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ão 9
히 자리를 피해서, 현장에 단서가 남는 것이었다.
"그럼 그 에반젤린이라는 마녀를 잡는 건가요?"
"잡기는 힘들죠. 세상을 들쑤시고 마왕과도 친분이 있는 마녀인데. 제가 가서 다시 한 번 조사를 해야 할거에요."
"그럼, 이번에 또 영주님은 그 쪽으로 파견가시겠네요."
"일이니까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에반젤린을 잡아야 이 세상에서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 멸망이 확정된 세상에서 사는 것 만큼 기분나쁜 일이 없다. 마왕을 재부활시키는 흉계를 꾸미는 좆같은 마녀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는 것만큼 빡치는 일도 없다. 이 세상에 와선 편하게 살 줄 알았는데 에반젤린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다 특전 DLC 보스들도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어디 무슨 내용이 왔는 지 볼까요."
나는 아이라를 옆에 두고 편지를 뜯었다. 아이라도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와서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대충 마녀의 흔적을 발견했다거나, 가벼운 전투가 있었다는 식의 내용을 기대했던 나는 겉봉을 뜯고 나타난 첫문장부터 굳고 말았다.
- 마탑은 페타 루시우스 사제장이 파견한 용병 및 사제가 전원 현장에서 사망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씨벌?"
전원 사망이라니.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에반젤린의 행보를 보자면 인간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마탑 한가운데서 죽일 줄은 몰랐다. 거기서 이런 대량 살인을 한다고? 용병에 사제까지 포함해서 대충 헤아려도 10명은 되는 인원이었다. 전부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도 장소가 마탑이었다. 정해진 장소 외에선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마법을 쓰면 바로 감지가 되고, 마법으로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몰려오는 마탑.
- 사건은 회색 마탑 7층의 상주 마법사. 카를린의 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마탑의 조사원들이 해당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 중이며, 현재 실종 상태인 마법사 카를린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됐나요?"
"전부 죽었다네요. 빨리 가봐야겠어요."
나는 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용병들은 용병 길드에서 알아서 장례식을 치뤄주겠지만, 사제는 내가 시신을 인계받아서 장례를 치뤄줘야했다. 거기다 남부 사제장으로서 이번 파견에서 사제들이 죽은 이유를 대천신교 본부에 보고하고, 사제들의 가족에 대한 위로금까지 지급할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용병과 사제들이 얻은 정보들을 종합하여 왕궁에 보고할 의무까지 있었다. 잠깐 사이에 일이 대책없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시종을 시켜 사제들의 시신을 인계해서 데리고 갈 수레와 마차를 수배하고, 아이라를 통해 일정을 확인했다. 꼭 참여해서 결정해야 하는 안건이 있었기 때문에 빨리 출발하더라도 모레에나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뭐야. 또 가?"
급박한 출장일정을 알려주자 이브는 대단히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자주 외근을 나가니까 이브도 이제 슬슬 자기가 대리일을 맡는 것에 무감각해진 모양이었다. 애초에 내가 출장 가기 전에 중요한 안건들은 다 해놓고 나가니까 이브는 정말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됐다.
"이번엔 마탑으로 가."
나는 수영장에서 발만 물에 담근 채 말했다. 셀루가 내 발을 붙잡고 이리저리 가지고 놀면서 물었다.
"마탑이면 드워프 왕국이 있는 곳 아니야? 멀리 가네."
"신랑. 이번엔 드워프 따먹을거야?"
"드워프는 좀."
이 세계관은 야겜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드워프에 대한 이상성욕이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 드워프는 김리와 무라딘을 섞어가지고 만든 것처럼 생겼고, 여자 드워프는 론다로우지를 프레스기로 누른것처럼 생겼다. 짜리몽땅하고 온몸에 근육이 붙어있는 돌덩이. 이게 전반적인 드워프에 대한 감상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드워프는 왜 인간취급이지."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 새끼들은 인간보단 망치든 오크에 가깝게 생겼는데 인간으로 취급해줬다. 이렇게 따지면 훨씬 이쁜 인어나 수인들은 왜 인간으로 취급안해주지?
"드워프는 손재주가 좋으니까?"
셀루가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서로 도움이 되니까 '인간'의 구성원이 됐다는 건가.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인간은 드워프가 만드는 물건들이 필요하고, 드워프는 효율적으로 곡식이나 식량을 재배하는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며칠이나 걸리는데?"
"글쎄, 나도 그걸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확실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제들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내줘야 하고, 현장에서 조사도 해야했으니 이번엔 제법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빨리와. 알았어?"
"빨리 와야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이브를 꼭 껴안아 줬다. 이브는 어색하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셀루가 슬쩍 물에서 나와서 내 등을 껴안았다.
"앗 차가."
"헤흐"
나는 셀루를 밀어낼 수도 없어서 조금만 그렇게 있기로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서 몸을 일으키니, 등이 흠뻑 젖어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시에리가 돌아왔다.나는 시에리를 꼭 껴안아주면서 모레부터 출장을 갈거란 이야기를 했다. 시에리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건강히 돌아오셔야 해요?"
"저 없는 동안 울지 않을거죠?"
"지금까지도 한 번도 운 적 없던걸요."
"돌아오면 울려줄게요."
그 말에 시에리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시에를 등 뒤에서 껴안은 채 물었다.
"시에리. 우리가 처음 만날 때 제가 몇살이었죠?"
전부터 이 루시우스의 나이가 신경쓰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타이밍이 가장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시에리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글쎄요. 그.... 엘프의 나이는 물어보지 않는게 예의라는 관습이 있어서....."
"그런가요."
나는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전부터 묘하게 신경쓰였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대체 몇살이지? 나중에 엘프 공주 에리나를 만나면 다시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시에리의 볼을 주물렀다. 시에리의 몸은 아기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그녀는 내 손짓에 조금 몸을 움츠렸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 나는 한참동안 시에리를 주물럭거리다가 그녀를 보내줬다.
"성직자. 멀리간다고 들었다."
시에리가 떠나고 나자, 엘시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출장 여부를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시가 다시 물었다.
"성직자가 멀리가면. 마사지는 못하는 건가?"
"못하죠. 조금만 참으세요."
"안된다. 마사지를 하면서 수련하니까 확실히 효과가 있다. 더 해야 한다."
그 말대로 엘시는 진짜로 마사지 효과를 받고 있었다. 블레스를 받은 채 수행하는 게 도움이 된 것인지, 단순한 플라시보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그녀가 강해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근엔 수인종한테 질 수 없다며 이브도 개인 수행에 열중하고 있었다.
"엘시. 너무 마사지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
"그, 그건 그렇지만....."
얼마전에 로이에게 뭐라고 했던게 생각났던걸까. 엘시는 찔리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볼때 마사지의 효과가 좋은 것도 좋은 것이지만, 이미 그녀에게 섹스는 하나의 일과가 된게 분명했다. 오전 내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일과.
엘시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하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기 전에는 최대한 많이 해둬야 겠죠?"
"그래....그렇....다...."
내가 바지 위로 그녀의 성기를 문지르고 있으니 벌써부터 엘시가 쾌감에 젖은 신음성을 흘렸다. 나는 천천히 엘시의 바지를 벗겨냈다. 이미 균열 모양대로 촉촉하게 젖은 팬티가 보였다. 엘시도 서툰 손놀림으로 내 옷을 벗겨내려갔다.
"가만히...있어라....성직자....흐읏...."
그리고 엘시가 나를 침대로 떠밀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덮쳐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엘시는 벗겨낸 옷 틈새로 튀어나온 내 좆을 손으로 몇번 쓰다듬더니 팬티를 벗어던졌다. 매끈한 비부와 허벅지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엘시는 내 양손을 꼭 붙잡고 허리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내 성기가 엘시의 질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하윽...으윽...아...하아...."
엘시는 묘한 신음성을 내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나와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흔들며 다리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오로지 나를 쥐어짜내기 위한 섹스. 그녀가 허리를 내려찍을 때 마다 나는 폭발하는 사정감을 참아내기 위해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성직자. 표정..하응.... 귀엽다...흐읏...."
엘시는 내 성기를 축으로 삼고 이리저리 허리를 돌려댔다. 음란하게 휘적이는 허리와 축축하게 젖어있는 내 성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엘시는 접합부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를 들어서 내가 잘 볼수 있게끔 해주었다. 사정을 촉구하는 그 허리놀림에 나는 견딜수 없어 결국 싸고 말았다.
"으읏....!"
어마어마한 쾌감의 틈에서 내가 사정하자, 엘시는 몸 안을 파고드는 정액의 감각을 황홀한 표정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아...아아....흐으...."
그녀는 헐떡이면서도 나를 쳐다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엘시는 자기가 이런 표정을 짓는 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한 번 기운을 빼낸 내 좆이 사그라 들자, 엘시는 내 젖꼭지를 핥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배에 닿으면서 다시금 내 좆에 힘이 들어갔다.
"아....아아읏...."
뱃속에서 내 성기가 커지는 걸 느낀 엘시가 또다시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내 팔을 붙잡고 다시금 허리를 내려찍으며 보지를 조여대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전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학적인 쾌감에 허덕이는 암컷의 얼굴이었다.
"성직자....좋다...흐으....으윽...."
다시금 내 좆을 육벽이 쪼여왔다. 나는 이 순간도 얼마 버티지 못할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요즘 내가 내려찍는 일방적인 섹스에 길들여진 나에겐, 엘시의 이런 모습은 새로운 쾌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아읏...!"
"하으으으...또.....싼다...성직자...."
몇 번을 그렇게 짜내졌을까. 나는 지금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퀭할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엘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끌어안은 채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볍게 꼬리를 잡아당기자 엘시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꼬리만지는 건 싫다."
"알았어요. 엘시."
엘시는 귀를 가볍게 움직이며 내 배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호위로 가겠다."
"마탑은 수인족을 실험도구로 생각하니까 안돼요."
진짜로 뒤질 가능성이 높아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런가."
엘시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내 배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배방구 해달라고 하면 해줄까?
이브는 영지 대리인으로서 나를 따라갈 수 없다. 셀루는 육지에서 거동이 제한되고, 어딜 갈때 내가 들고다녀야 하는데다가 마탑에서 잘못 걸리면 그대로 인어 박제가 될 수 있었다. 시에리의 경우 마탑 자체는 안전한 곳이기 때문에 데려가도 무방했지만 시에리가 없으면 이브한테 브레이크를 걸어줄 인간이 없었다. 엘시는 수인족이라 갈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나 혼자서 출장을 가야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납관사 몇명과 수레를 끄는 사람들 몇명, 그리고 장례절차를 도와줄 사제가 두명 나와 함께했다. 계획을 설명하자면 일단 사제들 시신을 회수한 다음 빠르게 현장 조사를 끝내고 사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는 게 목표였다.
대천신교는 자기 교회의 사제들을 매우 아끼기 때문에 사제가 교회 관련 파견 임무에서 사망할 경우 해당 지역의 사제장이 직접 가서 장례를 주관하는 제도가 있었다. 어떻게 된 교회가 특권보다 제약사항이 더 많은지 알 수가 없다. 왜 이 세계관 교회는 부패하지 않은 거지? 씨발 야겜이면 당연히 배 튀어나오고 타락한 목사가 여자들 강간하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내가 아직 모자라서 건전하게 살고 있는건가?
나는 짐을 챙기며 그런 불만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교회의 부패가 당연시된 세상이 아니라면 내가 나쁜짓을 할 때 너무 눈에 띄었다. 내가 떠나는 길을 이브와 엘시가 배웅해주고 있었다. 조금 시야를 멀리하면 셀루가 수영장에서 적당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에리는 일찍부터 교회로 출근했고, 아이라는 아직도 집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브가 말했다.
"선물 사와."
"강아지 꼬리 사올게요."
".....넌 나를 대체 뭘로 만들고싶은거야? 인어 혼혈로는 부족해?"
"강아지 꼬리 달린 인어 혼혈이 더 꼴리니까."
"미친 새끼."
이브는 내 헛소리를 적당히 넘겼다. 엘시는 그 말을 듣고 내게 말했다.
"사온다면 고양이 꼬리가 더 낫다."
"네?"
"고양이 꼬리가 더 좋다."
"아, 네....."
나는 엘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어서 적당히 맞장구만 쳐주고 돌아섰다. 마차에 올라타자 건너편에 앉아있던 사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번에 사제가 6명이나 죽어서 대천신교 본부에서 특별히 내려온 장례주관 사제였다. 나로서도 하대할 수 없는 나이대의 인간이라 나 역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반갑습니다. 루시우스 사제장."
사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실눈을 뜬게 아닌가 싶을만큼 찡그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기분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 반갑습니다. 뭐라고 불러드려야하죠? 장례 사제?"
"그냥 엘슨 사제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차가 출발했다. 영지를 떠나는 바퀴 소리가 어쩐지 서글프게 들려왔다. 엘슨 사제가 말했다.
"수인을 이번에 호위병으로 삼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랬죠."
인어 부인 다음에 수인을 개인 호위병으로 삼았다는 소식은 이미 남부 전체에 퍼진지 오래였다. 물론 호위병으로 누구를 삼는 지는 내 마음이고 동부 사제장의 인증으로 엘시는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천 신교에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상당히 독특한 취향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나를 놀리는 건가?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무슨 이야기죠?"
"혹시 인간이 아닌 것들에 어떤 그, 특수한 성욕을 느끼시는 겁니까?"
"제가 욕정 때문에 수인인 엘시를 호위병으로 썼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답이었지만 나는 아닌 척 했다. 어차피 내가 엘시랑 떡치는 걸 대천신교 본부에서 일하는 이 사제가 알 리 없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대천신교에 몸담은 이로서도 다소 과하지 않나 싶을 만큼, 이제 그..... 너무 노골적인 인선을 하시기에 묻는 겁니다."
"대천신교의 교리에 어긋난건 아닐텐데요."
대천신교의 교리에는 수인을 호위병으로 삼거나 가까이해선 안된다는 말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대천신교는 '인간' 자체를 정의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대천신교의 경전 첫줄은 이렇게 시작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 의무가 있다. 대천신교는 그 의무로 통하는 길이자 진리이다.'
"우리 엘슨 사제께서는 수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입장에서 말하기 곤란한 내용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제 호위병이 수인이라는 걸 지적하고 싶으신 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싶으신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엘슨 사제가 말하는 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아무리 그래도 수인은 좀.....' 이었으니까. 대천신교가 아무리 이런 면에서 프리하다고 해도 너무 선을 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인 셈이었다. 내 정치적인 입지나 사회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수인을 호위병으로 두고 '인간'답게 대접해주는 건 다소 반발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엄연히 수인들은 동부 평야지대에서 인간들을 고생시키는 침략자들이었다. 내가 아무리 대천신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쳐도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장 동부 평야지대 영지들에는 수인한테 가족이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지금 내 행동을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친구집에서 편하게 있으라는 친구 부모님 말을 듣고 바로 바닥에 누운 채 마루에서 배를 긁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친구 부모님이 '뭐하니'라고 물어보면
- 편하게 있으라면서요?
이렇게 답하는 것과 같았다.
엘슨 사제는 지금 살살 돌려말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하라고. 이런 사건에 굳이 본부에서 직접 사람을 보낸 것도 내게 이 말을 돌려전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교회는 정치적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천신교가 커진 건 왕국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엘슨 사제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소 기분이 나빠보였지만 어차피 더 할말이 없었다. 저렇게 돌려말하는 것 말고는 내게 제재를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영지에서 자유민인 수인을 호위병으로 쓴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엘슨 사제가 입을 다물면서 나는 다소 편안한 마차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바로 옆에있는 인간이 말을 걸지 않으니 경치를 온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 왕국은 거대한 산맥과 함께했다. 드래곤 산맥의 근사한 위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드워프 왕국 역시 거대한 산에 파묻혀 있었다.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산의 단면들과 광부들이 헤집은 구멍들이 보였다. 언틋 보기엔 스위스 치즈 같기도 하고 내게 환공포증을 유발하기 위해 세워놓은 혐짤같기도 했다.
나는 산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보고있자니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구멍뚫린 산은 오래보고 있을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드워프 왕국은 산맥의 광맥을 전부 찾아낸 상태라 북부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작 그래픽으론 산이 얼마나 씹창났는 지 알기 힘들었는 데, 저렇게 구멍이 송송 뚤린 걸 보니 드워프 새끼들도 좆간에 비빌만큼 환경을 씹창내는 새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프레스에 짓눌린 브록 레스너 같은 새끼들이 산의 경관을 망쳐놨다는 사실을 나는 견딜수가 없었다.
좆같던 기분에 시달리던 찰나, 마차 옆을 나란히 달리던 사제 중 하나가 지평선을 가리키며 외쳤다.
"마탑입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내밀었다. 마탑 도시의 마탑들은 그야말로 탑이었다. 피사의 사탑 같이 생긴 탑들이 수십 수백개가 도시 하나에 늘어서 있었다. 탑 안에는 상가도 있었고 식당도 있었으며 숙박업소도 있었다. 우리로 치자면 주상복합 아파트와 비슷한 공간이었다.
층이 높을수록 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이 살았고 실력이 없는 마법사는 마탑 내부에 방을 배정받지 못했다. 때문에 마탑에 등록된 마법사라도 마탑에 살지 않고 따로 근처에 집을 지어살거나 천막을 만들어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도시 입구에 마차를 내린 뒤 책임자를 찾았다.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오는 걸 확인한 책임자인게 분명했다. 엘슨 사제도 본격적으로 일할 차례가 오자 찌푸렸던 표정을 풀고 근엄한 얼굴을 하였다.
담당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꺼운 명부를 펼쳤다. 그는 두꺼운 안경에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페타 루시우스 사제장님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우리 사제들과, 파견 간 용병들이 전부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시체는 저희가 수습해서 이 쪽으로....."
담당자가 작은 텐트를 가리켰다. 사제들을 텐트에다가? 내가 미묘한 표정으로 담당자를 쳐다보자 그가 급히 변명했다.
"마탑 내부에 영안실로 쓸 방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그래도 마탑에 들어선 마법사에게 시체를 보관했던 방을 주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창고에 넣어두기도 그렇고."
"아니, 뭐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빨리 가시죠."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는데 담당자는 알아서 변명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희가 대천신교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보존 마법부터, 온갖 마법을 다 걸어두었으니 시체 상태는 문제 없을겁니다. 꼭 잠들어 있는 것 같을 거....."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시체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누워있었다. 나는 천에 덮인 시신 중 하나를 골라서 천을 걷어보았다.
"워....."
시체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있었다. 드워프가 드워프제 너클을 끼고 면상에 초강타를 꽂아넣은 듯한 위력이었다. 나는 누군지도 알 수 없어서 적당히 성호만 그은 다음에 다시 천으로 시체를 덮었다. 어차피 장례는 장례 사제가 할 일이었다.
"애석한 일이로군요. 현장을 보고 싶습니다."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현장을 확인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 결국 결론은 '에반젤린이 그랬다.' 겠지만.
담당자는 나를 현장으로 안내했다. 사제들이 뒤에서 시체 수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웠다가 나중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하지? 나는 급히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혹시 시체를 조사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엘슨 사제는 다소 불만이 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휘하 사제들을 멈추게 하였다. 최대한 빨리 사제들을 가족들 곁으로 보내주고 싶을테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거다. 하지만 만약이란게 있었다. 시체를 조사해야될만큼 상황이 복잡할수도 있었으니까.
"워우."
사건 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몇가지 마법을 조합한 결과물이라고 담당자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건 현장은 마탑 내부에서도 구석진 방이었다.
이 곳에 있는 방 주인이었던 카를린을 조사하기 위해 용병들과 사제들이 올라갔고, 조금 뒤 폭발음이 울렸다. 담당자가 황급히 위로 올라온 결과 이미 용병들과 사제들이 전부 방 안에서 박살이 나 있었으며 카를린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했다.
"끔찍하군요."
현장은 참혹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작은 골방안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벽면에는 내장으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늘러붙어 있었고 유리플라스크의 내용물은 변질되어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린은 어떤 마법사였나요?"
"저희도 마법사 개개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따로 설명드릴게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붉은 머리에 꽤 괜찮은 성격의 마법사였던 것 같습니다."
"다소 애매모호한 기억이군요."
"아무래도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요. 카를린은 이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체들은 어떻게 쓰러져 있었죠?"
말그대로 폭탄이 터진듯한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은 제법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는 이게 마탑에서 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시신들을 복원한 흔적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멀쩡하게 쓰러져있던 것인지 궁금했다.
"아, 그게....."
담당자는 조금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다가 내게 말했다.
"좀 끔찍할텐데, 보실 수 있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담당자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 꺼림칙한 얼굴로 지팡이를 들더니 공중에 휘저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방 여기저기에 박혀있던 수정들이 빛을 발하더니 작은 레이저 같은 것들을 사방에 쏘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이 눈이 부셔서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레이저들은 천천히 무언가 뭉툭한 형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건 손 같기도 했고 사람의 얼굴같기도 한 다양한 크기의 덩어리들이었다. 이 덩어리들은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인간의 살점과 비슷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붉은 피로 범벅이....
"씹...."
빛은 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나는 사방에 널린 살점들과 그나마 온전한 하반신들, 그리고 방 밖까지 튕겨나간 몇몇 시체들의 형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순식간에 B급 스플래터 무비 촬영장이 된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마탑에서 자랑하는 현장 보존 마법입니다."
"이런 사건이 자주 있던건가요?"
마법 자체는 훌륭했지만, 이런 마법을 만드는 이유는 보통 자주 있는 말썽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썩 반가운 준비물이 아니었다.
"고독사하는 마법사들을 유족들한테 인계하기 전에, 현장 재현용으로 쓰던 마법입니다. 저희도 이런 대량 살인사건에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히도 이 빛으로 만들어진 형상들은 실제와 다르게 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바닥에 누워있는 사제의 발을 툭툭 걷어차자 지직거리며 살짝 형상이 흐트러질뿐 실제로 내가 발을 걷어찼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엄청난 폭발이군요."
방 안은 가구들은 멀쩡하지만 사람들은 죄다 터져 있었다. 방 중심을 기점으로 피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 있었으며, 사람들의 시체도 방 중심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카를린의 방에는 원래 아무도 방문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저희가 매주 고독사나 사고사 확인을 위해서 순찰을 돌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방문 자체를 그렇게 꺼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카를린은 왜 용병들을 공격했죠?"
방문을 꺼리지도 않는 인간이 왜 용병들을 공격했지? 용병들은 그냥 에반젤린에 대해 수소문하러 온거지 카를린에 대해 조사하러 온게 아니었다. 당장 방 안에는 에반젤린이라고 짐작할만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만일 에반젤린이고 마탑 마법사로 신분을 위장할 생각이었다면, 진짜 내가 쓰는 물건들은 다른 아지트에 숨겨놨을거다.
"뭔가 용병분들이나 사제분들이 카를린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게 아니겠습니까?"
"수상한게 있는데 카를린은 잘도 문을 열어줬군요. 용병의 조사시 마법사들이 문을 열게끔 마탑에서 지시를 내리나요?"
그리고 애초에 수상한게 있다면 문을 안열어주면 그만이었다. 카를린말고도 이 마탑에서 용병들에게 문을 안열어주는 마법사는 한 둘이 아니었을거다. 그러면 마법사들 중에서 용병들이 굳이 카를린만 콕 집어서 수상하다고 느낄 이유도 없었다.
"저희는 마법사들에게 그런 걸 강요하지 않습니다."
"카를린이 에반젤린이라면, 굳이 이 마탑에 수상한 물건들을 숨겨놓고, 굳이 안열어줘도 되는 문을 열어서 용병들을 끌어들인 다음, 굳이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며 도망간게 되겠군요."
"방심한게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실수는 합니다."
자기에 대한 정체를 발설하지 말라고 금제를 걸고다니고, 노예 시장에서도 가면을 쓰고 다니는 철저한 여자였다. 근데 그런 실수를 한다고?
"카를린이 에반젤린 본인이 아니라 끄나풀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레 겁먹고 달아난 것이죠."
"그런 가능성도 있군요."
담당자의 의견도 그럴듯 했다. 카를린이 에반젤린의 부하 중 한 명이라면, 갑자기 들이닥친 용병과 사제들에 놀라서 혼자 일을 키우고 도망갔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그런데 폭발은 방 한가운데서 일어난 것 같네요?"
"네. 그렇습니다. 마력을 강하게 응집시켜서 폭발시킨걸로 보입니다."
"카를린이 방 안에 있었다면....."
나는 폭발 자국으로 카를린이 위치했을 자리를 대충 추론해보았다. 그로부터 두발짝 쯤 뒤. 실험대와 의자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카를린은 대충 여기 앉아있었겠군요."
의자에서는 문이 바로 정면으로 보였다. 아마 저 문으로 용병들과 사제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대충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니 뭔가 이상했다. 마력 폭발은 용병과 사제들의 중심부에서 터졌으니 인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게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카를린이 앉은 의자 뒤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마법사의 시체가 있었다. 마법사는 벽을 등지고 누워있었다.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카를린이 냅다 마력폭발을 갈겼다면 여기 쓰러져 있는 마법사는 벽을 등진게 아니라 벽에 머리를 쳐박고 죽어있어야 맞았다.
마력폭발을 일행 중심부에 갈겼다면 맨 앞에 서있었을 이 마법사는 등 뒤에서 일어난 폭발에 휘말렸을 테니까.
"얼굴을 크게 다쳤군요."
그런데 마법사는 얼굴이 완전히 박살나있었으며, 얼핏봐도 뒤통수에는 상처가 없었다. 나는 담당자에게 말했다.
"잠깐 내려가서 용병 마법사의 시체를 확인해주시겠어요? 뒤통수에 마법을 맞은 흔적이 있는 지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담당자가 허공에 지팡이를 그으며 몇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타박상만 좀 있다더군요."
"마법은 편리하네요."
"배워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상황이 다시 짜여졌다. 카를린은 들어오는 용병 일행에게 다짜고짜 마법을 갈긴게 아니었다. 용병과 사제들이 카를린을 둘러싼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카를린은 용병들에게 어떤 결정적인 증거를 들켰다. 용병과 사제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최후의 발악으로 마력폭발을 일으킨 뒤 도망친것이었다.
"시체를 보면 무엇인가 빙 둘러싸고 있던게 아닌가 싶네요. 용병들과 사제가 뭘 보고 카를린을 둘러싼 것일까요?"
"에반젤린이라는 증거를 발견한게 아니겠습니까?"
"에반젤린이라는 증거요? 그런게 어디있죠?"
"카를린이 들고 도망간게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잡히더라도 발뺌하기 위해서죠."
그럼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카를린은 자신만만하게 용병들과 사제들을 방에 들어오게 했다. 하지만 개병신 빡대가리였던 카를린은 자신이 에반젤린이거나, 에반젤린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용병들에게 들키고 말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한다. 카를린은 최후의 수단으로 마력폭발을 일으켜서 용병과 사제들을 모조리 죽인 뒤 도주한다.
뭔가 살짝 아쉬운 듯 했지만, 이 이상의 결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담당자는 방 끝 벽에 처박혀있는 마법사의 시신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참, 활기찬 아가씨였는데, 아쉽게 됐군요."
"여자였습니까?"
용병들 신상 명세를 대충봐서 마법사가 누구였는지도 확인안했다. 예쁜 마법사라니, 나도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제 얼굴이 박살나서 누군지도 못알아볼테지만.... 그나저나 참 당돌한 아가씨 아닙니까? 카를린을 막아보겠다고 이렇게 앞에까지 나오다니....."
얼굴이 박살나서 누군지 못알아봐? 카를린을 막아보겠다고 앞으로 나와? 그제서야 나는 내가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왜 마법사가 앞에 나와있지? 사제들과 다른 용병들이 맨 앞에 있어야 하지 않나? 마법사가 전위를 서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왜 나는 마법사가 꼭 마탑에 있을거라고 생각한거지? 마탑에 이름만 등록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법사가 많은데? 용병이라는 팻말을 달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법사가 그렇게 많은데. 내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거지?
마력폭발을 왜 카를린이 일으켰다고 생각한거지? 마법사는 한 명 더 있었는데.
나는 다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더 자연스러운 그림을.
용병들과 사제들이 카를린을 조사차 방문한다. 카를린이 흔쾌히 문을 열어주고, 용병과 사제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다양한 실험 도구를 구비해야하기 때문에, 마탑의 방 하나 하나는 상당히 넓었다. 누군가가 대표로 상황을 설명하고 탐문을 위해서 서류를 꺼내든다. 카를린이 서류에 집중하는 그 순간, 맨 뒤에 있던 마법사가 지팡이를 꺼내들고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펑.
마법사와 마주보는 방향에 있던 카를린은 얼굴이 박살난 채 그대로 날아가서 벽에 처박힌다. 사제와 용병들은 사방으로 터져서 날아간다.
"이 용병 마법사의 머리색은 무슨 색이었죠?"
"붉은색이었죠. 그러고보니 카를린이랑 똑같....."
담당자가 말하다 말고 얼굴 표정을 굳혔다. 그 역시 내가 했던 추론 과정을 천천히 거쳐가는 게 분명했다. 할 말을 잃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담당자를 재촉했다.
"지금 당장 카를린의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카를린임을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는 지 물어보도록 하세요."
에반젤린 이 씨발년이 사람을 놀리고 있었다. 내가 용병을 모집하는 순간부터, 이미 그 여자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던거다.
"카를린의 가족에게 신체적인 특징들을 확인받은 결과, 마법사의 시체는 카를린이 맞았습니다. 현재 용병 마법사를 수배중입니다.이름은 엠버. 기록 상의 나이는 23세. 주 특기는 불을 활용한 마법입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카를린은 이미 자기 방에서 용병 및 사제들과 함께 시체로 변한지 오래였다. 진짜 범인은 이미 현장에서 달아나고 없었다. 마법사 엠버. 나는 불쾌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들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남부 용병길드에 조사자를 수배하는 시점에서? 어쩌면 마탑과 에버딘 시장에 관련 문제를 문의하는 시점에 에반젤린이 내 행동을 알아챘던 것일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거였다. 에반젤린이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
정체를 숨기려했다면 그냥 다른 곳으로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이미 내가 조사한다는 것도, 어디를 조사하는 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처음부터 엇나간 조사방법이었으니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미친 년은 마법사 엠버라는 이름을 달고, 내가 탐색을 지시한 용병단에 들어가서 용병단과 사제들을 전멸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건 확실한 도발이었다. 거기다 파훼법도 없었다. 이 마법사 엠버도 에반젤린의 진짜 신분인지 다른 용병 마법사를 죽이고 위장한 신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씨발 변신이 가능했으면 왜 가면을 쓰고 다닌거지?"
정말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아예 다른 용병 마법사로 완벽하게 변장이 가능했다면 왜 가면을 쓰고 다닌거지? 컨셉충인가? 담당자는 완벽하게 마법사 엠버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이 말인즉 마법사 엠버는 에반젤린 본인이 아니거나 엠버의 인상착의가 에반젤린의 맨얼굴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용병 길드에 마법사 엠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둔 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용병 길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일테지. 믿고 맡겼던 용병이 마탑에서 대량 살인을 저질렀으니.
물론 나는 용병길드가 곤란한게 내 돈이 나가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에 용병 길드에 용병 관리 책임 소홀을 물어서 사제 및 용병들의 장례비용과 유족 보상금을 요구한 상태였다.
"에반젤린의 끄나풀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담당자가 다시 한 번 끄나풀설을 제기했다. 여전히 그럴듯한 이야기였기에 나는 판단을 보류했다. 모든 건 엠버를 잡고 나서 결정될 일이었다. 나는 마탑시체 안치소 옆 의자에 앉아서 분을 삭였다. 에반젤린한테 놀아난 기분이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마탑 중앙에 놓인 커다란 방망이가 내 시선을 자극했다. 마탑에 어울리지 않는 저 거대한 방망이는 이 게임 제작자들이 나중에 이벤트 보스를 넣을거라며 떡밥용으로 설치해둔 방망이였다. DLC가 나오기 전에 내가 이 세상으로 왔기 때문에 난 그 보스를 깨지 못했지만.
대충 작품 내용으로 따지자면 지하에서 발견한 유물인데 그 용도가 불분명해서 장식용으로 마탑 도시 중앙에 걸어놨다는 설정이었다.
담당자가 그 방망이 쪽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연이어 벌어진 반전에 휘말리느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두꺼운 안경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앉아있는 내게 달려왔다.
"마탑의 감시 장벽을 확인한 결과, 도시 쪽 방향으로 텔레포트나 기타 이동 마법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것도 확인이 가능한가요?"
"아무래도 텔레포트로 왔다갔다 하는 마법사의 숫자가 제법 있다보니 그 마법의 흔적을 감지하는 장벽이 하늘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담당자는 에반젤린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텔레포트를 사용해 마탑 밖으로 빠져나갔다면 흔적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마법사 엠버는 대충 사건 현장 밖으로만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탈출했고, 그 다음에는 도보로 이동했단 말인데.....
"그럼 도보로 이동한 흔적은 없나요?"
"수상한 행색을 한 마법사가 드워프 왕국 방향으로 향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마탑의 마법으론 못하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드워프 왕국 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시 생긴게 극혐이라 썩 가고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뚤린 산들과 둥글고 납작한 집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슨 사제는 이제 슬슬 떠나고 싶어하는 듯 했다. 원칙적으로는 나 역시 엘슨 사제를 따라서 장례식을 주관해야 맞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에반젤린을 쫓아서 드워프 왕국에서 행적을 수소문해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서 결정해야 했다.
"외부인인 제가 조사하는 것보단, 마탑에서 직접 조사하는 게 맡겠죠. 이 부분은 마탑에 위임하겠습니다."
드워프 새끼들 중에 이쁜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에반젤린인지 엠버인지가 드워프 왕국으로 도망친지 벌써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발로 뛰어가도 이미 드워프 왕국은 통과했을 시간이고, 드워프 왕국으로 간다고 쳐도 딱히 특별한 증거품을 찾을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 엘슨 사제 우리는 장례식을 주관하러 출발합시다."
담당자는 내 말을 상부에 전하겠다고 알렸다. 마탑 입장에서도 민감한 문제기 때문에 수사 자체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었다. 나는 드워프 왕국에서 소득이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일단은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용병들과 사제들의 시체를 대충 수습해서 수레에 실었다. 이제 한 명 한 명 가족들에게 이 시신을 인계해주는 작업만이 남은 것이다. 엘슨 사제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법사에 의해 사제들이 여러명 죽은 사건이었다.오랜 세월 사제 생활을 해온 엘슨 사제 입장에선 가족들이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
"빨리 에반젤린을 잡아야 이런 비극도 없어지겠지요."
내가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에반젤린을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해결법을 말했음에도 내 스스로 답답하다는 게 느껴졌다. 해결법에 대해 떠들기는 쉽지만 이를 실천하기가 무지 어려웠다. 엘슨 사제는 나를 천천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엘슨 사제와 함께 다시 마차에 올랐다.
짧은 마탑 방문기가 끝난 것이다. 사제들의 고향이 적힌 문서를 엘슨 사제가 내밀었다. 나는 명단을 체크하면서 엘슨 사제에게 물었다.
"사제 장례식은 다른게 있나요? 제가 사제 장례식 주관 절차를 잘 몰라서 실수할까봐 걱정이 되는 군요."
"제가 옆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충 보니 우리 영지 출신 사제는 없었고 아무르 영지 출신 사제가 2명 정도 있었다. 요즘 들어 많이 힘들다고 하던데 구빈 사업에 가장 필요한 사제들이 둘이나 죽었으니 더 힘들게 분명했다.
"우선은 가장 가까운 에리에타 영지로 가겠습니다."
엘슨 사제는 지도를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사제 중 1명이 이 곳 출신이라고 했다. 용병들은 에리에타 영지에 들리는 김에 용병 길드에 시신을 인계할 생각이었다. 에리에타 영지는 남부의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영지 초입부터 목초지가 아닌가 싶을만큼 광활한 밀밭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밀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엘슨 사제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눈을 찌푸리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교회 앞까지 이렇게 드넓은 밀밭이 쭉 이어져 있었다. 우리 영지와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였으며, 여기 영지민들이 내는 세금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엘슨 사제는 교회에서 사제들의 얼굴을 확인하게끔 하고, 에리에타 출신 사제를 지명하여 장례식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 준비과정은 제법 오래걸리기 때문에 나는 엘슨 사제에게 제안했다.
"준비 시간이 꽤 걸리는 것 같은데, 제가 일꾼들을 데리고 용병 길드에 용병 시신을 인계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사제장씩이나 되면 장례 준비 과정에서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엄연히 남부 대천신교 교회에선 최고 책임자였으니까. 관을 옮기거나 촛불을 설치하는 등 잡일들은 내가 할게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다른 사제나 신도들이 부담스러워 할게 뻔했다. 지금도 장례식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수할까봐 신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이 굳어있는 게 보였다.
이 때문에 엘슨 사제도 본격적인 장례식 전에 나를 좀 떨어뜨려놓는 것에 동의했다. 나도 사제들 장례식 준비하는 걸 보는 건 썩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일꾼들 몇명을 불러서 용병길드로 향했다. 에리에타 영지의 용병길드는 남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대충 여기서 시신을 인계하면 용병들의 가족이 남부에 있다는 가정하에 며칠 내로 시체가 배달될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용병길드와 대천신교 교회는 제법 가까이 붙어있었다. 용병들이 사제 도움을 받는 일이 많아서 편의를 위해 이렇게 지은 게 분명했다. 몇걸음 걷지 않아서 우리는 용병길드 건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본 용병 길드 건물은 고급스러운 여관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게임 상으로 볼 때는 주점과 비슷한 건물이었는데, 실제 용병길드는 훨씬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용병 길드 대문에 서있던 사람들이 수레에 시체들을 담아오는 내 모습에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말했다.
"마탑 파견 의뢰에 참가했던 용병들의 시신을 인계하러 왔습니다."
그 말에 용병길드에 있던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시신을 구경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이번 건에 금액을 크게 걸었다보니, 참가했던 용병들도 한끗발 날리던 인간들인 모양이었다. 유명인들이 죽었으니 구경하러 올만도 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내가 용병들을 물리치기 위해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른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나와있어요? 나 마중나왔어요?"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크써클이 깊게 내려간 눈, 분홍색 장발, 그리고 180은 넘어보이는 훤칠한 키와 풍만하다 못해 터질듯한 가슴. 히죽히죽 웃는 얼굴과 비틀대는 몸을 가누기 위한 지팡이.
나는 이 마법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용병들 역시 이 마법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으니까.
"씨발 미친년이다. 째자."
"야, 야 빨리 빨리 도망쳐!"
기분나쁜 중사를 발견한 병사들처럼 용병들이 슬금슬금 사라졌다. 방랑 마법사 소야. 원작의 히로인 중 딱 둘 밖에 없는 마법사 직업군. 그 여인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이름: 소니아 야이반
직업: 방랑 마법사
레벨: 42
호감도 : 20
스텟
힘 : 6 (+70)
민첩 : 3
지능 : 140
행운 : 40
특성
아는 것이 힘이다
마법사는 지식이 곧 힘입니다.
지능 수치의 절반만큼 힘이 상승합니다.
가학증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상대를 공격할 때 데미지가
레벨차이 X 5% 상승합니다.
핸드메이드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서 도구 등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영구적 장애
뛰거나 빠르게 걷지 못합니다.
예로부터 핑크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원작에도 등장하는 방랑 마법사 소야는 이 말에 가장 잘어울리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다. 몸을 막 굴리거나, 주인공을 암걸리게 만드는 트롤짓을 일삼지는 않아도 그 행동이 아주 기이한 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명은 소니아 야이만. 하지만 아무도 본명으로 안부르고 용병 길드 등록명인 소야라고 불렀다. 용병길드에 굳이 본명으로 등록안한 이유는 소야가 더 어감이 귀여우니까. 이 때문에 한국 팬덤에서 자주 불리는 별명은 소시지 야채볶음이었다.
소야의 첫등장은 사천왕 흘러내리는 팔키오스 퀘스트였다. 당시 이 물리 면역 슬라임은 드워프 왕국과 마탑에서 생산되는 고순도 마석들을 훔쳐 자신의 몸에 흡수하여 물리 마법 양쪽으로 전부 완벽한 슬라임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 마석 절도 사건의 범인으로 소야가 의심받게 된다.
이 누명을 벗기 위해 독자적으로 조사하고 있던 소야는 주인공인 용사일행과 합류하게 되고, 마침내 범인인 흘러내리는 팔키오스는 잡아 누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후 동료로 들어올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되지만 흘러내리는 팔키오스는 용사와 소야를 엮어주기 전에 이미 저승으로 가버렸으니 지금 나와 소야는 접점이랄게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누구에요?"
소야가 그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며 내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내가 빙의한 루시우스가 남자치고 키가 작은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소야를 보고 있으니 그녀가 거인족 혼혈이 아닌가 싶을만큼 소야는 키가 컸다.
정면으로 똑바로 마주보면 나는 소야의 쇄골과 매끈한 턱선 정도만 볼 수 있었으니까.
그 큰 키 덕분에 소야가 허리를 숙이자 육감적인 가슴골이 내게 훤히 들여다 보였다. 나는 차마 성직자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이런 외설스러운 광경을 공공연하게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천신교 남부 사제장이자 페타 영지의 영주. 페타 루시우스입니다. 그 쪽은 누구시죠?"
내 대답에 소야는 살짝 놀란 듯 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조금 크게 뜨면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손에 들고있는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특성에서도 '영구적인 장애'라는 게 활성화 되어 있었지. 하지만 원작의 소야는 두다리 멀쩡하게 잘 걸어다니는 여성이었다. 내가 지팡이에 시선을 주자 소야가 지팡이를 흔들며 말했다.
"아, 이건 최근에 마탑이랑 좀 안좋은 일이 있었어요..... 그나저나, 실례 했어요. 저는 마법사 소니아 야이반이라고 해요. 무슨 일로 이곳에.....왔어요?"
그제서야 소야는 시체들을 발견한 듯 했다. 수레에 실려온 시체들을 슬쩍 쳐다본 소야가 말했다.
"시체를 인계해주러 왔군요. 파견나간 A급 용병 3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네.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탑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불미스러운 사건이요?"
소야는 그 말에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지? 마탑에서 일어난 사건과 소야가 관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엠버라는 이름으로 용병 길드에 등록할 이유도 없었고, 에반젤린 같은 캐릭터의 끄나풀일수도 없었으니까.
소야는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약해보이는 여성이 이런 표정을 지으니까 이 것도 이것 나름대로 섹시하게 느껴졌다.내가 소야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제가 최근에 마탑이랑 좀 안좋게 엮여서 혹시나 저한테 불똥이 튈까봐서요."
"그렇군요."
나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가 소야와 대화하는 사이 용병 길드 담당자가 용병들의 신원을 확인해준 다음, 내게 말했다.
"네. 당초 전달받은 내용과 같군요. 두 사람의 시체를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인계해주러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내가 고개를 숙이고 떠날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확인 작업이 시간을 잡아먹어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마법사 소야를 여기서 못따먹는 건 아쉬웠지만, 원작에서도 제법 긴 시간을 들여서 공략해야 하는 괴팍한 캐릭터였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한 번 만났다고 따먹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커다란 가슴으로 파이즈리를 시키거나, 진공 펠라로 내 좆을 쭉쭉 빠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돌아가서 시에리한테 시켜야지.
내가 돌아갈 때도 소야는 계속해서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내게 별 관심이 없었는 지 내가 수레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 동안에도 줄곧 용병 길드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돌아가는 동안에도 한가지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소야의 다리. 누가 소야의 다리를 저렇게 만들었는 지가 의문이었다. 팔키오스 퀘스트가 좋게 끝나지 않은 건가? 몬스터한테 당했으면 아예 죽었을테니까 그 쪽이 신빙성있었다. 사건의 배후가 되어야할 팔키오스가 어중간하게 마석을 훔치다가 마왕성으로 가버렸으니, 누명을 쓴 소야가 해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마탑과 엮여서 안좋은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리 하나가 아예 장애인이 된 걸 보니 혹독하게 고문이라도 당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뭔가 누명을 벗을만한 증거가 발견되서 풀려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소야가 살짝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억누르고 교회로 향했다.
"어서오십시오. 사제장님."
엘슨 사제가 나를 환영했다. 마침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원래 루시우스가 얼마나 많이 장례식에 참여했는 지 모르지만, 나는 전생 현생 통틀어서 장례식 참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엘슨 사제. 장례식 절차에 대해 다시 한 번 알려주시겠어요? 파견 사제들의 사망을 위로하는 장례식에서 제가 실수라도 할까봐 걱정되네요."
"제가 옆에서 하나하나 알려드릴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제장님."
"역시 엘슨 사제가 있으니 많이 도움이 되네요."
나는 씩 웃어주고 장례식 절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엘슨 사제는 성심성의껏 내게 장례 절차를 안내해주고 있었다. 내 역할은 간단했다. 표정을 아주 엄숙하게 하고 관 옆에 서있다가 장례를 주관하는 엘슨 사제가 '사제장이 교황을 대신하여....'로 시작하는 문구를 발언하면 그 문구에 따라 행동하면 끝이었다.
내 걱정과 다르게 실제로 장례식은 실수할 여지가 없을 만큼 매우 쉬웠다. 기껏해야 교회에서 준비한 성수를 허공에 뿌리거나 시체들 옆에서 기도문을 읽는게 다였다. 하지만 행동 자체는 어렵지 않은 반면, 표정 관리는 무지 어려웠다. 장장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장례식 내내 나는 하품도 지루하다는 표정도 지어서는 안됐으니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었다면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겠지만, 이 장례식은 정말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없는 타인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억지로 침통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정말 애를 써야 했다. 하품이 나올 것 같으면, 고개를 푹 숙였고 표정관리가 안될 것 같으면 잠시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사망한 사제들을 묘지로 옮기기 위해 수레꾼들이 관을 옮겼다.
나는 장례식을 치뤘던 교회 계단에 주저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제들의 관을 따라서 사람들이 곡을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인기를 보아하니 이 지방에서 제법 인망있던 사제들인듯 했다.
아마 다른 사제들도 특별히 엄선한 후보군을 추려서 뽑은 것이니 분위기는 비슷할 듯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더 엄숙하고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며 장례식을 해야한단 뜻이기도 했고.
나는 이 지랄을 도시를 몇군데 돌면서 더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탄할수 밖에 없었다. 내가 깊이 한숨을 내쉬자, 내 한숨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엘슨 사제가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죽고 사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루시우스 사제장."
이렇게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내 연기가 제법 잘 먹힌 모양이었다 나는 엘슨 사제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쳤다.
"맞아요. 엘슨 사제. 너무 상심해있어서도 안되겠죠. 그럼 서두르도록 할까요? 여기 남은 사제들도 가족들의 품이 그리울 테니까."
"네. 움직입시다. 사제장님."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보단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마차에 타자 엘슨 사제가 뒤이어서 마차에 올라탔다. 남은 시신들을 실은 수레가 앞장서서 출발하고, 우리가 탄 마차가 그 뒤꽁무니를 따랐다. 장례식이 끝난 영지의 분위기는 우중충하기 그지 없었다.
멀리 산기슭에서 사제들을 묻기 위해 무덤을 파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는 이 과정까지 우리가 전부 기켜보면서 참여해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는 들릴 곳이 많았다. 엘슨 사제는 아쉽다는 듯이 무덤파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빨리 다음 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군요."
그런 나의 상념을 깨운 건 엘슨 사제의 한마디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창 밖을 바라봤다. 정말 마탑의 마법사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용병길드 앞에 서 있었다. 엘슨 사제가 덧붙였다.
"저들은 마탑의 치안을 담당하는 이들인데,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 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용병길드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이 있었으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인이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방랑 마법사 소야였다.
"잠깐, 엘슨 사제. 마차를 멈춰주세요."
"네?"
엘슨 사제가 대답을 제대로 못하자 나는 내가 직접 마부에게 명령해서 마차를 멈추게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뛰어내려 용병길드로 달려갔다. 뭔 사태인진 몰라도 여기서 그냥 소야를 두고가면 왠지 그녀가 뒤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멀리 용병길드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밀밭을 가로질러서 그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용병길드를 둘러싼 마법사들은 아주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소야가 쓰러져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특수한 마법으로 소야를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후미에 있던 마법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마법사 중 몇몇이 뒤를 돌아서 내가 지팡이를 겨누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페타 영지의 영주이자 남부 사제장 페타 루시우스입니다! 쏘지 마세요!"
내가 암만 힐이 있고 어쩌고 해도 마법에 맞으면 아팠다. 일단은 살아서 올라가야 됐기 때문에 나는 손을 흔들면서 최대한 나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서로 쑥덕거리면서 대화하더니 지팡이를 거두었다.
내가 소리를 지른 덕분에 소야를 둘러싸고 있던 마법사들도 내가 다가오고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들도 서로 웅얼거리면서 대화하더니 가장 나이가 많은 마법사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었으며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꼰대의 기운이 넘쳐흘러서 나는 그와 대화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내가 밀밭에서 용병길드 대로변으로 올라올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려줬다. 나는 높은 턱을 한손으로 붙잡고 단숨에 뛰어올라 마법사 대장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나이든 마법사는 허리가 구부정해서 제법 덩치가 컸음에도 나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멀리서 엘슨 사제가 길을 빙 둘러서 달려오고 있었다. 늙은 마법사는 엘슨 사제가 달려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한숨을 쉬며 내게 물었다.
"페타 영지의 영주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무슨 일을 하는 지 대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야는 눈만 겨우 위로 치켜올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소야 주변에는 푸른색 막이 펼쳐져 있었고 마법사들 몇몇이 어떤 특수한 마법을 이용해 소야와 그녀 주변의 땅을 억누르고 있었다. 소야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마치 그녀는 보이지않는 사슬에 묶여있는 듯 했다. 내가 소냐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늙은 마법사는 대답했다.
"마탑의 일입니다. 사제장께서 간섭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억울해요! 난 범인이 아니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야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살기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늙은 마법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네가 범인이라고는 여기있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소니아 야이반! 네게 용병들 살해 '혐의'가 있으니 마탑에서 조사를 받는 것 뿐이다."
"증거 있어요? 없잖아요! 증거도, 의심할 근거도 없잖아! 내가 왜 용병들을 죽였다는 거에요!"
늙은 마법사는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크게했다. 이 자리에서 소야가 왜 끌려가야 하는 지를 공개적으로 밝힐 생각인듯 했다.
"마법사 소니아 야이반! 너에게는 카를린을 죽일만한 동기가 있다. 저번 마석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네가 지목되었을 때, 마석의 행방을 추적하는 추적 마법을 지원한 인물이 바로 카를린이었으니까!"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건가?
"알게뭐야! 누가 무슨 마법을 지원했는지 내가 어떻게알아요? 난 그 때 마탑 감옥에 갇혀있었잖아요! 변호할 기회도 안줬잖아! 내가 무슨 수로 마법을 누가 지원했는 지 알아내?"
"그러니 우리 처우에 불만을 품고 네가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더냐! 마탑의 마석을 훔친 혐의는 정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아서 마탑에서 내쫓는 정도로 그쳤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소니아 야이반!"
"아니라고! 내가 왜 그런 범행을 저질러? 뭐가 아쉬워서? 애초에 난 마석도 훔치지 않았어! 난 죄가 없다고!"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소야는 이를 갈며 늙은 마법사에게 독설을 퍼부어댔다. 존댓말도 그만두고 마구잡이로 따져물었다.
"당신이 훔친거 아니야? 당신이 훔쳤으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을 옭아매고, 범인 취급 하는 거 아니냐고! 내 다리를 병신 만든걸론 부족해? 말해봐. 그래서 내 집과 창고, 심지어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용병길드에서 빌린 내 숙소까지 다 뒤져서, 마석이 한톨이라도 나왔어? 한톨도 안나왔지? 그렇겠지! 진짜로 내가 마석을 훔쳤다는 증거가 있었으면 난 지금쯤 죽었을테니까!"
이 세계에서 소야는 따로 의심을 받으니 의심을 피하기 위해 수사한 게 아니라 정말 뜬금없이 누명을 쓰고 붙잡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토해내라고 고문을 받았겠지. 다리가 작살난 건 그 고문 후유증인게 분명했다. 늙은 마법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건의 진범이 드러나지 않은 이상, 너는 여전히 마석을 훔친 혐의를 의심받고 있다. 진범이 드러나면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여전히 진범은 오리무중이고, 우리에겐 범행을 의심받는 아주 수상쩍은 마법사 한 명만 있을 뿐이지."
내가 물었다.
"그 사건은 제가 관여를 하고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범인은 엠버라는 여자 마법사인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 여인을 체포하는 겁니까?"
"엠버는 조사결과 이미 한달도 전에 동부 평야지대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용병패가 없어서 시체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그저께 겨우 마탑에 도착했지요. 누군가 엠버를 사칭하고 용병 길드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달 전? 대충 계산해봐도 내가 의뢰를 낸 시점에 이미 엠버는 죽었거나 죽음에 준하는 어떤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에반젤린은 아주 작정하고 이 일을 꾸민 것인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여인은 살해할 동기도 있고, 원래부터 마석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로군요."
"거기다 사건 당시 행적도 불분명 하지요. 소니아 야이반. 용병들이 마탑을 조사하는 그 때 뭘 하고 있었지?"
"그건....."
소야가 말끝을 흐렸다. 대체 무슨 씹지랄을 하고 있었길래 말을 못하는 거지. 원작을 해본 나로서는 소야가 할만한 일들 리스트가 머리에 그려졌다. 그 중 절반 정도는 확실히 설명하기 좀 거시기 한 것들이었다. 그 모습에 이것 보라는 듯이 늙은 마법사가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이미 저번 마석 도난 건으로 인해 네 이름이 용병길드에서도 제명당했다는 건 파악하고 있다! 분명 변신 마법이나 특별한 속임수를 사용하여 엠버를 사칭한 뒤 자신을 제명한 용병 길드와 마탑에 전부 복수하려는 속셈이었겠지!"
늙은 마법사의 주장은 대충 듣기에 제법 그럴듯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소야는 마석을 훔쳤다는 혐의로 인해 마탑에서 임시 제명당했고, 마탑 소속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용병 길드에서도 손절당했다.
주변 상황만 보자면 소야는 확실히 길드와 마탑에 전부 원한을 품을 만 했다. 그러므로 소야가 용병과 마법사들을 전부 죽였다는 게 아예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진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소야의 개인적인 복수극이 아니었으니까. 소야가 그럴만한 캐릭터도 아니고.
"하지만 용의자로 유력한 실루엣은 지팡이를 짚지 않고 있었습니다."
"눈속임이었겠지요! 일시적인 위장은 마법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법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니 할말이 없었다. 나는 소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아주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저런 눈빛을 보내지 않더라도 나는 소야를 구해줄 생각이었다. 이번에 끌려가면 죽을게 분명했으니까. 히로인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았다.
"당시 행적만 증명되면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늙은 마법사가 나를 쳐다봤다. 그는 말없이 소야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제장님. 순간의 동정으로 범인을 놓치는 우를 범하시려는 겁니까? 잘 생각하고 말씀하십시오. 사제장님이 증언하신다면, 저희도 증언에 대한 진의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증언을 하신다면, 대천신교와 마탑의 관계가 조금 불편해질수도 있습니다."
"거짓증언이 아닙니다. 소야는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어떤 물건을 만드느라 바빴거든요. 그래서 사건 당시 용병을 사칭해서 범행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그렇죠?"
원작에서 소야의 취미는 마도구 제작이었다. 아주 좆같고 야리꾸리한 마도구. 소야가 지금 뒤지기 직전임에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인이 생각해도 존나 부끄럽고 좆같은 성도구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미 인어박이인 시점에서 내 이미지는 성적인 면에서는 더 떨어질 곳이 없었으니, 나는 그냥 내가 그런 걸 제작시켰다고 우겨볼 참이었다.
조사하는 인간이 마법사인 이상 이 쪽 논리로 상대하면 내가 소야를 풀어줄 수가 없었다.
소야는 내 발언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마법사들도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탑에서 일했던 마법사인만큼 소야가 만드는 게 어떤 물건인지 대충은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사제장이 미치광이 괴짜한테 성욕처리도구를 주문했다니까 다들 놀라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이 불편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왜 그러시죠?"
늙은 마법사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소야를 쳐다봤다. 소야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렇죠! 맞아요! 사제장님! 제가 사제장님을 위해! 특별히 만든 물건이에요! 그게 그.... 사제장님의 인권? 존엄성? 그런 걸 위해서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존엄성이 나올 정도면 씨발 대체 뭘 만들고 있었던거지? 이미 떨어질 곳이 없는 이미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 한마디에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대체 무슨 좆같은 물건이지?
"......믿을 수 없군요. 사제장. 소야에게 그런..... 종류의 물건을 부탁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늙은 마법사는 다시 한 번 내게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뭐든지 괜찮다. 사람 하나 살리는 일이잖아?
늙은 마법사가 손짓했다.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거두고 소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가벼워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늙은 마법사가 말했다.
"소니아 야이반은 지금 당장 영주가 부탁했다는 물건을 소환하도록."
씨발? 마침 멀리서 엘슨 사제가 걸어왔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게 물었다.
"사제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옆에 있던 다른 마법사가 작은 소리로 엘슨 사제엑 상황을 설명해줬다. 엘슨 사제는 미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짐꾼들과 수행 사제들 몇명이 사람들이 몰려있는 이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곳 영지 교회의 사제들도 슬금슬금 용병길드로 몰려왔고 용병길드 안에 숨어있던 용병들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공개처형 각인가?
"소니아 야이반! 어서 소환하도록!"
"아, 그..... 사제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소야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존나 쫄리긴 했지만 소야도 사람이었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사람이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겠지. 원작에서도 자가발전 진동 오나홀 같은 웃기는 거나 만들었지 하드코어한 도구는 안만들었으니까.
늙은 마법사는 내가 공개해도 된다고 했으니 더욱 거리낄것 없는 어조로 소야에게 외쳤다.
"소니아 야이반!"
"진짜...진짜죠? 딴소리 안하실거죠?"
소야는 몇번이고 내게 확인을 부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늙은 마법사가 재촉하는 만큼 나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야는 눈을 꼭 감더니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제장의 비밀 자위도구를 공개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퍼지고 있었다. 존나 창피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 하나 구하는 일이잖아? 이 일이 계기가 되서 소야를 따먹을 수 있는 거 잖아? 그렇지? 대천신교에는 자위하지 말라는 규칙 없잖아. 응?
"이익....소, 소환!"
그리고 소야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에서 연기가 펑! 솟아오르더니 연기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길고....뭉툭한 그것은.....
"사제장님이 저런 걸 쓰신다고?"
"저걸?"
"저런 걸 대체 어떻게 쓰신대?"
딜도였다. 작은 돌기가 빼곡하게 나있는 거대한 딜도. 그 굵기는 휴지심만큼 두꺼웠고 길이는 30cm 정도의 대물이었다. 소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 딜도를 들어보이며 설명했다.
"이, 이건.... 마법으로 움직이는 생체공학 딜도로서.... 그...이 빨간 버튼을 누르면...."
버튼을 누르자 딜도에서 새파란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나를 기반으로 그 기운은 딜도 주변에 모여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딜도가 변신을 마치자 그 모습은 꼭 자지달린 펩시맨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인들은 눈을 가렸고, 남자들은 묘한 표정으로 그 딜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소야는 처음 홈쇼핑 호스트를 맡은 판매자처럼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고요..... 그, 이제 이 딜도의 파란색 버튼을 누르면...."
버튼을 누르자 파란색 사람의 형체가 덜렁덜렁 매달려있던 딜도를 붙잡더니 빳빳하게 세웠다. 그리고 허공에다가 미친듯이 박아대기 시작했다. 허리에 재봉틀을 박아도 나오지 않을 속도였다.
사람들이 그 모습이 너무 추잡하고 노골적이라 고개를 돌리며 어머머를 연발했다. 늙은 마법사도 이렇게 생생하고 더러운 꼴을 볼 줄은 몰랐던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이, 이렇게..... 격렬하게 박아주는....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자위용....딜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일부 사람들은 벌써부터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저걸로 항문자위하는 사제장 vs 저걸로 자위하는 마누라가 있는 사제장.
"....제 아내겁니다. 아내가 성욕이 강하거든요."
이럴 때 팔라고 아내가 있는 것이다. 이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음...... 사제장님. 그, 그게 무슨....."
"저를 더 수치스럽게 만드실 생각인가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제 개인사를 얼마나 풀어야 하는 건지 알수가 없군요. 이만하면 됐잖아요? 이 주제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군중이 웅성대고 있었다. 늙은 마법사는 민망함에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엘슨 사제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치심을 견뎌내고 있었다. 너무 수치스럽다. 사람 하나 구하자고 이런 개망신을 당할 줄이야. 딜도까진 예상은 했는데 거기서 파란 근육질 남자가 튀어나올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나로 일렁거리는 사내 홀로그램은 보기만 해도 내 기분을 끔찍하게 만들었다.
소야가 딜도를 작동중지 하지 않은 바람에 여전히 퍼런 몸뚱이가 미친듯이 허리를 튕기고 있었다. 스트리퍼한테 한달 월급을 꼬라박고 트월킹을 시켜도 저렇게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진 못할것이다. 늙은 마법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여러모로 난감할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미친 척하고 다 까버릴 줄은 몰랐겠지.
여기서 더 캐내면 예의가 아니었으니 늙은 마법사가 취할 행동은 돌아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가 아무리 사건 해결에 미쳐있었다고 해도 내 부인에게 가서 물어보자거나, 확인해보자는 개소리를 하지는 못할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제들이며 마법사, 용병들 중에 이브에 대한 음담패설이나 모욕적인 언사를 꺼내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브를 모욕한 친구는 지금 하늘의 별이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브를 놀리거나 욕할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사태가 일단락 되어 가는 것 같으니 사람들이 슬금슬금 흩어지고 있었다. 사실 사태의 일단락보다는 이 민망한 사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게 더 큰 것 같았다. 마법사들도 지팡이를 거두고 늙은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소야를 구속할 명분이 없으니 늙은 마법사의 지시를 기다려야 했다.
"....철수한다!"
늙은 마법사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늙은 마법사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사실 지금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영지로 돌아갈 때 쯤엔 영지에도 소문이 퍼졌을텐데 이거 어떻게 넘기지? 화 안내겠지? 엘슨 사제가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른 사제들도 입을 꾹 다물고 필사적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소야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입을 우물거리며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하다가 하며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원작에서 소야는 인간 불신이 깔려있는 캐릭터였다. 몬스터도 증오하고 인간도 혐오하는 순수한 혐오주의자 그 자체인 캐릭터가 용사와 만나 동료가 되고, 또 용사의 다정다감하고 매력적인 모습에 반해서 마침내 벌려준다는 스토리인데.....
일단 스토리는 틀어진지 오래였으니, 나는 어떻게해야 소야가 벌려줄지를 고민해야 했다. 원작에서 나온 공략법은 못썼다. 그리고 자위 도구 만드는 애치고 소야는 의외로 비싸게 구는 년이라 목숨 한 번 살려줬다고 벌려줄리도 만무했다. 내가 명색에 사제장으로서 목숨값을 화대취급하는 것도 이상했고.
"소니아 야이반."
"네, 네. 사제장님."
"영주라고 부르세요. 듣자하니 용병길드에서도 마탑에서도 쫓겨났다는 데. 사실인가요?"
".....네. 사실이에요."
소야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그녀 옆에는 아직도 펩시맨이 열심히 공기를 강간하고 있었다. 허리를 움직일 때 마다 쉭 쉭 소리가 나서 사람들을 떨게했다. 나는 저 추찹한 꼴을 더 보기 싫어서 손으로 파란 딜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것좀 꺼주시겠어요?"
"아, 네."
소야가 손으로 딜도를 붙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재봉틀 수준의 빠르기로 공기를 우다다다 쑤시고 있는 딜도를 붙잡기란 역부족이었다. 이거 자위기구라고 하지 않았나, 못멈추면 뒤지겠는데.
"이거 어떻게 멈춰요? 자위기구로 쓰기엔 좀 부적합해 보이는데."
"아, 그.... 속도를 개선중이었어요. 너무 그....격렬해서...."
소야가 말끝을 흐리며 허둥지둥 버튼을 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소야는 버튼 하나 눌러 보겠다고 허공을 겁탈하고 있는 딜도의 기둥 부분을 붙잡은 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딜도 대딸쳐주는 것같은 모양새가 민망함을 더했고 사제들이 고개를 돌려서 헛기침을 했다.
"아, 이게..... 왜 안되지....이익....!"
소야는 양손으로 딜도를 붙잡고 이리저리 훑어내다가 마침내 버튼을 찾아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파란색 형체가 우뚝, 멈추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며 사라졌다. 허공에 떠있던 딜도가 툭 떨어지고 소야는 황급히 그 딜도를 품에 넣고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푹 숙이며 외쳤다.
"그,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전 소야가 보여준 아스트랄한 광경에 나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소야가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엘슨 사제를 비롯한 사제들은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엘슨 사제는 헛기침을 하며 내게 힐끔힐끔 눈길을 주고 있었고, 사제들은 허리를 살짝 뒤로 뺀 채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한채 소야에게 집중했다. 소야가 허리를 숙이고 있으니 그 거대한 가슴이 출렁거리며 계곡을 훤히 보여주었다. 나는 그 계곡에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소니아 야이반. 당신은 그럼 현재 맡은 일거리가 없군요. 그렇죠?"
"네, 네. 그렇네요."
소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내 시선이 향한 자신의 가슴골을 슬쩍 가렸다. 존나 꼴리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따로 갈곳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죠?"
"네, 네. 그래요."
"그러면 제가 제안을 좀 하고자 하는데요. 당신한테도 꽤 괜찮은 제안이에요. 들어보시겠어요?"
"네, 네. 말씀하세요."
소야는 아주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따르고 있었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고, 이딴 자위기구를 만들고 있음에도 경멸하지 않았기에 그러는 듯 했다. 나는 소야를 우리 영지의 마법사로 쓸 생각이었다.
"실은 우리 페타 영지에는 마법사가 없거든요. 그래서 당신을 영지 마법사로 좀 쓰고자 하는데....."
"그..... 영지 마법사가 되려면 마탑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딴 법률이 있었구나. 마탑의 승인을 받은 마법사만이 영지 마법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소야는 마탑에서 쫓겨난 상태이니 승인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용병으로 소야를 고용하자니 소야는 현재 용병 길드에서도 잘린 상태였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소야를 정식으로 고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페타 영지로 가주시겠어요? 대책은 거기서 다시 논의해보시죠. 그리고 그 선물은 제 아내가 진짜 좋아할수도 있으니까 한 번 보여줘보구요."
이브랑 셀루가 배에서 맨날 딜도 가지고 놀았다는 거 생각해보면 의외로 괜찮은 선물이 될수도 있었다. 혹시 몰라. 취미가 딜도 수집일수도 있으니까. 소야는 그 말에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진짜로 보내라고 할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도 일단 소야가 이브한테 딜도를 보여주는게 나았다. 그래야 이브가 수령거부를 하더라도 나중에 마탑에서 딴 소리 못할테니까.
"지, 진짜로 이걸요? 진짜로?"
"네. 일단 겸사겸사 가져다주세요. 뭐 주기 싫으면 안주셔도 되구요. 일단 페타 영지로 편지를 보내둘텐데, 혹시 편지보다 먼저 도착하면 좀 기다리셔야 할거에요."
"네. 알겠어요."
소야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 때 마다 가슴이 출렁거리는 게 너무 노골적이라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사제들은 허리를 더욱 더 뒤로 뺀 채 서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엘슨 사제에게 말했다.
"편지 한 통만 보내고 가죠. 엘슨 사제."
"아, 네. 네! 그렇게 하십시오. 루시우스 사제장님."
그렇게 나는 페타 영지로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된 것이다. 마차 안에는 해가 비치면서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엘슨 사제는 매우 어색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밖을 쳐다봤다.
남의 성생활을 알게된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이게 최선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실상 무지 신경쓰여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내 아내는 이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인어였다. 그 인어가 30cm 자만큼 거대한 딜도랑 씹질을 한다는 걸 남편 앞에서 상상하니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것이다.
"엘슨 사제? 어디 불편하신가요?"
"네? 아, 아닙니다. 그냥, 그냥 좀 마차가 느리군요."
"속도를 높이라고 말씀드리면 되지 않나요. 엘슨 사제?"
"그, 그렇지요. 그..... 방금 전 행보는...."
"제 아내 일을 그렇게 언급하는 건 아무리 저라도 좀 그렇네요. 엘슨 사제."
구라니까 적당히 넘어가세요. 라고 말하기엔 이미 대천신교도 얽혀있고 소야 문제가 좀 강하게 엮여있었다. 나는 이브한테 살짝 미안했지만 이브를 위해 거대 딜도를 마법사한테 주문했다는 구라를 밀고가기로 작정했다.
그래도 용서해주겠지. 아마 별일 없을 것이다. 딜도 선물 정도야 할수도 있는 일이었고, 어쩌다보니 일이 꼬여 사람 죽게 생겨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면 이브도 그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을게 분명했다.
이브도 나중에 상황 설명들으면 납득할 수 밖에 없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마차 안과 일행들의 공기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과 마차를 타고 이렇게 어색하진 않을게 분명했다. 엘슨 사제는 내가 뭐라고 말하든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어린 사제들은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으며 수레꾼들도 어딘지 선망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서로 자기 팔뚝이나 다리를 가리키며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는데, 말하는 중간중간 나를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리는 걸 보니 썩 건전한 대화는 아닌 듯 했다.
나는 부러움과 경멸이 뒤섞인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다음 영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이제 첫번째 영지를 돌았을 뿐이지만 뭔가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브는 나름대로 영지 대리인이 해야하는 임무에 익숙해졌다. 그녀 나름대로 세운 규칙 덕분이었다. 규칙 하나. 기사들의 업무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규칙 둘. 시에리와 아이라가 주관하는 회계 업무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규칙 셋. 국가에서 보내는 공문들은 일단 진행하지 않고 뒤로 미뤄놓는다. 규칙 넷. 영주 부인다운 교양있는 이미지를 위해 되도록이면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모든 규칙을 지킨 결과 이브는 영지 대리인으로 있는 동안 평소보다 더 아무것도 안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엘시와 함께 운동하고, 점심 때 시에리가 결재 요청하는 일들을 결재해주며, 저녁에 날아온 공문들을 받아서 대충 집무실 책상에 모아놓는 것이었다.
물론 답변이 시급한 일들은 이브와 시에리 아이라, 그리고 셀루에 엘시, 거기다 로빈까지 전부 모여서 머리를 짜내 겨우겨우 답변하거나 진행했다.
그렇게 영지를 운영한 결과 이브가 다스리는 페타 영지는 매우 평화로웠으며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브는 루시우스와 다르게 처벌에 자비가 없었기 때문에 루시우스가 출장만 가면 범죄율이 뚝 떨어졌다. 루시우스는 잡범 정도는 대충 경고와 노역 후에 보내주지만 이브는 정말 법대로 손을 잘라버리거나 반 병신으로 만들어 내보내줬기 때문이었다.
"시에리."
"네. 이브 씨."
"이번엔 신랑은 언제 올까? 조사한다니까 꽤 오래걸리겠지?"
"영주님이 많이 보고싶으신가봐요. 이브씨."
"너도 씨발 신랑이랑 똑같은 새끼야 진짜."
그렇게 제법 시간이 지났다. 이브는 시에리와 함께 회계 서류를 검토하다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이제 이브에 대한 공포감이 옅어진 시에리가 농담을 던졌고, 이브는 그 농담에 아주 훌륭하게 반응해줬다. 의외로 시에리와 이브는 죽이 잘맞았다.
"실례합니다."
아이라가 서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루시우스가 오면 시킬 생각으로 미뤄두었던 것들인데, 생각보다 늦게오는 바람에 이브가 처리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이브가 물었다.
"씨발 이걸 다 하라고?"
"다 해야돼요. 안그러면 나중에 우리 영주님이 고생하신다구요."
"내 고생은 신경 안쓰냐?"
"근 2주 동안 쭉 노셨잖아요."
"아니, 뭐 그건 그런데...."
이젠 아이라도 이브에게 마음놓고 말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브는 이 저택에서 자기 포지션이 이빨빠진 호랑이나 발톱 빠진 사자와 비슷한 수준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지 서글펐지만, 화를 낼 대상도 없기에 이브는 입맛만 다시며 서류를 훑어봤다. 창밖을 보면 엘시가 오늘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호위 대상인 영주가 없으면 제일 편한건 엘시와 셀루였다. 이브는 따로 호위가 필요없다고 못박아놨기 때문에 엘시는 하루 종일 운동이나 휴식을 했고, 셀루는 영주가 있든 없든 수영장에서 몸을 푹 담근 채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씨발 존나 부럽네."
이브는 밖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맨날 이런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이브는 잠깐만 이런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래서 외근을 나가는 건가?
"실례합니다."
서류를 뒤적이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빈이었다. 기사단장은 여자들로 가득한 방 안이 익숙하지 않은 지 흠칫하고 있었다. 이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데."
"페타 부인을 뵙고 싶다고 하는 마법사가 있어서...."
"마법사? 씨발 마법사가 날 보고 싶다고?"
이브는 마법사를 싫어했다. 인어를 구입하는 제 1순위가 변태들이었고 제 2순위가 마법사들이었으니까. 마법사들은 인어의 피를 시약 재료로 쓰거나 인어 자체를 실험체로 쓰기도 했다. 물 속에 있는 인어는 인간보다 튼튼했으니까 인어를 물 속에 넣고 거기다 약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브는 그래서 마법사란 족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빈이 이브의 이런 날선 반응의 원인을 알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 마법사가 페타 부인을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씨발 반 인어는 어떻게 생겼나 보고싶나보지? 씨발 오늘 뒤진 줄 알아라 개 좆같은 년이."
서류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찾아온 이브는 거침이 없었다. 마법사의 목적도 이름도 관심없었다. 이브는 일단 찾아왔다는 마법사의 팔 하나 잘라버리고 대화를 시작해볼 생각이었다. 집무실 옆에 놔뒀던 곡도를 빼들고 이브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갑작스럽게 이브가 날아오자 엘시가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대련?"
"아니. 마법사 죽이러 갈건데. 같이 갈래?"
"간다. 마법사 죽는 거 구경거리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브에게 합류했다. 수인족도 마법사에 대해선 원한이 많았다. 병사들이 맨몸 싸움으론 수인족을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엘시 같은 수인족 전사에게 마법사는 불법 도핑을 지원하는 씹새끼들에 불과했다.
그렇게 살기등등한 얼굴의 2인조 연쇄살인범들이 저택 대문을 열어젖혔다. 이브가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다.
"씨발 나와!"
"히이이익!"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 소야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바로 모가지를 쳐버리려던 이브는 이미 소야의 한쪽 다리가 불구인 걸 보고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암만 마법사라고 해도 다짜고짜 죽이는 건 좀 너무한게 아닐까, 하는 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브는 숨을 고르고 소야에게 물었다.
"뭐야."
"그, 그.... 페타 부인이신가요?"
"그런데?"
이브의 날이 선 반응에 소야는 더욱 더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나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영주님이신 루시우스 사제장님께서, 그.... 서, 선물을 보내셨거든요."
"선물?"
아직 이브에게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브는 눈을 찌푸리며 소야를 훑어봤다. 분홍색 머리에 존나 큰 키. 그리고 볼링공을 하나씩 집어넣은 듯 빵빵한 가슴. 생긴 것만 보면 확실히 루시우스가 혹해서 잡아올만한 여자였다.
"선물을 보냈다고?"
"네, 네. 그.... 보시면 마음에 들거라고.....했어요."
"뭔데."
"네?"
"뭐냐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소야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색이 되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 그.... 여기서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알려드리면 안될까요?"
"뭐래 씨발 걸레같이 생긴 년이. 젖탱이 잘라서 배구공으로 쓰기 전에 뭔지 말하라고 개씹년아. 알았어?"
이브가 칼을 들이대며 물었다. 이미 영주 부인다운 고귀함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소야는 더욱 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허둥댔다.
"지, 진짜! 진짜로! 조, 조금, 좀 그런거라서 그래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진짜 이상한거 아니고! 수상하지도 않아요! 아니, 수상한 물건이긴 한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안전....안전한 물건이니까! 진짜로 괜찮은 거니까 제발 안에서 보여드리면 안될까요!"
"마법사는 믿으면 안된다."
엘시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브 역시 굳이 이 마법사를 저택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에 대해 루시우스가 편지를 보낸 것도 없었고 연락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아무르 영지 같은 곳에서 지난 일에 원한을 품고 마법사로 폭탄 배달이라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마법사를 안에 들여선 안된다. 이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씨이발. 여기서 남은 다리 하나도 병신 되기 싫으면 물건 까보라니까? 내가 두번 세번 말하게 할래?"
"아, 그게 그.... 진짜 좀 그렇고 그런 물건인데.... 괜찮으신가요?"
"한 번만 '더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면 아가리 찢어버릴거니까 빨리 까라고."
이브가 곡도로 바닥을 톡톡치며 다시금 다그쳤다. 그 말에 소야가 바닥에 서둘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야가 마법진을 그리려 하자마자 엘시가 소야의 팔을 붙잡아 꺾었다.
"마법사. 개수작부리지 마라."
"아야야! 아파파! 지, 진짜 소환 마법진이에요! 소환진이라구요! 제가 그딴 물건을 들고 다닐리 없잖아요오오! 아, 아파파파! 아파!"
이브가 엘시를 뜯어말렸다. 소야는 팔을 문지르며 훌쩍댔다.
"흑...히힝...."
"우리가 지켜 보고 있으니까 빨리 소환해. 개수작부리면 바로 모가지 쳐버릴테니까 그런 줄 알고."
"아, 알았어요."
소야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루시우스는 멀쩡한 인간 같았는 데 부인은 왜 이러지? 진짜 부인 맞나? 이런 부인이라고 루시우스가 딜도를 선물하는 건가? 소야는 잡념을 떨쳐내고 마법진을 그렸다.
"이, 이게 소환 마법진이에요...."
그 말과 함께 이브가 기사들을 시켜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자신과 엘시도 조금 뒤로 물러난 뒤 검으로 소야를 겨누었다.
"소환해 이제."
"진짜 위험한 물건은 아닌데.....그...."
"씨발 뒤지기 싫으면 빨리 하라고!"
"아, 알았어요!"
소야는 눈을 딱 감고 소환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딜도가 튀어나왔다. 기사들이 힐끔 힐끔 그 물건을 쳐다봤다. 이브도 미묘한 표정으로 물건을 쳐다봤다.
"딜도?"
"아, 네...이게 그...마나에 감응하는 생체 딜도인데요....어떻게 쓰냐면....."
예상을 뛰어넘은 물건에 영지민들도 기사들도 이브도 엘시도 전부 굳어버렸다. 소야는 이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었던 지라 전보다 더욱 능숙한 자세로 딜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버튼을 누르자 예의 파란색 사람의 형체가 딜도를 좆삼아서 둥실 떠올랐다.
"어머머!"
"어이구! 망측해라!"
"사제장님 망신은 다시키네 어이구...."
"아이고....무슨..."
소야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브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한 상태였다. 엘시가 말했다.
"위험해보이진 않는다."
"아니....씨...발...뭔..."
이브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시에리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시에리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는 딜도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뭐, 뭐에요 저게!"
"그리고 이 파란색 버튼을 누르면...."
그리고 소야가 파란 버튼을 누르자 파란색 인간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허공에다가 미친듯이 트월킹을 추기 시작했다. 그 음란하고 더러우면서 추잡하기 짝이 없는 허리 놀림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고오오! 저런 걸 영지에 들인다니!"
"끔찍해라! 추잡해라! 아아아악!"
"사제장님!! 아이고오오! 사제장니이이임!"
"사제장님이 저런 걸 주문했을리 없다아아아! 끄아아아아!"
현장은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지옥의 스트립 클럽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푸른색 스트리퍼가 좆을 흔들며 트월킹을 추고,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른다. 소야는 침착함을 애써 유지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브의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칼을 휘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그 한가운데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이브 씨?"
"인어. 저런 거 가지고 노는 건가? 재밌어보인다."
시에리가 약간의 경멸이 섞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브는 사태를 수습할 책임이 있었다. 일단 모양새를 보니 루시우스가 보낸 선물인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이브는 이딴 선물은 고맙게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거부해버리면 그것도 좀 그랬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이브가 입을 열었다.
"......꺼야."
"네?"
시에리가 되물었다. 이브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우리 엄마 꺼라고! 씨발 알았어? 우리 엄마한테 쓰려고 한거야!"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이 묘한 얼굴로 이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직접적인 언어폭력이 나오지 않는 건 이브가 영주 부인이며 북부 대공 아들도 회쳐버린 미친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화끈하게 응답했다.
"뭐 씨발놈들아! 우리 엄마한테 쓸건데 불만있어? 효도하는 법 몰라?"
물론 페타 영지의 영지민들은 이런식으로 효도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더 언급하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입을 꾹 닫을 뿐이었다.
이후의 사제들 장례식은 아주 무난하게 흘러갔다. 내 입장에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악명을 잘 알고 있는 영주들은 내가 가는 길을 아주 정중하게 안내해줬고, 대접도 융숭하게 해주었다. 특히 예전에 내가 죽여버린 금발 태닝 뚱보 영주의 후임 영주는, 나 덕분에 자신이 영주가 되었다며 친한 척을 했다.
아무르 영지에 도착했을 때도 영주 부인이 나를 아주 죽일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 외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나도 사제장으로서 다시 한 번 아무르 영주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현해준 뒤 영지를 떠났다.
영주 부인은 내가 애도를 표현한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건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꼬우면 좆같이 굴지 말았어야지. 누울 자리를 보고 뻗어있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르 영주도 착하게 굴었으면 나한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냈다가 내 손에 죽고 말았다. 아무르 영주 부인은 내가 돌아가는 길에 저주를 퍼부어댔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엘슨 사제와 나는 아무르 영지 끝자락에서 서로 안녕을 고했다. 엘슨 사제는 이번 장례 행진에서 겪은 일이 많아서 그런 지 매우 피곤하고 처음 봤을 때 보다 조금 더 늙어보였다. 첫 만남 때 보았던 인자한 사제는 어느새 농사일에 쩔은 농부같은 인상으로 변해있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루시우스 사제장."
"고생하셨습니다. 엘슨 사제."
"헌데, 이 늙은이가 충고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돈 빌려달라거나 보증 좀 서달라는 이야기가 아닌 이상 무슨 잡소리든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었다. 루시우스 사제장은 그런 캐릭터니까. 엘슨 사제는 싱글벙글 웃는 내 표정과 다르게 아주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노인들이 말하기 힘들 때 흔히 하는 버릇이었다.
"루시우스 사제장. 너무 방탕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엘슨 사제가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나는 거기서 말을 잘랐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절제하고 있었으니까. 엘슨 사제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내가 말했다.
"살펴가세요."
장례식도 끝났으니 이제 나는 다시 영지에 붙박혀 있을 일만 남은 셈이었다. 에반젤린에 대한 조사는 당분간 마탑에 맡길 생각이었다. 도망치는 흔적이 드워프 왕국으로 향해있었다고 했으니 마탑 말고는 조사할 사람이 없었다. 드워프 왕국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이들은 마탑 마법사와 그 일행 뿐이었다.
"어라?"
나는 잠깐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까 소야가 중요 용의자면 이 새끼들 에반젤린이라고 생각 안하는 거 아닌가? 정확한 사건 경위는 며칠 뒤 조사 보고서가 내 영지로 도착해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 마탑의 행보를 보면 드워프 왕국에서 에반젤린의 족적을 놓친게 틀림 없었다.
그러니까 애먼 소야를 족쳐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고. 아무래도 에반젤린 건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애초에 그녀의 목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딴 일을 저지르는 거지? 지금까지 에반젤린이 했던 행동은 한가지 목표를 따르고 있었다. 인간을 이종족의 손으로 몰살시키는 것.
그런데 이게 참 이상했다. 에반젤린은 이 목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셀루에게는 힘을 줄테니, 인간 도시를 부숴버리자고 제안했고, 엘시에게도 노예 시장을 깨부수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이상했다. 에반젤린이 실제로 그만큼 강대한 존재라면 왜 제안만하고 마는거지? 인어 한마리를 그 정도로 존나 쌔게 만들 수 있으면 왜 강제로 안시키는 거지?
당장 노예 시장에 있는 인어들한테 힘을 주면 인어들이 벌크업해서 다 죽이고 다닐텐데? 에버딘 영지의 노예 시장에서 힘을 뿌리고 다니면 에버딘 영주가 헬창이든 사모아인이든 그냥 햄이 되고 말텐데?
에반젤린은 그 목표나 위험성에 비해 하는 일이 매우 적었다. 실제로 우리가 에반젤린을 쫓으면서 실제로 그녀가 일으켰던 범죄는 딱 하나. 용병들과 사제들 몇명을 살해한게 전부였다. 셀루는 본인이 딸감으로 쓴다고 선원들을 거세시켰고, 엘시는 애초에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거지?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마차는 계속 바퀴를 굴렸다.
아무르 영지 끝에서 우리 영지까지는 금방 갈 수 있었다. 영지의 경계라는 게 서로 딱 붙어있는 게 아니라 경계를 설정하는 초소가 서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경비병들이 서로 잡담을 나누는 게 보였다. 내가 보이자 경비병들은 금방 경계 태세에 들어가서 창을 내밀며 외쳤다.
"정,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찌른다!"
더듬는 거 보니까 신입인가. 나는 멈춰섰다. 초소 경비대장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와 신입 병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수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해야한다. 원래 나같이 높은 사람이 오면 프리 패스였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내가 바꿨다.
"써, 썬더!"
"암구호 미숙지."
내가 몇주 동안 영지를 비웠는 데 암구호를 알리가 있나. 신입은 당황한 표정으로 경비대장을 쳐다봤다. 경비대장이 작은 목소리로 합구호라고 중얼거렸다. 합구호는 숫자 두개를 합쳐서 특정 숫자를 만들면 되는 암구호였다. 예를 들어 합구호가 10이라고 쳤을 때 경비병이 7! 이라고 외치면 내가 3! 이라고 외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영지의 합구호는 10이었다. 신입이 외쳤다.
"합구호!"
경비 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신입을 보면서 씩 웃었다. 신입은 그 웃음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 지 나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외쳤다.
"합구호!"
귀엽네. 새끼. 한 번 더 합구호를 외친 신입은 잠시 기다리다가 외쳤다.
"합구호를 외치지 않으면 찌르겠다!"
뭐지? 병신인가? 지금 나보고 합구호! 이 지랄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문어를 말하라는 건가? 합구호 문어면 내가 그냥 1 외치면 끝나는 거 아닌가? 웃다말고 내가 멍한 표정으로 신입을 쳐다보고 있으니, 경비대장은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저 놈 잘못이 아니다. 신입이 병신일 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신입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자, 신입. 합구호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래요?"
"네? 아, 아! 13!"
합구호가 10인데 왜 13이 나오는 것이지? 벌써 우리 경비대들은 한차원 높은 영역의 수학을 하는 것인가? 이미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체가 되어버린 경비대장의 표정을 보자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불호령을 내릴까, 개판을 칠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빼기 3."
"누구냐!"
"페타 루시우스. 페타 영지의 영주."
"목적은?"
"귀가."
"신원확인을 위해 3보 앞으로!"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신입의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수하가 종료됐다. 나는 초소를 지나면서 호달달 떨고있는 경비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신입은 그 옆에서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경비대장. 요즘 지내기 편한가봐요? 경계면에 몬스터도 없고, 힘든 일 있으면 기사들이 다 해주잖아요. 그렇죠?"
"아닙니다!"
"기사단들이랑 같이 훈련 한 번 받아보시겠어요? 요즘 훈련 커리큘럼이 잘 짜여있어서 한 번 갔다오면 다들 눈빛부터 달라지더라구요."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입 교육 잘해야 겠죠?"
"네 그렇습니다!"
"귀빈이라도 오셨는데 또 실수하면 어쩌겠어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신입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내 반응이 본인 예상과는 달라서 그렇겠지. 본인 생각에는 되게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초소를 통과했다. 뒤에서 경비대장의 열받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내가 수하 그따위로 하라고 가르쳤냐?"
"아닙니다!"
"너 병신이야? 내가 씨발 합구호 외칠 때 합구호! 이러기만 하라고 지랄했어?"
"아닙니다!"
경비대장의 분노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랜만에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 목소리였다. 이래서 나 군대에 있을 때 사단장, 대대장 급 인사들이 초소를 돌아다녔구나. 그 새끼들은 초소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하기 때문에 점검을 나오는 게 아니었다. 처음 경계를 서는 뉴비들의 야한 냄새를 맡기위해 올라오는 것 뿐이었다.
경계면을 통과하니까 공기마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마을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놀라며 서로 수군거리고 앞으로 나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여, 영주님! 오셨습니까?"
"네. 그동안 별 일 없으셨나요?"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영지민들이 나와 눈도 못마주치고 서로 허공을 보면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뭐지? 대체 영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브가 저택 대문 앞에서 스트립 쇼라도 했나? 영지 전체에 껄끄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내가 인어박이라고 소문났을 때도 이 지경으로 마을 분위기가 씹창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수인한테도 박는다는 소문이 난게 분명했다.
나는 마차 창문을 열고 영지민 한 명을 불렀다. 영지민이 움찔움찔 몸을 움츠리면서 다가왔다. 내가 따먹기라도 할까봐 무서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괜히 겁에 질린 그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다.
"영지에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소문이 난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 아, 아닙니다! 아무 소문도 나지 않았습니다!"
매우 좆같은 소문이 났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영지민들이 차마 내 얼굴을 똑바로 못 볼 정도의 괴소문. 나는 암만 생각해도 이런 소문이 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야야 편지가 갔을테니까. 알아서 조용히 이브한테 물건을 보여줬을거고. 이브는 저번에 북부대공 배를 갈라버린 거 말고는 영지에서 아주 조용히 생활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나는 영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내가 도착하는 것에 맞춰서 로빈이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빨리 이브를 만나야 했다. 이 좆같은 분위기는 80퍼센트 정도는 이브가 원인일거고 20 퍼센트 정도는 이브가 아닐 경우 그 때 부터 찾아봐야 했으니까.
복도를 지나갈 때도 이 이상한 분위기는 가득했다. 하인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고, 기사단원들도 헛기침을 하며 지나갔다. 나는 집무실의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이브 사랑하는 네 신..."
"이 씨발놈아!"
화분이 날아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화분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벽에 부딪힌 화분은 산산조각이 나며 폭탄 터지는 소리를 냈다. 이브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대고 있었고, 옆에 있던 시에리는 멍한 표정으로 나와 이브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전 머리가 터질뻔 했단 사실에 살짝 쫄아서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일이에요 이브?"
"너, 너, 너 씨발 그 딜도 왜 보낸거야! 나 엿먹이려고? 어?"
"아, 그거. 편지 안왔어요? 선물 보낸다고, 좀 야리꾸리한거니까 안에서 확인하라고 편지 보냈는데."
"편지?"
이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도착 못한 모양이었다. 영지 우체국 씨발놈들. 급한 편지니까 빨리 보내라고 그렇게 닦달을 했는데 편지를 안보냈다고? 미친 새끼들인가? 나는 물었다.
"그래서 그 선물 때문에 뭔 일이 일어났는데요."
"그.... 내가 어디 수상한 놈이 보낸 건줄 알고, 그.... 대문에서 까보라 그랬거든?"
"......씨발."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광경이 대충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소야가 트월킹 댄스 머신 앞에서 딜도의 성능을 설명하고 이브가 소리를 질러댔겠지.이브도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시에리가 어색하게 내게 다가워서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괘, 괜찮을 거에요. 어떻게 수습 됐으니까요?"
수습되지 않았다. 내가 들어오는 동안 영지민들이 아주 꺼림칙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안그래도 씹창난 이미지에 정점을 찍은 게 틀림 없었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 딜도는 어떻게 했어요?"
"엄마 줬어. 좋아하던데? 근데 너무 커서 못쓰겠다더라."
셀루가 덩치가 큰 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집무실 창 밖을 바라봤다. 셀루는 여전히 수영장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수영장 모서리에는 그 딜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제장 저택 마당에 저런게 굴러다녀도 되는 걸까? 나는 그런 고민에 빠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엘시도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는 데 소야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딜도 가져왔다고 죽여버렸나? 나는 소야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소야는요?"
"뭔데 그게."
"여기 왔던 마법사요."
"아, 1층 응접실에 있어."
"살아있죠?"
"응. 죽일까 했는데. 신랑이 데려온 애 같아서 일단 살려놨어."
"잘했어요."
"뭐, 뭐야?"
내가 꼭 끌어안자 이브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어색하게 나를 마주 껴안았다. 나는 이브의 등을 토닥여주고 시에리를 쳐다봤다. 시에리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 바라고 있길래 시에리도 한 번 껴안아줬다.
그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왓다. 1층에 응접실의 문을 열자 소야가 나른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댄 채 푹 퍼져 있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사, 사제장님! 어서오세요! 빨리 오셨네요."
"네. 소니아 야이반. 오랜만이네요. 지방에서 일이 길어져서 늦었어요. 별 일 없었나요?"
"네, 네! 별 일 없었어요!"
소야는 아까 전 초소에서 본 신병만큼 빠릿빠릿한 자세로 내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나는 소야를 다시 안게 한 다음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딜도 문제는 이미 지난 일이었으니까.
"소니아 야이반. 일단, 당신 말대로 당신이 마탑 소속 마법사가 아니다보니까 정식으로, 영지 마법사로 고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요. 용병 길드에서도 제명당한 상태라 당신을 용병으로 쓸수도 없구요."
그냥 무상으로 일시키기도 그랬다.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영지 마법사였으니까. 소야 본인은 괜찮겠지만, 이런 문제가 소문이 퍼지면 주변에서 시비가 걸리기 마련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잡음이 날 요소는 안만드는 게 나았다.
"가장 좋은 건, 이제 당신이 이 영지에서 어떤 죄를 지어서, 그 죄를 갚기 위해 무상으로 노동을 한다는 게 가장 좋은 핑계인데...."
"죄, 죄요? 저, 저는 노예가 되는 건가요?"
소야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제장은 노예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노역형을 받은 죄수를 굴리는 건 가능했다. 나는 소야에게 대충 죄를 하나 찍어주고 노역형을 내린 다음 영지 마법사로 써먹을 계획이었다. 본래 마법사가 죄를 지으면 마탑에서 개입하여 사건을 합의해준다. 하지만 소야는 마탑 소속이 아니다.
따라서 소야가 죄를 지었을 때 판결은 내 좆대로 할 수 있으며 노역형을 내려서 일을 굴려먹어도 마탑은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마법사가 죄를 지었을 때 마법으로 봉사하면 안된다는 법률은 없으니까. 마탑이 영주의 권한을 침범하려 드는 순간 사건은 복잡해진다.
"아뇨. 일단 보수는 매달 사례금 명목으로 지급할거에요. 집도 드릴거구요. 그냥 무늬만 죄수인거죠. 혹시 지하 감옥이 좋으시면 거기서 지내게 해드릴게요."
"아뇨! 저는 그래도 지상이 좋은 것 같아요."
내 친절한 제안에 소야가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보다보면 소야는 겁이 많고 리액션이 화끈해서 놀리는 맛이 있었다. 나는 소야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럼 동의 하신거죠?"
"네! 저,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소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몸을 움츠렸다. 내가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서 두려운 거겠지. 하지만 지금 소야는 이 저택 말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원작 기준으로 소야는 가족들도 다 죽고 혼자 마법을 연구하다가 자수성가해서 마탑에 입문, 그 후 마탑에서 쭉 생활하다가 누명을 쓴 방랑 마법사였으니까.
의탁할 가족도 용병길드도 없으니 어지간하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나는 다시 집무실로 올라가서 애들을 호출했다. 아이라, 엘시, 셀루, 이브, 시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처음에 이렇게 모이면 서로 매우 어색해했지만, 요즘에는 그냥저냥 친해진 듯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거나 합심해서 나를 놀리곤 했다.
나는 만나자마자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시 여자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소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뒤 우리가 모인 목적을 이야기했다.
목적이라 해도 간단했다. 소야가 이 저택에 계속 머물러서 일하려면 죄수 신분이 제일 깔끔하고 돈도 아낄 것 같은데, 그럴려면 소야에게 적당한 죄목을 덮어씌워야 한다. 누구 아이디어 있는 사람?
셀루가 물었다.
"그 소야라는 마법사도 합의한거야?"
"그렇죠. 대충은요."
"무슨 죄든 상관없어?"
"너무 피해가 크거나 말도안되는 죄명은 안돼요."
셀루는 아무래도 아이디어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마법사가 온 김에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셀루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뭐하고 싶은데요."
"내가 걔랑 이야기해봐도 돼? 나 꼭 해보고 싶은게 있는 데 이 정도면 확실히 노역 시켜도 될거 같거든?"
"재산적인 피해가 나면 안되는 거 알죠?"
"헤흐..... 걱정하지마 그런 거 하나도 없어."
셀루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배에서 셀루를 만났을 때도 이런 정신나간 눈빛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랜 만에 보니까 괜히 가슴이 섬뜩했다. 셀루는 잠깐 소야랑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먼저 1층으로 내려갔다.
팔딱대면서 내려가는 게 활어횟집에서 탈출하는 광어 같아서 난 웃음을 참아야 됐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다음날. 나는 수영장에서 다시 셀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수영장에 발을 담근 채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헤흐....다 해주기로 했어."
"뭔데요. 말해주면 안돼요?"
"안돼. 이브한테도 비밀로 했단 말이야.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걸?"
".....이상한거 아니죠?"
"헤흐....맞는데."
나는 아직도 트월킹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젯밤 꿈에서도 새파란 타이즈를 입은 남자가 허리를 흔들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꿈을 꿨으니까. 그 때 본 광경은 아마 내가 지옥에 떨어져도 무한히 재생될게 분명했다.
근데 그 만큼 이상한거라니까 대체 뭐가 나올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씨발."
"인어한테 박는 시점에서 이미 끝난 거 아니야? 이제 받아들여야지. 안그래?"
"아니 뭐 그러긴 한데요."
재산상의 피해는 없을거라고 확답했으니 더 묻지는 않았다. 이미지가 망가져봐야 얼마나 망가지겠어. 움직이는 생체 딜도로 마누라 따먹는 사제장 + 인어박이인데 이젠 정말 성적으로 더 떨어질 곳이 없었다.
이제 정말 더 망가지려면 내가 어디서 영지민 납치해서 강간하는 것 말고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셀루가 암만 해봐야 내 이미지를 더 떨어트릴수는 없다. 어디 마음껏 바보짓을 해보라지.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셀루는 말했다.
"앞으로 사흘 쯤 걸릴 것 같대. 기대해주면 좋겠어 헤흐....."
하지만 셀루가 그렇게 웃을수록 나는 솟아나는 불안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뭐지? 내 상상을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등장하는 건가?
다음 날. 셀루는 내게 라이브 밴드 고용비용을 청구했다. 당일에 딱 하루만 쓸 비용이라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즉석에서 결재해줬다. 그런데 밴드까지 부른다니까 나는 더욱 더 불안해졌다. 뭐지? 대체 무슨 좆같은 짓을 준비하는 거지?
그렇게 며칠간 호달달 떨면서 불안감으로 보낸 끝에 이브가 준비가 다 된 거 같다며 나를 불렀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이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 표정에 다시 한 번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거대 딜도 로켓이라도 만들었나? 차라리 그정도면 괜찮았다. 그건 병신같긴 했어도 거기서 끝이었으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수영장 주변에는 딜도가 잔뜩 널려있었다. 수영장 한가운데에는 이브가 헤엄치고 있었고, 수영장에서부터 운동장에 이르기까지 딜도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뭐에요 이게?"
"헤흐.... 보면 알아....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어."
멀리 라이브 밴드가 악기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소야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손을 들고 있었다. 엘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중이었고, 기사단들도 내 옆에 몰려와있었다. 로빈이 물었다.
"영주님. 이게 무슨....."
"저도 모르겠네요. 셀루가 마법사가 찾아온 김에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 도통 모르겠어요."
진짜 모르겠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예술인가? 바닥에 흩어진 딜도들을 통해서 현대인의 무질서한 성욕의 타락을 경고하는 설치 예술인가? 내 의문을 뒤로한 채 셀루가 소야에게 말했다.
"음악!"
그 말과 함께 소야가 밴드에게 눈짓했고 밴드들이 생전 처음보는 기괴한 공연장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 둥, 둥, 둥, 둥, 둥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빠밤- 빠밤- 빠밤- 빠빠빰
클럽에서나 들릴법한 흥겨운 음악이 들려오고 셀루는 물 속으로 잠수했다가 크게 점프하며 소야에게 말했다.
"시작해!"
그 말과 함께 소야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셀루를 번갈아 보더니 눈을 질끈감고 외쳤다.
"에, 에이! 나, 난 몰라!!"
그 외침과 동시에 소야의 손이 푸른색 기운을 뿜어냈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딜도들이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푸른색 기운이 스며들어 파란색 형체를 갖추었다.
"씨, 씨발!"
나는 얼마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온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연주하던 밴드들은 그 와중에 아주 침착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프로 중의 프로였다.
- 둥, 둥, 둥, 둥, 둥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빠밤- 빠밤- 빠밤- 빠빠빰
"이, 이게 무슨!"
로빈이 벌개진 얼굴로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파란색 나체남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셀루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소야는 이미 한계치만큼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브에게 외쳤다.
"모, 못하겠어요! 진짜, 진짜 꼭 해야돼요?"
"빨리 해!"
- 둥, 둥, 둥, 둥, 둥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빠밤- 빠밤- 빠밤- 빠빠빰
셀루가 물 속을 헤엄치며 다그치고 있었다. 사방에는 딜도를 덜렁덜렁 달고 다니는 파랑이들이 가득했다. 너무 끔찍한 이 광경. 소야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한 번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던 나체 파랭이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의 좆부분에 매달려있는 딜도를 붙잡고 단단히 세우더니.
"으악 씨발! 내눈!"
집단으로 트월킹을 추기 시작했다. 이브도 로빈도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허공에 좆질을 하는 파란색 형체들이 가득했다. 로빈은 시뻘개진 얼굴로 이 딜도들을 노려보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저런 년 딸이라고?"
라이브 밴드들은 프로 중의 프로. 이 기괴한 광경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 둥, 둥, 둥, 둥, 둥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빠밤- 빠밤- 빠밤- 빠빠빰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인어분이 시킨거란 말이에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꿈이 이뤄졌어!"
소야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내게 빌고 있었다. 셀루는 수영장에서 신나게 웃으면서 헤엄치고 있었다. 수영장 주변에 수십명의 생체 딜도들이 허공에 트월킹을 하고 있는 모습. 그야말로 아스트랄하면서 존나 좆같으며 더러운 광경이었다. 뭐지?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거지? 나쁜 짓을 많이해서 지옥에 온 건가?
이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지옥 밑바닥에서나 볼 수 있는 악마적인 풍경이었다. 에반젤린도 이 모습을 봤다면 인어 혐오자가 되서 인어들부터 도살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사태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격렬한 트월킹 댄스 파티 현장 한가운데서 셀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나는 사방에서 덜렁거리는 딜도들을 쳐내며 셀루에게 달려들어 외쳤다.
- 둥, 둥, 둥, 둥, 둥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빠밤- 빠밤- 빠밤- 빠빠빰
"씨이발! 셀루! 이게 뭐에요!"
"헤흐....난 인간들을 이렇게 모아다가 헛짓거리 시키는 게 꿈이었거든."
"아니 뭔....씹....!"
"이름하여 쥬지육림!"
"알았으니까 멈춰요!"
내 고함소리와 셀루의 웃음소리가 수영장을 가득 채웠다.
"씨이발."
집무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내가 뱉은 한마디였다. 그 날 벌어진 사건은 그만큼 강렬한 후유증을 내게 동반했다. 그나마 영지민들이 볼 수 없는 수영장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 사건을 영지민들이 봤으면 진지하게 사제장 탄핵건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게 분명했다.
아무리 성적으로 자유롭다지만 이건 좀 선을 씨게 넘었잖아? 나는 탄핵안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헤흐.... 그래도 재밌었잖아?"
"닥치세요."
오늘 집무실에는 새로운 업무 보조가 들어와 있었다. 그 이름은 셀루. 엊그제 블루맨 트월킹 파티에 대한 징계 조치로 셀루는 지금 내 집무실 욕조에 처박히는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왜 셀루에겐 노역을 시키지 않냐면 아무리 힘좋은 인어라도 그냥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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