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árbaro 2
처음으로 기척이 아니라 통증에 눈을 떴다.
코앞에서 고블린이 보였다. 일단 망치로 후려쳐 앞에 놈부터 죽였더니, 다른 한 새끼는 이번에도 부리나케 튀었다.
“그, 그륵!!”
나는 곧바로 통증의 원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쇄골 뼈 사이에 조각칼이 박혀 있다.
…씹, 어쩐지 왼팔이 잘 안 움직이더라니.
후, 그래도 아픈 걸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내 키가 조금 더 작거나, 고블린이 조금만 더 점프력이 좋았어도 이 조각칼이 박혀있는 곳은 내 목이었을 테니까.
까드득.
이를 악물며 조각칼을 뽑아낸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포션을 상처 부위에 몇 방울 떨어뜨린다. 마개를 닫고 가방에 도로 집어넣기가 무섭게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빠르게 재생된다.
치이이이이익.
포션을 만든 새끼, 사이코패스인가?
어찌 된 게 찔렸을 때보다 더 아프다.
“끄으으윽, 흐흐흐흐…….”
약 5분의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사라진다.
이 정도 통증이면 잠이 확 깰 법도 한데,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더 눈꺼풀이 무겁다.
잠깐만 집중을 풀어도 흐려지는 초점.
미뤄 왔던 결단을 내릴 시간이다.
살의에 민감한 바바리안의 몸뚱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조는 건 한계가 있다. 방금 전엔 칼에 찔리고 나서야 깨어나지 않았나.
‘휴식을 취해야 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저씨와 헤어진 지 약 14시간이 지났다.
아마 1층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도 슬슬 다시 밤친구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 터.
“이봐 바바리안, 혹시 밤친구를 찾고 있나?”
실제로 근처를 배회하고 있으니, 탐험가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
“흐음, 꽤나 피곤해 보이는걸? 이리 오겠나?”
“바바리안이라면 믿을 만하지. 자네만 오면 3명이 되는데, 함께하는 게 어떤가?”
마치 인기 좋은 창남이 된 기분이다.
다들 비슷한 꼴이 된 2일 차라 그런가?
냄새로 딴지를 거는 새끼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처음부터 냄새가 문제인 게 아니었던가.
하기야, 피 칠갑 한 상태로 신발 하나를 잃어버려서 뒤뚱거리던 어제의 내 꼴이 조금 심하긴 했지.
“그래? 아쉽게 됐군.”
수많은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나는 전부 거절하며 계속해서 통로를 지나쳤다.
하, 어디 튼실한 바바리안 하나 없나?
사실 내게 가장 좋은 경우는 동족을 만나 밤친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2일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바바리안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거겠지만.
“동족을 찾고 있다고? 흠, 힘들 텐데?”
“힘들다고? 어째선가?”
“갓 성인식을 마친 바바리안이라도 두세 달이면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니까. 모르긴 몰라도 1층에는 백 명도 채 없을 것이네.”
탐문을 해 보니 1층에서는 바바리안 자체가 드문 모양이다. 하긴, 이런 육체를 갖고 있는데 1층에서 빌빌거리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애당초 1층에서 만난 탐험가 중 99%는 인간이었고.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렇군. 자네의 여정에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겠네.”
“고맙다.”
이 아저씨는 제법 믿음직해 보였지만, 나는 그 대화를 끝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바바리안의 심장이 고가라는 걸 알게 됐더니, 도무지 탐험가 중에 수상해 보이지 않는 새끼가 없었다.
딸깍.
나는 나침반을 꺼냈다.
이걸 얻은 다음부터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난 고블린 지대도 벗어나지 못했다.
새삼 1층이 얼마나 큰지 느껴진다.
‘…동족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짓은 관두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동족이 아니어도 되니까 밤친구를 구한다.
단, 인간은 빼고.
1% 남짓의 인구비를 지닌 이종족을 찾는다.
약속을 중시하는 요정이나, 바바리안만큼 호방한 성격을 가진 드워프가 가장 베스트지겠만…….
다른 이종족이어도 큰 상관은 없다.
이종족들은 대부분 인간과 달리 여유가 있으니까.
시간만 주어진다면 위로 쭉쭉 올라갈 재능이 있는데, 벌써부터 푼돈에 눈이 멀어 같은 탐험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나는 약 1시간가량 동굴을 배회했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낯선 요정과 조우했습니다.」
마침내 찾아 헤매던 이종족을 발견했다.
* * *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하게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기 시작한다.
“…….”
뾰족 귀를 가진 요정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말없이 나를 쳐다만 보고 있다.
밤친구 없이 혼자 졸고 있던 건가?
고양이처럼 빛나는 호박색 눈에는 당혹스런 감정과 짙은 경계심이 느껴진다.
암만 봐도 그냥 내가 지나쳐 사라져 주길 바라는 눈치지만…….
스윽.
대치 시간이 길어지자 요정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근데 자세가 부자연스럽다.
살펴보니 복부에 입은 상처가 보였다.
“다쳤군.”
깊진 않지만 길게 찢어진 자상이다.
고블린이 쓰는 조각칼로는 결코 낼 수 없는.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인간인가?”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두려운 모양이다.
하기야, 이해할 수 있다. 나라도 내가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이따만한 덩치가 다가오면 존나 쫄 테니까.
심지어 쟤는 성별도 여자이지 않은가.
몸도 쪼그맣고. 한 160쯤 되려나?
아무튼, 나쁘진 않은 상황—
“살려 주세요.”
응?
“제발요. 한 번만 봐주세요 바바리안 아저씨, 도시에 돌봐야 하는 동생이 있어요.”
이게 무슨 전개인가 생각하던 차.
요정이 미련 없이 툭, 무릎까지 꿇었다.
어느샌가 눈에는 습기마저 맺혔다.
“부탁드릴게요.”
뭐야, 무슨 요정이 이렇게 기개가 없어?
솔직히 말해 쿨미녀 타입인 줄 알았다.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게임 내에서 요정의 말투나 성격은 대부분 그따위였으니까.
후, 이런 캐릭터인 줄 알았으면 아예 다르게 접근하는 건데.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오해부터 풀자.
“난 널 죽일 생각이 없다.”
시선을 마주한 채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진정할 시간만 준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저쪽도 알 것—
“…꼭 이러셔야 하나요, 바바리안 아저씨?”
—은 개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온다.
마치 학교 앞에서 여고생을 괴롭히는 바바리맨이 된 기분이다. 분명 난 바바리안인데.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내 침묵이 길어지자, 요정은 한층 두려움이 깊어진 눈빛으로 뒷걸음까지 치며 앞깃을 여몄다.
어이가 없었다.
바바리안 새끼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지? 평소 이미지가 어떻기에 얘가 이 지랄을 떨어?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떡하지?
내가 그런 쓰레기가 아니란 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면 오해가 좀 풀릴까?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일단 치료부터 해라. 대화는 나중에 하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가방에서 약초와 붕대를 꺼내 던졌다.
“이건, 리쵸 잎……?”
역시 이게 리쵸 잎이 맞았구나.
앞으로는 마음 놓고 써도 되겠다.
독초일 수도 있단 걱정에 아까는 다치고도 쓰지 못했는데.
9화 밤친구 (2)
“…왜, 이걸 주시는 거죠?”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려니 왠지 입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나, 어쩔 수 없다.
이런 타입엔 이쪽이 더 잘 먹힐 테니까.
난 이 요정과 밤친구가 되고 싶다.
왠지 그렇게 말하니 쓰레기처럼 들리긴 하지만, 얘한테도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부상에 수면 부족에 예쁘장한 외모까지.
암만 봐도 얘가 나보다 상황이 몇 배는 더 좋지 않다.
그걸 아니까 얘도 방금 그 지랄을 한 걸 테고.
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 보여 준 삶에 대한 집착만큼은 나도 놀랄 정도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선 치료부터 해라.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하지만…….”
“난 경계를 서고 있겠다.”
일축하는 태도로 등을 돌리니 머지않아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상처에 바르기 좋게 약초를 씹는 듯하다.
“…다 됐어요.”
벌써? 의외로 손기술이 좋은 편이구나.
뒤를 돌아보니, 찢어진 옷 틈 사이로 야무지게 묶인 붕대가 보인다. 왠지 날 보는 시선에서도 경계심이 조금은 줄어들은 것 같고.
일단 통성명부터 해 천천히 거리를 좁히자.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에르웬.”
“무슨 착각을 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다.”
“네? 아, 네…….”
아닌 척은 하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공포는 여전하다.
이만큼 했으면 슬슬 저 오해도 풀리리라 여겼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결국,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나를 그토록 두려워하지?”
“…바바리안은 요정과 적대 관계잖아요?”
“적대 관계?”
“죄, 죄송해요.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고… 저는 아저씨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 질문에 얘가 급 정신을 차렸는지 아까처럼 다시 빌빌 기기 시작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요정과 바바리안이 적대 관계라니? 금시초문이다. 분명 게임 내에선 제법 사이가 좋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눈에 힘을 빡 주고 바라만 봤을 뿐인데 원하는 정보가 술술 나왔다.
“…시, 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이잖아요? 저, 저는 거기에 아무런 앙금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10년 전이라…….
뭔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말만 들어 보면 적대 관계라기보다는 앙숙에 가까워 보인다.
음, 그럼 어려서부터 안 좋은 얘기를 듣고 자라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건가?
상황이 제법 골치 아파졌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다른 애를 찾아봐?
그러자기엔 이미 준 약초랑 붕대가 조금 아까운데…….
그래, 일단 시도나 해 보자.
“앙금이 없는 건 나도 매한가지다.”
“그, 그런가요!”
“그렇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에르웬. 혹시 나와 밤친구가 되지 않겠는가?”
“…밤친구요?”
“나는 지금 피곤하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일 테고, 앙금이 있던 없던 오늘만큼은 협력하는 게 어떤가?”
“으음…….”
갑자기 눈이 똘망똘망 해졌다.
솔직히 말해 아까 걔가 맞나 싶을 정도.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을 주자,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열렬히 고민하던 에르웬은 승낙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놨다.
“바바리안은 전사로서의 명예를 중요시한다고 여겼어요. 그걸 걸고서 맹세해 줄 수 있나요? 먼저 절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라.”
“무, 물론 저도 일족의 이름에 대고 약속하겠어요. 아저씨에게 먼저 해를 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한국 문화로 설명하자면 서로 엄지를 혓바닥에, 새끼를 이마에 찍잔 소리다.
물론, 나야 하루 종일이라도 찍을 수 있다.
다만, 그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하나 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아저씨가 아니라.”
나는 몰라도, 우리 비요른은 20살밖에 안 됐단 말이다.
* * *
계약은 성립됐다.
지장을 찍은 건 아니지만 우린 이곳 문화상 그와 비슷한 걸 찍었다.
덕분에 그 과정에서 요정 아가씨의 본명을 알게 됐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나이는 20살로 동갑이었다.
후, 내가 진짜 비요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분명 진짜 비요른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난 그렇다 쳐도 얘는…….
굳이 말은 않겠다.
“그럼 순번은 어떻게 정할까요?”
“내가 먼저 자겠다. 그 편이 너도 안심이 되겠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제가 어쩔 수 없기도 하고…….”
한 마디로 불감청 고소원이었단 얘기.
“좋다는 뜻으로 알겠다.”
“네.”
휴, 먹혀서 다행이다.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고 했으면 눈앞이 캄캄했을 텐데.
아까부터 자꾸 눈이 감기고 있다. 제발, 이제 그만 좀 자고 싶다. 한숨 편히 자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참! 시간은 어떻게 알죠?”
쯧쯧, 이래서 초심자는 곤란하다니까?
나는 배낭에서 시계를 꺼내 에르웬에게 전해 주었다.
“비싼 물건이니 망가뜨리면 안 된다.”
“네에…….”
말만이 아니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걸 보니 적잖이 마음이 놓인다.
“조심히 다룰게요. 주무세요.”
나는 아저씨가 그랬듯이 배낭을 베고서 담요를 덮고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드르르르르렁!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저씨!”
…비요른이라니까.
“아저씨,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나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몸을 일으켰다. 믿기지가 않는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고?
“자, 여기 시계 받으세요.”
시간을 보니 정말로 2시간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떠보기용 코골이도 제대로 못한 거 같다. 혹시 모르니 10분은 하고 잘랬는데…….
와씨, 이게 배낭과 담요의 시너지인가?
무서울 정도다.
분명 아저씨가 이걸 빌려줬으면, 난 기습을 피할 수 없었겠지.
세상 모르고 존나 편하게 자고 있었을 테니까.
어찌 보면 인과응보인가?
…그런 의미에서 얘한테도 빌려주자.
“덮고 자라. 이것도 베고 싶으면 베고.”
“네? 하지만…….”
말은 사양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게 보인다.
대충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뭐, 그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한 번 더 권하지도 않았음에도 에르웬은 알아서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양이처럼 웅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거, 외간 남자 앞에서 잘도 자는구먼?
하기야 지쳤을 것이다. 내가 힘들었던 것만큼이나 얘도 힘든 하루를 보낸 모양이니.
“후…….”
벽에 등을 기대며 버릇처럼 시계를 열었다.
[22 : 50]
체감상 한 5일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2일 차가 끝나려면 1시간도 넘게 남아 있다.
어서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 사실, 돌아간다는 말도 웃기긴 하지만……. 돌아가기만 한다면 며칠이고 잠만 잘 거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정말 몸이 살 만해지긴 한 모양이네.’
나는 시계를 집어넣고, 본격적으로 상념에 잠겼다. 간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맞이해선지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났다.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실종 처리가 됐을까? 분명 아직일 것이다. 누가 찾아오기야 했어야지. 회사에서도 며칠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테고.
“킥.”
괜히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게 아니다.
서글퍼만 지니까.
돌아가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의지가 꺾여 버릴 테니까.
여러모로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다.
그게 아무리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라도, 난 자가최면이 제법 잘 통하는 편이니.
“…….”
의도적으로 사고의 흐름을 비튼다.
그래, 차라리 이틀간 있었던 일이나 복기해 보자. 성인식을 마치고, 미궁에 들어오고, 고블린과 싸우고, 아저씨와 싸우고…….
지금까진 잘했다고 칭찬해 줘도 되겠지?
진짜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아무도 칭찬해 줄 사람은 없으니 나라도 해 주면 안 되나?
딸깍-
자화자찬은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나 생각해 보기로 하며 시계를 열어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됐다.
“에르웬, 일어나라.”
“5분만 더…….”
무슨 5분만은 5분만이야 얼른 일어나.
“으으…….”
바바리안의 우악스런 손길로 어깨를 흔들자 에르웬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
그때 아저씨가 왜 나를 못 미더워 했는지 알겠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서 졸 생각은 하지 마라.”
“네…….”
조금 불안했지만, 일단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담요와 배낭을 빌려줘서인지, 다시 누웠음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껴 본 게 과연 얼마 만이지? 굉장히 낯설다.
어쩌면 내가 이틀간 겪은 모든 일보다 더.
드르르르르렁!
이번엔 제법 기운이 있었기에 떠보기용 코골이를 시작했다. 솔직히 떠보기보다는 얘가 안 졸고 잘 하는지 확인하는 게 더 컸다.
…조는 것 같진 않네.
실눈을 떠 에르웬을 쓱 살펴본 나는 걱정을 버리고 다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탁.
나는 기척을 느끼며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끼얏!”
왠진 몰라도 나는 에르웬의 하얀 팔목을 쥐고 있었다.
정황상 내게 뻗어지고 있던 듯한데…….
“뭐 하는 짓이지?”
“저, 악, 악몽을 꾸시는지, 자꾸 땀을 흘리셔서…….”
손에 쥔 손수건을 보니 핑계는 아닌 듯하다.
뭐, 애당초 흉기였으면 이유를 묻는 일도 없이 방패로 후려쳤겠지만.
“죄, 죄송해요.”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에르웬은 괴로운 표정으로 잡힌 부분을 쓰다듬었다.
벌써 시뻘겋게 자국이 올라왔다.
미안하단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해 봐야 어차피 빈말일 테니까.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교대까지 10분 정도 남았어요.”
“그렇군. 그럼 지금 교대하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자 봤자 더 피곤해진다.”
내 말에 에르웬이 미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아저씨.”
“문제라도 있나?”
“아뇨. 궁금한 게 있어서요.”
“물어봐라.”
에르웬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대체 누구예요?”
뭐지? 말장난인가?
“계속 꿈속에서 미안하다고 하시기에……. 아,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죠?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이만 잘게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웬은 지 혼잣말을 다 하더니 담요를 머리 위에 덮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내가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닫자 슬슬 호기심이 피어나는 모양이다.
“끄으으.”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해 보았다.
기억은 정말 하나도 나진 않지만, 말을 들어 보면 진짜 악몽을 꾸긴 한 모양인데…….
갑자기 조금 궁금해진다.
과연 내가 용서를 구했다는 아저씨는 대체 누구였을까?
떠오르는 후보는 둘이다.
성인식에서 목이 베어 잘린 무명의 아저씨와, 내게 사람다움을 가르쳐준 한스 아저씨.
…근데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이든 이상하다. 난 둘 모두에게 사과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이내 나는 결론을 내렸다.
무슨 꿈을 꾸었던, 별 의미 없는 개꿈일 것이라고.
* * *
[04 : 30]
3일 차가 시작됐다. 그리고 에르웬을 깨우기까지 10분가량이 남았다.
담요를 다리 사이에 끼고 새우잠을 자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애프터 신청.
즉, 동료 제안을 할지 말지에 대해서.
물론, 동료가 되면 전리품을 나눠야 하는 단점이 있기야 하다.
아무리 3일 차부터 고블린이 서넛 씩 나온다지만, 에르웬의 합류는 내 소득을 감소시킬 게 분명하니까.
그녀의 강함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뭐, 종족값이 요정이니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테지만…….
이미 전력 과다라고 해야 하나?
에르웬이 없어도 고블린 서너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쉽게 해치울 수가 있다.
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로 몇 번이나 실전을 겪은 나는 정말로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의 생활비나, 이후의 세금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되도록이면 최대한 마석을 모아야 하는 입장.
“후…….”
안전한 잠자리냐, 더 많은 마석이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을 거듭하던 때였다.
터벅.
좌측 통로에서 탐험가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불침번 도중 몇 번이나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한 번 쓰윽 보고서 그냥 지나쳐 가는 게 보통이니까.
다만…….
탁-
퉁퉁이와 비실이로 이뤄진 이 2인조 탐험가는 이쪽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였다.
“저거, 그 요정 아니야?”
“맞는 거 같군. 활의 생김새가 일치한다.”
속닥이며 결론을 내린 두 놈 중, 퉁퉁이가 대표로 내게 질문했다.
“바바리안, 그 요정과는 무슨 관계지?”
“보다시피 밤친구다.”
“바바리안과 요정이 밤친구라니, 신기한 경우를 다 보는군. 그래서 얼마나 남았지?”
“대답해 줄 용무는 없다.”
내 대답에 퉁퉁이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씨익 미소 지으며 옆에 있던 비실이를 데리고 떠날 뿐.
“그렇군. 가자.”
“어? 어, 어…….”
이내 2인조의 기척이 주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대체 이 새끼들은 뭐지? 부족장이 코앞에서 소리 질렀을 때만큼이나 불길하다.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해 자고 있던 에르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으으…….”
야, 넌 지금 이 상황에 잠이 오냐?
빨리 일어나.
왠지 우리 좆된 거 같으니까.
10화 밤친구 (3)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란 말은 옳지 않다.
퉁퉁이와 비실이 2인조가 관심을 보인 건 내가 아니라 에르웬이었으니까.
툭툭, 나는 다시금 에르웬을 발로 흔들었다.
“으으음…….”
으으는 무슨. 빨리 일어나. 안 자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아까 쟤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슬쩍 확인하더니 담요로 얼굴 가리는 거 다 봤어.
“꺄앗!”
실랑이할 시간도 아깝기에 그냥 어깨를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왜 자는 척을 하지?”
“그게…….”
에르웬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고 판단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꽤나 갑갑한 태도.
휙.
턱을 잡고 내 눈을 보게끔 돌리자, 에르웬이 마지못해 입을 연다.
“제가 일어나면 가실 거잖아요…….”
과연, 그래서였나.
나는 맹세를 했다. 그러니 불침번을 서던 중 탐험가와 분쟁이 생기면 함께 싸워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약속했던 마지막 순번에 이 일이 발생했다.
뭐, 나야 명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얘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다.
눈을 뜨는 순간 밤친구 맹세는 끝이니까.
“후.”
나는 일단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만약, 한스 아저씨 같은 성인 남성이 이딴 짓을 했으면 화가 났을 테지만…….
겨우 20살짜리가 이러니까 딱한 마음이 먼저 피어난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만.
“저 두 놈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숨은 거지?”
“…옷에 박힌 문양이 같았어요. 절 해치려고 했던 그 인간 남자와. 분명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거예요.”
집단이라……. 씨바, 상황이 더 빡세지는데?
그냥 여기서 이 요정 아가씨와 작별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마저 들기 시작한다.
“일단 이동하면서 얘기하도록 하지.”
“도와주시는 건가요?”
“얘기를 마저 들어 보고.”
우선 에르웬을 데리고 있던 장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거의 뛰어가다시피 이동하며 남은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라.”
에르웬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군말 없이 간략하게 중요한 정보만을 읊었다.
“첫날에 밤친구로 만난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저를 덮쳤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1층을 주 무대로 하는 어느 집단의 간부라고 하더라고요.”
참고로 그 집단의 이름은 ‘수정 연합’.
“어떻게 겨우 도망치긴 했는데, 이후로도 같은 소속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공격을 해 왔어요. 부상도 그때 입었고요.”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잠깐, 그들은 어떻게 그 얘길 알았지?”
“메시지 스톤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내가 했던 게임에 그딴 건 없었어.
“좀 더 자세히.”
“미리 공명시켜 둔 메시지 스톤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예요. 반경은 300m 정도라고 들었고요.”
“그렇군.”
일종의 무전기다. 주파수를 미리 맞춰 두면 반경 300m까지 통신이 가능한.
슬슬 상황이 이해됐다.
이런 마도구가 있고, 수많은 인력이 있다면 이런 폐쇄적인 환경에서도 정보 전달이 쉽게 이뤄질 거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널 쫓는 이유가 뭐지?”
에르웬은 잘못한 게 없다.
한데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공들여 피해자를 쫓는가.
“혹시 입막음 때문인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요.”
“더 있다고?”
“그게…….”
시원시원하게 묻는 말에 답하던 에르웬이 다시금 말하기를 주저한다. 이런 태도라면, 나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막 생각하던 차였다.
“처, 처음에 도망칠 때 나이프를 막 휘둘렀어요. 근데 그게 하필 안 좋은데 맞아서…….”
“…안 좋은 데라면?”
왠지 서늘하다.
자꾸만 사타구니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그, 거, 거, 거기 있잖아요……?”
진짜구나.
“흠흠, 아무튼 절 쫓는 사람들 얘길 들어 보니까 아예 잘려 나가는 바람에 포션으로 붙일 수도 없었다고……. 그래서인 거 같아요…….”
눈에 불 켜고 쫓을 만하네.
“죄, 죄, 죄송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다.
원인 제공을 한 것은 그놈이지 않은가? 자업자득이다. 문제는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놈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는 것이지만.
“아저씨, 추적자가 있는 거 같아요.”
“뭐?”
“뒤는 돌아보지 마세요.”
청각에 집중해 봤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거리는… 150m 정도 뒤인 거 같아요.”
기척을 느끼는 게 이상할 정도의 거리지만,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다. 얘가 굳이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럼 이게 그 요정이 타고난 기감인가?
갑자기 얘가 달라 보인다.
“속도를 높여야겠는데, 괜찮겠나?”
“네. 아직까진 버틸 만해요.”
상처가 벌어졌는지 하얗던 붕대가 붉게 물들었음에도 에르웬은 앓는 소리를 뱉지 않았다.
좋은 근성이다.
뭐,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지만.
“추적자와의 거리는?”
“…여전히 150m 정도요.”
속도를 높였음에도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쯤 추적자는 메시지 스톤인가 뭔가로 우리 위치를 동료들에게 알리고 있을 터.
해치워야 한다.
만약 저들의 목표가 나였다면, 나는 분명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고만 있다.
죽이고 나면,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발을 담그기 전에 확인해 보자.
“저, 아저씨……?”
내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는 얼마이며,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보다 디테일한 정보가 필요하다.
“에르웬.”
“네, 네?”
“너는 뭘 잘하지?”
“빨래, 청소 같은 건 자신 있어요. 요, 요리는 잘 못하지만…….”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전투 중이라고 했을 때.”
“…활, 활이요! 아, 그리고 정령술도!”
딱 정석적인 활요정이다.
“속성은?”
“…불이요.”
음, 가장 귀한 속성이네.
덕분에 슬슬 그림이 그려진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할 수 있어요.”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거고.
“그렇군.”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에르웬, 나와 동료가 되겠나? 기간은 미궁에서 벗어날 때까지, 전리품 배분은 내가 9고 네가 1이다.”
“할, 할게요!”
이로써, 내게도 명분이 생겼다.
* * *
“—라고 일족의 이름에 대고 약속합니다.”
“나 역시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우리들은 이전처럼 신뢰의 증표로 무언가를 찍었고, 하룻밤 밤친구에서 임시적 동료로 관계를 진화시켰다.
물론, 존나게 뛰면서.
“거리는?”
“100m 정도요!”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였음에도,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외곽 지역으로 빠진다.”
“네!”
방향을 꺾어 어두운 통로 속으로 들어선다.
벽과 천장에 빛나는 수정들이 점점 적어지고, 머지않아 캄캄한 어둠이 우리 앞에 드리운다.
마음이 복잡하다.
후, 내 발로 다시 여길 올 줄은 몰랐는데.
“에르웬, 정령을 소환해라.”
손바닥 위로 떠오른 수박만 한 불꽃이 주위를 밝힌다. 나는 바닥을 조심하며 빠르게 어둠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소환 해제해라.”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기척은?”
“곧 아저씨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나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청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최상의 상황은 추적자가 우리를 놓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럼 굳이 죽일 필요도 없어지고, 나 역시 나중에라도 발을 뺄 수 있게 된다.
타다다다다닷-.
머지않아 내 귀에도 추적자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기대와 달리 놈의 걸음은 스쳐 지나가는 일 없이 멈췄다.
딱 우리가 꺾은 갈림길 앞에서.
툭.
제기랄…….
아무래도 저놈은 우리를 추적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듯하다. 냄새, 소리, 그도 아니면 마법적인 무언가든지 간에.
터벅, 터벅.
놈이 방향을 꺾어 천천히 걸어오더니, 우리와 약 30m 떨어진 거리에서 정지했다.
무저갱 같은 어둠이 시작되는 경계선.
“…….”
그는 고개를 내밀어 그 속을 들여다보았고,
우리도 그 속에서 숨죽여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 있군.”
고요한 정적 속에서 몇 번 킁킁거리던 놈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나, 난 직감적으로 그 물건의 정체를 눈치챘다.
메시지 스톤.
이를 봄과 동시 짧게 읊조려 신호를 보냈다.
지금까지 계속 시위를 당긴 채 화살을 겨누고 있었을 에르웬을 향해서.
“쏴라.”
푹-.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진 화살이 사내의 미간에 박혔다.
털썩.
절명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나는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
바로 옆자리에 있는 에르웬에게서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잘했다. 망설였으면 위험했을 거다.”
허울뿐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도 아저씨에게 방패를 내리찍을 때 멈칫했지 않은가. 방금 전의 에르웬에겐 그러한 시간조차 없었다.
내가 굳이 다시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던 거겠지.
결코 망설여선 안 된다는걸.
“네…….”
“너는 잠시 쉬어라.”
위로는 이쯤에서 끝내고 어둠 속에서 나와 시체를 뒤졌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 배낭은 다른 동료에게 맡겼는지, 추적자는 제법 단출한 행색이었다.
‘이런데서 아쉬운 감정을 느끼다니, 나도 이곳 사람이 다 됐군.’
우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적자의 장비를 통째로 벗긴 이후, 하나씩 획득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허리띠, 가죽 재질의 상하의, 단검 두 자루, 제법 묵직한 마석 주머니, 포켓에 보관된 채로 허리띠에 매어져 있던 포션 한 병, 그리고 메시지 스톤까지.
“잘됐군. 이리 와라.”
대강 분류를 마친 나는 에르웬을 불렀다.
그리고 붕대를 벗기고 포션을 이용해 상처를 치료했다.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끄으읏…….”
소리를 내도 괜찮은데 에르웬은 굳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얘도 독한 구석이 있구나. 아니, 그냥 멘탈이 나간 건가?
부디 전자면 좋겠다. 카운셀링은 자신이 없어서.
“정신이 좀 드나?”
“네. 번쩍요.”
“그럼 이걸로 갈아입어라.”
몇 분간의 치료가 끝난 뒤, 나는 방금 획득한 가죽 상하의를 내밀었다.
나풀거리는 천 옷보다는 이게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판단.
“바로 입고 올게요.”
내 판단은 전부 따르는 쪽이 살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을까? 찝찝할 법도 한데 에르웬은 곧장 옷을 들고 어둠 속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조금 남는군. 이리 와 봐라.”
나는 직접 팔과 다리로 삐죽 나온 단을 잘라 주었다.
“이것도 차라. 조금은 나을 거다.”
전체적으로 조금 헐렁해 보이긴 하지만, 허리띠까지 차자 그래도 제법 편해 보인다.
그런데 옷이 달라져서인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에는 나들이 나온 요정 소녀였다면, 이젠 어엿한 여전사 같다.
그 표정까지도.
“…느낌이 엄청 이상하네요.”
“익숙해질 거다.”
“그렇겠, 죠……?”
“그래, 그럴 거다.”
나는 다른 물건들을 전부 배낭에 쑤셔 넣고는 벌거숭이가 된 시체를 질질 끌어 어둠 속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메시지 스톤을 손에 쥐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잠시만요. 제가 해 볼게요.”
에르웬이 메시지 스톤을 살펴보더니 무언가를 딸깍 눌렀다.
[…요정년과 바바리안을 추적하던 세르딘의 연락이 끊겼다. 연락을 받는 이들은 모두 고블린 지구로 집결하라.]
일단,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다.
11화 2층 (1)
[지금쯤 둘로 나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한 손 망치와 방패를 사용하는 바바리안을 본다면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지원을 기다려라.]
인상착의가 퍼져 나간다.
상세하진 않지만, 별 의미는 없다.
방패를 쓰는 바바리안이 나 말고 더 있을 거 같진 않으니.
“아저씨…….”
에르웬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여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안 버리고 가니까.”
이미 나는 에르웬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부터 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걸 좋아했었다.
그쪽이 내게 이득이 된다면.
“앞서 말했듯, 이후 전리품은 내가 아홉을 갖고 너는 하나를 가진다. 알겠나?”
“물론이에요.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은혜라…….
“그래, 꼭 갚아라.”
굳이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크게 기대는 않겠다마는.
“네, 꼭이요…….”
결의에 찬 눈으로 주먹을 꽉 쥐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장화 끈을 조이며 이동할 채비를 끝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일단 외곽 지대를 통해서 이동한다. 다시 정령을 소환해라. 나머지는 가면서 얘기하지.”
“네.”
주먹 크기의 불꽃을 등불 삼아 어둠 속을 걸어가며 나는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정령은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소환이 가능하지?”
“주변을 밝히는 정도라면 10시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다시 회복되는 시간은?”
“2시간 정도 쉬면 될 거예요.”
“그렇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들은 별다른 위험 없이 그들의 추적을 벗어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번에 짊어진 리스크만큼의 반사이익을 보게 될 테고.
“아저씨.”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중 에르웬이 말을 걸었다.
“이제 어디로 향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걸 안 말했구나.
“2층이다.”
“네……?”
그런 표정 하지 마. 제대로 들은 게 맞으니까.
“우린 2층으로 간다.”
“아저씨랑 저, 둘이서요?”
“그래, 너랑 나 둘이서.”
사실 선택지가 없다기보단, 이전부터 생각하던 것이다. 1층에서는 둘이 움직여 봤자 소득이 줄어들 뿐이었지만…….
2층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저기… 아, 아저씨? 2층은 1층이랑은 아예 달라요. 그건 알고 계신 거, 맞죠……?”
“알고 있다.”
1층에선 서너 마리씩 나오던 게 열댓 마리로 늘어나고, 그 외의 변이종, 심지어는 아예 상위 등급의 몬스터도 나타난다.
“하지만, 초입부에서만 활동하면 괜찮을 거다. 너랑 나는 상성이 제법 좋으니까.”
“제, 제가 아저씨랑요?”
뭘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근접 탱커와 원거리 딜러는 조합이 좋다.
일찍이 에르웬과 위층에 가는 걸 고민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고. 그곳이라면 마석을 반씩 나눠도 소득이 크게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어둠을 지나칠 수단이 없기에 나는 이 아이디어를 폐기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고, 고블린을 피해서 오크 소굴로 들어가는 거 같은데…….”
뭐, 이 반응을 보면 알고서 제안을 했어도 칼같이 거절당했을 듯하다마는…….
아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알다시피 1층에는 저놈들이 쫙 깔려 있는데.”
에르웬에게 2층으로 가야 할 동기가 생겼고, 그 틈을 타서 비율도 9:1로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결정에 감정적인 요인이 일절 존재하지 않던 것은 아니었다.
[요정년을 잡는 자에게는 1만 스톤에 가장 먼저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추가로 주겠다.]
나는 이러한 놈들이 싫다.
아니, 싫은 걸 넘어 혐오하는 감정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놈들에게 엿을 먹이면서, 리스크보다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데다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었다는 자기만족까지 얻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효율의 결정체 아닌가.
“선택할 기회는 주겠다. 어쩔 거지?”
“갈게요…….”
에르웬이 울며 겨자 먹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방금 메시지 스톤에서 들려온 통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듯한데…….
나이스 타이밍.
“그럼 계속 이동하지.”
“…그런데 2층으로 가는 길은 아세요?”
“정확히는 모른다.”
“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다 보면 언젠가 나올 테니까.”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어둠을 따라서 한 방향으로만 가면 어떻게든 포탈이 나온다. 이 어둠이야말로 위층을 가리키는 항로 같은 것이니까.
워낙 미로 같은 구조라 헤매기야 하겠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다.
“고블린 덫이에요!”
그렇게 걷고 있는데 덫이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늦은 시기였다. 원래였으면 나와도 아까 나왔어야 맞는데.
…설마 빛이 없는 곳에선 고블린들도 별로 없는 건가?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왠지 가슴이 갑갑해진다.
시작부터 어둠 속에 떨어져, 곧바로 고블린을 만났던 난 대체 얼마나 운이 없던 거지?
“제가 상대할게요! 아저씨는 쉬고 계세요!”
자기 어필을 할 기회라 여겼는지 에르웬이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정령은 쓰지 마라.”
“…다, 당연하죠!”
당연하다기엔 너무도 당황한 모습으로 에르웬은 덫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륵!”
고블린이 튀어나오는 순간, 초근접 거리에서 미리 시위에 걸어 둔 화살을 쏘았다.
푹-!
오, 저러니까 무슨 레골라스 같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솜씨가 좋다. 몸동작도 아주 민첩하고.
“어때요?”
이내 고블린을 해치운 에르웬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정령을 썼었겠지?”
“네…….”
“잘했다. 활 쏘는 걸 보니 요정이 맞긴 하군.”
에르웬은 쑥스러워하며 기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인정받는 게 좋은 건가? 솔직히 말해 조금 돌려서 까는 것도 있었는데.
실력이 아니라 성격 부분에서.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는 내가 하겠다. 화살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을 테니.”
“아, 그냥 다시 주워서 쓰면 되는데요? 뽑을 필요도 없어요.”
에르웬이 허리를 굽히더니 마석과 화살을 주워서 돌아왔다. 화살은 척 보기에도 망가진 곳 없이 멀쩡했다.
“…그렇군.”
거, 사람 무안하게.
게임에서 화살은 한 발 쏘면 없어지는 소모품이었다. 대신 한 칸에 천 발씩 들고 다닐 수 있긴 했지만.
“자, 여기요!”
에르웬이 작달막한 손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아저씨가 아홉 개 가질 때 제가 한 개 맞죠?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그럼 저도 조금은 벌어갈 수 있겠죠? 돌아가면 동생한테 사 주기로 약속한 게 있거든요!”
어, 아, 음…….
“그래, 열심히 해라…….”
뭐지? 돌려 까는 건가?
* * *
어둠 속에서 간간이 고블린을 잡아 가며 빠르게 북상하고 있던 때, 한동안 조용하던 메시지 스톤에서 음성이 출력된다.
[추가 전달 내용이다. 요정에게 당했던 하츠 영이 현상금을 2만 스톤으로 올리겠다는군. 살았든 죽었든 관계없이.]
300m 근방에 놈들이 있단 뜻이다.
본능인지 에르웬이 슬그머니 내게 밀착했다.
“안심해라. 횃불까지 써 가며 우릴 찾으려는 놈은 없을 거다.”
“그렇겠죠?”
“그래.”
사실 확신에 가깝다.
메시지 스톤으로 계속 대화를 엿들으며 느낀 것인데, 이들은 집단이라 해 봐야 시정잡배들의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까지 단합이 잘 되지도 않는 듯했고.
추측건대, 기껏 해 봤자 지들끼리만의 편리한 커뮤니티 같은 역할이나 했을 것이다. 애초에 1층은 5명 이상이서 활동할 수도 없는 곳이니까.
[칼날늑대를 사냥하러 지역을 옮길 생각인데, 혹시 함께 이동할 자가 있는가? 전달은 필요 없다.]
[피곤해서 같이 휴식을 할 자를 구한다. 큰바위 옆 연못으로 와라. 전달은 필요 없다.]
실제로, 이곳까지 이동하며 이러한 통신도 곳곳에서 들렸다. 현상금을 걸거나 말거나 그리 관심 없는 이들도 있단 거다.
다만,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일이 꼬였다기보다는, 너무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어서.
제기랄…….
내 팔자상 이쯤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질 때인데, 잠잠하니 오히려 불안해진다.
“아저씨!”
뭐야.
“저기, 구울이에요!”
안 보이는데? 고개를 갸웃하자 에르웬이 불꽃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너 눈 진짜 좋구나.
그제야 내 눈에도 구울의 형체가 들어왔다.
썩은 피부와 텅 빈 눈두덩이, 클로를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긴 손톱, 그리고 사람과 비슷한 체형으로 4족 보행을 한다는 점까지.
로딩 화면에서 봤던 일러스트 그대로다.
다만, 문제는…….
‘뭐야, 왜 구울이 여기서 나와?’
1층은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출몰하는 몬스터가 바뀐다. 그리고 구울이 나오는 것은 서쪽 지역.
설마, 헤매다가 경계선까지 온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긴 했지만 막다른 길이 나오면 이리저리 빙 돌기도 했으니.
이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자.
“…이번에도 저 혼자 싸우나요?”
고블린과 싸울 땐 의욕이 넘치던 에르웬이 싫다는 티를 팍팍 낸다.
처음 만나는 몬스터라 무서운 건가?
얘도 참, 남다른 구석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너는 가장 뒤쪽의 한 놈만 신경 써라.”
“네!”
대강 전략을 공유한 나는 천천히 나가갔다.
통로를 가로막은 구울의 숫자는 총 셋으로, 전부 강아지 앉아 자세를 하고 있었다.
터벅.
제법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미동도 없다.
음, 게임에선 일정 범위에 다가가야만 선공을 해 왔는데, 이것도 게임 그대로인 건가?
터벅.
조심스레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구울 세 마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르르륵!”
내는 소리는 고블린과 비슷하다.
9등급 몬스터라 그런가? 거, 개성이 없구먼.
“흐아앗!”
물러나기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가며, 선두에 있던 구울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찍었다.
이름하여 해머 스매쉬.
콰직-!
구울 하나의 대갈통이 짓뭉개지는 순간, 뒤에서 화살이 쏘아지며 또 다른 구울에 명중했다.
푹!
얘는 참 미간을 좋아하는 거 같네.
이어서 달려드는 구울을 방패로 한 번 밀쳐낸 후, 해머 스매쉬로 마무리하자 전투가 싱겁게 마무리됐다.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EXP +1」
순식간에 끝난 전투지만, 나는 짧게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투력 면에선 구울이 고블린보다는 위였다.
힘도 훨씬 셌고 속도도 빨랐다.
뭐, 고블린은 덫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당하는 새끼가 병신이다.
…물론 주변에 빛이 있다는 가정하에.
“그래도 고블린보다는 이쪽이 한결 낫군.”
“네? 왜요?”
“고블린은 잡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전면전에서 밀리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고블린보다는 구울을 사냥하는 게 효율이 좋아 보인다.
얘낸 적어도 덫 하나만 뿌려놓고 근처에서 존버타지는 않으니까.
다가가기 전까지 선공을 하지 않는단 것도 아주 큰 장점이었고.
“다음번에는 화살로 한 마리를 먼저 죽이고 시작하는 편이 효율이 좋겠군.”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앞으로의 전투 플랜을 짧게 공유하고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마석들을 수거해 주머니에 챙겼다.
“저, 아저씨……?”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이제 저 하나 주실 차례인데요…….”
“아, 그렇군.”
우리는 계속해서 통로를 나아갔다.
* * *
경계선 부근이란 내 예상은 맞아들었다.
한동안 구울과 고블린이 번갈아 나오더니, 계속 북상을 하자 다시 고블린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22 : 47]
어느새 3일 차가 끝나가기 시작하는 시점.
도중에 4시간가량 휴식을 취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온 우리는 발견했다.
바닥에 그려진 검붉은 선 하나를.
“어, 핏자국이네요? 고블린은 아닌 거 같은데, 누굴까요?”
…왠지 난 그 주인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떨어진 빵 조각이 나왔다. 일정 간격마다 계속해서.
이에 나는 확신을 갖고서 핏자국을 계속 추적했다.
“저기, 아까부터 왠지 말이 없으신 거 같은데…….”
10분.
“혹시 저한테 화난 거라도 있으신가요?”
30분.
“네? 아저씨?”
2시간.
“…….”
그 긴 거리를 걸어온 끝에 나는 마침내 땅에 버려진 샌들을 발견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저…….”
“씨발, 장난치나.”
“자, 잘못했어요! 뭔진 몰라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포탈이 있었다.
12화 2층 (2)
포탈이 나오리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야 당연하다.
상위 모험가인 금발 파티와 조우한 것부터가 내가 온 방향에 2층 포탈이 있다는 방증.
핏자국을 발견하자마자 확신을 갖고 이를 따라갔던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스타트 포인트에서 10m도 안 되는 지점에 포탈이 있을 줄이야.
“미치겠군.”
세 발로 기어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는 대체 얼마나 운이 나쁜 거지?
반대 방향으로 몇 걸음만 갔어도 포탈을 활성화시키고 빛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좆같은 덫을 보고 피할 수도 있었을 테고!
“아저씨, 말해 주세요. 그렇게 무서운 표정만 짓지 마시고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칠 테니까…….”
근데 얘는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아, 나 때문이구나.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둘러대자.
“신경 쓰지 마라. 그저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아…….”
에르웬이 날 보며 안심을 하더니 이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본다. 믿기지 않았다.
핏자국, 빵 조각, 샌들, 내가 짓던 표정.
이 정황만으로 내가 첫날에 겪은 일들을 유추했다고? 얘가?
“분명, 그분도 좋은 곳에 가셨을 거예요.”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믿고 있었다.“그래… 고맙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무슨 예전에 잃은 동료라도 추억한다고 오해한 듯싶지만…….
구태여 정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하나씩 설명하기엔 너무 긴 이야기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말하다 보면 울분이 복받쳐 오를 거 같고.
그러니 그냥 이 이야기는 묻어두자.
“위로 올라갈 마음 준비는 됐나?”
“솔직히 아직도 무섭긴 한데, 왠지 아저씨랑 있으면 죽을 것 같진 않단 생각이 들어요.”
가만 보면 얘는 참 말을 길게 하는 요상한 버릇이 있다. 그냥 ‘네’ 한 마디면 되는데.
“그럼 가지.”
“네에…….”
에르웬과 함께 포탈 속으로 몸을 실은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모니터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때처럼.
번뜩-!
[00 : 57]
미궁에 들어선지 딱 4일 차가 넘어가는 시점.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나는 2층에 도달했다.
* * *
현재 소감이 어떻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거대한 개구리 입속에서 한참 우물거려지다가 퉷! 하고 뱉어진 기분이라고.
“꺄앗!”
무언가에 튕겨져 나가듯 몸이 체공한다.
에르웬처럼 볼품없이 비명은 내지르진 않았지만, 결과만 보면 나보다 쟤가 더 나았다.
쿵-!
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은 반면, 에르웬은 금방 균형을 잡고 멀쩡하게 착지했다.
“와, 놀랐네요. 이런 말은 언니들도 안 해 줬는데.”
새삼 느끼는 건데, 얘도 진짜 피지컬이 좋구나.
바바리안으로선 가질 수 없는 민첩함이다.
“아저씨, 여기가 2층인가요?”
“그래.”
“으음, 숲이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확실한 거죠?”
“아마 네가 들은 이야기는 다른 2층을 말하는 걸 거다.”
“다른 2층이요?”
요정들은 미궁 정보 공유를 제대로 안 하나? 왜 이런 것도 모르고 있지?
“1층의 포탈은 동서남북 방향마다 네 개씩 있고, 이어지는 곳은 지역마다 다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까먹었을 뿐이었구나.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에르웬이 당황하며 뭐라 입을 열었다.
“아, 3층! 어느 경로로 가던 3층부터는 다시 전부 이어진다고 했어요. 맞죠?”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고 싶은 모양이다.
대충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에르웬이 흡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슬슬 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온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죠?”
“기다려라. 생각 중이니.”
일단 나는 차분히 주변 지형들부터 확인했다.
게임과 어떤 부분이 다르고, 같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방금 전에 포탈을 타고 넘어오면서 3m 정도 날았던 것처럼.
모니터 너머로는 알 수 없었던 그런 것들.
“흐음.”
우선 한 번 더 주위를 확인했다.
뒤에는 언제든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포탈이 있고, 반경 50m쯤 되는 공터엔 어떠한 생명체도 보이지 않는다.
뭐, 저 멀리 나무속은 어떨지 모르겠다마는.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가만히 있어라.”
2층의 맵은 숲이다.
주변은 밤처럼 깜깜하지만, 하늘에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빛들 덕분에 어느 정도 시야 확보는 된다.
체감상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 정도의 밝기.
다만, 시간이 흐른다고 낮이 되며 밝아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이곳은 미궁 속이니까.
저것도 사실 하늘이 아니라, 그저 높은 곳에 위치한 천장이겠지. 뭐, 진짜 하늘과 태양이 존재하는 층도 있긴 하다마는.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네? 어디로 갈 건데요?”
“이곳을 중심으로 근방을 탐색한다.”
1층에서부터 대강 세워 둔 계획은 있다.
하지만 이게 실제로 통할지에 대해서는 확인해야 하는 부분들이 몇 가지 존재한다.
그러니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
콰앙-!
공터 외곽의 나무를 향해 대뜸 망치를 휘두르자 에르웬이 흠칫한다.
“뭐, 뭐 하세요?”
“나무를 쓰러뜨리는 게 가능한지 확인해 봤다.”
“그런 걸 왜 확인하는데요?”
“포탈 주변에 목책을 세울 생각이었다.”
“으음, 그렇구나.”
그제야 에르웬이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씩 대답해 주려니까 엄청 귀찮다.
“아무튼 이 계획은 포기다.”
에르웬도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야 얘도 눈은 있으니까.
온 힘을 다해 후려쳤는데도 나무는 껍질이 조금 부서진 게 끝이었다.
이게 무슨 나무냐? 바위지.
“그럼 다음 계획은요?”
“예정대로 이 주변을 수색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가 앞장을 선다.”
“…제가요?”
의문은 받지 않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은 앞서가며 함정을 찾을 것. 그리고 최대한 기척에 유의하며 적을 경계할 것. 이렇게 두 가지다.”
“…역할 분담이라는 거죠. 알겠어요.”
의외로 에르웬은 순순히 부여된 역할을 받아들였다.
근데, 왜 아쉽지?
이미 설득할 말까지 다 준비해 둬서 그런가?
“그래도 숲에 와서인지 뭔가 그리운 느낌이네요. 몬스터들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에르웬은 나로선 전혀 공감 못할 얘기를 하면서 숲길을 걸어나갔다.
“아, 덫은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되도록이면 제가 걷는 길로만 오세요.”
뭐지? 얘? 갑자기 뭔가 든든해졌다.
실제로 덫이 두렵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머지않아 에르웬이 작게 읊조렸다.
“덫이네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기 보시면 나뭇잎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안 보인다.
이내 에르웬이 ‘왜 이런 것도 못하지?’라는 눈빛을 하더니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채챙-!
진짜 있었네.
어떻게 이리도 어두운데 이 거리에서 저걸 발견할 수 있지?
요정의 탐지 능력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네가 성큼성큼 걷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어때요?”
“돌멩이를 잘 던지는 거 같다.”
“…그게 전부?”
“달리 뭐가 필요한가?”
이때다 싶어 쭉쭉 펴지던 에르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근을 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너무 뻔하지 않도록 은근하게.
“덫을 찾는 건 처음부터 네게 기대하고 있던 능력이었다. 너는 이미 어엿한 한 명의 탐험가다. 당연한 일을 갖고 너무 들뜨지 마라.”
“흐으음…….”
아닌 척하지만, 어깨가 살짝 씰룩거리는 게 뒤에서 훤히 보인다.
덕분에 완전히 감을 잡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다루면 될 듯하다.
“그래도 제가 한 사람분 역할은 하고 있다는 말씀이죠? 어엿한 탐험가로서?”
“그래.”
그래 봤자 배분은 9:1이지만.
아무튼, 우리 부족장이 특히나 좋아했던 ‘한 사람의 전사’ 변형판이 생각보다 잘 먹힌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고블린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그야 당연하다.
2층은 1층과 다르니까. 덫이 있다고 무조건 고블린이 근처에 있지 않다. 2층에서의 덫은 그저 지형적 특성으로 보는 게 편하다.
어딜 가나 수도 없이 깔려 있으니.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하지.”
“네.”
나는 풀어진 긴장을 다시 조이며 이 근방을 탐색했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게임상에서 ‘고블린 숲’이라 불리던 곳이다.
덫 외의 특징으로는 고블린이 기본적으로 열댓 마리씩 뭉쳐다닌다는 것.
가끔씩 변이종, 그러니까 고블린 검사나 고블린 궁수 따위가 출현한단 것이 있다.
물론, 외곽부로 나가면 변이종들도 늘어나고, 상위 등급의 몬스터도 나타나지만…….
포탈 근처 초입부에서만 깔짝댈 예정인 우리로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다.
“일단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우리는 포탈을 중심으로 반경 200m가량의 수색을 끝마쳤다.
덫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고블린 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이 근방의 덫을 전부 제거한 뒤 차츰 범위를 늘린다.”
우리들은 멀리서 돌멩이로 덫을 제거하는 식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혹시라도 위험하면 1층으로 도망쳐야 하니까.
뛰는 도중에 덫을 밟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그렇게 반경을 500m 이상 넓혔을 때였다.
“아저씨.”
에르웬이 발을 멈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 역시 덩달아 숨을 죽였다.
“고블린 무리예요.”
“몇 마리나 되지?”
“모르겠어요. 열은 확실히 넘는 것 같은데…….”
“거리는?”
“50m 정도요. 아직 우리를 눈치채진 못한 거 같아요. 어떡하죠?”
얘는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을까.
“싸운다.”
내 말에 에르웬은 토를 달지 않았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걸.
정 싸우는 게 싫다면 미궁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
“들키지 않고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아저씨 없이 저 혼자라면 30m까지는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이상은 무리예요. 고블린들이 생각보다 후각이 예민해서.”
“그렇군.”
나는 짧게 고민한 뒤, 아까 말했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에르웬도 천천히 고블린들 무리들이 있는 방향으로 수풀을 헤치며 걸어갔다.
저게 바로 요정인가?
수풀 사이를 걷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 게 볼 때마다 신기하다.
“…….”
이내 에르웬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등을 돌려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았다.
휘유우우웅.
명중인가?
모르겠다.
하도 멀어서 박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미간을 꿰뚫었으면 좋겠는데.
타다다닷!
화살이 쏘아지는 것을 기점으로 나는 곧장 에르웬에게로 달려나갔다.
“그륵!!!”
“그르르륵!!!”
잔뜩 흥분한 고블린들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에르웬은 침착하게 2발째를 준비하고 있었다.
휘유우우우웅!
매번 느끼지만 미친 연사 속도다.
이러한 부분들을 게임으로 봤을 땐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푹-!
달려오던 고블린 한 마리가 쓰러졌다.
명중한 위치는 미간이 아니고 목.
하긴, 아무리 요정이어도 멀리서 움직이는 얘를 정확히 맞히는 건 어렵겠지.
“에르웬, 너는 뒤로 물러나라.”
“네!”
에르웬이 망설임 없이 뒤로 빠지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내 전방에는 우르르 몰려드는 고블린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1층에서 마주치던 것에 비해 3배는 되는 규모.
아무리 고블린이어도 이만큼이나 되면 조금은 위축될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두려운 마음은 전혀 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근-!
이 육체가 지닌 전사의 심장이 호전적으로 꿈틀대며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륵, 그륵!!”
“그르르륵!!!”
수많은 고블린들이 뱉는 위협적인 하울링을 들으며, 나는 도리어 소리쳤다.
“스파아아르타아아아아—!!!”
다 덤벼 씨발.
13화 2층 (3)
내게 달려드는 고블린의 숫자는 총 아홉.
일반 고블린이 여덟에 고블린 검사가 하나 섞여 있다.
검사라 해 봤자 검신 60cm 정도 되는 시미터 하나를 들고 있을 뿐이지만…….
조각칼과 달리 저쯤 되면 훌륭한 날붙이다.
“그르륵!”
정면부에서 달려드는 고블린을 보며, 나는 짧게 쥔 망치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퍽-!
원샷원킬. 고블린이 바닥에 쓰러질 새도 없이 빛무리로 변해 사라진다.
다만, 기뻐하긴 이르다.
이제 고작 한 마리를 해치웠을 뿐이니.
“그르르륵!!!”
한 마리를 잡기가 무섭게 양측면에서 고블린 두 마리가 동시에 날아든다.
손에는 조각칼이 쥐어져 있다.
나는 오른쪽으로 대쉬하며 방패로 한 마리를 밀쳐낸 뒤, 곧바로 등을 돌려 다른 한 마리를 망치로 후려쳤다.
퍽-!
이걸로 두 마리 째.
하지만 숨 돌릴 시간조차 없다.
어느새 내 후방까지 점했는지, 등 뒤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더 날아든다.
고블린 검사다.
“캬아악!”
꼴에 검사라고 뱀 같은 소리를 낸다.
나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바닥을 굴렀다.
휘익-!
매서운 파공음을 내며 위로 지나가는 칼.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었다.
1층보다 2층이 몇 배는 더 위험한 이유다.
일반 고블린 4마리야 피지컬로 어떻게 찍어누른다 해도, 이쯤 되면 그게 불가능하니까.
부상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내가 혼자였다면.
푸욱!
수풀 사이에서 쏘아진 화살이 고블린 한 마리의 미간을 꿰뚫는다.
에르웬이 다시 저격 포지션을 잡은 모양.
타닷!
나는 구르는 반탄력으로 재빠르게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패를 들고 적진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그야 전사가 어그로 끄는 건 당연하잖아?
“새끼들아! 다 덤벼!”
방패로 막고, 망치를 휘두르고, 피하고, 발로 밀어내거나, 머리로 박치기를 하는 등.
들끓는 바바리안의 피와 줄타기하며 고블린 진형 한복판에서 날뛰는 사이, 재차 포지션을 잡은 에르웬이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냈다.
휘이이잇, 푹! 푹! 푹!
2초 내지 3초마다 쏘아지는 화살에 고블린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그륵!!”
조금 서두르는 탓인지, 늘 화살이 급소에 꽂히는 건 아니었지만…….
푹!
어깨, 팔, 배, 가슴, 허벅지 등 어딘가에는 반드시 명중한다.
어떨 땐 정령의 힘까지 불어넣었는지 확 하고 불이 붙어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나 역시 이에 지지 않게끔, 화살을 경계하느라 이도 저도 못하는 고블린 새끼들의 대갈통을 하나씩 망치로 부쉈다.
퍽! 퍽!
이내 고블린의 숫자가 둘까지 줄어들자, 고블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미친 듯이 뛰어서 머리끄댕이를 잡아챈 내가, 다른 하나는 에르웬이 뒤통수에 화살을 꽂아 넣어 처리했다.
「고블린 검사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전투 상황이 종료되자 수풀에 숨어 있던 에르웬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아저씨, 다친 데는 없으세요?”
“괜찮다. 너는 어떤가?”
“저도 마찬가지예요.”
“됐다. 그럼 마석들을 수거하지.”
이후 우리는 둘로 나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화살과 마석을 주웠다.
난전 중에 고블린 검사도 쓰러트렸지만, 시미터를 획득한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1층에서처럼 입고 있던 옷과 무기들도 함께 빛이 되어 사라진 탓이다.
“여기 여섯 개요.”
그렇게 에르웬이 기습해서 죽인 두 마리 분까지 합쳐 수확한 마석은 총 11개.
1일 차에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마흔네 개의 소득을 올린 걸 생각하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전투 시간만 따지면 2분 남짓도 안 됐으니.
“자, 받아라.”
“2개나요? 감사합니다!”
내가 9개를 갖고 에르웬이 2개를 가졌다.
같은 9등급이더라도, 일반 고블린보다는 검사의 것이 좀 더 중량이 높다는 걸 감안한 배분.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죠?”
“그래, 혹시 이번 전투에서 불편하다거나 위험하게 느껴졌다거나 한 게 있었나?”
“아뇨, 딱히 없었어요.”
이후 나는 전투를 복기하며 전투 방식의 개선점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당장은 딱히 고칠 점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는 아직 우리들이 미숙하단 증거겠지.
전투 횟수가 늘고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좋아, 그럼 여기까지 하고 계속 이동하도록 하지.”
“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01 : 31]
4일 차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소득을 올릴 수 있으려나?
* * *
우리들은 포탈을 중심으로 반경을 확장하는 식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3km 넘게 반경을 늘린 후로는 정말이지 5분에 한 번꼴로 고블린 무리와 조우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블린 궁수도 만났다.
“키키키키!”
‘그륵’보다는 조금 더 개성적인 소리를 내는 고블린 궁수는 확실히 위협적인 상대였다.
하프를 연상시키는 작은 단궁을 무기로 사용했으며, 다른 고블린들처럼 무기인 화살촉에 독이 묻어 있었다.
심지어 은신 마법도 쓸 줄 알았다.
다만…….
「고블린 궁수를 처치했습니다. EXP +1」
집중만 하고 있다면 이 바바리안의 몸뚱이는 날아오는 화살에 반응해 피하거나 방패로 막는 게 가능했다.
뭐,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만.
“고블린 궁수가 하나 더 있다! 먼저 해치워라!”
“네!”
아무리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머리통에 화살이 꽂히면 즉사다.
도시로 돌아가면 투구부터 사던가 해야지.
“잠시 쉬도록 하지.”
“하! 드디어!”
한 번의 전투를 더 마무리 지은 우리는 포탈 근처의 공터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원한다면 먼저 자도 된다.”
“정말요?”
얘는 정말 사양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공터에 털썩 앉더니 쉬 마려운 강아지처럼 나를 힐끔 바라본다.
“저, 배낭이랑 담요는요?”
“…여깄다.”
나는 한층 더 묵직해진 가방을 내려놓고는 담요까지 꺼내서 덮어 주었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로롱, 도로로롱-.
정통 바바리안 스타일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얌전한 소리지만…….
얘 진짜 피곤했구나.
지금까진 소리 하나 안 내면서 자더니.
음,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 걸지도.
[18 : 20]
우리는 약 15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고블린 숲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다.
매번 열이 넘는 개체들과 싸워야 했지만, 익숙해질수록 위험한 상황은 줄어들었고,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다.
그 결과, 1층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하지만 긴장되는 순간이 없던 건 아니었다.
“후…….”
반경이 넓어지다 보니 탐험가를 만나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주친 횟수는 총 열한 번.
전부 3인 이상으로 이뤄진 무리였고, 간혹 이종족들도 껴 있는 팀도 있었다.
전부 마주치자 관례대로 서로 거리를 벌리며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뭉텅이로 진이 빠졌다.
난 고블린보다 탐험가 새끼들이 더 무섭다.
지금은 특히나 경계할 이유도 있고.
“얘가 너무 예쁜 것도 문제란 말이지.”
쿨쿨 자는 에르웬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노숙 중인데도 찰랑거리는 은발에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호박색 눈, 미인의 조건을 몽땅 갖춘 이목구비까지.
여자로서는 행운인 일이지만…….
탐험가로서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실제로 마주친 탐험가 무리 중, 에르웬을 보자마자 입술부터 핥는 새끼도 있었지 않나.
부디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그렇게 예뻐요?”
뭐야 씨발, 너 방금까지 코 골고 있었잖아.
“자라.”
“네에.”
잠결이었는지 에르웬은 대충 대답하고는 곧바로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드르렁, 드르렁.
진짜 뭐지 얘는?
내가 아는 요정은 이렇지 않았는데.
* * *
4일 차, 5일 차, 6일 차…….
고블린 숲에 들어선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내 7일 차가 시작됐다.
드디어 미궁을 떠날 날이 온 것이다.
“돌아가면 일단 잠부터 잘래요…….”
“동감이다.”
미궁을 떠나 도시로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
층계가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미궁은 해당 층에 있던 탐험가들을 도시로 뱉어낸다.
1층은 168시간, 2층은 좀 더 늘어난 240시간.
층수가 오를수록 미궁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나는 셈.
다만 우리는 7일 차가 끝나기 직전에 1층으로 내려가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오늘은 어제처럼 멀리 나가지 않고 근방에서만 움직이도록 하지.”
“네!”
일찍 나가는 이유는 몇 있다.
1층이 폐쇄되면, 포탈 역시 사라진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퇴각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뜻.
또한 식량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다.
가끔 만나는 탐험가들에게 마석을 대가로 식량을 구매해 본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멀쩡한 화살이 이제 10발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재활용을 가정해 튼튼하게 만들어진 화살이라 한들, 소모품이기에 불가피했던 일.
애초에 지구의 나무로 만든 화살이었으면 몇 번 다시 쓰지도 못했겠지.
새삼 다른 세계라는 게 느껴진다.
[22 : 27]
이후 한참 더 사냥을 이어 나가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혹시 모르니 이만 돌아가지.”
“네!”
현재 우리는 포탈로부터 약 4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길어 봤자 40분이면 포탈에 도착한다.
물론 그러면 시간이 좀 남긴 하지만…….
늦어서 못 내려가는 것보단 일찍 가 있는 게 한결 마음이 편하겠지.
헤어지기 전에 얘랑 나눌 얘기도 있고.
“조심하세요. 또 덫이 깔렸어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데, 어느샌가 또 숲에 덫이 뿌려져 있다.
고블린 무리들이 리스폰 됐다는 뜻이다.
뭐, 리스폰이라고 해서 게임에서처럼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는 건 아니었지만.
숲속엔 토끼굴같이 생긴 것이 자주 보이는데, 고블린들은 항상 거기서 기어 나온다.
그래서 한 번은 앞에서 대기도 해 보고, 에르웬을 이용해 불도 질러 봤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땅을 파도 금방 통째로 무너지는 바람에 밑을 확인하진 못했고.
터벅.
앞장서 걷던 에르웬이 걸음을 멈췄다.
“1시 방향 약 70m 거리에 고블린 무리예요. 일반 여덟에 검사 둘, 궁수 둘이네요.”
이제는 얘도 익숙해졌는지 재차 질문할 필요가 없도록 완벽하게 브리핑을 해 준다.
“싸울 거죠?”
“싸운다.”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늘 그랬듯이 에르웬이 앞장서서 수풀을 헤치고 길을 열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날 멈춰 세우더니, 혼자 10m가량을 더 이동해 자리를 잡고 시위를 당겼다.
휘이이이이잇!
화살이 쏘아진다.
푹!
아마 명중한 것은 고블린 궁수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걔를 최우선으로 노리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아저씨!”
“오냐, 너는 뒤로 빠져라.”
달려드는 고블린 무리에게 화살 한 발을 더 쏘아낸 에르웬이 뒤로 빠진다.
이젠 너무도 익숙한 바톤 터치.
나는 앞으로 달려들며 일반 고블린들 사이에 있던 검사부터 망치로 후려쳤다.
퍽-!
손맛이 좋은 걸 보니 두 번 때릴 필요는 없겠군.
“와아아아아악!”
진형의 중심에서 포효하듯 외치자 고블린들이 주춤한다.
거, 새끼들 쫄기는.
퍽-!
고블린들이 멈칫한 찰나, 나는 빠르게 대시하며 나머지 검사 한 마리도 대가리를 터뜨렸다.
“그르르륵!!”
하도 난전을 거듭해 왔더니 이런 개싸움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그건 에르웬도 마찬지였지만.
휘이이이잇! 푹!
벌써 자리를 잡았는지 본격적으로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한다.
합이 맞지 않을 때는 동선이 겹쳐 화살에 맞을 뻔한 적도 있으나, 서서히 그런 일이 사라졌다.
에르웬이 어떤 상황에 어떤 적을 우선시해서 어느 곳을 노리는지 대강 예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피차일반이긴 하겠다마는.
퍼억-!
1분 남짓의 시간이 지났을 때.
도망치려는 고블린의 뒤통수를 깨트리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앞서 고블린 궁수가 둘이라고 듣긴 했으나, 전투 중 화살이 날아오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아무래도 기습하며 쏜 처음 두 발이 전부 궁수에게 명중한 모양.
“잘했다. 에르웬.”
“히힛.”
“그래도 궁수를 다 잡았으면 말은 해 줘라. 계속 신경 쓰려면 귀찮은 일이니.”
“마지막 건 맞았는지 확신이 안 서서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얘도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왠지 뿌듯하다.
“어서 챙길 것만 챙기고 이동하지.”
“네!”
이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석을 줍고 있는데 에르웬이 다급하게 날 불렀다.
“아저씨! 뭔가 신기한 게 있어요!”
얼른 가 봤더니, 허공에 주먹만 한 빛의 구슬이 둥둥 떠 있다.
그리고 난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정수군. 그것도 분명 고블린 궁수의.”
솔직히 보자마자 떨떠름했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저, 저, 정수요? 이, 이, 이게요?”
“그래. 확실하다.”
“어, 어, 어, 어떡하죠?”
얘의 반응만 봐도 알겠지만, 정수는 탐험가에게 있어 보물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정수야말로 [던전 앤 스톤]의 스킬 시스템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이, 이걸 먹으면 고블린이 되는 거예요?”
“그럴 리가. 고블린이 갖고 있던 능력 중 일부분이 생길 뿐이다.”
예를 들자면, 1층에서 냄새로 우리를 추적했던 놈처럼. 아마 그때 그 추적자는 ‘칼날늑대’의 정수를 흡수했던 거겠지.
“어떡하죠……?”
똑같은 질문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비율이 9:1이긴 하지만 쟤도 이건 욕심이 나나 보다.
“갖고 싶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주신다면은 뭐어…….”
주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지만, 왠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듯한 건 착각일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속 하나만 한다면 너에게 정수를 주겠다.”
‘고블린 궁수의 정수’는 바바리안인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물건이 아니다.
당장은 약간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흡수 가능한 정수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훗날 삭제하려면 괜히 큰돈만 나갈 터.
“…정말요?”
“그래.”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정수는 몬스터를 사냥 시 극히 낮은 확률로 드랍된다. 그런데 초행에 일반 고블린도 아니고 고블린 궁수의 정수가 나오다니?
초심자의 행운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운이 좋았다.
이제야 내 기구한 팔자가 좀 피려는 걸까?
“원래는 1층으로 내려가 말하려 했지만 지금 말하겠다. 에르웬—”
“어이, 너네들! 지금 뭔 개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제기랄,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에르웬에게 한 가지를 약속받으려는 차, 멀리서 외침이 들려온다.
“움직이지 마라!”
총 4명으로 이뤄진 인간 탐험가 파티.
그들이 멀리서 우릴 발견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힌다.
솔직히 말해, 그럼 그렇지 싶었다.
“아, 아저씨?”
이게 올바른 수순이다.
운이 좋았다고? 그럴 리가. 난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달랐다.
내게 있어 행운이란, 언제나 직접 쟁취해야지만 겨우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에르웬, 싸울 준비를 해라.”
바로 이렇게.
14화 귀환 (1)
에르웬이 긴장한 얼굴로 화살을 집어 든 순간.
나는 그녀를 앞으로 툭 밀었다.
“에?”
돌연 등이 떠밀려진 에르웬이 한 걸음을 툭 내디뎠고, 이 과정에서 허공에 떠 있던 정수와 살이 맞닿았다.
솨아아아아아-!
정수가 빛을 뿜어내며 에르웬의 몸속으로 휘감겨 들어간다.
“이런, 미친 새끼가!”
역시 저 새끼들 목적도 이거였군.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테!”
이내 네 명으로 이뤄진 탐험가 무리가 10m 거리 앞에 도착했다.
근데 이걸 어쩌냐.
이미 정수는 얘가 먹어 버렸는데.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며 위압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왜 너희 말을 들어야 하지?”
“그 정수는 우리 것이었다!”
에르웬에게 정수를 먹이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대충 그려진다.
아마 억지를 부리며 내놓으라 했겠지.
저 멀리서 우리가 화살로 잡은 거라거나, 뭐 이유야 붙이면 어떻게든 되니까.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넷과 둘.
수적 열세인 상황이지만 나는 도리어 강하게 대응했다.
소형견이 요란하게 짖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으니까.
사람은 짐승과 같아서 얕보이면 물어뜯긴다.
“…….”
상대 무리의 대표로 보이던 빨간 머리가 말없이 이를 악문다.
하기야, 지도 생각이란 걸 하겠지.
정수가 허공에 남아 있다면 모를까.
이미 주인이 정해졌는데, 굳이 우리들과 싸워 봤자 얻을 게 없다.
그러니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는 게 현명—
“…보상을 요구한다.”
징징거려 보기로 한 거냐.
눈앞에서 정수가 보였다가 사라지자, 얘도 아쉬운 마음이 컸나 보다.
내가 고려해 줄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가 획득한 정수를 우리가 챙겼는데 대체 무슨 보상을 말하는 거지?”
“증거가 있나? 방금 그 고블린은 우리가 사냥한 것이었다.”
‘그러는 너는 증거가 있냐?’라는 질문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미궁 속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힘을 가진 놈 말이 진실이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싸우고 싶다면 덤벼라. 나는 피하지 않는다.”
나는 여지없이 완고하게 대응했다.
덤빌 거면 덤비고, 말 거면 억지 부리지 말고 꺼지라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셋을 주지. 그전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아, 아저씨……?”
얘는 왜 분위기 파악을 못하니.
가만있으렴. 지금 강하게 나가니까 쟤네 다 잔뜩 쫄은 거 안 보여?
“셋.”
“둘.”
“물러가겠다.”
하나를 세기 전에 놈이 선택을 내렸다.
하긴, 나였어도 이만한 문신 떡대 바바리안이 숫자를 세고 있으면 저럴 거 같다.
진짜 자기 게 뺏긴 거였으면 억울한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복수하려 들었겠지만…….
그게 아니란 건 본인들이 더 잘 알 테니.
이내 놈들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갔나?”
“네. 그런 거 같아요.”
“포탈에 도착할 때까지 속도를 올리겠다. 앞장 서라.”
내 말에 에르웬은 군말 없이 달리는 수준으로 길을 뚫었다.
본인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유혈사태 없이 지나갔지만,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라는걸.
“놈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요. 아, 3시 방향에 고블린 무리가 있는데 어떡하죠?”
“무시한다.”
“네.”
원래는 느긋하게 고블린들을 사냥하며 돌아가려 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최대한 빨리 2층을 벗어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1층에 내려가서도 포탈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내 계획을 들은 에르웬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1층까지 따라올까요?”
“따라오는 게 아니다. 그저 행선지가 같을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간단한 추측이다.
놈들은 네 명이서 파티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이면 2층 초입부에서 활동하기엔 제법 넉넉한 숫자. 그런데 외곽이 아니라 초입부를 향해서 움직인다?
의도가 뻔하다.
“아마 놈들도 7일 차에 1층으로 내려가 도시로 돌아갈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이곳에서 마주쳤겠지.”
“아…….”
쉽게 말해 놈들은 우리처럼 2층에서 간만 보던 어중이떠중이란 얘기다.
그러니까 숫자가 2배나 되면서 나한테 겁먹고 도망쳤겠지.
어쩌면 제대로 된 파티도 아니고, 그저 1층에서 우연히 만나 급조된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구나…….”
내 이어진 말에 에르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아저씨는, 대단하시네요!”
…못했지 너?
“저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만 할게요!”
뭐,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는 놈들이 오히려 더 사고를 많이 치니까.
“아저씨, 고블린이에요!”
“피해 간다.”
“그치만, 이미 저쪽에서 우리를 발견한 거 같은데요? 지금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어요!”
“뭐?”
얘기를 듣자마자 이질감이 느껴진다.
4일 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블린이 우리를 먼저 발견한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에르웬의 감지 능력은 탁월했다.
아무리 그때와 달리 뛰어가며 이동하고 있다고 한들, 이게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다.
심지어 얘는 지금 정수까지 흡수한 상태 아닌가.
“일단 반대 방향으로 우회한다.”
“네!”
내 지시에 에르웬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휘이이익!
꺾은 방향으로부터 화살이 쏘아진다.
나는 발견과 동시 에르웬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켁!”
기도가 강하게 압박된 탓에 에르웬이 신음을 뱉었지만…….
잠시 목이 졸리는 게 나을 것이다.
목이 꿰뚫리는 것보단.
쾅!
에르웬을 끌어안으며 방패로 상체를 가린 즉시, 화살이 내 방패에 튕겨져 나간다.
빗겨맞았는데도 제법 묵직하다.
아까 그 석궁을 들고 있던 새낀가?
“제, 제가… 알아서 피, 피할 수…….”
에르웬이 켁켁거리면서 뭐라 말을 한다.
미안하지만 들어줄 시간은 없다.
“있었는…….”
“일단 뛰어라.”
나는 다시금 에르웬을 앞세우고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 혹시 또 화살이 날아오면 굳이 그렇게 잡아당기실 필요는…….”
“조용히 해라. 생각 중이니”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에르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뛰는 한편 생각을 이어 나갔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놈들이 고블린을 유인했다. 그리고 반대 방향에서 매복하며 우리를 쌈싸먹으려고 하는 중이다.
이대로 마냥 도망친다고 포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가능성을 점쳐 봤지만, 지극히 낮게 판단됐다.
저쪽엔 석궁수가 있다.
고블린들도 계속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운이 좋으면 살아서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적어도 그 운 좋은 놈이 나는 아니겠지.
“싸워야겠군.”
숨 몇 번 가다듬을 시간.
그 안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에르웬, 이능을 사용해라.”
“이능요?”
“정수의 힘을 쓰라는 거다.”
몬스터가 드랍하는 정수에는 각 개체가 지닌 특수 능력이 담겨있다.
예를 들자면,
[고블린 궁수]
민첩성+2 유연성+4 시각+6 후각+2 인지력+2 인식방해+6 명중률+8 독내성+4 집착+7
(P) 독화살 — 활류 무기를 사용 시, 독 데미지를 부여합니다.
(A) 도둑걸음 — 은신 상태를 얻습니다.
게임에서는 이렇게 정보가 표기됐다.
스탯 증가와 패시브 하나, 액티브 하나.
이 정보는 이쪽 세상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악령, 스타트 포인트 등, 지금까지 몇몇 변수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항상 게임과 일치했으니까.
“그, 그치만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데…….”
무리한 요구를 듣고서 당황하는 에르웬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됐군.”
“됐다니요?”
“은신 상태가 됐다는 뜻이다.”
뛰고 있는 에르웬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래봤자 미약한 정도라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지만…….
“멈춰 봐라.”
걸음을 멈춰세우자 은신 효과가 강해진다.
게임에서 캐릭터가 느릿느릿 움직이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가만히 선 채로 시간이 흐르자 반투명을 넘어 거의 투명해졌다.
윤곽선에서 명확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근접 거리가 아니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어두운 숲에서야.
“와아…….”
에르웬이 자기 몸을 보며 감탄사를 뱉는다.
신기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쟤랑은 포인트가 좀 다르긴 하겠다마는.
시동어나 그런 게 아니라, 의지에 반응해 스킬이 발동되는 메커니즘이구나.
아무튼, 이건 나중에 더 자세히 연구해 보자.
“에르웬. 이걸 받아라.”
“네?’
나는 에르웬에게 배낭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석궁수부터 쏴 죽여라. 절대 그전에 나서면 안 된다. 알겠나?”
“그게, 무슨 말씀…….”
“시간이 없다. 알아들은 걸로 알지.”
나는 할 말을 얼른 끝마치고서 곧장 뛰기 시작했다.
“잠깐만, 신호! 신호는 어떻게—!”
뒤에서 작게 소리치는 게 들려왔지만, 돌아가기엔 리크스가 많았다.
터벅.
원래 위치에서 약 30m가량을 이동하고서야 나는 멈춰 섰다.
애초에 멀리 갈 생각도 없었다.
이렇게 뛰다가 수풀 속에서 덫이라도 밟으면 큰일이니까.
“그륵그륵!”
뒤로 돌자, 전방 좌측에서 고블린들이 몰려드는 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씹새끼들은…….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첫 발을 막고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않는다.
이 새끼들이 하고 있을 생각이야 뻔하니까.
“그륵, 그륵!”
고블린과 싸우고 있으면 먼저 나타날 거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고블린을 유인한 것일 테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는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살폈다.
“그르륵!!”
열댓의 고블린 중 검사는 둘.
다행히 고블린 무리 중에 궁수는 없—
깡!
있구나.
방패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나는 고블린 무리들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이전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고블린 궁수는 물론이고, 인간 석궁수까지 날 노리고 있을 테니까.
깡!
약 10초 정도의 텀을 두고 한 번 더 화살이 날아든다.
이번에도 고블린 궁수의 것이다.
깡!
화살을 방패로 막아 낸 나는 시미터를 휘두르는 고블린 검사의 대갈통을 박살 냈다.
그 대가로, 다른 고블린에게 조각칼로 다리가 살짝 찔리긴 했지만…….
푸슉.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한다.
고블린의 숫자가 줄어들어야지만, 놈들도 조급함을 느끼고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퍽! 퍽! 퍽!
그야말로 바바리안에 빙의해서 고블린들을 때려잡고 있자니, 점차 부상이 늘어난다.
팔뚝, 허벅지, 옆구리 등등.
하나하나 살펴보면 중상은 아니지만 이만큼 쌓이니 무시할 수는 없다.
퍽!
독까지 돌기 시작했는지, 부상 부위들로부터 저릿한 감각이 퍼져 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수하고 총 7마리의 고블린을 해치웠을 때.
휘이이이잇!
화살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무려 두 개씩이나.
휘이이이잇!
방향도 달랐다.
하나는 고블린 궁수의 것이고, 하나는 석궁수의 것이겠지.
둘 다 막는 건 어렵다.
나는 측면에서 날아드는 석궁수의 화살을 방패로 막는 걸 선택했다.
쾅!
고블린 궁수와는 소리부터가 다른 묵직함.
과연, 이게 석궁의 위력인가?
그런 생각이 들던 차, 푹! 소리를 내며 고블린 화살이 왼쪽 팔꿈치에 박힌다.
“씨입.”
아프다.
뼈까지 닿았나? 아픈 것도 아픈 건데, 화살 한 발 맞았다고 팔이 아예 안 움직인다.
씨바, 이쪽은 어떻게든 어깨 보호대로 흘려내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구나.
툭.
나는 미련 없이 오른손에 쥔 망치를 버렸다.
그리고 못 쓰게 된 왼손에 쥐어진 방패를 들었다. 망치와 방패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무조건 방패 쪽이 좋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욱더.
퍽! 퍽! 퍽!
한 손에 쥔 방패로 셋만 남은 고블린을 후드려 패니, 일단 당장은 주변이 정리됐다.
고블린 궁수도 튀었는지 화살도 멈췄다.
상처투성이의 1라운드 승리긴 하지만 어쨌든 버텨 낸 셈인가?
나는 외쳤다.
“나와라! 씹새끼들아!”
내가 이 말을 고블린이 아니라 사람한테 할 줄은 몰랐는데.
하긴, 뭐 다를 것도 없나?
휘이이이이잇!
나오란 놈은 안 나오고 저 멀리서 화살이 쏘아진다.
인간 석궁수의 것이다.
예상했기에 막는 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쾅!
씨바, 뭐야.
정통으로 맞았는지 화살이 철판을 꿰뚫고 촉을 드러낸다.
잘못하면 이쪽 손도 씹창이 나겠는데?
방패로 상체 쪽을 가리며 수풀 너머를 경게하자 머지않아 인기척이 들려왔다.
“바바리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명이었다.
리더로 추정되는 빨간 머리.
일본도 같은 외날 검을 쥔 사무라이.
한 손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멀대.
석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역시 너희들이었군.”
“그래, 우리들이다.”
어떻게 고블린을 유인한 거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더 깔보일 게 분명하니까.
“덤벼라.”
“역시 바바리안이라는 건가? 혼자 그 많은 고블린을 상대하고서도 기운이 넘치는군. 그 요정년은 어디 있지?”
말이 많다 싶더니, 역시 이게 목적이었구나.
“배낭도 넘겨준 거 같은데, 아픈 꼴을 보기 싫다면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해주면 순순히 보내 주겠다니, 누구를 호구 병신으로 아나.
“미친놈.”
실실 쪼개는 날 보며 리더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어딘가 질린 듯한 표정.
아무래도 저놈 눈엔 내 모습이 정석적인 바바리안처럼 보인 모양이다.
“일단 제압부터 하고 천천히 물어봐 주지.”
리더가 동료들과 눈빛 교환을 하더니 다 같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온다.
생포라…….
듣던 중에 반가운 이야기다.
하기야, 나 하나 죽여 봤자 수지가 안 맞겠지.
굳이 기습을 한 것엔 여러 이유가 있을 테니까.
우리가 7일간 모은 마석, 착용한 장비, 어여쁜 외모를 소유한 에르웬, 그리고 코앞에서 목도한 남의 행운에 배가 더 안 아파도 된다는 것까지.
새삼 느낀다.
“다들 방심치 말고, 대형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생각해라.”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효율충이 너무 많구나.
뭐,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자란 것이겠지만.
스륵.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에 화살이 박히고, 이젠 마비독까지 돌기 시작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왼손을, 억지로 머리 위까지 올려세웠다.
그리고…….
“무슨 짓이지?”
가운데 중지 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렸다.
휘이이이이잇!
이 세계에서 살아온 그 누가 봐도 특이한 신호라고 여길 수 있게끔.
푹-!
이내 섬찟한 소리가 숲가에 울려 퍼졌다.
15화 귀환 (2)
“페르시? 페르시!”
리더가 다급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내가 에르웬에게 내린 지시는, 무조건 석궁수부터 쏴 죽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대체 뭔 짓을 했지?”
그제야 리더가 내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서도 스스로 예상가는 게 있는지, 내가 아닌 뒤쪽을 경계했다.
이는 아주 큰 실수였다.
난 답을 정해 놓고 질문하는 새끼를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스매쉬!
리더의 시선이 잠시 수풀로 향하던 찰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대쉬하며 방패를 휘둘렀다.
후웅!
애석하게도, 손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피하다니, 고블린이었으면 영락없이 그걸로 세상의 빛이 되어 사라졌을 텐데.
“일리스! 지금이다!”
리더가 호명하자 사무라이가 내게 대쉬하더니, 절도 있는 자세로 횡베기를 시전했다.
카칵!
방패에서 불똥이 튀는 소리가 난다.
미친, 뭐지 이 충격은? 하마터면 방패를 놓칠 뻔했다.
다만 놀란 것과는 별개로, 나는 도리어 셋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선을 분산시켜 에르웬에게 보다 확실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후웅!
또 한 번의 스매쉬가 빗나간다.
꼴에 2층 탐험가라 그런가?
이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처음으로 방패의 리치가 짧은 게 유난히 거슬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는 거리를 좁히며 호전적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휘이이이잇!
드디어 에르웬의 지원 사격이 시작된 것.
다만 쏘아진 화살은 미간도 목도, 다리나 팔에도 맞지 않았다. 검과 방패를 소지한 멀대 새끼가 방패로 막아 낸 탓이다.
“화살은 내가 막겠다! 신경 쓰지 말고 바바리안을 상대해라!”
어쩐지 지 혼자 안 덤비더라니.
아예 화살만 전담하기로 한 건가?
역시 인간은 고블린에 비해 너무 까다롭다.
쾅!
사무라이의 일격을 방패로 받아내던 차, 리더가 얍삽하게 검을 휘둘러 내 왼팔을 노려왔다.
서걱-!
다행히 제때 반응해 깊진 않진 않다.
베이긴 했지만 이미 망가진 팔이라 그다지 의미도 없고, 마비독까지 돌고 있어서 크게 아프지도 않다.
“이런, 괴물 같은…….”
팔이 베이고도 움찔하지도 않는 내 모습에 리더가 중얼거렸다.
씨바, 어디서 내 핑계야. 지가 시원찮은걸.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방패를 밀어내며 힘으로 사무라이를 튕겨 냈다.
그때 다시 한번 지원 사격이 쏘아졌다.
휘이이이이잇!
그새 저격 위치를 바꾸기라도 했는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으나 멀대도 만만치 않았다.
타악!
멀대가 다시 한번 방패로 화살을 막아낸다.
지가 무슨 외야수야? 다른 새낄 노린 걸 굳이 지가 몸까지 던져 가며 막는다.
쉽사리 진전될 기미가 없는 전황에 속이 타기 시작하려던 차.
화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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