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ção 1
슬기로운 문명생활 ⓒ위래
신이 되어 판타지 문명을 건설하는 게임 "로스트 월드".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자 랭킹 1위 최성운은 지금까지의 플레이가 실전을 위한 연습 게임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 * *
001화
최성운은 얼리 액세스 게임 "로스트 월드"를 좋아했다.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잘하기도 했다.
최대 서른 두 명의 플레이어가 신으로 참가해, 인간과 엘프, 오크 같은 여러 이종족을 현대 문명까지 발전시키고 서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시뮬레이션 게임, 로스트 월드.
성운은 작년엔 듬성듬성 1위를 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연속 11개월 동안 1위였다. 오늘까지 레이팅 점수를 유지하면 12개월, 즉 1년 동안 1위 자리를 벗어난 적 없는 챔피언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성운은 오늘의 마지막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성운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신 '네뷸라'의 이름으로, 핵 공격을 승인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네'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성운이 가진 핵미사일 기지에서 수십 개의 핵탄두를 실은 ICBM이 일제히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몇 시간이나 플레이한 끝에 성운과 상대, 단 둘만이 남았다.
준비된 핵미사일들이 일제히 대륙을 날아 적국을 향해 쏘아졌다.
적국에서 쏘아진 몇 개의 ABM이 성운의 핵을 대양 위에서 떨구었지만 모두 계산 이내였다. 상대의 미사일 요격 체계는 성운을 따라올 수 없었다.
성운은 화신의 눈을 통해 적국의 황제가 사는 궁전을 향했다.
오크 황제는 자국을 향해 쏘아진 핵미사일 소식을 듣고 지하 벙커 안에 마련된 사원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운이 우려하던 부분이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신성 일치 사회에서 통치자가 신에게 최후에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거나, 처연해 보이겠지만 로스트 월드에서는 아니었다.
'내가 핵 빌드를 올리는 동안 상대는 기술에 투자하지 않은 만큼, 신앙 자원은 더 챙겼겠지.'
로스트 월드에서 플레이어는 신이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다스리는 종족이나 국가에 한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자신의 힘을 더 널리 퍼트려 로스트 월드 세계의 존재들이 자신을 믿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앙이라는 이름의 자원이 되고, 플레이어는 그 신앙을 통해 기적을 일으켜 자신의 신자들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었다.
'상대는 오크를 주류 종족으로 선점했지만 그건 그냥 수를 빨리 늘릴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성운은 세계 각지에 퍼진 자신의 화신들을 통해서 핵이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ABM에 요격되지 않은 핵미사일 중 몇 개가 허공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엄청난 열량을 내뿜으며 날아가던 미사일을 그렇게 꺾기 위해선 강대한 힘이 필요하다.
곧 그 힘의 실체가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이족 보행 생물의 실루엣을 닮았으나 그 크기는 수백 미터에 이르렀다.
몰아치는 바람에 휘감긴 거대한 먹구름, 그 안에는 뇌전이 끝없이 번쩍거렸다.
상대가 가진 바람의 화신이었다.
곧 핵미사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압축된 공기들이 회오리치며 휘감아 위로 끌어 올렸다.
상대의 대영역은 하늘.
하늘의 힘이 기적으로 나타나 창공신의 뜻을 거스르고 괘씸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미사일들을 위로 끌어당긴 것이다.
지표에 사는 생물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솟아오른 핵미사일들이 폭발하며 로스트 월드 위로 광구들을 만들어 냈다.
때 이른 인공 태양 덕분에 밤하늘의 별들이 지워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또 홀리오크군.'
성운은 이 전략을 알고 있었다.
오크만을 주류 종족으로 정해서 숫자를 빠르게 불리고, 신자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신앙 자원을 빠르게 획득한다. 과학 기술과 문화는 침략으로 얻는다.
높은 신앙과 오크의 숫자 때문에 전쟁에서 이점을 얻기 때문에 초반에서 후반까지 고루 좋은 평가를 받는 전략이었다.
상대가 대영역으로 하늘을 가져간 것은, 과학 발전을 주류로 놓은 성운을 어느 시점부터 의식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상대가 하늘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성운은 후반에 들어선 전쟁에서 대공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별다른 방해 없이 비행기와 관련된 기술을 사용했다면 핵미사일까지 맞고 손쉽게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상대는 아마 핵미사일을 다 막고 나면 신앙을 좀 더 모아서 벼락이나 토네이도, 태풍 따위의 천재지변 기적으로 반격을 할 심산일 것이다.
최근 홀리오크는 최고 승률의 메타였다.
그래서 더 쉬웠다.
성운이 랭킹 1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카운터 빌드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성운도 홀리오크라면 메타가 만들어진 직후부터 사용해 왔었다.
약점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성운도 같은 전략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운은 중 가장 높게 떠 있는 것을 움직였다.
'그것'은 지표로 부터 무려 2000km보다 높이 있었다.
인공 지능으로 운영되는 군사 위성으로, 고대의 성물로 제작된 성운의 화신이었다.
하늘의 대영역을 가진 신이라도 모든 하늘을 지배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자기 머리 위의 하늘이란 말이지.'
우주는 신들의 영역이 아니었고, 인공위성이 떠 있는 위치도 당연히 그러했다.
하늘이라는 건 결국 대기권 이내.
저 하늘의 신은 준엄하게 땅 아래만 내려다보느라 자기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다.
성준은 자신의 화신을 움직여 적국의 황제 머리통 위를 겨누었다.
군사 위성이라고 해도, 화기는 단 하나도 실려 있지 않다.
그저 몇 개의 텅스텐 막대 뿐.
그것으로 충분했다.
10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텅스텐 막대는 행성의 중력에 이끌려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처음엔 움직이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렸던 그것은 하늘을 찢으며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 상대는 핵미사일을 상대하느라 알아차릴 수도 없었을 테고,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기적으로는 각도를 조금 바꾸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의 지팡이라고 들어 봤냐?'
텅스텐 막대가 제국의 궁전 지붕을 꿰뚫고, 몇 개의 층을 그대로 관통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낙하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텅스텐 막대는 벙커를 그대로 꿰뚫고 지하 사원에 처박혔다.
그 끝에는 기도를 올리던 황제가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한 발 늦게 제국의 궁전과 그 아래 지하 사원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겼군.'
곧장 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저 상대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상대는 '헤게모니아'라는 닉네임을 쓰는 랭킹 2위로, 최근 레이팅 점수를 급격히 올리며 쫓아온 유명 플레이어였다.
앞으로도 자주 맞부딪칠 테니 주요 빌드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추해지기 전에 항복하는 게 좋을 텐데.'
화신이었을 제국 황제가 사망하고 가장 많은 신앙을 얻고 있었을 지하 사원이 붕괴되었다.
상대의 신앙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신을 유지할 신앙은 없는 것 같았다. 바람의 화신은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더 이상 핵미사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자명했다.
상대는 허둥지둥하면서 기적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바람의 사도들이 흩어졌고 적국의 수도와 주요 도시, 그리고 기간 시설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결국 상대는 추해진 다음에야 항복했다.
「승리했습니다!」
성운은 점수 화면으로 나가자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과의 점수 차이 때문이 아니라, 태평양 표준시 기준으로 다음 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개월 연속 랭킹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로스트 월드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일뿐더러 앞으로도 그 누가 쉽게 넘보지 못할 기록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운을 기쁘게 했던 것은 100% 달성의 업적 목록이었다.
'12개월 연속 랭킹 1위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업적이라니.'
제작사에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만들었냐고 업적 마니아들 사이에서 욕을 먹기도 했는데, 아무튼 존재하는 업적이었고 성운으로선 말도 안 되게 힘든 만큼 오히려 도전할 가치를 느꼈다.
실패도 많았고 연속 5개월 차에서 한 번 실패한 이후는 다시 도전할 수 있을지 의문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성운은 여기까지 왔다.
성운이 기지개를 펴고 다시 화면을 봤을 때, 쪽지가 하나 와 있었다.
「'로스트 월드'를 즐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리 액세스로 진행된 로스트 월드는 이제 정식 게임으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플레이어 '네뷸라' 님은 정식 서비스 이전 먼저 게임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플레이 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타이밍 좋게? 업적 달성을 했을 때 정식 출시할 예정이었나?'
성운은 시계를 힐끗 봤다.
12개월 연속 랭킹 1위 자리를 지켰고, 업적 100%를 달성해서 고양된 기분이었지만,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다. 이제 손이 풀렸을 뿐이다.
성운은 '네'를 눌렀다.
─┼
성운은 점멸했다.
─┼
성운은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운은 새카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야가 또렷해지자 하늘은 완전히 검지도 않았다.
별들이 반짝거렸다. 어딘가 익숙한, 푸르게 빛나는 행성도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것은 당연히 태양이었다.
누워 있던 성운은 허리를 번쩍 들었다.
'사원 폐허...인가?'
그리스의 사원을 생각나게 하는 투박한 양식의 석주가 둘레를 두르고 있고, 바닥 또한 같은 회색빛 돌로 다듬어져 있었다.
성운이 누워 있던 이 건물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지 석주 너머로 비슷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상한 점은 지평선이 보이는데도 하늘은 검다는 것이다.
'대기가 없구나.'
대기가 없으면 빛의 투과가 없으니 산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해가 떠도 하늘은 검게 보인다.
물론 대기가 없으면 숨도 못 쉬겠지만, 성운은 생생한 꿈이겠거니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꿈이 아닙니다."
성운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사람이 서 있었다.
중세 수도사들이나 입을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 쓴 모습이었다.
성운은 얼굴 안쪽이 보일까 싶어 허리를 살짝 숙여도 봤는데, 후드 안쪽은 캄캄하기만 했다.
성운이 되물었다.
"꿈이 아니라뇨?"
"성운, 저는 알딘입니다. 당신도 선택받았습니다."
성운은 눈을 껌뻑거렸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 선택 받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되묻기 전에 더 의아한 점이 있었다.
"당신'도'라고?"
알딘은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들어 성운의 주변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그림자들이 성운의 눈에 보였다.
성운은 조금 놀랐지만, 그 그림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실루엣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자들도 성운처럼 놀라서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같은 세계, 지구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이에는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공평한 게임을 위해 그림자로 덮어 두었습니다."
"게임이라는 말은..."
성운은 자신이 이곳에 오기 직전 뭘 했었는지 깨달았다.
알딘은 팔을 들어 머리 위의 행성을 가리켰다.
지구라고 생각했던 행성은, 사실 성운에게 아주 익숙한 또 다른 행성, 로스트 월드였다.
'그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여기는 로스트 월드의 달이란 말이군.'
"예. 여러분이 했던 게임 '로스트 월드'는 실제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여러분이 무수히 플레이했던 그 게임들은 다음 한 번을 위한 연습 게임이었습니다."
알딘이 말했다.
"여러분은 저 로스트 월드에서, 진짜 신이 될 겁니다."
002화
그림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해하며 혼잣말을 하거나 알딘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임을 통해 로스트 월드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 행성에는 과거 찬란했던 문명이 꽃 피웠고, 다양한 종족들이 조화롭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신들은 떠나갔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 행성에는 신을 잃은 가여운 존재들이 황야를 떠돌며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 후보자를 찾기 위해 저 행성의 존재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찾아냈고, 그곳에서 저 행성을 닮은 게임 로스트 월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장소에 대한 기억을 잃을 겁니다."
성운이 질문했다.
"도전한다면?"
"예?"
"포기한다면 기억을 잃는다. 그럼 계속해서 도전해서 결국 승리하면 뭘 얻는 거지?"
알딘은 성운을 향해 말했다.
"도전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신이 됩니다. 로스트 월드에서 겪었듯 처음엔 초라한 것들만 당신을 믿겠죠. 하지만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존재를 불려 나간다면, 당신은 이 행성의 유일신이 될 수도 있겠죠.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의 세계를 얻는 겁니다."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딘의 말에는 빈틈이 있었다.
"지금 포기하면 되돌아가는 건 알겠어. 그런데 도전하겠다고 한 다음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신들에게 패배하면..."
"신다운 최후를 맞이하겠지요."
성운이 기대한 답변이었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한 게임이라면 자기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대로라면 목숨을 거는 것 이상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승리 조건은 게임 로스트 월드와 똑같나?"
"예."
로스트 월드의 승리 조건에는 동맹 승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명목에 불과했다. 거대한 적을 두고 동맹을 만들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었고, 보통은 그런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단기적인 목표를 두고만 동맹이 생기는 것이 일례였다.
'그야 단독 승리가 레이팅 점수가 더 많이 오르니까. 여기에서도... 아마 비슷하겠지.'
레이팅 점수로 랭킹을 올릴 수는 없지만, 아무도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는 유일신이 될 수 있다.
성운은 이곳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서른두 명, 즉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하기 위한 최대 인원이라는 걸 알았다.
"도전에 대가가 따른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겨우 게임을 플레이한 걸로 도전할 자격을 줘도 괜찮은 건가?"
"물론이죠."
알딘이 말했다.
"여러분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로스트 월드를 통해 세계를 수백 번, 수천 번 구해 냈습니다. 여러분에겐 로스트 월드에 익숙할 인터페이스도 그대로 제공될 겁니다. 물론, 이건 정말로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 행성에 사는 생물들은 글자 그대로 살아 있고, 그만큼 많은 변수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성운은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었지만, 알딘은 가볍게 손을 내밀며 제지했다.
"이제 선택할 시간입니다. 포기하실 분은 지금 말씀하십시오."
"도전할 이들은?"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곧 몇 사람이 입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질문을 던지거나, 포기한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드문드문 그림자들이 사라졌다.
성운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신이 된다고?'
성운은 돌아가서 남은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
게임에, 로스트 월드에 그토록 몰입했던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가족은 불화했고, 재산이라곤 빚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성운의 머릿속 계산이 맞다면, 이곳에 남아 신이 되는 것이 더 행복할 가능성이 컸다. 어렵지 않은 계산이었다.
성운은 로스트 월드를 잘했다.
잘할뿐더러, 좋아하기도 했다.
'포기할 이유가 없잖아.'
서른두 명의 그림자가 스물일곱으로 줄어든 이후, 포기하겠다 말한 이가 없었다.
알딘이 말했다.
"그럼 이 제단에서 카드 하나를 선택하세요. 그 카드가 여러분의 첫 번째 소영역을 결정할 겁니다."
알딘이 뒤로 물러나자, 언제 있었냐는듯 둥근 제단이 나타났고, 카드들이 엎어져 있었다.
'게임이랑 똑같군.'
알딘은 첫 번째로 성운을 가리켰다.
"당신이 먼저 뽑으면 됩니다."
성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에서와 같이 무작위로 결정하므로 뽑는 순서는 상관없지만, 랭킹 1위이니 배려라면 배려인 것 같았다.
"카드를 뒤집으면, 이동합니다."
다행히 성운은 최초에 선택할 수 있는 서른두 개의 소영역 모두 편차 없이 잘 다루는 편이었다.
'그래도 승률이 조금 더 잘나오는 소영역들이 있긴 하지만...'
성운은 한 가운데 있는 카드를 집고, 뒤집었다.
카드를 뒤집은 성운은 그림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
성운이 뽑은 첫 번째 소영역은 '곤충'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곤충은 아니고, 여러 절지동물과 갑각류를 어느 정도 포괄하는 범주였다.
최초로 선택할 수 있는 서른두 개의 소영역 중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고, 실제 데이터에서도 승률이 최하였다.
'아무래도 곤충이 선택되면 바로 나가 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지금 성운은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다소의 편차가 있다곤 해도, 성운은 무슨 소영역으로 시작하든지 승률이 고르게 좋은 편이었다.
'곤충은 광물이나 가축 같은 인기 소영역보다 까다로울 뿐이지.'
광물을 얻는다면 청동기 시대가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상당히 유리했다.
아마 누구보다 철기 문명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철기의 막강함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가축도 훌륭한 소영역이다.
고기 자원을 손쉽게 불리고, 소를 이용해서 곡물 자원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
산 제물을 통해 신앙 자원 이득을 얻는 건 보너스다.
'반면에 곤충은...'
골똘히 생각하던 성운은 곤충 카드를 품에 넣고 행성을 내려다보았다.
참고 있던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스타팅까지 구릴 줄은 몰랐는데.'
일단 대륙도 좋지 않았다.
로스트 월드는 크게 봤을 때 세 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져 있고, 성운이 위치한 지역은 세 번째 대륙의 북반구였다.
제3대륙은 가장 큰 대륙이긴 하지만, 제1대륙처럼 자원 매장량이 많지도 않았고 제2대륙처럼 기후가 좋지도 않았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여러 종족과 괴물들이 살고 게임에서 특별한 능력을 제공하는 유적도 많았다. 이용하기에 따라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성운은 주어진 것에 불만을 표하기보다, 불만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는데 시간을 쓰는 편이었다.
성운은 곧 자신의 의지대로 허공에서 움직이거나, 지표면을 확대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신이 되었다는 느낌은 들었다.
성운은 가볍게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훑으며 종족과 부족들을 파악했다.
그 땅은 제3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반도였다.
'조금만 더 서쪽에서 시작해도 좋았을 텐데.'
성운은 로스트 월드의 초중반, 그러니까 청동기에서 중세 시대 전투에 자신이 있었고 다른 신들과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도는 진출에 불리한 부분이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초반에 안전하다고 봐야겠지.'
성운의 머릿속으로 빌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게임 로스트 월드는 평균 게임 시간이 네 시간인데 비하면, 시간도 많았다.
조금 더 서두른다고 크게 유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영역과 땅이 정해지면, 플레이어는 첫 번째 종족과 부족을 정해야 했다.
로스트 월드에는 인간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종족들이 있었고, 그 종족들은 크고 작은 부족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에 택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부족뿐이었다.
'신이라고해도 처음엔 아주 작은 힘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신이라고해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신은 인과율이라는 필터를 거쳐야만 행성 위의 생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과율을 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다.
처음 가진 신앙은 겨우 10.
이걸 잘 이용해서 자신이 정한 종족에게 신의 존재를 믿게 하고 의지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신앙이 상승하고, 상승한 신앙으로 더 많은 기적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일단 두 개 무리 정도가 눈길을 끄는데.'
하나는 리자드맨 무리였다.
피부는 푸른빛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는 녀석들로, 리자드맨치고 크기도 왜소하고 빼빼 말랐다.
숫자도 부족이라고 불리긴 적은 서른 명 남짓.
아마 모두가 혈연관계에 속하는 씨족일 것이다.
'더 큰 무리에서 힘 싸움에 밀려 내쫓긴 놈들이겠지.'
실제로 이 무리가 멀어져 가는 곳에는 작은 오아시스를 터전으로 삼은 같은 리자드맨 종족들이 무리 짓고 있었다.
이쪽은 백오십 명 정도 되었다.
하지만 성운은 더 큰 쪽보다 작은 쪽에 관심이 갔다.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무리가 클수록 작은 기적에 연연하지 않는다.
큰 무리를 처음부터 얻는 건 이득일지도 모르지만, 신앙 10을 모두 소비하는 모험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무리가 작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일수록, 신을 쉽게 믿고 따랐다.
'신앙은 개체의 믿음 정도, 얼마나 신의 존재를 믿고 마음을 의탁해 오는지, 그리고 실제로 의존하는지에 따라 갈리니까. ...하지만 꼭 처음부터 험한 길을 택할 필요는 없어.'
사실 성운이 리자드맨에 끌린 가장 큰 이유는, 리자드맨이 바로 '곤충'을 먹기 때문이다.
다른 종족도 필요하다면, 그러니까 인간이나 엘프도 극한 상황에서 곤충을 먹긴 하지만 문화적 혐오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란 건 어디까지나 곤충을 먹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병균이나 기생충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자드맨은 그 부분에 있어서 내성이 높은 편이기에 곤충 생식에도 혐오감이 없었다.
인간에게 '가축' 소영역이 식량을 얻기 용이하다면, 리자드맨에게 '곤충'도 조금은 유용한 것이다.
'물론 곤충 사육은 기술 수준이 제법 있어야 하지. 게다가 똑같이 곤충을 먹는다면...'
이번에 성운은 두 번째 무리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프로그맨 무리였다.
실제로 곤충을 더 즐겨 먹는 건 이 수생 생물이자 양서류 인간들이었다.
청동기 문화 수준으로도 곤충 양식이 가능한데다 문명이 발전하는 강과 호수에서 터전을 잡고 시작하기도 했다.
실제로 성운이 내려다보고 있는 황야의 남서쪽에 위치한 프로그맨 무리는 무려 500명으로 첫 부족으로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무리였다.
'하지만 수생 생물이라는 게 꼭 강점이라고 할 수는 없어. 물가가 없는 곳에서는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지기 전까지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지. 이 게임은 모험을 부릴 여유는 없을 거야. 유연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녀석들로 가능할까?'
성운은 한동안 고민을 했다.
'파충류냐, 양서류냐.'
그리고 첫 부족을 선택했다.
003화
상처 입은 젊은 리자드맨은 무리의 후미를 따르고 있었다.
얼마 전 검치호에게 할퀴어진 어깨 상처가 잘 아물지 못하고 있었다. 영양이 부족한 탓이었다. 걸음마다 상처가 자극되었고 체력도 떨어져 그 걸음이 느렸다.
서른 남짓한 무리는 황야를 지나며 드문드문 보이는 새나 길 잃은 짐승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사냥에 참가하지 못한 약한 이들에겐 살점이 다 뜯기고 남은 뼈다귀만 주어질 뿐이었다.
상처 입은 리자드맨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냥을 해낸 이가 더 많은 고기를 먹는 건 당연하다.
사냥을 하지 못한 이는 그 찌꺼기를 남겨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한다.
무리는 입을 줄이기 위해 약한 이와 환자를 놔두고 떠나 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단순한 동정심 때문은 아니었다.
무리 중 몇몇은 저 리자드맨, 얼마 전 '상처 입은 자'라는 뜻의 이름을 얻은 라크락에게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젊은 리자드맨은 얼마 전 검치호가 나타나 모두가 등을 보여 달아날 때, 유일하게 맞선 존재였다.
덕분에 무리는 라크락의 상처를 제외하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라크락이 없었다면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무리가 완전히 와해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병들고 늙고 약하다는 이유로, 그런 약한 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더 큰 무리에서 내쫓긴 이들이었다.
라크락이 없었다면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크락은 모두의 기대보다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
라크락에게 남겨 주는 뼈의 골수마저도 아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하나둘 떠올리고 있었다.
운 좋게 흰개미 집을 찾아내면 무리는 재량껏 흰개미를 집어 먹어야 하는데, 손재주가 좋은 라크락은 그때서야 제대로 된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몇몇은 겉으로 말을 꺼내진 못했지만 괘씸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차라리 라크락이 검치호를 막아 내고 죽었더라면, 그를 묻고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 무리는 다른 이들에게 내팽개쳐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라크락의 느린 걸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
라크락 스스로도 그때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폐가 되는 자신이 미워질 정도였다.
황야는 너무 넓었고, 먹을 것은 부족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고, 약한 것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크락의 걸음은 멈추어지는 일이 없었고, 이번이 마지막 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음 걸음을 내딛을 힘이 어디선가 솟았다.
'저게 뭐지?'
라크락은 희미해지는 눈으로 황야의 작은 언덕 위에 눈길이 갔다.
무리의 선두는 지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놓친 것 같지만, 언덕 위에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있었다. 검은 안개는 언덕 위에서 보였다가 너머로 사라졌다.
'정신이 혼미해져 보이는 환상인가?'
하지만 어렴풋하게 붕붕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라크락은 귀가 좋은 편이기도 했다.
라크락은 무리와 언덕 위의 검은 안개를 번갈아 보다가, 언덕을 올라 보기로 결정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리 중 몇몇은 라크락이 언덕을 오르는 걸 보고 잠깐 멈춰 섰다.
그들은 라크락이 무리를 이탈하려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무리 전체가 라크락을 보기 위해 멈춰 섰다.
몇몇은 이대로 떠나자고 말했고, 몇몇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라크락이 언덕 위에서 뭐라고 외쳤다.
라크락이 발견한 것은 딱정벌레 떼였다.
딱정벌레는 다른 종족이라면 불편해하겠지만 리자드맨들에겐 간식거리였고, 충분한 수가 있다면 끼니가 되었다.
이 딱정벌레 떼는 짝짓기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좁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라크락이나 다른 리자드맨의 손을 피하지도 않았다.
모두 얌전한 식량이 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리자드맨들은 그날 모두 포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가 부른 라크락은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리자드맨 1102-1 무리가 기적을 인식하였습니다.」
성운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보고 안심했다.
알딘이 말한 대로 인터페이스는 게임 로스트 월드와 똑같았다.
곤충의 소영역은 신앙을 소비해 곤충을 조종하거나 창조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조종과 창조는 게임과 달랐다.
게임에서는 시스템이 제시하는 몇 가지 방법 중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행성에서는 성운의 의지대로 세심한 컨트롤이 가능했다.
'당장 그런 컨트롤은 의미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로스트 월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었고,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당연히 인간이 가장 인기 종족이긴 하지만, 인간은 기생충이나 질병 저항력이 낮고 상대적으로 음식을 가리는 편이었다. 육체 능력이 낮은 것도 까다롭다. 중반 이후로는 여러모로 괜찮은 종족이긴 하지만 로스트 월드 게이머들이 말하는 스타팅 추천 종족이 아니었다.
성운이 있는 지역에는 인간 부족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재주 특성 때문에 중반쯤에는 포섭하는 게 좋겠지.'
반면 리자드맨은 머릿수가 금방 늘어나는 편이고 성장도 빨랐다.
같은 장점을 공유하는 오크 같은 종족도 있지만, 성운이 자리한 곳에서 부족 숫자가 더 많은 건 리자드맨이었다.
성운은 다음 계획을 향해 움직였다.
'기적을 인식한 다음은 신성을 알아차리겠지.'
성운은 리자드맨 부족의 이름을 우선 '라크락의 무리'로 부르기로 했다.
로스트 월드 게임에서도 기적에 예민한 개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마 라크락은 성운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라크락에게도 내가 중요한 존재가 되겠지만.'
성운은 리자드맨 부족 주변에 딱정벌레 무리를 일으키는 기적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배가 고파질 때쯤이면 벌레 무리가 나타났고, 어김없이 라크락이 그것을 발견해 무리를 이끌었다.
특별히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던 씨족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라크락이 무리를 이끌기 시작했다.
'역시 게임할 때랑 크게 다르진 않아.'
기적이 나타나면 지성을 가진 존재들은 그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기적이 반복되면 그 놀라운 일을 벌이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필연적 존재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라크락의 무리가 신성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을 인식했습니다.」
성운은 딱정벌레 신이라는 대목에서 웃었다.
'뭐, 처음부터 대단한 이름을 가지는 경우는 없으니까.'
지적 존재가 문명과 기술을 발전시키듯 신의 이름도 바뀌는 법이었다.
기적 다음에는 신성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적과 신성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겠지.'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성운의 계획대로라면 다음 기적을 통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터였다.
─┼
라크락은 또 다시 딱정벌레 떼를 발견했다.
며칠 간 포식이 이어진 덕에 어깨의 상처는 나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무리 또한 딱정벌레 떼를 쉽게 발견해 내는, 눈과 귀가 밝은 라크락에게 의지했다.
심지어 라크락에게 험한 말을 했던 리자드맨 몇몇은 사과를 해 오기도 했다.
라크락은 그 화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리자드맨 몇몇은 라크락의 태도에 부끄러워했고, 반성했다. 이들은 언제든 더 좋은 무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와 별개로 라크락은 이 신기한 딱정벌레 떼를 의심하고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과거 문명을 잃어 버린 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남아 있는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의지하던 신들이 떠난 이유 중에는, 신들조차 막을 수 없는 악이 창궐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악은 지금까지도 존재해서, 이따금 부족 앞에 나타나 유혹해서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 봤자 무리에서 내쫓긴 떠돌이들의 말이지만.'
떠돌이들은 힘이 없었고, 구걸을 위해 거짓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라크락이 보기에 딱정벌레 떼를 만들어 내는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은 그들을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북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겨울에도 리자드맨은 살아갈 수 있긴 하지만, 냉혈 동물이었던 선조들의 핏줄이 아직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겨울엔 몸이 둔해진다.
먹이가 줄어드는 겨울이 오면 해가 떠 있는 낮에나 활동이 가능할 테고, 그럼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럼 적어도 황야를 지나 몸을 덥힐 땔감이 많은 숲이라도 찾아야 했다.
본래 라크락의 무리는 남쪽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딱정벌레 떼는 무리를 북쪽으로 유도했다.
지금까지 딱정벌레 떼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보다 큰 시야에서 본다면 딱정벌레 떼의 인도는 함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까지 시간이 있다. 다음 딱정벌레 떼를 발견한 다음 내려가도 괜찮겠지.'
라크락은 그리 생각하며 눈앞의 딱정벌레 떼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번 딱정벌레 떼는 가까이 다가가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라크락은 금세 딱정벌레 떼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시여...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 겁니까?'
성질이 급한 리자드맨들이 달려들기도 했지만, 그러면 딱정벌레 떼는 더 빨리 멀어졌다.
라크락은 회의를 열어 딱정벌레 떼를 따라갈지, 아니면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갈지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회의적인 라크락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딱정벌레 떼를 따라가자고 말했다.
라크락은 비록 이것이 함정일지라도 무리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라크락의 무리는 밤을 지새우며 이틀을 꼬박 걸었다.
라크락은 가장 어린 리자드맨을 들쳐 업고 선두로 나아갔다.
딱정벌레 떼는 황야를 지나 솟은 작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수풀이 보이자 라크락은 의아해졌다.
메마른 황야에는 풀이 거의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덕을 오르자 넓은 샘이 나타났다.
샘 주변으로는 수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언덕 뒤로 샘에서 쏟아진 물로 작은 폭포와 시냇물이 흘렀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작은 토끼 하나가 낯선 종족을 발견하고서 도망갔다.
딱정벌레 떼는 제 할일을 마쳤다는 듯 라크락의 주위를 맴돌았다.
라크락은 딱정벌레 하나를 집어 들며, 언덕을 막 올라와 놀란 무리를 향해 돌아섰다.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께서 우리를 성역으로 인도하셨다!"
무리에서 기쁨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
「라크락의 무리가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신성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1 → 2」
「신앙이 상승했습니다.」
「3/10 → 36/50」
「'소영역:벌레'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1 → 2」
「'벌레의 축복'이 해금되었습니다.」
004화
성운은 신성 레벨과 벌레의 소영역 레벨이 상승한 것을 확인했다.
신성 레벨은 초반에는 신앙의 제한을 늘려주는 역할 뿐이니 당장은 주목할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벌레의 소영역이 상승했다는 점이었다.
겨우 2레벨이 되었을 뿐이지만, 2레벨이 되면서 '축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커스텀이 가능하겠어.'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는 플레이어의 소영역이 상승하면, 그 소영역을 지지하는 신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시스템 상 이름은 '신의 축복'이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커스텀'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불의 소영역을 가지고 있다면 열기에 저항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고, 풀의 소영역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 가지 풀독에 저항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시킬 수 있단 말이었다.
이런 축복은 종족의 외형을 변화시키고, 그 후손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
'다만 문제가 있지.'
축복은 한 마리에게 내리는데도 10의 신앙이 소모 되었다.
현재 성운의 신앙은 36, 최대치는 50.
소영역 당 괜찮은 축복은 세 개 정도 되기 때문에, 겨우 한 마리에게 축복을 다 내리면 신앙을 다 소모하는 셈이다.
'물론 그 축복을 받은 개체가 계속 자손을 번성시키면 자연스럽게 수가 불어나니까 값비싸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그걸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는 법.
나중에 더 많은 소영역을 얻고 그 소영역으로 축복을 내리고 다른 기적으로 서포트를 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가까운 시간 내에 라크락의 무리에게 축복을 내려 줘야만 했다.
'신앙을 더 많이 모아야 해.'
다행히 신앙을 모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지금 단계에서도 실행할 만한 것이 많았다.
'우선은 라크락을 제사장으로 삼아야겠지.'
제사장은 중세에 들어가기 전까지 써먹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제사장으로 선택하면 약간의 신앙을 소비하고 꿈을 통해 적절한 암시를 내려 줄 수 있기도 했다.
게다가 라크락은 특수 능력치 하나가 높은 '특별한 개체'기도 했다.
『라크락(전사 Lv.1)
힘 14
지능 15
사회성 16
의지 9』
'검치호에게서 동료를 구한 경험 덕분인가? 아니면 저 능력치가 있어서 그런 경험을 한 건가? 어느 쪽이든 의지는 좋은 능력치야.'
의지 능력치는 무언가를 도전할 때 포기를 하지 않고 부단하게 노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당장 9라는 숫자는 적어 보이지만, 일반적인 개체는 능력치가 평균일 경우 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제단. 사원 같은 건축물은 아직 무리겠지만, 제단을 만드는 건 문제 없을 거야.'
원시적인 신앙에서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제단은 기초 중의 기초였다.
이런 종류의 제단은 지속적인 신앙 공급을 해 줄 수 있었고, 제사장이 진행하는 제사를 통해 무리의 신앙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사를 열기 위해선 역시 제물이 필요하지.'
소영역에 맞는 적절한 방식으로 제단 위의 제물이 소모되면, 아주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물이 귀하고 중요한 것일수록, 얻기 어려울수록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는 증거이므로 비례해서 더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었다.
'로스트 월드 게임 초기 생각이 나는걸.'
제물과 신앙 사이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려지고 나자,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빌드에 매료되었다.
게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 그리고 얻기 어려운 것을 제단에 바치게 한 다음 큰 신앙 자원을 얻는 것.
바로 '인신 공양' 빌드.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 유행한 빌드는 아니었다.
반짝하며 높은 승률을 보장했지만 곧장 파훼 빌드가 나왔다.
인신 공양, 즉 같은 부족이나 동족을 산 제물로 삼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정이 파탄나기 마련이다.
신을 의지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공포심이 더 커진다.
사회 규율이 경직되면서 제사장들은 플레이어가 의도하지 않은 제약과 법을 만들고, 그걸 어기면 제물로 바쳐 버린다.
기술 문명이 발전하기 어렵고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내줘야 할 인적 자원이 신앙으로 환산되면서 다른 빌드로 옮겨 타기도 어려워진다.
'아, 물론 동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산 제물 삼는 건 경우에 따라 유효하긴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내정 대신 외교 관계가 파탄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지구에 실재했던 아즈텍 문명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런 빌드는 정석적인 빌드보다 좋을 게 없었다.
성운은 인신 공양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지만, 제물을 필요로 했다.
'라크락의 무리가 도전을 할 필요는 있어.'
성운은 라크락의 무리가 위치한 장소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륙을 향해서 뻗어나가기 힘든 반도.
황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초기에 유용한 자원도 부족하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만 했다.
'인신 공양까진 아니지만, 산 제물은 필요해. 기왕이면 큼직한 놈으로.'
하지만 라크락의 무리 주변에는 큼직한 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라크락의 무리는 황야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긴 했지만 무리가 크다고 생각한 숲도 언덕에서 내려오는 시냇물 때문에 조성된 환경에 불과했다.
숲은 넓지 않다. 그 뒤는 다시 황야다.
이 숲에서 제일 큰 사냥감이라고 해 봐야 토끼 정도일까.
황야 깊숙한 곳으로 가면 라크락을 공격한 검치호, 검치호보다 강한 드레이크, 그런 상위 포식자들의 먹잇감인 물소 떼 같은 게 있긴 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정착을 시작한 라크락의 무리에게 다시 황야로 떠나라고 종용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일단 남은 신앙으로 라크락에게 축복을 몰아주고 생각하자.'
성운은 라크락의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
라크락은 최근 자신의 몸에서 생겨나는 변화를 느꼈다.
일단 겉 비늘이 검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질병이 아닐까 겁이 났지만, 허물벗기를 한 이후 드러난 비늘은 매끄러운 광택과 전보다 단단하면서 부드러웠다.
마치 딱정벌레 같았다.
다른 변화도 있었다.
원래 왜소했던 라크락은 이제서야 평균적인 덩치를 갖춰 가고 있었다.
하지만 힘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움막을 짓기 위해 나무를 해 왔을 때 라크락보다 큰 나무를 짊어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숲에는 처음 보는 새빨간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라크락은 처음엔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손가락의 비늘이 없는 살갗으로 만져도 별 느낌이 없었다.
괜찮다고 생각한 라크락은 버섯을 아주 조금 뜯어 먹었고, 다음날이 되어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자 하나를 모두 먹었다.
그다지 맛있지는 않지만 탈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크락을 따라 빨간 버섯을 먹으려고 했던 무리의 다른 리자드맨들은 손을 댄 것만으로도 부어올랐다.
며칠 지나 붓기가 가라앉긴 했지만 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변화는 모두 신기한 일이었고, 라크락의 무리는 라크락의 변화에 경외심을 느꼈다.
라크락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
이런 일은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 내려 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께서 왜 이런 힘을 내게 내려 주셨을까?'
며칠 뒤 라크락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라크락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황야를 걸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몇 날 며칠을 걷던 라크락은 어떤 리자드맨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라크락이 찾던 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라크락은 내달려서 그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쳐 쓰러진 라크락이 기어코 무릎을 꿇자, 등만 보이던 리자드맨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러자 밝기만 하던 하늘이 어두워졌고, 라크락이 쫓던 리자드맨의 얼굴도 어둠 속에 가려졌다.
라크락은 그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리자드맨은 손을 내밀었다.
라크락은 그 손이 일으켜 주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느새 라크락의 품에는 물소의 두개골이 들려 있었다.
머리 사이로 솟아오른 거대한 뿔, 퀭하게 뚫린 안와와 비강, 아직 단단하게 붙은 위턱뼈의 이빨들.
라크락은 물소 두개골을 리자드맨에게 건네주었다.
리자드맨은 물소 두개골을 자신의 머리에 덮어썼다.
그러곤 다시 손을 내밀었다.
라크락은 다시 줄 게 있나 싶어 두 손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리자드맨은 사라졌다.
라크락은 꿈에서 깨어났다.
─┼
"물소를 사냥해야 한다."
잠에서 깨어난 라크락이 무리를 불러 모아서 한 첫 마디였다.
자올이 투덜거렸다.
"물소를 사냥하려면 황야 저 깊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자올은 본래 이 씨족을 이끌던 큰 리자드맨이었다.
라크락이 신성한 땅을 찾아내며 큰 불만 없이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라크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께서 물소를 잡길 원하신다."
"신께서? 신을 보았나?"
"그래. 그분은 오늘 내 꿈에 나오셨다."
라크락은 운을 떼고는, 꿈 이야기를 전했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신께서 물소를 바치길 원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크락의 꿈 이야기에 무리 모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소를 잡으려면 무리의 사냥꾼 모두가 나서야 한다. 사냥꾼 모두가 떠나면 나머지 약한 이들은 누가 지키나? 사냥꾼들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너무 위험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라크락은 반대를 표하는 자올이 싫지 않았다.
맹목적인 믿음은 다양한 의견을 배제한다.
하지만 라크락도 생각한 바가 있었다.
"나 혼자 떠나겠다."
"뭐?"
"신께선 내 꿈에 나타나셨다. 나보고 그 일을 행하라는 뜻이다."
자올은 으르렁거렸다.
"안 된다. 무리에 너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다. 무리를 흩트릴 셈인가? 그리고 어떻게 혼자 물소를 잡는가?"
"보여 주지."
라크락은 투창을 들고 일어났다.
돌로 깎은 투박한 촉을 묶어 놓은 투창은 라크락의 애병이었다.
라크락은 무리 앞으로 걸어 나가, 멀리 있는 고목을 가리켰다.
라크락은 한 번 디딤 발을 밟고 창을 던졌다.
포물선이 아닌, 하나의 선으로 그려지는 완벽한 직선이 쏘아졌다.
퍽 소리와 함께 창이 고목에 꽂혔고, 말라비틀어진 고목은 쩌적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그 경이로운 힘을 보자 자올은 주둥이를 다물었고, 무리는 환호를 내질렀다.
라크락은 자올을 돌아보곤 창을 줍기 위해, 고목이 있는 언덕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창을 뽑으려던 라크락은 언덕 아래의 풍경을 보고 멈칫했다.
라크락은 미소를 지었다.
"자올! 저걸 봐라. 우리 다툼은 신의 뜻 아래에선 부질없었구나."
언덕 아래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라크락이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물소 떼였다.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사냥하는데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물소 떼는 언덕 위의 물 냄새를 맡고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언덕으로 오는 기나긴 길 와중에 물소 떼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저들도 길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늘 같은 장소를 이리저리 이동할 뿐인 물소 떼가 길을 잃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안배가 있지 않고서는.'
무리 모두가 물소 떼를 보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신께서는 무리를 흩트릴 목적으로 라크락의 꿈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라크락은 창대를 뽑아 들고 말했다.
"신께 영광을 올리고자 하는 이는 나를 따르라!"
라크락이 앞서 나가자 무리의 사냥꾼들이 라크락을 뒤따랐다.
005화
라크락과 그 부족은 다섯 마리의 물소를 사냥해 냈다.
제물 모두를 그대로 신단에 바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라크락은 그렇게 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성운도 그 정도까지 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냥은 계속 있을 것이고, 부족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라크락은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 어떻게 물소 떼를 움직였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우선은 눈앞의 살코기를 부족과 나누는데 집중했다.
성운은 라크락의 부족이 사냥한 물소를 옮기는 걸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운은 가축이나 짐승의 신이 아니다.
성운이 현재 가진 유일한 소영역은 곤충이다.
달리 말하면 '곤충의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물소 떼를 직접 컨트롤할 만한 힘은 없다.
'하지만 기적을 잘만 이용한다면 딱히 불가능한 건 없어.'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써 봤기 때문에, 성운은 별문제 없이 물소 떼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물소 떼를 잘 움직여 냈다.
로스트 월드에서와 같이 이 세계도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물소 떼는 풀을 뜯으며 이동한다.
그러니 그 풀을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물소를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들풀의 신인 건 아니지만.'
하지만 성운은 곤충의 신이었다.
성운은 늘어난 신성을 통해 '메뚜기 떼'를 소환했다.
메뚜기 떼는 풀을 뜯어 먹는다.
성운에게 없던 풀을 창조하는 건 안 되지만, 있는 풀을 없애는 건 가능한 것이다.
물소 떼가 가는 경로의 풀을 먼저 뜯어먹으며, 물소 떼의 진행 방향을 천천히 좁히다 보면, 물소를 동쪽이나 서쪽, 원하는 방향으로 간접적인 유도가 가능했다.
'게임과는 다르게 시스템 지원이 미비하긴 했지만.'
'물소 떼를 움직인다'는 작업은 라크락에게 신탁을 내려 주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물소 떼가 언덕으로 오기 전날에 맞춰서 라크락에게 신탁을 내려 준 셈이다.
'그럼 어떻게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치는지 볼까...'
─┼
최초의 제단은 초라했다.
물소 다섯 마리의 뼈라고 해도 엉성하게 뼈와 뼈만 맞대어 쌓아 올린 제단에는 손대지 않은 네 개의 물소 머리가, 그리고 한 마리는 산 채 그대로 올라갔다.
라크락은 당연히 '의식'이란 걸 해 본 적 없으므로 어떻게 해야 '제물을 바친다'는 것인지 개념이 흐릿했지만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제물을 바친다는 개념 그 자체였다.
라크락의 제의는 엉성하고 서툴렀다.
라크락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물소를 제단 위에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아냈다.
피는 뼈와 물소 머리들 사이로 엉켜들었다.
콸콸 쏟아지는 피를 향해 라크락과 그 부족은 제단을 향해 절을 올렸다.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에게 경애를 표하는 리자드맨의 유일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원시 제의에서 중요한 것은 정성뿐이니까.'
그대로 놔둔 물소 머리와 뼈들 사이로 벌레가 끼면서 천천히 썩기 시작했다.
「제단에 신앙이 쌓입니다.」
「신앙이 상승했습니다.」
「3/50 → 162/50」
'초과했구나. 빨리 써먹어야지.'
나는 라크락을 따라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리자드맨에게 차례대로 축복을 내렸다.
내린 것은 라크락과 같은 축복이었다.
두 가지 축복은 고민이 없었다.
첫 번째 축복은 '딱딱한 껍데기'로, 축복받은 자의 피부를 곤충의 외골격과 유사한 단단한 외피로 만들어 주는 축복이었다.
두 번째 축복은 '딱정벌레의 힘'으로, 크기에 비해 강한 근력을 가진 곤충처럼 강하게 만드는 축복.
'벌레'의 영역에 좋은 점이 있다면 피지컬에서 좋은 축복을 내려 줄 수 있어 전투나 극한 환경에서 부족 숫자를 유지하는데 유리하단 점이었다.
그러니 피지컬을 올려 주는 축복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축복은 고민을 해야 했는데, '독소 저항'이었다.
원래 아무것이나 잘 주워 먹는 리자드맨이긴 하지만, 박테리아나 병균과 별개로 화학적 독을 저항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먹이를 가리지 않고 잘 먹게 하려면 강점에 강점을 더하는 게 좋아 보였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이 주변의 식량 자원이 떨어질 테니까.'
무리 짓는 생물이란 건 소비가 굉장하다.
다행히 라크락의 무리는 초보적인 수준의 훈연을 알고 있었고, 꽤 많은 물소 고기를 저장해 두고 있었다.
당분간 음식을 구할 일이 없으니 집을 짓고 터전을 가꾸는 일에 신경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리의 숫자도 늘어나겠지.'
하지만 그건 영원하지 못했다.
라크락의 무리가 자리 잡은 곳은 황야 가운데 있는 작은 언덕이고, 길게 잡아도 몇 년 가지 못할 것이다.
'이 녀석들은 농경을 몰라.'
뿌리 식물을 파먹을 줄은 알지만 그걸 남겨서 다시 묻어 두고, 더 씨알이 좋은 것끼리 교배를 해야 된다거나, 물소 새끼를 살려 두고 짝짓게 하여 가축으로 만든다는 걸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기적이나 신탁으로 알려 주고 싶지만...'
역시나 이 부분은 로스트 월드와 같았다.
그런 종류의 '지식'을 전수하는 건 현재 신앙으로는 불가능했다.
설정상으로는 '인과율을 위반한다'는 말인데, 잘은 몰라도 이 행성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인과율을 위반해서 지식을 직접 전수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정도의 신앙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부족에게 '지식'이 나타나는 과정은 간단했다.
그냥 원 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럼 데리고 있는 부족 중에 똑똑한 녀석이 나타나거나 우연적으로 기술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런 지식과 기술을 후대에 넘겨줄 수만 있다면 문명이 진보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시간은 없어.'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성운은 라크락의 무리에 청동검을 쥐고 있는 이들이 소수 있다는 걸 알았다.
원래 로스트 월드는 신석기의 끝과 청동기의 시작 부분에서 시작하니 청동기를 녹일 수 있는 수준의 화로를 만들 기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크락의 부족은 보다 큰 부족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고, 그만큼 지식은 부정확할 것이다.
'지식과 기술은 언제든 소실될 수 있는 거야. 특히 문자 발견 이전이라면.'
쇠퇴를 벗어나기 위해선 부족과 부족이, 종족과 종족이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특히나 리자드맨은 기초 능력치가 높은 반면, 기술 발전 속도가 늦은 종족군에 속했다.
신의 존재를 명백하게 입증시켰으니, 이제 그 이름을 떨칠 때도 되었다.
'그 방법이 다소 거칠더라도 말이야.'
성운은 이미 라크락에게서 떨어진 먼 땅으로부터 자신의 기적을 투사하고 있었다.
성운은 곤충을 움직일 수 있었고, 덕분에 물소 떼를 움직일 수도 있으며, 충분한 시간과 의욕, 그리고 라크락의 무리가 만들어 줄 신앙만 있다면 그 밖에 다른 것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라면 순식간에 지나갈 테지만, 여기에서라면 하나하나 손수 움직일 수 있다. 게임 시스템의 힘을 빌려 좀 더 건성으로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성운은 이 일이 지루하거나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이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듯 싶었다.
'좋아, 해 볼까.'
─┼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라크락과 그 무리는 샘물과 샘물로부터 만들어진 자그마한 생태계에 빚지며 겨울을 어렵지 않게 버텨 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축복을 받았다.
이제는 무리의 어린아이들마저도 신의 축복을 받아 튼튼하고 건강했다.
처음에는 검은색의 광택 나는 비늘을 어색해하던 이들도 이제는 신의 축복 앞에서 겸허하게 감사했으며, 곧 자랑스러워하였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라크락은 천천히 찾아오는 언덕의 쇠퇴를 감지했다.
무리가 커지면서 이 작은 샘은 더 이상 무리를 견디지 못했다.
물고기들은 사라졌고, 뿌리 식물들은 이제 독한 맛이 나는 것만 남아 있었다.
라크락은 뼈 제단 앞에 있었다.
라크락은 이 제단을 보며 몇 년 전 초라했던 첫 번째 제단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눈앞의 제단은 8미터 정도 되었다.
수십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의 물소 뼈다귀로 촘촘하게 쌓아 올린 제단은 세 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단마다 올라간 물소의 머리는 경외감을 가지게 만들 정도였다.
"라크락, 일찍 일어나셨군요."
"제단을 살펴봤지. 간밤의 꿈이 뒤숭숭했거든."
라크락은 대답하면서 자신에게 말을 건 자올을 바라보았다.
자올은 처음엔 라크락과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을 인정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부족의 모두가 딱정벌레 신을 따르는 검은빛 거죽으로 덮여 있었고, 신력이 아니라면 이해되지 않는 강한 몸을 지닌 상태였다.
부족의 가장 약한 전사도 맨몸으로 물소의 목을 분지를 수 있었다.
자올은 이제 다른 리자드맨들과 같이 라크락을 족장으로서 대하고 있었다.
라크락이 족장이 된 이후 어린 리자드맨이 스무 명이나 건강히 태어났다. 부족은 모두 쉰 명에 가까워졌다.
"꿈이라니요? 신탁입니까?"
"모르겠군. 애매모호해."
라크락은 꿈 이야기를 했다.
"멀리서 제단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 축복의 못에 더 이상 물고기가 올라오지 않고, 땅을 파도 뿌리 식물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의 터전은 점점 척박해지고 있지. 두 달 전 잡은 토끼가 마지막 토끼였지 않나?"
자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크락,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께서 여전히 저희에게 물소 떼를 보내 주고 계시고요. 신께서 저희를 돌봐 주시는 동안 걱정할 건 없습니다."
"나도 신을 믿는다.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라크락은 창대를 잡고 제단 위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하지만 신의 뜻을 헤아리는데 부족함이 있다면, 우리는 신의 뜻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나?"
"맞습니다."
"새벽녘에 유르와 그 친구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아, 그래서 그 시끄러운 애들이 보이지 않는 거군요. 신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아마도."
제단에 걸터앉아 있던 라크락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벌떡 일어섰다.
"역시. 제단이 흔들린 이유를 알겠다."
자올이 고개를 기울이자, 라크락이 팔을 당겼다.
같은 눈높이에 이르자, 자올은 지평선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무언가의 무리였다.
물소 떼라기에는 너무 느렸고, 숫자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리 헷갈릴 것은 없었다.
늘 보는 익숙한 모습이었으니까.
긴 주둥이, 허리를 세우고서 두 발로 걷고, 비늘로 몸이 뒤덮였으며, 긴 꼬리를 늘어뜨린 종족.
또 다른 리자드맨 무리였다.
이들은 과거 라크락이 그랬던 것처럼 푸른 거죽을 가지고 있었다.
006화
리자드맨 뷰에는 자신의 부족과 습지에서 오랜 시간 군림하였다.
알에서 깨어날 때부터 거체였던 그는 다른 리자드맨들조차 겁에 질릴 포악한 성질을 겸비해 다른 리자드맨들을 온순하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뷰에가 '푸른 거죽'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부족에서 오래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거칠고 사납기만 해서는 300명이나 되는 거대한 부족의 부족장 자격을 얻기 어렵다.
뷰에는 산수를 잘했다.
이를테면 300명의 리자드맨은 반나절 정도면 돌 수 있는 작은 습지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300명이 아닌 310명, 320명이 되면 그렇지 않다.
습지는 조금씩 소진된다.
뿌리 식물을 모두 파먹고, 작은 동물들을 모두 사냥하고, 이윽고 나무 껍데기까지 벗겨 먹을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때문에 뷰에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부족에서 약한 것, 병에 걸린 것, 늙은 것을 골라서 땅 밖으로 내쫓았다.
적게는 한 번에 열 명, 많게는 서른 명.
그렇게하면 남은 리자드맨들은 조금의 유예 기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리자드맨들이 순순히 떠나는 법은 없다.
때문에 무리를 내쫓아 보낼 때는 늘 피를 봐야 했다.
그런 순간마다 뷰에를 도운 것은 드레이크 마눈이었다.
뷰에의 또 다른 재능이었다.
뷰에는 젊은 시절 드레이크의 알을 주웠고, 마눈이 태어나는 순간을 보았다.
마눈은 포악하지만 자신에게 먹이를 주며 길러 준 뷰에를 따랐고, 기꺼이 등을 허락했다.
이 사족 보행 도마뱀은 검치호를 우습게 볼 정도로 거대하게 자랐고, 거대한 덩치의 뷰에를 태우고도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언젠가 뷰에가 다른 리자드맨들을 떠나보내라고 결정하기 전에, 뷰에를 공격한 이들이 있었다.
뷰에의 산수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선 뷰에가 죽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드레이크 마눈이 뷰에를 지켰고, 뷰에와 마눈은 배신자들을 기꺼이 처단해 냈다.
이후 뷰에는 마눈의 힘으로 자신의 작은 영토를 철저히 지켜 내었다.
뷰에는 황야 밖으로 내쫓은 리자드맨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뷰에는 지금까지 생에 다섯 번 동안 리자드맨들을 나누어 내쫓았고, 그들 중 다시 본 무리는 없었다.
뷰에가 보는 것은 남은 300명의 리자드맨들이었다.
뷰에는 자신의 산수가 부정할 수 없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풍족하진 않아도 메마르지 않았던 습지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았다.
오래 살아남은 뷰에로서도 처음 보는 메뚜기 떼였다.
습지의 하늘을 시커멓게 덮어 해를 가릴 만큼 거대한 메뚜기 떼.
처음에는 보기 드물게 배를 든든하게 해 주는 고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길조가 아닌 흉조였다.
메뚜기 떼는 습지의 들풀과 나무를 죄다 갉아먹었고, 그런 들풀과 나무와 조화롭게 살던 다른 동식물들을 말려 죽였다.
메뚜기 떼 몇몇은 약한 리자드맨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습지의 절반이 사라지는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이 기이한 일에 더 이상 뷰에의 산수는 통하지 않았다.
뷰에는 자신의 푸른 거죽 무리가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메뚜기 떼가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자신이 그렇게나 많이 쫓아냈던 리자드맨들이 떠난 그 황야로.
─┼
라크락은 뷰에를 알아보았다.
부족에게서 떠밀려 나올 당시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뷰에의 키는 2미터 50센티미터를 넘는, 다른 리자드맨이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뷰에의 강점은 단순히 큰 덩치뿐만이 아니었다.
"드레이크 마눈... 더 커졌나?"
뷰에는 드레이크 마눈 위에 올라타 있었다.
비록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드레이크라면 이 황야에서 적대자를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다.
평범한 리자드맨 무리라면 서른, 아니 쉰 마리가 덤벼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자올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코 저 도마뱀이 푸른 거죽의 습지를 다 뜯어먹은 모양이군요."
"그건 모를 일이지. 언젠가는 그리 되었겠지만."
라크락은 푸른 거죽의 무리에 있을 때에도 저 마눈이 너무 많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저 스스로 사냥해서 음식을 구하긴 해도, 황야에는 먹을 음식이 그리 많지 않다.
저 드레이크가 없었더라면 부족은 약자들을 내보내지 않고 더 오래 유지할 수도 있을 터였다.
뷰에는 드레이크를 손에 두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다른 리자드맨들을 황야로 내쫓았던 것이다.
"지금도 저 혼자 살쪘군. 멍청한 욕심쟁이."
시간이 지나자, 뷰에를 앞서 정찰을 나갔던 유르와 그 친구들이 달려왔다.
라크락이 본 것을 그대로 설명했다.
늙고 뚱뚱한 뷰에와 뷰에가 올라탄 거대한 드레이크 마눈,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300명의 리자드맨들.
뷰에는 이곳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성역을 보고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자올이 걱정하며 말했다.
"저들이 오면 숲의 생명은 얼마 가지 않아 동날 겁니다."
"나도 안다."
"그럼 저들을 내쫓을 겁니까?"
"내쫓길 바라느냐?"
"우리는 힘이 있습니다. 저들의 숫자는 많고 강대한 드레이크 마눈도 있다지만,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가호 아래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내 생각에, 저들은 분명 신께서 보내셨다."
"예? 신께서 저희를 왜 시험에 들게 합니까?"
"우리는 버림받았지만, 구원받았다. 저 무리가 모두 움직인 걸 보면, 저들 또한 마찬가지다. 저들은 땅에게서 버림받았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저들을 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위명을 더 많은 이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당연히 내쫓는 것보다 복속시키는 것이 더 어렵다.
더 이상 싸울 자들이 없으면 저들은 분열하며 도망치겠지.
하지만 숫자는 저쪽이 더 많고, 도망치는 모두를 굴종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감히 신의 뜻을 헤아리지 않겠다. 행할 수 있는 바를 행할 뿐."
─┼
성운은 라크락과 자올의 대화를 들으며 흥미를 느꼈다.
'내가 원한 의도를 다 알고 있잖아?'
반대로 말하자면 성운이 라크락을 완전히 컨트롤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의지력이 높은 개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긴 했지.'
의지력이 높다는 건 개별적인 행동이 생길 수 있다는 것.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통제 밖의 행동을 한다면 곤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의지 자체는 무언가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통제 밖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좋은 행동을 내놓기도 하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이 생리적으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성운은 달랐다.
'강한 의지를 가졌다고 해서 항상 플레이어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지는 않아. 그 의지력을 내가 원하는 방면으로 유도할 수 있다면, 단순히 조종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내 뜻을 펼치게 되는 거지.'
어쨌든 성운이 바라는 것이 바로 부족을 합치는 것이었다.
라크락의 부족은 성운을 통해 강해졌지만, 기술 수준은 낮다.
이미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푸른 거죽 부족은 성운이 좋다고 판단하는 기술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이 향후 부족 전체를 먹여 살리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요소로 쓰일 예정이었다.
'결국은 라크락의 부족이 푸른 거죽 부족을 피해 없이 집어삼켜야 한단 말이지.'
성운이 내려다보니 라크락은 부관이라고 할 만한 자올, 그리고 라크락을 제외하면 젊고 강건한 정예 전투원인 유르와 친구들만을 데리고 뷰에에게 접근했다.
언덕 아래에 대기한 뷰에는 정지한 다음 이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늙은 뷰에는 마눈을 끌고 앞으로 나와 라크락에게 말했다.
뷰에는 이 검은 리자드맨들이 과거에 자신이 내쫓은 무리라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린 리자드맨, 너는 여기 사느냐?"
"그렇다."
"이 위에 무엇이 있지?"
"수풀과 나무. 사냥감."
뷰에는 자신의 많은 무리에 겁에 질려 순순히 답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잘됐구나. 우리는 허기지다. 너희가 이 언덕을 떠난다면 우리는 공격하지 않겠다."
"여긴 우리의 땅이다."
"그래서? 떠나지 않겠다는 건가?"
"우리는 전사다. 우리는 땅을 지킨다."
"너희는 이길 수 없다.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앞에 있는 우리만으로 막을 수 있다."
그 말에 뷰에는 컥컥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넌 산수를 모르는구나."
"너는 신을 모르는군."
뷰에가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신?"
"지금 무릎을 꿇고 나에게 굴종하라. 그럼 나는 신의 뜻대로 너희를 살펴 배불리라."
"미치광이군. 죽어라."
뷰에는 그렇게 말하며 드레이크 마눈의 허리를 발로 쳤다.
마눈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나며 라크락에게 달려들었다.
라크락이 창을 꼬나 쥐었다.
성운은 위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이 된 이후로 시간의 흐름은 성운에게 그리 다급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드레이크 마눈이 라크락에게 다가가는 모습도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단지, 라크락이 이 정도로 믿음을 보내 준다면 그에 맞는 결과를 보여 주고 싶단 생각이었다.
팝업이 하나 떠 있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부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성운은 팝업을 끄고, 자신의 상태창을 체크했다.
「신성 레벨」
「4」
「신앙」
「482/500」
「소영역:벌레」
「Lv. 3」
이번 전투를 위해 신앙을 조금 모아 뒀고, 메뚜기 떼를 컨트롤하는 동안 벌레의 소영역이 성장한 편이었다.
'그리고...'
아래로 두 개의 리자드맨 부족이 접촉하며 드러난 새로운 능력치가 드러났다.
「당신은 하나의 부족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제 이들 부족은 당신의 영역에 속합니다.」
「영역:리자드맨」
「Lv. 1」
로스트 월드에선 게임 시작 시 최초의 소영역을 얻은 이후, 행동 여하에 따라 여러 가지 영역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단지 그 소영역을 얻기 전까지 표기가 안 되기 때문에 답답한 측면이 있지만, 성운은 경험상 이쯤하면 리자드맨을 영역으로 넣을 수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걸 얻지 못했다면, 피해 없이 승리하긴 불가능하겠지.'
종족의 영역은 다른 소영역과 달리 극적인 효과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를테면 벌레의 소영역은 허공에서 벌레를 창조해 낼 수 있지만, 리저드맨의 소영역이 있다고 해서 리자드맨을 맨땅에서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역이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로스트 월드에서 초반 빌드는 이 종족의 소영역을 얼마나 빠르게 얻느냐로 갈리는 편이었다.
종족의 영역은 단순하고, 강하다.
'그 말인 즉...'
「이제부터 스킬 '강신(降神)'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네'를 클릭했다.
007화
로스트 월드에선 플레이어의 신성 레벨이 오르거나 추가 영역을 얻게 되면 부가적인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벌레의 소영역'을 1레벨로 가지고 있다면 기적을 사용할 수 있고, 2레벨로 가지고 있다면 축복을 사용한다.
'벌레의 소영역이 3레벨로 오르면서 새로운 스킬이 생겨났지만 이번에는 쓸모가 없겠지.'
이번에 얻게 된 '리자드맨의 영역'은 1레벨에 '강신'을 얻는다.
스킬이 다른 이유는 일반적인 소영역과 종족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
강신은 간단한 스킬이다.
'...!'
성운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비늘.
날카로운 발톱이 마디 길이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시야 안쪽으로 기다란 주둥이가 보인다.
'이게 라크락의 몸인가?'
라크락의 어깨 높이가 2미터는 넘기 때문에 바닥이 멀어 보인다.
꼬리가 달린 느낌도 다소 생경하다.
주먹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펴 보기도 한다.
'완전히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지도.'
하지만 적응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성운이 여유롭게 라크락의 몸을 조종하는 동안에도, 라크락을 향해 달려드는 드레이크 마눈이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는 없지.‘
「강신을 사용하는 동안 신앙이 하락합니다.」
「신앙」
「482/500 → 477/500 」
성운이 강신을 통해 라크락을 조종하는 동안 신앙은 빠르게 하락한다.
다행히 이런 하락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능력치를 볼까.'
『뷰에(전사 Lv.1/부족장 Lv.4)
힘 24
지능 15
사회성 16
스킬: 사육
리자드맨 푸른 거죽 부족의 부족장』
뷰에는 300명의 리자드맨을 이끌 정도의 능력치라고 볼 만했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다.
'뷰에만이라면 내가 강신할 필요는 없었지.'
나는 드레이크 마눈을 바라보았다.
『마눈(드레이크 Lv.1)
힘 87
지능 6
사회성 9』
지능이나 사회성은 딱 도마뱀 수준이지만, 힘만큼은 아니다.
그야말로 괴물.
심지어 드레이크의 레벨이 1이라는 말은 아직 어리다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라크락'의 능력치를 보았다.
『라크락(전사 Lv.2/부족장 Lv.2/제사장 Lv.1)
힘 30(+D3)
지능 24(+D3)
사회성 26(+D3)
의지 14(+D3)
라크락의 무리의 부족장
상태 이상: 강림(신성 Lv. 3)』
물소의 힘이 대략 22.
30이라면 맨몸으로 정면에서 물소를 막고 목을 꺾어 버릴 정도는 된다.
아마 뷰에와 정면 대결이라면 지능 보정치 덕분에 큰 문제없이 뷰에를 박살 낼 것이다.
'하지만 큰 전투 없이 뷰에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부족을 피해 없이 포섭해야만, 푸른 거죽 안에 있는 지식이 고스란히 공유될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성운이 봤을 때 계획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라크락=성운은 창대를 바닥에 꽂아 넣었다.
라크락의 능력치 뒤에 붙은 D는 신성(Divine)을 의미했다.
그리고 1D가 생략하는 숫자는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물의 최대치인 200가량.
'단순히 보자면, 현재 라크락의 힘은 630.'
상대가 마찬가지로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신과의 싸움은 성립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라크락=성운은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마눈의 위턱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단숨에 뒤쪽으로 뒤집어엎었다.
"크아아악!"
5미터나 되는 거체가 허공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순간, 누군가의 것인지도 모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미 균형을 잃은 뷰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쾅!
그야말로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푸른 거죽 리자드맨들 몇몇이 주저앉았다.
힘을 더 강하게 주었더라면 드레이크 마눈을 그냥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성운의 생각에 그건 과했다.
경외감을 가지기보다는 두려워할 것이다.
'드레이크도 좀 아깝고.'
뒤집어져 기절한 마눈을 뒤로한 채 라크락=성운이 뷰에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채로 뒷걸음치던 뷰에는 웅성거리는 푸른 거죽 리자드맨들을 보자 허겁지겁 일어났다.
"마, 말도 안 된다! 너, 너 이 자식!"
뷰에는 순순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성운으로서는 오히려 편하다 싶었다.
뷰에는 잘 벼려진 청동검을 뽑아 들고 라크락=성운에게 달려들었다.
성운은 빠르게 잽을 내질렀다.
-뻐걱!
뷰에의 목이 한 바퀴 꺾인 뒤, 무릎이 꺾였다.
침묵이 푸른 거죽 리자드맨들 사이로 오갔다.
절대적인 강함.
분명 이들 중에는 도망칠 수도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라크락=성운이 말했다.
"다음은 누구냐?"
그 말에 푸른 거죽 리자드맨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엎드려 복종을 표했다.
─┼
이제 언덕은 350명으로 불어난 라크락의 무리가 터전으로 삼기에는 북적거렸다.
다행히 숫자는 안 맞아도 그 둘은 과거에 같은 집단이었기에, 익히 얼굴을 아는 사이도 있었다.
거기다 라크락의 신위와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의 신화가 푸른 거죽 소속에게 전해지기 시작하자, 라크락에 대한 선망과 기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제단 앞에 앉은 라크락에게 자올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오늘 보여 준 힘이 오롯이 그대 것이라고 하시진 않겠지요. 신께서 그대 몸에 깃들지 않았습니까?"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풍경들이 떠오른다. 나는 과분하고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기적을 몸으로 직접 행하였다. 덕분에 저들이 우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언덕은 황폐해질 겁니다."
"떠날 준비를 해야지."
"또 다시 황야로 나간단 말입니까?"
"그 수밖에 없다."
"신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자올은 라크락이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신께선 이미 우리를 도와주셨다. 우리가 허기질 때마다 신께서 우리를 돕지 않으시니."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답 없이 황야를 헤매면 많이 굶고 죽을 겁니다."
"아무런 답도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
라크락도 고개를 갸웃했다.
자명한 답을 내진 못한 것 같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께서는 우리에게 300명의 옛 부족과 합치길 원하셨다. 그렇다면 답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래 고립되었고, 저들은 숫자가 더 많으니 현명한 생각을 떠올린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쇠붙이를 만드는 방법처럼 말입니까?"
"그렇지. 우리 중에는 쇠붙이를 그렇게 뜨겁게 구울 줄 아는 이가 없었지. 이제는 저들 중에는 제대로 만드는 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마침 쇠붙이를 구울 줄 아는 이 하나가 부족장에게 물건을 헌상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왕이면 전사들 모두가 그것으로 무장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 전하지요."
"그리고..."
자올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혹시 길잡이를 찾을 수 있는지 찾아보지요. 저희 중엔 떠돌이가 없었지만, 저들 중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황야를 건너는데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가진 이들이 있는지도 찾아보겠습니다."
"고맙군. 그대만 믿지."
라크락은 자올을 보낸 다음, 아직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제단의 뼈 위에 몸을 뉘였다.
뼈다귀 하나가 구르며 달그락 소리가 났다.
─┼
라크락은 자올의 소개로 세 명의 리자드맨을 만났다.
하나는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날붙이 장인으로, 라크락이 허락만 해 준다면 언덕을 떠나기 전에 많은 나무를 태워서 더 단단한 날붙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성운은 장인이 설명하는 것이 '철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청동을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주석, 아연보다 철이 더 흔한 편이긴 하지. 그런데 화력을 올릴 기술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 쓰지 않은 거지?'
역시나 라크락도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그 점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뷰에가 나무를 태우지 말도록 막았던 것이 드러났다.
뷰에에게는 더 단단한 쇠붙이보다 그냥 환경을 보존하는 쪽이 부족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늪지를 떠날 쯤에는 서둘러 떠나야 했으니 시험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되는군. 하지만 지금 라크락은 또 다르지. 언덕을 떠나는 입장에선 시험을 해 볼 만할 텐데.'
신탁을 내려 줄 수도 있지만 성운이 보기엔 일장일단이 있어 보였다.
'언덕 위의 나무 숫자를 줄이지 않는다면 이 땅으로 되돌아왔을 때 수혜를 볼 수 있으니까. 이 건은 라크락에게 맡기자.'
라크락은 다음날까지 고민해 본다고 말한 뒤 날붙이 장인을 돌려보냈다.
다음으로 만난 것은, 외팔이 리자드맨이었다.
"그대는... 떠돌이로군."
"그렇소."
늙은 리자드맨으로, 검은빛의 라크락의 무리는 물론, 푸른 거죽과는 비늘 색이 달랐다.
종이 완연히 다르지 않으니 청색을 바탕으로 초록빛이 다소 돌았는데, 다른 무리임은 틀림없었다.
"길잡이를 찾는다고 들었소. 나는 팔이 없고 늙어 무리에 의탁을 해야 하오. 그래서 날 받아 줄 수 있는 이들을 찾아 이리저리 오가야 했지. 그래서 길을 볼 줄 아오. 그리고 이들 무리가 안착하진 못하더라도, 배를 곯지는 않게 해 줄 땅들을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소.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
라크락은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다른 떠돌이들도, 다른 부족들도 있을 테니."
"그렇소."
"하지만 땅으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쟁취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소."
"그럼 내게 믿음을 줄 수 있나?"
"믿음?"
"나는 많은 무리를 이끈다. 그대가 만약 허튼 소리로 자리를 구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필요하다."
외팔이 리자드맨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했다.
리자드맨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별잡이요."
"별잡이?"
"어렸을 때 누이와 친했는데, 누이는 별의 위치를 잘 알았지."
"별들은 움직이지 않나?"
"모르는가 보군? 별들은 항상 제 자리를 찾아다닌다오."
"그런가?"
"별들이 언제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면, 방향을 헷갈리지 않고 길을 오갈 수 있소. 내 오늘의 별들 위치를 알려 주고 내일 어디로 갈 지 알려 주리다. 그럼 그대는 기억해 두었다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하면 될 일이지."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은 태초의 천문학자에게 감명을 받았다.
'철기는 그렇다 치고, 천문학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천문학자는 후에 건축이나 수학 같은 기술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성운은 라크락이 저 별잡이를 잘 기용하길 바랐다.
라크락의 그날 마지막 손님은, 라크락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유르?"
"부족장님, 저녁 바람이 좋군요."
"무슨 일이냐."
유르는 라크락보다 어린 리자드맨이었다.
하지만 이제 덩치는 비슷해졌고 몸도 기민해 라크락이나 자올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전사라 할 만했다.
그리고 유르와 같이 어울리는 리자드맨 친구들도 유능하고 손발이 잘 맞아 라크락이 무언가를 맡기기 좋았다.
"자올 님이 말하길, 저희가 굶지 않고 건너갈 방법이 필요하다더군요."
"그래. 당연히 너한테도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부족장님. 저는 멍청한 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사는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유르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통을 긁었다.
"아무튼, 오늘에서야 떠올린 생각인데, 저 먹성 좋은 드레이크를 보고 생각을 했습니다."
"뭐지?"
"뷰에 놈은 드레이크를 '길들였습니다'. 그런 것처럼 다른 것도 길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유르가 소뼈 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소 같은 거요?"
「'라크락의 부족'이 스킬:목축을 알아차렸습니다.」
008화
성운은 역사를 게임으로 배웠다.
때문에 실제 인간 역사의 발전 경향이 어떤지는 몰랐다.
'하지만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는 둘 중 하나였지.'
그건 바로 목축과 농경.
'일장일단이 있어.'
농경은 문명 발전에 있어 안정적이었다.
외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식량을 비축하면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실제로 지구에서의 인류 문명 발전은 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들이 기반이 되기도 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
농경의 문제는 역시 환경.
지구의 현대까지도 가뭄과 홍수는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술 수준이 낮은 문명일수록 천재지변에 취약하다.
강을 정비하는 치수 사업은 물론, 기르는 작물의 모종을 선별하는 작업 등 농경은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속되는 문제를 부닥쳐야만 했다.
'그렇다고 목축이 쉬운 것도 아니고.'
성운의 영역 안에서는 목축을 시작한 다른 부족이 없었지만, 아마 플레이어 중엔 첫 선택에서 이미 목축 스킬을 가진 부족이 존재할 터였다.
하지만 목축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직접 가 보기 전까지는 어디가 가물고 어디가 비옥한 땅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 주변 땅에 오랜 경험이 축적되기 전까지는 소규모의 원시적인 목축 밖에 할 수 없지.'
결과적으로 선택한 부족에 맞게 그때그때 맞춰서 가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내가 고른 건 리자드맨이지.'
프로그맨을 골랐어도 '연어 목축'이라는 개념이 있어 목축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농경으로 가게 된다.
반면 리자드맨의 경우에는 피지컬을 살려서 약탈을 겸하는 목축이 성향에 잘 맞았다.
'이 정도 타이밍에서는 무난히 강한 편일 거야.'
때문에 성운은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초기 라크락의 무리 50명 정도에게 축복을 아낌없이 나눠 준 뼈 제단을 놔두고 간다는 건 아쉽지만, 이런 초기 제단은 일회용이다. 뼈로 만들어졌으니 그리 오래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성운만 미련이 남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이 되자, 라크락은 유르와 전사들에게 물소 떼를 가능한 많이,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성운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 물소 떼를 발견할 테고, 너무 늦지 않게 이 물소 떼를 잘 달래서 끌고 올 것이다.
당장 야생 물소가 가축화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어찌되었든 힘으로 끌고 올 수 있으니 기를 수는 있었다.
그러다 보면 스킬:목축을 획득하고, 길들여진 물소는 한층 다루기 쉬워지고, 그럼 끌고 다니는 소 떼의 숫자도 늘릴 수 있다.
'모든 일엔 시간이 필요하니까.'
낮 동안 라크락은 쇠붙이 장인을 도와 불을 지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쇠붙이는 '검댕 나무'부터 만들었다.
화로를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잔뜩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겉면에 진흙을 발라 불길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다음 불을 떼고, 바람이 통하도록 놔두었던 구멍을 완전 밀봉한 다음 나무가 완전 연소하도록 기다린다.
라크락은 그 행동을 잘 이해는 못했지만, 그냥 쇠붙이 장인을 믿기로 했다.
신의 뜻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옳을 테지만, 다른 일에서라면 라크락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걸 인정했다.
성운은 쇠붙이 장인이 만든 검댕 나무 옆에 상태창으로 '숯'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았다.
쇠붙이 장인의 기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인은 화구 앞에 쪼개진 나무 판 두 개를 서로 엮어 바람개비처럼 만들었다. 실제 역할도 바람개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바람개비 가운데에 곧은 나무 작대기를 묶어 손바닥으로 밀기 시작하면 화구에 쉽게 바람을 넣을 수 있는데, 바로 원시적인 풀무였다.
'화력은 보장된 셈이군. 철기는 문제없겠어.'
밤이 되자 라크락은 길잡이이자, 별잡이를 다시 만났다.
밤하늘은 별잡이가 이른 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라크락이 보기엔 하루 정도는 우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별잡이 또한 동의했다.
별잡이는 또 다시 바뀔 별의 움직임을 이야기했고 라크락은 기억해 두었다.
─┼
며칠이 지나, 첫 번째 쇠 창촉이 만들어졌다.
투박했지만, 그 경도 덕분에 라크락이 만져 본 그 어떤 창날보다도 날카로웠다.
'사실 품질 정도를 봐선 동시대 잘 만든 청동기보다 무르긴 하겠지만.'
딱히 성운이 나서서 초를 칠 이유는 없다.
철기의 이점은 단순히 단단한 것이 아니다.
청동기에 비해 노면에서 철을 구하기 쉬운 데다가 합금이 아닌 경우 청동기보다 만들기도 쉬웠다. 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않는다면 불가능하지만, 일단 철을 녹일 온도만 갖추면 되는 것이다.
'농기구 보급에 더 좋긴 하겠지만 무기 보급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애초에 부족장이던 라크락이 돌촉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다.
날붙이로 바뀐 것만으로 장족의 발전이다.
─┼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유르를 비롯한 전사들이 물소 떼를 이끌고 왔다.
벌레의 축복을 받고도 대부분의 전사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끌고 온 물소 떼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대열 안에서 이끌려 왔다.
모두 스무 마리나 되었다.
'아마 축제를 즐길 테니 몇 마리 줄겠지.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지만 성운의 생각과 달리, 라크락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나무를 해서 물소 떼를 임시로 가둘 목책을 만들었고, 모두 안에 가두고 혹시나 소를 몰래 도살하지 않는지 보초를 붙여 두었다.
맛있는 소가 스무 마리도 있는데 한 마리도 먹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리자드맨들 사이에서 동요가 있었다.
자올이 대표해서 라크락에게 물어 올 정도였다.
"다들 물소를 먹고 싶어 합니다."
"나도 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먹고 싶다."
"그런데 왜..."
라크락은 물소 우리 옆에 있었고, 직접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셈을 하자면, 우리가 배를 굶지 않는데 저것들을 먹을 필요는 없다. 저것들은 황야로 나갔을 때 요긴한 식량이 될 테고, 더 먼 미래를 보았을 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리자드맨 개체 라크락의 '의지'가 상승합니다.」
「14 → 18」
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은 인류의 문명 발전에 대해서는 몰랐다.
하지만 이후의 큰 이득을 위해서 당장의 작은 이득을 참는 것이, 결과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미래를 위해서 인내할 수 있었던 저 작고 사소한 의지가 뭔가를 바꾸었던 것이다.
자올 또한 뒤늦게 수긍했다.
"하지만 전사들은 지치고 굶주렸습니다. 유르는 선하고 당신을 따르지만,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모든 리자드맨이 당신처럼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이해한다."
라크락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지쳐 잠든 전사들을 깨워라."
"예?"
"아니, 모두를 깨워라. 쇠붙이를 부닥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라. 화톳불에 나뭇가지를 듬뿍 넣어서 모두의 졸음을 떨쳐라."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라크락은 다소 못마땅하게 자올을 바라보았다.
라크락은 제단 위로 올라가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외쳤다.
"일어나라! 전사들아! 잠에서 깨어라! 무리의 아이들아!"
그제야 자올은 라크락이 진심이란 걸 알았다.
성운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자올은 우선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깨운 뒤, 라크락이 이른 대로 시끄러운 소리로 부족을 깨우고 화톳불에 나뭇가지를 집어넣어 불을 키웠다.
늦은 새벽이긴 했으나 잠에서 깨어날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리자드맨들은 기온이 낮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기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밤새 꺼져만 가던 화톳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자 라크락의 무리는 웅성거리며 제단 앞으로 모여들었다.
자올이 준비한 대로 물소 떼를 잡아 온 전사들이 제단 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부족에서 가장 강하고 지혜로운 리자드맨이자, 제사장인 라크락 앞에 서자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의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라크락이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떠날 것이다."
그 말에 무리가 웅성거렸다.
물소 떼를 데려오면 곧 출발하리란 걸 알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떠날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거기, 별잡이. 이리 오라."
외팔이이자 청록색 거죽, 길잡이이자 별잡이가 의아한 듯 라크락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지난 며칠간 내게 별의 움직임을 미리 일러 주었고, 나는 그것이 모두 옳다는 걸 확인했다. 따라서 모두 앞에서 그대가 별잡이는 물론 길잡이로서의 능력이 있음을 공표한다. 그대는 거짓말쟁이도, 사기꾼도 아니다."
"믿어 주어 고맙소."
"그럼 그대가 우리를 인도하기로 한 곳에 대해 말하라."
"내가 직접?"
"그래. 여기 모두에게."
별잡이가 말했다.
"아침이 되면 바로 저곳에서 해가 떠오를 거요. 우리는 해의 오른쪽으로 걸어갈 테고, 열흘을 더 걸으면 썩은 내가 나고 너무 뜨거워 거품이 솟는 작은 호수들이 있소. 그 호수를 끼고 다시 오른쪽으로 보름을 더 가면 비탈지고 황량한 산길을 만나게 되오. 그 계곡으로 사흘을 더 가면 들풀이 나오지."
"그 다음은?"
"계속 초목이 있소."
"닷새를 더 가도?"
"그만큼 깊게 가 보진 못했소. 거친 짐승이 많고 이종족 무리도 있소."
라크락이 웃으며 말했다.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군."
그 말에 리자드맨 전사 몇몇이 웃었다.
"자리로 들어가도 좋다. 별잡이. 고맙다."
"별말씀을."
라크락이 제단 위로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
"신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시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신의 힘으로 더 큰 무리를 내쫓고, 우리끼리 사는 것이지. 그럼 우리는 이 땅에서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내쫓긴 이들은 황야에서 죽었겠지만."
라크락은 콧김을 흥 하고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신께선 배제가 아니라 구원을 원하셨다. 그것이..."
라크락의 눈이 반짝였다.
"...더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리자드맨 무리는 이제 완전히 침묵하고 라크락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라크락의 선언은 부족 전체에 가치가 있었다.
단순한 생존으로서의 삶이 아닌, 보다 큰 대의와 규칙이 있는 삶을 지향하기로 공표한 것이다.
"유르!"
갑작스럽게 호명된, 전사 중 가장 앞에 선 유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라크락."
"어제 물소를 먹지 못해 아쉬웠겠지?"
"예, 솔직히, 조금 그랬습니다. 저희는 물소 떼를 잡는 동안 부족장님의 명령대로 한 마리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가 왜 그런 명령을 내렸고, 너희가 기진맥진해서 잡아 온 다음에도 한 마리도 잡지 않았는지는 알겠지."
"예... 압니다. 지금 참아야, 더 크게 돌아온다는 거지요? 신께서 그걸 원하시고."
"그래."
"그럼 앞으로도 참겠습니다. 신께서 저희에게 그런 기대를 하신다면, 기대에 부응해야겠지요."
다른 전사들도 유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크락은 미소를 지었다.
"좋다. 너희는 너희의 인내와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에 대한 경의를 보였으니, 그에 맞는 보답을 받으리라. ...쇠붙이 장인은 어디 있나?"
그 말에 장인이 무리 속에서 걸어 나왔다.
"예. 여기 있습니다."
"준비해 둔 쇠 창날을 이들에게 주어라."
"알겠습니다."
이건 미리 준비해 둔 이벤트였다.
애초에 최고의 전사들에게 최고의 장비를 지급하는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다른 리자드맨은 물론, 성운이 보아도 극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이걸 다 계획한 건가?'
성운이 이쯤에서 라크락의 깜짝 이벤트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럼, 유르부터 제단으로 올라와라."
"예?"
"어서."
유르는 다소 경건해진 태도로 물소 뼈로 만들어진 제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 사이 라크락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축복받은 언덕과 뼈 제단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신의 뜻을 함께하니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뼈 제단조차 형상에 불과할 뿐, 진정 신이 깃드는 곳은 아니다. 신은 그 전부터 존재하셨다."
유르가 올라오자, 라크락은 제단 가장 위에 있는 물소 머리뼈를 집어 들고는, 유르의 머리 위에 놓았다.
"앞으로 전사로 행동할 때 이 머리뼈를 써라. 신의 가호가 함께 할 것이니, 너는 신의 뜻을 대신하는 '뼈의 전사'다. 이 말은 곧 신의 뜻이니라."
그 말에 유르는 울컥한 것 같았다.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 것이다.
"라크락."
"내려가라. 끈으로 제대로 고정하고. 다음 전사 올라오라."
그렇게 해서 스물세 명의 뼈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뼈의 전사들은 단순히 허기를 보충하는 것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리자드맨 개체 유르의 '신뢰'가 상승합니다.」
「4 → 7」
「리자드맨 개체 유르의 '레벨(전사)'이 상승합니다.」
「2 → 3」
'실제로 능력치와 경험치가 올랐어.'
성운도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 비슷한 이벤트를 본 적은 있긴 했지만 이런 종류의 이벤트는 의도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뼈의 전사들이 모두 물소 머리뼈를 받고 난 뒤, 라크락 또한 자신의 머리 위에 물소 머리뼈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동이 터 올랐다.
리자드맨 부족은 몸을 감싸는 온기와 지난 새벽 동안의 열의로 환호를 내질렀다.
성장한 것은 뼈의 전사들만이 아니었다.
「리자드맨 개체 라크락의 '지도력'이 상승합니다.」
「7 → 14」
「리자드맨 개체 라크락의 '레벨(제사장)'이 상승합니다.」
「1 → 2」
「리자드맨 개체 라크락의 '레벨(전사)이 상승합니다.」
「2 → 3」
'눈에 보이지 않던 특수 능력치가 드러났군. 게다가 레벨이 2나 오르다니.'
라크락은 환호를 뒤로하고 남은 뼈 제단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운은 처음엔 그것이 그저 동틀 녘의 빛으로 사라져 가는 별자리를 알아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라크락은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혼자 신의 뜻이라 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성운은 그제야 라크락이 자신에게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뼈의 전사들을 선택한 건 내가 아니라 라크락이었지.'
하지만 당연히, 성운으로서는 기분 나쁠 것이 없었다.
모든 캐릭터를 제 뜻으로 움직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애초에 성운은 '의지'가 높은 라크락을 제사장으로 선택했다.
이런 결과는 환영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최근에 단백질 맛을 못 봤지.'
성운은 고민하다가, 리자드맨이라면 환영할 만한 기적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0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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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드맨들은 굼벵이를 뜯으며 황야를 걸었다.
별잡이의 말대로 열흘을 가자 뜨겁고 썩은 냄새가 나는 호수가 나타났다.
불모지였고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다행히 라크락은 마눈의 등에 항아리를 가득 실었고, 항아리에는 아직 물이 남아 있었다.
─┼
다시 보름을 더 걸어가자 가파른 산길이 나타났다.
낮은 관목들이 나타나고 먹을 것이 좀 보이긴 했지만 아직 황량했다.
다행히 마실 수 있는 샘이 있었다.
마실 물이 모두 떨어졌기 때문에 라크락은 샘의 물로 항아리를 채우도록 명령했고, 나머지는 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뿌리 식물과 메마른 작은 짐승들이 있었다.
무리를 따르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물소들이 눈치를 보며 마른 풀을 뜯었다.
라크락은 별잡이를 불러 물었다.
"이제 사흘만 더 들어가면 되는 건가?"
"아마도."
"자신이 없어졌군."
"별의 위치는 바뀌지 않소. 하지만 땅은 바뀌지."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비가 가문 해라면 그만큼 초목이 푸르지 못할 테니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할 테고, 반대라면 더 빨리 풀들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라크락은 물소 떼가 걱정이었다.
질질 끌고 오느라 전사들도 물소 떼도 진이 빠져서 이제 잘 따라오고 있긴 해도, 반대로 말하자면 지쳐 가고 있단 말이기도 했다.
'조만간 배불리 먹일 수 있어야 할 텐데.'
황야를 지나오는 한 달 정도 동안, 역시나 신께서는 부족을 버리지 않았다.
몇 번의 사사로운 기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위험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신께서는 물소 떼를 배불리 먹이시진 못했다.
라크락은 그 부분에 대해 신이 '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신께서 우리를 보살피는 것처럼, 우리가 황소 떼를 보살펴야 하는 것이지.'
라크락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건실하게 걷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수밖에.
단지 더 이상의 지체는 곤란하다는 판단뿐이었다.
라크락은 물을 실어 올 때까지 드레이크 마눈을 감독했다.
마눈은 허기져 있었고, 다른 전사들이 있지 않으면 다른 리자드맨들에게 덤비려 들었다.
하지만 라크락만 있다면 눈을 내리깔고 얌전해졌다.
한 번의 호된 엎어치기가 도마뱀의 뇌에 남은 것이다.
자올은 굶고 있는 라크락을 위해 통통한 뿌리 식물을 가져왔다.
라크락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제 배 하나 채우지 못하는 놈을 부족장으로 삼고 싶은가."
자올은 꼬리 끝을 바닥에 두 번 탁탁 쳤다.
다소의 불만을 나타내는 제스처였다.
"부족장을 굶도록 놔두는 무리도 없습니다."
"무리가 같이 허기가 진데, 어떻게 부족장만 배를 채우나."
"좋습니다. 그럼 나눠 먹지요."
자올은 두툼한 뿌리를 나누어 반을 라크락에게 내밀었다.
마눈에게 기대어 있던 라크락은 그걸 받아들고 반절을 통째로 깨물어 먹고, 나머지를 마눈의 주둥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졸고 있던 마눈은 입에 뭔가 들어오자 침을 흘리며 허겁지겁 삼켰다.
자올이 또 꼬리로 바닥을 치자 라크락이 변명하듯 말했다.
"이놈도 힘이 있어야 물 항아리를 싣고 갈 거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만..."
자올이 말꼬리를 흐리자 라크락이 눈을 깜빡였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예."
"편하게 말해."
"라크락."
"뭐지?"
"슬슬 반려를 찾으셔야죠."
라크락은 먹고 있던 뿌리 식물이 목에 걸렸지만, 리자드맨 특유의 넓은 목구멍 덕에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켁켁거렸다.
라크락은 지난 몇 년 동안 생존과 부족, 신에 대한 고민으로 반려 찾기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으므로, 자올의 말은 당황스러웠다.
"...아, 반려 말인가?"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라크락은 수컷이었고, 자올은 암컷이었다.
라크락은 반려 찾기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고, 무성의하거나 무심하게 대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니 정작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라크락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해결해야 할 다른 일이 일어났다.
산비탈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서 무리가 웅성거렸다.
전사 하나가 라크락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민둥이 놈들입니다."
"얼마나? 무슨 색인데?"
"스물 정도. 초록색입니다. 덩치가 큽니다."
민둥이는 피부가 매끄러운 종족을 부르는 말이었다.
리자드맨은 인간, 엘프, 그리고 오크나 고블린까지 그렇게 불렀다.
자올이 말했다.
"오크군요. 무장은 했던가?"
"아닙니다. 모두 지쳤습니다. 전사는 서넛 밖에 안 됩니다. 우리 전사들이 포위 중입니다. 부족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황을 들어 보니 그리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라크락은 전사를 따라 오크 무리로 향했다.
찾아가니 작고 왜소한 무리였다.
라크락은 전면으로 나서서 말했다.
"너희 중 우두머리가 누구냐?"
"나다. 우리를 보내 주길 바란다."
"조용히 가고 싶다면 우리에게 오지 말았어야지. 왜 소란스럽게 하느냐? 우리의 음식을 노린 게 아니냐?"
오크 우두머리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라크락은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무리가 잔뜩 있으니 어물쩍 음식을 강탈하고 도망가면 된다는 판단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의외로 오크 우두머리는 무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하다. 우리는 너희를 소란스럽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급했다. 빨리 저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왜지?"
라크락은 산비탈 너머를 바라보았다.
황량하긴 하지만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별지기의 말에 따르면 이런 협곡이 3일이나 더 이어진다고 하지만, 여기까지 버텨 온 이상 그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환경이 바뀌면서 드문드문 먹을 만한 것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니까.
우두머리 오크가 말했다.
"저 언덕을 넘으면 괴물이 있다."
─┼
오크 무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을 갚게 할 참이었지만, 라크락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올은 이런 황야의 규칙이 그러하듯, 오크들에게서 가진 것을 빼앗는 것도 권유해 보았다.
라크락은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자올이 라크락에게, 라크락이 마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먹을 것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던지라 우두머리 오크는 연신 고개를 바닥에 닿도록 절을 했다.
라크락은 오크가 좋을 대로 하게 놔두었다.
"아무 대가 없이 주는 것은 아니다. 괴물에 대해 자세히 말해라."
"물론이다. 자세히, 정확히 알려 주겠다."
오크 무리는 이 근방에서 살고 있었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더 강한 종족이나 육식 동물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야에 비하면 이 근방은 먹을 것을 곧잘 찾을 수 있으므로 30명의 작은 무리인 오크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딱딱한 갑피를 가지고 있고, 많은 발로 배를 바닥에 붙이고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데, 오크의 묘사에 따르면 그 크기가 20미터는 넘었다.
성운은 듣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흉물(凶物)이군.'
게임 로스트 월드의 설정은 '옛 신'들이 행성을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들만 사라졌을 뿐, 신들을 섬기던 수많은 종족들과, 신의 피조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 중에 흉물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보통 필드에서 나타나는 거대 보스로, 위험을 부담하고 사냥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는다.
'...문제는 낮은 문명 레벨에서는 상대하기가 까다롭다는 거지.'
이유는 간단했다.
흉물은 신들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능력치에 신성 레벨이 존재한다.
'능력치 뻥튀기가 어마어마할 거란 말이지. 던전 안에 있는 놈이 아니라 필드 밖에 나와 있는 놈이니 그리 높지는 않겠지만, 기본 능력치에 특수 능력을 감안하면 D+3 정도라도 강신한 라크락보다 강할 거야.'
호각으로 싸운다면 라크락은 다칠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전사들의 피해가 있을 터였다.
'길을 우회하라고 암시를 줄까?'
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라크락이 이끌고 있는 무리는 물론 소 떼도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라크락도 성운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별잡이를 불렀다.
"우리가 길을 돌아갈 수 있나?"
"다른 길도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까?"
"황야로 나가 여드레는 산맥을 끼고 돌아야 할 겁니다."
라크락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가 무엇인지도 보기 전에 도망칠 수는 없지."
자올이 옆에서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면 돌아가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 될 겁니다."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갈 필요는 없었다.
라크락은 소수의 전사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키도록 하면서, 충분히 휴식하라고 말했다.
라크락은 괴물을 찾아 줄 오크 하나와 자올과 유르, 전사 열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성운은 라크락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풀어 둔 벌레 떼를 통해서 흉물의 위치를 확인했다.
직접 보고 나니 흉물의 이름도 알 수 있었다.
'뭘 묘사하는가 싶었는데, 고대 갑충(甲蟲)이었구나.'
갑충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생긴 건 지네에 가까웠다.
길이는 오크가 묘사한 것보다 조금 작은 15미터 정도지만, 그걸 작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길쭉하고 단단한 외피가 감싸고 있다. 입에는 독니까지.
그리고 그 외피 위에는 고대인들이 이 생물을 섬겼음을 의미하는 석재 구조물들이 반파된 채 매달려 있었다.
그 구조물들에 잔뜩 덮인 이끼 덕분에 이 생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대 갑충(흉물 Lv.9)
힘 120(+d3)
지능 12(+d3)
사회성 4(+d3)
갑충의 독니
잊힌 신의 축복(알 수 없음)』
'강한데.'
예상했던 대로 신성 레벨이 3이나 붙었다. 기본 힘이 120이나 되다 보니 강신을 해도 라크락보다 강한 셈이다.
애초에 갑충 자체가 자연 생물 중에는 드래곤 같은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비슷한 정도로 나이를 먹은 드레이크나 '거대' 사이즈의 돌연변이 동물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인 탓이 강할 것이다.
'차라리 특수 능력이 많이 붙더라도 피지컬이 약한 놈이었다면...'
그리고 능력치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라크락과 그 전사들은 계곡 아래 또아리를 틀고 있는 고대 갑충을 보자 주눅 든 모습이었다.
유르가 중얼거렸다.
"움직이는 것만으로 여기까지 땅이 흔들립니다.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크 우두머리가 말했다.
"저건 지금 잠자고 있다. 잠꼬대지."
성운은 겁먹은 리자드맨들을 보며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소의 피해를 입어야 한다면, 그보다 덜한 쪽이 낫다.
돌아가는 것도 방법.
보상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면 모를까, 겁을 먹은 상태로 도전하라고 라크락에게 등 떠밀 수는 없지.'
그때 자올이 말했다.
“우리가 유리합니다, 부족장.”
0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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