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árbaro 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정윤강
D 버전으로도 못 깼는데, 이걸 현실에서 깨라고?
어쩌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조차도 쉽지는 않겠지만.
* * *
1화 서장
어려서부터 게임이 좋았다.
계기는 간단했다.
병원에만 있으니 자연스레 할 게 게임밖에 없었고, 점차 시간이 지나다 보니 게임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뭐든 오래 하면 식상하고 질리는 법.
“아, 씹… AI 판단 실화냐? 왜 거기서 걔한테 힐을 줘?”
언제부턴가 무슨 게임을 하던 이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AOS, RPG, FPS 등 장르 문제가 아니었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게임들은 전부 쓰레기 같았다. 스토리나 세계관은 판에 박힌 듯 비슷했고, 시스템엔 깊이가 없었다.
좀 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게임을 원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게 [던전 앤 스톤]이었다.
타다닷. 딸각, 딸깍.
장르는 싱글 RPG.
해외 인디 게임이었다.
한글 지원은 없었고,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2D 픽셀 그래픽을 사용했다.
솔직히 말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무료였기에 일단 해 보잔 마음으로 게임을 설치했고, 머지않아 나는 이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와, 신관 새끼 때매 다 와서 뒈질 뻔했네.”
여러모로 특이한 게임이었다.
캐릭터가 사망 시 처음부터 키워야 했다.
게임 진행에 NPC 동료가 필수였으며, 종스크롤 게임인 주제에 자유도는 또 엄청나게 높았다.
스킬 시스템이나 세계관도 매력적이었고, 스토리는 영문으로 읽었음에도 흥미로웠다.
결정적으로, 이 게임엔 알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타다닷, 타다다닥.
당시 막 지하철로 배정받은 사회복무요원이었던 나는 본격적으로 [던전 앤 스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다.
이 게임에서의 전투는 단순히 HP/MP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풀피에서도 판단 미스 한 번이면 세 달 동안 공들여 키운 캐릭터가 사라졌다.
“…가 보자.”
2년이 넘도록 게임의 중반부도 가지 못한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공략법을 검색했다.
한국 포털엔 검색도 되지 않아 영문을 번역하며 읽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크게 의미 있진 않았다.
해외에도 유저 수가 많지 않아 관련 글 자체가 적었고 영양가도 없었다.
한두 달 해 보고 망겜이라 하는 그들보단, 2년간 부딪치며 진지하게 이 게임을 탐구했던 내 쪽이 훨씬 더 이해도가 높았다.
따라서 공략법을 찾는 것도 그만뒀다.
“위로 세 번, 좌로 네 번, 아래로 한 번에, 좌로 두 번, 다시 위 여섯에, 우로 네 번. 마지막에 함정까지 피해 주고… 오케이.”
어차피 즐길 만한 게임을 찾아 헤매다 겨우 발견한 게 이것 아니던가? 얼마가 걸리던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후우.”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Gate of the Abyss」
지금 내 캐릭터는 최종 보스방과 이어진 포탈 앞에 서 있다.
물론 엔딩을 보는 건 앞으로 몇 번은 더 이곳에 온 다음이 될 것이다. 고작 한 번의 트라이로 보스를 잡을 수 있을 만한 게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경직된 손끝으로부터 지금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가 느껴진다.
“최종 보스라…….”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9년이 걸렸다.
20대 시절 전부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사회복무요원 소집 해제일 때도,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가 복학 신청을 했던 날도, 졸업 후 원하는 직장의 합격 문자를 받았던 날도.
나는 항상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해 왔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캐릭터를 조작해 포탈에 다가서자 입장하겠냐는 물음이 뜬다.
당연히 YES를 눌렀다.
근데 최종 보스 방이라 그런지 뭔가 있어 보이는 메시지가 한 번 더 출력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입장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 입장에선 불필요한 연출이었다.
그럼 여기서 안 들어 가겠냐?
「예 / 아니오」
예를 누르자 화면이 로딩창으로 넘어간다.
검게 변한 모니터를 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놈은 패턴이 몇 개나 될까? 속성은? 즉사기는 당연히 갖고 있을 테고. 음, 첫 트라이에 성공할 생각은 버리고 최대한 정보를 모으자. 어쩌면 육성 방식이나 조합을 싹 갈아엎어야 할지 모르니까.
흥분과 기대로 자극된 뇌는 오직 최종 보스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당신은 심연에 도달했습니다.」
「튜토리얼 완료.」
튜토리얼 완료?
아니, 그것보다 왜 한글이 나오지? [던전 앤 스톤]은 영문만 지원하던 게 아니었나?
「전송을 시작합니다.」
위화감을 감지함과 동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발원지가 모니터라 생각도 못 할 만큼 강렬한 빛.
“악, 씨발! 내 눈!”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한다.
귀에서는 이명이, 피부에선 정체 모를 열기가 전해졌다. 정신은 마취주사를 맞은 듯 빠르게 아득해졌다.
평소 위기 대처 능력만큼은 자신 있던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번뜩-!
빛이 한층 더 강해짐을 느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게임 속 바바리안이 되어 있었다.
2화 튜토리얼 (1)
눈을 감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만약, 이게 아주아주 불친절한 게임의 도입부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지?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는 것.’
후,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다.
스스로 정한 1차 과제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떠 다시금 주변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이전과 변한 건 없었다.
“…….”
내가 숲속 공터에 있다는 것도.
어두운 주변을 밝히는 것이 LED 가로등이 아니라 일렁이는 횃불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동서남북 어딜 보나 근육질의 야만인들이 득실거린단 사실까지도…….
“축하한다! 어린 전사들이여!”
씨발,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오밤중에 옹기종기 모여서 뭘 하는 중인진 모르겠지만, 표정들이 꽤나 경건하다.
가운데 저 아저씨는 부족장 같은 건가?
뭐, 그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오늘부로 너희들은 성지를 떠나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부족장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눈을 감았다.
의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가 진단을 해 보자면, 지금 내겐 블랙아웃 증상이 있다.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 스스로에게 맞는 무기를 골라 보아라!”
그러니까 한번 해 보자.
방금 전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뇌에 문제가 생긴 상황은 아닌지, 차근차근 되짚자 곧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최종 보스 방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고, 흥분을 억누르며 포탈을 작동시켰다. 그때 갑자기 튜토리얼 완료니, 전송을 시작하니 뭐니 하는 문구가 뜨더니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이다.
어찌 된 게 처음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은 나와라!”
일단 몸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픈 감각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숙인 나는 흠칫 굳었다.
…이건 또 뭐지?
“양손도끼라! 훌륭하다!”
내려다 본 손이 우악스러울 정도로 크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내친김에 다른 곳도 확인했더니 가관이다.
상의 탈의는 물론이고 우락부락한 근육 위로 온갖 형태의 문신이 그려져 있다.
…어쩐지, 다들 한 덩치 해 보이는데 눈높이가 맞더라니.
일단 나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아니, 사실 정리랄 것도 없었다.
어째선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야만인이 되어 있었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이여!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납치, 몰래카메라, 심리 실험 그 외 등등등.
이와 비슷한 가능성들을 즉시 머릿속에서 지운다. 상황이 요지경인데 희망 회로를 돌리며 억지로 근거를 끼워 맞추는 건 미련할 테니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생산적이다.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과학이나 현대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다.
이 커다란 몸뚱이 말고도 근거는 차고 넘친다.
“다음!”
첫째로 저 야만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니다.
평생 어떤 미디어에서도 접한 적 없는 언어.
문제는 그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머릿속에 지식이 새겨지기라도 한 듯이.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는 나와라!”
두 번째로, 나는 이 상황이 익숙하다.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검을 골랐구나! 영민한 너와 잘 맞는 선택이다!”
어린 야만인들이 차례로 무기를 선택한단 것.
공통점은 딱 그것뿐이지만…….
이는 [던전 앤 스톤]의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정확히는 여러 종족 중 ‘바바리안’을 선택했을 때, 이런 식으로 게임이 시작됐다.
근데 이게 정말 우연이라고?
의문의 빛이 나를 집어삼킬 때 하고 있던 게임도 [던전 앤 스톤]이었고, 심지어 플레이하던 메인 캐릭터도 ‘바바리안’이었는데?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여! 이로써 너는 한 사람의 전사가 되었다. ‘라프도니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마!”
‘이런 미친…….’
남은 근거를 정리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라프도니아.
부족장이 방금 전에 언급한 이 고유명사 하나 덕분에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나는 이제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
내가 10년 가까이 플레이해 온 게임 속 세상.
“더, 던전 앤 스톤.”
어, 얘는 또 뭐야. 뭔데 내 말을 대신해.
곁눈질로 옆자리의 야만인을 확인한 나는 흠칫 굳었다. 척 보기에도 그는 다른 야만인들과는 달랐다.
“뭐, 뭐야 이게 내가 왜 여기에…….”
숨결은 거칠며 눈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던전 앤 스톤]을 아는 것도 그렇고. 혹시 얘도 나랑 똑같은 상황인 건가?
한번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었다.
“방금 입을 연 것은 누구냐!”
고막이 얼얼할 만큼 큰 목소리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언제 왔는지는 몰라도, 나를 내려다보는 부족장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확 들었으니까.
“네놈이냐?”
질문을 받는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옆자리의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나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 신속한 행동.
이에 부족장도 추궁 대신 옆자리의 야만인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미안, 근데 네가 맞긴 하잖아. 입 연 거.
“네놈이냐?”
“예?”
“방금 중얼거린 게 네놈이냐고 물었다.”
이제야 느낀 것인데, 부족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암만 봐도 단지 떠든 것 때문은 아닌 듯한데…….
“아, 던전 앤 스톤 말입니까? 근데… 그게 왜?”
녀석은 아직 이 분위기를 눈치 못 챈 듯하다.
“네놈이었구나…….”
이를 악 문 부족장의 눈에 짧게나마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간다.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낀 나는 무의식중에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거 이벤트 같은 거죠? 아, 혹시 제가 너무 빨리 눈치챈 게 문제가 됐—”
뭐가 지나갔는지, 내 눈으론 볼 수도 없었다.
무언가 번뜩였고, 이후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
그게 사건의 전부였다.
찰나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머리가 데구루루 구른다.
비현실적인 것 같은 잔혹한 광경.
눈은 방금 본 그대로의 정보를 뇌로 전했다.
“…….”
사람 목이 눈앞에서 잘라져 나갔다. 뼈가 보이고 근육의 단면이 보인다. 피와 살점과 함께 하얀 무언가가 얼굴에 튄다. 뭐지 이건? 지방인가?
음, 잘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영화나 만화에서 봤던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오는 일도, 전부 꿈일 거라며 멘탈이 나가지는 일도 없었다.
피슈우우웃!
사람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지는 걸 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왜, 부족장이 얘를 죽인 거지?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영혼에 ‘악령’이 깃들었다. 어린 전사들은 방금 악령이 뱉은 말들은 모두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라!”
부족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정보가 조합된다.
정보1, 나는 악령이다.
정보2, 이 사실이 들키면 죽는다.
정보3, 자칫했으면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사람 목이 잘려 나갔을 때도 멀쩡하던 등골에 오한이 일었다.
“불칸! 그대는 어서 시신과 함께 이 사실을 신전에 알리도록 하라!”
“성인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행하겠다!”
한바탕 피가 흘렀지만 성인식은 계속됐다.
여기선 이런 일이 흔한지, 어딜 봐도 눈 하나 깜빡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주변의 어린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워낙 불친절한 게임을 많이 해 봐서일까?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악령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치십시오.
친절한 게임이라면 이런 메시지가 떴겠지.
갱신된 과제를 뇌리에 새기며, 나는 억지로 몸의 떨림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태도를 가이드라인 삼아 표정을 연기했다.
누구도 내게서 위화감을 느껴선 안 된다.
이들에게 있어 나는 주인의 몸을 빼앗은 ‘악령’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듯하니까.
“다음!”
사고가 그곳에 이어졌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
“케닉의 넷째 아들 세룸은 나와라!”
나는 내 이름을 모른다.
이것은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이름이 불렸는데도 혼자 가만히 있으면 분명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다음!”
물론, 잘못 들었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분명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상하단 이유로 부족장이 질문을 던져 온다면?
난 무엇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
불안한 감정이 뇌의 호르몬을 자극했을까.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호명되면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지 않나?’라는 나약한 생각.
“다음!”
스스로가 한심했다.
운에 기댄다고?
평생 단 한 번도 운이 좋았던 적이 없던 주제에? 게임을 하다 이런 곳에 끌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 같은 놈이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선,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계획이 필요하다.
“다음!”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턱은 정면을 향한 채 눈으론 다른 이들의 표정, 움직임, 습관 등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고 있자니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다음!”
물론, 이 방법도 100%를 보장하진 못한다.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나는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이게 가장 살 가능성이 높은 길이라고.
“다음!”
“다음!”
“다음!”
이후로도 호명은 이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약 2초를 셌다.
그 짓을 여덟 번 반복했을 때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나와라!”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호명이 되고서 2초가 지났음에도 누구 하나 발을 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나는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당당히 어깨를 편 채 부족장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걸음을 내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게 내 이름이란 확신은 없다.
터벅.
만약 내 판단이 틀렸다면 수상하다며 저 미친 부족장이 대뜸 불러 세울 것이다.
그리고 묻겠지, 너는 엄마가 누구니?
나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터벅.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호흡을 고르며 계속해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간단한 이유다.
이게 가장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으니까.
“어린 전사여, 원하는 무기를 택하거라!”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날 보는 부족장의 시선에선 어떠한 의심도 묻어나지 않았다.
다른 어린 전사를 대할 때처럼의 온화한 눈빛.
나는 묘한 흥분을 억누르며 숨을 다듬었다.
살았다.
* * *
눈을 뜨고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누군가에겐 이런 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부정하는 건 의미 없다.
꿈같은 게 아니다.
‘비요른 얀델.’
앞으로 나는 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 이름뿐만이 아니라 완벽하게 이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일진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은 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알지 못하니까.
뭐, 게임의 클리어 조건을 채우면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다마는.
이 또한 아직 단정 짓기엔 이르다.
솔직히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아직 2D 버전으로도 못 깨봤는데, 이걸 현실에서 어떻게 깨?
어쩌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
그런 의미에서 무기 선택은 중요했다.
질질 끌면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신중히 무기를 하나씩 살폈다.
한손 검, 양손 대검, 메이스, 쇠곤봉, 창, 작살, 양손 도끼, 도리깨, 대형 망치 등등등.
활, 지팡이 류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이 야만인 새끼들에겐 힐러, 마법사, 궁수처럼 날로 먹는 직업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종족적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어서 무기를 택하라!”
선택의 시간이 길어지자 부족장도 슬슬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바바리안은 선천적으로 마법 쪽 재능이 전무한 대신 강력한 신체 능력을 지녔다.
그런 이유로 나도 바바리안을 키울 땐 항상 근접 무기를 쥐어 주고 전위에 세우는 식으로 플레이했다.
호기심에 활바바도 키워 봤지만 별로였다.
언제나 그들의 진가는 근접 전투에서 발휘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것.’
나는 고심 끝에 무기를 택했다.
“흐음.”
선택이 끝날 때마다 감탄과 칭찬을 곁들이던 부족장이 처음으로 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나는 그 누구도 고르지 않은 무기를 택했다.
* * *
그 시각, 섬광이 잦아든 어두운 방.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캐릭터 정보 및 일지가 기록되며 관리자에게 전송됩니다.」
꺼졌던 본체의 팬이 돌기 시작하며, 모니터에서 새어 나온 빛이 텅 빈 방 안을 비춘다.
다만 부팅은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삐비빅, 삐빅, 삑—
검은색 배경의 DOS 화면에 멈춰, 오류라도 난 것처럼 비프음에 맞춰 입력되는 타이핑들.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2 상승합니…….」
「…….」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실시간으로 적어 내리고 있듯, 그 소리들만이 주인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한없이, 계속해서.
「비요른 얀델」
레벨: 1
육체: 25 / 정신: 35 / 이능: 1
아이템 레벨: 24 (New +24)
종합 전투 지수: 67 (New+6)
3화 튜토리얼 (2)
바바리안Barbarian.
직역하면 ‘야만인’을 뜻하는 이 종족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내가 고른 것은 대검이었다.
그야, 멋있으니까.
남자라면, 양손에 검을 쥐고 적진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고픈 욕구가 있다.
‘문제는, 너무 잘 죽어 버린단 거였지만.’
바바리안이란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나는 연구를 시작했다. 바바리안을 어떻게 키우면 생존력까지 챙길 수 있을까?
여러 시도를 했지만, 여전히 바바리안은 너무 쉽게 죽었다. 생존력을 아무리 챙겨도 광전사 같은 존재가 될 뿐이었다.
매 전투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지라 안정성이 떨어졌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얘를 꼭 딜러로 써야 하나?’
바바리안은 선택 가능한 종족들 중에 생명력이 가장 높은 데다가, 근력 기댓값도 높아서 아다만티움 장비도 착용이 가능하다.
비록 사기적인 특수 능력을 지닌 드워프만큼은 아니더라도, 탱커로서의 기본 소양은 갖추고 있는 셈.
뭐, 그와 별개로 탱커인 바바리안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지만…….
그간 연구한 게 아까워 한번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육성법을 만든 뒤.
‘뭐야, 이 사기캐는.’
나는 미련 없이 원래 탱커로 쓰던 드워프를 버렸다.
호쾌한 전투를 펼치지 못하면 어떤가.
난 언제나 효율을 중시했고, 공략에 도움이 된다면 게이머로서의 취향 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인간었다.
지금 내린 이 결정처럼.
터벅.
무기 선택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다른 야만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뭘 봐, 방패바바 처음 봐?
나는 야만인답게 전혀 기죽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내 자리로 돌아와 섰다.
이번엔 딱히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나는 내 결정에 미련 따위 없다.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 시작 무기 중에서도 방패가 되팔았을 때 가장 비싸다.
둘, 내가 당장 날붙이를 쥐어 봤자 제대로 쓰지도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 최종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건 방패바바다.
오늘의 나는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너는 전사가 되었다!”
무기를 고르고 자리로 돌아서니 이제야 좀 시간이 주어졌다.
다른 야만인들이 성인식을 치르는 동안 나는 현사태의 원인을 추측해보기로 했다. 사실 진작에 짚고 넘어가야 했을 일이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그런 걸 생각하다간 내가 뒈질 판이었는데.
「당신은 심연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라도 정리해 보자.
나는 최종 보스 방에 도달했다.
아마 그것이 트리거였을 확률이 높다.
‘잠깐만, 그럼 아까 죽은 걔는 뭐지? 걔도 최종 보스 방까지 왔다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사람은 많고 그중 나처럼 별난 놈도 있으니.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자.
「튜토리얼 완료.」
나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알려 줄 건 다 알려 줬으니, 이 지식을 이용해서 잘 살아남아 보라고.
누군진 몰라도 악독한 새끼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살아남길 바랐으면 ‘악령’인지 뭔지에 대한 설정도 넣어 줬어야지.
오자마자 뒈질 뻔했잖아. 개새끼야.
“후우…….”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와서인가? 평소와 달리 감정 조절이 되지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쯤에서 상념을 끝냈다.
괜히 흥분했다간 일을 그르칠 지도 모르는 데다가, 애초에 원인을 곱씹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나답지 않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
이럴 시간에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생각하는 게 생산적이다.
그러니까…….
그래,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자.
‘살아남는 것.’
* * *
성인식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숲길을 걷고 있다.
앞에는 부족장이, 뒤에는 어린 야만인들이 있다.
모두 소풍이라도 가듯 즐거워 보인다.
허나 나는 이들처럼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
무성한 수풀을 지나 도착한 곳은 30m는 됨직한 성벽 앞이었다.
“개문하라!”
투박한 기계장치 소리를 내며 성문이 열린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
그러나 어린 야만인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묘한 침묵 속에서 마침내 성문 너머로 회색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프도니아…….”
아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이들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비된 도로와 석재 건축물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탑.
로딩 창 일러스트로만 보았던 그 모습을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제기랄.
“전사들아!”
문이 열리자 부족장이 뒤돌며 외쳤다.
떠나보내기 전에 뭔가 좋은 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도 싶었지만…….
“떠나라! 저곳에 너희들의 운명이 있다!”
야만인들에게 지루한 연설은 필요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막 성인이 된 야만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도시 속으로 달려 나갔다. 내키진 않지만 나도 소리를 지르며 뒤를 따랐다.
저기 불 꺼진 건물들 안에 곤히 자고 있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야만인인데.
쿠웅-!
뒤에서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신경 쓰는 야만인은 한 명도 없었다.
잔뜩 흥분한 야만인들은 한참을 더 달려 나간 후에야 겨우 진정하고 속도를 낮췄고, 그제야 나도 차분히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현재 내게는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
“…….”
맞이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내가 가장 즐겁게 플레이하던 게임 속 세상의 일원이 되었다는 모종의 기대감.
조금 우습긴 하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고 다짐한 게 바로 전인데 이따위 감정이 피어나다니.
…역시 나는 정상이 아닌 거 같다.
이 야만인 새끼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정지!”
선두에서 달리던 리더 격 야만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충격적인 고백에 야만인들이 웅성였다.
“파눈의 세 번째 아들 카락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그에겐 이끄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책임을 져야 한다!”
지랄. 지들도 좋다고 따라가던 주제에.
이게 야만인의 사회인가? 비정하다.
“알겠다. 그만해라.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이끄는 자에서 내려가겠다.”
지속된 원성에 파눈의 두세 번째 아들인 카락이 푹 고개를 숙이며 무리로 돌아왔다.
차대 리더로 추대된 이는 여자 바바리안이었다.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현명한 아이나르라면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 수 있다!”
여러 기대 어린 말들에 여자 바바리안은 기쁜 얼굴로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대 리더와 같은 수순을 밟는 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놀랍게도, 둘은 하는 말마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했다.
“그럴 수가! 우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미궁까지 가야만 한다!”
“아이나르에겐 이끄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맞다!”
혼란에 빠진 야만인들은 3대 리더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테트란의 두 번째 아들 진이 좋을 거 같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새끼들은 뇌가 없나?
그 누가 앞장을 서든지 간에, 목적지엔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정말로 깨닫지 못한 건가?
어쩌면 이러다 내 차례까지 올지도.
“…….”
조용히 뒤로 빠져 2대 리더에게 접근했다.
2m에 살짝 못 미치는 거구를 소유한 그녀는 낙심한 표정으로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너도 날 탓하러 온 것인가?”
그럴 리가.
내가 보기엔 전부 똑같은 놈들이었다.
고개를 내젓자 여자 바바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위로라면 필요 없다.”
“아니다. 나는 길을 찾을 방법을 알려 주러 왔다.”
“…그게 정말인가? 대체 어떻게?”
나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냥 저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논리적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설명했다.
한밤중의 도시.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들엔 전부 불이 꺼져 있다. 하지만 야심한 시각이라기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전부 일상복이 아니라 무장을 한 상태다.
그런 이들이 갈 곳이 어디겠는가?
“확실히. 이제 보니 그런 것 같다. 한번 해 보겠다.”
여자 바바리안이 무리로 돌아가 ‘길을 알아냈다!’라며 소리쳤고, 이에 야만인들도 3대 리더를 뽑는 걸 멈추고 환호를 내질렀다.
“역시 아이나르다!”
“현명한 여전사!”
어쨌거나, 다시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에 무장한 이들이 늘어났다.
어느덧 저 멀리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빛무리도 보이기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으면 적어도 길은 잃지 않겠지.
“미궁이다! 미궁이 보인다!”
“신성한 전투의 차원!”
나는 다시금 끊겼던 생각을 이어 나갔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은 하나, 과연 미궁에 들어가는 게 옳은 판단인가다.
“느껴진다! 미궁이 내 영혼을 이끌고 있다!”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야만인들은 내가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럼 난 미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피 흘려 괴물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직까지 이 고민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도망치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겠지.’
[던전 앤 스톤]엔 세금 시스템이 있다.
20세부터 모든 도시민들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며, 세금을 내지 못할 시 사형에 처한다.
이것만 들으면 뭔 망겜인가 싶지만, 세계관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벌써부터 고민할 문제는 아니겠다마는.
“아이나르! 속도를 올리자!”
“우오오오오오!!”
아무튼, 돈은 벌어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이 꼭 미궁에 들어가 괴물들과 싸우는 것일 필요는 없다.
하다못해 주점에서 일을 하더라도 당장 먹고, 자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가 바바리안만 아니라면 말이다.
게임 시작부터 무기를 주는 건 바바리안이 유일하다.
무척이나 간단한 이유다.
[바바리안? 미안하군. 방금 사람이 구해져서.]
[저리 안 가? 바바리안한테 시킬 일은 없어! 이번엔 또 뭘 부셔먹으려고!]
바바리안은 평범한 일을 할 수 없다.
게임 내 설정상 미궁에서 괴물과 싸우는 것 말고는 밥벌이해 먹을 수단 자체가 막혀 있다.
뭐, 실제로는 어떨지 미지수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일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무리에서 이탈하기에는 한 가지가 걸린다.
“폐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미궁은 게임 시간으로 한 달에 한 번 열렸다.
즉, 이번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는 한 달간 이 도시에서 버텨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일자리를 못 구하면?
바바리안이란 이유로 어느 누구도 채용을 안 해 주면?
글쎄, 미래가 암울해진다.
일단 일주일은 부족장이 준 식량으로 버틴다 해도, 그다음은 음식 쓰레기나 주워 먹으며 연명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전에 굶어죽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시일을 버텨 내더라도 내 몸뚱이는 지금과 전혀 다르리란 사실이다.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
“아니다! 내가 먼저다!”
굶주림, 추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의 수면.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육체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들어갈 거라면 컨디션이 가장 좋은 지금 들어가는 게 합리적이다.
‘문제는 그게 내 명줄만 단축할 수도 있단 거지만.’
고민이 깊어지던 때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누가 내 어깨를 잡았다.
확인해 보니 아까 그 여자 바바리안이다.
분명 이름이…….
“프넬린의 세 번째 딸 아이나르.”
“두 번째 딸이다.”
아무튼, 그래서 얘가 나한텐 무슨 용무지?
“이미 다른 전사들은 모두 미궁에 들어갔다. 아직 들어가지 않은 건 너와 나뿐이다.”
“아.”
어쩐지 조용하더라.
확인해 보니 다른 야만인들은 물론이고 광장에 남은 사람 자체가 별로 없다. 아이나르는 2대 리더로서 내가 가만히 있자 챙겨주러 온 모양.
“서둘러야 한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시간이 얼마 없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저 멀리서도 강렬한 빛을 내뿜던 포탈은 어느덧 눈에 띄게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폐쇄까지 5분 남았습니다!”
때마침 안내원이 한 번 더 남은 시간을 알려 줬다.
5분이라, 생각보다 빠듯하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하긴 하겠는데…….
“먼저 들어가라. 바로 뒤따라 들어가겠다.”
“알겠다.”
아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포탈을 향했고, 이에 따라 내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다.
자,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극한의 효율충으로서 뭐든 빨리빨리를 선호했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다.
게임과 달리 실제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치려던 차.
갑자기 잘 걸어가던 아이나르가 휙 뒤돌았다.
“아까는 고마웠다.”
“…고마워할 것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엄마 이름만 아니라면 뭐든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나르가 100% 진심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너처럼 현명해질 수 있나? 너처럼 똑똑한 바바리안은 살면서 처음 봤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떻게 해야 똑똑해질 수 있냐고? 솔직히 그냥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지만…….
아니, 내가 이걸 왜 고민하고 있는 거지?
그냥 대충 대답해 주고 얼른 보내자.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흐음, 그렇군!”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이나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금 의외인 말을 했다.
“조언해 줘서 고맙다. 만약 미궁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보답하도록 하겠다.”
살아 돌아온다면이라니?
바바리안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도 이상하게만 들린다.
그래서 나답지 않게 불필요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너는 죽는 게 두려운 건가?”
“당연하지 않나? 죽는 건 당연히 두렵다. 아마 다른 전사들도 그럴 것이다. 내색은 않겠지만.”
그런가?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와닿지 않는다.
게임 속에서의 바바리안들은 공포를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고.
내가 말이 없자 아이나르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들은 전사로 태어났다. 싸우지 못하면 죽는다.”
말투는 서툴고 딱딱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내가 그랬듯, 이들 역시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바바리안으로 태어났으니까.
미궁에서 괴물을 잡아 죽이지 못하면,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어려서부터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 겨우 그뿐이었다.
이들이 야만인처럼 보였던 것은.
“살아서 보자. 얀델의 아들 비요른.”
이내 아이나르가 포탈에 들어섰다.
“폐쇄까지 1분 남았습니다!”
이제 나를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최종 보스 방에 들어갈 때 떠올랐던 문구처럼, 선택지는 두 가지다.
「예 / 아니오」
왠지 복잡했던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그래, 차라리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자.
게임을 할 때의 난 언제나 목표를 위한 효율 중시 플레이를 해 왔다.
행동하기 전에 가능성부터 따졌고, 항상 그다음의 다음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당장 이득을 봐도 결과적으로 손해라고 판단이 서면 ‘아니오’를.
그 반대라면 ‘예’를 택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곧 게이트가 폐쇄됩니다! 물러서십시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부족장이 내 이름을 호명했을 때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이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평생 병약하게 살아왔던 내게는 흔한 주먹다짐 경험도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괴물이라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 온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지금의 내겐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바바리안의 육체가 있다.
수천 번 캐릭터를 육성하며 얻은 지식이 있다.
무엇보다 살아남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그러니까, 할 수밖에 없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고르지 않을 끔직한 고행이 예정된 선택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1층 수정 동굴에 입장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렸으니까.
4화 튜토리얼 (3)
[던전 앤 스톤]에 한해서 나는 전문가다.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무슨 습성을 가졌으며 약점은 뭔지, 딱히 떠올리지 않아도 줄줄이 읊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나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바바리안의 육체와 내 지식이 합쳐지면 미궁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적어도,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하…….”
미궁에 들어오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미래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는 지금 누가 눈에 안대를 채워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래 봤자 별 차이가 없을 테니까.
“씨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야만인들도 전부 무기 하나만 달랑 들고 있어서 나도 이 부분에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1층에선 횃불이 딱히 필요 없어야 한다.
벽에 붙은 수정들이 광원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1층에도 암흑지대가 있긴 하지만, 2층으로 이어진 최외곽부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분뿐—
‘아, 설마 내가 지금 거기 떨어진 건가?’
나는 빠르게 가설을 세웠다.
미궁에 들어섰을 때 시작 위치는 랜덤이다.
물론, 말이 랜덤이지 이딴 곳에 내던져지는 일은 없다. 외곽부에서 시작하더라도 늘 근처엔 빛나는 수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긴 단순히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모두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부여한 일종의 편의였다면?
실제로는 암흑지대가 스타트 포인트로 잡히는 개같은 경우도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1층 전부가 이딴 식이라고 한다면 하루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으니까.
“후…….”
그래도 차분히 정리를 하니 조금 진정됐다.
다행히 눈도 어둠에 적응을 했는지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그래 봤자 윤곽선만 겨우 보일 뿐이지만.
이 정도면 뭐, 혀 깨물고 죽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일단 확인할 것부터 하고 넘어가자.
이제야 혼자 있게 됐지 않은가.
“상태창, 장비창, 캐릭터 정보, 스테이터스, 인벤토리. 일지 확인… 은 니기럴.”
역시 안 되는구나.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가자.”
한 손에는 방패를, 한 손으로는 벽을 짚은 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속도는 기어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
음, 아닌가?
어쩌면 기어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만, 속도를 더 올릴 수는 없다.
위험하니…….
“끄아아아악!”
돌연 발목에서 쨍한 통증이 피어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신경이 미쳐 날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전투 로그 없이도 답은 금방 나왔다.
「캐릭터가 고블린 덫을 밟았습니다.」
씨발, 나는 지금 덫을 밟았다.
* * *
패착이 뭘까.
생각할 것도 없이 줄줄 나온다.
방패는 내게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하지만 그 대신 상당 부분 시야를 가렸다.
차라리 방패를 허리띠에 매고, 살피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덫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방패가 무슨 소용인가?
정신적 안정감보다는 실리를 챙겨야 했다.
제기랄.
“끄으… 흐…….”
머리가 하얘진다.
당장에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는다.
비명을 내질러 상황이 나아진다면 모를까.
더 악화시킨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뛴다.
“후욱, 후욱, 후욱…….”
입술을 짓누르며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지금 떠올려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가 아니다.
1층에 함정을 쓰는 몬스터는 딱 하나.
고블린밖에 없다.
그리고 놈은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머리를 가린다.
그다음 아예 호흡을 멈추고, 청각에 집중한다.
당장 들리는 소리는 없다.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된 것처럼 고요하다.
…혹시 없는 건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거나 그런 경우의 수도 있긴 하니까. 고블린도 똥은 쌀 것이다.
‘지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도 안 하는 주제에.’
나는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희망을 고이 접어 머릿속에서 던져 버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 긍정적인 것과 낙천적인 것은 다르다.
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다.
“…….”
확신할 수 없다면, 아예 최악을 가정하자.
고블린은 내 비명을 들었다.
놈은 어둠 속에 숨어 내가 힘이 빠지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건, 그래서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덫이 있으면, 반드시 그 주변에 고블린이 있었다.
“후우…….”
멈춰왔던 숨을 천천히 토해 낸다.
일의 전말이야 어쨌든, 워낙 조용한 환경이다 보니 긴장만 놓지 않으면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
일단은 내가 해야 할 일부터 하자.
“…흐으읍!”
자세를 낮춘 뒤, 양손으로 덫을 벌려 발을 빼낸다. 그리고 바짓단을 뜯어낸 다음, 신발을 벗고 상처 부위를 강하게 압박한다.
걸레짝이 된 신발은 버리기로 했다.
사실 신발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내가 신고 있던 건 쪼리에 가까운 샌들이었으니까.
망할 바바리안 새끼들.
하다못해 가죽 장화만 신겨서 보냈어도 이렇게 덫 한 방에 반병신 상태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씨발,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성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더 이상 한심해지지 말자.
아무리 그들을 욕한들 마주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제대로 바닥을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그러니 그만 징징대고 몸 상태부터 확인하자.
‘후, 진짜 큰일 났네 이거.’
벌써 오른발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뜨겁단 것은 느낄 수 있지만 그조차도 점점 무뎌지고 있다.
“숨어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라.”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여전히 어둠 너머에선 작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터벅. 터벅.
한쪽 다리가 아작났지만, 생각보다 통증은 크지 않다. 아무래도 마비독 덕분인 듯한데…….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오라고, 씨발놈아.”
나는 놈들을 도발하는 말도 서슴지 않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야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니까.
싸워야 한다면, 되도록 이를수록 유리하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놈이 동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안 나와?”
물론, 이는 전부 내 망상에 불과하고 사실 고블린 같은 건 없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뭐, 혼자 덫을 밟고서 온갖 생쇼를 하는 병신이 되겠지.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은 병신이 되고 싶다.
“그럼 그냥 계속 거기 있던가. 난 갈 거니까.”
속도를 올린다.
그래 봐야 기어가는 정도에서 조금 빨라진 수준이지만, 체감상 전력 질주로 마라톤을 뛰는 기분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무리해서 걷고 있자니 오른발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쓰읍, 하아, 하아…….”
둘 중 하나다.
마비 독의 약효가 끝났거나, 아니면 그걸로도 부족할 만큼 통증이 심해졌거나.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이 건 나쁘지 않다.
약효가 끝났다면 그걸로 좋고.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따져 보면 신경 세포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아니, 근데 나는 왜 이런 쪽으로만 긍정적인 거지?’
글쎄,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럴 정신머리도 없고.
“…네 엄마 고블린.”
뇌에서 필터링 없이 말이 튀어나온다.
피를 하도 흘려서 그런가?
술로 뇌가 절여진 기분이다.
“네 아빠도 고블린.”
물론, 나오는 대로 뱉으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너도 고블린.”
그때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분명 작은 소리였지만 집중하고 있던 내 귀에는 몹시 크게 들렸다.
착-
드디어 놈이 처음으로 기척을 드러냈다.
“왜 너도 부모 욕은 못 참겠냐?”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란 건 안다.
애초에 욕도 아니었을뿐더러…….
소리가 난 건 뒤쪽이었다.
이건, 내가 점점 멀어지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나는 더 속도를 올렸다.
이에 놈의 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착- 착- 착- 착-
보다 선명해진 놈의 걸음 소리는 특이했다.
걸을 때마다 끈적한 무언가가 매끄러운 표면에 붙었다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신장 1m도 안 된다는 설정을 알면서도, 마치 거대한 괴물이 쫓아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놈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바바리안이다.
접근전으로 유도만 할 수 있다면, 결코 고블린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
“따라만 오지 말고 드루와. 좆밥아.”
그러한 이유로 도발을 이어 갔지만, 놈은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계속 따라오기만 할 뿐이었다.
놈은 이제 스스로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륵, 그륵……!”
하울링에 가까운 소리지만, 왠지 느껴진다.
“그르르륵! 그륵!”
놈은 지금 낄낄거리고 있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냥감을 보면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내가 저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기를 바라고 있다.
…똑똑한 새끼.
좋아, 계획 변경이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퍽!
바위에 부딪친 이마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인내심 싸움이다.
내가 쓰러졌다고 생각하고 먼저 접근해 준다면 나의 승리.
그전에 진짜 쓰러져 버리면 나의 패배.
“그륵?”
나는 발이 아작난 채로 약 300m는 되는 거리를 걸어온 이 몸뚱이의 터프함을 믿기로 했다.
착-
놈의 걸음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진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다.
바라던 대로 사냥감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의심하고 있다.
‘미친, 고블린이 뭐 이리 신중해?’
욕이 절로 나온다.
게임 내에서 고블린은 최약체 잡몹이었다. 독을 쓰고, 함정을 설치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고블린은 어땠는가.
착-
전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어째서 마을 NPC들이 그토록 고블린의 영악함을 이야기했는지 깨달았다.
체감상 야만인 새끼들보다는 얘네가 지능이 몇 배는 더 높다.
착-
5m에서 10m 사이의 그 언저리쯤에서 놈이 걸음이 멈춘다.
왜지?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차.
어깨에서 둔탁한 충격이 전해진다.
툭. 데구르르르.
뭐야. 지금 이 씹새끼가 나한테 돌멩이를 던진 거야?
‘…설마 피떡이 될 때까지 던지진 않겠지?’“그르르륽! 그륵!”
우려와 달리 놈은 기쁨의 하울링을 뱉었다.
돌팔매질에도 반응이 없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
착- 착- 착- 착-
놈이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뜀박질에서 얼마나 신났는지가 느껴졌다.
나는 흥분을 잠재우며 차분히 소리를 통해 거리를 쟀다. 그리고 바로 지근거리까지 왔다고 판단을 했을 때.
“씹새꺄!”
벌떡 일어나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패를 집어 들고 후려칠 시간에 손을 뻗는 게 더 신속하고 유효 거리도 길다는 판단.
다만, 나는 곧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직감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놈과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 멀었다.
그리고 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훨씬 기민했다.
“그륵!”
놈이 허리를 빼며 뒤로 물러난다.
보이진 않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이제 어떡하지? 나는 머리를 굴리며 다음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찰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
참으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눈앞은 깜깜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고블린이 어디로 뛰었는지를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내 손은 궤도를 틀어 놈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륵?!”
손끝에서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팔목인지 발목인지, 그도 아니면 목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직!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기에 곧바로 놈의 상체 위에 올라섰다.
“그, 그륵!”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내가 위고, 네가 아래야. 이 씹새끼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굴을 내리쳤다.
워낙 흥분해서 바닥을 칠 때도 있었지만, 이 바바리안의 육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주먹이 아프긴커녕 돌바닥이 깨져 나갔다.
“…….”
머지않아 놈의 움직임이 멎는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
먼지가 흩날린다.
특이하게도 빛이 나는 먼지다.
나는 주먹을 멈췄다.
어느샌가, 깔고 앉아 있던 고블린의 몸뚱이가 잘게 잘게 쪼개지며 흩날리고 있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하 씨발, 이건 또 그대로야?”
제발, 하나로 정해 줬으면 좋겠다.
게임이든가, 아니면 비슷할 뿐인 현실이든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자꾸 헷갈리잖아.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EXP +1」
곧이어 고블린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유 모를 허탈함을 느끼며 그 자리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를 집었다.
「9등급 마석을 습득하였습니다.」
강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빛이 났다.
[던전 앤 스톤]에서 화폐가 되는 마석이었다.
이게 얼마였더라? 곧 기억이 떠올랐다.
“빵 한 조각.”
게임 속 고블린이 뱉는 마석의 평균 값어치.
왠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흐흐흐흐…….”
그 개지랄을 떨고 얻은 게 고작 이거라고?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다.
잔뜩 울고 나니 묘하게 웃음이 나는 그런 기분에 가깝다.
“크흐, 크흐흐흐.”
미궁이 있고, 몬스터가 있다.
죽은 몬스터는 드랍템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저 밖의 도시에선 실존하는 이종족들이 아우러져 살아간다.
분명, 이곳은 그런 세계다.
하지만…….
또다시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5화 기브 앤 테이크 (1)
돌이켜 보면 난 참 웃긴 인간이었다.
늘상 삶이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 번도 스스로 죽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겹다는 감정은 결국 감정일 뿐이었고, 내게 있어 목숨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었으니까.
여러모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기에…….
* * *
세 발로 어둠 속을 기고 있다.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 말 그대로다.
현재 나는 완전히 씹창이 나버린 오른발을 질질 끌면서, 세 발로 바닥을 기어 이동하고 있다.
누군가 지금 내 꼴을 본다면 골절상을 입은 유기견을 연상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 대가는 달콤했다.
우선 다친 발을 쓰지 않아도 돼서 아프지 않으며, 이동 속도도 오히려 이전보다 빠르다.
무엇보다 덫을 밟을 일도 없다.
반대급부로 팔꿈치와 무릎이 아리긴 하지만, 이거야 뭐…….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견뎌 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뭔가?
나는 개똥도 웃으며 처먹을 수 있다.
음… 마음 준비할 시간만 준다면 분명 가능은 할 것이다.
‘근데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으려나?’
아저씨라는 건 그냥 내가 붙인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의 성별도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그저 말투로 유추할 뿐.
왠지 안경 낀 30대 백인 아저씨였을 거 같다.
아니면 말고.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카두아의 아들 오름의 몸에서 깨어났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다시 원래 몸으로 깨어났을까?
눈을 뜬 이래로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상황이 좆같아질수록 자꾸 그 아저씨 생각이 난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종교를 믿는지 알 것만 같다.
현실은 혼자 살아가기에 너무나 험난하다.
절망이 닥쳐왔을 때, 시선이 돌릴 곳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경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5% 미만입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캐릭터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후, 딴생각하면서 기어갔더니 꽤 많이 왔다.
미세한 차이긴 하지만 점점 주변이 밝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상황이다.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왔고, 1층 전체가 이렇게 어두울 리 없다는 내 가설도 맞았단 뜻이니.
어떻게든 밝은 곳까지만 가자.
거기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 마석을 주면서 도움을 구하자.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지랄, 웃기고 있네.’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속삭이며 당근을 주고 있는데, 내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났다.
‘야 이 병신아, 걔네가 바쁜데 꼴랑 빵 한 조각 받고 퍽이나 도와주겠다. 마석이랑 방패만 뺏고 죽이면 모를까.’
나여서 그런가?
이 새끼, 똑똑하다.
‘애초에 사람보다 고블린 새끼를 먼저 만나면 어떡할 건데? 넌 뇌가 없냐? 응?’
더 이상의 모욕은 본주로서 참을 수 없다.
‘병신아 그럼 어쩔 건데. 그래도 일단은 가야지. 거기선 적어도 앞이 보이기라도 하잖아. 고블린이 튀어나와도 여기서 싸우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
내 또 다른 자아가 수긍하며 머릿속이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계속해서 기어갔다.
“크흐흐흐흐…….”
미칠 것 같다.
아니, 이미 미친 걸지도 모른다.
하긴 피를 이만큼이나 흘렸으니 당연한가?
아까부터 자꾸만 자아가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졌다가, 무뎌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일종의 선순환이다.
그 이상 무뎌졌다간 나는 틀림없이 다시 눈을 뜨지 못할 테니까.
“흐흐흐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기력도 없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어느샌가 주변이 환했다.
저 멀리 통로 끝에서 수정이 영롱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 앞에 역광을 맞으며 서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고블린을 잘못 본 게 아니다.
틀림없는 사람의 형체.
“도… 와…….”
뭐라 외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가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사람의 형체가 좀 더 가까워졌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그 사실이 놀라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출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앞에 서 있었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업적 달성」
조건: 생명력이 2% 이하로 하락.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그러자 무릎을 굽힌 금발 사내가 보였다.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묘한 눈길로 나와 주변을 관찰할 뿐 무엇도 묻지 않았다.
남의 말을 듣기보단, 우선 스스로의 경험과 직관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베테랑답게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초심자군.”
씨발, 그럼 도와줘 개새끼야.
보다시피 난 방패 하나만 달랑 가진 좆밥 바바리안이고, 그 외에 가진 거라곤 다리 하나와 맞바꾼 고블린 마석이 있어.
원한다면 이거라도 다 줄게. 그러니까…….
“수상하군. 어떻게 초심자가 우리보다 빨리 왔지?”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온 것은 가래 끓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그르르…….”
아니, 솔직히 말해 고블린이 냈던 소리에 더 비슷한 거 같지만…….
내가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리기엔 충분했다.
이내 금발이 동료에게 물었다.
“에르시나 신관님. 혹시 이자를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관? 설마 파티에 신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기적을 맞이한 중생의 눈빛으로 옆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흰색 법복을 입은 적발의 여신관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신관이 고운 입술로 똑부러지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응? 뭐라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넌 또 왜 수긍하는데.
서러웠다. 씨발, 내가 왜 이곳에 끌려와서 이딴 대접을 받고 있는지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던 순간이었다.
“파츠란, 포션을 하나 주겠나?”
“신성력을 쓰지 못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만?”
“어차피 많이 갖고 있잖아. 값은 나가서 따로 치를 테니까.”
“쳇.”
그제야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찬 사내가 혀를 차며 가방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던진다.
저게 내 목숨이라 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툭.
다행히 금발은 제대로 포션을 잡아챘다.
“신성력이 아니라 조금 아플 거다.”
금발은 마개를 열어 반은 상처 부위에 뿌리고, 반은 직접 내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머지않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몸에 축적됐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이런 아픔일까?
「회복(중) 효과로 인해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게임상에서 전투 중에 포션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냥 시스템상으로 막아 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현실을 오지게 잘 반영한 거였구나.
제기랄.
“허억, 허억, 허억…….”
몇 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통증이 줄어들며 정신이 든다.
“자, 이제 말해 보겠나 바바리안? 어떻게 초심자인 주제에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도달했지? 만약 새로운 통로를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정보를 사고 싶다.”
과연, 그게 목적이었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목적이 있어서 날 잘 대해 준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이유 없는 선의만큼 불길한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왠지 미안하게 됐네.
비밀 통로 같은 건 모르거든.
“…미궁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이었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금발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뭔가 납득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확실히……. 글에서 읽은 적은 있다. 간혹 차원 불안정 현상으로 그런 경우가 있기도 하다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나는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처음, 본 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이 파티에는 신관이 있고, 마법사가 있다. 최소 중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제대로 된 놈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처음이라고?
“그래, 책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경우라더군. 이렇게까지 최외곽부에 떨어지는 건”
아, 그렇구나.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 거구나. 그리고 그걸 나는 미궁에 처음 들어온 순간에 겪은 거구나.
다른 야만인들이 횃불을 안 들고 다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벼락 맞을 걱정하는 놈은 없지 않은가?
“보아하니 초행인 듯한데 그런 희귀한 일을 겪다니 그거 참, 재앙이었겠어.”
금발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였다. 포션 값은 생각지 말고 가 보도록.”
말투가 좀 재수 없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놈인 거 같다.
“참, 저기 떨어진 방패도 챙겨가고.”
금발이 가리킨 곳을 보니 바닥에 떨어진 방패가 보인다. 거리는 약 20m 정도. 허리에 잘 매 둔다고 했는데 흘러내린 모양이다.
“그럼 우리는 가 보도록 하지.”
그들은 내가 감사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나를 지나쳐 갔다.
미궁에서는 시간이 돈이나 다름없으니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날 위해 이렇게까지 시간을 써 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얼른 뛰어가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집었다.
분명 살아남은 건 기쁜 일일진데…….
그럼에도 뭔가 기분이 묘했다.
* * *
「비요른 얀델」
레벨:1.
육체: 25 / 정신: 36 (New +1) / 이능: 1
아이템 레벨: 24
종합 전투 지수: 68 (New +1)
* * *
“아까 그 바바리안, 운도 좋군.”
“글쎄, 운이 좋다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을까? 초행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
금발이 애매하게 웃으며 답하자 남검사가 코웃음쳤다.
“고블린 덫을 밟을 놈이면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애초에 우릴 만난 부분에서 운이 좋은 게 맞지.”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드로우스를 만난 거겠죠. 당신은 포션 쓰기도 아까워했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여궁수가 끼어들자 남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저런 놈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어차피 오래 살아남지도 못해. 분명 우리 신관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걸?”
여신관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를 대신해 여궁수가 쏘아붙였다.
“에르시나 님도 신전의 규율만 아니었으면 치료를 해 줬을 거예요. 아니, 포션이 없었다면 스스로 규율을 깨셨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전부 당신 같은 줄 알아요?”
“글쎄, 그거야 또 모르지. 하도 앞뒷면이 다른 걸 많이 봐서 말이야.”
“…파츠란, 당신은 조금이라도 드로우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면, 굳이 비밀 통로를 아냐고 물어보던 배려 같은?”
“네. 바바리안들은 타인의 도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래서 그렇게 배려해 준 거겠죠.”
“…저기, 나를 너무 띄워 주는 거 같은데?”
화제가 자신에게 쏠리자 금발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 역시 배려란 말은 부정치 않았다.
“아, 지름길로 가려면 여기서 꺾어야 돼.”
“역시 파티에 인도자가 있으니 편하군요.”
“에르시나 님! 보통 인도자들은 포탈로 가는 방향만 알 뿐이에요. 이건 그냥 드로우스가 대단한 거죠. 1층의 지형지물 전부를 외웠으니까.”
여궁수를 보던 남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근데 저 핏자국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지? 이미 꽤 걷지 않았나?”
“글쎄요. 하지만 이만한 거리를 기어서 온 정신력만 봐도 단순히 운이 좋았단 당신의 말은 틀린 거 같은데요?”
“허, 참 이게 뭐 대수라고……. 그래 봤자 결국 이 근처겠지.”
핏자국을 따라가던 일행은 중간에 지름길로 방향을 꺾었다. 그리고 약 15분 뒤 목표지에 도달했다.
“이 경로로는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네. 서두른 보람이 있어. 어서 작동시켜 보자.”
금발이 막다른 길 앞에 위치한 비석 위에 손을 올리자, 강렬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구체의 형체를 취했다.
2층으로 이어지는 포탈이었다.
“잠깐만요.”
다들 포탈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차, 여궁수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저거, 아까 그 바바리안이 신고 있던 거 아닌가요?”
“뭐?”
여궁수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일행은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포탈이 뿜어낸 빛으로 드러난 어둠 속에는 피 묻은 덫 하나와 정체 모를 샌들 한 쪽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맞는 듯하군.”
마법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더니, 새로운 빛의 구체를 만들어 통로 너머로 이동시켰다.
후우우우웅-!
덫으로부터 시작된 핏자국은 곡선형 통로를 따라 쭉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빛의 구체를 움직여도 이 자리에선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보게 드로우스, 여기서 아까 있던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나?”
“…지름길을 쓰지 않는다 가정 하에, 15km는 될 듯합니다.”
“허허허, 괴물 같은 몸뚱이구먼. 이 어둠 속에서 혼자 그 먼 거리를 기어서 오다니.”
마법사는 그저 놀랍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만, 옆에 있던 남검사는 그럴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가 느끼기에 이건 신체가 아닌 정신의 문제였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몇 시간 동안 기어갈 수 있었을까?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는 와중에?’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처음 발견했을 때도 바바리안은 기어가고 있었다. 의식도 없어 보이는 상태로 팔과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그다음엔 어땠는가?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손을 위로 내밀었다.
손엔 자그마한 마석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땐 별생각 없었지만, 이젠 그 행동이 뭘 의미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걸 줄 테니 도와달라는 거였겠지.’
그것 말고는 대가로 내놓을 게 없으니까.
그래서 바바리안은 먼 거리를 기어 오는 동안 마석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혹여나, 사람을 만난다면 바로 보여 줄 수 있도록.
이내 사내는 결론을 내렸다.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어차피 저런 놈은 일찍 죽는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드로우스, 아까 그 바바리안 이름이 뭐였지?”
저런 미친놈은 어지간해선 뒈지지 않는다.
아무리 현 순간이 고되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결코 죽음을 탈출구로 삼는 법이 없으니까.
6화 기브 앤 테이크 (2)
[던전 앤 스톤]은 특이한 게임이다.
동료 NPC가 게임 진행에 필수이면서도, 결코 그 새끼들을 믿으면 안 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라면 더욱더.
* * *
동굴 속을 걷고 있다.
뒤뚱뒤뚱.
한쪽 신발이 없는 탓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기쁘다.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은, 적어도 세 발로 기어가던 시절엔 느낄 수도 없던 종류의 것 아닌가.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았다.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후…….”
방패로 적당히 상체를 보호하며 나아간다.
이전처럼 눈이 빠개지도록 바닥을 살필 필요는 없다.
이곳엔 빛이 있으니까.
벽과 천장에 박힌 수정들이 뿜어내는 빛이 주변을 환하게 주변을 밝혀 주고 있다.
피 흘리며 어둠 속을 기어가던 게 꿈같다.
단언컨대, 앞이 보인다는 건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사악한 고블린 새끼들을 족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와악!”
“그륵?!”
내 외침에 놀랐는지 고블린이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다.
이미 숨은 위치까지도 대강 파악하고 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킬을 사용했다.
“스매쉬! 개새끼야!”
스매쉬는 MP 소모도 없으면서 준수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이다.
참고로 내가 방금 만들었다.
퍽-!
도약 중이던 고블린이 방패에 처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민첩하게 다가가 고블린의 상체를 발로 짓눌렀다.
“그, 그륵?!”
불쌍한 눈빛을 지어 봤자다.
나는 이 씹새끼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사악한 생명체인지 알고 있다.
“그, 그륵!”
뭐, 자기는 아니라고?
그럼 먼저 간 네 친구한테 따져. 그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콰직-!
방패 모서리로 고블린의 안면부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휘두르거나 밀쳐서 정면의 적을 가격할 뿐인 스매쉬와는 다르다.
이름은… 파이널 쉴드 어택.
마찬가지로 방금 지었다.
솨아아아아아-!
이내 깔끔하게 절명한 고블린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희미하게나마 악이 줄어들고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단 뜻이다.
나는 보상으로 나온 마석을 집어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미궁에 들어오고서 획득한 열 번째 마석.
“후, 좆밥 새끼들.”
한 번 죽었다가 겨우 살아난 뒤, 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고블린과 조우했다.
처음엔 긴장했지만,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시야가 확보된 곳에서 만난 고블린들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똑똑하지도 않았고.
일단 저기 아무렇게나 설치한 덫만 봐도 그렇다.
‘흙이라도 파서 좀 덮어 두던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놓고 길목에 두면 대체 누가 밟겠냐고.’
고블린 덫은 저 멀리서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조악했다. 심지어 덫을 밟지 않고 지나치려 하면 대부분 뛰쳐나와 먼저 덤벼들었다.
아무래도 그 새끼처럼 실실 쪼개면서 변태처럼 뒤따라오는 건 덫을 밟아야지만 생기는 일 같은데…….
차차 습성을 파악하고 나니 놈들과의 전투는 점점 쉬워졌다.
일단 놈들의 주무기가 짧은 단검일뿐더러, 피지컬도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 나는 2m에 달하는 체격을 가진 근육질의 바바리안. 전면전에 돌입하면 고블린 따위는 3초 안에 제압이 가능했다.
따라서 기습만 조심하면 됐는데, 덫을 통해 매복 장소까지 미리 알 수가 있으니…….
‘음, 이참에 고블린 슬레이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즉시 손을 움직여 뺨을 세게 후려쳤다.
퍽-!
아픈 만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미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면서 킥킥거릴 리가 없다.
고블린 몇 마리 죽였다고 자만하지 말자.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지 고작 2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며, 새롭게 생긴 문제들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우씨, 배고픈데…….”
일단 첫 번째는 식량 문제다.
내가 어둠 속을 기어 오며 흘린 것은 방패만이 아니다.
부족장이 준 식량 주머니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7일 치 중 약 5일 치에 달하는 식량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걸 찾자고 어둠 속을 헤맬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와그작, 와그작.
내친김에 바로 주머니를 풀어 빵 하나를 꺼내 먹었다.
보존을 위해선지 빵은 딱딱하고 수분이 없었지만, 침으로 살살 녹여먹으니 탄수화물의 단맛이 서서히 혀로 느껴진다.
이게 왜 이렇게 맛있지?
바바리안의 몸뚱이라 식성도 변한 거 같다.
몇 입 먹으니 내 손바닥만 하던 빵이 사라졌다.
나는 묘한 아쉬움과 입에서의 텁텁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마르다.
이게 바로 두 번째 문제다.
…씨발, 물은 어디서 구하지?
* * *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경고: 체내의 수분이 부족합니다. 서둘러 식수를 조달…….」
* * *
[던전 앤 스톤]에는 포만감 시스템이 있다.
물론 미궁 안에서만 활성화되며, 식사만 해도 채워졌기에 식수를 챙겨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게임 속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아는 그 게임과 아주 닮은 또 하나의 세상에 가깝다.
‘안 그래도 하드코어한 게임이었는데, 이게 현실이 되니 난이도가 아예 미쳐날뛰는구나.’
그래도 크게 걱정은 않는다.
물이 식량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인 건 맞지만, 부족장도 물은 챙겨주지 않았으니까.
분명 미궁 내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찾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스매쉬!”
고블린을 때려잡으며 개미굴처럼 복잡한 동굴 속을 헤매길 언 1시간.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소리를 추적한 나는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이미 탐험가 한 명이 쪼그려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상 금발 파티를 제하면 사실상 첫 만남인 셈이었지만…….
“…….”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멀리서 날 보고서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 역시 굳이 다가가 말을 걸지 않았다.
이후로 만난 다른 탐험가들도 매한가지였다. 다들 날 보자마자 쓰윽 피해 지나갔다.
게임에서처럼 탐험가들 사이에는 어지간하면 서로 접촉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는 듯하다.
뭐, 그냥 피 칠갑을 한 바바리안이랑은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고블린을 잡다가 배고프면 빵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걸 반복하니 시간은 쭉쭉 흘러 지금이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세어보니 지금까지 총 마흔네 개의 마석을 얻었다.
빵으로 환산하면 44개의 빵을 획득한 셈.
죽어 가던 시절을 떠올리면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마는,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없는 법.
그 대가로 나는 짙은 피로감을 얻었다.
이게 내가 가진 세 번째 문제였다.
‘슬슬 졸리네…….’
생물로 태어난 이상 수면은 취해야 한다.
그것은 이 고성능의 스펙을 지닌 바바리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몬스터들이 실존하는 미궁 속에서는 어떻게 수면을 취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선잠을 자거나.
서로를 지켜 줄 동료를 구하거나.
이미 내가 고를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목숨을 하늘에 맡긴다고? 경험에 따르면 그건 믿을 게 못 된다. 적어도 내게는 정말로 그렇다.
‘동료를 찾아보자.’
물론, 정식 파티를 꾸리겠단 뜻은 아니다.
현재 피곤한 상황은 다들 똑같을 테니, 적당한 사람을 찾아 임시 협력 관계를 맺을 생각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피로도가 차면 대부분 그렇게 밤을 넘겼고.
터벅, 터벅.
판단을 마친 나는 전투보다 이동에 치중하며 미궁 속을 돌아다녔다. 그랬을 뿐인데, 아까와 달리 무리를 지은 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터벅, 터벅.
둘 내지 셋으로 이뤄진 탐험가 무리가 불침번을 번갈아 맡으며 쉬고 있다.
행색과 관상을 중점으로 살핀 나는 용기 내어 몇몇 무리와 접촉해 보았고, 전부 빠꾸를 맞았다.
“미안하네만 필요한 인원은 다 구했네.”
말은 그리했지만, 내가 다가가자 인상까지 찌푸리며 코를 막던 그들을 보면 그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씹새끼들.
대체 지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는 인간 아저씨였다.
키는 180cm가량.
제법 선해 보이는 푸근한 인상이지만, 손에는 고블린 피로 떡칠된 망치가 쥐어져 있다.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밤친구를 구하고 있는 건가?”
씨발, 이 새끼 뭐야.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한다.
“밤친구를 구하는 게 아니었던 건가? 바바리안이라서 믿고 편히 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군.”
진작 그렇게 말하라고요 아저씨…….
아무래도 밤친구란 내가 말한 임시 협력 관계의 은어인 듯하다.
게임 내 표기는 ‘Night Companion’.
밤의 동지, 밤의 동행 그런 느낌으로 해석했는데, 실제로 들으니 어감이 아주 변태스럽다.
“…아니다. 밤친구를 구하고 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럼 나와 함께하겠나?”
“그러겠다.”
그렇게 나는 아저씨와 밤친구가 되었다.
“내 이름은 한스일세.”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그럼 비요른이라고 부르면 되겠나?”
경험이 많아 보이는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통성명까지 끝내더니 분위기를 리드했다.
“밤친구는 세 명이 가장 좋긴 하네마는, 굳이 찾아다니는 쪽이 더 체력 낭비일 듯하군. 비요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쉽게 말해 둘이서 자자는 소리다
이 아저씨, 진짜 딴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능구렁이 같은 말투 때문인진 몰라도 자꾸 뭔가 당하는 기분이 든다.
“좋다.”
“잘됐군. 만약 누가 껴달라 한다면 그땐 서로 의논해 받아들이든가 말든가 하세.”
짧은 의견 조율 끝에 우린 둘이서 첫날밤을 보내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문제는…….
“그럼 가위바위보를 해서 순서를 정하기로 하지.”
가위바위보는 여기서도 국룰인 거 같다.
씨바, 나 이거 잘 못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운이 없다.
“흠, 웬일로 내가 이겼군.”
니미.
“그럼 잘 부탁하겠네. 고블린이나 다른 탐험가가 접근하면 일단 깨우도록 하고. 알겠나?”
“…알겠다.”
“자, 이걸 받게.”
문자판에 0부터 23까지 새겨진 시계를 빌려준 아저씨는 친절히 사용법까지도 알려 주었다.
“여기 짧은 시침이 여기에 오면 그때 날 깨우면 되네.”
아마 이게 이곳 사람들이 바바리안을 바라보는 인식일 것이다.
“망가뜨리면 안 되네. 비싼 물건이니.”
“…알겠다.”
거, 깐깐하기는.
이내 아저씨가 담요 하나를 꺼내더니 이를 덮고 배낭을 베개 삼아 눕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쿨쿨 자기 시작한다.
이게 짬인가? 존나 편해 보인다.
내 차례 때 빌려 달라 하면 안 빌려주겠지?
“후…….”
그나저나 불침번이란 거, 엄청 지루하구나.
고블린 새끼는 보이지도 않고, 통로를 지나치려는 다른 탐험가들도 없다. 다들 밤친구를 구해 쉬고 있을 타이밍이라 그런가?
정적이 이어지니 자꾸 졸음이 몰려온다.
그래도 벽에 기댄 채 앞으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자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한스, 일어나라.”
“…별일은 없었나?”
“없었다.”
“그렇군. 수고 많았네. 그럼 시계는 이리 주고 자네도 어서 쉬도록 하게. 2시간 뒤에 깨워 주겠네.”
빌려 달란 말을 꺼내 볼 새도 없이 아저씨는 담요를 배낭에 정리하고 일어섰다.
쩝.
나도 미련을 지우고 벽면으로 다가가 등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척을 했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이 아저씨가 친절하고, 지성적으로 보이며, 날 해칠 의도가 없어 보인다고 한들—
처음 본 새끼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7화 기브 앤 테이크 (3)
나는 지금 코를 골고 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곯아떨어진 야만인을 상상하며 아주 힘차게.
드르르르르렁!
…음, 이건 좀 오버인가?
살짝 걱정하고 있는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신기한 종족이라니까.”
아무래도 잘 통한 거 같다.
내가 연기를 잘했다기보다는 종족적 어드밴티지가 컸겠지만.
바바리안은 단순하고 멍청하다는 게 사람들의 인식이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악령 문제가 아니어도 항상 바바리안의 모습을 연기했다.
일종의 소리장도 笑裏藏刀 같은 것이다.
웃음 속에 칼을 숨기듯, 순진할 거란 선입견을 무기 삼아 그들의 뱃속을 간파한다.
…라는 건 좀 중2병 같고.
결국, 정리하자면 속내를 떠보는 게 한결 쉽단 뜻이다.
바로 이렇게.
드르르르르르렁!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배까지 벅벅 긁으며 옆으로 웅크린다.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여 아저씨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쏟는다.
이만큼이나 빈틈을 보여 준 이상, 꿍꿍이가 있다면 곧 행동에 옮길 거다.
아니면 그냥 쭉 자면 될 테고.
솔직히 이 상태로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요른, 교대 시간이네.”
아, 음……. 진짜 한숨도 못 잘 줄은 몰랐는데.
“지금까지 고블린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너무 마음 놓고 있지는 말게. 영악한 놈들이니까.”
내가 못 미더운지 아저씨는 불침번 똑바로 서라는 말을 돌려 하며 아까처럼 편하게 누웠다.
그리고 5분도 안 돼 다시 잠에 들었다.
허탈함이 밀려든다.
나도 그냥 잘걸. 대체 2시간 동안 나는 뭔 뻘짓을 한 거지?
제기랄.
초면의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믿을 만하다고 판단을 내렸으면서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고블린을 조심하면서 혼자 선잠을 자는 게 나았을 듯하다.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었을 텐데.
“후…….”
피곤해서 뒈질 거 같다.
아저씨가 자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더 졸리다.
그래도 내 순번이니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하며 수마를 쫓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비요른, 일어나게.”
“…자지 않았다.”
“입가에 침이나 닦고 말하는 게 어떤가?”
손등으로 쓱 문질러 보니 정말로 축축하다.
“서서 자서 그런지 코도 안 골더군.”
아무래도 진짜 잔 모양이다.
교대 시간을 10분 남겨 두고서 잠깐이긴 하다마는.
…심장이 철렁한다.
다만, 안일한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바바리안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밤친구는 일종의 거래 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아저씨가 불침번 동안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행히 자는 동안 문제가 없었으니 별말은 않겠네.”
“고맙다. 원한다면 더 자도 된다. 내가 한 번 더 불침번을 서겠다.”
“아닐세. 그럴 수 없지. 자네 차례이니 자게. 시계는 내게 다시 돌려주고.”
날 탓할 법도 했지만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용서해 주었다.
이에 나도 더 이상 사양 않고 자리로 가서 쪼그려 누웠다.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아저씨를 비롯한 모든 탐험가가 유난히 존경스러웠다. 처음 본 사람을 믿고 목숨을 맡기는 게 일상이라니?
엄청난 배짱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암만 생각해도 내게는 무리인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김없이 아까처럼 코골이 소리를 냈다.
드르르르르렁!
어쩔 수 없었다.
미안 아저씨, 근데 난 왠지 아저씨가 더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했거든.
드르르르르렁!
사기꾼들처럼 인상이 선한 점.
다른 멤버를 구하지 말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게 아저씨라는 점.
냄새난다고 뭐라 구박하지도 않은 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방금 전, 아저씨는 잠든 날 탓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자도 된다는 대가마저 거절했다.
물론 그냥 내가 미친 새끼고, 사실 이 아저씨는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친절한 새끼가 제일 수상하다.
‘항상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린 건 이런 새끼들이었거든.’
분명 옛날의 나였다면 지금쯤이 딱 방심했을 타이밍이었겠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건 지능의 문제니까.
드르르르르렁!
그렇게 수상하면 이쯤에서 쫑내고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코를 골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작지만, 이질적인 소리가 피어난다.
배낭의 버클? 허리띠? 그도 아니면 신발 굽?
어디서 난 파생된 소리인지는 감이 잡히는 곳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함과 동시, 바바리안의 몸뚱이가 자의적으로 해석을 내린다.
위험하다.
이게 무협지에서 말하는 그 살의인가?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즉시, 눈을 떠 전방을 확인했다.
“깼군.”
여전히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고블린의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양손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상태로.
이런 씹…….
피해!
전사로 키워진 몸이 내린 판단은 나보다 빨랐다.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옆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코앞에서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반동을 이용해 잽싸게 일어나 균형을 잡는다.
“읏!”
회심의 급습이 실패로 돌아간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유를 묻기보단 앞으로 대쉬했다.
“잠, 잠깐!”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몸이나 풀려고 했다고?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조금, 아니, 많이 웃기다.
씨발, 진짜 바바리안 새끼들은 얼마나 좆밥 같은 인식인 거지?
퍼억-!
방패를 이용한 스매쉬가 아저씨의 턱주가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다만, 건장한 체격의 인간은 고블린과 달랐다.
아저씨는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그럼 한 번 더.
퍼억-!
스매쉬.
“끄아아악!”
쩔그렁, 소리가 내며 아저씨 손에 들린 망치가 바닥에 떨어진다.
벌써 빨갛게 부은 코에선 피가 철철 나고 있다.
…으, 아프겠네.
생각은 하지만 방심하진 않는다.
난 그런 걸 모르는 새끼이고 싶은 새끼이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 그만! 설, 설명할 수……!”
“스매쉬.”
연이어 방패로 안면부를 가격당한 아저씨가 비로소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게임으로 치자면 전투 불능 상태.
즉, 이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아저씨.”
“잘, 잘못했네! 살려 주게!”
아예 용서를 구하기로 한 건가?
판단은 빠르지만, 차마 현명하다고는 못하겠다.
지금 내가 원하는 대화는 그런 게 아니다.
“왜 그랬어?”
“마, 마석이 탐 나서……. 기절만 시키고 훔쳐 갈 생각이었네. 믿어주게!”
믿기는 개뿔.
내가 그렇게 인류애가 넘쳤다면, 친구가 몇 명은 더 있었을 거다.
“방패! 그 방패도 가져갈 생각이었네!”
슬그머니 방패를 들어 올리자 아저씨가 재빨리 뭐라 말을 덧붙인다.
내가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다들 거짓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제대로 속이지도 못할 거면서.
“방패는 왜?”
“…바바리안의 무구는 질이 좋으니까. 도시로 돌아가 팔아치울 생각이었네.”
확실히, 바바리안들이 튜토리얼 때 받는 무구들은 대부분 값이 비싸다.
강철 중량이 일반적인 무구들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내 방패만 봐도 통짜 강철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이걸 얻겠다고 사람을 죽인다고?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혀 납득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랄.”
저 아저씨는 아직 뭔가를 숨기고 있다.
“솔직히 말해. 왜 그랬어?”
나는 쓰러진 고블린을 대할 때처럼, 아저씨의 상체를 발로 짓눌렀다.
“끄윽!”
아저씨의 눈에 두려움이 깊게 새겨졌다.
근데 나를 죽이려던 새끼여서 그럴까?
신기할 정도로 별다른 감흥이 피어나지 않는다.
소를 잡을 때 왜 눈을 보지 말라는지는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기분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쯤에서 대화를 끝낼까 고민하던 차, 아저씨가 외쳤다.
“심, 심장!”
“심장?”
예상치 못한 단어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저씨가 뭔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바바리안의 심장이 고가에 팔리고 있네.”
“어째서?”
“잘, 잘은 모르겠네만, 새로 개발된 마법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네!”
“그렇군.”
이제야 동기가 이해됐다.
나는 이 아저씨에게 고블린이었던 것이다.
잡기는 까다롭지만 잡고 나면 커다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처음 잘 때가 아니라 이제 행동한 건 왜지?”
“…나도 잠은 자야 하니까.”
아, 그렇구나.
이왕이면 잠도 자고 돈도 벌고 하려고 그랬구나.
난 영락없이 아저씨가 신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극한의 효율충이었던 거구나.
“전부 말했으니, 용서해 주게…….”
“용서?”
솔직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용서라니?
마석에 장비에 심장까지 뽑아가려 했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내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난 목숨을 구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거다.
“제발…….”
하긴, 살고 싶겠지. 지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 자세는 칭찬해 줄 만하다.
하지만.
“아저씨, 대가는 치르는 게 맞잖아.”
난 멋대로 저질러 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
그렇기에…….
“전, 전부 주겠네! 지금 당장은 얼마 안 돼도, 도시로 돌아가기만 하면…….”
믿을 수 없다.
그런 부분에서, 나도 이 아저씨가 고블린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고블린과는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아저씨는 그럴 가능성이라도 갖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다를 뿐이고, 그래서 더 악질이다.
물론 이는 감정적인 견해에 불과하며, 나는 감정에 따라 선택을 하지 않는다.
늘 그럴 순 없지만,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아마 앞으로 아저씨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보겠지. 걔네들도 똑같은 말을 할 거고. 그럼 그때마다 내가 용서해 줘야 할까?”
용서란, 참 무서운 말이다.
좋은 마음으로 내린 그 결정이 오히려 비수로 돌아와 등에 꽂히기도 한다.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이 원초적인 세계에서의 실수는, 단순히 마음이 다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목숨까지 위협할 테니까.
“미안, 아저씨. 내가 뒤통수를 너무 많이 맞아 봐서 그러진 못할 거 같아.”
“아, 아니네!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다르네!”
그러고 보면 고블린도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눈빛만 보고서 멋대로 해석한 거지만 아무튼.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꽈악.
양손으로 쥔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린다.
다만, 그때와 달리 잠시 멈칫한다.
물론, 망설임의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팔을 잡아당기는 걸 느끼며,
“아, 안 돼!”
나는 있는 힘껏 방패를 내리찍었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업적 달성」
조건: 첫 살인
보상: 정신 수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외면치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지 약 하루가 지난 시점.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대형 망치, 어깨 보호대, 가죽 장화, 나침반, 나이프, 회중시계, 수통, 배낭, 담요, 약초와 붕대, 포션 한 병, 6일 치 식량과 간식, 9등급 마석 32개를 얻었다.
8화 밤친구 (1)
동굴 속을 걷고 있다.
이번에는 뒤뚱뒤뚱 거리지 않고 멀쩡하게.
「캐릭터가 가죽 장화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5 상승합니다.」
장화의 사이즈가 조금 남는다. 덕분에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그 아저씨 키에 비해 발이 컸구나. 아무튼 제법 튼튼했기에, 덫을 밟아도 이젠 옛날처럼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캐릭터가 양손 망치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30 상승합니다.」
통짜 철로 만들어진 이 망치의 길이는 약 1m 정도. 아저씨가 쓸 때는 양손 둔기였지만, 내가 쓰니 한 손으로도 충분히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캐릭터가 어깨 보호대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3 상승합니다.」
강철 재질이다. 끈을 좀 느슨하게 묶었더니 딱 맞는다. 상의를 벗은 상태에서 보호대만 걸쳤더니 검투사 같은 외형이 되었다.
「캐릭터가 배낭을 착용했습니다.」
「인벤토리가 늘어납니다.」
이제 피 묻은 마석을 빵과 같이 보관하지 않아도 됐고, 움직일 때도 훨씬 덜 거추장스럽다.
질겅질겅.
육포를 꺼내 씹는다.
간식용이라 몇 개 없지만 빵보다 맛있다.
남은 부분은 휴대용 나이프로 잘라 침이 묻지 않게 잘 보관했다.
2일 차, 나는 원시적인 생활을 졸업했다.
목이 마르면 수통에 담아 놓은 물을 마신다.
방향이 궁금하면 나침반을, 시간이 알고 싶으면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본다.
비상용 포션 한 병은 혹시 모를 부상에도 대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조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사람을 죽였더니, 조금 더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 * *
「비요른 얀델」
레벨: 1
육체: 25 / 정신: 37(New +1) / 이능: 1
아이템 레벨: 72 (New +48)
종합 전투 지수: 81 (New +13)
* * *
스매쉬는 방패로 사용할 때도 좋은 기술이었지만, 제대로 된 무기를 쥐니 그 위력이 남달랐다.
퍼억-!
망치질 한 방에 고블린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할 때 그냥 무기를 고를 걸 그랬다. 어차피 방패야 나중에 돈을 모아서 사도 됐던 것 아닌가.
뭐, 그땐 내가 이렇게 잘 싸울지 몰랐지만.
바바리안의 몸에 들어와서일까?
전투를 할 때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슬슬 적응할 법도 한데, 늘 예상을 뛰어넘는 이 몸을 보면 아직도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졸려 뒈지겠네.”
하품을 내쉬며 주변에 떨어진 두 개의 마석을 집어 가방에 넣는다.
2일 차가 시작되며 생긴 변화다.
고블린이 둘씩 무리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내일이 되면 서넛으로 늘어날 것이며, 그 상태가 미궁이 닫히는 7일 차까지 이어질 것이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
새로운 무기가 생기며 전투력도 올라갔고, 다양한 소모품들 덕분에 좀 더 안전해졌다.
제법 순조롭다.
‘자꾸 눈이 감긴단 것만 빼면 말이지.’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움직이며 고블린들과 싸웠다. 그런데 내가 잔 시간은 고작 10분도 안 되며, 그마저도 서서 졸은 것이다.
자고 싶다.
이불과 베개는 바라지도 않는다. 맨바닥이라도 좋으니까 쪼그려 눕고 싶다.
진짜 이러다 뒈질 거 같—
“아, 씨바!”
졸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나답지 않게 운이 좋았다. 덫이었으면 크게 낭패를 봤을 테니.
“이럴 바에 조금만 자자…….”
판단을 내린 즉시 나는 방패와 망치를 양손에 쥔 채로 벽에 기댔다.
비록 내 옆엔 아무런 밤친구도 없지만…….
오히려 그편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기습을 당할 거라면 고블린 쪽이 낫다.
기왕이면, 조각칼에 찔리는 쪽이 더 살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누워서 자다가 망치로 처맞는 것보다는.
착-
니미.
이젠 너무도 익숙해진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불침번을 설 땐 4시간이 넘도록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니. 혼자 조는 거 같으니까 바로 나타나는구나.
아저씨가 왜 한눈팔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다.
…집요한 새끼들.
나는 즉시 달려나가 고블린의 정수리에 망치를 꽂아 넣었다.
퍽-!
“그, 그륵!”
슬금슬금 다가오던 건 총 2마리였지만, 한 마리는 친구가 곤죽이 되자마자 즉시 등 돌려 도망쳤다.
그래, 가라 가.
따라갈 기력도 없다.
“하, 씹새끼들…….”
시간을 확인하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동굴을 돌아다니며 고블린들을 사냥했다.
그러다가 피곤해서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으면 아까처럼 벽에 기대고 잠시 졸았다.
졸면서 아찔한 상황이 몇 번인가 있었지만, 진짜 뒈질 뻔했다고 느낀 건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뜨자 웬 탐험가 새끼가 조용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 듯 웃더니 뒷걸음쳐 쓰윽 사라졌다.
…다시 생각해도 존나 소름이 돋는다.
아찔한 것만으로 따지면 두 번째 것도 만만치 않지만.
현재 진행형이란 점에서 특히나 더.
「캐릭터가 수면 도중 고블린에게 공격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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