑜쇰씪의 얼굴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癤우삤瑜쇰씪의 눈에 정확히 화살이 닿았지만, 그렇게까지 높게 쏘아진 화살에는 힘이 많이 부족했다.
癤우삤瑜쇰씪는 한 손으로 눈을 훑어 내며, 칼을 내리쳤다.
'제길! 죽었나?'
아니었다.
아낙세가 바닥에 내리쳐진 칼날을 훌쩍 뛰어넘어 내달렸다.
라크락의 손에서 쏘아진 번개 줄기가 癤우삤瑜쇰씪의 팔을 때렸다.
외피가 검게 타올랐지만 癤우삤瑜쇰씪에게 큰 타격은 주지 못한 듯했다.
'뭐가 문제야? 가만히 있으면 이긴다는 걸 너도 알잖아. 궁으로 돌아가서 전사들과 떠들고 자올과 이야기하고 자식들 재롱을 보고 있으면 그만인데. 아직 젊잖아. 감히 왕권에 도전해 올 전사는 앞으로 수십 년은 없을 텐데.'
라크락은 거리를 두고 파지직의 힘을 빌려 癤우삤瑜쇰씪의 몸에 번개를 내리꽂는다.
'도대체 왜...'
성운은 이제라도 기적을 통해 라크락을 지원한다.
성운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걸 알면 강신 스킬을 허용해 줄지도 모르니까.
신앙을 상당히 소모하자 최초의 번개를 시작으로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癤우삤瑜쇰씪은 피뢰침이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癤우삤瑜쇰씪는 그때마다 움찔할 뿐, 역부족이다.
번개 자체는 강력하지만 癤우삤瑜쇰씪에게 명백한 타격을 주기 위해선 디바인 랭크가 필요하다.
그리고 라크락은 강신 스킬을 거부한다.
'그거냐?'
성운은 뒤늦게 라크락의 뜻을 알아차렸다.
계속해서 맴도는 라크락이 짜증나는지, 癤우삤瑜쇰씪은 드디어 활을 들었다.
거대한 화살이 라크락을 향해 쏘아졌다.
'검은 비늘 부족 전사들 중 일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부족장의 명령을 어기기도 한다고? 그래서 부족장이었던 너는 신의 뜻을 어기겠단 건가?'
또다시, 라크락은 살아남았다.
수 미터의 화살이 비탈에 직각으로 꽂혔다.
뿐만 아니라 라크락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긴 것 같았다.
'목숨 하나로 목숨 둘을 구하기 위해서? 그 망할 산수냐?'
라크락은 들리지 않는 성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라크락은 아낙세를 꽂힌 화살로 몰았다.
아낙세도 라크락의 뜻을 이해했는지 꽂힌 거대한 화살을 향해 내달렸다.
아낙세가 화살을 발판 삼아 날아올랐다.
癤우삤瑜쇰씪은 감히 필멸의 존재가 자신에게 직접 뛰어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머리를 방어하는 손은 없었다.
라크락은 창을 역수로 쥐었다.
라크락이 생각했다.
'파지직, 부탁한다.'
-...알겠다.
라크락의 창이 손에서 떠나는 순간, 휘몰아치는 전기와 함께 癤우삤瑜쇰씪의 머리로 가서 꽂혔다.
하지만 癤우삤瑜쇰씪도 신이었다.
癤우삤瑜쇰씪의 해머가 라크락과 아낙세를 후려쳤다.
─┼
『거수 사냥꾼이자 천둥 도마뱀.
최초의 선택받은 자이자 검은 비늘 부족의 대족장.
흑린의 건국왕이며 뇌룡대왕.
리자드맨의 본이자 길을 여는 자.
그 누구보다도 왕다웠던 이.
그리고 셈을 잘했다고 알려진...』
─┼
「당신의 제사장 '라크락'이 사망했습니다.」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성운은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운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괜찮다. ...제사장 사망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야. 이런 사태를 상정해서 빠르게 인간 휘경을 제사장으로 둔 거고. 경험치를 꽤 잃었지만 레벨도 1밖에 떨어지지 않았어.'
성운은 정말로 그런지 생각했다.
가슴 한 구석이 아팠다.
아닐지도 몰랐다.
「알림: 위대한 희생! 모두에게 존경받던 라크락이 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라크락의 죽음에 슬퍼합니다.」
성운은 코웃음 쳤다.
플레이어의 최고 레벨 캐릭터가 사망하면 나오는 알림으로, 플레이어 대부분이 비아냥으로 생각했다.
'...누굴 놀리나.'
성운은 가까스로 마음을 회복했다.
그렇게까지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성운에게는 사후 세계가 있으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사후 세계를 확장하다 보면 영웅이었던 라크락은 확실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성운은 라크락의 영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뭐지?'
성운의 앞에 라크락의 영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성운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상태창이 떠올랐다.
「개체 '라크락'이 사도로 등극했습니다.」
「사도 '라크락'이 신성 레벨을 획득했습니다.」
성운은 상태창을 읽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라크락이 사도가... 되었다고?'
사도(使徒).
신을 보좌하는 존재들.
신의 창조물들이 성장하거나, 드래곤과 같이 특별한 존재들이 신앙에 편입되면 '사도'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개체'가 성장을 이루면 사도가 되기도 하는데, 이를 '승천'이라고 불렀다.
사도는 독자적인 신성 레벨을 얻으며 신의 명령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신앙을 퍼트린다.
성운은 자신의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다. 상태창은 그대로였다.
'불가능해. 승천하기 위한 조건이 부족하다고.'
승천의 조건은 모두 네 가지.
해당 개체가 영웅, 즉 21레벨 이상일 것.
또한 해당 개체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을 것.
그리고 해당 개체가 신에 대한 믿음을 내면화하고 있을 것.
'이 세 가지 조건 중에 레벨은 확실히 도달했지만, 나머지는 모르겠어. 라크락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긴 했지. 하지만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는 경계가 모호해. 게다가 세 번째 조건은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지. 해당 개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얼마나 나를 믿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승천은 플레이어가 시키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무엇보다도, 네 번째 조건은 틀림없이 아니지...'
네 번째 조건, 1백만 이상의 신앙.
'내 신성 레벨인 11의 신앙 최대치는 겨우 10만이야. 사도가 등장하기 위한 신앙 최대치 1백만이 되려면 신성 레벨이 21은 돼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성운은 신앙을 확인했다.
「999998/10K」
「999997/10K」
「999996/10K」
...
빠르게 1씩 줄어들던 신앙은 곧장 차올랐다.
「10K/10K」
성운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했다.
사도를 만들기 위해 소모되는 신앙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신앙이 공급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도대체 어디에서 신앙이 온다는 거지?'
성운은 전장을 내려다봤다.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거대한 악신은 여전히 서 있다.
라크락에게 분이 쌓였는지, 그 시체 위로 또 다시 망치를 내려친다.
하지만 그 악신 앞에서 모두가 도망가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다.
산성을 빠져나가던 흑린의 리자드맨들과, 뱀파이어 노예들.
심지어 백아의 뱀파이어들마저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악신과 맞서 싸우던 라크락을 본 것은 성운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라크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크락이 무엇을 위해, 왜 악신과 맞서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라크락 덕에 살아남았고, 라크락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터였다.
라크락은 그 의지대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본이 된 셈이었다.
라크락이 옳았던 것이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겨우 이 숫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앙이 아니야.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성운은 알아차렸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는 게임이었지만, 이 세계는 아니었다.
시스템은 그저 이 세상을 게임의 형태로 유지시키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숫자로서 만들어지지 않는 마음과 신념, 믿음을 숫자로 표기하면 오류처럼 나타날 수도 있었다.
저 줄어들지 않는 신앙이 그 증거였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사도 '라크락'이 강림(降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허가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076화
강림.
플레이어의 사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플레이어를 돕는다.
그중 강림은 가장 직접적으로 플레이어를 돕는 스킬이다.
'네'를 누르려던 성운은 다시 냉철해졌다.
'라크락이 사도가 된 건 좋지만, 그냥 복수를 하겠다는 이유로 내려 보낼 수는 없어.'
성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도 라크락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뭐야?'
성운은 눈을 껌뻑였다.
'강하잖아?'
승천한 사도는 생전의 명성과 여러 호칭을 능력치와 스킬에 반영하게 된다.
'사도가 된다는 건 그야말로 이야기 속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니까.'
성운은 라크락의 강림을 허가했다.
─┼
퀘즐은 비탈 아래로 병력을 내려다 보냈다.
퀘즐 자신이 마지막이었다.
라크락의 희생 덕분에 모두가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올에게 라크락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단 사실에 마음이 미어졌다.
자올은 무던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내면을 갈무리하는 솜씨가 훌륭할 뿐.
그럼에도 퀘즐은 라크락의 최후가, 향후 리자드맨들뿐만 아니라 흑린의 모든 백성들, 어쩌면 이 대륙 전체의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률.
'지금까지 대륙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고 귀한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사라지진 않겠지. 하지만 라크락 님이 이 대륙에 남긴 거대한 흔적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퀘즐은 아쉽게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저 악신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구나.'
그때, 마치 하늘이 퀘즐의 한탄에 대답을 하는 듯, "우르릉"하고 대기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퀘즐이 고개를 들었다.
퀘즐만이 아니라 리자드맨들, 그리고 뱀파이어 노예들과 뱀파이어, 심지어 악신 癤우삤瑜쇰씪 마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보이는 마른하늘이기에 천둥이 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癤우삤瑜쇰씪는 그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癤우삤瑜쇰씪는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주춤하며 물러나더니 들고 있는 무기들을 치켜세우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공세를 취했다.
퀘즐을 포함한 필멸자들 모두가 의아하게 여겼다.
'...뭘 노리는 거지?'
악신이 바라보는 곳은 산성도 아니며, 리자드맨도, 뱀파이어 노예나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바로 그 정체가 밝혀졌다.
-콰광!
거대한 빛줄기가 내리쳤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기도 전에 癤우삤瑜쇰씪가 망치로 빛이 떨어진 자리를 내리쳤다.
이상하게도 망치는 지면에 닿지 못했다.
망치는 그대로 튕겨져 나갔고, 癤우삤瑜쇰씪의 거대한 육체가 휘청거렸다.
-너... 이놈...!
이제서야 모두의 눈에 癤우삤瑜쇰씪가 공격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이었다.
강건한 육체에 무구를 갖춘 전사였지만,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선 끊임없이 푸른 번개가 튕기고 있었고 대지는 그 힘이 닿을 때마다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분명 구분할 수 없는 먼 거리인데도 날카로운 눈매 안의 금색 눈동자가 빛났고, 머리 위로 마찬가지의 금빛 후광이 왕관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라크락!"
퀘즐이, 그리고 라크락의 희생에 구원받은 목숨들이 그 이름을 외쳤다.
라크락의 손에는 금으로 만든 아름다운 조형의 창이 들려 있었다.
癤우삤瑜쇰씪는 라크락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듯했다.
-감히, 필멸자... 주제에!
라크락은 癤우삤瑜쇰씪의 분노를 무시하고 몸을 비틀고,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굽힌다.
癤우삤瑜쇰씪가 칼을 내리쳤다.
하지만 라크락이 더 빨랐다.
라크락은 지면을 두 다리로 쳐 내며 癤우삤瑜쇰씪의 어깨로 쏘아졌다.
-쾅!
라크락의 궤적이 그 자체로 하나의 번개가 되어, 癤우삤瑜쇰씪의 어깨를 꿰뚫었다.
-...!
단순히 癤우삤瑜쇰씪를 어깨를 관통한 것이 아니다.
癤우삤瑜쇰씪의 몸에 1미터는 될 법한 새카만 구멍을 남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癤우삤瑜쇰씪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죽기 전까지 라크락은 癤우삤瑜쇰씪에게 제대로 된 상처도 남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성운은 라크락의 능력치를 알고 있었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라크락(전사 Lv.6/왕 Lv.6/사도 Lv.13)
힘 167(+d13)
지능 155(+d13)
사회성 132(+d13)
의지 287
지도력 115
속임수 82
인내 74
(...)』
제사장 레벨이 모두 사도 레벨로 전환되며 능력치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뻥튀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능력치는 현신한 癤우삤瑜쇰씪의 능력치보다 낮았다.
癤우삤瑜쇰씪의 신성 레벨은 16, 즉 거대화된 신체에서 나오는 힘을 제외하고도 d로 표기되는 신성력이 3이나 더 높다.
이것만으로는 라크락이 癤우삤瑜쇰씪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긴 해도, 이기긴 힘들 것이다.
'그래. 이 능력치는 사도가 가지게 된 힘의 일부일 뿐이야.'
사도의 진정한 힘은 스킬에 있었다.
『(...)
무구 창조: 자신만의 무구를 만들어 낸다. 무구의 레벨은 사도의 레벨과 같다.
거수 사냥꾼: 자신보다 거대한 적을 상대할 때 힘+d4.
천둥 도마뱀: 신앙을 소모해 전기 공격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자세히 보기).
첫 번째 선택받은 자: 현재 신앙 자원에 비례해 능력치가 추가 상승한다.
검은 비늘 대족장: '검은 비늘 리자드맨'을 대상으로 추가 사회성+d4.
흑린의 왕: 국가 '흑린' 출신의 사람에게 추가 사회성+d4.
길을 여는 자: '라크락'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에게 추가 사회성+d4』
라크락이 얻은 호칭들이 반영된 고유한 스킬들.
'처음에 망치를 튕겨 낼 수 있었던 건 거수 사냥꾼이란 스킬 덕분이었지.'
癤우삤瑜쇰씪는 활을 들고 다시 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관통하고 날아간, 허공의 라크락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하지만 라크락도 단순히 추락 중인 게 아니었다.
라크락이 손을 뻗자, 허공에서 금빛 활이 만들어졌다.
'무구 창조 스킬.'
라크락은 '빈 시위'를 당겼다.
'...거기에 천둥 도마뱀, 인가.'
라크락이 빈 시위를 당기자 허공의 전류들이 모이며 화살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했다.
-...죽어라!
癤우삤瑜쇰씪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라크락의 몸을 그대로 짓뭉갤 만한 크기의 화살이었다.
라크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위를 최대로 당겼다가, 놓았다.
-콰가가가광!
고압의 전기에 대기가 터져 나갈 듯한 굉음을 냈다.
활을 떠난 빛줄기가 癤우삤瑜쇰씪의 화살을 그대로 증발시켰다.
그 번개는 癤우삤瑜쇰씪의 옆구리까지 닿았다.
-...커헉!
癤우삤瑜쇰씪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내가, 갓... 신성을 얻은, 사도 따위에게...
순간 라크락의 몸이 또 번개로 변하며 癤우삤瑜쇰씪에게 쏘아졌다.
癤우삤瑜쇰씪의 신성력 또한 결코 무시 못 할 수준.
癤우삤瑜쇰씪의 창날이 달려드는 라크락을 찔렀다.
-...당할 것 같은가!
라크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癤우삤瑜쇰씪가 찔러 넣은 창대 위에서 가볍게 미끄러졌다.
라크락은 그대로 癤우삤瑜쇰씪의 창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놈!
癤우삤瑜쇰씪이 창을 거두는 순간, 라크락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어림잡아도 한 번의 도약으로 이백 미터는 넘었다.
癤우삤瑜쇰씪는 고개를 치켜들며 라크락을 올려다봤다.
'검은 비늘 대족장, 흑린의 왕, 길을 여는 자 모두 특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라크락의 사회성을 대폭 상승시키는 스킬.'
라크락이 두 손으로 창을 쥐고, 다시 일렁거리며 푸른빛으로 변했다.
'여기에 스킬 첫 번째 선택받은 자는 신앙 자원에 비례해 능력치를 추가 상승시킨다.'
라크락이 癤우삤瑜쇰씪의 미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癤우삤瑜쇰씪의 무기들 또한 빛으로 변한 라크락을 향했다.
'라크락이 얻는 신앙은, 그 자신의 사회성, 즉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하지. 라크락에 대한 기도가 쌓일수록 라크락은 강해진다.'
그리고 신화 속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모두가, 라크락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라크락! 악을 멸하소서!"
그 뜻대로, 푸른빛이 악신을 꿰뚫었다.
─┼
癤우삤瑜쇰씪의 현신이 반으로 짜갈라졌다.
악신의 시체는 곧 떠오르는 햇빛을 받자 재 가루가 되었고, 비탈을 타고 올라가는 바람에 흩어져 하늘로 사라졌다.
저 지평선에 걸친 산란된 붉은 여명에 사람들이 하나둘 라크락을 바라보았다.
비탈 가운데 선 라크락은, 작은 바위 위에 다리 하나를 올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크락의 시선은 뱀파이어와, 뱀파이어의 노예들, 그리고 자신의 전사들에게 향했다.
퀘즐은 멍하니 있다가 라크락을 향해 달렸다.
"라크락 님! 왕이시여!"
퀘즐이 달려오자, 라크락은 미소를 지었다.
퀘즐은 라크락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며 절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퀘즐.
"예, 말씀하시지요."
-난 이제 떠나야 한다.
퀘즐은 고개를 들었다.
"안 됩니다. 기껏 돌아오셨는데, 다시 가시다니요?"
-이는 하늘의 법도다.
"하지만 궁에 돌아가 마지막 인사라도 하셔야..."
-어허!
라크락이 호통 쳤다.
-너는 하늘이 우스우냐?
퀘즐은 입을 다물었다.
라크락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퀘즐은 눈물 때문에 아른거려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크락은 들고 있던 창에 癤우삤瑜쇰씪 죽이고 남은 신앙 자원을 소모했다.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적으로 그 창은 사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구가 아니라, 필멸자도 쓸 수 있는 무구가 되었다.
-이 창을 받으라.
"이건..."
라크락이 창을 내밀자, 퀘즐은 두 손으로 창을 받았다.
-흑린에 악신을 죽인 창을 남기겠다. 이는 신물이니 귀히 다루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나라의 보물로 삼고 위기가 닥칠 때 사용하겠습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라. 내 비록 떠나가도, 신의 사도로서 흑린을 지킬 것이다.
"이 땅에 라크락의 이름이 잊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퀘즐.
"예?"
라크락이 퀘즐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이미 이해했을 것이다.
그 말에 퀘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퀘즐은 물론, 알고 있었다.
라크락이 보여 준 신념은 모든 리자드맨과 흑린의 백성들에게 끝없이 회자될 터였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오웬이 라크락의 이야기를 전한다면, 퀘즐 자신은 라크락의 신념이 무엇인지 기록할 생각이었다.
라크락은 퀘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남은 일을 부탁한다.
퀘즐은 감히 목이 메여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였다.
"예, 물론, 그러겠습니다."
퀘즐이 코를 훌쩍이며 겨우 눈물을 훔쳐 냈을 때, 그 자리에 라크락은 사라지고 없었다.
─┼
137년의 시간이 지났다.
─┼
안평왕(安平王) 23년, 흑린의 오라즌.
궁 한쪽,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하는 제2 서고에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리자드맨이었다.
인간은 안뜰을 내다보다가, 리자드맨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자네 말은 이건가? 셋째 왕자님이 세자 자리를 받아야 한다고?"
077화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리자드맨 데아닌은 서고의 책장 사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제2 서고에 있는 것은 데아닌과 인간 휘문뿐이었다.
흰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늙은 여자, 휘문이 말했다.
"자네가 어처구니없는 소릴 하니 그런 것 아닌가? 지난 백 년 동안 첫째 왕자가 세자가 된 건 오랜 규칙이야."
"예외가 없진 않습니다."
"또 위험한 소릴 하는군. 다 이유가 있었어."
"이번엔 왜 아닙니까?"
휘문은 한숨을 쉬고 데아닌의 말을 고심했다.
궁 안에서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첫째 왕자인 바센은 문제가 있었다.
나이가 충분히 찼는데도 공부를 게을리 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최근엔 사냥을 배워 코카투를 타고 나가 오라즌의 시정잡배들과 산중을 나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데아닌, 많은 대신들이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물론 그렇겠죠."
반도 산골짜기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백색 비늘에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젊은 리자드맨.
데아닌은 콧김을 내뿜고 말했다.
"나랏일엔 무관심하고 나가 놀기를 좋아하는 왕이면 대신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어허."
휘문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데아닌의 말이 완전 거짓은 아니었다.
라크락이 죽고 백여 년이 지났다.
라크락의 후예가 흑린의 왕가를 이어나갔고, 뛰어난 왕들이 있긴 했지만 라크락만큼 해냈다고 평가받긴 어려웠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왕도 있었다.
휘문이 생각했다.
'감히 외람된 생각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의 안평왕께서도 그런 분이시다. 왕이 되고도 근 십년 간 치적이 없어 그저 나라를 평화롭게 했다는 별칭을 얻으셨으니.'
휘문은 이 백색의 리자드맨의 말에 크게 동감했다.
하지만 휘문은 좌수관(左手官)의 수장이었다.
좌수관은 라크락의 사후에 만들어진 직위였다.
라크락과 자올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식 밖에 없었으나 그 세 명의 자식은 더 많은 자식을 낳았다.
왕족이 늘어나면서 왕과 왕족을 보필하고 잡다한 일을 해 줄 이들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궁에 기거할 사람이 왕족과 같은 리자드맨이어서는 곤란했다.
같은 리자드맨이 궁에 기거한다면 왕족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지도 몰랐고, 이런 일이 빈번해진다면 정치적 문제가 가시화된다.
그래서 흑린의 왕가는 간단한 해법을 찾았다.
'왕가에 일손이 필요해지나 왕족과 같은 리자드맨이라면 왕가에 혼란이 커지는 것을 막기 힘들다. 따라서 이 직위를 얻기 위해선 우선 리자드맨이 아니어야만 한다.'
물론 리자드맨의 성기를 절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궁에 자식을 보내려는 이들이 있을까 하여 그것도 금지되었다.
이후 이 직위는 왕좌의 왼쪽, 내궁을 맡아 관리한다 하여 좌수관으로 명명되었다.
휘문은 좌수관을 맡는 이로서 궁의 혼란을 막고 평안을 유지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었다.
휘문이 말했다.
"안평왕께서 속병을 앓고 계신걸 알고 있겠지? 특히나 성격이 예민하신 분인데 그런 엄한 소리를 했다가는 낫고 있던 속병이 다시 도지다 못해 속이 뒤집어지실 게야."
데아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럼 역시 좌수관 상석이신 휘문 님이 미리 제 의견을 귀띔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제가 내일 첫째 왕자를 폐하고 셋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상소를 올리면 난리가 날 것 아닙니까? 폐하의 속병 관리를 위해서라도 휘문 님이 힘써 주셔야겠군요. 그럼 이만."
"자, 잠깐. 데아닌?"
휘문은 돌아서는 데아닌의 팔뚝을 잡아챌 수밖에 없었다.
이 젊은 리자드맨의 고집은 대단해서, 휘문도 근시일 내로 안평왕께 암시를 드려 보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데아닌은 그것으론 못마땅한 듯싶었지만 어쨌든 내일 상소를 올리지 않겠다고 확약을 했다.
휘문은 돌아가는 데아닌을 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목숨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현재 왕가의 대신들, 즉 우수관(右手官) 대부분은 과거 라크락 시절 전사의 후예들이다.
당시의 전사, 정확히는 전사장들은 공적을 인정받아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다만 이들 또한 문제가 있었다.
라크락의 피를 이은 왕족이 모두 우수하지는 못한 것처럼, 전사의 후예들이라고 해서 모두 전사답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전사의 후예들이니 당연히 나랏일을 보기 어려운 거 아니라는 농담도 하지만... 그 시대의 전사들은 제 힘만 믿고 싸우지 않는 지혜로운 이들이었다지.'
그럼에도 이들은 귀족의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의 직위를 대물림하고 있었다.
데아닌처럼 아무런 혈통도 이어받지 못하고, 아니. 심지어 피부가 희어 고대의 저주를 받았느니 어쨌느니 하는 편견을 받는 리자드맨이 우수관이 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수렵대신이라는 지위는 대신들 중에서도 말석에 불과하지. 행운이 많이 따르기도 했고.'
그럼에도 휘문은 노력으로 직위를 얻은 데아닌을 좋게 보았다.
그런 데아닌이 셋째 왕자를 세자로 앉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운이 좋을 경우 정치적 공세 속에서 목숨이라도 건져 귀향을 갈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소리 소문도 없이 땅에 파묻힐 터였다.
휘문은 자신의 잔잔한 마음속에 돌멩이를 던진, 아니. 어쩌면 거대한 바위를 던져 파도를 일으킨 데아닌의 말을 되새겼다.
'셋째 왕자라...'
─┼
그 시각, 셋째 왕자 카일 라크 오라즌은 자신의 선생 라뷘 퀘즈와 함께 있었다.
공부가 끝나고 머리를 식힐 겸 다과를 먹는 자리였다.
간소해 보이지만 흑린의 남쪽 대평야에서 나는 쌀을 수차 방아로 찧고 그것을 쪄서 만든 쌀떡을, 오라즌의 서쪽 계곡에서 양봉되는 벌로 만들어 낸 꿀에 찍어 먹는 별미였다.
마실 것은 저 북해안의 엘프들이 따낸 찻잎을 우려 만든 녹차였다.
라뷘이 말했다.
"좋습니다, 왕자님. 이번엔 제가 질문을 좀 하지요."
"말씀하세요."
카일은 조용히 찻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라뷘이 보기에 카일은 명석하고 머리가 좋은, 그야말로 기재였지만 어딘가 멍하고 둔한 모습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라뷘이 말했다.
"왕자님께선 이미 제1 서고에 있는 책을 모두 떼셨으니,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위해서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가장 좋아하시는 책이 뭡니까?"
카일은 약간 인상을 쓰고 라뷘을 올려다보았다.
"좋아하는 책이 너무 많아서 어려운데, 한 권만 꼽아야 합니까?"
"아뇨. 원하는 대로 말씀하시죠. 다만,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간단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일은 어렵지 않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오웬 님의 '여행일지'가 대단히 재미있죠. 제가 가 보지 못한 땅과 수많은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까요."
라뷘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이른바 '이야기꾼 오웬'은 라크락 시대에 살았고 라크락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흑린 이곳저곳에는 오웬에 대한 미담이 남아 있기 마련이었고 정과 망치를 들고 직접 비석에 글을 새겨 둔 경우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여행일지'.
오웬의 입장에서는 그저 일기에 불과했겠지만, 그 내용이 상세한 데다 오웬 자신이 워낙 여러 나라와 장소를 오갔고, 글 솜씨 또한 직접 눈앞에서 말을 하는 듯 훌륭하여 흑린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읽혔다.
오웬의 여행일지와 관련된 일화 중 유명한 것은, 이것이 미완이라는 이야기였다.
오웬은 여행일지를 9권까지 쓰고서 말년에 마지막으로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오웬은 죽었을 테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웬이 마지막으로 여행일지를 쓰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덕분에 환상의 책인 여행일지 10권을 찾고 있는데 아직까진 발견되지 않았다.
'역시 또래다운 구석도 있으시군.'
하지만 카일의 다음 말에는 라뷘의 기대가 깨졌다.
"그리고 자올 님의 '대수학론'과 '오라즌의 건축설계'요."
"흠."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자올 님 책에는 이치가 맞아떨어지는 즐거움이 있다가도,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따뜻하게 느껴져요."
"배려 말입니까?"
"예. ...제가 잘못 보았나요?"
"아닙니다."
자올은 라크락의 반려, 즉 왕비로도 잘 알려졌지만 공부를 하는 이들에겐 수학자와 건축가로서 강한 인상이 남아 있었다.
수학자로서의 자올이야 당시 수학을 집대성한 '대수학론'을 통해 알 수 있다.
라뷘이 더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건축가로서의 자올이 쓴 '오라즌의 건축설계'였다.
그 이전에 이미 자동성에 네 개의 수차 건설을 감독했던 자올은 흑린의 수도를 짓는다는 과감한 도전을 기어코 성공해 냈다.
그리고 그 설계에는 강의 치수는 물론 궁만이 아니라 오라즌에 사는 백성들에 대한 편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오라즌의 건축설계 책에는 그저 수치와 도면 밖에 없다. 그 숫자와 직선들만을 보고서 설계자의 마음을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렵다.'
카일이 계속 말했다.
"아, 라뷘 퀘즈 선생님의 선조 되시는 퀘즐 님의 '도덕'도 좋아해요."
"영광이군요. 어째서입니까?"
"음, 그건 어려운데요."
"천천히 풀어서 설명하셔도 됩니다."
퀘즐의 '도덕'은 엄밀히 말해 퀘즐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퀘즐이 라크락을 보고서 라크락이 했던 행동을 관찰하고, 라크락과 대화했던 내용을 책으로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곤 안뜰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 벌을 받지요?"
"예."
"그래서 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으로 처벌하지 않지만 나쁜 일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미운 말을 한다던가?"
라뷘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계속 말했다.
"미운 말을 한다고 누가 법을 어겼다고 벌을 주지는 않죠.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미운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시원하게 자기감정을 쏟아 내는 게 기분 좋을지도 모르는 데도요. 다들 그러진 않죠."
"왜일까요?"
"그야 미운 말을 듣는 건 기분 나쁘니까요. 미운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걸 아는 사람들이죠. 도덕이란 책에서는 그러니 앞으로도 미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요. 대체로 '라크락 님도 이러했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아무튼 그 점이 좋아요.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저도 언젠가 미운 말을 실컷 하면서 이렇게 살아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하하, 설마요."
라뷘은 어린 카일이 윤리를 이해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윤리는 왕들의 교육에서 간과되긴 하지만, 어쩌면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런 윤리 도덕적 기준이 없이, 왕의 기분대로 나라를 이끈다면 그것이야말로 패망의 지름길일 터.
'물론 퀘즐 선조 님이 보았던 라크락 님은 경이로운 야천(夜天)의 인도를 따랐으니 당연히 윤리의 화신이었겠지.'
실제로 라크락은 야천의 사도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어쩌면 야천께서는 그저 자신의 사도를 리자드맨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 보내신 것일지도 몰랐다.
이후에도 한동안 카일은 병법서인 유르의 '평야에서의 전투'나 신학서라고 할 수 있는 사이란 무엘의 '야천', 그리고 얼마 없는 라크락의 저서이자 천문학책인 '하늘을 읽는 법' 등을 언급하며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열거했다.
라뷘은 카일의 독서 이력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했다.
왕자인 카일이 공부를 좋아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카일은 첫째가 아닌 셋째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이 지식은 후에 어떤 식으로든 좋게 쓰이겠지만...'
라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 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카일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러다 선생 노릇도 못하겠군. 이미 몇 가지 분야에선 왕자님이 더 많이 알고 계시니.'
왕가의 걱정은 어찌되었든 남의 일이었다.
라뷘이 선생 노릇을 하려면 카일을 뭐라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재잘재잘 떠들던 카일이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라뷘은 벌써 끝날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하면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말했다.
"라뷘 선생님."
"예, 말씀하시지요?"
"제가 오늘 답을 많이 드렸으니 저도 궁금한 걸 여쭈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아니, 저는 공부에 있어 궁금한 건 거리낌 없이 질문하라 했지 않습니까?"
카일은 수줍게 웃었다.
"그게, 공부랑 관련된 건 아니라서요. 어쩌면 공부랑 관련된 걸지도 모르지만, 제 학식이 좁아 자신이 없네요."
"왕자님이 잘 모르겠다고 하니 그것도 재밌군요. 말씀하시지요."
카일이 라뷘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제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라뷘은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다행히 카일의 얼굴이 아니라 안뜰을 향해서였다.
078화
"저, 혹시 왕자님, 방금 하신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지요."
"...네. 아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압니다, 라뷘 선생님."
카일은 못마땅한 얼굴로 라뷘을 보았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뭡니까?"
라뷘은 어색하게 웃었다.
라뷘은 셋째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그리고 제3 서고에 기거하는 학자로서 궁내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미 세자는 첫째 왕자인 바센 라크 오라즌으로 정해져 있다.
카일이 세자가 된다는 건 바센을 폐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 모반이 될 수도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향냄새 맡게 생겼구나.'
하지만 라뷘은 이상하게도, 겁이 나면서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라뷘이 말했다.
"저, 어려운 질문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압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질문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했지요."
"...왕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카일의 시선이 다시 안뜰로 향했다.
"되고 싶냐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겁니까?"
"어쩌면, 제가 왕이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라뷘은 카일의 말에 반문했다.
왕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왕이 되면 좋겠다고 하는 건 얼핏 보아서는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라뷘은 카일의 말에 주어가 빠져 있다는 걸 알았다.
라뷘이 질문했다.
"누구에게 좋다는 겁니까?"
카일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백성들에게요."
─┼
언제 마지막으로 사람의 손이 닿았을지 모를 흰 눈으로 덮인 설산.
그 꼭대기에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닥을 뚱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르나르들의 신 룬다였다.
룬다가 화상 채팅창 너머에서 말했다.
"...여기까지가 대강의 보고야. 자세한 건 공유한 정보로 봐."
"그러지."
"근데, 네뷸라."
"뭐야?"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일단 들어는 보지."
"...한 수만 물러 줄래?"
성운은 안 될 것 없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바둑판 위에서 백돌 하나를 물렀다.
지난 일백여 년 동안 성운은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흉물과 흉신을 죽이며 여러 가지 소영역을 얻었다.
그중에는 나무의 소영역과 자갈의 소영역이 존재했다.
기적으로 바둑판을 만드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룬다 또한 마찬가지라서, 자갈의 소영역이 아닌 보석의 소영역으로 돌들이 루비와 파란 사파이어로 반짝이고 있긴 했지만 역시나 바둑판이었다.
화상 채팅창을 끼고 서로의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원거리 게임을 두는 것이었다.
성운은 황야의 한 복판, 햇볕이 내리쬐는 메마른 땅 위에 앉아 있었다.
성운의 뒤로는 정물이라 할 것도 없어서 오래전에 죽은 물소의 앙상한 머리뼈만이 오도카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다가 흑돌을 옮기며 말했다.
"요즘은 뭐 재미있는 일 없어?"
"오, 이쪽 정보도 캐 보겠다는 건가?"
"모든 걸 게임이랑 엮는 건 그만둬 줄래? 이건 그냥 스몰토크라고. 안부 인사의 연장선이지."
성운은 모두가 자신처럼 게임에 진심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조금 서운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차피 알게 될 이야기긴 한데."
"뭐야?"
"변화가 생길지도 몰라."
"드디어?"
룬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룬다는 변화라는 단어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백여 년은 정체기였다.
이른바 중세라고 할 만한 시기에 접어들면서 국가 간의 국경은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엽적인 전투가 발생하더라도 큰 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정체기는 로스트 월드에서 필연적이긴 했다.
로스트 월드에선 빌드에 따라 초기에 확장 정책을 계속 밀고 가서 게임을 어떻게든 끝내는 방식도 존재했지만, 일반적인 빌드에서는 어느 정도 국경선이 정해지면 내정을 다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초기 확장에 사용했던 주요 종족 이외에도, 자신의 나라 안에 있는 종족들을 플레이어의 신도로 끌어들이는 등 여러 가지 유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내적으로는 각 종족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성운만 하더라도 역사에 뚜렷한 흔적이 남지 않았을 뿐, 여섯 번의 반란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적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더 유능한 캐릭터를 앞세워 왕조를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성운은 라크락과 자올의 DNA를 믿었다.
'유능한 아버지와 유능한 어머니 사이에서 유능한 자식만 나오는 건 아니지. 유전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으니까.'
그리고 군대를 움직이는 전쟁이 아닐 뿐, 플레이어 간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마 흑린의 여섯 번의 반란 시도 중 네 번 정도는 다른 플레이어가 일으킨 걸로 보이니까.'
당연히 성운도 다른 나라의 궁정을 노린 여러 가지 내분을 유도했다.
결과는 그럭저럭 성공이라고 할 만했다.
사티로스의 나라 단염과 닉스의 나라 금안의 왕, 그리고 절반 정도의 귀족이 친 흑린파였다.
이 두 나라는 과거 라크락에 의해서 사실상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은 악신으로 제3 대륙 전체에 그 이름을 알렸었다.
그리고 악신의 하수인인 샤이븐 또한 마왕이라는 칭호로 남아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악신을 죽인 라크락의 영향력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크락이 악신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모두 흑린으로 귀화한 것도 그 영향력에 힘을 실어 주었다.
라크락이 구해 낸 노예들은 당연한 것이지만, 뱀파이어들마저도 도망치는 샤이븐을 잡아 죽이고 그것을 리자드맨들에게 바쳤다.
리자드맨들은 그 자리에 있던 뱀파이어들의 항복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종족이라 하더라도 뱀파이어와의 공생은 불가능했다.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를 마셔야 했다.
다만 가장 저급한, 이른바 4세대 뱀파이어들은 동물의 피로 버틸 수 있긴 했지만 2세대나 3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자 뱀파이어들은 놀라운 선택을 보여 주었다.
라크락과 야천의 뜻에 따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살 수는 없다며 굶어 죽기를 고수한 것이다.
리자드맨의 산성 가까이 무려 1천 명의 뱀파이어들이 각자의 석굴을 파고 들어앉았다.
리자드맨과 여러 종족들이 그들이 정말로 뜻을 이루는지 보았다.
몇몇 뱀파이어들은 뜻을 저버린 채 도망쳤고, 또 몇몇 뱀파이어들은 유혹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무려 6백여 명의 뱀파이어가 앉은 자리에서 목마름이라는 고통을 참아 내고, 죽었다.
리자드맨들은 그들의 진심을 뒤늦게 확인했다.
자올이 그 계곡에서 야천에게 올린 기도가 후대에 전해졌다.
"푸른 벌레신이시여, 비록 죄 지은 이들이나 그 죄를 자각하고 스스로 벌을 받을 줄 안다면, 이를 딱히 여겨 용서하실 줄로 압니다."
그러자 푸른 나비가 자올의 주위에 뱅뱅 돌았다.
자올은 깊이 절하며 말했다.
"저는 이미 이들을 용서했나이다."
이후 많은 이들이 리자드맨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참회하고 스스로 벌을 받는다면 야천이 포용한다고 알려졌다.
뱀파이어들이 죽은 그 지역은 '좌불곡(座佛谷)'으로 불리며 야천교의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덕분에 해당 성지와 접하고 있는 사티로스들, 그리고 뱀파이어에게 완전히 궤멸을 당했다가 겨우 복구에 성공해 낸 닉스들은 리자드맨들을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코볼트의 나라 만굴은 뱀파이어의 영향력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으며, 트롤의 나라 석면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 거라 믿어 친 흑린파가 그리 득세하지 못했다.
'그리고 르나르의 나라 적과는...‘
생각하던 성운은 룬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말 안 들려?"
"뭐라고 했지?"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니까."
성운은 고개를 들고 룬다를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은 없는데?"
"...아, 그래. 이번 판 이기면 말해 줘."
"그럴 생각 없다니까. 그리고 넌 뭘 걸 건데?"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거지? 뭐가 좋을까..."
"내 부탁 하나 들어줘."
그 말에 룬다는 흠칫했지만, 곧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30분 뒤, 룬다는 바둑판을 뒤집었다.
"야, 집어치워. 알까기로 해. 너 이쪽으로 와. 아니지, 내가 그쪽으로 갈까?"
"룬다 님, 결과에는 승복하셔야지요."
그렇게 말한 것은 성운이 아닌 엘다르였다.
엘다르는 화상 채팅창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룬다가 게임 판을 뒤집자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이미 셋은 사실상의 느슨한 동맹 관계가 되어 있었고, 룬다의 경우에는 크람푸스에 대한 첩자가 되어 있었다.
"뭐야? 넌 거기 왜 있어?"
"룬다 님만 지루함을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엘다르는 성운과 자신 사이에 있던 체스 판을 들어 보였다.
룬다는 성운의 손이 한쪽으로 꿈지럭거린다고만 생각했지 또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단 걸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네뷸라. 너 지금 나랑 엘다르 동시에 두고 있었던 거야?"
성운과 엘다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존심 상해. 안 할 거야."
"가려고?"
"흥이다."
룬다는 혀를 살짝 내밀고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보여 주곤 화상 채팅을 종료했다.
엘다르가 말했다.
"그래도 네뷸라 님, 저는 좀 궁금한데요."
"변화의 조짐 말이야?"
"네."
성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체스 판으로 향했다.
엘다르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왕을 쓰러트렸다.
"체스도 내가 이긴 거 같은데?"
엘다르는 큰 눈으로 하늘을 살짝 바라봤다.
"그래도 내기를 한 건 아니니까요?"
성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다르와 룬다는 처지가 조금 달랐다.
룬다는 성운이 보기에 이중 첩자였다.
그래서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엘다르의 엘프는 거의 흑린 소속이라고 볼 만했다.
북해안의 엘프들은 이제 나름의 영역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휘경과 맺었던 백여 년이 넘는 여러 가지 계약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흑린의 도움 없이는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엘프들은 리자드맨 때문에 겪었던 고난조차도 자신들의 신께서 의도한 필연적인 고난으로 잘 포장했다. 엘다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엘다르의 엘프들 중 일부가 이미 흑린의 궁에서 신하와 좌수관으로 일하고, 엘다르의 대사제가 만든 교리 또한 야천을 함께 믿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까지 결론을 내렸다.
성운은 이제서야 엘다르와의 실질적인 동맹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엘다르는 이미 성운을 게임 끝까지 함께할 동맹으로 생각 중이었다.
성운은 아무런 탈이 없겠다는 확신을 한 뒤에 말했다.
"좋아, 이걸 보자고."
성운은 창을 열어 오라즌의 궁을 비추었다.
엘다르의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
"변화의 조짐은 이거야."
라크락이 가리킨 곳에는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리자드맨이 앉아 있었다.
엘다르도 얼굴을 보긴 했던 캐릭터로, 현재 흑린의 왕인 안평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엘다르는 셋째 아들인 만큼 별다른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의아했다.
"이 개체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성운은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능력치도 한 번 안 봤었나?"
"예."
"뭐, 스킬이 붙거나 하는 특별한 점 없어. 단지..."
성운은 카일의 상태창을 띄웠다.
엘다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카일 라크 오라즌(Lv.0)
힘 14
지능 107
사회성 32』
레벨0으로서는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수치가 적혀 있었다.
"지능이 엄청 높을 뿐이지."
079화
엘다르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 이런 수치는 처음 보는 것입니다마는..."
"그 정도는 아닌데."
"그... 드문 경우는 맞지 않사옵니까?"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마다, 그리고 해당 캐릭터의 나이나 문명 단계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지만, 현 단계의 카일은 덜 자란 청소년기이기 때문에 15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평균적인 능력치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14의 힘은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통의 능력을 의미하는데, 32의 사회성은 과거 문명이라면 왕의 재목, 현대 문명이라면 정치가나 연예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엘다르가 말했다.
"지능이 60 정도만 되어도 해당 시대에 유별난 천재라고 할 텐데, 80을 넘어서 100을 넘다니요?"
"아마 향후 몇십 년 동안은 대륙 전체에서 보기 힘들겠지."
사실, 지난 백여 년 동안 세계가 정체된 이유는 단순히 각 국가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문명이 발전하려면 그에 걸맞은 기술과 발명품들이 나타나야 한다. 신들이 직접 발명품을 전해 내려 줄 수는 없어. 그건 인과율에 크게 위배되니까.'
다른 문제도 있었다.
'기술과 발명품이 있더라도 그게 일회성의 사건이 되어서는 안 돼. 그 발명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서, 그 발명이 다른 발명으로 연결되어야 해.'
하지만 지난 백여 년은 그런 사건이 거의 없었다.
가진 기술들이 퍼져 나가고 각 나라의 환경에 맞게 최적화되는 과정은 있었지만 그렇게 새롭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운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새로운 것, 새로운 기술, 새로운 발명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 지더라도 지엽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대 문명으로 발전해 이른바 '세계화'가 되지 않는 이상, 많은 부분을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로스트 월드 플레이할 때야 이런 정체기는 짧으면 몇 분, 길어도 십 몇 분이면 지나가 버리지만.'
때문에 성운에게 카일의 존재가 '변화의 조짐'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정도 지능이면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에 적합하고, 게다가 그 기술과 발명품을 흑린이라는 나라 각지에 전달할 만큼의 영향력도 가지고 있어."
성운이 보기에 흑린은 다음 단계로 발전할 여력이 충분했다.
자원도 축적이 되었고 상인들도 대륙 각지를 오갔으며, 기초적인 수학과 과학 지식을 갖춘 학자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엘다르가 말했다.
"저, 하지만,"
"왜?"
"중요한 문제가 있는 듯하온데..."
성운은 엘다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첫째가 아니라 셋째란 말이지."
"예. 현재 첫째인 바센은 놀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결격 사유를 가진 건 아닌 듯하옵니다. 게다가 바센은 이미 세자의 지위를 얻었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카일이 왕이 되기는 힘들지 않을지요."
성운은 잠깐 생각했다.
성운이 개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전 회의에서 안평왕에게 특정한 징조를 내린다면 대신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야천께서 선택하셨으니 카일에게 왕의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결정하는 건 좋지 않지.'
그 결과가 현재의 오라즌이었다.
지구에서의 환관이라고 할 만한 위치, 일종의 비서실인 좌수관은 여러 종족으로 채워져 있지만, 일명 우수관, 실질적으로 흑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정 관료들은 리자드맨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왕권을 지지하므로 흑린에서 모반은 이제 와선 들어설 구석도 없었다.
각 행정 관료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리자드맨인 셈이니까.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실제로 이 리자드맨들이 썩었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흑린의 왕가에 다소 우둔한 왕은 있어도 암군은 없었다.
그러나 흑린의 종족 비율에서 리자드맨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은 반면, 행정 관료 비율은 압도적으로 리자드맨이 차지한다. 성운이 리자드맨에게 좋은 축복을 내렸으므로 비교적 능력이 좋을 수는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비율이 너무 높았다.
리자드맨 이외의 종족 중에도 좋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성운은 이제 인간과 리자드맨만이 아니라 더 많은 종족을 자신의 영역으로 손에 넣었다. 초기에 효율을 위해 공격적으로 영역을 넓혔던 만큼 이제는 조화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근대까지 가서 종족 갈등이 생긴다고? 그럼 정말 환장하는 일이 생기는 거지.'
그동안 성운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흑린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했지만 슬슬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방식을 쓰려고."
"예를 들면 어떤...?"
성운이 방법을 설명하자 엘다르가 걱정했다.
"저, 그게 생각대로 풀릴까요? 카일의 지능을 과신하시는 것 같은데..."
"난 잘 풀릴 것 같은데. 비슷한 방법은 다른 게임에서도 많이 써 봤어."
"어차피 제가 말려도 뜻대로 하실 것 아닙니까?"
"응."
성운이 말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훼방 놓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야."
엘다르는 한숨을 포옥 쉬고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
오라즌의 궁에는 많은 정원이 있다.
기본적으로 리자드맨들이 생각하는 사후 세계의 모습을 풍경화한 것으로, 발목까지 오는 얕은 초목으로 몇 그루 나무를 심거나 앉아 놀 수 있는 바위를 두는 둥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오라즌의 정원 문화는 흑린의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행해서 큰 장원에 뜰을 두고 정원을 가꾸는 일을 귀족의 미덕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라즌에는 있지만 다른 지방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갓 궁에 들어온 좌수관 엘프들이 귀를 쫑긋대며 나무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와, 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쉿. 목소리 좀 줄여. 저놈이 우릴 보겠어."
먼저 말을 꺼낸 엘프는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게 오라즌의 수호룡 마눈이구나."
몸길이 25미터, 나이는 대략 150살, 종족 드레이크.
최초에 푸른 거죽이라는 리자드맨 부족의 족장이었던 뷰에가 기른 드레이크였으나, 이후 라크락이 그를 쓰러트리고 발아래 두었다는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드레이크는 늙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실제로 마눈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마눈은 궁 안쪽에 마련된 특별한 뜰 안에 자리했는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성장기가 끝나지 않아 궁의 기록을 들여다 보면 마눈을 키울 수 있는 뜰을 만들기 위해 몇 번이나 궁을 중축했다고 되어 있었다.
사실 오라즌에 있는 수많은 정원은 마눈 때문에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와선 궁 안의 대신들은 마눈을 골칫덩이로 보았다.
성장기가 끝났지만 워낙에 큰 덩치 때문에 밥값이 너무 많이 들고, 그에 비례해서 싸는 양도 어마어마했다.
돈이 많이 들고 사람 손도 많이 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마눈을 쉽게 치워 버릴 수도 없었다.
다른 왕도 아닌 건국 시조이자 뇌룡대왕 라크락이 부렸다는 드레이크.
마눈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왕권을 상징하고 있었기에 궁은 큰돈이 들고 많은 일손을 쓰더라도 마눈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백여 년은 긴 시간인지라, 대신들 중에는 마눈을 인적이 드문 산에 풀어놓거나, 그마저도 위험하니 야천에게 바치는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도 말했다.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의 상징 중 하나라고 하나 상징은 상징.
진짜 왕이 있는 이상 그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눈이 그동안 사람의 손을 많이 타긴 했어도, 지상에서 가장 두려운 생물 중 하나인 드레이크였다.
심지어 150살이나 되는 드레이크.
원하기만 한다면 하룻밤 사이에 궁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었다.
왕권의 상징이 왕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과 무관하게, 마눈은 리자드맨들이 만들어 준 자신의 자리에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눈에 대해 잘 모르는 점이 있었다.
어린 성장기의 드레이크와 달리 나이가 제법 든 마눈과 같은 드레이크는 나름의 의식이 생긴다는 점이다.
당연히 마눈만큼 오래 살아온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모를 만했다.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던가, 도구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정도의 지능은 아니지만 마눈은 매일 먹이인 물소를 몰고 오는 사람이라던가, 자신의 대변을 치워 주는 사람이나, 자신이 잘 때 몸 위에 올라타 비늘을 닦는 사람 따위를 먹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분류할 정도의 지능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샘솟는 감정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느낄 줄 알았다.
마눈이 최근 화두로 삼은 감정이 있었다.
가장 깊게 느끼는 그 감정은 어딘가 답답하고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어찌해야 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지 마눈은 알 수 없었다.
마눈은 그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저 주는 대로 먹고 되는 대로 싸고 남는 시간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니 마눈으로선 부족할 게 없었고, 감정에 대한 상념도 이 드레이크에겐 낯선 것이라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눈은 밤중에 눈가에 어른거리는 푸른 빛 때문에 눈을 떴다.
그건 푸른 나비였다.
마눈은 불빛이 있거나 말거나 다시 잠들기 위해 앞발로 쾅 내리쳤는데. 오히려 푸른 나비는 배로 늘어나 버렸다.
마눈은 어지간한 것들은 제 발로 내려치면 박살이 나 버리는 걸 알았기에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마눈은 눈을 떴다.
다시 나비 떼를 내려치자 또 두 배로 늘었고, 다른 발로 또 내려치자 마눈의 몸을 뒤덮을 만큼 많아졌다.
푸른 나비 떼는 마눈의 몸을 휘감았다가, 마눈의 정원 위를 휘적휘적 날아다녔다.
마눈은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그 나비 떼를 쫓다가, 나비 떼가 속력을 내자 성큼성큼 달렸다.
정원 안을 몇 바퀴 돌던 푸른 나비 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무로 만든 담을 통과해 버렸다.
이 담은 십 미터는 되는 촘촘한 나무 창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눈이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마눈은 앞발을 들고 쥐었다 폈다 하며 주저했다.
나무 창살을 부수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한 번 부수고 나가 버린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고 긴 막대로 쿡쿡 쑤셔 대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내키지 않는다면 앞발로 전부 납작하게 눌러 버릴 수도 있지만, 마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은 마눈이 좋아했던 사람들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주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주인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리해라 저리해라 시키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주인은 좋았다.
첫 만남에서 마눈의 주둥이를 쥐고 바닥에 내쳐 버렸지만, 힘으로 서열을 결정하는 드레이크의 특성상, 마눈에게 따르고 의지할 만한 우두머리로 각인된 사건이었다.
게다가 두 번째는 마눈에게 딱히 시키는 일도 없고 재깍재깍 먹을 것을 주둥이에 밀어 넣어 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아서 퍽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입에 매일 뭔가 들이밀어 주니 두 번째 주인을 잊어버리고 그냥 살고 있었다.
'...!'
그제야 마눈은 자신의 마음속에 맺혀 있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눈은 푸른 나비들을 쫓으며 그 감정을 털어 낼 수 있었고, 또 과거에 두 번째 리자드맨이 먹이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비들처럼 함께 놀아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마눈의 속에 답답하게 자리 잡은 감정은 바로 '지루함'이었다.
"이리 와라, 마눈."
낯익은 목소리가 마눈에게 들려왔다.
마눈은 눈을 좁혀 뜨면서 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주인이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신께서 또 괴이한 일을 시키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재미있겠구나."
마눈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을 까딱이는 것이 잡기 놀이의 신호라는 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마눈은 어깨를 숙이고,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마눈, 어디 한번 실력이 늘었는지 보자."
25미터의 거체가 나무 창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
수렵대신 데아닌은 출근한 아침부터 부하에게서 황당한 보고를 받았다.
"새벽에 큰 폭발음이 들렸다는 거 아십니까?"
"별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 아닙니다."
"그럼?"
"새벽에 금군(禁軍)이 출동해 폭발음이 어디서 들렸는지 확인해 봤더니, 아니 글쎄 마눈이 선산으로 도망쳤다지 뭡니까?"
"그것 참 큰일이군."
마눈이 오라즌의 수호룡이니, 왕권의 상징이니 말이 많지만 어찌되었든 괴수였다.
단순한 야수가 아니기 때문에 금군, 어쩌면 군대가 움직일 테고, 무작정 죽일 수도 없는 동물이니 그 거체를 살려서 데려오는 건 책임자에게 있어 악몽 같은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데아닌으로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데아닌 님, 왜 자꾸 남의 일처럼 답하십니까?"
"어?"
"데아닌 님이 수렵대신이지 않습니까?"
"응?"
데아닌은 그 말에 의식이 정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데아닌이 수장으로 있는 '수렵대'는 말 그대로 사냥과 관련된 부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냥이란, 귀족의 유흥을 이야기한다.
오래전부터 활쏘기에 능통한 리자드맨들인 만큼 사냥하기를 즐기는데, 당연히 왕이 있는 궁 가까이에 위험한 동물을 둘 수는 없다.
그러니 사냥을 할 때만 산에다 사냥감을 풀어놓게 되는데 수렵대는 이런 유흥을 즐기기 위한 전담부서였다.
육체노동을 하는 일이 많고 다른 부서가 맡지 않는 잡다한 일을 하느라 정치적으로 힘이 생기기 어려운 부서라서 수렵대 소속이면 우수관이라 하더라도 천대했다.
그리고 이번 일 또한 그런 천대의 연장선상이었다.
"서둘러 준비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아침 회의 전까지 마눈을 잡을 방법에 대해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마눈 잡기를 다른 조직들로부터 짬 당한 것이다.
"이런 시팔."
080화
데아닌은 대회관에서 머리를 짚으며 걸어 나왔다.
회의 자체는 무난히 좋았다.
오라즌의 산지에는 수렵대 소속의 산지기들은 물론 멧돼지나 꿩, 카벙클 따위를 잡으러 다니는 민간의 사냥꾼들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인적이 드문 숲이 아니라는 것.
데아닌은 그런 사람들에게 마눈을 보았는지, 또는 습격을 받거나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지 조사해서 마눈의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눈의 위치가 파악되면 금군을 모아 마눈을 몰면서 동시에 마눈이 좋아하는 소로 유인해서 다시 왕궁에 있는 마눈의 정원으로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병력을 내줘야 하는 금군의 경비대장이 불만을 표하긴 했지만 마눈을 잡자고 병사를 소집할 수도 없는 노릇.
거대한 드레이크가 왕실을 지킨다는 이야기 덕분에 백성들의 마눈에 대한 호의는 적지 않지만, 그런 마눈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또한 안평왕과 다른 대신들 또한 현실적인 부분에서 적은 병력으로 마눈을 데려올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안평왕은 마눈을 잡아들이는 데에 데아닌에게 전권을 주고 다른 대신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라고 하며 해당 안건은 끝났다.
데아닌은 서둘러 마눈을 잡으라는 어명에 다른 대신들이 나오기 전에,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대회관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데아닌이 보기에 좋은 점이라곤 없었다.
'금군을 빌려준다고? 허, 궁 안에 있는 금군을 싹싹 긁어모아 봤자 마눈이 앞구르기만 해도 다 깔려 죽을 텐데.'
경비대장이 듣는다면 고래고래 고함을 칠 생각이었지만 데아닌은 현실주의자였다.
데아닌은 야천의 존재를 믿긴 했지만 마왕을 이겼다거나 악신을 죽였다거나 하는 라크락 전설에는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지난 백여 년 동안 야천의 기적은 제한적인 구석이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짐승은 짐승. 덩치는 산만하더라도 먹을 걸 보면 쫄래쫄래 따라오긴 하겠지.'
데아닌은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인다면 마눈을 잡아들이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았다.
오라즌의 주변 산에 위험한 동물들이 없도록 잘 관리하고 있었기에 마눈이 배를 채울 동물도 그리 많지는 않을 터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산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산을 내려올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가' 하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마눈의 성미는 유순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생각할 수 없는 동물이란 어떤 급작스런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데아닌은 솔직한 생각으로, 이번 일에서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야천의 보살핌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25미터에 이르는 거구다.
다들 궁 안의 정원에서 졸고 잠자는 모습만 보아 왔다고 해도 본성은 드레이크.
북해안과 반도를 오가는 상단들이 지금도 간간히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었다.
현시대에 흉포함의 대명사로 황야의 드레이크를 꼽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사직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데아닌은 고향으로 내려가 학당이나 열고 유유자적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가, 그것도 운이 좋을 경우라는 걸 깨달았다.
운이 나쁘면 귀양을 떠나게 될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마눈이 일으킨 모든 문제에 대한 벌로 목이 달아날지도 몰랐다.
'...어머니, 아들은 여기까진가 봅니다.'
피부가 희고 눈이 붉은, 저주받았다는 멸시를 딛고 열심히 공부해서 궁을 출입하고 한직이나마 대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데아닌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눈이 갇혀 있던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마눈의 울타리를 누군가 부수기 쉽도록 조작하진 않았는지, 마눈이 울타리를 부수도록 유도한 건 아닌지 살폈다.
모든 게 누군가의 음모라면 그 음모자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데아닌은 슥 훑어본 것만으로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럴 리가 없지.'
제 아무리 음모라고 해도 너무 위험했다.
천한 신분인 데아닌을 골려 주기 위해서 작당을 할 수는 있지만, 데아닌을 궁 밖으로 내쫓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너무 대책이 없었다.
데아닌은 마눈이 사라진 산길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마눈을 잡기 위해서라도 아랫사람들을 잘 쪼아야겠다 생각하며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일군의 코카투 무리가 데아닌 앞으로 지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데아닌은 코카투에 올라탄 사람 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손을 허우적허우적 흔들었다.
"자, 잠깐! 멈추시오!"
코카투 무리는 데아닌을 무시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멈춰 섰다가 되돌아왔다.
코카투에 올라탄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왜 불러 세운 거지, 데아닌?"
"바센 왕자님!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데아닌이 세운 사람은 바센 라크 오라즌, 안평왕의 첫째 왕자였다.
"보면 모르나? 마눈을 찾으러 가는 중이다."
"예?"
"아, 그렇지. 데아닌 당신이 수렵대신이었지. 잊고 있었군. 내가 알기로는 선산에 들어가 사냥을 하려면 수렵대신의 허락 같은 게 필요하다던데, 나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데아닌은 한숨을 쉬었다.
바센은 데아닌을 놀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바센과 그 사냥 친구들은 한 번도 데아닌의 허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이유를 들어서 데아닌은 바센의 친구들 집으로 벌금을 내라는 공문을 수차례 보냈다.
바센의 사냥 친구들이야 잘 사는 집 자제들이니 벌금 따위야 내면 그만이지만 바센은 나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것과 별개였다.
"평소라면 제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 벌금을 받아 낼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 저는 단순한 수렵대신이 아니라, 폐하께 마눈 잡기의 전권을 받은 수렵대신이지요."
"오, 그건 몰랐군."
"아까 전 어전 회의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아직 안 끝난 줄 알았는데."
"폐하께서 한시라도 빨리 마눈을 잡아오라 하셔서 미리 나왔습니다."
바센은 턱에 손을 괴더니 말했다.
"잘됐군, 데아닌."
"뭐가 말입니까?"
"난 그냥 친구들이랑 마눈 구경이라도 할 참이었거든. 그 잠꾸러기가 산보를 나갔다기에, 드디어 움직이는 마눈을 볼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요?"
"그 말을 들으니 욕심이 나는군. 마눈을 잡아 와야겠어."
데아닌이 눈가를 찌푸렸다.
"농담이시지요?"
"아니. 진담이다. 어떤가, 벗들이여?"
바센의 말에 그의 사냥 친구들이 껄껄 웃으며 동의했다.
데아닌이 뒤늦게 그 친구들에게서 술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라면 바센은 술에 취했더라도 코카투 위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걸 보아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첫째 왕자, 바센. 그래도 사냥 실력은 좀 괜찮다지.'
데아닌은 무작정 반대해 봤자 바센이 들어 먹을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눈이 얼마나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그 덩치를 생각하면 코카투를 따라잡지는 못할 거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저 친구들이 대신 마눈의 밥이 되어 주겠지.'
게다가 데아닌은 바센이 마눈에게 욕심을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왕세자라고 한들, 알게 모르게 바센이 왕답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데아닌처럼 말이다.
때문에 바센은 이번 일에 사냥꾼의 만용을 핑계 삼아 도움을 주고자 하려 하고 있었다.
데아닌이 말했다.
"좋습니다, 바센 왕자님. 그렇지 않아도 사냥꾼들을 불러 모아 마눈을 찾아낼 생각이었습니다."
"어허, 찾아내는 게 아니라 잡아 올 것이래도."
"만용을 부리시는 건 좋지만, 혹시 마눈을 찾게 되면 잡아오시기 전에 가까운 산지기에게 언질을 좀 주십시오."
바센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데아닌을 살폈다.
그러다 바센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뭐, 그럼. 알겠다. 그리하지."
"부디 다치는 일 없이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바센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사냥꾼들과 함께 마눈이 사라진 길로 달려갔다.
'좋아, 그럼 이대로 돌아가서...'
그렇게 생각하던 데아닌은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소리도 없이 찾아온 것에 흠칫 놀랐지만, 등 뒤의 사람은 데아닌에겐 관심도 없는 듯 쪼그려 앉아서 마눈이 부수고 간 나무 창살만 바라보고 있었다.
데아닌은 반가운 얼굴에 미소를 띠었지만, 표정을 관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카일 왕자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데아닌의 목소리에 안평왕의 셋째 왕자, 카일 라크 오라즌이 고개를 들었다.
"아, 데아닌. 마눈이 사라졌다기에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그 말에 데아닌은 미소를 찾기 힘들었다.
왕자라지만 겨우 열세 살인 꼬마다.
게다가 몸을 쓰는 일이 서투른 편이라 제 큰형처럼 코카투도 탈 줄 몰랐다.
하지만 그 영특함이 남달랐다.
데아닌으로선 카일이 어떻게든 왕이 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할 정도로.
"마눈을 찾으러 오셨군요. 하지만 마눈은 이미 저 산속 깊이 도망쳐 버려서 산지기들과 사냥꾼들이 찾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제 형님도요?"
"예?"
"아까 멀리 코카투를 타고 있는 큰 형님을 보았습니다."
"예, 뭐... 저는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큰 형님이 사냥 실력이 뛰어나다곤 했지만 마눈을 잡아오긴 힘들겠지요."
"예."
"금군 모두가 대령되어도 마눈이 싫다면 어쩔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현실적인 지적은 데아닌과 같았지만, 이미 책임을 져야 하는 데아닌으로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데아닌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카일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뭘 그리 골똘히 보고 계십니까?"
"이 나무 창살이 이상해서요."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이렇게 깔끔하게 부서지긴 힘들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데아닌은 창살을 얼핏 봤을 때 숨겨진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그렇지 않았다.
"저도 누군가 고의로 나무 창살을 헐겁게 잘라 두었나 생각했지만 아니더군요. 벌레가 먹어서 그렇습니다."
"아, 벌레가요?"
"예. 거기 보시면... 그렇죠. 그 부분입니다. 아주 깔끔하게 파먹었죠. 그리고 사실 이런 벌레 먹은 자리가 없었어도 마눈은 쉽게 창살을 부쉈을 겁니다. 큰 의미는 없죠."
카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요?"
"벌레가 먹은 건 맞지만, 벌레 먹음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일은 손가락으로 나무 창살이 연결되는 기둥을 가리켰다.
"이 나무 창살들은 석재 기둥에 닿아 있습니다. 이 벌레 먹은 자리가 없었다면 마눈이 나무 창살을 부술 때 석재 기둥이 함께 무너졌을 겁니다. 그랬다면 마눈이 나무 창살을 부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금군이 마눈을 창으로 쿡쿡 찔러서 다시 정원에 밀어 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벌레 먹은 자리 때문에 마눈이 힘을 주는 순간 부러져 버려서 큰 소음이 나지 않았죠. 늦게 발견된 겁니다."
타당한 말이었기에, 데아닌은 그대로 긍정해 버릴 뻔했다.
하지만 데아닌은 현실주의자였다.
"아, 그렇지만,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이 부분만 벌레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꿀 같은 걸 발라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벌레 먹은 자리가 넓으니 하루 이틀로는 힘들 거고요. 며칠씩 그런 일을 벌였다면 진작에 들통 났을 겁니다."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린지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데아닌, 야천께서 과거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아시나요?"
"네?"
뜬금없이 신의 이름이 나오자 데아닌은 혼란스러워졌다.
데아닌은 남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아닌지라, 야천의 옛 이름을 알지 못했다.
"옛날이야기엔 관심이 많이 없으신가 보군요. 푸른 벌레신입니다."
"벌레... 신이요?"
"예. 옛 문헌을 찾아보면 벌레와 관련한 기적이 엄청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이유가 있었지요. 아, 하나 더. 그 전엔 라크락께서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라고 불렀다더군요."
카일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그럼 왕자님 말씀은, 야천께서 이런 일을 벌이셨단 겁니까?"
"예."
"하지만 우연히 창살이 벌레를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예. 물론 가설이지요. 하지만 확인해 볼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요?"
카일은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이 나무 창살의 다른 자리에 벌레 먹은 자리가 있는지 찾아보는 거지요. 그럼 우연히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럴 확률은 낮아 보이는군요. 약초로 칠까지 한 것 같은데..."
당장 확인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데아닌은 수렵대로 돌아가 부하들을 시킬 것도 없이 재빨리 마눈의 정원을 달리며 나무 창살을 확인했다.
정원 한 바퀴를 달리고 다시 카일 앞에 서자 몸의 열기가 솟고 심장이 뛰었지만 단순히 오랜만에 달리기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없다!'
데아닌은 허리를 숙이고 숨을 돌리며 말했다.
"헉, 헉... 왕자님, 만약 야천께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후우, 칩시다. 그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카일은 마눈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마눈이 부수고 나간 나무 창살, 그리고 마눈이 무거운 꼬리를 흔들며 만들어 낸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았다.
"마눈이 들어간 선산엔 다행히 별것 없는 걸로 압니다. 산지기들과 사냥꾼들이 있지만 마눈과 같은 큰 덩치는 나무를 부수며 다닐 테니 위험해지기 전에 피할 수 있겠지요. 적어도 마눈의 목표는 그 안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신이 나서 마눈을 따라갈지도 모르지요. 그 사람이 마눈의 목표는 아닐까요?"
그 말에 데아닌의 등골이 섬뜩해졌다.
'...어라?'
보통이라면 그 드레이크를 신이 나서 쫓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의 말처럼, 신이 나서 마눈을 쫓아간 사람이,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야천께서 정말로 존재하고, 나라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다음 왕세자는 첫째가 아닌 셋째가 받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건 데아닌 자신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마눈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책임을 지는 것은 데아닌 자신이었다.
데아닌은 한숨을 쉬며, 이것이 비록 야천께서 바라는 일이라 하더라도 알아 버린 이상 자기 보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센을 서둘러 데려와야 했다.
데아닌은 수렵대로 달려가다가 다시 카일에게 돌아와 말했다.
"왕자님,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그러지요. 하지만 부탁 좀 들어주세요."
"네?"
"수렵대신에게도 도움이 될 일입니다."
카일의 부탁은 황당한 것이었다.
081화
"저를 큰형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예?"
"저는 코카투를 탈 줄 모르니 수렵대신께서 저를 함께 태워 데려 달란 말입니다."
데아닌은 카일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한시가 급한 이때 왕자님을 신경 써 드릴 수는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데아닌. 저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카일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데아닌을 올려다보았다.
'야천께서 바센 왕자님을 노리는 와중에, 이 수렵대신이 바센 왕자를 그냥 보내 주었다고 협박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데아닌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아니구나.'
데아닌은 이제서야 숨을 완전히 고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야천께서 정말로 첫째 왕자님을 노린다면, 그 이유는 다른 왕자에게 세자 자리를 주기 위해서겠지요."
최근에는 야천이 기적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흑린의 왕가에 야천의 힘이 개입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아마 야천께서는 첫째 왕자님이 아닌 셋째 왕자님에게 세자 자리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오, 수렵대신께선 그리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데아닌은 그 말에 위화감을 느꼈으나, 카일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야천께서 아무리 마눈을 잘 유인하더라도, 제가 큰형님 옆에 붙어 있는다면, 큰형님을 해치긴 어려울 겁니다. 마눈의 앞발이나 턱이 그렇게 섬세하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잘못했다간 한 번에 왕자를 둘이나 잃게 되겠지요."
"네,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사실 데아닌은 그런 식으로 야천의 뜻을 거슬러도 괜찮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이것저것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니, 야천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실 지도 모른다. 신의 뜻을 이렇게 잘 읽어 내는 왕자가 있으니. 어차피 이번에만 기회가 있겠나? 사람이 살고자 노력하는데 그걸 탓하실 리가 없지.'
데아닌이 말했다.
"그럼 빨리 수렵대에 다녀왔다가 코카투들을 끌고 오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지요. 그래도 큰형님이 떠난 건 방금 전이니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데아닌은 제발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랐다.
─┼
"왕자님, 아마 이쪽인 것 같습니다."
"'아마'라고? 이래서야 눈을 감고서라도 쫓을 수 있겠는데."
첫째 왕자 바센은 피식 웃었다.
마눈의 몸길이는 25미터에 이르지만 산 속의 나무들은 마눈의 어깨 높이보다 훨씬 크다.
선산이라지만 산맥은 이어져서 저 자동성을 넘어 대륙 중앙으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깊은 산세다.
마눈이 산중에 툭 떨어져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산속에서 마눈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눈은 어디에 그런 활력이 있었던 것인지 여기저기 난장을 피우며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남겨 놓고 있었다.
지나간 자리마다 나무가 부러지고 꼬리가 닿은 자리의 흙이 움푹 패여 모르고 지나치려고 해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바센은 마눈을 이해할 수 있었다.
'1백 년은 넘게 정원 안에서 살았을 테니 당연하지. 몸이 찌뿌둥했나 보구나, 녀석.'
마눈이 살고 있는 정원은 대단히 넓긴 하지만 마눈에게는 가장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도 반대편에 닿을 정도이니 비좁아 했을 거라 짐작되었다.
'그간 참고 있었던 게 기특하다.'
-쩌저적...!
부러지는 소리에 산새들이 날아오르고, 이어 땅을 때리는 굉음이 뒤이었다.
-쿵!
하늘을 보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다 왔나 보군. 생각보다 멀리 가진 않았던 모양이다."
바센의 생각대로 언덕을 넘어서자 마눈이 보였다.
하지만 마눈은 몸을 똬리 틀고 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잠결에 제 꼬리가 밀어 부러트린 나무를 힐끗 바라봤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잠들었다.
"하, 짐승이라고 얕보았더니 뇌룡대왕의 기개가 있긴 하구나."
하지만 바센을 제외한 다른 사냥 친구들은 마눈이 그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것뿐인데도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호기롭게 바센을 따라오긴 했지만 마눈의 거체를 바라보자 뒤늦게 실감이 온 것이다.
"저... 이제 어떻게 합니까, 왕자님?"
"놈을 깨워 궁으로 몰아가야지 않겠느냐?"
그 말에 사냥 친구들의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명가의 자제들이다 보니 꾀가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제게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뭐지?"
"놈이 한바탕 신나게 뛰놀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진 듯한데, 오는 동안 사냥당한 짐승은 보지 못한 듯합니다. 사슴이나 멧돼지라도 잡아와 유인을 하면 어떨지요."
"흠, 그거 좋은 생각이군."
바센이 자신의 사냥 친구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난 마눈이 혹시 잠에서 깨어 다른 곳으로 가 버리지 않는지 감시해야겠다. 너희끼리 마눈의 요기가 될 것들을 잡아 와라."
평소라면 잔심부름으로 생각해 표정이 좋지 못했을 이들도 바센의 말을 반기며 코카투를 보채면서 언덕을 내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바센은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겁먹은 얼굴들하고는. 이리저리 핑계 대며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아마 수렵대나 금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겠지.'
어차피 바센은 자신의 사냥 친구들에게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야 내가 마눈을 데리고 가도 제대로 인정받긴 힘들 테니.'
바센은 잠깐 '인정'에 대해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바센은 자신이 인정받는 것에 그리 관심을 쏟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이고 좌수관과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다는 대신들도 바센이 뭔가를 해낼 때마다 칭찬을 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동생들이 생겨나면서 그것이 자신이 타고난 핏줄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특히 셋째 동생의 존재는, 바센에게 있어 단순히 겉보기로서의 칭찬이 아니라 진짜 인정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무언가를 인정할 때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거나 탄성을 내지르지 않아. 내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지도 않지. 진짜 인정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동생들과 함께 라뷘에게서 공부를 배웠을 때 바센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았다.
사이란 무엘의 신학서 '야천'을 함께 읽고, 라뷘은 왕자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다.
그때 별다른 대답 없이 책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던 셋째 카일이 말했다.
"라뷘 선생님, 야천께서 선하시다고요?"
"예?"
"그리고 전지전능하시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왕자님, 뭔가 문제라도..."
"단순히 의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야천께서 진정으로 전지전능하며 동시에 선하시다면, 그분께서는 왜 전쟁과 고통, 슬픔과 불행이 있도록 가만 놔두시는지요."
"아, 저... 그건..."
라뷘은 뜸을 들였다.
바센조차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라뷘은 답을 몰랐던 것이다.
라뷘은 솔직하게 말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야천교의 사제는 아닌지라 신학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음번에 답을 구해 오겠습니다."
그날 라뷘은 왕자들에게 책을 읽게 시키곤 창밖을 보며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공부를 끝냈다.
그게 진짜 인정이었다.
더 고통스러운 사실은 그게 진짜 인정이라면, 바센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짜 인정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바센은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위험하고 무모한 일에 뛰어들었다.
바센이 세자라는 지위에도 미치광이 같은 짓을 벌이면 사람들은 허례허식이 섞인 칭찬이 아니라, 어김없이 진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그것은 인정이 아니지만, 적어도 진짜긴 했다.
'옳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궁의 사람들은 바센이 영리하진 못하다고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바센에겐 마치 사냥꾼의 자질이라고 해도 좋을, 날카로운 감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은근한 힐난을 보내는 눈빛을 잘 잡아냈다.
너는 세자감이 아니라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이리 태어난 걸 어쩌란 말인가?'
바센은 그런 눈빛을 가진 이들에게 짓궂게 굴긴 했지만 미워하진 않았다.
진정으로 미워하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그저 첫째로 태어났으니 세자가 됨이 마땅하고 거짓 인정으로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이득을 탐하는 이들.
왕이 된다면 이들을 서로 가려내어 논공행상이라도 해 볼 참이지만, 바센은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세자감이 아니며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제 자신의 눈이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자신이 없구나. 하지만, 그래도 좋다.'
바센은 혼자서 마눈을 데려와 볼 작정이었다.
잠을 깨우면 누구라도 신경질을 내는 법.
바센의 작전은 마눈을 깨워 유인해서 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마눈이 덩치가 크긴 하지만 바센의 코카투는 특별히 발이 빠른데다 바센도 코카투를 다루는데 자신이 있었다.
만약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면, 야천을 믿어 볼 생각이었다.
'그럼 내가 정말 왕이 될 자인지 재어 보자꾸나.'
바센은 코카투의 고삐를 잡아당겨 마눈에게 향했다.
바센의 코카투는 이쪽으로 가라는 게 진심이냐는 듯 바센을 슬쩍 돌아봤지만 바센이 옆구리를 살짝 차자 체념한 듯 내려갔다.
"형님!"
카일의 목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형님, 멈추세요!"
카일은 데아닌의 코카투가 멈춰 서자마자 훌쩍 뛰어내렸다.
하지만 발을 잘못 디뎠는지 내려오자마자 발목을 잡고 웅크렸다.
"앗, 이런."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카일!"
"괜찮습니다. 발목을 삐었나 봅니다."
바센은 마눈과 카일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코카투에서 내려와 카일에게 달려갔다.
바센이 데아닌에게 말했다.
"수렵대신, 애는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아니, 그게..."
"됐습니다. 저기 산등성에 산지기 움막 있는 건 압니까?"
"예. 압니다. 바로 다녀오죠."
산지기 움막에는 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품이 항시 채워져 있었고, 그중에는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과 상처에 대거나 부목을 감을 깨끗한 천도 있었다.
바센은 사냥을 좋아해 산을 타고 다니고 데아닌은 명색이 수렵대신이니 모를 리 없었다.
"어디 보자, 꼬마야. 조심 좀 하지 그랬니?"
카일은 발목을 쥐고 있다가 데아닌이 코카투와 함께 움막으로 달려 올라가는 걸 보고 웃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응?"
"발목은 삔 게 아닙니다. 데아닌이 저랑 형님이 하는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해서 연기를 한 겁니다."
"뭐라고?"
바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은 두 발로 가볍게 통통 뛰어오르며 멀쩡하다는 걸 보여 주었다.
"대화라니? 그전에 여긴 왜 올라온 것이냐? 마눈이 지척에 있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그 때문에 여기 온 것입니다."
"설명해 보거라."
카일은 데아닌에게 했던 추리를 설명했다.
마눈을 가둔 나무 창살에 벌레 먹은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벌레 먹은 자리가 없다면 마눈이 빠져나갈 때 큰 소리가 났을 테니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것, 하지만 사람의 짓이라기엔 너무 신이(神異)하다는 것, 따라서 마눈을 산으로 유인한 것은 야천의 뜻이라는 것까지.
그 말을 듣고 바센은 주저했다.
"...그럼 야천께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말이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데아닌은 제 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내 옆에 널 붙여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로군."
"예. 그래야 형님이 안전해질 테니."
바센은 씁쓸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랑스러웠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그런 거냐?"
"예?"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넌 가만히 있어도 왕이 될 거다. 첫째는 죽었고 둘째는 야천교의 사제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세자 자리는 너에게 가겠지. 꼬마, 너는 왕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냐?"
카일이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넌 그 욕망을 가져도 남들이 탓하지 않을 게다. 타당한 바람이지. 그럼 왜 이곳에 온 것이냐?"
카일이 저 아래에 잠자고 있는 마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거 아십니까?"
"무얼?"
"옛 서책들을 펼쳐 보면 야천께선 좀처럼 실패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뜻한 바가 있으시면 뭐든 성공하십니다."
"그야..."
"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신들을 보십시오. 교묘한 말로 속이며 패배를 포장하기 바쁩니다. 특히 마왕 샤이븐 때 많이 드러나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계획에 실패하는 신들이 있는 것을 보면, 제 생각엔 야천께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단지, 야천께서는 더 많은 준비를 하시는 거죠. 마눈이 형님을 노릴 수 있었던 건 단 한 가지 기회에 불과합니다."
바센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카일이 계속 말했다.
"그 후, 이렇게 둘 뿐인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발목을 잡고 연기할 때 형님은 서둘러 달려오셨죠. 제가 어리다곤 하나 독검이라도 준비해 왔다면 꼼짝없이 당하셨을 겁니다. 야천의 계획에 기회가 두 번만 있을까요? 마눈 잡기에 성공은 없습니다. 이미 궁을 지켜야 할 금군이 동원돼야 한다는 점에서 실패이니, 그 대가를 물을 수 있지요. 그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의 목숨 값을 형님에게 물어 세자 자리를 폐할 수도 있습니다. 제 시야가 좁긴 하나, 아마 다른 기회가 또 오겠지요. 하지만 저는 발견하는 족족 형님에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바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야천께서 주신 그 세 번의 기회를 무르고도 또 무르겠다는 것이냐?"
"예. 그리할 것입니다."
"왜? 왕 자리에 대한 욕심 이전에, 너는 야천이 두렵지 않으냐?"
카일은 새카만 눈동자로 바센을 바라보았다.
"예. 전 야천의 뜻을 알고 있으니, 두렵지 않습니다. 야천께서 만들어 주신 길들도 제가 왕에 이르는 길이나, 제 의지를 반하고 형님을 상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저는 그 길들을 버리고 형님을 상하게 하지 않고 야천께서 만족하실 더 좋은 길을 찾아 그 길로 가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뭐길래?"
"저는 야천께서 준비한 모든 계획을 무르고, 감히 청하겠습니다."
"말해라.'
카일이 바센에게 말했다.
"형님, 제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세요."
"...!"
그 말에 바센이 웃기 시작했다.
급기야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형님?"
"아, 미안하구나. 너무 웃겨서."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바센은 가로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현명하면서 올곧은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너의 마음이 기뻐서. 그래서 웃었다.'
하지만 바센은 형님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말을 내진 않았다.
바센은 웃다가 나온 눈물을 닦아 냈다.
"꼬마... 아니, 카일."
"예."
"너의 말대로 하마."
바센은 자신이 인정하는 동생이라면, 마땅히 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082화
"하지만 카일, 내가 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놓거나 할 수 없는 건 알고 있지? 이걸 결정한 이상 당연히 널 도울 테지만..."
"예. 제가 준비할게요."
겨우 열두 살인 꼬마 애가 '준비'라는 말에 저토록 무게를 실을 수 있다니.
바센은 내심 감탄했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하지?"
바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카일의 시선이 따라갔다.
"아, 마눈이요?"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문제는 풀어냈지만, 당장 앞에 놓인 문제는 아니었다.
마눈을 다시 왕궁으로 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카일은 마눈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코카투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데아닌에게 향했다.
"원래라면 책임자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그런데?"
"저대로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죠."
그 말에 바센이 턱을 쓰다듬었다.
마눈은 거대한 괴수다.
드레이크의 활동 반경은 좁지 않아서, 저대로 있다가도 사람들이 있는 길이나 민가로 내려가게 되면 정말 큰일이 된다.
일견 허황된 소리지만 카일이 말을 하니 그럴듯해 보였다.
"어떻게?"
"수렵대신이 오면 설명하겠습니다."
카일은 바센과 함께 코카투를 타고, 데아닌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 와중에 카일은 마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데아닌은 처음엔 난색을 표하다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눈이 뛰쳐나간 나무 창살까지 내려오자 데아닌이 답했다.
"좋습니다. 카일 왕자님 말대로 하지요.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수렵대신."
그 말을 하고 카일은 바센과 함께 궁 안쪽으로 사라졌다.
데아닌은 의아하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수렵대야 연회를 준비하고 사냥을 준비하는 부서이니 왕족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책 읽기와 다른 학자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는 카일이 수렵대신을 챙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어쩌면...'
─┼
오라즌, 궁의 기와 위에 걸터앉은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네뷸라 님,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왜?"
"저 셋째 왕자가 똑똑한 데다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건 좋습니다. 생각을 들여다봐도 순수한 구석이 있고. 하지만..."
성운이 끄덕였다.
"내가 보여 주는 계시를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이지?"
"걱정되지 않사옵니까?"
성운이 답했다.
"별로."
"왜죠?"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할 때야 게임 캐릭터라고 생각하니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지. 왜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느냐고. 근데 그때도 나는 플레이 잘했어."
"...예."
카일의 생각대로 성운은 될지 어떨지 확정되지 않은 첫 번째 계획에 모든 걸 걸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계획까지 연장했다.
성운의 이번 목적은 카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고, 카일이 성운의 뜻을 하나하나 밝히는 지적인 유능함에 더해 자신의 뜻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솔함이, 바센이 세자 자리를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 밑에 있는 게 사람들이라는 걸 알잖아. 각자의 뜻이 달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어.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는 거지.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더 잘됐잖아?"
왕은 당연히 카일인 쪽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바센 또한 포기하기엔 아까운 개체였다.
카일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바센이 왕이 되더라도 성운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이 둘일 수는 없으니.'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카일과 네뷸라 님의 의지가 같았지만..."
"엘다르."
"예?"
성운은 몸을 숙였다.
옆을 돌아본 엘다르가 흠칫했다.
성운은 엘다르의 이마에다 딱밤을 때렸다.
"앗."
엘다르는 아프라고 때린 것이 아니라 환기의 의미임을 알았다.
"왜요?"
성운은 몸을 세우며 말했다.
"나는 카일을 그냥 결정한 게 아니야."
지능은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성운은 카일 라크 오라즌이 태어나는 자리에 있었고, 학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써내는 글과 말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카일은 이전 세대의 영웅들과 그 가치를 존중하고 동시에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언젠가 성운의 뜻을 그르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르침 자체가 더 큰 의미가 될지도 몰랐다.
'라크락이 그랬던 것처럼.'
─┼
안평왕은 저녁 회의에 불참했다.
속병이 다시 도졌다는 이야기에 대신들 사이에 말들이 오고 갔지만 안평왕의 병증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 되었으니 대신들로선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행정대신 살루신 오가 회의를 주관했다.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당연히 마눈에 대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궁에 있던 대신들이니 당연히 도망친 마눈이 오늘 하루 최고의 화젯거리임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눈을 잡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구려, 수렵대신."
그 말에 데아닌보다 빠르게 경비대장이 답했다.
"예. 저희 금군도 아직 대기 중입니다."
"허, 해가 지도록 잡지 못했으니 날이 밝기 전에도 모르겠군. 그 전에 마눈이 사람을 상하게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수렵대신?"
데아닌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말했다.
"다행히 마눈이 있는 곳은 찾아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오? 마눈처럼 거대한 덩치를 찾지 못할 수가..."
데아닌에게 시종일관 깐깐하게 구는 재정대신이 말을 꺼내자, 데아닌이 덧붙였다.
"바센 왕자님이 도와주셨지요."
"...있지만, 왕자님이 도와주셨다니 참 다행이로군."
"예. 이후 지켜보고 있는데 새벽 내내 돌아다닌 탓인지 움직이지 않고 잠만 자는 중이라 별 탈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행정대신이 말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폐하께서 걱정이 크신데, 내일 아침까진 금군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마눈을 찾아냈으면 서둘러 금군을 빌려 마눈을 몰아오지 그랬소?"
데아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눈이 도망치는 과정을 조사하다 보니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깜짝 놀랐다.
흰머리의 좌수관 수장 휘문이 질문했다.
"그럼 그 말은 오늘도 마눈을 데려올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일도, 앞으로도 마눈을 데려오지 않겠단 말인가?"
"예."
"폐하께서 내려 준 임무를 무슨 핑계로 피하려고?"
데아닌은 서 있는 자리에서만 이야기하는 건 부족하다 여겼는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 회의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다른 대신 여러분들도 놀라셨을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 청컨대 들어 주십사 합니다."
재정대신이 한 소리를 하려 했지만 행정대신이 손을 내저었다.
"좋소, 수렵대신.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데아닌이 말했다.
"오늘 아침 마눈을 쫓기 위해 마눈이 있던 정원으로 갔는데, 부러진 나무 창살을 들여다보니 벌레가 먹었더군요."
재정대신이 핀잔을 주었다.
"설마하니 누가 그대를 골려 주려고 나무 창살을 갉아먹었단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마눈은 그런 벌레 먹은 자리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나무 창살을 박살 내고 나갔을 걸세."
"예, 물론 아닙니다. 저도 재정대신님처럼 생각했지요."
"그런데?"
데아닌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카일 왕자님은 생각이 다르시더군요. 나무 창살에 벌레 먹은 자리 덕분에 나무 창살이 쉽게 부러지면서, 나무 창살에 연결된 돌기둥이 무너지지 않았고, 덕분에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요. 금군의 발견이 늦은 것도 당연했던 겁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 고의로 갉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랬더라도 금군에게 발견되어 매를 맞았겠지요."
"결국 우연의 일치라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누군가 고의로 했으나 그것이 사람의 짓이 아니라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누구겠습니까?"
그 말에 의아하게 데아닌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경탄하며 눈을 크게 뜬 이도 있었다.
행정대신이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그대의 말은..."
"예. 야천께서 행하신 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그대가 아니야."
"예. 그래서 오늘 오후에 교단을 찾아가 사제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야천께선 과거에 푸른 벌레신으로 불렸고 더 이전에는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라고 불리셨습니다. 벌레를 통해 기적을 보인 일이 많았단 거죠. 사제들은 현장까지 와서 벌레 먹은 자리를 보았고..."
데아닌이 말을 하는 중간에 대회관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법복을 입은 야천교 사제였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건 야천께서 보이신 기적이 맞습니다."
사제의 말에 행정대신이 말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슌 왕자님?"
슌 라크 오라즌, 안평왕의 둘째 왕자가 말했다.
"수렵대신이 사제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기에, 제가 직접 왔지요."
"그렇다고 왕자님이 직접 오실 것까지야..."
"저는 이제 야천의 사제이니 자꾸 왕자로 호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듣자 하니 형님과 동생이 이번 마눈 찾기에 한 손씩 도움을 주었는데 저도 빠지려니 섭섭하더군요."
슌은 일찌감치 야천교 교단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데아닌은 슌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곤, 돌아섰다.
"따라서 마눈이 밖으로 나간 것은 모두 야천의 뜻. 저는 감히 야천의 뜻을 거스르고 마눈을 다시 들이기 위해 금군을 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에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마눈을 잡아들이라 한 것은 안평왕의 뜻.
하지만 마눈을 내보낸 것은 야천의 뜻이니, 왕권을 지지하는 가장 큰 힘은 당연히 야천의 의지였다.
행정대신이 말했다.
"좋소, 데아닌. 그것이 야천의 뜻이라면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하지만 궁금한 것은 마눈을 그대로 둬도 괜찮냐는 거요. 야천의 뜻을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건 야천교 사제들이지만, 우리는 그 전까진 백성들의 안전을 구가하여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닌이 말했다.
"그래서 저는 수렵대를 확대 개편하였으면 합니다."
그 말에 대신들이 술렁였다.
"무슨 말이오?"
"만약 마눈이 저대로 있으면 저 산을 지나는 수많은 사냥꾼과 땅꾼, 보부상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마눈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관리 감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을 관리하는 저희 수렵대에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되어야 합니다."
타당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궁이란 서로가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곳.
한 집단의 인력을 확충한다는 말은 새로운 힘이 생겨난다는 말이었다.
행정대신이 그런 우려를 대표해서 말했다.
"어, 그렇지만 수렵대신..."
"한시가 급한 일인 줄 압니다. 앞서 여러 대신들이 걱정한 것과 같이, 마눈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짐승. 하물며 그 거대한 덩치를 생각하면 이를 쉬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금군을 빌리고 싶으나 궁과 폐하를 지켜야 하는 금군으로 마눈을 지키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 현실적으로 생각합시다. 마눈은 짐승이니 어디서 그런 인력을 보충하겠소?"
"민간에는 산을 잘 타는 사냥꾼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고용하고 마눈을 추적하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도록 할 사람들도 고용해야 하며..."
"인력만 보충하면 되겠소?"
"예? 물론 아니지요. 마눈이 이리저리 튀어 다니지 않게 하려면 먹이는 그대로 줘야겠지요. 소를 산중으로 옮기려면 수레도 필요할 겁니다. 수레는 산길을 가다 보면 잘 부서지니 그에 대한 추가 비용도 들 겁니다. 그리고..."
데아닌이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하자 대신들의 얼굴이, 특히나 재정대신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었다.
데아닌의 말을 부정하고 공격하고 싶지만 그랬다가 마눈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수렵대신 데아닌은 수렵대를 확대 개편해야 된다는 말을 부정한 사람부터 언급할 테니까.
"음, 대강의 이야기는 알겠소. 그럼 내일 아침까지 문서로 정리해서 폐하와 우리가 읽어 보면 어떨까 하는데."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데아닌은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데아닌은 이런 기회가 와도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왕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들 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몸을 보신하며 긴 시간을 들여서 궁의 사람들을 한 사람씩 자기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데아닌은 카일의 의지를 알아보았다.
'카일 왕자님은 왕이 될 생각이신 거야.'
그렇다면 일은 더 쉬웠다.
어전 회의의 말석인 자리라지만 그 자리 하나도 누가 앉느냐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데아닌은 생각했다.
인력을 늘리고 재정을 확충하면 그 자체로도 권력이 생기고, 빈틈을 더 이용하면 사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데아닌은 그 사적인 힘을 공적으로 유용할 생각이었다.
'그 힘으로, 카일 왕자님을 왕이 되도록 돕겠다.‘
─┼
여섯 달 뒤, 안평왕은 바센 라크 오라즌을 세자에서 폐하고, 카일을 세자로 봉했다.
3년 뒤, 안평왕이 오랜 지병으로 사망하며 카일 라크 오라즌이 흑린의 11대 왕위에 올랐다.
카일의 나이 15세 때 일이다.
083화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폐하."
카일에게 그렇게 말한 첫째 왕자 바센이었다.
카일의 사랑채에는 카일과 바센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카일은 무안해하며 말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폐하는 이제 일국의 왕, 아니. 대륙의 제일가는 나라의 왕이십니다. 만민을 굽어보는 자리에 오르셨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건 압니다만..."
카일은 떼를 쓸 것이 아님을 알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바센은 만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일이면 첫 어전 회의가 있겠지요."
"예. 그래서 걱정이 되긴 합니다."
"폐하께서 걱정이 되는 일도 있습니까?"
카일은 콧잔등을 긁었다.
"저라고 걱정이 없을 리가요. 오히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걱정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흠, 오랜 시간 폐하를 보아 와도 그 생각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걱정 중 하나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에 카일이 말했다.
"제 걱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센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일 대신 중 하나가 이리 이야기하겠지요. '바센 라크 오라즌을 궁에서 내쳐야 한다'고요. 그것이 폐하의 걱정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 말에 카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센의 말이 맞았다.
다른 왕자가 궁 안에 있으면 왕권이 흔들릴 수 있다.
모반을 꾀하는 이들은 당연히 정통성이 있는 왕자를 원할 테니까.
둘째 왕자 슌 라크 오라즌이야 이미 궁 밖에 있고 야천교 사제이니 걱정이 없지만, 첫째인 바센 라크 오라즌은 다르다.
대신들은 바센을 내보내라 할 것이다.
카일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단상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더 가까워.'
바센이 모반할 생각이 없다는 건 대신들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럼에도 바센이 다른 사람의 간계에 휘둘릴 수 있다는 핑계만으로 바센을 궁 밖으로 내쫓을 이유는 충분하다.
바센이 정말로 모반을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신들은 왕이 제 뜻대로 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 할 것이다.
'현재 흑린은 대신들의 권한이 큰 나라다.'
그것 자체는 카일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왕이 유능하다 하여도 한 사람일 뿐.
시조인 라크락도 부족장이었을 때 부족민들의 의견을 두루 듣고 가장 좋은 의견을 찾아내곤 했다.
왕이라는 지위에 자만한다면 나라가 패망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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