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árbaro 3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힌 방패가 빠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씹!”
이내 뜨거움을 참지 못한 멀대가 자기 손으로 방패를 집어 던졌다.
미안, 우리 궁수는 정령궁수라서.
그러게 나처럼 통짜 철판 방패를 썼어야지 거지새끼야!
휘이이이이익!
성가시던 방패가 사라지자 에르웬도 서슴없이 다시 화살을 쏘았다.
“아아아악!”
명중한 곳은 멀대의 어깨.
이내 멀대는 쥐고 있던 검까지 놓치며 쓸모없는 새끼로 전직했다.
“일리스! 요정년은 내가 처리하마!”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리더가 사무라이에게 나를 맡기고는 수풀로 달려갔다.
잡기엔 이미 늦었다.
제기랄…….
에르웬을 믿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만 포기해라 바바리안.”
사무라이가 뒤로 물러서더니 위엄 있게 말한다.
역시 인간은 이래서 엿같다.
어디서 훼이크질이야? 리더가 올 때까지 시간 벌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데.
타닷!
내가 앞으로 대쉬하며 스매쉬를 사용하자 사무라이의 인상이 구겨진다.
“왜 혼자서는 쫄리냐?”
“혼자가 아니다!”
질문은 사무라이한테 했는데, 대답은 멀대가 하면서 일어선다.
왼손에는 아까 놓친 한 손 검이 쥐어져 있다.
그런데…….
후웅!
오른손잡이여서 그런가? 칼질이 영 시원찮다.
방패 하나는 기똥차게 다루더니, 뭐 이리 매가리가 없어?
퍽!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깔끔하게 멀대의 공격을 회피한 나는 멀대의 무르팍을 발로 내리찍었다.
멀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어, 그게 그렇게 꺾일 줄은 몰랐는데.
무르팍으로 튀어나온 뼈 부근을 양손으로 잡으며 멀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예 이 기회를 이용해 멀대를 마무리해 볼까도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사무라이 덕분에 무산됐다.
카칵!
몇 번을 막아 내도 적응되지 않는 묵직함.
얘는 왜 이 좆밥들이랑 다니지?
사연이라도 있나?
모르겠지만, 그게 이 새끼 인생에서의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다.
후웅!
내가 스매쉬를 사용하자, 사무라이가 익숙하게 거리를 벌리며 피해 낸다.
그 즉시, 나는 방패를 버리고 한 번 더 대쉬하며 손을 뻗었다.
이름하여… 스매쉬인 척하면서 손 뻗기.
이제 이름 짓기도 귀찮다. 재밌지도 않고.
“컥!”
목덜미를 잡힌 사무라이의 표정에 당혹이 어린다.
“이건 예상치 못했나 보지?”
나는 넘치는 힘으로 사무라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는 왼팔 대신 입으로 사무라이의 목을 덥석 깨물은 다음—
뜨드득-!
뜯어냈다.
“아, 아, 아아…….”
사무라이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멍한 눈빛으로 분수처럼 피를 쏟아내는 목을 양손으로 막으며 뒷걸음질 치더니…….
툭,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저쪽도 혼자 알아서 해치운 건가?
전투가 종료되기가 무섭게 에르웬이 헐레벌떡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 씨?”
나는 입안에 가득한 고깃덩이를 바닥에 뱉으며 팔로 입을 쓰윽 닦았다.
씨바, 존나 비리네.
* * *
힘겹던 전투가 끝났다.
아니, 나 혼자만 그렇게 느꼈나?
에르웬은 다행히 접근전까지 가기도 전에 끝냈는지 헤어질 때처럼 멀쩡한 행색이었다.
그에 비해 난 완전히 걸레 조각이 돼 있었고.
“아저씨! 얼른 이거 마시세요.”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무릎 꿇은 내게 에르웬이 포션을 들이밀었다.
꿀꺽, 꿀꺽, 꿀꺽…….
사약을 마시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포션 한 병을 싹 비웠다.
독도 독이지만, 한 곳에 집중된 상처가 아니기에 마시는 쪽이 낫다는 게 에르웬의 설명.
아무튼, 한 병을 통째로 비워서일까?
평소와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끄으으으윽.”
내장에서 뭔가가 끓어오른다.
혈관을 타고 작은 밤송이가 통통 튕기며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피부는 뜨거울 정도로 가려워 미칠 거 같았다.
그런 시간이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아저씨, 힘내세요.”
에르웬은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몸을 이전의 손수건으로 하나하나 닦아내 주었다.
독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더러워서?
모르겠지만, 하얗던 손수건은 완전히 새카맣게 변했다.
…나중에 새로 사 주던가 해야지.
“됐다. 이제 괜, 찮다.”
조금은 살만해진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내려다보니, 베이고 찔린 크고 작은 부상들 위로 딱지가 앉은 게 보인다.
포션 한 병을 더 까잡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여긴 흉지겠네요…….”
흉터야 남으면 어떤가, 나는 바바리안인데.
“물.”
“네, 네! 여기요.”
말 한마디에 에르웬이 잽싸게 가방을 뒤져 수통을 꺼내 주었다.
마치 상전이라도 된 기분.
꿀꺽꿀꺽, 한 병을 전부 마시자 기운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이 이렇게 맛있었나?
어느샌가 온몸에 도드라져 있던 핏줄들도 가라앉았다.
“시계 좀 꺼내 줘라.”
에르웬의 도움을 받아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23 : 20]
젠장, 쉴 시간도 주질 않는구나.
7일 차가 종료되기까지 딱 40분이 남았다.
그때까지 1층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이 빌어먹을 곳에서 3일을 더 보내야 한다.
“에르웬, 옷을 벗겨라.”
“네, 네?”
아니, 너 말고 쟤네들.
뭐라 할 기운도 없어 손으로 시체들을 가리키자 에르웬이 앞깃을 여미던 손을 풀었다.
“아니, 옷은 내버려둬라. 시간이 없으니 장비와 마석주머니, 배낭 정도만 챙기도록 하겠다.”
“네, 네!”
시간이 없단 걸 아는지 에르웬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아, 그 빨간 머리 아저씨 거랑 석궁 아저씨 것도 챙겨서 올게요!”
그래, 덫 밟지 않게 조심하고.
에르웬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사무라이, 멀대의 장비를 벗겼다.
가슴 보호대, 사무라이가 쓰던 검, 숯이 되어 버린 나무 방패는 버리고…….
장비 분류가 끝나자, 대충 쫙 견적을 내린 뒤 비싸 보이는 것만 골라서 루팅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낭에 닥치는 대로 욱여넣고 있자니, 때마침 에르웬이 도착했다.
“으…….”
배낭 2개를 짊어진 것이 꽤 무거워 보인다.
근데 미안, 난 3개라서 들어줄 수가 없어.
이내 나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23 : 35]
이젠 25분밖에 남지 않았다.
“뛰자.”
“괜찮으시겠어요? 지쳐 보이시는데…….”
“신경 쓰지 마라.”
에르웬은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내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었다.
그렇게 강제로 마라톤이 시작됐다.
“어떻게든 따라갈 테니, 최대한 속도를 올려서 길을 열어라.”
“네.”
나는 에르웬을 먼저 앞에 보내놓고, 페이스 조절을 하며 계속해서 뛰었다.
정신적 피로감 때문인지 묘하게 몸이 무겁다.
아니, 그냥 이 배낭들 때문인가?
…그래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보상은 있어야지. 그게 정의로운 세상 아니겠는가.
“후우, 후우, 후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저 멀리서 포탈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에르웬은 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응원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담긴 표정이 무슨 청춘 만화 여주인공 같았다.
씨바, 이러니까 무슨 나 혼자 남겨질 거 같은 분위기네.
왠지 불안해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먼저 들어간다!”
“엣, 저, 저도요!”
만화가 아닌 현실답게, 감격의 포옹 따위는 과감히 생략하고 포탈에 들어섰다.
번뜩-!
터져 나온 광채는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빛이 나를 감싸 안아주는 기분이 들었다.
* * *
1층으로 돌아온 소감은 2층에 진입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의 뱃속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기분.
“꺄앗!”
애석하게도, 그때와 결과마저 일치했다.
아니, 더 안 좋은가?
쿵-!
나는 거의 머리채 잡혀 내팽개지듯 던져진 반면, 에르웬은 이번에도 멀쩡하게 착지했다.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2층에 던져질 땐 그래도 하늘로 붕 뜨며 포물선을 그리기라도 했지, 이번엔 야구로 치면 거의 직구나 다름없었지 않은가.
제기랄, 뼈마디가 쑤신다.
“이거 뭔가 재밌네요!”
응, 그렇겠지.
나라도 옆에 나 같은 놈이 있으면 웃길 거 같거든.
“후…….”
뻐근한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23 : 58]
진짜 아슬하게 세이프구나.
운이 좋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럼 하늘을 원망할 일이 너무 많아질 테니까.
잘 되면 내 덕분, 잘 안 돼도 내가 못한 탓.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잠깐만, 뭔가 까먹은 기분인데…….
“전리품 분배!”
“아, 맞다! 정수!”
나와 에르웬은 동시에 생각이 났다는 듯 외쳤다.
“정수?”
“네! 아까 뭘 약속해 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래 그것도 있었지.
이제야 나는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다.
나는 재빠르게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23 : 59]
초침을 보니 약 15초가 남았다.
나는 얼른 시계를 닫고 고개를 들어 에르웬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그… 이름이 뭐였지?
블랙 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검은고래! 검은고래 주점에서 만나자!”
“네!”
내 다급한 외침에 에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심해도 좋을 거 같—
「미궁이 폐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아 씨바, 시간을 안 말했구나.
16화 귀환 (3)
빛이 눈앞을 뒤덮고, 그보다 옅은 빛이 얹어지며 시야가 돌아온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밝은 빛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뭐, 그래 봐야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었지만.
“데릭, 숙소로 돌아갈 건가?”
“한 달 만에 나왔는데 그럴 리가. 씻고 나면 바로 주점으로 갈 거다.”
“돌아왔다아아아아!!”
“7등급 이하 탐험가들은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변은 시끄럽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미궁에 들어선 탐험가들 전부가 한곳에 몰리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도시에 탐험가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무슨 월드컵 때의 광화문을 보는 거 같네.
딸각, 딸각.
나는 시계를 조정해 12시로 맞추었다.
미궁에 들어가도 도시에선 하루밖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건 밖에 나왔을 땐 다음 날 정오다.
‘게임을 할 땐 그냥 제작자의 배려 어린 세계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면 미궁에 갔다 와서도 도시에서 진행되는 퀘스트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유저를 위한 편의인 줄 알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누구지? 익숙한 목소린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와 눈높이가 비슷한 바바리안 한 명이 보인다.
첫 리더라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눈의 두 번째 아들 카락.”
“파눈의 세 번째 아들이다.”
뭐지? 그럼 아이나르가 두 번째인가?
아무튼 이러한 인파 속에서도 키가 큰 바바리안끼리는 서로를 발견하는 게 쉬웠다.
“케닉의 넷째 아들 세룸! 너도 살아서 돌아왔군!”
“그러는 너도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
진짜로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바바리안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하! 칼날늑대도 별거 아니더군! 내 도끼를 한 방 넘게 버티는 놈이 없었다!”
“너의 용맹한 도끼질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네룬의 아들 파르만!”
무슨 동창회인가? 순식간에 정신이 없어졌다.
쉴 새 없이 저 기다란 이름들을 부르면서 인사를 해대고, 서로의 무용을 칭찬하는데.
얘네들도 진짜 신기하다.
머리는 나쁜 거 같은데, 어떻게 저 긴 이름은 잘만 외우고 다니는 거지?
“비요른! 뭐 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이제 마석을 바꾸러 갈 것인데, 같이 안 가나?”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최대한 우렁차게 답했다.
“아, 가겠다!”
“꽤 지쳤나 보군!!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렇다!”
그동안 바바리안 연기를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감이 사라진다.
네이티브는 다르구나.
“저기 있다!”
“전사의 용맹을 증명하는 곳!”
이내 바바리안들 무리에 섞여 움직인 나는 자연스레 탐험가로서의 절차도 밟을 수 있었다.
별건 아니고, 검문소에서 마석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24,476스톤입니다.”
“28,420스톤입니다.”
“41,498스톤입니다.”
무슨 마트 계산대 같다.
손이 빠르다는 점에서 특히나.
탁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공무원들은 정말 신속 그 자체였다.
그들은 바코드 찍듯 마석 주머니를 어딘가에 올리고 숫자가 나오면 기계처럼 돈을 꺼내 줬다.
조금 신기한 마음에 그걸 보고 있자니, 주변의 야만인들이 또 창피한 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수다를 떨었다.
“오오오! 4만 스톤을 넘게 벌다니, 과연 대단하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은 전사 중의 전사다!
후, 요정이랑 며칠 살다 와서 그런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나저나 에르웬 얘도 찾아야 되는데…….
왜 찾는 애는 안 오고 이런 애들만 온 거지?
난 진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제 네 차례이다!”
한숨을 쉬고 있는데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영혼이 없어 보이는 공무원 앞에 주머니를 내려놨다.
“주머니 3개 모두 마석입니까?”
다른 두 개는 멀대와 사무라이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내 거다.
40분인가 전에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무원이 주머니를 저울 같은 곳 위에 올렸다.
그리고 정확한 금액을 읊어 줬다.
“182,413스톤입니다.”
빵 한 조각에 20스톤 정도였으니, 7일간 9천 개가 넘는 빵을 획득한 셈인가?
고블린 한 마리를 잡고 빵 한 조각 벌었다며 서글픔을 느끼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왠지 감정이 복받친다.
“18만 스톤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18만 스톤을 벌었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역대 최고의 전사다!”
이 새끼들은 감상에 젖을 시간도 안 주는구나.
나는 얼른 공무원에게서 돈을 넘겨받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근데 인파 속에서 나오자 그제야 내 행색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는지, 먼저 나온 야만인들도 주접을 떨기 시작했다.
“스톤만이 아니다! 망치도 들고 있다!”
“아니다, 신발까지 신었다! 부럽다!”
“가방이 세 개다!”
“시계를 본다! 혹시 시계도 볼 줄 아는 건가?"
“어떻게 저게 가능한 것인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마법사인가?”
뭐, 저 반응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마법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겠지.
맨몸뚱이로 미궁 속에 들어가 문명인으로 진화해서 돌아온 바바리안은 내가 최초일 테니까!
씨바, 이거 칭찬이 너무 과하니까 몸뚱이가 제멋대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워워, 진정해 비요른.
나는…….
“내가 바로 최고의 전사다!!”
“와아아아아아!!!”
내 외침과 동시에 바바리안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고는 나를 들고 헹가레질하기 시작했다.
근데 놀랍게도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괜찮다.
뭐, 될 대로 되라지.
“이곳에서 너무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미안하다! 사과하겠다!”
“그러니까, 목소리를 좀…….”
“알겠다!!”
끝내 직원이 와서 한 소리를 하고 난 후에야 광기가 잦아들었다.
그제야 나도 평정을 되찾고서 주변의 야만인들처럼 바닥에 앉아, 남은 야만인들의 검문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때였다.
“…….”
웬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북적이는 탐험가 무리 사이로 한 요정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에르웬이다.
대체 언제부터 날 본 거지? 제발 헹가래가 끝난 다음부터였으면 좋겠는데…….
“…….”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마주치자 에르웬이 반갑다는 듯 미소 짓는다.
다만, 옆에 있던 미남미녀 요정들이 말을 거는 탓에 금방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궁금해서 대화를 들어 보니 상당히 신선했다.
언니, 오빠거리며 조용히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는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언니! 이제 좀 정령을 다루는 방법을 알 거 같아요! 그린데린 할머니가 왜 그렇게 우선 친구가 되라고 했는지 이해된달까?”
“어머, 그러니? 불의 정령은 제법 성질이 급한 구석이 있다고 하니, 너도 금방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란다.”
음, 너는 그쪽 사람이구나.
난 옆에 야만인 새끼들밖에 없는데.
부럽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비슷한 마음으로 에르웬 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입모양으로 때를 말했다.
‘오늘 밤.’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꺄르르 웃으며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네!’
일단, 이 비밀 대화가 에르웬에게 있어 상당히 재밌게 느껴졌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근데, 쟤가 내 말을 이해한 건진 모르겠다.
애초에 ‘네’라고 답한 것도 맞긴 한가?
후, 검문소에서 나오면 제대로 대화를 해 보든가 해야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왜 저길 그렇게 보니, 혹시 아는 사람이니?”
“아, 아니에요! 언니! 그럴 리가요!”
옆에 있던 요정 언니의 물음에 에르웬이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는 틈을 봐서 나를 힐긋하며 입모양으로 말을 건다.
‘미안해요!’
이번엔 제대로 들은 듯하다.
이후 요정 언니를 몰래 가리키며 고개를 휙휙 내젓는 제스처도 곧 이해할 수 있었고.
이 언니 땜에 어쩔 수 없었단 거겠지.
뭐, 피차일반인 상황이겠다마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 뭘 그렇게 보고 있나! 아는 요정인가?”
“그렇지 않다!”
“하긴 그렇겠지! 너 같은 역대 최고의 전사가 야비한 귀쟁이들과 아는 사이일 리 없다!”
이 새끼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도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요정들이 찌릿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중에는 에르웬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씁쓸한 눈빛으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하…….”
저 애절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현타가 찾아왔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뭔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가자!”
이내 바바리안들이 검문을 마치고 입구로 나왔다.
어차피 기다려봤자 요정들 사이에 있는 에르웬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할 듯했기에,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지겹게도 그 앞엔 또다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아빠! 다친 덴 없어요? 보고 싶었어요!”
“형! 여기야 여기!”
음, 그래 게임에서도 이런 게 있긴 했지.
쉽게 말해 여기 있는 자들은 탐험가들의 가족 혹은 지인들이다.
“가자! 내가 길을 열겠다!”
“우오오오오!”
나는 바바리안들을 따라 수많은 반가움, 환희, 절망, 슬픔, 애정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인파 사이를 헤쳤다.
그러면서 그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리마리온! 제 남편은, 제 남편은 어디 있죠? 설마…….”
“죄송합니다.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안 돼… 안 돼요. 안 돼… 아아!”
[던전 앤 스톤]을 수도 없이 플레이해 왔지만.
모니터 너머 2D 그래픽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표정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 * *
굳이 바바리안들과 함께 이동한 이유는 하나.
앞의 검문소처럼, 초심자가 이 도시에서 겪어야 할 절차가 더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술이다! 술을 마시자!”
“우오오오오오오!”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야만인들이 향한 곳은 주점이었다.
장난하냐?
“나는 빠지겠다.”
“어째선가!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안 그래도 길던 이름에 수식어가 붙었다.
나는 참을 인 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갈 곳이 있어 어쩔 수 없다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무운이 함께하기를 빌겠다!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
거듭 느끼지만, 도무지 상식을 기반한 예상이란 게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후, 드디어 조용해졌네.”
야만인들과 잠시 같이 있었더니 정신이 나갈 거 같다. 에르웬이 나랑 지냈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다음부턴 야만인 연기도 자중하든가 해야지.
터벅, 터벅.
그들과 헤어지고서 하염없이 도시를 누볐다.
목적지는 있지만 일단 당장은 마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평화롭다.
처음 이 도시를 보았을 때는 한밤중이었지만, 낮인 지금엔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놀랍게도, 그것이 내게 안정감을 준다.
“…….”
이곳엔 몬스터가 없다.
나를 해칠 인간도 없다.
길바닥에 쓰러져 자도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게 건넬지도 모르고.
이곳엔 법과 규칙, 그리고 여유가 존재한다.
물론 머나먼 이세계고, 보이는 것과 달리 이들의 사상, 문화, 사회제도 등 거의 모든 게 21세기에 비하면 야만적이리란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화롭다.
적어도 내가 7일간 지냈던 미궁에 비하면.
“…….”
그 안정감을 더욱 느끼고 싶어 계속 걸었다.
방금 전에 탐험가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인지, 피 칠갑을 한 내 모습은 딱히 튀지 않았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고.
하지만 계속 길을 걷고 있자니, 씻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보인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고 씻었다.
조금 신기했다.
사람 몸을 씻는데 땟국물보다 시뻘건 핏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게.
“…….”
약 1시간에 걸쳐 성심성의껏 몸을 씻고 밖에 나오니,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제기랄, 옷이라도 사고 와서 씻을걸.
한숨 자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다시 거리로 나와 옷가게를 찾았다.
그런데 왜일까.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상의를 벗은 것도, 흙과 피로 얼룩진 바지를 입은 것도 전부 그대로인데, 아니, 오히려 몸만큼은 훨씬 깨끗해졌는데…….
나는 다시 야만인이 된 기분이었다.
대체 왜지?
“어서오십시오!”
옷가게로 추정되는 매장에 들어서자, 친절하게 종업원이 다가온다.
거지꼴의 바바리안임에도 싱긋 웃고 있다.
이렇게 프로페셔널한 종업원은 서울에서도 별로 보지 못했는데…….
“상의요? 혹시 주문 제작을 원하신다면 옆 건물에……. 아, 당장 입을 걸 찾으신다고요?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찾아보겠습니다.”
종업원의 도움으로 나는 터질 것처럼 꽉 끼는 셔츠 한 벌에, 검정색 천바지를 살 수 있었다.
가격은 합쳐서 2,500스톤.
바가지를 쓴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게임에서도 아무 기능 없는 옷 같은 건 사서 입어 본 적이 없어서.
“다음에 또 오십시오!”
이제 제법 사람 같은 행색을 하게 된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마석을 환전해 주던 공무원을 봤을 때도, 방금 본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느꼈지만, 묘하게 현대적인 분위기를 뿜는 도시다.
이 라프도니아는.
건물들도 대부분이 석재로 만들어졌고, 층수도 전부 높다.
아니, 대로변에는 아예 3층 이하짜리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씻을 때 보니까 수도꼭지에서 물도 나왔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해볼 만한 일일지도 몰랐다.
“…….”
이내 여관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7일간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리자니, 나 또한 한스 아저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살아남는 것만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결국 수없이 참아왔던 말을 뱉고 말았다.
“집에 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그곳에 날 반기는 이가 한 명도 없을지라도.
17화 라프도니아 (1)
슬며시 눈을 뜬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건다.
‘어서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해.’
앞으로 도시에서 해야 할 여러 숙제들을 떠올리니 덜 깬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해 보자.
일단은 시간을 확인했다.
[21 : 18.]
미궁에서 나온 게 정오였으니, 이것저것 빼고도 대충 4시간가량은 잔 셈.
근데 침대에서 자서 그런가?
잠든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개운하다.
꼬르륵.
미궁에서 먹던 빵이 있긴 하지만 나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돈이 목숨이나 다름없는 세계지만…….
그 정도 사치는 괜찮겠지.
“…….”
낮에 그렇게 씻고도 왠지 몸에서 냄새가 났던지라 한 번 더 빠르게 몸을 씻고 숙소를 나섰다.
터벅터벅.
낮에 비하자면 한산한 밤거리를 걷고 있자니 조금 갑갑했다.
심리적으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현재 내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셔츠는 중세풍으로 가슴이 파인데다가 소매와 목에 레이스 같은 것이 달린 것이다.
단추 대신 V 자로 깊게 파인 목 부분에 끈이 달려서 신발끈처럼 교차해 조이는 방식인데…….
줄을 전부 풀어놨음에도 작다.
바바리안들이 상의를 벗고 다니던 이유를 알겠다. 맞는 옷이 없어서였다. 이 얼마나 슬픈 종족인가?
‘…근데 어디로 가야 하지?’
현재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약속 장소로 가서 에르웬과 만나는 것이다.
근데, 검은고래 주점이 어딘지 모르겠다.
미궁 포탈이 열리는 차원광장 기준으로 남쪽 지대에 있던 건 확실한데, 게임에선 도시 크기가 수만 배는 족히 축소돼 있던지라 이런 부분에선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검은고래 주점? 그런 데가 있었나?”
“처음 들어 보는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어도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머리가 희끗한 어느 중년 아저씨는 달랐다.
“검은고래 주점이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자네는 젊어 보이는데 거길 어떻게 아는가? 10년도 전에 사라졌을 터인데.”
젊어 보인단 말은 고맙지만 내용은 그리 반갑지가 않다.
“…사라졌단 말인가?”
“그래, 몇 대째 이어 오던 가게였는데 아들내미가 도박에 빠져 주인이 바뀌었지. 그러면서 이름도 달라졌고.”
미궁에서부터 간직해왔던 가설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 속 세계관은 이 시대로부터 과거의 시기인 건가?
그렇다면 ‘악령’이나 바바리안과 요정의 앙숙 관계 같은 것도 설명이 된다.
낮이 되면 도서관부터 가 보든가 해야지.
“고맙다. 크게 도움이 되었다.”
“허허, 자네처럼 깍듯한 바바리안은 생전 처음 보는 듯하군.”
이후 나는 토박이 아저씨와 헤어져 밤거리를 걸었다. 상호만 바뀌었지 여전히 주점으로 영업 중인 모양이었기에, 일단 가보기나 할 생각이었다.
에르웬도 그렇게 찾아와 줬길 바라면서.
‘파이든푸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발음은 읽을 수 있는데 뜻은 모르겠다. 이 세계에서도 고대어 같은 건가?
내 머릿속에 자연스레 들어온 언어 지식에 대해서도 한 번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흐하하하하하!”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새끼들아!”들어선 주점 속은 내가 딱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탐험가, 음악, 너저분함, 담배연기, 가끔 보이는 이종족들까지.
입구에서 쓱 스캔을 하고 있는데, 구석 자리에 익숙한 은색 뒤통수가 보였다. 심지어 살짝 튀어나온 귀도 뾰족했다.
반가운 마음에 어서 가 보려는 차.
툭.
술에 취한 웬 좆밥 새끼 하나가 내 어깨를 치고는 먼저 통로를 지나간다.
뭐, 그것만이면 문제가 안 될 테지만…….
“요정 아가씨들, 혼자 심심해 보이는데 오빠랑 술이나 할까?”
에르웬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저따위의 상투적인 대사를 던진다.
음, 사실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도 별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시궁창 같은 주점이라 그런가? 별 같잖은 쥐새끼들만 꼬이는군.”
에, 에르웬……?
너 대체 언제 그렇게 된 거니?
“…뭣? 쥐, 쥐새끼?”
찰진 비아냥에 수작을 부리던 좆밥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아마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꺼져라. 이마에 구멍이 나기 싫으면.”
미간을 특히 좋아하는 걸로 봐선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지?
어서 확인해 봐야 했다.
그전에 일단 얘부터 치워야겠다마는.
“뭐, 뭐야 넌 또!”
내가 다가가 어깨를 잡자 추근대던 아저씨가 휙 고개를 돌리더니…….
“어어, 어.”
곧장 눈을 깐다.
“꺼지라는 말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아저씨는 대답 대신 조심스레 내 옆을 꾸겨져 지나가더니, 비틀거리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때였다.
“아, 아저씨!”
내가 익히 아는 그 말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에르웬이 이중인격자였단 루머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야 아까 저 아저씨도 ‘요정 아가씨들’이라고 말을 걸었잖아?
“네가 그 바바리안이군?”
구석진 자리라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테이블에는 총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 아마 그 바바리안이 맞을 거다. 근데 그러는 너는 누구지?”
“얘의 언니.”
진짜 언니였구나.
어쩐지 옆모습이 얘랑 완전 똑같더라.
“얘의 언니가 네 이름인가?”
“…멍청하긴. 테르시아라 불러라.”
에르웬의 성이 테르시아였다.
아무래도 언니는 내게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
“그러지. 테르시아, 그럼 이제 앉아도 되나?”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르시아를 관찰했다.
일단 쌍둥이는 아닌 것 같다.
서너 살은 더 나이가 많아 보였으며, 정면에서 보니 이목구비도 꽤나 달랐다.
눈매 때문인지 분위기가 사나웠고.
아, 이건 딱히 눈매 때문만은 아닌가?
“바바리안.”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무튼, 이 어린애를 대체 왜 이런 술집으로 불러낸 거지?”
“저, 언니……?”
“너는 가만히 있어.”
에르웬이 분위기를 느끼고 중재를 하려 했으나 언니에 의해 가로막혔다.
흐음, 상황이 꽤 재밌게 돌아간다.
에르웬이 왜 언니를 데려왔는지는 제쳐두고, 이 언니가 날 못마땅해하는 게 단지 내가 바바리안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직감이 든다.
일던 이것부터 파악해야겠군.
“테르시아,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목적으로 날 보려 한 거지?”
“에르웬이 어젯밤 외박을 해서 캐물었더니 밤새 주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하더군. 내 동생을 바람맞힌 게 어떤 놈인지가 궁금했다.”
잠깐,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소리지? 어젯밤이라니?”
“시치미 떼는 건가?”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거 같진 않다.
“…에르웬, 미궁에서 나오고 지금 몇 시간이 지났지?”
“아, 어… 서른 시간 정도네요!”
미친, 하루를 넘게 처자고 일어난 거였구나. 4시간만 잔 게 아니라.
어쩐지, 존나 개운하더라.
“사과하겠다. 자느라 하루가 지났는지도 몰랐다.”
순순히 사과를 하자 테르시아가 의외라는 눈빛을 짓는다.
왠지 나는 그게 서글펐다.
하루를 넘게 잠만 처잤다는 사실엔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는 듯 보여서.
“바바리안이 시간을 제대로 지킬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왜 에르웬을 불러낸 거지?”
뭐, 여기엔 꽤나 길고도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다마는…….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걸 너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다. 정 궁금하다면, 나중에 에르웬에게 들어라.”
직역하자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꺼지란 뜻이었는데, 다행히 테르시아도 잘 이해했는지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재미있군. 이제 막 미궁에 들어간 초심자 주제에.”
“초심자가 무슨 상관이지? 에르웬은 탐험가다. 옆에서 평생 보살펴 줄 게 아니라면, 그런 태도는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야만스럽긴.”
“저, 언니? 아저씨……?”
눈싸움이 시작되자 에르웬 혼자서 안절부절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이내 테르시아가 주머니를 탁자에 올렸다.
“35만 스톤이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지?”
“에르웬이 흡수했다는 정수의 값이다.”
아,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구나.
아침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패턴이라 뭔가 기분이 묘하다.
“왜 가져가지 않지? 역시 다른 속셈이 있던 건가?”
그런 건 아니다.
돈으로 값을 치른다면, 나 역시 정수의 대가로 에르웬에게 ‘약속’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직 에르웬의 의사를 듣지 못했다.
“너도 같은 의견인가?”
“그게…….”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린다.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
원래 단둘이 있을 때 나누려 했다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하기로 했다.
“내가 요구하려던 약속은, 내가 원하는 정수를 얻을 때까지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에, 그게 전부예요?”
“그렇다. 가능하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 팀을 꾸리고 싶지만, 이건 별개다. 약속은 필요 없다. 앞으로는 비율도 5:5로 나눌 거고.”
한마디로 2인조 파티를 꾸리잔 뜻이다.
과연 에르웬은 어떤 대답을 할까.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죄송해요.”
답은 거절이다.
고개를 푹 숙인 에르웬을 대신해 언니가 그 이유까지도 설명해 주었다.
“에르웬은 앞으로 나와 함께 미궁에 들어갈 거다.”
“이제서야?”
“전통에 따라 첫 경험만큼은 홀로 해내야 했을 뿐, 나는 처음부터 에르웬을 혼자 둘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
얘는 튜토리얼만 끝내고 나오면 버스를 태워 줄 기사가 있던 거구나.
빌어먹을 혈연.
“이해가 됐다면 이 주머니를 가져가라.”
에르웬은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나름 상성이 좋은 동료긴 하다마는, 꼭 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계산은 제대로 해야겠지.
“35만 스톤은 정수의 평균 시세를 반으로 나눈 거겠지?”
“물론이다. 함께 얻은 전리품이니까.”
고인물로서 판단을 내리건데, 70만 스톤이라면 상당히 괜찮은 금액이다.
그러나 비율이 잘못됐다.
“그렇다면 28만 스톤이 모자라군. 약속된 분배 비율은 9:1이었으니까.”
“좋다.”
테르시아가 흔쾌히 주머니 하나를 더 꺼냈다.
의심스러워 확인해 보니 정확히 28만 스톤이 들어 있다.
니미, 나 지금 호구 잡힐 뻔한 거야?
분명 내가 말을 안 꺼냈으면 35만 스톤만 받고 끝났을 것이다.
이런, 야비한 귀쟁이 새끼들…….
바바리안들이 왜 요정을 극혐하는지 알겠다.
“용무가 끝났다면 슬슬 자리를 비켜 주겠나? 에르웬과 나눌 얘기가 있는데.”
“굳이 나눌 얘기가 있을까?”
또다시 기싸움이 시작되려는데 에르웬이 끼어들었다.
“언니, 걱정해 주고 같이 여기까지 와준 건 고마운데, 이제 가도 될 것 같아.
“에르웬?”
“나도 아저씨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응?”
“…하긴, 이제 너도 어린아이가 아니겠지.”
테르시아는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바바리안, 맹세를 해라. 에르웬과 자지 않겠다고. 그럼 곧바로 떠나 주겠다.”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언, 언니?!”
음,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 같다.
자지 말라니…….
그 아래의 스킨쉽까지는 전부 허용이란 건가?
“맹세하겠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아, 아저씨?”
“그럼 됐다.”
마침내 테르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 이걸 깜빡했군. 바바리안, 에르웬을 구해 줘서 고맙다.”
한마디를 더 남기고서 쿨하게 주점 밖으로 떠났다.
* * *
딸랑딸랑.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를 들으며, 에르웬이 테이블 위로 축 늘어진다.
“흐아! 어떡하죠! 한 번도 이렇게 대들어 본 적 없는데… 혹시 언니가 화났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야, 나가기 전에 널 한 번 보더니 씨익 웃었거든. 너한텐 안 보였겠지만.
…잠깐만, 저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에르웬은 몇 번인가 자기 머리를 박박 긁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죄송해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이미 언니랑 함께 움직이기로 예전부터 얘기가 되어 있어서…….”
“사과할 것 없다.”
나였어도 고렙 요정이 쩔해 준다는데 의리로 쪼렙 바바리안이랑 붙어 다니며 개고생할 거 같진 않으니까.
“저,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에르웬이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정확히 63,000스톤이에요.”
석궁과 리더가 갖고 있던 마석의 값일 것이다.
실제 금액이 얼마였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의심치 않았다.
그래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아무튼 이걸 9:1로 나누면 얼마를 줘야 하지?
“아, 제거는 제가 알아서 챙겼으니 굳이 안 주셔도 돼요.”
응, 그랬구나.
이런 데서는 참 야무지단 말이야.
“두 사람이 갖고 있던 배낭은 일단 제 숙소에 놔뒀어요. 이것저것 많기는 한데… 이건 내일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지.”
며칠을 같이 지내서인지, 얘는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를 참 잘 알아차린다.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전리품 분배 관련 안건이 순식간에 일단락 지어졌다.
다만, 다음 안건에 들어서자 에르웬도 한층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보답은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보답?”
“말했잖아요.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아,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지.
“은혜라…….”
말꼬리를 흐리자 에르웬이 꿀꺽 침을 삼킨다.
…설마, 이것 때문에 얘 언니가 마지막에 맹세하라며 그 지랄을 떤 건가?
내가 얘한테 뭐 이상한 보답을 바랄까 봐?
“놀리지 말고, 어서 말해 주세요.”
눈치가 많이 늘었다.
놀리는 것도 바로 알아채고.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군. 일단 뭐 좀 시키려는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배는 안 고픈데…….”
“그럼 내 것만 시키겠다.”
이내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있자니 에르웬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럼 술! 술 시켜 주세요!”
“술?”
“네. 일부러 어제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첫 귀환주는 아저씨랑 같이 마시려고! 히히.”
에르웬이 해맑게 웃으며 칭찬해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귀환주라…….
그러고 보니 그런 문화도 있었다.
뭐, 퇴근하고 맥주 한 캔 마시는 그런 느낌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다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성지에서만 자라는 이종족들에게 있어 ‘첫 귀환주’는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음, 근데 이럴 땐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예요!”
“고맙다?”
“고맙기는요! 우리는 미궁에서 동고동락한 동료인데, 첫 귀환주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얘는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고민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볼을 긁적였다.
“물론 아저씨한텐 이게 첫 귀환주가 아니겠지만요…….”
“무슨 소리지? 나도 이게 첫 귀환주다.”
“네에?!”
왜 놀라는 걸까.
“나도 20살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어쩐지 말을 해도 계속 아저씨라 부르더라.
“미궁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그렇구나…….”
이내 에르웬이 내 눈치를 슬슬 보더니, 종업원에게 가 알아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온 건 한 20분쯤 지나서였다.
“아저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냥 계속 아저씨라 할 생각이구나.
그래 뭐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너도 수고 많았다.”
우리는 술과 음식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미궁에서는 대부분 꼭 필요한 말들만 주로 했기에, 이런 사적인 대화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만은 없는 법.
“아저씨, 오늘은 셔츠를 입으셨네요?”
응, 너는 치마를 입었네.
그런 얘기는 실컷 했으니 이제 됐고.
“에르웬, 아까 은혜를 갚겠다고 했지?”
“네? 네, 그랬죠?”
“그럼 지금 여기서 그때 쓴 이능을 써 봐라.”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한다.
과연 이게 보답이라 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듯한데…….
내게는 중요한 문제다.
과연 게임 속의 정수와 실제의 정수는 어떤 부분이 다르고 같은가.
반드시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육성법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근데 이능은 갑자기 왜요?”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이능을 발현하는 건 불법인데요? 바로 잡혀갈 거예요. 경비병한테.”
이게 게임을 할 때 마을에서 스킬이 안 써지던 이유구나.
그럼 아예 방법이 없는 건가?
고민하던 때 에르웬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어떨까요? 아, 저희 숙소는 안 돼요. 다른 종족은 출입이 금지거든요.”
요정들은 전용 숙소도 있는가 보다.
흐음, 그나저나 어떡하지? 으슥한 뒷골목이라도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에르웬이 먼저 해답을 찾아냈다.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 방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그래, 그러면 되겠다.
18화 라프도니아 (2)
숙소로 돌아온 나는 약간 취한 듯한 에르웬의 몸을 낱낱이 연구했다.
물론, 언니와 한 맹세가 깨지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몸만 전사인 내게 그런 맹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에르웬, 조금 더 벌려 봐라.”
“흐읏,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현재 나는 에르웬을 강제로 스트레칭 시키고 있었다.
“아악! 어깨! 어깨가 빠질 거 같아요!”
“흐음.”
“원, 원래 이렇게까지도 안 꺾였어요! 진짜예요!”
“확실한가?”
“네, 네! 일족의 이름에 걸고!!”
이내 팔에 힘을 풀자 에르웬이 곧장 침대 위에 드러눕는다.
‘유연성+4’라고 해 봤자 그렇게 막 티가 나는 건 아니구나.
하긴, 그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또, 또 남았나요?”
“아니다. 일단은 쉬어라.”
[던전 앤 스톤]은 불친절한 게임이었다.
일단 스탯만 봐도 그렇다.
육체, 정신, 이능.
메인 스탯은 이렇게 세 가지였지만, 옆에 붙은 [+] 버튼을 누르면 세부 스탯들이 수천 개 나왔다.
예를 들자면, 육체의 하위 스탯인 근력이 올라가면 소지 가능한 중량, 물리 공격력 등에 보정이 생기는 식.
유연성?
미약하게나마 회피율과 치명타율이 증가했다.
시각?
원거리 계열 무기의 사정거리와 캐릭터의 가시 범위가 늘어났다.
후각은 관련 이능이 있을 시 그 이능의 계수가 되었고, 명중률은 말 그대로 명중률이었다.
때문에 육체 수치가 똑같이 50이더라도, 세부 항목이 어떠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전혀 달라졌다.
“…….”
참고로 이는 전부 스스로 알아낸 것이다.
게임 제작사에서도, 그 어떤 해외 유저도 말해주지 않은 정보였기에, 나는 직접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며 통계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씨바, 그땐 그 열정이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후, 갑자기 또 열받네.’
다시 돌아와, 나는 9년 차 진성 고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 알아내지 못한 스탯들이 몇 가지 있었다.
고블린 궁수가 뱉은 정수에 표기된 ‘집착+7’이 대표적이다.
집착 스탯은 정신 수치의 하위 항목이라는 것 말고는 모든 게 미스터리였다.
“에르웬.”
“아저씨가 한숨 쉰 다음이라 불안해지는데 그냥 말 안 하면 안 돼요?”
“혹시 미궁에서 나온 뒤로 뭔가 달라진 것이 없었나? 자꾸 뭔가 머릿속에 아른거린다던가. 참기가 어렵다던가 그런 것 말이다.”
“…그, 글쎄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말해 봐라.”
“과자……? 네, 과자요. 그러고 보면 나오자마자 엄청 사 먹었는데…….”
“평소에 단 음식을 싫어했나?”
“아뇨, 좋아했는데요? 그래도 하루에 이만큼이나 먹은 적은 처음인 것 같기는 해요.”
“그렇군.”
어쩌면 집착은 욕구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을 뜻할지 모른다.
그러니, 게임에서도 별 기능이 없었겠지.
괜시리 머리가 복잡해진다.
현실 패치가 되며 다른 세부 스탯들에도 추가 기능들이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연성만 보아도 그렇다.
게임 내에서 그랬듯, 몸 동작이 자연스러워지면 피하기가 쉬워진다. 상황이 맞으면 원래라면 못했을 동작을 성공해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유연성이 좋아지면 좁은 곳에 들어가기 수월해질 것이고, 착지 시에도 뻣뻣한 몸보다는 충격을 더 잘 흡수할 것이다.
그런 건 게임에서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그러한 것들까지 종합해 육성법을 재차 점검해야 한다.
“아저씨, 저 이제 졸려요…….”
아, 너무 쉬게 뒀나?
이미 얘 눈이 반쯤 감겨 있다.
액티브 스킬을 쓰면 힘든 건 없는지, 다시 쓰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그런 것도 확인해 보려 했는데…….
“알았다. 자라.”
“네에…….”
나는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그리고 에르웬의 옆에 누웠다.
에르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궁에서 그렇게 볼꼴 못 볼 꼴을 다 보여 주었는데, 이제 와서 데면데면하는 것도 웃겼다.드르렁!
그렇게 잤는데 또 눈이 사르르 감긴다.
뒤늦게 같이 자지 말라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지만…….
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쪽도 이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까.
* * *
[07 : 35]
제법 이른 아침 눈이 떠졌다.
이틀 동안 거의 잠만 잤으니 이르다는 말엔 어폐가 좀 있겠다마는.
“아저씨, 물 좀…….”
에르웬도 마침 일어났기에, 우리는 대충 세수만 한 뒤 1층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에르웬의 숙소로 향했다.
도시가 워낙에 크다 보니 걸어서 가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같은 구역이라 다행이네요!”
동감이다.
만약, 정반대편이었다면 마차를 타고도 한참은 가야 했을 테니까.
말만 요새 도시지, 라프도니아는 정말 터무니없을 만큼 넓은 면적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꼭 조용히 계셔야 해요. 알겠죠? 아저씨와의 일을 아는 건 아직 언니뿐이니까.”
“그러겠다.”
숙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에르웬이 배낭 두 개를 힘겹게 메고서 걸어왔다.
7일차가 끝나기 직전에 우릴 기습했던 리더와 석궁의 배낭. 막 쑤셔박아서 잠기지도 않고 무기들이 삐죽 나와 있다.
“들어 주마.”
“아, 감사합니다!”
역시 얘는 사양이라는 걸 잘 모른다.
처음엔 안 그랬던 것도 같은데.
“무기는 이곳에, 방어구는 이곳에, 도구나 소모품은 따로 잘 모아놔라.”
“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물품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됐지만, 전리품이라 그럴까? 꽤나 즐거웠다.
나와 에르웬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바닥에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들을 쫙 둘러보았다.
“전부 다 파실 건가요?”
“필요한 것만 빼고.”
“그럼, 아저씨가 준 가죽옷이랑 허리띠는 제가 계속 가져도 돼요?”
“상관없다. 그만큼 몫에서 제외하겠다면.”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이내 팔 것과 팔지 않을 것까지 분류를 마친 우리는 다시 도시로 나왔다.
시계, 나침반 같은 중복되는 도구를 뺀 나머지 탐험 용품이나 포션 같은 소모품은 나눠 갖기로 했지만, 사실상 장비류는 거의 다 팔기로 결정했다.
안 맞는 걸 쓰는 것보단 돈으로 바꿔 다른 걸 사는 게 나을 테니까.
이제 그 정도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예요!”
그렇게 도착한 곳은 테르시아가 알려주었다는 한 무기상점이었다.
판매 물품은 일본도, 장검 두 자루, 석궁, 양손망치, 단검 두 자루, 휴대용 나이프 3개.
“총 35만 스톤입니다.”
지인 소개였기에 더욱 걱정을 했지만, 비교를 위해 들린 어느 상점보다도 가장 값을 잘 쳐주었기에 그냥 싹 판매했다.
“우아아…….”
상점을 나서자마자 에르웬이 참아왔던 감탄을 뱉었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저씨, 이거 꿈 아니죠?”
빼앗은 마석을 제외하면, 7일 간 순수 사냥만으로 번 돈은 10만 스톤 안팍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35만스톤이라니?
게다가 아직 방어구는 팔기도 전 아닌가.
…탐험가 새끼들이 사람만 보면 눈깔이 뒤집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장비는, 돈이 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저씨, 그럼 제 몫은 얼마예요?”
에르웬의 두눈에 돈을 향한 갈망이 맺힌다.
“기다려 봐라, 아직 팔 게 한참 남았으니까.
다음 행선지는 10분 거리에 위치한 방어구상점이었다.
“여기 18만 스톤이네.”
물품 갯수는 방어구 쪽이 많았지만, 총 값어치는 무기보다 적었다.
방어구는 중고로 팔기가 어려워서 매입가가 낮다고 하는데, 충분히 납득 가는 이유였다.
우리만 해도 사이즈 문제 때문에 전부 팔기로 한 것 아닌가.
“그 가격에 판매하겠다.”
“바바리안답게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다음에도 이런 물건이 생기면 또 와 주게. 그때도 값은 잘 쳐 주지.”
“그러겠다.”
이내 잡화 상점에 들려 불필요 판정을 받은 여러 용품까지 판매를 마치니, 총 145만 스톤이란 거액이 손에 들어왔다.
뭐, 전부 내 돈은 아니겠다마는.
“여기 받아라, 4만 5천 스톤이다.”
“어? 조금 많은 거 아닌가요?”
가죽옷과 허리띠로 2만 스톤을 제하고, 정확히 7,000스톤을 더 넣었다.
예뻐서 주는 건 아니고, 멀대와 사무라이가 갖고 있던 마석을 9:1로 나눈 값이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서, 네가 준 다른 두 명을 기준으로 잡았다.”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아무튼, 뗄거 다 떼고 나서 총 자산을 확인하니 무려 140만 스톤에 달한다.
조금, 아니, 많이 신기했다.
게임에서도 1회 차에 이만한 금액을 손에 넣어 본 적은 거의 없는데…….
시작이 좋다.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네?”
왜 놀라는 얼굴이야?
돈 계산도 다 끝났겠다, 서로 갈길 가야지.
너 때문에 계획이 어긋나서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거든.
“뭐, 중앙광장까지는 같이 가면 되겠군.”
“네에…….”
갑자기 에르웬의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마냥 길을 걷다보니 갈림길인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어?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네요?”
아까 지나쳤을 때와 달리 인파가 들끓었다.
절반은 병사들이었고, 남은 절반은 포승줄에 묶인 죄인들이었다.
아니, 죄인들이라 하기엔 좀 그런가?
“읍, 으읍! 윽! 으으윽!”
살인, 강간, 방화 같은 강력 범죄자가 아니다.
재갈을 입에 물고서 두려움에 떠는 이들의 죄목은 ‘세금 미납’.
다시 말해, 돈이 없었기에.
저기 저 이십대의 젊은 여인은, 자식이 있을 연령의 사내, 한 평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을 주름 진 손의 노인은 사형수가 되었다.
“집행을 시작하겠다!”
징수관이 외치자 병사들이 단두대 아래로 사내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걱-!
섬짓한 소리와 함께 잘려져 나간 사내의 머리가 앞에 비치된 나무통으로 쏘옥 들어간다.
근처에 있던 몇몇 군중들은 갖고 온 빵에 떨어지는 핏물을 적셔 허겁지겁 먹었다.
“히끅!”
난데없이 눈앞에서 펼쳐진 유혈사태에 에르웬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대, 대체 뭐예요! 저 사람들은? 왜 사람 피에 빵을 찍어 먹어요?”
“징수관에게 처형당한 자의 피를 마시면 재물운이 따른다는 미신이 있다.”
에르웬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얘한테는 사람 목이 잘린 것보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던 모양.
“에르웬, 1년 차 세금이 얼마지?”
“이종족 기준으로 70만 스톤이요.”
“그렇군.”
게임에선 60만 스톤이었는데.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얼추 일치한다.
“그래도 아저씨는 걱정 없으시겠네요. 그만큼이나 버셨으니까.”
응? 그야 그렇긴 한데…….
언니 빽을 가진 얘가 할 말은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이 돈을 내년에 낼 세금을 위해 아껴 둘 생각도 없고.
간단한 이유다.
“에르웬, 2년 차부터는 세금이 얼마지?”
“80만 스톤이요. 그리고 환전할 때 수수료도 생겨요.”
일정 년차가 쌓일 때까지 세금은 계속해서 오른다.
그러니 지금은 스스로에게 투자할 때다.
수수료 면제에 세금까지 비교적 적은 1년 차야말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니까.
“아악! 사, 살려 주세요!”
“재갈을 제대로 다시 물려라!”
“다음 달! 다음 달이면 돈을 낼 수 있— 읍, 으으읍! 으읍!”
아무튼 다행이다.
인간은 시각 정보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생물이라던가?
서걱-!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실감이 확 난다.
원래 세계로의 귀환.
이딴 현실성 없는 목표보다는, 좀 더 명확한 중간 목표를 세우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내 수명이 90세라고 가정했을 때.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서, 평생 남은 삶을 이곳에서 보내야만 한다고 했을 때.
‘대체 얼마가 필요한 거지?’
글쎄, 계산을 한번 해 봐야 할 거 같다.
부엌이 있는 집에서, 아플 땐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쉰 살부터는 일을 그만두고서도 강아지 세 마리쯤 키우며 여유롭게 보낼 수 있으려면…….
“6층.”
최소 6층에서 은퇴 전까진 죽어라 저축하며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 그러니까—.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적어도 6층까지는 가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건 말건.
그건,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일 테니까.
* * *
「6등급 탐험가 다리아 위트엠버 디 테르시아에게 63만 스톤을 양도받았습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3 하락합니다.」
「장비를 판매했습니다.」
「장비를 판매…….」
「…….」
「……」
「TIP: 현재 캐릭터의 총 소지금은 1,403,520스톤입니다. 이를 사용해 캐릭터의 종합 전투 지수를 올려 보세요!」
19화 라프도니아 (3)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아, 네에… 안녕히 가세요…….”
에르웬과 헤어진 뒤,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차분해지는 종이와 잉크 냄새.
기침도 참아야 할 듯한 정숙한 분위기.
그 속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여러 비실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 혼자만 이질적인 존재가 된 기분이었으나······.
드르르르르렁-!
놀랍게도 도서관엔 나 말고도 바바리안이 한 명 더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등을 쿡쿡 찔렀다.
“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역시 너였구나.
프넬린의 두세 번째 딸, 아이나르.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군.”
“너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이나르도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걸 느꼈는지 목소리를 죽였다.
“미안하다. 나 말고 다른 동족을 여기서 볼 줄은 예상하지 못해 놀란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엔 무슨 일이지?”
“지난번에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했지 않나. 이번에 미궁에서 돌아다니며, 생각을 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음, 그렇구나.
제법 기특하다.
책을 펼쳐 놓고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것만 아니었다면.
“뭔가 미궁에서 일이 있었나 보군.”
“처음부터 끝까지 쉽지 않았다. 싸우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아이나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경계해야 할 것은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얘는 다른 야만인들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걔내들은 자기가 몬스터를 얼마나 쉽게 때려잡았는지만 자랑하던데.
곧 죽어도 힘들었단 말은 절대 안 하더라.
“그래서 여기서 공부를 하기로 한 거군.”
“그렇다. 하지만 역시 이런 건 내게 잘 맞는 거 같지가 않다. 글을 읽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때 좀 잘 배워 둘 걸 그랬다.”
…아, 거기부터가 문제인 거니?
“그래서 오늘부터 성지에 들려 장로님들에게 다시 글부터 배울 생각이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 값은 치러야겠지만.”
그래도 조금 놀랍긴 하다.
내가 대충 한 조언에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이내 아이나르가 펼쳐 놨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갈 생각인가?”
“생각이 났을 때 하지 않으면 까먹는다.”
그렇구나.
알면 알수록 슬픈 종족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가 보겠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출구 방향으로 향하던 아이나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살아 돌아온다면 조언에 대한 보답을 하기로 했었지.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성난 뿔소 여관으로 와라. 무슨 일이던 힘이 닿는 대로 돕겠다.”
“그러지.”
부디 하루 이틀 사이에 이 약속을 까먹지 않았기를 바라야겠다.
도움을 청할 일이 곧 있을 거 같거든.
* * *
아이나르가 떠난 뒤, 나는 잠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야, 국회의사당만 한 건물이 통째로 도서관이라니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않은가.
게임에서도 도서관은 ‘건축 중’이라는 표시만 뜨고 입장이 불가했었고.
음, 근데 이런 데서 어떻게 책을 찾지?
현대에서처럼 키보드 몇 번 뚜닥이면 위치가 나올 거 같진 않은데…….
고민할 시간에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크흠.”
기침 소리를 내자 데스크에서 졸고 있던 사서가 천천히 눈을 뜬다.
“무슨 일이십니까?”
“책을 찾고 있다. 역사와 관련된…….”
“파르시티에브.”
어떤 종류의 책을 찾는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졸려 보이는 얼굴의 사서가 읊조렸다.
그와 동시 희미하게 빛이 내 몸속으로 깃든다.
뭐야, 설마 마법이야?
“이제 돌아다니다 보면 찾으려는 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출은 안 되고, 다 읽은 다음엔 꼭 원래 자리에 정리하시고요.”
빛이 잦아들자, 사서는 기계적인 멘트만을 뱉고서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이 여자는?
왠지 다시 깨울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일단 안내대로 도서관을 배회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유독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슬슬 어떤 식의 마법인지 금방 감이 왔다.
악령, 역사, 미궁, 탐험가, 정수 등.
속으로 생각하는 키워드가 바뀔 때마자 이끌림을 주는 책들도 변한다.
‘뭐야 이 편리한 마법은.’
이런 마법이 있으면 사서가 한 명인 것도 납득이 간다. 애당초 규모에 비하자면 도서관 이용자 수는 거의 없다시피했고.
나는 책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이끌림을 주는 책들만을 골라서 하나씩 펼쳤다.
[멸망한 세계]
일단 처음 펼친 700쪽 가까이 되는 이 책에는 이 세계관에 대한 초기 역사가 서술되어 있었다.
대부분 게임과 일치했다.
수천 년 전, 마녀의 저주로 이 땅에서 생명이 살 수 없게 됐고, 유일하게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만이 그 재앙에서 비껴 갔다는 것.
한정된 자원으로 굶어죽어 가는 신민들을 위해 왕가에서 또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통로를 뚫었다는 것.
그게 지금의 미궁이 되었다는 것까지.
[연금술의 기본 이해 주석본 IV]
두 번째 책에는 몬스터에게서 나온 마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빵이 되고, 물이 되고, 강철이 되는지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다.
원리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됐지만.
나는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으며 지식들을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성물 전쟁 III]
덕분에 바바리안과 요정이 어떠한 이유로 지금의 관계가 되었는지, 악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보다 상세히 알게 됐다.
악령이란, 다른 차원에서 넘어와 몸을 빼앗는 사악한 존재란 게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음, 따져 보면 틀린 말은 아닌가?
[심연의 악령들]
아쉽게도 이 책엔 악령이 어째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라프도니아 왕가와 신전에서 악령을 절멸의 대상으로 공표하고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악령 입장에서는 개꿀팁이었다.
책 내용대로라면, 금기어만 뱉지 않으면 악령으로 의심받을 일은 거의 없다는 거네.
예를 들자면, [던전 앤 스톤]이라던가.
…스파르타를 외치는 것도 이제 자중하든가 해야지.
[탐험가들은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라프도니아 왕가의 쌍둥이들]
[영웅에 대하여]
[수용소 비프론의 생애]
이후로도 주구장창 책을 읽고 있자니 마침내 원하던 정보도 획득할 수 있었다.
[왕의 죽음에 관하여]
이 책은 초대왕, 혹은 불멸왕으로 불렸던 라비기온 3세의 죽음을 다뤘다.
다만, 이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나, 그로 인해 파생된 변화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 중요한 건 그 시기다.
어디 보자, 날짜가…….
“150년 전이라고……?”
내 가설이 맞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책에 적힌 왕의 서거일은 약 150년 전.
바꿔 말하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게임 기준으로 150년이 흐른 뒤의 미래라는 뜻이 된다.
어느 종족을 고르던, 게임은 라비기온 3세가 서거한 다음 날로부터 시작됐으니까.
제기랄.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야겠네.
“후우…….”
책을 덮고 잠시 눈의 피로를 풀었다.
중요한 부분만을 읽었다 해도 열 권이나 되는 책을 살펴봤더니, 눈이 빠개질 거 같다.
그렇지만 꺼내놓은 두 권은 마저 읽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혹시 중요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차원불안정 관측 기록]
세 발로 기어가던 나를 구해 줬던 금발이 읽었다는 책이 이거였을까?
책엔 나와 비슷한 사례와 통계가 적혀 있었다.
금발 말대로 최외곽부에 떨어지는 건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는데…….
“지랄.”
경험자로써 한마디 하는데, 이러한 케이스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웬만하면 다 뒈져서 모르는 거지.
나머지 내용은 거진 통계였기에 대충 페이지를 넘기며 읽던 나는 마지막 장에서 멈칫했다.
‘포탈이 닫히는 순간 진입을 하는 것이 불안정현상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라는 작가의 추론이 끝에 적혀 있었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구나.
슬퍼질 거 같으니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9등급 정수 총합본]
드디어 마지막 책이었다.
9등급 몬스터가 뱉는 정수가 지닌 능력들이 백과사전처럼 정리되어 있었지만, 게임 내 표기와 달리 정확한 숫자로 정보를 알려 주진 않았다.
[고블린]
인내심(하) 후각(하) 독내성(하) 손재주(하) 시각(하)
*근접 무기 사용시 마비독 상시 부여.
*덫 생성.
다른 몬스터들을 살펴보니, 스탯치가 21 이상이면 그때부터 중으로 표시하는 듯한데…….
상 등급의 기준치는 알 방법이 없었다.
첫장에 적혀있던 안내 문구에 따르면 8등급 이상의 정보부터는 탐험가 길드에서 구매해야한다는 모양이니까.
“후…….”
나는 책을 덮고서 간단하게 기지개를 폈다.
어느샌가 창밖이 어두웠다.
슬슬 도서관도 닫을 시간인지 이용객도 거의 없다시피했고.
읽었던 책들을 전부 원래 자리에 꽂아넣은 나는 그대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그대로 침대 위에 뻗었다.
이로써 도시에서의 3일 차가 지나갔다.
“앞으로 27일인가…….”
매월 1일이 되는 자정에는 미궁이 열린다.
이곳의 한 달은 정확히 30일이니, 약 4주 뒤면 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
“…….”
남은 시일 동안 도시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자니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내일이 되면, 새로운 동료부터 구해 보자.
* * *
“아저씨! 아저씨! 어서 일어나요!”
아침 댓바람부터 에르웬이 찾아와 방문을 두들겼다.
꽤나 신난 목소리라는 건 둘째치고…….
‘대체 얘가 왜 찾아온 거지?’
설마 이제와서 언니 대신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진 않을 터.
솔직히 이제 볼일 없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거 보세요! 계약에 성공했어요!”
이내 문을 열자 에르웬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뱉어 온다.
“계약? 아, 설마 ‘정령석’을 먹은 건가?”
정령석이란, 요정이 다른 속성의 정령과도 계약을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물건이다.
사용자의 운이 좋다는 전제하에.
“네! 어제 아저씨랑 헤어지고 새로운 정령과 계약에 성공했어요!”
“운이 좋았군.”
게임 속에서 정력석의 가격은 약 15만 스톤.
성공 확률은 10%에 불과했다.
아마 얘로서는 거의 전재산을 꼬라박는 도박이었을 텐데 그걸 성공하다니?
“네! 언니가 사준 걸로 열 번인가 하니까 되더라고요!”
…씨바, 놀리러 온 건가?
물려받은 게 이 몸뚱이뿐인 근수저 바바리안으로서는 박탈감만 느껴진다.
첫 만남 땐 돌볼 동생이 있다느니 뭐니 해서 불쌍한 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이런 금수저가 따로 없다.
아마 갖고 있던 활도 언니가 사 준 거였겠지.
“그나저나,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모양이군.”
“네!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불과 바람은 궁합이 좋으니까!”
“알았으니, 일단 소환 해제부터 해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배가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이유였다.
“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못 보여드렸는데…….”
“여기서 더 어지럽힐 셈인가?”
“아, 아! 죄송해요!”
그제야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후,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야.
인상을 찌푸리자, 잔뜩 들떠 있던 에르웬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 제가 치울게요?”
왜 의문형인지 모르겠다.
그럼 나보고 치우라 할 생각이었던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웬이 난장판이 된 방안을 빠르게 정리했다.
놀랍게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번에 빨래나 청소는 자신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였구나.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처럼.
“더 치울까요?”
“…….”
“더 치울게요…….”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더 치우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
어찌 된 게 여관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지금이 더 깨끗한 거 같네.
잘했으니 당근을 하나 주자.
이따가 부탁할 것도 있고.
“그러고 보니 아직 이 말을 안 했군. 새로운 정령과 계약한 것, 축하한다.”
“헤헤, 감사합니다!”
“아침 식사는 했나?”
“아직이요.”
식전이란 말에 1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하며 나머지 얘기를 나누었다.
“바람의 정령으로는 뭘 할 수 있지?”
“이미 쏘아진 화살의 궤도를 살짝 비튼다든가, 훨씬 더 빠르게 쏜다든가,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아요!”
기대했던 것에 비하자면 꽤나 1차원적인 운용 방식이다.
화살을 회전시켜 관통력을 올린다든가, 화살이 쏘아질 때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한다든가 그런 건 안 되나?
만약 된다면 전투력이 한층 더 상승할 텐데.
“어,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왠지 될 것도 같기는 하네요?”
대체 뭐지 이 말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아무튼 잘 왔다. 식사를 마쳤으면 슬슬 다시 올라가지.”
“네? 왜요?”
“방에서 할 일이 있다.”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짐작 가는 게 없다는 듯한 표정인데…….
“설마 저번에 그걸로 은혜를 전부 갚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네, 네? 아니었어요?”
얘도 참 순진한 면이 있다.
철컥.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까지 걸어 잠근 나는 에르웬을 침대 위에 앉혔다.
“자, 이능을 써 봐라.”
스킬을 쓰면 힘든 건 없는지, 다시 쓰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은신 능력에 어떠한 약점이 숨겨져 있는지 등등.
확인해 봐야 할 게 산더미다.
20화 라프도니아 (4)
“수고했다. 그럼 가 봐라.”
“안녕히 계세요!”
에르웬은 사양의 말조차 없이 신속하게 떠날 채비를 갖췄다.
아무래도 반나절 간 이어진 이능 연구 시간이 꽤나 힘겹게 느껴졌던 모양인데…….
“그럼 또 올게요!”
또 온다고?
아, 내가 그걸 안 말했구나.
“이제 굳이 시간 내서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된다.”
“네에에?”
뭘 놀라고 있어.
이게 당연한 거지.
네가 내 동료도 아니고.
“너도 새 능력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질 것 아닌가. 미궁이 열릴 때까지 더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전부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어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목표란 중층 탐험가가 되어 6층에 진입하는 것.
따라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우선 140만 스톤을 사용해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가능하면 전문적인 격투 훈련도 받고 싶다. 아직 나는 이 괴물 같은 몸뚱어리의 성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또한 책을 읽으며 상식과 지식도 쌓아야 하며, 최대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물가나 문화에 적응할 시간도 가져야 한다.
한마디로, 용건이 없는 이상 에르웬과 노닥거릴 이유가 없다.
“확실히! 그, 그건 그렇지만요?”
“동생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만나서 시간도 보내고 그래라. 너도 3주 뒤면 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네에…….”
에르웬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얘의 첫 동료였어서 그럴까?
얘는 나한테 뭔가 이상한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어떤 느낌의 환상인지까지도 대충 예상은 간다.
하지만 원래 비즈니스 관계가 오래가는 법.
“계속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니,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부담 없이 와도 좋다. 힘닿는 만큼 도와주겠다.”
“어, 정말요?”
“우리는 전우 아닌가.”
“히히, 그렇긴 하죠! 알겠어요!”
이내 당근까지 던져 주자 에르웬도 만족한 얼굴로 떠났다.
거, 여전히 다루기 쉽구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르웬과의 친분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인맥이긴 할 테니까.
혈연은 어떻게 못해도, 지연은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너무 속물 같은가?”
뭐, 그럼 어떤가.
가릴 때가 아닌데.
이후 간단하게 씻고 밖으로 나온 나는 다시금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전날 보았던 귀차니즘 사서에게 마법을 부여받고 대여섯 시간가량 책들을 읽었다.
‘국밥 같은 거 파는 집은 없겠지?’
조금 늦긴 했지만, 점심은 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멀건 스튜에 빵 몇 조각으로 때웠다.
가격은 450스톤.
아무래도 식사는 여관에서 해결하는 쪽이 좀 더 가성비가 좋을 듯하다.
“최고의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식사를 마친 다음엔 수소문을 통해 아이나르가 묵고 있다는 성난 뿔소 여관을 방문했다.
놀랍게도 그곳엔 바바리안이 득실거렸다.
“설마 너도 이곳에 묵으려는 것인가? 잘 생각했다! 이곳은 하루에 300스톤밖에 안 한다!”
뭐, 300스톤?
믿기지 않는 가격에 놀라며 조금 알아봤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좁은 침상 5개가 놓인 방에 들어가자마자 며칠은 숙성된 진한 땀내가 코를 찔러온다.
“다섯 명이서 방을 함께 쓰는 건가?”
“아니다! 열 명의 전사가 함께한다!”
“…하지만 침대가 다섯 개뿐인데?”
“시간을 정해 돌아가면서 자면 된다!”
딱히 싼 게 아니라, 그냥 여럿이서 내서 싼 거였구나.
하긴, 얘내들은 기껏해야 3, 4만 스톤을 벌어 왔으니 선택지가 없었겠지.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프넬린의 세 번째 딸 아이나르를 찾고 있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라면 아침에 나갔다!”
역시 두 번째 딸이었구나.
마지막에 바꾸지 말걸.
여하튼 1시간 정도 기다리자 외출 중이던 아이나르가 돌아왔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피차 바바리안이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와 싸우고 싶다.”
“대련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현재 내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미궁에서 나는 어느 바바리안들 보다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순수 전투 기술만으로 나는 이들에게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조금 이상하군.”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운 부탁이어서 그런 건 아닌 듯한데…….
“그런 거라면 부탁할 필요도 없이, 그냥 공터로 나가면 그만 아닌가?”
공터?
이내 아이나르가 날 이끌고 여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열댓은 되는 바바리안들이 모여 주먹을 휘두르고 바닥을 구르며 땀을 흘려 대고 있었다.
음, 어쩌면 피까지도.
“흐하하하하! 방금 주먹은 꽤 묵직했다!”
“네 것도 마찬가지다!”
어쩐지 아까부터 바깥이 계속 시끄럽더라니.
얘네들은 이런 게 그냥 일상인 거구나.
요정들은 깔깔거리면서 정령의 목소리가 어떻느니 그런 얘기를 하던데.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바바리안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는 사이, 아이나르가 물었다.
“굳이 상대가 나여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사실 그렇진 않다.
그저 아이나르라면 내 부탁을 승낙해 줄 것이라 생각했을 뿐. 하지만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유일하게 검을 쓰니까.”
“검사와의 전투법을 익히고 싶은 건가?”
“그렇다.”
“그런 이유라면 알겠다. 오전엔 글을 배우러 가야 하니, 이 시간에 오면 언제라도 원하는 만큼 상대를 해 주겠다.”
즉, 오후 5시부터 스케줄이 비는 셈인가.
앞으로는 매일 이곳에 들려야겠다.
“오늘부터 시작할 건가?”
“물론이다.”
잠시 기다리자 아이나르가 방으로 돌아가 검을 차고 돌아왔다.
“아이나르와 비요른이 대결한다!”
이에 다른 바바리안들도 싸움을 멈추고 관전하기 시작했다.
배우러 오긴 했지만 허무하게 질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방패를 꽉 쥐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다만, 결과는…….
“그럼 가겠다!”
개발렸다.
존나 후드려 맞기만 하다가 방패를 놓치기까지 3분은 걸렸나?
얘 진짜 잘 싸우는구나.
그래도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역대 최고의 전사가 아니었다!!”
“이제 아이나르가 역대 최고의 전사다!!”
“와아아아아아!!”
이 새끼들만 빼면.
* * *
그로부터 몇 번을 더 쳐발렸을까.
어느덧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더 할 건가? 나도 슬슬 쉬고 싶은데.”
“아니다. 오늘 대련은 여기서 끝마치겠다.”
다른 바바리안들은 진작에 공터를 떠난 시간.
나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이나르.”
“무슨 일인가?”
이내 기지개를 켜며 건물로 향하던 아이나르가 발을 멈춘다.
“혹시 다음번에도 혼자 미궁에 들어갈 생각인가?”
“그래야겠지. 팀을 꾸리기에는 돈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이번엔 가능하면 2층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새삼 바바리안이 얼마나 하드코어하게 살아가는지가 느껴진다.
나침반과 횃불.
이 두 가지만 있으면 2층까지는 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첫 진입에 소모품을 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곧장 다음 층으로 향하다니…….
“혼자서는 힘들 텐데?”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선택지가 없다라…….
어쩌면, 이거야말로 저층에 인간만 바글바글하던 이유일지 모른다.
세금이 몇 배는 더 높게 붙는 이종족들은 1, 2층에서 활동해서는 1년 차 세금조차 낼 수가 없다.
동기 바바리안들만 봐도 확연하다.
가장 많이 벌었다는 놈이 겨우 4만 스톤을 넘게 벌었지 않았던가.
“운이 좋으면 1층에서 다른 동족들과 만나 팀을 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군.”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아이나르가 곧장 본론을 물어온다.
나도 바바리안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이나르, 나와 동료가 되지 않겠나?”
“동료?”
“팀을 꾸리는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다.”
오늘 몇 번 대련을 해 보며 느꼈다.
아이나르는 강하다.
주변에서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동기 바바리안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름 똑똑하기도 하고.
“제안은 고맙지만, 어째서인가?”
어차피 동료는 필요하다.
매번 밤친구를 구하는 것도 고역인데다가, 파트너가 있으면 오히려 수익도 늘어나니까.
한데 아이나르는 높은 전투력을 지녔을뿐더러, 종족 특성상 배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까지 있다.
대신 클래스가 겹치긴 하지만…….
에르웬이 떠난 이상, 아이나르는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다.
물론, 구구절절한 말은 필요 없었다마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렇군.”
아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좋다. 영민한 전사인 너와 함께 미궁에 들어가다니, 모든 전사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거, 조금 더 욕심부려도 되겠는데?
“다만,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
“비율은 내가 8을 갖겠다.”
“……?”
내 갑질에 아이나르가 인상을 찌푸린다.
설마 심기가 불편해진 건가?
나는 재차 입을 열어 부연 설명을 이어 갔다.
“팀을 꾸리는 비용도 내가 내지 않나. 그리고 약속하겠다. 비율이 적어도 혼자 미궁에 들어갔을 때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소모품 비용도 전부 내가 지불—”
“그만,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
“비율이 8이니 뭐니 어려운 말을 해 봤자 어차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알아서 줘라. 나는 너를 신용한다.”
“…그렇군.”
나는 내가 바바리안이란 종족을 너무 얕봤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세를 지겠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내 아이나르가 다가와 내 등을 거세게 후려쳤다.
호의라 여기기엔 너무도 묵직했으나…….
뭐, 얼른 익숙해지는 편이 좋겠지.
“나야말로 잘 부탁하겠다.”
듬직한 바바리안 동료가 생겼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이나르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다.
성지란 일종의 공동 양육 시설 같은 곳이다.
도시로 떠난 바바리안들은 자식을 낳으면 이곳으로 아이들을 보낸다. 죽을 때까지 전사여야 하는 그들에게 자식을 키울 여력은 없으니까.
그리고 성인이 되어 도시로 떠난 바바리안들은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지금 신경 쓸 건 그런 게 아니겠다마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
도착하자마자 부족장이 나와 우리를 반긴다.
씨바, 이래서 어지간하면 오기 싫었는데…….
“떠난 전사가 찾아오는 일은 드물지. 너도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처럼 글을 배우러 온 것인가?”
콩닥이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부족장, 내가 성지를 찾은 이유는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라…….”
부족장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긴장하지 말자.
바바리안의 말투나 부르는 호칭 같은 건 미리 아이나르에게 배워뒀지 않은가.
실수만 안 하면 될 것이다.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혼령각인을 받고 싶다.”
이종족들에게는 저마다의 특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요정이 정령을 다루고, 드워프가 아티팩트를 다루는 것처럼.
바바리안에게는 ‘혼령각인’이 있다.
게임에선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기에, 초반부에는 쓸 수 없는 성장법이지만…….
운 좋게도 100만 스톤이 넘는 거금이 생겼다.
따라서, 고민을 거듭한 나는 판단했다.
이 좆같은 부족장 새끼 앞에 서는 건 아직도 존나게 무섭지만…….
“정확히는 ‘불사자 각인술’을 받고 싶다.”
틀림없다.
이게 가장 올바른 돈의 사용처이다.
21화 레벨 업 (1)
부족장의 눈이 좁혀진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혼령각인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 어린 전사들이 알 수 있을 내용이 아닌데?”
당연히 최초 습득처는 게임이다.
고인물이었던 내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고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당당히 말했다.
“책에서 읽었다.”
이미 도서관의 책들에서도 해당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왔기에 꿇릴 게 없다.
“책에선 성물 전쟁 때 요정족들과 싸우는데 혼령각인이란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던—”
“흐하하하하하하하핫!!”
내 말을 끊으며 부족장이 광소를 터트렸다.
솔직히 존나 쫄렸지만 그래도 제법 기꺼운 듯한 투의 웃음소리여서 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참으로 재밌구나! 아이나르도 그렇고, 이런 기특한 놈들이 한 번에 둘씩이나 나오다니!”
다행히 부족장의 눈엔 학구열 넘치는 어린 바바리안들이 좋게만 보이는 모양.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도 꼭 비술을 받고 싶다.”
“확실히, 전사가 요구한다면 우리들은 혼령각인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어린 전사야!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뭐야, 괜히 쫄았네.
무슨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해?
혼령각인에는 값비싼 재료가 많이 들어간다.
상위 등급 각인에는 돈이 아니라 재료가 없으면 받을 것도 상당수였고.
“하하하! 책을 읽고 여기까지 온 건 기특하지만,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돈이라면 있다. 얼마인가?”
부족장이 나를 보더니 귀엽다는 듯 말했다.
“불사자 각인술에 들어가는 비용은 음, 80만 스톤쯤 되겠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으, 게임보다 15만 스톤이나 더 비싸네.
그래도 어떻게 낼 수는 있겠다.
“지불하지.”
“뭣?”
“그게 정말인가?”
부족장과 아이나르가 동시에 기함한다.
뭐라 귀찮게 하기 전에 주머니를 열어 50만 스톤짜리 하나, 10만짜리를 세 개 꺼냈다.
이에 부족장의 눈에 의문이 맺혔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대체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얻었지?”
안 물어보면 서운할 뻔했다.
미리 시나리오까지 짜 왔거든.
나는 에르웬과 있었던 일을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대충 1층에서 만난 요정을 노예처럼 부리다가 우연히 정수가 나왔고, 이에 대한 대가를 그 언니한테 돈으로 지불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흐하하하하핫!! 꼴좋구나, 귀쟁이들아!”
“야비한 귀쟁이들을 털어먹다니, 그런 건 네가 최초일 것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기대 이상으로 바바리안들은 이 얘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이나르과 부족장은 물론, 저 멀리 있던 장로까지 옆에 오더니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렇게 쌓인 게 많은 건가?
“흐하하하핫! 이렇게 웃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내 부족장이 내 손에서 60만 스톤을 집어갔다.
어? 분명 아깐 80만 스톤이라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하자 부족장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위대한 자질을 보인 어린 전사를 위한 내 선물이다!”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뻐근했지만 그 보상은 실로 달콤했다.
씨바, 말 한마디로 20만 스톤이라니!
우리 부족장, 바바리안답게 화끈하다.
나는 진심을 담아 외쳤다.
“앞으로도 보이는 족족 귀쟁이들을 엿 먹이며 더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기대하겠다! 어린 전사,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여!”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다는 게 이런 걸까.
점점 바바리안들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 * *
혼령각인이란, 일종의 강화술이다.
원리는 마법 재료에 깃든 ‘혼력’을 육체에 불어넣어 특수한 힘을 선사하는 것.
바바리안들이 전부 문신쟁이인 이유기도 하다.
성인이 돼서도 영혼 회로가 보이도록, 비교적 영혼이 깨끗한 갓난아기일 때 미리 문신을 새겨넣어야 한다던가?
분명 그런 설정이었다.
“한 번 더 고민할 기회를 주겠다. 이 경로를 택하면, 다른 경로의 혼령각인은 부여받을 수 없다. 그래도 괜찮겠나?”
“물론이다.”
나는 모든 경로를 전부 꿰고 있다.
따라서 결정을 바꿀 일도 없다.
불사자 경로의 상위 등급 각인에 내 육성법의 핵심이 담겨 있을뿐더러, 그게 아니어도 불사자 경로의 모든 능력이 대부분 고성능이다.
“장로도 도착한 모양이니, 너는 이만 가 보아라.”
“그러겠다.”
이후 아이나르가 떠나자 부족장이 나를 주술사의 천막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술이 시작됐다.
“흐음, 회로가 상당히 깨끗하군. 계속 순수한 마음을 유지한다면 앞으로도 혼령이 너에게 강한 힘을 선사할 것이다.”
안대를 찬 주술사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상체의 문신에 따라 바늘을 찔러 댔다.
그리고…….
“끄으흐흐흐흐…….”
“어린 전사여, 참지 말고 비명을 내질러도 좋다. 다들 그러니.”
“끄아아아아아악!!”
체감상 포션의 10배 정도 되는 통증이 나를 덮쳤다.
제기랄, 단순히 타투 정도로 생각하고 왔는데.
앞으로 상위 경로로 갈 때마다 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건가?
“자, 끝났다. 피곤하니 나가 보아라.”
주술사가 이내 기다려 온 말을 뱉었을 때, 이미 날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부족장도 보이지 않았고.
“고맙다.”
“크크크, 주술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전사는 처음이군.”
응? 뭔가 잘못한 건가?
모르겠지만, 책 잡히기 전에 어서 천막을 나왔다.
「불사자 각인 1단계를 활성화했습니다. 자연 재생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육체 수치가 + 20 상승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나게 피로한데, 묘하게 몸에서는 기운이 넘친다.
이게 혼의 힘이라는 건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다. 왠지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한 건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개문하라!”
이내 성지를 떠나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새롭게 얻은 능력을 몇 번 시험해 보고는 그대로 쓰러져 잠에 들었다.
* * *
또다시 하루가 흘러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지난 날 에르웬과 방문했던 상업 지구를 다시 찾았다.
부족장의 화끈한 에누리로 남은 90만 스톤을 전부 나에게 투자하기 위함이다.
“지난번에 왔던 분이시군요. 이번에도 판매이십니까?”
“아니, 이번엔 사러 왔다.”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아저씨에게서 획득한 해머는 지난번에 함께 팔았으니까.
손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한 손 무기로 쓰자기엔 손잡이가 길어서 불편했었다.
“한 손 둔기류를 보고 싶다.”
“한 손 둔기라…….”
아이나르와 대련한 결과, 역시 내게는 날붙이보다 이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도검류 무기술은 숙련도가 필요하다.
뭐, 연습을 하면 못할 건 없겠지만…….
애당초 무기 자체도 초반부에만 쓸 것이니 효율이 떨어진다. 어차피 그 ‘정수’를 얻고 나면 방패에만 집중할 생각이니까.
“흐음.”
점원은 나를 쓱 스캔하고는 한 손 둔기처럼은 보이지 않는 한 손 둔기를 보여 주었다.
제일 가벼운 것도 아저씨가 쓰던 양손 망치보다 3배는 무거운 거 같다.
근데, 이게 한 손 둔기라고?
“모두 바바리안 분들이 선호하시는 한 손 둔기입니다.”
아, 걔네라면 좋아 죽을 거 같기도 하다.
내 방패만 해도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무식한 장비였으니.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평범한 것을 원한다.”
“알겠습니다.”
굳이 저런 무지막지한 걸 살 필요는 없다.
저런 무기라면 한 방 한 방의 파괴력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올라가리란 건 자명하겠지만…….
이미 1층 몬스터들은 거의 원샷원킬인 상황.
대형 몬스터와 전투할 것도 아닌데, 이런 무기를 껴 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것들은 어떠십니까?”
이내 점원이 새로운 무기들을 꺼냈다.
물론, 이것들도 일반적인 규격과는 동떨어진 것들이긴 했지만 바바리안의 몸뚱이에는 이 정도가 딱 알맞겠지.
나는 적당히 무식한 크기의 메이스를 택했다.
“이건 얼마지?”
“25만 스톤입니다.”
25만이라고?
지난번에 6명 분의 무기를 판 게 겨우 35만밖에 안 됐는데?
인상을 찌푸리자 점원이 말을 덧붙인다.
“제작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강철 함량이 높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아, 그렇긴 하겠네.
나는 납득했다.
비록 군말 없이는 아니었지만.
“22만 스톤으로 가격을 조정해 준다면 바로 사겠다.”
내가 흥정을 시도하자 점원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바바리안 새끼들은 대체 얼마나 호구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이런 무기들은 팔리지도 않을 것 아닌가.”
“바바리안 분들께서 자주 찾으십니다마는.”
글쎄, 처음 보여 준 것이면 모를까.
내가 아는 바바리안들이라면 이렇게 애매한 것은 고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바리안들은 대부분 둔기가 아니라 도끼 같은 날붙이를 선호했고.
그런 근거들을 덧붙이자 점원은 맥 빠질 정도로 쉽게 흥정에 응해 주었다.
“좋습니다. 22만 스톤에 판매하지요.”
…20만을 부를 걸 그랬나?
「종합 아이템 레벨이 +85 상승합니다.」
아무튼 이후로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두 개의 장비를 추가로 구매했다.
일단 첫 번째는 바로 하프 아머.
「종합 아이템 레벨이 +57 상승합니다.」
형태는 판판한 강철로 된 방탄조끼를 생각하면 쉽다. 가격은 36만 스톤으로, 마침 사이즈가 딱 맞는 게 있어서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아마 주문 제작이었으면 2배는 더 줬어야 했을 거다.
두 번째로 구입한 투구처럼.
“3일 정도 걸릴 걸세. 주소를 적어 두고 가면 사람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지.”
투구 같은 경우엔 머리에 딱 맞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문 제작을 해야 했다.
디자인을 아예 포기하는 대신, 17만 스톤으로 비교적 싸게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47 상승합니다」
그 결과, 약 5만 스톤이 남았다.
…앞으로 고기는 못 먹을 듯하다.
* * *
내 하루 일과가 정해졌다.
오전 7시에 기상.
그리고 에르웬과 함께 아침 식사.
“와, 오늘은 스튜에 감자도 들어 있어요!”
“근데 너는 왜 맨날 여기서 아침을 먹는 거지?”
“그야 맛있고 싸잖아요?”
식사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천천히 걸어서 가면 딱 8시가 되어 개장하자마자 들어갈 수 있다.
“파르시티에브.”
이 만성피로인 여자 사서에게 마법을 받는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럼 수고해라.”
“…….”
물론,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꼬르륵-!
오후 4시까지 독서를 한 뒤에는, 되도록이면 처음 가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다.
음, 여긴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네.
탐험가들은 많아서 대화를 엿듣긴 좋지만.
“아이나르는 아직인가?”
“그렇다! 그전까지는 내가 상대해 주겠다!”
대강 식사를 마치고 바바리안 숙소로 가면 5시쯤이 된다.
훈련 7일 차부터는 다른 바바리안들과도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윗옷을 벗고서 주먹을 휘두르고 목을 조르며 치열하게 싸웠다.
내가 기대한 체계적인 격투 기술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본능과 직감이 극도로 발달된 바바리안들과의 대련은 결과적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됐다.
나 역시 바바리안이니까.
「반복된 훈련으로 반사 신경이 미약하게 향상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유연성이 미약하게 향상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동체시력이…….」
「육체 수치가 +1 향상됩니다.」
이제 슬슬 이 몸뚱어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온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이겼다!!”
“역대 최강의 전사다!!”
새로운 장비 도움 없이도, 아이나르와의 대련에서도 승리하는 경우도 간혹 생겼다.
얘가 확실히 실력이 좋기는 한데 패턴이 일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조언해 줬지만,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 본인도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모양.
“피곤하다! 나는 자러 간다!”
“나도다!”
“현명한 전사는 쉴 때를 아는 법!”
오후 9시가 되면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련도 모두 끝이 난다.
그럼 나도 땀과 흙으로 범벅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간다.
씻고 나올 때쯤이면 에르웬이 또 온다.
“아저씨! 얼른 씻어요! 음식 다 식겠어요!”
“알겠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다섯 번은 저녁에 한 번 더 만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대부분의 내용은 에르웬이 오늘 하루 동안 뭘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시답잖은 일상 얘기들.
“매번 1시간씩 걸어가며 오는 게 귀찮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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